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 ICC는 남한에 있는, 좌파공산주의 전통과 관련된 그룹, 사회주의정치연합(SPA)으로부터, 동년 10월 서울과 울산에서 개최될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에 참가를 초청받았다. 우리는 이미 1여년정도 SPA와 접촉하고 있으면서, 언어문제로 인한 불가피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특히 자본주의의 데카당스 문제에 관해 그리고 현시기의 공산주의조직들의 발전 전망에 관해 토론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 대회가 불러일어킨 정신은 SPA에 의한 서문에서 강력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지금까지 세계 여러 곳에서 정기적으로 맑스주의자 대회(모임)가 열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강단의 추상적인 논의나 자본주의의 좌파에 속하는 정치적 세력들의 연대를 위한 행사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자본주의 데카당스 시대의 객관적이고 주체적 조건이 야만과 전쟁을 넘어서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더욱더 깊이 인식하고 있다.
한국의 노동계급은 현장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고 혁명적 정치세력은 전망을 분명하게 열어젖히지 못하고 있지만 과거 혁명운동이 국제주의의 원칙을 저버리면서 참담한 패배를 경험했던 역사를 뿌리로부터 반성하면서 우리는 하나의 현장,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을 넘어서는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이루어내야만 한다."
한번 극동의 역사를 잠시만 생각해보는 것도 이러한 발의의 엄청난 중요성을 감지하기엔 충분하다. 이 대회를 위한 환영사에서 우리가 이미 언급했듯이, „1927년 상해노동자학살은 1917년 러시아에서의 10월혁명이래 10년간 세계를 뒤흔든 혁명투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이후 세계노동자계급은 그리고 인류 전체는 역사상 유래없이 혹독한 반혁명의 모든 공포를 겪었다. 동양에서 노동인민은 제 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었던 일본의 만주침략을, 그런 다음은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파괴로 정점을 이루는 제 2차 세계대전을, 중국내전을, 한국전쟁을, ‚대약진Great Leap Forward' 동안 중국에서의 참혹한 기아를, 그리고 베트남전쟁 등을 경험했다.
이 모든 무시무시하고, 충격적인 사건들은 , 동양에서는 여전히 그 역사가 짧고 경험이 적였던 그리고 서양에서의 공산주의이론의 발전과 접촉이 극히 적었던 프롤레타리아계급을 휩쓸었다. 적어도 우리가 알기로는, 좌파공산주의의 어떤 표현들도 동양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생존하거나 출현할 수 없었다.
결국, 동양에서 좌파공산주의와 명백히 공명하는 조직에 의해 소집된 공산주의 국제주의자들의 오늘의 회의는 노동자계급에게 있어서 역사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이것은 - 아마도 역사상 최초로 - 동서양의 노동자들 사이의 진정한 단결이라는 희망을 갖게 한다. 이것은 하나의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프롤레타리아계급과 그것의 정치적 소수들에서 천천히 진행되고 있는 전세계적인 의식 자각의 일부이다." 그래서 ICC의 대표단은 이 대회에 참가하면서, 국제주의적 좌파공산주의의 목소리가 극동에서 출현하는데 우리의 모든 역량을 다해 도울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배우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한국의 노동자들과 혁명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안들은 무엇인가? 모든 노동자들과 관련된 문제들이 그곳에서는 어떻게 제기되는가? 한국 노동자들의 경험들은 다른 곳의 노동자들에게, 특히 극동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노동자들에게 어떤 교훈들을 주는가? 그리고 한국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세계의 다른 지역의 계급형제들의 경험들로부터 어떤 교훈들을 이끌어내는가?
이 대회의 원래 계획은 다음의 주제들을 토론하는 것이었다:자본주의의 데카당스, 계급투쟁의 상황 및 현 상황에서 혁명가들이 취할 전략. 그런데, 대회 며칠 전에 이 목표들의 장기적인 정치적 중요성이, 북한의 최초의 핵폭탄실험에 의해, 그리고 이에 뒤이은 그 지역에 존재하는 다른 세력들(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남한) 측의 기동훈련에 의해 그 지역내의 제국주의간 긴장이 극적으로 첨예화됨으로써 그늘지게 되었다. 대회 이전에 가진 회합에서 ICC대표단과 SPA의 서울그룹은, 국제주의자들이 이 상황에 대해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데 동의했고 전쟁위협에 대항한 국제주의선언을 공동으로 대회에 제출할 것을 결정했다. 우리가 앞으로 살펴 보게될 바와 같이, 이렇게 제안된 선언에 의해 촉발된 토론은 대회 자체 동안의 논쟁들 중에서 중요한 일부를 차지했다.
이 보고서에서 우리는 대회의 논쟁들의 몇몇 주요 테마을 살펴보고자 한다. 토론 자체를 폭넓게 묘사할 뿐만 아니라,한국의 동지들에게 그들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국제적인 전망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숙고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역사적인 배경
그런데 우리가 대회 자체로 들어가기 이전에, 한국의 상황을 간략히 그 역사적인 배경 속에 자리매김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본주의가 극동으로 팽창하기 이전 수세기 동안 한국은 중국과 일본이라는 2개의 역사적인 강대국들 사이에 놓인 약소국이라는 그 지리적 입지로 인해 이득을 보기도 하고 해를 입기도 했다. 한편으로, 그것은 그 두나라를 위한 교량이자 문화적 촉매로서의 역할을 했는데, 예를 들어 중국 그리고 특히 일본의 도자기예술의 경우 지금은 잊혀진 청자유약기법을 개발한 한국의 도공들에게 크게 빚지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1]. 다른 한편으로, 이 나라는 이웃의 강력한 두 나라들에 의한 빈번하고 잔인한 침략들로 인해 고통당했으며, 근대사의 대부분 동안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한자를 썼던 그리고 유럽열강들이 그 지역에 도착함과 더불어 진행된 새로운 사상들의 유입에 저항했던 유교적 학자층에 의해 지배되었다. 19세기동안 중국, 일본 및 러시아-후자의 식민지 세력은 이때 중국의 국경과 태평양까지 확대됨- 사이의 점점 더 치열해진 라이벌의식은 한국 자체 내의 영향력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초래했다. 그런데 이러한 세력들이 추구한 영향력은 본질적으로 전략적인 것이었다: 투자회수의 관점에서 보자면 중국과 일본이 제공하는 가능성들은 한국에서 가능한 그것들보다 훨씬 더 막대했는데, 이는 한국지배계급들의 상이한 분파들 사이의 상살적인 투쟁들에 의해 야기된 정치적인 불안정을 감안하면 특히 그러했다. 이 지배계급들은 „근대화"의 이득을 놓고 그리고 한국의 제국주의 이웃들의 영향력을 이용해 그들 자신의 권력의 입지를 다지려는 노력들에 의해 분열되었다. 20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한국에 해군기지를 확립하려는 러시아의 시도가 강화되었고, 이것은 다시 일본의 독립성에 있어서 치명적인 위협으로 보여졌다. 이러한 경쟁은 1905년의 러일전쟁으로 이어지고, 이 전쟁동안 일본은 러시아의 함대를 전멸시켰다. 1910년 일본은 한국을 침략하여 식민정권을 세우는데 이것은 1945년의 일본의 패배까지 존속하게 된다.
