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발제문에서 우리가 제기하려는 질문은 우리가 계급투쟁을 어떻게 분석해야 하는가이다. 어떻게 우리는 주어진 시기에 - 특히 현재 - 노동계급의 일반적 조건을 그리고 계급역량의 균형에 의해, 즉 부르조아계급과 프롤레타리아계급 사이의 역균형에 의해 결정되는 가능성들을 결정해야 하는가?
계급 역균형을 파악하는 것은 단순히 파업 일수를 헤아리는 문제나 노동자의 전투성의 정도를 가늠하는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1930년대의 프랑스를 보면, 1938년의 인민전선의 선거승리이후 대중파업들과 시위들과 심지어는 공장점거들이 발생하여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포함하면서 몇주간이나 지속되었지만 여기서 우리는 노동자들의 전투성의 강력한 정도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그 자신의 목표를 위한 투쟁의 정도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볼 수 있다. 파업들이 있은 후 7월 14일(프랑스 민족주의의 기념일)의 시위들에서 노동자들은 최초로 노동자운동의 붉은 깃발과 부르조아국가의 삼색기 두가지 모두의 뒤에서 행진했다. 노동자들은 고용주들을 양보하게 만든것이 그들의 „옹호자들"이 권력에로 선출된 덕분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인민전선이 권력을 잡은 뒤 3년후 그리고 노동계급의 이러한 대규모의 동원이 있은 지 3년후 노동계급은 부르조아계급의 민족국가적 이익의 수호를 위한 6년간의 제국주의적 살육으로 끌려갔다.
그래서 역사적 유물론의 방법을 충실히 유지하는 것과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 시기에 대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계급과 부르조아계급 사이의 역균형을 결정하는 상이한 요소들에 대한 전반적이고 총체적인 이해를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예를 들어 공산당선언의 1888년 영어판 서문을 위해 엥겔스가 쓴 다음과 같은 말을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은 맑스와 엥겔스의 방법이었다: „이 선언은, 처음에는 전적으로 독일의, 나중에는 국제적인 그리고 1848년 이전의 대륙의 정치적 상황때문에 불가피하게 비밀조직이었던 노동자단체, 공산주의자동맹Communist League의 강령으로서 출판되었다. (...) 1848년 6월의 파리폭동 - 프롤레타리아계급과 부르조아계급사이의 최초의 대전투 - 의 패배는 유럽노동계급의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야망을 당분간은 다시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 독립적인 프롤로레타리아운동이 계속 생명을 유지하는 곳마다 그것은 무자비하게 추적당하고 사냥되었다. (...) 유럽노동자들이 지배계급에 대한 재공격을 위한 충분한 힘을 회복했을때 국제노동자협회 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이 솟아났다. 그러나 이 협회는 유럽과 아메리카의 전투적인 프롤레타리아계급 전체를 하나의 조직체로 주조해 낸다는 명백한 목적을 갖고 건설되었기에 그 선언에 담긴 원칙들을 당장 선포할 수가 없었다..."(자체번역).
맑스와 엥겔스의 모든 작업으로부터 그리고 노동계급의 구체적인 경험으로부터 우리가 도출해내는 교훈은, 혁명적 행동은 어떤 순간에라도 가능한 그런 것이 아니며 혁명가들의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1848년에 그랬듯이 노동계급이 중대한 패배를 당하면 계급 역량의 균형은 한 시기동안 부르조아계급에 유리하도록 결정적으로 이동한다. 노동계급이 패배로부터 회복하는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한가지 점은 자본주의사회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부르조아계급은 맑스의 표현대로 그 자신의 무덤파는 자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을 착취함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고 결과적으로 프롤레타리아계급은 항상 투쟁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이 패배했을 때는, 항상 새로운 힘, 새로운 세대가 과거의 패배로부터 일어나서 투쟁을 다시 이어왔다.
