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2차 당 대회에서 혁명가들은 당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혁명을 독립적인 정치적 당 없이 수행할 수 있다는 관점을 단호히 거부한다.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 투쟁이다. 내전이 될 수밖에 없는 이 투쟁의 목적은 정치권력의 획득이다. 정치권력은 오직 정치적 당에 의해서만 획득되고, 조직되며, 지도될 수 있다. 그 어떤 다른 방법도 아니다.”( 『당의 역할에 대한 테제』, 우리의 강조)
이 입장은, 특정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이 시기 혁명가들 대다수의 입장이었다. 이 입장은 어디서 제기되었는가? 그리고 어떻게 발전해갔는가?
당에 대한 이러한 생각의 기원은 제2 인터내셔널이 표방한 일반적인 입장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번영하는 자본주의로 인해 노동자계급이 지속적인 개량을 여전히 획득할 수 있던 시기와, 혁명가들이 혁명의 궁극적인 목표를 멀리 떨어져 있어 닿을 수 없는 미래로 격하시킨 시기와 동시에 일어났다.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는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 시기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고 파악하면서 노동조합의 일을 강조하고 당이 의회의 일에 전념할 필요를 강조했다. 영국 사회민주주의자, 에드워드 데이비드(Edward David)가 다음과 같이 강조했을 때처럼: “혁명주의의 짧은 개화는 매우 다행히도 과거의 일이 되었다.(…) 당은 의회에서 그의 권력을 긍정적으로 활용하고 확장하는데 전념할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해서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의 ‘수정주의’가 탄생하고, 노동자의 (노동조합에 의해 이끌어지는) 경제적 활동과 그들의 (대중 의회 정당에 위임된) 정치적 활동사이의 점점 더 날카로운 분리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은 노동자 투쟁의 최종 목적의 포기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1902년에 벌써, 카우츠키는 ‘점진적인 운동, 민주주의적이며 거의 알아차릴 수 없는 수단을 통해,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를 주창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의 유일한 임무는, 이러한 점진적인 운동을 강제할 목적으로 의회에 참여하는 것뿐이었다. 권력 쟁취는 더 이상 노동자들 스스로가 부르주아 국가를 폭력적으로 전복하는 것, ‘노동자들의 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당들의 일로서, 부르주아 국가를 평화적으로 정복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맑스주의가 이렇게 엄청나게 왜곡됨으로써, 또 다른 왜곡이 초래되었다. 즉, 프롤레타리아 당은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 준비하는 필수적인 분파(a fraction)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당은 통치 기구가 되었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 당에 투표함으로써 자신의 정치 활동과 권력을 그 당에 위임해야만 한다.
사회민주주의는 공공연한 목표로 부르주아 국가의 ‘정복’을 내세웠지만, 노동자계급의 대중 정치 기관에 대한 생각은 존재하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유일한 정치 기구는 당이었다. 만약 국가가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통제 아래에서 프롤레타리아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고 친다면, 제2인터내셔널이 그렇게 믿었듯이, 권력 쟁취는 오직 당에 의해 조직되고, 수행되며, 지도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논리적이었다. 이러한 책무를 위해, 특히 개량을 위한 투쟁을 이끌기 위하여, 당은 대중적이고, 극도로 규율 잡히고 위계적인 조직이어야 했다. 부르주아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유산이 이러한 발상들에 심하게 남아 있었다.
20세기 초, 사회민주주의의 좌파 인자들은 건강하게 제2 인터내셔널의 테제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큰 이점은 새롭게 열리고 있는 시대를 인식하고 그 시기에 비추어 혁명가들의 역할을 명확히 한 점에 있었다. 그들의 첫 번째 행동은 베른슈타인, 카우츠키와 그 친구들에 의해 만들어진 경제 투쟁과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궁극적인 목적 사이의 분리에 집중되었다.
레닌은 나로드니크스 (Narodniks, 농민 꼬뮌에 기초한 혁명을 지지했던 러시아 인민주의자)에 반대하는 그의 첫 번째 저작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제 투쟁의 최종 목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러시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들의 활동과 관심을 산업 노동 계급에 집중시키고 있다. 이 계급의 선진 인자들이 과학적 사회주의 (scientific socialism) 의 생각들을 흡수하고, 러시아 노동자들의 역사적 역할을 이해했을 때, 그들의 생각들이 널리 퍼지고, 현재의 지리멸렬한 경제적 전투를 의식적인 계급투쟁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안정된 조직을 만들어 내었을 때, - 러시아 노동자들은 모든 민주주의 인자들의 선두에 나서서, 절대주의를 전복시키고,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를(모든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공산주의 혁명의 승리를 위한 공개적인 정치적 투쟁으로 이끌 것이다.”(레닌, 저작집, 1권)
그 후 레닌은, 사회민주주의 당의 일부로서 러시아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객관적인 조건들을 보지 못했던 '멘셰비키에 반대하여’ 맹렬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또한 대중 정당이라는 사회민주주의적 개념을 버렸다. 레닌에게, 투쟁의 새로운 조건들은, 경제적 투쟁을 정치적 투쟁으로 변환시킬 소수 전위 정당이 필요함을 의미했다.
