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의식을 획득하는데 지속적인 의지와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하나의 일관되고 집단적인 실체로서 혁명가들 조직 또한, 기회가 주어지면 즉석에서 이뤄지는 그런 과정이 아니다. 공산주의 조직이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필요에 부응해 출현한다는 사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부로서 자생적인 계급투쟁의 결실로서 등장한다는 사실은, 사건들의 밀물과 썰물에 의해 자신이 이리 저리 떠밀리도록 아무 생각 없이 내버려두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투쟁의 자생적인 흐름에 엄격하게 ‘복종’하는 것은 이러한 자생성의 진실로 혁명적인 방향을 변경해 버림으로써 끝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이해관계는, ‘매일매일’ 상황이 나타나는 그 대로, 그저 그 앞에 수동적으로 고개를 숙이는 것에 있지 않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자생성은 그 투쟁들이 의식적이고 자생적으로 최종 목표를 향하도록 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혼란스럽고 통제되지 않는 채 일어나는 일련의 산발적인 폭동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자생적으로 더 큰 숙달과 심사숙고된 자기 절제(self-control)를 향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적 미래가 없는 계층이나 계급들의 폭동들과는 달리, 혁명적 자생성은 확 타오르고 또 그 만큼 빨리 다 타버리는 것이 아니라, 불꽃은 없으나 연기는 많이 나며 끊임없이 천천히 타들어가다가, 현존하는 질서를 의식적인 방법으로 파괴하는 커다란 불이 되어 터져 나온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자본의 비참함에 대한 갑작스럽고 자생적이며 매우 예견 불가능한 반응은, 물질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투쟁을 일반화시킬 가능성, 그리고 오늘날 파업에서 미래의 파업을 준비하기 위해 교훈을 뽑아낼 가능성과 결합되어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생성은, 부르주아지와 맞서는 잠재적 능력과, 각각 분리된 저항들을 더 큰 규모의 행동, 더 광범위한 정치적 틀로 모아내는 능력을 포함한다. 이 잠재력은 혁명가들의 개입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만드는 것과 동시에, 그런 개입을 마치 사막에 뿌려진 씨앗처럼 죽은 문자가 되지 않게 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들의 목표를 지향하는 그 역량을 발전시키는데 당이 그토록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비옥한 토양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즉, 역사적 이해관계에 부응하는 정치적 지향을 듣고,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동지들에게 말하기 때문이다.
혁명가들을 명확한 강령의 기초 위에 “별도의 정치적인 당” 속에 조직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의식적으로 투쟁의 주인이 되려는 자생적인 의지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이다. “조직적 문제는 정치적 문제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레닌)는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조직적 문제 자체가 정치적 문제이다.
역사의 경험은 이러한 생각을 강화시킨다. 그러므로 볼셰비키가 옛 사회민주주의의 조류 외부에서 조직하는 쓰디쓴 결단을 보여주고 그리하여 혁명 과정의 진행에 총력을 다 한 반면에,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좌익은 주검에 연결된 탯줄을 재빨리 끊어버리는 데 주저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세계 혁명의 역사적 과정에 제동을 걸었다.
이러한 좌파의 가장 유명한 대표자인 로자 룩셈부르크는, 비록 그녀가 자신의 저작에서 1910년에 벌써 카우츠키의 정책들과 공개적으로 결별하고 그들의 정치적 입장 사이에 간극이 생겼음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간극을 조직적 수준에까지 가져가는 것에는 반대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곳에서 단순한 “조직적 처방”을 보았을 뿐, 근본적인 정치적 문제를 보진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대중의 수준에’ 머물 필요를 방어했던, 사회민주주의의 당에 관한 관점에 얽매여 있었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적이 되어버린 옛 조직들과는 다른 명백하게 정치적인 분파로 혁명가들을 조직하는 것이, 어떻게 계급의 자생적인 운동으로 하여금 기회주의자들을 제거하도록 돕고, 그 자생성의 생동하는 요소를 구성할 수 있는가를 그녀는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당의 실제적인 어떤 개입도 없이, 자생적인 운동 자체가 기회주의자들을 극복할 필요성을 주장함으로써, 룩셈부르크는 본의 아니게 조직적 문제와 혁명가들의 존재를 바로 이러한 자생적인 운동의 경계선 밖으로 치워버렸다.
