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 발전과 이데올로기를 구분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았다. 그 전에, 우리는 왜 공산주의의 특성들이 프롤레타리아트 의식을 불가결한 요소로 만드는 지 이해하려 했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답해야 한다. : ‘계급의 의식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계급의식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계급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첫 번째 요소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 계급으로서 본질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과거의 다른 혁명 계급들과 마찬가지로, 낡은 정치적 경제적 질서들을 전복하려면 그들 스스로 의식적으로 조직해야한다.
“인간의 모든 활동들처럼, 계급 행동은 특히 그것이 사회 운동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조직된 행동이다. 사실, 모든 계급은, 특히 혁명 계급은, 스스로 조직하는 경향을 그 자신 속에서 발생시킬 때에야 비로소 그 자신의 살아있는 실체를 나타낸다. 이 경향은 즉각적이고, 실천적이며, 물질적인 필요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존재와 현존과 미래를 성찰하고 이해하고 의식할 좀 더 일반적인 필요성에도 부합한다.” (『계급의식과 조직화 (Class consciousness and Organisation)』ICC가 바타글리아 코뮤니스타 (Battaglia Comunista)의 주도로 조직된 제2차 국제대회(IInd International Conference)에 제출한 문건, 1978년 10월 ; 좌익 공산주의 그룹의 두 번째 대회 (Second Conference of Groups of the Communist Left) 팸플릿 참조)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스스로를 조직하는 것과 의식은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 전체를 떠맡아야 할 사명을 띠지만, 이전의 계급들과는 달리, 그들이 미래에 사회를 지배할 것임을 전주곡처럼 알릴, 권력의 어떤 경제적 토대도 현존 사회 안에 갖지 않는 유일한 계급이다. 프롤레타리아가 가진 유일한 물질적 힘은 그 조직화이다. 이렇기 때문에 조직화는 다른 계급들에게 있어서보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있어서 훨씬 더 그들의 투쟁의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조건을 이룬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조직화 역량은 즉자적 계급(class-in-itself)에서 대자적 계급(class-for-itself)로 나아간, 자본주의 생산의 간단한 경제적 범주로부터 역사적 계급으로 나아간 정도를 가늠케 하는 척도이다. 같은 이유로, 의식은 이전의 혁명 계급들의 투쟁보다 프롤레타리아 투쟁에서 훨씬 더 근본적인 요소인 것이다.”(『계급의식과 조직화』, 윗글 52쪽)
맑스가 말했듯이, “노동자들이 가진 유일한 사회적 힘은 그들의 숫자상의 우세이다. 그러나 그 힘은 단결되지 않으면 분쇄 당한다. 노동자들의 분열은 그들의 불가피한 경쟁에 의해 생기고 유지된다.” 이러한 분열과 경쟁을 극복하고 자본주의에 대항해 최종적으로 승리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에게는 하나의 선택 밖에 없다. 그들의 공통된 이해를 위해 조직하여 함께 투쟁하는 길 밖에 없다. 노동자들은 그들이 생산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인해서 단결과 연대에 기반하여 조직할 수 있다. 그러한 조직화는 사실 가공할 힘이다.
“공동체 정신은 늘 혁명의 진전에 주요하고 필수적인 힘이었다. 이러한 진전은 노동자들의 연대, 상호결속, 그리고 단결의 성장 속에 체화된다.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노동자들의 새롭게 성장하는 권력은 투쟁을 통해 획득된 새로운 특징들이다. (…) 연대와 헌신이라는 덕목 그리고 사회적 투쟁에서 만들어진 공고한 단일체로서 행동하려는 충동은 공동 노동(common labor)에 기반하게 될 새로운 경제체제의 바로 그 토대이다.” (판네쿡, 『노동자 평의회(Workers’ Councils)』, 1941)
그러나 그들의 조직화와 연대만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의 붕괴를 결정짓지 못한다. 전투적인 의지와 집단적인 의식으로써 이러한 조직화와 연대를 유지하고 끈끈하게 결합할 필요가 남아있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손에 성공을 위한 한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 그것은 그들의 숫자다. 그러나 연합에 의해 단결되지 않고, 의식에 의해 지도되지 않으면, 숫자상의 우세로는 능가할 수 없다. 과거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해방을 향한 투쟁 속에서, 다른 나라들의 노동자들 사이에 우애적인 연결고리들(fraternal links)이 존재해서, 그들이 함께 서로 어깨 걸고 연대하도록 자극해야 한다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연결고리들을 무시한다면, 그 대가로서, 모든 분열된 시도들은 공통적으로 패배하고 말 것이다.”
