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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라는 베일을 벗어던지는 남한 지배계급

민주주의라는 베일을 벗어던지는 남한 지배계급

우리가 한국으로부터 받은 소식에 따르면 사회주의노동자 연합 (사노련)“ 투쟁가8명이 남한의 악명높은 국가보안법 따라 체포 ,구형되었다고 한다. 판결은 1 27일에 이뤄질 예정이다.

이것이 정치재판이자, 지배계급이 정의라고 부르기 좋아하는 그것에 대한 희화화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점을 다음과 같은 3가지 사실들이 증언다

첫째, 남한 법정 자체가, 체포된 이들에 대한 경찰의 구속신청을 2차례에 걸쳐 기각했었다는 사실.

둘째, 투쟁가들이 이적 (,북한)단체구성혐의를 받았다는 사실. 그런데, 그들 오세철과 남궁원은 2006, „전쟁위협에 대항한 한국으로부터의 국제주의자선언 서명한 사람들에 속한다. 선언은 북한의 핵실험을 비난하고 특히, „북한 자본주의국가(…) 노동자 계급이나 공산주의와 전혀 무관하며, 군사주의적 야만주의를 향하는 쇠퇴 자본주의의 일반적 경향의 가장 극단적이고 기괴한 형태의 하나에 불과하다라고 언명했다.

셋째, 오세철의 진술은 그가 북한국가자본주의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에 반대함을 분명히 한다는 사실

투쟁가들은 오직 사회주의자라는 사상범죄 때문에 피소된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그들 자신, 가족들 그리고 생존조건을 방어하라 선동했다고, 자본주의의 진정한 본질을 명백히 공공연하게 폭로했다는 이유로 피소되어 법정에 서있다. 검찰이 요구한 판결은 남한 지배계급이 그에 대항하는 자들에 대응해 시행한 억압 사례들 한가지를 더하는데 불과하다. 이러한 잔혹한 억압은 2008 촛불시위에 아이들을 데려와서 이후 법적 그리고 경찰의 괴롭힘을 당했던 유모차부대 젊은 엄마들을 이미 겨냥해 행해졌었다. 점거된 작업장에 침입한 진압경찰에 의해 구타당한 쌍용자동차노동자들을 겨냥하기도 했다.

무거운 징역형의 판결이 예상되는 가운데, 체포된 투쟁가들은 법정에서 모범적으로 위엄있게 행동했고 기회를 재판의 정치적 본질을 분명히 폭로하는 활용했다. 우리는 아래에 오세철의 법정최후진술을 싣는다

최후진술

 

2010. 12.

 

오세철

자본주의 역사에서 위기에 대한 입장들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하나는 파국론입니다. 자본주의 모순이 극에 달해 어느 순간 나락으로 떨어져 새로운 천년왕국이 것이라는 묵시론이나 극단적인 무정부주의가 자본주의 억압과 착취 밑에서 신음하는 무산자들을 미몽에 빠뜨렸고, 그러한 비과학적 태도에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부르주아지가 항상 내뱉는 낙관론입니다. 자본주의 체제는 스스로 모순을 극복할 있는 장치를 내장하고 있고 투기를 근절시키면 실제 경제는 운영되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의 가지 입장보다 더욱 세련되고 지배적 입장은 자본주의의 위기를 순환적 위기로 규정하고 조용히 참고 기다리면 비바람이 그치고 순탄한 항해를 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19세기 자본주의에서 일어났던 광경이며 20세기와 21세기 자본주의 위기에 이상 적용될 없는 논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는 상승기에 있고 무한히 확장되는 19세기 자본주의의 위기였고 맑스도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위기를 과잉 생산의 전염병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과잉 생산의 경향은 기아, 가난, 실업을 가져왔지만 그것은 상품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너무 많은 상품, 너무 많은 산업, 너무 많은 자원 때문이었습니다. 하나의 자본주의 위기의 원인은 경쟁을 통해 무정부로 체제를 끌고 가는 자본주의의 기능인데, 새로운 임노동과 상품을 찾아 새로운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생산관계를 확장하고 심화시킬 있었습니다. 따라서 19세기는 위기의 순간을 건강한 심장이 뛰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20세기에는 1 세계대전을 정점으로 이러한 상승기의 자본주의가 마감을 하고 지구가 임노동과 상품의 생산관계로 확장되었습니다. 시기의 자본주의를 1919 코민테른은 전쟁인가 혁명인가 시기로 규정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세계시장의 쟁탈과 통제를 위한 제국주의 전쟁으로 나아갔으며 다른 편으로 과잉 생산 경향은 19세기와 달리 세계경제를 불안정과 파괴의 반영구적인 위기로 종속시키는 만성적인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모순은 2천만의 목숨을 앗아가고 20-30% 실업자를 만든 가지 역사적 사건인 1 세계대전과 1929 세계대공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는 쪽에 경제의 국가화를 통한 국가 자본주의라는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들 다른 쪽에 사적 부르주아지와 국가 관료주의가 결합한 자유주의국가들을 형성시켰습니다.

2 세계대전 이후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들 포함하는 세계자본주의는 25 동안 재건과 부채 증가에 힘입어 예외적인 번영을 했으며, 정부 관료, 노조 지도자, 경제학자, 자칭 맑스주의자들까지 자본주의가 결정적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했다고 호언장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67 파운드화의 평가절하, 1931 달러위기, 1973 오일 쇼크, 1974-75년의 경기 후퇴, 1979 인플레이션 위기, 1982 부채 위기, 1987 월스트리트 위기, 1989 경기 후퇴, 1992-93 유럽 통화의 혼란, 1997 아시아의 호랑이 위기, 2001 미국의 신경제 위기, 2007 서브프라임 위기, 2008 리먼 브라더스 금융위기, 2009-2010 재정위기로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연속되는 위기는 순환적위기, ‘주기적위기입니까? , 아닙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결코 치유할 없는 , 지불능력이 있는 시장의 부족 때문이며 이윤율 저하 때문입니다. 1929 세계대공황은 거대한 국가 개입을 통해 극단적인 상황을 모면할 있었지만, 요즈음의 금융위기, 재정위기처럼 국가의 구제금융이나 국가부채라는 단기 처방으로는 자본주의라는 체제는 이상 생존할 없고, 생산력의 확대가 불가능한 막다른 길목에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자본주의는 막다른 골목에서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국가부채에 의존하는 것이며 과잉생산의 출구를 가공적인 시장의 창조에서 찾는 것입니다.

지난 40 동안 세계 자본주의는 엄청난 부채를 짊어짐으로써 재앙을 피해 왔습니다. 자본주의에서 부채는 마약중독자에게 마약이나 다름없습니다. 모든 부채의 결과는 지불 가능한 시장을 찾지 못하고 결국 세계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세계 노동자의 가난, 제국주의 전쟁 그리고 생태적 재앙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끝나가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갑작스런 파멸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자본주의 역사에서 서서히 끝나는 마지막 단계, 체제 몰락의 단계입니다. 우리는 100 전의 전쟁인가, 혁명인가 화두를 진지하게 꺼내들고 다시 야만인가, 사회주의인가 말하는 역사적 인식과 과학적 사회주의의 실천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는 혁명적 맑스주의 원칙에 올바르게 사회주의자들의 단결과 통일을 요구합니다. 화폐, 상품, 시장, 임노동, 교환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를 넘어서서 자유로운 개인의 연합이 살아 숨쉬는 노동해방 사회의 건설을 위해서 말입니다.

잉여가치의 생산과 실현에서 이윤율 하락과 시장 포화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총체적 위기가 임계점에 다다랐음은 이미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주의 분석으로 확인된 것이지만, 지금은 야만으로서의 자본주의와 문명으로서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선택의 기로에 있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 자본주의 체제는 임금노예도 먹여 살릴 없는 체제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매일 굶주림으로 10 명이 죽어가고 있고 10 미만 어린이는 5초마다 죽습니다. 8 4 2백만 명이 만성적인 영양실조로 고통 받고 있으며 60 인구 20억이 식품비 인상으로 매일매일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는 경제번영의 환상을 유지할 없는 체제입니다. 인도와 중국의 경제 기적은 환상임이 드러났으며 중국에서는 2008 상반기에 2천만 명이 해고 되었고, 6 7천개의 회사가 파산했습니다.

, 생태적 재앙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지구의 온난화를 보면 지구의 평균 온도는 1896 이래 0.6% 증가했고, 20세기는 북반구에서 지난 동안 이전보다 가장 심각한 온난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덮인 지역은 1960 이래 10% 감소했으며 북극빙하의 두께는 40% 감소했습니다. 평균 해수면은 20세기 동안 10-20% 상승했는데, 이러한 해수면 상승은 지난 3천년 보다 10 증가한 것입니다. 또한 90 동안 지구에 대한 약탈은 남벌, 토양 침식, 오염(공기, 수질), 화학 방사능 물질의 살포, 동식물의 파괴, 전염병의 폭발 등으로 나타나 생태적 재앙은 종합적이고 지구적 형태로 구성되어 앞으로 얼마나 심각해질지 예측할 없습니다.

그러면 자본주의의 억압과 착취에 맞선 계급투쟁의 역사는 어떠했습니까? 계급투쟁은 항상적이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1인터내셔널은 상승기 자본주의의 능력 때문에, 2인터내셔널은 혁명주의의 포기와 민족주의 때문에, 그리고 코민테른은 사회주의 혁명을 포기한 스탈린주의의 반혁명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특히 1930년대 이후의 반혁명세력은 국가자본주의의 본질을 호도하면서 사회주의 참칭하였고, 결국 세계자본주의 체제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진영의 대립을 위장하면서 세계노동자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해 왔습니다.

더구나 1989 동구블럭과 스탈린 체제의 몰락이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명백한 승리”, “계급투쟁의 종말”, 그리고 심지어 노동계급 자체의 종말이라고 떠드는 부르주아지의 캠페인은 노동계급을 의식과 전투성 수준에서 심각하게 후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1990년대 동안 노동계급은 투쟁을 전적으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난 시기의 투쟁의 기관이었던 노동조합에 필적할 폭이나 그리고 능력을 지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989 이래 노동계급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의 연금에 대한 공격에 대한 반대투쟁이 전기가 되었습니다. 노동자의 투쟁은 대부분 중심 국가에 영향을 주었는데, 미국의 2005 보잉과 뉴욕 교통의 투쟁, 독일에서는 2004 다임러와 오펠 투쟁, 2006 의사 투쟁, 2007 독일 텔레콤 투쟁, 영국의 2005 8 런던 공항 투쟁, 프랑스의 2006 CPE 반대 투쟁이 있고, 주변부 국가들로는 두바이의 2006 건설 노동자 투쟁, 방글라데시의 2006 방직 노동자 투쟁, 이집트의 2007 방직 노동자 투쟁 등이 있습니다.

2006 이후 2008년까지 벌어진 세계의 노동자 계급의 투쟁은 이집트, 두바이, 알제리, 베네주엘라, 페루, 터키, 그리스, 핀란드, 불가리아, 헝가리, 러시아, 이탈리아,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중국 세계로 확대되고 있으며 2009년부터 심화되는 대공황과 자본주의의 위기에 맞선 노동계급의 투쟁은 최근 프랑스에서의 연금개혁에 대한 반대투쟁에서 보듯이 점점 치열한 공세로 나아갈 것으로 예상됩니다.

위와 같은 세계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쇠퇴의 마지막 경향과 위기의 노동자계급에 대한 전가는 예외 없이 세계노동자들의 필연적인 투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아닌 동물과 같은 야만으로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존엄성으로 행복하게 것인가의 기로에서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한국의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모순의 깊이와 폭은 이른바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수준보다 더욱 심각하고 이미 노동자들의 투쟁의 성과를 쌓아온 유럽의 국가들의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참상보다 훨씬 크다고 있습니다. 이는 G20 정상회의의 한국 개최라는 허장성세나 총량적인 경제 지표로 말할 없는 계급적인 인간의 삶의 문제입니다.

자본은 본래부터 세계적이었고 민족 자본끼리의 경쟁과 다툼은 있었지만 항상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를 위해 손잡고 위기를 은폐하고 노동자인 인간을 공격해 왔습니다. 노동자는 자본가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윤극대화와 무한경쟁의 법칙으로만 움직이고 유지되는 자본주의 체제와 싸웁니다.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맑스주의자는 이와 같은 인류사회의 역사법칙과 사회체제의 법칙의 본질을 파헤치고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위한 방향을 제시하며 이를 가로막는 비인간적인 체제와 법칙을 비판하고 역사의 주인인 노동자계급과 함께 싸워왔습니다.

그를 위해 당이라는 조직을 만들고 투쟁적 실천을 왔습니다. 적어도 2 세계대전 이후부터 이러한 맑스주의자들의 실천이 법적인 제재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들의 사상과 실천이 인류사회의 진보에 공헌했음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버금가게 맑스의 자본론이나 공산주의자 선언 저작들이 폭넓게 읽히고 있습니다.

이번의 사노련 사건은 한국사회가 얼마나 야만적인 사상 탄압을 하는 사회인지를 세계에 드러내는 역사적 사건이며 세계의 사회주의 재판 역사에서 오점으로 남을 것입니다. 앞으로 보다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사회주의 운동, 맑스주의 운동이 세계적으로나 우리나라에서 폭넓게, 그리고 힘차게 펼쳐질 것입니다. 사법기구가 조직사건은 다룰지 모르지만, 사회주의 운동, 맑스주의 운동은 억압할 없을 것입이다. 이는 인류와 노동자가 존재하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 운동과 실현이 법의 죄의 대상이 없습니다. 오히려 존경과 신뢰의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 사상의 자유, 학문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라!

- 역사의 주체, 생산의 주체, 권력의 주체로 나아가려는 모든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자본과 권력의 탄압을 중단하라!

-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만들기 위해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경제불황, 전쟁, 사회적 붕괴- 계급투쟁만이 출구를 제공한다.

올 여름 경제위기의 극적인 첨예화는 자본주의 체제가 그 한계에 다달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부채위기“는 문자그대로 은행의 파산일뿐만 아니라 전체 국가들의 파산을 백일하에 드러냈고, 게다가 그리스나 포르투갈과 같이 경제가 허약한 나라들 뿐만 아니라 유로지역의 주요국가들, 특히 세계경제최강대국 미국도 포함된다.

그리고 이 위기는 전세계적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이기도 하다. 지난 몇년간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낸 빚더미는 1960년대말 1970년대초에 이미 나타난 경제위기를 자본주의가 연체하거나 은폐하려한 시도들의 결과일 뿐이다. 또한 오늘의 “침체”가 진정한 불황으로서의 본 모습을 드러내면서, 우리는 이것이 실상, 1930년대에 생산 마비시켰고 그당시 세계를 제국주의전쟁으로, 즉 제 2차세계대전으로 몰아갔던 위기과 같은 심각한 위기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 위기는 자본주의 체제가 역사적으로 진부해졌음을 보여준다.

오늘의 불황과 1930년대의 불황사이의 차이는 오늘의 자본주의는 어떤 수단도 갖고 있지 않다는데 있다. 1930년대에 지배계급은 그 위기에 대항한 그들 자체의 야만적인 해법, 즉 제국주의 전쟁에 전 사회를 동원하고 세계를 새롭게 분활하는 것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재조직화는 2차 세계대전 후,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있었던 재건의 기적의 토대를 만들어냈다. 그 당시 이러한 가능성이 존재했던 것은 부분적으로, 세계대전이 자동적으로 자본주의의 자기파괴를 의미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 전후에 새로운 제국주의 종주국의 출현 여지가 여전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의 옵션이었는데, 이는 그 이전에 노동자계급이 1차 세계대전에 뒤이어 혁명을 시도했었고 그러면서 스탈린주의, 파시즘 그리고 민주주의로 인해 그 역사상 가장 심각한 배패를 경험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대전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의미에서만 하나의 옵션이다. 사실상 전세계적인 제국주의전쟁으로의 길은 자본주의가 옛 양대 블록 구도의 붕괴 후 그 어떤 안정적인 제국주의적 연합도 이뤄낼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막혀있다. 그 길은 또한 자본주의 주요국가들에서 착취당하는 사람들 대다수를 이 체제는 그 수호를 위해 투쟁하고 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설득하고 단합시킬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존재하기 않는다는 점에 의해서도 마찬가지로 가로막혀 있다. 이 두가지 요소들은 더 심층적인 어떤 것과 연결되어있는데, 노동자계급은 오늘날 패배당하지 않았고 여전히 자본주의에 대항해 그들 자신의 이해를 위해 투쟁에 나설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노동자계급이 직면한 위험


이는 혁명으로의 그 어떤 자동적 현상이 존재함을 의미하는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노동자계급의 혁명은 도대체가 결코 “자동적 현상”이 될 수 없는데, 이 혁명은 과거의 그어떤 혁명보다도 더 높은 의식수준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처음으로 연대원칙이 중심에 서 있는 그러한 한 사회에서 그들 자신의 생산과 분배에 대한 콘트롤을 넘겨받는 바로 그 순간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이 혁명은 점점 더 대대적으로 되어가는 일련의 투쟁들에 의해서만 준비될 수 있고, 그러한 투쟁은 다시 더 깊고 더 넓은 계급의식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1960년대 말 위기의 최근 시기가 시작된 이래, 노동자계급의 많은 주요한 투쟁들이 있었다. 685월 프랑스에서의 사건들이 유발했던 국제적인 투쟁물결에서부터 1980년 폴란드에서의 대중파업들과 1980년대 영국 광산노동자파업에 이르기까지. 비록1990년대에 계급투쟁의 오랜 역류가 있었지만, 지난 몇년동안에, 그들에게 그 어떤 미래도 제공할 능력이 없는 현 사회질서에 대해 적극적으로 “분노하는” (스페인어 개념대로 말하자면)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다. 튀니지, 이집트, 그리스, 스페인, 이스라엘 등등에서의 투쟁들에서 “혁명” 의 생각은 진지한 토론주제가 되었다. 1968년 파리, 1969년 밀라노의 거리들에서 그당시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당장 이 생각은 아직 매우 혼란스럽고 막연하다. '혁명', 가장 분명하게는 튀니지와 이집트의 경우에서, 또 지금 리비아가 그런 것처럼 지배계급의 일부분으로부터 그 다른 한 부분으로의 권력의 단순한 이동정도로 이해되기 쉽다. 그리고 최근의 운동들에서, 지배체제에 대항한 투쟁은 계급투쟁임을, 즉 지배계급 전체에 대항한 노동자계급의 투쟁임을 분명히해야 함을파악한 것은 소수에 불과했다. 40여년간의 위기 이후 특히 자본주의의 주요국가 노동자계급은 1960년대말과 같은 모습을 더이상 띠지 않는다. 거대한 산업기지들과 강력한 계급투쟁의 집중지들은 사방으로 분산되었다. 전 세대가 지속적인 불안정과 실업의 원자화의 영향을 받았다. 노동자계급의 가장 절망적인 층들은 범죄와 허무주의 또는 종교적 근본주의에 빠져들 위험에 처해있다.

요컨대, 자본주의 사회의 길고 점점 더 첨예해지는 붕괴과정으로 인해, 노동자계급은 계급정체성을 재획득하고 사회의 지도력을 넘겨받아 그 사회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자신감을 형성하는 능력에 있어서 가장 심각하고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착취에 대항해 투쟁하는 노동자계급의 모범이 없이는, 체제의 불평등하고 억압적이며 부패한 본질에 대항한 무수한 분노의 반응들이 있을 지언정, 그 자체만으로는 그 어떤 출구도 만들어낼 수 없다. 몇몇 반응들은 올여름 영국의 예에서처럼, 폭동, 봉기 및 수많은 약탈의 형태를 띨 지도 모른다...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정당한 분노의 분출들이 지배계급에 의해 인도되어, 리비아에서 보여지듯이 제국주의의 한 진영에 대항해 다른 한 진영을 지지하는 용도로 투입될 수도 있다.

가장 비관적인 시나리오는, 피착취자들의 투쟁이 무의미하고 자기파괴적인 행동들로 분산되어버리고, 이때 노동자계급 전체가 너무 원자화되고 너무나 분열되어버려서 하나의 진정한 사회적 힘으로 출현할 수 없게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 시나리오가 실현된다면, 아무것도 자본주의가 우리 모두를 심연에 빠뜨리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세계전쟁의 전개가 없이도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 지점에 도달하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새세대 노동자들은 경제적 붕괴, 제국주의적 충돌, 환경파괴라는 자본주의의 미래에 수동적으로 그리고 아무 저항없이 이용당할 용의가 전혀 없다는 많은 암시들이 존재하고, 이 새세대가 노동자계급의 더 나이든 세대들과, 자본주의로부터 생존의 위협을 받는 모든 이들을 자신들 주변으로 끌어모을 수 있다는 증후들이 존재한다.


세계혁명, 201191

 

 

부채위기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세계경제가 심연에 빠진듯 보인다. 대공황의 위기가 점점 가까와지고 있는데, 그것은 1929년의 대공황보다 심각할 것이다. 은행, 기초지방단체, 지방들, 심지어는 국가들도 오늘날 파산에 내몰리고 있다. 언론매체는 온통 부채위기灯에 대해 떠들어댄다.

부채장벽에 부딪힌 자본주의

다음의 그래픽은 1960년이래 오늘까지 전세계의 부채(1) 증가를 보여준다. 이러한 부채들은 전세계 국민총생산 대비 백분율로 표현되어진다.

그래픽을 통해, 1960 부채비율은 전세계 국민총생산의 100% 해당했지만 2008 이는 두배 반으로( 250%) 증가됨을 있다. 바꿔 말하자면, 1960 이래 전세계적으로 누적된 부채를 완전히 상환하자면 이는 전세계에서 일년 반동안 생산된 모든 생산물의 총합에 상응한다

소위 선진국灯의 이러한 극적인 경향은 또한 미국의 공채에 관한 다음의 그래픽을 통해 분명히 보여질 있다.

지난 몇년 동안 거대한 공채의 산더미가 생겨나서 증가가 거의 수직적으로 진행됨을 있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부채장벽灯이라 부른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지금 전력을 다해 부채장벽에 맞부딛혔다.

부채  자본주의 쇠퇴의 결과

세계경제가 이러한 부채장벽을 향해 치닫고 있음은 분명했다. 전세계의 정부들은좌우파를  막론하고, 극좌 극우를 막론하고, „자유방임지향 이건 국가개입灯지향이건을 막론하고 모두가 크레딧조건들을 점점 느슨하게 만들었는가, 결손이 점점 증가하게 내버려두었는가, 모든 짓을 다하면서 국가와 기업과 가계의 부채더미가 지난 50년간 증대되도록 방치하였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정부들이 그런식으로 대처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현재 빠져들고 있는 끔직한 침체가 이미 1960년대에 이미 시작되었을 것이다사실상 자본주의는 지난 몇십년이래 크레딧의 도움으로 살고, 생존해 있다 현상의 뿌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맑스가 현대사회의 크다란 비밀이라고 나타냈던것, 잉여가치의 창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우리는 여기서 간단하게 이론적인 서술을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선천적 질병을 앓고 있다. 자신의 신체가 배설해낼 없는 많은 양의 , 과잉생산을 끊임없이 생산한다. 자본주의의 시장이 수용할 있는 것보다 많은 상품을 생산한다? 설명을 위해 순전히 단순화된 예로서, 콘베이어 벨트 노동자나 Pc작업을 하면서 매달100만원로정도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 생각해보자. 실상 그는 자신의  매달 임금총합에 해당하는100만원 가치의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200만원 가치의 상품을 생산한다. 그는 지불되지 않은 노동(잉여노동) 것이다. , 잉여가치를 만들어낸 것이다. 자본가는 노동자로부터 훔친 (물론 그렇게 생산된 상품을 파는데 성공한다는 가정하에) 100만원으로 무엇을 하는가 돈의 일부를 자본가는 자신의   사적인 소비에 충당한다. 이를 대략 25만원이라고 치자. 나머지 75만원을 그는 자본금으로 자신의 회사에 투자한다, 대부분은 현대적인 새기계를 구입하는 등등의 형태로. 그러나 자본가를 이런식으로 행동하는가? 왜냐하면 그는 경제적으로 그렇게 할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경쟁에 기반한 체제다. 모든 자본가는  자신들의 상품을 동일한 상품을 생산하는 다른 자본가들에 비해서 싸게 팔아야 한다. 그래서 기업가는 생산비용, 임금을 낮추어야 뿐만 아니라, 점점 많은 부분의 미지불노동을 좋은 성능의 기계에 우선적으로 투자하는데자신의 생산성을 높이는데 사용해야 한다만약 그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현대화를 없고한편 이렇게 주의깊고 활동적인 경쟁자는  결국 싸게 생산하고 시장을 정복할 있게 된다.

자본주의 체제는 그래서 다음과 같은 모순이 특징적인데 노동자들이 사실상 생산한 것에 상응한 보상을 받지 못함으로써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가가 '분배' 있는 것보다 많은 가치가 발생한다는 점이다결코 자본가들과 노동자들 모두를 함쳐도 생산된 모든 상품들을 소비할 없다그래서 자본주의는 이러한 상품과잉을, 자신의 생산영역의 외부에 존재하는 아직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의해 정복되지 않은 시장들에 팔아야 한다. 이는 자본주의외부의 시장들이라 불린다. 이것이 성공하지 못하면, 광잉생산위기가 초래된다. 이것이 바로 핵심에 있어서, '자본론'에서 맑스가  그리고 '자본축적론'에서 로자 룩샘부르크가 도달하게 결론들의 일부이다이를 좀더 분명하게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과잉생산이론을 몇몇 요점으로 요약해 보겠다.

 

  • 자본은 자신의 노동자들을 착취한다(달리 말해서, 그들의 임금은 그들이 생산한 실제 상품가치보다 낮다). 
  • 그렇게 해서 자본은 자신의 상품을 이윤과 함께, 임금과 잉여가치 그리고 생산수단의 비용들이 참작된 가격에 판매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자본가들은 상품을 누구에게 팔것인가?
  • 당연히 노동자들이 상품들을 구매한다... 그들에게 지불된 임금의 한도 내에서그래서 아직도 판매되어야할 일부분이 여분으로 남게 되고 그것은 노동자들에게 지불되지 않은 부분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오직 부분- 잉여가치- 만이 자본으로 하여금 이윤을 얻게 하는 마술적인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자본가들도 물론 마찬가지로 소비를 한다...그리고 대부분 상당히 호화롭게 산다. 하지만 잉여노동을 통해 생산된 모든 상품을 그들 혼자서 구매할 수는 없다자본은 상품들을 스스로에게 판매함으로써는 이윤을 획득할 없다. 그것은 말하자면, 왼쪽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오른쪽 호주머니에 넣는 꼴이 것이다그런 식으로는 아무도 부유해질 수가 없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것을 알고 있다...
  • 축적을 하기 위해서는, 성장을 위해서는 자본은 그래서 노동자와 자본가 이외의 다른 구매자를 찾아야 한다. 달리 말해서, 반드시 자신의 체제의 외부에 있는 구매자를 찾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장에서 홍수를 이루는  판매될 없는 상품더미 위에 앉아 있을 밖에 없다. 그러면 과잉생산위기灯가 초래된다.

 

이러한 내적 모순”(내재된 과잉생산경향과 항상 외부의 시장을 찾아야한다는 강박) 체제가 출현이래 오늘날까지 갖고 있는 소위 믿을 없을 정도의 활력을 이루는 뿌리들중의 하나이다. 16세기에 자본주의가 출현한 이래 자본주의는 주변에 놓인 모든 경제영역들과  통상을 해야만 했다. 전세계의 낡은 지배계급들과, 농부들과 수공업자들과. 18세기와 19세기에 자본주의 강대세력들은 세계의 정복을 놓고 경쟁에 돌입했다. 그들은 차츰차츰 지구를 식민지들로 분할했고,. 그것을 서로 빼앗으며 진정한 제국을 건설했다. 가끔 두개의 세력들이 동일한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러면 약자는 포기해야만 했고, 원주민에게 자신의 상품을 사도록 강제할 있을 지구의 다른 한조각을 찾아보아야 했다. 이렇게 자연경제들은 변화되고 차츰 차츰 자본주의 속으로 강제 편입되었다. 식민지들이 유럽과 미국에서 생산된 모든 상품들을 수용하는데 점점 실패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도 과잉생산이 발생했다.          

18세기와 19세기 자본의 이러한 활력, 과잉생산위기와 장기간의 복지와 확장시기의 반복 자본주의의 부단한 상승은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매우 명확하게 서술되었다:

 

  • 공황시에는, 이전의 모든 시기에는 어불성설로 보였을 하나의 사회적 전염병이  돌발한다 과잉생산이라는 전염병이. 사회는 갑자기 순간적인 야만의 상태로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기아와 전면적인 섬멸전이 사회로부터 모든 생활 수단들을 박탈해간 것처럼 보인다; 공업, 상업이 파괴된 듯이 보인다. 그런가? 그것은 사회가 너무 많은 문명, 너무 많은 생활 수단너무 많은 공업, 너무 많은 상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공산당선언, 부르조아와 프롤레타리아, 1848, 칼맑스 프리드리히엥겔스저작선집, 박종철출판사, 1 406)
  • 자본주의가 아직 확장기에 있었고 당시 아직도 새로운 시장을 정복할 있었기에, 위기마다 새로운 재회복기가 뒤따를 있었다. „자신의 생산물의 판로를 부단히 확장하려는 욕구는 부르주아지를 지구상으로 내몬다. 부르주아지는 도처에서 뿌리를 내려야 하며, 도처에서 정착해야 하고, 도처에서 연계를 맺어야 한다. (…)  부르주아지의 상품의 가격은, 부르주아지가 모든 만리 장성을 쏘아 무너뜨리고, 외국인에 대한 야만인들의 완고하기 그지 없는 증오심을 굴복시키는 중포이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민족들에게 망하고 싶지 않거든 부르주아지의 생산 양식을 채용하라고 강요한다; 그들은 소위 문명을 도입하라고, 부르주아지가 되라고 강요한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모습대로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공산당선언, 같은 , 403 - 404) “
  • 그러나 이미 당시에 맑스와 엥겔스는 주기적인 위기의 뒤편에 있는 무언가를, 항상 많은 번영을  만들어낼 것같던 단순한 영원한 주기 이상의 무엇을 인식했다. 그들은 한층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심각한 모순들이 표현됨을 속에서 보았다. 새로운 시장들의 정복을 통해 부르주아지는 전면적이고 강력한 공황들을  준비하고 , „ 공황들을 예방할 수단들을 감소시킨다“(공산당선언, 같은 , 406).  또는, 공황들은 더욱더 빈번해지고 더욱더 격렬해지는데 까닭은 생산물들의 양이 많아지고 따라서 확대된 시장들에 대한 욕구가 커지는 것과 같은 정도로 세계시장은 축소되어 이용할 여지가 있는 새시장이 점점 적어진다...”(임금 노동과 자본, 1849, 같은 , 571)”

 

그런데 단지 작고 둥글뿐인 우리의 지구

20세기초, 모든 지역들이 정복되었다, 자본주의 강대국가들이 지구를 분할해 가졌다. 이후 그들은 어떤 새로운 지역도 정복할 없었고, 오히려  경쟁자들로부터 지역들을 무력으로 빼앗을 밖에 없었다. 이제 이상 아프리카나 아시아 |또는 남아메리카에서 식민지를 놓고 경쟁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영향- 권력지대의 방어를 위한 치열한 전쟁이 현안이었다. 그래서 제국주의적 경쟁자들로부터 무력으로 지역들을 빼앗으려 시도할 밖에 없었다.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진정 생존의 문제였다. 그래서,  아주 소수의 식민지만을 소유하고 있며 대영제국의 선의에 의존적(독일 부르주아지에게는 견딜수 없는 상황) 이던 독일이 통상을 해나갈 있기 위해 1914 1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독일은 강제적 상황때문에 공격적인 역할을 맡게되고, 역할을 히틀러는 나중에 2 세계대전을 준비하면서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수출할 것이냐 아니면 죽을 것이냐“. 400년간의 확장후 자본주의는 쇠퇴하는 체제가 되었다. 이점에 대해 양대 세계대전의 악몽  그리고 1930년대의 대공황은 반론을 제기할 없는 극적인 증거를 제시한다.  그렇지만  그후 그때까지는 여전히 존재하던 자본주의외부 시장들이 완전히 고갈되는 1950년대에도 자본주의는 아직 치명적인 과잉생산위기에 빠져들지 않았다.

100년이상 서서히 진행된 단말마의 고통뒤에도 체제는 여전히 살아있다; 발부둥치면서, 비참한 상황에 놓여있긴 하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체제는 어떻게 생존해 있는가?   이체제의 몸은 과잉생산이라는 독에 의해 아직도 완전히 마비되지 않았는가? 해답은, 빚이라는 수단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세계경제는 점점더 대대적으로 채무를 짐으로써 극적인 붕괴를 피할 있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일종의 인위적인 시장이 창출될 있었다. 지난 40년은 침체와 크레딧주입이라는 도움에 힘입은 재회복의 연속으로 표현될 있다.  그런식으로 사적인 가계의 소비를 국가적인 도움으로 회복하려 시도했던 것만은 아니다... 아니, 국가들 자체가 라이벌  나라들에 대한 경제 세계경쟁력을 인위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 기간산업프로젝트에 투자하고 은행들에 저금리로 돈을 대어주고 은행들은 다시 기업과 가계들에 돈을 대출함으로써...) 빚을 졌다.  크레딧의 수도꼭지가 도처에서 활짝  열려 돈이 흘렸고 한발 한발 모든 경제영역들이 과잉채무를 갖게 되었다. 기존의 빚을 갚기 위해 매일 새로운 빚을 얻어야만 했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어쩔 없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밖에 없었다. 자본주의는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이러한 막다른 골목의 가장 낮은 지점에 빠져있다. 부채장벽을 코앞에  맞대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부채위기灯는 죽어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과용량灯의 모르핀과 같다

비유를 하자면, 부채는 자본주의에게 있어서, 죽을 사람에 있어서 모르핀이 의미하는 것과 같은 것을 나타낸다. 모르핀을 투여함으로써 병자의 위기는 잠시 경감된다병자는 안정을 얻고 달래질 수가 있다. 그러나 매일 의존성이 증가되고 점점 높은 용량의 모르핀이 투여된다. 처음에는 경감하는 작용을 했던 수단이 나중에는 해롭게 되고 결국에는 과용량으로서 작용하게 된다.

전세계적인 부채의 산더미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쇠퇴의 증상이다. 세계경제는 1960년대 이래 크레딧에 매달려 있지만, 부채는 도처에 스려있다. 몸의 모든 부위로 파고들어 그것을 장악해 버린다. 점점 많은 은행들, 회사들, 지방자치단체, 국가들이 지불불능이고 그렇게 것이며 그들의 채무를 이상 상환할 수도 없고 이자를 더이상 지불할 수도 없다.

2007 여름, 1 세계대전과 함께 시작된 자본주의 쇠퇴의 역사에서 새로운 장이 열렸다. 위기의 리듬을 점점 대대적으로 되어가는 크레딧 투입을 통해 제지하는 지배계급의 능력이 점점 약해지고 없어져 간다. 이제 중간 중간에 한숨 돌릴 틈도 없이, 경제의 회복기도 없이 점점 많은 충격들이 있을 것이다지배계급은 위기에 대한  실제적이고 지속적인 해답을 찾을 없을 것이다. 이는 그들이 갑자기 무능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문제가 해결될 없다는 단순한 이유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자본주의 자체내에서는 해결될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글에서 보여주려 시도했던 것처럼, 문제가 자본주의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체제 전체에 있기 때문이다. 체제 전체가 파산상태이다파웰, 26.11.2011


(1) 전세계의 총부채, . 모든 나라들의 가계, 기업 국가들의 부채를 의미한다.

       

 

 

                 

북아프리카, 근동 및 중동에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북아프리카와 근동 및 중동의 사건에 관한 토론을 위한 참고점들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은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서, 결과들은 현재 분명한 예측이 어렵다. 그러나 사건들에  관한 토론은 중요하며 이를 통해 혁명가들은 일관성있는 분석틀을 발전시켜 나갈 있을 것이다. 다음 사항들은 결코 그러한 자체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상황의 상세한 서술도 아니며,  단지 논쟁을 고무자극하는 것을 목표로하는 기본적인 참고점들이다.

 

 

1. 1848년이나1917-1919 이후 우리는 그렇게 광범위하고 동시다발적인 반란의 물결을 보지 못했다. 움직임의 진원지는 북아프리카(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그리고 알제리와 모로코) 있었는데,  가자지구, 요르단, 이라크 이란 예맨, 바레인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반정부 시위가 발생한 한편, 일련의 다른 억압된 아랍국가들, 특히 시리아에서 높은 경보가 울리고 있다. 중국의 스탈린주의적 체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항의의 메아리는 수단, 탄자니아, 짐바브웨, 스와질란드등과 같이 아프리카의 다른 부분들에서도 울려퍼진다. 이러한 반란들의 반향은 크로아티아에서 경제위기의 영향과 부패한 정부에 대항한 시위에서도, 영국 학생시위의 플랜카드와 슬로건에서도 그리고 위스콘신에서 노동자투쟁에서도 느껴질 있으며, 다른 여러나라들에서도 확실히 그러하다. 이것은 모든 움직임들이 아랍세계의 그것들과 똑같다라고 말하는 것이이 아니다. 내용면에서도 요구사항들의 측면에서도, 지배계급의 반응에 있어서도. 하지만 현상 전체를 놓고 이야기할 있는 그러한 일련의 공통점들이 분명 존재한다.

 

 

2. 이러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는 역사적인 맥락은 다음과 같다:

 

-         깊고 참으로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심각한 경제위기, 이로 인해 아랍국가들의 취약한 경제는  특히 심하게 타격을 받았고, 이미 수백만이 비참한 가난 속으로 빠져들고 있으며,  상황이 악화되리라는 전망만이 앞에 놓여 있다. 많은 노쇠해가는중심부 국가들과는 반대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젊은 층은 무수한 젊은 전문 비전문인력의 실업과 전망부재로 특히 심하게 타격을 받았다. 모든 경우에서 이러한 운동의 최전선에  젊은 층이 있다.

-         지역의 모든 정부들의 견딜 없이 부패하고 억압적인 본질. 비밀경찰과 군대의 잔인한 행동이 오랫동안 국민들을 파편화하고 강압할 있었던 반면,  국가의 바로 그러한 무기들, 원자화와 공포는  이제 함께 모여 공동으로 저항하려는 국민들의 의지를 일반화하는데 기여했다. 이는 예를 들어 특히 이집트에서 매우 분명했다. 무바라크가 진압군과 사복경찰들을 타흐리르광장을 점령한 사람들에게 테러를 가하도록 보냈을 ,  이러한 도발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방어하려는 결의를 더욱 강화시켜  훨씬 많은 사람들이 항의시위에 동참하도록 만들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일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안 엄청난 사적인 부를 축적한 집권층의 탐욕과 치솟는 부정부패는 국민들이 두려움을 떨쳐버리자마자 반항의 불꽃을 더욱 불붙혔다.

-         많은 시위참가자들이 언급하는 이러한 갑작스런 공포의 상실은 국지적 지역적인 수준에서 변화들의 산물일뿐만  아니라, 국제적 수준에서 증대하는 불만과 명백한 계급투쟁의 기후의 산물이기도 하다. 경제위기에 직면하여 모든 곳에서,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강요되는 희생을 제공하는 것을 점점 달갑게 여기고 있다. 여기서 다시, 새로운 세대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되었고 이런 의미에서  2년전 그리스에서 있었던 젊은이들의 반항, 영국과 이태리에서의 학생투쟁, 프랑스에서의 연금개혁 반대투쟁등도 아랍세계에 영향을 남긴 것이다. 특히, 지배계급으로서는 기존 관계들에 대항한 투쟁들에 대해 지속적인 보도통제를 하기 힘든 패이스북과 트위터 시대에.

 

 

3. 이러한 운동들의 계급적 성격은  단일하지 않고 나라마다 그리고 단계에 따라서 상이하다. 하지만 대체로 비착취계급의 운동들로서, 국가에 대항한 사회반란으로서 규정될 있다.  노동자계급은 일반적으로 반란들을 이끌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상당한 존재성을 드러내고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는 운동에 의해서 제시된 그리고, 알제리에서의 파업들그리고 특히 이집트에서의 주요 파업물결들과 같은 그런 경우들에서는,  노동자투쟁의 특정한 발전에 의해 제시된  조직화의 방법들과 형태들 모두에 의해서 확인될 있다.  한편 이집트에서의 파업들은 무바라크를 폐기한다는 결정에 핵심적인 요소의 하나였다(이점에 대해서는 우리 다른 기사들을 참조바람). 나라들의 대부분에서는 노동자계급이 유일한 피억압 계급은 아니다. 농민층과  훨씬 오래된 생산양식들로부터 유래한 다른 계층들은 비록 매우 파편화되고 수십년간의 자본주의의 쇠락을 통해 파괴되었을 지라도 여전히 나라에서 무게를 갖고 있다. 반면 반란들의 중심이 되고 있는 도시들에서는 노동자계급화의 길에 들어 있긴 하지만 여전히 자체의  특수성을 가진 다수의 중산층 그리고 일부는 노동자 일부는 소상인과  룸펜화된 인자들로 이뤄진 대다수  슬램거주자들과 나란히 노동자계급이 존재한다. 가장 집중되고 경험많은 노동자계급이 있는 이집트에서조차도, 타흐리르광장의 목격자들에 따르면, 시위는 체제 상위계층을 제외한 모든 계급들 결집했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비노동자 계급들의 비중이 중심부 국가들의 주요 투쟁들에서보다 훨씬 높았다.

 

4. 이러한 반란들의 계급적 성격을 파악하려는 노력 속에서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대칭적인 오류들 두가지를 피해야만 한다. , 한편으로는 운동 속의 모든 대중들을 노동자계급과 무조건 동일시하는 (국제공산주의그룹 Groupe Communiste Internationaliste 가장 특징적인 입장)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폭동들에서 긍정적인 점들 분명하게 노동자 계급적이 아닌 모든 것을 거부하는 . 여기서 제기된 문제는 1970년대 이란의 사건과 같은 이전의 사건들을 되짚어보게 한다. 당시에 우리는 한동안 노동자계급이 선두적인 역할을 가정할 있었던 하지만  결국 이슬람주의자들에 의해 운동이 전복되는 것을  막기에는 불충분했던 그러한  대중반란을 목격했다. 역사적인 수준에서, 노동자계급과  일반적인 사회폭동들 사이의 관계 문제는 또한 과도기에서의 국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문제는 모든 비착취계급들의 운동에서 그렇지만 노동계급이 계급자치성을 유지할 필요성에 직면하여 생겨난다.

 

5. 러시아혁명에서 소비에트 형식은 노동자계급에 의해 생겨났지만 모든 피억압자들에게 조직화의 모델을 제공했다. 비례감각을 잃지 않고도 -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노동자계급이 다른 계층들에게 분명한 정치적 지도력을 제공할 있는 혁명적인 상황과는 한참 멀리 떨어져 있기에 -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투쟁방법들이 아랍세계의 사회반란들에 영향을 주었음을 있다:

 

-         자기조직화의 경향 속에서, 이는 국민들에 대항해 범죄갱단들을 풀어놓은  이집트정부의 전술에 대응해서 출현한 이웃보호위원회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다. 타흐리르광장에서의 몇몇 대중집회들의 파견위원구조 속에서. 그리고 집단적인 토론과 결정과정 전체에서;

-         대규모의 결집와 조직화의 중심점을 제공하기 위해서,  보통이라면 국가에 의해 통제되는 공간을 점거한 점에 있어서;

-         정부가 출동시킨 경찰과 깡패들에 대항해 대대적인 자위단의 필요성을 의식했지만 그와 동시에, 폭력과 파괴와 약탈 자체는 거부한 점에 있어서;

-         기독교도와 회교도사이, 시아파와 수니파 사이, 신앙인과 비신앙인 사이, 그리고 남자와 여자 사이의 분열등, 정부에 의해 냉소적으로 조작된 종파주의와 기타의 분열들을 극복하려는 신중한 노력들 속에서;

-         일반 병사들과의 우애를 이뤄내려는 수많은 노력들 속에서.               

 

이러한 경향들이 노동자계급의 오랜 투쟁전통을 지닌 이집트에서 가장 강력하게 발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데,  이집트의 노동자계급은 운동의 결정적인 단계에서 하나의 독자적인 세력으로 출현하여, 2006-7년의 그것과 같이 미래의 대대적 파업의 맹아들로서 간주될 있는 일련의 투쟁들을 전개했다. 이때 대대적 파업의 가장 중요한 많은 특징들 갖고 있었다. , 부문에서 다른 부문들로의 파업과 요구사항들의 자연발생적인 확장, 어용노조에 대한 비타협적인 거부와 자기조직화의 특정 경향들,  경제적 요구와 정치적 요구를 함께 제기한 . 여기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옹호자로 앞에 나서 새로운 사회의 전망을 제시할 노동자 계급의 역량을 대략 있다.

 

6. 모든 경험들은 진정한 혁명의식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단계들이다. 그러나 방향으로의 길은 여전히 길고 수많은 명백한 환상들과 이념적 취약성들이 걸림돌로 놓여 있다:

 

-         특히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들,  이러한 환상들은 군사독재와 부패한  군주들이 조합되어 지배하는 나라들에서 특히 강력한데, 이곳에서는 비밀경찰이 편재하고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체포, 고문 처형이 일상화되어 있다. 그러한 환상들은 민주주의적 반대파  국가 관리를 위한 대안적인 팀으로 부상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집트의 바라데이와 무슬림형제들, 튀니지의 과도기정부, 리비아의 국민회의등과 같이. 이집트에서는 군대를 국민의 이라고 여기는 환상들이 특히 강하데, 타흐리르광장의 시위대에 대한 군대의 최근의 진압행동들은 확실히 소수의 일부가 이점에 대해 반추하도록 만들것이다. 이집트에서 민주주의의 신화의 중요한 측면은 독립노동조합에 대한 요구인데, 확실히 이러한 조합들은 불신임당한 공식 노조들의 해체를 상당히 정당하게 요구하는 대부분의 전투적 노동자들의 다수를 포함한다;

-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의 환상들, 이는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혁명들 상징으로 국기를,  또는 리비아에서처럼, 가다피의 지배에 반대하는 모든 이들의 상징으로서 왕국 깃발을  채택한 점에서 보여진다. 또한, 이집트에서 무수한 깃발들에서  무바라크를 시오니즘의 앞잡이로 낙인찍는 것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가 계급투쟁의 주의를 전환시켜  제국주의적 충돌로 향하게 하는 중요한 지렛대로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팔레스타인문제를 제기하려는 관심이 그리 느껴지지 않는데, 왜냐하면 지배계급은 지금까지 팔레스타인의 고통을 그들이 자기 국민들에게 부과한 고통들로부터 주의를 돌리는 방법으로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국기들이 나라의 폭동에 대한 연대의 표시로 흔들어졌던  것에서 확실히 어느 정도의 국제주의적인 요소가  있었다. ‚아랍세계와 너머를 가로지르는 폭동의 규모는 국제주의의 물질적인 현실성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애국주의 이데올로기는 매우 적응력있는 것으로서, 이러한 사건들에서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대중적이고 민주적인 형식으로 변모할 있는지를 목격하고 있다.

-         종교에 대한 환상들, 이는 공개적인 기도를 빈번히 이용한 점과  반란의 조직화 장소로서 회교사원을 사용한 점에서 보여진다. 리비아에서는 훨씬 특별하게 이슬람주의 그룹들 (가다피가 주장하듯이 알카이다에 연결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자생적인 그룹들) 반란에서 초기부터 중요한 역할을 것은 명백하다. 이는 부족적 충성심의 역할과 더불어 리비아 노동자계급의 상대적인 허약성과 나라 국가구조의 후진성을 반영한다. 그런데, 라든 변종의 과격 이슬람주의가 무슬림국가들에서 대중들의 비참에 대한 해답이라 자처하는 점을 , 튀니지와 이집트에서의 반란들과  심지어 리비아 그리고  예맨과 바레인과 같은 걸프 국가들에서의 반란들 조차도, 작은 테러리스트 세포들을 통한  실천과 유해한 종파적 이데올로기를 가진 지하드 그룹들은  운동들의 대대적인 성격과  종파주의적 분열들을 극복하려는 진정한 노력들에 의해 거의 전적으로 주변화되어버렸음을 보여준다. 

 

7.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의 현상황은 여전히 진행중의 상태에 있다.��������������������������������������������������������������������������������������������������������������������������������������������������������������������������������������������������������������������������������������������������������������������������������������������������������������������������������������������������������������������������������������������������������������������������������������������������������������������������������������������������������������������������������������������������������������������������������������������������������������������������������������������������������������������������������������������������������������������������������������������������������������������������������������������������������������������������������������������������������������������������������������������������������������������������������������������������������������������������������������������������������������������������������������������������������������������������������������������������������������������������������������������������������������������������������������������������������������������������������������������������������������������������������������������������������������������������������������������������������������������������������������������������������������������������������������������������������������������������������������������������������������������������������������������������������������������������������������������������������������������������������������������������������������������������������������������������������������������������������������������������������������������������������������������������������������������������������������������������������������������������������������������������������������������������������������������������������������������������������������������������������������������������������������������������������������������������������������������������������������������������������하게 선언했다. 가다피 세력이 다시 승세를 보이기 시작하자 비행금지지역을 설정하거나 직접적인 군사적 개입의 다른 형식들을 사용할 것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런데 글을 쓰는 시점에는 EU NATO사이에 깊은 분열이 존재하는 것같은데, 영국과 프랑스는 매우 강력하게 군사적 행동을 선호하고 미국과 독일은 매우 주저하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는 물론 군사적 개입에 원칙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지만 아랍세계에서 벌써 다른 골치거리에 빠져들 위험에 노출되길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 부르조아지의 어떤 부분들은 대량 테러라는 가다피의 저주 지역 전역에서 이상의 다른 소요를 막는 방법일지 궁금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리비아의 사건들과  진정 지역의 전체 상황전개가  세계부르조아지의 기괴한 위선을 폭로했다는 사실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가다피의 리비아를 국제 테러리즘의 온상(이는 사실 맞는 말이었다)이라고 수년간 비난했으면서, 2006 가디파의 심경변화와  대량살상무기폐기 결심은 사담 후세인의 소위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그들의 자세를 정당화하기 위해 씨름하고 있던 미국과 영국같은 나라들의 지도자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토니 블레어는 특히 어제의 미친 테러리스트 리더 당장 껴안았다. 단지 몇년이 지난 지금 가다피는 다시 미친 테러리스트 리더이고 그를 지지했던 자들은 급히 다투어  자신들과 사이의 거리를 두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은 같은 이야기의 다른 판본에 불과하다. 거의 모든 최근의 또는 현재의 아랍 독재자들 미국과 다른 열강들이라는 든든한 뒷배경을 즐겼고 나라들은  지금까지는  튀니지, 이집트, 바레인 또는 사우디 민중들의 민주적 열망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가격폭등과 생필품의 품귀에 의해 자극된, 그리고 어떤 경우들에서는 폭력적으로 진압된, 이라키 쿠르디스탄의 현지배자들을 포함해 미국이 내세운 이라크정부에 대항한 거리 시위들의 발생은 더욱이민주주의적 서방 의해 제조된 공허한 약속들을 드러낸다.

 

10. 크로아티아의 어떤 국제주의 아나키스트들 (자그래브와 기타지역에서 진행중인 시위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적어도) libcom.org 개입해서, 아랍세계의 사건들은 마치 1989 동구에서의 사건들의 재연처럼 보이며, 당시에 모든 변화열망은 민주주의라는 용어로 탈선되었고 이는 노동자계급에게 결코 아무것도 가져다 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번의 새로운 운동 내부에 존재하는 민주주의의 신비화들의 명백한 위력을 놓고 볼때 매우 정당한 걱정이지만   역사적 순간들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놓치고 있다. 무엇보다도 세계 규모에서 계급역량의 외형 수준에서. 동구권의 몰락당시 서방의 노동자 계급은 정치적 수준에서 발전할 없었던 투쟁기의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고, 공산주의의 죽음과 계급투쟁의 종말에 관한 부수적인 켐페인을 거느린 동구블록 붕괴 그리고 자신의 계급 지대 위에서 대응함에 있어 동구지역 노동자계급의 무능력은 그래서 노동자 계급이 국제적으로 장기간 후퇴에 빠지는 것을 도왔다. 그와 동시에, 비록 스탈린주의 체제들 자체가 사실상 세계경제위기의 희생자들일 지라도, 이는 당시 분명하지 않았고 서구 경제에게는 세계자본주의에게 밝은 미래가 열리고 있다는 인상을 제공하는 작전을 펴기에 충분한 여유공간이 있었다. 자본주의 위기의 진정으로 총체적인 성격이 지금처럼 명백히 드러난 적이 결코 없었는데, 이것은 모든 곳의 노동자들이  그들 모두가 본질적으로는 실업, 물가등귀, 세체하에서의 전망부재라는 동일한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있게 만든다.  그리고 지난 7-8년에 걸쳐 우리는 전세계에서 노동자 투쟁의 느리지만 진정한 부활을 경험하고 있는데, 이러한 투쟁들은 80년대와 90년대의 후퇴로 인해 상처를 받은 프롤레타리아의 새세대에 의해 주도되며 이러한 부활로 인해 정치의식화된 증가되는 소수를 다시 전세계적 규모로 출현하고 있다. 이러한 심오한 차이들로 볼때, 아랍세계에서의 사건들이 중심부 국가들의 계급투쟁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보다는 오히려 미래의 발전을 강화시킬 실질적 가능성이 존재한다.

 

-         대대적이고 불법적인 거리행동의 힘을, 세계 지배자들의 평정을 뒤흔드는 능력을 재확인함으로써;

-         획일적이고 생각없는 광신도 무리로서의 아랍인 관한 부르조아의 선전을 파괴함으로써 그리고 이지역 대중들의 토론하고 반성하고 스스로 조직하는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         아랍세계를 향한  곡절을 통해 타산성과 무자비함이 돋보이기게 중심국가들의 리더들의 신빙성을 더욱 침식함으로써;

 

이들 기타의 다른 요소들은 처음에는 중심부 국가들의 노동자들 다수보다는 정치의식화된 소수에게 훨씬 명백할 것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국가와 대륙의 경계를 넘어선 계급투쟁의 진정한 단일화에 기여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것도, ‚민주주의 독립노동조합 기쁨들을 수년간 경험하고, 역사적 정치적 전통들이 넓지는 않을 지언정 깊이 뿌리내려 있으며,  세계제국주의체제의 심장부에 집중되어 있는 선진국 노동자계급의 책임을 경감시키지는 않는다.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노동자계급이 민주주의의 환상들과 단절하고 무산자 민중을 위해 뚜렷한 길을 제시할 있는 능력은 여전히, 중심부 국가 노동자들이 자기조직화되고 정치화된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분명한 예를 제공할 있는 능력에 근본적으로 달려있다.  ICC, 2011 3 11.                                           

 

  

       

 

 

 

 

  

 

 

 

 

스테판 헤셀의 두 책, „분노하라!“와 참여하라“!”에 대하여

스테판 헤셀의 , „분노하라!“ 참여하라“!” 대하여

 분노하기, 그래  자본주의 착취에 대해서!

     작가이자 서정시인 그리고 프랑스외교관인 스테판 헤셀의 글들, „분노하라!“ 참여하라“!” 진정한 베스트셀러들이다.  지금 벌써 글들은 세계의 불의에 대해 고민하는 모든 사람들의 참조점이 되었다. 최근에 스페인전역으로 멀리 퍼져나간 (그리고 그정도는 아니라도 다른 유럽나라들에서 있었던) 사회적 분노의 운동은 심지어 스스로를 분노한 사람들이라고 부르며 헤셀의 첫번째 책과 분명하게 관련지었다[1]. 

   분노하라!“ 대략 30쪽분량의 글이다. 여러 언어들로 번역되었고 되도록이면 많은 보급을 위한 터무니없이 값으로 전세계적으로 수백만부가 팔려나갔다. 책의 출판은 처음부터 매우 성공적이었다. 아주 당연한 이유로, 왜냐하면 책제목 자체가 이미 세계의 야만성에 대항한 절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억압당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확산되는, 그리고 점점 참을 없고 적대적으로 보여지는 세계 전역에서의 가난과 전쟁이 초래하는 공포가 촉발한 그러한 감정에 들어맞는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의 아랍의 봄과 분노한 사람들운동이 이를 증명한다.

 

 

스테판 헤셀은 어떤 사회를 꿈꾸는가?

 

   현재 93살인 스페판 헤셀은 부정의한 세상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표현할 만한 정력을 여전히 갖고 있다.  이렇게 볼때는 오직 경의와 공감을 불러일으킬 밖에 없다. 하지만, 그의  시각으로 우리는 어떤 사회를 위해 투쟁해야 할것인가라는 문제가 논의될 필요가 있다.

   그의 초입부터 이미 스테판 헤셀은 2 세계대전 종결시 국민저항의회(CNR)[2] 경제강령작성의 계기가 원칙과 가치들을 옹호한다. 방침들이 아직도 여전히 현실성을 갖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헤셀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당연히 지난 65년동안 사정이 달라졌다. 오늘날 우리는 레지스탕스 시대의 도전들과 똑같은 도전들 앞에 서있지 않다. 그당시 우리들이 제안한 강령은 오늘날 형태로는 더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이점을 감아버려서도 안된다. 그러나 우리가 그당시 따랐던 가치들은 동일하고 우리는 그것들을 계속 존중해야한다. 그것은 바로 공화국과 민주주의의 가치이다. 각각의 정부들은 이러한 가치를 놓고 평가될 있다. 국민저항의회의 강령에서 특정한 비젼이 제시되었고 비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윤의 독재와 돈의 독재에 맞서는 , 한편에는 극도의 가난과 다른 한편에는 오만한 부가 나란히 존재하는 것에 분노하는 , 경제적으로 봉건적 상태를 탈피하는 ,  진정으로 독립적인 언론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 모든 형태의 사회적 안전을 보장하는  우리가 그당시 지향했던 일련의 가치들와 성취들, 모두가 오늘날 위협당하고 있다. 최근에 결정된 많은 대책들이 레지스탕스시대의 동지들을 경악시키는데, 그것들은 우리의 기본적인 가치들을 겨냥하기 때문이다.  내생각에,  사람들은 특히 젊은이들이 분노해야 한다. 그리고 저항해야 한다!“[3].     그러나 누가 이러한 상황에 책임이 있는가? „이는 오직, 레지스탕스가 맞서 싸웠던 금권력이 지금 어느때보다 막대하고 불손하며 이기적이고 국가 최고위층까지 스며들어 자체의 이익옹호자들을 갖고 있기에 가능해 보인다. 사이 사유화된 은행들은 그들의 배당금과 매니저들의 넘쳐나는 수입만 생각하지 공익에는 관심이 없다. 빈부의 차이는 갈수록 커져가고 돈과 영향력을 향한 노력은 점점 많은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4] 헤셀에 따르면, 민주주의가 지도자들의 행동을 이끌어야 한다는데,  금융계나 은행가들의 이기주의와는 반대로 민주주의는 공중의 이해를 도모하기 때문이란다: „우리는 그들에게 말한다: '그것을 포착하고 분노하라!'라고. 정치, 경제의 책임자들, 지식인들 그리고 사회 전체는 양보해서는 안되며, 평호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현재 금융시장의 국제적 독재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5]  그러니까 이것이 공중의 극도로 성스러운 이해라는 것이다. 정치가, 경제지도자와 노동자, 실업자, 학생, 퇴직자, 비정규직을 결합하는 것이... 바꿔 말하자면, 스테판 헤셀의 민주주의는 하나의 신화이다. 그것은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마치 기적처럼 같은 눈높이로 만나는 상태를 그럴듯하게 그려낸다, 그들이 소위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가지며 금융시장의 독재에 대항해 국민들로서 동일한 민주주의적 이해를 옹호하는 그런 상태를.  그러면 모든 것은 어디로 이끄는가?

   오늘날 고민하고, 글을 쓰고 민주적으로 정부들의 선거에 참가함으로써 우리는 사정을 현명하게 ...간단히 말해서 장기적인 시야를 가지고 이끌어가길 바랄 있다.“[6] 그러면 그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어느 쪽을 지지해야 하는가? „나는 나자신을 여전히 사회주의자로, 내가 개념을 파악하는 바대로, 사회적 불평등을 의식하고 있는 사회주의자로  본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은 자극들을 받아야 한다. 용감한, 필요하다면 '건방진' 좌파가 나타나서 비중을 가지면서 국민의 자유라는 비젼을 주장하기를 나는 바란다. 녹색당이 의회에 진출해서 환경보호 사상이 진전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7] 결국 헤셀의 견해로 볼때 우리의 분노는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구호, 우리는 투표하러 가야 한다를 받아들이는 것을 초래한다. 우리는 국민저항의회(CNR)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그리고, 극좌파, 반국제화주의자, 노동조합주의자들 등등, 자본의 전반적인 이해를 충심으로 옹호하는 당과 조직등 각양각색의 모든 사람들을 포괄하는 새로운 대안적인 강령( 다른 저작으로서 간행될) 찬성해야 한단다. 다행히도, 헤셀이 특히 대상으로 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수많은 젊은이들은 모든 좌파성향의 언설에 귀기울이지 않았고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서 사회주의적 정부들이 하는 짓을 있는 충분한 기회를 가졌었다. 그들은 사회주의 정당들이 어떤 혹심한 긴축정책들을 펼수 있는지를, 게다가 정책들이 완전히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결정되는 것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경험할 있었다(이는 그리스에도 해당된다). 그리고 그들은 민주주의적 사회주의 사파테로정부의 민주적 경찰의 곤봉도 경험해보았다.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헤셀은 계속해서 정당들을 지지할 것을 주장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그로부터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서 어떤 임무들이 생겨나는가? 우리는 그들이 지배자들을 신임하거나 불신함에 있어서 기반하고 있는 가치들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가치들이다. 이러한 가치들의 도움으로 결정권자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있다.“[8]  어떤 영향력을 젊은 세대가 그들에게 그렇게 많은 비참을 강요하는 민주적 국가들에 행사할 수있는가?  아마 눈밖에 장관 한명쯤을 대체할 있을까, 그리고 그다음은? 그것을 통해 진정으로 무엇이 바뀌겠는가?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나라에서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집권하고 있는 것이 우파정부든 좌파정부든 (아니면 남아메리카에서처럼 극좌파정부든) 상관없이, 생존조건의 전반적 악화에 직면한 국민 대다수와 경제의 파산을 모면하기 위해 엄격한 긴축정책을 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국가기구사이의 골은 점점 깊어만 가고 있다. 어떤 다른 길도 없다. 국가의 민주주의적 가면뒤에 자본의 독재가 항상 도사리고 있다.

 

 

자본주의를 손대지는 말것!

 

   나의 세대는 세계혁명이라는 생각에 대해 단단한 알레르기를 갖고 있다. 약간은, 우리가 그것과 함께 태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러시아혁명의 , 1917년에 태어났고, 해는 인격의 특징이다. 나는 우리가 폭력적 혁명적 행동들을 통해서는 기성제도권을 무너뜨릴 없다는, 그렇게는 역사를 추진할 없다는 느낌을, 부당할지도 모르지만,  갖게 되었다.“[9]  약간 나중에 헤셀은 계속해서, „ 모든 사회들 속에는 고삐풀린 나타날 있는 잠재된 폭력이 존재한다. 식민지해방투쟁때가 그러한 경우이다. 폭동들, 예를 들어 노동자폭동들은 아직도 가능함을 의식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경제적 국제화의 진전을 놓고 가능성이 적다. 제르미날이라는 장르는 약간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10]

   그러니까 헤셀이 젊은 세대에게 하는 호소는 다음과 같다. 세계혁명이니 계급투쟁이니 하는생각을 머리에서 지워버려라! 모든 것은 과거사에 속한다. 오히려 체제의 기능방식을 개선하도록 노력하라. 어떻게? 여기서 헤셀은 천재적이고 혁신적인 제안, 모든 좌파정당들이 백년도 되는 동안 해온 제안을 내놓는다. , 세계의 강대국들이 함께 모인 경제회의 사회회의, 일종의 전세계조정위원회의 창립을 제안한다. 세계에서 전세계적 조정위원회가, 위기 방지를 위해 그리고 이윤욕과 권력욕에 사로잡힌 모든 거대 금융기관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 경제규제를 목표로 추구할 것이라 한다. UN 전신인 국가연맹이 1차대전후 공식적으로 거의 동일한 설립이유로 창립되었음을 상기해 보자.  설립이유는 상이한 국가들의 이해를 서로 화해시키는 국제기구의 도움으로 전쟁재발을 방지하자는 것이었다. 결과는? 2 세계대전과  1950년이래 세계에서 14일간의 평화. 사실상 세계는 서로 경쟁하는 국가들로 조각나있고 그들은 서로간에 무자비한 통상전쟁을 끊임없이 그리고 필요시에는 무기를 들고 치르고 있다.   모든 조정하는 세계기구들”(세계통상기구, 국제통화기금, UN, NATO)  안에서 국가들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강탈적인 기구들일 뿐이다.  그러나 이점을 스테판 헤셀은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하나의 새로운 체제의 필요성, 국제적인 혁명의 필요성을 시인해야만 할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이들이 이러한 착취체제 자체를 과격하게 문제시하게 되도록 이끌 출구를 제시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보낸다.  대신에 그는 각국이 새로운 사회- 경제안전보장회의 내에서 새로운 정책을 펼치도록 각각의 국가에 압력을 행사하도록 젊은이들을 고무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국가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의 대대적인 개입, 국민의 광범위한 동원이면 충분하단다. 이러한 참여는 젊은이들이 NGO들와 이런류의 다른 단체들에 대거 참여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는데,  이는 많은 도전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치뤄야할 많은 투쟁들, 환경, 사회, 반인종차별, 평화 연대적인 경제를 위한 투쟁등이 존재하기 때문이라 한다.  실제로 헤셀은 우리에게 낡은 똑같은 개량주의적 뒤범벅을 제공한다. 직접 고른 재료들(국민의 시민참여, 지적인 선거참여 등등) 가지고 자본주의는 자신이기를 착취체제이기를 멈출 있고 인간적이고 사회적일 있다는 것이다.

 

 

개량이냐 혁명이냐?

 

   역사는 이러한 도전의 댓가인 일련의 연이은 격렬한 요동들로 이루어져 있다. 사회사는 전진하고 결국에, 인간이 완전한 자유를 획득한 , 우리는 완성된 민주국가에 도달한다라고 헤셀은 그의 , „분노하라!“에서 우리에게 말한다. 인류가 도전 앞에 서있다는 것은, 그래서 모든 문제들의 해답을 찾아야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라질 것이라는 말은 맞다. 문제의 중심에는 사회변혁의 필요성이 놓여있다. 하지만 어떤 변혁? 자본주의는 개량될 있는가? 아니면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 파괴되어야 하는가?

   자본주의를 개량하려 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이를 행하려는 것은 자본주의의 규칙과 법칙들에, 인류를 비참함과 전쟁과 무질서와 야만에 빠져들게 하는 자본주의의 모순들에 굴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체제는 착취체제인데, 착취가 인간적으로 구성될 있는가?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댓가로 이윤을 만들어냄으로써 계급에게 가능한한 많은 부의 축적을 가능케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그러한 체제가 인간적으로 있는가? 그리고 자본가들 사이에 경쟁이 첨예화되면 노동자계급이 대대적인 실업,  비정규적고용상황의 확대, 노동현장에서의 무제한적인 착취, 임금인하와 같이 댓가를 치르게 되는 그러한 체제가. 동시에, 인간들이 기본요구를 충족시키고 계급없는, 불평등이 없는, 전쟁의 야만이 없는 사회를 민족국가들과 국경을 폐지함으로써 건설할 있을 모든 물질적 수단은 존재한다. 오직 노동자계급만이 그러한 사회의 전망을 실현할 수있다. 맹아는 물론 분노한 사람들운동 속에 이미 존재한다. , 서로 돕고, 서로 나누며 연대감과 헌신을 나타내고, 함께함으로써 즐거운 것등등. 스페인에서 관찰될 있는 인상적인 운동은 짚단의 불같은 일시적 흥분이 아니다. 그것은 전세계 도처에서 앞으로 일어날 투쟁들을 알린다. 노동자계급이 점점 대대적으로 나서서 다른 피압박 계층들을 함께 합류시킬 투쟁들을. 투쟁들은 비인간적인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해 점점 분명하게 나설 것이다. 그러한 투쟁들로부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커다란 의식이 생겨날 것이다.

Antoine. 2011 7 2

 

    



[1]스테판 헤셀은 스페인에서 상당히 유명하다. 적어도 프랑스에서만큼 알려져 있다.  그는 스페인에 살고 있고 스페인의 작가이자 특히 지금 진정한 민주주의를의 창시자이기도 경제학자 호세 루이 삼페드로와 친구로 지낸다. 호세 루이 삼페드로는 헤셀의 캠페인에서 영감을 얻은 팜플렛을 간행했고 분노하라“!” 스페인어판에 서문을 썼다.

[2]CNR 스테판 헤셀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준거점이고 뒤따라야할 모범이다. 우리는 나중에 이점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3]Indignez-Vous!(분노하라!) , 15

[4]같은 , 11

[5]같은 , 12

[6]Engagez-Vous(참여하라)!,  16

[7]위과 같은 43쪽과 44

[8]Engagez-Vous(참여하라)!, 22

[9]같은 , 20

[10]같은 , 21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과의 연대 – 미래는 노동자 계급에게 있다!

대중매체는 오바마의 '의기양양한' 유럽방문이나 성추행혐의로 구속된 IWF총재 도미니크 스트라우스-칸 스캔들로 가득차 있는 반면 유럽을 강타하는 진정한 지진에 관해서는 우리에게 그리 많이 알려주지 않는다. 이 지진은 스페인에 중심을 두고 있지만 그리스에 직접적인 반향을 갖고 있으며 다른 나라들에서도 일어나려 위협한다.

 

 

스페인에서의 사건들은 실업, 사파테로정부의 긴축정책 및 정치가들의 부정부패등에 대해 반항하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마드리드의 푸에르따 델 솔(태양의 문) 광장을 점거하면서 515이래 전개되고 있다. 이 사회운동은 소셜네트워크(페이스북, 트위트...)와 유튜브에 올려진 비디오들을 활용해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그라나다, 세비아, 말라가, 네온과 같은 스페인의 대도시로 들불처럼 빠르게 번져나갔다. 그리고 이런 방식을 통해서 우리는 스페인밖에서 그 운동에 대해 정보를 얻는다. 왜냐하면 부르조아 매체들은 이 사건들에 대해 상당히 많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체들이 오히려 오바마나 도미니크 스트라우스-칸이나 셔릴 콜의 여행으로 쪽으로 우리들의 관심을 돌리려 한다면, 그 이유는 스페인에서의 이러한 운동이 자본주의라는 막다른 골목에 직면한 세계노동자계급의 투쟁과 사회투쟁들의 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한 한 단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운동의 전제들

 

스페인에서 “분노한 사람들”의 운동은 연금개혁안에 대항해 일어난 2010929일의 총파업이래 무르익어왔다. 이 총파업은 노조가 정부와 협상하여 개혁안(40-50세의 현노동자들은 그들이 정년퇴직시 현재 연금수령자들보다 20% 낮은 연금을 받게되는 것)을 수용함으로써 패배로 끝났다. 이러한 패배는 노동자계급 내에 깊은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특히 노동자들의 피켓과 함께, 연대감을 표현함으로써 그 파업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했던 젊은이들 사이에서 심오한 분노를 유발했다.

 

2011년 초부터 그러한 분노는 대학들에서 날카로와지기 시작했다. 지난 3월 포르투갈에서는 '비정규직 젊은이들'이라는 그룹이 제안한 시위에 리스본에만 25만명이 모여들었다. 이 예는 스페인의 대학들에, 특히 마드리드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대다수의 학생들과 30대 미만의 젊은 이들은 시간제 일을하며 월 600유로로 살아야만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여명의 학생들이 '호베네스 신 푸투로' (미래없는 젊은이들)이라는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다. 주로 노동자계급출신인 이 가난한 학생들은 47일 시위를 소집했다. 5천명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들었고, 이렇게 처음의 동원이 성공함으로써 호베네스 신 푸투로 그룹은 515일 시위를 계획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마드리드에서 데모크라시아 레알 야(진정한 민주주의를 지금)이라는 공동체가 출현했다. 그것의 강령은 실업과 “시장의 독재”를 비판하지만 좌파도 우파도 아닌 “비정치적”임을 주장한다. 데모크라시아 레알 야 역시 다른 구역들에서 515일에 시위를 할 것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5만명의 시위대가 참가함으로써 거대한 성공을 이룬 것은 마드리드에서 였다. 처음의 의도는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서 조용히 끝나는 평화적인 행진을 하는 것이었다.

 

민중 전체에게로 번진 '미래없는' 젊은이들의 분노

 

데모크라시아 레알 야 공동체가 호소한 515일의 시위들은 굉장한 성공이었다. 그들은 일반적인 불만을, 특히 졸업과 함께 실업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의 전반적인 불만을 표출했다. 모든 것은 그곳에서 끝나게 되어있었지만 마드리드와 그라나다에서의 시위들의 끝에는 작은 '블랙 블록' 그룹들에 의해 유발된 사건들이 발생해서, 경찰 개입으로 20명이 체포되었다. 체포된 사람들은 경찰서에서 잔인하게 다뤄졌고 그 이후 이들은 경찰폭력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성명서의 공개는 즉각적으로 분노의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공권력에 대항한 연대를 확산시켰다. 전혀 알려지지 않고 조직화되지도 않은 사람들 30명이 푸에르타 델 솔광장에 캠프를 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발의는 즉시 사람들의 동감을 얻었고 이러한 예는 바르셀로나, 그라나다 및 발렌시아로 확산되었다. 경찰의 제 2차 진압은 도화선에 불을 붙혔고 그이후 중앙광장들에 점점 더 증가된 대대적인 집회들이 70개 이상의 구역들에서 개최되었다.

517, 화요일 오후에 '515일 운동'의 조직자들은 조용한 시위나 다양한 극적 퍼포먼스들을 가질 계획이었지만, 광장들에 모여든 군중들은 집회를 갖자고 소리높혀 외치기 시작했다. 저녁 8시 집회들이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및 다른 도시들에서 개최되기 시작했다. 18일 수요일부터는 참으로 이러한 집회들이쇄도하게 되었다. 모든 곳에서 집회들은 공공장소에서의 공개적인 총회의 형식을 띠었다.

 

경찰의 진압에 직면하여 그리고 시 및 지방선거를 앞두고, 데모크라시아 레알 야 공동체는 스페인의 “민주주의의 퇴행”이라는 테마를 둘러싼 논쟁을 시작했다. 그것은 프랑코체제의 붕괴이후 34년간의 “불완전한 민주주의”이후 “진정한 민주주의”를 외치며, 사회당(PSOE)과 우익 대중당에 의해 독점된 2당체제를 끝장내기 위한 선거개혁을 요구했다.

 

그러나 '분노한 자들'의 운동은 대부분 데모크라시아 레알 야의 민주주의적 개혁주의적 강령을 뛰어넘었다. 그것은 “600유로세대”의 반란으로 제한되지 않았다.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말라가, 세비아등의 점거된 광장들과 시위들에서, 플랜카드와 기치들 위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볼 수 있었다: “자본없는 민주주의!”, “PSOEPP, 다같은 쓰레기!”, “너희들이 우리들의 꿈을 방해한다면, 우리는 너희들의 잠을 방해할 것이다!” , “모든 권력을 총회로!”, “문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문제는 자본주의다!”, “일자리가 없다, 집이 없다, 두려움도 없다!”, “노동자들이여 깨어나라!”, “ 600유로, 지금 그것은 폭력이다!”

발렌시아에서 한 여성그룹은, “조부모들이 속임을 당했다, 그들의 자식들도 속임을 당했다, 그 손자손녀들도 속임을 당하게 해서는 않된다!”라고 외쳤다.

 

대중집회들은 “미래를 짊어진 무기”

 

부르조아 민주주의에서는, 선거공약을 결코 지키지 않고, 무자비하게 깊어만 가는 경제위기로 인해 요구되는 긴축계획을 그저 계속 실행하는 정치가들 사이에서 4년마다 “선택”하는 것으로 “정치 참여”는 축소된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면전에 스페인에서의 '분노한 사람들'의 운동은 공개 총회라는 노동자계급의 투쟁무기를 자생적으로 재충당했다. 모든 곳에서 대대적인 도시 집회들이 출현해서, 모든 세대, 모든 비착취사회계층들을 아우르며 수만명의 사람들을 재조직했다. 이러한 집회들에서는 누구나 발언하고, 분노를 표출하고 상이한 문제들에 대해 논쟁하고 제안들을 제시할 수 있다. 전반적인 발효라는 이러한 대기 속에서 혀가 자유로와진다. 사회 생활의 모든 측면(정치적, 문화적, 경제적...)들이 점검된다. 광장들에서 연대와 상호존중의 기운 속에서 토론된 생각들의 거대한 집단적 물결이 넘쳐났다. 몇몇 구역들에서는 “아이디어 상자들”이 설치되었는데, 여기에는 누구나 종이에 그들의 생각들을 적어서 집어넣을 수 있다. 운동 자체가 매우 지혜롭게 스스로를 조직한다.

모든 종류의 문제들에 대해 위원회들이 만들어졌고, 공권력과의 비조직화된 충돌을 방지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총회 내에서의 폭력이 금지되고, 음주도 “라 레볼루시옹 노 에스 보테이온”(대충 번역하자면, “혁명은 곤드레 만드레 만취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기치로 금지된다. 매일 청소팀들이 조직된다. 공공매점들이 식사를 제공하고, 자원봉사자들이 어린이들을 위해 보육시설을 세운다. 도서관과 “타임 뱅크”가 세워져서, 여기서 과학, 문화, 예술, 정치 및 경제 등 모든 종류의 문제들에 대해 토론이 이뤄진다. “반성의 날”들이 계획되어 있다. 모든이가 그들의 지식과 기술을 함께 나눈다.

 

표면적으로는 이러한 사색의 폭발이 아무것도 초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구체적인 제안들이나 직접적으로 실현가능한한 요구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일어나고 있는 것은 그 분명히 무엇보다도 가난에, 긴축안들에, 현사회질서에 대해 느끼는 거대한 염증이다. 그리고 동시에 사회적인 원자화를 돌파하려는, 그래서 함께 모여서 심사숙고하려는 집단적인 의지이다. 많은 환상들과 혼돈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말 속에서 그리고 플랜카드와 기치들 위에서 “혁명”이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집회들에서, 논쟁들은 다음과 같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을 제기했다:

·         민주주의의 퇴행”에 우리들을 제한해야만 하는가? 문제들의 근원이 개량될 수 없는 완전히 파괴되어야만 하는 체제인 자본주의 자체에 있지는 않는가?

·         이 운동은 선거후인 522일에 끝나야만 하는가 아니면 계속 진행되어 생존 조건들에 대한 공격, 실업, 비정규직화, 퇴출에 대항한 대대적인 투쟁으로 발전해야 하는가?

·         집회를 작업장으로, 이웃으로, 취업 사무실로, 고등학교로, 대학교로 확대해야 하지 않는가? 전반적인 투쟁을 끌어낼 역량을 가진 노동자들사이에 운동을 뿌리내려야 하지 않는가?

 

집회들에서의 논쟁들에서 두가지 경향들이 매우 분명하게 나타났다:

·         그중 하나는 비프롤레타리아 사회계층들에 의해 활성화된 보수적인 경향으로서, 자본주의 체제가 “민주주의적인 시민혁명”에 의해 개량될 수 있다는 환상을 씨뿌린다.

·         다른 하나는 프롤레타리아적 경향으로서, 자본주의 철폐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선거당일인 522일 개최된 집회들은, “설혹 선거가 분출구라 할지언정, 그것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 ”라며 운동의 계속을 결정했다. 프롤레타리아적 경향은 실업, 비정규직화, 사회적 공격들에 대항한 요구들을 제시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을 향해 나아가는” 제안들 속에서 스스로를 분명히 했다.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서는 지역들에서 “대중집회”를 조직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작업장에서, 대학교에서, 취업 사무실에서 그와 같은 것을 하자는 제안들이 이뤄졌다. 말라가, 바르셀로나 및 발렌시아에서 집회들이 사회 임금감축에 대항한 시위를 조직하는 문제가 제기되어, 발언자들 중의 한명의 표현을 빌자면, “이번에는 진짜인 ” 새로운 총파업을 제안했다.

 

스페인의 산업적 수도인 바르셀로나에서, 카탈로니아 광장의 중앙집회는 가장 과격했고, 프롤레타리아 경향에 의해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민주주의의 퇴행”이라는 환상으로부터 가장 거리가 먼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텔리포니카의 노동자들, 병원노동자들, 소방관들, 사회적 삭감에 대해 싸우는 학생들이 바르셀로나 집회에 합류해서 그것에 다른 음색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525일 카탈로니아 광장집회는 병원노동자들의 파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을 결정한 반면, 마드리드의 푸에르타 델 솔 광장 집회는 참여적이고 “수평적인” 민주주의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이웃지역에서 “대중 집회들”을 이끌어냄으로써 운동을 탈중심화할 것을 결정했다. 발렌시아에서는 시위하는 버스노동자들이 학교예산 삭감에 대항한 지역 주민들의 시위에 함께 했다. 사라고사에서는 버스 운전사들이 마찬가지로 열광적으로 집회들에 합류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분노한 사람들“이 615일까지 캠프를 유지하고 카탈로니아광장의 점거를 계속할 것을 결정했다.

 

미래는 노동자계급의 젊은 세대들의 손안에

 

이 운동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든지, 그 결과가 어떠하든지, 실업(스페인에서 20-25세 인구중 45%가 실업상태)에 직면한 젊은 세대에 의해 시작된 이 반란이 확실히 노동자계급 투쟁의 일부임은 명백하다. 계급의 국제적 운동에 대한 그것의 기여는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모든 비착취 사회계층들,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모든 세대들을 아우른 전면화된 운동이다. 비록 계급이 “대중적인” 분노의 물결의 일부였고, 대대적인 파업들과 특정한 경제적 요구들을 통해 스스로를 확언하지는 않았을 지라도, 이 운동은 여전히, 세계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의 의식의 진정한 성숙을 표현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점점 더 명백해지는 파산에 직면해 상당수의 사람들이 서유럽의 “민주주의” 나라들에서 떨쳐일어나기 시작해서 프로레타리아 투쟁의 정치화를 향해 길을 열어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운동은 그 절대다수가 비정규직 노동자이거나 실업자인 젊은이들이 노동자계급의 무기들, 즉 대대적이고 공개적인 총회들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무기들을 통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연대를 확인하고 정치적 정당들과 노동조합의 외부에서 운동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었다.

 

비록 소수 중에서 일지라도, 그 운동 내부에서 출현한, “모든 권력을 집회들로”라는 슬로건은 러시아 혁명의 옛슬로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의 리메이크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옛 동구권의 스탈린주의 체제의 붕괴 이후 부르주아 캠페인의 무게 때문에) 여전히 “공산주의”라는 단어를 두려워할 지라도, 그와는 반대로 “혁명”이라는 단어는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운동은 데모크라시아 레알 야 공동체가 주장하는 그러한 “스페인 혁명”이 결코 아니다. 착취당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실업, 비정규직화, 높은 생활비용 및 생활조건의 끊임없는 악화는 결코 스페인만의 특수성은 아니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실업이라는 어두운 얼굴은 마드리드에서와 마찬가지로 카이로에서, 파리뿐만 아니라 런던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 뿐만 아니라 아테네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이러한 하향 나선 속에서 모두 함께이다. 우리는 모두가 자본주의 사회의 부패에 직면하고 있는데, 이러한 부패는 가난과 실업에서뿐만 아니라 재앙과 전쟁의 증가 속에서도, 사회관계들의 혼란과 증대되는 도덕적 야만성(이는 무엇보다도, “3세계”와 “선진”국가들 모두에서 여성들에 대한 성적 공격과 폭행에서 표현됨)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낸다.

 

분노한 사람들”의 운동은 혁명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없는” 젊은이들에게 그리고 인류 전체에게 전망을 열어줄 수 있는 유일한 투쟁인, 세계 규모의 노동자계급투쟁의 발전에서 단지 하나의 새로운 단계이다.

푸에르타 델 솔의 독립공화국”에 관한 그 모든 환상들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새로운 사회의 지평이 낡은 사회의 내장 속에서 그 형상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스페인 지진”은, 잃을 것이 없는 노동자 계급의 신세대들이 역사라는 무대 위에서 이미 배우들로 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인류의 해방의 길을 정화할 훨씬 더 거대한 폭풍들의 선봉들이다.

인터넷, 소셜네트워크 그리고 핸드폰의 활용을 통해 이 젊은 세대는, 부르주아지와 그 매체들의 침묵을 돌파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국경을 넘어선 연대의 기초를 놓았다.

이 새로운 세대는 2003년부터 국제 사회의 무대에 등장했는데, 처음에는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에 대한 군사적 개입에 대항한 항의들(많은 나라들에서 젊은이들이 부시의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음)에서 그런 다음은 프랑스 연금개혁에 대항한 최초의 시위들에서였다. 이는 2006년 같은 나라에서 CPE에 반대하는 대학생 및 고등학생들의 대대적인 운동과 더불어 재등장했다. 그리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영국에서 수학중인 젊은이들은 자본주의가 그들에게 제공하는 절대빈곤과 실업이라는 미래에 대항하여 목소리를 높혔다.

이 “미래없는” 세대의 밀물결은 최근 튀니지와 이집트를 강타해서 벤 알리와 무바라크를 넘어뜨린 거대한 사회반란을 낳았다. 그러나 주요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부르주아지(특히 바락 오바마)가 벤 알리와 무바라크를 버리도록 강제한 결정적인 요소는 노동자 파업들의 출현과 총파업운동의 위험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이후, 타흐리르 광장은 여러 나라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젊은 세대들에게 하나의 상징이 되었고, 투쟁을 고무하는 것이 되었다. 이것을 모델로 삼아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은,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 캠프를 쳤고, 70여 구역들의 주요 광장들을 점거했으며, 모든 억압받은 사회 계층들을 집회들로 끌어들었다(바르셀로나에서는 “분노한 사람들”이 심지어 카탈로니아광장을 “플라사 타흐리르(타흐리르 광장)”으로 이름을 바꿔부르기도 했다).

스페인에서의 운동은, 사실,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서 결정화된 극적인 반란보다 훨씬 더 심오하다. 그것은 두 대륙을 잇는 다리인 이베리아 반도의 주요 국가에서 발생했다. 그 운동이 서유럽의 “민주주의”국가(게다가 “사회주의” 정부가 이끄는!)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은 튀니지에서의 “재스민 혁명”이래 매체들에 의해 전개되는 민주주의적 신비화들을 침식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데모크라시아 레알 야가 이 운동을 “스페인 혁명”이라 부를 지라도, 스페인 국기는 거의 나부끼지 않았던 반면, 타흐리르 광장은 국기가 물결쳤다.1

이 운동을 동반하는 불가피한 혼동들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오늘날 사회투쟁들의 사슬에서 하나의 매우 중요한 연결점이다. 자본주의의 세계적 위기의 악화와 더불어 이러한 사회운동들은 점점 더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과 만나게 되고 그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이 “분노한” 세대에 의한 용기와 결단과 깊은 연대감은 다른 세계가 가능함을, 세계 인류공동체의 통일인 공산주의가 가능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인류의 이 오랜 꿈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사회의 모든 부의 본질적인 것들을 생산하는 계급인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의 모든 공격들에 대항해 대대적인 투쟁들을 전개함으로써 그 계급 정체성을 재발견해야 한다.

분노한 사람들”의 운동은 다시 한번 혁명의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의 타도를 목표로, 운동에 분명한 계급적 방향을 부여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달려있다. 상품생산과 이윤에 기반한 이 착취체제를 무너뜨린 그 폐허 위에서만 새로운 세대들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고, 진정 보편적인 “민주주의”를 성취하고 인류에게 존엄성을 회복시킬 수 있다.

Sofiane, 2011527

 

 

1반면에, 우리는 “세계 혁명”을 요구하며 국경을 넘은 운동의 “확대”를 주장하는 슬로건들도 보았다. 모든 집회들에서 “국제”위원회가 하나씩 만들어졌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대도시들에서, 심지어 도쿄, 프롬펜과 하노이에서 연대 시위를 볼 수 있었다.

 

ICConline - 2012

ICConline 2012

2011년: 분노에서 희망으로

년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자본주의 세계위기의 첨예화 그리고 튀니지, 이집트, 스페인 그리스, 이스라엘, 칠레, 미국, 영국에서의 사회운동들이다.(1)

 

국제적인 차원의 분노

자본주의의 위기의 결과들은 세계인구의 절대다수에게 매우 혹독하다. 생활조건들이 악화되고, 실업은 점점 양상을 띠고 지속기간 또한 길어저서, 최소한의 안정성도 기대할 없는 비정규직화가 점점 깊이 잠식하고 있다. 극도의 가난과 굶주림이 만연한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안정적이고 정상적인삶의 가능성이 그리고우리 아이들을 위한 미래 가능성이 사라져가는 것을 근심어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이는 심각한 분노를 야기했고 수동성을 돌파하고 광장과 거리들을 점거하려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지난 5 이래 극도로 첨예화된 위기의 원인들에 관한 문제들을 토론하려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러한 분노는 은행가들과 정치가들 그리고 기타의 자본가계급 대표자들이 명백히 드러낸 오만과 소유욕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한층 격화되었다. 그러나 심각한 사회문제들에 대해 정부들이 보여준 무능력으로 인해서도. 정부들의 대책들은  어떤 해답도 제시하지 못한 오직 빈곤과 실업만을 심화시키고 있다.

분노한 사람들의 운동은 국제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사회주의적 정부가 최초의 혹독한 긴축정책을 펼치려 안간힘을 쓰던 스페인에서 시작되었다. 그런 다음 부채위기의 상징인 그리스에서, 세계자본주의의 전당인 미국에서, 근동의 가장 극심하고 가장 오랜 제국주의적 충돌의 인접국가들인 이집트와 이스라엘에서.  특히 이집트에서는 아랍의 봄이후 운동의 새로운 동력으로 작용했다.

이것이 세계적인 운동이라는 의식은, 민족주의의 파괴적인 무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와 이집트, 그리고 미국에서 국기를 흔들었던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널리 확산되었다. 스페인에서는 그리스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가 다음과 같은 슬로건들로 표현되었다. „아테네여 견뎌라, 마드리드가 떨쳐 일어난다!“  2011 11 미국 오클랜드에서 파업노동자들은전세계의 점거(Occupy)운동과의 연대 외쳤다. 이집트에서는 미국의 운동에 대한 카이로의 연대선언이 의결되었다. 이스라엘에서는네탄야후, 무바라크, 아사드는 모두 똑같은 도당들이라고 외쳐졌고 팔레스타인의 노동자들과 연락을 취했다.

현재로서는 투쟁들의 최절정이 지난 상태이다. 그리고 비록 새로운 투쟁들의 증후들이 스페인과 그리스와 멕시코등에서 있긴 하지만, 많은 이들은 다음과 같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분노의 저항물결이 무슨 소용이 있었는가?“, „우리가 무언가를 얻었는가?“

운동의 긍정적인  측면들뿐만 아니라 약점과 한계 또한 알아보기 위해서 대차대조를 통한 결산을 해볼 필요가 있다.

광장을 점거하자“ – 운동의 공통된 슬로건

그처럼 광범위하고 다양한 주도성들은, 자체의 이해를 모도하며 우리를 통제하는 환상과 혼란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서 거리와 광장을 점거하는 같은 주도성들은 지난 30여년 이래 처음이었다.

패배한, 무관심하고 무기력한사람들로 표현되었던 사람들, 노동자들, 착취당하는 자들, ‚주도성을 발휘하고 무언가를 함께 이뤄내기에는 무능한 그자들이 결집하고 공동으로 주도성을 발휘해서 체제의 일상성이 우리에게 부과한 수동성을 깨뜨릴 있었다.

