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대와 정치적 대화
새로운 혁명세대와의 접촉은 ICC가 외부세계와 소통하고 정치적 대화능력을 더욱 발전시키도록 한 계기가 되었다.
인류역사의 고리 안에서 저마다 하나의 사슬을 구성하고 있는 각 세대들은 세 가지 중요한 임무에 직면하고 있다. 첫째, 이전 세대가 남긴 유산을 이어받고, 둘째, 이들 고유의 경험에 기반하는 유산들을 현 세대에서 더욱 풍요롭게 하며, 셋째, 다음 세대가 자기 세대보다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이들 유산을 다시 전수하는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이 임무들은 특별한 도전이다. 이는 노동운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이다. 구세대들은 제공할 수있는 자신들의 경험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역시 투쟁과정에서 상처와 트라우마를 얻었고 패배와 실망을 겪은 바 있다. 따라서 이들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영속적으로 집단투쟁을 하기 위해서는 한 세대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자각했다(1). 이를 위해서는 다음 세대의 열정과 에너지, 이들이 제기하는 새로운 문제점,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신세대들의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각 세대가 서로를 필요로 할지라도 세대 간의 통합능력은 저절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한 사회가 전통적인 자연경제에서 멀어질수록 자본주의는 생산력과 사회전체를 더욱 더 빠르고 집요한 방식으로 “혁신”하고, 한 세대와 다음 세대의 경험은 더욱 그 차이가 커진다. 이처럼 최고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경쟁체제는 모두에 대항한 각자의 투쟁 속에서 세대들간의 반목까지도 유발시킨다.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우리조직은 각 세대 간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토론 문화”가 얼마나 특별한 의미를 지닌 주제인가를 깨닫게 된 계기는 이 작업의 준비과정에서 보다는 실제로 직접적인 새로운 세대들과의 만남을 통해서이다. 우리는 “토론 문화”에 68세대의 경우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세대를 만나게 되었다. 노동자계급내의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는 2006년 고용의 “불안정화(precarisation)”에 반대하는 프랑스 대학생 및 고교생들의 집단 운동이다. 이 과정에서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이들이 집회 때마다 최대한 자유롭고 폭 넓은 토론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60년대 말 학생운동은 정치적 대화에 무능했다는 점을 한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이 같은 차이점은 바로 오늘날 학생집단이 40년 전에 비해 훨씬 더 프롤레타리아화(化) 됐음을 표현한다. 폭 넓고 심도 있는 토론은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중요한 특성이자 1968년 프랑스와 1969년 이탈리아 노동자 집회를 특징짓는 요인이다. 그러나 2006년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은 투쟁을 하는 데 있어 젊은 세대들이 나이든 세대들과 소통을 하며 그들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열의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60년대 말에 있었던 학생운동, 특히 독일 학생운동과는 극명히 다른 차이점을 드러낸다. 당시 시대정신 상태를 가장 희화적으로 표현한 슬로건 중의 하나가 바로 “30세 이상의 사람들은 집단 수용소로!”이다. 실제로 이러한 생각은 서로에게 야유를 보내고 “라이벌”모임들을 폭력적으로 해산시키는 등의 행위로 구체적으로 표출됐다. 여기에 심리적 수준에서, 독일뿐만 아니라 이태리에서 저항의 한 형태로서 테러리즘이 발전하게 되는 그 뿌리들 중 하나가 놓여 있다. 노동자계급의 세대간 연속성의 단절이 이 문제의 뿌리들 중의 하나였다. 왜냐하면 세대 간의 관계는 이미 오래 전부터 대화능력을 단련시키는 특별한 토대였기 때문이다. 68혁명의 투쟁가들은 자기 부모세대를 자본주의에 “팔린” 세대, 혹은 이태리와 독일의 경우처럼 전체주의와 전범의 세대로 간주하였다. 자식들만큼은 자기보다 더 나은 삶을 영위하기만을 바라며 1945년 이후 계속된 끔찍한 착취를 견뎌냈던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제 3세계를 착취하며 살아가는 “기생충”이라고 자기 자식들이 비난할 때 쓰디 쓴 실망감을 맛봐야만 했다. 그러나 그 시대를 살았던 부모세대가 대화 능력을 크게 상실했거나 이를 가져본 적도 없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들 세대는 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대으로 또한, 전체주의적, 스탈린주의적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적 반혁명으로 인해 큰 상처와 충격을 입었다.
반면 2006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은 새롭고 풍요로운 무언가의 출현을 예고했다(2). 새로운 세대의 이러한 관심은 이미 몇 년 전부터 노동자계급 내 혁명적 소수들(revolutionary minorities)에 의해 예고되었었다. 이 소수들은 정치무대에 등장하자마자, 토론을 거부하는 태도와 분리주의를 그 나름의 논리로 강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내세운 처음의 요구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되었다. 첫째, 토론은 사치품이나 장식요소로서가 아니라 절대적인 필요성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둘째, 토론에 참여하는 이들은 다른 참가자들을 진지하게 대하고 그 의견을 신중히 듣는 것을 배워야 한다. 셋째, 토론의 무기는 논증이지 강제적인 힘이나 도덕적, 또는 “이론적” 권위에의 호소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자 진영과 관련해서, 이 혁명적 소수들은 일반적으로 (또한 매우 정당한 이유로) 현존하는 그룹들 사이에 우애적인 토론이 부재하는 현실에 크게 놀라며 이를 비판했다. 또한 이들은 마르크스주의는 신세대가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받아들여야하는 일종의 도그마라는 생각을 단호하게 거부했다.(3).
한편, 우리 조직은 새로운 세대들이 ICC에 대해 보이는 반응에 놀랐다. 우리의 공개토론모임에 참석했던 새로운 동지들, ICC와 교류를 시작한 전 세계로부터의 공감자들, 함께 토론할 기회가 있었던 다른 그룹과 써클들, 그 모두는 ICC의 강령적 입장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동, 특히 토론방식에서 ICC의 프롤레타리아적 본질을 알아볼 수 있었다고 우리에게 수 차례 말했다.
