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차리즘이 있지 않은가! 의심할 나위 없이 이것은 당의 태도에서, 특히 전쟁의 첫 시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회민주당 원내분파는 그들의 선언에서, <차리즘 반대!>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사회민주당 신문들은 이것으로부터 곧바로 전유럽의 ‘문화’를 위한 투쟁을 만들어냈다.
프랑크푸르트『민중의 목소리』는 벌써 7월 31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독일사회민주당은 차르정권을 오래 전부터 유럽반동들의 유혈적 피난처로 비난해 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예리한 눈으로 이 야만적인 체제의 모든 움직임을 주시했던 그때부터, 이 체제가 정치범들로 감옥을 가득 채우고서 그 어떤 노동자운동에 대해서도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지금까지. 이제 독일의 전쟁 깃발 아래 이 끔찍한 사회를 청산할 기회가 온 것이다.”
루드비히스하픈의『팔스 포스트』는 같은 날 다음과 같이 썼다.
“그것은 우리의 잊을 수 없는 아우구스트 베벨이 갖고 있던 원칙이다. 이제 비문화에 대항한 문화의 투쟁을 해야 하고, 여기에 프롤레타리아트도 함께 한다.”
『뮌헨 포스트』는 8월 1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잔혹한 차르정권에 대항해 나라를 수호하는 데서 우리는 2등 시민처럼 취급당하지 않을 것이다.”
할레『민중신문』은 8월 5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러시아가 우리를 공격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보고들로 볼 때 그렇게 볼 수 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방어를 위한 모든 수단을 사회민주당이 승인한 것은 당연하다. 차리즘은 모든 힘을 다해 내쫓아야 한다.”
그리고 8월 18일자에 쓴 것에 따르면,
“그러나 철의 주사위가 던져진 지금, 다른 모든 독일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손에 무기를 들 수 밖에 없는 것은 조국방어의 의무 때문만은 아니다. 지금 동양에서 우리가 대적해 싸우는 그 적과 싸움으로써 우리는 모든 진보의 적, 모든 문화의 적에 대항해 싸우고 있다는 자각 때문이다.… 러시아의 패배는 동시에 유럽 자유의 승리를 의미한다.”
브라운슈바익의『민중의 벗』는 8월 5일자에 이렇게 다음과 같이 썼다.
“군사적 무력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압력이 모두를 함께 휩쓸어간다. 그러나 계급의식적 노동자들은 외부적인 힘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이 발딛고 서 있는 그 땅을 동양의 침략으로부터 스스로 방어할 때 그들은 자신의 신념을 따르는 것이다.”
에센의『노동자신문』은 8월 3일에 이미 다음과 같이 썼다.
“지금 러시아의 결정이 이 나라를 위협한다면, 그렇다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러시아의 잔학한 차리즘에 대항해, 자유와 문화에 대한 백만번의 죄인에 대항해 싸워야 할 때, 의무완수와 희생각오에 있어서 이 나라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차리즘 타도! 야만의 도피처 타도! 그러면 이것이 구호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빌레펠트의『민중근위대』도 8월 4일자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모든 곳에서 구호는 똑같다. 러시아 전제정치와 음흉함 반대!”
엘베펠트 당신문은 8월 5일자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서유럽 전체는 혐오스럽고 살인적인 차리즘을 타파할 사활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류의 이해관계를, 지금까지 독일 자본이 수행하던 수익성있는 돈벌이들을 저지하려는 영국과 프랑스의 자본가계급들의 탐욕이 질식시킨다.”
쾰른의『라인신문』은 다음과 같이 썼다.
“친구들이여, 운명이 너희들에게 내세우는 그 만큼 너희들의 의무를 다하라! 너희들은 유럽의 문화를 위해, 너희들의 조국의 자유를 위해 그리고 너희 자신들의 안녕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슐레스빅-홀슈타인 민중신문』은 8월 7일자에 다음과 같이 썼다.
“물론 우리는 자본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다. 확실히 우리는 이 대전 이후에도 계급투쟁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급투쟁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는 더 자유로운 나라에서 이뤄질 것이다. 이러한 계급투쟁은 훨씬 더 경제적인 측면에 국한될 것이며,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소외된 자, 2등 시민, 정치권력이 없는 자로 취급하는 것은 미래에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러시아 차리즘이 사라지고 난다면 말이다.”
