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1월 미국의 리차드 릭슨 대통령은 취임시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지속적 성장이 보장되도록 경제를 조성하는 것을 마침내 알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이러한 낙관론이 잔인한 현실에 의해 얼마나 반증되었는지를 볼 수 있다. 그 4년 후, 즉 그의 두번째 임기가 시작될 때 이미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래 최악의 불경기에 빠져들었다. 이에 따라 다른 많은 것들이 결과되었는데, 그 모두는 각각 그 전에 앞섰던 것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었다. 하지만 세상 물정에 어두운 낙관주의와 관련해서, 그 한 해 전에 이미 훨씬 더 경험많은 국가수반 하나가 닉슨을 능가했다. 그 사람은 바로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였고1958년 이래 프랑스공화국의 대통령이던 드골이었다. 이 위대한 지도자는 신년사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지 않았던가: „1968년, 나는 올해를 평온하게 맞이한다 " 그의 경우에는 그러한 낙관주의가 사라지기까지 4년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그 장군의 평온이 가장 큰 혼란에게 자리를 내어 주기까지 4개월이면 충분했다. 드골은 폭력적이고 대규모의 학생폭동들뿐만 아니라 국제노동자운동 역사상 가장 큰 파업을 상대해야만 했다. 1968년은 그래서 프랑스에게 있어 전혀 평온하지 않은 해였을 뿐만 아니라, 제 2차 세계대전 이래 가장 큰 격동의 해였고 오늘날까지도 그런 해로 남아 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만 그해에 크다란 격동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야가 프랑스에만 국한 되었다고는 절대로 비난될 수 없는 저자 2명, 즉 영국인 데이비드 쿠테 그리고 미국인 마아크 퀄란스키는 그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진술한다: „1968년은 제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래 가장 격렬한 해였다. 미국과 서유럽에서, 체코슬로바키아에서까지 연이어 봉기들이 일어났다. 이러한 봉기들을 통해서 전후질서가 문제시되었다."[1] „그 이전까지는 1968년과 같은 해는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러한 사건들이 한 해에 일어나는 일은 앞으로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민족국가들과 문화들이 여전히 나뉘어 있고 서로 매우 다른 한 시기에, (...) 하나의 반항적인 정신이 전세계에 걸쳐 자생적으로 나타났다. 그 이전에도 다른 혁명의 해가 예를 들어 1848년처럼 있었지만, 1968년과 견주어 볼때 그러한 사건들은 유럽에만 국한된 채로 머물렀다..."[2] 이 „뜨거운 해" 이후 40년이 지난 현재 여러 나라에서 이 주제를 놓고 신문과 텔레비젼등에서 보도들이 그야말로 홍수를 이루는 동안, 혁명가들은 1968년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것들을 여기서 면밀하고 빠짐없이 다시 펼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사건들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해내기 위해서.[3] 특히, 그들은 오늘날 매우 널리 확산되어 있고 퀄란스키의 책 표지에도 실려있는 한 생각에 대해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 „역사학자들뿐만 아니라 정치학자들도 - 전세계의 사회학 전문가들이 동의하는 것은, 1968년이전과 1968년이후가 구분될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 우선 말하자면, 우리는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지만,항상 반복해서 듣게 되는 다음 과 같은 이유들과는 확실히 다른 이유들 때문이다: „성해방"이, „여성해방"이, 가족의 권위주의적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가, (대학교와 같은 )특정 제도들의 „민주화"가, 새로운 예술형식들의 발전 등등이 출현했기 때문이라는. 그래서 우리는 이 글에서 ICC의 관점에서 볼때1968년에 발생한 진정한 혁명들을 보여주고자 한다.
상당히 중요한 사건들(예를 들어, 미군이 방어해내긴 했지만 그래도베트남전에서 미국이 결코 승리할 수 없을 것임을 분명하게 만들었던1968년 2월의 베트콩의 구정공세 또는, 같은 해 8월 소련 탱크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이외에도 1968년은 - 코테와 퀄란스키가 강조하듯이 - 이러한 „전세계에서 느껴질 수 있었던 반항정신에 의해 각인되었다." 기존 질서에 대한 이러한 문제제기에서, 그 정도에 있어서도 또 의미에 있어서도 상이한 두가지 구성요소들을 구분지어야 한다.
한편으로 서구권 지역의 거의 모든 나라들을 휩쓴 그리고 심지어 어느 정도는 그 당시 동구권국가들로도 확산된 학생반란이 그것이었다. 다른 한 요소는, 1968년 근본적으로는 오직 한 나라, 즉 프랑스에서만 발전했던 노동자계급의 대대적인 투쟁이었다.
이 첫번째 글에서 우리는 오직 첫번째 요소만 검토할 것인데, 이는 그것이 가장 중요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것은 노동자 투쟁들에 앞서 전개되었을 뿐이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학생반란의 의미를 훨씬 능가하는 역사적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세계의 학생운동
지구상에서 가장 큰 나라, 미국에서 그 당시 1964년부터 그 시기 가장 대대적이고 가장 격렬한 운동들이 전개되었다. 특히 북부 켈리포니아의 버클리 대학교에서 학생들의 항의가 최초로 더 큰 규모로 확대되었다. 학생들이 주요하게 제기한 것은, 대학들에서 자유로운 정치적 발언을 위한 „자유로운 발언 운동(free speech movement)"(언론자유를 위한 운동)의 요구였다.
미군의 잘 무장된 신병모집자들에 대해 항의하는 학생들은 베트남전 반대 그리고 인종분리 반대를 선동하려 했다(이 모든 것은, 마틴 루터 킹이 그의 유명한 연설, „나는 꿈이 있습니다"를 행한, 1963년 8월 28일 워싱턴에서의 „시민권을 위한 행진"이 있은 1년 후에 일어났다). 처음에 당국은, 매우 억압적으로, 특히 경찰력을 통원해서 „씻트-인(sit-ins)", 즉 대학공간들의 평화로운 점거에 대해 대응했고, 이때 800명의 학생들이 체포되었다. 1965년초 대학측은 대학내에서의 경찰들의 활동을 허가했고, 그렇게 해서 이 대학교는 미국내 학생저항운동의 주요중심지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동시에 그당시 로날드 레이건이 „버클리에서의 무질서를 일소하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1965년 예상치 않게 켈리포니아 주지사가 되었다. 운동은 강한 자극을 받았고 그 다음해에 인종분리 반대, 여성권리 옹호 그리고 특히 베트남전쟁 반대 항의시위를 통해서 과격화되었다. 같은 시기에 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특히 학생들이 베트남으로의 징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떼지어 외국으로 도피하는 한편, 그 나라의 대부분은 대학교들은 반전운동의 무대가 되었고, 대도시의 흑인게토들에서는 폭력 봉기들이 불타올랐다(베트남전에 보내진 흑인 젊은이들의 비율은 베트남전에 소집된 국가평균보다 훨씬 높았다).
