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적 유물론의 구체화
데카당스 이론은 원시 공산제, 고대 노예제, 봉건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등의 생산양식의 발전을 분석하는 역사유물론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따라서 데카당스 이론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 시기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틀이다. 사회가 아직도 진보하고 있는지 또는 사회가 진보를 완결하여 ‘역사'로 되었는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정치, 사회, 경제적인 수준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모든 과거에 존재하였던 사회처럼, 자본주의의 상승 단계는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생산관계의 역사적으로 필요한 성격, 즉 사회의 생산력 확대에서 생산관계가 하는 중대한 역할을 나타내 준다. 이와 대조적으로, 데카당스 단계에서 생산관계는 생산력을 확대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생산력 확대를 막는다. 이것은 맑스와 엥엘스가 우리에게 남겨준 주요한 이론적 성과 가운데 하나이다.
20세기는 인류의 역사에서 보기를 찾을 수 없는 참으로 잔인한 시기였다. 20세기에 일어난 수많은 전쟁은 규모와 빈도, 기간에서, 그리고 그 결과 인간들에게 안겨준 재앙의 폭에서 다른 어떤 시기와 비교할 수 없었다. 즉 전쟁은 지구 전체를 뒤흔들고 수천만 명의 프롤레타리아트와 인류를 절망적인 가난으로 몰아넣은 경제위기를 가져왔고, 역사에서 가장 커다란 기근에서 체계적인 집단학살까지도 낳았다. 19세기와 20세기는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시대였다.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Belle Epoque)」동안 부르주아 생산양식은 비할 바 없이 가장 전성기를 누렸다. 이 때 부르주아 생산양식은 전에는 꿈으로만 꾸어왔던 생산성과 기술의 정교화를 이루면서 지구를 하나로 묶어 놓았다. 사회의 토대에 긴장이 쌓여가고 있었지만, 자본주의가 성장한 지난 20년(1894-1914)은 가장 번영한 시기였다. 자본주의는 적이 없는 것처럼 보였고, 군사적 갈등은 주변부에 한정되어 있었다. 거의 끊이지 않고 도덕적, 지적, 물질적 진보를 이룬 "긴 19세기" (역사가 홉스봄의 표현)와 달리, 1914년 이후의 20세기에는 모든 면에서 뚜렷한 퇴보가 있었다. 지구를 가로질러 더욱 더 세계의 종말을 방불케 하는 경제와 사회생활의 성격, 끝없이 이어지는 갈등 속에서 자멸의 위협, 그리고 심상치 않은 생태계의 재앙은 당연한 숙명도 아니고 단순히 인간의 광기의 산물도 아니며, 자본주의 발생과 더불어 시작된 자본주의의 특성도 아니다. 그러한 퇴보는 처음부터, 즉 16세기에서 1차 세계대전까지 경제, 사회, 정치 발전의 강력한 요인인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데카당스의 징후였다. 그리고 이는 모든 그러한 발전의 족쇄가 되었으며, 인류의 생존 그 자체에 대한 위협이 되었다.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물질적 가난 없는 세상을 향해, 인류의 필요와 욕망, 그리고 의식을 근거로 하여 인류가 활동할 수 있는 통일된 사회를 향해 움직일 수 있게 한 수준으로 생산력이 발전했던 바로 그 순간에 왜 인류는 생존의 문제와 마주하게 되었는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는 정말로 자본주의가 이끌어온 막다른 골목에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혁명세력을 이루는가? 왜 우리 시대에 노동자 투쟁의 대부분의 형식은 특정한 민족국가의 헌법이나 부르주아지의 진보적인 특정분파를 지지하면서 노동조합주의와 의회주의를 통한 점진적 개혁을 위한 투쟁과 같은. 지난 세기에 두드러진 노동자 투쟁의 형식일 수밖에 없는가? 이러한 초보적이지만 중요한 질문에 답변할 수 있는 지구적이고 일관된 전망도 없고, 여전히 전위 역할을 할 수 없는 현재의 역사적 상황에서 우리의 방향을 찾는 것은 힘든 일이다. 맑스주의, 즉 역사유물론은 그러한 질문을 풀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세계관이다. 대답은 명확하고 단순해서 몇 마디로 할 수 있다. 앞 선 생산양식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는 영원한 체제가 아니다.
"어느 선을 지나면, 생산력의 발전은 자본에 대한 장애요소가 되고, 결과적으로 자본 또한 노동의 생산력 발전의 장애 요소가 된다. 일단 이러한 관계가 형성되면, 족쇄로서의 길드체제, 농노제, 그리고 노예제가 해체되었던 것처럼 자본, 다시 말하면 임금 노동은 사회적 부의 발전과 생산력과 같은 관계로 시작된다. 노예체제의 마지막 형태, 한편으로는 임금 노동, 다른 한편으로 자본으로 구성된 형태가 분출되고 이 분출은 자본에 대응하는 생산양식의 결과이다. 그것은 임금노동과 자본의 부정, 부자유한 사회적 생산의 이전 형태에 대한 부정을 위한 물질적 그리고 정신적 조건들을 발생시키는 자본의 생산과정이다.