『함부르크의 메아리』는 8월 11일 다음과 같이 외쳤다.
“우리는 영국과 프랑스에 대항해 방어전쟁을 치뤄야 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차리즘에 맞서 전쟁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전쟁을 열광적으로 수행한다. 그것은 문화를 위한 전쟁이기 때문에.”
뤼벡의 당기관지는 9월 4일에도 여전히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유럽의 자유가 구원된다면, 그러면 유럽은 전쟁이 끝난 뒤 독일무기의 힘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우리 투쟁의 주요 상대는 모든 민주주의, 모든 자유에 있어서 불구 대천의 원수이다.”
이렇게 독일 당신문들의 합창이 한 목소리로 울려퍼졌다.
독일정부는 전쟁 초기에 이렇게 제공된 도움을 받아들였다. 유럽문화의 해방자라는 월계수를 태연하게 제 손으로 제 헬멧에 꽂았다. 그렇다, 분명히 불편해하기는 해도 그리고 상당히 서투르게 고마워하긴 했어도 “민족들의 해방자”라는 역할에 안주했다.
심지어 “양쪽 대군”의 총사령부들은 “절박한 나머지 그 어떤 규정도 고려치 않은 채” 야합하는 걸 배워서, 러시아-폴란드지역i의 “부랑자와 음모자”를 부추겼다. 마찬가지로 폴란드인들에게도 폴란드 천국화 계획이 제시되었다. 이는 당연히, 차르 정부에 대항해 그들이 “엄청난 배반”을 대대적으로 행한다는 전제하에 그 대가로서 제시된 것이다. 그런데 이른바 그와 같은 것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카메룬의 두알라족의 추장 만가 벨은 전쟁의 소음 속에서 소리 소문 없이 그리고 성가신 재판과정 없이 교수형 당했다.ii 곤경에 처한 독일 제국주의의 이 모든 재주넘기에 사회민주당의 당 언론이 동참했다. 사회민주당의 제국의회내 분파가 신중한 침묵으로 두알라족 추장의 주검을 덮어버리는 동안, 사회민주주의 신문들은 “독일의 무기”가 차리즘의 가련한 희생자들에게 가져다준 자유에 대해 환호하는 종달새의 지저귐으로 대기를 가득 채웠다. 당의 이론지,『새시대』는 8월 28일자 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차르 제국의 국경지역 국민들은 환호하며 독일 전초부대를 맞이했다. 폴란드 유태인 중 이 지역 정착자들은 이제까지 조국이라는 개념을 단지 부정부패와 채찍의 형태로만 맛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가련하고 참으로 국적 없는 자들, 잔혹한 니콜라이에게 착취당하는 이러한 신하들은 그들의 족쇄 외에 지킬 것이라곤 없다. 그래서 지금, 독일의 주먹이 휘두르는 독일의 무기가 차르체제 전체를 재빨리 때려 부셔버렸으면 하는 갈망과 희망으로 살고 있다.… 그들의 머리 위에서 세계대전의 천둥이 치고 있는 동안, 독일 노동자계급 안에는 목표가 분명한 정치의지가 또한 살아 있다. 명예로운 평화를 이뤄내기 위해서, 동쪽 야만주의의 동맹국들을 서쪽에서 막아내려는 그리고 차리즘을 절멸하는데 마지막 준마와 인명까지 바치려는 의지가 살아있다.”iii[강조 – R.L.]
사회민주당의 제국의회 원내분파가 독일 민족과 문화의 수호라는 성격을 이 전쟁에 부여한 뒤, 사회민주당 언론은 심지어 다른 민족의 해방자라는 성격까지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힌덴부르크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산 집행인이 되어버렸다.
그 기억은 지금 전쟁에서 우리당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당은 자신의 원칙, 국제대회의 칭송과 결의들, 이 모든 것을 실상 그것들이 적용되어야할 바로 그 순간에 완전히 잊은 반면에, 마르크스의 “유언” 하나를 불운하게도 기억해냈다. 마르크스가 “마지막 준마와 인명까지 바쳐서”라도 무찌르려 했던 그 프로이센 군국주의을 장식하는데 그 “유언”이 쓰일 수 밖에 없는 그 순간에 그것을 시간의 먼지로부터 끌어냈다. 니콜라이 1세 당시 봉건적 러시아에 대항한 1848년 독일 3월 혁명에 관한, 『신라인신문』의 얼어붙은 나팔소리들을 멀쩡한 1914년에 독일사회민주당에게 갑자기 들이대면서, 이제 프로이센의 호족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독일의 총검”을 대혁명의 러시아에 대항해 싸우라고 손에 쥐어주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수정”을 가할 때이다. 곧 70년이 될 그 역사적 경험의 도움으로 3월 혁명의 구호들을 점검할 때이다.
