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C의 분파로서의 역할에 관한 보고서
국제평론(International Review), 2016년 1월 26일
(보고서 1부 노동자계급의 역사에서 분파 개념)
우리가 “ICC창립 40년 이후 – 우리 활동의 대차 대조표는 무엇이며 전망은 무엇인가?“라는 이전의 기사에서 말했듯이, 2015년 ICC 제 21차 대회는 ICC의 “분파”로서의 역할에 관한 보고서를 채택했다. 이 보고서는 1,2부로 나눠지는데, 그 1부는 분파 개념의 역사적 맥락과 그것의 환기를 제공한다. 2부는 우리 조직이 이러한 측면에서 그 책무를 어떻게 이행해오고 있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분석이다. 아래에 우리는 그 보고서의 첫 번째 부분을 공개하는데, 이는 ICC가 직면하는 특수한 문제들을 넘어서는 전반적인 관심사에 관한 것이다.
제 21차 국제 대회는 ICC의 40년 간의 존재에 관한 비판적인 평가를 그 관심의 중심에 놓을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대차 대조표는,
- 첫째, ICC가 해온 일반적인 분석과
- 둘째, ICC가 미래의 당 건설에 있어서 자체의 역할을 설정하는 방식에 관련되어 있다.
이 두 번째 질문에 관한 해답이 분명하게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역사의 현 시기, 즉 계급 대립의 노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가질 조직인 혁명당의 출현을 위한 조건들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시기에 ICC가 떠맡는 역할이 잘 정의되어 있다는 점이다 :
„이 유기체의 역사, 즉 당의 역사를 탐구하거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유기체를 계급의 운동이 겪어오는 여러 단계들, 계급에 부과된 문제들, 그리고 매 순간 이러한 문제들을 의식하고 그것들에 적절히 대응하며 경험에서 교훈을 끌어내고 그 교훈을 미래의 투쟁을 향한 발판으로 활용하려는 그것의 노력들의 일반적인 맥락 안에 놓고 살펴 보아야 한다. 정치 당들은 계급의 발전에 주요한 요소인 한편, 그것들은 동시에 계급의 역사에서 주어진 순간에 계급의 진정한 상태의 표현이다.“
„그 역사 전체를 통틀어 노동자계급은 프롤레타리아 당들을 불구로 만들고 부패시키며 그 정당들의 진정한 기능을 왜곡하는 경향을 가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무게에 노출되어 왔다. 이러한 경향에 대응하여 코뮤니즘의 입장들을 가다듬고 명확하게 좀 더 정밀하게 만들 목표를 갖고 혁명 분파들이 출현했다. 제 3 인터네셔널로부터 출현한 코뮤니스트좌파(the communist left)는 확실히 이러한 경우였다. 그래서 당 문제를 이해하려면 국제 코뮤니스트좌파 전체의 경험과 성과들을 이해하고 동화하는 것이 반드시 요구된다. “
„그런데, 그 시기가 발전하는 계급 투쟁의 시기인가 아니면 패배나 후퇴의 시기인가에 따라서 혁명가 조직의 질적인 차이를 분명히 밝힌 점에서 특별한 공헌을 한 것은 코뮤니스트좌파의 이탈리아 분파였다. 이 이탈리아 분파는 이러한 두 시기들의 각각에서 혁명 조직은 어떤 형태를 띠는지를 보여주었다. 첫 번째 경우에는 계급 투쟁에 어떤 중개도 없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갖게 될 조직의 형태, 즉 당의 형태를 띤다. 두 번째 경우에는 계급의 직접적인 삶에 훨씬 더 미약한 영향력을 갖는 수적으로 제한된 조직의 형태를 띤다. 이탈리아 분파는 이러한 두 번째 유형의 조직에게 ‘분파(fraction)’이라는 특별한 명칭을 부여했다. 이때 분파는 계급 투쟁의 발전의 두 시기들, 즉 당(the party)의 존재의 두 순간들 사이에서 존재하면서 과거의 당과 미래의 당을 연결하는 고리(link), 즉 유기적인 교량(bridge)을 구성한다.“
(영문판 국제평론 35호,‘당 그리고 당의 계급과의 관계에 관하여’제 9항 )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질문들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 노동자 운동의 역사상 상이한 순간들에서 이러한 분파 개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어떤 지점까지 ICC는 “분파”로 간주될 수 있는가?
- 분파의 임무들 중에서 어떤 것은 ICC에 적용되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은가?
- 어떤 특별한 임무들을 ICC가 가지며, 혁명 조직의 임무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분파의 임무에 속하지 않는가?
이 보고서의 1부에서 우리는 우리의 성찰에 역사적인 윤곽을 세우기 위해 이 4가지 질문들 중에서 그 첫 번째를 주로 다룰 것이다. 그럼으로써 보고서 2부에서 더 잘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 2부에서는 우리는 앞에서 이미 언급된 핵심적인 질문, 즉 ICC가 미래의 당을 준비하는데 그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과 관련하여 어떤 대차 대조표를 그려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해답을 제안할 것이다.
노동자 운동 역사의 상이한 순간들에서 분파 의 이 개념을 검토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세가지 시기를 구분한다:
- 노동자 운동 초기, 코뮤니스트동맹(Communist League)과 제 1인터네셔널로도 알려진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men’ Association, IWA) 의 시기;
- 성숙기, 제 2 인터네셔널의 시기;
- “전쟁과 혁명의 시기”(코뮤니스트인터네셔널의 표현에 따르면)
그러나, 먼저 프롤레타리아의 당들의 역사에 대한 아주 짤막한 환기를 포함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분파의 문제를 다루려면 우리는 어떨 수 없이 당의 문제를 제기할 수 밖에 없는데, 이때 당은 분파의 출발점과 도착점을 이루기 때문이다.
1) 노동자 운동 역사에서 당
당 개념은 노동자운동의 경험(코뮤니스트동맹, IWA, 제 2인터네셔널의 당들, 코뮤니스트당들)을 통해 이론적 실천적으로 점진적으로 세공되었다.
불법조직이었던 코뮤니스트동맹은 여전히 종파들의 시기에 속했다:
“근대 자본주의가 동틀 무렵인 19세기의 전반부에 는 여전히 그 형성 단계에 있던 노동자 계급은 지역적이고 고립적인 투쟁들을 벌렸고 교조적인 학파들, 종파들 그리고 연맹들을 산출할 수 없었다. 코뮤니스트동맹은 이 시기의 가장 선진적인 표현있었던 한편 그와 동시에 그것의 선언문은 ‘모든 나라의 프롤레타리아들이여 단결하라’라는 구호와 함께 앞으로 다가올 시기를 예고했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정치당의 본질과 기능’, Internationalisme 38호, 1948년 10월 )
IWA의 임무는 정확히 바로, 종파들을 넘어서서 유럽 노동자들의 광범위한 결집 그리고 그들의 의식을 제압하는 많은 혼란과 관련한 규명 작업을 가능케 하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 이질적인 구성(노동조합, 협동조합, 선동그룹등등 ) 때문에 그것은 이후 제 2인터네셔널의 내부에서 당이라는 그 단어가 얻게 된 근대적인 의미의 그런 당은 아니었다.
“제 1 인터네셔널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유럽 주요 나라들에서 사회적 정치적 투쟁의 무대 위에 효과적으로 등장한 것에 해당한다. 그래서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모든 조직화된 역량들을, 계급의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경향들을 함께 결집시켰다. 제 1 인터네셔널은 경제적, 교육적, 정치적 및 이론적인 노동자투쟁들의 모든 흐름들과 모든 우발적 측면들 이 두 가지 모두를 함께 모이게 만들었다. 그것은 그 모든 다양성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단일 조직의 최고점이었다.
제 2 인터네셔널은 임금노동의 경제투쟁과 사회적 정치적 투쟁 사이의 분화의 시기를 표시했다. 자본주의사회가 완전히 꽃핀 이시기에 제 2 인터네셔널은 개혁투쟁의 조직이자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확인을 위한 정치적 정복의 조직이었던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역사적 혁명적 사명의 이론적 기초들을 명확히하고 세공함으로써 계급의 이데올로기적인 구분에서 더 높은 단계를 나타냈다. ”(위와 동일한 출처 )
계급의 일반 조직(노동조합)과 계급의 역사적 강령의 방어를 임무로 하는 그 특수 조직, 즉 당 사이의 구분은 제 2 인터네셔널에서 분명하게 이뤄졌다. 그 구분은 제 3인터네셔널(코뮤니스트인터네셔널, CI)가 창립될 당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최초로 역사의 현안으로 된 그 순간에 더욱더 분명해졌다. 그 새로운 인터네셔널에게 있어서 계급의 일반 조직은 더 이상 노동조합(그 어느 순간에도 노동자계급 전체를 조직하지 않았던)이 아니라 노동자평의회로 구성되었다 (이때 CI 안에서 노동조합문제와 당의 역할문제에 관해 많은 점들이 불분명하게 남아있긴 했을 지라도).
이러한 다양한 조직들 사이의 그 모든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그것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들은 계급투쟁의 진로에 영향력을 갖고 이런 의미에서 “당”이라는 명칭이 부여될 수 있다. 코뮤니스트동맹이 민주주의 운동의 좌익으로서 주로 활동했던 1848-1849년의 혁명들 시기에는 그 코뮤니스트동맹의 영향력은 여전히 미약했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라인란트지방과 그 밖의 독일지역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졌던 신라인신문(Neue Rheinische Zeitung)은 직접적으로 그 연명의 기관지는 아니였지만 “민주주의의 기관지”로 제시되었다. 엥겔스가 지적했듯이, “(…) 그 동맹은 지금은 분쇄되어버린 대중적인 대중운동에 대항해서는 너무 약한 지렛대임이 증명되었다”(‘코뮤니스트동맹의 역사에 관하여 ’, 1885년 11월).