새로운 시기를 연 1914년
1914년에 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자본주의 사회의 생존에 있어 하나의 새로운 시기, 자본주의의 쇠퇴기가 개막되었다. 갑자기 프롤레타리아투쟁이 역사상 그 이전의 어떤 시기보다도 첨예하게 전개되었다. 선택은 더 이상 더 강도가 높거나 낮은 착취사이의, 더 하거나 덜한 반동시기들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전쟁과 혁명사이에, 프롤레타리아계급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가 사느냐 죽느냐 사이에 있었다. 전세계적 혁명을 이끌기 위해 1919년 창설된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은 이 새로운 시기를 „전쟁들과 혁명들의 시기"로 묘사하고 그 함의들을 너무나 분명하게 이해했다: 만약 노동계급이 기회주의자들의 설교에 의해 기만당한다면, „자본주의적 발전은 수많은 새대들의 뼈 위에 새롭고 더 집약된 그리고 더 괴물같은 형태들로써 그 회복을찬양하게 될 것이고 그 전망은 새로운 그리고 불가피한 세계전쟁이 될 것이다. "
이새로운 시기- 우리가 여전히 살고 있는- 의 현재 우리와 관계된 주요한 특징들은 무엇인가?
- 전 세계적 제국주의간의 전쟁으로의 경향은 자본주의 사회의 영구적인 특징이 되었다.
- 제국주의 전쟁 와중에 혁명을 개시하는 것이 이제는 더 이상 불가능할 것이다. 1914년의 노동계급의 불완전한 패배이후, 이는 노동계급이 1917년 러시아에서 그리고 1919년 독일에서 혁명적 급습을 개시할 수 있었음을 의미했는데, 그 이후 지배계급은 혁명의 위험을 알게 되었다. 러시아와 독일에서의 혁명들의 패배 이후 프롤레타리아계급이 경험한 가장 야만적인 반혁명들이 뒷따랐지만 부르조아계급은 노동계급의 위협에 직면해서 그것이 느꼈던 공포를 결코 잊지 않았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종결은 특히 패전국들에서의 노동자폭동의 모든 가능성들을 체계적으로 제거한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연합군은 1943년 이탈리아노동자들의 폭동들을 독일군이 무자비하게 진압하도록 내버려두었고, 스탈린의 적군은 바르샤바 앞에서 멈춤으로써 나치가 바르샤바봉기를 절멸할 시간을 주었으며 영국군과 미군은 고의적으로 공장들이 아니라 노동계급지구들을 표적으로 하여 독일의 산업도시들을 대대적으로 폭격했다. 독일이 붕괴되었을 때, 연합군은 전쟁이 노동자와 병사의 반란으로 종결되었던 1918년의 그것과 유사한 상황에 직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독일군과 첩보부들가 제시한 항복을 위한 모든 비밀제안들을 무시한 채 그 나라 전체를 점령했다.
- 어느 때보다도, 계급역량의 총체적인 균형은 나라 마다가 아니라 국제적으로 결정된다. 우리는 세계대전과 세계혁명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은 한 국가에서의 명백히 혁명적 상황(1936년의 프랑스나 스페인의 예에서와 같은)이 노동계급의 국제적인 패배에 의해 결정된, 전쟁으로 향한 진로를 전도시킬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역으로, 한 국가에서의 노동계급의 패배가 반드시 혁명으로 향한 진로의 전반적 패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1870년 파리코뮨의 경험을 근거로 혁명가들이 생각했던 (그리고 1905년과 1917년 러시아혁명들의 경험들에 의해 확인된 듯이 보이는 ) 것과는 반대로, 전쟁으로 향하는 역사적 진로와 혁명으로 향하는 역사적 진로는 동시적일 수 없다. 오히려 그것들은 대조적이다. 부르조아계급이 총력을 다해 전면화된 제국주의전쟁을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이 전쟁터에서 죽을 각오가 그리고 후방에서는 최대의 물질적 궁핍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해서 그것이 완전히 패배당했어야 한다.
우리가 말했듯이, 1917년에 시작된 혁명물결의 패배를 이어 역사상 가장 지독한 반혁명이 뒤따랐다. 계급이 물리적으로 분쇄당했을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재앙은 더더욱 심각했다. 한때 노동계급의식의 최고의 표현이었던 것들(1914년까지의 사회민주당, 1919년 이후의 공산주의인터네셔널)이 파괴되었거나, 심지어는, 만연한 반혁명을 여전히 노동계급 자체의 이름으로 방어하고 있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을 가능케 했던 그 패배-노동계급이 3년뒤 극복했던- 와 혁명물결을 뒤 이은 그 물리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패배를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패배는 소련에서 „사회주의조국"가 존재한다라는 많은 노동자들의 믿음에 의해 훨씬 더 심각했고 그 결과들은 중첩적이었다: 그들은 스탈린주의 당의 영향하에서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이해의 주체로 만들어짐과 동시에, 스탈린주의적 소련의 야만성을 거부하며 사회민주당들로의 회귀 이외에는 어떤 다른 해답도 찾을 수 없었던 다른 노동자들로부터 분리되었다. 파시즘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가 제국주의 세력의 승리로서가 아니라 노동계급의 승리로서 제시되었을때 사태는 한층 더 악화되었다. 국제주의자들은 그들의 계급의 행동에 있어서 어떤 영향력도 완전히 상실한 작은 그룹들 안의 극소수의 투쟁가들로 남게 되었다.
