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상치 못한 영국의 EU 국민투표 결과 직후,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은 불안과 공포의 파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현재 세계 질서를 책임지고 있다고 여기는 우리의 지배자들이 어떻게 그런 일 – 자본가 계급의 ‘합리적’ 이해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 – 이 발생하도록 놔두었는가? 어떻게 도박꾼, 자기도취에 빠진 악당이자 사기꾼이 이제 세계의 가장 강력한 국가의 수장인 것인가?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도, 전 세계의 향방에 대해 이 사건이 이야기해주는 바가 무엇인가?
1부. 계급투쟁 100년
2. 우리의 관점에서 인간 사회의 진정한 조건을 계급투쟁의 관점, 그리고 사회의 착취 받는 계급, 진실을 숨기는데 아무런 관심이 없고 자본주의 전복을 목표로 하여 자본주의의 모든 신비화를 간파할 수밖에 없는 투쟁을 하는 프롤레타리아트 관점에서 볼 때만 이해할 수 있다. 똑같이, 현재 당장 지엽적인 사건들은 세계-역사적인 틀 속에 위치 지울 때만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맑스주의 방법의 본질이다. 2017년, 이 해가 러시아 혁명의 100주년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이유로, 세계적 상황에서 최근 진전이 있는 역사적인 시대 – 자본주의 생산 양식 쇠퇴 또는 퇴락의 시대 - 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100년 그 이상을 되돌아보기를 시작한다.
러시아 혁명은 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의 공포에 대한 러시아 노동계급의 대응이었다. 1919년 코민테른이 확인하였듯이, 이 전쟁은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자 자본주의 상승기의 폐막을 나타냈다. 경쟁하는 국가들로 세계를 나누었던 장벽을 허물면서, 자본주의 ‘세계화’의 거대한 폭발 다시 말해 ‘전쟁과 혁명’의 시대가 닥쳐온 것이었다. 모든 나라에서 부르주아 국가를 전복시킬 수 있는 노동계급의 역량,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향해 계급을 지도할 수 있는 정치 정당과 함께할 수 있는 노동계급의 역량은 자본주의 야만을 교체한다는 약속이 역사적으로 가능하며 필연적이라는 것을 나타냈다.
더욱이, 1917년 혁명 운동의 전위에 있었던 볼셰비키 당은 러시아에서 노동자평의회(소비에트)의 권력 쟁취가 오직 세계 혁명의 발단으로서 첫 타격일 때에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와 똑같이, 독일 혁명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10월 봉기가 제기한 도전에 반응하지 않고, 자본주의 체계를 끝장내지 않는다면, 인류는 심화하는 야만의 시대, 인간의 문명을 위험에 빠뜨릴 전쟁과 파괴가 휘몰아치는 시대에 돌입할 것임을 이해했다.
세계 혁명을 염두에 두고, 이제는 반혁명적인 사회민주당에 대한 대안을 마련할 필요에 따라 볼셰비키 당은 코민테른의 창설을 주도했고, 1919년 모스크바에서 첫 대회가 열렸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새로운 코뮤니스트당은 서유럽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확장되는 선두에 있었다.
3. 러시아 혁명은 세계적인 수준의 대대적 파업과 봉기를 촉발해 실제로 부르주아지의 제국주의 학살을 중단하도록 강제했지만, 예외적으로 헝가리와 독일의 도시들에서의 일시적인 몇몇 시도를 제외하면, 국제 노동계급은 다른 국가들에서 권력을 쟁취할 수 없었다. 잠재적이지만 자신의 무덤을 팔 이들의 위협에 직면한 지배 계급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응하여 숙원의 적과 연합함으로써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봉쇄, 침략, 그리고 무장된 반혁명을 지원함으로써 러시아의 소비에트 권력을 고립시켰고, 제국주의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자본에 충성을 보여준 사회민주주의노동자정당과 노동조합을 이용하여 독일의 노동자평의회에 침투하거나 그것을 무력화하고, 그들이 새로운 ‘민주주의적’ 부르주아 정권에 순응하도록 우회시켰다. 그러나 패배는 이제는 반동적인 지배계급의 지배 역량 때문만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미성숙함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노동계급은 개혁을 위한 투쟁에서 혁명을 위한 투쟁으로 갑작스러운 전환에 직면해 있었고, 여전히 민주주의적 선거를 통해, 중요 산업의 국유화 또는 사회의 가장 가난한 계층에게 사회적 이득을 양도해 자본주의 정권을 개선시킬 가능성에 대한 수많은, 심각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이에 더하여 노동계급은 꽃다운 젊은이들이 학살당한 전쟁, ‘승리한’ 노동자와 ‘패배한’ 국가의 깊은 분리를 일으킨 전쟁의 공포에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당은 고립, 내전, 그리고 경제 붕괴에 직면해 있었고, 더욱이 소비에트 국가기관과의 복잡한 문제로 얽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볼셰비키 당은 일련의 끔찍한 오류를 저질렀는데, 이러한 오류는 결국 노동계급과 폭력적인 대립을 앞당겼다. 특히 노동자의 반대와 정치조직에 대한 억압을 포함하는 ‘적색 테러’는 1921년 크론슈타트 봉기를 진압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는데, 이 봉기는 1917년에는 존재했던 진정한 소비에트 권력 회복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국제 수준에서 코민테른 역시 세계 혁명의 필요보다 소비에트 국가의 필요에 점점 더 기울었고 원래의 명료함을 훼손하는, 1922년에 채택한 통일전선전술(United Front Tactics) 같은 기회주의적 정책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타락은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 정당으로 유명하고 중요한 좌익 반대파의 등장에 이바지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정당에서 이탈리아 분파가 결국 패배한 혁명의 교훈을 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에 밝혀낼 수 있었다.
4. 따라서 세계 혁명 물결의 패배는 1917~18년의 혁명가들이 이러한 실패의 결과 – 야만의 시대로의 새로운 추락 - 에 대해 경고했던 것이 진실임을 확인시켜주었다.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변질되었을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에 반대하는 자본주의 독재로 변해버렸다. 그것은 ‘일국 사회주의’ 원칙을 내세운 스탈린주의 국가기관의 승리로 (비록 시작한 것은 그들이 아니었을지라도) 확인한 과정이었다. 혁명의 위협을 끝내기 위해 삽입된 ‘평화’는 곧 새로운 제국주의 갈등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1929년 과잉 생산으로 인한 세계 위기의 발발로 가속화, 강화되었는데, 이러한 과잉 생산은 자본 확장이 그 내재적 한계에 도달할 것이라는 신호였다. 체계의 심장부, 특히 미국과 독일의 노동계급은 경제적 불황의 충격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으나, 이 계급은 비록 미국과 스페인에서 일부 진정한 계급 저항의 표현이 있었음에도 10년 전 혁명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근본적으로 패배한 계급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세계 전쟁으로의 또 다른 진군을 막을 수 없었다.
5. 반혁명의 갈고리에는 세 개의 주요한 갈퀴가 있었다. 스탈린주의, 파시즘, 그리고 민주주의. 이들 각각은 노동계급의 정신에 깊은 상처를 새겼다.
반혁명은 혁명의 불꽃이 가장 높게 타올랐던 국가들 – 러시아와 독일 - 에서 가장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유령을 쫓아내야 할 필요, 역사상 가장 큰 경제적 위기에 적응할 필요, 그리고 전쟁 준비의 필요에 직면한 모든 곳에서 자본주의는 전체주의적 형태를 띠기 시작했고, 사회경제적 삶의 모든 모공에까지 침투했다. 스탈린주의 정권은 완전한 전쟁 경제, 모든 반대의 격멸, 무시무시한 착취율, 광범위한 강제 수용소 등의 기조를 세웠다. 그러나 수십 년 후의 삶과 죽음에서 스탈린주의의 가장 최악의 유산은 그들이 10월 혁명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가면을 썼다는 것이다. 자본을 국가의 손에 집중시키는 것이 사회주의인 것인 양, 제국주의 확장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인 양 세계에 팔려나갔다. 10월 혁명의 기억을 여전히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을 때는 많은 노동자가 이런 사회주의 조국이라는 신화를 믿었지만, 스탈린주의 정권의 진정한 본질이 계속 폭로됨에 따라 더 많은 이들이 혁명에 대한 모든 사상에 등을 돌렸다. 스탈린주의가 코뮤니즘(공산주의)의 전망, 노동계급 혁명이 높은 수준의 사회 조직 형태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에 가한 피해는 막대하다. 스탈린주의가 구름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끌어내리지 않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국제 계급 운동의 패배와 무엇보다도 정당을 타락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트라우마가 된 1914년 사회민주주의당의 변절 이후, 20년이 되지 않은 기간 동안 노동계급이 힘차게 만들고 방어한 조직이 노동계급을 다시 한번 배신하고 가장 최악의 적이 된다.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신감, 사회적 삶을 더 높은 수준으로 인류를 이끌어갈 가능성에 대한 확신에 이보다 더 큰 타격이 있을 수 있었을까?