명백히, 혁명가들의 존재는 객관적인 조건들에 의존하고, 조직들로 그리고 언젠가는 당으로 재편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객관적 조건들에 의존한다. 우리는 혁명이 전체로서 노동자들 전체의 일임을, 그 자신들의 일임을 또한 보아왔다.
“인간은, 마음대로 역사를 만들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역사를 만든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행동은 당시 사회 진화의 성숙도에 의존한다. 그러나 사회 진화는 다시, 프롤레타리아트와 독립된 별개의 것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 발전의 산물이자 결과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 추동력과 그 유발요인이다. 행동 자체는 역사를 함께 결정하는 힘이다. 사람이 자신의 그림자를 뛰어넘을 수 없듯이 우리는 역사발전에서 한 시기를 건너뛸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발전의 속도를 가속하거나 감속할 수는 있다. (…) 그러나 대중의 의식적인 의지라는 점화의 불꽃이 과거 발전에 의해 이루어진 물질적인 조건들로부터 분출하지 않으면 (승리는) 결코 쟁취할 수 없을 것이다.”(로자 룩셈부르크, 『사회민주주의의 위기(Die Krise der Sozialdemokratie)』, 1916년, 우리의 강조)
그러므로 당은 “역사 발전에서 한 시기를 건너뛸 수는” 없으며, “거대한 대중”의 의식을 대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 계급의식은 언제나 폭넓은 다수 운동으로 나타나는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 글을 썼던 1916년에, 프롤레타리아트를 전쟁으로 끌어들였던 ‘사회민주주의’를 두고서 그것이 ‘계급의식’의 표현이라 말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절대 다수는 계속해서 이 조직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성숙과 정치의식의 표시였던가?
혁명은 진정 노동자들 전체의 의식적인 작업일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아름답게 곧은 일직선처럼 뻗어있지 않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마치 한 사람이 걸어가듯 그렇게 조용히 움직이지 않는다. 광대한 노동자 대중은 언제나 하나의 길만을 걷는 것은 아니며, 동일한 의식을 갖는 것도 아니다. 혁명적 시기에조차도 프롤레타리아 절대 다수가 부르주아지의 책략에 반쯤 눈먼 상태에 놓인 그러한 시기들이 있다. 이러한 중요한 순간에, 소수 혁명가들이 도입한 ‘가속화’가 결정적일 수 있다. 이러한 순간에는, 계급의식이 도달한 성숙도를 가늠하는 것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영향 아래 있는 다수의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반응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명확한 인자들의 입장이다. 이러한 인자들의 책무는 그들이 이해한 것을 나머지 노동자들에게 널리 전달하는 것이지, 그들의 정치를 대중의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 아니다.
공산주의자의 역할은, 계급투쟁의 밀물과 썰물에 수동적으로 따르는 것이 결코 아니라, 이러한 투쟁 속에서 불꽃은 없이 연기만 피우며 타고 있는 혁명적 경향들을 촉진하기 위해서 그들 스스로를 조직하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 계급의 살아있는 산물이자,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성숙에서 능동적인 요소이다.
그러므로 일단 혁명가들이 구 정치 체제, 이전의 조직 형식과 정치적 실천들의 붕괴를 깨닫고 나면, 그들의 책임은 명확한 기반 위에 스스로를 조직하고 투쟁에 대한 전망을 실현시키기에 앞서 우선 나머지 노동자들이 따라잡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이런 태도는 계급의식의 어떤 진보도 불가능하게 만들며, 악순환으로 끝나고 만다. 도대체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의식적인 인자들 자체가 낡은 조직 형식들의 죽음을 선언하고 새로운 지향을 제안하길 주저한다면,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 전체가 그러한 죽음과 과거 정치적 입장의 파산을 알게 되겠는가?