이러한 항의운동은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그렇게 1967년 말 952명의 학생들이 베트남으로의 소집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다는 이유로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68년 2월 8일 사우스 케롤라이나에서 시민권을 위한 시위 도중에 3명의 학생들이 살해당했다. 그운동은1968년에 가장 강력히 확대되었다. 3월에 흑인 학생들이 워싱턴의 호워드 대학교에서 4일동안 그학교 일대를 점거했다. 1968년 4월 23일에서 30일까지 뉴욕의 콜럼비아대학교가, 국방부와의 합력대한 항의로 그리고 할렘의 흑인 게토 주민들과의 연대를 이유로 점거되었다. 불만과 과격화는 4월 4일 마틴 루터 킹의 암살에 의해 한 층 더 증폭되었는데, 이 사건은 그 나라의 흑인 게토들에서 수많은 폭력충돌들을 불러일으켰다. 콜럼비아대학교의 점거는 미국 학생운동의 최절정점들 중의 하나로서, 다시금 새로운 충돌들을 초래했다.
5월에 동맹휴학중인 12개 대학교 학생들이, 인종주의와 베트남전에 반대해 항의하기 위해 만났다. 그여름에 켈리포니아는 운동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이틀 밤동안 경찰과 버클리대 대학생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고, 그런다음 켈리포니아의 주지사, 로날드 레이건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이러한 새로운 충돌 물결은, 민주당 대회 기간 동안 큰 무력충돌이 발생한, 8월 22일에서 30일사이 시카고에 그 절정에 도달했다.
미국 대학생들의 반란은 같은 시기에 많은 다른 나라들로 확산되었다.
아메리카대륙의 다른 나라들중에서는 브라질과 멕시코의 학생들이 가장 활동적이었다.
1967년 브라질에서는 브라질 정부와 미국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들이 늘 다시 발생했다. 3월 28일 경찰이 학생들에 반대해 투입되어 그들 중에 루이스 에드손이라는 학생이 살해되었고, 중상을 입은 여러 학생들 중에서 한명이 다시 그 며칠후 사망했다. 3월 29일의 루이스 에드손의 장례은 엄청난 시위로 바뀌었다. 무기한 동맹휴업중이던 리오 데 자네로대학에서부터 운동은 상파울로의 대학들로 확산되어 그곳에서는 바리케이트가 세워졌다. 3월 30일과 31일에 다시 시위들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4월 4일에 리오에서 대략 600명이 검거되었다. 엄청난 진압과 대대적인 검거에도 불구하고1968년 10월까지 거의 매일 시위들이 있었다.
몇 달 후 멕시코가 휩쓸렸다.
7월말 멕시코시티에서 학생반란이 일어났다. 그 대응으로써 경찰은 탱크를 투입했다. 수도의 경찰총수는 그 진압을 다음과 같이 정당화했다: „제 19회 올림픽 대회 전야에 우리 정부에 대해 적대적 분위기를 만들어낼 경향이 있는 하나의 파괴적인 운동"에 대응해야만 한다. 진압은 계속되었고 심지어는 더욱 극심해졌다. 9월 18일 대학캠퍼스가 경찰에 의해 점령되었다. 9월 21일 경찰은 수도에서 있었던9건의 충돌 동안 736명을 검거했다. 9월 30일에는 베라크루스대학교가 점거되었다. 10월 2일 마침내 정부는 멕시코시티의 3문화광장에서 10,000명의 학생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도록 했는데, 이때 사복차림의 준군사조직이 투입되었다. „틀라텔롤코의 학살"로서 기억에 새겨진 이 진압시 최소한 200명이 살해당하고 500명 이상이 중상을 입었으며 2000명 이상이 검거되었다. 그렇게 해서 디아스 오르다스 대통령은 10월 12일에 시작된 올림픽대회를 „조용하게" 치를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학생들은 올림픽대회라는 „강제된 휴식" 이 있은 후 몇 달동안 운동을 계속 펼쳤다.
하지만 아메리카대륙만이 학생운동의 이러한 물결에 휩싸인 것은 아니었다. 사실 모든 대륙이 해당되었다.
그렇게 해서 아시아에서는 일본에서 특히 극적인 운동이 출현했다. 1963년이래 미국에 반대하는 그리고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폭력적인 시위들이 발생했는데, 이는 주로 전학련(전국일본학생자치위원회연합)에 의해 주도되었다. 1968년 봄이 끝날 무렵, 그 학생저항운동은 학교들과 대학교들에 도달했다. 투쟁구호 하나는 다음과 같았다: „칸다[도쿄의 대학지구]를 라탱지구로 탈바꿈시키자." 노동자들이 운동에 가담한 후 이 운동은 1968년 10월에 절정에 달했다. 10월 9일에 도쿄, 오사카 그리고 교토에서 경찰과 학생들이 충돌했다 - 80명이 부상당하고 188명이 검거되었다. 반봉기법이 통과되었다- 이에 반대해서 약 800,000명이 거리에서 시위를 했다. 도쿄대학의 점거에 대항해 경찰이 그 대학에 진입한 것에 대응하여 10월 25일 6000명의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했다. 1969년 1월 중순 학생운동의 마지막 요새, 도쿄대학이 무너졌다.
아프리카에서는 특히 세네갈과 튀니지가 두드러졌다.
세네갈에서 학생들은 정부의 우익성향과 프랑스의 신식민주의적 영향력을 탄핵하고 대학들의 구조변경을 요구했다. 1968년 5월 29일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사회주의 인터네셔널'의 회원인 레오폴드 세다르 셍호르에 의해 군부의 도움으로 진압당했다. 그러한 진압시에 다카르 대학교에서 1명이 살해당했고 20명이 부상당했다. 6월 12일 다카르 근교에서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의 시위에서 다시 1명이 살해당했다.
