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조직과 계급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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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서론

우리가 결정적으로 답해야 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

 

자본주의를 어떻게 전복시킬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프롤레타리아가 전 과정에 걸쳐

모든 것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면서

자본주의의 타도라는 목적을 위해서 행동할 수 있는가?”

 

(1921,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3차 당 대회에서 발표한

KAPD(독일 공산주의 노동자당)의 개입)

 

노동자 운동의 조직 문제에 대해 지금까지 역사에서 텍스트, 토론, 그리고 다양한 이견들이 있었다. 보기를 들어, 우리는 <국제 노동자 협회(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 안에 있었던 논쟁, 레닌,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사이의 논쟁 그리고 이 주제에 대한 이탈리아와 독일의 좌익공산주의 운동의 문서를 상기할 수 있다. 혁명가들이 그들의 조직 방법과 노동자계급 안에서 그들의 임무, 그리고 자신들의 개입의 본질을 명확하게 시도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노동자계급은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자본주의와의 최종적 대결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자계급 운동의 여명이 밝을 무렵부터 그들의 노동조합 조직을 만드는 것과 더불어, 혁명의식이라는 무기를 벼리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를 위해서 대중 조직은 그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다. 노동자계급의 해방에는 혁명가들의 조직, 즉 정치적인 당(the political party)이 필요하다.

노동자계급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본주의를 파괴하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단지 눈앞의 이해관계를 방어하기 위해서만 조직할 수는 없다. 실천 속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어야한다 :

- 계급의 일상적인 투쟁이 어떻게 정치적 공세로 발전할 수 있는가?

- 노동자계급 안에서 경제적 요구를 뛰어넘어 사회를 전복시킬 필요성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발전할 수 있는가?

-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배에 대항하여 노동자계급은 어떻게 투쟁할 수 있는가?

 

오늘날과 같이 영속적인 개량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사회 혁명의 시대(era of social revolutions)”에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이 더욱 더 중요하다. 자본주의의 돌이킬 수 없는 쇠퇴를 증명했던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에 이미, 이 문제에 대한 해답 하나가 노동자계급 운동 안에서 발전해왔다.

노동자평의회(workers’ councils)야 말로 노동자계급이 권력 쟁취를 위해 만든 조직 형태였다. 혁명적 소수들에게는 혁명 과정을 가속하는 임무가 부여되었다. 20년대의 혁명 물결이 잦아든 뒤에도, 가장 건강한 혁명 세력은 반혁명의 맹공격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이 분파들은 이전 투쟁의 정치적 성과들을 보존할 수 있었다. 50년에 걸친 반혁명 후, 새로운 조직과 혁명가 그룹들, 그리고 토론 써클이 60년대의 계급투쟁에 조응하여 나타났다. <국제공산주의흐름(ICC)>을 포함하여 이들 중 일부는, 처음부터 뚜렷하게 정의된 강령(programme)을 기반으로 국제적인 수준에서 조직되었다. 그러나 ICC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길을 밝히려 하는 이러한 노력의 유일한 표현은 아니다. 옛 좌익 공산주의 운동에서 비롯된 그룹, 토론 써클, 다소 ICC와 비슷한 입장을 옹호하는 조직들, 이 모두가 노동자계급의 혁명의식의 부활을 표현했다. 이러한 그룹들의 대부분은 그들의 차이와 동의의 영역을 명확히 하는 토론에 최근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조직들이 참여하는 <국제대회>는 프롤레타리아 운동 안에서 국제당 설립 작업의 필요성이 이해되었음을 표현한다.(1)

이런 토론들의 많은 부분들은 당의 역할과 혁명가들의 임무와 관련된 것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논쟁들은 우리가 해석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 일반적 틀을 명확히 하는 데 그쳤다. 우리는 ICC가 혁명가의 역할에 관한 자체의 견해에 정치적인 틀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좀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팸플릿이 이 분석을 보충해 줄 것이다. 그러나 첫 단계로서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 공산주의와 공산주의 혁명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

- 노동자계급의 의식이 그 이전의 사상들과 어떻게 구분되는지 아는 것

- 혁명가들의 역할을 계급의식의 본질적 기능의 하나로서 이해하는 것

 

우리 입장의 일반적인 틀의 윤곽을 그려내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문제에 접근해왔다. , 혁명가들의 개입 문제를 다루기 전에 우리는, 왜 노동자계급의 행동 수단들, 활동 형식들, 그리고 조직 형식들이 필연적으로 혁명적 과정과 노동자계급의 의식 발전의 객관적 필요조건들에 조응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이때 노동자계급의 의식 발전은 완전무결한 당의 특별한 특징들보다는 오히려 혁명가들의 개입을 더욱 필수적인 것으로 만든다!

공산주의 혁명이 과거의 혁명들과는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왜 노동자계급의 의식은 단순히 이데올로기가 아닌지를 이해함으로써만, 혁명 조직의 필요성과 혁명가들의 역할은 이해될 수 있다.

지금, 당의 역할에 대한 이해는 극히 이론적 차원에서만 머물러 있다. 그 문제 전체는 과거에 대한 오해들로 인해 불분명한데, 지난 50년간 거의 전적으로 부르주아지 이데올로기가 지배함으로써 이러한 오해들은 더욱 더 강화되어 왔다. 우리는 과거의 덫을 피하면서 공산주의 전통과의 연결고리를 새롭게 해야 한다. 더욱이, 노동자계급의 부활된 투쟁은 여전히 막 출발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 투쟁이 다시 등장함으로써, 우리들은 개입할 때에 실천적으로 이미 그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매일 가능한 한 빨리 해결되어야 할 새롭고 구체적인 문제들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입장은, 노동자계급의 경험에 의해 풍부해지고 정제된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로부터 정치적인 교훈을 도출할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의 개입이 점점 더 계급투쟁 그 자체를 지향하고 있는 만큼, 계급투쟁의 요구에 재빠르게 부응하려한다면, 우리의 분석은 더욱 구체적이 되어야만 한다.

 

Note:

 

(1) 이것은 19798월 작성되었다. 그 후에 일어난 <국제 대회(International Conferences)>의 해체에 대해서는 『인터내셔널 리뷰(International Review)no.22에 실려 있다.

제1장 공산주의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첫 번째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압력이 항상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미래 사회를 객관적으로 묘사하기가 매우 어렵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목적은 자본주의가 영원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압력은 공산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정의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단절시키고 훼손한다.

많은 노동자들에게 공산주의는 그래서 러시아, 중국, 쿠바 등 소위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볼 수 있었던 국가 자본주의와 군사화된 노동의 ‘천국’이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공산주의의 본질 자체로 인해서 공산주의를 자세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실, “공산주의란 우리에게 있어서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가 아니며, 혹은 현실이 따라가야 할 하나의 이상도 아니다. 우리는 공산주의를 현재의 상태를 폐기해 나가는 현실의 운동이라 부른다.”(맑스,『독일 이데올로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것은 공산주의 사회가 소수의 ‘계몽된’ 사람들의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추상적인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완성’의 추상적인 이상일 수 없다.

헤겔(19세기 초, 독일의 철학자로 맑스는 그에게서 변증법을 도출했다)의 개념과는 대조적으로, 역사는 관념(인간의 관념, 공산주의의 관념)의 진보적 실현이 아니다. 공산주의는 인류의 목표로서 기능하는 정신적인 창조물이나 환상이 아니다. 공산주의 사회는 실재적이고 인간적이며,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신기원이다. 이것은 구 사회에 내재된 모순으로부터 그리고 그 사회 발전의 필수적인(necessary) 귀결의 하나로서 출현한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필연적인(inevitable) 것은 아니다. 비록 공산주의 사회가 자본주의에 내재된 경제적, 사회적 모순의 결과이자 실재적이고 객관적인 조건들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실천적이고 집단적이며, 의식적인 창조물이다. 역사상 최초로 하나의 사회 계급이 그들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조직화되고 의식적인 방법으로만 가능하다. 이것이 왜 공산주의가 지적인 ‘계획’도 아니며,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필연성(inevitability)도 아닌 이유다. 공산주의는 인류 공동체가 이전 사회관계들의 폭력적 파괴에 뒤이어 구세계를 의식적이고 점진적으로 변혁시킨 그 결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공산주의를 향한 이 현실의 운동을 지배하는 주체적이고 객관적인 조건들은, 오늘날 존재하는 조건들의 산물이다. 일단 공산주의가 역사적인 측면에서 하나의 가능성이 되고나면, 이러한 가능성의 실현은 주체적 발전, 즉 현 시대의 의식의 발전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혁명 그 자체도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의식적인 정치 행동의 형식을 취해야 하고, 그 성공 여부가 프롤레타리아트가 획득한 의식과 조직화의 수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기초 위에서 인류 공동체는 단지 객관적인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이 될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공산주의 사회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공산주의 혁명의 주요 국면과 이 혁명이 지향해야 하는 최종 목표를 정의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공산주의 혁명은 오직 스스로를 의식하고 있는 운동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의해 확립되는 새로운 사회관계의 특징들 자체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과 조직양식이 발전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우리는 뒤 이은 장에서 이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로 되돌아갈 것이다.

공산주의의 본질

공산주의는 유토피아라든가, 추상적인 이상향이 아니기 때문에, 그 뿌리를 그 이전 사회에 두고 있다. 공산주의의 가능성과 공산주의를 이루기 위한 객관적인 조건들은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하려는 혁명적 계급의 정치적 역량, 이 두 가지로부터 나온다. 미래 사회의 자양이 되는 것은, 생산력의 발전 정도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구체화된 사회관계의 본질, 이 두 가지 모두이다. 공산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객관적 필요성(necessity)이 되는 시기는 오직, 생산력의 발전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렀을 때, 생산력의 계속된 발전과 자본주의의 생산 관계 사이의 모순이 발전함에 따라 이전 사회가 더 이상의 발전할 가능성이 없을 때이다.

 

사회가 모든 생산 수단의 통제를 장악하는 것은 “이것이 일어날 수 있는 물질적 조건들이 존재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해지고, 역사적 필요성으로 될 수 있다. 다른 모든 사회적 진보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계급들이 존재함이 정의나 평등 등등에 모순된다는 통찰이 얻어진다고 해서, 이러한 계급들을 폐지하겠다는 단순한 의지가 있다고 해서 실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새로운 경제적 조건들에 의해서만 실행 가능한 것으로 된다.”

(엥겔스, 『반뒤링론』1894)

 

이러한 새로운 객관적 조건들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구별을 철폐하고 자본과 임금 체계, 상품 생산, 그리고 모든 민족적이며 계급적인 분리들을 철폐할 수 있는 그러한 사회관계들만이, 생산력의 진보적 발전을 허용하고 인류의 현재 필요에 대응하게 될 사회관계들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다:

공산주의는 계급,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어떤 종류의 개인적, 집단적 소유도 없는 사회여야만 한다. 자본주의에 의해 이뤄진 생산의 사회화의 유일한 최절정은 사회 전체에 의한, 생산 수단의 사회적인 몰수이다. 오직 계급 특권과 사적인 몰수의 철폐만이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사회관계의 자본주의적 성격 사이의 현존하는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 모든 생산력과 생산 수단의 사회적 몰수는 오직, 경제적으로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으면서 하나의 생산적인 집단으로서만 기능하는 피착취 계급,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수행할 수 있다.

공산주의 사회는 그러므로 결핍의 철폐와 인류의 필요를 위한 생산에 근거한다. 공산주의는 풍요의 사회이며, 이 사회는 인류의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켜줄 것이다. 생산력, 인문학, 기술과 지식의 수준을 통해서 인간들은 보이지 않는 경제적 힘들의 지배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들은 자신들의 삶과 재생산을 결정짓는 조건들에 대한 통제력을 의식적으로 획득함으로써, “필요가 지배하는 시대로부터 자유가 만연한 시대로” 나아갈 것이다.

인간의 필요를 위한 생산은, 인류의 해방은 오직 세계적 규모로 그리고 경제적 사회적 삶의 모든 측면에서 혁명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는 가치 법칙(the law of value)철폐한다. 모든 인간들에 의해 모든 수준에서 사회화되고 계획되는 공산주의적 생산은 오로지 사용가치의 생산에만 기반하며, 그 사용가치의 사회화된 직접적 분배는 교환, 시장, 화폐(…) 등을 배제한다.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사회, 경제적 경쟁과 경제적 무질서의 사회, 그러므로 개개인과 계급들이 서로 충돌하고 경쟁하는 사회로부터, 인류는 공산주의 아래에서 인류 공동체가 지배하는 사회로 진입한다.

이 공동체에서는, 하나의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는 체제를 유지하는 정치권력의 모든 형식들(정부, 국가, 경찰 등)은 착취와 계급 분리가 사라짐과 동시에 사라질 것이다. 통치권들의 존재는, 인간성과 인간의 창조성을 억압하는 모든 방식들의 존재는 사물의 단순한 관리,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an association of free producers)”에게 자리를 내줄 것이다.

공산주의의 이러한 특징들은 최소한의 윤곽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넘어서 (위에서 이야기했던 것들을 가슴속에 품고), 더 이상 서술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광범위한 일반화에 국한된다. 더구나, 이러한 간단한 묘사 속에는 인간관계와 관련된 새로운 삶의 방식들의 결과들이 다뤄지지 않았다. 또한 사회 내부의 분리와 차별, 소외, 인간 사이의 세력 관계 등을 철폐가 담고 있는 의미도 다뤄지지 않는다.

그러나 심지어 이렇게 대략적인 개괄을 통해서도 자본주의 사회와 이전에 있었던 모든 사회들과 미래 세계 사이의 엄청난 차이를 볼 수 있다.

착취가 없는 사회! 우리의 필요와 욕구에 따라 살 수 있는 곳!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분리가 없는 곳! 자유의 의미가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있는 자유 이상을 의미하는 곳! 놀랄만하지 않은가!

비록 이렇게 인류가 만들어 가야할 거대한 도약의 자세한 부분까지 생각할 수는 없을 지라도, 인류의 역사상 아직까지 이와 같은 종류의 질적 도약을 위한 필요성은 없었다는 점, 이것 하나는 명확하다.

이 발언은 양날의 칼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런 종류의 도약은 오직 한 사회 계급이 자신의 역사적 과업을 완벽하게 의식하고 있을 때야 비로소 성취될 수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의식 수준을 성취할 수 있는 계급인 노동자계급은 가장 극단적인 박탈, 가장 사나운 착취, 영속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압력에 종속되어 있는 바로 그 계급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가 이전의 모든 사회들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 이르도록 하는 공산주의의 모든 특징들 그 자체는 프롤레타리아트 존재의 취약함, 궁핍, 그리고 비인간성에 달려있다. “사회 존재의 모든 비인간성이 프롤레타리아의 존재 조건에 집중된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은 “현재 그 자신의 상황에 집중되어 있는 사회의 모든 비인간적 측면을 극복하지 않고는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없다.”(맑스, 엥겔스, 『신성 가족』, 1844) 착취당하는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바로 그 입장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사회를 해방시키고, 또한 계급이나 착취 없는 사회를 만들도록 강제되는 것이다.

사회 내부에서 어떤 경제적 권력도 소유하지 않고, 생산의 지점에서 착취 받는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자신의 해방을 위해서 오직 스스로에게만 기대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연대(solidarity), 자신들의 의식(consciousness)으로써만 자본주의에 반대할 수 있다. 이 두 무기는 그 자체가 미래 사회의 특징적인 원칙들의 체화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반대가 매우 취약하고 깨지기 쉽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지 사회와 대결할 때 기반으로 삼을 수 있는 경제적 특권들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해방을 위한 최종적 투쟁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계속적인 압력에 극단적으로 취약하다.

이것이 공산주의를 향한 길이 필연적이지 못한 이유이다. 공산주의는 길고 고통스러운 투쟁의 열매다. 이것이 어째서, 잃을 것은 그 쇠사슬뿐이며 쟁취할 것은 세계라는 프롤레타리아의 특별한 혁명적 역량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승리를 절대적으로 보장할 수 없는지, 그 발전에 대한 결정론적인 전망이 있을 수 없는지 이유다. 그러나 만약 이 새로운 역사적 신기원이 쟁취되지 못한다면, 인간성은 이름 없는 야만으로 전락하고, 아마도 그 최종적 파멸에까지 이를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를 향한 길, 계급투쟁은, 일련의 승리와 패배로서, 한 발 퇴진과 그에 뒤이은 새로운 승리라는 패턴의 연속으로서 나타난다. 이것은 의지와 의식 사이의 긴장, 끊임없는 재평가와 자기비판 사이의 긴장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공산주의 혁명

부르주아 혁명들, 18세기의 혁명들은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여 맹렬히 돌진한다. 그 극적 효과들은 서로 자신을 내세우며, 사람들과 사물들은 불꽃의 찬란함에 묻힌 것처럼 보인다. 황홀경이 그 날 그 날의 정신이다 ; 그러나 이것들은 수명이 짧다. 이것들은 얼마 안 가서 그 정점에 도달한다. 사회는 이 질풍노도의 시기의 결과들을 냉정하게 자기 것으로 하기까지 기나긴 회한의 시기를 거쳐야 한다. 그런데 반대로 프롤레타리아 혁명들, 19세기의 혁명들은 항상 자기비판을 행하고, 진행 도중에 반복해서 걸음을 멈춘다. 그 임무를 다시 수행하기 위해서, 완수된 것처럼 보이는 것들로도 다시 되돌아온다. 처음 시도된 것들의 불완전함, 허약함, 빈약함을 가차 없이 철저하게 비웃는다. 또한 이 혁명들은 마치 자신들의 상대들을 땅에다 메다꽂아, 그 상대들이 땅에서 새로운 힘을 흡수하여 더욱 거대해져서 자신들에게 대항하도록 만드는 듯하다. 이 혁명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목표들이 너무나 거대하다는 것에 놀라 거듭 뒤로 물러난다. 그러다가 마침내 어떠한 반전도 있을 수 없는 상황이 창출되어 관계들 자체가 다음과 같이 외치게 되면 이러한 물러섬은 끝나게 된다 :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여기 장미가 있다. 여기서 춤 춰라!

(맑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1852)

 

이러한 끊임없는 운동과 지속적인 자기비판이라는 기초 위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공산주의를 향한 험난한 길을 걸어간다. 사실상, 공산주의 혁명은 하나의 경제적 과정에서 그 최절정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적 사회적 변혁을 위한 정치적 수준에서의 전제조건이다. 또한 공산주의 혁명은 옛 사회를 변혁하는 모든 과정을 위한 출발점이다. 과거에는, 계급의 경제적 권력과 그 계급이 사회관계의 새로운 시스템을 강제하는 능력은 실질적으로 같은 의미였다. 사회적 진보의 체화로서, 설득이나 힘에 의해 사회에 부과되는 새로운 사회구조는, 그 혁명 계급의 특정한 경제적 이해관계 속에서 그 정당성을 찾았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중세 봉건 사회가 부르주아지에 의해 파괴되었는지를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15세기부터 16세기까지, 거대한 부르주아 가문들은, 특히 남부 유럽에서, 무역과 상업의 명백한 주인이었다. 대지와 바다를 넘나드는 무역로를 따라서 금속과 직물, 향신료의 끊임없는 파도가 흘러들어왔다(…) 황금이 새로운 무역의 중심지들을 연결하는 무역로에 그리고 많은 도시들에 흘러넘쳤다. 미술, 과학, 문학, 그리고 지식이 번영했다. 과학과 기술의 발견들이 산업 도시들처럼 증가했다. 머지않아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했다. 인간의 이해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의 진보도 일어났다. 어디든 속도와 정확성이 필요하다는 점이 명확했고, 산업 생산과 관련해서 뿐만 아니라 금융과 상업 문제에 있어서도 특히 그러했다. 한 사회 계급이 사회를 지배하고 세계를 정복하는 과정에 있었다. 이를 위해, 이 계급은 하나의 본질적인 힘, 즉 금융과 돈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부르주아지는 중세 귀족정치의 수중에 남아있던 정치권력에 직접적으로 도전하지 않고서도 그들 자신의 법을 사회에 강제했다.

 

중세 귀족세력에 대항한 부르주아지의 투쟁은 농촌에 대한 도시의 투쟁이었으며, 토지 재산에 대한 산업 재산의 투쟁이었으며, 자연경제에 대한 화폐경제의 투쟁이었다. 이 투쟁에서 부르주아지의 결정적인 무기는 그들의 경제적 권력들이었고, 이것은 산업의 발전 - 첫 번째로 수공업, 그 다음 단계로 증가하는 메뉴팩쳐, 그리고 상업의 확장을 통해 - 과 더불어 끊임없이 증가해 온 것이었다. 이 모든 투쟁 동안, 정치적인 힘은 귀족세력의 편에 있었다.” (엥겔스,『반뒤링론』, (우리의 강조))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위해서, 모든 착취 형태의 파괴를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런 종류의 경제적 권력을 갖지 않는다. 투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돈, 재산, 또는 산업 권력을 갖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권력을 해체하고, 공산주의로 점차적으로 이행해 갈 수 있는 어떤 경제적 권력도 없다. 자본주의의 사회관계가 지배하는 일반적인 틀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노동의 도구, 기계, 또는 심지어 공장 전체를 소유함으로써 대체 어떤 물질적 권력을 얻을 수 있는가? 자본주의적 틀 안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생산 수단이나 그 결실을 부분적으로라도 소유한다는 발상은 객관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이며, 덫이며, 신비화이다. 오직 폭력적이고 세계적인 혁명만이 생산수단과 그 결실의 집단적 전유를 위한 기초를 제공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떤 특정한 경제적 이해관계나 소유형식에 기반 하지 않는 만큼, 새로운 종류의 착취 사회를 만드는 것 따위를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착취 받는 계급으로서, “잃을 것이라고는 오직 그 족쇄뿐”인 바로 그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객관적으로 착취가 없는 사회, 계급이 없는 사회의 건설로 나아갈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 후에도, 정치적 권력을 쟁취한 후에도 착취 받는 계급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이러한 권력 쟁취 -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현 - 와 공산주의 사이에서는 일종의 이행기가 필요할 것이다. 이 시기에 프롤레타리아트는 전 사회를 통해 다른 사회 계급들을 생산적 노동에 통합함으로써 자신들의 조건을 일반화시켜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회 변혁 없이, 계급의 이러한 점진적인 해체 없이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심지어 세계적으로 정치적 혁명이 일어난 이후에도 여전히 ‘착취받는’ 계급 (다른 사회 계층들의 기생적 소비를 위한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매우 빈번하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공산주의 혁명과 관련하여 제기된다 : “일단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잡으면 (복수를 위해) 또 다른 사회 계급을 착취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을 보라!”(…) 또는 “아무리 최선의 의도를 지녔다 해도 권력은 부패 한다” 등등. 이러한 질문들이 제기되는 그 방식은 그들의 잘못된 추론을 드러낸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착취 받는 계급이자 혁명적인 계급이라는 본질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 그들은 다음을 설명할 수 없다 :

계급 억압을 할 수 있는 유일한 토대인 경제적 권력을 위한 어떤 물질적 토대도 노동자계급에게는 없다는 점

생산력의 계속적인 발전의 유일한 기초로서 계급 없는 사회가 이뤄질 필요성과 객관적 가능성

 

이러한 것들을 볼 수 없는 이들은 매우 쉽게 그러한 진부한 의문에 빠지는데, 그것은 사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유지를 위한 변명과 자기합리화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서 특징적인 이러한 근시안은, 혁명이 일어난 후 노동자계급의 일부분이 나머지들을 착취하기 시작한다면 (모든 노동자계급이 그 자신을 착취한다는 것을 상상하기만 해도 우스꽝스런 일이 될 것이다), 이는 혁명의 후퇴를 의미하고 자본주의의 재등장을 의미할 뿐임을 보지 못한다. “착취하는 노동자”는 실제적이고 객관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계급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대리인들로 되어버린 것에 불과할 터이다. 혁명과 자본주의의 파괴는 오직 지연될 뿐이다.

그러므로 세계적 공산주의 혁명의 승리는 그 자체로 결정론적이지도 않으며, 공산주의의 승리를 절대적으로 보장하지도 않는다. 그 이행기 동안, 자본주의 사회로의 후퇴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한 후퇴 가능성에 대항하여 투쟁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엄청난 노력을 다해 그 자신의 의식과 연대를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기 때문에, 이 투쟁을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제한된 수의 무기만이 유용하다. 무엇보다도,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옛 부르주아 권력의 어떤 잔재도 용인할 수 없음은 명확하다. 오히려 옛 부르주아 권력의 잔재들은 이행기동안 점진적으로 분해되고 파괴되어 사라져야 할 것이다. 과거에는 이렇게 과거의 제도와 기구를 깨끗하게 철폐시키는 것이 필수적이진 않았다.

부르주아 혁명은 많은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 구조들 뿐만 아니라, 사고와 행동의 방식들(…)의 전복을 포함했다. 그러나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이 착취를 강제하는 기구라는,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근본적 토대까지는 아니었다. 이단 심문의 도끼는 길로틴의 ‘민주적’ 칼날로 대체되었다. 중세의 노예 상태로부터 미래에 착취당할 계급을 ‘해방시킨’ 우리의 새로운 주인들은 구체제의 ‘덜 공격적인’ 측면들, 중세 국가의 억압적인 기구들과 같은 것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간단히 이 기구들을 근대적 요구들을 충족시키는 데 적용했다. 경찰, 공무원, 검찰(…)들은 그들의 제복을 바꿔 입었다. 사색가, 선생, 철학자 등은 그들의 학설을 바꿨다. 특정 경우에는, 20세기가 시작했을 때의 독일과 러시아처럼, 부르주아의 경제적 권력은 귀족, 귀공자, 제국의 장교들과 행정 관료들, 귀족들, 왕자와 황제 등의 토지와 공존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억압적 사회가 다른 억압적 사회로 바뀐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부르주아지는 이전의 억압적인 중세적 권력 구조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것들은 부르주아 경제적 권력을 유지하는데 정말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종류 중 어떤 것도 프롤레타리아트에겐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오직 부르주아 국가의 모든 측면들을 사전에 파괴한 그 기반 위에서만 지배적인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빠리꼬뮨의 경험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단순히 현존하는 국가를 전복시켜서만은 안되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파괴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러므로 반드시 공산주의 사회의 본질에 어울리는 투쟁과 사회 변혁의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 혁명 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 양식은, 사회 혁명의 본질에 조응해야 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주도할 사회의 새로운 형식의 본질에 조응해야 한다.

 

이러한 전유는 더욱이 그것이 달성되어야 하는 방식에 의해서 결정된다. 전유는,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의 성격상 그 자체가 다시 하나의 보편적인 연합일 수밖에 없는 일종의 연합(a union)에 의해 그리고 혁명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혁명 속에서 한편으로 지금까지의 생산 및 교류에서, 그리고 사회적 편제에 있어서 이전의 양식의 권력이 전복되고, 다른 한편으로 그 속에서 혁명 완수에 불가결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보편적 성격과 에너지가 발전한다. 더욱이 그러한 혁명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사회적 지위로 인해 아직 그에게 남아 있던 모든 것을 벗어 던지게 된다. ”(맑스, 『독일 이데올로기』, 우리의 강조)

 

노동자계급의 집단적 조직화, 계급연대, 혁명적 의식의 성장, 명확한 전망과 지칠 줄 모르는 행동, 눈앞에 놓인 거대한 의무에 대해 전체 노동자계급의 창조적인 참여(…) 이 모든 것들은 혁명, 권력 장악, 그리고 공산주의의 비옥한 토양이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은, 집단적이며 폭력적인 과정이라는 점 외에도, 무엇보다도 계급의식의 발전에 달려있다.

과거에는 객관적인 조건들이, 인간의 의지와 의식보다 훨씬 큰 역할을 했다. 상이한 생산 양식의 계승은 어느 정도 인간과 사회 계급의 “머리 위에서” 발생했다. 생산력의 불충분한 발전으로 인해, 혁명 계급은 자동적이고, 신비스러우며, 변치 않는 것 같은 현실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의 원동력은 자연적 힘으로서 나타났고, 그 힘은 보이지 않으며, 폭력적이고, 제멋대로이며, 제어되지 않는 그러한 것처럼 보였다.

 

공산주의는, 그것이 지금까지의 모든 생산 관계들 및 교류 관계들을 변혁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모든 운동들과 구별된다. 또한 그것은 최초로 의식적으로 모든 자연적인 전제들을 지금까지 존재하는 인간들의 창조물로서 간주하고, 그 전제들에게서 자연적이라는 성격을 벗겨내며, 그 전제들을 연합된 개인들의 힘에 복속시킨다.”(맑스, 『독일 이데올로기』, 우리의 강조)

 

그러므로 우리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공산주의와 공산주의를 향한 진행은, 다시 말해, 혁명은 같은 과정의 일부이며, 같은 문제들을 제기한다. 이 운동의 각각의 특정한 단계들은(그 단계들은, 각각 다른 단계들과 고립되어 있다고 할 수 없다), 이미 최종적 목표의 특징적 성격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만약 공산주의가 인간 필요를 위한 생산을 의식적으로 조직함을 의미한다면, 공산주의에 앞선 사회 변혁과 혁명은, 그 스스로 의식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러므로 반드시 편견 없이 현실을 이해하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최초의 계급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혁명적 계급들은 그 이전의 사회 질서에 비해 진보적인 사회 질서를 위해 투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회질서는 새로운 착취의 형식에 기반하고 있었다. 투쟁을 통해 얻어진 이 계급들의 의식은 그들의 착취를 정당화하거나 은폐해야 했기 때문에 그저 신비화된 의식일 뿐이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투쟁은 새로운 형태의 착취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모든 착취의 형식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을 지향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 의식은 진정으로 과학적인 방법으로 사회 현실을 파악할 수 있는 최초의 의식이다.

확실히, 노동자계급 의식의 발전은 완결된 과정이 아니다. 노동자계급의 최초의 투쟁들의 ‘자생적’ 성과는 말할 것도 없이 더 미완적이다. 그 계급의식은 물질적 환경의 압력, 계급의 역사적 경험 아래에서 차츰 발전하며, 성장과 풍부화의 지속적 과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비록 계급의식의 발전이 ‘완전한’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맞다 하더라도, 이는 혁명적 계급 의식없이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자생주의(spontaneism)나 자발주의(voluntarism), 그 어느 것도 혁명의 토대가 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쟁취는 그 계급이 자신의 ‘역사적 임무’를 완전히 의식하고 있을 것을 요구한다. 요구되는 의식의 수준을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와 혁명의 필요에 상응해야만 한다. 더욱이, 계급의식의 발전은 집단적인 과정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발전은 계급의 객관적인 조건과 주체적인 능력들, 이 두 가지로부터 비롯되는 상이한 요소들이 결합한 산물이다. 우리가 이제부터 이야기할 것은 이 문제에 대한 것이다.

2장 계급의식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공산주의의 근본적인 성격중 하나는, 그들이 노동자계급의 의식적이고 집단적인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해야한다 : ‘계급의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전의 혁명을 동반했던 이데올로기적 과정을 똑같이 경험해야만 하는가? 프롤레타리아 의식은 과거 사회의 특징적인 그런 유형의 지적인 과정과 어떤 공통점을 갖는가?

모든 현존하는 이데올로기로부터 계급의식을 구분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 일반으로부터 계급의식을 구분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공산주의 혁명에 유익하게 될 생산력의 놀라운 발전과, 마찬가지로 사회사상들의 엄청난 발전도 참작해야 한다. 공산주의가 생산력의 발전과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의 심화에 의해 가능하게 되는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의식 또한 과거의 사회에서 발전해 온 전체 범위의 사상들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위기의 압박 아래에서 이러한 사상들이 극복됨을 나타낸다.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발전은, 그러므로 이전의 지적 발전 기간 전체에 기초한다. 사실, 인류의 역사를 사실들의 일관성 없고 ‘자연적인’ 연속이나 사건들의 기계적인 연쇄로 파악하는 것보다 더 진실과 거리가 먼 것은 없다. 이와 같이 인간의 역사가 ‘운명’이라는 저항할 수 없고 맹목적인 힘에 의해 결정된다는 생각은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동물은 그 자신의 활동과 전적으로 동일시되지만, 인간은 그들의 삶의 활동을 의지와 의식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다.

 

인간은, 자신의 실천 활동으로 사물의 세계를 창조할 때, 비유기적 자연을 가공할 때 인간이 의식적인 존재라는 것을 증명 한다 … 분명히 동물도 생산을 한다. 꿀벌, 비버, 개미 등등처럼 동물은 둥지, 주거를 짓는다. 그렇지만 동물은 자기나 자신의 새끼들에게 직접적으로 필요한 것만을 생산 한다 ; 동물은 단편적으로 생산하지만, 반면에 인간은 보편적으로 생산 한다 ; 동물은 즉각적인 육체적 필요의 지배하에서만 생산하지만, 반면에 인간은 육체적인 필요가 없어도 생산하고 그 필요로부터 자유로울 때 진정으로 생산한다…그러므로 인간은 또한 미의 법칙들에 부합하는 것들을 만든다.”

(맑스,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

 

명확히, 인류에 의한 전적으로 자발적이며 명료한 세계 변혁을 이야기하는 것은 또한 거짓일 것이다. 더욱이, 인간은 역사를 추상적이거나 정신적인 방식으로 만들어가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즉 자신이 선택한 상황 하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상황 하에서 만든다.”(맑스, 『브뤼메르의 18일』)

 

행동은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 “의식은 존재에 의해 결정 된다” 생산력의 발전에서 도달된 순차적 단계는 사회사상의 진보에 반영된다. 인간, 좀 더 정확히 사회 계급이 생존 수단을 생산하고 자연적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성취한 의식의 상대적 수준은 물질적 환경에 의해 엄격하게 결정된다.

인류의 모든 역사는, 인간들이 자신들에 대해, 다른 것들과의 자신의 관계들에 대해, 그리고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자신들의 관계들에 대해 의식하는 역량의 성장과 더불어 점점 더 생산력이 풍부하게 성장함을 보여준다.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발전과, 그 기반이 되는 물질적 혁명은, 이 유산을 계속 풍부화하고 능가한다.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의 등장

여기서 인류의 모든 역사를 서술하려는 시도는 명백하게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의 이데올로기적 발전의 가장 중요한 단계에 대한 분석을 요약하는 데에 논의를 제한할 것이다.

인간 발전의 첫 번째 단계, 즉 팔기 위한 생산은커녕 교환을 위한 생산조차 알지 못했던 원시 공동체에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진화와 그들을 둘러싼 자연적 힘들의 진화를 구별하지 못했다. 공동체는 직접적인 방법으로 그 필요를 충족시켰고, 노동의 분업도 없었고, 음식과 거주와 마찬가지로 도구들도 공동으로 소유했다. 인간은 그러한 공동체 안에서 진화하면서 스스로를 주변 자연 환경들의 통합적인 일부로 생각했다. 각자를 공동체와 자연적 환경에 연결하는 이러한 직접적인 의존성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그 스스로를 마법적인 통일체의 측면에서 표현했다. 이러한 마법적인 통일체의 징후들은 어디서든 볼 수 있었지만, 통일체 그 자체는 이러한 징후들 그 이상이었다.