이러한 미약함의 가장 중요한 원인들 중의 하나는 독일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미약함 자체에 놓여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산업 발전이 아직 개시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엥겔스는 또한 지적하기를, “ 동맹이 독일에서 중요성을 가진 유일한 혁명조직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IWA의 영향력은 훨씬 더 중요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유럽에서 “권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 2인터네셔널 (사실상 그것을 구성하는 상이한 정당들을 통해서)이야 말로 역사상 최초로 노동자 대중에게 결정적인 영향력을 갖는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2) 노동자운동의 초기의 분파개념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강령, 즉 코뮤니스트 혁명을 옹호하는 선봉이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투쟁들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갖지 않을 때 그 당은 어떻게 되는가? 이 질문은 이미 마르크스의 시기에 제기되었지만 그 이후에 훨씬 더 큰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 질문에 역사는 다른 해답들을 제시했다. 그 첫 번째 답은 당의 존재 조건들이 존재하지 않을 때 그 당은 해체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코뮤니스트동맹 과 IWA의 경우에 해당되었다. 이 두 가지의 경우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 해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래서 독일에서 반혁명의 승리를 확인한 쾰른 코뮤니스트재판이 있은 후, 1852년 11월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코뮤니스트동맹의 해체 선언을 중앙위원회에 요구했다. 반동의 시기에 혁명적 소수의 활동 문제는 r그 동맹 내에서 1850년 가을에 이미 제기되었었음은 지적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 해 중반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경제회복의 결과로 인해 혁명 물결이 잠잠해지는 썰물의 시기라는 결론에 도달했었다. “이러한 전반적인 번영의 상황에서 , 부르주아 사회의 생산력이 부르주아 생산관계 내부에서 가능한 풍부하게 발전하고 있는 그러한 상황에서 진정한 혁명이란 생각할 수 없다. 그러한 혁명은 오직 이러한 두 요소들 – 근대 생산력과 부르주아 생산양식-이 서로 상충하게 되는 시기에만 가능하다.”(마르크스,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제 4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래서 윌리치-샤퍼(Willich-Schapper)의 즉각주의적 소수(immediatist minority)에 대항해 투쟁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 소수는 그러한 썰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이 봉기할 것을 계속해서 요구하길 원했다.
“특히, ‘다음 혁명에서 독일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위상’의 문제에 관한 우리의 지난번 논쟁 에서 , 중앙위원회의 소수의 회원들이 , 지난번 회람과 모순되는 심지어 ‘선언(Manifesto)’과도 모순되는 견해들을 제시했다. ‘선언’의 전반적인 견지 대신에 독일 수공업자들의 민족감정에 아첨하는 독일민족주의의 견해가 자리를 차지했다 . ‘선언’의 유물론적 견지 대신에 관념론적 견지가 강조되었다. 실제의 관계들 대신에 의지가 혁명에서 주요인자로서 강조되었다. 우리가 노동자들에게 , 그 관계들을 바꾸기 위해서 15, 20, 50년의 내전을 겪어야만 할거라고 이야기하는 동안 , 그 대신에 우리는 당장 권력을 잡아야만 하거나 아니면 잠이나 자러 갈 수 밖에 없다고 말해졌다. 민주주의자들에 의해 ‘민중’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듯이 그렇게 이제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단어가 단순한 문구처럼 사용되고 있다.이 문구를 실현하기 위해서 라면 그냥 모든 소부르주아들을 프롤레타리아라고 선언해 버리고, 그렇게 사실상 프롤레타리아가 이나라 소부르주아를 대변하면 될 터이다. 실제의 혁명적 발전 대신에 그냥 혁명이라는 문구를 내세우면 될 터이다.”(마르크스, 1850년 9월 15일 코뮤니스트동맹 중앙위원회의 회의에서 행한 연설 , 쾰른 코뮤니스트재판1의 “사전준비들”에서 인용)
마찬가지로 1872년 헤이그대회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IWA의 총회(General Council)를 바쿠닌주의와 라살레주의 경향들의 영향으로부터 격리하기 위해서 그것을 뉴욕으로 옮기는 결정을 지지했다. 한편 이러한 경향들은 파리코뮌이 분쇄됨으로 인해서 유럽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주요한 패배를 경험했던 그 시기에 성장했다. 총회를 유럽 밖으로 옮기는 것의 의도는 IWA가 해체 이전단계인 잠복기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었고, 그 해체는 결국 1876년 7월의 필라델피아대회에서 이뤄졌다.
어떤 의미에서는, 당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조건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그 당을 해체한다는 것이 코뮤니스트동맹과 IWA의 경우에는 그 이후보다 훨씬 쉬운 편이었다. 동맹은(1848-1849년 혁명들 당시를 제외하면) 작은 비밀조직으로서 사회에서 어떤 “공식적인” 위치도 갖지 않았었다.
IWA의 경우, 그것의 형식상의 소멸은 그 모든 구성요소들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았다. 영국노동조합이나 독일노동자당(SAP)은 IWA의 소멸을 살아 남았다. 사라진 것은 그 다양한 구성요소들 사이 묶는 형식적인 끈이었다.
그 이후 사정이 변했다. 노동자의 당들은 더 이상 사라지지 않았다 - 그것들은 적의 진영으로 넘어가버렸다. 그것들은 자본주의체제의 기관들이 되어버렸고 이점은 남은 혁명가들에게 새로운 책임을 부여했다.
코뮤니스트동맹이 해체되었을 때, 미래에 언젠가 출현하게 될 새로운 당을 향한 다리를 건설할 임무를 띤 그 어떤 형식적 조직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 시기에 마르크스와 엘겔스는 이론적 세공작업이 최우선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점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발전시킨 이론에 숙달한 사실상 유일한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이 작업의 수행을 위해서 어떤 형식적 조직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코뮤니스트동맹의 많은 전회원들, 특히 영국에서 망명 중이던 전회원들과 접촉을 유지했다. 심지어 1856년에는 마르크스와 샤퍼사이에 화해가 있기도 했다. 코뮤니스트동맹의 중앙위원회 전회원이었고 영국노동자운동과 긴밀한 연결을 맺고 있던 에커리우스(Eccarius)는 1864년에 마르크스에게 세인트마틴홀에서 9월 28일 열린 그 유명한 회합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고 그곳에서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men’ Association, IWA)의 창립이 결정되었다2. IWA의 총회는 그래서 에커리우스(Eccarius), 레스터(Lessner), 로허너(Lochner), 판더(Pfaender), 샤퍼(Schapper) 그리고 물론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같이 동맹의 전회원의 상당수를 포함했다.
IWA가 사라졌을 때,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제 2 인터네셔널의 창립의 기원에 놓이게 될 조직들이 남아있었는데, 특히 독일의 당이 그중 하나였다. 그 당(SAP)은 1875년의 통합으로 출현했는데 아이젠나허(Eisenachers)들로 알려진 베벨(Bebel)과 리프크네히트(Liebknecht)와 같이 당의 마르크스주의 인자들은 IWA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첫 두 조직들이 수행하려 창립당시 의도했던 역할과 관련해서 한 점을 지적해야만 한다. 코뮤니스트선언(Communist Manifesto)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듯이, 코뮤니스트동맹은 머지 않은 미래에 프롤레타리아혁명을 볼게 될 것을 기대했다.1848년 혁명들의 패배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역사적 조건들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음을 간파했다. 마찬가지로, IWA의 창립 당시 (그 규범들(Statutes)에 따르면) (상호주의자들(mutualists)와 집산주의자들(Collectivists)등 IWA의 여러 다른 구성요소들로 인해 다양한 비젼들이 이 문건에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 다가오는 짧은 또는 그리 길지 않은 시기에 “노동자들의 해방”이라는 생각이 존재했다.
파리 코뮌의 패배는 자본주의의 전복을 위한 조건들이 미성숙함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파리코뮌 이후 이 시기는 대대적인 자본주의 확장의 시기로서 특히, 독일이 산업열강의 하나로 출현하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20세기 초 독일은 영국을 추월하게 된다.
3) 제 2 인터네셔널에서 분파들
혁명적 전망이 멀리에 놓여있던 이 시기3동안에 사회당은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특히 독일에서) 주요성을 획득했다. 이러한 증대하는 영향력은, 대부분의 노동자의 정신이 혁명적이지 않던 시기에 사회당이 그들의 강령 안에는 사회주의의 전망을 포함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일간신문들에서는 자본주의 사회 내부에서의 개혁들이라는 “최소강령”을 옹호했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또한 이러한 상황의 결과로서, “최종목표는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리 중요하지 않고 오직 운동만이 모든 것이다”라고 말한 베른슈타인(Bernstein)과 같은 사람들과 “사회주의라는 최종목표는 바로 사회민주주의를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부르주아 과격주의로부터 구별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결정적 요소이다, 전체 노동자 운동이 자본주의 질서를 수리하려 헛수고하지 않고 이 질서에 대항해 계급투쟁을 벌이도록, 이 질서를 억누르도록 전환키는 유일한 요소이다 - 베른슈타인이 제기한 질문, ‘개량이냐 혁명이냐’는 사회민주주의에게는 ‘존재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질문과 동일하다. 베른슈타인 및 그 추종자들과의 논쟁에서 당의 모든 이들이 분명하게 이해해야 할 점은, 그것이 투쟁의 이런 저런 방법에 관한 또는 이런 저런 종류의 전술의 사용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존재 그 자체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다”(로자 룩셈부르크, 사회개량이냐 혁명이냐, 서문) 라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의 대립이 형성되었다. 베른슈타인의 테제들이 독일사회민주당(SPD)와 사회주의인터네셔널(SI)에 의해 공식적으로 거부되긴 했지만, 이 비젼은 SPD 내부에서 (특히 당 기구 안에서) 그리고 인터네셔널 내부에서 다수를 획득했다.
“사회주의 인터네셔널의 경험은 비혁명적인 상황으로 표시되는 연장된 시기 동안에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당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확인해 준다. 제 2인터네셔널 당들이 1914년의 제국주의 전쟁에 참여한 사실은 그 조직의 오랜 부패를 드냈을 뿐이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정치조직이 갖는 자본주의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의 침투성에 대한 취약성과 그래서 언제라도 그것에 의해 침투당할 가능성은 계급투쟁의 기나긴 정체와 후퇴 시기에 점점 더 그 정도가 심해져서 결국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대체해 버려서 그 당은 불가피하게 그 모든 원래의 계급 내용을 잃고 대신에 적대 계급의 도구가 되어버릴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정치당의 본질과 기능 (Nature and function of the political party of the proletariat)”,Internationalisme, 38호, 1948년 10월4)
이러한 문맥 속에서, 최초로 진정한 분파들(fractions)이 출현했다. 최초의 분파는 볼세비키분파로서,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대회 이후 처음에는 조직에 관한 문제를 놓고 그 다음에는, 러시아와 같이 반봉건(Semi-feudal)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임무들과 관련된 전술 문제를 놓고 기회주의에 대항한 투쟁을 벌였다. 이 때 주목할 점은, 1917년까지는 볼셰비키분파들과 멘셰비키분파들이 서로 독자적으로 자신들의 정책을 수행하긴 했어도 형식적으로는 동일한 당, 즉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Russian Social Democratic Labour Party: RSDLP)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다.