지배계급, 그리고 중간계급에 버림받은 이들, 그리고 심지어 노동계급 운동의 변절자들로부터 출발한 운동인 파시즘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가장 강력한 분파가 받아들였는데, 이는 그들의 필요 - 프롤레타리아트를 분쇄하고 전쟁 동원을 완수하는 것 - 에 부합했기 때문이었다. 파시즘은 부르주아 사회의 표면 아래에 있는 비합리성의 어두운 힘을 해방하는 근대적 기술 사용에 특화되어 있었다. 특히 나치즘은 독일에서 더욱더 파괴적인 패배의 산물이었는데, 중세적 대학살을 안정화, 산업화시키고, 결국 자기-파괴를 향한 광적인 행진으로 타락한 대중들을 끌고 가는 등 비합리성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노동계급은 전체적으로 파시즘에 대한 어떤 긍정적인 생각에도 흔들리지 않았으나, 반대로 반파시즘의 유혹 - 다가올 전쟁에 대비해 뭉치자는 주요한 호소 - 에는 훨씬 취약했다. 그러나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에 대한 전례 없는 공포는 스탈린주의 강제수용소 못지않게 인류의 미래에 대한 확신 – 곧 코뮤니즘의 전망 – 에 대한 타격이었다.
선진 산업화 국가에서 부르주아 지배의 주요한 형태인 민주주의는 이러한 전체주의적 형태에 대해 적으로 자신을 포장했는데, 사실은 혁명적 노동자 운동을 끝장낼 때, 스탈린주의 정권과 전쟁에서 연합하여 히틀러 독일을 상대할 때에는 파시즘 지지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전쟁 중에 무너져 버린 파시즘이나, (중국과 기괴한 북한 정권의 경우를 제외하고) 경제 위기의 압박과 자본주의 세계 시장과 - 이를 국가 조례 등으로 회피하려 하였으나 그러지 못하고 - 경쟁할 수 없는 무능력함으로 무너져 버린 파시즘보다 훨씬 더 지능적이고 지속 가능한 자본주의적 전체주의의 형태임을 스스로 입증해 보였다.
체계의 위기에 대해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관리자들은 시장의 힘을 왜곡시키는 국가와 신용의 힘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으나, 물질적, 전략적 약점으로 인해 동구 블록이 선택했던 하향식 중앙집중화라는 극단적인 형태를 선택하도록 강요된 것은 아니었다. 민주주의는 그 경쟁자들에 비해 오래 살아남았고, 이제는 서구의 오랜 자본주의의 심장부에 남은 유일한 경기가 되었다. 오늘날까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파시즘에 반대하여 민주주의를 지지할 필요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불경한 것이며, 자본주의의 정면 뒤에 지배계급의 독재가 있다는 주장은 음모론으로 기각된다. 이미 1920년대와 30년대, 민주주의에서 대중매체의 발전은 괴벨스가 부러워한 공식적인 선전 유포 모델을 제공했으며, 그동안 미국 자본주의의가 개척한, 여가와 가족의 삶의 영역에까지 침투한 상품 관계는 자본주의의 전체주의적 지배로 더욱 교묘한 경로를 제공했고, 이는 단순히 정보제공자와 노골적인 테러에 의존하는 것보다 효과적이었다.
6. 30~40년대 동안 국제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던 혁명적 소수는 매우 감소했는데, 그들의 희망과는 반대로 종전(終戰)은 새로운 혁명의 등장을 일으키지 않았다. 반대로 1917년의 교훈을 학습하여 처칠을 전위로 한 부르주아지가 독일 도시들에 융단 폭격을 하는 한편, 1943년 북부 이탈리아의 대대적 파업에 대해 “이탈리아 스튜는 그들의 국물로 만들어라!”라는 정책을 통해 어떤 프롤레타리아 봉기도 가능하지 않도록 그 싹을 잘라버렸다. 그러므로 종전은 노동계급의 패배를 심화시켰다. 그리고 또다시 혁명가들의 기대와 달리, 전후 경제는 더 심한 경제적 불황에 돌입하지 않았으며, 전쟁에 승리한 블록 간의 제국주의 적대가 인류의 목을 조이려 계속 위협하고 있음에도 세계 전쟁으로의 새로운 추동 또한 없었다. 오히려 전후 시기는 미국의 지도력 아래 자본주의의 진정한 확장기였으며, 세계 시장의 일부분(러시아 블록과 중국)이 서방 자본의 침투를 차단하려 했음에도 그러했다. 동구 블록의 긴축 재정과 억압이 계속되자 중요한 노동자들의 봉기(1953년 동독, 1956년 폴란드와 헝가리)가 발생했으나, 서구에서는 1947년 프랑스의 파업과 같이 일부 전후 불만에 대한 표현이 있었으나, 계급투쟁은 점차 사그라들어 사회학자들이 소비주의의 확산과 복지국가 발전의 결과로 노동계급이 ‘중산계급화’한다는 이론화를 시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실제로 1945년 이후 자본주의의 이러한 측면들은 중요하게 남아, 노동계급 자신을 혁명 세력으로 재조직화할 가능성에 무게를 더했다. 소비주의는 노동계급을 원자화했고, 모든 사람이 개인적 소유의 낙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환상을 전파했다. 복지주의는 좌익 정당이 종종 도입했는데, 이것은 노동계급의 승리로 표현되지만, 사실 자본주의 통제의 훨씬 더 중요한 도구이다. 복지주의는 노동계급의 자신감을 갉아먹고 국가의 자비에 의존하도록 만든다. 또한, 대규모 이민의 단계에서 민족 국가의 복지 조직은 건강·의료, 주택, 그리고 다른 복리후생에의 접근의 문제에 있어서 이민자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노동계급 내의 분리를 발생시키는 잠재 요인이 될 것이었다. 그동안 1950년대와 60년대 노동계급의 명백한 소멸과 더불어 혁명적 정치 운동은 역사상 가장 고립된 상태로 축소되었다.
7. 이러한 암흑기에도 계속 활동한 혁명가 중 일부는 자본주의가 관료제 국가 관리 덕분에 맑스가 분석한 경제적 모순을 통제할 방법을 학습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의 국제주의 그룹(Internacialismo group)과 같은 더욱 선견지명이 있었던 이들은 오랜 문제들 – 시장의 한계, 이윤율의 하락 경향 – 이 사라질 수 없으며, 60년대 후반 경험한 재정적 어려움은 노골적인 경제 위기의 새로운 단계를 예고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들은 또한 프롤레타리아의 새로운 세대가 계급투쟁을 다시 주장함으로써 이러한 위기에 반응할 수 있는 역량에 대해 환호했는데, 이러한 예측은, 수십 년 동안의 반혁명이 끝을 맞이했으며, 세계 전쟁으로의 과정을 촉발하는 새로운 위기를 막아온 주요한 방해요인이 프롤레타리아 투쟁이었음을 보여준, 1968년 5월 프랑스의 엄청난 운동과 그 후의 국제적인 투쟁의 물결로 충분히 확인되었다.