그러므로 역사의 초기에 등장한 언어는, 인간들과 그들의 공동체, 그리고 자연의 힘을 잇는 마법적인 연결고리가 되었다. 이 의사소통 수단은 실용적 목적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연의 구체적이고 즉각적인 표현이면서, 금기와 금지의 강제를 통해서 자연에 대해 진정한 권력을 가졌다. 특정한 수렵 또는 채취지역은 거명될 수 없었고, 이것을 어길 경우 제어할 수 없는 힘이 풀려졌다.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를 행사하기 위해서 마법의 주문이 마음속에 간직되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을 둘러싼 자연 세계 사이에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비록 존재의 물질적 조건과 공동체 사이의 이러한 조화로운 관계가 사회적 삶과 자연적 리듬 사이, 사회적 존재와 사상 사이, 그리고 구체적인 활동과 언어 사이의 근본적인 통일을 표현한다는 것이 사실일 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생산력이 거의 발전하지 않아서 끔찍한 결핍이 모든 영역을 뒤덮고 있는 사회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공동체는 지각변동(가뭄, 폭풍, 기아 등)과 같은 자연의 힘에 의해 좌우되었다. 인간이 자신이 의지해 있는 자연에 대해 품은 공포와 경이는 원시적 물신숭배로 이어졌다. 자연현상들(, , 바람, 별 등)은 아직은 신성화되지 않은 채, 독립적인 힘으로 이해되었다. 공경과 공포와 진정의 대상으로서 능동적이고 무시무시한 힘으로 여겨졌다.

인간이 유목 생활을 포기하고 땅에 경작을 시작하고 나서야, 간단한 마법에서 종교적인 의례로의 이행이 이뤄졌다.

 

사냥꾼은 그의 사냥 운을 바랄 때, 주술이나 마법에 의지했다. 계절의 규칙적인 변화, 발아에서 성숙 그리고 죽음까지의 일상적인 순환의 규칙을 알고 있는 농민들은, 자연의 힘을 설명하는 또 다른 형태의 사상에 의지해야 했다. 그러므로 여기서 영혼에 대한 생각과 신화가 탄생했다. (…) 농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생명력은 삶과 죽음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자연 요소들에 놓여 있었다. 서로 어떤 논리적 연관성도 갖지 않는 그러한 요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것들은 하나의 힘의 상이한 측면들로 여겨졌다. , 태양, 여자, , 뱀 등이 그러했다. 이들의 생명력은 별도로 존재하는, 스스로 존재하고, 본질적으로 실재적인 어떤 것처럼 보였다.”(허버트 쿤(Herbert Kuhn))

 

자연의 힘에 대한 이러한 원시적 물신주의는 인간이 스스로 세계와 자연적 현상을 설명하려한 최초의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들이 자연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고 있음을 깨닫자, 종교를 통해 그러한 자연에서 벗어나거나, 혹은 자연을 통제할 길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현실은 아주 간단한 하나의 신성한 개념으로 요약될 수 있었을까? 라고. 농업(그들이 자연 환경에 영향을 행사하는 첫 번째 형태)은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좀 더 높은 권력이 존재한다는 환상을 사회사상 안으로 통합했다. 그러므로 맑스가 설명한 것처럼 “종교는 자기 자신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거나 이미 다시 잃어버린 그런 인간들의 자의식이자 자존심이다.” (맑스, 『권리에 대한 헤겔 학설 비판 서문 Introduction to the Critique of Hegel's Doctrine of Right)

 

그 후 노동의 사회적 분업의 발전, 공동체의 즉각적인 필요를 능가하는 생존 수단의 생산, 잉여의 출현 … 이 모든 것들은 교환 행위를 통해 고대 사회관계를 해체시키고, 원시 공동체를 붕괴시켰다. 공동체들은 그들의 생산에서의 잉여를 서로서로 교환하기 시작했다.

이 단계에서 생산력 발전은 노예제를 통한 노동력의 체계적 이용과 착취를 초래했다. 그러므로 농업은, 땅의 착취와 동물의 가축화를 통해,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부의 원천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발전으로 인해 사회관계의 완전히 새로운 기반이 창조되었다. 더 이상 생산물과 노동 도구들은 공동소유가 아니라, 사적 소유물로 되었다. 분업으로 인해, 인간은 자연스럽게 부의 형태가 된 노동 도구나 먹을거리를 취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남자들은 식량의 새로운 원천인-가축-의 주인이 되었고 그에 이어 새로운 생산 수단인 노예의 주인이 되었다. 남자의 곁에서 여자는, 그녀들의 고대 모계 사회의 권리를 모두 잃고, 가재도구들의 주인으로만 남게 되었다. 이 거대한 사회적 분업의 발달과 나란히, 사회가 최초로 계급들로 분화되었다. 주인과 노예로, 착취자와 피착취자로의 계급분화가 일어났다.

가축 떼, 노예, 사치품, 생산 수단 등과 같은 형태를 띤 사적 소유가 이렇게 증가함에 따라, 생산자와 생산물 사이가 이렇게 분리됨에 따라, 그리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시작됨에 따라, 인간들은 차츰 자연으로부터 그리고 그 자신들로부터 분명하게 분리되어 갔다. 공동체는 더 이상 자연 환경의 직접적인 표현이 아니며, 더 이상 평등하고 조화로운 관계가 아니라, 반대로 특정 사적 소유 관계들에 기초하게 되었다. 개인은 점차적으로 공동체와의 객관적이고 대대로 이어져온 연결고리를 잃어버리고, 그의 생존 수단과의 직접적인 경제적 연결고리를 잃어버린다. 그는 그의 동료들과 경쟁자가 되어버린다.

역사 발전의 이 단계에서 인간 공동체의 사회 조직은 더 이상 그 공동체 전체의 의지에 의해 좌우되지 않았다. 화해 불가능한 사회적 적대와 내적 모순에 의해 분열된 상품 사회는, 그 사회 위에 군림하게 되고 사회질서의 유지를 목적으로 한 일련의 법과 규칙을 채택해야만 했다.

 

사회로부터 발생하였으나, 사회 위에서 점점 더 사회에 낯선 것이 되어 가는 이 권력이 바로 국가이다.”(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 (The Origins of the Family, Private Property and the State)

 

같은 방식으로, 이러한 정치적이고 법률적인 구조의 등장과 연계되어, 사회사상의 지배적 양식은 착취하는 지배 계급의 이해관계를 정당화하고 대표하는 것이 되었다. 이 사상은 더 이상 실천적 활동의 직접적인 반영도 아니고, 집단적 의지와 이전 같은 친밀한 접촉을 유지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현실과 그 자체 사이에서 추구되는 간격을 특징으로 한다. 원시 공동체에서 실제 삶의 언어의 한 표현이었던 사상은, 상품사회에서는 지배 계급의 사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정치적 상부구조와 동시에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가 나타났다. 그래서 지배 계급은 사회가 계급들로 새롭게 분리된 것을 정당화했고 영원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착취의 현실은 은폐되고, 특권층 소수의 특정한 이해관계는 마치 사회 전체의 이해관계인 것처럼, 진보의 전제조건인 것처럼 제시되었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리를 통해서, 이러한 사상을 보호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삼는 전문화된 계층이 나타났다.

그 이후,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는 현실을 이렇게 정당화하는 것은 계속해서 재확인되고 강화되었다. 그러나 주창되는 정당화가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니었다.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인류가 현실을 이해하는 능력은 더 커졌다, 진보의 행로에서 각각의 단계는, , 자연의 지배에 대한 인류의 승리는 사상과 사회의 이해를 풍부히 하면서 함께 나아갔다.

 

사회는 발전했고, 근래의 세기동안은, 매우 가파른 속도로 발전했다. 노동의 형식은 변화되었다. 인간들 사이의 관계, 노동에 대한, 자연에 대한 그 자신들을 지배하는 더 고차원의 힘에 대한 그들의 태도, 이 모든 것들 또한 발전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삶과 세계에 대한 관점이 진화하는 그 원인이다.”(안톤 판네쿡, 『노동자 평의회(The Workers Councils)

 

다른 동물 사회, 심지어 가장 잘 조직된 다른 동물 사회와는 달리, 인류는 그의 생존-활동의 단순하고 무의식적 재생산에 만족하지 않는다.

인간의 사회적 요구는 그것의 만족을 위한 물질적 역량에 따라 증가한다.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즉각적인 만족을 기초로 하거나, 단일한 과정의 무한정한 재생산을 기초로 하여 자신의 요구에 반응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는 매개가 필요하다. 인간은 그들의 생존수단을 생산해야 하지만, 또한 생산의 도구들과 수단들을 점점 더 의식적인 방식으로 이용해야만 한다. 더욱이, 이것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반드시 서로와의 관계를 발전시켜야 하며, 진보에 장해가 되는 조직 형태들을 다소 의식적으로 극복해야 한다.

옛 구조와 생산관계를 물적으로 극복하는 것은, 필수적으로 과거의 낡은 사회사상 형식들과 지배적인 관념들의 극복을 동반한다. 이것은 생산력의 발전이 사회사상의 발전을 가져오기 때문만이 아니라, 혁명적 계급은 자신이 대변하는 이해관계의 사회적 효율성을 - 권력을 가진 계급과는 반대로 - 사회 전체에 증명해 보임으로써만 그 역사적 과업을 효과적으로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물질적 하부구조에서 이뤄진 각각의 개선에 대해서 사회사상에서도 그에 따른 유사한 발전과 풍부화가 이뤄진다.

사회가 물질적, 즉 생산적 발달의 관점에서 성숙한 수준에 이르렀을 때마다 언제나 사상, 과학, 예술, 그리고 문학은 모두 번성한다. 사회관계의 발전의 각 진전 단계, 모든 기술적 진보와 사회 변화는 그에 상응하여 일어나는 사상 세계의 혁명에 의해 표시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이전에 선행된 아시아적, 중세적, 고대적 사회들에 비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이데올로기적 물질적 진보를 나타낸다고 이야기될 수 있다. 자본주의가 기술과 과학의 진보에 부여한 특별한 추진력은, 만약 이 진보가 통합되고 유지되려면, 현실에 대한 합리적이고 유물론적인 분석이라는 체계화를 요구한다. 이러한 생각은 부르주아 경제 발전이 정점에 다다름과 동시에 승리하게 되었다.

부르주아 사회는, 경제적으로는 이미 정복한 사회를 그 원시성과 오래된 믿음들로부터 빨리 해방시키기 위해, 낡은 중세 도그마(dogmas)에 대한 합리적 비판을 시작했다. 부르주아지가 이탈리아 도시들에서 통제권을 획득하고 있었던 르네상스 시대에 이미,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적 대변자들은 영혼의 불멸성과 신의 존재 유무와 같이 봉건주의의 신성한 중세적 가치들에 도전했다. 그러나 설령 부르주아 사상이 종교적인 특성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이자와 폭리에 대한 관념에 더 잘 어울리는 종교인 프로테스탄티즘을 강요하려 노력했다.

어디서든, 부르주아지는 새로운 생산 관계들을 강제했는데, 그 관계들이란 중세 영주에 대한 농노의 경우처럼 직접적인 의존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법적 평등의 개념에,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 팔 수 있는 ‘자유’를 가진 개개인의 존재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 당시 과거의 미신… 등을 정복하고 있던, 세계를 정복하게 되는 자본주의 사회 관계의 기초였다.

 

세계는 하루아침에 거의 10배나 커져 있었다. 이제 서유럽인의 시야에는 반구의 4분의 1이 아니라 지구 전체가 있었다. 그들은 남아있는 모든 구석구석을 차지하기 위해 돌진했다. 그리고 출신 국가라는 낡고 좁은 경계가 무너짐과 동시에, 천년을 내려온 중세적 사고방식의 족쇄도 무너졌다. 인간 육체의 눈에도 마음의 눈에도 훨씬 더 광대한 지평이 열렸다.” (엥겔스, 『가족, 사유 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

 

이러한 정신적 각성, 현실을 이해하려는, 물리적, 자연적, 그리고 인간적 현상을 이해하는 역량의 이러한 증가…이 모든 것의 근원은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역량에, 부르주아 사회가 생산수단과 생산 기술에 부여한 추동력에 있다. 과학적 유물론(scientific materialism)은 자연을 ‘정복하고’ 그 법칙을 이해하고 통제하는 역량의 증가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표현이다.

 

자연은 인간이 의지하고 있는 ‘필요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의 법칙에 대한 지식이 증가하는 만큼 이러한 의존성을 합리적 방법으로 통제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자연을 사회화함으로써 이러한 지식을 얻는다. 다시 말해 생산할 때 자연을 인간 자신이 실용적으로 변형함으로써 그러한 지식을 얻는 것이다.”(F.Jakubowski. 『역사적 유물론에서 이데올로기와 상부구조 (Ideology and Superstructure in Historical Materialism)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한계가 있다:

- 생산력의 발전은 인간이 그들의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아직도 불충분했다. 자본주의 아래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깨지고, 더럽혀지고 오염되었다. 자본주의는 생산을 사회화시켰으나, 생산의 전유 양식까지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 부르주아지는, 착취 계급으로서 이 착취의 현실을 은폐할 수밖에 없다. 특히, 모든 생산양식은 본질적으로 역사적이고 일시적임을 인정할 수 없다. 이러한 환상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침투한다.

 

부르주아지는 처음으로 경제를 일련의 통일된 법칙 아래 작동하는 총체적 과정으로서 이해하게 되었다. 바로 자본주의가 이러한 통일을 초래하고, 모든 이전 사회 질서의 특수성과는 반대로 통일성 있는 사회를 창조한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지에게는 이러한 법칙들이 그 참여자들의 의식과는 상관없는 자연적 법칙으로 보였다. 만약 부르주아지가 이러한 법칙들을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면, 이는 그 자신의 지배를 역사적 한계가 있는 것으로 인식해야 함을 또한 의미할 것이다. 계급의 이해관계와 계급의식이 서로 모순된다.

그러나 이 사실 하나만으로 부르주아지의 사회적 위치에서부터 비롯되는 의식의 이데올로기적 본질을 설명할 수 없다. 사회적 생산과 사적 전유 사이에 좀 더 결정적인 모순이 존재한다. 생산수단은 사회적으로 생산되며 사회를 위해 생산되지만, 개개의 자본가들의 손 안에 떨어진다. ‘자본은 사적이 아니라 사회적인 권력이다 (Capital is not a personal but a social power)’, 그러나 이 권력의 운동은, 자신의 활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전반적인 관점을 갖지 못한 개별적인 자본 소유자의 이해관계에 의해 지배된다. 자본의 법칙과 사회적인 기능은 ‘그들의 머리 위에서, 그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한다.(루카치)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는 부르주아지의 위치에서 가능한 유일한 관점이 자본주의자 개개인의 관점일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본가 개개인에게는, 노동의 소외로부터 비롯된 법칙이 인간과 독립된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F. Jakubowski. 『이데올로기와 상부구조』)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생산과 상품 생산 일반의 객관적 한계는 부르주아지 사상의 한계에 반영된다. 이러한 한계를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을 구분할 수 있다. 확실히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세계를 의식하려는 시도의 한 표현이다. 그러나 이 의식은 이미 제한되어 있었고 환상을 발전시켰다. 이는 위에서 약술했던 두 가지 이유, 즉 자본주의 생산의 본질, 그리고 자본주의 생산의 일시적인 본질을 부르주아지가 인정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상품 - 구조의 본질은 자주 지적되었다. 그 토대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사물의 특징을 취해서 ‘환영적인 대상성(phantom objectivity)’을 획득한다는 점, 즉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그 근본적인 본질의 어떤 흔적도 감춰버릴 만큼 엄격하게 합리적이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자치를 손에 넣는다는 점이다.”(루카치. 『역사와 계급 의식(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

 

마찬가지로, 계급 사이의 사회관계는 사물 사이의 자연적인 관계처럼 보인다. 더욱이, 생산자들은 자신들의 노동 성과물과 분리된 채 그들의 사회적 활동을 마치 자신들과 독립적인 것처럼, 자신들의 통제 밖에 있는 것처럼 바라보게 된다.

 

이 모든 귀결들은 노동자가 마치 낯선 대상에게처럼 그의 노동 생산물에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러한 전제에 따른다면 다음의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 노동자가 힘을 들여 노동하면 할수록, 그가 창조한 낯선 대상들의 세계는 더욱더 강력하게 노동자 자신을 넘어서 그에게 대립하게 되며, 그 자신 - 그의 내적 세계 - 은 더욱더 빈약해진다. 이는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신에게 더 많은 것을 부여할수록, 그가 자신 속에 지니는 것은 더욱더 적어지게 된다. 노동자는 대상 속에 자신의 생명을 불어넣는데, 그 생명은 이제 더 이상 그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게 귀속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활동이 더 크면 클수록 노동자에게는 대상의 결핍이 더욱 더 심해진다. 그의 노동 생산물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 자신은 아니다. 따라서 이 생산물이 커질수록 그 자신은 더욱더 작아진다. 노동자가 그의 생산물 속에서 소외된다는 것은, 그의 노동이 하나의 대상, 하나의 외부적 실존으로 된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노동이 그의 외부에, 그로부터 독립되어, 그에게 낯설게 실존하며, 그에게 대립하는 자립적 힘으로 된다는 것, 즉 그가 대상에게 부여했던 생명이 그에게 적대적이고 낯설게 대립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국민경제학은 노동자(노동)와 생산 사이의 직접적 관계를 고찰하지 않음으로써 노동의 본질 내부의 소외를 은폐한다.”(맑스, 188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Economic and Philosophical Manuscripts)

 

이 소외는 사회사상의 수준에 필연적으로 반영될 수밖에 없다. 사실 사상의 발전은 현실의 발전이 인간 두뇌 속에서 이동되고 전치된 채 단순히 반영되는 것에 불과하다.”(맑스, 자본론 1) 그렇기 때문에, 생산의 사회적 조건들의 체화 (다시 말해, 그들이 대상 또는 사물로 나타나는)를 암시하는 상품 생산이 가진 물질적 한계는 사회사상에서 그에 상응하는 한계에 반영된다. 자본주의적 소외가 사회적 차원에서 반영되어 다음과 같은 것이 결과된다:

사상과 학문(thought and science)은 본질적으로 심사숙고의 활동인 것처럼 나타난다. 이때 사상은 현실에 ‘맞도록’ 만들어진 ‘장갑’이나, 현실에 따라 형을 뜬 거푸집과 같은 것이지, 현실을 변형시키지는 않는다.

사회관계는 초역사적 법칙을 따르는 현상으로서 연구된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는 이러한 법칙을 바꾸거나, 인간 그 자체를 변형시키는 인간 활동의 여지가 전혀 없다.

자연과학은 관찰대상으로부터 분리되어 현실을 관조하고 ‘사실’의 경험주의적 평가를 통해 결론을 도출하는데 그칠 뿐인 ‘정확한 학문(exact science)’의 원형이었다.

사상은 각각의 법칙을 가진 서로 독립적인 많은 ‘전문적 연구 분야’로 파편화된다. 총체(totality)는 이러한 개개의 사실들의 단순한 합처럼 여겨진다.

이 모든 것들은 이데올로기가 현실을 이해할 능력이 없거나 일관적인 방법으로 현실의 발전을 이해할 능력이 없음을 함축하고 있다. 사회적 삶의 상이한 측면들은 마치 서로 전혀 연관성이 없는 특이한 요소 또는 특수한 상황들처럼 보여진다. 그것들은 인간의 발전과는 독립적인 고정된 실체들인 것처럼 나타난다. 현실은 마치 하나의 대상처럼 나타나지, 인간 활동의 산물이자 인지될 수 있고 구체적인 어떤 것처럼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이데올로기는 소위 사상가가 확실히 의식적으로 하지만 잘못된 의식으로써 성취하는 어떤 과정입니다.” (엥겔스. 『「철학연구」에서 메링에게 보낸 편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

이제 질문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의 출현에 대해 말할 때는 어떤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가? 어떻게 우리는 이데올로기를 정의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탄생을 이해할 수 있는가?’

우리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의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한다면, 명백히 이는 프롤레타리아가 의식화되는 그 현상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탐구가 아직 규명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현재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적 계급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의식하게 되는 그러한 경향이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님을 알고 있다. 과거의 다른 혁명적 계급들도 자신들의 세계관을 위해 투쟁했고, 그 전의 도그마와 경직된 생각들에 대항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과거에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 생산 양식을 제도화하기 위한 투쟁에 사상끼리의 투쟁, 서로 다른 세계관들 사이의 투쟁이 동반하여 일어났다. 그러므로 인간 사회 발전 과정 전체를 통틀어 언제나 새로운 사회적 관계 설립을 위한 계급투쟁은 동시에, 새로운 보편사상의 승리를 위한 투쟁이었다. 사회가 경제적 수준에서 경화되는 순간부터, 사회의 생산 관계가 사회의 진보와 삶을 제한하는 껍질로 변형되는 그때부터, 과거의 사회진화에 상응하는 모든 이데올로기적 형식들은 뿌리 뽑히고, 내용이 없어졌으며, 공공연하게 사회적 현실에 대립하게 된다. 이데올로기, 철학, 그리고 예술에서 표현되던 낙관주의와 생기는, 일단 사회가 경제 수준에서 노쇠와 데카당스의 시기에 진입하고 나면, 철학적 비관론, 반계몽주의, 그리고 예술 표현과 사회사상의 쇠락으로써 대체된다. 이렇게 증대되는 분열은, 사회를 통제하는 현존 관계와 그 사회가 직면한 새로운 역사적 필요뿐만 아니라, 인간이 사회에 대해 갖는 사상들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그런 시기에 정말 진보적일 수 있는 유일한 사상들은 새로운 사회를 선언하는 것들이다. 사회관계의 새로운 유형을 내다볼 수 있는 사상들이 나타나서, 혁명적 사상이 되기 전에 처음에는 비판적이고 유토피아적이며 논쟁적인 형태를 띤다.

계급의식도 같은 맥락에서 전개된다. 쇠퇴하는 자본주의 경제적 모순의 심화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쇠퇴의 과정은, 노동자계급에게는 역사의식을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비옥한 지형을 제공한다. 또 다른 비교점은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발전과, 과거의 혁명 계급들의 투쟁을 특징짓는 이데올로기적 과정들 그 사이에 존재한다. 프롤레타리아 의식은, 이데올로기 일반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사회적인 물질적 조건들의 총체성을 토대로 한다. 그러한 구체적인 토대가 존재한다는 점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인 전진을 결정짓는다. 그러므로 계급의식의 발전은, 두 사회 계급간의 현실의 경제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대립, 바로 그것을 표현한다. 이러한 본질적으로 실천적인 운동의 과정에서, 계급의식은 그 스스로 정립하고 승리할 수 있다.

 

사람들의 대대적인 변화는 반드시 공산주의 의식의 이러한 대대적인 창조 속에서 확인되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변화는 단지 하나의 실천적인 운동, 혁명 속에서만 실행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혁명이 필요한 까닭은 혁명이 단지 지배 계급을 전복할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계급을 전복한 계급이 오직 혁명 속에서만 스스로 낡은 체제의 모든 썩은 것들을 쓸어 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맑스, 『독일 이데올로기』)

 

프롤레타리아 의식은, 과거의 혁명 사상과 마찬가지로, 노동 계급의 정치적 사회적 승리의 끝에 이르러서야 정말로 승리할 수 있다.

 

현실 세계의 종교적인 반영은, 어떤 경우에서든,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에서 일상적인 삶의 실천적인 관계들이 인간에게 그것들 스스로를 일반적으로 투명하고 합리적인 형태로 드러낼 때 비로소 사라질 수 있다. 자유롭게 연합된 인간들이 생산하고 그러한 물질적 생산이 그들의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통제하에 놓여 있을 때에야 비로소 사회적 삶의 과정, 즉 물질적 생산과정의 겉모습으로부터 베일이 벗겨지게 된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사회가 물질적인 기반들, 즉 일련의 물질적 실존 조건들을 소유해야 하는데, 이러한 조건들은 다시, 고통스럽고 오랜 역사 발전의 자연적이고 자생적인 산물이다.”(맑스, 『자본론 1권』)

 

그래서 과거의 낡은 사상들을 결정적으로 극복한다는 것은 (이것은 언제나 그러한 경우였다) 낡은 경제적 모순들을 물질적으로 극복함을 함의한다.

종교, 가족, 국가, , 윤리, 학문, 예술 등은 생산 양식의 특수한 형태일 뿐이며, 그러므로 그 일반법칙을 따른다. 사적 소유를 긍정적으로 폐지하는 것, 인간적인 삶을 전유하는 것은 그러므로 모든 소외를 긍정적으로 폐지하는 것이자, 인간이 종교, 가족, 국가 등으로부터 자신의 인간적인, 즉 사회적인 실존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종교적인 소외는, 의식의 영역에서만, 즉 인간의 내적 삶의 영역에서만 일어나지만, 경제적 소외는 실제 삶의 소외이다. 그래서 그것의 폐지는 두 영역 모두를 포괄한다.”(맑스,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

 

그런데, 일정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거에 대해 말할 때는 이데올로기들을 이야기하고,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 말할 때는 계급의식을 계속 이야기한다. 이것은 단순히 용어상의 차이인가?

실제로, 우리의 관심이 근본적으로 다른 두 과정들을 정밀하게 특징짓는데 있기 때문에, 이러한 두 가지 다른 용어들을 쓴다. 과거의 혁명적 계급들의 이데올로기적 과정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 발전 사이의 차이는 그들이 일반적으로 공유하는 얼마 되지 않는 요소들에 비해서 훨씬 더 중요하다. 게다가,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바로 그 진정한 본질과 근원이 단순한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것을 막는다.

이데올로기와 계급의식 사이의 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에 기반을 둔 경제적 하부구조의 존재를 사회사상의 수준에서 표현한다. 이러한 하부구조에서 지배적이며, 경제적 권력, 생산수단과 물리적 힘을 가진 그러한 사회적 계급은 그 지배를 정당화하는데 필수적인 이데올로기적 수단들까지도 마찬가지로 소유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데올로기적 “반영”을 이야기할 수 있다. 심지어 지배계급의 사상이 현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들이 실체없는 애매한 개념들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들은 여전히 훨씬 더 결정적인 현실, 즉 경제적인 현실과 그 법칙을 수동적으로 따라야만 한다. 그래서 부르주아지가 봉건제에 맞선 혁명적 투쟁의 과정에 있을 때조차도, 부르주아 사상의 비판적 행동은 그 최종적 분석에 이르기까지도 오직 빙산의 일각이었을 뿐이었다. 실제 혁명적 행동은 더 낮은 곳, 즉 사회의 토대에서 발생했었다.

비록, 계몽기의 철학자들의 저작들 - 프랑스 백과전서파의 저작들, 볼테르, 디데로, 몽테스큐, 칸트, 로크 등등의 저서들 –이 부르주아지의 혁명적 투쟁에 그리고 그것이 정치적 규칙을 강제하는 데에 신뢰성을 주는 한편으로 중세의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를 심각하게 약화시키는데 공헌한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들의 공헌들은 항상 이미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경제적 변혁 과정을 뒤따른 것뿐이라는 점도 진실이다. 부르주아지의 선각자들이었던 모든 천재들(로저 베이컨, 폼포나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에라스무스, 토마스 모어 등)은 생산력의 발전 정도와 봉건적 사회관계 사이에 점점 더 극악해지는 모순들을 표현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그 혁명적 역할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지가 경제적 힘을 획득한 이후로는 일종의 정당화처럼 보였다.

 

자본주의는 19세기에만, 그러니까 그 역사적 궤적의 끝에서만, 그 투쟁의 역사적 강령을 구체적으로 결정하는 데 성공했다. 바로 그 승리의 전야까지 자본주의의 역사적 지성은, 그것의 경제적 지위가 구 사회 내에서 발전하고 그 지속적 발전을 위한 길을 명확히 하는 그 만큼 점진적으로 실현되었다.” (Bilan , 5. 19343, 우리의 강조)

 

반면에,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은 어떤 경제적 하부구조에도 기반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경제적 권력이 전혀 없고, 새로운 착취 형태의 확립을 그들의 목표로 삼을 수 없다. 심지어 사회의 지배 계급으로서 스스로를 확인할 때조차도, 프롤레타리아트는 착취 계급이 되지 않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착취의 영속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꾸며내도록 강요당할 어떠한 경제적 이해관계도 갖고 있지 않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비록 그들이 원한다 하더라도,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를 창조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계급의식의 정치적 성취물은 그것이 절대적인 사상으로, 이데올로기로 굳어버리는 순간, 그 혁명적 성격을 잃고, 부르주아적 편견의 혼잡한 체계들로 통합되어 버린다.

이러한 상황의 귀결들은 다음과 같다:

 

1. 과거의 사회사상의 진보와 대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은 구 사회의 경제적 변혁에 종속되어 있지 않으며, 그것에 수동적으로 따르지도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아무런 경제적 특권도 갖고 있지 않기에, 기존 질서의 물질적 전복으로 나아가기 이전에 처음부터 의식적이고 정치적인 운동을 통해서 스스로를 주장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 즉 혁명적 강령은 계속 전진하여, 기존 사회의 전복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

자본주의처럼, 프롤레타리아트 역시 계급으로서의 특정한 원칙들에 대해 기반을 설립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기반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롯되는 반대, 동요, 봉기들을 흡수하여, 그것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확립을 지향하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자본주의가 체계적이지 않고, 무질서적이며, 모순적인 형태의 역사적 강령을 정교화하면서 전진할 수 있었다면, 반대로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 투쟁의 성장에 필수적인 정치적 기반을 먼저 설립해야 한다.”(Bilan519343)

 

공산주의 의식은 현실 상태를 반영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반드시 그 스스로를 혁명 과정에서 능동적 요소로 표현해야한다.

 

2. 이데올로기는 지배적인 사회 질서를 그대로 둔 채, 불변적이라 선언함으로써 보존하려한다. 권력에 있어서도, 착취계급은 신비화와 독단론을 영속화하는데 모든 관심을 쏟는다. 이 때문에 부르주아지는 소외를 기뻐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권력을 인식한다. 현실은 은폐되고, 사회관계의 역사적 성격도 베일에 가려진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적 상황은 부르주아지의 상황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그 상황은 부르주아지가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게 ‘이해’할 가능성을 제공한다. 결국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상황에 반대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모든 이들로 하여금 자본주의 사회의 영원한 본질을 믿게 만든 자본주의의 자기만족적인 이데올로기적 가면을 찢어버릴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상황을 변혁하고, 그 착취를 끝내기 위해 필요한 첫 번째 조건들 중 하나는, 자본주의는 잠정적이고 역사적이며 변혁될 수 있다는 특성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착취를 규정하는 경제적 사회적 법칙들이 인간 행동과는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자연법칙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일시적인 현실을 반영하는 법칙임을 부분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그 스스로 착취에 반대하여 정면으로 나서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오직 그렇게 이해함으로써만 생산자와 생산수단 사이의 분리를 폐지하고, 경제에서 하나의 사물처럼 자신에게 대상화된 그 자신의 힘에 대한 지배력을 획득하여 이러한 현실을 변혁 할 수 있다. 현실로부터 그것의 ‘구체화된’ 겉모습을 분리하고 그 물질적 토대를 분쇄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있어서 사활이 걸린 문제다.”(F. Jakubowski,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사고에서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Ideological Superstructures in the Materialist Conception of History)

 

다소 추상적인 이러한 말 뒤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담겨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에 대항한 투쟁에서 도움이 될 만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의 상황을 변혁하기 위해서 그러한 상황을 신비화의 껍질을 깨고 이해하는 것을 발전시켜야 한다. 계급의식을 통해서 그들은, 당대의 자본과 노동의 관계가 일단 한 번 확립된 뒤 영원히 지속되는 어떤 추상적인 것들 간의 관계가 아니라, 바뀔 수 있고, 바꿔야만 하는 살아있는 사회관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모든 이데올로기들은, 그것이 어떤 경향이든 간에, 절대로 이러한 전반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3. 이데올로기의 출발점은 무엇인가?

사유 재산으로서 묶여진 생산수단은 부르주아지에 속한 개개인들을 고립시킨다. 개별 자본가, 국가, 경쟁하는 개인들, 상품의 개별 소유자, 이러한 것들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출발점이다. 이데올로기는, 비록 한 사회 계급의 지배를 매우 잘 보여준다고 할지라도, 진정으로 집단적인 산물이 될 수 없다. 하나의 거울이 조각나서 생긴 수 천 개의 파편들이 모두 같은 이미지를 비추듯이, 이데올로기는 스스로를 모든 개인에게 강제한다. 사회는, 그 자체에 의해 제어되지 않고 외부적 힘처럼 보이는 경제적 상황에 굴복하듯이 마찬가지로 지배 이데올로기에도 굴복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서로 경쟁하는 개인들은 모두 같은 이데올로기적 위협, 같은 환상, 같은 편견과 도그마에 종속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개인은 다른 사람들을 타인으로 그리고 경쟁자로 간주하며, 각자는 그 자신만의 고유한 개성과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한다. 행동과 사상에서 진정한 연대(real solidarity)는 자본주의 사회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관점에서는 생산수단의 집단화와 인간관계의 사회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정말 어쩔 수 없이 혼자이고, 그 모두 부르주아지 지배의 산물인 그의 생각과 그의 삶의 방식은 진정으로 집단적인 운동 속으로 진입할 수 없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는 생산 과정에서 연합되어 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의 조건들로 인해서 연합하여 연대할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오직 투쟁 속에서 연합함으로써, 노동 과정에서 연합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결실을 통해서만 그 자신들의 공동의 적, 자본을 압박할 수 있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은 그들의 투쟁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 자신들의 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에는 개별 노동자들이, 그 다음에는 한 공장의 노동자들이, 또 그 다음에는 한 노동 부문의 노동자들이, 한 지역에서, 그들을 직접 착취하는 개별 부르주아에 대항하여 투쟁한다. (…) 그러나 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프롤레타리아트는 단지 수적으로만 증가하는 것이 아니다, 더 대규모로 집결되고, (…) 개별 노동자와 개별 부르주아 사이의 충돌은 점점 더 두 계급들의 충돌이라는 성격을 띤다.”(『공산주의 선언』)

 

프롤레타리아트만이 국제적 연대(international solidarity)에 기초한 하나의 계급을 구성할 수 있다. 이러한 연대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존재하게 될 사회관계의 선구체로서, 투쟁에서 자생적으로 분출한다. 이것은 믿기 힘든 현상이다. 노동자들은, 어제는 지옥 같은 노동의 압박으로 말하지도 않고 심지어 때때로 서로 간 경쟁을 느끼다가, 어느 날 갑자기 투쟁의 열기 속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벽을 허물고 서로를 돕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들의 강고한 연대를 깨려면 노동조합과 경찰 등, 부르주아지의 모든 권력이 필요할 만큼, 노동자들은 그렇게 강하게 연합되어 있음을 느낀다. 이것이야말로 계급의식의 출발점이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있어서 정치적 성찰의 출발점은 개체로서 개인(the individual as an individual)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일부로서 개인(the individual as a part of a whole), 계급의 부분으로서 개인에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노동자나 저 노동자가 무엇을 생각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어떤 의식을 가져야 하는가에 있다. 계급의식은 총체(totality)로부터 시작하며, 고도로 집단적인 과정이다.

 

4. 그러나 그러한 총체, 즉 프롤레타리아 계급 의식이 그 안에서 비롯되는 바로 그 계급은, 특질 없는 대중이 아니며, 부르주아 사회를 구성하는 그 모든 것들 중의 평범한 한 부분이 아니다. 종파나 수도회 또는 종교 단체들 중에서도 그들의 삶과 사상에서 총체적 공동체를 획득했다고 주장하는 것들이 있다. 부르주아지도 프롤레타리아트의 공격에 직면하면 자신들끼리 ‘연대’할 수밖에 없고, 농민들도 크고 작은 집단체를 구성해 낼 수 있으며 … 실제로, 이러한 다른 계급들 중 그 어떤 계급이나 종파도 프롤레타리아 연대의 수준에 이를 수 없는데, 이는 단지,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관계의 새로운 유형의 담지자로서 하나의 역사적인 계급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에 적대적인 하나의 역사적인 계급을 구성하며,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살아있는 부정(the living negation)이다. 계급의식 또한 이러한 역사적 차원을 포함한다. 이것은 단지 주어진 상황의 이데올로기적 반영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단순히 자본주의의 파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계급투쟁은 자의적인 상상의 산물일까? 그 반대다! 노동자들이 획득하고, 그들의 투쟁을 앞으로 추진하게 하는 계급의식은, 완벽하게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과정이다. 그것은 매우 정밀하게 물화되는 능동적인 힘으로서, 생존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투쟁의 생생한 경험을 요구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론적으로는 풀리지 않았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그 스스로의 실천 속에서 해결해 나가며, 낡고 닳아빠진 사상은 폐기하고 다른 사상을 소생시킨다. 그리고 다시 질적 단계 하나를 통과해 나가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들의 과거 경험에서부터 정치적 이론적 교훈을 끌어내야 한다.

