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Conline - 2020

미국대선: 민주주의의 환상

지구 상에서 최강국인 미국이 자본주의 세계질서의 진행되는 해체에 대한 실례가 되고 있다. 이번 대선은 인종분열에 의해, 지배계급 내부에서의 점점 더 잔인한 충돌들에 의해, 이미 거의 25만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낳은 코로나19 팬데믹 대응에 있어 충격적인 무능력에 의해, 경제적 환경적 위기의 파멸적인 영향에 의해 그리고 비합리적이고 세기말적인 이데올로기의 확산에 의해 분열된 한 나라를 거칠게 조명했다. 그리고 이제 이 이데올로기들은 역설적이게도 그 밑바닥에 놓인 진실을 반영한다. 즉 우리는 세계의 모든 나라를 지배하는 하나의 자본주의 체제의 “최후의 나날들”을 살고 있다는 진실을.

그러나 심지어 그 역사적 쇠락의 이 최종시기에 조차도, 지배계급이 그 자체의 체계에 대한 통제력 상실을 점점 더 드러내고 있을 지라도, 자본주의는 자체의 부패성의 방향을  그 실제의 숙적에 대항해서 방향을 돌린다. 즉 노동자 계급에 대항해 그리고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진정한 이해들을 의식하게 될 위험에 대항해서. 이번 대선의 기록적인 참여율과 정치적으로 분열된 양측의 시끄러운 항의시위들과 자축들은 민주주의의 환상의 강력한 증강을 나타내는데, 즉 대통령 한 명이나 정부 하나를 바꿈으로써 심연으로 빠져드는 자본주의를 막을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 투표를 통해 “국민”이 그들의 운명을 스스로의 손에 쥘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의 강력한 증강을 나타낸다.

오늘날 이 이데올로기의 선두에는 자리한 것은, 조 바이든과 카말라 해리스가 트럼프의 권위주의적 괴롭힘으로부터 미국의 민주주의를 구할 것이며 상처를 치유하고 미국과 다른 국제 열강들과의 관계에 합리성과 신뢰성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리고 이 생각들은 민주주의의 회복 및 대중추수주의자들의 진보적 가치 공격의 퇴진을 외치는 거대한 국제적 켐페인에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 노동자들은 경고되어야 한다. 트럼프와 “미국 우선”이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특히 중국과의 경제적 심지어는 군사적 격돌의 첨예화를 공공연하게 지향했다면, 바이든과 해리스 또한 그 방식과 수사학에 있어서 약간 다를 지언정 제국주의적 주도권을 향한 미국의 경로를 추구할 것이다. 트럼프가 부자들을 위한 감세를 지향하고 실업의 광대한 증가를 주관하며 그의 통치를 끝냈다면, 바이든 정부는 팬데믹으로 심각하게 악화된 세계 경제 위기에 직면해서 착취받는 계급의 생활 및 노동조건들을 공격함으로써 이 계급이 위기의 댓가를 치르게 만드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이주 및 “불법” 노동자들이 바이든 정부 아래에서 좀 더 안전하다고 생각한다면, 오바마가 대통령이고 바이든이 부통령이던 시절에 3백만 “불법” 노동자들이 미국에서 추방되었던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현재 바이든을 지지하는 많은 부분이 트럼프주의의 진정한 공포들, 즉 시끌벅쩍한 거짓말들, 망난이 같은 인종주의, 시위들에 대한 거친 진압, 코로나19와 기후변화에 대한 완전히 무책임한 대응등에 대한 반작용에서 나온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트럼프가 썩어가는 사회 체계를 분명하게 거울처럼 반영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그러나 트럼프도 민중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무책임한 “엘리트들”에 대항하는 “아웃사이더”로서 행동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가 자본주의 민주주의의 “규범들”을 공공연하게 침해할 때 조차도 그는 그럼으로 우리는 이러한 규범들의 방어를 위해 그 만큼 더 많이 궐기해야 한다는 상대주장을 강화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바이든과 트럼프는 동일한 민주주의의 사기극의 두개의 날개들이다.

이는 이 두개의 날개들이 평화적으로 함께 작동할 것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설령 트럼프가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날 지라도 트럼프주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는 거리에서 프레이드를 벌이는 무장한 우익 민병들을 정상상태로 규정했고 큐아논과 같은 주변적 음모론숭배들을 이데올로기적인 주류로 가져왔다. 이것은 다시 군사적 영역에서 백인우월주의자들에 대항할 준비가 된 안티파시즘 진영들과 흑인 민병들의 성장을 가져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뒤에서 세계 부르주아 계급과 그 국가기계는 바이든의 “치유적인” 연설들에 의해 씻겨질 수 없는 충돌하는 정치적 외교적 이해들에 의해 추동된다. 이 충돌들이 앞으로 더 강하지고 격렬해지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노동자 계급은 이런 종류의 “내전”에 관여할 그 어떤 이해도 갖지 않는다, 부르주아지의 대중추수주의자 분파들과 반대중추수주의자 분파들 사이의 투쟁에서 그들의 에너지와 심지어 피를 제공할 그 어떤 이해도 갖지 않는다.

이러한 부르주아 분파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식의 “노동자 계급”에 호소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트럼프는 “부당한” 외국 경쟁에 의해 위험에 처하거나 파괴된 일자리들을 가진 육체노동자들의 옹호자라고 자처한다. 민주당원들, 특히 샌더스와 오카시오-코르테즈와 같은 좌익 인사들도 착취되고 억압된 사람들을 위해서 발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은 그 자체의 이해관계들을 가지는데 그러한 이해관계들은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부르주아 정당들의 그 어떤 이해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그 이해관계들은 “아메리카”,  즉 착취되는 자와 착취자들이 (다른 나라들과의 무자비한 경쟁의 저편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그 전설적인 장소인 “국가”나 “민중”의 이해들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에게는 국가가 없다. 그들은 모든 나라들에서 자본에 의해 착취되고 그 정부들에 의해 억압당하는 국제적인 한 계급의 일부이다. 이러한 정부들에는 중국이나 쿠바와 같은 자칭 사회주의국가들의 정부들이 포함되는데, 이 나라들은 자본과 임노예들 사이의 관계를 국유화했기 때문이다. 이런 국가자본주의 유형은 민주당 좌익이 선호하는 선택이지만, 그것은 엥겔스가 지적했듯이 “자본주의적 관계가 청산됨”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선두에 가져온다.

진정한 사회주의는 계급과 임금노예제와 국가가 폐지된  하나의 전세계적 인류공동체이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손과 마음의 생산물들에 대해 진정한 통제력을 갖는 역사상 최초의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를 향한 첫걸음을 내딛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 스스로가 자본에 반대하는 한 계급으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의식은 오직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물질적 필요를 위해, 임금을 삭감하고 일자리를 감축하고 노동일을 연장하려는 고용자계급과 그것의 국가의 노력들에 대항해서  필사적으로 투쟁할 때에만 발전할 수 있다.그리고 팬데믹에 잇달아 그 모양세를 띠어가고 있는 국제적인 경기침체는 그러한 공격들을 자본가 계급 모든 부분들의 불가피한 강령으로 만들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공격들에 직면해 노동자들은 그들의 생활수준들을 방어하는 투쟁에 대대적으로 들어서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바이든은 다른 모든 자본주의적 지배자와 마찬가지로 노동자계급이 그들의 질서를 위협하면 유혈진압을 주저없이 지시할 것이라는 점에 있어서 어떤 환상을 가질 여지도 있을 수 없다.