토론에 관한 새로운 세대들의 깊은 관심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우리는 이것이 1968년 당시보다 더욱 심각하고 가중된 자본주의의 역사적 위기에서 도래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은 자본주의에 대해 철저히 비판할 것은 물론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파악할 것을 요구한다. 부르주아 개인주의의 가장 부식적인 영향들 중 하나는 토론 능력을 파괴한 방식, 특히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는 능력을 파괴한 방식이다. 대화 대신 “잡담”이 난무하고 (부르주아 선거 캠페인에서 볼 수 있듯이), 가장 큰 소리로 떠드는 이가 승자가 된다. 토론 문화는 인류의 미래를 짊어질 유일한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쟁무기인 의식을 발달시키기 위한 중요수단이다. 또한, 이들이 고립과 조급함을 극복하고, 통합된 투쟁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유일한 수단이다.
오늘날 이러한 관심의 또 다른 측면은 스탈린주의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이다. 오늘날 국제주의적 입장을 획득하려 애쓰는 수많은 투쟁가들은 직접적으로 어느 한 좌파 그룹 출신이고 좌파의 영향을 받았다. 이 그룹은 사회주의라는 옷을 입은 쇠퇴적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행동이라는 캐리커쳐를 나타낸다. 이들은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것은 곧 “부르주아 자유주의”라고 믿도록 정치적 교육을 받았다. “좋은 공산주의자”는 “입을 다물고” 자신의 의식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자라고 그들은 배웠다. 반혁명의 이러한 소멸해가는 산물의 영향들을 떨쳐버리고자 결심한 동지들은 이를 위해서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뿐만 아니라 정신구조까지 버려야 한다는 것을 더욱 더 이해하게 됐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운동에서 있어서 그 전통의 유기적 연속성에 반혁명이 유발한 균열이 생기면서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전통 하나를 재확립하는데 기여하고 있다.(4).
조직위기와 만장일치성(monolithism)의 경향
ICC가 토론 문화를 다시 성찰할 수밖에 없었던 두 번째 핵심 이유는 21세기 초반에 나타났던 조직의 내부적 위기 때문이다. 이 위기는 우리 조직에서 그 동안 결코 볼 수 없었던 가장 추악한 행동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ICC 창설 이후 처음으로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멤버들을 제명해야만 했다(5). 내부위기가 일어났던 초반에는 중앙집권이라는 조직 원리에 대한 견해 차이와 이에 따른 여러 어려움들이 프랑스 지부에서 나타났다. 이러한 유형의 견해 차이 자체는 조직의 위기로 이어진 질 이유가 전혀 없었고 그 원인도 아니였다. ICC의 위기를 초래한 것은 내부적인 토론의 거부, 특히 서로를 고립시키고 헐뜯는, 즉 자신과 의견을 달리 하는 동지들을 공격하는 술책이었다.
이후 우리 조직은 이러한 위기와 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을 파헤칠 것을 결심하였고 이에 대한 조사를 실시해서 몇몇 기사들을 공개했다(6). 우리가 도달한 결론 중의 하나는 그 동안 겪었던 모든 분열에는 만장일치성의 경향이 중요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견해 차이가 생기자마자 이미 몇몇 조직원들은 더 이상 다른 이들과는 함께 일할 수 없다고 단언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ICC는 스탈린주의 조직으로 변질되어가고 있거나 조직 자체가 타락해 가는 중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위기는, 만장일치가 요구되지 않는 (non-monolithic) 조직 안에서라면 대부분 전혀 문제 없이 존재할 수 있고, 분열이 생기기에 앞서 함께 논의되고 규명되어야할 의견 차이와 관련해서 발생하고 말았다.
이러한 만장일치성 경향이, 특히 “ 좌파공산주의 이태리 분파(Italian Fraction of the Left Communism)”의 전통들에 기반을 두고 있는 조직에서 반복적으로 출현한 점은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태리 분파는 근본적 원칙에 관한 그 어떤 의견 차이에 있어도 토론을 통해 심도 깊고 통합적으로 문제점을 명확히 밝히는 것이 조직적 분열에 앞서야 한다는 것을 항상 옹호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ICC는 “좌파공산주의 이태리 분파(Bilan이라고도 함)”와 “프랑스좌파공산주의(GCF)”의 조직적 전통을 승계하는 유일한 좌파 공산주의 조직이다. “좌파공산주의 이태리분파(이하 이태리분파)”는 2차 세계대전 말 이태리에서 창립된 국제 공산당(PCint)에서 유래하는 다른 그룹들과는 달리 스탈린주의의 반혁명에 대한 반응으로 출현한 “좌파공산주의”의 다른 국제적 흐름들, 특히 “독일 좌파공산주의”와 “네덜란드 좌파공산주의”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인정하였다. 이태리분파는 이 집단들을 “무정부-자연발생주의자(anarcho-spontaneist)” 또는 “노동조합주의자 (syndicalist)”라고 배척하기 보다는 이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받아들였다. “평의회주의(councilist)” 경향으로 된 것들에 대해 이태리분파가 가한 주된 비판은 그것이 제 2 인터내셔널의 공헌들 특히 볼셰비즘의 공헌들을 인정하길 거부한데서 나타난 종파주의에 대해서 였다(7). 그렇게 해서 이태리분파는 반혁명의 시대에서 계급의식은 집단적으로 발달하며 그 어떤 정당이나 그 어떤 전통도 독점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마르크스주의 입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의식이라는 것이 우애적, 공개적, 국제적인 토론 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8).
그러나 이러한 근본적인 이해는 ICC가 계승한 기본 유산의 일부이긴 하지만 실천에 옮기기에 쉽지 않다. 토론 문화는 부르주아 사회의 흐름에 대항해서만 발달할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경향은 어떤 생각들을 명확히 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 조작, 다수의 표를 얻으려는 싸움(부르주아 민주주의 선거가 보여주는 서커스가 가장 좋은 예다)등이다. 그래서 이러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프롤레타리아 조직에 침투할 경우 위기와 쇠퇴의 씨앗을 늘 품고 있게 된다. 볼셰비키 정당의 역사는 이를 명백히 보여준다. 혁명의 첨병이었던 이들에게 있어 활발하고 때로는 격렬하기까지 한 토론은 당의 주요 원동력이었다. 반면에 1921년 크론슈타트 학살사건 이후 진정한 분파(fraction)들의 구성이 금지되었는데 이것은 볼셰비키 쇠락의 영구적인 징후이자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미 국제공산당(PCint) 창립 과정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 여러 대립적 입장들의 “평화적 공존”(다시 말해 “토론의 부재”)이라는 관행, 또는 보르디가(Bordiga)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한 만장일치라는 미덕의 이론화는 20세기 중반에 있었던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패배라는 상황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혁명조직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주요 임무인 계급의식의 발달과 확장을 완수하려면, 집단적이며 국제적이고 우애적이며 공개적인 토론 문화의 배양은 필수불가결하다. 물론 이것이 정치적 성숙(좀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인간적 성숙)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이다. ICC의 역사는 이러한 성숙함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진보의 산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 이 성숙의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이들이 바로 신세대들이다.
