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독재와 언론검열에도, 사회민주당의 기능상실에도, 형제살해적인 전쟁에도 불구하고, ‘당쟁중지’로부터 강력하게 계급투쟁이 그리고 전쟁터의 피안개로부터 노동자의 국제연대가 생겨나고 있다. 옛 인터내셔널을 인위적 전기요법을 통해 되살리려는 미약한 시도에서가 아니다. 전쟁 뒤에는 즉시 다시 결속하겠다는 여기저기서 새로이 이뤄지는 맹세에서가 아니다. 아니다, 지금, 전쟁 중에, 전쟁으로부터 완전히 새로운 힘과 무게로, 모든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는 하나의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이 되살아나고 있다. 세계대전은 그 자체가 만들어낸 속임수를 스스로 반증했다.
승리냐 패배냐! 이것이 모든 교전 국가에서 지배적인 군사주의의 구호이다. 그것을 메아리마냥 사회민주당지도자들은 받아들였다. 전쟁터에서 승리 아니면 패배가 문제라고 한다. 지금 프랑스뿐만 아니라 독일, 러시아뿐만 아니라 영국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있어서도 이 나라들의 지배계급에게 그러하듯 똑같이 그것이 문제란다. 대포가 천둥치듯 울려대자마자, 모든 프롤레타리아트는 자국의 승리에, 그러니까 타국의 패배에 관심을 두어여 한단다. 승리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무엇을 가져올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공식적인 설명에 따르면, 독일이 승리하면 방해받지 않는 무제한적인 경제활황이, 패배할 때에는 경제적인 폐허가 초래된다고 한다. 이러한 견해는 1870년 전쟁의 도식에 바탕한 것이다. 그러나 독일에서 1870년 전쟁 뒤에 나타난 자본주의적 개화는 전쟁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비스마르크가 창조한 독일제국이라는 기형적인 형태이긴 해도 어쨌든 그런 정치적 통일의 결과였다. 경제활황은 여기서 전쟁과 그 결과로 나타난 다양한 반동적인 방해들에도 불구하고 통일에서 비롯되었다. 승리한 전쟁이 그에 덧붙여 자체적으로 행한 것이라고는 독일에서 군사왕정과 프로이센 융커체제의 확립이었다. 그와 달리 프랑스의 패배는 제국의 해체와 공화국의 탄생을 가져왔다. 하지만 오늘날은 사정이 모든 관련 국가들에서 완전히 다르다. 오늘날 전쟁은 떠오르는 젊은 자본주의에게 그것의 ‘민족’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될 정치적 전제조건을 만들어주는 일종의 역동적인 수단으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이러한 성격을 이번 전쟁은 기껏해야 그것도 고립된 파편으로서 고찰될 때 세르비아에서만 가지고 있다. 그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로 환원하면, 전체로서의 지금의 세계전쟁은 이미 완전히 꽃필 대로 꽃핀 자본주의가 세계지배를, 마지막 남은 비자본주의적 세계지대의 착취를 놓고 벌이는 경쟁적 투쟁이다. 이로부터 이 전쟁 자체의 완전히 변화된 성격과 그 작용이 나온다. 자본주의 생산의 고도의 세계경제적 발전은 여기서 대단히 높은 기술, 즉 전쟁수단의 파괴력에서 뿐만 아니라, 그 기술 수준이 모든 교전국들에서 거의 완전히 동일하게 높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살인병기산업의 국제적인 조직화는 지금 군사적 균형 속에 반영되는데, 이러한 균형은 부분적 결정들과 저울접시의 흔들림을 통해서 항상 다시 이뤄지고 그래서 총체적인 결정이 항상 다시 뒤로 미뤄지게 된다. 전쟁의 승패가 결정나지 않기에 다시, 교전국의 국민 대중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중립을 지켜온 나라들도에 항상 새로운 예비군을 포화 속으로 보낸다. 제국주의적 탐욕과 대립에서 이 전쟁은 도처에서 쌓여있는 연료를 발견하고, 스스로 새로운 연료를 만들어내면서 마치 대초원의 산불마냥 퍼져나 간다. 그러나 더 많은 대중이 그리고 더 많은 나라가 사방에서 이 세계대전에 개입할수록, 전쟁의 지속기간은 더 연장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합치면, 군사적 승패가 결정되기 전에 이미 그 전쟁의 작용으로 인해 이전까지의 전쟁들에서는 알려진 바 없는 현상이 현대에는 나타나게 된다. 