8. 60년대 말 70년대 초의 프롤레타리아 봉기에 앞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폭넓은 계층 사이에서 정치 불안이 고조되었는데,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러했다.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과 인종 분리에 대한 반대가 있었고, 현대 자본주의의 분석에서 더욱 이론적으로 접근하는 데 관심을 표명한 독일 학생들 사이의 운동, 프랑스에서의 베트남 전쟁과 대학의 억압적 정책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운동, 현명한 사회학자들이 진부하다고 한 계급투쟁의 필연성을 다시 주장한 전후 이탈리아 맑스주의 ‘오퍼라이스트(operaist)’ 또는 자율주의적 경향 등이 있었다. 모든 곳에서 전후 경제 번영의 감미로운 과실이라고 광고하는 비인간적인 삶에 대한 불만족이 고조되었다. 프랑스와 다른 산업 국가들에서 전투적 투쟁의 증가로 동력을 얻은 소수는 의식적인 국제주의 정치 전위의 건설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이러한 소수의 일부가 좌익공산주의(코뮤니스트좌파)의 기여를 재발견하기 시작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9.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다시피, 이러한 소수와 광범위한 계급 운동의 만남은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가끔 발생했다. 이것은 불만을 품은 소부르주아지가 정치화된 소수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일부 기인한다. 특히 학생 운동은 자본주의 조직의 변화를 가져올, 다음 수십 년 넘게 존재할 강력한 프롤레타리아 핵심이 부족했다. 또한, 전 세계에 걸쳐 강력한 계급 운동 그리고 노동조합과 좌파 정당이 노동자들을 저지하느라 발생한 심각한 대결에도 계급투쟁의 다수는 방어적으로 남아있었다. 오직, 아주 가끔 직접 정치적 의문을 제기할 뿐이었다. 더욱이 노동계급은 동서 간 ‘철의 장막’ 그리고, 자본 중심에 있는 소위 ‘특권적’ 노동자와 이전 식민지 지역 빈곤한 대중들 사이의 분리와 같은 세계적 수준의 중요한 분리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는 동안 정치적 전위의 성숙은 즉각적인 혁명의 전망에 따라 억제되었고, 소부르주아지 성급함의 전형인 활동가(activist) 관행들은 혁명적 작업과 정치화된 소수가 직면한 거대한 규모의 이론적 작업이 가지는 장기적 성격을 포착하는 데 실패했다. 활동가주의(activism)의 우세는 소수의 다수가 좌익주의(leftism)의 부활에, 또는 투쟁이 침체 되었을 때는 타락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좌익주의를 거부한 이들은 종종 조직 건설의 문제 전체를 거부하는 평의회주의적 주장들에 의해 방해받았다. 그러나 작은 소수는 이러한 방해를 극복할 수 있었고, 성장과 재그룹화 움직임 활동을 개시, 1970년대까지 지속하여 코뮤니스트좌파(좌익공산주의)의 전통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코뮤니스트좌파 국제대회(International Conferences)의 몰락으로 상징되는 1980년대 초 갑작스럽게 끝났다. 1968년 거리에서 그리고 회의에서 제기되었던 동구와 서구의 자본주의를 새로운 사회로 대체하는 문제에 싹을 틔우고 보다 진전된 정치 수준에 이르게 하는 데 실패한 이 시기의 투쟁은 결국 뒤이은 시대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도 프롤레타리아 에너지의 거대한 폭발은 그 열기를 모두 잃지 않았고, 지배 계급은 이 에너지의 시선을 돌리고, 탈선시키고, 억압하기 위해 합심하여 노력을 기울였다. 근본적으로 이는 정치적 수준에서 발생했는데, 여전히 노동계급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자본주의 좌파와 노동조합의 힘을 최대한 이용한 것이었다. 좌파 정부를 선출할 것이라는 약속을 통해서든, 1968년 이후 20년 동안의 급진적 노동조합주의 발전과 함께하는 ‘좌익 반대파’ 전략을 통해서든, 노동자들이 여전히 어느 정도는 그들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기관(역자 주: 노동조합)의 도구화는 계급투쟁 억압에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동시에, 부르주아지는 세계 위기에 따른 모든 구조 변화를 가능한 전부 이용했다: 한 편에서는 항만, 자동차, 그리고 인쇄 같은 산업들에서 숙련, 비숙련 노동을 모두 대체하는 기술적 변화를 도입하였고, 다른 한 편에서는 과거 자본 중심지의 모든 산업 연결망을 파괴하고, 노동력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싸고 이윤은 엄청나게 큰 주변 지역으로 생산을 옮겨가는 생산 과정의 ‘세계화’를 향한 운동을 가져왔다. 이러한 심장부에서의 노동계급 구성의 변화는, 종종 70년대와 80년대 초반 투쟁 중심지에 있었던 영역에 영향을 미쳤는데, 이제는 계급 원자화에 영향을 미치고 그 계급 정체성을 훼손시키는 데 기여하는 또 다른 요인이 되었다.
10. 1968년 해방된 투쟁의 역동성은, 몇몇 일시중단에도 70년대에 걸쳐 지속하였다. 자기 조직화와 확장에 관한 프롤레타리아 역량의 성숙도는 1980년 폴란드 대중 파업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이 절정은 동시에 쇠퇴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했다. 비록 폴란드 파업이 경제 요구와 정치 요구의 전통적인 상호작용을 드러내 보여주었음에도 폴란드 노동자들은 어떤 지점에서도 새로운 사회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파업은 자기 조직화가 아직 발달 단계였으나 사회 혁명의 필요성에 대해 보다 급진적인 토론이 가능한 맥락을 제공했던 68운동보다 ‘낮은’ 수준에 있었다. 폴란드의 운동은 매우 제한적인 예외를 제외하면 ‘자유로운 서유럽’, ‘민주주의 정부’, ‘독립적인 노동조합’ 등을 그들이 원하는 대안적 사회로 보았다. 서유럽에서는 폴란드의 파업에 대한 몇몇 연대 표현이 있었고, 1983년부터 경제적 위기가 급격하게 깊어짐에 따라 그들의 범위에서 점점 더 넓은 세계적인 투쟁의 파도를 관찰했다. 많은 경우에서 노동자들과 노동조합 사이의 대립이 증가했다. 그러나 전 세계적 투쟁이 발생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연적으로 투쟁에서 의식적인 국제주의의 필요를 인식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즉, 노동조합은 당연히 국가 일부인데, 이러한 노동조합과 충돌했다고 해서 그것이 국가 전복의 필연성을 깨달았다는 의미에서 운동의 정치화가 이뤄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을뿐더러, 인류를 위한 전망을 제시할 만큼 역량이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았다. 70년대보다 더욱, 선진국들에서 80년대의 투쟁은 부문적 요구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고, 이러한 의미에서 역시 급진화한 형태의 노동조합 방해 공작에 취약한 채로 남아있었다. 이 시기 두 블록 간의 제국주의 긴장 심화는 전쟁 위협을 주요한 관심사로 등장하도록 했으나, 평화 운동이 이러한 관심을 분산시켰는데, 평화 운동은 사실 경제적 저항과 전쟁 위험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의식적 발전을 효과적으로 방해한 것이었다. 이 시기 조직 활동을 지속했던 혁명가들의 작은 그룹들은, 그들은 노동자들의 특정 제안에 더욱 직접 개입할 수 있었음에도, 더 심층적인 수준에서 노동계급 내의 ‘정치’에 대한 지배적 의혹에 전체적으로 의견충돌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계급과 그 정치적 소수의 커다란 격차 심화는 그것 자체로 노동계급이 그 자신의 전망을 발전시킬 수 없는 무능력에 기여하는 요인이 되었다.
2부. 해체의 충격
11. 폴란드의 투쟁과 그 패배는 세계 계급 균형을 요약하여 보여주었다. 그 파업들은 동유럽 노동자들이 그들의 러시아 대군주를 대신하여 싸울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 체제 위기 심화에 대한 혁명적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음을 명확히 했다. 실제로 폴란드 노동자들의 물리적 충돌은 그곳의 전 지역의 노동계급에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정치적 결과를 일으켰다. 이들 노동계급은 스탈린주의 정권의 해체를 촉발시킨 정치적 격변 때에는 계급으로서 존재하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이후의 러시아, 헝가리, 그리고 폴란드의 권위주의적 정권이 내재하고 있는 사악한 민족주의 선전 파도에 취약해졌다. 잔혹한 억압 없이는 위기와 계급투쟁에 대처할 수 없었던 스탈린주의 지배계급은 역사적 환경의 변화에 적응할 정치적 유연성이 부족함을 드러냈다. 따라서 1980~81년의 상황은 이미 동쪽 블록의 전반적인 붕괴를 준비하는 것이었으며,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쇠퇴라는 새로운 단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가 자본주의 해체의 시기로 정의하는 이 단계는 보다 광범위한 계급 간의 교착상태에 그 기원이 있다. 1968년 이후 선진국들에서 터져 나왔던 계급운동은 반혁명의 끝을 고하는 것이었고, 노동 계급의 지속적인 저항은 경제 위기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해결책”, 다시 말해 세계 전쟁으로 가는 길을 막는 걸림돌이었다. 이 시기는 “대규모 계급 적대를 향한 과정”으로 정의할 수 있었고, 또한 저항하는 노동계급과 정면으로 맞붙어 패배시키지 않고서는 전쟁으로 향하는 길이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새로운 단계에서는 계급투쟁의 수준과는 별개로 제국주의 블록 양쪽 모두의 해체가 세계 전쟁을 의제에서 제외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과정에 대한 문제가 더는 동일한 용어로 제기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적대자를 극복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무능력함은 자본주의가 인류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야만의 미래밖에 없음을 의미했으며, 이 야만적인 미래의 윤곽은 지역적, 국지적 전쟁, 생태계의 황폐화, 계획적 대량학살, 동족상잔의 사회 폭력이 결합된 지옥과도 같은 광경에서 이미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이데올로기적 패배와 직접적인 물리력이 모두 필요한 세계전쟁과는 달리, 야만으로 떨어지는 이 “새로운” 하강은 더욱 느린 속도로, 노동계급을 집어삼키고 계급으로서 스스로 재구성할 수 없도록 만드는, 더욱 교활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세계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고 있는 상황은 더는 계급 간 세력 균형의 진화 정도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전반적으로 이를 측정하기는 더욱더 어려워졌다.