역사 속에서의 토론의 문화
토론 능력은 노동운동의 핵심적인 특징이나, 노동운동 자체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은 인류의 가장 훌륭한 업적을 흡수하고 자신의 필요에 맞춰 이들을 채택하는 능력을 지녔다. 또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훌륭한 장점들을 좀 더 나은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근본적으로 토론 문화는 인간의 뛰어난 사회적 본질의 한 표현이며 특히 언어사용으로 인해 나타난 산물이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다른 몇몇 동물들도 정보교환의 수단으로써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인간은 과학과 논리의 발달로 함께 토론하는 능력을 발전시키고, 특히 예술의 발달과 관련된 감정이입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알아간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들과 구별된다.
인간의 토론능력은 어느 날 갑자기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며 계급사회 이전부터 존재했고 인류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엥겔스는 호머(Homer)시대의 그리스 사회와 게르만 초기 부족사회, 북미 이로쿼이(Iroquois)족의 부족 총회(general assembly)들의 역할을 언급하면서, 특히 이로쿼이족의 토론문화를 칭송하였다(9). 19세기 루이스 헨리 모르간(Luis Henri Morgan)과 그의 동료들 그리고 이후 다른 학자들이 행한 이들에 대한 연구들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분야에서 초기의 확실히 가장 결정적인 발달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
반면에, 우리는 철학 및 과학적 사고의 시초가 “신화”와 “순진한 사실주의”라는 모순적이면서도 분리될 수 없는 한 쌍을 이루는 고대의 두 요소가 의문시 됐을 때 번영하기 시작했음을 알고 있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이 두 가지 단순한 방식은 직접적인 경험을 더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오류에 빠져있었다. 고대인들이 실제경험에 근거하여 형성한 사고는 천성적으로 종교적일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가 어떻게 구성됐는지는 알지 못한 채 꿈속에 나타나는 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던 아주 옛 시대부터, 자신들의 사고와 감각이 어떤 육체적 활동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에 있다가 죽음의 순간 육체를 떠나는 어떤 특별한 영혼의 활동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죽음이 찾아 올 때 영혼과 외부 세계의 관계에 관한 무언가를 만들어낼 필요성을 느꼈다. 만약 죽음의 순간에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된다면 그 영혼 자체의 개별적인 죽음을 상상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영혼불멸 개념이 생겨났다. 인류발달의 이 단계에서 이 개념은 어떤 위안을 위해서 생겨난 것이 전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서 생겨났다. 특히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영혼 불멸을 불행으로 여겼다.”(10)
바로 이러한 “순진한 사실주의”라는 체계 안에서 문화와 생산력의 매우 느린 발전의 첫걸음이 시작됐다. 마법적 사고(magical thought)는 어느 정도의 심리적 지혜를 지니고 있으면서 불가해한 현상을 설명하고 그렇게 해서 공포를 제한하는 것을 가장 최우선의 임무로 여겼다. 이 두가지 즉, 순진한 사실주의와 마법적 사고는 인류 발전에 중요하게 공헌했다. 하지만, 순진한 사실주의가 유물론 철학과 특별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거나 유물론 철학이 순진한 사실주의에서부터 시작되어 발전했다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대중의 의식 속에는 변증법의 오래된 가정(postulate) 하나, 즉 극과 극은 통한다라는 가정이 전해져 오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공상적 정신과 고지식함, 미신의 극한 점을 찾을 때, 독일 자연철학의 경우에서와 같이 객관적 세계를 자신의 주관적 사고의 틀에 강제로 밀어넣어 이해하려 노력하는 과학적인 방향에서 찾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방향에서 즉, 오로지 경험만을 중요시 하고 관념을 극도로 경멸함으로써 무모함에 있어 가장 멀리까지 나아간 그 곳에서 찾으면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학파가 영국에서 지배적이다.”(11)
엥겔스가 지적했듯이 종교는 마법적 세계관에서 생겨났을 뿐만 아니라 순진한 사실주의에서도 출발했다. 순진한 사실주의는 처음으로 대담하게 세계를 일반화하여 바라보았고, 그럼으로써 당연하게 권위적 성격을 획득했다.
예를 들어, 초기 농경 공동체들은 농사를 지으려면 비가 필요하다는 것은 곧 이해했으나 정작 비를 내리게 하는 조건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들이 비의 신(神)을 만들어 낸 것은 선물이나 숭배를 통해 자연의 변화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스스로 안심하고자 만든 창조적 행위이다. 자신의 생존을 확고히 하기 위해 의식의 발전에 기대를 건 종(species)이 바로 호모 사피엔스이다. 이들은 일찍이 존재하지 않던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바로 낯선 것에 대한 무력한 공포가 그것이다. 미지(未知)의 것에 대한 설명은 그 어떤 의심도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필요로부터 가장 발전된 표현으로서 계시종교들(religions of revelation)이 출현했다. 이 세계관의 감정적 기반 전체는 믿음이지 지식이 아니다.
순진한 사실주의는 이 똑 같은 동전의 또 다른 한 면에 불과하며 일종의 초보적인 정신적 “분업(division of labour)”이다. 즉각적이고 실제적인 의미에서 설명할 수 없던 모든 것은 당연히 마법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게다가 실제적 이해 자체는 원래 애니미즘 세계관이었던 종교적 세계관에 기반을 둔다. 여기서 모든 것은 물신(物神)화된다. 인간이 의식적으로 생산하고 재생산할 수 있는 과정들조차 우리의 의지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인격화된 힘의 협력에 의해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세상에서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로서 토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없다. 약 2,500년 전, 새로운 특성 하나가 종교와 “상식(common sense)”이라는 쌍둥이에게 직접적으로 도전하며 나타났다. 이 특성은, 전통적인 사고방식이 자신의 반대방향으로 전환했다는 의미로 볼 때, 전통적인 옛 사고방식으로부터 발달하였다. 따라서 예를 들어 중국에서 볼 수 있는 여성과 남성의 원리들 사이의 극성 사상, 즉 음양(陰陽)사상과 같이, 계급사회의 출현에 앞서 존재했던 초기 변증법적 사고는 과학과 철학, 유물론에 근거를 둔 비판적 사고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가 토론 문화라고 부르는 것의 출현 없이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리스어로 변증법은 대화, 혹은 토론을 의미한다.