튀니지에서는 그 운동이 1967년에 시작되었다. 6월 5일, 아랍국가들에 대항해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것으로 비난된 미국과 영국에 반대하는 한 시위중에 미문화원이 파괴되었고 영국대사관이 공격당했다. 모하마드 벤 제넷이라는 학생이 검거되어 2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1월 17일에 수 많은 학생들이 베트남전에 반대해서 항의했다. 1968년 3월 15일부터19까지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했고 모하마드 벤 제넷의 석방을 요구했다. 결국 이 운동은 일련의 검거를 통해서 진압되었다.
...유럽에서...
그러나 가장 거대하고 극적인 운동은 유럽에서 전개되었다.
영국에서는 이미 1966년 말에, 부르조아 경제학파들의 중심지인 매우 권위있는 „런던경제학교(LSE, 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들끓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학생들은 당시 로데지아와 남아프리카에서 인종차별주의적 정부들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진 한 인물이 그 학교의 학장으로 지명되는 것에 반대해 항의했다. 항의운동은 그 이후에도 계속 LSE를 엄습했다. 그렇게 해서 예를 들어 1967년 3월에는 징계대책들에 반대해서 5일간의 점거(sit-in)가 있었고, 이에 후속적으로, 미국의 예를 본받아 „자유대학"이 만들어졌다. 12월에 리전트 스트리트 폴리테크닉에서 그리고 홀번 법 및 상업대학에서 점거가 일어났다. 이것은 대학 지도부 내에 학생대표를 둘 것을 요구했다. 5월에 에섹스 대학교가, 호른세이미술대학이, 헐, 브리스톨 및 클레에서 점거당했다: 이에 뒤어어 크로이던, 버어밍햄, 리버풀, 길드포드 에서 그리고 왕립예술대학에서 운동이 일어났다.
가장 극적인 시위들(출신과 견해에 있어서 상이한 많은 사람들이 참가한)은 베트남전에 반대하여, 1967년 3월과 10월에, 1968년 3월과 10월(가장 나중 것이 참가자수에 있어서 가장 대규모였음)에 일어났는데, 이 모두는 경찰과의 폭력적인 충돌을 초래했다. 이때 미국대사관과 그로스베노르 광장 앞에서는 각각 수백명의 부상자와 검거자가 발생했다.
벨기에에서는 학생들이 베트남전에 반대하여 항의하고 교육부문의 개선을 요구하기 위해서1968년 4월부터 여러번 가두로 나섰다. 5월 22일에는 브뤼셀자유대학교가 점거되어 „민중을 위해 열린 대학교"라 선언되었다. 그 일대는, 그학교의 대학위원회가 학생들의 요구들 중 몇몇을 수용하고 나서 6월 말에 다시 정리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1967년부터 여러 대학교들이 점거되었고, 경찰과 학생들 사이에 정기적인 충돌도 있었다. 로마대학교가 1968년 2월에 점거되었다. 경찰이 그 일대를 정리하자 학생들은 보르게제거리에 있는 건축과 건물들로 이동했다. 결국 „그룰랴 계곡의 전투"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폭력적인 충돌들이 일어났다. 동시에노동조합이 허약한 산업부문의 종사자들이 (베니스의 마르쪼토-작업장에서) 자생적으로 저항했다. 이에 대해 노동조합들은 그 산업에서 하루동안의 총파업을 선언했고 많은 종사자들이 이에 참여했다. 결국 5월에 열린 선거들은 이미 봄부터 기울어져가던 그 운동의 종말을 의미했다.
프랑코 지배하의 스페인에서는 1966년부터 노동자들의 파업과 대학교점거의 물결이 전개되었다. 1967년에 그 운동은 한층 강하게 성장했고 1968년까지 지속되었다.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서로에게 연대를 표시했다. 예를 들어 1967년 1월 27일 100,000명의 시위자들이 마드리드에서 있었던 한 시위 참가자들에 대한 잔혹한 진압에 반대하여 항의했는데, 이때 경제학과 건물로 피신한 학생들은 경찰과 6시간동안이나 대치상태에 있었다. 당국은 시위자들에 대해 모든 수단을 총 동원했다. 언론은 통제되었고, 운동 관련자와 지하에서 활동하던 노동조합활동가들이 검거되었다. 1968년 1월 정부는 각 대학교에 „대학교경찰"을 설치했다. 그러나 이것은 학생운동이 베트남전과 프랑코체제에 반대해 계속 저항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해서 마드리드 대학교는 3월에 폐쇄되었다.
유럽의 모든 나라들 중에서 독일에서의 학생운동이 가장 강력했다.
독일에서는 1966년 말, 무엇보다도 사회민주당이 정권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반응으로서, „의회외부의 반대파(APO)" 하나가 출현했다. 그 APO는 특히 학생들의 총회에 기반하고 있었고, 그 회의에서는 저항의 수단과 방법에 관한 열띤 논쟁들이 이루어졌다. 많은 대학교들에서 - 미국의 모범을 따라서 - 토론그룹들이 만들어졌고, „기성의" 부르조아적인 것에 대한 반대극으로서 „비판적인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시기에, 논쟁의 오랜 전통, 즉 공개적인 총회에서의 토론 전통이 일부 부활했다. 많은 이들이 비록 극적인 행동에 대한 충동에 의해 이끌리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래도 이론에 대한, 혁명운동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다시 출현했고 그러한 관심과 더불어 자본주의의 극복을 생각할 용기도 다시 나타났다. 독일에서의 항의운동은 국제적으로 „가장 이론적이며, 토론들에 있어서 가장 깊이 파고들었고 가장 정치적이었던 "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토론들에 병행하여 수많은 항의시위들이 있었다. 베트남전 문제는 확실히, 미국의 군사력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정부를 가진, 그리고 2차대전의 영향이 지속적으로 남아 있는 나라에서 주요 원동력이었다. 1968년 2월 17일과 18일 서베를린에서 국제베트남대회가 개최되었고 그에 뒤어어 12,000명이 참가한 시위가 있었다. 1965년이래 일어난 시위들은 마찬가지로 비상사태법령의 제정을 탄핵했는데, 이 법령으로써 국가는 내부적인 군국주의화와 강화된 진압에 대한 포괄적인 권리들을 갖게 될 터였다. 1966년 대연정에 참가한 SPD는 이러한 기획을 주장하면서, 그들이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유혈진압을 지휘했던 1918-1919의 자신들의 오랜 전통을 이어갔다. 1967년 6월 2일 페르시아의 샤의 베를린방문에 반대해 있었던 한 시위가, 이 피에 굶주린 독재자와 가장 좋은 관계들을 맺고 있던 „민주적인" 독일 국가에 의해 가장 잔혹하게 공격당했다. 그러한 무력적 충돌에서 한 사복경찰에 의해서 베노 오네조르그라는 학생이 등에 총을 맞고 살해되었다. (그 경찰은 이후 사면되었다.) 이러한 살인이 있은 후 시위대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선동되었고, 특히 지도자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했다. 빌트-신문은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이제 젊은 빨갱이들의 테러를 끝장내라!" 1968년 2월 21일 베를린 참의회의 하나에 의해 조직된 „친미 데모"에서 참가자들은 „국민의 적 1호: 루디 두취케"라는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는데, 그는 저항운동의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다. 이 시위 도중에 두취케로 오인된 한 행인은 시위참가자들에 의해 때려죽이겠다는 위협을 받았다. 미국에서 마틴 루터 킹이 암살된 1주일 후인 4월 11일 „푸른 목요일(Gründonnerstag)"에 결국 독일에서도 그러한 선동캠페인은, 스프링어[빌트-신문의 발행사]-출판물에 의해 선동당한 한 젊은 자객이 베를린에서 루디 두취케를 암살을 시도한 후 그 절정에 달했다. 그에 뒤어은 부활절의 소요는 주로 스프링어출판사를 겨냥했다. 몇 주 동안 독일에서의 학생운동은, 그런 다음 프랑스가 눈길을 끌기전까지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게 참조점 역할을 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프랑스 학생반란의 주요 일화는 1968년 3월 22일 파리 서편 근교인 낭트르에서 시작되었다.
