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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공산주의혁명이 오늘날 필요하고 가능한가를 알기 위하여 우리는 자본주의의 쇠퇴의 문제를 제기하고 현 시기 프롤레타리아트의 강령과 전략의 역사적 근거를 명확히해야 한다. 사회주의의 내용, 노동조합의 본질, ‘전선주의(frontism)'의 정치, 민족해방운동의 본질과 같은 문제는 자본주의 쇠퇴의 분석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노동자운동의 역사에서의 쇠퇴론
사회주의가 오늘날 역사적 필요성이라는 것은 대다수 사람들이 착취당하고 소외되어서가 아니다. 착취와 소외는 노예제, 봉건제, 19세기 자본주의에서도 이미 존재했지만 사회주의는 그 어느 시기에도 실현될 수 없었다.
사회주의가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그 실현 수단들, 즉 노동계급과 생산수단이 충분히 발전되어야할 뿐만 아니라, 극복되어야 할 체제 즉, 자본주의가 생산력의 발전에 필수불가결한 체제이기를 멈춘 채 점점 더 생산력에 대해 족쇄가 되어가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가 쇠퇴의 시기에 진입한 상태여야 한다.
19세기 초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를 획득해야 할 이상으로 여겼고 그 실현을 인간의 선한 의지(유토피아사회주의자의 경우)나 지배계급의 선의의 결과로서 보았다. 맑스와 엥겔스의 공헌은 자본주의의 소멸과 공산주의의 실현을 위한 물질적 필요성을 파악하고 과학적으로 정련화 시킨 점에 있었다. 맑스가 자신의 저작의 정수를 단 한 구절에 담으려 하면서 인류가 발전해온 다양한 생산양식의 역사적 성장과 쇠퇴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데 집중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의지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일정한 필수불가결한 관계들, 즉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력들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들에 들어선다. 이러한 생산관계들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 구조, 즉 그 위에 법률적 및 정치적 상부구조가 서며 일정한 사회적 의식 형태들이 그에 조응하는 그러한 실재적 토대를 이룬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 방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 과정 일반을 조건 짓는다. 인간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들은 그 발전의 특정 단계에서, 지금까지 그것들이 그 내부에서 운동해 왔던 기존의 생산관계들 혹은 이 생산관계들의 법적 표현일 뿐인 소유 관계들과 모순에 빠진다. 이러한 관계들은 생산력들의 발전 형태들이다가 그것들의 족쇄로 변전한다. 그때에 사회 혁명의 시대가 도래한다. 경제적 기초의 변화와 더불어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가 서서히 또는 급속히 변혁된다. 이러한 변혁들을 고찰함에 있어서, 사람들은 자연과학적으로 정확히 확인될 수 있는 경제적 생산조건들에서의 물질적 변혁과 인간들이 이러한 충돌들을 의식하고 싸워서 해결하는 법률적, 정치적, 종교적, 미학적 혹은 철학적, 간단히 말해서 이데올로기적 형태들을 항상 구별해야 한다. 한 개인이 무엇인가를 그 개인이 자신을 무엇이라고 여기는가에 따라 판단하지 않듯이, 그러한 변혁의 시기도 그 시기의 의식으로부터 판단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이러한 의식을 물질적 생활의 모순들로부터, 사회적 생산력들과 생산관계들 사이의 현존하는 충돌로부터 설명해야만 한다. 한 사회 질서(Gesellschaftsformation)는 그것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생산력들 모두가 발전하기 전에는 결코 몰락하지 않으며, 더 발전한 새로운 생산관계들은 자신의 물질적 존재 조건들이 낡은 사회 자체의 태내에서 부화되기 전에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인류는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과제만을 항상 설정한다. 왜냐하면 더 자세히 고찰해 보면, 그 과제 자체는 그것의 해결을 위한 물질적 조건이 이미 존재하거나 적어도 형성되는 과정에 있을 때만 발생한다는 점이 항상 드러나기 때문이다. 대략적으로, 아시아적, 고대적, 봉건적 그리고 현대 부르주아적 생산양식들은 경제적 사회 질서의 점진적인 시대들로 규정할 수 있다" (맑스, [정치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 서문,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박종철출판사, 2권, 477~478쪽, 독일어 원본참조하에 약간 수정번역됨)
