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독일사회민주당의 전쟁 참여와 그 정당화

“지금 우리는 전쟁이라는 엄연한 사실 앞에 있다. 적의 침략이라는 소름끼치는 사실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결정해야 할 것은 전쟁지지냐 반대냐가 아니라 국가 방어를 위해 필요한 수단의 문제에 대해서이다.… 스스로의 가장 고귀한 피로 점철된 러시아 전제주의가 승리할 경우, 우리 민족과 그 자유로운 미래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많은 것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 위험을 막아야 한다. 우리 나라의 문화와 독립을 공고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늘 강조해왔던 것을 실행한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 조국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때 우리는, 모든 정복전쟁을 비난할 때 그러하듯이, 각 민족의 독립과 자위권을 언제나 인정해 온 인터내셔널의 견해와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원칙하에 우리는 요구된 전쟁차관을 승인한다.”i

이러한 선언과 더불어 8월 4일 우리당의 제국의회 원내분파는 전쟁기간 동안 독일노동자의 태도를 결정하고 지배하게 될 슬로건을 제공했다. 위험에 처한 조국, 국가방어, 존립과 문화와 자유가 걸린 민족전쟁, 이것이 사회민주당의 원내분파가 제공한 표어이다. 다른 모든 것은 그 단순한 결과로서 초래되었다. 당 언론과 노동조합 언론의 태도, 대중의 애국적 도취, 당쟁중지, 인터내셔널의 갑작스런 해체, 이 모든 것은 제국의회에서 내려진 최초 지침의 불가피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민족국가의 존립이 진정 문제라면, 자유가 문제라면, 만약 이것이 오직 총칼로만 수호될 수 있다면, 만약 전쟁이 성스러운 민족적 사안이라면, 그렇다면 모든 것은 당연하고 분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감수되어야 할 것이다. 목적을 원하는 자는 수단을 원하기 마련이다. 전쟁은 방법적이고 조직화된 거대한 살인이다. 체계적인 살인을 위해선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우선 적절한 도취가 조장되어야 한다. 이것은 오래 전부터 전쟁하는 자들의 잘 증명된 방법이다. 실행의 잔인성은 그에 상응하는 사고와 신념의 잔인성을 요구하고, 후자가 전자를 준비하고 동행해야 하는 법이다. 그리하여 독일판 “타작하는 사람들” 그림을 실은 8월 28일자의『진정한 야콥』ii이, 특히 애국적인 선동 시와 산문들을 실은 캠니츠, 함부르크, 키일, 프랑크푸르트, 코부르크 등등의 당 신문들이야 말로 바로, 죽음의 총탄을 러시아인, 프랑스인, 그리고 영국인 형제들의 가슴에 쏘아댐으로써만 스스로의 존재와 자유를 구원할 수 있다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있어 그러한 상응하는 필수적 정신적 마취제인 것이다. 이처럼 산봉우리와 골짜기를 한데 모으려 들고, 전쟁과 “인간성”을, 살인과 형제애를, 전쟁차관 승인과 민족들의 사회주의적 결연을 뒤섞으려는 것에 비하면, 공공연하게 교사 선동하는 보수 언론들은 그런대로 훨씬 더 일관성은 있는 편이다.

그런데 8월 4일 독일 제국의회 사회민주당 원내분파가 제시한 슬로건이 맞다면, 그렇다면 그와 더불어 노동자인터내셜에 대한 판단은 이 전쟁 뿐만 아니라 전쟁 일반에 대해 내려진 것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현대 노동자운동이 존재 한 이래 최초로, 한편에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연대라는 계명과 다른 한편에는 민족들의 자유와 국가적 존립의 이해 사이에 심연이 놓이게 된다. 최초로 우리는 민족국가들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선 국적이 다른 프롤레타리아트가 서로를 무찌르고 절멸시켜야만 한다는 새로운 발견 앞에 서 있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민족국가들의 이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이해가 조화롭게 결합되고 결국 동일하며, 서로를 대립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신념으로 살아왔다. 이것이 우리의 이론과 실천의 기초이자 우리의 민중에 대한 선동의 혼이었다. 그러면 우리의 세계관의 이 주요점에 있어 우리는 오류에 빠져 있었던 것인가? 지금 우리는 국제사회주의의 사활의 문제 앞에 서 있다.

