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촛불시위“에 대하여
ICC에 의한 서문
한국에서 새로이 선출된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쇠고기 수입(몇년전 광우병의 공포때문에 금지되었던)의 허용을 결정한 것에 항의하는 최근의 „촛불시위“는 6월에 거대한 규모에 이르러 서울에서만도 백만명의 사람들이 시위에 참가했다. 대중의 건강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실제적이든 간에 분명히 이 시위들에는 그 이상의 더 많은 것이 있다. 노동자들의 생활 조건의 전반적인 악화는 정규직 업무가 점점 더 비정규직과 시간제노동에 의해 대체되는 것과 더불어 전세계적인 현상으로서 한국 노동자들을 심하게 타격해 오고 있다. 게다가 새로이 구성된 이명박정부는 노동자들의 삶과 생활조건에 대한 일련의 공격을 개시함에 있어서 특히 더 오만하고 압제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더우기, 2007년 미국과 조인된 자유무역협정(FTA)은 한국의 소농민들의 존재에 직접적인 위협이다.이 협정이 공공연히 „리버럴하고“, „친자본가적인“ 정부(이명박은 한때 현대그룹의 회장이었다)에 의해 조인되었다는 사실은 반미주의적 경향을 강화시켰는데, 이러한 경향 자체는 단지 민족주의의 한 형태일 뿐이다.
아래에 우리가 실는 글은 이전에 „사회주의정치연합(SPA)“으로 알려졌던 „좌익 공산주의 그룹“(LCG)의 한 동지가 보낸 것이다. 독자들이 기억하겠듯이, SPA는 그룹은2006년 10월 서울과 울산에서 개최된 맑스주의자대회를 조직했었다. 우리는 몇가지 이유로 이 글을 강력히 환영한다.
첫째, 우리가 이미 여러 차례 말해오듯이,노동자 계급 일반에게뿐만 아니라 계급투쟁이 부활된 이시기에 국제주의적 전망을 발전시키려 하고 있는 투쟁가들에게도 매우 실제적인 언어적인 곤란으로 인해 또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서의 노동자 운동 관련 문건들을 접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 한국에서의 노동자투쟁의 특이한 역사적 경험들이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건들과 지난 30년간의 한국역사에 관한 국제주의적 전망을 발전시키고 무엇보다도 이것들을 전세계 노동자투쟁의 국제주의적 맥락 속에 자리매김하려는 LCG 동지들의 노력은 우리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계급투쟁의 운명, 공산주의혁명의 운명은 다른 어느 한 나라에서 결정되지 않을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결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글에서의 국제주의적 시각의 전개는 그래서 강력하게 환영되어야 한다.
둘째, 이 글은 노동자들의 행동이 „가두의 축제나 부르조아정치로 해소되어(dissolved into street festivals or bourgeois politics)“버려서 노동자계급의 독립적인 행동이 사회의 다른 비착취계층들을 분명하게 선도할 수 있는 그러한 계급적 기초 위에 스스로를 확립하는데 실패할 위험을 명확하게 파악한다. 이문제도 결코 한국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LCG동지가 „87년 6월 항쟁도 직선제라는 부르주아 선거의 환상에 민중의 폭발적 투쟁요구를 빠뜨림으로써 6.29기만선언에 굴복하게 만든 뼈아픈 역사가 되었다(Even the June Struggles of 1987 were to be a painful historical experience of surrender through achieving direct voting, an illusion of bourgeois democracy and dropping the masses' explosive demands for struggles)“라고 말할 때 그와 우리의 의견이 일치함을 강조하길 원한다. 종종 들리는 바와는 반대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조직화에 기회들을 열어주지 않는다. 브라질과 같이 군사독재를 당한 다른 나라들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역사는 정확히 그와는 반대의 경우임을 보여준다. 민주주의의 확립은 관료주의적 노동조합이 번성할 수 있게 했고, 그 이래 계급투쟁을 맨 먼저 사보타지하는 것들이 바로 이러한 노동조합들인 것으로 드러났다.
셋째, 이 글은 ”부르조아정치인을 선택하는 길이 곧 정치민주화의 길이라는(that the way which the bourgeois politicians chose would be the very way toward political democratization)“ 1987년 6월의 환상 뒤에 놓인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상당히 적확하게 제기한다. 사실상,1980년대의 투쟁에 관여한 상이한 계급들은 그것을 완전히 의식하고 있었든 그렇지 않았든 상이한 목표들을 갖고 있었다. 군사독재에 대한 순전히 민주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 반대파에게 있어서는, 이명박에 의해 대표되는 현실이 얼마나 1987년의 달콤한 꿈을 실망시킬지언정 한국에 민주적인 정부를 확립하려는 것이 진정 그것-부르주아-의 야망의 한계이다! 그런데 노동자계급의 목표는 군사독재뿐만이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체제“전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오직 전세계적으로 수행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글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 투쟁과 함께하고 방향을 제시할 혁명적 정치세력은 없었다(there was no revolutionary political force which would be together with and give orientations to the struggles) ”는 사실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인 문제로서, 전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새로운 인터네셔널을 아직 발전시킬 수 없었다는 사실의 지역적인 표현이다. 그러한 인터네셔널의 존재 자체가 계급 전체 내부의 혁명투쟁과 의식의 전세계적인 발전의 표현일 것이다. 오늘날 국제주의자들 사이에 유대와 공동작업을 발전시키는 것은 그 직접적인 결과들을 놓고 볼때 이것이 얼마나 하찮아 보일지라도 미래에 프롤레타리아트가 새로운 인터네셔널을 창건할 수 있는데 결정적이 될 것임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다.