모든 관련국의 경제적 폐허, 그것도 점점 더 정도가 심하게, 그리고 또한 공식적으로 관여되지 않은 국가들의 경제적 폐허가 바로 그것이다. 전쟁이 한달 두달 더 지속될 수록, 이러한 폐허는 더 고착되고 더 강화되어, 그렇게 군사적으로 승리할 경우 기대되는 열매를 십년 앞서 빼앗아버린다. 이런 결과를 놓고 볼 때, 최종적으로 승리하든 패배하든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오히려 그 역으로 순수하게 군사적인 결정이 전적으로 의심스럽게 되어 모든 측에서 극도의 고갈로 인해 종국적인 전쟁종결이 초래될 것이 점점 더 확실해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하에서 독일이 승리한다 하더라도, 전쟁선동자들이 그러한 대량살해를 통해 모든 반대자를 완전히 진압하는데 성공한다고, 이러한 대담한 꿈이 이뤄진다고 가정하더라도, 많은 희생을 치르고 얻는 피로스의 승리i만을 얻게 될 것이다. 그 트로피는, 인구가 전멸되고 재정이 바닥난 합병지역 몇몇, 그리고 전쟁차관을 통해 이뤄진 재정관리로 그려진 커튼과 전쟁물자조달을 통해 운영되던 ‘튼실한 국민생활수준’이라는 포템킨촌ii의 겉치레를 걷어내자마자 즉시 드러나게 될 조롱하는 듯한 국내의 폐허가 전부일 것이다. 승전국이라 하더라도 이번 전쟁으로 생긴 상흔을 치유할 수 있기는 커녕 오늘날 어떤 전쟁배상도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은 가장 피상적인 관찰자에게도 분명하다. 그 대신에 그리고 그 ‘승리’에 위안을 제공하는 것은, 패배한 반대편, 즉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더 큰 경제적 폐허가 생겼다는 점일 것이다. 이 나라들과 독일은 경제적 관계들을 통해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이 나라들의 생활수준에 독일 자체의 재개화는 가장 많이 의존적이다. 그러한 틀 안에서, 독일 국민에게 있어서 전쟁 후, ‘승리한’ 전쟁 후라는 전제하에서, 애국적인 민중대변자가 미리 ‘승인한’ 전쟁비용을 나중에 실제로 치르는 것, 즉 강화된 군사적 반동뿐만 아니라 조세의 엄청난 부담을 ‘승리’의 유일하게 남은 구체적인 열매로서 스스로의 어깨에 부담하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패배라는 최악의 결과들을 상상해 본다면, 제국주의적 합병을 제외하고는, 승리의 불가피한 귀결들로 나타나게 될 것과 모양새가 비슷하다. 즉, 전쟁수행 자체의 영향은 오늘날 매우 근본적이고 광범위한 성질의 것이어서 그 군사적 결과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주 적다.
그런데 승리한 국가가 그래도 더 큰 폐허를 패배한 상대편에게 떠넘기고 그 편의 경제발달을 모든 장해물을 써서 묶어둘 수 있다고 잠시 한번 가정해 보자. 프랑스, 영국, 벨기에 그리고 이탈리아 노동자의 노동조합적 행동이 경제적 퇴보를 통해 저지당한다면, 독일노동자계급이 전쟁 후 노동조합투쟁에서 성공적으로 전진할 수 있을까? 1870년까지 노동자운동은 각 나라에서 독자적으로 진행되었고, 각 개별 도시들에서 자체적인 결정을 내렸다. 파리의 길거리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전투가 이뤄지고 결정되었다. 오늘날의 노동자운동은, 그 힘겨운 경제적 일상투쟁은, 그 대중조직은 자본주의 생산의 모든 나라의 공동작용에 기반하고 있다. 건강하고 강력하게 맥박 치는 경제생활의 지반 위에서만 노동자의 형편이 나아질 수 있다는 말이 옳다면, 그것은 독일에게 뿐만 아니라 프랑스, 영국, 벨기에, 러시아 그리고 이탈리아에게도 통용된다. 그리고 유럽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노동자운동이 침체되고, 그곳에서 저임금과 허약한 노동조합이 존재하고 착취당하는 이들의 저항력이 약하다면, 독일에서 노동조합운동은 꽃필 수 없다. 이러한 견지에서, 독일 자본주의가 프랑스 자본주의를 대가로 또는 영국 자본주의가 독일 자본주의를 대가로 강화된다면, 이는 경제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진영에게는 정확히 똑같은 손실이다.