12. 1968년 이후 코뮤니스트 운동 부활의 초기 단계에는 자본주의 쇠퇴라는 주제가 수많은 지지자를 설득시켰고, 부활한 코뮤니스트좌파의 강령적 기반을 제공했다. 오늘날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코뮤니즘을 인류가 직면한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여기는 새로운 이들의 다수는 쇠퇴라는 개념을 부정할만한 온갖 종류의 이유를 댈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자본주의 쇠퇴의 마지막 단계라고 정의하는 해체라는 것을 언급하기 시작하면,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다소 세계에서 동떨어져 나온 것처럼 여겨진다. 다른 그룹들은 모두에게 자유로운 제국주의 사이의 새로운 시기의 다음과 같은 주요 특성을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그들은 종교적 근본주의와 무시무시한 민족주의와 같은 심각하게 반동적인 이데올로기의 귀환, 자연과 사람의 관계 위기 등의 새로운 시대에 대한 주요한 징후를 인정하는 다른 그룹들은 존재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계급 간 세력 균형의 교착상태로부터 비롯되었다거나, 이러한 현상이 자본주의 쇠퇴의 질적 변화의 표현이라거나, 이러한 모든 단계나 시대가 프롤레타리아 혁명 없이는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끌어내는 이들은 거의 없다. 해체라는 개념에 대한 반대는 종종 국제코뮤니스트흐름의 “세계종말론적” 성향에 대한 비판의 형태를 띠는데, 이는 우리가 해체의 시기를 자본주의 말기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관념론”적이라는 비판은 우리가 해체 배후의 경제적 위기를 핵심 요인으로 오랫동안 바라보았기 때문이지만, 우리는 순수한 경제적 요인이 새로운 시대의 출발에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러한 비판은 역사상 계급 사회의 마지막으로서의 자본주의가 이러한 종류의 역사적 막다른 길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전의 계급사회가 그 쇠퇴의 시기에 진입했을 때와는 달리, 자본주의는 그 내부에서 새롭고 보다 역동적인 생산 양식을 끌어낼 수 없으며, 사회적 삶의 보다 높은 형태로의 유일한 길은 경제적 법칙으로부터 비롯된 어떠한 자동화된 노동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인류 다수의 의식적인 운동, 말 그대로 역사상 가장 힘든 작업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이다.
13. 해체는 두 주요 계급의 전쟁 중 교착 상대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1989년 이후 계급의 어려움을 증가시키는 유효한 요인임이 드러났다. 지배 계급이 해체의 징후들을 착취 받는 이들에게 불리한 방식으로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러시아 블록의 몰락을 동반한 코뮤니즘의 죽음에 대한 매우 잘 편집된 선전은 계급의 자신감과 역사적인 임무를 새로이 할 수 있는 역량을 더욱 침식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요인이었다. 코뮤니즘, 맑스주의, 심지어 계급투쟁 그 자체는 끝났다고, 죽은 역사일 뿐이라고 선언되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의식, 전투성, 그리고 정체성에 거대하고 지속적인 악영향을 미친 1989년의 사건은 단순히 거대한 규모의 반공산주의 선전의 결과가 아니었다. 이 선전의 효과성은 그 자체로 설명되어야 한다. 그것은 오직 1917년 이후 계속된 혁명과 반혁명의 독특한 발전의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소련을 적대한 전투적 반혁명의 실패와 더불어 동시에 세계 혁명의 패배와 함께 완전히 예측하지 못했던, 전례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프롤레타리아트 진영 내부에서 반혁명이, 소련 내부에서 역사적으로 발전한 자본주의 계급이 없는 자본주의 경제가 발생했다. 그 결과는 어떤 보다 높은 역사적 필연성의 표현이 아니라 단지 역사적 일탈의 표현이었다. 반혁명 부르주아 국가 관료제가 운영하는 자본주의 경제는 완전히 자격이 없는 것이었고, 그러한 임무에 적합하지도 않았다. 비록 스탈린주의 명령 경제가 소련이 2차 세계대전의 시련을 견뎌내는 데 효과적임은 드러났을지라도, 장기적으로 경쟁력 있는 국가 자본을 형성시키는 데에는 완전히 실패했다.
비록 스탈린주의 정권이 쇠퇴하는 부르주아 사회의 특히나 반동적 형태였을지라도, 봉건적이거나 전제적인 종류의 정권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니었고, 또한 “정상”적인 자본주의 경제도 결코 아니었다. 비효율적인 회사가 제거됨으로써 처벌되지 않는, 노동자들이 해고되지 않는 자본주의 경제는 부르주아지의 성공이 될 수 없다. 스탈린주의의 특수성을 반혁명의 예상치 못한 산물로 심각하게 이해한 덕분에, 국제코뮤니스트흐름은 1989년의 사건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보기를 들어 스탈린주의는 노동자 투쟁이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파열에 의해 전복된 것이며, 이러한 동쪽의 붕괴는 유사한 서쪽의 붕괴를 미루는 조짐이 아니었다는 것 말이다. 그 붕괴는 지배계급에 마지막으로 큰 서비스를 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코뮤니즘의 죽음에 대한 선전은 현실에서 입증된 듯하다. 적절히 기능하는 자본주의와 스탈린주의의 차이는 매우 중대하고 광범위하여 실제로 사람들에게 스탈린주의가 자본주의가 아닌 것처럼 비쳤다. 스탈린주의가 존재했던 이전에는 그것이 마치 자본주의의 대안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여겨졌었다. 비록 바로 이 대안이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을지라도 그 존재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무기고에 잠재적인 상처를 남겼다. 1960년대 계급투쟁의 부활은 이러한 상처로부터 반자본주의와 반스탈린주의를 동시에 이야기하는, 그리고 국가 관료제나 정당 국가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노동자평의회에 기반을 둔 혁명의 전망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1960년대와 70년대 많은 이들에게 세계 혁명은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 “그림의 떡”이었다면, 그 이유는 지배계급의 거대한 권력, 또는 인류라는 종이 내재한 이기주의와 파괴적인 본능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감은 대중 투쟁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연대에서 평형추를 찾아낼 수 있고, 종종 실제로 그러했다. “사회주의” 정권이 붕괴한 1989년 이후 질적으로 새로운 요인이 부상했다. 자본주의 원칙에 기반을 두지 않고서는 현대 사회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의식과 계급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방어적 경제 투쟁을 전개하기도 더 어렵다. 왜냐하면, 대안 없이는 자본주의 경제의 필요라는 논리가 훨씬 더 큰 무게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계급투쟁이 당장 직면한 상황이 상당한 정도로 변화할 수 있는지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해 전체로서의 노동계급이 전반적으로 맑스주의자가 되거나, 코뮤니즘에 대해 명확한 전망을 발전시킨다거나 하는 것이 반드시 필수적이지 않더라도, 다양한 분야의 계급이 자본주의가 뭔가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14. 그러나 전반적인 해체의 진행은 더욱 은밀하게 작동하고, “그 자체로” 노동 계급, 그리고 계급 정체성과 계급의식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특징은 1980년대 일어난 구조적 변화 때문에 “뒤에 남겨진” 장기 실업 계층과 부분적으로 고용된 계층들 사이에서 특히 뚜렷하다. 과거 실업 계층은 노동자 투쟁의 전위였으나, 이 시기 그들은 룸펜화, 조직폭력, 그리고 성전주의자(jihadism) 또는 네오파시즘과 같은 허무주의 이데올로기의 확산에 매우 취약했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이 89년 사건의 직접적인 여파를 예견한 바와 같이, 계급은 장기간 후퇴의 시기에 막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 후퇴의 길이와 깊이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엄청난 것으로 드러났다. 2006년(프랑스의 반 CPE 운동), 그리고 2009년에서 2013년 사이의 세계 각지의 수많은 나라(튀니지, 이집트, 이스라엘, 그리스, 미국, 스페인 등)에서의 새로운 노동계급 세대의 중요한 운동, 그리고 코뮤니스트 사상에 관심을 가지는 분위기가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모두 계급투쟁이 다시 한번 무대 중앙을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혁명 운동 발전의 새로운 단계가 열렸다는 생각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간의 많은 발전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혁명적 전위가 얼마나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15. 2011년 전후의 투쟁들은 경제적 위기의 심화 영향에 명백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경제적 위기란 보기를 들면 그 지지자들이 자주 언급하듯이, 고용의 불안정 그리고 심지어 몇 년간의 대학 교육을 이수한 젊은이들조차 기회가 부족한 점 등이다. 그러나 경제적 위기의 심화와 계급투쟁의 질적 발전 사이에는 어떤 자동적 연결도 없다. 그것이 이미 패배한 노동계급의 사기를 더욱 악화시키는 경향을 보였던 1930년대 대공황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이다. 오랜 동안의 패배와 방향 상실 이후 2007~8년의 금융 지진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에 굉장히 부정적인 충격을 주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경제적 확장의 심장부에 있었으나 내재적 모순으로 이제 그 붕괴를 예고하고 있는 신용(credit) 시스템의 확장이 바로 중요한 요인이다. 이 “금융화”의 과정은 이제 거대한 금융 기관들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수백만 노동자들의 삶 수준에서도 작동했다. 이 수준에서 상황은 1920년대와 30년대의 것과 매우 다르다. 그 시절에는 노동자들을 제외한 이른바 중산 계급(적은 재산의 소유자, 자유주의적 전문가들 등)의 대부분에게 잃어버릴 저축이 있었고, 국가가 제공하는 보험이 있는 곳에서는 노동자들이 간신히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한 편에서 그러한 국가들에서 많은 노동자들의 당장의 물질적 상황이 80~90년 전보다 덜 극적이라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러한 국가들에서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정확히 자신을 1930년대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에 놓여있음을 정확히 알 것이다. 그들은 종종 엄청난 규모의 채무자가 된 것이다. 19세기 동안, 그리고 1945년 이전의 많은 부분 동안, 오직 채권자 노동자들이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지역 술집이나 카페, 그리고 식품 소매점밖에 없었다. 어려울 때 그들은 오직 계급 연대에 의지해야만 했다. 주택과 건물 융자와 함께 큰 규모로 시작된 프롤레타리아의 신용대출은 최근 수십 년 동안의 대규모 소비자 부채의 전개와 함께 폭발했다. 노동 계급의 많은 부분에서의 이러한 신용 경제의 전례 없이 세련되고, 교활하고 불안정한 발전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에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부르주아지의 노동계급 수입의 전유는 감춰져 있으며, 그것이 저축의 평가절하, 은행 또는 보험 상품의 부도, 또는 시장에서의 주택 소유권 몰수의 형태로 나타날 때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 “복지 국가”의 보장과 그들의 재정이 점점 불안정해짐으로 인해 이러한 공공 체계에 대해 지급할 수 있는 이들과, 그들만큼 지급할 수 없이 그저 이들 체계에 의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뿐인 이들로의 노동자 사이의 구분이 더욱 쉬워진다. 그리고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빚의 늪에 떨어졌다는 사실은 프롤레타리아를 훈육하는 새롭고, 추가적인, 강력한 수단임을 보여준다.