그래서 일본의 침략 이전의 산업발전은 극도로 지연되었었고, 그 이후의 산업화는 거의 일본의 전쟁경제의 필요에 따라 조율되었다. 1945년경 한국에는 대략 2백만명의 산업노동자가 있었는데 그 대부분이 북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나라의 남부지역은 본질적으로 농촌지역으로 남은 채 혹독한 빈곤에 시달렸다. 한국의 노동대중들이 식민 지배, 강요된 산업화 그리고 전쟁[2]으로 인해 당하게 된 그러한 고통도 모자랐던지, 그들은 1989년까지 전 세계를 지배하게되는 새로운 제국주의적 충돌, 즉 미국과 소련이라는 2개의 거대한 제국주의 블록 사이의 지구분활의 경계영역에 놓이게 되었다. 스탈린주의적인 „조선노동당"에 의해 시작된 폭동을 지지한 소련의 결정은, 1945년 이후 그리스에서 그랬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결국은 미국의 제국적 지배의 새로운 변방을 시험해보려는 시도였다. 그 결과는, 비록 훨씬 더 크고 더 파괴적인 규모였긴 했으나 마찬가지로 남북한 사이의 맹렬한 내전이었다. 이 전쟁에서 남북한의 권력자들은-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자신의 부르조아 이해관계를 옹호하기 위해 싸웠던 간에- 세계 패권을 놓고 투쟁하는 강대국들의 앞잡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 전쟁은 3년(1950-1953)간 지속되었고 그 동안 한반도 전역은 교전중인 군대들의 계속된 전진과 후퇴에 의해 완전히 황폐화되었으며 결국 남한과 북한이라는 2개의 개별 국가들로의 영구적인 분할로 끝나고 말았다. 미국은 남한에 지금까지도 군사적 현존을 유지하고 있어서 대략 30,000명의 미군이 현재 주둔중이다.
전쟁이 종결되기도 전에 이미 미국은 군사적인 점령 자체는 그 지역을 안정화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고[3], 동남아시아와 극동을 위한 마샬계획에 해당하게 될 것을 제정하기로 결정했다. „경제적 사회적 빈곤이, 특정 아시아 국가들에서 권력을 잡게 된 친소련적인 민족주의 분파들이 사용하는 주요한 주장들의 하나임을 인식한 미국은 중국의 접경지역(대만, 홍콩, 한국 및 일본)에 서구의 번영의 전초지로서 기능할 수 있는 지대들을 형성했다. 미국에게 있어서 최우선은 아시아에서 소련블록의 진군에 대항할 일종의 방역선을 확립하는 것이었다.[4]" 이 정책은 남한에게 중요한 함의를 가졌다: „원자재가 부족하고, 그것의 산업적 기반의 대부분이 북부에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그 나라는 전쟁의 말기에 고갈되어 버렸다. 생산은 44%, 고용은 59% 하락했으며, 신규 자본의 원천, 생산의 중간수단들, 기술력 및 경영역량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1945년에서 1978년까지 남한은 대략130억 달러 또는 인구당 600달러를 대만은 56억달러 또는 인구당 4.5달러를 지원받았다. 1953년과 1960년 사이에 외국의 원조가 남한 고정자본의 90%를 차지했다. 미국에 의해 제공된 원조는 1957년에 GNP의 14%에 달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 나라에 대한 군사적, 재정적 및 기술적 원조에만 그치지 않고, 국가와 경제의 전체 경영을 또한 담당했다. 사실상의 민족부르조아가 부재한 상황에서 미국이 원하는 근대화를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실체는 군대였다.국가자본주의의 고도로 효과적인 형태가 이 두 나라 모두에서 설치된 것이었다.유사-군대식의 집중화를 통해 하지만 시장을 인정하면서 공적부문과 사적부문을 밀접하게 연결하는 체계에 의해 경제성장에 박차가 가해졌다. 터무니 없이 과도한 관료제를 가진 동구식의 국가자본주의와는 반대로 이들 국가들은 국가적 집중화를 가치법칙의 인정과 결합시켰다. 수많은 중재주의적 정책(interventionist policies)들이 시행되었다. 경제적 집적체의 형성, 내수시장을 보호하는 법률들, 변경에서의 무역제한, 명령적이긴 했지만 또한 미래의 노력을 장려한 계획형태, 크레딧분배의 국가관리, 자본과 자원을 핵심산업으로 돌리기, 배타적인 면허의 발행, 경영독점등등. 그래서 남한에서는, 국가원조나 발의를 통해 종종 만들어지는 거대한 경제집적체인 재벌[5](일본어의 자이바추스와 동일)과의 독특한 관계 덕분으로 공공 당국이 경제 발전의 방향제시를 했다.. "
그래서 남한의 노동자계급은, 불안정하게 연속된 반-민주적(semi-democratic)이고 권위주의적인 군사정권들에 의해 시행된 잔인한 착취와 강제된 산업화 정책에 직면했다. 이러한 정권들은, 1980년 초의 광주에서의 대중봉기의 예에서와 같이 노동자들의 파업과 소요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함으로써 그들의 권력을 유지했다[6]. 광주사건 이후, 한국의 지배계급은 장성 전두환(한국정보부의 이전 우두머리)의 대통령직 하에서, 본질적으로 군사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권으로 남아있는 것에 민주주의적인 겉치례를 부여하여 상황을 안정시키려 했다. 그러한 시도는 무참히 실패했다: 1986년에는 서울, 인천, 광주, 대구 및 부산에서 대대적인 반대가 연이었으며, 한편 1987년에는 „3,300이상의 산업쟁의가 발생했는데, 이는 임금인상, 처우개선 및 작업조건개선에 대한 노동자들의 요구를 포함하면서 정부가 그들 요구의 일정부분을 수용하는 타협을 하도록 강제했다[7]" 무력으로 사회적 평화를 유지함에 있어서 전두환의 부패한 군사정권의 무능력은 방향전환을 초래했다. 전정권은,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총수, 장성 노태우의 „민주화 프로그램"을 수용했고, 노태우는 1987년 12월에 치뤄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하게 된다. 1992년의 대선을 통해, 민주 야당에서 오랫동안 총수를 지내고 있던 김영삼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의 전통이 완성되었다. 또는, SPA의 동지들이 우리에게 말했듯이, 한국의 부르조아계급은, 군부와 재벌과 보안기관 사이의 연합의 계속된 권력을 숨기기에 그럴듯한 민주적 겉모양새를 마침내 선출해낸 것이었다.