1920년대 혁명적 물결 속에서 계급의식의 뛰어나고, 실천적이고, 생동하는 특질이 확인되었다. 러시아, 독일, 헝가리 혁명 모두에서는 풍요롭게 넘쳐나는 생각들이 계급 안에서 강하게 분출했다. 투쟁이 발전함과 동시에, 모든 장소에서 노동자 평의회(worker’s councils)와 총회(general assemblies)가 나타났고, 모든 곳에서 즉흥적 화합과, 진실한 토론, 생각과 제안들의 무수한 교류가 발생했다. 어제의 노동자들은 자본주의가 그들에게 부과한 심각한 무지 속에 침체되어 있었지만, 오늘의 노동자들은 실천적인 지성과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대담함을 보여주는 연설자가 된다. 자본의 지배에 침묵하며 속박되어 있던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별안간 연설하기 시작하여, 모든 곳에서 수많은 생각과 사상들을 교환하고 정보를 모으며, 함께 정치적 토론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주도성과 창의력을 생생하게 증명한다(…) 정치적인 환경은 열정적인 음조를 띠고, 교류와 성찰을 위한 수많은 통로들이 창조된다(…) 계급의식이 집단적이고 실천적으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의 발전을 확인하기 위해서, 폭동의 시기나 혁명적 시기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착취에 대한 일상적인 저항은, 현실 투쟁의 결실이자, 마찬가지로 계급 단결과 계급의식의 확장을 위한 비옥한 지형을 형성한다. 우리는 1920년대 혁명적 시기와 동일한 현상들, 즉 모든 열정적이고 생동하는 생각들, 토론들의 갑작스런 폭발들이, 하지만 좀 더 소규모로 이뤄지는 것을 본다.

이 과정이 기계적이거나 균질적이지 않다는 점을 잘 이해해야 한다. 노동자들의 회합들에 의해, 자본주의에 대한 일상적인 투쟁들을 통해 얻어진 의식 수준으로는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제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계급투쟁은, 프롤레타리아트 내에서 의식화 과정과 마찬가지로, 변동적인 운동이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새롭게 하지만 또한 동시에 퇴조할 수도 있는 물결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힘과 실천은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의 사상에 종속된 채 남아있는 한 휴면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잠재력을 효과적인 위력으로 바꾸는 것이 바로 계급의식이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실천을 통해서, 자신들이 하나의 계급을, 즉 자본에 의해 착취되는 특정한 계급을 형성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러한 착취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자본에 대항해 싸워야만 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자신들의 투쟁을 통해서 경제체제를 이해하고, 그들의 적들과 그 동맹들이 발견될 그 사회를 알게 된다.

 

대중의 진정한 교육은 대중 스스로의 독립적이고 정치적이며 특히 혁명적인 투쟁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오직 투쟁만이 착취받는 계급을 교육한다. 오직 투쟁만이 그 고유한 힘의 정도를 드러내고, 그 지평을 넓히며, 능력들을 높이고, 정신을 명확히 하며, 그 의지를 단련시킨다.”(레닌, 1905년 혁명에 대한 강연』 1917122, 1905년 혁명으로 재판)

 

5. 계급의식은 프롤레타리아트 자신들의 투쟁에서 시작한다. ‘경제적인’ 것과 ‘사회회적’ 인 것, ‘정치적인’ 것들 사이에 분리가 있다고 가정하는 이데올로기와 대조적으로, 계급의식은 경제적 정치적 투쟁이 한 번에 그리고 동시에 기반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분리될 수 없다.

 

정치적, 경제적 파업, 대대적 파업과 부분 파업, 시위적 파업과 전투적 파업, 각 산업 부문의 총파업과 개개 도시의 총파업, 평화적 임금 투쟁과 거리의 대량 학살, 바이케이트 투쟁 –이 모든 행동들은 이것에서 저것으로 넘나들며, 나란히 발생하기도 하고, 또 순환하여 일어나기도 한다 - 이것은 현상들의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바다이다.”(로자 룩셈부르크,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 (Massenstreik, Partei und Gewerkschaften)

 

부분적이든 전면화된 투쟁이든 간에, 오직 경제 파업과 정치 파업 사이의 밀접한 연계를 통해서만 이후의 투쟁의 발전, 국제적 일반화, 그리고 계급의식의 풍부화가 가능하다.

 

두드러진 특징은 혁명의 시기에 경제 파업이 정치 파업과 결합하는 방식이었다. 이 두 가지 형식의 파업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 때에만 비로소 그 거대한 힘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착취 받는 광범위한 대중들은, 어떻게 다양한 산업 부문들의 임금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조건들을 자본가들이 개선하도록 강제하였는지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혁명적 운동에 휩쓸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러시아 대중들을 새로운 정신으로 물들였다.”(레닌, 윗글)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생활 조건들의 악화에 저항함으로써 자신의 힘에 대한 감각과 의식을 획득한다. 그 투쟁과 의식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자신들의 사회적 획득물들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다시 강탈되는 것을 지켜볼 때 확장된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죽음의 위기라는 것, 이러한 곪아가는 체계는 노동자계급에게 어떤 것도 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자본주의는 이미 진보적 체계가 아니라는 것을 차츰 주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가 그것들을 진정으로 의식하게 되는 것은, 더더욱 급진적인 방법으로 투쟁하고, 내핍과 전쟁을 부추기는 자본주의의 추동력을 거부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가 엄격하게 경제 투쟁에만 머물러 있는 한 그 투쟁은 부분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다. 투쟁에서 만들어진 요구 수준에서 일련의 ‘패배’들(, 부르주아지가 오늘은 허용하지만 내일은 다시 빼앗아가는 것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과 정치적 통일의 수준에서는 점차 승리로 변화되어 간다. 투쟁의 운동은 조금씩 조금씩 사회 전체에 대한 정치적이고 혁명적 문제제기로 향한다.

계급의식이 본질적으로 계급의 경험의 산물이자 실천적 투쟁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진실로 계급 전체의 행동이 대체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혁명 의식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해방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 자신들의 일이다. 이것은 경직된 생각들, 계급 외부에서 이미 만들어진 처방들을 수집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이와 유사하게도,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자신의 상황에 대해 갖는 의식은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신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다. 프롤레타리아 의식은 계급으로서 자신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인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매우 단순히, 프롤레타리아트가 생산 과정에서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의식할 때 그들은 자본주의 체계의 복잡성과 야만성의 본질에 대한 모든 것을 의식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계급의식의 이러한 발전은 항상 계급투쟁과 동의어다. 계급의식은,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적 계급으로서, 의식적인 존재로서 스스로의 본질을 확인하는 것이다.

조직, 그리고 계급의식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 발전과 이데올로기를 구분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았다. 그 전에, 우리는 왜 공산주의의 특성들이 프롤레타리아트 의식을 불가결한 요소로 만드는 지 이해하려 했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답해야 한다. : ‘계급의 의식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계급의식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계급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첫 번째 요소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 계급으로서 본질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과거의 다른 혁명 계급들과 마찬가지로, 낡은 정치적 경제적 질서들을 전복하려면 그들 스스로 의식적으로 조직해야한다.

 

인간의 모든 활동들처럼, 계급 행동은 특히 그것이 사회 운동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조직된 행동이다. 사실, 모든 계급은, 특히 혁명 계급은, 스스로 조직하는 경향을 그 자신 속에서 발생시킬 때에야 비로소 그 자신의 살아있는 실체를 나타낸다. 이 경향은 즉각적이고, 실천적이며, 물질적인 필요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존재와 현존과 미래를 성찰하고 이해하고 의식할 좀 더 일반적인 필요성에도 부합한다.” (『계급의식과 조직화 (Class consciousness and Organisation)ICC바타글리아 코뮤니스타 (Battaglia Comunista)의 주도로 조직된 제2차 국제대회(IInd International Conference)에 제출한 문건, 197810; 좌익 공산주의 그룹의 두 번째 대회 (Second Conference of Groups of the Communist Left) 팸플릿 참조)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스스로를 조직하는 것과 의식은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 전체를 떠맡아야 할 사명을 띠지만, 이전의 계급들과는 달리, 그들이 미래에 사회를 지배할 것임을 전주곡처럼 알릴, 권력의 어떤 경제적 토대도 현존 사회 안에 갖지 않는 유일한 계급이다. 프롤레타리아가 가진 유일한 물질적 힘은 그 조직화이다. 이렇기 때문에 조직화는 다른 계급들에게 있어서보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있어서 훨씬 더 그들의 투쟁의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조건을 이룬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조직화 역량은 즉자적 계급(class-in-itself)에서 대자적 계급(class-for-itself)로 나아간, 자본주의 생산의 간단한 경제적 범주로부터 역사적 계급으로 나아간 정도를 가늠케 하는 척도이다. 같은 이유로, 의식은 이전의 혁명 계급들의 투쟁보다 프롤레타리아 투쟁에서 훨씬 더 근본적인 요소인 것이다.”(『계급의식과 조직화』, 윗글 52)

 

맑스가 말했듯이, “노동자들이 가진 유일한 사회적 힘은 그들의 숫자상의 우세이다. 그러나 그 힘은 단결되지 않으면 분쇄 당한다. 노동자들의 분열은 그들의 불가피한 경쟁에 의해 생기고 유지된다.” 이러한 분열과 경쟁을 극복하고 자본주의에 대항해 최종적으로 승리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에게는 하나의 선택 밖에 없다. 그들의 공통된 이해를 위해 조직하여 함께 투쟁하는 길 밖에 없다. 노동자들은 그들이 생산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인해서 단결과 연대에 기반하여 조직할 수 있다. 그러한 조직화는 사실 가공할 힘이다.

 

공동체 정신은 늘 혁명의 진전에 주요하고 필수적인 힘이었다. 이러한 진전은 노동자들의 연대, 상호결속, 그리고 단결의 성장 속에 체화된다.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노동자들의 새롭게 성장하는 권력은 투쟁을 통해 획득된 새로운 특징들이다. (…) 연대와 헌신이라는 덕목 그리고 사회적 투쟁에서 만들어진 공고한 단일체로서 행동하려는 충동은 공동 노동(common labor)에 기반하게 될 새로운 경제체제의 바로 그 토대이다.” (판네쿡, 『노동자 평의회(Workers’ Councils), 1941)

 

그러나 그들의 조직화와 연대만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의 붕괴를 결정짓지 못한다. 전투적인 의지와 집단적인 의식으로써 이러한 조직화와 연대를 유지하고 끈끈하게 결합할 필요가 남아있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손에 성공을 위한 한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 그것은 그들의 숫자다. 그러나 연합에 의해 단결되지 않고, 의식에 의해 지도되지 않으면, 숫자상의 우세로는 능가할 수 없다. 과거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해방을 향한 투쟁 속에서, 다른 나라들의 노동자들 사이에 우애적인 연결고리들(fraternal links)이 존재해서, 그들이 함께 서로 어깨 걸고 연대하도록 자극해야 한다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연결고리들을 무시한다면, 그 대가로서, 모든 분열된 시도들은 공통적으로 패배하고 말 것이다.”

(맑스, 『국제 노동자 연합이 전 세계의 노동자들에게 한 연설』, 1864)

 

통일된 조직, 집합적인 기능, 노동자들의 생생하고 능동적인 참여, 정치적 의식, 연대 (…)등은 모두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스스로를 혁명적 계급으로 구성해 내는 경향 속에 결합된 여러 요소들이다. 조직화와 계급의식은 함께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 분리 될 수도 없는 것이다. 바로 정치적인 이해력의 발전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화를 강화하여 하나의 혁명 계급으로 만든다. 계급이 자기 조직화에서 이뤄낸 진보는 그 의식을 풍부하게 한다. 이렇기 때문에, 부르주아지의 관점을 수용함으로써 혁명적 삶의 마지막 불꽃을 잃어버린 프롤레타리아 조직은 결국 더 이상 운동의 최종적 목표를 지켜내지 못하고, 더 이상 노동자들의 실천으로부터 새로운 피를 수혈 받을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조직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송장과 다름없으며, 그래서 투쟁의 새로운 혁명적 물결 속에서 반드시 일소되고 대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계급의 조직

 

역사에서 노동계급이 창조하는 조직 유형은 자본주의 자체가 거치는 상이한 단계에 반드시 연관되어 있고, 그 단계가 만들어내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에 부과하는 목적들에 따라서 변한다.”(『계급의식과 조직화』)

 

19세기 초 노동자들이 기계와 그 기계를 자본주의가 이용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구분하는데 익숙해졌을 때(노동자들이 일으킨 처음 폭동은 기계를 부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공격 목표를 물질적 생산수단으로 잡지 않고, 사회 체계 자체로 잡았을 때, 그들 자신을 재편하려는 최초의 시도가 실제로 나타났다. 단체 결성의 권리를 위한 최초의 투쟁이 발생한 것이 바로 이 때이다. 유토피아주의자들은 이러한 최초의 계급투쟁들에서 비롯된 이론가들이었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조직된 운동들에 개입해서 그러한 운동들의 정치적 차원을 강조하려 했다. 그러나 그 자신들의 유토피아적 성격과 계급투쟁 자체의 상태 때문에 그 이론들은 주위를 맴돌 뿐이었다.

 

봉건 사회가 전복되어가던 전반적 소요의 시대에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 자신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직접 관철시키려고 행했던 최초의 시도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프롤레타리아트 자체가 발달되지 않은 상태였고, 또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의 물질적 조건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절히 말해서, 소위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체계들, 즉 생시몽, 푸리에, 오웬 등등의 체계들은 앞에서 말한 적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투쟁이 발전하지 못한 초기시기에 출현하였다.” (『공산주의 선언』)

 

후에, 차티스트 운동(Chartist movement)과 접촉하게 되면서, 그리고 노동조합주의의 발전에 영향을 받게 되면서, 프롤레타리아트와 그들의 가장 의식적인 인자들은 역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을 위한 토대를 설립할 수 있었다. 역사적 유물론은 탈신비화된 방식으로 현실을 이해하는 도구이자, 마찬가지로 행동과 투쟁 방법의 기초다. 그러한 의식의 강화를 통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비밀스럽고 음모적인 모임이었던 <정의로운 자들의 모임(the society of the Just)>1847년에 선동과 투쟁의 혁명적 조직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1년 후,공산주의 선언(Communist Manifesto)』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치 조직( an autonomous organistaion)과 정치 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제시했다. 노동조합과 정치조직들의 결합된 노력들의 결과로, 노동자계급은 정치 운동 내부에서 자신들의 투쟁을 부르주아지의 민주주의적 조직과 그 사상과는 구분되게 점차적으로 구획 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와 혁명적 인자들에게는 여전히 이해(understanding)라는 결정적인 요소가 부족했다. 1인터내셔널은, 그 설립 시기(1864)가 임박한 권력 장악을 가져오게 될 “사회적 혁명”의 시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항상 최종 목표를 내다보면서도 경제적 요구를 위해서 투쟁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혁명적 조직의 임무들과는 구별되는 임무들을 계급의 단위기관들(unitary organs)에게 부과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시기를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었기에, <국제노동자협회>는 노동자들의 연합들과 노조들 그리고 정치적 조류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혁명이 아직 의제가 아니라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의식은, 2 인터내셔널의 발전에 이르러서야 노동자 운동의 실천 속에서 나타날 수 있었다. 그리고 운동의 가능성과 필요성에 적합한 조직화의 두 가지 형식들이 마침내 의식적이고 체계적으로 건설될 수 있다.” (R.빅터, 『프롤레타리아와 그 전위(The Proletariat and its Vanguard), 국제 혁명( Revolution Internationale), 17, 1975)

 

2인터내셔널과 더불어, 그 시기에 대한 이해,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단위조직과 정치조직 사이의 구분들이 좀 더 명확해졌다. 부르주아지 질서의 결정적 전복은 투쟁의 당면 목표가 아니었다. 그 시기에 해야 할 일은 정치적 경제적 개량을 위해 투쟁함으로써 최종적 투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들 스스로를, 한 쪽에서는 단위적인 경제 조직(a unitary economic organisation), 즉 모든 노동자들이 노동자라는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가입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어야 하고,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성원의 기준이 그 사회적 출신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정치적 동의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 조직(a political organisation)을 만들어야 했다. 이 조직은 또한 의회적 조직(a parliamentary organisation)이었다. 이것은 노동조합, 협동 조직 등과 대중 정당을 만드는 문제였다.

확실히, 노동자 투쟁의 경제적 정치적 성격은 여전히 하나의 동일한 과정에 묶여 있었다. 이렇기 때문에,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에 만들어진 구분과 ‘최소’와 ‘최대’ 강령 사이의 엄밀한 분리는, 2 인터내셔널의 이론가들이 이러한 구분을 이론화시킨 후(베른슈타인에게 운동이 모든 것이고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다), 계급의식의 발전에 진정한 장해가 되었다. 이런 발상은,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 물질적인 조건들이 실현되자마자 사회민주주의가 자본주의 늪에 빠지는 길을 ‘촉진시켰’다. 그 이후로 계속, 계급 조직의 새로운 형식이 요구되는 그 만큼 계급의식의 새로운 성숙 과정도 요구되었다.

1차 세계대전 말 특히 러시아와 독일에서 폭발한 혁명 운동은, 부르주아 지배의 결정적 파괴라는 역사적 의제에 마침내 도달한 그 새로운 책무에 적합한 새로운 조직 형태를 창조함으로써, 바로 그곳에서 그때에 ‘최대 강령’을 즉각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1905년 러시아의 계급 운동에서 최초로 자생적으로 발생한 노동자 평의회는, 계급 조직의 특별한 형식으로서, 자본주의 국가에 대항한 투쟁 속에서 모든 노동자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재창조될 조직 형식임을 보여주었다. 노동자평의회 - 공장들과 노동자 거주 지역들(working class neighborhoods)에서 형성된 회합체 –는 프롤레타리아트 스스로가 자신들의 투쟁을 이끌 수 있도록 해 주는 조직 형태였다. 평의회는 물리적으로 노동자계급 전체를 재조직하며, 동시에 투쟁의 경제적 정치적 성격을 포괄했다. 이러한 투쟁의 두 가지 측면들은, 그러므로, 비록 순간적일지라도 서로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R.빅터,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전위』)

그러나 이 모든 것 중에, 혁명가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대중 정당’이라는 조직화 형식은 쇠퇴하는 자본주의 속에서 그 본질적 기반을 잃었다. 그 기반은,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 의회에 참여하여 자본주의로 하여금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개량을 단행하도록 강제할 가능성과 필요성이다. 부르주아 국가는 그 모든 형식들에서 파괴되어야 하고, 이러한 파괴의 행위는, 계급의 한 분파나 소수가 아무리 깨어있다 할지라도 그러한 한 분파나 소수의 업무일 수가 없다. 그것은 노동자계급 전체의 일이어야 한다, 노동자 평의회의 일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상황과 시기에 혁명가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평의회가 경제적 투쟁과 정치적 투쟁을, 계급의식과 조직화를 합치한다면, 혁명가들은 왜 존재해야 하는가? 심지어 우리는, 평의회가 계급이 자본주의의 착취와 이데올로기를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모두 극복할 수 있도록 해 준다고 할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평의회를 조직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의 멍에로부터, 특히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멍에로부터 점진적으로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다. 평의회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그 자신에 대한 의식 그리고 그 계급의식을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표현하려는 의지가 점차 실현된다.”(<독일 일반 노동자 연합(AAUD)> 3차 대회의 테제, 1920)

 

쇠퇴 시기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왜 가장 전투적이며 의식적인 요소인 공산주의 전위로 구성된 소수 조직을 발전시키는가?

그러한 문제의 대답은 자기-조직화 과정과 계급의식의 발전 과정 전반에 놓여있음에 틀림없다. , “과정”이라는 용어는, 계급의식이 어떤 특정한 시기에 완결되고 완벽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난데없이 등장하지도 않으며, 계시처럼 노동자들 위에 내려오지도 않는다. 계급의식은 점진적으로 단련되며, 이 과정은 매우 길고 고통스럽다.

 

과정으로서 계급의식

 

비록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가 평의회로 조직되어 공산주의 혁명을 끝까지 수행할 책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노동자들 속에서 이러한 필요성에 대한 의식이 오로지 변하지 않고 동질적 방식으로 존재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프롤레타리아트를 평의회 안에 단위적으로 조직하는 것 또한 항구적인 현상이 아니다.

공산주의에 도달하기 위해서, 평의회에로 스스로를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식에 도달하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험난한 길을 걸어야만 한다. 심지어 투쟁하고, 파업하고, 자본주의 착취에 저항하겠다는 간단한 의지조차도, 노동자계급 안에서 항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소강이나 낙담 또는 환상의 시기가 투쟁의 물결을 잠식시킬 수 있고, 물러서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만약 부르주아지가 노동자들의 운동을 유혈 진압함으로써 투쟁의 퇴조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혁명에 대한 전망은 좀 더 먼 미래로 밀려나게 된다.

계급투쟁의 과정, 프롤레타리아트가 스스로를 혁명적 계급으로 형성하는 과정은, 점진적으로, 평탄하지 않게, 엎치락뒤치락 전개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요한 투쟁이나 파업이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불타오르는 것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노동자 투쟁의 세계화는 자본주의의 위기의 세계화의 압력 아래 점차로 진행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지, 어떻게 파업을 혁명으로 이끌어야 하는지 동질적인 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 어떤 부문들, 어떤 노동자들은 더욱 단호하며, 더욱 전투적일 것이다. 반면 다른 이들은 계속 망설이며, 그들 스스로 끝까지 투쟁에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해답은 분명하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소외가 극에 달하도록 내몰린 계급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지가 그 이데올로기를 강하게 주입하고, 경쟁을 통해 분리시키는 계급인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자신을 통일되고 의식적인 계급으로 구성할 때 지향하게 되는 목표는, 하나의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산출하는 자본주의의 조건들과 모순된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와, 경쟁하는 개인으로 원자화되거나 경제적 요구를 위해 처음 투쟁을 시작한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는 변증법적 모순이 존재한다. 그 모순은 자발적이고 의식적이며, 조직적으로 행동하는 계급 속에서 절정점에 이른다.

 

사회주의 혁명의 근본적인 어려움은 이러한 복잡하고 모순적인 상황에 있다. 한편으로, 혁명은 오직 노동자계급의 절대 다수의 의식적인 행동을 통해서만이 실현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계급의식의 발전은 사회에서의 노동자계급의 조건들에 반대하여, 즉 그들의 역사적 혁명적 과업을 생각하는 노동자들의 의식을 방해하고 끊임없이 파괴하는 조건들에 반대하여 이루어진다.”( ‘당의 본질과 기능에 관하여(On the Nature and Function of the Party)’, 『국제주의』(Internationalisme), 38, 1948, Bulletin d'etude et de discussion, 재판, 6, 1974)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투쟁에서 어떤 일치 단결에 이르든 간에, 마치 한 개인이 행동하듯이 그렇게 똑같이는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목표를 향해서 마치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그렇게 기계적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의식을 이데올로기의 고정되고 얼어붙은 원칙이나 이미 준비된 일련의 처방에 따라서 발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사회적 존재의 물질적 조건과 연결된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과정 속에서만 그들의 상황에 대해 의식하게 된다. 근본적으로 투쟁의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실천적이고 이론적인 무기를 연마한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들 자체의 원천은 매우 길고 복잡한 사회적 과정 속에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페테르스부르크 사건에 크게 자극을 받아 1월에 갑작스럽게 일으킨 총반란은 외적으로는 절대주의에 대한 혁명전쟁을 선포하는 정치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 최초의 전면적인 직접 행동은 내적으로 훨씬 더 강력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마치 전기충격과도 같이 몇 백만의 사람들에게서 계급감정과 계급의식을 처음으로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계급감정을 자각하면서 몇 백만을 헤아리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은 자본주의의 사슬에 묶여 몇 십 년 동안 끈기 있게 견뎌 왔던 사회적 경제적 존재 조건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것인가 하는 것을 아주 갑작스럽고 철저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사슬을 흔들고 잡아당기려는 자생적이고 전반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

지각없는 사람들만이 무정부주의적 계획에 따라 한 번 벌인 ‘장기간’의 총파업으로 절대주의를 한방에 파괴할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다. 러시아의 절대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분쇄해야 한다. 그러나 절대주의를 분쇄하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높은 수준의 정치 교육과 계급의식, 그리고 조직화가 필요하다. 이 모든 조건들은 소책자나 전단으로는 충족될 수 없고 오직 살아 있는 정치 학교인 투쟁을 통해서만 그리고 투쟁 속에서, 혁명의 연속적인 과정 속에서만 마련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절대주의는 단지 적절한 ‘노력’과 ‘인내’ 속에서 원하면 언제든 분쇄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절대주의가 무너지는 것은 단지 러시아 사회 안의 사회적, 계급적 발전이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이처럼 겉으로는 단순하고 순전히 기계적인 것으로 보이는 문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절대주의의 타도는 오랫동안의 연속적인 사회과정이며, 그 해결책은 사회 지반을 완전히 침식하는 것이다. 최상층은 최하층으로 바뀌고 최하층은 최상층으로 바뀌어야 한다. 겉으로 보이는 ‘질서’는 혼돈으로 바뀌어야 하고 겉보기에 ‘무정부주의적인’ 혼돈은 새로운 질서로 바뀌어야 한다.”(로자 룩셈부르크,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

 

프롤레타리아 의식은 물질적 경제적 조건의 부패와, 자본주의의 공포와 모순의 노출, 사회적 긴장의 악화에 의해 발전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옥한 지형이 휴경지로 남겨져 있으면 안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그들의 정치적인 이해(understanding)를 일반화시키기에 좋은 상황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행동으로부터 충분한 교훈들을 끌어냄으로써 그 투쟁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일반화하는 것은, 심지어 투쟁의 침잠기에도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러한 시기에, 프롤레타리아트는 과거의 경험을 반성해 볼 수 있고, 그들이 경험해 왔던 승리와 패배의 대차대조표를 그려서, 미래를 준비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계급의식의 발전은 주어진 상황의 즉각적인 반영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이론적 과업을 실행하기 전에 다음 투쟁의 물결을 기다리며 앉아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 의식의 발전은, 계급의 다수 속에서 동질적이고 지속적으로 살아있을 수는 없을 지라도, 끊임없는 이론적 성찰, 과거 경험의 비판을 요구한다. 그것은 공산주의 강령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이해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정련을 포함한다.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가 끊임없는 성찰과 그 정치적 성취들의 적극적인 일반화를 수행해 낼 수 있는가?

한 가지는 명확하다. 모순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하기에,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러한 일들을 전체 구성원들에게 맡길 수 없다. 사회적 안정기에, 절대 다수의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 이데올로기의 압력에 종속되어 있다. 정치적 성취들을 일반화하고 계급의식을 균질화하는 책무는 계급의 가장 결정적이고 가장 전투적인 인자에게 돌아간다. 이러한 분파들 덕분에, 즉 그 자체의 이러한 일부(정치적인 관점으로 정의된) 덕분에, 프롤레타리아트는 의식에 있어서 즉각적인 우연성과 부분적인 경험을 극복함으로써 의식에서의 성취들을 집단화할 수 있다. 이러한 분파가 운동의 목적을 더 일찍 이해했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노동자계급은 그 경향을 강화하여, 자신들의 투쟁을 파편화하고 약화시키는 고립과 분열을 분쇄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방법으로, 강력하고 의식적인 계급은 자본주의에 대항하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이러한 계급의 요소들은 그들의 책무를 만족스럽게 처리하기 위해, 그들 스스로를 혁명적인 공산주의 조직으로 재편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그들의 계급투쟁 속에서 본질적으로 적극적인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혁명가들은, 이러한 이질적 과정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진로와 조건들과 전반적인 결과들’ (공산주의 선언)를 최초로 분명하게 이해한, 계급의 구성인자들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기’ 때문에, 혁명가들은 어쩔 수 없이 계급의 소수를 이룬다. 계급에서 유래하며, 의식화 과정의 표현으로서 혁명가들은 이러한 의식화과정에 능동적인 요소가 됨으로써만 그렇게 존재할 수 있다. (ICC 강령. 국제 공산주의 흐름(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의 강령과 선언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은 영어로 각각 출판됨)

 

그러므로 혁명적 조직들이 노동자계급 속에서 생겨날 때, 그것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스스로를 평의회 속에서 조직하도록 만드는 그것과 동일한 토대 위에서 그리고 동일한 필요성으로부터 생겨난다. 그래서 혁명가들은 자신들 계급의 자생적이고 자발적인 산물(a spontaneous and voluntary product)이다. 자생적인 이유는, 그들의 존재가 투쟁의 산물이고 그들 계급의 실천적인 경험에 의해 풍부해지기 때문이다. 자발적인 이유는, 그들은 단순하고 제한적이며 기계적인 경제적 요소들로부터가 아니라 계급투쟁의 역사적 필요성으로부터 출현하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승리를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자계급이 국제적으로 이해하는 것(the international understanding of the workers), 그것뿐이다. 이러한 필요 때문에 <국제 노동자 협회(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가 탄생했다. 이것은 하나의 종파나 이론의 자식이 아니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자생적인 산물이며, 근대 사회의 자연적이고 억제할 수 없는 경향들에 의해 비롯된 것이다. (…) 노동자계급의 열망들과 일반적인 경향들은 그들이 위치한 현실의 조건들로부터 나온다.”(맑스, 『폴 라파르그(Paul Lafargue)에게 보낸 서한』, 1870, 우리들의 강조)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생적이며 역사적인 운동들이, 진정으로 혁명가들의 존재를 위한 유일한 기반을 이룬다. 혁명가들은 마키아벨리적 목표나 독재의 꿈을 추구함으로써 자신들의 열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들은 계급의 단위조직 그 자체로는 노동자들의 다수에 의해 제기되는 의식적인 자기 조직화의 복잡한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등장한다. 혁명가들이 나타나는 이유는 또한, 노동자계급이 혁명의 최종목표를 마침내 깨달았을 때마저도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 안에 존재하며 그 모순과 굴욕, 타락한 분위기와 유혹적인 거짓말 속에서 계속 고통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수천 년 노예 상태의 유산과 매일 매일의 몽매주의로부터 자신을 그렇게 간단히 해방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공산주의 사회가 존재할 때까지, 계급의 의식 발전 과정은 비록 일반화되고 점점 더 발전하는 경향을 띨 지라도 이질적인 현상들로 남아있을 것이다.

만약, 계급 전체가 각각의 파업 뒤에, 투쟁에서의 부분적 패배와 승리 이후에 만들어지는 이론적 정치적 성취에 대한 ‘기억’들을 집단적으로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계급의식의 일반화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만약, 프롤레타리아트가, 각각의 전투 이후에, 리용 직공들의 투쟁부터 1917년 러시아 노동자들의 투쟁들을 거쳐, 오늘날 1982년의 노동자들의 투쟁에 이르는 역사적 길을 다시 걸어야만 한다면, 어떻게 계급의식의 동질화가 가능하겠는가?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투쟁의 교훈들을 어디에서 얻을 것인가? 이러한 교훈들이 뜬 구름 속에서나 집단적인 무의식 속에서 발견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만약 이러한 교훈들이 존재한다면(그리고 그것들이 혁명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들 중의 하나라면), 그것들은 물질적 인간의 형식으로 존재해야한다. 공산주의 의식은 신비스런 것이 아니며, 오히려 매우 구체적이고 인간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공산주의 의식과 행동은 혁명 강령과 혁명 조직 없이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러한 필요성은 공산주의와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본질에 의해 부과된다. 만약 공산주의 혁명과 사회의 변혁을 이뤄내려 한다면,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역사적 이해관계를 파악하는 방법에 있어서 질적 발전 없이는 불가능하다.

3장 당에 관한 그릇된 이론들

공산주의 혁명의 본질, 프롤레타리아 의식 성장의 특징,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계급으로 구성하는 것, 이 모든 개념들은 매우 이론적으로 다루어져 왔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분석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물어야만 한다. 혁명가의 역할을 정의하고, 또 이데올로기와 계급의식 사이의 차이점을 강조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가? 공산주의 혁명의 본질이 공산주의자들의 개입에 영향을 주는가? 사실, 이것은 그 문제를 다루기엔 너무 학구적인 것은 아닌가?

오늘날 혁명가들이 계급투쟁의 구체적이고 복잡한 과정을 그들의 눈앞에 전개되는 그대로 이론화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의 분석은 여전히 매우 일반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고, 그들에게는 너무나 빈번히 노동자 투쟁의 경험이나 그러한 투쟁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부족하다. 50년간의 반혁명의 무게가 노동자계급을 무겁게 짓누르고, 오늘날 혁명가들은 과거의 혁명 조직들로부터 오래 동안 단절된 이후, 마치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와 같다. 50년 전의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당연했던 것이 오늘날의 혁명가들에게 깜짝 놀랄만한 것으로 다가오고, 과거의 일상적인 실천과 생생한 개입으로부터, 즉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은 오늘날에는 추상적이고 여전히 애매모호한 발상처럼 보인다. 공산주의자들의 적극적인 역할, 계급과 공산주의자의 관계, 투쟁 속에의 효과적인 개입(…), 이 모든 것들을 1920년대 혁명가들은 실천에 옮겼고, 구체적으로 논했다. 오늘날 이러한 전통을 되살리려는 혁명가들은 여전히 배워야 할 것이 많다. 최근 계급투쟁의 부활로 인해 그들의 공산주의 전위로서의 책임이 천 편의 이론적인 문서보다 좀 더 구체적이고 좀 더 효과적으로 정의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의 역할과 그 책무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들의 관점은 여전히 다소 이론적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면, 이 팸플릿을 과거의 저작들을 기초로 작성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왜 이 절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대회에서의 당에 대한 태제를 충실하게 인용함으로써 시작되지 않는가? 레닌의『무엇을 할 것인가(What Is To Be Done)는 훌륭한 참조점이 아닌가? 불행하게도, 아니다.

사실, 1920-1921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당에 대한 이론적 저작들은 1917년 볼셰비키의 실천을 진정하게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졸렬한 모방이나 변형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이론적 수준에서, 특히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 담겨있는, 기존의 현저한 혼란들을 증폭한다. 우리가 혁명가의 역할 문제를, 공산주의에 관한 문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화에 관한 전반적인 분석과 함께 시작할 필요를 느꼈던 이유는, 공산주의자들의 개입에 관한 일반적인 이론적인 틀이 제3 인터내셔널의 노동자 운동에게도, 심지어는 그 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퇴락에 반대하여 투쟁한 좌익 분파에게마저도 완전히 명확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성과들을 재전유한다는 것은 우리에 앞서 존재한 혁명 조직들을 흉내 내서 과거 문서들을 한자 한자까지 그대로 베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경험을 재전유한다는 것은 또한 긍정적인 교훈과 부정적인 교훈을 끌어내면서 비판하는 것을 뜻한다. 1920년대의 혁명적 물결과 그에 뒤따른 투쟁의 퇴조는 교훈의 무궁무진한 보고이다. 이러한 교훈들로 인해 우리는 세계 혁명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화 과정과 자기 조직화의 특징들을 좀 더 명확하게 다시 정의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교훈들로 인해 우리는 당의 역할과 노동자계급과의 관계에 대해 이전에 존재할 수 있었고, 심지어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혼란들을 좀 더 잘 드러낼 수 있다.