이는 우리의 기운을 북돋웠고, 우리 자신의 능력들에 대한 자신감을 강화시켰다. 우리는 대중의 공동 행동이 발산하는 권력을 발견했다. 사회적인 분위기가 바꼈다. 공공의 주제들에 대한 정치가와 전문가와대지도자들의 독점이 서서히, 스스로 발언하기를 원하는 수많은 무명인들에 의해 의문시되었다.(2)

확실히 이는 여전히 쉽게 부서져버릴 모르는 여린 출발점이다.  환상, 혼란,  기운의 불가피한 기복, 억압, 탄압력들과 자본주의 국가들이 우리를 유인하려는 위험한 함정들 ( 선두에 좌파정당과 노동조합들이 있는) 반동과 쓰디쓴 패배를 야기할 것이다. 우리는 길고 험난한 앞에 있다. 난관으로 가득찬 하지만 승리의 보장이 없는.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첫번째 승리이다.

 집회운동의 심장

집회들은 단지 불만들을 표출하는 수동적인 태도에 스스로를 국한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집회들 속에서 조직한다는 능동적인 태도가 발전했다. 다양한 집회들은 1864년의 1 인터네셔널(국제노동자연합) 주요이념, ,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들 스스로의 일이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렇게 해서, 파리콤뮨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1905년과 1917 러시아에서 최고조에 도달했으며 1918 독일에서 그리고  1919년과 1956 헝거리에서, 그런 다음 1980 폴란드로 이어져 노동자계급의 이러한 전통이 계속된다. 

총회와 노동자평의회는 노동자투쟁의 진정한 조직형식이며 새로운 사회 조직형식의 핵심이다.

총회들을 통해 우리는 대대적으로 결합하고, 우리를 임금노예제에 얽매고 있는 사슬들을 파괴하며, 파편화, 각자 살궁리만 하는 폐기하고, 제각각의 영역들이나 사회적 범주들의 게토 속으로의 고립을 극복하는 것을 도모할 있다.

총회들을 통해 우리는 공동으로 고민하고, 토론하며 결정하는 것을 도모할 있다. 이루어진 결정들에 대해 집단적으로 책임을 지며, 결정과 실행에 모두가 참여할 있다.

총회들을 통해 우리는 투쟁의 추진에 필수 불가결할 뿐만 아니라 미래의 계급과 착취없는 사회의 기둥 역할을 상호신뢰와 전반적인 공감과 연대를 만들어갈 있다.

2011년에 폭발적인 전정한 연대가 있었는데, 이는 지배계급이 설교하는 위선적이고 이기적인연대와는 전혀 무관하다. 예를 들어, 마드리드에서는 체포된 사람들의 방면을 위하거나 경찰이 난민들을 체포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시위들이 있었다. 또한 스페인과 그리스 그리고 미국에서는 주거장소로부터의 강제이주를 막기 위한 대대적인 회합들이 있었다. 미국 켈리포니아의 오클랜드에서는, „파업집회에서 다른 작업장들로 파업파괴저지원파견이 결정했고, 직원들이나 학생들을 11 2일의 총파업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처벌한 작업장이나 대학을 점거할 것이 결정되었다. “  또한, 비록 아주 간헐적이고 짧게 지속되긴 했어도,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가진 동지들에 의해 지지되고 보호된다는 느낌을 함께 느꼈던 순간들이 있었고, 이는 불안감과 무방비상태와 가망없음이 지배적인 사회의정상적인 상태와는 전적으로 정반대였다.     

 논쟁문화는 미래을 밝히는 능불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세계를 변혁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의식은 우리가 계몽된 지도자의 말을 귀기울여 듣거나 그의 지침들을 따른다고 해서 도달될 없다. 오히려 대대적인 논쟁에 의해 동반되고 그러한 논쟁으로 이끌어지는 투쟁들을 경험함으로써 발생한다. 예전의 투쟁경험이 참작되지만 또한 시선은 앞에 놓인 미래를 향하게 됨으로써 이뤄진다. 이는 스페인에서, „혁명없이는 어떤 미래도 없을 것이다 같은 슬로건들로 표현되었다.

논쟁문화, 상호존중과 경청에 기반한  공개토론은 총회 안에서 싹트기 시작할 뿐만 아니라 주변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동도서관과 소모임과 회합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많지 않은 기술적인 설비로 수많은 인문적 활동들이 크다란 즉흥적 창의력을 바탕으로 거리와 광장들에서 시작되었다.  총회들에서 그렇듯이 이는 노동자운동의 이전 경험들로의 재연결을 의미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억압되어 있던 지식열이 혁명 속에서 격렬하게 분출되어 나왔다. 스몰리대학으로부터만도 6개월동안 매일 수톤에 달하는 트럭의 책들이 지방으로 보내졌다.  러시아는 뜨거운 모래가 물을 빨아들이 듯이 물릴줄 모르게 모든 읽을 거리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그렇게 삼키듯 읽힌 책들은 우화집들이 아니었다, 거짓된 역사책도  지루한 종교책도 아니였다, 풍기문란을 유발하는 소설책도 아니였다.  그것은 사회 경제 이론들, 철학서들, 톨스토이와 고골과 고리키의 책들이었다…“( 리드,“ 세계를 뒤흔든 10“, 1)

성공모델 위해 투쟁하는 듯하지만 자꾸 수백만번 실패하는 사회의 문화에 대해서, 지배 이데올로기와 매체가 우리에게 주입시키려드는  소외된 전형들과 위조에 대항해서, 수천의 사람들이 자체의 비판적이고 독립적인 척도를 제시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그들 스스로가 담지하는 전정한 민중문화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이러면서 위기와 뿌리, 은행의 역할 등과 같은 주제들이 다뤄졌다. 마찬가지로 혁명에 대해서 토론되었는데, 이때 문제에 대한 모든 가능한 견해들이 출현했는데, 이는 많은 혼란들을 표현했다.  민주주의와 독재에 대해서도 논의되었다. 그렇게 해서 상호보완적인 다음과 같은 문구들이 출현했다. „그들은 그것을 민주주의라 부르지만 그것은 전혀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독재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 계략과 거짓과 모호함, 지배계급의 정치를 특징짓는 짓거리들의 세계와는 전혀 무관한, 다수의 진정한 정치가 시작되기 위한 최초의 발걸음이 내디뎌졌다. 이러한 접근법에서, 경제나 정치분야뿐만 아니라 환경파괴나 윤리, 문화, 교육, 건강부문등 우리와 관련된 모든 주제들이 모두 다뤄진다.       

 미래는 노동자계급의 손에 놓여있다

지금까지 서술된 것과 같은 2011년의 운동의 전개가 해를 희망의 시작의 해로 만든다면,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운동들의 매우 크다란  한계와 약점들을 인식하기 위해 진지하고 혜안적이며 비판적인 시선을 운동들에 던질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가  낡은 체계임을 그리고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본주의가 극복되어야   전세계의 점점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는 반면, 많은 이들은 여전히 자본주의를 한줌의“ (가차없음, 금융상어, 비정한 독재자들 )으로 환원시킨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전체적으로 심원하게 변혁되어야만 하는 복잡한 사회관계망이다.  다양한 현상들 (금융, 투기, 정치경제계 지도자들의 부정부패) 인해 혼돈에 빠져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힘을 허비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든 구멍들을 통해 휘몰아쳐 나오는 폭력(억압, 테러와 테러리즘, 윤리적 야만) 마땅이 거부되어야 하지만, 체제가 오직시민들 평화로운 압력만으로 척결될 있을거라고 믿어서는 안된다. 소수일 밖에 없는 지배계급은 그들의 권력을 순순히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4년이나 5년마다 있는 선거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국가의 배후에 있다. 결코 지키지않을 공약을 내세우고 예고하지 않은 일들을 처리해버리는 정당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지배계급의 다른 기둥들은  기상을 저하시키기위해 노동자들을 동원하고 지배계급이 서명하라고 내놓는 모든 것에 서명하는 노조이다. 오직 대대적이고 집요하며 끈질긴 투쟁만이, 국가의 존재를 떠받치고 있는 억압수단을 파괴하는데 필수적인 힘을 착취받는 사람들에게 제공할 있다. 오직 그렇게만 그들은 스페인에서 항상 다시 등장하는 슬로건, „모든 권력을 총회로  실현할 있다.

비록 미국의 점거(occupy)운동에서 그렇게 인기가 있었던 슬로건우리가 99%(상위의 소수 1% 대비해서)“ 통해,  사람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깊은 계급격차들을 서서히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긴 할지라도, 저항운동 참가자 대부분은 스스로를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 사는 사회에서 인정받기를 원하는아래로부터의 시민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는 계급들로 나누어져 있다. 편에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는 자본가계급이, 다른 한편에는 모든 것을 생산하지만 점점 빈곤해져가는 착취받는 계급, 노동자계급이 존재한다. 사회발전의 동력은 대다수 시민의 결정이라는 민주주의 놀음 ( 놀음은 오히려 지배계급의 독재를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가면에 다름 아님) 아니다, 그것은 계급투쟁이다.

사회운동은  가장 중요한 착취받는 계급,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참조점으로 하여 수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계급은 함께 사회의 주요한 부를 생산하고, 공장, 병원, 학교와 유치원, 대학들, 사무실, 항구, 건설산업, 운송 우편등  사회생활이 기능하도록 담보한다. 2011년의 몇몇 운동들에서 힘이 싹틈을 예감할 있었다.  이집트에서 분출해서 무바라크의 퇴진을 결과시킨 투쟁물결.  미국 켈리포니아의 오클랜드에서 점거자들은 총파업을 외쳤고, 항만이 마비되었으며 항구의 종사자들과 화물차운전자들에게 능동적인 지원이 요구되었다. 런던에서는 파업중의 전기기사들과 세인트 성당의 점거자들이 공동의 행동을 위해 함께 모였다. 스페인에서는 광장 집회들에서 투쟁중인 특정 영역들을 단합시키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현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과 자본주의사회의 억압에 고통받는 사회계층들의 근본적 욕구들사이에는 어떤 대립도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결코 이기적인 운동이 아니라, 오히려엄청난 다수의 이해를 위한 엄청난 다수의 자립적인 운동 기초이다. (공산주의 선언, MEW, 4, 472)

현재의 운동은 2백년간의 노동자투쟁의 경험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여 교훈을 얻음으로써 이전의 투쟁들과 해방시도들로부터 배울 있다. 길은 기나 길고 장해물로 가득차 있다. 그로부터 스페인에서 항상 다시 들리는 슬로건이 생겨났다. , „우리가 천천히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길이 것이다(No es que vamos despacio, es que vamos muy lejos)“   우리는 집요하게 새로운 운동을 준비하기 위해서  어떤 염려나 두려움 없이 가능한한 광범위하고 깊이 있게 논쟁해야 한다.  오직 그렇게만이 자본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를 위한 기초가 세워질 있다.

2012 3 12

ICC  

 

(1)    인터네셔널리뷰 148호의 , „경제위기는 끝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체계의 종말을 그리고 세로운 세계를 위한 토쟁을 고시한다참조. 체계의 세계적 위기와 연관되어 후쿠시마사태는 인류가 직면한 거대한 위험들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2)    시사잡지 타임(The Times) „2011년의 인물분노한 자들운동의 참가자들을 선택한 것은 시사하는 점이 많다.

             

      

 

 

               

 

 

 

애국의 서커스

:ICC

번역: 사노신(https://sanosin.jinbo.net)

[국제],[ 번역]

애국의 서커스

2012 런던 올림픽이 한창이다. 이에 따라 한국의 모든 언론들 역시 올림픽 메달 소식과 오심 소식을 전하느라 바쁘다. 사람들의 시선이 올림픽에 집중되어 있는 동안컨택터스라는 경비업체는 SJM 노동자들에게 극도의 폭력을 가했고 사실을 보도한 언론은 많지 않았다. 올림픽 이슈가 다른 중요한 사안들을 덮어버리는 일은 한국에서만의 일은 아닌 같다. 올림픽이 진행 중인 영국도 예외가 아니다. 이에 사노신은 ICC(국제공산주의흐름) 런던올림픽과 관련한 기사를 번역해서 싣는다. 기사는 2012 6 12일에 작성되었다.

기사의 내용은 본지의 입장과 다를 있습니다.

2012 런던 올림픽이 한창이다. 이에 따라 한국의 모든 언론들 역시 올림픽 메달 소식과 오심 소식을 전하느라 바쁘다. 사람들의 시선이 올림픽에 집중되어 있는 동안컨택터스라는 경비업체는 SJM 노동자들에게 극도의 폭력을 가했고 사실을 보도한 언론은 많지 않았다. 올림픽 이슈가 다른 중요한 사안들을 덮어버리는 일은 한국에서만의 일은 아닌 같다. 올림픽이 진행 중인 영국도 예외가 아니다. 이에 사노신은 ICC(국제공산주의흐름) 런던올림픽과 관련한 기사를 번역해서 싣는다. 기사는 2012 6 12일에 작성되었다.

기사의 내용은 본지의 입장과 다를 있습니다.

지난 , 영국 지배계급은 우리로 하여금 국수주의와 애국심, 영국인의 자부심이라는 진흙탕에 시달리게 하고 있다. 지배계급은 영국 국기와 잉글랜드의 기장을 우리의 머릿속에 쑤셔 넣고 있다. 언론, 신문, TV 라디오는 순간도 멈추지 않고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했다. , 지위, 계급과 상관없이 우리는 영국인임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캠페인(부르주아지가 짜놓은 캠페인) 지금까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각기 다른 이벤트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참가했다. 여왕즉위 60주년 행사에는 수억 파운드가 지출되었고 수십억 파운드가 올림픽 개최에 소요되었다.

여왕즉위 60주년 행사를 위해 여왕은 가두행진을 했다. 거리에서의 파티와 깃발의 물결, 특히 아이들이 흔드는 깃발에 대한 언론의 보도 세례가 이어졌다. 모든 것은 1952년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행사는 자애로운 여왕 폐하가 인기 스타들이 총출동하는 콘서트 장소로 버킹검 궁을 개방한 것에서 절정을 이뤘다. 즉위 60주년 행사 직후에는 유로 2012 축구경기가 열렸다. 분위기를 띄우려는 사람들은 응원 복장을 했고우리는 하나의 팀을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나라를 응원하는 이라는 광고캠페인이 울려 퍼졌다. 우리 영국인들은 영국 팀이 틀림없이 패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역경에 맞서 단결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패배하는 역시영국적 특성임을 알고 있다.) 이제 우리는 올림픽준비 기간 동안 영국 전역을 도는 성화 봉송과 함께 번째 애국심의 향연을 준비하고 있다.

서커스의 이면의 현실은 때때로 검열된 채로 보도된다. 번째로 일군의 실업자들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로열 플로틸라(템즈강에서 벌어지는 선박 퍼레이드) 행사 당일, 관객들을 상대하는 스태프를 하기 위해 런던으로 버스를 타고 실업자들에 대한 논란이었다. 이들은 적절한 숙소와 보호장비는 고사하고 식사(당연히 임금 역시)조차 제공받지 못했다. 근로복지제도 그와 유사한 제도를 통해 노예노동과도 같은 조건에서 일하는 실업자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건보다 명백히 보여주는 고발은 없을 것이다.

(여왕의) 세습된 부와 지위를 축하하는 거창한 행사 이후, 6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권리의 문화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연설을 통해 그는 복지수당을 받으면서 많은 자녀를 사람들을 비난하면서 사회보장예산개혁 번째 국면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마련했다. 카메론 총리는 25 미만인 사람들에 대한 주택보조금 지급 중단, 실업수당을 받을 있는 기한 축소, 다자녀 가구에 대한 보조금 지급 제한을 골자로 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캐머런 총리에 따르면권리의 문화 심각한 사회 분열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듣자하니 그런 분열은 상층의권리를 가진극소수와 점점 늘어나는 하층의 대중들 사이의 물질적 격차로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캐머런이 말한바람직하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 그들의 노동에 기대어 무임승차하는 복지수혜자 사이에 진짜 분열이 존재한다고 한다. 노동계급 내부의 고용된 사람과 고용되지 못한 집단 분열이라는 것이다.

계급투쟁이 축제를 망치다

그러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거대한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맑스가 말한 역사의노련한 두더지(Old mole)’ 계급투쟁은 사라지지 않았다. 6, 에식스 주의 코리튼 정유공장(2007년에 페트로플러스 소유가 되었으나 페트로플러스가 파산신청을 하면서 앞날이 불투명해졌다.-역주)에서는 피켓시위 경찰과의 전투가 진행되었다. 180명의 노동자들은 스위스 기업인 페트로플러스(유럽최대의 정유업체-역주)로부터 정리해고될 예정이었다. 투쟁에 린지 지역(영국 중동부의 링컨셔 내의 지역-역주) 그레인지머스(스코틀랜드 중부의 Forth () 면한 도시-역주) 있는 공장 노동자도 함께했다.

6 에섹스에서는 소방관들의 파업도 벌어졌다. 소방당국의 현장대응 서비스(frontline service) 축소에 반대하는 투쟁 과정에서 5차례로 예정된 파업 계획 번째 파업을 진행한 것이다. (에섹스 소방관들은 10월까지 1시간~24시간의 파업을 다섯 차례 벌일 것이라고 발표했다.-역주)

우리는 런던 버스의 하루 파업으로 인해 33 도로가 정체된 것을 보았다. 버스회사 직원들은 올림픽 기간 동안의 보너스를 요구하며 하루 파업을 하고 있었다. 런던 지하철 기관사 역시 올림픽 기간 동안의 보너스 지급을 요구하며 투쟁을 하고 있었다.

런던 버스 운전사들이 파업한 , 바로 그날에 의사들은 연금과 관련하여 전국적인쟁의 행위 벌였다. 흔히 없는 풍경이었다.

이러한 투쟁은 모두 작고 고립돼 있으며 노동조합이 강화해 놓은 단사주의적인 전망이 득세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투쟁은 여전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투쟁들이 우리 모두를조국으로 포섭하려는 대대적인 캠페인에 직면하여 벌여졌기 때문이다. 이런 투쟁이 발생한 자체가 우리가 계급, 중에서도 노동계급에 속해있다는 증거다. 노동계급이란 정의상 국제적일 수밖에 없다. 세계 어디에서나 노동계급은 똑같은 착취의 체제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체제는 현재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고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의 노동계급과 같은 정도의 위기에 휩싸이게 것이다. 지배계급은 국익을 위해 커다란 희생을 감수할 것을 우리에게 기대할 것이다. 사실 그들은 이미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맞서 우리는 오로지 계급투쟁, 우리의 계급정체성, 계급의식만을 믿을 있을 뿐이다.

 

 

 

 

이일재 동지에게 존경을 표하며

이일재 동지에게 존경을 표하며

 

 

 

국제공산주의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2012 75

 

 

우리는 한국 좌익공산주의 그룹의 투사 이일재 동지가 병원에서 89세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에 잠겼다. 그는 1923 대구 출생이다. 대구는 현재 남한의 도시지만, 당시에는 조선의 역사적 이름을 갖는 곳이었다. 당시 한국 전역은 원자재와 농업의 풍부한 값어치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였으며,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노력을 지원하는 운명이었다. 일본의 공식적인 정책은 한국 문화를 우민화하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일본어를 배워야 했고, 그래서 이일재는 일본어에 유창했다.

전쟁 와중에, 스무 살이 안된 이일재는 이미 노동자 투쟁에 참가하고 있었다. 1945 8 일본 점령군의 철수로, 한국은 혼란이 줄어들면서, 도처에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생산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일재 동지는 노동자평의회 (전평 혹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설명한다. 비록 시대적 조건 때문이지만, 그러한 평의회들은 전쟁으로 와해된 나라에서 기본 생활필수품 생산 보다 많이 생산하기는 불가능 했다.

이일재는 1946 9 공산당에 가입하고, 같은 대구에서 발발한 총파업 투쟁을 이끄는 중요한 구성원이 된다. 점령군 당국이 노동자 투쟁을 진압하면서, 이일재는 남한 빨치산 투쟁에 참가하면서, 1950 다리에 총상을 입는다.

1968 박정희 독재 하에서도 이일재는 지속적인 정치 활동을 하는데, 때문에 체포되고 종신형을 선고 받는다. 투옥 기간 중에 그는 건강에 씻을 없는 피해를 받는데, 그의 얼굴에는 옥중 고문과 고통의 흔적이 여전히 담겨있다. 이일재는 1988 가석방된다. 가석방이 대구에서 즉각적인 그의 정치 활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97 이일재는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된다.

1946년에 청년 노동자가 공산당에 가입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동지 대부분이 의심할 없이 어떠한 용기와 신실함으로 있었을지라도, 그때 한국 전쟁 말기에, 한국의 당은 사실상 러시아와 중국 제국주의의 수단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특히 기괴하고 야만적인 스탈린주의 캐리커쳐였다. 가족의 세습독재였다.

그의 속에 남은 모든 것들을 우리는 애도의 글에 모두 담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역사는 나쁜 원인들의 영향으로 영웅주의로 가득 있다. 그러나 이일재는 80세에 가까웠을 때에도 일생의 투쟁에 의문을 던질 있는 실로 대단한 존재였다. 2002 그는 사회주의정치연합(the Socialist Political Alliance) 활동가가 된다. 새롭게 결성된 단체는 좌익공산주의의 이념을 한국에 소개하고 있었다. ICC 대표단이 2006 8 사회주의정치연합이 조직한 국제 마르크스주의자 대회 참석하기 위해 내한했을 당시, 우리는 이일재 동지를 만났다. 국제 마르크스주의자 대회 토론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문제 - 특히 노동자 투쟁을 위한 조직형태로서 노동조합의 재건이 가능하다-에서 이일재 동지와 의견이 달랐다. 우리는 진정한 국제주의자로서 문제를 분명히 했다. 무엇보다 북한 문제에 대해서, 그는 혐오스러운 정권이라며 어떤 지지도 거부했다.

이듬 (2007), 이일재 동지와 토론할 , 그는 무엇보다 가지 문제에 관심을 표명했다. 첫째는 노동계급의 국제적 단결이고 둘째는 한국에서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한국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방글라데시와 필리핀 이주 노동자들 간의 장벽을 허무는 것이었다. 이일재 동지는 노동조합 조직형태를 이용하는 희망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지만, 둘째 문제 때문에 그가 생각했던 노조와 단절했다. 이일재 동지는 2007 국제공산주의흐름 (ICC) 17 대회에 참석했다. 2008년에는 ICC 대표단과 일본에 동행하기를 희망했다. 애석하게도 그는 악화된 건강 때문에 일본에 가지 못했다.

이일재 동지는 프롤레타리아 대의를 향한 불굴의 투사였으며, 그의 정신은 고난과 투옥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남아있다.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국제주의자로 남아있었다. 이일재 동지는 지난 세월 역경과 투쟁을 통해 지키고자 했던 이념에 질문을 던지면서, 진실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도덕적 용기를 지녔다. 노동계급은 이일재 동지를 잃고서 빈곤해졌지만, 그의 삶의 본보기로 풍부해졌다.

 

 

 

자본주의를 민주화할 것인가 아니면 파괴할 것인가?

‘자본주의를 민주화하자'라는 슬로건이 세인트 파울성당의 점거시 텐트시티 유니버시티 측에서 나타나서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결국은 그 기치가 내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세인트 파울성당, UBS 그리고 다른 모든 곳에서의 점거들이 현사회체제에 불만을 갖고 대안을 모색하는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풍요로운 토론공간을 제공했음을 보여준다. ‘자본주의를 민주화하는 것'은 실제적인 옵션은 아니지만, 점거운동과 그로 인해 생겨난 회합들에 참가하는 많은 사람들의 시각을 반영한다. 부자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도록 만든다면, 은행가들이 보너스를 포기한다면, 금융시장들이 더 잘 통제된다면 또는 국가가 좀더 직접적으로 경제의 운영에 관여한다면 자본주의가 더 인간적으로 되도록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이러한 생각은 반복해서 제기되어왔다.

그러나 자본의 정치가들로부터 유래하는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자본주의가 무엇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알아보는 것을 방해하려는 공허한 잡담, 연막에 불과하다.

자본주의는 사사로운 개인들에 의한 부의 소유로 축소될 수 없다. 그것은 단순히, 훨씬 적은 노력에 비해 훨씬 많은 보상을 받는 은행가나 부유한 엘리트들의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인류문명사에서 한 단계 전체이다. 소수에 의한 다수의 착취에 기반한 일련의 사회들 중에서 마지막 사회이다. 모든 생산이 시장에서 이윤실현욕구에 의해 추동되는 최초의 인류 사회이다. 그래서 모든 피착취자들이 그들의 노동할 능력,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자들에게 팔아야하는 최초의 계급으로 양분된 사회이다. 봉건사회에서 농노들이 그들의 노동이나 생산물을 영주에게 직접적으로 받치도록 무력적으로 강제당했던 반면, 자본주의에서 우리의 노동시간은 더 교묘하게 임금체제를 통해 우리들로부터 뽑아내진다.

그래서, 착취자들이 사적인 보스들로서 조직되어 있건 아니면 중국이나 북한에서와 같이 ‘공산당' 관리들로 조직되어있건 전혀 차이가 없다. 임노동이,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맑스가 썼듯이, "자본은 임노동을 전제로 한다. 임노동은 자본을 전제로 한다"(임노동과 자본)

자본은, 그 본질에 있어서 임노동자계급(실업은 이 계급의 조건의 일부이기에 실업자를 포함)과 착취계급사이의 사회관계이다. 자본은 노동자들에 의해 생산된 소외된 부 - 그들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그들에 대항해 무자비한 적으로서 마주선 힘 - 이다.

자본주의는 위기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자들이 이러한 조정을 통해 이득을 보는 반면 그것을 진정으로 통제하지는 못한다. 자본은 궁극적으로 자본가들의 손에서 빠져나가고 그들을 지배하는 일반적인 힘이다. 이때문에 바로 자본주의의 역사가 경제위기의 역사이다. 20세기초 자본주의가 세계적인 체제가 된 이래, 이 위기는 세계대전의 형태로든 세계대공항의 형태로든 간에 다소 영구적으로 되어버렸다.

그리고 지배계급과 그것의 국가가 어떤 경제정책을 시도하든, 케인즈주의든, 스탈린주의 또는 국가를 등에 업은 ‘신자유주의'든 간에, 이 위기는 더 심화되고 해결이 더 불가능해졌을 뿐이다. 경제의 막다른 골목으로 인해 절망에 내몰린 채, 지배계급의 상이한 분파들과 이러한 분파들이 조직된 여러 민족국가들은 무자비한 경쟁, 군사적 충돌 그리고 환경파괴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고, 이로 인해 그들은 이윤과 전략적 잇점의 사냥에서 점점 덜 ‘도덕적'으로 되고 점점 더 ‘약탈자'의 면모를 띨 수 밖에 없다.

자본계급은 침몰하는 선박의 선장이다. 지구에 대한 그것의 명령권을 박탈할 필요성이 이렇게 절박한 적은 결코 없었다.

그러나 인간의 소외에서 그 최극점인 이 체제는 또한 새롭고 진정으로 인간적인 사회의 가능성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변모시켜 모두의 이득을 위해 사용될 수 있는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켰다. 그래서 화폐나 시장의 매개없이 직접적으로 소비를 위해 조정될 수 있는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세계를 통합했거나 적어도 그 진정한 통합을 위한 전제들을 마련했다. 그래서 전 체계안에서 민족국가들을 그들간의 끊임없는 전쟁들과 함께 제거하는 것이 실행가능하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세계인류공동체라는 오랜 꿈을 필요성이자 가능성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를 공산주의라 부른다.

피착취계급, 즉 임노동계급은 그것이 맞서있는 현체제에 관한 환상들에 빠져드는데 어떤 관심도 없다. 그것은 잠재적으로 이 사회의 무덤을 파는 자이자 새로운 사회의 건설자이다. 자본을 개량하거나 ‘민주화'하는 것에 대한 생각들은 이러한 선명성에 많은 장해물들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자본주의를 더 인간적으로 만드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은 오늘날 민주주의를 찬성한다고 주장하고 사회가 더 민주주의적으로 되기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관념을 그것의 액면가대로 받아들일 수 없고,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어떤 추상적인 관념으로 생각한다.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에도 역사가 있다. 정치체제의 하나로서의 고대 아테네에서의 민주주의는 노예제 그리고 여성배제와 공존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하에서 의회민주주의는 경제적인 부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사고 (그리고 투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도구들까지도 독식한 소수에 의한 권력독점과 공존할 수 있다.

자본주의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사회를 반영하는데, 이는 다시 우리 모두를 시장에서 경쟁하는 고립된 경제단위들로 만들어버린다. 이론상으로 우리 모두는 동등한 여건에서 경쟁하지만, 실제로는 부가 점점 더 소수의 손안에 집중된다. 우리는 개개 시민으로서 투표소에 들어갈 때 고립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실제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것으로부터도 거리가 멀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스페인, 그리스 및 미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점거와 공공집회운동으로 활성화된 논쟁들에서 두가지 입장들사이에서 다소 지속적인 대립이 있어 왔다. 한편으로 현체제를 좀 더 민주적으로 만드는 것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무바라크와 같은 폭군을 제거하고 의회제도를 도입하거나 또는 기성의 정당들에 압력을 행사해서 그들이 거리의 요구들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게 만든다는 목표에서 멈춰버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비록 지금 소수이긴 하지만,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집회들에서 스스로를 직접적으로 조직할 수 있다면 왜 의회가 필요한가? 의회선거가 뭔가를 바꿀 수 있는가? 우리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도록 공공광장에서뿐만 아니라 들판에서, 공장에서, 작업장에서 집회와 같은 형식들을 사용할 수는 없을까?

이러한 논쟁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1차 세계대전 말 러시아혁명과 독일혁명 당시에 있었던 논쟁들을 반향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전쟁터에서 수백만을 살육함으로써 인류를 위해 유용한 역할을 해내기를 멈췄음을 이미 보여주었고, 이 체제에 대항해 수백만이 일어났었다. 그러나 어떤이들은 그 혁명들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상 더 나아가서는 안된다고 말했던 반면, 그 당시 당상수에 달했던 다른 이들은 의회는 지배계급에 속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집회를, 즉 공장위원회들을, 소비에트들(선출되고 소환될 수 있는 파견위원들 가진 총회에 기반한 조직들)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 조직들이 권력을 잡게 될 것이라고 그러면 그 권력은 우리의 손안에 남아 있을 수 있고 이는 사회의 완전한 재조직화의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혁명들이 고립과 내전 그리고 내부 퇴행으로 인해 파괴되기 전 아주 잠깐 동안, 노동자계급의 기관, 소비에트는 러시아에서 권력을 장악했다.

그것은 인류에게 전대미문의 희망의 순간이었다. 그것이 패배당했다는 사실이 우리를 막을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패배로부터 그리고 과거의 실수로 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민주화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괴물같고 파괴적인 힘이어서 우리가 그것을 파괴하지 않은 다면 세계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괴물을 자본주의 자체의 제도들을 이용해서 제거할 수 없다. 우리는 새로운 조직들이 필요하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고 우리의 유일하게 진정한 희망으로 남은 혁명적 변화를 향하게 할 수 있는 조직들이 필요하다.

Amos 25/1/12      

제국주의적 꼼수, 긴축조치, 억압의 이야기

제국주의적 꼼수, 긴축조치, 억압의 이야기

2012 런던 올림픽이 한창이다. 이에 따라 한국의 모든 언론들 역시 올림픽 메달 소식과 오심 소식을 전하느라 바쁘다. 사람들의 시선이 올림픽에 집중되어 있는 동안 ‘컨택터스’라는 경비업체는 SJM 노동자들에게 극도의 폭력을 가했고 이 사실을 보도한 언론은 많지 않았다. 올림픽 이슈가 다른 중요한 사안들을 덮어버리는 일은 한국에서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 올림픽이 진행 중인 영국도 예외가 아니다. 이에 사노신은 ICC(국제공산주의흐름)의 런던올림픽과 관련한 기사를 번역해서 싣는다. 이 기사는 6월 12일에 작성되었다.
본 기사의 내용은 본지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글:ICC
번역:사노신https://sanosin.jinbo.net


[국제][번역]런던 올림픽
제국주의적 꼼수, 긴축조치, 억압의 이야기

2012 런던 올림픽이 한창이다. 이에 따라 한국의 모든 언론들 역시 올림픽 메달 소식과 오심 소식을 전하느라 바쁘다. 사람들의 시선이 올림픽에 집중되어 있는 동안 ‘컨택터스’라는 경비업체는 SJM 노동자들에게 극도의 폭력을 가했고 이 사실을 보도한 언론은 많지 않았다. 올림픽 이슈가 다른 중요한 사안들을 덮어버리는 일은 한국에서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 올림픽이 진행 중인 영국도 예외가 아니다. 이에 사노신은 ICC(국제공산주의흐름)의 런던올림픽과 관련한 기사를 번역해서 싣는다. 이 기사는 6월 12일에 작성되었다.

본 기사의 내용은 본지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올해 역대 세 번째 런던 올림픽이 개최된다. 각각의 런던 올림픽들은 저마다 당대 자본주의 사회의 변화하는 상황을 보여주었다.
강대국의 지배
1908년 올림픽은 원래 로마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1906년 4월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는 바람에 나폴리를 재건하는데 재원을 쏟아 부아야 하게 되었다. 영국은 세계 육지의 약 1/4, 인구의 1/5를 지배하고 있는 강대국으로서 급작스럽게 올림픽 개최를 떠맡게 되었다.
10개월 후, 영국은 재정과 부지 마련에 성공하여 최신식 경기장을 지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1908년 올림픽은 약 15,000 파운드를 지출해서 21,377 파운드를 벌어들였다. 첫 번째 런던 올림픽은 흑자를 달성했다는 면에서 성공적이었다. <더 타임즈>(1908년 7월 27일자)는 “모두가 바란 완벽한 조화는 심판의 판정에 대한 몇몇 유감스러운 논란, 항의, 반대로 인해 훼손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신문들이 폭발적으로 국민감정을 쏟아냈으며 각국 국민들은 비난에 비난으로 맞섰다.”며 애석해했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1905년 러일전쟁, 1차 세계대전을 불러일으킨 그 모든 적대감에서 알 수 있듯이 제국주의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유일한 방법이 되었을 때 국가 간 갈등이 증폭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은 아니다.
1908년 올림픽에서 모든 심판은 영국인이었으며 이에 대해 미국팀은 하루에 한 번꼴로 불만을 표했다. 갈등은 개막식에서 미국이 영국 국왕에게 국기로 경례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런 갈등은 올림픽 내내 계속되었다. 줄다리기 종목에서 미국 팀은 영국대표로 나온 리버풀 경찰 팀이 신고나온 스파이크 화에 불만을 표시했다. 항의가 묵살되자 미국 팀은 경기를 포기했다. 400미터 육상 결승에서는 미국 선수가 영국 선수를 팔꿈치로 밀쳤다는 이유로 영국 심판들이 재경기를 결정하기도 했다. 미국은 재경기를 보이콧했다. 결국 이 올림픽에서 영국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메달을 땄다. 22개국 2000명의 선수들이 출전한 가운데 영국대표팀은 역대 올림픽 출전 사상 가장 많은 146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이에 앞서 <더 타임즈>(1908년 7월 13일자)는 “올해 올림픽에서 우리나라의 꼼수가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상대국 경쟁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 선견지명을 발휘했다.
긴축 게임

1948 런던 올림픽 공식포스터    
1948년 두 번째 런던 올림픽이 열리기까지 40년 동안, 영국 제국주의의 위치는 많이 변했다. 영국·러시아·미국의 제국주의 연합은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이제는 미국이 서구에서 지배국의 위치를 차지했고 영국은 부차적인 지위로 떨어졌다.
영국은 올림픽 개최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경제는 초토화되었고 (식량, 휘발유, 의류 등의) 배급은 전시보다 더 혹독해졌다. 실업률은 높았으며 노숙자가 만연했고 노동자들의 파업이 잇따랐다. 이 때문에 영국은 마셜 플랜을 통한 미국의 기금지원이 절실했으나 올림픽 개최가 자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올림픽 개최를 겨우 한 달 남겨둔 시점에서 런던 부두노동자들의 비공인 파업이 터졌다. 새로 징집된 부대가 항구로 파견되었다. 영국정부가 파업을 탄압하기 위해 1920년에 제정된 비상대권법(Emergency Powers Act)에 따른 권한을 행사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긴축조치를 강제하는 전후 노동당 정권에 맞서 노동자가 투쟁한 사례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올림픽 준비에는 최소한 2년이 걸렸다. 새로운 경기장이 건립되지는 않았지만 웸블리 경기장으로 이어지는 도로 건설 등 몇몇 건설 프로젝트에서 독일 전쟁포로들이 강제 노역을 했다.
1948년 런던 올림픽이 긴축 올림픽으로 알려진 데는 이유가 있다. 경기 참가자들에게는 광부들에게 지급되는 수준의 배급이 허용되었으나 그래도 각국은 필요한 식량을 직접 가져오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를 받았다. 남자 선수들의 숙소는 영국 공군 캠프였고 여자 선수 숙소는 런던 대학교였다. 영국 선수들은 필요한 복장과 장비를 자신들이 직접 사거나 만들어야 했다.
59개국 4000명의 선수들이 참여한 1948년 올림픽 개최에는 (예산보다 적은) 732,268 파운드가 들었고 761,688 파운드를 벌어들였다. 다소 이익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전체 메달 개수를 합산했을 때 영국은 12위에 그쳤다. 올림픽이 시작되기 전부터 모든 사람들은 미국이 1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채와 억압

몇몇 나라들은 올림픽 개최를 통해 본전치기 또는 흑자를 남겼다고 주장한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대한 중국의 미심쩍은 주장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최근 대부분의 개최지들에게 올림픽은 재정적 재앙이었다. 몬트리올의 부채 규모는 너무나 커서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30년이 지나서야 모든 부채를 청산할 수 있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원래 예산은 16억 달러였다. 그러나 투입된 공적자금은 160억 달러에 달했으며, 거의 사용되지 않고 방치된 경기장들의 유지와 보안을 위해 지금도 수백만 달러가 소요되고 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 그리스 경제위기가 커지는 데 영향을 준 요인 중 하나란 점은 명백하다.
처음 2012년 런던올림픽의 예산은 23억 7천 파운드였다. 그러나 올림픽을 유치한 지 7년 후, 최종 비용이 얼마나 될지에 대해서는 최초 예산의 4배에서 10배까지 다양한 추정치가 나오고 있다. 현재 영국정부는 93억 파운드의 예산 중에서 4억 7천 6백 파운드를 사용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아직 전혀 시작되지도 않은 여러 행사들의) 운영경비를 고려한다면 적어도 122억 파운드는 소요될 것이 분명하다. 물론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지출 비용을 만회할 방안을 아무것도 고민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런던이 물가가 높은 도시라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입장료, 음식, 음료 등 올림픽 경기장과 관련한 모든 것들이 터무니없이 비싸다. 공식스폰서의 이해는 매우 엄격하게 보호되고 있다. 매복마케팅 광고는 엄하게 규제되고 있다. 매복마케팅이란 공식스폰서가 아닌 회사명이 들어간 물품을 노출시키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개인 복장의 소품들까지 모두 포함된다.
하지만 2012년 런던 올림픽이 신기록을 경신할 종목은 무엇보다 공권력에 의한 억압 종목일 것이다. 가장 바쁜 날들에는 경찰 12000명이 근무를 서고, 군인 13500명이 대기할 것이다. 이는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된 영국군 9500명보다 많은 인원이다. 사설경비원 13,300명을 고용할 계획도 나와 있다. 사설경비원들은 며칠 동안 군인들과 같이 훈련할 것이다. 관련 경비업체 대변인은 “이번 경기장 훈련은 부분적인 목표는 두 집단 사이에 경호의 ‘질을 동등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관람객들은 군인과 사설경비대로부터 같은 질의 경호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파이낸셜타임즈> 2012년 5월 24일자)”라고 밝혔다.
이 모든 억압의 최정상에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올림픽 주요 경기장 근처 6개의 주거지역에 고속 지대공미사일 시스템을 설치하려는 계획이 놓여있다. 아마도 이는 인구가 밀집한 주거지역 위에서 비행기를 격추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전문가들’은 남부유럽 아나키스트들이 조직적 활동을 수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해왔다. 그러나 이 전문가들은 “공격 계획에 대한 구체적 낌새는 아무것도 없다(<텔레그래프지> 2012년 6월 21일자)”는 말도 덧붙여 놓았다.
런던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영국정부와 함께 모든 보안방안들을 다 고려해본 것 같다. 내무부는 실제로 다 진행하진 못한다 할지라도 참가선수, 심판, 노동자, 언론사 직원 등 올림픽과 관련된 38만 명 전부에 대해 보안 검사를 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승인된 차량만 다닐 수 있는 특별한 올림픽 차선도 마련될 예정이다. 이 차선을 침범하는 사람은 135파운드의 벌금을 물게 된다. 또한 올림픽 경기장 입장 시에 소지품 검사를 받아야 하고 물 반입은 금지되어 있다. 또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 어떠한 방식으로든 올림픽 행사 사진을 공유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이번 런던올림픽에는 200개 이상의 나라들이 참가하게 될 것이고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지금까지 그래 온 대로 애국주의 광란을 위한 판을 깔아주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다. 코카콜라, 맥도날드, 파나소닉, 삼성, 비자카드, 제너럴 일렉트릭, P&G, BMW, EDF, UPS 등등 자본가 패거리들에게 광고 기회를 주기 위해서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애국주의와 상업주의는 근대 올림픽의 흔한 메뉴가 되어버렸다. 한편 2012년 런던올림픽의 준비 도중, 올림픽 경기장이 있는 뉴엄(Newham) 지구 의회는 500가구를 150마일(약 240km) 떨어진 스톡-온-트렌트(Stoke-on-Trent)로 ‘이주(relocate)’시키려 하고 있다. 지역의 건물주들이 엄청나게 오른 가격에 세를 놓을 수 있도록 세입자들이 쫓겨나고 있다. 올림픽은 젊은이들에게 영감을 주어야 한다고 한다. 뉴엄은 잉글랜드와 웨일즈 전역을 통틀어 돌도 지나지 않은 신생아의 비율이 가장 높으며 저연령층이 가장 많은 인구구조를 가지고 있다. 가족의 평균 규모가 가장 크고, 런던에서 질병율과 조기사망률이 가장 높으며 복지지원금을 받는 인구 비율 역시 가장 높다. 뉴엄의 아이들은 올해 올림픽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지만 이 아이들의 미래가 스펙터클한 메달 전쟁을 통해 더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토론 문화: 계급투쟁의 무기

토론 문화”는 노동운동이나 ICC(국제공산주의흐름)에게 이상 새로운 주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21세기 이후 역사의 변화를 겪으면서 우리 조직은 문제를 보다 자세히 재검토하고 성찰해야 절실한 필요성을 느꼈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두가지 주요 발전은 새로운 혁명세대의 등장과 21세기 초반에 겪었던 내부 위기였다.

새로운 세대와 정치적 대화

  새로운 혁명세대와의 접촉은 ICC 외부세계와 소통하고 정치적 대화능력을 더욱 발전시키도록 계기가 되었다.

  인류역사의 고리 안에서 저마다 하나의 사슬을 구성하고 있는 세대들은 가지 중요한 임무에 직면하고 있다. 첫째, 이전 세대가 남긴 유산을 이어받고, 둘째, 이들 고유의 경험에 기반하는 유산들을 세대에서 더욱 풍요롭게 하며, 셋째, 다음 세대가 자기 세대보다 더욱 발전할 있도록 이들 유산을 다시 전수하는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이 임무들은 특별한 도전이다. 이는 노동운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이다.  구세대들은 제공할 수있는 자신들의 경험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역시 투쟁과정에서 상처와 트라우마를 얻었고 패배와 실망을 겪은 있다. 따라서 이들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영속적으로 집단투쟁을 하기 위해서는 세대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자각했다(1). 이를 위해서는 다음 세대의 열정과 에너지, 이들이 제기하는 새로운 문제점,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신세대들의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세대가 서로를 필요로 할지라도 세대 간의 통합능력은 저절로 얻어지는 아니다. 사회가 전통적인 자연경제에서 멀어질수록 자본주의는 생산력과 사회전체를 더욱 빠르고 집요한 방식으로 “혁신”하고, 세대와 다음 세대의 경험은 더욱 차이가 커진다. 이처럼 최고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경쟁체제는 모두에 대항한 각자의 투쟁 속에서 세대들간의 반목까지도 유발시킨다.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우리조직은 세대 간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토론 문화”가 얼마나 특별한 의미를 지닌 주제인가를 깨닫게 계기는 작업의 준비과정에서 보다는 실제로 직접적인 새로운 세대들과의 만남을 통해서이다. 우리는토론 문화”에 68세대의 경우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세대를 만나게 되었다. 노동자계급내의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는 2006 고용의 “불안정화(precarisation)”에 반대하는 프랑스 대학생 고교생들의 집단 운동이다. 과정에서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이들이 집회 때마다 최대한 자유롭고 넓은 토론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60년대 학생운동은 정치적 대화에 무능했다는 점을특징으로 있다. 같은 차이점은 바로 오늘날 학생집단이 40 전에 비해 훨씬 더 프롤레타리아화() 됐음을 표현한다. 넓고 심도 있는 토론은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중요한 특성이자 1968 프랑스와 1969 이탈리아 노동자 집회를 특징짓는 요인이다. 그러나 2006년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은 투쟁을 하는 있어 젊은 세대들이 나이든 세대들과 소통을 하며 그들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열의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60년대 말에 있었던 학생운동, 특히 독일 학생운동과는 극명히 다른 차이점을 드러낸다. 당시 시대정신 상태를 가장 희화적으로 표현한 슬로건 중의 하나가 바로 30 이상의 사람들은 집단 수용소로!”이다. 실제로 이러한 생각은 서로에게 야유를 보내고 “라이벌”모임들을 폭력적으로 해산시키는 등의 행위로 구체적으로 표출됐다. 여기에 심리적 수준에서, 독일뿐만 아니라 이태리에서 저항의 한 형태로서 테러리즘이 발전하게 되는 그 뿌리들 중 하나가 놓여 있다. 노동자계급의 세대간 연속성의 단절이 이 문제의 뿌리들 중의 하나였다. 왜냐하면 세대 간의 관계는 이미 오래 전부터 대화능력을 단련시키는 특별한 토대였기 때문이다. 68혁명의 투쟁가들은 자기 부모세대를 자본주의에 “팔린” 세대, 혹은 이태리와 독일의 경우처럼 전체주의와 전범의 세대로 간주하였다. 자식들만큼은 자기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기만을 바라며 1945 이후 계속된 끔찍한 착취를 견뎌냈던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3세계를 착취하며 살아가는 “기생충”이라고 자기 자식들이 비난할 쓰디 실망감을 맛봐야만 했다. 그러나시대를 살았던 부모세대가 대화 능력을 크게 상실했거나 이를 가져본 적도 없었던 것은 부인할 없는 사실이다. 이들 세대는 2 세계대전과 냉전시대으로 또한, 전체주의적,  스탈린주의적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적 반혁명으로 인해 상처와 충격을 입었다.

  반면 2006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은 새롭고 풍요로운 무언가의 출현을 예고했다(2). 새로운 세대의 이러한 관심은 이미 전부터 노동자계급 내 혁명적 소수들(revolutionary minorities)에 의해  예고되었었다.  이 소수들은 정치무대에 등장하자마자, 토론을 거부하는 태도와 분리주의를 그 나름의 논리로 강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내세운 처음의 요구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되었다. 첫째, 토론은 사치품이나 장식요소로서가 아니라 절대적인 필요성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둘째, 토론에 참여하는 이들은 다른 참가자들을 진지하게 대하고 그 의견을 신중히 듣는 것을 배워야 한다. 셋째, 토론의 무기는 논증이지 강제적인 힘이나 도덕적, 또는 “이론적” 권위에의 호소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자 진영과 관련해서, 이 혁명적 소수들은 일반적으로 (또한 매우 정당한 이유로) 현존하는 그룹들 사이에 우애적인 토론이 부재하는 현실에 크게 놀라며 이를 비판했다. 또한 이들은 마르크스주의는 신세대가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받아들여야하는 일종의 도그마라는 생각을 단호하게 거부했다.(3).

  한편, 우리 조직은 새로운 세대들이  ICC 대해 보이는 반응에 놀랐다. 우리의 공개토론모임에 참석했던 새로운 동지들,  ICC 교류를 시작한 세계로부터의 공감자들, 함께 토론할 기회가 있었던 다른 그룹과 써클들, 그 모두는 ICC의 강령적 입장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동, 특히 토론방식에서 ICC프롤레타리아적 본질을 알아볼 수 있었다고 우리에게 차례 말했다.

  토론에 관한 새로운 세대들의 깊은 관심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우리는 이것이 1968 당시보다 더욱 심각하고 가중된 자본주의의 역사적 위기에서 도래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은 자본주의에 대해 철저히 비판할 것은 물론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파악할 것을 요구한다. 부르주아 개인주의의 가장 부식적인 영향들 하나는 토론 능력을 파괴한 방식, 특히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는 능력을 파괴한 방식이다. 대화 대신 “잡담”이 난무하고 (부르주아 선거 캠페인에서 있듯이), 가장 소리로 떠드는 이가 승자가 된다. 토론 문화는 인류의 미래를 짊어질 유일한 계급,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쟁무기인 의식을 발달시키기 위한 중요수단이다. 또한, 이들이 고립과 조급함을 극복하고, 통합된 투쟁을 있게 도와주는 유일한 수단이다.

오늘날 이러한 관심의 또 다른 측면은 스탈린주의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이다. 오늘날 국제주의적 입장을 획득하려 애쓰는 수많은 투쟁가들은 직접적으로 어느 한 좌파 그룹 출신이고 좌파의 영향을 받았다. 이 그룹은 사회주의라는 옷을 입은  쇠퇴적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행동이라는 캐리커쳐를 나타낸다.  이들은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것은 “부르주아 자유주의”라고 믿도록 정치적 교육을 받았다. “좋은 공산주의자”는 “입을 다물고” 자신의 의식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자라고 그들은 배웠다. 반혁명의 이러한 소멸해가는 산물의 영향들을 떨쳐버리고자 결심한 동지들은 이를 위해서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뿐만 아니라 정신구조까지 버려야 한다는 것을 더욱 이해하게 됐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운동에서 있어서 그 전통의 유기적 연속성에 반혁명이 유발한 균열이 생기면서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전통 하나를 재확립하는데 기여하고 있다.(4).

조직위기와  만장일치성(monolithism)의 경향

  ICC 토론 문화를 다시 성찰할 수밖에 없었던 번째 핵심 이유는 21세기 초반에 나타났던 조직의 내부적 위기 때문이다. 위기는 우리 조직에서 동안 결코 없었던 가장 추악한 행동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ICC 창설 이후 처음으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멤버들을 제명해야만 했다(5). 내부위기가 일어났던 초반에는 중앙집권이라는 조직 원리에 대한 견해 차이와 이에 따른 여러 어려움들이 프랑스 지부에서 나타났다. 이러한 유형의 견해 차이 자체는 조직의 위기로 이어진 질 이유가 전혀 없었고 그 원인도 아니였다. ICC 위기를 초래한 것은 내부적인 토론의 거부, 특히 서로를 고립시키고 헐뜯는, 자신과 의견을 달리 하는 동지들을 공격하는 술책이었다.

  이후 우리 조직은 이러한 위기와 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을 파헤칠 것을 결심하였고 이에 대한 조사를 실시해서 몇몇 기사들을 공개했다(6). 우리가 도달한 결론 중의 하나는 동안 겪었던 모든 분열에는 만장일치성의 경향이 중요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견해 차이가 생기자마자 이미 몇몇 조직원들은 이상 다른 이들과는 함께 일할 없다고 단언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ICC 스탈린주의 조직으로 변질되어가고 있거나 조직 자체가 타락해 가는 중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위기는, 만장일치가 요구되지 않는 (non-monolithic) 조직 안에서라면 대부분 전혀 문제 없이 존재할 수 있고, 분열이 생기기에 앞서 함께 논의되고 규명되어야할 의견 차이와 관련해서 발생하고 말았다.

  이러한 만장일치성 경향이, 특히 “ 좌파공산주의 이태리 분파(Italian Fraction of the Left Communism)”의 전통들에 기반을 두고 있는 조직에서 반복적으로 출현한 점은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태리 분파는  근본적 원칙에 관한 어떤 의견 차이에 있어도 토론을 통해 심도 깊고 통합적으로 문제점을 명확히 밝히는 것이 조직적 분열에 앞서야 한다는 것을 항상 옹호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ICC “좌파공산주의 이태리 분파(Bilan이라고도 함)”와 “프랑스좌파공산주의(GCF)”의 조직적 전통을 승계하는 유일한 좌파 공산주의 조직이다. “좌파공산주의 이태리분파(이하 이태리분파)”는 2 세계대전 이태리에서 창립된 국제 공산당(PCint)에서 유래하는 다른 그룹들과는 달리 스탈린주의의 반혁명에 대한응으로 출현한 “좌파공산주의”의 다른 국제적 흐름들, 특히 “독일 좌파공산주의”와 “네덜란드 좌파공산주의”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인정하였다. 이태리분파는 집단들을 “무정부-자연발생주의자(anarcho-spontaneist)” 또는 노동조합주의자 (syndicalist)”라고 배척하기 보다는 이들로부터 배울 있는 것들은 모두 받아들였다. “평의회주의(councilist)” 경향으로 된 것들에 대해 이태리분파가 가한 주된 비판은  그것이 제 2 인터내셔널의 공헌들 특히 볼셰비즘의 공헌들을 인정하길 거부한데서 나타난 종파주의에 대해서 였다(7). 그렇게 해서 이태리분파는 반혁명의 시대에서 계급의식은 집단적으로 발달하며 어떤 정당이나 어떤 전통도 독점권을 주장할 없다는 마르크스주의 입장을 유지할 있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의식이라는 것이 우애적, 공개적, 국제적인 토론 없이는 발전할 없다는 것을 있다(8).

  그러나 이러한 근본적인 이해는 ICC가 계승한  기본 유산의 일부이긴 하지만 실천에 옮기기에 쉽지 않다. 토론 문화는 부르주아 사회의 흐름에 대항해서만 발달할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경향은 어떤 생각들을 명확히 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 조작, 다수의 표를 얻으려는 싸움(부르주아 민주주의 선거가 보여주는 서커스가 가장 좋은 예다)등이다. 그래서 이러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프롤레타리아 조직에 침투할 경우 위기와 쇠퇴의 씨앗을 늘 품고 있게 된다. 볼셰비키 정당의 역사는 이를 명백히 보여준다. 혁명의 첨병이었던 이들에게 있어 활발하고 때로는 격렬하기까지 토론은 당의 주요 원동력이었다. 반면에 1921 크론슈타트 학살사건 이후 진정한 분파(fraction)들의 구성이 금지되었는데 이것은 볼셰비키 쇠락의 영구적인 징후이자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미 국제공산당(PCint) 창립 과정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 여러 대립적 입장들 “평화적 공존”(다시 말해 “토론의 부재”)이라는 관행, 또는 보르디가(Bordiga) 그의 추종자들에 의한 만장일치라는 미덕의 이론화는 20세기 중반에 있었던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패배라는  상황을 통해서만 이해될 있다.

혁명조직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주요 임무인 계급의식의 발달과 확장을 완수하려면, 집단적이며 국제적이고 우애적이며 공개적인 토론 문화의 배양은 필수불가결하다. 물론 이것이 정치적 성숙(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인간적 성숙) 요구하는 것은 사실이다. ICC 역사는 이러한 성숙함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진보의 산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 성숙의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이들이 바로 신세대들이다.

 

역사 속에서의 토론의 문화

  토론 능력은 노동운동의 핵심적인 특징이나, 노동운동 자체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은 인류의 가장 훌륭한 업적을 흡수하고 자신의 필요에 맞춰 이들을 채택하는 능력을 지녔다. 또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훌륭한 장점들을 나은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근본적으로 토론 문화는 인간의 뛰어난 사회적 본질의 표현이며 특히 언어사용으로 인해 나타난 산물이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다른 몇몇 동물들도 정보교환의 수단으로써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인간은 과학과 논리의 발달로 함께 토론하는 능력을 발전시키고, 특히 예술의 발달과 관련된 감정이입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알아간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들과 구별된다.

  인간의 토론능력은 어느 갑자기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며 계급사회 이전부터 존재했고 인류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엥겔스는 호머(Homer)시대의 그리스 사회와 게르만 초기 부족사회, 북미 이로쿼이(Iroquois)족의  부족 총회(general assembly) 역할을 언급하면서, 특히 이로쿼이족의 토론문화를 칭송하였다(9). 19세기 루이스 헨리 모르간(Luis Henri Morgan) 그의 동료들 그리고 이후 다른 학자들이 행한 이들에 대한 연구들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우리는 분야에서 초기의 확실히 가장 결정적인 발달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

  반면에, 우리는 철학 과학적 사고의 시초가 “신화”와 “순진한 사실주의”라는 모순적이면서도 분리될 수 없는 한 쌍을 이루는 고대의 요소가 의문시 됐을 때 번영하기 시작했음을 알고 있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가지 단순한 방식은 직접적인 경험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오류에 빠져있었다. 고대인들이 실제경험에 근거하여 형성한 사고는 천성적으로 종교적일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가 어떻게 구성됐는지는 알지 못한 꿈속에 나타나는 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던 아주 시대부터, 자신들의 사고와 감각이 어떤 육체적 활동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에 있다가 죽음의 순간 육체를 떠나는 어떤 특별한 영혼의 활동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죽음이 찾아 영혼과 외부 세계의 관계에 관한 무언가를 만들어낼 필요성을 느꼈다. 만약 죽음의 순간에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된다면 그 영혼 자체의 개별적인 죽음을 상상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영혼불멸 개념이 생겨났다.  인류발달의 이 단계에서 이 개념은 어떤 위안을 위해서 생겨난 것이 전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없는 운명으로서 생겨났다.  특히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영혼 불멸을 불행으로 여겼다.(10)

바로 이러한순진한 사실주의”라는 체계 안에서 문화와 생산력의 매우 느린 발전의 첫걸음이 시작됐다. 마법적 사고(magical thought)는 어느 정도의 심리적 지혜를 지니고 있으면서 불가해한 현상을 설명하고 그렇게 해서 공포를 제한하는 것을 가장 최우선의 임무로 여겼다. 이 두가지 즉, 순진한 사실주의와 마법적 사고는 인류 발전에 중요하게 공헌했다. 하지만, 순진한 사실주의가 유물론 철학과 특별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거나 유물론 철학이 순진한 사실주의에서부터 시작되어 발전했다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대중의 의식 속에는 변증법의 오래된 가정(postulate) 하나, 즉 극과 극은 통한다라는 가정이 전해져 오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공상적 정신과 고지식함, 미신의 극한 점을 찾을 때, 독일 자연철학의 경우에서와 같이 객관적 세계를  자신의 주관적 사고의 틀에 강제로 밀어넣어 이해하려  노력하는 과학적인 방향에서 찾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방향에서 즉, 오로지 경험만을 중요시 하고 관념을 극도로 경멸함으로써 무모함에 있어 가장 멀리까지 나아간 그 곳에서 찾으면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학파가 영국에서 지배적이다.”(11)

  엥겔스가 지적했듯이 종교는 마법적 세계관에서 생겨났을 뿐만 아니라 순진한 사실주의에서도 출발했다. 순진한 사실주의는 처음으로 대담하게 세계를 일반화하여 바라보았고, 그럼으로써  당연하게  권위적 성격을 획득했다.

  예를 들어, 초기 농경 공동체들은 농사를 지으려면 비가 필요하다는 것은 곧 이해했으나 정작 비를 내리게 하는 조건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들이 비의 () 만들어 것은 선물이나 숭배를 통해 자연의 변화에 영향을 있을 거라 생각하며 스스로 안심하고자 만든 창조적 행위이다. 자신의 생존을 확고히 하기 위해 의식의 발전에 기대를 (species)이 바로 호모 사피엔스이다. 이들은 일찍이 존재하지 않던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바로 낯선 것에 대한 무력한 공포가 그것이다. 미지(未知) 것에 대한 설명은 어떤 의심도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필요로부터 가장 발전된 표현으로서  계시종교들(religions of revelation)이 출현했다. 세계관의 감정적 기반 전체는 믿음이지 지식이 아니다.

  순진한 사실주의는 이 똑 같은 동전의 다른 면에 불과하며 일종의 초보적인 정신적 “분업(division of labour)”이다. 즉각적이고 실제적인 의미에서 설명할 없던 모든 것은 당연히 마법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게다가 실제적 이해 자체는 원래 애니미즘 세계관이었던 종교적 세계관에 기반을 둔다. 여기서 모든 것은 물신(物神)화된다. 인간이 의식적으로 생산하고 재생산할 수 있는 과정들조차 우리의 의지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인격화된 힘의 협력에 의해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세상에서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로서 토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없다. 2,500 , 새로운 특성 하나가 종교와 “상식(common sense)”이라는 쌍둥이에게 직접적으로 도전하며 나타났다. 특성은, 전통적인 사고방식이 자신의 반대방향으로 전환했다는 의미로 볼 때, 전통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 발달하였다. 따라서 예를 들어 중국에서 있는 여성과 남성의 원리들 사이의 극성 사상, 즉 음양(陰陽)사상과 같이, 계급사회의 출현에 앞서 존재했던 초기 변증법적 사고는 과학과 철학, 유물론에 근거를 비판적 사고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우리가 토론 문화라고 부르는 것의 출현 없이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리스어로 변증법은 대화, 혹은 토론을 의미한다.

  무엇이 이러한 새로운 접근법을 가능케 했을까?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사회적 관계와 지식  세계의 확장 덕분이었다. 엥겔스가 즐겨 말했듯이 상식은 자신의 안에 머물러 있을 때는 강하고 힘센 소년이지만 세상으로 모험을 떠나는 순간 온갖 실패와 환멸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종교는 공포를 경감시키는 능력에 있어서 자신의 한계를 드러냈다. 사실상 종교는 공포를 없애는 대신 그저 밖으로 던져버리기만 했었다. 이 메커니즘을 통해 인류는 다른 자기 방어 수단이 없던 그 순간에 그렇지 않았다면 짓눌림을 당하고 말았을 그 공포에 대적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인류는 그 자신의 공포로부터 그것을 지배하는 부가적인 힘을 만들어냈다.

  여전히 설명 불가능한 것을 “설명”하는 것은 진정한 탐구의 포기를 의미한다. 그래서 바로 여기에서 종교와 과학 사이의 충돌, 혹은 스피노자가 말했듯이종과구 사이의 충돌이 일어난다.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은 원래 종교에 반대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는 이미 신비주의적 세계관에서 탈피했었고, 그의 제자인 아낙시만드로스는 자연이 자연 자체로부터 설명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은 순진한 사실주의에 대항한 전쟁선포이기도 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물의 본질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연은 숨기를 좋아한다”라고 말했고, 마르크스는 “사물의 본질과 겉모습이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12) 공언했다.

  이러한 새로운 접근은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신앙과 편견, 전통에 도전했다. (독일어로 신앙(Glaube)과 미신(Aberglaube)은 연관된  단어이다). 이들에 반대되는 개념이 바로 이론과 변증법이다. 얼마나 모든 이론적 사고가 경멸될 지언정 이들 없이는 자연의 사실 사이가 연관될 수 없고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가 이해될 수는 없다.(13)

  사회적 교류의 증대는 물론 생산력 발전과 연계되어 있었다. 따라서 예를 들어 기존 사고방식들의 부적절함과 같은 문제점이 드러났을 이를 해결할 있는 수단도 함께 등장했다. 자신감의 증대, 특히 인간 사고력의 증대가 바로 그것이었다. 과학은 의혹과 불확실함의 존재를 받아들일 능력과  준비상태가 있을 때에만 비로소 발전할 있다. 종교와 전통의 권위와는 반대로 과학의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교환할 가능성뿐만 아니라 그 필요성이 생긴다.

  지식의 지배라는 주장은 (가장 넓은 문화적 의미에서의) 생산력이 어느 정도의 성숙도에 이르렀을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음은 분명하다. 지식의 지배는 예술, 교육, 문학, 자연관찰, 언어, 모든 것이 상응하게 발전하지 않고서는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이것은 역사의 특정 단계에서 계급사회와 물질적 생산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운 지배계층의 출현과 나란히 진행된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들이   새롭고 독립적인 접근을 자동적으로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이집트인들과 바빌로니아인들은 그들의 과학적인 진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들만큼 멀리 나아가진 못했다. 현대 알파벳 발달의 선구자 페르시아인들도 이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 였다.

  그리스에서 노예제의 발달은 사제와 더불어 자유 시민계급의 출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종교의 힘을 약화시킬 물질적 기초를 제공했다(이를 통해 우리는 엥겔스의 “안티 뒤링”에 나오는 문장,  “고대사회의 노예제도가 없었다면 현대 사회주의도 없었을 것이다”를 이해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인도에서는 철학, 유물론(이른바 로카야타(Lokayata))과 자연에 관한 연구의 발달이 있었다. 이것은   브라만 신정(神政)정치에 반대하고 농노제에 일정 기반을 무사(武士) 귀족계급의 형성 및 강화와  때를 같이 한다.  종교, 불멸 그리고 육체적 쾌락에 대한 비난에 반대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싸움이 전제군주와 억압된 민중 양측 모두의 편견에 대항해 이뤄졌던 그리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도에서 행해진전투적이고 새로운 접근은 귀족계급으로부터 유래했다.  같은 시기에 출현한 불교와 자이니즘은 노동계급에서 많이 퍼졌으나 영혼의 환생이라는 개념과 함께 종교적 안에서 머물렀. 이 영혼 환생의 개념은 이들 종교가 반대했던 카스트 사회에서 전형적이었고 그 비슷한 유형은 이집트에서도 발견된다.

  반면, 과학과 일종의 초보적 유물론(예를 들어 모티의 “논리학”) 발달했던 중국에서 그 발달이 어느 정도의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유는 반란이 일어나려면 이에 대항해야 지배계층이 있어야 하는데 중국에는 반란의 씨앗일 있는 사제지배계층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사회는 자국을 둘러싸고 있던 외적들과의 전투를 통해 훈련된 군사관료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인도의 경우처럼 어떤 보충적이고 결정적인 요인이 작용했는데 바로 상품생산이 앞서 발달했다는 점이다. 그리스 철학은 그리스 자체에서가 아닌 소아시아 항구 식민지에서 출발하였다. 상품생산은 재화뿐 아니라 생산을 통해 얻은 경험도 교환할 있게 도와주며, 변증법적 사고에 있어서 더 고차원의 표현들의 등장을 촉진하면서 역사발전을 가속화한다. 또한 생각의 교환이 보다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지려면 일정 정도의 개인화가 필요한데 상품생산은 바로 이러한 개인화(individualisation)를 가능케 했다. 지금까지 사회적 진보가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이루어졌다면 상품생산을 통해 고립화가 끝나기 시작한다. 자연경제에 기반을 모든 농업사회의 기본적 경제단위는 마을, 조금 낫게는 자치적 지방이었다. 그러나 종종 관개작업을 위해 더 넓은 협업에 기초한 최초의 착취사회는 여전히 근본적으로는 농경사회의 성격을 띠었다. 반면에 그리스 사회는 상업과 항해를 통해 세계로 나아갔다. 이를 통해 그리스는 유목사회의 특징인 다른 세계를 발견하고 정복해 나가는 태도를, 하지만 더 높은 수준으로 획득했다. 일정수준의 역사 발전단계에 이르면 열린 토론의 출현이 국제적 발전(비록 지역에 집중된다 할지라도)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과, 어떤 의미에서는 토론의 출현이 어떤 의미에서는 “국제주의적 (inter-nationalist)” 성격을 지닌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디오게네스와 견유학파 철학자들은 헬라스 사람과 이민족 “야만인”을 구분하는 것에 반대하고 스스로를 세계시민이라 선언하였다. 데모크리토스는 이집트, 바빌론, 페르시아, 인도로 교육여행을 떠나기 위해 자신이 받은 유산을 낭비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았다. 그는 여행의 결실인 자신의 저서의 일부를 읽으면서 스스로를 변론했고 무죄를 주장하였다.

토론은 실천적인 필요성에 답하기 위해 생겨났다. 그리스에서 토론은 지식의 여러 다른 근원들을 비교하는 데서 발달했다. 그리스인들은 다른 사고방식, 다른 연구방식과 결과들, 생산의 방법들, 관습과 전통들을 비교했고, 이를 통해 이들이 서로 모순되거나 확인하거나 상호 보완한다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들은 서로 대립하여 투쟁하거나 서로를 지지하고, 혹은 가지를 다한다. 절대적 진리는 비교를 통해서 상대화된다.

  이러한 토론은 공개적이어서,  항구, 시장이 서는 광장(포럼), 학교, 아카데미 에서 이루어졌다. 이렇게 이뤄진 토론은 기록된 형태로 여러 도서관에 보관되었고 이는 세계로 퍼져나갔다.

  시장이 서는 광장에서 토론하는 모든 시간을 보낸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철학자이다. “어떻게 하면 도덕적으로 참된 지식에 이를 있을까?”라는 그의 주된 관심 자체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이미 나와 있다고 생각하는 편견과 종교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는 지식이야말로 올바른 윤리를 위한 주요조건이며 무지는 이를 방해하는 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도덕적 발전을 가능케 하는 것은 벌이 아니라 양심의 발달인데, 이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의 양심의 목소리에 거슬러서 다른 방향으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더욱 멀리 나아가서 모든 과학과  모든 집단적 규명 이론적 기초를 놓았다. , 그는 지식의 출발점은 모든 편견의 폐기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는 본질적인 것, 즉 탐구(연구)를 위한 길을 열어준다. 소크라테스는 성급한 결론, 비판적이지 않고 스스로 만족하는 의견, 건방짐과 자만에 단호히 반기를 들었다. 또한 “알지 못하는 겸손함”과 어떤 비젼, 확신에 근거한 참된 지식으로부터 나오는 열정을 믿었다. 이것이 바로소크라테스와의 대화 출발점이다. 진리는 모든 학생들, 또한 모두가 학생인 동시에 선생인 이들의 대화에서 이루어지는 집단적 탐구의 결과이다. 철학자는 어떤 새로운 사실을 알리는 예언자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지도자에 대한 새로운 개념, “지도자는 자신의 최종목표를 결코 잊지 않고 진리를 밝혀내는 일을 앞당기는 결연한 사람이다”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놀라운 점은 공산당 선언 정의된 계급투쟁을 위한 공산당의 역할이 이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토론을 이끌고 활기차게 만드는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공개토론을 예술 혹은 과학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렸고 그의 제자 플라톤은 이전에는 도달하지 못했던 수준으로 대화를 발달시켰다.

  엥겔스는자연변증법서론에서 지금까지 행해졌던 자연에 관한 연구의 역사 가지 중요한 시기에 대해 언급했다. 첫째, 고대 그리스인의 “천재적인 직관(genius of intuition), 둘째, 르네상스 시대를 예고한 아랍인들의 “매우 의미가 크지만 산발적인” 결과들, 셋째, 르네상스 시대에 발자국을 내디딘 근대과학이 바로 그것이다. “이슬람 아랍문화 시대”에서 주목할 점은 고대 다른 문화들의 지식들을 흡수하고 이를 집대성한 그들의 놀라운 능력과 토론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이다. 아우구스트 베벨(August Bebel) 바그다드에서 있었던 공개토론의 생생한 목격담을 예로 들었다. “첫 회의에는 모든 이슬람 종파 대표들, 그리스 정교도 정통파와 이단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배화교도, 유물론자, 무신론자, 유대교도, 기독교인들, 한마디로 말해서 각종 이교도들이 참석했습니다. 종파는 자신들의 대변인이 있었는데, 어떤 그룹의 지도자들 명이 회의장에 들어오면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정중히 일어났고 그가 착석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앉지 않았습니다. 회의장이 거의 찼을 무렵, 이교도 명이 말했습니다. ‘모두들 규칙을 알고 계시죠. 이슬람교도들은 자기들 경전에서 나온 증거나 예언자들의 연설에 근거하여 우리와 토론할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경전도 예언자들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는 인간의 이성에 기초한 논쟁만 가능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발언에 기꺼이 동의했습니다.(15) 베벨은 이에 덧붙여 “아랍문화와 기독교 문화의 차이점은 아랍인들이 세계를 정복하면서 자신들의 연구에 도움이 되고 자국민들과 자신들이 정복한 국가의 국민들을 가르칠 있는 저서들을 수집했던 반면,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교리를 전파하면서 모든 문화유적들을 악마의 산물, 혹은 혐오스러운 우상숭배로 취급하면서 파괴했다는 점입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슬람 아랍 문화시대는 그리스 로마 문화와 고대 문화를 르네상스 이후 피었던 유럽 문화에 연결시켜준 고리입니다. 이슬람 아랍 문화가 없었다면 유럽문화는 현재의 위치에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반면, 기독교는 모든 문화발달에 적대적이었습니다.”라고 결론지었다.

  하인리히 하이네는 기독교가 만들어내고, 이후 노동운동에 의해 확인된 종교적 광신과 맹목적인 종파주의의 원인 하나는 문화가 다른 문화의 희생과 포기를 요구하면 할수록 문화의 사상과 원칙은 더욱 냉혹해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엥겔스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인류가 경험하지 못했던 전대미문의 가장 진보주의적 변혁”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사건에서 사상 발달뿐만 아니라 감정, 인격, 인간의 잠재성, 투쟁성의 역할 또한 강조하였다. “당시는 사상, 열정, 인격, 보편성과 학식의 거장이 필요했던 시대였고 결국 이들을 배출한 시대였다.(…) 시기의 영웅들은 그들의 후손들이 종종 느끼는 한계와 편협성을 지닌 노동 분업의 노예가 아니었다. 그러나 특히 특징적인 것은, 거의 그들 모두는 당시의 운동의 와중에서 입장을 세우고 투쟁한, 실천적 투쟁들의 본질적인 부분이었다는 점이다. 때로는  글로 때로는 검으로 아니면 종종 두가지 모두를 가지고서.” (엥겔스,자연변증법서론)

 

토론과 노동자 운동

  엥겔스에 따르면 현대과학 발달에 공헌을 인간사상의 영웅적” 시대를 관찰해 보면, 이 시기가 얼마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았던가를 인식하게 된다. 우선, 시대는 전체적 인간 역사로 놓고 볼 때 매우 늦게 시작되었다. 우리가 중국과 인도의 경우까지 포함한다고 할지라도 지리적 측면에서도 제한이 있었다. 게다가 시대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르네상스와 독일에서의 종교개혁은 고작 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또한 운동에 활동적으로 참여했던 착취계급(그들 자체가 소수였던) 수도 극히 적었다.

  점에 관련하여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들 수 있다. 첫째, 급격한 변화와 모든 곤경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인 토론과 과학이 출현했고 영향력 또한 매우 중요하고 지속적이었다는 점. 둘째, 20세기 중반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유기적 연속성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또한 자본주의 쇠퇴기에 영구적인 대중조직의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토론의 목표를 확장시키고 유지하려는 보여준 프롤레타리아의 능력. 노동자 운동은 여러 번의 중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전통을 거의 2세기 동안 유지했다. 프랑스, 독일, 러시아에서 일어난 여러 혁명운동에서처럼 어느 순간에는 이러한 발전이 수백만의 사람들을 결집시켰다. 여기에서 () () 변화한다.

  그러나 () 적어도 산업화된 국가에서는 프롤레타리아가 인구의 다수를 구성한다는 사실의 산물만은 아니다. 우리는 현대과학과 이론이 르네상스 시대의 영광스러운 출발 이후 부르주아적 분업으로 인해 어떻게 망쳐지고 족쇄가 채어졌는지 이미 목격했다. 이 문제의  중심에는 이슬람 아랍시대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생산자로부터의 과학의 분리가 위치한다. 이러한 괴리는 “근대 산업에서 완성되는데, 이것은 과학을 노동으로부터 분리된 생산력으로 만들어 자본에 봉사하도록 강요한다.(16)

  마르크스는 베라 자수리치에게 보내는 답장의 초안에 과정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이 사회는 과학과 민중, 그리고 사회 자체가 만들어낸 생산력에 대항하는 전쟁을 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과학을 생산에 체계적으로 적용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없는 최초의 경제체제이다.계급지배를 지속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의 교육을 “제한”해야만 하는 체제이다. 또한 자신의 경제적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는 프롤레타리아 교육을 “발전”시켜야 한다. 오늘날, 부르주아 계급은 점점 교양이 없고 원시적인 계급이 되어가는 반면에 과학과 문화는 프롤레타리아 또는, 혹은 경제사회적 측면에서 점점 노동자 계급과 닮아가는 부르주아 계급 임금을 받는 대표자들의 소유가 되어간다.

  사회계급의 폐지는 (…) 그래서 생산발달의 상승을 전제로 하는데, 그러한 생산의 발달 정도에서는 특정한 사회계급의 생산수단과 생산물의 점유, 정치적 지배 문화와 지식 독점이 쓸모 없어질 뿐만 아니라 경제, 정치, 지적 측면에서 발달의 장애가 된다. 이 지점에 지금 도달했다.(17)

  프롤레타리아는 인류 과학전통의 계승자이다. 미래의 프롤레타리아 혁명투쟁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 더욱 토론이 발달하고 과학과 노동의 연합을 위한 움직임, 시대의 요구를 앞서는 총체적 이해가 수반될 것이다.

  새로운 정점에 이를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능력은 인간사회 역사와 관련된 과학적 시도인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이미 증명되었다. 오직 프롤레타리아만이 부르주아 철학사상 가장 최고의 지식인 헤겔 철학을 소화 흡수할 있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가장 널리 알려진 가지 변증법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의 변증법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상호작용의 변증법이었다. 오직 헤겔만이 가지 변증법을 결합시켰고 역사적으로 진정한 변증법의 토대를 창조하였다.

  헤겔은 참과 거짓 사이의 엄격하고 형이상학적인 대립을 그 어느 때보다도 심오하게  공격하면서 토론의 개념 전체에 새로운 차원을 부가했. 정신현상학서론에서 그는 꽃과 과일의 관계처럼 어떤 발달과정(예를 들면 철학의 역사 같은) 상이하고 대립된 단계들이 어떻게 유기적 연합을 이루는가를 보여주었다. 헤겔은 연합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모순”에만 집중하고 “발달”은 외면시하는 경향에 있다고 설명하였다. 쓰러진 변증법을 다시 일으켜 세우면서 마르크스주의는 헤겔 철학의 가장 진보적인 부분, 미래로 이끄는 과정을 이해하고 흡수하였다.

  프롤레타리아는 최초로 피착취계급인 동시에 혁명적인 계급이다. 착취자였던 이전 혁명계급과는 달리 프롤레타리아의 진리탐구는 계급으로서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어떤 이해관계에도 제한되지 않는다. 환상을 품으며(특히 종교적인)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생존했던 이전의 피착취계급과는 달리 프롤레타리아의 관심은 환상을 버리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일단 그들이 숙고하고, 조직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투쟁하자 마자  그 자연스런 경향이 진리의 규명(clarification)을 지향하는 최초의 계급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이러한 독특한 특성은  보르디가주의(Bordigism)불변성(invariance) 개념을 창조할 때 망각되었.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대항해 마르크스주의 기초원칙에 충실하겠다는 그들의 출발점은 옳았다. 그러나 계급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토론을 제한하거나 폐지할 필요성이 있다는 그들의 결론은 반혁명의  산물이다. 부르주아 계급은 자본의 영역으로 프롤레타리아를 끌어들이기 위해  무엇보다 토론을 전부 억누르고 없애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이해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초기에는 이들이 폭력적인 억압을 시도했다면, 이후에는 의회 “민주주의”와 좌파 자본주의 사보타지라는 더욱 효과적인 무기를 발달시켰다. 기회주의자들 역시 점을 이미 오래 전부터 이해했었다. 이들은 말과 사상의 불일치라는 핵심적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스스로를 숨겨야 하며 토론은 이들에게 있어 회피해야 어떤 것이었다. 그러므로 () 기회주의 투쟁과 토론 문화의 필요성은 양립적인 것일 아니라 서로 불가분의 관계일 수밖에 없다.

  토론 문화는 다양한 정치적 입장들 사이의 격렬한 대립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 토론이 “필연적으로” 트라우마적이고 분열과 단절을 낳는다는 말은 아니다. 역사 속에서 토론의 “예술” 혹은 토론의 “과학”의 가장 모범적인 예는 1917 2월에서 10월까지 있었던 볼셰비키당의 토론이다. 각종 낯선 이데올로기가 대량으로 끼어드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토론들은 열정적이지만 매우 친밀한 분위기에서 진행됐으며, 모든 참가자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토론들은 트로츠키가 정당의 “재무장(再武裝)”이라고 불렀던, 승리를 위해 혁명과정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정치적 중재를 가능케 했다.

  볼셰비키적 대화”가 가능 하려면 모든 토론이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푸르동(Proudhon) 반대하는 마르크스의 논쟁은 “파괴적인” 성격의 논쟁이였다. 그에게 있어 푸르동의 이론은 노동운동의 의식 발달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므로 역사의 쓰레기통에 버려 없애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은 마르크스는 헤겔과 유토피아 사회주의에 대항하는 거대한 싸움 중에도 그가 인류의 영원한 공동유산으로 여긴 헤겔과 푸리에(Fourier), 시몽(Saint Simon) 오웬(Robert Owen) 향한 무한한 존경심을 결코 잃지 않았다. 엥겔스는 헤겔 없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없었을 것이며, 유토피아주의자 없이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사회주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ICC 포함하여 노동운동에 있어 가장 심각한 위기는 대부분 각각의 의견들의 대립에서가 아니라 (물론 문제점이 근본적이기는 하지만) 토론하기를 거부하고 사실을 명확히 밝혀내는 과정을 무시하는 데서 왔다. 기회주의자들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사용한다. 이들은 중요한 대립들을 최소화할 아니라 부차적인 대립들을 과장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대립들을 만들어낸다. 또한 개인적인 공격은 물론 중상모략과 비방도 서슴지 않는다.

  노동운동이 짊어져야 무거운 , 한편으로는 일상적인 “상식”, 다른 한편으로는 관습과 전통을무”비판적으로, 거의 종교에 가깝게 존중하는 태도의 짐은 레닌이 써클정신(the circle spirit)이라고 불렀던 것과 관련이 있다. 조직의 건설과정과 정치적 삶을 일상적인 상식과 그 귀결들의 “자연발생성(spontaneity)”에 내맏겨버리는 것과 관련한 레닌의 생각은 전적으로 옳았다. “가장 저항이 작은 방향으로의 자연발생적인 운동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초래한다, 왜 ? 그것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고, 더 다면적으로 완성되었으며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전파시킬 있는 많은 수단을 지니고 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18)

  토론을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과 관련시키는 것(personalisation) 바로 레닌이 말한 써클정신의 특징인데 이는 정치적 논쟁의 중심을 “말해진 것”이 아닌 “누가 그것을 말하는가”에 두는 것이다. 토론을 이렇게  개인화하는 것이 유익한 전체토론에 엄청난 구속이 되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소크라테스와의 대화 통해 토론의 발달이 단지 사고의 문제가 아닌 윤리의 문제라는 것을 이해할 있다. 오늘날, 어떤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자 하는 노력은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만 사보타주를 하는 것은 그들에게 오히려 해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자 계급은 계몽주의 시대의 독일인 레싱(Lessing) 슬로건, 그가 진리보다 사랑하는 것은 “진리를 위한 탐구”라는 말을 유념해야 것이다.

종파주의와 조급함에 대항하는 투쟁

  프롤레타리아 대중운동의 핵심요소인 토론 문화의 가장 훌륭한 예는 러시아 혁명에서 있다(19). 혁명당은 서로 대립하는 대신 토론문화를 활성화시키는 선두에 섰다. 1917 볼셰비키당에서 이루어진 토론들은 혁명계급의 본질, 예를 들어 제국주의 전쟁을 계속하는 것을 지지할 것인가 말 것인가, 언제, 어떻게 권력을취해야 하는가 등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들은 세계 혁명의 운명과 더불어 인류의 운명이 걸려있던 정치적 위기에도 통일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 특히 조직적 노동운동의 역사는 토론 문화가 항상 이러한 수준에 도달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ICC 내에서 만장일치적 접근들이  반복적으로 침입했었다는 것을 이미 언급했다. 이러한 침입이 종종 조직의 분열을 초래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만장일치의 틀 안에서는 견해차이에 대해 분열 이외의 다른 해결책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문제는 이러한 접근법을 과장된 방식으로 받아들인 그러한 인자들이 분열해 나감으로써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러한 () 프롤레타리아적인 접근법이 등장하고 또 재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조직  자체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약점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약점들은 주로 삶과 일상적 대화에서 인식되기 쉽지 않은 작은 혼란들과 잘못된 생각들에 있지만, 그것들은 특정한 상황에서는 심각한 어려움을 일으킬 있다. 이러한 약점들 중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와 기회주의간의 대립의 측면으로, 또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논쟁적 투쟁의 측면으로 놓고 모든 토론을 행하려는 경향이다. 이로 인해 생기는 문제점으로는  첫째, 토론을 하는 동지들이 자신들이 절대 실수해서도, 자신들이 느끼는 혼란이나 서로간의 의견의 불일치를 말해서도 안된다는 심리적 압박을 가함으로써 토론을 방해한다. 둘째, 기회주의가 “진부하고 사소하게 되어(banalisation)”버린다. 우리가 기회주의를 어디서나 만나고 서로 조금의 대립이라도 있을 때마다 “늑대야!”라고 외친다면, 정작 정말로 기회주의가 나타났을 때는 이를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 문제점은 토론 나타나는 조급함인데 이러한 경우에는 결과적으로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들을 수 없으며, 토론을 독점하고 “적수”를 진압하여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른 이들을 설득하고자 한다(20).

  결국, 모든 것들의 공통점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내부에 쁘띠 부르주아적 조급함이 존재한다는 것과, 집단적인 진리규명의 생생한 실천에  필수 요건인 자신감이 결여됐다는 점이다. 이는 , 토론과 진리규명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준다. 그 과정은 사회적 삶의 모든 근본적 과정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내적인 리듬과  고유의 발전법칙을 지닌다. 또한 전개 과정은 진리를 밝혀나가는 있어 발생하는 혼란, 실수와 잘못된 방향, 이를 고치기 위한 노력이 필수적으로 동반된다. 그리고 진정으로 성숙한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모든 과정은 가속될 수는 있지만 단축되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참여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계급전체의 참여가 환영 받고 장려될수록 과정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베른슈타인(Bernstein)에 대항한 논쟁에서, 현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계급투쟁을 하되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성격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주장의 모순을 비판하였다(21). 계급투쟁을 위협하는 가지 주요 위험성이 바로 모순적 본질에서 생겨난다. 번째 위험은 기회주의로서, 노동자는 자신의 적들의 치명적인 영향력의 지배 아래에 놓일 있다. 계급투쟁으로부터의 이러한 일탈에 있어서는, “노동운동이 중요한 것이지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다”가 그 좌우명이다. 두 번째 위험은 종파주의(sectarianism), 자신의 계급인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삶의 영향력에 대한 개방성이 결여된 것이다. 엇나간 노선에 있어서는 “목적이 중요한 것이지 노동운동은 아무것도 아니다”가 그 좌우명이다.

1 세계대전 세계혁명의 패배를 낳게 끔찍한 반혁명의 진행 속에서, 종파주의가 기회주의를 억제할 있을 것이라는 잘못되고 치명적인 생각이 혁명진영의 잔존자들 사이에서 발달하였다. 혁명운동을 불모화시키고 화석화시킨 이러한 접근법은 종파주의와 기회주의 두가지 모두가 노동자 운동과 목표를 분리하기 때문에 똑같은 동전의 양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혁명적 소수들이 그들 계급의 실제적 삶과 운동에  완전히 참여하지 않는다면 공산주의의 목표는 결코 달성되지 못할 것이다.

 

 

 

·(1) 마르크스와 엥겔스처럼 이론적으로 성숙하고 명확했던의 젊은 혁명가들조차 당시에 곧 공산주의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1848 사회적 격변기에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은 곧바로 이러한 가정을 재검토하고 수정해야만 했다.

· (2)  인터내셔널 리뷰( International Review)125호, 2006 프랑스 학생운동에 관한 논문 참조

· (3) 프롤레타리아 진영 내에서 관점은 이른바보르디가주의(Bordigism)”에 의해 이론화되었다.

·  (4) 과거 혁명가들의 전기(傳記) 회상록에는 그들의 토론 능력, 특히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는 능력의 실례(實例) 가득 실려 있다. 관점에서 레닌은 유명했으나 그가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면, 프리츠 슈테른베르크(Fritz Sternberg)1963년에 작성한트로츠키와의 대화”에 관한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함께 대화를 나눌 트로츠키는 무척 예의 바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어떤 단어나 개념을 보다 상세히 설명해달라고 요청할 때만 제외하고는 나의 말을 도중에 끊어버리는 일은 결코 없었다.

· (5) 주제에 관해서 인터내셔널 리뷰( International Review)110 기사  ICC 특별총회: 조직원칙 수호를 위한 투쟁  114 기사  ICC 15 ICC총회: 시대의 도전에 직면한 조직의 강화  참조할 .

·  (6)  인터내셔널 리뷰( International Review)111, 112, 127, 128호에 실린 기사 프롤레타리아 투쟁에 있어서 신뢰와 연대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와 윤리 참조할

·  (7) 이탈리아 좌파공산주의 네덜란드 좌파공산주의 관해 ICC 저술한 책을 참조할

·(8) 프랑스 좌파공산주의는 좌파공산주의 이태리분파 해체 이후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려고 하였다. 예로  인터내셔널 리뷰( International Review)33호의  « 천재적인 지도자 »개념에 관한 비판과, 같은 잡지 34호에 실린 조직투사들을 조직의 정치적 방향은 논의할 필요가 없는 그저 단순한 집행자로 인식한 « 통제 » 개념에 관한 비판을 참조할

·(9)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10) 엥겔스, 포이어르 바흐에 관한 테제 

  (11) 엥겔스, 자연변증법  심령계에서의 자연연구

   (12) 마르크스,  자본론 37 48 : « 3 공식 »(3 초반)

    (13) 엥겔스, 자연변증법  심령계에서의 자연연구  마지막 부분

    (14) 기원전 500 아시아의 발달에 관해서 1927 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열린 학회 아우구스트 탈하이머(August Thalheimer) 발표 변증법적 유물론 입문  (1938 미국판 출간) 참조할

    (15) 아우구스트 베벨, 이슬람 아랍 문화시대 6과학 발달과 () 참조

    (16) 마르크스,  자본론 1 4 14: 분업과 매뉴팩처, 5: 매뉴팩처의 자본주의적 성격

    (17) 엥겔스,  안티 뒤링 ,3 « 사회주의 », « 이론적 개념 »

  (18) 레닌,  무엇을 것인가  2 « 대중의 자생성과 사회 민주주의 당의 의식성 »

   (19) 트로츠키의 저서  러시아 혁명 역사 』 또는 리드의 « 세계를 뒤흔든 10 참조

    (20) 주제에 관해 인터내셔널 리뷰( International Review)130호에 실린 ICC 17 총회 토론 보고서, « ICC 17 총회: 프롤레타리아 진영의 국제적 강화 » 참조

    (21)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인터내셔날리스메(Internationalisme), 1946 : 러시아적 경험 : 사유재산과 공동재산   빌랑(Bilan) 35 1936 9-10월호 : 공산주의(VII) : 전화기의 문제점          

후쿠시마 1년후

3 11 거대한 쓰나미가 일본 동부 해안을 휩쓸었다. 12- 15미터이상의 높은 파도가 믿을 없을 만큼 피해를 초래했다. 2만명 이상이 쓰나미로 사망했고, 아직도 수천명의 실종자들이 보고되어 있다. 무수한 사람들이 집을 잃었다. 전세계적으로 상당 수의 인구가 해안가나 해안 부근에 정착해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좁은 공간에 밀집해 살고 있으며, 돌이킬 없는 해수면 상승으로 점점 위협당하고 있다. 쓰나미의 높은 파도는 그렇게 해안선을 따라 밀집된 정착으로 야기되는 모든 위험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정부의 모든 예상과는 달리, 재앙적인 사건이 후쿠시마핵발전소에서 발생했다이번의 지진과 쓰나미는 해안선을 따라 이뤄진 정착으로 인해 기후변화시대에 야기되는 잠재적인 위험들과 지배계급의 원자력 취급방식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우리는 쓰나미의 파괴적 결과들을 무시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단지 공간의 제약으로 인해 글에서는 핵노심용융의 결과들에 촛점을 맞추고자 한다.