이 구절에서 채택된 방법론적 접근은 어떻게 사회가 생성하고 소멸하는가를 이해하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남아 있다. 하나의 생산양식은 그 사회체계의 기반을 이루는 생산관계가 생산력이 더 이상 발전하는데 족쇄가 되어버릴 때까지는 소멸되지 않는다는 이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 강령을 정의하는데 기초가 되고 있다.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 혁명의 전망이 자본주의 자체의 전반적이고 역사적인 진화와 맞물려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맑스에게서, 특히 초기 저작에서 명확하지 않은 것은 자본주의 발전에서 "사회혁명의 시기"의 실제적 묘사였다. 이러한 명료성의 결여는 역사유물론의 방법론이 그러한 시기가 동트기 훨씬 전에 출현했다는 사실의 객관적 결과였다. 맑스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위한 첫번 째 나팔을 자본주의의 쇠퇴기가 아니라 가장 눈부신 상승기에 분 것이다. [공산주의 선언]에서 주장된 임박한 프롤레타리아혁명은 전 세계에 걸친 자본주의 사회관계의 지속적 성장과 확장에 의해 뒤로 미뤄졌다. 자본주의 사회관계가 생산력과 최종적인 갈등에 들어섰다고 그 시기에 주장한 점에 있어서 맑스는 결정적으로 틀렸다. 둘 사이의 충돌이 항상 자본주의의 국면이었지만, 그 갈등은 19세기에서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자본은 아직도 지구상의 광범위한 영역을 가지고 있어서 지속적인 확대재생산이 가능했고, 맑스가 그 축적과정에서 확인한 기본모순들, 즉 보편적인 과잉생산 경향, 시장의 포화, 이윤율 저하의 경향을 상쇄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에도 불구하고 맑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가 그의 진보적 성격을 소진해야 한다는 인식 위에 그들의 기획을 정초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그 당시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잡았을 때의 과업에 대해 말한 [선언]의 구절에 예시되어 있다. 즉 자본주의의 뿌리와 가지를 파괴하기보다는 가장 가능한 진보적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래서 이러한 맑스의 통찰력의 훌륭한 보기는 불행하게도 그 같은 수단을 현 시기에 주창하는 자들에 의해 반동적인 국가자본주의 강령으로 변해버렸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제1인터내셔널의 맑스주의자들의 실천은 자본주의가 아직 진보적 역할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노동계급은 사회주의를 위해 역사적 토대를 다지는데 도움이 되는 부르주아운동 (보기를 들어 이탈리아, 독일과 미국의 민족통일 투쟁)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는 정확한 이해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자본주의의 성장으로 인해 개량이 가능하고 개량투쟁을 통해 노동자가 하나의 사회정치세력을 구성하게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가 계속해서 개량을 위한 투쟁을 할 필요가 있다는 이해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러한 유물론적 입장은 자본주의의 즉각적 폐절과 개량투쟁에 대한 절대 반대라는 무정부주의자들의 비역사적 요구들(이들 주장이 극도로 혁명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와 임노동을 역사적으로 극복하는 방향으로 진전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 소생산자들의 세계로 퇴행함으로써 그것들을 ‘폐절하려는' 소부르주아의 열망을 감추고 있는)에 대항하여 옹호되었다.
제2인터내셔널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위기가 불가피해졌을 때 실천할 수 있는 사회주의의 ‘최대강령'과 나란히 즉각적으로 획득 가능한 개량(노동조합 인정, 노동시간 단축 등)의 ‘최소강령'을 정교화 해냄으로써 그 시기에 좀더 분명하게 전략적으로 적응했다. 그러나 제2인터내셔널의 대다수 주요 전술가들과 공식 지도자들에게 있어 최소강령이 점점 사회민주당의 유일한 실질적 강령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혁명은 노동절 행렬에서나 내보여지는 상투어가 되어 버렸고 공식적인 운동의 에너지는 자본주의체제 내에서 사회민주주의의 위상을 획득해내는데 점점 더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불가피하게 제2인터내셔널의 수정주의자들(베른슈타인 등)은 자본주의 몰락과 사회주의로의 혁명적 이행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자본주의의 사회주의로의 점진적이고 평화적 전환의 가능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19세기 마지막 시기의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괄목할 만한 발전에 의해 더욱 힘을 얻었지만 이는 이미 자본주의 체제의 상승행군의 마지막 단계였다. 제국주의적 확장은 부르주아사회의 생명의 새로운, 파국적 단계의 전조로서의 그 실체를 드러냈고, 계급적대는 점점 첨예화되고 광범위해 졌다(미국, 독일, 러시아에서의 대중파업). 베른슈타인과 그 측근들의 기회주의적 이론화, 사회민주주의 중앙파 (카우츠키 등)의 타협에 대항하여 제2인터내셔널 내의 좌익, 즉 룩셈부르크, 볼셰비키, 네덜란드 트리뷴 그룹 등은 자본주의의 종국적인 폭력적 전복의 필요성이라는 맑스주의의 기본 언명을 방어했다. 이러한 방어는 룩셈부르크의 [사회개량이냐 혁명이냐](1898)에서 가장 명확하게 잘 진술되어 있다. 이 저작에서 그녀는 자본주의가 "거친 팽창주의적 공격(제국주의)"을 통해 여전히 상승 중임을 인정하는 한편, 그 체제는 불가피하게 세계시장의 포화를 겪게 될 것이고 그러한 포화상태는 자본주의의 ‘노쇠의 위기'를 재촉하고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혁명적 권력정복의 즉각적 필요성을 초래할 거라고 주장했다. 1913년에 룩셈부르크는 이러한 역사적 위기의 진정한 경제적 뿌리를 분석하려 시도한 [자본축적론]이라는 위대한 이론적 업적을 출간하였는데, 이러한 위기가 실제로 도래했음은 곧 제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의 형태로 인류에게 선포되었다.
