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역량의 국제적인 재편이 프롤레타리아혁명 승리의 전제조건이다

혁명전략이라 할때 우리는 무엇을 의미하는 가? 근본적으로 오늘 우리가 제기하려는 문제는, 현재 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국제주의 그룹들과 조직들이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을 위한 노동계급투쟁에서 어떻게 그들의 역할을 수행하고 기능할 수 있는가를 이해하는 그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혁명전략을 결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다음의 2가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 먼저, 이러한 혁명조직들이 정확이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우리의 전략이 겨냥하는 목표가 무엇인가?
  • 둘째,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바꿔 말해서 우리가 작업하고 있고 또 우리의 공통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용가능한 수단들는 결정하게 될 물질적인 조건들이 무엇인가?

혁명조직은 정확히 무엇인가?

우리는 공산당선언에 있는 맑스의 말을 기억하면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공산주의자의 이론적 명제들은 결코 자칭 보편적 개혁가가 발명 또는 발견한 사상이나 원칙들에 기초하지 않는다. 명제들은 단지 일반적인 견지에서 현존하는 계급투쟁으로부터, 바로 우리 앞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운동으로부터 솟아나오는 실제적 관계들을 표현할 뿐이다. 현존하는 소유관계의 폐지는 결코 공산주의의 명백한 특질이 아니다"(공산당선언 제 91~93페이지, 백산고전대역, 1989).

여기서 맑스의 말은 조직의 본질과 기능 모두에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양자 모두 노동계급의 역사적 본질과 경험에 의해 그리고 그 투쟁의 물질적 조건들에 의해 결정된다.

그의 역사 전반에 걸처 프롤레타리아는 다음과 같은  2가지 유형의 조직을 만들어냈다:

  • 그 대중조직, 이 조직의 목적은 모든 노동자들을 공동의 투쟁 속에 결집하고 그들의 즉각적인 경제적 요구들을 옹호하는 것이다
  • 그 정치조직, 이 조직의 목적은 계급의식의 발전에 특히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스스로를, 그 자체의 혁명적 본성과 목표들을 의식하게 되는데 기여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 점은 프롤레타리아계급에게 결정적이다.  과거의 모든 혁명계급들 - 즉, 역사의 특정순간에  낡은 생산양식이 사회를 위협한 그 모순들을 극복가능한 새로운 생산양식의 담지자였던 그러한 계급들 - 은 낡은 사회 내에서 재산소유에 근거한 경제력을 갖고 있어서 그것을 정치력의 장악에 지렛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계급은 그러한 경제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것의 유일한 물질적 힘은 그것의 조직에 있다.

더욱이, 모든 혁명계급들이 그들의 미래의 프로젝트를 어떤 식으로든 자각해야 할 지라도, 프롤레타리아계급에 있어서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결정적이다:

  • 그것은 모든 착취를 끝장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피착취계급으로서 자신의 혁명의 목적을 숨길 필요도 또 그것이 창조하려는 새로운 공산주의사회의 본질을 감출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경제력이나 소유권도 갖지 않은 피착취계급으로서 계급에 대한 그리고 그 자신의 목표들에 대한 자각이 자신의 승리에서 결정적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2가지 유형의 조직들 - 대중투쟁조직 및 정치조직 - 은 역사속에 항상 존재했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그 형태들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역사적 조건들의 변화와 더불어 변화했다. 우리는 이 2가지 형태들이 노동계급의 시초부터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의 세계최초 노동계급의 역사를 살펴볼면, 한편으로는 18세기말 지독한 억압조건하에서 특히 파업들 조직하기 위해 그리고 임금과 작업조건 방어를 목표로 한 일정 정도의 무력적인 행동들을 조직하기 위해서 생겨난 비밀대중조직들을 찾아볼 수 있다. 두번째로 우리는 그 당시 "통신회들"(이들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런던통신회였다)로 불려졌던 것의 출현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선동그룹들로서 노동계급에서 가장 결연한 혁명적 일원들을 하나의 단일한 국가적 네트워크 안에 단합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1].