이 세계대전은 우리의 국제적 원칙의 사례를 보여주는 최초의 시험대는 아니다. 최초의 시험을 우리당은 45년 전에 통과했다. 1870년 7월 21일 그 당시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아우구스트 베벨은 북독일제국의회에서 다음과 같은 역사적 선언을 했다.

“현재의 전쟁iii은 일종의 왕조전쟁으로서, 1866년의 전쟁iv이 호엔쫄레른왕조의 이해관계에 따랐던 것처럼 보나파르트왕조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행되고 있다.

전쟁의 수행을 위해서 제국의회에 요청된 자금을 우리는 가결할 수 없는데, 이는 이것이 1866년의 행위로 지금의 전쟁을 준비해온 프로이센 정부에 대한 신임투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요구된 자금을 부결할 수 없는데, 이는 보나파르트의 오만하고 범죄적인 정치를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왕조전쟁의 원칙적인 반대자로서, 사회-공화주의자로서, 그리고 국적에 상관없이 모든 억압자들에 대항해 투쟁하며 모든 억압받는 자들을 하나의 형제연맹으로 단결시키려 노력하는 국제노동자연맹의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현재의 전쟁을 지지할 수 없다. 그래서 유럽의 민족들이 현재의 처참한 사태로부터 교훈을 얻어, 자결권을 획득하고 모든 국가적이고 사회적인 악의 근원인 오늘의 무단정치와 계급지배를 철폐하는데 전력을 다할 것이라는 확고한 기대를 표명하며 이 표결에서 기권한다.”v

이러한 선언과 더불어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대표자들은 자신들의 본분을 매우 분명히 인터내셔널의 깃발 아래 자리매김했고 프랑스에 대항한 전쟁에 대해 자유를 건 민족전쟁이라는 성격을 완전히 거부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베벨은 만약 그후 수년간 밝혀지게 된 그 모든 사실들을 자신이 표결 당시 알았더라면 그 차관의 승인에 반대했을 것이라 회고록에서 말하고 있다.

그 전쟁에 대해, 즉 전체 부르주아 여론 및 국민의 절대다수가 그 당시 비스마르크의 술수의 영향을 받아 독일의 민족국가적 생존의 이해로 여겼던 그 전쟁에 대해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민족국가 생존의 이해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이해는 하나이고, 그 양자는 모두 전쟁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대변했다. 기껏해서 현재의 전쟁이, 사회민주당 제국의회 원내분파의 1914년 8월 4일 선언이 처음으로 엄청난 딜레마를 폭로한 것이다. 한쪽에는 민족의 자유, 다른 한쪽에는 국제연대라는 딜레마를!

지금, 우리당의 제국의회 원내분파의 선언에 포함된 근본적인 사실, 즉 프롤레타리아 정치의 원칙적으로 새로운 지향은 어쨌든 우리에게는 완전히 갑작스런 깨달음이었다. 그것은 8월 4일 황제연설 및 수상연설의 단순한 메아리였다. 황제의 연설에 따르면, “우리의 동기는 정복욕이 아니다, 신이 우리에게 배정한 자리를 우리와 우리 후손들을 위해 지키고자하는 불굴의 의지가 우리에게 용기를 불어넣는다. 그대들에게 제시된 문건들을 통해서 그대들은, 나의 정부, 특히 나의 수상이 최악의 사태를 막으려고 마지막 순간까지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강요된 정당방위의 상황에서 깨끗한 양심과 깨끗한 손으로 우리는 칼을 빼어 든다.”vi 그리고 독일제국의 수상 베트만 홀벡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신사여러분, 우리는 지금 긴급한 정당방위의 상황에 놓여있고 긴급은 어떤 계명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처럼 이렇게 위협을 느끼며 황제폐하를 위해 투쟁하는 자라면, 어떻게 자신 앞의 장해물을 치울 것인가만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평화로운 노동의 결실을 위해, 위대한 과거유산을 위해 그리고 우리 미래를 위해 우리는 투쟁합니다.”vii

