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Conline - 2008

Publication during 2008

1929 - 2008: 자본주의는 파산한 체제다. 하지만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바로 공산주의다!

정치가들과 경제학자들은 이상황의 중요성을 묘사할 말을 더이상 찾지 못하고 있다. „심연의 가장자리“, „경제적인 진주만습격“, „밀려오는 쓰나미“, „금융계의 9.11사건등등…(재앙과 관련한 표현들 중에서) 타이타닉호의 침몰에 대한 언급만 빠졌을 뿐이다! 진정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누구나 경제적인 대충격으로 인해 불안스런 질문들에 직면하게 된다. 지금 우리는 1929년과 같은 새로운 공황을 앞두고 있는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렸는가? 스스로를 지키려면 우리는 무엇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생활조건이 야만적인 악화로 치닫는다.

환상을 가져서는 안된다. 전세계적으로 인류 전체가 달안에 생활조건의 끔찍한 악화를 겪어야만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최근보고서에 따르면, „2009년초까지 50개국이기근을 당하는 국가들의 대열에 합류할 것이다. 그들 중에는 많은 아프리카국가들, 라틴아메리카나라들, 카리브해연안 국가들 그리고 심지어는 아시아국가들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이디오피아에서는 공식적 발표에 따르면 이미 12백만명이 기아로 인해 죽음에 직면해 있다. 자본주의의 새로운 엘도라도, 인도와 중국에서는 수억의 노동자들이 대빈곤에 빠진다. 미국과 유럽에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견딜 없는 가난으로 떨어지게 것이다.

경제의 모든 부문이 해당된다. 사무실에서, 은행에서, 공장에서, 병원에서, 자동차산업에서, 건설분야에서, 운송에 있어서 도처에서 수백만명이 해고될 것이다. 실업률이 폭등할 것이다! 2008년초 이래 미국에서만도 대략 백만명이 이미 일자리를 잃었다. 모든 것은 단지시작에 불과하다. 이러한 해고의 물결은, 점점 많은 노동자가정에게 있어서 집세를 내고, 의료혜택을 받고, 입에 풀칠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질 것임을 의미한다. 젊은 이들에게 이것은 또한, 자본주의가 그들에게 어떤 미래도 제공할 없다는 말이다!

 

어제 우리를 속인 자들이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기만한다!

자본주의 세계의 지도자들, 정치가들, 지배계급을 위해 일하는 언론인들, 모두는 이러한 재앙같은 전망을 감추려 들지도 않는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기나 하겠는가? 세계최대의 은행들이 파산하고, 중앙은행들, 국가가 그들에게 제공한 수천억 달러와 유로의 구제방안 덕분에 살아남았다. 미국의, 아시아의, 그리고 유럽의 주식시장들에서 주가곡선이 계속해서 급추락하고 있다. 증시는 2008 1 이래 25 달러, 말하자면 미국의 2년치 GNP 잃었다. 모든 것은 전세계의 도처에서 지배계급을 엄습한 진정한 공포를 반영한다. 오늘날 주식시장들이 붕괴되면, 이는 은행들의 재앙적 상황 때문만이 아니라, 경제의 대대적인 위축, 파산기업들의 폭발적인 증가로 인한 이윤의 엄청난 감소, 우리가 지난 40년간 경험해온 모든 것들보다 훨씬 심각할 경기침체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세계의 주요지도자들인, 부시, 메아켈, 브라운, 사르코지, 후진따오는 최악의 상황을 막고 피해제한을 시도하려는 희망으로 연이어 정상회담(G4, G7, G8, G27, G40) 가지고 있다. 11 중순에 계획되어 있는 새로운 정상회담 어떤 이들에 따르면 자본주의를 새로이 구축하는데 기여하게 것이라고 한다. 세계지도자들의 격앙은 언론인들과 전문가들 격앙과 비슷한다. 텔레비젼, 라디오, 신문 등등- 모든 곳에서 위기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이렇게 야단법석인가?

지배계급은 그들 경제의 재앙스런 상태를 이상 은폐할 수는 없지만,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체제가 문제시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단지 과도함 잘못된 태도 대항하는 것의 문제라는 점을 그래도 우리가 믿게 하려고 애쓰고 있다. 투기꾼들 탓이란다! 사장들의 탐욕 탓이란다! 탈세천국 탓이란다! „신자유주의탓이라고 한다!

이러한 동화가 우리에게 먹혀들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전문적인 협잡꾼들이 총동원된다. 경제는 건강하고 은행들은 튼튼하다고 어제 우리에게 말했던 바로 전문가들 지금은 매스미디어에서 쉴새없이 그들의 새로운 거짓말을 퍼뜨리고 있다. ‚신자유주의 해답이라고, 국가는 경제에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우리에게 말하던 바로 사람들이 지금은 만큼 강력하게 국가의 개입을 외치고 있다. 많은 국가개입과 많은 도덕성“, 그러면 자본주의는 다시 완전하게 기능할 있을 것이란다. 이러한 거짓말을 그들은 지금 우리에게 주입시키려 한다!

 

자본주의가 위기를 극복할 있는가?

오늘날 세계자본주의를 뒤흔드는 위기는 겨우 2007 여름 미국에서 터진 비우량주택담보대출위기의 시작과 더불어 출현한 것이 아니다. 40여년전이래 경기침체가 1967, 1974, 1981, 1991, 2001 차례로 있었다. 수십년 이래 실업은 사회의 지속적인 현상의 하나가 되었다, 수십년 이래 피착취자들은 그들의 생활수준이 점점 공격당하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인간의 필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시장과 이윤을 위해서 생산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만족되지 않는 필요들은 엄청나지만 사람들은 지불능력이 없다. 다시 말해서, 세계인구의 절대다수는 생산된 상품을 구매력이 없다.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한다면, 수백만, 수십억의 사람들이 견딜 없는 빈곤에 빠지게 되고 기아에 직면하게 된다면, 그것은 체제가 충분히 생산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판매할 있는 것보다 많은 상품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매번 지배계급은 크래딧의 대대적인 상환청구와 인위적인 시장의 창출을 통해서 잠시 숨통을 튀울 있었다. 그렇기에 이러한 재호황 많은 피눈물을 초래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어디선가 계산서가, 모든 빚들이 지불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바로 그것이 오늘날 일어나고 있다. 지난 시기의 굉장한 성장전체는 전적으로 부채에 의지한 것이었다. 세계경제는 빚으로 살았고, 지금 상환의 시기가 오자, 모든 것은 마치 카드로 집처럼 무너지고 있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지금의 혼란은 정치지도자들에 의한 잘못된 관리, „상업인들의 투기나 은행가들의 무책임한 행동 때문이 아니다. 모든 이들은 단지 자본주의의 법칙들을 이용했을 뿐이고, 체제에 재앙이 것은 바로 이러한 법칙들인 것이다. 그래서 모든 국가들과 중앙은행들이 경제에 공급한 모든 수조 달러는 상황을 전혀 변화시키지 않을 것이다. 빚더미를 키울 뿐일 것이다. 이는 마치 기름으로 불을 끄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절망적이고 무효한 수단을 취하는 것은 지배계급이 속수무책임을 보여준다. 모든 구제계획들은 실패할 밖에 없다. 자본주의 경제의 진정한 획복은 없을 것이다. 어떤 정책도, 그것이 좌파의 것이든 우파의 것이든, 자본주의를 구할 없는데, 왜냐하면 체제는 치명적이고 불치의 병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빈곤의 극심화에 대해 우리는 투쟁과 연대로서 대항해야 한다.

여기저기에서 1929년의 공황, 그리고 1930년대의 대불황과 비교되고 있다. 끊임없는 실업자들의 행렬, 무료급식소앞의 빈민들, 파산하여 문을 닫은 공장들등등, 당시의 그림들은 여전히 머리속에 뚜렷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이 정말로 똑같은가? 대답은 아주 분명하게, 아니다! 설사 자본주의가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고 국가의 개입과 나은 국제적인 협력 덕분에 끔찍한 붕괴를 막을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의 상황은 훨씬 나쁘다.

그러나 다른 차이가 있다. 1930년대의 공포스런 불황은 2 세계대전을 초래했다. 현재의 위기가 3 세계대전으로 연결될 것인가? 전쟁으로의 도피는 자본주의의 극복될 없는 위기에 대한 지배계급측의 유일하게 가능한 해답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항할 있는 유일한 세력은 그것의 숙적, 세계 노동자계급이다. 노동자계급은 1930년대에 러시아의 1917년혁명이 고립된 이후 끔찍한 패배를 겪었고, 제국주의적 학살에 끌려갔다. 그러나 지금의 노동자계급은 1968년의 대투쟁들 이래, 착취자계급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을 태세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지난 40 이래, 노동자계급은 종종 고통스런 패배들을 감수할 밖에 없었지만, 계속해서 패배당하지는 않았고 특히 2003 이래 그들은 점점 저항에 나서고 있다. 경제위기의 가속은 저개발국가들에서 뿐만 아니라 선진국들에서도 수억의 노동자들에게 끔찍한 고통, 실업, 빈곤, 기아등등을 유발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와 마찬가지로 피착취자들 측의 방어투쟁들을 불가피하게 유발하게 것이다.

이러한 투쟁들은 지배자들측의 경제적 공격을 제한하여 이들이 피착취자들을 절대적인 빈곤상태로 빠뜨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나 그러한 투쟁들이 자본주의가 점점 위기로 빠져드는 것을 막을 수없음은 명백하다. 이를 통해 피착취자들은 그들의 집단적인 강력함을 발전시킬 있다, 그들의 단결을, 그들의 연대를, 그들의 의식을 인류에게 미래를 보장할 있는 유일한 대안,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과 그와는 완전히 다른 기초를 갖는 사회로써 그것을 대체하는 것과 관련하여 발전시킬 있다. 이상 착취와 이윤, 시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필요를 위해서 생산하는 사회로써. 이러한 사회는 노동자들 자신들에 의해서지 소수의 특권층에 의해서 꾸려나가지지 않을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80여년 동안 자본가계급의 모든 부분들은, 좌우익을 막론하고, 그당시 동유럽과 중국을 지배하던 체제를 공산주의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은 국가자본주의의 특히 야만적인 형태에 불과했다. 그들은 다른 세계를 꿈꾸는 것은 헛됨을, 자본주의 이외의 다른 세계는 있을 없음을 피착취자들에게 확신시키려 시도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파산이 명백해진 이후, 공산주의사회의 전망이 노동자들의 투쟁에 점점 영감을 주어야 한다.

 

극도의 곤경에 처한 자본주의의 공격에 직면하여, 착취와 빈곤과 전쟁의 야만을 극복하기 위해서,

전세계의 노동자계급의 투쟁만세!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국제공산주의흐름 2008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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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년 5월 – 제 3편 - (출처: ICC의 프랑스지부 신문) -노동자계급의 소생

노동자계급의 소생

68년 5월에 관해 오늘날 확산되는 모든 거짓말들에 대항해서, 혁명가들은 진실을 회복시켜야 한다. 그들은 또한 이러한 사건들의 의미와 교훈들을 파악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 특히, 그러한 사건들의 교훈들이 꽃과 화환 더미에 묻혀버리는 것을 막아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68년 8월에 관해서, 그것의 첫번째 구성요소, 즉 학생운동을 다룬 2개의 글들(이 1, 2편은 하나의 글로 재편집되어 영어판 International Review133에 개재되었고, 한국어 번역판에서는 제 1부로서 표시됨)로써 그러한 노력을 시작했다. 이번 글에서 우리는 그 사건들의 본질적인 구성요소, 즉 노동자계급 운동을 다룰 것이다.

이 시리즈의 전편에서 프랑스에서의 사건들에 대한 결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5 14일에 토론은 많은 직장에서 계속 진행되었다. 모든 열광과 자신들의 강력함에 대한 느낌이 표면화된 폭력적인 시위들이 전날밤에 있은 ,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일을 손에 잡는 것은 어려웠다. 낭트에서 쉬드-아비아시옹(Sud-Aviation) 노동자들이 자생적인 파업에 들어갔고 작업장을 점거하기로 결정했다. 특히 젊은 노동자들이 운동을 추진했다. 노동자계급이 다시 무대 위에 등장했다."

이러한 묘사를 우리는 여기서 계속하겠다.  

파업의 확산 

낭트에서는, 학생들 또래의 노동자들이 운동에 동참했다. 그들의 논거는 단순하면서도 명료했다: „ 학생들이 결코 파업을 통해서 압력을 가할 없음에도 정부를 강제하여 승복하도록 만들 힘을 가지고 있다면, 노동자들도 정부를 승복하게 만들 있다. " 그 도시의 학생들 측에서도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선언하고, 노동자들의 파업초소에, 결연에 가담했다. CGT(프랑스노조총연맹)와 CPF(프랑스공산당)은, 학생들 속에 스며들어서 „고용주들과 내무부를 위해 일하는 좌파 선동자들"에 대해 경고했지만 이러한 캠페인은 그다지 큰 효과가 없었다.

5월 14일 저녁에 총 3,100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다.

5월 15일에는 노르망디의 클레옹에 소재한 르노작업장과, 그 지역의 다른 두 작업장으로 운동이 확산되어서, 전체적인 파업, 무제한의 공장점거가 이뤄지고, 공장정문에는 붉은 깃발이 내걸렸다. 이날이 저물 무렵에는 파업자가 총 11,000명에 달했다.  

5월 16일 다른지역 르노작업장의 노동자들이 동참해서, 플랭, 상두빌, 르 망 과 빌랑꾸르에 붉은 깃발이 나부꼈다. 이날 저녁에는 총 75,000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르노-빌랑꾸르의 노동자들의 투쟁 참여는 매우 분명한 신호탄이 되었다. 그것은 프랑스에서 가장 큰 작업장(35,000명이 고용된)으로서 오랫동안 다음과 같은 말이 통용되어왔다: „르노가 재채기를 하면, 프랑스가 감기에 걸린 것이다"  

5월 17일에는 총 215,000명의 파업자가 있었다.

파업물결은 이제 프랑스 전역에, 특히 프로방스에 도달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생적인 운동이었고 노조들은 그 꽁무니를 뒤따랐다. 전 지역에서 젊은 노동자들이 선두에 서 있었다. 빈번하게 학생들과 젊은 노동자들이 결연했다. 젊은 노동자들은 점거된 대학교들로 가서,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공장 구내식당에 식사하러 올 것을 권했다.  

정확한 요구사항들은 없었다. 그 대신에 오히려 불만이 표현되었다. 노르망디의 한 공장벽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삶을 영위할 시간과 많은 존엄이 필요하다."  이 날 CGT는 „파업의 확산"을 요구했다. 그것은 „기층에 의해" 추월당할 까봐 그리고 지금까지의 초기 며칠 동안 훨씬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던 CFDT에 의해 뒤로 밀려날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 이야기되었듯이, 그것은 „달리고 있는 기차에 뛰어올라 탔다." 그 호소는 그 다음날에야 알려졌다.

5월 18일 정오에, 즉 CGT의 파업호소가 알려지기 전에 이미 백만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 날 저녁에는 이백만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5월 20일에는 6백만명이 5월 21일에는 6백 50만명이 일손을 멈추었다.