(맑스, 『국제 노동자 연합이 전 세계의 노동자들에게 한 연설』, 1864)
통일된 조직, 집합적인 기능, 노동자들의 생생하고 능동적인 참여, 정치적 의식, 연대 (…)등은 모두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스스로를 혁명적 계급으로 구성해 내는 경향 속에 결합된 여러 요소들이다. 조직화와 계급의식은 함께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 분리 될 수도 없는 것이다. 바로 정치적인 이해력의 발전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화를 강화하여 하나의 혁명 계급으로 만든다. 계급이 자기 조직화에서 이뤄낸 진보는 그 의식을 풍부하게 한다. 이렇기 때문에, 부르주아지의 관점을 수용함으로써 혁명적 삶의 마지막 불꽃을 잃어버린 프롤레타리아 조직은 결국 더 이상 운동의 최종적 목표를 지켜내지 못하고, 더 이상 노동자들의 실천으로부터 새로운 피를 수혈 받을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조직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송장과 다름없으며, 그래서 투쟁의 새로운 혁명적 물결 속에서 반드시 일소되고 대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계급의 조직
“역사에서 노동계급이 창조하는 조직 유형은 자본주의 자체가 거치는 상이한 단계에 반드시 연관되어 있고, 그 단계가 만들어내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에 부과하는 목적들에 따라서 변한다.”(『계급의식과 조직화』)
19세기 초 노동자들이 기계와 그 기계를 자본주의가 이용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구분하는데 익숙해졌을 때(노동자들이 일으킨 처음 폭동은 기계를 부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공격 목표를 물질적 생산수단으로 잡지 않고, 사회 체계 자체로 잡았을 때, 그들 자신을 재편하려는 최초의 시도가 실제로 나타났다. 단체 결성의 권리를 위한 최초의 투쟁이 발생한 것이 바로 이 때이다. 유토피아주의자들은 이러한 최초의 계급투쟁들에서 비롯된 이론가들이었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조직된 운동들에 개입해서 그러한 운동들의 정치적 차원을 강조하려 했다. 그러나 그 자신들의 유토피아적 성격과 계급투쟁 자체의 상태 때문에 그 이론들은 주위를 맴돌 뿐이었다.
“봉건 사회가 전복되어가던 전반적 소요의 시대에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 자신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직접 관철시키려고 행했던 최초의 시도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프롤레타리아트 자체가 발달되지 않은 상태였고, 또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의 물질적 조건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절히 말해서, 소위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체계들, 즉 생시몽, 푸리에, 오웬 등등의 체계들은 앞에서 말한 적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투쟁이 발전하지 못한 초기시기에 출현하였다.” (『공산주의 선언』)
후에, 차티스트 운동(Chartist movement)과 접촉하게 되면서, 그리고 노동조합주의의 발전에 영향을 받게 되면서, 프롤레타리아트와 그들의 가장 의식적인 인자들은 역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을 위한 토대를 설립할 수 있었다. 역사적 유물론은 탈신비화된 방식으로 현실을 이해하는 도구이자, 마찬가지로 행동과 투쟁 방법의 기초다. 그러한 의식의 강화를 통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비밀스럽고 음모적인 모임이었던 <정의로운 자들의 모임(the society of the Just)>을 1847년에 선동과 투쟁의 혁명적 조직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1년 후,『공산주의 선언(Communist Manifesto)』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치 조직( an autonomous organistaion)과 정치 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제시했다. 노동조합과 정치조직들의 결합된 노력들의 결과로, 노동자계급은 정치 운동 내부에서 자신들의 투쟁을 부르주아지의 민주주의적 조직과 그 사상과는 구분되게 점차적으로 구획 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와 혁명적 인자들에게는 여전히 이해(understanding)라는 결정적인 요소가 부족했다. 제1인터내셔널은, 그 설립 시기(1864년)가 임박한 권력 장악을 가져오게 될 “사회적 혁명”의 시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항상 최종 목표를 내다보면서도 경제적 요구를 위해서 투쟁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혁명적 조직의 임무들과는 구별되는 임무들을 계급의 단위기관들(unitary organs)에게 부과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시기를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었기에, <국제노동자협회>는 노동자들의 연합들과 노조들 그리고 정치적 조류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혁명이 아직 의제가 아니라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의식은, 제2 인터내셔널의 발전에 이르러서야 노동자 운동의 실천 속에서 나타날 수 있었다. 그리고 운동의 가능성과 필요성에 적합한 조직화의 두 가지 형식들이 마침내 의식적이고 체계적으로 건설될 수 있다.” (R.빅터, 『프롤레타리아와 그 전위(The Proletariat and its Vanguard)』, 국제 혁명( Revolution Internationale), 17권, 1975)