역사적 배경의 귀결
정치적 소수들의 최근 경험들의 측면에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주변부의 다른 나라들에서, 즉 아시아에서 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유사하다[8]. 그것은 한국에서의 국제주의운동의 출현 자체에 대해서도 중요한 귀결을 가졌다.
우리가 계급의 „집단적 기억"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의 수준에서 볼때, 유럽에서의 노동자계급의 축적된 정치적 그리고 조직적 경험들과 한국에서 계급의 경험사이에는 분명히 중요한 차이가 있다. 유럽에서 노동자계급은 1848년(영국의 인민헌장운동의 „완력(physical force)"분파)에 이미 사회의 독립적인 세력으로 스스로를 주장하기 시작했었다. 우리가1980년대 유럽에서의 계급투쟁의 물결동안 노동조합에 대한 일반적인 불신이 서서히 발달한 것을 그리고 노동자들이 자신의 투쟁들을 스스로의 손으로 행하려는 경향을 보여준 것을 기억한다면, 동일한 시기에 한국에서의 운동은 노동자 자신의 계급적 요구들을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부르조아 국가기구의 재조직을 위한 „민주주의 운동"의 요구들과 융합하려는 경향으로 특징지워진다는 점이 특히 놀랍다. 결과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와 부르조아계급의 민주적 분파들의 이해관계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이, 이 시기에 정치적 활동을 시작한 투쟁가들에게 즉각적으로 명백하지 않았다.
언어장벽에 의해 유발된 어려움들을 우리는 또한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집단적 기억"은 그것이 기록되고 이론적인 형태를 띨때 가장 강력하다. 1970년대에 유럽에 출현한 정치적 소수들이, 원문이든 번역본이든간에 사회민주주의 좌파(레닌, 룩셈부르크)의 저작들과 제 3인터네셔널좌파와 그로부터 출현하게 되는 좌파공산주의자들(보르디가, 판네콕, 고어타, 빌랑그룹 및 프랑스좌파공산주의자들)의 저작들을 접할 수 있었던 반면, 한국에서는 겨우 판네콕의 저작(노동자평의회)과 룩렘부르크의 저작(자본축적론)이 출판되기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노동자평의회를 위한 서울그룹(SGWC)와 이 그룹과 밀접히 관련된 SPA의 공동노력의 덕분이다[9].
한국의 상황에서 가장 특이적인 것은, 미국과 소련블록사이의 제국주의적 충돌에 의해 야기된 남북사이의 분단의 결과, 즉 남한에서의 미군주둔과 1988년말에 종결되게 되는 일련의 군사정권들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었다. 이것은, 한국노동자계급의 전반적인 경험부족, 계급 내부에서 분명한 국제주의적 목소리의 부재, 이에 더불어 우리가 위에서 설명했던, 노동자 운동과 부르조아적 민주적 재야 사이의 혼동 등과 조합된 채, 침투적인 한국민족주의가 종종 „반제국주의"로 가장된 채 사회를 전반적으로 감염시기는 것을 초래했다. 이에 따르면 단지 미국과 그 동맹국들만이 제국주의세력으로 보여진다. 군사정권에 대한 반대, 그리고 진정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는 미국에 대한 반대와 동일시되는 경향이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정치적 환경 내부에서의 논쟁의 중요한 특징 하나는 노동조합문제이다. 특히 현재의 활동가 새대들에게 있어서 노동조합주의(trade unionism)의 경험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의 투쟁들에 기반하고 있다. 이때의 노동조합은 대부분 비합법적이고 아직은 „관료주의화"되지 않았으며 확실히 매우 헌신적인 투쟁가들(현재 SPA와 SGWC에 관계된 동지들을 포함)에 의해 활성화되고 지도되었다. 노동조합의 „프로그램들"이 혁명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옹호할 수조차 없다는 점은, 그 당시 비합법성과 탄압이라는 조건으로 인하여 관련 동지들에게 분명하지 않았다. 1980년대 동안, 노동조합은 군사정권에 대항한 민주적 야권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는데, 후자의 야심은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것이 아나라 오히려 정반대로 군사정권을 타도하고 국가자본주의적 기구를 스스로 장악하는 것이었다. 반대로, 1990년대 이후의 한국사회의 „민주화"는 노동조합의 국가로의 이러한 통합을 공공연하게 만들었고 어떻게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 대처할 것인가를 놓고 투쟁가들 사이에 상당한 혼란을 초래했다. 한 동지의 진술에 따르면, „노동조합은 민주 국가의 가장 좋은 옹호자임이 밝혀졌다" 결과적으로, 노동조합에 대한 전반적인 „실망"감이 존재하고 노동자계급 내에서 투쟁활동을 위한 어떤 다른 방법이 모색되고 있다. 대회에서의 그리고 비공식적인 토론들에서의 발언들에서 반복적으로 우리는, 한국의 동지들이 자본주의 데카당스에서 노동조합의 본질에 대한 숙고를 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숙고는 러시아혁명이래, 특히 독일에서의 혁명 실패이래 유럽노동자운동에 대한 숙고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새로운 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스탈린주의와 부르조아민주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강하게 영향을 받았던 자신들의 과거 활동의 기반들에 의문을 제기하려는 진정한 노력들이 많은 한국의 투쟁가들 사이에서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 관여된 이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단결을 유지하고 토론 공간을 제공하려는 노력 속에서 몇몇 그룹들과 개인들이 다소 공식적인 „혁명적 맑스주의자 네트워크[10]"의 건설을 발의했다. 불가피하게도, 과거와의 결별은 극도로 어렵고 그래서 이 네트워크 내의 상이한 그룹들 간에 대단한 이질성을 결과시켰다. 위에서 우리가 간략히 기술한 역사적 배경들은,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의 원칙들과, 스탈린주의와 트로츠키주의를 특징짓는 부르조아적, 특히 민족주의적 전망 사이의 분화가, 1990년대의 실천적 경험을 기반으로 그리고 네트워크 내부에 좌파공산주의의 사상과 입장을 소개하려는 SPA의 노력 덕분으로 겨우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이러한 문맥 속에서, 이 대회에 대한 SPA의 서문에는 우리가 보기에 절대적으로 근본적인 2가지 측면들이 있다:
- 첫째, 한국의 혁명가들이 한국 노동자들의 경험을 국제노동자계급의 더 넓은 역사적 이론적 틀 속에 자리매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선언한 것이다: „대회의 주제를 이론, 실천, 전망으로 구분하고 이를 꿰뚫는 인식의 지평을 넓혀 나가는 것이 이번 대회의 주요 목표이다. 우리는 이번 대회를 시작으로 세계의 혁명적 맑스주의 세력이 연대하고 단결하여 세계혁명을 향한 힘을 축적하고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그 역사적 과업을 완수하기를 바란다."