그 패배는 매우 심각해서 그 결과 전후재건기의 경제붐 동안 마르쿠제와 같은 자칭 혁명적 공론가가 노동계급의 혁명적 본성의 소실을 선언하는 것이 대단한 유행이었다. 노동계급의 자리는 앞으로는 추측컨대 다른 사회계층들, 즉 학생들, 미국에서의 흑인민중들, 제 3세계의 농민들 등등에 의해 차치될 터였다.
재건기는 또한 부르조아계급 내부에서, 그것이 자신의 경제적 문제들을 확실히 극복했다는 그리고 1929년의 지독한 위기는 이제 추억에 불과하다는 또 다른 환상을 낳았다. 그러나 1960년대 말엽 경제위기의 귀환의 첫 징후들이 재발하여 자본주의세계를 괴롭히면서 이 환상은 희박해졌다. 그리고 위기의 귀환과 더불어 전쟁의 새로운 위험이 나타났다. 1939년의 독일처럼 1960년대말의 소련은 자신의 주요한 제국주의적 경쟁자들에 의해 군사적으로 포위당하고, 승리한 전쟁의 열매들에 의해서만 보상될 수 있는 엄청난 비용의 전쟁무기로 부담지워진 자신을 발견했다. 2개의 세계적으로 강력한 제국주의세력들의 군대들과 대리자들이 „민족해방"의 무수한 충돌들 속에서 서로 싸웠고, 독일에서 그들은 핵전쟁의 세기말적인 위협을 등에 업고서 세계사상 가장 거대한 군사력의 축적을 가진 „철의 장막"의 양쪽에서 대치했다.
제국주의 전쟁은 아직 발발하지 않았다. 왜?
대답은 프랑스에서의 1968년 5월의 사건에 있다 - 또는 오히려 노동계급의 재각성에 그리고 이 사건이 그 한 표현인 반혁명의 종결에 있다.
부르조아계급의 공론가들은 1968년 5월을 „학생폭동"으로 생각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래서 이 사건들의 실체를 한번 기억할 만 하다: 사실, 1968년 프랑스는 9백만 이상의 노동자들이 파업하여 나라 전체가 완전히 정지함으로써 역사상 가장 큰 파업을 보여주었다. 겁에 질린 프랑스 대통령(드 골)이 군대를 통한 폭동의 진압이 필요시 군대의 지지를 확신하기 위해서 독일의 프랑스점령군을 휘령하는 장교들을 만나기 위해 독일로 떠날 정도였다. 그리고 프랑스는 단지 그 시작에 불과했다: 1969년의 이탈리아, 1970년 그런 다음 1976년의 폴란드에서의 노동자폭동, 발전소의 석탄부족으로 인해 정부가 주 3일근무를 강요할 수밖에 없었던 1973년 영국의 광부파업, 코르도바의 산업지역의 통제권을 노동자들이 사실상 거머쥐었던 1969년 5월 아르헨티나의 그 유명한 „코르도바사". 이들은선진국과 제 3세계국가 양자 모두에서 있어서 그리고 2개의 제국주의 블록들을 분할하는 철의 장막의 양 측 모두에서 있어서 세계의 산업지역들을 휩쓴 계급투쟁의 물결의 단지 몇몇 예들에 불과하다.
동시에, 노동계급의 이러한 각성과 더불어, 기존의 그룹들의 발전과 새로운 그룹들의 출현들에서 표현되는 바와 같이 정치의식이 고양되었다. 프롤레타리아의 이러한 새로운 정치운동의 가장 중요한 측면들 중의 하나가 세대간의 괴리를 극복하려는 노력이었다. 혁명가들이 과거의 계급투쟁과의 연결을 쇄신하려 하면서 공산주의좌파의 입장들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판네쿡, 고르타, KAPD, 로자 룩셈부르크 및 보르디가가 재출간되었다. 그들은 또한 반혁명에 의해 끊어진 국제적 유대를 쇄신하게 되었다. 한 가지 예는 통신과 토론의 국제적 네트워그로서 그것은 1975년 ICC의 창립을 결과시켰다.