네덜랜드에서는 (와인콮(Wijnkoop), 반 레브스테인(van Ravesteyn) 그리고 세톤(Ceton)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호르타(Gorter)와 판네쿡(Pannekoek)도 참여한) 주간지 드트리뷴(De Tribune)을 중심으로 발전한 마르크스주의경향이 1907년부터 네덜랜드사회민주노동자당(Dutch Social Democratic Workers Party: Dutch SDAP) 내부에서 유사한 작업에 관여했다. 그 주간지는 이 경향은 당내의 기회주의적 기류(주로 트로엘스트라(Troelstra)와 의회분파에 의해 대표된)에 대항해 싸웠고, 그 기류는 1908년 당대회에서 드트리뷴의 폐간을 제안했다. 트로엘스트라가 결국 데벤터임시대회(1909년 2월)에서 승리하고 이 대회는 드트리뷴의 폐간과 그 편집인 3명의 당으로부터의 제명을 결정했다. 트리뷴주의 “지도자들”을 그 동조자들로부터 분리할 목적을 띤 이 정책은 실상 그 동조자들로부터 강력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최종적으로 , 트로엘스트라의 이러한 제명 정책은 중재를 목적으로 요청된, 개량주의자가 지배적인 사회주의인터네셔널 국제사무국의 후원을 받았고, 그 3명의 편집인들이 SDAP로부터 결별하려던 열망(한편 호르타는 이러한 결별을 원치 않았다5)과 시기적으로 일치했다. 그 제명 정책으로 인해 그“트리뷴주의자”들은 1909년 3월 새로운 당,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 SDP)를 결정하게 된다. 이 당은 제 1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선거에 거의 영향력이 없이 극히 작은 소수로 남아 있었지만 인터네셔널 내부의 좌파로부터, 특히 볼세비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지지를 통해 그 당은 (1909년 11월 사회주의인터네셔널 국제사무국으로부터 한번 거부당한 뒤) 결국 1910년 인터네셔널에 재합류해서 1910 년 코펜하겐대회와 1912년 바젤대회에 (SDAP의 7명에 비해서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그래도) 대리인 한 명을 파견할 수 있었다. 1차 대전 동안, 네덜랜드는 중립국으로 남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업과 식량부족 등 그 부담이 노동자계급에게 과중했던 그 전쟁 동안 SPD는 국제주의적 정책 덕분에 그리고 노동자투쟁을 지원한 덕분에 선거에서 영향력을 획득했다. 결국 1918년 11월에, 심지어는 독일 코뮤니스트당 (Kommunistische Partei Deutschlands: KPD)의 창립 이전에 SPD는 네덜랜드 코뮤니스트당(Communsit Party of the Netherlands: CPN)이라는 명칭을 채택했다.
사회주의인터네셔널에 속한 한 당의 내부의 분파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세 번째 경향은 KPD를 창립하게 된다. 전쟁차관이 제국의회에서 사회민주당의원들을 포함해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1914년 8월 4일 저녁, 몇몇 국제주의 투쟁가들이 로자 룩셈부르크의 거처에 모여서 당내에서 지도부와 대다수의 국수주의적 정책에 대항해 싸우길 원하는 모든 인자들을 규합할 방법들과 투쟁 전망들을 모색했다. 이 투쟁가들은 이 논쟁을 당 내부에서 수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했다. 여러 도시들에서 평당원들(the party rank and file)은 당의 의회 내의 분파가 전쟁차관을 승인한 점을 비난했다. 심지어 리프크네히트도 당규율(party discipline) 때문에 8월 4일 그 차관을 지지한 점을 놓고 비판을 받았다.
12월 2일에 이뤄진 두 번째 표결에서 유일하게 리프크네히트만이 반대표를 던졌지만, 뒤이은 두 번의 표결에서는, 우선은 오토 륄레(Otto Rühle)가 그 다음번엔 점점 더 많은 수의 의원들이 그의 예를 따랐다. 1914 -1915년 겨울부터 불법 전단지가 유포되었다. 특히 그 중의 하나는 “적은 국내에 있다(Der Feind steht im eigenen Land)”였다. 1915년 4월 인테어나치오날레(Die Internationale) 최초이자 유일한 발간호가 간행되어 바로 그날 저녁에 5000부가 팔렸고 그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레오 요기헤스(Leo Jogiches),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프란츠 메링(Franz Mehring) 및 클라라 체트킨(Klara Zetkin)을 중심으로 한 그 그룹에게 ‘인테어나치오날레(Internationale)’라는 명칭을 제공했다. 불법이라는 조건 하에서 탄압에 노출된 채6, “스파르타쿠스그룹(Spartakusgruppe)”을 그 다음엔 “스파르타쿠스동맹(Spartakusbund)”을 이름으로 채택한 이 극히 작은 그룹은 전쟁과 정부에 반대한 투쟁 뿐만 아니라 사회민주당의 우파와 중앙파에 대항한 투쟁을 벌렸다. 스파르타쿠스멤버들이 혼자는 아니었다. 다른 그룹들, 특히 함부르크와 브레멘에서의 다른 그룹들(판네쿡(Pannekoek), 라덱(Radek), 프뢸리히(Fröhlich)가 활동함)은 스파르타쿠스동맹의 멤버들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국제주의적 정책들을 옹호했다. 1917년 초 SPD지도부는 당내에서 반대파들의 입지가 진전되는 것을 중단시키기 위해서 그 반대파들을 제명했고, 이 반대파 그룹들은 자치적으로 계속 활동한 반면, 스파르타쿠스동맹의 멤버들은 중앙파의 독립사회민주당(Unabhangige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USPD) 내부의 한 분파로서 계속 남아 있었다. 결국 이러한 상이한 경향들은 1918년 12월 31일, KPD의 창립 순간에 함께 결집하게 되지만 이 새로운 당의 근간을 이룬 것은 명백하게 스파르타쿠스동맹 멤버들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좌파분파가 러시아, 네덜랜드 그리고 독일에서 보다 약간 뒤늦게 형성되었다. 이것은 나폴리에서 보르디가(Bordiga)와 그의 동지들이 1918년 12월부터 간행한 신문, “일 소비에트(Il Soviet)”를 중심으로 한 “기권주의자 분파(Abstentionist Fraction)”(이 분파는 의회선거에서 기권할 것을 옹호했기 때문에 이렇게 불리게 됨)였는데, 공식적으로는 1919년 10월 이탈리아사회당(Italian Socialist Pary:PSI)의 당대회에서 한 분파를 이루었다. 사실상, 일찌기 1912년에 이미 청년 사회주의자 연합 (The Federation of Young Socialists) 안에서 그리고 PSI의 나폴리연합(Naples federation) 안에서 보르디가는 비타협적인 혁명적 경향들에 생명을 불어넣었었다. 이탈리아좌파의 형성이 이렇게 지체된 것은 부분적으로는, 보르디가가 군대에 징집됨으로써 1917년 이전에는 정치생활에 개입할 수 없었는 사실에 의해서 설명되지만 무엇보다도, 전쟁 동안에는 당의 지도부가 좌파의 손에 놓여있었다는 사실에 의해서 설명된다. 1912년 대회는 개량주의적 우파를 축출했었고 1914년 대회는 프리메이슨들을 축출했었다.
PSI 의 신문 아반티(Avanti)는 무솔리니(Mussolini)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그는 이 대회들에서 축출 안건들을 제출했었다. 그는 이 지위를 이용해서 1914년 10월 18일에 “절대적인 중립성에서 행동과 업무의 중립성으로 ”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는데, 이 사설은 이탈리아가 협상(Entante)의 편에서 전쟁에 가담한다고 선언했다. 물론, 그는 그 지위에서 해직되었지만 그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장래에 프랑스코뮤니스트당 지도자가 될 마르셀 카셍(Marcel Cachin)이 가져온 기금 덕분에, 프랑스정부와 협상(Entante)에 친화적인 일 포롤로 이탈리아(Il Popolo d`Italia)라는 신문을 창간했다. 무솔리니는 그해 11월 29일 PSI에서 제명되었다. 그 이후 세계대전이 지배적인 상황으로 인해 좌파, 우파 그리고 중앙파로의 선명한 입장 표명이 요구되자 그 당의 지향은 우파와 좌파 사이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입장과 개량주의적 입장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1917년 로마 대회에서 우파와 좌파 사이의 대립이 굳어졌다. 우파는 17,000표를 좌파는 14,000표를 얻었다. 러시아혁명이 이미 진행중이던 시점에 투라티(Turati), 트레베스(Treves) 그리고 모딜리아니(Modigliani)의 승리는 피렌체, 밀라노, 투린 및 나폴리에서 비타협적이고 혁명적인 분파의 형성을 재촉했다.”(이탈리아코뮤니스트좌파: The Italian Communist Left). 1920년에 가서야, 러시아에서의 혁명, 코뮤니스트인터네셔널(CI)의 형성 그리고 또한 이탈리아에서의 특히 투린에서의 노동자투쟁들의 자극을 받아서 기권주의분파(Abstentionist Fraction)는 당내에서 영향력을 획득했다. 그것은 또한 그람시(Gramsci)가 주도한 신문, 신질서(Ordine Nuovo)를 중심으로 모여든 경향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 두 경향들 사이에는 중요한 이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그람시는 선거참여에 호의적이었고, 일종의 혁명적 노동조합을 옹호했으며, 우파와 중앙파로부터 단절하고 자치적인 분파를 형성하는 것을 주저했다).