그러나 전쟁의 정치적 사건들을 살펴보자. 여기서 구별하기가 경제영역에 비해서 훨씬 더 쉬울 것이다. 오래 전부터 사회주의자들은 반동에 맞서 역사적 진보를 위해 싸우는 그러한 쪽을 향해 공감대를 갖고 또 그에 가담하였다. 오늘의 세계대전에서 어느 쪽이 진보를 또 어느 쪽이 반동을 대표하는가? 분명히 이 문제는 ‘민주주의’나 ‘절대주의’라는 교전국들의 외적인 특징에 따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각 측이 옹호하는 세계정치적 입장의 객관적 경향에 따라서만 판단될 수 있다. 독일의 승리가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가져올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판단하기 전에, 우리는 어떻게 그 승리가 유럽의 정치 관계들의 전체적 조형에 영향을 끼칠 것인가를 주시해야 한다. 독일의 결정적인 승리는 그 즉각적인 결과로서 벨기에의 합병뿐만 아니라 아마도 동서쪽 몇몇 지역들과 프랑스식민지 몇 부분의 합병을 초래할 것이며, 동시에 합스부르크왕가의 유지와 그것의 새로운 지역 획득,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일 보호령 하에 터키의 허구적 ‘통합성’의 유지가 초래될 것이다. 즉, 소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가 동시에 이런 저런 형태로 사실상 독일지방으로 전환될 것이다. 그 이외의 결과로서 유럽에서 독일의 실제적인 군사적 경제적 헤게모니가 뒤따를 것이다. 독일의 철저한 군사적 승리가 가져오게 될 이러한 모든 결과가 예상될 수 있는 것은, 오늘의 전쟁에서 제국주의적 장담자들의 희망에 따라서가 아니라 독일이 일단 채택한 세계정치적 입장으로부터, 독일이 질주해온 그리고 전쟁이 진행되면서 그 시작 당시의 차원을 엄청나게 뛰어넘어버린, 영국에 대한, 프랑스에 대한 그리고 러시아에 대한 독일의 대립들로부터 이러한 것들이 결과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결과들이, 그 어떤 식으로든 유지될 수 있는 세계정치적 균형을 결코 초래하지 않을 것임을 통찰하기에는 이러한 결과들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전쟁이 모든 관련국들에게 얼마나 큰 페허를 의 미하든 간에, 그리고 패전국들에게는 아마도 훨씬 더한 정도의 폐허를 의미하든 간에, 유럽과 근동에 부담으로 작용할 프로이센-독일 군사주의의 질곡을 벗어나기 위해서 평화협정체결 그 다음날 바로 영국 주도하에 새로운 세계전쟁으로의 준비가 시작될 것이다. 독일의 승리는 그래서 곧 이어질 제2차 세계대전의 전주곡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치열한 군사적 무장 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들에서 하지만 최우선적으로 독일 자체에서 가장 어두운 반동들이 날뛰게 되는 신호탄에 불과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승리는 독일에게 거의 확실히 최소한 식민지와 제국의 몇 부분의 손실을 가져올 것이고 독일 제국주의의 세계정치적 지위를 파산시킬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파편화와 터키의 완전한 해체이다. 지금 그 두 나라는 극히 반동적인 구조물이다. 그 두 나라의 붕괴 자체는 진보적인 발전의 요구에 아주 부합한다. 오늘날의 구체적인 세계정치적 환경에서 합스부르크왕가와 터키 제국이 무너지면, 그곳의 나라들과 민족들은 러시아, 영국, 프랑스 및 이태리에게로 귀속될 수밖에 없다. 발칸과 지중해지역에서 이런 광대한 세계재분할과 권력이동에 뒤이어 아시아에서 또 다른 것, 즉 페르시아의 해체와 중국의 새로운 파편화가 끊임없이 뒤따를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영국-러시아의 대립뿐만 아니라 영국-일본의 대립이 세계정치의 전면에 나타날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오늘날 세계전쟁의 청산에 곧이어 콘스탄티노플을 놓고 벌이는 새로운 세계대전을 초래할 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것은 불가피한 앞으로의 전망이 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승리는 모든 국가들에서, 패전한 독일을 당연히 선두로 하여, 새로운 치열한 군무장을, 그래서 새로운 세계전쟁을 그 최종목표로 유럽전체에서 군사주의와 반동의 완전한 지배의 시대를 준비하게 된다.