체르노빌, 후쿠시마 : 지배계급의 만연한 무력감과 부도덕

후쿠시마에서 대재앙적 사태가 발생한 , 주민의 대피는 너무 늦게 시작되었고 필요한 통행금지구역을 모두 포괄한 것도 아니었다. 구제대책과 대피가 쓰나미의 결과로 지연되고    방해받았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정부가 발생된 위험들의 규모를 완전히 의식하고 싶지 않았고 그것들을 과소포장하길 원했기에 광범위한 대피를 피하고 싶어했음은 부정할 없다. 일본의 책임자들(원전운영사 텝코와 국가) 그러한 일을 전혀 예기치 않았으며 안전대비책들도 그러한 규모의 지진과 쓰나미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불충분했음이 갑자기 밝혀졌다. 계획된 구제대책들과 용도로 제공된 구제수단들은 하이테크국가 일본을 빈약하게 무장된 무력한 거인처럼 보이게 했다.

  재앙이 발생한지 며칠이 지난 , 경우에 따라서는 3 5백만인구를 거느린 토쿄 광역권의 인구를  대피시켜야할 필요성의 문제가 제기되었을 , 정부는 생각을 즉시 포기했다. 일단 그렇게 수단이 없었고 그러한 대피가 국가의 붕괴위험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원자력발전소 안과 주변에서는 방사능측정치가 치명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재난이 시작되고 얼마지 않아 일본수상 칸은, “원자로내 압력을 수동으로 낮출 노동자들로 이뤄진 '자살부대'” 요청했다. 그곳 현장에서 작업하는 노동자들은 전적으로 충분한 보호장비 없이 재난에 대항해 싸워야만 했다. „종종 측정기과 허가된 적당한 보호장화가 부족했다. 노동자들은 대신에 플라스틱봉지를 신발 둘레에 테잎으로 붙혀 썼다고 보고했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잠을 자야했고 납으로 덮개 외에는 아무것도 덮을 것이 없었다.  비상상태에 남성 핵발전소노동자의 한해동안의 피폭한계치는 3 15 100mSv에서 250mSv 높게 책정되었다.  부분적으로는 노동자들은 원전에서 해체작업을 한지 그리고 달이 지난 후에야 건강검진을 받았다.

25년전 체르노빌의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했을 , 당시 몰락의 길에 들어서 있던 소련체제는 기술적 수단의 부족으로, 대부분 강제동원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피해복구작업을 위해 지옥으로 파견하는 밖에 없었다. 세계보건기구의 자료에 따르면 60만에서 80만명의 해체인력이 파견되었는데, 중에서 지금까지 수십만명이 피폭의 결과로 사망하거나 암을 앓고 있다. 그에 대한 통계숫자는 정부측에서 지금까지 결코 공개되지 않았다.

그후 25년이 지난 지금, 하이테크국가 일본은 무력하게 소방호스와 헬리콥터로 불을 끄고 설비를 냉각시키려 시도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기획된 구상들과는 반대로, 냉각을 위해 엄청난 양의 해수를 투입하고 이렇게 해서 방사능물질로 오염된 물을 다시 바다로 배출할 밖에 없었다. 소련정부가 25년전에 수백만명의 해체인력을 강제로 동원했던 반면, 일본의 경제적인 곤궁은 무수한 노동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게 만들었다.  텝코는, 예를 들어 오사카의 노동자구역인 카마가사키와 같은 곳에서 노숙자나 실직자를 대상으로 인력을 구했고, 그렇게 동원된 사람들에게는 투입지역이나 위험들에 대해서 종종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다.  그러나 해체인력들의 생명만이 위험에 처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생명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지역의 아이들은 아무 대책없이 높은 방사능량에 노출되었다. 방사능방출이 지금까지의 모든 측정치를 넘어섰기 때문에, 정부는 후쿠시마지역 학생들의 한해 피폭한계치를 20mSv까지로 상향조정했다. 스탈린주의적인 소련의 권력자들만 체르노빌의 폭발에 대해 처음 몇일 완전히 침묵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민주주의 정부도 후쿠시마의 경우에 진실을 말하지 않고 재앙의 규모를 과소포장하려 했다. 이런 점으로 , 냉소주의와 생명경시에 있어서 일본의 책임자들은 스탈린주의 소련의 권력자들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장기적인 결과를 오늘날 사실상 가늠해 보기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노심용융이 일어난 것은 용융된 연료봉들이 엄청난 방사능을 지닌 덩어리로 뭉쳐져 압력용기를 관통해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투입된 냉각수 자체는 극도로 오염되어 있고, 계속해서 다시 냉각되어야 하며 그때마다 다시 엄청난 양의 오염된 해수가 발생한다. 물뿐만 아니라 보호되지 않은 원자로들은 세슘, 스트론튬과 플루토늄 동위원소들을 방출한다. 물질들은  파티클스(뜨거운 입자들)” 불리는데, 나중에 일본 전역에서, 그래서 토쿄에서도 발견되었다.  지금까지의 기술적 수단으로는 후쿠시마에서 발생한 핵쓰레기의 처리는 불가능하다.  냉각하는 것만도 몇년이 걸릴 것이다. 체르노빌에서는 일종의 석관이 설치되었는데, 100년후헐어내고 다시 설치되어야 한다. 후쿠시마에 대해서는 아직 어떤 해답의 전망도 없다. 그러는 동안 방사능에 오염된 물이 점점 쌓여가고, 그것을 어디에 버려야할지 수가 없다. “대부분의 방사능은 냉각수를 통해서 후쿠시마를 빠져나가 곧장 바다로 들어가서 해류를 따라 곳곳으로 확산되기에, 태평양과 먹이사슬 그리고 그와 더불어 인간들에게 미치게 결과는 예측할 수가 없다. 일본의 북동부 해안 앞의 극히 풍부한 어장이 타격을 입었고, 예를 들어 베링해역의 바다연어로 확산되는 것이 가능성의 영역권에 놓여있다.” (1)

그렇게 많은 양의 방사능물질의 해양으로의 방출은 지금까지 없었다.”

  일본 이지역의 인구밀도가 우크라이나보다 15배나 높기때문에, 주민에 대한 영향은 지금 아직은 정확하게 가늠될 수가 없다.

그래서 노심용융은 그러한 핵재앙의 결과들이 전적으로 통제불가능함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책임자들은 페스트와 콜레라사이에서만 선택할 있는데, 노심용융을 방치한 보고만 있거나 아니면 해수로 냉각을 시도해서 결국은 소방물질을 통해 방사능이 광범위하게 확산되도록 하거나. 무력한 정부는 두번째의 경우, 높은 방사능으로 오염된 소방물질을 통한 해수의 오염을 선택했다.

오염제거: 문제의 해결 대신 불운의 악화

 주변의 오염된 토양을 처리하려는 시도도 무력감과 부도덕을 백일하에 드러낸다. 30 인구의 도시 후쿠시마에서 8월초까지 334개의 학교와 유치원에서 마당의 오염된 토양을 제거하는 정화작업이 이뤄졌다. 후쿠시마지방의 코리야마시는 방사능으로 오염된 흙을 어디로 처리할지 몰라서, 많은 부모들이 경악하게도... 학교주변에 묻었다. 외에도 일본의 48개의 지방들 17 지방들이, 그중에는 토쿄도 속하는데, 방사능으로 오염된 진흙찌꺼기를 처리 못한 보유하고 있다고 전한다. 심지어 토쿄로부터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까지도 방사능으로 오염된 토양이 발견되었다. 한편 방사능입자들을 제거작업이 이뤄져야될 건물들이 수천개나 여전히 남아있다. 수목이 우거진 조차도 아마 오염제거작업이 이뤄져야만 것이다. 아마 많은 나무들을 베어내야만 것이다.

일본의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정부는 방사능으로 오염된 수백만 톤의 물질들을 위한 임시보관장소를 찾고 있다.  마땅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방사능 오염된 폐기물은 일부분 소각되었다. 그렇게 생겨난 매연을 통해 방사능이 광범위하게 확산될 것이다. 발생된 핵폐기물에 대한 이러한 속수무책은 방사능폐기물의 처리라는 풀릴 없는 근본적인 문제를 조명한다. 

핵폐기물처리  파괴적인 유산 또는 우리를 뒤따를 대홍수

원자력 발전에서 특별한 점은, 원자력발전소의 수명이 다해 가동 종결된다 하더라도 방사능의 발산이 끝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가동중지와 동시에 핵분열과정이 종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방사능물질과 접촉한 모든 것은 오염되는데, 원자력발전소에서 발생된 폐기물은 어떻게 것인가? 

세계원자력협회 제공 정보에 따르면, 매년 1 2천톤의 고방사능 폐기물이 발생한다. 모두 합치면 전세계적으로 2010 말까지 생겨난 고방사능폐기물은 이미 30만톤에 달한다. 몇몇 나라들에서 실행중이거나 계획중인 지리적인 저장, 옛광산에 저장하는 것은 위험성에 대해 눈가림식의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그런식으로, 독일의 아세(Asse) 저장된 12 5 통의 핵폐기물은 조만간 인접한 소금의 영향으로 침식될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 벌써 방사능으로 오염된 여과액이 흘러나오고 있다. 독일의 임시저장소 고어레벤(Gorleben)에서 전문가들은 지반함몰 위험을 조사했다. 비슷한 위험들이 전세계 대부분의 저장소灯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원자력발전소의 운전이 이미 위험 요소들과 관련되어 있다면, 그렇게 핵페기물의 처리는 전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지금의 책임자들은 모든 폐기물을 저장소나 임시보관소에 떠넘기는데, 이는 결국 문제의 해결을 무수한 미래의 세대들에게 미루는 것에 불과하다.

원자력발전소의 아주 정상적인灯 운행도 결코, 원자력산업의 옹호자들이 주장하듯이 그렇게  깨끗하지灯 않다. 사실상 원자력을 이용한 전력생산시에는 연료봉의 냉각을 위해 엄청난 양의 물이 요구된다. 그래서 원자력발전소는 주로 해변이나 강변에 건설된다. 14개월마다 원자로의 연료봉들을 교체하는데, 연료봉들은 아직 매우 뜨겁기때문에 계속해서 폐연료냉각수조 안에 저장되어  2-3년간 냉각되어야 한다. 강으로 유입된 냉각수는 물의 온도상의 오염을 가져와서 수초가 자라고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한다. 또한 화학물질들(특히 나트륨, 붕산, 암모니아등) 핵발전소로부터 강으로 유입된다.

대재앙 이후 1: 권력자들은 어떤 결론을 냈는가?

권력자들, 책임자들은 원인규명에 관심이 있는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사실은,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설계 전체가 지진에 제대로 대비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동안 밝혀진 바로는,  원전운영사 텝코는 이전에 많은 단순사고들을 얼버무렸고 지적된 안전결함들을 해결하지 않았으며, 특히 발전소는 40년간의 수명을 다해서 어차피 가동종결되었어야 했다.  하필이면, 자국 자본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MITI 같은 제도들을 통해 경제에 깊이 개입하는 일본국가가 바로 원자력산업에 백지수표를 줘어 주었다.  조사보고서 조작이나 사고 얼버무리기의 진상이 백일하에 들어났을 조차도 국가는 어떤 결정도 내지 않았다. 밖에도, 경쟁의 압력과 위기의 무게로 인해 감독과 유지에 점점 투자를 하게 되고, 점점 숙련된 인력을 투입하려는 경향은 전세계적으로 널리 확산되어 있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불충분하게 양성된 인력에 의해 안전기준이 낮아지게 됨으로써 원자로의 안전을 위협하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세계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442개의 원자력발전소중 많은 발전소가 지진발생위험지역에 놓여있음이 분명해졌다. 일본에서만도 50 이상의 원전이 지진발생위험지역에 세워져있다. 미국에서는 12 이상의 원전이 잠재적으로 비슷한 재앙발생에 노출되어 있다. 러시아에는 많은 원전들이 지진발생시 자동으로 작동되는 가동중지메커니즘 없이 가동되고 있다. 터어키에서는 아쿠유베이(Akkuyu Bay) 원자로가 활성  에세미스(Ecemis) 단층선 근처에 건설되었다. 한편 현재 27개의 새로운 원전을 건설중인 중국은 지진활동이 가장 왕성한 나라들 중의 하나이다. 많은 예들을 리스트에 포함시킬 있을 것이다. 자연재해의 위험을 고려하는 대신, 자본주의는 도처에 시한폭탄을 만들어냈다! 고도로 발전한 나라들에서 안전기준들이 이미 불충분한 것으로 드러난 마당에, 이제서야 원전의 운전에 뛰어드는 나라들은 안전기준들과 사고처리경험을 조롱한다. 지역에 사고가 발생했을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할 조차도 없다....

게다가 오래된 원자력발전소의 수명이 연장된다. 미국에서는 60년으로, 러시아에서는 45년으로 연장되었다. 국제적 수준에서는 엄격한 안전기준에 대한 저항이 그리고, 원자력산업에 대한 국가들의 허술한 통제를 넘어서는 국제감시기관의 개입에 대한 저항이 상당히 거세다. 국가의 독립성이 안전에 우선시되고 있다(3).

종합하자면, 후쿠시마사태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여전히 시한폭탄 위에 앉아있는데, 시한폭탄들은 곳곳에서 그리고 언제라도 지진이나 고장 또는 테러리즘 등에 의해 새로운 재앙으로 작용할 있다.    

원자력 전력  값싸고,  깨끗하며 다른 대안이 없는가?

사회를 댓가로 이윤

 원자력산업의 옹호자들은 반복해서, 원자력 전력은 값싸고, 깨끗하며 다른 대안이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사실은, 원자력발전소 하나를 세우는데 엄청난 비용이 들고, 이는 전력회사들에 의해 충당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다시 국가의 보조, 세금을 통해 지원된다핵페기물의 처리비용의 주요부분도 운영회사들에 의해 사회에 전가된다. 지금까지 핵페기물처리에 대한 어떤 해답도 없다는 점은 논외로 치더라도, 핵로비측의 계산 전체에 이러한 폐기물처리비용은 참작되어 있지 않다. 원전이 50년의 운전후에 가동중지되더라도, 지금까지 참작되지 않은 거대한 비용이 생겨난다.

단순사고이거나 대형사고이거나를 막론하고, 여기서도  비용은 사회에 전가된다. 후쿠시마에서는 규모가 지금으로선 현실적으로 산정되기 불가능한 결과비용들은 지금까지 2-3천억 유로로 추정된다. 금액은 텝코가 도저히 조달할 없는 것이다. 일본 국가는 텝코노동자들이 희생한다는 조건하에 이미 원조灯를 약속했다. 그렇게 해서 연금이 삭감되고 임금이 인하되며 수천개의 일자리가 없어질 것이다. 또한 일본의 전체 가정에 특별세도입이 계획되어 있다.

경제적 생태적인 측면에서 원전운행으로 발생하는 사실상의 비용과 폐기물처리라는 미해결 문제는 밑빠진 독과 같다. 원자력은 어떤 측면으로 보더라도 비합리적인 프로젝트이다. 원전사들은 전력생산으로 거대한 금액을 벌어들이지만 결과비용灯은 사회에 전가한다.  원자력발전소는 그래서 이윤추구 그리고 인류와 자연의 장기적 보호사이의 극복될 없는 대립을 체화하고 있다.

위기와 자연 남용

원자력이 환경에 대한 유일한 위협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자연 남용을 자행하고 있다. 전혀 보존에 대한 고민 없이 모든 자원을 강탈하고 환경을 창고처럼 취급한다.

사이에 점차 지역이 사람이 없게 되는 곳이 늘어나고, 바다는 쓰레기로 가득하며, 얼마전까지만 해도 도달불가능했던 자원들이 점점 정교화된 기술로 남김없이 약탈된다. 이때 투입되는 수단은 점점 폭력적이고 비용이 많이 뿐만 아니라 위험과 잠재적파괴력이 배가된다.  2010 4 멕시코만에서 원유시추선, 딮워터 호라이즌이 폭발했을 , 진상조사위원회는 안전규정상의 명백한 결함들을 발견했다.  엄청난 경쟁의 압력때문이기도 하고 바로 그때문에, 시설의 건설, 감독 운영에 거대한 투자를 했어야할 대기업은 결국 엄격한 긴축정책을 펼수 밖에 없었고, 이는 안전비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최근의 예로는 브라질해안이 원유로 오염된 것을 있다. 모든 과실들은 결코 기술적으로 후진적인 나라들에 국한될 없는 현상들이다.  오히려 고도로 발전된 나라들에서 믿을 없는 양상을 띠게 된다.

인류 전체에 대한 위협

1970년대 미국에서 발생한 쓰리마일아일랜드(Three Mile Island)사태나 체르노빌의 경우와는 달리후쿠시마사태는 인구가 밀집된 대지대, 3 5백만의 인구를 거느린 토쿄를 직접적으로 위협했다.

원자력은 2 세계대전시에 전쟁무기로서 개발되었다. 일본의 도시에 투하된 원자탄과 더불어, 쇠퇴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새로운 단계의 파괴가 도입되었다.  2 대전후 군비경쟁은 체계적인 고도의 핵무장과 더불어 이러한 군사적인 파괴무기를 더욱 강화시켜서 오늘날에는 한번의 핵무기전투에 인류가 절멸될 있을 정도가 되었다.  냉전 종결후 2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대략  20만개의 핵무기가 존재하고, 이는 인류를 몇십번이나 절멸시킬 수있는 파괴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쓰리마일아일랜드, 체르노빌 그리고 후쿠시마의 핵사고를 통해서, 인류가 군사상의 핵무기투입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원자력의  '비군사적이용을 통해서도 위협받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일본정부의 추산에 따르면, 후쿠시마 다이이치 원전사고의 결과로 대기중에 방출된 세슘-137 동위원소의 양은 1945 히로시마에 원폭투하로 야기된 양의 대략 168배에 해당된다고 한다.(4)

후쿠시마사태 발생 이후 사태수습의 전반적인 전개양상을 , 책임자들은 속수무책이었고 사태의 규모를 과소포장하려 했으며 사태로부터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은 , 비용에 대한 어떤 통제도 상실했다오히려, 원자력 문제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환경 전체의 보호에 있어서도 지배계급은 점점 가차없어진다. 환경파괴는 점점 위협적인 규모를 띠고 지배계급은 환경보호를 위해 책임있는 대책들을 시행함에 있어서 무능함을 점점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지구가, 인류가 이윤의 제단 위에 희생되고 있다.

게다가 지난 해에 첨예해진 세계경제위기로 인해자연유지를 위한 보호대책을 도입하기에는 지배계급의 재량권의 폭이 부가적으로 축소되었다자본주의는 위기를 통해서만, 기아, 빈곤, 전쟁등과 같은 위기의 재앙적인 결과들을 통해서만 인류를 파멸로 내모는 것이 아니다자본주의는 파괴력을 통해 전체 생태계의 존재를 위협하고 있다. 원자력발전소들은 단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시간과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자본주의가 지구 전체를 파괴하거나, 아니면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이 노동자계급을 선두로 하여 이체제를 극복하느냐가 문제이다자본주의는 인류를 다양한 수준들(위기, 전쟁, 환경)에서 위협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 원자력에 대항하는 것과 같이, 자본주의적 현실의 오직   측면에 대해서만 배타적으로 대항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모든 공포의 시나리오들과 자본주의 체제에 놓인 뿌리들 사이의 연관성들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성행했던 소위 “1-쟁점-운동들”(반핵운동, 가택점거, NATO무장반대운동) 투쟁을 내맡겨버리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가 것이다. 오늘날 어느때 보다도, 전세계적인 파산을, 체제가 막다른 골목에 다달았음을 세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위기와 전쟁과 환경파괴 사이의 이러한 연관성을 외면한다면, 어쩔 없이 개량주의라는 살얼음판 위에 도달하게 되고 체제에 의해 흡수되어버릴 위험에 빠지게 된다.  D. 2012 1


 

(1)     후쿠시마 북동쪽에서 2개의 해류들, 큐로시오난류와 오야시오한류가 만나서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어장들 중의 하나를 이룬다. 그곳에서 이뤄지는 일본의 어획은 일본에서 소비되는 생선제품의 반을 이룬다. 그렇게 해서 생선공급이 위태롭게 될수 있다.

(2)   Http://news.ippnw.de/index.php?id=72, 일본환경단체의 정보에 따르면, 일본정부는 후쿠시마지역으로부터의 오염된 토사들을 일본 지역으로 분배해서 소각할 계획이라고 한다. 일본환경성이 추산하기에, 이와테, 미야기 후쿠시마등 해안지대에서  3월의 재앙으로 인해 생겨난 건축폐기물은 대략 2 3 8십만톤에 달한다고 한다.  이미 이와테에서 토쿄로 대략 천톤의 폐기물의 첫운송이 지난 11월에 시행되었다고 마이니치신문은 보도했다. 이와테 지방정부가 추정하기에 폐기물은 133bq/kg 방사능물질을 함유한다.  2011 3월이전이라면 이것은 불법이었겠지만,  일본정부는 7월에 건축폐기물안전수준을 100bq/kg에서 8,000bq/kg으로,  10월에는 다시 10,000bq/kg으로 상향조정했다. 토쿄는 총합 500,000톤의 폐기물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밝혔다.

(3)     후쿠시마이후, 2022년까지 원전으로부터 하차하겠다는 독일 자본의 태도에 대해서는 세계혁명 168, 169호에 실린 우리의 기사를 참조.

마이니치신문, 2011 8 25일자 기사참조                                                                      

ICConline - 2013

[번역] 중국과 일본의 제국주의 충돌

2012년에 시작된 센카쿠 열도(열도는 대만의 북동쪽 약 200km, 일본 오키나와의 400km 남서쪽, 중국의 동쪽 대략 400km에 있다)를 둘러싼 분쟁은, 극동아시아 최대의 양국 간 적대적 야망과 긴장을 초래했다. 세계 최고의 인구를 갖고 있으면서 세계 2위의 경제력을 지닌 중국, 그리고 세계 3위의 경제력을 가진 일본, 두 나라는 서로 이 제도(諸島)를 둘러싼 긴장을 고조시키고, 자신들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병력을 동원해왔다. 대만 또한 이 섬을 둘러싸고 일본과 충돌했다. 이것은 일본과 중국, 아시아뿐 아니라 세계 전체에 있어서 분명히 심각한 문제다.

이 양 거두(巨頭)뿐만 아니라 대만도 이 제도(諸島)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센카쿠 열도는 바위투성이로 거주 불가능한 땅임에도, 그 전략적 가치와 잠재적인 유전, 천연 가스원, 풍부한 어장의 존재가 이 제도의 영유권 주장을 결정적으로 강화시키고 있다.

중국 - 신흥 제국주의 대립

중국이 센카쿠 열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일본과 충돌하고 있는데, 이곳이 이웃 제국주의와 대립하고 있는 유일한 분쟁지대는 아니다. 최근의 경제 성장 이후, 중국은 점점 자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위험을 안게 되었다. 자국 선박 수송의 80%가 센카쿠 열도 주변을 통과한다. 아시아에 있어 어떤 해협의 봉쇄도 중국을 심각하게 방해한다. 게다가 중국은 본토를 넘어 바다 건너까지, 특히 남중국해(South-China-Sea)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려 하고 있다. 주요 경쟁자인 인도와 직면하게 된 중국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각각 전초 기지를 설치하려 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과 다른 나라의 공격을 무릅쓰고 이란과 시리아를 지원해 왔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평화적인 경제발전을 바라는 한편 동시에 군사력 증강에 투자를 계속해 왔다.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은 이미 중국이 아시아에서 최대의 경쟁자라 인식하고, 군사적 중점을 동아시아로 옮기는 것을 결정했다. 미국은 2020년까지 해군력의 60%를 동아시아 지역에 배치할 예정이다.

게다가, 증대하는 자원 수요, 특히 에너지 자원 수요는 중국의 남중국해에서의 자원 탐사 및 채취권 주장을 하게 만들었다. 중국의 지금까지 남중국해에서의 대립과 이번 일본과의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대립은, 중국이 엄청나게 자원을 갈망할 뿐 아니라, 제국주의 서열(계층)의 재편성에 나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은 이제 미국과 그 동맹국의 지배적인 역할을 끝내고, 자국 영토를 넘은 지역에서 이익을 방어하기 위한 세력이 되려 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일본, 중국의 대립은 극동아시아에 있어 증대하는 제국주의 국가 간 긴장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일본: 자기 야심에 집착하는 쇠약해진 제국주의

일본은 지금까지 센카쿠 열도의 영유권을 주장해, 자신의 능력을 예전의 제국주의 역사 속에서 새롭게 찾아내려 하고 있다. 19세기 말에 이미 일본 자본은 대만, 동중국해 섬들 그리고 한국 침략의 야망을 품고 있었다. 현재 일본 정부는 1894년 센카쿠 열도 점령의 역사적 정당화를 추진하고 있다. 일본이 미 제국주의에 패배함에 따라 이 열도는 미국의 관리로 넘어갔지만 1972년 일본에 반환되었다. 물론 일본은 이 땅에 매장된 에너지 자원을 중국에 양도할 생각도 없고, 제국주의 서열을 바꿀 생각도 없다. 이 땅은 과거의 속박에서 벗어나려 한다. 2차 세계대전 패배 후, 일본은 미국의 우산 아래 들어갔다. 격렬한 폭격(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와 도쿄 다른 지역까지 공습) 후, 미국의 관리하에 놓였다. 일본은 외국에서의 충돌에 군사력 사용이 허용되지 않는 헌법을 제정할 것을 강요당했다.

하지만 1950년대 초 냉전 상황에서 일어난 한국 전쟁에서 미국은, 러시아와 중국과의 대결 시 지원을 받기 위해, 일본의 재무장을 강요했다. 북한의 정기적인 일본, 미국, 한국에 대한 무력행사 협박과 중국의 증가한 힘 때문에, 일본은 스스로 모순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미국의 의존에서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북한과 중국의 군사적 위협에 대해서는 자국을 미국의 군사력의 아래 두고 싶은 것이다. 1989년 이래 일본은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약간의 행보를 시작했다. 자위대는 페르시아만과 인도양에서 최초의 ‘해외파병’을 경험했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미국 주도의 전쟁에서 병참 일부를 담당했다. 일본은 인도, 베트남과 함께 말라카 해협과 남중국해에서의 군사 행동에 참가했다. 앞서 일본은 지부티(아프리카 북동부 아덴만 기슭에 있는 국가의 수도)에서 최초의 군사기지를 설립했다. 이 자위대는 최신 무기를 갖추고 있다. 중국군의 현대화와 확장은 일본에 군사력 투자를 한층 더 재촉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게 중국과 센카쿠 열도는 유일한 분쟁지역이 아니다. 일본은 한국과도, 일본이 1905년 한국으로부터 획득한 타케시마(독도)를 둘러싼 다툼을 벌이고 있다. 일본은 북한의 군사적 도발을 두려워하고 있고, 장래 일어날 수 있는 남북한 통일을 더욱 큰 위협이라고 느끼고 있다. 그렇다 해도, 일본은 중국 제국주의의 번창이 가장 큰 위협이라고 느끼고 있다. 역사적으로 일본과 중국은 이 지역에서 양대 제국으로서 대립해 왔다. 수년 동안 중국 대부분을 점령하고 수많은 국민을 학살한 처참한 전쟁을 감행한 일본에 대해, 중국의 지배계급은 항상 일본에 대한 복수의 애국주의적 감정을 이용했다. 이에 대해 일본 아베 내각은, 중국에 대해 더욱 공격적인 자세를 취한다고 밝혔다.

일본, 중국 간의 긴장의 고조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갈등에 기름을 붓는 격이며, 양국과 그 동맹국이 대립하고 있는 다른 지역에서의 긴장을 한층 더 발전시킨다. 아시아 양대 강국의 경쟁은 전 세계로 번지게 될 것이다!

민족주의적 견제에 머물지 않는 중국과 일본의 충돌

일부의 경우, 특히 2012년 가을, 중국의 일부 도시에서, 센카쿠 열도에서의 일본 군사력에 대해, 일본계 상점을 불태우거나, 일본계 기업의 공장을 공격하는 등의 항의가 있었다. 중국 정부는 분명히 이러한 시위를 환영하고, 아마도 직접 조직까지 했을 것이다. 다른 정권과 같이 중국 정부도 경제 성장 문제, 환경 오염, 지배 세력의 부정부패에 대한 분노 등 심각한 사회 문제로부터 사람들의 눈을 돌리는 것에 집중했다. 당국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폭동’의 회수는 지난 몇 년간 증가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이러한 항의를 국수주의-애국주의의 틀로 왜곡시키고 있다. 일본과의 충돌은 사람들을 국가에 재결집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중국은 지난 몇 년 동안 세련된 애국 선전을 젊은 세대의 머리에 주입해 왔다. 오랜 세월 불황에 고통받고, 후쿠시마 재해와 쓰나미의 참극에 직면한 일본 정부도 똑같이 사람들을 민족주의로 끌어들여, 국가 아래 단결시키고 싶어했다. 확실히 지배세력이 이러한 항의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지만, 이 대립을 단순히 경제, 사회, 환경 문제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기 위한 민족주의의 책략이라고 보는 것은 위험하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최대의 양국이 센카쿠 열도를 둘러싸고 충돌해, 미국과 아시아 국가들이 이 분쟁에서 적과 아군을 정하는 과정에 들어가면, 제국주의 국가 간의 긴장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 전체로 퍼질 것이다.

양국 모두 서로의 수출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상태에서, 앞서 말한 충돌 때문에 교역이 심각하게 감소했는데, 왜 지배자들은 ‘이성적’으로 민족주의 경향을 억제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원래 지배자들은 ‘이성적’인가? 사실 군국주의는 자본주의의 불치병이다. 자본주의는 일개 국가의 힘보다 훨씬 강력하다. 자본주의는 평화적으로 경제 경쟁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자본주의 시스템은 인류를 점점 야만스럽게 만드는 전쟁으로 끌어들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주요 전장은 유럽이었다. 아시아는 이 시점에 아직 전장에서 약간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아시아의 광대한 지역이 주요 전쟁터가 되어, 몇 천만의 생명을 앗아갔다. 베트남 전쟁에 앞선 한국 전쟁은, 1950년대 가장 처참한 대립의 하나였다. 소련의 붕괴와 미 제국주의의 쇠퇴에 따라, 중국 제국주의가 영향력을 얻어 아시아의 제국주의 경쟁에 도전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아시아에서의 중국의 경쟁자들(일본, 한국, 베트남, 필리핀, 인도 등)은 중국의 세력 확대를 막기 위해 미국의 군사적 지원을 바라고 있다. 중국, 일본의 최근 충돌은 이 지역 전체로 확대되는 일련의 긴장의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우리는 정부의 민족주의적 정책에 따라 대량 학살에 대비해야 할까? 아니,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민족주의, 국수주의, 애국주의는 프롤레타리아의 무덤이다. 극복할 수 없는 경제위기, 끝없는 전쟁으로 가는 길, 배타주의, 노동자계급의 빈곤화, 지구환경 파괴 등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민족주의로는 해결할 수 없다. 민족주의의 함정에 빠지면 인류는 도태될 것이다. 20세기에만 2억 명이 끝없는 일련의 전쟁 때문에 살해되었다. 이 사회가 현재의 생산양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우리를 야만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노동자 계급, 특히 젊은 세대의 노동자 계급이 각 나라의 사회운동에 보내야 할 메시지다. 일본에서는 후쿠시마 참사에 대한 수많은 항의가 있었고, 경제위기의 참상에 대한 분노도 늘어나고 있다. 중국에서는 믿기 어려운 끔찍한 착취와 무서운 환경오염에 대한 수많은 노동자 파업이 일어나고 있다.

아랍의 봄, 스페인, 미국, 그리스, 방글라데시 등, 높은 실업률, 빈민화와 직장에서 증가하는 중압에 시달리는 노동자 계급이 많은 나라에서는, 국가 아래 단결하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계급투쟁이 해결책이다. 우리는 이 위기와 야만을, ‘외국의 경쟁 상대’가 소유한 상점이나 공장을 불태우거나, 외국 경쟁사들의 상품 불매를 호소하거나 구매를 제한하는 것으로 극복할 수 없다. 노동자계급의 이름으로, 국가 대 국가가 아니라, 계급 대 계급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슬로건은 언제나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이다!

제1차 대전이라는 대살육을 노동자 계급이 끝낼 수 있던 것은 이러한 입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경을 넘어 전 세계 노동자의 단결을 호소한- 레닌, 리프크네히트, 룩셈부르크와 주위의 혁명가들은 국제주의의 입장을 지켰다. 공장과 전선에 있는 노동자들을 고무시키고, 마침내 혁명적 봉기로 제1차 세계 대전을 종결로 이끈 것은, 강고한 국제주의 입장이었다. 1937년의 중일 전쟁 당시 소규모 좌익 공산주의 그룹 <빌랑(Bilan)>의 국제주의자들은 이러한 입장을 지켜냈다.

“이 전선의 양측에는 노동자를 학살하는 것이 목적인 탐욕스러운 지배적 부르주아가 있다. 이 전선의 양측에는 대학살을 한 노동자들이 있다. 이것은 잘못이다. 노동자들이 혁명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먼저 제국주의 일본을 타도해야 한다는 생각에, 중국의 노동자와 잠시라도 함께 ‘싸우는’ 부르주아가 있다고 믿는 것은 절대적으로 잘못되었다. 제국주의는 어느 장소든지 확장하며 중국은 다른 제국주의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혁명적 투쟁을 위해서는 중국과 일본의 노동자들이 계급 단결을 가져올 수 있는 계급투쟁에 돌아와야 한다. 그들의 동맹은, 착취자들에 대한 동시적 공격을 공고히 할 것이다. ( … ) 국제 공산주의 좌익분파만이 수많은 배신자, 기회주의자에 대항하여 혁명투쟁의 깃발을 높게 내걸 수 있다. 이러한 세력만이 아시아에서 아비규환을 가져온 제국주의 전쟁에서 착취자에 대한 노동자의 인민 전쟁 - 중국과 일본 노동자의 단결, ‘국가전쟁’의 전선 파괴, 국민당에 대한 투쟁,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 노동자를 제국주의 전쟁으로 동원하는 모든 세력에 대한 투쟁 - 으로 전환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좌파 잡지 <빌랑 (Bilan)> 제44호, October 1937, p1415)

우리는 이러한 국제주의자의 전통을 이어 민족주의의 감옥으로부터 빠져나가야 한다. 오늘날 노동자들이 서로 소통하고, 국제주의자들 사이에 연계를 놓고, 세계 곳곳에서 국제주의자들의 공통 입장을 지키기 위한 필요조건이 창출되고 있다. 지배자들이 검열, 인터넷 검열, 탄압, 국경 폐쇄 등의 어떠한 수단을 이용한다 해도- 우리는 노동자의 단결을 위해 계속 나아갈 것이다.

중국, 일본의 지배자들이 특히 젊은 세대를 민족주의 유혹에 빠트리려 하는 가운데, 우리는 확고한 우리의 대안- 계급투쟁- 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지배자들 간에 매일 협박하고, 똑같이 전쟁 선전을 부추기는 북한과 한국의 노동자와 전 세계 노동자계급에 중요한 메시지가 될 것이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위협에 대항하여

지난 몇달동안 북한과 남한 및 미국사이에 다시 한번 긴장이 고조되었다. 반복된 미사일성능시험과 함께, 남한 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하와이 또는 괌을 표적으로 미사일 공격을 심지어는 핵무기 공격을 가하겠다며 북한은 온갖 수사학으로 위협하고 있다. 이에 대해 남한과 미국과 일본은 북한에 대해 군사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결의를 선언했다. 다시 한번 이 나라들의 지배계급들은 그들의 탐욕스런 국가적 이해를 위해 수백만 민중의 목숨을 위협할 태세다.

이러한 전쟁 위협에 직면하여, 착취받는 사람들과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책무를 가진다:

  • 착취받는 사람들을 학살로 내몰려는 자본의 모든 세력에 대항해 국제주의적 입장을 분명하게 확인하는 것,

  • 지배계급 지도자들의 연설의 연막 그 뒤에 숨겨진 진정한 사안을 분석하는 것.

국제주의적 입장

북한의 핵실험에 뒤어어 2006년 10월 남한과 다른 나라 국제주의자들의 한 회합에서 다음과 같은 선언이 채택되었다.

북한의 핵실험 소식에 이어, 서울과 울산에서 회합을 갖고 있는 우리 공산주의국제주의자들은:

  1. 또 하나의 자본주의국가의 손 안에서의 새로운 핵무기 개발을 비난한다. 핵폭탄은 제국주의자들 간 전쟁에서 최종적인 무기로서 그 유일한 기능은 일반 민간인의 특히 노동자계급의 대량학살이다.

  2. 자본주의국가 북한에 의해 자행된 전쟁으로 향한 이러한 새로운 단계를 전적으로 비난한다. 이때 북한은 자신이 노동자계급이나 공산주의와는 전혀 무관함을 그리고 군사적인 야만주의로 향한 쇠퇴한 자본주의의 전반적 경향의 가장 극단적이자 괴기한 판본에 지나지 않음을 (필요하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3. 그들의 적 북한에 대항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위선적인 켐페인을 가차없이 비난한다. 그러한 캠페인은, 오늘의 이라크에서와 같이 노동인민이 결국은 그 주요 희생자가 될 선제공격들의 개시 – 그들이 이렇게 할 능력을 갖고 있다면 – 를 위한 그들의 이데올로기적인 준비에 불과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민간인을 절멸했을 때의 그 미국이 지금까지 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한 유일한 세력임을 우리는 잊지 않고 있다.

  4. 중국과 같은 다른 제국주의 갱스터들의 비호 아래 출현할 수 밖에 없는 소위 „평화 발의(peace initiative)“들을 가차없이 비난한다. 이것들은 이 지역에서의 평화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의 옹호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노동자들은 어느 자본주의 국가의 어떤 „평화적인 의도“도 믿을 수 없다.

  5. 국가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옹호라는 미명아래 남한 부르조아계급이, 국제주의적 원칙을 방어하는 노동계급에 또는 그 활동가들에 대항하여 억압적 조치들을 취하려는 모든 시도를 가차없이 비난한다.

  6. 발생하게 될 군사행동으로 인해 제일 먼저 고통당할, 남북한의, 중국의, 일본의 그리고 러시아의 노동자들과의 우리의 전적인 연대를 선언한다.

  7. 자본주의 아래의 인류를 엄습하는 야만주의의, 제국주의 전쟁의, 그리고 핵파괴의 위협을 영원히 종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자들의 전세계적인 투쟁임을 선언한다.

노동자들은 방어할 어떤 국가도 없다!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현상황에 직면하여 2006년 10월의 선언은 완전히 유효하다.

증대되는 군사적 긴장 이해하기

북한과 그 라이벌사이에 존재하는 최근의 상황악화와 이에서 비롯된 전망들을 분석하기 위해 우리는 이러한 충돌을 더 넓은 역사적 국제적 문맥안에 위치시킬 필요가 있다.

북한과 그 라이벌 사이에서 긴장의 첨예화는 극동의 더 전반적인 긴장 첨예화의 일부이다. 지난 몇 달 동안 이 지역의 두 주요 라이벌, 중국과 일본은 센카쿠/댜오위다오열도에 대한 영유권을 반복적으로 주장하면서 애국주의적 캠페인들을 자극해 왔다. 지난 몇 년간 중국과, 남지나해를 둘러싼 몇몇 나라들은 이러한 남지나해에서의 영토주장을 놓고 충돌해 왔다. 남한과 일본은 독도/다케시마를 놓고 늘 분쟁하고 있다. 최근의 상황악화는 이 지역에서 제국주의적 긴장이 전반적으로 첨예화되는 경향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동시에 남북한 사이의 충돌은 동아시아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충돌들 중의 하나이다.

충돌의 뿌리

동아시아는 제 1차 세계대전에서 동아시아는 기본적으로 전쟁의 잔혹함을 경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에서는 모든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의 주요한 전쟁터들 중 하나가 되었다(이때 2천만명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독일에서 나치정권이 패배하고 유럽이 1945년 5월 전승국가들 사이에서 분할되자마자, 소련과 미국은 아시아의 여러지대에서 그 지배권을 놓고 서로 충돌했다. 러시아가 일본의 일부를 낚아채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는 결심으로 미국은, 1944/45년 겨울 화염폭탄으로 도쿄를 이미 초토화시킨 뒤임에도 불구하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최초로 핵폭탄을 떨어뜨렸다. 중국에서 러시아는 마오의 붉은 군대를 그리고 미국은 장개석의 군대를 지원했다. 중국은 친러시아파(중국인민공화국)와 친미국파(타이완)로 분할된 최초의 나라였다. 이러한 치명적인 분할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존재하며 그 양측은 중무장한 채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고 있다. 그리고 1945년 일본 점령자들이 패배한 뒤, 러시아 군대는 한반도 전체를 점령할 태세였던 반면 미국은 한국의 공동점령을 러시아에게 강요했고, 그 결과 한국은 1945년 북위 38도선을 따라 분단되었다. 그래서 1945년 이래 동아시아에서는 한편으로 미국과 그 동맹국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중국과 러시아 및 다른 동맹국들 사이의 항상적인 대립이 그 한 특징을 이룬다. 1950-1953년의 한국전쟁이 이러한 두 블럭사이의 냉전에서 최초의 그리고 가장 처참한 시기의 하나를 이루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 전쟁에서 미국 주도의 연합군은 중국과 러시아군대의 지원을 받은 북한에 대항해 싸웠다. 한국전쟁 동안 3백만명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많은 사람들이 양측에 의해 자행된 학살에서 희생되었다. 그 전쟁 자체로 그 나라는 파괴되었고, 서울과 평양은 여러번에 걸쳐 심한 폭격을 당했다. 한국은 고도로 군무장 된 채 분단국으로 남았다. 세계에서 „가장 잘 방어된“ 군사지역의 하나로서, 양쪽 군대가 60여년을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눠오고 있다.

그래서 현재의 상황악화는 이러한 연속성의 한 표현이자,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동아시아를 괴롭히는 일련의 충돌들의 격렬화이다. 그 뿌리는 제국주의적 분할, 세계가 민족국가들로 파편화된 것에 놓여있다. 이러한 파편화의 결과인 민족국가들은 서로를 절멸하겠다고 위협하면서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이고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유럽전체가 1945년 이래 두 블럭사이에 분할되었다. 독일은 1989년까지 분단된 채로 있었다. 인도 아대륙 전체는 파키스탄/방글라데시와 인도 사이에 분할되었다. 베트남은 분단되었다. 1990년대에는 예전의 유고슬라비아가 무수한 후속전쟁들을 거치며 갈기갈기 찢어졌다. 중동에서 예전의 오토만 제국의 영토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는 수많은 작은 나라들로 쪼개졌고 이러한 배경에 이스라엘이 창립이 부가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또다른 영구적 전쟁지대가 남겨졌다. 이 모든 것은 새로운 나라의 형성이 인류에게 더 이상 어떤 진보도 제공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나라들은 노동자계급에게 치명적인 함정이자 묘지이다.

1950년대 초 한국전쟁이 이미 미국과 중국의 직접적인 대립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상황악화 또한 그들 동맹국들의 동일한 „든든한 옹호자들“을 대립시킨다.

제국주의 체스판

북한체제는 그 탄생 첫날부터 철저히 중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한반도의 지리적-전략적 위치는 그 나라가 모든 이웃 라이벌들에게 표적이자 소중한 완충지대임을 위미한다. 특히 중국은 북한을 자신과 일본 및 미국 사이의 완충물로 여긴다.

중국은 부상하고 있는 세력으로서 지속적으로 미국에 도전하면서 그 국제적 영향력을 확대해 오고 있다. 이 나라는 미국을 댓가로 자체의 입지를 확대하기 위해 군대를 근대화하고 아시아 전역에서 군기지들의 선을 형성하려 노력해왔다. 이 새로운 도전자가 장기적으로 제시하는 위험을 알고 있는 미국은 자신의 군대의 주요부분을 동아시아로 동원하여 중국을 제한하려는 의도를 선언했다. 미국은 가능한 한 많은 나라들이 자신의 편에 서도록 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동아시아에서의 그 어떤 충돌도 미국과 새로이 부상하는 중국사이의 이러한 전반적인 권력싸움의 그늘에 가려질 뿐만 아니라 어느정도는 직접적으로 그 싸움의 일부가 되었다. 중국은 평양체제의 붕괴를 참을 수 없는데, 이는 북한의 호전적인 반항이 일본 및 남한과의 긴장들 편향시키고 무엇보다도, 그렇지 않다면 훨씬 더 중국에 대항해 향하고 있을 미국의 군병기가 북한을 겨냥해 있도록 발묶어두기 때문이다. 남한과 북한의 (남한 주도아래) 재통합 그리고 중국국경 근처의 미군기지가 생길 전망은 중국이 북한을 옹호하려는 결의를 더 증대시킬 수 밖에 없다. 중국이 북한에 대해 갖는 영향력과 제어력의 정도를 가늠하기는 불가능할 지라도, 미국과의 군사적인 대치에서 북한의 패배는 중국의 상당한 약화를 의미할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북한을 제한하려 노력하면서 동시에 북한이 미국 군대들을 „묶어 놓도록“ 해야 할 수 밖에 없다.

러시아는 1989년 이후 다른 많은 충돌지역들에서처럼 모순적인 입장에 놓여 있다. 한편으로 러시아는 냉전초기 그들의 제휴가 있은 뒤 1960년대부터 줄곧 중국의 라이벌이었지만, 지난 십년 동안 중국이 „떠오르는 세력“으로 부상면서 러시아는 미국에 대항해 중국의 편을 드는 경향이었다. 동시에 러시아는 중국이 너무 독단적으로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북한과 관련해서 러시아는 미국이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증대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미국은 결코 한국이 중국이나 러시아의 손에 떨어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태세가 되어 있었다. 현재 먼거리에서 미국은 다시 한국과 일본의 든든한 옹호자이다. 물론 주요한 동기는 중국을 제한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북한의 군사적 위협은 미국이 태평앙에서 무기를 증가시키는데 환영할 만한 정당화를 제공한다(이미 괌, 알라스카 그리고 남한 자체로 더 많은 무기를 이동시켰다). 물론 이러한 무기들은 북한에 대항해 사용될 수 있지만 중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동시에 괌이나 알라스카의 미군기지 또는 미국 동맹국의 영토들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그 어느 나라도 미국의 패권에 대한 도전이다. 그래서 중국에 의한 미국의 입지의 약화를,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북한의 위협을 미국은 견딜 수 없다. 미국의 중국 견제정책은 다시 북한과의 긴장상태에 상당히 기여한다.

일본은 중국의 오랜 숙적으로서, 중국과 그 동맹국 북한에 의해 많은 위협을 느낀다. 동시에 일본은 독도/다케시마를 놓고 남한과 갈등한다. 1989년 러시아블럭이 해체된 이래 일본은 미국의 지역 장악력을 느슨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급부상과 북한과의 반복적이고 악화된 충돌들 때문에 일본은 미국의 군사력에 대한 자체의 의존도를 축소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만약 한반도의 통일이 이뤄진다면, 일본은 그 지역에서 또다른 주요 라이벌과 직면하게 될 것이다. 30여년이 넘도록 한국을 점령했던 일본으로서는 , 역설적이게도, 완충국가로서의 북한이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이 매우 유감일 것이다. 최근 중국 및 북한과의 긴장 증대는 일본 정부에게는 그들의 군비지출을 늘릴 고마운 빌미를 제공했다.

그래서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지 거의 정확히 60년이 지난 지금, 동일한 세력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지금 북한으로부터 그리고 그 반대편으로부터도 마찬가지로 핵무기, 고전적인 무사일 및 대포공격의 위협이 세계에서 가장 큰 몇몇 대도시들(서울, 도쿄, 평양)에 대해 가해지는 것을 보고 있다. 두개의 가장 큰 경제대국들인, 중국과 미국사이의 점점 더 커지는 양극화와 더불어, 동아시아는 또 하나의 영구적인 갈등지역이 되어 전세계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두개의 체제 – 노동자계급에게 있어서 두가지 적

사회주의적이라 주장하는 북한체제는 노동자들의 봉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러시아와 중국의 군사적 도움 덕분에 권력을 잡게 되었다. 스탈린주의적 후견국가들에 완전히 의존하면서 그 체제는 군사기구의 유지와 확장에 자원을 집중해 왔다. 거대한 군국화의 결과로 2천 4백 5십만 인구를 가진 이 나라는 1백 1십만명의 상비군과 4백 7십만명에 이르는 남여예비군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전의 모든 스탈린주의적 동유럽국가들과 비슷하게 북한경제도 세계시장에 제공할 경쟁력 있는 민간상품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군사부문의 과잉비대는 식료품과 다른 소비재들이 지난 60여년동안 영구적이 아니라면 적어도 빈번하게 배급되어오고 있음을 의미한다. 1989년 소련블럭의 붕괴이래 산업생산은 50%이상 하락했다. 인구는 1990년대 중반의 기근으로 10% 정도 감소되었다. 이러한 인구감소추세는 중국으로부터 식량공급이 이뤄진 이후에야 중지되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북한은 에너지의 90%, 소비재의 80%, 그리고 식량의 약 50%를 중국으로부터 수입하고 있다.

만약 지배계급이 민중에게 공포와 굶주림, 억압과 영구적인 군사화외에는 아무것도 제공할 수 없다면, 만약 그 나라 기업들이 세계시장에서 상품으로 경쟁할 수 없다면, 그 체제는 자신의 위협하고 협박하는 군사적 역량을 통해서만 „인정“받으려 할 수 밖에 없다. 그러한 행위는 몰락한 계급의 전형적인 표현으로서, 이러한 계급은 폭력과 강탈과 테러, 이외에는 인류에게 그 어떤 것도 제공할 수 없다. 모든 종류의 군사적 공격을 통해 라이벌들을 위협하려는 자세는 상황이 얼마나 예측불가능하고 광란스럽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경제적 곤경에 직면해 그 체제는 공급상황을 개선하려는 희망으로 여러해 동안 제한적인 경제적 „자유화“ 조치들을 도입하려 노력하고 있다. 어떤이들은 현재의 위협적 군사력이 경제문제로부터의 단순한 주의돌리기이자 젊은 후계자 김정은이 군부에 강한 인상을 주려는 군사작전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이 체제의 정치적 안정성에 대해 추정할 수는 없어도, 그 상황 악화의 실제적인 위험을 과소평과하면 큰 실수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제국주의적 긴장들의 상승은 결코 단순히 „허세“나 „공갈“ 또는 단순한 주의돌리기와 정치적 연극이 아니다. 세계의 모든 정부들은 군사주의의 악순환을, 설령 이것이 그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거슬러 작용하는 듯이 보일지라도, 그것을 강화할 수 밖에 없다. 지배계급은 군사주의라는 암에 대한 실제적인 통제력을 갖고 있지 않다. 북한이 남한이나 미국을 공격할 경우, 이것은 한 체제 및 국가 전체의 붕괴는 아닐지라도 상당한 약화를 초래할 것임이 명백하다. 하지만 지배계급은 초토화 정책에 있어서 어떤 한계도 모른다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은 자살공격을 행하여, 무수한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상처입고 그 자신들의 생명을 희생한다. 북한의 경우 한 국가 전체가 학살을 행하려고 위협하며 „자살“할 태세가 되어있음을 보여준다. 북한이 중국에 극도로 의존하고 있지만, 광기의 새로운 차원을 보여주고 있는 평양체제를 중국은 „고삐 당겨 자제시킬“ 수 있을 지 확신할 수 없다. 한국전쟁동안 중국과 북한은 수백만의 병사들을 총받이로 희생하고 가능한 한 많은 상대편 병사들을 제거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북한 체제는 그래서 자기 나라의 국가적 이해를 위해 싸운다는 것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보여준다. 북한 체제의 위협 및 협박정책은 외예가 아니라, 인류 전체를 점점 더 야만으로 내몰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 전체가 보여주는 전망들의 조금 과장된 표현에 불과하다.

그렇게 공공연하게 남한, 일본, 및 미국을 위협하는 북한 제체와 더불어, 남한은 스스로를 „희생자“로 „순진무구하게“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남한 지배계급도 북한의 지배계급 만큼 잔인하다.

1948년 봄 서울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승만 정부가 제주도에서 6만명(이 섬 인구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의 학살을 조직했다. 한국전쟁동안 남한정부는 북한군대 만큼 잔인하게 학살을 자행했다. 전후 남한은 특히 이 승만 아래에서는 간접적으로 그리고 박정희 아래에서는 직접적으로 이뤄진 독재를 포함 대략 40여년 동안 독재를 행한 정권들이 통치했다. 노동자나 학생들의 저항이 되살아날 때마다 진압당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은 처참하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후 재건기간동안, 특히 1960년대 이후 노동력의 극심한 착취덕분에 남한 자본은 낮은 상품가격을 통해 세계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남한은 비정규 임시계약 노동자의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들 중 하나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독재자“이든 그렇지 않든 모든 정부들은 그들의 억압정책을 유지했다. 국가보안법은 정부가 그 누구라도 북한의 스파이라고 기소하기만 하면 남한정부에 비판적인 그 어떤 목소리도 마녀사냥해버릴 수 있는 권위를 제공한다. 노동자나 학생들 심지어는 „평범한 시민들“의 많은 파업이나 항의시위들(예를 들어 쌍용자동차파업이나 „촛불시위“를 보라)에서 남한 국가는 특히 노동자계급에 대해 끊임없이 억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북한에서 김씨왕조의 여러 세대가 권력을 대물림하는 것을 대중매체가 비웃는 반면, 남한에서는 전독재자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최근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민주주의“ 아래에서 권력 승계의 주목할 만한 연속성을 보여준다. 게다가, 개성공단에서 북한 노동력의 공동 착취는 남한자본가들이 북한의 한 패들과 완벽하게 협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남한 지배자 도당들은 북한에 있는 라이벌에 대항해 어떤 군사적 수단도 사용할 결의가 되어 있다. 최근 서울에서 스스로 핵무기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다.

제국주의 전쟁에 대항한 계급전쟁

역사는 남북한에서의 그 두 가지 유형의 제체들이 기본적으로 동일하며 노동자계급의 절대적인 적들임을 보여주었다. 노동자들은 그 어느 한 쪽도 편을 들 수 없다. 동아시아에서의 최근 긴장의 첨예화는 자본주의의 파괴적 경향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최근의 충돌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인류에 대한 위험들은 훨씬 더 커졌다. 이번에는 가장 강력한 라이벌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 중국과 일본, 모두 심하게 무장한 채 군비경쟁을 가속하고 있다. 한국전쟁과 냉전 동안 노동자계급은 패배했었고 고개를 들수 없었다. 한국전쟁 시기에 세계에서는 오직 소수의 좌파공산주의 혁명가들만이 국제주의적 입장을 옹호했다. 오늘날, 동아시아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자본주의의 치명적 악순환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희생하려하지 않는다. 오직 노동자계급만이 인류를 점점 더 깊은 야만으로 빠져드는 것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노동자 계급은 애국주의와 군사주의의 악순환을 거부해야 한다.

„정부와의 연합전선“ 반대! 노동자계급에게 유일한 해결책은 남한과 북한에서 자신의 부르조아계급들에 대항해 결연하게 투쟁하는 것이다. 오늘날 혁명가들에게 이것은, 제 1 차 세계대전 동안 레닌과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의 전통을, 그리고 2차 세계대전동안의 좌파공산주의의 국제주의적 전통을, 2006년 전쟁위협이 있었을 때 국제주의자선언을 통해 옹호되었던 그 전통을 옹호해야 함을 의미한다.

ICC, 2013년 4월 8일

ICConline - 2015

파리에서의 학살: 테러리즘은 썩어가는 부르주아사회의 표현이다

2015년 1월 7일과 9일 파리에서의 공격으로 살해당한 20명 중에서 까뷔(Cabu), 샤브(Charb), 틴유(Tignous), 볼린스키(Wolinsky), 이 네명은 일종의 상징이었다. 그들이 주요 표적이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어리석음에 대항해 지성을, 광신주의에 대항해 이성을, 복종에 대항해 반항을, 비겁함에 대항해 용기1를, 증오에 대항해 동감을, 그리고 순응주의와 우둔한 독선에 대항해 특히 인간적인 특징인 유머와 웃음을 주장했다. 우리는 그들의 정치적 입장들 일부를 거부하거나 반대할 지도 모른다, 그 중 어떤 것들은 완전히 부르주아적이다2. 그러나 공격당한 것은 그 중에서 가장 최상의 것이었다. 단지 만화가나 슈퍼마켓의 평범한 쇼핑객에 불과했던 사람들에 대한 야만적 난폭행위는 프랑스에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상당히 이해할만 하다. 이러한 감정이 지금 브르주아 민주주의의 모든 면허받은 대표자들에 의해 활용되고 있는 방식 때문에, 수백만의 사람들을 사로잡아 1월 7일 자생적으로 거리 시위로 나가게 만든 그 분노와 노여움과 깊은 슬픔이 야만의 이러한 경멸적인 행위에 대항한 기본적이고 건강한 반응이었다는 사실이 은폐되어서는 안된다.

자본주의 부패의 순수한 산물

테러리즘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3. 새로운 것이라면 그것이 지니게 된 형식이고, 이것은 80년대 중반부터 발전해 나가서 전대미문의 전세계적 현상이 되었다. 소규모의 고립된 그룹들에 의해 자행된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국가의 소인이 찍힌, 1985-86년 파리를 강타한 일련의 무차별 공격들은 테러리즘의 활용에 있어 새로운 시대를 개막했고 그렇게 테러리즘은 지금까지 알려진바 없던 수준에 이르러 점점 더 많은 수의 희생자를 내고 있다.

회교 광신주의자들에 의한 테러공격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 새로운 세기의 역사는 이를 정기적으로, 그리고 2015년 1월 초의 파리 공격들 보다 더 훨씬 더 큰 규모로 목격했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쌍둥이 빌딩에 충돌한 가미가제 비행기들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우리의 견해로는, 미국 비밀정보부가 이 공격들이 일어나도록 방치했고 심지어는 용이하게 했음이 분명하다. 이 사건들로 미국 제국주의 세력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전쟁을 개시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루즈벨트가 예견하고 원하기도 했던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미해군기지 공격이 결국 미국의 제 2차 세계대전에의 개입에 적절한 구실로 작용했던것과 마찬가지로4. 그러나 2001년 9월 11일 그 비행기를 조종한 자들이 대규모의 살상을 자행하고 자신의 생명을 희생함으로써 천국에 갈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완전히 망상적 광신주의자들이었음도 분명하다.

뉴욕사태가 있은지 3년도 채 지나지 않은 2004년 3월 11일 마드리드에서 끔직한 학살사태가 일어났다. 아토샤(Atocha) 역에서 “이슬람주의자“의 폭탄들로 인해 200명이 살해당하고 1700명이 부상당했다. 시체들이 너무 뒤엉겨서 DNA검사를 통해서만 신분식별이 가능할 정도였다. 그 다음해인 2005년 7월 7일 이번에는 런던에서 역시 대중교통수단에서 4차례의 폭발로 56명이 죽고 700명이 부상을 당했다. 러시아도 2000년대에 몇 차례 이슬람주의의 공격을 받았는데, 그 중 하나인 2010년 3월 29일 사태에서는 39명이 사망하고 102명이 부상당했다. 그리고 지엽적인 나라들이라고 무사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2003년 미국의 침략이래 이라크에서 그리고 우리가 최근 페샤와(Peshawar)지역에서 다시 보게된 처럼 파키스탄에서 그러한 공격들이 있었다. 페샤와에서는 지난 12월 132명의 아이들을 포함해 141명이 한 학교에서 살해당했다5.

의도적으로 아이들을 겨냥한 이 공격은 그 모든 공포를 통해 이 “지하드” 추종자들의 점증하는 야만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1월 7일 파리에서의 공격은, 비록 파키스탄의 그것보다 훨씬 덜 끔찍하고 덜 공포스럽다할 지라도 야만으로의 이러한 경향에서 새로운 차원을 표현한다.

이전의 모든 경우들에서, 아이들을 포함한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이 얼마나 경악스러울 지언정, 어떤 “합리성”이 존재했다. 국가와 그 무장세력에 보복하거나 압력을 가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2004년의 마드리드학살은 스페인이 미국을 도와 이라크에 개입한 것에 대해 “처벌”하는것이 의도었다. 2005년 런던의 폭탄사건도 마찬가지였다. 페샤와에서의 공격은 파키스탄군부의 아이들을 학살함으로써 그 군부에 압력을 가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1월 7일의 파리 공격들의 경우에서는 조금이라도 심지어 가상으로라도 “군사적 목표”가 전혀 없었다. 샤를리 엡도(Charlie Hebdo) 만화가들과 그 동료들은 그 신문에 모하메드의 캐리캐춰가 실렸기 때문에 “예언자의 복수를 하려” 살해당했다. 그리고 이는 전쟁으로 황폐화되거나 종교적 반계몽주의에 의해 지배당하는 어느 한 나라에서가 아니라 프랑스에서, “민주주의적이고 세속적이며 공화적인” 프랑스에서 발생했다.

증오와 허무주의는 항상 테러리스트들의 행동들에서 핵심 동인이다. 가능한한 대대적으로 살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생명을 희생하는 이들에게서는 특히 더 그러하다. 그러나 이 때 인간을 무고한 사람들을 전혀 개의치 않고 무차별로 살해하는 냉혹한 살인기계로 만들어버리는 이러한 증오는 또 다른 “살인기계”, 즉 국가를 그 주요 표적으로 한다. 하지만 1월 7일 파리에서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다. 여기서는 반계몽주의적 증오와 복수에의 광신적 갈증이 그 순수한 형식으로 보여질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 표적은 타자,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자, 특히, 생각 자체를 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로, 즉, 인간에게 알맞은 이 생각하는 능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1월 7일의 학살은 그렇게 대단한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우리는 상상하기도 조차도 어려운 어떤 것에 직면해 있다: 어떻게 해서, “문명화된” 나라에서 교육된 인간 정신이, 책을 불태우고 유태인을 절멸시키려던 가장 광신적인 나치들의 그것과 유사한 야만적이고 부조리한 계획에 빠져들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최악인 것도 아니다. 최악은 쿠아치(Kouachi)형제들의, 아메디 쿨리발리(Amedy Coulibaly)와 그 공모자들의 극단적 행위는, 주로 빈곤지역에서 번창하고 있는 한 운동 전체로 볼 때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 다는 점이다. 그 운동은, 많은 젊은이들이 “샤를리 엡도는 예언자를 모욕했기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라는 생각과 만평가들을 살해한 것이 “정상적”이라는 생각을 단언할 때 표현되었다.

이것은 또한 야만주의의 전진, 우리 “문명화된” 사회들의 붕괴의 한 징후이다. 이민 과정을 거친 이들 뿐만 아니라 일부 젊은이들의 이러한 증오와 종교적인 반계몽주의에로의 전락, 이것은 자본주의사회의 부패의 여러 증상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현 위기의 무게를 가늠케 하는 특히 중요한 지침(pointer)이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유럽에서도, 그리고 특히 프랑스에서) 연속적인 패배로 문화적 사회적 빈곤으로 모욕당한 수 많은 젊은이들이 아무 미래도 없이 무질서한 일상을 살고 있다. 이들은 무원칙적인 일종의 신병모집관(종종 국가나 ISIS와 같은 정치적 표현들과 관련된)들의 쉬운 먹이가 된다. 이 모집관들은 예상치 못했던 것만큼이나 갑작스런 대화들을 통해 그러한 부적응자들을 그들의 네트워크에 끌어들여 “지하드”를 위한 잠재적인 공격수나 포탄받이로 전환시킨다. 경제체계이지만 또한 사회적 도덕적 그리고 문화적 체계이기도 한 자본주의의 현 위기로 인한 자신들의 전망 부재와, 발밑에서 썩어가며 모든 구명으로부터 파멸을 분출해 내는 사회에 직면한 많은 젊은이들에게 삶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해 보인다. 그들의 절망은 종종 맹목적이고 광신적인 복종이라는 종교적인 색채를 띠며온갖 종류의 비합리적이고 극단적인 행동을 부추기고 자살적인 허무주의로 부채질될 수 있다. 다른 곳에서, (예를 들어 우간다, 콩고 및 챠드에서, 특히 1990년대 초 이래) 엄청난 수의 소년병들을 만들어내는, 부패 중인 자본주의사회의 공포는 지금, 유럽의 중심부에서, 완전히 무감각해지고 그어떤 댓가도 기대하지 않은 채 최악을 저지를 수 있는 젊은 정신병자들을, 냉혈적 전문 킬러들을 생산해 내고 있다. 간단히 말해, 자체의 병적이고 야만적인 동력에 내맡겨진 이 썩어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오직 인류 전체를 처참한 무질서로, 살인적인 광기와 죽음으로 이끌 뿐이다. 테러리즘의 성장에서 보여질 수 있듯이 그것은 점점 더 많은 완전히 절망적인 개인들을 생산해 내고, 이들은 최악의 잔혹행위도 저지를 수 있는 지점까지 전락해가고 있다. 요약하자면, 그것은 그 자신의 이미지에 걸맞게 이러한 테러리스트들을 주조해낸다. 만약 그러한 “괴물들”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괴물처럼”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반계몽주의적 허무주의적 경향에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 모두가 스스로 직접 “지하드”에 가입하지는 않을 지라도, 그들중 많은 이들은 이 단계를 선택한 이들을 “영웅들”이나 “정의”의 요원들로 간주한다는 사실은 사회를 침투해오는 절망과 야만성의 점증하는 무게를 증명해준다.

추악한민주주의적활용

그러나 자본주의 세계의 야만성은 이러한 테러리스트 행위들과 그러한 행위들에 대해 일부 젊은이들이 보이는 동감에 의해서만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부르주아지가 이러한 드라마들을 활용하는 비열한 방식에 의해서도 드러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자본주의 세계는 주요한 “민주주의” 지도자들을 선두로 가장 치사한 작전을 실행하려 하고 있다. 1월 11일 일요일 파리에서 거대한 거리집회가 계획되었다. 올랑드 대통령과 모든 국내정치지도자들 주위로, 안겔라 메어클, 데이비드 카메른, 스페인과 이태리 및 여러 다른 유럽국가들의 정부수뇌들뿐만 아니라 요르단국왕, 마흐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자치구 대표 및 벤야민 네탄야후 이스라엘수상과 같은 세계 지도자들과 함께6.

1월 7일 저녁 수십만 민중들이 자생적으로 거리 시위에 참여하는 동안, 프랑스와 올랑드를 시작으로 한 정치인들과 프랑스 대중매체는 그들의 캠페인을 시작했다. 위협당하는 것은 언론의 자유와 민주주의다, “나서서 단합하여 우리 공화국의 가치를 수호해야 한다.

점점 더 빈번하게 우리는, 1월 7일의 시위에 뒤이은 집회들에서 프랑스국가, “마르세예즈(Marseillaise)”를 들었다. 그 합창은 “우리의 고랑을 불결한 자들의 피로 적시자!” … “국민단합”, “민주주의의 수호”, 이것들이 지배계급이 우리의 머리 속에 집어넣길 원하는 메세지들이다, 즉, 20세기 두개의 세계대전에서 수백만 노동자들의 탄압과 학살을 정당화했던 그 슬로건들이다. 올랑드도 그의 첫번째 연설에서 그것을 말했다. 아프리카로, 특히 말리로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프랑스는 테러리즘에 대항한 전쟁을 이미 시작했다고(미국이 2003년 이라크에 군사적으로 개입할때 부시도 이와 동일한 목적이라 설명했던 것처럼).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제국주의적 이해들은 명백히 이러한 개입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가련한 까뷔, 샤브, 틴유, 볼린스키! 광신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이 그들을 처음 한번 죽였다. 그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이러한 대표들과 “팬들”, 인류사회를 침투해오는 야만에 책임이 있는 부패하는 세계체제인 자본주의의 국가과 정부 수뇌들에 의해 두번째로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정치 지도자들은 이 체제와 그 지배계급, 부르주아지의 이해들을 방어함에 있어 민간인에 대한 테러와 암살과 강탈을 서슴치 않는다.

1월 7일 파리에서의 학살에 의해 표현된 이러한 야만성의 끝은 이러한 야만성을 생산하는 경제체제의 주요 지지자들이고 보장자들인 그런 이들의 행동들로부터는 도래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 끝은 오직,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즉, 그 연합이 사회의 대부분의 부를 생산하는 그 계급이 이 체제를 전복함으로써, 그리고 더이상 이윤과 경쟁과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에 기반하지 않고 인류 선사의 이러한 자취의 폐지에 기반한 진정으로 세계적인 인류공동체를 이룸으로써만 결과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에서는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그러한 연합7”이 될 사회, 공산주의사회를 이룸으로써만.

세계혁명(2015년 1월 11일)


1이 만화는 볼렌스키가 1968년에 그린 것이다.:노동자들이 혁명을 요구하자 노동조합간부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당신들은 제정신이 아니군 – 정부와 사장들은 결코 그것을 허용하지 않을테니.

이 만화가들은 수년간 정기적으로 살해위협을 받아왔다.

2'68세대'인 볼린스키는 프랑스공산당기관지, " 류마니테(L'Humanité)"에서 수년간 일하지 않았던가? 그 자신이 다음과 같이 쓰지 않았던가? "우리는 68년 5월을 우리처럼 되지 않도록 만들었다."

319세기에는, 러시아의 인민주의자들과 프랑스나 스페인의 아니카스트들처럼 작은 규모의 소수들이 국가에 대항한 반항으로 테러행위에 의존했다. 이러한 무모하고 폭력적인 행동들은 항상 부르주아지에 의해 노동자운동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하고 합법화하는데 이용되었다.

4우리 웹싸이트의 다음 기사를 참조:' 1941년 진주만, 2001년 쌍둥이빌딩: 미국 부르주아의 마키아벨리주의(Pearl Harbor 1941, the 'Twin Towers' 2001: Machiavellianism of the US bourgeoisie)'. Http://en.internationalism.org/ir/108_machiavel.htm

5그리고 파리에서의 공격들이 있기 며칠 전, 나이제리아의 이슬람주의 그룹, 보코하람(Boko Haram)은 그 최악의 잔악행위를, 즉 바가(Baga)시 주민 2000명에 대한 무차별적 살상을 자행했다.

6 “국민단합”을 위한 시위에 대한 요구는 노조와 정당측에서 만장일치였다(국민전선(the National Front)만이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뿐만아니라 대중매체도. 심지어 스포츠신문, (L´Équipe) 도 시위를 요구했다.

7마르크스, 코뮤니스트 선언, 1848

 

ICConline - 2016

로자 룩셈부르크의 독일사회민주당의 위기(“유니우스팸플렛”) 한국어판 서문

2015년 7월 6일, ICC

ICC100년전 제 1차 세계대전의 대학살에 대항에 쓰여진 로자 룩셈부르크의 유니우스팸플렛이 최초로 한국어 번역본으로 나오는데 여했다. 그 새로운 한국어본을 위해 작성된 서문을 여기에 공개한다. 지배계급과 그 선동기기가 1차대전 발발 100주년을 '기념하여' 다양한 형식으로 그 대학살에 대한 변명들을 늘어놓는다. 다른 한편의 혁명가들은 전쟁반대와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위해 맞섰던 그 국제주의자들의 도덕적 지적 용기를 자랑스럽게 칭송할 수 있을 것이다.

 


유니우스팸플렛은 세계의 역사적 변화의 개막을 열었던 제 1차 세계대전에 대한 최초의 주요한 이론적-정치적 분석의 하나로 쓰여졌다. 이 전쟁에서 파괴의 기계가 작동되어 전대미문의 규모로 인류를 학살했다. 예를 들어 북프랑스와 플랑드르(벨기에)에서 독가스와 같은 신무기의 사용으로 단 몇 주 동안 수만명의 병사들이 살해되었다. 종전까지 사망자가 약 2천만명에 달했다. 그리고 종전 직후, 지치고 영양실조에 시달리던 사람들 2천만명이 이후 '스페인독감'이라 알려지게 되는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1914년 8월 4일, 독일사회민주당 소속 제국의회 의원들은 전쟁차관 승인에 찬성했다. 처음으로, 프롤레타리아당의 지도부가, 이 경우에는 제 2인터네셔널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영향력있는 당 중의 하나가 국제주의의 가장 결정적인 원칙, 즉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라는 원칙을 배반했다. 그 배반자들에 대항해 독일에서 몇몇 남지 않은 국제주의자들이 로자 룩셈부르크의 거처에 모여서 국제주의의 옹호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 1년 후 국제주의자들의 최초의 국제대회가 스위스의 찜머발트1에서 조직되었다. 전쟁의 발발과 사회민주당지도부의 배반에 대응해 혁명가들은 그 전쟁의 뿌리와 그 귀결들의 분석을 시작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팸플렛, 사회민주당의 위기 그녀가 초안한 국제사회민주당의 임무에 대한 테제는 인류에게 있어 새로운 그 상황을 이해하고 혁명가들의 활동에 전망을 그려내려는 이러한 국제적 노력들의 일부였다. 그녀는 전쟁이 발발한지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915년 4월 감옥 안에서 '유니우스'라는 가명으로 이 팸플렛을 썼다. 전쟁 조건들 때문에 그 글은 즉시 출판될 수 없었고 1916년 1월에야 독일 밖에서 출판될 수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사적 상황를 놓고 볼 때, 그녀의 슬로건은 무엇보다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왜 그 전쟁이 시작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실수로부터 배우는 것이었다. 가차없고 대담한 자기비판을 행할 필요가 있었다.

근원을 찾아서

그 팸플렛의 여러 장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을 분석했다. 그녀는 자본주의가 세계적으로 팽창하면서 어떻게 그리고 왜 끊임없이 새로운 시장을 정복해야만하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너무) 뒤늦게 도착한”나라들이 어떻게 해서“먼저 도착한”나라들로부터 무력으로, 즉 전쟁을 통해서 정복물들을 빼앗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지를 보여주었다. 제국주의의 상승을 다룬 이 장들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전쟁의 역할을 보여준다. 그녀는 모든 국가들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폭로했고 이러한 발전은 어느 한 나라만에 의해서 개시되는 것이 아님을 인식했다. “(…)제국주의 정치는 어떤 한 국가 또는 몇몇 국가들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세계 발전에서 특정 성숙도의 산물이다. 그것은 국내에서부터도 국제적인 현상이자 그 모든 상호관계들 속에서만 인식될 수 있고 그로부터 어떤 국가도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분할될 수 없는 전체이다.”(본문 제 7장)

1890년대에 행한 분석에서 그녀는 폴랜드는 더 이상 독립국가가 될 수 없고 그래서 혁명가들은 더 이상 민족자결요구를 지지할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점은 1차 세계대전의 사건들로 확인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진영 안에서 국가방어전쟁에 대한 그 어떤 지지도 거부한 선구자들 중의 하나였다.“이러한 결정적인 역사적 환경을 도외시하며 세계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나라의 고립된 관점에 따라 좌우되는 모든 사회주의 정치는 이미 사상누각인 것이다.”(본문 제 7장)

전쟁 발발 후 몇 달만에 로자 룩셈부르크 참여국가들의 경제적 폐허를 초래하는 이 전쟁의 새로운 특성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새로운 역사적 조건들과 이러한 질적으로 새로운 시기가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분석한 후, 그녀는 전쟁의 발발에 있어서 주관적 조건들을 강조했다. 그녀의 결론은,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노동자당인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배반이 없었다면, 그리고 노동조합이 자본가들과 함께 서명한, 공장들에서의 당쟁중지(즉, 파업금지) 선언이 없었다면, 간단히 말해서,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이 노동자계급을 전쟁에 동원하지 않았다면 그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노동자계급과 인류에게 있어서의 귀결들

독일에서 사회민주당이 조국을 위한 지원을 호소하는 동안, 룩셈부르크는 전쟁의 종결에 있어 노동자계급의 결정적 역할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본주의가 자체의 전쟁 및 파괴충동을 제거할 것이라는 평화주의적 희망에 대해 경고했다. 그녀는 자본주의가 존속한다면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당할 것이라는 위험을 인식했다. 인류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양자택일과 직면했다.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귀결들

SPD 지도부의 배반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트, 프란츠 메링 등등을 중심으로 한 결연한 독일국제주의자들은, 당의 다수의 지지를 확보하지 않은 SPD 지도부가 당 전체를 지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룩셈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그 그룹은 모든 국제주의적 역량을 하나의 당으로 재조직하고 새로운 기초 위에 새로운 인터네셔널을 준비하기를 원했다. 룩셈부르크는 유니우스팸플렛에 부록으로서 출판된“국제사회민주당의 임무에 대한 테제”를 초안했다. 이 초안은 몇몇 변경을 거쳐 새로이 창립된 스파르타쿠스연맹에 의해 그 그룹의 가이드라인으로 채택되었다.

유니우스팸플렛의 중요성

룩셈부르크의 이팸플렛은 자본주의가 들어선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에 대한 역사적-이론적 틀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혁명가들의 활동에 대해 정치적 틀을 제공했다. 그것의 주요한 견해들 (제국주의의 역사적 발전, 쇠퇴기 자본주의사회의 전망들, 사회주의냐 야만이야, 노동자운동에서 국제주의의 문제 그리고 혁명가들의 임무)과 방법(모든 문제를 뿌리까지 파고들어 그 원칙들을 규명하는것, 가차없는 자기비판, 혁명가들의 임무에 대한 장기적 관점)은 모든 면에서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유니우스팸플렛의 이론적-역사적 기능들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 1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 쓴 다른 저작,자본의 축적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이 글에서 그녀는 자본주의의 추동력들과 그 기본 모순들 그리고 왜 자본의 축적이 특정 시기부터는 불가피하게 전쟁과 파괴를 초래하게 되는지의 윤곽을 보여주었다.

자본의 축적 출판이 이미 노동자운동 내부에서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것과 마찬가지로, 유니우스팸플렛의 출판도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 열정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제국주의의는 크든 작든 간에 모든 국가들의 암이 되었고 그래서 '민족자결' 요구는 더 이상 의제가 아니라는 룩셈부르크의 결론은 큰 논쟁을 유발했다. 전쟁 중에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 거센 논쟁이 시작되었고, 이 논쟁에서 레닌은 룩셈부르크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들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 논쟁이 공통된 국제주의의 입장, 즉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공유된 전망의 틀 안에서 이뤄졌음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제국주의 발전의 근원들 및 국제주의에 대한 배반의 근원들에 관한 그리고 혁명의 전망들에 관한 그 토론은, 억압과 추방등 가장 어려운 조건들 아래에서도 그들이 같은 방향을 향해 줄을 당기는 것을, 즉 자본주의체제의 전복을 위해 투쟁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전쟁 동안의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정신

인류에게 있어 이러한 역사적 재앙에 직면하여, 예전의 노동자당에 의한 이러한 배반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정신의 본보기, 지칠줄 모르는 결연함과 장기적 관점에서 이론적-정치적 분석을 이뤄내는 역량의 한 본보기였다.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전개된 야만성과 당의 배반은 혁명가들에게 진정한 충격이었고 그들 중의 일부는 침울함에 빠졌다. 독일의 많은 혁명가들이 수감되거나 추방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 자신도 전쟁기간 대부분 동안 감옥에 억류되었다. 4년 4개월간의 전쟁기간동안 총 3년 4개월을 그녀는 감옥에서 보내야했다. 그러나 그녀의 결연함을 굴복시키고 그녀를 침묵하게 하려는 것이 그 수감의 의도였다면, 수감된 후 그녀의 반응은 이론이라는 무기로 반격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책, 자본의 축적에 대한 비판들에 대한 대답으로 반비반을 썼다. 전쟁발발전 독일사회민주당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는 동안 그녀는 정치경제학에 관한 강의를 했었다. 수감 중에 그녀는 당 학교 교사로서 사용했던 초기의 그 강의자료로 정치경제학입문을 썼다. 그리고 그녀는 문학과 문화 문제들도 다루었는데, 러시아 작가 코로렌코의 내 동시대인의 이야기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그 서문을 작성했기도 했다. 그녀가 그녀의 최초의 러시아혁명에 대한 분석, 러시아혁명에 대하여를 작성하고 러시아에서의 혁명에서 행해진 실수들에 대한 비판을 위한 최초의 몇몇 중요점들을 발전시킨 것도 수감 중인 상태에서 였다.

물론 룩셈부르크는 감옥에 갇힌 상태로 고통받았지만, 이것은 결코 그녀의 의지를 꺾거나 사기을 저하시킬 수 없었다. 그녀가 수감 중에 쓴 기록들이나 서신들을 읽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그녀가 감옥 속에서 다룬 화제들의 다양성과 예술과 문학에 대한 일련의 편지들은 길들여질 수 없는 창조적 정신을 증언한다.“나는 종종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책읽기와 글쓰기로만 하루를 보냅니다2

자본주의의 도덕적 파산과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전망에 직면하여 그녀는 스스로 가장 결연한 투쟁에 투신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깊은 슬픔을 겪으면서도 용감한 정신을 유지했다. 그녀가 강인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이론적인 노력과 다른 열정들(예를 들어 그림그리기나 식물학)을 추구하는 능력을 통해서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거대한 지원망을 통해서 였다. 위장이 약해서 특별식이요법이 필요했던 그녀는 감옥 밖으로부터 음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녀의 저작들은 반복적으로 감옥밖으로 밀반출되었고, 이는 때때로 간수들의 묵인하에 이뤄졌다. 수감 중에 그녀는 많은 동지들과 서신교류를 했고, 그들에게 충고를 주고 감옥에 갇힌채 할 수 있는 한 최선 다해 그들을 지원했다. 감옥을 둘러싼 그 어떤 벽도 그녀를 침묵시키고 그녀가 개인들에게, 그녀의 동지들에게 그리고 노동자계급 전체에게 그녀의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막을 만큼 두껍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목소리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감옥 밖에서도 '들릴수' 있었다. 그녀가 감옥에서 풀려나는 날 약 천명의 노동자들(그 대부분이 여성들)이 감옥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가 집까지 동행했다.

그녀의 수감시기 동안의 삶은 그녀의 전체 삶의 연속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애

로자 룩셈부르크는 1871년 3월 자모치(폴랜드)에서 한 유태인 가정의 다섯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1871년은 파리코뮌의 해였고, 제 1인터네셔널 내에서 바쿠닌의 음모에 대항한 투쟁이 있었던 때였다. 17살 소녀로서 그녀는 폴랜드에서의 억압 때문에 스위스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고, 취리히대학에서 몇몇 과목들(식물학, 수학, 경제학, 역사 및 법학 등등)을 수학했다. 1897년 그녀는 '폴랜드의 산업발전'에 관한 박사논문을 제출했다. 1890년대에 이미 그녀는 폴랜드출신의 다른 동지들과 함께 제 2인터네셔널의 오래된 원칙들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녀는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발달을 감지할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제 2인터네셔널의 저항에 맞서, 폴랜드의 민족자결권이 더 이상 의제가 아니라고 결론지을 용기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입장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지배적인 입장과, 특히 레닌의 입장과 마찰을 일으켰다.

1898년 그녀는 독일로 이주하여SPD에 참여했다. SPD내부에 하나의 경향이 출현했는데 그 주요 대표자가 베른슈타인이었다. 그 경향은 자본주의가 다소 위기로부터 자유롭다는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평화로운 수단을 통해 가능하다는 생각을 옹호했다. 사실상 베른슈타인은 운동의 목표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녀의 답변,“혁명이냐 개량이냐”(1899)를 썼다. 그 시기 동안에 이미 그녀는 기회주의에 대항한 투쟁에 앞장섰다.

1903 년 그녀의 글“마르크시즘의 침체와 진전”에서 그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죽음 이후 마르크스주의 운동에서의 침체를 비탄하며 새로운 이론적 노력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그녀는 1916년 옥중에서 쓴“반비판”의 끝머리에서 다시 한번 강조하기를,“마르크스주의는 언제나 새로운 인식을 얻으려고 애쓰는 혁명적인 세계관이다. 이는 한번 유용했던 표식에 형식적으로 되는 것을 철저히 혐오하며, 자기비판이라는 정신적인 격렬한 울림에서, 그리고 정신적인 천둥번개에서 생명력을 가장 잘 유지한다.3

1904년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에 뒤이어 러시아에서 최초로 대대적 파업의 큰 물결이 일어났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20세기 계급투쟁의 새로운 원동력을 최초로 발견한 이들 중의 하나였는데, 이제는 노동자들의 주도성이 특징적인 요소가 되고 계급투쟁은 노동조합이나 당 기구에 의해 '계획될' 수가 없다. 비록 그녀가 노동자평의회의 역할을 아직 이해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책,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에서 그녀는 이러한 대중 활동을 강조했다. 계급투쟁의 이러한 새로운 원동력을 노동조합과 증가되는 사회민주당 내부 인자들은 격렬한 투쟁으로 꺽어버리려 했다. 노동조합 기구와 밀접하게 협력하면서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당 내부에서 대대적 파업에 대한 논쟁을 금지했다. 1906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대적파업에 관한 그녀의 책 출판 후“계급 증오를 조장했다”는 선고를 받고 2개월 동안 수감되어야만 했다. 사회민주당의 이전의 지도자로 마르크시즘의 정통적인“교황”으로서 알려진, 칼 카우츠키는 로자의 과격한 노선에 점점 더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 시기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를 “평화롭고”, “조화를 사랑하는”사회민주당 안에 곤란을 유발하는“유태인”, “외국인”, 그리고 “노처녀”라고 비방하는 캠페인과 중상모략이 강화되었다.

1907년 점증하는 전쟁위협에 대응하여 조직된 제 2인터네셔널 슈튜트가르트대회에서 룩셈부르크, 레닌 그리고 마르토프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자본주의 계급지배의 철폐를 촉진한다”는 공통된 지향을 위해 투쟁했다. 1912년 그녀의 책, 자본의 축적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의 저작들 속에 존재하는 한계와 모순들을 용감하게 지목했었다.그녀의 책은 아직 자본주의에 포섭되지 않고 그 외부에 존재하는 시장들의 역할과 군국주의의 특수한 기능을 파악하는데 기본을 제공한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2년전에 쓰여진 그 책은 자본주의의 기본모순들에 대한 필요불가결한 통찰을 제공한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1914년 8월 SPD 지도부의 배반이 있은 직후 룩셈부르크는 전쟁 반대 투쟁에서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유니우스팸플렛은 그래서 1890년대 이래 새로운 조건들을 이해하려는 그녀의 투쟁, 제1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게 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조건들을 설명하려는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한 도전을 설명하려는 그녀의 투쟁과 직접적인 연장선 속에 놓여있다.

1917년 여전히 감옥 속에 있으면서 그녀는 러시아에서 그때 막 시작된 그 혁명의 중요성에 대해 최초의 분석을 제공했다. 러시아에서 혁명의 문제가 제기되긴 했지만 러시아 자체에서 해결될 수는 없음이 그녀에게는 분명했다. 룩셈부르크가 1918년 11월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지배계급은 그녀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두려워했다. 특히 사회민주당 은 노동자계급에 반대한 그당의 투쟁의 표적으로 그녀를 삼았다. 1918년 12월 베를린 노동자평의회에 그녀와 독일 노동자계급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중 하나였던 칼 리프크네히트의 참여가 허용되지 않았는데, 그 핑계는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1918년 12월 독일공산당, KPD의 창립대회에서 강령에 대해 행한 연설에서 그녀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역사적 차원을 강조하면서 혁명이 테러로 복귀할 수 없으며 노동자계급 전체의 모든 에너지와 의식을 동원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매우 교활한 적에 대항한 재빠르고 쉬운 승리라는 즉각주의적 환상에 대항해 목소리를 높인 극소수 중의 하나였다. 결국 그녀를 겨냥한 중상 비방 캠페인은 1919년 1월 그 극에 달했다. 1919년 1월 중렵 소위 스파르타쿠스봉기가 진압되고 수천명의 노동자들이 학살된 뒤 로자 룩셈부르크도 암살되었다. 지배계급은 당시 가장 용감하고 통찰력있는 혁명가들중 하나를 일소해버리는데 마침내 성공하고 만 것이다.

유니우스팸플렛은 20세기와 21세기를 거치면서 점점 더 심각해지는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파악하고 착취당하는 계급에 의한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을 위한 전망을 발전시키는데 필요불가결한 그녀의 대작들 중의 하나로 남아있다. D


2 로자 룩셈부르크가 클라라 체트킨에게 보낸 1916년 7월 11일자 편지

3자본의 축적 II( 로자 룩셈부르크; 황선길 옮김,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3)에 실린“비판에 대한 반비판, 자본의 축적, 또는 아류들이 마르크스 이론으로 무엇을 만들었는가?”, 974쪽

 

브렉시트, 트럼프 : 프롤레타리아에게 좋을 것 전혀 없는 지배계급을 위한 후퇴

통제 불능에 이른 국민 투표

우리는 30년도 더 전에 "해체에 대한 테제(Theses on Decomposition)"1)를 통해 부르주아지가 그 자신의 정치 기관 중심에서 바깥으로 해체되어 가는 원심력 경향을 더욱더 통제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것의 구체적인 의미가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 투표와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 후보가 된 것으로 표현되었다. 지배계급으로부터 나온 파렴치한 정치적 모험가들은 두 경우 모두에서 지난 30년 동안 경제적 대변동에 고통받아왔던 이들의 포퓰리즘적 저항을 자신들만의 자기-확장에 이용해왔다.  

국제공산주의흐름(ICC)은 포퓰리즘의 확장에 대해 인식하고 그 결과를 설명하는데 뒤늦었다. 이것이 우리가 왜 이제야 포퓰리즘에 대해 - 여전히 조직 내에서 토론이 진행되고 있지만2) - 전반적인 글을 출간하는 이유이다. 이 글은 토론에서 제기된 문제의식을 영국과 미국의 특수한 상황에 적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빠르게 진화하는 국제 상황에서 완벽한 분석을 내놓으려는 의도는 없지만, 우리는 이 글이 새로운 사상과 토론 심화를 위한 좋은 밑거름이 되길 희망한다. 

지배계급이 통제력을 상실한 것이 영국에서의 EU 국민투표와 그 이후의 일들로 나타난 전례 없는 혼잡과 무질서의 광경만큼 너무나 명백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때까지 영국의 자본주의자들은 민주주의 절차에 대한 통제를 놓쳐본 적이 없었고, 자신들의 매우 중요한 이해관계가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이나 나이젤 파라지(Nigel Farage)와 같은 모험가들 손에 좌지우지된 적도 없었다. 