1848년 당시 러시아의 차리즘은 실제로 “유럽 반동들의 도피처”였다. 중세의 자연경제적인 토대에 단단히 뿌리를 둔 러시아 사회관계의 확고한 산물인 러시아 절대주의는, 부르주아 혁명으로 뒤흔들리고 특히 독일에서는 작은 공국들로 약화된 왕정주의적 반동들의 피난처이자 동시에 조종자였다. 1851년만 해도 니콜라이 1세는 베를린의 프로이센 사절, 폰 로호프를 통해서, “1848년 11월 브랑엘장군의 베를린 입성시에 혁명이 그 뿌리까지 진압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이고 “어떤 나쁜 헌법도 제공할 필요가 없었을 그런 다른 순간도 있었다는 것”을 전하게 했다. 다른 한번은 만토이펠에게 경고하면서, 그는 “호흐데로 휘하의 왕국부서가 의회에 대항해 결연히 왕의 권리를 수호하고 보수적 원칙들이 적용되도록 할 것이라 낙관적으로 기대한다”라고 전했다. 바로 그 니콜라이는 프로이센의 한 수상에게, “프로에센에서 법질서를 공고화하기 위한… 그의 지속적인 노력”을 인정하여 알렉산더-네프스키훈장을 수여했다.
크림전쟁은 이미 그 점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이 전쟁을 통해 그 낡은 체제는 군사적, 정치적으로 파산에 이르게 되었다. 러시아 절대주의는 개혁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음을, 스스로를 근대화하고 부르주아적 관계에 적응하는 것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것은 작은 손가락 하나를 악마에게 내밀었는데, 그 악마가 지금 벌써 팔을 단단히 붙잡고서 있어서 결국은 통째로 끌려들어가고 말 것이다. 크림전쟁의 결과는 그와 동시에, 종속된 민족에게 “총검”으로써 선사할 수 있는 해방이라는 도그마에 대한 교훈적인 시험대였다. 세당에서의 군사적인 파산은 프랑스에게 공화국을 선사했다. 그러나 이 공화국은 비스마르크 군대의 선물이 아니었다. 프로이센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그때에도 다른 민족에게 자신의 융커체제 말고는 선사할 것이라곤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 공화국은 프랑스에서 1789년 이래 사회투쟁과 3개의 혁명iv이 내부적으로 성숙된 열매였다. 세바스토폴에서의 파산v은 예나vi에서처럼 작용했다. 즉, 그 나라 내부에서 혁명 운동이 없었기 때문에 그 군사적 패배는 오직 개량적으로 낡은 체제를 새롭게 강화시킬 뿐이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을 터 놓은 러시아의 1860년대 개혁들vii도 부르주아-자본주의 경제의 자금을 통해서만 작동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자금은 서유럽 자본으로부터, 즉 독일과 프랑스로부터 조달되었다. 그 뒤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즉, 러시아 절대주의가 서유럽 부르주아지에 의해 부양되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러시아의 루블화”가 외교회의에, 그리고 프로이센의 빌헬름 왕세자가 1854년만 해도 통렬히 불평해 댔듯이, “왕의 전실에까지” 굴러다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일과 프랑스의 금이 페테르부르크로 굴러들어가서, 차르의 군대를 먹여 살렸다. 이러한 활력수가 없었다면, 이 군대는 오래 전에 이미 그 수명을 다했을 것이었다. 그 이후 차리즘은 더 이상 단순히 러시아 상황의 산물이 아니다. 그 두 번째 뿌리는 서유럽의 자본주의적 관계들이다. 그리고 그 관계는 그 뒤 십년마다 더욱 더 변화했다.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인해 러시아 전제정치의 내적인 확고한 뿌리 자체가 갉아먹혀 들어가는 그 만큼, 그 두 번째 뿌리, 즉 서유럽의 그것은 점점 더 강화되었다. 재정적 지원에 더하여, 1870년 전쟁 이후 프랑스와 독일의 경쟁 때문에 정치적 지원이 한층 더 강력히 덧붙혀졌다. 러시아 자체의 품 안에 혁명적 역량이 절대주의에 맞서 솟구치면 솟구칠수록 그만큼 더, 이러한 역량은 위협당하는 차리즘을 정치적 도덕적으로 후원하는 서유럽의 더 완강한 저항에 부딪치게 되었다. 1880년대 초, 오래된 러시아 사회주의의 테러리스트 운동이 차르 통치를 한 순간 강력하게 뒤흔들었을 때, 그 권위를 차례 차례 파괴해 버렸을 때, 바로 그 때 비스마르크는 러시아와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고 국제정치에서 러시아를 지원했다.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가 독일정치와 뒤얽히면 뒤얽힐수록 당연히 그만큼 더 무제한 적으로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돈지갑을 열어주었다. 이러한 두 가지 지원을 받으며, 러시아 절대주의는 내부로부터 밀물처럼 떠오르는 혁명운동에 대항한 투쟁 속에서 시한부의 삶을 근근이 이어갔다.
