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장벽에 부딪힌 자본주의
다음의 그래픽은 1960년이래 오늘까지 전세계의 부채(1) 증가를 보여준다. 이러한 부채들은 전세계 국민총생산 대비 백분율로 표현되어진다.
이 그래픽을 통해, 1960년 부채비율은 전세계 국민총생산의 100%에 해당했지만 2008년 이는 두배 반으로(즉 250%)로 증가됨을 볼 수 있다. 바꿔 말하자면, 1960년 이래 전세계적으로 누적된 부채를 완전히 상환하자면 이는 전세계에서 일년 반동안 생산된 모든 생산물의 총합에 상응한다.
소위 선진국灯의 이러한 극적인 경향은 또한 미국의 공채에 관한 다음의 그래픽을 통해 분명히 보여질 수 있다.
지난 몇년 동안 거대한 공채의 산더미가 생겨나서 그 증가가 거의 수직적으로 진행됨을 볼 수 있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부채장벽灯이라 부른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지금 전력을 다해 이 부채장벽에 맞부딛혔다.
부채 자본주의 쇠퇴의 결과
세계경제가 이러한 부채장벽을 향해 치닫고 있음은 분명했다. 왜 전세계의 정부들은, 좌우파를 막론하고, 극좌 극우를 막론하고, „자유방임지향 이건 국가개입灯지향이건을 막론하고 모두가 크레딧조건들을 점점 더 느슨하게 만들었는가, 결손이 점점 더 증가하게 내버려두었는가, 모든 짓을 다하면서 국가와 기업과 가계의 부채더미가 지난 50년간 더 증대되도록 방치하였는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그 정부들이 그런식으로 대처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현재 빠져들고 있는 끔직한 침체가 이미 1960년대에 이미 시작되었을 것이다. 사실상 자본주의는 지난 몇십년이래 크레딧의 도움으로 살고, 생존해 있다. 이 현상의 뿌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맑스가 현대사회의 크다란 비밀이라고 나타냈던것, 즉 잉여가치의 창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우리는 여기서 간단하게 이론적인 서술을 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이 선천적 질병을 앓고 있다. 자신의 신체가 배설해낼 수 없는 많은 양의 독, 즉 과잉생산을 끊임없이 생산한다. 자본주의의 시장이 수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한다. 왜? 설명을 위해 순전히 단순화된 예로서, 콘베이어 벨트 노동자나 Pc작업을 하면서 매달100만원로정도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 를 생각해보자. 실상 그는 자신의 매달 임금총합에 해당하는100만원 가치의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200만원 가치의 상품을 생산한다. 그는 지불되지 않은 노동(잉여노동)을 한 것이다. 즉, 잉여가치를 만들어낸 것이다. 자본가는 그 노동자로부터 훔친 (물론 그렇게 생산된 상품을 파는데 성공한다는 가정하에) 그 100만원으로 무엇을 하는가? 그 돈의 일부를 자본가는 자신의 사적인 소비에 충당한다. 이를 대략 25만원이라고 치자. 그 나머지 75만원을 그는 자본금으로 자신의 회사에 투자한다, 대부분은 더 현대적인 새기계를 구입하는 등등의 형태로. 그러나 왜 자본가를 이런식으로 행동하는가? 왜냐하면 그는 경제적으로 그렇게 할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경쟁에 기반한 체제다. 모든 자본가는 자신들의 상품을 동일한 상품을 생산하는 다른 자본가들에 비해서 더 싸게 팔아야 한다. 그래서 그 기업가는 생산비용, 즉 임금을 낮추어야 할 뿐만 아니라, 점점 더 많은 부분의 미지불노동을 더 좋은 성능의 기계에 우선적으로 투자하는데, 자신의 생산성을 높이는데 사용해야 한다. 만약 그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현대화를 할 수 없고, 한편 이렇게 한 주의깊고 활동적인 경쟁자는 결국 더 싸게 생산하고 시장을 정복할 수 있게 된다.