모든 면에서 브렉시트 결과에 대한 준비의 실패는 영국 지배 계급 내부의 혼란을 보여준다. 결과가 발표되고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주요한 탈퇴 운동가들은 그들의 지지자들에게 그들이 약속했던, 그리고 탈퇴 캠페인 버스의 모든 벽에 붙어있었던, 브렉시트 투표가 가져다줄 NHS3)를 위한 매주 3억 5천만 파운드 추가 자금은 본질적으로 '오타'였음을 설명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파라지는 UKIP4)대표 자리에서 사임했고, 모든 브렉시트 쓰레기더미를 그를 따르던 탈퇴 찬성자들의 무릎에 던져버렸다. 보리스 존슨은, 전임 의사소통 담당국장(director of communications) 구토 하리(Guto Harri)는 존슨의 "심장은 브렉시트 운동에 있지 않았다"며, 존슨이 브렉시트를 지지한 대의는 순수하게 기회주의적인 것이며,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에 도전하는 그의 리더십을 부흥시키기 위해 고안된 자위적 조작이라는 강한 의혹을 제기했다. 국민투표의 모든 기간 존슨의 선전부장이었으며, 존슨이 영국 총리가 되기 위한 운동을 운영할 예정이었던(그러나 반복적으로 그 일에 관심이 없음을 선언해왔던) 마이클 고브(Michael Gove)는 그의 오랜 친구 존슨이 총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근거로 후보자 등록 마감 고작 2시간 전에 스스로 총리 후보에 이름을 올리며 존슨의 등에 칼을 꽂았다. 앤드레아 리드섬(Andrea Leadsom)은 고작 3년 전에는 탈퇴가 영국에게 '재앙'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으면서 토리당 대표 경선에 확고한 탈퇴 지지자로 입후보했다. 거짓말, 위선, 말 바꾸기들 - 이 모든 것들은 지배계급의 정치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다. 충격적인 것은 세계에서 가장 노련한 지배계급이 어떤 의미에서건 국가에 대한 개인의 야망이나 사소한 맞수들의 비판 너머에 있는 압도적인 역사적, 국가적 이해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영국 지배계급의 역사에서 이와 비견할만한 사건을 찾아보자면, 우리는 쇠퇴하는 중세 질서에 대한 마지막 갈망을 보여준 장미 전쟁(셰익스피어의 헨리 6세로 극화된)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탈퇴 의견이 승리한 것에 대해 금융과 산업의 사장들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 역시 충격적이다. 결과에 대한 모든 징후가 "당신의 인생에서 보았던 가장 아슬아슬한 승부"(만약 이를 인용해도 된다면, 워털루 전쟁 이후의 웰링턴 대공)5)임을 보여주는 상황이었는데에도. 20%, 그 이후 30%로 달러에 대한 파운드화(Sterling)가 즉각적으로 붕괴했던 것은 브렉시트가 기대한 결과가 아님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파운드화의 가치는 국민 투표 이전에 반영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은행과 사업가들이 사무실을, 또는 사업체를 더블린이나 파리로 옮기는 것과 같이 탈출을 향해 질주하는 가감 없는 장관에 배가 부를 정도였다. 세계에서 해외 직접투자(Foreign Direct Investment, FDI) 의존도가 가장 높은 영국경제 상황에서 조지 오스본(George Osborne)이 즉각적으로 법인세를 15%로 내리기로 한 것은 영국에 기업들을 잡아두기 위한 명백한 긴급 비상조치였다.

제국의 반격

영국의 지배계급은 아직 쓰러지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분별력 있게 존속을 지지해왔던 확고하고 역량이 뛰어난 정치인인 테리사 메이(Theresa May)가 캐머런의 즉각적인 후임 총리가 되었고(애초에 9월 이전에는 그렇게 기대되지 않았다), 언론과 토리당의 국회의원들에 의해 그녀의 반대편인 앤드리아 리드섬과 마이클 고브가 직장을 잃은 것은 국가의 유력한 지배계급 일부에 대해 신속하고 통일된 반응을 할 수 있다는 그들의 진정한 역량을 보여준다.

근본적으로 이 상황은 세계 자본주의의 진화와 계급 사이 힘의 균형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은 자본주의 쇠퇴기라는 현 단계에서 통일된 부르주아 정책이 분해되어가는 더욱 전반적인 움직임의 산물이다. 포퓰리즘으로 기울어지는 경향 너머의 추동력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포퓰리즘의 문제에 기여한 토론"에서 분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반적인 국제 현상은 특정 국가의 역사와 특징들의 영향 아래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띤다. 그래서 토리당은 항상 그 EU에서 영국의 구성원 자격을 실제로 허락한 적이 없는, "유럽연합에 대해 회의적인" 한 측면을 담당해 왔고, 그 근원은 우리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1. 유럽의 해안에서 떨어져 있는 영국의 - 그리고 그 전에는 잉글랜드의 - 지리학적 위치는 영국이 대륙의 국가들이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유럽의 경쟁으로부터 분리된 채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해 왔다.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 지주 권력의 부재 또한 프랑스가 19세기 이전, 또는 독일이 1870년 이후 그러했던 것처럼 유럽 지배를 바랄 수 없도록 했고, 오직 주요 강국들이 서로가 서로를 적대하도록 하고, 그들 중 어느 나라와도 연루되는 것을 회피함으로써 그들의 생존의 이해를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
  2. 영국의 섬으로서의 지리학적 위치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산업화한 국가의 지위는 대항해시대, 세계 제국주의의 개막을 결정지었다. 적어도 17세기부터 영국의 지배계급들은 전 세계에 모양새를 갖추었고, 그것은 다시 그들에게 유럽 정치로부터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러한 상황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격하게 변했다. 영국의 세계 강대국으로서의 지배적인 지위는 더는 유지 가능하지 않았고, 근대적 전쟁 기술들 - 공군, 장거리 미사일, 핵무기 – 로 인해 유럽 정치로부터의 고립이 더는 선택사항이 아님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를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 중 하나가 윈스턴 처칠(Winston Curchill)이다. 그는 1946년 "유럽 연방국(United States of Europe)"을 만들자고 요구하였으나 보수당 내에서 그의 입장은 전적으로 승인되지 못했다. <편집자 주 : 처칠의 구상에서 유럽연방국에 영국이 포함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아 논쟁이 되고 있다.특히 소련(USSR)의 몰락과 1990년대 독일 통일이 실질적으로 유럽에서 독일의 권력을 증가시킴에 따라 EU의 구성원이 되는 것에 대한 반대의견이 증가했다.6) 국민투표 운동 동안 보리스 존슨은 EU가 “히틀러” 독일 지배의 도구라고 이야기하는 중상모략을 하였으나, 이러한 사건은 그가 처음이 아니었다. 거의 똑같은 언어로, 그와 똑같은 감수성들을 이미 1990년에 니콜라스 리들리(Nicholas Ridley)가, 그 이후에는 대처 정부의 총리가 표현한 바 있다. 그것은 전후 정치 기관 내에서 권위와 규율의 상실을 의미하는 상징이었다. 다만 리들리는 정부로부터 즉각 사임할 수밖에 없었던 반면, 존슨의 반향은 새로운 내각의 구성원에게 영향을 주었다.

영국이 세계의 가장 위대한 제국주의 국가로서 한때 누렸던 지위. 그 지위의 상실은 영국 국민들(노동계급을 포함하여)의 심리적, 문화적 현상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국가적 집착은 - 영국이 마지막으로 독립적인 세계 강대국으로서 행동할 수 있었던 - 이를 완벽하게 묘사한다. 영국 부르주아지의 일부와 더 많은 소부르주아지는 영국이 오늘날 오직 2등급, 또는 3등급의 강대국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탈퇴 운동가들의 다수가 EU의 "족쇄"로부터 영국이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세계는 영국의 상품과 서비스를 사러 몰려들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영국 경제가 매우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가능성이 큰 환상에 불과하다.

제국주의 권력의 상실에 대해 바깥 세계로 향하는 분노와 적개심은 미국 국민이 자신들의 지위 일부를 잃었다고 인식한 결과(트럼프의 "다시 위대한 아메리카를 만들자"는 지속적인 테마)로서의 감성들, 그리고 냉전 시기 그들이 자신들의 법칙을 부여할 수 있었던 능력의 상실에서 비롯되는 감성들에 비견할 만하다.

포퓰리즘에 대한 양보로서의 국민투표

보리스 존슨의 포퓰리즘 광대 짓은 더욱 극적이었고, 더욱 많은 미디어로부터의 주목을 받았다. 그 후 데이비드 캐머런의 낡은, 최상위 계급의 "책임감 있는" 페르소나가 발휘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캐머런은 지배 계급 내에서 얼마나 부패가 진행되었는지를 더 잘 보여주는 지표이다. 하지만 지난 총선에서 이기려고 당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국민투표라는 카드를 이용한 무대를 만든 것은 캐머런이었다. 바로 그 성격으로 인해 국민투표는 의회 선거보다 통제하기 훨씬 어렵고, 그러하기에 언제나 도박을 의미한다.7)카지노에 중독된 것처럼, 캐머런은 반복하여 스스로 도박사임을 드러내었는데, 처음에는 아슬아슬하게 그가 승리했던 스코틀랜드 독립에 대한 국민투표였고, 그다음이 브렉시트였다. 그의 보수당은 언제나 경제, 영국(연합 왕국)8), 그리고 국방의 최고의 보호자임을 자처해 왔는데 이번에는 이 세 가지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고 말았다. 

결과 조작이 어려운 상황에서, 국가 이해의 중요한 문제에 대한 국민투표는 지배계급에 있어서 대부분 결과를 보장할 수 없는 위험이다. 의회 민주주의는 전통적, 이데올로기적 의미에서, 그리고 심지어 쇠퇴기의 그릇된 형식에서도 그러한 문제에 대한 결정은 전체 대중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문가들과 이해관계자 그룹들의 조언을 받은(로비를 받은) “선출된 대표자들”에 의해 내려지게 되어 있다. 부르주아지의 관점에 의하면, 이를테면 2004년 EU의 헌법 조약(Constitutional Treaty)과 같은 복잡한 문제에 대해, 대부분의 투표자들이 조약 문서를 읽으려고도 그리고 읽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물어서 결정하는 것은 완전히 미친 짓이다. 국민투표들에서 자주 “잘못된” 결과를 얻었던 지배계급이 이 조약을 연기시켰다는 것은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프랑스, 네덜란드, 최초에는 아일랜드에 대해).9)

오늘날 영국 부르주아 정당 내부에 메이 정부가 프랑스와 아일랜드 정부가 헌법 조약에 대한 국민투표를 망친 뒤 했던 것과 같은 속임수를 쓰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국민투표를 무시하거나 뒤집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단기간에 그렇게 될 가능성이 적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영국 부르주아지가 그 추종자들보다 더 민주주의를 신뢰해서가 아니라, 정확하게는 “대중의 의지”의 “민주주의적 표현”을 무시하는 것이 오직 포퓰리즘 사상에 신뢰를 부여하고 그들을 보다 위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테리사 메이의 전략은 EU로부터 탈퇴하게 된 영국을 조직할 책임을 떠맡은 채, 장관직에서 최대한 잘 해보려고 애쓰고, 가장 잘 알려진 탈퇴 찬성자 셋과 함께 브렉시트의 길을 멈추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광대인 존슨을 국제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것 - 해외 인사들을 공포와 유쾌함과 불신이 뒤섞인 감정으로 환영하는 것 - 도 분명 이러한 폭넓은 전략의 일부이다. 존슨을 EU 탈퇴 협상이라는 논란이 많은 자리에 앉힘으로써, 메이는 탈퇴 운동가들의 주요한 발언들이 거의 확실하게 적대적인 언어로 가득할 대부분의 격렬한 비난 - 그리고 불신 - 에 직면할 것임을, 그리고 이는 측면 저격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 것임을 확신했다.

특히 유럽이나 미국의 포퓰리즘 운동에 찬성하는 이들이 갖는, 엘리트가 단순히 그들에게 불편한 결과를 무시하기 때문에 모든 민주주의 과정은 협잡이라는 인식은 지배계급의 체계로서의 민주주의 효율성에 실질적인 위협이다. 정치에 대한 포퓰리즘 개념에서는 “사람들에 의한 직접적인 결정”이 기존의 정치 엘리트에 의한 선출된 대표자들의 부패를 피하도록 해 줄 것이다. 이것이 독일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부정적 경험과 나치 독일이 국민투표를 이용했던 경험 이후 전후(post-war) 헌법에서 그러한 국민투표를 배제한 까닭이다.10)

탈선한 선거

만약 브렉시트가 통제에서 벗어난 국민투표였다면, 2016년 미 대선 후보로 트럼프가 당선된 것은 정도를 벗어난 선거이다. 트럼프가 후보가 되었다는 것이 처음 공언되었을 때에는 그 사실이 거의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선두는 부시 왕가, 공화국 귀족들의 선호하는 선택, 그리고 잠재적인 강력한 기금 조달자(언제나 미국 선거에서 결정적인 고려사항)는 젭 부시(Jeb Bush)였다. 그러나 모든 기대를 저버리고, 트럼프는 초반 프라이머리에서 승리했고, 그다음 주(state) 선거에서 계속 이겨나갔다. 부시는 ‘픽’ 소리를 내며 쓰러져 나갔고, 다른 후보들도 다르지 않았다. 공화당 대표자들은 트럼프를 이길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후보는 테드 크루즈(Ted Cruz) 뿐이라는 불쾌한 전망에 직면해야 했다. 그는 자기네 상원 의원들로부터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그리고 트럼프보다 아주 조금 덜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사람으로 여겨지는 인물이었다.

트럼프가 클린턴을 이길 가능성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상황이 얼마나 비정상적으로 돌아가는지 보여주는 지표이다. 그러나 벌써 트럼프 후보는 제국주의 동맹들의 모든 시스템을 통해 충격을 선사하고 있다. 미국은 70년 동안 그 효과성이 상호 방어의 불가침 - 하나에 대한 공격은 모두에 대한 공격 - 에 의존하는 나토(NATO, 북대서양 조약기구) 동맹의 보증국이었다. 트럼프가 만약 러시아가 발트 해 국가들을 공격했을 때 “그들이 대가를 치렀는지”에 대한 그의 판단에 미국의 반응이 달려있을 것이라고 선언한 방식으로, 미래의 미국 대통령이 NATO 동맹과 그 조약의 의무를 존중할 준비가 되었음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때가 온다는 것은, 푸틴의 마피아 국가에 직접적으로 대면하고 있는 동유럽 지배계급의 등골을 오싹하게 할 것이며, 중국이라는 용으로부터 보호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일본, 대한민국, 베트남, 필리핀 등의 아시아 국가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그러할 것이다. 우크라이나에 러시아 군대는 없다는 트럼프의 최근의 발언(러시아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크리미아(크림 반도)가 우크라이나의 일부라고 여긴다는 사실을 완전히 모르는 것)을 보았을 때, 트럼프가 단순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것이라는 가능성은 높은데 이것 역시 다른 이들에게 매우 위급한 상황임을 알려주는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트럼프는 러시아 정보국의 민주당 IT 시스템 해킹을 환영하고 푸틴을 초대하기까지 했다. 그것이 트럼프에 조금이라도 얼마나 피해를 줬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1945년 이후 공화당이 극단적으로까지는 아니어도 격렬하게 반러시아적이었으며, 어떤 비용을 들여서라도 강력한 군대 조직과 세계 각지에 배치된 다수의 군대 존재를 옹호하는 것(이것은 재정 적자 수준을 급등하게 한 레이건의 엄청난 군비 증강이었다)을 떠올려 볼 가치는 있을 것이다.

공화당이 그 후보를 극단적으로 위험하게 취급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1964년, 프라이머리에서 종교적 우익과 “보수 연합”의 지지로 인해 승리한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는 오늘날 티 파티 운동의 선구자였다. 그의 정책은 적어도 일관적이었다. 연방 정부 예산, 특히 사회 안전망에 대한 예산의 대대적인 감축, 군비 증강, 소련에 대항하는 핵무기의 사용 준비 등. 그것은 전통적인 극우 정책이었으나, 미국의 국가 자본주의의 필요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골드워터는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패배했는데, 이는 공화당의 지배층이 그를 지원하는 데 실패한 것에 부분적인 원인이 있었다.

트럼프는 단지 골드워터 2.0 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 차이는 유익하다. 골드워터 후보는 그 시기 “티 파티 운동”에 의해 대표되는, 골드워터의 패배 이후 몇 년 동안 물러서야 했던 - 보수당의 권력 장악을 대표한다. 최근의 10~20년 동안 이러한 경향이 돌아왔으며, 이 경향이 GOP11) 권력을 다소간 성공적으로 차지해 왔음은 비밀도 아니다. 그러나 골드워터 지지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보수 연합”이었다. 그들은 심각한 사회 변화(페미니즘, 시민권 운동, 베트남 전쟁 반대의 시작, 전통적인 가치의 몰락)를 경험하는 미국 내에서 진정으로 보수적인 경향을 대표했다. 비록 많은 티파티의 “원인”이 골드워터와 같을지라도, 맥락은 그렇지 않다. 그가 반대하는 사회적 변화는 이미 일어난 것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티파티는 보수의 연합이라기보다 신경증적인 반응의 동맹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문제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고 기본적으로 미국의 군사력과 이윤을 가져다주는 자유 무역에만 관심이 있는 대(大)부르주아지의 어려움을 증가시켰다. 공화당 프라이머리에 나서는 자가 스스로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 “완전무결함”을 증명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가 되었다: 낙태(당신은 “생명을 존중하는 이”가 되어야 한다), 총기 규제(총기에 저항하기 위해), 재정적 보수주의와 낮은 세금, “오바마케어”(사회주의, 이는 철폐되어야 한다. 실제로 테드 크루즈의 신용 일부는 상원에서 오바마케어에 저항하는 대중 호소 필리버스터를 한 것에 기반을 뒀다), 결혼(신성한), 민주당(만약 사탄이 당을 만든다면, 그것은 민주당일 것이다). 자, 짧은 몇 달의 기간 트럼프는 효과적으로 당의 핵심골자를 빼버렸다. 우리는 그 스스로 낙태, 총기 규제, 결혼(그 스스로 세 번이나 했다)에 대해 “신뢰할 수 없음”을 보여준 인물, 과거 스스로 악마 힐러리 클린턴에게 기부했던 인물이 후보가 되었음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그는 최저 임금의 인상,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오바마케어의 유지, 고립주의 해외 정책으로의 회귀, 재정 적자 폭의 증대, 그리고 미국 경제에 필수적인 저임금 노동을 제공해 온 천백만의 이민자들의 추방을 제안한다.

브렉시트에서의 영국의 토리당처럼, 공화당과 잠재적인 미국의 모든 지배 계급은 자신들의 제국주의적인 입장과 경제적 계급의 이해관계에 대해 완전히 불합리한 정책을 가진 말안장 위에 스스로 올라탔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함의

우리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후보 당선이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제국주의적 수준에서 더욱 불안정한 시대로 안내할 것이라는 점이다. 경제적 수준에서 유럽 국가들 - 우리는 이들이 세계 경제의 중요한 부분이며 가장 큰 단일 시장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은 이미 허약한 상황에 부닥쳐있다. 그들은 2007/8년의 금융 위기와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위협을 경험하였으나, 그것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영국은 주요 유럽 경제권에 남아있지만, EU와의 연결을 끊어내는 오랜 과정은 예측할 수 없게 파탄 날 것이며, 이는 적어도 금융 수준에만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브렉시트가 유럽의 은행, 보험, 그리고 주식거래의 중심지인 런던에 어떠한 영향을 가져올지 아무도 모른다. 정치적으로 브렉시트의 성공은 유럽 대륙의 포퓰리즘 정당들만을 고취시키고 그들에게 큰 힘을 실어줄 것이다. 내년 반유럽주의자이며 포퓰리스트인 마린 르 펜(Marine Le Pen)이 있는 국민 전선이 프랑스 대선에서는 가장 큰 단독 정당이다. 유럽 강대국들의 정부는 영국의 유럽으로부터의 분리를 가능한 부드럽고 마찰 없이 이뤄내려는 열망과 영국에 대한 어떤 양보(이를테면 인구의 이동은 제한한 채 시장에의 접근은 허락하는)도 다른 이들에게 - 지적하자면 폴란드와 헝가리와 같은 국가들에게 - 같은 생각을 하게 할 수 있다는 실질적 두려움 사이에서 갈가리 찢겨졌다. 과거 유고슬라비아 국가들을 통합함으로써 유럽의 남동쪽 국경을 안정시키려는 시도는 완전히 중단될 것이다. 터키 에르도안(Erdogan)의 쿠데타와 시리아 난민들을 공갈·협박의 비열한 게임의 말로써 쓰는 것에 대해 EU는 통일된 반응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비록 EU 그 자체가 제국주의 동맹이었던 적은 없으나 그 구성원의 대부분은 NATO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따라서 유럽의 단합을 약화시키는 어떤 것도 러시아가 동유럽의 측면, 우크라이나와 발트 해 국가들을 무너뜨리는 압력에 반격하는 NATO의 능력에 도미노 효과를 불러올 것이다. 러시아가 가끔 프랑스의 국민 전선에 자금을 지원하고, 독일의 페기다(Pegida: Patriotische Europäer gegen die Islamisierung des Abendlandes, 서양의 이슬람화를 반대하는 애국 유럽인) 운동에는 자금을 지원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브렉시트 국민투표의 유일한, 가장 뚜렷한 승자는 사실 블라디미르 푸틴이다.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트럼프 후보자는 이미 미국의 신뢰성에 한 방 펀치를 날렸다. 핵무기 버튼에 손가락을 얹은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생각은, 반드시 말해둬야겠는데, 매우 두려운 전망이다.12) 그러나 우리가 수차례 이야기한 것처럼, 오늘날 불안정과 전쟁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그 지배적인 제국주의적 지위를 모든 이민자에 저항하여 유지하고자 하는 미국의 결의이며 이 상황은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기구에 대한 분노

보리스 존슨과 도널드 트럼프는 수다쟁이라는 것 외에 다른 것도 공유하고 있다. 둘 다 정치적 모험주의자이며 국가의 이해를 넘어서는 어떤 원칙이나 감성도 결여하고 있다. 둘 다 자신들의 메시지를 왜곡시키든 바꾸든 그들의 청중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들려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의 익살은 그것들이 터무니없어 보일 때까지 미디어에 의해 부풀어 오른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완전히 하찮은 것들이며 세계화의 패배자들의 울부짖는 분노, 절망, 그리고 부유한 엘리트와 자신들의 비참함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민자들에 대한 증오를 쏟아내는 창구일 뿐이다. 그러므로 트럼프는 가장 무도하고 모순적인 발언을 대충 지껄여버린다. 그의 지지자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이 듣길 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존슨과 트럼프가 똑같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차이는 개인적인 인격의 차이라기보다 그들이 속한 지배계급의 차이와 관계가 있다. 영국 부르주아지는 수 세기 동안 세계무대에서 중요한 지배적인 역할을 해 왔다. 이에 비해 미국의 거칠고 대담하며, 자기-몰입적인 국면은 제2차 세계대전에 진입하는, 루스벨트의 고립주의자들에 대한 승리와 더불어 끝났다. 미국 지배 계급의 중요한 분파는 여전히 바깥 세계에 대해 무지한 채로 남아있다. 어떤 이는 그들이 발달이 늦은 성인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선거의 결과는 우리에게 노동 계급의 상황에 대해 무엇인가를 이야기해 줄지언정 절대 계급의식의 표현은 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되었든 미국에서의 트럼프에 대한 지지가 되었든, 프랑스의 국민 전선의 마린 르 펜이 되었든, 또는 독일의 포퓰리즘인 페기다와 독일을 위한 대안(Alternative für Deutschland, AfD)이 되었든, 이러한 당과 운동이 노동자의 지지를 얻는 곳에는 지난 40년 동안 자본주의 경제 변화로부터 가장 고통받은 이들이 있음을, 그들의 삶의 조건에 대한 좌우익을 막론하고 정부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고 패배한 수년의 경험이 그들로 하여금 지배 엘리트를 위협할 수 있는 방법은 똑같은 엘리트에 대한 저주를 정책으로 하는 무책임한 정당을 향해 보란 듯이 투표하는 것일 뿐임을, 합리적으로 결론내린 이들이 있는 곳임을 모든 투표 수치는 보여준다. 비극이라면, 이러한 노동자들이 정확히 1970년대 투쟁에 가장 대중적으로 참여했던 이들이라는 점이다.

브렉시트와 트럼프 선전의 공통 주제는 “우리”는 “다시 통제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무엇이 되었든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 실제로 통제해 본 적 없다. 보스턴 UK 의 한 거주자가 “우리는 단지 모든 것들을 원래 있었던 자리로 되돌리고 싶을 뿐입니다”고 이야기한 것처럼. 그때란, 일자리가 있었을 때, 그 일자리가 적절한 임금을 보장해 줄 때, 노동 계급 공동체의 사회적 연대가 실업과 태만으로 무너지지 않았을 때, 변화가 뭔가 긍정적이고 조절 가능한 속도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을 때이다.

브렉시트 투표가 영국에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자가 목조 뒤에서 기어 나오는 것이 더욱 자유롭다고 느끼는 새롭고 추악한 분위기를 조장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진실이다. 그러나 브렉시트 또는 트럼프에 이민을 멈추라고 투표한 많은 - 아마도 절대다수 - 이들은 그렇게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다. 그보다 그들은 외국인 혐오로부터 고통받고 있다. 외국인에 대한 공포, 알려지지 않은 자에 대한 공포. 그리고 이 ‘알려지지 않은 자’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경제 그 자체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생산의 과정에서 실제의 사회관계를 마치 자연적인 힘으로, 요소로, 마치 날씨와 같이 통제 불가능한 것으로, 그러나 노동자들의 생활에의 영향력은 훨씬 파괴적일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여, 본질적으로 신비스럽고 이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시대와 같은 과학적 발견의 시대, 사람들이 더는 궂은 날씨를 마녀가 일으킨 것이라고 믿지 않는 시대에, 그들의 경제적인 비통함이 그들의 불행한 이민자 동료들에 의해 일어났다고 믿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다는 사실은 매우 끔찍한 아이러니이다.

우리가 직면한 위험

우리는 이 글을 “해체에 대한 테제”를 언급하면서 시작했다. 해체에 대한 테제는 거의 30년 전인 1990년에 썼다. 우리는 그 테제를 인용하며 결론을 짓고자 한다.

“우리는 특히 프롤레타리아가 스스로 그 역사적 책무의 수준에 도달하는 능력이 해체될 위험에 대해 명확히 해야 한다. (…) 노동계급의 힘을 구성하는 서로 다른 요소들은 바로 이 이데올로기 해체의 다양한 측면들에 직면한다.”

  • 연대와 집단적 행동은 ‘자신의 이익을 찾는’ 원자화에 직면한다.
  • 조직의 필요는 모든 사회적 삶의 기반이 되는 관계의 파괴, 사회적 해체에 직면한다.
  • 프롤레타리아의 미래에 대한 신뢰와 그 자신의 힘은 지속해서 사회에 만연한 절망과 허무주의에 의해 활력을 잃는다. 의식, 명석함, 일관되며 통일된 생각, 이론의 달콤함은 환상, 마약, 분파주의, 신비주의,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에 대한 거부 또는 파괴의 가운데로 곤두박질치는 어려운 시기를 겪을 것이다."

그 위험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것들이다.

포퓰리즘의 유행은 지배계급에 위험한데, 포퓰리즘이 지배계급의 정치 기관들을 통제할 능력을 위협하는 동시에, 지배계급의 사회적 지배를 지탱하는 기둥인 민주주의의 신비화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프롤레타리아에게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반대로,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혼란에 대해 어떤 대안적 전망도 제공하지 못하는 무능력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의 허약함이며, 그것이 포퓰리즘의 유행을 가능하게 했다. 프롤레타리아만이 오늘날 사회가 직면한 막다른 길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스스로 유혹의 말 - 포퓰리스트 선동가들이 약속하는, 어떤 경우에라도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과거로의 회귀라는 불가능한 약속에 스스로를 맡긴다면,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2016년 8월, Jens

국제공산주의흐름


<주>

1) International Review 107, 2001년 출판

2) International Review의 이 주제를 보라.

3) 국가 의료 제도(National Health Service)

4) 영국 독립당(United Kingdom Independence Party): 1991년 세워진 포퓰리즘 정당. 그 선전은 본질적으로 EU 탈퇴와 이민 반대이다. 역설적으로 유럽 의회에서 가장 거대한 단독 영국 정당을 구성하는 22명의 MEPs 를 보유하고 있다.

5) EU와 영국 재무부가 탈퇴 캠프가 승리할 경우 상황에 대한 계획에 대해 일정정도 노력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준비가 부적절하며 - 아마도 보다 적절하게는 - 아무도 탈퇴파가 국민투표에서 승리할 것이라도 진실로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이것은 탈퇴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진실이었다. 명백히, 파라지는 국민투표 날 잔류파의 승리를 인정했으나, 잔류파가 패배한 다음 날이 되어서야 그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6) 1973년 보수당 정권 아래 영국은 유럽 경제 공동체(EEC)에 가입했다. 그 구성원 자격은 1975년 노동당 정부의 국민투표에 의해 승인되었다.

7) 대처가 의회 선거에서 40% 이상의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10년 넘게 권력을 유지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8)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그리고 북아일랜드의 통합 왕국 연합이라고 이야기된다.

9) 이러한 불편한 결과에 따르면, 유럽 정부들은 헌법 조약을 채택하지 않았고, 2009년 리스본 조약으로 기존의 협정을 단순히 수정함으로써 가장 본질적인 요인을 구했다.

10) 스위스와 캘리포니아에서 있었던 국민투표와 구분해야 한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정립된 정치적인 과정의 일부였다.

11) “Grand Old Party”,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사용된 공화당의 구어식 표현이다.

12) 골드워터 패배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전술적 핵무기를 사용할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한 것이다. 존슨의 선전은 골드워터의 슬로건 “당신의 가슴 속에서 당신은 그가 옳음을 알고 있다”와 대비되게 “당신의 창자에서, 당신이 그가 괴짜임을 안다”라는 슬로건으로 맞받아쳤다.

 본 기사는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원문출처┃https://en.internationalism.org/international-review/201608/14087/brexit-trump-setbacks-ruling-class-nothing-good-proletariat

 

트럼프대통령 : 사멸해가는 사회체계의 상징

고대로마 시대가 기울어갈 무렵 로마황제들의 광기는 예외적이 아니라 지배적인 현상이었다. 그것이 로마가 노쇠하고 있다는 징후였음을 역사가들은 의심하지 않는다. 오늘 무시무시한 광대 하나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에서 왕이 되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 사실은 자본주의 사회가 그 자체의 쇠퇴에서 더 진전된 단계에 도달했음의 징후로서 이해되지 않는다. 그 체제의 진원지에서 대중추수주의(Populism)의 쇄도는 단기간에 연이어 브렉시트와 도달드 트럼트의 승리를 초래했는데, 이 사실은 지배계급이 지금까지 몇 십년 동안 자본주의에 내재적인 붕괴경향을 억제하는데 활용해 온 정치기구에 대한 장악력을 잃고 있음을 표현한다. 우리는 지금 사회질서의 가속된 해체에 의해서, 지배계급이 인류에게 미래의 전망을 제시할 수 없는 그 완전한 무능함으로 인해 생겨난 거대한 정치적 위기를 목격하고 있다. 그러나 대중추수주의는 또한 피착취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적 대안을 추진하지 못함으로 해서 결과되는 산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기력한 분노와 공포, 소수자들의 희생양화, 그리고 실제로 결코 실존한 적이 없는 과거에 대한 허상적 추구에 기반한 반동에 말려들어갈 심각한 위험이 있다. 전세계적인 현상으로서의 대중추수주의의 근원들에 대한 이러한 분석은 '대중추수주의 문제에 대하여(On the question of populism)'라는 글에서 더 깊이 전개되어 있다. 우리는 독자들이 그 글이 제공하는 일반적인 틀을 브렉시트 결과와 대통령후보로 떠오른 트럼프에 대한 우리의 초기의 좀 더 구체적인 대응, '브렉시트, 트럼프 : 프롤레타리아에게 좋을 것 전혀 없는 지배계급을 위한 후퇴(Brexit, Trump: setbacks for the ruling class, nothing good for the proletariat)'와 함께 검토할 것을 권한다. 이 두 글은 우리의 국제평론(International Review) 157 호에 실려있다.

우리는 또한 ' 트럼프 대 클린턴: 부르조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나쁜 선택들일뿐(Trump v. Clinton: nothing but bad choices for the bourgeoisie and the proletariat) '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10월초에 작성된 이 기사는 트럼프가 백악관에 입성하는 것을 막기 위해 US부르조아지의 좀 더 '책임감있는' 분파들이 민주당과 공화당을 막론하고 거의 미친듯이 노력하는 것을 살펴보았다1. 이러한 노력들은 명백하게 실패했는데 이 실패를 초래한 더 즉각적인 요소들 중의 하나로는, 클린턴이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바로 그 순간에 연방수사국의 국장, 제임스 코메이(Comey)가 어이없게 개입한 것을 들 수 있다. US정보기구의 심장인 FBI는 클린턴이 국가안보의 기본적인 법규들에 위배되게도 사적인 이멜 서버를 사용한 점을 더 조사한 뒤 그녀가 이후에 형사소송에 관여될 지도 모른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녀의 당선 기회를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그 일주일 정도 뒤 코메이(Comey)는 FBI가 점검한 모든 자료들에서 그 어떤 불리한 점도 없었다고 선언함으로써 후퇴를 시도했다. 그러나 피해는 이미 발생해버렸고 ' 그녀를 감옥에'라고 집회들에서 끊임없이 반복해서 주장해 온 트럼프 캠페인에 FBI는 주요한 기여를 했다. 그런데 FBI의 그 기념비적인 실수는 국가기구의 중심에서 정치적 통제력이 점점 더 상실되어감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표현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차악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

'트럼프 대 클린턴(Trump v. Clinton) ' 기사는 역사의 현시기에 부르조아 민주주의와 선거는 노동자계급에게 어떤 선택도 제공하지 않는 거대한 사기극이라는, 그것들에 대한 공산주의의 입장을 선명하게 재언급하면서 시작한다. 이렇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은 이번 선거에서 아마도 가장 심했던 것 같은데, 이는 명백하게 인종차별적이고 여성혐오적인 사안을 가진 오만한 쇼맨 트럼프와 지난 30년 동안 국가자본주의의 지배적인 형식인 '신자유주의'를 체화하는 클린턴 사이에 이뤄졌기 때문이다. 두가지 악 사이에서 선택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해 유권자들의 상당부분은 미국선거들에서 늘 그렇듯이 아예 투표를 하지 않았다. 초기의 추정투표율은 57%이하로서, 투표하러 가라는 그 모든 압력들에도 불구하고 2012년의 투표율보다 낮았다. 동시에 두 진영 모두에 비판적이지만 특히 트럼프에 비판적인 많은 이들은 결국 차악으로서의 클린턴에 투표했다. 우리는 부르조아가 제공하는 것에 대한 환상이 깨짐으로 인해 부르조아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기껏해야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비록 노동자계급이 계급으로서 행동하지 않을 때 극도로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자본주의 국가의 해체를 관통하게 될 또 다른 사회조직방식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은 본질적이다. 그리고 선거 이후의 시기에, 기존의 정치사회질서를 이렇게 거부하는 것, 부르조아국가라는 감옥의 밖에서 그리고 그것에 대항하여 노동자계급이 그 자신의 이해를 위해 투쟁할 필요성을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그 만큼 적절하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트럼프반대주의, 일종의 개편된 반파시즘2 쪽으로 이끌려가게 될 것이고 이것은 다시 부르조아의 좀 더 '민주적인' 분파들, 가장 그럴듯하게는 민주당 대선후보지명전에서 버니 샌더스3가 그랬던 것처럼 노동자계급과 사회주의의 언어를 말하는 그런 분파들의 입장을 취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트럼프주의의 사회적 기초

이글은 트럼프에 투표한 사람들의 동기와 사회적 구성을 자세하게 분석하는 자리가 아니다. 트럼프 캠페인에 그렇게 결정적인 여성반대 수사학인, 여성혐오주의는 자체의 역할을 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점은 특히 지난 몇 십년 동안 성별관계에 나타난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변화들에 대항한 훨씬 더 세계적인 '남성의 반격' 의 일부이기에 그 자체로 연구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모든 중심부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인종차별주의와 외국인혐오증이 불길하게 성장해 왔고 이점은 트럼프 갬페인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아메리카의 인종차별주의에는 이해될 필요가 있는 그 특유한 요소들이 또한 존재한다. 즉, 단기적으로는, 오바마의 대통령직과 미국판 '이민자 위기'에 대한 반응,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노예제와 차별의 유산 전체가 그러한 요소들이다. 초기의 통계로 볼 때, 대략 88% 의 흑인 유권자들이 클린턴진영을 선택한 반면 친트럼프표는 압도적으로 백인들( 비록 상당수의 '히스페닉'들을 동원하긴 했지만) 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미국 인종분리의 긴 역사는 극명하게 보여질 수 있다. 우리는 앞으로 작성될 기사들에서 이 문제들을 다시 다룰 것이다.

그러나 대중추수주의에 관한 우리의 기사에서 주장하듯이 트럼프의 승리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는 대다수를 희생하여 특히 오래된 제조 및 생산산업의 노동자계급을 희생하여 작은 소수만을 부유하게 만드는 거시경제적인 과정들인 경제지구화와 금융화와 동일시되는 신자유주의 '엘리트'에 대한 분노였다고 생각된다. '지구화(Globalisation)'는 자동차와 철강같은 산업들이 도매식으로 분해되어 노동력이 더 값싸고 이윤이 훨씬 더 높은 중국과 같은 나라들로 이전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또한,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을 의미했는데, 이는 자본주의에 있어 '빈곤한' 나라에서 '부유한' 나라로의 이주를 통해 노동력을 값싸게 만드는 또다른 수단이었다. 금융화는 대다수에게는 경제생활을 점점 더 신비스런 시장의 법칙들이 지배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더 구체적으로는 많은 작은 투자자들과 희망찬 주택소유자들을 파산하게 만들었던 2008년의 대폭락을 의미했다.

다시 말하자면, 앞으로 좀 더 자세한 통계적 연구들이 필요하겠지만, 트럼프 캠페인의 핵심적 강점은 대학교육을 받지않은 백인들로부터, 특히 소위 '대도시의 자유주의 엘리트' 안에 체화되어 있는 기존의 정치질서에 반대하는 저항의 하나로 트럼프에게 투표한 새로운 산업 황무지들인 '녹슨 지대(Rust Belt)'의노동자들로부터 받은 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노동자들이나 이 지역들의 다수는 이전의 대선에서 오바마에게 투표했고 몇몇은 민주당의 대선후보경선에서 버니 샌더스를 지지했다. 그들의 표는 무엇보다도 부의 점점 더 커져가는 불평등에 대항한, 그들 자신과 자식들에서 어떤 미래도 보장하는 않는다고 느껴지는 그 체계에 대항한 그러한 반대의 표였다. 그러나 진정한 노동자계급운동의 완전한 부재라는 틀 안에 결국 이러한 반대는 엘리트가 외국 투자자들에게 나라를 팔아먹는고, '순진한' 노동자계급을 댓가로 이민자와 난민들과 소수자들에게, 남성노동자들을 댓가로 여성노동자들에게 특별한 잇권들을 준다고 비난하는 대중추수주의적 세계관에 자양분을 제공했다. 트럼프주의의 인종차별적 여성혐오적인 요소들은 '엘리트'에 대한 언사적인 공격과 연관되어 있다.

트럼프의 집권: 평탄하지 않는 주행

우리는 트럼프의 대통령직이 어떨지 그가 어떤 정책들을 구현하려 할지에 관해 추측할 생각은 없다. 트럼프에게 무엇보다도 특징적인 것이 바로 예측불가능성이라서 그의 통치의 결과들을 예언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트럼프는 아침밥도 먹기전에 벌써 몇 십개의 모순적인 말들을 할 수 있는 반면 이점이 선거캠페인에서 그의 지지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도 있다. 하지만 캠페인에서 작용했다고 해서 재임기간에도 그렇게 잘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트럼프는 전형적인 자수성가한 기업가로 자신을 소개하고 미국 기업인들을 관료주의로부터 해방하는 것에 대해 말하지만, 그는 또한 내륙도시들에서의 인프라구조들을 회복하고 도로와 학교와 병원을 건설하며 환경보호제한들의 폐지를 통해 화석연료산업을 재활성화하는 등의 대대적인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 모두는 경제에 대한 중대한 국가자본주의적 개입을 함의한다. 그는 수백만의 불법이민자들을 추방하겠다고 맹세하지만 US경제의 많은 부분이 그들의 값싼 노동에 의존하고 있다. 외교정책에서 그는 고립주의와 철병(나토에서의 US의 참여규모를 축소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에서 보여지듯이)의 언어를, 군비예산증가를 약속하며 'IS에 폭탄을 퍼붓는것'에 관한 그의 허세에서와 같은 개입주의의 언어와 조합한다.

확실해 보이는 것은 트럼프의 대통령직의 특징이 지배계급 내부 그리고 국가와 사회 이 둘 모두에서의 충돌로 드러날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트럼프의 승리연설이 화해의 전형이었고 그는 '모든 미국인의 대통령'이되고 싶어한다. 그리고 트럼프를 백안관에서 맞이하기전 오바마는 가능한한 원만한 이행기를 보장하고 싶다고 말했다. 게다가, 상원과 하원에서 공화당이 대다수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만약 공화당 기존 세력이 트럼프에 대한 그들의 반감를 극복한다면 그는 더 선동적인 정책들은 대기 중에 놓더라도 많은 정책들에 대한 지지를 확보할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장래의 긴장과 충돌의 징후들은 어렵지 않게 발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트럼프가 나토에 관한 회의감을 유지한다면 또는 강력한 지도자로서 푸틴에 대한 그의 존경이 동유럽과 중동에서 러시아 제국주의의 위험스런 재활에 맞서는 US의 시도들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야기한다면 군위계질서의 일부들은 그의 몇몇 대외정책에 아마도 매우 적대적일 것이다. 그의 몇몇 국내정책들에 대한 반대는 또한 정보기구, 연방관료 및 대자본관계자들의 내부로부터도 발생할 수 있을 터이고 이때 이들은 트럼프가 광란스럽게 마구날뛰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보장하는 것이 자신들이 할 역할이라 여길지도 모른다. 한편, 아마도 민주당내부에서는 '클린턴왕조'의 정치적 소멸로 새로운 반대파들이 출현하고 심지어는 분열을 일으켜서, 버니 샌더스와 같은이들 주변에 좌익이 출현해서 경제적 정치적인 기존 세력들에 대한 적대 기운을 이용하길 희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의 수준에서, 브렉시트 이후의 영국과 비교하자면, 명백히 인종차별주의적 그룹들이 이제 그들의 폭력과 지배의 환상을 실현할 권한을 부여받은 듯이 느끼면서 '대중적인' 외국인혐오증이 불길하게 꽃피는 것을 우리는 아마도 보게 될 것 같다. 그리고 만약 트럼프가 '불법자들'의 억류와 추방 프로그램을 진지하게 시작한다면, 이 모든 발전들은 지난 몇 년간 경찰에 의한 흑인살해 후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거리에서의 저항들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터이다. 실제로, 선거결과가 발표된 바로 그날부터 미국전역의 도시들에서 일련의 매우 분노한 시위들이 있어 왔는데, 전반적으로 이 시위들에는 트럼프가 이끄는 정부라는 전망에 역겨움을 느끼는 젊은이들이 참여하고 있다.

국제적인 영향

국제수준에서, 트럼프의 승리는 그 스스로가 말하는 것처럼 '브렉시트 플러스 플러스 플러스(Brexit plus plus plus)'가 될 것이다. 그것은 이미 서유럽의 우익대중추수주의적 정당들에, 특히 2017년 선거를 치르게 될 프랑스의 민족전선(Front National)에 강력한 후원를 제공했다. 이들은 다국적인 무역 조직들로부터 탈퇴를 원하고 경제보호주의를 선호하는 정당들이다. 트럼프의 가장 공격적인 선언들은 중국의 경제적 경쟁을 겨냥한 것이었는데, 이는 우리가 1930년대의 경우처럼 이미 포화된 세계 시장을 더 위축하게 될 무역전쟁을 향해 가고 있음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모델은 지난 20년간 세계자본주의에 잘 기여했지만 이제 그 한계에 도달해가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제국주의의 수준에서 우리가 목격해온 ' 각자 나홀로(every man for himself)' 경향을 지금까지는 그것이 더 단단히 억제되어 온 경제 영역으로 전파할 위험이 있다. 또한 트럼프는 지구온난화가 단지 중국인들이 그들의 수출추세를 지원하기 위해 고안해낸 장난이라고 선언했고, 기후변화에 대해 존재하는 모든 국제조약들에서 철수하겠다고 말한다. 이러한 조약들이 이미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우리는 알지만, 그것들을 없애버리는 것은 우리를 산적한 세계환경재앙들에 훨씬 더 깊이 빠뜨리는 것과 같다.

반복하자면, 트럼프는 사회운영에 대한 그 모든 전망들을 완전히 잃어버린 부르조아지를 상징한다. 그 모든 허영과 자아도취주의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자신은 미치지 않았으나, 점점 선택의 여지가 없어져가는 심지어 세계대전의 선택의 여지마저 없어져가는 체계의 광기를 그는 체화한다. 자본주의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지배계급은 자체의 정치적 군사적 기구들을 이용하여, 달리 말해서 한 계급으로서의 의식적 개입을 통해 완전한 통제상실, 즉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카오스로의 충동이 최종적으로 발현되는 것을 거의 한 세기동안 막아낼 수 있었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통제의 한계들을 목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의 적들이 새로운 일시적 수리를 통해 살아남는 능력이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 계급의 문제는 경제적 정치적 윤리적으로 그 모든 수준에서 부르조아지의 명백한 파산이, 아주 작은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체계에 대한 혁명적 비판을 결과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대열에서 오도된 분노와 유해한 분열들을 생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자본주의를 미래에 하나의 인류사회로 대체할 가능성에 심각한 위협을 나타낸다.

한편 자본주의의 위기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세계대전이 오늘날 의제가 아닌 이유들 중 하나는 노동자계급이 큰 전투에서 패배당함이 없이 여전히 마르지 않은 저항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를 들어 2006년의 프랑스학생투쟁과 2011년 스페인의 인디그나도스(Indignados: 분노한 자들)반란들처럼 지난 십년동안 나타난 다양하고 대대적인 운동들 속에서 그것을 목격해왔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저항의 전조들은 경찰에 의한 살해에 반대하는 항의시위와 트럼프에 반대해 이뤄지는 선거후 데모들에서 발견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위들은 분명한 노동자계급 성격을 띠지는 않고, 좌익의 직업정치인들에 의해서 그리고 다양한 민족주의적이거나 민주주의적 이데올로기에 흡수될 수 있는 취약점을 갖고 있다. 노동자계급이 대중추수주의의 위협과 자본의 좌익이 제공하는 잘못된 대안 이 두가지 모두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깊이 있는 무언가가 요구된다. 그것은 바로, 정치적으로 자기 스스를 이해하고 우리 계급의 공산주의의 전통들과 재접촉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독립(proletarian independence)을 위한 투쟁이다. 이것은 당장에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혁명가들은 오늘날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만연한 스모그를 특히 모든 가장된 형식들까지 관통해서 길을 비춰줄 수 있는 정치적이고 이론적인 명료성을 위해 투쟁함으로써 그러한 발전을 준비하는 역할을 갖는다.

Amos 11.11.16


*번역원본은ICC 웹사이트 www.internationalism.org 기사'President Trump: symbol of a dying social system'이다

1 트럼프에 대한 공화당의 반대가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로, 그 당의 좌익의 일부로 여겨지기 어려운 조지 W 부시 전대통령은 트럼프에게 투표하느니 차라리 백지를 제출하겠다고 선언했다.

2 지배계급의 한 종파에 대항해 다른 한 종파와 '반파시즘'연합을 결정하는 정책을 우리가 거부하는 것은 특히 이탈리아좌파공산주의(Italian communist left)로부터 물러받은 유산이다. 이것은 반파시즘이 노동계급을 전쟁에 동원하려는 수단임을 정확히 인식했다. 우리의 국제평론(International Review) 101호에 재간행된 빌랑(Bilan)지의 기사, '반파시즘: 혼돈을 위한 공식(Anti-fascism: a formula for confusion)'을 참조하기 바란다.

3샌더스에 대해 더 자세한 것은 '트럼프 대 클린턴(Trump v Clinton)' 기사를 참조 바란다.

 

1919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창설

국제공산주의흐름

 

우리가 기념해야 할 수많은 기념일 가운데 매체와 역사가들이 짧게 언급하고 그 의미를 의도적으로 왜곡하면서 제대로 다루지 않는 기념일이 있다. 1919년 3월 열린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하 코민테른)>의 창립대회가 그것이다.

코민테른 창설의 기념은 계급투쟁이 오늘날 위기로 고통받는 자본주의의 현실이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착취받는 계급일 뿐 아니라 혁명계급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부르주아지 자체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을 현재의 부르주아지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1. 1919년 국제적인 혁명물결

 

코민테른의 창설은 전체 자본가계급과 그들의 열광적 하수인들에게는 불쾌한 기억을 일깨우고 있다. 특히 그들에게는 국제적인 혁명 물결의 솟구치고 피할 수 없는 조류에 직면한 1차 세계대전 말의 공포를 상기시키고 있다. 그것은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 참호에서의 반란, 독일에서 빌헬름 황제의 퇴위와 노동계급의 반란과 폭동에 직면한 휴전 서명, 그리고 독일 노동자들의 봉기, 러시아 노선에 따른 바바리아와 헝가리에서의 노동자평의회 공화국 건설,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노동 대중 사이의 파업,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적대적 개입을 거부한 몇몇 영국 군대뿐만 아니라 프랑스 함대와 군대의 반란 등이었다.

그 당시 영국 정부의 수상인 로이드 죠지는 만일 그가 러시아 정복을 돕기 위해 천 명의 영국 군대를 파견한다면 그 군대는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만약 영국의 군사점령이 볼셰비키에 맞서 이루어진다면 영국은 볼셰비키가 되고 런던에 소비에트가 건설될 것이라고 1919년 1월 선언했다. 그것은 러시아 노동자평의회 권력에 대한 국제 부르주아지의 경악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었다.

 

“유럽 전체는 혁명정신으로 가득 찼다. 노동자들 사이에는 전쟁 조건에 반대하는 불만감뿐만 아니라 분노와 반항감이 깊이 쌓여 있다. 정치적·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모든 기존 질서에 대해 유럽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모든 인민대중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E. H. 카의 「볼셰비키 혁명」 3권, 135쪽에서 인용)

 

우리는 오늘날 코민테른의 창설이 1917년으로부터 적어도 1923년 말까지, 유럽으로부터 아시아(중국)로, 그리고 캐나다(위니페그)와 미국(시애틀)의 ‘신’세계로부터 라틴아메리카에 이르는 전 세계의 혁명물결에서 정점이었다고 알고 있다. 이러한 혁명 물결은 세계를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분할로 이끈 1차 세계대전, 4년간의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응답이었다. 1914년 전쟁이 꿀꺽 삼킨 제2인터내셔널 사회민주주의의 당들과 개별 투사들이 제국주의 전쟁에 대해 취한 태도는 그들이 혁명과 코민테른을 맞아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결정했다.

 

“코민테른은 각기 다른 나라들의 제국주의 부르주아지가 2천만 명을 희생시킨 1914~18년의 제국주의 전쟁이 끝난 후 만들어졌다. ‘제국주의 전쟁을 기억하라’ 이 말은 코민테른이 모든 남성 노동자와 모든 여성 노동자에게 한 첫 번째 말이다. 그들이 어디에 살건 어떤 언어로 말하든지 그들에게 한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한줌의 제국주의자들이 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각기 다른 나라들의 노동자들이 서로의 목을 베도록 강제했다는 점을 기억하라. 부르주아지의 전쟁이 유럽과 전 세계에서 가장 가공할 기근과 가장 소름끼치는 참상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을 기억하라. 자본주의를 전복하지 않고는 이러한 강도 같은 전쟁의 반복이 가능할 뿐 아니라 불가피함을 기억하라” (2차 대회에서 채택한 코민테른의 문건, 제인 데그라스, 「코민테른 1919-43: 문헌집」)

 

2. 코민테른의 제2인터내셔널과의 연속성

 

(1) 제2인터내셔널과 제국주의 전쟁


1848년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칼 맑스는 “노동자는 조국이 없다”라고 자본주의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근본적 원칙 하나를 정립했다. 이 원칙은 노동자들이 민족 국가의 문제에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반대로 민족문제와 그들의 역사적 투쟁의 하나의 기능으로서 민족 전쟁의 문제에 대해 노동자의 입장과 태도를 규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전쟁의 문제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는 제1인터내셔널(1864~73)과 제2인터내셔널(1889~1914)에서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19세기 동안 프롤레타리아트는 특히 러시아 짜르 체제와 같은 봉건적이고 군주적 반동에 맞서는 민족해방 전쟁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제2인터내셔널 내에서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는 선두에 서서 20세기 벽두에 발생한 자본주의의 시기 변화를 인식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정점에 다다랐으며 전 지구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제 레닌이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가장 높은 단계인 제국주의”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다가올 유럽전쟁은 식민지의 분할과 그 영향력을 둘러싼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제국주의 세계 전쟁일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원칙을 저버렸던 기회주의 진영에 맞서서,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서 인터내셔널과 프롤레타리아트가 무장하는 전투로 이끈 것은 제2인터내셔널의 좌익이었다. 이 투쟁의 중대한 순간에 러시아 1905년 대중파업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낸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국주의 전쟁을 대중파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연결시킨 1907년 슈투트가르트의 인터내셔널 대회가 있었다.


“나는 이 문제[러시아에서의 대중파업과 전쟁(편집자)]에 대해서 우리가 위대한 러시아 혁명[1905년(편집자)]의 교훈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을 여러 동지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을 러시아와 폴란드 대표들의 이름으로 말하라고 요청받았습니다. … 러시아 혁명은 전쟁의 결과로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 전쟁을 끝내려고 일어났습니다. 혁명이 없었다면 짜르 체제는 의심할 여지없이 전쟁을 지속시켰을 것입니다.” (로자 룩셈부르크, BD 울프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에서 인용)

 

좌파는 룩셈부르크와 레닌이 제출한 대회의 중대한 수정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래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사회주의자들은 가능한 한 빨리 그 전쟁을 끝내고 전쟁이 촉발시킨 경제적·정치적 위기를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인민에게 일깨우고, 그럼으로써 자본주의 지배의 몰락을 서두를 의무가 있다.” (코민테른 1차 대회에서 채택한 「사회주의 경향들과 그들의 베른대회에 대한 결의문」에서 인용)

 

1912년 제2인터의 바젤 대회는 유럽에서 점증하는 제국주의 전쟁의 위협에 맞서는 위와 같은 입장을 다시 확인했다.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이 코뮌의 혁명적 반란을 탄생시켰고, 러일전쟁이 러시아에서 혁명세력을 움직였다는 것을 부르주아 정부들이 잊지 않게 하자. 노동자계급의 눈으로 볼 때, 자본가들의 이익, 왕조의 경쟁, 그리고 외교 협정의 남발을 위해 노동자계급이 스스로를 학살하는 것은 범죄다.” (앞 글)

(2) 제2인터내셔널의 배반과 죽음

 

1914년 8월 4일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기회주의 때문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애국주의 홍수와 전쟁열에 쓸려 제2인터는 깨어져 부끄럽게 목숨을 다했다. 주요 당들은 (특히 누구보다 기회주의자들 수중에 있었던 프랑스와 독일 사민당과 영국의 노동당은) ‘조국방어’와 ‘외세침략’에 맞서기 위한 부르주아지와의 ‘신성한 동맹’을 요구하며 전쟁채권에 찬성표를 던졌다. 프랑스에서는 계급투쟁을 포기하면서 장관직을 보상으로 받기까지 했다. 그들은 “맑스주의의 황제”라고 불렸던 카우츠키가 계급투쟁은 “평화 시기”에만 가능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면서 전쟁과 계급투쟁을 구분했을 때, “중도주의”(인터내셔널의 좌파와 우파 사이의 중간)로부터 이론적 지원을 받았다.

“계급의식이 있는 노동자들은 인터내셔널 붕괴에 대해 슈투트가르트와 바젤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대회의 발언들과 결의문들 속에 담긴 가장 거룩한 선언들, 그리고 그들의 신념을 공식 사민당들의 다수가 명백하게 배신한 것으로 이해한다.” (레닌, 「제2인터내셔널의 몰락」)

소수의 당들만이 이러한 폭풍 속에서 우뚝 섰다. 특히 이탈리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고 러시아의 당들이 그랬다. 다른 곳에서는 고립된 혁명가들과 혁명 그룹이 있었는데, 로자 룩셈부르크와 호르터와 판네쿡 주위의 네덜란드 “트리뷴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계급투쟁에 충실했으며 재조직화를 시도했다.

제2인터내셔널의 죽음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심대한 패배였다. 이는 그들이 참호 속에서 피를 흘리게 했다. 수많은 혁명적 노동자들이 살육당했다.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들의 국제 조직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재건해야 했다.

“제2인터는 기회주의에 패배해 죽었다. 기회주의자를 타도하자. 변절자뿐 아니라 기회주의로부터 해방된 제3 인터내셔널 만세!” (레닌,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정세와 임무」, 1914. 1. 10)

(3) 찌머발트와 키엔탈 대회: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건설을 향한 발걸음

1915년 9월 “국제사회주의자들의 찌머발트 대회”가 열렸다. 이어서 스위스의 키엔탈에서 1916년 4월 2차 대회가 열렸다. 전쟁과 억압이라는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를 포함한 11개국의 대표들이 참여했다. 찌머발트 대회는 전쟁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식했다. 대회의 다수파는 ‘거룩한 동맹’의 진영으로 넘어갔거나 그들과 분리되어 관망하는 사민당들의 기회주의 우파를 비난하기를 거부했다. 이러한 중도주의 다수파는 “평화”라는 표어를 방어하는 평화주의자였다.

볼셰비키 분파의 대표인 레닌과 지노비예프의 주도 아래 통일된 “찌머발트 좌파”는 분립의 필요성과 제3인터내셔널의 건설을 주창했다. 평화주의에 맞서 그들은 “혁명적 행동이 없는 평화 투쟁은 공허하고 기만적인 문구”(레닌)라고 선언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자”는 슬로건으로 중도주의를 반대했다. “이 슬로건은 구체적으로 슈투트가르트와 바젤대회의 결의문으로 나타난다.”(레닌)

이들 대회를 통해 <좌파>는 힘을 얻었지만, 다른 대표들을 깨닫게 할 수 없어 소수파로 남았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었다.

“두 번째 찌머발트 대회(키엔탈)는 의심할 여지없이 한 걸음 진전이다. (…) 그러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앞으로 우리는 우리의 결의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제3인터내셔널을 위한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 찌머발트와 키엔탈 대회는 우리의 길이 올바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노비예프, 1916. 10. 6)

지노비예프가 1918년 3월에 말했듯이, 각기 다른 나라 좌파 사이의 회의와 그들 사이의 공동투쟁을 통해 “형성 중인 제3인터내셔널의 첫 번째 핵”을 만들 수 있었다.

 

(4) 프롤레타리아트가 슈투트가르트와 바젤 대회의 결의문을 수행하다

1917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유럽 전역에 혁명적 물결을 열어 젖혔다. 프롤레타리아의 위협은 제국주의 대학살이 종지부를 찍었다는 점을 국제 부르주아지에게 확인시켰다. 레닌의 슬로건은 현실이 되었다. 러시아 그리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가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시켰다. 이처럼 프롤레타리아트는 유명한 슈투트가르트 결의를 적용함으로써 제2인터내셔널 좌파의 명예를 드높였다.

1차 세계대전은 사회민주당의 의회주의적 우파를 부르주아지 진영으로 결정적으로 몰아넣었다. 혁명적 물결은 중도주의의 평화주의자들이 부르주아지에 맞서 싸우도록 했지만 그들의 다수는 특히 카우츠키 같은 지도자들은 부르주아지 진영으로 뛰어들었다. 더 이상 인터내셔널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민주주의로부터 분리된 분리파들이 만든 새로운 당들은 “공산주의”당이라는 이름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혁명적 물결은 고무되었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당, 제3인터내셔널의 건설을 요구했다.


(5) 코민테른의 건설 : 제2인터내셔널의 정치와 원칙과의 연속성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라는 이름을 채택한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이미 죽은 제2인터내셔널 당들의 우파로부터 조직적으로 분리하는 것을 기반으로 1919년 3월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제2인터내셔널의 원칙과 그 공헌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에 생명을 다한 공식적 사회주의당들의 냉담, 거짓 그리고 부패를 쓸어버리면서,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제3인터내셔널에서 하나가 되어 바베프로부터 칼 리프크네히트,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로 기다랗게 이어지는 혁명 세대들의 영웅적 노력과 순교의 직접적 계승자라고 우리를 생각한다.

제1인터내셔널이 발전의 미래 경로를 미리 비추고 그 도정을 가리켰다면, 그리고 제2인터내셔널이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모으고 조직했다면, 제3인터내셔널은 열린 대중행동의 인터내셔널이고 혁명적 실현의 인터내셔널이며, 행위[실천]의 인터내셔널이다.” (코민테른의 선언)

코민테른의 기반을 이룬 흐름, 분파, 전통 그리고 입장은 제2인터내셔널의 좌파가 발전시키고 방어한 것들이었다.

“1차 대전 이전에 프롤레타리아트가 발전시킨 제2인터내셔널이라는 역사적 대열로부터 선발해 재편한 그룹을 통해서만,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음을 우리의 경험은 증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그룹만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선진적 강령을 만들 수 있고 그래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기초를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빌랑������(공산주의 좌파의 이탈리아 분파의 이론지), 1936년 8월, 34호, 1128쪽)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 안톤 판네쿡 같은 개인은 물론이고 볼셰비키,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좌파 같은 사회민주당들의 그룹과 분파를 보더라도, 제2인터내셔널과 찌머발트의 좌파와 제3인터내셔널의 좌파 사이에는 정치적이고 유기적인 연속성이 있다. 코민테른의 첫 번째 대회는 제2인터내셔널의 부분이었던 러시아 공산주의당(볼셰비키)(이전의 러시아 노동자 사회민주주의당(볼셰비키))과 독일 공산주의당(이전의 스파르타쿠스)의 주도로 소집되었다. 볼셰비키는 찌머발트 좌파의 주도 세력이었다. 찌머발트 좌파는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 사이의 진정한 유기적·정치적 연결고리였는데, 그들은 제2인터내셔널의 좌익으로서 과거에 벌였던 투쟁을 평가하면서 그 시대의 요구를 다음과 같이 정립했다.

“찌머발트와 키엔탈 대회는 제국주의 살육에 항의하기 위해, 결의가 있는 모든 프롤레타리아 세력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통일시키는 것이 필요했던 상황에서 열린 매우 중요한 대회였다. (…) 찌머발트 그룹은 자기 전성기를 가졌다. 찌머발트에 모인 진실로 혁명적인 세력은 모두 더 전진해 코민테른에 합류한다.” (찌머발트 대회 참가자 선언)

우리는 두 인터내셔널 사이의 연속성을 강력히 주장한다. 우리가 계통적 측면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코민테른은 느닷없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 강령과 정치적 원칙도 마찬가지다. 두 인터내셔널 사이의 역사적 연결고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역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무정부주의에 굴복하는 것이다. 또한 코민테른을 단지 노동자 대중의 혁명운동의 산물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연속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코민테른이 왜 그리고 어떻게 제2인터내셔널과 결별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슈투트가르트 결의에 표현된 두 인터내셔널 사이의 연속성이 있지만, 두 인터내셔널 사이에는 단절도 있기 때문이다. 그 단절은 코민테른의 정치 강령 속에, 그 정치적 입장에, 그리고 “세계 공산주의당”으로서의 조직적이고 전투적인 실천 속에 구체화되었다. 사실 단절은 물리적인 유혈 탄압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것은 제2인터내셔널의 성원인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참여한 케렌스키 정부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와 볼셰비키를 억압하고, 독일에서는 노스케-샤이드만 사민주의 정부가 프롤레타리아트와 공산주의당을 억압해서 단절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연속성 속의 단절”을 인식하지 않으면, 1920년대의 코민테른의 퇴행, 그리고 그 내부의 투쟁, 그리고 1930년대 ‘이탈리아’, ‘독일’ 및 ‘네덜란드’ 공산주의 좌파의 외부투쟁 및 그들 세력의 배제를 이해할 수 없다. 오늘날 공산주의 그룹들과 그들이 방어하는 입장은 이런 좌파들이 공산주의 원칙을 지키고, 코민테른 및 1917~23년의 혁명적 물결을 비판적으로 재평가했던 그들의 노력의 산물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유산인 제2인터내셔널의 유산을 인식하지 않으면, 코민테른의 기반, 오늘날까지 중요한 몇몇 기반의 타당성, 1930년대 공산주의 좌파의 공헌을 이해할 수 없다. 다른 말로 그것은 오늘날 혁명적 입장을 지속적으로, 확신과 결단을 가지고 방어할 수 없음을 뜻한다.


 

3. 코민테른의 제2인터내셔널과의 단절


(1) 코민테른의 정치 강령

1919년 1월 말 트로츠키는 코민테른 창립대회의 초대장을 썼다. 그 대회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채택할 정치 강령의 원칙을 결정했다. 사실 이 편지는 제안된 ‘코민테른 강령’이고 그를 잘 요약하고 있다. 그것은 두 개의 주요 공산주의당들의 강령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 의견으로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여기서 강령으로 제시되었고, 독일 스파르타쿠스 동맹과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강령에 기초해서 구성된 다음의 제안들에 기초해야만 한다.” (데그라스, 앞글)

사실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1918년 12월 29일 독일 공산주의당이 창설된 이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1919년 1월 베를린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끔찍한 탄압기 동안에, 사민주의 세력이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죽여 독일 공산주의당은 두 명의 주요 지도자를 잃었다. 이처럼 바로 창립 순간에 코민테른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첫 번째 패배의 고통을 겪었다. 창립 두 달 전 코민테른은 그의 명성, 힘 그리고 이론적 능력에서 레닌과 트로츠키에 필적할 두 명의 지도자를 잃었다. 지난 세기 말 그녀의 저작에서 코민테른의 정치 강령의 기초가 될 핵심들을 가장 많이 발전시킨 사람은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2) 돌이킬 수 없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쇠퇴

로자 룩셈부르크에게는 1914년 전쟁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쇠퇴기를 열어 놓았다는 점이 명백했다. 제국주의 살육 이후 이러한 입장은 더 이상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오늘날 인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혼돈 속에서 멸망하느냐 아니면 사회주의에서 구원을 발견하느냐” (독일 공산주의당 창립대회에서 강령에 대한 연설)

이러한 입장은 코민테른에서 강력하게 재확인되었다.

“1. 현 시대는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지닌 자본주의가 파괴되지 않는다면, 그와 함께 유럽 문명의 전체를 끌어내릴, 전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몰락과 해체의 시대이다.” (「초청장」, 데그라스, 앞글)

“새로운 시대가 태어난다! 자본주의 소멸과 내부 해체의 시대가! 프롤레타리아트의 공산주의 혁명의 시대가!” (코민테른 강령, 앞글)

(3) 자본주의 쇠퇴 시대의 정치적 함의

코민테른의 지형 위에 서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의 쇠퇴는 삶의 조건과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에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보기를 들어 카우츠키와 같은 중도주의 평화주의의 사상과는 반대로 전쟁의 끝은 전쟁 전 시기의 삶과 강령으로 회귀하는 걸 의미할 수 없었다. 이는 죽은 제2인터내셔널과 코민테른 사이의 단절의 한 지점이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세계대전은 세상의 전환점이다. (…) 우리의 투쟁을 위한 조건과 우리들 자신은 세계대전으로 발본적으로 변화되었다.” (룩셈부르크, 「유니우스 팜플렛」으로 알려진 「사회민주주의의 위기」, 1915)


 

제국주의 전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쇠퇴기가 열렸다는 것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삶과 투쟁의 새로운 조건을 의미했다. 1905년 러시아 대중파업, 그리고 노동대중 단일 조직의 새로운 형태인 소비에트가 최초로 등장한 것이 자본주의 쇠퇴기의 개막을 예고했다. 룩셈부르크(「대중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 1906)와 트로츠키(1905년 그의 책)는 이러한 대중운동의 본질적 교훈을 끌어냈다. 룩셈부르크와 함께 모든 좌파는 제2인터내셔널 내에서 대중파업에 대한 논쟁을 이끌었으며 노동조합과 사민당 지도부의 기회주의에 맞서서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평화적이고 점진적 진화라는 그들의 전망에 맞서서 정치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사민주의적 실천과 결별하면서 코민테른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기본적인 투쟁방법은 자본의 정치권력에 맞서 공개적인 무장투쟁으로 나아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행동이다” (「초청장」, 데그라스, 윗글)

(4)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노동대중의 행동은 부르주아 국가와의 충돌로 나아간다. 코민테른의 가장 소중한 공헌은 국가에 대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사민주의의 “개량주의”와 결별하고 파리코뮨과 1905년 러시아 그리고 무엇보다 자본주의 국가를 파괴하고 노동자 평의회로 권력을 행사한 1917년 10월 혁명의 역사적 경험의 교훈과 맑스주의 방법을 새롭게 함으로써, 코민테른은 스스로 명쾌하게 그리고 어떠한 모호함도 없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노동자 평의회 안에 조직된 노동대중의 독재를 선언했다.

“2.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는 지금 즉각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국가권력의 장악은 부르주아지의 국가기구의 파괴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권력기구의 조직을 의미한다.

3. 이러한 새로운 권력기구는 노동계급의 독재를 구현해야 하고 몇몇 곳에서는 농촌의 반(半)프롤레타리아트, 빈민의 독재를 구현해야 한다. (…) 소비에트 및 그와 비슷한 기구의 권력을 통해 그 구체적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4.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자본의 즉각적 전유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폐지와 국가 재산으로의 전환을 위한 지렛대여야 한다.” (윗글)

이 문제는 레닌이 제안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테제”를 채택했던 창립대회에서 본질적인 문제였다.

(5)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에 대한 테제

이 테제는민주주의와 독재 사이의 그릇된 대립을 비난하면서 시작한다.

 

“어떤 문명화된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추상 속의 민주주의’는 없다. 오직 부르주아 민주주의만 있을 뿐이다” (윗글)

 

파리코뮌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독재적 성격을 드러냈다. 자본주의에서 ‘순수한’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것은 사실 기껏해야 자본의 독재의 형식인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방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회의 자유나 출판의 자유는 노동자들에게 무엇인가?

 

“‘출판의 자유’는 ‘순수 민주주의’의 또 다른 대표적 슬로건이다. 여기에서도 또 가장 좋은 인쇄소와 막대한 종이더미를 자본가가 장악하고 있는 한, 또 자본이 신문·잡지에 대한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한, 그리고 이 권력은 세계에서, 예를 들어 미국처럼 민주주의와 공화제도가 발전하면 할수록, 더욱 더 명확하게, 더욱 더 첨예하게, 더욱 더 냉소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런 조건이 계속되는 한 이 자유가 기만이라는 것을 … 노동자는 알고 있다. 노동자를 위한,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참된 평등과 진정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문필가를 고용하거나 출판소를 사들이거나 신문을 매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자본으로부터 박탈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의 멍에를 뒤집어버리고, 착취자를 타도하고 그들의 반항을 분쇄할 필요가 있다.” (「테제」, 윗글)

 

전쟁과 혁명을 경험한 후 카우츠키주의자들이 한 것처럼 순수한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방어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는 범죄라고 「테제」는 계속 말하고 있다. 각기 다른 제국주의와 소수 자본가들의 이해 때문에 수백만의 인민이 참호에서 학살당했고 ‘부르주아지의 군사독재’는 민주적이건 아니건 간에 모든 나라에 세워졌다. 사민주의 정부가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체포하고 투옥한 것처럼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그들을 학살했다.

 

“이러한 사태 하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착취자를 압도하고, 그들의 저항을 극복하는 수단으로서 완전히 정당할 뿐만 아니라, 전쟁을 일으켰고 지금도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부르주아 독재에 대한 유일한 방위수단으로서 노동대중 전체에게 절대로 필요하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다른 계급의 독재 사이의 근본적 차이는 (…) 이를 포함한다. 즉 (…)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는 착취자 즉 주민 중에서 극소수인 대지주와 자본가의 반항을 무력으로 억누르는 것이다. (…)

사실, 이미 실제로 창출되어 있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여러 형태, 즉 러시아 소비에트권력, 독일의 노동자평의회, 직장위원회, 이와 유사한 다른 나라의 또 다른 소비에트적 제도, 이 모두는 다름 아닌 노동자계급, 즉 주민 대다수에게 민주적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한다. 그것은 가장 민주적인 부르주아 공화국조차 전혀 보장할 수 없었던 또 그와 유사한 것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민주적 권리와 자유가 실제로 가능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윗글)

 

오직 세계적 차원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만이 자본주의를 파괴하고, 계급을 폐지하며 공산주의로 가는 길을 보증할 수 있다.

 

“국가권력의 폐지는 맑스를 포함해서 모든 사회주의자들의 목표다. 이러한 목표가 달성되지 않으면 자유와 평등의 진정한 민주주의는 달성될 수 없다. 그러나 오직 소비에트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만이 실제로 이 목표로 나아가게 한다. 왜냐하면 노동인민의 대중조직을 국가행정에 지속적이고 제한 없이 참여하게 함으로써 어떤 종류의 국가도 완전히 소멸시킬 준비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윗글)


국가의 문제는 혁명적 물결이 유럽을 휩쓸고 모든 나라의 부르주아지가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 내전을 벌일 때, 그리고 자본과 노동,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적대감이 극에 달할 때 중요한 문제였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와 혁명의 확장, 즉 소비에트 권력을 유럽에 국제적으로 확장할 필요성은 혁명가들에게 구체적으로 제기되었다. 그것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국가와 혁명적 물결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그에 맞설 것인가의 문제였다. ‘[프롤레타리아 독재]편에 선다는 것’은 코민테른에 가입해 사회민주주의와는 체계적으로 정치적으로 단절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맞선다는 것’은 부르주아 국가를 방어하고 결정적으로 반혁명 진영을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둘 사이에서 머뭇거렸던 중도주의 흐름에게는 그것이 단절과 소멸을 뜻했다. 혁명 시기는 ‘중도 기반’의 멍청한 정책을 가질 어떤 틈도 남겨두지 않았다.

4. 오늘과 내일 : 코민테른의 과업을 지속하기

1914~18년 전쟁이 결정적으로 보여준 시기 변화는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 사이의 단절을 결정짓는다. 우리는 이를 국가의 문제에서 살펴보았다. 자본주의의 쇠퇴,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삶과 투쟁 조건에 미친 결과는 일련의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즉, 아직도 선거 참여와 의회의 활용이 가능한가, 노동자평의회가 출현했는데도, 자본가들과 ‘성스런 동맹’에 참여했던 노동조합이 아직도 노동계급의 조직인가, 제국주의 전쟁의 시대에 민족해방투쟁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가 그런 문제들이었다.

코민테른은 이러한 새로운 문제에 응답할 수 없었다. 그것은 1917년 10월 혁명 1년여 뒤, 그리고 베를린 프롤레타리아트가 겪은 첫 번째 패배로부터 두 달 뒤에 창설되었다. 그 뒤를 이은 여러 해 동안 국제 혁명의 물결은 패배하고 쇠퇴했으며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점점 고립되었다. 이러한 고립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의 퇴행에서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러한 사태들 때문에 코민테른은 기회주의의 성장에 저항할 수 없었다. 반대로 코민테른은 죽었다.

코민테른을 평가할 때, 우리는 그것이 <국제공산주의당>이었다고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것의 실질적 퇴행 때문에 그것을 부르주아 조직으로만 보려는 사람은 그걸 제대로 평가할 수 없고, 그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끌어낼 수도 없다. 트로츠키주의는 초기 4차 대회를 계승해야 한다고 무비판적으로 주장한다. 창립대회가 제2인터내셔널과 단절했던 지점들에서, 그 후속 대회는 퇴행했다는 점을 그들은 결코 보지 못했다. 1차 대회는 사회민주주의로부터 분리했다. 그런데 3차 대회는 그에 반대해 ‘통일전선’ 속에서 사회민주주의와 함께 할 것을 제안했다. 사회민주주의가 부르주아 진영으로 결정적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인식한 후인데도, 코민테른은 3차대회에서 사회민주주의를 부활시켰다. 사민주의당과의 동맹정책은 1930년대에 트로츠키주의가 ‘입당주의’ 정책을 채택하게 했다. 입당주의란 곧 코민테른 1차 대회의 원칙을 정면으로 무시하면서, 사민주의당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레닌이 말한 것처럼 이러한 동맹 또는 항복의 정책은 스페인 내전에서 부르주아 공화 정부를 지지하고, 찌머발트와 인터내셔널을 배신하고 제국주의 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는 반혁명으로 트로츠키 흐름을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미 1920년대에 코민테른 내부에서 이러한 퇴행에 맞서 투쟁하려는 새로운 좌파가 만들어졌다. 그들은 특히 이탈리아, 네덜란드 그리고 독일 좌파였다. 1920년대 동안 배제된 이러한 좌익 분파들은 코민테른과 혁명적 물결을 비판적으로 재평가함으로써 죽어가는 코민테른과 ‘미래의 당’ 사이에서 연속성을 보증할 정치투쟁을 지속했다. 1930년대에 공산주의 좌파의 이탈리아 분파의 잡지가 「빌랑(Bilan)」(“평가”)이었다는 것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인터내셔널의 원칙과 연속성을 갖고, 이들 그룹들은 제2인터내셔널과 단절하는 데에서 나타난 약점을 비판했다. 1930년대 동안의 반혁명과 2차 제국주의 전쟁의 암흑기 속에서 그들이 펼쳤던 이름 없는 노력 덕분에 오늘날 공산주의 그룹들이 부활해서 존재할 수 있게 됐다. 그들은 코민테른과 조직적 연속성을 지니지 않지만 정치적 연속성은 지니고 있다. 이들 그룹들이 만들어내고 방어한 입장들은 자본주의 쇠퇴의 새로운 시기를 맞아 코민테른 안에서 제기된 문제들에 답을 주고 있다.

따라서 ‘공산주의 좌파 분파들’이 이루어낸 비판적 재평가의 기초 위에서 코민테른은 오늘날 살아 있고, 미래의 <세계공산주의당>에서 살아있게 될 것이다.

오늘날 점증하는 착취와 가난에 직면해 프롤레타리아트는 다음과 같은 <찌머발트 좌파>의 입장과 동일한 입장을 채택해야 한다.

경제 전쟁에서 부르주아지와는 어떠한 신성한 동맹도 없다!

민족 경제를 구하기 위한 어떤 희생도 반대한다!

계급투쟁 만세!

경제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라!

경제적 파국, 사회적 해체 그리고 제국주의 전쟁의 전망에 직면해 1919년에서와 같이 오늘날도 역사적 대안은 똑같다. 그것은 자본주의 파괴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수립인가 아니면 인간성의 파괴인가, 사회주의인가 아니면 야만인가다.

미래는 공산주의의 것이다.

참조) 이 한국어번역본은 국제공산주의전망의 싸이트에 공개되었다.

 

원본출처(Orignial Text): International Review 57 - 2nd Quarter 1989 https://en.internationalism.org/node/3066

러시아의 좌익 공산주의: 러시아 공산당의 「노동자 그룹」의 선언

 

 우리는 여기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노동자 그룹」의 선언(강령)을 펴낸다. 이들은 가장 유명한 지도자들 중 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종종 “미아스니코프(Miasnikov) 그룹”(미주1을 보라)으로 불린다. 이 그룹은 소위 좌익 공산주의1)의 일부로, 그들은 한 편으로 러시아의 다른 그룹들과 기반을 공유하며, 또 다른 한 편으로 세계, 특히 유럽의 다른 그룹들과 기반을 공유한다. 이 경향은 그들의 기원을 제3인터내셔널의 당과 러시아의 소비에트 권력의 기회주의적 타락에 대한 반응에서도 찾는다. 그들은 좌익 경향 속에서의 프롤레타리아적 대응을 대표하며, 과거 제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의 발전에 직면했던 이들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우리의 서론

 

 1918년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2) 안에서부터 좌익 분파가 등장했는데, 이는 볼셰비키의 정치3)에 대한 의견차이의 표현이었다. 이것은 그 자체로 볼셰비키주의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의 증거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노동계급의 생생한 표현이었으며, 노동계급은 그 자신의 실천에 대해 급진적이고 지속적인 비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기 때문이다. 볼셰비키는 혁명적 분파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이에 저항하는 당 내부의 타락한 목소리가 제시될 때마다, 볼셰비키주의의 원래의 강령에 대한 배신을 비판하기 위해 당 내부에서 분파들이 생기거나 해체되었다. 스탈린주의가 당을 무덤에 파묻고 나서야 이러한 분파들의 끊임없는 발생은 멈췄다. 러시아 좌익 공산주의는 모두 볼셰비키였다. 볼셰비키주의의 본질을 부수는 이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칭송하며, 좌익 공산주의를 비난하고, 박해하고, 그리고 몰살시키려 할 때에도, 좌익 공산주의는 혁명의 영웅적 시기의 볼셰비키주의의 연속성을 방어했다.

 

 레닌이 그의 정치적 삶으로부터 물러난 것은 볼셰비키의 공개적 위기를 촉진한 한 요소였다. 한 편에서는 스탈린과 지노비예프, 카멘예프에 의한 “삼두 정치”의 형성 과정에서 관료적 분파가 당 내에서의 권력을 확고히 했다. 이 연합의 주요 유대는 트로츠키를 고립시키려는 의도였기 때문에 불안정했다. 트로츠키는 그 동안 상당한 우유부단함에도 불구하고 당 내에서 공공연히 반대파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볼셰비키 정권은 경제와 사회에서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했다. 1923년 여름, 신경제정책(NEP)의 도입에 의한 “시장 경제”의 명백한 첫 번째 위기가 전체 경제의 균형을 위협했다. NEP가 1921년의 위기로 귀결된 전시 공산주의의 과도한 국가 집중을 되돌리기 위해 소개된 것이었던 것만큼, 이제는 경제의 자유화가 러시아를 자본주의 생산의 좀 더 고전적인 위기에 노출시켰음이 명백해졌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과 “보통”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임금 삭감, 해고 정책과 같은 정부의 대응은 이미 궁핍해질 대로 궁핍해져 있던 노동계급의 상황을 악화시켰다. 1923년 8-9월, 동시적인 파업의 발발은 주요 산업 중심지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현상 유지에 관심이 있었던 삼두체제는 NEP를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왕도로 보기 시작했다. 이 관점은 특히 부하린에 의해 이론화되었는데, 부하린은 당의 극좌에서 우익으로 전향했으며, 스탈린 이전에 “사회주의” 시장 경제의 발전에 의한 “달팽이 걸음”으로 일국 사회주의가 가능하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다른 한 편, 트로츠키는 국가의 경제적 위기에 대해 더 강화된 국가 집중과 계획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의 지도적인 그룹 안에서부터 나온 첫 번째 명확한 발언은 「46인의 강령」이었다. 이 강령은 Poliburo(정치국)에 1923년 10월 제출된 것이다. 「46」은 트로츠키와 가까웠던 피아타코브(Piatakov), 프레오브라진스키(Preobrazhinsky)와 같은 인물들과 사프라노브(Sapranov), 스밀노프(V Smirnov), 그리고 오신스키(Ossinski)와 같은 민주 집중 그룹의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문서에 트로츠키의 서명이 없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분파의 일부로 여겨지는 것을 두려워한 까닭(분파는 1921년 이후 금지되었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중앙 위원회에 보낸 공개적인 편지는 1923년 11월 프라우다에, 그리고 그의 팸플릿 「새 길」(New Course)에도 실렸고, 이것은 46과 비슷한 관심을 표현하고 있었으며 그를 반대파의 중요인물로 명백히 위치짓게 해 주었다. 

 

 「46인의 강령」은 최초에는 정권이 직면한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 강령은 지배적인 계층의 실용주의적 경향과 NEP를 불변의 원칙으로 끌어 올리려는 경향에 대한 반대로서 더욱 강력한 국가 계획을 위한 몽둥이 역할을 맡았다. 이것은 우리가 앞으로 보겠지만, 트로츠키를 둘러싼 좌익 반대파가 견지한 주제였지, 그 힘이 아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당의 내적 생명을 질식시키는 것에 대해 제기한 긴급한 경고였다.4)

 

 동시에, 강령은 “병적인” 반대파로 불리는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물론 강령은 그 단어를 당 내 위기의 표현으로 보았지만 말이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던 미아스니코프와 보그다노프의 「노동자의 진실」(Workers' Truth) 주위의 노동자 그룹의 경향에 대한 것이었다. 곧 트로츠키도 비슷한 관점을 취했다. 그들의 분석이 너무 극단적이라거나, 동시에 당의 병적인 상태의 표현이라고 바라보는 관점을 거부한 것이다. 트로츠키는 이러한 그룹들을 제거하기 위해 억압적인 방법으로 협력하는 것에 대해서도 내켜하지 않았다.

 

 사실 이런 그룹들이 “병적인” 현상들로 해체될 리는 없다. 「노동자의 진실」 그룹이 패배주의, 심지어 멘셰비즘으로 나아가는 특정 경향을 표현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독일 좌파와 네덜란드 좌파 내에서의 대부분의 경향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러시아에서의 국가 자본주의의 부흥에 대한 통찰은 10월 혁명을 다소 진보적인 부르주아 혁명으로 바라보며 그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향에 의해 약화되었다.5)

 

 이것은 미아스니코프, 쿠즈네쵸프(Kuznetsov), 그리고 모이셰프(Moiseev)와 같은 오랜 볼셰비키들에 의해 지도되는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노동자 그룹」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이 그룹은 13차 볼셰비키 총회 직후 1923년 4-5월에 그 선언(강령)을 배포함으로써 처음으로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 문서를 검토하는 것은 그 그룹의 진지함, 그 정치적인 깊이와 전망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 문서에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국제 혁명의 후퇴, 그 귀결로서 노동 계급에 의한 방어적인 투쟁의 필요를 깨닫지 못한 “공격의 이론(theory of the offensive)”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것은 1921년을 후퇴로 보지만 그로부터 많은 기회주의적인 결론들을 이끌어 낸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분석의 동전의 뒷면이다. 더욱이, 이 선언(강령)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대에서 더 이상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없는 임금 상승을 위한 투쟁을 요구하는 잘못된 관점을 채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서의 강점은 그 약점을 압도한다.

 

 첫 째, 우선 단호한 국제주의다. 「콜론타이의 노동자 반대 그룹」과는 반대로 그 분석에 러시아 지역주의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강령의 전체 서론 부분은 국제적인 상황을 다루고 있으며 세계 혁명의 지연에 따른 러시아 혁명의 어려움을 언급하며, 러시아 혁명의 구원은 오직 세계 혁명의 부활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그 자신을 국제 프롤레타리아 세계 군대의 군인으로, 그의 계급 조직을 이 군대의 연대(regiment)로 보도록 배웠다. 10월 혁명의 운명에 대해 염려스런 질문을 제기할 때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러시아 국경 너머의, 혁명의 조건이 무르익었지만 아직 혁명이 발발하지 않은 곳을 응시한다.”

 

 둘 째, 이 강령은 「통일 전선」과 「노동자 정부」의 슬로건이라는 기회주의적 정책에 대해 맹렬히 비판한다. 우리는 여기서도 깊은 국제주의를 확인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 이것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정치에 대한 비판이기 때문이다. 그룹의 입장은 분파주의도 아니고 - 다른 공산주의 조직들(독일의 KPD와 KAPD과 같은) 사이의 혁명적 통일의 필요를 긍정한다 -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사회민주주의 배신자들과의 연합을 요구하면서, 볼셰비키가 러시아 혁명에서 통일 전선 전술을 사용한 것처럼 그 방법을 계승했다는 겉치례의 논의에도 반대한다. “봉기한 프롤레타리아를 승리로 이끄는 전술은 통일 전선이 아니다. 오히려 이 부르주아 분파와 그들의 혼란을 야기하는 용어에 반대하는 유혈낭자하고 타협하지 않는 싸움만이 승리로 이끌 수 있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사회주의 혁명가들, 인민주의자들, 그리고 멘셰비키와의 연합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반대하는 투쟁을 통해 이뤄진다. 통일 전선 전술을 폐기하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이 부르주아 분파 - 이 시기에는 제2인터내셔널의 정당들이다 - 가 결정적인 순간에 자본주의 체제를 방어하기 위해 무기를 들 것이라는 경고를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셋 째, 소비에트가 직면한 위험에 대한 해석이 강점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자본주의 과두정치로 교체”하려는 위협이 그 위험으로 지적된다. 강령은 관료 엘리트의 증가와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공민권 박탈이라는 현실을 보여주며, 공장 위원회와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비에트를 복구시켜 경제와 국가의 지도력을 접수할 것을 요구한다.6) 「노동자 그룹」에게 있어서는 노동자의 민주주의의 부활은 관료주의의 부흥에 반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고, 「노동자의 점검」(Workers' Inspection)을 통해 흔듦으로서 새로운 전진이 있다는 레닌의 생각을 관료주의적 수단을 통해 관료주의를 통제하려는 시도일 뿐이라는 점에서 명백히 거부한 것이었다.

 

 넷 째, 강령은 막중한 책임을 표현하고 있다. KAPD는 독일의 베를린에서 1924년 발표한 「강령」에 대해 비판적 주석을 덧붙이는데, 이는 러시아 혁명과 코민테른의 죽음에 대한 독일 좌파의 성급한 판단을 표현한다. 이에 반해 「노동자의 그룹」은 러시아에서의 반혁명이 명백히 승리했다거나 코민테른의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고 성급하게 주장하지 않는다. 1923년의 “커즌 위기(Curzon crisis)”는 영국이 러시아에 전쟁 선포를 한 것이었는데, 이 동안 「노동자의 그룹」의 구성원들은 전쟁에서 소비에트 공화국을 방어하는데 헌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에게서는 10월 혁명과 볼셰비키의 경험으로부터 단절했다는 어떤 단서도 발견할 수 없다. 사실 그 자신의 역할에 대한 앞서 언급한 의견은 이탈리아 망명 좌파에 의해 상술된 좌익 분파의 견해와 매우 닮아있다. 이 강령은 독립적으로, 심지어 비밀스럽게 스스로를 조직해야 할 필요를 인식하고 있으나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노동자 그룹」이라는 그 이름과 그 강령의 내용은 모두 그 스스로를 볼셰비키 당의 강령과 규칙의 연속선상에 위치 짓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강령은 당 내의 모든 건강한 구성원들, 리더부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진실」, 「노동자 반대파」, 그리고 「민주 집중파」와 같은 다른 반대 그룹에게서도 그룹을 재편성하고 당과 혁명의 재건을 위한 단호한 투쟁을 수행하자고 호소한다. 그리고 많은 측면에서 이것은 “46”이라는 당내 주도적인 분파가 그 자신에 의해 “우선적으로” 폐지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현실적이다.

 요약하자면, 「노동자 그룹」의 프로젝트 안에 어떠한 병적인 것은 없다. 그리고 이 「노동자 그룹」은 계급에 어떤 영향력도 갖지 못하는 분파 따위가 아니다. 이들은 모스크바에서의 그 구성원이 약 200명에 달하고, 관료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편을 일관적으로 지지했다. 따라서 1923년 여름과 가을에 걸친 비공인파업(wildcat strikes)에서도 적극적인 정치적 개입을 추구했다. 사실 당 기구가 이들을 최대로 억압하려 했던 데에는 당 내의 평당원들 사이에서 그룹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미아스니코프가 예견했듯이, “그가 탈출하려는 동안” 자신을 암살하려는 시도까지도 있었다. 미아스니코프는 살아남았고, 투옥된 뒤 추방되었지만, 외국에서 20년동안 혁명 활동을 계속 했다. 러시아 안에서의 「그룹」은 대대적 체포에 의해 다소 절룩거렸고, 그것은 20년대 후반 감옥에 갇힌 안테 실리가(Ante Ciliga)가 다룬 소중한 글 「러시아의 수수께끼」(Russian Enigma)에서 반대파에 대해 설명한 것에서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으며 “극좌” 반대파 운동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최초의 억압은 진실로 불길한 사건이었다. 이것은 공산주의 그룹이 볼셰비키 정권 아래에서 직접적인 국가 폭력에 고통받았다는 첫 번째 공공연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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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공산당 노동자 그룹 선언(강령)

Manifesto of the Workers' Group of the Russian Communist Party

 

서문

 

 자기 계급의 고통과 고뇌, 그리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투쟁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는 모든 의식 있는 노동자는 우리의 혁명 발전의 모든 단계에서 적어도 한 번 이상 그 운명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한다. 각각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운명이 세계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운명에 깊히 연관되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상업의 발전은 문명화된 세계의 국가들 사이의 깊은 관계를 만든다”, “프롤레타리아의 운동은 국제적이어야 하며 이미 그렇게 되고 있다”는 옛 사회민주주의의 강령을 아직도 읽고 있다.