5월 22일에는 8백만명이 무기한 파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것은 국제 노동자운동 사상 최대의 파업이었다. 이 파업은, 유명하게 된 이전의 파업들 - 1926년 5월 영국의 ‚총파업'(1주일에 걸친) 1936년 5월과 6월에 있은 프랑스의 파업들 -에 비해서 훨씬 더 대규모였다.

모든 부문이 해당되었다: 산업, 운송 및 교통, 에너지, 우편 및 텔레커뮤니케이션, 교육, 행정(정부의 여러 기관들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언론매체(국영테레비전이 파업을 했고, 종사자들은 특히, 강요된 검열을 탄핵했다), 연구소 등등.

장례사업장 마저도 파업했다(68월 5월은 사망하기에 좋은 시기가 아니었다).  심지어는 프로 스포츠 선수들도 그 운동에 동참했다. 프랑스축구협회 건물에 붉은 깃발이 나부꼈다. 예술가들도 참여해서, 칸느영화제가 감독들의 권유로 중단되었다.

이 시기에, 점거된 대학들(파리의 오데옹극장과 같은 다른 공공건물들과 마찬가지로)은 끊임없는 정치적인 논쟁 공간이 되었다. 많은 노동자들, 특히 젊은 노동자들이, 물론 이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토론들에 참여했다. 노동자들은 혁명의 필요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점거된 공장들을 방문해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할 것을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나중에 프랑스에서의 ICC 분파를 창립하게 될 소 규모의 사람들은, 점거된 공장 JOB에서 노동자평의회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설명하도록 요청받았다. 가장 의미있는 것은, 이러한 초대가 CGT와 CPF...의 회원들의 입을 통해 이루어진 점이었다. 이 회원들은, JOB의 파업초소를 ‚강화하기' 위해서 온  쉬드- 아비아시옹(Sud-Aviation) 대공장의 CGT 주요관료들과 한 시간동안 협상을 한 후에야 비로소 ‚과격한 좌파'를 공장에 들어놓는데 동의를 얻어낼 수 있었다.  6시간이상 동안 노동자들과 혁명가들은, 종이뭉치위에 앉아서, 혁명과 노동자운동의 역사와 소비에트에 대해서 심지어는 CPF와 CGT의... 배신에 대해서 토론했다.

마찬가지로 거리에서 보도에서 많은 토론들이 이뤄졌다(68년 5월에는 도처에 날씨가 매우 좋았다). 그러한 토론들은 매우 즉흥적으로 생겨났다. 각자가 할 말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서로 대화를 나눈다"가 슬로건의 하나였다). 도처에서 축제분위기 같은 것이 지배했지만, 예외적으로 ‚부유층구역들'에서는 공포와 증오가 쌓여갔다.

프랑스 도처에서, 도시구역들에서, 몇몇 큰 작업장들이나 그 인근관할 구역들에서 „행동위원회"가 출현했다. 그곳에서는 어떻게 투쟁해야할지, 혁명적 전망이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지에 대해 토론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토론들에는 좌파 그룹들이나 아나키스트 그룹들이 왕성하게 참여했지만, 그곳에는 이러한 그룹들의 회원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국영 라디오 및 TV 방송국, ORTF에서 조차도, 행동위원회가 출현했는데, 특히 미셜 드루커가 이것을 함께 고무했고 티에리 롤랑이 크게 관여했다.

부르조아지의 반응들

이러한 상황을 놓고 볼때, 지배계급은 방황하는 시기에 있었고, 이러한 방황은 혼동되고 비효과적인 발의들을 통해 나타났다.

그렇게 해서 우파가 지배하는 의회는 좌파가 2주 전에 제시한 검열안을 토론한 다음 거부했다. 프랑스공화국의 공식적인 제도권들은 딴 세상에 사는 것처럼 보였다. 정부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같은 날, 독일로 출국했던 다니엘 콘벤디트의 재입국을  금지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불만을 한층 더 들끓게 만들었다. 5월 24일 여러 시위들이, 특히 콘벤디트의 체류금지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서 많은 많은 시위들이 있었다: „국경 타도!", „우리 모두가 독일 유태인이다!"

CGT가 „모험가들"과 „선동가들"(즉, „과격한" 학생들)에 대해 설치한 저지선에도 불구하고 많은 젊은 노동자들이 이러한 시위들에 합류했다.

이날 저녁 공화국 대통령 드골장군은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는 프랑스인들이 (일종의 자본-노동 연합으로서) „참여"를 표명할 수 있도록 국민투표를 제안했다. 상황을 그보다 더 잘못 파악할 수는 없었다. 이 담화문은 쇠귀에 경읽기와 마찬가지였고, 정부와 부르조아지의 전반적인 혼란스러움을 나타냈다[1].

거리에서 시위대들은 그 담화문을 트렌지스터라디오를 통해서 전해들었다. 즉시 분노가 더 고조되었다: „우리는 그의 담화문을 야유했다." 파리 시내 전체에 그리고 몇몇 지방도시들에서 폭력적인 대결들이 일어났고 바리케이트가 세워졌다. 수많은 쇼윈도우가 깨여지고, 자동차들이 불태워졌다. 이렇게 해서 여론의 일부가 학생들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고, 이들은 이제 „폭동자들"로 비춰졌다. 그런데 시위대들 중에, 불길에 기름을 붓고 국민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드골주의 민병대 대원들이나 경찰들이 섞여있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많은 학생들이, 바리케이트를 세우거나, ‚소비사회'의 상징인 자동차를 불태움으로써 자신들이 ‚혁명을 만들 것'이라고 믿었던 점은 분명했다. 이러한 행위들은 특히, 역사상 최대의 파업물결에 대한 당국의 한심스럽고 도전적인 반응들에 대해 시위대, 학생들과 젊은 노동자들이 갖는 분노를 드러냈다. 체제에 대한 이러한 분노의 한 표현으로서, 자본주의의 상징인 파리주식거래소가 화염에 휩싸였다.

결국 부르조아지는 그 다음날에야 효과적인 대책을 마련했다. 토요일인 5월 25일에 노동부(그르넬가에 위치한)에서 노동조합, 고용주들 그리고 정부 사이에서 협상이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고용주들은 노동조합이 기대했던 것 이상을 제공할 용의가 있었다. 부르조아지가 겁에 질려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퐁피두 수상이 그 협상을 지휘했다. 그 일요일 저녁 그는 CGT 의 총수 세귀와 한 시간동안 단독면담을 했다. 프랑스에서의 자본주의 사회질서 유지의 중책을 맡고 있는 이 두 사람은, 질서를 다시 확보하기 위해서 아무런 증인 없이 상의할 시간이 필요했다[2].

 5월 26일밤에 „그르넬협정"이 서명되었다:

  • 모두에게 6월 1일부터 7% 그리고 10월 1일부터 부가적으로 3%의 임금인상;
  • 최저임금 25%인상;
  • 보건의료부문에서 ‚본인부담'을 30%에서 25%로 감축(특히, 사회보험의 적용을 받지 않는 의료비지출에서);
  • 회사들에서 노조의 인정;
  • 그 외에, 특히 노동시간에 관련해서, 협상초기의 일련의 매우 불분명한 언약들(그당시 노동시간은 주당 평균 47시간이었다).

운동의 강력함을 놓고 볼때, 그것은 순전히 도발에 지나지 않았다:

  • 10%의 임금인상은 인플레이션에 의해 재빨리 잠식당할 것이었다(그 당시 인플레이션 비율이 높았다);
  • 인플레이션에 대한 임금보상 문제에 대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 노동시간 단축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것도 없었다. 주당 40시간(공식적으로는 이미 1936년에 달성된)으로의 „단계적인" 회귀를 목표로 선언함으로써 만족했다. 정부가 제안한 그 리듬에 따랐다면 그 목표는 2008년에나 도달되었을 것이다!     
  • 본질적인 어떤 것을 획득해낸 유일한 부분은 저임금 노동자들(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키고 그들이 작업을 개시하게 할 희망에 의해)과 노동조합들(그들의 사보타지 역할에 보상으로써)이었다.  

5월 27일 총회는 „그르넬협정"을 만장일치로 거부했다.

르노 빌랑꾸르에서 노동조합은 ‚전시적인 행사'를 조직했고, 언론매체는 이를 크게 보도했다. 세귀는 협상에서 돌아왔을 때 기자들에게, „작업 복귀가 곧 이뤄질 것"이며, 빌랑꾸르의 노동자들이 모범을 보일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침부터 모여든 10,000명의 직원들은, 노조지도자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파업을 계속할 것을 결정했었다.  

CGT의 ‚역사적인' 지도자, 베누아 프라숑(1936년의 협상에 이미 참가한 적이 있는)은 선언했다: „그르넬의 협정은 수백만의 노동자들에게 기대하지 않았던 복지를 제공할 것이다."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CFDT의 앙드레 장송은, 파업 계속에 관한 처음의 결정을 환영하며 노동자들과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의 연대에 대해 언급했다. 열렬한 박수갈채가 있었다.

결국 세귀는 „그르넬의 성과들"에 대한 „객관적인 보고"를 제시했고, 몇 분동안 야유를 받았다. 그런 다음 세귀는 상황에 적응했다: „여기서 들은 것에 따라서 판단해 보건데, 여러분들은 순순히 물러서지 않을 것 같습니다! "  박수갈채, 하지만 그 무리들 속에서 한 목소리가 외쳤다: „그는 우리를 속인다."

„그르넬의 협정"을 거부한 가장 좋은 증거는,  5월 27일에 파업자 수가 9백만으로 증가한 것을 들 수 있다.

5월 29일 파리의 샤르레티 스타디움에서 대규모의 집회가 있었다. 그것은 학생조합 UNEF와 CFDT(CGT보다 더 과격한 것처럼 보여진), 그리고 좌파그룹들이 주관했다. 연설중에 혁명적인 논조들이 울려퍼졌다. 증가하는 불만들에 대해서 CGT와 CPF로써 배출구를 마련하려 했다. 극좌파들의 대변인들 곁에 망데-프랑스(1950년대의 전직 정부수반)와 같은 사회민주주의자들도 참석해 있었다. 머리를 검은 색으로 염색하고서 독일로부터 돌아온 콘벤디트도 등장했다(그는 전날 저녁에 소르본느에 나타났었다).

5월 28일은 좌파 당들의 작전과 조처들이 있는 날이었다.  

아침에," 좌파 민주주의자 및 사회주의자 연합"(사회당, 과격당 그리고 상이한 작은 좌파그룹들을 대표하는)의 총수 프랑스와 미테랑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가 보기에, 권력의 진공상태가 존재하며 그래서 그 자신이 공화국 대통령 후보로서 출마할 것임을 선언했다. 오후에는 CPF의 지도자, 발덱-로쉐는 „공산주의자들의 참여"를 포함하는 정부를 제안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혼자서 그 상황을 자신들이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는 것을 막는 것이 관건이었다. 5월 29일에 큰 시위가 있었는데, CGT가 그것을 주관하고 „국민정부"를 요구했다. 우파들은 즉시 „공산주의의 음모"에 대해 경고했다.   

이날 드골 장군이 „사라졌"다. 그가 퇴위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사실 그는 독일로 날아가서, 그곳 프랑스점령군을 지휘하고 있던 마수(Massus) 장군의 지지와 군대의 충성을 확실히 하려했다.

5월 30일은 부르조아지가 상황에 대한 주도권을 다시 장악하려는 시도에서 일종의 결정적인 날을 표현했다. 드골은 다시 담화문을 발표했다. „ 상황에서 나는 결코 퇴위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 국회를 해산한다..."

동시에 파리의 샹젤리제거리에서 드골을 지지하기 위한 엄청한 규모의 시위가 있었다. 부유층구역들에서, 잘 사는 교외지역에서, 그리고 시골에서 군용트럭으로 „국민"이 운송되어 왔다.  겁먹은 자들과 가진자들, 서민들, 부유층 자제들을 위한 지역학교 대리자들, 자신들의 ‚우월함을' 의식하고 있는 지도층들, 쇼윈도우가 파괴될까 조바심하는 작은 상점주인들이 모두 한 곳에 모였다. 국기에 대한 공격 때문에 격노한 참전용사들, 은폐물 아래에서 지하 세계와 더불어 잠복하는 비밀경찰들 그리고 알제리정착민들, 파시스트적인 옥시당 그룹의 젊은 회원들인 OAS와 비시(Vichy)에 대해 향수를 느끼는 늙은 추종자들(이 모두는 드골을 경멸하지만)이 함께 모였다. 이 모든 순량한 사람들이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신들의 증오와 „질서 사랑"을 알리기 위해서 보여들었다. „자유 프랑스"의 투사들도 속해 있던 그 군중들로부터 „콘벤디트를 다하우(Dachau)로 보내라!"와 같은 구호들이 퍼져나왔다. 그러나  그 „질서의 당"은 샹제리제에서의 시위들로 그친 것이 아니었다. 같은 날 CGT는 „그르넬의 성과들의 개선"을 위해 부문별 협상들을 요구했다. 이는 운동을 절멸하기 위해 그 운동을 분열시키는 수단이었다.

조업 재개 

그 목요일부터 조업이 재개되긴 했지만 이것은 느리게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6월 6일에도 여전히 약 6백만명이 파업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업은 매우 분산적으로 재개되었다.

5월 31일: 로트링엔의 강철산업, 북프랑스의 직물산업

6월 4일: 병기창, 보험

6월 5일: 발전소, 탄광소

6월 6일: 우체국, 텔레커뮤니케이션, 운송(파리에서 CGT는 조업재개를 위해 압력수단을 동원했다. 각 작업장에서 노조지도자들은, 다른 정거장들에서는 조업이 이미 재개되었다고 알렸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6월 7일: 초등학교

6월 10일: 플랭스의 르노 작업장이 경찰에 의해 점령되었다. 경찰에 의해 폭행을 당한 고등학생들 중의 한명이 센느강에 추락해서 익사했다.

6월 11일: 소쇼의 푸조 작업장(프랑스에서 두번째로 큰 작업장)에 CRS(내전경찰)이 개입. 2명의 노동자가 살해당함.

프랑스 전역에 다시 한번 엄청난 시위들이 발생했다. „그들이 우리 동지들을 살해했다." 노동자들의 결연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CRS는 소쇼 작업장을 정리했다. 하지만 조업은 그 이후 10일이 지나서야 재개되었다.

그러한 분노가 다시 파업의 부활(아직 3백만이 여전히 파업중이었다)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노동조합들(CGT를 그 선두로 한)과 좌파정당들(CPF를 선두로 한)은,  „선거가 실시될 있고  그래서 노동자계급의 승리가 완성될 있기 위해서" 조업을 재개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CPF의 일간지, 뤼마니테(l'Humanité)는, „그들의 승리로써 강력해진 수백만의 종사자들이 조업을 재개하다" 를 표제로 삼았다.

노동조합들에 의해 5월 20일에 체계적으로 이뤄진 파업 호소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었다: 그들은 그 운동을 통제해서,  덜 전투적인 부분들에서 조업재개를 그렇게 손쉽게 이뤄낼 수 있도록 그래서 다른 부문들로 그러한 사기저하를 확산시킬 수 있도록 만들길 원했다.