임노동관계의 본질로 인해서 자본주의는 그것이 추출한 모든 잉여가치를 그 자신의 사회적 경계 내에서 실현할 수 없다는 맑스의 주장에 기초하여,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하강은 자본주의적 총생산에 의해 창출된 잉여가치의 양에 비해 자본주의 외부의 시장들이 모두 소진되는 그 시점에서 시작될 수 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 룩셈부르크에게 자본주의는 "자체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그래서 매개나 토양으로 다른 경제체제를 필요로 하는 최초의 경제양식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세계적 보편 체제가 되려는 경향을 갖지만, 그러한 체제가 될 수 없어서 파괴되고마는 것이었다."([자본축적론]). 요약하면, 자본주의는 지구 전체를 지배하게 된 그 시점에 과잉생산의 영원한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결론은 오늘날까지 자본주의 쇠퇴의 근본적 기원에 대한 가장 명확한 언명으로서, 쇠퇴를 80년간 경험하면서 혁명운동이 이뤄낸 다양한 이론적 정교화를 당연히 거치게 되었다.
1914년 제국주의 전쟁의 발발은 자본주의 역사뿐만 아니라 노동자운동 모두에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더 이상 ‘노쇠의 위기' 문제는 노동자운동의 상이한 노선 사이의 이론적 논쟁의 하나가 아니었다. 그 전쟁이 역사적 체제로서의 자본주의에 있어서 새로운 시기를 표시한다는 이해는 진정한 맑스주의 흐름들로 하여금 자신들과 이런저런 형태로 제국주의 전쟁의 옹호자가 된 세력들 사이에 계급의 경계선을 긋도록 요구했고 또한 가능하게 했다. 그 경계선이 사회민주주의의 기회주의 노선(이제 공공연하게 부르주아지의 신병모집관처럼 행동하는)과 줄곧 맑스주의 위기론의 기본원칙을 고수했던 좌익노선사이에 그어지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룩셈부르크의 인터내셔널 그룹, 레닌의 볼셰비키 분파, 브레멘의 좌익급진파 등 이들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원칙을 고수한 세력들로서, 그 전쟁이 맑스가 예측한 "전쟁과 혁명"의 시기의 시작을 나타냄을 확인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혁명적 투쟁으로써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할 것을 요구했다.
찜머발트와 키엔탈에서 있었던 국제주의적 반대파대회들에 결집한 혁명가들 중에 전쟁문제에 대한 가장 명확한 입장을 취한 세력은 볼셰비키로서, 그들은 독일좌파들과 함께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시키자"라는 슬로건, 즉 전쟁에 관해 중앙파와 준평화주의파의 흐름과 선명하게 다른 혁명적 입장을 주장했다. 러시아에서 혁명적 상황이 성숙해지자 볼셰비키(특히 레닌)은 이 새로운 시기의 과업을 이해함으로써 멘셰비키의 기계적이고 민족주의적 궤변을 공격할 수 있었다. 멘셰비키는 러시아가 사회주의를 위하여 "너무 낙후했다"고 주장하면서 혁명의 파고를 되돌리려고 시도했지만 볼셰비키는 전쟁의 세계 제국주의적 본질이 사회주의 혁명을 향한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성숙을 나타낸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그들은 세계프롤레타리아혁명의 전주로서 러시아 노동계급에 의한 권력 장악을 과감하게 주장했다.