분명히, 이 그룹들은 극소수였고 계급투쟁 자체에 대해 어떤 중대하고 직접적인 영향력도 갖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노동계급 내부에서 그리고 특히 반혁명과 세계대전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새대의 노동자들에게서 진행되는 한 과정의 전조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세대는 전후의 붐과 경제위기의 시작과 대면하여 이에 대해 미래를 위한 크다란 희망을 품은 투쟁의 물결 속에서 대응하였다.
그 10년 후 1979년에 계급투쟁의 이러한 고조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침공에 의해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그 이래 발생한 모든 것과 더불어 이 사건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를 잊거나 소홀히 하기 쉽다: 1945년 이래 최초로 소련이 그 자신의 블록 외부에 위치한, 그 자신의 직접적인 영향력권 밖의 국가를 침공한 것이다. 소련은 경제위기에 의해서 그리고 그보다 더 강한 경쟁자 미국에 대항해 세계 제 2위의 제국주의 권력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가 위해서 요구되는 무기생산의 엄청난 무게에 의해 점점 더 불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1914년과 1939년의 독일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권력들 중에서 더 약한 자가 다시 한번 세계를 전면전의 위험에로 위협했다. 이번에는 배후에서 아른거리는 핵전쟁의 위협을 가지고서. 세계는 중대한 질문에 직면했다: 노동계급의 반응이 어떠할 것인가? 1970년대의 투쟁들에 의해 열려진, 혁명으로 향한 진로가 전도될 것인가? 부르조아계급이 쇠퇴한 자본주의의 경제위기에 대한 그 자신의 해답, 즉 세계대전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대답은 1980년 폴란드노동자들의 장대한 투쟁에 의해 주어졌다. 그들은 유럽 - 두 블록사이의 결정적인 대치가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 의 노동계급이 소련 블록의 „사회주의"국가이든 아니면 미국블록의 „민주주의"국가이든 상관없이 민족국가의 이해를 위해 그들 자신의 이해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노동자평의회와 동일한 기초(대중집회들, 그들을 선출한 대중집회를 책임지는 선출되고 재소환가능한 대리자들,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열린 공간에서 진행된 정부와의 협상들... )위에 그들 자신의 조직들을 발전시킨 폴란드 노동자들은 확실히 바르샤바조약의 군대들로 끌려가서 전쟁으로 진군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1970년대와 1980년대초의 역사가 ICC로 하여금 역사적 양자택일, 전쟁으로 향한 진로냐 아니면 혁명으로 향한 진로냐에 대한 그것의 관점을 수정하도록 만들었음을 언급해야 한다. 전쟁으로 향한 진로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물리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패배당했어야 함과 전쟁의 발발을 방지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함을 의미하는 반면, 그 역이 혁명으로 향한 진로에 있어서 참인 것은 아니다. 이는 전세계적인 권력장악의 정확히 그 시점까지 부르조아계급이 자본주의사회의 지배적인 계급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에서 인용했던 공산주의인터네셔널의 난관적인 예언들에도 불구하고 러시아혁명의 승리조차도 전세계의 혁명의 승리를 보장할 수 없었다. 결국, 1983년의 ICC 제 5차 회의는 역사적 실상에 더 알맞은 용어를 채택했다: „계급대치를 향한 진로의 존재는, 우선 노동계급과 대결하여 패배시켜야 하기에 부르조아계급이 새로운 세계대학살을 개시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식으로든 이러한 대치의 결과를 미리 판결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혁명으로 향한 진로'라기 보다는 오히려‚ 계급대치를 향한 진로'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국제상황에 대한 결의, 인터네셔널리뷰 제 35호에 출간됨)
1980년의 폴란드투쟁들은 제국주의전쟁의 위협을 막았다 - 하지만 역사는 중단되지 않았고, 노동계급이 계속적으로 위기의 전개에 저항하고 전쟁으로의 길을 막을 것인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미결로 남았다. 결국, 1980년대 동안 계속된 평탄하지 않은 계급투쟁의 발전은 노동계급이 패배하지 않았고 세계대전으로의 길은 닫힌채 남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의 어떤 투쟁들은 20세기의 시작이래 볼 수 없었거나 어떤 경우에는 그때까지 전혀 볼 수 없었던 높이에 도달했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 1980년대 네덜랜드를 강타한 파업물결은 1903년의 대중파업이래 그 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 영국광부들은 1985년 파업에 들어가서, 대처정부가 거의 그 광산지역의 군점령을 방불케하는 대책을 마련하는 동안 1년간 계속했다.