먼저 노동계급대중조직들의 진화를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19세기동안 노동계급의 출현 그리고 확장 상승하는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이계급이 어느 정도는 향상된 생활조건을 획득하려는 요구로 인해, 여러 상이한 형태들을 띠는 대중조직들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노동조합이었지만, 동시에 우리는 노동조합과 나란히, 실업이나 질환시의 상호부조를 위해 고안된 "친목회들"인 노동자협동회들 그리고 심지어는 스포츠클럽이나 문화협회와 같은 모임들이 발달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들은 노동자 대중의 교육수준을 향상시킨다는 중요한 목적을 또한 갖고 있었다.

그런데 20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계급투쟁의 역사적 조건들의 변화는 계급조직의 형태들에도 그에 상당하는 변화를 초래했다.

무엇보다도 1914년의 세계대전발발과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혁명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이 시기는 프롤레타리아계급과 부르조아계급사이의 계급투쟁을 첨예화 시켰다. 이제 문제는 더 이상 노동계급의 생활조건의 방어만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그리고 인류 자체의 파멸만을 초래하게 될 수 있는 자본주의 국가들간의 전 세계적인 반복되는 충돌들이냐 아니면 세계 노동계급에 의한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과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이냐라는 역사적 양자택일이다.

자본주의 내부에서의 투쟁을 위해 만들어진 노동조합은 권력을 향한 혁명투쟁에는 전적으로 부적절함이 판명되었다. 그리고 1905년과 1917년 러시아에서 프로레타리아계급은 쇠퇴하는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시기에 있어서의 대중조직을 창조했다. 자본주의 사회내부에서의 노동자들의 이해를 옹호하기 위한 단순한 그러한 조직이 더 이상 아니라 노동계급에 의한 권력의 장악과 자본주의 질서의 전복을 위한 조직으로서 노동자소비에트가 그것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상승기의 종말은 계급투쟁의 조직적 형태의 변화로써 특징지워진다. 대중집회에 그리고 선출되고 철회가능한 대리자들에 근거한 소비에트형태는 자본주의의 쇠퇴기의 모든 노동자 투쟁에서 나타나는 경향으로, 가장 극적으로는 1980년 폴란드에서의 투쟁에서 나타난다.

노동자의 대중조직들의 경우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노동계급의 정치조직들의 형태와 기능도 물질적 조건들의 변화의 결과로서 변화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들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보기 이전에 공산당선언에 표현된 총체적인 조망은 상기할만한 가치가 있다:

"공산주의자는 전체 프롤레타리아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공산주의자는 노동계급의 당들과 대립하는 별도의 당을 결성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지는 이해와 별도로 분리된 이해를 가지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자신만의 분파적 원칙을 세워 프롤레타리아운동을 원칙에 뜯어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오직 다음과 같은 점에서만 다른 노동계급의 당들과 구별된다: (1) 각국 프롤레타리아의 일국적 투쟁에서, 일체의 국적으로부터 독립된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공동이해를 제기하고 전면에 내세운다. (2) 부르조아지에 반대하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거치는 다양한 발전단계에서, 언제 어디서나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는 한편으로 실천적인 면에서는 모든 나라 노동계급 당들 가운데 가장 선진적이고 결의에 부분으로서 다른 모든 당들을 밀고 나아가며, 다른 한편으로 이론적인 면에서는 거대한 프롤레타리아 대중에 비해 프롤레타리아운동의 진행노선, 조건, 궁극적인 전반적 결과들을 명확히 알고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공산당선언, 제 89~91페이지, 백산고전대역, 1989)

매우 도식적으로 - 그리고  그러한 도식들이 역사적 실재의 풍부함을 포괄할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안다 - 노동계급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이래 출현한, 노동계급의 다음과 같은 종류의 정치조직들을 우리는 구별할 수 있다.

먼저 1848년까지의 시기와 이당시 유럽대륙을 휩쓴 혁명들과 혁명시도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시기에 노동계급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갖는 개별적인 계급으로서의 자각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전복에 직면하게 될 그 날까지의 노정이 얼마나 기나긴지는 알지 못한 채 처음으로 독립된 행위자로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결국 노동계급이 생성한 정치조직들은 여전히 매우 작고 사실상 극소수에 불과했으나 동시에 그들은 계급투쟁의 즉각적인 가능성들을 넘어 노동계급이 자체내에 잠재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미래까지 내다볼 수 있었고, 이러한 경향의 가장 분명하고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표현은 물론 공산주의자동맹(Communist League)이었다. 이것은 세계혁명이라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궁극적 목표에 이론적인 형식을 부여할 수 있었고 특히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의대한 원칙을 그 유명한 말인,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로 선언할 수 있었다.   