이것은 사회민주당의 선언 내용 그대로이다. 1. 우리는 평화를 유지하려고 최선을 다했고, 다른 자들이 우리에게 전쟁을 강요했다. 2. 지금 전쟁이 일어난 이상 우리는 스스로를 방어해야 한다. 3. 이 전쟁에서 독일 민족의 모든 것이 위험에 처해 있다. 우리당의 제국의회 원내분파의 선언은 정부가 선언한 것의 약간 다른 양식화에 불과하다. 정부의 선언이 베트만 홀벡의 외교적인 평화노력, 황제의 전보를 거론하는 것처럼, 원내분파는 전쟁발발 이전의 사회민주당 주도의 평화시위들을 거론한다. 황제연설이 어떤 정복욕도 부인하듯이 그렇게 이 분파도 정복전쟁임을 사회주의라는 이름 아래 부인한다. 그리고 황제와 수상이, ‘황제폐하를 위하여 우리는 투쟁한다! 나는 어떤 정당도 모른다, 나는 단지 독일인만을 안다’viii고 외친다면, 사회민주당 선언의 메아리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 모든 것이 위험에 처해 있다, 우리는 위험의 순간에 조국을 저버리지 않는다’라고 대답한다. 단지 한 부분에 있어서 사회민주당의 선언은 정부의 견해에서 벗어난다. 그것은 러시아 전제주의를 독일의 자유에 대한 위험으로서 상황 파악의 전면에 내세운다. 황제연설은 러시아와 관련 다음과 같이 유감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무거운 심정으로 나의 군대를, 수많은 전장에서 나란히 함께 싸워왔던 그 이웃에 대항해 동원해야 했다. 솔직히 매우 유감스럽게도 나는 독일이 충실하게 유지해 왔던 우정이 깨어지는 것을 보았다.”ix

사회민주당 원내분파는 충실하게 유지되어왔던 러시아 차리즘과의 우정의 고통스런 단절을 전제주의에 대항한 자유의 팡파르로 탈바꿈시켰다. 이렇게 정부의 선언에 대해 독창성을 보이는 이 유일한 부분에서 전쟁을 민주적인 것으로 미화하고 그것에 일종의 민족적인 영광을 부여하기 위해 사회주의의 혁명적 전통을 이용했다.

이미 말했듯이, 이 모든 것이 8월 4일 사회민주당에게 갑작스럽게 분명해졌다. 그날까지 전쟁발발 전야까지 말해 왔던 모든 것은 그 분파의 선언과 정확히 상반된 것이었다. 7월 26일 이 전쟁의 도화선이 된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x이 공개되었을 때,『전진』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들은 전쟁을 원한다, 비엔나의 궁정에서 영향력과 결정권을 가진 비양심적인 자들은. 그들은 전쟁을 원한다. 원색적인 비방 교사 언론으로부터 벌써 몇 주째 울려 퍼지고 있다. 그들은 전쟁을 원한다.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은 그것을 만천하에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한 미치광이의 총격으로 프란츠 패르디난트와 그 부인의 피가 흘렸기 때문에, 수천의 노동자와 농민의 피가 흘러야 한단다, 부조리한 범죄가 한 층 더 부조리한 범죄로 극복되어야 한단다.…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은, 유럽 전역을 온통 불바다로 만들어버릴 그 불씨가 될 지도 모른다!

이 최후통첩은 이에 고분고분하게 굴복하는 세르비아의 정부라면 그 국민들에 의해 순식간에 불신임당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할 정도로 그 이해와 요구에 있어서 파렴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 국수주의 언론의 오만불손이, 전쟁야욕에 사로잡혀 소중한 동맹국을 극한의 사태로 자극하였고, 아무 의심없이 베트만 홀벡씨는 베르흐톨트씨에게 도움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때 베를린에서도 비엔나에서와 마찬가지로 위험한 게임을 벌이고 있다.… ”xi[강조-R.L.]

『라이프치히 민중신문』은 7월 24일 다음과 같이 썼다.

