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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라는 베일을 벗어던지는 남한 지배계급

민주주의라는 베일을 벗어던지는 남한 지배계급

우리가 한국으로부터 받은 소식에 따르면 사회주의노동자 연합 (사노련)“ 투쟁가8명이 남한의 악명높은 국가보안법 따라 체포 ,구형되었다고 한다. 판결은 1 27일에 이뤄질 예정이다.

이것이 정치재판이자, 지배계급이 정의라고 부르기 좋아하는 그것에 대한 희화화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점을 다음과 같은 3가지 사실들이 증언다

첫째, 남한 법정 자체가, 체포된 이들에 대한 경찰의 구속신청을 2차례에 걸쳐 기각했었다는 사실.

둘째, 투쟁가들이 이적 (,북한)단체구성혐의를 받았다는 사실. 그런데, 그들 오세철과 남궁원은 2006, „전쟁위협에 대항한 한국으로부터의 국제주의자선언 서명한 사람들에 속한다. 선언은 북한의 핵실험을 비난하고 특히, „북한 자본주의국가(…) 노동자 계급이나 공산주의와 전혀 무관하며, 군사주의적 야만주의를 향하는 쇠퇴 자본주의의 일반적 경향의 가장 극단적이고 기괴한 형태의 하나에 불과하다라고 언명했다.

셋째, 오세철의 진술은 그가 북한국가자본주의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에 반대함을 분명히 한다는 사실

투쟁가들은 오직 사회주의자라는 사상범죄 때문에 피소된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그들 자신, 가족들 그리고 생존조건을 방어하라 선동했다고, 자본주의의 진정한 본질을 명백히 공공연하게 폭로했다는 이유로 피소되어 법정에 서있다. 검찰이 요구한 판결은 남한 지배계급이 그에 대항하는 자들에 대응해 시행한 억압 사례들 한가지를 더하는데 불과하다. 이러한 잔혹한 억압은 2008 촛불시위에 아이들을 데려와서 이후 법적 그리고 경찰의 괴롭힘을 당했던 유모차부대 젊은 엄마들을 이미 겨냥해 행해졌었다. 점거된 작업장에 침입한 진압경찰에 의해 구타당한 쌍용자동차노동자들을 겨냥하기도 했다.

무거운 징역형의 판결이 예상되는 가운데, 체포된 투쟁가들은 법정에서 모범적으로 위엄있게 행동했고 기회를 재판의 정치적 본질을 분명히 폭로하는 활용했다. 우리는 아래에 오세철의 법정최후진술을 싣는다

최후진술

 

2010. 12.

 

오세철

자본주의 역사에서 위기에 대한 입장들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하나는 파국론입니다. 자본주의 모순이 극에 달해 어느 순간 나락으로 떨어져 새로운 천년왕국이 것이라는 묵시론이나 극단적인 무정부주의가 자본주의 억압과 착취 밑에서 신음하는 무산자들을 미몽에 빠뜨렸고, 그러한 비과학적 태도에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부르주아지가 항상 내뱉는 낙관론입니다. 자본주의 체제는 스스로 모순을 극복할 있는 장치를 내장하고 있고 투기를 근절시키면 실제 경제는 운영되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의 가지 입장보다 더욱 세련되고 지배적 입장은 자본주의의 위기를 순환적 위기로 규정하고 조용히 참고 기다리면 비바람이 그치고 순탄한 항해를 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19세기 자본주의에서 일어났던 광경이며 20세기와 21세기 자본주의 위기에 이상 적용될 없는 논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는 상승기에 있고 무한히 확장되는 19세기 자본주의의 위기였고 맑스도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위기를 과잉 생산의 전염병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과잉 생산의 경향은 기아, 가난, 실업을 가져왔지만 그것은 상품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너무 많은 상품, 너무 많은 산업, 너무 많은 자원 때문이었습니다. 하나의 자본주의 위기의 원인은 경쟁을 통해 무정부로 체제를 끌고 가는 자본주의의 기능인데, 새로운 임노동과 상품을 찾아 새로운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생산관계를 확장하고 심화시킬 있었습니다. 따라서 19세기는 위기의 순간을 건강한 심장이 뛰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20세기에는 1 세계대전을 정점으로 이러한 상승기의 자본주의가 마감을 하고 지구가 임노동과 상품의 생산관계로 확장되었습니다. 시기의 자본주의를 1919 코민테른은 전쟁인가 혁명인가 시기로 규정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세계시장의 쟁탈과 통제를 위한 제국주의 전쟁으로 나아갔으며 다른 편으로 과잉 생산 경향은 19세기와 달리 세계경제를 불안정과 파괴의 반영구적인 위기로 종속시키는 만성적인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모순은 2천만의 목숨을 앗아가고 20-30% 실업자를 만든 가지 역사적 사건인 1 세계대전과 1929 세계대공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는 쪽에 경제의 국가화를 통한 국가 자본주의라는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들 다른 쪽에 사적 부르주아지와 국가 관료주의가 결합한 자유주의국가들을 형성시켰습니다.

2 세계대전 이후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들 포함하는 세계자본주의는 25 동안 재건과 부채 증가에 힘입어 예외적인 번영을 했으며, 정부 관료, 노조 지도자, 경제학자, 자칭 맑스주의자들까지 자본주의가 결정적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했다고 호언장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67 파운드화의 평가절하, 1931 달러위기, 1973 오일 쇼크, 1974-75년의 경기 후퇴, 1979 인플레이션 위기, 1982 부채 위기, 1987 월스트리트 위기, 1989 경기 후퇴, 1992-93 유럽 통화의 혼란, 1997 아시아의 호랑이 위기, 2001 미국의 신경제 위기, 2007 서브프라임 위기, 2008 리먼 브라더스 금융위기, 2009-2010 재정위기로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연속되는 위기는 순환적위기, ‘주기적위기입니까? , 아닙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결코 치유할 없는 , 지불능력이 있는 시장의 부족 때문이며 이윤율 저하 때문입니다. 1929 세계대공황은 거대한 국가 개입을 통해 극단적인 상황을 모면할 있었지만, 요즈음의 금융위기, 재정위기처럼 국가의 구제금융이나 국가부채라는 단기 처방으로는 자본주의라는 체제는 이상 생존할 없고, 생산력의 확대가 불가능한 막다른 길목에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자본주의는 막다른 골목에서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국가부채에 의존하는 것이며 과잉생산의 출구를 가공적인 시장의 창조에서 찾는 것입니다.

지난 40 동안 세계 자본주의는 엄청난 부채를 짊어짐으로써 재앙을 피해 왔습니다. 자본주의에서 부채는 마약중독자에게 마약이나 다름없습니다. 모든 부채의 결과는 지불 가능한 시장을 찾지 못하고 결국 세계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세계 노동자의 가난, 제국주의 전쟁 그리고 생태적 재앙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끝나가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갑작스런 파멸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자본주의 역사에서 서서히 끝나는 마지막 단계, 체제 몰락의 단계입니다. 우리는 100 전의 전쟁인가, 혁명인가 화두를 진지하게 꺼내들고 다시 야만인가, 사회주의인가 말하는 역사적 인식과 과학적 사회주의의 실천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는 혁명적 맑스주의 원칙에 올바르게 사회주의자들의 단결과 통일을 요구합니다. 화폐, 상품, 시장, 임노동, 교환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를 넘어서서 자유로운 개인의 연합이 살아 숨쉬는 노동해방 사회의 건설을 위해서 말입니다.

잉여가치의 생산과 실현에서 이윤율 하락과 시장 포화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총체적 위기가 임계점에 다다랐음은 이미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주의 분석으로 확인된 것이지만, 지금은 야만으로서의 자본주의와 문명으로서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선택의 기로에 있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 자본주의 체제는 임금노예도 먹여 살릴 없는 체제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매일 굶주림으로 10 명이 죽어가고 있고 10 미만 어린이는 5초마다 죽습니다. 8 4 2백만 명이 만성적인 영양실조로 고통 받고 있으며 60 인구 20억이 식품비 인상으로 매일매일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는 경제번영의 환상을 유지할 없는 체제입니다. 인도와 중국의 경제 기적은 환상임이 드러났으며 중국에서는 2008 상반기에 2천만 명이 해고 되었고, 6 7천개의 회사가 파산했습니다.

, 생태적 재앙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지구의 온난화를 보면 지구의 평균 온도는 1896 이래 0.6% 증가했고, 20세기는 북반구에서 지난 동안 이전보다 가장 심각한 온난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덮인 지역은 1960 이래 10% 감소했으며 북극빙하의 두께는 40% 감소했습니다. 평균 해수면은 20세기 동안 10-20% 상승했는데, 이러한 해수면 상승은 지난 3천년 보다 10 증가한 것입니다. 또한 90 동안 지구에 대한 약탈은 남벌, 토양 침식, 오염(공기, 수질), 화학 방사능 물질의 살포, 동식물의 파괴, 전염병의 폭발 등으로 나타나 생태적 재앙은 종합적이고 지구적 형태로 구성되어 앞으로 얼마나 심각해질지 예측할 없습니다.

그러면 자본주의의 억압과 착취에 맞선 계급투쟁의 역사는 어떠했습니까? 계급투쟁은 항상적이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1인터내셔널은 상승기 자본주의의 능력 때문에, 2인터내셔널은 혁명주의의 포기와 민족주의 때문에, 그리고 코민테른은 사회주의 혁명을 포기한 스탈린주의의 반혁명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특히 1930년대 이후의 반혁명세력은 국가자본주의의 본질을 호도하면서 사회주의 참칭하였고, 결국 세계자본주의 체제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진영의 대립을 위장하면서 세계노동자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해 왔습니다.

더구나 1989 동구블럭과 스탈린 체제의 몰락이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명백한 승리”, “계급투쟁의 종말”, 그리고 심지어 노동계급 자체의 종말이라고 떠드는 부르주아지의 캠페인은 노동계급을 의식과 전투성 수준에서 심각하게 후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1990년대 동안 노동계급은 투쟁을 전적으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난 시기의 투쟁의 기관이었던 노동조합에 필적할 폭이나 그리고 능력을 지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989 이래 노동계급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의 연금에 대한 공격에 대한 반대투쟁이 전기가 되었습니다. 노동자의 투쟁은 대부분 중심 국가에 영향을 주었는데, 미국의 2005 보잉과 뉴욕 교통의 투쟁, 독일에서는 2004 다임러와 오펠 투쟁, 2006 의사 투쟁, 2007 독일 텔레콤 투쟁, 영국의 2005 8 런던 공항 투쟁, 프랑스의 2006 CPE 반대 투쟁이 있고, 주변부 국가들로는 두바이의 2006 건설 노동자 투쟁, 방글라데시의 2006 방직 노동자 투쟁, 이집트의 2007 방직 노동자 투쟁 등이 있습니다.

2006 이후 2008년까지 벌어진 세계의 노동자 계급의 투쟁은 이집트, 두바이, 알제리, 베네주엘라, 페루, 터키, 그리스, 핀란드, 불가리아, 헝가리, 러시아, 이탈리아,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중국 세계로 확대되고 있으며 2009년부터 심화되는 대공황과 자본주의의 위기에 맞선 노동계급의 투쟁은 최근 프랑스에서의 연금개혁에 대한 반대투쟁에서 보듯이 점점 치열한 공세로 나아갈 것으로 예상됩니다.

위와 같은 세계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쇠퇴의 마지막 경향과 위기의 노동자계급에 대한 전가는 예외 없이 세계노동자들의 필연적인 투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아닌 동물과 같은 야만으로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존엄성으로 행복하게 것인가의 기로에서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한국의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모순의 깊이와 폭은 이른바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수준보다 더욱 심각하고 이미 노동자들의 투쟁의 성과를 쌓아온 유럽의 국가들의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참상보다 훨씬 크다고 있습니다. 이는 G20 정상회의의 한국 개최라는 허장성세나 총량적인 경제 지표로 말할 없는 계급적인 인간의 삶의 문제입니다.

자본은 본래부터 세계적이었고 민족 자본끼리의 경쟁과 다툼은 있었지만 항상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를 위해 손잡고 위기를 은폐하고 노동자인 인간을 공격해 왔습니다. 노동자는 자본가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윤극대화와 무한경쟁의 법칙으로만 움직이고 유지되는 자본주의 체제와 싸웁니다.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맑스주의자는 이와 같은 인류사회의 역사법칙과 사회체제의 법칙의 본질을 파헤치고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위한 방향을 제시하며 이를 가로막는 비인간적인 체제와 법칙을 비판하고 역사의 주인인 노동자계급과 함께 싸워왔습니다.

그를 위해 당이라는 조직을 만들고 투쟁적 실천을 왔습니다. 적어도 2 세계대전 이후부터 이러한 맑스주의자들의 실천이 법적인 제재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들의 사상과 실천이 인류사회의 진보에 공헌했음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버금가게 맑스의 자본론이나 공산주의자 선언 저작들이 폭넓게 읽히고 있습니다.

이번의 사노련 사건은 한국사회가 얼마나 야만적인 사상 탄압을 하는 사회인지를 세계에 드러내는 역사적 사건이며 세계의 사회주의 재판 역사에서 오점으로 남을 것입니다. 앞으로 보다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사회주의 운동, 맑스주의 운동이 세계적으로나 우리나라에서 폭넓게, 그리고 힘차게 펼쳐질 것입니다. 사법기구가 조직사건은 다룰지 모르지만, 사회주의 운동, 맑스주의 운동은 억압할 없을 것입이다. 이는 인류와 노동자가 존재하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 운동과 실현이 법의 죄의 대상이 없습니다. 오히려 존경과 신뢰의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 사상의 자유, 학문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라!

- 역사의 주체, 생산의 주체, 권력의 주체로 나아가려는 모든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자본과 권력의 탄압을 중단하라!

-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만들기 위해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경제불황, 전쟁, 사회적 붕괴- 계급투쟁만이 출구를 제공한다.

올 여름 경제위기의 극적인 첨예화는 자본주의 체제가 그 한계에 다달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부채위기“는 문자그대로 은행의 파산일뿐만 아니라 전체 국가들의 파산을 백일하에 드러냈고, 게다가 그리스나 포르투갈과 같이 경제가 허약한 나라들 뿐만 아니라 유로지역의 주요국가들, 특히 세계경제최강대국 미국도 포함된다.

그리고 이 위기는 전세계적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이기도 하다. 지난 몇년간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낸 빚더미는 1960년대말 1970년대초에 이미 나타난 경제위기를 자본주의가 연체하거나 은폐하려한 시도들의 결과일 뿐이다. 또한 오늘의 “침체”가 진정한 불황으로서의 본 모습을 드러내면서, 우리는 이것이 실상, 1930년대에 생산 마비시켰고 그당시 세계를 제국주의전쟁으로, 즉 제 2차세계대전으로 몰아갔던 위기과 같은 심각한 위기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 위기는 자본주의 체제가 역사적으로 진부해졌음을 보여준다.

오늘의 불황과 1930년대의 불황사이의 차이는 오늘의 자본주의는 어떤 수단도 갖고 있지 않다는데 있다. 1930년대에 지배계급은 그 위기에 대항한 그들 자체의 야만적인 해법, 즉 제국주의 전쟁에 전 사회를 동원하고 세계를 새롭게 분활하는 것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재조직화는 2차 세계대전 후,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있었던 재건의 기적의 토대를 만들어냈다. 그 당시 이러한 가능성이 존재했던 것은 부분적으로, 세계대전이 자동적으로 자본주의의 자기파괴를 의미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 전후에 새로운 제국주의 종주국의 출현 여지가 여전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의 옵션이었는데, 이는 그 이전에 노동자계급이 1차 세계대전에 뒤이어 혁명을 시도했었고 그러면서 스탈린주의, 파시즘 그리고 민주주의로 인해 그 역사상 가장 심각한 배패를 경험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대전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의미에서만 하나의 옵션이다. 사실상 전세계적인 제국주의전쟁으로의 길은 자본주의가 옛 양대 블록 구도의 붕괴 후 그 어떤 안정적인 제국주의적 연합도 이뤄낼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막혀있다. 그 길은 또한 자본주의 주요국가들에서 착취당하는 사람들 대다수를 이 체제는 그 수호를 위해 투쟁하고 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설득하고 단합시킬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존재하기 않는다는 점에 의해서도 마찬가지로 가로막혀 있다. 이 두가지 요소들은 더 심층적인 어떤 것과 연결되어있는데, 노동자계급은 오늘날 패배당하지 않았고 여전히 자본주의에 대항해 그들 자신의 이해를 위해 투쟁에 나설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노동자계급이 직면한 위험


이는 혁명으로의 그 어떤 자동적 현상이 존재함을 의미하는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노동자계급의 혁명은 도대체가 결코 “자동적 현상”이 될 수 없는데, 이 혁명은 과거의 그어떤 혁명보다도 더 높은 의식수준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처음으로 연대원칙이 중심에 서 있는 그러한 한 사회에서 그들 자신의 생산과 분배에 대한 콘트롤을 넘겨받는 바로 그 순간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이 혁명은 점점 더 대대적으로 되어가는 일련의 투쟁들에 의해서만 준비될 수 있고, 그러한 투쟁은 다시 더 깊고 더 넓은 계급의식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1960년대 말 위기의 최근 시기가 시작된 이래, 노동자계급의 많은 주요한 투쟁들이 있었다. 685월 프랑스에서의 사건들이 유발했던 국제적인 투쟁물결에서부터 1980년 폴란드에서의 대중파업들과 1980년대 영국 광산노동자파업에 이르기까지. 비록1990년대에 계급투쟁의 오랜 역류가 있었지만, 지난 몇년동안에, 그들에게 그 어떤 미래도 제공할 능력이 없는 현 사회질서에 대해 적극적으로 “분노하는” (스페인어 개념대로 말하자면)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다. 튀니지, 이집트, 그리스, 스페인, 이스라엘 등등에서의 투쟁들에서 “혁명” 의 생각은 진지한 토론주제가 되었다. 1968년 파리, 1969년 밀라노의 거리들에서 그당시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당장 이 생각은 아직 매우 혼란스럽고 막연하다. '혁명', 가장 분명하게는 튀니지와 이집트의 경우에서, 또 지금 리비아가 그런 것처럼 지배계급의 일부분으로부터 그 다른 한 부분으로의 권력의 단순한 이동정도로 이해되기 쉽다. 그리고 최근의 운동들에서, 지배체제에 대항한 투쟁은 계급투쟁임을, 즉 지배계급 전체에 대항한 노동자계급의 투쟁임을 분명히해야 함을파악한 것은 소수에 불과했다. 40여년간의 위기 이후 특히 자본주의의 주요국가 노동자계급은 1960년대말과 같은 모습을 더이상 띠지 않는다. 거대한 산업기지들과 강력한 계급투쟁의 집중지들은 사방으로 분산되었다. 전 세대가 지속적인 불안정과 실업의 원자화의 영향을 받았다. 노동자계급의 가장 절망적인 층들은 범죄와 허무주의 또는 종교적 근본주의에 빠져들 위험에 처해있다.

요컨대, 자본주의 사회의 길고 점점 더 첨예해지는 붕괴과정으로 인해, 노동자계급은 계급정체성을 재획득하고 사회의 지도력을 넘겨받아 그 사회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자신감을 형성하는 능력에 있어서 가장 심각하고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착취에 대항해 투쟁하는 노동자계급의 모범이 없이는, 체제의 불평등하고 억압적이며 부패한 본질에 대항한 무수한 분노의 반응들이 있을 지언정, 그 자체만으로는 그 어떤 출구도 만들어낼 수 없다. 몇몇 반응들은 올여름 영국의 예에서처럼, 폭동, 봉기 및 수많은 약탈의 형태를 띨 지도 모른다...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정당한 분노의 분출들이 지배계급에 의해 인도되어, 리비아에서 보여지듯이 제국주의의 한 진영에 대항해 다른 한 진영을 지지하는 용도로 투입될 수도 있다.

가장 비관적인 시나리오는, 피착취자들의 투쟁이 무의미하고 자기파괴적인 행동들로 분산되어버리고, 이때 노동자계급 전체가 너무 원자화되고 너무나 분열되어버려서 하나의 진정한 사회적 힘으로 출현할 수 없게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 시나리오가 실현된다면, 아무것도 자본주의가 우리 모두를 심연에 빠뜨리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세계전쟁의 전개가 없이도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 지점에 도달하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새세대 노동자들은 경제적 붕괴, 제국주의적 충돌, 환경파괴라는 자본주의의 미래에 수동적으로 그리고 아무 저항없이 이용당할 용의가 전혀 없다는 많은 암시들이 존재하고, 이 새세대가 노동자계급의 더 나이든 세대들과, 자본주의로부터 생존의 위협을 받는 모든 이들을 자신들 주변으로 끌어모을 수 있다는 증후들이 존재한다.


세계혁명, 201191

 

 

부채위기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부채 및 위기
세계경제가 심연에 빠진듯 보인다. 대공황의 위기가 점점 가까와지고 있는데, 그것은 1929년의 대공황보다 심각할 것이다. 은행, 기초지방단체, 지방들, 심지어는 국가들도 오늘날 파산에 내몰리고 있다. 언론매체는 온통 부채위기灯에 대해 떠들어댄다.

부채장벽에 부딪힌 자본주의

다음의 그래픽은 1960년이래 오늘까지 전세계의 부채(1) 증가를 보여준다. 이러한 부채들은 전세계 국민총생산 대비 백분율로 표현되어진다.

그래픽을 통해, 1960 부채비율은 전세계 국민총생산의 100% 해당했지만 2008 이는 두배 반으로( 250%) 증가됨을 있다. 바꿔 말하자면, 1960 이래 전세계적으로 누적된 부채를 완전히 상환하자면 이는 전세계에서 일년 반동안 생산된 모든 생산물의 총합에 상응한다

소위 선진국灯의 이러한 극적인 경향은 또한 미국의 공채에 관한 다음의 그래픽을 통해 분명히 보여질 있다.

지난 몇년 동안 거대한 공채의 산더미가 생겨나서 증가가 거의 수직적으로 진행됨을 있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부채장벽灯이라 부른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지금 전력을 다해 부채장벽에 맞부딛혔다.

부채  자본주의 쇠퇴의 결과

세계경제가 이러한 부채장벽을 향해 치닫고 있음은 분명했다. 전세계의 정부들은좌우파를  막론하고, 극좌 극우를 막론하고, „자유방임지향 이건 국가개입灯지향이건을 막론하고 모두가 크레딧조건들을 점점 느슨하게 만들었는가, 결손이 점점 증가하게 내버려두었는가, 모든 짓을 다하면서 국가와 기업과 가계의 부채더미가 지난 50년간 증대되도록 방치하였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정부들이 그런식으로 대처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현재 빠져들고 있는 끔직한 침체가 이미 1960년대에 이미 시작되었을 것이다사실상 자본주의는 지난 몇십년이래 크레딧의 도움으로 살고, 생존해 있다 현상의 뿌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맑스가 현대사회의 크다란 비밀이라고 나타냈던것, 잉여가치의 창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우리는 여기서 간단하게 이론적인 서술을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선천적 질병을 앓고 있다. 자신의 신체가 배설해낼 없는 많은 양의 , 과잉생산을 끊임없이 생산한다. 자본주의의 시장이 수용할 있는 것보다 많은 상품을 생산한다? 설명을 위해 순전히 단순화된 예로서, 콘베이어 벨트 노동자나 Pc작업을 하면서 매달100만원로정도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 생각해보자. 실상 그는 자신의  매달 임금총합에 해당하는100만원 가치의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200만원 가치의 상품을 생산한다. 그는 지불되지 않은 노동(잉여노동) 것이다. , 잉여가치를 만들어낸 것이다. 자본가는 노동자로부터 훔친 (물론 그렇게 생산된 상품을 파는데 성공한다는 가정하에) 100만원으로 무엇을 하는가 돈의 일부를 자본가는 자신의   사적인 소비에 충당한다. 이를 대략 25만원이라고 치자. 나머지 75만원을 그는 자본금으로 자신의 회사에 투자한다, 대부분은 현대적인 새기계를 구입하는 등등의 형태로. 그러나 자본가를 이런식으로 행동하는가? 왜냐하면 그는 경제적으로 그렇게 할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경쟁에 기반한 체제다. 모든 자본가는  자신들의 상품을 동일한 상품을 생산하는 다른 자본가들에 비해서 싸게 팔아야 한다. 그래서 기업가는 생산비용, 임금을 낮추어야 뿐만 아니라, 점점 많은 부분의 미지불노동을 좋은 성능의 기계에 우선적으로 투자하는데자신의 생산성을 높이는데 사용해야 한다만약 그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현대화를 없고한편 이렇게 주의깊고 활동적인 경쟁자는  결국 싸게 생산하고 시장을 정복할 있게 된다.

자본주의 체제는 그래서 다음과 같은 모순이 특징적인데 노동자들이 사실상 생산한 것에 상응한 보상을 받지 못함으로써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가가 '분배' 있는 것보다 많은 가치가 발생한다는 점이다결코 자본가들과 노동자들 모두를 함쳐도 생산된 모든 상품들을 소비할 없다그래서 자본주의는 이러한 상품과잉을, 자신의 생산영역의 외부에 존재하는 아직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의해 정복되지 않은 시장들에 팔아야 한다. 이는 자본주의외부의 시장들이라 불린다. 이것이 성공하지 못하면, 광잉생산위기가 초래된다. 이것이 바로 핵심에 있어서, '자본론'에서 맑스가  그리고 '자본축적론'에서 로자 룩샘부르크가 도달하게 결론들의 일부이다이를 좀더 분명하게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과잉생산이론을 몇몇 요점으로 요약해 보겠다.

 

  • 자본은 자신의 노동자들을 착취한다(달리 말해서, 그들의 임금은 그들이 생산한 실제 상품가치보다 낮다). 
  • 그렇게 해서 자본은 자신의 상품을 이윤과 함께, 임금과 잉여가치 그리고 생산수단의 비용들이 참작된 가격에 판매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자본가들은 상품을 누구에게 팔것인가?
  • 당연히 노동자들이 상품들을 구매한다... 그들에게 지불된 임금의 한도 내에서그래서 아직도 판매되어야할 일부분이 여분으로 남게 되고 그것은 노동자들에게 지불되지 않은 부분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오직 부분- 잉여가치- 만이 자본으로 하여금 이윤을 얻게 하는 마술적인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자본가들도 물론 마찬가지로 소비를 한다...그리고 대부분 상당히 호화롭게 산다. 하지만 잉여노동을 통해 생산된 모든 상품을 그들 혼자서 구매할 수는 없다자본은 상품들을 스스로에게 판매함으로써는 이윤을 획득할 없다. 그것은 말하자면, 왼쪽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오른쪽 호주머니에 넣는 꼴이 것이다그런 식으로는 아무도 부유해질 수가 없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것을 알고 있다...
  • 축적을 하기 위해서는, 성장을 위해서는 자본은 그래서 노동자와 자본가 이외의 다른 구매자를 찾아야 한다. 달리 말해서, 반드시 자신의 체제의 외부에 있는 구매자를 찾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장에서 홍수를 이루는  판매될 없는 상품더미 위에 앉아 있을 밖에 없다. 그러면 과잉생산위기灯가 초래된다.

 

이러한 내적 모순”(내재된 과잉생산경향과 항상 외부의 시장을 찾아야한다는 강박) 체제가 출현이래 오늘날까지 갖고 있는 소위 믿을 없을 정도의 활력을 이루는 뿌리들중의 하나이다. 16세기에 자본주의가 출현한 이래 자본주의는 주변에 놓인 모든 경제영역들과  통상을 해야만 했다. 전세계의 낡은 지배계급들과, 농부들과 수공업자들과. 18세기와 19세기에 자본주의 강대세력들은 세계의 정복을 놓고 경쟁에 돌입했다. 그들은 차츰차츰 지구를 식민지들로 분할했고,. 그것을 서로 빼앗으며 진정한 제국을 건설했다. 가끔 두개의 세력들이 동일한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러면 약자는 포기해야만 했고, 원주민에게 자신의 상품을 사도록 강제할 있을 지구의 다른 한조각을 찾아보아야 했다. 이렇게 자연경제들은 변화되고 차츰 차츰 자본주의 속으로 강제 편입되었다. 식민지들이 유럽과 미국에서 생산된 모든 상품들을 수용하는데 점점 실패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도 과잉생산이 발생했다.          

18세기와 19세기 자본의 이러한 활력, 과잉생산위기와 장기간의 복지와 확장시기의 반복 자본주의의 부단한 상승은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매우 명확하게 서술되었다:

 

  • 공황시에는, 이전의 모든 시기에는 어불성설로 보였을 하나의 사회적 전염병이  돌발한다 과잉생산이라는 전염병이. 사회는 갑자기 순간적인 야만의 상태로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기아와 전면적인 섬멸전이 사회로부터 모든 생활 수단들을 박탈해간 것처럼 보인다; 공업, 상업이 파괴된 듯이 보인다. 그런가? 그것은 사회가 너무 많은 문명, 너무 많은 생활 수단너무 많은 공업, 너무 많은 상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공산당선언, 부르조아와 프롤레타리아, 1848, 칼맑스 프리드리히엥겔스저작선집, 박종철출판사, 1 406)
  • 자본주의가 아직 확장기에 있었고 당시 아직도 새로운 시장을 정복할 있었기에, 위기마다 새로운 재회복기가 뒤따를 있었다. „자신의 생산물의 판로를 부단히 확장하려는 욕구는 부르주아지를 지구상으로 내몬다. 부르주아지는 도처에서 뿌리를 내려야 하며, 도처에서 정착해야 하고, 도처에서 연계를 맺어야 한다. (…)  부르주아지의 상품의 가격은, 부르주아지가 모든 만리 장성을 쏘아 무너뜨리고, 외국인에 대한 야만인들의 완고하기 그지 없는 증오심을 굴복시키는 중포이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민족들에게 망하고 싶지 않거든 부르주아지의 생산 양식을 채용하라고 강요한다; 그들은 소위 문명을 도입하라고, 부르주아지가 되라고 강요한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모습대로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공산당선언, 같은 , 403 - 404) “
  • 그러나 이미 당시에 맑스와 엥겔스는 주기적인 위기의 뒤편에 있는 무언가를, 항상 많은 번영을  만들어낼 것같던 단순한 영원한 주기 이상의 무엇을 인식했다. 그들은 한층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심각한 모순들이 표현됨을 속에서 보았다. 새로운 시장들의 정복을 통해 부르주아지는 전면적이고 강력한 공황들을  준비하고 , „ 공황들을 예방할 수단들을 감소시킨다“(공산당선언, 같은 , 406).  또는, 공황들은 더욱더 빈번해지고 더욱더 격렬해지는데 까닭은 생산물들의 양이 많아지고 따라서 확대된 시장들에 대한 욕구가 커지는 것과 같은 정도로 세계시장은 축소되어 이용할 여지가 있는 새시장이 점점 적어진다...”(임금 노동과 자본, 1849, 같은 , 571)”

 

그런데 단지 작고 둥글뿐인 우리의 지구

20세기초, 모든 지역들이 정복되었다, 자본주의 강대국가들이 지구를 분할해 가졌다. 이후 그들은 어떤 새로운 지역도 정복할 없었고, 오히려  경쟁자들로부터 지역들을 무력으로 빼앗을 밖에 없었다. 이제 이상 아프리카나 아시아 |또는 남아메리카에서 식민지를 놓고 경쟁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영향- 권력지대의 방어를 위한 치열한 전쟁이 현안이었다. 그래서 제국주의적 경쟁자들로부터 무력으로 지역들을 빼앗으려 시도할 밖에 없었다.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진정 생존의 문제였다. 그래서,  아주 소수의 식민지만을 소유하고 있며 대영제국의 선의에 의존적(독일 부르주아지에게는 견딜수 없는 상황) 이던 독일이 통상을 해나갈 있기 위해 1914 1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독일은 강제적 상황때문에 공격적인 역할을 맡게되고, 역할을 히틀러는 나중에 2 세계대전을 준비하면서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수출할 것이냐 아니면 죽을 것이냐“. 400년간의 확장후 자본주의는 쇠퇴하는 체제가 되었다. 이점에 대해 양대 세계대전의 악몽  그리고 1930년대의 대공황은 반론을 제기할 없는 극적인 증거를 제시한다.  그렇지만  그후 그때까지는 여전히 존재하던 자본주의외부 시장들이 완전히 고갈되는 1950년대에도 자본주의는 아직 치명적인 과잉생산위기에 빠져들지 않았다.

100년이상 서서히 진행된 단말마의 고통뒤에도 체제는 여전히 살아있다; 발부둥치면서, 비참한 상황에 놓여있긴 하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체제는 어떻게 생존해 있는가?   이체제의 몸은 과잉생산이라는 독에 의해 아직도 완전히 마비되지 않았는가? 해답은, 빚이라는 수단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세계경제는 점점더 대대적으로 채무를 짐으로써 극적인 붕괴를 피할 있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일종의 인위적인 시장이 창출될 있었다. 지난 40년은 침체와 크레딧주입이라는 도움에 힘입은 재회복의 연속으로 표현될 있다.  그런식으로 사적인 가계의 소비를 국가적인 도움으로 회복하려 시도했던 것만은 아니다... 아니, 국가들 자체가 라이벌  나라들에 대한 경제 세계경쟁력을 인위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 기간산업프로젝트에 투자하고 은행들에 저금리로 돈을 대어주고 은행들은 다시 기업과 가계들에 돈을 대출함으로써...) 빚을 졌다.  크레딧의 수도꼭지가 도처에서 활짝  열려 돈이 흘렸고 한발 한발 모든 경제영역들이 과잉채무를 갖게 되었다. 기존의 빚을 갚기 위해 매일 새로운 빚을 얻어야만 했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어쩔 없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밖에 없었다. 자본주의는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이러한 막다른 골목의 가장 낮은 지점에 빠져있다. 부채장벽을 코앞에  맞대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부채위기灯는 죽어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과용량灯의 모르핀과 같다

비유를 하자면, 부채는 자본주의에게 있어서, 죽을 사람에 있어서 모르핀이 의미하는 것과 같은 것을 나타낸다. 모르핀을 투여함으로써 병자의 위기는 잠시 경감된다병자는 안정을 얻고 달래질 수가 있다. 그러나 매일 의존성이 증가되고 점점 높은 용량의 모르핀이 투여된다. 처음에는 경감하는 작용을 했던 수단이 나중에는 해롭게 되고 결국에는 과용량으로서 작용하게 된다.

전세계적인 부채의 산더미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쇠퇴의 증상이다. 세계경제는 1960년대 이래 크레딧에 매달려 있지만, 부채는 도처에 스려있다. 몸의 모든 부위로 파고들어 그것을 장악해 버린다. 점점 많은 은행들, 회사들, 지방자치단체, 국가들이 지불불능이고 그렇게 것이며 그들의 채무를 이상 상환할 수도 없고 이자를 더이상 지불할 수도 없다.

2007 여름, 1 세계대전과 함께 시작된 자본주의 쇠퇴의 역사에서 새로운 장이 열렸다. 위기의 리듬을 점점 대대적으로 되어가는 크레딧 투입을 통해 제지하는 지배계급의 능력이 점점 약해지고 없어져 간다. 이제 중간 중간에 한숨 돌릴 틈도 없이, 경제의 회복기도 없이 점점 많은 충격들이 있을 것이다지배계급은 위기에 대한  실제적이고 지속적인 해답을 찾을 없을 것이다. 이는 그들이 갑자기 무능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문제가 해결될 없다는 단순한 이유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자본주의 자체내에서는 해결될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글에서 보여주려 시도했던 것처럼, 문제가 자본주의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체제 전체에 있기 때문이다. 체제 전체가 파산상태이다파웰, 26.11.2011

(1) 전세계의 총부채, . 모든 나라들의 가계, 기업 국가들의 부채를 의미한다.

       

 

 

                 

북아프리카, 근동 및 중동에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북아프리카와 근동 및 중동의 사건에 관한 토론을 위한 참고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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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은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서, 결과들은 현재 분명한 예측이 어렵다. 그러나 사건들에  관한 토론은 중요하며 이를 통해 혁명가들은 일관성있는 분석틀을 발전시켜 나갈 있을 것이다. 다음 사항들은 결코 그러한 자체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상황의 상세한 서술도 아니며,  단지 논쟁을 고무자극하는 것을 목표로하는 기본적인 참고점들이다.

 

 

1. 1848년이나1917-1919 이후 우리는 그렇게 광범위하고 동시다발적인 반란의 물결을 보지 못했다. 움직임의 진원지는 북아프리카(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그리고 알제리와 모로코) 있었는데,  가자지구, 요르단, 이라크 이란 예맨, 바레인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반정부 시위가 발생한 한편, 일련의 다른 억압된 아랍국가들, 특히 시리아에서 높은 경보가 울리고 있다. 중국의 스탈린주의적 체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항의의 메아리는 수단, 탄자니아, 짐바브웨, 스와질란드등과 같이 아프리카의 다른 부분들에서도 울려퍼진다. 이러한 반란들의 반향은 크로아티아에서 경제위기의 영향과 부패한 정부에 대항한 시위에서도, 영국 학생시위의 플랜카드와 슬로건에서도 그리고 위스콘신에서 노동자투쟁에서도 느껴질 있으며, 다른 여러나라들에서도 확실히 그러하다. 이것은 모든 움직임들이 아랍세계의 그것들과 똑같다라고 말하는 것이이 아니다. 내용면에서도 요구사항들의 측면에서도, 지배계급의 반응에 있어서도. 하지만 현상 전체를 놓고 이야기할 있는 그러한 일련의 공통점들이 분명 존재한다.

 

 

2. 이러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는 역사적인 맥락은 다음과 같다:

 

-         깊고 참으로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심각한 경제위기, 이로 인해 아랍국가들의 취약한 경제는  특히 심하게 타격을 받았고, 이미 수백만이 비참한 가난 속으로 빠져들고 있으며,  상황이 악화되리라는 전망만이 앞에 놓여 있다. 많은 노쇠해가는중심부 국가들과는 반대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젊은 층은 무수한 젊은 전문 비전문인력의 실업과 전망부재로 특히 심하게 타격을 받았다. 모든 경우에서 이러한 운동의 최전선에  젊은 층이 있다.

-         지역의 모든 정부들의 견딜 없이 부패하고 억압적인 본질. 비밀경찰과 군대의 잔인한 행동이 오랫동안 국민들을 파편화하고 강압할 있었던 반면,  국가의 바로 그러한 무기들, 원자화와 공포는  이제 함께 모여 공동으로 저항하려는 국민들의 의지를 일반화하는데 기여했다. 이는 예를 들어 특히 이집트에서 매우 분명했다. 무바라크가 진압군과 사복경찰들을 타흐리르광장을 점령한 사람들에게 테러를 가하도록 보냈을 ,  이러한 도발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방어하려는 결의를 더욱 강화시켜  훨씬 많은 사람들이 항의시위에 동참하도록 만들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일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안 엄청난 사적인 부를 축적한 집권층의 탐욕과 치솟는 부정부패는 국민들이 두려움을 떨쳐버리자마자 반항의 불꽃을 더욱 불붙혔다.

-         많은 시위참가자들이 언급하는 이러한 갑작스런 공포의 상실은 국지적 지역적인 수준에서 변화들의 산물일뿐만  아니라, 국제적 수준에서 증대하는 불만과 명백한 계급투쟁의 기후의 산물이기도 하다. 경제위기에 직면하여 모든 곳에서,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강요되는 희생을 제공하는 것을 점점 달갑게 여기고 있다. 여기서 다시, 새로운 세대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되었고 이런 의미에서  2년전 그리스에서 있었던 젊은이들의 반항, 영국과 이태리에서의 학생투쟁, 프랑스에서의 연금개혁 반대투쟁등도 아랍세계에 영향을 남긴 것이다. 특히, 지배계급으로서는 기존 관계들에 대항한 투쟁들에 대해 지속적인 보도통제를 하기 힘든 패이스북과 트위터 시대에.

 

 

3. 이러한 운동들의 계급적 성격은  단일하지 않고 나라마다 그리고 단계에 따라서 상이하다. 하지만 대체로 비착취계급의 운동들로서, 국가에 대항한 사회반란으로서 규정될 있다.  노동자계급은 일반적으로 반란들을 이끌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상당한 존재성을 드러내고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는 운동에 의해서 제시된 그리고, 알제리에서의 파업들그리고 특히 이집트에서의 주요 파업물결들과 같은 그런 경우들에서는,  노동자투쟁의 특정한 발전에 의해 제시된  조직화의 방법들과 형태들 모두에 의해서 확인될 있다.  한편 이집트에서의 파업들은 무바라크를 폐기한다는 결정에 핵심적인 요소의 하나였다(이점에 대해서는 우리 다른 기사들을 참조바람). 나라들의 대부분에서는 노동자계급이 유일한 피억압 계급은 아니다. 농민층과  훨씬 오래된 생산양식들로부터 유래한 다른 계층들은 비록 매우 파편화되고 수십년간의 자본주의의 쇠락을 통해 파괴되었을 지라도 여전히 나라에서 무게를 갖고 있다. 반면 반란들의 중심이 되고 있는 도시들에서는 노동자계급화의 길에 들어 있긴 하지만 여전히 자체의  특수성을 가진 다수의 중산층 그리고 일부는 노동자 일부는 소상인과  룸펜화된 인자들로 이뤄진 대다수  슬램거주자들과 나란히 노동자계급이 존재한다. 가장 집중되고 경험많은 노동자계급이 있는 이집트에서조차도, 타흐리르광장의 목격자들에 따르면, 시위는 체제 상위계층을 제외한 모든 계급들 결집했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비노동자 계급들의 비중이 중심부 국가들의 주요 투쟁들에서보다 훨씬 높았다.

 

4. 이러한 반란들의 계급적 성격을 파악하려는 노력 속에서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대칭적인 오류들 두가지를 피해야만 한다. , 한편으로는 운동 속의 모든 대중들을 노동자계급과 무조건 동일시하는 (국제공산주의그룹 Groupe Communiste Internationaliste 가장 특징적인 입장)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폭동들에서 긍정적인 점들 분명하게 노동자 계급적이 아닌 모든 것을 거부하는 . 여기서 제기된 문제는 1970년대 이란의 사건과 같은 이전의 사건들을 되짚어보게 한다. 당시에 우리는 한동안 노동자계급이 선두적인 역할을 가정할 있었던 하지만  결국 이슬람주의자들에 의해 운동이 전복되는 것을  막기에는 불충분했던 그러한  대중반란을 목격했다. 역사적인 수준에서, 노동자계급과  일반적인 사회폭동들 사이의 관계 문제는 또한 과도기에서의 국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문제는 모든 비착취계급들의 운동에서 그렇지만 노동계급이 계급자치성을 유지할 필요성에 직면하여 생겨난다.

 

5. 러시아혁명에서 소비에트 형식은 노동자계급에 의해 생겨났지만 모든 피억압자들에게 조직화의 모델을 제공했다. 비례감각을 잃지 않고도 -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노동자계급이 다른 계층들에게 분명한 정치적 지도력을 제공할 있는 혁명적인 상황과는 한참 멀리 떨어져 있기에 -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투쟁방법들이 아랍세계의 사회반란들에 영향을 주었음을 있다:

 

-         자기조직화의 경향 속에서, 이는 국민들에 대항해 범죄갱단들을 풀어놓은  이집트정부의 전술에 대응해서 출현한 이웃보호위원회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다. 타흐리르광장에서의 몇몇 대중집회들의 파견위원구조 속에서. 그리고 집단적인 토론과 결정과정 전체에서;

-         대규모의 결집와 조직화의 중심점을 제공하기 위해서,  보통이라면 국가에 의해 통제되는 공간을 점거한 점에 있어서;

-         정부가 출동시킨 경찰과 깡패들에 대항해 대대적인 자위단의 필요성을 의식했지만 그와 동시에, 폭력과 파괴와 약탈 자체는 거부한 점에 있어서;

-         기독교도와 회교도사이, 시아파와 수니파 사이, 신앙인과 비신앙인 사이, 그리고 남자와 여자 사이의 분열등, 정부에 의해 냉소적으로 조작된 종파주의와 기타의 분열들을 극복하려는 신중한 노력들 속에서;

-         일반 병사들과의 우애를 이뤄내려는 수많은 노력들 속에서.               

 

이러한 경향들이 노동자계급의 오랜 투쟁전통을 지닌 이집트에서 가장 강력하게 발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데,  이집트의 노동자계급은 운동의 결정적인 단계에서 하나의 독자적인 세력으로 출현하여, 2006-7년의 그것과 같이 미래의 대대적 파업의 맹아들로서 간주될 있는 일련의 투쟁들을 전개했다. 이때 대대적 파업의 가장 중요한 많은 특징들 갖고 있었다. , 부문에서 다른 부문들로의 파업과 요구사항들의 자연발생적인 확장, 어용노조에 대한 비타협적인 거부와 자기조직화의 특정 경향들,  경제적 요구와 정치적 요구를 함께 제기한 . 여기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옹호자로 앞에 나서 새로운 사회의 전망을 제시할 노동자 계급의 역량을 대략 있다.

 

6. 모든 경험들은 진정한 혁명의식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단계들이다. 그러나 방향으로의 길은 여전히 길고 수많은 명백한 환상들과 이념적 취약성들이 걸림돌로 놓여 있다:

 

-         특히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들,  이러한 환상들은 군사독재와 부패한  군주들이 조합되어 지배하는 나라들에서 특히 강력한데, 이곳에서는 비밀경찰이 편재하고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체포, 고문 처형이 일상화되어 있다. 그러한 환상들은 민주주의적 반대파  국가 관리를 위한 대안적인 팀으로 부상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집트의 바라데이와 무슬림형제들, 튀니지의 과도기정부, 리비아의 국민회의등과 같이. 이집트에서는 군대를 국민의 이라고 여기는 환상들이 특히 강하데, 타흐리르광장의 시위대에 대한 군대의 최근의 진압행동들은 확실히 소수의 일부가 이점에 대해 반추하도록 만들것이다. 이집트에서 민주주의의 신화의 중요한 측면은 독립노동조합에 대한 요구인데, 확실히 이러한 조합들은 불신임당한 공식 노조들의 해체를 상당히 정당하게 요구하는 대부분의 전투적 노동자들의 다수를 포함한다;

-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의 환상들, 이는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혁명들 상징으로 국기를,  또는 리비아에서처럼, 가다피의 지배에 반대하는 모든 이들의 상징으로서 왕국 깃발을  채택한 점에서 보여진다. 또한, 이집트에서 무수한 깃발들에서  무바라크를 시오니즘의 앞잡이로 낙인찍는 것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가 계급투쟁의 주의를 전환시켜  제국주의적 충돌로 향하게 하는 중요한 지렛대로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팔레스타인문제를 제기하려는 관심이 그리 느껴지지 않는데, 왜냐하면 지배계급은 지금까지 팔레스타인의 고통을 그들이 자기 국민들에게 부과한 고통들로부터 주의를 돌리는 방법으로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국기들이 나라의 폭동에 대한 연대의 표시로 흔들어졌던  것에서 확실히 어느 정도의 국제주의적인 요소가  있었다. ‚아랍세계와 너머를 가로지르는 폭동의 규모는 국제주의의 물질적인 현실성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애국주의 이데올로기는 매우 적응력있는 것으로서, 이러한 사건들에서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대중적이고 민주적인 형식으로 변모할 있는지를 목격하고 있다.

-         종교에 대한 환상들, 이는 공개적인 기도를 빈번히 이용한 점과  반란의 조직화 장소로서 회교사원을 사용한 점에서 보여진다. 리비아에서는 훨씬 특별하게 이슬람주의 그룹들 (가다피가 주장하듯이 알카이다에 연결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자생적인 그룹들) 반란에서 초기부터 중요한 역할을 것은 명백하다. 이는 부족적 충성심의 역할과 더불어 리비아 노동자계급의 상대적인 허약성과 나라 국가구조의 후진성을 반영한다. 그런데, 라든 변종의 과격 이슬람주의가 무슬림국가들에서 대중들의 비참에 대한 해답이라 자처하는 점을 , 튀니지와 이집트에서의 반란들과  심지어 리비아 그리고  예맨과 바레인과 같은 걸프 국가들에서의 반란들 조차도, 작은 테러리스트 세포들을 통한  실천과 유해한 종파적 이데올로기를 가진 지하드 그룹들은  운동들의 대대적인 성격과  종파주의적 분열들을 극복하려는 진정한 노력들에 의해 거의 전적으로 주변화되어버렸음을 보여준다. 

 

7.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의 현상황은 여전히 진행중의 상태에 있다.��������������������������������������������������������������������������������������������������������������������������������������������������������������������������������������������������������������������������������������������������������������������������������������������������������������������������������������������������������������������������������������������������������������������������������������������������������������������������������������������������������������������������������������������������������������������������������������������������������������������������������������������������������������������������������������������������������������������������������������������������������������������������������������������������������������������������������������������������������������������������������������������������������������������������������������������������������������������������������������������������������������������������������������������������������������������������������������������������������������������������������������������������������������������������������������������������������������������������������������������������������������������������������������������������������������������������������������������������������������������������������������������������������������������������������������������������������������������������������������������������������������������������������������������������������������������������������������������������������������������������������������������������������������������������������������������������������������������������������������������������������������������������������������������������������������������������������������������������������������������������������������������������������������������������������������������������������������������������������������������������������������������������������������������������������������������������������������������������������������������������������하게 선언했다. 가다피 세력이 다시 승세를 보이기 시작하자 비행금지지역을 설정하거나 직접적인 군사적 개입의 다른 형식들을 사용할 것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런데 글을 쓰는 시점에는 EU NATO사이에 깊은 분열이 존재하는 것같은데, 영국과 프랑스는 매우 강력하게 군사적 행동을 선호하고 미국과 독일은 매우 주저하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는 물론 군사적 개입에 원칙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지만 아랍세계에서 벌써 다른 골치거리에 빠져들 위험에 노출되길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 부르조아지의 어떤 부분들은 대량 테러라는 가다피의 저주 지역 전역에서 이상의 다른 소요를 막는 방법일지 궁금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리비아의 사건들과  진정 지역의 전체 상황전개가  세계부르조아지의 기괴한 위선을 폭로했다는 사실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가다피의 리비아를 국제 테러리즘의 온상(이는 사실 맞는 말이었다)이라고 수년간 비난했으면서, 2006 가디파의 심경변화와  대량살상무기폐기 결심은 사담 후세인의 소위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그들의 자세를 정당화하기 위해 씨름하고 있던 미국과 영국같은 나라들의 지도자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토니 블레어는 특히 어제의 미친 테러리스트 리더 당장 껴안았다. 단지 몇년이 지난 지금 가다피는 다시 미친 테러리스트 리더이고 그를 지지했던 자들은 급히 다투어  자신들과 사이의 거리를 두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은 같은 이야기의 다른 판본에 불과하다. 거의 모든 최근의 또는 현재의 아랍 독재자들 미국과 다른 열강들이라는 든든한 뒷배경을 즐겼고 나라들은  지금까지는  튀니지, 이집트, 바레인 또는 사우디 민중들의 민주적 열망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가격폭등과 생필품의 품귀에 의해 자극된, 그리고 어떤 경우들에서는 폭력적으로 진압된, 이라키 쿠르디스탄의 현지배자들을 포함해 미국이 내세운 이라크정부에 대항한 거리 시위들의 발생은 더욱이민주주의적 서방 의해 제조된 공허한 약속들을 드러낸다.

 

10. 크로아티아의 어떤 국제주의 아나키스트들 (자그래브와 기타지역에서 진행중인 시위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적어도) libcom.org 개입해서, 아랍세계의 사건들은 마치 1989 동구에서의 사건들의 재연처럼 보이며, 당시에 모든 변화열망은 민주주의라는 용어로 탈선되었고 이는 노동자계급에게 결코 아무것도 가져다 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번의 새로운 운동 내부에 존재하는 민주주의의 신비화들의 명백한 위력을 놓고 볼때 매우 정당한 걱정이지만   역사적 순간들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놓치고 있다. 무엇보다도 세계 규모에서 계급역량의 외형 수준에서. 동구권의 몰락당시 서방의 노동자 계급은 정치적 수준에서 발전할 없었던 투쟁기의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고, 공산주의의 죽음과 계급투쟁의 종말에 관한 부수적인 켐페인을 거느린 동구블록 붕괴 그리고 자신의 계급 지대 위에서 대응함에 있어 동구지역 노동자계급의 무능력은 그래서 노동자 계급이 국제적으로 장기간 후퇴에 빠지는 것을 도왔다. 그와 동시에, 비록 스탈린주의 체제들 자체가 사실상 세계경제위기의 희생자들일 지라도, 이는 당시 분명하지 않았고 서구 경제에게는 세계자본주의에게 밝은 미래가 열리고 있다는 인상을 제공하는 작전을 펴기에 충분한 여유공간이 있었다. 자본주의 위기의 진정으로 총체적인 성격이 지금처럼 명백히 드러난 적이 결코 없었는데, 이것은 모든 곳의 노동자들이  그들 모두가 본질적으로는 실업, 물가등귀, 세체하에서의 전망부재라는 동일한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있게 만든다.  그리고 지난 7-8년에 걸쳐 우리는 전세계에서 노동자 투쟁의 느리지만 진정한 부활을 경험하고 있는데, 이러한 투쟁들은 80년대와 90년대의 후퇴로 인해 상처를 받은 프롤레타리아의 새세대에 의해 주도되며 이러한 부활로 인해 정치의식화된 증가되는 소수를 다시 전세계적 규모로 출현하고 있다. 이러한 심오한 차이들로 볼때, 아랍세계에서의 사건들이 중심부 국가들의 계급투쟁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보다는 오히려 미래의 발전을 강화시킬 실질적 가능성이 존재한다.

 

-         대대적이고 불법적인 거리행동의 힘을, 세계 지배자들의 평정을 뒤흔드는 능력을 재확인함으로써;

-         획일적이고 생각없는 광신도 무리로서의 아랍인 관한 부르조아의 선전을 파괴함으로써 그리고 이지역 대중들의 토론하고 반성하고 스스로 조직하는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         아랍세계를 향한  곡절을 통해 타산성과 무자비함이 돋보이기게 중심국가들의 리더들의 신빙성을 더욱 침식함으로써;

 

이들 기타의 다른 요소들은 처음에는 중심부 국가들의 노동자들 다수보다는 정치의식화된 소수에게 훨씬 명백할 것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국가와 대륙의 경계를 넘어선 계급투쟁의 진정한 단일화에 기여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것도, ‚민주주의 독립노동조합 기쁨들을 수년간 경험하고, 역사적 정치적 전통들이 넓지는 않을 지언정 깊이 뿌리내려 있으며,  세계제국주의체제의 심장부에 집중되어 있는 선진국 노동자계급의 책임을 경감시키지는 않는다.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노동자계급이 민주주의의 환상들과 단절하고 무산자 민중을 위해 뚜렷한 길을 제시할 있는 능력은 여전히, 중심부 국가 노동자들이 자기조직화되고 정치화된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분명한 예를 제공할 있는 능력에 근본적으로 달려있다.  ICC, 2011 3 11.                                           

 

  

       

 

 

 

 

  

 

 

 

 

스테판 헤셀의 두 책, „분노하라!“와 참여하라“!”에 대하여

스테판 헤셀의 , „분노하라!“ 참여하라“!” 대하여

 분노하기, 그래  자본주의 착취에 대해서!

     작가이자 서정시인 그리고 프랑스외교관인 스테판 헤셀의 글들, „분노하라!“ 참여하라“!” 진정한 베스트셀러들이다.  지금 벌써 글들은 세계의 불의에 대해 고민하는 모든 사람들의 참조점이 되었다. 최근에 스페인전역으로 멀리 퍼져나간 (그리고 그정도는 아니라도 다른 유럽나라들에서 있었던) 사회적 분노의 운동은 심지어 스스로를 분노한 사람들이라고 부르며 헤셀의 첫번째 책과 분명하게 관련지었다[1]. 