“...10월 밀라노에서 통합코뮤니스트분파(United Communist Fraction)가 결성되었다. 투라티의 우익을 배제하고 코뮤니스트당을 건설할 것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내놓았고, 코민테른(Comintern)의 제 2차 대회의 결정에 따라서 선거보이콧을 포기했다”(위와 같은 출처). 1920년 12월 이몰라(Imola)대회에서 분열 원칙(the Principle of a Split)이 결정되었다 : “하나의 분파로서 우리의 업무는 지금 중단되고 중단되어야 한다 (…) 표결을 통해 우리가 대다수가 되거나 또는 소수가 되든 그 결과에 상관없이 표결이 끝나자마자 즉시 당과 (SPI의) 대회를 떠나야 한다. 이것에 (…) 중앙과의 분열이 뒤따른다 ”(위와 같은 출처).1921년 1월 21일에 시작된 리보르노(Livorno)대회에서 “ 이몰라안건은 총 172,487표 중 그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58,783표를 얻었다. 그 소수는 대회를 떠나서,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Communist Party of Italy)으로 정착하고 코뮤니스트 인터네셔널의 한 지부(Section)가 될 것을 결정했다.”(출처는 위와 동일)
사회주의 인터네셔널의 당들 내부에서 형성된 주요한 분파들의 이렇게 (아주 신속한) 활동들을 종합해 보면, 하나의 분파에게 주어진 주요한 역할은 바로, 퇴행하는 당 내부에서 혁명 원칙들의 방어라고 정의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처음에는 이러한 원칙들을 위해 대다수의 투사들을 결집하고 당으로부터 우파와 중앙파의 입장들을 배제하며 그런 다음, 상황에 따라서 그 당 자체를 새로운 혁명당으로 전환하는 것.
주목할 만한 점은 좌파의 모든 경향들이 실천적으로 가능한 한 오랫동안 그 당내에 남아 있으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 유일한 예외는 트리뷴주의자들의 분파(호르타와 판네쿡은 그 성급함에 동의하지 않았었지만)들 그리고, 1917년 SPD로부터 반대파가 축출된 뒤 (스파르타쿠스동맹자들과는 달리) USPD에 가입하기를 거부했던 라덱과 판네쿡과 프뢸리히 주도하의 “급좌파(radical lefts)”였다. 배반을 한 옛 당으로부터 좌파의 분리는 제명을 통해서 또는 혁명 물결의 선봉이 될 새로운 당 건설의 필요로 인해서 결과되었다.
또한, 좌파의 행동이 퇴행하는 당 내부에서 늘 소수로 남아있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 하다. 프랑스사회당(Section FranÇaise de l`Internationale Ouvriére, SFIO)의 투르(Tours)대회에서 CI에 가담을 요구하는 좌파의 안건이 대다수에 의해 통과되었다. 그래서 투르에서 창립된 코뮤니스트당은 조레스(Jaurès)가 창간한 루마니테(L`Humanité)를 계속 유지했다. 불행히도, 그것은 SFIO의 사무총장 프로사르(Frossard)을 유지했는데, 그는 한 동안 프랑스코뮤니스트당(PCF)의 지도적 인물로 활동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점은, 좌파분파들이 당장 새로운 당을 건설한 이러한 역량은 오직, 낡은 당의 배반과 혁명물결의 갑작스런 출현 사이의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가능했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상황은 상당히 달라지게 되었다.
4) 코뮤니스트 인터네셔널로부터 출현한 분파들
코뮤니스트 인터네셔널은 1919년 3월에 창설되었다. 그 당시 아주 극소수의 코뮤니스트당들이 이미 존재했다(러시아, 네덜랜드, 독일, 폴랜드, 그리고 몇몇 그리 중요하지 않는 다른 나라들에서의 코뮤니스트당). 하지만 그 당시 최초의 (그리고 그렇게 선언한) “좌파”분파가 주요한 당 내부에서, 즉 러시아 코뮤니스트당(1918년 3월 RSDLP 제 7차 대회에서 코뮤니스트라는 이름을 채택했음) 내부에서 출현했다. 1918년 초 이 경향은 코뮤니스트(Kommunist)라는 신문을 중심으로 결집했고 오신스키(Ossinsky), 부하린(Bukharin), 라덱(Radek) 및 스미르노프(Smirnov)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분파가 당의 공식적인 방향과는 달리 가진 주요한 불일치점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k-Litovsk)에서의 협상을 놓고 였다. 그 “좌파코뮤니스트들”은 그 협상에 반대하고 “혁명전쟁”을 , 다른 나라들로 혁명을 무력적으로 “수출하는 것 ”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분파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권위적인 방법들을 비판했고 노동자 대중이 광범위하게 이 권력에 참여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비판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행한 비판들과 유사하다(그녀의 팜플렛을 참조 바람).
브레스트-리토프스크평화협정의 승인은 이 분파의 종말을 선언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하린은 당의 우익의 대표자가 되었지만 오신스키와 같은 이 분파의 몇몇 인자들은 그 이후에 출현한 좌파 분파에 가담하게 된다. 그래서 서유럽에서는 앞으로 코뮤니스트당을 출현시키게 될, 사회당들 내부의 몇몇 분파들이 아직 형성되기 전에 (보르디가가 주도한 기권분파는 1918년 12월에 가서 형성된다) 이미 러시아혁명가들은 자국의 코뮤니스트당에 영향을 미치는 일탈들에 대항해 (분명히 매우 혼란스런 방식으로이긴 하지만) 투쟁을 개시했었다. 여기서 (이 현상을 지금 여기서 분석할 필요는 없긴 하지만) 주목할 만한 점은 20세기 초 수 년 동안 러시아혁명가들이 다음과 같이 일련의 모든 주요한 문제들에 있어서 선봉에 있었다는 것이다. 즉, RSDLP의 제 2차 대회에서 볼세비키 분파의 형성, 1914년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한 선명한 입장, 찜머발트에서 좌파를 주도한 것, 새로운 인터네셔널의 창립 필요성의 인식, 1918년 3월 최초의 코뮤니스트당의 건설, 그리고 코뮤니스트 인터네셔널 제 1차 대회에 대한 자극과 정치적 방향설정 등에서.
그리고 이러한 “조숙함”은 코뮤니스트당 내부에서의 분파들의 형성에서도 발견된다. 사실상, 권력을 잡게 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코뮤니스트당으로서 그것의 특별한 역할로 인해서, 러시아당은 (명백히, 전세계적인 혁명 물결의 패배와 더불어) 그 당이 부패하면서 주요 인자의 압력을, 당의 국가로의 융합을 겪는 최초의 당이기도 했다. 그렇게 프롤레타리당의 이러한 퇴행 과정에 직면해서 비록 혼란스럽긴 했지만 그 어느 곳보다 훨씬 더 일찍 저항의 형식들을 시작했다.
그때 이후 러시아당에서 상당수의 다른 “좌파” 경향들이 출현했다.
- 1919년 오신스키와 사프로노프(Sapronov)를 중심으로 형성된 “민주중앙집권주의(Democratic Centralism)”그룹은 산업에서 “개인적 권위(individual authority)”에 대항해 싸웠고 “국가기구의 부문화(Departmentalisation)와 관료주의적 억압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무기”로서 집합적(collective) 또는 우의적인(collegial principle)을 옹호했다.(우의의 원칙과 개인적 권위에 관한 테제).
- 또한 1919년에 많은 수의 “민주중앙집권주의”그룹 구성원들이 “군사적인 반대파(Military Opposition)”에 참여했는데, 이 파는 적군(Red Army)를 전통적인 부르주아 군대의 범주에 따라 변형시키려는 경향에 맞서 투쟁하기 위해 1919년 3월에 잠시 구성되었었다.
내전 동안 당 정책에 관한 비판은 새로운 체제에 대한 백군들(White Armies)의 위협 때문에 그 빈도가 더 낮게 표면화되었지만 그 내전이 백군들에 대한 적군의 승리로 끝나자마자 그러한 비판의 강도는 배가되었다.
- 1921년 초, 제 10회 전당대회와 노동조합문제를 놓고 벌인 논쟁을 계기로, “노동자들의 반대(Workers´ Opposition)”가 형성되었고, 철강노동자들인 쉴리아프니코프(Shliapnikov)와 메드베데프(Medvedev), 그리고 특히, 그 강령을 작성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Alexandra Kollontai)에 의해 주도되었다. 혁명적인 노동조합지상주의자들(Syndicalists)처럼 이 반대파는 국가의 관료제 대신에 노동조합에 경제의 관리를 맡기기를 원했다7. 바로 이 전당대회(크론슈타트봉기 동안에 개최된)에서 채택된 결정으로 분파들이 금지된 이후 노동자 반대파는 해체되고 콜론타이는 나중에 스탈린(Stalin)의 충실한 추종자가 된다.
- 1921년 가을에 “노동자들의 진리(Workers´ Truth)”그룹이 결성되었는데, 그 주요 구성원들은 지식인들 그리고 그것의 주요 조직가인 보그다노프(Bogdanov)처럼 “프롤레타리아문화(Proletkult)”의 추종자들이었다. 다른 반대파 경향들과 함께 이 그룹은 당과 국가의 관료화를 비난했지만 그와 동시에 절반-멘세비키적(semi-Menshevik) 입장을 취했는데,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조건들이 러시아에서는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점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은 근대 자본주의의 기초 위에 만들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한 점(이러한 입장은 나중에 “평의회주의 경향(councilist current)”의 입장이 된다)에서 그러했다.
- 1922-23년에 “노동자들그룹(Workers´ Group)”이 결성되었는데, 그 주도자는 우랄지방의 노동자 미아스니코프(Miasnikov)였다. 그는 10차 전당대회가 끝난 직후 “왕당파들에서 아나키스트들까지 언론의 자유”를 요구함으로써 1921년 볼세비키당 안에서 두각을 드러냈었다. 이 문제에 관해 논쟁하려던 레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아스니코프는 그 요구의 철회를 거부했고 결국 1922년초 당에서 축출되었다. 그는 노동자계급 출신의 다른 투쟁가들과 함께 “러시아 코뮤니스트당(RCP; 볼세비키)의 노동자들그룹”을 창설했고 RCP의 12차 대회에서 이 그룹의 선언문이 배포되었다. 이 그룹은 당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불법활동을 시작했고 1923년 여름의 파업 물결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드러냈던 것 같다. 그 당시 이 그룹은 대대적인 시위(mass demonstration)을 요구했고 일차적으로 방어적인 계급 운동의 정치화를 시도했다. 이 시위들에서 그 그룹의 활동으로 인해 GPU는 그것이 위협이 된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미아스니코프를 포함한 그 그룹의 주도자들은 수감되었다. 하지만 그 그룹의 활동은 (망명 중 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 불법적인 방법으로 1920년대 말까지 계속되었다. 이때 미아스니코프는 러시아를 탈출하는데 성공해서 파리로 망명했고 KAPD의 입장들에 가까운 입장들을 옹호하는 코뮤니스트노동자(L´Ouvrière Communiste)의 간행에 참여했다.