제2인터내셔널과 더불어, 그 시기에 대한 이해,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단위조직과 정치조직 사이의 구분들이 좀 더 명확해졌다. 부르주아지 질서의 결정적 전복은 투쟁의 당면 목표가 아니었다. 그 시기에 해야 할 일은 정치적 경제적 개량을 위해 투쟁함으로써 최종적 투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들 스스로를, 한 쪽에서는 단위적인 경제 조직(a unitary economic organisation), 즉 모든 노동자들이 노동자라는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가입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어야 하고,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성원의 기준이 그 사회적 출신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정치적 동의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 조직(a political organisation)을 만들어야 했다. 이 조직은 또한 의회적 조직(a parliamentary organisation)이었다. 이것은 노동조합, 협동 조직 등과 대중 정당을 만드는 문제였다.
확실히, 노동자 투쟁의 경제적 정치적 성격은 여전히 하나의 동일한 과정에 묶여 있었다. 이렇기 때문에,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에 만들어진 구분과 ‘최소’와 ‘최대’ 강령 사이의 엄밀한 분리는, 제2 인터내셔널의 이론가들이 이러한 구분을 이론화시킨 후(베른슈타인에게 운동이 모든 것이고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다), 계급의식의 발전에 진정한 장해가 되었다. 이런 발상은,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 물질적인 조건들이 실현되자마자 사회민주주의가 자본주의 늪에 빠지는 길을 ‘촉진시켰’다. 그 이후로 계속, 계급 조직의 새로운 형식이 요구되는 그 만큼 계급의식의 새로운 성숙 과정도 요구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말 특히 러시아와 독일에서 폭발한 혁명 운동은, 부르주아 지배의 결정적 파괴라는 역사적 의제에 마침내 도달한 그 새로운 책무에 적합한 새로운 조직 형태를 창조함으로써, 바로 그곳에서 그때에 ‘최대 강령’을 즉각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1905년 러시아의 계급 운동에서 최초로 자생적으로 발생한 노동자 평의회는, 계급 조직의 특별한 형식으로서, 자본주의 국가에 대항한 투쟁 속에서 모든 노동자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재창조될 조직 형식임을 보여주었다. 노동자평의회 - 공장들과 노동자 거주 지역들(working class neighborhoods)에서 형성된 회합체 –는 프롤레타리아트 스스로가 자신들의 투쟁을 이끌 수 있도록 해 주는 조직 형태였다. 평의회는 물리적으로 노동자계급 전체를 재조직하며, 동시에 투쟁의 경제적 정치적 성격을 포괄했다. 이러한 투쟁의 두 가지 측면들은, 그러므로, 비록 순간적일지라도 서로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R.빅터,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전위』)
그러나 이 모든 것 중에, 혁명가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대중 정당’이라는 조직화 형식은 쇠퇴하는 자본주의 속에서 그 본질적 기반을 잃었다. 그 기반은,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 의회에 참여하여 자본주의로 하여금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개량을 단행하도록 강제할 가능성과 필요성이다. 부르주아 국가는 그 모든 형식들에서 파괴되어야 하고, 이러한 파괴의 행위는, 계급의 한 분파나 소수가 아무리 깨어있다 할지라도 그러한 한 분파나 소수의 업무일 수가 없다. 그것은 노동자계급 전체의 일이어야 한다, 즉 노동자 평의회의 일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상황과 시기에 혁명가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평의회가 경제적 투쟁과 정치적 투쟁을, 계급의식과 조직화를 합치한다면, 혁명가들은 왜 존재해야 하는가? 심지어 우리는, 평의회가 계급이 자본주의의 착취와 이데올로기를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모두 극복할 수 있도록 해 준다고 할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평의회를 조직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의 멍에로부터, 특히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멍에로부터 점진적으로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다. 평의회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그 자신에 대한 의식 그리고 그 계급의식을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표현하려는 의지가 점차 실현된다.”(<독일 일반 노동자 연합(AAUD)> 3차 대회의 테제, 1920)
쇠퇴 시기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왜 가장 전투적이며 의식적인 요소인 공산주의 전위로 구성된 소수 조직을 발전시키는가?