무엇이 이러한 새로운 접근법을 가능케 했을까?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사회적 관계와 지식 세계의 확장 덕분이었다. 엥겔스가 즐겨 말했듯이 상식은 자신의 집 안에 머물러 있을 때는 강하고 힘센 소년이지만 세상으로 모험을 떠나는 순간 온갖 실패와 환멸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종교는 공포를 경감시키는 능력에 있어서 자신의 한계를 드러냈다. 사실상 종교는 공포를 없애는 대신 그저 밖으로 던져버리기만 했었다. 이 메커니즘을 통해 인류는 다른 자기 방어 수단이 없던 그 순간에 그렇지 않았다면 짓눌림을 당하고 말았을 그 공포에 대적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인류는 그 자신의 공포로부터 그것을 지배하는 부가적인 힘을 만들어냈다.
여전히 설명 불가능한 것을 “설명”하는 것은 진정한 탐구의 포기를 의미한다. 그래서 바로 여기에서 종교와 과학 사이의 충돌, 혹은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복종과 탐구 사이의 충돌이 일어난다.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은 원래 종교에 반대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는 이미 신비주의적 세계관에서 탈피했었고, 그의 제자인 아낙시만드로스는 자연이 자연 그 자체로부터 설명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은 순진한 사실주의에 대항한 전쟁선포이기도 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물의 본질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연은 숨기를 좋아한다”라고 말했고, 마르크스는 “사물의 본질과 겉모습이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12)고 공언했다.
이러한 새로운 접근은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신앙과 편견, 전통에 도전했다. (독일어로 신앙(Glaube)과 미신(Aberglaube)은 연관된 단어이다). 이들에 반대되는 개념이 바로 이론과 변증법이다. “얼마나 모든 이론적 사고가 경멸될 지언정 이들 없이는 자연의 두 사실 사이가 연관될 수 없고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가 이해될 수는 없다.”(13)
사회적 교류의 증대는 물론 생산력 발전과 연계되어 있었다. 따라서 예를 들어 기존 사고방식들의 부적절함과 같은 문제점이 드러났을 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도 함께 등장했다. 자신감의 증대, 특히 인간 사고력의 증대가 바로 그것이었다. 과학은 의혹과 불확실함의 존재를 받아들일 능력과 준비상태가 있을 때에만 비로소 발전할 수 있다. 종교와 전통의 권위와는 반대로 과학의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교환할 가능성뿐만 아니라 그 필요성이 생긴다.
지식의 지배라는 주장은 (가장 넓은 문화적 의미에서의) 생산력이 어느 정도의 성숙도에 이르렀을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음은 분명하다. 지식의 지배는 예술, 교육, 문학, 자연관찰, 언어, 이 모든 것이 상응하게 발전하지 않고서는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이것은 역사의 특정 단계에서 계급사회와 물질적 생산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운 지배계층의 출현과 나란히 진행된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들이 새롭고 독립적인 접근을 자동적으로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이집트인들과 바빌로니아인들은 그들의 과학적인 진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들만큼 멀리 나아가진 못했다. 현대 알파벳 발달의 선구자 페르시아인들도 이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 였다.
그리스에서 노예제의 발달은 사제와 더불어 자유 시민계급의 출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종교의 힘을 약화시킬 물질적 기초를 제공했다(이를 통해 우리는 엥겔스의 “안티 뒤링”에 나오는 문장, “고대사회의 노예제도가 없었다면 현대 사회주의도 없었을 것이다”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인도에서는 철학, 유물론(이른바 로카야타(Lokayata))과 자연에 관한 연구의 발달이 있었다. 이것은 브라만 신정(神政)정치에 반대하고 농노제에 일정 기반을 둔 무사(武士) 귀족계급의 형성 및 강화와 때를 같이 한다. 종교, 불멸 그리고 육체적 쾌락에 대한 비난에 반대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싸움이 전제군주와 억압된 민중 양측 모두의 편견에 대항해 이뤄졌던 그리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도에서 행해진 그 전투적이고 새로운 접근은 귀족계급으로부터 유래했다. 같은 시기에 출현한 불교와 자이니즘은 노동계급에서 더 많이 퍼졌으나 영혼의 환생이라는 개념과 함께 종교적 틀 안에서 머물렀다. 이 영혼 환생의 개념은 이들 종교가 반대했던 카스트 사회에서 전형적이었고 그 비슷한 유형은 이집트에서도 발견된다.
반면, 과학과 일종의 초보적 유물론(예를 들어 모티의 “논리학”)이 발달했던 중국에서 그 발달이 어느 정도의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반란이 일어나려면 이에 대항해야 할 지배계층이 있어야 하는데 중국에는 반란의 씨앗일 될 수 있는 사제지배계층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사회는 자국을 둘러싸고 있던 외적들과의 전투를 통해 훈련된 군사관료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인도의 경우처럼 어떤 보충적이고 결정적인 요인이 작용했는데 바로 상품생산이 앞서 발달했다는 점이다. 그리스 철학은 그리스 자체에서가 아닌 소아시아 항구 식민지에서 출발하였다. 상품생산은 재화뿐 아니라 생산을 통해 얻은 경험도 교환할 수 있게 도와주며, 변증법적 사고에 있어서 더 고차원의 표현들의 등장을 촉진하면서 역사발전을 가속화한다. 또한 생각의 교환이 보다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지려면 일정 정도의 개인화가 필요한데 상품생산은 바로 이러한 개인화(individualisation)를 가능케 했다. 지금까지 사회적 진보가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이루어졌다면 상품생산을 통해 이 고립화가 끝나기 시작한다. 자연경제에 기반을 둔 모든 농업사회의 기본적 경제단위는 마을, 조금 더 낫게는 자치적 지방이었다. 그러나 종종 관개작업을 위해 더 넓은 협업에 기초한 최초의 착취사회는 여전히 근본적으로는 농경사회의 성격을 띠었다. 반면에 그리스 사회는 상업과 항해를 통해 세계로 나아갔다. 이를 통해 그리스는 유목사회의 특징인 다른 세계를 발견하고 정복해 나가는 태도를, 하지만 더 높은 수준으로 획득했다. 일정수준의 역사 발전단계에 이르면 열린 토론의 출현이 국제적 발전(비록 한 지역에 집중된다 할지라도)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과, 어떤 의미에서는 이 토론의 출현이 어떤 의미에서는 “국제주의적 (inter-nationalist)” 성격을 지닌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디오게네스와 견유학파 철학자들은 헬라스 사람과 이민족 “야만인”을 구분하는 것에 반대하고 스스로를 세계시민이라 선언하였다. 데모크리토스는 이집트, 바빌론, 페르시아, 인도로 교육여행을 떠나기 위해 자신이 받은 유산을 낭비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았다. 그는 여행의 결실인 자신의 저서의 일부를 읽으면서 스스로를 변론했고 무죄를 주장하였다.