발덱-로쉐는  선거운동동안 자신의 연설에서, „공산당은 질서의 당"이라고 선언했다. 사실상 부르조아적인 „질서"가 서서히 회복되었다.

6월 12일: 중고등학교에서의 업무 재개

6월 14일: 에어 프랑스와 해운

6월 17일: 르노 빌랑꾸르에서 조업의 혼돈스런 재개

6월 18일: 드골은 아직 수감중에 있던 OAS 지도자들을 석방하게 함.

6월 23일: 국회의원선거의 첫 투표일, 우파가 크게 득표함.

6월 24일: 파리 중심에 위치한, 시트로엥 쟈벨에서 조업재개(CGT의 제 2인자인 크라수키가 총회 앞에 나서서 파업중단을 외침.)

6월 26일: 우시노 뒨키르션

6월 30일: 결선투표, 우파의 역사적인 승리.

마지막으로 업무를 재개한 직장 중의 하나로서 라디오 및 TV방송국이 7월 12일에 업무를 재개했다. 많은 언론인들은 이전에 정부에 의해 이뤄졌던 것처럼 다시 그렇게 후견되고 검열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업무가 재개된 후 그들 중 많은 이들이 해고당했다. 도처에서 질서가 다시 회복되었고, 특히 목적에 알맞게 국민을 „설득하는데" 중요한 언론매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해서 역사상 가장 큰 파업은 CGT와 CPF의 주장과는 반대로 패배로 끝났다. 그 심각한 패배는, 그 운동 동안 분노와 경멸을 샀던 당들과 „권위들"의 복귀에 의해 확증되었다. 그러나 노동자운동은 오래전부터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의 투쟁들의 참된 결과는 직접적인 결과가 아니라, 점점 결속해가는 노동자들의 단결이다"(공산주의 선언).

그러나 직접적인 패배와는 상관없이 1968년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서도 크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들을 우리는 다음 번의 글에서 보여줄 것이다. 그 글에서 우리는 프랑스에서의 이 „아름다운 5월"의 심층에 놓인 원인들과 역사적 그리고 국제적인 차원들을 밝혀내려 시도할 것이다.

파비안느(27/04/2008)


[1]   이 담화문이 발표된 다음 날 많은 도시들의 코뮨들의 종사자들이, 국민투표를 조직하기를 거부한다고 공표했다. 당국들은 투표용지를 어떻게 인쇄해야할지도 몰랐다- 국영 인쇄소는 파업중이었고, 파업하지 않았던 사립 인쇄소들은 그 인쇄주문을 거부했다. 고용주들은 자신들의 종업원들과의 부가적인 마찰을 원치 않았다.

[2]   사회부 차관이던 시락(Chirac) 역시 CGT의 제 2인자 크라수키를 (어느 다락방에서!) 만났다는 것이 이후에 알려졌다.

68년 5월과 혁명적 전망(제 1부) - 1960년대의 세계학생운동

1969년 1월 미국의 리차드 릭슨 대통령은 취임시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지속적 성장이 보장되도록 경제를 조성하는 것을 마침내 알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이러한 낙관론이 잔인한 현실에 의해 얼마나 반증되었는지를 볼 수 있다. 그 4년 후, 즉 그의 두번째 임기가 시작될 때 이미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래 최악의 불경기에 빠져들었다. 이에 따라 다른 많은 것들이 결과되었는데, 그 모두는 각각 그 전에 앞섰던 것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었다. 하지만 세상 물정에 어두운 낙관주의와 관련해서, 그 한 해 전에 이미 훨씬 더 경험많은 국가수반 하나가 닉슨을 능가했다. 그 사람은 바로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였고1958년 이래 프랑스공화국의 대통령이던 드골이었다. 이 위대한 지도자는 신년사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지 않았던가: „1968년, 나는 올해를 평온하게 맞이한다 " 그의 경우에는 그러한 낙관주의가 사라지기까지 4년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그 장군의 평온이 가장 큰 혼란에게 자리를 내어 주기까지 4개월이면 충분했다. 드골은 폭력적이고 대규모의 학생폭동들뿐만 아니라 국제노동자운동 역사상 가장 큰 파업을 상대해야만 했다. 1968년은 그래서 프랑스에게 있어 전혀 평온하지 않은 해였을 뿐만 아니라,  제 2차 세계대전 이래 가장 큰 격동의 해였고 오늘날까지도 그런 해로 남아 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만 그해에 크다란 격동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야가 프랑스에만 국한 되었다고는 절대로 비난될 수 없는 저자 2명, 즉 영국인 데이비드 쿠테 그리고 미국인 마아크 퀄란스키는 그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진술한다: „1968년은 2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래 가장 격렬한 해였다. 미국과 서유럽에서, 체코슬로바키아에서까지 연이어 봉기들이 일어났다. 이러한 봉기들을 통해서 전후질서가 문제시되었다."[1]  „ 이전까지는 1968년과 같은 해는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러한 사건들이 해에 일어나는 일은 앞으로도 이상 없을 것이다. 민족국가들과 문화들이 여전히 나뉘어 있고 서로 매우 다른 시기에, (...) 하나의 반항적인 정신이 전세계에 걸쳐 자생적으로 나타났다. 이전에도  다른 혁명의 해가 예를 들어  1848년처럼 있었지만, 1968년과 견주어 볼때 그러한 사건들은 유럽에만 국한된 채로 머물렀다..."[2]  이 „뜨거운 해" 이후 40년이 지난 현재 여러 나라에서 이 주제를 놓고 신문과 텔레비젼등에서 보도들이 그야말로 홍수를 이루는 동안, 혁명가들은 1968년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것들을 여기서 면밀하고 빠짐없이 다시 펼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사건들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해내기 위해서.[3]  특히, 그들은 오늘날 매우 널리 확산되어 있고 퀄란스키의 책 표지에도 실려있는 한 생각에 대해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 „역사학자들뿐만 아니라 정치학자들도 - 전세계의 사회학 전문가들이 동의하는 것은, 1968년이전과 1968년이후가 구분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우선 말하자면, 우리는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지만,항상 반복해서 듣게 되는 다음 과 같은 이유들과는 확실히 다른 이유들 때문이다:  „성해방"이, „여성해방"이, 가족의 권위주의적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가, (대학교와 같은 )특정 제도들의 „민주화"가, 새로운 예술형식들의 발전 등등이 출현했기 때문이라는. 그래서 우리는 이 글에서 ICC의 관점에서 볼때1968년에 발생한 진정한 혁명들을 보여주고자 한다.    

상당히 중요한 사건들(예를 들어, 미군이 방어해내긴 했지만 그래도베트남전에서 미국이 결코 승리할 수 없을 것임을 분명하게 만들었던1968년 2월의 베트콩의 구정공세 또는, 같은 해 8월 소련 탱크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이외에도 1968년은 - 코테와 퀄란스키가 강조하듯이 - 이러한 „전세계에서 느껴질 수 있었던 반항정신에 의해 각인되었다." 기존 질서에 대한 이러한 문제제기에서, 그 정도에 있어서도 또 의미에 있어서도 상이한 두가지 구성요소들을 구분지어야 한다.

한편으로 서구권 지역의 거의 모든 나라들을 휩쓴 그리고 심지어 어느 정도는 그 당시 동구권국가들로도 확산된 학생반란이 그것이었다. 다른 한 요소는, 1968년 근본적으로는 오직 한 나라, 즉 프랑스에서만 발전했던 노동자계급의 대대적인 투쟁이었다.

이 첫번째 글에서 우리는 오직 첫번째 요소만 검토할 것인데, 이는 그것이 가장 중요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것은 노동자 투쟁들에 앞서 전개되었을 뿐이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학생반란의 의미를 훨씬 능가하는 역사적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세계의 학생운동

지구상에서 가장 큰 나라, 미국에서 그 당시 1964년부터 그 시기 가장 대대적이고 가장 격렬한 운동들이 전개되었다. 특히 북부 켈리포니아의 버클리 대학교에서 학생들의 항의가 최초로 더 큰 규모로 확대되었다. 학생들이 주요하게 제기한 것은, 대학들에서 자유로운 정치적 발언을 위한  „자유로운 발언 운동(free speech movement)"(언론자유를 위한 운동)의 요구였다.   

미군의 잘 무장된 신병모집자들에 대해 항의하는 학생들은 베트남전 반대 그리고 인종분리 반대를 선동하려 했다(이 모든 것은, 마틴 루터 킹이 그의 유명한 연설, „나는 꿈이 있습니다"를 행한,  1963년 8월 28일 워싱턴에서의 „시민권을 위한 행진"이 있은 1년 후에 일어났다). 처음에 당국은,  매우 억압적으로, 특히 경찰력을 통원해서 „씻트-인(sit-ins)", 즉 대학공간들의 평화로운 점거에 대해 대응했고, 이때 800명의 학생들이 체포되었다. 1965년초 대학측은 대학내에서의 경찰들의 활동을 허가했고, 그렇게 해서 이 대학교는 미국내 학생저항운동의 주요중심지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동시에 그당시 로날드 레이건이 „버클리에서의 무질서를 일소하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1965년 예상치 않게 켈리포니아 주지사가 되었다. 운동은 강한 자극을 받았고 그 다음해에 인종분리 반대, 여성권리 옹호 그리고 특히 베트남전쟁 반대 항의시위를 통해서 과격화되었다. 같은 시기에 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특히 학생들이 베트남으로의 징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떼지어 외국으로 도피하는 한편, 그 나라의 대부분은 대학교들은 반전운동의 무대가 되었고, 대도시의 흑인게토들에서는  폭력 봉기들이 불타올랐다(베트남전에 보내진 흑인 젊은이들의 비율은 베트남전에 소집된 국가평균보다 훨씬 높았다).

이러한 항의운동은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그렇게 1967년 말 952명의 학생들이 베트남으로의 소집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다는 이유로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68년 2월 8일 사우스 케롤라이나에서 시민권을 위한 시위 도중에 3명의 학생들이 살해당했다. 그운동은1968년에 가장 강력히 확대되었다. 3월에 흑인 학생들이 워싱턴의 호워드 대학교에서 4일동안 그학교 일대를 점거했다. 1968년 4월 23일에서 30일까지 뉴욕의 콜럼비아대학교가, 국방부와의 합력대한 항의로 그리고 할렘의 흑인 게토 주민들과의 연대를 이유로 점거되었다. 불만과 과격화는 4월 4일 마틴 루터 킹의 암살에 의해 한 층 더 증폭되었는데, 이 사건은 그 나라의 흑인 게토들에서 수많은 폭력충돌들을 불러일으켰다. 콜럼비아대학교의 점거는 미국 학생운동의 최절정점들 중의 하나로서, 다시금 새로운 충돌들을 초래했다.

5월에 동맹휴학중인 12개 대학교 학생들이, 인종주의와 베트남전에 반대해 항의하기 위해 만났다. 그여름에 켈리포니아는 운동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이틀 밤동안 경찰과 버클리대 대학생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고, 그런다음 켈리포니아의 주지사, 로날드 레이건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이러한 새로운 충돌 물결은, 민주당 대회 기간 동안 큰 무력충돌이 발생한, 8월 22일에서 30일사이 시카고에 그 절정에 도달했다.

미국 대학생들의 반란은 같은 시기에 많은 다른 나라들로 확산되었다. 

아메리카대륙의 다른 나라들중에서는 브라질과 멕시코의 학생들이 가장 활동적이었다. 

1967년 브라질에서는 브라질 정부와 미국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들이 늘 다시 발생했다. 3월 28일 경찰이 학생들에 반대해 투입되어 그들 중에 루이스 에드손이라는 학생이 살해되었고, 중상을 입은 여러 학생들 중에서 한명이 다시 그 며칠후 사망했다. 3월 29일의 루이스 에드손의 장례은 엄청난 시위로 바뀌었다. 무기한 동맹휴업중이던 리오 데 자네로대학에서부터 운동은 상파울로의 대학들로 확산되어 그곳에서는 바리케이트가 세워졌다.  3월 30일과 31일에 다시 시위들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4월 4일에 리오에서 대략 600명이 검거되었다. 엄청난 진압과 대대적인 검거에도 불구하고1968년 10월까지 거의 매일 시위들이 있었다.

몇 달 후 멕시코가 휩쓸렸다.

7월말 멕시코시티에서 학생반란이 일어났다. 그 대응으로써 경찰은 탱크를 투입했다. 수도의 경찰총수는 그 진압을 다음과 같이 정당화했다: „제 19회 올림픽 대회 전야에 우리 정부에 대해 적대적 분위기를 만들어낼 경향이 있는 하나의 파괴적인 운동"에 대응해야만 한다. 진압은 계속되었고 심지어는 더욱 극심해졌다. 9월 18일 대학캠퍼스가 경찰에 의해 점령되었다. 9월 21일 경찰은 수도에서 있었던9건의 충돌 동안 736명을 검거했다. 9월 30일에는 베라크루스대학교가 점거되었다. 10월 2일 마침내 정부는 멕시코시티의 3문화광장에서 10,000명의 학생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도록  했는데, 이때 사복차림의 준군사조직이 투입되었다. „틀라텔롤코의 학살"로서 기억에 새겨진 이 진압시 최소한 200명이 살해당하고 500명 이상이 중상을 입었으며 2000명 이상이 검거되었다. 그렇게 해서 디아스 오르다스 대통령은 10월 12일에 시작된 올림픽대회를 „조용하게" 치를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학생들은 올림픽대회라는 „강제된 휴식" 이 있은 후 몇 달동안 운동을 계속 펼쳤다.

하지만 아메리카대륙만이 학생운동의 이러한 물결에 휩싸인 것은 아니었다. 사실 모든 대륙이 해당되었다.

그렇게 해서 아시아에서는 일본에서 특히 극적인 운동이 출현했다. 1963년이래 미국에 반대하는 그리고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폭력적인 시위들이 발생했는데, 이는 주로 전학련(전국일본학생자치위원회연합)에 의해 주도되었다. 1968년 봄이 끝날 무렵, 그 학생저항운동은 학교들과 대학교들에 도달했다. 투쟁구호 하나는 다음과 같았다: „칸다[도쿄의 대학지구]를 라탱지구로 탈바꿈시키자." 노동자들이 운동에 가담한 후 이 운동은 1968년 10월에 절정에 달했다. 10월 9일에 도쿄, 오사카 그리고 교토에서 경찰과 학생들이 충돌했다 - 80명이 부상당하고 188명이 검거되었다. 반봉기법이 통과되었다- 이에 반대해서 약 800,000명이 거리에서 시위를 했다. 도쿄대학의 점거에 대항해 경찰이 그 대학에 진입한 것에 대응하여 10월 25일 6000명의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했다.  1969년 1월 중순 학생운동의 마지막 요새, 도쿄대학이 무너졌다.  

아프리카에서는 특히 세네갈과 튀니지가 두드러졌다.

세네갈에서 학생들은 정부의 우익성향과 프랑스의 신식민주의적 영향력을 탄핵하고 대학들의 구조변경을 요구했다. 1968년 5월 29일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사회주의 인터네셔널'의 회원인 레오폴드 세다르 셍호르에 의해 군부의 도움으로 진압당했다. 그러한 진압시에 다카르 대학교에서 1명이 살해당했고 20명이 부상당했다. 6월 12일 다카르 근교에서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의 시위에서 다시 1명이 살해당했다.