자신들의 계급적 요구들을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부르주아지가 개시한 경제적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런 저런 부르주아 정당이나 지도자에 대한 그들의 환상들을 극복하기 위한 기본으로서 그리고 이러한 부패해가는 사회에 대한 그 자신의 전망, 그 자신의 대안을 발전시키기 위해 필수적이다.

노동자계급은 그 투쟁들의 길에서, 계급의 권력 장악과 새로운 사회 구축의 개시에 소용될 수 있는 수단으로서 과거 혁명적인 순간들에 기능했던 노동자평의회의 맹아적 형태들인 총회나 소환가능한 파업위원회들 같은 자체의 조직형태들을 발전시켜야만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진정한 노동자 계급 정치 당은 수행해야할 결정적인 역할을 가질 터인데, 그 역할은 노동자들에게 권력을 얻기위해 투표를 하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투쟁들에서 끌어낸 원칙들을 방어하고 혁명적인 미래를 향한 길을 가리키는 것이다. 인터네셔널의 표현을 쓰자면, “저 높은 곳의 그 어떤 구세주가 구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는 왕자나 귀족들에 대한 어떤 믿음도 없다.” 트럼프도, 바이든도, 그 어떤 거짓 메시아들도 아니다 – 노동자 계급은 오직 그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해방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류 전체를 자본의 사슬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다.

Amos 2020 – 11- 10

 

 

백신 전쟁: 자본주의는 치료법 개발에 방해

모든 미디어는 세계적 유행병 사스(SARS)와 코로나 바이러스 19가 글을 쓰는 현재 시점에 1천만 인구를 감염시켰으며 그 가운데 50만의 죽음을 유발했음을 인정했고, 이는 과학 공동체를 백신 개발 경쟁에 돌입하게 했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백신 경쟁’이 ‘마지막 박차를 가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접종 원칙을 이용한 최초 백신인 1881년 루이스 파스퇴르의 광견병 백신 이후, 생명기술과 유전학에 기초한 바이러스 세포 배양 방법에는 엄청난 진보가 있었고, 이로 인해 여러 바이러스 백신이 등장할 수 있었으나, 현재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 19 백신이 2021년 말에나 이용 가능해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사실 모든 전문가는 신뢰할 만한 백신을 찾아내어 이용하게 되기까지 평균 10년에서 15년 정도 걸린다는 데 동의한다. 왜냐하면 수정, 제조, 비압축 3단계, 대규모 실험 프로그램 - 동물 실험, 비감염 인구에 대한 실험, 환자에 대한 실험 - 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텍사스 A&M 대학교 텍사카나 대학의 바이러스 학자 벤자민 뉴먼(Benjamin Neuman)은 “그것은 많은 시행착오가 있지만 다른 방법을 탐험할 많은 선택지가 있다는 뜻”이라고 판단했는데, “왜냐하면 코로나 바이러스 군에 대한 효과적인 백신은 인간을 위해 설계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뒤늦은, 또는 포기한 예방법

이는 매우 충격적인 선언이다. 왜냐하면 코로나 바이러스는 과학에 있어 미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SARS-CoV1(중국 남동 지역에서 2002년 말 출현)과 MERS-CoV(사우디 아라비아에서 2012년 출현)이라는 SARS-CoV2의 두 형제는 백신을 만드는 관점에서 몇몇 과학적 연구의 등장을 촉발했다. 첫 번째 사례에서, 연구는 중단되었고, 백신 계획은 임상시험도 실시하기 전에 폐기되었다. 두 번째 사례에서 연구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동물 실험이 이루어졌다. 몇 년 동안 과학자들이 ‘코로나 바이러스 19와 같은 유행병의 위협’을 예상했다는 사실에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관한 과학적 연구와 백신 개발은 ··· ‘이윤이 되지 않는다.’라고 판단되었다! 공중 보건 서비스 내 과학적 연구의 영역은 재정적, 유통 수단의 부족으로 위협받고 방해에 직면해 있다. 그것은 현재 권력을 쥔 정부의 정치적 색깔이 어떻든 예산 감축으로 희생된 것 중 하나이다. “2019년 5월, 도널드 트럼프는 유행병 사태에 싸우는 책임을 지고 있는 저명한 전문가들로 구성된 안전보장회의의 특수부 하나를 폐쇄했다.[1] 2009년 돼지 독감 이후, 유럽 집행위원회 정치적 권고사항들을 포함한 보고서를 출간했으나, 이후 EU 구성원 국가들이 이를 거부했다 (...) 2003년 사스 이후, 질병 통제 유럽 센터(European Centre for the Control of Diseases)가 창설되었고, 훌륭하게 일했다: 그러나 협력자는 180에 불과했다(...). Sciensano(벨기에 국립 공공보건연구소)에는 매우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으나, 연구소는 투자 부족으로 인해 힘이 없었다”[2].

이제 그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SARS-CoV2 백신 개발을 위해 연구자들은 SARS-CoV1과 MERS-CoV에 대한 연구를 토대 삼고 있다”[3]. 처음 바이러스가 출현한 지 17년이나 지났다! 수천 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었던 백신을 찾는데 17년을 잃었다!

시간과 싸움

이러한 재앙에 맞선 투쟁에 불가피한 지체 이후, 가능한 이를 따라잡기 위해 전 세계적인 유행병 사태로 인한 현재의 황폐화에 직면하여 협력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일치단결한 과학적 노력이 국제적으로 조정되고, 백신을 탐색하는데 과학적 지식이 집약되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간단한 논리다.

그러나 현재 현실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 정반대다. 현재 백신과 치료제를 찾기 위한 세계적인 경쟁은 광적이고, 혼란스러우며, 무질서한 유혹의 모습을 띠고 있다. 모든 이들이 자기 자신만을 위하고 있다: “질병에 대항하는 치료제를 찾기 위해, 전세계에서 100개가 넘는 프로젝트가 발주되고, 십 수 개의 임상 실험이 진행 중이다”[4]. 미디어에 따르면, 모든 거대 제약회사들, 사노피(Sanofi, 프랑스 제약 기업 그룹), 길리어드 사이언스(Gilead Sciences, 미국 제약 연구소), 글락소스미스클라인(GlaxoSmithKline, 영국 거대 제약회사), 리제네론 제약회사(Regeneron Pharmaceuticals, 뉴욕 기반 기업), 존슨 앤 존슨(미국 기업), 그리고 중국 기업 칸시노(CanSino) 등 오직 일부만 거론했지만, 많은 기업이 이런 실험 중 일부를 하고 있으며, 독자적으로 이를 수행하고 있다.

우리는 왜 이러한 상황에 부닥쳤는가? 바로 자본주의의 법칙이다. 이 법칙은 모든 국가의 야망의 무게, 그리고 그들 사이의 경쟁을 반영하며, 분산되고 혼란스러운 방법으로만 이루어지는 보편화한 경쟁, 이윤의 법칙을 통해서만 사회가 기능하도록 한다. 같은 방법으로 자본주의는 보건의 모든 영역에서 모든 예방 수단과 연구 예산을 저지하고, 지연시키고, 방해하고, 중지시켜왔다: 효과적인 백신 발견에 필수 불가결한 자원 집중, 그리고 정보 공유에 대해 그리고 자본주의 기능과 그 법칙은 직접적으로 반대한다.