- 둘째, 이것은 좌파공산주의의 원칙을 기본으로 해서만 수행될 수있다는 점을 분명히 선언한 것이다: „이번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는 한국의 혁명적 맑스주의자들과 세계의 좌익공산주의자들과의 소중한 만남과 토론의 마당이며 혁명적 맑스주의[즉, 좌파공산주의] 진영내의 입장과 노선 차이를 드러내고 소통하는 첫 번째 경험이 될 것이다."
대회에서의 논쟁들
이 글은 이 대회의 토론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하기에 너무 짧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떠오른 가장 중요한 요점들로 보이는 것들을 조명하려 할 것이다. 이때, 우리는 그 대회에서 시작된 논쟁들이 한국의 동지들 사이에서 그리고 더 전반적으로는 전세계의 국제주의운동 내부에서 계속되는데 공헌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자본주의의 데카당스에 대하여
이것은 토론의 첫번째 주제였다. 논쟁 자체를 살펴보기전에 우리는, SPA의 근본적인 노고를, 즉 계급투쟁의 상황과 혁명전략이라는 토론될 다른 문제들에 견고한 이론적 기초지식을 제공함으로서 대회를 시작한 SPA의 근본적 노력을 진심으로 지지한다는 점을 먼저 말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좌파공산주의 내부에 존재하는 상이한 시각들을 간략히 요약 제시하려한 SPA 동지의 영웅적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이 문제의 복잡성-20세기가 시작된 이래 노동운동 내부의 논쟁의 주제가 되었고 여러 위대한 정신들을 단련시킨-을 감안하면, 이것은 극히 담대한 시도였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것은 너무 과감한 것이었다! 자본주의 데카당스 개념이 „본능적으로" 우호적으로 수용된 점(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을 보게 된 것은 매우 놀라웠던 한편, 토론 중에 그리고 그 이후에 비공식적으로 제기된 질문들로 볼때, 대부분의 참가들에게 있어서 이 문제와 깊이 씨름하기에는 이론적인 기초가 부족하다는 점 또한 명백했다[11]. 이렇게 말하는 것은 결코 비판이 아니다: 여러 기본적 텍스트들이 한국어로 입수될 수 없는데, 이는 그 자체가 -우리가 이미 언급했듯이- 한국의 노동운동의 객관적인 경험부족의 표현이다. 우리는, 제기된 문제들과, 특히, SPA와 ICC에 의해 제출된 발제문들을 통해, 동지들이 그 논쟁 속에서 스스로의 입장을 세우기 시작하고 또한 - 마찬가지로 중요하게도 - 이러한 이론적 문제가 실제 세계와 구체적인 투쟁 노력들의 외부로부터 부과된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상황의 기본적이고 결정적인 요소라는 점을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12].
한 젊은 학생이 제기한 질문 하나는 제시할 만한데, 이것은 현재의 자본주의에서의 외양과 실체 사이의 충격적인 모순을 몇 마디로 표현했다: „많은 사람들이 데카당스를 느끼고 있다, 우리들-대학생들-은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에 빠지기 쉽다, 풍족한 사회가 존재한다는 느낌이 있다, 어떻게 우리는 데카당스를 더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적어도 산업국가들에서)의 한 측면은, 우리가 „소비적인 풍족"한 세상에 살고 있는 체 하는 것임은 사실이다. 그리고 참으로 서울의 도심거리들, 전자제품으로 가득 채워진 상점들은 현실이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일치하는 듯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한국의 젊은이들도 다른 곳의 젊은 프로레타리아들과 동일한 문제들, 즉, 실업, 임시고용계약, 구직난, 높은 주거비용이라는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오늘의 노동자계급 젊은이들에게,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서면상의 답변에서 지적하려 했던 점, 즉 그들이 겪고 있는 대량실업과 자본주의의 데카당스의 또 다른 근본적 측면인 전면화되고 영구적인 전쟁사이의 연관성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과업의 일부이다.
계급투쟁에 대하여
확실히, 대회 도중 뿐만 아니라 한국 운동 전반에 있어서 토론중인 가장 중요한 쟁점들의 하나는 계급투쟁과 그 방법의 문제였다. 대회 중의 발언들과 비공식적인 토론으로부터 우리가 이해하기로는, 노동조합 문제는 1980년대 말에 투쟁에 가담하게 된 투쟁가들에게 있어서 실제적인 문제를 부과한다. 어쩐지 한국의 상황은, 연대노조의 결성 이후의 폴란드에서의 상황과 유사하다- 그리고 좌파공산주의의 원칙이, 즉 자본주의의 데카당스에서 노동자계급의 영구적인 대중 조직 건설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심히 옳다는 것의 또다른 표현이다. 한국에서의 경우처럼, 투쟁의 열기 속에서 건설된 노동조합들 조차도 종국에는 국가의 부속물이, 노동자의 투쟁을 강화하는 수단이 아니라 노동자의 투쟁에 대한 국가의 장악을 강화하는 수단이 되어버릴 수 밖에 없다. 왜 그럴까? 근본적으로 그 이유는, 데카당스 시기에는 자본주의로부터 지속적인 개선을 얻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우리가 이전에 언급했듯이- 민족적 부르조아계급의 상이한 분파들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노동자들에게 공통적인 국제적 관점이 아니라 종종 단일 업종이나 산업 또는 한정된 민족적 관점을 필연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다. 불가피하게 그것들은 „무엇을 국가가 부담할 수 있는가"라는, „무엇이 국민경제에 좋은가?"라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머리를 숙인다. 이것은 실상 우리가 들을 수 있었던 한국 노동조합에 대한 비난의 하나였다- 그것들은, 노동자 자신들의 요구들에 그 기반을 두기는 커녕 노동자들의 요구를 사장들이 지불할 준비가 된 것에 맞춰 제한하도록 노동자들에게 촉구하는 지점까지 도달했다는 것이다[13].