붕괴의 결과가 그 순손익이 많은 이들에게는 궁핍함으로, 그리고 작은 소수에게는 파렴치한 부의 이전이 될지라도, 충돌의 전반적인 결과는 자본주의 체계의 노동에 대한 이해를 날카롭게 하거나 확장시켜주지 않는다. 불평등의 증가에 대한 분노는 대부분 “부패한 도시 엘리트”를 향했고, 이는 우익 포퓰리즘의 주요한 강조점이 되었다. 위기와 동반하는 부정에 대한 반응이 미국의 점거 운동(Occupy movement)과 같은 보다 프롤레타리아적 형태의 투쟁을 불러일으켰을지라도, 이러한 운동조차 탐욕스러운 은행가, 심지어 사회에 대한 자신들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섬세하게 붕괴를 조장한 비밀 그룹에 대한 비판으로 향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상당 부분 약해졌다.
16. 1917~23년의 혁명 물결은 1871년, 1905년의 봉기 운동과 같이,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해 점화되었고, 혁명가들이 전쟁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있어서 매우 호의적인 조건을 제공한다고 생각하게끔 했다. 실제로는 혁명 물결의 패배가 보여준 것은 전쟁이 계급 내 심각한 분열을 낳는다는 것이었고, ‘승리한’ 나라와 ‘패배한’ 나라의 노동자 간에 특히 그러했다. 더욱이 2차 세계 대전 종결 당시의 사건들이 보여주었듯이, 부르주아지는 1917년 일어난 일로부터 필수적인 교훈을 배웠고,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응 가능성을 제한하는 역량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적군들과의 우애를 다지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도록 만드는 군사 기술 전략과 형태의 발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러시아 제국주의 블록의 몰락 이후 서쪽의 지배 계급의 약속과는 반대로, 그것이 열어젖힌 새로운 역사적 단계는 결코 평화와 안정이 아니라, 군사적 혼란, 아프리카와 중동 일부를 완전히 황폐화시키고 심지어 유럽의 문마저 흔든, 점점 더 지루한 전쟁의 확산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이라크에서 야만이 드러나는 동안, 아프가니스탄, 르완다, 이제는 예멘과 시리아의 사건은 이러한 전쟁과 직접 관련된 부르주아지들이 있는 자본주의의 중심부를 포함한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넓은 영역들에서 공포와 분노를 불러일으켰으나, 프롤레타리아 형식의 반대는 이러한 해체의 전쟁들 가운데 매우 드물었다. 직접 영향을 받은 나라들에서는 노동 계급은 스스로 지역의 군사적 갱들과 그들의 제국주의 스폰서들에 반대하여 스스로 조직하기에는 너무 약했다. 이는 시리아에서의 최근 전쟁에서 가장 명백했다. 이 전쟁에서는 공중 폭격을 비롯한 다른 형태의 폭격과, 무엇보다도 국가의 공권력에 의해 무자비한 대학살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 전선의 건설과 정권의 반대자들을 다양한 무장 갱으로 징용함으로써 발생한 최초의 사회적 불만들의 탈선이었다. 자본주의의 가운데에서는 그러한 소름 끼치는 시나리오는 주로 절망감과 무기력감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그것은 주로 현재 체제에 대한 어떤 저항 시도도 오직 더 나쁜 상황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어 보이기 때문이었다. “아랍의 봄”의 우울한 운명은 혁명의 가능성에 반대하는 새로운 논거로 쉽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과거 몇 년간의 유럽 주변부 모든 국가에 대한 야만적인 분할은 체제의 중앙에 있는 노동계급에까지 부메랑이 되어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는 두 가지 문제로 요약된다. 한 편에서, 세계적 수준의, 그리고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있는, 그 범위에 있어서 진정으로 지구적인, 난민 위기의 진행, 다른 한 편에서, 테러리즘의 발전이다.
17. 유럽 난민 위기를 촉발시킨 순간은 2015년 여름 “발칸 루트”로부터 비롯된 난민에 대한 독일(그리고 오스트리아) 국경 개방이었다. 메르켈 총리의 이러한 결정의 동기는 두 가지였다. 우선 독일의 경제적, 인구통계학적 상황(주요 산업에서 당장 질적으로 보증되고 “동기화된” 노동력의 부족해질 것이라는 전망). 두 번째로, 남동 유럽이 수백만의 난민들을 감당하지 못해 법과 질서가 붕괴될 위험. 그러나 독일 부르주아지는 다른 세계, 특히 유럽의 다른 지역에 대한 일방적인 결정의 결과를 잘못 계산했다. 중동 아프리카에서, 수백만의 난민들과 자본주의 비참함의 다른 희생자들은 유럽으로, 특히 독일로 도망갈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는 “셍겐(Schengen)”조약 또는 “더블린 난민 협정”과 같은 조약이 있어 독일의 문제를 EU 전체의 문제로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의 첫 번째 결과는, 그러므로, 아마도 지금까지 그 역사상 가장 심각한 유럽 연합의 위기였다.
유럽에 수많은 난민이 도착하자 처음에는 전체 사람들의 광범위한 영역에서 자연스러운 동정의 물결 – 이탈리아 또는 독일과 같이 충동이 여전히 강한 나라들에서 - 이 일었다. 그러나 이 충동은 곧 유럽의 외국인 혐오 때문에 파묻혀 버렸다. 이러한 외국인 혐오는 포퓰리스트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법과 질서의 비밀 군대와 전문적 수호자들에 의해서도 이뤄졌다. 이들은 갑작스럽고 통제되지 않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유입을 매우 경계했다. 그들이 사는 국가가 어디인지 밝혀지지 않은 엄청난 숫자의 무슬림 유입이 유럽 내에서 이민자들의 하부 공동체를 발달시키게 될 것이라는 공포는 테러리스트의 유입에 대한 공포를 동반했다. 이러한 공포는 프랑스, 벨기에, 독일에서의 테러 공격의 증가 때문에 강화되었다. 독일 하나만 보아도, 이민자들을 향한 우익 테러 공격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이전 옛 동독 일부에서는 실체적인 대학살의 분위기가 전개되었다. 서유럽은 전반적으로 경제 위기 이후 우익 포퓰리즘의 불길에 부채질하는 (근본주의자 테러 때문에 증가한) “난민 위기”가 두 번째로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2008년 이후 경제 위기가 어떻게 세계 경제를 관리하는 것이 최선인가에 대한 부르주아지 내부의 심각한 분열의 길을 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2015년 여름은 이민에 대한 합의의 종말의 시작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정책의 기반은 지금까지 반쯤 개방된(semi-permeable) 국경의 원칙이었다. 도널드 트럼프가 쌓길 원한 멕시코 장벽은 이미 존재하며, (군사적 순찰선 또는 공항 감옥 등의 형태로) 유럽을 둘러싸고도 그와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그러나 현재 장벽의 목적은 이민의 속도를 늦추고 규제하는 것이지 막는 것이 아니다. 불법 이민은 그들을 범죄화하여 그들이 어떤 사회적 보상의 권리도 받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조건 아래 적은 임금만을 위해 일하게 강요한다. 더욱이, 승인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 수밖에 없도록 함으로써, 국경 지역의 체제는 결국 가장 용감하고, 단호하며, 역동적인 이들만 선별하는 야만적인 선택 메커니즘의 한 종류가 되었다.
2015년 여름은 사실 존재하는 이민 시스템 붕괴의 시작이었다. 이민하려는 이들은 계속 증가해 왔던 반면, 그들이 이민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나라의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감소하는(독일의 경우는 다소 예외이다) 이 불균형은 더는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하듯이, 포풀리스트들은 손쉬운 해결책을 내놓았다. 이 반쯤 개방된 국경을, 그 어떤 수준의 폭력이 필요할지라도 폐쇄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그들의 제안은 부르주아지의 관점에서 매우 그럴듯하게 여겨졌다. 그것은 전 국가 수준의 “폐쇄된 사유지(gated communities)” 논리의 적용에 불과하였다.
여기서 다시, 이러한 상황이 노동계급의 의식에 미친 영향은, 당장은, 매우 부정적이다. 동쪽 블록의 붕괴는 마치 서쪽 민주주의 자본주의의 궁극적인 승리의 증거인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점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위기의 심화가 결국 자본주의가 최고의 현실적인 체제라는 이미지에 손상을 주는 데 역할을 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위기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난민들뿐만 아니라) 수백만의 사람들이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과거 자본주의의 중심부로 목숨을 걸고 갈 준비가 되어있다는 사실은 오직 이러한 구역이 (적어도 비교적으로는) 천국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상대적으로 번영과 안정의 지역이라는 인상을 강제로 심어줄 뿐이다.