볼세비키당의 퇴행에 맞서 투쟁을 벌인 모든 경향들 중에서 확실히 노동자들그룹(Workers´ Group:WG)이 가장 정치적으로 명확했다. 그것은 KAPD에 매우 가까웠고(KAPD는 이 그룹의 문건들을 출판하고 그것과 접촉을 유지했다.) 특히, 당이 추구하는 정책에 대한 그것의 비판들은 혁명의 국제적인 비젼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점에서 그것은 (당과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민주주의의 문제에 그리고 경제의 관리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었던 다른 그룹들의 경우와는 상반되었다. 그것은 계속해서 코뮤니스트인터네셔널(CI)의 첫 4번 대회들을 참조점으로 삼는 트로츠키주의 경향들과는 달리 CI의 제 3차 및 4차 대회의 통일전선(United Front) 정책들을 거부했다. 하지만 트로츠키주의 경향의 좌익과 노동자들그룹(WG)의 인자들 사이에 (특히 망명 중에) 토론들이 있었다.
노동자들그룹(WG)은 일관되게 하나의 분파처럼 활동했던, 볼세비키당 내부에서 출현한 아마도 유일한 경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이 혁명가들에 대해 개시한 (그리고 차르의 탄압보다 훨씬 더했던) 혹독한 탄압은 이 경로를 따라 발전할 가능성을 제거해버렸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아스니코프는 러시아로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예상 대로 그는 즉시 실종되었고 코뮤니스트 좌파의 미약한 역량은 그 가장 용감한 투사를 잃고 말았다.
다른 나라들에서 코뮤니스트 좌파의 투쟁은 불가피하게 러시아에서와는 다른 형태들을 취했지만, 위에서 언급된 세 개의 다른 코뮤니스트당들로 돌아가자면 우리는 그 좌파 경향들도 아주 일찍 투쟁을 시작했음을 볼 수 있다.
독일 코뮤니스트당(KPD)이 창설될 당시 좌파의 입장이 대다수를 이루었다. 노동조합 문제에 있어서는, KDP의 강령을 작성하고 당 대회에서 제시했던 로자 룩셈부르크는 매우 명확하고 범주적이었다. “[노동조합은] 더 이상 노동자들의 조직이 아니라 국가와 부르주아 사회의 가장 확고한 옹호 기관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은 노동조합의 파괴 투쟁을 포함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는 이점에 동의한다.” 한편, 의회 문제에 있어서 그 대회는 그 당시 곧 있게 될 선거의 참여라는 스파르타쿠스동맹자들(룩셈부르크, 리프크네히트, 요기헤스 등)의 입장을 거부했다. 이 투사들이 암살된 후 새로운 지도부(레비(Levi), 브란들러(Brandler))는 노동조합 문제와 관련해서 처음에는 좌파(대다수로 남아있던)에 양보를 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1919년 8월 KDP의 프랑크푸르트 대회부터, USPD와의 친교 회복을 원했던 레비는 의회 내에서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내에서의 활동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는 10월의 하이델베르크 대회에서는 계략을 써서 좌익 반노동조합 반의회주의적인 대다수를 제명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제명된 투쟁가들 대다수는 승복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그 당시 CI내부에서 거대한 권위를 갖고 있으면서 암스테르담 사무국의 건설을 추진하던 네덜랜드 좌파 투쟁가들(특히 호르타와 판네쿡)의 확고한 지지를 받았어 인터네셔널에 의해 서유럽과 아메리카의 활동을 조화시키고 조정하는 일에 임명되었다. 그 이후 6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1920년 4월 그 제명된 투쟁가들은, 그 해 2월의 KPD 대회가 그들의 재입당을 거부했던 것 그리고 그리고 3월 13일에서 17일 사이에 있었던 발생한 캅프-구테타(Kapp Putsch) 동안 SPD를 향해 당이 보였던 유화적인 태도에 직면해서 독일 코뮤니스트노동자당(Kommunistische Arbeiterpartei Deutschlands; KAPD)을 창설하게 된다. 그들의 접근법은 (노동조합과 의회문제에 관하여 그리고 CI의 기회주의적 전환의 거부에 관한 ) 좌파의 테제들이 승리를 거두게 되는 국제대회를 2월에 조직했던 암스테르담 사무국의 지원8으로 강화되었다. 여기서 특히 CI의 기회주의의 일면은 영국의 코뮤니스트들이 노동당에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표현되었었다. 그 새로운 당은 네덜랜드코뮤니스당(CPN)의 좌파 소수(호르타와 판네쿡에 의해 주도된)의 지지를 받아 강화되었는데, 이 좌파 소수는 자체의 신문에 KAPD의 창립대회에서 채택된 강령을 실었다. 그렇다고 해서 판네쿡이 (1920년 7월 5일자 편지에서) KAPD를 비판하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그는 특히 (혁명적인 노동조합 지상주의에의 그 어떤 타협에 대해서도 경고하면서) “유니언(Unionen)”에 관한 그 당의 입장을, 무엇보다도 그 당의 기초 단위 안에, 그가 “괴물 같은 탈선(monstrous aberration)”으로 여긴 “민족적 볼세비키(National Bolshevik)” 경향이 존재하는 점을 비판했다. 이 순간, 세계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직면한 모든 결정적인 문제들(노동조합, 의회, 당9, 사회당들에 대한 태도, 러시아혁명의 본질 등등)에 있어서, KAPD의 다수에게 영감을 불러 넣었던 네덜랜드좌파 (그리고 특히 판네쿡)가 노동자운동의 선봉에 있었다.
8월 1일에서 4일 사이에 개최된 KAPD대회는 이러한 지향들에 찬성함을 선언했고 그 순간에 “민족적 볼세비키(National Bolshevik)”는 그 당을 떠났다. 그리고 그 몇 달 후 연방주의 인자들(federalist elements)은 KAPD가 CI에 참여하는 것에 적대적으로 되었다. 이 부분에 있어서 판네쿡, 호르타 및 KAPD는 CI 에 남아서 이 인터네셔널의 점증하는 기회주의적 편향에 대항해 투쟁할 결심이었다. 이런 이유로 KAPD는 1920년 10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 2차 CI 대회에 참석을 위해 2명, 얀 아펠(Jan Appel)과 프란츠 융(Franz Jung)으로 된 대표단을 러시아로 파견했다10. 한편 이들로부터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었던 KAPD는 다른 2명으로 된 대표단을 다시 파견했는데, 그 중 한 명이 오토 륄레였다. 그러나 러시아 노동자계급이 고통받고 있던 재앙적인 상황과 정부기구의 관료주의화 과정에 직면한 그들은, 비록 그 대회에서 그들의 입장들을 옹호하고 표결에 참여하도록 위임되었에도 불구하고 그 대회에 불참할 것을 결심했다. 이 대회를 준비하면서 레닌은 좌익코뮤니즘 유아기질환(Left Wing Communism an Infantile Disorder)를 작성했다. 이 팜플렛 안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레닌이 “코뮤니즘 안에서 좌파 교조주의의 실수는 우파 교조주의의 그것보다 천 배나 덜 위험하고 덜 중요하다 ”라고 썼다는 것이다.
한편에는 코뮤니스트인터네셔널(CI)과 볼세비키의 입장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에 KAPD의 입장에서 양쪽 모두에서, KAPD를 그 인터네셔널에 합류시키고 그래서 KPD 안으로 수용할 진정한 의지가 있었지만, 이 가능성은 1920년 12월 KPD가 재편되어 USPD의 좌파와 함께 독일통합코뮤니스트당(Vereingte Kommunistische Partei Deutschlands : VKPD)를 형성함으로써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 재편 과정을 CI의 모든 좌파 경향들은 반대했었다. KAPD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CI에 동감하는 당”의 지위를 획득해서 CI의 행정위원회에 상설 대표를 가졌고 1921년 6월 개최된 제 3차 대회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 이러한 협력은 특히 (VKPD가 부추긴 모험적인 “공격”이었던 ) “3월 행동 ” 이후 그리고 크론슈타트 반란의 진압(좌파는 처음에는 소련 정부의 선동에 따라 이 반란이 진정 백군 측의 작업이라고 믿고 그 진압을 지지했었다)으로 인해 심하게 악화되었다. 동시에, 네덜랜드코뮤니스트당(CPN)의 우파 지도부(네덜랜드의 레비(Levi)라고 불린 와인콮(Wijnkoop))는 모스크바의 지원을 받아서 당 규율에 위배는 방식으로 좌익 투쟁가들을 제명하는 정책을 펼쳤다. 결국 그해 9월 이렇게 제명된 투쟁가들은 KAPD를 모델로 해서 새로운 당, 네덜랜드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N)을 창설하게 된다.
CI의 제 3차 대회에서 채택된 통일전선(United Front) 정책은 KAPD가 VKPD로 통합될 최후통첩이 제출되면서 단지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었다. 1921년 7월 KAPD 지도부는 호르타의 지원을 받으며, CI와의 모든 연결의 단절하고 “코뮤니스트노동자 인터네셔널( Kommunistische Arbeiterinternationale : KAI)”의 창설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요구는 9월에 계획된 KAPD대회보다 두달 먼저 제기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성급한 결정이었다. 9월 대회에서 새로운 인터네셔널의 창설에 대해 토론이 있었고 (베를린의 투쟁가들 그리고 특히 얀 아펠은 그 안건에 반대했지만) 대회는 이 목적을 염두에 두고 정보사무국 (Bureau of Information)의 설치를 결국 결정했다. 이 사무국은 1922년 4월에 가서야 그 창립대회가 열리게 될 이 새로운 인터네셔널이 마치 이미 창립된 것 마냥 행동했다. 그와 동시에 KAPD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인터네셔널의 창립에 적대적이었던 “베를린 경향(Berlin tendency)” 다수파와 다른 한편으로는 (임금을 놓고 벌이는 투쟁을 거부했던) “에쎈 경향(Essen tendency)”으로 분열되었다.
오직 에쎈경향만 KAI의 강령을 작성한 호르타와 함께 그 창립대회에 참여했다. 참여한 그룹은 수적으로 적었고 매우 한정적인 역량들만을 대표했다. 에쎈경향 외에, KAPN, 불가리아 코뮤니스트좌파, 영국 실비아 팬크허스트(Sylvia Pankhurst)의 코뮤니스트노동자당(Communist Workers´ Party: CWP), 오스트리아의 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이 참여했는데, 이를 두고 베를린의 KAPD는 “포템킨마을( 즉, 과장된 겉치레)”이라 묘사했다. 결국 이 잔류파 “인터네셔널”은 그 구성요소들이 없어지거나 차츰 뒤로 물러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에쎈경향은 여러번의 분열들을 겪었다. KAPN는 처음에는, KAI의 창설에 적대적이었던 베를린경향에 우호적인 한 경향의 출현 때문에 그런 다음에는 정치 원칙들보다는 파벌 대립들에 기반한 내부적인 충돌들에 의해 분리되어 나갔다.