로자 룩셈부르크 또한 그녀의 저작 『사회개량이냐 혁명이냐』(Sozialreform oder Revolution)(1898년)에서, 제2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적이고 반혁명적 일탈에 대해 반대했다.
그녀는 특히 “사회민주주의에게는, 현존하는 체제 내에서의 투쟁만이, 즉 개량을 위해, 노동자들 상태의 개선을 위해, 민주주의적 수단을 위해 일상적으로 투쟁하는 것만이,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개입하고 그 최종 목표, 즉 정치권력의 정복과 임금 체제의 철폐로 향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로자 룩셈부르크,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 우리의 강조.)라고 상기시켰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또한 경제적 투쟁과 정치적 투쟁의 통일을 주장했고, 방어적인 투쟁들은 오직 권력 쟁취를 위한 최종적 정치 투쟁을 준비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주장했다.
전 세계적으로, 사회민주주의의 좌파는 새로운 시대에 의해 의제(agenda)로 부과된 공산주의 혁명의 필요성을 단언했다. 이러한 좌익 반대파는, 1차 세계대전 초기에 제2인터내셔널과 노동조합들을 결정적으로 압도해버린 애국주의와 민족주의에 반대하여 그 보루로써 1915년 찜머발트에서, 그리고 그 이후 1916년 케인탈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러한 보루는 여전히 약하며 미성숙했다. 시기는 극적으로 변화했다. 사회민주주의의가 죽음을 고함으로써 혁명가들은 자신들이 이전에 가졌던 ‘개량주의적’이고 조합주의적인 생각들을 거부해야만 했다. 투쟁의 새로운 필요에 적응하기 위해서, 공산주의 강령을 발전시키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이 모든 것들에는 희생이 필수적이었다. 과거 사상들에 대한 쓰디쓴 투쟁에도 불구하고, 혁명가들은 여전히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사회민주주의의 무게를 느꼈다. 레닌, 룩셈부르크, 판네쿡 등과 같은 혁명가들의 정치적이고 전투적인 저작들이 제2 인터내셔널의 이론적 짐을 다 청산하지는 못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혁명가의 대부분이 처음 무기를 들었던 것은 자본주의가 여전히 진보적이고, 카우츠키의 테제들이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질 때였다. ‘낡은 껍질을 벗어던지기’는 전혀 쉽지 않고, 구시대의 생각들의 찌꺼기는 여전히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었다.
그런 생각의 보기를 들자면, 몇몇 혁명가들이 여전히 주장하는 것인데,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을 앞당기는 데에 민주적 기구들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20세기 초, 대부분의 공산주의자들은 1871년의 빠리꼬뮌을 노동자계급에 의한 민주 공화국의 통제의 모델로서 보았고, 민주주의적인 기관을 노동자 권력의 도구로서 사용하는 모델로 보았다.
“국제 사회주의는 공화국을 사회주의 해방의 유일한 가능한 형태로 본다 - 이런 조건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의 손에서 이것을 빼앗아 ‘ 한 계급에 의한 다른 한 계급의 억압을 위한 도구’로부터 인류의 해방을 위한 사회주의의 무기로 변화시킨다.” (레온 트로츠키. 그 후 35년: 1871-1906)
사실, 네덜란드 좌파만이 『자본의 축적(Accumulation of Capital)』에서 룩셈부르크의 분석에 기초하여, 자본주의의 쇠퇴시기에는 부르주아 혁명들은 파산했고 민족 해방 투쟁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옹호했다.
레닌은 “부르주아지에 반대하는 계급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는 모든 민주주의적 기구들과 열망들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레닌,『전집 23권,』1915년-1916년)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Two Tactics of Social Democracy, 1905)에서 그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제(autocracy)의 힘을 제거하기 위해 농민 대중들과 결연함으로써 민주주의 혁명을 성공적인 결말로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을 옹호했다. 볼셰비키들에게 어떤 민주주의적 국가의 창설도 진보적이었다. 반면 판네쿡과 네덜란드 좌파에게는 인류를 제국주의적 학살 속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체제가 그 역사적 파탄을 드러낸 시대에는, 오직 국제적 프롤레타리아 혁명만이 실행 가능한 전망이었다.