그러한 문제의 대답은 자기-조직화 과정과 계급의식의 발전 과정 전반에 놓여있음에 틀림없다. 곧, “과정”이라는 용어는, 계급의식이 어떤 특정한 시기에 완결되고 완벽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난데없이 등장하지도 않으며, 계시처럼 노동자들 위에 내려오지도 않는다. 계급의식은 점진적으로 단련되며, 이 과정은 매우 길고 고통스럽다.
과정으로서 계급의식
비록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가 평의회로 조직되어 공산주의 혁명을 끝까지 수행할 책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노동자들 속에서 이러한 필요성에 대한 의식이 오로지 변하지 않고 동질적 방식으로 존재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프롤레타리아트를 평의회 안에 단위적으로 조직하는 것 또한 항구적인 현상이 아니다.
공산주의에 도달하기 위해서, 평의회에로 스스로를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식에 도달하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험난한 길을 걸어야만 한다. 심지어 투쟁하고, 파업하고, 자본주의 착취에 저항하겠다는 간단한 의지조차도, 노동자계급 안에서 항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소강이나 낙담 또는 환상의 시기가 투쟁의 물결을 잠식시킬 수 있고, 물러서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만약 부르주아지가 노동자들의 운동을 유혈 진압함으로써 투쟁의 퇴조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혁명에 대한 전망은 좀 더 먼 미래로 밀려나게 된다.
계급투쟁의 과정, 프롤레타리아트가 스스로를 혁명적 계급으로 형성하는 과정은, 점진적으로, 평탄하지 않게, 엎치락뒤치락 전개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요한 투쟁이나 파업이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불타오르는 것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노동자 투쟁의 세계화는 자본주의의 위기의 세계화의 압력 아래 점차로 진행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지, 어떻게 파업을 혁명으로 이끌어야 하는지 동질적인 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 어떤 부문들, 어떤 노동자들은 더욱 단호하며, 더욱 전투적일 것이다. 반면 다른 이들은 계속 망설이며, 그들 스스로 끝까지 투쟁에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해답은 분명하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소외가 극에 달하도록 내몰린 계급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지가 그 이데올로기를 강하게 주입하고, 경쟁을 통해 분리시키는 계급인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자신을 통일되고 의식적인 계급으로 구성할 때 지향하게 되는 목표는, 하나의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산출하는 자본주의의 조건들과 모순된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와, 경쟁하는 개인으로 원자화되거나 경제적 요구를 위해 처음 투쟁을 시작한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는 변증법적 모순이 존재한다. 그 모순은 자발적이고 의식적이며, 조직적으로 행동하는 계급 속에서 절정점에 이른다.