이렇게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는 진보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오늘의 전쟁의 어느 한쪽의 편을 들게 된다면, 세계정치와 그 앞으로의 전망들 전체를 놓고 볼 때, 스킬라와 카리브디스iii사이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유럽 노동자계급에게 있어 승리냐 패배냐의 문제는 이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측면에서 두개의 심한 타격 사이에서 가망 없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독일의 군사적 패배가 군사주의에 아니 심지어는 제국주의에 일격을 가할 것이고 세계에 평화로운 민주주의의 길을 열 것이라고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이 생각한다면, 이것은 불운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제국주의와 그것에 봉사하는 군사주의는 오히려 이 전쟁이 승리하든 패배하든 상관없이 완전히 사회주의자들의 부담으로 돌아오게 된다. 오직 한 가지 경우만이, 즉 국제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적으로 개입하여 군사주의의 계획을 망쳐놓을 경우만이 그 예외이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와 관련 오늘의 전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프롤레타리아트는 독일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영국에서도 러시아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승리냐 패배냐>라는 구호의 무비판적인 메아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흔들릴 수 없는 사실이다. 이 구호는 오직 제국주의의 입장에서만 진정한 내용을 가지고, 모든 강대국에게 있어서 세계정치적 권력입지의 획득이냐 상실이냐의 문제와 동일하며, 합병과 식민지 그리고 군사적 지배의 문제와 동일하다. 유럽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에게 있어 오늘날 그 계급 입장으로 볼 때 각 교전 진영의 승리와 패배는 똑같이 불운한 것이다. 바로 그러한 전쟁 자체와 그 모든 군사적인 결과들은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가장 큰 패배를 의미한다.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행동을 통해 전쟁을 극복하고 신속히 평화를 요구하는 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안에 있어 유일한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승리 자체만으로도 벨기에뿐만 아니라 동시에 유럽의 민주주의를 진정으로 구제하는 작용을 할 수 있다.
오늘의 전쟁에서 계급의식적 프롤레타리아트는 어떤 군사 진영과도 자신의 사안을 동일시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설마 결과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가 오늘날 현상태의 유지를 요구하는 것이 되는가? 우리는 그러면 모든 것이 전쟁 전과 같이 옛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소망 외에 그 어떤 다른 행동강령도 갖지 않는단 말인가? 하지만 기존 상태는 결코 우리의 이상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민족자결주의의 표현이 아니다. 게다가 이전의 상태는 전혀 구제될 수도 없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국경이 유지된다 할지라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은 그 사건들을 공식적으로 청산하기에 앞서 이미 권력관계, 상호적인 권력평가, 제휴와 대립의 엄청난 혼합을 초래했다. 전쟁은 국가들 사이의 관계와 사회 내 계급들 사이의 관계를 첨예하게 바꿔 놓았다. 