사회의 생산력 발전과 그것을 특징 지워 주는 생산관계들 사이에 증가되는 부조화는 모순, 위기, 변동으로 표현된다."(칼 맑스,「요강」 전집 29권, 133-4쪽)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충분히 발전하지 않는 한, 프롤레타리아 투쟁은 세계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투쟁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생활조건을 실질적으로 개혁하고 영원히 개선하기 위하여 노동조합과 의회의 투쟁을 경험하면서 스스로를 계급으로 인식하고 주장할 수 있게 했다. 자본주의 체제가 데카당스로 들어간 순간부터, 세계 공산주의 혁명은 가능하고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프롤레타리아의 투쟁형식은 완전히 달라졌다. 당면 수준에서도, 방어투쟁은 형식으로나 내용으로나 노동조합주의와 노동자 정치조직을 위한 의회주의 대의제와 같은 지난 세기를 이끌었던 투쟁 수단을 통해 더 이상 나타낼 수 없었다.
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는 혁명운동이 전개되면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the Communist International : 코민테른)은 부르주아지가 더 이상 역사적으로 진보 계급이 아니라는 인식을 중심으로 하여 1919년에 세워졌다.
"2. 자본가 계급의 쇠퇴기 - 세계경제상황의 평가에 기초하여 제3회의는 자본주의가 생산력 발전의 사명을 수행해 왔으며 현재 역사적 발전뿐만 아니라 인간 생존의 가장 기초적인 필수조건들과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의 단계에 도달했음을 단언할 수 있다. 이런 기본적 모순은 최근의 제국주의 전쟁에 반영되었고, 그 전쟁이 생산과 분배의 조건에 가한 심각한 손해에 의해 날카로워 졌다. 자본주의적 노예제라는 족쇄에도 불구하고 진부한 자본주의는 그것의 억제할 수 없는 힘으로 야기된 파괴행위가 노동자계급에 의해 이루어진 경제적 성과물들을 무능케 하고 황폐화시키는 단계에 있다. 현재의 자본주의라는 것은 그 자본주의의 소멸의 고통이다."(「코민테른 첫 4차 대회의 결의와 선언」에서 "코민테른 전술에 대한 테제", Hessel, 388-9쪽)
그때부터는, 제1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 체제를 쇠퇴 국면으로 들어서게 했다. 이러한 이해는 공산주의 좌파그룹 대다수의 공동 전술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나침반 덕택에 공산주의 좌파는 비타협적이고 일관된 계급지형에 남아있을 수 있었다. 단지 ICC는 1930년대와 40년대에 이탈리아와 독일, 네덜란드 좌파, 그리고 1940년대와 1950년대의 GCF(The Gauche Communiste de France)가 가치를 풍부하게 하여 전달한 유산을 받아 발전시켰다.
결정적인 계급 전투가 임박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거의 2세기에 걸친 노동자 투쟁과 노동자 정치 조직의 이론작업을 통해 발전했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세계관을 다시 갖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야만의 가속화와 착취의 끊임없는 증가가 당연한 사실이 아니라, 20세기 시작 이래 역사적으로 쓸모없는 것이 되었지만 세계를 계속해서 지배한 자본의 경제·사회적 법칙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19세기에 배웠던 투쟁형식(개량투쟁의 최소강령, 부르주아지의 진보적 분파에 대한 지지 등)이 사회 안에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존재를 "견뎌낼" 수 있었던 자본주의의 상승 시기에는 상식이었지만, 자본주의의 쇠퇴기에는 19세기의 투쟁 형식이 막다른 골목으로 이끌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노동계급이 아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공산주의 혁명이 쓸데없는 꿈이나 유토피아가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데카당스를 이해하는 과학적 근거였던 "필연"이자 "가능성"임을 아는 것이 프롤레타리아트로서는 훨씬 더 중요하다.
2)자본주의의 데카당스
① 역사적 진화의 결과로서, 노동력은 하나의 상품이 된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력은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
"고대시기에, 우리는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잉여노동을 착취하는 것을 보았다. 고대의 노예제나 중세의 농노제 모두 도달된 생산성 수준, 즉 다수의 개인을 지탱하기 위해 한 개인의 노동력에 의존한다. 노예제나 농노제는 한 사회계급이 다른 사회계급의 노동력에 의지하는 생산성으로부터 이윤을 추구하는 방식의 다른 표현이다. 이런 점에서, 고대사회의 노예나 중세 농노는 현재 임금노동자의 선조격이다. 그러나 고대나 중세의 노동력은 그것의 생산성과 착취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상품화되지 않았다.
상품으로서 노동력의 판매는 일련의 특수한 역사적 그리고 사회적 관계들을 뜻한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시장의 출현은 다음을 뜻한다.
- 노동자는 개인으로 자유롭다.
- 노동자는 생산수단과는 분리되고, 이후에 노동하지 않는 자의 소유 하에 합쳐진다.
- 노동 생산성은 최고 수준에 이른다. 다른 말로, 잉여노동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시장경제는 지배적인 체제가 된다. 다시 말해, 상품의 형태로서 잉여 노동의 창출은 노동력 구매의 목적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정치경제 입문」 제5장 「임노동」)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노동력이 상품으로 된 것은 지난 시대와 견주어 볼 때 전혀 새로운 차원의 빈곤이다.