토론은 실천적인 필요성에 답하기 위해 생겨났다. 그리스에서 토론은 지식의 여러 다른 근원들을 비교하는 데서 발달했다. 그리스인들은 다른 사고방식, 다른 연구방식과 그 결과들, 생산의 방법들, 관습과 전통들을 비교했고, 이를 통해 이들이 서로 모순되거나 확인하거나 상호 보완한다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들은 서로 대립하여 투쟁하거나 서로를 지지하고, 혹은 이 두 가지를 다한다. 절대적 진리는 비교를 통해서 상대화된다.
이러한 토론은 공개적이어서, 항구, 시장이 서는 광장(포럼), 학교, 아카데미 등에서 이루어졌다. 이렇게 이뤄진 토론은 기록된 형태로 여러 도서관에 보관되었고 이는 곧 세계로 퍼져나갔다.
시장이 서는 광장에서 토론하는 데 모든 시간을 보낸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선 철학자이다. “어떻게 하면 도덕적으로 참된 지식에 이를 수 있을까?”라는 그의 주된 관심 자체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이미 나와 있다고 생각하는 편견과 종교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는 지식이야말로 올바른 윤리를 위한 주요조건이며 무지는 이를 방해하는 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도덕적 발전을 가능케 하는 것은 벌이 아니라 양심의 발달인데, 이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의 양심의 목소리에 거슬러서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더욱 멀리 나아가서 모든 과학과 모든 집단적 규명의 이론적 기초를 놓았다. 즉, 그는 지식의 출발점은 모든 편견의 폐기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는 본질적인 것, 즉 탐구(연구)를 위한 길을 열어준다. 소크라테스는 성급한 결론, 비판적이지 않고 스스로 만족하는 의견, 건방짐과 자만에 단호히 반기를 들었다. 또한 “알지 못하는 겸손함”과 어떤 비젼, 확신에 근거한 참된 지식으로부터 나오는 열정을 믿었다. 이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와의 대화』의 출발점이다. 진리는 모든 학생들, 또한 모두가 학생인 동시에 선생인 이들의 대화에서 이루어지는 집단적 탐구의 결과이다. 철학자는 어떤 새로운 사실을 알리는 예언자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지도자에 대한 새로운 개념, 즉 “지도자는 자신의 최종목표를 결코 잊지 않고 진리를 밝혀내는 일을 앞당기는 데 결연한 사람이다”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놀라운 점은 『공산당 선언』에 정의된 계급투쟁을 위한 공산당의 역할이 이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토론을 이끌고 활기차게 만드는 데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공개토론을 예술 혹은 과학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렸고 그의 제자 플라톤은 이전에는 도달하지 못했던 수준으로 대화를 발달시켰다.
엥겔스는『자연변증법』서론에서 지금까지 행해졌던 자연에 관한 연구의 역사 중 세 가지 중요한 시기에 대해 언급했다. 첫째, 고대 그리스인의 “천재적인 직관(genius of intuition)”, 둘째, 르네상스 시대를 예고한 아랍인들의 “매우 의미가 크지만 산발적인” 결과들, 셋째, 르네상스 시대에 첫 발자국을 내디딘 근대과학이 바로 그것이다. “이슬람 아랍문화 시대”에서 주목할 만 한 점은 고대 다른 문화들의 지식들을 흡수하고 이를 집대성한 그들의 놀라운 능력과 토론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이다. 아우구스트 베벨(August Bebel)은 바그다드에서 있었던 공개토론의 생생한 목격담을 예로 들었다. “첫 회의에는 모든 이슬람 종파 대표들, 그리스 정교도 정통파와 이단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배화교도, 유물론자, 무신론자, 유대교도, 기독교인들, 한마디로 말해서 각종 이교도들이 참석했습니다. 각 종파는 자신들의 대변인이 있었는데, 어떤 그룹의 지도자들 중 한 명이 회의장에 들어오면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정중히 일어났고 그가 착석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앉지 않았습니다. 회의장이 거의 꽉 찼을 무렵, 이교도 중 한 명이 말했습니다. ‘모두들 규칙을 알고 계시죠. 이슬람교도들은 자기들 경전에서 나온 증거나 예언자들의 연설에 근거하여 우리와 토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경전도 예언자들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는 인간의 이성에 기초한 논쟁만 가능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발언에 기꺼이 동의했습니다.”(15) 베벨은 이에 덧붙여 “아랍문화와 기독교 문화의 차이점은 아랍인들이 세계를 정복하면서 자신들의 연구에 도움이 되고 자국민들과 자신들이 정복한 국가의 국민들을 가르칠 수 있는 저서들을 수집했던 반면,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교리를 전파하면서 모든 문화유적들을 악마의 산물, 혹은 혐오스러운 우상숭배로 취급하면서 파괴했다는 점입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슬람 아랍 문화시대는 그리스 로마 문화와 고대 문화를 르네상스 이후 꽃 피었던 유럽 문화에 연결시켜준 고리입니다. 이슬람 아랍 문화가 없었다면 유럽문화는 현재의 위치에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반면, 기독교는 이 모든 문화발달에 적대적이었습니다.”라고 결론지었다.