사실상, KAI의 이런 유감스럽고 극적인 실패를 설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은 CI창설의 발판 역할을 했었던 혁명물결의 썰물에서 발견될 수 있다.
“호르타와 그의 지지자들의 오류는, 하나의 국제적인 좌파코뮤니스트 경향으로 재편성될 수 있는 코뮤니스트좌파 분파들이 코민테른 내부에 여전히 남아있을 때에 인위적으로 코뮤니스트노동자인터네셔널(KAI)를 선언한 것이었다. 이 실수는 독일혁명운동에 심각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 1921년 즈음 세계혁명의 퇴조는 유럽에서 명백했고 이러한 퇴조로 인해서 새로운 인터네셔널의 창설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 경로가 여전히 혁명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본주의의 치명적인 위기’라는 이론을 가진 호르타와 에쎈경향의 KAI 선언에는 특정 논리가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의 전제들이 틀렸다.”(ICC의 책, 독일과 네덜랜드좌파(The German and Dutch Left), 제 5장, 4.d)
KAPD와 KAPN의 최종적인 실패는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 사이에 힘의 균형의 진화에 대해 가능한 선명한 비젼을 혁명가들이 가질 필요가 있음을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만약 독일-네덜랜드좌파가 그러게 지체된 이후에라도 혁명 물결의 퇴조를 의식하게 되었다면11, 볼세비키, 코뮤니스트인터네셔널의 지도자들, 또는 이탈리아 코뮤니스트 좌파의 경우에는 이렇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극히 다른 방식으로 반응했다.
- 볼세비키로서는 그리고 CI의 다수파로서는 대중들이 더 이상 혁명을 향해 움직이지 않기에 “대중들에게로 다가가는 것”이 필요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특히 “중앙파” 사회당들과 경향들을 향해서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을 향해서도 점점 더 기회주의적인 정치를 초래했다.
- 그와는 반대로 이탈리아좌파로서는 전쟁 동안 그리고 CI의 창설까지는 볼세비키의 특징이었던 것과 동일한 비타협성을 계속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다. 그들에게는 원칙들에 대해 타협하고 그 원칙들에 물을 타서 묽게 만듦으로써 혁명을 향한 지름길을 만드려고 시도하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가치도 없었고 그러한 지름길은 패배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다.
실제로, 이미 제 2차 대회에서 하지만 특히 제 3차 대회부터는 줄곧 CI에 영향을 끼치며 제 1차 대회에서의 명료함과 비타협성에 대해 문제 제기를 했던 기회주의 노선은 세계 프롤레타리아계급이 그것의 혁명투쟁을 지속하고 강화해 나가는데 있어서 직면한 곤경들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볼세비키당 자체가 처한 해결될 수 없는 모순을 또한 표현했다. 한편으로 볼세비키는 CI의 주도권의 영향으로 세계혁명의 선봉에 있으면서 러시아혁명에서도 동일한 역할을 수행했었다. 볼세비키는 후자, 즉 러시아혁명은 세계혁명을 향한 아주 작은 발걸음에 불가하다고 늘 주장했었고 세계 프로레타리아계급의 패배는 러시아에서의 혁명의 죽음을 의미하게 될 것임을 상당히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한 나라 전체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한 당으로서 볼세비키는 민족국가의 기능에 합당한 요구들에, 특히 내외적인 “보안(Security)”을 확실히 할 필요에 종속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서, 러시아의 이해관계와 일치하는 대외정책을 그리고 국가권력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국내정책을 따를 필요성에 종속되어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1921년 3월, 페트로그라드에서 파업들의 진압과 크론슈타트반란의 유혈적 분쇄는 “관대한 (open hand)” 정책에 있어서 동전의 이면과 같았다. 러시아에게 유리한 방향의 대외 정책을 펼치도록 다른 나라 사회당들이 자신들의 정부들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통일전선(United Front)” 이라는 명분 하에 볼세비키는 이 정책을 사회당들에게 시행했다.
사실상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의 선두에 있던 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 (1922년 제 2차 당대회에서 채택된 “로마 테제”는 보르디가와 테라시니(Terracini)가 작성함)의 비타협성은 1920년 계급투쟁들의 패배에 뒤이어 이탈리아에서 나타난 파시즘의 등장을 대항해 모범적으로 표현되었다. 실천적인 수준에서 이러한 비타협성은 파시스트들의 위협에 직면해서 (진보적이든 “사회주의적”이든) 부르주아의 그 어떤 당들과도 동맹을 맺는 것을 완전히 거부한 점에서 나타났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오직 자신의 영역에서, 경제파업과 자기방어를 위한 노동자 민병의 조직을 통해서만 파시즘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 이론적인 수준에서 보르디가는 파시스트 현상들에 대한 (오늘날까지 유효하게 남아있는) 최초의 진지한 분석을 우리에게 제공해주었다. 그는 이 분석을 CI제 4차 대회의 대표단들에게 제시하며 CI의 분석을 거부했다.
- “파시즘은 중산계급의 산물도 아니고 부르주아 지주들의 산물도 아니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겪은 패배의 산물로서, 그 패배는 우유부단한 쁘띠-부르주아 계층들이 파시스트 반동 세력을 지원하게 만들었다.”(ICC의 책, 이탈리아 코뮤니스트 좌파 (The Italian Communist left), 제 1장 참조)
- “파시즘은 ‘ 봉건적’ 반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밀라노와 같이 모든 산업대도시들에서 최초로 생겨났다...” (출처는 위와 동일). 그리고 산업 부르주아지의 지원을 받았다.
- “파시즘은 민주주의와 상반되지 않았다. 이것은 ‘ 국가가 부르주아 계급의 권력을 더 이상 방어할 수 없을’ 때 그것을 필수불가결하게 보완했다.”(출처는 위와 동일).
이러한 비타협성은 통일전선정책, 사회당들과 그 부수체들에 대한 “관대”정책과 관련해서도 표현되었는데, “노동자들의 정부 ”라는 구호는 “ 코뮤니즘의 정치강령을, 즉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독재를 위해 투쟁하도록 대중들을 준비할 필요성을 사실상 부정하는 지경에 다다른다”.(보르디가, 이탈리아코뮤니스트좌파에서 인용됨)
이와 동일한 비타협성은 코뮤니스트당들을 사회당들이나 중앙당들의 좌파경향들과 통합하려는 코뮤니스트인터네셔널의 정책에도 반대했다. CI의 그 정책의 결과로 독일에서는 VKPD가 건설되었다. 이탈리아에서 그 정책은 억압과 사기 저하의 결과 당원이 20,000명도 채 안되는 당에 “테르찌니(terzini)”(제 3인터네셔널의 빨치산에 해당하는) 2000명이 1924년 8월 가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그 비타협성은 1924년 7월 제 5차 CI대회에서 추진된 CP들의 “볼세비키화(Bolshevisation)”정책에 반대한 것에서도 표현되었다. 이 정책에는 트로츠키도 반대했다. 요약하자면, 그 정책은 코뮤니스트당(CP)내에서 규율의 강화, 그것의 퇴행에 맞선 저항을 묵살하길 의도한 관료주의적인 규율의 강화를 주장했다. 볼세비키화는 또한 “공장세포들(factory cells)”에 기반한 CP들의 조직화 방식을 추동하는 것에도 놓어 있었는데, 이러한 방식은 명백히도 노동자들을 “그들의 ” 기업체에서 발생하는 어려움들에 집중하게 만들어서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전반적 비젼과 전망에는 명백하게 해가 되는 것이었다.
비록 좌파가 그 당 안에서 여전히 다수이긴 했지만, CI는 그 자체의 정책을 지지하는 우익 지도부(그람시, 톨리아티(Togliatti))를 강요했고, 이 책략은 1923년 2월에서 10월까지 보르디가가 수감됨으로써 더 용이해졌다. 그런데, 1924년 5월 이탈리아당의 비밀대회에서 보르디가, 그리에코(Grieco), 포르티치아리(Fortichiari) 그리고 레포씨(Repossi)는 CI의 그 정책에 매우 비판적인 테제들을 제시했고, 총 45명의 연방사무관들(federal secrataries) 중 35명, 그리고 5명의 지역간사무관들(interregional secretaries)중 4명의 찬성표를 얻어 그 테제의 승인을 획득했다. 1925년 트로츠키가 이끄는 “좌파반대파(Left Opposition)”에 대한 켐페인을 시작으로 반대파들에 대항한 켐페인이 CI 내부에서 발생했다. “1925년 3월-4월에 CI의 확대된 행정위원회는 CPI 제 3차 대회에서 ‘보르디가주의’ 경향의 제거를 현안으로 제시했다. 그것은 트로츠키에 호의적인 보르디가의 글의 출판을 금지했다.
이탈리아 지부의 볼세비키화는 밀라노의 연방사무관 브루노 포르티치아리를 직위 해제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4월, 좌파는 활동들을 조정하기 위해 다멘(Damen)과 레포씨와 포르티치아리를 통해서 (...)‘협상위원회(Entente Committee; Comitato di intesa)’를 창설했다. 그람시 지도부는 이 위원회를 맹렬히 공격했고, 그것을 일종의 ‘조직된 분파’이라고 비난했다. 사실상, 좌파는 스스로를 하나의 분파로 조직하는 것을 아직 원하지 않았고 , 그들이 여전히 대다수인 이상 당으로부터 제명될 어떤 빌미도 제공하길 원치 않았다. 보르디가는 부과되어 있던 규율의 틀 밖으로 나가기를 원치 않아서 처음에는 그 위원회에 참여하길 거부했다. 6월에 가서야 그는 다멘, 레포씨 그리고 포르티치아리의 입장에 동참했다. 그는 그 좌파의 ‘입장(platform) ’의 초안을 작성하는 일을 떠맡았다. 그 입장은 볼세비키화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공격이었다.”(이탈리아 코뮤니스트 좌파, 제 1장).
