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공산주의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2012년 7월5일
우리는 한국 좌익공산주의 그룹의 투사 이일재 동지가 병원에서 89세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에 잠겼다. 그는 1923년 대구 출생이다. 대구는 현재 남한의 한 도시지만, 그 당시에는 조선의 역사적 이름을 갖는 곳이었다. 그 당시 한국 전역은 원자재와 농업의 풍부한 값어치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였으며,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노력을 지원하는 운명이었다. 일본의 공식적인 정책은 한국 문화를 우민화하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일본어를 배워야 했고, 그래서 이일재는 일본어에 유창했다.
전쟁 와중에, 스무 살이 채 안된 이일재는 이미 노동자 투쟁에 참가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일본 점령군의 철수로, 한국은 혼란이 줄어들면서, 도처에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생산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일재 동지는 ‘노동자평의회’ (전평 혹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로 설명한다. 비록 시대적 조건 때문이지만, 그러한 평의회들은 전쟁으로 와해된 나라에서 기본 생활필수품 생산 보다 더 많이 생산하기는 불가능 했다.
이일재는 1946년 9월 공산당에 가입하고, 같은 해 대구에서 발발한 총파업 투쟁을 이끄는 중요한 구성원이 된다. 미 점령군 당국이 노동자 투쟁을 진압하면서, 이일재는 남한 빨치산 투쟁에 참가하면서, 1950년 다리에 총상을 입는다.
1968년 박정희 독재 하에서도 이일재는 지속적인 정치 활동을 하는데, 이 때문에 체포되고 종신형을 선고 받는다. 투옥 기간 중에 그는 건강에 씻을 수 없는 피해를 받는데, 그의 얼굴에는 옥중 고문과 고통의 흔적이 여전히 담겨있다. 이일재는 1988년 가석방된다. 가석방이 대구에서 즉각적인 그의 정치 활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97년 이일재는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된다.
1946년에 청년 노동자가 공산당에 가입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동지 대부분이 의심할 바 없이 어떠한 용기와 신실함으로 차 있었을지라도, 그때 한국 전쟁 말기에, 한국의 당은 사실상 러시아와 중국 제국주의의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특히 기괴하고 야만적인 스탈린주의 캐리커쳐였다. 김 씨 가족의 세습독재였다.
그의 삶 속에 남은 모든 것들을 우리는 이 애도의 글에 모두 담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역사는 나쁜 원인들의 영향으로 영웅주의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일재는 80세에 가까웠을 때에도 일생의 투쟁에 의문을 던질 수 있는 실로 대단한 존재였다. 2002년 그는 ‘사회주의정치연합’(the Socialist Political Alliance)의 활동가가 된다. 새롭게 결성된 이 단체는 좌익공산주의의 이념을 한국에 소개하고 있었다. ICC 대표단이 2006년 8월 사회주의정치연합이 조직한 ‘국제 마르크스주의자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했을 당시, 우리는 이일재 동지를 만났다. 국제 마르크스주의자 대회 토론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문제 - 특히 노동자 투쟁을 위한 조직형태로서 노동조합의 재건이 가능하다-에서 이일재 동지와 의견이 달랐다. 우리는 진정한 국제주의자로서 이 문제를 분명히 했다. 무엇보다 북한 문제에 대해서, 그는 혐오스러운 정권이라며 어떤 지지도 거부했다.
이듬 해 (2007년), 이일재 동지와 토론할 때, 그는 무엇보다 두 가지 문제에 관심을 표명했다. 첫째는 노동계급의 국제적 단결이고 둘째는 한국에서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한국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방글라데시와 필리핀 이주 노동자들 간의 장벽을 허무는 것이었다. 이일재 동지는 노동조합 조직형태를 이용하는 희망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지만, 둘째 문제 때문에 그가 생각했던 노조와 단절했다. 이일재 동지는 2007년 국제공산주의흐름 (ICC) 17차 대회에 참석했다. 2008년에는 ICC 대표단과 일본에 동행하기를 희망했다. 애석하게도 그는 악화된 건강 때문에 일본에 가지 못했다.
이일재 동지는 프롤레타리아 대의를 향한 불굴의 투사였으며, 그의 정신은 고난과 투옥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남아있다.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국제주의자로 남아있었다. 이일재 동지는 지난 세월 역경과 투쟁을 통해 지키고자 했던 이념에 질문을 던지면서, 진실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도덕적 용기를 지녔다. 노동계급은 이일재 동지를 잃고서 더 빈곤해졌지만, 그의 삶의 본보기로 더 풍부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