"원시부족은 자연환경이 호의적이지 않을 때 배고픔을 겪었다. 원시부족의 빈곤은 대체적으로 사회의 빈곤이었다. 어떤 부족 구성원이 빈곤한 반면에, 다른 구성원이 부유하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생활수단들은 사회전반에 쓰일 수 있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평등하게 쓰일 수 있었다. 이것은 고대와 동양 노예제에도 해당된다. 그러나 이집트의 공공 노예나 그리스 사노예들은 강제되고 착취되었으며, 그들의 빈약한 생활환경과 주인들의 풍요로움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예로서의 그들의 조건들은 그의 존재를 확인시켰다. 어떤 사람도 그들의 말이나 가축이 굶어 죽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는 것처럼 노예들도 굶어 죽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중세 노동제도 여기에 해당된다. 소작농이 토지에 밀착되고, 모든 개개인이 주인이거나 다른 사람의 하인인 봉건적 종속 체제는 개개인들로 하여금 사회적 위치를 결정지었다. 농노는 강제되었지만, 어떤 지주도 농노를 토지로부터 쫓아내고 따라서 농노로부터 생존수단을 박탈할 권리를 가지지 않았다. 봉건적 관계는 지주로 하여금 대재앙, 화재, 홍수, 해일 등이 발생할 경우 소작농을 도와주도록 강제하고 있었다. 봉건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자본주의가 출현하기 시작하는 중세 후기 상황은 변화한다.
(.....)
자본주의 상품 생산은 인간역사에서 노동과 인구 대다수의 생존 수단의 부재, 그리고 인구의 다른 부분에서의 가난의 결과임과 동시에 필요조건이고 경제의 생존 조건인 새로운 경제 형태이다."(로자 룩셈부르크, 앞의 글)
②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의 조건을 창조한다.
『공산주의자 선언』은 부르주아지가 했던 탁월한 혁명적 역할을 강조한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낡고 제한된 사회형태를 쓸어버리고 결코 본 적 없는 가장 역동적이고 팽창적인 생산양식으로 바꾸어 놓았다. 즉 그러한 생산양식은 지구 전체를 정복하고 통일시킴으로써, 그리고 엄청난 생산력으로 추진함으로써 마침내 계급적대를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좀 더 높은 사회형태의 토대를 놓았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그 자체에 의한 전대미문의 생산력의 발전 때문에 물질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보편적 상품생산에 기초한 사회는 필연적으로 그 자신의 내적 기능의 논리에 따라 쇠퇴하여 결국 몰락하는 것으로 운명 지워 졌다. 『선언』에는 자본주의의 몰락을 이끌 내적 모순이 이미 확인되었다.
"부르주아적 생산 관계들과 교류 관계들, 부르주아적 소유 관계들, 즉 그토록 강력한 생산 수단과 교류 수단을 마법을 써서 불러내었던 현대 부르주아 사회는, 주문을 외워 불러내었던 지하 세계의 힘에 더 이상 군림할 수 없게 된 마법사와 같다. 지난 수십 년 이래로 공업과 상업의 역사는 현대의 생산관계들에 대한,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지배의 존립 조건들인 그 소유 관계들에 대한, 현대 생산력들의 반란의 역사일 뿐이다. 주기적으로 재발하며 점점 더 위협적으로 부르주아 사회 전체의 존재를 문제 삼는 상업공황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상업 공황 때에는 제조된 생산물들뿐만 아니라 이미 있는 생산력들까지도 으레 태반이 절멸된다. 공황 때에는, 이전의 모든 시기에는 어불성설로 보였을 하나의 사회적 전염병이 돌발한다. 과잉 생산이라는 전염병이 그것이다. 사회는 갑자기 순간적인 야만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기아와 전면적인 섬멸전은 사회에 대한 모든 생활 수단들의 보급을 차단해버린 것처럼 보인다. 공업과 상업은 절멸된 듯이 보인다. 왜 그런가? 사회가 너무 많은 문명, 너무 많은 생활 수단, 너무 많은 공업, 너무 많은 상업 따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칼 맑스, 『공산주의자 선언』, Pelican Marx Library, 72-73쪽)
『선언』을 쓴 뒤 맑스는 몇 년 동안 잉여가치의 추출과 실현 사이의 관계, 그리고 십년 또는 그 이상 자본주의 사회의 기초를 흔들었던 과잉생산의 주기적 위기를 좀 더 면밀히 분석하였다. 잉여가치의 비밀을 벗기면서, 맑스는 자본주의를 쇠퇴와 필연적으로 최종적 붕괴로 이끌게 될 엄청난 모순이 자본주의의 특징이었다는 점을 밝혀냈다. 이 모순은 임노동의 본질에 기초한 것이다.
- 과잉생산의 위기 : 자본주의 하에서 인구 대부분은 잉여가치의 본질에 따라 과잉생산자와 과소소비자로 구성된다. 자본주의는 그 자신의 생산관계의 폐쇄회로 속에서 생산된 모든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
- 이윤율 하락의 경향 : 인간의 노동력만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경쟁 때문에 자본주의는 이윤율이 하락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죽은 노동(기계, 원료)과의 관계에서 살아있는 노동의 양을 줄일 수밖에 없다.