... 사람들의 건강을 대가로

코로나 바이러스19 백신 탐색과 ‘기적의 치료제’를 위한 이 단거리 경주는 나머지 세계인들의 건강에 대한 비극적인 결과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연구자들과 바이러스학자들은 이런 갑작스러운 재촉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다: “어떤 죽음은 무모한 연구 때문이다 (...) 오늘날 과학은 너무 빨리 가고 있고, 이는 심각한 결과를 일으킨다 (...) 과학적 결과에 대한 비판적인 판단을 할 시간이 없고, 이는 우려스러운 결과를 갖는다”[5].

‘백신 대체’를 위한 엄청난 양의 업무가 수행되고 있고, 과거 바이러스 치료제가 재활용되고, 말라리아나 에볼라에 대한 것과 같은, 과거에는 ‘이윤이 되지 않는다’[6]라고 판단되었으나, 날이 갈수록 SARS-CoV2 유행병 사태가 연 새로운 시장에 대한 접근을 위한 ‘흥미로운 관점’이 된, 폐기된 백신에 관한 연구가 재개되고 있다. 이는 ‘과학 공동체’의 총체적인 무능력함과 혼란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런데도 이는 결국 질적으로 좋지 않고, 충분하게 검사하지 못한 ‘값싼’ 백신 시장에서 갑작스러운 유통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이는 셀 수 없는, 아찔한 숫자의 새로운 희생자들이 자신의 생명을 그 대가로 치르게 될 것을 의미한다.

... 그러나 국가의 이윤을 위해

현실에서 자본주의, 부르주아 계급과 그 국가는 국민 건강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군비와 군사적 연구에 투자된 비상식적 규모가 국민 건강과 건강한 삶에 투자되었더라면, 이런 유행병 사태가 진행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7].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기업들의 백신 개발부터, 누가 사업화에 성공한 첫 번째가 될 것인가?”[8]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 국가가 우선권이 있는가?”[9] 이것이 부르주아지가 그들의 미디어를 통해 제기하고 있는 커다란 질문들이다! 사실은 명백하다: 가능한 한 빨리 치료제와 백신을 생산하기 위해 모든 과학적 작업을 집중시키고 통합하는 대신, 백신을 찾아내는 첫 번째가 되기 위해, 최소 7년에서 12년까지의 기간 동안 생산 독점권을 부여하는 특허권을 따내기 위해 각각의 제약회사들이 자신의 실험실에서의 연구 단계와 수준을 질투에 가득 차 감춘다. 그들의 작업에 필요한 엄청난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그들은 가장 비열한 상업 조약을 대가로 가장 높은 입찰자에게 의존한다. 이들 가운데, 프랑스 거대 제약회사 사노피는 양심의 가책도 없이 최종 백신 배급을 할 때, 2019년 12월 독감 바이러스 백신 생산에 2억2천6백만 달러를 투자했고, 이에 더해 연구에 3천만 달러를 투자한 미국에 우선권을 줄 것이라 발표했다. 사노피에 대한 폭로로 유발된 추문과 특히 마크롱의 분노는 겉치레에 다름 아니다. 실제로는 백신은 ‘시장의 법칙’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공공의 선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접근성은 공평하고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그들의 위선적인 선언이나 ‘인간적인’ 맹세 너머에는, 유럽이 전 세계시장에서 국제적인 백신 개발 경쟁에서 질 것이라는 공포를 숨긴다. 자신의 이윤을 추구하고, 경쟁의 논리에 순응하며, 자본주의 사회의 주요 동력이 되는 제약회사들의 의지 외에도, 그들은 가장 강력한 ‘다국적 기업들’[10]을 포함하여 그들이 의존하고 있는 국가 경제의 지향과 경영, 그리고 사업에 대한 엄격한 통제와 가장 강력한 경계를 수행하도록 만드는 국가 자본주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 기업들의 재정적 정책을 지시하는 것이 바로 국가이다.

자본주의의 막다른 길 선언

‘마스크 전쟁’와 마찬가지로, 백신 전쟁은 “모든 국가를 포함하는 냉소적이고 광적인 경쟁의 극단적으로 교훈적인 예시이다”[11]. 이들 국가는 단순한 목표를 추구한다: 백신을 손에 넣어 독점하는 첫 번째가 되거나, 또는 그에 대한 어떤 특권을 주장하거나, 또는 다시, 경쟁에서 소외되어 도움을 ‘구걸’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 부르주아 해설가들은 이렇게 인식한다: “미래의 백신을 위한 미국과 유럽의 라이벌 경쟁과 도널드 트럼프와 중국의 새로운 긴장, 강대국들 사이의 분열이 심화하고 있다.”[12]. 미국과 중국에 직면하여, “유럽은 백신을 획득하기 위한 싸움에 수십억을 내던지고 있다 (...) 어떤 회원국도 (...) 백신 개발을 위한 완전한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지 않다”[13]. 그러므로 트럼프 행정부는 아스트라제네카 연구에 12억 유로를 보조금으로 지원해 왔으며, 이는 3억 개 분량의 백신의 대가이다. 그리고 EU의 국가들(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은 제약회사들과 백신의 우선적 공급을 위한 협상을 가속하기 위해 약 24억 유로의 ‘긴급 자금’을 활용하길 원한다. 폐쇄조치(lock-down)와 의료 기구들의 부족 관리에 있어서 일치단결한 방법을 만들어내는 데 실패한 EU가 이러한 공공 자금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에서 성공할지는 지켜볼 일이다.

트럼프는 에티오피아 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이에수스(WHO 사무총장)를 중국에 이용되었다고 비난했고, 미국은 그가 이끄는 WHO에 대한 원조를 철회했는데 이 행동은 세 마리의 상어(중국, 미국, EU)가 이 지구에서 치르고 있는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무역, 제국주의 전쟁의 충격적인 모습, 서로를 거부하며, 대단히 위선적이고, 협력이 결여된 상황에 빠져있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미국은 WHO를 중국과 ‘결탁’했다고 비난하고, EU는 미국의 ‘이기주의적’ 행위를 혹평한다.

가디언과 같은 좌익 성향의 신문들은 협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지하지만, 그들의 애도의 목소리는 오직 자본주의 체계 전체의 책임을 가리는데 기여할 뿐이다. 이 백신 전쟁에서 절대적으로 명확한 것은 사람들의 건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국가와 지배 계급에 있어서 중심적인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후자는 제국주의 전장에서 자신의 위치를 강화하기 위해 건강을 이용하는 데에만 관여한다.

백신 전쟁에서의 가장 큰 패배자는 오직 더 많은 고통으로 이어질 뿐인, 치료할 수 없이 병든 체계의 생존을 위해 훨씬 더 많은 희생자를 비롯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인류뿐이다. 스스로 동원하여, 전 세계적인 수준에서 연합된 방법으로 노력을 통합하고 집중할 수 있는 사회만이 진짜 인류가 필요로 하는 것에 기초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

2020년 6월 30일

아우베(Aube)

<주>

[1] 우리 인터내셔널 전단을 보라: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830/generalised-capitalist-bar...

[2] 벨기에 바이러스학자와의 인터뷰, De Standaard(역자: 벨기에 일간지)(2020년 5월 30-31일)

[3] RTL infos(2020년 5월 28일)

[4] La Croix (2020년 5월 15일)

[5] De Staandard (5월 20-21일)

[6] 보기를 들어, 에볼라 바이러스 백신 연구는 아프리카의 국가들이 “파산” 상태인 것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에 냉소적으로 폐기되었고, 많은 수의 희생자 피해가 발생했다.