그렇게 많은 오랜 환상과 활력을 파괴하고 그렇게 많은 새로운 충동과 새로운 과제를 창조해서 1914년 8월 4일 이전의 유럽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마치 혁명이 진압된 뒤 혁명전 관계들로 되돌아가는 것만큼이나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는 결코 ‘후퇴’를 모른다. 오직 앞을 향해 노력할 뿐이다. 항상 기존의 것과 새로이 창조된 것을 넘어서 나아가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라도 제국주의적 세계대전의 두 진영에 대항해 프롤레타리아트 자체의 정치를 대립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각각 또는 공동으로 국제대회에서 경쟁적으로 기획안들을 만들어 내는 것에 있지 않고, 평화적 민주주의의적 발전을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하려면 어떻게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할지에 관한 처방을 부르주아의 외교를 위해 고안해 내는 것에 있지 않다. 완전한 또는 부분적인 ‘무장해제’, 비밀외교의 폐지, 모든 강대국을 작은 민족국가들로 조각내는 것 등등으로 이어지는 모든 요구는, 자본주의적 계급지배가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 모두가 그리고 특히 완전히 공상적이다. 게다가 현재의 제국주의 노선은 오늘날 군사주의, 비밀외교, 그리고 민족들이 혼합된 집중화된 대국을 포기하지 않기에 그와 관련된 요구들은 결국 그 모두가 더 결연하게 자본주의 계급국가들의 폐지라는 단호한 ‘요구’로 나아가게 된다. 제국주의가 부르주아 국가의 틀 안에서 부분적인 개량을 통해서 어떻게 완화되고 길들여지고 억제될 수 있을 지에 대한 공상적인 충고나 계획들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정치가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없다. 세계대전이 사회주의당 앞에 제기한 그리고 그 해답에 노동자운동의 앞으로의 운명이 달린 그 원래의 문제는 자본주의에 대항한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행동능력이다.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요구들, 강령들 그리고 구호들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위와 효과적인 저항, 제국주의를 결정적인 순간에 그것도 바로 전쟁 중에 공격하고 ‘전쟁에는 전쟁을!’이라는 오랜 구호를 실천에 옮길 능력이 없는 것이다. 여기가 바로 뛰어내려야할 곳인 바로 그 로도스iv다. 여기가 바로 프롤레타리아 정치와 그것의 먼 미래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제국주의는 잔인한 폭력정치와 그것로 유발된 일련의 끊임없는 사회적 재앙과 함께 현재 자본주의 세계의 지배계급에게는 확실히 역사적인 필요성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지금의 전쟁으로부터 자본주의의 앞으로의 목가적이고 평화스런 발전에 대한 그 어떤 최소한의 환상과 희망이라도 건져내게 된다면, 그보다 더 불운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정치가 제국주의의 역사적 필요성으로부터 끌어내어야 할 결론은, 그 계급이 제국주의의 그늘 안에서 그 승리의 자비로운 떡고물로 앞으로의 삶을 근근이 이어가기 위해 제국주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변증법은 바로 모순들 속에서 움직이고 모든 필요성에 대해 그것의 반대편을 창출한다. 부르주아 계급지배는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의 역사적 필요성이지만 그것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반란도 또한 그렇다. 자본은 하나의 역사적 필요성이지만 그것의 무덤을 파는 자, 즉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도 그렇다. 제국주의의 세계지배는 하나의 역사적 필요성이지만 프롤레타리아 인터내셔널에 의해 그것이 몰락하는 것도 그렇다. 단계마다 서로 모순에 빠진 두 가지의 역사적 필요성이 있고, 우리의 것, 즉 사회주의의 필요성은 더 긴 생명을 갖는다. 