 러시아 노동자는 스스로를 국제 프롤레타리아 세계 군대의 병사로, 그의 계급 조직을 이 군대의 연대 조직으로 여기도록 배운다. 10월 혁명의 운명에 대한 염려스런 질문을 제기할 때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러시아 국경 너머의, 혁명이 무르익었지만 아직 발발하지 않은 곳을 응시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는 혁명이 현재 주어진 시점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불평하거나 또는 그의 머리를 숙여서는 안된다. 반대로, 프롤레타리아는 이러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러시아 노동자가 그 자신의 나라를 보았을 때, 그는 노동계급이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하였고, NEP(신경제정책)의 가장 힘든 시련을 떠안았지만, 그들 앞에 NEP의 잘 사육된 영웅들이 서 있음을 본다. 그들의 상황과 자신의 상황을 비교하며, 러시아 노동자는 동요하여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윽고 가장 쓰디쓴 생각에 이른다. 노동자는 제국주의 전쟁과 내전의 모든 무게를 어깨에 지고 왔다. 노동자는 러시아의 신문에서 이 투쟁에서 피를 흘린 영웅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는 빵과 물로 궁핍하게 살아간다. 다른 한 편 타인들, 그리고 자신의 무기를 내려놓은 노동자들의 고통과 비참함으로 자신의 배를 채우는 이들은 사치와 호화스러움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대체 어딜 향해 가고 있으며, 어떻게 될 것인가? 정말로 “신경제정책”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의 착취」로 변해버렸는가? 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이 현장의 노동자에게 제기되었을 때, 그는 과거와 현재를 이을 연결을 찾아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이해하기 위해 뒤를 돌아본다. 그러나 이러한 쓰디쓰고 교훈적 경험들 속에서, 노동자는 복잡하게 얽혀 풀리지 않는 역사적 사건들의 그물망 속의 자신의 존재를 발견한다.

 우리는 우리의 힘이 닿는 한 사실을 이해하는 것을 돕고 싶고, 가능하다면 그에게 승리를 향한 길을 보여주고 싶다. 우리는 신성하거나 오류가 없는 마법사나 예언자인 척 하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에 대해 가장 날카로운 비판과 필요한 정정을 요구한다.

 

세계의 공산주의자 동지들에게!

 

 현재 선진국과 특히 그 중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의 생산력은 이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굳은 살 가득한 손에 권력을 쥐기 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공산주의 혁명이 되도록 하고 있다. 인류는 끊임없는 부르주아 민족 전쟁에 관계되어 야만에 삼켜지고 그 자신의 피 웅덩이에 빠져 죽거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여 권력을 획득하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계급 사이, 인간 사이, 국가 사이의 전쟁을 완전히 끝장내어, 노동과 번영의, 평화의 깃발을 심는, 둘 중 하나의 미래를 맞이할 것이다.

 군비 경쟁,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의 항공 함대의 신속한 강화는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혹독한 전쟁 발발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으며,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 전쟁으로 죽을 것이다. 마을, 공장, 기업, 그리고 모든 노동자들이 힘겨운 노동을 통해 창조한 모든 부가 파괴될 것이다.

 부르주아지를 전복시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다. 각 나라에서 더 빨리 부르주아지를 물리칠수록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는 더 빨리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실현시킬 것이다.

 착취와 억압, 그리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는 임금을 높이거나 노동 시간을 줄이기 위한 투쟁을 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투쟁은 과거에는 필요했다. 그러나 오늘날 투쟁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부르주아지와 가지각색의 모든 유형의 억압자들은 모든 나라의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지극히 만족해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그 본질적인 임무인 부르주아지와 그 착취 정권에 대항하는 투쟁으로부터 떨어뜨려놓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복종과 폭력에 대해 최소한의 저항조차 보여주지 않은 채 사소한 요구들만을 제안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은 특정 순간,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직면했을 때 부르주아지의 유일한 구원자가 된다. 노동자 대중은 그 억압자들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면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본다. 그러나 만약 같은 일이 그들의 이해에 맞는 것처럼, 사회주의 용어로 치장되어 제시된다면, 노동 계급은 그 언어에 현혹되어, 배신자들을 신뢰하고 그 힘을 쓸데없는 싸움에 낭비한다. 그러므로 부르주아지나 「사회주의자들」이나,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별로 다른 놈들이 아니다.

 공산주의자 전위는 무엇보다도 먼저 투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계급 동지들의 머릿속에서 모든 지독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제거하고 프롤레타리아 의식을 획득하도록 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부르주아 찌꺼기들을 태워버리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모든 문제와 노동을 공유할 때 가능하다. 지금까지 부르주아지와 한 패거리인 이들을 따라왔던 프롤레타리아트가 투쟁하고, 파업하기 시작할 때, 외부에 서서 그들을 경멸적으로 비난해서는 안된다. 반대로, 그들과 함께 그들의 투쟁 속에 있으면서, 이 투쟁이 오직 부르주아지만을 살찌울 뿐이라고 끊임없이 설명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진실된 말을 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정직한 혁명의 신발을 더럽히는 의미가 될지라도 때로는 똥 무더기 위에 서야만 할 때(선거에 입후보한다든가)도 있는 것이다.

 확실히, 모든 것은 각 나라의 힘의 균형에 달려 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는 선거에 나가거나 파업에 참여할 것 없이, 바로 전투에 돌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나라의 사정이 똑같지는 않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공감을 얻기 위한 모든 방법을 그대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모든 근본적인 원칙을 양보하고 망각하거나 포기하는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거부해야한다. 왜냐하면 지금 당장의 성공에 대한 관심이 진짜 해법을 포기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며, 우리를 대중들을 지도할 수 없도록 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따라하면서 끝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끌려 다니게 된다.

 우리는 움직이지 않은 채 남들을 기다려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혁명은 모든 나라에서 동시에 발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미성숙함의 탓으로 돌리거나 다음과 같이 말하며 변명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혁명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게다가 매우 강하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우리와 함께 행동하지 않은데도 우리가 우리의 부르주아지를 전복시킨다면, 그 후에는 어떻게 되겠는가?”

 독일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와 그에 봉사하는 이들을 모두 쫓아내 버렸다고 가정해 보자.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부르주아지와 사회적 배신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분노로부터 멀리 도망쳐 프랑스나 벨기에로 도망칠 것이고, 푸앵카레와 그 동료들에게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원한을 풀어달라고 간청할 것이다. 그들은 프랑스에게 「베르사유」 조약을 존중할 것을 약속하며, 그들에게 라인 지방과 루르 지방을 주겠다고 제안할 수도 있다. 그것은 그들이 러시아 부르주아지나 그 사회민주주의 동맹들이 했었고, 또 미래에 반복할 행동을 똑같이 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당연히 푸앵카레는 독일을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구원하고, 동시에 소비에트 러시아를 전 세계의 도둑들로부터 구원하는 그런 사업을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푸앵카레와 그 동료들에게는 불행히도 군대를 구성한 노동자 농민들은 그 사업이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 반대해 독일 부르주아지와 그 동맹자들을 돕는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자신의 총구를 주인들, 다시 말해 푸앵카레를 향해 돌릴 것이다. 푸앵카레는 자기 자신과 프랑스 부르주아지를 지키기 위해 그의 군대를 부를 것이고, 불쌍한 독일 부르주아지와 그 사회주의 동맹들을 그들의 운명에 내버려 둘 것이다. 이것은 독일 프롤레타리아트가 베르사유 조약을 깬다고 해도 그럴 것이다. 푸앵카레는 「라인」과 「루르」로부터 추격을 받아, 인민의 자기 결정권 원칙에 입각하여 합병이나 배상금 없는 평화를 공포할 것이다. 푸앵카레에게 「쿠노」와 파시스트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 평의회에 의해 운영되는 독일은 등이 휘도록 열심히 일할 것이다. 당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면, 당신을 같은 곳을 빙글빙글 돌지 말고 그것을 써야 한다.

 

 독일 혁명을 위협하는 다른 위험도 있다. 그것은 세력의 분산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 혁명의 이해에 따르면, 모든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는 단결해야만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가 노동계급의 적에 대한 결정적인 단절과 무자비한 전투 없이 상상할 수 없다면, 그것은 자신의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운동을 군사적으로 억압했던 제2 인터내셔널의 사회적 배신자들에게 이와 같은 승리는 공산주의 혁명의 목표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가진 모든 세력들에 참가하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과 같다. 이것이 왜 우리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노동자 그룹」이 조직적으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제3 인터내셔널에 속한 다른 정당들 사이에서 진실된 혁명적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들에게 마지막 결정적인 전투를 위해 힘을 모으라고 호소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제3 인터내셔널의 정당들 모두에게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인터내셔널에 가입되지 않았지만 공동의 목적을 추구하는 특정 정당들에게도 전투와 승리를 위해 통일 전선을 구성하자고 호소하기 위해, 「제4 공산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1)의 정당들에 대한 우리의 소신을 밝혔다. 

 

 첫 번째 단계가 가까워졌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공산주의의 원칙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조직에 기반하여 부르주아지와 열심히 그들을 비호해 온 모든 종류의 추종자들과 그 아류들(사회주의 혁명가당, 멘셰비키 등)을 끌어내렸다. 그리고 독일 프롤레타리아보다 훨씬 약함에도 불구하고 세계 부르주아지들이 이끌어온 모든 공격들, 부르주아지와 지주들, 그리고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된 모든 공격들을 물리쳤다.

 

 이제 서유럽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힘을 모아 권력 투쟁을 시작할 때이다. 소비에트 러시아, 10월 혁명, 그리고 세계 혁명을 위협하는 것으로부터 눈을 감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현재 소련은 매우 힘든 시기이다. 엄청난 결핍과 그 무게에 직면해 있으며, 그것들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와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에게 치명적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결핍은 러시아 노동자 계급과 세계 노동자 운동의 약함으로부터 비롯된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는 한 쪽에서는 NEP의 관료주의적 퇴보 경향, 다른 한 쪽에서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를 내외부에서 위협하는 경향에 대해 아직 맞서지 못하고 있다.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10월 혁명의 승리가 모든 위협으로부터 방어되는 데에 관심이 있다. 러시아와 같은 나라가 세계 공산주의 혁명의 기지로서 존재하는 것이 이미 승리를 보증함을 의미하며, 결과적으로 국제 프롤레타리아 군대 - 모든 국가의 공산주의자들 - 의 전위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의 군대(볼셰비키)가 겪은 결핍과 고통에 대해 여전히 침묵하는 대다수의 프롤레타리아를 대표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의견을 단호하게 표현해야 한다.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노동자 그룹」은 러시아의 상황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으며, 이 작업을 시작하려 한다.

 

 우리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는, 우리가 소비에트 러시아와 공산주의에 반대해서 이야기한 것들을 악용할 사회적 배신자들과 악당들이 있다는 이유로 우리의 잘못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공포는 전혀 근거가 없다. 우리의 적이 공개되어 있든, 숨겨져 있든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멍에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려 하는 우리들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들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재앙을 일으키는 주체로 언제나 그대로 존재한다. 이로부터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들이 있다는 이유로 우리의 문제와 잘못에 대해 침묵하고 논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뿌리 뽑을 조치도 취하지 않아야만 하는가? 우리가 스스로 사회적 배신자들이 테러를 저지르도록 버려둔다면, 우리가 계속 침묵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대로 간다면 우리가 기억하는 10월 혁명이 더 이상 승리가 아니게 될 것이다. 이는 사회적 배신자들에게는 매우 유익한 일이 될 것이며, 국제적 프롤레타리아 공산주의 운동에게는 죽음의 일격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노동자 그룹」이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노동계급의 이해에 따라 시작하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사회적 배신자들의 의견에 직면하여 공포에 떠는 일이 없이, 인터내셔널과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총체성에 대해 결정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국제적 운동과 러시아 운동의 약점으로 그 실패가 설명될 수 있음을 보았다. 다른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도움은 그들 나라에서의 혁명이나 적어도 하나 둘의 선진국에서의 혁명이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은 러시아 노동자 계급이 10월 혁명의 승리로부터 차지한 위치를, 다른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봉기하여 그들의 적을 패배시키는 시점까지 보존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러시아 노동 계급은 제국주의 전쟁, 내전과 기근으로 약해져 강력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 위협이 되는 위험들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기반으로 적확하게 투쟁을 준비할 수 있다. 이 경험은 그들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며, 다른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도움으로 그것을 계승할 것이다.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노동자 그룹」은 러시아 전역에서 경고하고 호소해 왔다. 러시아 공산당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편에서 생각하는 모든 이들은 함께 모여 투쟁을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10월 혁명의 승리가 직면할 운명에 대해 분명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에 앞서 깨달을 것이다. 투쟁은 어렵다. 우리의 활동은 지하활동에 제한되어 있으며, 우리는 비공개적으로 움직인다. 우리의 「선언」은 러시아에서 출간될 수 없다. 우리는 비합법적으로 선언을 복사하고 유포한다. 우리 그룹에 속한다고 의심이 되는 동지들은 당과 조합에서 제명되며, 체포되고 추방되며 해체된다.

 

 러시아 공산당 12차 당대회에서, 지노비예프 동지는 당과 소비에트 관료의 승인 아래 노동계급으로부터의 비판을 질식시키는 새로운 규칙을 공표했다. “러시아 공산당의 리더십에 대한 모든 비판은, 좌우를 막론하고 멘셰비키주의다.”(12차 대회에서의 그의 연설을 참고하라) 그것은 만약 리더십이 공산주의 노동자나 프롤레타리아에게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누군가 비판하기 시작하면, 그는 당과 노동조합에서 배제되어 GPU(체카)에게 넘겨질 것임을 의미했다. 러시아 공산당의 중앙 위원회는 그 스스로를 로마의 교황처럼 절대 오류가 있을 수 없는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어떤 비판도 원하지 않는다. 우리의 걱정들, 러시아 노동자들이 10월 혁명의 승리가 직면할 운명에 대해 걱정하는 모든 것들은 반혁명으로 선언된다. 우리, 「러시아 공산당의 노동자 그룹」은 모든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앞에서 소련이 국제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가장 위대한 성과 중 하나라고 선언한다. 우리가 소비에트 권력이,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그리고 러시아 노동계급의 10월의 승리가 자본주의 과두제로 변형되고 있다는 위협에 대해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해 소비에트의 권력을 되돌리려는 시도들을 막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들이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이름아래 우리를 체포하고 감옥에 가두더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러시아 공산당의 지도 그룹이 우리의 10월 혁명에 대한 고려가 불법이고 반혁명적이라고 선언한다면, 모든 국가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들과 제3 인터내셔널에 충실한 동지들은 동지들이 알고 있는 우리의 「선언」에 기초하여 스스로 결정적인 의견을 표현할 수 있다. 동지들, 10월 혁명을 위협하는 이 모든 위험들에 대해 걱정하는 모든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가 동지를 보고 있다. 동지가 회의에서 우리의 강령에 대해 논쟁하길 바라고 동지의 대표가 제3 인터내셔널의 5차 당대회에서 당내 분파에 대해, 러시아 공산당의 정책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동지들, 우리의 선언을 토론하고 혁명을 만들어라. 이해하라 동지들, 이것은 당신이 완전하고 늘 고통받는 러시아의 노동자 계급이 10월 혁명의 성과를 보존하는 것을 돕는 것임을. 우리의 10월 혁명은 세계 혁명의 일부이다.

 

노동 동지들에게!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10월 혁명의 승리 만세!

 

세계 혁명 만세!

 

***

미주1 : 선언의 앞 두 파트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의 성격”, “계급 투쟁의 변증법”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여기 공포하지 않기로 했다. 물론 우리의 책에는 포함되어 있다. 그것들은 마르크스가 1848년 공산주의 선언에서 명시적으로 선언했던 것처럼 역사의 관점과, 계급투쟁의 역할을 상기시킨다. 우리에게는 그 당시 「노동자 그룹」이 세계 프롤레타리아가 직면한 역사적 시기에 대해 한 분석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으로 곧바로 가는 것이 더 좋을 것처럼 보인다.

 

러시아 혁명에서의 사울과 바울

 

 의식 있는 노동자들은 혁명을 통해 어떻게 다른 계급들이 “기적적으로” 사울에서 바울로 변화하는지 보았다. 그것은 평화의 선동가에서 내전의 선동가로, 그 역으로의 변화이기도 하다. 최근 15-20년의 사건들을 기억하는 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변화를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다.

 

 부르주아지, 지주, 성직자, 사회주의 혁명가당과 멘셰비키를 보라. 성직자들과 지주들 사이에서 누가 1917년 이전의 내전을 지지했는가? 아무도 아니다. 보편적 평화와 은총(state of grace)을 지지하는 모든 이들은 인민들이 내전을 지지 선전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쳐넣고 쏴 죽이고 목매달아 죽였다. 10월 이후에는? 누가 그만한 열정으로 내전을 지지 옹호 했는가? 똑같은 기독교의 독실한 아이들이었다. 성직자, 지주, 그리고 공무원들.

 

 「헌정 민주주의자들」(Constitutional Democrats)로 대표되는 부르주아지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내전의 전사들이 아니었던가? 비보르크의 폭동을 기억하라. 임시 정부의 최고 행정관이었던 밀류코프는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우리은 우리 손에 붉은 깃발을 쥐었다. 이 붉은 깃발은 오직 우리의 시체를 밟고서만이 빼앗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진실이다. 그는 두마 앞에서는 매우 다른 이야기를 했다. “이 붉은 깃발은 우리의 눈에 거슬린다.” 그러나 우리는 1905년 이전에는 부르주아지가 내전에 호의적이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1917년, “평화, 평화, 사회의 모든 계급의 연합 : 이것이 국가의 구원이다!”고 악의를 갖고 공표했던 임시정부 깃발 아래에서 이야기했던 것은 바로 부르주아지, 카데츠였다. 그러나 10월 이후에는 어떠했는가? 오늘날 누가 광신도와 같이 계속해서 부르짖는가?: “소비에트를 무너뜨려라. 볼셰비키, 전쟁, 내전을 그만둬라! 이것이 국가의 구원이다!” 이들이 지금 갈채를 받고 있는 똑같은 선량한 주인들과 “혁명적” 코훌쩍이들이다.

 

 사회주의 혁명가당은 어떤가? 그들은 한때 플레베(Plehve),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Grand Duke Serge Alexandrovich), 보그다노비치(Bogdanovich)와 구 정권의 기둥들을 암살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러한 폭력적 혁명가들은 1917년 임시 정부 아래에서 연합과 시민 평화를 요구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그들은 요구했다! 10월 이후에는? 그들은 여전히 평화를 사랑했나? 그렇지 않다! 그들은 다시 폭력의 인간으로, 그러나 이번에는 반동적으로, 레닌에 반대하여 그러했다. 그들은 이제 내전을 외친다.

 

 멘셰비키들은? 그들은 1908년 이전에는 무장 봉기의 옹호자들이었으며, 1908년에서 1917년까지는 8시간 노동, 토지의 징발, 민주 공화국의 옹호자로서 독재에 저항하여 단체를 조직할 권리와 합법적인 투쟁을 쟁취하기 위한 일종의 “계급 연합”에 함께 했었다. 그들은 독재정권의 전복에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전쟁 동안에는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애국자들이었고, 심지어 “국제주의자”이기까지 했다. 1917년 10월 이전, 그들은 시민 평화를 지지했다. 그러나 10월 이후, 군국주의자들, 카데츠와 사회주의 혁명가당처럼 내전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우리 러시아에만 국한된 현상인가? 아니다. 중세 봉건주의를 전복하기 전 영국, 프랑스, 독일 부르주아지 등은 내전을 옹호하고 이끌었다. 봉건주의가 먼지가 되고, 부르주아지가 권력을 잡은 후, 그들은 시민 평화의 옹호자가 되었으며, 특히 전력을 다해서 싸웠던, 새롭게 권력을 쟁취하고자 등장한 노동계급에 대해서 그러했다.

 

 이제 어디 부르주아지가 내전에 호의적인지 보라. 어디에도 없다! 모든 곳에서, 소비에트 러시아를 제외하고서는 평화와 사랑을 선전한다. 이러한 태도가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취하는 순간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은 그대로 시민 평화의 옹호자로 남아 있을 것인가? 그들은 평화와 단합을 요구할 것인가? 아니다. 그들은 곧 내전을 옹호하는 폭력적인 선동가가 될 것이며, 그 전쟁을 끝까지 수행할 것이다.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여, 우리들은 여전히 이 법칙의 예외인가?

 

 전혀 아니다.

 

 또 다시 1917년으로 돌아간다면, 우리의 노동자 평의회의 대표자들은 내전의 핵심이 되었을까? 그랬다. 그들은 나아가 권력을 잡았다. 그들은 부르주아지, 지주, 성직자와 그 외 평의회에 적대적인 이들에게 함께 봉기하기를 원했을까? 아니다. 그들은 부르주아지와 그 크고 작은 모든 동맹들이 저항없이 복종하길 바랬을까? 그렇다. 그들은 그것을 원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러므로 권력을 쥐기 전에 내전을 옹호했고, 그 승리 이후에 내전이 아니라 시민 평화를 옹호했다.

 

 이 모든 변혁에서 역사적인 관성이 충분히 있었음은 진실이다. 군국주의자들에서 멘셰비키들, 사회주의 혁명가당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이 소비에트 권력에 대항해 내전을 지휘하던 시기에조차 그것은 “시민 평화”의 슬로건 아래 있었다. 사실 프롤레타리아트는 평화를 원했다. 그러나 다시 전쟁을 외칠 수 밖에 없었다. 1921년, 러시아 공산당의 중앙 위원회의 순환 중 하나에서도 이러한 불가해한 상황을 엿볼 수 있었다. 내전에 대한 슬로건은 심지어 1921년에도 강한 혁명적 정신의 지표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관점을 흔들지 못하는 단지 역사적인 경우임을 알 수 있다.

 

 만약 최근의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에 의해 쟁취한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시민 평화를 옹호한다면, 모든 솔직한 프롤레타리아들은 유혈낭자하고, 폭력적인, 세계 부르주아에 저항하는 시민 전쟁의 슬로건 아래 굳게 단결해야만 할 것이다.

 

 노동 계급은 실제로 부르주아 국가에서의 착취 계층이 요구하는 시민 - 보편적 평화, 은총이 얼마나 병적인지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약 내일 이 부르주아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잡게 되면, 지주에서부터 제2, 2 1/2 인터내셔널에 이르기까지 모든 오늘날의 평화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에 저항하는 내전을 일으킬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전력을 다해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모든 국가에서의 유혈낭자하고 무자비한 내전을 요구해야 한다. 우리는 바람을 일으킬 것이다. 태풍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하여 권력을 잡은 모든 곳에는 더욱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시민적, 보편적 평화, 은총을 선전할 것이다. 

 

 모든 나라의 지주들, 멘셰비키들, 사회주의 혁명가당은 자본주의 억압이 지배하는 모든 곳에서 시민 평화를 옹호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차지한 모든 곳에서 더욱 잔인하고 유혈낭자한 내전을 옹호할 것이다.

 

오늘날의 주요한 책무

 

 모든 나라들에서의 생산력의 발전은 자본주의가 스스로 그 생산력을 파괴하는 요소가 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세계대전과 뒤따른 모든 사건들, 베르사유 조약, 배상금 문제, 제노바, 헤이그, 로잔, 파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랑스에 의한 루르 점령, 대규모 실업에 더해 끝나지 않는 파업의 물결은 자본주의 착취의 마지막 시간이 도달했고, 징발자였던 자들이 이제 몰수당해야 할 때가 왔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인 임무는 자본주의가 던져놓은 야만으로부터 인류를 구하는 것이다. 이 임무는 임금 상승, 8시간 노동, 부분적인 양보 등 자본주의가 선사해 줄 수 있는 것들로는 성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를 결정적인 권력 투쟁을 목표로 하도록 조직화해야 한다.

 

 그러는 동안,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물질적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을 옹호하는 선전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활 수준에 진정한 개선이 있을 것이라는 환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악의적인 선전이다.

 

 선진 노동자들은 파업에 참여해야 하고, 상황이 허락하는 한 지도해야 한다. 그들은 이 길을 따라가면 생활 조건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에게 실질적인 요구를 제안해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확고히 이야기해야 한다. 이것은 구원을 위한 길, 노동계급의 삶의 조건을 증진시킬 수 있는 길이 아님을. 이 모든 자본에 대한 분쟁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투쟁에 대한 관점으로 프롤레타리아를 조직할 수 있다면, 이것이 거부될 리가 없다. 권력을 차지하지 못한다면 생존의 조건을 변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설명하는 것보다 이 운동의 우두머리가 되어 용감하고 단정적이며, 실질적이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이해할만한 요구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모든 파업, 모든 싸움이 정치적인 권력을 차지하고, 착취자들을 몰수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함을 증명하는 교훈이 될 것이다.

 

 여기 모든 나라에서 온 공산주의자들은 의회에 대해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다. 국회의원은 입법 과정을 통해 긍정적인 일을 해보려 할 것이 아니라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이러한 의회가 파괴될 수 있도록 선전하고 작업한다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

 

 이와 비슷하게, 임금, 시간에 대한 파업의 필요가 있는 곳에, 우리는 반드시 참여해야 하지만 노동자들의 경제적 조건이 진정으로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가서는 안된다. 대신 우리는 이러한 환상을 깨부셔야 하고 각 투쟁을 마지막 투쟁을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의 군대를 조직하기 위한 의식화의 준비로써 이용해야 한다. 한때는 8시간 노동 요구가 혁명적이었지만, 사회주의 혁명이 현안이 된 모든 나라들에서 그 요구는 더 이상 혁명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통일 전선에 대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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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국제 평론에 게재될 선언의 나머지 부분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사회주의 통일 전선

○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잡은 국가(노동자 민주주의)에서의 통일 전선에 대한 의문

○ 민족 문제

○ 신 경제 정책(NEP)

○ 신경제정책과 농촌

○ 신경제정책과 정치

○ 신경제정책과 산업 관리

 

 미주

1. 가브리엘 미아스니코프(Gabriel Miasnikov)는 우랄 출신의 노동자로 1921년 볼셰비키 당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때는 결정적인 10차 당대회 직후로, 그는 “군국주의자들부터 아나키스트들까지 모두 포함하는 언론의 자유”(Carr, 「The Interregnum」에서 인용)를 요구했다. 레닌이 이러한 주장을 단념시키기 위해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굽히지 않았고, 결국 1922년 초기 당으로부터 축출되었다. 1923년 3월, 그는 다른 동지들과 함께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노동자 그룹」 창설에 동참했으며, 그들은 RCP 12차 대회에 배포된 이 「선언」을 출간했다. 그룹은 당 내에서, 비당원 노동자들 사이에서 비합법 활동을 시작했고, 1923년 여름 파업의 물결 속에서 대중 파업을 요구하고 본질적으로 방어적인 계급 운동을 정치화하려고 시도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파업에서의 그들의 활동은 GPU가 그들을 실질적인 위협으로 인식하도록 하는데 충분했다. 주도적인 동지들의 체포가 잇따랐고, 이는 그룹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축소된 규모로 1930년 초반까지 그들의 지하 활동을 수행했다. 그 이후 미아스니코프의 인생사는 다음과 같다. ; 1923년에서 1927년까지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감옥이나 지하 활동을 위한 망명 생활로 보냈다. 1927년 러시아에서 탈출한 그는 페르시아, 터키로 도망 다녔고, 그곳에서 역시 수감생활을 하다가 결국 1930년 프랑스에 정착했다. 이 시기동안 그는 여전히 러시아에서의 그의 그룹을 조직하려 했다. 전쟁 후, 그는 스탈린에게 그가 소련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원했다. 그가 그의 나라로 돌아간 날 이후 그에 대한 소식은 없다. 왜냐하면 군사 법정에 의한 비밀 심판으로 인해 그는 1945년 11월 16일, 모스크바의 감옥에서 총살당했기 때문이다.

 

(주)

1) 우리의 글 “좌익 공산주의와 맑스주의의 연속성”을 보라.

   https://en.internationalism.org/the-communist-left

2) ICC는 이미 영어와 러시아어로 「러시아 공산주의 좌파」 소책자를 발간했다. 이 책은 러시아에서의 좌익 공산주의의 상이한 표현에 대한 연구에 기여한다. 현재 프랑스어 판이 준비중이다. 영어 판은 「노동자 그룹」의 강령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 당시 새로운 완벽한 강령이 러시아에서 발견되었다. 오늘 우리가 펴내는 판은 원래 프랑스 어로 쓰여진 가장 최신의 것이며 미래의 프랑스어 개정판에 포함될 것이다.

3) 「국제평론」 8, 9호에 실린 우리의 글 “러시아의 좌익 공산주의”와 「러시아 공산주의 좌파」를 읽을 것.

4) “중앙 위원회의 이런저런 결정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 당의 구성원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이런저런 의심을 품었고,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오류, 불규칙성, 무질서들을 기록해 두었지만, 그것을 당의 회의에서 밖으로 꺼내어 말하기를 두려워했으며, 그것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현재 지방 위원회와 RCP의 중앙 위원회의 구성원을 추천하고 선택하는 것은 당도 아니고, 그 대중도 아니다. 반대로, 당의 서기 위계는 전에 없을 정도로 엄청난 정도로 집행 위원회(executive assemblies)가 될 회의와 총회의 구성원들을 전에 없을 정도로 뽑았다... 새로 만들어진 자리는 정권이 당 내의 분파의 독재라는 것으로 설명이 된다. 분파적 정권은 폐지되어야 하며, 우선 첫째로 그것을 만든 이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 그것은 동지적인 통일과 당내 민주주의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5) 「국제평론」 8, 9호의 “러시아의 좌익 공산주의” 참조.

 

6) 그러나 선언(강령)은 또한 노동조합이 경제를 관리하는 중앙집중적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방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노동자 반대파」의 옛날 입장은 1921년 미아스니코프가 비판했었다.

 

 

 

 

우리는 「선언(강령)」의 첫 번째 부분을 국제 평론 지난 호에 실었다. 되짚어보면 「러시아 공산당의 노동자 그룹」은 이 강령을 작성했고, 제3 인터내셔널의 당과 러시아에서의 소비에트 권력의 기회주의적 타락에 대한 반응으로 출현한 좌익 세력들로 구성된, 소위 좌익 공산주의의 일부를 형성했다.

 

 아래 게재된 이 문서의 앞으로의 두 장은 기회주의적인 통일 전선 정책과 노동자 정부 슬로건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을 역사적 맥락 속에 위치지음으로써, 강령은 역사적인 시기의 변화를 이해하려는 시도로 읽어야 한다. 새로운 시대는 반동적일 뿐인 부르주아지의 여러 분파들과의 동맹 정책을 무효화하고 헛된 것으로 만들었다. 이와 유사하게, 반역자로 드러난 사회 민주주의와 같은 조직들과의 동맹들도 프롤레타리아트를 약화시키는 것일 뿐이었다. 나아가 「강령」은 새로운 시대에서 개혁을 위한 투쟁은 더 이상 화두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엄청난 역사적 변화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일어났기 때문에 그 변화가 정확하게 무엇이었는지 그런 혁명가들조차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관점을 갖추기 힘들었다. 이것은 「노동자 그룹」도 마찬가지여서, 개혁을 위한 투쟁과 자본의 영구적인 잠식에 직면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방어적 경제 투쟁을 구분하지 못했다. 이들은 방어적 경제 투쟁을 거부하지 않았지만, 정치적‧경제적 투쟁이 전부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연대 없이 권력을 쟁취하는 것만이 프롤레타리아트를 그 사슬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라 믿었다.

 마지막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가해진 언론의 자유에 대한 제한에 직면하여, 내전이 끝난 후에도 「강령」은 지도자에게 “당신은 어떻게 사회 경제의 엄청난 조직화 문제를 프롤레타리아트 없이 해결할 수 있는가?”라고 물을 때, 굳건하고 명확하게 답하고 있다.

 

 

 

사회주의 통일 전선

 

 이 문제의 본질적인 내용을 보기 전에, 지노비예프 동지의 통일 전선에 대한 테제가 러시아에서 토론되고, 받아들여진 상황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1921년 12월 19-21일에, RCP(러시아 공산당)의 12차 당대회가 있었고, 이 때 통일 전선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 때까지 이 문제에 대해 언론에 발표되거나 당 모임에서 토론이 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당대회에서, 발표된 테제에 대해 조잡한 공격은 있었으나 곧 잠잠해졌고, 당대회는 즉시 거수로 이 테제를 승인하게 되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이러한 배경들을 떠올리는 이유는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사실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첫 째, 통일 전선 전술은 매우 서둘러, 거의 “군대처럼” 이뤄졌다는 점, 둘 째, 러시아에서 이것은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수행되어졌다는 점이다.

 

 볼셰비키는 코민테른1) 내에서 이 전술의 발기인이었다. 그들은 외국 동지들에게 우리 러시아 혁명이 성공했고, 그것은 통일 전선 때문임을 명확히 했다. 또한 통일 전선은 러시아 안에 모든 혁명 전 시기의 경험들과, 특히 볼셰비키의 멘셰비키에 맞선 투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축되어 있었다고 설득했다.

 다른 나라에서 온 동지들은 단순히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들도 그들의 부르주아지에게 승리하길 원했다. 이제 그들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통일 전선 전술 탓으로 승리했다고 납득했다. 그들은 러시아 혁명의 역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레닌 동지가 이 단순한 이야기를 믿어버린 이들을 심각하게 비난했지만, 그는 누구도 그가 이러한 특별한 단어에 붙들려 있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러시아 혁명의 경험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한 때 볼셰비키는 독재에 반대하는 진보적인 운동을 지지했다.

 “a)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짜리즘에 대항하여 부르주아지가 혁명적이든, 단지 반대파일 뿐이든 그들을 지지해야 한다.

 

 b)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러시아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의식의 성장을 반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 앞에 부르주아 해방 운동의 제한적이고 부적절한 성격이 스스로 드러날 때마다 그 정체를 밝혀야만 한다.” (「러시아 사회 민주주의 노동당」 2차 당대회 결의문, ‘자유주의자에 대한 태도’, 1903년 8월)

 

 1905년 4월 열린 3차 당대회 결의문은 동지들에게 두 가지 지점을 지적하며 권고했다.

 

 1) 노동자들에게, 많은 지주층과 제조업자들로 대표되는 온건 자유주의자들부터 “해방 연합(Emancipation Union)”과 다양한 자유주의 전문직 그룹들로 알려진 급진적 경향들에 이르기까지 부르주아 민주주의 경향이, 뉘앙스에도 불구하고, 반혁명적, 반 프롤레타리아 본질을 갖고 있음을 설명할 것.

 

 2) 노동자 운동을 되돌리려는 일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시도에 저항해 싸우고,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다양한 그룹의 이름으로 이야기할 것. 1898년 이후 사회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지와의 “통일 전선”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이 통일 전선은 세 가지 단계가 있다.

 첫 째, 1901년, 사회 민주주의는 현재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진보적인 운동들”을 지지했다.

 둘 째, 1903년, 그들은 “부르주아 운동의 한계”를 넘어설 필요를 인식했다.

 셋 째, 1905년 4월, 그들은 “동지들로 하여금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경향의 반혁명적, 반 프롤레타리아적 본질과 그 영향력을 비판”하고 그들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영향에 대해 정력적으로 싸웠다.

 

 부르주아지를 지원하는 것이 어떤 형태가 되었든, 1905년 이전 특정 시기 볼셰비키가 부르주아지와 통일 전선을 형성했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러시아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통일 전선하는 “혁명가”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가?

 

 1905년 9월, “Boulyguine 두마”의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소집된 회의에서, 대회는 이 두마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태도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정의했다. “인민의 대표라는 이러한 환상으로, 독재는 노동 운동이 지쳐감에 따라 성장하고 질서를 열망한 부르주아지의 많은 요소들을 부추겼다. 그들의 이해와 지원을 약속하면서, 독재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운동을 박살내려 했다.”

 

 볼셰비키가 1906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자당」(RSDLP) 통일 대회에서 제안한 결의안은 볼셰비키 정책 변화의 비밀을 드러내 준다. 부르주아지를 지원하던 정책이 부르주아지에 대한 투쟁 정책으로 변화한 것이다. “거대한 자본가와 지주들의 계급들이 독재에 대해 반대하다가 혁명을 파괴하기 위해 얼마나 재빨리 독재와 연합하게 되었는지 볼 수 있다.” “민주주의 혁명 시기의 노동자 계급의 주요 임무는 그 혁명의 완수”였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이 혁명의 완수를 원하는 당과의 “통일 전선”을 형성해야만 했다. 이러한 이유로 볼셰비키는 카데츠의 우익과 했던 협정을 폐기하고, 그 좌익인 「사회주의 혁명가당」, 「인민 사회주의자들」과 「트루도빅스」(Trudoviks)와의 협정을 맺었다. 이에 따라 민주주의 혁명의 지속적인 진전을 위한 투쟁에서 “사회주의 통일 전선”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 볼계비키의 전술은 옳았는가? 10월 혁명의 적극적인 투사들 사이에 이러한 전술의 시비에 대해 논쟁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러므로 1906년에서 1917년까지 볼셰비키가 「제헌 의회」를 소집하기 위한 「임시 혁명 정부」의 형성으로 완수된 민주주의 혁명의 지속적인 진행을 위한 투쟁에서 “사회주의 통일 전선”을 옹호했다고 본다.

 

 아무도 이 혁명이 프롤레타리아적이거나 사회주의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였음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는 사회주의 혁명가당, 멘셰비키, 인민주의자들과 트루도빅스들과 실질적으로 단결하면서 “사회주의 통일 전선” 전술을 제안하고, 그에 따랐다.

 

 우리는 민주주의 혁명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가, 아니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볼셰비키의 전술은 무엇이었는가? 소비에트 권력을 위한 투쟁도 “사회주의 통일 전선”을 필요로 하는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 혁명가당」을 “모호한 사회주의 표현을 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분파”로 여긴다. 그것은 혁명 동안, 지금까지 그들의 활동을 통해 확인되어 왔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분파로서, 이 당은 사회주의 혁명, 사회주의을 위한 투쟁에서 실질적인 임무를 떠맡을 수 없었다. 대신에 그들은 “모호한 사회주의적”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 투쟁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되돌리려 했다. 만일 그러하다면 (그리고 그들은 그러했다) 봉기한 프롤레타리아를 승리로 이끌 전략은 사회주의 통일 전선일 리가 없다. 오히려 부르주아지 분파와 그들의 혼란스런 사회주의 용어들을 상관하지 않는 피튀기는 전투만이 승리로 이끌 전략일 것이다. 오직 이러한 전투만이 승리를 가져올 것이며, 승리는 반드시 그런 방식으로 이뤄져야만 할 것이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승리했다. 사회주의 혁명가당, 인민주의자들과 멘셰비키들과의 동맹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에 맞서 싸움으로써 승리했다.

 

 10월이 다가왔을 때 볼셰비키는 사회주의 혁명가당2), 멘셰비키3)의 사회주의적 수사들로부터 노동자 대중을 해방시킴으로써 사회주의 혁명가당과 멘셰비키와의 분리에 성공했다. 그리고 부르주아지 분파와의 통일 전선으로 취급하기 힘든 이러한 분리로부터 그들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러시아의 경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무엇인가?

 1) 특정 역사적 순간, 부르주아지와의 통일 전선은 1905년 이전의 러시아에 존재했던 상황과 유사한 조건의 지역에서 형성될 수 있다.

 2) 1906년과 1917년 사이의 러시아와 다소 유사한 상황의 나라들에서는 부르주아지와의 통일 전선을 포기하고 “사회주의 통일 전선” 전술을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위한 직접적인 투쟁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사회주의 통일 전선” 전술을 폐기하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모호한 사회주의적 용어를 쓰는 부르주아 분파”- 그 당시로서는 제2 인터내셔널의 모든 정당들이 해당될 것이다 -가 결정적인 순간 자본주의 체제를 방어하기 위해 무장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세계 자본주의 착취를 전복하려는 목적을 가진 모든 혁명적 인자들의 단결을 위해서는, 그들이 「독일 공산주의 노동자당」(KAPD), 「네덜란드 공산주의 노동자당」과 「제4 인터내셔널」4)에 속한 다른 정당들과의 동맹이 필수적이다. 모든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들은 그들을 투옥했던 모든 세력들- 제2 인터내셔널의 정당들, 제2 1/2 인터내셔널5)과 그들의 “모호한 사회주의적 용어”- 로부터 스스로 분리할 필요가 있다.  세계 혁명의 승리는 부르주아의 사회주의 캐리커쳐로부터의 원칙적인 분리와 그들에 대항하는 멈추지 않는 투쟁 없이는 불가능하다. 기회주의자들과 사회주의-쇼비니스트들은 부르주아지의 하인들로서, 결과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적들을 지휘했는데, 특히 오늘날, 자본가들과 연결되어, 그들의 나라에서, 해외에서 무장한 억압자가 되었다. (볼셰비키의 강령과 비교해 보라) 이것이 코민테른의 최고 위원회의 테제에 의해 지지된 사회주의 통일 전선 전술의 진실이다. 실제로는 기회주의적 전술이었던 것이다. 자국과 다른 나라들에서 행해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무장 억압을 수행한 적들과의 합동 전술은 러시아 혁명의 경험에 명백히 대립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깃발 아래 남아있기 위해, 우리는 부르주아지와 그 사회주의자 하인들에 대항하는 “통일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사회주의 통일 전선” 전술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지원되는 독재에 대항하여 일어날 때, 부르주아 민주 혁명을 목표로 할 때 그 혁명적인 가치를 갖고 있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도 반대하는 독재에 대해 싸울 때, 부르주아지와의 “통일 전선” 전술을 따라야 한다.

 

 코민테른이 모든 국가들의 공산당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회주의 통일 전선을 쓸 것을 요구한 것은 각 나라의 조건에 상응하도록 해결책을 내놓는 현실적 임무를 방해하고, 의심할 바 없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혁명적 운동들에 해를 끼쳤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집행위원회의 테제에 대하여

 

 이 테제는 프라우다(Pravda)에 게재되었는데, “이론가들”이 “사회주의 통일 전선”의 아이디어를 단 두 단어의 표현으로 이해했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통일 전선”. 1917년 러시아에서는 모든 나라들에서, 특히 샤이데만, 노스케를 비롯한 사회적 배신자들이 얼마나 “인기 있었는지” 모든 이들이 안다. 볼셰비키의 당원들은 거의 경험이 없었기에, 모든 곳에서 외쳤다. “이 노동자 계급의 배신자들아! 우리는 너희들을 전신주에 목 매달 것이다. 너희들은 모든 나라들의 노동자들을 수장시켜 죽인 그 피의 욕조에 책임을 져야 한다. 너희들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암살했다. 베를린의 거리에서, 너희들의 폭력적인 행동 덕에 착취와 자본주의 억압에 반대에 일어난 노동자들의 붉은 피가 흐른다. 너희들은 베르사유 평화의 저자들이지만 그것을 매번 배신함으로써, 너희들은 국제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셀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우리는 공산주의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 통일 전선”을 제안하는 것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고 덧붙인다. 그것은 노스케, 샤이데만, 반데벨드, 브란팅 등과의 연합전선을 이야기한다. 그러한 통일 전선은 일방적으로든 다른 방식으로든 위장될 것이며, 이것이 앞으로 일어날 일 들이다. 테제는 단순히 “사회주의 통일 전선”으로 명명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통일 전선에 대한, 그리고 제2 인터내셔널에 속한 노동자들, 「2와 1/2 인터내셔널」과 암스테르담, 유사하게 아나키스트와 생디칼리스트 조직에 속한 노동자들에 대한 태도에 대한 테제”라고 이름 붙여졌다. 왜 이렇게 장황한가? 여러분은 오래지 않은 시간 전에 우리를 제2 인터내셔널의 장례식에 초대한 지노비예프 동지가 이제는 우리를 제2 인터내셔널과의 결혼 축하연에 초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장황한 제목을 달아야 했는가 그 이유이다. 사실 이 테제는 노동자와의 협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2 인터내셔널과 2와 1/2 인터내셔널의 정당들과의 협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노동자들은 해외에 나가 본 적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중앙 위원회에 앉아있는 반데벨데, 브란팅, 샤이데만, 노스케 등에 의해 대표되는 당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협정이 이뤄지는 것은 그들과 함께이다. 누가 세 개의 인터내셔널의 대회를 위해 베를린에 가겠는가?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은 진심에서 우러나는 신뢰를 누구에게 줘야 하는가? 벨스(Wels)파에게, 반데벨테(Vandervelde) 파에게 

 

 그러나 KAPD와 협정을 맺으려 시도한 적이 있던가? 지노비예프 동지가 대부분의 훌륭한 프롤레타리아적 인물들이 있다고 인정한 그곳과? 없다. 그리고 KAPD는 아직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쟁취를 위해 싸우고 있다.

 

 지노비예프 동지의 이 테제의 목적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제2 인터내셔널의 혼합이 아니라고 확인했던 것은 사실이다. 제2 인터내셔널에 대해, 그는 조직적 자율성의 필요를 일깨워준다. “제2 인터내셔널과 2 1/2 인터내셔널과 이러저러한 협정들을 맺은 각 공산당의 위치는 절대적 자율성과 총체적 독립성이 설명해준다.” 공산주의자들은 실천에 있어서 자기 규율을 스스로 강제하지만, 그들은 노동자 조직의 정치에 대한 예외없는 권리와 가능성을 - 실천의 전후에, 가능하다면 실천하는 가운데 - 유지해야 한다. “자본주의 전선에 대항하는 실천적인 행동에서의 모든 노동자 조직의 최고 수위의 단결”이라는 슬로건을 지지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입장을 방어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1921년 러시아 공산당 대회에서 제출된 코민테른 중앙위원회의 테제를 보라)

 

 1906년 이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자당」에서는 위의 코민테른의 테제에서 인용된, 가능한 최대한의 자율성을 갖고 있는 두 분파가 있었다.

 

 협상에서의 규율, 당 내 활동에서의 판단의 자율성은 공식적으로 RCP의 규정에 인정되어 있었다. 다수가 정한 것은 해야만 하며, 개인은 비판의 권리만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었다. 명령된 것은 해야만 하지만, 그것이 세계 혁명에 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에 대해 분노했다면, 실천 이전에, 와중에, 그리고 이후에 자유롭게 그 분노를 표현할 수 있었다. 이것은 자율적 행동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Vandervelde가 베르사유 조약에 사인하고, 스스로 타협했을 때와 같다)

 

 이러한 같은 테제들에서, 집행위원회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대신하는 것임이 분명한 노동자 정부의 슬로건을 제안했다. 노동자의 정부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당의 정수인 중앙 위원회로 구성된 정부이다. 이러한 테제의 이상적인 실현은 사회주의자인 에버트(Ebert)가 대통령인, 그의 승인과 함께 정부가 형성된 독일에서 일어났다. 이 공식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공산주의자들은 스웨덴의 브란팅과 독일의 에버트와 같은 사회주의자 수상, 대통령을 지지하는 투표를 해야만 한다.

 

 코민테른의 의장, 지노비예프 동지는 사회민주당의 중앙위원회, 에버트, 노스케, 샤이데만을 만나 주먹을 쥐고 외쳤다. “노동 계급의 배신자, 변절자!” 그들은 친절하게 미소 짓고 그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당신들은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살해했다. 우린 당신을 교수대에 목매달 것이다.” 그들은 그를 향해 더욱 친절하게 미소 지으며 더욱 고개를 숙였다.

 

 지노비예프 동지는 그들에게 통일 전선을 제시하고,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노동자 정부를 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므로 그는 교수대를 수상의 자리와 바꾸어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노스케, 에버트, 샤이데만, 등등은 노동자 집회에 가서 코민테른이 자신들을 사면했으며, 교수대 대신 수상 자리를 제안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조건은 공산주의자들이 수상을 인정하는 것이다 [...]6) 그들은 모든 노동 계급에게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실현의 가능성이 오직 자신들과의 단결에 있지, 그들과의 대결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덧붙인다. 이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우리를 예전에 교수형에 처해 무덤에 묻었다. 이제 그들은 우리에게 왔다. 우리는, 선의로 그들을 용서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를 용서했기 때문이다. 상호 사면인 셈이다.

 

 코민테른은 제2인터내셔널에 그 정치적 성실함의 증거를 보여주었고, 정치적 열등함의 증거를 받았다. 실제 이 변화의 기원은 무엇인가? 지노비예프 동지는 어떻게 에버트, 샤이데만, 노스케에게 교수대 대신 수상 자리를 권할 수 있는가? 얼마 전에 그들은 제2 인터내셔널의 장송곡을 불렀는데, 이제 그들은 삶에 키스를 한다. 왜 그는 그런 노래를 부르는가? 우리는 정말 그 부활을 보고 그 주장을 들어야 하는가?

 

 지노비예프의 테제는 이러한 질문에 효과적으로 대답한다. “세계 경제 위기는 더더욱 첨예해지고, 실업은 늘어만 간다. 자본은 공세로 나아가고, 교묘하게 작전행동을 하고 있다. 노동계급의 조건은 손상되었다.” 그러므로 계급 전쟁은 피할 수 없고, 노동 계급은 더욱 왼쪽으로 나아갈 것이다. 개량주의적 환상은 파괴되었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공산주의 전위의 용기를 제대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로부터 샤이데만과의 통일 전선은 구성되어야 한다. 극악무도한! 결론은 전제와 일관되지 않다!

 

 우리는 지노비예프가 그의 테제에서 통일 전선을 방어하기 위해 내세웠던 주장들에 대해 좀 더 근본적인 것들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객관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지노비예프 동지는 놀라운 발견을 했다. “우리는 단결을 위한 노동 계급의 투쟁을 안다. 샤이데만과의 통일 전선을 통하지 않고서 어떻게 단결할 수 있는가?” 자신의 계급의 이해와 세계 혁명에 대해 생소하지 않은, 모든 의식 있는 노동자들은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노동 계급은 “통일 전선”을 주장할 필요가 생겼을 때에만 단결을 위해 투쟁하는가? 노동 계급이 정치 투쟁에 발을 디뎠을 때부터 노동자와 함께 한 이라면 누구나 모든 노동자를 괴롭히는 의심을 알고 있다. 왜 멘셰비키, 사회주의 혁명가당, 볼셰비키, Trudoviks(인민주의자) 들은 서로 싸우는가? 모두가 민중을 위하고 있으면서도.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서로 싸우게 하는가? 모든 노동자들은 스스로 독립적인 계급으로서 조직화해야 하고, 그 외 모든 계급들에 대해 반대해야 한다. 우리의 쁘띠 부르주아적 편견들은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그것은 진실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 호의적인 상황에 있는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우리는 노동 계급이 국제적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에 대항하는 무장 투쟁을 준비하도록 해야 한다. 이 경우, 확실히 러시아 혁명의 경험이 고려되어야 한다. 세계 노동 계급은 제2 인터내셔널과 2와 1/2 인터내셔널의 사회주의자들이 반혁명의 선두에 있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회주의의 배신자들과의 통일 전선에 대한 선전들은 어떤 뉘앙스에 상관없이 그들도 역시 사회주의를 위해 부르주아지와 싸우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오직 공개적이고 용기있는, 내전을 옹호하고 노동계급에 의한 정치 권력의 획득을 옹호하는 선전들만이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심을 끌 수 있다.

 

 노동 계급이 그 자신의 물질적 법적 권리를 파업과 의회를 통해 개량할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 이것은 밝혀져야 한다. 가장 시급한 투쟁은 권력 투쟁이다. 우리는 우리의 선전을 통해, 많은 경우 파업을 자극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동자의 조건을 개선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아직 옛날 개량주의적 환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스스로를 약화시키는 투쟁을 하고 있다. 우리는 노동자와 파업 동안 연대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이러한 운동은 노동자들을 노예 상태, 착취와 갈증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노동자의 굳은 살 박힌 손으로 권력을 쟁취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지노비예프 동지의 연대 결정은 통일 전선 전술을 정당화 했다. 우리는 “사회 혁명의 시대”라는 관념을 이해하는 데 익숙하다. 그것은 현재, 사회 혁명이 시대의 화두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제로, “사회 혁명의 시대는 장기적 관점에서 혁명 과정의 일부”라는 것을 보여줬다. 지노비예프는 우리가 현실에 발을 딛고 노동 대중을 끌어들이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과 1903년에서 1917년까지 다른 방식으로 단결함으로써 대중들을 설득했고,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우리의 승리로 끝맺었다. 이것이 왜 그가 에버트, 샤이데만, 씨에(Cie)를 극복하라고 하며 그들과 싸우지 말고 단결하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우리는 사회 혁명의 기간이 장기든 단기든, 그 기간이 어느 정도든 여기서 논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논쟁은 천사의 성별에 대한 수도사들의 논쟁이나 대머리가 되려면 몇 개의 머리카락이 없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 혁명의 시대”라는 개념을 정의하고자 한다.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먼저 물질적 생산력이 발전하여 소유권과 양립할 수 없게 된 상태이다. 사회 혁명이 필연적인 것이 되는 물질적 조건이 있는가? 그렇다. 무엇이 부족한가? 주체, 인적 조건이 부족하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 계급은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 이러한 혁명의 필요를 실현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 이미 이를 이뤄낸 선진 노동자들, 다시 말해 전위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경종을 울려야 한다.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공장 폐쇄, 파업, 급박한 전쟁, 생활조건의 추락 등) 내전을 옹호하는 선전을 통해 전투를 요구하고, 이러한 즉각적 투쟁에 대해 노동 계급을 준비시키고 조직해야 한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했다고, 그것이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과 단결했기 때문이라고 누가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것은 넌센스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에 대항하는 치열한 싸움을 통해 부르주아지와 지주들에게 승리했다.

 

 통일 전선 전술의 필요에 대해서 트로츠키는 그의 연설에서 우리는 승리했지만 우리가 어떻게 승리했는지 분석해야만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우리는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과 통일 전선을 통해 진군했지만, 그것은 우리와 멘셰비키,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가당이 같은 위원회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통일 전선 전술이 같은 기관에 앉아있는 것이라면, 강제 노동의 우두머리들과 죄인들 또한 통일 전선에 포함된다. 그들은 모두 감옥에 있다.

 

 우리 공산당은 의회에 앉아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이 모든 대표들과 함께 통일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동지는 전 세계의 공산주의자에게, 다소 의심스런, 볼계비키, 멘셰비키,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가당의 소위 통일 전선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 볼셰비키가 1917년 8월 「사회 혁명적 케렌스키」가 소환한 “전-의회”나 사회주의자에 의해 주도된 임시 정부(유용한 교훈이었던)에 참가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밝혀야만 한다.

 

 우리는 볼셰비키가 부르주아지와 통일 전선을 꾸렸던 시기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인가? 1905년 전이다. 그렇다. 볼셰비키는 사회주의자들과의 통일 전선을 옹호했다. 이것은 언제인가? 1917년 전이다. 1917년, 노동계급의 권력을 위해 싸울 때, 볼셰비키는 사회주의 혁명가당 좌익에서부터 모든 종류의 아나키스트에 이르기까지 모든 혁명적 집단과 함께 무기를 들고 소위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통일 전선을 형성한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  그리고 부르주아지와 지주들과 싸웠다. 1917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있는, “사회 혁명의 시대” 최전선에 나섰다. 1917년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 전술은 뒤이은 나날들의 교훈을 설명해 준다. 부르주아지 분파들, 사회주의 혁명가당, 그리고 멘셰비키의의 격렬한 저항에 권력을 쟁취한 노동 계급은 직면하게 된 것이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을 단결시키는 것은 이 전술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아직 “개량주의적 환상을 제거”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이 전술은 제2인터내셔널이나 2와 1/2 인터내셔널과의 통일 전선이 아니라 그들과의 전쟁일 것이다. 이것이 세계 사회 혁명의 슬로건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쥔(노동자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통일 전선에 대한 문제

 

 이미 사회주의의 공격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 계급이 된 모든 나라들에서는 각 시기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물론 각각의 다른 나라들에서 혁명 과정의 모든 단계에 유효한 전략을 개발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같은 단계에 대한 정책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의 (그렇게 오래지 않은) 투쟁의 역사를 기억해 본다면, 적과의 싸움에 있어서 우리는 매우 다른 과정들을 겪어왔음을 알 수 있다.

 

 1906년과 그 후 몇 년동안은, “세 개의 기둥”이 있었다. 8시간 노동, 토지의 소유, 그리고 민주 공화국이 그것이다. 이러한 세 기둥은 언론과 집회, 파업,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포함하고 있었다.

 

 1917년 2월에는 어떠했는가? “독재 정치는 끝났다! 제헌 의회 만세!” 이것이 볼셰비키의 외침이었다.

 

 그러나 4-5월, 모든 것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집회, 언론의 자유는 있었지만 토지의 소유는 그대로였고, 노동자들은 권력을 잡지 못했다. 그래서 볼셰비키는 다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걸었다.

 

 이 시기, 우리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한 부르주아지의 시도들은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언론, 집회, 결사, 파업, 양심의 자유 만세! 토지를 몰수하라! 생산의 노동자 통제! 평화! 빵! 자유! 내전 만세!”

 

 그리고 10월의 승리. 노동 계급이 권력을 잡았다. 국가 억압의 오랜 작동원리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해방의 새로운 작동원리가 노동자, 군인 대표 평의회 속에 구조화되었다.

 

 이 시기에 와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언론, 결사의 자유는 주장되어야 했던 것일가? 군국주의자부터 멘셰비키, 사회주의 혁명가당이 내전을 지지하도록 허락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무엇보다도, 지배계급으로서 내전을 옹호하는 동지들에게 언론의 자유를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권력에 반대하는 어떤 내전에 대한 조직된 선전도 착취자, 억압자를 불러들일 수 있는 반혁명적 행위였다. 선전이 더욱 “사회주의”적일수록, 더욱 해악적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같은 프롤레타리아 가족의 이러한 선전들에 대한 가장 엄격하고 무자비한 제거”가 진행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착취자들의 저항을 억압할 수 있고, 스스로 조직하여 유일하게 권력을 쥐며, 모든 자본주의 정부들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국가를 건설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나타났다. 이들에게 부여된 새로운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국가 경제를 조직하고 가능한 한 많은 물질을 창조하는 것. 그리고 이 임무는 권력의 쟁취와 착취자들의 억압 만큼이나 엄청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권려의 쟁취와 착취자에 대한 억압은 그것 자체로 목적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로의 길은, 자본주의보다,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지배와 억압 하에서보다 더 나은 삶과 자유로의 길은 그것 자체로 목표였다.

 

 이전의 억압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조직의 형태와 실천의 수단들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접근이 필요했다.

 우리가 자원이 부족하다는 관점에서, 제국주의 전쟁과 내전으로 인한 끔찍한 황폐를 경험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동 계급과 동맹 그룹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주의 사회의 매력적인 힘들을 보여주기 위해 물품을 창조하는 임무가 우리에게 부과되었다. 더 이상 부르주아지, 경찰과 다른 기생충이 없을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가 주인이 되고 자유로우며, 모든 가치, 모든 상품, 모든 노동이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 그리고 굴욕받던 자의 삶을 개선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이것을 보여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것은 굶주림의 왕국이 아니며 오히려 전에 없던 풍요의 왕국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것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남겨진 임무이며, 선행된 것들을 능가해야할 임무이다.

 

 그렇다. 첫 번째 두 임무, 권력을 쟁취하고 억압자들의 저항을 제거했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앞선 이들을 뛰어넘었고(이것은 지주와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들의 강한 오를 설명한다) 그것은 위대한 일이지만 세 번째 목표보다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오늘날, 모든 노동자들은 질문해야 한다. 왜 이 모든 것을 해야 하는가? 이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토록 많은 피를 흘려야 했는가? 끝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는가? 이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우리 운명을 누가 결정하는가? 어떤 조직이 그것을 할 것인가?

 

 최고의 구세주는 없다.

 

 신도, 카이사르도, 호민관도 아니다.

 

 생산자, 우리 스스로를 구원하라!

 

 공통의 구권을 선포하라!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된 의지를 대표하는 조직이 필요하다. 우리는 부르주아지로부터 빼앗은 (국유화된), 그에 속한 거대한 계층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업이 속한 산업 조직 뿐만 아니라 노동자 대표의 평의회도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평의회는 무엇인가? 그들은 노동자 대표의 평의회, 다시 말해 “농장과 공장에서의 국가 권력의 핵심”을 조금이라도 닮았는가? 그들은 단결된 의지를 표현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평의회를 닮기는 했는가? 지금의 평의회는 그 의미와 산업 기반을 잃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압제자에 대한 저항과 그들의 파괴를 향한 목표에의 관심을 동원했던 오랜 내전은 연기되고 모든 다른 업무들을 제거하고 - 프롤레타리아트가 눈치채기도 전에 - 그 조직, 평의회를 변화시켰다. 공장의 노동자 대표의 평의회는 죽었다. 노동자 대표 평의회 만세!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도 보편적으로 이와 같지 않은가?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 언론의 자유에 대해 격렬한 내전과 노예 감독자의 봉기 때와 유사한 태도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권력을 차지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를 끔찍한 적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게 되어, 이제 그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 스스로 엄청난 생산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조직하고 생산과 전체 나라를 지도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고 있지 않은가?

 

 부르주아지는 확실히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그 누가 권력을 방어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언론의 자유를, 자신의 피를 흘리지 않고 논할 것인가?

 

 우리에게 언론의 자유는 무엇인가? 신인가 미신인가?

 

 우리는 우리를 위한 우상을 만들지 않는다.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아니다.

 

 우리는 누구 앞에서도 복종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진정한 민주주의, 절대적인 자유, 물적 숭배나 우상,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따위는 없다.

 

 민주주의는 전에도 그러했고 미래에도 모든 나라의 반혁명, 부르주아지, 지주, 성직자, 사회주의 혁명가당, 그리고 멘셰비키 등을 의미하는 미신이 될 수 없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의 계급적 목표를 달성하는 유일한 수단일 뿐이다.

 

 1917년 이전, 모든 시민의 언론의 자유는 우리의 진보적인 요구였다. 1917년에는, 우리는 이러한 자유를 쟁취하여 프롤레타리아트와 그를 따르는 지식인들과 농민들의 조직화와 선전에 썼다. 부르주아지를 이길 수 있는 조직을 만든 후, 우리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쟁으로 나아가 권력을 쟁취했다. 부르주아지가 언론의 자유를 우리를 반대하는 내전을 일으키는데 쓰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적 계급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부와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도 러시아의 부르주아지의 저항이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언론의 자유를 주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다수 노동자의 지원으로, 우리는 부르주아지의 저항을 분쇄했다. 이제 우리는 우리 프롤레타리아에게 말하도록 허락할 수 있지 않은가?

 

 1917년 이전과 1917년의 언론의 자유, 그리고 1918년에서 20년까지의 것과 1921년에서 1922년까지의 문제에 대한 우리 당의 태도는 필요하다.

 

 그러나 소비에트 권력의 적들이 이 자유를 소비에트를 전복시키기 위해 사용할 수 있지 않은가? 아마도 이 자유는 독일, 프랑스, 영국 등에서 이들이 혁명 과정의 같은 단계에 있다면 유용하고 필수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계급은 있지만 농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쟁과 경제적 재앙으로부터 살아남은 소수의 프롤레타리아가 춥고 배고픈 채로 피흘리며 지쳐 있다. 여기서는 그 자유가 소비에트 권력을 전복시키는 길의 첨단으로 몰고 가기는 힘들지 않을까? 프롤레타리아트에 더해 러시아에는 부유함과는 거리가 먼 대다수의 농민들이 간신히 삶을 연명하고 있다. 이 농민들에게 언론의 자유가 반혁명 군대를 형성하는데 쓰이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없다. 우리가 노동자들을 농민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조금이라도 먹이기라도 하면 우리는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길은 없다. 이것이 마음이 올바른 공산주의자들의 추론이다.

 

 우리들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 없이 사회 경제의 조직화라는 엄청난 임무를 해결할 것인가? 당신은 언제나 예, 아멘이라고 이야기하는 신의 어린양인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길 원하는가? 그럴 필요가 있는가?

 

 “당신들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조용히 있어라. 저항하지도, 생각하지도 마라. 왜냐하면 우리가 노동자와 농민들 중에서 용기 있는 이들에게 권력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당신들이 믿을 수 없는 방식으로 쓰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다보면 당신은 어느날 갑자기 사회주의 천국에 있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이야기하는 것은 개인, 영웅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지 계급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회색 대중과 그들의 평범한 생각들(적어도 지도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은 우리의 영웅들, 공산주의 공무원들이 공산주의 천국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재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웅을 믿지 않으며 모든 프롤레타리아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호소한다.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자 자신의 몫이다.

 

 그렇다. 우리 프롤레타리아트는 지치고, 배고프고, 춥고, 기진맥진해 있다. 그러나 우리 앞에 있는 문제는 어떤 계급도, 어떤 특수한 그룹도 우리를 대신해 풀어줄 수 없는 문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를 해결해야 한다. 당신이 우리들에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임무를 지식인들, 공산주의 지식인들이 풀어줄 것이라고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명을 당신에게 맡기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보여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지쳤고, 따라서 그 무엇을 알 필요도, 결정할 필요도 없다는 주장은 절대 옳지 않다.

 

 만약 1918년에서 20년까지 러시아의 상황이 달랐다면, 우리의 이 문제에 대한 태도 또한 달랐을 것이다.

 

 올바른 마음의 공산주의자 동지인 당신이 부르주아지의 얼굴을 후려갈기고 싶다면, 좋다. 그러나 문제는 손을 드는 것은 당신이고, 그들의 갈비뼈를 부수고 한 바가지의 피를 쏟아내도록 하는 것은 우리 프롤레타리아라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공산주의자 노동자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볼셰비키, 아나키스트, 사회주의 혁명가당, 그리고 다른 이들(이러한 당에는 속하지 않지만 그들의 기원을 여기서 찾을 수 있는 이들) 속에 노동 계급이 있을 뿐이다. 어떻게 그들을 공산주의에 연결시키는가? 부르주아 “카데츠”(헌정 민주주의자들), 교수들, 변호사들, 의사들과의 협상은 없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처방이 있을 뿐이다. 몽둥이. 그러나 노동 계급은 전혀 다르다. 우리는 그들을 협박할 것이 아니라 영향을 주고 지적으로 이끌어야 한다. 폭력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법과 행진의 진로를 명확히 함으로써.

 

 그렇다. 법은 법이지만 모두를 위한 법은 아니다. 마지막 당대회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의 투쟁에 대한 논쟁에서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는 180개의 부르주아지 출판사가 있었고, 지노비예프의 선언에 따라, 이들과 폭력적인 방법이 아니라 90% 열린 이데올로기적 설득력으로 싸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우리를 “설득”할 수 있는가? 지노비예프는 우리 중 일부를 설득하려하는지 안다. 부르주아지가 누리는 자유의 10분의 1만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노동자 동지들이여, 당신을 무엇을 생각하는가? 전혀 나쁘지 않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므로 1906년에서 1917년까지 첫 번째 전술, 1917년 10월까지 두 번째, 1917년 10월에서 1920년 후반까지 세 번째, 그리고 1921년 초부터 네 번째... [...]

 

각주

1) 편집자 주 ; 코민테른. 제3인터내셔널의 러시아 이름이다.

 

2) 편집자 주 ; 사회적 혁명가당 좌익. 이들은 소비에트에 우호적이었고, 사회주의 혁명가당으로부터 1917년 9월, 분리되어 나왔다.

 

3) 1917년 10월 25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110명의 멘셰비키 대표들은 소수였고(673명 중), 10월 혁명의 비준의 순간, “볼셰비키 쿠데타”라며 이를 비난하며 자리를 떠났다.

 

4) 편집자 주 ; KAI(공산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는 1922년에서 24년동안, KAPD의 제안에 의해 설립되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제4 인터내셔널과 혼돈하지 않길 바란다.

 

5) 편집자 주 ; 사회주의 당 국제 연합(the International Union of Socialist parties)의 별명은 제2와 1/2 인터내셔널이었다. “왜냐하면 제2 인터내셔널과 제3 인터내셔널 사이에 자신을 위치 지었기 때문이다.” 레닌의 글, ‘베를린에서의 제3 인터내셔널의 대표들’이 수록된 알프레드 로즈머(Alfred Rosmer)의 책, 「레닌의 모스크바」(Lenin’s Moscow)에서 이러한 재편성에 대한 비판을 보라(Pluto Press, 1971).

 

6) 편집자 주 ; 여기, 그리고 이 글의 다른 곳에서 [...]은 우리가 번역하지 못한 짧은 문구들을 의미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이다!

위대한 혁명가들은 살아생전에는 억압계급의 끊임없는 탄압을 받았고, 그들의 이론은 허위와 중상모략에 가득 찬 가장 야만적인 적의와 가장 표독스러운 증오 그리고 가장 파렴치한 구호로 대접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죽은 이후에는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변질되어 신성시되거나 결국에는 대부분 그들의 명성이 피억압계급을 회유하는 데 쓰이는 "위안"으로, 또는 후세에 기만하는 수단으로 숭배되는 등, 음모의 대상이 된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혁명적 이론은 그 혁명적 본질을 빼앗기고, 혁명적 이론이 지니는 무기로서의 예리함은 무디어지고 통속화되고 만다.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노동운동 내의 기회주의자들은 위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의 변조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레닌, 국가와 혁명, 1917)

1919115,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유 군단(Freikorps)에 의해, 투쟁의 동지 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암살되었다. 이 병사들은 "사냥개가 필요하다면 내가 될 것이다"! 라고 선언했던 독일 사회민주당(SPD) 당원 노스케 장관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 베를린에서 봉기한 노동자들의 유혈진압을 진두지휘했던 것도, 국제 노동자 운동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암살한 것도 권력을 잡은 그 사회주의자 당(독일 사회민주당)이었다.

이 끔찍한 살인은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한 일련의 중상모략을 통해 오랫동안 준비되었다. "붉은 로자", "선동자 로자", "피의 로자", "차리즘의 첩자 로자"...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한 거짓 비난이 그치지 않았고, 베를린에서 "피의 주간" 이었던 1918년 말 / 1919년 초에는 학살에 대한 요구가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로자 룩셈부르크를 살해하고 나서 불과 몇 달 후, 부르주아지와 노동자 운동의 기회주의자들은 그를 신성시하고, 그의 혁명적인 내용을 제거하고, 비하하고, 그리고 이 날카로운 혁명가를 무디게 하려고 그를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위해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원래 모습이었던 전투적이고 모범적인 혁명가로 남아있어서는 안 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일종의 평화주의자 그리고 페미니스트 민주주의자로 잘못 전해져, 두 번 살해되어야만 했다. 이것이 혁명을 위해 이 위대한 투사를 “명예 회복시키는”(, 다시 회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최근 몇 십 년간의 “기억”이라는 작업의 진정한 목적이다.

룩셈부르크와 레닌의 투쟁을 왜곡시키기 위한 꾸준한 캠페인

1930년대 프랑스의 예를 들면, 루시앙 라우렛(Lucien Laurat) 주변에서 발전한 모든 흐름은 민주주의의 유혹에 점점 더 양보했고, 이윽고 “볼셰비키 혁명” 처음부터 혁명 계획의 “과실” 안에 “벌레” 레닌이 있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 주장은 논리적으로 1936-39년의 스페인 전쟁에서 공화군을 위한 변명이 되었고, 파시즘에 대항하는 싸움이라는 구실로 제2차 세계 학살에 노동 계급을 용기병으로 참가하게 하는 변명이 되었다. 그것은 스페인의 POUM(스페인의 맑스주의 통합 노동자당 : 역주)과 그들, 민족 저항세력의 “영웅주의” 안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지지했다. 이 구역질이 나는 민주주의 선전은 스파르타쿠스 기관지 설립자인 르네 르페브레(Rene Lefeuvre)와 같은 인물들을 거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작을 한다. 나중에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 저작집[1]에서 완전히 이데올로기적인 머리말을 썼는데, 그것의 1946년 제목인 ‘독재에 반대하는 맑시즘’(로자 룩셈부르크는 절대 그 제목을 쓰지 않았다!)은 이 혁명을 위한 투사를 볼셰비즘에 근본적으로 적대적이라고 묘사했는데, 이는 역겨운 거짓말에 불과하다. 저작집 서문에서 르페브르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 “모든 위대한 맑스주의의 저명한 이론가들: 칼 카우츠키, 에밀 반데벨드, 루돌프 힐퍼딩, 칼 레너, 조지 플레하노프는 – 그리고 말하는 김에 우리 또한 –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레닌의 전체주의적 교조가 맑스주의의 원칙에 완전히 반대된다고 비판했다.”

스탈린은 레닌을 박제화했으며 그의 사상을 끔찍한 교리로 왜곡했다. "피의" 로자 룩셈부르크는 일종의 민주주의의 성인이 되었다. 스탈린주의 반혁명은 빠르게 두 개의 새로운 타락하고 상호 보완적인 이데올로기를 형성시켰다 : 한쪽은 매력적인 “룩셈부르크주의” 그리고 다른 쪽은 혐오스러운 "맑스-레닌주의". 정말 동전의 양면 또는 오히려 같은 결과를 가져올 함정으로 향하는 두 입구 : "피에 굶주린" 볼셰비키를 거부하고 "평화주의자" 로자로 묘사되는 인물을 존경하는 것은 철창 안의 사자를 존경하는 것과 같다.

1974년 서독(FRG)에서, 그들은 심지어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미지를 담은 우표를 발행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혁명 조직에 반대하는 새로운 캠페인

동유럽의 붕괴와 소련이 사라진 후, 이 광대한 이데올로기적 캠페인은 다시 발굴되었고,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부르주아지가 열광적으로 선언한 이른바 “공산주의의 죽음”을 부양하기 위해 확대되었다. 여기에서 공식 이데올로기는 역사의 가장 큰 거짓말로, 공산주의와 스탈린주의를 같은 것으로 여기는 사기를 목표로 했다. 그것은 지배 계급의 손에 있을 때 특히 효과적인 이데올로기적 무기이다. 왜냐하면, 1990년대 이후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을 하나의 사회적 세력으로 여기고 그 의식과 조직을 발전시키는데 수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는데, 이제 그 자신의 과거로부터 단절되어 정체성을 잃고, 스스로 어디서부터 왔는지 또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공산주의가 스탈린주의라면, 결국 실패한 공포였다면, 왜 그것을 위해 투쟁할까? 결국, 스탈린주의의 재앙으로 귀결될 뿐이라면 왜 노동자 운동의 역사를 공부하는가? 부르주아지가 우리의 머릿속에 집어넣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이 논리이며 독이다!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를 평화주의자,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 "스탈린의 정신적 아버지"인 레닌의 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이 비열한 선전에서 가장 악질적인 부분 중 하나이다. 그들이 그것을 의식하든 안하든, 이 가짜 싸움에 참여하는 사람은 노동계급에 반대하여 싸우는 것이다.

오늘날 유럽 전역과 세계 도처에 걸쳐 서점 및 가판대와 블로그, 포럼에서는 전투적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미지를 다시 왜곡시키기 위해 새로운 구역질이 나는 선전이 다시 떠오르고 있다. 그리하여, TV 프로그램에서부터 로자 룩셈부르크는 다시 "여성""평화"의 특성만을 가진 사람으로 등장한다. 아주 유명하고 명성 있는 신문 르몽드는 20139, ESCP 유럽의 교수인 장-마크 다니엘(Jean-Marc Daniel)이 쓴 글을 다음과 같이 잘 연상되는 제목으로 게재했다 : “로자 룩셈부르크, 맑스주의자-평화주의자” “맑스주의자”와 “평화주의자”라는 단어의 결합은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 지배 계급에 대항한 “진짜 맑스주의자”가 봉기와 자본주의의 전복을 포기하고 계급 전쟁으로부터 이탈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동문학을 포함하여 수많은 책이 지금 로자 룩셈부르크를 다시 볼셰비키와 “독재자” 레닌의 완고한 적으로 묘사하면서 출판되고 있다. 사회비판그룹의 “룩셈부르크주의자”인 민주적 역사학자들의 후원 아래 파리에서 있었던 것처럼, 회의와 토론들이 여기저기서 조직되었다. 예술계에서조차 2014 MAIF 상은 "로자 룩셈부르크"를 기획한 조각가 니콜라스 밀헤(Nicolas Milhe)가 수상했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 그녀가 혁명의 반대자로서 러시아 혁명, 볼셰비키에 대한 투쟁에서 그녀의 동지에게 반대했다는 조건으로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그녀를 변환시키기 위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재조명은 거대한 이데올로기 중독 사업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는 세계적인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라 더욱더 "민주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주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공산주의 흑서(Black Book of Communism)의 가증스러운 선전 후에는 매우 진지하고 공식적으로 학교 프로그램에서 배운 볼셰비키의 적으로서 여기는 것이 이제부터는 룩셈부르크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부르주아지를 위한 이해관계는 민주적인 부르주아지를 방어하는 것 외에 다른 미래가 없다는 것으로 가장 비판적이고 반항적인 구성원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왜곡 배후에 불신과 혁명 조직을 악마화하는 또 하나의 말 하지 않는 목적과 함께 모든 종류의 민주주의자들이 로자 룩셈부르크를 재조명하는 캠페인이 있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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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회주의 조직의 문제”(1904), “대중과 지도자”(1903), “비판의 자유와 과학의 자유”(1899).

https://en.internationalism.org/icconline/201505/13055/rosa-luxemburg-belongs-proletarian-revolution-not-social-democrats

 

ICConline - 2017

미국과 북한사이의 전쟁 위협: 비합리적인 것은 바로 자본주의이다.

72년전, 1945년 8월 최초의 원자폭탄 두개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두차례의 세계대전 동안 특히 방화폭탄을 포함하여 온갖 종류의 무기들로 이미 자행된 대대적인 파괴에 뒤이은 이러한 핵무기의 사용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위협하는 잠재적 파괴력의 새로운 단계를 열었다.

2017년 9월 9일 북한정권의 창립기념을 계기로 국가가 조직한 거대한 파티에서 김정은이 자국의 수소폭탄을 “우리 인민의 역사상 특별한 성취이자 위대한 사건”이라며 칭송하며 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언론매체를 통해 보여졌다.

북한은 성능에 있어서 그 이전의 어떤 테스트들도 능가하는 핵폭발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배타적인 세계핵폭탄보유국 클럽에 북한이 속하게 되었다. 부르조아사회의 쇠퇴가 야만주의로 내디딘 최근의 이 한걸음에 관한 소식은 허공에서 그냥 나타난 것이 아니다. 평양의 스탈린주의 정권측의 대량파괴 기술의 무시무시한 승리는 미국과 조선인민민주공화국사이에 몇 개월에 걸쳐 이뤄진 상호간 위협의 절정점이다. 북한은 올해에만 벌써 17차례나 미사일 테스트를 행했는데, 이는 이전에 이뤄진 테스트들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큰 수치다. 태평양에 위치한 미국영토인 괌 또는 미국본토의 목표물들에 대한 공격 위협, 일본상공을 지나간 미사일 그리고 미국의 공격이 있을 경우 핵무기로 스스로를 방어하겠다는 위협과 더불어 북한과 미국사이의 맞대결은 새로운 단계에 도달했다. 이에 미국은 국사적, 경제적 및 정치적 무기를 총 동원해서 대응하겠다고 위협한다. 트럼프대통령은 미국이나 미국의 동맹국들 중 어느 하나라도 북한정권에 의해 공격당한다면 “불과 분노(fire and fury)”로 북한을 방문하겠다고 말한다. 핵무기 사용의 위험은 이전보더 훨씬 더 높고, 서울이나 토쿄등 아시아의 몇몇 대도시들을 직접적으로 위협한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인 남한과 일본이 취한 최근의 군사적인 행보들(특히, 새로운 사드(THAAD)미사일체계의 남한내 배치)은 미국과 중국사이의 대결을 첨예화했고 다른 나라들을 이러한 대 혼란속으로 더욱더 끌어당기고 있다.

한국에서의 이러한 사건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러한 사건들은 인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북한의 희망은 그 폭탄 덕분에 살아남는 것이다

냉전기 수십년 동안은 주로 강대국들이 핵무기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1989년 이후 수많은 나라들이 핵폭탄에 접근했거나 접근하려 노력중이다. 그래서 상호파괴의 위협은 훨씬 더 예측불가능하게 되었다. 왜 북한같은 “약소국(underdog)”이 핵무기를 통한 위협역량을 개발하고 있는지 이해하려면 여러 다른 요소들을 고려해 보야한다. 이러한 상황전개들은 더 넓은 역사적 국제적 문맥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제 2차 세계대전 그리고 그 몇년 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한 황폐화에 뒤이어 북한과 남한은 재건을 위해 그들의 “보호자들”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에 의존하게 되었는데, 이 두 나라들은 더 발전한 자본주의국가들에 훨씬 뒤 쳐져서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이 없는 스탈린주의 정권들 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러시아는 나치 독일의 패배후 한 블럭의 지도자가 되었지만 전쟁으로 인한 심각한 고갈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군비경쟁에 자원의 대부분을 전용해야만 했다. 민간부문은 군사부문에 비해 몇 세기나 뒤쳐져 있었다. 동서블럭간의 차이는 피폐한 러시아의 경우 동유럽과 중부유럽의 공장들을 해체해야 했던 반면 미국은 서독과 남한 재건에 막대한 돈(마샬플랜)을 쏟아부었던 점으로써 요약될 수 있다.

북한 재건은 스탈린주의 모델을 따랐다. 1945년전까지는 남한보다 경제적으로 더 발전되었고 지하자원과 에너지원도 더 풍부했었지만, 북한은 군사주의로 질식당하고 스탈린주의 패거리 하나에 의해 운영된 체제들에 전형적인 후진성 때문에 고통받았다. 소련이 세계시장에서 경제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없었고 군사력의 사용 또는 사용위협에 대단히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북한도 세계시장에서 경제적으로 경쟁할 수가 없었다. 그 주요 수출품은 무기, 몇몇 지하자원 그리고 최근에는 값싼 직물류와 일부 노동력이다. 북한 정권은 노동력을 다른나라들에 “계약노동자”의 형태로 판다.1

그와 동시에 그 체제의 옹호자들인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는 북한무역의 90%이 중국과 이뤄질 정도로 상승했다. 군대에 대한 단단한 통제력을 유지하는 일당독재 지배로서 어떤 라이벌 부르주아 분파도 제거된 그 체제는 스탈린주의 통제하2의 모든 체제들과 마찬가지로 선천적인 약점들을 갖지만 몇 십년간의 결핍과 기아와 억압를 견뎌냈다. 군사 및 정치 기구들은 국민들, 특히 노동자들의 어떤 봉기도 막을 수 있었다. 다른 후진국들에서의 다른 왕조들의 몇십년에 걸친 지배와 비교해서 북한은 60년이상(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국민들을 억압하며 가장 기괴한 개인숭배3에 머리숙이도록 강요하는 단일한 왕조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남한의 민족주의적 야망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이해에 직면하여 어떤 경제적 힘에도 의지할 수 없는 이 체제는 내부적으로 극심한 억압 그리고 외부적으로 군사적 협박을 통해서 생존을 위해 투쟁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핵무기시대에 협박은 적들을 막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무시무시해야 한다.

김정은은 핵폭탄을 자신의 생명보험으로 여긴다. 김정은 자신이 공공개적으로 선언했던 것처럼, 그는 한편으로 우크라이나와 리비아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파키스탄에서 일어난 일에서 교훈을 얻었다. 소련이 붕괴된 후 신생 우크라이나는 자국내의 핵무기를 모스크바와 워싱턴으로부터의 대단한 압력아래 러시아에게 인도할 수 밖에 없었다. 리비아는 트리폴리에서 가다피정권의 국제적 고립을 끝내는 대신에 핵폭탄을 얻으려는 시도를 포기하는데 동의했다. 이라크도 비슷한 운명에 처했다. 그곳에서 특히 미국의 위협들4에 뒤이어 사담 후세인 정권은 핵무기프로그램을 포기했다. 반면 파키스탄은 “그 폭탄”을 손에 넣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예들에서 놀라운 점은 핵무기역량을 갖느냐 갖지 않느냐에 따라 그 나라들이 얼마나 다르게 취급되는가이다. 오늘날까지 미국은 파키스탄을 군사적으로 위협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라호르에 있는 그 정권이 여전히 아프가니스탄의 탈리반의 영원한 지지자이고 빈라덴에 피난처를 제공하기도 했으며, 미국의 주요 라이벌인 중국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음에도 그렇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크라이나는 핵무기를 빼앗긴 채 러시아에 의해 군사적으로 공격당했고 리비아는 프랑스와 영국(미국을 배후로 하여) 의 공격을 받았다. 교훈은 명백하다: 그 지도자들의 눈에 “폭탄”은 아마도 더 약한 세력들이 너무 심하게 떠밀리거나 심지어는 강자들에 의해 전복당할 위험을 피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일 것이다. 이러한 정책을 물론, 몇십년 동안 핵무기를 보유하며 그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이해를 위해 자신들 스스로 핵무기를 통한 위협을 활용해온 강대국들을 수용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한다. 냉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모든 핵무기세력들(미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영국)은 추산적으로 22000개의 핵폭탄에 해당하는 거대한 핵무기병창고를 유지했다. 그리고 약해지고 세계 도처에서 도전받기는 해도 유일하게 남은 초강대세력인 미국은 오랜 동맹국 이스라엘이나 인도 같은 나라들이 미국에게 도움이 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 예를 들어 인도의 경우는 중국과 파키스탄에 대항해 미국에게 무게를 실어주는 역할을 하는 한, 핵폭탄을 보유하도록 허용했다. 그래서 미국 자신이 핵무기의 확산에 기여했다. 현존의 핵무기보유국들 사이에서 지금까지는 러시아와 중국의 미사일만이 미국 영토에 도달 할 수 있고, 이란의 미사일은 핵이 장착되었든 그렇지 않았든 그럴 수가 없다. 북한은 아마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최초의 “깡패”국가가 될 것이다. 이를 미국은 견딜 수 없다.

냉전동안 핵무기 사용의 위협은 강대국들에 제한되어 있었다. 1989년 이래 핵확산은 더 많은 나라들이 핵무기에 접근하게 되었거나 그러한 무기들을 재빨리 생산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러한 무기들이 테러리스트 그룹들의 손에 들어갈지도 모르는 위험을 아무도 배제할 수 없다. “양극(bi-polar)”의 핵대학살의 위협이 더 심각한 “다극(multi-polar)”의 핵대학살이라는 악몽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상황 격화는 북한체제의 특이성과 그 생존투쟁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남북한에서 충돌 자체는 그 지정학적 위치때문에, 그리고 미국과 중국의 세계적 제국주의적 경쟁를 격화시킴에 있어 이 국가들에 대한 갖는 한국의 중요성때문에 또 다른 성질을 띤다.

제국주의적 장기판 위의 한국

한국은 늘 그 이웃 나라들의 제국주의적 야망의 표적이 되어왔다. 극동지역에 대한 우리의 국제평론 특별호에서 우리가 썼듯이, “ 이유는 명백하다: 러시아와 중국과 일본에 의해 둘러싸인 지리적 위치때문에 한국은 나라가 다른 다라로 팽창하기 위한 발판이 된다. 한국은 일본이라는 섬제국과 러시와와 중국이라는 두개의 대륙제국들 사이의 호두까기기게 안에 헤어날 없이 끼여있다. 한국을 통제하게 되면, 동해와 황해와 동지나해라는 3개의 바다를 통제할 있게 된다. 만약 한국이 다른 나라의 통제하에 있게 된다면, 한국은 다른 나라들의 등뒤의 칼역할을 있을 터이다. 1890년대 이래 한국은 지역의 주요 도적들의 제국주의적 야망의 표적이 되었다. 도적들은 처음에는 러시아와 일본과 중국 이렇게 3개국이었고, 이들은 각각 배후에서 활동하는 도적들인 유럽과 미국으로부터 지원과 저항을 받았다. 특히 한국의 북부가 몇몇 중요한 자원들 보유하긴 하지만, 한반도가 지역 제국주의에게 중요한 주춧돌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전략적 위치 때문이다.5

특히 한반도가 한국전쟁에서 현상태로 분단된 이래, 북한은 중국과 남한, 그래서 중국과 미국사이의 완충지대 역활을 해오고 있다. 만약 북쪽의 체제가 무너진다면, 남한의 군대뿐만 아니라 미국의 군대도 이전에 비해 훨씬더 중국국경에 가깝게 배치될 것이다. 이것은 중국에게는 악몽이다. 그래서 중국은 자신의 국경을 특히 미국에 대항해 방어하기 위해서 북한의 체제를 지원할 수 밖에 없다. 북한 정권이 예측불가능하고 이단자처럼 행동하려 하면 중국은 평양에 대항한 특정 제재에 동참할 수 밖에 없지만, 그 체제를 완전히 질식사시키는 것에는 반대한다. 중국에게 북한 정권의 공격적 정책은 양날의 칼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미국과 남한과 일본으로부터 더 강력한 군사적 대응을 자극하며 북쪽 지대에서의 중국의 위치를 약화시키지만 남쪽 지대(예를 들어 남지나해)에서 작전에 더 많은 여지를 남길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 정권의 붕괴는 미국과 자신의 숙적 일본에 정대면하여 중국이 더 공격당하기 쉽게 만들 것이다. 북한정권의 붕괴 그리고 중국으로 들어오거나 중국을 통과해 가는 난민 물결의 결과는 베이징으로서는 극도로 위협적일 것이다.

그 지위가 위협당하고 침식당하긴 했지만 그래도 미국은 역설적이게도 동시에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이득을 본다. 왜냐하면 그러한 위협들은 중국 주변에서 미국 자신이나 동맹국들의 군사적 존재성을 강화하는데 환영할 만한 정당화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측하건데, 만약 북한이 그렇게 도발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면 미국이 새로운 사드 무기체제를 그렇게 쉽게 남한에 설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남한의 설치된 어떤 무기도 손쉽게 중국을 겨냥해 사용될 수 있어서, 남한에게는 “방어용”무기로 제시된 것이 동시에 중국에게는 “공격용”무기인 것이다.

북한과 남한 및 미국 사이의 충돌은 극동에서의 새로운 조합에 의해 악화된다. 1990년대 중국도 경제적 상승과 거의 동시에 다시 제국주의적 야망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군대의 현대화와 자국 영토주변과 인도양 및 남동아시아의 바다에“진주목거리(string of Pearls)” 해상기지들의 건설을 우리는 보았다. 이는 적어도 남지나해의 일부에서는 일종의 군사적 점령이었다. 또한 지부티에 군사기지건설,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증가된 경제적 무게, 발틱해와 지중해 그리고 극동 등에서 러시아와의 합동군사훈련을 목격했다. 미국은 중국을 제한되어야할 제1의 위협으로 지목했다. 그래서 일본의 재무장(심지어 일본이 핵폭탄을 보유하게 허락할지도 모른다)은 남한에서의 증가된 군사적 노력들과 마찬가지로 남한을 보호함과 동시에 중국을 견제하려는 세계적 전략의 일부인 것이다. 물론 이는 미국 군비산업에 부가적인 뒷받침을 제공했다. 사우디 아라비아와 함께 남한은 미국군비산업의 가장 중요한 고객들 중 하나가 되었다. 미국의 거대한 군사기구의 재정에 대한 그 기여도는 오늘날 상당하다.

동시에, 북한이 지금 핵공격 역량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제국주의가 이 지역에서 군사적으로 대응공격을 하기는 더 힘들어질 것이고 그래서 다른 분쟁지대에서 중국에 대응하려는 그 결의를 강화시킬 것 같다.