노동조합의 불가피한 배반과 민주적 국가 기구로의 편입에 직면하여, 한국의 동지들은 좌파공산주의의 사상에서 그 해답을 모색하고 있었다. 결국, „노동자평의회(workers' councils)"개념이 그곳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어켰다. 문제는, 노동자평의회를 혁명적 상황에서 노동자권력의 기관으로서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내부에서 영구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하나의 새로운 종류의 노동조합으로서 바라보는 일반적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진정 이러한 생각은 심지어 „혁명적 노동자당을 위한 투쟁가그룹„에 의해 이뤄진 „남한에서의 현시기에서 평의회운동전략 및 그 실천 방안"에 관한 발제에서 역사적으로 이론화되어 있었다. 이 발제는 1919년의 독일혁명 동안에 건설되었던 노동자평의회가 사실상 노동조합으로부터 진화되었다고, 실제와는 완전히 정반대를 주장함으로써 역사를 완전히 전도시켰다는 점을 말할 수 밖에 없다[14]. 우리의 견해로는, 이것은 단지 학구적인 논쟁에 의해 정정될 수 있는 종류의 역사적 부정확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더 심오하게는, 혁명적 시기 이외에는 노동자들이 영구적으로 투쟁상태에 있는 것이 단순히 불가능하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극도로 어렵다는 사실로부터 유래한다. 그러한 논리에 사로잡힌 투쟁가들은-노동자계급을 위해 일하려는 그들의 진실한 열망과는 상관없이 그리고 그들이 진정으로 옹호하는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입장들과는 상관없이- 즉각주의(immediatism)의 함정에 빠질 위험에, 즉, 있는 그대로의 실제 역사적 상황 이내에서 구체적으로 가능한 것과는 전혀 어떤 연관도 없는 „실천" 활동들의 꽁무니만 끊임없이 찾아다닐 위험에 처해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세계관으로 볼때,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제기하는 것은 그에 대답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ICC 대표단 한명이 표현했듯이, „노동자들이 투쟁 중에 있지 않으면, 그들의 머리에 총을 들이대며 ‚너희들은 투쟁해야 돼!'라고 명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혁명가들이 노동계급을 „대신하여" 투쟁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혁명가들은 계급투쟁을 선동할 수 없는데, 이것은 하나의 원칙이 아니라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계급 자신이 스스로를 의식하는 것,그들 자신의 이해를 가진 그리고 특히 즉각적인 투쟁을 넘어서는,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실업수당대열에서의 노동자들의 즉각적인 상황들을 뛰어넘는 혁명적인 목표를 가진 하나의 계급으로서 사회 속에서 그 자신의 자리를 자각하는 것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1905년의 러시아에서와 같은 외관상으로는 „자연발생적인" 프롤레타리아 폭동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것들의 하나이다. 그 당시 혁명가들이 투쟁 초기의 급격한 고조에 작은 부분적인 역할 밖에 수행하지 않았긴 하지만, 그 지형은 사회-민주당(그 당시의 혁명가들)의 체계적인 개입활동에 의해 수년간 준비되어 왔었고, 그것은 노동자들이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자각을 발전시키는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15]. 간단히 표현하자면, 노동자들의 공공연한 투쟁의 시기 이외의 시기에 혁명가들의 본질적인 임무는, 다가올 투쟁을 강화시킬 그러한 사상들을 선전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로렌 골드너와 국제주의전망 대표단의 발제들에서 제기된, 우리가 생각하기에 대답되어야 될 것 같은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즉, 노동자계급의 „재구성(recomposition)" - 다시 말해, 한편으로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의 특징인 대공장들이 지리적으로 광범위하게 분산된 생산을 위해 사라지는 경향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들에게, 특히 젊은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점점 더 비정규의 노동 조건들(단기계약, 실업, 시간제 노동, 등등) - 은 „작업장을 초월" 하는 „새로운 투쟁방법들"의 발견을 결과시켰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투쟁방법들"의 가장 유명한 예들는 2001년 아르헨티나에서의 피케테로스(piqueteros)운동에 의해 고안된 것으로 추정되는 „플라잉 피켓츠(flying pickets)" 그리고 2005년의 프랑스 근교지역에서의 폭동들이라 한다. 우리의 관점에서는 심히 오해된 듯 보이는 프랑스의 폭동들과 피케테로스운동에 대한 그 동지들의 열광에 우리가 지금 이글에서 대답할 생각은 없다[16]. 하지만 이러한 입장들에서 표현된 좀 더 일반적인 정치적 오류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노동자들의 혁명의식은 결국 작업장에서의 그들의 즉각적인 일상 경험에 의존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상, 비정규의 노동조건들과 „플라잉 피켓츠"는 역사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17], 우리를 놀래키기 위해 제시된 소위 „새로운 투쟁형식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무력함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2005년의 프랑스 근교들의 젊은이 폭동들이 고전적인 실례이다. 실제(reality)는, (자본주의의 데카당스 시기에) 노동자 투쟁이 특정한 독립성을 획득할 때면 언제나 그것은 노동조합에서가 아니라, 선출된 대표단을 가진 대중집회들에서, 바꿔 말하자면 평의회로부터 유래하고 또 그러한 평의회의 맹아를 간직한 조직형태 속에 스스로를 조직하는 경향이었다는 점이다. 최근 역사의 가장 인상적인 실례는 물론 1980년의 폴란드에서의 투쟁들인데, 역시 1980년대의 또 다른 경험은, 이태리에서의 교사들(„전통적인" 산업부문이라고 말할 수 없는!)의 대대적인 투쟁동안에 형성된 코바스(Cobas)(기초위원회(rank-and-file committees))였다. 시기적으로 더 최근의 예로서 우리는 2006년 스페인 비고(Vigo)에서의 파업을 들 수 있다[18]. 여기서 파업을 시작한 기술노동자들은 대부분이 소규모 기업에서 비정규직 노동계약으로 일했다. 투쟁의 구심점을 형성할 수 있을 어떤 단일한 대규모 공장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작업장이 아니라 그 지역의 광장에서 매일의 대중집회를 가졌다. 이러한 대중 집회들은 다시 동일한 지역에서 1972년에 이미 활용된 조직형태로 소급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렇다면 이것이다: 왜19세기말에는 대대적인 비정규 노동력의 발전이 비숙련노동자들의 최초의 대중노조들의 설립을 초래한 반면, 21세기에는 더 이상 그렇지 않은 것인가?
