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세계대전과 국제사회민주당의 항복

장면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6주 안에 파리로의 진군계획i은 세계적인 사건으로 발전했다. 해결의 진전도 후퇴도 없이 대량학살은 지루하고 단조로운 일상이 되어버렸다. 부르주아 정치는 스스로의 족쇄에 묶인 채 궁지에 몰려있다. 이미 불러낸 망령들을 더 이상 쫓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열광은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다. 거리의 애국주의 소음도 없어졌다. 황금자동차사냥ii도, 추적하고 추적당하는 거짓 전문들도, 콜레라균으로 오염된 우물들도, 베를린 철교 위를 폭격하는 러시아학생들도, 뉘른베르크 상공을 비행하는 프랑스인들도, 스파이를 색출하는 군중들의 거리폭력도, 귀청을 때리는 음악과 애국주의 노래가 최고의 볼륨으로 흘러나오는 제과점으로 몰려들던 군중도, 시민 전체가 폭민으로 변한 채 밀고하고 여성을 학대하며 만세를 외치고 한갓 풍문에도 광란에 빠져들 태세였던 것도, 일종의 인신제물의 분위기, 길모퉁이의 순경이 인간다움을 유일하게 대변하던 일종의 키쉬뇨프의 공기iii도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다.

연출은 끝났다. 독일의 학자들, “비틀거리는 레무르들”iv은 오래 전에 벌써 소환되었다. 젊은 처녀들은 더 이상 예비병을 실은 기차들을 뒤따르며 떠들썩한 환호를 보내지 않고, 차창 너머로 예비병들이 사람들에게 기쁘게 인사를 하지도 않는다. 이제 예비병들은 각자의 짐꾸러미를 손에 든 채 묵묵히, 군중이 불쾌한 표정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거리에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창백한 대낮의 차가운 대기 속으로 또 다른 합창들이, 전장의 독수리와 하이에나의 목쉰 외침이 울려 퍼진다. 천막천 1만폭, 정품임을 보장함! 베이컨 10만 킬로그램, 코코아가루, 커피대용품, 현금거래에 한함, 즉시 조달가능! 수류탄, 회전총좌, 탄약통, 전몰미망인 중매, 가죽혁대, 군납품 주선, 진지한 입찰에 한함! 지난 8월, 9월에 차곡차곡 적재되어 애국주의적 분위기로 환영받았던 포탄받이들이 벨기에에서, 보주산맥v에서, 마주른지역vi에서 개죽음 당한 채 썩어가는 그 죽음의 땅 위에서 이윤이 가지도 무성하게 번창한다. 추수한 곡식을 창고에 채울 때인 것이다. 약탈에 동참하려는 수 천개의 탐욕스런 손들이 대양을 건너 내뻗치고 있다.

사업이 폐허 위에서 성장하고 있다. 도시들은 잿더미로 변했다. 마을은 묘지로, 들녘은 불모지로, 주민은 거지떼로, 교회는 마굿간으로. 국제법, 조약, 동맹, 성스러운 맹세, 최고의 권위는 산산조각이 났다. 군주들은 상대편에 가담한 사촌을 백치이자 믿을 수없는 악당으로, 외교관들은 상대편 동료외교관을 교활한 불량배로, 정부들은 상대편 정부를 국민의 재앙이라며 전적으로 경멸한다. 그리고 베니스, 리스본, 모스크바, 싱가포르에는 굶주림 때문에 소요가 끊이질 않는다. 러시아에는 페스트가 그리고 모든 곳에 비참과 절망이 퍼져 있다.