우리의 필요성은 다른 것, 즉 부르주아 계급지배가 역사적인 진보의 담지자이길 중단하는 순간, 사회의 앞으로의 발전에 방해물로, 위협으로 되는 순간과 더불어 완전히 정당하게 된다. 오늘날의 전쟁은 이 점을 자본주의 사회질서에서 들춰냈다.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팽창충동은 자본주의 성숙의 최고의 표현으로서, 그 삶의 마지막 단계의 표현으로서, 전 세계를 [하나의] 자본주의적으로 생산하는 세계로 변화시키고 전자본주의의 모든 낡은 생산방식과 사회형식을 없애버리며 지구상의 모든 부와 모든 생산수단을 자본으로 바꿔버리고 모든 지역의 노동하는 민중을 임금노예로 만들어버리는 경제적 경향성을 갖는다. 아프리카에서 그리고 아시아에서, 아메리카의 최북단에서부터 최남단까지 그리고 남태평양에서 오랜 원시공산주의적 연합체들, 봉건적 지배관계들, 가부장적인 농민경제, 아주 오랜 수공업생산들이 자본에 의해 파괴되고 짓밟히며, 전체 민족이 멸종되고 고대의 문화가 초토화 되어, 그 자리를 초현대적인 형태의 이윤 만들기가 차지한다. 세계에서 이러한 자본의 잔인한 전승 행렬을 모든 형태의 폭력, 강탈 그리고 파렴치가 길을 닦고 동행하면서 그래도 장점을 하나 갖고 있다. 즉, 그것은 그 자신의 결정적인 몰락의 전제조건을 창조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 뒤에라야 사회주의 세계혁명이 뒤따를 수 있는 자본주의의 세계지배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은 원시적인 나라들에서 시행된 자본주의의 이른바 위대한 문화작업의 유일하게 문화적이고 진보적인 측면이었다. 부르주아-자유주의 경제학자들과 정치가들에게는 철도, 스웨덴산 성냥, 하수도시설 그리고 백화점이 ‘진보’이자 ‘문화’이다. 원시적인 상태들을 희생시킨 그러한 작업들 그 자체는 문화도 진보도 아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민족의 갑작스런 경제적 문화적 폐허를 대가로 얻어지기 때문이다. 그 민족은 전통적인 자연경제적 지배관계와 최첨단의 가장 세련된 자본주의적 착취라는 두 시대의 그 모든 비참과 모든 공포를 한꺼번에 맛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의 자본주의적 전승 행렬은 자본지배의 철폐를 위한, 계급사회의 폐지를 위한 물질적인 전제조건들로서만 오직 광범위한 역사적 의미에서 진보의 낙인을 갖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국주의는 결국 우리를 위해 일했다.
오늘의 세계대전은 제국주의의 진로에서 하나의 전환점이다. 최초로 지금, 자본주의 유럽이 세계 곳곳에 풀어놓았던 흉포한 야수가 단번에 유럽 한 복판으로 침입했다. 유럽문화의 귀중한 작은 보석인 벨기에가, 북프랑스의 외경스런 문화유산들이 맹목적인 파괴력의 충돌로 쨍그랑거리며 산산조각났을 때, 경악의 외침이 전 세계를 휩쓸었다. 바로 그 제국주의가 수만 명의 헤레로v족에게 똑같은 몰락을 가져왔을 때 그리고 칼라하리사막이 목말라하는 자들의 외침으로, 죽어가는 자들의 신음으로 충만했을 때, 푸투마요vi에서 10년 만에 4만 명이 한 무리의 유럽 산업기사들에 의해 죽도록 수난을 당하고, 한 민족의 나머지가 불구가 되도록 매질 당할 때, 중국에서 아주 오랜 문화가 유럽 군인들에 의한 방화와 살인으로 파괴와 무질서의 모든 전율에 희생될 때, 페르시아가 점점 더 좁게 죄어오는 외부의 무력지배 속에서 무기력하게 질식당할 때, 트리폴리에서 불과 검을 가진 아랍인들이 자본의 질곡 아래 굴복당하고, 그들의 문화와 거주지가 초토화될 때, 그저 느긋하게 지켜보고만 있던 그 ‘문화세계’는 오늘에 와서야, 제국주의라는 야수의 물어뜯음이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 숨결이 극악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야수가 찢어발기는 발톱을 그 자신의 태내에, 유럽의 부르주아 문화에 할퀴자 그때야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도, 각 민족이 다른 민족의 군복을 입은 치욕만을 알아보는 그러한 부르주아의 위선의 왜곡된 형태로 겨우 얻어졌다. ‘독일 야만인들!’ – 마치, 조직화된 살인으로 나서는 거의 모든 민족이 그와 동시에 한 무리의 야만인들로 둔갑해버리지 않았던 것 마냥. ‘코사크인들의 만행!’- 마치, 전쟁 자체가 모든 만행 중의 만행이 아니라는 듯, 마치 한 사회주의 청소년잡지에서 살인을 영웅적인 행동으로 칭송한 것은 순수한 문화에서 정신적으로 코사크적이 아닌 듯이!