지구 전체를 그 자신의 법칙에 종속시키는 믿을 수 없는 팽창적인 본질과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로마 노예제나 중세 봉건제처럼 역사적으로 이행기적인 생산양식이다. 자본주의는 선행한 모든 생산양식처럼, 거대한 역사 운동이 다하여, 사라지도록 운명 지워졌다. 그러한 운명은 도덕적 파산이 아니라 스스로를 파괴하도록 강제한 내적 모순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자본주의를 좀 더 높은 사회조직의 형식으로 대체할 수 있는 계급을 자본주의가 그 자체 내에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그러한 모순의 해결도 암시했다 : 즉 공산주의가 그것이다. 상품관계의 지배로 혼돈에 빠져든 사회는 오직 임노동과 교환을 위한 생산을 폐지한 사회, 즉 인간사이의 관계가 더 이상 불명료하지 않고 단순하고 명백하게 될, 인간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유롭게 연합한 생산자" 사회를 통해 대체될 수 있다.
생애 말년 동안, 맑스는 그의 지적 힘의 대부분을 고대사회 연구에 바쳤다. 모건(Morgan)의 『고대사회(Ancient society)』가 출판되고 러시아의 노동자 운동이 러시아에서 혁명 전망에 대한 문제를 던지자, 맑스는 강도 높은 연구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 연구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아주 중요한 『민족지 노트(Enthnographic Notes)』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전해졌다. 이 연구는 엥엘스의 위대한 인류학적 작업인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의 버팀목이 되었다.
맑스와 엥엘스에게, 미국 인디언에 대한 모건의 연구는 원시공산주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분명히 확증시킨 것이었다. 즉 사유재산, 사회적 위계 그리고 성의 불평등이 인간 본성에 내재해있다는 전통적인 부르주아 개념과 반대로, 모건의 연구는 사회구성이 원시적일수록 재산은 더욱 공동소유가 되고, 의사결정 과정은 더욱 집합적이 되며, 남녀 사이의 관계는 더욱 서로의 존경에 기초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원시사회에 대한 맑스주의적 접근은 사회의 역사적 진화가 마지막 순간에 사회의 경제적 하부구조의 변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유물론적 방법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동은 원시공동체의 종말을 가져왔고 더욱 발전된 사회형태가 출현하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역사 진보에 대한 맑스의 견해는 어둠에서 빛으로의 직선의 상승, 즉 부르주아 문명의 찬란한 광채가 그 정점을 이룬 상승을 순진하게 상상했던 사소한 부르주아 진화론에 철저히 반대한 것이었다. 맑스의 관점은 아주 변증법적이다. 즉 원시공산주의를 인간이하로 보며 거부하는 것과 달리, 그의 『노트』에는 부족공동체가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그 공동체가 지닌 질적인 특징은 스스로 다스리는 능력, 상상력과 예술창조의 힘 그리고 성의 평등이다. 원시사회의 불가피한 한계, 특히 개인과 부족단위에서 인간의 분화에 부과되는 제약은 역사의 진보를 통해 극복되었다. 그러나 이들 사회의 긍정적 측면은 역사의 진보 과정에서 상실되었고 공산주의의 미래에서 좀 더 높은 수준으로 복원되어야 할 것이다.
수십만 년 동안 인류가 계급 없고 국가 없는 사회에서 살면서 얻은 발견은 노동자 운동의 수중에서 강력한 무기로 될 것이고, 사유재산에 대한 사랑과 위계제의 필요성이 인간본성의 타고난 부분이라는 모든 주장들을 상쇄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3) 제국주의 단계, 자본주의의 정점이자 데카당스의 서곡
『공산주의자 선언』이 쓰여 졌을 당시, 과잉생산의 순환적 위기는 아직 "새로운 시장의 정복과 옛 시장의 보다 철저한 착취를 통해" 극복될 수 있었다. 즉 자본주의의 앞에는 여전히 긴 팽창의 단계가 놓여 있었다.
1870년대와 1880년대 동안 자본주의 삶에 새로운 국면이 펼쳐졌다. 자본주의 체제는 이제 더 이상 국민국가를 세우기 위해 등장한 부르주아지의 계급투쟁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식민지정복의 방법을 사용하는 팽창과 세계 정복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섰다. 19세기 마지막 30년 동안 지구의 대부분이 정복되어 거대한 제국주의 열강 사이에서 분할되었다.
엥엘스가 1891년 주목할 만하게 통찰한 바와 같이, 자본주의 데카당스의 첫 조짐이 나타나자, 강대국 사이에는 긴장이 점점 늘었고 주변부에서는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위의 모든 것은 독일이 평화적으로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발전을 수행할 수 있다는 조건부로 언급되었다. 전쟁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전쟁은 어느 순간에도 발발할 수 있다. 현재 모든 사람들은 전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다. 만약 전쟁이 발발한다면,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전쟁은 1,500만-2,000만 군인들이 서로 죽이고 이전에는 없었던 유럽의 황폐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 전쟁은 사회주의의 즉각적인 승리를 이끌거나 구질서에서의 대변동을 야기할 것이다."(프리드리히 엥엘스, "독일에서의 사회주의", MEW, vol. 27, 1891, 241쪽, 245쪽)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사회적 재난이 터지기 전에, 노동자 운동내부에서 많은 영향력 있는 목소리들은 노동계급에게 자본주의가 개혁을 통해 평화적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점을 확신시키려 애썼다.