튀니지에서는 그 운동이 1967년에 시작되었다. 6월 5일, 아랍국가들에 대항해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것으로 비난된 미국과 영국에 반대하는 한 시위중에 미문화원이 파괴되었고 영국대사관이 공격당했다. 모하마드 벤 제넷이라는 학생이 검거되어 2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1월 17일에 수 많은 학생들이 베트남전에 반대해서 항의했다. 1968년 3월 15일부터19까지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했고 모하마드 벤 제넷의 석방을 요구했다. 결국 이 운동은 일련의 검거를 통해서 진압되었다.

...유럽에서...

그러나 가장 거대하고 극적인 운동은 유럽에서 전개되었다.

영국에서는 이미 1966년 말에, 부르조아 경제학파들의 중심지인 매우 권위있는 „런던경제학교(LSE, 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들끓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학생들은  당시 로데지아와 남아프리카에서 인종차별주의적 정부들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진 한 인물이 그 학교의 학장으로 지명되는 것에 반대해 항의했다. 항의운동은 그 이후에도 계속 LSE를 엄습했다. 그렇게 해서 예를 들어 1967년 3월에는 징계대책들에 반대해서 5일간의 점거(sit-in)가 있었고, 이에 후속적으로, 미국의 예를 본받아 „자유대학"이 만들어졌다. 12월에 리전트 스트리트 폴리테크닉에서 그리고 홀번 법 및 상업대학에서 점거가 일어났다. 이것은 대학 지도부 내에 학생대표를 둘 것을 요구했다. 5월에 에섹스 대학교가, 호른세이미술대학이, 헐, 브리스톨 및 클레에서 점거당했다: 이에 뒤어어 크로이던, 버어밍햄, 리버풀, 길드포드 에서 그리고 왕립예술대학에서 운동이 일어났다.

가장 극적인 시위들(출신과 견해에 있어서 상이한 많은 사람들이 참가한)은 베트남전에 반대하여, 1967년 3월과 10월에, 1968년 3월과 10월(가장 나중 것이 참가자수에 있어서 가장 대규모였음)에 일어났는데, 이 모두는 경찰과의 폭력적인 충돌을 초래했다. 이때 미국대사관과 그로스베노르 광장 앞에서는 각각 수백명의 부상자와 검거자가 발생했다.

벨기에에서는 학생들이 베트남전에 반대하여 항의하고 교육부문의 개선을 요구하기 위해서1968년 4월부터 여러번 가두로 나섰다. 5월 22일에는 브뤼셀자유대학교가 점거되어 „민중을 위해 열린 대학교"라 선언되었다. 그 일대는, 그학교의 대학위원회가 학생들의 요구들 중 몇몇을 수용하고 나서  6월 말에 다시 정리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1967년부터 여러 대학교들이 점거되었고, 경찰과 학생들 사이에 정기적인 충돌도 있었다. 로마대학교가 1968년 2월에 점거되었다. 경찰이 그 일대를 정리하자 학생들은 보르게제거리에 있는 건축과 건물들로 이동했다. 결국 „그룰랴 계곡의 전투"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폭력적인 충돌들이 일어났다. 동시에노동조합이 허약한 산업부문의 종사자들이 (베니스의 마르쪼토-작업장에서) 자생적으로 저항했다. 이에 대해 노동조합들은 그 산업에서 하루동안의 총파업을 선언했고 많은 종사자들이 이에 참여했다. 결국 5월에 열린 선거들은 이미 봄부터 기울어져가던 그 운동의 종말을 의미했다.

프랑코 지배하의 스페인에서는 1966년부터 노동자들의 파업과 대학교점거의 물결이 전개되었다. 1967년에 그 운동은 한층 강하게 성장했고 1968년까지 지속되었다.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서로에게 연대를 표시했다. 예를 들어 1967년 1월 27일 100,000명의 시위자들이 마드리드에서 있었던 한 시위 참가자들에 대한 잔혹한 진압에 반대하여 항의했는데, 이때 경제학과 건물로 피신한 학생들은 경찰과 6시간동안이나 대치상태에 있었다. 당국은 시위자들에 대해 모든 수단을 총 동원했다. 언론은 통제되었고, 운동 관련자와 지하에서 활동하던 노동조합활동가들이 검거되었다. 1968년 1월 정부는 각 대학교에 „대학교경찰"을 설치했다. 그러나 이것은 학생운동이 베트남전과 프랑코체제에 반대해 계속 저항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해서 마드리드 대학교는 3월에 폐쇄되었다.

유럽의 모든 나라들 중에서 독일에서의 학생운동이 가장 강력했다.

독일에서는 1966년 말, 무엇보다도 사회민주당이 정권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반응으로서, „의회외부의 반대파(APO)" 하나가 출현했다. 그 APO는 특히 학생들의 총회에 기반하고 있었고, 그 회의에서는 저항의 수단과 방법에 관한 열띤 논쟁들이 이루어졌다. 많은 대학교들에서 - 미국의 모범을 따라서 - 토론그룹들이 만들어졌고, „기성의" 부르조아적인 것에 대한 반대극으로서 „비판적인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시기에, 논쟁의 오랜 전통, 즉 공개적인 총회에서의 토론 전통이 일부 부활했다. 많은 이들이 비록 극적인 행동에 대한 충동에 의해 이끌리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래도 이론에 대한, 혁명운동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다시 출현했고 그러한 관심과 더불어 자본주의의 극복을 생각할 용기도 다시 나타났다. 독일에서의 항의운동은 국제적으로 „가장 이론적이며,  토론들에 있어서 가장 깊이 파고들었고 가장 정치적이었던 "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토론들에 병행하여 수많은 항의시위들이 있었다. 베트남전 문제는 확실히, 미국의 군사력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정부를 가진, 그리고 2차대전의 영향이 지속적으로 남아 있는 나라에서 주요 원동력이었다. 1968년 2월 17일과 18일 서베를린에서 국제베트남대회가 개최되었고 그에 뒤어어 12,000명이 참가한 시위가 있었다. 1965년이래 일어난 시위들은 마찬가지로 비상사태법령의 제정을 탄핵했는데,  이 법령으로써 국가는 내부적인 군국주의화와 강화된 진압에 대한 포괄적인 권리들을 갖게 될 터였다. 1966년 대연정에 참가한 SPD는 이러한 기획을 주장하면서, 그들이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유혈진압을 지휘했던 1918-1919의 자신들의 오랜 전통을 이어갔다. 1967년 6월 2일 페르시아의 샤의 베를린방문에 반대해 있었던 한 시위가, 이 피에 굶주린 독재자와 가장 좋은 관계들을 맺고 있던 „민주적인" 독일 국가에 의해 가장 잔혹하게 공격당했다. 그러한 무력적 충돌에서 한 사복경찰에 의해서 베노 오네조르그라는 학생이 등에 총을 맞고 살해되었다. (그 경찰은 이후 사면되었다.) 이러한 살인이 있은 후 시위대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선동되었고, 특히 지도자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했다. 빌트-신문은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이제 젊은 빨갱이들의 테러를 끝장내라!" 1968년 2월 21일 베를린 참의회의 하나에 의해 조직된 „친미 데모"에서 참가자들은 „국민의 적 1호: 루디 두취케"라는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는데, 그는 저항운동의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다. 이 시위 도중에 두취케로 오인된 한 행인은 시위참가자들에 의해 때려죽이겠다는 위협을 받았다. 미국에서 마틴 루터 킹이 암살된 1주일 후인 4월 11일 „푸른 목요일(Gründonnerstag)"에 결국 독일에서도 그러한 선동캠페인은, 스프링어[빌트-신문의 발행사]-출판물에 의해 선동당한 한 젊은 자객이 베를린에서 루디 두취케를 암살을 시도한 후 그 절정에 달했다.  그에 뒤어은 부활절의 소요는 주로 스프링어출판사를 겨냥했다. 몇 주 동안 독일에서의 학생운동은, 그런 다음 프랑스가 눈길을 끌기전까지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게 참조점 역할을 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프랑스 학생반란의 주요 일화는 1968년 3월 22일 파리 서편 근교인 낭트르에서 시작되었다.

그날의 사건들은 그 자체로서는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파리에서 베트남전에 반대해 많은 폭력적인 시위들이 벌어졌던 시기에 파리의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사무실을 겨냥한 암살계획에 한때 관여한 것으로 의심되는 낭트르대학교 소속 극좌파 학생 한명의 검거에 대항해 그의 동료 학생 300명이 한 강의실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들 중 142명이 그 대학의 대학위원회 건물을 그날밤 점거하기로 결정했다. 낭트르 대학교 학생들이 그들의 불만을 표현한 것이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 얼마전에 이미, 남학생들에게는 금지되어 있는 여학생 기숙사에의 출입문제를 놓고 학생들과 경찰들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1967년 3월 16일에는 500명의 기숙사생으로 이뤄진 회합, ARCUN이, 무엇보다도 여학생들이 (21세가 되어야 성년으로 인정되던 그당시에 이미 성년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미성년자로 간주되어야 함을 의미하고 있던 거주규칙의 폐지를 결정했다. 그결과 경찰은 1967년 3월 21일 대학 행정처의 요청에 따라, 그 건물에 남아서 맨 위층에 바리케이트를 쳐놓고 있던 150명의 학생들을 그곳에서 체포하기 위해서 그 여학생기숙사를 포위했다. 그러나 다음날 경찰관들 자신들이 수천명의 학생들에 의해 포위되어 버렸다. 이들은 그래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던 학생들이 어떤 장해도 없이 밖으로 나오게 내버러 두도록 명령받았다. 이 사건 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그들의 분노를 특히 1967년 가을에 공표된 대학교개선을 위한 ‚푸셔-플랜(Fouchet-Plan)'에 반대해 분노를 분출했던 시위들도 성과가 없었다. 그러나 1968년 3월 22일 이후 모든 것은 다르게 진행되었다. 몇 주 사이에 일련의 사건들이 전쟁 후 최대로 학생들을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 노동자 운동 사상 최대의 파업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 대학교의 대학위원회 건물을 점거한 142의 점거자들은 그 건물을 떠나기 전에, 그와 같은 선동을 유지하고 추진하기 위해서 3월 22일 운동(M22)의 성립을 결정했다. 그것은 트로츠키주의 성향의 혁명적 공산주의 연맹(LCR)과 아나키스트들(이 속에 특히 다니엘 콘벤디트가 속했다)이 초기에 속했던 비공식적인 운동의 하나였다. 4월 말 맑스-레닌주의적 공산주의 청년연합(UCJML)의 마오주의자들이 가담했다. 그에 뒤이은 몇 주 안에 총합하여 대략 1,200명의 학생들이 참여했다. 대학교 벽면에는 점 점 더 많은 플래카드와 낙서들이 등장했다: „교수들, 너희들은 낡았고 너희의 문화도 마찬가지이다 "; „삶을 살자!"; „너희의 꿈을 실현하라!" M22는 3월 29일을 „비판적인 대학교"의 날로 선언하고 이와 더불어 독일 학생들의 전철을 밟았다. 총장은 학교를 4월 1일까지 폐쇄하기로 결정했지만, 선동은 학교를 개방한 후 다시 타올랐다. 1000명의 학생들 앞에서 콘벤디트는 선언했다: „우리는 자본주의 착취의 장래 매니져들이 되길 원치 않는다." 대부분의 교수진은 상당히 보수적으로 대응해서, 4월 22일 그들 중에서 „좌파 강사들"을 포함한 18명은 „선동자들이 색출되고 처벌되도록 대책과 수단을" 요구했다. 총장은 일련의 억압대책들을 결정했고, 특히 경찰들에게 대학캠퍼스에의 자유로운 접근과 활동의 자유를 부여했다. 동시에 신문들은 „분노한 자들", „종파들"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에 반대를 부추겼다. 프랑스 „공산주의" 당(PCF)도 같은 방식으로 반응했는데, 4월 26일 중앙위원회 위원 피에르 쥬켕이 낭트르 모임에 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복한 마마보이 소요자들이 노동자의 자식들이 시험치지 못하게 방해한다 " 그는 자신의 연설을 다 끝마치지도 못하고 피신해야만 했다. PCF의 제 2인자  죠르쥬 마르세는 뤼마니테(l'Humanité)에서 다시 다음과 같이 부추겼다: „이러한 거짓 혁명가들은 끈기 있게 폭로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객관적으로 그들은 드골주의자들의 권력과 대자본 독점의 이해관계를 위해 봉사하기 때문이다"  

낭트르 캠퍼스에서는 극좌파 학생들과, „볼세비키들을 혼내주기 위해서" 파리에서 원정온 그룹 옥시당(Gruppe Occident) 소속 파시스트들 사이에 점점 더 빈번하게 격투가 벌어졌다. 이러한 상황을 놓고 총장은 5월 2일 그 대학교를 다시 폐쇄하기로 결정했고, 그래서 그 학교는 경찰에 의해 봉쇄되었다. 낭트르학생들은, 대학 폐쇄에 반대하고 콘벤디트를 포함해M22 구성원 8명에 대한 대학위원회의  징계대책에 반대해 항의하기 위해서 그 다음날 소르본느대학 마당에서 집회를 갖기로 결정했다.

그 모임에는 300명만이 참가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열심히 학년말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러한 선동을 끝장내길 바라던 정부는 결정적으로 큰 타격을 가하기로 마음먹고, 경찰로 하여금 라탱지구(파리의 대학가)를 점령하고 소르본느를 포위하도록 명령했다. 경찰이 수백년 이래 처음으로 소르본느대학교에 난입했다. 소르본느로 피신했던 학생들에게는 자유로운 귀가가 약속되었다. 여학생들이 걱정없이 귀가할 수 있었던 반면 남학생들은 캠퍼스를 떠나자마자 경찰차 안에 차곡차곡 채워졌다. 순식간에 수백명의 학생들이 소르본느광장에 모여들어서 경찰관들을 욕했다. 경찰은 그 학생들에게 최루탄을 쏘았다. 그 학생들은 광장로부터 강압적으로 쫓겨났지만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이 경찰관들과 그들의 차량들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충돌은 그날 저녁 4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경찰관 72명이 부상당했고 시위대 400명이 체포되었다. 그 다음날 경찰은 소르본느 일대를 완전히 봉쇄했다. 그와 동시에 학생 4명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단호한 손" 정책은 정부가 바라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했다: 선동을 끝장내기는 커녕 그것은 점점 더 대대적으로 되어갔다. 5월 6일, 월요일부터, 소르본느 주위에 결집한 경찰력과 수적으로 점점 더 확대되어가는 시위들 사이에는 되풀이 하여 충돌이 발생했다. M22, UNFEF(학생노동조합) 그리고 SNESup(대학교원노동조합)가 이러한 시위들을 호소했다. 45,000여명의 학생들이 „소르본느는 학생들에게 속한다", „경찰들은 라탱지구에서 물러나라" 그리고 특히 „우리의 동지들을 석방하라"라는 투쟁구호를 외치며 그러한 시위들에 참가했다. 대학생들에게 점점 더 많은 학생들, 선생들, 노동자들과 실업자들이 동참했다. 5월 7일 시위행렬은 갑자기 센느강을 건너서 샹젤리제를 따라 이동했고 대통령궁 근처까지 나아갔다. 대개는 라 마르세예즈나 장례의 조종이 들리던 그 개선문 아래에서 인터네셔널가가 불리기 시작했다. 몇몇 지방도시들에도 시위들이 번져나갔다. 정부는 자신의 좋은 의지를 증명해 보이고 싶어서 5월 10일 낭트르 대학교를 개방했다. 그날 저녁 만명의 시위대들이 라탱지구에 모여들어서, 소르본느를 봉쇄했던 그 경찰력과 대치했다. 21시에 몇몇 시위대들이 바리케이트를 치기 시작했다(총합하여 대략 60개가 세워졌다). 자정에 3명의 학생대표들(콘벤디트가 포함된)이 파리 대학위원회 총장의 영접을 받았다. 총장은 소르본느의 재개방을 확약했지만, 5월 3일에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에 대해서는 어떤 약속도 할 수 없었다. 오전 2시에 CRS(내전경찰)는 그 이전에 많은 최루탄을 발사한 후 바리케이트를 향해 돌격했다. 그 충돌은 매우 폭력적이었다. 양측에서 수백명이 부상당했다. 시위대중 500명이상이 체포되었다. 라탱지구에서는 많은 주민들이 학생들에게 호의를 보여서, 경찰의 최루탄이나 다른 공격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집으로 피신하게 하거나 거리에 물을 뿌려주었다. 이 모든 사건들, 특히 진압세력의 잔인성에 관한 보도들을 수십만의 사람들이 라디오를 통해 주목했다. 오전 6시에 라탱지구에 „질서가 지배했다". 하지만 그것은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처럼 보였다.