   분노하라!“ 대략 30쪽분량의 글이다. 여러 언어들로 번역되었고 되도록이면 많은 보급을 위한 터무니없이 값으로 전세계적으로 수백만부가 팔려나갔다. 책의 출판은 처음부터 매우 성공적이었다. 아주 당연한 이유로, 왜냐하면 책제목 자체가 이미 세계의 야만성에 대항한 절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억압당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확산되는, 그리고 점점 참을 없고 적대적으로 보여지는 세계 전역에서의 가난과 전쟁이 초래하는 공포가 촉발한 그러한 감정에 들어맞는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의 아랍의 봄과 분노한 사람들운동이 이를 증명한다.

 

 

스테판 헤셀은 어떤 사회를 꿈꾸는가?

 

   현재 93살인 스페판 헤셀은 부정의한 세상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표현할 만한 정력을 여전히 갖고 있다.  이렇게 볼때는 오직 경의와 공감을 불러일으킬 밖에 없다. 하지만, 그의  시각으로 우리는 어떤 사회를 위해 투쟁해야 할것인가라는 문제가 논의될 필요가 있다.

   그의 초입부터 이미 스테판 헤셀은 2 세계대전 종결시 국민저항의회(CNR)[2] 경제강령작성의 계기가 원칙과 가치들을 옹호한다. 방침들이 아직도 여전히 현실성을 갖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헤셀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당연히 지난 65년동안 사정이 달라졌다. 오늘날 우리는 레지스탕스 시대의 도전들과 똑같은 도전들 앞에 서있지 않다. 그당시 우리들이 제안한 강령은 오늘날 형태로는 더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이점을 감아버려서도 안된다. 그러나 우리가 그당시 따랐던 가치들은 동일하고 우리는 그것들을 계속 존중해야한다. 그것은 바로 공화국과 민주주의의 가치이다. 각각의 정부들은 이러한 가치를 놓고 평가될 있다. 국민저항의회의 강령에서 특정한 비젼이 제시되었고 비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윤의 독재와 돈의 독재에 맞서는 , 한편에는 극도의 가난과 다른 한편에는 오만한 부가 나란히 존재하는 것에 분노하는 , 경제적으로 봉건적 상태를 탈피하는 ,  진정으로 독립적인 언론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 모든 형태의 사회적 안전을 보장하는  우리가 그당시 지향했던 일련의 가치들와 성취들, 모두가 오늘날 위협당하고 있다. 최근에 결정된 많은 대책들이 레지스탕스시대의 동지들을 경악시키는데, 그것들은 우리의 기본적인 가치들을 겨냥하기 때문이다.  내생각에,  사람들은 특히 젊은이들이 분노해야 한다. 그리고 저항해야 한다!“[3].     그러나 누가 이러한 상황에 책임이 있는가? „이는 오직, 레지스탕스가 맞서 싸웠던 금권력이 지금 어느때보다 막대하고 불손하며 이기적이고 국가 최고위층까지 스며들어 자체의 이익옹호자들을 갖고 있기에 가능해 보인다. 사이 사유화된 은행들은 그들의 배당금과 매니저들의 넘쳐나는 수입만 생각하지 공익에는 관심이 없다. 빈부의 차이는 갈수록 커져가고 돈과 영향력을 향한 노력은 점점 많은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4] 헤셀에 따르면, 민주주의가 지도자들의 행동을 이끌어야 한다는데,  금융계나 은행가들의 이기주의와는 반대로 민주주의는 공중의 이해를 도모하기 때문이란다: „우리는 그들에게 말한다: '그것을 포착하고 분노하라!'라고. 정치, 경제의 책임자들, 지식인들 그리고 사회 전체는 양보해서는 안되며, 평호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현재 금융시장의 국제적 독재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5]  그러니까 이것이 공중의 극도로 성스러운 이해라는 것이다. 정치가, 경제지도자와 노동자, 실업자, 학생, 퇴직자, 비정규직을 결합하는 것이... 바꿔 말하자면, 스테판 헤셀의 민주주의는 하나의 신화이다. 그것은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마치 기적처럼 같은 눈높이로 만나는 상태를 그럴듯하게 그려낸다, 그들이 소위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가지며 금융시장의 독재에 대항해 국민들로서 동일한 민주주의적 이해를 옹호하는 그런 상태를.  그러면 모든 것은 어디로 이끄는가?

   오늘날 고민하고, 글을 쓰고 민주적으로 정부들의 선거에 참가함으로써 우리는 사정을 현명하게 ...간단히 말해서 장기적인 시야를 가지고 이끌어가길 바랄 있다.“[6] 그러면 그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어느 쪽을 지지해야 하는가? „나는 나자신을 여전히 사회주의자로, 내가 개념을 파악하는 바대로, 사회적 불평등을 의식하고 있는 사회주의자로  본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은 자극들을 받아야 한다. 용감한, 필요하다면 '건방진' 좌파가 나타나서 비중을 가지면서 국민의 자유라는 비젼을 주장하기를 나는 바란다. 녹색당이 의회에 진출해서 환경보호 사상이 진전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7] 결국 헤셀의 견해로 볼때 우리의 분노는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구호, 우리는 투표하러 가야 한다를 받아들이는 것을 초래한다. 우리는 국민저항의회(CNR)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그리고, 극좌파, 반국제화주의자, 노동조합주의자들 등등, 자본의 전반적인 이해를 충심으로 옹호하는 당과 조직등 각양각색의 모든 사람들을 포괄하는 새로운 대안적인 강령( 다른 저작으로서 간행될) 찬성해야 한단다. 다행히도, 헤셀이 특히 대상으로 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수많은 젊은이들은 모든 좌파성향의 언설에 귀기울이지 않았고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서 사회주의적 정부들이 하는 짓을 있는 충분한 기회를 가졌었다. 그들은 사회주의 정당들이 어떤 혹심한 긴축정책들을 펼수 있는지를, 게다가 정책들이 완전히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결정되는 것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경험할 있었다(이는 그리스에도 해당된다). 그리고 그들은 민주주의적 사회주의 사파테로정부의 민주적 경찰의 곤봉도 경험해보았다.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헤셀은 계속해서 정당들을 지지할 것을 주장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그로부터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서 어떤 임무들이 생겨나는가? 우리는 그들이 지배자들을 신임하거나 불신함에 있어서 기반하고 있는 가치들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가치들이다. 이러한 가치들의 도움으로 결정권자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있다.“[8]  어떤 영향력을 젊은 세대가 그들에게 그렇게 많은 비참을 강요하는 민주적 국가들에 행사할 수있는가?  아마 눈밖에 장관 한명쯤을 대체할 있을까, 그리고 그다음은? 그것을 통해 진정으로 무엇이 바뀌겠는가?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나라에서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집권하고 있는 것이 우파정부든 좌파정부든 (아니면 남아메리카에서처럼 극좌파정부든) 상관없이, 생존조건의 전반적 악화에 직면한 국민 대다수와 경제의 파산을 모면하기 위해 엄격한 긴축정책을 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국가기구사이의 골은 점점 깊어만 가고 있다. 어떤 다른 길도 없다. 국가의 민주주의적 가면뒤에 자본의 독재가 항상 도사리고 있다.

 

 

자본주의를 손대지는 말것!

 

   나의 세대는 세계혁명이라는 생각에 대해 단단한 알레르기를 갖고 있다. 약간은, 우리가 그것과 함께 태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러시아혁명의 , 1917년에 태어났고, 해는 인격의 특징이다. 나는 우리가 폭력적 혁명적 행동들을 통해서는 기성제도권을 무너뜨릴 없다는, 그렇게는 역사를 추진할 없다는 느낌을, 부당할지도 모르지만,  갖게 되었다.“[9]  약간 나중에 헤셀은 계속해서, „ 모든 사회들 속에는 고삐풀린 나타날 있는 잠재된 폭력이 존재한다. 식민지해방투쟁때가 그러한 경우이다. 폭동들, 예를 들어 노동자폭동들은 아직도 가능함을 의식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경제적 국제화의 진전을 놓고 가능성이 적다. 제르미날이라는 장르는 약간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10]

   그러니까 헤셀이 젊은 세대에게 하는 호소는 다음과 같다. 세계혁명이니 계급투쟁이니 하는생각을 머리에서 지워버려라! 모든 것은 과거사에 속한다. 오히려 체제의 기능방식을 개선하도록 노력하라. 어떻게? 여기서 헤셀은 천재적이고 혁신적인 제안, 모든 좌파정당들이 백년도 되는 동안 해온 제안을 내놓는다. , 세계의 강대국들이 함께 모인 경제회의 사회회의, 일종의 전세계조정위원회의 창립을 제안한다. 세계에서 전세계적 조정위원회가, 위기 방지를 위해 그리고 이윤욕과 권력욕에 사로잡힌 모든 거대 금융기관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 경제규제를 목표로 추구할 것이라 한다. UN 전신인 국가연맹이 1차대전후 공식적으로 거의 동일한 설립이유로 창립되었음을 상기해 보자.  설립이유는 상이한 국가들의 이해를 서로 화해시키는 국제기구의 도움으로 전쟁재발을 방지하자는 것이었다. 결과는? 2 세계대전과  1950년이래 세계에서 14일간의 평화. 사실상 세계는 서로 경쟁하는 국가들로 조각나있고 그들은 서로간에 무자비한 통상전쟁을 끊임없이 그리고 필요시에는 무기를 들고 치르고 있다.   모든 조정하는 세계기구들”(세계통상기구, 국제통화기금, UN, NATO)  안에서 국가들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강탈적인 기구들일 뿐이다.  그러나 이점을 스테판 헤셀은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하나의 새로운 체제의 필요성, 국제적인 혁명의 필요성을 시인해야만 할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이들이 이러한 착취체제 자체를 과격하게 문제시하게 되도록 이끌 출구를 제시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보낸다.  대신에 그는 각국이 새로운 사회- 경제안전보장회의 내에서 새로운 정책을 펼치도록 각각의 국가에 압력을 행사하도록 젊은이들을 고무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국가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의 대대적인 개입, 국민의 광범위한 동원이면 충분하단다. 이러한 참여는 젊은이들이 NGO들와 이런류의 다른 단체들에 대거 참여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는데,  이는 많은 도전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치뤄야할 많은 투쟁들, 환경, 사회, 반인종차별, 평화 연대적인 경제를 위한 투쟁등이 존재하기 때문이라 한다.  실제로 헤셀은 우리에게 낡은 똑같은 개량주의적 뒤범벅을 제공한다. 직접 고른 재료들(국민의 시민참여, 지적인 선거참여 등등) 가지고 자본주의는 자신이기를 착취체제이기를 멈출 있고 인간적이고 사회적일 있다는 것이다.

 

 

개량이냐 혁명이냐?

 

   역사는 이러한 도전의 댓가인 일련의 연이은 격렬한 요동들로 이루어져 있다. 사회사는 전진하고 결국에, 인간이 완전한 자유를 획득한 , 우리는 완성된 민주국가에 도달한다라고 헤셀은 그의 , „분노하라!“에서 우리에게 말한다. 인류가 도전 앞에 서있다는 것은, 그래서 모든 문제들의 해답을 찾아야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라질 것이라는 말은 맞다. 문제의 중심에는 사회변혁의 필요성이 놓여있다. 하지만 어떤 변혁? 자본주의는 개량될 있는가? 아니면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 파괴되어야 하는가?

   자본주의를 개량하려 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이를 행하려는 것은 자본주의의 규칙과 법칙들에, 인류를 비참함과 전쟁과 무질서와 야만에 빠져들게 하는 자본주의의 모순들에 굴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체제는 착취체제인데, 착취가 인간적으로 구성될 있는가?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댓가로 이윤을 만들어냄으로써 계급에게 가능한한 많은 부의 축적을 가능케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그러한 체제가 인간적으로 있는가? 그리고 자본가들 사이에 경쟁이 첨예화되면 노동자계급이 대대적인 실업,  비정규적고용상황의 확대, 노동현장에서의 무제한적인 착취, 임금인하와 같이 댓가를 치르게 되는 그러한 체제가. 동시에, 인간들이 기본요구를 충족시키고 계급없는, 불평등이 없는, 전쟁의 야만이 없는 사회를 민족국가들과 국경을 폐지함으로써 건설할 있을 모든 물질적 수단은 존재한다. 오직 노동자계급만이 그러한 사회의 전망을 실현할 수있다. 맹아는 물론 분노한 사람들운동 속에 이미 존재한다. , 서로 돕고, 서로 나누며 연대감과 헌신을 나타내고, 함께함으로써 즐거운 것등등. 스페인에서 관찰될 있는 인상적인 운동은 짚단의 불같은 일시적 흥분이 아니다. 그것은 전세계 도처에서 앞으로 일어날 투쟁들을 알린다. 노동자계급이 점점 대대적으로 나서서 다른 피압박 계층들을 함께 합류시킬 투쟁들을. 투쟁들은 비인간적인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해 점점 분명하게 나설 것이다. 그러한 투쟁들로부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커다란 의식이 생겨날 것이다.

Antoine. 2011 7 2

 

    


[1]스테판 헤셀은 스페인에서 상당히 유명하다. 적어도 프랑스에서만큼 알려져 있다.  그는 스페인에 살고 있고 스페인의 작가이자 특히 지금 진정한 민주주의를의 창시자이기도 경제학자 호세 루이 삼페드로와 친구로 지낸다. 호세 루이 삼페드로는 헤셀의 캠페인에서 영감을 얻은 팜플렛을 간행했고 분노하라“!” 스페인어판에 서문을 썼다.

[2]CNR 스테판 헤셀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준거점이고 뒤따라야할 모범이다. 우리는 나중에 이점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3]Indignez-Vous!(분노하라!) , 15

[4]같은 , 11

[5]같은 , 12

[6]Engagez-Vous(참여하라)!,  16

[7]위과 같은 43쪽과 44

[8]Engagez-Vous(참여하라)!, 22

[9]같은 , 20

[10]같은 , 21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과의 연대 – 미래는 노동자 계급에게 있다!

대중매체는 오바마의 '의기양양한' 유럽방문이나 성추행혐의로 구속된 IWF총재 도미니크 스트라우스-칸 스캔들로 가득차 있는 반면 유럽을 강타하는 진정한 지진에 관해서는 우리에게 그리 많이 알려주지 않는다. 이 지진은 스페인에 중심을 두고 있지만 그리스에 직접적인 반향을 갖고 있으며 다른 나라들에서도 일어나려 위협한다.

 

 

스페인에서의 사건들은 실업, 사파테로정부의 긴축정책 및 정치가들의 부정부패등에 대해 반항하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마드리드의 푸에르따 델 솔(태양의 문) 광장을 점거하면서 515이래 전개되고 있다. 이 사회운동은 소셜네트워크(페이스북, 트위트...)와 유튜브에 올려진 비디오들을 활용해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그라나다, 세비아, 말라가, 네온과 같은 스페인의 대도시로 들불처럼 빠르게 번져나갔다. 그리고 이런 방식을 통해서 우리는 스페인밖에서 그 운동에 대해 정보를 얻는다. 왜냐하면 부르조아 매체들은 이 사건들에 대해 상당히 많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체들이 오히려 오바마나 도미니크 스트라우스-칸이나 셔릴 콜의 여행으로 쪽으로 우리들의 관심을 돌리려 한다면, 그 이유는 스페인에서의 이러한 운동이 자본주의라는 막다른 골목에 직면한 세계노동자계급의 투쟁과 사회투쟁들의 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한 한 단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운동의 전제들

 

스페인에서 “분노한 사람들”의 운동은 연금개혁안에 대항해 일어난 2010929일의 총파업이래 무르익어왔다. 이 총파업은 노조가 정부와 협상하여 개혁안(40-50세의 현노동자들은 그들이 정년퇴직시 현재 연금수령자들보다 20% 낮은 연금을 받게되는 것)을 수용함으로써 패배로 끝났다. 이러한 패배는 노동자계급 내에 깊은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특히 노동자들의 피켓과 함께, 연대감을 표현함으로써 그 파업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했던 젊은이들 사이에서 심오한 분노를 유발했다.

 

2011년 초부터 그러한 분노는 대학들에서 날카로와지기 시작했다. 지난 3월 포르투갈에서는 '비정규직 젊은이들'이라는 그룹이 제안한 시위에 리스본에만 25만명이 모여들었다. 이 예는 스페인의 대학들에, 특히 마드리드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대다수의 학생들과 30대 미만의 젊은 이들은 시간제 일을하며 월 600유로로 살아야만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여명의 학생들이 '호베네스 신 푸투로' (미래없는 젊은이들)이라는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다. 주로 노동자계급출신인 이 가난한 학생들은 47일 시위를 소집했다. 5천명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들었고, 이렇게 처음의 동원이 성공함으로써 호베네스 신 푸투로 그룹은 515일 시위를 계획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마드리드에서 데모크라시아 레알 야(진정한 민주주의를 지금)이라는 공동체가 출현했다. 그것의 강령은 실업과 “시장의 독재”를 비판하지만 좌파도 우파도 아닌 “비정치적”임을 주장한다. 데모크라시아 레알 야 역시 다른 구역들에서 515일에 시위를 할 것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5만명의 시위대가 참가함으로써 거대한 성공을 이룬 것은 마드리드에서 였다. 처음의 의도는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서 조용히 끝나는 평화적인 행진을 하는 것이었다.

 

민중 전체에게로 번진 '미래없는' 젊은이들의 분노

 

데모크라시아 레알 야 공동체가 호소한 515일의 시위들은 굉장한 성공이었다. 그들은 일반적인 불만을, 특히 졸업과 함께 실업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의 전반적인 불만을 표출했다. 모든 것은 그곳에서 끝나게 되어있었지만 마드리드와 그라나다에서의 시위들의 끝에는 작은 '블랙 블록' 그룹들에 의해 유발된 사건들이 발생해서, 경찰 개입으로 20명이 체포되었다. 체포된 사람들은 경찰서에서 잔인하게 다뤄졌고 그 이후 이들은 경찰폭력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성명서의 공개는 즉각적으로 분노의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공권력에 대항한 연대를 확산시켰다. 전혀 알려지지 않고 조직화되지도 않은 사람들 30명이 푸에르타 델 솔광장에 캠프를 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발의는 즉시 사람들의 동감을 얻었고 이러한 예는 바르셀로나, 그라나다 및 발렌시아로 확산되었다. 경찰의 제 2차 진압은 도화선에 불을 붙혔고 그이후 중앙광장들에 점점 더 증가된 대대적인 집회들이 70개 이상의 구역들에서 개최되었다.

517, 화요일 오후에 '515일 운동'의 조직자들은 조용한 시위나 다양한 극적 퍼포먼스들을 가질 계획이었지만, 광장들에 모여든 군중들은 집회를 갖자고 소리높혀 외치기 시작했다. 저녁 8시 집회들이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및 다른 도시들에서 개최되기 시작했다. 18일 수요일부터는 참으로 이러한 집회들이쇄도하게 되었다. 모든 곳에서 집회들은 공공장소에서의 공개적인 총회의 형식을 띠었다.

 

경찰의 진압에 직면하여 그리고 시 및 지방선거를 앞두고, 데모크라시아 레알 야 공동체는 스페인의 “민주주의의 퇴행”이라는 테마를 둘러싼 논쟁을 시작했다. 그것은 프랑코체제의 붕괴이후 34년간의 “불완전한 민주주의”이후 “진정한 민주주의”를 외치며, 사회당(PSOE)과 우익 대중당에 의해 독점된 2당체제를 끝장내기 위한 선거개혁을 요구했다.

 

그러나 '분노한 자들'의 운동은 대부분 데모크라시아 레알 야의 민주주의적 개혁주의적 강령을 뛰어넘었다. 그것은 “600유로세대”의 반란으로 제한되지 않았다.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말라가, 세비아등의 점거된 광장들과 시위들에서, 플랜카드와 기치들 위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볼 수 있었다: “자본없는 민주주의!”, “PSOEPP, 다같은 쓰레기!”, “너희들이 우리들의 꿈을 방해한다면, 우리는 너희들의 잠을 방해할 것이다!” , “모든 권력을 총회로!”, “문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문제는 자본주의다!”, “일자리가 없다, 집이 없다, 두려움도 없다!”, “노동자들이여 깨어나라!”, “ 600유로, 지금 그것은 폭력이다!”

발렌시아에서 한 여성그룹은, “조부모들이 속임을 당했다, 그들의 자식들도 속임을 당했다, 그 손자손녀들도 속임을 당하게 해서는 않된다!”라고 외쳤다.

 

대중집회들은 “미래를 짊어진 무기”

 

부르조아 민주주의에서는, 선거공약을 결코 지키지 않고, 무자비하게 깊어만 가는 경제위기로 인해 요구되는 긴축계획을 그저 계속 실행하는 정치가들 사이에서 4년마다 “선택”하는 것으로 “정치 참여”는 축소된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면전에 스페인에서의 '분노한 사람들'의 운동은 공개 총회라는 노동자계급의 투쟁무기를 자생적으로 재충당했다. 모든 곳에서 대대적인 도시 집회들이 출현해서, 모든 세대, 모든 비착취사회계층들을 아우르며 수만명의 사람들을 재조직했다. 이러한 집회들에서는 누구나 발언하고, 분노를 표출하고 상이한 문제들에 대해 논쟁하고 제안들을 제시할 수 있다. 전반적인 발효라는 이러한 대기 속에서 혀가 자유로와진다. 사회 생활의 모든 측면(정치적, 문화적, 경제적...)들이 점검된다. 광장들에서 연대와 상호존중의 기운 속에서 토론된 생각들의 거대한 집단적 물결이 넘쳐났다. 몇몇 구역들에서는 “아이디어 상자들”이 설치되었는데, 여기에는 누구나 종이에 그들의 생각들을 적어서 집어넣을 수 있다. 운동 자체가 매우 지혜롭게 스스로를 조직한다.

모든 종류의 문제들에 대해 위원회들이 만들어졌고, 공권력과의 비조직화된 충돌을 방지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총회 내에서의 폭력이 금지되고, 음주도 “라 레볼루시옹 노 에스 보테이온”(대충 번역하자면, “혁명은 곤드레 만드레 만취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기치로 금지된다. 매일 청소팀들이 조직된다. 공공매점들이 식사를 제공하고, 자원봉사자들이 어린이들을 위해 보육시설을 세운다. 도서관과 “타임 뱅크”가 세워져서, 여기서 과학, 문화, 예술, 정치 및 경제 등 모든 종류의 문제들에 대해 토론이 이뤄진다. “반성의 날”들이 계획되어 있다. 모든이가 그들의 지식과 기술을 함께 나눈다.

 

표면적으로는 이러한 사색의 폭발이 아무것도 초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구체적인 제안들이나 직접적으로 실현가능한한 요구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일어나고 있는 것은 그 분명히 무엇보다도 가난에, 긴축안들에, 현사회질서에 대해 느끼는 거대한 염증이다. 그리고 동시에 사회적인 원자화를 돌파하려는, 그래서 함께 모여서 심사숙고하려는 집단적인 의지이다. 많은 환상들과 혼돈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말 속에서 그리고 플랜카드와 기치들 위에서 “혁명”이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집회들에서, 논쟁들은 다음과 같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을 제기했다:

·         민주주의의 퇴행”에 우리들을 제한해야만 하는가? 문제들의 근원이 개량될 수 없는 완전히 파괴되어야만 하는 체제인 자본주의 자체에 있지는 않는가?

·         이 운동은 선거후인 522일에 끝나야만 하는가 아니면 계속 진행되어 생존 조건들에 대한 공격, 실업, 비정규직화, 퇴출에 대항한 대대적인 투쟁으로 발전해야 하는가?

·         집회를 작업장으로, 이웃으로, 취업 사무실로, 고등학교로, 대학교로 확대해야 하지 않는가? 전반적인 투쟁을 끌어낼 역량을 가진 노동자들사이에 운동을 뿌리내려야 하지 않는가?

 

집회들에서의 논쟁들에서 두가지 경향들이 매우 분명하게 나타났다:

·         그중 하나는 비프롤레타리아 사회계층들에 의해 활성화된 보수적인 경향으로서, 자본주의 체제가 “민주주의적인 시민혁명”에 의해 개량될 수 있다는 환상을 씨뿌린다.

·         다른 하나는 프롤레타리아적 경향으로서, 자본주의 철폐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선거당일인 522일 개최된 집회들은, “설혹 선거가 분출구라 할지언정, 그것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 ”라며 운동의 계속을 결정했다. 프롤레타리아적 경향은 실업, 비정규직화, 사회적 공격들에 대항한 요구들을 제시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을 향해 나아가는” 제안들 속에서 스스로를 분명히 했다.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서는 지역들에서 “대중집회”를 조직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작업장에서, 대학교에서, 취업 사무실에서 그와 같은 것을 하자는 제안들이 이뤄졌다. 말라가, 바르셀로나 및 발렌시아에서 집회들이 사회 임금감축에 대항한 시위를 조직하는 문제가 제기되어, 발언자들 중의 한명의 표현을 빌자면, “이번에는 진짜인 ” 새로운 총파업을 제안했다.

 

스페인의 산업적 수도인 바르셀로나에서, 카탈로니아 광장의 중앙집회는 가장 과격했고, 프롤레타리아 경향에 의해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민주주의의 퇴행”이라는 환상으로부터 가장 거리가 먼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텔리포니카의 노동자들, 병원노동자들, 소방관들, 사회적 삭감에 대해 싸우는 학생들이 바르셀로나 집회에 합류해서 그것에 다른 음색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525일 카탈로니아 광장집회는 병원노동자들의 파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을 결정한 반면, 마드리드의 푸에르타 델 솔 광장 집회는 참여적이고 “수평적인” 민주주의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이웃지역에서 “대중 집회들”을 이끌어냄으로써 운동을 탈중심화할 것을 결정했다. 발렌시아에서는 시위하는 버스노동자들이 학교예산 삭감에 대항한 지역 주민들의 시위에 함께 했다. 사라고사에서는 버스 운전사들이 마찬가지로 열광적으로 집회들에 합류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분노한 사람들“이 615일까지 캠프를 유지하고 카탈로니아광장의 점거를 계속할 것을 결정했다.

 

미래는 노동자계급의 젊은 세대들의 손안에

 

이 운동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든지, 그 결과가 어떠하든지, 실업(스페인에서 20-25세 인구중 45%가 실업상태)에 직면한 젊은 세대에 의해 시작된 이 반란이 확실히 노동자계급 투쟁의 일부임은 명백하다. 계급의 국제적 운동에 대한 그것의 기여는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모든 비착취 사회계층들,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모든 세대들을 아우른 전면화된 운동이다. 비록 계급이 “대중적인” 분노의 물결의 일부였고, 대대적인 파업들과 특정한 경제적 요구들을 통해 스스로를 확언하지는 않았을 지라도, 이 운동은 여전히, 세계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의 의식의 진정한 성숙을 표현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점점 더 명백해지는 파산에 직면해 상당수의 사람들이 서유럽의 “민주주의” 나라들에서 떨쳐일어나기 시작해서 프로레타리아 투쟁의 정치화를 향해 길을 열어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운동은 그 절대다수가 비정규직 노동자이거나 실업자인 젊은이들이 노동자계급의 무기들, 즉 대대적이고 공개적인 총회들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무기들을 통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연대를 확인하고 정치적 정당들과 노동조합의 외부에서 운동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었다.

 

비록 소수 중에서 일지라도, 그 운동 내부에서 출현한, “모든 권력을 집회들로”라는 슬로건은 러시아 혁명의 옛슬로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의 리메이크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옛 동구권의 스탈린주의 체제의 붕괴 이후 부르주아 캠페인의 무게 때문에) 여전히 “공산주의”라는 단어를 두려워할 지라도, 그와는 반대로 “혁명”이라는 단어는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운동은 데모크라시아 레알 야 공동체가 주장하는 그러한 “스페인 혁명”이 결코 아니다. 착취당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실업, 비정규직화, 높은 생활비용 및 생활조건의 끊임없는 악화는 결코 스페인만의 특수성은 아니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실업이라는 어두운 얼굴은 마드리드에서와 마찬가지로 카이로에서, 파리뿐만 아니라 런던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 뿐만 아니라 아테네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이러한 하향 나선 속에서 모두 함께이다. 우리는 모두가 자본주의 사회의 부패에 직면하고 있는데, 이러한 부패는 가난과 실업에서뿐만 아니라 재앙과 전쟁의 증가 속에서도, 사회관계들의 혼란과 증대되는 도덕적 야만성(이는 무엇보다도, “3세계”와 “선진”국가들 모두에서 여성들에 대한 성적 공격과 폭행에서 표현됨)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낸다.

 

분노한 사람들”의 운동은 혁명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없는” 젊은이들에게 그리고 인류 전체에게 전망을 열어줄 수 있는 유일한 투쟁인, 세계 규모의 노동자계급투쟁의 발전에서 단지 하나의 새로운 단계이다.

푸에르타 델 솔의 독립공화국”에 관한 그 모든 환상들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새로운 사회의 지평이 낡은 사회의 내장 속에서 그 형상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스페인 지진”은, 잃을 것이 없는 노동자 계급의 신세대들이 역사라는 무대 위에서 이미 배우들로 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인류의 해방의 길을 정화할 훨씬 더 거대한 폭풍들의 선봉들이다.

인터넷, 소셜네트워크 그리고 핸드폰의 활용을 통해 이 젊은 세대는, 부르주아지와 그 매체들의 침묵을 돌파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국경을 넘어선 연대의 기초를 놓았다.

이 새로운 세대는 2003년부터 국제 사회의 무대에 등장했는데, 처음에는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에 대한 군사적 개입에 대항한 항의들(많은 나라들에서 젊은이들이 부시의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음)에서 그런 다음은 프랑스 연금개혁에 대항한 최초의 시위들에서였다. 이는 2006년 같은 나라에서 CPE에 반대하는 대학생 및 고등학생들의 대대적인 운동과 더불어 재등장했다. 그리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영국에서 수학중인 젊은이들은 자본주의가 그들에게 제공하는 절대빈곤과 실업이라는 미래에 대항하여 목소리를 높혔다.

이 “미래없는” 세대의 밀물결은 최근 튀니지와 이집트를 강타해서 벤 알리와 무바라크를 넘어뜨린 거대한 사회반란을 낳았다. 그러나 주요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부르주아지(특히 바락 오바마)가 벤 알리와 무바라크를 버리도록 강제한 결정적인 요소는 노동자 파업들의 출현과 총파업운동의 위험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이후, 타흐리르 광장은 여러 나라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젊은 세대들에게 하나의 상징이 되었고, 투쟁을 고무하는 것이 되었다. 이것을 모델로 삼아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은,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 캠프를 쳤고, 70여 구역들의 주요 광장들을 점거했으며, 모든 억압받은 사회 계층들을 집회들로 끌어들었다(바르셀로나에서는 “분노한 사람들”이 심지어 카탈로니아광장을 “플라사 타흐리르(타흐리르 광장)”으로 이름을 바꿔부르기도 했다).

스페인에서의 운동은, 사실,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서 결정화된 극적인 반란보다 훨씬 더 심오하다. 그것은 두 대륙을 잇는 다리인 이베리아 반도의 주요 국가에서 발생했다. 그 운동이 서유럽의 “민주주의”국가(게다가 “사회주의” 정부가 이끄는!)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은 튀니지에서의 “재스민 혁명”이래 매체들에 의해 전개되는 민주주의적 신비화들을 침식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데모크라시아 레알 야가 이 운동을 “스페인 혁명”이라 부를 지라도, 스페인 국기는 거의 나부끼지 않았던 반면, 타흐리르 광장은 국기가 물결쳤다.1

이 운동을 동반하는 불가피한 혼동들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오늘날 사회투쟁들의 사슬에서 하나의 매우 중요한 연결점이다. 자본주의의 세계적 위기의 악화와 더불어 이러한 사회운동들은 점점 더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과 만나게 되고 그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이 “분노한” 세대에 의한 용기와 결단과 깊은 연대감은 다른 세계가 가능함을, 세계 인류공동체의 통일인 공산주의가 가능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인류의 이 오랜 꿈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사회의 모든 부의 본질적인 것들을 생산하는 계급인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의 모든 공격들에 대항해 대대적인 투쟁들을 전개함으로써 그 계급 정체성을 재발견해야 한다.

분노한 사람들”의 운동은 다시 한번 혁명의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의 타도를 목표로, 운동에 분명한 계급적 방향을 부여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달려있다. 상품생산과 이윤에 기반한 이 착취체제를 무너뜨린 그 폐허 위에서만 새로운 세대들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고, 진정 보편적인 “민주주의”를 성취하고 인류에게 존엄성을 회복시킬 수 있다.

Sofiane, 2011527

 

 

1반면에, 우리는 “세계 혁명”을 요구하며 국경을 넘은 운동의 “확대”를 주장하는 슬로건들도 보았다. 모든 집회들에서 “국제”위원회가 하나씩 만들어졌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대도시들에서, 심지어 도쿄, 프롬펜과 하노이에서 연대 시위를 볼 수 있었다.

 

ICConline - 2012

ICConline 2012

2011년: 분노에서 희망으로

년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자본주의 세계위기의 첨예화 그리고 튀니지, 이집트, 스페인 그리스, 이스라엘, 칠레, 미국, 영국에서의 사회운동들이다.(1)

 

국제적인 차원의 분노

자본주의의 위기의 결과들은 세계인구의 절대다수에게 매우 혹독하다. 생활조건들이 악화되고, 실업은 점점 양상을 띠고 지속기간 또한 길어저서, 최소한의 안정성도 기대할 없는 비정규직화가 점점 깊이 잠식하고 있다. 극도의 가난과 굶주림이 만연한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안정적이고 정상적인삶의 가능성이 그리고우리 아이들을 위한 미래 가능성이 사라져가는 것을 근심어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이는 심각한 분노를 야기했고 수동성을 돌파하고 광장과 거리들을 점거하려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지난 5 이래 극도로 첨예화된 위기의 원인들에 관한 문제들을 토론하려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러한 분노는 은행가들과 정치가들 그리고 기타의 자본가계급 대표자들이 명백히 드러낸 오만과 소유욕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한층 격화되었다. 그러나 심각한 사회문제들에 대해 정부들이 보여준 무능력으로 인해서도. 정부들의 대책들은  어떤 해답도 제시하지 못한 오직 빈곤과 실업만을 심화시키고 있다.

분노한 사람들의 운동은 국제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사회주의적 정부가 최초의 혹독한 긴축정책을 펼치려 안간힘을 쓰던 스페인에서 시작되었다. 그런 다음 부채위기의 상징인 그리스에서, 세계자본주의의 전당인 미국에서, 근동의 가장 극심하고 가장 오랜 제국주의적 충돌의 인접국가들인 이집트와 이스라엘에서.  특히 이집트에서는 아랍의 봄이후 운동의 새로운 동력으로 작용했다.

이것이 세계적인 운동이라는 의식은, 민족주의의 파괴적인 무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와 이집트, 그리고 미국에서 국기를 흔들었던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널리 확산되었다. 스페인에서는 그리스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가 다음과 같은 슬로건들로 표현되었다. „아테네여 견뎌라, 마드리드가 떨쳐 일어난다!“  2011 11 미국 오클랜드에서 파업노동자들은전세계의 점거(Occupy)운동과의 연대 외쳤다. 이집트에서는 미국의 운동에 대한 카이로의 연대선언이 의결되었다. 이스라엘에서는네탄야후, 무바라크, 아사드는 모두 똑같은 도당들이라고 외쳐졌고 팔레스타인의 노동자들과 연락을 취했다.

현재로서는 투쟁들의 최절정이 지난 상태이다. 그리고 비록 새로운 투쟁들의 증후들이 스페인과 그리스와 멕시코등에서 있긴 하지만, 많은 이들은 다음과 같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분노의 저항물결이 무슨 소용이 있었는가?“, „우리가 무언가를 얻었는가?“

운동의 긍정적인  측면들뿐만 아니라 약점과 한계 또한 알아보기 위해서 대차대조를 통한 결산을 해볼 필요가 있다.

광장을 점거하자“ – 운동의 공통된 슬로건

그처럼 광범위하고 다양한 주도성들은, 자체의 이해를 모도하며 우리를 통제하는 환상과 혼란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서 거리와 광장을 점거하는 같은 주도성들은 지난 30여년 이래 처음이었다.

패배한, 무관심하고 무기력한사람들로 표현되었던 사람들, 노동자들, 착취당하는 자들, ‚주도성을 발휘하고 무언가를 함께 이뤄내기에는 무능한 그자들이 결집하고 공동으로 주도성을 발휘해서 체제의 일상성이 우리에게 부과한 수동성을 깨뜨릴 있었다.

이는 우리의 기운을 북돋웠고, 우리 자신의 능력들에 대한 자신감을 강화시켰다. 우리는 대중의 공동 행동이 발산하는 권력을 발견했다. 사회적인 분위기가 바꼈다. 공공의 주제들에 대한 정치가와 전문가와대지도자들의 독점이 서서히, 스스로 발언하기를 원하는 수많은 무명인들에 의해 의문시되었다.(2)

확실히 이는 여전히 쉽게 부서져버릴 모르는 여린 출발점이다.  환상, 혼란,  기운의 불가피한 기복, 억압, 탄압력들과 자본주의 국가들이 우리를 유인하려는 위험한 함정들 ( 선두에 좌파정당과 노동조합들이 있는) 반동과 쓰디쓴 패배를 야기할 것이다. 우리는 길고 험난한 앞에 있다. 난관으로 가득찬 하지만 승리의 보장이 없는.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첫번째 승리이다.

 집회운동의 심장

집회들은 단지 불만들을 표출하는 수동적인 태도에 스스로를 국한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집회들 속에서 조직한다는 능동적인 태도가 발전했다. 다양한 집회들은 1864년의 1 인터네셔널(국제노동자연합) 주요이념, ,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들 스스로의 일이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렇게 해서, 파리콤뮨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1905년과 1917 러시아에서 최고조에 도달했으며 1918 독일에서 그리고  1919년과 1956 헝거리에서, 그런 다음 1980 폴란드로 이어져 노동자계급의 이러한 전통이 계속된다. 

총회와 노동자평의회는 노동자투쟁의 진정한 조직형식이며 새로운 사회 조직형식의 핵심이다.

총회들을 통해 우리는 대대적으로 결합하고, 우리를 임금노예제에 얽매고 있는 사슬들을 파괴하며, 파편화, 각자 살궁리만 하는 폐기하고, 제각각의 영역들이나 사회적 범주들의 게토 속으로의 고립을 극복하는 것을 도모할 있다.

총회들을 통해 우리는 공동으로 고민하고, 토론하며 결정하는 것을 도모할 있다. 이루어진 결정들에 대해 집단적으로 책임을 지며, 결정과 실행에 모두가 참여할 있다.

총회들을 통해 우리는 투쟁의 추진에 필수 불가결할 뿐만 아니라 미래의 계급과 착취없는 사회의 기둥 역할을 상호신뢰와 전반적인 공감과 연대를 만들어갈 있다.

2011년에 폭발적인 전정한 연대가 있었는데, 이는 지배계급이 설교하는 위선적이고 이기적인연대와는 전혀 무관하다. 예를 들어, 마드리드에서는 체포된 사람들의 방면을 위하거나 경찰이 난민들을 체포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시위들이 있었다. 또한 스페인과 그리스 그리고 미국에서는 주거장소로부터의 강제이주를 막기 위한 대대적인 회합들이 있었다. 미국 켈리포니아의 오클랜드에서는, „파업집회에서 다른 작업장들로 파업파괴저지원파견이 결정했고, 직원들이나 학생들을 11 2일의 총파업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처벌한 작업장이나 대학을 점거할 것이 결정되었다. “  또한, 비록 아주 간헐적이고 짧게 지속되긴 했어도,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가진 동지들에 의해 지지되고 보호된다는 느낌을 함께 느꼈던 순간들이 있었고, 이는 불안감과 무방비상태와 가망없음이 지배적인 사회의정상적인 상태와는 전적으로 정반대였다.     

 논쟁문화는 미래을 밝히는 능불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세계를 변혁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의식은 우리가 계몽된 지도자의 말을 귀기울여 듣거나 그의 지침들을 따른다고 해서 도달될 없다. 오히려 대대적인 논쟁에 의해 동반되고 그러한 논쟁으로 이끌어지는 투쟁들을 경험함으로써 발생한다. 예전의 투쟁경험이 참작되지만 또한 시선은 앞에 놓인 미래를 향하게 됨으로써 이뤄진다. 이는 스페인에서, „혁명없이는 어떤 미래도 없을 것이다 같은 슬로건들로 표현되었다.

논쟁문화, 상호존중과 경청에 기반한  공개토론은 총회 안에서 싹트기 시작할 뿐만 아니라 주변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동도서관과 소모임과 회합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많지 않은 기술적인 설비로 수많은 인문적 활동들이 크다란 즉흥적 창의력을 바탕으로 거리와 광장들에서 시작되었다.  총회들에서 그렇듯이 이는 노동자운동의 이전 경험들로의 재연결을 의미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억압되어 있던 지식열이 혁명 속에서 격렬하게 분출되어 나왔다. 스몰리대학으로부터만도 6개월동안 매일 수톤에 달하는 트럭의 책들이 지방으로 보내졌다.  러시아는 뜨거운 모래가 물을 빨아들이 듯이 물릴줄 모르게 모든 읽을 거리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그렇게 삼키듯 읽힌 책들은 우화집들이 아니었다, 거짓된 역사책도  지루한 종교책도 아니였다, 풍기문란을 유발하는 소설책도 아니였다.  그것은 사회 경제 이론들, 철학서들, 톨스토이와 고골과 고리키의 책들이었다…“( 리드,“ 세계를 뒤흔든 10“, 1)

성공모델 위해 투쟁하는 듯하지만 자꾸 수백만번 실패하는 사회의 문화에 대해서, 지배 이데올로기와 매체가 우리에게 주입시키려드는  소외된 전형들과 위조에 대항해서, 수천의 사람들이 자체의 비판적이고 독립적인 척도를 제시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그들 스스로가 담지하는 전정한 민중문화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이러면서 위기와 뿌리, 은행의 역할 등과 같은 주제들이 다뤄졌다. 마찬가지로 혁명에 대해서 토론되었는데, 이때 문제에 대한 모든 가능한 견해들이 출현했는데, 이는 많은 혼란들을 표현했다.  민주주의와 독재에 대해서도 논의되었다. 그렇게 해서 상호보완적인 다음과 같은 문구들이 출현했다. „그들은 그것을 민주주의라 부르지만 그것은 전혀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독재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 계략과 거짓과 모호함, 지배계급의 정치를 특징짓는 짓거리들의 세계와는 전혀 무관한, 다수의 진정한 정치가 시작되기 위한 최초의 발걸음이 내디뎌졌다. 이러한 접근법에서, 경제나 정치분야뿐만 아니라 환경파괴나 윤리, 문화, 교육, 건강부문등 우리와 관련된 모든 주제들이 모두 다뤄진다.       

 미래는 노동자계급의 손에 놓여있다

지금까지 서술된 것과 같은 2011년의 운동의 전개가 해를 희망의 시작의 해로 만든다면,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운동들의 매우 크다란  한계와 약점들을 인식하기 위해 진지하고 혜안적이며 비판적인 시선을 운동들에 던질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가  낡은 체계임을 그리고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본주의가 극복되어야   전세계의 점점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는 반면, 많은 이들은 여전히 자본주의를 한줌의“ (가차없음, 금융상어, 비정한 독재자들 )으로 환원시킨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전체적으로 심원하게 변혁되어야만 하는 복잡한 사회관계망이다.  다양한 현상들 (금융, 투기, 정치경제계 지도자들의 부정부패) 인해 혼돈에 빠져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힘을 허비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든 구멍들을 통해 휘몰아쳐 나오는 폭력(억압, 테러와 테러리즘, 윤리적 야만) 마땅이 거부되어야 하지만, 체제가 오직시민들 평화로운 압력만으로 척결될 있을거라고 믿어서는 안된다. 소수일 밖에 없는 지배계급은 그들의 권력을 순순히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4년이나 5년마다 있는 선거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국가의 배후에 있다. 결코 지키지않을 공약을 내세우고 예고하지 않은 일들을 처리해버리는 정당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지배계급의 다른 기둥들은  기상을 저하시키기위해 노동자들을 동원하고 지배계급이 서명하라고 내놓는 모든 것에 서명하는 노조이다. 오직 대대적이고 집요하며 끈질긴 투쟁만이, 국가의 존재를 떠받치고 있는 억압수단을 파괴하는데 필수적인 힘을 착취받는 사람들에게 제공할 있다. 오직 그렇게만 그들은 스페인에서 항상 다시 등장하는 슬로건, „모든 권력을 총회로  실현할 있다.

비록 미국의 점거(occupy)운동에서 그렇게 인기가 있었던 슬로건우리가 99%(상위의 소수 1% 대비해서)“ 통해,  사람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깊은 계급격차들을 서서히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긴 할지라도, 저항운동 참가자 대부분은 스스로를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 사는 사회에서 인정받기를 원하는아래로부터의 시민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는 계급들로 나누어져 있다. 편에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는 자본가계급이, 다른 한편에는 모든 것을 생산하지만 점점 빈곤해져가는 착취받는 계급, 노동자계급이 존재한다. 사회발전의 동력은 대다수 시민의 결정이라는 민주주의 놀음 ( 놀음은 오히려 지배계급의 독재를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가면에 다름 아님) 아니다, 그것은 계급투쟁이다.

사회운동은  가장 중요한 착취받는 계급,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참조점으로 하여 수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계급은 함께 사회의 주요한 부를 생산하고, 공장, 병원, 학교와 유치원, 대학들, 사무실, 항구, 건설산업, 운송 우편등  사회생활이 기능하도록 담보한다. 2011년의 몇몇 운동들에서 힘이 싹틈을 예감할 있었다.  이집트에서 분출해서 무바라크의 퇴진을 결과시킨 투쟁물결.  미국 켈리포니아의 오클랜드에서 점거자들은 총파업을 외쳤고, 항만이 마비되었으며 항구의 종사자들과 화물차운전자들에게 능동적인 지원이 요구되었다. 런던에서는 파업중의 전기기사들과 세인트 성당의 점거자들이 공동의 행동을 위해 함께 모였다. 스페인에서는 광장 집회들에서 투쟁중인 특정 영역들을 단합시키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현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과 자본주의사회의 억압에 고통받는 사회계층들의 근본적 욕구들사이에는 어떤 대립도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결코 이기적인 운동이 아니라, 오히려엄청난 다수의 이해를 위한 엄청난 다수의 자립적인 운동 기초이다. (공산주의 선언, MEW, 4, 472)

현재의 운동은 2백년간의 노동자투쟁의 경험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여 교훈을 얻음으로써 이전의 투쟁들과 해방시도들로부터 배울 있다. 길은 기나 길고 장해물로 가득차 있다. 그로부터 스페인에서 항상 다시 들리는 슬로건이 생겨났다. , „우리가 천천히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길이 것이다(No es que vamos despacio, es que vamos muy lejos)“   우리는 집요하게 새로운 운동을 준비하기 위해서  어떤 염려나 두려움 없이 가능한한 광범위하고 깊이 있게 논쟁해야 한다.  오직 그렇게만이 자본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를 위한 기초가 세워질 있다.

2012 3 12

ICC  

 

(1)    인터네셔널리뷰 148호의 , „경제위기는 끝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체계의 종말을 그리고 세로운 세계를 위한 토쟁을 고시한다참조. 체계의 세계적 위기와 연관되어 후쿠시마사태는 인류가 직면한 거대한 위험들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2)    시사잡지 타임(The Times) „2011년의 인물분노한 자들운동의 참가자들을 선택한 것은 시사하는 점이 많다.

             

      

 

 

               

 

 

 

애국의 서커스

:ICC

번역: 사노신(http://sanosin.jinbo.net)

[국제],[ 번역]

애국의 서커스

2012 런던 올림픽이 한창이다. 이에 따라 한국의 모든 언론들 역시 올림픽 메달 소식과 오심 소식을 전하느라 바쁘다. 사람들의 시선이 올림픽에 집중되어 있는 동안컨택터스라는 경비업체는 SJM 노동자들에게 극도의 폭력을 가했고 사실을 보도한 언론은 많지 않았다. 올림픽 이슈가 다른 중요한 사안들을 덮어버리는 일은 한국에서만의 일은 아닌 같다. 올림픽이 진행 중인 영국도 예외가 아니다. 이에 사노신은 ICC(국제공산주의흐름) 런던올림픽과 관련한 기사를 번역해서 싣는다. 기사는 2012 6 12일에 작성되었다.

기사의 내용은 본지의 입장과 다를 있습니다.

2012 런던 올림픽이 한창이다. 이에 따라 한국의 모든 언론들 역시 올림픽 메달 소식과 오심 소식을 전하느라 바쁘다. 사람들의 시선이 올림픽에 집중되어 있는 동안컨택터스라는 경비업체는 SJM 노동자들에게 극도의 폭력을 가했고 사실을 보도한 언론은 많지 않았다. 올림픽 이슈가 다른 중요한 사안들을 덮어버리는 일은 한국에서만의 일은 아닌 같다. 올림픽이 진행 중인 영국도 예외가 아니다. 이에 사노신은 ICC(국제공산주의흐름) 런던올림픽과 관련한 기사를 번역해서 싣는다. 기사는 2012 6 12일에 작성되었다.

기사의 내용은 본지의 입장과 다를 있습니다.

지난 , 영국 지배계급은 우리로 하여금 국수주의와 애국심, 영국인의 자부심이라는 진흙탕에 시달리게 하고 있다. 지배계급은 영국 국기와 잉글랜드의 기장을 우리의 머릿속에 쑤셔 넣고 있다. 언론, 신문, TV 라디오는 순간도 멈추지 않고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했다. , 지위, 계급과 상관없이 우리는 영국인임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캠페인(부르주아지가 짜놓은 캠페인) 지금까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각기 다른 이벤트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참가했다. 여왕즉위 60주년 행사에는 수억 파운드가 지출되었고 수십억 파운드가 올림픽 개최에 소요되었다.

여왕즉위 60주년 행사를 위해 여왕은 가두행진을 했다. 거리에서의 파티와 깃발의 물결, 특히 아이들이 흔드는 깃발에 대한 언론의 보도 세례가 이어졌다. 모든 것은 1952년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행사는 자애로운 여왕 폐하가 인기 스타들이 총출동하는 콘서트 장소로 버킹검 궁을 개방한 것에서 절정을 이뤘다. 즉위 60주년 행사 직후에는 유로 2012 축구경기가 열렸다. 분위기를 띄우려는 사람들은 응원 복장을 했고우리는 하나의 팀을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나라를 응원하는 이라는 광고캠페인이 울려 퍼졌다. 우리 영국인들은 영국 팀이 틀림없이 패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역경에 맞서 단결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패배하는 역시영국적 특성임을 알고 있다.) 이제 우리는 올림픽준비 기간 동안 영국 전역을 도는 성화 봉송과 함께 번째 애국심의 향연을 준비하고 있다.

서커스의 이면의 현실은 때때로 검열된 채로 보도된다. 번째로 일군의 실업자들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로열 플로틸라(템즈강에서 벌어지는 선박 퍼레이드) 행사 당일, 관객들을 상대하는 스태프를 하기 위해 런던으로 버스를 타고 실업자들에 대한 논란이었다. 이들은 적절한 숙소와 보호장비는 고사하고 식사(당연히 임금 역시)조차 제공받지 못했다. 근로복지제도 그와 유사한 제도를 통해 노예노동과도 같은 조건에서 일하는 실업자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건보다 명백히 보여주는 고발은 없을 것이다.

(여왕의) 세습된 부와 지위를 축하하는 거창한 행사 이후, 6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권리의 문화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연설을 통해 그는 복지수당을 받으면서 많은 자녀를 사람들을 비난하면서 사회보장예산개혁 번째 국면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마련했다. 카메론 총리는 25 미만인 사람들에 대한 주택보조금 지급 중단, 실업수당을 받을 있는 기한 축소, 다자녀 가구에 대한 보조금 지급 제한을 골자로 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캐머런 총리에 따르면권리의 문화 심각한 사회 분열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듣자하니 그런 분열은 상층의권리를 가진극소수와 점점 늘어나는 하층의 대중들 사이의 물질적 격차로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캐머런이 말한바람직하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 그들의 노동에 기대어 무임승차하는 복지수혜자 사이에 진짜 분열이 존재한다고 한다. 노동계급 내부의 고용된 사람과 고용되지 못한 집단 분열이라는 것이다.

계급투쟁이 축제를 망치다

그러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거대한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맑스가 말한 역사의노련한 두더지(Old mole)’ 계급투쟁은 사라지지 않았다. 6, 에식스 주의 코리튼 정유공장(2007년에 페트로플러스 소유가 되었으나 페트로플러스가 파산신청을 하면서 앞날이 불투명해졌다.-역주)에서는 피켓시위 경찰과의 전투가 진행되었다. 180명의 노동자들은 스위스 기업인 페트로플러스(유럽최대의 정유업체-역주)로부터 정리해고될 예정이었다. 투쟁에 린지 지역(영국 중동부의 링컨셔 내의 지역-역주) 그레인지머스(스코틀랜드 중부의 Forth () 면한 도시-역주) 있는 공장 노동자도 함께했다.

6 에섹스에서는 소방관들의 파업도 벌어졌다. 소방당국의 현장대응 서비스(frontline service) 축소에 반대하는 투쟁 과정에서 5차례로 예정된 파업 계획 번째 파업을 진행한 것이다. (에섹스 소방관들은 10월까지 1시간~24시간의 파업을 다섯 차례 벌일 것이라고 발표했다.-역주)

우리는 런던 버스의 하루 파업으로 인해 33 도로가 정체된 것을 보았다. 버스회사 직원들은 올림픽 기간 동안의 보너스를 요구하며 하루 파업을 하고 있었다. 런던 지하철 기관사 역시 올림픽 기간 동안의 보너스 지급을 요구하며 투쟁을 하고 있었다.

런던 버스 운전사들이 파업한 , 바로 그날에 의사들은 연금과 관련하여 전국적인쟁의 행위 벌였다. 흔히 없는 풍경이었다.

이러한 투쟁은 모두 작고 고립돼 있으며 노동조합이 강화해 놓은 단사주의적인 전망이 득세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투쟁은 여전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투쟁들이 우리 모두를조국으로 포섭하려는 대대적인 캠페인에 직면하여 벌여졌기 때문이다. 이런 투쟁이 발생한 자체가 우리가 계급, 중에서도 노동계급에 속해있다는 증거다. 노동계급이란 정의상 국제적일 수밖에 없다. 세계 어디에서나 노동계급은 똑같은 착취의 체제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체제는 현재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고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의 노동계급과 같은 정도의 위기에 휩싸이게 것이다. 지배계급은 국익을 위해 커다란 희생을 감수할 것을 우리에게 기대할 것이다. 사실 그들은 이미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맞서 우리는 오로지 계급투쟁, 우리의 계급정체성, 계급의식만을 믿을 있을 뿐이다.

 

 

 

 

이일재 동지에게 존경을 표하며

이일재 동지에게 존경을 표하며

 

 

 

국제공산주의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2012 75

 

 

우리는 한국 좌익공산주의 그룹의 투사 이일재 동지가 병원에서 89세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에 잠겼다. 그는 1923 대구 출생이다. 대구는 현재 남한의 도시지만, 당시에는 조선의 역사적 이름을 갖는 곳이었다. 당시 한국 전역은 원자재와 농업의 풍부한 값어치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였으며,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노력을 지원하는 운명이었다. 일본의 공식적인 정책은 한국 문화를 우민화하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일본어를 배워야 했고, 그래서 이일재는 일본어에 유창했다.

전쟁 와중에, 스무 살이 안된 이일재는 이미 노동자 투쟁에 참가하고 있었다. 1945 8 일본 점령군의 철수로, 한국은 혼란이 줄어들면서, 도처에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생산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일재 동지는 노동자평의회 (전평 혹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설명한다. 비록 시대적 조건 때문이지만, 그러한 평의회들은 전쟁으로 와해된 나라에서 기본 생활필수품 생산 보다 많이 생산하기는 불가능 했다.