왜 1905년의 러시아 노동자들은, 레닌이 „프롤레타리아계급 독재의 최종적으로 발견된 형식"라고 불렀던 노동자평의회 - 소비에트(the soviet) - 를 창안해 냈는가?
왜 노동자들이 그들의 자치성(autonomy)과 세력을 발전시키는데 성공했을 때마나 대중집회가 노동자조직의 전형적인 형태가 되는가?
우리의 견해로는, 이미 말했듯이, 그 해답은 사회학적 비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20세기 초에 발생한 역사적 시기의 변화를 훨씬 광범위하게 정치적으로 파악하는 데에 있다. 이러한 변화를 제 3인터네셔널은 „전쟁과 혁명의 세기"의 시작으로서 묘사했다.
게다가, IP와 로렌 골드너가 옹호하는 노동자계급의 사회학적 비젼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정치적, 이론적 능력을 완벽히 과소평과하는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는 충격적이다. 그것은 마치 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 관해서만 사고할 수 있기나 하듯이, 마치 그들이 일터를 떠나자마자 그들의 뇌가 꺼져버리기나 하듯이, 마치 자신들의 아이들의 미래(학교, 교육, 사회적인 해체의 문제들)에 관하여, 그리고 노약자와의 또 미래세대들과의 연대(악화되는 의료시설 문제, 연금문제 등등)에 관해 그들이 전혀 무관심하기라도 하듯이, 마치 그들이 환경문제나 전쟁의 끊임없는 야만성을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없기나 하듯이, 그래서 그들이 넓은 세상에 대해 배운 것을 작업장에서의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자신들의 직접적 경험에 관련지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나 한 듯이.
또한, 세계에 대한 이러한 폭넓은 정치적 역사적 이해는 즉각적인 투쟁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세계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자본주의를 타도하는데 성공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 대신에 전혀 새로운 사회를, 인류역사상 전혀 존재한 적이 없는 그런 종류의 사회를 건설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류 역사에 대한 가장 심오한 이해를 발전시킬 수 있어야만 한다, 예술과 과학과 철학에서 인류의 가장 위대한 성취들을 자신이 물려받은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노동자계급의 정치조직들이 지향하는 정확히 그 것이다. 이러한 조직들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조건과 그들에게 열려있는 전망들에 관해 더 총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수단이다[19].
전쟁위협에 대한 반대선언
우리는 이미 그 선언의 텍스트를 우리의 웹싸이트에 공개했기에 그 내용을 여기서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20]. 그 내용을 둘러싼 논쟁은 울산 노동자 배움터의 한 회원에 의해 제기된 제안, 즉 그 지역의 증대하는 긴장에 대한 주요한 책임을 미국에게 묻자는 그래서 결국은 북한을 미국의 봉쇄정책의 „희생자"로 제시하자는 제안에 집중되었다.이 제안과, 대회에 참가한 많은 트로츠키주의 경향들 몇명으로부터 이 제안에 부여된 지지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많은 한국 동지들이 1980년대의 „반제국주의"(근본적으로는 „반미주의"로 읽히는) 이데올로기들과 단절하는데 겪는 어려움을 그리고,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이 진심으로 스탈린주의를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옹호에, 그래서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계속된 애착을 잘 나타낸다.
ICC와 몇몇 SPA 동지들은 선언의 주요 취지를 변경하는데 강력히 반대했다. 서울과 울산에서 있었던 데카당스에 관한 논쟁에서 우리가 지적했듯이, 하나의 제국주의적 충돌에서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서 „더 비난당해야" 한다는 생각은, 사회-민주주의적 반역자들이1914년에 노동자들로 하여금, 즉 독일노동자들은 „짜르의 야만주의"에 대항하여, 프랑스노동자들은 „프러시아의 군국주의"에 대항하여, 영국노동자들은 „용감한 꼬마 벨기에"를 지원하기 위해서 등등„그들의" 국가를 지지할 것을 호소할 있게 했던 그것과 정확히 동일한 생각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자본주의의 데카당스 시기는, 제국주의는 이런 저런 국가의 실수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의 근본적인 특성이고, 이 세기에 모든 국가는 제국주의적이라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분석의 심오한 진리를 보여주었다. 미국이라는 거인과 북한이라는 피그미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그들의 제국주의적 식욕의 크기이자 그것을 만족시킬 능력이다.
또 다른 2개의 반대 의견이 토론 동안 제기되었는데, 이것은 거론할 만하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그러한 긴장상황을 억압적 대책을 수립하는 빌미로 삼고 있는 남한 정부를 비난하자는 „노동해방연대"그룹의 한 동지의 제안이었다. 이 매우 정당한 제안은 서울에서의 토론에서 이뤄졌고 그 다음 날 울산에서 논쟁된(및 그 이래 공개된) 최종판은 그에 따라 변경되었다.
두번째 반대 의견은, „사회주의노동자[21]"그룹의 한 동지로부터 였는데, 현상황은 사실상 그렇게 심각하지 않으며, 지금 전쟁을 비난하는 것은, 부르조아계급에 의해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 협연되고 있는 전쟁공포를 신임하는 결과가 되어버릴 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 반론은 합리적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점으로 보자면 잘못된 것이었다. 어떻든 극동에는 임박한 전쟁위협이 존재하고, 전쟁위협이 이 지역에 걸려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제국주의의 장면 속의 상이한 주연 배우들(중국, 대만, 일본, 미국, 러시아)사이의 긴장들은 증대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국제주의자들이 모든 제국주의 진영들의 책임성을 비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1907년 슈투트가르트회의에서 결정된 국제주의결의를 지키기 위해 투쟁했던 레닌, 룩셈부르크 및 제 2 인터네셔널좌파의 모범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제국주의적 충돌의 결정적인 사건들이나 계급투쟁에 대하여 프롤레타리아계급 내부에서 입장을 취하는 것은 혁명조직들의 제일의 책무이다[22].
이 점에 대한 결론으로써, 우리는 이 선언에 대해 IP대표단과 대회에 개인자격으로 참가한 다른 동지들이 보여준 우애적이고 국제주의적인 지지를 환영한다.