“제명의 위협 아래에서 협상위원회 (Entente Committee)는 규율원칙을 존중해서 해산해야만 했다. 그것은 다수로서의 이탈리아좌파의 종말의 시작이었다. ”(위와 같은 출처)
파시스트의 억압 때문에 해외에서 개최된 1926년 1월 대회에서 좌파는 겨우 9.2%의 표를 얻은 “리옹 테제(Lyon Theses)”를 제시했다. CI의 지시들을 적용해서 취해진 정책, 젊고 거의 정치화되지 않은 인자들를 대거 유입한다는 정책이 이제 열매를 맺었다. 리용테제는 망명 중 이탈리아좌파의 정책 방향을 결정하게 되었다.
보르디가는 1926년 2월부터 3월까지 CI의 제 6대 확대된 행정위원회 동안 마지막 전투를 벌이게 되다. 그는 CI의 기회주의적 표류를 비난했고, “분파들의 역사는 레닌의 역사”이고 분파들은 병도 아니고 이 병의 증상도 아니라 “기회주의적 영향들에 맞선 방어” 반응임을 시인하면서 이 문제가 당장의 사안이 될 것으로는 내다보지 않으면서 분파들의 문제를 언급했다.
1926년 9월 칼 코르쉬(Karl Korsch)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르디가는 쓰기를, “ 우리는 당들과 인터네셔널의 분열을 원할 필요가 없다. 분열이 가능하기 전에, 우리는 인위적이고 기계적인 규율의 경험을, 그것으로부터 초래되는 부조리한 실천들과 함께 허용해야만 한다, 어떻게든 우리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입장들 결코 비판하지 않고 만연한 노선과의 연대를 표현하지 않으면서 (...). 일반적으로 나는 오늘날의 우선순위는 조직화와 작전들의 영역이 아니라 훨씬 더, 정치적인 이데올로기, 좌익이고 국제적이며 코민테른에 의한 수난을 당한 그런 이데올로기의 정교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한 측면에서 허약함은 어떤 국제적인 발의도 아주 어렵게 만들 것임을 의미할 것이다.(보르디가, 이탈리아 코뮤니스트 좌파에서 인용).
이것들은 또한 1928년 4월 파리근교 팡탱(Pantin)에서 개최된 그 최초의 대회 후 결국에 창설되는 이탈리아 코뮤니스트 당 좌파 분파를 받치는 기초들이였다. 그 당시 브뤼셀, 뉴욕, 파리 그리고 리용, 이렇게 총 네 개의 “연합들(federations)”이 존재했고 룩셈부르크와 베를린 그리고 모스크바에 투쟁가들이 있었다.
그 대회는 그것의 전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첫째, 코뮤니스트 인터네셔널의 좌파 분파를 결성하는 것
둘째, (…)
셋째, 두 달에 한 번씩 프로메테오(Prometeo)라는 이름의 잡지를 출판하는 것
넷째, 기회주의와 기회주의자들에 맞서 가차 없는 투쟁을 수행할 임무를 가진 좌파 그룹들을 건설하는 것
다섯째, 채택된 즉각적인 목표는,
- 코뮤니스트선언(Communist Manifesto)에 충실하고 제 3 차 세계대회의 테제들을 수용하는 인터네셔널로부터 축출된 모든 인자들을 재통합하는 것
- 레온 트로츠기를 회장으로 하여 제 6차 세계대회를 소집하는 것
- 제 15차 러시아 대회의 결의들에 연대를 선언하는 모든 인자들의 제명을 제 6차 세계대회의 현안으로 상정하는 것이다.”
보여지는 바와 같이
- 그 분파는 자체를 “이탈리아”의 것으로가 아니라 CI의 한 분파로 생각했고,
- 프롤레타리아의 삶이 CI 안에 여전히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여전히 구출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겼으며,
- 또한 러시아당이 CI대회의 결정들을 따라야 하며, 공공연히 배반한 모든 이들을 (인터네셔널의 다른 당들과 관련해서 이전에 이미 그렇게 했듯이) 축출함으로써 “제 집안을 정리 정돈해야 한다”라고 생각했고
- 노동자들에 대해 전반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CI의 투쟁가들 사이에서 개입하는 것을 스스로의 임무로 여겼다.
1945년까지 그 분파는 상당한 업무를 수행하고 되고, 그 뒤부터 1952년까지 프랑스 코뮤니스트좌파(the Gauche Communiste de France: GCF)가 그 업무를 계속하고 보충했다. 우리는 우리의 기사들, 내부 문건들 그리고 토론들에서 이미 자주 이들의 작업을 참조점으로 삼아왔기에 여기서 그것을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다.
이탈리아 분파의 근본적인 공헌들 중 하나로서 이 보고서의 핵심인 것을 들자면 정확히, 노동자운동의 경험 전체를 바탕으로 한 분파 개념의 발전 바로 그것일 것이다. 이 개념은 이 보고서의 초입에서 이미 대략적으로 정의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분파 개념이 정의된 우리 간행물의 한 기사로부터 몇 문단을 인용하는 선에서 머물려 한다(“이탈리아분파와 프랑스코뮤니스트좌파”; 국제평론(International Reviews:IR) 90호12).
“우리의 간행물에서 우리는 당과 분파 형식들 사이에서 이탈리아 좌파가 작업해낸 구분을 자주 다뤄왔다.(특히, IR 59호, 61호 그리고 64호에서 ‘마르크스주의 전통 안에서 분파와 당의 관계’에 관한 우리의 연구를 참조 ). 분명히 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문제의 주요한 몇 줄들을 여기에서 환기할 수 있다. 코뮤니스트 소수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혁명적 운명의 한 표현으로서 영구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 소수가 노동자계급의 즉각적인 투쟁들에 갖는 영향력은 그것의 수준과 노동자 대중들의 의식성의 정도에 의해 결정된다. 공개적이고 점점 더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시기에 만이 그 소수는 영향력을 갖기를 바랄 수 있다. 오직 이러한 조건들 아래에서만 그 소수는 하나의 당으로서 묘사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역사적으로 퇴조하고 반혁명이 승리하는 그러한 시기에 혁명적 입장들이 중요성을 띠고 계급 전체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갖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런 시기에는 유일하게 가능하지만 극히 중요한 일은 바로 분파의 일이다, 즉 계급 역량들의 균형이 또 다시 코뮤니스트 입장들로 하여금 프롤레타리아계급 전체에게 영향력을 갖도록 가능하게 만들 그 때를 대비해 미래의 당 건설을 위한 정치적 조건들을 준비하는 것이다. ”
“좌파 분파는 프롤레타리아 당이 기회주의의 영향으로, 다시 말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그 당에 침투함으로써 퇴행되어갈 때 형성된다.혁명적 강령을 지지하는 분파의 책무는 그 당내에서 승리하기 위해 조직된 투쟁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 분파가 성공한다면 그것의 원칙이 승리하고 그 당이 구출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 당은 퇴행을 계속하여 무기와 짐을 모두 건내 주고 결국 부르주아 진영 안으로 전향하게 된다. 프롤레타이라 당이 부르주아 진영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을 결정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전향의 가장 중요한 징후들의 하나는 프롤레타리아적인 정치생활이 그 당 안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좌파 분파의 책무는 그 당을 바로잡을 희망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그 당 내부에서 투쟁을 계속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에 좌파 경향들은 CI의 당들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런 당들은 종종 야비한 술책들까지 동원해서 이들을 제명했다. 프롤레타리아 당이 일단 자본주의 진영으로 넘어 가버리면 회귀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프롤레타리아계급은 혁명을 향한 길로 되돌아가기 위해 새로운 당을 건설해야 하고, 분파의 역할은 적에게로 넘어가버린 낡은 당과 미래의 당 사이에 놓인 ‘다리’가 되는 것으로, 그 미래의 당을 위해 강령적 기초를 세워야 하고, 그 당의 골격이 되어야 할 것이다.당이 일단 부르주아 진영으로 넘어 가버리면 그것 안에는 그 어떤 프롤레타이아적 삶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늘 트로츠키주의의 전술들 중의 하나였고 좌파 분파가 항상 거부해 온 ‘침투주의(entryism)’를 혁명가들이 수행하는 것은 쓸모없고 위험하다는 점이다. 부르주아의 당, 다시 말해 계급 입장들을 놓고 볼 때 불모지인 그러한 당 안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유지하려는 시도들은 결국 그 당을 조금이라도 바로 세우기는커녕 오히려 그러한 시도를 행한 조직들의 기회주의적 퇴행이 가속되는 것 이외의 어떤 다른 것도 결코 불러오지 않았다. 그런 방식으로 얻어진 ‘ 새로운 영입(recruitment)’과 관련해서는, 그것은 특히 혼란스럽고, 기회주의로 병들어 결코 노동자계급의 선봉을 형성할 수 없었다.”
“사실상, 이탈리아분파와 트로츠키주의의 근본적인 차이들 중 하나는, 혁명역량을 재조직할 때 이탈리아분파는 CI의 퇴행에 맞선 투쟁에 헌신했던 다른 모든 경향들과 토론하는데 열려있긴 했지만 그래도 항상 최대의 명료성과 강령적인 엄격함에 대한 필요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그와는 반대로 트로츠키주의 경향은 정치적 입장들을 사전에 진지하게 토론하거나 조율하지 않고 오직 1917년 혁명과 초기 CI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들 중의 하나인 트로츠키의 권위와 ‘인물들(Personalities)’ 사이 이뤄진 합의들에 본질적으로 의존하면서 성급하게 조직들의 건설을 시도했다.”
“트로츠키주의가 이탈리아분파와는 반대의 위치에 있는 또 다른 문제는 새로운 당을 건설할 시기와 관련되었다. 트로츠키와 그의 동지들에게는 새로운 당의 건설 문제는 낡은 당이 프롤레타리아계급에게 있어서 그 존재를 상실하는 그 순간부터 즉시 현안이 되었다. 이탈리아분파에게 그 문제는 매우 분명했다.‘분파의 당으로의 전환은 서로 밀접하게 의존적인 두 가지 요소들에 의해 결정된다.’”
이 문구는 우리가 공간의 제약 때문에 위에서 다루지 않은, 트로츠키주의의 방법들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 (트로츠키) 경향이 부르조아 진영에 합류하기 이전 그것이 갖고 있던 성격들 중 두 가지가 다음과 같다는 것은 중요하다:
- 첫째, 그 어느 순간에도 분파라는 이름을 그들의 개념에 포함하지 않았다. 트로츠키주의의 시각에서 보자면, 한 당에서 다른 당으로 이동하는 것이어서, 그래서 혁명가들이 극소수로 존재하는, 계급의 후퇴기 동안에는 그들의 조직은 ‘소당(mini-party)’으로 간주되어야 했다. 한편 이 ‘소당’ 개념은1930년대 중반 이탈리아분파 자체에서 출현했었고 현재 ICT의 개념인데, 왜냐하면 그것의 주요 구성요소가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소당(Partito Communista Internazionalista)이라 불리기 때문이다.