5월 11일 파리와 프랑스 전역에서 분노가 거세졌다. 도처에서 사람들이 자생적으로 시위행렬에 모여들었다. 이러한 시위들에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상이한 출신의 수십만의 시위자들, 특히 젊은 노동자들과 학부모들이 동참했다. 지방에서 많은 대학들이 점거되었고, 도처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사람들은 토론하기 시작했고 진압세력의 소행을 비난했다.

사건이 이렇게 전개되자 그날 저녁 죠르쥬 퐁피두 수상은, 5월 13일부터 경찰력이 라탱지구에서 철수하고 소르본느도 다시 개방될 것이며 체포된 학생들도 석방될 것임을 발표했다.   

같은 날, CGT(그때까지는 ‚극좌파 학생들'을 탄핵했었던 )를 포함한 노동조합중앙조직들과 몇몇 경찰노동조합들은, 진압과 정부정책에 항의하기 위해서 5월 13일에 파업과 시위를 하자고 외쳤다.

5월 13일 전국의 모든 도시들에서 제 2차 세계대전이래 최대규모의 시위들이 일어났다. 노동자계급은 학생들 곁에서 대대적으로 참가했다. 가장 널리 확산된 구호들 중의 하나가, „10년, 그것으로 충분하다"(드골이 다시 권력을 잡게된 1958년 5월 13일과 관련지어서)였다. 시위 끝에 거의 모든 대학교들이 수많은 학생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젊은 노동자들에 의해서 점거되었다. 도처에서 사람들이 발언했다. 토론은 대학 관련 문제들이나 진압에 관련된 것만에 한정되지는 않았다. 노동조건들, 착취, 사회의 미래 등등 가능한 모든 사회문제들을 다루기 시작했다.

5월 14일에 토론은 많은 직장에서 계속 진행되었다. 모든 열광과 자신들의 강력함에 대한 느낌이 표면화된 폭력적인 시위들이 전날밤에 있은 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일을 손에 잡는 것은 어려웠다. 낭트에서 쉬드-아비아시옹(Sud-Aviation)의 노동자들이 자생적인 파업에 들어갔고 그 작업장을 점거하기로 결정했다. 특히 젊은 노동자들이 운동을 추진했다. 노동자계급이 다시 무대 위에 등장했다.

1960년대 학생운동의 의미

당연히 이 운동 전체의 특징은 특히 베트남전쟁 반대에 있었다. 그러나 하노이나 모스크바 정권과 연계된 스탈린주의 당들이 그 이전 1950년대 초 한국전쟁동안 있었던 반전운동에서처럼 운동의 주도권을 쥘 것으로 애초에 생각되었던 반면에,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이러한 당들은 사실상 어떤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했고, 아주 빈번히 그 운동에 전적으로 대립했다.[4] 이점이 1960년대 말 학생운동의 특징들 중의 하나였고, 이는 그러한 운동들이 그후 가지게 될 근본적인 의미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의미를 우리는 지금 제시하려 시도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당연히 학생들을 움직인 그 당시 테마들을 반드시 상기해야 한다.

1960년대 미국 학생반란의 테마들

미국의 베트남전에 반대한 저항이, 서방 세계 모든 나라들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널리 확산된 동인이었다면, 학생반란이 지구상의 가장 중요한 나라들에서 일어난 것이 확실히 우연은 전혀 아니다. 미국의 젊은 세대는 전쟁문제와 직접적으로 대면했는데, 왜냐하면 젊은이들이 차례로 징집되어 „자유세계"를 수호하기 위해서 전쟁터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수만명의 미국 젊은이들이 그들 정부의 정책을 위해 목숨을 잃었고, 수십만명이 부상당하고 불구가 되어 베트남에서 돌아왔으며, 수백만명은 그들이 그 나라에서 겪은 것에 의해 평생동안 후유증을 앓았다. 그들이 현지에서 경험한 공포를 제외하더라도, 많은 이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직면했다: 우리가 베트남에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가? 공식적인 설명에 따르자면 그들은 ‚민주주의', ‚자유 세계' 그리고 ‚문명'을 수호하기 위해서 그곳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현지에서 경험한 것은 공식적인 정당화와는 완전히 모순되었다: 그들이 소위 방어해야할 정권, 즉 사이공의 정부는 ‚민주적'이지도 ‚문명적'이지도 않았다. 그것은 군사독재로서 부정부패가 극에 달해 있었다. 현지에서 병사들은, 무장하지 않은 가난한 농민들, 여자들 그리고 아이들과 노인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살해해야만 하도록, 자신들이 마치 야만인처럼 행동해야만 되도록 요구되는 그때에, 자신들이 ‚문명'을 수호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현지의 병사들뿐만이 아니라 전체 미국 젊은이들의 점점 더 많은 수가 그 전쟁의 경악스러움에 진저리를 쳤다. 단지 젊은 남자들이 전쟁터에 보내질 것을 두려워하고 젊은 여자들이 자신들의 친구들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은 귀환하는 ‚참전군인들'로부터 또는 그냥 테레비젼을 통해서, 그곳을 지배하고 있는 야만을 점점 더 많이 알게 되었다.[5]  미국 정부가 증거로서 제시하는 ‚문명과 민주주의의 수호'라는  공식적인 말과 베트남에서 그것의 실제 행동사이의 엄청난 모순은, 미국-부르조아지의 권위와 전통적인 가치들에 반대한 반란을 초래한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였다.[6]  이러한 반란은 첫 번째 시기에 히피운동을 함께 결과시켰는데, 이것은 비폭력적이고 평화주의적 운동의 일종으로서 „플라워 파워(flower power)"(꽃의 힘)을 주장했다. 그 슬로건들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았다: „메이크 러브, 낫 워(make love, not war)"(사랑을 해, 전쟁을 하지 말고).학생들이 규모 버클리대학교에서, 즉 당시 히피들의 메카였던 샌프란시스코 근교에서 최초로 더 대규모로 운집한 것은 아마도 전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운집의 테마들과 특히 수단은 여전히 이러한 히피운동을 닮은 „점거(Sit-in)"였는데, 이는 대학들에서 정치적인 선동을 위한 „자유로운 발언(free speech)"(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기 위해서, 또한 특히 흑인들의 ‚민권'을 지지하고, 대학내에서 이뤄지는 모병캠페인을 탄핵하기 위한 비폭력적인 방법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다른 나라들, 특히 1968년 프랑스에서와 같이 버클리에서의 진압은 그 운동의 ‚과격화'의 중요한 한 요소였다. 1967년부터, 애비 호프만(Abbie Hoffman)과, 비폭력운동에 잠시 함께 했던 제리 루빈(Jerry Rubin)에 의해 국제청년당(Youth International Party)이 창립된 이후, 그 반란운동은 ‚자본주의'에 대항한 일종의 ‚혁명적인' 전망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운동의 새로운 ‚영웅들'은 더 이상 밥 딜런이나 조안 배스가 아니라, (루빈이 1964년 하바나에서 만났던) 체 게바라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 운동의 이데올로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뒤죽박죽이었다. 여기에는 (자유숭배, 특히 섹스의 자유나 마약소비의 자유와 같은) 아나키스트적인 면모들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쿠바와 알바니아가 모범으로서 찬양되는) 스탈린주의적인 면도 있었다. 행동들은 아나키스트들의 그것 - 조롱과 도발 - 에 흡사했다. 그렇게 호프만-루빈 공동팀의 초기의 극적 행동들 중의 하나는, 위조지폐 뭉치들을 뉴욕주식거래소에 배포하는 것이었는데, 그에 이어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 지폐들을 줍기 위해 사납게 몰려들었다. 1968년 여름 민주당 대회동안 그들은, 한편으로 경찰과의 무장된 충돌을 준비하는 동시에,  페가수스라는 이름의 돼지를 대통령후보로 제안했다.[7] 요약해서, 1960년대 미국에서 확산된 저항운동의 주요특징들을 말하자면, 그것은 베트남전에 반대했을 뿐만아니라 인종차별에도 반대했으며, 성별에 따른 불평등한 대우에 반대하고 미국의 전통적인 도덕과 가치들에 반대했다. 참여자들 대부분이 (마치 자신들이 반항하는 서민 자녀들인양 행동할 때) 확인했듯이, 이러한 운동은 결코 노동자계급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들의 ‚이론가'인 철학교수 헤르베르트 마르쿠제가, 노동자계급은 ‚흡수 통합'되어 버렸다고,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항한 혁명적 세력은 다른 사회계층들, 예를 들어 인종차별 희생자들인 흑인들이나 제 3세계의 농민들이나 반항하는 지식인들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확실히 결코 우연은 아니다.

... 그리고 다른 나라들에서

서양의 대부분의 다른 나라들에서 1960년대의 학생운동들은 미국에서와 흡사했다: 미국이 베트남에 관여하는 것의 비난, 권위에 대해, 특히 대학의 권위에 대한, 권위주의 일반에 대한, 전통적인 도덕에 대한, 특히 성도덕에 대한 반란. 이것이 바로, 권위주의의 상징이었던 스탈린주의 당들이, 비록 미국의 베트남 개입을 강력히 탄핵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란자들 사이에서 전혀 반향을 얻을 수 없었던 이유였다. 그런데 베트남에서 미국의 투쟁상대, 즉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것으로서 행동했던 군사 세력은 전적으로 소련블록에 의해 지원되었다. 소련의 명성이 1956년 헝가리 봉기의 진압으로 매우 크게 손상당한 것은 사실이고, 브레지네프의 낡은 기관원들이 어떤 원대한 꿈도 질식시킨 것은 사실이다. 1960년대의 반란자들은 호치민(오랜 기관원였지만 훨씬 더 모범적이었고 ‚영웅적인' 것처럼 보였던)의 포스터를 걸어놓길 더 좋아했고, 체게바라(마찬가지로 스탈린주의 당의 당원었지만 ‚이국적'으로 여겨졌다)나 안젤라 데이비스(미국의 스탈린주의 당의 당원이었지만 흑인인데다가 여성이라는 이중의 장점을 갖고 있었고 체게바라와 마찬가지로 ‚멋진' 외모의 소유자였다)의 낭만적인 사진을 걸어두길 가장 좋아했다.

베트남전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자유스러워' 보이는 이러한 요소는 마찬가지로 독일에도 나타났다. 운동의 가장 유명한 인물, 루디 두취케는 구DDR출신으로서, 그곳에서 그는 젊은 나이에 벌써 헝가리봉기의 진압에 항거했었다. 그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은 청년 ‚맑스'와 프랑크푸르트학파(마르쿠제가 속했던) 그리고 상황주의 인터네셔널(그가1962년에 그것의 베를린 지부를세웠던 바로 그 „전복적인 행동(Subversive Aktion)" 그룹의 기반이었던)이었다.[8]

1965년이래 독일 대학들에서 전개된 토론 과정 동안, „반권위주의적인 진정한 맑스주의"에 대한 모색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당시 평의회주의운동의 많은 텍스트들이 다시 진열되었다.

프랑스에서 1968년 전개된 학생운동의 테마들과 요구들도 근본적으로는 동일했다. 그러한 전개 과정에서, 베트남전에 반대한 저항은 상황주의적이거나 아나키스트적으로 영감을 받은 (또는 초현실주의적이기까지 한) 그리고 더 빈번하게 담벼락 위에서 읽을 수 있었던(„벽도 할말을 갖고 있다")  일련의 슬로건들에 의해 뒷자리로 물러나게 되었다. 아나키스트적인 실행은 특히 다음과 같은 슬로건들에서 뚜렷했다:

파괴의 열정은 일종의 창조적인 희열이다"(바쿠닌)   

금지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자유는 모든 범죄들을 포함하는 범죄이다"

선거는 어리석은 자들을 위한 함정이다"

불손하고 파렴치하다는 것은 새로운 혁명 무기이다"

이것들은 „성혁명(sexual revolution)"을 호소하는 요구들로써 보완되었다:

아래 위로 포개 누워서 서로 사랑하라!"

너희들의 바지 지프를 여는 그만큼 자주 너희들의 두뇌도 열어라 "

나는 섹스를 하면 할수록 그만큼 혁명을 만들고 싶다. 혁명을 만들면 만들 수록 그만 섹스를 하고 싶다."

상황주의(Situationism)의 영향은 다음과 같이 반영되었다:

소비사회 타도!"

볼거리의 상품사회 타도!"

소외를 타도하자!"

절대로 일하지 말라!"

각자의 소망을 현실로 여기자, 왜냐하면 나는 나의 소망들의 현실성을 믿으니까 "

우리는 굶어죽지않을 안전함이 지루해서 죽을 위험과 맞바꿔지는 그런 세상은 원하지 않는다."

지루함은 반혁명적이다."

우리는 정체됨이 없이 살고 무제한으로 즐기고 싶다"

 „현실적이 되자, 비현실적인 것을 요구하자!"

그 밖에 세대 문제(미국과 독일에서 크게 다가왔던)도 상이한 슬로건들(종종 매우 유해한 방식으로)에 나타났다:

달려라 동지, 낡은 세계가 뒤에 있다!"

젊은 이들은 성교를 하고, 늙은 이들은 음란한 몸짓을 한다."

바리케이트가 세워졌던 68년 5월 프랑스에서는 다음과 같은 슬로건들을 들을 수 있었다:

바리케이트는 거리들을 차단하지만 길을 연다."

모든 생각의 결론은, CRS[내전경찰], 아가리 안에 포석(paving stone) 쳐넣는 것이다. " 

포석을 겉어내라, 아래에 해변이 놓여 있다."  