이일재는 1946 9 공산당에 가입하고, 같은 대구에서 발발한 총파업 투쟁을 이끄는 중요한 구성원이 된다. 점령군 당국이 노동자 투쟁을 진압하면서, 이일재는 남한 빨치산 투쟁에 참가하면서, 1950 다리에 총상을 입는다.

1968 박정희 독재 하에서도 이일재는 지속적인 정치 활동을 하는데, 때문에 체포되고 종신형을 선고 받는다. 투옥 기간 중에 그는 건강에 씻을 없는 피해를 받는데, 그의 얼굴에는 옥중 고문과 고통의 흔적이 여전히 담겨있다. 이일재는 1988 가석방된다. 가석방이 대구에서 즉각적인 그의 정치 활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97 이일재는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된다.

1946년에 청년 노동자가 공산당에 가입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동지 대부분이 의심할 없이 어떠한 용기와 신실함으로 있었을지라도, 그때 한국 전쟁 말기에, 한국의 당은 사실상 러시아와 중국 제국주의의 수단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특히 기괴하고 야만적인 스탈린주의 캐리커쳐였다. 가족의 세습독재였다.

그의 속에 남은 모든 것들을 우리는 애도의 글에 모두 담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역사는 나쁜 원인들의 영향으로 영웅주의로 가득 있다. 그러나 이일재는 80세에 가까웠을 때에도 일생의 투쟁에 의문을 던질 있는 실로 대단한 존재였다. 2002 그는 사회주의정치연합(the Socialist Political Alliance) 활동가가 된다. 새롭게 결성된 단체는 좌익공산주의의 이념을 한국에 소개하고 있었다. ICC 대표단이 2006 8 사회주의정치연합이 조직한 국제 마르크스주의자 대회 참석하기 위해 내한했을 당시, 우리는 이일재 동지를 만났다. 국제 마르크스주의자 대회 토론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문제 - 특히 노동자 투쟁을 위한 조직형태로서 노동조합의 재건이 가능하다-에서 이일재 동지와 의견이 달랐다. 우리는 진정한 국제주의자로서 문제를 분명히 했다. 무엇보다 북한 문제에 대해서, 그는 혐오스러운 정권이라며 어떤 지지도 거부했다.

이듬 (2007), 이일재 동지와 토론할 , 그는 무엇보다 가지 문제에 관심을 표명했다. 첫째는 노동계급의 국제적 단결이고 둘째는 한국에서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한국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방글라데시와 필리핀 이주 노동자들 간의 장벽을 허무는 것이었다. 이일재 동지는 노동조합 조직형태를 이용하는 희망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지만, 둘째 문제 때문에 그가 생각했던 노조와 단절했다. 이일재 동지는 2007 국제공산주의흐름 (ICC) 17 대회에 참석했다. 2008년에는 ICC 대표단과 일본에 동행하기를 희망했다. 애석하게도 그는 악화된 건강 때문에 일본에 가지 못했다.

이일재 동지는 프롤레타리아 대의를 향한 불굴의 투사였으며, 그의 정신은 고난과 투옥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남아있다.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국제주의자로 남아있었다. 이일재 동지는 지난 세월 역경과 투쟁을 통해 지키고자 했던 이념에 질문을 던지면서, 진실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도덕적 용기를 지녔다. 노동계급은 이일재 동지를 잃고서 빈곤해졌지만, 그의 삶의 본보기로 풍부해졌다.

 

 

 

자본주의를 민주화할 것인가 아니면 파괴할 것인가?

‘자본주의를 민주화하자'라는 슬로건이 세인트 파울성당의 점거시 텐트시티 유니버시티 측에서 나타나서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결국은 그 기치가 내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세인트 파울성당, UBS 그리고 다른 모든 곳에서의 점거들이 현사회체제에 불만을 갖고 대안을 모색하는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풍요로운 토론공간을 제공했음을 보여준다. ‘자본주의를 민주화하는 것'은 실제적인 옵션은 아니지만, 점거운동과 그로 인해 생겨난 회합들에 참가하는 많은 사람들의 시각을 반영한다. 부자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도록 만든다면, 은행가들이 보너스를 포기한다면, 금융시장들이 더 잘 통제된다면 또는 국가가 좀더 직접적으로 경제의 운영에 관여한다면 자본주의가 더 인간적으로 되도록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이러한 생각은 반복해서 제기되어왔다.

그러나 자본의 정치가들로부터 유래하는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자본주의가 무엇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알아보는 것을 방해하려는 공허한 잡담, 연막에 불과하다.

자본주의는 사사로운 개인들에 의한 부의 소유로 축소될 수 없다. 그것은 단순히, 훨씬 적은 노력에 비해 훨씬 많은 보상을 받는 은행가나 부유한 엘리트들의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인류문명사에서 한 단계 전체이다. 소수에 의한 다수의 착취에 기반한 일련의 사회들 중에서 마지막 사회이다. 모든 생산이 시장에서 이윤실현욕구에 의해 추동되는 최초의 인류 사회이다. 그래서 모든 피착취자들이 그들의 노동할 능력,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자들에게 팔아야하는 최초의 계급으로 양분된 사회이다. 봉건사회에서 농노들이 그들의 노동이나 생산물을 영주에게 직접적으로 받치도록 무력적으로 강제당했던 반면, 자본주의에서 우리의 노동시간은 더 교묘하게 임금체제를 통해 우리들로부터 뽑아내진다.

그래서, 착취자들이 사적인 보스들로서 조직되어 있건 아니면 중국이나 북한에서와 같이 ‘공산당' 관리들로 조직되어있건 전혀 차이가 없다. 임노동이,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맑스가 썼듯이, "자본은 임노동을 전제로 한다. 임노동은 자본을 전제로 한다"(임노동과 자본)

자본은, 그 본질에 있어서 임노동자계급(실업은 이 계급의 조건의 일부이기에 실업자를 포함)과 착취계급사이의 사회관계이다. 자본은 노동자들에 의해 생산된 소외된 부 - 그들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그들에 대항해 무자비한 적으로서 마주선 힘 - 이다.

자본주의는 위기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자들이 이러한 조정을 통해 이득을 보는 반면 그것을 진정으로 통제하지는 못한다. 자본은 궁극적으로 자본가들의 손에서 빠져나가고 그들을 지배하는 일반적인 힘이다. 이때문에 바로 자본주의의 역사가 경제위기의 역사이다. 20세기초 자본주의가 세계적인 체제가 된 이래, 이 위기는 세계대전의 형태로든 세계대공항의 형태로든 간에 다소 영구적으로 되어버렸다.

그리고 지배계급과 그것의 국가가 어떤 경제정책을 시도하든, 케인즈주의든, 스탈린주의 또는 국가를 등에 업은 ‘신자유주의'든 간에, 이 위기는 더 심화되고 해결이 더 불가능해졌을 뿐이다. 경제의 막다른 골목으로 인해 절망에 내몰린 채, 지배계급의 상이한 분파들과 이러한 분파들이 조직된 여러 민족국가들은 무자비한 경쟁, 군사적 충돌 그리고 환경파괴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고, 이로 인해 그들은 이윤과 전략적 잇점의 사냥에서 점점 덜 ‘도덕적'으로 되고 점점 더 ‘약탈자'의 면모를 띨 수 밖에 없다.

자본계급은 침몰하는 선박의 선장이다. 지구에 대한 그것의 명령권을 박탈할 필요성이 이렇게 절박한 적은 결코 없었다.

그러나 인간의 소외에서 그 최극점인 이 체제는 또한 새롭고 진정으로 인간적인 사회의 가능성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변모시켜 모두의 이득을 위해 사용될 수 있는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켰다. 그래서 화폐나 시장의 매개없이 직접적으로 소비를 위해 조정될 수 있는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세계를 통합했거나 적어도 그 진정한 통합을 위한 전제들을 마련했다. 그래서 전 체계안에서 민족국가들을 그들간의 끊임없는 전쟁들과 함께 제거하는 것이 실행가능하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세계인류공동체라는 오랜 꿈을 필요성이자 가능성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를 공산주의라 부른다.

피착취계급, 즉 임노동계급은 그것이 맞서있는 현체제에 관한 환상들에 빠져드는데 어떤 관심도 없다. 그것은 잠재적으로 이 사회의 무덤을 파는 자이자 새로운 사회의 건설자이다. 자본을 개량하거나 ‘민주화'하는 것에 대한 생각들은 이러한 선명성에 많은 장해물들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자본주의를 더 인간적으로 만드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은 오늘날 민주주의를 찬성한다고 주장하고 사회가 더 민주주의적으로 되기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관념을 그것의 액면가대로 받아들일 수 없고,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어떤 추상적인 관념으로 생각한다.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에도 역사가 있다. 정치체제의 하나로서의 고대 아테네에서의 민주주의는 노예제 그리고 여성배제와 공존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하에서 의회민주주의는 경제적인 부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사고 (그리고 투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도구들까지도 독식한 소수에 의한 권력독점과 공존할 수 있다.

자본주의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사회를 반영하는데, 이는 다시 우리 모두를 시장에서 경쟁하는 고립된 경제단위들로 만들어버린다. 이론상으로 우리 모두는 동등한 여건에서 경쟁하지만, 실제로는 부가 점점 더 소수의 손안에 집중된다. 우리는 개개 시민으로서 투표소에 들어갈 때 고립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실제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것으로부터도 거리가 멀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스페인, 그리스 및 미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점거와 공공집회운동으로 활성화된 논쟁들에서 두가지 입장들사이에서 다소 지속적인 대립이 있어 왔다. 한편으로 현체제를 좀 더 민주적으로 만드는 것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무바라크와 같은 폭군을 제거하고 의회제도를 도입하거나 또는 기성의 정당들에 압력을 행사해서 그들이 거리의 요구들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게 만든다는 목표에서 멈춰버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비록 지금 소수이긴 하지만,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집회들에서 스스로를 직접적으로 조직할 수 있다면 왜 의회가 필요한가? 의회선거가 뭔가를 바꿀 수 있는가? 우리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도록 공공광장에서뿐만 아니라 들판에서, 공장에서, 작업장에서 집회와 같은 형식들을 사용할 수는 없을까?

이러한 논쟁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1차 세계대전 말 러시아혁명과 독일혁명 당시에 있었던 논쟁들을 반향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전쟁터에서 수백만을 살육함으로써 인류를 위해 유용한 역할을 해내기를 멈췄음을 이미 보여주었고, 이 체제에 대항해 수백만이 일어났었다. 그러나 어떤이들은 그 혁명들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상 더 나아가서는 안된다고 말했던 반면, 그 당시 당상수에 달했던 다른 이들은 의회는 지배계급에 속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집회를, 즉 공장위원회들을, 소비에트들(선출되고 소환될 수 있는 파견위원들 가진 총회에 기반한 조직들)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 조직들이 권력을 잡게 될 것이라고 그러면 그 권력은 우리의 손안에 남아 있을 수 있고 이는 사회의 완전한 재조직화의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혁명들이 고립과 내전 그리고 내부 퇴행으로 인해 파괴되기 전 아주 잠깐 동안, 노동자계급의 기관, 소비에트는 러시아에서 권력을 장악했다.

그것은 인류에게 전대미문의 희망의 순간이었다. 그것이 패배당했다는 사실이 우리를 막을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패배로부터 그리고 과거의 실수로 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민주화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괴물같고 파괴적인 힘이어서 우리가 그것을 파괴하지 않은 다면 세계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괴물을 자본주의 자체의 제도들을 이용해서 제거할 수 없다. 우리는 새로운 조직들이 필요하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고 우리의 유일하게 진정한 희망으로 남은 혁명적 변화를 향하게 할 수 있는 조직들이 필요하다.

Amos 25/1/12      

제국주의적 꼼수, 긴축조치, 억압의 이야기

제국주의적 꼼수, 긴축조치, 억압의 이야기

2012 런던 올림픽이 한창이다. 이에 따라 한국의 모든 언론들 역시 올림픽 메달 소식과 오심 소식을 전하느라 바쁘다. 사람들의 시선이 올림픽에 집중되어 있는 동안 ‘컨택터스’라는 경비업체는 SJM 노동자들에게 극도의 폭력을 가했고 이 사실을 보도한 언론은 많지 않았다. 올림픽 이슈가 다른 중요한 사안들을 덮어버리는 일은 한국에서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 올림픽이 진행 중인 영국도 예외가 아니다. 이에 사노신은 ICC(국제공산주의흐름)의 런던올림픽과 관련한 기사를 번역해서 싣는다. 이 기사는 6월 12일에 작성되었다.
본 기사의 내용은 본지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글:ICC
번역:사노신http://sanosin.jinbo.net


[국제][번역]런던 올림픽
제국주의적 꼼수, 긴축조치, 억압의 이야기

2012 런던 올림픽이 한창이다. 이에 따라 한국의 모든 언론들 역시 올림픽 메달 소식과 오심 소식을 전하느라 바쁘다. 사람들의 시선이 올림픽에 집중되어 있는 동안 ‘컨택터스’라는 경비업체는 SJM 노동자들에게 극도의 폭력을 가했고 이 사실을 보도한 언론은 많지 않았다. 올림픽 이슈가 다른 중요한 사안들을 덮어버리는 일은 한국에서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 올림픽이 진행 중인 영국도 예외가 아니다. 이에 사노신은 ICC(국제공산주의흐름)의 런던올림픽과 관련한 기사를 번역해서 싣는다. 이 기사는 6월 12일에 작성되었다.

본 기사의 내용은 본지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올해 역대 세 번째 런던 올림픽이 개최된다. 각각의 런던 올림픽들은 저마다 당대 자본주의 사회의 변화하는 상황을 보여주었다.
강대국의 지배
1908년 올림픽은 원래 로마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1906년 4월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는 바람에 나폴리를 재건하는데 재원을 쏟아 부아야 하게 되었다. 영국은 세계 육지의 약 1/4, 인구의 1/5를 지배하고 있는 강대국으로서 급작스럽게 올림픽 개최를 떠맡게 되었다.
10개월 후, 영국은 재정과 부지 마련에 성공하여 최신식 경기장을 지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1908년 올림픽은 약 15,000 파운드를 지출해서 21,377 파운드를 벌어들였다. 첫 번째 런던 올림픽은 흑자를 달성했다는 면에서 성공적이었다. <더 타임즈>(1908년 7월 27일자)는 “모두가 바란 완벽한 조화는 심판의 판정에 대한 몇몇 유감스러운 논란, 항의, 반대로 인해 훼손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신문들이 폭발적으로 국민감정을 쏟아냈으며 각국 국민들은 비난에 비난으로 맞섰다.”며 애석해했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1905년 러일전쟁, 1차 세계대전을 불러일으킨 그 모든 적대감에서 알 수 있듯이 제국주의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유일한 방법이 되었을 때 국가 간 갈등이 증폭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은 아니다.
1908년 올림픽에서 모든 심판은 영국인이었으며 이에 대해 미국팀은 하루에 한 번꼴로 불만을 표했다. 갈등은 개막식에서 미국이 영국 국왕에게 국기로 경례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런 갈등은 올림픽 내내 계속되었다. 줄다리기 종목에서 미국 팀은 영국대표로 나온 리버풀 경찰 팀이 신고나온 스파이크 화에 불만을 표시했다. 항의가 묵살되자 미국 팀은 경기를 포기했다. 400미터 육상 결승에서는 미국 선수가 영국 선수를 팔꿈치로 밀쳤다는 이유로 영국 심판들이 재경기를 결정하기도 했다. 미국은 재경기를 보이콧했다. 결국 이 올림픽에서 영국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메달을 땄다. 22개국 2000명의 선수들이 출전한 가운데 영국대표팀은 역대 올림픽 출전 사상 가장 많은 146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이에 앞서 <더 타임즈>(1908년 7월 13일자)는 “올해 올림픽에서 우리나라의 꼼수가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상대국 경쟁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 선견지명을 발휘했다.
긴축 게임

1948 런던 올림픽 공식포스터    
1948년 두 번째 런던 올림픽이 열리기까지 40년 동안, 영국 제국주의의 위치는 많이 변했다. 영국·러시아·미국의 제국주의 연합은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이제는 미국이 서구에서 지배국의 위치를 차지했고 영국은 부차적인 지위로 떨어졌다.
영국은 올림픽 개최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경제는 초토화되었고 (식량, 휘발유, 의류 등의) 배급은 전시보다 더 혹독해졌다. 실업률은 높았으며 노숙자가 만연했고 노동자들의 파업이 잇따랐다. 이 때문에 영국은 마셜 플랜을 통한 미국의 기금지원이 절실했으나 올림픽 개최가 자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올림픽 개최를 겨우 한 달 남겨둔 시점에서 런던 부두노동자들의 비공인 파업이 터졌다. 새로 징집된 부대가 항구로 파견되었다. 영국정부가 파업을 탄압하기 위해 1920년에 제정된 비상대권법(Emergency Powers Act)에 따른 권한을 행사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긴축조치를 강제하는 전후 노동당 정권에 맞서 노동자가 투쟁한 사례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올림픽 준비에는 최소한 2년이 걸렸다. 새로운 경기장이 건립되지는 않았지만 웸블리 경기장으로 이어지는 도로 건설 등 몇몇 건설 프로젝트에서 독일 전쟁포로들이 강제 노역을 했다.
1948년 런던 올림픽이 긴축 올림픽으로 알려진 데는 이유가 있다. 경기 참가자들에게는 광부들에게 지급되는 수준의 배급이 허용되었으나 그래도 각국은 필요한 식량을 직접 가져오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를 받았다. 남자 선수들의 숙소는 영국 공군 캠프였고 여자 선수 숙소는 런던 대학교였다. 영국 선수들은 필요한 복장과 장비를 자신들이 직접 사거나 만들어야 했다.
59개국 4000명의 선수들이 참여한 1948년 올림픽 개최에는 (예산보다 적은) 732,268 파운드가 들었고 761,688 파운드를 벌어들였다. 다소 이익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전체 메달 개수를 합산했을 때 영국은 12위에 그쳤다. 올림픽이 시작되기 전부터 모든 사람들은 미국이 1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채와 억압

몇몇 나라들은 올림픽 개최를 통해 본전치기 또는 흑자를 남겼다고 주장한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대한 중국의 미심쩍은 주장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최근 대부분의 개최지들에게 올림픽은 재정적 재앙이었다. 몬트리올의 부채 규모는 너무나 커서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30년이 지나서야 모든 부채를 청산할 수 있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원래 예산은 16억 달러였다. 그러나 투입된 공적자금은 160억 달러에 달했으며, 거의 사용되지 않고 방치된 경기장들의 유지와 보안을 위해 지금도 수백만 달러가 소요되고 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 그리스 경제위기가 커지는 데 영향을 준 요인 중 하나란 점은 명백하다.
처음 2012년 런던올림픽의 예산은 23억 7천 파운드였다. 그러나 올림픽을 유치한 지 7년 후, 최종 비용이 얼마나 될지에 대해서는 최초 예산의 4배에서 10배까지 다양한 추정치가 나오고 있다. 현재 영국정부는 93억 파운드의 예산 중에서 4억 7천 6백 파운드를 사용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아직 전혀 시작되지도 않은 여러 행사들의) 운영경비를 고려한다면 적어도 122억 파운드는 소요될 것이 분명하다. 물론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지출 비용을 만회할 방안을 아무것도 고민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런던이 물가가 높은 도시라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입장료, 음식, 음료 등 올림픽 경기장과 관련한 모든 것들이 터무니없이 비싸다. 공식스폰서의 이해는 매우 엄격하게 보호되고 있다. 매복마케팅 광고는 엄하게 규제되고 있다. 매복마케팅이란 공식스폰서가 아닌 회사명이 들어간 물품을 노출시키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개인 복장의 소품들까지 모두 포함된다.
하지만 2012년 런던 올림픽이 신기록을 경신할 종목은 무엇보다 공권력에 의한 억압 종목일 것이다. 가장 바쁜 날들에는 경찰 12000명이 근무를 서고, 군인 13500명이 대기할 것이다. 이는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된 영국군 9500명보다 많은 인원이다. 사설경비원 13,300명을 고용할 계획도 나와 있다. 사설경비원들은 며칠 동안 군인들과 같이 훈련할 것이다. 관련 경비업체 대변인은 “이번 경기장 훈련은 부분적인 목표는 두 집단 사이에 경호의 ‘질을 동등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관람객들은 군인과 사설경비대로부터 같은 질의 경호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파이낸셜타임즈> 2012년 5월 24일자)”라고 밝혔다.
이 모든 억압의 최정상에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올림픽 주요 경기장 근처 6개의 주거지역에 고속 지대공미사일 시스템을 설치하려는 계획이 놓여있다. 아마도 이는 인구가 밀집한 주거지역 위에서 비행기를 격추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전문가들’은 남부유럽 아나키스트들이 조직적 활동을 수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해왔다. 그러나 이 전문가들은 “공격 계획에 대한 구체적 낌새는 아무것도 없다(<텔레그래프지> 2012년 6월 21일자)”는 말도 덧붙여 놓았다.
런던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영국정부와 함께 모든 보안방안들을 다 고려해본 것 같다. 내무부는 실제로 다 진행하진 못한다 할지라도 참가선수, 심판, 노동자, 언론사 직원 등 올림픽과 관련된 38만 명 전부에 대해 보안 검사를 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승인된 차량만 다닐 수 있는 특별한 올림픽 차선도 마련될 예정이다. 이 차선을 침범하는 사람은 135파운드의 벌금을 물게 된다. 또한 올림픽 경기장 입장 시에 소지품 검사를 받아야 하고 물 반입은 금지되어 있다. 또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 어떠한 방식으로든 올림픽 행사 사진을 공유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이번 런던올림픽에는 200개 이상의 나라들이 참가하게 될 것이고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지금까지 그래 온 대로 애국주의 광란을 위한 판을 깔아주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다. 코카콜라, 맥도날드, 파나소닉, 삼성, 비자카드, 제너럴 일렉트릭, P&G, BMW, EDF, UPS 등등 자본가 패거리들에게 광고 기회를 주기 위해서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애국주의와 상업주의는 근대 올림픽의 흔한 메뉴가 되어버렸다. 한편 2012년 런던올림픽의 준비 도중, 올림픽 경기장이 있는 뉴엄(Newham) 지구 의회는 500가구를 150마일(약 240km) 떨어진 스톡-온-트렌트(Stoke-on-Trent)로 ‘이주(relocate)’시키려 하고 있다. 지역의 건물주들이 엄청나게 오른 가격에 세를 놓을 수 있도록 세입자들이 쫓겨나고 있다. 올림픽은 젊은이들에게 영감을 주어야 한다고 한다. 뉴엄은 잉글랜드와 웨일즈 전역을 통틀어 돌도 지나지 않은 신생아의 비율이 가장 높으며 저연령층이 가장 많은 인구구조를 가지고 있다. 가족의 평균 규모가 가장 크고, 런던에서 질병율과 조기사망률이 가장 높으며 복지지원금을 받는 인구 비율 역시 가장 높다. 뉴엄의 아이들은 올해 올림픽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지만 이 아이들의 미래가 스펙터클한 메달 전쟁을 통해 더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토론 문화: 계급투쟁의 무기

토론 문화”는 노동운동이나 ICC(국제공산주의흐름)에게 이상 새로운 주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21세기 이후 역사의 변화를 겪으면서 우리 조직은 문제를 보다 자세히 재검토하고 성찰해야 절실한 필요성을 느꼈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두가지 주요 발전은 새로운 혁명세대의 등장과 21세기 초반에 겪었던 내부 위기였다.

새로운 세대와 정치적 대화

  새로운 혁명세대와의 접촉은 ICC 외부세계와 소통하고 정치적 대화능력을 더욱 발전시키도록 계기가 되었다.

  인류역사의 고리 안에서 저마다 하나의 사슬을 구성하고 있는 세대들은 가지 중요한 임무에 직면하고 있다. 첫째, 이전 세대가 남긴 유산을 이어받고, 둘째, 이들 고유의 경험에 기반하는 유산들을 세대에서 더욱 풍요롭게 하며, 셋째, 다음 세대가 자기 세대보다 더욱 발전할 있도록 이들 유산을 다시 전수하는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이 임무들은 특별한 도전이다. 이는 노동운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이다.  구세대들은 제공할 수있는 자신들의 경험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역시 투쟁과정에서 상처와 트라우마를 얻었고 패배와 실망을 겪은 있다. 따라서 이들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영속적으로 집단투쟁을 하기 위해서는 세대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자각했다(1). 이를 위해서는 다음 세대의 열정과 에너지, 이들이 제기하는 새로운 문제점,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신세대들의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세대가 서로를 필요로 할지라도 세대 간의 통합능력은 저절로 얻어지는 아니다. 사회가 전통적인 자연경제에서 멀어질수록 자본주의는 생산력과 사회전체를 더욱 빠르고 집요한 방식으로 “혁신”하고, 세대와 다음 세대의 경험은 더욱 차이가 커진다. 이처럼 최고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경쟁체제는 모두에 대항한 각자의 투쟁 속에서 세대들간의 반목까지도 유발시킨다.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우리조직은 세대 간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토론 문화”가 얼마나 특별한 의미를 지닌 주제인가를 깨닫게 계기는 작업의 준비과정에서 보다는 실제로 직접적인 새로운 세대들과의 만남을 통해서이다. 우리는토론 문화”에 68세대의 경우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세대를 만나게 되었다. 노동자계급내의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는 2006 고용의 “불안정화(precarisation)”에 반대하는 프랑스 대학생 고교생들의 집단 운동이다. 과정에서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이들이 집회 때마다 최대한 자유롭고 넓은 토론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60년대 학생운동은 정치적 대화에 무능했다는 점을특징으로 있다. 같은 차이점은 바로 오늘날 학생집단이 40 전에 비해 훨씬 더 프롤레타리아화() 됐음을 표현한다. 넓고 심도 있는 토론은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중요한 특성이자 1968 프랑스와 1969 이탈리아 노동자 집회를 특징짓는 요인이다. 그러나 2006년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은 투쟁을 하는 있어 젊은 세대들이 나이든 세대들과 소통을 하며 그들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열의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60년대 말에 있었던 학생운동, 특히 독일 학생운동과는 극명히 다른 차이점을 드러낸다. 당시 시대정신 상태를 가장 희화적으로 표현한 슬로건 중의 하나가 바로 30 이상의 사람들은 집단 수용소로!”이다. 실제로 이러한 생각은 서로에게 야유를 보내고 “라이벌”모임들을 폭력적으로 해산시키는 등의 행위로 구체적으로 표출됐다. 여기에 심리적 수준에서, 독일뿐만 아니라 이태리에서 저항의 한 형태로서 테러리즘이 발전하게 되는 그 뿌리들 중 하나가 놓여 있다. 노동자계급의 세대간 연속성의 단절이 이 문제의 뿌리들 중의 하나였다. 왜냐하면 세대 간의 관계는 이미 오래 전부터 대화능력을 단련시키는 특별한 토대였기 때문이다. 68혁명의 투쟁가들은 자기 부모세대를 자본주의에 “팔린” 세대, 혹은 이태리와 독일의 경우처럼 전체주의와 전범의 세대로 간주하였다. 자식들만큼은 자기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기만을 바라며 1945 이후 계속된 끔찍한 착취를 견뎌냈던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3세계를 착취하며 살아가는 “기생충”이라고 자기 자식들이 비난할 쓰디 실망감을 맛봐야만 했다. 그러나시대를 살았던 부모세대가 대화 능력을 크게 상실했거나 이를 가져본 적도 없었던 것은 부인할 없는 사실이다. 이들 세대는 2 세계대전과 냉전시대으로 또한, 전체주의적,  스탈린주의적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적 반혁명으로 인해 상처와 충격을 입었다.

  반면 2006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은 새롭고 풍요로운 무언가의 출현을 예고했다(2). 새로운 세대의 이러한 관심은 이미 전부터 노동자계급 내 혁명적 소수들(revolutionary minorities)에 의해  예고되었었다.  이 소수들은 정치무대에 등장하자마자, 토론을 거부하는 태도와 분리주의를 그 나름의 논리로 강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내세운 처음의 요구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되었다. 첫째, 토론은 사치품이나 장식요소로서가 아니라 절대적인 필요성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둘째, 토론에 참여하는 이들은 다른 참가자들을 진지하게 대하고 그 의견을 신중히 듣는 것을 배워야 한다. 셋째, 토론의 무기는 논증이지 강제적인 힘이나 도덕적, 또는 “이론적” 권위에의 호소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자 진영과 관련해서, 이 혁명적 소수들은 일반적으로 (또한 매우 정당한 이유로) 현존하는 그룹들 사이에 우애적인 토론이 부재하는 현실에 크게 놀라며 이를 비판했다. 또한 이들은 마르크스주의는 신세대가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받아들여야하는 일종의 도그마라는 생각을 단호하게 거부했다.(3).

  한편, 우리 조직은 새로운 세대들이  ICC 대해 보이는 반응에 놀랐다. 우리의 공개토론모임에 참석했던 새로운 동지들,  ICC 교류를 시작한 세계로부터의 공감자들, 함께 토론할 기회가 있었던 다른 그룹과 써클들, 그 모두는 ICC의 강령적 입장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동, 특히 토론방식에서 ICC프롤레타리아적 본질을 알아볼 수 있었다고 우리에게 차례 말했다.

  토론에 관한 새로운 세대들의 깊은 관심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우리는 이것이 1968 당시보다 더욱 심각하고 가중된 자본주의의 역사적 위기에서 도래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은 자본주의에 대해 철저히 비판할 것은 물론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파악할 것을 요구한다. 부르주아 개인주의의 가장 부식적인 영향들 하나는 토론 능력을 파괴한 방식, 특히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는 능력을 파괴한 방식이다. 대화 대신 “잡담”이 난무하고 (부르주아 선거 캠페인에서 있듯이), 가장 소리로 떠드는 이가 승자가 된다. 토론 문화는 인류의 미래를 짊어질 유일한 계급,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쟁무기인 의식을 발달시키기 위한 중요수단이다. 또한, 이들이 고립과 조급함을 극복하고, 통합된 투쟁을 있게 도와주는 유일한 수단이다.

오늘날 이러한 관심의 또 다른 측면은 스탈린주의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이다. 오늘날 국제주의적 입장을 획득하려 애쓰는 수많은 투쟁가들은 직접적으로 어느 한 좌파 그룹 출신이고 좌파의 영향을 받았다. 이 그룹은 사회주의라는 옷을 입은  쇠퇴적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행동이라는 캐리커쳐를 나타낸다.  이들은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것은 “부르주아 자유주의”라고 믿도록 정치적 교육을 받았다. “좋은 공산주의자”는 “입을 다물고” 자신의 의식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자라고 그들은 배웠다. 반혁명의 이러한 소멸해가는 산물의 영향들을 떨쳐버리고자 결심한 동지들은 이를 위해서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뿐만 아니라 정신구조까지 버려야 한다는 것을 더욱 이해하게 됐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운동에서 있어서 그 전통의 유기적 연속성에 반혁명이 유발한 균열이 생기면서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전통 하나를 재확립하는데 기여하고 있다.(4).

조직위기와  만장일치성(monolithism)의 경향

  ICC 토론 문화를 다시 성찰할 수밖에 없었던 번째 핵심 이유는 21세기 초반에 나타났던 조직의 내부적 위기 때문이다. 위기는 우리 조직에서 동안 결코 없었던 가장 추악한 행동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ICC 창설 이후 처음으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멤버들을 제명해야만 했다(5). 내부위기가 일어났던 초반에는 중앙집권이라는 조직 원리에 대한 견해 차이와 이에 따른 여러 어려움들이 프랑스 지부에서 나타났다. 이러한 유형의 견해 차이 자체는 조직의 위기로 이어진 질 이유가 전혀 없었고 그 원인도 아니였다. ICC 위기를 초래한 것은 내부적인 토론의 거부, 특히 서로를 고립시키고 헐뜯는, 자신과 의견을 달리 하는 동지들을 공격하는 술책이었다.

  이후 우리 조직은 이러한 위기와 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을 파헤칠 것을 결심하였고 이에 대한 조사를 실시해서 몇몇 기사들을 공개했다(6). 우리가 도달한 결론 중의 하나는 동안 겪었던 모든 분열에는 만장일치성의 경향이 중요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견해 차이가 생기자마자 이미 몇몇 조직원들은 이상 다른 이들과는 함께 일할 없다고 단언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ICC 스탈린주의 조직으로 변질되어가고 있거나 조직 자체가 타락해 가는 중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위기는, 만장일치가 요구되지 않는 (non-monolithic) 조직 안에서라면 대부분 전혀 문제 없이 존재할 수 있고, 분열이 생기기에 앞서 함께 논의되고 규명되어야할 의견 차이와 관련해서 발생하고 말았다.

  이러한 만장일치성 경향이, 특히 “ 좌파공산주의 이태리 분파(Italian Fraction of the Left Communism)”의 전통들에 기반을 두고 있는 조직에서 반복적으로 출현한 점은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태리 분파는  근본적 원칙에 관한 어떤 의견 차이에 있어도 토론을 통해 심도 깊고 통합적으로 문제점을 명확히 밝히는 것이 조직적 분열에 앞서야 한다는 것을 항상 옹호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ICC “좌파공산주의 이태리 분파(Bilan이라고도 함)”와 “프랑스좌파공산주의(GCF)”의 조직적 전통을 승계하는 유일한 좌파 공산주의 조직이다. “좌파공산주의 이태리분파(이하 이태리분파)”는 2 세계대전 이태리에서 창립된 국제 공산당(PCint)에서 유래하는 다른 그룹들과는 달리 스탈린주의의 반혁명에 대한응으로 출현한 “좌파공산주의”의 다른 국제적 흐름들, 특히 “독일 좌파공산주의”와 “네덜란드 좌파공산주의”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인정하였다. 이태리분파는 집단들을 “무정부-자연발생주의자(anarcho-spontaneist)” 또는 노동조합주의자 (syndicalist)”라고 배척하기 보다는 이들로부터 배울 있는 것들은 모두 받아들였다. “평의회주의(councilist)” 경향으로 된 것들에 대해 이태리분파가 가한 주된 비판은  그것이 제 2 인터내셔널의 공헌들 특히 볼셰비즘의 공헌들을 인정하길 거부한데서 나타난 종파주의에 대해서 였다(7). 그렇게 해서 이태리분파는 반혁명의 시대에서 계급의식은 집단적으로 발달하며 어떤 정당이나 어떤 전통도 독점권을 주장할 없다는 마르크스주의 입장을 유지할 있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의식이라는 것이 우애적, 공개적, 국제적인 토론 없이는 발전할 없다는 것을 있다(8).

  그러나 이러한 근본적인 이해는 ICC가 계승한  기본 유산의 일부이긴 하지만 실천에 옮기기에 쉽지 않다. 토론 문화는 부르주아 사회의 흐름에 대항해서만 발달할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경향은 어떤 생각들을 명확히 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 조작, 다수의 표를 얻으려는 싸움(부르주아 민주주의 선거가 보여주는 서커스가 가장 좋은 예다)등이다. 그래서 이러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프롤레타리아 조직에 침투할 경우 위기와 쇠퇴의 씨앗을 늘 품고 있게 된다. 볼셰비키 정당의 역사는 이를 명백히 보여준다. 혁명의 첨병이었던 이들에게 있어 활발하고 때로는 격렬하기까지 토론은 당의 주요 원동력이었다. 반면에 1921 크론슈타트 학살사건 이후 진정한 분파(fraction)들의 구성이 금지되었는데 이것은 볼셰비키 쇠락의 영구적인 징후이자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미 국제공산당(PCint) 창립 과정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 여러 대립적 입장들 “평화적 공존”(다시 말해 “토론의 부재”)이라는 관행, 또는 보르디가(Bordiga) 그의 추종자들에 의한 만장일치라는 미덕의 이론화는 20세기 중반에 있었던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패배라는  상황을 통해서만 이해될 있다.

혁명조직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주요 임무인 계급의식의 발달과 확장을 완수하려면, 집단적이며 국제적이고 우애적이며 공개적인 토론 문화의 배양은 필수불가결하다. 물론 이것이 정치적 성숙(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인간적 성숙) 요구하는 것은 사실이다. ICC 역사는 이러한 성숙함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진보의 산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 성숙의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이들이 바로 신세대들이다.

 

역사 속에서의 토론의 문화

  토론 능력은 노동운동의 핵심적인 특징이나, 노동운동 자체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은 인류의 가장 훌륭한 업적을 흡수하고 자신의 필요에 맞춰 이들을 채택하는 능력을 지녔다. 또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훌륭한 장점들을 나은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근본적으로 토론 문화는 인간의 뛰어난 사회적 본질의 표현이며 특히 언어사용으로 인해 나타난 산물이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다른 몇몇 동물들도 정보교환의 수단으로써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인간은 과학과 논리의 발달로 함께 토론하는 능력을 발전시키고, 특히 예술의 발달과 관련된 감정이입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알아간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들과 구별된다.

  인간의 토론능력은 어느 갑자기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며 계급사회 이전부터 존재했고 인류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엥겔스는 호머(Homer)시대의 그리스 사회와 게르만 초기 부족사회, 북미 이로쿼이(Iroquois)족의  부족 총회(general assembly) 역할을 언급하면서, 특히 이로쿼이족의 토론문화를 칭송하였다(9). 19세기 루이스 헨리 모르간(Luis Henri Morgan) 그의 동료들 그리고 이후 다른 학자들이 행한 이들에 대한 연구들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우리는 분야에서 초기의 확실히 가장 결정적인 발달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

  반면에, 우리는 철학 과학적 사고의 시초가 “신화”와 “순진한 사실주의”라는 모순적이면서도 분리될 수 없는 한 쌍을 이루는 고대의 요소가 의문시 됐을 때 번영하기 시작했음을 알고 있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가지 단순한 방식은 직접적인 경험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오류에 빠져있었다. 고대인들이 실제경험에 근거하여 형성한 사고는 천성적으로 종교적일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가 어떻게 구성됐는지는 알지 못한 꿈속에 나타나는 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던 아주 시대부터, 자신들의 사고와 감각이 어떤 육체적 활동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에 있다가 죽음의 순간 육체를 떠나는 어떤 특별한 영혼의 활동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죽음이 찾아 영혼과 외부 세계의 관계에 관한 무언가를 만들어낼 필요성을 느꼈다. 만약 죽음의 순간에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된다면 그 영혼 자체의 개별적인 죽음을 상상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영혼불멸 개념이 생겨났다.  인류발달의 이 단계에서 이 개념은 어떤 위안을 위해서 생겨난 것이 전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없는 운명으로서 생겨났다.  특히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영혼 불멸을 불행으로 여겼다.(10)

바로 이러한순진한 사실주의”라는 체계 안에서 문화와 생산력의 매우 느린 발전의 첫걸음이 시작됐다. 마법적 사고(magical thought)는 어느 정도의 심리적 지혜를 지니고 있으면서 불가해한 현상을 설명하고 그렇게 해서 공포를 제한하는 것을 가장 최우선의 임무로 여겼다. 이 두가지 즉, 순진한 사실주의와 마법적 사고는 인류 발전에 중요하게 공헌했다. 하지만, 순진한 사실주의가 유물론 철학과 특별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거나 유물론 철학이 순진한 사실주의에서부터 시작되어 발전했다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대중의 의식 속에는 변증법의 오래된 가정(postulate) 하나, 즉 극과 극은 통한다라는 가정이 전해져 오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공상적 정신과 고지식함, 미신의 극한 점을 찾을 때, 독일 자연철학의 경우에서와 같이 객관적 세계를  자신의 주관적 사고의 틀에 강제로 밀어넣어 이해하려  노력하는 과학적인 방향에서 찾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방향에서 즉, 오로지 경험만을 중요시 하고 관념을 극도로 경멸함으로써 무모함에 있어 가장 멀리까지 나아간 그 곳에서 찾으면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학파가 영국에서 지배적이다.”(11)

  엥겔스가 지적했듯이 종교는 마법적 세계관에서 생겨났을 뿐만 아니라 순진한 사실주의에서도 출발했다. 순진한 사실주의는 처음으로 대담하게 세계를 일반화하여 바라보았고, 그럼으로써  당연하게  권위적 성격을 획득했다.

  예를 들어, 초기 농경 공동체들은 농사를 지으려면 비가 필요하다는 것은 곧 이해했으나 정작 비를 내리게 하는 조건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들이 비의 () 만들어 것은 선물이나 숭배를 통해 자연의 변화에 영향을 있을 거라 생각하며 스스로 안심하고자 만든 창조적 행위이다. 자신의 생존을 확고히 하기 위해 의식의 발전에 기대를 (species)이 바로 호모 사피엔스이다. 이들은 일찍이 존재하지 않던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바로 낯선 것에 대한 무력한 공포가 그것이다. 미지(未知) 것에 대한 설명은 어떤 의심도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필요로부터 가장 발전된 표현으로서  계시종교들(religions of revelation)이 출현했다. 세계관의 감정적 기반 전체는 믿음이지 지식이 아니다.

  순진한 사실주의는 이 똑 같은 동전의 다른 면에 불과하며 일종의 초보적인 정신적 “분업(division of labour)”이다. 즉각적이고 실제적인 의미에서 설명할 없던 모든 것은 당연히 마법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게다가 실제적 이해 자체는 원래 애니미즘 세계관이었던 종교적 세계관에 기반을 둔다. 여기서 모든 것은 물신(物神)화된다. 인간이 의식적으로 생산하고 재생산할 수 있는 과정들조차 우리의 의지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인격화된 힘의 협력에 의해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세상에서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로서 토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없다. 2,500 , 새로운 특성 하나가 종교와 “상식(common sense)”이라는 쌍둥이에게 직접적으로 도전하며 나타났다. 특성은, 전통적인 사고방식이 자신의 반대방향으로 전환했다는 의미로 볼 때, 전통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 발달하였다. 따라서 예를 들어 중국에서 있는 여성과 남성의 원리들 사이의 극성 사상, 즉 음양(陰陽)사상과 같이, 계급사회의 출현에 앞서 존재했던 초기 변증법적 사고는 과학과 철학, 유물론에 근거를 비판적 사고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우리가 토론 문화라고 부르는 것의 출현 없이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리스어로 변증법은 대화, 혹은 토론을 의미한다.

  무엇이 이러한 새로운 접근법을 가능케 했을까?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사회적 관계와 지식  세계의 확장 덕분이었다. 엥겔스가 즐겨 말했듯이 상식은 자신의 안에 머물러 있을 때는 강하고 힘센 소년이지만 세상으로 모험을 떠나는 순간 온갖 실패와 환멸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종교는 공포를 경감시키는 능력에 있어서 자신의 한계를 드러냈다. 사실상 종교는 공포를 없애는 대신 그저 밖으로 던져버리기만 했었다. 이 메커니즘을 통해 인류는 다른 자기 방어 수단이 없던 그 순간에 그렇지 않았다면 짓눌림을 당하고 말았을 그 공포에 대적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인류는 그 자신의 공포로부터 그것을 지배하는 부가적인 힘을 만들어냈다.

  여전히 설명 불가능한 것을 “설명”하는 것은 진정한 탐구의 포기를 의미한다. 그래서 바로 여기에서 종교와 과학 사이의 충돌, 혹은 스피노자가 말했듯이종과구 사이의 충돌이 일어난다.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은 원래 종교에 반대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는 이미 신비주의적 세계관에서 탈피했었고, 그의 제자인 아낙시만드로스는 자연이 자연 자체로부터 설명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은 순진한 사실주의에 대항한 전쟁선포이기도 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물의 본질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연은 숨기를 좋아한다”라고 말했고, 마르크스는 “사물의 본질과 겉모습이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12) 공언했다.

  이러한 새로운 접근은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신앙과 편견, 전통에 도전했다. (독일어로 신앙(Glaube)과 미신(Aberglaube)은 연관된  단어이다). 이들에 반대되는 개념이 바로 이론과 변증법이다. 얼마나 모든 이론적 사고가 경멸될 지언정 이들 없이는 자연의 사실 사이가 연관될 수 없고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가 이해될 수는 없다.(13)

  사회적 교류의 증대는 물론 생산력 발전과 연계되어 있었다. 따라서 예를 들어 기존 사고방식들의 부적절함과 같은 문제점이 드러났을 이를 해결할 있는 수단도 함께 등장했다. 자신감의 증대, 특히 인간 사고력의 증대가 바로 그것이었다. 과학은 의혹과 불확실함의 존재를 받아들일 능력과  준비상태가 있을 때에만 비로소 발전할 있다. 종교와 전통의 권위와는 반대로 과학의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교환할 가능성뿐만 아니라 그 필요성이 생긴다.

  지식의 지배라는 주장은 (가장 넓은 문화적 의미에서의) 생산력이 어느 정도의 성숙도에 이르렀을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음은 분명하다. 지식의 지배는 예술, 교육, 문학, 자연관찰, 언어, 모든 것이 상응하게 발전하지 않고서는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이것은 역사의 특정 단계에서 계급사회와 물질적 생산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운 지배계층의 출현과 나란히 진행된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들이   새롭고 독립적인 접근을 자동적으로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이집트인들과 바빌로니아인들은 그들의 과학적인 진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들만큼 멀리 나아가진 못했다. 현대 알파벳 발달의 선구자 페르시아인들도 이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 였다.

  그리스에서 노예제의 발달은 사제와 더불어 자유 시민계급의 출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종교의 힘을 약화시킬 물질적 기초를 제공했다(이를 통해 우리는 엥겔스의 “안티 뒤링”에 나오는 문장,  “고대사회의 노예제도가 없었다면 현대 사회주의도 없었을 것이다”를 이해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인도에서는 철학, 유물론(이른바 로카야타(Lokayata))과 자연에 관한 연구의 발달이 있었다. 이것은   브라만 신정(神政)정치에 반대하고 농노제에 일정 기반을 무사(武士) 귀족계급의 형성 및 강화와  때를 같이 한다.  종교, 불멸 그리고 육체적 쾌락에 대한 비난에 반대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싸움이 전제군주와 억압된 민중 양측 모두의 편견에 대항해 이뤄졌던 그리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도에서 행해진전투적이고 새로운 접근은 귀족계급으로부터 유래했다.  같은 시기에 출현한 불교와 자이니즘은 노동계급에서 많이 퍼졌으나 영혼의 환생이라는 개념과 함께 종교적 안에서 머물렀. 이 영혼 환생의 개념은 이들 종교가 반대했던 카스트 사회에서 전형적이었고 그 비슷한 유형은 이집트에서도 발견된다.

  반면, 과학과 일종의 초보적 유물론(예를 들어 모티의 “논리학”) 발달했던 중국에서 그 발달이 어느 정도의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유는 반란이 일어나려면 이에 대항해야 지배계층이 있어야 하는데 중국에는 반란의 씨앗일 있는 사제지배계층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사회는 자국을 둘러싸고 있던 외적들과의 전투를 통해 훈련된 군사관료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인도의 경우처럼 어떤 보충적이고 결정적인 요인이 작용했는데 바로 상품생산이 앞서 발달했다는 점이다. 그리스 철학은 그리스 자체에서가 아닌 소아시아 항구 식민지에서 출발하였다. 상품생산은 재화뿐 아니라 생산을 통해 얻은 경험도 교환할 있게 도와주며, 변증법적 사고에 있어서 더 고차원의 표현들의 등장을 촉진하면서 역사발전을 가속화한다. 또한 생각의 교환이 보다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지려면 일정 정도의 개인화가 필요한데 상품생산은 바로 이러한 개인화(individualisation)를 가능케 했다. 지금까지 사회적 진보가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이루어졌다면 상품생산을 통해 고립화가 끝나기 시작한다. 자연경제에 기반을 모든 농업사회의 기본적 경제단위는 마을, 조금 낫게는 자치적 지방이었다. 그러나 종종 관개작업을 위해 더 넓은 협업에 기초한 최초의 착취사회는 여전히 근본적으로는 농경사회의 성격을 띠었다. 반면에 그리스 사회는 상업과 항해를 통해 세계로 나아갔다. 이를 통해 그리스는 유목사회의 특징인 다른 세계를 발견하고 정복해 나가는 태도를, 하지만 더 높은 수준으로 획득했다. 일정수준의 역사 발전단계에 이르면 열린 토론의 출현이 국제적 발전(비록 지역에 집중된다 할지라도)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과, 어떤 의미에서는 토론의 출현이 어떤 의미에서는 “국제주의적 (inter-nationalist)” 성격을 지닌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디오게네스와 견유학파 철학자들은 헬라스 사람과 이민족 “야만인”을 구분하는 것에 반대하고 스스로를 세계시민이라 선언하였다. 데모크리토스는 이집트, 바빌론, 페르시아, 인도로 교육여행을 떠나기 위해 자신이 받은 유산을 낭비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았다. 그는 여행의 결실인 자신의 저서의 일부를 읽으면서 스스로를 변론했고 무죄를 주장하였다.

토론은 실천적인 필요성에 답하기 위해 생겨났다. 그리스에서 토론은 지식의 여러 다른 근원들을 비교하는 데서 발달했다. 그리스인들은 다른 사고방식, 다른 연구방식과 결과들, 생산의 방법들, 관습과 전통들을 비교했고, 이를 통해 이들이 서로 모순되거나 확인하거나 상호 보완한다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들은 서로 대립하여 투쟁하거나 서로를 지지하고, 혹은 가지를 다한다. 절대적 진리는 비교를 통해서 상대화된다.

  이러한 토론은 공개적이어서,  항구, 시장이 서는 광장(포럼), 학교, 아카데미 에서 이루어졌다. 이렇게 이뤄진 토론은 기록된 형태로 여러 도서관에 보관되었고 이는 세계로 퍼져나갔다.

  시장이 서는 광장에서 토론하는 모든 시간을 보낸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철학자이다. “어떻게 하면 도덕적으로 참된 지식에 이를 있을까?”라는 그의 주된 관심 자체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이미 나와 있다고 생각하는 편견과 종교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는 지식이야말로 올바른 윤리를 위한 주요조건이며 무지는 이를 방해하는 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도덕적 발전을 가능케 하는 것은 벌이 아니라 양심의 발달인데, 이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의 양심의 목소리에 거슬러서 다른 방향으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더욱 멀리 나아가서 모든 과학과  모든 집단적 규명 이론적 기초를 놓았다. , 그는 지식의 출발점은 모든 편견의 폐기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는 본질적인 것, 즉 탐구(연구)를 위한 길을 열어준다. 소크라테스는 성급한 결론, 비판적이지 않고 스스로 만족하는 의견, 건방짐과 자만에 단호히 반기를 들었다. 또한 “알지 못하는 겸손함”과 어떤 비젼, 확신에 근거한 참된 지식으로부터 나오는 열정을 믿었다. 이것이 바로소크라테스와의 대화 출발점이다. 진리는 모든 학생들, 또한 모두가 학생인 동시에 선생인 이들의 대화에서 이루어지는 집단적 탐구의 결과이다. 철학자는 어떤 새로운 사실을 알리는 예언자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지도자에 대한 새로운 개념, “지도자는 자신의 최종목표를 결코 잊지 않고 진리를 밝혀내는 일을 앞당기는 결연한 사람이다”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놀라운 점은 공산당 선언 정의된 계급투쟁을 위한 공산당의 역할이 이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토론을 이끌고 활기차게 만드는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공개토론을 예술 혹은 과학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렸고 그의 제자 플라톤은 이전에는 도달하지 못했던 수준으로 대화를 발달시켰다.

  엥겔스는자연변증법서론에서 지금까지 행해졌던 자연에 관한 연구의 역사 가지 중요한 시기에 대해 언급했다. 첫째, 고대 그리스인의 “천재적인 직관(genius of intuition), 둘째, 르네상스 시대를 예고한 아랍인들의 “매우 의미가 크지만 산발적인” 결과들, 셋째, 르네상스 시대에 발자국을 내디딘 근대과학이 바로 그것이다. “이슬람 아랍문화 시대”에서 주목할 점은 고대 다른 문화들의 지식들을 흡수하고 이를 집대성한 그들의 놀라운 능력과 토론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이다. 아우구스트 베벨(August Bebel) 바그다드에서 있었던 공개토론의 생생한 목격담을 예로 들었다. “첫 회의에는 모든 이슬람 종파 대표들, 그리스 정교도 정통파와 이단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배화교도, 유물론자, 무신론자, 유대교도, 기독교인들, 한마디로 말해서 각종 이교도들이 참석했습니다. 종파는 자신들의 대변인이 있었는데, 어떤 그룹의 지도자들 명이 회의장에 들어오면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정중히 일어났고 그가 착석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앉지 않았습니다. 회의장이 거의 찼을 무렵, 이교도 명이 말했습니다. ‘모두들 규칙을 알고 계시죠. 이슬람교도들은 자기들 경전에서 나온 증거나 예언자들의 연설에 근거하여 우리와 토론할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경전도 예언자들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는 인간의 이성에 기초한 논쟁만 가능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발언에 기꺼이 동의했습니다.(15) 베벨은 이에 덧붙여 “아랍문화와 기독교 문화의 차이점은 아랍인들이 세계를 정복하면서 자신들의 연구에 도움이 되고 자국민들과 자신들이 정복한 국가의 국민들을 가르칠 있는 저서들을 수집했던 반면,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교리를 전파하면서 모든 문화유적들을 악마의 산물, 혹은 혐오스러운 우상숭배로 취급하면서 파괴했다는 점입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슬람 아랍 문화시대는 그리스 로마 문화와 고대 문화를 르네상스 이후 피었던 유럽 문화에 연결시켜준 고리입니다. 이슬람 아랍 문화가 없었다면 유럽문화는 현재의 위치에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반면, 기독교는 모든 문화발달에 적대적이었습니다.”라고 결론지었다.

  하인리히 하이네는 기독교가 만들어내고, 이후 노동운동에 의해 확인된 종교적 광신과 맹목적인 종파주의의 원인 하나는 문화가 다른 문화의 희생과 포기를 요구하면 할수록 문화의 사상과 원칙은 더욱 냉혹해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엥겔스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인류가 경험하지 못했던 전대미문의 가장 진보주의적 변혁”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사건에서 사상 발달뿐만 아니라 감정, 인격, 인간의 잠재성, 투쟁성의 역할 또한 강조하였다. “당시는 사상, 열정, 인격, 보편성과 학식의 거장이 필요했던 시대였고 결국 이들을 배출한 시대였다.(…) 시기의 영웅들은 그들의 후손들이 종종 느끼는 한계와 편협성을 지닌 노동 분업의 노예가 아니었다. 그러나 특히 특징적인 것은, 거의 그들 모두는 당시의 운동의 와중에서 입장을 세우고 투쟁한, 실천적 투쟁들의 본질적인 부분이었다는 점이다. 때로는  글로 때로는 검으로 아니면 종종 두가지 모두를 가지고서.” (엥겔스,자연변증법서론)

 

토론과 노동자 운동

  엥겔스에 따르면 현대과학 발달에 공헌을 인간사상의 영웅적” 시대를 관찰해 보면, 이 시기가 얼마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았던가를 인식하게 된다. 우선, 시대는 전체적 인간 역사로 놓고 볼 때 매우 늦게 시작되었다. 우리가 중국과 인도의 경우까지 포함한다고 할지라도 지리적 측면에서도 제한이 있었다. 게다가 시대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르네상스와 독일에서의 종교개혁은 고작 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또한 운동에 활동적으로 참여했던 착취계급(그들 자체가 소수였던) 수도 극히 적었다.

  점에 관련하여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들 수 있다. 첫째, 급격한 변화와 모든 곤경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인 토론과 과학이 출현했고 영향력 또한 매우 중요하고 지속적이었다는 점. 둘째, 20세기 중반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유기적 연속성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또한 자본주의 쇠퇴기에 영구적인 대중조직의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토론의 목표를 확장시키고 유지하려는 보여준 프롤레타리아의 능력. 노동자 운동은 여러 번의 중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전통을 거의 2세기 동안 유지했다. 프랑스, 독일, 러시아에서 일어난 여러 혁명운동에서처럼 어느 순간에는 이러한 발전이 수백만의 사람들을 결집시켰다. 여기에서 () () 변화한다.