자본주의 체제는 그래서 다음과 같은 모순이 특징적인데, 즉 노동자들이 사실상 생산한 것에 상응한 보상을 받지 못함으로써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가가 '분배'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결코 자본가들과 노동자들 모두를 함쳐도 생산된 그 모든 상품들을 소비할 수 없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이러한 상품과잉을, 자신의 생산영역의 외부에 존재하는 아직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의해 정복되지 않은 시장들에 팔아야 한다. 이는 자본주의외부의 시장들이라 불린다. 이것이 성공하지 못하면, 광잉생산위기가 초래된다. 이것이 바로 핵심에 있어서, '자본론'에서 맑스가 그리고 '자본축적론'에서 로자 룩샘부르크가 도달하게 된 결론들의 일부이다. 이를 좀더 분명하게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과잉생산이론을 몇몇 요점으로 요약해 보겠다.
- 자본은 자신의 노동자들을 착취한다(달리 말해서, 그들의 임금은 그들이 생산한 실제 상품가치보다 더 낮다).
- 그렇게 해서 자본은 자신의 상품을 이윤과 함께, 임금과 잉여가치 그리고 생산수단의 비용들이 참작된 가격에 판매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자본가들은 그 상품을 누구에게 팔것인가?
- 당연히 노동자들이 이 상품들을 구매한다... 그들에게 지불된 임금의 한도 내에서. 그래서 아직도 판매되어야할 일부분이 여분으로 남게 되고 그것은 노동자들에게 지불되지 않은 그 부분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오직 이 부분- 잉여가치- 만이 자본으로 하여금 이윤을 얻게 하는 마술적인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자본가들도 물론 마찬가지로 소비를 한다...그리고 대부분 상당히 호화롭게 산다. 하지만 잉여노동을 통해 생산된 그 모든 상품을 그들 혼자서 다 구매할 수는 없다. 자본은 상품들을 스스로에게 판매함으로써는 이윤을 획득할 수 없다. 그것은 말하자면, 왼쪽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오른쪽 호주머니에 넣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는 아무도 부유해질 수가 없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것을 알고 있다...
- 축적을 하기 위해서는, 성장을 위해서는 자본은 그래서 노동자와 자본가 이외의 다른 구매자를 찾아야 한다. 달리 말해서, 반드시 자신의 체제의 외부에 있는 구매자를 찾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장에서 홍수를 이루는 판매될 수 없는 상품더미 위에 앉아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면 과잉생산위기灯가 초래된다.
이러한 내적 모순”(내재된 과잉생산경향과 항상 외부의 시장을 찾아야한다는 강박)은 이 체제가 그 출현이래 오늘날까지 갖고 있는 소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활력을 이루는 뿌리들중의 하나이다. 16세기에 자본주의가 출현한 이래 자본주의는 주변에 놓인 모든 경제영역들과 통상을 해야만 했다. 전세계의 낡은 지배계급들과, 농부들과 수공업자들과. 18세기와 19세기에 자본주의 강대세력들은 세계의 정복을 놓고 경쟁에 돌입했다. 그들은 차츰차츰 지구를 식민지들로 분할했고,. 그것을 서로 빼앗으며 진정한 제국을 건설했다. 가끔 두개의 세력들이 동일한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러면 더 약자는 포기해야만 했고, 원주민에게 자신의 상품을 사도록 강제할 수 있을 지구의 다른 한조각을 찾아보아야 했다. 이렇게 자연경제들은 변화되고 차츰 차츰 자본주의 속으로 강제 편입되었다. 식민지들이 유럽과 미국에서 생산된 그 모든 상품들을 수용하는데 점점 더 실패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도 과잉생산이 발생했다.