이시기에 발견될 수 있는 가장 큰 혼란은, 다음의 두가지 슬로건들에서 표현된다:

혁명적인 사고란 없다. 오직 혁명적인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할말이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1960년대 학생운동의 계급적 본질

이러한 슬로건들이 다른 나라들에서 유포된 대부분의 슬로건들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1960년대의 학생운동은 비록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나 스페인 또는 세네갈과 같은) 여러 나라들에서 노동자투쟁으로의 가교를 만드려는 의지가 있었을 지라도, 노동자계급의 본질을 반영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밖에 이러한 접근방식은, 잘못 소화된 맑스주의 고전 텍스트들의 영웅이었던 육체노동자(blue-collar worker)로서의 노동자에 대한 어느 정도의 매혹과 뒤섞인, 노동자계급에 대한 오만을 반영했다.  

그 핵심에 있어서 1960년대 학생운동은 쁘띠부르조아적인 성격을 띠었다. 아나키스트적인 표현형 이외에 가장 분명한 측면들 중의 하나는 „삶을 즉시 변혁하려는" 의지였다. 조급함과 그러한 „모든 것을 당장에"는 역사에서 어떤 미래도 없는 쁘띠부르조아와 같은 사회계층의 특징들이다.

이 운동 지도부의 ‚혁명적인' 과격주의 그리고 운동의 몇몇 일부들에 의한 폭력미화는 마찬가지로 그것의 쁘띠부르조아적인 본질을 반영한다. 1968년의 학생들의 ‚혁명적' 관심사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옳았지만, 그것들은 제3-세계-전망(게바라주의와 마오주의)으로부터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 하나에 의해, 그리고 파시즘에 의해 강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 운동은, 혁명을 초래하는 노동자계급운동의 실제적인 발전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채, 혁명에 관한 낭만적인 관점을 갖고 있었다. 스스로를 ‚혁명적이라고' 여겼던 프랑스의 학생들은68년 5월 운동이 이미 혁명이었다고 믿었고, 날마다 세워졌던 바리케이트들은 1848년 그리고 1871년 코뮨의 바리케이트의 유산으로서 묘사되었다.

1960년대말의 학생운동의 특징들 중 하나는, „세대간의 갈등", 즉 새로운 세대와 그들에 의해 여러가지로 비난받는 부모세대들 사이에 존재한 매우 큰 간극이었다. 특히 부모세대들은, 제 1차 세계대전에 의해 초래된 가난과 굶주림을 극복하기 위해 힘들게 일해야 했다는 이유로, 오로지 물질적인 번영에만 신경을 썼다고 비난당했다. 그래서 „소비사회"에 관한 환상들과 „절대로 일하지 말라!"와 같은 슬로건들이 그렇게 성공을 거두었다. 반혁명을 철저히 경험한 세대의 자녀들로서 1960년대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부모들이 자본주의의 요구들에 무릎을 꿇고 순응했다고 비난했다. 반면 많은 부모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것보다는 더 나은 경제적 형편을 자녀들에게 가능하게 하려고 자신들이 치를 수 밖에 없었던 그 희생에 대해  자녀들이 경멸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이기도 어려워했다.

그렇지만 1960년대 학생반란들에게는 진정한 경제적인 결정요인이 있었다. 오늘의 상황과 비교할 때, 그당시에는 대학졸업 후 실업으로 인한 또는 불안정한 노동조건들으로 인한 더 큰 위협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당시 젊은 대학생들의 주요한 근심은, 자신들은 그 이전 세대의 대학졸업자들과 같은 동일한 사회적인 지위상승을 더 이상 이룰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1968년 세대는, 그 당시의 사회학자들에 의해 상세하게 연구된, „사무관리직 인력들의 프롤레타리아화" 현상에 어느 정도 혹독하게 직면한 최초의 세대였다. 이현상은, 학생수가 현저히 늘어나자 마자(그래서 예를 들어 독일의 학생수는 1964년에서 1974년 사이에 330,000명에서 1백 10만명으로 증가됨), 위기가 공공연하게 드러나기 그 몇년전 부터 이미 확산되었었다. 이러한 증가는 경제의 필요에 부응한 것이긴 했지만 또한 그 부모들이자신들의 경우보다는 더 나은 경제적 사회적 처지를 자녀들에게 부여하려는 의지와 능력에도 부합했다.

특히 학생수의 대규모 증가는 불편의 증대를 초래했었다. 이는, 대학들의 구조들과 관행들이 단지 엘리트들만이 대학을 다닐 수 있었고 강한 권위주의적 구조들이 지배했던 시대의 소산으로서 그대로 존속했기 때문이었다.

1964년에 시작된 학생운동이 자본주의의 „번영" 시대에 전개되었던 반면, 경제적 상황이 벌써 매우 심각하게 악화되었던 - 그래서 학생들의 불편도 더 커졌던 -

 1967년의 상황은 이미 달라 보였다. 이것이 바로, 그 운동이 1968년에 그 절정을 경험하게 되는 이유들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왜 1968년 5월에 노동자계급이 무대 위에 등장하여 운동을 이끌어나가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이점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번 글에서 논할 것이다.   


[1]  David Caute, 1968 dans le monde, Paris, Laffont, 1988, 번역원본: Sixty-Eight: The Year of the Barricades, London, Hamilton, 1988. 미국에서도 출간됨: „The Year of the Barricades - A Journey through 1968", New Yorker, Harper & Row, 1988

[2]   Mark Kurlansky, 1968: l'année qui ébranla le monde, Paris, Press De La Cite, 2005, 번역원본 - 1968 :The Year That Rocked the World. New York: Ballantine Books, 2004.

[3]  우리의 몇몇 지역 출판물이 각 나라들에서의 사건들에 대한 글을 이미 실었거나 실을 예정이다.

[4]  학생운동은 1968년에 스탈린주의 체제도 엄습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그것은 스탈린주의 당의 일부에 의해 선전된 „프라하의 봄"의 일부였다. 체제를 문제삼은 하나의 운동으로서 간주될 수는 없다. 폴란드에서 그 운동은 다른 성격을 띠었다. 3월 8일 러시아에 적대적으로 간주된 공연 하나가 금지된 것에 항의하는 학생시위가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다. 3월에 긴장이 더 증폭되었다. 점점 더 많은 대학교들이 학생들에 의해 점거되었고, 점점 더 많은 시위가 있었다. 이러한 시위들은 „파르티잔파"의 지도자, 내무부장관 모자르장군의 지휘아래 잔인하게 진압당했고, 동시에 당내에서는 유태인들이 ‚시오니즘비난'을 이유로 쫒겨났다.

[5]  베트남전 동안 미국언론은 군사당국에 굴종하지 않았다. 이러한 ‚실수'를 미국정부는 1991년과 2003년의 이라크전 동안에는 더이상 저지르지 않았다.

[6] 그러한 현상은 제 2차 세계대전 후에는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병사들은, 특히 1944년 노르망디에 상륙했던 이들은 마찬가지로 지옥을 경험했지만, 거의 모든 병사들과 국민들 모두는 나치-정권의 야만성을 보고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7]   20세기 초에 프랑스 아나키스트들은 의회선거에 후보로 당나귀를 지명했다. 

[8]   상황주의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종합적인 서술과 관련해서는 우리의 글: „ 드보르 - 상황주의 인터네셔널의 두번째 죽음", revue internationale, 80호 참조할 것.

오늘의 대대적 파업, 노동조합 그리고 분업

 

Massenstreik, Gewerkschaften und Arbeitsteilung heute

- 이글은 사회주의노동자 제 8호에 사노신의 간단한 편집서문과 함께 실려있다. 참고로, 그 서문에서 이 토론모임이 ICC 산하 인듯한 오해를 불러일어킬 수 있는 소개가 있는데, 이 토론 모임은 ICC가 구성원의 일부로서 참여하고 개입하지만 그것과는 독립적임을 밝힌다.

 

2007년 여름 라인란트 토론모임에서 대대적 파업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이 토론의 기본자료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1906년에 쓴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Massenstreik, Partei und Gewerkschaften]이었다. 그후 토론잡지 [아우프헤벤Aufheben]의 편집진으로부터 대대적 파업에 관한 글을 청탁받고 우리는 여러가지 이유로 매우 기뻤다. 먼저, 우리는 이 잡지가 독일어권에서, 여러가지 견해들이 표현될 수 있는, 정치적으로 의식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개방적이고 풍부한 의견교환의 장이라는 것을 높이 사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대대적파업의 문제가 대단히 현재성을 띤다고 여기며 이에 대해 가능한 폭넓고 열린 논쟁을 희망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모임 홈페이지를 위해 우리 모임에서 이뤄진 토론에 대한 요약문을 작성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모임의 한 구성원에게 우리들의 토론을 기초로 아우프헤벤을 위한 글을 작성하도록 위임하기로 결정했다.

1905, 사회적 지진

로자 룩셈부르크가 1906년 그녀의 팜플렛을 쓸 당시, 그녀에게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나라에서 막 일어났던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 그 규모에 있어서 엄청난 어떤 것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특히 1905년 러시아에서 홍수를 이룬 대대적파업들의 물결 전체를 분석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 물결은 계급투쟁의 전대미문의 폭발이었고,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대해 그때까지 상상할 수 있던 모든 것을 깨고 나온 것이었다. 서로 다른 직업군들 사이의 구별이 무너졌다. 정치투쟁과 경제투쟁 사이의 구별이 무너졌다. 즉각적인 요구들과 혁명투쟁사이의 구분도 낡은 것이었다. 갑자기, 전자본주의적 약탈을 제거하는 것은 더 이상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과 나란히 해결할 수 있는 과제의 하나로서가 아니라 사회주의혁명의 자체의 과제로 보였다. 결국 1905년의 투쟁들은 완전히 새로운 조직원칙을 낳았다. 투쟁을 조직하고 대중을 동원하는 것은 더 이상 노동조합의 임무도 그리고 노동자정당의 임무도 아니었다. 오히려 노동자대중들이 이 임무를 스스로 넘겨받았다. 소비에트가 , 독일어로는 노동자평의회가 탄생했다.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오직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일일 수 밖에 없다는 맑스의 표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분명해졌다. 그것은 짜르제국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질서를 뒤흔든 역사적인 지진이었다. 또한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주의혁명을 현재의 사안으로 세움으로써 그리고 수십년간 통용되던 전제들의 기반을 허물어 버림으로써 맑스주의 노동자운동을 뒤흔들었다.

대대적 파업 - 지금 더이상 논할 필요도 없는가?

우리가 현재 로자 룩셈부르크의 팜플렛을 토론할 때, 당연히 우리에게는 역사에 대해 그리고 역사로부터 어떤 것을 배우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백년 전 로자에게, 트로츠키에게 또는 레닌이게 있어서 만큼 우리들에게도 오늘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대적 파업의 문제가 우리의 현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언뜻 보기엔 참으로 별 상관이 없는 듯하다. 1905년의 그것과 같은 지진은 아무리 둘러봐도 눈에 띄지 않는다. 임노동자들은 전체 전선에서 지독한 방어전에 내몰려져 있다. 인원감축, 대량해고, 폐업 그리고 생산의 이전 등이 피해자들이 그에 대항해 많이 손써 볼 수도 없이 결정되고 시행된다. 실업자들은 체계적으로 압박당한다. 그들은 절대적인 빈곤에 뿐만 아니라 개별화에 내몰려서, 자신이 국가의 공격에 대해 의지할 데 없이 내던져진 것처럼 대부분 느낀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를 방어하기 위해 변질된, 한 때의 노동자조직이었던 노동조합은 1905년에 처음으로 러시아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대중들에 의한 자체조직화에 의해 범람되었다. 그들은 도처에서 상황의 주인이 아닌가? 지금 우리는, 어떻게 DGB와 같은 거대한 노동조합중앙협회들을 조합원들이 무더기로 떠나버리는지를 경험하고 있긴 하다. 그들이 실업자가 되어서 결국 노동조합귀속성의 의미를 더 이상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든 또는 그들이 이러한 노동조합들에 대해 실제로 어떤 신뢰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든. 그러나 우리는, 그 대신에 의사들, 항공기조종사들 또는 기차기관사들의 경우와 같이 공공연한 탈연대와 제각각의 투쟁을 선동하는 작은 부문노동조합들이 어떻게 세를 확대해 가는지를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또한, (철도노동자들의 파업과 같이) 사실상 국민경제에 해를 끼칠 수 있을 파업을 국가는 당장에 그냥 법원의 판결로 금지할 수 있지 않은가?

미래의 대대적 파업이 현재에 준비되는가?

지난 몇년간의 작은 충돌들 - 독일에서의 메르세데스, 오펠, AEG, 텔레콤의 경우 또는 뉴욕과 런던 지하철의 경우-을 1905년 러시아에서의 거대하고 영웅적인 파업들과 비교한다면, 현재는 사실 참 암담해 보인다. 그러나 이미 여기에서도 로자 룩셈부르크의 팜플렛으로부터 배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현재를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법일 것이다. 오늘의 세계를 1905년의 대대적 파업의 절정점과 비교한다면, 대대적 파업은 하나의 과정으로서 수년에 걸쳐 준비된다는 점을 간과하게 될 수 있다. 로자에 따르면 대대적 파업은 소위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는 그런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자체의 역사와 그 이전의 역사를 갖는 여러 해에 걸친 성장을 거친다. 대대적 파업의 시작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것들은 종종 나중에 가서야 그런 것으로 인식된다. 러시아에서 그것은 1896에서 1906까지 10년에 걸친 한 시기였다. 그것은 성페터스부르크에서 „순전히 경제적인 부분적 임금투쟁"으로서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4만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한 총파업이되었다. „지금은 사건이, 혁명의 엄청난 대대적 파업들에 비해서 사소해 보일지 모른다. 당시 러시아의 얼음같이 경직된 정치적 분위기에서 총파업이란 전례없는 어떤 것이었고, 그것 자체가 일종의 축소판의 온전한 혁명 이었다 (룩셈부르크저작집(독어판), 제 2권, 104쪽, 풀무162,163쪽 참조 :이것과 이후 모든 인용문은 역자가 직접 번역했고 쪽수는독어판, 로자 룩셈부르크저작집(Rosa Luxemberg Gesammelte Werke)의 쪽수임, 참조할 풀무질번역판의 쪽수는 풀무표시가 첨가됨-역주 )" 아마 우리는 언젠가는, 회고하면서 2004년 보쿰의 오펠에서의 6일동안 지속된 자생적 공장점거파업의 예가 일종의 „축소판의 혁명"이었음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공산주의의 종말을 공개적으로 승인하는 겉모습이 그리고 계급투쟁이 추월당한 것 같던 겉모습이 삐걱거리기 시작했을때, 그 파업이1989년이래 시기의 „얼음같이 경직된 정치적 분위기" 의 종결의 시작을 알렸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종류의 작은 충돌들에 대해 로자 룩셈부르크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것의 발단은 사소한 의미를 지닌다. 그 발생은 초보적이다. 그것들은 단지 겉으로 보기에 순전히 경제적이다. 그것들이 대부분 겪게되는 패배는 지속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왜 이러한 작은 전투들으로부터 막강하고 전반적인 운동이 되는가? 왜냐하면 그것은, 계급 전체에 쌓이는 어떤 것의 표면을 때리는 가시적이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부르조아계급이 자본을 축적하는 동안, 노동자계급은 궁핍과 비참을, 피폐와 수모를, 소외와 비인간화를, 증오와 분노를 축적한다. 노동자들은 대대적파업에 돌입하면 그제야, 로자가 썼듯이,그들의 고통이 얼마나 참을 수 없어졌는가를 포괄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의식적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고통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로 인한 고통이자 임금노동체제로 인한 고통 이다. 고통 그 자체보다는 그 고통에 대한 인식이, 그 원인의 인식이 노동자투쟁을 더 높은 단계로 이끄는 것이다. 대대적 투쟁의 세기에는, 임금노예제를 본래 특징짓는 모든 것들이 피부로 느껴지게 될 것이고 쟁점화될 것이다. 정체되거나 삭감되는 임금, 노동시간의 연장이나 강화 또는 두가지 모두, 직장지도부의 교만한 태도와 상사의 잔인성, 문화결핍 또는 그러한 문화에의 노동자들의 접근차단, 직장밖의 주거- 및 생활조건, 국가의 억압과 사법체계의 소란스런 불공평, 부르조아민주주의의 부패와 와해, 특히 임노동의 전반적이고 증대되는 불안정성 - 이 모든 것과 더 많은 것들이 쌓여간다. 이 모든 것들이 점점 더 피부에 와닿게 되고 의식된다. 불만이 분노로 바뀌는 시점까지, 어떤 것을 일으키기에 한점 불꽃이면 충분할 시점까지, 계급의 일부분에 대한 -개별적인 노동자 한 명에 대한 -어떤 공격이라도 계급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질 그 시점까지. 이렇게 집단적으로 저장된 경험은 노동자대중이 때때로 몽유병자같은 확신으로-행동하게 만든다 - 이것이 의식의 일부인 직관이다. 결국, 그러한 운동은 자본주의의 가장 깊은 내부의 경향 안에 강하게 뿌리박음으로써 그 자체의 힘을 얻는다.1905년의 사건은 준비된 것이었고, 그것을 위한 준비투쟁들은 무역- 및 산업위기에 의해, 실업에 의해 그리고 제국주의 전쟁에 의해 초래되었다.