“오스트리아의 군사정당은... 모든 것을 한장의 카드에 건다, 왜냐하면 민족적이고 군국주의적인 국수주의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전혀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에서 국수주의 단체들은 특히 파산했고, 그들의 민족적 포효가 자신들의 경제적 페허를 은폐하고 전쟁의 강탈과 살인이 그들의 주머니를 채울 것이라 한다.… ”xii[강조-R.L.]

『드레스덴 민중신문』은 같은 날 다음과 같이 의견을 표했다.

“지금으로서는 비엔나 권력층의 전쟁교사자들은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제시하는 요구조건을 정당화할 만한 어떤 적절한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정부가 그럴 입장에 있지 않는 한, 전체 유럽 앞에서 선동적이고 모욕적으로 세르비아에게 시비를 거는 것은 부당하다. 비록 세르비아 정부의 과오가 증명된다 할지라도, 그리고 세르비아 정부의 묵인아래 사라예보에서의 암살이 준비되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이 통첩에 제시된 요구들은 모든 보통의 한계를 넘어서 있다. 한 정부의 뻔뻔스러운 전쟁 의도만이 다른 국가에게 그 같은 무리한 요구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

『뮌헨 포스트』는 7월 25일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오스트리아의 이 통첩은 지난 2백년의 역사에서 유사한 예를 찾아 볼 수 없는 공문서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유럽의 여론에 공개되지 않은 조사서류를 근거로 그리고 황태자 부부의 암살자에 대해 공개적으로 재판을 진행하지도 않고서, 만약 받아들이게 된다면 자살이나 다름없은 그러한 요구들을 세르비아에게 제시한다.… ”

『슐레스빅-홀슈타인 민중신문』은 7월 24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를 자극하고 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전쟁을 원하고, 전체 유럽을 피로 물들일 수 있는 범죄를 저지른다.…

오스트리아는 모든 것을 건 도박을 하고 있다. 그것은 세르비아가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아니라면 잠자코 내버려 둘 수 없을 정도로 세르비아를 자극하고 있다.…

문명인이라면 누구라도 오스트리아 권력자의 이러한 범죄적인 행동에 대해 결연히 항의해야 한다. 특히 노동자의 임무는 그리고 자유와 문화를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그 모든 사람들의 임무는, 비엔나에서 유발된 엄청난 광기의 결과를 막기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임에 틀림없다. ”

7월 25일자 막데부르크의『민중의 목소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냥 저 멀리서 이 요구사항들에 진지하게 접근하려는 기색만 보이는 세르비아정부라도 그와 동시에 의회와 국민들에 의해 타도되고 말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구실은 베르흐톨트가 공허한 주장으로 세르비아 정부 앞에 그리고 그와 더불어 유럽 앞에 나설수록 그 만큼 더욱더 비난받아 마땅하다.…

일어난다면 세계대전이 될 그런 전쟁이 더 이상 이런 식으로는 책동될 수 없다. 전 세계의 평온을 교란하려 하지 않고서야 이런식으로 행동할 수 없다. 이런식으로는 도덕적으로 정복할 수도 없고 제 3자에게 자신의 정당성을 확신시킬 수도 없다. 그래서 유럽의 언론과 정부들이 자만심 강하고 고삐가 풀린 비엔나의 정치가들을 강력하고 분명하게 자제시킬 것으로 여겨진다.”

프랑크푸르트의『민중의 목소리』는 7월 24일 다음과 같이 썼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죽음으로 그들의 가장 친한 친구를 잃은 그래서 그의 죽음을 세르비아의 국민들에게 복수하길 바라는 교황지상권주의적 언론xiii의 사주에 의지한 채, 나날이 그 언어가 위협적이고 야비해져가는 독일의 일부 부유한 전쟁교사자들에 의지한 채, 오스트리아정부는 세르비아왕국에 최후통첩을 내리도록 유인되고 말았다, 더할 나위없이 오만불손한 어투로 작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르비아정부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몇몇 요구사항들을 포함하는 최후통첩을.”