[7] “보편화된 자본주의 야만이냐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냐”

[8] Etoro (2020년 5월 18일)

[9] Rtbf (2020년 5월 18일)

[10] “경제 위기: 국가, 자본주의의 마지막 유물”

[11] “가면 전쟁: 부르주아지는 깡패들의 계급이다”

[12] La Croix (2020년 5월 15일)

[13] De Standaard (2020년 6월 5일)

[14] 에볼라에 이미 이용되었던 안티-바이러스 치료제(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 19에 효과를 제약하는데 효과성은 의심스러운) 렘데시비르의 생산에 대한 미국 정부의 배타적 권리에 대한 계약은, 유럽에서 보편적인 사용을 권고했던 EU의 코앞에서 이뤄졌고, 이러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모습을 띤 이 전쟁이 깡패의 도덕성에 지배를 받는다는 또 다른 사실을 확인시켜 줬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894/war-vaccines-capitalism-obstacle-discovery-treatment

신종코로나폐렴 펜데믹(Covid-19-Pandemic): 자본주의 몰락의 종결기의 증상

코로나-19전염병에 관한 우리의 첫 번째 기사의 끝머리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 새로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스(SARS)의 경우처럼, 새로운 펜데믹으로 되든, 아니면 계절성 호흡기질환을 유발하는 바이러스로 남든, 이 새로운 질병은 자본주의가 인류와 지구 상의 생명에 위협이 되어버렸음을 나타내는 또 다른 경고의 하나이다. 질병들로부터 우리들을 지킬 수 있는 의학을 포함한 생산력의 엄청난 능력들은 전 세계 인구의 대부분이 불모지와 같은 도시들에 살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새로운 전염병들의 발생 위험들에 노출될 수 밖에 없는 이윤 추구와 충돌한다.“

오늘날 이 판데믹은 전세계에서 중요한 문제가 되었고 심각한 결과들을 갖는 제대로 된 경제적“쓰나미”를 유발했다. 제한된 지면 때문에 경제에 미치는 영향들의 이러한 차원을 자세히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 부분은 앞으로 다른 기사에서 다뤄질 것이다. 현 기사에서 우리는 이 전염병이 어떻게 자본주의의 질병을 폭로하는가의 분석에 집중할 것이다.

신종코로나폐렴( Covid-19)는 자본주의 붕괴의 한 표현임이 확인되다

오늘 (2020년 3월 13일) 가장 암울한 징조가 확인 되었고, 세계보건기구(WHO)는 그것이 이미 모든 대륙의 117개 국가에 확산된 전세계적인 유행병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공식적인 통계에 의하면 감염자수가 12만명 이상이고, 팬데믹로 불리게 된 이번 첫 주에 사망자 수가 4천명이 넘었다. 중국에서 “문제”로 시작된 것이 오늘날 지구 상에서 주요 자본주의 열강들(일본, 미국, 서유럽 등)에서 사회적 위기가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만도 사망자 수가 2002-2003년에 SARS-전염병으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발생한 사망자 수를 넘어섰다. 그리고 한 달 전 “독재적인” 중국 당국이 국민들의 통제를 위해 시행한 가혹한 대책들, 예를 들어 수백만의 격리1 ,그리고 질병 확산방지를 위한 투쟁에“우선적”이지 않은 모든 이들을 병원치료로부터 배제하는 것과 같은 진정 “사회다윈주의(social darwinism)”의 전형적인 정책들은 이제 모든 대륙 모든 해당국들의 많은 주요 도시들에서 현안이 되었다.

부르주아 “언론 매체”는 일종의 역병으로 새로운 “자연”-재앙으로 설명하려고 자료들과 추천들과 “해명들”로 우리들에게 지속적이고 대대적으로 폭탄 세례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재앙 대해 “자연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자연과 이 자연의 일부인 인류에 대한 이미 늙고 낡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질식할 것 같은 독재의 결과이다.

혁명가들은 질병 과정에 대한 역학 연구나 예후를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우리의 과제는 물질적인 토대 위해서 이러한 치명적인 결과들의 출현을 가능케 하고 불가피하게 만드는 사회적 조건들을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주의 제체의 본질이 인간적인 필요보다 착취와 이윤과 축적을 우위에 내세우는 것임을 명확히 했다. 그리고 도 다른 자본주의는 불가능함을 명확히 했다. 또한, 역사상의 특정 시기에 ( 자연이 인간에게 부과한 고난을 제한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자연을 지배한 과학의) 생산력의 거대한 진보를 가능하게 했던 바로 그 자본주의 생산 관계들이 오늘날 생산력의 발전에 장해물로 되어버렸음을 규명했다. 우리는 또한 혁명적 해결 없이 자본주의 쇠퇴의 이 시기가 몇 십년간 연장됨으로써 어떻게 하나의 새로운 시기, 즉 사회적인 해체 2(social decomposition)의 시기로의 진입이 초래되었는지를 설명했다. 이 새로운 시기에 그 모든 파괴적인 경향들은 더 강력하게 집중되고, 혼돈과 야만 그리고, 사회 결속을 최소한 보장하는 그 사회 구조의 계속적인 파괴가 배가되면서 지구 상의 생명의 생존 자체를 위협한다.

이것은 과거 속에 살고 있는 몇몇 맑스주의자의 허상들에 불과한 것인가? 분명 그렇지 않다. 현재의 코로나-19유행전염병에 대해 더 엄격하게 학문적으로 이야기하는 학자들은 이런 종류의 전염병의 확산은 무엇보다도, 생존을 위해 인간 거주지로 근접하는 동물에 의해 더 큰 규모의 감염(동물원성)을 초래하는 가속된 환경 파괴에 그 근원이 있고, 그와 동시에 수 백 만명이 거대 도시들에 거주하는 인구 과밀로 인해 아찔하게 상승하는 감염 곡선이 초래된다고 주장한다. 코로나-19에 대한 이전 기사3에서 이미 우리가 설명했듯이, 사실 중국에서 일부 의사들이 이미 2019년 12월부터 사스-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한 새로운 전염병에 대해 경고하려 시도했었지만, 중국의 자본이 보여 주길 원했던 지도적 세계 열강의 이미지를 위협했기 때문에 그들은 국가에 의해 직접 검열과 억압을 당했다.

또한, 자본주의 특징들 중의 하나인, 점점 더 심해지는 여러 나라들 사이 대책들의 조정 부족을 이 전염병 확산의 주요 동력의 하나로 파악하는 것이 ICC가 처음인 것도 아니다. 한편, 이러한 조정 부족은 자본주의 특징들 중의 하나이긴 하지만, 체제 해체의 시기에 놓인 국가와 자본가들의 경향성으로서 모든 사회 관계들에 침투하게 되는 “제 각각”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로의 후퇴”가 진전됨으로써 더욱 더 심해진다.

우리가 이 질병의 위험이 그 바이러스 자체 보다는 수 십 년 간 전세계적으로 건강 보건 체계가 심각하게 악화된 상황에서 이 유행성 전염병이 출현한 사실에 있다는 점을 지적할 때,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한 것도 아니다. 실상, 상이한 국가들의 정책은 유행성 전염병의 영향이 시간적으로 연장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하게 될 지라도 새로운 발병케이스들의 출현 방지를 위해서, 점점 더 희소해지고 더 이상 제대로 기능하지도 않는 이러한 구조물들의 “관리”를 지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수 십 년 동안의 인간의 노동으로 축적된 지식과 기술 등등 자원의 상태가 이렇게 무책임하게 악화된 것은 해체에 처한 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에 특징적인, 전망의 부재를 그리고 인류의 미래에 대한 관심의 전적인 부재를 명백하게 드러내면서 문제 해결의 새로운 실마리가 필요함을 나타내지 않는가?