결산
우리 대표단이 출국하기전에 있었던 마지막 모임에서 ICC와 SPA는 그 대회에 대한 총괄평가에 있어서 전적으로 동의했다. 제기된 중요한 점들은 다음과 같다:
- 이 대회가 개최된 자체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라는 사실. 왜냐하면 그것은, 극동의 고도로 산업화된 나라에서 좌파공산주의의 입장들이 옹호되고 또 뿌리를 내기리기 시작한 그 처음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 SPA은 대회 동안의 토론들이 좌파공산주의와 트로츠키주의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실천적으로 보여준 점에 있어서 특히 중요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대회는 좌파공산주의의 원칙들에 대한 그들 사진의 이해를 발전시키려는 그래서 이러한 원칙들을 한국 노동운동 속에서 널리 알려지게 하겠다는 SPA의 결심을 강화시켰다.
- 북한의 핵실험에 관한 공동선언은 좌파공산주의의, 특히 SPA와 ICC의 국제주의적 입장들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그 선언에 관한 논쟁은 한국노동운동에 잔존하는 민족주의적 경향들의 문제를 노출시켰다. „네트워크" 내부에는 이점에 대한 견해차이가 존재하고, 이 문제는 그 환경에서 풀리지 않은 채 이며 SPA는 장래에 이 문제의 극복을 위해 일할 결심이다.
- 미래의 논쟁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들 중의 하나는 노동조합문제이다. 한국의 동지들이, 특히 1980년대 이래의 그곳에서의 노동조합의 역사를, 좌파공산주의에 의해 옹호된 입장들 속에 집적되어 있는 것과 같이 세계프롤레타리아계급의 역사적 경험의 견지에서 분석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전망
그 모든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대회가 극동에서 좌파공산주의 원칙의 존재를 그리고 동서양의 혁명가들 사이의 공동작업을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단지 한 걸음을 내디딘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안다. 즉, 우리는 이 대회가 개최되었다는 사실과 그 속의 논쟁들이, ICC가 항상 주장해 오고 있으며 또 노동자계급의 미래 세계공산당의 건설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 될 2가지 점들을 확인시켜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 첫째는 그러한 조직이 건설될 정치적 기반이다. 모든 근본적인 문제들-노동조합문제, 의회문제, 민족주의의 문제 및 노동해방투쟁-에 대해서 새로운 국제주의운동의 발전은 1920년대에서 50년대 사이에 좌파공산주의의 작은 그룹들(특히, 빌랑(Bilan), KAPD, GIK, GCF)에 의해 이뤄진 기초작업을 기반으로 성취될 수 밖에 없다. 이 그룹들로부터 ICC는 기원을 갖는다[23].
두번째, 한국에서의 이번 대회는 그리고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연대를 완수하자"라는 SPA의 명쾌한 요청은 또한 , 국제주의운동이 기존의 국가적 정당들의 연방을 기초로 해서가 아니라 곧 바로 국제주의적 수준에서 발전하고 있음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24].
이것은, 혁명의 와중에 그리고 제 2인터네셔널의 국가적 정당들로부터 출현한 좌파 분파들을 기반으로 제 3인터네셔널이 창건되었을때의 그 상황을 너머선 역사적 진보이다. 그것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세계적인 생산 과정에서, 그리고 세계적 규모로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함으로써만 그 모순들이 극복될 수 있는, 세계적인 인류공동체에 의해 대체될 세계적인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단결된 하나의 계급이라는, 현재 노동자계급의 본성을 또한 반영한다.
존 던/하인리히 쉴러
[1] 우리는 15세기에 이뤄진 한글의 발명을 또한 언급해야 겠는데, 이는 구어형의 언어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에 근거해 표기법을 창조한 아마도 최초의 시도일 것이다
[2] 이것은 수 천명의 한국여성들이 일본 군대의 사창가에서 겪어야 했던 강요된 매춘을 포함했고, 한국농업이 일본 자체의 식량필요에 의해 점점 더 직접적으로 지배되면서 이뤄진 전통적인 농업경제의 파괴를 포함했다.
[3] „미국은 비공산주의 영역과 공산주의 영역 사이에 군사적인 장벽을 만드는데 관심을 갖고 있다. 그 장벽이 효과적이라면 그 뒤에 놓인 영역은 안정적일 것이다(...) 미국은 동요의 특정 원인들을 결정해야만 하고 그것들을 제거하는데 있어서 지능적이고 대담하게 조력해야 한다. 중국에서의 우리의 경험은 동요의 원인들과 타협하는 것이 쓸모없음을, 일시적인 안정을 추구하는 정책은, 일반적인 요구가 영구적인 변화를 갈망하기 시작하면 실패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었다. " 멜빈 코넌트 주니어, „JCRR: 구체적 실례(an object lesson)", 극동 조사(Far Eastern Survey)에서, 5월 2일, 1951
[4] 아시아의 용들이 기운을 잃어간다" 인터네셔널리뷰 제 89호(1997)
[5] 분배된 적산을 그 가치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재벌이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 제일이자 가장 중요한 재정적 원천이었다. 전쟁직후 이것은 남한이 일본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의 30%에 달했다. 초기에 미군정의 적산분배에 대한 통제 하에서 그것들은 군정 자체에 의해 그리고 한국정부에 의해 분배되었다.
[6] 이 글에서 우리는, 초강력-군국주의적 스탈린주의적인 체제의 모든 공포를 경험하고 있는 북한의 노동자계급의 상황을 다루지는 않겠다.
[7] 앤드류 남, 한국민중의 역사
[8] 즉각 생각나는 예로서 필리핀과 브라질을 들수 있다.
[9] SGWC의 몇몇 동지들은 이번 대회에 개인자격으로 참가했다.
[10] SPA 이외에 네트워크에 속하는 다음과 같은 한국그룹들이 대회에서 발제를 했다: 노동해방연대, 울산 노동자 배움터, 당건투. 계급투쟁에 대한 발제문 하나는 개인 자격으로 참여한 로렌 골드너에 의해 제시되었다.
[11] 이는 서울에서 열린, 데카당스에 관한 토론에서 특히 그러했다. 이때의 토론은 대중에게 공개된 것이어서 청중 속에는 정치적 경험이 적거나 거의 없는 젊은 학생들이 많았다.