엘버펠트의『자유언론』은 같은 날 다음과 같이 썼다.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볼프통신xiv의 전보 하나가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요구사항들을 제시한다. 그로부터, 비엔나의 권력자들이 총력을 다해 전쟁으로 치닫고 있음이 명백하다. 어제 저녁 베오그라드에 전해진 통첩 속에서 요구된 것은 이미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일종의 보호정치이기 때문이다. 독일은 그와 같은 부당한 요구들을 지지하기 위해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다. 그래서 오스트리아가 그 요구를 철회할 것을 독일이 분명하게 요청한다는 점을 베를린의 외교관들이 비엔나의 교사자들에게 명백히 알리는 것이 절실히 요구된다.”

졸링엔의『베르기쉬 노동자의 목소리』는 쓰기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와의 충돌을 원하고, 사라예보의 암살을 단지 세르비아를 도덕적으로 부당한 것으로 몰아 세우기 위한 핑계로 이용한다. 그러나 이 일은 유럽의 공론을 성공적으로 속이기에는 너무 조야하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비엔나 권력층의 전쟁교사자들이, 러시아도 개입하게 될 그러한 충돌이 있을 경우 3국동맹xv의 동맹국인 이탈리아와 독일이 그들을 도우려 와야만 될거라고 믿는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공허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아드리아해와 발칸반도에서의 경쟁자인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무력함은 이탈리아에게는 매우 유리하다. 따라서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손해가 될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독일에서는 권력자들이 감히 그것을 원할 만큼 어리석다할 지라도, 합스부르크의 범죄적인 정치를 위해서, 민중의 분노를 사는 일 없이는 단 한명의 병사의 목숨이라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 생겨서는 안된다.”

우리 당의 간행물들 전체는 전쟁발발 1주일 전만 해도 예외 없이 전쟁을 이렇게 비난했다. 이에 따르면 독일의 존립도 자유도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전쟁정당의 범죄적인 모험의 문제었다. 정당방위도, 국가방어도, 자신의 자유의 이름으로 강요된 성스러운 전쟁도 아니었다. 파렴치한 선동이자, 타국 세르비아의 독립과 자유에 대한 뻔뻔스런 위협의 문제였다.

사회민주당의 이렇게 날카롭게 뚜렷한, 이렇게 일반적으로 확산된 견해를 갑자기 뒤집기 위해서 도대체 8월 4일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단지 새로운 사실 하나가 덧붙여 일어났다. 그것은 같은 날 독일정부가 제국의회에 제출한 백서였다. 이 백서 4쪽에 다음과 같은 사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스트리아는, 국경 건너편의 소요를 무작정 계속 주시만 하는 것은 왕정의 위신에도 그것의 유지에도 걸맞지 않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정부는 이러한 견해를 우리에게 전하며 우리의 의견을 물었다. 우리는 진심으로 우리 동맹국의 판단에 의견일치를 표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군주국의 존재에 대항에 세르비아에서 일어난 움직임을 종결짓기 위해, 이 동맹국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게 될 그 행동을 우리가 승인할 것임을 보장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어쩌면 전쟁이 될지도 모르는 행동이 러시아를 불러들이고 이와 더불어 우리의 동맹의무에 따라 우리를 전쟁에 끌어들일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위기에 처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중요한 이해관계를 알기에 이 동맹국이 그 자신의 위엄에 어울리지 않게 승복하도록 권할 수도 없었고, 이 어려운 순간에 우리의 원조를 거절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가장 민감한 부분에 대한 세르비아의 지속적이고 음험한 선동이 우리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협하기에 더욱 더 그럴 수가 없었다. 세르비아가 러시아와 프랑스의 도움으로 이웃 군주국의 존재를 위협하도록 계속 방치해 둔다면, 이것은 차츰 오스트리아의 붕괴를 가져올 것이고 그 결과 슬라브권이 러시아의 지배하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이렇게 되면 중유럽에서의 게르만족의 지위를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우리의 동서쪽 이웃들의 움직임이 점점 더 위협적으로 되어가는 현상황에서 우리는 믿고 의지할 동맹국이 필요하다. 그런데 기세가 약화된,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의 돌진에 의해 붕괴되어가는 오스트리아는 더 이상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동맹국의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르비아에 대한 행동에 있어서 오스트리아가 전적으로 자유롭게 결정하도록 위임했다. 우리는 그 준비에 참여하지 않았다.”xvi[강조 - R.L.]