모욕당하고 명예가 손상된 채, 피에 잠기고 진탕에 빠진 채 그렇게 부르주아 사회가 서 있다. 이것이 부르주아 사회이다. 깨끗하고 정숙하게 문화, 철학과 윤리, 질서, 평화와 법치국가를 연기하던 때의 부르주아 사회가 아니다. 찢어발기는 야수로서, 무질서의 대혼란으로서, 문화와 인류에 대한 독기운으로서 그렇게 부르주아 사회는 벌거벗은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대혼란의 한 가운데에서 세계사의 대재앙이 발생했다, 국제 사회민주당이 항복하고 만 것이다. 이점에 대해 스스로를 기만하고 사실을 은폐하려 한다면,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어리석고 심각한 일이 될 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민주주의자(즉, 혁명적인 쁘띠 부르주아 - 로자 룩셈부르크가 덧붙임)는 “가장 굴욕적인 패배로부터도, 처음에 순진무구하게 그 속으로 빠져들었듯이 그렇게 오점 하나 없이, 자신이 승리해야 한다고, 자신과 자신의 당이 이전의 입장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상황이 자신에 맞춰 성숙해야 한다고 새롭게 확신하며 그 패배로부터 빠져나간다”vii. 현대 프롤레타리아트는 그와는 다르게 역사적 시험대를 통과한다. 그 과제 만큼이나 오류도 크다. 가야할 길을 알려주는 것은 미리 주어진 그 어떤 지시도 아니고, 모든 경우에 적용 가능한 그 어떤 본보기도 아니며, 틀림없이 확실한 그 어떤 지도자도 아니다. 역사적 경험만이 유일한 스승이며, 자기해방으로 가는 가시밭길 위에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고난뿐만 아니라 무수한 오류도 놓여 있다. 그 자신의 여정의 목표, 즉 자기해방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스스로의 오류들로부터 배울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 자기비판, 가차없고 혹독하며 밑바닥까지 철처히 파고드는 자기비판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동에 있어 생명의 공기이자 등불이다. 현재의 세계대전에서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몰락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으며 인류에게 있어 하나의 불행이다. 그러나 국제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러한 전락의 깊이를 가늠하고 그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이는 사회주의의 패배를 의미할 것이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현대 노동자운동의 발전에 있어 최근 45년간의 시기이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거의 반세기 이래 우리의 활동에 대한 비판이자 완결이고 총합이다. 파리코뮌viii의 무덤은 유럽 노동자운동의 제 1기 및 제 1 인터내셔널ix을 마감했다. 그 뒤 새로운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전에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연발생적인 혁명들, 봉기들, 바리케이트전투들이 있은 후 늘 다시 수동적 상태로 빠져들었었다. 이제 그러한 투쟁들 대신에 체계적인 일상투쟁이 시작되었다. 부르주아 의회주의의 활용, 대중조직,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결합 그리고 가장 근접한 일상적 이해관계의 끈질긴 방어와 사회주의의 이상의 결합이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심사와 그 해방에 엄정한 과학의 등불이 그 길을 비추었다. 나라마다 제 각각인 파벌들, 학파들, 공상들, 실험들 대신에 여러 나라를 하나의 책 속의 문장들처럼 하나로 묶는 통일되고 국제적인 이론적 토대가 탄생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인식은 전세계 노동자계급의 손에 나침반을 쥐어주어 이 계급이 일상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바른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순간 순간의 투쟁전술을 확고부동한 최종목표에 따라 설정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새로운 방법론의 담지자이자 주장자이자 보호자가 독일사회민주당이었다. 1870년 전쟁과 파리코뮌의 패배로 인해 유럽 노동자운동의 중심은 독일로 이동했다. 프랑스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 제 1기의 전형적인 장소였던 것처럼, 파리가 그 당시 유럽 노동자계급의 고동치고 피흘리는 심장이었던 것처럼, 독일 노동자계급은 제 2기의 전위가 되었다. 독일 노동자계급은 지칠줄 모르는 작은 활동들의 수 많은 희생자들을 통해 가장 강력하고 모범적인 조직을 건설해 냈고, 가장 대규모의 신문을 창간했으며, 가장 효과적인 교육 및 선동 수단을 창출해냈고, 엄청난 수의 유권자들을 결집해서 의회 내에 가장 많은 의석을 확보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의 순수한 체화로 여겨졌으며, 제 2 인터내셔널x 안에서 스승이자 지도자로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했다. 1895년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마르크스의『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 대한 그의 유명한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다른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독일 사회민주당은 특별한 지위를 갖고 그와 더불어 적어도 우선은 특별한 과제 또한 가진다. 이 당이 투표소로 보내는 2백만의 유권자들 그리고 그들이 거느린 비유권자인 젊은이들과 여자들은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단단한 집단을, 국제 프롤레타리아 군대의 결정적인 ‘권력집단’을 형성한다.”xi 1914년 8월 5일자『비엔나 노동자신문』에 표현된 것처럼, 독일사회민주당은 “계급의식적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있어서 조직의 보석”이었다. 그것을 본보기로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벨기에 사회민주당이,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스위스, 미국의 노동자운동이 항상 열심히 뒤따랐다. 그리고 슬라브계의 나라들, 러시아인들, 발칸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무한하고 거의 무비판적인 경탄과 더불어 독일사회민주당을 우러러보았다. 제 2 인터내셔널에서 그 독일 ‘권력집단’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표자회의에서, 국제사회주의사무국의 회합에서 모두는 독일의 의견을 기다렸다. 특히, 군국주의와 전쟁에 맞선 투쟁 문제에 있어서 독일 사회민주당은 언제나 결정적인 힘으로 나타났다. 인터내셔널의 나아갈 방향의 결정하기 위해서는, “우리 독일인에게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면 대개의 경우 충분했다. 인터내셔널은 맹목적인 신뢰로써 경외의 대상인 막강한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도에 스스로를 내맡겼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모든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자랑이자 모든 나라 지배계급들에게는 두려움이었다.