그날의 사건들은 그 자체로서는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파리에서 베트남전에 반대해 많은 폭력적인 시위들이 벌어졌던 시기에 파리의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사무실을 겨냥한 암살계획에 한때 관여한 것으로 의심되는 낭트르대학교 소속 극좌파 학생 한명의 검거에 대항해 그의 동료 학생 300명이 한 강의실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들 중 142명이 그 대학의 대학위원회 건물을 그날밤 점거하기로 결정했다. 낭트르 대학교 학생들이 그들의 불만을 표현한 것이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 얼마전에 이미, 남학생들에게는 금지되어 있는 여학생 기숙사에의 출입문제를 놓고 학생들과 경찰들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1967년 3월 16일에는 500명의 기숙사생으로 이뤄진 회합, ARCUN이, 무엇보다도 여학생들이 (21세가 되어야 성년으로 인정되던 그당시에 이미 성년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미성년자로 간주되어야 함을 의미하고 있던 거주규칙의 폐지를 결정했다. 그결과 경찰은 1967년 3월 21일 대학 행정처의 요청에 따라, 그 건물에 남아서 맨 위층에 바리케이트를 쳐놓고 있던 150명의 학생들을 그곳에서 체포하기 위해서 그 여학생기숙사를 포위했다. 그러나 다음날 경찰관들 자신들이 수천명의 학생들에 의해 포위되어 버렸다. 이들은 그래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던 학생들이 어떤 장해도 없이 밖으로 나오게 내버러 두도록 명령받았다. 이 사건 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그들의 분노를 특히 1967년 가을에 공표된 대학교개선을 위한 ‚푸셔-플랜(Fouchet-Plan)'에 반대해 분노를 분출했던 시위들도 성과가 없었다. 그러나 1968년 3월 22일 이후 모든 것은 다르게 진행되었다. 몇 주 사이에 일련의 사건들이 전쟁 후 최대로 학생들을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 노동자 운동 사상 최대의 파업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 대학교의 대학위원회 건물을 점거한 142의 점거자들은 그 건물을 떠나기 전에, 그와 같은 선동을 유지하고 추진하기 위해서 3월 22일 운동(M22)의 성립을 결정했다. 그것은 트로츠키주의 성향의 혁명적 공산주의 연맹(LCR)과 아나키스트들(이 속에 특히 다니엘 콘벤디트가 속했다)이 초기에 속했던 비공식적인 운동의 하나였다. 4월 말 맑스-레닌주의적 공산주의 청년연합(UCJML)의 마오주의자들이 가담했다. 그에 뒤이은 몇 주 안에 총합하여 대략 1,200명의 학생들이 참여했다. 대학교 벽면에는 점 점 더 많은 플래카드와 낙서들이 등장했다: „교수들, 너희들은 낡았고 너희의 문화도 마찬가지이다 "; „삶을 살자!"; „너희의 꿈을 실현하라!" M22는 3월 29일을 „비판적인 대학교"의 날로 선언하고 이와 더불어 독일 학생들의 전철을 밟았다. 총장은 학교를 4월 1일까지 폐쇄하기로 결정했지만, 선동은 학교를 개방한 후 다시 타올랐다. 1000명의 학생들 앞에서 콘벤디트는 선언했다: „우리는 자본주의 착취의 장래 매니져들이 되길 원치 않는다." 대부분의 교수진은 상당히 보수적으로 대응해서, 4월 22일 그들 중에서 „좌파 강사들"을 포함한 18명은 „선동자들이 색출되고 처벌되도록 대책과 수단을" 요구했다. 총장은 일련의 억압대책들을 결정했고, 특히 경찰들에게 대학캠퍼스에의 자유로운 접근과 활동의 자유를 부여했다. 동시에 신문들은 „분노한 자들", „종파들"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에 반대를 부추겼다. 프랑스 „공산주의" 당(PCF)도 같은 방식으로 반응했는데, 4월 26일 중앙위원회 위원 피에르 쥬켕이 낭트르 모임에 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복한 마마보이 소요자들이 노동자의 자식들이 시험치지 못하게 방해한다 " 그는 자신의 연설을 다 끝마치지도 못하고 피신해야만 했다. PCF의 제 2인자 죠르쥬 마르세는 뤼마니테(l'Humanité)에서 다시 다음과 같이 부추겼다: „이러한 거짓 혁명가들은 끈기 있게 폭로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객관적으로 그들은 드골주의자들의 권력과 대자본 독점의 이해관계를 위해 봉사하기 때문이다"
낭트르 캠퍼스에서는 극좌파 학생들과, „볼세비키들을 혼내주기 위해서" 파리에서 원정온 그룹 옥시당(Gruppe Occident) 소속 파시스트들 사이에 점점 더 빈번하게 격투가 벌어졌다. 이러한 상황을 놓고 총장은 5월 2일 그 대학교를 다시 폐쇄하기로 결정했고, 그래서 그 학교는 경찰에 의해 봉쇄되었다. 낭트르학생들은, 대학 폐쇄에 반대하고 콘벤디트를 포함해M22 구성원 8명에 대한 대학위원회의 징계대책에 반대해 항의하기 위해서 그 다음날 소르본느대학 마당에서 집회를 갖기로 결정했다.