  그러나 () 적어도 산업화된 국가에서는 프롤레타리아가 인구의 다수를 구성한다는 사실의 산물만은 아니다. 우리는 현대과학과 이론이 르네상스 시대의 영광스러운 출발 이후 부르주아적 분업으로 인해 어떻게 망쳐지고 족쇄가 채어졌는지 이미 목격했다. 이 문제의  중심에는 이슬람 아랍시대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생산자로부터의 과학의 분리가 위치한다. 이러한 괴리는 “근대 산업에서 완성되는데, 이것은 과학을 노동으로부터 분리된 생산력으로 만들어 자본에 봉사하도록 강요한다.(16)

  마르크스는 베라 자수리치에게 보내는 답장의 초안에 과정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이 사회는 과학과 민중, 그리고 사회 자체가 만들어낸 생산력에 대항하는 전쟁을 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과학을 생산에 체계적으로 적용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없는 최초의 경제체제이다.계급지배를 지속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의 교육을 “제한”해야만 하는 체제이다. 또한 자신의 경제적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는 프롤레타리아 교육을 “발전”시켜야 한다. 오늘날, 부르주아 계급은 점점 교양이 없고 원시적인 계급이 되어가는 반면에 과학과 문화는 프롤레타리아 또는, 혹은 경제사회적 측면에서 점점 노동자 계급과 닮아가는 부르주아 계급 임금을 받는 대표자들의 소유가 되어간다.

  사회계급의 폐지는 (…) 그래서 생산발달의 상승을 전제로 하는데, 그러한 생산의 발달 정도에서는 특정한 사회계급의 생산수단과 생산물의 점유, 정치적 지배 문화와 지식 독점이 쓸모 없어질 뿐만 아니라 경제, 정치, 지적 측면에서 발달의 장애가 된다. 이 지점에 지금 도달했다.(17)

  프롤레타리아는 인류 과학전통의 계승자이다. 미래의 프롤레타리아 혁명투쟁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 더욱 토론이 발달하고 과학과 노동의 연합을 위한 움직임, 시대의 요구를 앞서는 총체적 이해가 수반될 것이다.

  새로운 정점에 이를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능력은 인간사회 역사와 관련된 과학적 시도인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이미 증명되었다. 오직 프롤레타리아만이 부르주아 철학사상 가장 최고의 지식인 헤겔 철학을 소화 흡수할 있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가장 널리 알려진 가지 변증법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의 변증법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상호작용의 변증법이었다. 오직 헤겔만이 가지 변증법을 결합시켰고 역사적으로 진정한 변증법의 토대를 창조하였다.

  헤겔은 참과 거짓 사이의 엄격하고 형이상학적인 대립을 그 어느 때보다도 심오하게  공격하면서 토론의 개념 전체에 새로운 차원을 부가했. 정신현상학서론에서 그는 꽃과 과일의 관계처럼 어떤 발달과정(예를 들면 철학의 역사 같은) 상이하고 대립된 단계들이 어떻게 유기적 연합을 이루는가를 보여주었다. 헤겔은 연합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모순”에만 집중하고 “발달”은 외면시하는 경향에 있다고 설명하였다. 쓰러진 변증법을 다시 일으켜 세우면서 마르크스주의는 헤겔 철학의 가장 진보적인 부분, 미래로 이끄는 과정을 이해하고 흡수하였다.

  프롤레타리아는 최초로 피착취계급인 동시에 혁명적인 계급이다. 착취자였던 이전 혁명계급과는 달리 프롤레타리아의 진리탐구는 계급으로서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어떤 이해관계에도 제한되지 않는다. 환상을 품으며(특히 종교적인)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생존했던 이전의 피착취계급과는 달리 프롤레타리아의 관심은 환상을 버리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일단 그들이 숙고하고, 조직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투쟁하자 마자  그 자연스런 경향이 진리의 규명(clarification)을 지향하는 최초의 계급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이러한 독특한 특성은  보르디가주의(Bordigism)불변성(invariance) 개념을 창조할 때 망각되었.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대항해 마르크스주의 기초원칙에 충실하겠다는 그들의 출발점은 옳았다. 그러나 계급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토론을 제한하거나 폐지할 필요성이 있다는 그들의 결론은 반혁명의  산물이다. 부르주아 계급은 자본의 영역으로 프롤레타리아를 끌어들이기 위해  무엇보다 토론을 전부 억누르고 없애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이해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초기에는 이들이 폭력적인 억압을 시도했다면, 이후에는 의회 “민주주의”와 좌파 자본주의 사보타지라는 더욱 효과적인 무기를 발달시켰다. 기회주의자들 역시 점을 이미 오래 전부터 이해했었다. 이들은 말과 사상의 불일치라는 핵심적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스스로를 숨겨야 하며 토론은 이들에게 있어 회피해야 어떤 것이었다. 그러므로 () 기회주의 투쟁과 토론 문화의 필요성은 양립적인 것일 아니라 서로 불가분의 관계일 수밖에 없다.

  토론 문화는 다양한 정치적 입장들 사이의 격렬한 대립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 토론이 “필연적으로” 트라우마적이고 분열과 단절을 낳는다는 말은 아니다. 역사 속에서 토론의 “예술” 혹은 토론의 “과학”의 가장 모범적인 예는 1917 2월에서 10월까지 있었던 볼셰비키당의 토론이다. 각종 낯선 이데올로기가 대량으로 끼어드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토론들은 열정적이지만 매우 친밀한 분위기에서 진행됐으며, 모든 참가자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토론들은 트로츠키가 정당의 “재무장(再武裝)”이라고 불렀던, 승리를 위해 혁명과정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정치적 중재를 가능케 했다.

  볼셰비키적 대화”가 가능 하려면 모든 토론이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푸르동(Proudhon) 반대하는 마르크스의 논쟁은 “파괴적인” 성격의 논쟁이였다. 그에게 있어 푸르동의 이론은 노동운동의 의식 발달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므로 역사의 쓰레기통에 버려 없애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은 마르크스는 헤겔과 유토피아 사회주의에 대항하는 거대한 싸움 중에도 그가 인류의 영원한 공동유산으로 여긴 헤겔과 푸리에(Fourier), 시몽(Saint Simon) 오웬(Robert Owen) 향한 무한한 존경심을 결코 잃지 않았다. 엥겔스는 헤겔 없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없었을 것이며, 유토피아주의자 없이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사회주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ICC 포함하여 노동운동에 있어 가장 심각한 위기는 대부분 각각의 의견들의 대립에서가 아니라 (물론 문제점이 근본적이기는 하지만) 토론하기를 거부하고 사실을 명확히 밝혀내는 과정을 무시하는 데서 왔다. 기회주의자들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사용한다. 이들은 중요한 대립들을 최소화할 아니라 부차적인 대립들을 과장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대립들을 만들어낸다. 또한 개인적인 공격은 물론 중상모략과 비방도 서슴지 않는다.

  노동운동이 짊어져야 무거운 , 한편으로는 일상적인 “상식”, 다른 한편으로는 관습과 전통을무”비판적으로, 거의 종교에 가깝게 존중하는 태도의 짐은 레닌이 써클정신(the circle spirit)이라고 불렀던 것과 관련이 있다. 조직의 건설과정과 정치적 삶을 일상적인 상식과 그 귀결들의 “자연발생성(spontaneity)”에 내맏겨버리는 것과 관련한 레닌의 생각은 전적으로 옳았다. “가장 저항이 작은 방향으로의 자연발생적인 운동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초래한다, 왜 ? 그것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고, 더 다면적으로 완성되었으며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전파시킬 있는 많은 수단을 지니고 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18)

  토론을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과 관련시키는 것(personalisation) 바로 레닌이 말한 써클정신의 특징인데 이는 정치적 논쟁의 중심을 “말해진 것”이 아닌 “누가 그것을 말하는가”에 두는 것이다. 토론을 이렇게  개인화하는 것이 유익한 전체토론에 엄청난 구속이 되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소크라테스와의 대화 통해 토론의 발달이 단지 사고의 문제가 아닌 윤리의 문제라는 것을 이해할 있다. 오늘날, 어떤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자 하는 노력은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만 사보타주를 하는 것은 그들에게 오히려 해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자 계급은 계몽주의 시대의 독일인 레싱(Lessing) 슬로건, 그가 진리보다 사랑하는 것은 “진리를 위한 탐구”라는 말을 유념해야 것이다.

종파주의와 조급함에 대항하는 투쟁

  프롤레타리아 대중운동의 핵심요소인 토론 문화의 가장 훌륭한 예는 러시아 혁명에서 있다(19). 혁명당은 서로 대립하는 대신 토론문화를 활성화시키는 선두에 섰다. 1917 볼셰비키당에서 이루어진 토론들은 혁명계급의 본질, 예를 들어 제국주의 전쟁을 계속하는 것을 지지할 것인가 말 것인가, 언제, 어떻게 권력을취해야 하는가 등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들은 세계 혁명의 운명과 더불어 인류의 운명이 걸려있던 정치적 위기에도 통일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 특히 조직적 노동운동의 역사는 토론 문화가 항상 이러한 수준에 도달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ICC 내에서 만장일치적 접근들이  반복적으로 침입했었다는 것을 이미 언급했다. 이러한 침입이 종종 조직의 분열을 초래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만장일치의 틀 안에서는 견해차이에 대해 분열 이외의 다른 해결책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문제는 이러한 접근법을 과장된 방식으로 받아들인 그러한 인자들이 분열해 나감으로써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러한 () 프롤레타리아적인 접근법이 등장하고 또 재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조직  자체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약점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약점들은 주로 삶과 일상적 대화에서 인식되기 쉽지 않은 작은 혼란들과 잘못된 생각들에 있지만, 그것들은 특정한 상황에서는 심각한 어려움을 일으킬 있다. 이러한 약점들 중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와 기회주의간의 대립의 측면으로, 또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논쟁적 투쟁의 측면으로 놓고 모든 토론을 행하려는 경향이다. 이로 인해 생기는 문제점으로는  첫째, 토론을 하는 동지들이 자신들이 절대 실수해서도, 자신들이 느끼는 혼란이나 서로간의 의견의 불일치를 말해서도 안된다는 심리적 압박을 가함으로써 토론을 방해한다. 둘째, 기회주의가 “진부하고 사소하게 되어(banalisation)”버린다. 우리가 기회주의를 어디서나 만나고 서로 조금의 대립이라도 있을 때마다 “늑대야!”라고 외친다면, 정작 정말로 기회주의가 나타났을 때는 이를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 문제점은 토론 나타나는 조급함인데 이러한 경우에는 결과적으로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들을 수 없으며, 토론을 독점하고 “적수”를 진압하여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른 이들을 설득하고자 한다(20).

  결국, 모든 것들의 공통점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내부에 쁘띠 부르주아적 조급함이 존재한다는 것과, 집단적인 진리규명의 생생한 실천에  필수 요건인 자신감이 결여됐다는 점이다. 이는 , 토론과 진리규명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준다. 그 과정은 사회적 삶의 모든 근본적 과정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내적인 리듬과  고유의 발전법칙을 지닌다. 또한 전개 과정은 진리를 밝혀나가는 있어 발생하는 혼란, 실수와 잘못된 방향, 이를 고치기 위한 노력이 필수적으로 동반된다. 그리고 진정으로 성숙한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모든 과정은 가속될 수는 있지만 단축되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참여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계급전체의 참여가 환영 받고 장려될수록 과정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베른슈타인(Bernstein)에 대항한 논쟁에서, 현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계급투쟁을 하되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성격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주장의 모순을 비판하였다(21). 계급투쟁을 위협하는 가지 주요 위험성이 바로 모순적 본질에서 생겨난다. 번째 위험은 기회주의로서, 노동자는 자신의 적들의 치명적인 영향력의 지배 아래에 놓일 있다. 계급투쟁으로부터의 이러한 일탈에 있어서는, “노동운동이 중요한 것이지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다”가 그 좌우명이다. 두 번째 위험은 종파주의(sectarianism), 자신의 계급인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삶의 영향력에 대한 개방성이 결여된 것이다. 엇나간 노선에 있어서는 “목적이 중요한 것이지 노동운동은 아무것도 아니다”가 그 좌우명이다.

1 세계대전 세계혁명의 패배를 낳게 끔찍한 반혁명의 진행 속에서, 종파주의가 기회주의를 억제할 있을 것이라는 잘못되고 치명적인 생각이 혁명진영의 잔존자들 사이에서 발달하였다. 혁명운동을 불모화시키고 화석화시킨 이러한 접근법은 종파주의와 기회주의 두가지 모두가 노동자 운동과 목표를 분리하기 때문에 똑같은 동전의 양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혁명적 소수들이 그들 계급의 실제적 삶과 운동에  완전히 참여하지 않는다면 공산주의의 목표는 결코 달성되지 못할 것이다.

 

 

 

·(1) 마르크스와 엥겔스처럼 이론적으로 성숙하고 명확했던의 젊은 혁명가들조차 당시에 곧 공산주의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1848 사회적 격변기에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은 곧바로 이러한 가정을 재검토하고 수정해야만 했다.

· (2)  인터내셔널 리뷰( International Review)125호, 2006 프랑스 학생운동에 관한 논문 참조

· (3) 프롤레타리아 진영 내에서 관점은 이른바보르디가주의(Bordigism)”에 의해 이론화되었다.

·  (4) 과거 혁명가들의 전기(傳記) 회상록에는 그들의 토론 능력, 특히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는 능력의 실례(實例) 가득 실려 있다. 관점에서 레닌은 유명했으나 그가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면, 프리츠 슈테른베르크(Fritz Sternberg)1963년에 작성한트로츠키와의 대화”에 관한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함께 대화를 나눌 트로츠키는 무척 예의 바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어떤 단어나 개념을 보다 상세히 설명해달라고 요청할 때만 제외하고는 나의 말을 도중에 끊어버리는 일은 결코 없었다.

· (5) 주제에 관해서 인터내셔널 리뷰( International Review)110 기사  ICC 특별총회: 조직원칙 수호를 위한 투쟁  114 기사  ICC 15 ICC총회: 시대의 도전에 직면한 조직의 강화  참조할 .

·  (6)  인터내셔널 리뷰( International Review)111, 112, 127, 128호에 실린 기사 프롤레타리아 투쟁에 있어서 신뢰와 연대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와 윤리 참조할

·  (7) 이탈리아 좌파공산주의 네덜란드 좌파공산주의 관해 ICC 저술한 책을 참조할

·(8) 프랑스 좌파공산주의는 좌파공산주의 이태리분파 해체 이후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려고 하였다. 예로  인터내셔널 리뷰( International Review)33호의  « 천재적인 지도자 »개념에 관한 비판과, 같은 잡지 34호에 실린 조직투사들을 조직의 정치적 방향은 논의할 필요가 없는 그저 단순한 집행자로 인식한 « 통제 » 개념에 관한 비판을 참조할

·(9)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10) 엥겔스, 포이어르 바흐에 관한 테제 

  (11) 엥겔스, 자연변증법  심령계에서의 자연연구

   (12) 마르크스,  자본론 37 48 : « 3 공식 »(3 초반)

    (13) 엥겔스, 자연변증법  심령계에서의 자연연구  마지막 부분

    (14) 기원전 500 아시아의 발달에 관해서 1927 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열린 학회 아우구스트 탈하이머(August Thalheimer) 발표 변증법적 유물론 입문  (1938 미국판 출간) 참조할

    (15) 아우구스트 베벨, 이슬람 아랍 문화시대 6과학 발달과 () 참조

    (16) 마르크스,  자본론 1 4 14: 분업과 매뉴팩처, 5: 매뉴팩처의 자본주의적 성격

    (17) 엥겔스,  안티 뒤링 ,3 « 사회주의 », « 이론적 개념 »

  (18) 레닌,  무엇을 것인가  2 « 대중의 자생성과 사회 민주주의 당의 의식성 »

   (19) 트로츠키의 저서  러시아 혁명 역사 』 또는 리드의 « 세계를 뒤흔든 10 참조

    (20) 주제에 관해 인터내셔널 리뷰( International Review)130호에 실린 ICC 17 총회 토론 보고서, « ICC 17 총회: 프롤레타리아 진영의 국제적 강화 » 참조

    (21)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인터내셔날리스메(Internationalisme), 1946 : 러시아적 경험 : 사유재산과 공동재산   빌랑(Bilan) 35 1936 9-10월호 : 공산주의(VII) : 전화기의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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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1년후

3 11 거대한 쓰나미가 일본 동부 해안을 휩쓸었다. 12- 15미터이상의 높은 파도가 믿을 없을 만큼 피해를 초래했다. 2만명 이상이 쓰나미로 사망했고, 아직도 수천명의 실종자들이 보고되어 있다. 무수한 사람들이 집을 잃었다. 전세계적으로 상당 수의 인구가 해안가나 해안 부근에 정착해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좁은 공간에 밀집해 살고 있으며, 돌이킬 없는 해수면 상승으로 점점 위협당하고 있다. 쓰나미의 높은 파도는 그렇게 해안선을 따라 밀집된 정착으로 야기되는 모든 위험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정부의 모든 예상과는 달리, 재앙적인 사건이 후쿠시마핵발전소에서 발생했다이번의 지진과 쓰나미는 해안선을 따라 이뤄진 정착으로 인해 기후변화시대에 야기되는 잠재적인 위험들과 지배계급의 원자력 취급방식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우리는 쓰나미의 파괴적 결과들을 무시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단지 공간의 제약으로 인해 글에서는 핵노심용융의 결과들에 촛점을 맞추고자 한다.

체르노빌, 후쿠시마 : 지배계급의 만연한 무력감과 부도덕

후쿠시마에서 대재앙적 사태가 발생한 , 주민의 대피는 너무 늦게 시작되었고 필요한 통행금지구역을 모두 포괄한 것도 아니었다. 구제대책과 대피가 쓰나미의 결과로 지연되고    방해받았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정부가 발생된 위험들의 규모를 완전히 의식하고 싶지 않았고 그것들을 과소포장하길 원했기에 광범위한 대피를 피하고 싶어했음은 부정할 없다. 일본의 책임자들(원전운영사 텝코와 국가) 그러한 일을 전혀 예기치 않았으며 안전대비책들도 그러한 규모의 지진과 쓰나미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불충분했음이 갑자기 밝혀졌다. 계획된 구제대책들과 용도로 제공된 구제수단들은 하이테크국가 일본을 빈약하게 무장된 무력한 거인처럼 보이게 했다.

  재앙이 발생한지 며칠이 지난 , 경우에 따라서는 3 5백만인구를 거느린 토쿄 광역권의 인구를  대피시켜야할 필요성의 문제가 제기되었을 , 정부는 생각을 즉시 포기했다. 일단 그렇게 수단이 없었고 그러한 대피가 국가의 붕괴위험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원자력발전소 안과 주변에서는 방사능측정치가 치명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재난이 시작되고 얼마지 않아 일본수상 칸은, “원자로내 압력을 수동으로 낮출 노동자들로 이뤄진 '자살부대'” 요청했다. 그곳 현장에서 작업하는 노동자들은 전적으로 충분한 보호장비 없이 재난에 대항해 싸워야만 했다. „종종 측정기과 허가된 적당한 보호장화가 부족했다. 노동자들은 대신에 플라스틱봉지를 신발 둘레에 테잎으로 붙혀 썼다고 보고했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잠을 자야했고 납으로 덮개 외에는 아무것도 덮을 것이 없었다.  비상상태에 남성 핵발전소노동자의 한해동안의 피폭한계치는 3 15 100mSv에서 250mSv 높게 책정되었다.  부분적으로는 노동자들은 원전에서 해체작업을 한지 그리고 달이 지난 후에야 건강검진을 받았다.

25년전 체르노빌의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했을 , 당시 몰락의 길에 들어서 있던 소련체제는 기술적 수단의 부족으로, 대부분 강제동원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피해복구작업을 위해 지옥으로 파견하는 밖에 없었다. 세계보건기구의 자료에 따르면 60만에서 80만명의 해체인력이 파견되었는데, 중에서 지금까지 수십만명이 피폭의 결과로 사망하거나 암을 앓고 있다. 그에 대한 통계숫자는 정부측에서 지금까지 결코 공개되지 않았다.

그후 25년이 지난 지금, 하이테크국가 일본은 무력하게 소방호스와 헬리콥터로 불을 끄고 설비를 냉각시키려 시도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기획된 구상들과는 반대로, 냉각을 위해 엄청난 양의 해수를 투입하고 이렇게 해서 방사능물질로 오염된 물을 다시 바다로 배출할 밖에 없었다. 소련정부가 25년전에 수백만명의 해체인력을 강제로 동원했던 반면, 일본의 경제적인 곤궁은 무수한 노동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게 만들었다.  텝코는, 예를 들어 오사카의 노동자구역인 카마가사키와 같은 곳에서 노숙자나 실직자를 대상으로 인력을 구했고, 그렇게 동원된 사람들에게는 투입지역이나 위험들에 대해서 종종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다.  그러나 해체인력들의 생명만이 위험에 처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생명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지역의 아이들은 아무 대책없이 높은 방사능량에 노출되었다. 방사능방출이 지금까지의 모든 측정치를 넘어섰기 때문에, 정부는 후쿠시마지역 학생들의 한해 피폭한계치를 20mSv까지로 상향조정했다. 스탈린주의적인 소련의 권력자들만 체르노빌의 폭발에 대해 처음 몇일 완전히 침묵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민주주의 정부도 후쿠시마의 경우에 진실을 말하지 않고 재앙의 규모를 과소포장하려 했다. 이런 점으로 , 냉소주의와 생명경시에 있어서 일본의 책임자들은 스탈린주의 소련의 권력자들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장기적인 결과를 오늘날 사실상 가늠해 보기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노심용융이 일어난 것은 용융된 연료봉들이 엄청난 방사능을 지닌 덩어리로 뭉쳐져 압력용기를 관통해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투입된 냉각수 자체는 극도로 오염되어 있고, 계속해서 다시 냉각되어야 하며 그때마다 다시 엄청난 양의 오염된 해수가 발생한다. 물뿐만 아니라 보호되지 않은 원자로들은 세슘, 스트론튬과 플루토늄 동위원소들을 방출한다. 물질들은  파티클스(뜨거운 입자들)” 불리는데, 나중에 일본 전역에서, 그래서 토쿄에서도 발견되었다.  지금까지의 기술적 수단으로는 후쿠시마에서 발생한 핵쓰레기의 처리는 불가능하다.  냉각하는 것만도 몇년이 걸릴 것이다. 체르노빌에서는 일종의 석관이 설치되었는데, 100년후헐어내고 다시 설치되어야 한다. 후쿠시마에 대해서는 아직 어떤 해답의 전망도 없다. 그러는 동안 방사능에 오염된 물이 점점 쌓여가고, 그것을 어디에 버려야할지 수가 없다. “대부분의 방사능은 냉각수를 통해서 후쿠시마를 빠져나가 곧장 바다로 들어가서 해류를 따라 곳곳으로 확산되기에, 태평양과 먹이사슬 그리고 그와 더불어 인간들에게 미치게 결과는 예측할 수가 없다. 일본의 북동부 해안 앞의 극히 풍부한 어장이 타격을 입었고, 예를 들어 베링해역의 바다연어로 확산되는 것이 가능성의 영역권에 놓여있다.” (1)

그렇게 많은 양의 방사능물질의 해양으로의 방출은 지금까지 없었다.”

  일본 이지역의 인구밀도가 우크라이나보다 15배나 높기때문에, 주민에 대한 영향은 지금 아직은 정확하게 가늠될 수가 없다.

그래서 노심용융은 그러한 핵재앙의 결과들이 전적으로 통제불가능함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책임자들은 페스트와 콜레라사이에서만 선택할 있는데, 노심용융을 방치한 보고만 있거나 아니면 해수로 냉각을 시도해서 결국은 소방물질을 통해 방사능이 광범위하게 확산되도록 하거나. 무력한 정부는 두번째의 경우, 높은 방사능으로 오염된 소방물질을 통한 해수의 오염을 선택했다.

오염제거: 문제의 해결 대신 불운의 악화

 주변의 오염된 토양을 처리하려는 시도도 무력감과 부도덕을 백일하에 드러낸다. 30 인구의 도시 후쿠시마에서 8월초까지 334개의 학교와 유치원에서 마당의 오염된 토양을 제거하는 정화작업이 이뤄졌다. 후쿠시마지방의 코리야마시는 방사능으로 오염된 흙을 어디로 처리할지 몰라서, 많은 부모들이 경악하게도... 학교주변에 묻었다. 외에도 일본의 48개의 지방들 17 지방들이, 그중에는 토쿄도 속하는데, 방사능으로 오염된 진흙찌꺼기를 처리 못한 보유하고 있다고 전한다. 심지어 토쿄로부터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까지도 방사능으로 오염된 토양이 발견되었다. 한편 방사능입자들을 제거작업이 이뤄져야될 건물들이 수천개나 여전히 남아있다. 수목이 우거진 조차도 아마 오염제거작업이 이뤄져야만 것이다. 아마 많은 나무들을 베어내야만 것이다.

일본의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정부는 방사능으로 오염된 수백만 톤의 물질들을 위한 임시보관장소를 찾고 있다.  마땅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방사능 오염된 폐기물은 일부분 소각되었다. 그렇게 생겨난 매연을 통해 방사능이 광범위하게 확산될 것이다. 발생된 핵폐기물에 대한 이러한 속수무책은 방사능폐기물의 처리라는 풀릴 없는 근본적인 문제를 조명한다. 

핵폐기물처리  파괴적인 유산 또는 우리를 뒤따를 대홍수

원자력 발전에서 특별한 점은, 원자력발전소의 수명이 다해 가동 종결된다 하더라도 방사능의 발산이 끝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가동중지와 동시에 핵분열과정이 종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방사능물질과 접촉한 모든 것은 오염되는데, 원자력발전소에서 발생된 폐기물은 어떻게 것인가? 

세계원자력협회 제공 정보에 따르면, 매년 1 2천톤의 고방사능 폐기물이 발생한다. 모두 합치면 전세계적으로 2010 말까지 생겨난 고방사능폐기물은 이미 30만톤에 달한다. 몇몇 나라들에서 실행중이거나 계획중인 지리적인 저장, 옛광산에 저장하는 것은 위험성에 대해 눈가림식의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그런식으로, 독일의 아세(Asse) 저장된 12 5 통의 핵폐기물은 조만간 인접한 소금의 영향으로 침식될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 벌써 방사능으로 오염된 여과액이 흘러나오고 있다. 독일의 임시저장소 고어레벤(Gorleben)에서 전문가들은 지반함몰 위험을 조사했다. 비슷한 위험들이 전세계 대부분의 저장소灯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원자력발전소의 운전이 이미 위험 요소들과 관련되어 있다면, 그렇게 핵페기물의 처리는 전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지금의 책임자들은 모든 폐기물을 저장소나 임시보관소에 떠넘기는데, 이는 결국 문제의 해결을 무수한 미래의 세대들에게 미루는 것에 불과하다.

원자력발전소의 아주 정상적인灯 운행도 결코, 원자력산업의 옹호자들이 주장하듯이 그렇게  깨끗하지灯 않다. 사실상 원자력을 이용한 전력생산시에는 연료봉의 냉각을 위해 엄청난 양의 물이 요구된다. 그래서 원자력발전소는 주로 해변이나 강변에 건설된다. 14개월마다 원자로의 연료봉들을 교체하는데, 연료봉들은 아직 매우 뜨겁기때문에 계속해서 폐연료냉각수조 안에 저장되어  2-3년간 냉각되어야 한다. 강으로 유입된 냉각수는 물의 온도상의 오염을 가져와서 수초가 자라고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한다. 또한 화학물질들(특히 나트륨, 붕산, 암모니아등) 핵발전소로부터 강으로 유입된다.

대재앙 이후 1: 권력자들은 어떤 결론을 냈는가?

권력자들, 책임자들은 원인규명에 관심이 있는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사실은,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설계 전체가 지진에 제대로 대비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동안 밝혀진 바로는,  원전운영사 텝코는 이전에 많은 단순사고들을 얼버무렸고 지적된 안전결함들을 해결하지 않았으며, 특히 발전소는 40년간의 수명을 다해서 어차피 가동종결되었어야 했다.  하필이면, 자국 자본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MITI 같은 제도들을 통해 경제에 깊이 개입하는 일본국가가 바로 원자력산업에 백지수표를 줘어 주었다.  조사보고서 조작이나 사고 얼버무리기의 진상이 백일하에 들어났을 조차도 국가는 어떤 결정도 내지 않았다. 밖에도, 경쟁의 압력과 위기의 무게로 인해 감독과 유지에 점점 투자를 하게 되고, 점점 숙련된 인력을 투입하려는 경향은 전세계적으로 널리 확산되어 있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불충분하게 양성된 인력에 의해 안전기준이 낮아지게 됨으로써 원자로의 안전을 위협하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세계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442개의 원자력발전소중 많은 발전소가 지진발생위험지역에 놓여있음이 분명해졌다. 일본에서만도 50 이상의 원전이 지진발생위험지역에 세워져있다. 미국에서는 12 이상의 원전이 잠재적으로 비슷한 재앙발생에 노출되어 있다. 러시아에는 많은 원전들이 지진발생시 자동으로 작동되는 가동중지메커니즘 없이 가동되고 있다. 터어키에서는 아쿠유베이(Akkuyu Bay) 원자로가 활성  에세미스(Ecemis) 단층선 근처에 건설되었다. 한편 현재 27개의 새로운 원전을 건설중인 중국은 지진활동이 가장 왕성한 나라들 중의 하나이다. 많은 예들을 리스트에 포함시킬 있을 것이다. 자연재해의 위험을 고려하는 대신, 자본주의는 도처에 시한폭탄을 만들어냈다! 고도로 발전한 나라들에서 안전기준들이 이미 불충분한 것으로 드러난 마당에, 이제서야 원전의 운전에 뛰어드는 나라들은 안전기준들과 사고처리경험을 조롱한다. 지역에 사고가 발생했을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할 조차도 없다....

게다가 오래된 원자력발전소의 수명이 연장된다. 미국에서는 60년으로, 러시아에서는 45년으로 연장되었다. 국제적 수준에서는 엄격한 안전기준에 대한 저항이 그리고, 원자력산업에 대한 국가들의 허술한 통제를 넘어서는 국제감시기관의 개입에 대한 저항이 상당히 거세다. 국가의 독립성이 안전에 우선시되고 있다(3).

종합하자면, 후쿠시마사태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여전히 시한폭탄 위에 앉아있는데, 시한폭탄들은 곳곳에서 그리고 언제라도 지진이나 고장 또는 테러리즘 등에 의해 새로운 재앙으로 작용할 있다.    

원자력 전력  값싸고,  깨끗하며 다른 대안이 없는가?

사회를 댓가로 이윤

 원자력산업의 옹호자들은 반복해서, 원자력 전력은 값싸고, 깨끗하며 다른 대안이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사실은, 원자력발전소 하나를 세우는데 엄청난 비용이 들고, 이는 전력회사들에 의해 충당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다시 국가의 보조, 세금을 통해 지원된다핵페기물의 처리비용의 주요부분도 운영회사들에 의해 사회에 전가된다. 지금까지 핵페기물처리에 대한 어떤 해답도 없다는 점은 논외로 치더라도, 핵로비측의 계산 전체에 이러한 폐기물처리비용은 참작되어 있지 않다. 원전이 50년의 운전후에 가동중지되더라도, 지금까지 참작되지 않은 거대한 비용이 생겨난다.

단순사고이거나 대형사고이거나를 막론하고, 여기서도  비용은 사회에 전가된다. 후쿠시마에서는 규모가 지금으로선 현실적으로 산정되기 불가능한 결과비용들은 지금까지 2-3천억 유로로 추정된다. 금액은 텝코가 도저히 조달할 없는 것이다. 일본 국가는 텝코노동자들이 희생한다는 조건하에 이미 원조灯를 약속했다. 그렇게 해서 연금이 삭감되고 임금이 인하되며 수천개의 일자리가 없어질 것이다. 또한 일본의 전체 가정에 특별세도입이 계획되어 있다.

경제적 생태적인 측면에서 원전운행으로 발생하는 사실상의 비용과 폐기물처리라는 미해결 문제는 밑빠진 독과 같다. 원자력은 어떤 측면으로 보더라도 비합리적인 프로젝트이다. 원전사들은 전력생산으로 거대한 금액을 벌어들이지만 결과비용灯은 사회에 전가한다.  원자력발전소는 그래서 이윤추구 그리고 인류와 자연의 장기적 보호사이의 극복될 없는 대립을 체화하고 있다.

위기와 자연 남용

원자력이 환경에 대한 유일한 위협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자연 남용을 자행하고 있다. 전혀 보존에 대한 고민 없이 모든 자원을 강탈하고 환경을 창고처럼 취급한다.

사이에 점차 지역이 사람이 없게 되는 곳이 늘어나고, 바다는 쓰레기로 가득하며, 얼마전까지만 해도 도달불가능했던 자원들이 점점 정교화된 기술로 남김없이 약탈된다. 이때 투입되는 수단은 점점 폭력적이고 비용이 많이 뿐만 아니라 위험과 잠재적파괴력이 배가된다.  2010 4 멕시코만에서 원유시추선, 딮워터 호라이즌이 폭발했을 , 진상조사위원회는 안전규정상의 명백한 결함들을 발견했다.  엄청난 경쟁의 압력때문이기도 하고 바로 그때문에, 시설의 건설, 감독 운영에 거대한 투자를 했어야할 대기업은 결국 엄격한 긴축정책을 펼수 밖에 없었고, 이는 안전비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최근의 예로는 브라질해안이 원유로 오염된 것을 있다. 모든 과실들은 결코 기술적으로 후진적인 나라들에 국한될 없는 현상들이다.  오히려 고도로 발전된 나라들에서 믿을 없는 양상을 띠게 된다.

인류 전체에 대한 위협

1970년대 미국에서 발생한 쓰리마일아일랜드(Three Mile Island)사태나 체르노빌의 경우와는 달리후쿠시마사태는 인구가 밀집된 대지대, 3 5백만의 인구를 거느린 토쿄를 직접적으로 위협했다.

원자력은 2 세계대전시에 전쟁무기로서 개발되었다. 일본의 도시에 투하된 원자탄과 더불어, 쇠퇴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새로운 단계의 파괴가 도입되었다.  2 대전후 군비경쟁은 체계적인 고도의 핵무장과 더불어 이러한 군사적인 파괴무기를 더욱 강화시켜서 오늘날에는 한번의 핵무기전투에 인류가 절멸될 있을 정도가 되었다.  냉전 종결후 2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대략  20만개의 핵무기가 존재하고, 이는 인류를 몇십번이나 절멸시킬 수있는 파괴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쓰리마일아일랜드, 체르노빌 그리고 후쿠시마의 핵사고를 통해서, 인류가 군사상의 핵무기투입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원자력의  '비군사적이용을 통해서도 위협받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일본정부의 추산에 따르면, 후쿠시마 다이이치 원전사고의 결과로 대기중에 방출된 세슘-137 동위원소의 양은 1945 히로시마에 원폭투하로 야기된 양의 대략 168배에 해당된다고 한다.(4)

후쿠시마사태 발생 이후 사태수습의 전반적인 전개양상을 , 책임자들은 속수무책이었고 사태의 규모를 과소포장하려 했으며 사태로부터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은 , 비용에 대한 어떤 통제도 상실했다오히려, 원자력 문제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환경 전체의 보호에 있어서도 지배계급은 점점 가차없어진다. 환경파괴는 점점 위협적인 규모를 띠고 지배계급은 환경보호를 위해 책임있는 대책들을 시행함에 있어서 무능함을 점점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지구가, 인류가 이윤의 제단 위에 희생되고 있다.

게다가 지난 해에 첨예해진 세계경제위기로 인해자연유지를 위한 보호대책을 도입하기에는 지배계급의 재량권의 폭이 부가적으로 축소되었다자본주의는 위기를 통해서만, 기아, 빈곤, 전쟁등과 같은 위기의 재앙적인 결과들을 통해서만 인류를 파멸로 내모는 것이 아니다자본주의는 파괴력을 통해 전체 생태계의 존재를 위협하고 있다. 원자력발전소들은 단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시간과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자본주의가 지구 전체를 파괴하거나, 아니면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이 노동자계급을 선두로 하여 이체제를 극복하느냐가 문제이다자본주의는 인류를 다양한 수준들(위기, 전쟁, 환경)에서 위협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 원자력에 대항하는 것과 같이, 자본주의적 현실의 오직   측면에 대해서만 배타적으로 대항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모든 공포의 시나리오들과 자본주의 체제에 놓인 뿌리들 사이의 연관성들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성행했던 소위 “1-쟁점-운동들”(반핵운동, 가택점거, NATO무장반대운동) 투쟁을 내맡겨버리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가 것이다. 오늘날 어느때 보다도, 전세계적인 파산을, 체제가 막다른 골목에 다달았음을 세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위기와 전쟁과 환경파괴 사이의 이러한 연관성을 외면한다면, 어쩔 없이 개량주의라는 살얼음판 위에 도달하게 되고 체제에 의해 흡수되어버릴 위험에 빠지게 된다.  D. 2012 1

 

(1)     후쿠시마 북동쪽에서 2개의 해류들, 큐로시오난류와 오야시오한류가 만나서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어장들 중의 하나를 이룬다. 그곳에서 이뤄지는 일본의 어획은 일본에서 소비되는 생선제품의 반을 이룬다. 그렇게 해서 생선공급이 위태롭게 될수 있다.

(2)   Http://news.ippnw.de/index.php?id=72, 일본환경단체의 정보에 따르면, 일본정부는 후쿠시마지역으로부터의 오염된 토사들을 일본 지역으로 분배해서 소각할 계획이라고 한다. 일본환경성이 추산하기에, 이와테, 미야기 후쿠시마등 해안지대에서  3월의 재앙으로 인해 생겨난 건축폐기물은 대략 2 3 8십만톤에 달한다고 한다.  이미 이와테에서 토쿄로 대략 천톤의 폐기물의 첫운송이 지난 11월에 시행되었다고 마이니치신문은 보도했다. 이와테 지방정부가 추정하기에 폐기물은 133bq/kg 방사능물질을 함유한다.  2011 3월이전이라면 이것은 불법이었겠지만,  일본정부는 7월에 건축폐기물안전수준을 100bq/kg에서 8,000bq/kg으로,  10월에는 다시 10,000bq/kg으로 상향조정했다. 토쿄는 총합 500,000톤의 폐기물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밝혔다.

(3)     후쿠시마이후, 2022년까지 원전으로부터 하차하겠다는 독일 자본의 태도에 대해서는 세계혁명 168, 169호에 실린 우리의 기사를 참조.

마이니치신문, 2011 8 25일자 기사참조                                                                      

ICConline - 2013

[번역] 중국과 일본의 제국주의 충돌

Waving nationalist flags

2012년에 시작된 센카쿠 열도(열도는 대만의 북동쪽 약 200km, 일본 오키나와의 400km 남서쪽, 중국의 동쪽 대략 400km에 있다)를 둘러싼 분쟁은, 극동아시아 최대의 양국 간 적대적 야망과 긴장을 초래했다. 세계 최고의 인구를 갖고 있으면서 세계 2위의 경제력을 지닌 중국, 그리고 세계 3위의 경제력을 가진 일본, 두 나라는 서로 이 제도(諸島)를 둘러싼 긴장을 고조시키고, 자신들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병력을 동원해왔다. 대만 또한 이 섬을 둘러싸고 일본과 충돌했다. 이것은 일본과 중국, 아시아뿐 아니라 세계 전체에 있어서 분명히 심각한 문제다.

이 양 거두(巨頭)뿐만 아니라 대만도 이 제도(諸島)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센카쿠 열도는 바위투성이로 거주 불가능한 땅임에도, 그 전략적 가치와 잠재적인 유전, 천연 가스원, 풍부한 어장의 존재가 이 제도의 영유권 주장을 결정적으로 강화시키고 있다.

중국 - 신흥 제국주의 대립

중국이 센카쿠 열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일본과 충돌하고 있는데, 이곳이 이웃 제국주의와 대립하고 있는 유일한 분쟁지대는 아니다. 최근의 경제 성장 이후, 중국은 점점 자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위험을 안게 되었다. 자국 선박 수송의 80%가 센카쿠 열도 주변을 통과한다. 아시아에 있어 어떤 해협의 봉쇄도 중국을 심각하게 방해한다. 게다가 중국은 본토를 넘어 바다 건너까지, 특히 남중국해(South-China-Sea)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려 하고 있다. 주요 경쟁자인 인도와 직면하게 된 중국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각각 전초 기지를 설치하려 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과 다른 나라의 공격을 무릅쓰고 이란과 시리아를 지원해 왔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평화적인 경제발전을 바라는 한편 동시에 군사력 증강에 투자를 계속해 왔다.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은 이미 중국이 아시아에서 최대의 경쟁자라 인식하고, 군사적 중점을 동아시아로 옮기는 것을 결정했다. 미국은 2020년까지 해군력의 60%를 동아시아 지역에 배치할 예정이다.

게다가, 증대하는 자원 수요, 특히 에너지 자원 수요는 중국의 남중국해에서의 자원 탐사 및 채취권 주장을 하게 만들었다. 중국의 지금까지 남중국해에서의 대립과 이번 일본과의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대립은, 중국이 엄청나게 자원을 갈망할 뿐 아니라, 제국주의 서열(계층)의 재편성에 나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은 이제 미국과 그 동맹국의 지배적인 역할을 끝내고, 자국 영토를 넘은 지역에서 이익을 방어하기 위한 세력이 되려 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일본, 중국의 대립은 극동아시아에 있어 증대하는 제국주의 국가 간 긴장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일본: 자기 야심에 집착하는 쇠약해진 제국주의

일본은 지금까지 센카쿠 열도의 영유권을 주장해, 자신의 능력을 예전의 제국주의 역사 속에서 새롭게 찾아내려 하고 있다. 19세기 말에 이미 일본 자본은 대만, 동중국해 섬들 그리고 한국 침략의 야망을 품고 있었다. 현재 일본 정부는 1894년 센카쿠 열도 점령의 역사적 정당화를 추진하고 있다. 일본이 미 제국주의에 패배함에 따라 이 열도는 미국의 관리로 넘어갔지만 1972년 일본에 반환되었다. 물론 일본은 이 땅에 매장된 에너지 자원을 중국에 양도할 생각도 없고, 제국주의 서열을 바꿀 생각도 없다. 이 땅은 과거의 속박에서 벗어나려 한다. 2차 세계대전 패배 후, 일본은 미국의 우산 아래 들어갔다. 격렬한 폭격(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와 도쿄 다른 지역까지 공습) 후, 미국의 관리하에 놓였다. 일본은 외국에서의 충돌에 군사력 사용이 허용되지 않는 헌법을 제정할 것을 강요당했다.

하지만 1950년대 초 냉전 상황에서 일어난 한국 전쟁에서 미국은, 러시아와 중국과의 대결 시 지원을 받기 위해, 일본의 재무장을 강요했다. 북한의 정기적인 일본, 미국, 한국에 대한 무력행사 협박과 중국의 증가한 힘 때문에, 일본은 스스로 모순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미국의 의존에서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북한과 중국의 군사적 위협에 대해서는 자국을 미국의 군사력의 아래 두고 싶은 것이다. 1989년 이래 일본은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약간의 행보를 시작했다. 자위대는 페르시아만과 인도양에서 최초의 ‘해외파병’을 경험했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미국 주도의 전쟁에서 병참 일부를 담당했다. 일본은 인도, 베트남과 함께 말라카 해협과 남중국해에서의 군사 행동에 참가했다. 앞서 일본은 지부티(아프리카 북동부 아덴만 기슭에 있는 국가의 수도)에서 최초의 군사기지를 설립했다. 이 자위대는 최신 무기를 갖추고 있다. 중국군의 현대화와 확장은 일본에 군사력 투자를 한층 더 재촉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게 중국과 센카쿠 열도는 유일한 분쟁지역이 아니다. 일본은 한국과도, 일본이 1905년 한국으로부터 획득한 타케시마(독도)를 둘러싼 다툼을 벌이고 있다. 일본은 북한의 군사적 도발을 두려워하고 있고, 장래 일어날 수 있는 남북한 통일을 더욱 큰 위협이라고 느끼고 있다. 그렇다 해도, 일본은 중국 제국주의의 번창이 가장 큰 위협이라고 느끼고 있다. 역사적으로 일본과 중국은 이 지역에서 양대 제국으로서 대립해 왔다. 수년 동안 중국 대부분을 점령하고 수많은 국민을 학살한 처참한 전쟁을 감행한 일본에 대해, 중국의 지배계급은 항상 일본에 대한 복수의 애국주의적 감정을 이용했다. 이에 대해 일본 아베 내각은, 중국에 대해 더욱 공격적인 자세를 취한다고 밝혔다.

일본, 중국 간의 긴장의 고조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갈등에 기름을 붓는 격이며, 양국과 그 동맹국이 대립하고 있는 다른 지역에서의 긴장을 한층 더 발전시킨다. 아시아 양대 강국의 경쟁은 전 세계로 번지게 될 것이다!

민족주의적 견제에 머물지 않는 중국과 일본의 충돌

일부의 경우, 특히 2012년 가을, 중국의 일부 도시에서, 센카쿠 열도에서의 일본 군사력에 대해, 일본계 상점을 불태우거나, 일본계 기업의 공장을 공격하는 등의 항의가 있었다. 중국 정부는 분명히 이러한 시위를 환영하고, 아마도 직접 조직까지 했을 것이다. 다른 정권과 같이 중국 정부도 경제 성장 문제, 환경 오염, 지배 세력의 부정부패에 대한 분노 등 심각한 사회 문제로부터 사람들의 눈을 돌리는 것에 집중했다. 당국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폭동’의 회수는 지난 몇 년간 증가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이러한 항의를 국수주의-애국주의의 틀로 왜곡시키고 있다. 일본과의 충돌은 사람들을 국가에 재결집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중국은 지난 몇 년 동안 세련된 애국 선전을 젊은 세대의 머리에 주입해 왔다. 오랜 세월 불황에 고통받고, 후쿠시마 재해와 쓰나미의 참극에 직면한 일본 정부도 똑같이 사람들을 민족주의로 끌어들여, 국가 아래 단결시키고 싶어했다. 확실히 지배세력이 이러한 항의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지만, 이 대립을 단순히 경제, 사회, 환경 문제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기 위한 민족주의의 책략이라고 보는 것은 위험하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최대의 양국이 센카쿠 열도를 둘러싸고 충돌해, 미국과 아시아 국가들이 이 분쟁에서 적과 아군을 정하는 과정에 들어가면, 제국주의 국가 간의 긴장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 전체로 퍼질 것이다.

양국 모두 서로의 수출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상태에서, 앞서 말한 충돌 때문에 교역이 심각하게 감소했는데, 왜 지배자들은 ‘이성적’으로 민족주의 경향을 억제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원래 지배자들은 ‘이성적’인가? 사실 군국주의는 자본주의의 불치병이다. 자본주의는 일개 국가의 힘보다 훨씬 강력하다. 자본주의는 평화적으로 경제 경쟁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자본주의 시스템은 인류를 점점 야만스럽게 만드는 전쟁으로 끌어들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주요 전장은 유럽이었다. 아시아는 이 시점에 아직 전장에서 약간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아시아의 광대한 지역이 주요 전쟁터가 되어, 몇 천만의 생명을 앗아갔다. 베트남 전쟁에 앞선 한국 전쟁은, 1950년대 가장 처참한 대립의 하나였다. 소련의 붕괴와 미 제국주의의 쇠퇴에 따라, 중국 제국주의가 영향력을 얻어 아시아의 제국주의 경쟁에 도전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아시아에서의 중국의 경쟁자들(일본, 한국, 베트남, 필리핀, 인도 등)은 중국의 세력 확대를 막기 위해 미국의 군사적 지원을 바라고 있다. 중국, 일본의 최근 충돌은 이 지역 전체로 확대되는 일련의 긴장의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우리는 정부의 민족주의적 정책에 따라 대량 학살에 대비해야 할까? 아니,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민족주의, 국수주의, 애국주의는 프롤레타리아의 무덤이다. 극복할 수 없는 경제위기, 끝없는 전쟁으로 가는 길, 배타주의, 노동자계급의 빈곤화, 지구환경 파괴 등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민족주의로는 해결할 수 없다. 민족주의의 함정에 빠지면 인류는 도태될 것이다. 20세기에만 2억 명이 끝없는 일련의 전쟁 때문에 살해되었다. 이 사회가 현재의 생산양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우리를 야만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노동자 계급, 특히 젊은 세대의 노동자 계급이 각 나라의 사회운동에 보내야 할 메시지다. 일본에서는 후쿠시마 참사에 대한 수많은 항의가 있었고, 경제위기의 참상에 대한 분노도 늘어나고 있다. 중국에서는 믿기 어려운 끔찍한 착취와 무서운 환경오염에 대한 수많은 노동자 파업이 일어나고 있다.

아랍의 봄, 스페인, 미국, 그리스, 방글라데시 등, 높은 실업률, 빈민화와 직장에서 증가하는 중압에 시달리는 노동자 계급이 많은 나라에서는, 국가 아래 단결하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계급투쟁이 해결책이다. 우리는 이 위기와 야만을, ‘외국의 경쟁 상대’가 소유한 상점이나 공장을 불태우거나, 외국 경쟁사들의 상품 불매를 호소하거나 구매를 제한하는 것으로 극복할 수 없다. 노동자계급의 이름으로, 국가 대 국가가 아니라, 계급 대 계급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슬로건은 언제나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이다!

제1차 대전이라는 대살육을 노동자 계급이 끝낼 수 있던 것은 이러한 입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경을 넘어 전 세계 노동자의 단결을 호소한- 레닌, 리프크네히트, 룩셈부르크와 주위의 혁명가들은 국제주의의 입장을 지켰다. 공장과 전선에 있는 노동자들을 고무시키고, 마침내 혁명적 봉기로 제1차 세계 대전을 종결로 이끈 것은, 강고한 국제주의 입장이었다. 1937년의 중일 전쟁 당시 소규모 좌익 공산주의 그룹 <빌랑(Bilan)>의 국제주의자들은 이러한 입장을 지켜냈다.

“이 전선의 양측에는 노동자를 학살하는 것이 목적인 탐욕스러운 지배적 부르주아가 있다. 이 전선의 양측에는 대학살을 한 노동자들이 있다. 이것은 잘못이다. 노동자들이 혁명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먼저 제국주의 일본을 타도해야 한다는 생각에, 중국의 노동자와 잠시라도 함께 ‘싸우는’ 부르주아가 있다고 믿는 것은 절대적으로 잘못되었다. 제국주의는 어느 장소든지 확장하며 중국은 다른 제국주의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혁명적 투쟁을 위해서는 중국과 일본의 노동자들이 계급 단결을 가져올 수 있는 계급투쟁에 돌아와야 한다. 그들의 동맹은, 착취자들에 대한 동시적 공격을 공고히 할 것이다. ( … ) 국제 공산주의 좌익분파만이 수많은 배신자, 기회주의자에 대항하여 혁명투쟁의 깃발을 높게 내걸 수 있다. 이러한 세력만이 아시아에서 아비규환을 가져온 제국주의 전쟁에서 착취자에 대한 노동자의 인민 전쟁 - 중국과 일본 노동자의 단결, ‘국가전쟁’의 전선 파괴, 국민당에 대한 투쟁,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 노동자를 제국주의 전쟁으로 동원하는 모든 세력에 대한 투쟁 - 으로 전환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좌파 잡지 <빌랑 (Bilan)> 제44호, October 1937, p1415)

우리는 이러한 국제주의자의 전통을 이어 민족주의의 감옥으로부터 빠져나가야 한다. 오늘날 노동자들이 서로 소통하고, 국제주의자들 사이에 연계를 놓고, 세계 곳곳에서 국제주의자들의 공통 입장을 지키기 위한 필요조건이 창출되고 있다. 지배자들이 검열, 인터넷 검열, 탄압, 국경 폐쇄 등의 어떠한 수단을 이용한다 해도- 우리는 노동자의 단결을 위해 계속 나아갈 것이다.

중국, 일본의 지배자들이 특히 젊은 세대를 민족주의 유혹에 빠트리려 하는 가운데, 우리는 확고한 우리의 대안- 계급투쟁- 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지배자들 간에 매일 협박하고, 똑같이 전쟁 선전을 부추기는 북한과 한국의 노동자와 전 세계 노동자계급에 중요한 메시지가 될 것이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위협에 대항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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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달동안 북한과 남한 및 미국사이에 다시 한번 긴장이 고조되었다. 반복된 미사일성능시험과 함께, 남한 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하와이 또는 괌을 표적으로 미사일 공격을 심지어는 핵무기 공격을 가하겠다며 북한은 온갖 수사학으로 위협하고 있다. 이에 대해 남한과 미국과 일본은 북한에 대해 군사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결의를 선언했다. 다시 한번 이 나라들의 지배계급들은 그들의 탐욕스런 국가적 이해를 위해 수백만 민중의 목숨을 위협할 태세다.

이러한 전쟁 위협에 직면하여, 착취받는 사람들과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책무를 가진다:

  • 착취받는 사람들을 학살로 내몰려는 자본의 모든 세력에 대항해 국제주의적 입장을 분명하게 확인하는 것,

  • 지배계급 지도자들의 연설의 연막 그 뒤에 숨겨진 진정한 사안을 분석하는 것.

국제주의적 입장

북한의 핵실험에 뒤어어 2006년 10월 남한과 다른 나라 국제주의자들의 한 회합에서 다음과 같은 선언이 채택되었다.

북한의 핵실험 소식에 이어, 서울과 울산에서 회합을 갖고 있는 우리 공산주의국제주의자들은:

  1. 또 하나의 자본주의국가의 손 안에서의 새로운 핵무기 개발을 비난한다. 핵폭탄은 제국주의자들 간 전쟁에서 최종적인 무기로서 그 유일한 기능은 일반 민간인의 특히 노동자계급의 대량학살이다.

  2. 자본주의국가 북한에 의해 자행된 전쟁으로 향한 이러한 새로운 단계를 전적으로 비난한다. 이때 북한은 자신이 노동자계급이나 공산주의와는 전혀 무관함을 그리고 군사적인 야만주의로 향한 쇠퇴한 자본주의의 전반적 경향의 가장 극단적이자 괴기한 판본에 지나지 않음을 (필요하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3. 그들의 적 북한에 대항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위선적인 켐페인을 가차없이 비난한다. 그러한 캠페인은, 오늘의 이라크에서와 같이 노동인민이 결국은 그 주요 희생자가 될 선제공격들의 개시 – 그들이 이렇게 할 능력을 갖고 있다면 – 를 위한 그들의 이데올로기적인 준비에 불과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민간인을 절멸했을 때의 그 미국이 지금까지 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한 유일한 세력임을 우리는 잊지 않고 있다.

  4. 중국과 같은 다른 제국주의 갱스터들의 비호 아래 출현할 수 밖에 없는 소위 „평화 발의(peace initiative)“들을 가차없이 비난한다. 이것들은 이 지역에서의 평화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의 옹호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노동자들은 어느 자본주의 국가의 어떤 „평화적인 의도“도 믿을 수 없다.

  5. 국가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옹호라는 미명아래 남한 부르조아계급이, 국제주의적 원칙을 방어하는 노동계급에 또는 그 활동가들에 대항하여 억압적 조치들을 취하려는 모든 시도를 가차없이 비난한다.

  6. 발생하게 될 군사행동으로 인해 제일 먼저 고통당할, 남북한의, 중국의, 일본의 그리고 러시아의 노동자들과의 우리의 전적인 연대를 선언한다.