그런데 거대한 역사의 시험대가 다가왔을 때, 우리는 독일에서 무엇을 경험했는가? 가장 깊은 몰락, 가장 엄청난 붕괴를 경험한 것이다. 그 어디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이 독일에서처럼 그렇게 완전히 제국주의에 봉사하며 발묶이지 않았고, 그 어디에서도 계엄상태가 그렇게 아무 저항없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그 어디에서도 언론이 그렇게 재갈 물리지 않고, 여론이 그렇게 질식당하지 않으며, 노동자계급의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투쟁이 그렇게 전적으로 희생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독일 사회민주당은 가장 강력한 전위였을 뿐만 아니라 인터내셔널의 사고하는 두뇌였다. 그래서 독일 사회민주당과 그것의 몰락에 대한 분석이, 자각의 과정이 시작되어야 한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국제사회주의의 구원을, 즉 가차없는 자기비판을 선도해나갈 도의적인 책임을 지니고 있다. 부르주아 사회의 다른 어떤 정당도, 다른 어떤 계급도 자신의 오류, 자신의 약점을 모두의 앞에서 비판이라는 명징한 거울 속에 감히 드러내지 못한다. 거울이 그와 동시에 자신의 앞에 놓인 역사적 한계와 뒤에 놓인 역사적인 재앙을 반영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은 항상 기탄없이 진실을, 또한 가장 비참한 자책마저도 직시하길 피할 이유가 없다. 그의 약점은 단지 길을 잃고 헤맴을 의미할 뿐이며, 역사의 엄정한 법칙이 그에게 힘을 되돌려주고 그 궁극적인 승리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가차없는 자기비판은 노동자계급의 생존권일 뿐만 아니라 최상의 의무이다. 우리는 뱃전에, 그 보호자 역할을 프롤레타리아트가 위임받은 인류 최상의 보물들을 이끌었다! 그리고 부르주아 사회가 그 피의 방종 때문에 굴욕당하고 명예가 훼손된 채 자신의 불운을 향해 계속 질주하는 동안, 국제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신을 수습하여 세계대전의 사나운 소용돌이 속에서 한 순간의 혼미와 나약함 때문에 바닥을 떨어뜨린 그 황금의 보물들을 다시 건져내야만 하고 또 그렇게 할 것이다.

이 세계대전이 세계사에서 전환기라는 점 한가지는 분명하다. 나중에 명랑하게 이전의 습관에 다시 젖어들기 위해 덤불 아래에서 천둥번개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토끼처럼 이 전쟁에서 그저 살아남기만 하면 될거라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대전으로 인해 우리의 투쟁조건이 변했고, 우리들 자신이 가장 많이 변했다. 자본주의 발전의 기본법칙이, 자본과 노동 사이의 생사를 건 전쟁이 마치 그 궤도를 이탈하거나 유화되기라도 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이미, 전쟁의 도중에 그 가면들을 벗어버린 이전의 익숙한 모습들이 비웃고 있다. 그러나 발전속도는 제국주의의 화산 분출로 인해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사회내부에서의 충돌의 격렬함과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한 과제의 규모, 그것들은 노동자운동의 역사에서 이전까지의 모든 것들을 한가로운 전원생활처럼 보이게 한다.

역사적으로 이 전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심사를 크게 고무하기에 적절했다. 마르크스는 예언자적 시각으로 많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미래와의 연관 속에서 발견해 냈다. 그의『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는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프랑스에서 쁘띠부르주아는, 일반적으로 산업부르주아가 해야 했을 일(의회주의적 권리 획득을 위한 투쟁 – 로자 룩셈부르크가 덧붙임)을 하고, 노동자는, 보통의 경우라면 쁘띠부르주아의 과제였을 일 (민주공화국의 쟁취-로자 룩셈부르크가 덧붙임)을 하는데, 노동자의 과제는 누가 해결할 것인가? 그 누구도 아니다. 프랑스 안에서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프랑스에서 선언된다. 그것은 국가의 테두리 내에서는 어디에서도 해결되지 않고, 프랑스사회 내부의 계급전쟁은 여러 국가들이 서로 맞서 싸우게 되는 세계대전으로 전환되게 된다. 해결은, 그러한 세계대전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가, 세계시장을 지배하는 그 나라의 최정상을, 즉 영국의 최정상을 점하게 되는 그 순간에야 비로소 시작된다.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시작되는 그 혁명은 결코 단숨에 이루어질 혁명이 아니다. 지금 세대는 모세가 사막을 가로질러 이끌었던 유태인들과 같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를 정복해야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계에 알맞게 성장하는 그 인류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몰락해가야 한다.”xii