그러나 유럽의 마당에서 오늘날 제국주의의 야수성의 광란은 ‘문화세계’가 전혀 경악의 눈으로 바라보지도, 전혀 가슴아파하지도 않는 작용 하나를 갖고 있다. 그것은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대대적 몰락이다. 그 어떤 전쟁도 결코 이 정도로 완전한 민중층을 멸종시키지는 않았다. 그 어떤 전쟁도 수백 년 이래 결코 유럽의 크고 오래된 문명국가들을 그와 같이 완전히 휩쓸어버리지는 않았다. 수 백만의 인명이 보주산맥에서, 아르덴vii지역에서, 벨기에에서, 폴란드에서, 카르파티아viii산맥에서, 사브ix강가에서 죽어갔다. 수 백만이 불구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백만 중에서 10분의 9가 도시와 시골출신의 노동 민중이다. 그곳에서 낫질 아래 들풀처럼 차례로 날마다 잘려나가는 것은 우리의 인력이고, 우리의 희망이다. 국제사회주의의 가장 똑똑하고 가장 잘 훈련된 최상의 역량들이자, 가장 신성한 전통의 그리고 가장 대담한 영웅행위인 현대 노동자운동의 담지자들이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전위병들이 바로, 지금 무더기로 도륙당하고 있는, 영국의, 프랑스의, 벨기에의, 독일의, 러시아의 노동자들이다. 유럽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이러한 노동자들이야 말로 바로, 사회주의 변혁을 수행할 역사적 사명을 가진 이들이다. 유럽으로부터만, 가장 오래된 자본주의 국가들로부터만, 때가 무르익으면, 인류를 해방할 사회혁명으로의 신호가 나아갈 수 있다. 영국, 프랑스, 벨기에,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노동자들만이 힘을 합쳐 전 세계 5지역의 착취당하는 사람들과 노예화된 사람들의 군대를 이끌 수 있다. 오직 그들만이, 때가 되면, 모든 원시민족들에 대한 자본주의의 수백 년 묵은 범죄들에 대해, 지구상에서 그것의 파괴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고 앙갚음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전진과 승리를 위해서는 강력하고 행동력 있는 단련된 프롤레타리아트, 그 위력이 정신문화와 그 수에 놓여 있는 대중이 필요하다. 이러한 대중이 바로 지금 세계대전으로 큰 손실을 입었다. 생명의 그리고 젊음의 꽃들이, 그들의 사회주의적 단련이 영국과 프랑스에서, 벨기에와 독일과 러시아에서 수십 년 동안 이루어진 계몽과 선전 작업의 산물인 그러한 수십만이, 내일이면 사회주의의 편이 될 수 있었을 또 다른 수십만이 전장에서 전사하여 처참하게 썩어간다. 수세대의 수십 년에 걸친 희생과 노력의 열매가 몇 주 만에 파괴되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핵심부대가 뿌리 뽑혀가고 있다.
6월 전투의 피흘림이 프랑스 노동자운동을 15년간 마비시켰다. 코뮌 학살의 피흘림은 그것을 다시 10년 이상 후퇴시켰다. 지금 진행되는 것은 전대미문의 대량학살로서, 모든 선도적인 문화국가들의 성인 노동자인구를 점점 더 여자와 노인과 장애자로 축소시키며, 유럽 노동자운동이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를지도 모르게 위협하는 피흘림이다. 또 한번 그러한 세계대전이 있게 된다면, 그렇다면 사회주의의 전망은 제국주의적 야만이 쌓은 폐허더미 아래 파묻히고 말것이다. 그것은 루벵과 랭스대성당의 극심한 파괴 그 이상이다. 그것은 과거의 부르주아 문화에 대해서가 아니라 미래의 사회주의 문화에 대한 범행이다, 유일하게 과거의 귀중한 보물들을 더 나은 사회에 넘겨줄 수 있는, 인류의 미래를 품은 그러한 역량에 대한 치명타이다. 여기서 자본주의는 해골을 드러낸다. 여기서 자본주의는 그 역사적 생존권이 다했음을, 그것의 계속된 지배가 인류의 진보와 더 이상 화해될 수 없음을 폭로한다.
하지만 여기서 또한 오늘날의 세계대전은 하나의 엄청난 살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유럽 노동자계급의 자살로서도 드러난다. 자본의 명령 아래 몇 달 동안 서로 죽이고 서로의 가슴에 차가운 총구를 들이대며, 서로를 죽음의 팔로 함께 껴안으며 무덤 속으로 떨어져가는 자들은 바로 사회주의의 병사들이다. 영국의, 프랑스의, 독일의, 러시아의, 벨기에의 프롤레타리아들 자체이다.