다행히 그 당시에, 맑스주의 좌파는 자본주의의 경제 통계에서 나타난 것처럼 자본주의가 명백하게 건강한 상태라는 것을 통찰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자본주의는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하였다. 맑스주의 좌파가 사회민주주의 내의 개량주의에 맞서 화해할 수 없는 투쟁을 할 수 있었고 체제의 악화되는 모순을 고려할 수 있었던 것은 엥엘스의 발자국을 따라 걸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데카당스 단계에 대한 이해는 맑스의 계승자들, 그리고 특히 로자 룩셈부르크가 좀 더 발전시켰다.
4) 20세기 : 전쟁과 혁명의 세기
비록 맑스주의 좌파가 자본주의를 - 사회생활에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새로운 현상인-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끈 기본 이유에 대해 결코 통일된 의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 이것은 세계를 분할하려는 거대한 제국주의 열강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었다. 분명히 세계의 새로운 분할에 가장 관심이 많았고, 전쟁에 참전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제국주의 국가들은 가장 적은 식민지를 지닌 국가들이었다. 특히 독일이 그러했다. 다른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과 프랑스도 똑같이 자신들의 식민제국을 잃지 않으려고 참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야만에 대항한 국제적 분노의 물결이 부르주아지의 전복과 공산주의 사회의 창설을 역사적 의제로 삼은 세계의 혁명적 물결로 전환되었을 때, 노동자 운동 내부에는 러시아에서 부르주아지의 정치권력 장악이 아직 선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계급에 의한 권력 장악이 너무 이른 것이었다고 선언하기 위해 "맑스주의 정통"으로 도피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러시아에서 혁명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무르익지 않았다는 추정을 둘러싼 이러한 양극화는 그 나라에서 산업과 노동계급의 발전을 볼 때 완전히 오류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세계 혁명의 조건이 무르익었다는 근본적인 국면을 완전히 놓치는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혁명운동의 물결로 추진된 1919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이미 살펴보았듯이 역사적으로 부여된 부르주아지의 진보적 역할이 끝났다는 합의를 기초로 하였다.
어쨌든 혁명이 패배했다는 사실은 혁명의 객관적 조건이 이 시기에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결코 아니었다. 생산력의 발전 덕분에 풍요로운 사회를 위한 전제조건이 존재했을 뿐 아니라, 노동계급은 이미 1905년의 러시아와 1917년 이후 몇몇 공업국에서 부르주아지를 전복하고 세계적으로 자신의 정치권력을 세울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근본적으로 독일 혁명의 실패에 기인한 이러한 패배는 사실 혁명을 위한 주체 조건의 미성숙, 특히 전쟁 동안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대부분이 사회 민주주의에 여전히 환상을 갖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5) 자본주의 데카당스의 경제적 토대
세계대전은 자본주의가 데카당스 단계로 들어섰음을 알리는 첫 번째 잔인한 조짐이다. 그 전쟁은 사회의 경제적 토대 안에서 발전했던 모순과 분명히 연관되어 있었다. 실제로 전쟁은 이러한 모순의 순수한 산물이다.
A) 데카당스시기에 전쟁의 근원적인 경제적 원인
이미 우리가 지적한 바와 같이, 맑스는 자본주의는 잉여가치 일부의 실현을 위하여 비자본주의 국가와의 교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과, 그리고 이 필요가 자본주의에 특수한 잉여가치, 즉 임노동에 대한 전유양식의 결과라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자본가에게 노동자의 임금을 가능한 한 최소로 줄이도록 강제하는 것은 이러한 전유양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는 자신들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필요하지 않은 상품을 살 수 없고, 따라서 자본주의 안에 구매력을 가진 시장을 확대하는데 하나의 요소를 이룰 수 없었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자신의 생산관계 영역 밖에서 끊임없이 상품의 판로를 찾아야 했다.
"두 번째로 그는 생산수준이 임의적으로 선택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전하면 할수록, 즉각적 수요에 관계없는 세계시장의 지속적 팽창에 의존하는 규모로 생산을 하게 된다. 그는 세이(Say)의 사소한 가정에 의지한다. 즉 자본가는 이윤이나 잉여가치를 위해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가치를 위해 생산한다. 그는 상품이 화폐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노동자의 수요는 충분하지 않다. 이윤은 노동자의 수요가 그들의 생산가치보다 작다는 사실로부터 발생한다."("잉여가치론 제2부 ‘리카도의 이윤이론 - (e) 이윤율 저하와 지대이론과의 연관에 대한 리카도의 설명", 468쪽)
지구적 자본주의는 비자본주의 세계와 교환해야 한다. 이러한 필요는 힘을 적게 가지거나 많이 가진 각각의 자본주의 국가에 강제로 영향을 끼치고, 다른 강대국의 힘을 빌리지 않고 그러한 시장에 접근하기 위해 자신의 식민제국을 확보하도록 한다. 그 결과,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세계와 식민지 시장은 모두 경제 강대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때부터는 어떤 국가든지 새로운 식민지를 얻으려면 자신의 경쟁 상대를 희생시켜야만 했다.