그 이후의 시기는 자본주의 사회내부에서의 노동계급의 대중형성의 시작으로 묘사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가 바로 노동계급이 쁘띠부르조아계급의 영향으로부터 여전히 이탈하고 있던 시기이자,  지배계급에 의한 억압 그리고 독립된 수공업자로서의 상실된 지위를 살피는 새로이 프롤레타리아화된 계층들의 정치적 영향 이 두가지 모두에 대항한 끊임없는 투쟁과정 속에서 모든 종류의 새로운 조직형태들을 실험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의 최고의 표현은, 파업동안 파업파괴자들의 수입에 저항하기 위해 영국 및 프랑스노동자들에 의해 설립된 제 1 인터네셔널이다. 제 1인터네셔널의 가장 중요한 유산들 중의 하나는, 노동계급에 의한 권력의 장악은 작은 그룹의 헌신적인 혁명가들에 의해 "인민을 위해" 수행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님을 이해한 점이었다. 오구스트 블랑키(Auguste Blanqui)와 바쿠닌(Bakunin)과 같은 인물들에 의해 영감을 받은 그룹들을 특징짖는 이러한 시각에 반대해서 제 1인터네셔널은 그것의 1864년의 법규의 첫 문장 속에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에 의해 획득되어야 한다".

제 1인터네셔널은 1871년의 파리 코뮨의 패배와 이에 뒤이은 반동의 물결에 따라 사라졌다.  1880년대 동안 유럽에서의 계급투쟁의 재생은 제 2 인터네셔널의 형성을 낳았다. 이 자리는 제 2 인터네셔널의 역사를 논할 자리가 아니지만 이 발제의 문맥 안에서 그것의 가장 중요한 성취점들 중의 하나를 지적할 수 있다: 제 2 인터네셔널과 더불어 맑스주의가 하나의 광범위한 이론적 실천적 정치경향이 된 것이다. 19세기동안

맑스와 엥겔스의 거대한 이론적 성취의 상속자들은 제 2 인터네셔널의 맑스주의 좌익이다: 독일의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와 칼 리프그네히트(Karl Liebknecht); 네덜랜드의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과 헤르만 고르타(Herman Gorter); 이탈리아의 아메데오 보르디가(Amadeo Bordiga); 영국의 존 메클린(John Meclean); 러시아의 레닌(Lenin), 부하린(Bukharin) 및 트로츠키(Trotsky)- 이들은 역사 속에서 우리들에게 전해진 이름들이지만, 러시아 혁명이라는 도전에 부응하고 제 3인터네셔널을 만들게 되는 혁명적 맑스주의 좌익의 한 경향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들일 뿐이다.  

제 3인터네셔널은 자본주의가 세로운 세기에 진입했음을 선언했다: "우리의 세기는 자본의 몰락, 내부적인 해체의 세기이자,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공산주의혁명의 세기이다"(인터네셔널강령). 역사상 처음으로 제 3 인터네셔널은 노동자의 권력장악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될,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하나의 세계적으로 집중화된 정치조직의 건설을 목표로 했다- 하나의 먼 전망으로서가 아니라 즉각적이고 긴급한 그리고 실천적인 필요성으로서.

1917년 러시아에서 시작된 세계혁명은 패배했지만 자본주의의 쇠퇴기는 여전히 존재하며 공산주의에 대한 인류의 필요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긴급하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이 권력을 획득하려 한다면, 그것은 그 자신의 국제적인 정치조적을 창조해야하고 이는 제 3 인터네셔널의 경험으로부터 배운 교훈들을 토대로만 이뤄질 수 있다.  그런다음 우리는, 코민테른이 그 프롤레타리아적 내용을 잃어버리고 스탈린의 반혁명의 제국적 야심의 단순한 도구로 변질되면서 그 코민테른으로부터 축출된 3가지 좌파경향들로 향할 것이다.