그 모임에는 300명만이 참가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열심히 학년말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러한 선동을 끝장내길 바라던 정부는 결정적으로 큰 타격을 가하기로 마음먹고, 경찰로 하여금 라탱지구(파리의 대학가)를 점령하고 소르본느를 포위하도록 명령했다. 경찰이 수백년 이래 처음으로 소르본느대학교에 난입했다. 소르본느로 피신했던 학생들에게는 자유로운 귀가가 약속되었다. 여학생들이 걱정없이 귀가할 수 있었던 반면 남학생들은 캠퍼스를 떠나자마자 경찰차 안에 차곡차곡 채워졌다. 순식간에 수백명의 학생들이 소르본느광장에 모여들어서 경찰관들을 욕했다. 경찰은 그 학생들에게 최루탄을 쏘았다. 그 학생들은 광장로부터 강압적으로 쫓겨났지만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이 경찰관들과 그들의 차량들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충돌은 그날 저녁 4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경찰관 72명이 부상당했고 시위대 400명이 체포되었다. 그 다음날 경찰은 소르본느 일대를 완전히 봉쇄했다. 그와 동시에 학생 4명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단호한 손" 정책은 정부가 바라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했다: 선동을 끝장내기는 커녕 그것은 점점 더 대대적으로 되어갔다. 5월 6일, 월요일부터, 소르본느 주위에 결집한 경찰력과 수적으로 점점 더 확대되어가는 시위들 사이에는 되풀이 하여 충돌이 발생했다. M22, UNFEF(학생노동조합) 그리고 SNESup(대학교원노동조합)가 이러한 시위들을 호소했다. 45,000여명의 학생들이 „소르본느는 학생들에게 속한다", „경찰들은 라탱지구에서 물러나라" 그리고 특히 „우리의 동지들을 석방하라"라는 투쟁구호를 외치며 그러한 시위들에 참가했다. 대학생들에게 점점 더 많은 학생들, 선생들, 노동자들과 실업자들이 동참했다. 5월 7일 시위행렬은 갑자기 센느강을 건너서 샹젤리제를 따라 이동했고 대통령궁 근처까지 나아갔다. 대개는 라 마르세예즈나 장례의 조종이 들리던 그 개선문 아래에서 인터네셔널가가 불리기 시작했다. 몇몇 지방도시들에도 시위들이 번져나갔다. 정부는 자신의 좋은 의지를 증명해 보이고 싶어서 5월 10일 낭트르 대학교를 개방했다. 그날 저녁 만명의 시위대들이 라탱지구에 모여들어서, 소르본느를 봉쇄했던 그 경찰력과 대치했다. 21시에 몇몇 시위대들이 바리케이트를 치기 시작했다(총합하여 대략 60개가 세워졌다). 자정에 3명의 학생대표들(콘벤디트가 포함된)이 파리 대학위원회 총장의 영접을 받았다. 총장은 소르본느의 재개방을 확약했지만, 5월 3일에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에 대해서는 어떤 약속도 할 수 없었다. 오전 2시에 CRS(내전경찰)는 그 이전에 많은 최루탄을 발사한 후 바리케이트를 향해 돌격했다. 그 충돌은 매우 폭력적이었다. 양측에서 수백명이 부상당했다. 시위대중 500명이상이 체포되었다. 라탱지구에서는 많은 주민들이 학생들에게 호의를 보여서, 경찰의 최루탄이나 다른 공격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집으로 피신하게 하거나 거리에 물을 뿌려주었다. 이 모든 사건들, 특히 진압세력의 잔인성에 관한 보도들을 수십만의 사람들이 라디오를 통해 주목했다. 오전 6시에 라탱지구에 „질서가 지배했다". 하지만 그것은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처럼 보였다.
5월 11일 파리와 프랑스 전역에서 분노가 거세졌다. 도처에서 사람들이 자생적으로 시위행렬에 모여들었다. 이러한 시위들에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상이한 출신의 수십만의 시위자들, 특히 젊은 노동자들과 학부모들이 동참했다. 지방에서 많은 대학들이 점거되었고, 도처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사람들은 토론하기 시작했고 진압세력의 소행을 비난했다.
사건이 이렇게 전개되자 그날 저녁 죠르쥬 퐁피두 수상은, 5월 13일부터 경찰력이 라탱지구에서 철수하고 소르본느도 다시 개방될 것이며 체포된 학생들도 석방될 것임을 발표했다.
같은 날, CGT(그때까지는 ‚극좌파 학생들'을 탄핵했었던 )를 포함한 노동조합중앙조직들과 몇몇 경찰노동조합들은, 진압과 정부정책에 항의하기 위해서 5월 13일에 파업과 시위를 하자고 외쳤다.
5월 13일 전국의 모든 도시들에서 제 2차 세계대전이래 최대규모의 시위들이 일어났다. 노동자계급은 학생들 곁에서 대대적으로 참가했다. 가장 널리 확산된 구호들 중의 하나가, „10년, 그것으로 충분하다"(드골이 다시 권력을 잡게된 1958년 5월 13일과 관련지어서)였다. 시위 끝에 거의 모든 대학교들이 수많은 학생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젊은 노동자들에 의해서 점거되었다. 도처에서 사람들이 발언했다. 토론은 대학 관련 문제들이나 진압에 관련된 것만에 한정되지는 않았다. 노동조건들, 착취, 사회의 미래 등등 가능한 모든 사회문제들을 다루기 시작했다.
5월 14일에 토론은 많은 직장에서 계속 진행되었다. 모든 열광과 자신들의 강력함에 대한 느낌이 표면화된 폭력적인 시위들이 전날밤에 있은 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일을 손에 잡는 것은 어려웠다. 낭트에서 쉬드-아비아시옹(Sud-Aviation)의 노동자들이 자생적인 파업에 들어갔고 그 작업장을 점거하기로 결정했다. 특히 젊은 노동자들이 운동을 추진했다. 노동자계급이 다시 무대 위에 등장했다.