따라서 세계전쟁은 자본주의의 극복할 수 없는 경제 모순에서 빚어진 경제위기의 직접적 결과가 아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경제위기의 산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도, 그 뒤 일어난 전쟁들도 경제위기의 산물이었다.
자본주의가 점점 더 그 자신의 모순에 빠져들 때, 그 모순이 경제적 관점에서 점점 더 비합리적이 되자, 전쟁의 성격은 질적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비합리성은 자본주의가 발전하게 하기는커녕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차 없이 멈추게 하였으므로 이미 제1차 세계대전 때에도 있었다. 어느 진영에서 싸웠든지 간에 전투에 참여한 대부분의 경제는 전쟁으로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미국만이 총체적인 승자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뒤, 전쟁의 경제적 목적은 - 다른 말로 하면 경쟁자의 시장을 점령하는 것은- 그 자신의 득이 되게 세력균형을 유지하거나 개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순수한 전략적 고려에 길을 내어주는 경향이 있었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은 이를 뒷받침하는 현저한 보기이다. 왜냐하면 석유에 대한 통제는 근본적으로 경제적이 아닌 전략적 동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구적 수준에서, 모든 국가를 군사주의와 전쟁으로 몰고 가는 것은 경제적으로는 출구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B) 1929년과 1930년대의 위기 그리고 구조적인 대량실업의 폭발
자본주의의 역사는 지구에 대한 정복의 역사다. 이 발전은 비자본주의 경제와의 교역의 발전, 그리고 비자본주의 경제가 자본주의 생산관계로 통합되는 것과 뒤얽혀 있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생산 도구들의 급속한 개선과 한없이 편리해진 교통을 통해 모든 국민들을, 가장 미개한 국민들까지도 문명 속으로 잡아당긴다. 부르주아지의 값싼 상품 가격은, 부르주아지가 모든 만리장성을 쏘아 무너뜨리고 외국인에 대한 야만인들의 완고하기 그지없는 증오를 굴복시키는 중포(重砲)이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국민들에게 망하고 싶지 않거든 부르주아지의 생산 방식을 취하라고 강요하며, 이른바 문명을 자국에 도입하라고, 다시 말해 부르주아가 되라고 강요한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자기 자신의 형상을 따라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칼 맑스, 『공산주의자 선언』, Pelican Marx Library, 71쪽)
이 운동의 결과는 자본주의 경제가 "정상적" 조건에서 축적을 계속할 수 있도록 생산의 일부를 흡수할 수 있는 비자본주의 시장이 존재하여야 한다는 필요성에는 어떠한 감소도 없이 비자본주의 시장의 크기가 감소하는 것이다.
1929년의 위기는 순전히 경제적 수준에서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극복 될 수 없는 모순이 처음으로 노골적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1929년의 위기는 자본주의 상승기의 순환적 위기와 마찬가지로, 과잉생산의 위기였다. 그러나 상승기의 순환적 위기와 달리, 1929년의 위기는 새로운 성장을 위한 지속적인 근거를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을 개방함으로써 해결될 수 없었다. 그 위기는 새로운 축적의 순환에 불을 지피기 위하여 잉여가치를 실현할 자본주의의 필요에 비례하는 비자본주의 시장의 포화상태로 향하는 지구적이고 증가하는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1930년대 동안 경제 상황의 미미한 개선은 사실 경제를 통제하고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세계전쟁에서 군수생산의 필요를 충족시키도록 그 경제를 변형시키기 위한 국가자본주의 조치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조치들은 자본주의의 이겨낼 수 없는 모순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하기는커녕 당분간 모순을 미루어 놓는 것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미 수많은 국가자본주의적인 조치들을 채택하도록 자본주의를 강제했다. 그러나 분쟁이 끝나자, 부르주아지는 아직도 전쟁 전 황금시대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환상 속에서 애를 썼다. 그 후 몇 년 동안 사회ㆍ경제생활 전반에 대한 국가의 지배(국가자본주의)를 향한 경향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1929년의 위기는 제2차 세계대전의 뒤에 일어났던 유례없는 번영의 날들에 의해서만 단절되었던 영구적인 경제 위기의 시대를 열어 놓았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위기는 구조적인 대량 실업의 발생으로 특징 지워 졌다. 그러한 대량 실업은 1930년대 동안 공공사업과 무기 생산 정책, 1939-1945년 동안 전쟁, 그리고 그 뒤 제2차 세계대전 뒤에 일어났던, 비교적 짧은 시기에 있었던 재건을 통해서 일시적으로 해소되었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1929년 이래 실업은 실업자가 자본에 필요한 산업예비군을 형성했을 때인 20세기의 실업과 달랐다. 그것은 세계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과잉생산의 영구적 위기의 표현이다. 세계경제가 발전할 여지가 충분하지 않다는 정황에서는, 각각의 국민 자본과 개별 자본가는 경쟁력을 갖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이 노동력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영구적 과잉생산의 표출은 다음의 두 가지 수준에서 자본주의 모순의 전체를 폭로한 것이다.