인터네셔널의 변질과 스탈린주의의 반혁명에 대항해 싸운 것은 트로츠키주의 경향이 최초가 아니였다(시간상으로 그리고 10월혁명의 변질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  우리가 나중에 살펴볼 네덜란드/독일 및 이탈리아좌파 그리고 러시아좌파도 이 경향에 선행했다). 트로츠키의 암살까지의 트로츠키주의의 역사는 계급역량의 균형의 실상황 - 우리가 계급투쟁에 대한 이전의 발제에 포함시켰 듯 역사의 진로 - 의 착오가 낳은 비참한 결과 모두를 너무나 명백하게 보여준다. 트로츠키는 노동계급이 국제적으로 결정적인 패배로 고통당하고 있음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소련이 또 다른 자본주의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계급을 다가오는 세계전쟁에서 이런 저런 진영에 연결하는 모든 새로운 고리들을 그때마다  잠재적인 혁명적 융기로 끊임없이 착각했다. 당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계급을 "창조"하지 않고 그 반대로 당의 출현 자체가 프롤레타리아계급 내부에서 성숙하는 의식의 한 표현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프롤레타리아의 심각한 패배의 시기에 "제 4인터네셔널"을 건설하려 시도했을 때, 그는  하나의 기회주의적 책략에서 다른 하나로 이끌려 다렸다.  트로츠키주의의 비극은 1917년 혁명에서 그렇게 결정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그리고 활동하는 소비에트에 대한 가장 명쾌한 묘사들을 남긴 그 위대한 혁명가가 반혁명기에 종지부를 찍어야 했던 그 세대에게 어떤 기여도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트로츠기주의 운동은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민주주의적 제국주의들을 지지함으로써 그리고 스탈린주의의 극악한 체제에 의해 야기된 모든 전쟁을 지지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진영을 버렸다.[2]

네덜랜드와 독일에서의 노동자운동은 지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두 나라에서 혁명적 맑스주의 경향들 사이의 관계들의 측면에서도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3]. 네덜랜드/독일 공산주의 좌파의 입장들은 판네쿡, 고르타 및 얀 아펠[4]과 같은 이름들과 연관된다. 그들은 처음부터 독일노동계급의 혁명투쟁의 열기 속에서 단련되어 반동적인 짜리즘에 대항해서가 아니라 독일혁명의 사회민주주의적 사행집행인과 그들의 노동조합 심복에 대항했다. 네덜랜드/독일좌파공산주의자들은 전쟁 및 러시아와 독일에서의 혁명들에 의해 결과된 시대변화의 여러 함축들을 가장 먼저 파악하게 되었다: 노동계급 이해의 옹호를 위한 의회의 이용불가능성, 사회민주주의의 배반과 반동적 본질, 노동조합이 자본주의 국가의 옹호자이자 제국주의 전쟁의 신병모집하사관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사실, 새로운 시기의 프롤레타리아 투쟁은 소비에트와 동일한 원칙들에 근거한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필요로한 다는 점.

그러나 네덜랜드/독일 좌파는  정치조직 자체의 문제에 있어서 그리고 역사적 진로(계급 역량의 균형)의 문제에 있어서 취약했다.  1930년대 동안,  러시아에서의 혁명의 패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결정적인 문제와 직면하여 그것은 볼세비키당이 국가자본주의의 기관으로 변형된 것을 그 혁명 패배의 결과이기 보다는 원인이라고 잘못 파악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당의 반혁명적 본질을 이론화하고 노동자평의회를 현 시기에 유일하게 가능한 프롤레타리아조직형태로 간주했다. 결국, "평의회주의"경향으로 된 그것은 노동운동에 대한 그 자신의 무용성 - 아니 훨씬 심각하게도 그 자체의 파괴성 -을 이론화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탈리아좌파의 이론적 발전은 본질적으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를 떠나서 프랑스와 벨기에로 도피할 수 밖에 없었던 일군의 젊은 이탈리아 노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스탈린주의화된 이탈리아공산당에서 축출된 채 그들은 미래의 당을 위한 이론적 틀을 준비하기 위해 러시아 혁명의 패배로부터 교훈을 배운다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빌랑Bilan그룹을 형성했다. 이 경향 -  나중에는 벨기에, 프랑스 및 멕시코의 분파들도 포괄하게 되는 - 의 이론적 공헌들은 거대하고 진정 대체될 수 없는 것이었다. 러시아혁명의 변질에 대한 분석 - 1917년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결코 의문시하지 않았던- 에 있어서, 미래의 전이시기(period of transition)의 문제들에 대한 탐구들에 있어서,  경제위기와 자본주의 쇠퇴의 토대들에 대한 작업에 있어서,  "민족해방"투쟁을 지지하는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의 입장에 반대함에 있어서. 그러나 혁면전략의 문제와 관련된 한에 있어서, 그 가장 중요한 공헌의 하나는 당과 분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었다.  빌랑그룹은 당을 계급의식의 능동적 인자이자 동시에  계급 전체 내에서의 의식 발전의 표현으로서 파악했다. 빌랑이 혁명은 당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했을때 이것은 혁명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당을 만드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당의 창건 자체가 혁명문제를 제기하는 프롤레타리아계급 전체의 능력의 표현이라는  의미였다.