  7. 자본주의 아래의 인류를 엄습하는 야만주의의, 제국주의 전쟁의, 그리고 핵파괴의 위협을 영원히 종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자들의 전세계적인 투쟁임을 선언한다.

노동자들은 방어할 어떤 국가도 없다!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현상황에 직면하여 2006년 10월의 선언은 완전히 유효하다.

증대되는 군사적 긴장 이해하기

북한과 그 라이벌사이에 존재하는 최근의 상황악화와 이에서 비롯된 전망들을 분석하기 위해 우리는 이러한 충돌을 더 넓은 역사적 국제적 문맥안에 위치시킬 필요가 있다.

북한과 그 라이벌 사이에서 긴장의 첨예화는 극동의 더 전반적인 긴장 첨예화의 일부이다. 지난 몇 달 동안 이 지역의 두 주요 라이벌, 중국과 일본은 센카쿠/댜오위다오열도에 대한 영유권을 반복적으로 주장하면서 애국주의적 캠페인들을 자극해 왔다. 지난 몇 년간 중국과, 남지나해를 둘러싼 몇몇 나라들은 이러한 남지나해에서의 영토주장을 놓고 충돌해 왔다. 남한과 일본은 독도/다케시마를 놓고 늘 분쟁하고 있다. 최근의 상황악화는 이 지역에서 제국주의적 긴장이 전반적으로 첨예화되는 경향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동시에 남북한 사이의 충돌은 동아시아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충돌들 중의 하나이다.

충돌의 뿌리

동아시아는 제 1차 세계대전에서 동아시아는 기본적으로 전쟁의 잔혹함을 경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에서는 모든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의 주요한 전쟁터들 중 하나가 되었다(이때 2천만명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독일에서 나치정권이 패배하고 유럽이 1945년 5월 전승국가들 사이에서 분할되자마자, 소련과 미국은 아시아의 여러지대에서 그 지배권을 놓고 서로 충돌했다. 러시아가 일본의 일부를 낚아채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는 결심으로 미국은, 1944/45년 겨울 화염폭탄으로 도쿄를 이미 초토화시킨 뒤임에도 불구하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최초로 핵폭탄을 떨어뜨렸다. 중국에서 러시아는 마오의 붉은 군대를 그리고 미국은 장개석의 군대를 지원했다. 중국은 친러시아파(중국인민공화국)와 친미국파(타이완)로 분할된 최초의 나라였다. 이러한 치명적인 분할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존재하며 그 양측은 중무장한 채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고 있다. 그리고 1945년 일본 점령자들이 패배한 뒤, 러시아 군대는 한반도 전체를 점령할 태세였던 반면 미국은 한국의 공동점령을 러시아에게 강요했고, 그 결과 한국은 1945년 북위 38도선을 따라 분단되었다. 그래서 1945년 이래 동아시아에서는 한편으로 미국과 그 동맹국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중국과 러시아 및 다른 동맹국들 사이의 항상적인 대립이 그 한 특징을 이룬다. 1950-1953년의 한국전쟁이 이러한 두 블럭사이의 냉전에서 최초의 그리고 가장 처참한 시기의 하나를 이루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 전쟁에서 미국 주도의 연합군은 중국과 러시아군대의 지원을 받은 북한에 대항해 싸웠다. 한국전쟁 동안 3백만명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많은 사람들이 양측에 의해 자행된 학살에서 희생되었다. 그 전쟁 자체로 그 나라는 파괴되었고, 서울과 평양은 여러번에 걸쳐 심한 폭격을 당했다. 한국은 고도로 군무장 된 채 분단국으로 남았다. 세계에서 „가장 잘 방어된“ 군사지역의 하나로서, 양쪽 군대가 60여년을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눠오고 있다.

그래서 현재의 상황악화는 이러한 연속성의 한 표현이자,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동아시아를 괴롭히는 일련의 충돌들의 격렬화이다. 그 뿌리는 제국주의적 분할, 세계가 민족국가들로 파편화된 것에 놓여있다. 이러한 파편화의 결과인 민족국가들은 서로를 절멸하겠다고 위협하면서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이고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유럽전체가 1945년 이래 두 블럭사이에 분할되었다. 독일은 1989년까지 분단된 채로 있었다. 인도 아대륙 전체는 파키스탄/방글라데시와 인도 사이에 분할되었다. 베트남은 분단되었다. 1990년대에는 예전의 유고슬라비아가 무수한 후속전쟁들을 거치며 갈기갈기 찢어졌다. 중동에서 예전의 오토만 제국의 영토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는 수많은 작은 나라들로 쪼개졌고 이러한 배경에 이스라엘이 창립이 부가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또다른 영구적 전쟁지대가 남겨졌다. 이 모든 것은 새로운 나라의 형성이 인류에게 더 이상 어떤 진보도 제공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나라들은 노동자계급에게 치명적인 함정이자 묘지이다.

1950년대 초 한국전쟁이 이미 미국과 중국의 직접적인 대립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상황악화 또한 그들 동맹국들의 동일한 „든든한 옹호자들“을 대립시킨다.

제국주의 체스판

북한체제는 그 탄생 첫날부터 철저히 중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한반도의 지리적-전략적 위치는 그 나라가 모든 이웃 라이벌들에게 표적이자 소중한 완충지대임을 위미한다. 특히 중국은 북한을 자신과 일본 및 미국 사이의 완충물로 여긴다.

중국은 부상하고 있는 세력으로서 지속적으로 미국에 도전하면서 그 국제적 영향력을 확대해 오고 있다. 이 나라는 미국을 댓가로 자체의 입지를 확대하기 위해 군대를 근대화하고 아시아 전역에서 군기지들의 선을 형성하려 노력해왔다. 이 새로운 도전자가 장기적으로 제시하는 위험을 알고 있는 미국은 자신의 군대의 주요부분을 동아시아로 동원하여 중국을 제한하려는 의도를 선언했다. 미국은 가능한 한 많은 나라들이 자신의 편에 서도록 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동아시아에서의 그 어떤 충돌도 미국과 새로이 부상하는 중국사이의 이러한 전반적인 권력싸움의 그늘에 가려질 뿐만 아니라 어느정도는 직접적으로 그 싸움의 일부가 되었다. 중국은 평양체제의 붕괴를 참을 수 없는데, 이는 북한의 호전적인 반항이 일본 및 남한과의 긴장들 편향시키고 무엇보다도, 그렇지 않다면 훨씬 더 중국에 대항해 향하고 있을 미국의 군병기가 북한을 겨냥해 있도록 발묶어두기 때문이다. 남한과 북한의 (남한 주도아래) 재통합 그리고 중국국경 근처의 미군기지가 생길 전망은 중국이 북한을 옹호하려는 결의를 더 증대시킬 수 밖에 없다. 중국이 북한에 대해 갖는 영향력과 제어력의 정도를 가늠하기는 불가능할 지라도, 미국과의 군사적인 대치에서 북한의 패배는 중국의 상당한 약화를 의미할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북한을 제한하려 노력하면서 동시에 북한이 미국 군대들을 „묶어 놓도록“ 해야 할 수 밖에 없다.

러시아는 1989년 이후 다른 많은 충돌지역들에서처럼 모순적인 입장에 놓여 있다. 한편으로 러시아는 냉전초기 그들의 제휴가 있은 뒤 1960년대부터 줄곧 중국의 라이벌이었지만, 지난 십년 동안 중국이 „떠오르는 세력“으로 부상면서 러시아는 미국에 대항해 중국의 편을 드는 경향이었다. 동시에 러시아는 중국이 너무 독단적으로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북한과 관련해서 러시아는 미국이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증대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미국은 결코 한국이 중국이나 러시아의 손에 떨어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태세가 되어 있었다. 현재 먼거리에서 미국은 다시 한국과 일본의 든든한 옹호자이다. 물론 주요한 동기는 중국을 제한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북한의 군사적 위협은 미국이 태평앙에서 무기를 증가시키는데 환영할 만한 정당화를 제공한다(이미 괌, 알라스카 그리고 남한 자체로 더 많은 무기를 이동시켰다). 물론 이러한 무기들은 북한에 대항해 사용될 수 있지만 중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동시에 괌이나 알라스카의 미군기지 또는 미국 동맹국의 영토들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그 어느 나라도 미국의 패권에 대한 도전이다. 그래서 중국에 의한 미국의 입지의 약화를,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북한의 위협을 미국은 견딜 수 없다. 미국의 중국 견제정책은 다시 북한과의 긴장상태에 상당히 기여한다.

일본은 중국의 오랜 숙적으로서, 중국과 그 동맹국 북한에 의해 많은 위협을 느낀다. 동시에 일본은 독도/다케시마를 놓고 남한과 갈등한다. 1989년 러시아블럭이 해체된 이래 일본은 미국의 지역 장악력을 느슨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급부상과 북한과의 반복적이고 악화된 충돌들 때문에 일본은 미국의 군사력에 대한 자체의 의존도를 축소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만약 한반도의 통일이 이뤄진다면, 일본은 그 지역에서 또다른 주요 라이벌과 직면하게 될 것이다. 30여년이 넘도록 한국을 점령했던 일본으로서는 , 역설적이게도, 완충국가로서의 북한이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이 매우 유감일 것이다. 최근 중국 및 북한과의 긴장 증대는 일본 정부에게는 그들의 군비지출을 늘릴 고마운 빌미를 제공했다.

그래서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지 거의 정확히 60년이 지난 지금, 동일한 세력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지금 북한으로부터 그리고 그 반대편으로부터도 마찬가지로 핵무기, 고전적인 무사일 및 대포공격의 위협이 세계에서 가장 큰 몇몇 대도시들(서울, 도쿄, 평양)에 대해 가해지는 것을 보고 있다. 두개의 가장 큰 경제대국들인, 중국과 미국사이의 점점 더 커지는 양극화와 더불어, 동아시아는 또 하나의 영구적인 갈등지역이 되어 전세계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두개의 체제 – 노동자계급에게 있어서 두가지 적

사회주의적이라 주장하는 북한체제는 노동자들의 봉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러시아와 중국의 군사적 도움 덕분에 권력을 잡게 되었다. 스탈린주의적 후견국가들에 완전히 의존하면서 그 체제는 군사기구의 유지와 확장에 자원을 집중해 왔다. 거대한 군국화의 결과로 2천 4백 5십만 인구를 가진 이 나라는 1백 1십만명의 상비군과 4백 7십만명에 이르는 남여예비군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전의 모든 스탈린주의적 동유럽국가들과 비슷하게 북한경제도 세계시장에 제공할 경쟁력 있는 민간상품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군사부문의 과잉비대는 식료품과 다른 소비재들이 지난 60여년동안 영구적이 아니라면 적어도 빈번하게 배급되어오고 있음을 의미한다. 1989년 소련블럭의 붕괴이래 산업생산은 50%이상 하락했다. 인구는 1990년대 중반의 기근으로 10% 정도 감소되었다. 이러한 인구감소추세는 중국으로부터 식량공급이 이뤄진 이후에야 중지되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북한은 에너지의 90%, 소비재의 80%, 그리고 식량의 약 50%를 중국으로부터 수입하고 있다.

만약 지배계급이 민중에게 공포와 굶주림, 억압과 영구적인 군사화외에는 아무것도 제공할 수 없다면, 만약 그 나라 기업들이 세계시장에서 상품으로 경쟁할 수 없다면, 그 체제는 자신의 위협하고 협박하는 군사적 역량을 통해서만 „인정“받으려 할 수 밖에 없다. 그러한 행위는 몰락한 계급의 전형적인 표현으로서, 이러한 계급은 폭력과 강탈과 테러, 이외에는 인류에게 그 어떤 것도 제공할 수 없다. 모든 종류의 군사적 공격을 통해 라이벌들을 위협하려는 자세는 상황이 얼마나 예측불가능하고 광란스럽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경제적 곤경에 직면해 그 체제는 공급상황을 개선하려는 희망으로 여러해 동안 제한적인 경제적 „자유화“ 조치들을 도입하려 노력하고 있다. 어떤이들은 현재의 위협적 군사력이 경제문제로부터의 단순한 주의돌리기이자 젊은 후계자 김정은이 군부에 강한 인상을 주려는 군사작전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이 체제의 정치적 안정성에 대해 추정할 수는 없어도, 그 상황 악화의 실제적인 위험을 과소평과하면 큰 실수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제국주의적 긴장들의 상승은 결코 단순히 „허세“나 „공갈“ 또는 단순한 주의돌리기와 정치적 연극이 아니다. 세계의 모든 정부들은 군사주의의 악순환을, 설령 이것이 그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거슬러 작용하는 듯이 보일지라도, 그것을 강화할 수 밖에 없다. 지배계급은 군사주의라는 암에 대한 실제적인 통제력을 갖고 있지 않다. 북한이 남한이나 미국을 공격할 경우, 이것은 한 체제 및 국가 전체의 붕괴는 아닐지라도 상당한 약화를 초래할 것임이 명백하다. 하지만 지배계급은 초토화 정책에 있어서 어떤 한계도 모른다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은 자살공격을 행하여, 무수한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상처입고 그 자신들의 생명을 희생한다. 북한의 경우 한 국가 전체가 학살을 행하려고 위협하며 „자살“할 태세가 되어있음을 보여준다. 북한이 중국에 극도로 의존하고 있지만, 광기의 새로운 차원을 보여주고 있는 평양체제를 중국은 „고삐 당겨 자제시킬“ 수 있을 지 확신할 수 없다. 한국전쟁동안 중국과 북한은 수백만의 병사들을 총받이로 희생하고 가능한 한 많은 상대편 병사들을 제거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북한 체제는 그래서 자기 나라의 국가적 이해를 위해 싸운다는 것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보여준다. 북한 체제의 위협 및 협박정책은 외예가 아니라, 인류 전체를 점점 더 야만으로 내몰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 전체가 보여주는 전망들의 조금 과장된 표현에 불과하다.

그렇게 공공연하게 남한, 일본, 및 미국을 위협하는 북한 제체와 더불어, 남한은 스스로를 „희생자“로 „순진무구하게“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남한 지배계급도 북한의 지배계급 만큼 잔인하다.

1948년 봄 서울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승만 정부가 제주도에서 6만명(이 섬 인구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의 학살을 조직했다. 한국전쟁동안 남한정부는 북한군대 만큼 잔인하게 학살을 자행했다. 전후 남한은 특히 이 승만 아래에서는 간접적으로 그리고 박정희 아래에서는 직접적으로 이뤄진 독재를 포함 대략 40여년 동안 독재를 행한 정권들이 통치했다. 노동자나 학생들의 저항이 되살아날 때마다 진압당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은 처참하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후 재건기간동안, 특히 1960년대 이후 노동력의 극심한 착취덕분에 남한 자본은 낮은 상품가격을 통해 세계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남한은 비정규 임시계약 노동자의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들 중 하나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독재자“이든 그렇지 않든 모든 정부들은 그들의 억압정책을 유지했다. 국가보안법은 정부가 그 누구라도 북한의 스파이라고 기소하기만 하면 남한정부에 비판적인 그 어떤 목소리도 마녀사냥해버릴 수 있는 권위를 제공한다. 노동자나 학생들 심지어는 „평범한 시민들“의 많은 파업이나 항의시위들(예를 들어 쌍용자동차파업이나 „촛불시위“를 보라)에서 남한 국가는 특히 노동자계급에 대해 끊임없이 억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북한에서 김씨왕조의 여러 세대가 권력을 대물림하는 것을 대중매체가 비웃는 반면, 남한에서는 전독재자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최근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민주주의“ 아래에서 권력 승계의 주목할 만한 연속성을 보여준다. 게다가, 개성공단에서 북한 노동력의 공동 착취는 남한자본가들이 북한의 한 패들과 완벽하게 협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남한 지배자 도당들은 북한에 있는 라이벌에 대항해 어떤 군사적 수단도 사용할 결의가 되어 있다. 최근 서울에서 스스로 핵무기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다.

제국주의 전쟁에 대항한 계급전쟁

역사는 남북한에서의 그 두 가지 유형의 제체들이 기본적으로 동일하며 노동자계급의 절대적인 적들임을 보여주었다. 노동자들은 그 어느 한 쪽도 편을 들 수 없다. 동아시아에서의 최근 긴장의 첨예화는 자본주의의 파괴적 경향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최근의 충돌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인류에 대한 위험들은 훨씬 더 커졌다. 이번에는 가장 강력한 라이벌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 중국과 일본, 모두 심하게 무장한 채 군비경쟁을 가속하고 있다. 한국전쟁과 냉전 동안 노동자계급은 패배했었고 고개를 들수 없었다. 한국전쟁 시기에 세계에서는 오직 소수의 좌파공산주의 혁명가들만이 국제주의적 입장을 옹호했다. 오늘날, 동아시아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자본주의의 치명적 악순환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희생하려하지 않는다. 오직 노동자계급만이 인류를 점점 더 깊은 야만으로 빠져드는 것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노동자 계급은 애국주의와 군사주의의 악순환을 거부해야 한다.

„정부와의 연합전선“ 반대! 노동자계급에게 유일한 해결책은 남한과 북한에서 자신의 부르조아계급들에 대항해 결연하게 투쟁하는 것이다. 오늘날 혁명가들에게 이것은, 제 1 차 세계대전 동안 레닌과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의 전통을, 그리고 2차 세계대전동안의 좌파공산주의의 국제주의적 전통을, 2006년 전쟁위협이 있었을 때 국제주의자선언을 통해 옹호되었던 그 전통을 옹호해야 함을 의미한다.

ICC, 2013년 4월 8일

ICConline - 2015

파리에서의 학살: 테러리즘은 썩어가는 부르주아사회의 표현이다

Cartoon by Wolinski. Workers tell trade union rep they want to make the revolution, not have rise in wages!2015년 1월 7일과 9일 파리에서의 공격으로 살해당한 20명 중에서 까뷔(Cabu), 샤브(Charb), 틴유(Tignous), 볼린스키(Wolinsky), 이 네명은 일종의 상징이었다. 그들이 주요 표적이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어리석음에 대항해 지성을, 광신주의에 대항해 이성을, 복종에 대항해 반항을, 비겁함에 대항해 용기1를, 증오에 대항해 동감을, 그리고 순응주의와 우둔한 독선에 대항해 특히 인간적인 특징인 유머와 웃음을 주장했다. 우리는 그들의 정치적 입장들 일부를 거부하거나 반대할 지도 모른다, 그 중 어떤 것들은 완전히 부르주아적이다2. 그러나 공격당한 것은 그 중에서 가장 최상의 것이었다. 단지 만화가나 슈퍼마켓의 평범한 쇼핑객에 불과했던 사람들에 대한 야만적 난폭행위는 프랑스에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상당히 이해할만 하다. 이러한 감정이 지금 브르주아 민주주의의 모든 면허받은 대표자들에 의해 활용되고 있는 방식 때문에, 수백만의 사람들을 사로잡아 1월 7일 자생적으로 거리 시위로 나가게 만든 그 분노와 노여움과 깊은 슬픔이 야만의 이러한 경멸적인 행위에 대항한 기본적이고 건강한 반응이었다는 사실이 은폐되어서는 안된다.

자본주의 부패의 순수한 산물

테러리즘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3. 새로운 것이라면 그것이 지니게 된 형식이고, 이것은 80년대 중반부터 발전해 나가서 전대미문의 전세계적 현상이 되었다. 소규모의 고립된 그룹들에 의해 자행된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국가의 소인이 찍힌, 1985-86년 파리를 강타한 일련의 무차별 공격들은 테러리즘의 활용에 있어 새로운 시대를 개막했고 그렇게 테러리즘은 지금까지 알려진바 없던 수준에 이르러 점점 더 많은 수의 희생자를 내고 있다.

회교 광신주의자들에 의한 테러공격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 새로운 세기의 역사는 이를 정기적으로, 그리고 2015년 1월 초의 파리 공격들 보다 더 훨씬 더 큰 규모로 목격했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쌍둥이 빌딩에 충돌한 가미가제 비행기들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우리의 견해로는, 미국 비밀정보부가 이 공격들이 일어나도록 방치했고 심지어는 용이하게 했음이 분명하다. 이 사건들로 미국 제국주의 세력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전쟁을 개시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루즈벨트가 예견하고 원하기도 했던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미해군기지 공격이 결국 미국의 제 2차 세계대전에의 개입에 적절한 구실로 작용했던것과 마찬가지로4. 그러나 2001년 9월 11일 그 비행기를 조종한 자들이 대규모의 살상을 자행하고 자신의 생명을 희생함으로써 천국에 갈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완전히 망상적 광신주의자들이었음도 분명하다.

뉴욕사태가 있은지 3년도 채 지나지 않은 2004년 3월 11일 마드리드에서 끔직한 학살사태가 일어났다. 아토샤(Atocha) 역에서 “이슬람주의자“의 폭탄들로 인해 200명이 살해당하고 1700명이 부상당했다. 시체들이 너무 뒤엉겨서 DNA검사를 통해서만 신분식별이 가능할 정도였다. 그 다음해인 2005년 7월 7일 이번에는 런던에서 역시 대중교통수단에서 4차례의 폭발로 56명이 죽고 700명이 부상을 당했다. 러시아도 2000년대에 몇 차례 이슬람주의의 공격을 받았는데, 그 중 하나인 2010년 3월 29일 사태에서는 39명이 사망하고 102명이 부상당했다. 그리고 지엽적인 나라들이라고 무사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2003년 미국의 침략이래 이라크에서 그리고 우리가 최근 페샤와(Peshawar)지역에서 다시 보게된 처럼 파키스탄에서 그러한 공격들이 있었다. 페샤와에서는 지난 12월 132명의 아이들을 포함해 141명이 한 학교에서 살해당했다5.

의도적으로 아이들을 겨냥한 이 공격은 그 모든 공포를 통해 이 “지하드” 추종자들의 점증하는 야만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1월 7일 파리에서의 공격은, 비록 파키스탄의 그것보다 훨씬 덜 끔찍하고 덜 공포스럽다할 지라도 야만으로의 이러한 경향에서 새로운 차원을 표현한다.

이전의 모든 경우들에서, 아이들을 포함한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이 얼마나 경악스러울 지언정, 어떤 “합리성”이 존재했다. 국가와 그 무장세력에 보복하거나 압력을 가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2004년의 마드리드학살은 스페인이 미국을 도와 이라크에 개입한 것에 대해 “처벌”하는것이 의도었다. 2005년 런던의 폭탄사건도 마찬가지였다. 페샤와에서의 공격은 파키스탄군부의 아이들을 학살함으로써 그 군부에 압력을 가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1월 7일의 파리 공격들의 경우에서는 조금이라도 심지어 가상으로라도 “군사적 목표”가 전혀 없었다. 샤를리 엡도(Charlie Hebdo) 만화가들과 그 동료들은 그 신문에 모하메드의 캐리캐춰가 실렸기 때문에 “예언자의 복수를 하려” 살해당했다. 그리고 이는 전쟁으로 황폐화되거나 종교적 반계몽주의에 의해 지배당하는 어느 한 나라에서가 아니라 프랑스에서, “민주주의적이고 세속적이며 공화적인” 프랑스에서 발생했다.

증오와 허무주의는 항상 테러리스트들의 행동들에서 핵심 동인이다. 가능한한 대대적으로 살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생명을 희생하는 이들에게서는 특히 더 그러하다. 그러나 이 때 인간을 무고한 사람들을 전혀 개의치 않고 무차별로 살해하는 냉혹한 살인기계로 만들어버리는 이러한 증오는 또 다른 “살인기계”, 즉 국가를 그 주요 표적으로 한다. 하지만 1월 7일 파리에서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다. 여기서는 반계몽주의적 증오와 복수에의 광신적 갈증이 그 순수한 형식으로 보여질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 표적은 타자,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자, 특히, 생각 자체를 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로, 즉, 인간에게 알맞은 이 생각하는 능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1월 7일의 학살은 그렇게 대단한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우리는 상상하기도 조차도 어려운 어떤 것에 직면해 있다: 어떻게 해서, “문명화된” 나라에서 교육된 인간 정신이, 책을 불태우고 유태인을 절멸시키려던 가장 광신적인 나치들의 그것과 유사한 야만적이고 부조리한 계획에 빠져들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최악인 것도 아니다. 최악은 쿠아치(Kouachi)형제들의, 아메디 쿨리발리(Amedy Coulibaly)와 그 공모자들의 극단적 행위는, 주로 빈곤지역에서 번창하고 있는 한 운동 전체로 볼 때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 다는 점이다. 그 운동은, 많은 젊은이들이 “샤를리 엡도는 예언자를 모욕했기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라는 생각과 만평가들을 살해한 것이 “정상적”이라는 생각을 단언할 때 표현되었다.

이것은 또한 야만주의의 전진, 우리 “문명화된” 사회들의 붕괴의 한 징후이다. 이민 과정을 거친 이들 뿐만 아니라 일부 젊은이들의 이러한 증오와 종교적인 반계몽주의에로의 전락, 이것은 자본주의사회의 부패의 여러 증상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현 위기의 무게를 가늠케 하는 특히 중요한 지침(pointer)이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유럽에서도, 그리고 특히 프랑스에서) 연속적인 패배로 문화적 사회적 빈곤으로 모욕당한 수 많은 젊은이들이 아무 미래도 없이 무질서한 일상을 살고 있다. 이들은 무원칙적인 일종의 신병모집관(종종 국가나 ISIS와 같은 정치적 표현들과 관련된)들의 쉬운 먹이가 된다. 이 모집관들은 예상치 못했던 것만큼이나 갑작스런 대화들을 통해 그러한 부적응자들을 그들의 네트워크에 끌어들여 “지하드”를 위한 잠재적인 공격수나 포탄받이로 전환시킨다. 경제체계이지만 또한 사회적 도덕적 그리고 문화적 체계이기도 한 자본주의의 현 위기로 인한 자신들의 전망 부재와, 발밑에서 썩어가며 모든 구명으로부터 파멸을 분출해 내는 사회에 직면한 많은 젊은이들에게 삶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해 보인다. 그들의 절망은 종종 맹목적이고 광신적인 복종이라는 종교적인 색채를 띠며온갖 종류의 비합리적이고 극단적인 행동을 부추기고 자살적인 허무주의로 부채질될 수 있다. 다른 곳에서, (예를 들어 우간다, 콩고 및 챠드에서, 특히 1990년대 초 이래) 엄청난 수의 소년병들을 만들어내는, 부패 중인 자본주의사회의 공포는 지금, 유럽의 중심부에서, 완전히 무감각해지고 그어떤 댓가도 기대하지 않은 채 최악을 저지를 수 있는 젊은 정신병자들을, 냉혈적 전문 킬러들을 생산해 내고 있다. 간단히 말해, 자체의 병적이고 야만적인 동력에 내맡겨진 이 썩어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오직 인류 전체를 처참한 무질서로, 살인적인 광기와 죽음으로 이끌 뿐이다. 테러리즘의 성장에서 보여질 수 있듯이 그것은 점점 더 많은 완전히 절망적인 개인들을 생산해 내고, 이들은 최악의 잔혹행위도 저지를 수 있는 지점까지 전락해가고 있다. 요약하자면, 그것은 그 자신의 이미지에 걸맞게 이러한 테러리스트들을 주조해낸다. 만약 그러한 “괴물들”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괴물처럼”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반계몽주의적 허무주의적 경향에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 모두가 스스로 직접 “지하드”에 가입하지는 않을 지라도, 그들중 많은 이들은 이 단계를 선택한 이들을 “영웅들”이나 “정의”의 요원들로 간주한다는 사실은 사회를 침투해오는 절망과 야만성의 점증하는 무게를 증명해준다.

추악한민주주의적활용

그러나 자본주의 세계의 야만성은 이러한 테러리스트 행위들과 그러한 행위들에 대해 일부 젊은이들이 보이는 동감에 의해서만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부르주아지가 이러한 드라마들을 활용하는 비열한 방식에 의해서도 드러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자본주의 세계는 주요한 “민주주의” 지도자들을 선두로 가장 치사한 작전을 실행하려 하고 있다. 1월 11일 일요일 파리에서 거대한 거리집회가 계획되었다. 올랑드 대통령과 모든 국내정치지도자들 주위로, 안겔라 메어클, 데이비드 카메른, 스페인과 이태리 및 여러 다른 유럽국가들의 정부수뇌들뿐만 아니라 요르단국왕, 마흐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자치구 대표 및 벤야민 네탄야후 이스라엘수상과 같은 세계 지도자들과 함께6.

1월 7일 저녁 수십만 민중들이 자생적으로 거리 시위에 참여하는 동안, 프랑스와 올랑드를 시작으로 한 정치인들과 프랑스 대중매체는 그들의 캠페인을 시작했다. 위협당하는 것은 언론의 자유와 민주주의다, “나서서 단합하여 우리 공화국의 가치를 수호해야 한다.

점점 더 빈번하게 우리는, 1월 7일의 시위에 뒤이은 집회들에서 프랑스국가, “마르세예즈(Marseillaise)”를 들었다. 그 합창은 “우리의 고랑을 불결한 자들의 피로 적시자!” … “국민단합”, “민주주의의 수호”, 이것들이 지배계급이 우리의 머리 속에 집어넣길 원하는 메세지들이다, 즉, 20세기 두개의 세계대전에서 수백만 노동자들의 탄압과 학살을 정당화했던 그 슬로건들이다. 올랑드도 그의 첫번째 연설에서 그것을 말했다. 아프리카로, 특히 말리로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프랑스는 테러리즘에 대항한 전쟁을 이미 시작했다고(미국이 2003년 이라크에 군사적으로 개입할때 부시도 이와 동일한 목적이라 설명했던 것처럼).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제국주의적 이해들은 명백히 이러한 개입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가련한 까뷔, 샤브, 틴유, 볼린스키! 광신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이 그들을 처음 한번 죽였다. 그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이러한 대표들과 “팬들”, 인류사회를 침투해오는 야만에 책임이 있는 부패하는 세계체제인 자본주의의 국가과 정부 수뇌들에 의해 두번째로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정치 지도자들은 이 체제와 그 지배계급, 부르주아지의 이해들을 방어함에 있어 민간인에 대한 테러와 암살과 강탈을 서슴치 않는다.

1월 7일 파리에서의 학살에 의해 표현된 이러한 야만성의 끝은 이러한 야만성을 생산하는 경제체제의 주요 지지자들이고 보장자들인 그런 이들의 행동들로부터는 도래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 끝은 오직,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즉, 그 연합이 사회의 대부분의 부를 생산하는 그 계급이 이 체제를 전복함으로써, 그리고 더이상 이윤과 경쟁과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에 기반하지 않고 인류 선사의 이러한 자취의 폐지에 기반한 진정으로 세계적인 인류공동체를 이룸으로써만 결과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에서는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그러한 연합7”이 될 사회, 공산주의사회를 이룸으로써만.

세계혁명(2015년 1월 11일)


1이 만화는 볼렌스키가 1968년에 그린 것이다.:노동자들이 혁명을 요구하자 노동조합간부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당신들은 제정신이 아니군 – 정부와 사장들은 결코 그것을 허용하지 않을테니.

이 만화가들은 수년간 정기적으로 살해위협을 받아왔다.

2'68세대'인 볼린스키는 프랑스공산당기관지, " 류마니테(L'Humanité)"에서 수년간 일하지 않았던가? 그 자신이 다음과 같이 쓰지 않았던가? "우리는 68년 5월을 우리처럼 되지 않도록 만들었다."

319세기에는, 러시아의 인민주의자들과 프랑스나 스페인의 아니카스트들처럼 작은 규모의 소수들이 국가에 대항한 반항으로 테러행위에 의존했다. 이러한 무모하고 폭력적인 행동들은 항상 부르주아지에 의해 노동자운동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하고 합법화하는데 이용되었다.

4우리 웹싸이트의 다음 기사를 참조:' 1941년 진주만, 2001년 쌍둥이빌딩: 미국 부르주아의 마키아벨리주의(Pearl Harbor 1941, the 'Twin Towers' 2001: Machiavellianism of the US bourgeoisie)'. Http://en.internationalism.org/ir/108_machiavel.htm

5그리고 파리에서의 공격들이 있기 며칠 전, 나이제리아의 이슬람주의 그룹, 보코하람(Boko Haram)은 그 최악의 잔악행위를, 즉 바가(Baga)시 주민 2000명에 대한 무차별적 살상을 자행했다.

6 “국민단합”을 위한 시위에 대한 요구는 노조와 정당측에서 만장일치였다(국민전선(the National Front)만이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뿐만아니라 대중매체도. 심지어 스포츠신문, (L´Équipe) 도 시위를 요구했다.

7마르크스, 코뮤니스트 선언, 1848

 

ICConline - 2016

로자 룩셈부르크의 독일사회민주당의 위기(“유니우스팸플렛”) 한국어판 서문

2015년 7월 6일, ICC

ICC100년전 제 1차 세계대전의 대학살에 대항에 쓰여진 로자 룩셈부르크의 유니우스팸플렛이 최초로 한국어 번역본으로 나오는데 여했다. 그 새로운 한국어본을 위해 작성된 서문을 여기에 공개한다. 지배계급과 그 선동기기가 1차대전 발발 100주년을 '기념하여' 다양한 형식으로 그 대학살에 대한 변명들을 늘어놓는다. 다른 한편의 혁명가들은 전쟁반대와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위해 맞섰던 그 국제주의자들의 도덕적 지적 용기를 자랑스럽게 칭송할 수 있을 것이다.

 


유니우스팸플렛은 세계의 역사적 변화의 개막을 열었던 제 1차 세계대전에 대한 최초의 주요한 이론적-정치적 분석의 하나로 쓰여졌다. 이 전쟁에서 파괴의 기계가 작동되어 전대미문의 규모로 인류를 학살했다. 예를 들어 북프랑스와 플랑드르(벨기에)에서 독가스와 같은 신무기의 사용으로 단 몇 주 동안 수만명의 병사들이 살해되었다. 종전까지 사망자가 약 2천만명에 달했다. 그리고 종전 직후, 지치고 영양실조에 시달리던 사람들 2천만명이 이후 '스페인독감'이라 알려지게 되는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1914년 8월 4일, 독일사회민주당 소속 제국의회 의원들은 전쟁차관 승인에 찬성했다. 처음으로, 프롤레타리아당의 지도부가, 이 경우에는 제 2인터네셔널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영향력있는 당 중의 하나가 국제주의의 가장 결정적인 원칙, 즉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라는 원칙을 배반했다. 그 배반자들에 대항해 독일에서 몇몇 남지 않은 국제주의자들이 로자 룩셈부르크의 거처에 모여서 국제주의의 옹호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 1년 후 국제주의자들의 최초의 국제대회가 스위스의 찜머발트1에서 조직되었다. 전쟁의 발발과 사회민주당지도부의 배반에 대응해 혁명가들은 그 전쟁의 뿌리와 그 귀결들의 분석을 시작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팸플렛, 사회민주당의 위기 그녀가 초안한 국제사회민주당의 임무에 대한 테제는 인류에게 있어 새로운 그 상황을 이해하고 혁명가들의 활동에 전망을 그려내려는 이러한 국제적 노력들의 일부였다. 그녀는 전쟁이 발발한지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915년 4월 감옥 안에서 '유니우스'라는 가명으로 이 팸플렛을 썼다. 전쟁 조건들 때문에 그 글은 즉시 출판될 수 없었고 1916년 1월에야 독일 밖에서 출판될 수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사적 상황를 놓고 볼 때, 그녀의 슬로건은 무엇보다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왜 그 전쟁이 시작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실수로부터 배우는 것이었다. 가차없고 대담한 자기비판을 행할 필요가 있었다.

근원을 찾아서

그 팸플렛의 여러 장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을 분석했다. 그녀는 자본주의가 세계적으로 팽창하면서 어떻게 그리고 왜 끊임없이 새로운 시장을 정복해야만하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너무) 뒤늦게 도착한”나라들이 어떻게 해서“먼저 도착한”나라들로부터 무력으로, 즉 전쟁을 통해서 정복물들을 빼앗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지를 보여주었다. 제국주의의 상승을 다룬 이 장들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전쟁의 역할을 보여준다. 그녀는 모든 국가들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폭로했고 이러한 발전은 어느 한 나라만에 의해서 개시되는 것이 아님을 인식했다. “(…)제국주의 정치는 어떤 한 국가 또는 몇몇 국가들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세계 발전에서 특정 성숙도의 산물이다. 그것은 국내에서부터도 국제적인 현상이자 그 모든 상호관계들 속에서만 인식될 수 있고 그로부터 어떤 국가도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분할될 수 없는 전체이다.”(본문 제 7장)

1890년대에 행한 분석에서 그녀는 폴랜드는 더 이상 독립국가가 될 수 없고 그래서 혁명가들은 더 이상 민족자결요구를 지지할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점은 1차 세계대전의 사건들로 확인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진영 안에서 국가방어전쟁에 대한 그 어떤 지지도 거부한 선구자들 중의 하나였다.“이러한 결정적인 역사적 환경을 도외시하며 세계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나라의 고립된 관점에 따라 좌우되는 모든 사회주의 정치는 이미 사상누각인 것이다.”(본문 제 7장)

전쟁 발발 후 몇 달만에 로자 룩셈부르크 참여국가들의 경제적 폐허를 초래하는 이 전쟁의 새로운 특성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새로운 역사적 조건들과 이러한 질적으로 새로운 시기가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분석한 후, 그녀는 전쟁의 발발에 있어서 주관적 조건들을 강조했다. 그녀의 결론은,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노동자당인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배반이 없었다면, 그리고 노동조합이 자본가들과 함께 서명한, 공장들에서의 당쟁중지(즉, 파업금지) 선언이 없었다면, 간단히 말해서,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이 노동자계급을 전쟁에 동원하지 않았다면 그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노동자계급과 인류에게 있어서의 귀결들

독일에서 사회민주당이 조국을 위한 지원을 호소하는 동안, 룩셈부르크는 전쟁의 종결에 있어 노동자계급의 결정적 역할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본주의가 자체의 전쟁 및 파괴충동을 제거할 것이라는 평화주의적 희망에 대해 경고했다. 그녀는 자본주의가 존속한다면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당할 것이라는 위험을 인식했다. 인류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양자택일과 직면했다.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귀결들

SPD 지도부의 배반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트, 프란츠 메링 등등을 중심으로 한 결연한 독일국제주의자들은, 당의 다수의 지지를 확보하지 않은 SPD 지도부가 당 전체를 지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룩셈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그 그룹은 모든 국제주의적 역량을 하나의 당으로 재조직하고 새로운 기초 위에 새로운 인터네셔널을 준비하기를 원했다. 룩셈부르크는 유니우스팸플렛에 부록으로서 출판된“국제사회민주당의 임무에 대한 테제”를 초안했다. 이 초안은 몇몇 변경을 거쳐 새로이 창립된 스파르타쿠스연맹에 의해 그 그룹의 가이드라인으로 채택되었다.

유니우스팸플렛의 중요성

룩셈부르크의 이팸플렛은 자본주의가 들어선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에 대한 역사적-이론적 틀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혁명가들의 활동에 대해 정치적 틀을 제공했다. 그것의 주요한 견해들 (제국주의의 역사적 발전, 쇠퇴기 자본주의사회의 전망들, 사회주의냐 야만이야, 노동자운동에서 국제주의의 문제 그리고 혁명가들의 임무)과 방법(모든 문제를 뿌리까지 파고들어 그 원칙들을 규명하는것, 가차없는 자기비판, 혁명가들의 임무에 대한 장기적 관점)은 모든 면에서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유니우스팸플렛의 이론적-역사적 기능들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 1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 쓴 다른 저작,자본의 축적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이 글에서 그녀는 자본주의의 추동력들과 그 기본 모순들 그리고 왜 자본의 축적이 특정 시기부터는 불가피하게 전쟁과 파괴를 초래하게 되는지의 윤곽을 보여주었다.

자본의 축적 출판이 이미 노동자운동 내부에서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것과 마찬가지로, 유니우스팸플렛의 출판도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 열정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제국주의의는 크든 작든 간에 모든 국가들의 암이 되었고 그래서 '민족자결' 요구는 더 이상 의제가 아니라는 룩셈부르크의 결론은 큰 논쟁을 유발했다. 전쟁 중에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 거센 논쟁이 시작되었고, 이 논쟁에서 레닌은 룩셈부르크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들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 논쟁이 공통된 국제주의의 입장, 즉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공유된 전망의 틀 안에서 이뤄졌음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제국주의 발전의 근원들 및 국제주의에 대한 배반의 근원들에 관한 그리고 혁명의 전망들에 관한 그 토론은, 억압과 추방등 가장 어려운 조건들 아래에서도 그들이 같은 방향을 향해 줄을 당기는 것을, 즉 자본주의체제의 전복을 위해 투쟁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전쟁 동안의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정신

인류에게 있어 이러한 역사적 재앙에 직면하여, 예전의 노동자당에 의한 이러한 배반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정신의 본보기, 지칠줄 모르는 결연함과 장기적 관점에서 이론적-정치적 분석을 이뤄내는 역량의 한 본보기였다.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전개된 야만성과 당의 배반은 혁명가들에게 진정한 충격이었고 그들 중의 일부는 침울함에 빠졌다. 독일의 많은 혁명가들이 수감되거나 추방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 자신도 전쟁기간 대부분 동안 감옥에 억류되었다. 4년 4개월간의 전쟁기간동안 총 3년 4개월을 그녀는 감옥에서 보내야했다. 그러나 그녀의 결연함을 굴복시키고 그녀를 침묵하게 하려는 것이 그 수감의 의도였다면, 수감된 후 그녀의 반응은 이론이라는 무기로 반격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책, 자본의 축적에 대한 비판들에 대한 대답으로 반비반을 썼다. 전쟁발발전 독일사회민주당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는 동안 그녀는 정치경제학에 관한 강의를 했었다. 수감 중에 그녀는 당 학교 교사로서 사용했던 초기의 그 강의자료로 정치경제학입문을 썼다. 그리고 그녀는 문학과 문화 문제들도 다루었는데, 러시아 작가 코로렌코의 내 동시대인의 이야기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그 서문을 작성했기도 했다. 그녀가 그녀의 최초의 러시아혁명에 대한 분석, 러시아혁명에 대하여를 작성하고 러시아에서의 혁명에서 행해진 실수들에 대한 비판을 위한 최초의 몇몇 중요점들을 발전시킨 것도 수감 중인 상태에서 였다.

물론 룩셈부르크는 감옥에 갇힌 상태로 고통받았지만, 이것은 결코 그녀의 의지를 꺾거나 사기을 저하시킬 수 없었다. 그녀가 수감 중에 쓴 기록들이나 서신들을 읽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그녀가 감옥 속에서 다룬 화제들의 다양성과 예술과 문학에 대한 일련의 편지들은 길들여질 수 없는 창조적 정신을 증언한다.“나는 종종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책읽기와 글쓰기로만 하루를 보냅니다2

자본주의의 도덕적 파산과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전망에 직면하여 그녀는 스스로 가장 결연한 투쟁에 투신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깊은 슬픔을 겪으면서도 용감한 정신을 유지했다. 그녀가 강인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이론적인 노력과 다른 열정들(예를 들어 그림그리기나 식물학)을 추구하는 능력을 통해서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거대한 지원망을 통해서 였다. 위장이 약해서 특별식이요법이 필요했던 그녀는 감옥 밖으로부터 음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녀의 저작들은 반복적으로 감옥밖으로 밀반출되었고, 이는 때때로 간수들의 묵인하에 이뤄졌다. 수감 중에 그녀는 많은 동지들과 서신교류를 했고, 그들에게 충고를 주고 감옥에 갇힌채 할 수 있는 한 최선 다해 그들을 지원했다. 감옥을 둘러싼 그 어떤 벽도 그녀를 침묵시키고 그녀가 개인들에게, 그녀의 동지들에게 그리고 노동자계급 전체에게 그녀의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막을 만큼 두껍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목소리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감옥 밖에서도 '들릴수' 있었다. 그녀가 감옥에서 풀려나는 날 약 천명의 노동자들(그 대부분이 여성들)이 감옥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가 집까지 동행했다.

그녀의 수감시기 동안의 삶은 그녀의 전체 삶의 연속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애

로자 룩셈부르크는 1871년 3월 자모치(폴랜드)에서 한 유태인 가정의 다섯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1871년은 파리코뮌의 해였고, 제 1인터네셔널 내에서 바쿠닌의 음모에 대항한 투쟁이 있었던 때였다. 17살 소녀로서 그녀는 폴랜드에서의 억압 때문에 스위스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고, 취리히대학에서 몇몇 과목들(식물학, 수학, 경제학, 역사 및 법학 등등)을 수학했다. 1897년 그녀는 '폴랜드의 산업발전'에 관한 박사논문을 제출했다. 1890년대에 이미 그녀는 폴랜드출신의 다른 동지들과 함께 제 2인터네셔널의 오래된 원칙들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녀는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발달을 감지할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제 2인터네셔널의 저항에 맞서, 폴랜드의 민족자결권이 더 이상 의제가 아니라고 결론지을 용기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입장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지배적인 입장과, 특히 레닌의 입장과 마찰을 일으켰다.

1898년 그녀는 독일로 이주하여SPD에 참여했다. SPD내부에 하나의 경향이 출현했는데 그 주요 대표자가 베른슈타인이었다. 그 경향은 자본주의가 다소 위기로부터 자유롭다는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평화로운 수단을 통해 가능하다는 생각을 옹호했다. 사실상 베른슈타인은 운동의 목표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녀의 답변,“혁명이냐 개량이냐”(1899)를 썼다. 그 시기 동안에 이미 그녀는 기회주의에 대항한 투쟁에 앞장섰다.

1903 년 그녀의 글“마르크시즘의 침체와 진전”에서 그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죽음 이후 마르크스주의 운동에서의 침체를 비탄하며 새로운 이론적 노력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그녀는 1916년 옥중에서 쓴“반비판”의 끝머리에서 다시 한번 강조하기를,“마르크스주의는 언제나 새로운 인식을 얻으려고 애쓰는 혁명적인 세계관이다. 이는 한번 유용했던 표식에 형식적으로 되는 것을 철저히 혐오하며, 자기비판이라는 정신적인 격렬한 울림에서, 그리고 정신적인 천둥번개에서 생명력을 가장 잘 유지한다.3

1904년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에 뒤이어 러시아에서 최초로 대대적 파업의 큰 물결이 일어났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20세기 계급투쟁의 새로운 원동력을 최초로 발견한 이들 중의 하나였는데, 이제는 노동자들의 주도성이 특징적인 요소가 되고 계급투쟁은 노동조합이나 당 기구에 의해 '계획될' 수가 없다. 비록 그녀가 노동자평의회의 역할을 아직 이해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책,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에서 그녀는 이러한 대중 활동을 강조했다. 계급투쟁의 이러한 새로운 원동력을 노동조합과 증가되는 사회민주당 내부 인자들은 격렬한 투쟁으로 꺽어버리려 했다. 노동조합 기구와 밀접하게 협력하면서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당 내부에서 대대적 파업에 대한 논쟁을 금지했다. 1906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대적파업에 관한 그녀의 책 출판 후“계급 증오를 조장했다”는 선고를 받고 2개월 동안 수감되어야만 했다. 사회민주당의 이전의 지도자로 마르크시즘의 정통적인“교황”으로서 알려진, 칼 카우츠키는 로자의 과격한 노선에 점점 더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 시기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를 “평화롭고”, “조화를 사랑하는”사회민주당 안에 곤란을 유발하는“유태인”, “외국인”, 그리고 “노처녀”라고 비방하는 캠페인과 중상모략이 강화되었다.

1907년 점증하는 전쟁위협에 대응하여 조직된 제 2인터네셔널 슈튜트가르트대회에서 룩셈부르크, 레닌 그리고 마르토프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자본주의 계급지배의 철폐를 촉진한다”는 공통된 지향을 위해 투쟁했다. 1912년 그녀의 책, 자본의 축적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의 저작들 속에 존재하는 한계와 모순들을 용감하게 지목했었다.그녀의 책은 아직 자본주의에 포섭되지 않고 그 외부에 존재하는 시장들의 역할과 군국주의의 특수한 기능을 파악하는데 기본을 제공한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2년전에 쓰여진 그 책은 자본주의의 기본모순들에 대한 필요불가결한 통찰을 제공한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1914년 8월 SPD 지도부의 배반이 있은 직후 룩셈부르크는 전쟁 반대 투쟁에서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유니우스팸플렛은 그래서 1890년대 이래 새로운 조건들을 이해하려는 그녀의 투쟁, 제1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게 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조건들을 설명하려는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한 도전을 설명하려는 그녀의 투쟁과 직접적인 연장선 속에 놓여있다.

1917년 여전히 감옥 속에 있으면서 그녀는 러시아에서 그때 막 시작된 그 혁명의 중요성에 대해 최초의 분석을 제공했다. 러시아에서 혁명의 문제가 제기되긴 했지만 러시아 자체에서 해결될 수는 없음이 그녀에게는 분명했다. 룩셈부르크가 1918년 11월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지배계급은 그녀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두려워했다. 특히 사회민주당 은 노동자계급에 반대한 그당의 투쟁의 표적으로 그녀를 삼았다. 1918년 12월 베를린 노동자평의회에 그녀와 독일 노동자계급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중 하나였던 칼 리프크네히트의 참여가 허용되지 않았는데, 그 핑계는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1918년 12월 독일공산당, KPD의 창립대회에서 강령에 대해 행한 연설에서 그녀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역사적 차원을 강조하면서 혁명이 테러로 복귀할 수 없으며 노동자계급 전체의 모든 에너지와 의식을 동원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매우 교활한 적에 대항한 재빠르고 쉬운 승리라는 즉각주의적 환상에 대항해 목소리를 높인 극소수 중의 하나였다. 결국 그녀를 겨냥한 중상 비방 캠페인은 1919년 1월 그 극에 달했다. 1919년 1월 중렵 소위 스파르타쿠스봉기가 진압되고 수천명의 노동자들이 학살된 뒤 로자 룩셈부르크도 암살되었다. 지배계급은 당시 가장 용감하고 통찰력있는 혁명가들중 하나를 일소해버리는데 마침내 성공하고 만 것이다.

유니우스팸플렛은 20세기와 21세기를 거치면서 점점 더 심각해지는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파악하고 착취당하는 계급에 의한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을 위한 전망을 발전시키는데 필요불가결한 그녀의 대작들 중의 하나로 남아있다. D


2 로자 룩셈부르크가 클라라 체트킨에게 보낸 1916년 7월 11일자 편지

3자본의 축적 II( 로자 룩셈부르크; 황선길 옮김,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3)에 실린“비판에 대한 반비판, 자본의 축적, 또는 아류들이 마르크스 이론으로 무엇을 만들었는가?”, 974쪽

 

브렉시트, 트럼프 : 프롤레타리아에게 좋을 것 전혀 없는 지배계급을 위한 후퇴

통제 불능에 이른 국민 투표

우리는 30년도 더 전에 "해체에 대한 테제(Theses on Decomposition)"1)를 통해 부르주아지가 그 자신의 정치 기관 중심에서 바깥으로 해체되어 가는 원심력 경향을 더욱더 통제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것의 구체적인 의미가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 투표와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 후보가 된 것으로 표현되었다. 지배계급으로부터 나온 파렴치한 정치적 모험가들은 두 경우 모두에서 지난 30년 동안 경제적 대변동에 고통받아왔던 이들의 포퓰리즘적 저항을 자신들만의 자기-확장에 이용해왔다.  

국제공산주의흐름(ICC)은 포퓰리즘의 확장에 대해 인식하고 그 결과를 설명하는데 뒤늦었다. 이것이 우리가 왜 이제야 포퓰리즘에 대해 - 여전히 조직 내에서 토론이 진행되고 있지만2) - 전반적인 글을 출간하는 이유이다. 이 글은 토론에서 제기된 문제의식을 영국과 미국의 특수한 상황에 적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빠르게 진화하는 국제 상황에서 완벽한 분석을 내놓으려는 의도는 없지만, 우리는 이 글이 새로운 사상과 토론 심화를 위한 좋은 밑거름이 되길 희망한다. 

지배계급이 통제력을 상실한 것이 영국에서의 EU 국민투표와 그 이후의 일들로 나타난 전례 없는 혼잡과 무질서의 광경만큼 너무나 명백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때까지 영국의 자본주의자들은 민주주의 절차에 대한 통제를 놓쳐본 적이 없었고, 자신들의 매우 중요한 이해관계가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이나 나이젤 파라지(Nigel Farage)와 같은 모험가들 손에 좌지우지된 적도 없었다. 

모든 면에서 브렉시트 결과에 대한 준비의 실패는 영국 지배 계급 내부의 혼란을 보여준다. 결과가 발표되고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주요한 탈퇴 운동가들은 그들의 지지자들에게 그들이 약속했던, 그리고 탈퇴 캠페인 버스의 모든 벽에 붙어있었던, 브렉시트 투표가 가져다줄 NHS3)를 위한 매주 3억 5천만 파운드 추가 자금은 본질적으로 '오타'였음을 설명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파라지는 UKIP4)대표 자리에서 사임했고, 모든 브렉시트 쓰레기더미를 그를 따르던 탈퇴 찬성자들의 무릎에 던져버렸다. 보리스 존슨은, 전임 의사소통 담당국장(director of communications) 구토 하리(Guto Harri)는 존슨의 "심장은 브렉시트 운동에 있지 않았다"며, 존슨이 브렉시트를 지지한 대의는 순수하게 기회주의적인 것이며,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에 도전하는 그의 리더십을 부흥시키기 위해 고안된 자위적 조작이라는 강한 의혹을 제기했다. 국민투표의 모든 기간 존슨의 선전부장이었으며, 존슨이 영국 총리가 되기 위한 운동을 운영할 예정이었던(그러나 반복적으로 그 일에 관심이 없음을 선언해왔던) 마이클 고브(Michael Gove)는 그의 오랜 친구 존슨이 총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근거로 후보자 등록 마감 고작 2시간 전에 스스로 총리 후보에 이름을 올리며 존슨의 등에 칼을 꽂았다. 앤드레아 리드섬(Andrea Leadsom)은 고작 3년 전에는 탈퇴가 영국에게 '재앙'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으면서 토리당 대표 경선에 확고한 탈퇴 지지자로 입후보했다. 거짓말, 위선, 말 바꾸기들 - 이 모든 것들은 지배계급의 정치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다. 충격적인 것은 세계에서 가장 노련한 지배계급이 어떤 의미에서건 국가에 대한 개인의 야망이나 사소한 맞수들의 비판 너머에 있는 압도적인 역사적, 국가적 이해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영국 지배계급의 역사에서 이와 비견할만한 사건을 찾아보자면, 우리는 쇠퇴하는 중세 질서에 대한 마지막 갈망을 보여준 장미 전쟁(셰익스피어의 헨리 6세로 극화된)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탈퇴 의견이 승리한 것에 대해 금융과 산업의 사장들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 역시 충격적이다. 결과에 대한 모든 징후가 "당신의 인생에서 보았던 가장 아슬아슬한 승부"(만약 이를 인용해도 된다면, 워털루 전쟁 이후의 웰링턴 대공)5)임을 보여주는 상황이었는데에도. 20%, 그 이후 30%로 달러에 대한 파운드화(Sterling)가 즉각적으로 붕괴했던 것은 브렉시트가 기대한 결과가 아님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파운드화의 가치는 국민 투표 이전에 반영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은행과 사업가들이 사무실을, 또는 사업체를 더블린이나 파리로 옮기는 것과 같이 탈출을 향해 질주하는 가감 없는 장관에 배가 부를 정도였다. 세계에서 해외 직접투자(Foreign Direct Investment, FDI) 의존도가 가장 높은 영국경제 상황에서 조지 오스본(George Osborne)이 즉각적으로 법인세를 15%로 내리기로 한 것은 영국에 기업들을 잡아두기 위한 명백한 긴급 비상조치였다.