볼셰비키가 1919년 코민테른의 창설에 힘쓴 것은 세계혁명의 이해를 더욱 촉진하기 위해서였다. 코민테른의 깃발아래 모인 혁명당들은 공산주의자 강령의 정련화를 위해 역사적 시기를 규정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음에서 볼 수 있듯이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목적과 전술
1. 현시기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해체와 붕괴의 시기이다.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지닌 자본주의가 파괴되지 않는다면 전 유럽 문명은 그와 함께 멸망하게 될 것이다.
2. 프롤레타리아의 임무는 즉각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국가권력의 장악은 부르주아지의 국가권력기구의 파괴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권력기구의 조직을 의미한다."
(1919년 1월 24일, "코민테른 제1차 대회에의 초대"에서 인용)
코민테른 1차대회의 선언은 노동자 계급의 혁명과업에 대한 당당한 명확성과 자신감을 보여준다. 모든 강조점은 노동자평의회의 독재에 기반한, 노동자에 의한 즉각적 권력 장악의 필요성에 놓여 있었다. 결과적으로 전쟁 이전 노동자운동의 옛 목표들과 조직들, 즉 사회민주당과의 결별의 필요성이 명확히 이해되어 있었다. 전쟁노력을 지지하고 전쟁 이후 혁명운동의 분쇄에 총력을 기울인 사회민주당은 자본주의의 도구로 비난받았고 이들 기관과의 협력은 거부되었다. 또한 의회주의는 노동계급의 이해에 봉사할 수 없음이 대체로 인정되었으며 식민지 억압의 문제는 세계사회주의 사회의 맥락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으로 언급되었다. 이와 같은 견해는 전 세계를 휩쓸고 있던 혁명의 고양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이후 대회, 특히 1921년의 3차대회는 특히 결합력과 혁명원칙들에서 뚜렷한 퇴행을 보였고, 이는 다시 세계혁명의 퇴조와 러시아 소비에트국가의 고립의 맥락에서 볼셰비키당의 퇴행에 반영되어 나타났다. 러시아 소비에트 국가는 점점 러시아 민족자본을 관리하는 과업을 수행하게 되었고 볼셰비키당은 점점 국가와 복잡하게 융합되면서 코민테른은 세계혁명당으로서보다는 러시아의 외교정책의 도구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반혁명의 기세로부터 뭔가를 구원해 보려던 볼셰비키의 처절한 시도는 그들로 하여금 1차대회의 명료한 혁명적 입장을 포기하게 했으며 그 이전 시기의 쓸모없는 전술 즉, 의회주의, 노동조합주의, 사회민주당과의 통일전선, 식민지에서의 민족해방투쟁 지원 등의 전술로 퇴행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전술들은 아무리 혁명적 언사(쓸데없는)로 정당화되었을 지라도, 역사적 시기의 변화로 인해서 그 옹호자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전적으로 반혁명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바뀔 수는 없다.
오늘날 노동계급 내에서 자본주의의 좌익으로서 행동하는 세력들인 스탈린주의자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러한 반혁명적 정책들의 진정한 후예들이다. 한때 노동자운동의 오류였던 것들은 이러한 부르주아 그룹의 명분이 되었다. 물론 스탈린주의자나 트로츠키주의자이 자본주의 쇠퇴에 대한 여러 가지 개념들에 대해 입에 발린 말들을 해댈지 모르지만, 이것은 어떠한 물질적 기반도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의 역사를 통틀어 이러한 조류들은 세계의 상당부분을 ‘사회주의적' 아니면 적어도 ‘비자본주의적'이라고 그러므로 역사적으로는 진보적이고 ‘혁명가들'의 지원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탈린주의 정권들을 국가자본주의로 생각하는 좌파까지도 2차 세계대전이래 지구를 유린한 수많은 제국주의 간의 전쟁 속에서 그러한 정권들이나 제3세계 국가들을 지원하는데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도 자본주의 쇠퇴론을 이들 좌파들이 자본주의 국가라고 간주하는 그런 국가들에 적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본의 옹호자로서 그들의 즉각적인 실용적 요구에 종속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국「사회주의노동자당」(SWP)은 국가자본주의에 대해 얼마나 많은 말을 떠들더라도 국유화에서 진보적인 어떤 것을 보고 노동당 또는 공산당에게서 노동자 계급적인 어떤 것을 본다.