- 둘째, 트로츠키는 (비록 그 혼자만은 아니였을 지라도) 반혁명의 정도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얼마나 잘못 이해했는지는 프랑스에서 1936년 5월-6월에 있었던 파업들을 그가 “혁명의 시작”이라고 본 것에서 잘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역시 ICT에 의해 거부된) 역사적 경로(historic course)개념은 이탈리아분파에게 근본적이었다.
그 좌파가 자체의 역할을 완수하는 근본적인 전제 조건으로 여겼고 그 좌파에 항상 혼을 불어넣었던, 명확화로의 의지는 분명히 이론 편향과 분리될 수 없었고 한 때 결정적으로 보였던 분석들과 입장들을 문제시할 지속적인 필요성과도 분리될 수 없었다.
5) 결론을 맺으며
보고서의 1부를 끝내며 우리는 코뮤니스트 인터네셔널을 떠난 경향들의 이후의 괘적들로 아주 간략하게 되돌아가 보아야 한다. 독일네덜랜드좌파로부터 출현한 경향은 KAPD와 KAPN이 사라진 뒤에도 남아 있었다. 그것의 가장 주요한 대표는 네덜랜드의 국제주의 코뮤니스트그룹(Group of Internationalist Communists: GIK)이었다. 이 그룹는 (예를 들어, 파울 마틱(Paul Mattick)에 의해 격려된 미국 그룹, 생생한 마르크주의(Living Marxism)에 대해서 처럼) 네덜랜드 밖에서도 영향력을 가졌다. 1930년대의 가장 비극적이고 위기의 순간이었던 스페인내전(Spanish Civil War) 동안 이 그룹은 반파시즘을 향해 어떤 양보도 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국제주의적인 입장을 옹호했다. 이 그룹은 또한 (민족 문제에 있어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독일좌파의 입장을 채택한) 빌랑(Bilan)그룹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에 관하여 이탈리아좌파의 전통적인 입장을 거부하고 대신에 독일-네덜랜드좌파의 입장을 수용한 프랑스코뮤니스트좌파(Gauche Communiste de France)의 경우를 포함한 코뮤니스트좌파 내부에서 반성을 자극했다.
그러나 이 경향은 결과적으로는 치명적인 것으로 밝혀지는 (그리고 KAPD에게는 낯설었을) 입장들 두 가지를 채택했는데, 1917년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 분석하는 것과 당이 필요하다는 점을 거부하는 것이 그 두 가지였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결국 그 그룹은 과거에 존재했던 일련의 모든 프롤레타리아 조직들을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범주화해버리게 되었고 최종적으로는 노동자 운동의 역사를 그리고 그것이 미래를 위해 제공할 수 있을 교훈들을 거부하게 되었다.
이 두 가지 취약점들의 결과로 그것은, 비록 평의회주의적인 사상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계속 영향력을 갖고 있긴 할지라도, 앞으로 미래의 당으로 그래서 코뮤니스트혁명으로 나아가게 될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기회를 스스로 가로막았다.
보고서의 제 2부로 연결하는 마지막 개요적인 점은 바로, ICC는 하나의 분파로 간주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그 당연한 대답은, 분명히 그렇게 간주될 수 없다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 조직은 그 어느 순간에도 어느 한 프롤레타리아 당의 내부에서 건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대답은 이미 1950년대 초 우리의 동지 MC가 인터네션날리스메(Internationalisme) 그룹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보낸 편지 안에 다음과 같이 제시되었었다.
“분파는 상대적으로 짧게 존재하기 때문에 옛 조직과 직접적 유기적 연속성을 가졌다. 종종 그것은 분열(Split)의 바로 그 순간까지 옛 조직 내에 남아 있었다. 그러한 분열은 그 분파가 새로운 당으로 전환되는 것과 종종 동일했다(예를 들어, 볼세비키분파와 스파르타쿠스동맹, 그리고 옛 인터네셔널의 거의 모든 좌파 분파들 처럼). 오늘날, 이러한 유기적 연속성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 그 분파는 영구적인 위기와 국가 자본주의로의 진화를 특징으로 하는 우리 시대가 부과하는 문제들과 같은 그런 근본적으로 새로운 문제들과 대면할 필요가 없었고 또 극히 작은 경향들로 산산히 흩어져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새로운 원칙들을 만들어내도록 요구되기 보다는 그것이 획득한 혁명 원칙들 안에 더 단단하게 고정되었다. 그 분파는 새로 만들기 보다는 유지할 것이 더 많았다. 이 덕분에 그리고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걸쳐서 그 직접적이고 유기적인 연속성 덕분에 그것은 형성 중에 있는 새로운 당이었다.
[이 그룹은] , 비록 부분적으로 분파의 임무들을 -예를 들어 과거의 경험을 재점검하고 투쟁가들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갖고 있을 지라도, 새롭게 진화하는 상황들과 새로운 전망들에 대한 분석도 수행해야 하지만 미래당의 강령을 새로 만들 필요는 없다. 그것은 앞으로 건설될 미래의 당의 한 구성 요소에 불과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재건설에 단지 한 구성 요소를 이룰 뿐이다. 그 조직적인 성격 때문에, 그것이 강령적인 면에서 공헌하는 기능은 오직 부분적일 수 밖에 없다.”
ICC가 존재한지 40년이 되는 지금 우리는 30주년을 맞이해서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했던 것과 동일하게 접근해야 한다. “ ICC가 지난 30년 동안 살아남아서 그 책무들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 그 대부분이 우리는 이탈리아 코뮤니스트 좌파의 공헌들의 덕이라고 본다. 이 시기동안 활동으로부터 우리가 끌어낼 수 있는 긍정적인 대차 대조표의 비밀은 우리가 그 분파의 가르침에, 더 일반적으로는 ,특히 그것이 그렇게 잘 배운 마르크스주의의 정신과 방법에 충실했던 점에 있다. ”(ICC의 30년: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과거에서 배우기 ” , 국제평론, 제 123호13)
1“Minutes of the Central Committee Meeting of 15th September 1850” in Marx: The Revolutions of 1848, Penguin, 1973, p341 ) 마르크스엥겔스저작집(MEW) 제 8권, 598쪽
2이때 주목할 만 한 점이 있다. 이 회합 직후 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보냈던 편지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에커리우스가 이전에 건설을 시도했고 그래서 마르크스를 초대했었던 조직들이 마르크스에게는 인위적으로 여겨졌던 반면에 이번에는 그 노력이 진지한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그 초대를 이번에는 받아들였다고 한다.
3이 부분과 그 다음 부분에서 우리는 2개의 주요 나라들, 즉 영국과 프랑스의 당들을 검토함이 없이 4개의 다른 당들, 즉 러시아, 네덜란드,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의 당들 안에서의 분파들에 중점을 둘 것이다. 사실상,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그 이름값을 할 만한 좌파 분파가 존재하지 않았는데, 그 주요한 이유는 그 내부에서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극도로 미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는 제 1차 대전에 대항 한 초기의 조직된 반응이 사회당 안의 소수에게서가 아니라 CGT노동조합 내부의 소수로부터, 즉 노동자의 삶(La Vie Ouvriere)를 간행한 로스마(Rosmer)와 모나트(Monatte)를 주변의 그 핵심인자들부터 나왔다.
4국제평론 (International Review)제 153호, ‘프로레타리아당의 본질과 기능’에 재수록되었다
5 “나는 드트리뷴의 편집진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우리는 우리 주위로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할 있는 모든 것을 다해야 하지만, 만약 이것이 실패한다면, 우리가 마지막까지 싸운 뒤에 우리의 모든 노력들이 실패한다면, 그때 우리는 항복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다시 말하자면, 드트리뷴에 대한 억압을 수용하는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1909년 2월 16일 카우츠키에게 보낸 편지) “당 내에서 우리의 힘이 강해질 수는 있지만 당 밖에서의 우리의 힘은 결코 성장할 수 없다”(데벤터대회에서 호르타의 개입발언 (참조:‘네덜랜드좌파 (The Dutch Left; 1900-1914), 3부 : 트리뷴운동’, 국제평론 제 47호))
6탄압을 당한 여러 투쟁가들 중에서, 전쟁의 대부분을 감옥 속에서 보냈던 로자 룩셈부르크와 처음에는 징집되었다가 그다음엔 1916년 5월 1일 시위에서 전쟁과 정부를 비난한 후 요새에 감금당했던 칼 리프그네히트의 경우, 그리고 70살이 넘은 나이에 수감되었던 프란츠 메링의 경우를 우리는 인용할 수 있다.
7두 개의 다른 입장들 중 하나는 트로츠키(Trotsky)의 입장인데, 그는 (적군(Red Army)을 모델로 해서) 노동조합을 노동자에 대한 통제 기구로 만들고 그래서 노동 규율을 상승시키기 위해 노동조합을 국가 안으로 통합하는 것을 원했다. 한편 다른 하나는 레닌(Lenin)의 입장인데, 그는 오히려, “강력한 관료주의적 변형들”을 포함하는 국가에 맞서 노동자들을 옹호하는데 노동조합이 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8암스테르담 사무국이 CI내부에서 좌파 재결집의 축을 구성할 “위험” 때문에 CI 행정위원회는 1920년 5월 4일 그 사무국의 해체를 라디오를 통해 선언했다.
9그 당시에 네덜랜드 좌파와 판네쿡은 당이 필요함을 거부하는 오토 륄레가 발전시킨 비젼에 맞써 투쟁함에 있어서 확실히 명확했다. 하지만 그 동일한 입장은 나중에 평의회주의자들(councilists)의 입장 … 그리고 판네쿡의 입장이 된다.
10이 대표단은 어느 상선 하나의 선원들이 선상 폭동을 일으켜 항로를 무르만스크(Murmansk)로 바꾸도록 설득함으로써 (내전과 봉쇄 때문에 육로로 도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던) 러시아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11호르타는 그가 사망하는 날 저녁에 쓴 마지막 글에서 그 자신의 실수를 파악하고 그 동지들에게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런 오류들로부터 교훈을 얻도록 격려했다.(“독일-네덜랜드좌파”, 제 5장 끝부분, 4.d. 참조)
12The Italian Fraction and the French Communist Left
1330 years of the ICC: Learning from the past to build the fu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