혁명의 에너지들을 결집하여, 적의 진영으로 넘어간 옛 노동자당과는 독립적인 정치조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독일에서도 다른 어느 곳에서도 단순한 ‘조직적’ 문제가 아니었다. 조직적 문제는 근본적으로 정치적 문제이다. 독일 좌파는 조직적으로 사회민주당과 결별하는 것을 망설임으로써 더 심오한 다른 것들을 배신했다. 혁명가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학살자들, 즉 노동자들을 세계 대전의 대량학살로 내 몬 후 부르주아지의 “블러드하운드”(사냥개)가 된 샤이데만(Scheidemann), 에버트(Ebert), 노스케(Noske)와 그 일당 등과 같은 정말 역겨운 사회민주당 인간쓰레기들의 소행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확고하게 비난하는 데 주저했다.
그러므로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1918년 1월에 발발한 첫 번째 거대한 파업들은 사회민주당에 의해서 의식적으로 뒤로 위축되었고 부르주아 합법성으로, 즉 그들의 죽음으로 잘못 인도되었다. 이러한 (더욱이 전 유럽에 걸쳐 일반화된) 책략들에 직면하여, 사회민주당과 아직 결별하지 못한 스파르타쿠스 단원들, 즉 좌익은 완전히 무기력한 채로 남아 있었다.
“오후에는, 샤이데만과 에버트(SDP)가 행동 위원회(파업 중에 선출된)에, 수상이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중재를 통해 정부와 협상에 들어가자고 제안했다. 행동 위원회의 구성원들은 방향을 잃었다. 요기세스(Jogisches, 스파르타쿠스 단원)가 강조했듯이, 그들은 더 이상 이 혁명적 에너지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마련된 덫을 보았으나, 파업자들 사이에서 선출된 대표들만이 그들 자신들의 이름으로 적절히 협상할 수 있을 텐데라고 인정하는 것 그 이상으로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 (P.부루에 (Broue), 『독일혁명(La Revolution en Allemagne)』, 1969년, 우리의 강조)
파업의 패배에서 혁명가들은 무거운 책임을 느꼈고, 요기세스는 그 패배에서 교훈을 끌어내면서 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의회주의적 백치주의로 인해, 모든 노동조합 파업을 위해 만들어진 도식을 적용하려는 욕망으로 인해서, 특히 대중의 신뢰 부족 때문에 (…) 그 위원회는 모든 형태의 협상을 거부하고 노동자들의 에너지를 풀어놓는 대신에, 사회민주주의 대리인들의 영향 아래서 정부와 협상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데에 스스로를 한정시켰다.”
(스파르타키스트 리플렛, 『독일 노동자 운동의 역사에 관한 문서와 자료(Documents et Materiaux pour une histoire du mouvement ouvrier en Allemagne )』(1914-1945) Ⅱ/2권)
그 후 스파르타쿠스 단원들은 그들의 망설임이 위험한 오류였다는 것을 깨닫고 독립적인 정치적 당을 만들게 되었다. 이것이 <공산주의 당(Kommunist Party)> - KPD(스파르타쿠스당) - 이 결국 1918년 12월에 만들어진 이유이다. 슬프게도, 이 탄생은 때 늦었고, 1919년 1월에도 여전히, <공산주의 당>은 결정적인 개입에 대한 이전과 마찬가지의 공포, 어떤 행동이 일어나기 전에 이전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논쟁, 이전과 마찬가지의 방향성 부족과 명확한 정치적 전망 부족이 만연했다.