- 1985년에는 덴마크사상 최대의 파업이 있었다.
- 1986년말 프랑스에서는 몇 주간이나 지속된 대중철도파업이 있었고, 1988년말에는 병원노동자들의 대대적인 파업이 있엇다. 두 경우 모두에서 노조들은 사건들에 보조를 맞추는데 큰 곤란을 겪었다.
- 1987년에는 이탈리아의 모든 교육부문이 일련의 대대적인 대정부투쟁을 전개했다: 여기서도 노동자들은 „고전적인" 노조조직들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투쟁의 물결은, 1980년대 한국노동운동과 광주에서의 투쟁의 예에서 우리가 볼 수 있듯이 결코 유럽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양 블록의 부르조아계급이 제국주의 전쟁을 개시할것인가를 결정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유럽에서의 투쟁들이었고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 노동계급이 가장 집중되어있고 정치적 조직적으로 가장 긴 역사적 경험을 가진 곳이 유럽이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은 그 주요 대대가 격파됨이 없이는 전체적으로 패배당할 수 없을 것이다;
- 부르조아계급이 가장 집중되어 있고 노동계급을 다루는데 가장 경험이 많은 곳 또한 유럽이기 때문이다;
- 그 당시에 지구상에서 가장 집중되고 산업화된 지역인 유럽은 소련 부르조아계급에게 있어 주요 포획물 즉, 러시아 부르조아계급으로 하여금 그 미국경쟁자를 유럽대륙에서 몰아내고 소련에 결여된 선진산업역량을 움켜쥘 수 있게 해줄 그래서 그 자체의 군사적 잠재력을 증강시킬 그러한 포획물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주요 특성들은 무엇이었는가?
- 생활수준의 방어에 있어서, 특히 해고에 대항한 투쟁들에서의 끊임없이 재확인된 노동자들의 전투성
- 정부에 대한 깊은 불신
- 투쟁의 „조직자"로서의 노조에 대한 증대하는 불신, 이는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일반조합원 유니온 구조들(극좌 정치조직들에 의해 통제된)의 발달을 초래했는데, 그 목적은 노동자들 자신의 대중집회를 사전중지시키고 투쟁의 조직을 전적으로 노조의 손 안에 유지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의 시기는 그래서 노동계급의 근본적인 강점과 근본적인 약점 양자 모두를 특징으로 했다:
- 한편으로, 계급투쟁의 강함은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이 -1930년대와는 달리- 그들 자신의 생활조건 방어를 위해서 끊임없이 투쟁했고 „사회주의 조국의 수호"나 „민주주의의 수호"의 깃발아래 스스로를 편입시키도록 허용하는 것을 거부한 사실은 지배계급이 그들의 위기에 대한 그들 자신의 „해법" , 즉 제국주의 전쟁을 개시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의미했다.
- 다른 한편으로는, 전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자본주의 내부에서의 그것의 존재를 즉각적으로 옹호하는 것을 넘어서는 투쟁을 발전시킬 수 없었다. 대부분 노동자들은 1960년대와 재건기의 조건들로의 회귀가 가능해서 자본가계급의 공격을 물리치기 위해 임금인상을 위해 또는 해고를 반대하여 파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환상을 여전히 갖고 있었다. 그들은 부르조아계급의 공격들이 이런 저런 국가수반(예를 들어 마가렛 대처나 로날드 레이건같은 „반동들")의 „나쁜 정책들" 때문이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가 해결불가능한 위기 속으로 가차없이 전락한 것 때문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과소평가했다. 세계 전역에서 공산주의 좌파의 계속된 약세는 그 자체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자본주의의 전복과 새로운 공산주의사회의 건설이라는 그 자신의 역사적으로 결정된 목표를 재발견할 수 없음의 한 표현이었다.
사실상, 1980년대의 사회적 상황은 하나의 궁지에 의해 특징지워지는데, 즉, 부르조아계급은 전쟁으로 나아갈 수 없었고, 프롤레타리아계급은 혁명적인 공세를 개시할 수 없었다.