하인리히 하이네는 기독교가 만들어내고, 이후 노동운동에 의해 확인된 종교적 광신과 맹목적인 종파주의의 원인 중 하나는 한 문화가 다른 문화의 희생과 포기를 요구하면 할수록 그 문화의 사상과 원칙은 더욱 냉혹해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엥겔스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인류가 경험하지 못했던 전대미문의 가장 큰 진보주의적 변혁”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이 두 사건에서 사상 발달뿐만 아니라 감정, 인격, 인간의 잠재성, 투쟁성의 역할 또한 강조하였다. “당시는 사상, 열정, 인격, 보편성과 학식의 거장이 필요했던 시대였고 결국 이들을 배출한 시대였다.(…) 이 시기의 영웅들은 그들의 후손들이 종종 느끼는 한계와 편협성을 지닌 노동 분업의 노예가 아니었다. 그러나 특히 특징적인 것은, 거의 그들 모두는 당시의 운동의 와중에서 입장을 세우고 투쟁한, 실천적 투쟁들의 본질적인 부분이었다는 점이다. 때로는 글로 때로는 검으로 아니면 종종 두가지 모두를 가지고서.” (엥겔스,『자연변증법』서론)
토론과 노동자 운동
엥겔스에 따르면 현대과학 발달에 큰 공헌을 한 인간사상의 이 “영웅적” 세 시대를 관찰해 보면, 이 시기가 얼마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았던가를 인식하게 된다. 우선, 이 세 시대는 전체적 인간 역사로 놓고 볼 때 매우 늦게 시작되었다. 우리가 중국과 인도의 경우까지 포함한다고 할지라도 지리적 측면에서도 제한이 있었다. 게다가 이 세 시대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르네상스와 독일에서의 종교개혁은 고작 몇 십 년 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또한 이 운동에 활동적으로 참여했던 착취계급(그들 자체가 소수였던)의 수도 극히 적었다.
이 점에 관련하여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들 수 있다. 첫째, 급격한 변화와 모든 곤경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인 토론과 과학이 출현했고 그 영향력 또한 매우 중요하고 지속적이었다는 점. 둘째, 20세기 중반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유기적 연속성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또한 자본주의 쇠퇴기에 영구적인 대중조직의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토론의 목표를 확장시키고 유지하려는 데 보여준 프롤레타리아의 능력. 노동자 운동은 여러 번의 중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전통을 거의 2세기 동안 유지했다. 프랑스, 독일, 러시아에서 일어난 여러 혁명운동에서처럼 어느 순간에는 이러한 발전이 수백만의 사람들을 결집시켰다. 여기에서 양(量)은 질(質)로 변화한다.
그러나 이 질(質)은 적어도 산업화된 국가에서는 프롤레타리아가 인구의 다수를 구성한다는 사실의 산물만은 아니다. 우리는 현대과학과 이론이 르네상스 시대의 영광스러운 출발 이후 부르주아적 분업으로 인해 어떻게 망쳐지고 족쇄가 채어졌는지 이미 목격했다. 이 문제의 중심에는 이슬람 아랍시대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생산자로부터의 과학의 분리가 위치한다. 이러한 괴리는 “근대 산업에서 완성되는데, 이것은 과학을 노동으로부터 분리된 생산력으로 만들어 자본에 봉사하도록 강요한다.”(16)
마르크스는 베라 자수리치에게 보내는 답장의 초안에 이 과정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이 사회는 과학과 민중, 그리고 사회 자체가 만들어낸 생산력에 대항하는 전쟁을 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과학을 생산에 체계적으로 적용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최초의 경제체제이다. 그 계급지배를 지속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의 교육을 “제한”해야만 하는 체제이다. 또한 자신의 경제적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는 프롤레타리아 교육을 “발전”시켜야 한다. 오늘날, 부르주아 계급은 점점 더 교양이 없고 원시적인 계급이 되어가는 반면에 과학과 문화는 프롤레타리아 또는, 혹은 경제사회적 측면에서 점점 노동자 계급과 닮아가는 부르주아 계급 중 임금을 받는 대표자들의 소유가 되어간다.
“사회계급의 폐지는 (…) 그래서 생산발달의 상승을 전제로 하는데, 그러한 생산의 발달 정도에서는 특정한 사회계급의 생산수단과 생산물의 점유, 정치적 지배 및 문화와 지식 독점이 쓸모 없어질 뿐만 아니라 경제, 정치, 지적 측면에서 발달의 장애가 된다. 이 지점에 지금 도달했다.”(17)
프롤레타리아는 인류 과학전통의 계승자이다. 미래의 프롤레타리아 혁명투쟁은 과거 그 어느 시대보다 더욱 더 토론이 발달하고 과학과 노동의 연합을 위한 움직임, 시대의 요구를 앞서는 총체적 이해가 수반될 것이다.
새로운 정점에 이를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능력은 인간사회 및 역사와 관련된 첫 과학적 시도인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이미 증명되었다. 오직 프롤레타리아만이 부르주아 철학사상 중 가장 최고의 지식인 헤겔 철학을 소화 흡수할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가장 널리 알려진 두 가지 변증법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의 변증법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상호작용의 변증법이었다. 오직 헤겔만이 이 두 가지 변증법을 결합시켰고 역사적으로 진정한 변증법의 토대를 창조하였다.
헤겔은 참과 거짓 사이의 엄격하고 형이상학적인 대립을 그 어느 때보다도 심오하게 공격하면서 토론의 개념 전체에 새로운 차원을 부가했다. 『정신현상학』서론에서 그는 꽃과 과일의 관계처럼 어떤 발달과정(예를 들면 철학의 역사 같은)의 상이하고 대립된 단계들이 어떻게 유기적 연합을 이루는가를 보여주었다. 헤겔은 이 연합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모순”에만 집중하고 “발달”은 외면시하는 경향에 있다고 설명하였다. 쓰러진 변증법을 다시 일으켜 세우면서 마르크스주의는 헤겔 철학의 가장 진보적인 부분, 즉 미래로 이끄는 과정을 이해하고 흡수하였다.
프롤레타리아는 최초로 피착취계급인 동시에 혁명적인 계급이다. 착취자였던 이전 혁명계급과는 달리 프롤레타리아의 진리탐구는 한 계급으로서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그 어떤 이해관계에도 제한되지 않는다. 환상을 품으며(특히 종교적인)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생존했던 이전의 피착취계급과는 달리 프롤레타리아의 관심은 환상을 버리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일단 그들이 숙고하고, 조직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투쟁하자 마자 그 자연스런 경향이 진리의 규명(clarification)을 지향하는 최초의 계급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이러한 독특한 특성은 보르디가주의(Bordigism)가 불변성(invariance) 개념을 창조할 때 망각되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대항해 마르크스주의 기초원칙에 충실하겠다는 그들의 출발점은 옳았다. 그러나 계급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토론을 제한하거나 폐지할 필요성이 있다는 그들의 결론은 반혁명의 산물이다. 부르주아 계급은 자본의 영역으로 프롤레타리아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 무엇보다 토론을 전부 억누르고 없애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초기에는 이들이 폭력적인 억압을 시도했다면, 이후에는 의회 “민주주의”와 좌파 자본주의 사보타지라는 더욱 효과적인 무기를 발달시켰다. 기회주의자들 역시 이 점을 이미 오래 전부터 이해했었다. 이들은 말과 사상의 불일치라는 핵심적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스스로를 숨겨야 하며 토론은 이들에게 있어 회피해야 할 어떤 것이었다. 그러므로 반(反) 기회주의 투쟁과 토론 문화의 필요성은 양립적인 것일 뿐 아니라 서로 불가분의 관계일 수밖에 없다.