넷째, 투쟁의 당면한 전망과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 사항들을 강조하고자 한다.
우리는 노동자들이 작업 현장 수준에서 스스로 조직할 필요에 대해서 뿐만아니라, 계급연대를 발전시키고 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공장 점거로 고립되는 것을 피하고 가능한 한 거리시위를 활용할 필요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 또한 우리는 노동자들이 계급전체에 일반적인 요구사항들을 제기하고 공장에 따라, 산업무분에 따라 특이적인 요구사항들이 운동을 분열하도록 허용하는 덫-노동조합술책에서 전형적인-을 피할 필요성에도 동의한다.
우리는 노동자들이 „촛불집회에서 노동자의 고통이 건강이나 교육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총체적 삶과 연관되어 있음을 주장하고 서로 토론하는 적극적인 마당을 만들어야 한다(at the candlelight meetings (...) prepare actively places to discuss with one another and argue that the pains of workers reside not only in the health or educational problems but are related also to the entire living conditions of workers)“라는 생각에 강력하게 동의한다. 토론그룹과 써클의 발전은 노동자들이 스스로에 대한 신뢰와 독립적으로 조직화하는 그들 자신의 능력을 획득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의 활동에 대한 더 광범위한 정치적 국제적 비젼을 획득하기 위해서 매우 필수적이다.
이 모든 것을 말하고 나서, 우리가 한국에서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는 국제주의운동에서 논쟁에 붙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몇가지 불일치점들도 있다.
그 첫째는 글의 마지막 구절에서, „조직된“(즉, 노동조합에 조직된) 노동자들과 „미조직된“(즉, 노동조합에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들에게 개별적인 임무들이 있다고 표현된 것같은 그 생각을 들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이전에 말했듯이, 결코 순전히 한국의 문제가 아니다. 비정규노동자들의 조직화가 오늘날 한국의 동지들에게 주요한 관심사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실상, 전세계 노동자계급에게 있어서 주요한 어려움은 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 지배계급이 만들고 노동조합들이 유지하고 있는 분할들에 정확히 어떻게 맞설 것인가?라는 것이다. 운동이 강력해질 수 있는 전제조건은 비정규직과 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들의 공동의 이해관계를 인식하고서 모든 노동자들에게 열린 대중집회들에서 함께 투쟁하는 것이다. 이것을 해결함에 있어서 절대로 피해야 할 방법은 미조직노동자들과 조직노동자들이 이러한 분열들을 영속하게 만들어서 개별적으로 조직화하고, 더구나 비정규직노동자들을 위한 별개의 노동조합을 세우려 노력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계급투쟁에 또 하나의 분열을 도입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강조하고자 하는 두번째 사항은 노동자투쟁과 민족투쟁 사이의 절대적인 양립불가능성이다. 우리는 „태극기와 애국가 등으로 표현되는 순수한 애국주의도 노동계급의 총체적 삶의 요구를 통해 계급적 요구로 모아질 가능성이 많다(Through the general demands for the defence of living conditions of the working class even pure patriotism represented by Tae- gk –gi and Ae-guk-ga, the korean national flag and anthem, could possibly be welded together and transformed into demands of the class)“라는 문장과 관련하여 번역의 어려움을 겪었다. 우리가 이것을 잘못 번역했을 수 있고, 그 경우에는 LCG동지들이 교정해 주기를 바란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애국적인 요구들을 노동자계급 요구들 속으로 „모아지기(be welded together and transformed into)“가 절대로 불가능함을 분명하고 명백하게 언급하고 싶다. 민족주의-애국주의-와 국제주의는 반대극들이다. 그들은 사회의 두가지 주요한 적대계급들의 이해관계를 표현하고, 그들중에 오직 하나만이 다른 하나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다.
여기에서 전개하기에는 너무 길지도 모를 마지막 사항은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autonomous and democratic unions)“을 위한 투쟁 문제 전체이다. 이것은 확실히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의 노동자투쟁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우리가 보기에, 그러한 노동조합을 건설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일종의 환상이다-그 당시 지배적이던 조건들 하에서 자연스럽고 이해될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상일 뿐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한국의 동지들은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을 위한 20년간의 투쟁이 어떻게 오늘날 한국과 전세계의 노동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계급투쟁을 사보타지하는 관료화된 노동조합의 건설을 초래했는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한국에서의 계급의 경험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서, 특히 폴란드에서1980년의 대대적 파업들이후의 경험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우리로서는 최선을 다해 이러한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다.
ICC, 2008년 7월 중순
P.S.이서문을 LCG의 동지들에게 보낸 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받았다. 이 의견교환의 계속을 진행되는 대로 신속히 실을 수 있게 되길 바란다.
ICC동지들에게
우리의 글을 영어로 번역한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동지들이 그글에 대해 쓴 서문과 관련하여, 특히 두번째 항목, 애국주의에 대하여, 동지들이 동의하지 않는 그 문장에 관하여 더 명확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촛불시위에 함께하는 쁘띠부르주아적 참가자들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가 노동자계급에 기반한 이해관계들로 전환될 수 있을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시위들이 이제 거의 70일이상 계속되고 있습니다. 요구사항들과 슬로건들이 이명박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들과 자본주의 자체의 근본적인 쟁점들에 대한 반대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급의 이해관계에 대해 한달 반 사이에 쁘띠부르주아적 참가자들의 태도변화를 인식했습니다. 촛불시위가 대중과 이명박정부사이의 충돌로 이어져서 더 격렬한 대중운동이 전개되기를 우리는 기대합니다. 그 운동의 진행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전체과정의 진화를 토론할 것입니다.
가장 따뜻한 공산주의자의 인사를 보내며, LC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