더 심한 혼란 하나, 사회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유산 하나가 여전히 혁명적 운동에 부담을 주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화에 대한 도식적인 사고, 즉 당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관계에 대한 왜곡된 관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혼란은 특히 1902년 레닌의 저작, 『무엇을 할 것인가』 속의 테제에서 특히 분명하게 나타난다. 레닌은 계급투쟁의 퇴조기에 만들어진 이 저작을 러시아에서 그 시기에 유행했던 사상 학파인 경제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이용했다.
이 조류는 베른슈타인 이론의 작은 소산으로서, 계급투쟁이 엄격하게 경제적 영역에 남아있을 필요를 극찬했다. 이러한 발상은 맑스주의를 역사적 숙명론(fatalism)의 이데올로기로 변형시켜버리고, 노동자들의 수동적인 자생성(spontaneity)을 숭배하며 당의 비활동성을 불가피하게 만들어 버렸다. 레닌은 이와 대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경제적 투쟁을 넘어서 정치적 투쟁으로 나아갈 필요성을 매우 강력히 역설했고, 혁명적 이론과 활동의 힘을 옹호했다. 경제투쟁의 궁극적인 목표를 추진한다는 옳은 관심에서 시작하여, 레닌은 그 반대쪽으로 ‘막대를 너무 구부려버렸다’. 비록 그가 투쟁의 경제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 사이에 경제주의자들이 도입한 잘못된 분리에 대항해서 이러한 투쟁들의 정치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대답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을지라도, 레닌은 경제적 투쟁을 과소평가하고 말았다. 방어적인 투쟁은 더 이상 계급의식 발전의 비옥한 토양으로 보이지 않았고, 운동의 정치적 차원은 ‘생산관계들의 영역의 외부에서’ 발전했다. 경제와 정치는 물론 만나긴 하지만, 무한에서야 비로소 만나는 두개의 평행선들과 같다. 더욱이 당은 이 융합을 조직하고 노동자들에게 의식을 가져다줄 수 있는 유일한 실체가 된다.
레닌의 논의가 실상 사회민주주의의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책 속에 카우츠키의 저작들로부터 문구들을 그대로 취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요점은 1901년 『새로운 시대』(Neue Zeit)에 실린 카우츠키의 글에서 인용된, 이제 유명해진 문구들에 포함되어 있다.
“물론 사회주의는, 일종의 교의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이 그러하듯이, 근대 경제 관계에 그 뿌리를 갖고 있고, 그리고 그 계급투쟁과 마찬가지로, 대중의 가난과 비참함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부터 출현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계급투쟁은 나란히 생겨나는 것이지,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아니며, 각각 다른 조건들 아래 나타난다. 근대 사회주의 의식은 오직 심오한 과학적 지식(scientific knowledge)을 기초로 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사실 근대 경제학(economic science)은, 말하자면 근대 기술만큼이나 사회주의 생산에 있어서 한 조건이며, 프롤레타리아는 아무리 바란다고 해도 그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창조할 수 없다. 둘 다 근대 사회 과정에서 일어난다. 학문(science)의 견인차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부르주아 인텔리겐챠 (bourgeois intelligentsia)이다. 근대 사회주의가 발생한 것은 이 계층의 개별 성원들의 정신 속에서 였고, 또한 이것을 지적으로 가장 발전한 프롤레타리아들에게 전달해서 그들로 하여금 조건이 허락하는 곳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 속으로 도입할 수 있게 만든 것도 이 계층의 개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의식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외부로부터 도입되는 것이지, 그 속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계급의식이 경제투쟁에서부터 기계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레닌의 오류는 계급의식이 경제 투쟁을 바탕으로 발전할 수 없고 당에 의해 외부로부터 도입되어야 한다고 믿은 것에 있었다. 당과 노동자들의 투쟁 사이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관점은 결국 다음과 같은 말이 레닌의 펜으로부터 나오게 되는 신비주의의 한 형태를 초래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의 역할이, 자생적인 운동 너머로 비상할 뿐만 아니라 그 운동을 일으켜 세워 자신의 강령으로 만드는 ‘정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가?”(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기술적 학문적 지식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쟁취에 관한 사회민주주의의 관점과 매우 멋지게 융합된 지적 전문가들 특유의 재산이라는 점에 대해 이보다 더 나은 변명이 있는가? 