1960년대 학생운동의 의미
당연히 이 운동 전체의 특징은 특히 베트남전쟁 반대에 있었다. 그러나 하노이나 모스크바 정권과 연계된 스탈린주의 당들이 그 이전 1950년대 초 한국전쟁동안 있었던 반전운동에서처럼 운동의 주도권을 쥘 것으로 애초에 생각되었던 반면에,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이러한 당들은 사실상 어떤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했고, 아주 빈번히 그 운동에 전적으로 대립했다.[4] 이점이 1960년대 말 학생운동의 특징들 중의 하나였고, 이는 그러한 운동들이 그후 가지게 될 근본적인 의미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의미를 우리는 지금 제시하려 시도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당연히 학생들을 움직인 그 당시 테마들을 반드시 상기해야 한다.
1960년대 미국 학생반란의 테마들
미국의 베트남전에 반대한 저항이, 서방 세계 모든 나라들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널리 확산된 동인이었다면, 학생반란이 지구상의 가장 중요한 나라들에서 일어난 것이 확실히 우연은 전혀 아니다. 미국의 젊은 세대는 전쟁문제와 직접적으로 대면했는데, 왜냐하면 젊은이들이 차례로 징집되어 „자유세계"를 수호하기 위해서 전쟁터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수만명의 미국 젊은이들이 그들 정부의 정책을 위해 목숨을 잃었고, 수십만명이 부상당하고 불구가 되어 베트남에서 돌아왔으며, 수백만명은 그들이 그 나라에서 겪은 것에 의해 평생동안 후유증을 앓았다. 그들이 현지에서 경험한 공포를 제외하더라도, 많은 이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직면했다: 우리가 베트남에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가? 공식적인 설명에 따르자면 그들은 ‚민주주의', ‚자유 세계' 그리고 ‚문명'을 수호하기 위해서 그곳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현지에서 경험한 것은 공식적인 정당화와는 완전히 모순되었다: 그들이 소위 방어해야할 정권, 즉 사이공의 정부는 ‚민주적'이지도 ‚문명적'이지도 않았다. 그것은 군사독재로서 부정부패가 극에 달해 있었다. 현지에서 병사들은, 무장하지 않은 가난한 농민들, 여자들 그리고 아이들과 노인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살해해야만 하도록, 자신들이 마치 야만인처럼 행동해야만 되도록 요구되는 그때에, 자신들이 ‚문명'을 수호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현지의 병사들뿐만이 아니라 전체 미국 젊은이들의 점점 더 많은 수가 그 전쟁의 경악스러움에 진저리를 쳤다. 단지 젊은 남자들이 전쟁터에 보내질 것을 두려워하고 젊은 여자들이 자신들의 친구들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은 귀환하는 ‚참전군인들'로부터 또는 그냥 테레비젼을 통해서, 그곳을 지배하고 있는 야만을 점점 더 많이 알게 되었다.[5] 미국 정부가 증거로서 제시하는 ‚문명과 민주주의의 수호'라는 공식적인 말과 베트남에서 그것의 실제 행동사이의 엄청난 모순은, 미국-부르조아지의 권위와 전통적인 가치들에 반대한 반란을 초래한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였다.[6] 이러한 반란은 첫 번째 시기에 히피운동을 함께 결과시켰는데, 이것은 비폭력적이고 평화주의적 운동의 일종으로서 „플라워 파워(flower power)"(꽃의 힘)을 주장했다. 그 슬로건들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았다: „메이크 러브, 낫 워(make love, not war)"(사랑을 해, 전쟁을 하지 말고).학생들이 규모 버클리대학교에서, 즉 당시 히피들의 메카였던 샌프란시스코 근교에서 최초로 더 대규모로 운집한 것은 아마도 전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운집의 테마들과 특히 수단은 여전히 이러한 히피운동을 닮은 „점거(Sit-in)"였는데, 이는 대학들에서 정치적인 선동을 위한 „자유로운 발언(free speech)"(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기 위해서, 또한 특히 흑인들의 ‚민권'을 지지하고, 대학내에서 이뤄지는 모병캠페인을 탄핵하기 위한 비폭력적인 방법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다른 나라들, 특히 1968년 프랑스에서와 같이 버클리에서의 진압은 그 운동의 ‚과격화'의 중요한 한 요소였다. 1967년부터, 애비 호프만(Abbie Hoffman)과, 비폭력운동에 잠시 함께 했던 제리 루빈(Jerry Rubin)에 의해 국제청년당(Youth International Party)이 창립된 이후, 그 반란운동은 ‚자본주의'에 대항한 일종의 ‚혁명적인' 전망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운동의 새로운 ‚영웅들'은 더 이상 밥 딜런이나 조안 배스가 아니라, (루빈이 1964년 하바나에서 만났던) 체 게바라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 운동의 이데올로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뒤죽박죽이었다. 여기에는 (자유숭배, 특히 섹스의 자유나 마약소비의 자유와 같은) 아나키스트적인 면모들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쿠바와 알바니아가 모범으로서 찬양되는) 스탈린주의적인 면도 있었다. 행동들은 아나키스트들의 그것 - 조롱과 도발 - 에 흡사했다. 그렇게 호프만-루빈 공동팀의 초기의 극적 행동들 중의 하나는, 위조지폐 뭉치들을 뉴욕주식거래소에 배포하는 것이었는데, 그에 이어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 지폐들을 줍기 위해 사납게 몰려들었다. 1968년 여름 민주당 대회동안 그들은, 한편으로 경찰과의 무장된 충돌을 준비하는 동시에, 페가수스라는 이름의 돼지를 대통령후보로 제안했다.[7] 요약해서, 1960년대 미국에서 확산된 저항운동의 주요특징들을 말하자면, 그것은 베트남전에 반대했을 뿐만아니라 인종차별에도 반대했으며, 성별에 따른 불평등한 대우에 반대하고 미국의 전통적인 도덕과 가치들에 반대했다. 참여자들 대부분이 (마치 자신들이 반항하는 서민 자녀들인양 행동할 때) 확인했듯이, 이러한 운동은 결코 노동자계급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들의 ‚이론가'인 철학교수 헤르베르트 마르쿠제가, 노동자계급은 ‚흡수 통합'되어 버렸다고,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항한 혁명적 세력은 다른 사회계층들, 예를 들어 인종차별 희생자들인 흑인들이나 제 3세계의 농민들이나 반항하는 지식인들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확실히 결코 우연은 아니다.