차리즘이 지금껏 제 손으로 가꾸고 돌본 자본주의 발전이 드디어 그 열매를 맺어 1890년대 이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대중운동이 시작되었다. 차리즘 아래에서 자국의 기반이 흔들이기 시작했다. 한 때의 “유럽반동의 도피처”는 스스로 “나쁜 헌법을 제공할” 처지에 놓여 있음을 발견하고, 제집에 밀어닥치는 홍수에 직면하여 스스로가 “도피처”를 찾아 나서야만 했다. 그리고 독일에서 그것을 발견한다. 뷜로프의 독일은 브랑엘과 만토이펠의 독일이 받은 은혜에 대한 빚을 갚게 된다. 관계는 직접적인 역전을 맞이한다. 즉, 독일 혁명에 대항한 러시아의 원조가 러시아혁명에 대항한 독일의 원조로 대체된 것이다. 염탐, 추방, 양도 등 신성동맹의 멋진 시절로부터 유래하는 본격적인 “선동 모함”이 독일에서 러시아 자유투사들에 대해 이뤄졌다. 그것은 이 투사들을 러시아혁명의 문턱까지 추적했다. 그러한 모함은 1904년 쾨니히스베르크 재판viii에서 절정에 달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마치 번갯불로 비추듯이 선명하게 1848년 이래 역사적 발전의 구간 전체를, 러시아 절대주의와 서유럽 반동 사이의 관계 역전을 드러냈다. 프로이센의 법무부장관은 독일지배계급에게 손가락으로 러시아의 차르체제의 흔들리는 지반을 가리키면서, <저 나라가 흔들리는 것을 보라(Tua res agitur)!> 라고 외쳤다. 쾨니히스베르크의 수석검사 쉬츠ix는 “러시아에 민주공화국이 설립되면 독일에 민감하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내 이웃집이 불타고 있으면, 내 집도 위험에 처하게 된다”고. 그리고 그의 조수 카스파는 “그건 그렇고, 절대주의라는 방호벽이 유지되느냐 마느냐는 당연히 독일의 공적인 이해관계에 대단한 영향을 미친다. 분명히 혁명 운동의 불꽃은 손쉽게 독일로 옮겨 붙을 수 있다”고 전했다. 여기서 결국, 두더지가 역사발전에서 어떻게 땅 밑을 파서 허물고, 뒤집어서 “유럽반동의 피난처”라는 낡은 문구를 파묻어 버렸는지가 생생하게 드러난다. 유럽의 반동, 즉 가장 선두에 있는 프로이센의 융커체제가 지금 바로 러시아 절대주의의 피난처인 것이다. 이 피난처 곁에서 절대주의는 여전히 유지되고 그 안에서 치명상을 당할 수 있다. 러시아혁명의 운명은 이점을 확인해 주게 된다.