이러한 궁지의 한 결과로서, 냉전은 1914년이나 1939년의 그것과 같은 전면적인 제국주의적 대학살에 의해서가 아니라, 두개의 제국주의 블록들 중 하나의 붕괴라는 역사적으로 전대미문의 사건에 의해 종결되고 결국 제국주의 라이벌의 부재로 인해 다른 하나의 해체를 야기시켰다.
이에 뒤이은 시기는 노동계급에게 있어서 심각한 혼란의 시기가 되어야만 했다:
- 스탈린주의의 붕괴 그리고 전 세계 노동자들의 눈 앞에서 스탈린주의체제의 약점과 부패와 후진성의 폭로는 세계 전역의 승승장구하는 민주적 부르조아계급으로 하여금 사실상, „봐라! 이것이야 말로 너희들이 공산주의를 건설하려 노력할 때 얻게될 그것이다" 또는 대안적으로 „공산주의는 멋진 이상이지만 현실에서는 결코 기능할 수 없을 것이다- 소련을 한번 보아라"라고 말하는 거대한 캠페인을 벌이도록 허용했다.
- „공산주의의 패배"에 대조되는 것은 물론 „자본주의의 승리"였다. 자본주의는 완벽하지 않을 지 모르나 유일하게 가능한 사회이고 그것의 영향들에 대항해서 투쟁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라고들 말했다. 참으로, 한 부르조아 공론가는 심지어 „역사의 종말"을 선언할 정도였다. 그것이 인류 전체에게 특히 노동계급에게 얼마나 많은 비참을 만들어내든 상관없이 자본주의 경제의 계속된 발전 이외의 어떤 가능한 전망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 역사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의 자의식에 대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타격은 인터넷에 의해 연료를 공급받은 소위 „신경제 new economy"의 외견상의 붐과 결합되었다. 이는 자본주의 외부에서는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는 관념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요소들이, 수 많은 나라들에서의 노동계급 의 전투성의 계속된 표현들에도 불구하고 왜 1990년대가 명백한 계급투쟁 그리고 공산주의좌파의 조직들의 운명 양자 모두에 있어서 심각한 퇴조를 표시하는지를 설명한다. 프롤레타리아혁명과 국제주의의 깃발을 여전히 높이 들고 있는 이들은, 최악의 경우에는 스탈린주의의 하수인들로 그리고 기껏해야 회복불가능한 과거에 사로잡힌 몽상가들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것에도 불구하고, 전체로서의 노동계급-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정치적 조직적 경험이 가장 큰 그러한 가장 발전된 나라들에서 특히 - 은 자본과의 맞대결에서 패배당하지도 않았고 부르조아계급이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부르조아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자발적이거나 열광적으로 고수하게 만드는 데 성공하지도 못했다. 간단히 말해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이 패배당하지 않은 채 남았다. 전면화된 제국주의전쟁으로의 진로는 닫힌채로 남겨졌다.
계급투쟁에서의 전환점
2003년 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의 대규모 동원들은 1989년 이래의 계급투쟁들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나타냈다. 그것들은 1968년이래 가장 긴 퇴조기 이후 노동자들의 전투성의 회복에서 첫번째 중요한 한 단계였다. 물론 1990년대에 이미 이러한 전투성의 간헐적인 표현들이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의 운동들의 동시성은 새천년의 시작이래 상황의 진화를 보여주었다. 실상, 이러한 사건들은 계급이 - 자신감의 계속적인 결여에도 불구하고 - 위기의 극적인 악화에 그리고 공격의 더욱 대대적이고 전면화된 성격에 직면하여 투쟁의 필요성을 회피하는 것이 점점 더 불가능함을 드러냈다. 이러한 변화는 계급의 전투성뿐만 아니라 그것의 대오 내에서의 기세에도, 그 행동들이 자리매김되는 전망에도 영향을 준다. 우리는 1990년대의 전형적인 신비화들(신기술혁명, 주식을 통한 개인적 부의 축적, „석유를 위한 전쟁들"의 이윤성)과 관련해서 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더 나은 삶에 관한 그리고 임노동의 공포를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상당히 괜찮은 연금에 관한 제 2차 세계대전 전후세대의 희망과 관련한 환상의 상실의 징후들을 목격하고 있다.