... 그리고 다른 나라들에서
서양의 대부분의 다른 나라들에서 1960년대의 학생운동들은 미국에서와 흡사했다: 미국이 베트남에 관여하는 것의 비난, 권위에 대해, 특히 대학의 권위에 대한, 권위주의 일반에 대한, 전통적인 도덕에 대한, 특히 성도덕에 대한 반란. 이것이 바로, 권위주의의 상징이었던 스탈린주의 당들이, 비록 미국의 베트남 개입을 강력히 탄핵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란자들 사이에서 전혀 반향을 얻을 수 없었던 이유였다. 그런데 베트남에서 미국의 투쟁상대, 즉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것으로서 행동했던 군사 세력은 전적으로 소련블록에 의해 지원되었다. 소련의 명성이 1956년 헝가리 봉기의 진압으로 매우 크게 손상당한 것은 사실이고, 브레지네프의 낡은 기관원들이 어떤 원대한 꿈도 질식시킨 것은 사실이다. 1960년대의 반란자들은 호치민(오랜 기관원였지만 훨씬 더 모범적이었고 ‚영웅적인' 것처럼 보였던)의 포스터를 걸어놓길 더 좋아했고, 체게바라(마찬가지로 스탈린주의 당의 당원었지만 ‚이국적'으로 여겨졌다)나 안젤라 데이비스(미국의 스탈린주의 당의 당원이었지만 흑인인데다가 여성이라는 이중의 장점을 갖고 있었고 체게바라와 마찬가지로 ‚멋진' 외모의 소유자였다)의 낭만적인 사진을 걸어두길 가장 좋아했다.
베트남전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자유스러워' 보이는 이러한 요소는 마찬가지로 독일에도 나타났다. 운동의 가장 유명한 인물, 루디 두취케는 구DDR출신으로서, 그곳에서 그는 젊은 나이에 벌써 헝가리봉기의 진압에 항거했었다. 그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은 청년 ‚맑스'와 프랑크푸르트학파(마르쿠제가 속했던) 그리고 상황주의 인터네셔널(그가1962년에 그것의 베를린 지부를세웠던 바로 그 „전복적인 행동(Subversive Aktion)" 그룹의 기반이었던)이었다.[8]
1965년이래 독일 대학들에서 전개된 토론 과정 동안, „반권위주의적인 진정한 맑스주의"에 대한 모색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당시 평의회주의운동의 많은 텍스트들이 다시 진열되었다.
프랑스에서 1968년 전개된 학생운동의 테마들과 요구들도 근본적으로는 동일했다. 그러한 전개 과정에서, 베트남전에 반대한 저항은 상황주의적이거나 아나키스트적으로 영감을 받은 (또는 초현실주의적이기까지 한) 그리고 더 빈번하게 담벼락 위에서 읽을 수 있었던(„벽도 할말을 갖고 있다") 일련의 슬로건들에 의해 뒷자리로 물러나게 되었다. 아나키스트적인 실행은 특히 다음과 같은 슬로건들에서 뚜렷했다:
„파괴의 열정은 일종의 창조적인 희열이다"(바쿠닌)
„금지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자유는 모든 범죄들을 포함하는 범죄이다"
„선거는 어리석은 자들을 위한 함정이다"
„불손하고 파렴치하다는 것은 새로운 혁명 무기이다"
이것들은 „성혁명(sexual revolution)"을 호소하는 요구들로써 보완되었다:
„아래 위로 포개 누워서 서로 사랑하라!"
„너희들의 바지 지프를 여는 그만큼 자주 너희들의 두뇌도 열어라 "
„나는 섹스를 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혁명을 만들고 싶다. 혁명을 만들면 만들 수록 그만 큼 더 섹스를 하고 싶다."
상황주의(Situationism)의 영향은 다음과 같이 반영되었다:
„소비사회 타도!"
„볼거리의 상품사회 타도!"
„소외를 타도하자!"
„절대로 일하지 말라!"
„각자의 소망을 현실로 여기자, 왜냐하면 나는 나의 소망들의 현실성을 믿으니까 "
„우리는 굶어죽지않을 안전함이 지루해서 죽을 위험과 맞바꿔지는 그런 세상은 원하지 않는다."
„지루함은 반혁명적이다."
„우리는 정체됨이 없이 살고 무제한으로 즐기고 싶다"
„현실적이 되자, 비현실적인 것을 요구하자!"
그 밖에 세대 문제(미국과 독일에서 크게 다가왔던)도 상이한 슬로건들(종종 매우 유해한 방식으로)에 나타났다:
„달려라 동지, 낡은 세계가 네 뒤에 있다!"
„젊은 이들은 성교를 하고, 늙은 이들은 음란한 몸짓을 한다."
바리케이트가 세워졌던 68년 5월 프랑스에서는 다음과 같은 슬로건들을 들을 수 있었다:
„바리케이트는 거리들을 차단하지만 길을 연다."
„모든 생각의 결론은, CRS[내전경찰], 네 아가리 안에 포석(paving stone)을 쳐넣는 것이다. "
„ 포석을 겉어내라, 그 아래에 해변이 놓여 있다."
이시기에 발견될 수 있는 가장 큰 혼란은, 다음의 두가지 슬로건들에서 표현된다:
„혁명적인 사고란 없다. 오직 혁명적인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할말이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1960년대 학생운동의 계급적 본질
이러한 슬로건들이 다른 나라들에서 유포된 대부분의 슬로건들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1960년대의 학생운동은 비록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나 스페인 또는 세네갈과 같은) 여러 나라들에서 노동자투쟁으로의 가교를 만드려는 의지가 있었을 지라도, 노동자계급의 본질을 반영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밖에 이러한 접근방식은, 잘못 소화된 맑스주의 고전 텍스트들의 영웅이었던 육체노동자(blue-collar worker)로서의 노동자에 대한 어느 정도의 매혹과 뒤섞인, 노동자계급에 대한 오만을 반영했다.