21세기의 한가운데에서 세계 최강국들이 억제할 수 없는 전염병이 출현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물론, 인류의 역사상에 극히 치명적인 또 다른 전염병들이 있었다. 오늘날 부르조아 “언론”에서 천연두, 홍역, 콜레라 또는 흑사병이 어떻게 수백만의 사망자들을 유발했는지에 대해 보고서들이나 보충 글들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사망예들의 원인이 근본적으로, 물질적인 조건의 측면 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지식의 측면에서도 근본적으로 인류의 나쁜 생활조건들이었다고 설명하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자본주의는 바로 이러한 물질적 결핍 단계를 극복하고 생산력의 발전을 통해서 풍요의 토대를 놓을 역사적 가능성을 제공하고 또 필요로 한다. 이러한 풍요는 하나의 코뮤니스트사회 안에서 인류를 진정으로 단합시키고 해방시킬 수 있다. 최대의 자본주의적 팽창이 있었던 19세기를 살펴보면, 어떻게 건강이, 그리고 사망사례로서가 아니라 질병이 인식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연구에서 뿐만 아니라 상이한 연구자들 사이의 소통에서도 진보가 이뤄졌는지, 어떻게 의학에서 과학적인 접근으로의 진정한 변화가 있었는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공중위생의 개선을 위한 대책들로부터 예방 백신의 개발과 투입에 이르기까지, 의학적인 전문가들의 교육에서 병원 설립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일상적인 삶에서 활용되었다. 인구 증가(10억에서 20억으로) 그리고 특히 기대 수명 증가(19세기초 30~40세에서 1900년 50~65세)의 주요 원인은 과학과 위생에서의 이러한 진보였다. 하지만 이 어떤 것도, 민중의 필요를 배려한 지배계급의 이타심의 결과가 아니었다. 맑스가 말했듯이 “자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구멍들로부터 피와 흙탕물을 뚝뚝 흘리면서” 세상에 나왔다. 그리나 이러한 공포 속에서 자본의 목표는 노동력의 최대 수익성을 달성하고, 그리고 임금 노예들이 새로운 생산 공정들을 몇 십 년간 습득하면서 획득한 지식의 최대 수익성을 달성하는 것, 상품 공급과 화물 운송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것 등등이다. 이 때문에 착취자 계급은 직원들의 활동 수명을 가능한 한 저렴하게 연장하고,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재생산을 확보하며 피착취 계급의 생산성 증가를 통해 그 상대적인 잉여가치를 높이려 노력한다.

이러한 상황은 자본주의의 상승기에서 그 쇠퇴기로 역사시기가 변함으로써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쇠퇴는 코뮤니스트인터네셔널 이래 혁명가들이 제 1차 세계대전4에서 확인했다. 인류 사상 최대로 치명적인 전염병들 중의 하나인, 1918-19년의 소위 “스페인독감”이 1918년에 출현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전염병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병원체의 독성 자체보다 오히려 훨씬 더, 자본주의 쇠퇴기 제국주의 전쟁에 특징적인 (충돌의 세계적 차원, 주요 국가들의 민간인들에 끼친 전쟁의 영향들 등등) 사회적 조건들이 1차 세계대전 참호전의 사망자 수의 두 배에 가까운 5천만명의 사상자를 낸 그 재난의 정도를 설명한다는 점이다.

이 전쟁과 이 공포는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두 번째로 그리고 더 끔찍한 에피소드를 접하게 된다. 독가스의 사용과 같은 첫 번째 제국주의 전쟁의 잔학 행위는 두 세계 대전 사이의 기간에 줄어들었지만 다시 2차 세계대전에서 생물학적 무기의 투입(예를 들어 안트락스는 영국에 의해 실험되었다)까지 독일과 일본에 의한 인체 실험들,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계적인 파괴 기계들 그리고 최종적으로 전쟁 말의 미국에 의한 원자탄의 투하 등 야만은 날뛰게 되었다. 인간 생활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 없지 않았으나 이것 만으로 자본주의 군국주의의 완전한 파괴적인 잠재력이 전개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뒤이은 “평화”? 자본주의 열강들이 1948년에 설립된 소위 “복지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의 하나로 여겨지는 영국의 NHS(National Health Service:국민건강관리국)를 모범으로 삼아서 보건 체계를 세운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보건 체계의 목적은 “보편적인”건강 관리를 보장하는 것, 무엇보다도 스페인 독감과 같은 전염병을 예방하는 것이었다. 그 인도주의적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에게 진보이자 이득이 되었던가? 확실히 말해서 그렇지 않다. 이러한 보건 체계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전쟁에서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사망한 뒤 ‘부족해진’ 상품인)노동력의 수리를 최소한의 비용으로 보장하는 것 그리고 재건설 동안 전체 생산 공정을 확보하는 것에 있었다. 이는 투입된 “구제책”이 새로운 고통의 원천이 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감염을 통제하기 위해 처방되는 항생제요법은 자본주의의 생산성의 요구를 고려해서 노동할 수 없는 시간의 단축에 오용됨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점은 그 감염에 대항해 싸울 치료적인 무기들을 결국 축소시키는 소위“슈퍼버그”, 세균의 내성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그것은 또한, 자본주의의 식량 기술이 빈곤층의 비만을 야기할 정도까지의 사용되는 것은 노동 계급과 사회극빈층의 식습관의 악화, 즉, 피착취 계급의 재생산 비용의 감소로 인한 비만 및 당뇨병과 같은 질병의 증가로 나타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 착취체계가 노동하는 인구에게 부과하는 점증하는 고통을 다소 견딜만 하게 만드려고 분배된 약물이 어떻게 해서 소위 "아편 전염병()"과 같은 현상을 일으켜서 예를 들어,코로나 바이러스가 도착할 때까지 미국 최대의 건강 문제로서 베트남 전쟁의 사상자보다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게 되었는지도 드러난다.

코로나-19 전염병은 인류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문제들과 분리 될 수 없다. 반대로, 그러한 문제들은 21 세기 자본주의 건강관리와 같은 비인간화되고 상업화된 건강 관리의 대상이되는 경우에만 악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질병의 기원은 인류의 지식이나 기술의 부족에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역학에 대한 현재의 지식이면 새로운 전염병의 격리가 가능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질병이 발견 된 지 2 주 만에 연구소는 이미 코로나-19의 원인이 된 바이러스의 서열을 분석 할 수 있었다. 인류가 그것을 극복하는 데 장해물은 착취적인 소수에 도움이되고 그 싸움에서 브레이크 역할을 하는 생산양식에 사회가 종속되어 있다는 점이다. 백신개발 경쟁에서 보여지는 것은 공동 협력 작업이 아니라 실제로는 실험실 간의 상업적 전쟁이라는 점이다. 진정한 인간의 요구는 자본주의 정글의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 시장에 의해 치열한 경쟁법칙에, 시장에 최초로 도달한 자본가가 그 이점을 달성 할 수 있다는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

누가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가? 개인의 "무책임 성"인가 아니면 해체기 사회 체제의 부과인가? 최근 23 차 국제 대회에서 우리는 국제 상황에 대한 결의안을 승인했는데, 그 안에서 우리는 해체에 관해 우리가 썼던 테제를 다시 다루면서 그 내용의 타당성을 재차 주장했다: «1990 5 해체(decomposition)에 관한 논문은 사회의 진화에서 자본주의가 이 마지막 존재 단계에 진입 한 결과 발생하는 일련의 특성들을 강조한다. 22 차 의회가 승인 한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이러한 모든 특성들이 악화되었음을 보여준다:

