공산주의 혁명의 본질, 프롤레타리아 의식 성장의 특징,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계급으로 구성하는 것, 이 모든 개념들은 매우 이론적으로 다루어져 왔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분석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물어야만 한다. 혁명가의 역할을 정의하고, 또 이데올로기와 계급의식 사이의 차이점을 강조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가? 공산주의 혁명의 본질이 공산주의자들의 개입에 영향을 주는가? 사실, 이것은 그 문제를 다루기엔 너무 학구적인 것은 아닌가?
오늘날 혁명가들이 계급투쟁의 구체적이고 복잡한 과정을 그들의 눈앞에 전개되는 그대로 이론화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의 분석은 여전히 매우 일반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고, 그들에게는 너무나 빈번히 노동자 투쟁의 경험이나 그러한 투쟁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부족하다. 50년간의 반혁명의 무게가 노동자계급을 무겁게 짓누르고, 오늘날 혁명가들은 과거의 혁명 조직들로부터 오래 동안 단절된 이후, 마치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와 같다. 50년 전의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당연했던 것이 오늘날의 혁명가들에게 깜짝 놀랄만한 것으로 다가오고, 과거의 일상적인 실천과 생생한 개입으로부터, 즉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은 오늘날에는 추상적이고 여전히 애매모호한 발상처럼 보인다. 공산주의자들의 적극적인 역할, 계급과 공산주의자의 관계, 투쟁 속에의 효과적인 개입(…), 이 모든 것들을 1920년대 혁명가들은 실천에 옮겼고, 구체적으로 논했다. 오늘날 이러한 전통을 되살리려는 혁명가들은 여전히 배워야 할 것이 많다. 최근 계급투쟁의 부활로 인해 그들의 공산주의 전위로서의 책임이 천 편의 이론적인 문서보다 좀 더 구체적이고 좀 더 효과적으로 정의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의 역할과 그 책무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들의 관점은 여전히 다소 이론적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면, 이 팸플릿을 과거의 저작들을 기초로 작성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왜 이 절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대회에서의 당에 대한 태제를 충실하게 인용함으로써 시작되지 않는가? 레닌의『무엇을 할 것인가(What Is To Be Done)』는 훌륭한 참조점이 아닌가? 불행하게도, 아니다.
사실, 1920-1921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당에 대한 이론적 저작들은 1917년 볼셰비키의 실천을 진정하게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졸렬한 모방이나 변형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이론적 수준에서, 특히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 담겨있는, 기존의 현저한 혼란들을 증폭한다. 우리가 혁명가의 역할 문제를, 공산주의에 관한 문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화에 관한 전반적인 분석과 함께 시작할 필요를 느꼈던 이유는, 공산주의자들의 개입에 관한 일반적인 이론적인 틀이 제3 인터내셔널의 노동자 운동에게도, 심지어는 그 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퇴락에 반대하여 투쟁한 좌익 분파에게마저도 완전히 명확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성과들을 재전유한다는 것은 우리에 앞서 존재한 혁명 조직들을 흉내 내서 과거 문서들을 한자 한자까지 그대로 베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경험을 재전유한다는 것은 또한 긍정적인 교훈과 부정적인 교훈을 끌어내면서 비판하는 것을 뜻한다. 1920년대의 혁명적 물결과 그에 뒤따른 투쟁의 퇴조는 교훈의 무궁무진한 보고이다. 이러한 교훈들로 인해 우리는 세계 혁명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화 과정과 자기 조직화의 특징들을 좀 더 명확하게 다시 정의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교훈들로 인해 우리는 당의 역할과 노동자계급과의 관계에 대해 이전에 존재할 수 있었고, 심지어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혼란들을 좀 더 잘 드러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