당이 부르주아 국가를 장악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위해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권력 장악에는 권력의 고삐를 쥘 관리자적 능력을 가진 유능하고 지적인 기술자들이 존재할 필요가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녀의 저작 『사회개량이냐 혁명이냐』에서 이미 계급의식과 투쟁 사이의 분리,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경제적 측면들과 정치적 측면들 사이의 분리가 초래한 다른 궤도 이탈을 다루었다. 카우츠키와 레닌은 사회주의 의식을 생산관계의 외부에 위치시키면서 공산주의 혁명과 그 발전을 추상적이고 종교적인 이상으로 축소시켰다. 그러한 견지에서, 사회주의 강령과 혁명의 필요는 더 이상 경제 현실의 결과물이 아니며, 계급투쟁의 객관적인 조건들의 산물이 아니다. 더 이상 자본주의의 명백한 내적 모순들이나 그 붕괴의 긴박함을 반영하지 못하고, 자체의 속성인 완벽성에만 설득력의 근거를 두는 그러한 일종의 ‘이상(ideal)’으로 축소시켜 버린다 . 룩셈부르크는 그녀의 비판을 계속한다 :
“우리는 여기서, 간단히 말해서, ‘순수 이성’으로써 사회주의의 강령을 설명하는 것을 본다. 우리는 여기서, 좀 더 간단한 언어를 사용하자면, 사회주의에 대한 관념주의적 설명을 본다. 사회주의의 객관적 필요성을 설명하는 것은, 사회의 물질적 발전의 결과로서 사회주의를 설명하는 것은 실패로 돌아간다.”(룩셈부르크, 『사회개량이냐 혁명이냐』, 1898년)
1904년 그녀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좀 더 직접적인 답변으로 혁명가들의 개입이 처한 세계적 틀을 개관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완전한 해방을 위한 국제적인 운동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특수한 과정이다: 문명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은 그들의 의지를 모든 지배 계급들에 반대하여 그리고 의식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의지는 오직 현존하는 체제의 틀을 넘어서야만 만족될 수 있다. 대중들은 이 의지를 현존하는 사회적 질서에 저항하는 일상적인 투쟁의 과정 속에서, 즉 자본주의 사회의 한계 내에서 획득하고 강화할 수 있을 뿐이다. 한 편으로, 우리에게는 대중들이 있고, 다른 한 편으로, 그 역사적 목표는 기존 사회 바깥에 위치한다. 한 편으로 우리는 일상적인 투쟁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사회 혁명을 한다. 이런 것들은 사회주의 운동이 자신의 길을 만들며 나갈 때 통과해 나가게 되는 변증법적 모순의 측면들이다. 따라서 이 운동은 자신을 지속적으로 위협하는 두 가지 위험들 사이의 중간 위치에서 지그재그로 항해함으로써 가장 잘 나아갈 수 있다. 그 위험의 하나는 그 대중적 성격을 상실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목적을 포기하는 것이다. 하나는 종파의 상태로 되돌아 침몰할 위험이며, 다른 하나는 부르주아적인 사회 개량 운동이 되어버릴 위험이다.”
(룩셈부르크, ‘사회민주주의의 조직적 문제(Organisational Question of Social Democracy)’, 1904년 『새시대』(Die Neue Zeit)에서, 우리의 강조)
트로츠키 역시 레닌에 반대하는 논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상 투쟁과 계급의식의 관계에 대한 그 정확하고 변증법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그는 ‘정치적 대리주의를 타도하자(Down with Political Substitutionism)’이란 제목의 구절에서 1904년 다음과 같이 썼다.
“정치적 대리주의의 체계는, ‘경제주의자들’이 추진하는 단순한 체계와 마찬가지로, 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 프롤레타리아트의 객관적인 이해관계들과 그 의식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기인한다. 이에 대해 맑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관계들은 존재의 객관적인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이해관계들은 매우 강력하고 불가피해서, 결국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들의 객관적 이해관계들의 실현을 자신들의 주관적인 이해관계로 만들 수밖에 없다. 이러한 두 요소 - 그 계급 이해관계의 객관적인 사실들과 주관적인 의식 – 사이에, 모든 삶의 부분을 이루는 영역 - 갈등과 대립, 오류와 실망, 변화와 패배의 영역 - 이 놓여있다.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전술적 통찰력은 전적으로 이러한 요소들 사이에 놓여 있고,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의 길을 단축시키고 촉진하는 데 있다.”(트로츠키, 『우리의 정치적 책무(Our Political Tasks)』, 1904년, 우리의 강조)
혁명에 대한 이러한 생생하고 변증법적인 관점 – 여기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운명을 그 자신의 손에 거머쥔다 - 은 혁명적 과정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순수하게 기술적이고 조직적인 준비로 제한했던 경직된 생각에 대한 트로츠키의 응답이다.