이 글을 마르크스는 영국이 자본주의적으로 발전한 유일한 나라이자 영국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국의 경제호황으로 인해 국제 노동자계급을 이끌기에 적당한 것 처럼 보였던 1850년에 썼다. 영국 대신에 독일로 바꿔 읽게 되면 마르크스의 말은 현재의 세계대전에 대한 천재적인 예언으로 된다. 이 세계대전은 독일 프롤레타리아트를 그 나라의 선두에 나서도록 하기에 그리고 그와 더불어 노동과 자본이 국가 정치권력를 놓고 벌이는 거대한 국제적 전면대결을 위해 “조직적으로 시작” 하기에 적격이다.

그러면 우리는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노동자계급의 역할을 이와 다르게 생각했단 말인가? 우리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가올 그 일에 대해 어떻게 묘사하곤 했는지 상기해보자.

“그런 다음 대재앙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유럽에 거대한 비상 경보가 울리고, 그 경보에 맞춰 1600 ~1800만명의 남자들이, 최고의 살인무기로 무장한 여러 나라의 핏줄들이 서로를 적으로 하여 전장으로 이동할 것이다. 그 거대한 비상 경보의 배후에 거대한 파멸이 놓여있음을 나는 확신한다.… 그것은 우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신들 자신에 의해 다가온다. 당신들이 형세를 극단으로 몰고간다. 당신들이 그로부터 대재앙을 초래한다.… 당신들이 뿌린대로 당신들이 거두리라. 부르주아세계의 멸망이 다가오고 있다. 그것이 다가오고 있음이 확실하다!”xiii [강조-로자 룩셈부르크(R.L.)]

이렇게 우리당의 원내대변인, 베벨은 제국의회의 모로코논쟁에서 말했다.

몇 해 전 수십만 부가 배포되었던, 당의 공식팜플렛, 『제국주의냐 사회주의냐?』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고 있다.

“그렇게 제국주의에 대항한 투쟁으로부터 점점 더 자본과 노동 사이의 결정적인 투쟁이 성장해 나온다. 한편에는 전쟁위험, 인플레이션, 그리고 자본주의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평화, 모두를 위한 번영, 사회주의! 이렇게 문제가 제기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끊임 없이 자신의 세계사적인 임무를 수행해 나가고, 자신의 조직의 힘, 자신의 인식의 명확성을 강화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다가올 그일이 다가온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을 통해 인류가 세계대전의 끔찍한 공포를 모면하게 되거나, 아니면 자본주의세계가 역사 속으로 침몰할 것이다, 그것이 탄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피와 폭력 속으로. 그 역사적 순간에 노동자계급은 준비태세가 되어있을 것이고, 준비태세가 되어있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xiv

지난 제국의회선거를 위한 1911년의 공식적인『사회민주주의 유권자를 위한 지침서』의 42쪽에는 예상되는 세계대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우리의 지배자들과 지배계급들은 이 엄청난 일을 민중들에게 감히 부당하게 요구해도 된다고 믿고 있단 말인가? 경악과 분노와 격분에 사로잡힌 민중들이 그 살인에 종지부를 찍지 않을 것 같은가?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이라고 민중들이 질문하지 않을 것 같은가?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취급될 만큼 아니면 이렇게 우리들을 취급하도록 내버려둘 만큼 그렇게 백치들이란 말인가?

거대한 유럽전쟁의 발생확률을 조용히 계산 중인 자라면 바로 여기에 인용된 그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이 다음의 유럽전쟁은, 세계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사생결단의 승부가 될 것이다, 그것은 예상컨대 최후의 전쟁이 될 것이다.”xv

이런 말로 우리당의 현직 제국의회의원들이 110의 의석의 확보를 놓고 유세를 했었다.

1911년 여름 전함 판터호가 아가디어로 출격xvi하고 독일 제국주의자들의 떠들석한 부추김으로 인해 유럽전쟁의 위기가 한층 고조되었을 때, 8월 4일 파리xvii에서 열린 한 국제회의는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독일,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 그리고 프랑스 노동자 조직들의 대위원들은, 어떤 전쟁포고에 대해서도,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해 대항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선언한다. 대표된 각 나라들은 국내와 국제 회의의 결정들에 따라서, 지배계급의 모든 범죄적인 음모에 대항해 행동할 의무를 가진다.”