비극적이게도,  이러한 심오한 이해는, 전쟁기간을 이탈리아 안에서 무솔리니의 목적들 안에서 또는 "내부적인" 망명으로 보냈고 이탈리아 밖의 좌파부문에 의해 성취된 이론적 발전에 참여하지 않았던 "내부의" 국제주의적 이탈리아좌파에 의해 공유되지 못했다.  제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이탈리아 내부의 국제주의자들은 트로츠키가 30년대에 저지른 동일한 오류의 희생자로 전락해서, 전쟁의 영향들과 독일에 의한 점령에 대항한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대중 파업들을 이탈리아에서의 새로운 당의 창건을 정당화할 수 있을 새로운 혁명적 상황으로 착각했다.  노동계급 전체 내부의 의식수준이 당의 존재를 위한 어떤 물질적 토대도 제공하지 못한 상황에서 새로운 국제주의공산당(다양한 보르디가주의 "당들" 그리고 오늘의 혁명당국제사무국(International Bureau for the Revolutionary Party)의 주요 구성요소인 바타글리아 코뮤니스타(Battaglia Comunista)그룹을 출현시키게 될)의 창건은 반파시스트 파르티잔과 스탈린주의 당으로부터 인원들을 유입하려 시도했을때 고도의 기회주의에 의해 그리고 그들을 따라 이길을 가는 것을 거부한 좌파부문을 향한 격한 종파주의에 의해 불가피하게 특징지워졌다.

평의회주의경향의 유니언(union) 문제 및 소비에트의 중요성에 대한 명확성은 이탈리아좌파의 조직문제에 관한 명확성과의 종합을 통해서만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라고 말할때 우리는  이탈리아 좌파와 네덜랜드/독일좌파 사이의 관계를 가장 잘 가장 잘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종합은 빌랑(특히 민족문제에 있어서 독일좌파의 원칙들을 통합했던)에 의해 시작되었고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시기에는 극소의 프랑스공산주의좌파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것은 1975년 국제공산주의흐름(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의 창건과 더불어 하나의 완전한 조직적 형태를 얻게 되었다.

결국 다음의 인터네셔널이 될 세계공산당의 미래 발전에 열쇠를 쥐고 있다고 우리가 믿고 있는 공산주의좌파의 이러한 종합의 모든 요소들에 대해 하나의 완전한 견해를 이 짧은 발제 속에서 우리가 제시하는 것은 분명 불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단지 이탈리아좌파의 방법으로부터 우리가 취할 필요가 있는 핵심점들로 여겨지는 것들을 강조하고자 한다:

  • 미래의 당 자체의 본질에 대하여:
    • 당은 계급을 대신하여 권력을 장악하지 않는다,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행사하는 것은 전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이다, 하지만 당은 계급의 의식과 조직의 발전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이다.
    • 당은 국제적이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수행할 어떤 "민족적 임무"도 더 이상 갖지 않으며 세계적 기초 위에서만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 그래서 당 자체는 국가그룹들이나 정당들의 일종의 연합이 아니라 곧바로 세계적 기초 위에 건설될 것이다.
    • 당의 건설은 노동계급 자신의 의식과 투쟁성의 발달에 의존할 것이다: 당이 가능하기 위해서, 노동계급이 그 당을 그 자신의 것으로 인정할 수 있고 그 정치적 지향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이라고 할때, 우리는 사건들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하나의 국제적 조직을 의미한다.
    • 당의 강령은 공산주의좌파에 의해 이루어진 작업과 입장들에 근거하게 될 것이다.
  • 당의 건설로 이끌게 될 과정에 대하여:
    • 당건설의 가능성은 계급의식의 발전에 의존한다 - 그러나 이것이 "자동적인" 과정이 될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또한 오늘의 혁명적 그룹들과 조직들에 의해 행해지는 의식적인 노력들에 의존할 것이다. 결국, 그들은 분파들로서의 그들의 역할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회의의 작업은 미래의 당의 건설을 향한 전 세계적인 노력의 일부이다.
    • 오늘의 혁명적 그룹들이 이러한 과정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들은 국제주의 원칙에 대한 확고함과 더불어, 경청하고 타인으로부터 배울 태세로, 논쟁에서의 개방성을 결합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작업하고 있는 물질적 조건들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미 이전의 발제에서 우리가 그 안에서 행동하고 또 오늘의 혁명적 그룹들의 잠재력과 책무들을 결정하는 계급투쟁의 물질적 조건들을 개괄하였다.

여기서는 공산주의좌파의 진화와 더 넓게는 우리가 "국제주의진영"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의 상황을 살펴보려 한다.

프랑스에서의 1968년 5월 파업에 뒤이은 계급투쟁의 엄청난 급증을 새로운 혁명가세대에 의한 공산주의좌파의 입장들의 재발견이 - 그리고 결과적으로 기존의 조직들의 중요한 성장과 새로운 조직들의 출현이 동행했다. 그 이후 이 조직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네덜랜드/독일좌파공산주의자들의 "평의회주의적" 계승자들

위에서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 평의회주의자들의 조직적 약점은 그들이 정치조직의 "무용성"을 이론화한다는 점이다. 정규적인 조직적 존재(계급투쟁에의 개입과 이론적 발전)를 단지 유지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과업인 그러한 상황에서 이것은 심각한 약점이다[5]. 1970년대 이래 2개의 주요한 역사적 조직들 (스파르타쿠스연맹 (Spartakusbund) 및 행동과 사상(Daad en Gedachte))은 예를 들어, 1968년에 존재한 가장 중요한 평의회주의그룹들중의 하나로서 프랑스에서의 5월 사건들 동안과 그 이후에 상당한 확장을 이뤘던 ICO(노동자의 정보 및 통신Informations et Correspondances Ouvrières)와 마찬가지로 사라졌다. 비록 평의회주의 전통은 소그룹들과 토론써클들에서 계속 존재하지만,  하나의 조직을 형성하는 것의 "위험"에 대한 그리고  모든 조직이 관료화되는 것의 불가피성에 대한  강박에 의해 제한된다. 평의회주의 그룹들이 하나의 국제적 조직의 발전에 긍정적 역할을 수행하려면 그들 자신의 과거경험에 대한 비판을 행하고 이탈리아좌파의 경험을 다시 - 그리고 아무런 금기없이 - 고찰할 필요가 있다.

PCint 후예들

국제주의공산당(Partito Comunista Internazionalista)의 오늘의 후예들은 제 2차 세계대전의 말에 창립되었고, 이 모두는  "보르디가주의" 국제주의공산당과 바타글리아 코뮤니스타(Battaglia Comunista)를 형성하게 되는 1952년의 분열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데, 후자는1983년에 만들어진 혁명당국제사무국(International Bureau for the Revolutionary Party: IBRP)의 2개의 주요 창립그룹들 중의 하나가 된다.

이 조직들은 그 창립을 지배했던 그리고 그들이 빌랑그룹에 의해 발전된 이탈리아좌파의 경험과 이론적 유산을 거부하게 만들었던 근본적인 기회주의와 종파주의를 결코 극복할 수 없었다.