대리주의 개념의 역사적 기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2차 당 대회에서 혁명가들은 당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혁명을 독립적인 정치적 당 없이 수행할 수 있다는 관점을 단호히 거부한다.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 투쟁이다. 내전이 될 수밖에 없는 이 투쟁의 목적은 정치권력의 획득이다. 정치권력은 오직 정치적 당에 의해서만 획득되고, 조직되며, 지도될 수 있다. 그 어떤 다른 방법도 아니다.”( 『당의 역할에 대한 테제』, 우리의 강조)

이 입장은, 특정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이 시기 혁명가들 대다수의 입장이었다. 이 입장은 어디서 제기되었는가? 그리고 어떻게 발전해갔는가?

당에 대한 이러한 생각의 기원은 제2 인터내셔널이 표방한 일반적인 입장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번영하는 자본주의로 인해 노동자계급이 지속적인 개량을 여전히 획득할 수 있던 시기와, 혁명가들이 혁명의 궁극적인 목표를 멀리 떨어져 있어 닿을 수 없는 미래로 격하시킨 시기와 동시에 일어났다.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는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 시기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고 파악하면서 노동조합의 일을 강조하고 당이 의회의 일에 전념할 필요를 강조했다. 영국 사회민주주의자, 에드워드 데이비드(Edward David)가 다음과 같이 강조했을 때처럼: “혁명주의의 짧은 개화는 매우 다행히도 과거의 일이 되었다.(…) 당은 의회에서 그의 권력을 긍정적으로 활용하고 확장하는데 전념할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해서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의 ‘수정주의’가 탄생하고, 노동자의 (노동조합에 의해 이끌어지는) 경제적 활동과 그들의 (대중 의회 정당에 위임된) 정치적 활동사이의 점점 더 날카로운 분리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은 노동자 투쟁의 최종 목적의 포기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1902년에 벌써, 카우츠키는 ‘점진적인 운동, 민주주의적이며 거의 알아차릴 수 없는 수단을 통해,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를 주창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의 유일한 임무는, 이러한 점진적인 운동을 강제할 목적으로 의회에 참여하는 것뿐이었다. 권력 쟁취는 더 이상 노동자들 스스로가 부르주아 국가를 폭력적으로 전복하는 것, ‘노동자들의 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당들의 일로서, 부르주아 국가를 평화적으로 정복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맑스주의가 이렇게 엄청나게 왜곡됨으로써, 또 다른 왜곡이 초래되었다. , 프롤레타리아 당은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 준비하는 필수적인 분파(a fraction)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당은 통치 기구가 되었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 당에 투표함으로써 자신의 정치 활동과 권력을 그 당에 위임해야만 한다.

사회민주주의는 공공연한 목표로 부르주아 국가의 ‘정복’을 내세웠지만, 노동자계급의 대중 정치 기관에 대한 생각은 존재하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유일한 정치 기구는 당이었다. 만약 국가가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통제 아래에서 프롤레타리아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고 친다면, 2인터내셔널이 그렇게 믿었듯이, 권력 쟁취는 오직 당에 의해 조직되고, 수행되며, 지도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논리적이었다. 이러한 책무를 위해, 특히 개량을 위한 투쟁을 이끌기 위하여, 당은 대중적이고, 극도로 규율 잡히고 위계적인 조직이어야 했다. 부르주아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유산이 이러한 발상들에 심하게 남아 있었다.

20세기 초, 사회민주주의의 좌파 인자들은 건강하게 제2 인터내셔널의 테제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큰 이점은 새롭게 열리고 있는 시대를 인식하고 그 시기에 비추어 혁명가들의 역할을 명확히 한 점에 있었다. 그들의 첫 번째 행동은 베른슈타인, 카우츠키와 그 친구들에 의해 만들어진 경제 투쟁과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궁극적인 목적 사이의 분리에 집중되었다.

레닌은 나로드니크스 (Narodniks, 농민 꼬뮌에 기초한 혁명을 지지했던 러시아 인민주의자)에 반대하는 그의 첫 번째 저작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제 투쟁의 최종 목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러시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들의 활동과 관심을 산업 노동 계급에 집중시키고 있다. 이 계급의 선진 인자들이 과학적 사회주의 (scientific socialism) 의 생각들을 흡수하고, 러시아 노동자들의 역사적 역할을 이해했을 때, 그들의 생각들이 널리 퍼지고, 현재의 지리멸렬한 경제적 전투를 의식적인 계급투쟁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안정된 조직을 만들어 내었을 때, - 러시아 노동자들은 모든 민주주의 인자들의 선두에 나서서, 절대주의를 전복시키고,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를(모든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공산주의 혁명의 승리를 위한 공개적인 정치적 투쟁으로 이끌 것이다.”(레닌, 저작집, 1)

 

그 후 레닌은, 사회민주주의 당의 일부로서 러시아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객관적인 조건들을 보지 못했던 '멘셰비키에 반대하여’ 맹렬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또한 대중 정당이라는 사회민주주의적 개념을 버렸다. 레닌에게, 투쟁의 새로운 조건들은, 경제적 투쟁을 정치적 투쟁으로 변환시킬 소수 전위 정당이 필요함을 의미했다.

로자 룩셈부르크 또한 그녀의 저작 『사회개량이냐 혁명이냐』(Sozialreform oder Revolution)(1898)에서, 2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적이고 반혁명적 일탈에 대해 반대했다.

그녀는 특히 “사회민주주의에게는, 현존하는 체제 내에서의 투쟁만이, 즉 개량을 위해, 노동자들 상태의 개선을 위해, 민주주의적 수단을 위해 일상적으로 투쟁하는 것만이,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개입하고 그 최종 목표, 정치권력의 정복과 임금 체제의 철폐로 향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로자 룩셈부르크, 『대대적 파업, , 그리고 노동조합』, 우리의 강조.)라고 상기시켰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또한 경제적 투쟁과 정치적 투쟁의 통일을 주장했고, 방어적인 투쟁들은 오직 권력 쟁취를 위한 최종적 정치 투쟁을 준비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주장했다.

전 세계적으로, 사회민주주의의 좌파는 새로운 시대에 의해 의제(agenda)로 부과된 공산주의 혁명의 필요성을 단언했다. 이러한 좌익 반대파는, 1차 세계대전 초기에 제2인터내셔널과 노동조합들을 결정적으로 압도해버린 애국주의와 민족주의에 반대하여 그 보루로써 1915년 찜머발트에서, 그리고 그 이후 1916년 케인탈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러한 보루는 여전히 약하며 미성숙했다. 시기는 극적으로 변화했다. 사회민주주의의가 죽음을 고함으로써 혁명가들은 자신들이 이전에 가졌던 ‘개량주의적’이고 조합주의적인 생각들을 거부해야만 했다. 투쟁의 새로운 필요에 적응하기 위해서, 공산주의 강령을 발전시키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이 모든 것들에는 희생이 필수적이었다. 과거 사상들에 대한 쓰디쓴 투쟁에도 불구하고, 혁명가들은 여전히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사회민주주의의 무게를 느꼈다. 레닌, 룩셈부르크, 판네쿡 등과 같은 혁명가들의 정치적이고 전투적인 저작들이 제2 인터내셔널의 이론적 짐을 다 청산하지는 못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혁명가의 대부분이 처음 무기를 들었던 것은 자본주의가 여전히 진보적이고, 카우츠키의 테제들이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질 때였다. ‘낡은 껍질을 벗어던지기’는 전혀 쉽지 않고, 구시대의 생각들의 찌꺼기는 여전히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었다.

그런 생각의 보기를 들자면, 몇몇 혁명가들이 여전히 주장하는 것인데,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을 앞당기는 데에 민주적 기구들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20세기 초, 대부분의 공산주의자들은 1871년의 빠리꼬뮌을 노동자계급에 의한 민주 공화국의 통제의 모델로서 보았고, 민주주의적인 기관을 노동자 권력의 도구로서 사용하는 모델로 보았다.

 

국제 사회주의는 공화국을 사회주의 해방의 유일한 가능한 형태로 본다 - 이런 조건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의 손에서 이것을 빼앗아 ‘ 한 계급에 의한 다른 한 계급의 억압을 위한 도구’로부터 인류의 해방을 위한 사회주의의 무기로 변화시킨다.” (레온 트로츠키. 그 후 35: 1871-1906)

 

사실, 네덜란드 좌파만이 『자본의 축적(Accumulation of Capital)에서 룩셈부르크의 분석에 기초하여, 자본주의의 쇠퇴시기에는 부르주아 혁명들은 파산했고 민족 해방 투쟁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옹호했다.

레닌은 “부르주아지에 반대하는 계급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는 모든 민주주의적 기구들과 열망들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레닌,『전집 23,1915-1916)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Two Tactics of Social Democracy, 1905)에서 그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제(autocracy)의 힘을 제거하기 위해 농민 대중들과 결연함으로써 민주주의 혁명을 성공적인 결말로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을 옹호했다. 볼셰비키들에게 어떤 민주주의적 국가의 창설도 진보적이었다. 반면 판네쿡과 네덜란드 좌파에게는 인류를 제국주의적 학살 속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체제가 그 역사적 파탄을 드러낸 시대에는, 오직 국제적 프롤레타리아 혁명만이 실행 가능한 전망이었다.

더 심한 혼란 하나, 사회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유산 하나가 여전히 혁명적 운동에 부담을 주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화에 대한 도식적인 사고, 즉 당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관계에 대한 왜곡된 관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혼란은 특히 1902년 레닌의 저작, 『무엇을 할 것인가』 속의 테제에서 특히 분명하게 나타난다. 레닌은 계급투쟁의 퇴조기에 만들어진 이 저작을 러시아에서 그 시기에 유행했던 사상 학파인 경제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이용했다.

이 조류는 베른슈타인 이론의 작은 소산으로서, 계급투쟁이 엄격하게 경제적 영역에 남아있을 필요를 극찬했다. 이러한 발상은 맑스주의를 역사적 숙명론(fatalism)의 이데올로기로 변형시켜버리고, 노동자들의 수동적인 자생성(spontaneity)을 숭배하며 당의 비활동성을 불가피하게 만들어 버렸다. 레닌은 이와 대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경제적 투쟁을 넘어서 정치적 투쟁으로 나아갈 필요성을 매우 강력히 역설했고, 혁명적 이론과 활동의 힘을 옹호했다. 경제투쟁의 궁극적인 목표를 추진한다는 옳은 관심에서 시작하여, 레닌은 그 반대쪽으로 ‘막대를 너무 구부려버렸다’. 비록 그가 투쟁의 경제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 사이에 경제주의자들이 도입한 잘못된 분리에 대항해서 이러한 투쟁들의 정치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대답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을지라도, 레닌은 경제적 투쟁을 과소평가하고 말았다. 방어적인 투쟁은 더 이상 계급의식 발전의 비옥한 토양으로 보이지 않았고, 운동의 정치적 차원은 ‘생산관계들의 영역의 외부에서’ 발전했다. 경제와 정치는 물론 만나긴 하지만, 무한에서야 비로소 만나는 두개의 평행선들과 같다. 더욱이 당은 이 융합을 조직하고 노동자들에게 의식을 가져다줄 수 있는 유일한 실체가 된다.

레닌의 논의가 실상 사회민주주의의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책 속에 카우츠키의 저작들로부터 문구들을 그대로 취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요점1901『새로운 시대』(Neue Zeit) 실린 카우츠키의 글에서 인용된, 이제 유명해진 문구들에 포함되어 있다.

 

물론 사회주의는, 일종의 교의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이 그러하듯이, 근대 경제 관계에 그 뿌리를 갖고 있고, 그리고 그 계급투쟁과 마찬가지로, 대중의 가난과 비참함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부터 출현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계급투쟁은 나란히 생겨나는 것이지,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아니며, 각각 다른 조건들 아래 나타난다. 근대 사회주의 의식은 오직 심오한 과학적 지식(scientific knowledge)을 기초로 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사실 근대 경제학(economic science), 말하자면 근대 기술만큼이나 사회주의 생산에 있어서 한 조건이며, 프롤레타리아는 아무리 바란다고 해도 그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창조할 수 없다. 둘 다 근대 사회 과정에서 일어난다. 학문(science)의 견인차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부르주아 인텔리겐챠 (bourgeois intelligentsia)이다. 근대 사회주의가 발생한 것은 이 계층의 개별 성원들의 정신 속에서 였고, 또한 이것을 지적으로 가장 발전한 프롤레타리아들에게 전달해서 그들로 하여금 조건이 허락하는 곳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 속으로 도입할 수 있게 만든 것도 이 계층의 개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의식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외부로부터 도입되는 것이지, 그 속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계급의식이 경제투쟁에서부터 기계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레닌의 오류는 계급의식이 경제 투쟁을 바탕으로 발전할 수 없고 당에 의해 외부로부터 도입되어야 한다고 믿은 것에 있었다. 당과 노동자들의 투쟁 사이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관점은 결국 다음과 같은 말이 레닌의 펜으로부터 나오게 되는 신비주의의 한 형태를 초래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의 역할이, 자생적인 운동 너머로 비상할 뿐만 아니라 그 운동을 일으켜 세워 자신의 강령으로 만드는 ‘정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가?”(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기술적 학문적 지식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쟁취에 관한 사회민주주의의 관점과 매우 멋지게 융합된 지적 전문가들 특유의 재산이라는 점에 대해 이보다 더 나은 변명이 있는가? 당이 부르주아 국가를 장악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위해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권력 장악에는 권력의 고삐를 쥘 관리자적 능력을 가진 유능하고 지적인 기술자들이 존재할 필요가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녀의 저작 『사회개량이냐 혁명이냐』에서 이미 계급의식과 투쟁 사이의 분리,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경제적 측면들과 정치적 측면들 사이의 분리가 초래한 다른 궤도 이탈을 다루었다. 카우츠키와 레닌은 사회주의 의식을 생산관계의 외부에 위치시키면서 공산주의 혁명과 그 발전을 추상적이고 종교적인 이상으로 축소시켰다. 그러한 견지에서, 사회주의 강령과 혁명의 필요는 더 이상 경제 현실의 결과물이 아니며, 계급투쟁의 객관적인 조건들의 산물이 아니다. 더 이상 자본주의의 명백한 내적 모순들이나 그 붕괴의 긴박함을 반영하지 못하고, 자체의 속성인 완벽성에만 설득력의 근거를 두는 그러한 일종의 ‘이상(ideal)’으로 축소시켜 버린다 . 룩셈부르크는 그녀의 비판을 계속한다 :

 

우리는 여기서, 간단히 말해서, ‘순수 이성’으로써 사회주의의 강령을 설명하는 것을 본다. 우리는 여기서, 좀 더 간단한 언어를 사용하자면, 사회주의에 대한 관념주의적 설명을 본다. 사회주의의 객관적 필요성을 설명하는 것은, 사회의 물질적 발전의 결과로서 사회주의를 설명하는 것은 실패로 돌아간다.”(룩셈부르크, 『사회개량이냐 혁명이냐』, 1898)

 

1904년 그녀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좀 더 직접적인 답변으로 혁명가들의 개입이 처한 세계적 틀을 개관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완전한 해방을 위한 국제적인 운동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특수한 과정이다: 문명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은 그들의 의지를 모든 지배 계급들에 반대하여 그리고 의식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의지는 오직 현존하는 체제의 틀을 넘어서야만 만족될 수 있다. 대중들은 이 의지를 현존하는 사회적 질서에 저항하는 일상적인 투쟁의 과정 속에서, 즉 자본주의 사회의 한계 내에서 획득하고 강화할 수 있을 뿐이다. 한 편으로, 우리에게는 대중들이 있고, 다른 한 편으로, 그 역사적 목표는 기존 사회 바깥에 위치한다. 한 편으로 우리는 일상적인 투쟁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사회 혁명을 한다. 이런 것들은 사회주의 운동이 자신의 길을 만들며 나갈 때 통과해 나가게 되는 변증법적 모순의 측면들이다. 따라서 이 운동은 자신을 지속적으로 위협하는 두 가지 위험들 사이의 중간 위치에서 지그재그로 항해함으로써 가장 잘 나아갈 수 있다. 그 위험의 하나는 그 대중적 성격을 상실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목적을 포기하는 것이다. 하나는 종파의 상태로 되돌아 침몰할 위험이며, 다른 하나는 부르주아적인 사회 개량 운동이 되어버릴 위험이다.”

(룩셈부르크, ‘사회민주주의의 조직적 문제(Organisational Question of Social Democracy)’, 1904년 『새시대』(Die Neue Zeit)에서, 우리의 강조)

 

트로츠키 역시 레닌에 반대하는 논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상 투쟁과 계급의식의 관계에 대한 그 정확하고 변증법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그는 ‘정치적 대리주의를 타도하자(Down with Political Substitutionism)’이란 제목의 구절에서 1904년 다음과 같이 썼다.

 

정치적 대리주의의 체계는, ‘경제주의자들’이 추진하는 단순한 체계와 마찬가지로, 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 프롤레타리아트의 객관적인 이해관계들과 그 의식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기인한다. 이에 대해 맑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관계들은 존재의 객관적인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이해관계들은 매우 강력하고 불가피해서, 결국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들의 객관적 이해관계들의 실현을 자신들의 주관적인 이해관계로 만들 수밖에 없다. 이러한 두 요소 - 그 계급 이해관계의 객관적인 사실들과 주관적인 의식 – 사이에, 모든 삶의 부분을 이루는 영역 - 갈등과 대립, 오류와 실망, 변화와 패배의 영역 - 이 놓여있다.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전술적 통찰력은 전적으로 이러한 요소들 사이에 놓여 있고,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의 길을 단축시키고 촉진하는 데 있다.”(트로츠키, 『우리의 정치적 책무(Our Political Tasks), 1904, 우리의 강조)

 

혁명에 대한 이러한 생생하고 변증법적인 관점 – 여기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운명을 그 자신의 손에 거머쥔다 - 은 혁명적 과정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순수하게 기술적이고 조직적인 준비로 제한했던 경직된 생각에 대한 트로츠키의 응답이다.

그러나 레닌의 대리주의적인 『무엇을 할 것인가』의 관점과, 로자와 트로츠키의 전적으로 명확하고 건강한 관점을 단순히 대조한다면 이는 일종의 희화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1920년대에 와서 트로츠키는 노동의 군사화와 당의 강력한 독재를 옹호했다는 점이다.

 

첫째로, 레닌은 그 스스로 『무엇을 할 것인가』의 요지를 어느 정도는 ‘정정했다’. 1905년 계급의 구체적인 경험과 평의회의 등장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전투적인 활동에 의해 풍부해진 그의 후기 저작에서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테제들을 기계적으로 따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서, 볼셰비키 당은 계급의 방어적인 투쟁에 개입함으로써 그 스스로가 외부 요인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능동적이고 필수적인 분파임을 주장했다. 혁명 운동의 전체 경향은 당과 계급의 관계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전적으로 명확한 것은 아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독일 혁명가들도 러시아 혁명가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을 사회민주주의에 묶고 있는 탯줄을 완벽하게 절단하지는 못했다. 룩셈부르크가 카우츠키의 교의로부터 결별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1910년 룩셈부르크는 카우츠키를 기회주의의 수문을 열었다고 비판한 이후, 어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로부터도 지원을 받지 못했고, 그녀의 규탄을 ‘과장되었다고’ 생각한 레닌으로부터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당의 가장 기회주의인 멘셰비키로부터 조직적인 분리를 가장 명확하게, 가장 빨리 촉구한 것은 로자가 아니라 레닌이었다. 룩셈부르크와 카우츠키는 오히려 이러한 ‘분리’ 정책을 비난하고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재통합을 호소한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1919년 독일 공산당(KPD)을 창건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룩셈부르크는 여전히 주저했다. 그녀는 사회민주주의당(SPD)을 떠날 것인지 망설였고, 처음으로 소수가 될 위험이 있는 분리 조직을 건설하는 데 주저했으며, 새로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건설하는 레닌의 집요한 욕망 앞에서 뒤로 물러섰다. 룩셈부르크가 독일의 SPD에 집착했던 것은 사회민주주의의 객관적인 부패를 인식할 수 있는 정치적 지각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1916년 출간된 『사회민주주의의 위기(Die Krise der Sozialdemokratie)에서, 2 인터내셔널이 취한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태도와, 사회민주주의가 민족 부르주아지들을 지원한 점을 맹렬히 비판했다. 아니, 룩셈부르크를 구속하고 망설이게 했던 것은 대중의 혁명적 행동에 대한 그녀의 전반적인 생각과 그것이 당의 역할에 대해 갖는 귀결들이었다.

사회민주주의라는 학교를 통과해 온 이 혁명가는, 혁명 운동의 대중적 성격에 무조건적 애착을 발전시켜서, 그녀에게 당은 대중적 성격을 가진 어떤 것에도 적응시켜야 했다. 사회민주주의의 대중 정당에 대한 관점에 애착을 가졌기 때문에, 룩셈부르크는 운동에 앞서가는 것을 꺼려했다. 그녀는 노동자 ‘대중’들이 여전히 신뢰하고 있는 조직을 떠나기를 망설였다. 1914SPD와 제2 인터내셔널의 명백하고 결정적인 사망 이후에도, 룩셈부르크는 기회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대중 운동이라는 것을, 그리고 혁명가들은 이 운동을 가속화할 수 없다는 것을 계속 되풀이했다.

그녀에게는, "진정으로 혁명적인 노동자 운동에 의해 저질러진 오류는 가장 훌륭한 중앙 위원회의 무오류성보다 역사적으로 훨씬 훌륭하고 소중한 성과였다" (『사회민주주의의 조직의 문제』). 그래서 혁명가들은 옛 사회민주주의적 조직들을 넘어서는데 주도권을 발휘할 수 없었다.

노동자 운동의 집단적 성격을 강조할 때 룩셈부르크의 일반적 관심은 정확했다. 그러나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자들 자신들의 문제다”라는 주장은 정확하지 못한 실천적 결론들을 초래했다. 그리고 단순한 관심이 쉽게 이상주의로, 물신주의로 떨어질 수 있다. 대중적 성격을 띠는 모든 것에 대한 물신주의는 혁명가들을 제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로 떨어질 수 있는 위험한 경사로로 이끈다. 이러 저러한 조직이나 정치적 도구의 대중적 성격에 대한 애착은 (‘노동자 대중은 계속해서 투표하기 때문에’) 단순히 의회 정치를 지원하도록 오도될 수 있다. 룩셈부르크 사후 KPD의 뛰어난 대표자였던 폴 레비(Paul Levi)는 그 길을 뒤따랐다. 전적으로 대중들의 운동에 종속된 그의 ‘대중 당’이라는 개념으로 인해 그는 점차 사회민주주의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KPDSPD 좌파의 융합을 추진했고, 1922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서 축출된 후에는 USPD에 가입했으며, 결국 SPD에 다시 가입했다.

룩셈부르크는 혁명 활동의 집단적인 성격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동질화는 한꺼번에 이뤄지지 않는다. 당은 노동자계급의 광대한 다수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있을 때, 효과적으로 소수로 남아있을 수 있는 조직이다. 그 때의 당의 책무는, 대중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스스로 적응해가는 게 아니라 정치적 수준에서, 또한 조직적 수준에서 공산주의 강령 전체를 방어해 내는 것이다. 오직 이런 방법으로, 당은 계급의식의 동질화 과정에서 효과적으로 그 역할을 해낼 수 있다.

독일 혁명가들은, 그 시기의 대부분의 혁명가들처럼,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에 대해 전적으로 명확하지만은 않았다. 대체로,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 평의회를 권력 장악을 위한 기관으로 보았다. 1920년까지 모든 경우에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은 혁명에서, 권력의 실천에서 평의회의 탁월한 역할을 강조했다. 그러나 어떤 공산주의자도, 어떤 혁명적 조직도 지역 소비에트(이행기 국가의 토대)와 노동자 평의회 사이의 관계에 대해 명확하게 바라보지 못했다. 국가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사이의 혼란 또한 존재했다.

더욱이, 룩셈부르크가 1918KPD(스파르타쿠스 연맹, Spartacist League)의 창립대회에서 한 연설은 여전히 굉장히 애매모호한 여지를 남겨두고 있었다. 그 텍스트는 특히 부르주아 국가를 프롤레타리아트가 파괴하는 문제에 대한 정치적인 명료성이 부족하다.

 

그래서 우리에게 권력의 정복이 한 번의 타격으로 결과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점진적인 행동일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장악한 것은 끝까지 방어하면서 점진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의 모든 지위들을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평의회가 국가의 모든 권력을 가져야 한다(…) 한 단계 한 단계씩, 손에 손을 잡고, 모든 지역에서, 모든 마을에서, 모든 도시에서, 모든 공동체에서, 국가의 모든 권력은 조금씩 조금씩 부르주아지에서 노동자 병사 평의회로 옮겨가야만 한다.”

 

이 텍스트가 제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1.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 국가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그 국가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 (이 입장은 혁명적 의회주의의 흔적이 나타날 수 있도록 만들었다)

2.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 국가를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해야 한다는 것

3. 노동자들의 독재는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통해 표현된다는 것

부르주아 혁명의 도식과 유사한, 혁명에 대한 이러한 발상으로 인해, 프롤레타리아 당이 권력을 장악할 필요가 있다고 혁명가들이 생각한 것은 납득할 만하다. 스파르타쿠스 단원들이 옹호한 입장이 레닌의 입장과 많이 다르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권력 쟁취에 있어서 당의 ‘대중적’ 성격을 굉장히 강조했다.

 

스파르타쿠스 연맹은 단지 샤이데만-에버트의 인자들이 전적으로 그들 스스로를 불신했기 때문에 정부 권력을 차지하는 것을 거부한다(…) 스파르타쿠스 연맹은 오직 독일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절대 다수가 그 의지를 의심할 바 없이 명확히 선언함으로써만 정부 권력을 차지할 것이다.” (1918년 설립 당시 KPD(스파르타쿠스단 단원들)이 채택한 강령 제안, 붉은 깃발 (Die Rote Fahne)에서 출판, 191812)

 

대리주의의 기원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 사회민주주의적 사고의 무게라고. 그러나 ‘무엇이 대리주의 개념의 발전을 유발시켰나’는 질문에 대해서는, 우리는 대답해야만 한다: 국제 노동계급의 일반적인 정치적 미성숙함이라고.

 

자본주의의 상승기의 끝을 알린 제1차 제국주의 전쟁이 19세기 노동자 운동과 그 당면 목표들에 있어서 돌이킬 수 없는 절대적인 점을 찍었다. 전쟁에 대한 인민의 혐오는 빠르게 정치화되어 유럽의 주요 국가에서 국가들에 대한 전면적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의 다수는 과거의 유물(이제는 계급 적의 산실이 되어버린 제2인터내셔널의 정책들에 집착하는 것)을 완전히 폐기시킬 수 없었고, 새로운 시대의 함의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었다. 전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도, 그들의 정치 조직도 ‘전쟁과 혁명’,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새로운 시대에 프롤레타리아 투쟁에게 요구되는 것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이 시기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영웅적 투쟁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물결은 유럽에서 노동자계급의 학살 속에 익사했다. 러시아 혁명 시기에 노동자 계급 전체의 지침이었다는 사실이 그 고립이 심각한 위험이었다는 사실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혁명적 봉기들 사이의 일시적 간극조차도 그러한 위험을 내포할 수 있었지만, 1920년경 그 격차는 점점 더 벌어져서 다시 이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J.A. ‘러시아 혁명의 변질 (The Degeneration of the Russian Revolution)’, 『인터내셔널 리뷰(International Review), 3, 1975)

 

그러나 계급, , 그리고 국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혼란은, 계급이 충분히 강하고 혁명적 운동이 격동기에 있는 한, 구체적인 투쟁의 경험으로 극복될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 노동자들의 실천은, 노동자 당은 비록 자체가 그 계급에 속한 소수라 할지라도 노동자계급 전체의 활동을 대체하는 것은 물질적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191710, 러시아에서 누가 권력을 차지했는가 하는 질문은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의 역사와 실천으로 대답할 수 있다. 봉기의 전날 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소비에트들의 회의 (a Congress of Soviets)의 소집을 요구해서 그 회의에서 무장 봉기의 준비를 촉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고, 지역에서 충분한 지원을 받고 있다고 느꼈다. 소비에트는 그 회의의 역할이 “혁명 권력을 조직하는 문제에 대해 해답을 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소비에트와 공장 위원회에서 볼셰비키 당이 불굴의 선전을 펼친 이후, 노동자들 다수는 결국 그들 스스로 권력 쟁취를 선언했다. 군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페트로그라드에서 봉기를 준비한 것은 바로 <혁명 위원회>였다. 이 위원회는 소비에트, 해군, 공장 위원회, 철도와 적위대(Red Guard, 무장된 노동자들)에서 파견된 대표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비록 볼셰비키가 그 속에서 지배적이었다 할지라도 당의 기관은 아니었다. <혁명 위원회>는 전체 노동자계급과 지속적인 접촉을 유지하는 상태였고, 끊임없이 계급의 통제 하에서 행동했다. 그것은 소비에트와 공장 위원회에 직접적으로 연결된 기관이었다. 병영, 공장들, 위원회와 당 사이의 접촉은 한 순간도 끊기지 않았다. 생생하고 지속적인 연결이 계급의 집단의지를 굳히면서 모든 기관들 사이에 존재했다. 비록 일상적인 군사행동들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이뤄졌을 지라도 노동자들 전체가 결정했고, 그들의 손에 역사의 고삐를 쥐고 있었다. 이랬기 때문에, 트로츠키가 작은 그룹의 ‘음모론자들’, <혁명 위원회>로써 권력을 차지하려했다고 기소되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포크로브스키(Pokrovsky)교수는 소비에트냐 당이냐는 양자택일의 바로 그 중요성을 부인한다. 군인들은 형식주의자가 아니라며, 그는 웃는다. 그들은 케렌스키(Kerensky)를 전복시키기 위해 「소비에트 회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그 모든 농담과 더불어 그런 식의 표현은, 왜 당으로 충분하다면 소비에트 따위를 만드는가?라는 설명되지 않은 문제를 남긴다. 그 교수는 계속해서, ‘합법적으로, 즉 소비에트의 합법성으로써 모든 것을 행하려는 이러한 열망으로부터는 아무것도 결과되지 않았고, 권력이 결국 마지막 순간에 소비에트에 의해서가 아니라 명백히 비합법적인 특별 조직에 의해 쟁취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라고 말한다. 포크로브스키는 여기서 트로츠키가 소비에트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군사 혁명 위원회’의 이름으로, 케렌스키의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인용한다.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결론이다. 군사 혁명 위원회는 소비에트의 선출된 기관이었다. 전복에서 위원회의 지도적 역할을, 이 교수는 조롱하지만, 대중들은 극히 열광하는 그 소비에트 합법성을 결코 위반하지 않았다.”(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3, 우리의 강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0월 혁명이 엄격한 부르주아 합법성 아래에서, 형식적 민주주의의 보호 아래서, 어떤 비밀 결사적 행동도 없이 일어났음을 암시하는가? 물론 아니다! 트로츠키가 말한 ‘소비에트 합법성(Soviet Legality)’은 단지 노동자들의 집단 의지의 필요성, 즉 혁명 과정 전체를 노동자들이 통제할 필요성 바로 그것이었다. 러시아에서 권력 쟁취는 어떻게 노동자들 전체가 혁명을 결정하고 통제할 수 있는지를 놀라운 방법을 보여주었다. 러시아 혁명사』에서 트로츠키는 이 통제가 어떻게 구체화되었는지, 노동자들이 소비에트를 통해 봉기를 어떻게 준비했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어떤 당도 실천적이고 결정적인 노동자들의 행동을 대체할 수 없다. 볼셰비키는 그들의 계급 안에서 단호하게 행동했지만, 그들은 노동자들을 대신해서 권력을 차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 노동자계급, 그리고 국가 사이의 관계의 본질과 당의 역할에 대한 이론적 혼란이 존재했다. 그리고 당은 단순히 의식의 수동적인 반영이 아니기 때문에, 1902년부터 맹아적으로 존재하던 이러한 오해들은 혁명의 퇴행을 확장시키고 가속화시켰다. 1918년부터 계속,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권력은, 그 정상에 볼셰비키 당이 앉아있는 국가기구들에 의해 제한되고 억압되어 왔다. 권력 장악후, 볼셰비키 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단위 기관들과 갈등하게 되고, 그 스스로를 통치의 당의 면모를 드러냈다. 이렇게 당의 권력이 평의회 권력을 대체하는 것은, 20년대 초의 트로츠키의 저작 『테러리즘과 공산주의(the Terrorism and Communism)- 크론슈타트 학살과 같은 행동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내용을 이미 포함하고 있던 비극적 저작 – 에서 (노동의 군사화와 함께) 이론적으로 정당화되었다.