"3 세계 국가의 기근의 증가";

동일한 "3 세계"가 수억 명의 인간이 하수구의 쥐처럼 생존하는 거대한 응집체로 변형되는 것;"선진"국가의 대도수 중심부에서 동일한 현상의 발달;"우연한" 재난의 수적 증가 (...) 인간, 사회 및 경제에 대한 "자연" 재해의 점점 더 치명적인 효과 ;놀라운 비율로 진행되는 환경악화”(해체에 관한 논문, 7)». 오늘날 우리가 볼 수있는 것은 이러한 표현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에 결정적인 요소가되었으며, 주요한 규모의 사회적 사건의 출현과 발전은 이러한 표현에 기초해서 만 해석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Covid 19 전염병과 관련해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살펴보면, 자본주의의 이 마지막 단계의 특징 인 두 요소의 영향의 중요성을 볼 수 있다. 첫째, 중국이 최근 전염병의 단순히 지리적 원천인 것 만이 아니다. 2002-2003 의 SARS 전염병 또는 코로나-19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실요소를 넘어 세계 자본주의의 분해 단계에서 중국 자본주의 발전의 특성과 현재 상황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해야한다. 제국주의 블록의 변경 (1972) 이후 그리고 1989 년 이러한 블록의 소멸 이후 소위 세계화의 주요 수혜자로서 중국은 미국의 지원을 이용해서 단 몇 년 만에 세계 무역과 경제에서 엄청난 중요성을 가진 제 2 세계 강국이되었다. 하지만 정확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중국의 힘은 말기 자본주의의 모든 낙인을 지니고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노동의 과도한 착취,"군사-민간 융합 "이라는 국가 프로그램의 전쟁 경제의 무제한적 발전에 기반을두고 있으며 치명적인 환경 파괴와 맞물려있다. 다른 한편, "국가 응집력”은 당의 정치 교육을받는 대중에 대한 경찰의 통제에 기반을두고있다. (...) 사실, 중국은 전체 자본주의 체제라는 광범위한 확산된 군사주의적 암의 거대한 전이일 뿐이다. 중국의 군사 생산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으며 그 국방 예산은 20 년 만에 6 배 증가해서 2010 년 이래 세계에서 제 2위의 자리를 차지한다.»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강점의 예가되는 중국의 이러한 발전은 사실상 붕괴 과정의 주요 징후이다. 우리는 기술적인 정복의 "웅대함"이나 새로운 실크로드와 같은 이니셔티브를 통한 전 세계로의 팽창에 눈이 멀어서 실상 얼마나 엄청난 과잉 착취 조건 (과도한 노동일, 비참한 급여 등)과 생활, 영양 및 문화 측면에서 얼마나 후진적이고 점점 고갈되는 환경조건 아래에서 수억 명의 근로자가 생존하는지를 잊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이미 낮은 일인당의료비는 2.3% 감소했다. 예를 들어, 야생 동물 고기를 먹을 때와 같이 식품들이 위생 기준이 거의 없이 또는 직접 그 외부에서 생산된다. 지난 2 년 동안 "아프리카 돼지 독감"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이 중국에서 퍼져서이 동물의 30 %가 도살되고 돼지 고기 가격이 70 % 상승했다. 자본주의 해체의 영향이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두 번째 요소는 다른 국가의 자본들 간의 최소한의 조정 마저도 약화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가 분석 한 것처럼 자본주의가 마지 못해 노력할 수있는 최대의 통일성이 민족 국가(national state)이기 때문에 초 제국주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세계가 제국주의 블록으로 나눠진 단계에서 다양한 국가 구조 사이에서 최소한의 공통 관심사를 관리하려고 시도한, 유네스코에서 세계 보건기구 (WHO)에 이르기까지 모든 구조가 만들어 졌던 사실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본주의 해체가 진행됨에 따라 최소한의 조정을 향한 이러한 경향은 악화되고있다. 위에서 언급 한 제 23 차 의회의 국제 상황에 대한 결의에서 우리가 분석 한 바와 같이 : «(제국 주의적 경쟁의 요구뿐만 아니라) 위기의 악화 는 다자간기구와 메커니즘을 시험하고 있다 »(제 20 항). 이것은 예를 들어 세계 보건기구 (WHO)의 역할에서 보여졌다. 2002-2003 년 SARS 전염병에 직면 한 국제적인 조정은 전 세계 실험실에서 발견 된 몇 가지 연구의 속도와 함께 현재 Covid-19와 매우 유사한 가족 바이러스의 낮은 발현률을 설명한다. 그러나 그러한 역할은 2009 년 인플루엔자 A 전염병에 대한 WHO의 불균형한 반응으로 인해 도전 받았는데, 그 당시 WHO의 경보는 도널드 럼스펠드 전 국방 장관이 직접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실험실에서 제조 된 항 바이러스 약물 "타미플루(Tamiflu)"의 대량 판매를 촉발하는데 사용되었다. 그 이후로 WHO는 "최고의"추천을하는 NGO의 역할을 거의 추진했지만 경쟁하는 국가 자본에게 그것을 따르도록 강요 할 수는 없다.이 조직은 심지어 감염 기록에 대한 통계적 기준을 통일 할 수 조차 없었기 때문에 모든 국가 자본들이 가능한 한 오랫동안 각 국가에서 전염병의 영향을 숨기려고 시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이것은 전염병의 첫 징후를 숨기려고 시도한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미국민의 거의 30%가 실질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개인 보험 기반의 건강 보험 시스템을 보호하려는 미국에서도 발생했다. 진단 테스트 사용에 대한 기준의 이질성 또는 다양한 단계에서의 측정에 대한 프로토콜의 차이는 의심 할 여지없이 전 세계적 유행병의 확산을 억제하는 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더 나쁜 것은 의료인들을 위한 보호마스크나 보호복의 조달에 있어서 메르켈의 독일과 마찬가지로 모든 국가 자본이 보호 조치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1전염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여행하는 것을 막는 것과 그들이 집안에 머무는 것이 필요함은 자명하다. 그러나 아동이나 노인들의 돌봄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이 충분하지 않고, 게다가 예를들어 공장에서의 작업은 이에 해당되지 않은 것과 같이 선택적 격리 그리고 동시에 국민에 대한 경찰력을 통해 감시처럼, 그 격리정책이 시행된 방식은 자본주의적 국가전체주의의 기능적 특징을 나타낸다. 우리는 이러한 행태들이 전 세계의 착취받는 이들의 일상 생활에 미치는 영향들에 대해 앞으로 다른 한 기사에서 다룰 예정이다.

2해체(decomposition)에 대한 테제 그리고 “ICC 23차총회의 국제상황에 대한 결의문”

3우리의 웹싸이트 참조.

4우리 웹싸이트의 기사 참조.

코로나 팬데믹과 자본주의 해체기에 관한 보고서 (Report on the Covid-19 pandemic and the period of capitalist decomposition)

보고서는 우리 프랑스 지부에서 최근 열린 회의를 위해 작성되었고 세계 상황에 대한 다른 보고서들이 이어질 예정이다.