그러나 1912년 11월 바젤의 인터내셔널대회에서 노동자대표자들이 긴 행렬을 이루며 행사장인 교회당에 도착했을 때, 그때에는 다가올 운명의 순간의 거대함에 대한 전율과 영웅적인 결의가 모든 참석자들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냉철하고 회의적인 빅터 아들러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동지들이여,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여기에, 우리 힘의 공동의 근원에 있다는 점이다. 각자가 할 수 있는 것을 각자의 나라에서 시행할 힘을, 우리가 가진 방법과 수단을 총 동원하여,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다해서 전쟁이라는 범죄에 대항해 저항할 힘을 우리가 여기에서 얻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범죄가 일어난다면, 참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다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의 장해물, 최종의 장해물이 되도록 모든 힘을 다 기우려야 할 것이다 [강조-R.L.].

이것이 전체 인터내셔널에 혼을 불어넣는 신념이다.…

그리고 살인과 방화와 페스트가 문명화된 유럽전역을 휩쓴다면, 우리는 그에 대한 상상만으로도 전율할 수밖에 없고, 격노하고 실망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묻게 된다. 그러면 인류는, 그리고 프롤레타리아들은, 오늘날 묵묵히 도살장으로 끌려갈 만큼 진정 그렇게 어리석은 양떼들에 불과하단 말인가?”xviii[강조-R.L.].

트로엘스트라는 ‘약소국’의 이름으로, 그리고 벨기에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약소국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쟁을 막기 위해서 인터내셔널이 내리게 될 모든 결정들에 전적으로 모든 것을 다 바쳐 따를 것이다. 더불어 우리는, 약소국의 피로 그리고 약소국의 땅 위에서 자기 정부의 소유욕과 지배욕을 채우기 위해 강대국의 지배계급들이 자기 나라 프롤레타리아트의 아들들을 전쟁터로 불러낸다면, 프롤레타리아인 그 아들들은 프롤레타리아인 그 부모들, 계급투쟁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언론의 막강한 영향으로 인해서, 그 반문명적 행위로 자신들의 형제들이자 친구들인 우리들에게 해를 입히기 이전에 3번은 심사숙고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표명한다.”xix[강조-R.L.]

그 다음 조레스는 인터내셔널 사무국의 이름으로 전쟁반대 선언xx을 낭독한 후 자신의 연설을 다음과 같이 끝맺었다.

“인터내셔널은 세계의 모든 도의적인 힘들을 대표한다!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를 완전히 내맡겨야할 그 비극적인 순간이 언젠가 오게 된다면, 이 생각이 우리를 지탱하고 강화시킬 것이다. 그냥 가볍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다,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그 곳에서부터 우리는 선언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xxi[강조-R.L.]

그것은 의형제의 도원결의xxii와 같았다. 노동의 군대와 자본의 권력 사이에서 미래에 벌어질 거대한 전투를 알리는 종소리가 진지하고 엄숙하게 울려퍼진 그 바젤의 교회당을 전 세계가 주시했다.

1912년 12월 3일 사회민주당의 원내대변인 다비트는 독일 제국의회에서 말했다.

“그 때가 내 생애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 중의 하나였음을 나는 고백한다. 그 교회당의 종소리가 국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행렬을 동행할 때, 합창단석에 붉은 깃발들이 제단 둘레로 줄지어 세워질 때, 평화를 포고하길 원하는 여러 나라들에서 온 특사들을 오르간소리가 환영할 때, 그것이야 말로 내가 결코 잊지 못할 인상이었다.… 여기서 일어난 일, 이것은 당신들에게 매우 분명해질 것이다. 대중이, 의지박약하고 아무 생각도 없는 무리로서 존재하기를 그만둔 것이다. 이것은 역사상 새로운 일이다. 이전에는 전쟁에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대중을 맹목적으로 서로 반목하도록 선동하고 대량학살에 동원했었다. 이제 그것은 끝났다. 대중들은 어떤 전쟁당사자들의 의지박약한 도구나 하인이기를 거부한다.”xxiii[강조-R.L.]

전쟁 발발 1주일전인, 1914년 7월 26일에만 해도 독일의 사회민주당 간행물들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꼭두각시들이 아니다, 맹목적으로 좌우하는 상황들의 의지없는 도구로 인류를 전락시키는 이 체제에 대항하여, 평화를 갈망하는 유럽을 악취나는 도살장으로 탈바꿈시킬 채비를 하고 있는 이 자본주의에 맞서 우리는 모든 힘을 다해 투쟁할 것이다. 이 범죄가 시작된다면, 앞으로 며칠 안에 막강한 시위들을 통해 명백하게 드러날, 독일 및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단호한 평화의지가 세계대전을 막을 수 없게 된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적어도 최후의 전쟁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파멸이 될 것이다.”(『프랑크푸르트 민중의 소리』)

1914년 7월 30일에만 해도 여전히 독일 사회민주당의 중앙기관지,『전진』은 다음과 같이 외쳤다.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는 광기에 새로잡힌 지배계급이 야기하는 사건들에 대해 어떤 책임도 거부한다. 그 폐허로부터 자신에게 새로운 삶이 꽃필 것임을 안다. 모든 책임은 현재의 권력자들에게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다! 세계역사가 세계의 심판정이다!”xxiv

그리고 전대미문의, 전례가 없는 1914년 8월 4일이 다가왔다.