최초의 위대한 혁명적 파도의 시기에, 코민테른의 퇴행에 대항하여 싸운 좌익공산주의자들, 특히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은 그 새로운 시대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의 실질적 귀결들을 규정했다. 코민테른 3차대회에서의 KAPD의 개입들은 모두 새로운 시대가 혁명가들에게 부과한 과업들에 관련되어 있었고 그 당시 노동자운동에서 일어난 근본적 분화를 상징적으로 대표한다.
세계경제위기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KAPD의 슈바프(Schwab) 은 자본주의 상승기와 하강기 사이의 근본적 차이를 주장했고, 이러한 역사적 하강은 생산력의 완전한 정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존속이 점점 더 파괴적 기반 위에 이뤄짐을 의미한다는 인식이 이미 존재했다. "자본은 생산성을 희생 하더라도 재구축되고 그 이윤을 보존한다. 자본은 경제를 파괴함으로 그의 힘을 회복한다." 여기에 이미, 폐물생산, 자본의 과소 이용과 특히 위기의 순환, 전쟁과 재건 등, 자본주의 사회의 쇠퇴기의 본질적 특성들에 대한 통찰이 담겨져 있다.
물론, 자신들이 처한 역사적 순간에 대한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이해는 그들이 옛 시기로부터 출현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해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고, 또한 그들의 조직들에게 중대한 희생을 요구했던 반혁명이 신속히 개시된 점 때문에도 한층 더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20년대 초 좌익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된 경제 분석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가 옛 시기의 관습, 즉 개량주의의 관습과 완전하게 결별하고 사회혁명의 시기의 도래에 의해 부과된 과업에 적응해야 한다는 그들의 비타협적 주장이었다. 좌익공산주의자들이 코민테른의 기회주의적 전술을 거부한 것은 유물론적 분석에 기초한 것이지 그들의 내재적 ‘무정부주의'나 ‘유아적'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코민테른 제3차대회에서 KAPD는 상승시기에 노동계급이 의회분파를 조직하는 것이 필요했던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제"자본주의 쇠퇴의 시기에 프롤레타리아에게 선거에 참여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위기가 의회적 수단에 의해 극복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노동조합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KAPD는 진정한 개량이 여전히 가능하던 시기에 노동계급을 방어하기 위해 설립된 조직들은 혁명을 수행하는 도구로 적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혁명적 노동계급에 의해 분쇄되어야 하는 자본주의 질서의 기둥이 되어버렸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사회민주당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러므로 좌익공산주의자들은 계급의 적인 국가기구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들과의 통일전선에 참여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분석은 물론 완전한 것이 아니었고 아직도 많은 불일치를 보이고 있다. 보기를 들어, 혁명적 성격의 ‘항구적' ‘공장조직'으로써 노동조합을 대체할 수 있다는 KAPD의 환상이 그러한데, 이는 아나코생티칼리즘의 영향, 그래서 노동조합주의의 한 형태의 영향을 나타내는 입장이다. 또 다른 약점들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10월 혁명이 ‘이중혁명'이었다든가 심지어는 순수한 부르주아혁명이었다는 이론으로의 천청벽력같은 입장전환이 특히 그러했다. 그 이론은 자본주의의 전반적인 쇠퇴라는 개념을 완전히 부정했다. 반어적이게도 하지만 아마 불가피하게도, 자본주의의 쇠퇴에 대한 더 깊은 이해는 진정한 혁명조류들을 몇몇의 소그룹들로 축소시켜버린 반혁명의 끔찍한 경험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었는데, 이러한 소그룹들은 패배의 교훈을 끌어내 새 시대의 주요 특징을 그려내려 시도했다.
반혁명의 결정적 승리와 자본주의 쇠퇴의 가장 순수한 표현 (나치즘, 스탈린주의, 전시경제 등)을 보인 1930년대에 그 시대의 가장 일관된 분석을 발전시킨 분파는 Bilan(대차대조표-혁명의 물결과 실패의 교훈에 대한 대차대조표) 평론지 주변에 모인 이태리 망명 좌파였다. 빌랑(Bilan)은 자본주의 쇠퇴론을 공산주의 강령의 여러 측면들과 관련한 그들의 명확한 설명들에서 중추적으로 적용했다. 특히 새로운 시대에는 부르주아지가 식민지나 본국 모두에서 반동적 역할을 하기 때문에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민족운동을 완전히 거부함에 있어서 그러했다.