“독일, 모두 위의 독일! 민주만세! 차르와 슬라브족 만세! 천막천 수만폭, 규정대로임을 보장! 베이컨 수십만 킬로그램, 커피대용품 즉시 조달가능!” …이윤은 올라가고 프롤레타리아들은 죽어 쓰러져간다. 그 한 명이 전쟁터에서 죽어갈 때마다 미래의 투사, 혁명의 전사, 자본주의의 질곡으로부터 인류를 구할 해방자 한 명이 무덤 속으로 떨어진다.
이러한 부조리가 끝나고 지옥의 피비린내 나는 저주가 사라지는 것은, 독일과 프랑스의, 영국과 러시아의 노동자가 도취에서 마침내 깨어나 서로에게 우애적으로 손을 내밀어 제국주의 전쟁 선동자들의 야수 같은 합창과 자본주의적 하이에나의 목쉰 외침을 다음과 같이 노동의 오래되고 막강한 구호로 뒤덮어 버릴 때에야 가능해질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의 단결하라!
i Pyrrhussieg, 많은 희생을 댓가로 하여 얻어진 승리를 말한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패배와 다름없는 승리를 일컫기도 한다. 이 표현은, 기원전 279년 에피루스(Epirus)의 왕 피로스 1세(Pyrrhus I.)가 로마제국의 군대에 맞서 현재의 남부 이탈리아지역인 아스쿨룸(Asculum)에서 힘겹게 얻은 승리후, “이렇게 한번만 더 승리했다간 우린 다 끝장이야”라고 말했다는데서 유래한다.
ii Die Potemkinschen Dörfer, 실상의 황폐함을 감추기 위해 겉으로만 거짓으로 잘 꾸며놓은 것을 말한다. 러시아의 여제 카테리나 2세가 1787년 당시 새로 정복한 지 얼마되지 않은 새러시아지역 (Neurussland지금의 우크라이나남부)순방하는 것을 계기로, 그 지역의 지사 포템킨(Potemkin)이 마을 그림을 그려 길주변에 세우게 하여 실상을 은폐하려 했다는 현대판 전설에서 유래한다.
iii Zwischen der Scylla und Charybdis, 두가지 악중에서 선택해야하는 것을 표현한다. 그리스신화에서 바다괴물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는 좁은 해협의 양쪽에 살면서 항해자들을 위협했다.
iv hic Rhodus, hic salta(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내려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지금 여기서 행동으로 보여주라는 요구을 표현한다. 이솝의 이야기, [허풍장이 5종경기선수(Der Fünfkämpfer als Prahlhans)] 안에서 자기가 얼마나 로도스에서 잘 뛰어내렸는지를 뽐내는 한 5종경기선수에게 그 허풍에 식상한 한 사람이 당장 그 자리에서 시범을 보여보라 요구하는 데서 유래한다.
v Hereros, 1884년 독일식민지가 된 남서아프리카의 원주민들로 주로 지금의 나미비아 지역에 살았다. 억압적인 식민정권에 대항해 1904년 봉기했다가 무참하게 진압당했다. 봉기와 진압 과정에서 인구의 거의 70%, 대략 8만명의 헤레로인이 희생되었다.
vi Putumayo, 아마존강의 지류, 남미의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및 브라질을 흐른다. 1879년에서 1912년 사이에 있었던 아마존고무붐시기 이지역의 많은 원주민이 노예화되어 비인간적으로 착취당하고 죽음을 맞기도 했다.
vii Ardenn지역, 벨기에 남동부와 룩셈부르크, 프랑스 동북부지역에 걸친 지역.
viii Carpathia산맥,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에서 폴란드 남동부와 우크라이나 남서부까지, 남동쪽으로는 루마니아 동부에서 세르비아남동부까지 뻗어있는 반달모양의 산맥이다.
ix Save강, 사바(Sava)강이라고도 불린다. 유럽 중남부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나 그리고 세르비아를 흐르는 강으로 도나우강의 주요 지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