그러나 레닌의 대리주의적인 『무엇을 할 것인가』의 관점과, 로자와 트로츠키의 전적으로 명확하고 건강한 관점을 단순히 대조한다면 이는 일종의 희화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1920년대에 와서 트로츠키는 노동의 군사화와 당의 강력한 독재를 옹호했다는 점이다.
첫째로, 레닌은 그 스스로 『무엇을 할 것인가』의 요지를 어느 정도는 ‘정정했다’. 1905년 계급의 구체적인 경험과 평의회의 등장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전투적인 활동에 의해 풍부해진 그의 후기 저작에서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테제들을 기계적으로 따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서, 볼셰비키 당은 계급의 방어적인 투쟁에 개입함으로써 그 스스로가 외부 요인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능동적이고 필수적인 분파임을 주장했다. 혁명 운동의 전체 경향은 당과 계급의 관계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전적으로 명확한 것은 아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독일 혁명가들도 러시아 혁명가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을 사회민주주의에 묶고 있는 탯줄을 완벽하게 절단하지는 못했다. 룩셈부르크가 카우츠키의 교의로부터 결별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1910년 룩셈부르크는 카우츠키를 기회주의의 수문을 열었다고 비판한 이후, 어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로부터도 지원을 받지 못했고, 그녀의 규탄을 ‘과장되었다고’ 생각한 레닌으로부터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당의 가장 기회주의인 멘셰비키로부터 조직적인 분리를 가장 명확하게, 가장 빨리 촉구한 것은 로자가 아니라 레닌이었다. 룩셈부르크와 카우츠키는 오히려 이러한 ‘분리’ 정책을 비난하고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재통합을 호소한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1919년 독일 공산당(KPD)을 창건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룩셈부르크는 여전히 주저했다. 그녀는 사회민주주의당(SPD)을 떠날 것인지 망설였고, 처음으로 소수가 될 위험이 있는 분리 조직을 건설하는 데 주저했으며, 새로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건설하는 레닌의 집요한 욕망 앞에서 뒤로 물러섰다. 룩셈부르크가 독일의 SPD에 집착했던 것은 사회민주주의의 객관적인 부패를 인식할 수 있는 정치적 지각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1916년 출간된 『사회민주주의의 위기(Die Krise der Sozialdemokratie)』에서, 제2 인터내셔널이 취한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태도와, 사회민주주의가 민족 부르주아지들을 지원한 점을 맹렬히 비판했다. 아니, 룩셈부르크를 구속하고 망설이게 했던 것은 대중의 혁명적 행동에 대한 그녀의 전반적인 생각과 그것이 당의 역할에 대해 갖는 귀결들이었다.
사회민주주의라는 학교를 통과해 온 이 혁명가는, 혁명 운동의 대중적 성격에 무조건적 애착을 발전시켜서, 그녀에게 당은 대중적 성격을 가진 어떤 것에도 적응시켜야 했다. 사회민주주의의 대중 정당에 대한 관점에 애착을 가졌기 때문에, 룩셈부르크는 운동에 앞서가는 것을 꺼려했다. 그녀는 노동자 ‘대중’들이 여전히 신뢰하고 있는 조직을 떠나기를 망설였다. 1914년 SPD와 제2 인터내셔널의 명백하고 결정적인 사망 이후에도, 룩셈부르크는 기회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대중 운동이라는 것을, 그리고 혁명가들은 이 운동을 가속화할 수 없다는 것을 계속 되풀이했다.
그녀에게는, "진정으로 혁명적인 노동자 운동에 의해 저질러진 오류는 가장 훌륭한 중앙 위원회의 무오류성보다 역사적으로 훨씬 훌륭하고 소중한 성과였다" (『사회민주주의의 조직의 문제』). 그래서 혁명가들은 옛 사회민주주의적 조직들을 넘어서는데 주도권을 발휘할 수 없었다.