 

우리는 소비에트 독재를 당 독재로 대체했다고 여러 번 비난받았다. 그러나 소비에트 독재는 오직 당 독재를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었다고 완전히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당의 이론적 비젼의 명확함과 그 강력한 혁명조직 바로 그 덕분에, 당은 소비에트가 볼품없는 노동자들의 의회(parliaments of labour)로부터 노동자들이 우위를 갖는 기관으로 변화될 가능성을 제공했다. 노동자계급의 권력을 당의 권력이 이렇게 ‘대체’하는 것에, 우연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사실상, 대체란 전혀 없다.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의 근본적인 이해관계를 표현한다. 역사가 그러한 이해관계들을 전적으로 당대의 질서가 되도록 만든 시기에,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자계급 전체의 대표성을 자각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트로츠키, 『테러리즘 또는 공산주의』)

 

일단 당과 국가가 노동자계급 전체의 공언된 ‘대표자’가 되고나자, 그들은 절대 틀릴 수가 없었으며, 비록 전체 노동자계급에 대항하게 될 지라도, 학살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항상 옳았다. 그 순간부터, 사회주의 자체는 당과 국가의 일이 되어버린다. 그 순간부터 러시아 국가는 평의회를 파괴하기 시작했고, 이는 혁명의 힘을 파괴하고 반혁명으로 빠져드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심각한 혼란들과 나란히,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공동전선(United Front)의 개념, 대중 정당을 통해 최소 강령을 보호한다는 생각, 노동조합 작업의 필요성, 혁명적 의회주의 입장 등을 발전시켜갔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혁명적 물결의 퇴조에 저항하며 공산주의 원칙들을 그대로 지키려 노력하기 보다는, 오히려 더욱 더 이러한 후퇴에 전념하고 이러한 실천들에 적응해나고 있었다. ‘전술’과 원칙들 사이의 차이는 제2인터내셔널의 안에서 그랬던 만큼이나 발전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이해를 항상 염두에 두기보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더더욱 러시아 국가의 대변자가 되었고, 일국 사회주의 이론(the theory of Socialism in One Country)을 선택했을 때, 그 조종을 울렸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의해 옹호된 이러한 테제들은 단지 러시아의 국가자본주의의 강화를 옹호하기 위해서 제출되었을 뿐이었다. 바로 그 지점부터 볼셰비키 당은 반혁명의 가장 유순한 도구가 되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유산과 그 퇴행에 대한 반응

인간의 몸은 병균에 의해 공격받으면 항상 반응을 일으킨다. 인간의 몸은 나쁜 것을 점검하여 파괴하도록 항체를 만들어낸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조직도 같은 방법으로 반응한다. 비록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바이러스에 심각하게 공격받을 지라도, 혁명적 조직은 죽음으로부터 구제될 수 있다. 삶의 불꽃이 그대로 남아있는 한, 그 안에서 일련의 방어기제로써 건강한 반응을 재촉한다. 그러나 그 병든 조직이 프롤레타리아 진영을 떠나는 순간 그 조직의 그 죽음은 역행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는 단호하게 그 시체를 포기하고 투쟁의 새로운 무기를 재구축할 수밖에 없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점진적인 퇴행은 가장 건강한 혁명적 인자들 사이에 분출을 촉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출은 얼마나 어려웠던가! 오늘날 모든 것을 새롭게 날조하려 하고, 자신들의 우수한 지적인 위치에서 역사를 심판하는 이들은, 실상은 순전히 유아적인 태도로 그 시기에 ‘일어났어야만 했을’ 일들을 상상하며, 그들의 추상적인 도식을 벗어나는 모든 것들을 비난한다. 우리는 역사를 심판하지 않는다. 단지 미래를 위한 교훈들을 끌어낼 뿐이다. 우리가, 혁명적 물결의 퇴조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위기를 마치 그것들이 볼셰비키들의 마키아벨리적 계획의 산물인 것처럼, 마치 볼셰비키들이 1902년부터 그들의 쿠데타를 준비한 것처럼 분석한다면, 그것은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안에서 나타난 좌익 분파에게 모든 진실의 미덕을 부여하며 이것을 이상화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우스운 일일 것이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재난을 가져온 반혁명 과정은 노동자 운동에 끔찍한 혼란의 씨앗을 뿌렸다. 심지어 1930년대의 암흑기동안 이론적인 정련화를 추구했던 사람들, 좌파공산주의의 인자들도 패배의 모든 함의들을 알아보기 위해서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어떤 좌익 분파도 그 문제들에 대한 모든 열쇠들이나 ‘모든 진실’을 쥐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끔찍한 패배의 남겨진 모든 흔적들과 그들의 정치적 입장들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변형되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혁명가들이 겪었던 호된 시련들은 참으로 끔찍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계급은 1927년 이후 국제적인 수준에서 파괴되었고, 세계 혁명의 요새는 점차 더욱 더 고립되어 반혁명의 요새로 변형되어갔다. 그들의 국제 조직은 ‘일국 사회주의’ 이론을 도입한 순간에 결정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점점 더 고립되어가던, 영국,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 동지들은 추방의 고통 아래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의해 가장 비열한 종류인 중도주의자들과 기회주의자들과 합치도록 강요받았다. 이러한 파괴적인 타격 아래서,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굴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투쟁을 계속할 충분한 전투적 용기와 혁명적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퇴행에 대해 반응한 사람들은 소수였고, 그들은 조직적이고 일관적인 국제적 반대파를 결코 만들어낼 수 없었다. 세계의 일부(멕시코에서 아시아까지, 물론 러시아를 포함하여)에서 그들의 출현은, 정치적이거나 조직적인 수준에서 진정으로 조정되지는 않았다. 비록, 특히 KAPD, 보르디가 분파, 팽크허스트(Pankhurst) 주위의 영국 동지들과 벨기에 좌파 등등 사이에서 눈에 띄게 많은 접촉과 교류가 있었지만, 『일 소비에트』(Il Soviet,이탈리아 좌파의 기관지)가 좌파 흐름들의 많은 문서들을 출간했고 제2차 세계대전까지 국제적인 접촉들이 존재했었지만, 반혁명 충격의 무게와 힘은 좌익 분파를 심각한 고립으로 몰아넣었다.

우리는 인터내셔널 안에서 나타난 모든 좌익 분파나 반대파 조직들을 살펴볼 시간은 없다. 그래서 가장 의미 있는 좌익 흐름들이 볼셰비키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당에 대한 특정 입장에 어떻게 반응 했는지를 분석하는 것으로 만족해야할 것이다.

 

이탈리아 좌파

 

이탈리아 좌파를 형성하게 만든 모든 정치적 역사적 세부사항을 모두 살펴보지 않고, 간단히 이탈리아 좌파가 이탈리아 공산당에서 축출된 1926년으로 되돌아가면, 그들은 보르디가를 중심으로 하여, 주로 다음과 같은 것에 반대하여 싸웠다:

1.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혁명적 의회주의(revolutionary parliamentarism)’ 발상

2. 공동 전선(united front) 개념, 그리고 중도주의자와 명백히 부르주아 요소들과 함께 공산주의 당을 형성하는 문제와 관련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지시

3. 러시아 국가가 부르주아 국가로 발전한 것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차츰 국제주의적 입장을 포기한 것

4. 공산주의당들이 ‘반파시즘’과 ‘민주주의의 수호’를 기치로 내걸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함으로써 점점 부르주아 민족주의당으로 되어가는 것

 

그러나 당의 역할 그리고 노동자계급과 당의 관계 문제에 관해서, 이탈리아 좌파는 러시아 혁명의 퇴행의 모든 교훈들을 끌어낼 능력은 없음을 증명했다. 사실 이탈리아 좌파는, 혁명에서 당의 역할과 관련하여 전적으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테제와 입장(1920년 채택한)으로 되돌아갔다. 이것은 1921년과 1922년 출판된 이탈리아 좌파 공산주의자의 텍스트들에 잘 나타나 있다. 이 텍스트들에서 보르디가는 오래된 분리, 즉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발전된, 경제와 정치 투쟁 사이의 진부한 분리를 또 다시 채택했다. 현실의 정적인 사진들이 사회적 계급들을 부동의 경제적 실체들로 간주하는 것을 비난하는 세밀한 추론으로부터 시작하여, 보르디가는 노동자계급은 오직 혁명적 소수를 통해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계급으로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다는 부정확한 결론에 이른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를 경제적으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정치적 운동을 통해서, 즉 당을 통해서만 정의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르디가는, 계급이 단순히 경제적 범주만이 아니며 혁명적 당은 그 정치적 의식의 동질화와 분리될 수 없다는 정확한 전제에서 출발하여, 불합리한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그는 매우 단순하게, 의도하지 않게, 결국 그러한 계급의식과 당의 존재에 진정한 기초가 되는 경제적 물질적 결정들을 지워버리는 것으로 끝난다. 카우츠키가 개량과 혁명 사이의 분리를 만들었던 것과 꼭 같은 방법으로, 보르디가는 공산주의 혁명의 필요를 물질적 상황 속에서가 아니라, 이상의 완벽함 속에 둠으로써 결론을 내려버린 것이다.

당 활동을 떠나서는 계급의식과 계급행동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는 생각을 발전시킴으로써,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당의 존재가 노동자계급의 존재에 선행하게 만듦으로써, 이탈리아 좌파는 물구나무를 서서 손으로 걷는다. 만약 계급의 의식과 그 행동 의지가 계급 정당 안에서만 응축되고 구체화될 수 있다면, 또 만약 혁명적 조직들을 배출함으로써 스스로를 표현하고 의식을 향한 이러한 운동을 만들어내는 것이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아니라면, 만약 이것이 지금 있는 그대로라면, 그러면 당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되는가? 어떻게 발생하는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인가? 과거와 현재의 보르디가주의자들을 만족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대답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해, 혁명가들은 ‘노하우(knowhow)’를 알고 이해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노동자들에게 계급의식을 완성된 채로 가져다주는 지식인들인 것이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외부에 있는 인자들이다.

바로 이처럼 지나치게 단순하고 틀린 발상이 <이탈리아 공산주의당(PCI)>의 텍스트 (공산주의 강령, Programma Communista)에 나타나는데, 이는 오늘날 이탈리아 좌파를 가장 잘못 희화해서 제시한다. PCI에 따르면, 한 편으로, 우리에게는, 프롤레타리아 군대의 총사령관격인 당의 직접적인 개입 없이는 당면주의(immediatism)를 넘어설 능력이 없는 대중들이 있고, 다른 한 편에서는 당이 있는데, 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이해관계를 생각하고 진정으로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유일한 실체이자, 변하지 않는 공산주의 강령의 유일한 담지자라는 것이다. 혁명이 무엇보다 의식적인 혁명인 한(PCI는 이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유일한 의식적인 기관, 즉 그 자신들의 당이 이끌고, 지휘하고, 만드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자신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하나의 계급으로 스스로를 형성하도록 보증하는 것은 당이기에, 그 당이 권력을 잡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행하는 것은 논리적이게 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그러므로 공산당의 독재가 될 것이며, 정부의 당이 될 것이다. (참조: ‘이탈리아 공산당의 『기권주의 분파』(Abstentionist Fraction)의 테제’, 1920)

그러나 그렇게 충격적인 논증들을 앞에 놓고 제기돼야만 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 만약 노동자들이 생각 없는 양떼들이라면, 왜 그들은 부르주아지의 명령보다 혁명가들의 명령에 따라야만 하는가? 어떻게 그들은 당이 제시하는 혁명적 지향을 판별할 수 있게 될 것인가? PCI의 답변을 들어보자. “프롤레타리아트가 당을 따른다면, 그것은 수동적인 복종의 영향 때문이 아니다. 당이 결정하고, 계급이 ‘복종’한다고 결론짓는 것은 분명 불합리하다.” 그러나 PCI에 따르면, 그것은 대중들이 당의 신성한 지성의 일부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만약 당이 효과적인 지도 기관이 될 수 있고 되어야만 한다면, 그리고 만약 소비에트들을 강제해서 권력으로 인도할 수 있게 해 줄 결정적인 영향력을 당이 쟁취해 낼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면, 이는 당이 「공산주의 선언」에서 이야기된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대중에 비해서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조건과 일반적인 결과를 알고 있다는 이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계급투쟁의 매 순간에 그리고 미래 발전들에 앞서서, 이 투쟁을 가능한 효과적으로 만들고 그 최종 목표를 향해 갈 수 나아가도록 만들게 될 목표들, 방법들, 그리고 조직화를 당이 가르쳐 줄 수 있고 또 가르쳐 주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투쟁의 필요에 의해 노동자들에게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실천적인 정치적 해답을 줄 수 있고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르 플로레테르(Le Proletaire), 269, ‘당의 지도력 없이는 혁명적 행동도 없다 (No revolutionary action without party leadership)’, 19786)

 

이 답변의 빛나는 명료성에 주목하라! 만약 노동자들이 당의 명령에 따른다면, 그것은 “노동자들이 당의 명령을 따를 수 있고 따라야만 하기” 때문이다. 만약 노동자들이 당의 명령을 따를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당이 가장 명확할 수 있고 명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실, 여기서 어떻게 더 자연스러울 수 있는가? 옛날에 사람들은 성직자들의 좋은 말들은 맹목적으로, 또는 믿음에 대한 ‘그들의 자유의지’로 따랐는데, 그것은 성직자들이 신성한 의지의 화신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미래에 노동자들은 당의 말을 따를 것인데, 왜냐하면 당이 공산주의로 향하는 길을 체화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의 정치적 명료성이라는 바로 그 기적적인 미덕이 노동자들로 하여금 당의 지시에 복종하며 따르게 만드는 것이다.

얼마나 경직되고 빈약하며 임기응변식의 시각인가! 보르디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안경 너머로 고정하면서 볼 수 없는 것은 바로 생생한 계급투쟁이다. 왜냐하면 당의 이론적 명료성이 노동자 투쟁에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그 자신들의 경험에 의해 연마된 그 자신들의 정치적 틀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프롤레타리아트(혁명가들의 개입만큼이나 객관적 조건에 자극받은)의 더 커다란 역량에 단단히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그러한 이론적 명료성은 쇠약해지고 경직되어 결국 죽어버릴 뿐이기 때문이다.

왜 노동자들이 그들의 당이 제안하는 그 방향(direction)을 수용할 것인가를 이해하는 문제는 단순한 강령의 옳음에 근거하지 않는다. 만약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이해하지도, 일상적인 경험 속으로 소화하지도, 그들의 세계적 역사적 이해관계가 표현된다고 보지도 않으면서, 당의 ‘명령(directives)’을 그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따르는데 만족한다면,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손발을 부르주아지의 영역에 묶인 채 내버려 두는 태도를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공산주의 혁명은 이것에 의해 심각하게 손상될 것인데, 왜냐하면 그러한 노동자들 측의 빈약한 정치적 신념이 계급의 적들에게 유리하게 이용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혁명의 유일한 보증은 노동자들이 당의 지도에 비록 그것이 적극적인 복종이라 할지라도, 복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집단적 힘에, 그들이 혁명적 활동의 목적과 수단을 이해하는 전반적인 역량에, 그리고 집단적 계급의식에 있다.

이탈리아 공산주의 좌파에서 유래하는 그룹들이 갖는 당에 대한 이 모든 혼란들은, 정확히 공산주의 혁명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과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가 의식적으로 되는 가를 이해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결여된 데에 기인한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은 하나의 생생하고 복잡하며 집단적인 과정 전체를 기술적 군사적 준비의 문제로 축소한다. 그들이 당에 의한 국가 권력의 쟁취와 동일시하는 공산주의 혁명은 정부의 지배권을 인수할 역량이 있는 ‘전문’ 직업 혁명가들을 필요로 했다. 그들은 볼셰비키의 당, 국가, 계급의 관계에 대한 오래된 혼란을 다시 채택함으로써 부르주아지의 권력 쟁취와 공산주의 봉기를 단순히 동일시한다.

 

국가의 통제권을 정복한 이후, 프롤레타리아트는 복잡한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일정한 준비와 전문화가 단순히 옛 체제내의 전통적인 기능들에 따른 직업을 기초로 하여 노동자들을 조직함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근본적인 실수다 (…) 우리는 정치적, 행정적, 군사적 준비의 종합을 요구하는 훨씬 더 복잡한 본질의 업무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한 준비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명확한 역사적 책무와 정확하게 부응해야 하며, 오직 정치적 당(the political party)에 의해서만 보증될 수 있다. 요컨대, 정치적 당은 한 편으로 혁명적 과정과 그 필요들에 관한 하나의 일반적이고 역사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계급의 최종적 일반 목적에 대한 모든 특정한 기능들을 하는 하나의 엄격한 조직을 가진 유일한 유기체이다. (…) 이 때문에 계급의 지배는 당의 지배일 수밖에 없다.” (보르디가. 『당과 계급 행동(Party and Class Action), 1921)

 

혁명의 완수를 (과거의 혁명들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소수의 정치적 ‘전문가들’에게 위임하는 이러한 왜곡된 관점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는 간단히 두 가지를 인용하겠다. 첫 번째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반대하는 뜨거운 논쟁 중에 쓰인 트로츠키의 저작, 『우리의 정치적 임무(Our Political Tasks)』에서 인용한다.

 

레닌이 사회민주주의자 자코뱅에 대한 공식을 만들어낸 바로 그 순간, 우랄지역의 그의 정치적 동료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의 새로운 공식을 고안하고 있었다. 우랄지역의 맑스주의자가 말하기를, ‘1871년의 빠리꼬뮨이 실패한 것은,- 그것은 그 안의 다양한 경향들, 서로 모순되고 상반되는 경향들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쓸데없이 말참견을 하고 수많은 논쟁을 벌였으나 행동은 거의 없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러시아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강하고 위력적인 조직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독재를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를 준비시키는 것은 다른 것들이 그에 종속되어야 되는 중요한 조직적 책무이다. 이러한 준비는 특히, 강하고 위력적인 조직을 지지하는 정신 상태를 만들고, 그 조직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을 포함한다. 어떤 사람은 독재자들이 나타나 그렇게 제멋대로 행동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나 이와 같지 않았으며, 프롤레타리아 당은 언제나 모든 자생주의와 기회주의를 거부해야 한다. 그것은 매우 높은 수준의 지식과 절대적인 의지로 단결해야 한다.(…)그 하나가 다른 하나를 함축해야 한다.”

 

이 철학은 다음과 같은 세 테제로 요약할 수 있다.

 

1. 독재를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를 준비시키는 것은 조직의 문제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독재자’의 왕관을 쓴 강력한 조직을 ‘받아 들이’도록 준비시키는 것에 있다.

2.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이러한 독재의 출현을 의식적으로 준비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다.

3. 이 강령에서 벗어나는 어떤 것도 기회주의의 표현이다.

어쨌든, 이 문서의 저자들은, 그 자신들에게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하는 독재처럼 보인다고 큰 소리로 말할 용기가 있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자치 행동을 통해 사회의 운명을 스스로의 손에 거머지는 것이 아니라, ‘강하고 위력적인 조직’, 즉 프롤레타리아를 지배하며 이를 통해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조직이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보장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사실, 정치적 지배를 할 수 있도록 노동자계급을 준비시키기 위해서는 , 혁명의 모든 행정 인력들을 지속적으로 통제하면서 노동자계급의 자율적인 활동(self-activity), 활동의 습관을 계발하고 배양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 이것은 국제적 사회민주주의의 중대한 정치적 책무이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 자코뱅’과 정치적 대리주의의 대담무쌍한 대변자들에게는, 국가 권력을 접수할 수 있도록 계급을 준비시키는 중대한 사회적 정치적 임무는 권력 기구의 구성이라는 조직-전술적 임무에 의해 대체된다.

첫 번째 접근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끊임없이 성장하는 계층을 적극적인 정치 활동에 참여시킴으로써, 교육하고 재교육하는 방법을 강조한다. 두 번째는, ‘강하고 위력적인 조직’의 상이한 단계들에 훈련된 간부를 선발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선발은 일을 손쉽게 하기 위해, 적합하지 않는 이들을 기계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완수 될 수 있을 뿐이다.”(트로츠키.『우리의 정치적 임무』, 1904)

그 뒤로 계속해서, 트로츠키는 ‘우랄지역’ 경향의 입장과 블랑키주의자들의 입장을 정확하게 비교했다. 사실, 블랑키주의는 “소수의 착취자"를 누르고 "절대 다수의" 착취당하는 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착취당하는 다수에 반대하는 착취하는 소수”에 의해 이뤄진 이전의 부르주아 혁명들을 구별 짓는 중대한 차이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특징으로 한다. 오늘날 보르디가주의자들이 혁명에서 당의 역할에 대해 갖는 시각은 블랑키주의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당을 “그 자체의 이론으로 완벽하게 단일체적이며 유일한 특출 난 구조물을 건설할 때가 오면” (공산주의 강령(Programme Communists,76) 출현하는, 통찰력 있는 전문가들로 만들어진 강철더미로 보았다. 노동자 의식의 유일한 방어자로 행세하면서, 우리의 보르디가주의자 동지들은 과대 망상적이고 유아적인 정신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혁명에 대한 음모적이며 반란자적 관점을 가졌다. 당에 대한 그들의 우스운 묘사는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우스운 묘사와 나란히 진행된다.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왜곡된 관점을 이미 19세기 맑스주의자들이 적절히 비판했다. 다음은 블랑키주의자들이 사회주의 혁명의 순간에 그들의 역할이라고 한 것에 대한 엥겔스의 언급이다.

 

음모의 학파 안에서 키워지고, 그 안에 있는 엄격한 훈련으로 단결된 그들은, 유리한 순간이 오면, 상대적으로 소수의 단호하게 잘 조직된 사람들이 국가의 지배권을 쥘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거대하고 무자비한 에너지를 보여줌으로써 대중을 휩쓸어 혁명으로 나아가도록 만들어서 지도자들의 작은 무리 주위에 결집시키는데 성공할 때까지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관점으로부터 출발했다. 이것은 특히, 새로운 혁명 정부의 손에 모든 권력을 가장 엄격하고 전제적으로 집중하는 것을 포함했다.” (엥겔스, 『프랑스 내전(The Civil War in France)』 서문)

 

이 두 인용문은 공산주의 혁명에서 혁명가들의 역할에 대한 생각과, 혁명 그 자체의 본질 사이에서 필수적이며 논리적인 연결고리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당의 역할을 과대평가한다는 것은 혁명을 그 중대한 집단적 힘으로부터 절단해버림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계급의식을 실체화할 권력을 당에게 준다는 것은, 계급의식이 완전히 꽃피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는, 대다수 노동자들의 의식의 현 상태를 기정사실로 여기고 그 약점을 경직시킴을 의미한다. 의식과 결단을 요구하는 임무를 혁명적 소수에게 위임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대단하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태도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복종하도록 고무할 뿐이다.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혁명가들은 그들 스스로 혁명의 길에서 장해물로 바뀐다.

공산주의를 그에 선행하는 사회로부터 분리하는 그 간극을 우리가 그렇게 강하게 강조하는 까닭은 이러한 덫을 피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계급의식과 단순한 이데올로기를 구분하려고 시도했던 것 또한 이러한 이유에서다.

사실, 당의 역할에 대한 대리주의의 개념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에서 기반 할 뿐만 아니라, 이행 국가와 당, 노동자계급 사이의 혼란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개념들은 계급의식에 대한 하나의 제한적인 이론으로부터, 잘못된 분석 하나로부터 논리적인 결과된다. 이탈리아 좌파에서 비롯된 대부분의 그룹들은, 레닌과 카우츠키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이론적 오류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 프롤레타리아 이론과 실천 사이의 진정한 동일성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계급의식을 살아 움직이는 과정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인 존재의 확인으로 보지 않았다. 당이 계급 외부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계급의식을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래서 보르디가주의자들은 의식을 지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성취해야 한다든가, 맑스주의가 ‘학문(science)’이 되어야 한다든가, 공산주의 강령이 고정된 교리(doctrin)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상이다. 이럴 경우에 혁명가들이 노동자들에게 의식을 전달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해박한 정치 전문가로 보여야만 하는 것이 정상이다.

이러한 혼란들은 또한 이탈리아 좌파 중에서 덜 경직화되고, 덜 획일화된 그룹들에서도 발견된다. <국제주의 공산당(Partito Comunista Internazionalista (Battaglia Comunista)>의 이론 기관지, 프로메테오(Prometeo)의 한 텍스트 속에는 계급의식에 대한 다음과 같은 분석이 있다 :

 

다시 한 번 우리는 공산주의 교리의 본질적인 지점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것에 따르면, ‘계급 본능’과 ‘계급의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첫 번째 것은 노동자 자신들의 자산인 노동자 투쟁에서 발생하고 발전한다. 그리고 그것은 물질적 이해관계의 적대로부터 비롯되며, 그러한 적대로부터 비롯되는 경제, 사회, 정치적 모순의 발전에 의해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마지막으로, 프롤레타리아들과 자본가들 사이 존재하는 어느 정도의 긴장에 의존한다. 두 번째의 것, 즉 의식은 계급 모순을 과학적으로 검토함으로써 발생하여, 이러한 모순에 대한 지식의 발전과 함께 성장한다. 그것은 계급의 역사적 경험에서 나오는 사실들을 검토하고 연구함으로써 살아가며 자양분을 공급 받는다. (…) 의식은 그러므로 정확히 ‘그렇게 되도록 하는 조건이 없어도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도입되는’ 요소이다 (카우츠키, 논쟁적 형식으로 ICC가 인용함, 『인터내셔널 리뷰 (Revolution Internationale), 12).

ICC의 논쟁은 그들이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반대로, 그 논의들은 이 동지들이 변증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 다시 말해서, ICC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학문의 견인차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다’ (ICC가 카우츠키와 레닌에 대항하여 재인용)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으며, 그들이 맑스의 독일 이데올로기를 이해한 것도 아니다. (…)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인가, 그렇지 않은가? 생산의 물질적 수단을 가진 사람들은 생산의 지적 수단도 가지고 있는 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착취당하는 그래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지배되는 계급이라는 것이 맞는가, 맞지 않는가?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근대 사회주의가 발생한 것은 이 계층의 개별 성원들의 정신 속에서 였고, 또한 이것을 지적으로 가장 발전한 프롤레타리아들에게 전달해서 그들로 하여금 조건이 허락하는 곳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 속으로 도입할 수 있게 만든 것도 이 계층의 개인들이었다’ (카우츠키와 레닌)라는 것도 사실이다.” PCInt(『계급과 의식 : 이론에서 정치적 개입까지(Class und Consciousness: from Theory to Political Intervention)』에서, 프로메테오, 1978년 전반기, 우리의 강조)

이 인용문은 보르디가와 레닌의 분석에서 우리가 강조했던 오류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PCInt의 추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옳은 전제, 즉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며,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 문장의 시작부터, 그들은 거의 완전히 무익하고 경직된 분석을 만들어낸다. 첫 번째 판단 오류는 다음과 같다: 혁명을 이뤄내기 위해 노동자들은 그들의 계급적 적들과 동일한 정도로 학문적으로 분석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급의식은 ‘계급 경험의 과학적 반영(scientific reflection of the experiences of the class)’이다. 그것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적대가 사상의 영역에 반영되는 것(the reflection in the domain of ideas)이며,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혁명적 파괴를 통해 이 모순이 극복될 수 있게 하는 주체적 요소이다.” 그래서 계급의식은 이데올로기와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정의되는데, 이 이데올로기 또한 객관적 현실이 사상의 영역에 반영되는 것이다.(참고, 맑스, 『독일 이데올로기』)

두 번째 판단 오류는 다음과 같다: 노동자들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있는 한, 그들이 생산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는 한, 그들은 역시 계급의식, 다시 말해, 혁명적 이데올로기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직 부르주아지의 성원으로서, 지적 생산 수단을 가진 혁명가들만이 노동자에게 사회주의 의식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공산주의 혁명은 부르주아지의 학문적 역량을 (노동자들을 위해) 이용함으로써 가능해진다는 불합리에 도달하게 된다. 계급의식은 이데올로기와 경쟁하지만 같은 도구로 연마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가 되고 마는 것이다!

변증법적으로 보이려고 애쓰는 중에 결국 PCInt는 자가당착에 빠지고 만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설명에 뒤얽혀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계급의식이 단순히 이데올로기적 반영이라면, 그것은 어떤 경제적 힘 위에 존재하는가? 노동자들에게 실제적으로 어떤 경제적 권력들도 없는데, 어떻게 그들은 이데올로기를 만들낼 수 있는가? 혁명가들에 의해 연마된 이데올로기는 공중에 떠 있는가? 그것은 계급투쟁의 내부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내부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가? 노동자들에게는 그 어느 때에도 지적, 물질적 생산수단이 없는데, 어떻게 그들은 그러면 공산주의 혁명과 전체 사회의 변혁을 이뤄낼 수 있는가? 그들의 단순한 “계급 본능”이 충분하다면, 왜 이미 혁명을 이뤄내지 못했는가? 어떤 기적적인 수단에 의해 혁명가들은, 노동자들에게 언제라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그 어떤 것을 그 계급에게 간신히 도입할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PCInt의 대답이 매우 불만족스럽고, 그들의 대답에 굶주려 있다:

 

여기에는, 사회주의 의식은 계급으로부터 나오는가, 아니면 ‘역사의 법칙을 어떻게 설명할 지 아는’ 사람들로부터 오는가라는 잘못된 문제설정이 있다. 그것은 변증법적 방법으로, 다시 말해 사회적 역사적 현실을 포착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기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된 문제설정이다. 그 해답은 사실, 그러한 양자택일의 바깥에 존재한다. 사회주의 의식은 계급의 경험과 그것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에 대한 과학적 성찰(scientific reflection on the experience)로서, 이 성찰을 수행할 수단을 가지며 자신들을 노동자계급과 정치적으로 동일시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발전된다.”(앞의 책)

아니, 동지들, 우리가 제기한 문제는 그렇게 쉽게 피해갈 수 있는 잘못된 문제설정이 아니었다. 우리가 제기한 문제의 핵심은 계급의식에 대한 두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들이다. “누가 계급의식을 보유하고 발전시키는가”라는 문제에 답하는데 실패하면, 동지들은 스스로를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고 모순 속에 머물게 된다. 당신들이 이러한 막다른 골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하는 ‘변증법적노력들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계급의식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이 문제에 대답하려 시도하며,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의 도움 없이도) 공산주의 혁명을 이뤄낼 수 있는가에 대해 해명하려 시도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의식의 유일한 담지자인 이유는, 어떤 경제적 권력, 어떤 생산수단도 갖고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은 행동과 사고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이론적 진화는 단순히 그 실천의 “반영”(a reflection of its practice)으로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세계의 철학적 해석이 아니라, 현실의 구체적인 변혁을 위한 능동적인 요소이자, 수단이다. 이론과 실천은 분리가 불가능하다. 오직 계급투쟁 속에서 노동자계급만이 사회주의 의식의 이 두 가지 측면을 통합시킬 수 있다. 혁명가들의 활동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전반적이고 집단적인 활동에서 특권적인 순간임이 확실하지만, 계급 활동의 여러 국면들 중의 하나(그렇지만 필수불가결한)를 구성할 뿐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계급의 적에 대항해 싸우면서 적의 것과 동일한 이데올로기적 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확실히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힘은 사실상, 착취당하지만 혁명적인 계급으로서 그 조건에 있다. , 사회에서 어떤 권력도 없지만 동시에 유일하게 모든 착취와 계급지배의 형식에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계급이라는 점이다. 계급의식은, 현실을 엄정하게 이해함과 동시에 실천적으로 변혁하는 것, 정확히 바로 그 사실을 특징으로 하며, 어떤 이데올로기도 어떤 ‘학문적인’ 이해도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위력은 전적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계급의식과 조직화에 있다. 계급에서 이러한 위력을 빼앗는 것, 즉 그 이론과 계급투쟁 사이에 수많은 매개들을 위치시키는 것은, 계급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달성할 역량을 빼앗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프롤레타리아트 전체가 구세계를 파괴할 수 없다면, 우리는 차라리 드러누워서 죽는 편이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의지도, 어떤 경건한 소망도 그것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탈리아 좌파가 혁명 이론의 풍부화에 많은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의 성취들을 보존하려 노력한 그 용기와 고집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퇴행,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무게가 여전히 오늘날 공산주의 그룹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ICC는 모든 것을 이해한 체 하지는 않는다. ‘계급의식의 유일한 담지자’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ICC의 성찰 작업이 기반하는 관심사는 정확히 말해서, 볼셰비키를 함정에 빠뜨린 오래된 덫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 혁명과 20년대의 혁명적 물결의 퇴조에서 최대한의 교훈을 뽑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경험에서 결과된, 우리가 보기에 중요한 교훈들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오직 통일되고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사회를 변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당, 어떤 소수도 이 책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트를 대신할 수 없다.

 

독일 좌파

 

독일 네덜란드 좌파는 20년대 초부터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의해 울려 퍼진 반혁명의 합창에서 벗어나려 노력했던 다른 하나의 혁명적 목소리를 대표한다.

독일 좌파는 ‘공식적인’ 공산주의당, KPD(s)에서 축출된 좌익 인자들이 설립한 KAPD를 중심으로 1919년에 재편되었다. KAPD, ‘동조하는 당’으로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이 허락되었는데, 이들은 주로 인터내셔널의 의회와 노동조합에 대한 입장 (1920년 호르터(Gorther)의 레닌에 대한 대답을 참고), 공동전선의 개념에, 그리고 민족 해방주의의 투쟁을 지지하는 것에 반대했다.

KAPD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다른 좌파 그룹들, 예를 들어 벨기에, 헝가리, 이탈리아, 멕시코, 불가리아, 덴마크 좌파와 접촉하여 일관된 좌익 반대파를 형성하려 했다. 이러한 기회는 KAPD1921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서 축출됨으로써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당에 대한 문제에서, KAPD는 전반적인 정치적 방향을 제시할 수 있고 당분간 소수로 남을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계급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강하고 일관된 당을 건설할 필요를 매우 정확하게 주장하는 점에서 그 공을 인정받고 있다 (1921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대회에서 발표하기 위해 쓰인, 당에 관한 테제들 중 제 7항과 8). 이것은 독일 좌파의 입장 속에서 보르디가주의자들이 보고 싶어 하는 ‘아나코-생디칼리스트’적 입장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당에 관한 테제들 전체에서, 당이 권력을 쟁취할 필요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아마 이것이 이탈리아 좌파가 KAPD를 비난해서 말하는 그 아나키스트적 변형인가 보다). 반면, 강조점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도구로서 평의회(당과는 별도로 존재하는)의 역할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네덜란드 좌파는 이탈리아, 영국, 헝가리나 멕시코 좌파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혁명과 그 패배로부터 모든 교훈을 다 뽑아낼 수는 없었다. KAPDKAI(1922KAPD의 인자들에 의해 창설된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문서에서도, 당과 국가가 평의회 권력들을 대체한 것이 러시아 혁명의 퇴행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 대해 어떤 언급도 없다.

반대로, 일련의 심각한 혼란들이 독일 좌파 안에서 발전했다.

 

1. 러시아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과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혁명 두 가지 모두로서(1921) 그런 다음엔 부르주아 혁명으로서 파악한 잘못된 분석 때문에, 정치적 당의 존재를 러시아 혁명의 부르주아적 본질의 근거로 보는 경향이 KAPD 안에서 발전했다.

 

2. 권력을 잡아야 하는 의회적인 당의 하나로 간주되는 것을 옳게 거부하고 그러한 거부를 이론화함으로써, KAPD-AAUD 안에서 정확히 ‘반-(anti-party)적’ 입장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경향이 형성되었다. 이 ‘반-인텔리(anti-intellectual)’ 흐름은 KAPD의 에센(Essen) 경향에서 그리고 그 후에 <평의회 공산주의자 연맹(League of Council Commmunists)>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잘 알려진, KAPD-AAUD와의 불화로 인해 1920년대 초, 오토 륄레(Otto Ruhle)를 중심으로 AAUD(E)가 결성되었다.

 

3. 정치적 당과 같은 별도의 존재를 거부하면서, AAUD(E)는 당과 평의회의 중간정도 되는 조직, <일반 노동자 연합(the General Workers Union)>(AAU)의 발전을 옹호했다. 이러한 분석의 그 마지막 귀결까지 추구한 일부 인자들은 반-조직적(anti-organisational) 분석에 기초하여 분열하다가 결국 스스로 해산했다. 1925년 륄레 자신은 결국 스스로 모든 조직된 정치 활동을 포기했다.

 

30년대 초부터, 독일-네덜란드 좌파로부터 남은 것이라고는, 고립된 ‘반-(anti-party)’적인 개인들, 반 데어 루베(Van der Lubbe)와 같은 테러리스트들, 그리고 AAUD(E)에서 나와서 공산주의 강령의 원칙들을 보존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조직의 필요성을 거부한 그러한 공산주의자들이 전부였다.

사실,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의 일반적 패배로 인해 그리고 혁명적 물결 동안의 독일 혁명가들의 허약함으로 인해 심각하게 타격을 입은) 이러한 독일 좌파의 이러한 인자들의 큰 실수는, 첫째로 그들이 쇠퇴기(decadent period)에 당의 본질과 기능에서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실패한 것에 있다. KAPD는 이 변화를 어렴풋이 눈치 챘다. 그것은 혁명적 시기와 의회주의 시기 사이의 차이를 정확하게 지적했고, 19세기 의회적인 노동자 정당의 역할과 사회주의 혁명 시기의 공산주의당의 역할 사이를 구분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의 모든 함축된 의미들을 독일 좌파가 완전히 흡수했던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KAPD 안에서 대중 의회 정당의 개념과 당의 개념을 혼란시킨 한 경향이 발전했다. 이 경향은 시기의 변화가 갖는 실천적인 귀결들을 모두 도출할 수는 없었기에, 볼셰비키의 대리주의적 실수를 노출할 수 없었던 까닭에, ‘욕조의 물을 비우려다 아기까지 버리고’ 말았다. 이 뒤에 놓인 추론 근거는 다음과 같다 : “그러한 당의 역할이라고는, 지도자로, 즉 그들의 위치에서 대중을 지배하고 권력을 휘두르려는 의회주의의 우두머리로 되는 것밖에 없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들은 이 역할을 거부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당을 지양할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 독일 좌파는 언제나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전반적 미성숙함으로 인해, 이론으로 무장하고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물결을 맞이할 준비가 된 혁명적 당을 만드는 데 무능력한 이 나라 혁명가들로 인해 고통받았다. 오랫동안, SPD 좌파의 인자들은 공개적으로 사회민주당과 결별하고 독립적인 당을 만드는데 망설였다. 이러한 이유로, KAPD는 경험이 거의 없는 어린 조직으로서 등장했다.