18세기와 19세기 자본의 이러한 활력, 과잉생산위기와 장기간의 복지와 확장시기의 반복 및 자본주의의 부단한 상승은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매우 명확하게 서술되었다:
- „공황시에는, 이전의 모든 시기에는 어불성설로 보였을 하나의 사회적 전염병이 돌발한다 과잉생산이라는 전염병이. 사회는 갑자기 순간적인 야만의 상태로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기아와 전면적인 섬멸전이 사회로부터 모든 생활 수단들을 박탈해간 것처럼 보인다; 공업, 상업이 파괴된 듯이 보인다. 왜 그런가? 그것은 사회가 너무 많은 문명, 너무 많은 생활 수단, 너무 많은 공업, 너무 많은 상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공산당선언, 부르조아와 프롤레타리아, 1848, 칼맑스 프리드리히엥겔스저작선집, 박종철출판사, 1권 406쪽)
- 자본주의가 아직 확장기에 있었고 그 당시 아직도 새로운 시장을 정복할 수 있었기에, 매 위기마다 새로운 재회복기가 뒤따를 수 있었다. „자신의 생산물의 판로를 부단히 확장하려는 욕구는 부르주아지를 전 지구상으로 내몬다. 부르주아지는 도처에서 뿌리를 내려야 하며, 도처에서 정착해야 하고, 도처에서 연계를 맺어야 한다. (…) 부르주아지의 상품의 싼 가격은, 부르주아지가 모든 만리 장성을 쏘아 무너뜨리고, 외국인에 대한 야만인들의 완고하기 그지 없는 증오심을 굴복시키는 중포이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민족들에게 망하고 싶지 않거든 부르주아지의 생산 양식을 채용하라고 강요한다; 그들은 소위 문명을 도입하라고, 즉 부르주아지가 되라고 강요한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모습대로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공산당선언, 같은 책, 403 - 404쪽) “
- 그러나 이미 그 당시에 맑스와 엥겔스는 주기적인 위기의 뒤편에 있는 무언가를, 항상 더 많은 번영을 만들어낼 것같던 단순한 영원한 주기 그 이상의 무엇을 인식했다. 그들은 한층 더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더 심각한 모순들이 표현됨을 그 속에서 보았다. 새로운 시장들의 정복을 통해 부르주아지는 더 전면적이고 더 강력한 공황들을 준비하고 , „그 공황들을 예방할 수단들을 감소시킨다“(공산당선언, 같은 책, 406쪽). 또는, 그 공황들은 더욱더 빈번해지고 더욱더 격렬해지는데 그 까닭은 생산물들의 양이 많아지고 따라서 확대된 시장들에 대한 욕구가 커지는 것과 같은 정도로 세계시장은 축소되어 이용할 여지가 있는 새시장이 점점 더 적어진다...”(임금 노동과 자본, 1849년, 같은 책, 571쪽)”
그런데 단지 작고 둥글뿐인 우리의 지구
20세기초, 모든 지역들이 정복되었다, 자본주의 강대국가들이 지구를 분할해 가졌다. 그 이후 그들은 그 어떤 새로운 지역도 정복할 수 없었고, 오히려 경쟁자들로부터 지역들을 무력으로 빼앗을 수 밖에 없었다. 이제 더 이상 아프리카나 아시아 |또는 남아메리카에서 식민지를 놓고 경쟁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영향- 및 권력지대의 방어를 위한 치열한 전쟁이 현안이었다. 그래서 제국주의적 경쟁자들로부터 무력으로 지역들을 빼앗으려 시도할 수 밖에 없었다.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진정 생존의 문제였다. 그래서, 아주 소수의 식민지만을 소유하고 있며 대영제국의 선의에 의존적(독일 부르주아지에게는 견딜수 없는 상황) 이던 독일이 통상을 해나갈 수 있기 위해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독일은 그 강제적 상황때문에 공격적인 역할을 맡게되고, 이 역할을 히틀러는 나중에 제 2차 세계대전을 준비하면서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수출할 것이냐 아니면 죽을 것이냐“. 400년간의 확장후 자본주의는 쇠퇴하는 체제가 되었다. 이점에 대해 양대 세계대전의 악몽 그리고 1930년대의 대공황은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극적인 증거를 제시한다. 그렇지만 그후 그때까지는 여전히 존재하던 자본주의외부 시장들이 완전히 고갈되는 1950년대에도 자본주의는 아직 치명적인 과잉생산위기에 빠져들지 않았다.