1970년대 동안,  상이한 PCI들[6]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상히 성장한다 - 그러나 이 성장의 상당부분은, "민족해방"운동들, 특히 아랍(특히 팔레스타인)민족주의에 대한 극도의 기회주의적 태도에 기반했다. 그 결과로 PCI는 1982년 공중분해되어 한때는 공산주의좌파의 최대 조직이던 것이 모두가 자신속에 철저히 폐쇄된 채 머무르는 몇몇의 극소의 분산된 그룹들로 되어버렸다 - 그리고 그 모두가 "그당"이라 자칭한다.   

바타글리아 코뮤니스타(Battaglia Comunista)그룹은 초기에는 1970년대의 새로운 상황에 대해 더 개방적임을 증명했고 1970년대동안 3차례의 공산주의좌파국제회의에서 다른 조직들(특히 ICC와 CWO)과의 함께 일할 태세를 보이다가 결국 CWO와 함께 IBRP를 창건함으로써 그 이래 자신의 "첫사랑"에게로 되돌아갔다. 스스로를 "미래의 당을 위한 유일하게 가능한 기초"라고 선언함으로써 그것은 새로운 시기에 의해 제시된 도전에 응할수 없음을 증명했고 - 비록 다른 방향으로는 수많은 관심표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 공산주의좌파의 다른 조직들과는 어떤 유형의 공동작업도 체계적으로 거부했다.[7]

결국, PCInt의 후손에 의해 형성된 전통은 프롤레타리아운동의 코엘라칸트[8]가 되어버렸다.  그 자신의 종파주의의 깊은 곳으로부터 이따금 출현은 하지만, 특히 오늘의 국제주의 운동의 발전 속에 표현되는 바와 같이 새롭고 천천히 숙성하는 계급투쟁의 강화에 적응할 수 없는  살아있는 화석이.

새로운 국제주의운동

"새로운 국제주의운동"이라 할때 우리는 무엇을 의미하는 가?  지난 5년간 ICC는 전세계적으로 점증하는 수의 새로운 그룹들과 사람들과 접촉해 오고 있다 - 그러나 우리가 "새로운"이라고 말할때 이는 "우리에게 새로운"을 의미한다: 어떤 경우에 그것은 수년동안 존재해 왔지만 이제서야 우리와 만나게된 그룹들이다. 여기에는  2가지 요인들이 있는데, 한편으로는 새로운 그룹들의 출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그리고 기존의 그룹들과 개인들 측에서 국제적 접촉을 향한 전반적인 기동력이 그것이다.

부분적으로, 새로운 접촉의 이러한 발전은 인터넷 덕분이지만 단지 부분적으로만 그러하다.[9] 근본적으로 그것은 이번 10년의 시작 이래 국제적인 계급투쟁의 새로운 발전의 표현이다- 매우 천천히 발전하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의 투쟁들보다 훨씬 더 멀리 그리고 더 깊이 나아가려는 욕구를 이미 만족시킬 수 있는 계급투쟁의. ICC는 라틴아메리카의 거의 모든 나라들에, 터어키에, 러시아에 그리고 우크라이나에, 그리고 아시아 - 그리고 물론 한국 - 에 있는 그룹들과 개인들과 현재 접촉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그러한 그룹들이 공산주의좌파와 자신들을 명백히 동일시한다: 이는 예를 들어 SPA의 동지들의 경우뿐만 아니라 터어키의 EKS의 경우이다.  어떤 경우에 그들은 개별적으로 진화해왔고 단지 최근에 공산주의좌파의 사상들- 그들이 반드시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 사상들- 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는 브라질의 OPOP 그리고  러시아의 ISPRC의 경우이다.  다른 경우에 그들은 트로츠키주의나 마오주의의 위기로부터 출현했다. 그러나  이 모든 동지들은,  항상 노동자운동의 시금석이 되어온 근본 원칙인 국제주의를 공유한다.  그들은 또한 이탈리아좌파의 가장 근본적인 유산들 2가지를 공유하는데, 이는 노동계급은 국제적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확신과, 그래서 국제적인 접촉들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며 세계공산당, 즉 이것 없이는 노동계급이 "하늘을 휘몰아쳐"서 이 쇠퇴하고 야만적인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하고 새로운 세계적인 인류공동체를 창조할 수 없을 그런 새로운 인터네셔널을 미래에 건설하기 위한 조건들을 우리는 단지 우애적이고 열린 논쟁을 통해서만 준비할 수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국제공산주의흐름(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2006