노동자 운동의 집단적 성격을 강조할 때 룩셈부르크의 일반적 관심은 정확했다. 그러나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자들 자신들의 문제다”라는 주장은 정확하지 못한 실천적 결론들을 초래했다. 그리고 단순한 관심이 쉽게 이상주의로, 물신주의로 떨어질 수 있다. 대중적 성격을 띠는 모든 것에 대한 물신주의는 혁명가들을 제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로 떨어질 수 있는 위험한 경사로로 이끈다. 이러 저러한 조직이나 정치적 도구의 대중적 성격에 대한 애착은 (‘노동자 대중은 계속해서 투표하기 때문에’) 단순히 의회 정치를 지원하도록 오도될 수 있다. 룩셈부르크 사후 KPD의 뛰어난 대표자였던 폴 레비(Paul Levi)는 그 길을 뒤따랐다. 전적으로 대중들의 운동에 종속된 그의 ‘대중 당’이라는 개념으로 인해 그는 점차 사회민주주의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KPD와 SPD 좌파의 융합을 추진했고, 1922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서 축출된 후에는 USPD에 가입했으며, 결국 SPD에 다시 가입했다.
룩셈부르크는 혁명 활동의 집단적인 성격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동질화는 한꺼번에 이뤄지지 않는다. 당은 노동자계급의 광대한 다수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있을 때, 효과적으로 소수로 남아있을 수 있는 조직이다. 그 때의 당의 책무는, 대중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스스로 적응해가는 게 아니라 정치적 수준에서, 또한 조직적 수준에서 공산주의 강령 전체를 방어해 내는 것이다. 오직 이런 방법으로, 당은 계급의식의 동질화 과정에서 효과적으로 그 역할을 해낼 수 있다.
독일 혁명가들은, 그 시기의 대부분의 혁명가들처럼,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에 대해 전적으로 명확하지만은 않았다. 대체로,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 평의회를 권력 장악을 위한 기관으로 보았다. 1920년까지 모든 경우에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은 혁명에서, 권력의 실천에서 평의회의 탁월한 역할을 강조했다. 그러나 어떤 공산주의자도, 어떤 혁명적 조직도 지역 소비에트(이행기 국가의 토대)와 노동자 평의회 사이의 관계에 대해 명확하게 바라보지 못했다. 국가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사이의 혼란 또한 존재했다.
더욱이, 룩셈부르크가 1918년 KPD(스파르타쿠스 연맹, Spartacist League)의 창립대회에서 한 연설은 여전히 굉장히 애매모호한 여지를 남겨두고 있었다. 그 텍스트는 특히 부르주아 국가를 프롤레타리아트가 파괴하는 문제에 대한 정치적인 명료성이 부족하다.
“그래서 우리에게 권력의 정복이 한 번의 타격으로 결과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점진적인 행동일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장악한 것은 끝까지 방어하면서 점진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의 모든 지위들을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평의회가 국가의 모든 권력을 가져야 한다(…) 한 단계 한 단계씩, 손에 손을 잡고, 모든 지역에서, 모든 마을에서, 모든 도시에서, 모든 공동체에서, 국가의 모든 권력은 조금씩 조금씩 부르주아지에서 노동자 병사 평의회로 옮겨가야만 한다.”
이 텍스트가 제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1.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 국가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그 국가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 (이 입장은 혁명적 의회주의의 흔적이 나타날 수 있도록 만들었다)
2.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 국가를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해야 한다는 것
3. 노동자들의 독재는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통해 표현된다는 것
부르주아 혁명의 도식과 유사한, 혁명에 대한 이러한 발상으로 인해, 프롤레타리아 당이 권력을 장악할 필요가 있다고 혁명가들이 생각한 것은 납득할 만하다. 스파르타쿠스 단원들이 옹호한 입장이 레닌의 입장과 많이 다르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권력 쟁취에 있어서 당의 ‘대중적’ 성격을 굉장히 강조했다.
“스파르타쿠스 연맹은 단지 샤이데만-에버트의 인자들이 전적으로 그들 스스로를 불신했기 때문에 정부 권력을 차지하는 것을 거부한다(…) 스파르타쿠스 연맹은 오직 독일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절대 다수가 그 의지를 의심할 바 없이 명확히 선언함으로써만 정부 권력을 차지할 것이다.” (1918년 설립 당시 KPD(스파르타쿠스단 단원들)이 채택한 강령 제안, 붉은 깃발 (Die Rote Fahne)에서 출판, 1918년 12월)
‘대리주의의 기원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 사회민주주의적 사고의 무게라고. 그러나 ‘무엇이 대리주의 개념의 발전을 유발시켰나’는 질문에 대해서는, 우리는 대답해야만 한다: 국제 노동계급의 일반적인 정치적 미성숙함이라고.