100년이상 서서히 진행된 단말마의 고통뒤에도 이 체제는 여전히 살아있다; 발부둥치면서, 비참한 상황에 놓여있긴 하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이 체제는 어떻게 생존해 있는가? 왜 이체제의 몸은 과잉생산이라는 독에 의해 아직도 완전히 마비되지 않았는가? 그 해답은, 빚이라는 수단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세계경제는 점점더 대대적으로 채무를 짐으로써 극적인 붕괴를 피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일종의 인위적인 시장이 창출될 수 있었다. 지난 40년은 침체와 크레딧주입이라는 도움에 힘입은 재회복의 연속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런식으로 사적인 가계의 소비를 국가적인 도움으로 회복하려 시도했던 것만은 아니다... 아니, 국가들 자체가 라이벌 나라들에 대한 경제 세계경쟁력을 인위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 기간산업프로젝트에 투자하고 은행들에 저금리로 돈을 대어주고 이 은행들은 다시 기업과 가계들에 돈을 대출함으로써...) 빚을 졌다. 크레딧의 수도꼭지가 도처에서 활짝 열려 돈이 흘렸고 한발 한발 모든 경제영역들이 과잉채무를 갖게 되었다. 기존의 빚을 갚기 위해 매일 새로운 빚을 얻어야만 했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어쩔 수 없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수 밖에 없었다. 자본주의는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이러한 막다른 골목의 가장 낮은 지점에 빠져있다. 부채장벽을 코앞에 맞대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부채위기灯는 죽어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과용량灯의 모르핀과 같다
비유를 하자면, 부채는 자본주의에게 있어서, 곧 죽을 사람에 있어서 모르핀이 의미하는 것과 같은 것을 나타낸다. 모르핀을 투여함으로써 병자의 위기는 잠시 경감된다. 병자는 안정을 얻고 달래질 수가 있다. 그러나 매일 의존성이 증가되고 점점 더 높은 용량의 모르핀이 투여된다. 처음에는 경감하는 작용을 했던 수단이 나중에는 해롭게 되고 결국에는 과용량으로서 작용하게 된다.
전세계적인 부채의 산더미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쇠퇴의 한 증상이다. 세계경제는 1960년대 이래 크레딧에 매달려 있지만, 부채는 몸 도처에 스려있다. 몸의 모든 부위로 파고들어 그것을 장악해 버린다. 점점 더 많은 은행들, 회사들, 지방자치단체, 국가들이 지불불능이고 또 그렇게 될 것이며 그들의 채무를 더 이상 상환할 수도 없고 이자를 더이상 지불할 수도 없다.
2007년 여름, 제 1차 세계대전과 함께 시작된 자본주의 쇠퇴의 역사에서 새로운 장이 열렸다. 위기의 리듬을 점점 더 대대적으로 되어가는 크레딧 투입을 통해 제지하는 지배계급의 능력이 점점 더 약해지고 없어져 간다. 이제 중간 중간에 한숨 돌릴 틈도 없이, 경제의 회복기도 없이 점점 더 많은 충격들이 있을 것이다. 지배계급은 위기에 대한 실제적이고 지속적인 해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그들이 갑자기 무능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자본주의 자체내에서는 해결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글에서 보여주려 시도했던 것처럼, 문제가 자본주의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체제 전체에 있기 때문이다. 체제 전체가 파산상태이다. 파웰, 26.11.2011
(1) 전세계의 총부채, 즉. 모든 나라들의 가계, 기업 및 국가들의 부채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