첫째, 사회 안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가 가장 집중되어 있고 가장 경험이 많은 국가에서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도 실업구제를 도입하여야 하였다. 이러한 실업구제는 경제에 엄청난 부담을 주는 비생산적 비용이다.
둘째, 유일하게 가치를 생산하는 생산력인 프롤레타리아트를 생산과정에서 축출함으로써 부르주아지는 노동계급의 착취에 기반을 둔 체제의 기초를 끊임없이 약화시킨다.
1945년 뒤 재건 시기 : 자본주의 삶의 새로운 임차인가, 또는 병든 사회체제의 반응인가?
제2차 세계대전의 뒤를 이은 20년 동안 성장률은 자본주의 상승기 동안 이루었던 가장 높은 성장률보다 더 높았다. 이러한 성장률은 자본주의가 그 위기를 결정적으로 극복했다고 주장하는 지지자들이 즐겨 쓰던 ‘단골 메뉴'였다. 전쟁이 끝난 뒤 자본주의가 높은 성장률을 이루자, 혁명 진영에서는 자본주의 데카당스의 실재를 둘러싸고 회의주의가 널리 퍼졌다.
이러한 성장률은 사실 노동생산성의 실질적 증가로 가능했다. 물론 이 노동생산성의 증가는 어느 정도 노동계급의 생활조건을 함께 개선시키기도 했다. 또한 자본주의가 공공연한 위기로 선회한 첫 조짐은 1960년대 말에 나타났지만, 1970년대에는 성장률이 상대적으로 높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21세기 초에 우리의 위치가 허용한 뒤늦은 지혜를 가지고 총체적으로 20세기를 돌이켜 볼 때, 재건의 시기가 사실은 자본주의가 불가피하게 위기로 미끄러지는 것을 특징으로 한 시기에서 하나의 예외라는 점을 우리는 좀 더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또한 다음을 지적해야 한다.
첫째, 옛 사회와 달리, 그리고 트로츠키가 1930년대 믿었던 것과 반대로, 자본주의의 데카당스로의 진입은 생산력 발전의 중지가 아니라, 생산력 발전에 대한 항구적인 족쇄가 존재한다는 것으로 특징 지워 진다. 이것은 기술 발전의 완전한 이용이 시장의 부적합성에 의하여 제한받을 때에도, 옛 사회에서와 달리, 중대한 기술 발전이 자본주의의 존재에 결정적이기 때문에 본질적이다.
둘째, 데카당스의 일반 시기는 지배계급이 국가 개입을 통해 생산양식의 하강을 막으려하기 때문에 단기간의 번영시기와 모순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재건시기의 경제적 경기상승에 대한 일반적 설명을 하기로 한다.
첫째, 우리는 성장의 전체통계에 비생산적 자본, 특히 무기생산에서의 상당한 몫을 포함하고 있다는 현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국민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 덕분에 노동생산성의 중요한 증가로부터 부르주아지가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지만, 이러한 생산성 증가는 부분적으로 비생산적 자본으로의 쓸데없는 낭비에 기인한 자본주의적 축적으로 "상실"되었다.
둘째, 이러한 상대적 번영시기의 밑에 깔린 다음의 요인들을 강조해야 한다.
① 본질적으로 「마샬플랜」의 제국주의 계획 덕택으로 서유럽과 일본의 재건에 의한 힘
② 각국내의 국가자본주의의 발전과 제국주의 블록(IMF, EEC, 세계은행, COMECON 등)의 수준에서 국가자본주의 조치의 채택은 커지는 경제모순을 조절하고 시장의 제재를 잠정적으로 피하게 했다.
③ 부채가 상당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④ 남아있는 비자본주의 시장의 보다 효율적인 착취, 기술발전, 통신과 교통비 하락은 살아있는 비자본주의 시장에 대한 집중적 침투를 촉진시켰다. 게다가 강대국은 탈식민정책을 펼쳐 자신들이 짊어진 비싼 짐(식민지 관리와 그 지원에 필요한 주둔군의 비용)을 줄였고 옛 식민지에 대한 판매를 늘릴 수 있었다.
재건시기의 경제호황의 밑에 깔려있는 구체적 요인들이 소진되자, 부채의 일반적 증가는 지불능력 있는 시장의 부적합성에 대한 중요한 완화제가 되었다. 자본주의 모순에 대한 기적적인 치료가 되는 것과 달리, 이것은 1970년대 동안 수많은 아프리카 국가로부터 시작해서 1998년 많은 ‘호랑이'와 ‘용'에게 퍼져나가면서 채무국 사이에 오랫동안 일련의 파산으로 이끌게 했다. 파산 국가의 목록은 분명히 완전히 공개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비밀로 유지되지도 않았다.