이것이 8월 4일 사회민주당의 제국의회 원내분파에게 제출되었다. 백서 전체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결정적 위치를 차지하는 이말들이, 전쟁의 외교적인 이면사와 원동력들에 대한 나머지 황-, 녹-, 회-, 청-, 주황서들에, 전적으로 사소하고 하찮은 독일정부의 총천연색 설명들에 곁들여 제출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제국의회 원내분파는 상황판단을 위한 열쇠를 손에 쥐었다. 사회민주당 언론 전체는 일주일 전만해도,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이 범죄적으로 세계대전을 선동하는 것이라 외쳤고, 비엔나의 이러한 전쟁선동을 독일정부가 억제하고 제한하는 영향력을 발휘하길 기대했었다. 모든 사회민주당원들과 독일 여론 전체는,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이 있은 뒤 독일정부가 유럽 평화의 유지를 위해 땀흘려 일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사회민주당 언론매체 전체는 이 최후통첩이 독일 여론에게와 마찬가지로 독일 정부에게도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이 백서는 분명하게 다음과 같은 점을 설명했다. 1. 오스트리아 정부는 세르비아에 대한 대응에 앞서 독일의 승인을 받았다는 것. 2. 오스트리아의 대응이 세르비아와의 전쟁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유럽전쟁이 될 수도 있음을 독일 정부는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 3. 독일정부가, 오스트리아에게 승복하도록 충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굴복하는 약화된 오스트리아는 독일에게 결코 중요한 동맹국이 될 수 없음을 선언했다는 것. 4.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에 대한 대응에 앞서 독일 정부가 오스트리아에게 그 어떤 경우에도 전쟁에 원조를 보장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5. 독일정부가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결정적인 최후통첩에 대해 통제권을 갖지 않고 오히려 오스트리아에게 “전적으로 자유롭게 결정하도록 위임했다”는 것.

이 모든 것을 우리당의 제국의회 원내분파는 8월 4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독일군이 이미 벨기에에 진군했음을 정부의 입으로부터 같은 날 알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사회민주당의 분파는 이것이 외국의 침략에 대항한 독일의 방어전쟁의 문제라고, 조국의 생사가 걸린 문제라고, 문화와 러시아 전제주의에 대항한 자유전쟁의 문제라고 결론지었다.

전쟁의 분명한 배경, 이 배경을 불가피하게 숨기는 베일, 전쟁 발발을 휘감은 모든 외교놀음, 모두가 독일의 목숨을 노리며 독일을 약화시키고 모욕하며 굴복시키길 원하는 적들 세계의 아우성, 이 모든 것이 독일 사회민주당에게 갑작스런 사실일 수 있었을까? 그의 판단력과 비판적 통찰력을 무리하게 요구하는 일일 수 있었을까? 특히 우리 당에게는 더더욱 그럴리가 없었다! 우리당은 독일이 치른 큰 전쟁 2개를 이미 경험했고 이로부터 중요한 교훈들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역사에 관한 초보자라도 오늘날 알고 있다. 오스트리아에 대항한 1866년의 첫번째 전쟁이 비스마르크에 의해 계획적이고 장기적으로 준비되었음을, 처음부터 그의 정책은 오스트리아와의 단절을, 전쟁을 향하고 있었음을. 그 당시 왕세자이자 후일 황제가 된 프리드리히는 그해 11월 14일자 일기에 수상의 이런 의도를 기록했다고 한다. 아우어는 그의 팜플렛『세당기념식xvii과 사회민주당』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비스마르크)는 수상직에 오르면서 이미,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하도록 만들 계획이었지만 그 때는 아니, 그가 적절하다고 여기는 순간까지는 어쨌든 너무 일찍 국왕폐하와 그 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도록 조심했다고 한다.’ 이 고백을 지금 사람들은 당시의 빌헬름 프로이센국왕이… ‘그의 국민에게’ 한 호소문의 취지와 비교한다고들 한다. 그 호소문의 표현은 다음과 같다.