그것이 그렇게 일어나야만 했을까? 이러한 의미를 갖는 사건은 절대로 우연의 산물일 수가 없다. 심오하고 포괄적이며 객관적 원인들이 뿌리에 놓여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원인들은 또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들과 사회민주당의 과오들에도, 우리들의 투쟁의지의 부족에, 용기의 부족에, 신념에 대한 충실함의 부족에도 놓여 있을 수 있다. 과학적인 사회주의는 역사발전의 객관적인 법칙들을 파악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쳤다. 인간은 역사를 자유자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행동에 있어 그때 그때의 역사발전의 성숙도에 의존하지만, 역사발전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저편에서 무관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역사발전의 산물이자 결과인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발전의 추동력이자 원인이다. 그것의 활동은 역사를 함께 결정하는 일부이다. 인간이 자신의 그림자를 뛰어넘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역사발전을 건너뛸 수는 없지만, 그것을 가속하거나 감속할 수는 있다.

사회주의는 인간의 사회적인 행동에 의식적인 의미를, 계획적인 사고를 그와 더불어 자유의지를 도입하는 것을 스스로 목표로 하고 또 역사에 의해 그렇게 소명된, 세계사상 최초의 민중운동이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종국의 승리를, 동물계로부터 자유세계로의 인류의 도약으로 지칭했다. 이러한 ‘도약’도 역사의 엄정한 법칙들에, 이전의 고통스럽고 매우 느린 수천의 발전단계들에 연계되어있다. 그러나 그 발전으로 함께 모아진 물질적 전제조건들이라는 이 모든 재료로부터 거대한 민중의 의식적인 의지라는 점화의 불꽃이 피어오르지 않는 한 그러한 도약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사회주의의 승리는 운명처럼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오직 낡은 권력과 새로운 권력 사이의 길고 긴 일련의 거대한 힘겨루기를 통해서만 쟁취될 수 있고, 그 힘겨루기 동안 국제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민주당의 지휘 아래에,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의 손에 거머쥐는 것을, 사회적 삶의 운전대를 잡는 것을, 자기의지가 없는 장난감이기를 벗어나 자기 자신의 역사의, 목표가 분명한 조종사가 되는 것을 배우고 또 그렇게 되려고 시도할 것이다.

언젠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말했다. 부르주아사회는, 사회주의로 이행하느냐 아니면 야만으로 복귀하느냐의 딜레마 앞에 서 있다고. 우리시대의 유럽 문명 수준으로 볼때 ‘야만으로의 복귀’는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우리는 모든 말들을 지금까지 아무 생각 없이, 그 엄청난 중요성은 모른 채 읽고 반복해 왔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주위를 한번 돌아보면, 부르주아 사회의 야만으로의 복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해진다. 이 세계대전, 이것이 야만으로의 복귀이다. 제국주의의 승리는 문화의 절멸을 초래한다. 현대전의 전쟁 진행기간 동안은 산발적으로, 그리고 지금 시작된 세계대전의 시기가 억제되지 않은 채 그 최종 결론에 이르기까지 진행된다면 최종적으로. 우리는 그래서 오늘날,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정확히 한 세대 이전인 40년 전에 예언했던 것처럼,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제국주의의 승리 및 고대 로마에서처럼 모든 문화의 몰락, 민족절멸, 황폐, 퇴행, 일종의 거대한 묘지이냐, 아니면 사회주의의 승리, 즉 제국주의와 그것의 수단인 전쟁에 대항한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인 투쟁활동의 승리냐. 이것이 세계사의 딜레마, 일종의 양자택일이고, 그 저울대는 계급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결정 앞에서 떨며 흔들리고 있다. 문화와 인류의 미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용감한 결의로써 혁명투쟁의 칼을 저울의 접시 위로 던지는가에 달려 있다. 이 전쟁에서는 제국주의가 승리했다. 그 민중학살의 피묻은 칼이 잔인한 초과중량으로 저울대를 비참과 치욕의 편으로 끌어내렸다. 그 모든 비참과 그 모든 치욕은 오직, 이 전쟁으로부터 그리고 이 전쟁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계급의 손아귀에 놓인 하인의 역할에서 벗어나 정신을 수습하여 스스로 운명의 지배자가 될 것인가를 배움으로써만 상쇄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노동자계급은 그들의 역사적 소명의 모든 인식들을 비싼 값을 치르고 얻는다. 계급해방의 골고다의 길은 엄청난 희생들로 덮혀있다. 6월의 투사들, 코뮌의 희생자들, 러시아혁명의 순교자들 – 거의 셀 수 없이 많은 피묻은 그림자들의 윤무.xxv 그러나 그들은 명예로운 전장에서 스러져갔고, 마르크스가 코뮌의 영웅들에 대해 썼듯이, 그들은 영원히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심장 속에 새겨져 있다.”xxvi 지금 각국의 수백만 프롤레타리아들이 노예의 노래를 부르며 치욕과 형제살해와 자기도륙의 전장에서 죽어가고 있다. 그것도 우리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세가 사막을 건너 인도했던 유태인들과 같다. 그러나 배우기를 잊지 않는 한, 우리는 가망이 있고, 승리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현재의 지도자, 사회민주당이 더 이상 배울 줄 모른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새로운 세계에 어울리게 성장한 그 인류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xxvii 몰락하고 말 것이다.