세계 경제의 붕괴가 미국과 독일에 집중되었던 1930년대의 대공황 시절과는 달리 오늘날은 지구화된 자본주의 관리로 인해 자본주의 중심 국가들이 무너지는 것은 마지막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일하진 않지만) 특히 유럽과 미국에서 포위된 요새와 같은 상황이 등장했다. 이 지역의 노동계급은, 심지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뒤에서 적극적으로 동원되지는 않더라도, 외부로부터의 공동 위험으로 여겨지는 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착취자들이 자신을 보호해주길 바라는데(심리학적 용어를 빌자면, “침략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 이러한 위험은 현실이다.
18. 중동 전쟁에서의 테러 공격에 대한 “반응”은 최근의 난민 위기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 2001년 알카에다의 쌍둥이 빌딩 공격 뒤로 마드리드와 런던 교통 체계에 대한 더 극악무도한 테러는 이미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이 그들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뿌린 씨앗이 소용돌이가 되어 나타났으며 이를 거두어야 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최근 독일, 프랑스, 벨기에, 터키, 미국 등지에서의 살인의 급증은 IS(Islamic State) 탓이지만, 비록 미숙하고 심지어 변칙적인 특징임에도 불구하고 훈련받은 테러리스트 “군인”과 고립되고 불안한 개인들을 구분하기 점점 더 어려워진 탓이기도 하며, 이것이 난민 위기와 함께 발생함으로써, 전체 주민들 가운데 의심과 편집증적 과대망상을 강화하였고, 이는 결국 형식이 없고 예측할 수 없는 “내부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동시에, IS와 그 모방자들의 허무주의적 이데올로기는 반-게토화된 거대한 서쪽 도시들 속에서 더는 미래가 없음을 인식하는 불만이 가득한 이민지 청년들에게 짧은 영광의 순간을 제공한다. 해체의 시대 테러리즘은 더욱더 국가와 준-국가 사이의 전쟁 수단이 되고 있으며, 동시에 국제주의의 표현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19. 그러므로 최근의 포퓰리스트의 등장은 이 모든 요인들 – 2008년의 경제적 붕괴, 전쟁의 충격, 테러리즘, 그리고 난민 위기 – 에 의해 성장했고, 체제 해체와, 사회의 두 주요한 계급들 모두 인류에게 미래를 위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농축된 표현으로 나타났다. 지배 계급의 관점에서는 70년대 개방 경제 위기의 출발에서부터 자본주의가 유지되고 심지어 축적을 확장할 수 있도록 해 주었던 “신자유주의” 합의가 소진됨을, 그리고 특히 전후 호황을 지배했던 케인즈주의 정책이 소진됨을 의미했다. 2008년 붕괴는 이미 존재하던 매우 부유한 소수와 대다수 사이의 거대한 부의 격차를 보다 넓혔는데, 탈규제와 지구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들에 의해 고안된 틀 내에서의 자본과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 등은 부르주아지의 점점 더 많은 이들, 신자유주의와 신케인즈주의를 같은 선전 연설 중에 동시에 지지할 수 있는 이들 포퓰리스트 우익과 같은 이들 사이에서도 문제시되고 있었다. 포퓰리스트 정책의 본질은 부르주아 사회 불평등의 정치적, 행정적, 그리고 법적 공식화이다. 2008년 위기가 상황을 보다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은 이러한 공식적인 평등이 전에 없이 명확한 사회적 불평등의 진정한 기반이라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적 해결책 – 계급 없는 사회 - 을 내놓지 못하는 지금 상황에서, 포퓰리스트의 반동적 대책은 존재하는 위선적인 가짜 평등을 노골적이고 “솔직한” 불법적 차별 체제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것이 트럼프 대통령의 고문, 스티브 배넌(Steve Bannon)이 주창한 “보수적 혁명”의 핵심이다.
“미국 먼저”(America First)와 같은 슬로건이 의미하는 바를 가리키는 첫 번째 징후는 국민 전선의 선거 강령, “프랑스 먼저”(France d’abord)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고용, 세금, 그리고 사회 복지의 모든 수준에서 유럽 연합의 다른 국적 사람들보다 프랑스 시민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것을 주장하는데, 결국 다른 외국인들에 비해 우선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논쟁이 영국에서 있었는데, 브렉시트 이후 유럽 연합의 시민들이 영국 원주민과 외국인 중간 지위에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었다. 영국에서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주요 논지는 유럽 연합의 거래 정책에 대한 반대이거나, 대륙인 유럽을 향한 영국의 보호주의적 충동 같은 것이 아니라 이민과 국내 노동 시장에 대한 “민족적 주권을 다시 획득”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지였다. 이 주장은 장기적 민족 경제의 성장 전망이 없는 상황에서 오직 다른 모든 이들을 차별함으로써만 원주민의 삶의 조건이 다소간 안정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20. 이른바 금융과 유로 위기는 1989년 이후 계급의식, 계급 정체성과 전투성의 장기간의 심각한 퇴조에 치료약이 되는 대신 반대의 효과를 가져왔다. 특히, 일반 프롤레타리아트 계층에서의 연대 상실의 치명적인 효과는 심각하게 증대했다. 특히, 우리는 희생양 현상, 이 사회의 잘못이 무엇이든 간에 세계의 모든 악이 투영된 사람을 비난하는 현상을 보고 있다. 그러한 생각은 대량학살로 가는 문을 연다. 오늘날 포퓰리즘은 매우 충격적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모든 사회관계 속에 퍼져 있는 문제의 유일한 형식은 아니다. 노동계급의 일터에서, 그리고 삶에서 그것은 협력을 약화시키고, 원자화, 그리고 상호 의심과 약탈의 발전을 부추긴다.
맑스주의 노동자 운동은 이러한 경향에 평형추가 되는 데 도움이 되는 이론적 통찰을 오랜 시간 동안 방어해왔다. 두 가지 가장 본질적인 통찰은 1) 자본주의 아래에서 착취는 비인간적 성격이 된다. 왜냐하면, 시장의 “법칙”(가치법칙)에 따라 작동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자들은 스스로 이러한 법칙에 복종한다. 2) 이러한 기계와 유사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계급 간 사회관계이다. 왜냐하면, 이 “체제”는 부르주아 국가 의지의 법칙(자본주의 사적 소유의 창조와 강요)에 기반을 두고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급투쟁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이다. 계급투쟁은 사람과 싸우는 대신, 사회관계를 바꾸기 위해 직접 체제 – 체제를 체화하고 있는 계급 – 를 목표로 한다. 이러한 통찰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더 의식적인 계급의 층위라고 해서 희생양에 대한 면역력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더 많은 회복탄성력을 준다. 이러한 통찰들은 심지어 반혁명의 가운데서도, 그리고 심지어 독일에서도,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반유대주의에 더욱 오랫동안 저항했는지 그 이유를 일부 설명해 준다.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전통은 지속해서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노동 계급은 계급 일부가 심각하게 그에 영향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종류의 독의 확산에 유일하게 진정한 방패로 남아있다.
21. 이 모든 것은 부르주아 사회의 정치적 성격을 전반적으로 바꾸게 한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당장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유리하지 않다. 미국이나 폴란드와 같은 나라들에서는 포퓰리스트가 현재 집권해 있는데, 거리의 대규모 저항은 어쨌든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와 그 “자유주의적” 규제들을 방어한다. 대중들을 동원하는 또 하나의 이슈는 브라질, 한국, 루마니아 또는 러시아에서와 같은 부패에 대한 투쟁이다. 이탈리아의 오성(Five Star) 운동도 주요하게는 같은 문제로 고무되었다. 부패는 자본주의의 풍토병으로, 자본주의의 마지막 시기의 유행병과 같은 것이다. 국가 자본의 이해를 방어하는 가운데에는 부패가 생산력과 경쟁력을 방해하는 한 이에 저항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므로 그런 저항에서 국기를 흔드는 대중들이 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부르주아 선거 과정에서의 이해관계의 재편도 있다. 연대의 후퇴 영향 아래에서 노동계급 일부분은 포퓰리스트에 투표하는 희생자가 되거나 기존의 정치 계급에 반대하는 종류의 것에 빠진다. 오늘날 해방의 대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은 노동자들이 포퓰리스트를 선택함으로써 지배 계급에게 충격을 주고 압박을 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아마도 더 큰 위험은, 생산 과정의 핵심에 있는, 가장 현대화되고 지구화된 계급의 부문들이 혐오스러운 포퓰리스트의 배타주의에 분노하고, 이러한 정치적 흐름이 이미 존재하는 질서의 안정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다소 명확한 이해를 함으로써,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정권의 군림을 방어하는 함정에 빠지는 것에 있다.