‘조국이 위험에 처해 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대부분이 동일한 적에 대항해 무장해 있다!

내가 독일인 국가 하나를 외세로부터 해방시킬 필요 때문에 자유로운 결정으로 그리고 이전의 부당함에 원한을 품지 않고 오스트리아의 황제에게 동맹의 손길을 내민 지 겨우 몇 년이 지났을 뿐이다... 그러나 기대는 어긋나고 말았다. 오스트리아는 자신의 제후들이 한 때 독일을 지배했음을 잊으려 하지 않는다. 더 젊지만 왕성하게 발전하고 있는 프로이센을 오스트리아는 결코 자연스런 동맹국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적대적인 경쟁자로 인식하고자 한다. 프로이센에 이로운 것은 오스트리아에 해롭게 된다는 이유를 들어서 프로이센을 무슨 일에서든 척결되어야 하는 것으로 본다. 오래되고 불행한 질시가 다시 활활 타오른다. 프로이센이 약화되고, 절멸되고, 폐위되기를 바란다. 프로이센에 대해 어떤 조약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연방xviii의 제후들에게 프로이센에 반대할 것을 호소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연방을 탈퇴하도록 유인한다. 독일 지역 그 어디를 둘러보더라도, 우리는 적들에 둘러싸여 있고, 그들의 투쟁구호는 프로이센의 굴복이다.’

이 정당한 전쟁에 하늘의 축복을 간구하기 위해 국왕 빌헬름은 6월 18일을 거국적인 국가-기도-및-속죄의 날로 정하는 칙령을 내렸다. 그는 그 칙령 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국민이 평화의 축복을 누리게 해주려는 내 노력을 성공으로 장식하는 것이 신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xix

우리당의 원내분파가 당역사를 완전히 잊지 않았다면, 8월 4일의 전쟁발발의 반주음악이 예전부터 잘 알려진 멜로디와 노랫말들을 생생하게 환기시키는 것으로 여겨졌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면. 1870년 프랑스와의 전쟁이 연이어 일어났고, 그 발발과정은 역사 속에 문서 하나와 확고히 연계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엠스의 전보』xx 이다. 이 문서는 전쟁만들기에 있어 모든 부르주아정치에 고전적인 군호의 하나가 되어버렸고 또 우리당의 역사에서 기억할 만한 일화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때 “어떻게 전쟁이 만들어지는가”를 밝혀내서 민중에게 보여주는 것을 과제와 책무로 여겼던 사람이 바로 원로 리프크네히트였고, 독일사회민주당이었다.

그런데 위협당한 조국의 수호만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 만들기 자체는 비스마르크가 고안한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그 특유의 치밀함으로 부르주아정치의 오래되고 일반적이며 진정으로 국제적인 기술 하나를 따랐을 뿐이다. 정부들의 계산에 이른바 여론이 한 몫 하게 된 이래, 언제 어디엔들 교전하는 각 측이 오직 조국의 방어만을 위해 그리고 상대측의 비열한 침략 앞에서 자신의 정당한 일을 위해 무거운 마음으로 칼집에서 칼을 뽑지 않은 그런 전쟁이 하나라도 있었던가? 그 전설은 그래서 탄약과 마찬가지로 작전에 속한다. 이 게임은 오래된 것이다. 새로운 것은 단지, 사회민주당이 이 게임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iVerhandlungen des Reichstags, XIII. Legislaturperiode, II. Session, Bd. 306, Stenographische Berichte, Berlin 1916, S.8-9

ii<진정한 야콥(Der Wahre Jacob)>, 독일사회민주당의 풍자잡지, 빌헬름 블로스(Wilhelm Blos)에 의해 1879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창간되어 1900년부터는 혁명주의대신 개량주의노선을 견지했다. 몇몇 단절을 겪으며 1933년까지 유지되다 나치정권에 의해 폐간당했다.