토론 문화는 다양한 정치적 입장들 사이의 격렬한 대립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 토론이 “필연적으로” 트라우마적이고 분열과 단절을 낳는다는 말은 아니다. 역사 속에서 토론의 “예술” 혹은 토론의 “과학”의 가장 모범적인 예는 1917년 2월에서 10월까지 있었던 볼셰비키당의 토론이다. 각종 낯선 이데올로기가 대량으로 끼어드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 토론들은 열정적이지만 매우 친밀한 분위기에서 진행됐으며, 모든 참가자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토론들은 트로츠키가 정당의 “재무장(再武裝)”이라고 불렀던, 승리를 위해 혁명과정의 변화가 꼭 필요하다는 정치적 중재를 가능케 했다.
“볼셰비키적 대화”가 가능 하려면 모든 토론이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푸르동(Proudhon)에 반대하는 마르크스의 논쟁은 “파괴적인” 성격의 논쟁이였다. 그에게 있어 푸르동의 이론은 노동운동의 의식 발달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므로 역사의 쓰레기통에 버려 없애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은 마르크스는 헤겔과 유토피아 사회주의에 대항하는 거대한 싸움 중에도 그가 인류의 영원한 공동유산으로 여긴 헤겔과 푸리에(Fourier), 생 시몽(Saint Simon)과 오웬(Robert Owen)을 향한 무한한 존경심을 결코 잃지 않았다. 엥겔스는 헤겔 없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없었을 것이며, 유토피아주의자 없이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사회주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ICC를 포함하여 노동운동에 있어 가장 심각한 위기는 대부분 각각의 의견들의 대립에서가 아니라 (물론 이 문제점이 근본적이기는 하지만) 토론하기를 거부하고 사실을 명확히 밝혀내는 과정을 무시하는 데서 왔다. 기회주의자들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사용한다. 이들은 중요한 대립들을 최소화할 뿐 아니라 부차적인 대립들을 과장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대립들을 만들어낸다. 또한 개인적인 공격은 물론 중상모략과 비방도 서슴지 않는다.
노동운동이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 한편으로는 일상적인 “상식”, 다른 한편으로는 관습과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거의 종교에 가깝게 존중하는 태도의 짐은 레닌이 써클정신(the circle spirit)이라고 불렀던 것과 관련이 있다. 조직의 건설과정과 그 정치적 삶을 일상적인 상식과 그 귀결들의 “자연발생성(spontaneity)”에 내맏겨버리는 것과 관련한 레닌의 생각은 전적으로 옳았다. “가장 저항이 작은 방향으로의 자연발생적인 운동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초래한다, 왜 ? 그것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고, 더 다면적으로 완성되었으며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전파시킬 수 있는 더 많은 수단을 지니고 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18)
토론을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과 관련시키는 것(personalisation)는 바로 레닌이 말한 써클정신의 특징인데 이는 정치적 논쟁의 중심을 “말해진 것”이 아닌 “누가 그것을 말하는가”에 두는 것이다. 토론을 이렇게 개인화하는 것이 유익한 전체토론에 엄청난 구속이 되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통해 토론의 발달이 단지 사고의 문제가 아닌 윤리의 문제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어떤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자 하는 노력은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만 사보타주를 하는 것은 그들에게 오히려 해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자 계급은 계몽주의 시대의 독일인 레싱(Lessing)의 슬로건, 즉 그가 진리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진리를 위한 탐구”라는 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종파주의와 조급함에 대항하는 투쟁
프롤레타리아 대중운동의 핵심요소인 토론 문화의 가장 훌륭한 예는 러시아 혁명에서 볼 수 있다(19). 혁명당은 서로 대립하는 대신 토론문화를 활성화시키는 데 선두에 섰다. 1917년 볼셰비키당에서 이루어진 토론들은 혁명계급의 본질, 예를 들어 제국주의 전쟁을 계속하는 것을 지지할 것인가 말 것인가, 언제, 어떻게 권력을 쟁취해야 하는가 등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들은 세계 혁명의 운명과 더불어 인류의 운명이 걸려있던 정치적 위기에도 통일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 특히 조직적 노동운동의 역사는 토론 문화가 항상 이러한 수준에 도달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ICC 내에서 만장일치적 접근들이 반복적으로 침입했었다는 것을 이미 언급했다. 이러한 침입이 종종 조직의 분열을 초래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만장일치의 틀 안에서는 견해차이에 대해 분열 이외의 다른 해결책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문제는 이러한 접근법을 과장된 방식으로 받아들인 그러한 인자들이 분열해 나감으로써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러한 비(非) 프롤레타리아적인 접근법이 등장하고 또 재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조직 자체에 이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약점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약점들은 주로 삶과 일상적 대화에서 인식되기 쉽지 않은 작은 혼란들과 잘못된 생각들에 있지만, 그것들은 특정한 상황에서는 더 심각한 어려움을 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약점들 중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와 기회주의간의 대립의 측면으로, 또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논쟁적 투쟁의 측면으로 놓고 모든 토론을 행하려는 경향이다. 이로 인해 생기는 문제점으로는 첫째, 토론을 하는 동지들이 자신들이 절대 실수해서도, 자신들이 느끼는 혼란이나 서로간의 의견의 불일치를 말해서도 안된다는 심리적 압박을 가함으로써 토론을 방해한다. 둘째, 기회주의가 “진부하고 사소하게 되어(banalisation)”버린다. 우리가 기회주의를 어디서나 만나고 서로 조금의 대립이라도 있을 때마다 “늑대야!”라고 외친다면, 정작 정말로 기회주의가 나타났을 때는 이를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 문제점은 토론 중 나타나는 조급함인데 이러한 경우에는 결과적으로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들을 수 없으며, 토론을 독점하고 “적수”를 진압하여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른 이들을 설득하고자 한다(20).