[12] 우리는 국제주의전망(Internationalist Perspective) 그룹의 „자본의 형식적이고 실제적인 지배"에 대한 강박관념을 여기서 검토할 생각은 없다. 우리는, IP가 여전히 „ICC의 외부분파(External Fraction of the ICC)"라 자칭하던 1990년에 발간된 인터네셔널리뷰 제 60호에 이 주제를 이미 길게 다룬바 있다(https://en.internationalism.org/ir/060_decadence_part08.html 을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새로운" 이론적 통찰의 우월성을 실상에서 과시하려는 IP의 최초의 노력이 거의 신빙성이 없었다는 점은 언급할 만한데, IP가 동유럽에서의 사건들은 사실상 소련의 강화를 나타낸다는 주장을 베를린 장벽 붕괴 3년후에도 계속했기 때문이다!
[13] 불가피하게, 이러한 설명은 극도록 도식적으로 남아있고, 교정되고 상세화될 여지가 열려있다. 울산노동자 배움터의 동지가 행한 한국노동운동사에 관한 발제가 영어로 번역되기에는 너무 길어서 우리가 접할 수 없었던 점을 우리는 매우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 동지가 그것의 요점을 요약하는 그 텍스트의 축약본을 준비해서 번역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14] 사실상, 독일혁명 동안의 노동조합은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의 최악의 적이었다. 독일혁명에 대한 설명으로는 인터네셔널리뷰 제80-82호에 실린 기사들을 참조.
[15] 인터네셔널리뷰 제 120, 122, 123, 125호에 실린, 1905년혁명에 관한 우리의 일련의 기사들을 참조:
https://en.internationalism.org/taxonomy/term/340
[16] 이 주제에 관한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프랑스 근교들에서의 폭동: 절망과 마주하여, 계급투쟁만이 미래를 제시한다(Riots in the French suburbs: in the face of despair, only the class struggle offers a future)"와 „아르헨티나: ‚피케테로'운동의 신비화(Argentina: the mystification of the ‚piquetero' movement)" 을 참조. 이 글들은 각각 en.internationalism.org/icconline/2005_suburbs 와 인터네셔널리뷰 제 119호(https://en.internationalism.org/ir/119_piqueteros.html )에 실려있다. 대규모의 산업노동력의 „소멸"이라는 생각을 제안하는 것은 울산에서는 어쩐지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였다는 점을 말해야 겠다. 이곳에는 현대공장 단독으로도 2만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다!
[17] 예를 들어, „비정규의 노동"이 „새로운 투쟁형태"로서의 „플라잉 피켓츠"의 창안을 결과시켰다는 생각을 살펴보면, 우리는 이 생각이 단순히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다는 점을 볼 수 있다. 플라잉 피켓(즉, 투쟁중인 노동자들의 대표단이 다른 노동자들을 투쟁에 합류시키기 위해 다른 작업장으로 가는 것)은 이미 오랫동안 시행되고 있다. 영국의 예만 보더라도 플라잉 피켓은 1970년대에 있었던 2개의 중요한 파업들에서 유명하게 사용되었다. 즉, 광부들이 발전소에 피켓을 보냈던 1972년과 1974년의 광부파업들에서, 그리고 건설노동자들이 다른 공사장으로 파업을 확산시키기 위해서 피켓을 보냈던 1972년의 건설노동자파업에서. „비정규의" 노동력의 존재도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사실상, 혁명적 노동조합주의자 톰 만(Tom Mann)의 „총노동자조합(General Labourers' Union)"(엥겔스 그리고 맑스의 딸 엘레노어도 이 노조의 발전에 관계했었음)이 1889년에 설립되게 만든것이 정확히 정확히 바로 이러한 대규모의 비숙련의 비정규 노동력의 출현이었다.
[18] 세계혁명 제 295호에 실린 기사를 참조: https://en.internationalism.org/wr/295_vigo
[19]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의 운동을 거기에 짜 맞추고자 하는 바의 특수한 원리들을 세우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이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의 다양한 일국적 투쟁들에 있어서 국적에 상관없는,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공동 이해를 내세우고 주장한다는 점에서만, 다른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조아지 사이의 투쟁이 경과하는 다양한 발전 단계들에 있어서 항상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만 다른 프롤레타리아 정당들과 구별된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은 실천적으로는 모든 나라의 노동자 정당들 중에서 가장 단호한 부분, 언제나 운동을 추동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부분이다: 그들은 이론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조건들, 진행 및 일반적 결과들에 대한 통찰을 여타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에 앞서서 가진다(공산주의당 선언, 맑스-엥겔스저작선집 1권, 412-3쪽,박종철출판사)"
[20] 이 선언은 온라인상으로 en.internationalism.org/icconline/2006-north-korea-nuclear-bomb 에서 찾아볼 수 있다.
[21] 이 그룹의 영어명은 Socialist Worker이다. 그 명칭에도 불구하고, 이 그룹은 영국의 „사회주의 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와는 무관하다. 만약 우리가 그 동지의 생각을 잘못 제시했다면 먼저 사과한다-언어 장벽때문에 우리가 해석의 오류를 범했을 지도 모른다.
[22] 이 대회에서 국제주의자들이 전쟁위협에 직면하여 침묵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보기에는 1970년대 말의 좌파공산주의대회에 비해서 한 걸음 진보 한 것이다. 그 당시에는 다른 참가자들-그리고 특히 바타글리아 코뮤니스타와 CWO-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어떤 공동선언도 거부했다.
[23] IP에 따르면, 우리는 „좌파공산주의"를 넘어서야 한단다. 적어도 우리가 거명한 모든 그룹들 중에서 그 누구도, 그들이 이런 저런 문제들에 대해 최종의 말을 한 것인 체 하지 않았다. 역사는 전진하고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토대를 세우지 않고 집을 짓는 것은 불가능하며, 우리의 관점에서 볼때 그러한 건설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토대들은 좌파공산주의의 선구자들의 그것이다. IP의 입장의 논리는 우리가 출현한 그 역사를 내던져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는 우리와 더불어 시작된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IP가 이 생각을 얼마나 싫어하든 간에, 이것은 „당(the Party)"(IBRP의 경우에는, „사무국(the Bureau)")이 지혜의 유일한 원천이고 다른 누구로부터도 어떤 것도 배울 필요가 없다라는 보르디가주의의 입장의 한 변형에 불과하다.
[24] 미래의 국제주의 조직의 발전의 이러한 측면은 1980년대에 ICC와 IBRP사이의 논쟁의 한 주제였다. IBRP는 국제주의 조직은 상이한 나라들에서 이미 존재하는 독립적인 정치조직들을 기반으로 형성될 수 밖에 없다는 견해를 고수했다. 이 „이론"을 현재의 국제주의운동의 진정한 실천이 완전히 무효화시킨 점은 IBRP의 실천적 이론적 파산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