22. 포퓰리즘의 등장, 그리고 반 포퓰리즘의 등장은 노동 계급이 악의 파시즘과 반파시즘 사이에 붙잡혀 버렸던 1930년대와 어떤 유사함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역사적 상황은 1930년대의 그것과 같지 않다. 그 시기에는 소련과 독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적 반대뿐만 아니라 물리적 패배로 고통 받았다. 이와는 반대로, 오늘날은 반혁명의 상황이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지배계급이 프롤레타리아트에 물리적 패배를 강요하는 모든 시도를 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1930년대와 또 하나 다른 점이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포퓰리즘 또는 반포퓰리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집착이 전혀 결정적이지 않다. 포퓰리즘 후보를 찍는 많은 노동자들은 어느 날 자신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투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반포퓰리즘 시위에 사로잡혀 있는 노동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오늘날 노동계급, 무엇보다 과거 자본주의의 중심부에 사는 이들은, 계급의 특정 부문에서 민족주의의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국가의 이해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싸울 가능성 또한 잃지 않았다. 이러한 잠재력은 68년에서 89년 시기, 그리고 2006년과 2013년 사이의 투쟁보다 훨씬 더 분산되고 단기적인 방식이라고 할지라도 지속해서 표면 위로 떠오른다. 동시에 소수 프롤레타리아 가운데 어려움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심사숙고와 성숙의 과정이 계속되며, 이것이 다시 프롤레타리아트의 더 넓은 계층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더욱 숨겨진 과정을 반영한다.
이러한 조건에서 계급을 공포로 몰아넣으려는 시도는 정치적으로 위험하고 반생산적일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착취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강점 중 하나를 구성하는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노동자들의 현존하는 환상에 강하게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이유로, 막다른 길의 해체하는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효과를 이용하는 것은 노동계급을 약화시키는 자본가 계급의 객관적인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다.
3부. 1917, 2017년, 그리고 코뮤니즘의 전망
23. 1917년 10월 혁명에 대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주요 공격 중 하나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은, 2월 봉기의 민주주의적 희망과 볼셰비키에 의한 10월 “쿠데타”를 억지로 대비시키는 것이다. 볼셰비키의 10월 쿠데타가 러시아를 재앙과 폭정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0월 혁명을 이해하는 핵심은 그것이 제국주의 전선을 무너뜨릴 필요에 기반을 두었다는 것이며, 이 제국주의 전선은 “민주주의” 편을 포함한 부르주아지의 모든 분파 때문에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10월 혁명은 세계 혁명의 첫 번째 일격이었다. 그것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가 쇠퇴의 시기에 들어선 것에 대한 첫 번째 명확한 응답이었으며, 이런 수준에서 1917년 10월은 잃어버린 시대의 폐허와는 거리가 먼, 인류의 미래의 이정표였다.
오늘날, 세계 부르주아지로부터 받은 모든 반격 이후, 노동계급은 그 혁명적 프로젝트의 회복에서 거리가 멀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아직, “어떤 의미에서는 코뮤니즘에 대한 문제가 오늘날 인류가 처해 있는 곤경의 바로 그 핵심에 있다. 코뮤니즘이 부재함으로써 만들어진 공허함의 형태로 그것은 세계의 상황은 곧 지배한다.”(세계의 상황에 대한 보고, 국제코뮤니스트흐름 22차 대회). 20세기와 21세기의 수많은 야만, 히로시마와 아우슈비츠에서 후쿠시마와 알레포까지, 그것은 수십 년 전 코뮤니스트 혁명의 실패로 인류가 치러야 했던 매우 값비싼 대가였다. 그리고 만약, 부르주아 문명 쇠퇴기의 이 늦은 시간에, 혁명적 변환의 희망이 결정적으로 사라진다면, 인간 사회의 생존의 전망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그리고 아직, 우리는 이러한 희망이 여전히 살아있으며, 진정한 가능성을 띠고 발견된다고 생각하고 확신한다.
한 편에서 그들은 객관적인 가능성과 코뮤니즘의 필연성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들은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첨예해지는 충돌에 내포되어 있다. 쇠퇴기 해체의 자본주의는 모든 불황의 시대를 견뎌왔던 이전의 계급 사회들과는 달리 지구적 확장을 멈추지 않고, 사회적 삶의 모든 세포에까지 침투하기 때문에, 그 충돌은 더욱 날카로워져 왔다. 몇몇 수준에서 이를 관찰할 수 있다.
- 현대 기술과 자본주의 아래에서 그 실제 사용에 잠재적으로 내포된 모순. 정보 기술과 인공 지능의 발달은 고된 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고 노동 시간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도록 이용할 수 있지만, 한 편에서 그것은 일자리를 줄이고 다른 한 편에서 노동 시간을 연장하는데 이용되고 있다.
- 자본주의 생산의 세계적이고 연합된 성격의 자본주의 생산과 그 사적 소유권 사이의 모순, 다시 말해 한 편에서 수백만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적 부를 생산하는 데 참여하는데, 다른 한 편에서 손톱만 한 소수의 오만과 낭비 때문에 그 사회적 부가 전용된다는 모순은 삶의 수준을 정체시키고 대다수가 직면하고 있는 노골적인 빈곤에 대한 모욕이 되고 있다. 노동의 연결 수준의 객관적인 세계적 성격은 최근 수십 년 동안 특히 중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산업화와 함께 어마어마하게 증가했다. 종종 스스로 극단적으로 전투적인 모습을 보였던 이러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군대는 잠재적으로 국제 계급투쟁의 힘에 새로운 원천을 구성하는데, 이는 서구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에 맞서는 혁명적 대결을 향한 노동계급의 정치적 성숙의 열쇠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그러하다.
-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모순은 그 자체로 무엇보다 과잉생산의 위기와 자본주의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모든 수단들, 특히 대규모 부채에 의존하는 등을 의미한다. 과잉생산은 자본주의 고유의 불합리함으로, 풍요의 가능성과 자본주의 아래 그러한 풍요로움을 달성할 수 없는 불가능을 동시에 가리킨다. 다시, 기술적 발전의 예시가 이러한 불합리함을 부각시킨다. 인터넷은 모든 종류의 무료 재화(음악, 책, 영화 등)를 분배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나, 이윤 시스템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 자본주의는 어떠한 무료 배포도 축소하거나 상품을 광고하는 광장으로만 주로 작동할 수 있도록 거대한 관료체계를 만들어야만 했다. 더욱이, 과잉생산의 위기는 노동계급의 삶의 수준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과 인류 대중의 빈곤으로 귀결된다.
- 자본의 지구적 확장과 민족 국가의 경계를 넘어설 수 없는 불가능성 사이의 모순. 1980년대 시작된 지구화의 특정 단계는 맑스가 그룬드리세(Grundrisse)에서 예언한 바로 그 지점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저항할 수 없는 지향으로서의 보편성은 그 자신의 본질에 의한 장벽에 직면한다. 이 본질은 발전의 특성 단계에서 스스로 보편성 경향의 가장 거대한 장벽으로 인식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자신의 극복으로 나아갈 것이다.”[1] 1차 세계대전 시절의 혁명가들은 물론 이 모순을 인식했다. 왜냐하면, 전쟁 그 자체가 민족 국가가 여전히 존재하여 자본이 실제로 그 너머로 이동할 수 없는 상황의 첫 번째 명백한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본의 이러한 극복이 – 사실 몰락이 – 순수하게 경제적인 형식을 취하지 않을 것을 안다. 자본주의가 경제적 막다른 길에 가까워질수록, 군사적 수단들을 통해 타자를 희생하면서 “생존”을 향한 추동이 커질 것이다. 트럼프, 푸틴 등등의 노골적인 민족 전쟁은 인류의 통합과는 먼 자본주의 지구화가 우리를 자기-파괴에 더욱 더 가깝게 몰고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심연으로의 몰락이 반드시 세계 전쟁이라는 형태가 아니라도 그러하다.
- 자본주의 생산과 자본주의 시작에서부터 “공짜 선물”로 여겨지는(애덤 스미스) 본질 사이의 모순과 전례 없는 수준으로 해체의 단계에 도달한 것. 이는 기후 변화에 대한 미국의 반대와 같은 노골적인 공공 파괴, 그들의 주적인 중국의 성장,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중국은 희생을 감수한 성장을 향한 열띤 사냥으로 도저히 숨을 쉴 수 없는 대기의 도시들을 탄생시켰고, 이는 지구 온난화의 위험을 크게 가중시켰다. 그리고 고대의 미신과 현대의 깡패 자본주의의 기묘한 결합은 아프리카의 모든 종의 파괴를 가속했으며, 다른 곳에서는 그들의 뿔과 가죽의 마법적인 힐링 효과를 찬양했다. 자본주의는 성장에 대한 열광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나, 이는 인류가 살아 숨 쉬는 자연환경의 건강과는 양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바로 자본주의의 영속화가 군사적인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교환 수준에서도 인간종의 존재를 위협한다.