계급의 이러한 일반적 미성숙함은 독일 좌파의 시야를 흐리는데 큰 역할을 했고, 특히 계급들 사이의 힘의 균형의 본질에 대해, 혁명적 물결의 충격에 대해 그러했다. 이렇게 해서 KAPD1921년의 사건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패배의 시작을 알리는 것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을 혁명 운동의 고조의 상징으로 보았다. 이러한 과대평가로 인해 그들은 1921년 ‘3월 행동’이라는 모험을 감행했다.

독일 혁명가들의 수많은 망설임, 자신들의 역할에 대한 신뢰 부족, ‘3월 행동’의 실패 이후 쓰디쓴 패배주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퇴행과 혁명적 물결의 퇴조,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힘의 균형의 변화를 이해하는데 실패 : 이 모든 것들은 독일 좌파의 혼란, 비관주의 그리고 최후의 붕괴를 촉진해서 결국에는 테러리스트들의 행동에 절망적으로 의지하는 지점까지 이르도록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 시기에 대해 좀 더 실제적인 대차대조표를 그릴 수 있었던 이탈리아 좌파와 대조적으로, 독일 좌파는 반혁명기 동안 혁명가들의 책무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이해하기에는 그 스스로가 무능력하고 나약함을 증명했다. 이탈리아 동지들과 달리, 독일 혁명가들은 과거 투쟁의 성과를 모두 지켜낼 역량을 갖춘 분파를 자신들로부터 만들지 않았다.

이렇기 때문에, 오늘날 평의회주의 조직들은 결코 과거의 혁명적 물결과 명확하고 일관된 연속성을 유지하고 표현하지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비판했을 때의 그 독일-네덜란드 좌파의 강력함을 표현하지도 않고, 모든 약점과 혼란을 극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보르디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평의회주의자들도 계급의 경제 투쟁의 잠재적인 혁명적 본질을 부정했다. 혁명적 과정에 대한 그들의 분석은, 이탈리아 좌파의 분석과 마찬가지로, 결과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노동조합’ 수준의 투쟁과 의식을 넘어설 가능성과 필요성을 박탈해 버렸다. 보르디가주의자들에게는 이 무능력을 당의 존재가 보완하지만 평의회주의자들에게는, 아나코-생디칼리스트들에게처럼, 국가를 파괴하기에는 경제 투쟁 그 자체만으로 충분했다. 네덜란드 좌파의 명백히 경직된 예의 하나인, <다아트 엔 게다흐테(Daad en Gedachte)> 노동조합에 의한 파업과 공산주의 혁명 사이에 질적 차이가 없다! 이 그룹은 경제적 투쟁에 대한 변명을 불합리한 지점까지 밀고 나가서, 명백히 제2 인터내셔널과(…) 레닌의 ‘경제주의적’ 입장으로 끝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가 노동조합 수준을 넘어설 필요성을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해했던 레닌과는 달리, <다아트 엔 게다흐테>는 경제적 투쟁에 끊임없이 찬사를 보낸다. 투쟁의 양적 확장은 구세계를 뒤흔들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아트 엔 게다흐테>에게 있어서, 이러한 양적 축적(quantitative accumulation) 또한 질적 발전(qualitative development)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혁명은 일상적인 계급행동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보기를 들어 노동자들이 그들 스스로 혁명의 과정에서 높은 의식적 수준에 도달하는 사실만 보아도 그러하다. 혁명은 이러한 계급행동과 질적으로 전혀 다르지 않으며, 유일한 차이점은 양적인 면 뿐이다.” (다아트 엔 게다흐테, 19755)

<다아트 엔 게다흐테>에게, 노동자계급의 의식은 순수하게 경험적이며 즉각적인 것이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조직적 정치적 경험들을 일반화할 필요가 없다. 각각의 투쟁은 그 자체로 충분하며, 그 공장, 지역, 한정된 영역 안에 제한된다. 평의회주의자들은 경제 투쟁들의 혁명적 성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계급의식의 동질화를 통해 그러한 투쟁을 정치적으로 확장할 필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여기서 우리는, “운동이 모든 것이며, 목표는 중요하지 않다”라는 사회민주주의의 오래된 후렴구를 발견한다.

계급의식에 대한 이러한 당면주의적 사고로 인해 평의회주의자들이 노동조합주의와 지역주의로 비틀거리며 쓰러지게 되고, 투쟁에서 혁명가들의 역할을 완전히 방치하게 되는 것은 논리적이다. 어떤 경우에, 이러한 과소평가는 단순히 혁명가들의 역할을 전적으로 부정하게 만든다. 이런 식으로 <다아트 엔 게다흐테>는 엄격하게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활동의 한계 속에 머문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을 엄격히 경제적인 투쟁에 국한시키는 것에 대한 평의회주의자들의 변명을 그 마지막 결론까지 추구하면, 그것은 모든 혁명적 조직의 완전하고 단순한 자기-파괴로 끝난다.

평의회주의자들은 1920년대의 혁명적 물결의 성숙에 의해 남겨진 정치적 성과들을 거둬들이는데 있어서 보르디가주의자들보다 더 유능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더 이상 왕겨에서 알곡을 분리할 역량도 없고, 대리주의적 일탈을 거부하면서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 조직의 필요를 안전하게 보호할 역량도 없다. 평의회주의자들은 보르디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50년간의 반혁명, 50년간의 혼란과 이론적 당황에 치뤄진 희생이었고, 그러는 동안 흐름을 거슬러 헤엄치는데 성공한 혁명가들이 거의 없었다. 오직 <프랑스 좌파 공산주의>(Gauche Communiste de France) (1940년대와 50년대 『국제주의(Internationalisme)』라는 이론지를 발간함)와 같은 그룹만이 러시아 혁명의 경험이 남긴 소중한 성과들을 보전할 역량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국제주의』의 텍스트 중 하나인, 194810월 발간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당의 본질과 기능에 대해(On the nature and function of the political party of the proletariat)’에서 보이듯이, 이 그룹은 보르디가주의자들과 평의회주의자들의 입장들에서 드러난 정치적 변질에 물들지 않은 거의 유일한 그룹이었다.

결론

우리는 보르디가주의자들과 평의회주의자들의 혼란이 같은 기원을 가졌다고 반복함으로써 간단히 결론내릴 수 있다. , 방어적 투쟁의 혁명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들 두 가지 정치적 흐름들은, 겉으로 보기에 서로 그렇게 달랐지만, 혼란에는 함께 빠져들었다. 왜냐하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사이의 분리에 기반을 둔 어떤 정치적 입장도,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역사적 목적을 의식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혁명 계급임을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보르디가주의와 평의회주의가 향하는 곳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자신의 으로는 엄밀히 방어적인 영역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래서 그 차이를 메우는 것이 당이라고 반복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이 영역을 뛰어넘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모더니스트들은 노동자계급이 경제적 요구를 위해 투쟁하면, 그것이 마치 “자본을 위한 계급(class-for-capital)", 다시 말해 자본주의 지배에 완전히 종속된 경제적 범주의 하나인 것 인양 가장함으로써 더 심하게 못 박아 버린다. 의식에 대한 그러한 관점으로 인해 다수 모더니스트들이 쁘띠부르주아지적 절망에 빠져버린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보르디가주의자들과 평의회주의자들은 투쟁을 발전시키는 객관적 조건들로부터 계급의식을 분리시킨다. 그 둘은 모두 혁명가들을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 외부적인 요소로 파악한다. 보르디가주이자들이 보기에 의식은 프롤레타리아트 자체만으로는 발전할 수 없고, 그러므로 의식을 외부에서 가져오는 것이 문제이며, 그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당이다. 평의회주의자들에게 혁명가들의 역할은 철학적인 역할, 단순히 지적인 구경꾼들로서의 역할로 제한되어야만 한다. 이런 관점은 곧 혁명가들이 구체적인 계급투쟁의 바깥에 위치하도록 만든다. 그 둘 중 아무도, 계급의식을 정확하고 변증법적으로 사고하는 것과 그 계급의식이 꽃피는 것은, 혁명가들이 계급의 생동하고 적극적인 일부로서 이해하는 것과 나란히 나아간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4장 혁명가와 계급의 연결고리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이해관계와 분리되어 별도로 존재하는 어떤 이해관계도 갖지 않는다.”(공산주의 선언)

 

매우 단순해 보이는 이 짧은 어구가, 우리의 관심의 대상인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다. 이 어구는 그 자체 속에, 많은 해답을 갖고 있으며, 우리들에게 혁명가의 역할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이 어구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모든 것들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된다. 혁명은 진정 프롤레타리아들 자신의 일이며, 그 안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전투 역량이 집중되어 있는 노동자 평의회의 일인 것이다. 그러나 이 단위 권력, 모든 노동자들로 이뤄진 이 조직은 지속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노동자들의 세력은 전투 중에 재편되는 군대와 같다.”(판네쿡)

프롤레타리아트는, 적을 이기기 위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목표를 의식하기 때문에, 자신의 일부를 산출해서 계급의식의 성숙을 가속화할 수밖에 없다. 그 자신의 모순되는 상황 때문에 결국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러한 도구인 공산주의 조직을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공산주의 조직은 “기본적인 계급투쟁에서 역사적으로 등장하며, 변증법적 모순 속에서, 즉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투쟁기간 동안에만 자신의 군대를 소집하고 그 투쟁의 목적을 의식하게 된다는 변증법적 모순 속에서 살아간다.”(로자 룩셈부르크)

“ ‘(party)’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pars'에서 기원한다. 우리 맑스주의자들은 오늘날 당은 잘 정의된 계급의 일부라고 이야기한다.”(지노비에프) 공산주의 조직은 진정 노동계급의 한 분파를 형성한다는 점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막 비판했던 이론적, 실천적 오류들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왜 혁명가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외부적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그 일부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또한 왜 그들의 행동이 모든 노동자들의 행동을 대신할 수 없으며, 그들이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이론적, 실천적 운동을 대체할 수 없는지를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계급의식이 프롤레타리아트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의 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적 계급으로서 스스로에 대해 갖는 의식인 것과 마찬가지로, 혁명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관계는 기원의 차이에 기초하지 않는다.

혁명가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의 일부로서 살아가며, 그 의식을 동질화하는 데 기여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계급 전체와 동일한 투쟁에 참여하고, 동일한 전반적인 실천에 참가하며, 동일한 강령을 만들고 풍부히 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개인적인 보물로서, 그들의 영특한 두뇌의 성과로서 어떤 이론도 가지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들의 이론적 귀결들은 결코 이러 저러한 자칭 세계 개량가들에 의해 발명되거나 발견된 이념들에, 원리들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 그러한 이론적 귀결들은 다만 실제 계급투쟁으로부터, 우리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역사적 운동으로부터 솟아나는 실제 관계들을 일반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공산주의 선언)

 

공산주의 강령을 마치 그것이 10계명의 명판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혁명 강령은 신비스런 기원을 가진 것도 아니요, 변하지 않는 규칙도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계급 자체의 구체적인 산물이며 투쟁의 무기다. 혁명 강령은 사회와 노동자 투쟁의 궁극적 목적을 이론적으로 진술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들에 선행한 실제 발전에 대한 세세하고 구체적인 분석이자,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그 물질적인 특성들과 더불어 철저하게 분석한 것이다. 강령은 실현될 목적과 이러한 목적들로부터 결과되고 이러한 목적들의 일부를 이루는 수단들을 한 번에 그리고 동시에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수단들은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나오는 실제적인 조건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때문에 강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필요에 대한 이론적 정련이자 동시에 혁명적 행동의 지침이다. 또한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실천의 결실인 것이다

역사적 유물론의 이론이 만들질 수 있게 한 것은, 영국의 노동자계급의 구체적인 상황과 실레지아(Silesian) 노동자들의 경험이 아니었던가? 레닌이 스스로 썼듯이, “이 시기 (프랑스 혁명기간) 영국 노동자들의 운동은, 많은 면에서 미래의 맑스주의를 이미 찬란하게 예기하고 있다.그리고 1871년 빠리꼬뮨 이후에, 맑스와 엥겔스는 혁명적 이론이 변화될 필요를 깨닫지 않았던가?

 

그 문구(Ⅱ절 끝에서 제시된)는 오늘날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르게 서술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 25년에 걸친 대공업의 엄청난 발전, 그리고 이와 함께 노동자계급의 당 조직이 개선되고 확장된 점을 비추어 볼 때, 그리고 우선 2월 혁명의 실천적 경험에, 그 다음은 더 나아가 프롤레타리아트가 처음으로 2개월간 정치권력을 장악했던 빠리꼬뮌의 실천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 강령의 몇몇 세부사항들은 오늘날 낡은 것이 되어 버렸다. 특히 꼬뮌은, 노동자계급이 기존의 국가 기구를 단순히 장악하여 그것을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할 수는 없음을 증명해주었다.” (공산주의 선언』 1872판 서문)

 

이후에, 엥겔스는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1895)의 서문에서, 혁명이 임박하다고 보는 생각이 적절치 않음을 깨달았다. 그 기간의 혁명적 사상에서 또 하나의 또 다른 변화였다!

그러나 일단 사회 혁명의 시대가 실제로 시작되자, 투쟁의 새로운 조건들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다시 한 번, 혁명의 이론을 풍부화하고, 노동자들의 실천에서 교훈들을 끌어내며, 오래되고 낡아빠진 생각들을 과감하게 극복하고, 강령에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하는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할 필요가 있었다. 사회민주주의의 혁명적 좌파들과 레닌은 새롭게 열리는 시대에 직면해서 제2 인터내셔널의 테제들은 더 이상 적절하지 않음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첫 번째 사람들이었다.

우파 멘셰비키인 수카노프(Sukanov)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불가능함을 선언하기 위해서 사회민주주의의 강령을 기반하여 쓴 책을 인용하면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카우츠키에 의해 쓰여진 그 매뉴얼이 그 당시에 매우 유용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매뉴얼이 물질적 역사 발전의 모든 형식들을 예견했다고 보는 생각은 버릴 때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을 천치라 묘사할 수밖에 없다.”(레닌, 『우리의 혁명』, 1923)

 

이미 1903, <러시아의 노동자 사회민주주의당(WSDPR)> 대회는 생산력 발전과 자본주의적 사회관계 사이에 증대되는 양립불가능성과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그러나 이 관점은 여전히 추상적인 채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WSDPR의 멘셰비키 경향은 러시아의 경제적 낙후성을 이유로 러시아에서 예비적인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생각을 지지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1905년이 되어서야, 그 투쟁과 평의회 조직의 실천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성과 객관적 가능성을 증명했다.

1905년의 사건들과 소비에트 창설에 의해 처음에는 완전히 압도당했던 혁명가들은 프롤레타리아가 그들에게 준 굉장한 교훈들을 재빨리 인식했다.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에서 레닌은 이론적 형식으로, 이시기에 러시아를 포함한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스스로에게 부과해야 할 최종 목표, 즉 사회주의 혁명의 수행이라는 목표를 설계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경험에서 진정한 교훈을 뽑아낼 수 없었던 멘셰비키가 자신들의 잘못되고 실천적으로 증명하지 않은 신념을 강화해서 점점 부르주아 진영으로 빠져 들어가는 동안, 볼셰비키들은 반대로, 자신들의 계급을 계속 주시하며, 그들의 혁명적 역량을 증명했다.

19172월을 통해서 그들은, 비록 모든 것들이 전적으로 명확한 것이 아니었을 지라도(무엇보다 소비에트 // 국가 관계에 대해서는), 혁명에서 소비에트의 역할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실천에서, 레닌의 말처럼, “당보다 100배 더 좌파적”임을 보여주는 보기들은 충분히 많이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혁명가들이, 그들의 계급의 경험에 무관심하거나 자신들의 절대적인 무오류성 뒤로 은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프롤레타리아트의 실천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항상 관심을 기울여왔음을 보여준다.

이 이후에는, 오직 맹목적인 사람이나 변하지 않는 강령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머리를 모래에 쳐 박고 있는 사람만이 프롤레타리아 투쟁 그 자체를 통해 엄청나게 풍부해진 강령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맹목은 단순한 이론적 왜곡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결과를 야기한다. 왜냐하면, 맑스주의는 변하지 않는다라고 보르디가주의자들처럼 주장하는 것은 계급투쟁의 현실을 얼려버리고, 공산주의 이론에서 혁명적 내용을 제거하며 운동에서 비켜서 있는 것을 결과시키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강령의 “불변성”이라는 미명아래, 반세기 동안 반혁명적이었던 입장들을 자본의 좌익과 공유하는 것으로 끝날 수 있는 것이다

맑스주의의 입장에서 이야기될 때, 이론은 물질적 힘, 사회적 변혁의 힘을 부여받는다. 이제, “이론은, 그 자체가 대중들의 필요를 구현하는 만큼 대중들 속에서 실현될 뿐이다.(…) 사상이 스스로를 실현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현실이 그 자체 안으로 사상을 일체화하려는 경향이 있어야 한다.”(맑스) 혁명 계급의 필요를 구현하기 위해서, 혁명 이론은 사회 진화 자체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요소들을 정확히 일체화해야 한다. 만약 혁명 이론이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정밀화되고 세분화된 객관적 필요들을 통합해 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 그것은 경직되고 빈 껍질처럼 말라비틀어져, 더 이상 현재와 미래의 필요에 조응할 수 없는 죽은 문자가 된다. 왜냐하면, 혁명의 객관적 조건들이 더욱 더 명확해 질수록, 프롤레타리아트는 실천 속에서 그 조직적 도구들을 새롭게 하고 개선해 나가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투쟁의 도구들과 그 실천들을 자신들의 역사적 필요와 그 운동의 객관적 가능성들에 부합하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강령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그것을 유용하게 이용하고 완전히 실천할 수 있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실제적인 역사적 필요에 완벽하게 부응해야 하며, 단단한 현실로부터 그 풍부함을 끌어내야 한다. 강령은, 사회적 격변의 필요들에 순응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담지하는 계급의 교훈들을 흡수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기회주의와는 정반대이다.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에 반대한 것은 맑스주의의 정통과 무오류성의 이름을 내건 가장 해악적 형태의 기회주의자들이었다. 반면에 혁명가들은 그들 계급이 투쟁 중에 겪는 격렬하고 거친 삶으로부터 이론적인 힘을 끌어내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 한 적이 결코 없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목표, 이론 활동과 실천은 분리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화는 이론적이면서 동시에 실천적인 과정이다. 이론과 실천은 같은 토양에 뿌리는 내리고 있으며, 같은 원천으로부터 힘을 얻는다. 이론도, 실천과 마찬가지로 투쟁 속에서 성취되는 것이지, 외부의 중간자, 중간 매개물이나 ‘중재(mediation)’로부터 성취되지 않는다. 혁명적 이론은,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명확하게 공식화시킨 것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 고유의 것이며, 그 집단적 실천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관념적인 학문(abstract science)이나, 세계에 대한 단순한 지식이나, 철학의 일종으로서 간주될 수 없다. 단순히 세계를 해석하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그것은 또한 세계의 변혁을 돕는다.

 

이제 이 모든 것들이 혁명가와 그들 계급의 관계에 대해 갖는 귀결들을 검토해보자.

 

1. 첫 번째 귀결은, 다음과 같이 완전히 직접적이다: 만약 혁명 이론이 학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계급의식이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면, 혁명가들은 학자나 이데올로그들과 어떤 유사점도 없다! 과거의 부르주아지와 혁명적 계급들에게는,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분리, 사회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분리, 분업의 존재가 사상과 정치의 전문가들의 존재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회 변혁에 계급 구성원들 다수가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참여가 필요 없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경제적 하부구조의 수준에서 대격변이 발생했기 때문에, 과거의 혁명적 계급들은 그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의 방어를 좀 더 명확한 안목을 가진 정치가나 지식인들 소수에게 완벽하게 위임할 수 있었다. 정치 활동과 이데올로기적 반영의 전문화는 이러한 착취계급의 존재에 필수적이다.

 

지배계급의 소수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사회의 절대 다수에 대해 갖는 이 계급의 권력을 표현할 뿐이다. 이러한 대리주의는 부르주아지에게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왜냐하면 극단적인 분업과 기능분화에 기초하는 사회에서, 오직 정치 전문가들 소수만이 전반적인 이해관계에 대해 충분하게 의식적인 관점을 채택하여 그것과 모순되는 이해관계나 다양한 분파들에게 방향을 제시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도록 요구되기 때문이다.”(‘조직에 관한 결의문(Resolution sur l'Organisation)’, 『국제혁명(Revolution Internationale), 17, 19758)

 

반대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소수의 의식은, 그 소수가 얼마나 잘 알고 있든 간에 그 책무를 해내기에 충분하지 않다. 이러한 책무는 모든 시기에 계급의 끊임없는 참가와 창조적인 활동을 필요로 한다.”(ICC의 강령)

프롤레타리아트가 의식적이고 자치적으로 조직해야 할 필요성은 그 책무에서 어떤 식의 배타성과 전문성도 당연히 배제되도록 만든다. 그러나 혁명적 소수들이,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목적에 관한 명확한 의식을 가지고 투쟁을 지속할 수 없음의 한 표현으로서 그리고, 이 상황을 극복할 필수불가결한 도구로서 출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소수들이 고유의 특권적인 기능이나 책무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정치나 사상의 전문가들도 아니고, 계급과 그 단위 기관들의 ‘두뇌들’도 아니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라는 옷을 걸치지도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에 경제적 토대가 없기 때문에, 역할의 극단적인 분리, 즉 지적 노동과 육체 노동 사이에서 고유의 분리를 만들어낼 수가 없다. 프롤레타리아트 자체의 활동과 투쟁에서 분리된 전문가 집단을 만들어낼 수 없다. 더욱이 이러한 ‘무능력’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최종적인 이해관계와 그 전반적인 역사적 능력에 완벽하게 부응한다.

 

2. 또 하나의 중요한 귀결은, 혁명가들이 노동자계급을 혁명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당이 존재함으로써 혁명적 노동자계급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혁명가들이 존재하는 것은 바로 혁명적 계급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 계급의 전체 사회 운동의 원인이 아니다. 비록 혁명가들이 능동적이고 단호하게 참여한다고 해도, 그들은 하나의 동력에 대한 ‘최초의 동인(first mover)’이 아니라 그 산물이다.

 

존재가 의식적으로 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가장 의식적인 것들의 조직화가 이뤄지는 것이지, 조직된 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당과 계급투쟁을 연결하는 변증법적인 관계들 중 하나를 무시하고, 그들이 서로 동시에 반응하는 방법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문제에 대한 부분적이고 그릇된 관점이 될 수밖에 없다.”(R.빅터, ‘자발주의와 혼란 (Volontarisme et Confusion)’, 『국제혁명(Revolution Internationale), 7, 19724)

 

이 잘못된 관점은 능동적인 정신을 활력 없는 물질에 대립시킴으로써 끝난다.

 

“‘정신과 물질’ 관계는 숨겨진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헤겔주의적 사고의 문제적이고 희화적인 완성에 불과하다.(헤겔에게는, 관념이 현실에 선행하며, 현실 속에서 물질화된다. - 글쓴이의 주). 영혼과 육체, 신과 세계의 대립이라는 기독교적 도그마의 사변적 표현일 뿐이다. 이러한 대립은 사실상 역사적으로, 인류 자체 안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 극소수의 선택받은 개인들은 능동적인 영혼으로서, 영혼 없는 대중, 즉 물질로서 간주되는 나머지 인류에 대립된다.”

(맑스,『신성 가족(The Holy Family), 1845)

 

그래서 바로 부르주아지와 종교적인 이데올로기는, 생명이 없는 물질을 움직이기 위하여 외부의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정신이 필요하다는 믿음을 만드는 경향이 있고, ‘능동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스스로는 움직일 수 없는 저능한 대중들’에 대립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부르주아지와 종교이데올로기는 또한 그래서 중개물, 매개물, 장해물을 계급과 실천 사이, 그리고 실천과 이론 사이에 두려고 애쓰며, 오직 영웅적 소수만이 사건들에 대해 행동하고 ‘대중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만들려고 애쓴다. 파업과 혁명이 소수의 ‘전문적 선동자’의 인위적 산물일 뿐이라는 생각을 퍼뜨리려고 온 힘을 다하는 것은 바로 부르주아지다.

 

독일의 계급 의식적 노동자들은 모든 근대 노동운동이 한 줌의 무절제한 ‘민심선동자들과 교사자들’이 만들어낸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산물이라는 이러한 경찰 이론의 우스꽝스러운 측면을 이미 벌써부터 간파했다.(…) 만약 대대적인 파업이 혁명적 낭만주의자들의 격정적인 ‘선전’이나 당 지도부의 은밀하거나 공개적인 결정에 좌우되는 것이라면, 러시아에서 진정한 대대적 파업은 아직껏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Massenstreik, Partei und Gewerkschaften))

 

그러므로, 혁명가들은 계급투쟁을 ‘만들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계급의 혁명적 운동을 창조해내지 않는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러시아 혁명이 가르쳐주는 교훈은, 무엇보다도, 대대적 파업은 결코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거나 그냥 공허하게 ‘결정되고’, ‘선전되는’ 그런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특정 순간에 역사적 필요성으로 인해 그 사회적 관계들로부터 비롯되는 역사적 현상이라는 점이다.”(앞의 책)

 

이 생각은 트로츠키의 19172월 혁명의 분석에 의해 확인된다.

 

투간-바라노프스키(Tugan-Baranovsky)는 그가 2월 혁명은 노동자와 (병사로서의) 농민들에 의해 성취되었다고 이야기할 때 옳다. 그러나 아직 큰 의문이 남아있다. 누가 혁명을 이끌었는가? 누가 노동자들을 일어나게 했는가? 누가 군인들을 거리로 나오게 했는가? 승리 이후에, 이 의문들은 당 갈등의 주제가 되었다. 그것들은 보편적인 공식에 의해 간단히 해결되었다 : 아무도 혁명을 지도하지 않았다. 그것은 스스로 일어났다. (…) 마지막 순간까지, 이러한 지도자들은 혁명적 선언의 문제로, 많은 것들 중에서도 특히 혁명적 선언의 문제로 생각했지, 무장 봉기 문제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비보르크(Vyborg) 지부의 지도자 중 하나인, 우리의 친구 카이우로프(Kayurov)는 명확히 단언한다. ’절대로 당 중앙으로부터의 어떤 주도권도 느껴지지 않았다. (…) 페트로그라드 위원회는 체포되어 있었고, 중앙 위원회의 대표, 슬리아프니코프(Shliapnikov) 동지는 다가오는 (혁명의) 날에 대해 어떤 지시도 내릴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날, 누구도 기대하고 있지 않았던 혁명이 펼쳐졌고, 위에서 보기에 운동이 이미 쓰려져 죽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 그 때, 돌연히 부활하여, 강한 격변으로써 승리를 쟁취했다.”(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1)

 

3. 혁명가들은,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발전을 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의지의 힘으로써 실제 운동을 예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역할을 완수하기 위해 그들 계급의 집단적인 활동을 필요로 한다. 어떤 자발주의도 프롤레타리아트가 의식적이 되는 과정을 대체할 수 없다.

 

그러한 소수는 비판적 의식 대신에 교조적 개념으로, 유물론적 개념 대신에 관념론적 개념으로 대체한다. 실제 상황 대신에, 단순한 의지가 혁명의 동기적 힘이 된다. 우리가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은 현존하는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들을 바꾸고 당신 자신들을 정치적 권력에 적응하게 하기 위해, 15, 20, 50년의 내전과 국제적 투쟁을 겪어야만 한다’라고 이야기하는 동안, 당신은 반대로 그들에게 ‘우리가 즉시 권력을 쟁취하든, 침대로 돌아가 잠을 자든지 둘 중 하나다’라고 이야기한다.”(소수 빌리히-샤퍼(Willich-Schapper) 경향과의 분리를 완성한 <공산주의 연맹 중앙 위원회>1850년 회기에서 맑스 말, 우리의 강조)

 

이러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집단적 활동 동안에 노동자계급은 권력 쟁취와 사회 변혁을 위해 스스로를 준비하는 필수불가결한 체험수련을 하기 때문에, 그러한 활동은 대체될 수 없다. 어떤 소수 행동도 이 행동을 대체할 수 없다.

 

계급의 일부로서 혁명가들은 자본주의 안에서 계급투쟁 속에서는 물론이고, 자본주의의 전복과 정치적 권력의 행사시에는 더욱 더, 그 어느 때에도 계급을 대체할 수 없다.”(ICC의 강령)

 

혁명과 노동자 독재는 “계급의 일이어야 하지, 계급의 이름으로 지시하는 소수의 일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노동자 대중들의 참여가 충실하고 진보적으로 발산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항상 그들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있어야 한다.(…)”(룩셈부르크, 『러시아 혁명』, 1906)

 

지배권을 획득한 이전의 모든 계급들은 사회 전체를 자신들의 전유 조건들 아래에 복속시킴으로써, 그들이 이미 획득한 생활상의 지위를 보전하고자 했다. 프롤레타리아들은 자기 자신의 지금까지의 전유 양식을, 그래서 또한 지금까지의 전유 양식 전체를 철폐함으로써만 사회적 생산력들의 주인이 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들에게는 지키고 강화해야할 자신의 소유라고는 없다. 그들은 지금까지 사적 소유를 보호하고 보장한 것들을 파괴해야만 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운동들은 소수의 운동들이었거나 혹은 소수의 이익을 위한 운동들이었다. 프롤레타리아의 운동은 압도적 다수의 이익을 위한 압도적 다수의 자의식적이고 독립적인 운동이다.”(맑스, 『공산주의 선언』)

 

과거의 혁명 계급들과는 대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권력과 독재의 행사를 어떤 종류의 소수나 분파에게도 위임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의 해방은 노동자들 자신들의 일이어야만 한다.

혁명가들의 역할은 그러므로 노동자계급의 이름으로 권력을 차지하는 것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행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제 다음과 같이 반박할지도 모른다 : ‘당신의 말에 따라서 혁명가들이 단지 노동자계급의 일부에 불과하다면, 그들의 책무가 그들만의 고유한 어떤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그들이 프롤레타리아를 대신해서 행동하지도 권력을 쥐지도 않는다면... 그렇다면 그들은 뭘 해야 하는가?’

그러나 이런 의문 뒤에 있는 추론은 그것 자체로 잘못된 것이다. 보르디가주의자들과 평의회주의자들에게는, 당은 권력을 차지하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이들은 각각 다른 결론에 이른다. , 전자에게는, 당은 그러므로 반드시 권력을 차지해야 한다는 것으로, 후자에게는, 그러므로 당이 쓸모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추론하지 않는다. 만약 당이 권력을 잡지 않는다면, 이는 권력 장악이 당의 기능, 즉 존재 이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당의 실질적이고 필수불가결한 역할은 그러므로 다른 곳에 있다. 그리고 그렇다고 해서 당의 중요성이 감소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인 의지만이 역사의 방향과 혁명의 가능성을 결정할 수 있다고 이해하는 것은, 혁명가들의 조직과 당의 필수불가결한 성격을 마찬가지로 내포하고 있다. 이는, 그것이 어떤 불가능한 특유의 기능을 찾는 게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는 모순적 상황에 있고, 혁명은 그 결과가 미리 정해지지 않은 힘의 균형에 의존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사실상 프롤레타리아트가 생산 관계 속에서 갖는 바로 그 위치가, 자본에 저항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을 결정하고 그 계급의식의 발전을 결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상황은, 우리가 보았듯이, 프롤레타리아트로 하여금 지속적인 이데올로기적 압력, 국가의 권력 (…)등등과 같이 반대 방향으로 작동하는 사회의 모든 세력들의 희생물이 되게 한다. 바로 이 때문에, 오직 심오한 위기의 순간들에만, 부르주아 사회의 붕괴의 순간들에만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를 의식적인 계급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이 때문에, 심지어 그러한 순간에 조차도, 혁명에 관한 어떤 것도 결코 숙명적이지도, 기계적이지도 않다. 혁명적 운동, 프롤레타리아트가 끝까지 싸우려는 결심, 계급의식 - 이것들은 균질적인 현상들이 아니다. 그들을 보편화하기 위해서는 의지의 노력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언제나 전투에 있어서 단호하고 투쟁의 마지막 목적을 가장 빨리 보는 계급 인자들로부터 비롯된다.

파업이 발발했을 때 일반적으로 무엇이 일어나는지 보라. 임금이 다시 하락하고 작업 속도가 빨라짐으로써 공장 전체에는 잠재된 불만이 가득하게 된다. 어떤 노동자들은 그들의 불만을 이야기하고, 그들 끼리 토론한다. 파업에 대한 생각이 구체화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망설이며, 모든 부분들이 동등하게 전투적이지는 않다. 가장 단호한 노동자들은 토론을 통해, 그리고 그들 자신의 결단의 보기를 통해 반드시 그들의 더 많은 말없는 동지들을 설득시키려 한다. 이후에, 파업이 발발하면, 이런 인자들은 총회에서 나머지 동지들을 계속 자극할 것이며, 그들의 위상이 점점 더 증대됨을 볼 것이다.

그러므로 좀 더 전투적인 전위는 프롤레타리아트 내에서 자생적으로 나타나며 그 결단과 의식을 최대로 자극하고 일반화시킨다. 이런 점에서, 러시아 혁명의 역사는 본보기가 될 만하다:

 

러시아 혁명의 역사는, 가장 뛰어난 끈기와 자기희생으로 싸우는 이들이 바로 전위, 임금 노동자의 엘리트란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공장이 거대하면 거대할수록, 파업을 하는 사람들은 더욱 더 완강했고, 그 해 동안 더 자주 새로워졌다. 도시가 크면 클수록, 투쟁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역할은 그 만큼 더 컸다. 페테스부르그, 리가(Riga), 바르샤바(Warsaw)에서는, 즉 노동자들이 가장 의식적이고 가장 많은 이 세 도시에서는 노동자들의 총 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놓고 볼때, 모든 다른 도시들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파업자들이 있었다. (…) 러시아에서는 – 아마도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우도 그러하듯이 - 공업기술 노동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를 대표했다. 계급의 가장 뛰어난 인자들이 선두에서 전진했으며, 망설이는 자들을 끌어당기고, 잠에 빠진 자들을 깨우며, 약한 자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었다.(레닌, 1905년의 보고서』, 1917122)

 

우리는 이 과정이 1917년 혁명기 동안 좀 더 강력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본다. 여기서, 노동자들의 전위는 전 지역을 걸쳐서 선동의 진정한 작업을 수행했다.

 

그러나 봉기 전의 마지막 시기 동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효과적이었던 것은 이름 없는 노동자들, 선원들, 군인들에 의해 수행된 개별화된 선전이었다. 그것은 하나씩 하나씩 개종자로 만들어내고, 마지막 의심을 부숴버리며, 마지막 망설임을 극복했다. 몇 달간의 열광적인 정치적 삶은 낮은 지위의 수많은 간부들을 만들었고, 수십만의 거친 다이아몬드 원석을 교육시켰다. 이들은 위가 아니라 아래에서 보는 정치에 익숙했고,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학구적인 유형의 연설가들에게는 볼 수 없는 예리함으로 사실과 사람들을 평가했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이 선두에 섰다. 그들은 사상과 일, 행동에서 독립적이며, 특출난 혁명적 기질과 높은 정치적 문화를 갖춘 선전가와 조직가 혈통을 배출해 낸 세습 프롤레타리아들이었다. (…) 대중들은 더 이상 망설임, 의심, 중립의 중간적 입장을 참아내고자 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휘어잡고, 매료시키고, 설득하고, 정복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공장은 전선으로 대표를 보내어 부대와 합류했다.(트로츠키,『러시아 혁명사』 3, 우리의 강조)

 

그 혁명에 대한 이러한 생생한 이미지는, 당을 전지전능한 참모본부로 바꾸고, 프롤레타리아트를 수동적이고 복종적인 보병대 같은 대중으로 바꾸는 그러한 시대에 뒤떨어진 청사진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가!