iii프랑스-프로이센전쟁(1870~1871). 전쟁발발 당시 프랑스는 보나파르트왕가의 나폴레옹 3세가 통치하는 제국이었다.

iv1866년 6월부터 7월까지 지속된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왕가)와 프로이센(호엔졸레른왕가) 사이의 전쟁은 독일에서의 주도권을 놓고 벌인 경쟁에서 프로이센이 유리하도록 결정났다. 1866년 8월 23일 프라하평화협정에서 오스트리아는 독일연방의 해체에 동의해야만 했고 이후의 독일국가연방에서 제외되었다.

vAugust Bebel, Ausgewählte Reden und Schriften, Bd.1, Berlin 1970, S.117

viVerhandlungen des Reichstags, XIII. Legislaturperiode, II. Session, Bd. 306, Stenographische Berichte, Berlin 1916, S.2

vii위과 같은 책, S.6-7

viii1914년 8월 4일 독일제국의회 개막회의에서 빌헬름 2세는 선동적으로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어떤 정당도 모른다, 오직 독일인만을 안다.”

ixVerhandlungen des Reichstags, XIII. Legislaturperiode, II. Session, Bd. 306, Stenographische Berichte, Berlin 1916, S.2

x1914년 7월 23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세르비아민족주의자들에 의한 프란츠 페르디난트대공의 암살과 관련해여 보낸 최후통첩에서 세르비아정부에게 자백을 요구했다. 이는 민족자결권에 위배되게 세르비아의 국내문제에의 개입을 의미했다. 이 최후통첩을 세르비아가 거부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이를 전쟁도발의 계기로 삼았다.

xiKrieg? Ultimatum, in Vorwärts(Berlin), Nr.200, 25. Juli 1914

xiiKrieg?, in Leipziger Volkszeitung, Nr.168, 24. Juli 1914

xiii 카톨릭교회 내에서 국가적 교회나 교구의 독립성에 반대하고 교황청으로의 권력 집중과 그 영향력 강화를 지지하는 언론

xivDas Wolffsche[Telegraphen- ]Bureau(W.T.B.). 베른하르트 볼프(Bernhard Wolff)에 의해 1849년 설립된 독일의 정보통신사

xvDer Dreibund, 1879년 독일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사이에 체결된 2국동맹에, 1882년 프랑스와 이해의 충돌에 빠진 이탈리아왕국이 가담하면서 3국동맹으로 확대되었다.

xviDas deutsche Weißbuch über den Ausbruch des Weltkrieges, Pößneck in Thür. 1914. S.3-4.

xviiSedanfeier, 1870/71년의 프로이센-프랑스전 당시 프로이센군이 프랑스군을 대파하고 나폴레옹 3세와 대약 8만 3천명의 프랑스군사들을 생포함으로써 전승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세당전투(1871년 9월1일~2일)를 기리는 기념식. 독일제국 당시 9월 2일이 세당일(Sedantag)로 기념되었다.

xviiiDeutscher Bund, 1806년 붕괴된 신성로마제국의 영방국가(Territorialstaat)들을 포괄하여 현재의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룩셈부르크지역에 1815년 성립되었다. 오스트리아제국과 프로이센왕국이 주도국가들이었고, 오스트리아의 영토중 일부(헝가리, 롬바르디아, 베네치아 및 달마치아)와 프로이센의 영토중 일부(동프로이센, 포센)는 신성로마제국의 영토가 아니였다는 이유로 제외되어 이 두나라는 각각 독립국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 이 연방은 1866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전쟁의 결과 해체되었다.

xixI. Auer, Sedanfeier und Sozialdemokratie, 1895년 9월 4일 베를린의 한 집회에서 한 연설문, Berlin 1895, S. 12-13

xxDie Emser Depesche, 프로이센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870년 7월 14일 자신이 위조한 전보 하나를 공개토록 했다. 이는 빌헬름 1세가 프로이센 주재 프랑스대사와 1870년 7월 13일 바트 엠스(Bad Ems)에서 나눈 담화에 대해 보고하는 것이었다. 이 엠스의 전보는 비스마르크가 바라던,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전쟁포고를 유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