위에 언급한 더는 견딜 수 없이 첨예화된 모순은 어쨌든 하나의 해결방법을 가리킨다. 이윤이 아니라 사용을 위한 세계 생산의 연합, 인간 존재 간의 연합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와 자연과의 연합이 그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전환이 주로 드러나는 것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중심, 그리고 가장 현대적인 부분, 젊은 세대들 가운데서, 비록 역사적 상황의 심각성을 점점 더 깨닫고 있기는 해도, 그들이 이전 수십 년간 공유해 왔던 “미래가 없다는” 절망을 더는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확신은 자신의 연합된 생산력에 대한 앎에 기반을 둔다. 이 앎이란 과학적, 기술적 진보로 표현되는 잠재성, 지식과 그에 접근하는 수단의 “축적”, 그리고 인류와 나머지 자연의 상호작용에 대한 심오하고 결정적인 이해의 성장이다.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이 부분 – 2011년, “세계 혁명”의 깃발을 한껏 높였던 서유럽 운동에서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 은 오늘날 노동의 연합이 띠는 국제적 성격을 훨씬 더 잘 알고 있으며, 그러므로 투쟁의 국제적 통합의 가능성을 더 잘 움켜쥘 수 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의 지구적 통합은 자본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회피해야 할 해결책이며, 그것이 교환을 위한 생산에 내재적 한계를 드러내는 방법일지라도 그러하다. 쇠퇴의 시기 국가 자본주의의 발전은 어떤 의미에서는 전제주의적 방식으로 사회 통합하는 방법을 찾으려는 다급한 탐색의 일종이며, 자신의 붕괴를 부추기는 체제의 “자연법칙”이 전개되는 시기에 지배계급이 경제적 삶에 대한 통제를 행사하려는 시도이다.
24. 자본주의가 코뮤니즘의 필연성을 마법으로 없앨 수 없는 이상, 이러한 새로운 생산 양식은 자동으로 나타날 수 없으며, 혁명 계급,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 개입이 필요하다. 오늘날 노동계급이 직면하고 있는 극단적인 어려움 - 코뮤니즘의 “소유권”을 부활시킬 수 없는 명백한 무능력 - 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코뮤니즘을 향한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부활, 재구성이 여전히 오늘날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몇 가지 이유를 개략적으로 서술하였다. 왜냐하면, 코뮤니즘의 객관적인 필요가 마법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새로운 사회를 향한 주관적인 바람을 완전히 억압할 수도 없고, 연합한 계급, 프롤레타리아트 가운데서 어떻게 그것을 성취해 낼지 이해하기 위한 탐색 또한 완전히 억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붉은 10월의 기억, 실제로는 독일혁명과 세계규모의 혁명적 물결이 10월에 의해 활성화된 것을 포함한 기억은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 말하자면, 그것은 억압되었으나, 모든 억압된 기억은 조건이 무르익었을 때 다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노동계급 안에는 진짜 이야기와 그로부터의 교훈을 의식적인 수준에서 유지하고 정교화하며, 그 자신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를 회복할 때 계급의 사고를 살찌워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소수가 항상 있다.
계급은 실천적인 투쟁이라는 엄격한 학교를 통하지 않고서는 대규모로 이러한 수준의 의문에 도달할 수 없다. 자본의 공격이 심화하는데 대한 반응으로서의 이러한 투쟁은 연합된 노동이라는 현실에 의해 만들어진 자기 확신과 구속되지 않는 연대의 발전을 위한 강고한 기반이다.
그러나 1968년 이후 프롤레타리아트의 순수하게 방어적인, 경제적 투쟁은 교착상태에 이르렀고, 이러한 상태는 또한 한 편에서 이론적인 투쟁, “깊은” 과거와 그 가능성 있는 미래를 이해해야 하는 과제를 필연적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과제는 계급 운동이 지역과 민족 수준에서 보편적인 수준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 그리고 경제적 수준에서 정치적 수준으로, 방어에서 공격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을 지적한다. 계급의 당면한 투쟁은 다소 자본주의의 삶 자체이지만, 이러한 다음 중요한 단계를 밟을 수 있을지에 대한 보장은 없다. 그러나 아무리 한계가 있고 혼란스러운 방법으로라 할지라도 프롤레타리아트의 현재 세대들의 투쟁, 무엇보다 전체 체제 – 시위자들이 그들의 깃발에 공공연히 써 놓았듯이, “구시대적” 체제 - 에 대한 진정한 분노의 표현이었던 스페인의 분노 운동(Indignados)과 같은 투쟁은 어떻게 이 체제가 작동하고 무엇이 이 체제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인지 이해하고자 하는 바람, 동시에 현존하는 질서라는 제도를 부수고 나올 수 있는 조직적 수단들을 발견하고자 하는 바람을 표현한다. 그리고 보라, 그러한 수단은 본질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대중 집회의 일반화, 위임된 대표의 선출은 1917년 소비에트 시절로부터의 명확한 메아리다. 이것은 사회적 삶의 깊은 지하에서 활동한 “노련한 두더지(Old Mole: 1968년 9월부터 1970년 9월까지 매사추세츠의 케임브리지에서 발간된 지하신문 중심의 급진적 신좌파 그룹)”의 작업의 명백한 표현이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정치-도덕적 차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발전을 위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계급의 더욱 넓은 부문의 일부로서 현존하는 삶과 행동의 방식에 대한 고질적인 거부의 등장이다. 이러한 순간의 진화는 계급 영역에서의 대중 투쟁과 혁명적 관점의 준비와 성숙에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동시에, 분노 운동이 진정한 계급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은 이러한 거리와 광장에서의 초기 정치화와 경제적 투쟁, 노동 계급이 여전히 가장 뚜렷한 존재감을 가진 노동 현장에서의 운동이 연결될 필요성을 보여준다. 룩셈부르크의 「대대적 파업」에서 볼 수 있고, 주창되듯이, 혁명적 미래는 경제적 투쟁을 현대주의자의 선언인 것으로 “부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계급 운동의 경제적, 정치적 차원의 진정한 통합에 있다.
25. 운동의 경제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의 연결을 볼 수 있는 역량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코뮤니스트 정치 조직은 수행해야 할 필수불가결한 역할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왜 부르주아지가 1917년 볼셰비키 당의 역할을 전력으로 부정하며 자기 자신이 권력을 획득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광신도와 지식인들의 음모론이라고 내세우며 의심하는지 그 이유이다. 코뮤니스트 소수의 책무는 투쟁을 유발하거나 앞서서 그들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수단과 목표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 속에 있는 것이다.
또한, 붉은 10월을 지키는 것은 당연히 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스탈린주의가 붉은 10월에 반대하는 부르주아지 반혁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 책무는 스탈린주의의 붕괴가 코뮤니즘의 경제가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생각이 무겁게 다가오는 오늘날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생각이 코뮤니스트좌파와 자본의 좌익 사이에서 불안정하게 존재하는 정치적으로 탐색하는 소수들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심각하다. 1989년 이전에는 반대로 혼란스럽지만, 식별가능했던 반자본주의 생각들은, 보기를 들어 평의회주의자 또는 자율주의자(autonomist)와 같은 종류의 이들은 상대적으로 그런 그룹들 내에서 영향력 있었는데, 그 이후 실물 경제 또는 현존하는 “상품”의 영역의 보존과 확장에 대한, 지역 수준에서 상호 교환 네트워크의 형성에 기반을 둔 개념의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 그런 생각의 진전은 오늘날 프롤레타리아트의 더욱 정치화된 계층들조차 종종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사회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환경 아래서, 미래의 혁명가 세대의 출현을 준비하는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는 오늘날 현존하는 혁명적 소수들이 가능한 가장 심오하고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유토피아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왜 오늘날 코뮤니즘이 필연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가능성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오늘날 코뮤니스트좌파는 극단적으로 감소했고, 분산되어 있으며 정치적 명확성을 찾는 광범위한 요인들은 거대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오늘날 작은 혁명운동에서 미래의 대중 계급 운동의 진정한 전위로 행동할 역량을 갖추는 것까지 나아가는 데에는 갈 길이 매우 먼 것이 명백하다. 혁명가들과 정치화된 소수들은 이런 상황의 순수하게 수동적인 산물이 아니다. 그들 자신의 혼란은 자신의 분열과 방향 상실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혁명적 소수의 약점은 계급 전체 약점의 표현이며, 이를 극복할 어떤 조직적 비법이나 활동가주의 슬로건은 있을 수 없다.
시간은 더 이상 노동계급의 편이 아니다. 그러나 그 그림자를 뛰어넘을 수도 없다. 실제로 오늘날에는 1917년 이후뿐만 아니라 1968년~89년의 투쟁에서 잃어버렸던 많은 것을 되찾아야만 한다. 이 작업은 혁명가들에게 계급의 실제 운동과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위기로 드러난 전망을 분석하고, 이러한 이론적 노력의 바탕 위에 코뮤니스트로서의 입장의 첨단에 설 사람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에 대답을 제공하는 데에는 매우 오랜 시간의 끈질긴 작업이 필요하다. 이러한 작업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혁명의 문제를 제기할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조건이 다시 한번 갖춰질 때, 미래 당을 위한 정치적, 조직적 준비의 일부로 여겨져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오늘날 혁명적 조직의 책무는, 1930년대 코뮤니스트좌파인 이탈리아 분파가 가장 명쾌하게 정교화한, 코뮤니스트 분파의 책무와 유사하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 2017년 4월
<주>
[1] Notebook IV, the Chapter on Capital.
<출처>
22nd ICC Congress: Resolution on the international class strugg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