“자본주의의 상승기의 끝을 알린 제1차 제국주의 전쟁이 19세기 노동자 운동과 그 당면 목표들에 있어서 돌이킬 수 없는 절대적인 점을 찍었다. 전쟁에 대한 인민의 혐오는 빠르게 정치화되어 유럽의 주요 국가에서 국가들에 대한 전면적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의 다수는 과거의 유물(이제는 계급 적의 산실이 되어버린 제2인터내셔널의 정책들에 집착하는 것)을 완전히 폐기시킬 수 없었고, 새로운 시대의 함의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었다. 전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도, 그들의 정치 조직도 ‘전쟁과 혁명’,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새로운 시대에 프롤레타리아 투쟁에게 요구되는 것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이 시기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영웅적 투쟁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물결은 유럽에서 노동자계급의 학살 속에 익사했다. 러시아 혁명 시기에 노동자 계급 전체의 지침이었다는 사실이 그 고립이 심각한 위험이었다는 사실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혁명적 봉기들 사이의 일시적 간극조차도 그러한 위험을 내포할 수 있었지만, 1920년경 그 격차는 점점 더 벌어져서 다시 이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J.A. ‘러시아 혁명의 변질 (The Degeneration of the Russian Revolution)’, 『인터내셔널 리뷰(International Review)』, 3권, 1975년)
그러나 계급, 당, 그리고 국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혼란은, 계급이 충분히 강하고 혁명적 운동이 격동기에 있는 한, 구체적인 투쟁의 경험으로 극복될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 노동자들의 실천은, 노동자 당은 비록 자체가 그 계급에 속한 소수라 할지라도 노동자계급 전체의 활동을 대체하는 것은 물질적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누가 권력을 차지했는가 하는 질문은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의 역사와 실천으로 대답할 수 있다. 봉기의 전날 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소비에트들의 회의 (a Congress of Soviets)의 소집을 요구해서 그 회의에서 무장 봉기의 준비를 촉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고, 지역에서 충분한 지원을 받고 있다고 느꼈다. 소비에트는 그 회의의 역할이 “혁명 권력을 조직하는 문제에 대해 해답을 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소비에트와 공장 위원회에서 볼셰비키 당이 불굴의 선전을 펼친 이후, 노동자들 다수는 결국 그들 스스로 권력 쟁취를 선언했다. 군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페트로그라드에서 봉기를 준비한 것은 바로 <혁명 위원회>였다. 이 위원회는 소비에트, 해군, 공장 위원회, 철도와 적위대(Red Guard, 무장된 노동자들)에서 파견된 대표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비록 볼셰비키가 그 속에서 지배적이었다 할지라도 당의 기관은 아니었다. <혁명 위원회>는 전체 노동자계급과 지속적인 접촉을 유지하는 상태였고, 끊임없이 계급의 통제 하에서 행동했다. 그것은 소비에트와 공장 위원회에 직접적으로 연결된 기관이었다. 병영, 공장들, 위원회와 당 사이의 접촉은 한 순간도 끊기지 않았다. 생생하고 지속적인 연결이 계급의 집단의지를 굳히면서 모든 기관들 사이에 존재했다. 비록 일상적인 군사행동들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이뤄졌을 지라도 노동자들 전체가 결정했고, 그들의 손에 역사의 고삐를 쥐고 있었다. 이랬기 때문에, 트로츠키가 작은 그룹의 ‘음모론자들’, 즉 <혁명 위원회>로써 권력을 차지하려했다고 기소되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포크로브스키(Pokrovsky)교수는 소비에트냐 당이냐는 양자택일의 바로 그 중요성을 부인한다. 군인들은 형식주의자가 아니라며, 그는 웃는다. 그들은 케렌스키(Kerensky)를 전복시키기 위해 「소비에트 회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그 모든 농담과 더불어 그런 식의 표현은, 왜 당으로 충분하다면 소비에트 따위를 만드는가?라는 설명되지 않은 문제를 남긴다. 그 교수는 계속해서, ‘합법적으로, 즉 소비에트의 합법성으로써 모든 것을 행하려는 이러한 열망으로부터는 아무것도 결과되지 않았고, 권력이 결국 마지막 순간에 소비에트에 의해서가 아니라 명백히 비합법적인 특별 조직에 의해 쟁취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라고 말한다. 포크로브스키는 여기서 트로츠키가 소비에트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군사 혁명 위원회’의 이름으로, 케렌스키의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인용한다.