    재앙이 지속되고 악화되고 있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전세계적으로 3천 6백만 명이 감염되었고 백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1] 전세계적으로 부르조아지의 상이한 분파들이 이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위한 예방 정책들의 도입을 무모하게 지연하다가 결국 경제의 광범위한 부문들에 잔인한 폐쇄(Shutdown)을 부과한 이후, 세계 부르조아지의 다른 분파들은 팬데믹이 몇몇 나라들에서 일시적으로 약화된 상황에 사회를 재개방함으로써 결국 훨씬 더 많은 희생자들을 댓가로 한 경제회복이라는 도박을 하고 있다. 겨울이 다가오면 이러한 도박은 승산이 없음이 분명한데, 이는 적어도 중기적으로 경제적 의료적 악화를 의미한다. 이 재앙의 부담은 국제 노동자 계급의 어깨에 놓여졌다.

    지금까지  자본주의가 그 역사적 쇠퇴의 최종기, 즉 사회적 해체의 시기에 진입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들 중의 하나는, 1989년 동구권의 몰락에 의해 결정적으로 개시된 이 현 시대가, 세계 전쟁이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같은 명백한 지표들이 정의하고 지배하던 자본주의 쇠퇴의 이 이전 시대와 달리, 겉으로  명백한 상호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증상들이 급증함으로써 표면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이다[2]. 그러나 2020년 현재, 2차 세계대전 이래 세계사에서 가장 심각한 위기인 코로나 팬데믹은 자본주의 체제의 전면화된 부패를 나타내는 일련의 카오스 요소들을 합침으로써 이 해체기의 확실한 상징이 되었다. 이러한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 1967년에 시작된 장기적인 경제위기[3]의 연장 그리고 뒤이은 긴축 정책의 축적과 강화는 팬데믹에 대해 부르조아지가 부적절하고 무질서하게 대응하도록 내몰았고 이는 다시 지배 계급이 중요한 시기에 생산을 중단함으로써 경제위기를 엄청나게 악화시키도록 만들었다;

- 팬데믹의 기원은 과잉 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고질적인 위기로 인해 지속적으로 창출된 가속적인 환경 파괴에 분명히 놓여있다;

- 이전의 동맹국가들 사이에서 보여지듯, 제국주의 열강들의 지리멸렬한 경쟁 관계로 인해 팬데믹에 대항한 세계 부르조아지의 대응은 국제적인 대실패로 나타났다 ;

- 이 건강 위기에 대한 지배 계급의 부적절한 대응은 각 나라 내부에서 부르조아지와 그 국가가 사회에 대한 정치적 통제력을 점점 더 상실해 가는 경향을 드러낸다;

- 지배 계급과 그 국가의 정치적 사회적 능력의 쇠락은 놀라운 방식으로 이데올로기적 부패를 동반한다: 자본주의 최강국가들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터무니없는 거짓말과 미신적인 넌센스를 유포하고 있다.

    그래서 코로나19는 그 이전보다 훨씬 분명하게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주요 수준들에 대한, 즉 경제적, 제국주의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및 사회적 수준들에 대한 해체의 영향을 한꺼번에 모아서 보여주고 있다.

현 상황은 자본주의가 무질서와 사회적 붕괴라는 그 마지막 시기에 진입했다는 분석에 대해서 모순적으로 간주된 많은 현상들의 중요성을 또한 일소해버렸다.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우리의 분석이 ‘의문시’되거나 단순히 무시되어야 하는 증거로 통했었다. 특히, 몇 년 전 중국 경제의 놀라운 성장률은, 우리를 비판하는 이들에 따르자면, 해체기 심지어는 쇠퇴기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반증처럼 보였다. 이러한 관찰자들은 실제로는 중국 산업 성장이 방출하는 ‘현대성의 향기’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오늘날, 코로나 팬데믹의 결과의 하나로서, 중국 경제는 정체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저개발과 부패라는 덜 유쾌한 냄새를 방출하는 만성적인 후진성을 드러냈다.

    ICC가 갖는 1989년부터의 전망은, 일시적인 유행을 따르거나 낡은 공식들에 얽매이는 대신에, 저변에 깔린 국제적이고 장기적인 경향들의  맑스주의적 분석에 기반해 도출해낸 전망은, 세계 자본주의가 내부적 해체의 최종 시기에 들어섰다는 것이고, 이 전망은 충격적으로 확인되었다. 현재의 건강 대재앙은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계급이 그 체계에 대해 점점 더 통제력을 상실하고 있고 인류 사회 전체의 전망에 대한 지배력을 점점 더 상실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자본주의가 그 생산 양식의 역사적 쇠퇴의 효과들을 억제하고 그 방향을 틀기 위해 지금까지 발전시킨 수단들에 대한 자본주의의 지배력 상실이 심각해짐은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게다가 현 상황은 얼마나 자본주의 계급이 증대하는 사회적 카오스를 방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는 통제할 수 있었던 바로 그 해체를 점점 더 악화시키고 있는지 그 정도를 노출한다.

팬데믹, 쇠퇴, 해체

    코로나 팬데믹이 왜  자본주의 해체기에 상징적인지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 그것이 이전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방식으로 발생하지 않을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팬데믹은 물론 이전의 사회 유형들에서도 알려져 있고, 고대 노예 사회 말기의 저스틴역병이나 봉건제 말렵의 흑사병과 같이 이전 계급 사회들의 쇠락에 파괴적이고 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봉건제의 쇠퇴에는 해체기가 없었는데, 이는 새로운 생산양식 (자본주의)이 이미 낡은 양식 내부에서 그것과 나란히 형태를 띠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치명적인 전염병의 참상은 심지어 부르조아지의 초기 발전을 가속했다.

    역사상 노동력의 착취의 가장 동적인 체계인 자본주의의 쇠퇴는 필수적으로 사회 전체를 포괄하며 어떤 새로운 생산 양식도 그 내부에서 출현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이것이 바로, 세계대전이나 프롤레타리아적인 대안으로의 경로가 없음에도, ICC가 해체에 대한 테제들에서 표현했듯이[4],  자본주의가 ‘극-쇠퇴(ultra-decadence)’의 시기에 진입하게 된 이유이다. 그래서, 현재의 팬데믹은 현존 사회 내부에서 인류의 생산력의 그 어떤 재생을 초래하지 않을 것이고, 대신에 우리는 이 팬데믹을 통해서, 세계 자본주의 전체가 전복되지 않는 한 인류 사회 전체가 붕괴할 수 밖에 없는 불가피성을 희미하게 나마 감지할 수 밖에 없다. 전염병의 분출을 이해하고 방지하고 억제할 과학적 기술적 사회적 수단들을 개발한 (하지만 그것들을 사용할 수 없는) 자본주의가, 코로나에 대한 대응으로 격리라는 중세적인 방법에 의지하는 것은, 썩어 가는 그리고 스스로 만들어낸 생산력을 이용하는데 점점 더 무능해지는 한 사회의 난국을 증언한다.