그 핵심에 있어서 1960년대 학생운동은 쁘띠부르조아적인 성격을 띠었다. 아나키스트적인 표현형 이외에 가장 분명한 측면들 중의 하나는 „삶을 즉시 변혁하려는" 의지였다. 조급함과 그러한 „모든 것을 당장에"는 역사에서 어떤 미래도 없는 쁘띠부르조아와 같은 사회계층의 특징들이다.
이 운동 지도부의 ‚혁명적인' 과격주의 그리고 운동의 몇몇 일부들에 의한 폭력미화는 마찬가지로 그것의 쁘띠부르조아적인 본질을 반영한다. 1968년의 학생들의 ‚혁명적' 관심사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옳았지만, 그것들은 제3-세계-전망(게바라주의와 마오주의)으로부터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 하나에 의해, 그리고 파시즘에 의해 강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 운동은, 혁명을 초래하는 노동자계급운동의 실제적인 발전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채, 혁명에 관한 낭만적인 관점을 갖고 있었다. 스스로를 ‚혁명적이라고' 여겼던 프랑스의 학생들은68년 5월 운동이 이미 혁명이었다고 믿었고, 날마다 세워졌던 바리케이트들은 1848년 그리고 1871년 코뮨의 바리케이트의 유산으로서 묘사되었다.
1960년대말의 학생운동의 특징들 중 하나는, „세대간의 갈등", 즉 새로운 세대와 그들에 의해 여러가지로 비난받는 부모세대들 사이에 존재한 매우 큰 간극이었다. 특히 부모세대들은, 제 1차 세계대전에 의해 초래된 가난과 굶주림을 극복하기 위해 힘들게 일해야 했다는 이유로, 오로지 물질적인 번영에만 신경을 썼다고 비난당했다. 그래서 „소비사회"에 관한 환상들과 „절대로 일하지 말라!"와 같은 슬로건들이 그렇게 성공을 거두었다. 반혁명을 철저히 경험한 세대의 자녀들로서 1960년대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부모들이 자본주의의 요구들에 무릎을 꿇고 순응했다고 비난했다. 반면 많은 부모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것보다는 더 나은 경제적 형편을 자녀들에게 가능하게 하려고 자신들이 치를 수 밖에 없었던 그 희생에 대해 자녀들이 경멸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이기도 어려워했다.
그렇지만 1960년대 학생반란들에게는 진정한 경제적인 결정요인이 있었다. 오늘의 상황과 비교할 때, 그당시에는 대학졸업 후 실업으로 인한 또는 불안정한 노동조건들으로 인한 더 큰 위협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당시 젊은 대학생들의 주요한 근심은, 자신들은 그 이전 세대의 대학졸업자들과 같은 동일한 사회적인 지위상승을 더 이상 이룰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1968년 세대는, 그 당시의 사회학자들에 의해 상세하게 연구된, „사무관리직 인력들의 프롤레타리아화" 현상에 어느 정도 혹독하게 직면한 최초의 세대였다. 이현상은, 학생수가 현저히 늘어나자 마자(그래서 예를 들어 독일의 학생수는 1964년에서 1974년 사이에 330,000명에서 1백 10만명으로 증가됨), 위기가 공공연하게 드러나기 그 몇년전 부터 이미 확산되었었다. 이러한 증가는 경제의 필요에 부응한 것이긴 했지만 또한 그 부모들이자신들의 경우보다는 더 나은 경제적 사회적 처지를 자녀들에게 부여하려는 의지와 능력에도 부합했다.
특히 학생수의 대규모 증가는 불편의 증대를 초래했었다. 이는, 대학들의 구조들과 관행들이 단지 엘리트들만이 대학을 다닐 수 있었고 강한 권위주의적 구조들이 지배했던 시대의 소산으로서 그대로 존속했기 때문이었다.
1964년에 시작된 학생운동이 자본주의의 „번영" 시대에 전개되었던 반면, 경제적 상황이 벌써 매우 심각하게 악화되었던 - 그래서 학생들의 불편도 더 커졌던 -
1967년의 상황은 이미 달라 보였다. 이것이 바로, 그 운동이 1968년에 그 절정을 경험하게 되는 이유들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왜 1968년 5월에 노동자계급이 무대 위에 등장하여 운동을 이끌어나가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이점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번 글에서 논할 것이다.
[1] David Caute, 1968 dans le monde, Paris, Laffont, 1988, 번역원본: Sixty-Eight: The Year of the Barricades, London, Hamilton, 1988. 미국에서도 출간됨: „The Year of the Barricades - A Journey through 1968", New Yorker, Harper & Row, 1988
[2] Mark Kurlansky, 1968: l'année qui ébranla le monde, Paris, Press De La Cite, 2005, 번역원본 - 1968 :The Year That Rocked the World. New York: Ballantine Books, 2004.
[3] 우리의 몇몇 지역 출판물이 각 나라들에서의 사건들에 대한 글을 이미 실었거나 실을 예정이다.
[4] 학생운동은 1968년에 스탈린주의 체제도 엄습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그것은 스탈린주의 당의 일부에 의해 선전된 „프라하의 봄"의 일부였다. 체제를 문제삼은 하나의 운동으로서 간주될 수는 없다. 폴란드에서 그 운동은 다른 성격을 띠었다. 3월 8일 러시아에 적대적으로 간주된 공연 하나가 금지된 것에 항의하는 학생시위가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다. 3월에 긴장이 더 증폭되었다. 점점 더 많은 대학교들이 학생들에 의해 점거되었고, 점점 더 많은 시위가 있었다. 이러한 시위들은 „파르티잔파"의 지도자, 내무부장관 모자르장군의 지휘아래 잔인하게 진압당했고, 동시에 당내에서는 유태인들이 ‚시오니즘비난'을 이유로 쫒겨났다.
[5] 베트남전 동안 미국언론은 군사당국에 굴종하지 않았다. 이러한 ‚실수'를 미국정부는 1991년과 2003년의 이라크전 동안에는 더이상 저지르지 않았다.
[6] 그러한 현상은 제 2차 세계대전 후에는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병사들은, 특히 1944년 노르망디에 상륙했던 이들은 마찬가지로 지옥을 경험했지만, 거의 모든 병사들과 국민들 모두는 나치-정권의 야만성을 보고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7] 20세기 초에 프랑스 아나키스트들은 의회선거에 후보로 당나귀를 지명했다.
[8] 상황주의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종합적인 서술과 관련해서는 우리의 글: „귀 드보르 - 상황주의 인터네셔널의 두번째 죽음", revue internationale, 80호 참조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