현재의 잠재력의 인식

룩셈부르크의 팜플렛이 대대적 파업의 문제를 100여년전에 고찰했듯이, 그렇게 우리가 현재 그것을 고찰하자면, 우리는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와 현재가 얼마나 유사한지를 확인하게 될 뿐만이 아니다. 심지어는 오늘 쌓이고 있는 사회적인 시한폭탄은 1905년에 축적되었던 그것을 훨씬 능가한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위기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깊고, 실업의 위험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확산되어 있다. „사회적 국가"가 허물어지는 시기인 지금, 실업은 점점 더 그것 본래의 공포를 되찾고 있다. 또한 제국주의전쟁- 당시는 극동에서의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충돌, 지금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충돌-은 체제의 본질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게 만든다. 게다가 오늘의 전쟁은 현존하는 무기체계와 테러리즘으로 볼 때 점점 더 직접적으로 민간인들에게도 피해를 주고 있다. 또한 오늘은 자본주의에 의해 유발된 재앙과 같은 환경문제로 인한 멸망위협 등과 같은 새로운 위협들이 의식된다. 이미 그 당시에도 특수하게 러시아 적이 아니라 국제적이었던 이러한 과정이 오늘은 훨씬 더 분명하게 하나의 전세계적인 전개라는 점이 또한 부가된다.

독일의 예는 이러한 전개를 잘 보여준다. 한 때 전후독일은 자본주의 복지수준의 그리고 사회적 평화의 성채었다. 이제 한 때의 모범국가였던 이 나라를 노동자투쟁이 엄습하고 있다. 이 투쟁은 아직은 점점이 고립되고 또 노동조합에 의해 통제당한 채 머물러 있긴 하지만 계급의 더욱 더 많은 부분들을 포괄하면서 자본주의의 비참함의 점점 더 많은 측면들을 쟁점화하고 있다. 역시 여기에서도 우리는 100년전의 러시아와 유사점들을 보게 된다. 그 당시 상업종업원들이, 은행의, 사무실의 그리고 관청의 직원들이, 음식점계의 종사자들이 그리고 부유층의 집안고용인들이 심지어는 경찰의 최하층이 투쟁속에서 어떤 역할을 행했는지를 보는 것은 놀랍다. 현재는 병원근무의사들이나 기관사들의 파업을 통해서야 , 지금까지 특권을 가진 것으로 통해왔던 이런 직업들이 얼마나 한심한 급료를 받고 있는지가 일반인들에게 알려진다. 이 직업군에 속하는 이들도 자신들이 „노동하는 빈곤층(working poor)"에 속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스스로도 놀란다.

2007년 여름 독일에서는 , 실업자와 연금생활자들이 증가된 세금부담과 식료품물가상승 그리고 생활비삭감으로 인해 일년전에 비해 15% 적게 받은 점이 심지어는 공식적인 통계 속에서도 인정될 수 밖에 없었다. 그 대신에 작센주의 주립은행은 즉각 170억유로를 지원받았는데, 이는 그 은행이 미국의 부동산시장에 잘못 투자했기 때문이었다. 철도노동자의 파업은 , 파업이 즉각적인 행동이긴 하지만 (판결근거에 따르면) 국민경제에 해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이유로.법원판결을 통해 금지되었다. 실업율감소와 경제호황에 대한 모든 승리의 함성에도 불구하고 해고의 물결은 계속되고 있고, 노동자들에 대한 협박들(경영합의라 불리는)은 증가한다. 또한 경제전문가들은 피닉스-TV의 심야 토론프로그램에서, 앞으로 몇년간 실질임금이 부가적으로 30% 더 떨어지게 될 것이란 점을 어떻게하면 노동자들에게 무리없이 전달할 지를 놓고 씨름한다.

게다가 68년세대인 부모보다는 패배를 덜 당한 새로운 세대가 사회적 투쟁의 장면에 등장하고 있다. 이 대세는 1년전 프랑스에서 정부의 고용불안정화법에 대항한 학교와 대학교에서의 대대적 투쟁들에서 볼 수 있었다. 또한 로스톡과 하일리겐담에서도 이 체제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고 대안을 찾는 정치적으로 의식화된 젊은 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로자 룩셈부르크의 눈으로 주시하자면, 우리가 다시 대대적 파업의 시기에 접어들었다는 가정을 세울 수 밖에 없다. 대대적 파업으로의 성숙시기는 아마도 부르조아계급의 노련함과, 민주주의와 노동조합이라는 국가의 통제기계의 효과성 그리고 대대적인 실업의 섬뜩한 영향때문에 훨씬 더 오래 걸릴 지 모르지만 전개의 방향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노동조합의 역할

참으로 노동조합은 오늘날 계급투쟁의 전개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제어요소이다. 1905년 러시아에서 그것은 달랐다. 그 당시는 대대적 파업이 노동조합의 전반적인 창립을 위한 최초의 동력을 창조해냈다. 그러나 이 노동조합들은 처음부터, 본래 투쟁의 조직자들, 즉 노동자평의회들의 그늘 안에 있었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1905년은, 계급이 단지 공동으로, 투쟁의 확대를 통해서만 어떤 것을 획득할 수 있는 그러한 새로운 시기에로의 진입을 알렸다. 노동조합적인 투쟁방법은 그래서 역사적으로 낡은 것이 되었다. „혁명적 시기의 뇌우의 기운 속에서만 노동과 자본 사이의 소위 어떤 부분적이고 작은 충돌도 하나의 전면적인 폭발로 자라날 있다. 독일에는 매년 그리고 매일 노동자들과 기업가들 사이에 치열하고 잔인한 충돌들이 발생하지만 투쟁은 관련된 개별 분야나 개별 도시, 공장의 장벽을 뛰어넘어 솟아오르지 않는다 " (129쪽, 풀무195쪽)

독일에서 대대적 파업의 전개는 그 당시에도 이미 러시아에서보다 휠씬 어려웠는데, 그곳에는 막강하고 종종 사회민주주의적이기도한 노동조합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곳의 상황은 그래서 모든 오랜된 산업국가들에서의 현재의 상황과 더 유사했다. 그래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1905년에 관한 팜플렛을 쓰면서 독일의 상황을 러시아의 상황 만큼이나 주시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대대적 파업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에 대하여 썼던 것이다.

제 1차 세계대전의 말에 있었던 혁명의 실패에 대한 반작용으로 평의회공산주의라는 정치적 경향이 출현했다. 그것의 특징은 노동자평의회를 선전하는데(이런 선동은 다른 경향들도 했다) 있는것이 아니라 계급당의 기구들을 모든 악의 근원이라며 거부하는데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 1차 세계대전 이전 시기에, 사회민주주의 노동자운동 내부에서 노동조합이 당보다 훨씬 더 기회주의적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당 내부의, 심지어 당의 의회분파 내부의 많은 이들이 전쟁에 반대했었다. SPD쪽에서는 3년동안 전쟁찬성파와 전쟁반대파사이의 투쟁이 벌어지다가 결국 전쟁찬성파가 승리하고 그 반대파는 당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그와는 달리 노동조합은 전쟁발발 이전에 이미, 향토전선에의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기로 정부와 협정을 맺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노동조합은 전쟁경제와 공장에서의 전시법의 수행을 더 많이 넘겨받았다. 뿐만 아니라 소위 노동조합측은 자본이 당을 정복할 때 추진력이었고, 독일에서 혁명의 실패에 있어서 그리고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중요한 두뇌들의 살해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독일에서 노동조합은 본래 사회민주당의 창조물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당의 정치적인 지도 아래 놓여 있었다. 제 1차 세계대전 이전의 호황기에- 베른슈타인이 당의 맑스주의적 기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을 때- 그 당시 노동자운동에서 기회주의의 발전은 특히 노동조합이 „후견인"으로서의 당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여 정치적으로 „중립성"의 태도를 가지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노력은 러시아의 혁명적 사건들에 의해 새로운 양분을 공급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녀의 글에서 당이 이제 노동조합에 대한 지도적인 위치를 되찾을 것을 요구했다. 1906년 SPD의 만하임 전당대회에서 카우츠키와 32명의 동지들은 -룩셈부르크의 혁명적인 채찍질에 의해 또 러시아로부터 전해지는 기운에 고무되어- 당수뇌의 결정에 대한 한 보충안에서, 모든 사회민주주의자는 전당대회의 결정들을 따라야하고 SPD는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최고이자 가장 포괄적인 형식임을 주장했다. 그런데 그 제안에서 결정적인 이 문구를 카우츠키는 노동조합측의 대표자들이 이빨을 드러내자 철회해버렸다. 카우츠키의 중심주의의 본질은, 당내의 통일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당과 노동조합 사이의 통일을 위해서 기회주의에 굴복하고 이러면서 당의 맑스주의적 이론적 기초를 내부로부터 스스로 파괴한 것에 있다.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통일

로자 룩셈부르크는 좌파의 이러한 요구에 대해 러시아에서의 투쟁 결과들을 그 근거로 들었다. 이 투쟁들은, 그녀의 논거에 따르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사이의 오랜 구분을 낡은 것이 되어버렸음을 증명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사회민주주의적 대중정당들에게 있어서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들에 있어서도 단호한 귀결을 갖는다고 한다. 우리가 여기서 좀더 자세히 인용하자면: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사이의 구분은 그리고 두가지의 독립은 의회주의시대에 역사적으로 생겨난 산물이긴 하지만 인위적인 것에 불과하다. 한편으로 여기서, 부르조아사회의 평화롭고 정상적인' 시기에 경제투쟁은 분산되고 기업, 산업분야에서의 여러 개별적인 투쟁으로 해체된다. 다른 한편으로 정치투쟁은 대중 자신들에 의해 직접적인 행동으로 수행되지 않고 대신에 부르조아국가의 형식들에 알맞게 입법적인 대리자들에 대한 압력을 통해서 이뤄진다. 혁명 투쟁의 시기가 시작되자마자 , 대중이 투쟁의 장에 출현하자마자, 경제투쟁의 분산뿐만 아니라 정치투쟁의 간접적인 의회주의적인 형식도 사라지게 된다. 혁명의 대대적 행동 속에서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은 하나이며, 분리되고 전적으로 독립적인 두개의 형태로서의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 사이의 인위적인 경계도 사라질 것이다. (...) 하나는 경제투쟁 하나는 정치투쟁이라는, 노동자계급의 두가지 상이한 계급투쟁들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직 하나의 투쟁만이 있다. 그것은 부르조아사회 내부에서 자본주의의 착취를 제한하는 것을 그리고 부르조아사회와 착취의 폐지를 동시에 겨냥한 투쟁이다. (...) 노동조합의 투쟁은 현재의 이해를, 사회민주당의 투쟁은 노동자운동의 미래의 이해를 포괄한다. (...) 노동조합들은 그룹들의 이해를 그리고 노동자운동 발전의 단계를 대표한다. 사회민주당은 노동자계급을 그리고 그들의 해방이라는 이해 전체를 대표한다."(155, 156쪽, 풀무228, 229쪽)

대대적 파업은, 계급정당이나 노동조합 중 어떤 것도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는 자들이 스스로를 투쟁 중에 조직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당은 자신의 가장 근원적인 과제에, 즉 „정치적인" 지도에, 계급의식의 옹호와 확산과 한층 더한 발전에 집중해야 한다. 노동조합의 역할은 이와는 반대로 점점 더 축소되는데, 이는 파업기금을 통한 파업준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 노동조합들의 대대적 파업에 대한 공공연한 적대는 그 당시에도 있었다. 그것들이 노동자투쟁에 쓸모 없어질 수 록 그 만큼 더 계급의 적의 진영에서 그들의 안전을 찾는다. 그곳에서 그들은 계급투쟁에 대항한 장해물로 잘 활용될 수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06년에 소비에트의 완전한 의의를 파악하지 못했듯이 노동조합의 이러한 발전의 종결점을 아직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참 대단하게도 그녀는 이미 매우 광범위하고 깊이 있게 노동조합투쟁의 한계를 파악해냈다. 그녀는, 체제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소위 평화적으로 팽창하는 시기에 마저도 (노동조합운동의 고향인 영국에서 마저도) 노동계급의 총체는 결코 노동조합적으로 포착되지 않았음을 제시했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많은 주요부문들 자체를 포함하는, 계급의 특히 억눌린 부분들, 즉„서로 뒤엉켜진 노예 무리들(die zusammengeknaeulte Masse der Heloten)", 이들에서는 노동조합적인 조직화가 전혀 접근불가능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여기에는 그당시 독일제국에서는 광부들, 직조공들, 철도노동자들과 우편노동자들 그리고 농촌노동자들이 포함되었다. 로자는 조직화되지 않은 대중과 그들의 정치적인 성숙도를 과소평가하는 것에 대해 호통을 쳤다. 심지어 그녀는 다가올 혁명투쟁에서 이러한 부문들이 선두적인 역할을 할 것임을 예언했다 - 이 예언은 독일혁명에서 정확히 명중했다. 로자에 따르면, 대대적 파업은 계급 전체가 포함되지 않는 한 좌절로 끝나게 된다. 하지만 노동자 대중의 이러한 포괄은, 투쟁 속에서의 그들의 결집은 결코 노동조합적인 방법으로는 도달될 수 없다. 바로 이점에 소비에트의 비밀이 놓여있다, 즉 소비에트는 상이한 노동조합들의 구성원들을, „조직된 자들"과 „조직되진 않은 자들"을, 직장인들과 실업자들을 결합시킨 것이다.