그 혁명은 진압 당했다. 그러나 그 잠정적 패배의 바로 그 원인들을 더 심층적으로 살펴보면, 이는 현재 전쟁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의 태도에 대해 교훈적이다. 1905/6년에 있은 그 러시아 혁명이 혁명역량, 목표의 명료함 그리고 집요함에 있어서 전례가 없었음에도 패배한 점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하나는 그 혁명 자체의 내부적 성격에 있다. 즉, 거대한 역사적 강령에 있다. 그 혁명이 100년전 프랑스대혁명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경제적 정치적 문제들의 규모에, 즉 농업문제와 같이 현사회질서의 틀 안에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몇몇 문제들을 포함하는 그런 경제적 정치적 문제들의 규모에 있다. 제국의 부르주아지 전체의 반혁명적 저항에 맞서 부르주아 지배를 위한 국가형태를 창조하려는 데서 오는 어려움에 그 한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으로 볼 때, 러시아 혁명이 실패한 것은 그것이 부르주아 계급의 과업을 가진 프롤레타리아혁명이었기 때문이다. 또는 달리 말하자면, 프롤레타리아-사회주의적 투쟁수단을 가진 부르주아혁명이었기 때문이다. 천둥벼락 속에서 두 시대의 충돌이자, 러시아 계급관계의 지연된 발전뿐만 아니라 서유럽에서의 너무 익어버린 계급 관계의 열매였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으로 보면 또한, 1906년의 패배는 그 파산이 아니라 제 1장의 자연스런 결말에 불과하며, 그에 이어 다음 장들이 자연법칙에 따라 당연히 뒤따르게 된다. 1905년 러시아혁명 실패의 두번째 원인은 다시 외부적인 성질의 것이다. 즉, 그것은 서유럽에 있다. 유럽의 반동은 그들의 보호를 받고 있던 그 체제가 위험에 처하자 다시 서둘러 도움을 주었다. 이미 1905년에 “독일의 총구”가 “독일의 주먹 안에서”, 이웃 폴란드로 처들어가기 위해서 페테스부르크의 손짓만을 기다리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총탄”을 통해서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와 마찬가지로 효과적인 구조수단, 즉 재정지원과 정치적 연합을 통해 차리즘은 어깨걸어 부축되었다. 프랑스의 자금으로 차리즘은 러시아 혁명가들을 진압하는 데 쓰인 산탄을 마련했고 독일로부터는 일본의 어뢰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의 주먹이 가한 치욕으로부터 기상을 회복할 도덕적 정치적 힘을 얻었다. 1910년 포츠담에서 공식적으로 독일은 러시아의 차리즘을 두팔 벌려 환영했다.x 학살의 피로 더럽혀진 자를 독일제국 수도의 정문 앞에서 영접한 것은 페르시아를 교살한 것xi에 대해 뿐만 아니라, 특히 러시아 반혁명의 형리역할에 대한 독일의 축복이었다. 그것은 러시아혁명의 가상의 무덤 위에서 독일과 유럽 “문화”의 공식적 파산이었다. 참 이상하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그 당시 러시아 혁명의 대학살 위에 자신들의 고향인 독일에서 이러한 도전적인 장례식 후 성찬이 벌어졌을 때, 완전히 침묵했으니 말이다. 1848년으로부터 유래하는 “우리의 노장의 유언”을 철저히 잊고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의 이 전쟁이 시작될 즈음에는 아주 작은 당신문들 마저도 경찰의 허락을 받은 뒤, 러시아에서 자유를 학살한 자들에 대항해 온갖 처참한 표현을 즐겨 썼다. 그러나 1910년 그 학살자들이 포츠담에서 칭송될 그 당시에는 러시아 반혁명을 지지하는 것에 반대해 어떤 저항 행동도 없었고, 러시아의 자유를 위한 연대를 알리는 어떤 기사도 실리지 않았다! 그런데 1910년 차르의 바로 이 유럽여행은, 진압당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들은 그 나라 반동뿐만 아니라 서유럽 반동의 희생자들이라는 사실을 다른 그 무엇보다도 가장 잘 폭로했다. 그들은 1848년 3월의 투사들과 꼭 마찬가지로, 자국의 반동뿐만 아니라 그 반동의 외국 ‘피난처’에 대항해 피흘리며 싸운 것임을 잘 드러냈다.