6) 인류가 지금까지 알아온 가장 야만적인 세기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가장 열성적으로 변명하는 사람들조차 20세기를 인류가 지금까지 고통스럽게 겪었던 가장 어두운 시기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인류역사는 온갖 종류의 잔인성, 즉 종교, 언어, 문화, 인종을 기반으로 고문, 학살, 대량추방 또는 전 인류의 절멸로 가득 차 있다. 로마군대에 의한 카르타고의 소멸, 15세기 중엽 아틸라의 침공, 782년 하루에 4천5백 명 생존 포로에 대한 샤르만느의 처형, 종교재판 때 고문과 화형, 미국에서 인디언 절멸 그리고 16세기와 19세기 사이의 아프리카인 수백만의 노예매매는 어떤 학생도 역사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조그만 보기에 불과하다. 비슷하게 인류역사는 이미 쇠퇴와 재난의 길고 비극적인 시기의 다른 보기도 보여주었다. 즉 로마제국의 쇠퇴와 몰락, 중세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백년전쟁, 18세기 동안 독일을 초토화한 30년 전쟁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인류에게 들이닥친 이러한 종류의 모든 재난을 고려한다하더라도, 우리는 20세기에 자본주의가 가져다준 고통과 동일한 것을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첫째, 제1차 세계대전 : 5백만 피난민, 천만의 사상자, 그 두 배의 부상자와 불구자 그리고 인류에게 전쟁의 궁핍으로 악화시키고 전쟁 그 자체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든 질병(1918년의 인플루엔자 전염병)의 영향
둘째, 1918년과 1921년 사이에 러시아 혁명에 맞서 부르주아지가 저지른 끔직한 내전에서 6백만이 죽었다.
셋째,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벌어진 전쟁(중일전쟁, 스페인 내전) 그리고 스탈린 병영에서 2천만 명 이상이 죽었다.
넷째, 제2차 세계대전 : 4천만 명의 피난민, 5천만 명 이상의 사망자, 그 이상의 부상자와 불구자
다섯째, 1945년에 시작된 "평화의 시기"는 실제로는 결코 평화의 시기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150내지 200번의 국지전(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같은 주요 분쟁을 포함하여)이 있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야기한 수보다 더 많은 사망자를 기록했다.
단순한 숫자를 떠나서 우리가 오늘날 강조해야 하는 두 가지 특별한 측면이 있다.
- 역사상 최초로 역사적으로 쇠퇴하는 사회에 의해 인류에 닥친 재난이 어느 구석도 남기지 않고 어떤 종(種)도 남기지 않고 온 지구를 덮고 있다는 사실
- 존재하는 사회와 역사적으로 창조된 부의 발전에 의해 열려진 가능성 사이에 거대한 간극이 지금까지 결코 없었다는 사실
과학의 지배와 노동생산성의 예외적 증가를 통해 이러한 잠재적 부의 기초를 놓은 것은 자본주의 사회이다. 노동계급에 대한 잔인한 착취 덕으로, 자본주의는 이윤욕구와 소수의 욕구만족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끊임없이 확장하는 욕구의 만족에 의해, 앞으로 나아갈 사회에 의해 대체되도록 하게 만드는 물질적 조건을 창조했다. 이러한 물질적 조건은 20세기 초부터 존재해 왔다. 자본주의는 노동계급이라는 가장 주요한 생산력을 포함하는 생산력의 전대미문의 확장을 허용하는 역사적 과업을 완수했다. 그 전에 존재했던 노예사회나 봉건사회처럼 자본주의가 역사의 단계를 떠날 만큼 긴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사라질 수 없다. 1848년 『공산주의자 선언』에 제시되었듯이, 역사가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 선언한 사형선고를 프롤레타리아트가 집행하는 것이다.
7) 자본주의 데카당스의 함의
자본주의 사회의 데카당스의 실재를 이해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상승기로부터 쇠퇴기로의 이행이 프롤레타리아트가 투쟁하는 물질적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국제주의, 그리고 투쟁이 역사적으로 나아가는 공산주의의 미래라는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기본원칙은 똑같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들이 투쟁으로 실천되는 방식은 크게 달라졌다. 투쟁을 위한 노동자 조직(노동조합 문제, 의회 활동 문제), 사회 속에서 다른 계급과의 관계(민족문제, 이른바 "부분투쟁"의 문제)는 오늘날 1914년 제1차 세계 제국주의전쟁과 1917년 러시아에서 시작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첫 번째 권력에 대한 세계적 공격이 열어 놓은 자본주의 역사에서의 새로운 시대가 결정짓게 된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데카당스 시대가 열리자, 노동자 투쟁의 이해관계에 관련된 문제가 제기되었다. 19세기에 노동자들은 생활조건을 보호하고 자본가 계급에 의한 착취를 줄이기 위해 싸웠다. 그런데 오늘날 자신을 방어하려는 노동자 투쟁은 일반화된 전쟁과 야만으로의 미끄러짐에 대항하는 유일한 장애물이다. 19세기에 노동자들은 사회에서 일정한 "위치"를 허락하는 확장된 경제체제 안에 자기방어를 조직했다. 그런데 오늘날 모든 노동자 투쟁은 노동자와 이런 저런 기업의 사주사이가 아닌 전체 노동계급과 자본가 계급 사이의 힘의 균형, 즉 권력의 문제를 즉각적으로 제기한다.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2006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