왜 이 모든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왜냐하면, 노동조합이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계급투쟁의 이해를 위해 활용되도록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여전히 널리 확산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노동조합투쟁의 표현이라 환영되는, 독일에서의 부문노동조합의 재탄생은 실은 오래동안 존재해온 그리고 반동이 되어버린 노동조합적인 편협성이 표현된 것에 불과하다. 이를 로자는 백년전에 이미 비난했었다:

노동조합 지도자로서의 업무의 전문화 그리고 평화로운 시기에 분산된 경제투쟁들과 관련하여 당연히 좁을 밖에 없는 시야는 노동조합관료들을 생각의 편협성과 관료주의로 이끈다."(163쪽, 풀무237쪽)

다수의 동지들은 주로 규율' 미덕, 수동적인 복종의 미덕을 의무로 가지는 판단력이 없는 대중으로 폄하된다. 사회민주당과는 반대로 (...) 노동조합에서는 종속된 대중에 대한 상관이라는 관계가 정도에 있어서 휠씬 심각하다 "(165쪽, 독일어판 초안에만 있는 부분임-역주)

이러한 편협성이 혁명가들을 향한 순전한 살인욕으로 바뀔 것임을 비록 로자 룩셈부르크로서는 그 당시 알 수 없었음에도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옳은지!

대대적 파업과 분업

노동조합운동은 노동자운동의 발전에서 일시적인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전복이, 계급사회의 극복이 역사의 현안이 된 시기에 노동조합은 계급투쟁의 족쇄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노동자계급 자체 내부의 분업의 특정 단계를 체화하고 영구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업 자체는 그것이 역사적으로 발전한 것과 같이, 그것을 초래한 계급사회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투쟁은 물질적 비참함에 대항한 투쟁 그 이상이다. 이는 분업 자체를 그 주요한 희생자들인 임금노예들의 주도로 폐지하는 것이다. 대대적 파업의 비밀은 프롤레타리아가 다시 전인적인 인간으로 되려는 노력인 것이다. 대대적 파업에서는 직업, 산업부분, 국가 등의 구분들이 없어진다. 경쟁을 부추기는 -또 사고와 감정사이에서의- 이러한 분리들이 의문시 될 것이다. 그렇게 로자는 러시아에서 투쟁하는 이들이 어떻게 웃고 노래했는지를 묘사하며 그녀의 기쁨을 표현했다. 그들은 서로 얼싸안았고, 밤이 되어도 각자 자기 집으로 들어가서 개별화될 필요가 없도록 거리에 남아있었다.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깊은 집단적인 이상주의가 준비되었다. „그러나 혁명시기의 폭풍속에서 바로 노동자는 (노동조합의) 도움을 청하는 신중한 가장에서혁명의 낭만주의자' 변하고, 그에게 있어서 물질적인 행복은 말할 것도 없고 가장 최고의 재산 , 자신의 목숨 마저도 투쟁의 이상에 비해서는 하찮게 보인다."(133쪽, 풀무199쪽)

대대적 파업의 결과는 특히 „노동자계급의 ,, 생활수준의 전반적인 상승,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지적인 수준의 전반적인 상승"이다.(114쪽, 풀무175쪽) 이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로자 룩셈부르크는 마찬가지로 분명히 했다: „실제로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의 전반적인 상승만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행복의 지속적인 단계로서의 물질적인 생활수준은 혁명속에서 설자리가 없다. (...) 혁명의 상승하고 하강하는 이러한 날카로운 물결속에서도 존속하기에 가장 소중한 것은 정신적인 결정체(강조는 로자 룩셈부르크에 의함-역주)이다, 노동자계급의 도약적인 지적 문화적 성장이다. 이것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에서의 계속적 전진을 확고하게 담보한다."(117쪽, 풀무179쪽)

2007년 10월. 토론모임 라인란트( de.geocities.com/zirkelrunde )

 

한국의 „촛불시위“에 대하여

한국의 촛불시위에 대하여

ICC에 의한 서문

한국에서 새로이 선출된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쇠고기 수입(몇년전 광우병의 공포때문에 금지되었던)의 허용을 결정한 것에 항의하는 최근의 촛불시위6월에 거대한 규모에 이르러 서울에서만도 백만명의 사람들이 시위에 참가했다. 대중의 건강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실제적이든 간에 분명히 이 시위들에는 그 이상의 더 많은 것이 있다. 노동자들의 생활 조건의 전반적인 악화는 정규직 업무가 점점 더 비정규직과 시간제노동에 의해 대체되는 것과 더불어 전세계적인 현상으로서 한국 노동자들을 심하게 타격해 오고 있다. 게다가 새로이 구성된 이명박정부는 노동자들의 삶과 생활조건에 대한 일련의 공격을 개시함에 있어서 특히 더 오만하고 압제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더우기, 2007 미국과 조인된 자유무역협정(FTA)은 한국의 소농민들의 존재에 직접적인 위협이다.이 협정이 공공연히 리버럴하고“, „친자본가적인정부(이명박은 한때 현대그룹의 회장이었다)에 의해 조인되었다는 사실은 반미주의적 경향을 강화시켰는데, 이러한 경향 자체는 단지 민족주의의 한 형태일 뿐이다.

아래에 우리가 실는 글은 이전에 사회주의정치연합(SPA)“으로 알려졌던 좌익 공산주의 그룹“(LCG)의 한 동지가 보낸 것이다. 독자들이 기억하겠듯이, SPA는 그룹은2006 10월 서울과 울산에서 개최된 맑스주의자대회를 조직했었다. 우리는 몇가지 이유로 이 글을 강력히 환영한다.

첫째, 우리가 이미 여러 차례 말해오듯이,노동자 계급 일반에게뿐만 아니라 계급투쟁이 부활된 이시기에 국제주의적 전망을 발전시키려 하고 있는 투쟁가들에게도 매우 실제적인 언어적인 곤란으로 인해 또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서의 노동자 운동 관련 문건들을 접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 한국에서의 노동자투쟁의 특이한 역사적 경험들이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건들과 지난 30년간의 한국역사에 관한 국제주의적 전망을 발전시키고 무엇보다도 이것들을 전세계 노동자투쟁의 국제주의적 맥락 속에 자리매김하려는 LCG 동지들의 노력은 우리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계급투쟁의 운명, 공산주의혁명의 운명은 다른 어느 한 나라에서 결정되지 않을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결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글에서의 국제주의적 시각의 전개는 그래서 강력하게 환영되어야 한다.

둘째, 이 글은 노동자들의 행동이 가두의 축제나 부르조아정치로 해소되어(dissolved into street festivals or bourgeois politics)버려서 노동자계급의 독립적인 행동이 사회의 다른 비착취계층들을 분명하게 선도할 수 있는 그러한 계급적 기초 위에 스스로를 확립하는데 실패할 위험을 명확하게 파악한다. 이문제도 결코 한국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LCG동지가 „87 6월 항쟁도 직선제라는 부르주아 선거의 환상에 민중의 폭발적 투쟁요구를 빠뜨림으로써 6.29기만선언에 굴복하게 만든 뼈아픈 역사가 되었다(Even the June Struggles of 1987 were to be a painful historical experience of surrender through achieving direct voting, an illusion of bourgeois democracy and dropping the masses' explosive demands for struggles)라고 말할 때 그와 우리의 의견이 일치함을 강조하길 원한다. 종종 들리는 바와는 반대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조직화에 기회들을 열어주지 않는다. 브라질과 같이 군사독재를 당한 다른 나라들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역사는 정확히 그와는 반대의 경우임을 보여준다. 민주주의의 확립은 관료주의적 노동조합이 번성할 수 있게 했고, 그 이래 계급투쟁을 맨 먼저 사보타지하는 것들이 바로 이러한 노동조합들인 것으로 드러났다.

셋째, 이 글은 부르조아정치인을 선택하는 길이 곧 정치민주화의 길이라는(that the way which the bourgeois politicians chose would be the very way toward political democratization)“ 1987 6월의 환상 뒤에 놓인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상당히 적확하게 제기한다. 사실상,1980년대의 투쟁에 관여한 상이한 계급들은 그것을 완전히 의식하고 있었든 그렇지 않았든 상이한 목표들을 갖고 있었다. 군사독재에 대한 순전히 민주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 반대파에게 있어서는, 이명박에 의해 대표되는 현실이 얼마나 1987년의 달콤한 꿈을 실망시킬지언정 한국에 민주적인 정부를 확립하려는 것이 진정 그것-부르주아-의 야망의 한계이다! 그런데 노동자계급의 목표는 군사독재뿐만이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체제전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오직 전세계적으로 수행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글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 투쟁과 함께하고 방향을 제시할 혁명적 정치세력은 없었다(there was no revolutionary political force which would be together with and give orientations to the struggles) 는 사실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인 문제로서, 전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새로운 인터네셔널을 아직 발전시킬 수 없었다는 사실의 지역적인 표현이다. 그러한 인터네셔널의 존재 자체가 계급 전체 내부의 혁명투쟁과 의식의 전세계적인 발전의 표현일 것이다. 오늘날 국제주의자들 사이에 유대와 공동작업을 발전시키는 것은 그 직접적인 결과들을 놓고 볼때 이것이 얼마나 하찮아 보일지라도 미래에 프롤레타리아트가 새로운 인터네셔널을 창건할 수 있는데 결정적이 될 것임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다.


넷째
, 투쟁의 당면한 전망과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 사항들을 강조하고자 한다.

우리는 노동자들이 작업 현장 수준에서 스스로 조직할 필요에 대해서 뿐만아니라, 계급연대를 발전시키고 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공장 점거로 고립되는 것을 피하고 가능한 한 거리시위를 활용할 필요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 또한 우리는 노동자들이 계급전체에 일반적인 요구사항들을 제기하고 공장에 따라, 산업무분에 따라 특이적인 요구사항들이 운동을 분열하도록 허용하는 덫-노동조합술책에서 전형적인-을 피할 필요성에도 동의한다.

우리는 노동자들이 촛불집회에서 노동자의 고통이 건강이나 교육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총체적 삶과 연관되어 있음을 주장하고 서로 토론하는 적극적인 마당을 만들어야 한다(at the candlelight meetings (...) prepare actively places to discuss with one another and argue that the pains of workers reside not only in the health or educational problems but are related also to the entire living conditions of workers)라는 생각에 강력하게 동의한다. 토론그룹과 써클의 발전은 노동자들이 스스로에 대한 신뢰와 독립적으로 조직화하는 그들 자신의 능력을 획득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의 활동에 대한 더 광범위한 정치적 국제적 비젼을 획득하기 위해서 매우 필수적이다.

이 모든 것을 말하고 나서, 우리가 한국에서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는 국제주의운동에서 논쟁에 붙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몇가지 불일치점들도 있다.

그 첫째는 글의 마지막 구절에서, „조직된“(, 노동조합에 조직된) 노동자들과 미조직된“(, 노동조합에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들에게 개별적인 임무들이 있다고 표현된 것같은 그 생각을 들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이전에 말했듯이, 결코 순전히 한국의 문제가 아니다. 비정규노동자들의 조직화가 오늘날 한국의 동지들에게 주요한 관심사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실상, 전세계 노동자계급에게 있어서 주요한 어려움은 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 지배계급이 만들고 노동조합들이 유지하고 있는 분할들에 정확히 어떻게 맞설 것인가?라는 것이다. 운동이 강력해질 수 있는 전제조건은 비정규직과 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들의 공동의 이해관계를 인식하고서 모든 노동자들에게 열린 대중집회들에서 함께 투쟁하는 것이다. 이것을 해결함에 있어서 절대로 피해야 할 방법은 미조직노동자들과 조직노동자들이 이러한 분열들을 영속하게 만들어서 개별적으로 조직화하고, 더구나 비정규직노동자들을 위한 별개의 노동조합을 세우려 노력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계급투쟁에 또 하나의 분열을 도입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강조하고자 하는 두번째 사항은 노동자투쟁과 민족투쟁 사이의 절대적인 양립불가능성이다. 우리는 태극기와 애국가 등으로 표현되는 순수한 애국주의도 노동계급의 총체적 삶의 요구를 통해 계급적 요구로 모아질 가능성이 많다(Through the general demands for the defence of living conditions of the working class even pure patriotism represented by Tae- gk –gi and Ae-guk-ga, the korean national flag and anthem, could possibly be welded together and transformed into demands of the class)“라는 문장과 관련하여 번역의 어려움을 겪었다. 우리가 이것을 잘못 번역했을 수 있고, 그 경우에는 LCG동지들이 교정해 주기를 바란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애국적인 요구들을 노동자계급 요구들 속으로 모아지기(be welded together and transformed into)“가 절대로 불가능함을 분명하고 명백하게 언급하고 싶다. 민족주의-애국주의-와 국제주의는 반대극들이다. 그들은 사회의 두가지 주요한 적대계급들의 이해관계를 표현하고, 그들중에 오직 하나만이 다른 하나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다.

여기에서 전개하기에는 너무 길지도 모를 마지막 사항은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autonomous and democratic unions)“을 위한 투쟁 문제 전체이다. 이것은 확실히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의 노동자투쟁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우리가 보기에, 그러한 노동조합을 건설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일종의 환상이다-그 당시 지배적이던 조건들 하에서 자연스럽고 이해될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상일 뿐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한국의 동지들은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을 위한 20년간의 투쟁이 어떻게 오늘날 한국과 전세계의 노동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계급투쟁을 사보타지하는 관료화된 노동조합의 건설을 초래했는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한국에서의 계급의 경험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서, 특히 폴란드에서1980년의 대대적 파업들이후의 경험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우리로서는 최선을 다해 이러한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다.

ICC, 2008 7월 중순


P.S.이서문을 LCG의 동지들에게 보낸 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받았다. 이 의견교환의 계속을 진행되는 대로 신속히 실을 수 있게 되길 바란다.

ICC동지들에게

우리의 글을 영어로 번역한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동지들이 그글에 대해 쓴 서문과 관련하여, 특히 두번째 항목, 애국주의에 대하여, 동지들이 동의하지 않는 그 문장에 관하여 더 명확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촛불시위에 함께하는 쁘띠부르주아적 참가자들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가 노동자계급에 기반한 이해관계들로 전환될 수 있을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시위들이 이제 거의 70일이상 계속되고 있습니다. 요구사항들과 슬로건들이 이명박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들과 자본주의 자체의 근본적인 쟁점들에 대한 반대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급의 이해관계에 대해 한달 반 사이에 쁘띠부르주아적 참가자들의 태도변화를 인식했습니다. 촛불시위가 대중과 이명박정부사이의 충돌로 이어져서 더 격렬한 대중운동이 전개되기를 우리는 기대합니다. 그 운동의 진행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전체과정의 진화를 토론할 것입니다.

가장 따뜻한 공산주의자의 인사를 보내며, LC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