북한과의 어떤 직접적 군사적 대치도 양측에 파괴의 연쇄반응을 개시할 것이다. 남한 인구의 반이 서울지역에 살고 남한에 거주하는 2십5만명의 미국인중 다수가 이 지역에 살고 있다. 이 지역은 모두 북한 미사일의 도달 범위내에 있다. 트럼프의 “불과 분노”위협은 무수한 한국인뿐만 아니라 많은 미국민의 죽음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북한 체제의 타도는 이것이 전세계 제국주의 수준에서 의미하게 될 격화는 말할 것도 없이 남한에서의 거대한 파괴를 댓가로만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주류 언론에서 이러한 전개를 다루는 지배적인 견해는 평양에 미친자가 권력을 쥐고 있다는 사실에서 또는 김정은과 트럼프 양자의 자아도취와 비합리성의 대결에서 오는 결과로 여기는 것이다. 두 사람이 정신분석적 연구에 많은 흥미로운 특성들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고 그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상황격화에 더 스팩타클하고 거의 히스테리컬한 톤을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의 국가 자본을 방어한다는 관점에서 김정은의 핵정책은 상당히 이치에 맞다는 점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다. 진정한 비합리성은 더 깊은 곳에 놓여있다, 진전해 가는 자본주의 부패의 시기에 국가의 경쟁이라는 비합리성에 놓여있다. 극동에서의 군비경쟁은 군국주의라는 확산되어가는 종양의 한 표현일 뿐이고, 그것은 역사적인 막다른 길에 갇힌 사회체계의 필수적인 산물이다. 그 어떤 정치가도 그 정신적인 프로필과는 무관하게 이 체계의 지독한 논리를 피할 수 없다. 영리하고 언어적 표현에서 분명한 버락 오바마는 중동에서 부시행정부의 재앙적인 관여를 축소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미국이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군대를 철수할 때마다 극동에서 그 존재를 더 강화시킬 수 밖에 없었다. 트럼프는“외국 전쟁”, 특히 중동에서의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피하지 못한 무능력을 들어서 자신의 전임자들을 비판했지만, 지금 거의 모든 지역에서 미군의 존재를 증대해야 했다. 실상, 오바마와 트럼프 모두는 군국주의의 장악이 정치가 개인들의 선언이나 바램보다 더 강력함을 보여주었다.

중국의 북한과의 불화

역사적으로 중국은 한반도를 놓고 벌어진 투쟁에서 비싼 댓가를 치뤘다. 한국전쟁에서 마오쩌뚱의 군대는 그 최초의 외국침략에 나서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그리고 한국전쟁 이로는 더욱더, 미국은 그 지역에서 거대한 군사기지를 유지하는 것을 정당화하는데 중국의 위협을 이용해왔다. 게다가 중국은 일본과 라이벌 관계에 있다. 그러한 문맥에서, 중국이 남한에 대해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한 현재로서, 중국은 경제 카드를 활용해 오고 있다. 남한을 되도록이면 중국 경제에 의존적으로 만드는 것이 그 목적이다. 오늘날 이미 남한 수출의 주요시장은 중국(대략 23%)이지 더이상 미국(12%)이 아니다. 그리고 남한은 중국생산품이 수출되는 네번째로 큰 시장이다. 이러한 정책이 당한 심각한 패배의 상징이 바로 사드미사일방어체제의 남한내 배치이다. 베이징은 즉각 서울에 대한 경제적 제재를 가하겠다는 위협으로 대응할 필요를 느꼈다. 지금까지 베이징의 평양에 대한 정책은 북한이 중국이나 베트남의 예를 따르도록 설득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즉, 스탈린주의 당이 권력을 유지하면서도 국가 소유 공장들을 사유화하고 외국 투자에 개방적으로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김정은은 이러한 생각에 그 아버지보다 더 개방적임이 드러났다. 경제의 30%~50%는 오늘날 사유화된 것으로 말해진다. 이렇게 사유화된 부분은 동유럽 국가들과 러시아 그리고 중국의 경험으로 볼 때 당에 속하거나 당에 충성적인 무리들 그리고 군대 자체가 주로 소유함을 의미한다. 비록 이러한 사유화가 공식적이지는 않지만(어떤 법적 근거도 없기에 언제라도 번복될 수 있다), 경제의 몇 부문들을 더 효율적이게 만든것 같다. 백만명의 이용자를 가진 자체의 이동통신체계가 (한 이집트회사의 도움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베이징과 평양의 관계는 최근 몇년간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왔고 전자의 후자에 대한 영향력은 분명하게 약화되어왔다. 주요한 상충영역은 핵무기개발이다. 어느 정도 경제적 발전을 도모하라는 중국의 제안을 수용하는 대신 김정은은 그의 최우선 과제는 경제가 아니라“폭탄”이라고 늘 주장해 왔다. 그에게 폭탄은 정권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다. 일단 이것이 성취되고 나면 경제를 생각해 볼거라고 그는 말한다. 김의 폭탄은 그래서 중국 영향력의 한계의 상징일 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군사적 이해의 무게가 경제적 이해들보다 얼마나 더 큰지를 또한 보여준다.

중국은 블럭 지도자가 아니어서 북한에 어떤 “징계”도 부과할 수 없고 이점은 부가적인 요소를 첨가해서 여기서“각자 제홀로(every man for himself)”의 경향은 상황을 훨씬 더 예측불가능하게 만든다. 결국, 김정은과 그 군대는 미국이 핵충돌을 피하길 원한다는 판단하에 생존을 위해 폭탄을 가지고 도박을 하고 있고 반면, 그러한 계산은 자본주의 지배자들이 권력 유지를 위해서든 단순한 복수욕구 때문이든 지구의 초토화를 자행하고 결국 자신들 자체의 절멸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막지 못해 왔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히틀러가 자신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학살과 처형 명령을 주저했던가? 아사드는 통제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제 나라 대부분의 파괴를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극동에서 우리는 그래서 주요 라이벌들인 미국과 중국사이에 긴장이 첨예화되고 이 두 주도적 열강의 뒤에 러시아와 일본이 무리를 짓는 것을 본다. 그러나 이 주도적 열강들은 그들 뒤에 군사 블럭을 형성하지는 않는다. 일본과 남한은 북한과 중국에 대항해 미국이 제공할 수 있는 보호 수준에 걸맞게 미국을 지지하지만 그들은 미국의 하인들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들의 운신의 여지를 찾는다. 남한과 일본도 특정 섬을 놓고 영토분쟁을 해오고 있다. 그동안 국내의 온갖 테러리스트들에 대항한 투쟁에서 미군의 지원에 의존하는 필리핀과 같이 과거에 미국을 지지했던 다른 나라들은 남지나해에서의 충돌에서 중국의 편을 들겠다고 위협했다. 투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서방국가의 무기대신에 러시아와 중국의 무기를 구매할 가능성을 내비쳐 오고 있다. 그리고 남한 내부에서도, 여전히 없어서는 안될 보디가드로 남아 있는 미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 지배 분파들의 무조건적 충성에 의지할 수 없다. 이 남한 지배 분파들의 몇몇은 미국의 장기판의 장기말 정도에 지나지 않음을 느끼고 있다.

남한 지배계급의 민족적 이해

남북한 모두 더 큰 라이벌들에 대해 중요한 완충 역할을 하기에 그 지역의 모든 제국주의적 도적들은 한반도의 분단을 유지하려 한다. 이것은 평양 정권에도 해당된다. 그런데 남한 지배계급은 통일을 늘 꿈꿔왔고 주기적으로 목표로 해왔다. 평양과의 협력 확대를 주창하는 소위 “햇볕 정책”은 최종적으로는 통일을 바라며 좀더 장기적 해결을 도모하려는 시도이다.

남한 지배계급 내부의 이러한 꿈은 1990년 독일의 통일 이후 더 강해졌다. 이 사건은 한반도의 통일을 세계정치의 현안에 올려놓으려는 남한의 열망에 힘을 실어주었다. 독일의 예를 따라서 남한 정치인들은 1970년 서독수상 빌리 브란트의 동독정책의 일종의 남한 버젼인 자신들의 “햇볕 정책”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 목적은 남한에 대한 북한의 경제적 “인도적”의존성을 재통일의 준비 수단으로서 확립하는 것이었다. 남북한은 서로를 외교적으로 인정하고 1991년 9월 유엔의 회원국이 되었다. 그 3개월 후 그들은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reconciliation, non-aggression, trade and collaboration)”합의를 체결했다. 이 합의서는 비록 평화협정은 아니였지만 남북한 두 나라 사이의 전쟁상태를 종결했다. 그 당시 남한정부가 지적했듯이, 남한이 요구해왔던 평화협정은 북한을 외교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미국 때문에 이뤄질 수 없었다. 워싱턴의 이러한 태도는 “햇볕 정책”을 약화시켜서 결국 후임 대통령 김영삼은 당시 미국대통령 빌 클린턴의 도움을 받아 대북강경책으로 전환했다. 이 후자의 정책은 냉전중에 미국이 소련에 대항해 발전시킨 소위 캐넌 독트린(Kennan Doctrine)을 모델로 삼는다. 이는 적의 정권을 굴복시키기 위한 군사적 봉쇄와 경제적 목조르기를 내용으로 한다. 1994년 북한의 핵무기개발 시도에 대응하여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그 정권의 핵발전소시설에 대한 방어적 공격을 고려했다. 1994년 가을 제네바협정에서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북한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강화했다. 그 결과로 생겨난 남북간 충돌의 악화는 1995년과 1998년 사이에 북한을 엄습한 심각한 굶주림에 기여했다. 이 재앙은 다시 햇볕 정책 지지자들이 권력에 새로이 도전하는데 이용되었다.

남한의 대기업 현대의 창업자 정주영은 1998년 소 천마리를 북한에 상징적으로 기증함으로써 남한정부의 북한경제 목조르기정책에 의문을 제기했다고 한다. 가장 열렬한 햇볕 정책 신봉자이고 이것을 기반으로 대선에 승리한 김대중은 2000년대 초 북한의 상대자 김정일(김정은의 아버지)을 만났다. 이 “역사적 정상회담”은 그 참여하기를 북한이 처음에는 꺼렸음에도 현대가 제공한 1억 8천 6백만 달러의 힘으로 그리고 남한 비밀 정보부의 도움으로 성사되었다. 이에 2004년 중요한 경제적 모험이 뒤따랐다. 중국을 모델로 하여 북한의 개성에 경제특구가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남한 기업들은 투자를 하고 북한 노동력을 값싸게 착취할 수 있었다. 그의 햇볕 정책으로 김대중은 노벨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그와 그의 후임 노문현에게 남한의 라이벌과 미국의 반대를 초래했다.

북한은 남한에서 햇볕 정책이 늑의양양하게 귀환한 것에 분노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독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한번 살펴보기만 하면 된다. 그곳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의 지배하에 있던 동독은 1990년 모조리 삼켜졌다. 그러한 상황에서 북한의 스탈린주의자들은 동베를린에서 일어난 것처럼 자신들의 권력을 잃을 위험을 감수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명을 거는 것이었다. 서울의 좀 더 화해적인 접근도 그것이 곧 북한의 종말의 시작일 것임을 느끼는 평양의 스탈린주의자들의 두려움을 쓸어내버릴 수는 없었다. 북한 정권이 “협력을 통한 변화(transformation through cooperation)라는 남한측 정책을 지지할 것이라는 남한 햇볕 정책 주창자들의 희망은 산산이 부서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햇볕 정책은 워싱턴으로부터 어떤 지지도 받지 않았다.

그러는 중간에 북한에 대해 더 강경한 노선을 택한 박근혜의 탄핵이 있은 후 현재 문재인이 2017이 정권을 넘겨받았다6. 문재인은 북한과의 대치보다는 대화와 협력을 원칙으로 하는“햇볕 정책”의 확고한 옹호자로서 권력에 도달했다. 그는 북한과 미국사이의 새로운 격화에 격분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적어도 초기에는 미국의 사드 미사일방어시스템을 남한에 배치한다는 도달드 트럼프의 결정(문 정부와 상의없이 이뤄진것이 분명한)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 결정은 탄핵된 전임 대통령인 박근혜 집권 당시 이미 계획된 단계였다. 현재의 충돌에서 도날드 트럼프의 편을 드는 대신에 서울의 정부는 처음에는 양측 모두에게 자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가장 최근의 핵무기 테스트와 위협들이 있은 뒤 문재인은 갑자기 미국 핵무기의 전개를 요구하고 사드와 같은 새로운 미사일 시스템의 남한내 배치를 관철했다. 또한 (지금까지 800km로 거리가 제한되어 있던)남한 미사일의 반경과 500kg의 운반용량은 상당히 증가될 예정이다. 이 모든 것은 그의 햇볕 정책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결론짓기는 어렵지만 그 정책을 확실히 위태롭게 한다.

노동자계급의 핵심역할

모든 나라들에서 지배계급은 노동자계급을 민족주의 영역에 묶어두려 애쓴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은 그러한 함정으로 유혹당하기를 거부해야 한다. 진정, 북한의 노동자계급의 투쟁성과 의식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일상적인 감시과 테러에 직면해서 그 어떤 저항도 대대적이야만 할 것이고 국가와 군대 그리고 정치기구에 적접적으로 맞서게 될 것이다. 이것은 현재 있을법 하지 않다. 게다가, 유엔 제재의 효과는 북한 정권을 질식시키지 않을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노동자계급을 강타할 것이다. 권력자들이 성공적인 미사일 테스트들을 환영할 때마다 노동자들과 농부들은 새로운 제재가 다가오고 있음을 그리고 그 댓가를 자신들이 치뤄야함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굶주림의 위험에 대해 권력자들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더 많은 무게가 남한과 중국의 노동자계급의 어깨에 놓여있다. 비록 수 십년간의 “반공산주의 캠페인”때문에 많은 노동자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시각이 왜곡되어 있지만, 남한과 중국 노동자들은 지난 몇 십년 동안 전투적이고 대대적인 많은 투쟁들에 참여해 왔고, 이것은 자신들의 착취자들의 제국주의적 전쟁에 순순히 희생양이 되지는 않겠다는 한 표현이다. 그리고 노동자계급내의 저항이 그 어느 정도일 지언정 전쟁 몰이에 맞서려면 “노동자들에게 조국은 없다”라는 노동자계급의 가장 오래된 원칙이자 슬로건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존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한국의 국제코뮤니스트전망(International Communist Perspective) 동지들이 쓰고 우리가 여기에 공개하는 국제주의자의 성명서를 지지한다.

우리는 이 성명서에 약간 비판적이다. 특히 사드 배치에 그 중점이 놓여있기에 자칫하면 이것은 단일한 사안 캠패인들이 마치 전쟁 기계의 요구들에 대항해 노동자들의 이해를 방어하는 노동자들의 투쟁과 동등하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계급이 의식을 발전시길 수 있는 것은 이런 저런 무기체계에 대항한 캠패인에 의해서가 아니다. 혁명가들의 임무는 “민족적 단일성(national unity)”이라는 환상을 깨고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과 진정한 연대를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급의 요구들을 위한 투쟁들에 참여하면서 체제 전체의 난국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이한 관점들은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 논쟁되어야지 그들이 공유하는 원칙의 방어를 위해 협력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제 1차 대전 발발후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국주의 충돌에 대항해 함께 싸웠지만 민족문제에 대해서는 열띤 논쟁을 펼쳤음을 환기한다. 그래서 우리는 ICP 동지들과 이 지역에서 진정한 국제주의를 위해 싸우는 모든 이들과의 진정한 연대에 참여한다.

2017년 9월 18일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1노동자들은 한달에 이틀 쉬고 노예처럼 일해서 120-150달러정도를 받는다.

2“동구권 나라들에서 경제적 정체적 위기에 대한 테제“,"Theses on the economic and political crisis in the eastern countries" 을 참조

3지도자의 타이들 목록은 끝이 없다. "김정일의 호칭 목록" 을 참조

4파월 미국외무장관과 블레어영국수상 모두는 사담 후세인이 이미 핵무기를 보유한다고 경고했다. 그것은 “허위 뉴스”로 판명되지만 2003년 당시 이라크 침공의 빌미가 되었다.

6박근혜의 탄핵 이유들은 다층적이었다. 한편으로 그것은 “햇볕 정책파”와 “강경노선파”사이의 권력투쟁이었고 우리는 박근혜에 반대한 큰 시위물결의 배후에서 “햇볕정책파”도 어느정도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동시에 엄청난 부정부패에 관한 국민의 분노도 그녀의 종말에 기여했다. 어쨌든 이 모든 것은 민주주의의 이미지를 끌어올리는데 이용되었다.

 

북한을 둘러싼 전쟁 압력에 대한 성명서 – 국제코뮤니스트전망(한국)

우리는 한반도의 제국주의 긴장 상태에 대한 국제코뮤니스트전망(International Communist Perspective)의 성명서를 여기에 게시한다.

우리는 이 성명서에 약간 비판적이다. 특히 사드 배치에 그 중점이 놓여있기에 자칫하면 이것은 마치 전쟁 기계의 요구들에 대항해 노동자들의 이해를 방어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단일한 사안 캠패인들과 동등하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계급이 의식을 발전시길 수 있는 것은 이런 저런 무기체계에 대항한 캠패인에 의해서가 아니다. 혁명가들의 임무는 “민족의 단일성(national unity)”이라는 환상을 깨고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과 진정한 연대를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급의 요구들을 위한 투쟁들에 참여하면서 체제 전체의 난국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성명서에서 국제 노동자계급의 목소리, 즉 전체 자본가계급의 제국주의자들(소위 “공산주의자들“을 포함해서) 을 비난하는 목소리를 인식한다. 따라서 우리는 ICP 동지들과 이 지역에서 진정한 국제주의를 위해 싸우는 모든 이들과의 결연한 연대에 참여한다.

ICC의 상황 분석은 여기 를 참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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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와 미국의 사드 배치 강행을 규탄한다.

사드 철거!!! 자본가 정부, 제국주의 전쟁위기에 대항하여 자본주의 국가를 넘어 투쟁하자!

  97일 문재인 정부와 미국은 주민을 비롯한 수많은 반대에도 성주 소성리에 사드 배치를 강행했다. 사드의 한반도 배치는 북핵 문제 해결에도, 한반도-동아시아 평화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위선적인 안보 놀음'이다. 그것은 미제국주의 세력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한반도 전쟁 위기 고조 프로그램이자, 제국주의 격돌의 최전방에 한국을 앞세우는 전략일 뿐이다.  

우리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 목적이 체제 보장이라는 주장에도 끝내는 민간인 특히 노동자계급에 대한 대량 학살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또한, 민간인을 무차별하게 학살한 핵무기를 전쟁에서 사용한 유일한 세력이 미제국주의 세력임을 결코 잊지 않고 있다. 역사는 남북한에서 서로 다르게 보이는 두 개의 체제가 노동자계급 착취라는 면에서 동일하며, 노동자계급의 절대적인 ''임을 보여주었다. 노동자들은 어느 한 쪽 편도 들어서는 안 된다.  

동아시아에서 긴장의 극대화는 자본주의의 파괴적 경향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최근의 충돌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위험을 훨씬 더 키웠다. 이번에는 더욱 강하게 최악의 맞수로 충돌하고 있다. 북한뿐만 아니라 미국과 중국, 중국과 일본 모두 강력하게 무장한 채 군비경쟁을 가속하고 있다.  

두 번의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이후의 수많은 전쟁은 항상 노동자계급에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오늘날, 동아시아의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의 치명적 악순환 속에서 더는 자신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 오직 노동자계급만이 인류를 야만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 그것을 위해 노동자계급은 애국주의(민족주의)와 군비경쟁(군사주의)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한다. 노동자계급에 유일한 해결책은 남과 북(, , )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지배계급에 맞서 결연하게 투쟁하는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를 추구한다던 문재인 정부의 이번 사드 배치는 북핵 억제가 아니라 오히려 핵무기 경쟁을 포함한 군사적 대립이라는 화약고에 기름을 붓는 격이다. 이번 사드 추가 배치 결정과 강행은 문재인 정부의 '평화 정책', '민주적 절차', '자주외교' 주장의 위선과 무능을 넘어 제국주의 세력과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 봉사하는 현 정부의 정치적, 계급적 본질을 온 세상에 드러냈다.

출범 4개월도 되지 않아 이전 박근혜 정부와 다를 것 없는 만행을 저지른 문재인 정부에 맞서

노동자 계급은 정권교체-적폐청산이라는 '문재인 환상'에서 먼저 벗어나야 한다

노동자계급은 문재인 정부와의 연합전선-협력을 반대해야 한다.

사드 철거는 물론 자본가 정부, 한반도 전쟁위기에 맞서 싸워나가야 한다.

1. 미제국주의와 그 동맹국들의 북한 위협(전쟁 위협, 안보 캠페인)과 그에 대항한 북한의 핵무기 개발, 전쟁 위협을 반대한다.

2. 핵무기로 민간인을 실제 학살한 미제국주의와 또 다른 전쟁(위기)으로 향하는 북한의 핵무기 모두는 노동자계급에 가장 큰 재앙이 될 뿐이다. 노동자계급은 모든 핵무기를 반대한다.

3. 오로지 자신들의 정권과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에 따라 무기경쟁과 전쟁 위협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평화'를 주장하는 자본주의-제국주의 국가들의 어떠한 '평화 정책(협정)'도 믿을 수 없다.  

4. 자본주의 아래 인류를 위협하는 야만주의, 제국주의 전쟁, 그리고 핵 파괴의 위협을 영원히 끝장낼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자들의 전 세계적인 투쟁과 노동자 혁명임을 선언한다.

5. 사드 철거!!! 자본가 정부, 제국주의 전쟁위기에 대항하여 자본주의-국가를 넘어 투쟁하자!

노동자들에게 수호해야 할 조국은 없다!

전 세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201797

국제코뮤니스트전망

ICConline - 2018

22회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대회: 국제 계급투쟁에 대한 결의안

1. 예상치 못한 영국의 EU 국민투표 결과 직후,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은 불안과 공포의 파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현재 세계 질서를 책임지고 있다고 여기는 우리의 지배자들이 어떻게 그런 일 – 자본가 계급의 ‘합리적’ 이해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 – 이 발생하도록 놔두었는가? 어떻게 도박꾼, 자기도취에 빠진 악당이자 사기꾼이 이제 세계의 가장 강력한 국가의 수장인 것인가?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도, 전 세계의 향방에 대해 이 사건이 이야기해주는 바가 무엇인가?

 

 

1. 계급투쟁 100

 

2. 우리의 관점에서 인간 사회의 진정한 조건을 계급투쟁의 관점, 그리고 사회의 착취 받는 계급, 진실을 숨기는데 아무런 관심이 없고 자본주의 전복을 목표로 하여 자본주의의 모든 신비화를 간파할 수밖에 없는 투쟁을 하는 프롤레타리아트 관점에서 볼 때만 이해할 수 있다. 똑같이, 현재 당장 지엽적인 사건들은 세계-역사적인 틀 속에 위치 지울 때만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맑스주의 방법의 본질이다. 2017, 이 해가 러시아 혁명의 100주년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이유로, 세계적 상황에서 최근 진전이 있는 역사적인 시대 – 자본주의 생산 양식 쇠퇴 또는 퇴락의 시대 - 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100년 그 이상을 되돌아보기를 시작한다.

 

러시아 혁명은 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의 공포에 대한 러시아 노동계급의 대응이었다. 1919년 코민테른이 확인하였듯이, 이 전쟁은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자 자본주의 상승기의 폐막을 나타냈다. 경쟁하는 국가들로 세계를 나누었던 장벽을 허물면서, 자본주의 ‘세계화’의 거대한 폭발 다시 말해 ‘전쟁과 혁명’의 시대가 닥쳐온 것이었다. 모든 나라에서 부르주아 국가를 전복시킬 수 있는 노동계급의 역량,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향해 계급을 지도할 수 있는 정치 정당과 함께할 수 있는 노동계급의 역량은 자본주의 야만을 교체한다는 약속이 역사적으로 가능하며 필연적이라는 것을 나타냈다.

 

더욱이, 1917년 혁명 운동의 전위에 있었던 볼셰비키 당은 러시아에서 노동자평의회(소비에트)의 권력 쟁취가 오직 세계 혁명의 발단으로서 첫 타격일 때에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와 똑같이, 독일 혁명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10월 봉기가 제기한 도전에 반응하지 않고, 자본주의 체계를 끝장내지 않는다면, 인류는 심화하는 야만의 시대, 인간의 문명을 위험에 빠뜨릴 전쟁과 파괴가 휘몰아치는 시대에 돌입할 것임을 이해했다.

 

세계 혁명을 염두에 두고, 이제는 반혁명적인 사회민주당에 대한 대안을 마련할 필요에 따라 볼셰비키 당은 코민테른의 창설을 주도했고, 1919년 모스크바에서 첫 대회가 열렸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새로운 코뮤니스트당은 서유럽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확장되는 선두에 있었다.

 

3. 러시아 혁명은 세계적인 수준의 대대적 파업과 봉기를 촉발해 실제로 부르주아지의 제국주의 학살을 중단하도록 강제했지만, 예외적으로 헝가리와 독일의 도시들에서의 일시적인 몇몇 시도를 제외하면, 국제 노동계급은 다른 국가들에서 권력을 쟁취할 수 없었다. 잠재적이지만 자신의 무덤을 팔 이들의 위협에 직면한 지배 계급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응하여 숙원의 적과 연합함으로써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봉쇄, 침략, 그리고 무장된 반혁명을 지원함으로써 러시아의 소비에트 권력을 고립시켰고, 제국주의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자본에 충성을 보여준 사회민주주의노동자정당과 노동조합을 이용하여 독일의 노동자평의회에 침투하거나 그것을 무력화하고, 그들이 새로운 ‘민주주의적’ 부르주아 정권에 순응하도록 우회시켰다. 그러나 패배는 이제는 반동적인 지배계급의 지배 역량 때문만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미성숙함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노동계급은 개혁을 위한 투쟁에서 혁명을 위한 투쟁으로 갑작스러운 전환에 직면해 있었고, 여전히 민주주의적 선거를 통해, 중요 산업의 국유화 또는 사회의 가장 가난한 계층에게 사회적 이득을 양도해 자본주의 정권을 개선시킬 가능성에 대한 수많은, 심각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이에 더하여 노동계급은 꽃다운 젊은이들이 학살당한 전쟁, ‘승리한’ 노동자와 ‘패배한’ 국가의 깊은 분리를 일으킨 전쟁의 공포에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당은 고립, 내전, 그리고 경제 붕괴에 직면해 있었고, 더욱이 소비에트 국가기관과의 복잡한 문제로 얽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볼셰비키 당은 일련의 끔찍한 오류를 저질렀는데, 이러한 오류는 결국 노동계급과 폭력적인 대립을 앞당겼다. 특히 노동자의 반대와 정치조직에 대한 억압을 포함하는 ‘적색 테러’는 1921년 크론슈타트 봉기를 진압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는데, 이 봉기는 1917년에는 존재했던 진정한 소비에트 권력 회복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국제 수준에서 코민테른 역시 세계 혁명의 필요보다 소비에트 국가의 필요에 점점 더 기울었고 원래의 명료함을 훼손하는, 1922년에 채택한 통일전선전술(United Front Tactics) 같은 기회주의적 정책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타락은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 정당으로 유명하고 중요한 좌익 반대파의 등장에 이바지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정당에서 이탈리아 분파가 결국 패배한 혁명의 교훈을 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에 밝혀낼 수 있었다.

 

4. 따라서 세계 혁명 물결의 패배는 1917~18년의 혁명가들이 이러한 실패의 결과 – 야만의 시대로의 새로운 추락 - 에 대해 경고했던 것이 진실임을 확인시켜주었다.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변질되었을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에 반대하는 자본주의 독재로 변해버렸다. 그것은 ‘일국 사회주의’ 원칙을 내세운 스탈린주의 국가기관의 승리로 (비록 시작한 것은 그들이 아니었을지라도) 확인한 과정이었다. 혁명의 위협을 끝내기 위해 삽입된 ‘평화’는 곧 새로운 제국주의 갈등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1929년 과잉 생산으로 인한 세계 위기의 발발로 가속화, 강화되었는데, 이러한 과잉 생산은 자본 확장이 그 내재적 한계에 도달할 것이라는 신호였다. 체계의 심장부, 특히 미국과 독일의 노동계급은 경제적 불황의 충격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으나, 이 계급은 비록 미국과 스페인에서 일부 진정한 계급 저항의 표현이 있었음에도 10년 전 혁명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근본적으로 패배한 계급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세계 전쟁으로의 또 다른 진군을 막을 수 없었다.

 

5. 반혁명의 갈고리에는 세 개의 주요한 갈퀴가 있었다. 스탈린주의, 파시즘, 그리고 민주주의. 이들 각각은 노동계급의 정신에 깊은 상처를 새겼다.

 

반혁명은 혁명의 불꽃이 가장 높게 타올랐던 국가들 – 러시아와 독일 - 에서 가장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유령을 쫓아내야 할 필요, 역사상 가장 큰 경제적 위기에 적응할 필요, 그리고 전쟁 준비의 필요에 직면한 모든 곳에서 자본주의는 전체주의적 형태를 띠기 시작했고, 사회경제적 삶의 모든 모공에까지 침투했다. 스탈린주의 정권은 완전한 전쟁 경제, 모든 반대의 격멸, 무시무시한 착취율, 광범위한 강제 수용소 등의 기조를 세웠다. 그러나 수십 년 후의 삶과 죽음에서 스탈린주의의 가장 최악의 유산은 그들이 10월 혁명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가면을 썼다는 것이다. 자본을 국가의 손에 집중시키는 것이 사회주의인 것인 양, 제국주의 확장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인 양 세계에 팔려나갔다. 10월 혁명의 기억을 여전히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을 때는 많은 노동자가 이런 사회주의 조국이라는 신화를 믿었지만, 스탈린주의 정권의 진정한 본질이 계속 폭로됨에 따라 더 많은 이들이 혁명에 대한 모든 사상에 등을 돌렸다. 스탈린주의가 코뮤니즘(공산주의)의 전망, 노동계급 혁명이 높은 수준의 사회 조직 형태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에 가한 피해는 막대하다. 스탈린주의가 구름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끌어내리지 않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국제 계급 운동의 패배와 무엇보다도 정당을 타락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트라우마가 된 1914년 사회민주주의당의 변절 이후, 20년이 되지 않은 기간 동안 노동계급이 힘차게 만들고 방어한 조직이 노동계급을 다시 한번 배신하고 가장 최악의 적이 된다.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신감, 사회적 삶을 더 높은 수준으로 인류를 이끌어갈 가능성에 대한 확신에 이보다 더 큰 타격이 있을 수 있었을까?

 

지배계급, 그리고 중간계급에 버림받은 이들, 그리고 심지어 노동계급 운동의 변절자들로부터 출발한 운동인 파시즘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가장 강력한 분파가 받아들였는데, 이는 그들의 필요 - 프롤레타리아트를 분쇄하고 전쟁 동원을 완수하는 것 - 에 부합했기 때문이었다. 파시즘은 부르주아 사회의 표면 아래에 있는 비합리성의 어두운 힘을 해방하는 근대적 기술 사용에 특화되어 있었다. 특히 나치즘은 독일에서 더욱더 파괴적인 패배의 산물이었는데, 중세적 대학살을 안정화, 산업화시키고, 결국 자기-파괴를 향한 광적인 행진으로 타락한 대중들을 끌고 가는 등 비합리성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노동계급은 전체적으로 파시즘에 대한 어떤 긍정적인 생각에도 흔들리지 않았으나, 반대로 반파시즘의 유혹 - 다가올 전쟁에 대비해 뭉치자는 주요한 호소 - 에는 훨씬 취약했다. 그러나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에 대한 전례 없는 공포는 스탈린주의 강제수용소 못지않게 인류의 미래에 대한 확신 – 곧 코뮤니즘의 전망 – 에 대한 타격이었다.

 

선진 산업화 국가에서 부르주아 지배의 주요한 형태인 민주주의는 이러한 전체주의적 형태에 대해 적으로 자신을 포장했는데, 사실은 혁명적 노동자 운동을 끝장낼 때, 스탈린주의 정권과 전쟁에서 연합하여 히틀러 독일을 상대할 때에는 파시즘 지지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전쟁 중에 무너져 버린 파시즘이나, (중국과 기괴한 북한 정권의 경우를 제외하고) 경제 위기의 압박과 자본주의 세계 시장과 - 이를 국가 조례 등으로 회피하려 하였으나 그러지 못하고 - 경쟁할 수 없는 무능력함으로 무너져 버린 파시즘보다 훨씬 더 지능적이고 지속 가능한 자본주의적 전체주의의 형태임을 스스로 입증해 보였다.

 

체계의 위기에 대해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관리자들은 시장의 힘을 왜곡시키는 국가와 신용의 힘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으나, 물질적, 전략적 약점으로 인해 동구 블록이 선택했던 하향식 중앙집중화라는 극단적인 형태를 선택하도록 강요된 것은 아니었다. 민주주의는 그 경쟁자들에 비해 오래 살아남았고, 이제는 서구의 오랜 자본주의의 심장부에 남은 유일한 경기가 되었다. 오늘날까지, 2차 세계대전 시기 파시즘에 반대하여 민주주의를 지지할 필요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불경한 것이며, 자본주의의 정면 뒤에 지배계급의 독재가 있다는 주장은 음모론으로 기각된다. 이미 1920년대와 30년대, 민주주의에서 대중매체의 발전은 괴벨스가 부러워한 공식적인 선전 유포 모델을 제공했으며, 그동안 미국 자본주의의가 개척한, 여가와 가족의 삶의 영역에까지 침투한 상품 관계는 자본주의의 전체주의적 지배로 더욱 교묘한 경로를 제공했고, 이는 단순히 정보제공자와 노골적인 테러에 의존하는 것보다 효과적이었다.

 

6. 30~40년대 동안 국제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던 혁명적 소수는 매우 감소했는데, 그들의 희망과는 반대로 종전(終戰)은 새로운 혁명의 등장을 일으키지 않았다. 반대로 1917년의 교훈을 학습하여 처칠을 전위로 한 부르주아지가 독일 도시들에 융단 폭격을 하는 한편, 1943년 북부 이탈리아의 대대적 파업에 대해 “이탈리아 스튜는 그들의 국물로 만들어라!”라는 정책을 통해 어떤 프롤레타리아 봉기도 가능하지 않도록 그 싹을 잘라버렸다. 그러므로 종전은 노동계급의 패배를 심화시켰다. 그리고 또다시 혁명가들의 기대와 달리, 전후 경제는 더 심한 경제적 불황에 돌입하지 않았으며, 전쟁에 승리한 블록 간의 제국주의 적대가 인류의 목을 조이려 계속 위협하고 있음에도 세계 전쟁으로의 새로운 추동 또한 없었다. 오히려 전후 시기는 미국의 지도력 아래 자본주의의 진정한 확장기였으며, 세계 시장의 일부분(러시아 블록과 중국)이 서방 자본의 침투를 차단하려 했음에도 그러했다. 동구 블록의 긴축 재정과 억압이 계속되자 중요한 노동자들의 봉기(1953년 동독, 1956년 폴란드와 헝가리)가 발생했으나, 서구에서는 1947년 프랑스의 파업과 같이 일부 전후 불만에 대한 표현이 있었으나, 계급투쟁은 점차 사그라들어 사회학자들이 소비주의의 확산과 복지국가 발전의 결과로 노동계급이 ‘중산계급화’한다는 이론화를 시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실제로 1945년 이후 자본주의의 이러한 측면들은 중요하게 남아, 노동계급 자신을 혁명 세력으로 재조직화할 가능성에 무게를 더했다. 소비주의는 노동계급을 원자화했고, 모든 사람이 개인적 소유의 낙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환상을 전파했다. 복지주의는 좌익 정당이 종종 도입했는데, 이것은 노동계급의 승리로 표현되지만, 사실 자본주의 통제의 훨씬 더 중요한 도구이다. 복지주의는 노동계급의 자신감을 갉아먹고 국가의 자비에 의존하도록 만든다. 또한, 대규모 이민의 단계에서 민족 국가의 복지 조직은 건강·의료, 주택, 그리고 다른 복리후생에의 접근의 문제에 있어서 이민자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노동계급 내의 분리를 발생시키는 잠재 요인이 될 것이었다. 그동안 1950년대와 60년대 노동계급의 명백한 소멸과 더불어 혁명적 정치 운동은 역사상 가장 고립된 상태로 축소되었다.

 

7. 이러한 암흑기에도 계속 활동한 혁명가 중 일부는 자본주의가 관료제 국가 관리 덕분에 맑스가 분석한 경제적 모순을 통제할 방법을 학습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의 국제주의 그룹(Internacialismo group)과 같은 더욱 선견지명이 있었던 이들은 오랜 문제들 – 시장의 한계, 이윤율의 하락 경향 – 이 사라질 수 없으며, 60년대 후반 경험한 재정적 어려움은 노골적인 경제 위기의 새로운 단계를 예고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들은 또한 프롤레타리아의 새로운 세대가 계급투쟁을 다시 주장함으로써 이러한 위기에 반응할 수 있는 역량에 대해 환호했는데, 이러한 예측은, 수십 년 동안의 반혁명이 끝을 맞이했으며, 세계 전쟁으로의 과정을 촉발하는 새로운 위기를 막아온 주요한 방해요인이 프롤레타리아 투쟁이었음을 보여준, 19685월 프랑스의 엄청난 운동과 그 후의 국제적인 투쟁의 물결로 충분히 확인되었다.

 

8. 60년대 말 70년대 초의 프롤레타리아 봉기에 앞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폭넓은 계층 사이에서 정치 불안이 고조되었는데,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러했다.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과 인종 분리에 대한 반대가 있었고, 현대 자본주의의 분석에서 더욱 이론적으로 접근하는 데 관심을 표명한 독일 학생들 사이의 운동, 프랑스에서의 베트남 전쟁과 대학의 억압적 정책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운동, 현명한 사회학자들이 진부하다고 한 계급투쟁의 필연성을 다시 주장한 전후 이탈리아 맑스주의 ‘오퍼라이스트(operaist)’ 또는 자율주의적 경향 등이 있었다. 모든 곳에서 전후 경제 번영의 감미로운 과실이라고 광고하는 비인간적인 삶에 대한 불만족이 고조되었다. 프랑스와 다른 산업 국가들에서 전투적 투쟁의 증가로 동력을 얻은 소수는 의식적인 국제주의 정치 전위의 건설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이러한 소수의 일부가 좌익공산주의(코뮤니스트좌파)의 기여를 재발견하기 시작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9.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다시피, 이러한 소수와 광범위한 계급 운동의 만남은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가끔 발생했다. 이것은 불만을 품은 소부르주아지가 정치화된 소수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일부 기인한다. 특히 학생 운동은 자본주의 조직의 변화를 가져올, 다음 수십 년 넘게 존재할 강력한 프롤레타리아 핵심이 부족했다. 또한, 전 세계에 걸쳐 강력한 계급 운동 그리고 노동조합과 좌파 정당이 노동자들을 저지하느라 발생한 심각한 대결에도 계급투쟁의 다수는 방어적으로 남아있었다. 오직, 아주 가끔 직접 정치적 의문을 제기할 뿐이었다. 더욱이 노동계급은 동서 간 ‘철의 장막’ 그리고, 자본 중심에 있는 소위 ‘특권적’ 노동자와 이전 식민지 지역 빈곤한 대중들 사이의 분리와 같은 세계적 수준의 중요한 분리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는 동안 정치적 전위의 성숙은 즉각적인 혁명의 전망에 따라 억제되었고, 소부르주아지 성급함의 전형인 활동가(activist) 관행들은 혁명적 작업과 정치화된 소수가 직면한 거대한 규모의 이론적 작업이 가지는 장기적 성격을 포착하는 데 실패했다. 활동가주의(activism)의 우세는 소수의 다수가 좌익주의(leftism)의 부활에, 또는 투쟁이 침체 되었을 때는 타락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좌익주의를 거부한 이들은 종종 조직 건설의 문제 전체를 거부하는 평의회주의적 주장들에 의해 방해받았다. 그러나 작은 소수는 이러한 방해를 극복할 수 있었고, 성장과 재그룹화 움직임 활동을 개시, 1970년대까지 지속하여 코뮤니스트좌파(좌익공산주의)의 전통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코뮤니스트좌파 국제대회(International Conferences)의 몰락으로 상징되는 1980년대 초 갑작스럽게 끝났다. 1968년 거리에서 그리고 회의에서 제기되었던 동구와 서구의 자본주의를 새로운 사회로 대체하는 문제에 싹을 틔우고 보다 진전된 정치 수준에 이르게 하는 데 실패한 이 시기의 투쟁은 결국 뒤이은 시대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도 프롤레타리아 에너지의 거대한 폭발은 그 열기를 모두 잃지 않았고, 지배 계급은 이 에너지의 시선을 돌리고, 탈선시키고, 억압하기 위해 합심하여 노력을 기울였다. 근본적으로 이는 정치적 수준에서 발생했는데, 여전히 노동계급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자본주의 좌파와 노동조합의 힘을 최대한 이용한 것이었다. 좌파 정부를 선출할 것이라는 약속을 통해서든, 1968년 이후 20년 동안의 급진적 노동조합주의 발전과 함께하는 ‘좌익 반대파’ 전략을 통해서든, 노동자들이 여전히 어느 정도는 그들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기관(역자 주: 노동조합)의 도구화는 계급투쟁 억압에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동시에, 부르주아지는 세계 위기에 따른 모든 구조 변화를 가능한 전부 이용했다: 한 편에서는 항만, 자동차, 그리고 인쇄 같은 산업들에서 숙련, 비숙련 노동을 모두 대체하는 기술적 변화를 도입하였고, 다른 한 편에서는 과거 자본 중심지의 모든 산업 연결망을 파괴하고, 노동력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싸고 이윤은 엄청나게 큰 주변 지역으로 생산을 옮겨가는 생산 과정의 ‘세계화’를 향한 운동을 가져왔다. 이러한 심장부에서의 노동계급 구성의 변화는, 종종 70년대와 80년대 초반 투쟁 중심지에 있었던 영역에 영향을 미쳤는데, 이제는 계급 원자화에 영향을 미치고 그 계급 정체성을 훼손시키는 데 기여하는 또 다른 요인이 되었다.

 

10. 1968년 해방된 투쟁의 역동성은, 몇몇 일시중단에도 70년대에 걸쳐 지속하였다. 자기 조직화와 확장에 관한 프롤레타리아 역량의 성숙도는 1980년 폴란드 대중 파업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이 절정은 동시에 쇠퇴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했다. 비록 폴란드 파업이 경제 요구와 정치 요구의 전통적인 상호작용을 드러내 보여주었음에도 폴란드 노동자들은 어떤 지점에서도 새로운 사회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파업은 자기 조직화가 아직 발달 단계였으나 사회 혁명의 필요성에 대해 보다 급진적인 토론이 가능한 맥락을 제공했던 68운동보다 ‘낮은’ 수준에 있었다. 폴란드의 운동은 매우 제한적인 예외를 제외하면 ‘자유로운 서유럽’, ‘민주주의 정부’, ‘독립적인 노동조합’ 등을 그들이 원하는 대안적 사회로 보았다. 서유럽에서는 폴란드의 파업에 대한 몇몇 연대 표현이 있었고, 1983년부터 경제적 위기가 급격하게 깊어짐에 따라 그들의 범위에서 점점 더 넓은 세계적인 투쟁의 파도를 관찰했다. 많은 경우에서 노동자들과 노동조합 사이의 대립이 증가했다. 그러나 전 세계적 투쟁이 발생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연적으로 투쟁에서 의식적인 국제주의의 필요를 인식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 노동조합은 당연히 국가 일부인데, 이러한 노동조합과 충돌했다고 해서 그것이 국가 전복의 필연성을 깨달았다는 의미에서 운동의 정치화가 이뤄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을뿐더러, 인류를 위한 전망을 제시할 만큼 역량이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았다. 70년대보다 더욱, 선진국들에서 80년대의 투쟁은 부문적 요구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고, 이러한 의미에서 역시 급진화한 형태의 노동조합 방해 공작에 취약한 채로 남아있었다. 이 시기 두 블록 간의 제국주의 긴장 심화는 전쟁 위협을 주요한 관심사로 등장하도록 했으나, 평화 운동이 이러한 관심을 분산시켰는데, 평화 운동은 사실 경제적 저항과 전쟁 위험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의식적 발전을 효과적으로 방해한 것이었다. 이 시기 조직 활동을 지속했던 혁명가들의 작은 그룹들은, 그들은 노동자들의 특정 제안에 더욱 직접 개입할 수 있었음에도, 더 심층적인 수준에서 노동계급 내의 ‘정치’에 대한 지배적 의혹에 전체적으로 의견충돌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계급과 그 정치적 소수의 커다란 격차 심화는 그것 자체로 노동계급이 그 자신의 전망을 발전시킬 수 없는 무능력에 기여하는 요인이 되었다.

 

 

2. 해체의 충격

 

11. 폴란드의 투쟁과 그 패배는 세계 계급 균형을 요약하여 보여주었다. 그 파업들은 동유럽 노동자들이 그들의 러시아 대군주를 대신하여 싸울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 체제 위기 심화에 대한 혁명적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음을 명확히 했다. 실제로 폴란드 노동자들의 물리적 충돌은 그곳의 전 지역의 노동계급에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정치적 결과를 일으켰다. 이들 노동계급은 스탈린주의 정권의 해체를 촉발시킨 정치적 격변 때에는 계급으로서 존재하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이후의 러시아, 헝가리, 그리고 폴란드의 권위주의적 정권이 내재하고 있는 사악한 민족주의 선전 파도에 취약해졌다. 잔혹한 억압 없이는 위기와 계급투쟁에 대처할 수 없었던 스탈린주의 지배계급은 역사적 환경의 변화에 적응할 정치적 유연성이 부족함을 드러냈다. 따라서 1980~81년의 상황은 이미 동쪽 블록의 전반적인 붕괴를 준비하는 것이었으며,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쇠퇴라는 새로운 단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가 자본주의 해체의 시기로 정의하는 이 단계는 보다 광범위한 계급 간의 교착상태에 그 기원이 있다. 1968년 이후 선진국들에서 터져 나왔던 계급운동은 반혁명의 끝을 고하는 것이었고, 노동 계급의 지속적인 저항은 경제 위기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해결책”, 다시 말해 세계 전쟁으로 가는 길을 막는 걸림돌이었다. 이 시기는 “대규모 계급 적대를 향한 과정”으로 정의할 수 있었고, 또한 저항하는 노동계급과 정면으로 맞붙어 패배시키지 않고서는 전쟁으로 향하는 길이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새로운 단계에서는 계급투쟁의 수준과는 별개로 제국주의 블록 양쪽 모두의 해체가 세계 전쟁을 의제에서 제외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과정에 대한 문제가 더는 동일한 용어로 제기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적대자를 극복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무능력함은 자본주의가 인류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야만의 미래밖에 없음을 의미했으며, 이 야만적인 미래의 윤곽은 지역적, 국지적 전쟁, 생태계의 황폐화, 계획적 대량학살, 동족상잔의 사회 폭력이 결합된 지옥과도 같은 광경에서 이미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이데올로기적 패배와 직접적인 물리력이 모두 필요한 세계전쟁과는 달리, 야만으로 떨어지는 이 “새로운” 하강은 더욱 느린 속도로, 노동계급을 집어삼키고 계급으로서 스스로 재구성할 수 없도록 만드는, 더욱 교활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세계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고 있는 상황은 더는 계급 간 세력 균형의 진화 정도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전반적으로 이를 측정하기는 더욱더 어려워졌다.

 

12. 1968년 이후 코뮤니스트 운동 부활의 초기 단계에는 자본주의 쇠퇴라는 주제가 수많은 지지자를 설득시켰고, 부활한 코뮤니스트좌파의 강령적 기반을 제공했다. 오늘날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코뮤니즘을 인류가 직면한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여기는 새로운 이들의 다수는 쇠퇴라는 개념을 부정할만한 온갖 종류의 이유를 댈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자본주의 쇠퇴의 마지막 단계라고 정의하는 해체라는 것을 언급하기 시작하면,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다소 세계에서 동떨어져 나온 것처럼 여겨진다. 다른 그룹들은 모두에게 자유로운 제국주의 사이의 새로운 시기의 다음과 같은 주요 특성을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그들은 종교적 근본주의와 무시무시한 민족주의와 같은 심각하게 반동적인 이데올로기의 귀환, 자연과 사람의 관계 위기 등의 새로운 시대에 대한 주요한 징후를 인정하는 다른 그룹들은 존재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계급 간 세력 균형의 교착상태로부터 비롯되었다거나, 이러한 현상이 자본주의 쇠퇴의 질적 변화의 표현이라거나, 이러한 모든 단계나 시대가 프롤레타리아 혁명 없이는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끌어내는 이들은 거의 없다. 해체라는 개념에 대한 반대는 종종 국제코뮤니스트흐름의 “세계종말론적” 성향에 대한 비판의 형태를 띠는데, 이는 우리가 해체의 시기를 자본주의 말기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관념론”적이라는 비판은 우리가 해체 배후의 경제적 위기를 핵심 요인으로 오랫동안 바라보았기 때문이지만, 우리는 순수한 경제적 요인이 새로운 시대의 출발에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러한 비판은 역사상 계급 사회의 마지막으로서의 자본주의가 이러한 종류의 역사적 막다른 길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전의 계급사회가 그 쇠퇴의 시기에 진입했을 때와는 달리, 자본주의는 그 내부에서 새롭고 보다 역동적인 생산 양식을 끌어낼 수 없으며, 사회적 삶의 보다 높은 형태로의 유일한 길은 경제적 법칙으로부터 비롯된 어떠한 자동화된 노동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인류 다수의 의식적인 운동, 말 그대로 역사상 가장 힘든 작업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이다.

 

13. 해체는 두 주요 계급의 전쟁 중 교착 상대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1989년 이후 계급의 어려움을 증가시키는 유효한 요인임이 드러났다. 지배 계급이 해체의 징후들을 착취 받는 이들에게 불리한 방식으로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러시아 블록의 몰락을 동반한 코뮤니즘의 죽음에 대한 매우 잘 편집된 선전은 계급의 자신감과 역사적인 임무를 새로이 할 수 있는 역량을 더욱 침식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요인이었다. 코뮤니즘, 맑스주의, 심지어 계급투쟁 그 자체는 끝났다고, 죽은 역사일 뿐이라고 선언되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의식, 전투성, 그리고 정체성에 거대하고 지속적인 악영향을 미친 1989년의 사건은 단순히 거대한 규모의 반공산주의 선전의 결과가 아니었다. 이 선전의 효과성은 그 자체로 설명되어야 한다. 그것은 오직 1917년 이후 계속된 혁명과 반혁명의 독특한 발전의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소련을 적대한 전투적 반혁명의 실패와 더불어 동시에 세계 혁명의 패배와 함께 완전히 예측하지 못했던, 전례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프롤레타리아트 진영 내부에서 반혁명이, 소련 내부에서 역사적으로 발전한 자본주의 계급이 없는 자본주의 경제가 발생했다. 그 결과는 어떤 보다 높은 역사적 필연성의 표현이 아니라 단지 역사적 일탈의 표현이었다. 반혁명 부르주아 국가 관료제가 운영하는 자본주의 경제는 완전히 자격이 없는 것이었고, 그러한 임무에 적합하지도 않았다. 비록 스탈린주의 명령 경제가 소련이 2차 세계대전의 시련을 견뎌내는 데 효과적임은 드러났을지라도, 장기적으로 경쟁력 있는 국가 자본을 형성시키는 데에는 완전히 실패했다.

 

비록 스탈린주의 정권이 쇠퇴하는 부르주아 사회의 특히나 반동적 형태였을지라도, 봉건적이거나 전제적인 종류의 정권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니었고, 또한 “정상”적인 자본주의 경제도 결코 아니었다. 비효율적인 회사가 제거됨으로써 처벌되지 않는, 노동자들이 해고되지 않는 자본주의 경제는 부르주아지의 성공이 될 수 없다. 스탈린주의의 특수성을 반혁명의 예상치 못한 산물로 심각하게 이해한 덕분에, 국제코뮤니스트흐름은 1989년의 사건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보기를 들어 스탈린주의는 노동자 투쟁이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파열에 의해 전복된 것이며, 이러한 동쪽의 붕괴는 유사한 서쪽의 붕괴를 미루는 조짐이 아니었다는 것 말이다. 그 붕괴는 지배계급에 마지막으로 큰 서비스를 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코뮤니즘의 죽음에 대한 선전은 현실에서 입증된 듯하다. 적절히 기능하는 자본주의와 스탈린주의의 차이는 매우 중대하고 광범위하여 실제로 사람들에게 스탈린주의가 자본주의가 아닌 것처럼 비쳤다. 스탈린주의가 존재했던 이전에는 그것이 마치 자본주의의 대안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여겨졌었다. 비록 바로 이 대안이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을지라도 그 존재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무기고에 잠재적인 상처를 남겼다. 1960년대 계급투쟁의 부활은 이러한 상처로부터 반자본주의와 반스탈린주의를 동시에 이야기하는, 그리고 국가 관료제나 정당 국가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노동자평의회에 기반을 둔 혁명의 전망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1960년대와 70년대 많은 이들에게 세계 혁명은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 “그림의 떡”이었다면, 그 이유는 지배계급의 거대한 권력, 또는 인류라는 종이 내재한 이기주의와 파괴적인 본능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감은 대중 투쟁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연대에서 평형추를 찾아낼 수 있고, 종종 실제로 그러했다. “사회주의” 정권이 붕괴한 1989년 이후 질적으로 새로운 요인이 부상했다. 자본주의 원칙에 기반을 두지 않고서는 현대 사회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의식과 계급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방어적 경제 투쟁을 전개하기도 더 어렵다. 왜냐하면, 대안 없이는 자본주의 경제의 필요라는 논리가 훨씬 더 큰 무게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계급투쟁이 당장 직면한 상황이 상당한 정도로 변화할 수 있는지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해 전체로서의 노동계급이 전반적으로 맑스주의자가 되거나, 코뮤니즘에 대해 명확한 전망을 발전시킨다거나 하는 것이 반드시 필수적이지 않더라도, 다양한 분야의 계급이 자본주의가 뭔가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14. 그러나 전반적인 해체의 진행은 더욱 은밀하게 작동하고, “그 자체로” 노동 계급, 그리고 계급 정체성과 계급의식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특징은 1980년대 일어난 구조적 변화 때문에 “뒤에 남겨진” 장기 실업 계층과 부분적으로 고용된 계층들 사이에서 특히 뚜렷하다. 과거 실업 계층은 노동자 투쟁의 전위였으나, 이 시기 그들은 룸펜화, 조직폭력, 그리고 성전주의자(jihadism) 또는 네오파시즘과 같은 허무주의 이데올로기의 확산에 매우 취약했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이 89년 사건의 직접적인 여파를 예견한 바와 같이, 계급은 장기간 후퇴의 시기에 막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 후퇴의 길이와 깊이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엄청난 것으로 드러났다. 2006(프랑스의 반 CPE 운동), 그리고 2009년에서 2013년 사이의 세계 각지의 수많은 나라(튀니지, 이집트, 이스라엘, 그리스, 미국, 스페인 등)에서의 새로운 노동계급 세대의 중요한 운동, 그리고 코뮤니스트 사상에 관심을 가지는 분위기가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모두 계급투쟁이 다시 한번 무대 중앙을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혁명 운동 발전의 새로운 단계가 열렸다는 생각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간의 많은 발전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혁명적 전위가 얼마나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15. 2011년 전후의 투쟁들은 경제적 위기의 심화 영향에 명백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경제적 위기란 보기를 들면 그 지지자들이 자주 언급하듯이, 고용의 불안정 그리고 심지어 몇 년간의 대학 교육을 이수한 젊은이들조차 기회가 부족한 점 등이다. 그러나 경제적 위기의 심화와 계급투쟁의 질적 발전 사이에는 어떤 자동적 연결도 없다. 그것이 이미 패배한 노동계급의 사기를 더욱 악화시키는 경향을 보였던 1930년대 대공황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이다. 오랜 동안의 패배와 방향 상실 이후 2007~8년의 금융 지진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에 굉장히 부정적인 충격을 주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경제적 확장의 심장부에 있었으나 내재적 모순으로 이제 그 붕괴를 예고하고 있는 신용(credit) 시스템의 확장이 바로 중요한 요인이다. 이 “금융화”의 과정은 이제 거대한 금융 기관들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수백만 노동자들의 삶 수준에서도 작동했다. 이 수준에서 상황은 1920년대와 30년대의 것과 매우 다르다. 그 시절에는 노동자들을 제외한 이른바 중산 계급(적은 재산의 소유자, 자유주의적 전문가들 등)의 대부분에게 잃어버릴 저축이 있었고, 국가가 제공하는 보험이 있는 곳에서는 노동자들이 간신히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한 편에서 그러한 국가들에서 많은 노동자들의 당장의 물질적 상황이 80~90년 전보다 덜 극적이라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러한 국가들에서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정확히 자신을 1930년대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에 놓여있음을 정확히 알 것이다. 그들은 종종 엄청난 규모의 채무자가 된 것이다. 19세기 동안, 그리고 1945년 이전의 많은 부분 동안, 오직 채권자 노동자들이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지역 술집이나 카페, 그리고 식품 소매점밖에 없었다. 어려울 때 그들은 오직 계급 연대에 의지해야만 했다. 주택과 건물 융자와 함께 큰 규모로 시작된 프롤레타리아의 신용대출은 최근 수십 년 동안의 대규모 소비자 부채의 전개와 함께 폭발했다. 노동 계급의 많은 부분에서의 이러한 신용 경제의 전례 없이 세련되고, 교활하고 불안정한 발전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에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부르주아지의 노동계급 수입의 전유는 감춰져 있으며, 그것이 저축의 평가절하, 은행 또는 보험 상품의 부도, 또는 시장에서의 주택 소유권 몰수의 형태로 나타날 때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 “복지 국가”의 보장과 그들의 재정이 점점 불안정해짐으로 인해 이러한 공공 체계에 대해 지급할 수 있는 이들과, 그들만큼 지급할 수 없이 그저 이들 체계에 의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뿐인 이들로의 노동자 사이의 구분이 더욱 쉬워진다. 그리고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빚의 늪에 떨어졌다는 사실은 프롤레타리아를 훈육하는 새롭고, 추가적인, 강력한 수단임을 보여준다.

 

붕괴의 결과가 그 순손익이 많은 이들에게는 궁핍함으로, 그리고 작은 소수에게는 파렴치한 부의 이전이 될지라도, 충돌의 전반적인 결과는 자본주의 체계의 노동에 대한 이해를 날카롭게 하거나 확장시켜주지 않는다. 불평등의 증가에 대한 분노는 대부분 “부패한 도시 엘리트”를 향했고, 이는 우익 포퓰리즘의 주요한 강조점이 되었다. 위기와 동반하는 부정에 대한 반응이 미국의 점거 운동(Occupy movement)과 같은 보다 프롤레타리아적 형태의 투쟁을 불러일으켰을지라도, 이러한 운동조차 탐욕스러운 은행가, 심지어 사회에 대한 자신들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섬세하게 붕괴를 조장한 비밀 그룹에 대한 비판으로 향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상당 부분 약해졌다.

 

16. 1917~23년의 혁명 물결은 1871, 1905년의 봉기 운동과 같이,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해 점화되었고, 혁명가들이 전쟁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있어서 매우 호의적인 조건을 제공한다고 생각하게끔 했다. 실제로는 혁명 물결의 패배가 보여준 것은 전쟁이 계급 내 심각한 분열을 낳는다는 것이었고, ‘승리한’ 나라와 ‘패배한’ 나라의 노동자 간에 특히 그러했다. 더욱이 2차 세계 대전 종결 당시의 사건들이 보여주었듯이, 부르주아지는 1917년 일어난 일로부터 필수적인 교훈을 배웠고,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응 가능성을 제한하는 역량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적군들과의 우애를 다지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도록 만드는 군사 기술 전략과 형태의 발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러시아 제국주의 블록의 몰락 이후 서쪽의 지배 계급의 약속과는 반대로, 그것이 열어젖힌 새로운 역사적 단계는 결코 평화와 안정이 아니라, 군사적 혼란, 아프리카와 중동 일부를 완전히 황폐화시키고 심지어 유럽의 문마저 흔든, 점점 더 지루한 전쟁의 확산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이라크에서 야만이 드러나는 동안, 아프가니스탄, 르완다, 이제는 예멘과 시리아의 사건은 이러한 전쟁과 직접 관련된 부르주아지들이 있는 자본주의의 중심부를 포함한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넓은 영역들에서 공포와 분노를 불러일으켰으나, 프롤레타리아 형식의 반대는 이러한 해체의 전쟁들 가운데 매우 드물었다. 직접 영향을 받은 나라들에서는 노동 계급은 스스로 지역의 군사적 갱들과 그들의 제국주의 스폰서들에 반대하여 스스로 조직하기에는 너무 약했다. 이는 시리아에서의 최근 전쟁에서 가장 명백했다. 이 전쟁에서는 공중 폭격을 비롯한 다른 형태의 폭격과, 무엇보다도 국가의 공권력에 의해 무자비한 대학살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 전선의 건설과 정권의 반대자들을 다양한 무장 갱으로 징용함으로써 발생한 최초의 사회적 불만들의 탈선이었다. 자본주의의 가운데에서는 그러한 소름 끼치는 시나리오는 주로 절망감과 무기력감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그것은 주로 현재 체제에 대한 어떤 저항 시도도 오직 더 나쁜 상황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어 보이기 때문이었다. “아랍의 봄”의 우울한 운명은 혁명의 가능성에 반대하는 새로운 논거로 쉽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과거 몇 년간의 유럽 주변부 모든 국가에 대한 야만적인 분할은 체제의 중앙에 있는 노동계급에까지 부메랑이 되어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는 두 가지 문제로 요약된다. 한 편에서, 세계적 수준의, 그리고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있는, 그 범위에 있어서 진정으로 지구적인, 난민 위기의 진행, 다른 한 편에서, 테러리즘의 발전이다.

 

17. 유럽 난민 위기를 촉발시킨 순간은 2015년 여름 “발칸 루트”로부터 비롯된 난민에 대한 독일(그리고 오스트리아) 국경 개방이었다. 메르켈 총리의 이러한 결정의 동기는 두 가지였다. 우선 독일의 경제적, 인구통계학적 상황(주요 산업에서 당장 질적으로 보증되고 “동기화된” 노동력의 부족해질 것이라는 전망). 두 번째로, 남동 유럽이 수백만의 난민들을 감당하지 못해 법과 질서가 붕괴될 위험. 그러나 독일 부르주아지는 다른 세계, 특히 유럽의 다른 지역에 대한 일방적인 결정의 결과를 잘못 계산했다. 중동 아프리카에서, 수백만의 난민들과 자본주의 비참함의 다른 희생자들은 유럽으로, 특히 독일로 도망갈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는 “셍겐(Schengen)”조약 또는 “더블린 난민 협정”과 같은 조약이 있어 독일의 문제를 EU 전체의 문제로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의 첫 번째 결과는, 그러므로, 아마도 지금까지 그 역사상 가장 심각한 유럽 연합의 위기였다.

 

유럽에 수많은 난민이 도착하자 처음에는 전체 사람들의 광범위한 영역에서 자연스러운 동정의 물결 – 이탈리아 또는 독일과 같이 충동이 여전히 강한 나라들에서 - 이 일었다. 그러나 이 충동은 곧 유럽의 외국인 혐오 때문에 파묻혀 버렸다. 이러한 외국인 혐오는 포퓰리스트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법과 질서의 비밀 군대와 전문적 수호자들에 의해서도 이뤄졌다. 이들은 갑작스럽고 통제되지 않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유입을 매우 경계했다. 그들이 사는 국가가 어디인지 밝혀지지 않은 엄청난 숫자의 무슬림 유입이 유럽 내에서 이민자들의 하부 공동체를 발달시키게 될 것이라는 공포는 테러리스트의 유입에 대한 공포를 동반했다. 이러한 공포는 프랑스, 벨기에, 독일에서의 테러 공격의 증가 때문에 강화되었다. 독일 하나만 보아도, 이민자들을 향한 우익 테러 공격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이전 옛 동독 일부에서는 실체적인 대학살의 분위기가 전개되었다. 서유럽은 전반적으로 경제 위기 이후 우익 포퓰리즘의 불길에 부채질하는 (근본주의자 테러 때문에 증가한) “난민 위기”가 두 번째로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2008년 이후 경제 위기가 어떻게 세계 경제를 관리하는 것이 최선인가에 대한 부르주아지 내부의 심각한 분열의 길을 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2015년 여름은 이민에 대한 합의의 종말의 시작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정책의 기반은 지금까지 반쯤 개방된(semi-permeable) 국경의 원칙이었다. 도널드 트럼프가 쌓길 원한 멕시코 장벽은 이미 존재하며, (군사적 순찰선 또는 공항 감옥 등의 형태로) 유럽을 둘러싸고도 그와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그러나 현재 장벽의 목적은 이민의 속도를 늦추고 규제하는 것이지 막는 것이 아니다. 불법 이민은 그들을 범죄화하여 그들이 어떤 사회적 보상의 권리도 받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조건 아래 적은 임금만을 위해 일하게 강요한다. 더욱이, 승인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 수밖에 없도록 함으로써, 국경 지역의 체제는 결국 가장 용감하고, 단호하며, 역동적인 이들만 선별하는 야만적인 선택 메커니즘의 한 종류가 되었다.

 

2015년 여름은 사실 존재하는 이민 시스템 붕괴의 시작이었다. 이민하려는 이들은 계속 증가해 왔던 반면, 그들이 이민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나라의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감소하는(독일의 경우는 다소 예외이다) 이 불균형은 더는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하듯이, 포풀리스트들은 손쉬운 해결책을 내놓았다. 이 반쯤 개방된 국경을, 그 어떤 수준의 폭력이 필요할지라도 폐쇄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그들의 제안은 부르주아지의 관점에서 매우 그럴듯하게 여겨졌다. 그것은 전 국가 수준의 “폐쇄된 사유지(gated communities)” 논리의 적용에 불과하였다.

 

여기서 다시, 이러한 상황이 노동계급의 의식에 미친 영향은, 당장은, 매우 부정적이다. 동쪽 블록의 붕괴는 마치 서쪽 민주주의 자본주의의 궁극적인 승리의 증거인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점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위기의 심화가 결국 자본주의가 최고의 현실적인 체제라는 이미지에 손상을 주는 데 역할을 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위기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난민들뿐만 아니라) 수백만의 사람들이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과거 자본주의의 중심부로 목숨을 걸고 갈 준비가 되어있다는 사실은 오직 이러한 구역이 (적어도 비교적으로는) 천국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상대적으로 번영과 안정의 지역이라는 인상을 강제로 심어줄 뿐이다.

 

세계 경제의 붕괴가 미국과 독일에 집중되었던 1930년대의 대공황 시절과는 달리 오늘날은 지구화된 자본주의 관리로 인해 자본주의 중심 국가들이 무너지는 것은 마지막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일하진 않지만) 특히 유럽과 미국에서 포위된 요새와 같은 상황이 등장했다. 이 지역의 노동계급은, 심지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뒤에서 적극적으로 동원되지는 않더라도, 외부로부터의 공동 위험으로 여겨지는 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착취자들이 자신을 보호해주길 바라는데(심리학적 용어를 빌자면, “침략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 이러한 위험은 현실이다.

 

18. 중동 전쟁에서의 테러 공격에 대한 “반응”은 최근의 난민 위기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 2001년 알카에다의 쌍둥이 빌딩 공격 뒤로 마드리드와 런던 교통 체계에 대한 더 극악무도한 테러는 이미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이 그들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뿌린 씨앗이 소용돌이가 되어 나타났으며 이를 거두어야 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최근 독일, 프랑스, 벨기에, 터키, 미국 등지에서의 살인의 급증은 IS(Islamic State) 탓이지만, 비록 미숙하고 심지어 변칙적인 특징임에도 불구하고 훈련받은 테러리스트 “군인”과 고립되고 불안한 개인들을 구분하기 점점 더 어려워진 탓이기도 하며, 이것이 난민 위기와 함께 발생함으로써, 전체 주민들 가운데 의심과 편집증적 과대망상을 강화하였고, 이는 결국 형식이 없고 예측할 수 없는 “내부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동시에, IS와 그 모방자들의 허무주의적 이데올로기는 반-게토화된 거대한 서쪽 도시들 속에서 더는 미래가 없음을 인식하는 불만이 가득한 이민지 청년들에게 짧은 영광의 순간을 제공한다. 해체의 시대 테러리즘은 더욱더 국가와 준-국가 사이의 전쟁 수단이 되고 있으며, 동시에 국제주의의 표현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19. 그러므로 최근의 포퓰리스트의 등장은 이 모든 요인들 – 2008년의 경제적 붕괴, 전쟁의 충격, 테러리즘, 그리고 난민 위기 – 에 의해 성장했고, 체제 해체와, 사회의 두 주요한 계급들 모두 인류에게 미래를 위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농축된 표현으로 나타났다. 지배 계급의 관점에서는 70년대 개방 경제 위기의 출발에서부터 자본주의가 유지되고 심지어 축적을 확장할 수 있도록 해 주었던 “신자유주의” 합의가 소진됨을, 그리고 특히 전후 호황을 지배했던 케인즈주의 정책이 소진됨을 의미했다. 2008년 붕괴는 이미 존재하던 매우 부유한 소수와 대다수 사이의 거대한 부의 격차를 보다 넓혔는데, 탈규제와 지구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들에 의해 고안된 틀 내에서의 자본과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 등은 부르주아지의 점점 더 많은 이들, 신자유주의와 신케인즈주의를 같은 선전 연설 중에 동시에 지지할 수 있는 이들 포퓰리스트 우익과 같은 이들 사이에서도 문제시되고 있었다. 포퓰리스트 정책의 본질은 부르주아 사회 불평등의 정치적, 행정적, 그리고 법적 공식화이다. 2008년 위기가 상황을 보다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은 이러한 공식적인 평등이 전에 없이 명확한 사회적 불평등의 진정한 기반이라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적 해결책 – 계급 없는 사회 - 을 내놓지 못하는 지금 상황에서, 포퓰리스트의 반동적 대책은 존재하는 위선적인 가짜 평등을 노골적이고 “솔직한” 불법적 차별 체제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것이 트럼프 대통령의 고문, 스티브 배넌(Steve Bannon)이 주창한 “보수적 혁명”의 핵심이다.

 

미국 먼저”(America First)와 같은 슬로건이 의미하는 바를 가리키는 첫 번째 징후는 국민 전선의 선거 강령, “프랑스 먼저”(France d’abord)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고용, 세금, 그리고 사회 복지의 모든 수준에서 유럽 연합의 다른 국적 사람들보다 프랑스 시민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것을 주장하는데, 결국 다른 외국인들에 비해 우선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논쟁이 영국에서 있었는데, 브렉시트 이후 유럽 연합의 시민들이 영국 원주민과 외국인 중간 지위에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었다. 영국에서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주요 논지는 유럽 연합의 거래 정책에 대한 반대이거나, 대륙인 유럽을 향한 영국의 보호주의적 충동 같은 것이 아니라 이민과 국내 노동 시장에 대한 “민족적 주권을 다시 획득”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지였다. 이 주장은 장기적 민족 경제의 성장 전망이 없는 상황에서 오직 다른 모든 이들을 차별함으로써만 원주민의 삶의 조건이 다소간 안정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20. 이른바 금융과 유로 위기는 1989년 이후 계급의식, 계급 정체성과 전투성의 장기간의 심각한 퇴조에 치료약이 되는 대신 반대의 효과를 가져왔다. 특히, 일반 프롤레타리아트 계층에서의 연대 상실의 치명적인 효과는 심각하게 증대했다. 특히, 우리는 희생양 현상, 이 사회의 잘못이 무엇이든 간에 세계의 모든 악이 투영된 사람을 비난하는 현상을 보고 있다. 그러한 생각은 대량학살로 가는 문을 연다. 오늘날 포퓰리즘은 매우 충격적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모든 사회관계 속에 퍼져 있는 문제의 유일한 형식은 아니다. 노동계급의 일터에서, 그리고 삶에서 그것은 협력을 약화시키고, 원자화, 그리고 상호 의심과 약탈의 발전을 부추긴다.

 

맑스주의 노동자 운동은 이러한 경향에 평형추가 되는 데 도움이 되는 이론적 통찰을 오랜 시간 동안 방어해왔다. 두 가지 가장 본질적인 통찰은 1) 자본주의 아래에서 착취는 비인간적 성격이 된다. 왜냐하면, 시장의 “법칙”(가치법칙)에 따라 작동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자들은 스스로 이러한 법칙에 복종한다. 2) 이러한 기계와 유사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계급 간 사회관계이다. 왜냐하면, 이 “체제”는 부르주아 국가 의지의 법칙(자본주의 사적 소유의 창조와 강요)에 기반을 두고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급투쟁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이다. 계급투쟁은 사람과 싸우는 대신, 사회관계를 바꾸기 위해 직접 체제 – 체제를 체화하고 있는 계급 – 를 목표로 한다. 이러한 통찰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더 의식적인 계급의 층위라고 해서 희생양에 대한 면역력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더 많은 회복탄성력을 준다. 이러한 통찰들은 심지어 반혁명의 가운데서도, 그리고 심지어 독일에서도,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반유대주의에 더욱 오랫동안 저항했는지 그 이유를 일부 설명해 준다.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전통은 지속해서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노동 계급은 계급 일부가 심각하게 그에 영향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종류의 독의 확산에 유일하게 진정한 방패로 남아있다.

 

21. 이 모든 것은 부르주아 사회의 정치적 성격을 전반적으로 바꾸게 한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당장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유리하지 않다. 미국이나 폴란드와 같은 나라들에서는 포퓰리스트가 현재 집권해 있는데, 거리의 대규모 저항은 어쨌든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와 그 “자유주의적” 규제들을 방어한다. 대중들을 동원하는 또 하나의 이슈는 브라질, 한국, 루마니아 또는 러시아에서와 같은 부패에 대한 투쟁이다. 이탈리아의 오성(Five Star) 운동도 주요하게는 같은 문제로 고무되었다. 부패는 자본주의의 풍토병으로, 자본주의의 마지막 시기의 유행병과 같은 것이다. 국가 자본의 이해를 방어하는 가운데에는 부패가 생산력과 경쟁력을 방해하는 한 이에 저항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므로 그런 저항에서 국기를 흔드는 대중들이 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부르주아 선거 과정에서의 이해관계의 재편도 있다. 연대의 후퇴 영향 아래에서 노동계급 일부분은 포퓰리스트에 투표하는 희생자가 되거나 기존의 정치 계급에 반대하는 종류의 것에 빠진다. 오늘날 해방의 대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은 노동자들이 포퓰리스트를 선택함으로써 지배 계급에게 충격을 주고 압박을 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아마도 더 큰 위험은, 생산 과정의 핵심에 있는, 가장 현대화되고 지구화된 계급의 부문들이 혐오스러운 포퓰리스트의 배타주의에 분노하고, 이러한 정치적 흐름이 이미 존재하는 질서의 안정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다소 명확한 이해를 함으로써,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정권의 군림을 방어하는 함정에 빠지는 것에 있다.

 

22. 포퓰리즘의 등장, 그리고 반 포퓰리즘의 등장은 노동 계급이 악의 파시즘과 반파시즘 사이에 붙잡혀 버렸던 1930년대와 어떤 유사함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역사적 상황은 1930년대의 그것과 같지 않다. 그 시기에는 소련과 독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적 반대뿐만 아니라 물리적 패배로 고통 받았다. 이와는 반대로, 오늘날은 반혁명의 상황이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지배계급이 프롤레타리아트에 물리적 패배를 강요하는 모든 시도를 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1930년대와 또 하나 다른 점이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포퓰리즘 또는 반포퓰리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집착이 전혀 결정적이지 않다. 포퓰리즘 후보를 찍는 많은 노동자들은 어느 날 자신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투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반포퓰리즘 시위에 사로잡혀 있는 노동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오늘날 노동계급, 무엇보다 과거 자본주의의 중심부에 사는 이들은, 계급의 특정 부문에서 민족주의의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국가의 이해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싸울 가능성 또한 잃지 않았다. 이러한 잠재력은 68년에서 89년 시기, 그리고 2006년과 2013년 사이의 투쟁보다 훨씬 더 분산되고 단기적인 방식이라고 할지라도 지속해서 표면 위로 떠오른다. 동시에 소수 프롤레타리아 가운데 어려움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심사숙고와 성숙의 과정이 계속되며, 이것이 다시 프롤레타리아트의 더 넓은 계층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더욱 숨겨진 과정을 반영한다.

 

이러한 조건에서 계급을 공포로 몰아넣으려는 시도는 정치적으로 위험하고 반생산적일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착취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강점 중 하나를 구성하는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노동자들의 현존하는 환상에 강하게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이유로, 막다른 길의 해체하는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효과를 이용하는 것은 노동계급을 약화시키는 자본가 계급의 객관적인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다.

 

 

3. 1917, 2017, 그리고 코뮤니즘의 전망

 

23. 191710월 혁명에 대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주요 공격 중 하나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은, 2월 봉기의 민주주의적 희망과 볼셰비키에 의한 10월 “쿠데타”를 억지로 대비시키는 것이다. 볼셰비키의 10월 쿠데타가 러시아를 재앙과 폭정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0월 혁명을 이해하는 핵심은 그것이 제국주의 전선을 무너뜨릴 필요에 기반을 두었다는 것이며, 이 제국주의 전선은 “민주주의” 편을 포함한 부르주아지의 모든 분파 때문에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10월 혁명은 세계 혁명의 첫 번째 일격이었다. 그것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가 쇠퇴의 시기에 들어선 것에 대한 첫 번째 명확한 응답이었으며, 이런 수준에서 191710월은 잃어버린 시대의 폐허와는 거리가 먼, 인류의 미래의 이정표였다.

 

오늘날, 세계 부르주아지로부터 받은 모든 반격 이후, 노동계급은 그 혁명적 프로젝트의 회복에서 거리가 멀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아직, “어떤 의미에서는 코뮤니즘에 대한 문제가 오늘날 인류가 처해 있는 곤경의 바로 그 핵심에 있다. 코뮤니즘이 부재함으로써 만들어진 공허함의 형태로 그것은 세계의 상황은 곧 지배한다.”(세계의 상황에 대한 보고, 국제코뮤니스트흐름 22차 대회). 20세기와 21세기의 수많은 야만, 히로시마와 아우슈비츠에서 후쿠시마와 알레포까지, 그것은 수십 년 전 코뮤니스트 혁명의 실패로 인류가 치러야 했던 매우 값비싼 대가였다. 그리고 만약, 부르주아 문명 쇠퇴기의 이 늦은 시간에, 혁명적 변환의 희망이 결정적으로 사라진다면, 인간 사회의 생존의 전망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그리고 아직, 우리는 이러한 희망이 여전히 살아있으며, 진정한 가능성을 띠고 발견된다고 생각하고 확신한다.

 

한 편에서 그들은 객관적인 가능성과 코뮤니즘의 필연성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들은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첨예해지는 충돌에 내포되어 있다. 쇠퇴기 해체의 자본주의는 모든 불황의 시대를 견뎌왔던 이전의 계급 사회들과는 달리 지구적 확장을 멈추지 않고, 사회적 삶의 모든 세포에까지 침투하기 때문에, 그 충돌은 더욱 날카로워져 왔다. 몇몇 수준에서 이를 관찰할 수 있다.

 

- 현대 기술과 자본주의 아래에서 그 실제 사용에 잠재적으로 내포된 모순. 정보 기술과 인공 지능의 발달은 고된 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고 노동 시간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도록 이용할 수 있지만, 한 편에서 그것은 일자리를 줄이고 다른 한 편에서 노동 시간을 연장하는데 이용되고 있다.

 

- 자본주의 생산의 세계적이고 연합된 성격의 자본주의 생산과 그 사적 소유권 사이의 모순, 다시 말해 한 편에서 수백만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적 부를 생산하는 데 참여하는데, 다른 한 편에서 손톱만 한 소수의 오만과 낭비 때문에 그 사회적 부가 전용된다는 모순은 삶의 수준을 정체시키고 대다수가 직면하고 있는 노골적인 빈곤에 대한 모욕이 되고 있다. 노동의 연결 수준의 객관적인 세계적 성격은 최근 수십 년 동안 특히 중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산업화와 함께 어마어마하게 증가했다. 종종 스스로 극단적으로 전투적인 모습을 보였던 이러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군대는 잠재적으로 국제 계급투쟁의 힘에 새로운 원천을 구성하는데, 이는 서구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에 맞서는 혁명적 대결을 향한 노동계급의 정치적 성숙의 열쇠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그러하다.

 

-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모순은 그 자체로 무엇보다 과잉생산의 위기와 자본주의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모든 수단들, 특히 대규모 부채에 의존하는 등을 의미한다. 과잉생산은 자본주의 고유의 불합리함으로, 풍요의 가능성과 자본주의 아래 그러한 풍요로움을 달성할 수 없는 불가능을 동시에 가리킨다. 다시, 기술적 발전의 예시가 이러한 불합리함을 부각시킨다. 인터넷은 모든 종류의 무료 재화(음악, , 영화 등)를 분배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나, 이윤 시스템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 자본주의는 어떠한 무료 배포도 축소하거나 상품을 광고하는 광장으로만 주로 작동할 수 있도록 거대한 관료체계를 만들어야만 했다. 더욱이, 과잉생산의 위기는 노동계급의 삶의 수준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과 인류 대중의 빈곤으로 귀결된다.

 

- 자본의 지구적 확장과 민족 국가의 경계를 넘어설 수 없는 불가능성 사이의 모순. 1980년대 시작된 지구화의 특정 단계는 맑스가 그룬드리세(Grundrisse)에서 예언한 바로 그 지점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저항할 수 없는 지향으로서의 보편성은 그 자신의 본질에 의한 장벽에 직면한다. 이 본질은 발전의 특성 단계에서 스스로 보편성 경향의 가장 거대한 장벽으로 인식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자신의 극복으로 나아갈 것이다.”[1] 1차 세계대전 시절의 혁명가들은 물론 이 모순을 인식했다. 왜냐하면, 전쟁 그 자체가 민족 국가가 여전히 존재하여 자본이 실제로 그 너머로 이동할 수 없는 상황의 첫 번째 명백한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본의 이러한 극복이 – 사실 몰락이 – 순수하게 경제적인 형식을 취하지 않을 것을 안다. 자본주의가 경제적 막다른 길에 가까워질수록, 군사적 수단들을 통해 타자를 희생하면서 “생존”을 향한 추동이 커질 것이다. 트럼프, 푸틴 등등의 노골적인 민족 전쟁은 인류의 통합과는 먼 자본주의 지구화가 우리를 자기-파괴에 더욱 더 가깝게 몰고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심연으로의 몰락이 반드시 세계 전쟁이라는 형태가 아니라도 그러하다.

 

- 자본주의 생산과 자본주의 시작에서부터 “공짜 선물”로 여겨지는(애덤 스미스) 본질 사이의 모순과 전례 없는 수준으로 해체의 단계에 도달한 것. 이는 기후 변화에 대한 미국의 반대와 같은 노골적인 공공 파괴, 그들의 주적인 중국의 성장,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중국은 희생을 감수한 성장을 향한 열띤 사냥으로 도저히 숨을 쉴 수 없는 대기의 도시들을 탄생시켰고, 이는 지구 온난화의 위험을 크게 가중시켰다. 그리고 고대의 미신과 현대의 깡패 자본주의의 기묘한 결합은 아프리카의 모든 종의 파괴를 가속했으며, 다른 곳에서는 그들의 뿔과 가죽의 마법적인 힐링 효과를 찬양했다. 자본주의는 성장에 대한 열광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나, 이는 인류가 살아 숨 쉬는 자연환경의 건강과는 양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바로 자본주의의 영속화가 군사적인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교환 수준에서도 인간종의 존재를 위협한다.

 

위에 언급한 더는 견딜 수 없이 첨예화된 모순은 어쨌든 하나의 해결방법을 가리킨다. 이윤이 아니라 사용을 위한 세계 생산의 연합, 인간 존재 간의 연합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와 자연과의 연합이 그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전환이 주로 드러나는 것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중심, 그리고 가장 현대적인 부분, 젊은 세대들 가운데서, 비록 역사적 상황의 심각성을 점점 더 깨닫고 있기는 해도, 그들이 이전 수십 년간 공유해 왔던 “미래가 없다는” 절망을 더는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확신은 자신의 연합된 생산력에 대한 앎에 기반을 둔다. 이 앎이란 과학적, 기술적 진보로 표현되는 잠재성, 지식과 그에 접근하는 수단의 “축적”, 그리고 인류와 나머지 자연의 상호작용에 대한 심오하고 결정적인 이해의 성장이다.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이 부분 – 2011, “세계 혁명”의 깃발을 한껏 높였던 서유럽 운동에서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 은 오늘날 노동의 연합이 띠는 국제적 성격을 훨씬 더 잘 알고 있으며, 그러므로 투쟁의 국제적 통합의 가능성을 더 잘 움켜쥘 수 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의 지구적 통합은 자본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회피해야 할 해결책이며, 그것이 교환을 위한 생산에 내재적 한계를 드러내는 방법일지라도 그러하다. 쇠퇴의 시기 국가 자본주의의 발전은 어떤 의미에서는 전제주의적 방식으로 사회 통합하는 방법을 찾으려는 다급한 탐색의 일종이며, 자신의 붕괴를 부추기는 체제의 “자연법칙”이 전개되는 시기에 지배계급이 경제적 삶에 대한 통제를 행사하려는 시도이다.

 

24. 자본주의가 코뮤니즘의 필연성을 마법으로 없앨 수 없는 이상, 이러한 새로운 생산 양식은 자동으로 나타날 수 없으며, 혁명 계급,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 개입이 필요하다. 오늘날 노동계급이 직면하고 있는 극단적인 어려움 - 코뮤니즘의 “소유권”을 부활시킬 수 없는 명백한 무능력 - 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코뮤니즘을 향한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부활, 재구성이 여전히 오늘날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몇 가지 이유를 개략적으로 서술하였다. 왜냐하면, 코뮤니즘의 객관적인 필요가 마법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새로운 사회를 향한 주관적인 바람을 완전히 억압할 수도 없고, 연합한 계급, 프롤레타리아트 가운데서 어떻게 그것을 성취해 낼지 이해하기 위한 탐색 또한 완전히 억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붉은 10월의 기억, 실제로는 독일혁명과 세계규모의 혁명적 물결이 10월에 의해 활성화된 것을 포함한 기억은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 말하자면, 그것은 억압되었으나, 모든 억압된 기억은 조건이 무르익었을 때 다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노동계급 안에는 진짜 이야기와 그로부터의 교훈을 의식적인 수준에서 유지하고 정교화하며, 그 자신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를 회복할 때 계급의 사고를 살찌워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소수가 항상 있다.

 

계급은 실천적인 투쟁이라는 엄격한 학교를 통하지 않고서는 대규모로 이러한 수준의 의문에 도달할 수 없다. 자본의 공격이 심화하는데 대한 반응으로서의 이러한 투쟁은 연합된 노동이라는 현실에 의해 만들어진 자기 확신과 구속되지 않는 연대의 발전을 위한 강고한 기반이다.

 

그러나 1968년 이후 프롤레타리아트의 순수하게 방어적인, 경제적 투쟁은 교착상태에 이르렀고, 이러한 상태는 또한 한 편에서 이론적인 투쟁, “깊은” 과거와 그 가능성 있는 미래를 이해해야 하는 과제를 필연적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과제는 계급 운동이 지역과 민족 수준에서 보편적인 수준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 그리고 경제적 수준에서 정치적 수준으로, 방어에서 공격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을 지적한다. 계급의 당면한 투쟁은 다소 자본주의의 삶 자체이지만, 이러한 다음 중요한 단계를 밟을 수 있을지에 대한 보장은 없다. 그러나 아무리 한계가 있고 혼란스러운 방법으로라 할지라도 프롤레타리아트의 현재 세대들의 투쟁, 무엇보다 전체 체제 – 시위자들이 그들의 깃발에 공공연히 써 놓았듯이, “구시대적” 체제 - 에 대한 진정한 분노의 표현이었던 스페인의 분노 운동(Indignados)과 같은 투쟁은 어떻게 이 체제가 작동하고 무엇이 이 체제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인지 이해하고자 하는 바람, 동시에 현존하는 질서라는 제도를 부수고 나올 수 있는 조직적 수단들을 발견하고자 하는 바람을 표현한다. 그리고 보라, 그러한 수단은 본질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대중 집회의 일반화, 위임된 대표의 선출은 1917년 소비에트 시절로부터의 명확한 메아리다. 이것은 사회적 삶의 깊은 지하에서 활동한 “노련한 두더지(Old Mole: 19689월부터 19709월까지 매사추세츠의 케임브리지에서 발간된 지하신문 중심의 급진적 신좌파 그룹)”의 작업의 명백한 표현이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정치-도덕적 차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발전을 위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계급의 더욱 넓은 부문의 일부로서 현존하는 삶과 행동의 방식에 대한 고질적인 거부의 등장이다. 이러한 순간의 진화는 계급 영역에서의 대중 투쟁과 혁명적 관점의 준비와 성숙에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동시에, 분노 운동이 진정한 계급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은 이러한 거리와 광장에서의 초기 정치화와 경제적 투쟁, 노동 계급이 여전히 가장 뚜렷한 존재감을 가진 노동 현장에서의 운동이 연결될 필요성을 보여준다. 룩셈부르크의 「대대적 파업」에서 볼 수 있고, 주창되듯이, 혁명적 미래는 경제적 투쟁을 현대주의자의 선언인 것으로 “부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계급 운동의 경제적, 정치적 차원의 진정한 통합에 있다.

 

25. 운동의 경제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의 연결을 볼 수 있는 역량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코뮤니스트 정치 조직은 수행해야 할 필수불가결한 역할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왜 부르주아지가 1917년 볼셰비키 당의 역할을 전력으로 부정하며 자기 자신이 권력을 획득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광신도와 지식인들의 음모론이라고 내세우며 의심하는지 그 이유이다. 코뮤니스트 소수의 책무는 투쟁을 유발하거나 앞서서 그들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수단과 목표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 속에 있는 것이다.

 

또한, 붉은 10월을 지키는 것은 당연히 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스탈린주의가 붉은 10월에 반대하는 부르주아지 반혁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 책무는 스탈린주의의 붕괴가 코뮤니즘의 경제가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생각이 무겁게 다가오는 오늘날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생각이 코뮤니스트좌파와 자본의 좌익 사이에서 불안정하게 존재하는 정치적으로 탐색하는 소수들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심각하다. 1989년 이전에는 반대로 혼란스럽지만, 식별가능했던 반자본주의 생각들은, 보기를 들어 평의회주의자 또는 자율주의자(autonomist)와 같은 종류의 이들은 상대적으로 그런 그룹들 내에서 영향력 있었는데, 그 이후 실물 경제 또는 현존하는 “상품”의 영역의 보존과 확장에 대한, 지역 수준에서 상호 교환 네트워크의 형성에 기반을 둔 개념의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 그런 생각의 진전은 오늘날 프롤레타리아트의 더욱 정치화된 계층들조차 종종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사회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환경 아래서, 미래의 혁명가 세대의 출현을 준비하는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는 오늘날 현존하는 혁명적 소수들이 가능한 가장 심오하고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유토피아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왜 오늘날 코뮤니즘이 필연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가능성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오늘날 코뮤니스트좌파는 극단적으로 감소했고, 분산되어 있으며 정치적 명확성을 찾는 광범위한 요인들은 거대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오늘날 작은 혁명운동에서 미래의 대중 계급 운동의 진정한 전위로 행동할 역량을 갖추는 것까지 나아가는 데에는 갈 길이 매우 먼 것이 명백하다. 혁명가들과 정치화된 소수들은 이런 상황의 순수하게 수동적인 산물이 아니다. 그들 자신의 혼란은 자신의 분열과 방향 상실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혁명적 소수의 약점은 계급 전체 약점의 표현이며, 이를 극복할 어떤 조직적 비법이나 활동가주의 슬로건은 있을 수 없다.