제국의 반격

영국의 지배계급은 아직 쓰러지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분별력 있게 존속을 지지해왔던 확고하고 역량이 뛰어난 정치인인 테리사 메이(Theresa May)가 캐머런의 즉각적인 후임 총리가 되었고(애초에 9월 이전에는 그렇게 기대되지 않았다), 언론과 토리당의 국회의원들에 의해 그녀의 반대편인 앤드리아 리드섬과 마이클 고브가 직장을 잃은 것은 국가의 유력한 지배계급 일부에 대해 신속하고 통일된 반응을 할 수 있다는 그들의 진정한 역량을 보여준다.

근본적으로 이 상황은 세계 자본주의의 진화와 계급 사이 힘의 균형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은 자본주의 쇠퇴기라는 현 단계에서 통일된 부르주아 정책이 분해되어가는 더욱 전반적인 움직임의 산물이다. 포퓰리즘으로 기울어지는 경향 너머의 추동력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포퓰리즘의 문제에 기여한 토론"에서 분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반적인 국제 현상은 특정 국가의 역사와 특징들의 영향 아래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띤다. 그래서 토리당은 항상 그 EU에서 영국의 구성원 자격을 실제로 허락한 적이 없는, "유럽연합에 대해 회의적인" 한 측면을 담당해 왔고, 그 근원은 우리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1. 유럽의 해안에서 떨어져 있는 영국의 - 그리고 그 전에는 잉글랜드의 - 지리학적 위치는 영국이 대륙의 국가들이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유럽의 경쟁으로부터 분리된 채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해 왔다.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 지주 권력의 부재 또한 프랑스가 19세기 이전, 또는 독일이 1870년 이후 그러했던 것처럼 유럽 지배를 바랄 수 없도록 했고, 오직 주요 강국들이 서로가 서로를 적대하도록 하고, 그들 중 어느 나라와도 연루되는 것을 회피함으로써 그들의 생존의 이해를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
  2. 영국의 섬으로서의 지리학적 위치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산업화한 국가의 지위는 대항해시대, 세계 제국주의의 개막을 결정지었다. 적어도 17세기부터 영국의 지배계급들은 전 세계에 모양새를 갖추었고, 그것은 다시 그들에게 유럽 정치로부터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러한 상황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격하게 변했다. 영국의 세계 강대국으로서의 지배적인 지위는 더는 유지 가능하지 않았고, 근대적 전쟁 기술들 - 공군, 장거리 미사일, 핵무기 – 로 인해 유럽 정치로부터의 고립이 더는 선택사항이 아님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를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 중 하나가 윈스턴 처칠(Winston Curchill)이다. 그는 1946년 "유럽 연방국(United States of Europe)"을 만들자고 요구하였으나 보수당 내에서 그의 입장은 전적으로 승인되지 못했다. <편집자 주 : 처칠의 구상에서 유럽연방국에 영국이 포함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아 논쟁이 되고 있다.특히 소련(USSR)의 몰락과 1990년대 독일 통일이 실질적으로 유럽에서 독일의 권력을 증가시킴에 따라 EU의 구성원이 되는 것에 대한 반대의견이 증가했다.6) 국민투표 운동 동안 보리스 존슨은 EU가 “히틀러” 독일 지배의 도구라고 이야기하는 중상모략을 하였으나, 이러한 사건은 그가 처음이 아니었다. 거의 똑같은 언어로, 그와 똑같은 감수성들을 이미 1990년에 니콜라스 리들리(Nicholas Ridley)가, 그 이후에는 대처 정부의 총리가 표현한 바 있다. 그것은 전후 정치 기관 내에서 권위와 규율의 상실을 의미하는 상징이었다. 다만 리들리는 정부로부터 즉각 사임할 수밖에 없었던 반면, 존슨의 반향은 새로운 내각의 구성원에게 영향을 주었다.

영국이 세계의 가장 위대한 제국주의 국가로서 한때 누렸던 지위. 그 지위의 상실은 영국 국민들(노동계급을 포함하여)의 심리적, 문화적 현상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국가적 집착은 - 영국이 마지막으로 독립적인 세계 강대국으로서 행동할 수 있었던 - 이를 완벽하게 묘사한다. 영국 부르주아지의 일부와 더 많은 소부르주아지는 영국이 오늘날 오직 2등급, 또는 3등급의 강대국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탈퇴 운동가들의 다수가 EU의 "족쇄"로부터 영국이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세계는 영국의 상품과 서비스를 사러 몰려들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영국 경제가 매우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가능성이 큰 환상에 불과하다.

제국주의 권력의 상실에 대해 바깥 세계로 향하는 분노와 적개심은 미국 국민이 자신들의 지위 일부를 잃었다고 인식한 결과(트럼프의 "다시 위대한 아메리카를 만들자"는 지속적인 테마)로서의 감성들, 그리고 냉전 시기 그들이 자신들의 법칙을 부여할 수 있었던 능력의 상실에서 비롯되는 감성들에 비견할 만하다.

포퓰리즘에 대한 양보로서의 국민투표

보리스 존슨의 포퓰리즘 광대 짓은 더욱 극적이었고, 더욱 많은 미디어로부터의 주목을 받았다. 그 후 데이비드 캐머런의 낡은, 최상위 계급의 "책임감 있는" 페르소나가 발휘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캐머런은 지배 계급 내에서 얼마나 부패가 진행되었는지를 더 잘 보여주는 지표이다. 하지만 지난 총선에서 이기려고 당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국민투표라는 카드를 이용한 무대를 만든 것은 캐머런이었다. 바로 그 성격으로 인해 국민투표는 의회 선거보다 통제하기 훨씬 어렵고, 그러하기에 언제나 도박을 의미한다.7)카지노에 중독된 것처럼, 캐머런은 반복하여 스스로 도박사임을 드러내었는데, 처음에는 아슬아슬하게 그가 승리했던 스코틀랜드 독립에 대한 국민투표였고, 그다음이 브렉시트였다. 그의 보수당은 언제나 경제, 영국(연합 왕국)8), 그리고 국방의 최고의 보호자임을 자처해 왔는데 이번에는 이 세 가지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고 말았다. 

결과 조작이 어려운 상황에서, 국가 이해의 중요한 문제에 대한 국민투표는 지배계급에 있어서 대부분 결과를 보장할 수 없는 위험이다. 의회 민주주의는 전통적, 이데올로기적 의미에서, 그리고 심지어 쇠퇴기의 그릇된 형식에서도 그러한 문제에 대한 결정은 전체 대중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문가들과 이해관계자 그룹들의 조언을 받은(로비를 받은) “선출된 대표자들”에 의해 내려지게 되어 있다. 부르주아지의 관점에 의하면, 이를테면 2004년 EU의 헌법 조약(Constitutional Treaty)과 같은 복잡한 문제에 대해, 대부분의 투표자들이 조약 문서를 읽으려고도 그리고 읽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물어서 결정하는 것은 완전히 미친 짓이다. 국민투표들에서 자주 “잘못된” 결과를 얻었던 지배계급이 이 조약을 연기시켰다는 것은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프랑스, 네덜란드, 최초에는 아일랜드에 대해).9)

오늘날 영국 부르주아 정당 내부에 메이 정부가 프랑스와 아일랜드 정부가 헌법 조약에 대한 국민투표를 망친 뒤 했던 것과 같은 속임수를 쓰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국민투표를 무시하거나 뒤집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단기간에 그렇게 될 가능성이 적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영국 부르주아지가 그 추종자들보다 더 민주주의를 신뢰해서가 아니라, 정확하게는 “대중의 의지”의 “민주주의적 표현”을 무시하는 것이 오직 포퓰리즘 사상에 신뢰를 부여하고 그들을 보다 위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테리사 메이의 전략은 EU로부터 탈퇴하게 된 영국을 조직할 책임을 떠맡은 채, 장관직에서 최대한 잘 해보려고 애쓰고, 가장 잘 알려진 탈퇴 찬성자 셋과 함께 브렉시트의 길을 멈추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광대인 존슨을 국제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것 - 해외 인사들을 공포와 유쾌함과 불신이 뒤섞인 감정으로 환영하는 것 - 도 분명 이러한 폭넓은 전략의 일부이다. 존슨을 EU 탈퇴 협상이라는 논란이 많은 자리에 앉힘으로써, 메이는 탈퇴 운동가들의 주요한 발언들이 거의 확실하게 적대적인 언어로 가득할 대부분의 격렬한 비난 - 그리고 불신 - 에 직면할 것임을, 그리고 이는 측면 저격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 것임을 확신했다.

특히 유럽이나 미국의 포퓰리즘 운동에 찬성하는 이들이 갖는, 엘리트가 단순히 그들에게 불편한 결과를 무시하기 때문에 모든 민주주의 과정은 협잡이라는 인식은 지배계급의 체계로서의 민주주의 효율성에 실질적인 위협이다. 정치에 대한 포퓰리즘 개념에서는 “사람들에 의한 직접적인 결정”이 기존의 정치 엘리트에 의한 선출된 대표자들의 부패를 피하도록 해 줄 것이다. 이것이 독일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부정적 경험과 나치 독일이 국민투표를 이용했던 경험 이후 전후(post-war) 헌법에서 그러한 국민투표를 배제한 까닭이다.10)

탈선한 선거

만약 브렉시트가 통제에서 벗어난 국민투표였다면, 2016년 미 대선 후보로 트럼프가 당선된 것은 정도를 벗어난 선거이다. 트럼프가 후보가 되었다는 것이 처음 공언되었을 때에는 그 사실이 거의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선두는 부시 왕가, 공화국 귀족들의 선호하는 선택, 그리고 잠재적인 강력한 기금 조달자(언제나 미국 선거에서 결정적인 고려사항)는 젭 부시(Jeb Bush)였다. 그러나 모든 기대를 저버리고, 트럼프는 초반 프라이머리에서 승리했고, 그다음 주(state) 선거에서 계속 이겨나갔다. 부시는 ‘픽’ 소리를 내며 쓰러져 나갔고, 다른 후보들도 다르지 않았다. 공화당 대표자들은 트럼프를 이길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후보는 테드 크루즈(Ted Cruz) 뿐이라는 불쾌한 전망에 직면해야 했다. 그는 자기네 상원 의원들로부터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그리고 트럼프보다 아주 조금 덜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사람으로 여겨지는 인물이었다.

트럼프가 클린턴을 이길 가능성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상황이 얼마나 비정상적으로 돌아가는지 보여주는 지표이다. 그러나 벌써 트럼프 후보는 제국주의 동맹들의 모든 시스템을 통해 충격을 선사하고 있다. 미국은 70년 동안 그 효과성이 상호 방어의 불가침 - 하나에 대한 공격은 모두에 대한 공격 - 에 의존하는 나토(NATO, 북대서양 조약기구) 동맹의 보증국이었다. 트럼프가 만약 러시아가 발트 해 국가들을 공격했을 때 “그들이 대가를 치렀는지”에 대한 그의 판단에 미국의 반응이 달려있을 것이라고 선언한 방식으로, 미래의 미국 대통령이 NATO 동맹과 그 조약의 의무를 존중할 준비가 되었음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때가 온다는 것은, 푸틴의 마피아 국가에 직접적으로 대면하고 있는 동유럽 지배계급의 등골을 오싹하게 할 것이며, 중국이라는 용으로부터 보호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일본, 대한민국, 베트남, 필리핀 등의 아시아 국가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그러할 것이다. 우크라이나에 러시아 군대는 없다는 트럼프의 최근의 발언(러시아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크리미아(크림 반도)가 우크라이나의 일부라고 여긴다는 사실을 완전히 모르는 것)을 보았을 때, 트럼프가 단순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것이라는 가능성은 높은데 이것 역시 다른 이들에게 매우 위급한 상황임을 알려주는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트럼프는 러시아 정보국의 민주당 IT 시스템 해킹을 환영하고 푸틴을 초대하기까지 했다. 그것이 트럼프에 조금이라도 얼마나 피해를 줬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1945년 이후 공화당이 극단적으로까지는 아니어도 격렬하게 반러시아적이었으며, 어떤 비용을 들여서라도 강력한 군대 조직과 세계 각지에 배치된 다수의 군대 존재를 옹호하는 것(이것은 재정 적자 수준을 급등하게 한 레이건의 엄청난 군비 증강이었다)을 떠올려 볼 가치는 있을 것이다.

공화당이 그 후보를 극단적으로 위험하게 취급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1964년, 프라이머리에서 종교적 우익과 “보수 연합”의 지지로 인해 승리한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는 오늘날 티 파티 운동의 선구자였다. 그의 정책은 적어도 일관적이었다. 연방 정부 예산, 특히 사회 안전망에 대한 예산의 대대적인 감축, 군비 증강, 소련에 대항하는 핵무기의 사용 준비 등. 그것은 전통적인 극우 정책이었으나, 미국의 국가 자본주의의 필요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골드워터는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패배했는데, 이는 공화당의 지배층이 그를 지원하는 데 실패한 것에 부분적인 원인이 있었다.

트럼프는 단지 골드워터 2.0 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 차이는 유익하다. 골드워터 후보는 그 시기 “티 파티 운동”에 의해 대표되는, 골드워터의 패배 이후 몇 년 동안 물러서야 했던 - 보수당의 권력 장악을 대표한다. 최근의 10~20년 동안 이러한 경향이 돌아왔으며, 이 경향이 GOP11) 권력을 다소간 성공적으로 차지해 왔음은 비밀도 아니다. 그러나 골드워터 지지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보수 연합”이었다. 그들은 심각한 사회 변화(페미니즘, 시민권 운동, 베트남 전쟁 반대의 시작, 전통적인 가치의 몰락)를 경험하는 미국 내에서 진정으로 보수적인 경향을 대표했다. 비록 많은 티파티의 “원인”이 골드워터와 같을지라도, 맥락은 그렇지 않다. 그가 반대하는 사회적 변화는 이미 일어난 것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티파티는 보수의 연합이라기보다 신경증적인 반응의 동맹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문제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고 기본적으로 미국의 군사력과 이윤을 가져다주는 자유 무역에만 관심이 있는 대(大)부르주아지의 어려움을 증가시켰다. 공화당 프라이머리에 나서는 자가 스스로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 “완전무결함”을 증명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가 되었다: 낙태(당신은 “생명을 존중하는 이”가 되어야 한다), 총기 규제(총기에 저항하기 위해), 재정적 보수주의와 낮은 세금, “오바마케어”(사회주의, 이는 철폐되어야 한다. 실제로 테드 크루즈의 신용 일부는 상원에서 오바마케어에 저항하는 대중 호소 필리버스터를 한 것에 기반을 뒀다), 결혼(신성한), 민주당(만약 사탄이 당을 만든다면, 그것은 민주당일 것이다). 자, 짧은 몇 달의 기간 트럼프는 효과적으로 당의 핵심골자를 빼버렸다. 우리는 그 스스로 낙태, 총기 규제, 결혼(그 스스로 세 번이나 했다)에 대해 “신뢰할 수 없음”을 보여준 인물, 과거 스스로 악마 힐러리 클린턴에게 기부했던 인물이 후보가 되었음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그는 최저 임금의 인상,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오바마케어의 유지, 고립주의 해외 정책으로의 회귀, 재정 적자 폭의 증대, 그리고 미국 경제에 필수적인 저임금 노동을 제공해 온 천백만의 이민자들의 추방을 제안한다.

브렉시트에서의 영국의 토리당처럼, 공화당과 잠재적인 미국의 모든 지배 계급은 자신들의 제국주의적인 입장과 경제적 계급의 이해관계에 대해 완전히 불합리한 정책을 가진 말안장 위에 스스로 올라탔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함의

우리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후보 당선이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제국주의적 수준에서 더욱 불안정한 시대로 안내할 것이라는 점이다. 경제적 수준에서 유럽 국가들 - 우리는 이들이 세계 경제의 중요한 부분이며 가장 큰 단일 시장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은 이미 허약한 상황에 부닥쳐있다. 그들은 2007/8년의 금융 위기와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위협을 경험하였으나, 그것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영국은 주요 유럽 경제권에 남아있지만, EU와의 연결을 끊어내는 오랜 과정은 예측할 수 없게 파탄 날 것이며, 이는 적어도 금융 수준에만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브렉시트가 유럽의 은행, 보험, 그리고 주식거래의 중심지인 런던에 어떠한 영향을 가져올지 아무도 모른다. 정치적으로 브렉시트의 성공은 유럽 대륙의 포퓰리즘 정당들만을 고취시키고 그들에게 큰 힘을 실어줄 것이다. 내년 반유럽주의자이며 포퓰리스트인 마린 르 펜(Marine Le Pen)이 있는 국민 전선이 프랑스 대선에서는 가장 큰 단독 정당이다. 유럽 강대국들의 정부는 영국의 유럽으로부터의 분리를 가능한 부드럽고 마찰 없이 이뤄내려는 열망과 영국에 대한 어떤 양보(이를테면 인구의 이동은 제한한 채 시장에의 접근은 허락하는)도 다른 이들에게 - 지적하자면 폴란드와 헝가리와 같은 국가들에게 - 같은 생각을 하게 할 수 있다는 실질적 두려움 사이에서 갈가리 찢겨졌다. 과거 유고슬라비아 국가들을 통합함으로써 유럽의 남동쪽 국경을 안정시키려는 시도는 완전히 중단될 것이다. 터키 에르도안(Erdogan)의 쿠데타와 시리아 난민들을 공갈·협박의 비열한 게임의 말로써 쓰는 것에 대해 EU는 통일된 반응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비록 EU 그 자체가 제국주의 동맹이었던 적은 없으나 그 구성원의 대부분은 NATO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따라서 유럽의 단합을 약화시키는 어떤 것도 러시아가 동유럽의 측면, 우크라이나와 발트 해 국가들을 무너뜨리는 압력에 반격하는 NATO의 능력에 도미노 효과를 불러올 것이다. 러시아가 가끔 프랑스의 국민 전선에 자금을 지원하고, 독일의 페기다(Pegida: Patriotische Europäer gegen die Islamisierung des Abendlandes, 서양의 이슬람화를 반대하는 애국 유럽인) 운동에는 자금을 지원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브렉시트 국민투표의 유일한, 가장 뚜렷한 승자는 사실 블라디미르 푸틴이다.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트럼프 후보자는 이미 미국의 신뢰성에 한 방 펀치를 날렸다. 핵무기 버튼에 손가락을 얹은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생각은, 반드시 말해둬야겠는데, 매우 두려운 전망이다.12) 그러나 우리가 수차례 이야기한 것처럼, 오늘날 불안정과 전쟁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그 지배적인 제국주의적 지위를 모든 이민자에 저항하여 유지하고자 하는 미국의 결의이며 이 상황은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기구에 대한 분노

보리스 존슨과 도널드 트럼프는 수다쟁이라는 것 외에 다른 것도 공유하고 있다. 둘 다 정치적 모험주의자이며 국가의 이해를 넘어서는 어떤 원칙이나 감성도 결여하고 있다. 둘 다 자신들의 메시지를 왜곡시키든 바꾸든 그들의 청중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들려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의 익살은 그것들이 터무니없어 보일 때까지 미디어에 의해 부풀어 오른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완전히 하찮은 것들이며 세계화의 패배자들의 울부짖는 분노, 절망, 그리고 부유한 엘리트와 자신들의 비참함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민자들에 대한 증오를 쏟아내는 창구일 뿐이다. 그러므로 트럼프는 가장 무도하고 모순적인 발언을 대충 지껄여버린다. 그의 지지자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이 듣길 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존슨과 트럼프가 똑같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차이는 개인적인 인격의 차이라기보다 그들이 속한 지배계급의 차이와 관계가 있다. 영국 부르주아지는 수 세기 동안 세계무대에서 중요한 지배적인 역할을 해 왔다. 이에 비해 미국의 거칠고 대담하며, 자기-몰입적인 국면은 제2차 세계대전에 진입하는, 루스벨트의 고립주의자들에 대한 승리와 더불어 끝났다. 미국 지배 계급의 중요한 분파는 여전히 바깥 세계에 대해 무지한 채로 남아있다. 어떤 이는 그들이 발달이 늦은 성인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선거의 결과는 우리에게 노동 계급의 상황에 대해 무엇인가를 이야기해 줄지언정 절대 계급의식의 표현은 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되었든 미국에서의 트럼프에 대한 지지가 되었든, 프랑스의 국민 전선의 마린 르 펜이 되었든, 또는 독일의 포퓰리즘인 페기다와 독일을 위한 대안(Alternative für Deutschland, AfD)이 되었든, 이러한 당과 운동이 노동자의 지지를 얻는 곳에는 지난 40년 동안 자본주의 경제 변화로부터 가장 고통받은 이들이 있음을, 그들의 삶의 조건에 대한 좌우익을 막론하고 정부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고 패배한 수년의 경험이 그들로 하여금 지배 엘리트를 위협할 수 있는 방법은 똑같은 엘리트에 대한 저주를 정책으로 하는 무책임한 정당을 향해 보란 듯이 투표하는 것일 뿐임을, 합리적으로 결론내린 이들이 있는 곳임을 모든 투표 수치는 보여준다. 비극이라면, 이러한 노동자들이 정확히 1970년대 투쟁에 가장 대중적으로 참여했던 이들이라는 점이다.

브렉시트와 트럼프 선전의 공통 주제는 “우리”는 “다시 통제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무엇이 되었든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 실제로 통제해 본 적 없다. 보스턴 UK 의 한 거주자가 “우리는 단지 모든 것들을 원래 있었던 자리로 되돌리고 싶을 뿐입니다”고 이야기한 것처럼. 그때란, 일자리가 있었을 때, 그 일자리가 적절한 임금을 보장해 줄 때, 노동 계급 공동체의 사회적 연대가 실업과 태만으로 무너지지 않았을 때, 변화가 뭔가 긍정적이고 조절 가능한 속도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을 때이다.

브렉시트 투표가 영국에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자가 목조 뒤에서 기어 나오는 것이 더욱 자유롭다고 느끼는 새롭고 추악한 분위기를 조장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진실이다. 그러나 브렉시트 또는 트럼프에 이민을 멈추라고 투표한 많은 - 아마도 절대다수 - 이들은 그렇게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다. 그보다 그들은 외국인 혐오로부터 고통받고 있다. 외국인에 대한 공포, 알려지지 않은 자에 대한 공포. 그리고 이 ‘알려지지 않은 자’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경제 그 자체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생산의 과정에서 실제의 사회관계를 마치 자연적인 힘으로, 요소로, 마치 날씨와 같이 통제 불가능한 것으로, 그러나 노동자들의 생활에의 영향력은 훨씬 파괴적일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여, 본질적으로 신비스럽고 이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시대와 같은 과학적 발견의 시대, 사람들이 더는 궂은 날씨를 마녀가 일으킨 것이라고 믿지 않는 시대에, 그들의 경제적인 비통함이 그들의 불행한 이민자 동료들에 의해 일어났다고 믿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다는 사실은 매우 끔찍한 아이러니이다.

우리가 직면한 위험

우리는 이 글을 “해체에 대한 테제”를 언급하면서 시작했다. 해체에 대한 테제는 거의 30년 전인 1990년에 썼다. 우리는 그 테제를 인용하며 결론을 짓고자 한다.

“우리는 특히 프롤레타리아가 스스로 그 역사적 책무의 수준에 도달하는 능력이 해체될 위험에 대해 명확히 해야 한다. (…) 노동계급의 힘을 구성하는 서로 다른 요소들은 바로 이 이데올로기 해체의 다양한 측면들에 직면한다.”

  • 연대와 집단적 행동은 ‘자신의 이익을 찾는’ 원자화에 직면한다.
  • 조직의 필요는 모든 사회적 삶의 기반이 되는 관계의 파괴, 사회적 해체에 직면한다.
  • 프롤레타리아의 미래에 대한 신뢰와 그 자신의 힘은 지속해서 사회에 만연한 절망과 허무주의에 의해 활력을 잃는다. 의식, 명석함, 일관되며 통일된 생각, 이론의 달콤함은 환상, 마약, 분파주의, 신비주의,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에 대한 거부 또는 파괴의 가운데로 곤두박질치는 어려운 시기를 겪을 것이다."

그 위험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것들이다.

포퓰리즘의 유행은 지배계급에 위험한데, 포퓰리즘이 지배계급의 정치 기관들을 통제할 능력을 위협하는 동시에, 지배계급의 사회적 지배를 지탱하는 기둥인 민주주의의 신비화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프롤레타리아에게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반대로,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혼란에 대해 어떤 대안적 전망도 제공하지 못하는 무능력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의 허약함이며, 그것이 포퓰리즘의 유행을 가능하게 했다. 프롤레타리아만이 오늘날 사회가 직면한 막다른 길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스스로 유혹의 말 - 포퓰리스트 선동가들이 약속하는, 어떤 경우에라도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과거로의 회귀라는 불가능한 약속에 스스로를 맡긴다면,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2016년 8월, Jens

국제공산주의흐름

<주>

1) International Review 107, 2001년 출판

2) International Review의 이 주제를 보라.

3) 국가 의료 제도(National Health Service)

4) 영국 독립당(United Kingdom Independence Party): 1991년 세워진 포퓰리즘 정당. 그 선전은 본질적으로 EU 탈퇴와 이민 반대이다. 역설적으로 유럽 의회에서 가장 거대한 단독 영국 정당을 구성하는 22명의 MEPs 를 보유하고 있다.

5) EU와 영국 재무부가 탈퇴 캠프가 승리할 경우 상황에 대한 계획에 대해 일정정도 노력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준비가 부적절하며 - 아마도 보다 적절하게는 - 아무도 탈퇴파가 국민투표에서 승리할 것이라도 진실로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이것은 탈퇴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진실이었다. 명백히, 파라지는 국민투표 날 잔류파의 승리를 인정했으나, 잔류파가 패배한 다음 날이 되어서야 그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6) 1973년 보수당 정권 아래 영국은 유럽 경제 공동체(EEC)에 가입했다. 그 구성원 자격은 1975년 노동당 정부의 국민투표에 의해 승인되었다.

7) 대처가 의회 선거에서 40% 이상의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10년 넘게 권력을 유지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8)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그리고 북아일랜드의 통합 왕국 연합이라고 이야기된다.

9) 이러한 불편한 결과에 따르면, 유럽 정부들은 헌법 조약을 채택하지 않았고, 2009년 리스본 조약으로 기존의 협정을 단순히 수정함으로써 가장 본질적인 요인을 구했다.

10) 스위스와 캘리포니아에서 있었던 국민투표와 구분해야 한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정립된 정치적인 과정의 일부였다.

11) “Grand Old Party”,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사용된 공화당의 구어식 표현이다.

12) 골드워터 패배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전술적 핵무기를 사용할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한 것이다. 존슨의 선전은 골드워터의 슬로건 “당신의 가슴 속에서 당신은 그가 옳음을 알고 있다”와 대비되게 “당신의 창자에서, 당신이 그가 괴짜임을 안다”라는 슬로건으로 맞받아쳤다.

 본 기사는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원문출처┃http://en.internationalism.org/international-review/201608/14087/brexit-trump-setbacks-ruling-class-nothing-good-proletariat

 

트럼프대통령 : 사멸해가는 사회체계의 상징

고대로마 시대가 기울어갈 무렵 로마황제들의 광기는 예외적이 아니라 지배적인 현상이었다. 그것이 로마가 노쇠하고 있다는 징후였음을 역사가들은 의심하지 않는다. 오늘 무시무시한 광대 하나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에서 왕이 되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 사실은 자본주의 사회가 그 자체의 쇠퇴에서 더 진전된 단계에 도달했음의 징후로서 이해되지 않는다. 그 체제의 진원지에서 대중추수주의(Populism)의 쇄도는 단기간에 연이어 브렉시트와 도달드 트럼트의 승리를 초래했는데, 이 사실은 지배계급이 지금까지 몇 십년 동안 자본주의에 내재적인 붕괴경향을 억제하는데 활용해 온 정치기구에 대한 장악력을 잃고 있음을 표현한다. 우리는 지금 사회질서의 가속된 해체에 의해서, 지배계급이 인류에게 미래의 전망을 제시할 수 없는 그 완전한 무능함으로 인해 생겨난 거대한 정치적 위기를 목격하고 있다. 그러나 대중추수주의는 또한 피착취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적 대안을 추진하지 못함으로 해서 결과되는 산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기력한 분노와 공포, 소수자들의 희생양화, 그리고 실제로 결코 실존한 적이 없는 과거에 대한 허상적 추구에 기반한 반동에 말려들어갈 심각한 위험이 있다. 전세계적인 현상으로서의 대중추수주의의 근원들에 대한 이러한 분석은 '대중추수주의 문제에 대하여(On the question of populism)'라는 글에서 더 깊이 전개되어 있다. 우리는 독자들이 그 글이 제공하는 일반적인 틀을 브렉시트 결과와 대통령후보로 떠오른 트럼프에 대한 우리의 초기의 좀 더 구체적인 대응, '브렉시트, 트럼프 : 프롤레타리아에게 좋을 것 전혀 없는 지배계급을 위한 후퇴(Brexit, Trump: setbacks for the ruling class, nothing good for the proletariat)'와 함께 검토할 것을 권한다. 이 두 글은 우리의 국제평론(International Review) 157 호에 실려있다.

우리는 또한 ' 트럼프 대 클린턴: 부르조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나쁜 선택들일뿐(Trump v. Clinton: nothing but bad choices for the bourgeoisie and the proletariat) '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10월초에 작성된 이 기사는 트럼프가 백악관에 입성하는 것을 막기 위해 US부르조아지의 좀 더 '책임감있는' 분파들이 민주당과 공화당을 막론하고 거의 미친듯이 노력하는 것을 살펴보았다1. 이러한 노력들은 명백하게 실패했는데 이 실패를 초래한 더 즉각적인 요소들 중의 하나로는, 클린턴이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바로 그 순간에 연방수사국의 국장, 제임스 코메이(Comey)가 어이없게 개입한 것을 들 수 있다. US정보기구의 심장인 FBI는 클린턴이 국가안보의 기본적인 법규들에 위배되게도 사적인 이멜 서버를 사용한 점을 더 조사한 뒤 그녀가 이후에 형사소송에 관여될 지도 모른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녀의 당선 기회를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그 일주일 정도 뒤 코메이(Comey)는 FBI가 점검한 모든 자료들에서 그 어떤 불리한 점도 없었다고 선언함으로써 후퇴를 시도했다. 그러나 피해는 이미 발생해버렸고 ' 그녀를 감옥에'라고 집회들에서 끊임없이 반복해서 주장해 온 트럼프 캠페인에 FBI는 주요한 기여를 했다. 그런데 FBI의 그 기념비적인 실수는 국가기구의 중심에서 정치적 통제력이 점점 더 상실되어감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표현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차악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

'트럼프 대 클린턴(Trump v. Clinton) ' 기사는 역사의 현시기에 부르조아 민주주의와 선거는 노동자계급에게 어떤 선택도 제공하지 않는 거대한 사기극이라는, 그것들에 대한 공산주의의 입장을 선명하게 재언급하면서 시작한다. 이렇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은 이번 선거에서 아마도 가장 심했던 것 같은데, 이는 명백하게 인종차별적이고 여성혐오적인 사안을 가진 오만한 쇼맨 트럼프와 지난 30년 동안 국가자본주의의 지배적인 형식인 '신자유주의'를 체화하는 클린턴 사이에 이뤄졌기 때문이다. 두가지 악 사이에서 선택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해 유권자들의 상당부분은 미국선거들에서 늘 그렇듯이 아예 투표를 하지 않았다. 초기의 추정투표율은 57%이하로서, 투표하러 가라는 그 모든 압력들에도 불구하고 2012년의 투표율보다 낮았다. 동시에 두 진영 모두에 비판적이지만 특히 트럼프에 비판적인 많은 이들은 결국 차악으로서의 클린턴에 투표했다. 우리는 부르조아가 제공하는 것에 대한 환상이 깨짐으로 인해 부르조아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기껏해야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비록 노동자계급이 계급으로서 행동하지 않을 때 극도로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자본주의 국가의 해체를 관통하게 될 또 다른 사회조직방식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은 본질적이다. 그리고 선거 이후의 시기에, 기존의 정치사회질서를 이렇게 거부하는 것, 부르조아국가라는 감옥의 밖에서 그리고 그것에 대항하여 노동자계급이 그 자신의 이해를 위해 투쟁할 필요성을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그 만큼 적절하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트럼프반대주의, 일종의 개편된 반파시즘2 쪽으로 이끌려가게 될 것이고 이것은 다시 부르조아의 좀 더 '민주적인' 분파들, 가장 그럴듯하게는 민주당 대선후보지명전에서 버니 샌더스3가 그랬던 것처럼 노동자계급과 사회주의의 언어를 말하는 그런 분파들의 입장을 취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트럼프주의의 사회적 기초

이글은 트럼프에 투표한 사람들의 동기와 사회적 구성을 자세하게 분석하는 자리가 아니다. 트럼프 캠페인에 그렇게 결정적인 여성반대 수사학인, 여성혐오주의는 자체의 역할을 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점은 특히 지난 몇 십년 동안 성별관계에 나타난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변화들에 대항한 훨씬 더 세계적인 '남성의 반격' 의 일부이기에 그 자체로 연구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모든 중심부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인종차별주의와 외국인혐오증이 불길하게 성장해 왔고 이점은 트럼프 갬페인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아메리카의 인종차별주의에는 이해될 필요가 있는 그 특유한 요소들이 또한 존재한다. 즉, 단기적으로는, 오바마의 대통령직과 미국판 '이민자 위기'에 대한 반응,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노예제와 차별의 유산 전체가 그러한 요소들이다. 초기의 통계로 볼 때, 대략 88% 의 흑인 유권자들이 클린턴진영을 선택한 반면 친트럼프표는 압도적으로 백인들( 비록 상당수의 '히스페닉'들을 동원하긴 했지만) 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미국 인종분리의 긴 역사는 극명하게 보여질 수 있다. 우리는 앞으로 작성될 기사들에서 이 문제들을 다시 다룰 것이다.

그러나 대중추수주의에 관한 우리의 기사에서 주장하듯이 트럼프의 승리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는 대다수를 희생하여 특히 오래된 제조 및 생산산업의 노동자계급을 희생하여 작은 소수만을 부유하게 만드는 거시경제적인 과정들인 경제지구화와 금융화와 동일시되는 신자유주의 '엘리트'에 대한 분노였다고 생각된다. '지구화(Globalisation)'는 자동차와 철강같은 산업들이 도매식으로 분해되어 노동력이 더 값싸고 이윤이 훨씬 더 높은 중국과 같은 나라들로 이전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또한,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을 의미했는데, 이는 자본주의에 있어 '빈곤한' 나라에서 '부유한' 나라로의 이주를 통해 노동력을 값싸게 만드는 또다른 수단이었다. 금융화는 대다수에게는 경제생활을 점점 더 신비스런 시장의 법칙들이 지배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더 구체적으로는 많은 작은 투자자들과 희망찬 주택소유자들을 파산하게 만들었던 2008년의 대폭락을 의미했다.

다시 말하자면, 앞으로 좀 더 자세한 통계적 연구들이 필요하겠지만, 트럼프 캠페인의 핵심적 강점은 대학교육을 받지않은 백인들로부터, 특히 소위 '대도시의 자유주의 엘리트' 안에 체화되어 있는 기존의 정치질서에 반대하는 저항의 하나로 트럼프에게 투표한 새로운 산업 황무지들인 '녹슨 지대(Rust Belt)'의노동자들로부터 받은 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노동자들이나 이 지역들의 다수는 이전의 대선에서 오바마에게 투표했고 몇몇은 민주당의 대선후보경선에서 버니 샌더스를 지지했다. 그들의 표는 무엇보다도 부의 점점 더 커져가는 불평등에 대항한, 그들 자신과 자식들에서 어떤 미래도 보장하는 않는다고 느껴지는 그 체계에 대항한 그러한 반대의 표였다. 그러나 진정한 노동자계급운동의 완전한 부재라는 틀 안에 결국 이러한 반대는 엘리트가 외국 투자자들에게 나라를 팔아먹는고, '순진한' 노동자계급을 댓가로 이민자와 난민들과 소수자들에게, 남성노동자들을 댓가로 여성노동자들에게 특별한 잇권들을 준다고 비난하는 대중추수주의적 세계관에 자양분을 제공했다. 트럼프주의의 인종차별적 여성혐오적인 요소들은 '엘리트'에 대한 언사적인 공격과 연관되어 있다.

트럼프의 집권: 평탄하지 않는 주행

우리는 트럼프의 대통령직이 어떨지 그가 어떤 정책들을 구현하려 할지에 관해 추측할 생각은 없다. 트럼프에게 무엇보다도 특징적인 것이 바로 예측불가능성이라서 그의 통치의 결과들을 예언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트럼프는 아침밥도 먹기전에 벌써 몇 십개의 모순적인 말들을 할 수 있는 반면 이점이 선거캠페인에서 그의 지지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도 있다. 하지만 캠페인에서 작용했다고 해서 재임기간에도 그렇게 잘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트럼프는 전형적인 자수성가한 기업가로 자신을 소개하고 미국 기업인들을 관료주의로부터 해방하는 것에 대해 말하지만, 그는 또한 내륙도시들에서의 인프라구조들을 회복하고 도로와 학교와 병원을 건설하며 환경보호제한들의 폐지를 통해 화석연료산업을 재활성화하는 등의 대대적인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 모두는 경제에 대한 중대한 국가자본주의적 개입을 함의한다. 그는 수백만의 불법이민자들을 추방하겠다고 맹세하지만 US경제의 많은 부분이 그들의 값싼 노동에 의존하고 있다. 외교정책에서 그는 고립주의와 철병(나토에서의 US의 참여규모를 축소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에서 보여지듯이)의 언어를, 군비예산증가를 약속하며 'IS에 폭탄을 퍼붓는것'에 관한 그의 허세에서와 같은 개입주의의 언어와 조합한다.

확실해 보이는 것은 트럼프의 대통령직의 특징이 지배계급 내부 그리고 국가와 사회 이 둘 모두에서의 충돌로 드러날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트럼프의 승리연설이 화해의 전형이었고 그는 '모든 미국인의 대통령'이되고 싶어한다. 그리고 트럼프를 백안관에서 맞이하기전 오바마는 가능한한 원만한 이행기를 보장하고 싶다고 말했다. 게다가, 상원과 하원에서 공화당이 대다수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만약 공화당 기존 세력이 트럼프에 대한 그들의 반감를 극복한다면 그는 더 선동적인 정책들은 대기 중에 놓더라도 많은 정책들에 대한 지지를 확보할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장래의 긴장과 충돌의 징후들은 어렵지 않게 발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트럼프가 나토에 관한 회의감을 유지한다면 또는 강력한 지도자로서 푸틴에 대한 그의 존경이 동유럽과 중동에서 러시아 제국주의의 위험스런 재활에 맞서는 US의 시도들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야기한다면 군위계질서의 일부들은 그의 몇몇 대외정책에 아마도 매우 적대적일 것이다. 그의 몇몇 국내정책들에 대한 반대는 또한 정보기구, 연방관료 및 대자본관계자들의 내부로부터도 발생할 수 있을 터이고 이때 이들은 트럼프가 광란스럽게 마구날뛰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보장하는 것이 자신들이 할 역할이라 여길지도 모른다. 한편, 아마도 민주당내부에서는 '클린턴왕조'의 정치적 소멸로 새로운 반대파들이 출현하고 심지어는 분열을 일으켜서, 버니 샌더스와 같은이들 주변에 좌익이 출현해서 경제적 정치적인 기존 세력들에 대한 적대 기운을 이용하길 희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의 수준에서, 브렉시트 이후의 영국과 비교하자면, 명백히 인종차별주의적 그룹들이 이제 그들의 폭력과 지배의 환상을 실현할 권한을 부여받은 듯이 느끼면서 '대중적인' 외국인혐오증이 불길하게 꽃피는 것을 우리는 아마도 보게 될 것 같다. 그리고 만약 트럼프가 '불법자들'의 억류와 추방 프로그램을 진지하게 시작한다면, 이 모든 발전들은 지난 몇 년간 경찰에 의한 흑인살해 후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거리에서의 저항들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터이다. 실제로, 선거결과가 발표된 바로 그날부터 미국전역의 도시들에서 일련의 매우 분노한 시위들이 있어 왔는데, 전반적으로 이 시위들에는 트럼프가 이끄는 정부라는 전망에 역겨움을 느끼는 젊은이들이 참여하고 있다.

국제적인 영향

국제수준에서, 트럼프의 승리는 그 스스로가 말하는 것처럼 '브렉시트 플러스 플러스 플러스(Brexit plus plus plus)'가 될 것이다. 그것은 이미 서유럽의 우익대중추수주의적 정당들에, 특히 2017년 선거를 치르게 될 프랑스의 민족전선(Front National)에 강력한 후원를 제공했다. 이들은 다국적인 무역 조직들로부터 탈퇴를 원하고 경제보호주의를 선호하는 정당들이다. 트럼프의 가장 공격적인 선언들은 중국의 경제적 경쟁을 겨냥한 것이었는데, 이는 우리가 1930년대의 경우처럼 이미 포화된 세계 시장을 더 위축하게 될 무역전쟁을 향해 가고 있음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모델은 지난 20년간 세계자본주의에 잘 기여했지만 이제 그 한계에 도달해가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제국주의의 수준에서 우리가 목격해온 ' 각자 나홀로(every man for himself)' 경향을 지금까지는 그것이 더 단단히 억제되어 온 경제 영역으로 전파할 위험이 있다. 또한 트럼프는 지구온난화가 단지 중국인들이 그들의 수출추세를 지원하기 위해 고안해낸 장난이라고 선언했고, 기후변화에 대해 존재하는 모든 국제조약들에서 철수하겠다고 말한다. 이러한 조약들이 이미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우리는 알지만, 그것들을 없애버리는 것은 우리를 산적한 세계환경재앙들에 훨씬 더 깊이 빠뜨리는 것과 같다.

반복하자면, 트럼프는 사회운영에 대한 그 모든 전망들을 완전히 잃어버린 부르조아지를 상징한다. 그 모든 허영과 자아도취주의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자신은 미치지 않았으나, 점점 선택의 여지가 없어져가는 심지어 세계대전의 선택의 여지마저 없어져가는 체계의 광기를 그는 체화한다. 자본주의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지배계급은 자체의 정치적 군사적 기구들을 이용하여, 달리 말해서 한 계급으로서의 의식적 개입을 통해 완전한 통제상실, 즉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카오스로의 충동이 최종적으로 발현되는 것을 거의 한 세기동안 막아낼 수 있었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통제의 한계들을 목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의 적들이 새로운 일시적 수리를 통해 살아남는 능력이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 계급의 문제는 경제적 정치적 윤리적으로 그 모든 수준에서 부르조아지의 명백한 파산이, 아주 작은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체계에 대한 혁명적 비판을 결과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대열에서 오도된 분노와 유해한 분열들을 생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자본주의를 미래에 하나의 인류사회로 대체할 가능성에 심각한 위협을 나타낸다.

한편 자본주의의 위기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세계대전이 오늘날 의제가 아닌 이유들 중 하나는 노동자계급이 큰 전투에서 패배당함이 없이 여전히 마르지 않은 저항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를 들어 2006년의 프랑스학생투쟁과 2011년 스페인의 인디그나도스(Indignados: 분노한 자들)반란들처럼 지난 십년동안 나타난 다양하고 대대적인 운동들 속에서 그것을 목격해왔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저항의 전조들은 경찰에 의한 살해에 반대하는 항의시위와 트럼프에 반대해 이뤄지는 선거후 데모들에서 발견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위들은 분명한 노동자계급 성격을 띠지는 않고, 좌익의 직업정치인들에 의해서 그리고 다양한 민족주의적이거나 민주주의적 이데올로기에 흡수될 수 있는 취약점을 갖고 있다. 노동자계급이 대중추수주의의 위협과 자본의 좌익이 제공하는 잘못된 대안 이 두가지 모두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깊이 있는 무언가가 요구된다. 그것은 바로, 정치적으로 자기 스스를 이해하고 우리 계급의 공산주의의 전통들과 재접촉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독립(proletarian independence)을 위한 투쟁이다. 이것은 당장에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혁명가들은 오늘날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만연한 스모그를 특히 모든 가장된 형식들까지 관통해서 길을 비춰줄 수 있는 정치적이고 이론적인 명료성을 위해 투쟁함으로써 그러한 발전을 준비하는 역할을 갖는다.

Amos 11.11.16

*번역원본은ICC 웹사이트 www.internationalism.org 기사'President Trump: symbol of a dying social system'이다

1 트럼프에 대한 공화당의 반대가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로, 그 당의 좌익의 일부로 여겨지기 어려운 조지 W 부시 전대통령은 트럼프에게 투표하느니 차라리 백지를 제출하겠다고 선언했다.

2 지배계급의 한 종파에 대항해 다른 한 종파와 '반파시즘'연합을 결정하는 정책을 우리가 거부하는 것은 특히 이탈리아좌파공산주의(Italian communist left)로부터 물러받은 유산이다. 이것은 반파시즘이 노동계급을 전쟁에 동원하려는 수단임을 정확히 인식했다. 우리의 국제평론(International Review) 101호에 재간행된 빌랑(Bilan)지의 기사, '반파시즘: 혼돈을 위한 공식(Anti-fascism: a formula for confusion)'을 참조하기 바란다.

3샌더스에 대해 더 자세한 것은 '트럼프 대 클린턴(Trump v Clinton)' 기사를 참조 바란다.

 

1919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창설

국제공산주의흐름

 

우리가 기념해야 할 수많은 기념일 가운데 매체와 역사가들이 짧게 언급하고 그 의미를 의도적으로 왜곡하면서 제대로 다루지 않는 기념일이 있다. 1919년 3월 열린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하 코민테른)>의 창립대회가 그것이다.

코민테른 창설의 기념은 계급투쟁이 오늘날 위기로 고통받는 자본주의의 현실이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착취받는 계급일 뿐 아니라 혁명계급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부르주아지 자체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을 현재의 부르주아지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1. 1919년 국제적인 혁명물결

 

코민테른의 창설은 전체 자본가계급과 그들의 열광적 하수인들에게는 불쾌한 기억을 일깨우고 있다. 특히 그들에게는 국제적인 혁명 물결의 솟구치고 피할 수 없는 조류에 직면한 1차 세계대전 말의 공포를 상기시키고 있다. 그것은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 참호에서의 반란, 독일에서 빌헬름 황제의 퇴위와 노동계급의 반란과 폭동에 직면한 휴전 서명, 그리고 독일 노동자들의 봉기, 러시아 노선에 따른 바바리아와 헝가리에서의 노동자평의회 공화국 건설,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노동 대중 사이의 파업,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적대적 개입을 거부한 몇몇 영국 군대뿐만 아니라 프랑스 함대와 군대의 반란 등이었다.

그 당시 영국 정부의 수상인 로이드 죠지는 만일 그가 러시아 정복을 돕기 위해 천 명의 영국 군대를 파견한다면 그 군대는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만약 영국의 군사점령이 볼셰비키에 맞서 이루어진다면 영국은 볼셰비키가 되고 런던에 소비에트가 건설될 것이라고 1919년 1월 선언했다. 그것은 러시아 노동자평의회 권력에 대한 국제 부르주아지의 경악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었다.

 

“유럽 전체는 혁명정신으로 가득 찼다. 노동자들 사이에는 전쟁 조건에 반대하는 불만감뿐만 아니라 분노와 반항감이 깊이 쌓여 있다. 정치적·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모든 기존 질서에 대해 유럽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모든 인민대중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E. H. 카의 「볼셰비키 혁명」 3권, 135쪽에서 인용)

 

우리는 오늘날 코민테른의 창설이 1917년으로부터 적어도 1923년 말까지, 유럽으로부터 아시아(중국)로, 그리고 캐나다(위니페그)와 미국(시애틀)의 ‘신’세계로부터 라틴아메리카에 이르는 전 세계의 혁명물결에서 정점이었다고 알고 있다. 이러한 혁명 물결은 세계를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분할로 이끈 1차 세계대전, 4년간의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응답이었다. 1914년 전쟁이 꿀꺽 삼킨 제2인터내셔널 사회민주주의의 당들과 개별 투사들이 제국주의 전쟁에 대해 취한 태도는 그들이 혁명과 코민테른을 맞아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결정했다.

 

“코민테른은 각기 다른 나라들의 제국주의 부르주아지가 2천만 명을 희생시킨 1914~18년의 제국주의 전쟁이 끝난 후 만들어졌다. ‘제국주의 전쟁을 기억하라’ 이 말은 코민테른이 모든 남성 노동자와 모든 여성 노동자에게 한 첫 번째 말이다. 그들이 어디에 살건 어떤 언어로 말하든지 그들에게 한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한줌의 제국주의자들이 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각기 다른 나라들의 노동자들이 서로의 목을 베도록 강제했다는 점을 기억하라. 부르주아지의 전쟁이 유럽과 전 세계에서 가장 가공할 기근과 가장 소름끼치는 참상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을 기억하라. 자본주의를 전복하지 않고는 이러한 강도 같은 전쟁의 반복이 가능할 뿐 아니라 불가피함을 기억하라” (2차 대회에서 채택한 코민테른의 문건, 제인 데그라스, 「코민테른 1919-43: 문헌집」)

 

2. 코민테른의 제2인터내셔널과의 연속성

 

(1) 제2인터내셔널과 제국주의 전쟁


1848년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칼 맑스는 “노동자는 조국이 없다”라고 자본주의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근본적 원칙 하나를 정립했다. 이 원칙은 노동자들이 민족 국가의 문제에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반대로 민족문제와 그들의 역사적 투쟁의 하나의 기능으로서 민족 전쟁의 문제에 대해 노동자의 입장과 태도를 규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전쟁의 문제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는 제1인터내셔널(1864~73)과 제2인터내셔널(1889~1914)에서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19세기 동안 프롤레타리아트는 특히 러시아 짜르 체제와 같은 봉건적이고 군주적 반동에 맞서는 민족해방 전쟁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제2인터내셔널 내에서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는 선두에 서서 20세기 벽두에 발생한 자본주의의 시기 변화를 인식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정점에 다다랐으며 전 지구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제 레닌이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가장 높은 단계인 제국주의”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다가올 유럽전쟁은 식민지의 분할과 그 영향력을 둘러싼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제국주의 세계 전쟁일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원칙을 저버렸던 기회주의 진영에 맞서서,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서 인터내셔널과 프롤레타리아트가 무장하는 전투로 이끈 것은 제2인터내셔널의 좌익이었다. 이 투쟁의 중대한 순간에 러시아 1905년 대중파업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낸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국주의 전쟁을 대중파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연결시킨 1907년 슈투트가르트의 인터내셔널 대회가 있었다.


“나는 이 문제[러시아에서의 대중파업과 전쟁(편집자)]에 대해서 우리가 위대한 러시아 혁명[1905년(편집자)]의 교훈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을 여러 동지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을 러시아와 폴란드 대표들의 이름으로 말하라고 요청받았습니다. … 러시아 혁명은 전쟁의 결과로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 전쟁을 끝내려고 일어났습니다. 혁명이 없었다면 짜르 체제는 의심할 여지없이 전쟁을 지속시켰을 것입니다.” (로자 룩셈부르크, BD 울프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에서 인용)

 

좌파는 룩셈부르크와 레닌이 제출한 대회의 중대한 수정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래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사회주의자들은 가능한 한 빨리 그 전쟁을 끝내고 전쟁이 촉발시킨 경제적·정치적 위기를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인민에게 일깨우고, 그럼으로써 자본주의 지배의 몰락을 서두를 의무가 있다.” (코민테른 1차 대회에서 채택한 「사회주의 경향들과 그들의 베른대회에 대한 결의문」에서 인용)

 

1912년 제2인터의 바젤 대회는 유럽에서 점증하는 제국주의 전쟁의 위협에 맞서는 위와 같은 입장을 다시 확인했다.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이 코뮌의 혁명적 반란을 탄생시켰고, 러일전쟁이 러시아에서 혁명세력을 움직였다는 것을 부르주아 정부들이 잊지 않게 하자. 노동자계급의 눈으로 볼 때, 자본가들의 이익, 왕조의 경쟁, 그리고 외교 협정의 남발을 위해 노동자계급이 스스로를 학살하는 것은 범죄다.” (앞 글)

(2) 제2인터내셔널의 배반과 죽음

 

1914년 8월 4일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기회주의 때문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애국주의 홍수와 전쟁열에 쓸려 제2인터는 깨어져 부끄럽게 목숨을 다했다. 주요 당들은 (특히 누구보다 기회주의자들 수중에 있었던 프랑스와 독일 사민당과 영국의 노동당은) ‘조국방어’와 ‘외세침략’에 맞서기 위한 부르주아지와의 ‘신성한 동맹’을 요구하며 전쟁채권에 찬성표를 던졌다. 프랑스에서는 계급투쟁을 포기하면서 장관직을 보상으로 받기까지 했다. 그들은 “맑스주의의 황제”라고 불렸던 카우츠키가 계급투쟁은 “평화 시기”에만 가능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면서 전쟁과 계급투쟁을 구분했을 때, “중도주의”(인터내셔널의 좌파와 우파 사이의 중간)로부터 이론적 지원을 받았다.

“계급의식이 있는 노동자들은 인터내셔널 붕괴에 대해 슈투트가르트와 바젤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대회의 발언들과 결의문들 속에 담긴 가장 거룩한 선언들, 그리고 그들의 신념을 공식 사민당들의 다수가 명백하게 배신한 것으로 이해한다.” (레닌, 「제2인터내셔널의 몰락」)

소수의 당들만이 이러한 폭풍 속에서 우뚝 섰다. 특히 이탈리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고 러시아의 당들이 그랬다. 다른 곳에서는 고립된 혁명가들과 혁명 그룹이 있었는데, 로자 룩셈부르크와 호르터와 판네쿡 주위의 네덜란드 “트리뷴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계급투쟁에 충실했으며 재조직화를 시도했다.

제2인터내셔널의 죽음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심대한 패배였다. 이는 그들이 참호 속에서 피를 흘리게 했다. 수많은 혁명적 노동자들이 살육당했다.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들의 국제 조직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재건해야 했다.

“제2인터는 기회주의에 패배해 죽었다. 기회주의자를 타도하자. 변절자뿐 아니라 기회주의로부터 해방된 제3 인터내셔널 만세!” (레닌,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정세와 임무」, 1914. 1. 10)

(3) 찌머발트와 키엔탈 대회: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건설을 향한 발걸음

1915년 9월 “국제사회주의자들의 찌머발트 대회”가 열렸다. 이어서 스위스의 키엔탈에서 1916년 4월 2차 대회가 열렸다. 전쟁과 억압이라는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를 포함한 11개국의 대표들이 참여했다. 찌머발트 대회는 전쟁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식했다. 대회의 다수파는 ‘거룩한 동맹’의 진영으로 넘어갔거나 그들과 분리되어 관망하는 사민당들의 기회주의 우파를 비난하기를 거부했다. 이러한 중도주의 다수파는 “평화”라는 표어를 방어하는 평화주의자였다.

볼셰비키 분파의 대표인 레닌과 지노비예프의 주도 아래 통일된 “찌머발트 좌파”는 분립의 필요성과 제3인터내셔널의 건설을 주창했다. 평화주의에 맞서 그들은 “혁명적 행동이 없는 평화 투쟁은 공허하고 기만적인 문구”(레닌)라고 선언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자”는 슬로건으로 중도주의를 반대했다. “이 슬로건은 구체적으로 슈투트가르트와 바젤대회의 결의문으로 나타난다.”(레닌)

이들 대회를 통해 <좌파>는 힘을 얻었지만, 다른 대표들을 깨닫게 할 수 없어 소수파로 남았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었다.

“두 번째 찌머발트 대회(키엔탈)는 의심할 여지없이 한 걸음 진전이다. (…) 그러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앞으로 우리는 우리의 결의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제3인터내셔널을 위한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 찌머발트와 키엔탈 대회는 우리의 길이 올바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노비예프, 1916. 10. 6)

지노비예프가 1918년 3월에 말했듯이, 각기 다른 나라 좌파 사이의 회의와 그들 사이의 공동투쟁을 통해 “형성 중인 제3인터내셔널의 첫 번째 핵”을 만들 수 있었다.