다음은 한 공산주의자가 산증인으로서, 1919년 1월의 운동과 공산당의 반응을, 처음에는 <스파르타쿠스 연맹>의 것이다가 그 다음엔 KPD(s)의 것이 된 신문에 기술한 것이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대중들은 일찍부터, 9시부터 계속 안개와 추위 속에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지도자들은 토론하며 어딘가에 앉아 있었다. 안개는 짙어지고, 노동자들은 여전히 기다렸다. 그리고 지도자들은 토론했다. 정오가 되고, 추위에 배고픔이 더해졌다. 그리고 지도자들은 토론했다. 노동자들은 흥분으로 미쳐가고 있었고, 그들의 광기를 가라앉힐 말, 실천을 원했다.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안개는 더욱 더 짙어졌고, 그와 함께 어둠이 깔렸다. 슬프게도, 노동자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어떤 거대한 것을 원했으나,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도자들은 여전히 토론했다. 바깥에는 프롤레타리아들이 손에 무겁고 가려운 총을 들고 있었다. 안에서는 지도자들이 토론하고 있었다. 현청에는 대포가 조준되어 있고, 건물들의 모든 코너에는 수병들이 지키고 서 있으며, 밖으로 열린 모든 방에는 군인들, 선원들, 프롤레타리아로 가득했다. 안에는, 지도자들이 앉아서 토론했다. 그들은 밤 새 앉아서, 여명이 비추고 해가 떠 아침이 될 때까지 계속 앉아서 토론했다. 그리고 그룹들은 다시 지게스알레(Siegesallee) 거리에 모였고, 지도자들은 여전히 앉아서 토론했다. 그들은 토론하고, 또 토론하고, 또 토론했다.”(붉은 깃발(Die Rote Fahne), 1920년 9월 5일)
이 묘사는, 일화적이고 다소 희화화된 비유에도 불구하고, 1919년 1월의 상황을 충분히 잘 요약하고 있다. 1월 4일부터 계속 펼쳐진 운동에 개입해서 부르주아 정부의 전복이라는 명백한 전망을 제공하는 대신, 공산주의자들은 오래 동안 망설이다가 그 자신들의 혼란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결국 노동자들의 혁명적 운동의 속도를 늦추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환상을 유지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마침내 KPD(s)는 마지막 순간에, 그것도 그 운동에 의해 추동되어 권력 쟁취의 슬로건을 걸었다. 이것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실, 에버트 정부의 탄핵도, 운동의 마지막 목표의 제시도 이전에 먼저 준비되거나 논의되지 못했었다. 이랬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그 전투성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당과의 결별이라는 전망에 직면했을 때 주저하는 반응을 보였다.
“베를린 노동자의 다수는 각각 사회주의자라고 주장하는 두 진영 사이에 막 벌어지려는 이러한 전쟁에 참가하거나, 심지어는 그 전쟁을 받아들일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공장에서 열린 모임과 집회에서 그들은 두 경향들 사이의 싸움, ‘형제간의 싸움’의 즉각적인 종결을 요구했고, 또한 모든 사회주의 경향들에서 보편적으로 요구되고 호소되는 ‘일치단결’을 지지했다.”(P. 부루에(Broue), 『독일혁명( La Revolution en Allemagne)』, 1969)
독일에서는 그 당시 명확한 강령과 조직에 기반한 선전과 정치적 선동이 전적으로 부족했다. 그 뒤로 계속, KPD는 기회주의자의 길을 걷게 되었고, 1920년 12월 사회민주당의 ‘좌파’와 통합되어 VKPD(독일 통합 공산주의당)를 결과시켰다. 이 모호한 태도는 가장 건강한 정치적 전위 인자들의 반응을 자극해서, 그 결과 이러한 인자들은,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이라는 하나의 독립적인 당을 조직하게 되었다. 슬프게도, 이 반응은 너무 늦게, 1920년 4월에야 나타났다. 세계 혁명은 이미 더욱 어려운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고, 패배에 패배를 거듭하다가 1927년에 결국 죽음을 맞았다. 혁명가들은 그들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 그들은 충분히 일찍 조직화되지 못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