“사회주의 혁명의 근본적인 어려움은 이러한 복잡하고 모순적인 상황에 있다. 한편으로, 혁명은 오직 노동자계급의 절대 다수의 의식적인 행동을 통해서만이 실현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계급의식의 발전은 사회에서의 노동자계급의 조건들에 반대하여, 즉 그들의 역사적 혁명적 과업을 생각하는 노동자들의 의식을 방해하고 끊임없이 파괴하는 조건들에 반대하여 이루어진다.”( ‘당의 본질과 기능에 관하여(On the Nature and Function of the Party)’, 『국제주의』(Internationalisme), 38권, 1948년, Bulletin d'etude et de discussion, 재판, 6권, 1974년)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투쟁에서 어떤 일치 단결에 이르든 간에, 마치 한 개인이 행동하듯이 그렇게 똑같이는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목표를 향해서 마치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그렇게 기계적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의식을 이데올로기의 고정되고 얼어붙은 원칙이나 이미 준비된 일련의 처방에 따라서 발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사회적 존재의 물질적 조건과 연결된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과정 속에서만 그들의 상황에 대해 의식하게 된다. 근본적으로 투쟁의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실천적이고 이론적인 무기를 연마한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들 자체의 원천은 매우 길고 복잡한 사회적 과정 속에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페테르스부르크 사건에 크게 자극을 받아 1월에 갑작스럽게 일으킨 총반란은 외적으로는 절대주의에 대한 혁명전쟁을 선포하는 정치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 최초의 전면적인 직접 행동은 내적으로 훨씬 더 강력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마치 전기충격과도 같이 몇 백만의 사람들에게서 계급감정과 계급의식을 처음으로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계급감정을 자각하면서 몇 백만을 헤아리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은 자본주의의 사슬에 묶여 몇 십 년 동안 끈기 있게 견뎌 왔던 사회적 경제적 존재 조건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것인가 하는 것을 아주 갑작스럽고 철저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사슬을 흔들고 잡아당기려는 자생적이고 전반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
지각없는 사람들만이 무정부주의적 계획에 따라 한 번 벌인 ‘장기간’의 총파업으로 절대주의를 한방에 파괴할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다. 러시아의 절대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분쇄해야 한다. 그러나 절대주의를 분쇄하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높은 수준의 정치 교육과 계급의식, 그리고 조직화가 필요하다. 이 모든 조건들은 소책자나 전단으로는 충족될 수 없고 오직 살아 있는 정치 학교인 투쟁을 통해서만 그리고 투쟁 속에서, 혁명의 연속적인 과정 속에서만 마련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절대주의는 단지 적절한 ‘노력’과 ‘인내’ 속에서 원하면 언제든 분쇄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절대주의가 무너지는 것은 단지 러시아 사회 안의 사회적, 계급적 발전이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이처럼 겉으로는 단순하고 순전히 기계적인 것으로 보이는 문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절대주의의 타도는 오랫동안의 연속적인 사회과정이며, 그 해결책은 사회 지반을 완전히 침식하는 것이다. 최상층은 최하층으로 바뀌고 최하층은 최상층으로 바뀌어야 한다. 겉으로 보이는 ‘질서’는 혼돈으로 바뀌어야 하고 겉보기에 ‘무정부주의적인’ 혼돈은 새로운 질서로 바뀌어야 한다.”(로자 룩셈부르크,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
프롤레타리아 의식은 물질적 경제적 조건의 부패와, 자본주의의 공포와 모순의 노출, 사회적 긴장의 악화에 의해 발전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옥한 지형이 휴경지로 남겨져 있으면 안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그들의 정치적인 이해(understanding)를 일반화시키기에 좋은 상황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행동으로부터 충분한 교훈들을 끌어냄으로써 그 투쟁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일반화하는 것은, 심지어 투쟁의 침잠기에도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러한 시기에, 프롤레타리아트는 과거의 경험을 반성해 볼 수 있고, 그들이 경험해 왔던 승리와 패배의 대차대조표를 그려서, 미래를 준비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계급의식의 발전은 주어진 상황의 즉각적인 반영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이론적 과업을 실행하기 전에 다음 투쟁의 물결을 기다리며 앉아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 의식의 발전은, 계급의 다수 속에서 동질적이고 지속적으로 살아있을 수는 없을 지라도, 끊임없는 이론적 성찰, 과거 경험의 비판을 요구한다. 그것은 공산주의 강령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이해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정련을 포함한다.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가 끊임없는 성찰과 그 정치적 성취들의 적극적인 일반화를 수행해 낼 수 있는가?