혁명과 봉기를 향한 진군은 일종의 생동적인 발효 과정이다. 그러한 과정의 가속화와 전면화가 가능한 것은 오직 그 거대한 숨겨진 힘이 아직 터져 나오길 망설이고 있는 잠재된 삶과 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혁명적 전투는 외부로부터 떨어진 슬로건이나 명령에 의해 집단화되지는 않는다. 전위의 일은 단지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분출하는 결단을 ‘깨우는’ 것이다.

혁명가들과 노동자 전위의 행동은, 결코 프롤레타리아트의 전투성을 부정하거나 그 속도를 늦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전투성을 본질적으로 보증하는 것들 중의 하나이다. 그들의 활동은 결코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생성을 대신하지도 그렇다고 프롤레타리아트를 수동적으로 추종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 혁명적 경향들을 가속한다.

그러나 혁명가들이 혁명의 자발적 전위를 형성하는 수천 수백만 노동자들과는 구별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노동자 전위와는 별도로 그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엄청난 전투성과 결단, 그들의 활동의 지속성으로 구별된다. 혁명가들은 사실 그들 계급의 일부지만, 그저 여느 일부분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당이 존재하는 운동을 가속할 뿐이기 하지만, 이러한 가속화가 역사적 사건들의 진행 경로를 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그런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투쟁 동안에 노동자 전위가 자발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그것이 혁명가들의 정치활동에 의해 오랜 기간 동안 준비된 것일 때, 훨씬 더 비중이 크고 의미가 있다. 그러한 정치 활동은 투쟁에서 연속성을 유지하고 미래를 위한 무기를 제련할 수 있게 한다.

룩셈부르크는 러시아의 1905년 파업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민주당의 격렬한 선전과 그 정치적 리더십 덕분에, 도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1905년의 봄과 여름 경제 투쟁의 기간을 통해서 1월에 있은 서막 사건으로부터 교훈을 얻어내고 혁명을 위한 미래의 책무를 깨달을 수 있었다.”(우리의 강조)

투쟁에서 주도적이긴 하지만 일단 파업이 끝나면 일반적으로 사라지는 무수한 전투적인 노동자와는 대조적으로, 혁명가들은 지속적으로 조직된 채로 남아있으며 사회학적 기준이나 특정 환경이 아니라, 정치적 기준을 기반으로 존재 한다. 혁명가들은 자신들이 방어하는 정치적 강령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에서 그 역사적 이해관계를 촉진할 수 있고, 자본주의 착취에 대항 일상적으로 저항함에 있어서 완고하게 방어하며 운동의 마지막 목적을 가장 비타협적으로 담지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개입을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활동으로 본다.

그러므로 당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생동하는 부분이게 하고, 혁명가와 그들의 계급 사이의 연결고리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것은 노동자와의 ‘물리적인 접촉’도 아니며, 전면적인 행동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혁명적 조직이 프롤레타리아 투쟁에 의해 명확화된 정치적 입장을 흡수하는 능력이다. 이렇기 때문에 혁명가들은 그저 계급의 한 분파가 아니라 가장 전투적이고 결연하게 조직된 전위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은 한편으로는 실천적으로 모든 나라의 노동자 정당들 중에서 가장 선진적이고 단호한 부분, 모든 다른 부분들을 추동해 나가는 부분이다. 다른 한편 그들은 이론적으로 여타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에 비해서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진로, 조건들 및 궁극적인 전반적 결과들을 명확히 이해한다는 이점을 가진다. (…)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의 당면한 목적들의 성취와 당장의 이해관계들의 강화를 위해 투쟁하지만, 동시에 현재의 운동 속에서 운동의 미래를 대변하고 보살핀다.”(맑스, 『공산주의 선언』)

5장 혁명가들의 역할

계급으로부터 유래하며, 계급의 의식화 과정의 표현으로서 혁명가들은 스스로를 조직하여 이러한 의식화 과정에서 능동적인 요소가 됨으로써만 그렇게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제를 확고하게 완수하기 위해, 혁명가들의 조직은 다음과 같은 것을 수행해야 한다:

- 계급의 모든 투쟁들에 참여하는 것, 이때 조직의 구성원들은 결연하고 전투적인 투사로서 두드러진다

- 이러한 투쟁들에 개입하면서 항상 계급의 전반적인 이해관계들과 운동의 최종목표들을 강조하는 것

- 개입활동의 일부분으로 그리고 이것을 촉구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이론적 토론 및 심화에 기여하는 것. 이러한 일을 통해서만, 자신들의 전반적인 활동들을 계급의 과거 경험 전체와 그로부터 유래된 미래의 전망들 위에 구축할 수 있다.”(ICC의 강령) 지금까지 우리는 대부분 부정을 통해 진행해 왔다. 우리는 왜 계급의식이 이데올로기가 아닌지 살펴보았다. 왜 혁명가들은 권력을 취하지 않는지도 살펴보았다. 우리는 이제 혁명가들이 무엇이고, 무엇을 하며, 그들의 책무는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 사실, 혁명가들의 임무는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인 이해관계에 기반하여 운동에 명확한 정치적 방향을 제시할 목적으로 그들 스스로를 조직하여 계급의식의 발전을 능동적으로 돕는 것이다.

이 책무는, 겉보기에 그렇게 단순하지만, 굳건한 혁명적 의지와 명확함을 필요로 한다. 이제 이것을 그 모든 실제적인 함의들 안에서 검토해 보자.

혁명가들의 역할은 그들 스스로를 조직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의식을 획득하는데 지속적인 의지와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하나의 일관되고 집단적인 실체로서 혁명가들 조직 또한, 기회가 주어지면 즉석에서 이뤄지는 그런 과정이 아니다. 공산주의 조직이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필요에 부응해 출현한다는 사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부로서 자생적인 계급투쟁의 결실로서 등장한다는 사실은, 사건들의 밀물과 썰물에 의해 자신이 이리 저리 떠밀리도록 아무 생각 없이 내버려두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투쟁의 자생적인 흐름에 엄격하게 ‘복종’하는 것은 이러한 자생성의 진실로 혁명적인 방향을 변경해 버림으로써 끝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이해관계는, ‘매일매일’ 상황이 나타나는 그 대로, 그저 그 앞에 수동적으로 고개를 숙이는 것에 있지 않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자생성은 그 투쟁들이 의식적이고 자생적으로 최종 목표를 향하도록 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혼란스럽고 통제되지 않는 채 일어나는 일련의 산발적인 폭동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자생적으로 더 큰 숙달과 심사숙고된 자기 절제(self-control)를 향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적 미래가 없는 계층이나 계급들의 폭동들과는 달리, 혁명적 자생성은 확 타오르고 또 그 만큼 빨리 다 타버리는 것이 아니라, 불꽃은 없으나 연기는 많이 나며 끊임없이 천천히 타들어가다가, 현존하는 질서를 의식적인 방법으로 파괴하는 커다란 불이 되어 터져 나온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자본의 비참함에 대한 갑작스럽고 자생적이며 매우 예견 불가능한 반응은, 물질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투쟁을 일반화시킬 가능성, 그리고 오늘날 파업에서 미래의 파업을 준비하기 위해 교훈을 뽑아낼 가능성과 결합되어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생성은, 부르주아지와 맞서는 잠재적 능력과, 각각 분리된 저항들을 더 큰 규모의 행동, 더 광범위한 정치적 틀로 모아내는 능력을 포함한다. 이 잠재력은 혁명가들의 개입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만드는 것과 동시에, 그런 개입을 마치 사막에 뿌려진 씨앗처럼 죽은 문자가 되지 않게 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들의 목표를 지향하는 그 역량을 발전시키는데 당이 그토록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비옥한 토양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 역사적 이해관계에 부응하는 정치적 지향을 듣고,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동지들에게 말하기 때문이다.

혁명가들을 명확한 강령의 기초 위에 “별도의 정치적인 당” 속에 조직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의식적으로 투쟁의 주인이 되려는 자생적인 의지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이다. “조직적 문제는 정치적 문제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레닌)는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조직적 문제 자체가 정치적 문제이다.

역사의 경험은 이러한 생각을 강화시킨다. 그러므로 볼셰비키가 옛 사회민주주의의 조류 외부에서 조직하는 쓰디쓴 결단을 보여주고 그리하여 혁명 과정의 진행에 총력을 다 한 반면에,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좌익은 주검에 연결된 탯줄을 재빨리 끊어버리는 데 주저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세계 혁명의 역사적 과정에 제동을 걸었다.

이러한 좌파의 가장 유명한 대표자인 로자 룩셈부르크는, 비록 그녀가 자신의 저작에서 1910년에 벌써 카우츠키의 정책들과 공개적으로 결별하고 그들의 정치적 입장 사이에 간극이 생겼음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간극을 조직적 수준에까지 가져가는 것에는 반대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곳에서 단순한 “조직적 처방”을 보았을 뿐, 근본적인 정치적 문제를 보진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대중의 수준에’ 머물 필요를 방어했던, 사회민주주의의 당에 관한 관점에 얽매여 있었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적이 되어버린 옛 조직들과는 다른 명백하게 정치적인 분파로 혁명가들을 조직하는 것이, 어떻게 계급의 자생적인 운동으로 하여금 기회주의자들을 제거하도록 돕고, 그 자생성의 생동하는 요소를 구성할 수 있는가를 그녀는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당의 실제적인 어떤 개입도 없이, 자생적인 운동 자체가 기회주의자들을 극복할 필요성을 주장함으로써, 룩셈부르크는 본의 아니게 조직적 문제와 혁명가들의 존재를 바로 이러한 자생적인 운동의 경계선 밖으로 치워버렸다.

명백히, 혁명가들의 존재는 객관적인 조건들에 의존하고, 조직들로 그리고 언젠가는 당으로 재편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객관적 조건들에 의존한다. 우리는 혁명이 전체로서 노동자들 전체의 일임을, 그 자신들의 일임을 또한 보아왔다.

 

인간은, 마음대로 역사를 만들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역사를 만든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행동은 당시 사회 진화의 성숙도에 의존한다. 그러나 사회 진화는 다시, 프롤레타리아트와 독립된 별개의 것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 발전의 산물이자 결과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 추동력과 그 유발요인이다. 행동 자체는 역사를 함께 결정하는 힘이다. 사람이 자신의 그림자를 뛰어넘을 수 없듯이 우리는 역사발전에서 한 시기를 건너뛸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발전의 속도를 가속하거나 감속할 수는 있다. (…) 그러나 대중의 의식적인 의지라는 점화의 불꽃이 과거 발전에 의해 이루어진 물질적인 조건들로부터 분출하지 않으면 (승리는) 결코 쟁취할 수 없을 것이다.”(로자 룩셈부르크, 『사회민주주의의 위기(Die Krise der Sozialdemokratie), 1916, 우리의 강조)

 

그러므로 당은 “역사 발전에서 한 시기를 건너뛸 수는” 없으며, “거대한 대중”의 의식을 대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 계급의식은 언제나 폭넓은 다수 운동으로 나타나는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 글을 썼던 1916년에, 프롤레타리아트를 전쟁으로 끌어들였던 ‘사회민주주의’를 두고서 그것이 ‘계급의식’의 표현이라 말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절대 다수는 계속해서 이 조직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성숙과 정치의식의 표시였던가?

혁명은 진정 노동자들 전체의 의식적인 작업일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아름답게 곧은 일직선처럼 뻗어있지 않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마치 한 사람이 걸어가듯 그렇게 조용히 움직이지 않는다. 광대한 노동자 대중은 언제나 하나의 길만을 걷는 것은 아니며, 동일한 의식을 갖는 것도 아니다. 혁명적 시기에조차도 프롤레타리아 절대 다수가 부르주아지의 책략에 반쯤 눈먼 상태에 놓인 그러한 시기들이 있다. 이러한 중요한 순간에, 소수 혁명가들이 도입한 ‘가속화’가 결정적일 수 있다. 이러한 순간에는, 계급의식이 도달한 성숙도를 가늠하는 것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영향 아래 있는 다수의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반응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명확한 인자들의 입장이다. 이러한 인자들의 책무는 그들이 이해한 것을 나머지 노동자들에게 널리 전달하는 것이지, 그들의 정치를 대중의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 아니다.

공산주의자의 역할은, 계급투쟁의 밀물과 썰물에 수동적으로 따르는 것이 결코 아니라, 이러한 투쟁 속에서 불꽃은 없이 연기만 피우며 타고 있는 혁명적 경향들을 촉진하기 위해서 그들 스스로를 조직하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 계급의 살아있는 산물이자,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성숙에서 능동적인 요소이다.

그러므로 일단 혁명가들이 구 정치 체제, 이전의 조직 형식과 정치적 실천들의 붕괴를 깨닫고 나면, 그들의 책임은 명확한 기반 위에 스스로를 조직하고 투쟁에 대한 전망을 실현시키기에 앞서 우선 나머지 노동자들이 따라잡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이런 태도는 계급의식의 어떤 진보도 불가능하게 만들며, 악순환으로 끝나고 만다. 도대체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의식적인 인자들 자체가 낡은 조직 형식들의 죽음을 선언하고 새로운 지향을 제안하길 주저한다면,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 전체가 그러한 죽음과 과거 정치적 입장의 파산을 알게 되겠는가?

혁명의 에너지들을 결집하여, 적의 진영으로 넘어간 옛 노동자당과는 독립적인 정치조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독일에서도 다른 어느 곳에서도 단순한 ‘조직적’ 문제가 아니었다. 조직적 문제는 근본적으로 정치적 문제이다. 독일 좌파는 조직적으로 사회민주당과 결별하는 것을 망설임으로써 더 심오한 다른 것들을 배신했다. 혁명가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학살자들, 즉 노동자들을 세계 대전의 대량학살로 내 몬 후 부르주아지의 “블러드하운드”(사냥개)가 된 샤이데만(Scheidemann), 에버트(Ebert), 노스케(Noske)와 그 일당 등과 같은 정말 역겨운 사회민주당 인간쓰레기들의 소행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확고하게 비난하는 데 주저했다.

그러므로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19181월에 발발한 첫 번째 거대한 파업들은 사회민주당에 의해서 의식적으로 뒤로 위축되었고 부르주아 합법성으로, 즉 그들의 죽음으로 잘못 인도되었다. 이러한 (더욱이 전 유럽에 걸쳐 일반화된) 책략들에 직면하여, 사회민주당과 아직 결별하지 못한 스파르타쿠스 단원들, 즉 좌익은 완전히 무기력한 채로 남아 있었다.

 

오후에는, 샤이데만과 에버트(SDP)가 행동 위원회(파업 중에 선출된), 수상이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중재를 통해 정부와 협상에 들어가자고 제안했다. 행동 위원회의 구성원들은 방향을 잃었다. 요기세스(Jogisches, 스파르타쿠스 단원)가 강조했듯이, 그들은 더 이상 이 혁명적 에너지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마련된 덫을 보았으나, 파업자들 사이에서 선출된 대표들만이 그들 자신들의 이름으로 적절히 협상할 수 있을 텐데라고 인정하는 것 그 이상으로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 (P.부루에 (Broue), 『독일혁명(La Revolution en Allemagne), 1969, 우리의 강조)

 

파업의 패배에서 혁명가들은 무거운 책임을 느꼈고, 요기세스는 그 패배에서 교훈을 끌어내면서 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의회주의적 백치주의로 인해, 모든 노동조합 파업을 위해 만들어진 도식을 적용하려는 욕망으로 인해서, 특히 대중의 신뢰 부족 때문에 (…) 그 위원회는 모든 형태의 협상을 거부하고 노동자들의 에너지를 풀어놓는 대신에, 사회민주주의 대리인들의 영향 아래서 정부와 협상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데에 스스로를 한정시켰다.”

(스파르타키스트 리플렛, 『독일 노동자 운동의 역사에 관한 문서와 자료(Documents et Materiaux pour une histoire du mouvement ouvrier en Allemagne )(1914-1945) Ⅱ/2)

 

그 후 스파르타쿠스 단원들은 그들의 망설임이 위험한 오류였다는 것을 깨닫고 독립적인 정치적 당을 만들게 되었다. 이것이 <공산주의 당(Kommunist Party)> - KPD(스파르타쿠스당) - 이 결국 191812월에 만들어진 이유이다. 슬프게도, 이 탄생은 때 늦었고, 19191월에도 여전히, <공산주의 당>은 결정적인 개입에 대한 이전과 마찬가지의 공포, 어떤 행동이 일어나기 전에 이전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논쟁, 이전과 마찬가지의 방향성 부족과 명확한 정치적 전망 부족이 만연했다.

 

다음은 한 공산주의자가 산증인으로서, 19191월의 운동과 공산당의 반응을, 처음에는 <스파르타쿠스 연맹>의 것이다가 그 다음엔 KPD(s)의 것이 된 신문에 기술한 것이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대중들은 일찍부터, 9시부터 계속 안개와 추위 속에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지도자들은 토론하며 어딘가에 앉아 있었다. 안개는 짙어지고, 노동자들은 여전히 기다렸다. 그리고 지도자들은 토론했다. 정오가 되고, 추위에 배고픔이 더해졌다. 그리고 지도자들은 토론했다. 노동자들은 흥분으로 미쳐가고 있었고, 그들의 광기를 가라앉힐 말, 실천을 원했다.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안개는 더욱 더 짙어졌고, 그와 함께 어둠이 깔렸다. 슬프게도, 노동자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어떤 거대한 것을 원했으나,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도자들은 여전히 토론했다. 바깥에는 프롤레타리아들이 손에 무겁고 가려운 총을 들고 있었다. 안에서는 지도자들이 토론하고 있었다. 현청에는 대포가 조준되어 있고, 건물들의 모든 코너에는 수병들이 지키고 서 있으며, 밖으로 열린 모든 방에는 군인들, 선원들, 프롤레타리아로 가득했다. 안에는, 지도자들이 앉아서 토론했다. 그들은 밤 새 앉아서, 여명이 비추고 해가 떠 아침이 될 때까지 계속 앉아서 토론했다. 그리고 그룹들은 다시 지게스알레(Siegesallee) 거리에 모였고, 지도자들은 여전히 앉아서 토론했다. 그들은 토론하고, 또 토론하고, 또 토론했다.”(붉은 깃발(Die Rote Fahne), 192095)

 

이 묘사는, 일화적이고 다소 희화화된 비유에도 불구하고, 19191월의 상황을 충분히 잘 요약하고 있다. 14일부터 계속 펼쳐진 운동에 개입해서 부르주아 정부의 전복이라는 명백한 전망을 제공하는 대신, 공산주의자들은 오래 동안 망설이다가 그 자신들의 혼란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결국 노동자들의 혁명적 운동의 속도를 늦추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환상을 유지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마침내 KPD(s)는 마지막 순간에, 그것도 그 운동에 의해 추동되어 권력 쟁취의 슬로건을 걸었다. 이것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실, 에버트 정부의 탄핵도, 운동의 마지막 목표의 제시도 이전에 먼저 준비되거나 논의되지 못했었다. 이랬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그 전투성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당과의 결별이라는 전망에 직면했을 때 주저하는 반응을 보였다.

 

베를린 노동자의 다수는 각각 사회주의자라고 주장하는 두 진영 사이에 막 벌어지려는 이러한 전쟁에 참가하거나, 심지어는 그 전쟁을 받아들일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공장에서 열린 모임과 집회에서 그들은 두 경향들 사이의 싸움, ‘형제간의 싸움’의 즉각적인 종결을 요구했고, 또한 모든 사회주의 경향들에서 보편적으로 요구되고 호소되는 ‘일치단결’을 지지했다.”(P. 부루에(Broue), 『독일혁명( La Revolution en Allemagne), 1969)

 

독일에서는 그 당시 명확한 강령과 조직에 기반한 선전과 정치적 선동이 전적으로 부족했다. 그 뒤로 계속, KPD는 기회주의자의 길을 걷게 되었고, 192012월 사회민주당의 ‘좌파’와 통합되어 VKPD(독일 통합 공산주의당)를 결과시켰다. 이 모호한 태도는 가장 건강한 정치적 전위 인자들의 반응을 자극해서, 그 결과 이러한 인자들은,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이라는 하나의 독립적인 당을 조직하게 되었다. 슬프게도, 이 반응은 너무 늦게, 19204월에야 나타났다. 세계 혁명은 이미 더욱 어려운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고, 패배에 패배를 거듭하다가 1927년에 결국 죽음을 맞았다. 혁명가들은 그들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 그들은 충분히 일찍 조직화되지 못한 것이다.

운동에 명확한 정치적 지향을 제시하는 것

19181,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미 1917년의 혁명 운동에서 교훈을 하나 얻었다 :

 

혁명의 동기가 진보하려면, 프롤레타리아트와 사회주의의 승리가 꿈이 아니려면, 혁명적 노동자들은 그들의 전투적인 에너지를 활용하고 안내할 수 있는 선도적 유기체들을 만들어야 한다.”(로자 룩셈부르크,『붉은 깃발(Die Rote Fahne), 1918114)

 

이 교훈은, 안타깝게도 그 시기에는 실천으로 옮겨지지 못했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유용하다. 우리는 이 교훈을 통해서, 오늘날 혁명가들의 선결과제는 명확한 정치적 지향을 제안하는 것이고, 또 모든 예비적 선전 작업을 통해서 그것을 준비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독일 혁명가들이 스스로를 별도로 조직하는 것을 망설였던 것이 그들의 정치적 전망의 부족과 함께 했음을 보았다. 19191월의 혁명가들은, 무장한 프롤레타리아들이 그들로부터 어떤 구체적인 제안을 기다리는 동안, 비공개 회의에서 끊임없이 토론했지만, 신속하게 즉각적인 전망을 결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운동이 취해야 하는 전반적인 지향에 대해서 그들 스스로 혼란스러워했기 때문이다. 이랬기 때문에, 그들은 운동의 최종 목표와 그 목표를 달성할 실천적인 수단들을 지속적으로 주장한다는 공산주의 전위의 본질적인 책임들 중 하나를 완수하지 못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다른 노동자계급당과 다음과 같은 지점에서만 구분된다.

1. 여러 나라의 프롤레타리아의 다양한 국내 투쟁들에 있어서 국적에 상관없이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공동의 이해관계를 지적해내고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2.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투쟁이 경과하는 다양한 발전 단계들에 있어서 항상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공산주의 선언)

 

공산주의자들에게,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혁명의 길로 안내한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이고 국제적인 이해관계와 운동의 최종적 목표를 지속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간단해 보이고, 사실 단순하지만, 실천에 옮기기 매우 어렵다.

그러나 어떤 혁명가들은 이 단순함을 불쾌한 속임수를 숨기는 것처럼 보인다며 불신한다. 그들의 눈에는 그러한 단순함은 손쉬운 탈출구가 될 뿐이며, 당의 고결한 책무에 대한 무지와 과소평가로 비춰질 뿐이다. 이 ‘단순함’에 좀 더 빛을 비추기 위해서, 그리고 당이 그 충만한 영광으로 둘러싸이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당에 ‘지도자’ 또는 사령관의 역할을 주어야만 한다고 느낀다.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그들의 취향에는 너무 수동적인 책무인 것이다. 그들은 좀 더 멋지고, 좀 더 생동적인 어떤 것을 원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향하도록(orientating)’하거나 ‘방향을 제시 한다’는 생각들과 거리가 먼, 혁명가들의 역할에 대한 잘못된 정치적 해석에 빠져버린다. ‘방향을 제시하는 것’에서 명령하거나 지시한다는 의미에서 ‘지도하는 것(leading)’으로의 간단한 도약을 통해, 그들은 당의 활동들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실제로는, 그들은 그런 종류의 것들을 전혀 하지 않는다.

혁명가 자신들을 마치 프롤레타리아 ‘군대’가 수동적으로 복종하고 추종해야 하는 장군처럼 만들어 버리게 되는 그런 책무를 혁명가들에게 부여하는 것은, 과거 혁명들의 오랜 도식들을 공산주의 혁명 속에 가져오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접근해서는 혁명가들은 어떤 실제적인 영향력도 가질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앞서 보았듯이, 노동자들이 수동적으로 명령 (그들이 어떤 진영에 있든 간에)에 따르는 한, 이는 그들이 권력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고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대해 충분히 의식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세계 자본주의는 우둔하고 복종적인 군대에 의해서가 아니라, 강력하고 단결된 계급에 의해, 신중하고 자신감 있는 계급에 의해 전복될 것이다. 혁명가들은 바로 이것을 위해 일해야 하지, 자신들을 영웅으로서 그리고 뛰어난 연설가로서 숭배되도록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당의 역사적 기능은, 계급이 마치 군대인 것처럼 그리고 군대식으로 지휘하지만 그 최종 목표에 대해서도, 그 작전의 당면 목표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 전술의 종합적인 운동에 대해서도 무지한 참모본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 혁명은 군사 행동과 비교될 만한 것이 아니다. 그 실현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함에 따라 그 자신들의 의식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당은 계급을 대신해서 행동하지 않는다. 당은, 그 단어의 부르주아적 의미에서의 ‘신임’- , 사회의 운명을 결정하도록 위임받는 것- 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당의 유일한 역사적 기능은, 계급 스스로가 그 책무와 그 혁명적 행동의 기반이 되는 목적과 수단을 의식하게 되도록 활동하는 것이다.”(‘당의 본질과 기능에 대하여(on the Nature and Function of the Party)’, 국제주의( Internationalisme), 38, 1948. 연구토론 회보 (Bulletin d'etude at de discussion) 6권에서 재판, 우리의 강조)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정치적 방향을 제시한다는 것은, 계급이 역사적으로 맡게 될 혁명적 지향을 의식하게 되도록 활동함을 의미한다. 이 책무를 수행하면서, 혁명가들은 결코 그 자신들의 중요성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이것이야말로 그들에게 진정한 근본적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혁명의 승리를 유일하게 보장하는 것은 엄밀히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가 스스로를 의식하고 스스로를 조직하는 정확히 바로 그 역량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의 생생한 예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인가?

러시아 혁명은, 혁명가들이 프롤레타리아에게 외부에서 가져온 정치적 지도력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사관 정도의 가치밖에 없는 자발적인 태도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들의 진행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프롤레타리아트 전체가 스스로의 역사적 이해관계를 의식하도록 만들기 위해 일했을 뿐임을 보여주었다. 혁명가들을 1917년의 ‘폭동분자들’이나 무자비한 독재자들로 묘사하는 부르주아 선전의 주장과는 대조적으로, 볼셰비키들은 권력 쟁취의 책무를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절대로 넘겨받지 않았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대신해서 행동하도록 노동자들로부터 위임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투표하라, 그러면 나머지는 우리가 처리하겠다!”와 같이 부르주아의 의미에서 노동자들의 신임을 얻지도 않았다. 볼셰비키들은 그들의 계급 속에서 물속의 물고기들처럼 살고 활동했다. 그들은 몇 개월, 아니 심지어 몇 년간 끈기 있게 설명하고 선전하고 선동하는 활동을 하고 투쟁의 마지막 목표를 끊임없이 주장 후에 이러한 일치단결을 벼려냈다. 이러한 일치단결은, 프롤레타리아트 내에 존재하는 요구와 구체적인 경향들에 대해 당이 더 일반적인 정치적 표현을 제공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이러한 명확한 표현이 혁명의 과정을 결정했다.

이 경우에, 혁명 이론은 실천적인 힘이 될 수 있었고, 노동자들 전체를 설득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당이 제공하는 신비하고 마법 같은 어떤 조미료 덕분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명백하고 보편적인 용어로 노동자들의 실제 필요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이론이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 그러한 반향을 얻고, 볼셰비키 혁명가들이 자연스럽게 전투의 ‘선두’에 서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볼셰비키 혁명가들은 노동자들이 무엇을 혼란스러워하는지를 명료하게 표현했을 뿐이었다.

 

선원 코린(Khorrin)은 그의 회고록에서, 스스로를 사회 혁명당 당원들(Social Revolutionaries)로 생각하는 뱃사람들이 어떻게 현실에서 볼셰비키 강령을 방어하려했는지 이야기한다. 이것은 어디서나 목격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지만, 어떻게 이름 붙여야 할 지 몰랐다.

어떻게 이러한 허약한 기구와 미미하게 배포된 당 출판물로, 볼셰비키의 생각과 슬로건이 사람들을 휘어잡을 수 있었는가? 설명은 매우 간단하다 : 계급과 시대의 예리한 요구에 상응하는 이러한 슬로건들은 그들 자신을 향한 수천의 채널들을 만들어낸다. 붉게 달아오른 혁명적 매체는 사상의 뛰어난 전도체이다. 볼셰비키 신문들은 큰 소리로 읽혔고, 세세한 부분까지 읽혔다. 가장 중요한 기사는 외워졌고, 인용되고, 다시 복사 되었으며, 가능한 곳에선 어디든 다시 인쇄되었다. (…) 볼셰비즘의 성공에 대한 일상의 설명은 대중들의 욕구와 맞아떨어지는 ‘슬로건의 단순함’이란 표현으로 요약 설명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그들의 투쟁에서 그들의 요구뿐만 아니라, 그들의 필요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의 경험에 의해 인도되었다. 볼셰비즘은 대중의 독립적 경험에 대한 귀족주의적 냉소에 절대 오염되지 않았다. 반대로, 볼셰비키들은 이러한 경험을 그들의 출발점으로 삼고, 토대로 삼았다. 그것이 그들의 탁월함을 엿볼 수 있는 뛰어난 지점 중 하나였다.”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2)

 

그들 계급에 존재하는 필요를 명백하고 간단하게 표현하고, 투쟁들 경험에서 시작하며, 프롤레타리아트의 보편적이고 역사적인 열망을 참작하고, 운동에 방향을 제시하며 혁명적 경향들을 가속시킨다. 이런 일들이 바로, 혁명가들이 그들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이용하는 ‘신비스러운’ 수단들이다! 사실은 전혀 불가사의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책무의 단순함은, 공산주의자는 계급의 의식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것 외의 다른 목적을 갖지 않는다는 점으로써 쉽게 설명된다.

어떻게 계급의식을 균질화할 것인가?

단순함은 용이함이나 필연적인 것과는 동의어가 아니다. 의심할 바 없이, 혁명가들의 역할은 단순히 정의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매우 복잡한 상황의 산물로 남아있고 그 구체화는 노력과 지속성을 요구한다. 먼저, 우리가 보았듯이, 혁명가들은 그들 스스로를 조직해야 한다. 그들은 계급의 경험에서 혁명적 이론을 계속 풍부하게 할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하며, 과거로부터 교훈을 끌어내야 하고, 최종 목표에 대한 시각을 견지하며, 그들의 활동을 장기적 전망 속에 위치시켜야 한다. 혁명가들에게 그들의 계급에 영향을 미칠 기회가 언제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계급 당(the class party)’이라고 선언할 수도 없으며, 계급의식과 그 발전의 복잡성에 대한 전적으로 인위적인 해결책을 제공할 수도 없다. 그들의 계급처럼, 그리고 그들의 책무와 존재의 지속성에도 불구하고, 혁명가들은 사회적 현실의 일부이다. 그들은 그들과 부르주아지 사이의 계급 역량의 균형에서 변화를 경험하고, 계급투쟁의 밀물과 썰물을 경험한다. 계급적 동지들의 패배의 시기에는, 그들은 그저 극소수로 남아서 패배의 교훈들을 끈질기게 뽑아내고, 투쟁의 새로운 국면을 준비한다. 공산주의 조직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로부터 격리 보호되어 있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압박에서 전적으로 벗어날 수도 없다. 그것은 숨을 쉬고, 영분을 섭취하고, 행동하고, 다시 숨을 들이쉬어야 하는 하나의 생명체이며, 그런 만큼 병과 죽음으로 시달릴 가능성도 또한 존재한다.

비록 공산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의식적인 요소를 구성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완전무결하지는 않다. 우리는 볼셰비키들의 혼란이 세계 혁명의 이후 발전에서 어느 정도 해악적인 역할을 했는지, 그들이 이러한 퇴행에서 얼마나 적극적인 힘이 되었는지를 보았다. 이 말은 네덜란드와 독일 혁명가들의 혼란에서도 마찬가지로 진실이다. 계급의식의 발전을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결실로 생각하는 것은 당의 신비스런 힘이 프롤레타리아트를 혁명으로 이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불합리하다. 혁명가들은 뒤로 물러 앉아 그들의 손가락을 까닥거림으로써, 또는 그들의 불변의 강령을 가지고 노동자들의 머리 위를 강하게 때림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을 발전시킬 수 없을 것이다. 당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당은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거나, 당의 책무가 ‘사건들의 과정을 강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계급의식을 획득하는 실제 과정에서 모든 생명을 죽여 버리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계급의식의 발전은 더 이상 성장하고 그 모순을 극복하며 질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발전하는 살아있는 실체가 아니라, 무력하고 경직되어 죽어가는 노파일 뿐이다. 혁명적 이론은 더 이상 적극적이고 필수적인 효소가 아니라, 힘을 잃고 쓸모없는 미라일 뿐이다. 이렇게 계급의식 발전의 생동하고 실천적이며 집단적인 방식을 잘못 파악하는 것은, 혁명가들의 역할에 대한 혼란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자체를 심각한 위험에 빠뜨린다.

사실, 혁명가들이 힘이나 자발주의 또는 단순한 민중 선동책을 통하여 ‘그들의’ 사상을 강제하려 노력할 때마다, 그들은 오직 노동자들을 막다른 길로, 총구 앞으로 내모는데 성공했을 뿐이다.