 

(4) 프롤레타리아트가 슈투트가르트와 바젤 대회의 결의문을 수행하다

1917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유럽 전역에 혁명적 물결을 열어 젖혔다. 프롤레타리아의 위협은 제국주의 대학살이 종지부를 찍었다는 점을 국제 부르주아지에게 확인시켰다. 레닌의 슬로건은 현실이 되었다. 러시아 그리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가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시켰다. 이처럼 프롤레타리아트는 유명한 슈투트가르트 결의를 적용함으로써 제2인터내셔널 좌파의 명예를 드높였다.

1차 세계대전은 사회민주당의 의회주의적 우파를 부르주아지 진영으로 결정적으로 몰아넣었다. 혁명적 물결은 중도주의의 평화주의자들이 부르주아지에 맞서 싸우도록 했지만 그들의 다수는 특히 카우츠키 같은 지도자들은 부르주아지 진영으로 뛰어들었다. 더 이상 인터내셔널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민주주의로부터 분리된 분리파들이 만든 새로운 당들은 “공산주의”당이라는 이름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혁명적 물결은 고무되었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당, 제3인터내셔널의 건설을 요구했다.


(5) 코민테른의 건설 : 제2인터내셔널의 정치와 원칙과의 연속성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라는 이름을 채택한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이미 죽은 제2인터내셔널 당들의 우파로부터 조직적으로 분리하는 것을 기반으로 1919년 3월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제2인터내셔널의 원칙과 그 공헌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에 생명을 다한 공식적 사회주의당들의 냉담, 거짓 그리고 부패를 쓸어버리면서,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제3인터내셔널에서 하나가 되어 바베프로부터 칼 리프크네히트,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로 기다랗게 이어지는 혁명 세대들의 영웅적 노력과 순교의 직접적 계승자라고 우리를 생각한다.

제1인터내셔널이 발전의 미래 경로를 미리 비추고 그 도정을 가리켰다면, 그리고 제2인터내셔널이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모으고 조직했다면, 제3인터내셔널은 열린 대중행동의 인터내셔널이고 혁명적 실현의 인터내셔널이며, 행위[실천]의 인터내셔널이다.” (코민테른의 선언)

코민테른의 기반을 이룬 흐름, 분파, 전통 그리고 입장은 제2인터내셔널의 좌파가 발전시키고 방어한 것들이었다.

“1차 대전 이전에 프롤레타리아트가 발전시킨 제2인터내셔널이라는 역사적 대열로부터 선발해 재편한 그룹을 통해서만,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음을 우리의 경험은 증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그룹만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선진적 강령을 만들 수 있고 그래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기초를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빌랑������(공산주의 좌파의 이탈리아 분파의 이론지), 1936년 8월, 34호, 1128쪽)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 안톤 판네쿡 같은 개인은 물론이고 볼셰비키,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좌파 같은 사회민주당들의 그룹과 분파를 보더라도, 제2인터내셔널과 찌머발트의 좌파와 제3인터내셔널의 좌파 사이에는 정치적이고 유기적인 연속성이 있다. 코민테른의 첫 번째 대회는 제2인터내셔널의 부분이었던 러시아 공산주의당(볼셰비키)(이전의 러시아 노동자 사회민주주의당(볼셰비키))과 독일 공산주의당(이전의 스파르타쿠스)의 주도로 소집되었다. 볼셰비키는 찌머발트 좌파의 주도 세력이었다. 찌머발트 좌파는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 사이의 진정한 유기적·정치적 연결고리였는데, 그들은 제2인터내셔널의 좌익으로서 과거에 벌였던 투쟁을 평가하면서 그 시대의 요구를 다음과 같이 정립했다.

“찌머발트와 키엔탈 대회는 제국주의 살육에 항의하기 위해, 결의가 있는 모든 프롤레타리아 세력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통일시키는 것이 필요했던 상황에서 열린 매우 중요한 대회였다. (…) 찌머발트 그룹은 자기 전성기를 가졌다. 찌머발트에 모인 진실로 혁명적인 세력은 모두 더 전진해 코민테른에 합류한다.” (찌머발트 대회 참가자 선언)

우리는 두 인터내셔널 사이의 연속성을 강력히 주장한다. 우리가 계통적 측면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코민테른은 느닷없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 강령과 정치적 원칙도 마찬가지다. 두 인터내셔널 사이의 역사적 연결고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역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무정부주의에 굴복하는 것이다. 또한 코민테른을 단지 노동자 대중의 혁명운동의 산물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연속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코민테른이 왜 그리고 어떻게 제2인터내셔널과 결별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슈투트가르트 결의에 표현된 두 인터내셔널 사이의 연속성이 있지만, 두 인터내셔널 사이에는 단절도 있기 때문이다. 그 단절은 코민테른의 정치 강령 속에, 그 정치적 입장에, 그리고 “세계 공산주의당”으로서의 조직적이고 전투적인 실천 속에 구체화되었다. 사실 단절은 물리적인 유혈 탄압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것은 제2인터내셔널의 성원인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참여한 케렌스키 정부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와 볼셰비키를 억압하고, 독일에서는 노스케-샤이드만 사민주의 정부가 프롤레타리아트와 공산주의당을 억압해서 단절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연속성 속의 단절”을 인식하지 않으면, 1920년대의 코민테른의 퇴행, 그리고 그 내부의 투쟁, 그리고 1930년대 ‘이탈리아’, ‘독일’ 및 ‘네덜란드’ 공산주의 좌파의 외부투쟁 및 그들 세력의 배제를 이해할 수 없다. 오늘날 공산주의 그룹들과 그들이 방어하는 입장은 이런 좌파들이 공산주의 원칙을 지키고, 코민테른 및 1917~23년의 혁명적 물결을 비판적으로 재평가했던 그들의 노력의 산물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유산인 제2인터내셔널의 유산을 인식하지 않으면, 코민테른의 기반, 오늘날까지 중요한 몇몇 기반의 타당성, 1930년대 공산주의 좌파의 공헌을 이해할 수 없다. 다른 말로 그것은 오늘날 혁명적 입장을 지속적으로, 확신과 결단을 가지고 방어할 수 없음을 뜻한다.


 

3. 코민테른의 제2인터내셔널과의 단절


(1) 코민테른의 정치 강령

1919년 1월 말 트로츠키는 코민테른 창립대회의 초대장을 썼다. 그 대회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채택할 정치 강령의 원칙을 결정했다. 사실 이 편지는 제안된 ‘코민테른 강령’이고 그를 잘 요약하고 있다. 그것은 두 개의 주요 공산주의당들의 강령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 의견으로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여기서 강령으로 제시되었고, 독일 스파르타쿠스 동맹과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강령에 기초해서 구성된 다음의 제안들에 기초해야만 한다.” (데그라스, 앞글)

사실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1918년 12월 29일 독일 공산주의당이 창설된 이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1919년 1월 베를린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끔찍한 탄압기 동안에, 사민주의 세력이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죽여 독일 공산주의당은 두 명의 주요 지도자를 잃었다. 이처럼 바로 창립 순간에 코민테른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첫 번째 패배의 고통을 겪었다. 창립 두 달 전 코민테른은 그의 명성, 힘 그리고 이론적 능력에서 레닌과 트로츠키에 필적할 두 명의 지도자를 잃었다. 지난 세기 말 그녀의 저작에서 코민테른의 정치 강령의 기초가 될 핵심들을 가장 많이 발전시킨 사람은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2) 돌이킬 수 없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쇠퇴

로자 룩셈부르크에게는 1914년 전쟁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쇠퇴기를 열어 놓았다는 점이 명백했다. 제국주의 살육 이후 이러한 입장은 더 이상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오늘날 인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혼돈 속에서 멸망하느냐 아니면 사회주의에서 구원을 발견하느냐” (독일 공산주의당 창립대회에서 강령에 대한 연설)

이러한 입장은 코민테른에서 강력하게 재확인되었다.

“1. 현 시대는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지닌 자본주의가 파괴되지 않는다면, 그와 함께 유럽 문명의 전체를 끌어내릴, 전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몰락과 해체의 시대이다.” (「초청장」, 데그라스, 앞글)

“새로운 시대가 태어난다! 자본주의 소멸과 내부 해체의 시대가! 프롤레타리아트의 공산주의 혁명의 시대가!” (코민테른 강령, 앞글)

(3) 자본주의 쇠퇴 시대의 정치적 함의

코민테른의 지형 위에 서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의 쇠퇴는 삶의 조건과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에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보기를 들어 카우츠키와 같은 중도주의 평화주의의 사상과는 반대로 전쟁의 끝은 전쟁 전 시기의 삶과 강령으로 회귀하는 걸 의미할 수 없었다. 이는 죽은 제2인터내셔널과 코민테른 사이의 단절의 한 지점이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세계대전은 세상의 전환점이다. (…) 우리의 투쟁을 위한 조건과 우리들 자신은 세계대전으로 발본적으로 변화되었다.” (룩셈부르크, 「유니우스 팜플렛」으로 알려진 「사회민주주의의 위기」, 1915)


 

제국주의 전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쇠퇴기가 열렸다는 것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삶과 투쟁의 새로운 조건을 의미했다. 1905년 러시아 대중파업, 그리고 노동대중 단일 조직의 새로운 형태인 소비에트가 최초로 등장한 것이 자본주의 쇠퇴기의 개막을 예고했다. 룩셈부르크(「대중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 1906)와 트로츠키(1905년 그의 책)는 이러한 대중운동의 본질적 교훈을 끌어냈다. 룩셈부르크와 함께 모든 좌파는 제2인터내셔널 내에서 대중파업에 대한 논쟁을 이끌었으며 노동조합과 사민당 지도부의 기회주의에 맞서서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평화적이고 점진적 진화라는 그들의 전망에 맞서서 정치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사민주의적 실천과 결별하면서 코민테른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기본적인 투쟁방법은 자본의 정치권력에 맞서 공개적인 무장투쟁으로 나아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행동이다” (「초청장」, 데그라스, 윗글)

(4)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노동대중의 행동은 부르주아 국가와의 충돌로 나아간다. 코민테른의 가장 소중한 공헌은 국가에 대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사민주의의 “개량주의”와 결별하고 파리코뮨과 1905년 러시아 그리고 무엇보다 자본주의 국가를 파괴하고 노동자 평의회로 권력을 행사한 1917년 10월 혁명의 역사적 경험의 교훈과 맑스주의 방법을 새롭게 함으로써, 코민테른은 스스로 명쾌하게 그리고 어떠한 모호함도 없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노동자 평의회 안에 조직된 노동대중의 독재를 선언했다.

“2.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는 지금 즉각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국가권력의 장악은 부르주아지의 국가기구의 파괴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권력기구의 조직을 의미한다.

3. 이러한 새로운 권력기구는 노동계급의 독재를 구현해야 하고 몇몇 곳에서는 농촌의 반(半)프롤레타리아트, 빈민의 독재를 구현해야 한다. (…) 소비에트 및 그와 비슷한 기구의 권력을 통해 그 구체적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4.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자본의 즉각적 전유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폐지와 국가 재산으로의 전환을 위한 지렛대여야 한다.” (윗글)

이 문제는 레닌이 제안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테제”를 채택했던 창립대회에서 본질적인 문제였다.

(5)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에 대한 테제

이 테제는민주주의와 독재 사이의 그릇된 대립을 비난하면서 시작한다.

 

“어떤 문명화된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추상 속의 민주주의’는 없다. 오직 부르주아 민주주의만 있을 뿐이다” (윗글)

 

파리코뮌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독재적 성격을 드러냈다. 자본주의에서 ‘순수한’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것은 사실 기껏해야 자본의 독재의 형식인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방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회의 자유나 출판의 자유는 노동자들에게 무엇인가?

 

“‘출판의 자유’는 ‘순수 민주주의’의 또 다른 대표적 슬로건이다. 여기에서도 또 가장 좋은 인쇄소와 막대한 종이더미를 자본가가 장악하고 있는 한, 또 자본이 신문·잡지에 대한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한, 그리고 이 권력은 세계에서, 예를 들어 미국처럼 민주주의와 공화제도가 발전하면 할수록, 더욱 더 명확하게, 더욱 더 첨예하게, 더욱 더 냉소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런 조건이 계속되는 한 이 자유가 기만이라는 것을 … 노동자는 알고 있다. 노동자를 위한,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참된 평등과 진정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문필가를 고용하거나 출판소를 사들이거나 신문을 매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자본으로부터 박탈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의 멍에를 뒤집어버리고, 착취자를 타도하고 그들의 반항을 분쇄할 필요가 있다.” (「테제」, 윗글)

 

전쟁과 혁명을 경험한 후 카우츠키주의자들이 한 것처럼 순수한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방어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는 범죄라고 「테제」는 계속 말하고 있다. 각기 다른 제국주의와 소수 자본가들의 이해 때문에 수백만의 인민이 참호에서 학살당했고 ‘부르주아지의 군사독재’는 민주적이건 아니건 간에 모든 나라에 세워졌다. 사민주의 정부가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체포하고 투옥한 것처럼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그들을 학살했다.

 

“이러한 사태 하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착취자를 압도하고, 그들의 저항을 극복하는 수단으로서 완전히 정당할 뿐만 아니라, 전쟁을 일으켰고 지금도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부르주아 독재에 대한 유일한 방위수단으로서 노동대중 전체에게 절대로 필요하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다른 계급의 독재 사이의 근본적 차이는 (…) 이를 포함한다. 즉 (…)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는 착취자 즉 주민 중에서 극소수인 대지주와 자본가의 반항을 무력으로 억누르는 것이다. (…)

사실, 이미 실제로 창출되어 있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여러 형태, 즉 러시아 소비에트권력, 독일의 노동자평의회, 직장위원회, 이와 유사한 다른 나라의 또 다른 소비에트적 제도, 이 모두는 다름 아닌 노동자계급, 즉 주민 대다수에게 민주적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한다. 그것은 가장 민주적인 부르주아 공화국조차 전혀 보장할 수 없었던 또 그와 유사한 것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민주적 권리와 자유가 실제로 가능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윗글)

 

오직 세계적 차원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만이 자본주의를 파괴하고, 계급을 폐지하며 공산주의로 가는 길을 보증할 수 있다.

 

“국가권력의 폐지는 맑스를 포함해서 모든 사회주의자들의 목표다. 이러한 목표가 달성되지 않으면 자유와 평등의 진정한 민주주의는 달성될 수 없다. 그러나 오직 소비에트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만이 실제로 이 목표로 나아가게 한다. 왜냐하면 노동인민의 대중조직을 국가행정에 지속적이고 제한 없이 참여하게 함으로써 어떤 종류의 국가도 완전히 소멸시킬 준비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윗글)


국가의 문제는 혁명적 물결이 유럽을 휩쓸고 모든 나라의 부르주아지가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 내전을 벌일 때, 그리고 자본과 노동,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적대감이 극에 달할 때 중요한 문제였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와 혁명의 확장, 즉 소비에트 권력을 유럽에 국제적으로 확장할 필요성은 혁명가들에게 구체적으로 제기되었다. 그것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국가와 혁명적 물결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그에 맞설 것인가의 문제였다. ‘[프롤레타리아 독재]편에 선다는 것’은 코민테른에 가입해 사회민주주의와는 체계적으로 정치적으로 단절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맞선다는 것’은 부르주아 국가를 방어하고 결정적으로 반혁명 진영을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둘 사이에서 머뭇거렸던 중도주의 흐름에게는 그것이 단절과 소멸을 뜻했다. 혁명 시기는 ‘중도 기반’의 멍청한 정책을 가질 어떤 틈도 남겨두지 않았다.

4. 오늘과 내일 : 코민테른의 과업을 지속하기

1914~18년 전쟁이 결정적으로 보여준 시기 변화는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 사이의 단절을 결정짓는다. 우리는 이를 국가의 문제에서 살펴보았다. 자본주의의 쇠퇴,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삶과 투쟁 조건에 미친 결과는 일련의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즉, 아직도 선거 참여와 의회의 활용이 가능한가, 노동자평의회가 출현했는데도, 자본가들과 ‘성스런 동맹’에 참여했던 노동조합이 아직도 노동계급의 조직인가, 제국주의 전쟁의 시대에 민족해방투쟁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가 그런 문제들이었다.

코민테른은 이러한 새로운 문제에 응답할 수 없었다. 그것은 1917년 10월 혁명 1년여 뒤, 그리고 베를린 프롤레타리아트가 겪은 첫 번째 패배로부터 두 달 뒤에 창설되었다. 그 뒤를 이은 여러 해 동안 국제 혁명의 물결은 패배하고 쇠퇴했으며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점점 고립되었다. 이러한 고립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의 퇴행에서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러한 사태들 때문에 코민테른은 기회주의의 성장에 저항할 수 없었다. 반대로 코민테른은 죽었다.

코민테른을 평가할 때, 우리는 그것이 <국제공산주의당>이었다고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것의 실질적 퇴행 때문에 그것을 부르주아 조직으로만 보려는 사람은 그걸 제대로 평가할 수 없고, 그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끌어낼 수도 없다. 트로츠키주의는 초기 4차 대회를 계승해야 한다고 무비판적으로 주장한다. 창립대회가 제2인터내셔널과 단절했던 지점들에서, 그 후속 대회는 퇴행했다는 점을 그들은 결코 보지 못했다. 1차 대회는 사회민주주의로부터 분리했다. 그런데 3차 대회는 그에 반대해 ‘통일전선’ 속에서 사회민주주의와 함께 할 것을 제안했다. 사회민주주의가 부르주아 진영으로 결정적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인식한 후인데도, 코민테른은 3차대회에서 사회민주주의를 부활시켰다. 사민주의당과의 동맹정책은 1930년대에 트로츠키주의가 ‘입당주의’ 정책을 채택하게 했다. 입당주의란 곧 코민테른 1차 대회의 원칙을 정면으로 무시하면서, 사민주의당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레닌이 말한 것처럼 이러한 동맹 또는 항복의 정책은 스페인 내전에서 부르주아 공화 정부를 지지하고, 찌머발트와 인터내셔널을 배신하고 제국주의 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는 반혁명으로 트로츠키 흐름을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미 1920년대에 코민테른 내부에서 이러한 퇴행에 맞서 투쟁하려는 새로운 좌파가 만들어졌다. 그들은 특히 이탈리아, 네덜란드 그리고 독일 좌파였다. 1920년대 동안 배제된 이러한 좌익 분파들은 코민테른과 혁명적 물결을 비판적으로 재평가함으로써 죽어가는 코민테른과 ‘미래의 당’ 사이에서 연속성을 보증할 정치투쟁을 지속했다. 1930년대에 공산주의 좌파의 이탈리아 분파의 잡지가 「빌랑(Bilan)」(“평가”)이었다는 것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인터내셔널의 원칙과 연속성을 갖고, 이들 그룹들은 제2인터내셔널과 단절하는 데에서 나타난 약점을 비판했다. 1930년대 동안의 반혁명과 2차 제국주의 전쟁의 암흑기 속에서 그들이 펼쳤던 이름 없는 노력 덕분에 오늘날 공산주의 그룹들이 부활해서 존재할 수 있게 됐다. 그들은 코민테른과 조직적 연속성을 지니지 않지만 정치적 연속성은 지니고 있다. 이들 그룹들이 만들어내고 방어한 입장들은 자본주의 쇠퇴의 새로운 시기를 맞아 코민테른 안에서 제기된 문제들에 답을 주고 있다.

따라서 ‘공산주의 좌파 분파들’이 이루어낸 비판적 재평가의 기초 위에서 코민테른은 오늘날 살아 있고, 미래의 <세계공산주의당>에서 살아있게 될 것이다.

오늘날 점증하는 착취와 가난에 직면해 프롤레타리아트는 다음과 같은 <찌머발트 좌파>의 입장과 동일한 입장을 채택해야 한다.

경제 전쟁에서 부르주아지와는 어떠한 신성한 동맹도 없다!

민족 경제를 구하기 위한 어떤 희생도 반대한다!

계급투쟁 만세!

경제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라!

경제적 파국, 사회적 해체 그리고 제국주의 전쟁의 전망에 직면해 1919년에서와 같이 오늘날도 역사적 대안은 똑같다. 그것은 자본주의 파괴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수립인가 아니면 인간성의 파괴인가, 사회주의인가 아니면 야만인가다.

미래는 공산주의의 것이다.

참조) 이 한국어번역본은 국제공산주의전망의 싸이트에 공개되었다.

 

원본출처(Orignial Text): International Review 57 - 2nd Quarter 1989 http://en.internationalism.org/node/3066

러시아의 좌익 공산주의: 러시아 공산당의 「노동자 그룹」의 선언

 

 우리는 여기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노동자 그룹」의 선언(강령)을 펴낸다. 이들은 가장 유명한 지도자들 중 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종종 “미아스니코프(Miasnikov) 그룹”(미주1을 보라)으로 불린다. 이 그룹은 소위 좌익 공산주의1)의 일부로, 그들은 한 편으로 러시아의 다른 그룹들과 기반을 공유하며, 또 다른 한 편으로 세계, 특히 유럽의 다른 그룹들과 기반을 공유한다. 이 경향은 그들의 기원을 제3인터내셔널의 당과 러시아의 소비에트 권력의 기회주의적 타락에 대한 반응에서도 찾는다. 그들은 좌익 경향 속에서의 프롤레타리아적 대응을 대표하며, 과거 제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의 발전에 직면했던 이들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우리의 서론

 

 1918년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2) 안에서부터 좌익 분파가 등장했는데, 이는 볼셰비키의 정치3)에 대한 의견차이의 표현이었다. 이것은 그 자체로 볼셰비키주의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의 증거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노동계급의 생생한 표현이었으며, 노동계급은 그 자신의 실천에 대해 급진적이고 지속적인 비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기 때문이다. 볼셰비키는 혁명적 분파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이에 저항하는 당 내부의 타락한 목소리가 제시될 때마다, 볼셰비키주의의 원래의 강령에 대한 배신을 비판하기 위해 당 내부에서 분파들이 생기거나 해체되었다. 스탈린주의가 당을 무덤에 파묻고 나서야 이러한 분파들의 끊임없는 발생은 멈췄다. 러시아 좌익 공산주의는 모두 볼셰비키였다. 볼셰비키주의의 본질을 부수는 이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칭송하며, 좌익 공산주의를 비난하고, 박해하고, 그리고 몰살시키려 할 때에도, 좌익 공산주의는 혁명의 영웅적 시기의 볼셰비키주의의 연속성을 방어했다.

 

 레닌이 그의 정치적 삶으로부터 물러난 것은 볼셰비키의 공개적 위기를 촉진한 한 요소였다. 한 편에서는 스탈린과 지노비예프, 카멘예프에 의한 “삼두 정치”의 형성 과정에서 관료적 분파가 당 내에서의 권력을 확고히 했다. 이 연합의 주요 유대는 트로츠키를 고립시키려는 의도였기 때문에 불안정했다. 트로츠키는 그 동안 상당한 우유부단함에도 불구하고 당 내에서 공공연히 반대파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볼셰비키 정권은 경제와 사회에서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했다. 1923년 여름, 신경제정책(NEP)의 도입에 의한 “시장 경제”의 명백한 첫 번째 위기가 전체 경제의 균형을 위협했다. NEP가 1921년의 위기로 귀결된 전시 공산주의의 과도한 국가 집중을 되돌리기 위해 소개된 것이었던 것만큼, 이제는 경제의 자유화가 러시아를 자본주의 생산의 좀 더 고전적인 위기에 노출시켰음이 명백해졌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과 “보통”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임금 삭감, 해고 정책과 같은 정부의 대응은 이미 궁핍해질 대로 궁핍해져 있던 노동계급의 상황을 악화시켰다. 1923년 8-9월, 동시적인 파업의 발발은 주요 산업 중심지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현상 유지에 관심이 있었던 삼두체제는 NEP를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왕도로 보기 시작했다. 이 관점은 특히 부하린에 의해 이론화되었는데, 부하린은 당의 극좌에서 우익으로 전향했으며, 스탈린 이전에 “사회주의” 시장 경제의 발전에 의한 “달팽이 걸음”으로 일국 사회주의가 가능하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다른 한 편, 트로츠키는 국가의 경제적 위기에 대해 더 강화된 국가 집중과 계획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의 지도적인 그룹 안에서부터 나온 첫 번째 명확한 발언은 「46인의 강령」이었다. 이 강령은 Poliburo(정치국)에 1923년 10월 제출된 것이다. 「46」은 트로츠키와 가까웠던 피아타코브(Piatakov), 프레오브라진스키(Preobrazhinsky)와 같은 인물들과 사프라노브(Sapranov), 스밀노프(V Smirnov), 그리고 오신스키(Ossinski)와 같은 민주 집중 그룹의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문서에 트로츠키의 서명이 없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분파의 일부로 여겨지는 것을 두려워한 까닭(분파는 1921년 이후 금지되었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중앙 위원회에 보낸 공개적인 편지는 1923년 11월 프라우다에, 그리고 그의 팸플릿 「새 길」(New Course)에도 실렸고, 이것은 46과 비슷한 관심을 표현하고 있었으며 그를 반대파의 중요인물로 명백히 위치짓게 해 주었다. 

 

 「46인의 강령」은 최초에는 정권이 직면한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 강령은 지배적인 계층의 실용주의적 경향과 NEP를 불변의 원칙으로 끌어 올리려는 경향에 대한 반대로서 더욱 강력한 국가 계획을 위한 몽둥이 역할을 맡았다. 이것은 우리가 앞으로 보겠지만, 트로츠키를 둘러싼 좌익 반대파가 견지한 주제였지, 그 힘이 아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당의 내적 생명을 질식시키는 것에 대해 제기한 긴급한 경고였다.4)

 

 동시에, 강령은 “병적인” 반대파로 불리는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물론 강령은 그 단어를 당 내 위기의 표현으로 보았지만 말이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던 미아스니코프와 보그다노프의 「노동자의 진실」(Workers' Truth) 주위의 노동자 그룹의 경향에 대한 것이었다. 곧 트로츠키도 비슷한 관점을 취했다. 그들의 분석이 너무 극단적이라거나, 동시에 당의 병적인 상태의 표현이라고 바라보는 관점을 거부한 것이다. 트로츠키는 이러한 그룹들을 제거하기 위해 억압적인 방법으로 협력하는 것에 대해서도 내켜하지 않았다.

 

 사실 이런 그룹들이 “병적인” 현상들로 해체될 리는 없다. 「노동자의 진실」 그룹이 패배주의, 심지어 멘셰비즘으로 나아가는 특정 경향을 표현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독일 좌파와 네덜란드 좌파 내에서의 대부분의 경향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러시아에서의 국가 자본주의의 부흥에 대한 통찰은 10월 혁명을 다소 진보적인 부르주아 혁명으로 바라보며 그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향에 의해 약화되었다.5)

 

 이것은 미아스니코프, 쿠즈네쵸프(Kuznetsov), 그리고 모이셰프(Moiseev)와 같은 오랜 볼셰비키들에 의해 지도되는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노동자 그룹」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이 그룹은 13차 볼셰비키 총회 직후 1923년 4-5월에 그 선언(강령)을 배포함으로써 처음으로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 문서를 검토하는 것은 그 그룹의 진지함, 그 정치적인 깊이와 전망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 문서에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국제 혁명의 후퇴, 그 귀결로서 노동 계급에 의한 방어적인 투쟁의 필요를 깨닫지 못한 “공격의 이론(theory of the offensive)”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것은 1921년을 후퇴로 보지만 그로부터 많은 기회주의적인 결론들을 이끌어 낸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분석의 동전의 뒷면이다. 더욱이, 이 선언(강령)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대에서 더 이상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없는 임금 상승을 위한 투쟁을 요구하는 잘못된 관점을 채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서의 강점은 그 약점을 압도한다.

 

 첫 째, 우선 단호한 국제주의다. 「콜론타이의 노동자 반대 그룹」과는 반대로 그 분석에 러시아 지역주의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강령의 전체 서론 부분은 국제적인 상황을 다루고 있으며 세계 혁명의 지연에 따른 러시아 혁명의 어려움을 언급하며, 러시아 혁명의 구원은 오직 세계 혁명의 부활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그 자신을 국제 프롤레타리아 세계 군대의 군인으로, 그의 계급 조직을 이 군대의 연대(regiment)로 보도록 배웠다. 10월 혁명의 운명에 대해 염려스런 질문을 제기할 때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러시아 국경 너머의, 혁명의 조건이 무르익었지만 아직 혁명이 발발하지 않은 곳을 응시한다.”

 

 둘 째, 이 강령은 「통일 전선」과 「노동자 정부」의 슬로건이라는 기회주의적 정책에 대해 맹렬히 비판한다. 우리는 여기서도 깊은 국제주의를 확인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 이것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정치에 대한 비판이기 때문이다. 그룹의 입장은 분파주의도 아니고 - 다른 공산주의 조직들(독일의 KPD와 KAPD과 같은) 사이의 혁명적 통일의 필요를 긍정한다 -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사회민주주의 배신자들과의 연합을 요구하면서, 볼셰비키가 러시아 혁명에서 통일 전선 전술을 사용한 것처럼 그 방법을 계승했다는 겉치례의 논의에도 반대한다. “봉기한 프롤레타리아를 승리로 이끄는 전술은 통일 전선이 아니다. 오히려 이 부르주아 분파와 그들의 혼란을 야기하는 용어에 반대하는 유혈낭자하고 타협하지 않는 싸움만이 승리로 이끌 수 있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사회주의 혁명가들, 인민주의자들, 그리고 멘셰비키와의 연합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반대하는 투쟁을 통해 이뤄진다. 통일 전선 전술을 폐기하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이 부르주아 분파 - 이 시기에는 제2인터내셔널의 정당들이다 - 가 결정적인 순간에 자본주의 체제를 방어하기 위해 무기를 들 것이라는 경고를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셋 째, 소비에트가 직면한 위험에 대한 해석이 강점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자본주의 과두정치로 교체”하려는 위협이 그 위험으로 지적된다. 강령은 관료 엘리트의 증가와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공민권 박탈이라는 현실을 보여주며, 공장 위원회와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비에트를 복구시켜 경제와 국가의 지도력을 접수할 것을 요구한다.6) 「노동자 그룹」에게 있어서는 노동자의 민주주의의 부활은 관료주의의 부흥에 반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고, 「노동자의 점검」(Workers' Inspection)을 통해 흔듦으로서 새로운 전진이 있다는 레닌의 생각을 관료주의적 수단을 통해 관료주의를 통제하려는 시도일 뿐이라는 점에서 명백히 거부한 것이었다.

 

 넷 째, 강령은 막중한 책임을 표현하고 있다. KAPD는 독일의 베를린에서 1924년 발표한 「강령」에 대해 비판적 주석을 덧붙이는데, 이는 러시아 혁명과 코민테른의 죽음에 대한 독일 좌파의 성급한 판단을 표현한다. 이에 반해 「노동자의 그룹」은 러시아에서의 반혁명이 명백히 승리했다거나 코민테른의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고 성급하게 주장하지 않는다. 1923년의 “커즌 위기(Curzon crisis)”는 영국이 러시아에 전쟁 선포를 한 것이었는데, 이 동안 「노동자의 그룹」의 구성원들은 전쟁에서 소비에트 공화국을 방어하는데 헌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에게서는 10월 혁명과 볼셰비키의 경험으로부터 단절했다는 어떤 단서도 발견할 수 없다. 사실 그 자신의 역할에 대한 앞서 언급한 의견은 이탈리아 망명 좌파에 의해 상술된 좌익 분파의 견해와 매우 닮아있다. 이 강령은 독립적으로, 심지어 비밀스럽게 스스로를 조직해야 할 필요를 인식하고 있으나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노동자 그룹」이라는 그 이름과 그 강령의 내용은 모두 그 스스로를 볼셰비키 당의 강령과 규칙의 연속선상에 위치 짓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강령은 당 내의 모든 건강한 구성원들, 리더부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진실」, 「노동자 반대파」, 그리고 「민주 집중파」와 같은 다른 반대 그룹에게서도 그룹을 재편성하고 당과 혁명의 재건을 위한 단호한 투쟁을 수행하자고 호소한다. 그리고 많은 측면에서 이것은 “46”이라는 당내 주도적인 분파가 그 자신에 의해 “우선적으로” 폐지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현실적이다.

 요약하자면, 「노동자 그룹」의 프로젝트 안에 어떠한 병적인 것은 없다. 그리고 이 「노동자 그룹」은 계급에 어떤 영향력도 갖지 못하는 분파 따위가 아니다. 이들은 모스크바에서의 그 구성원이 약 200명에 달하고, 관료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편을 일관적으로 지지했다. 따라서 1923년 여름과 가을에 걸친 비공인파업(wildcat strikes)에서도 적극적인 정치적 개입을 추구했다. 사실 당 기구가 이들을 최대로 억압하려 했던 데에는 당 내의 평당원들 사이에서 그룹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미아스니코프가 예견했듯이, “그가 탈출하려는 동안” 자신을 암살하려는 시도까지도 있었다. 미아스니코프는 살아남았고, 투옥된 뒤 추방되었지만, 외국에서 20년동안 혁명 활동을 계속 했다. 러시아 안에서의 「그룹」은 대대적 체포에 의해 다소 절룩거렸고, 그것은 20년대 후반 감옥에 갇힌 안테 실리가(Ante Ciliga)가 다룬 소중한 글 「러시아의 수수께끼」(Russian Enigma)에서 반대파에 대해 설명한 것에서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으며 “극좌” 반대파 운동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최초의 억압은 진실로 불길한 사건이었다. 이것은 공산주의 그룹이 볼셰비키 정권 아래에서 직접적인 국가 폭력에 고통받았다는 첫 번째 공공연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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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공산당 노동자 그룹 선언(강령)

Manifesto of the Workers' Group of the Russian Communist Party

 

● 서문

 

 자기 계급의 고통과 고뇌, 그리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투쟁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는 모든 의식 있는 노동자는 우리의 혁명 발전의 모든 단계에서 적어도 한 번 이상 그 운명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한다. 각각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운명이 세계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운명에 깊히 연관되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상업의 발전은 문명화된 세계의 국가들 사이의 깊은 관계를 만든다”, “프롤레타리아의 운동은 국제적이어야 하며 이미 그렇게 되고 있다”는 옛 사회민주주의의 강령을 아직도 읽고 있다.

 러시아 노동자는 스스로를 국제 프롤레타리아 세계 군대의 병사로, 그의 계급 조직을 이 군대의 연대 조직으로 여기도록 배운다. 10월 혁명의 운명에 대한 염려스런 질문을 제기할 때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러시아 국경 너머의, 혁명이 무르익었지만 아직 발발하지 않은 곳을 응시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는 혁명이 현재 주어진 시점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불평하거나 또는 그의 머리를 숙여서는 안된다. 반대로, 프롤레타리아는 이러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러시아 노동자가 그 자신의 나라를 보았을 때, 그는 노동계급이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하였고, NEP(신경제정책)의 가장 힘든 시련을 떠안았지만, 그들 앞에 NEP의 잘 사육된 영웅들이 서 있음을 본다. 그들의 상황과 자신의 상황을 비교하며, 러시아 노동자는 동요하여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윽고 가장 쓰디쓴 생각에 이른다. 노동자는 제국주의 전쟁과 내전의 모든 무게를 어깨에 지고 왔다. 노동자는 러시아의 신문에서 이 투쟁에서 피를 흘린 영웅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는 빵과 물로 궁핍하게 살아간다. 다른 한 편 타인들, 그리고 자신의 무기를 내려놓은 노동자들의 고통과 비참함으로 자신의 배를 채우는 이들은 사치와 호화스러움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대체 어딜 향해 가고 있으며, 어떻게 될 것인가? 정말로 “신경제정책”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의 착취」로 변해버렸는가? 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이 현장의 노동자에게 제기되었을 때, 그는 과거와 현재를 이을 연결을 찾아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이해하기 위해 뒤를 돌아본다. 그러나 이러한 쓰디쓰고 교훈적 경험들 속에서, 노동자는 복잡하게 얽혀 풀리지 않는 역사적 사건들의 그물망 속의 자신의 존재를 발견한다.

 우리는 우리의 힘이 닿는 한 사실을 이해하는 것을 돕고 싶고, 가능하다면 그에게 승리를 향한 길을 보여주고 싶다. 우리는 신성하거나 오류가 없는 마법사나 예언자인 척 하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에 대해 가장 날카로운 비판과 필요한 정정을 요구한다.

 

● 세계의 공산주의자 동지들에게!

 

 현재 선진국과 특히 그 중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의 생산력은 이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굳은 살 가득한 손에 권력을 쥐기 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공산주의 혁명이 되도록 하고 있다. 인류는 끊임없는 부르주아 민족 전쟁에 관계되어 야만에 삼켜지고 그 자신의 피 웅덩이에 빠져 죽거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여 권력을 획득하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계급 사이, 인간 사이, 국가 사이의 전쟁을 완전히 끝장내어, 노동과 번영의, 평화의 깃발을 심는, 둘 중 하나의 미래를 맞이할 것이다.

 군비 경쟁,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의 항공 함대의 신속한 강화는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혹독한 전쟁 발발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으며,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 전쟁으로 죽을 것이다. 마을, 공장, 기업, 그리고 모든 노동자들이 힘겨운 노동을 통해 창조한 모든 부가 파괴될 것이다.

 부르주아지를 전복시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다. 각 나라에서 더 빨리 부르주아지를 물리칠수록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는 더 빨리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실현시킬 것이다.

 착취와 억압, 그리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는 임금을 높이거나 노동 시간을 줄이기 위한 투쟁을 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투쟁은 과거에는 필요했다. 그러나 오늘날 투쟁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부르주아지와 가지각색의 모든 유형의 억압자들은 모든 나라의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지극히 만족해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그 본질적인 임무인 부르주아지와 그 착취 정권에 대항하는 투쟁으로부터 떨어뜨려놓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복종과 폭력에 대해 최소한의 저항조차 보여주지 않은 채 사소한 요구들만을 제안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은 특정 순간,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직면했을 때 부르주아지의 유일한 구원자가 된다. 노동자 대중은 그 억압자들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면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본다. 그러나 만약 같은 일이 그들의 이해에 맞는 것처럼, 사회주의 용어로 치장되어 제시된다면, 노동 계급은 그 언어에 현혹되어, 배신자들을 신뢰하고 그 힘을 쓸데없는 싸움에 낭비한다. 그러므로 부르주아지나 「사회주의자들」이나,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별로 다른 놈들이 아니다.

 공산주의자 전위는 무엇보다도 먼저 투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계급 동지들의 머릿속에서 모든 지독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제거하고 프롤레타리아 의식을 획득하도록 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부르주아 찌꺼기들을 태워버리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모든 문제와 노동을 공유할 때 가능하다. 지금까지 부르주아지와 한 패거리인 이들을 따라왔던 프롤레타리아트가 투쟁하고, 파업하기 시작할 때, 외부에 서서 그들을 경멸적으로 비난해서는 안된다. 반대로, 그들과 함께 그들의 투쟁 속에 있으면서, 이 투쟁이 오직 부르주아지만을 살찌울 뿐이라고 끊임없이 설명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진실된 말을 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정직한 혁명의 신발을 더럽히는 의미가 될지라도 때로는 똥 무더기 위에 서야만 할 때(선거에 입후보한다든가)도 있는 것이다.

 확실히, 모든 것은 각 나라의 힘의 균형에 달려 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는 선거에 나가거나 파업에 참여할 것 없이, 바로 전투에 돌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나라의 사정이 똑같지는 않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공감을 얻기 위한 모든 방법을 그대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모든 근본적인 원칙을 양보하고 망각하거나 포기하는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거부해야한다. 왜냐하면 지금 당장의 성공에 대한 관심이 진짜 해법을 포기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며, 우리를 대중들을 지도할 수 없도록 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따라하면서 끝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끌려 다니게 된다.

 우리는 움직이지 않은 채 남들을 기다려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혁명은 모든 나라에서 동시에 발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미성숙함의 탓으로 돌리거나 다음과 같이 말하며 변명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혁명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게다가 매우 강하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우리와 함께 행동하지 않은데도 우리가 우리의 부르주아지를 전복시킨다면, 그 후에는 어떻게 되겠는가?”

 독일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와 그에 봉사하는 이들을 모두 쫓아내 버렸다고 가정해 보자.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부르주아지와 사회적 배신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분노로부터 멀리 도망쳐 프랑스나 벨기에로 도망칠 것이고, 푸앵카레와 그 동료들에게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원한을 풀어달라고 간청할 것이다. 그들은 프랑스에게 「베르사유」 조약을 존중할 것을 약속하며, 그들에게 라인 지방과 루르 지방을 주겠다고 제안할 수도 있다. 그것은 그들이 러시아 부르주아지나 그 사회민주주의 동맹들이 했었고, 또 미래에 반복할 행동을 똑같이 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당연히 푸앵카레는 독일을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구원하고, 동시에 소비에트 러시아를 전 세계의 도둑들로부터 구원하는 그런 사업을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푸앵카레와 그 동료들에게는 불행히도 군대를 구성한 노동자 농민들은 그 사업이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 반대해 독일 부르주아지와 그 동맹자들을 돕는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자신의 총구를 주인들, 다시 말해 푸앵카레를 향해 돌릴 것이다. 푸앵카레는 자기 자신과 프랑스 부르주아지를 지키기 위해 그의 군대를 부를 것이고, 불쌍한 독일 부르주아지와 그 사회주의 동맹들을 그들의 운명에 내버려 둘 것이다. 이것은 독일 프롤레타리아트가 베르사유 조약을 깬다고 해도 그럴 것이다. 푸앵카레는 「라인」과 「루르」로부터 추격을 받아, 인민의 자기 결정권 원칙에 입각하여 합병이나 배상금 없는 평화를 공포할 것이다. 푸앵카레에게 「쿠노」와 파시스트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 평의회에 의해 운영되는 독일은 등이 휘도록 열심히 일할 것이다. 당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면, 당신을 같은 곳을 빙글빙글 돌지 말고 그것을 써야 한다.

 

 독일 혁명을 위협하는 다른 위험도 있다. 그것은 세력의 분산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 혁명의 이해에 따르면, 모든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는 단결해야만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가 노동계급의 적에 대한 결정적인 단절과 무자비한 전투 없이 상상할 수 없다면, 그것은 자신의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운동을 군사적으로 억압했던 제2 인터내셔널의 사회적 배신자들에게 이와 같은 승리는 공산주의 혁명의 목표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가진 모든 세력들에 참가하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과 같다. 이것이 왜 우리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노동자 그룹」이 조직적으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제3 인터내셔널에 속한 다른 정당들 사이에서 진실된 혁명적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들에게 마지막 결정적인 전투를 위해 힘을 모으라고 호소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제3 인터내셔널의 정당들 모두에게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인터내셔널에 가입되지 않았지만 공동의 목적을 추구하는 특정 정당들에게도 전투와 승리를 위해 통일 전선을 구성하자고 호소하기 위해, 「제4 공산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1)의 정당들에 대한 우리의 소신을 밝혔다. 

 

 첫 번째 단계가 가까워졌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공산주의의 원칙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조직에 기반하여 부르주아지와 열심히 그들을 비호해 온 모든 종류의 추종자들과 그 아류들(사회주의 혁명가당, 멘셰비키 등)을 끌어내렸다. 그리고 독일 프롤레타리아보다 훨씬 약함에도 불구하고 세계 부르주아지들이 이끌어온 모든 공격들, 부르주아지와 지주들, 그리고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된 모든 공격들을 물리쳤다.

 

 이제 서유럽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힘을 모아 권력 투쟁을 시작할 때이다. 소비에트 러시아, 10월 혁명, 그리고 세계 혁명을 위협하는 것으로부터 눈을 감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현재 소련은 매우 힘든 시기이다. 엄청난 결핍과 그 무게에 직면해 있으며, 그것들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와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에게 치명적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결핍은 러시아 노동자 계급과 세계 노동자 운동의 약함으로부터 비롯된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는 한 쪽에서는 NEP의 관료주의적 퇴보 경향, 다른 한 쪽에서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를 내외부에서 위협하는 경향에 대해 아직 맞서지 못하고 있다.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10월 혁명의 승리가 모든 위협으로부터 방어되는 데에 관심이 있다. 러시아와 같은 나라가 세계 공산주의 혁명의 기지로서 존재하는 것이 이미 승리를 보증함을 의미하며, 결과적으로 국제 프롤레타리아 군대 - 모든 국가의 공산주의자들 - 의 전위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의 군대(볼셰비키)가 겪은 결핍과 고통에 대해 여전히 침묵하는 대다수의 프롤레타리아를 대표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의견을 단호하게 표현해야 한다.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노동자 그룹」은 러시아의 상황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으며, 이 작업을 시작하려 한다.

 

 우리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는, 우리가 소비에트 러시아와 공산주의에 반대해서 이야기한 것들을 악용할 사회적 배신자들과 악당들이 있다는 이유로 우리의 잘못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공포는 전혀 근거가 없다. 우리의 적이 공개되어 있든, 숨겨져 있든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멍에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려 하는 우리들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들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재앙을 일으키는 주체로 언제나 그대로 존재한다. 이로부터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들이 있다는 이유로 우리의 문제와 잘못에 대해 침묵하고 논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뿌리 뽑을 조치도 취하지 않아야만 하는가? 우리가 스스로 사회적 배신자들이 테러를 저지르도록 버려둔다면, 우리가 계속 침묵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대로 간다면 우리가 기억하는 10월 혁명이 더 이상 승리가 아니게 될 것이다. 이는 사회적 배신자들에게는 매우 유익한 일이 될 것이며, 국제적 프롤레타리아 공산주의 운동에게는 죽음의 일격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노동자 그룹」이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노동계급의 이해에 따라 시작하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사회적 배신자들의 의견에 직면하여 공포에 떠는 일이 없이, 인터내셔널과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총체성에 대해 결정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국제적 운동과 러시아 운동의 약점으로 그 실패가 설명될 수 있음을 보았다. 다른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도움은 그들 나라에서의 혁명이나 적어도 하나 둘의 선진국에서의 혁명이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은 러시아 노동자 계급이 10월 혁명의 승리로부터 차지한 위치를, 다른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봉기하여 그들의 적을 패배시키는 시점까지 보존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러시아 노동 계급은 제국주의 전쟁, 내전과 기근으로 약해져 강력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 위협이 되는 위험들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기반으로 적확하게 투쟁을 준비할 수 있다. 이 경험은 그들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며, 다른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도움으로 그것을 계승할 것이다.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노동자 그룹」은 러시아 전역에서 경고하고 호소해 왔다. 러시아 공산당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편에서 생각하는 모든 이들은 함께 모여 투쟁을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10월 혁명의 승리가 직면할 운명에 대해 분명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에 앞서 깨달을 것이다. 투쟁은 어렵다. 우리의 활동은 지하활동에 제한되어 있으며, 우리는 비공개적으로 움직인다. 우리의 「선언」은 러시아에서 출간될 수 없다. 우리는 비합법적으로 선언을 복사하고 유포한다. 우리 그룹에 속한다고 의심이 되는 동지들은 당과 조합에서 제명되며, 체포되고 추방되며 해체된다.

 

 러시아 공산당 12차 당대회에서, 지노비예프 동지는 당과 소비에트 관료의 승인 아래 노동계급으로부터의 비판을 질식시키는 새로운 규칙을 공표했다. “러시아 공산당의 리더십에 대한 모든 비판은, 좌우를 막론하고 멘셰비키주의다.”(12차 대회에서의 그의 연설을 참고하라) 그것은 만약 리더십이 공산주의 노동자나 프롤레타리아에게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누군가 비판하기 시작하면, 그는 당과 노동조합에서 배제되어 GPU(체카)에게 넘겨질 것임을 의미했다. 러시아 공산당의 중앙 위원회는 그 스스로를 로마의 교황처럼 절대 오류가 있을 수 없는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어떤 비판도 원하지 않는다. 우리의 걱정들, 러시아 노동자들이 10월 혁명의 승리가 직면할 운명에 대해 걱정하는 모든 것들은 반혁명으로 선언된다. 우리, 「러시아 공산당의 노동자 그룹」은 모든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앞에서 소련이 국제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가장 위대한 성과 중 하나라고 선언한다. 우리가 소비에트 권력이,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그리고 러시아 노동계급의 10월의 승리가 자본주의 과두제로 변형되고 있다는 위협에 대해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해 소비에트의 권력을 되돌리려는 시도들을 막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들이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이름아래 우리를 체포하고 감옥에 가두더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러시아 공산당의 지도 그룹이 우리의 10월 혁명에 대한 고려가 불법이고 반혁명적이라고 선언한다면, 모든 국가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들과 제3 인터내셔널에 충실한 동지들은 동지들이 알고 있는 우리의 「선언」에 기초하여 스스로 결정적인 의견을 표현할 수 있다. 동지들, 10월 혁명을 위협하는 이 모든 위험들에 대해 걱정하는 모든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가 동지를 보고 있다. 동지가 회의에서 우리의 강령에 대해 논쟁하길 바라고 동지의 대표가 제3 인터내셔널의 5차 당대회에서 당내 분파에 대해, 러시아 공산당의 정책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동지들, 우리의 선언을 토론하고 혁명을 만들어라. 이해하라 동지들, 이것은 당신이 완전하고 늘 고통받는 러시아의 노동자 계급이 10월 혁명의 성과를 보존하는 것을 돕는 것임을. 우리의 10월 혁명은 세계 혁명의 일부이다.

 

노동 동지들에게!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10월 혁명의 승리 만세!

 

세계 혁명 만세!

 

***

미주1 : 선언의 앞 두 파트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의 성격”, “계급 투쟁의 변증법”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여기 공포하지 않기로 했다. 물론 우리의 책에는 포함되어 있다. 그것들은 마르크스가 1848년 공산주의 선언에서 명시적으로 선언했던 것처럼 역사의 관점과, 계급투쟁의 역할을 상기시킨다. 우리에게는 그 당시 「노동자 그룹」이 세계 프롤레타리아가 직면한 역사적 시기에 대해 한 분석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으로 곧바로 가는 것이 더 좋을 것처럼 보인다.

 

● 러시아 혁명에서의 사울과 바울

 

 의식 있는 노동자들은 혁명을 통해 어떻게 다른 계급들이 “기적적으로” 사울에서 바울로 변화하는지 보았다. 그것은 평화의 선동가에서 내전의 선동가로, 그 역으로의 변화이기도 하다. 최근 15-20년의 사건들을 기억하는 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변화를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다.

 

 부르주아지, 지주, 성직자, 사회주의 혁명가당과 멘셰비키를 보라. 성직자들과 지주들 사이에서 누가 1917년 이전의 내전을 지지했는가? 아무도 아니다. 보편적 평화와 은총(state of grace)을 지지하는 모든 이들은 인민들이 내전을 지지 선전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쳐넣고 쏴 죽이고 목매달아 죽였다. 10월 이후에는? 누가 그만한 열정으로 내전을 지지 옹호 했는가? 똑같은 기독교의 독실한 아이들이었다. 성직자, 지주, 그리고 공무원들.

 

 「헌정 민주주의자들」(Constitutional Democrats)로 대표되는 부르주아지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내전의 전사들이 아니었던가? 비보르크의 폭동을 기억하라. 임시 정부의 최고 행정관이었던 밀류코프는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우리은 우리 손에 붉은 깃발을 쥐었다. 이 붉은 깃발은 오직 우리의 시체를 밟고서만이 빼앗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진실이다. 그는 두마 앞에서는 매우 다른 이야기를 했다. “이 붉은 깃발은 우리의 눈에 거슬린다.” 그러나 우리는 1905년 이전에는 부르주아지가 내전에 호의적이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1917년, “평화, 평화, 사회의 모든 계급의 연합 : 이것이 국가의 구원이다!”고 악의를 갖고 공표했던 임시정부 깃발 아래에서 이야기했던 것은 바로 부르주아지, 카데츠였다. 그러나 10월 이후에는 어떠했는가? 오늘날 누가 광신도와 같이 계속해서 부르짖는가?: “소비에트를 무너뜨려라. 볼셰비키, 전쟁, 내전을 그만둬라! 이것이 국가의 구원이다!” 이들이 지금 갈채를 받고 있는 똑같은 선량한 주인들과 “혁명적” 코훌쩍이들이다.

 

 사회주의 혁명가당은 어떤가? 그들은 한때 플레베(Plehve),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Grand Duke Serge Alexandrovich), 보그다노비치(Bogdanovich)와 구 정권의 기둥들을 암살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러한 폭력적 혁명가들은 1917년 임시 정부 아래에서 연합과 시민 평화를 요구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그들은 요구했다! 10월 이후에는? 그들은 여전히 평화를 사랑했나? 그렇지 않다! 그들은 다시 폭력의 인간으로, 그러나 이번에는 반동적으로, 레닌에 반대하여 그러했다. 그들은 이제 내전을 외친다.

 

 멘셰비키들은? 그들은 1908년 이전에는 무장 봉기의 옹호자들이었으며, 1908년에서 1917년까지는 8시간 노동, 토지의 징발, 민주 공화국의 옹호자로서 독재에 저항하여 단체를 조직할 권리와 합법적인 투쟁을 쟁취하기 위한 일종의 “계급 연합”에 함께 했었다. 그들은 독재정권의 전복에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전쟁 동안에는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애국자들이었고, 심지어 “국제주의자”이기까지 했다. 1917년 10월 이전, 그들은 시민 평화를 지지했다. 그러나 10월 이후, 군국주의자들, 카데츠와 사회주의 혁명가당처럼 내전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우리 러시아에만 국한된 현상인가? 아니다. 중세 봉건주의를 전복하기 전 영국, 프랑스, 독일 부르주아지 등은 내전을 옹호하고 이끌었다. 봉건주의가 먼지가 되고, 부르주아지가 권력을 잡은 후, 그들은 시민 평화의 옹호자가 되었으며, 특히 전력을 다해서 싸웠던, 새롭게 권력을 쟁취하고자 등장한 노동계급에 대해서 그러했다.

 

 이제 어디 부르주아지가 내전에 호의적인지 보라. 어디에도 없다! 모든 곳에서, 소비에트 러시아를 제외하고서는 평화와 사랑을 선전한다. 이러한 태도가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취하는 순간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은 그대로 시민 평화의 옹호자로 남아 있을 것인가? 그들은 평화와 단합을 요구할 것인가? 아니다. 그들은 곧 내전을 옹호하는 폭력적인 선동가가 될 것이며, 그 전쟁을 끝까지 수행할 것이다.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여, 우리들은 여전히 이 법칙의 예외인가?

 

 전혀 아니다.

 

 또 다시 1917년으로 돌아간다면, 우리의 노동자 평의회의 대표자들은 내전의 핵심이 되었을까? 그랬다. 그들은 나아가 권력을 잡았다. 그들은 부르주아지, 지주, 성직자와 그 외 평의회에 적대적인 이들에게 함께 봉기하기를 원했을까? 아니다. 그들은 부르주아지와 그 크고 작은 모든 동맹들이 저항없이 복종하길 바랬을까? 그렇다. 그들은 그것을 원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러므로 권력을 쥐기 전에 내전을 옹호했고, 그 승리 이후에 내전이 아니라 시민 평화를 옹호했다.

 

 이 모든 변혁에서 역사적인 관성이 충분히 있었음은 진실이다. 군국주의자들에서 멘셰비키들, 사회주의 혁명가당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이 소비에트 권력에 대항해 내전을 지휘하던 시기에조차 그것은 “시민 평화”의 슬로건 아래 있었다. 사실 프롤레타리아트는 평화를 원했다. 그러나 다시 전쟁을 외칠 수 밖에 없었다. 1921년, 러시아 공산당의 중앙 위원회의 순환 중 하나에서도 이러한 불가해한 상황을 엿볼 수 있었다. 내전에 대한 슬로건은 심지어 1921년에도 강한 혁명적 정신의 지표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관점을 흔들지 못하는 단지 역사적인 경우임을 알 수 있다.