계급투쟁에서 전환점들이 모두 1917년이나 1968년의 그것만큼 중요하거나 극적인 것은 아니다. 이러한 연도들은 역사적 진로에서의 교체들을 나타내는 반면, 2003년은 대대적인 계급 대치를 향한 진로의 연속성 안에서 한 퇴조기의 끝이 시작됨을 표시할 뿐이다. 더 일반적으로, 우리는, 말하자면, 다음날 깨어났을 때 세상이 더 이상 그 이전과 동일하지 않은 그러한 상황들과, 조수의 밀물과 썰물사이의 거의 비가시적인 교체처럼 세계 전반으로 볼때 처음에는 거의 알아챌 수 없게 발생하는 변화들 사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2003년에 시작되어 3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는 그 진화는 의심의 여지없이 후자의 유형에 속한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의 2003년 투쟁들의 특히 중요한 측면은 그것들이 노동자들의 연금에 대한 국가의 공격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점이다. 위기의 악화로 인해 부르조아계급은 정년퇴직연령을 높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면서 그것은 노동계급이 최근 몇십년간 부과된 점점 참을 수 없는 착취수준을 감내하게 하는데 주요한 부분을 담당했던 사회적 완충장치를 희생시켰다.
부르조아계급은 1970년대 대량실업의 도래에 대해 일련의 국가자본주의적 복지대책으로 대응했는데, 그것은 경제적 관점에서 볼때 전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았고 오늘 국가부채의 엄청난 증가의 주요 요소들중의 하나이다. 현재 일어나는 복지국가의 분해는 자본주의가 사회에 제공하는 진정한 전망에 관한 심오한 문제제기만을 자극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모든 공격들이 노동계급으로부터 동일한 방어적 반응을 자극하는 것은 아니다. 인금삭감이나 노동시간연장에 대항해 투쟁하는 것은, 자본축척과정의 일부인, 노동생산성상승(기술적 개선의 덕으로)의 결과로서의 상대적 임금의 감소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것보다 더 용이하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표현처럼: „노동자의 실제적인 생활수준의 저하를 초래하는 임금삭감은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가들의 가시적인 급습이고 일반적으로 (...) 즉각적인 투쟁과 같은 것으로써 대응될 것이며, 최상의 경우에 물리쳐질 것이다. 이것과는 반대로, 상대적 임금의 저하는 외관상으로는 자본가들의 어떤 인격적인 개입도 없이 발생하며, 이에 대항하여 노동자들은 임금체계내부에서, 즉 상품생산의 영역에서 투쟁과 저항의 어떠한 작은 가능성도 갖고 있지 않다(국민경제에 대한 개요). " (자체번역)
실업의 증가는 노동계급에게 있어서 착취의 강화(상대적 임금에 대한 공격)와 마찬가지의 어려움을 제시한다. 실업이 지금까지 노동해 본 적이 없는 젊은 이들을 공격하면, 그것은 해고의 경우에서와 같은 폭발적인 효과를 갖지 않는다. 대량실업의 존재는 사실상 노동계급의 즉각적인 투쟁을 방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증대하는 수의 여전히 노동하고 있는 이들에 대해 그것이 항상적인 위협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과격한 사회변혁을 쟁점화함이 없이는 대답될 수 없는 질문들을 제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임금의 상대적 감소에 대항한 투쟁과 관련하여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상대적 임금의 저하에 대항한 투쟁은 그러므로 노동력의 상품적 성격에 대항한,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생산 전반에 대항한 투쟁을 또한 의미한다. 상대적 임금의 하락에 대항한 투쟁은 그래서 상품생산의 영역에서의 투쟁이 더 이상 아니라 이러한 경제의 존재에 대항한 혁명적, 반란적 운동이며, 그것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사회주의운동이다" (같은책). (자체번역)
1930년대는 대량실업과 더불어 어떻게 절대적 빈민화가 폭발하는지를 보여주었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이 그 이전에 패배함이 없이, „자본축척의 전반적이고 절대적인 법칙"은 그것의 반대항, 즉 혁명의 법칙이 될 위험으로 치달았다. 1970년대 이래 대량실업의 재출현과 더불어 부르조아계급은 국가자본주의적 복지주의라는 방책으로 대응했는데, 이 방책은 경제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고 오늘의 잴 수 없이 많은 공공부채의 주요 원인들 중 하나이다. 노동계급은 역사적 기억을 갖고 있다. 계급정체성의 상실에도 불구하고, 악화되는 위기로 인해 이 기억이 서서히 활성화되기 시작하고 있다. 대량실업과 사회적 임금의 삭감은 오늘 1930년대의 기억들을, 전면화된 불안정과 빈곤화의 영상들을 환기시킨다. „복지국가"의 파괴는 맑스주의자들의 예언들을 확인시킬 것이다.