i1차 대전 발발 당시 독일의 슐리펀계획(Schlieffen Plan)이 서부전선의 승리에 할당한 시간이 6주였다. 하지만 총사령부는 1914년 10월 전쟁의 양상이 지루한 참호전으로 발전하자 이 계획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ii1차 대전당시,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이뤄진 반독일동맹의 결과로 프랑스가 러시아에 제공하는 자금(황금)이 독일지역을 통과해서 자동차로 운반된다는 정보가 있어 이러한 자동차를 색출하려는 사냥이 독일 곳곳에서 벌어졌다.

iii러시아차르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무장조직 검은 백인단(Schwarzhunderter)이 1903년 4월 차르 통치하의 몰다비아의 키쉬뇨프에서 유태인들, 대학생들, 혁명가들 및 계급의식적 노동자들에게 테러를 가했다. 이러한 학살들은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에 대한 차르정원의 대응이었다.

ivDie “wankenden Lemuren“, 괴테의 파우스트 2편에 나오는 구절,“ihr schlotternden Lemuren“에서 인용된 어구로 보인다. 이때 Lemuren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 놓인 채 육체적 부패가 진행되는 마당에도 보잘것 없는 기교를 계속 보여주고 있는 형상들을 일컫는다. 한편 Lemuren는 동물도감에 따르면, 원숭이의 손발을 가졌으나 머리는 원숭이가 아닌 반원숭이(Halbaffe), 여우원숭이를 말한다

v독일어로는 Vogesen, 프랑스명은 Vosges, 프랑스동부에 위치한 산맥으로, 알자스-로렌지방에 걸쳐있다.

viMasuren, 옛 동프로이센 그리고 현재는 폴란드의 북쪽에 위한 지역으로 2000여개의 호수가 산재되어 있다. 1차 대전 당시 1914년 1915년 러시아군과 독일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들이 있었다.

vii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미에르 18일 (Karl Marx, “Der achtzehnte Brumaire des Louis Bonaparte”). In: Karl Marx/Friedrich Engels: Werke, Bd. 8, Berlin, 1969, S.145

viiiParis commune, 프로이센-프랑스전쟁(1870~71) 중인 1871년 파리노동자들의 봉기 후 자생적으로 형성된 혁명적 파리시평의회(1871년 3월 18일~5월 28일). 보르도에 위치한 보수적 중앙정부의 의지에 반대해 사회주의적 정책들을 실천하려했다. 거의 10주동안 유지되다 프랑스과 교전중이던 독일제국과 그외 외국군대의 도움을 받은 정규프랑스군에 대항해 치열한 바리케이트전 끝에 유혈 진압되었다. 파리코뮌은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예로, 평의회민주주의의 모범으로 통하며 이후 사회주의 및 코뮤니스트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ixDie erste Internationale, 또는 국제노동자협회(Die Internationale Arbeiterassoziation: IAA, 1864 ~1874). 최초의 국제노동자조직으로 1863년 1월 폴란드에서 일어난 노동자봉기와 그 진압에 반대한 시위를 계기로 여러나라 노동자들의 공동활동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864년 런던에서 창립되었다. 사회주의자, 코뮤니스트, 아나키스트등 다양한 경향들이 참여했다. 카를 마르크스는 그 결성선언문과 규약을 작성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그 결성을 적극 도왔다. 파리코뮌의 붕괴 후 쇠퇴하기 시작해서 결국 1874년 필라델피아대회를 마지막으로 해체되었다.