 

시간은 더 이상 노동계급의 편이 아니다. 그러나 그 그림자를 뛰어넘을 수도 없다. 실제로 오늘날에는 1917년 이후뿐만 아니라 1968~89년의 투쟁에서 잃어버렸던 많은 것을 되찾아야만 한다. 이 작업은 혁명가들에게 계급의 실제 운동과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위기로 드러난 전망을 분석하고, 이러한 이론적 노력의 바탕 위에 코뮤니스트로서의 입장의 첨단에 설 사람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에 대답을 제공하는 데에는 매우 오랜 시간의 끈질긴 작업이 필요하다. 이러한 작업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혁명의 문제를 제기할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조건이 다시 한번 갖춰질 때, 미래 당을 위한 정치적, 조직적 준비의 일부로 여겨져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오늘날 혁명적 조직의 책무는, 1930년대 코뮤니스트좌파인 이탈리아 분파가 가장 명쾌하게 정교화한, 코뮤니스트 분파의 책무와 유사하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 20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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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otebook IV, the Chapter on Capital.

 

<출처>

22nd ICC Congress: Resolution on the international class struggle

 

혁명 투사 칼 맑스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억압계급은 위대한 혁명가들을 끊임없이 평생 추적했으며, 가장 야만적인 악의, 가장 격렬한 증오, 거짓과 중상의 가장 파렴치한 캠페인으로 그들의 이론을 대했다. 혁명가들이 죽은 후에는 혁명가들을 무해한 아이콘으로 만들며, 억압받는 계급에 ‘위안’을 주기 위하여 그들의 이름을 어느 정도까지는 거룩하게 만들고 그들을 성인으로 떠받드는 동시에 그들 이론의 혁명적 본질을 강탈하고 혁명적 칼날을 무디게 하여 평범하게 만든다.” 

부르주아 계급은 맑스를 일생에 걸쳐서 경찰기구를 통해 박해하고 악마와 동일화시켜 그의 활동을 막기 위한 모든 것을 했다[1]. 그의 죽음 후, 부르주아 계급은 자본주의를 파괴하고 코뮤니즘(공산주의)의 미래를 열기 위해 그의 전투를 왜곡하기 위한 모든 것을 했다.

악명 높은 선전

맑스 탄생 200주년에 맞추어 제작된 모든 출판물, 라디오,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은 이러한 규칙을 따른다. 많은 학자는 경제학, 철학, 사회학에 대한 맑스의 업적에 대해서 경의를 표하는 한편, 정치영역에서는 ‘현실과는 멀어져’ 전적으로 실패했거나 완전히 실수한 사람으로 그를 소개한다. 이것은 맑스의 예리하고 전투적인 혁명이론의 칼날을 무디게 만드는 것 이상은 아니다! 오늘날 제기되는 논쟁 중 하나는 맑스가 20세기와 21세기의 미래 혁명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19세기의 사상가"[2]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추론에 따르면 혁명적인 관점은 오늘날 타당성이 없다. 노동계급은 존재하지 않고, 게다가 맑스의 정치적 프로젝트는 스탈린주의의 공포로 귀결될 뿐이다. 맑스의 모든 정치적 업적은 마침내 역사의 쓰레기통에 던져진다.

그러나 이러한 선전의 좀 더 교활한 견해는 맑스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옹호와 소외에 대한 비판이라는 요소를 확인하여 ‘진정한’ 맑스의 요소를 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단언한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우리에게 맑스를 혁명가로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국가통제 없이 불평등과 경제위기를 만드는 ‘규제되지 않는’ 자본주의를 개선하고 이해하게 하는 업적을 남긴 위대한 사상가의 하나로 보여주는 것이다. 부르주아 가운데는 맑스를 자본주의의 위기, 세계화의 예측, 불평등의 성장 등을 예견한 ‘경제학의 천재’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 세기보다 더 오랜 기간 맑스에게 아첨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른바 맑스 상속자를 자처했으며, 이들 가운데는 스탈린주의자로부터 트로츠키주의자를 포함한 좌파도 있었다. 이들은 레닌이 앞에서 비판한 것처럼 혁명적인 맑스를 망가뜨리고 손상하고 왜곡하여 반(半)종교적인 우상으로 그를 추앙하고 받들어 모셨다. 이 모든 것은 소련(USSR), 동유럽 국가들 그리고 중국에 세워진 국가자본주의(쇠퇴의 시대에서 자본주의의 위장된 형태이자 반혁명의 산물)의 지배를 사회주의 또는 코뮤니즘으로 위장하기 위한 것이다.

맑스는 무엇보다도 먼저 투사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맑스는 엥겔스와 함께 무엇보다도 우선 혁명가였으며 투사였다. 그의 이론적 연구는 이러한 출발점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 누군가는 맑스를 책에 둘러싸여서 세계와는 단절된 순수한 학자로 만들기를 원하지만, 오직 혁명적 투사만이 맑스주의자가 될 수 있다. 그가 1842년 베를린의 청년헤겔학파(Hegelians)에 참여한 이후부터 맑스의 삶은 프러시아 전제주의에 대항한 투쟁이었다. 이 투쟁은 그가 사회 대다수의 비참함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파리 노동자들과의 토론에서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보았을 때 코뮤니즘을 위한 투쟁으로 변화되었다. 이 투쟁은 그를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추방당해서 떠도는 유배자로 만들었으며 그를 극도의 빈곤으로 몰아넣어서 아들마저도 죽어야 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프랑스 TV ‘문화’ 프로그램에서 아르테(Arte)가 맑스의 가난에 대한 원인을 맑스나 그의 부인이 유복한 집안 출신이기 때문에 가정경제를 잘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암시한 것은 정말로 역겹다. 

실제로 맑스는 전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연대에 철저했으며, 정기적으로 그의 적은 수입을 혁명운동에 사용했다! 게다가 조나손 스펜서(Jonathon Spencer)가 말한 것과는 반대로, 맑스는 ‘언론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프러시아 전제주의에 대항한 투쟁과 부르주아에 대항한 투쟁에서 선전의 필요성을 이해한 전사였기 때문에 ‘라인신문’, ‘독일-브뤼셀 신문’, ‘프랑스-독일 연보’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라인신문’에 기사를 썼다. 맑스는 투사로서 ‘코뮤니스트동맹’의 전투에 전적으로 함께 했고, ‘코뮤니스트동맹’이 노동운동의 주요 문서인 ‘코뮤니스트 선언’ 작성을 위임한 것에 대하여 수락했다. (보리스(Boris Nicolaievsky)와 오토(Otto Maenchen)가 쓴 ‘Marx, Man and Fighter’라는 맑스 전기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투사로서 혁명가들의 재편성과 조직화가 그의 활동의 핵심이었다. 같은 방식으로, 그의 이론적 작업 전체의 원동력은 노동계급에서 진행되는 계급적 명확성을 위한 투쟁이었다.

맑스의 이론 연구

맑스는 자본주의에서 지킬 것은 어떤 것도 없으며, 착취에 대한 투쟁을 통해서 “잃을 것이라고는 사슬밖에 없는” 노동계급의 관점으로부터 출발하여 엄청난 이론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의 이론작업은 이 전투가 사회계급의 출현 이후 나타난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의 종결 가능성을 포함하며, 노동계급의 해방이 코뮤니즘을 통한 인간성의 회복을 가져올 것이라는 자명한 원리로부터 진행되었다. 자크 아탈리(Jaques Attali)의 맑스가 ‘현대 민주주의의 창시자’라는 말은 부르주아의 거짓말일 뿐이다. 이 거짓말은 현 사회가 존재하는 최고의 사회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선전의 목적은 사멸하는 자본주의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관점은 코뮤니즘이라는 것을 노동계급이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맑스가 확립한 과학적 방법과 역사유물론은 계급전투를 지도하기 위한 노동계급의 필요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 방법론은 헤겔의 철학을 비판하며, 실재의 변형은 항상 변증법적 과정이었다는 헤겔의 발견을 ‘거꾸로 뒤집어’서 넘어선 것이었다. 맑스는 이 방법론을 1848년 파리코뮌과 같은 위대한 노동자들의 투쟁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었다. 코뮤니스트 좌파와 같은 후속 세대의 혁명가들은 맑스가 남겨준 똑같은 방법론을 이용하여 1917년 혁명적 물결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끌어낼 수 있었다. 맑스의 접근법은 효과적이다. 그의 방법을 이용하여 실재를 조사하고 그 분석 결과를 실제 결과와 비교하는 것을 통해서 혁명가들은 이론을 풍부하게 할 수 있다.

노동계급의 관점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노동계급이 무엇에 대항해야 하는지와 사슬에서 벗어나 그 자신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파괴해야 할 것인가를 근본적으로 이해하게 한다. 따라서 맑스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기초를 연구했다. 이 연구는 자본주의의 기초가 상품교환이며, 이 상품교환은 자본주의에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형태인 임금노동의 기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 연구결과를 「리베라시옹(Liberation)」1)이 맑스의 탄생 기념일에 말한 다음의 말과 비교하는 것은 흥미롭다. "칼 맑스는 자본가에 의한 노동력 구매가 임금노동자가 투여한 노력을 현실화하는 데 있어서 불확실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말은 만약 누군가가 노동자가 견딜 수 있는 노동력을 측정할 수 있다면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는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맑스가 사용되는 방법의 보기이다. 이와는 반대로 맑스에게 있어서 ‘노동력 구매’는 ‘잉여가치의 생산’을 의미하므로 착취를 의미한다!

맑스는 또한 그의 전투적 관점을 통한 이론작업에서 자본주의 이전의 다른 생산양식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가 영원한 체계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고, 이 자본주의 시스템은 그 한계에 부딪혀 역사적으로 위기에 빠질 것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발전의 특정 단계에서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기존의 생산관계(이를 법률적 용어로 다시 표현하면 지금까지 운영된 체계에서의 소유 관계이다)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생산력 발전으로부터 이러한 관계는 생산력의 족쇄로 변하며, 혁명의 시대가 시작된다(정치경제학 비판)." 또한, 맑스는 자본주의가 자신의 무덤을 파는 프롤레타리아트, 즉 역사의 마지막 피착취 계급이자 모든 것을 빼앗긴 계급이며 그 자신이 가진 노동력의 성격 때문에 혁명적 가능성이 유일한 사회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를 만든다는 것을 논증하였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계급과 착취가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세계적 차원에서 국경을 넘어 연대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전복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다.

20세기와 21세기의 "위대한 분석들"은 맑스가 반박되었거나, 과거의 일이거나, 또는 맑스가 ‘경제학’ 덕분에 또는 자본주의의 ‘너무 심함’을 바로 잡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반(反)세계주의자의 이론에서 “위대한 선지자”가 된 덕분에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모든 이데올로기의 혼란은 프롤레타리아 혁명투쟁을 모호하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

주 1) 리베라시옹(Liberation)은 1973년 사르트르가 창간한 좌파 일간지로, 최근에는 그 선명성을 점차 상실해서 ‘부르주아 보헤미안 성향의 파리지앵’을 위한 일간지로 전락했다는 지적을 받았다(이하 각주 옮긴이).

혁명가조직과 노동계급에 대한 맑스의 관심

칼 맑스에게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코뮤니즘의 도래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행위자로서의 노동계급에 관한 확인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을 조직해야 할 필요성과 관련 있었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에 대한 맑스의 공헌은 아주 중요했다. 그는 독일, 프랑스, ​​영국의 사회주의자들이 서로 소통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통신위원회(Correspondence Committee)’를 조직했다. 그는 “행동의 시점에, 모든 사람이 국내 상황만 아니라 해외의 상황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라고 했다. 맑스는 프롤레타리아트 안의 국제혁명조직을 만들고 이를 방어하기 위한 투쟁에 꾸준히 참여하면서 프롤레타리아 조직화의 필요성을 구체화했다. 맑스의 코뮤니즘을 위한 투쟁과 이 투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그의 가장 깊은 이해는 1847년에 ‘의인동맹(League of the Just)’2)이 ‘코뮤니스트동맹’에 합류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기 위한 싸움에 그를 밀어붙였다. 맑스와 엥겔스는 혁명가들의 역할에 대한 예리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코뮤니스트동맹’이 강령을 채택해야 할 필요성을 주장했으며, 이는 1848년 ‘코뮤니스트 선언’의 작성으로 나타났다.

‘코뮤니스트동맹’은 1848년 혁명의 패배 이후 탄압의 타격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후 투쟁은 1860년대 초에 다시 시작되었고 다른 조직화의 노력이 나타났다. 맑스는 1864년에 결성된 ‘국제노동자협회(IWA)’의 창립 초기부터 참여했다. 그는 규약을 작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창립선언을 쓰기도 했다. 조직의 중요성과 그의 이론적 명확성에 대한 그의 확신은 그를 조직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코뮤니스트동맹’의 조직원으로 그는 IWA안에서 ‘코뮤니스트동맹’ 조직이 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단호한 투쟁을 했다. 그의 이론적 관심은 투쟁의 필요와 절대 분리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맑스가 ‘코뮤니스트동맹’에서 바이틀링(Weitling)3)과 만났을 때, 바이틀링의 코뮤니즘에 대한 이상주의적이고 관념적인 시각 때문에 “지금까지의 무지는 누구에게도 쓸모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맑스가 국익의 옹호에 IWA 활동의 초점을 맞추고 싶어 했던 마찌니(Mazzini)4)에 맞서서 IWA에서 싸웠던 근본적 이유였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행동 대신에 음모적인 모험을 내세우며 IWA를 통제하려고 계획했던 바쿠닌(Bakunin)5)에 반대한 근본 이유이다.

맑스의 이론적 업적은 19세기 부르주아사회에 대하여 경이적인 빛을 비춘다. 그러나 이 업적을 단순히 ‘세상을 이해하는’ 수단으로 간주한다면, 마치 부르주아계급의 사이비 전문가가 맑스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처럼, 그의 업적은 보이지 않은 안개에 둘러싸인다. 부르주아는 ‘미래는 없다’라는 생각을 퍼트리지만, 노동계급은 사슬에서 자신을 스스로 해방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맑스에 대한 이론적 연구를 활용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의 투쟁적인 삶, 그의 전사로서의 생활로부터 영감을 얻어야 한다. 즉 그의 이론적 작업은 "세상을 변혁시키자!"라는 프롤레타리아의 투쟁목표와 일치해서 발전할 수 있었다.

Vitaz, June 1, 2018

 주 2) 의인동맹(Just of League)의 회원은 주로 독일의 재봉과 목공에 종사하는 장인으로, 1847년 6월, 맑스와 엥겔스가 주도한 ‘통신위원회’와 합쳐 코뮤니스트동맹을 구성했다. 

 주 3) 유럽 도시에서 독일 수공업 직인의 결사 운동을 지도하고, 1850~60년대의 뉴욕에서 이민노동자의 사회건설을 주창한 독일의 공상적 사회주의자.

 주 4) 이탈리아의 애국자·혁명가로 가리발디(Garibaldi)를 도와 이탈리아의 통일과 독립을 꾀했다.

 주 5)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프루동의 영향을 받아 아나키즘을 주장했으며, 1868년 제1 인터내셔널에 참가했으나 맑스와 대립하다 제명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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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따라서 엥겔스는 맑스의 장례식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맑스는 그의 시대에서 가장 많이 미움을 받고 가장 거짓말로 평가된 사람이었다. 절대주의자와 공화정부가 그를 추방했다. 민주적 부르주아와 보수적 부르주아가 그에 반대해 연합했다".

[2] 최근 미디어의 대규모 프로모션으로 혜택을 받은 미국학자 Jonathon Spencer는 “칼 맑스 전기”에서 맑스를 ‘19세기의 사람’으로 불렀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옮긴이 ┃ 한동이

 

<출처>

https://en.internationalism.org/icconline/201807/16482/karl-marx-revolutionary-militant

 

혁명조직의 기능에 관한 보고서

혁명조직의 본질과 기능에 관한 보고서는 1982년 ICC(국제코뮤니스트흐름) 국제총회에서 채택되었다. 「국제평론(IR)」 다음 호에서 두 번째 보고서, ‘혁명조직의 구조와 작동 양식에 관하여’를 실을 것이다.

1. ICC는 창립 이래, 전 세계적인 계급투쟁의 새로운 도약에 국제 혁명조직의 중요성을 늘 강조해 왔다. 그 투쟁에 비록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일지라도 개입하여 혁명가 그룹 사이에서 토론의 구심점을 형성하려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또한, ICC의 존재가 필요하고 공상적이지도 않음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ICC는 자체 기능이 계급 내부의 심오한 요구에 부응한다는 신념으로, 여전히 무책임성과 미성숙으로 강하게 드러나는 혁명 환경의 딜레탕티즘(제대로 모르고 좋아하는 어설픈 전문가주의)과 과대망상증에 대항해 싸워오고 있다. 이 신념은 어떤 종교적인 신앙이 아니라 맑스 이론의 분석법에 기반을 둔다. 혁명조직의 출현, 혁명조직의 역할, 형태, 목적과 원칙의 근거는 맑스 이론의 틀을 벗어나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이론 없이는 진정한 혁명운동은 존재할 수 없다.

2. ICC가 최근에 겪은 분열은 조직의 치명적인 위기로 여겨질 수 없다. 본질에서 그것은 혁명조직이 나타나는 계급 운동의 조건과 발전노선, 이해할 수 없었던 무능력의 표현이었다:

- 혁명을 향한 경로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지 지역적인 것이 아니다.

- 위기와 투쟁의 폭이 필연적으로 혁명적 시기를 즉시 펼쳐내지는 않는다.

- 조직화의 필요성은 우발적이거나 지역적인 요구가 아니라, 코뮤니즘이 전 세계적으로 승리할 때까지의 역사적 시기 전체를 총괄한다.

- 결과적으로, 혁명조직의 과업은 장기적인 토대에서 이해해야 하고, 조직의 진정한 위험인 당면주의(맞닥뜨린 국면에 조급/당면하게 대응)적 조급함에 따른 모든 인위적인 지름길로부터 조직은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3. 혁명조직의 기능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항상 귀결되었다:

- 아나키스트와 평의회주의 시각에서 조직은 노동자 각각의 인성에 어긋나는 것으로 여겨지고, 개인의 순전히 우연적인 집합체로 환원된다.

- 전통적인 보르디가주의는 계급을 당과 동일시하면서, 계급의 총괄 조직의 기능과 더불어 혁명조직의 필요성을 거부한다.

4. 혁명조직의 필요성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여전히 크다. 반혁명으로(1980년대 당시 폴란드에서처럼) 어떤 조직화한 혁명분파도 부재했던 곳에서 거대한 투쟁이 출현했다고 하더라도 이 필요성은 없어지지는 않는다.

- 19세기에 프롤레타리아트가 하나의 계급이 된 뒤, 혁명가들을 조직하는 것은 결정적인 요구였고 지금도 그렇다. 역사상 사회 변혁의 잠재력을 자체에 품은 모든 계급은 그 역사적 목표의 승리로 이끌 투쟁의 목표와 방법에 관한 분명한 시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 프롤레타리아트의 코뮤니스트 목표는 이론적으로 (강령) 그리고, 실천적으로 (활동)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전반적인 목적을 옹호하는 정치조직을 출현시키는 것이다.

- 계급의 내부에서 출현하고 계급의 영구적이고 일부인 혁명조직은 모든 자연적인 분할(지리적이고 역사적인)과 인위적인 구분(직업 분야, 생산현장)을 초월하며 부정한다. 그것은 계급 내부에서 통일된 의식 발전을 향한 영구적 경향을 표현한다. 모든 즉각적인 구분을 반대함으로써 자신을 확인한다.

-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을 탈선시키고 파괴하려는 부르주아지의 체계적인 시도에 직면해서 혁명조직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해로운 효과에 대항한 투쟁에서 결정적인 무기이다. 그 이론(코뮤니스트 강령)과 계급 내부에서의 투쟁 활동은 자본주의의 선전이라는 독(毒)에 대항한 강력한 해독제이다.

5. 코뮤니스트 강령과 투쟁 활동 원칙은 혁명조직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모든 조직의 초석이다. 혁명이론 없이, 어떤 혁명적 기능, 즉 이 강령의 실현을 위한 어떤 조직화도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맑스주의는 항상 모든 당면주의적이고 경제주의적인 편향을 거부해 왔다. 이러한 편향은 코뮤니스트 조직의 역사적 역할을 왜곡하고 부정하는데 봉사한다.

6. 혁명조직은 계급의 한 기관이다. 기관은 생명체의 살아있는 구성요소를 의미한다. 그 기관이 없다면 계급의 삶에서 치명적인 기능의 하나가 없는 것이라서 언제라도 위축되거나 마비될지 모른다. 그래서 계급이 필요로 하는 기관을 불가피하게 창조해냄으로써 재탄생하고, 성장하고, 확장된다.

7. 이 기관은 계급의 즉각적 충동에 복종하는 것에 국한된 단순한 생리학적 부속물이 아니다. 혁명조직은 계급 일부이다. 이것은 계급에서 분리되지도 않고, 계급과 같지도 않다. 그것은 계급 존재와 의식 사이의 매개체도 아니고, 계급의식의 총체도 아니다. 그것은 계급의식의 특별한 형식으로서, 가장 의식적인 부분이다. 그래서 계급의 총체가 아니라 계급의 가장 의식적이고 활동적인 부분을 포괄한다. 계급이 곧 당이 아니듯이 당도 곧 계급이 아니다.

8. 계급 일부로서 혁명가의 조직은 그 부분(투쟁가)의 합도 아니고 사회학적 계층(노동자, 피고용자, 지식인)의 연합체도 아니다. 그것은 그 생명체의 최적화된 작동을 보장함으로써 그 구성 세포들의 유일한 기능인 하나의 생명체로서 발전한다. 그것은 개인이나 특정 범주에 그 어떤 특권도 부여하지 않는다. 계급과 마찬가지로 혁명조직은 하나의 집합체로 나타난다.

9. 혁명조직이 완전하게 꽃필 수 있는 조건은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혁명적 성숙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과 같다.

- 국제적인 차원 : 프롤레타리아트와 마찬가지로 혁명조직은 부르주아지가 부과한 민족국가 틀을 돌파함으로써 태어나고 살아간다. 자본의 민족주의에 대항하여 모든 나라에서 계급투쟁의 국제주의를 옹호한다.

- 사적 차원 : 혁명조직은 계급의 가장 진보된 분파로서 계급에 대해 역사적인 책임을 갖는다. 과거 노동자 운동의 대체할 수 없는 경험의 기억을 사수하기에 그것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전반적 역사적 목표의 가장 의식적인 표현이다.

이러한 요인이 바로 계급과 그 정치조직에 그들의 단일한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다.

10. 혁명조직의 활동은 오직 통일된 단일체로서 이해해야 하며, 그 구성요소는 따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이다:

- 이론적 활동, 이 활동의 수행은 항시적인 노력이어야만 하고, 그것은 결코 최종적으로 고정되거나 완결되지 않는다. 이것은 필수적이며 대체할 수 없다.

- 계급의 경제적 정치적 투쟁에의 개입 활동. 이것은 조직 최상의 실천이며, 이때 이론은 선전과 선동을 통해 투쟁 무기로 변환된다.

- 기관의 발전과 강화, 그리고 조직의 성과를 가져오는 조직 활동 없이는 양적 발전(새로운 구성원)은 질적 발전으로 바뀌지 않는다.

11. ICC 안에서 표현된 많은 정치·조직적 몰이해의 보기는 ICC가 처음에 채택한 이론적 틀을 망각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몰이해는 자본주의 쇠퇴이론과 이 이론의 실천적인 함의를 우리의 개입 활동에 동화시키는 것이 빈약했던 점에 기초한다.

12. 혁명조직이 근본 본성은 바뀌지 않았지만, 그 기능의 속성은 자본주의의 상승기와 쇠퇴기 사이에 질적으로 변경되었다. 1차 세계대전에 뒤이은 혁명의 격동기에는 혁명조직의 특정 존재 형태를 낡은 것으로 만들어 버린 한편, 19세기에는 오직 맹아적으로 출현했던 다른 형식을 발전시켰다.

13. 자본주의 상승 주기는 혁명적 정치조직에 하나의 특정한 과도적인 형태를 부여했다.

- 혼합형태. 협동조합, 노동조합 그리고 당이 같은 조직 안에 존재할 수 있었다. 맑스의 노력에도 그 조직의 정치적 기능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노동조합 투쟁이 중심에 놓여 있었다.

- 대중조직의 형성. 이것은 특정한 사회적 범주(청년, 여성, 협동조합주의자)의 중요한 분파를 포괄하거나 심지어는 특정 나라에서 노동자계급 대다수를 포괄함으로써 혁명조직의 원래 기능을 축소하는 경향이 있는 느슨한 형태를 사회주의 조직에 부여했다.

- 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즉각적인 개량의 가능성은 사회주의 조직 활동의 장을 이동시켰다.

「코뮤니스트 선언」에 확인된 코뮤니즘이라는 더 광범위한 전망을 넘어, 즉각적이고 점진적인 투쟁이 우선권을 차지했다.

14. 혁명의 객관적 조건 미숙은 조직적으로 결합하여야 할 임무의 전문화, 즉 조직 기능의 원자화를 가져왔다.

- 이론적인 임무는 전문가(맑스주의 학파, 직업적인 이론가)에게 맡겨졌다.

- 선전과 선동 임무는 항구적인 노동조합과 의회 대표자(’직업 혁명가’)가 맡게 되었다.

- 조직 임무는 당의 임금을 받는 직원이 책임졌다.

15. 그 대다수가 이제 막 시골 지역이나 수공업장에 도착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미성숙과 그때 겨우 형성된 민족국가 틀 내부에서 자본주의 발전은 혁명조직의 진정한 기능을 불분명하게 만들었다.

- 정치적, 조직적 전통 없이 여전히 종교적인 신비화 영향 아래, 독립적 생산자로서 그들의 예전 조건에 대한 향수에 갇힌 채 프롤레타리아화한 대중의 거대한 성장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직하고 교육하는 작업에 지나친 역할을 부여했다. 조직 기능은 여전히 문화가 부족하고, 이전의 유아기 환상으로 고통받는 한 계급에 의식을 주입하고 ‘과학’을 주입하는 것으로 여겼다.

- 산업화한 나라의 틀 내부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은 사회주의의 국제적 성격을 가려버렸다(국제사회주의보다는 ‘독일사회주의’나 ‘영국사회주의가’ 더 많이 거론되었다). 제1 그리고 제2 인터내셔널은 단일하고 집중화된 세계사회주의가 아니라 민족국가 분파들의 하나의 연방체로 작동했다.

- 조직 기능은 국가적인 것으로 보였다. 각 나라에서 사회주의 건설은 ‘사회주의’ 국가의 연합된 연방체로 장식되었다.(카우츠키)

- 조직은 ‘민주적인’ 사람들의 조직으로 보였고, 그 임무는 선거에서 사회주의 강령을 위해 민중을 불러 모으는 것이었다.

16. 이 역사적 시기의 과도기 성격은 당과 계급 사이의 관계를 왜곡했다. 혁명가의 역할은 참모부를 형성한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지휘인 것 같았다. 계급의 주요한 미덕은 규율, 지도자에 대한 복종으로 여겨졌다. 어느 군대나 마찬가지로 그것은 목적(대리주의)의 완수를 위해 심지어는 투쟁방법(노동조합주의)의 완수를 위해 위임된 ‘우두머리’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다. 당은 ‘전체 민중’의 당이었고, 그것은 ‘사회민주주의’의 승리였다. 당의 계급 기능은 민주주의 이념의 늪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당 기능의 이러한 퇴행에 대항해서 제2 인터내셔널의 좌파와 초기 제3 인터내셔널이 싸웠다. 코민테른이 인터내셔널의 몇몇 낡은 개념(대중당, 전선주의, 대리주의)을 넘겨받았다는 사실을 오늘날 혁명가들은 결코 모범의 미덕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조직 기능에 대한 이러한 왜곡과 단절이 바로 역사적인 쇠퇴 시기 부과한 매우 중대한 요구이다.

17. 전쟁에 뒤이은 혁명 시기는 혁명가의 기능에 심오하고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의미했다.

- 조직은, 규모가 축소되었거나 발전된 당이거나 상관없이, 혁명을 준비하거나 조직할 임무를 더는 갖지 않았다. 혁명은 계급 전체의 행위였다.

- 계급의 투쟁가를 준비하고 지도하는 것은 교육가도 참모부도 아니다. 계급은 혁명 투쟁 속에서 자신을 교육하고 ‘교육가’ 자체도 계급에 의해 “교육되어야” 한다.

- 그것은 더는 특정 그룹(청년, 여성, 협동조합주의자 등)의 형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18. 혁명조직은 그래서, 비록 계급 단일 조직인 노동자평의회는 아닐지라도, 즉각 단일한 성격을 가진다. 그것은 더 넓은 단일성 즉, 그것을 탄생시킨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의 단일성이다.

그것은 더는 국가 규모가 아니라 세계 규모로, 다른 ‘국가’ 분야를 배출하는 하나의 총체로서 부상한다.

그 강령은 동방이나 서방이나, 선진국이나 후진국이나 모든 나라에서 같다. 불균등한 자본주의 발전과 전(前)자본주의 아나키즘의 산물로서 국가적인 ‘특이성’이 오늘날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 때문에 강령의 단일성이 부인될 수는 없다. 강령은 전 세계적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19. 혁명의 객관적 조건 성숙(프롤레타리아트의 결집, 더 단일화되고, 더 좋은 질, 지적 수준이나 성숙도에서 이전 세기 그것보다 우월한 계급의식의 더 커다란 균일성)은 혁명가들의 조직 형태와 목표 모두를 심오하게 변화시켰다.

(가) 그 형태에 있어서

- 혁명조직은 과거보다 훨씬 더 제한된 소수지만 더 의식적이며, 그 강령과 정치적 활동으로 선택된다.

- 혁명조직은 19세기에 비해 훨씬 더 개인적이지 않으며, 투쟁가 대중을 지휘하는 지도자 조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유명한 지도자와 위대한 이론가의 시기는 지났다. 이론 작업은 진정 집합적인 임무이다. 수백만 ‘무명의’ 프롤레타리아 투사들과 마찬가지로 조직 의식은 개개인의 의식이 통합되고 초월함으로써 하나의 단일한 집합 의식으로 발전한다.

- 그 기능 양식에 있어서 그것은 국가 지부의 병립에 불과했던 제1 그리고 제2 인터내셔널과는 반대로 더 집중화된다. 혁명이 오직 전 세계적 규모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시기에 혁명조직은 혁명가들의 재조직화를 지향하는 전 세계적인 경향의 표현이다. 이러한 집중화는, 1921년 이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퇴행적인 견해와는 반대로, 혁명가들의 전 세계적인 활동을 특정한 한 나라의 당이 흡수해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혁명가들의 전 세계적인 활동이 많은 나라에서 존재하며 그 중 어느 한 부분이 다른 부분에 관해 지배적이지 않은 그러한 단일체가 스스로 활동을 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분에 대한 단일체의 우선성이 부분의 삶을 조건 짓는다.

(나) 그 방법에 있어서,

- 전쟁과 혁명의 역사적 시기 혁명조직에 그 진정한 최종목적, 즉 코뮤니즘을 더는 장기적 목표로 단순한 선전이 아니라 세계혁명을 위한 대투쟁 안에 직접 뛰어들어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전면에 떠오른다.

- 러시아 혁명이 보여주듯이, 혁명가는 그들이 요구할 어떤 권리도 특권도 갖지 않고 계급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단지 출현하고 존재할 수 있다. 그들은 계급을 대체하지도 않고 계급을 대신해 권력을 획득하지도 국가권력을 장악하지도 않는다.

- 혁명가의 근본 역할은 혁명 이후까지 계급의 모든 투쟁에 개입하는 것이고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성숙을 촉진하는 그들의 대체 불가능한 기능을 완수하는 것이다.

20. 반혁명의 승리, 국가의 전체주의적 지배는 혁명조직의 존재 자체를 매우 어렵게 만들었고 그들의 개입 범위를 축소했다. 이렇게 심오한 후퇴 시기에 이론 기능은 개입 기능을 초월했고, 혁명원칙 보존에 결정적임을 증명했다. 반혁명 시기는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주었다.

- 작은 써클, 핵 또는 극소수로, 계급으로부터 고립된 채 혁명조직은 혁명을 향한 새로운 역사적 시기가 열린 후에만 발전할 수 있었다.

-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새로운 조직원을 영입’하는 것은 숫자라는 신기루에 원칙을 깨뜨리고 조직 기능 손실을 준다. 그래서 가입하는 이들은 강령에 의식적으로 동의하면서 자발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 조직 존재는 맑스주의 이론의 틀에 따라 굳건히 해야만 유지될 수 있다. 철저하고 이론적이며 정치적이고 투쟁적인 선택에 따른 양적인 손실은 질적인 이득을 낳는다.

- 과거보다 더욱더, 혁명조직은 50년간의 반혁명의 지배로 강화된 자본주의의 엄청난 압력에 대항한 프롤레타리아의 미약한 역량이 저항할 수 있는 특권적 위치이다.

이 때문에, 비록 홀로 존재하지는 않을지라도 계급에 의해 생겨난 혁명조직을 결연히 보존하고 강화하며 세계 규모로 혁명가들을 재조직하려는 노력은 중요하다.

21. 반혁명 시기 종결은 혁명조직의 존재 조건을 변화시켰다. 혁명가들의 재조직화 발전에 유리한 새로운 시기가 열렸다. 하지만, 이 새로운 시기는 여전히, 당의 출현에 필수 조건이 진정한 질적 도약을 통해 충분한 조건으로 아직 전환되지 않은 중간시기이다. 그렇기에 이 시기 동안, 우리는 사상 투쟁과 공동 행동을 통해 결국에는 서로 융합함으로써 하나의 세계당 건설을 향한 경향을 나타낼 혁명가 그룹의 발전을 보게 될 것이다. 이 경향의 실현은 혁명을 향한 노정이 열리는 것과 혁명가들의 의식에 달려 있다.

비록 1968년 이래 특정 단계가 도달되었을지라도, 비록 혁명 환경 내부에 선택이 이뤄졌을지라도, 당의 출현은 계급투쟁의 발전이 느리고 혁명 진영이 아직 미성숙한 상황에서 자동적이지도 않고 자발주의의 결과물도 아니다.

22. 사실, 1968년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재기 이후 혁명 환경은 새로운 시기를 감당하기에 매우 미약하고 미성숙한 것으로 드러났다. 반혁명 시기 동안 그 흐름에 대항에 투쟁했던 예전의 코뮤니스트 좌파의 약화 또는 소멸은 혁명조직의 성숙에 부정적인 요소였다. 천천히 재발견되고 재동화된 코뮤니스트 좌파의 이론적인 성과보다도 훨씬 더 조직적 성과(유기적 연속성)가 부재했는데, 이러한 성과물 없이는 이론은 죽은 글귀로 남는다. 혁명조직의 기능, 심지어 필요성조차도 비웃음의 대상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종종 오해되었다.

23. 이러한 유기적 연속성이 부재한 상태에서 68시기 이후 출현한 인자들은 학생운동과 그것에 의해 대변된(모든 것을 의문시하고, 모든 것을 폐기하는) 논쟁주의의 압도적인 압력에 취약했다.

- 이것은 일상생활과 자아실현에 관한 개인주의 이론을 대변했다.

- 맑스주의를 하나의 ‘학문’으로 또는 사적인 기풍으로 바라보는 학습 써클의 아카데미즘.

- 노동자주의가 좌익주의의 압력에 굴복했음을 은폐하는 행동주의/당면주의.

계급투쟁의 느리고 불균등한 걸음걸이에 직면한 학생운동의 환멸과 해체는 모더니즘이라는 형태로 이론화되었다. 그러나 진정한 혁명 운동은 가장 덜 확고하고 덜 진지한 인자들을 걸러내고 자신을 정화했다. 그런 인자들에게 투쟁주의는 휴일의 소일거리이거나 소외의 극치였다.

24. 특히 폴란드 이후, 위기가 더 넓고 넓은 계급 분출로 향한 길을 열어낼 것을 충격적으로 확인했음에도, ICC를 포함해서 혁명조직들은 모더니즘과 아카데미즘만큼이나 위험한 또 다른 위험이자 개인주의와 딜레탕티즘(제대로 모르고 좋아하는 어설픈 전문가주의)과 쌍을 이루는 당면주의(맞닥뜨린 국면에 조급/당면하게 대응)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오늘날 혁명조직은 이것을 결정적으로 일소할 수 없다면 적어도 이러한 재앙들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25. 최근에 ICC는, 쁘띠 부르주아적 조급함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이고 1968년 5월의 혼란스러운 정신의 최종 전형인 당면주의의 재앙적인 결과로 고통받았다. 이러한 당면주의의 가장 충격적인 형태는 다음과 같다.

(가) 행동주의, 이것은 개입에 나타났고 자발주의 개념인 ‘신규모집’ 안에 이론화되었다. 조직은 인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강령을 기반으로 한 엄격한 선택을 통해 조직적으로 발전한다는 점이 잊히었다. ‘수적인’ 발전은 단순한 의지의 결과가 아니라 계급과 그것이 배출해 내는 인자의 성숙 결과이다.

(나) 지역주의, 이것은 특정한 개입에서 표면화되었다. 우리는 ICC 내의 특정 인자가 그들의 지역적인 지부가 마치 개인의 소유물이자 자동적인 실체인 것처럼 간주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지부는 전체의 일부분일 수밖에 없다. 국제조직의 필요성조차도 부정되거나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국제조직은 일종의 ‘허세’로, 기껏해야 지부 간의 느슨한 ‘연결고리’ 정도로 치부되었다.

(다) 경제주의, 오래전에 레닌이 대항해 싸웠던 그 경제주의는 계급투쟁의 전 세계적 틀 속에 각각의 파업을 통합해 내기보다는 그것 자체로만 바라보는 경향 속에 나타났다. 종종 우리 조직의 정치적 기능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혁명가들을 노동자를 위해 봉사하는 투쟁의 ‘심부름꾼’이나 ‘기술자’로 여기어 결국에는 장래 투쟁의 물질적 준비만을 옹호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라) 추종주의는 혁명조직 역할과 기능에 대한 이러한 몰이해의 마지막 구체화로서, 우리 자신의 깃발을 숨긴 채 파업을 단순히 따라가려는 경향의 형태를 띠었다. 노동조합주의의 모든 숨겨진 형태를 분명하고 비타협적으로 고발하는데 주저함이 있었다. 운동과 함께 머물며 더 많은 즉각적인 반향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든지 계급에 의해 인정받기 위해서 원칙을 외면하였다.

(마) 노동자주의는 이러한 혼란스러움의 최종적인 종합이었다. 좌익주의자와 마찬가지로 특정 인자들은 조직 내부에 ‘노동자’와 ‘지식인’, ‘지도부’와 ‘풀뿌리 단위’가 존재한다고 선동적으로 주장했다.

몇몇 동지들이 조직을 떠난 것은 당면주의가 매우 심각한 병임을 보여주고, 그것은 불가피하게 조직의 정치적 기능과 그 이론적 강령적 기초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26. 이 모든 전형적인 좌파적 편향은 조직 강령 안 이론적인 불충분성의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이론적 틀의 빈약한 적용을, 특히 자본주의 쇠퇴론의 빈곤한 적용을 반영하는데, 자본주의의 쇠퇴는 혁명조직에 열린 활동과 개입의 형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27. 이 때문에 ICC는 정치분석에서 당면주의로밖에 귀결될 수 없는, 그 어떤 강령적 틀의 포기에 완강하게 반대해야 한다. ICC는 다음과 같은 위험들에 대항해 결연히 싸워야 한다.

- 경험주의에 대항해서 싸워야 한다. 경험주의의 경우, 당면한 사건과 현상에 집착함으로써 기회주의의 영원한 원천인 ‘특정한’ 경우라는 낡은 개념이 초래된다.

- 피상성의 모든 경향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 이 경향은 관행성이나 정신적인 게으름의 형태를 취한다.

- 이론 작업에 대한 특정한 불신이나 주저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 이론의 ‘회색’은 개입이라는 ‘장밋빛’에 반대 항에 놓여서는 안 된다. 이론은 맑스주의 전문가에게 맡겨진 어떤 것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집합적인 심사숙고의 산물이자 이러한 사색 과정에 모든 이의 참여 산물이다.

28. 우리의 이론적 조직적 성취를 보존하기 위해서 우리는 개인주의의 유아기 형태인 딜레탕티즘의 다음과 같은 흔적들을 없애야 한다.

- 방법이 없이 단기적으로 조금씩 일하는 것.

- 수공업자의 딜레탕티즘의 표현으로, 개별적으로 일하는 것.

- 미숙하거나 인위적인 경향을 구축하는 정치적인 무책임성.

- 책임을 다하지 못하거나 회피하는 것

조직이 투쟁가의 일상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투쟁가는 일상 투쟁을 유지해서 조직의 폭넓은 작업에 스스로 발 딛는다.

29. 자본주의 쇠퇴기에 혁명조직의 기능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은 1980년대라는 결정적 시기에 우리 자체의 발전에 필요한 조건이다. 혁명이 조직의 문제는 아닐지라도, 혁명적 소수들이 하나의 계급 기관으로 존재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조직문제와 극복되어야 할 몰이해가 존재한다.

30. ICC 존재는 오직 맑스주의 방법의 재습득을 통해서만 보장될 수 있는데, 이 방법이 사건을 이해하고 개입하는데 가장 확실한 나침반이다. 조직의 모든 작업은 오직 장기적인 기반 위에서만 이해되고 발전할 수 있다. 방법 없이, 집합적인 정신 없이, 모든 투쟁가의 지속적인 노력 없이는, 당면주의 조급함을 배제할 수 있는 불굴의 자세 없이는 그 어떤 진정한 혁명조직도 존재할 수 없다. ICC는 그 존재가 장래의 투쟁에 필수적인 요소의 하나인,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창조한 그러한 기관의 하나이다.

31. 지난 19세기와는 달리, 혁명조직의 임무는 더 난해하다. 구성원 모두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조직은 여전히 반혁명의 마지막 영향으로부터 고통받고, 그 시기 동안 전진과 후퇴로 표시되는 계급투쟁의 결과로 고통받는다.

반혁명의 기나긴 밤 질식할 것 같고 파괴적인 분위기 안에서 살 필요는 더 없을지라도, 현재의 활동이 계급투쟁에 그리고 세계적 규모의 대중 운동 발생에 유리한 시기에 활동하고 있을지라도, 조직은 계급 운동이 일시적으로 후퇴하는 시기에 올바르게 퇴진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이런 이유로 혁명조직은 혁명의 순간이 올 때까지, 계급을 엄습할 수 있는 불확실성과 사기 저하의 물결에 대항해 결연하게 투쟁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그 가장 결정적인 임무는 조직의 통일성, 그 원칙과 기능을 방어하는 것이다. 스스로 위축되어버리는 약점 없이 저항하는 법을 배우는 것, 이것이 바로 미래의 승리를 위한 조건을 준비하는 길이다. 혁명이론을 대중이 파악할 수 있으려면 당면주의 편향에 대항한 처절한 투쟁이 필요하다.

당면주의 잔재로부터 자신을 해방하여, 코뮤니스트 좌파에 의해 보존되고 풍부해진 맑스주의의 생생한 전통을 다시 품어 조직이 역사적 임무를 감당할 수 있고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배출된 대체 불가능한 도구임을 실천 속에서 보여줄 것이다.

보론

전면화된 투쟁과 혁명운동의 시기에 혁명가의 활동은 직접적이고 심지어 결정적인 영향을 갖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노동자계급은 이때 숙적과 직접 대면해야 한다. 계급이 자체의 전망을 강요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신비화와 자극에 항복하여 부르주아지에 의해 파괴되고 만다.

- 계급은 회합이나 총회에서 투쟁 속도를 늦추고 그것을 이탈시키려 모든 가능한 수단을 사용하는 부르주아지 대리인들이 자행하는 사보타지와 훼손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취약점을 갖고 있다.

운동에 분명한 정치적 방향성을 유지하고 계급의식 균질화 과정을 가속하는 임무를 가진 혁명가들이 있다는 것은 독일 혁명과 러시아 혁명에서 보였듯이 힘의 균형을 어느 한쪽으로 기울게 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특히, 우리는 레닌이 4월 테제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했듯이 이 영역에서 볼셰비키가 행한 근본적인 역할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당이 노동자 대리인 소비에트에서 소수이고, 부르주아의 영향 아래에 놓인 채 이 영향을 프롤레타리아트에 확산시키는 모든 기회주의적 쁘띠부르주아적 인자들의 블록에 비해서 잠정적으로 미약한 소수임을 인정하라… 노동자 대리인 소비에트가 혁명정부의 유일한 형태이고 그래서 이 정부가 부르주아의 영향 아래 놓여 있는 한 노동자 대중들의 요구들에 근거해서 그들의 전술 오류를 인내심 있고 체계적으로 노동자 대중에게 설명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임을 그들에게 설명하라." (테제4)

지금부터 ICC 존재와 현 임무 실현은 미래 임무에 부응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준비를 표현한다. 전면화된 활동의 시기에 혁명가들이 그들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역량은 현재 활동이 조건 짓는다.

1) 이러한 역량은 자생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조직적 숙련과정을 통해 발전한다. 일관적이고 분명히 규정된 입장은, 그것을 옹호하고 유포하며 심화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역사는 보기를 들어 독일의 혁명가들과는 달리 어떻게 볼셰비키가 (1905년부터 1차대전까지) 계급의 경험을 고려해서 그들의 입장을 발전시키고 조직을 강화하는 역량으로 인해 계급의 혁명 투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틀 안에서, 코뮤니스트 그룹의 근본적인 목적 중의 하나는 일반적으로 정치투쟁 초기의 특징인 활동과 조직의 수공업적인 수준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 임무, 즉 개입, 출판, 유포, 토론 및 근접한 인자들과의 교류를 발전시키고 체계화하며 정규적으로 완수하는 것이 중점적인 급선무이어야 한다. 이것은 특수한 기관 그리고 그것이 다양한 세포들의 총합으로서가 아니라 균형 잡힌 신진대사를 갖는 단일체로써 활동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기능규칙을 요구한다.

2) 지금부터, 혁명조직은 전 세계적으로 투쟁의 발전과 더불어 출현하는 정치 그룹, 토론 써클, 그리고 노동자그룹에 있어서 국제적인 정치적 재조직화의 일관된 축을 표현한다. 간행물을 가지고 있고 개입하는 국제 코뮤니스트 조직이 존재함으로써 이 그룹은 입장과 경험의 대결을 통해서 자신을 정립하고 그들 입장의 혁명적 일관성을 발전시키며 어떤 경우에는 국제 코뮤니스트 조직에 가담할 수도 있게 된다. 만약 그러한 축이 없다면, 그러한 그룹은 (예를 들어 행동주의, 지역주의 및 협동조합주의 등을 통해) 분산되고 낙담하고 퇴행하게 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 투쟁이 발전하고 혁명적 대결의 시기가 다가옴에 따라 이 역할은 계급투쟁에 따라 생겨나는 인자들과 관련해서는 훨씬 더 중요해질 것이다.

점점 더 노동자계급은 숙적과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심지어 부르주아 권력을 즉각 전복할 수 없는 시기에조차도 충격은 격렬하며 계급투쟁의 결과에 결정적일 것이다. 이 때문에 혁명가들은 그들이 가진 어떤 수단을 활용해서라도 계급투쟁 안에 개입해야 한다.

- 노동자들의 투쟁이 가진 모든 잠재성이 실현될 수 있도록 그러한 투쟁을 가능한 한 멀리 추진하기 위해서.

- 모든 문제가 분명하게 제기되고, 일반적인 정치적 전망의 틀 안에서 최대한 많은 교훈이 도출될 수 있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서.

ICC(국제코뮤니스트흐름), 1982년 1월.

2005년 1월 17일, 인터내셔널 리뷰 (IR)

<원문출처> https://en.internationalism.org/specialtexts/IR029_function.htm

ICConline - 2019

ICC의 분파로서의 역할에 관한 보고서

ICC의 분파로서의 역할에 관한 보고서

국제평론(International Review), 2016126

 

(보고서 1부 노동자계급의 역사에서 분파 개념)

 

우리가 “ICC창립 40년 이후 – 우리 활동의 대차 대조표는 무엇이며 전망은 무엇인가?“라는 이전의 기사에서 말했듯이, 2015년 ICC 제 21차 대회는 ICC의 “분파”로서의 역할에 관한 보고서를 채택했다. 이 보고서는 1,2부로 나눠지는데, 그 1부는 분파 개념의 역사적 맥락과 그것의 환기를 제공한다. 2부는 우리 조직이 이러한 측면에서 그 책무를 어떻게 이행해오고 있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분석이다. 아래에 우리는 그 보고서의 첫 번째 부분을 공개하는데, 이는 ICC가 직면하는 특수한 문제들을 넘어서는 전반적인 관심사에 관한 것이다.

제 21차 국제 대회는 ICC의 40년 간의 존재에 관한 비판적인 평가를 그 관심의 중심에 놓을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대차 대조표는,

- 첫째, ICC가 해온 일반적인 분석과

- 둘째, ICC가 미래의 당 건설에 있어서 자체의 역할을 설정하는 방식에 관련되어 있다.

이 두 번째 질문에 관한 해답이 분명하게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역사의 현 시기, 즉 계급 대립의 노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가질 조직인 혁명당의 출현을 위한 조건들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시기에 ICC가 떠맡는 역할이 잘 정의되어 있다는 점이다 :

이 유기체의 역사, 즉 당의 역사를 탐구하거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유기체를 계급의 운동이 겪어오는 여러 단계들, 계급에 부과된 문제들, 그리고 매 순간 이러한 문제들을 의식하고 그것들에 적절히 대응하며 경험에서 교훈을 끌어내고 그 교훈을 미래의 투쟁을 향한 발판으로 활용하려는 그것의 노력들의 일반적인 맥락 안에 놓고 살펴 보아야 한다. 정치 당들은 계급의 발전에 주요한 요소인 한편, 그것들은 동시에 계급의 역사에서 주어진 순간에 계급의 진정한 상태의 표현이다.“

그 역사 전체를 통틀어 노동자계급은 프롤레타리아 당들을 불구로 만들고 부패시키며 그 정당들의 진정한 기능을 왜곡하는 경향을 가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무게에 노출되어 왔다. 이러한 경향에 대응하여 코뮤니즘의 입장들을 가다듬고 명확하게 좀 더 정밀하게 만들 목표를 갖고 혁명 분파들이 출현했다. 3 인터네셔널로부터 출현한 코뮤니스트좌파(the communist left)는 확실히 이러한 경우였다. 그래서 당 문제를 이해하려면 국제 코뮤니스트좌파 전체의 경험과 성과들을 이해하고 동화하는 것이 반드시 요구된다. “

그런데, 그 시기가 발전하는 계급 투쟁의 시기인가 아니면 패배나 후퇴의 시기인가에 따라서 혁명가 조직의 질적인 차이를 분명히 밝힌 점에서 특별한 공헌을 한 것은 코뮤니스트좌파의 이탈리아 분파였다. 이 이탈리아 분파는 이러한 두 시기들의 각각에서 혁명 조직은 어떤 형태를 띠는지를 보여주었다. 첫 번째 경우에는 계급 투쟁에 어떤 중개도 없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갖게 될 조직의 형태, 즉 당의 형태를 띤다. 두 번째 경우에는 계급의 직접적인 삶에 훨씬 더 미약한 영향력을 갖는 수적으로 제한된 조직의 형태를 띤다. 이탈리아 분파는 이러한 두 번째 유형의 조직에게 ‘분파(fraction)’이라는 특별한 명칭을 부여했다. 이때 분파는 계급 투쟁의 발전의 두 시기들, 즉 당(the party)의 존재의 두 순간들 사이에서 존재하면서 과거의 당과 미래의 당을 연결하는 고리(link), 즉 유기적인 교량(bridge)을 구성한다.“

(영문판 국제평론 35호,‘당 그리고 당의 계급과의 관계에 관하여’제 9항 )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질문들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 노동자 운동의 역사상 상이한 순간들에서 이러한 분파 개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어떤 지점까지 ICC는 “분파”로 간주될 수 있는가?

- 분파의 임무들 중에서 어떤 것은 ICC에 적용되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은가?

- 어떤 특별한 임무들을 ICC가 가지며, 혁명 조직의 임무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분파의 임무에 속하지 않는가?

이 보고서의 1부에서 우리는 우리의 성찰에 역사적인 윤곽을 세우기 위해 이 4가지 질문들 중에서 그 첫 번째를 주로 다룰 것이다. 그럼으로써 보고서 2부에서 더 잘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 2부에서는 우리는 앞에서 이미 언급된 핵심적인 질문, 즉 ICC가 미래의 당을 준비하는데 그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과 관련하여 어떤 대차 대조표를 그려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해답을 제안할 것이다.

노동자 운동 역사의 상이한 순간들에서 분파 의 이 개념을 검토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세가지 시기를 구분한다:

- 노동자 운동 초기, 코뮤니스트동맹(Communist League)과 제 1인터네셔널로도 알려진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men’ Association, IWA) 의 시기;

- 성숙기, 제 2 인터네셔널의 시기;

- “전쟁과 혁명의 시기”(코뮤니스트인터네셔널의 표현에 따르면)

그러나, 먼저 프롤레타리아의 당들의 역사에 대한 아주 짤막한 환기를 포함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분파의 문제를 다루려면 우리는 어떨 수 없이 당의 문제를 제기할 수 밖에 없는데, 이때 당은 분파의 출발점과 도착점을 이루기 때문이다.

 

1) 노동자 운동 역사에서 당

당 개념은 노동자운동의 경험(코뮤니스트동맹, IWA, 제 2인터네셔널의 당들, 코뮤니스트당들)을 통해 이론적 실천적으로 점진적으로 세공되었다.

불법조직이었던 코뮤니스트동맹은 여전히 종파들의 시기에 속했다:

근대 자본주의가 동틀 무렵인 19세기의 전반부에 는 여전히 그 형성 단계에 있던 노동자 계급은 지역적이고 고립적인 투쟁들을 벌렸고 교조적인 학파들, 종파들 그리고 연맹들을 산출할 수 없었다. 코뮤니스트동맹은 이 시기의 가장 선진적인 표현있었던 한편 그와 동시에 그것의 선언문은 ‘모든 나라의 프롤레타리아들이여 단결하라’라는 구호와 함께 앞으로 다가올 시기를 예고했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정치당의 본질과 기능’, Internationalisme 38호, 1948년 10월 )

IWA의 임무는 정확히 바로, 종파들을 넘어서서 유럽 노동자들의 광범위한 결집 그리고 그들의 의식을 제압하는 많은 혼란과 관련한 규명 작업을 가능케 하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 이질적인 구성(노동조합, 협동조합, 선동그룹등등 ) 때문에 그것은 이후 제 2인터네셔널의 내부에서 당이라는 그 단어가 얻게 된 근대적인 의미의 그런 당은 아니었다.

1 인터네셔널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유럽 주요 나라들에서 사회적 정치적 투쟁의 무대 위에 효과적으로 등장한 것에 해당한다. 그래서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모든 조직화된 역량들을, 계급의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경향들을 함께 결집시켰다. 1 인터네셔널은 경제적, 교육적, 정치적 및 이론적인 노동자투쟁들의 모든 흐름들과 모든 우발적 측면들 이 두 가지 모두를 함께 모이게 만들었다. 그것은 그 모든 다양성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단일 조직의 최고점이었다.

2 인터네셔널은 임금노동의 경제투쟁과 사회적 정치적 투쟁 사이의 분화의 시기를 표시했다. 자본주의사회가 완전히 꽃핀 이시기에 제 2 인터네셔널은 개혁투쟁의 조직이자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확인을 위한 정치적 정복의 조직이었던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역사적 혁명적 사명의 이론적 기초들을 명확히하고 세공함으로써 계급의 이데올로기적인 구분에서 더 높은 단계를 나타냈다. ”(위와 동일한 출처 )

계급의 일반 조직(노동조합)과 계급의 역사적 강령의 방어를 임무로 하는 그 특수 조직, 즉 당 사이의 구분은 제 2 인터네셔널에서 분명하게 이뤄졌다. 그 구분은 제 3인터네셔널(코뮤니스트인터네셔널, CI)가 창립될 당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최초로 역사의 현안으로 된 그 순간에 더욱더 분명해졌다. 그 새로운 인터네셔널에게 있어서 계급의 일반 조직은 더 이상 노동조합(그 어느 순간에도 노동자계급 전체를 조직하지 않았던)이 아니라 노동자평의회로 구성되었다 (이때 CI 안에서 노동조합문제와 당의 역할문제에 관해 많은 점들이 불분명하게 남아있긴 했을 지라도).

이러한 다양한 조직들 사이의 그 모든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그것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들은 계급투쟁의 진로에 영향력을 갖고 이런 의미에서 “당”이라는 명칭이 부여될 수 있다. 코뮤니스트동맹이 민주주의 운동의 좌익으로서 주로 활동했던 1848-1849년의 혁명들 시기에는 그 코뮤니스트동맹의 영향력은 여전히 미약했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라인란트지방과 그 밖의 독일지역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졌던 신라인신문(Neue Rheinische Zeitung)은 직접적으로 그 연명의 기관지는 아니였지만 “민주주의의 기관지”로 제시되었다. 엥겔스가 지적했듯이, “(…) 그 동맹은 지금은 분쇄되어버린 대중적인 대중운동에 대항해서는 너무 약한 지렛대임이 증명되었다”(‘코뮤니스트동맹의 역사에 관하여 ’, 1885년 11월).

이러한 미약함의 가장 중요한 원인들 중의 하나는 독일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미약함 자체에 놓여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산업 발전이 아직 개시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엥겔스는 또한 지적하기를, 동맹독일에서 중요성을 가진 유일한 혁명조직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IWA의 영향력은 훨씬 더 중요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유럽에서 “권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 2인터네셔널 (사실상 그것을 구성하는 상이한 정당들을 통해서)이야 말로 역사상 최초로 노동자 대중에게 결정적인 영향력을 갖는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2) 노동자운동의 초기의 분파개념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강령, 즉 코뮤니스트 혁명을 옹호하는 선봉이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투쟁들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갖지 않을 때 그 당은 어떻게 되는가? 이 질문은 이미 마르크스의 시기에 제기되었지만 그 이후에 훨씬 더 큰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 질문에 역사는 다른 해답들을 제시했다. 그 첫 번째 답은 당의 존재 조건들이 존재하지 않을 때 그 당은 해체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코뮤니스트동맹 과 IWA의 경우에 해당되었다. 이 두 가지의 경우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 해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래서 독일에서 반혁명의 승리를 확인한 쾰른 코뮤니스트재판이 있은 후, 1852년 11월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코뮤니스트동맹의 해체 선언을 중앙위원회에 요구했다. 반동의 시기에 혁명적 소수의 활동 문제는 r그 동맹 내에서 1850년 가을에 이미 제기되었었음은 지적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 해 중반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경제회복의 결과로 인해 혁명 물결이 잠잠해지는 썰물의 시기라는 결론에 도달했었다. 이러한 전반적인 번영의 상황에서 , 부르주아 사회의 생산력이 부르주아 생산관계 내부에서 가능한 풍부하게 발전하고 있는 그러한 상황에서 진정한 혁명이란 생각할 수 없다. 그러한 혁명은 오직 이러한 두 요소들 – 근대 생산력과 부르주아 생산양식-이 서로 상충하게 되는 시기에만 가능하다.”(마르크스,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제 4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래서 윌리치-샤퍼(Willich-Schapper)의 즉각주의적 소수(immediatist minority)에 대항해 투쟁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 소수는 그러한 썰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이 봉기할 것을 계속해서 요구하길 원했다.

특히, ‘다음 혁명에서 독일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위상’의 문제에 관한 우리의 지난번 논쟁 에서 , 중앙위원회의 소수의 회원들이 , 지난번 회람과 모순되는 심지어 ‘선언(Manifesto)과도 모순되는 견해들을 제시했다. ‘선언’의 전반적인 견지 대신에 독일 수공업자들의 민족감정에 아첨하는 독일민족주의의 견해가 자리를 차지했다 . ‘선언’의 유물론적 견지 대신에 관념론적 견지가 강조되었다. 실제의 관계들 대신에 의지가 혁명에서 주요인자로서 강조되었다. 우리가 노동자들에게 , 그 관계들을 바꾸기 위해서 15, 20, 50년의 내전을 겪어야만 할거라고 이야기하는 동안 , 그 대신에 우리는 당장 권력을 잡아야만 하거나 아니면 잠이나 자러 갈 수 밖에 없다고 말해졌다. 민주주의자들에 의해 ‘민중’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듯이 그렇게 이제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단어가 단순한 문구처럼 사용되고 있다.이 문구를 실현하기 위해서 라면 그냥 모든 소부르주아들을 프롤레타리아라고 선언해 버리고, 그렇게 사실상 프롤레타리아가 이나라 소부르주아를 대변하면 될 터이다. 실제의 혁명적 발전 대신에 그냥 혁명이라는 문구를 내세우면 될 터이다.”(마르크스, 1850년 9월 15일 코뮤니스트동맹 중앙위원회의 회의에서 행한 연설 , 쾰른 코뮤니스트재판1“사전준비들”에서 인용)

마찬가지로 1872년 헤이그대회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IWA의 총회(General Council)를 바쿠닌주의와 라살레주의 경향들의 영향으로부터 격리하기 위해서 그것을 뉴욕으로 옮기는 결정을 지지했다. 한편 이러한 경향들은 파리코뮌이 분쇄됨으로 인해서 유럽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주요한 패배를 경험했던 그 시기에 성장했다. 총회를 유럽 밖으로 옮기는 것의 의도는 IWA가 해체 이전단계인 잠복기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었고, 그 해체는 결국 1876년 7월의 필라델피아대회에서 이뤄졌다.

어떤 의미에서는, 당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조건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그 당을 해체한다는 것이 코뮤니스트동맹과 IWA의 경우에는 그 이후보다 훨씬 쉬운 편이었다. 동맹은(1848-1849년 혁명들 당시를 제외하면) 작은 비밀조직으로서 사회에서 어떤 “공식적인” 위치도 갖지 않았었다.

IWA의 경우, 그것의 형식상의 소멸은 그 모든 구성요소들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았다. 영국노동조합이나 독일노동자당(SAP)은 IWA의 소멸을 살아 남았다. 사라진 것은 그 다양한 구성요소들 사이 묶는 형식적인 끈이었다.

그 이후 사정이 변했다. 노동자의 당들은 더 이상 사라지지 않았다 - 그것들은 적의 진영으로 넘어가버렸다. 그것들은 자본주의체제의 기관들이 되어버렸고 이점은 남은 혁명가들에게 새로운 책임을 부여했다.

코뮤니스트동맹이 해체되었을 때, 미래에 언젠가 출현하게 될 새로운 당을 향한 다리를 건설할 임무를 띤 그 어떤 형식적 조직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 시기에 마르크스와 엘겔스는 이론적 세공작업이 최우선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점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발전시킨 이론에 숙달한 사실상 유일한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이 작업의 수행을 위해서 어떤 형식적 조직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코뮤니스트동맹의 많은 전회원들, 특히 영국에서 망명 중이던 전회원들과 접촉을 유지했다. 심지어 1856년에는 마르크스와 샤퍼사이에 화해가 있기도 했다. 코뮤니스트동맹의 중앙위원회 전회원이었고 영국노동자운동과 긴밀한 연결을 맺고 있던 에커리우스(Eccarius)는 1864년에 마르크스에게 세인트마틴홀에서 9월 28일 열린 그 유명한 회합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고 그곳에서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men’ Association, IWA)의 창립이 결정되었다2. IWA의 총회는 그래서 에커리우스(Eccarius), 레스터(Lessner), 로허너(Lochner), 판더(Pfaender), 샤퍼(Schapper) 그리고 물론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같이 동맹의 전회원의 상당수를 포함했다.

IWA가 사라졌을 때,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제 2 인터네셔널의 창립의 기원에 놓이게 될 조직들이 남아있었는데, 특히 독일의 당이 그중 하나였다. 그 당(SAP)은 1875년의 통합으로 출현했는데 아이젠나허(Eisenachers)들로 알려진 베벨(Bebel)과 리프크네히트(Liebknecht)와 같이 당의 마르크스주의 인자들은 IWA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첫 두 조직들이 수행하려 창립당시 의도했던 역할과 관련해서 한 점을 지적해야만 한다. 코뮤니스트선언(Communist Manifesto)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듯이, 코뮤니스트동맹은 머지 않은 미래에 프롤레타리아혁명을 볼게 될 것을 기대했다.1848년 혁명들의 패배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역사적 조건들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음을 간파했다. 마찬가지로, IWA의 창립 당시 (그 규범들(Statutes)에 따르면) (상호주의자들(mutualists)와 집산주의자들(Collectivists)등 IWA의 여러 다른 구성요소들로 인해 다양한 비젼들이 이 문건에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 다가오는 짧은 또는 그리 길지 않은 시기에 “노동자들의 해방”이라는 생각이 존재했다.

파리 코뮌의 패배는 자본주의의 전복을 위한 조건들이 미성숙함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파리코뮌 이후 이 시기는 대대적인 자본주의 확장의 시기로서 특히, 독일이 산업열강의 하나로 출현하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20세기 초 독일은 영국을 추월하게 된다.

3) 2 인터네셔널에서 분파들

혁명적 전망이 멀리에 놓여있던 이 시기3동안에 사회당은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특히 독일에서) 주요성을 획득했다. 이러한 증대하는 영향력은, 대부분의 노동자의 정신이 혁명적이지 않던 시기에 사회당이 그들의 강령 안에는 사회주의의 전망을 포함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일간신문들에서는 자본주의 사회 내부에서의 개혁들이라는 “최소강령”을 옹호했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또한 이러한 상황의 결과로서, “최종목표는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리 중요하지 않고 오직 운동만이 모든 것이다”라고 말한 베른슈타인(Bernstein)과 같은 사람들과 “사회주의라는 최종목표는 바로 사회민주주의를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부르주아 과격주의로부터 구별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결정적 요소이다, 전체 노동자 운동이 자본주의 질서를 수리하려 헛수고하지 않고 이 질서에 대항해 계급투쟁을 벌이도록, 이 질서를 억누르도록 전환키는 유일한 요소이다 - 베른슈타인이 제기한 질문, ‘개량이냐 혁명이냐’는 사회민주주의에게는 ‘존재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질문과 동일하다. 베른슈타인 및 그 추종자들과의 논쟁에서 당의 모든 이들이 분명하게 이해해야 할 점은, 그것이 투쟁의 이런 저런 방법에 관한 또는 이런 저런 종류의 전술의 사용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존재 그 자체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다”(로자 룩셈부르크, 사회개량이냐 혁명이냐, 서문) 라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의 대립이 형성되었다. 베른슈타인의 테제들이 독일사회민주당(SPD)와 사회주의인터네셔널(SI)에 의해 공식적으로 거부되긴 했지만, 이 비젼은 SPD 내부에서 (특히 당 기구 안에서) 그리고 인터네셔널 내부에서 다수를 획득했다.

사회주의 인터네셔널의 경험은 비혁명적인 상황으로 표시되는 연장된 시기 동안에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당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확인해 준다. 2인터네셔널 당들이 1914년의 제국주의 전쟁에 참여한 사실은 그 조직의 오랜 부패를 드냈을 뿐이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정치조직이 갖는 자본주의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의 침투성에 대한 취약성과 그래서 언제라도 그것에 의해 침투당할 가능성은 계급투쟁의 기나긴 정체와 후퇴 시기에 점점 더 그 정도가 심해져서 결국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대체해 버려서 그 당은 불가피하게 그 모든 원래의 계급 내용을 잃고 대신에 적대 계급의 도구가 되어버릴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정치당의 본질과 기능 (Nature and function of the political party of the proletariat)”,Internationalisme, 38호, 1948년 10월4)

이러한 문맥 속에서, 최초로 진정한 분파들(fractions)이 출현했다. 최초의 분파는 볼세비키분파로서,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대회 이후 처음에는 조직에 관한 문제를 놓고 그 다음에는, 러시아와 같이 반봉건(Semi-feudal)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임무들과 관련된 전술 문제를 놓고 기회주의에 대항한 투쟁을 벌였다. 이 때 주목할 점은, 1917년까지는 볼셰비키분파들과 멘셰비키분파들이 서로 독자적으로 자신들의 정책을 수행하긴 했어도 형식적으로는 동일한 당, 즉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Russian Social Democratic Labour Party: RSDLP)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다.

네덜랜드에서는 (와인콮(Wijnkoop), 반 레브스테인(van Ravesteyn) 그리고 세톤(Ceton)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호르타(Gorter)와 판네쿡(Pannekoek)도 참여한) 주간지 드트리뷴(De Tribune)을 중심으로 발전한 마르크스주의경향이 1907년부터 네덜랜드사회민주노동자당(Dutch Social Democratic Workers Party: Dutch SDAP) 내부에서 유사한 작업에 관여했다. 그 주간지는 이 경향은 당내의 기회주의적 기류(주로 트로엘스트라(Troelstra)와 의회분파에 의해 대표된)에 대항해 싸웠고, 그 기류는 1908년 당대회에서 드트리뷴의 폐간을 제안했다. 트로엘스트라가 결국 데벤터임시대회(1909년 2월)에서 승리하고 이 대회는 드트리뷴의 폐간과 그 편집인 3명의 당으로부터의 제명을 결정했다. 트리뷴주의 “지도자들”을 그 동조자들로부터 분리할 목적을 띤 이 정책은 실상 그 동조자들로부터 강력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최종적으로 , 트로엘스트라의 이러한 제명 정책은 중재를 목적으로 요청된, 개량주의자가 지배적인 사회주의인터네셔널 국제사무국의 후원을 받았고, 그 3명의 편집인들이 SDAP로부터 결별하려던 열망(한편 호르타는 이러한 결별을 원치 않았다5)과 시기적으로 일치했다. 그 제명 정책으로 인해 그“트리뷴주의자”들은 1909년 3월 새로운 당,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 SDP)를 결정하게 된다. 이 당은 제 1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선거에 거의 영향력이 없이 극히 작은 소수로 남아 있었지만 인터네셔널 내부의 좌파로부터, 특히 볼세비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지지를 통해 그 당은 (1909년 11월 사회주의인터네셔널 국제사무국으로부터 한번 거부당한 뒤) 결국 1910년 인터네셔널에 재합류해서 1910 년 코펜하겐대회와 1912년 바젤대회에 (SDAP의 7명에 비해서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그래도) 대리인 한 명을 파견할 수 있었다. 1차 대전 동안, 네덜랜드는 중립국으로 남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업과 식량부족 등 그 부담이 노동자계급에게 과중했던 그 전쟁 동안 SPD는 국제주의적 정책 덕분에 그리고 노동자투쟁을 지원한 덕분에 선거에서 영향력을 획득했다. 결국 1918년 11월에, 심지어는 독일 코뮤니스트당 (Kommunistische Partei Deutschlands: KPD)의 창립 이전에 SPD는 네덜랜드 코뮤니스트당(Communsit Party of the Netherlands: CPN)이라는 명칭을 채택했다.

사회주의인터네셔널에 속한 한 당의 내부의 분파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세 번째 경향은 KPD를 창립하게 된다. 전쟁차관이 제국의회에서 사회민주당의원들을 포함해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1914년 8월 4일 저녁, 몇몇 국제주의 투쟁가들이 로자 룩셈부르크의 거처에 모여서 당내에서 지도부와 대다수의 국수주의적 정책에 대항해 싸우길 원하는 모든 인자들을 규합할 방법들과 투쟁 전망들을 모색했다. 이 투쟁가들은 이 논쟁을 당 내부에서 수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했다. 여러 도시들에서 평당원들(the party rank and file)은 당의 의회 내의 분파가 전쟁차관을 승인한 점을 비난했다. 심지어 리프크네히트도 당규율(party discipline) 때문에 8월 4일 그 차관을 지지한 점을 놓고 비판을 받았다.

12월 2일에 이뤄진 두 번째 표결에서 유일하게 리프크네히트만이 반대표를 던졌지만, 뒤이은 두 번의 표결에서는, 우선은 오토 륄레(Otto Rühle)가 그 다음번엔 점점 더 많은 수의 의원들이 그의 예를 따랐다. 1914 -1915년 겨울부터 불법 전단지가 유포되었다. 특히 그 중의 하나는 “적은 국내에 있다(Der Feind steht im eigenen Land)”였다. 1915년 4월 인테어나치오날레(Die Internationale) 최초이자 유일한 발간호가 간행되어 바로 그날 저녁에 5000부가 팔렸고 그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레오 요기헤스(Leo Jogiches),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프란츠 메링(Franz Mehring) 및 클라라 체트킨(Klara Zetkin)을 중심으로 한 그 그룹에게 ‘인테어나치오날레(Internationale)’라는 명칭을 제공했다. 불법이라는 조건 하에서 탄압에 노출된 채6, “스파르타쿠스그룹(Spartakusgruppe)”을 그 다음엔 “스파르타쿠스동맹(Spartakusbund)”을 이름으로 채택한 이 극히 작은 그룹은 전쟁과 정부에 반대한 투쟁 뿐만 아니라 사회민주당의 우파와 중앙파에 대항한 투쟁을 벌렸다. 스파르타쿠스멤버들이 혼자는 아니었다. 다른 그룹들, 특히 함부르크와 브레멘에서의 다른 그룹들(판네쿡(Pannekoek), 라덱(Radek), 프뢸리히(Fröhlich)가 활동함)은 스파르타쿠스동맹의 멤버들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국제주의적 정책들을 옹호했다. 1917년 초 SPD지도부는 당내에서 반대파들의 입지가 진전되는 것을 중단시키기 위해서 그 반대파들을 제명했고, 이 반대파 그룹들은 자치적으로 계속 활동한 반면, 스파르타쿠스동맹의 멤버들은 중앙파의 독립사회민주당(Unabhangige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USPD) 내부의 한 분파로서 계속 남아 있었다. 결국 이러한 상이한 경향들은 1918년 12월 31일, KPD의 창립 순간에 함께 결집하게 되지만 이 새로운 당의 근간을 이룬 것은 명백하게 스파르타쿠스동맹 멤버들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좌파분파가 러시아, 네덜랜드 그리고 독일에서 보다 약간 뒤늦게 형성되었다. 이것은 나폴리에서 보르디가(Bordiga)와 그의 동지들이 1918년 12월부터 간행한 신문, “일 소비에트(Il Soviet)”를 중심으로 한 “기권주의자 분파(Abstentionist Fraction)”(이 분파는 의회선거에서 기권할 것을 옹호했기 때문에 이렇게 불리게 됨)였는데, 공식적으로는 1919년 10월 이탈리아사회당(Italian Socialist Pary:PSI)의 당대회에서 한 분파를 이루었다. 사실상, 일찌기 1912년에 이미 청년 사회주의자 연합 (The Federation of Young Socialists) 안에서 그리고 PSI의 나폴리연합(Naples federation) 안에서 보르디가는 비타협적인 혁명적 경향들에 생명을 불어넣었었다. 이탈리아좌파의 형성이 이렇게 지체된 것은 부분적으로는, 보르디가가 군대에 징집됨으로써 1917년 이전에는 정치생활에 개입할 수 없었는 사실에 의해서 설명되지만 무엇보다도, 전쟁 동안에는 당의 지도부가 좌파의 손에 놓여있었다는 사실에 의해서 설명된다. 1912년 대회는 개량주의적 우파를 축출했었고 1914년 대회는 프리메이슨들을 축출했었다.

PSI 의 신문 아반티(Avanti)는 무솔리니(Mussolini)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그는 이 대회들에서 축출 안건들을 제출했었다. 그는 이 지위를 이용해서 1914년 10월 18일에 “절대적인 중립성에서 행동과 업무의 중립성으로 ”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는데, 이 사설은 이탈리아가 협상(Entante)의 편에서 전쟁에 가담한다고 선언했다. 물론, 그는 그 지위에서 해직되었지만 그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장래에 프랑스코뮤니스트당 지도자가 될 마르셀 카셍(Marcel Cachin)이 가져온 기금 덕분에, 프랑스정부와 협상(Entante)에 친화적인 일 포롤로 이탈리아(Il Popolo d`Italia)라는 신문을 창간했다. 무솔리니는 그해 11월 29일 PSI에서 제명되었다. 그 이후 세계대전이 지배적인 상황으로 인해 좌파, 우파 그리고 중앙파로의 선명한 입장 표명이 요구되자 그 당의 지향은 우파와 좌파 사이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입장과 개량주의적 입장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1917년 로마 대회에서 우파와 좌파 사이의 대립이 굳어졌다. 우파는 17,000표를 좌파는 14,000표를 얻었다. 러시아혁명이 이미 진행중이던 시점에 투라티(Turati), 트레베스(Treves) 그리고 모딜리아니(Modigliani)의 승리는 피렌체, 밀라노, 투린 및 나폴리에서 비타협적이고 혁명적인 분파의 형성을 재촉했다.”(이탈리아코뮤니스트좌파: The Italian Communist Left). 1920년에 가서야, 러시아에서의 혁명, 코뮤니스트인터네셔널(CI)의 형성 그리고 또한 이탈리아에서의 특히 투린에서의 노동자투쟁들의 자극을 받아서 기권주의분파(Abstentionist Fraction)는 당내에서 영향력을 획득했다. 그것은 또한 그람시(Gramsci)가 주도한 신문, 신질서(Ordine Nuovo)를 중심으로 모여든 경향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 두 경향들 사이에는 중요한 이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그람시는 선거참여에 호의적이었고, 일종의 혁명적 노동조합을 옹호했으며, 우파와 중앙파로부터 단절하고 자치적인 분파를 형성하는 것을 주저했다).

“...10월 밀라노에서 통합코뮤니스트분파(United Communist Fraction)가 결성되었다. 투라티의 우익을 배제하고 코뮤니스트당을 건설할 것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내놓았고, 코민테른(Comintern)의 제 2차 대회의 결정에 따라서 선거보이콧을 포기했다”(위와 같은 출처). 1920년 12월 이몰라(Imola)대회에서 분열 원칙(the Principle of a Split)이 결정되었다 : “하나의 분파로서 우리의 업무는 지금 중단되고 중단되어야 한다 (…) 표결을 통해 우리가 대다수가 되거나 또는 소수가 되든 그 결과에 상관없이 표결이 끝나자마자 즉시 당과 (SPI) 대회를 떠나야 한다. 이것에 (…) 중앙과의 분열이 뒤따른다 ”(위와 같은 출처).1921년 1월 21일에 시작된 리보르노(Livorno)대회에서 “ 이몰라안건은 총 172,487표 중 그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58,783표를 얻었다. 그 소수는 대회를 떠나서,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Communist Party of Italy)으로 정착하고 코뮤니스트 인터네셔널의 한 지부(Section)가 될 것을 결정했다.”(출처는 위와 동일)

사회주의 인터네셔널의 당들 내부에서 형성된 주요한 분파들의 이렇게 (아주 신속한) 활동들을 종합해 보면, 하나의 분파에게 주어진 주요한 역할은 바로, 퇴행하는 당 내부에서 혁명 원칙들의 방어라고 정의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처음에는 이러한 원칙들을 위해 대다수의 투사들을 결집하고 당으로부터 우파와 중앙파의 입장들을 배제하며 그런 다음, 상황에 따라서 그 당 자체를 새로운 혁명당으로 전환하는 것.

주목할 만한 점은 좌파의 모든 경향들이 실천적으로 가능한 한 오랫동안 그 당내에 남아 있으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 유일한 예외는 트리뷴주의자들의 분파(호르타와 판네쿡은 그 성급함에 동의하지 않았었지만)들 그리고, 1917년 SPD로부터 반대파가 축출된 뒤 (스파르타쿠스동맹자들과는 달리) USPD에 가입하기를 거부했던 라덱과 판네쿡과 프뢸리히 주도하의 “급좌파(radical lefts)”였다. 배반을 한 옛 당으로부터 좌파의 분리는 제명을 통해서 또는 혁명 물결의 선봉이 될 새로운 당 건설의 필요로 인해서 결과되었다.

또한, 좌파의 행동이 퇴행하는 당 내부에서 늘 소수로 남아있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 하다. 프랑스사회당(Section FranÇaise de l`Internationale Ouvriére, SFIO)의 투르(Tours)대회에서 CI에 가담을 요구하는 좌파의 안건이 대다수에 의해 통과되었다. 그래서 투르에서 창립된 코뮤니스트당은 조레스(Jaurès)가 창간한 루마니테(L`Humanité)를 계속 유지했다. 불행히도, 그것은 SFIO의 사무총장 프로사르(Frossard)을 유지했는데, 그는 한 동안 프랑스코뮤니스트당(PCF)의 지도적 인물로 활동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점은, 좌파분파들이 당장 새로운 당을 건설한 이러한 역량은 오직, 낡은 당의 배반과 혁명물결의 갑작스런 출현 사이의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가능했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상황은 상당히 달라지게 되었다.

4) 코뮤니스트 인터네셔널로부터 출현한 분파들

코뮤니스트 인터네셔널은 1919년 3월에 창설되었다. 그 당시 아주 극소수의 코뮤니스트당들이 이미 존재했다(러시아, 네덜랜드, 독일, 폴랜드, 그리고 몇몇 그리 중요하지 않는 다른 나라들에서의 코뮤니스트당). 하지만 그 당시 최초의 (그리고 그렇게 선언한) “좌파”분파가 주요한 당 내부에서, 즉 러시아 코뮤니스트당(1918년 3월 RSDLP 제 7차 대회에서 코뮤니스트라는 이름을 채택했음) 내부에서 출현했다. 1918년 초 이 경향은 코뮤니스트(Kommunist)라는 신문을 중심으로 결집했고 오신스키(Ossinsky), 부하린(Bukharin), 라덱(Radek) 및 스미르노프(Smirnov)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분파가 당의 공식적인 방향과는 달리 가진 주요한 불일치점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k-Litovsk)에서의 협상을 놓고 였다. 그 “좌파코뮤니스트들”은 그 협상에 반대하고 “혁명전쟁”을 , 다른 나라들로 혁명을 무력적으로 “수출하는 것 ”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분파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권위적인 방법들을 비판했고 노동자 대중이 광범위하게 이 권력에 참여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비판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행한 비판들과 유사하다(그녀의 팜플렛을 참조 바람).

브레스트-리토프스크평화협정의 승인은 이 분파의 종말을 선언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하린은 당의 우익의 대표자가 되었지만 오신스키와 같은 이 분파의 몇몇 인자들은 그 이후에 출현한 좌파 분파에 가담하게 된다. 그래서 서유럽에서는 앞으로 코뮤니스트당을 출현시키게 될, 사회당들 내부의 몇몇 분파들이 아직 형성되기 전에 (보르디가가 주도한 기권분파는 1918년 12월에 가서 형성된다) 이미 러시아혁명가들은 자국의 코뮤니스트당에 영향을 미치는 일탈들에 대항해 (분명히 매우 혼란스런 방식으로이긴 하지만) 투쟁을 개시했었다. 여기서 (이 현상을 지금 여기서 분석할 필요는 없긴 하지만) 주목할 만한 점은 20세기 초 수 년 동안 러시아혁명가들이 다음과 같이 일련의 모든 주요한 문제들에 있어서 선봉에 있었다는 것이다. 즉, RSDLP의 제 2차 대회에서 볼세비키 분파의 형성, 1914년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한 선명한 입장, 찜머발트에서 좌파를 주도한 것, 새로운 인터네셔널의 창립 필요성의 인식, 1918년 3월 최초의 코뮤니스트당의 건설, 그리고 코뮤니스트 인터네셔널 제 1차 대회에 대한 자극과 정치적 방향설정 등에서.

그리고 이러한 “조숙함”은 코뮤니스트당 내부에서의 분파들의 형성에서도 발견된다. 사실상, 권력을 잡게 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코뮤니스트당으로서 그것의 특별한 역할로 인해서, 러시아당은 (명백히, 전세계적인 혁명 물결의 패배와 더불어) 그 당이 부패하면서 주요 인자의 압력을, 당의 국가로의 융합을 겪는 최초의 당이기도 했다. 그렇게 프롤레타리당의 이러한 퇴행 과정에 직면해서 비록 혼란스럽긴 했지만 그 어느 곳보다 훨씬 더 일찍 저항의 형식들을 시작했다.

그때 이후 러시아당에서 상당수의 다른 “좌파” 경향들이 출현했다.

- 1919년 오신스키와 사프로노프(Sapronov)를 중심으로 형성된 “민주중앙집권주의(Democratic Centralism)”그룹은 산업에서 “개인적 권위(individual authority)”에 대항해 싸웠고 “국가기구의 부문화(Departmentalisation)와 관료주의적 억압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무기”로서 집합적(collective) 또는 우의적인(collegial principle)을 옹호했다.(우의의 원칙과 개인적 권위에 관한 테제).

- 또한 1919년에 많은 수의 “민주중앙집권주의”그룹 구성원들이 “군사적인 반대파(Military Opposition)”에 참여했는데, 이 파는 적군(Red Army)를 전통적인 부르주아 군대의 범주에 따라 변형시키려는 경향에 맞서 투쟁하기 위해 1919년 3월에 잠시 구성되었었다.

내전 동안 당 정책에 관한 비판은 새로운 체제에 대한 백군들(White Armies)의 위협 때문에 그 빈도가 더 낮게 표면화되었지만 그 내전이 백군들에 대한 적군의 승리로 끝나자마자 그러한 비판의 강도는 배가되었다.

- 1921년 초, 제 10회 전당대회와 노동조합문제를 놓고 벌인 논쟁을 계기로, “노동자들의 반대(Workers´ Opposition)”가 형성되었고, 철강노동자들인 쉴리아프니코프(Shliapnikov)와 메드베데프(Medvedev), 그리고 특히, 그 강령을 작성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Alexandra Kollontai)에 의해 주도되었다. 혁명적인 노동조합지상주의자들(Syndicalists)처럼 이 반대파는 국가의 관료제 대신에 노동조합에 경제의 관리를 맡기기를 원했다7. 바로 이 전당대회(크론슈타트봉기 동안에 개최된)에서 채택된 결정으로 분파들이 금지된 이후 노동자 반대파는 해체되고 콜론타이는 나중에 스탈린(Stalin)의 충실한 추종자가 된다.

- 1921년 가을에 “노동자들의 진리(Workers´ Truth)”그룹이 결성되었는데, 그 주요 구성원들은 지식인들 그리고 그것의 주요 조직가인 보그다노프(Bogdanov)처럼 “프롤레타리아문화(Proletkult)”의 추종자들이었다. 다른 반대파 경향들과 함께 이 그룹은 당과 국가의 관료화를 비난했지만 그와 동시에 절반-멘세비키적(semi-Menshevik) 입장을 취했는데,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조건들이 러시아에서는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점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은 근대 자본주의의 기초 위에 만들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한 점(이러한 입장은 나중에 “평의회주의 경향(councilist current)”의 입장이 된다)에서 그러했다.

- 1922-23년에 “노동자들그룹(Workers´ Group)”이 결성되었는데, 그 주도자는 우랄지방의 노동자 미아스니코프(Miasnikov)였다. 그는 10차 전당대회가 끝난 직후 “왕당파들에서 아나키스트들까지 언론의 자유”를 요구함으로써 1921년 볼세비키당 안에서 두각을 드러냈었다. 이 문제에 관해 논쟁하려던 레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아스니코프는 그 요구의 철회를 거부했고 결국 1922년초 당에서 축출되었다. 그는 노동자계급 출신의 다른 투쟁가들과 함께 “러시아 코뮤니스트당(RCP; 볼세비키)의 노동자들그룹”을 창설했고 RCP의 12차 대회에서 이 그룹의 선언문이 배포되었다. 이 그룹은 당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불법활동을 시작했고 1923년 여름의 파업 물결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드러냈던 것 같다. 그 당시 이 그룹은 대대적인 시위(mass demonstration)을 요구했고 일차적으로 방어적인 계급 운동의 정치화를 시도했다. 이 시위들에서 그 그룹의 활동으로 인해 GPU는 그것이 위협이 된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미아스니코프를 포함한 그 그룹의 주도자들은 수감되었다. 하지만 그 그룹의 활동은 (망명 중 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 불법적인 방법으로 1920년대 말까지 계속되었다. 이때 미아스니코프는 러시아를 탈출하는데 성공해서 파리로 망명했고 KAPD의 입장들에 가까운 입장들을 옹호하는 코뮤니스트노동자(L´Ouvrière Communiste)의 간행에 참여했다.

볼세비키당의 퇴행에 맞서 투쟁을 벌인 모든 경향들 중에서 확실히 노동자들그룹(Workers´ Group:WG)이 가장 정치적으로 명확했다. 그것은 KAPD에 매우 가까웠고(KAPD는 이 그룹의 문건들을 출판하고 그것과 접촉을 유지했다.) 특히, 당이 추구하는 정책에 대한 그것의 비판들은 혁명의 국제적인 비젼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점에서 그것은 (당과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민주주의의 문제에 그리고 경제의 관리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었던 다른 그룹들의 경우와는 상반되었다. 그것은 계속해서 코뮤니스트인터네셔널(CI)의 첫 4번 대회들을 참조점으로 삼는 트로츠키주의 경향들과는 달리 CI의 제 3차 및 4차 대회의 통일전선(United Front) 정책들을 거부했다. 하지만 트로츠키주의 경향의 좌익과 노동자들그룹(WG)의 인자들 사이에 (특히 망명 중에) 토론들이 있었다.

노동자들그룹(WG)은 일관되게 하나의 분파처럼 활동했던, 볼세비키당 내부에서 출현한 아마도 유일한 경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이 혁명가들에 대해 개시한 (그리고 차르의 탄압보다 훨씬 더했던) 혹독한 탄압은 이 경로를 따라 발전할 가능성을 제거해버렸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아스니코프는 러시아로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예상 대로 그는 즉시 실종되었고 코뮤니스트 좌파의 미약한 역량은 그 가장 용감한 투사를 잃고 말았다.

다른 나라들에서 코뮤니스트 좌파의 투쟁은 불가피하게 러시아에서와는 다른 형태들을 취했지만, 위에서 언급된 세 개의 다른 코뮤니스트당들로 돌아가자면 우리는 그 좌파 경향들도 아주 일찍 투쟁을 시작했음을 볼 수 있다.

독일 코뮤니스트당(KPD)이 창설될 당시 좌파의 입장이 대다수를 이루었다. 노동조합 문제에 있어서는, KDP의 강령을 작성하고 당 대회에서 제시했던 로자 룩셈부르크는 매우 명확하고 범주적이었다. “[노동조합은] 더 이상 노동자들의 조직이 아니라 국가와 부르주아 사회의 가장 확고한 옹호 기관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은 노동조합의 파괴 투쟁을 포함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는 이점에 동의한다.” 한편, 의회 문제에 있어서 그 대회는 그 당시 곧 있게 될 선거의 참여라는 스파르타쿠스동맹자들(룩셈부르크, 리프크네히트, 요기헤스 등)의 입장을 거부했다. 이 투사들이 암살된 후 새로운 지도부(레비(Levi), 브란들러(Brandler))는 노동조합 문제와 관련해서 처음에는 좌파(대다수로 남아있던)에 양보를 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1919년 8월 KDP의 프랑크푸르트 대회부터, USPD와의 친교 회복을 원했던 레비는 의회 내에서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내에서의 활동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는 10월의 하이델베르크 대회에서는 계략을 써서 좌익 반노동조합 반의회주의적인 대다수를 제명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제명된 투쟁가들 대다수는 승복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그 당시 CI내부에서 거대한 권위를 갖고 있으면서 암스테르담 사무국의 건설을 추진하던 네덜랜드 좌파 투쟁가들(특히 호르타와 판네쿡)의 확고한 지지를 받았어 인터네셔널에 의해 서유럽과 아메리카의 활동을 조화시키고 조정하는 일에 임명되었다. 그 이후 6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1920년 4월 그 제명된 투쟁가들은, 그 해 2월의 KPD 대회가 그들의 재입당을 거부했던 것 그리고 그리고 3월 13일에서 17일 사이에 있었던 발생한 캅프-구테타(Kapp Putsch) 동안 SPD를 향해 당이 보였던 유화적인 태도에 직면해서 독일 코뮤니스트노동자당(Kommunistische Arbeiterpartei Deutschlands; KAPD)을 창설하게 된다. 그들의 접근법은 (노동조합과 의회문제에 관하여 그리고 CI의 기회주의적 전환의 거부에 관한 ) 좌파의 테제들이 승리를 거두게 되는 국제대회를 2월에 조직했던 암스테르담 사무국의 지원8으로 강화되었다. 여기서 특히 CI의 기회주의의 일면은 영국의 코뮤니스트들이 노동당에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표현되었었다. 그 새로운 당은 네덜랜드코뮤니스당(CPN)의 좌파 소수(호르타와 판네쿡에 의해 주도된)의 지지를 받아 강화되었는데, 이 좌파 소수는 자체의 신문에 KAPD의 창립대회에서 채택된 강령을 실었다. 그렇다고 해서 판네쿡이 (1920년 7월 5일자 편지에서) KAPD를 비판하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그는 특히 (혁명적인 노동조합 지상주의에의 그 어떤 타협에 대해서도 경고하면서) “유니언(Unionen)”에 관한 그 당의 입장을, 무엇보다도 그 당의 기초 단위 안에, 그가 “괴물 같은 탈선(monstrous aberration)”으로 여긴 “민족적 볼세비키(National Bolshevik)” 경향이 존재하는 점을 비판했다. 이 순간, 세계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직면한 모든 결정적인 문제들(노동조합, 의회, 당9, 사회당들에 대한 태도, 러시아혁명의 본질 등등)에 있어서, KAPD의 다수에게 영감을 불러 넣었던 네덜랜드좌파 (그리고 특히 판네쿡)가 노동자운동의 선봉에 있었다.

