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첫 번째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압력이 항상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미래 사회를 객관적으로 묘사하기가 매우 어렵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목적은 자본주의가 영원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압력은 공산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정의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단절시키고 훼손한다.
많은 노동자들에게 공산주의는 그래서 러시아, 중국, 쿠바 등 소위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볼 수 있었던 국가 자본주의와 군사화된 노동의 ‘천국’이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공산주의의 본질 자체로 인해서 공산주의를 자세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실, “공산주의란 우리에게 있어서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가 아니며, 혹은 현실이 따라가야 할 하나의 이상도 아니다. 우리는 공산주의를 현재의 상태를 폐기해 나가는 현실의 운동이라 부른다.”(맑스,『독일 이데올로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것은 공산주의 사회가 소수의 ‘계몽된’ 사람들의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추상적인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완성’의 추상적인 이상일 수 없다.
헤겔(19세기 초, 독일의 철학자로 맑스는 그에게서 변증법을 도출했다)의 개념과는 대조적으로, 역사는 관념(인간의 관념, 공산주의의 관념)의 진보적 실현이 아니다. 공산주의는 인류의 목표로서 기능하는 정신적인 창조물이나 환상이 아니다. 공산주의 사회는 실재적이고 인간적이며,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신기원이다. 이것은 구 사회에 내재된 모순으로부터 그리고 그 사회 발전의 필수적인(necessary) 귀결의 하나로서 출현한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필연적인(inevitable) 것은 아니다. 비록 공산주의 사회가 자본주의에 내재된 경제적, 사회적 모순의 결과이자 실재적이고 객관적인 조건들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실천적이고 집단적이며, 의식적인 창조물이다. 역사상 최초로 하나의 사회 계급이 그들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조직화되고 의식적인 방법으로만 가능하다. 이것이 왜 공산주의가 지적인 ‘계획’도 아니며,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필연성(inevitability)도 아닌 이유다. 공산주의는 인류 공동체가 이전 사회관계들의 폭력적 파괴에 뒤이어 구세계를 의식적이고 점진적으로 변혁시킨 그 결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공산주의를 향한 이 현실의 운동을 지배하는 주체적이고 객관적인 조건들은, 오늘날 존재하는 조건들의 산물이다. 일단 공산주의가 역사적인 측면에서 하나의 가능성이 되고나면, 이러한 가능성의 실현은 주체적 발전, 즉 현 시대의 의식의 발전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혁명 그 자체도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의식적인 정치 행동의 형식을 취해야 하고, 그 성공 여부가 프롤레타리아트가 획득한 의식과 조직화의 수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기초 위에서 인류 공동체는 단지 객관적인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이 될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공산주의 사회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공산주의 혁명의 주요 국면과 이 혁명이 지향해야 하는 최종 목표를 정의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공산주의 혁명은 오직 스스로를 의식하고 있는 운동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의해 확립되는 새로운 사회관계의 특징들 자체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과 조직양식이 발전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우리는 뒤 이은 장에서 이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로 되돌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