[1]      대중단일조직들과 정치조직들사이의 이러한 구분은 19세기동안 다소 분명하게 남아 있었던 점이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IWA는 정치조적들과 노동조합들 양자 모두를 함께 규합했던 한편, 심지어 제 2인터네셔널에서도 우리는 영국노동당의 경우를 인용할 수 있는데, 이 당은 원래는 의회내에서 노동조합의 대표를 조직하기 위한 „노동대표위원회(Labour Representation Committee)"로서 만들어졌다.

[2]     여기서 나탈리아 트로츠키가 , 1951년 제 4인터네셔널의  스탈린주의  지지를  훈계하기를 더 이상 거부했을 때의 그녀의 말을 인용할 만하다: „가장 참을 없는 것은 당신들이 밝힌 전쟁에 대한 입장입니다. 인류를 위협하는 3 세계대전이 혁명운동을 가장 어렵고 복잡한 상황들, 가장 중대한 결정들 앞에 세웁니다(...) 그러나 최근 몇년의 사건들에 직면해서 당신들은 스탈린주의 국가의 옹호를 끊임없이 요청하고 그리고 전체 운동을 그것에 맡깁니다. 이제, 당신들이 한국의 인민들을 십자가에 매달고 있는 전쟁에서 스탈린의 군대를 비록 지지하더라도(...) 나는 점에 있어서 당신들을 따를 없고 그러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나는우리의 의견불일치로 인해 당신들의 대오에 더이상 머무를 없음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이외의 어떤 출구도 찾을 없음을 당신들에게 말해야만 할것 같습니다."

[3]       예를 들어 판네쿡은 네덜랜드인이지만 그 일생의 대부분을 독일에서 투쟁가로서 보냈다.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했을때, 독일좌파의 많은 투쟁가들이 네덜랜드의 동지들에게로 피신했고, 독일에서의 계속된 비밀활동을 위한 토대로 네덜랜드를 이용했다.

[4]       얀 아펠은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의 제 3차 회의에 파견된  KAPD(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 의 대리인이었다. 그는 1979년 ICC의 창립회의에 참석하여 새로운 혁명가세대에게 횟불을 넘겨주었다.

[5]       참으로, 하나의 혁명적 조직을 유지하는 것은 그것이 진정 혁명적이기 때문에 항상 그리고 불가피하게 험난한 과업일 것임이라 말할 수 있다.

[6]      PCI의 종파주의는 일련의 부조리한 분열들을 낳았다 - 이 모두는  세계에서  단일하고 유일한 „그" 당이라고 자칭한다.

[7]      예를 들어, 이라크전과 코소보전에 반대하는 공동팜플렛을 만들자는 그리고 그것이 아르헨티나의 NCI에 의해 제안된 회의들에의 어떤 참여도 거부했기 때문에 그러면 독일에서 공동모임을 갖자는 ICC의 모든 제안들을 거부했다. 이번 회의에의 불참(적어도 이 글을 작성하는 시점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은 마찬가지로 주목할만 하다.

[8]       지금은 단지 2가지의 살아있는 종으로 대표되지만, 하나의 그룹으로서 코엘라칸트들은 한때는 데본기로부터 크레타세기 말엽까지 풍부한 화석기록을 남긴 여러 속과 종을 거느리면서 매우 성공적이였는데,  이 시점에서 그들은 거의 완전하게 멸종된 것 같고 그 이후로는 어떤 화석도 알려져 있지 않다.

[9]     우리는 여기에 선언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때때로 노동자는 승리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다. 싸움의 실제적 결실은 직접적인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팽창하는 노동자들의 단결에 있다. 현대산업이 만들어낸 전달수단으로 인해 여러지역의 노동자들이 서로 접촉할 있게 됨으로써 단결은 한층 확대된다.(...) 중세시기의 시민이 옹색한 도로를 가지고 수백년의 기간을 거쳐 달성한 단결을 현대 프롤레타리아는 철도에 힘입어 수년간에 이룩한다"(공산당선언, 제 79페이지, 백산고전대역,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