이태리 좌파가 획득한 명료성의 예는 1934년 9월 빌랑 11호에 실린 "고통받는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와 순환"이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저자 미첼 (Mitchell)은 쇠퇴기의 자본의 최심층적인 경향들을 추적한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주의 몰락에 대한 이론에 기초하여 논거를 발전시킨 그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쇠퇴가 1912-14년에 시작된 것으로 규정하고 "생산양식에 내재한 모순의 본질 때문에 자본주의사회는 더 이상 역사적 사명을 즉, 지속적이고 진보적 방식으로 생산력과 인간노동생산성을 발전시키는 사명을 달성할 수 없는" 과정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적 전유에 대항한 생산력의 반란은 한때는 간헐적이었으나 이제 항구적인 것이 되었고 자본주의는 전반적인 해체의 위기에 들어섰다"고 보았다.
미첼은 상승하는 자본주의의 순환적 위기와 쇠퇴과정에서의 경기상승 및 후퇴시기 사이의 본질적 차이를 지적했다. 상승기에는 위기가 세계자본주의 시장의 지속적 확장에 필요한 계기가 되는 반면, 새로운 시대에 초래된 시장의 포화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오로지 제국주의 전쟁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있음을 의미한다.
"쇠퇴기에는 자본주의는 전쟁이라는 한 방향으로만 체제의 모순을 인도할 뿐이다. 인류는 오직 프롤레타리아혁명을 통해서만 그 결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마치 예언처럼 정확하게 그 저자는 그 시기가 앞으로 추정적으로 어떻게 발전하게될 지를 논하고 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어떤 길로 가던, 어떤 방법을 사용하던 간에 자본주의는 전쟁이라는 운명으로 돌이킬 수 없게 내몰리게 된다. 그것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지는 오늘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알고 단언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시아를 재분할할 목적으로 폭발하게 될 것이고 결국 전 세계적인 문제로 될 것이라는 점이다."
미첼은 ‘파시즘 대 민주주의'라는 자본주의의 대안에 대해 경고를 하면서 이것은 프롤레타리아를 계급투쟁으로부터 분리시켜 자본주의 전쟁으로 동원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그 시기의 노동계급은 너무 많은 패배의 고통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 공산주의 분파의 경고를 따라갈 수 없었고 그 분파 자신들도 노동계급이 겪은 패배가 얼마나 극심한지에 대해 어떤 환상도 가지지 않았다.
이태리 좌파와 함께 평의회공산주의자들(KAPD의 잔류파, 네덜란드 좌파 및 기타)만이 유일하게 스페인 내전과 2차 세계대전에서의 제국주의의 살육에 직면해 국제주의원칙을 옹호했다. 그러나 평의회공산주의자들은 소련에서의 ‘노동자국가'를 국가자본주의 형태로 인식한 최초의 분파이지만, 1917년 10월 혁명이 부르주아혁명이었다는 틀에 경직적으로 집착함으로서 이론적으로 절름발이가 되어버렸고 그래서, 국가자본주의가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보편적 경향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인식할 수 없었다. 미국에서 폴 매틱은 이윤율 저하를 위기의 결정요인으로 강조하는 그로스만의 견해에 근거하여 영구위기 이론을 발전시켰지만, 그의 방법론은 국가자본주의를 제국주의적 역동성이 없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진보적인 새로운 생산양식이라 규정하는 것과 같이 정도에서 벗어난 수많은 분석을 낳았다. 중국의 본질, 베트남 전쟁 등에 대한 폴 매틱의 양가적인 감정도 이점을 토대로 설명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주의이론의 정밀화는 이태리 좌파와 독일, 네덜란드 좌파의 종합을 시도한 세력들에게서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국제주의(Internationalisme)」를 출간한 「프랑스 좌익공산주의(Gauche Communiste de France)」는 반동의 시기에 자발적으로 당을 건설하려는 이태리 좌파에서 분리된 분파로서, 빌랑이 다소 불명료하게 다루었던 당과 노동자평의회 사이의 관계에 대한 독일 좌파의 통찰력을 수용했다. 더 중요하게도 그것은 국가화를 향한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경향을 심오하게 분석함으로써 1917년 10월 혁명을 부르주아혁명으로 부르는 오류를 범하지 않으면서도 러시아와 그 위성국가들의 자본주의적 본질을 이해할 수 있었다.