그러나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의 혁명에너지의 생생한 원천은 차리즘과 자본주의라는 이중 학정의 고통의 잔만큼이나 마를 길이 없다. 반혁명의 비인간적인 십자군원정 시기가 지난 뒤 혁명적 발효가 다시 시작되었다. 1911년 이후, 레나의 학살xii이 있은 뒤 노동자 대중은 다시 기운을 차려 투쟁에 나섰다. 밀물이 다시 부상하여 부글거리며 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보고에 따르면, 러시아에서 1910년에 46,623명의 노동자들 256,385일에 걸쳐 경제파업을 했다. 1911년에는 96,730명의 노동자들이 768,556일에 해당하는 경제파업을, 그리고 1912년 첫 5개월 동안 98,771명의 노동자들이 1,214,881일에 해당하는 경제파업을 했다. 1912년 한 해 동안에 정치적인 대대적 파업xiii, 항의행위, 시위에 100,500명의 노동자들이 그리고 1913년에는 1,272,000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했다. 1914년 이러한 밀물은 희미하게 웅성거리면서 점점 더 위협적으로 되고 그 수위가 높아져 갔다. 1월 22일 혁명xiv시작을 기념하기 위해 200,000명의 노동자가 참여한 대대적 시위파업xv이 있었다. 6월에는, 1905년 당시 혁명이 시작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코카서스에서, 바쿠에서, 고지대에서 거대한 화염이 타올랐다. 40,000명의 노동자들이 여기에서 대대적 파업에 참가 했다. 그 불길은 곧바로 페테스부르크로 옮겨 붙어, 여기서 7월 17일에는 80,000명, 7월 20일에는 200,000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했다. 7월 23일에는 총파업이 제정러시아 전체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미 바리케이트가 설치되고 혁명이 진행중이었다. 그렇게 몇 달만 계속되었다면, 그랬다면 확실히 나부끼는 깃발로 진입했을 것이다. 그렇게 몇 년만 더 지속되었다면, 그랬다면 러시아 절대주의가 더 이상은1916년으로 계획된 모든 국가들의 제국주의적 춤판에 공헌할 수 없을 만큼 그 혁명은 절대주의를 마비시킬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아마도 세계정치구조 전체를 변화시키고, 제국주의의 계획을 망쳐놓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으로 독일의 반동이 다시 러시아운동의 혁명적 계획을 망쳐놓았다. 비엔나와 베를린은 전쟁을 시작했고 이 전쟁은 러시아혁명을 폐허 속에 파묻어 버렸다 - 아마 몇 년동안은. “독일의 총구”는 차리즘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자를 분쇄해버린 것이다. 그것은 러시아가 지난 백년간 치르고 있던 가장 전면화된 전쟁에서 차리즘을 도왔다. 비엔나와 베를린이 자행한, 독일 밖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라도 명백한 전쟁선동, 독일 내에서의 “당쟁중지”와 이로 인해 유발된 애국주의적 도취, 벨기에의 운명, 프랑스공화국을 원조할 필요성, 이 모든 것은 이번에 러시아정부의 도덕적인 후광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절대주의는 지금까지 결코 그 어느 유럽전쟁에서도 이렇게 전대미문으로 유리한 입장에 놓인 적이 없었다. 희망차게 나부끼던 혁명의 깃발은 전쟁의 거친 소용돌이 속에서 내려졌지만, 명예롭게 내려졌다. 그리고 살륙의 혼란으로부터 다시 휘날리게 될 것이다. 독일의 “총구”에도 불구하고, 전장에서 차리즘이 승리하든 패배하든 상관없이.
러시아에서의 민족 봉기들도 실패했다. 독일사회민주당에 비해서 확실히 그 “민족들”은 힌덴부르크의 공동방패라는 해방 사명에 덜 현혹당했다. 원래 현실적인 민족인 유태인들은, “독일의 주먹”이 자체의 프로이센 반동, 예를 들어 3등급선거권을 “분쇄하는” 데도 성공하지 못했으니 러시아 절대주의를 끝장낼 능력은 더더욱 없음을 간단한 주먹구구로도 파악해냈을 것이다. 전쟁의 3중 지옥의 희생자가 된 폴란드는, 폴란드 아이들의 몸에 피투성이 채찍자국으로 독일어 주기도문을 새겨넣는 브레쉔xvi으로부터 그리고 프로이센정착위원회xvii들이라는 “해방자”들에게 그 약속의 성스러운 메시지에 소리 높히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용히 괴츠 폰 베얼리힝엔의 독일어 격언xviii을 더 간결한 폴란드어로 번역한 것 같다. 러시아인뿐만 아니라 폴란드인과 유태인 모두는 그들의 머리통을 깨부수는 “독일의 총구”는 그들에게 자유가 아니라 죽음을 초래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곧 알아차렸다.