8월 1일에서 4일 사이에 개최된 KAPD대회는 이러한 지향들에 찬성함을 선언했고 그 순간에 “민족적 볼세비키(National Bolshevik)”는 그 당을 떠났다. 그리고 그 몇 달 후 연방주의 인자들(federalist elements)은 KAPD가 CI에 참여하는 것에 적대적으로 되었다. 이 부분에 있어서 판네쿡, 호르타 및 KAPD는 CI 에 남아서 이 인터네셔널의 점증하는 기회주의적 편향에 대항해 투쟁할 결심이었다. 이런 이유로 KAPD는 1920년 10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 2차 CI 대회에 참석을 위해 2명, 얀 아펠(Jan Appel)과 프란츠 융(Franz Jung)으로 된 대표단을 러시아로 파견했다10. 한편 이들로부터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었던 KAPD는 다른 2명으로 된 대표단을 다시 파견했는데, 그 중 한 명이 오토 륄레였다. 그러나 러시아 노동자계급이 고통받고 있던 재앙적인 상황과 정부기구의 관료주의화 과정에 직면한 그들은, 비록 그 대회에서 그들의 입장들을 옹호하고 표결에 참여하도록 위임되었에도 불구하고 그 대회에 불참할 것을 결심했다. 이 대회를 준비하면서 레닌은 좌익코뮤니즘 유아기질환(Left Wing Communism an Infantile Disorder)를 작성했다. 이 팜플렛 안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레닌이 “코뮤니즘 안에서 좌파 교조주의의 실수는 우파 교조주의의 그것보다 천 배나 덜 위험하고 덜 중요하다 ”라고 썼다는 것이다.

한편에는 코뮤니스트인터네셔널(CI)과 볼세비키의 입장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에 KAPD의 입장에서 양쪽 모두에서, KAPD를 그 인터네셔널에 합류시키고 그래서 KPD 안으로 수용할 진정한 의지가 있었지만, 이 가능성은 1920년 12월 KPD가 재편되어 USPD의 좌파와 함께 독일통합코뮤니스트당(Vereingte Kommunistische Partei Deutschlands : VKPD)를 형성함으로써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 재편 과정을 CI의 모든 좌파 경향들은 반대했었다. KAPD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CI에 동감하는 당”의 지위를 획득해서 CI의 행정위원회에 상설 대표를 가졌고 1921년 6월 개최된 제 3차 대회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 이러한 협력은 특히 (VKPD가 부추긴 모험적인 “공격”이었던 ) “3월 행동 ” 이후 그리고 크론슈타트 반란의 진압(좌파는 처음에는 소련 정부의 선동에 따라 이 반란이 진정 백군 측의 작업이라고 믿고 그 진압을 지지했었다)으로 인해 심하게 악화되었다. 동시에, 네덜랜드코뮤니스트당(CPN)의 우파 지도부(네덜랜드의 레비(Levi)라고 불린 와인콮(Wijnkoop))는 모스크바의 지원을 받아서 당 규율에 위배는 방식으로 좌익 투쟁가들을 제명하는 정책을 펼쳤다. 결국 그해 9월 이렇게 제명된 투쟁가들은 KAPD를 모델로 해서 새로운 당, 네덜랜드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N)을 창설하게 된다.

CI의 제 3차 대회에서 채택된 통일전선(United Front) 정책은 KAPD가 VKPD로 통합될 최후통첩이 제출되면서 단지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었다. 1921년 7월 KAPD 지도부는 호르타의 지원을 받으며, CI와의 모든 연결의 단절하고 “코뮤니스트노동자 인터네셔널( Kommunistische Arbeiterinternationale : KAI)”의 창설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요구는 9월에 계획된 KAPD대회보다 두달 먼저 제기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성급한 결정이었다. 9월 대회에서 새로운 인터네셔널의 창설에 대해 토론이 있었고 (베를린의 투쟁가들 그리고 특히 얀 아펠은 그 안건에 반대했지만) 대회는 이 목적을 염두에 두고 정보사무국 (Bureau of Information)의 설치를 결국 결정했다. 이 사무국은 1922년 4월에 가서야 그 창립대회가 열리게 될 이 새로운 인터네셔널이 마치 이미 창립된 것 마냥 행동했다. 그와 동시에 KAPD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인터네셔널의 창립에 적대적이었던 “베를린 경향(Berlin tendency)” 다수파와 다른 한편으로는 (임금을 놓고 벌이는 투쟁을 거부했던) “에쎈 경향(Essen tendency)”으로 분열되었다.

오직 에쎈경향만 KAI의 강령을 작성한 호르타와 함께 그 창립대회에 참여했다. 참여한 그룹은 수적으로 적었고 매우 한정적인 역량들만을 대표했다. 에쎈경향 외에, KAPN, 불가리아 코뮤니스트좌파, 영국 실비아 팬크허스트(Sylvia Pankhurst)의 코뮤니스트노동자당(Communist Workers´ Party: CWP), 오스트리아의 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이 참여했는데, 이를 두고 베를린의 KAPD는 “포템킨마을( 즉, 과장된 겉치레)”이라 묘사했다. 결국 이 잔류파 “인터네셔널”은 그 구성요소들이 없어지거나 차츰 뒤로 물러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에쎈경향은 여러번의 분열들을 겪었다. KAPN는 처음에는, KAI의 창설에 적대적이었던 베를린경향에 우호적인 한 경향의 출현 때문에 그런 다음에는 정치 원칙들보다는 파벌 대립들에 기반한 내부적인 충돌들에 의해 분리되어 나갔다.

사실상, KAI의 이런 유감스럽고 극적인 실패를 설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은 CI창설의 발판 역할을 했었던 혁명물결의 썰물에서 발견될 수 있다.

호르타와 그의 지지자들의 오류는, 하나의 국제적인 좌파코뮤니스트 경향으로 재편성될 수 있는 코뮤니스트좌파 분파들이 코민테른 내부에 여전히 남아있을 때에 인위적으로 코뮤니스트노동자인터네셔널(KAI)를 선언한 것이었다. 이 실수는 독일혁명운동에 심각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 1921년 즈음 세계혁명의 퇴조는 유럽에서 명백했고 이러한 퇴조로 인해서 새로운 인터네셔널의 창설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 경로가 여전히 혁명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본주의의 치명적인 위기’라는 이론을 가진 호르타와 에쎈경향의 KAI 선언에는 특정 논리가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의 전제들이 틀렸다.”(ICC의 책, 독일과 네덜랜드좌파(The German and Dutch Left), 제 5장, 4.d)

KAPD와 KAPN의 최종적인 실패는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 사이에 힘의 균형의 진화에 대해 가능한 선명한 비젼을 혁명가들이 가질 필요가 있음을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만약 독일-네덜랜드좌파가 그러게 지체된 이후에라도 혁명 물결의 퇴조를 의식하게 되었다면11, 볼세비키, 코뮤니스트인터네셔널의 지도자들, 또는 이탈리아 코뮤니스트 좌파의 경우에는 이렇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극히 다른 방식으로 반응했다.

- 볼세비키로서는 그리고 CI의 다수파로서는 대중들이 더 이상 혁명을 향해 움직이지 않기에 “대중들에게로 다가가는 것”이 필요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특히 “중앙파” 사회당들과 경향들을 향해서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을 향해서도 점점 더 기회주의적인 정치를 초래했다.

- 그와는 반대로 이탈리아좌파로서는 전쟁 동안 그리고 CI의 창설까지는 볼세비키의 특징이었던 것과 동일한 비타협성을 계속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다. 그들에게는 원칙들에 대해 타협하고 그 원칙들에 물을 타서 묽게 만듦으로써 혁명을 향한 지름길을 만드려고 시도하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가치도 없었고 그러한 지름길은 패배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다.

실제로, 이미 제 2차 대회에서 하지만 특히 제 3차 대회부터는 줄곧 CI에 영향을 끼치며 제 1차 대회에서의 명료함과 비타협성에 대해 문제 제기를 했던 기회주의 노선은 세계 프롤레타리아계급이 그것의 혁명투쟁을 지속하고 강화해 나가는데 있어서 직면한 곤경들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볼세비키당 자체가 처한 해결될 수 없는 모순을 또한 표현했다. 한편으로 볼세비키는 CI의 주도권의 영향으로 세계혁명의 선봉에 있으면서 러시아혁명에서도 동일한 역할을 수행했었다. 볼세비키는 후자, 즉 러시아혁명은 세계혁명을 향한 아주 작은 발걸음에 불가하다고 늘 주장했었고 세계 프로레타리아계급의 패배는 러시아에서의 혁명의 죽음을 의미하게 될 것임을 상당히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한 나라 전체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한 당으로서 볼세비키는 민족국가의 기능에 합당한 요구들에, 특히 내외적인 “보안(Security)”을 확실히 할 필요에 종속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서, 러시아의 이해관계와 일치하는 대외정책을 그리고 국가권력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국내정책을 따를 필요성에 종속되어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1921년 3월, 페트로그라드에서 파업들의 진압과 크론슈타트반란의 유혈적 분쇄는 “관대한 (open hand)” 정책에 있어서 동전의 이면과 같았다. 러시아에게 유리한 방향의 대외 정책을 펼치도록 다른 나라 사회당들이 자신들의 정부들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통일전선(United Front)” 이라는 명분 하에 볼세비키는 이 정책을 사회당들에게 시행했다.

사실상 이탈리아코뮤니스트당의 선두에 있던 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 (1922년 제 2차 당대회에서 채택된 “로마 테제”는 보르디가와 테라시니(Terracini)가 작성함)의 비타협성은 1920년 계급투쟁들의 패배에 뒤이어 이탈리아에서 나타난 파시즘의 등장을 대항해 모범적으로 표현되었다. 실천적인 수준에서 이러한 비타협성은 파시스트들의 위협에 직면해서 (진보적이든 “사회주의적”이든) 부르주아의 그 어떤 당들과도 동맹을 맺는 것을 완전히 거부한 점에서 나타났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오직 자신의 영역에서, 경제파업과 자기방어를 위한 노동자 민병의 조직을 통해서만 파시즘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 이론적인 수준에서 보르디가는 파시스트 현상들에 대한 (오늘날까지 유효하게 남아있는) 최초의 진지한 분석을 우리에게 제공해주었다. 그는 이 분석을 CI제 4차 대회의 대표단들에게 제시하며 CI의 분석을 거부했다.

- “파시즘은 중산계급의 산물도 아니고 부르주아 지주들의 산물도 아니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겪은 패배의 산물로서, 그 패배는 우유부단한 쁘띠-부르주아 계층들이 파시스트 반동 세력을 지원하게 만들었다.(ICC의 책, 이탈리아 코뮤니스트 좌파 (The Italian Communist left), 제 1장 참조)

- 파시즘은 ‘ 봉건적’ 반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밀라노와 같이 모든 산업대도시들에서 최초로 생겨났다... (출처는 위와 동일). 그리고 산업 부르주아지의 지원을 받았다.

- “파시즘은 민주주의와 상반되지 않았다. 이것은 ‘ 국가가 부르주아 계급의 권력을 더 이상 방어할 수 없을’ 때 그것을 필수불가결하게 보완했다.(출처는 위와 동일).

이러한 비타협성은 통일전선정책, 사회당들과 그 부수체들에 대한 “관대”정책과 관련해서도 표현되었는데, “노동자들의 정부 ”라는 구호는 “ 코뮤니즘의 정치강령을, 즉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독재를 위해 투쟁하도록 대중들을 준비할 필요성을 사실상 부정하는 지경에 다다른다”.(보르디가, 이탈리아코뮤니스트좌파에서 인용됨)

이와 동일한 비타협성은 코뮤니스트당들을 사회당들이나 중앙당들의 좌파경향들과 통합하려는 코뮤니스트인터네셔널의 정책에도 반대했다. CI의 그 정책의 결과로 독일에서는 VKPD가 건설되었다. 이탈리아에서 그 정책은 억압과 사기 저하의 결과 당원이 20,000명도 채 안되는 당에 “테르찌니(terzini)”(제 3인터네셔널의 빨치산에 해당하는) 2000명이 1924년 8월 가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그 비타협성은 1924년 7월 제 5차 CI대회에서 추진된 CP들의 “볼세비키화(Bolshevisation)”정책에 반대한 것에서도 표현되었다. 이 정책에는 트로츠키도 반대했다. 요약하자면, 그 정책은 코뮤니스트당(CP)내에서 규율의 강화, 그것의 퇴행에 맞선 저항을 묵살하길 의도한 관료주의적인 규율의 강화를 주장했다. 볼세비키화는 또한 “공장세포들(factory cells)”에 기반한 CP들의 조직화 방식을 추동하는 것에도 놓어 있었는데, 이러한 방식은 명백히도 노동자들을 “그들의 ” 기업체에서 발생하는 어려움들에 집중하게 만들어서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전반적 비젼과 전망에는 명백하게 해가 되는 것이었다.

비록 좌파가 그 당 안에서 여전히 다수이긴 했지만, CI는 그 자체의 정책을 지지하는 우익 지도부(그람시, 톨리아티(Togliatti))를 강요했고, 이 책략은 1923년 2월에서 10월까지 보르디가가 수감됨으로써 더 용이해졌다. 그런데, 1924년 5월 이탈리아당의 비밀대회에서 보르디가, 그리에코(Grieco), 포르티치아리(Fortichiari) 그리고 레포씨(Repossi)는 CI의 그 정책에 매우 비판적인 테제들을 제시했고, 총 45명의 연방사무관들(federal secrataries) 중 35명, 그리고 5명의 지역간사무관들(interregional secretaries)중 4명의 찬성표를 얻어 그 테제의 승인을 획득했다. 1925년 트로츠키가 이끄는 “좌파반대파(Left Opposition)”에 대한 켐페인을 시작으로 반대파들에 대항한 켐페인이 CI 내부에서 발생했다. “19253-4월에 CI의 확대된 행정위원회는 CPI 3차 대회에서 ‘보르디가주의’ 경향의 제거를 현안으로 제시했다. 그것은 트로츠키에 호의적인 보르디가의 글의 출판을 금지했다.

이탈리아 지부의 볼세비키화는 밀라노의 연방사무관 브루노 포르티치아리를 직위 해제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4, 좌파는 활동들을 조정하기 위해 다멘(Damen)과 레포씨와 포르티치아리를 통해서 (...)협상위원회(Entente Committee; Comitato di intesa)’를 창설했다. 그람시 지도부는 이 위원회를 맹렬히 공격했고, 그것을 일종의 ‘조직된 분파’이라고 비난했다. 사실상, 좌파는 스스로를 하나의 분파로 조직하는 것을 아직 원하지 않았고 , 그들이 여전히 대다수인 이상 당으로부터 제명될 어떤 빌미도 제공하길 원치 않았다. 보르디가는 부과되어 있던 규율의 틀 밖으로 나가기를 원치 않아서 처음에는 그 위원회에 참여하길 거부했다. 6월에 가서야 그는 다멘, 레포씨 그리고 포르티치아리의 입장에 동참했다. 그는 그 좌파의 ‘입장(platform) ’의 초안을 작성하는 일을 떠맡았다. 그 입장은 볼세비키화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공격이었다.”(이탈리아 코뮤니스트 좌파, 제 1장).

제명의 위협 아래에서 협상위원회 (Entente Committee)는 규율원칙을 존중해서 해산해야만 했다. 그것은 다수로서의 이탈리아좌파의 종말의 시작이었다. ”(위와 같은 출처)

파시스트의 억압 때문에 해외에서 개최된 1926년 1월 대회에서 좌파는 겨우 9.2%의 표를 얻은 “리옹 테제(Lyon Theses)”를 제시했다. CI의 지시들을 적용해서 취해진 정책, 젊고 거의 정치화되지 않은 인자들를 대거 유입한다는 정책이 이제 열매를 맺었다. 리용테제는 망명 중 이탈리아좌파의 정책 방향을 결정하게 되었다.

보르디가는 1926년 2월부터 3월까지 CI의 제 6대 확대된 행정위원회 동안 마지막 전투를 벌이게 되다. 그는 CI의 기회주의적 표류를 비난했고, “분파들의 역사는 레닌의 역사”이고 분파들은 병도 아니고 이 병의 증상도 아니라 “기회주의적 영향들에 맞선 방어” 반응임을 시인하면서 이 문제가 당장의 사안이 될 것으로는 내다보지 않으면서 분파들의 문제를 언급했다.

1926년 9월 칼 코르쉬(Karl Korsch)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르디가는 쓰기를, “ 우리는 당들과 인터네셔널의 분열을 원할 필요가 없다. 분열이 가능하기 전에, 우리는 인위적이고 기계적인 규율의 경험을, 그것으로부터 초래되는 부조리한 실천들과 함께 허용해야만 한다, 어떻게든 우리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입장들 결코 비판하지 않고 만연한 노선과의 연대를 표현하지 않으면서 (...). 일반적으로 나는 오늘날의 우선순위는 조직화와 작전들의 영역이 아니라 훨씬 더, 정치적인 이데올로기, 좌익이고 국제적이며 코민테른에 의한 수난을 당한 그런 이데올로기의 정교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한 측면에서 허약함은 어떤 국제적인 발의도 아주 어렵게 만들 것임을 의미할 것이다.(보르디가, 이탈리아 코뮤니스트 좌파에서 인용).

이것들은 또한 1928년 4월 파리근교 팡탱(Pantin)에서 개최된 그 최초의 대회 후 결국에 창설되는 이탈리아 코뮤니스트 당 좌파 분파를 받치는 기초들이였다. 그 당시 브뤼셀, 뉴욕, 파리 그리고 리용, 이렇게 총 네 개의 “연합들(federations)”이 존재했고 룩셈부르크와 베를린 그리고 모스크바에 투쟁가들이 있었다.

그 대회는 그것의 전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첫째, 코뮤니스트 인터네셔널의 좌파 분파를 결성하는 것

둘째, (…)

셋째, 두 달에 한 번씩 프로메테오(Prometeo)라는 이름의 잡지를 출판하는 것

넷째, 기회주의와 기회주의자들에 맞서 가차 없는 투쟁을 수행할 임무를 가진 좌파 그룹들을 건설하는 것

다섯째, 채택된 즉각적인 목표는,

- 코뮤니스트선언(Communist Manifesto)에 충실하고 제 3 차 세계대회의 테제들을 수용하는 인터네셔널로부터 축출된 모든 인자들을 재통합하는 것

- 레온 트로츠기를 회장으로 하여 제 6차 세계대회를 소집하는 것

- 15차 러시아 대회의 결의들에 연대를 선언하는 모든 인자들의 제명을 제 6차 세계대회의 현안으로 상정하는 것이다.”

보여지는 바와 같이

- 그 분파는 자체를 “이탈리아”의 것으로가 아니라 CI의 한 분파로 생각했고,

- 프롤레타리아의 삶이 CI 안에 여전히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여전히 구출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겼으며,

- 또한 러시아당이 CI대회의 결정들을 따라야 하며, 공공연히 배반한 모든 이들을 (인터네셔널의 다른 당들과 관련해서 이전에 이미 그렇게 했듯이) 축출함으로써 “제 집안을 정리 정돈해야 한다”라고 생각했고

- 노동자들에 대해 전반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CI의 투쟁가들 사이에서 개입하는 것을 스스로의 임무로 여겼다.

1945년까지 그 분파는 상당한 업무를 수행하고 되고, 그 뒤부터 1952년까지 프랑스 코뮤니스트좌파(the Gauche Communiste de France: GCF)가 그 업무를 계속하고 보충했다. 우리는 우리의 기사들, 내부 문건들 그리고 토론들에서 이미 자주 이들의 작업을 참조점으로 삼아왔기에 여기서 그것을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다.

이탈리아 분파의 근본적인 공헌들 중 하나로서 이 보고서의 핵심인 것을 들자면 정확히, 노동자운동의 경험 전체를 바탕으로 한 분파 개념의 발전 바로 그것일 것이다. 이 개념은 이 보고서의 초입에서 이미 대략적으로 정의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분파 개념이 정의된 우리 간행물의 한 기사로부터 몇 문단을 인용하는 선에서 머물려 한다(“이탈리아분파와 프랑스코뮤니스트좌파”; 국제평론(International Reviews:IR) 90호12).

우리의 간행물에서 우리는 당과 분파 형식들 사이에서 이탈리아 좌파가 작업해낸 구분을 자주 다뤄왔다.(특히, IR 59, 61호 그리고 64호에서 ‘마르크스주의 전통 안에서 분파와 당의 관계’에 관한 우리의 연구를 참조 ). 분명히 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문제의 주요한 몇 줄들을 여기에서 환기할 수 있다. 코뮤니스트 소수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혁명적 운명의 한 표현으로서 영구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 소수가 노동자계급의 즉각적인 투쟁들에 갖는 영향력은 그것의 수준과 노동자 대중들의 의식성의 정도에 의해 결정된다. 공개적이고 점점 더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시기에 만이 그 소수는 영향력을 갖기를 바랄 수 있다. 오직 이러한 조건들 아래에서만 그 소수는 하나의 당으로서 묘사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역사적으로 퇴조하고 반혁명이 승리하는 그러한 시기에 혁명적 입장들이 중요성을 띠고 계급 전체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갖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런 시기에는 유일하게 가능하지만 극히 중요한 일은 바로 분파의 일이다, 즉 계급 역량들의 균형이 또 다시 코뮤니스트 입장들로 하여금 프롤레타리아계급 전체에게 영향력을 갖도록 가능하게 만들 그 때를 대비해 미래의 당 건설을 위한 정치적 조건들을 준비하는 것이다.

좌파 분파는 프롤레타리아 당이 기회주의의 영향으로, 다시 말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그 당에 침투함으로써 퇴행되어갈 때 형성된다.혁명적 강령을 지지하는 분파의 책무는 그 당내에서 승리하기 위해 조직된 투쟁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 분파가 성공한다면 그것의 원칙이 승리하고 그 당이 구출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 당은 퇴행을 계속하여 무기와 짐을 모두 건내 주고 결국 부르주아 진영 안으로 전향하게 된다. 프롤레타이라 당이 부르주아 진영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을 결정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전향의 가장 중요한 징후들의 하나는 프롤레타리아적인 정치생활이 그 당 안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좌파 분파의 책무는 그 당을 바로잡을 희망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그 당 내부에서 투쟁을 계속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에 좌파 경향들은 CI의 당들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런 당들은 종종 야비한 술책들까지 동원해서 이들을 제명했다. 프롤레타리아 당이 일단 자본주의 진영으로 넘어 가버리면 회귀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프롤레타리아계급은 혁명을 향한 길로 되돌아가기 위해 새로운 당을 건설해야 하고, 분파의 역할은 적에게로 넘어가버린 낡은 당과 미래의 당 사이에 놓인 ‘다리’가 되는 것으로, 그 미래의 당을 위해 강령적 기초를 세워야 하고, 그 당의 골격이 되어야 할 것이다.당이 일단 부르주아 진영으로 넘어 가버리면 그것 안에는 그 어떤 프롤레타이아적 삶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늘 트로츠키주의의 전술들 중의 하나였고 좌파 분파가 항상 거부해 온 ‘침투주의(entryism)’를 혁명가들이 수행하는 것은 쓸모없고 위험하다는 점이다. 부르주아의 당, 다시 말해 계급 입장들을 놓고 볼 때 불모지인 그러한 당 안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유지하려는 시도들은 결국 그 당을 조금이라도 바로 세우기는커녕 오히려 그러한 시도를 행한 조직들의 기회주의적 퇴행이 가속되는 것 이외의 어떤 다른 것도 결코 불러오지 않았다. 그런 방식으로 얻어진 ‘ 새로운 영입(recruitment)’과 관련해서는, 그것은 특히 혼란스럽고, 기회주의로 병들어 결코 노동자계급의 선봉을 형성할 수 없었다.

사실상, 이탈리아분파와 트로츠키주의의 근본적인 차이들 중 하나는, 혁명역량을 재조직할 때 이탈리아분파는 CI의 퇴행에 맞선 투쟁에 헌신했던 다른 모든 경향들과 토론하는데 열려있긴 했지만 그래도 항상 최대의 명료성과 강령적인 엄격함에 대한 필요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그와는 반대로 트로츠키주의 경향은 정치적 입장들을 사전에 진지하게 토론하거나 조율하지 않고 오직 1917년 혁명과 초기 CI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들 중의 하나인 트로츠키의 권위와 ‘인물들(Personalities)’ 사이 이뤄진 합의들에 본질적으로 의존하면서 성급하게 조직들의 건설을 시도했다.”

트로츠키주의가 이탈리아분파와는 반대의 위치에 있는 또 다른 문제는 새로운 당을 건설할 시기와 관련되었다. 트로츠키와 그의 동지들에게는 새로운 당의 건설 문제는 낡은 당이 프롤레타리아계급에게 있어서 그 존재를 상실하는 그 순간부터 즉시 현안이 되었다. 이탈리아분파에게 그 문제는 매우 분명했다.‘분파의 당으로의 전환은 서로 밀접하게 의존적인 두 가지 요소들에 의해 결정된다.’”

이 문구는 우리가 공간의 제약 때문에 위에서 다루지 않은, 트로츠키주의의 방법들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 (트로츠키) 경향이 부르조아 진영에 합류하기 이전 그것이 갖고 있던 성격들 중 두 가지가 다음과 같다는 것은 중요하다:

- 첫째, 그 어느 순간에도 분파라는 이름을 그들의 개념에 포함하지 않았다. 트로츠키주의의 시각에서 보자면, 한 당에서 다른 당으로 이동하는 것이어서, 그래서 혁명가들이 극소수로 존재하는, 계급의 후퇴기 동안에는 그들의 조직은 ‘소당(mini-party)’으로 간주되어야 했다. 한편 이 ‘소당’ 개념은1930년대 중반 이탈리아분파 자체에서 출현했었고 현재 ICT의 개념인데, 왜냐하면 그것의 주요 구성요소가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당(Partito Communista Internazionalista)이라 불리기 때문이다.

- 둘째, 트로츠키는 (비록 그 혼자만은 아니였을 지라도) 반혁명의 정도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얼마나 잘못 이해했는지는 프랑스에서 1936년 5월-6월에 있었던 파업들을 그가 “혁명의 시작”이라고 본 것에서 잘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역시 ICT에 의해 거부된) 역사적 경로(historic course)개념은 이탈리아분파에게 근본적이었다.

그 좌파가 자체의 역할을 완수하는 근본적인 전제 조건으로 여겼고 그 좌파에 항상 혼을 불어넣었던, 명확화로의 의지는 분명히 이론 편향과 분리될 수 없었고 한 때 결정적으로 보였던 분석들과 입장들을 문제시할 지속적인 필요성과도 분리될 수 없었다.

5) 결론을 맺으며

보고서의 1부를 끝내며 우리는 코뮤니스트 인터네셔널을 떠난 경향들의 이후의 괘적들로 아주 간략하게 되돌아가 보아야 한다. 독일네덜랜드좌파로부터 출현한 경향은 KAPD와 KAPN이 사라진 뒤에도 남아 있었다. 그것의 가장 주요한 대표는 네덜랜드의 국제주의 코뮤니스트그룹(Group of Internationalist Communists: GIK)이었다. 이 그룹는 (예를 들어, 파울 마틱(Paul Mattick)에 의해 격려된 미국 그룹, 생생한 마르크주의(Living Marxism)에 대해서 처럼) 네덜랜드 밖에서도 영향력을 가졌다. 1930년대의 가장 비극적이고 위기의 순간이었던 스페인내전(Spanish Civil War) 동안 이 그룹은 반파시즘을 향해 어떤 양보도 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국제주의적인 입장을 옹호했다. 이 그룹은 또한 (민족 문제에 있어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독일좌파의 입장을 채택한) 빌랑(Bilan)그룹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에 관하여 이탈리아좌파의 전통적인 입장을 거부하고 대신에 독일-네덜랜드좌파의 입장을 수용한 프랑스코뮤니스트좌파(Gauche Communiste de France)의 경우를 포함한 코뮤니스트좌파 내부에서 반성을 자극했다.

그러나 이 경향은 결과적으로는 치명적인 것으로 밝혀지는 (그리고 KAPD에게는 낯설었을) 입장들 두 가지를 채택했는데, 1917년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 분석하는 것과 당이 필요하다는 점을 거부하는 것이 그 두 가지였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결국 그 그룹은 과거에 존재했던 일련의 모든 프롤레타리아 조직들을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범주화해버리게 되었고 최종적으로는 노동자 운동의 역사를 그리고 그것이 미래를 위해 제공할 수 있을 교훈들을 거부하게 되었다.

이 두 가지 취약점들의 결과로 그것은, 비록 평의회주의적인 사상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계속 영향력을 갖고 있긴 할지라도, 앞으로 미래의 당으로 그래서 코뮤니스트혁명으로 나아가게 될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기회를 스스로 가로막았다.

보고서의 제 2부로 연결하는 마지막 개요적인 점은 바로, ICC는 하나의 분파로 간주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그 당연한 대답은, 분명히 그렇게 간주될 수 없다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 조직은 그 어느 순간에도 어느 한 프롤레타리아 당의 내부에서 건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대답은 이미 1950년대 초 우리의 동지 MC가 인터네션날리스메(Internationalisme) 그룹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보낸 편지 안에 다음과 같이 제시되었었다.

분파는 상대적으로 짧게 존재하기 때문에 옛 조직과 직접적 유기적 연속성을 가졌다. 종종 그것은 분열(Split)의 바로 그 순간까지 옛 조직 내에 남아 있었다. 그러한 분열은 그 분파가 새로운 당으로 전환되는 것과 종종 동일했다(예를 들어, 볼세비키분파와 스파르타쿠스동맹, 그리고 옛 인터네셔널의 거의 모든 좌파 분파들 처럼). 오늘날, 이러한 유기적 연속성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 그 분파는 영구적인 위기와 국가 자본주의로의 진화를 특징으로 하는 우리 시대가 부과하는 문제들과 같은 그런 근본적으로 새로운 문제들과 대면할 필요가 없었고 또 극히 작은 경향들로 산산히 흩어져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새로운 원칙들을 만들어내도록 요구되기 보다는 그것이 획득한 혁명 원칙들 안에 더 단단하게 고정되었다. 그 분파는 새로 만들기 보다는 유지할 것이 더 많았다. 이 덕분에 그리고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걸쳐서 그 직접적이고 유기적인 연속성 덕분에 그것은 형성 중에 있는 새로운 당이었다.

[이 그룹은] , 비록 부분적으로 분파의 임무들을 -예를 들어 과거의 경험을 재점검하고 투쟁가들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갖고 있을 지라도, 새롭게 진화하는 상황들과 새로운 전망들에 대한 분석도 수행해야 하지만 미래당의 강령을 새로 만들 필요는 없다. 그것은 앞으로 건설될 미래의 당의 한 구성 요소에 불과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재건설에 단지 한 구성 요소를 이룰 뿐이다. 그 조직적인 성격 때문에, 그것이 강령적인 면에서 공헌하는 기능은 오직 부분적일 수 밖에 없다.

ICC가 존재한지 40년이 되는 지금 우리는 30주년을 맞이해서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했던 것과 동일하게 접근해야 한다. “ ICC 지난 30년 동안 살아남아서 그 책무들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 그 대부분이 우리는 이탈리아 코뮤니스트 좌파의 공헌들의 덕이라고 본다. 이 시기동안 활동으로부터 우리가 끌어낼 수 있는 긍정적인 대차 대조표의 비밀은 우리가 그 분파의 가르침에, 더 일반적으로는 ,특히 그것이 그렇게 잘 배운 마르크스주의의 정신과 방법에 충실했던 점에 있다. ”(ICC의 30년: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과거에서 배우기 ” , 국제평론, 제 123호13)

 

1“Minutes of the Central Committee Meeting of 15th September 1850” in Marx: The Revolutions of 1848, Penguin, 1973, p341 ) 마르크스엥겔스저작집(MEW) 제 8권, 598쪽

2이때 주목할 만 한 점이 있다. 이 회합 직후 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보냈던 편지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에커리우스가 이전에 건설을 시도했고 그래서 마르크스를 초대했었던 조직들이 마르크스에게는 인위적으로 여겨졌던 반면에 이번에는 그 노력이 진지한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그 초대를 이번에는 받아들였다고 한다.

3이 부분과 그 다음 부분에서 우리는 2개의 주요 나라들, 즉 영국과 프랑스의 당들을 검토함이 없이 4개의 다른 당들, 즉 러시아, 네덜란드,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의 당들 안에서의 분파들에 중점을 둘 것이다. 사실상,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그 이름값을 할 만한 좌파 분파가 존재하지 않았는데, 그 주요한 이유는 그 내부에서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극도로 미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는 제 1차 대전에 대항 한 초기의 조직된 반응이 사회당 안의 소수에게서가 아니라 CGT노동조합 내부의 소수로부터, 즉 노동자의 삶(La Vie Ouvriere)를 간행한 로스마(Rosmer)와 모나트(Monatte)를 주변의 그 핵심인자들부터 나왔다.

4국제평론 (International Review)제 153호, ‘프로레타리아당의 본질과 기능’에 재수록되었다

5 “나는 드트리뷴의 편집진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우리는 우리 주위로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할 있는 모든 것을 다해야 하지만, 만약 이것이 실패한다면, 우리가 마지막까지 싸운 뒤에 우리의 모든 노력들이 실패한다면, 그때 우리는 항복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다시 말하자면, 드트리뷴에 대한 억압을 수용하는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1909년 2월 16일 카우츠키에게 보낸 편지) “당 내에서 우리의 힘이 강해질 수는 있지만 당 밖에서의 우리의 힘은 결코 성장할 수 없다”(데벤터대회에서 호르타의 개입발언 (참조:‘네덜랜드좌파 (The Dutch Left; 1900-1914), 3부 : 트리뷴운동’, 국제평론 제 47호))

6탄압을 당한 여러 투쟁가들 중에서, 전쟁의 대부분을 감옥 속에서 보냈던 로자 룩셈부르크와 처음에는 징집되었다가 그다음엔 1916년 5월 1일 시위에서 전쟁과 정부를 비난한 후 요새에 감금당했던 칼 리프그네히트의 경우, 그리고 70살이 넘은 나이에 수감되었던 프란츠 메링의 경우를 우리는 인용할 수 있다.

7두 개의 다른 입장들 중 하나는 트로츠키(Trotsky)의 입장인데, 그는 (적군(Red Army)을 모델로 해서) 노동조합을 노동자에 대한 통제 기구로 만들고 그래서 노동 규율을 상승시키기 위해 노동조합을 국가 안으로 통합하는 것을 원했다. 한편 다른 하나는 레닌(Lenin)의 입장인데, 그는 오히려, “강력한 관료주의적 변형들”을 포함하는 국가에 맞서 노동자들을 옹호하는데 노동조합이 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8암스테르담 사무국이 CI내부에서 좌파 재결집의 축을 구성할 “위험” 때문에 CI 행정위원회는 1920년 5월 4일 그 사무국의 해체를 라디오를 통해 선언했다.

9그 당시에 네덜랜드 좌파와 판네쿡은 당이 필요함을 거부하는 오토 륄레가 발전시킨 비젼에 맞써 투쟁함에 있어서 확실히 명확했다. 하지만 그 동일한 입장은 나중에 평의회주의자들(councilists)의 입장 … 그리고 판네쿡의 입장이 된다.

10이 대표단은 어느 상선 하나의 선원들이 선상 폭동을 일으켜 항로를 무르만스크(Murmansk)로 바꾸도록 설득함으로써 (내전과 봉쇄 때문에 육로로 도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던) 러시아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11호르타는 그가 사망하는 날 저녁에 쓴 마지막 글에서 그 자신의 실수를 파악하고 그 동지들에게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런 오류들로부터 교훈을 얻도록 격려했다.(“독일-네덜랜드좌파”, 제 5장 끝부분, 4.d. 참조)

12The Italian Fraction and the French Communist Left

1330 years of the ICC: Learning from the past to build the future

국제적인 계급투쟁만이 자본주의의 파괴 충동을 끝낼 수 있다

기후 변화를 위한 항의들에서 가장 대중적인 구호들 중의 하나는 “기후 변화가 아니라 체제 변화”이다.

현 체제가 인류를 환경 대재앙을 향해 끌어가고 있음은 자명하다. 전대미문의 폭염, 아마존 지역의 산불들, 녹아 사라지는 빙하, 홍수, 그리고 궁극적인 결과로 인류를 제외한 모든 종들의 멸종 등 물증이 매일 쌓여가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 지구온난화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더라도 토양과 대기 그리고 강과 바다는 계속 오염되고 생명을 잃어갈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특히 위협적인 미래에 직면한 그렇게 많은 젊은 이들이 이 상황을 매우 염려스럽게 여기며 이와 관련하여 뭔가 행동으로 나타내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기후를 위한 청소년(Youth for Climate), 멸종반란(Extinction Rebellion), 녹색당과 좌파 정당들에 의해 조직된 항의들의 물결은 진보의 한 방식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그들의 지도를 현재 따르고 있는 이들은 자문해야 한다. 왜 현 체제를 관리하고 방어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저항들을 광범위하게 지지하고 있는지를. 왜 그래타 툰베르크가 의회와 정부 그리고 유엔에서 연설하도록 초대되는 걸까?

물론 트럼프, 볼소나로나 페라지와 같은 이들은 끊임없이 그래타와 “환경-전사들”을 헐뜯는다. 그들은 기후변화가 속임수이고 오염을 억제하려는 대책들이 특히 자동차나 석유 부문들에서 경제성장에 위협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본주의 이윤의 뻔뻔스런 옹호자들이다. 그러나 기후를 위한 항의에 칭찬을 늘어놓는 메르켈, 마크롱, 코베인, 알렉산드라 오카시오-코르테즈 그리고 기타의 다른 사람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러면 그들은 현 체제의 일부가 아닌가?

현재의 항의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다수는 환경파괴의 뿌리들이 체제에 놓여 있음을 그리고 이 체제가 바로 자본주의 체제임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항의자들의 배후에 있는 조직들 그리고 그러한 항의자들을 지지한다고 위선적으로 떠들어대는 정치인들은 자본주의의 진정한 본질을 은폐하는 정책들을 옹호한다.

이러한 정치인들 중에서 좀 더 과격한 이들이 추진하는 주요 계획들의 하나인 “뉴 그린 딜(New Green Deal)”를 살펴보자. 그것은 현존하는 국가들에 의해 시행될 대책들의 패키지를 우리에게 제공하는데, 이때 이들은 점잖은 이윤을 창출할 것으로 여겨지는 “비-오염적(non-polluting)” 산업들의 발전을 위한 대대적인 자본 투자를 요구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전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들 안에 틀지워져 있다. 1930년대의 뉴딜정책과 마찬가지로 그것의 목적은 곤경에 처한 자본주의를 구제하는 것이지 그것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는 무엇인가?

자본주의는 사적인 보스들 대신에 국가 관료들이 운영한다고 해서 또는 그 스스로를 녹색으로 칠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자본은 이윤은 실현하기 위해 임노동의 착취와 판매를 위한 생산에 기반한 전세계적인 계급 관계이다. 그 상품 판로의 끊임없는 모색으로 인해 세계 시장의 지배를 놓고 민족 국가들 사이에서 가차 없는 경쟁이 출현한다. 그리고 이 경쟁은 모든 민족 국가들이 팽창하거나 사멸할 수 밖에 없는 것을 요구한다. 지구의 맨 끝 가장자리까지 침투하고 무한히 성장하는 것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 자본주의란 존재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는 모든 이전의 기후 정상회담들과 규약들의 처참한 실패가 이미 보여주듯이, 환경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전 세계적인 규모로 협력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

자연 파괴의 뿌리에는 인간의 필요와 무관한 이윤 사냥이 놓여 있고 이것은 자본주의가 시작된 이래 진실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역사를 갖고 있고, 거의 백년 전에 진보적인 요소이기를 멈추고 심오한 역사적 위기로 돌입했다. 그것은 한계 없는 성장을 강제당하는 경제적 기반으로서 영구적인 경향의 과잉 생산의 위기들을 창출하는 부패에 처한 문명이다. 세계대전들과 20세기의 “냉전”이 보여 주었듯이, 이러한 쇠락 과정은 자본의 파괴 충동을 오직 가속할 수 있을 뿐이다. 전세계적인 자연 대참살이 분명해지기 전에 이미 자본주의는 그것의 끊임없는 제국주의적 충돌들과 전쟁들을 통해 인류를 절멸하려 위협하고 있었고, 이것은 지금도 여전히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파키스탄과 인도까지 지구 전역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러한 충돌들은 점점 줄어드는 자원들을 놓고 민족 국가들이 경쟁하면서 환경 위기에 의해 오직 더 첨예화될 수 밖에 없다. 다른 한편으로, 점점 더 악몽적인 무기의 생산, 그리고 특히 그 사용을 놓고 벌이는 경주는 지구를 더 오염시킬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자본주의의 황폐화의 사악한 조합은 이미 지구의 일부를 불모지로 만들어 수백만 명을 난민으로 내몰고 있다.

코뮤니즘의 필요성과 가능성

현 체제는 경제위기나 환경 위기, 전쟁 충동을 극복할 수 없다. 그래서, 현재의 행진과 항의들을 조직하는 모든 그룹들이 요구하는 것 같이 전세계의 정부들이 “힘을 모아 함께” 지구를 구하기 위해 대책을 마련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속임수에 불과하다. 인류를 위한 유일한 희망은 현 체제를 파괴하고 새로운 사회 형태를 창조하는 데 있다. 민족 국가들이 없고 노동의 착취가 없으며 시장과 돈이 존재하지 않는, 전세계적 규모로 그리고 인간의 필요 충족을 유일한 동기로 하여 모든 생산이 계획되는 그런 사회, 이것을 우리는 코뮤니즘이라 부른다. 이러한 사회는 중국이나 북한 또는 쿠바나 이전의 소련과 같이 국가가 운영하는 자본주의 형태와 어떤 공통점도 갖지 않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진정한 코뮤니즘은 인류와 그 이외의 자연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확립할 수 있는 유일한 기초이다. 그리고 이것은 공상이 아니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이미, 과학과 기술의 발전 그리고 모든 생산 활동의 상호 의존성과 같은 물질적인 토대들을 세웠기 때문에 가능하다. 전자, 즉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현 체제 아래에서의 왜곡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고 후자, 즉 생산 활동의 상호 의존성은 자본주의의 경쟁과 국가 간의 적대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그러나 특히, 잃을 것이라고는 족쇄 밖에 없는 계급, 착취에 저항하고 그것을 극복하는데 이해관계를 갖는 계급인 국제 노동자 계급, 모든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를 형성하는데 자본주의가 기반하기 때문에 코뮤니즘은 가능하다. 이 계급은 작업장에서 착취당하는 이들 뿐만 아니라 노동 시장에서 자리를 찾기 위해 공부하는 이들과 자본에 의해 일터에서 내쫓아 쓰레기 더미에 내던져진 이들도 포함한다.

시민들의 항의냐 노동자들의 투쟁이냐?

그래서 바로 특히 여기에서, 기후 행진들 뒤에 놓인 이데올로기는 우리들이 이 체제에 저항해 투쟁할 수단들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기여한다. 그 이데올로기는 예를 들어서, “더 나이든 세대(the older generation)”가 너무 많이 소비하는데 익숙해져서 세계가 엉망이 되었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러나 세대들 “일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사회가 두 개의 주요 계급들, 즉 모든 권력을 갖고 있는 자본가 계급, 부르조아지라는 한 계급과 모든 결정권력을 심지어는 가장 “민주주의” 국가들에서도 박탈당한 채 착취당하는 다른 훨씬 더 큰 계급으로 분할되어 있는데 문제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자본의 비인격적인 메카니즘들이 우리를 현재의 궁지로 몰아넣었지, 개인들의 사적인 행위나 이전 세대의 탐욕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세계를 구할 수 있는 역량으로서의 “민중”이나 “시민”에 관한 모든 논의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들은 대립적인 계급 이해관계들을 덮어버리는 의미 없는 범주들에 불과하다. 한 계급의 다른 한 계급에 의한 착취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체제로부터의 탈출은 계급 투쟁의 부활을 통해서 가능할 뿐이고, 그 시작은 경제위기에 대한 반응으로 그리고 환경을 보호한다는 이름으로 점점 더 정당화하면서 모든 정부들과 모든 보스들이 노동자들의 생활 조건과 노동 조건들에 부과하는 공격들에 대항해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가장 기본적인 이해관계들을 옹호하는 것에서 이뤄진다. 이것이야 말로 노동자 계급은 이미 멸종한 종이라고 우리에게 말하는 모든 거짓말들에 대항해 노동자 계급이 그 자체의 존재감을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기초이다. 또한 이것이야 말로 경제위기와 전쟁과 생태계 대재앙 사이의 연관을 발견하고 이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전세계적인 혁명 뿐임을 알아채고 경제적 정치적 차원을 융합하는 계급 투쟁의 유일한 기초이다.

1 차대전 발발 즈음 수십만명이 평화 시위에 참여했다. 그들은 평화로운 자본주의가 가능하다는 환상을 유포한 “민주주의적” 지배계급들에 의해 고무되었다. 오늘날은 녹색자본주의가 가능하다는 환상이 널리 유포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선량한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평화주의는 러시아혁명과 러시아 혁명이 지배계급을 강제해서 전쟁이 재빨리 종결되도록 했던 것에서 증명된 것처럼 오직 계급투쟁만이 전쟁을 진정으로 반대할 수 있음을 은폐한다. 평화주의는 전쟁을 결코 중단시킨 적이 없다. 그리고 현재의 생태주의 캠페인은 기후 대재앙에 대해 잘못된 해답들을 유포하기에 그 진정한 해결에 장해물로 이해될 수 밖에 없다.

ICC

2019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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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단지는 10 여 개국에서 유포되고 있다. 이 죽어가고 있는 체제에 관해 의문들을 제시하는 모든 이들과의 토론을 우리는 환영한다. 자본주의의 본질과 그것이 제기하는 위협들 그리고 이에 대항한 투쟁의 역사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드는 많은 기사들이 우리의 웹싸이트(www.internationalism.org)에 실려있다. 우리의 이멜주소는 [email protected]. 올해 10월에 우리는 이 전단지에서 주제들을 놓고 여러 나라들에서 공개토론회를 가질 것이다. 세부적인 사항들에 대해서는 우리 웹싸이트를 참조바란다.

다가오는 이스라엘 총선 : 계급의 전망

‘다가오는 이스라엘 총선:계급의 전망 ’에 대한 ICC의 서문

2018년 12월 말 이스라엘의 소설가 아모스 오즈(Amos Oz)가 79세로 별세했다. 그는 근대 이스라엘 국가의 지난한 역사를 연대기로 기록한 탁월한 소설가였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점점 더 군사적인 정책들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자였다. 1967년, 6일 전쟁의 열광의 한가운데에서 오즈는 그 점령이 이스라엘 사회에 가져올 도덕적으로 부패적인 영향력을 경고한 드문 몇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점령의 즉각적인 종결과 이스라엘과 나란히 팔레스타인 국가의 건설을 옹호했다. 이 견지는 그 당시 과격하게 보였을 지 모르지만 곧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2000년 캠프 데이비드 합의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그런데, 무제한적 대중 추수주의의 시대에는 심지어 이렇게 온건한 제안 조차도 극도로 공상적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의 우익 네탄야후 정권은, 팔레스타인 국가의 건설을 향한 그 어떤 진전도 말살시키려 모든 가능한 노력을 다 해오고 있는 와중에,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의 대대적인 국외 추방을 초래하게 될 한 국가 해법인 ‘더 위대한 이스라엘’, 을 공공연하게 요구하는 보다 더 우파에 속하는 이들로부터 점점 더 커져가는 압력에 직면해 있다. 한편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운동은 그 시온주의 국가의 군사적 파괴를 결정하게 될 이슬람주의 분파들에 의해 점점 더 지배되고 있는데, 이 해법은 의심의 여지없이 또 다른 대대적 국외 추방, 즉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추방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점점 더 험악해지는 분위기에서 이스라엘 내부로부터 나오는 진정으로 국제주의적인 입장의 흔치 않은 표현의 하나인 한 기고문의 출현을 우리는 환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기고문의 저자는, 자본주의 쇠퇴의 시기에 모든 국가의 투쟁들과 슬로건들은 반동적이 되어 버렸다는 맑스주의의 입장을 취하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 제국주의가 만든 함정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길은 계급에 기반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의 단합이고 모든 부르조아 국가들에 대항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향해 나아가는 것임을 거침없이 주장한다.

상당히 올바르게도 이 동지는 이러한 전망을 대표할 혁명 정당의 건설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것은 무엇보다도 세계 자본의 주요 중심지들에서 노동자 계급이 그 역사적인 기획인 코뮤니즘을 다시 활용할 수 있는 국제적인 발전의 일부로서만 오직 가능하다는 점을 주장하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노동자들 사이에 어떤 지속적인 단합도 오직 계급 투쟁의 전 세계적인 재생의 일부분으로서, 최근 모든 곳에서 점점 더 강해지고 있지만 특히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는 그 특별한 역사 때문에 더 증가된 힘을 방출하는 민족주의와 외국인혐오의 물결들을 물리칠 수 있는 운동의 한 일부로서만 오직 가능할 것임이 거의 확실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적인 대안을 중동에서 옹호하는 극소수의 출현은, 그것이 아무리 작을 지라도, 이러한 혁명적 미래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연결 고리이고, 이 혁명적 미래는 여전히 가능하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하다. ICC

2019년 4월에 예정된 이스라엘의 때 이른 총선에서는 이 시온주의 국가의 불안정성이 주목될 것이다. 벤야민 네탄야후 총리가 때 이른 총선 요청을 선택한 것은 텔아비브 정권이 직면한 곤경을 나타내고 있다. 게다가 이스라엘 검찰이 네탄야후를 뇌물 수수 및 사기 혐의로 고소하려는 결정이 예상되는 것 또한 때 이른 총선을 발의하려는 그의 결심에 한 요소로서 작용하면서 시온주의 체제는 극심한 경제적 정치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 이스라엘의 노동자 계급은 생활 조건뿐만 아니라 수 십 년 간의 군사 점령의 대가를 계속 지불할 가능성의 측면에서 지독한 악화를 느낀다. 보건과 교육 체계의 재정 지원은 미흡하고 소비 재화와 용역의 가격은 상승하여, 빈곤에 처하게 된 국내 노동자들 사이의 여러 계층들은 그들의 어려운 경제 상황을 헤쳐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이스라엘 국민의 20퍼센트 가 빈곤하게 살고 있는 이 나라는 서방에서 가장 불평등한 사회들 중의 하나이다.

정치적 측면에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점령군에 저항하는 웨스트 뱅크와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무장파에 의해 도전받고 있다. 그 남쪽 국경은 분단 장벽 근처로 무장된 저항을 진행해가려는 하마스의 계속된 시도들 때문에 불안정하다. 이슬람 투사들은 남쪽의 이스라엘인들에 대항해 미사일을 발사한다. 북쪽 국경에서 이스라엘은 시리아에 있는 이란 혁명군의 기지들을 계속 군사적으로 공격하느라 바쁘다. 게다가, 이스라엘군과 히스볼라는 전쟁 가능성에 그 어느 때보다도 근접해 있다. 미국 행정부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에 있는 이슬람주의자들을 항복시키기 위해 국경들에서 공격적인 정책들(가자 지구는 이스라엘의 봉쇄정책으로 인해 인도주의적 측면에서 혹독한 상황에 처해 있다)을 펼치고 있고 이란의 민병들을 (이들이 장래의 전쟁에서 히즈볼라를 돕게 될까 두려워하며) 시리아에서 몰아내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의 이러한 상황은 그 불안정성과 위기를 표시한다. 차별주의 국가로서 이스라엘은 노동자 계급이 점령과 국가의 군사적 공격성의 대가를 치르면서 그와 동시에 정부가 경제를 운영하는 자본주의적 방식을 수용하게 될 조건을 유지하려 모색한다. 해외의 우익-대중추수주의적 파시스트적 지도자들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 지배 계급은 민족주의적 보이콧과 박탈과 처벌(BDS) 운동에 대항해 싸우면서 시온주의적 식민화 계획을 생생히 유지하기 위해서 대중들을 억압한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젊은이들은 민족적 억압과 자본주의의 잔혹한 착취라는 이스라엘의 조건을 더 이상은 순순히 받아드리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일부는 네탄야후 정부에 대항하는 이스라엘 야당들이 이스라엘의 부르조아 엘리트에 봉사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당들에 의해 이미 동원된다.

정치적 대안의 부재

 

이스라엘의 정치체계는 파편화되어 있고 허약하다. 정치적으로 우파 정당들은 네탄야후 총리가 이끄는 리쿠드(Likud)당을 위주로 전통적으로 조직되어 있다. 그런데, 현재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 우파 정당들 사이에서도 분열과 위기가 있다. 크네셋(Knesset) 안에는 1973년 창당된 극히 배타주의적 신자유주의적 형태인 리쿠드가 가장 큰 정치 분파이지만 리쿠드보다 작은 다른 정당들도 있는데, 이들의 정책들은 더 극심하게 민족주의적이고 배타주의적이다. 이러한 정당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을 내쫓게 될 더 위대한 이스라엘(The Greater Israel)을 만들려는 목표를 추진한다. 네탄야후의 연정에 참여한 유일하게 ‘중도적’분파는 이전의 리쿠드 당원들 몇몇에 의해 구성되었다. 그렇지만, 이 분파는 네탄야후와 정치적 우파들이 국가의 경제를 자본주의적 극단으로 내몰아 가는데 협력했다.

네탄야후에 대해 반대파를 형성하는 정당들은 정책과 이념에 있어서 균일적이지 않다. 그들 중의 하나는 노동당인데, 그 기회주의적이고 사회배타적인 정책들을 대부분의 이스라엘인은 불신한다. 다른 하나는 작은 사회민주주의적 시온주의 당, 메레츠(Meretz)인데, 그 정치적 선거 영향력은 협소하다. 이스라엘 내의 팔레스타인인들은 민족주의적 정치당들에 의해 대표되는데, 이 안에서 스탈린주의적인 이스라엘 코뮤니스트당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러한 좌파-중심 뒤죽박죽 집합체의 문제는 정치적 측면에서 그들의 이질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 중 그 어느 하나도 이스라엘과 아랍 노동자들에게 전망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유사-좌파 시온주의자 분파들도 반시온주의 아랍 코뮤니스트 당들도 수 십 년간의 점령, 잔인한 자본주의, 긴축 정책과 계속되는 사회적 위기들로부터의 탈출구를 제시하지 않는다.

이 상황은 이스라엘이 정착민-국가로서 팔레스타인 민중들을 계속해서 식민화하는 한 유감스럽긴 하지만 이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점령 문제는 이 나라의 정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정치적 우파가 점령과 식민화의 강화를 갈망한다면 정치적 유사-좌파는 이미 사멸한 두 나라(Two-States) 해법을 추진하는데, 그 해법 상으로는 작은 팔레스타인 반투스탄(Bantustan)국가가 이스라엘과 나란히 창건될 것이다. 민중들은 이 유혈적인 충돌의 종결을 보게 되기를 열렬히 갈망하는 반면, 우파는 노동자계급을 민족주의의 대열로 분열하려고 과격한 배타주의와 해악적인 민족주의를 퍼뜨리면서 번창한다. 유사-좌파는 자본주의 체제가 계속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게 될 제국주의적 질서에 기반한 해법 밖에는 제시하지 않는다. 100년 이상의 유혈적 충돌에 대해 진정한 대안 없이 민족주의는 번창하고 배타주의는 이스라엘 노동자들과 팔레스타인 노동자들 사이의 진정한 화해로의 그 어떤 변화도 좌절시키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한 나라 해법(The one-state solution)

몇몇 좌파 써클들 사이의 새로운 유행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두 민족 단일 국가 개념인데, 이 국가는 그 두 민족들에게 ‘자결(self-determination)’을 제공할 것이라는 개념이다. 이 생각은 팔레스타인에 두 개의 독립국가들을 건설한다는 전망에 대해 절망하는 과격파 진영에서 점점 더 유행하고 있다. 그런데, ’자결’이라는 슬로건은 기만적이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쇠퇴의 시기에 자결에 대한 요구는 부르조아 체제의 확립을 의미한다. 노동자 계급의 시점에서 볼 때 부르조아 국가의 건설은 계급 투쟁의 측면에서 궁지에 몰리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 안에서 자결을 요구하는 것은 부르조아 질서에 대한 위험한 환상을 구성하고 노동자 계급이 민족 부르조아 계급과 구별되지 않는 상황을 초래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 대열들을 따라서 노동자 계급의 분열이 있게 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존재하고 혁명 행동을 수행할 수 있는 그러한 나라들에서의 혁명가들은 ‘자결’의 요구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한층 더, ‘자결권’을 지지하는 것은 바로 이 권리가 민족 부르조아지의 이해관계와 상충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이 입장은 팔레스타인에서의 현실과 모순되는데, 부르조아지는 한 나라로 단일화된 자본주의 경제 상황에서 이득을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는 그들이 계급 대열을 따라서 통합되는 것이다. 민족주의와 자결에 대한 반동적 요구는 노동자 계급이 사회주의를 성취하는 것을 저지하길 원하는 민족 부르조아지가 손에 쥔 무기이다. 이점에 우리는 제국주의의 시기에 자본주의는 민족 국가와 경제를 파괴하고 식민화 과정을 통해 세계시장을 건설하려 모색하기 때문에 이 시기에 민족 독립을 위한 투쟁은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덧붙힌다. 진정으로 독립적인 민족 국가들의 건설이 가능하던 시대로 회귀하려는 과격한 충동은 공상적이고 심지어 반동적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질서 내에 하나의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요구는 사실상 부르조아지에게 또 하나의 자본주의 국가를 건설하라는 요구와 마찬가지이고, 이렇게 건설된 나라에서 노동자 계급은 억압되고 자본주의 지배 계급에 대항해 자체의 권리를 방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트로츠키주의 그룹들이 그 주를 이루는 극 소수는 하나의 팔레스타인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 즉, ‘억압된’민중들 즉 팔레스타인인들의 자결권에 기반한, 사회주의 성격들을 지닌 민족 국가의 건설을 주창한다. 이렇게 ‚‘억압된 자’와 ‘억압자’사이를 구분하는 것은 노동자 계급의 권력 쟁취를 목표하는 혁명 기획에 모순되며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조아지 사이의 계급 차이를 흐리게 만든다. 민중의 통합성은 오직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기반 위에서만 성취될 수 있다.

어떤 길을 갈 것인가?

이런 저런 좌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파시즘에 의해 분쇄되는 것으로부터 이스라엘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구해내기 위해서 다양한 정당들- 자유주의자들, 개량주의자들, 스탈린주의자들 또는 트로츠키주의자들 - 에 투표하라는 요구들이 있다. 그런데, 이 요구는 제국주의 시기에 부르조아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주적 체제이고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는 믿음을 반영한다. 민중은 민주주의를 보게 되기를 진정으로 원하고 파시스트들은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잔재들을 파괴하기를 진정으로 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부르조아-민주주의/자유주의 정당들이 총선에서 승리하면 파시즘이 승리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혁명적 행위자로서 노동자 계급의 힘을 위축시키는 정치적 전략이다. 파시즘은 민중에 의해 직접적이고 독립적인 혁명 행동을 통해 패배할 것이지 자본주의를 지지하거나 옹호하는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다.

이스라엘 정치 체계 안에 존재하는 현재의 ‘좌파’정당들은 자본주의 질서를 옹호하고 자본주의 내에서 민족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에 대한 환상들을 유포하는 점에 있어서 유럽과 미국의 다른 정당들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부패되어 가는 질서를 옹호한다, 그 죽음의 마지막 고통를 겪고 있는 질서를. 이러한 정당들은 민중들을 자신들 주위로 끌어 모을 수 없는데,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들을 경멸하고 그들의 지도력도 그들의 강령들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콤뮤니스트 강령을 추진할 자체의 혁명당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개량주의자들과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제안된 게임, 즉 부르조아 의회에 참여하고 그래서 혁명이 허공에서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잘 못 된 것이고 기만적이다.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신비화는 ‘시민권(citizenship)’과 같은 개념들을 확고하게 믿는 자들이 행한 잘못된 분석들에서 유래한다. 사실상, 계급 사회 안에서 유일한 진정한 민주주의,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혁명이 근접해 있거나 다가오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인 개입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부르조아 의회 안에서 활동한다는 환상들을 가지고는 노동자들은 해방되지 않을 것이다.

이 분석이 목표한 것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내의 노동자계급에게 그들의 투표용지를 망쳐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코뮤니스트 강령에 근거한 단일한 혁명 정당 안에 조직되라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민족주의와 전쟁들을 일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혁명을 통해서이다. 노동자들에게는 조국이 없고 그래서 노동자들은 그들의 미래를 콤뮤니스트 사회 안에 건설하기 위해 단결해야만 한다. DS

 

번역 원본 : 로자 룩셈부르크 선집 제 4권 1914년 8월부터 1919년 1월까지, 디이츠 출판사, 베를린 1974, 291 - 301쪽

[“자본”] 제 2권 및 제 3권 (1)

 

마르크스의 자본 제 2권과 제 3권도 제 1권과 마찬가지의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탈고하자 마자 곧 출판할 수 있기를 바랬지만, 그 사이 여러 해가 지나도 결국 인쇄될 수 있는 상태로 만들 수가 없었다.

   항상 새롭고 항상 더 깊이 파고드 는 연구들, 오랜 병고 그리고 결국에는 죽음 으로 인해 그는 그 저작 전체를 완성할 수 없었고 그래서 친구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미완성 수고들로부터 그 두 권을 편집해냈다 .  그 수고들은 집필 원고, 초안, 메모, 어떤 때는 연관된 큰 단락들, 다른 어떤  때는 연구자들이 스스로나 알아볼 수 있게 늘 하는 것처럼  짧게 대충 써놓은 소견들이었는데, 이는 엄청난 정신작업으로 종종 긴 중단기를이 있긴 해도 1861년부터 1878년이라는 긴 기간에 걸쳐 이뤄진 작업이었다.

   이런 상황들 때문에 우리는 “자본”의 이 두 마지막 권들에서 정치경제학(Nationalökonomie)의 모든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완결된 해답들을 발견하기 보다는, 오히려 부분적으로 그러한 문제들의 나열과 이에  덧붙여, 해답을 어떤 방향에서 찾아야 될지 알려주는 지표들만을 찾을 수 있다. 마르크스의 세계관 전체가 그러하듯이, 그의 주요 저작은 이미 완성되어 그 어떤 경우에도 유효한  진실들의 결정체를 지닌 성경이 아니라, 계속된 정신 작업으로 나아가도록 자극하고  진리를 향해 계속 탐구하고 투쟁하도록 고무하는 마르지 않는  원천이다.  

   이런 상황들 때문에 외면적으로도, 그 문학적인 형식면에서 제 2권과 제 3권은 제 1권처럼 그렇게 완성도가 높지 않고, 그렇게 생명력이 넘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두 권은 어떤 형식에도 구애되지 않은 바로 그 단순한 사고작업 때문에 어떤 독자들에게는 제 1권보다 더 훨씬 더 큰 즐거움을 제공한다.  내용면에서 이 두 권은, 비록 아쉽게도 지금까지 그 어떤 대중화도 고려되지 않은 채 그러니까 계몽된 광범위한 노동자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있지만, 제 1권을 본질적으로 보완하고 더 발전시키고 있기에, 체계 전체를 이해하는데 불가피하다.

   제 1권에서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의 주요한 질문을 다룬다: 치부(die Bereicherung)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윤(Profits)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마르크스가 출현하기 이전에 두 가지 다른 방향으로 제시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최상의 “학문적인”옹호자들,  슐츠-델리츠(Schulze-Delitzsch)와 같이 그 일부는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명망과 신뢰를 향유했던 이사람들은 자본주의의 부를 어느 정도는 설득력이 있는 정당화근거들과 교묘한 조작들을 통해 설명했다. 즉 기업가들이 생산을 위해 고귀하게 “넘겨준”자본에 대해 기업가들의 배상(Entschädigung) 을 위해 상품들에 체계적으로 부가된 가격(Preisaufschlag)의 결실이라고, 각 기업가가 감당하는 “위험”에 대한 보상(Vergütung)이라고,  기업의 “정신적 지휘”와 그 비슷한 활동등에 대한 임금(Lohn)이라고 그렇게 자본주의의 부를 설명했다. 이러한 설명들에 따르면 항상 중요한 것은 단지 한편의 부를 그리고 다른 한편의 빈곤 또한 “정당한”어떤 것, 불변의 어떤 것으로 설정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부르주아 사회의 비판자들, 즉 마르크스  이전에 출현한 사회주의자 학파들은 자본가들의 치부(die Bereicherung)를 기껏해야 순전한 사기치기로서, 그러니까 노동자들에 대한 도둑질로서, 화폐가 그 사이에 끼어듬으로써 또는 생산과정의 조직화의 부재로 인해 가능해지는 것으로 설명했다. 여기서 출발해서 그 사회주의자들은 여러가지 공상적인 계획들에 도달했다. 어떻게 화폐의 폐지를 통해서, “노동의 조직(Organisation der Arbeit)” 을 통해 그리고  그 비슷한 해결책 등을 통해 착취( die Ausbeutung)를 척결할 수 있을 지에 관해서.

    마르크스는 이제 “자본”의 첫번째 권에서 자본주의의 치부(Bereicherung)의 진정한 뿌리를 밝혀내고 있다. 그는 자본가들의 정당화근거들을 다루지도 않고, 그들의 부당성의 고발을 다루지도 않는다. 처음으로 그는 어떻게 이윤이 생겨나고 어떻게 그것이 가본가들의 주머니안으로 들어가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을 그는 두개의 결정적인 경제적 사실들을 통해 설명하는데, 첫째, 노동자 대중은 노동력(Arbeitskraft)을 상품으로서 팔아야 하는 프롤레타리아트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통해서, 그리고 둘째, 노동력이라는 이 상품은 오늘날 그 자체의 유지를 위해 요구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생산물(Produkt)을 특정시간에 생산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높은 생산성(Produktivität)을 갖는 다는 점을 통해서.  이 두 가지의 순수하게 경제적이면서 또한  객관적 역사 발전에 의해 주어진 사실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이 생산한 열매가 저절로 자본가의 품안으로 굴러떨어지며 임금체제가 지속되는 한 기계적으로 항상 더 거대한 자본자산(Kapitalvermögen)으로 축적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마르크스는 그러니까  자본주의의 치부(Bereicherung)를 자본가들의 상상된 희생이나 자선행위들에 대한 그 어떤 보상으로서 설명하지 않고, 말그대로 사기치기나 도둑질로서도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서 형법상의 의미에서 완전히 적법하며 모든 다른 상품구입(Warenkauf)과 상품판매(Warenverkauf)에 적용되는 것과  동일한 법칙들에 따라 이뤄지는 교환거래(Austauschgeschäft) 로 설명한다. 자본가에게 황금의 열매들을 가져다주는 이 흠잡을 데없는 거래를 철저히 규명하기 위해서, 마르크스는  18세기말과 19세기초의 위대한 영국 고전학자들인 스미스와 리카르도에 의해 설정된 가치법칙(Wertegesetz) , 즉 상품교환의 내적 법칙들의 설명을 그 마지막까지 발전시켜 노동력이라는 상품(Ware)에 적용해야 했다. 가치법칙, 그로부터  임금(Lohn)과 잉여가치(Mehrwert)가 도출되는 것, 즉 그 어떤 폭력적인 사기치기도 없이 임금노동의 생산물이 어떻게 저절로 노동자들을 위해서는 옹색한 생계유지로 그리고 자본가의 무노동의 부(Reichtum)로 나눠지는가를 설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본” 제 1권의 주요 내용이다.  그리고 그 안에 이 권의 거대한 역사적 의미가 놓여있다. 그는 오직, 노동력의 판매, 즉 임금체제가 폐지됨으로써만 착취가 철폐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우리는 “자본”의 첫번째 권에서 내내 노동의 작업장(Werkstatt)에 있다. 하나의 공장에, 탄광에 또는 근대적인 농장에 있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어느 자본주의의 기업에나 유효하다.  우리들 혼자 관련된 것은 전체 생산양식들(die Produktionsweise)의 전형으로서 개별자본(Einzelkapital)이다. 우리가 이 권을 떠날 즈음에는 이윤이 매일 생성되는 것이 우리에게 매우 분명하고, 착취의 메커니즘은 그 밑바닥까지 조명되어 있다. 우리 앞에는 온갖 종류의 상품들이, 아직 노동자들의 땀에 젖은 채 작업장에서 곧바로 도착해서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그 상품들 안에서 우리는 프롤레타라이트의 미지불된 노동에서 결과되어 상품 전체와 마찬가지로 적법하게 자본가의 소유가 되어버리는 가치의 그  부분을 뚜렷하게 식별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착취의 뿌리를 손으로 움켜쥔다.

   그러나 이것으로 자본가의 수확물이 곡간 안에 옮겨지려면 한참 멀었다. 착취의 열매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아직 기업가가 향유할 수 없는 형식 안에 존재한다. 그가 그 열매를 쌓여있는 상품의 형태로 소유하는 한 자본가는 착취에 대해 기뻐할 수 없다.  그는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의 노예소유주가 아니고, 자신의 사치와 거대한 궁중의 유지를 위해 노동 인민을 혹사했던 중세의 봉건영주도 아니다. 자본가는 “사회적 지위에 걸맞는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것에 더불어 자신이 소유한 자본의 계속적인  확대에 사용하기 위해서는 짤랑거리는 화폐(Geld)의 형태로된 부(Reichtum)를 필요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임금노동이 생산한 상품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잉여가치의 판매가 요구된다. 상품은 공장의 창고와 농장의 광에서 나와야 하고 자본가는 그 상품을 사무실(Kontor)에서 거래소(Börse)로 추적한다. 우리는 “자본”의 제 2권에서 그를 그곳까지 따라간다.

   자본가의 삶의 제 2장이 펼쳐지는 상품교환(Warenaustausch)의 영역에서 그는 몇몇 곤경들을 겪게 된다. 자신의 공장에서, 자신의 농장에서는 그 자본가 스스로가 주인이었다. 그곳에서는 엄격한 조직, 규율 그리고 계획성이 지배적이었다.  그 반대로 상품시장(Warenmarkt)에서는 완전한 무질서(Anarchie), 소위 자유로운 경쟁(Konkurrenz)이 지배한다. 여기에서는 아무도 다른 이를 상관하지 않고 그 아무도 전체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본가는 바로 이 무질서의 한 가운데에서 다른 이들에 대한 그리고 어느 방향으로든 사회에 대한 자신의 의존성을 느낀다.

   그는 모든 경쟁자들과 보조를 맞춰야 한다. 자신의 상품을 최종적으로 판매할 때까지 최소한으로 필요한 것보다 더 시간을 지체한다면, 중간에 작업이 중단되지 않고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원자재등을 제시간에 구매하기 위해서 충분한 자금(Geld)을 조달하지 못한다면, 상품을 팔아 획득한 자신의 금전을 그냥 한가하게 놀리는게 아니라 어딘가에 이윤이 남도록 투자하지 않는다면, 그는 어떤 식으로든 뒤처지고 말게 된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떠밀린 자는 뒤쫒는 개들에게 물리는 신세가 된다. 개별 기업가가 자신의 사업이 공장과 상품시장 사이의 계속적인 우왕좌왕 속에서도 작업장에서처럼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가 아무리 양심적으로 자신의 임금노동자들을 활용할 지언정, 보통의 이윤을 획득할 수 없다. 자신의 “정당하게 얻은”이윤의 일부가 그 어딘가에서 정체되어버리고 제 주머니안으로는 떨어지지 않게 된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자본가는 그가 상품들, 즉 실용품(Gebrauchsgegenstände)를 제조할 때만 부를 축적할 수 있다.  그는데 그는 그 사회가 필요로하는 그 상품의 종류를 그것도 그 사회가 필요로하는 양만큼만 제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품들은 팔리지 않은 채 남게되고 그 안에 들어있는 잉여가치는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개별 자본가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 사회가 실용재화(Gebrauchgüter)들의 무엇을 얼마만큼 필요로하는지를 아무도 그에게 알려주지 않는데, 왜냐하면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계획적이고 무질서한 사회에서 살고 있으니 말이다!  개별 기업가 각자는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 그래도 이 카오스로부터, 이 뒤죽박죽으로부터 전체적인 어떤 것(etwas Ganzes)이 생겨나야 한다, 자본가들의 개별사업과 그 부의 축적뿐만 아니라 사회의 필요충족과 존재지속 그 모두를 가능케 할 그것이 생겨나야만 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규제되지 않은 시장의 뒤죽박죽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것들이 가능해져야 한다. 첫째, 개별자본의 지속적인 순환운동, 즉 생산하고 판매하고 구매하고 다시 생산하는, 그 사이에 자본(Kapital)이 금전형태(Geldgestalt)에서 안정적으로 상품형태(Warengestalt)로 바뀌었다가 다시 되바뀌는 그 순환운동이 가능해져야 한다. 이 단계들은 서로 맞아떨어져야 하고, 구매를 위해 어떤 시장 경기(Marktkonjunktur)도 이용할 수 있고 공장의 운영비용이 충당할 수 있도록 금전(Geld)이 예비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상품판매에 따라 점차 다시 흐르게 된 금전은 곧바로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 벌써 여기서, 겉으로 보기엔 서로 완전히 독립적인 개별자본가들은 크레딧(Kredit) 체계를 통해서, 은행들의 체계를 통해서 서로 계속해서 필요한 금전을 제공하고 예비금을 떠맡으며 그렇게 개개인들 뿐만 아니라 사회를 위해서도 생산과 상품판매의 중단없는 진행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하나의 거대한 결사체(Bruderschaft)로 결집된다.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이 “상품교류의 편의(Erleichterung des Warenverkehrs)”를 위한 똑똑한 시설이라고만 설명할 수 있는 그 크레딧을 마르크스는  자본의 단순한 생존방식의 하나라고,  생산에서 그리고 상품시장에서의 자본의 두 생활시기들 사이의 연결일 뿐만 아니라 개별자본가들의 겉보기에 독자적인 움직임들 사이에서의 연결이라고 자신의 저작 제 2 권에서 대략 묘사한다.

   둘째, 개별자본들의 뒤죽박죽 속에서 그 사회 전체의 생산과 소비의 순환운동이 매끄럽게 유지되어야 하는데, 그것도 자본주의적 생산을 위한 조건들, 즉 생산수단(Produktionsmittel)의 제조, 노동자계급의 생계, 자본가계급의 점진적 부의 축적등, 말하자면 사회의 총자본(Gesamtkapital)의 축적과 활동이 확보되어 있도록 그렇게 그 순환운동이 유지되어야만 한다. 어떻게 개별자본들의 좌충우돌하는 움직임들로부터 그 전체(das Ganze)가  맺어지는 지, 어떻게 그 전체의 이러한 움직임이, 금방은 호황(Hochkonjunktur)의 과잉으로, 금방은 다시 위기(Krise)로 인한 붕괴로 치닫는 그러한 계속적인 탈선들을 통과해서 그 다음 순간에 다시 올바른 관계로 조정되는지, 그런 다음 결국 다시 그 관계로부터 다시 일탈하게 되는지, 어떻게 이 모든 것으로부터,  오늘날의 사회에게 있어서 오직 수단에 불가한 것, 즉 그 자체의 생계와 경제발전이 출현하고 그리고 그 사회의 목적, 즉  계속적인 자본축적(Kapitalansammlung)이 점점 더 엄청난 규모로 결정적으로 출현하는지, 그것을 마르크스는 그의 저작 제 2권에서 비록 결정적으로 해결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담 스미스 이래 백여년만에 처음으로 법칙성의 단단한  기초 위에 세웠다.

   그러나 이 모든 것으로 자본가들의 험난한 과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윤이 점증하는 규모로 금(Gold)으로 변화되면서 또 그렇게 된 후인 지금, 노획물(Beute)이 어떻게 분배될 것인가라는 커다른 문제가 떠오른다. 기업가(Unternehmer) 이외에도 상인(Kaufmann), 대출자본가(Leihkapitalist), 지주(Grundbesitzer)등 여러 다른 그룹들이 여기서 그들의 요구를 들고 나선다.  이들 모두는 임금노동자의 착취 및 그에 의해 생산된 상품의 판매를  가능하게 하는데 각자 자기 몫만큼 기여했고  이제 이윤에서 제 몫을 요구한다. 이러한 분배는 그런데 언뜻 보기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게 뒤엉킨 과제이다. 왜냐하면 기업가들 중에서도 그 기업의 유형에 따라서, 어떻게 그 이윤이 노동의 작업장으로부터 소위 신선하게 만들어지느냐에 따라, 획득된 이윤들에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한 생산부문(Produktionszweig) 안에서 상품의 제조와 그 판매는 매우 신속히 이뤄지고 자본은 그 증가분과 함께 짧은 시간에 회수된다. 그렇게 항상 다시 사업과 이윤이 매끄럽게 만들어질 수 있다. 다른 한 생산부문에서 자본은 생산 안에 수년 동안 묶여 있고 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이윤을 가져온다.  특정 부문들에서 기업가는 자신의 자본의 대부분을 죽은 생산수단들, 즉 건축물, 비용이 많이 드는 기계등등에 쏟아 넣어야 하는데, 이런 것들은 아무리 이윤만들기(Profitmacherei)에 필요한 지언정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고 어떤 이윤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다른 부문들에서는 기업가는 아주 극소한 지출만으로 자신의 자본을 주로 노동자들을 획득하는데 사용할 수 있고, 그 각각의 노동자는 황금알을 낳아주는 부지런한 암탉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게 이윤만들기 자체 안에서 개별자본들 사이에 커다란 차이들이 생겨나고, 부르주아 사회의 눈에는 이 차이들이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그 특이한 “분배”보다 훨씬 더 떠들썩한  “불공평(Ungerechtigkeit)”을 표현한다. 어떻게 이제 여기서 보정(Ausgleich), 즉 노획물의 “공평한”분배를 이뤄내서 각 자본가가 “제 몫”을 가질 수 있게 할 것인가? 게다가 이 모든 과제들은 그 어떤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규제도 없이 해결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 사회에서는 분배는 생산만큼이나 무질서적이다. 실상 어떤 사회적인 대책이라는 의미에서 그 어떤 “분배”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교환만이 발생한다, 상품교류만이, 구매와 판매만이 일어난다. 어떻게 그러면 오직 맹목적인 상품교환의 길 위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력으로 창조된 부(Reichtum)에서 자본지배의 관점으로 볼 때  “공평한”분량만큼을 착취자들의 각 계층과 그 계층에 속한 각 개인들이 획득하게 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해 마르크스는 그의 저작 제 3권에서 대답한다. 그가 제 1권에서 자본의 생산과 그 안에 놓인 이윤만들기의 비밀을 파헤쳤듯이, 제 2권에서 작업장과 상품시장사이에서,  사회의 생산과 소비 사이에서 자본의 움직임을 묘사했듯이, 그는 제 3권에서 이윤분배(Profitverteilung)를 추적해 나간다. 그것도 동일한 세가지 기본조건들을 유지하면서. 그 첫째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무작위적이 아니라는 것, 즉 규칙적으로 작용하는 그리고 관련자들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특정한 법칙들에 따라서 일어난다는 것.  둘째는, 그 경제관계(die wirtschaftlichen Verhältnisse)들은 강탈과 도둑질이라는 폭력적인 대책들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어떤 사회적 이성( gesellschaftliche Vernunft)도 계획적인 작용으로  그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 오직 교환의 메커니즘, 즉 가치법칙과 그로부터  유도되는 잉여가치(Mehrwert)로부터 마르크스는 조금씩 자본주의 경제의 모든 현상들과 관계들을 투명하게 철처하고 명료하게 전개해 나간다.

   그 대작 전체를 개관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제 1권은 그 안에 전개된 가치법칙, 임금 및 잉여가치와 더불어 현 사회의 토대(Fundament)을 폭로하고, 제 2권과 제 3권은 그것에 기초하여 세워진  건물의 층들을 보여준다. 또는 아주 다른 그림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데, 말하자면, 제 1권은 우리에게, 사회 유기체에서 생명의 즙이 만들어지는 그 심장을 보여준다면, 제 2권과 3권은 혈액순환과 최말단의 피부세포에 이르기까지의 그 전체의 양분공급을 보여준다.

   그 내용에 알맞게 우리는 마지막 두 권들에서는 제 1권에서와는 다른 평면들 위에서 움직인다.  전자인 제 1권에서 그것은 우리가 자본주의의 치부(Bereicherung)의 원천을 찾아 내게된 작업장, 즉 노동의 깊은 사회 갱도(Schaft)였다. 제 2권과 3권에서 우리는 표면에서, 사회의 공식적인 무대 위에서 움직인다.  상점(Warenmagazine), 은행, 거래소, 금융업, “궁핍한 지주(Agrariar)”그리고 그들의 근심들이 여기서 전면을 가득 채운다. 노동자는 여기서 참여하지 않는다. 그는 실제로, 실컷 두들겨 맞을 대로 맞은 후 자신의 등 뒤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일들에 관심이 없다. 거래하는 군중의 시끄러운 소란 속에서 우리는 실제로도 단지 노동자들이 새벽녘에 무리를 지어 작업장들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때 그리고 저물녘에 긴 행렬로 작업장으로부터 내뱉어질 때에나 그들을 만난다.  

   그 뒤 이윤만들기과 노획물의 분배를 놓고 자본가들이 벌이는 싸움박질에서 자본가들의 여러 개인적인 근심들이 노동자들에게 있어 어떤 이해관계를 갖겠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본”의 제 2권과 제 3권은  제 1권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경제메커니즘의 완전한 인식에 속한다.  물론  이 두 권은 현대 노동자운동에 있어서 첫째 권만큼 그렇게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역사적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들은 실천적 투쟁을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신적 무장에 가름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의미를 띠는 풍부한 통찰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점에 대해 두가지 예만 들자면 다음과 같다.

   제 2권에서 마르크스는 어떻게 개별자본들의 혼란스런 지배로부터 사회의 정규적인 부양(Ernährung)이 결과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자연스럽게 위기(Krise)의 문제도 언급한다. 여기서 위기에 대한 그 어떤 체계적이고 교훈적인 논문을 기대해서는 안되며, 그냥 몇몇 부수적인 소견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 소견들의 활용은 사고하는 계몽된 노동자들에게 유용할 것이다. 사회민주당의 그리고 특히 노동조합의 선동에 있어서 소위 고정재고(eisener Bestand)에 속하는 것이 바로, 위기는 일차적으로, 자본가들이 그들의 노동자 대중이 그들의 최상의 구매자들임을 그리고 구매력있는 고객층을 유지하고 위기의 위험을 방지하려면 노동자들에게 더 높은 임금을 지불할 필요가 있음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 자본가들의 그 근시안 때문에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 생각은 상당히 대중적이지만 완전히 뒤바뀐 것으로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것을 반증한다:

“위가가 지불능력이 있는 소비의 부재로 인해 또는 지불능력이 있는 소비자들의 부재로 인해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은 순전히 동의이어의 반복(Tautologie)이다. 빈민구호(Sub forma paupris)나  “도둑(Spitzbube)”의 방식을 제외하면, 지불하는 방식 이외의 다른 소비유형들(Konsumarten)을 자본주의 체제는 알지 못한다. 상품들이 팔릴 수 없다는 것은, 지불력이 있는 구매자를 찾지 못했다는 것외에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소비자들은… 그러나 이러한 동의이어의 반복에 더 심오한 근거를 부여하고자, 노동자계급은 그 자신의 생산물의 너무 작은 부분만을 받는다고 그들이 더 큰 부분을 수령해서 노동임금이 증가하면 당장 그 나쁜 상황에 도움이 될거라고 말한다면, 이 주장에 대항해서, 위기들(Krisen)은 항상, 노동임금이 전반적으로 상승하고 노동자계급이 사실상 연간 생산물 중 소비를 위해 결정된 부분에서 더 큰 할당을 받은 시기를 통해 준비됨을 언급할 수 있다 . 그 시기는 -  ‘단순한(!)’ 상식의 이러한 기사들 (Ritter)의 견지에 따르자면 - 반대로 위기를 제거해야할 터이다. 자본주의 생산은  좋거나 나쁜 의지와는 독립적인 조건들을 포함하는 것 같은데, 이러한 조건들은 노동자계급의 그 상대적인 번영을 단지 순간적으로만  그것도 항상 위기의 전조로서만 허용한다.” (2)

실제로  제 2권과 제 3권의 논증들은,  단순히 자본 운동의 불가피한 결과로서 나타나는 위기의 본질에 대한 기본적인 통찰로 이끈다. 이러한 자본의 운동은 축적을 향한, 성장을 향한 격렬하고 채워지지 않는 충동 속에서,비록 소비(Konsumtion)가  어느 한 단일 사회계층의 상승된 구매수단을 통해서 또는 하나의 새로운 판매시장 전체의 정복을 통해 그 얼마나 크게 확대될 지언정,  소비의 그 어느 장벽도 곧 뛰어넘는다. 그래서 또한 노동조합의 그 대중적인 선동의 배후에 잠복하고 있는 그리고 기업가의 근시안 때문에 오해된다고 하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이해의 조화(Interessenharmonie)라는 그 생각은 버려져야 하며 자본주의의 경제적 무질서(Anarchie)에 완화적인 짜집기(Flickarbeit)의 모든 희망들은 포기되어야 한다. 임금프롤레타리아의 물질적인 개선을 위한 투쟁은 그 정신적 무기고에 수천개의 너무 좋은 무기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근거없고 실천적으로 애매모호한 논거를 필요로하지 않는다.

   또 다른 하나의 예. 제 3권에서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이 그 출현이래 속수무책으로 놀라워하기만 해오던 현상, 즉 모든 생산부문(Produktionszweigen)들에서 자본들은, 비록 다른 조건들 아래 투자되어 있지만 소위 “보통의(landesüblichen)”이윤을  가져오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과학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첫눈에 이 현상은 마르크스 본인이 제공한  한 설명, 즉  자본주의의 모든 부를 오직 임금프롤레타리아트의 미지불 노동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설명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해서 실상, 자기 자본의 비교적 큰 분량을 죽은 생산수단에 투자해야 하는 자본가가 이러한 종류로는 적은 지출을 하고 그만큼 더 많은 살아있는 노동을 확보할 수 있는 동료 자본가와 동일한 이윤을 획득할 수 있는가?  

   이제, 마르크스는 놀랍도록 단순하게 이 수수께끼를 푼다. 어떻게  어떤 상품종류들(Warensorten)은 그 가치 이상으로  그리고 다른 상품종류들은 그 가치 이하로 판매됨으로써 이윤의 차이들이 상쇄되고  단번에 생산의 모든 부문들에게“평균이윤(Durchschnittsprofit)”이 형성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자본가들은 전혀 모른 채, 서로간에 그 어떤 의식적인 의사소통도 없이, 어느 정도 각자 자기들의 노동자들이 생산한 잉여가치를 함께 끌어 모으고 착취의 이 총수확(Gesamternte)을 자기들 사이에서 우애롭게 각자 투여한 자본의 크기에 따라 분배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상품교환을 진행한다. 말하자면, 개별자본가는 그가 개인적으로 획득한 이윤이 아니라 자기 동료들 모두가 획득한 이윤들 중에서 그의 몫으로 돌아온 그 분량만을 향유할 수 있다. “여기서 다양한 자본가들은, 이윤을 참작할 때, 이윤의 지분이 골고루 퍼센트로 분배되고 각자가 그 기업에 쏟아부은 자본의 크기에 따라서, 그 기업 전체(Gesamtunternehmen)에 각자의 비례적인 관여(Beteiligung) 정도에 따라서만 서로 차이를 보이는, 주식회사(Aktiongesellschaft)의 주주(Aktionär)들처럼 행동한다.” (3) 

   겉보기에 완전히 건조한 이 “평균이윤율(durchschnittliche Profitrate)”법칙이 자본가들의 계급연대의 견고한 물질적 토대에 대해 얼마나 심오한 통찰을 주는지!  자본가들은 일상에서는 서로 적대적인 형제들이지만 노동자계급에 대항해서는,  노동자계급의 총착취(Gesamtasubeutung)에 최고로 그리고 극히 직접적인 관심을 갖는 결사체를 형성한다.  자본가들은 이 객관적인 경제 법칙들을 당연히 전혀 알지 못하지만, 지배계급의 틀림없는 본능 안에서 자신의 계급이해(Klasseninteressen) 그리고 그것의 프롤레타리아트와의 적대에 대한 감각을 표출하는데,  이는 역사의 모든 격랑들을 통하여 안타깝게도 과학적인 - 바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을 통해서 -  계몽되고 확립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보다 훨씬 더 확실하게 스스로를 증명했다.

   이 두 가지 짧고 무작정 골라진 증거들이, “자본”의 마지막 두 권들 안에 얼마나 많은 묻힌 보물들이 계몽된 노동자들의 정신적 고무와 심화를 위해 여전히 존재하며 대중에게 제시되기를 고대하고 있는가를 약간이나마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  미완성인 채로 그들은 그 어떤 완성된 진리보다 무한히 소중한 것을, 즉 생각(Denken)과 비판(Kritik)과 자기 비판(Selbstkritik)에 대한 격려를 제공하는데, 자기비판은 마르크스가 남긴 교훈의 가장 특유의 요소이다.

(1) 마르크스의 전기를 쓰고 있던 프란츠 메링의 요청에 따라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글을 썼다. (메링은 이 글을 그의 마르크스 전기, 칼 마르크스, 그의 삶의 이야기 (Franz Mehring: Karl Marx, Geschichte seines Lebens) 제 12장 제 3절에 포함시켰다 -역자)
English translation:
At the request of Franz Mering, who was writing Marx's electricity, Rosa Luxemburg wrote the Eagle. (Merring included this article in Chapter 12, Section 3 of his Marxian biography, Karl Marx, and his life story (Franz Mehring: Karl Marx, Geschichte seines Lebens) Included in Chapter 12, Section 3 - Translator)

(2) 칼 마르크스: 자본, 제 2권.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집 제 24권, 베를린  1972, 409/410쪽
English translation:
Karl Marx: The Capital, Volume 2. Karl Marx / Friedrich Engels, vol. 24, Berlin 1972, 409/410 

(3) 칼 마르크스: 자본, 제 3권,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집, 제 23권, 베를린 1972. 168쪽.
English translation:
Karl Marx: The Capital, Volume 3, Karl Marx / Friedrich Engels Collection, Vol. 23, Berlin, 1972, p. 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