한 가지는 명확하다. 모순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하기에,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러한 일들을 전체 구성원들에게 맡길 수 없다. 사회적 안정기에, 절대 다수의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 이데올로기의 압력에 종속되어 있다. 정치적 성취들을 일반화하고 계급의식을 균질화하는 책무는 계급의 가장 결정적이고 가장 전투적인 인자에게 돌아간다. 이러한 분파들 덕분에, 즉 그 자체의 이러한 일부(정치적인 관점으로 정의된) 덕분에, 프롤레타리아트는 의식에 있어서 즉각적인 우연성과 부분적인 경험을 극복함으로써 의식에서의 성취들을 집단화할 수 있다. 이러한 분파가 운동의 목적을 더 일찍 이해했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노동자계급은 그 경향을 강화하여, 자신들의 투쟁을 파편화하고 약화시키는 고립과 분열을 분쇄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방법으로, 강력하고 의식적인 계급은 자본주의에 대항하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이러한 계급의 요소들은 그들의 책무를 만족스럽게 처리하기 위해, 그들 스스로를 혁명적인 공산주의 조직으로 재편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그들의 계급투쟁 속에서 본질적으로 적극적인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혁명가들은, 이러한 이질적 과정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진로와 조건들과 전반적인 결과들’ (공산주의 선언)를 최초로 분명하게 이해한, 계급의 구성인자들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기’ 때문에, 혁명가들은 어쩔 수 없이 계급의 소수를 이룬다. 계급에서 유래하며, 의식화 과정의 표현으로서 혁명가들은 이러한 의식화과정에 능동적인 요소가 됨으로써만 그렇게 존재할 수 있다. (ICC 강령. 국제 공산주의 흐름(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의 강령과 선언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은 영어로 각각 출판됨)
그러므로 혁명적 조직들이 노동자계급 속에서 생겨날 때, 그것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스스로를 평의회 속에서 조직하도록 만드는 그것과 동일한 토대 위에서 그리고 동일한 필요성으로부터 생겨난다. 그래서 혁명가들은 자신들 계급의 자생적이고 자발적인 산물(a spontaneous and voluntary product)이다. 자생적인 이유는, 그들의 존재가 투쟁의 산물이고 그들 계급의 실천적인 경험에 의해 풍부해지기 때문이다. 자발적인 이유는, 그들은 단순하고 제한적이며 기계적인 경제적 요소들로부터가 아니라 계급투쟁의 역사적 필요성으로부터 출현하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승리를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자계급이 국제적으로 이해하는 것(the international understanding of the workers), 그것뿐이다. 이러한 필요 때문에 <국제 노동자 협회(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가 탄생했다. 이것은 하나의 종파나 이론의 자식이 아니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자생적인 산물이며, 근대 사회의 자연적이고 억제할 수 없는 경향들에 의해 비롯된 것이다. (…) 노동자계급의 열망들과 일반적인 경향들은 그들이 위치한 현실의 조건들로부터 나온다.”(맑스, 『폴 라파르그(Paul Lafargue)에게 보낸 서한』, 1870년, 우리들의 강조)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생적이며 역사적인 운동들이, 진정으로 혁명가들의 존재를 위한 유일한 기반을 이룬다. 혁명가들은 마키아벨리적 목표나 독재의 꿈을 추구함으로써 자신들의 열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들은 계급의 단위조직 그 자체로는 노동자들의 다수에 의해 제기되는 의식적인 자기 조직화의 복잡한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등장한다. 혁명가들이 나타나는 이유는 또한, 노동자계급이 혁명의 최종목표를 마침내 깨달았을 때마저도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 안에 존재하며 그 모순과 굴욕, 타락한 분위기와 유혹적인 거짓말 속에서 계속 고통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수천 년 노예 상태의 유산과 매일 매일의 몽매주의로부터 자신을 그렇게 간단히 해방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공산주의 사회가 존재할 때까지, 계급의 의식 발전 과정은 비록 일반화되고 점점 더 발전하는 경향을 띨 지라도 이질적인 현상들로 남아있을 것이다.
만약, 계급 전체가 각각의 파업 뒤에, 투쟁에서의 부분적 패배와 승리 이후에 만들어지는 이론적 정치적 성취에 대한 ‘기억’들을 집단적으로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계급의식의 일반화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만약, 프롤레타리아트가, 각각의 전투 이후에, 리용 직공들의 투쟁부터 1917년 러시아 노동자들의 투쟁들을 거쳐, 오늘날 1982년의 노동자들의 투쟁에 이르는 역사적 길을 다시 걸어야만 한다면, 어떻게 계급의식의 동질화가 가능하겠는가?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투쟁의 교훈들을 어디에서 얻을 것인가? 이러한 교훈들이 뜬 구름 속에서나 집단적인 무의식 속에서 발견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만약 이러한 교훈들이 존재한다면(그리고 그것들이 혁명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들 중의 하나라면), 그것들은 물질적 인간의 형식으로 존재해야한다. 공산주의 의식은 신비스런 것이 아니며, 오히려 매우 구체적이고 인간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공산주의 의식과 행동은 혁명 강령과 혁명 조직 없이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러한 필요성은 공산주의와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본질에 의해 부과된다. 만약 공산주의 혁명과 사회의 변혁을 이뤄내려 한다면,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역사적 이해관계를 파악하는 방법에 있어서 질적 발전 없이는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