「프랑스좌익공산주의(GCF)」는 2차 세계대전과 파시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에 의해 강화된 반혁명의 엄청난 압박 아래에서 1952년 소멸했다. 그그룹은 전쟁이 세계자본에게 잠정적인 숨 쉴 공간을 마련해준 것을 충분히 명료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즉 1950년대와 60년대의 ‘거대한' 붐은 유럽과 일본에서의 전쟁으로 산산히 부서진 경제 재건설과 미제국주의의 압도적 우월성을 그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세계경제 재편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었다. 이 시기의 놀랄만한 성장지표로 인해 많은 사회학자, 심지어 혁명운동의 세력도 ‘위기 없는' 새로운 자본주의와 노동계급의 "부르주아 포섭"에 대한 이론화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베네수엘라에서 옛 GCF의 지도부의 하나였던 인물주위에 소그룹이 형성됐다. 이 새로운 그룹「국제주의(Internacialismo) 」는 자본주의 쇠퇴의 전체 순환, 즉 위기, 전쟁, 재건, 새로운 위기를 기술하는데 한 걸음 나아가 이러한 이해에 기초하여 붐의 종료, 열려진 위기의 새로운 시대의 시작, 그리고 반혁명의 테러나 망상에 의해 더 이상 마비되지 않는 노동자세대에 의한 국제적 투쟁의 고양을 예측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전망은 프랑스에서의 68년 5-6월의 대대적인 투쟁과 그에 이은 계급운동의 세계적 물결, 그리고 미국과 소련의 제국주의 블록 사이의 첨예화된 긴장을 또한 초래한 70년대 초의 세계경제 위기의 심화에 의해 증명되었다. 결론적으로 인류는 이제는 인류의 파멸을 의미하는 세계전쟁과 세계혁명, 즉 공산주의사회 건설 사이의 역사적 딜레마에 또 다시 직면하게 되었다.
이 그룹은 1968년 5월 사건이후 프랑스의「국제혁명(Revolution Internationale) 」의 형성을 추진했다. 이 팸플릿의 뼈대는「국제혁명(Revolution Internationale) 」의 초기 연재물에 실린 글(옛시리즈 5호과 새시리즈 2, 3, 5호)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RI는 다른 나라의 비슷한 그룹형성에 핵심역할을 수행했고 이들과 함께 1975년 「국제공산주의흐름(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을 창설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통하여 ICC는 자본주의체제의 죽음의 고뇌의 진정한 표현으로 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길고, 가장 깊은 위기를 유발한 요인들을 밝힘으로서 위기의 경로를 체계적으로 그려냈다. 제국주의간의 적대관계의 발전, 특히 러시아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의 미국 블록의 공격, 소련의 세계권력으로서의 지위 박탈을 궁극적 목적으로 한 미국의 소련에 대한 증대되는 포위를 추적했다. 동시에 ICC는 이 시기를 통해서, 두 가지 국제적 계급투쟁 물결(1978-80, 1983-89) 속에서의 계급의식의 균질적이진 않으나 진정한 발전을 기술 하였다.
1980년대 말경, 쇠퇴하는 자본주의는 중요한 분기점에 도달했다. 노동자 투쟁의 지속은 세계대전으로의 길을 막았지만, 프롤레타리아는 혁명적 문제를 제기할 만큼 성숙하지는 못했다. 그 결과 경제위기의 격화는 사회적 해체의 보편적 과정을 열어 놓았고 자본주의사회는 발끝까지 썩어 갈라 터지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은 러시아블럭의 갑작스런 붕괴와 그 서구 라이벌의 결과적인 혼란을 가져왔고 또 이로 인해 더욱 가속화 되었다. 이러한 붕괴와 혼란은 자본주의 쇠퇴의 마지막 시기인 전면화된 해체의 시기를 열어놓은 역사적 사건들이 되었다. 제국주의블럭이 부재한 가운데 세계대전은 어떤 예견가능한 의제로부터도 벗어났지만 이점이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군사주의화와 제국주의화 경향을 결코 완화시키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1991년 벽두 걸프에서의 거대한 살육이 상당히 명확히 보여주었듯이, 이러한 해체 과정 자체가 국지적, 지역적 갈등, 강대국들에 의한 ‘경찰행위', 기근과 생태적 파국 등으로써 인류의 생존에 위협이 되고 있다.