이 전쟁에서 마르크스의 유언을 거론한 독일사회민주당의 해방전설은 그러나 평소의 농담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경솔한 짓이었다. 마르크스에게 러시아혁명은 하나의 세계적인 전환점이었다. 그의 모든 정치적 역사적 전망들은, “그 사이에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생하지 않는 한”이라는 조건에 연결되어 있었다. 마르크스는 눈앞에 봉건적 러시아를 놓고 있을 때조차도 러시아혁명을 믿고 기다렸다. 그 혁명이 그러는 동안에 다가왔다. 첫 번째 타격에 승리하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축출될 수 없는 것이었고, 의제가 되었고 이제 막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갑자기 독일사회민주당이 “독일의 총구”를 들이대며 러시아혁명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선언한 것이다, 역사로부터 그것을 지워버린 것이다. 그들은 갑자기 1848년의 기록부를, <러시아에 대항한 전쟁 만세!>라는 구호를 꺼냈다. 그러나 1848년 당시에는 독일에 혁명이, 러시아에는 경직되고 가망없는 반동이 있었다. 그때와 달리 1914년에는 러시아는 혁명을 잉태하고 있어지만 독일에는 프로이센의 융커체제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때 “유럽의 해방자” 독일인들은 1848년 마르크스 때 처럼 바리케이트로부터가 아니라, 고작 소위 한명이 그 문 밖을 지키고 서 있던 조그마한 지하창고 안에 갇혀있다가 곧바로 러시아에 맞선 문화사명을 위해 출동했다! 그들은 출동했다. 우애롭게 얼싸안고, 러시아 차리즘의 가장 강력한 도피처인 프로이센 융커체제나 민중이나 하나가 되어, 쾨니히스부르크의 장관들, 검사들과 “당쟁중지로 평화롭게” 얼싸 안고, 그렇게 그들은 차리즘에 맞서 출동하여 “총구”를 내밀었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의 머리에!
이보다 더 처참한 역사의 농담, 러시아혁명과 마르크스의 유언에 대해 이 보다 더 잔인한 조롱을 상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전쟁 동안 사회민주당의 정치적 행동에서 가장 암흑같은 시기를 형성한다.
이른바 유럽문화의 해방은 하나의 에피소드가 되고 말았다. 그 불편한 가면은 독일 제국주의로부터 곧 벗겨져서 전선은 공개적으로 프랑스, 특히 영국을 향했다. 몇몇 당신문들은 이러한 변화에 민첩하게 동조했다. 유혈적인 차르 대신에 음험한 영국인들과 그들의 소상인적인 기질이 전반적인 조롱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유럽문화를 러시아 절대주의로부터가 아니라 그 대신 영국의 해상지배로부터 해방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당이 놓이게 된 절망적으로 뒤엉킨 상황은 당신문들 중에서 몇몇 더 괜찮은 신문들의 발작적 노력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들은 반동적인 전선에 놀라서, 전쟁을 원래 목표로 되돌리려 안간힘을 다했다. 전쟁을 “우리의 노장의 유언”, 즉 그 자신들이, 사회민주당이 창조해냈던 신화에 못박아 두기 위해서! 황제는, “나는 무거운 심정으로 나의 군대를, 수많은 전장에서 나란히 함께 싸워왔던 그 이웃에 대항해 동원해야 했다. 솔직히 매우 유감스럽게도 나는 독일이 충실이 유지해 왔던 우정이 깨지는 것을 보았다”라고 말했었다. 그것은 단순하고 공공연하며 정직하기라도 했다. 사회민주당 제국의회 원내분파와 그 언론들은 이것을 변형해서『신라인신문』의 기사 하나로 만들었다. 전쟁 발발 후 첫 몇 주 동안의 온갖 수사학이 제국주의의 산문적 간경체로 대체된 이제 독일사회민주당의 태도에 대한 미약하나마 유일한 해명은 공중분해되어 버렸다.
i 1815년 비엔나 회의로 창조된 폴란드왕국은 러시아-폴란드(회의폴란드Kongreßpolen)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는 1915년까지 존속했고, 인적 결연을 통해 러시아와 결합된 채 차르지배하에 고통받았다.
ii 1914년 카메룬 해안의 두알라족이 독일의 식민지배에 저행해 봉기했다. 그 봉기는 유혈적으로 진압되었고, 만가 벨 추장은 1914년 8월 8일 처형되었다.