KPD(독일공산당)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의 부자연스러운 결합에 의해 만들어 졌으며, 1920년 제3인터내셔널의 공식적인 부분이 된 VKPD, <독일 통합 공산주의당>이라는 기회주의 무리의 통탄할 만한 경험을 회상해 보자. 이 당의 뛰어난 대표인 레비(Levi)에게는, 어떤 희생을 통해서라도, 비록 이것이 그들의 환상을 지껄이는 것을 의미할 지라도, 노동자 대중의 ‘가슴과 마음’을 휘어잡는 것이 중요했던 한편, 같은 당의 자발주의자와 ‘폭동분자’ 측에게는 투쟁과 계급의식의 현실적인 상태는 참작하지 않고 곧바로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이 관건이었다. 사실, 호르터(Gorter)KAPD가 ‘레비 박사와 VKPD의 길’이라는 문서에서 상당히 정확히 강조한 것처럼, 이러한 폭동주의(putschism)는 기회주의의 평범한 확장일 뿐이다. 그 창립부터 줄곧 VKPD는 이 길을 따랐다. 그것은, 이미1914년 민족 애국주의 진영으로 넘어가버린 노동조합들에도 계속 활동했다. ‘폭넓은 대중’들을 설득하기 위해 의회주의 전술을 채택했으며, 프롤레타리아트를 대량 학살했던 <사회민주주의당>과의 공동 전선의 필요성을 옹호하는 것으로 결국 끝났다. 간단히 말해서, VKPD는 제3인터내셔널의 2차 대회에서부터 계속 발전된 그 혼란을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채택했다. 독일에서는 오직 KAPD만이 그러한 실천에 반대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두 가지 경향들이 출현했다. 이것들은 그 지역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나라에서 인식될 수 있다. 하나의 경향은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혁명화하고 명확히 하는 것을 추구하며, 이 목적을 위해서 새로운 원리들을 낡고 공인된 생각들과는 가능한 한 가장 날카롭게 대조되게 제시하려 노력한다. 다른 경향은 아직 주변에 서 있는 대중들을 실제 행동으로 이끌려고 시도하며, 그러므로 그들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들은 가능한 한 피하려 하는 시도 속에서, 차이점보다 동의의 지점을 강조한다. 첫 번째는 대중들 사이에서 명확하고 날카로운 분리를 얻으려 노력하며, 두 번째는 단결을 얻으려 노력한다. 첫 번째 경향은 급진적인 경향으로 불릴 수 있으며, 두 번째는 기회주의적인 경향으로 불릴 수 있다. (…)

 

공산주의를 사회민주주의로부터 구분하는 새로운 원리들 - 소비에트 체제와 독재 - 을 강력하고 뚜렷하게 강조하기는커녕, 3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는 제 2인터내셔널로부터 건네받은 투쟁 형식들 (노동조합, 의회주의)에 가능한 한 의지한다.” (판네쿡, ‘세계혁명의 전개와 공산주의의 전술('Die Entwicklung der Weltrevolution und die Taktik des Kommunismus'), 1920, 『판네쿡과 호르터의 맑스주의』로 재판)

 

자발주의(voluntarism)와 기회주의(opportunism)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상부상조하며, 각자 서로의 오류를 보완해 준다. 그 둘은 모두 프롤레타리아트가 의식화되는 과정과 그 과정 속에서 혁명가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대해 똑같은 몰이해를 드러낸다. 이러한 혼란들은 모두, 계급 속에서 장기적이고 끈기 있게 설명 작업을 해나간다는 전망과, 최종 목표와 역사적 필요를 지속적으로 주장한다는 전망을 포기한다. 자발주의자에게, 프롤레타리아트는 소수만의 의지와 힘을 통해서 행동으로 이끌어져야만 하며, 기회주의자들에게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아첨과 공산주의 원칙들의 포기에 의해 이끌어져야만 한다. 1917,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이러한 두 과정들 중 어느 것도 따르지 않았다. 그들에게, 당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남아있는 환상을 극복해야했다. 노동자계급이 자발주의와 기회주의를 전위의 개입 없이 스스로 제거하기 기다리기보다, 오히려 노동자들의 혼란스런 열망의 앞에 나아가서 그러한 열망들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계급의식의 발전을 촉진하며, 프롤레타리아가 그 진정한 역사적 이해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되도록 행동해야 했다. 레닌에게는, 이것은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 편견들에 아첨하는 문제도 아니었고, 노동자 대중의 의식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하는 문제도 아니라, 권력 쟁취의 필요성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을 일반화시키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스스로 그 역사적 책무를 실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도록 하는 문제였다.

 

사회 애국지사들의 일시적인 힘은 대중들의 편견과 환상에 의지하는 데 있는 반면, 볼셰비키의 기회주의 세력의 숨겨진 나약함은 그러한 편견과 환상에 적응하는데 있다. 레닌의 원칙의 강점은 그가 운동의 내부적 논리를 이해하고, 그의 정책들을 그것에 따라 조절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대중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계획을 고안하고 실현하도록 도왔다. 레닌이 혁명의 모든 문제들을 ‘꾸준히 설명하는 것’만으로 끌어내려 했을 때, 이는 대중들의 의식이, 역사적 과정에 의해 그들이 추동되어온 그 상황에 일치하게 되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했다.”(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2, 우리의 강조)

 

혁명가들의 진정한 관심사가 되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과거 환상들을 설명하고 비판하는 오랜 작업을 수행해야 하며, 계급의식의 균질화를 추진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일을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 그들은 원칙과 최종 목표의 포기, 그리고 대리주의와 소수 행동이라는 두 가지 함정을 피해야 한다. 바로 이렇게 해서 레닌은, 19174, ‘4월 테제’(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요성을 제시한)를 추진했을 때,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치단결을 강화한다는 거짓된 변명 아래 멘셰비키와 화해할 어떤 가능성도 거부했던 것이다. 처음에, 그는 당의 소수파로 남았고 무정부주의자나 광인으로 불렸다. 그 후, 바로 그 끈기 있고 지치지 않는 ‘설명’으로써, 그는 마침내 전체 볼셰비키 당을 설득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레닌의 강점은 노동자들의 혼란스런 열망과, 상황의 현실적 필요에 조응하는 정치적 명확성이었다. 그리고 그 때까지 레닌은 한 순간도 그 시기 프롤레타리아트 다수가 품고 있던 환상에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단 한순간도 레닌은 대중 사이에 ‘솔직한’ 민족 방어 심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눈을 감아버리지 않았다. 그들과 합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등 뒤에서 행동할 생각도 아니었다. 그는 미래의 반대와 비난들에 대한 대답으로 말하기를, ‘우리는 허풍쟁이가 아니다, 우리는 오직 대중 의식에 기반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입장 때문에, 우리가 소수로 남아있어야만 한다면, 그래도 좋다! (…) 진정한 정부는 노동자들의 대표자들의 소비에트이다. 그러나 소비에트에서 우리의 당은 소수파이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의 전술의 잘못됨을 끈기 있게, 인내 하며,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소수로 남아있는 한, 우리는 노동자들을 이 속임수로부터 분리해내기 위해 비판 작업을 수행할 것이다. 우리는 대중들이 우리들의 말을 속임수로 착각하지 않길 바란다. 우리는 허풍쟁이가 아니다. 우리는 대중들이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그들의 오류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란다.’”(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2)

 

이것들이 레닌이 봉기 전날 밤 한 말이다. 그는 무엇을 제안하고 있는가? 그는 당이 명령이나 소수 행동을 통해서 스스로를 강요할 필요성을 옹호하는가? 그는 당이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경험을 고려하지 않고 사건을 지시할 것을 요구하는가? 그런 것은 전혀 아니다! 혁명 몇 달 전, 레닌은 최종 전망을 상기시키는 자로서 비판하고 설명하는 오랜 과정을 시작하자고 제안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는 단지 혁명적 의식을 널리 확산시키자고, 그래서 조직된 노동자들의 전위 속에서 더 명료화된 정치적 성과들을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에게로 보편화시키자는 것을 제안한 것이다.

19172월 또는 심지어 7월까지도,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전적으로 권력을 잡기에 아직 충분히 강하거나 의식적이지 않다는 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볼셰비키 당이 권력을 잡아야 하는 필요성과 관련하여 있었던 모든 혼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 가지는 명확했다. , 권력 쟁취를 통제하고 지도하는 것은 소비에트이며, 그들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다수가 혁명의 필요성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은 명확했다.

 

“7월에는,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들조차도 끝없는 투쟁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권력을 잡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권력을 <집행위원회(Executive Committee)>에게 내주었다. 수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압도적인 다수가 볼셰비키 쪽으로 끌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타협자들에게 연결된 2월의 탯줄을 끊어내지 못했다. (…) 만약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적으로 동질적이지 않고, 충분히 단호하지도 않다면, 농민군 또한 마찬가지였다. (…) 그러므로 인민의 의식의 상태- 혁명적 정책에서의 결정적인 요소인데 – 로 인해, 7월에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는 것은 불가능했다.”(트로츠키, 앞글)

 

1917년 볼셰비키의 태도는 코민테른 그리고 VKPD와 그 ‘폭동주의자’측의 태도와는 정반대였다. 후자는 심지어 KAPD의 일부마저도, 공산주의 강령이 옮음을 보여주게 될 ‘모법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나머지 노동자들이 같은 길을 걷도록 강제함으로써, 자신들이 전위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VKPD의 전투적 활동가들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성원이라는 주도권에 용기를 얻어) 19213, ‘혁명의 과정을 강제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이 시도는 안타까운 재앙이 되었다.

 

“324일 목요일, 공산주의자들은 무력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총파업을 시도했다. 활동가들은 갑작스레 공장을 점거하고, 그들이 ‘파업파괴자’라 부르는 사람들 - 수많은 비공산주의 노동자 대중 – 의 출입을 막았다. 다른 곳에서는, 실업 노동자 무리들이 일하러 가거나 일하는 자들을 방해했다. 베를린은 몇몇 대공장에서, 루르에서 사건들이 일어났고 그리고 함부르크에서는 부두를 점거한 실업 노동자들과 부두 노동자들이 총격전 후 추격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전체적 성과는 낮았는데, 비관적 추산으로는 이십만 명, 낙관적 추산으로는 오십만 명이 파업에 참가했다. 어떤 실패들은, 발전소에서 그의 동지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한 줄트(Sult)의 실패처럼, 특히 쓰디썼다.” (피에르 브루에(Pierre Broue), 『독일혁명(La Revolution en Allemangne), 1969)

 

볼셰비키들이 191710월 이전에 행한 선전과 선동의 작업은 매우 다른 결과들을 가져왔다:

 

"봉기가 어디 있는가? 어떤 봉기의 광경도 볼 수 없다. 사건들이 하나의 그림을 만들지 않는다. 미리 계산되고 준비된 일련의 작은 작전들은 공간적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 각각 분리된 채 남아있다. 사상과 목표의 일치가 그들을 하나로 결합시키지만, 그들은 투쟁 자체 속에서 융합하지는 않는다. 거대한 대중들의 행동이 없다. 군대와의 어떤 극적 충돌도 없다. 역사적 사실 위에서 자라난 상상을 통해서 봉기라는 발상과 연결 지을 만한 그 어떤 것도 전혀 없다.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혁명의 전반적인 성격을 계기로, 많은 다른 사람들 중에서 마자릭(Masaryk)은 다음과 같이 썼다 : ‘10월 혁명은 (…) 전혀 인민 대중 운동이 아니었다. 그 혁명은 현장 위에서, 그리고 그 배후에서 일하는 지도자들의 행위였다.’ 사실상, 그것은 역사적으로 가장 인민적인 대중 봉기였다. 노동자들은 서로 융화되기 위해 광장으로 나올 필요가 없었다. 그럴 것 없이 그들은 이미 정치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하나의 단일한 전체였다. (…) 그러나 이러한 보이지 않는 대중들은 훨씬 이전에 그 사건들과 발맞춰 나가는 것 그 이상으로 전진해가고 있었다. 공장들과 병영들은 잠시도 지역의 본부들과의 연결고리를 잃지 않았고, 스몰니(Smolny) 지역 본부와도 마찬가지였다. 적위대(Red Guard, 무장된 노동자들)는 그들 뒤에 공장들의 지원이 있음을 느꼈다. 병영으로 돌아온 군인 소대는 새로운 교대자들이 벌써 준비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그들 뒤에 대량의 예비병이 있는 혁명적 파견대만이 그러한 신뢰을 가지고 자신들의 일을 행할 수 있었다. (…) 거대한 화재를 일으키고, 약탈하고, 강을 피로 물들이는 바리케이트를 부르주아계급은 기대했었다. 실제로는, 침묵이 세상의 우레와 같은 소음보다 훨씬 더 무섭게 지배했다. 사회적 토대는 소리 없이 마치 회전 무대같이 인민 대중을 앞으로 나아가게하고, 과거의 지배자들을 망각 속으로 보냈다.”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3)

 

191710월의 그 투쟁은 우리에게, 1921년 독일에서 투쟁과 마찬가지로, 수백만 노동자들의 혼란스런 행동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두 경우에 모두, 혁명적 행동은 모든 노동자들에 의해 수행되지 않고, 개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명백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사건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19213월 행동에서는, 혁명가들이 노동자 대중들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채 매우 작게 무장된 분대로 행동했던 반면, 러시아에서 권력 장악 동안 프롤레타리아트의 무장한 분대의 행동은 수백만 프롤레타리아트의 집단적인 의지가 통제하는 그 아래에서 일어났다. 비록 이러한 참여가 거창하고 무정부주의적인 형태를 취하지는 않았을 지라도, 사건의 진행을 이끈 것은 의식적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였다.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의지의 융합이 이 시기에 진정으로 존재했다. 그것은 수천의 채널을 통해, 소비에트, 지역 위원회, 혁명 위원회와 노동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적위대와 볼셰비키 사이에서 있었던 접촉과 무수한 교류를 통해 생명을 유지했다. 모든 곳에서, 혁명적 불길은 끊임없이 타올라서 사람들의 에너지에 불을 붙였고, 모든 곳에서의 주도권을 고취시켰다. 이러한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자생적으로 제안하고 결정했다. 동시에, 이러한 무장한 프롤레타리아들이 획득한 의식, 즉 같은 목표를 추구하며 함께 밀착된 그들의 의지는 그 광경 전체에 고요함과 결단성과 면밀함이라는 주목할 만한 겉모습을 부여했다.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용두사미식 계획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미래가 전혀 없는 수천의 필사적인 저항들의 무정부주의적이고 제어되지 않은 폭발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191710월의 혁명은 우리들에게, 공산주의 혁명은 인류가 지금까지 경험한 가장 의식적이고 통제된 역사적 현상임을 보여주었다. 수백만의 프롤레타리아들의 정치적 감독 아래에서, 혁명은 부르주아 반혁명의 맹목적이고 억제되지 않는 힘에 대항해 정밀함, 용기와 자기의식(self-awareness)으로써 격렬하게 맞설 것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가 그렇게 단호하고 집단적인 의식에 도달하는 것은 자동적이지도 용이하지도 않을 것이다. 사건들의 충격도, 위기의 악화도, 생활수준의 하락도, 그 자신의 투쟁의 역사적 전망에 대해 프롤레타리아트의 눈을 뜨게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위기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재촉하여 더 치열하고 대대적으로 투쟁하도록 강제할 것이다.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질서의 부패는 혁명의 객관적인 영역이 될 것이다. 그러나 거름은 거름 이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생명은 절대로 비료만으로 분출되어 나오지는 않는다. 생산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처한 상황과, 그 조건의 객관적 일부분인 새로운 생산관계,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 속에 지니고 있는 역사적인 힘, 이것들은 그렇게 많은 거름 속에서 반드시 꽃피워야 하는 많은 씨앗들이다. 이러한 생명의 약속은, 그것이 완전히 개화할 수 있게 되기 전에 사소한 실수로 절멸되어 버릴 지도 모를 만큼 깨지기 쉽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적 조직을 마련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생명의 약속을 더 완벽하게 보호하고 발전시켜서 혁명의 필요성에 대한 대규모의 동질적인 의식이 이러한 부패한 객관적 토양 위에서 발전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러시아 혁명의 역사와, 자본주의 세계를 같은 시기에 뒤흔든 세계적 혁명 운동들의 역사는 이것이 혁명가들의 기능임을 확인시켜준다. 그러나 이러한 책무를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고 균질화시킨다는 것은 단순히 사상을 선전하고 뛰어난 이론적 저작들을 쓰는 것을 의미하는가? 혁명가들은 어떻게 이 계급 안에서 그들의 개입을 생각하게 되는가?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오직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맑스)

 

혁명가들은 그들 계급의 일부로서, 이러한 세계 변혁에 동참한다. 그들은 지적인 공상가들과 어떤 공통점도 갖고 있지 않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의식을 획득하는 것은 생생하고 구체적인 과정으로서, 이러한 과정을 계급투쟁의 실천으로부터, 파업의 운동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부분적 투쟁들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시도는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혁명가들은 이러한 실천에 전적으로 참여한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파업에, 대중 집회에, 투쟁속의 그들 계급의 행동들에 개입한다. 혁명가들은 심사숙고하는 즐거움 자체를 위해서 성찰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공산주의 강령을 심화시키는 것은 단순히 이론 속에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혁명가들이 혁명적 이론을 발전시킬 때, 그들은 계급투쟁에 그들의 구체적인 개입을 더 잘 규정하고 지향하기 위해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실천에 좀 더 잘 연결 짓기 위해서 그렇게 할 뿐이다. 계급의식의 발전에서 그들의 행동에 관한 그 어떤 것도 수동적이지도, 엄격하게 이론적이지도 않다. 비록 공산주의자들이 계급투쟁의 기계적인 산물이 아니라, 행동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조직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개입을 그들 계급의 일반적인 실천에서 특수한 경우의 하나로 본다.

심지어, 역사적 발전의 특정 순간에, 혁명가들이 어떤 영향력도 갖고 있지 못하며, 노동자들 사이에서 미미한 반향만을 갖는 그러한 보편적인 사상을 확산시키는, 근본적으로 선전적인 책무를 수행할 때조차도, 혁명가들은 결코 엄격히 탁상공론적이거나 지적 수준에서 개입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계급투쟁에 개입할 때, 그들은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대신 ‘전유할 것으로’ 여겨지는 순수하게 추상적인 이론을 내놓지 않는다. 혁명가들은 투쟁 속에 있다. 그 속에서, 그들은 요구들, 조직 형식들(파업 위원회, 대중 집회…)를 방어한다. 그들은 투쟁을 확산시키고 강화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원한다. 그들의 임무는 그들 계급의 모든 부분적 투쟁들에 그들의 능력이 닿는 한 개입하고 참여하는 것이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에 대해 독립적으로 스스로를 조직하려는 모든 경향들을 자극해야 한다. 혁명가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정치적 조직적 표현에, 모든 투쟁에, 모든 총회와 소비에트, 구역위원회에 참여할 것이다. 거기서 그들은 ‘노동자계급’ 언어의 외피를 쓰고 투쟁을 막다른 길로 몰아내 패배시키려는 자본의 개들(guard-dogs)의 책략을 엄정하게 공격할 것이다.

혁명이 있기 전 시기에, 당은 모든 투쟁에서 출간물과 슬로건, 투쟁가들의 선동을 통해, 자본의 경제적 해체에 대한 단순한 경제적 반응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투쟁들을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를 위한 정치적 투쟁들로 전환하려 시도를 할 것이다. 이런 운동 속에서 당은 그와 같은 전환을 돕고 전투를 정치적으로 통일시킬 수 있는 모든 요구와 슬로건을 지원한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자치적 파업 위원회들의 집중화된 조정(centralized co-ordination)과 통합, 그리고 그것들의 정치적 평의회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자기방어를 부르주아지에 대해 적대적으로 조직된 군사적 공격으로 변화시킬 것을 요구한다. 같은 식으로, 봉기의 기간에, 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군사 조직에 참여하여, 무장 투쟁의 최종 목표와 계급 간 역량 균형에 대한 분석을 추진한다. 내전 동안, 당은 국제적인 혁명으로의 확장과, 군사적 경제적 문제를 정치적 목적에 종속시키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점을 주장한다.

혁명가들의 이러한 실천적인 개입은 계급의식의 발전에 전적으로 동참한다. 왜냐하면 계급의식의 발전이란 투쟁의 성격을 변화시키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실천적인 의식을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계급의식을 발전시키는 것은, 혁명 사상을 널리 확산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혁명가로서, 계급의 일부로서, 이 이론이 실천적으로 적용되도록 방어하기 위해서 투쟁에 참여하는 것도 의미한다. 투쟁의 정치적 성취들을 균질화시키는 것 또한, 지속적으로 운동의 최종 목표를 강조하는 한편으로 그러한 성취들의 구체적인 함의들을 균질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부분적 행동도 거부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행동, 모든 전투가 완수되고 추진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 저러한 전투들을 거부한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필요들을 포함한 전투는, 모든 수단을 사용해서 반드시 추진되어야 한다.”(1921,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3차 대회>에서 헴펠(Hempel)의 개입연설(KAPD), 우리의 강조)

 

공산주의자로서 우리의 임무는 노동자 대중 사이의 일상적인 투쟁들의 슬로건들을 발안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공장의 노동자들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이러한 일상적인 문제들이 해결된다고 해도, 그들의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으며, 절대로 자본주의의 몰락을 가능케 할 수도 없음을 항상 지적해야 한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일상적 투쟁에 참여하고 그 투쟁의 선두에서 진군할 책무가 있다. 그러므로, 동지들, 우리는 이러한 일상적인 전투를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이 전투에서 우리는 대중의 선두에 서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그들에게 공산주의의 길과 위대한 목표를 보여주어야 한다.”(위와 같은 대회에서 마이어-베르크만(Meyer-Bergman)의 개입연설(KAPD))

 

혁명가들은 계급의식이 전진함을 보장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들은 모든 투쟁과 그 조직에 참여해야 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각각의 전투의 추동력을 활용하여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 체제를 전복시킬 역량을 가진 세력을 구성해가는 데 있어서 가능한 많은 단계들을 전진해 나가도록 해야 한다.

공산주의자 개입의 목표는 이러한 단련 과정에 공헌하는 것이다. 모든 투쟁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운동의 역사적이고 지리적 차원들을 보여줘야 하지만, 이것은 세계적인 공산주의라는 최종 목표를 설정하는 것만으로 만족해도 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더더욱, 투쟁이 도달하는 지점에 무게를 실어주는 방법을 알아야 하고, 구체적으로 실현가능한 제안들을 하고, 동시에 전체 계급의 일치단결(unity)의식(awareness)의 발전에 있어서 그 투쟁이 이룬 진정한 진보를 설명해야 한다. 각각의 투쟁에서 최대한 전진해 가는 것, 실현가능하지만 언제나 더욱 더 진보적인 목표를 제안함으로써 잠재적 역량을 극한까지 끌어내는 것, 이것이 혁명가들이 그들 계급의 공개 투쟁에 개입했을 때 목표로 삼는 것이다. 쇠퇴기 자본주의에서, 이러한 노동자계급 투쟁들은 혁명적 투쟁들을 좌우하는 것과 똑같은 법칙을 따른다. 그래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것을 이렇게 요약했다:

 

러시아 혁명은 단지 모든 위대한 혁명들의 근본적인 교훈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모든 혁명은 다음과 같은 지극히 중요한 법칙을 가지고 있다: 민첩하게 여세를 몰아, 강철 같은 손으로 모든 장애물을 넘어뜨리고, 언제나 더 진전된 목표를 설정하며 단호히 전진해 나가든가, 아니면 그들의 허약한 출발점보다 더 뒤로 내몰려서, 반혁명에 의해 분쇄당하든가 하는 두 가지 길 밖에 없다는 것이다. , 혁명에서, 멈추거나, 시기를 정하거나, 일단 도착한 최초의 목표에 만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로자 룩셈부르크, 『러시아 혁명』, (RI 3차 대회에서 채택된 개입에 대한 보고서, 19786)

그러므로 공산주의자의 개입은 본질적으로, 노동자들의 의식과 전투의 전진을 자극하는 것에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전투의 어떤 계기라도 이용해서 그 전투가 질적으로 집단적으로 세계 혁명과 공산주의로 진화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6장 결론 : 그리고 오늘?

역사상 처음으로 한 사회 계급이 자신들의 운명의 고삐를 쥐게 만들 혁명의 성숙과정에 혁명가들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의 역할은 훨씬 더 근본적이다. 인류는 과거의 역사로부터 떠날 준비가 되었으며,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기적 같지만 사실은 필수적인 역사적 단계일 뿐인 혁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오직 그 조직과 의식으로부터만 충분한 힘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사회의 지배적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가 그들의 역사적 책무에 대해 의식하는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이것이 혁명가들의 참여와 개입이 지극히 필요한 이유이다. 혁명가들은 그러한 의식의 균질화를 목표로 행동한다. 그리고 혁명가들이 그들 계급 외부의 관찰자, 구경꾼이 아니라 생동하는 계급의 일부로서 진화하는 이유는, 바로 계급의식이 이론과 실천 사이에,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사이에 분리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계급의식은 그 힘을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활력에서 받는다. 그것은 사상의 전문가들, 철학자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시늉을 하는 원숭이 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의식적이고 혁명적인 계급으로서 스스로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생동적이고 집단적인 긍정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좀 더 명확히 하려는 시도에서, 혁명가들의 개입을 프롤레타리아 의식 발전과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전반적인 틀 속에 위치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개입의 객관적인 토대는 정적인 것이 아니다. 역사적 시기와 그 역동성에는 진화가 있다. 혁명이 언제나 의제(agenda)인 것은 아니고, 계급 간 역량 균형이 항상 사회적 상대자들 중의 하나 또는 다른 하나에 유리하게 되는 것도 아니며, 계급투쟁은 전진과 후퇴를 경험한다. 그러므로 혁명가들은 그것이 어떤 시기이든 간에, 그 역할을 다 하기 위해 언제나 동일한 힘을 들이는 것이 아니며, 계급이 언제나 동일한 반향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혁명가들이 그 시기를 분석하는 것은 근본적인 일로서,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그들의 활동 목적들이 정확히 평가될 수 있어야 한다. 계급 내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갖는 공산주의당과, 반혁명 시기로부터 교훈을 뽑아내는 좌익 분파 사이에는 하나의 진화 과정 전체가 놓여 있다. 혁명적 과업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그 순간의 객관적인 조건들과 계급투쟁의 수준이다. 혁명가들은 경험주의적으로 되지 않으면서, 유물론적 토대 위에 서야 한다. 자발주의에 빠져들지 않는 한, 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속일 수 없다. 혁명가들이 해야 할 일은 나타나는 혁명적 경향들을 가속화시키는 것이며, 권력 쟁취를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주관적인 준비를 강화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으며, 지금 혁명가들의 책무는 무엇인가?

이 의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최근 몇 해 동안 일어난 노동자들의 투쟁들에 대해 연구해야만 한다. 그 투쟁들의 생명력과 전투성은 1960년대 말 이래의 변화를 수천마디의 말보다 더 잘 확인해 준다. 재건 시기(the reconstruction period)는 이 기간 동안 막을 내렸다. 위기는 이 자본주의 체제가 부패하고 노쇠한 체제라는 슬픈 현실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상기시킨다. 생존 조건의 점진적인 악화는 프롤레타리아트로 하여금 내핍을 거부하고, 다시 한 번 투쟁의 길로 나아가도록 만든다. 50여 년 간의 잔혹한 반혁명 이후, 역사의 방향은 다시 한 번 혁명을 향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파업과 다른 전투들은 자본의 전쟁기계의 작동을 가로막는 수많은 장해물들이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틀 안에서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최종의 목표에 대한 의식을 획득하려 시도하면서, 많은 그룹들, 조직들, 써클 등이 출현하는 것을 보았다.

ICC1968년에서 73년 사이의 계급투쟁의 물결의 최절정점에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 물결의 하강 동안에 ICC는 정치적으로 조직적으로 강화되었다. 혁명을 향한 역사적 진행에 있어서, 노동자들의 전투성의 상승 운동은 기계적으로 일직선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계급투쟁은 생동적인 과정으로서, 상승과 하강, 밀물과 썰물을 겪는다. 사회 투쟁이 상대적으로 조용한 1974년에서 78년의 기간 동안, ICC는 두 가지 근본적인 목표를 스스로의 장기적 전망 속에 설정했다.

- 투쟁들과 정치적 환경에 체계적으로 개입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성장에 기여한다.

- 당의 건설을 준비한다.

 

계급의식의 발전에의 공헌

 

“1968년부터, 계급투쟁은 다양한 시기에, 특히 이탈리아, 폴란드, 스페인에서 높은 수준의 전투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투쟁들은 그들의 계획을 부르주아지가 너무 쉽게 방해하고, 쟁점을 흐리고, 결국 패배시키는데 성공한 것으로도 주목할 만 했다. 어떤 때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과 좌파에 직접적으로 대결하기도 했지만 (1969년 이탈리아, 1974년 포르투갈), 지난 몇 년 동안의 계급투쟁의 진화에서 더 충격적인 것은, 자본주의가 초반에 잃었던 영역을 재정복해나가는 그 거대한 역량이다. 이러한 상황은, 자본주의의 심화되는 위기의 영향에 대항한 노동자들의 방어적 투쟁을 발전시킴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다. 바로 이런 과정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투쟁의 무기를 연마하는 만큼 부르주아지의 권력은 점차적으로 약해지게 될 것이다. 현재 경제적 위기의 심화에 대한 반응으로서 존재하는, 계급의식 발전에 있어서의 지연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임무가 숙명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선고하는 것이 아니다. 전반적인 전망으로 남아있는 것은 계급 전쟁이지, 제국주의 전쟁이 아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 내의 의식의 현재 수준을, 혁명적 시기에 프롤레타리아트가 이해할 필요가 있게 될 그 수준과 비교해 보면, 최종적인 혁명적 대결을 향한 길 위에서 노동자들이 아직 얼마나 먼 거리를 더 가야만 하는지를 보게 된다.”(C.G. ‘혁명가의 책무’, WR18)

 

이것이 혁명가들이 현재 그들의 개입을 그려볼 수 있는 전반적인 틀이다.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성장에 참여하는 것은 오늘날 주요한 과업으로 되었다. 1978년에서 79년부터 노동자계급은 그들의 적을 정면으로 대항할 준비를 해 왔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충돌은 매우 폭력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이 부르주아지의 권력을 전복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계급들 사이에서 첫 대결의 시기에 있다), 그 충돌은 결정적인 것이 될 것이다.

최근 북부 프랑스의 파업과 폭력적인 시위, 영국, 미국, 폴란드, 독일, 볼리비아, 모로코 등의 파업은, 1974년에서 78년까지 썰물의 끝과 노동자들의 전투성의 새로운 폭발을 보여주는 좋은 지표이다.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정치적 위기의 심화, 좌파 정당과 노동조합의 영향력의 부식은 투쟁의 부활을 위한 매우 환영할 만한 토대이다.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사회적 토대, 그리고 그 가치와 이데올로기적 거짓말들은 뿌리까지 썩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의 눈먼 법칙들과는 대조적으로,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 진화를 의식적으로 도달하려는 경향이 있다. 위기가 노동자들의 분노를 날카롭게 하고, 노동자들을 자극하여 비참함, 내핍, 실업의 증가를 거부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기의 심화와 계급투쟁 사이의 연결은 기계적이지 않다. 현재의 파업 운동은 새로운 퇴조를 볼지도 모른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앞에 아무런 전망도 볼 수 없기에 낙심하게 될지도 모른다. 바로 이 순간부터 부르주아지는 반격에 들어가서, 노동자들의 저항을 격퇴하고, 투쟁을 무장 해제시켜, 종국에는 모든 형태의 저항들을 부숴버릴 지도 모른다. 그러면 아마도 그 진로는 위험하게도 제국주의 전쟁을 향하여 전환될지도 모른다.

혁명가들의 개입이 과소평가되고 지연돼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과거의 경험들로부터 교훈들을 얻어낼 수 있어야 한다. 미래 투쟁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 전반적인 정치적 전망을 설정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스스로 혁명적 조직으로 무장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책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주 조금이라도 지연된다면 계급 대결을 향한 현재의 진로를 위태롭게 할 위험이 있다. 현재 노동자 투쟁의 부활과, 위기와 계급의식의 수준 사이의 지속된 틈은, 혁명가들이 점점 더 직접적으로 계급의 전투에 참여하는 것을 요구한다.

 

당의 건설을 위한 준비

 

지금, 공산주의 그룹의 본질적인 목표 중 하나는 일반적으로 정치 투쟁의 첫 단계의 특징, 즉 활동과 조직의 ‘수공업적’ 수준을 극복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출판, 배포, 토론, 다른 그룹들과 개인들과의 교류와 같은 임무들을 꾸준하게 수행하는 것이 그 관심사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 말은, 조직이 분산된 세포들의 단순한 합으로서가 아니라 마치 균형 잡힌 물질대사를 이루는 단일한 실체로서 행동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특별한 기관과 운영 규칙들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 그러나 혁명가들의 조직화를 강화하는 데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측면은 현재 세계에 존재하는 취약한 공산주의 세력을 재편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그들은 중대한 계급 대결을 뿔뿔이 흩어져 분산된 채 직면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C.G. ‘혁명가의 책무’ 『WR19)

 

1968년 투쟁의 부활은 공산주의 사상들에 대한 새로워진 관심과, 혁명 그룹, 요소들, 조직들의 출현을 특징으로 한다. 이들 인자들의 분산과 혼란에 직면하여, 가장 명확한 조직들의 역할은, 일관된 국제적인 재조직의 기둥을 구축하는 것, 혁명적 에너지의 재규합을 위한 중심을 강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다른 공산주의 그룹과 조직 간의 공개적이고 우애적 토론을 견지하는 맥락이다.

국제대회의 조직은 이러한 견지에 부합한다. 오늘날 우리는 국제적인 당을 건설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부터 이미 우리는 이러한 관점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혁명가들이 계급에 더욱 더 체계적으로 개입하고, 세계 공산주의당을 건설할 준비를 할 객관적인 필요성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맑스가 이야기했듯이, “인류는 오직 자신이 실행할 수 있는 과제만을 설정하며,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그 과제의 실현을 위한 물질적인 조건들이 완전히 형성되어 있거나 형성되고 있는 중인 곳에서 그러한 과제들이 출현함을 본다.” 오늘날, 공산주의 혁명의 객관적인 조건은 다시 한 번 성숙했다. 1차 세계 대전은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 역사적인 무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1968년 이래, 혁명을 위한 객관적인 조건들이 제기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전쟁이냐 혁명이냐’, ‘사회주의냐 야만주의의 심화냐’의 양자택일로 불가피하게 나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의 진화의 과정에서 운명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사회주의가 역사적인 필요성(necessity)임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 사회의 쇠퇴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은 모든 순간에 구체적인 가능성(possibility)인 것은 아니다. 오랜 기간의 반혁명 동안, 프롤레타리아트는 패배했으며, 그 의식과 조직화는 그것이 사회에서 자체적인 세력이 되기에 너무 약했다.

한편 오늘날은 역사의 과정이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부흥으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의 압박을 받으며, 역사에 숙명이란 없다. 역사적 과정은 결코 모든 시기에 대해 고정된 ‘정적인’ 것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의 길은 하나의 열린 가능성이며, 계급 대결로 이끄는 조건의 성숙이다. 그러나 만약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전투성을 발전시키지 않는다면, 그리고 자신들의 투쟁 속에서 그리고 혁명가들의 계급 내에서의 공헌을 통해 연마된 의식으로써 스스로 무장하지 않는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러한 성숙에 대해 그 자신의 창조적이고 혁명적인 활동으로써 응답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프롤레타리아가 패배한다면, 분쇄되어 다시 수동성으로 빠져버리고 만다면, 역사는 역전되어, 보편화된 전쟁(generalized war)의 항상적 잠재성이 실현될 것이다.

오늘날, 역사의 진로는 계급투쟁의 발전을 향하고 있다. 왜냐하면 노동자계급은 패배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전 세계에서 생존 조건의 악화에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고, 국제 경제 위기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그리고 그것이 계급에 대해 가진 영향을 마멸시키고 있기 때문이며, 노동자계급은 유혈적인 반혁명의 ‘죽음은 계속 된다’라는 외침에 저항하는 생명의 힘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이유들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쇠퇴기에서 두 번째로 역사의 문을 연 위기에게 인사를 한다.”

(J.A. ‘역사의 진로(The course of History)’, IR15)

 

이와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혁명가들이 세계적 수준에서 개입하고 재규합될 것을 주장한다. 우리는 거대한 책임을 갖고 있다. 우리는 우리 수준에서, 헛된 분쟁이나 종파주의자의 저주에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이, 토론을 자극해야 한다. 남은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으며, 부르주아지의 무기는 날카로워지고 있다. 노동조합의 감옥, 지역주의, 민족주의 (…) 피해야 할 수많은 함정들이 있으며, 찢어버려야 할 수많은 신비화의 껍데기가 있다.

오직 혁명가들의 국제적인 개입만이, 오늘날부터 신비화의 껍질을 벗기는 작업을 시작할 수 있으며, 노동자 투쟁의 명확한 전망을 밝힐 수 있다. 오직 공산주의 세력의 재편만이 공산주의 혁명의 성공의 필수적인 기구인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당의 기초를 쌓을 수 있다.

 

그리고 이제, 동지들, 우리는 우리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맑스로 되돌아왔으며, 그의 깃발 아래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강령에서 선언 합니다 : 프롤레타리아에게 사회주의를 진실로, 사실로 만들며, 자본주의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파괴하는 것 외에 더욱 긴급한 일은 없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더 이상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조건 아래서 살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계급적 의무를 수행하지 않거나, 사회주의를 실현하지 못하면 소멸한다는 위협을 받아왔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필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 『우리의 강령과 정치적 상황』 KPD(LS) 창립대회, 1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