ICC는 쇠퇴론을 주장하는 프롤레타리아운동의 유일한 조직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최종단계를 확인하고 분석할 수 있었던 유일한 조직이다. ‘해체, 자본주의 쇠퇴의 마지막 단계'라는 글이 1990년 인터네셔널 리뷰(International Review) 여름 호인 62권에 실려 있다.
짧은 역사적 스케치에서 본 바와 같이 쇠퇴론은 ICC가 고안한 것이 아니라 맑스주의 전통 전체로부터의 진정한 유산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관된 혁명적 활동의 필수불가결한 기초이다. 그것이 작동하는 시대에 대한 이해 없이는 프롤레타리아 정치조직의 강령은 그 분석과 계급내 개입을 위한 물질적 기초를, 지향성을 가질 수 없다. 자본주의 쇠퇴에 대한 이해 없이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캠프를 구별하는 계급경계가 확고하게 방어될 수 없다. 이것은 1980년대 초 ‘보르디가'의 국제공산주의당(ICP, 공산주의자 강령)의 몰락으로 가슴 아프게 목격된 바 있다. 이 흐름은 이탈리아 좌파 전통의 진정한 후예라고 주장하면서도 1930년대 이탈리아 분파의 작업에서 그렇게 중요했던 쇠퇴론을 거부했다. 특히, 자본주의 쇠퇴가 지구적 현상이기 때문에, 저개발지역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이 어떤 진보적 역할도 할 수 없다는 노선을 거부했다. ICP는 1848년 이래 맑스주의의 ‘불변성'에 대한 보르디가의 메마른 이론을 되풀이 하면서 모든 종류의 민족해방전쟁의 혁명적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실상 두개의 제국주의블럭 사이 또는 지역적 제국주의 세력들 사이의 대리전에 불과했다. 1980년대 초 ICP가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를 지지함으로써 그 내부의 한 분파가 순전히 부르주아 좌파주의 진영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이는 결국 그 국제조직 전체의 내부로부터의 붕괴를 초래했다.
반면 쇠퇴론을 부인하지만 민족문제나 노동조합문제에서 계급관점을 방어한 그룹들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국제주의 공산주의 그룹(Groupe Communiste Internationaliste)」의 경우가 시사적이다. 초정통 맑스주의자들이라고 주장하며 시작한 이 그룹은 지난 50년간 좌익공산주의 정치의 거의 모든 이론적 기반을 거부하면서 점점 모더니즘과 무정부주의로 흘러갔다. 쇠퇴론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평의회주의자들도 같은 운명이었다. 이는 쇠퇴론을 헐뜯고 대안적 설명과 시기구분을 하려는 최근의 유행을 추종하는 모든 사람들, 보기를 들어, 이미 자본주의 상승기에 관철된 몇몇 중요한 변화들을 설명하기 위해 맑스가 발전시킨 "자본의 형식적, 실질적 포섭"이라는 개념을 잘못 적용하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경고가 되어야 할 것이다. ICC는 이러한 ‘유행'에 대해 인터네셔널 리뷰의 연재논문들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이 연재 글들은 사실상 쇠퇴론의 진전된 발전을 보이고 있다.[1]
자본주의 쇠퇴를 이해하는 작업은 계속된다. 그러나 그 이론은 무엇보다도 인류의 생존이 경각에 달린 역사적 상황에서 혁명가의 행동과 개입의 지침이 된다. 이 팜플릿은 이전 계급사회의 쇠퇴에 대한 긴 역사적 검토로 시작한다(이 장은 전에 영어로 완전히 출간된 적이 없다). 그리고 이 시기의 자본주의 경제의 특성에 대한 복잡한 이론적 쟁점들을 다룬다. 그러나 이 작업은 학문적 겉치레가 전혀 아니다. 현재의 자본주의의 실재를 검토함에 있어서 그 유일한 목적은 그 자본주의에 대항한 전투적 투쟁을 무장시키는 것이다.
[1] [각주에 대한 짧은 언급〕이 팜플렛에 포함된 통계는 1970년대에 작성된 것이며 오늘날 분명히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지만, 이 사회의 계속되는 쇠퇴가 그 통계가 예시하는 경향을 증명했다는 의미에서만 그렇다. ICC의「국제평론」은 자본주의 위기의 ‘진전'에 대해서 정기적으로 새로운 정보로 갱신해 왔으며 독자는 이러한 글들을 참조하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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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8,49,50,54,55,58,60호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