 

 만약 최근의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에 의해 쟁취한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시민 평화를 옹호한다면, 모든 솔직한 프롤레타리아들은 유혈낭자하고, 폭력적인, 세계 부르주아에 저항하는 시민 전쟁의 슬로건 아래 굳게 단결해야만 할 것이다.

 

 노동 계급은 실제로 부르주아 국가에서의 착취 계층이 요구하는 시민 - 보편적 평화, 은총이 얼마나 병적인지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약 내일 이 부르주아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잡게 되면, 지주에서부터 제2, 2 1/2 인터내셔널에 이르기까지 모든 오늘날의 평화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에 저항하는 내전을 일으킬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전력을 다해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모든 국가에서의 유혈낭자하고 무자비한 내전을 요구해야 한다. 우리는 바람을 일으킬 것이다. 태풍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하여 권력을 잡은 모든 곳에는 더욱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시민적, 보편적 평화, 은총을 선전할 것이다. 

 

 모든 나라의 지주들, 멘셰비키들, 사회주의 혁명가당은 자본주의 억압이 지배하는 모든 곳에서 시민 평화를 옹호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차지한 모든 곳에서 더욱 잔인하고 유혈낭자한 내전을 옹호할 것이다.

 

● 오늘날의 주요한 책무

 

 모든 나라들에서의 생산력의 발전은 자본주의가 스스로 그 생산력을 파괴하는 요소가 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세계대전과 뒤따른 모든 사건들, 베르사유 조약, 배상금 문제, 제노바, 헤이그, 로잔, 파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랑스에 의한 루르 점령, 대규모 실업에 더해 끝나지 않는 파업의 물결은 자본주의 착취의 마지막 시간이 도달했고, 징발자였던 자들이 이제 몰수당해야 할 때가 왔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인 임무는 자본주의가 던져놓은 야만으로부터 인류를 구하는 것이다. 이 임무는 임금 상승, 8시간 노동, 부분적인 양보 등 자본주의가 선사해 줄 수 있는 것들로는 성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를 결정적인 권력 투쟁을 목표로 하도록 조직화해야 한다.

 

 그러는 동안,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물질적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을 옹호하는 선전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활 수준에 진정한 개선이 있을 것이라는 환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악의적인 선전이다.

 

 선진 노동자들은 파업에 참여해야 하고, 상황이 허락하는 한 지도해야 한다. 그들은 이 길을 따라가면 생활 조건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에게 실질적인 요구를 제안해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확고히 이야기해야 한다. 이것은 구원을 위한 길, 노동계급의 삶의 조건을 증진시킬 수 있는 길이 아님을. 이 모든 자본에 대한 분쟁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투쟁에 대한 관점으로 프롤레타리아를 조직할 수 있다면, 이것이 거부될 리가 없다. 권력을 차지하지 못한다면 생존의 조건을 변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설명하는 것보다 이 운동의 우두머리가 되어 용감하고 단정적이며, 실질적이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이해할만한 요구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모든 파업, 모든 싸움이 정치적인 권력을 차지하고, 착취자들을 몰수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함을 증명하는 교훈이 될 것이다.

 

 여기 모든 나라에서 온 공산주의자들은 의회에 대해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다. 국회의원은 입법 과정을 통해 긍정적인 일을 해보려 할 것이 아니라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이러한 의회가 파괴될 수 있도록 선전하고 작업한다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

 

 이와 비슷하게, 임금, 시간에 대한 파업의 필요가 있는 곳에, 우리는 반드시 참여해야 하지만 노동자들의 경제적 조건이 진정으로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가서는 안된다. 대신 우리는 이러한 환상을 깨부셔야 하고 각 투쟁을 마지막 투쟁을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의 군대를 조직하기 위한 의식화의 준비로써 이용해야 한다. 한때는 8시간 노동 요구가 혁명적이었지만, 사회주의 혁명이 현안이 된 모든 나라들에서 그 요구는 더 이상 혁명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통일 전선에 대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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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국제 평론에 게재될 선언의 나머지 부분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사회주의 통일 전선

○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잡은 국가(노동자 민주주의)에서의 통일 전선에 대한 의문

○ 민족 문제

○ 신 경제 정책(NEP)

○ 신경제정책과 농촌

○ 신경제정책과 정치

○ 신경제정책과 산업 관리

 

 미주

1. 가브리엘 미아스니코프(Gabriel Miasnikov)는 우랄 출신의 노동자로 1921년 볼셰비키 당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때는 결정적인 10차 당대회 직후로, 그는 “군국주의자들부터 아나키스트들까지 모두 포함하는 언론의 자유”(Carr, 「The Interregnum」에서 인용)를 요구했다. 레닌이 이러한 주장을 단념시키기 위해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굽히지 않았고, 결국 1922년 초기 당으로부터 축출되었다. 1923년 3월, 그는 다른 동지들과 함께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노동자 그룹」 창설에 동참했으며, 그들은 RCP 12차 대회에 배포된 이 「선언」을 출간했다. 그룹은 당 내에서, 비당원 노동자들 사이에서 비합법 활동을 시작했고, 1923년 여름 파업의 물결 속에서 대중 파업을 요구하고 본질적으로 방어적인 계급 운동을 정치화하려고 시도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파업에서의 그들의 활동은 GPU가 그들을 실질적인 위협으로 인식하도록 하는데 충분했다. 주도적인 동지들의 체포가 잇따랐고, 이는 그룹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축소된 규모로 1930년 초반까지 그들의 지하 활동을 수행했다. 그 이후 미아스니코프의 인생사는 다음과 같다. ; 1923년에서 1927년까지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감옥이나 지하 활동을 위한 망명 생활로 보냈다. 1927년 러시아에서 탈출한 그는 페르시아, 터키로 도망 다녔고, 그곳에서 역시 수감생활을 하다가 결국 1930년 프랑스에 정착했다. 이 시기동안 그는 여전히 러시아에서의 그의 그룹을 조직하려 했다. 전쟁 후, 그는 스탈린에게 그가 소련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원했다. 그가 그의 나라로 돌아간 날 이후 그에 대한 소식은 없다. 왜냐하면 군사 법정에 의한 비밀 심판으로 인해 그는 1945년 11월 16일, 모스크바의 감옥에서 총살당했기 때문이다.

 

(주)

1) 우리의 글 “좌익 공산주의와 맑스주의의 연속성”을 보라.

   http://en.internationalism.org/the-communist-left

2) ICC는 이미 영어와 러시아어로 「러시아 공산주의 좌파」 소책자를 발간했다. 이 책은 러시아에서의 좌익 공산주의의 상이한 표현에 대한 연구에 기여한다. 현재 프랑스어 판이 준비중이다. 영어 판은 「노동자 그룹」의 강령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 당시 새로운 완벽한 강령이 러시아에서 발견되었다. 오늘 우리가 펴내는 판은 원래 프랑스 어로 쓰여진 가장 최신의 것이며 미래의 프랑스어 개정판에 포함될 것이다.

3) 「국제평론」 8, 9호에 실린 우리의 글 “러시아의 좌익 공산주의”와 「러시아 공산주의 좌파」를 읽을 것.

4) “중앙 위원회의 이런저런 결정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 당의 구성원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이런저런 의심을 품었고,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오류, 불규칙성, 무질서들을 기록해 두었지만, 그것을 당의 회의에서 밖으로 꺼내어 말하기를 두려워했으며, 그것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현재 지방 위원회와 RCP의 중앙 위원회의 구성원을 추천하고 선택하는 것은 당도 아니고, 그 대중도 아니다. 반대로, 당의 서기 위계는 전에 없을 정도로 엄청난 정도로 집행 위원회(executive assemblies)가 될 회의와 총회의 구성원들을 전에 없을 정도로 뽑았다... 새로 만들어진 자리는 정권이 당 내의 분파의 독재라는 것으로 설명이 된다. 분파적 정권은 폐지되어야 하며, 우선 첫째로 그것을 만든 이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 그것은 동지적인 통일과 당내 민주주의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5) 「국제평론」 8, 9호의 “러시아의 좌익 공산주의” 참조.

 

6) 그러나 선언(강령)은 또한 노동조합이 경제를 관리하는 중앙집중적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방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노동자 반대파」의 옛날 입장은 1921년 미아스니코프가 비판했었다.

 

 

 

 

우리는 「선언(강령)」의 첫 번째 부분을 국제 평론 지난 호에 실었다. 되짚어보면 「러시아 공산당의 노동자 그룹」은 이 강령을 작성했고, 제3 인터내셔널의 당과 러시아에서의 소비에트 권력의 기회주의적 타락에 대한 반응으로 출현한 좌익 세력들로 구성된, 소위 좌익 공산주의의 일부를 형성했다.

 

 아래 게재된 이 문서의 앞으로의 두 장은 기회주의적인 통일 전선 정책과 노동자 정부 슬로건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을 역사적 맥락 속에 위치지음으로써, 강령은 역사적인 시기의 변화를 이해하려는 시도로 읽어야 한다. 새로운 시대는 반동적일 뿐인 부르주아지의 여러 분파들과의 동맹 정책을 무효화하고 헛된 것으로 만들었다. 이와 유사하게, 반역자로 드러난 사회 민주주의와 같은 조직들과의 동맹들도 프롤레타리아트를 약화시키는 것일 뿐이었다. 나아가 「강령」은 새로운 시대에서 개혁을 위한 투쟁은 더 이상 화두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엄청난 역사적 변화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일어났기 때문에 그 변화가 정확하게 무엇이었는지 그런 혁명가들조차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관점을 갖추기 힘들었다. 이것은 「노동자 그룹」도 마찬가지여서, 개혁을 위한 투쟁과 자본의 영구적인 잠식에 직면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방어적 경제 투쟁을 구분하지 못했다. 이들은 방어적 경제 투쟁을 거부하지 않았지만, 정치적‧경제적 투쟁이 전부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연대 없이 권력을 쟁취하는 것만이 프롤레타리아트를 그 사슬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라 믿었다.

 마지막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가해진 언론의 자유에 대한 제한에 직면하여, 내전이 끝난 후에도 「강령」은 지도자에게 “당신은 어떻게 사회 경제의 엄청난 조직화 문제를 프롤레타리아트 없이 해결할 수 있는가?”라고 물을 때, 굳건하고 명확하게 답하고 있다.

 

 

 

사회주의 통일 전선

 

 이 문제의 본질적인 내용을 보기 전에, 지노비예프 동지의 통일 전선에 대한 테제가 러시아에서 토론되고, 받아들여진 상황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1921년 12월 19-21일에, RCP(러시아 공산당)의 12차 당대회가 있었고, 이 때 통일 전선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 때까지 이 문제에 대해 언론에 발표되거나 당 모임에서 토론이 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당대회에서, 발표된 테제에 대해 조잡한 공격은 있었으나 곧 잠잠해졌고, 당대회는 즉시 거수로 이 테제를 승인하게 되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이러한 배경들을 떠올리는 이유는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사실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첫 째, 통일 전선 전술은 매우 서둘러, 거의 “군대처럼” 이뤄졌다는 점, 둘 째, 러시아에서 이것은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수행되어졌다는 점이다.

 

 볼셰비키는 코민테른1) 내에서 이 전술의 발기인이었다. 그들은 외국 동지들에게 우리 러시아 혁명이 성공했고, 그것은 통일 전선 때문임을 명확히 했다. 또한 통일 전선은 러시아 안에 모든 혁명 전 시기의 경험들과, 특히 볼셰비키의 멘셰비키에 맞선 투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축되어 있었다고 설득했다.

 다른 나라에서 온 동지들은 단순히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들도 그들의 부르주아지에게 승리하길 원했다. 이제 그들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통일 전선 전술 탓으로 승리했다고 납득했다. 그들은 러시아 혁명의 역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레닌 동지가 이 단순한 이야기를 믿어버린 이들을 심각하게 비난했지만, 그는 누구도 그가 이러한 특별한 단어에 붙들려 있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러시아 혁명의 경험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한 때 볼셰비키는 독재에 반대하는 진보적인 운동을 지지했다.

 “a)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짜리즘에 대항하여 부르주아지가 혁명적이든, 단지 반대파일 뿐이든 그들을 지지해야 한다.

 

 b)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러시아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의식의 성장을 반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 앞에 부르주아 해방 운동의 제한적이고 부적절한 성격이 스스로 드러날 때마다 그 정체를 밝혀야만 한다.” (「러시아 사회 민주주의 노동당」 2차 당대회 결의문, ‘자유주의자에 대한 태도’, 1903년 8월)

 

 1905년 4월 열린 3차 당대회 결의문은 동지들에게 두 가지 지점을 지적하며 권고했다.

 

 1) 노동자들에게, 많은 지주층과 제조업자들로 대표되는 온건 자유주의자들부터 “해방 연합(Emancipation Union)”과 다양한 자유주의 전문직 그룹들로 알려진 급진적 경향들에 이르기까지 부르주아 민주주의 경향이, 뉘앙스에도 불구하고, 반혁명적, 반 프롤레타리아 본질을 갖고 있음을 설명할 것.

 

 2) 노동자 운동을 되돌리려는 일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시도에 저항해 싸우고,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다양한 그룹의 이름으로 이야기할 것. 1898년 이후 사회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지와의 “통일 전선”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이 통일 전선은 세 가지 단계가 있다.

 첫 째, 1901년, 사회 민주주의는 현재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진보적인 운동들”을 지지했다.

 둘 째, 1903년, 그들은 “부르주아 운동의 한계”를 넘어설 필요를 인식했다.

 셋 째, 1905년 4월, 그들은 “동지들로 하여금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경향의 반혁명적, 반 프롤레타리아적 본질과 그 영향력을 비판”하고 그들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영향에 대해 정력적으로 싸웠다.

 

 부르주아지를 지원하는 것이 어떤 형태가 되었든, 1905년 이전 특정 시기 볼셰비키가 부르주아지와 통일 전선을 형성했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러시아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통일 전선하는 “혁명가”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가?

 

 1905년 9월, “Boulyguine 두마”의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소집된 회의에서, 대회는 이 두마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태도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정의했다. “인민의 대표라는 이러한 환상으로, 독재는 노동 운동이 지쳐감에 따라 성장하고 질서를 열망한 부르주아지의 많은 요소들을 부추겼다. 그들의 이해와 지원을 약속하면서, 독재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운동을 박살내려 했다.”

 

 볼셰비키가 1906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자당」(RSDLP) 통일 대회에서 제안한 결의안은 볼셰비키 정책 변화의 비밀을 드러내 준다. 부르주아지를 지원하던 정책이 부르주아지에 대한 투쟁 정책으로 변화한 것이다. “거대한 자본가와 지주들의 계급들이 독재에 대해 반대하다가 혁명을 파괴하기 위해 얼마나 재빨리 독재와 연합하게 되었는지 볼 수 있다.” “민주주의 혁명 시기의 노동자 계급의 주요 임무는 그 혁명의 완수”였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이 혁명의 완수를 원하는 당과의 “통일 전선”을 형성해야만 했다. 이러한 이유로 볼셰비키는 카데츠의 우익과 했던 협정을 폐기하고, 그 좌익인 「사회주의 혁명가당」, 「인민 사회주의자들」과 「트루도빅스」(Trudoviks)와의 협정을 맺었다. 이에 따라 민주주의 혁명의 지속적인 진전을 위한 투쟁에서 “사회주의 통일 전선”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 볼계비키의 전술은 옳았는가? 10월 혁명의 적극적인 투사들 사이에 이러한 전술의 시비에 대해 논쟁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러므로 1906년에서 1917년까지 볼셰비키가 「제헌 의회」를 소집하기 위한 「임시 혁명 정부」의 형성으로 완수된 민주주의 혁명의 지속적인 진행을 위한 투쟁에서 “사회주의 통일 전선”을 옹호했다고 본다.

 

 아무도 이 혁명이 프롤레타리아적이거나 사회주의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였음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는 사회주의 혁명가당, 멘셰비키, 인민주의자들과 트루도빅스들과 실질적으로 단결하면서 “사회주의 통일 전선” 전술을 제안하고, 그에 따랐다.

 

 우리는 민주주의 혁명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가, 아니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볼셰비키의 전술은 무엇이었는가? 소비에트 권력을 위한 투쟁도 “사회주의 통일 전선”을 필요로 하는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 혁명가당」을 “모호한 사회주의 표현을 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분파”로 여긴다. 그것은 혁명 동안, 지금까지 그들의 활동을 통해 확인되어 왔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분파로서, 이 당은 사회주의 혁명, 사회주의을 위한 투쟁에서 실질적인 임무를 떠맡을 수 없었다. 대신에 그들은 “모호한 사회주의적”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 투쟁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되돌리려 했다. 만일 그러하다면 (그리고 그들은 그러했다) 봉기한 프롤레타리아를 승리로 이끌 전략은 사회주의 통일 전선일 리가 없다. 오히려 부르주아지 분파와 그들의 혼란스런 사회주의 용어들을 상관하지 않는 피튀기는 전투만이 승리로 이끌 전략일 것이다. 오직 이러한 전투만이 승리를 가져올 것이며, 승리는 반드시 그런 방식으로 이뤄져야만 할 것이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승리했다. 사회주의 혁명가당, 인민주의자들과 멘셰비키들과의 동맹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에 맞서 싸움으로써 승리했다.

 

 10월이 다가왔을 때 볼셰비키는 사회주의 혁명가당2), 멘셰비키3)의 사회주의적 수사들로부터 노동자 대중을 해방시킴으로써 사회주의 혁명가당과 멘셰비키와의 분리에 성공했다. 그리고 부르주아지 분파와의 통일 전선으로 취급하기 힘든 이러한 분리로부터 그들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러시아의 경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무엇인가?

 1) 특정 역사적 순간, 부르주아지와의 통일 전선은 1905년 이전의 러시아에 존재했던 상황과 유사한 조건의 지역에서 형성될 수 있다.

 2) 1906년과 1917년 사이의 러시아와 다소 유사한 상황의 나라들에서는 부르주아지와의 통일 전선을 포기하고 “사회주의 통일 전선” 전술을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위한 직접적인 투쟁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사회주의 통일 전선” 전술을 폐기하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모호한 사회주의적 용어를 쓰는 부르주아 분파”- 그 당시로서는 제2 인터내셔널의 모든 정당들이 해당될 것이다 -가 결정적인 순간 자본주의 체제를 방어하기 위해 무장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세계 자본주의 착취를 전복하려는 목적을 가진 모든 혁명적 인자들의 단결을 위해서는, 그들이 「독일 공산주의 노동자당」(KAPD), 「네덜란드 공산주의 노동자당」과 「제4 인터내셔널」4)에 속한 다른 정당들과의 동맹이 필수적이다. 모든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들은 그들을 투옥했던 모든 세력들- 제2 인터내셔널의 정당들, 제2 1/2 인터내셔널5)과 그들의 “모호한 사회주의적 용어”- 로부터 스스로 분리할 필요가 있다.  세계 혁명의 승리는 부르주아의 사회주의 캐리커쳐로부터의 원칙적인 분리와 그들에 대항하는 멈추지 않는 투쟁 없이는 불가능하다. 기회주의자들과 사회주의-쇼비니스트들은 부르주아지의 하인들로서, 결과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적들을 지휘했는데, 특히 오늘날, 자본가들과 연결되어, 그들의 나라에서, 해외에서 무장한 억압자가 되었다. (볼셰비키의 강령과 비교해 보라) 이것이 코민테른의 최고 위원회의 테제에 의해 지지된 사회주의 통일 전선 전술의 진실이다. 실제로는 기회주의적 전술이었던 것이다. 자국과 다른 나라들에서 행해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무장 억압을 수행한 적들과의 합동 전술은 러시아 혁명의 경험에 명백히 대립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깃발 아래 남아있기 위해, 우리는 부르주아지와 그 사회주의자 하인들에 대항하는 “통일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사회주의 통일 전선” 전술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지원되는 독재에 대항하여 일어날 때, 부르주아 민주 혁명을 목표로 할 때 그 혁명적인 가치를 갖고 있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도 반대하는 독재에 대해 싸울 때, 부르주아지와의 “통일 전선” 전술을 따라야 한다.

 

 코민테른이 모든 국가들의 공산당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회주의 통일 전선을 쓸 것을 요구한 것은 각 나라의 조건에 상응하도록 해결책을 내놓는 현실적 임무를 방해하고, 의심할 바 없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혁명적 운동들에 해를 끼쳤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집행위원회의 테제에 대하여

 

 이 테제는 프라우다(Pravda)에 게재되었는데, “이론가들”이 “사회주의 통일 전선”의 아이디어를 단 두 단어의 표현으로 이해했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통일 전선”. 1917년 러시아에서는 모든 나라들에서, 특히 샤이데만, 노스케를 비롯한 사회적 배신자들이 얼마나 “인기 있었는지” 모든 이들이 안다. 볼셰비키의 당원들은 거의 경험이 없었기에, 모든 곳에서 외쳤다. “이 노동자 계급의 배신자들아! 우리는 너희들을 전신주에 목 매달 것이다. 너희들은 모든 나라들의 노동자들을 수장시켜 죽인 그 피의 욕조에 책임을 져야 한다. 너희들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암살했다. 베를린의 거리에서, 너희들의 폭력적인 행동 덕에 착취와 자본주의 억압에 반대에 일어난 노동자들의 붉은 피가 흐른다. 너희들은 베르사유 평화의 저자들이지만 그것을 매번 배신함으로써, 너희들은 국제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셀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우리는 공산주의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 통일 전선”을 제안하는 것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고 덧붙인다. 그것은 노스케, 샤이데만, 반데벨드, 브란팅 등과의 연합전선을 이야기한다. 그러한 통일 전선은 일방적으로든 다른 방식으로든 위장될 것이며, 이것이 앞으로 일어날 일 들이다. 테제는 단순히 “사회주의 통일 전선”으로 명명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통일 전선에 대한, 그리고 제2 인터내셔널에 속한 노동자들, 「2와 1/2 인터내셔널」과 암스테르담, 유사하게 아나키스트와 생디칼리스트 조직에 속한 노동자들에 대한 태도에 대한 테제”라고 이름 붙여졌다. 왜 이렇게 장황한가? 여러분은 오래지 않은 시간 전에 우리를 제2 인터내셔널의 장례식에 초대한 지노비예프 동지가 이제는 우리를 제2 인터내셔널과의 결혼 축하연에 초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장황한 제목을 달아야 했는가 그 이유이다. 사실 이 테제는 노동자와의 협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2 인터내셔널과 2와 1/2 인터내셔널의 정당들과의 협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노동자들은 해외에 나가 본 적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중앙 위원회에 앉아있는 반데벨데, 브란팅, 샤이데만, 노스케 등에 의해 대표되는 당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협정이 이뤄지는 것은 그들과 함께이다. 누가 세 개의 인터내셔널의 대회를 위해 베를린에 가겠는가?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은 진심에서 우러나는 신뢰를 누구에게 줘야 하는가? 벨스(Wels)파에게, 반데벨테(Vandervelde) 파에게 

 

 그러나 KAPD와 협정을 맺으려 시도한 적이 있던가? 지노비예프 동지가 대부분의 훌륭한 프롤레타리아적 인물들이 있다고 인정한 그곳과? 없다. 그리고 KAPD는 아직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쟁취를 위해 싸우고 있다.

 

 지노비예프 동지의 이 테제의 목적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제2 인터내셔널의 혼합이 아니라고 확인했던 것은 사실이다. 제2 인터내셔널에 대해, 그는 조직적 자율성의 필요를 일깨워준다. “제2 인터내셔널과 2 1/2 인터내셔널과 이러저러한 협정들을 맺은 각 공산당의 위치는 절대적 자율성과 총체적 독립성이 설명해준다.” 공산주의자들은 실천에 있어서 자기 규율을 스스로 강제하지만, 그들은 노동자 조직의 정치에 대한 예외없는 권리와 가능성을 - 실천의 전후에, 가능하다면 실천하는 가운데 - 유지해야 한다. “자본주의 전선에 대항하는 실천적인 행동에서의 모든 노동자 조직의 최고 수위의 단결”이라는 슬로건을 지지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입장을 방어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1921년 러시아 공산당 대회에서 제출된 코민테른 중앙위원회의 테제를 보라)

 

 1906년 이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자당」에서는 위의 코민테른의 테제에서 인용된, 가능한 최대한의 자율성을 갖고 있는 두 분파가 있었다.

 

 협상에서의 규율, 당 내 활동에서의 판단의 자율성은 공식적으로 RCP의 규정에 인정되어 있었다. 다수가 정한 것은 해야만 하며, 개인은 비판의 권리만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었다. 명령된 것은 해야만 하지만, 그것이 세계 혁명에 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에 대해 분노했다면, 실천 이전에, 와중에, 그리고 이후에 자유롭게 그 분노를 표현할 수 있었다. 이것은 자율적 행동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Vandervelde가 베르사유 조약에 사인하고, 스스로 타협했을 때와 같다)

 

 이러한 같은 테제들에서, 집행위원회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대신하는 것임이 분명한 노동자 정부의 슬로건을 제안했다. 노동자의 정부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당의 정수인 중앙 위원회로 구성된 정부이다. 이러한 테제의 이상적인 실현은 사회주의자인 에버트(Ebert)가 대통령인, 그의 승인과 함께 정부가 형성된 독일에서 일어났다. 이 공식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공산주의자들은 스웨덴의 브란팅과 독일의 에버트와 같은 사회주의자 수상, 대통령을 지지하는 투표를 해야만 한다.

 

 코민테른의 의장, 지노비예프 동지는 사회민주당의 중앙위원회, 에버트, 노스케, 샤이데만을 만나 주먹을 쥐고 외쳤다. “노동 계급의 배신자, 변절자!” 그들은 친절하게 미소 짓고 그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당신들은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살해했다. 우린 당신을 교수대에 목매달 것이다.” 그들은 그를 향해 더욱 친절하게 미소 지으며 더욱 고개를 숙였다.

 

 지노비예프 동지는 그들에게 통일 전선을 제시하고,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노동자 정부를 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므로 그는 교수대를 수상의 자리와 바꾸어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노스케, 에버트, 샤이데만, 등등은 노동자 집회에 가서 코민테른이 자신들을 사면했으며, 교수대 대신 수상 자리를 제안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조건은 공산주의자들이 수상을 인정하는 것이다 [...]6) 그들은 모든 노동 계급에게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실현의 가능성이 오직 자신들과의 단결에 있지, 그들과의 대결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덧붙인다. 이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우리를 예전에 교수형에 처해 무덤에 묻었다. 이제 그들은 우리에게 왔다. 우리는, 선의로 그들을 용서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를 용서했기 때문이다. 상호 사면인 셈이다.

 

 코민테른은 제2인터내셔널에 그 정치적 성실함의 증거를 보여주었고, 정치적 열등함의 증거를 받았다. 실제 이 변화의 기원은 무엇인가? 지노비예프 동지는 어떻게 에버트, 샤이데만, 노스케에게 교수대 대신 수상 자리를 권할 수 있는가? 얼마 전에 그들은 제2 인터내셔널의 장송곡을 불렀는데, 이제 그들은 삶에 키스를 한다. 왜 그는 그런 노래를 부르는가? 우리는 정말 그 부활을 보고 그 주장을 들어야 하는가?

 

 지노비예프의 테제는 이러한 질문에 효과적으로 대답한다. “세계 경제 위기는 더더욱 첨예해지고, 실업은 늘어만 간다. 자본은 공세로 나아가고, 교묘하게 작전행동을 하고 있다. 노동계급의 조건은 손상되었다.” 그러므로 계급 전쟁은 피할 수 없고, 노동 계급은 더욱 왼쪽으로 나아갈 것이다. 개량주의적 환상은 파괴되었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공산주의 전위의 용기를 제대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로부터 샤이데만과의 통일 전선은 구성되어야 한다. 극악무도한! 결론은 전제와 일관되지 않다!

 

 우리는 지노비예프가 그의 테제에서 통일 전선을 방어하기 위해 내세웠던 주장들에 대해 좀 더 근본적인 것들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객관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지노비예프 동지는 놀라운 발견을 했다. “우리는 단결을 위한 노동 계급의 투쟁을 안다. 샤이데만과의 통일 전선을 통하지 않고서 어떻게 단결할 수 있는가?” 자신의 계급의 이해와 세계 혁명에 대해 생소하지 않은, 모든 의식 있는 노동자들은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노동 계급은 “통일 전선”을 주장할 필요가 생겼을 때에만 단결을 위해 투쟁하는가? 노동 계급이 정치 투쟁에 발을 디뎠을 때부터 노동자와 함께 한 이라면 누구나 모든 노동자를 괴롭히는 의심을 알고 있다. 왜 멘셰비키, 사회주의 혁명가당, 볼셰비키, Trudoviks(인민주의자) 들은 서로 싸우는가? 모두가 민중을 위하고 있으면서도.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서로 싸우게 하는가? 모든 노동자들은 스스로 독립적인 계급으로서 조직화해야 하고, 그 외 모든 계급들에 대해 반대해야 한다. 우리의 쁘띠 부르주아적 편견들은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그것은 진실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 호의적인 상황에 있는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우리는 노동 계급이 국제적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에 대항하는 무장 투쟁을 준비하도록 해야 한다. 이 경우, 확실히 러시아 혁명의 경험이 고려되어야 한다. 세계 노동 계급은 제2 인터내셔널과 2와 1/2 인터내셔널의 사회주의자들이 반혁명의 선두에 있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회주의의 배신자들과의 통일 전선에 대한 선전들은 어떤 뉘앙스에 상관없이 그들도 역시 사회주의를 위해 부르주아지와 싸우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오직 공개적이고 용기있는, 내전을 옹호하고 노동계급에 의한 정치 권력의 획득을 옹호하는 선전들만이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심을 끌 수 있다.

 

 노동 계급이 그 자신의 물질적 법적 권리를 파업과 의회를 통해 개량할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 이것은 밝혀져야 한다. 가장 시급한 투쟁은 권력 투쟁이다. 우리는 우리의 선전을 통해, 많은 경우 파업을 자극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동자의 조건을 개선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아직 옛날 개량주의적 환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스스로를 약화시키는 투쟁을 하고 있다. 우리는 노동자와 파업 동안 연대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이러한 운동은 노동자들을 노예 상태, 착취와 갈증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노동자의 굳은 살 박힌 손으로 권력을 쟁취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지노비예프 동지의 연대 결정은 통일 전선 전술을 정당화 했다. 우리는 “사회 혁명의 시대”라는 관념을 이해하는 데 익숙하다. 그것은 현재, 사회 혁명이 시대의 화두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제로, “사회 혁명의 시대는 장기적 관점에서 혁명 과정의 일부”라는 것을 보여줬다. 지노비예프는 우리가 현실에 발을 딛고 노동 대중을 끌어들이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과 1903년에서 1917년까지 다른 방식으로 단결함으로써 대중들을 설득했고,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우리의 승리로 끝맺었다. 이것이 왜 그가 에버트, 샤이데만, 씨에(Cie)를 극복하라고 하며 그들과 싸우지 말고 단결하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우리는 사회 혁명의 기간이 장기든 단기든, 그 기간이 어느 정도든 여기서 논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논쟁은 천사의 성별에 대한 수도사들의 논쟁이나 대머리가 되려면 몇 개의 머리카락이 없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 혁명의 시대”라는 개념을 정의하고자 한다.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먼저 물질적 생산력이 발전하여 소유권과 양립할 수 없게 된 상태이다. 사회 혁명이 필연적인 것이 되는 물질적 조건이 있는가? 그렇다. 무엇이 부족한가? 주체, 인적 조건이 부족하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 계급은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 이러한 혁명의 필요를 실현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 이미 이를 이뤄낸 선진 노동자들, 다시 말해 전위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경종을 울려야 한다.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공장 폐쇄, 파업, 급박한 전쟁, 생활조건의 추락 등) 내전을 옹호하는 선전을 통해 전투를 요구하고, 이러한 즉각적 투쟁에 대해 노동 계급을 준비시키고 조직해야 한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했다고, 그것이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과 단결했기 때문이라고 누가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것은 넌센스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에 대항하는 치열한 싸움을 통해 부르주아지와 지주들에게 승리했다.

 

 통일 전선 전술의 필요에 대해서 트로츠키는 그의 연설에서 우리는 승리했지만 우리가 어떻게 승리했는지 분석해야만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우리는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과 통일 전선을 통해 진군했지만, 그것은 우리와 멘셰비키,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가당이 같은 위원회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통일 전선 전술이 같은 기관에 앉아있는 것이라면, 강제 노동의 우두머리들과 죄인들 또한 통일 전선에 포함된다. 그들은 모두 감옥에 있다.

 

 우리 공산당은 의회에 앉아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이 모든 대표들과 함께 통일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동지는 전 세계의 공산주의자에게, 다소 의심스런, 볼계비키, 멘셰비키,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가당의 소위 통일 전선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 볼셰비키가 1917년 8월 「사회 혁명적 케렌스키」가 소환한 “전-의회”나 사회주의자에 의해 주도된 임시 정부(유용한 교훈이었던)에 참가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밝혀야만 한다.

 

 우리는 볼셰비키가 부르주아지와 통일 전선을 꾸렸던 시기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인가? 1905년 전이다. 그렇다. 볼셰비키는 사회주의자들과의 통일 전선을 옹호했다. 이것은 언제인가? 1917년 전이다. 1917년, 노동계급의 권력을 위해 싸울 때, 볼셰비키는 사회주의 혁명가당 좌익에서부터 모든 종류의 아나키스트에 이르기까지 모든 혁명적 집단과 함께 무기를 들고 소위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통일 전선을 형성한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  그리고 부르주아지와 지주들과 싸웠다. 1917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있는, “사회 혁명의 시대” 최전선에 나섰다. 1917년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 전술은 뒤이은 나날들의 교훈을 설명해 준다. 부르주아지 분파들, 사회주의 혁명가당, 그리고 멘셰비키의의 격렬한 저항에 권력을 쟁취한 노동 계급은 직면하게 된 것이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을 단결시키는 것은 이 전술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아직 “개량주의적 환상을 제거”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이 전술은 제2인터내셔널이나 2와 1/2 인터내셔널과의 통일 전선이 아니라 그들과의 전쟁일 것이다. 이것이 세계 사회 혁명의 슬로건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쥔(노동자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통일 전선에 대한 문제

 

 이미 사회주의의 공격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 계급이 된 모든 나라들에서는 각 시기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물론 각각의 다른 나라들에서 혁명 과정의 모든 단계에 유효한 전략을 개발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같은 단계에 대한 정책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의 (그렇게 오래지 않은) 투쟁의 역사를 기억해 본다면, 적과의 싸움에 있어서 우리는 매우 다른 과정들을 겪어왔음을 알 수 있다.

 

 1906년과 그 후 몇 년동안은, “세 개의 기둥”이 있었다. 8시간 노동, 토지의 소유, 그리고 민주 공화국이 그것이다. 이러한 세 기둥은 언론과 집회, 파업,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포함하고 있었다.

 

 1917년 2월에는 어떠했는가? “독재 정치는 끝났다! 제헌 의회 만세!” 이것이 볼셰비키의 외침이었다.

 

 그러나 4-5월, 모든 것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집회, 언론의 자유는 있었지만 토지의 소유는 그대로였고, 노동자들은 권력을 잡지 못했다. 그래서 볼셰비키는 다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걸었다.

 

 이 시기, 우리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한 부르주아지의 시도들은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언론, 집회, 결사, 파업, 양심의 자유 만세! 토지를 몰수하라! 생산의 노동자 통제! 평화! 빵! 자유! 내전 만세!”

 

 그리고 10월의 승리. 노동 계급이 권력을 잡았다. 국가 억압의 오랜 작동원리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해방의 새로운 작동원리가 노동자, 군인 대표 평의회 속에 구조화되었다.

 

 이 시기에 와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언론, 결사의 자유는 주장되어야 했던 것일가? 군국주의자부터 멘셰비키, 사회주의 혁명가당이 내전을 지지하도록 허락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무엇보다도, 지배계급으로서 내전을 옹호하는 동지들에게 언론의 자유를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권력에 반대하는 어떤 내전에 대한 조직된 선전도 착취자, 억압자를 불러들일 수 있는 반혁명적 행위였다. 선전이 더욱 “사회주의”적일수록, 더욱 해악적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같은 프롤레타리아 가족의 이러한 선전들에 대한 가장 엄격하고 무자비한 제거”가 진행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착취자들의 저항을 억압할 수 있고, 스스로 조직하여 유일하게 권력을 쥐며, 모든 자본주의 정부들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국가를 건설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나타났다. 이들에게 부여된 새로운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국가 경제를 조직하고 가능한 한 많은 물질을 창조하는 것. 그리고 이 임무는 권력의 쟁취와 착취자들의 억압 만큼이나 엄청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권려의 쟁취와 착취자에 대한 억압은 그것 자체로 목적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로의 길은, 자본주의보다,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지배와 억압 하에서보다 더 나은 삶과 자유로의 길은 그것 자체로 목표였다.

 

 이전의 억압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조직의 형태와 실천의 수단들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접근이 필요했다.

 우리가 자원이 부족하다는 관점에서, 제국주의 전쟁과 내전으로 인한 끔찍한 황폐를 경험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동 계급과 동맹 그룹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주의 사회의 매력적인 힘들을 보여주기 위해 물품을 창조하는 임무가 우리에게 부과되었다. 더 이상 부르주아지, 경찰과 다른 기생충이 없을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가 주인이 되고 자유로우며, 모든 가치, 모든 상품, 모든 노동이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 그리고 굴욕받던 자의 삶을 개선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이것을 보여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것은 굶주림의 왕국이 아니며 오히려 전에 없던 풍요의 왕국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것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남겨진 임무이며, 선행된 것들을 능가해야할 임무이다.

 

 그렇다. 첫 번째 두 임무, 권력을 쟁취하고 억압자들의 저항을 제거했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앞선 이들을 뛰어넘었고(이것은 지주와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들의 강한 오를 설명한다) 그것은 위대한 일이지만 세 번째 목표보다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오늘날, 모든 노동자들은 질문해야 한다. 왜 이 모든 것을 해야 하는가? 이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토록 많은 피를 흘려야 했는가? 끝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는가? 이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우리 운명을 누가 결정하는가? 어떤 조직이 그것을 할 것인가?

 

 최고의 구세주는 없다.

 

 신도, 카이사르도, 호민관도 아니다.

 

 생산자, 우리 스스로를 구원하라!

 

 공통의 구권을 선포하라!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된 의지를 대표하는 조직이 필요하다. 우리는 부르주아지로부터 빼앗은 (국유화된), 그에 속한 거대한 계층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업이 속한 산업 조직 뿐만 아니라 노동자 대표의 평의회도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평의회는 무엇인가? 그들은 노동자 대표의 평의회, 다시 말해 “농장과 공장에서의 국가 권력의 핵심”을 조금이라도 닮았는가? 그들은 단결된 의지를 표현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평의회를 닮기는 했는가? 지금의 평의회는 그 의미와 산업 기반을 잃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압제자에 대한 저항과 그들의 파괴를 향한 목표에의 관심을 동원했던 오랜 내전은 연기되고 모든 다른 업무들을 제거하고 - 프롤레타리아트가 눈치채기도 전에 - 그 조직, 평의회를 변화시켰다. 공장의 노동자 대표의 평의회는 죽었다. 노동자 대표 평의회 만세!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도 보편적으로 이와 같지 않은가?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 언론의 자유에 대해 격렬한 내전과 노예 감독자의 봉기 때와 유사한 태도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권력을 차지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를 끔찍한 적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게 되어, 이제 그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 스스로 엄청난 생산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조직하고 생산과 전체 나라를 지도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고 있지 않은가?

 

 부르주아지는 확실히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그 누가 권력을 방어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언론의 자유를, 자신의 피를 흘리지 않고 논할 것인가?

 

 우리에게 언론의 자유는 무엇인가? 신인가 미신인가?

 

 우리는 우리를 위한 우상을 만들지 않는다.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아니다.

 

 우리는 누구 앞에서도 복종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진정한 민주주의, 절대적인 자유, 물적 숭배나 우상,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따위는 없다.

 

 민주주의는 전에도 그러했고 미래에도 모든 나라의 반혁명, 부르주아지, 지주, 성직자, 사회주의 혁명가당, 그리고 멘셰비키 등을 의미하는 미신이 될 수 없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의 계급적 목표를 달성하는 유일한 수단일 뿐이다.

 

 1917년 이전, 모든 시민의 언론의 자유는 우리의 진보적인 요구였다. 1917년에는, 우리는 이러한 자유를 쟁취하여 프롤레타리아트와 그를 따르는 지식인들과 농민들의 조직화와 선전에 썼다. 부르주아지를 이길 수 있는 조직을 만든 후, 우리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쟁으로 나아가 권력을 쟁취했다. 부르주아지가 언론의 자유를 우리를 반대하는 내전을 일으키는데 쓰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적 계급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부와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도 러시아의 부르주아지의 저항이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언론의 자유를 주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다수 노동자의 지원으로, 우리는 부르주아지의 저항을 분쇄했다. 이제 우리는 우리 프롤레타리아에게 말하도록 허락할 수 있지 않은가?

 

 1917년 이전과 1917년의 언론의 자유, 그리고 1918년에서 20년까지의 것과 1921년에서 1922년까지의 문제에 대한 우리 당의 태도는 필요하다.

 

 그러나 소비에트 권력의 적들이 이 자유를 소비에트를 전복시키기 위해 사용할 수 있지 않은가? 아마도 이 자유는 독일, 프랑스, 영국 등에서 이들이 혁명 과정의 같은 단계에 있다면 유용하고 필수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계급은 있지만 농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쟁과 경제적 재앙으로부터 살아남은 소수의 프롤레타리아가 춥고 배고픈 채로 피흘리며 지쳐 있다. 여기서는 그 자유가 소비에트 권력을 전복시키는 길의 첨단으로 몰고 가기는 힘들지 않을까? 프롤레타리아트에 더해 러시아에는 부유함과는 거리가 먼 대다수의 농민들이 간신히 삶을 연명하고 있다. 이 농민들에게 언론의 자유가 반혁명 군대를 형성하는데 쓰이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없다. 우리가 노동자들을 농민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조금이라도 먹이기라도 하면 우리는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길은 없다. 이것이 마음이 올바른 공산주의자들의 추론이다.

 

 우리들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 없이 사회 경제의 조직화라는 엄청난 임무를 해결할 것인가? 당신은 언제나 예, 아멘이라고 이야기하는 신의 어린양인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길 원하는가? 그럴 필요가 있는가?

 

 “당신들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조용히 있어라. 저항하지도, 생각하지도 마라. 왜냐하면 우리가 노동자와 농민들 중에서 용기 있는 이들에게 권력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당신들이 믿을 수 없는 방식으로 쓰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다보면 당신은 어느날 갑자기 사회주의 천국에 있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이야기하는 것은 개인, 영웅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지 계급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회색 대중과 그들의 평범한 생각들(적어도 지도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은 우리의 영웅들, 공산주의 공무원들이 공산주의 천국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재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웅을 믿지 않으며 모든 프롤레타리아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호소한다.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자 자신의 몫이다.

 

 그렇다. 우리 프롤레타리아트는 지치고, 배고프고, 춥고, 기진맥진해 있다. 그러나 우리 앞에 있는 문제는 어떤 계급도, 어떤 특수한 그룹도 우리를 대신해 풀어줄 수 없는 문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를 해결해야 한다. 당신이 우리들에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임무를 지식인들, 공산주의 지식인들이 풀어줄 것이라고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명을 당신에게 맡기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보여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지쳤고, 따라서 그 무엇을 알 필요도, 결정할 필요도 없다는 주장은 절대 옳지 않다.

 

 만약 1918년에서 20년까지 러시아의 상황이 달랐다면, 우리의 이 문제에 대한 태도 또한 달랐을 것이다.

 

 올바른 마음의 공산주의자 동지인 당신이 부르주아지의 얼굴을 후려갈기고 싶다면, 좋다. 그러나 문제는 손을 드는 것은 당신이고, 그들의 갈비뼈를 부수고 한 바가지의 피를 쏟아내도록 하는 것은 우리 프롤레타리아라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공산주의자 노동자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볼셰비키, 아나키스트, 사회주의 혁명가당, 그리고 다른 이들(이러한 당에는 속하지 않지만 그들의 기원을 여기서 찾을 수 있는 이들) 속에 노동 계급이 있을 뿐이다. 어떻게 그들을 공산주의에 연결시키는가? 부르주아 “카데츠”(헌정 민주주의자들), 교수들, 변호사들, 의사들과의 협상은 없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처방이 있을 뿐이다. 몽둥이. 그러나 노동 계급은 전혀 다르다. 우리는 그들을 협박할 것이 아니라 영향을 주고 지적으로 이끌어야 한다. 폭력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법과 행진의 진로를 명확히 함으로써.

 

 그렇다. 법은 법이지만 모두를 위한 법은 아니다. 마지막 당대회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의 투쟁에 대한 논쟁에서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는 180개의 부르주아지 출판사가 있었고, 지노비예프의 선언에 따라, 이들과 폭력적인 방법이 아니라 90% 열린 이데올로기적 설득력으로 싸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우리를 “설득”할 수 있는가? 지노비예프는 우리 중 일부를 설득하려하는지 안다. 부르주아지가 누리는 자유의 10분의 1만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노동자 동지들이여, 당신을 무엇을 생각하는가? 전혀 나쁘지 않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므로 1906년에서 1917년까지 첫 번째 전술, 1917년 10월까지 두 번째, 1917년 10월에서 1920년 후반까지 세 번째, 그리고 1921년 초부터 네 번째... [...]

 

각주

1) 편집자 주 ; 코민테른. 제3인터내셔널의 러시아 이름이다.

 

2) 편집자 주 ; 사회적 혁명가당 좌익. 이들은 소비에트에 우호적이었고, 사회주의 혁명가당으로부터 1917년 9월, 분리되어 나왔다.

 

3) 1917년 10월 25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110명의 멘셰비키 대표들은 소수였고(673명 중), 10월 혁명의 비준의 순간, “볼셰비키 쿠데타”라며 이를 비난하며 자리를 떠났다.

 

4) 편집자 주 ; KAI(공산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는 1922년에서 24년동안, KAPD의 제안에 의해 설립되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제4 인터내셔널과 혼돈하지 않길 바란다.

 

5) 편집자 주 ; 사회주의 당 국제 연합(the International Union of Socialist parties)의 별명은 제2와 1/2 인터내셔널이었다. “왜냐하면 제2 인터내셔널과 제3 인터내셔널 사이에 자신을 위치 지었기 때문이다.” 레닌의 글, ‘베를린에서의 제3 인터내셔널의 대표들’이 수록된 알프레드 로즈머(Alfred Rosmer)의 책, 「레닌의 모스크바」(Lenin’s Moscow)에서 이러한 재편성에 대한 비판을 보라(Pluto Press, 1971).

 

6) 편집자 주 ; 여기, 그리고 이 글의 다른 곳에서 [...]은 우리가 번역하지 못한 짧은 문구들을 의미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이다!

위대한 혁명가들은 살아생전에는 억압계급의 끊임없는 탄압을 받았고, 그들의 이론은 허위와 중상모략에 가득 찬 가장 야만적인 적의와 가장 표독스러운 증오 그리고 가장 파렴치한 구호로 대접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죽은 이후에는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변질되어 신성시되거나 결국에는 대부분 그들의 명성이 피억압계급을 회유하는 데 쓰이는 "위안"으로, 또는 후세에 기만하는 수단으로 숭배되는 등, 음모의 대상이 된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혁명적 이론은 그 혁명적 본질을 빼앗기고, 혁명적 이론이 지니는 무기로서의 예리함은 무디어지고 통속화되고 만다.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노동운동 내의 기회주의자들은 위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의 변조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레닌, 국가와 혁명, 1917)

1919115,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유 군단(Freikorps)에 의해, 투쟁의 동지 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암살되었다. 이 병사들은 "사냥개가 필요하다면 내가 될 것이다"! 라고 선언했던 독일 사회민주당(SPD) 당원 노스케 장관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 베를린에서 봉기한 노동자들의 유혈진압을 진두지휘했던 것도, 국제 노동자 운동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암살한 것도 권력을 잡은 그 사회주의자 당(독일 사회민주당)이었다.

이 끔찍한 살인은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한 일련의 중상모략을 통해 오랫동안 준비되었다. "붉은 로자", "선동자 로자", "피의 로자", "차리즘의 첩자 로자"...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한 거짓 비난이 그치지 않았고, 베를린에서 "피의 주간" 이었던 1918년 말 / 1919년 초에는 학살에 대한 요구가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로자 룩셈부르크를 살해하고 나서 불과 몇 달 후, 부르주아지와 노동자 운동의 기회주의자들은 그를 신성시하고, 그의 혁명적인 내용을 제거하고, 비하하고, 그리고 이 날카로운 혁명가를 무디게 하려고 그를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위해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원래 모습이었던 전투적이고 모범적인 혁명가로 남아있어서는 안 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일종의 평화주의자 그리고 페미니스트 민주주의자로 잘못 전해져, 두 번 살해되어야만 했다. 이것이 혁명을 위해 이 위대한 투사를 “명예 회복시키는”(, 다시 회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최근 몇 십 년간의 “기억”이라는 작업의 진정한 목적이다.

룩셈부르크와 레닌의 투쟁을 왜곡시키기 위한 꾸준한 캠페인

1930년대 프랑스의 예를 들면, 루시앙 라우렛(Lucien Laurat) 주변에서 발전한 모든 흐름은 민주주의의 유혹에 점점 더 양보했고, 이윽고 “볼셰비키 혁명” 처음부터 혁명 계획의 “과실” 안에 “벌레” 레닌이 있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 주장은 논리적으로 1936-39년의 스페인 전쟁에서 공화군을 위한 변명이 되었고, 파시즘에 대항하는 싸움이라는 구실로 제2차 세계 학살에 노동 계급을 용기병으로 참가하게 하는 변명이 되었다. 그것은 스페인의 POUM(스페인의 맑스주의 통합 노동자당 : 역주)과 그들, 민족 저항세력의 “영웅주의” 안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지지했다. 이 구역질이 나는 민주주의 선전은 스파르타쿠스 기관지 설립자인 르네 르페브레(Rene Lefeuvre)와 같은 인물들을 거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작을 한다. 나중에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 저작집[1]에서 완전히 이데올로기적인 머리말을 썼는데, 그것의 1946년 제목인 ‘독재에 반대하는 맑시즘’(로자 룩셈부르크는 절대 그 제목을 쓰지 않았다!)은 이 혁명을 위한 투사를 볼셰비즘에 근본적으로 적대적이라고 묘사했는데, 이는 역겨운 거짓말에 불과하다. 저작집 서문에서 르페브르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 “모든 위대한 맑스주의의 저명한 이론가들: 칼 카우츠키, 에밀 반데벨드, 루돌프 힐퍼딩, 칼 레너, 조지 플레하노프는 – 그리고 말하는 김에 우리 또한 –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레닌의 전체주의적 교조가 맑스주의의 원칙에 완전히 반대된다고 비판했다.”

스탈린은 레닌을 박제화했으며 그의 사상을 끔찍한 교리로 왜곡했다. "피의" 로자 룩셈부르크는 일종의 민주주의의 성인이 되었다. 스탈린주의 반혁명은 빠르게 두 개의 새로운 타락하고 상호 보완적인 이데올로기를 형성시켰다 : 한쪽은 매력적인 “룩셈부르크주의” 그리고 다른 쪽은 혐오스러운 "맑스-레닌주의". 정말 동전의 양면 또는 오히려 같은 결과를 가져올 함정으로 향하는 두 입구 : "피에 굶주린" 볼셰비키를 거부하고 "평화주의자" 로자로 묘사되는 인물을 존경하는 것은 철창 안의 사자를 존경하는 것과 같다.

1974년 서독(FRG)에서, 그들은 심지어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미지를 담은 우표를 발행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혁명 조직에 반대하는 새로운 캠페인

동유럽의 붕괴와 소련이 사라진 후, 이 광대한 이데올로기적 캠페인은 다시 발굴되었고,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부르주아지가 열광적으로 선언한 이른바 “공산주의의 죽음”을 부양하기 위해 확대되었다. 여기에서 공식 이데올로기는 역사의 가장 큰 거짓말로, 공산주의와 스탈린주의를 같은 것으로 여기는 사기를 목표로 했다. 그것은 지배 계급의 손에 있을 때 특히 효과적인 이데올로기적 무기이다. 왜냐하면, 1990년대 이후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을 하나의 사회적 세력으로 여기고 그 의식과 조직을 발전시키는데 수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는데, 이제 그 자신의 과거로부터 단절되어 정체성을 잃고, 스스로 어디서부터 왔는지 또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공산주의가 스탈린주의라면, 결국 실패한 공포였다면, 왜 그것을 위해 투쟁할까? 결국, 스탈린주의의 재앙으로 귀결될 뿐이라면 왜 노동자 운동의 역사를 공부하는가? 부르주아지가 우리의 머릿속에 집어넣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이 논리이며 독이다!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를 평화주의자,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 "스탈린의 정신적 아버지"인 레닌의 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이 비열한 선전에서 가장 악질적인 부분 중 하나이다. 그들이 그것을 의식하든 안하든, 이 가짜 싸움에 참여하는 사람은 노동계급에 반대하여 싸우는 것이다.

오늘날 유럽 전역과 세계 도처에 걸쳐 서점 및 가판대와 블로그, 포럼에서는 전투적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미지를 다시 왜곡시키기 위해 새로운 구역질이 나는 선전이 다시 떠오르고 있다. 그리하여, TV 프로그램에서부터 로자 룩셈부르크는 다시 "여성""평화"의 특성만을 가진 사람으로 등장한다. 아주 유명하고 명성 있는 신문 르몽드는 20139, ESCP 유럽의 교수인 장-마크 다니엘(Jean-Marc Daniel)이 쓴 글을 다음과 같이 잘 연상되는 제목으로 게재했다 : “로자 룩셈부르크, 맑스주의자-평화주의자” “맑스주의자”와 “평화주의자”라는 단어의 결합은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 지배 계급에 대항한 “진짜 맑스주의자”가 봉기와 자본주의의 전복을 포기하고 계급 전쟁으로부터 이탈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동문학을 포함하여 수많은 책이 지금 로자 룩셈부르크를 다시 볼셰비키와 “독재자” 레닌의 완고한 적으로 묘사하면서 출판되고 있다. 사회비판그룹의 “룩셈부르크주의자”인 민주적 역사학자들의 후원 아래 파리에서 있었던 것처럼, 회의와 토론들이 여기저기서 조직되었다. 예술계에서조차 2014 MAIF 상은 "로자 룩셈부르크"를 기획한 조각가 니콜라스 밀헤(Nicolas Milhe)가 수상했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 그녀가 혁명의 반대자로서 러시아 혁명, 볼셰비키에 대한 투쟁에서 그녀의 동지에게 반대했다는 조건으로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그녀를 변환시키기 위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재조명은 거대한 이데올로기 중독 사업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는 세계적인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라 더욱더 "민주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주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공산주의 흑서(Black Book of Communism)의 가증스러운 선전 후에는 매우 진지하고 공식적으로 학교 프로그램에서 배운 볼셰비키의 적으로서 여기는 것이 이제부터는 룩셈부르크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부르주아지를 위한 이해관계는 민주적인 부르주아지를 방어하는 것 외에 다른 미래가 없다는 것으로 가장 비판적이고 반항적인 구성원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왜곡 배후에 불신과 혁명 조직을 악마화하는 또 하나의 말 하지 않는 목적과 함께 모든 종류의 민주주의자들이 로자 룩셈부르크를 재조명하는 캠페인이 있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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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회주의 조직의 문제”(1904), “대중과 지도자”(1903), “비판의 자유와 과학의 자유”(1899).

http://en.internationalism.org/icconline/201505/13055/rosa-luxemburg-belongs-proletarian-revolution-not-social-democra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