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정치 영역에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키라고 강요당한다.
노딜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의 '반란연합'은 보리스 존슨(영국 총리, 보수당 대표)의 의회 정회 ‘쿠데타’를 규탄했다. 그들은 9월 10일부터 10월 14일까지 5주간 의회 정회에 반대하는 행진과 집회를 조직하고, 보리스가 의회 관습과 절차를 존중하도록 강제하기 위해 힘을 합쳤다.
나이절 패러지(브렉시트당 대표)에서 스파이크(Spiked, 영국 온라인 잡지)에 이르기까지 브렉시트 강경 찬성파들은, 오히려 반대파가 2016년 6월 국민투표에서 확인된 '국민의 의지'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모욕한다며 '잔류불평자들(Remoaners)'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EU 관료주의의 간섭에 맞선 영국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주의’와 ‘국민’이라는 바로 그 용어를 의미 없게 만드는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착취계급은 막대한 부를 손에 쥐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와 정치 권력은 언론, TV 그리고 주류 소셜 미디어와 같은 이데올로기 지배 수단과 마찬가지로 착취계급의 특권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 사회에서 ‘국민’은 이러한 계급 적대를 숨기는 데 사용되는 용어이고, ‘민주주의’는 지배계급의 권력독점을 감추는 역할을 한다.
반면, 피착취계급은 일반적으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자신들의 실질 요구를 관철하기 힘들다. 그동안 착취에 맞서 피착취계급을 조직화하려는 노력은 무력으로 진압되거나 회유와 협박으로 길들어 결국 국가에 편입되었다. 그것은 지난 100년 이상 동안 노동조합과 ‘노동자’ 정당(노동당 등)의 역사이기도 하다.
물론, 자본주의 초기와는 달리 노동자들은 대통령/의회/지방선거와 국민투표에서 자유롭게 투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극 권장 받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계급이 아닌 고립된 개인들의 집합으로 원자화된 ‘시민’으로서만 유권자 권리를 누릴 수 있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시민으로서 부르주아 선거에서 투표하는 바로 그 행위는 계급으로서 노동자계급의 부재(不在)에 따른 무력감의 표현이다.
또한, 선거와 국민투표에서의 이슈, 의회에서의 논쟁 주제는 우리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독점 아래 살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브렉시트 찬성 또는 반대? 이 토론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영국’이라는 국가 이익이 우리 이익이라고 가정해야 한다. 그러나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으며, 국가는 국민과 마찬가지로 타협할 수 없는 계급 적대를 감추는 거짓 공동체일 뿐이다. 게다가 브렉시트 분쟁에서 어떠한 선택도 세계 경제 위기가 초래한 생활 수준 하락에서 노동자들을 보호하지 못한다. 브렉시트가 진행된다면, 10월 31일 이전에 EU 거주자들이 그들의 ‘정착지위(settled status)’를 정리해야 한다는 최근의 규칙처럼 불법이든 합법이든 이주노동자들을 향한 야만스러운 공격이 벌어질 것이다. 그것은 미래의 ‘윈드러쉬(Windrush) 스캔들’(주1)에 대한 보증과 같다. 그러나 이른바 노동자 권리를 옹호한다는 EU는, 이미 노동자계급의 다른 부분에 엄격한 긴축을 강요할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리스의 경우가 여기서 가장 웅변적이다(그리고 EU가 요구하는 긴축을 실행한 것은 ‘좌파’ 시리자 정부였다).
민주주의라는 종교
오늘날 민주주의와 국가는 칼 맑스가 처음으로 ‘인민의 아편’이라는 용어를 만든 시대의 종교처럼 되었다. 민주주의와 국가 이익은 부르주아 사회의 ‘영적(靈的) 향기’이며, “이 세계의 도덕적 재가(載可)이며, 이 세계의 장엄한 보충이요, 이 세계의 일반적 위안 근거이자 정당화 근거이다.”(주2) 다시 말해, 이 사회의 궁극적인 실체인 노동과 전쟁에서 요구하는 모든 희생에 대한 정당성을 민주주의와 국가를 가정(假定)하지 않고서는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 ‘향기’는 이제 자본주의 사회 자체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의회도 심하게 부패했기 때문에 매우 나쁜 악취가 되었다. 맑스와 엥겔스 시대, 즉 자본주의 상승기에는 노동자정당의 부르주아 의회 참가가 적합한 활동이었다. 왜냐하면, 의회는 지배계급 내부의 진보와 반동이 실제로 대립하는 장이었고, 노동자들을 대신하여 지속적인 향상을 위해 싸울 조건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노동자 대표의 부패 위험성을 상시로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단지 부르주아 선거에서 노동자정당에 표를 모으면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의회 백치증’의 주요 수단이 되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쇠퇴기에, 지배계급 모든 분파는 똑같이 반동적이며, 생활 수준의 지속적인 향상의 여지는 전혀 없다. 그리고 전체로서의 전체주의 국가의 성장에 직면하여 의회 절차의 깊은 무기력은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 특히 현재 브렉시트 판토마임에서는 더욱 그렇다.
의회의 막다른 골목과 포퓰리즘 부상은, ‘엘리트’를 향한 가짜 비판과 함께, 많은 사람에게, 일을 해내는 사람, 즉 ‘독재자’의 통치 방식인 ‘비자유 민주주의’를 갖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자계급에게 여전히 또 다른 잘못된 선택이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대안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운동은 다른 방법을 보여준다. 1871년 파리 코뮨은 이미 의회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서, “3년에서 6년에 한 번 지배계급의 어떤 구성원이 의회에서 국민을 잘못 대변하는지를 결정하는 대신”(주3) 노동자 집단은 별도 집회에서 스스로를 조직하기 시작했는데, 그 집회(총회)의 대표들은 선출되고 위임받았을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소환되었다. 1905년과 1917년 러시아에서 발생한 소비에트나 노동자평의회는 공장과 다른 작업장의 노동자들 집회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이러한 원칙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켜서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윤곽을 1871년 보다 더욱 뚜렷하게 만들었다.
1917~21년 전 세계 혁명운동 물결 속에서 노동자평의회는 의회(그리고 노동조합) 기구에 직접 반대하여 생겨났다. 그리고 부르주아지는 이것을 매우 잘 이해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세계혁명의 운명이 결정될 독일에서, 우선 평의회를 합병하고, 평의회를 의회와 지방정부의 무력한 부속물로 만든 다음, 1919년 베를린에서처럼 평의회의 실질 권력을 회복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격렬하게 분쇄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혁명, 피착취계급 해방에 치명적인 적(敵)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목표는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인민’ 아니 오히려 통일된 인류를 이야기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진정한 인간 공동체에서는 그리스인들이 ‘크라토스(kratos)’라고 부르는 힘, 지배, 통치가 어떤 종류의 국가나 정치 권력에도 필요치 않을 것이다.
Amos
2019년 9월 7일
국제코뮤니스트흐름
<주>
1. 윈드러쉬 스캔들이란, 2차 대전 이후 국가 재건을 위한 영국 정부의 장려로 대거 이주해 온 카리브해 이민자들의 후손, '윈드러쉬 세대'를 불법 이주자로 분류하는 행정 착오가 발생, 이들이 각종 복지 혜택에서 배제되고 추방 위기에까지 몰려 논란이 된 사건이다. 이로 인해 2018년 4월 앰버 러드 영국 내무장관이 사임했다.
2. 맑스, 「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 서설」, 1843
3. 맑스, 「프랑스 내전」, 1871
Source : ICC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731/deal-or-no-deal-capitalist-democracy-frau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