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결론이다. 군사 혁명 위원회는 소비에트의 선출된 기관이었다. 전복에서 위원회의 지도적 역할을, 이 교수는 조롱하지만, 대중들은 극히 열광하는 그 소비에트 합법성을 결코 위반하지 않았다.”(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3권, 우리의 강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0월 혁명이 엄격한 부르주아 합법성 아래에서, 형식적 민주주의의 보호 아래서, 어떤 비밀 결사적 행동도 없이 일어났음을 암시하는가? 물론 아니다! 트로츠키가 말한 ‘소비에트 합법성(Soviet Legality)’은 단지 노동자들의 집단 의지의 필요성, 즉 혁명 과정 전체를 노동자들이 통제할 필요성 바로 그것이었다. 러시아에서 권력 쟁취는 어떻게 노동자들 전체가 혁명을 결정하고 통제할 수 있는지를 놀라운 방법을 보여주었다. 『러시아 혁명사』에서 트로츠키는 이 통제가 어떻게 구체화되었는지, 노동자들이 소비에트를 통해 봉기를 어떻게 준비했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어떤 당도 실천적이고 결정적인 노동자들의 행동을 대체할 수 없다. 볼셰비키는 그들의 계급 안에서 단호하게 행동했지만, 그들은 노동자들을 대신해서 권력을 차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 노동자계급, 그리고 국가 사이의 관계의 본질과 당의 역할에 대한 이론적 혼란이 존재했다. 그리고 당은 단순히 의식의 수동적인 반영이 아니기 때문에, 1902년부터 맹아적으로 존재하던 이러한 오해들은 혁명의 퇴행을 확장시키고 가속화시켰다. 1918년부터 계속,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권력은, 그 정상에 볼셰비키 당이 앉아있는 국가기구들에 의해 제한되고 억압되어 왔다. 권력 장악후, 볼셰비키 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단위 기관들과 갈등하게 되고, 그 스스로를 통치의 당의 면모를 드러냈다. 이렇게 당의 권력이 평의회 권력을 대체하는 것은, 20년대 초의 트로츠키의 저작 『테러리즘과 공산주의(the Terrorism and Communism)』 - 크론슈타트 학살과 같은 행동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내용을 이미 포함하고 있던 비극적 저작 – 에서 (노동의 군사화와 함께) 이론적으로 정당화되었다.
“우리는 소비에트 독재를 당 독재로 대체했다고 여러 번 비난받았다. 그러나 소비에트 독재는 오직 당 독재를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었다고 완전히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당의 이론적 비젼의 명확함과 그 강력한 혁명조직 바로 그 덕분에, 당은 소비에트가 볼품없는 노동자들의 의회(parliaments of labour)로부터 노동자들이 우위를 갖는 기관으로 변화될 가능성을 제공했다. 노동자계급의 권력을 당의 권력이 이렇게 ‘대체’하는 것에, 우연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사실상, 대체란 전혀 없다.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의 근본적인 이해관계를 표현한다. 역사가 그러한 이해관계들을 전적으로 당대의 질서가 되도록 만든 시기에,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자계급 전체의 대표성을 자각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트로츠키, 『테러리즘 또는 공산주의』)
일단 당과 국가가 노동자계급 전체의 공언된 ‘대표자’가 되고나자, 그들은 절대 틀릴 수가 없었으며, 비록 전체 노동자계급에 대항하게 될 지라도, 학살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항상 옳았다. 그 순간부터, 사회주의 자체는 당과 국가의 일이 되어버린다. 그 순간부터 러시아 국가는 평의회를 파괴하기 시작했고, 이는 혁명의 힘을 파괴하고 반혁명으로 빠져드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심각한 혼란들과 나란히,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공동전선(United Front)의 개념, 대중 정당을 통해 최소 강령을 보호한다는 생각, 노동조합 작업의 필요성, 혁명적 의회주의 입장 등을 발전시켜갔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혁명적 물결의 퇴조에 저항하며 공산주의 원칙들을 그대로 지키려 노력하기 보다는, 오히려 더욱 더 이러한 후퇴에 전념하고 이러한 실천들에 적응해나고 있었다. ‘전술’과 원칙들 사이의 차이는 제2인터내셔널의 안에서 그랬던 만큼이나 발전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이해를 항상 염두에 두기보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더더욱 러시아 국가의 대변자가 되었고, 일국 사회주의 이론(the theory of Socialism in One Country)을 선택했을 때, 그 조종을 울렸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의해 옹호된 이러한 테제들은 단지 러시아의 국가자본주의의 강화를 옹호하기 위해서 제출되었을 뿐이었다. 바로 그 지점부터 볼셰비키 당은 반혁명의 가장 유순한 도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