결국, 이 모든 것들의 공통점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내부에 쁘띠 부르주아적 조급함이 존재한다는 것과, 집단적인 진리규명의 생생한 실천에 필수 요건인 자신감이 결여됐다는 점이다. 이는 곧, 토론과 진리규명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준다. 그 과정은 사회적 삶의 모든 근본적 과정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내적인 리듬과 고유의 발전법칙을 지닌다. 또한 그 전개 과정은 진리를 밝혀나가는 데 있어 발생하는 혼란, 실수와 잘못된 방향, 이를 고치기 위한 노력이 필수적으로 동반된다. 그리고 진정으로 성숙한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모든 과정은 가속될 수는 있지만 단축되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참여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계급전체의 참여가 환영 받고 장려될수록 이 과정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는 베른슈타인(Bernstein)에 대항한 논쟁에서, 현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계급투쟁을 하되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성격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주장의 모순을 비판하였다(21). 계급투쟁을 위협하는 두 가지 주요 위험성이 바로 이 모순적 본질에서 생겨난다. 첫 번째 위험은 기회주의로서, 노동자는 자신의 적들의 치명적인 영향력의 지배 아래에 놓일 수 있다. 계급투쟁으로부터의 이러한 일탈에 있어서는, “노동운동이 중요한 것이지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다”가 그 좌우명이다. 두 번째 위험은 종파주의(sectarianism), 즉 자신의 계급인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삶의 영향력에 대한 개방성이 결여된 것이다. 이 엇나간 노선에 있어서는 “목적이 중요한 것이지 노동운동은 아무것도 아니다”가 그 좌우명이다.
1차 세계대전 말 세계혁명의 패배를 낳게 한 이 끔찍한 반혁명의 진행 속에서, 종파주의가 기회주의를 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잘못되고 치명적인 생각이 혁명진영의 잔존자들 사이에서 발달하였다. 혁명운동을 불모화시키고 화석화시킨 이러한 접근법은 종파주의와 기회주의 두가지 모두가 노동자 운동과 그 목표를 분리하기 때문에 똑같은 동전의 양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혁명적 소수들이 그들 계급의 실제적 삶과 운동에 완전히 참여하지 않는다면 공산주의의 목표는 결코 달성되지 못할 것이다.
·(1) 마르크스와 엥겔스처럼 이론적으로 성숙하고 명확했던의 젊은 혁명가들조차 당시에 곧 공산주의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1848년 사회적 격변기에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은 곧바로 이러한 가정을 재검토하고 수정해야만 했다.
· (2) 『 인터내셔널 리뷰( International Review)』125호, 2006년 봄 프랑스 학생운동에 관한 논문 참조
· (3) 프롤레타리아 진영 내에서 이 관점은 이른바 “보르디가주의(Bordigism)”에 의해 이론화되었다.
· (4) 과거 혁명가들의 전기(傳記)와 회상록에는 그들의 토론 능력, 특히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는 능력의 실례(實例)가 가득 실려 있다. 이 관점에서 레닌은 꽤 유명했으나 그가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면, 프리츠 슈테른베르크(Fritz Sternberg)는 1963년에 작성한 “트로츠키와의 대화”에 관한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함께 대화를 나눌 때 트로츠키는 무척 예의 바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어떤 단어나 개념을 보다 상세히 설명해달라고 요청할 때만 제외하고는 나의 말을 도중에 끊어버리는 일은 결코 없었다.”
· (5) 이 주제에 관해서『 인터내셔널 리뷰( International Review)』110호 기사 ICC의 특별총회: 조직원칙 수호를 위한 투쟁 과 114호 기사 ICC 15차 ICC총회: 시대의 도전에 직면한 조직의 강화 를 참조할 것.
· (6) 『 인터내셔널 리뷰( International Review)』111호, 112호, 127호, 128호에 실린 기사 프롤레타리아 투쟁에 있어서 신뢰와 연대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와 윤리 참조할 것
· (7) 이탈리아 좌파공산주의와 네덜란드 좌파공산주의에 관해 ICC가 저술한 책을 참조할 것
·(8) 프랑스 좌파공산주의는 좌파공산주의 이태리분파 해체 이후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려고 하였다. 그 예로 『 인터내셔널 리뷰( International Review)』 33호의 « 천재적인 지도자 »개념에 관한 비판과, 같은 잡지 34호에 실린 조직투사들을 조직의 정치적 방향은 논의할 필요가 없는 그저 단순한 집행자로 인식한 « 통제 »의 개념에 관한 비판을 참조할 것
·(9)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
(10) 엥겔스,『 포이어르 바흐에 관한 테제 』
(11) 엥겔스,『 자연변증법 』중 심령계에서의 자연연구
(12) 마르크스, 『 자본론』 3권 7편 48장 : « 3자 공식 »(3부 초반)
(13) 엥겔스,『 자연변증법 』중 심령계에서의 자연연구 마지막 부분
(14) 기원전 500년 아시아의 발달에 관해서 1927년 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열린 학회 중 아우구스트 탈하이머(August Thalheimer)의 발표『 변증법적 유물론 입문 』 (1938년 미국판 출간) 참조할 것
(15) 아우구스트 베벨,『 이슬람 아랍 문화시대』 6장: 과학 발달과 시(詩) 참조
(16) 마르크스, 『 자본론』 1권 제 4편 14장: 분업과 매뉴팩처, 5절: 매뉴팩처의 자본주의적 성격
(17) 엥겔스, 『 안티 뒤링 』,3부 « 사회주의 », « 이론적 개념 »
(18) 레닌, 『 무엇을 할 것인가? 』 2부 « 대중의 자생성과 사회 민주주의 당의 의식성 »
(19) 트로츠키의 저서 『 러시아 혁명 역사 』 또는 존 리드의 «『 세계를 뒤흔든 10일 』 참조
(20) 이 주제에 관해『 인터내셔널 리뷰( International Review)』130호에 실린 ICC 17차 총회 토론 보고서, « ICC 17차 총회: 프롤레타리아 진영의 국제적 강화 » 참조
(21) 로자 룩셈부르크, 『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
『 인터내셔날리스메(Internationalisme)』, 1946 : 러시아적 경험 : 사유재산과 공동재산 및『 빌랑(Bilan)』지 35호 1936년 9-10월호 : 공산주의(VII) : 전화기의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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