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보르디가주의자들과 평의회주의자들의 혼란이 같은 기원을 가졌다고 반복함으로써 간단히 결론내릴 수 있다. 즉, 방어적 투쟁의 혁명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들 두 가지 정치적 흐름들은, 겉으로 보기에 서로 그렇게 달랐지만, 혼란에는 함께 빠져들었다. 왜냐하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사이의 분리에 기반을 둔 어떤 정치적 입장도,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역사적 목적을 의식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혁명 계급임을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보르디가주의와 평의회주의가 향하는 곳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자신의 힘으로는 엄밀히 방어적인 영역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래서 그 차이를 메우는 것이 당이라고 반복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이 영역을 뛰어넘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모더니스트들은 노동자계급이 경제적 요구를 위해 투쟁하면, 그것이 마치 “자본을 위한 계급(class-for-capital)", 다시 말해 자본주의 지배에 완전히 종속된 경제적 범주의 하나인 것 인양 가장함으로써 더 심하게 못 박아 버린다. 의식에 대한 그러한 관점으로 인해 다수 모더니스트들이 쁘띠부르주아지적 절망에 빠져버린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보르디가주의자들과 평의회주의자들은 투쟁을 발전시키는 객관적 조건들로부터 계급의식을 분리시킨다. 그 둘은 모두 혁명가들을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 외부적인 요소로 파악한다. 보르디가주이자들이 보기에 의식은 프롤레타리아트 자체만으로는 발전할 수 없고, 그러므로 의식을 외부에서 가져오는 것이 문제이며, 그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당이다. 평의회주의자들에게 혁명가들의 역할은 철학적인 역할, 단순히 지적인 구경꾼들로서의 역할로 제한되어야만 한다. 이런 관점은 곧 혁명가들이 구체적인 계급투쟁의 바깥에 위치하도록 만든다. 그 둘 중 아무도, 계급의식을 정확하고 변증법적으로 사고하는 것과 그 계급의식이 꽃피는 것은, 혁명가들이 계급의 생동하고 적극적인 일부로서 이해하는 것과 나란히 나아간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