iii Volkskrieg. Die Neue Zeit(Stuttgart), 32. 1913/14, Zweiter Band, S.872
iv 프랑스대혁명(1789~1793), 7월혁명(1830), 그리고 2월혁명(1848)을 말한다.
v해군요새 세바스토폴은 크림전쟁 당시 러시아 군대와 해병들이 343일 동안 방어했으나 결국 1855년 8월 수적으로 우세한 프랑스와 영국의 전투력에 의해 점령당했다.
vi나폴레옹의 원정이 시작된 직후, 예나(Jena)와 아우어스테트(Auerstedt)에서의 이중전투에서 1806년 10월 14일 프로이센의 주력부대 2개가 나폴레옹 1세에게 패배했다.
vii 크림전쟁(1853~1856)에서의 패배로 러시아내부의 정치적 상황이 매우 악화되었다. 결국 지배계급은 1861년에서 1870년사이에 일련의 개혁을 추진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개혁들은 미완적이고 또 봉건적 잔재들 때문에 제한적이긴 했지만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추동했고(1861), 촌락지역과 도시지역의 자치기관들이 형성되었으며(1864), 국민교육계(1863)과 법원계(1864) 그리고 검열(1865)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viii Königsberger Prozeß, 1904년 7월 12일부터 25일까지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열린 한 재판에서 혁명서적을 러시아로 반입했다는 이유로 독일사회민주당원 9명이 러시아에 대한 반역, 차르모독 및 비밀결사관여죄로 기소되었다. 변호인중의 한명이었던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러시아에서의 잔인한 억압과 프로이센당국과 차르당국의 협력을 규탄했다.
ix Schüze – 원저에는 Schulze로 되어있음
x 차르는 1910년 11월 독일을 방문했다. 이때 포츠담에서 두 나라 외무장관들은 페르시아에서의 양국 이해관계의 구획과 바그다드철도에 대해 협상했다.
xi 1905년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페르시아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적 대중운동이 전개되어 절대주의를 제한하고 입헌정부형태를 도입했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남북쪽에서 혁명세력을 무력진압했던 영국과 차르 러시아의 적극적 지원에 힘입은 페르시아의 반혁명세력들은 1911년말 혁명을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xii 1912년 1월 29일 레나 골드필드유한회사(Lena Goldfields Co. Limited)의 한 광구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볼세비키가 주도한 이 파업은 6천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한 총파업으로 확대되었다. 노동자들이 체포된 파업위원들의 석방을 요구하자 군대가 발포하여 노동자 250명이 사망하고 270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학살에 대항해 러시아 전역에서 항의파업이 일어났다.
xiii Massenstreik
xiv 1905년 러시아혁명을 말한다
xv Demonstrationsmassenstreik
xvi 1901년 5월 20일 그 당시 포센(Posen)지방의 소도시 브레쉔(Wreschen)에서 한 교사가 폴란드아이들이 수업시간에 독일어로 대답하려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아이들을 심하게 학대했다. 이에 뒤이어 격분해 항의한 학부모들은 그 이후 “국가평화파괴”죄로 높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xvii 이른 바 정착위원회(Ansiedlungskommission) 활동의 법적 기초가 되는 정착법은 1886년 의결되어 1893년과 1902년에 더 보강되었다. 이 정착법에 따라 수백만 마르크가 “서프로이센과 포센에서의 독일인 인자들의 강화” 목적으로 제공되었다. 정착위원회는 독일인 대지주에게 양도하거나 독일인 정착민들에게 분할 제공할 목적으로 폴란드토지를 국가자금으로 매입했다.
xviii Kernspruch Götz von Berlichingens, 중세독일의 농민전쟁을 배경으로 한 괴테의 희곡, 괴츠 폰 베얼리힝엔(Götz von Berlichingen)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 지나치게 선동적이고 너무 직실적이게 황제를 비하하여 초판 이후부터는 부분적으로 삭제당하지만, 그 표현은 이미 잘 알려진 후였다. 농민전쟁에서 패배한 주인공 괴츠 폰 베를리싱엔은 쇠사슬에 묶인 채, “leck mich am Arsch(어디 해볼테면 해보라고: 직역하자면, 내 엉덩이나 핥으라고)!”라고 당당하게 외치며 이 말을 황제에게 전할 것을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