룩셈부르크가 노동자들은 상품생산의 영역에서는 상대적 임금의 저하에 대항한 저항의 어떤 조그만 가능성도 갖고 있지 않다라고 쓸 때, 이것은 단념된 숙명론도, KAPD의 후기 에센경향의 „혁명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유사과격주의도 아니라, 이 투쟁이 „최소 강령"(즉각적 경제적 요구들)의 경계선 내부에 남아있어서는 않되고 가능한 가장 큰 정치적 명확성을 가지고 시작되어야 한다는 인식이다. 1980년대에 실업과 착취증대의 문제들이 이미 제시되었지만 예를 들어서, „영국 광부의 일터 지키기" 와 같이 종종 협소하고 지역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오늘 위기의 질적인 진전은 실업, 빈곤, 착취와 같은 문제들이 좀더 세계적 차원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제기되도록 만들 수 있는데, 연금, 건강, 실업자후원, 노동조건, 노동수명연장, 그리고 세대간 유대의 문제들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매우 맹아적인 형태로, 연금공격에 대한 반응인 최근의 운동들에 의해 노출된 잠재력이다. 이러한 장기적 교훈은 매우 중요한 것이고, 계급의 즉각적인 전투성이 회복되어가는 속도와 같은 그러한 문제들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실상, 룩셈부르크가 설명하는 바와 같이, 자본주의의 객관적 메카니즘들의 파괴적인 영향들(대량실업, 상대적인 착취의 강화)과 직접적으로 직면하는 것은 투쟁에 돌입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이유로, 투쟁들의 전개가 더 느리고 더 비틀리게 될 지라도 그 투쟁들 자체는 정치적으로 더 중요하다.
계급투쟁의 중심에서의 연대
ICC가 그 간행물에서 조명했던, 최근 투쟁들의 뚜렷한 특징 하나는 투쟁들의 목적과 방법 모두에 있어서 노동자들의 연대의 중심적인 성격이다:
- 2004년 진델핑엔과 브레멘의 다임러-크라이슬러 노동자들의 파업에서 - 그리고 스페인의 동지들로부터 그들이 받은 지지에서 - 우리가 보았듯이, 경영진의 협박 시도에 대항하여 상이한 공장들의 노동자들간의 연대;
- 예를 들어 히드로우공항에서의 게이트 고멧Gate Gourmet 파업(2005년 8월)에서 그리고 스페인의 시트SEAT 파업(2005년 12월)에서의 해고노동자들과의 연대;
- 미래의 노동자들의 임금을 방어하기 위한 뉴욕 운송시스템에서의 파업(2005년 12월)에서 그리고 강력하게는 프랑스에서 연금을 방어하거나 CPE노동계약에 대항하기 위한 투쟁들(2006년 봄)에서 표현된 세대들간의 연대.
이러한 투쟁들의 목적들과 구호들 안에는 노동계급 내부에서 천천히 성숙하는 정치의식의 분명한 징후가, 즉, 자본주의의 지속된 생존이 인류의 미래를 위협한다는 그리고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본성의 심장에 놓인 연대는 투쟁 그 자체에 있어서 중요한 인자이자 새로운 사회인 공산주의에로의 열쇠라는 자각의 분명한 징후가 있다. 공산주의사회는 모든 인간 사회의 근본적 토대의, 즉 세계 인류 공동체의 구축을 위한 기초가 될 연대의 더 높고, 전 세계적 수준에서의 재발견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위기가 그리고 제국주의전쟁과 생태적 재앙이라는 지옥속으로의 자본주의의 추락이 굽힐 수 없게 전개되는 것과, 노동자들의 투쟁 속에서 연대를 노동계급의 근본적인 무기로서 주장하는 것은 혁명가들에게 열린 가능성들을 결정하는 객관적인 조건과 주관적인 조건을 형성한다. 이러한 조건들은 혁명가들이 프롤레타리아혁명 자체로 향한 길을 열게될 결정적 계급대치를 향한 진로의 발달에 그들의 최대한의 능력들을 다해서 참여와 더불어 직면하게 되는 거대한 책임감을 또한 결정한다.
ICC, 2006년 10월
(이 글은 ICC에 동감하는 사람에 의해 번역되었다. 번역상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