xDie zweite Internationale, 일명 사회주의인터내셔널(1889~1914). 제 1인터내셔널에 참여했던 아나키스트들을 배제하고 유럽내의 거의 모든 사회민주당들이 참여해 파리에서 창립되었다. 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거의 모든 사회민주당들이 자국내에서 당쟁중지와 계급투쟁중지를 선언하고 전쟁에 관여하게 되면서 존재이유를 잃고 해체되었다.

xi프리드리히 엥겔스“Einleitung zu Marx’ Klassenkämpfe in Frankreich(마르크스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서문),” in Karl Marx u. Friedrich Engels, Werke, Bd.22, S.524

xii칼 마르크스 Karl Marx, “Klassenkämpfe in Frankreich(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in Karl Marx u. Friedrich Engels, Werke, Bd. 7, S. 79.

xiii제국의회심리 속기록(Verhandlungen des Reichstags, XII. Legislaturperiode. II.Session, Bd.268, Stenographische Berichte, Berlin 1911, S.7730.)

xivJulian Marchlewski(J. Karski), “Imperialismus oder Sozialismus(제국주의냐 사회주의냐)? ”, Berlin 1960, S. 48–49.

xvHandbuch für sozialdemokratische Wähler, Berlin 1911, S. 42.

xvi1911년 초, 프랑스제국주의가 지배력을 모로코 전체로 확대하고 공고히 하려는 시도에 대해 독일제국주의는 전함„판터(Panther)“호와 „베를린(Berlin)“호를 모로코의 아가디어(Agadir)로 출격시킴으로써 대응했다. 이러한 도발로 인해 즉각적인 전쟁위협이 조성되었다. 영국이 프랑스편을 들며 참견함으로써 독일 식민정책이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xvii원저에는 런던으로 되어있으나, 1911년 8월 4일 파리에서 노동총연맹 주도의 시위가 있었다. 여기에 독일노동조합총위원회 회원들과 독일사민당 간부들, 그리고 영국, 스페인 및 네덜란드 노동조합의 대표단들이 참가했다.

xviiiAußerordentlicher Internationaler Sozilaisten-Kongreß zu Basel am 24. und 25. November 1912, Berlin 1912, S.18

xix위와 같은 책, S33.

xx바젤에서 1912년 24일에서 25일까지 개최된 인터내셔널 사회주의자특별회의에서 채택된 “현 상황에 대한 인터네셔널의 선언(Manifest der Internationale zur gegenwärtigen Lage)”은 1907년 슈투트가르트대회와 1910년 코펜하겐대회의 결정들을 강화했다. 그리고 모든 효과적 수단을 동원해서 전쟁발발을 저지할 것을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전쟁이 발발할 경우, 자본주의의 계급지배를 붕괴시킴으로써 그 전쟁을 끝낼 것을 프롤레타리아트에 호소했다.

xxiAußerordentlicher Internationaler Sozilaisten-Kongreß zu Basel am 24. und 25. November 1912, Berlin 1912, S.27

xxii원문에는 Rütlischwur, 중세시대에 스위스 뤼틀리에서 이뤄졌다는 반합스부르크동맹결의. 이후 스위스 근대민족국가의 형성신화로 발전했다. 도원결의는 중국 촉나라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에서 결의 형제한 고사에서 유래한 말, 의형제를 맺음을 의미한다.

xxiiiVerhandlungen des Reichstags. XII. Legislaturperiode. I. Session, Bd.286, Stenographische Berichte, Berlin 1911, S.2517-18

xxiv “Vor der Katastrophe,” in Vorwärts (Berlin), Nr. 295, 30. Juli 1914.

xxv1848년 프랑스의 오를레앙왕정이 2월 혁명에 의해 전복된지 네달만인 6월 보수적 부르주아세력이 파리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게 되는데, 이때 격렬한 시가전과 유혈사태가 있었다. 1871년 파리의 코뮌주의자들이 프랑스정규군에 의해 패배당했을 때 대대적인 처형과 추방이 뒤따랐다. 여기서 룩셈부르크가 언급하는 러시아혁명은 1905년에 일어났다. 당시 노동자계급소비에트(평의회)가 페테스부르크와 모스크바의 통제권을 장악했지만 차르정권은 무력으로 혁명가들을 진압하고 약간 수정보완된 독재정치를 재확립했다.

xxviKarl Marx, “Der Bürgerkrieg in Frankreich(프랑스내전),” in Karl Marx u. Friedrich Engels, Werke, Bd.17, Berlin 1971, S.362

xxviiKarl Marx, “Klassenkämpfe in Frankreich 1848 bis 1850 (1848년부터 18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 in Karl Marx u. Friedrich Engels, Werke, Bd.7, S.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