    자본주의의 일생에서 전염병들의 사회적 영향의 역사는 한 체계의 쇠퇴와 1914년에 시작된 그 쇠퇴기 내부에서 해체라는 특정 시기 사이의 구분에 대한 더 나은 통찰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자본주의의 상승과 그 쇠퇴 대부분의 역사는 사실상 특히 선진국들에서 전염 질환들에 대한 의학과 공중 보건의 증대된 지배력을 보여 준다.  예를 들어 천연두와 소아마비의 정복 그리고 말라리아의 퇴치와 같이 공중위생 및 위생 시설의 증진은 이러한 진보의 증거이다. 결국, 2차 대전 후에는 비전염성 질환들이 자본주의의 주요 국가들에서 조기 사망의 주된 이유가 되었다. 우리는 역학의 역량에 있어서 이러한 개선이 부르조아지가 주장하듯이 인류애적인 관심에서 발생했다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결정적인 목표는 자본주의의 영구적인 위기로 인해 요구되는 착취의 강화를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국주의 블록들의 군사적인 이해에 적합하도록 국민들을 준비하고 극도로 동원하기 위해 안정적인 환경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부터  전염 질환들에 대한 긍정적인 경향은 역전되기 시작했다. HIV, 치카, 에볼라, 사스, 메르스, 니파, N5N1, 뎅기열 등등 과 같은 새로운, 또는 진화하는 병원체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특히 동물원성의 바이러스의 발달은 자본주의의 주변 지역들에서 도시의 성장(이러한 성장의  40%는 거대한 빈민가들의  증가가 차지한다), 벌목, 기후변화와 연계되어 있다. 역학이 이러한 바이러스들을 이해하고 추적할 수 있게 된 반면, 국가가 그 대책을 구현하는 것은 그러한 위협들과 보조를 맞추는데 실패했다. 코로나19에 대한 부르조아지의 불충분하고 무질서적인 대응은 전염 질환들의 소생과 공중보건에 대한 자본주의 국가의 점증하는 태만, 그래서 최소한의 수준에서 사회적 보호의 중요성에 대한 무관심을 확인해 준다. 부르조아 국가에 의한 증가하는 사회적 무능력의 이러한 발전은 수 십년간 이뤄진, 특히 건강 서비스의 ‘사회적 임금’에 대한 삭감과 관련된다. 그러나 공중 보건에 대한 증가하는 무관심은, 지배 계급 대부분에 의해 무책임하고 단기적인 대응들이 선호되는 해체시기라는 틀 안에서만 완전히 설명될 수 있다.

    지난 수 십 년에 걸친 전염 질환 통제의 진행에서 발생한 이러한 역전으로 끌어낼 수 있는 결론들은 피할 길이 없다: 그것은 쇠퇴하는 자본주의가 그 최종 시기인 해체시기로 이동했음을 나타낸다.

    물론, 자본주의의 영구적인 경제위기의 악화가 이러한 이동의 근본 원인인데, 이러한 위기는 그 쇠퇴의 모든 시기들에 공통적이다. 그러나 바로 이 위기의 영향들에 대한 관리, 또는 오히려 증가하는 부실 관리가 변했고, 그리고 해체라는 이 특정 시기의 특징들인 현재 및 미래의 재앙들의 핵심 구성 요소이다.

    이러한 변형을 포함하는데 실패한 설명들, 예를 들어 국제공산주의경향(International Communist Tendency)의 경우처럼, 그런 설명들은 팬데믹은 이윤 동기 때문이라는 진부한 문구만 남긴다. 그들에게는 특정한 상황들, 재앙의 시기와 규모는 일종의 미궁으로 남는다.

    팬데믹에 대한 부르조아지의 반응도, 마치 제국주의 열강들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제국주의적 군사적 목적으로 ‘무기화’하고 대량 격리를 이러한 측면에서 국민들의 동원인  것 마냥 냉전기의 틀로 회기함으로써 설명되지 않는다. 이러한 설명은 주요 제국주의 열강들은 더 이상 제국주의 블록으로 조직되어 있지 않고 그들의 전쟁 목적들에 따라 자유롭게 국민을 동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이점은 해체기의 근본 원인인,  두 주요 계급들의 사이에 놓인 난국에 중심적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제국주의 블록의 군사적 야망에 도움이 되는 것은 바이러스가 아니라 백신이다[5].  부르조아지는 이러한 측면에서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부터 교훈을 배웠다. 몇몇 미공군모함들과 프랑스 공군모함 하나가 코로나19에 의해서 작동정지된 것에서 보여지듯이, 통제되지 않은 감염증은 군부에게는 엄청난 부담이다. 대조적으로, 치명적인 병원체를 엄격한 통제 하에 유지하는 것은 항상 모든 제국주의 열강의 생물학적 전쟁력의 조건이었다.

    이것은, 제국주의 열강들이 이 건강 위기를 그들의 경쟁자들을 희생해서 자신들의 이해를 증진시키는데 이용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은, 미국이 남긴 세계제국주의 지도력의 진공 상태가 증가되고 있고, 중국을 포함해서 그 어느 다른 열강도 이 역할을 맡을 수 없거나 대안적인 견인축을 형성할 수 없음을 전반적으로 보여주었다. 제국주의적 충돌의 수준에서 무질서는 코로나 대재앙에 의해 확인되었다.

    오늘날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한 대량 격리에는 확실히, 일상생활에의 군병력의 더 많은 투입과 국가들에 의한 전쟁 같은 권고문들의 사용이 병행된다. 그러나 국민의 이러한 제한에는, 노동자 계급이 비록 조용하지만 패배당하지 않고 남아있는 시기에 사회적 동요라는 위협에 대한 국가의 두려움이 상당한 정도는 그 동기로 작용한다.

    자본주의 쇠퇴의 모든 시기들의 공통적인 특성인 근본적인 자기파괴경향은 해체기에 그 지배적 형식이  세계대전이 아니라 세계 무질서로 바꿔었다. 그러한 세계 무질서는 사회와 인류 전체에 대한 자본주의의 위협을 증가시킬 뿐이다. 

팬데믹과 국가

    이 팬데믹을 성격짓는, 부르조아지의 통제력 상실은 국가라는 도구에 의해 매개된다. 이 재난이 해체시기 국가 자본주의에 관해 폭로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상부구조들의 전복’에 관한 ICC의 팜플렛 자본주의의 쇠퇴에서의 언급을, 즉 사회 안에서 국가의 역할의 증대는 모든 생산양식들에서 쇠퇴의 한 특징이라는 점을 환기할 것이다. 국가 자본주의의 발전은 이러한 일반적 역사적 현상의 극단적 표현이다.

    프랑스 좌파공산주의(GCF)[6]가 1952년 지적했듯이, 국가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모순들의 효과들을 지연할 수는 있을 지 언정 그러한 모순들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그것들의 한 표현이다. 그래서 붕괴하는 사회를 통합하는 국가의 능력은 그것이 아무리 간섭적으로 될 지 언정, 시간이 지날 수록 약화될 수 밖에 없고 결국 그것이 억제하려 애쓰고 있는 바로 그 모순들을 악화시키는 요소가 된다. 자본주의의 해체는 지배 계급에 의한 통제력 손실이 증가하고 그것의 국가가, 코로나가 극적으로 보여주듯이, 사회적 진화의 지배적 경향으로 되는 시기이다.  

    그런데, 이러한 통제 상실이 국가의 모든 활동 영역들에서 균일하게 전개될 거라고, 또는 그것이 모든 나라들을 동등하게 강타하거나 나 단지 단기적인 현상에 거칠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국제적인 차원에서

    동구권의 몰락과 그 결과 서구권의 해체와 더불어, 나토와 같은 군사 기구들은,  발칸 전쟁과 골프 전의 경험이 보여 주었듯이, 단결력을 잃게 되었다. 군사적 전략적 수준에서 혼란은 모든 국제기구들이 상이한 속도로 그 위력을 상실하는 것과 병행되었다. 그러한 기구들, 예를 들어 사회적 차원에서 국제보건기구(WHO)와 유네스코, 경제적 차원에서 EU(예전의 형태로서),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국제무역기구(WTO)등은  2차 대전이후 미국 제국주의의 주도 하에 세워졌었다. 이들은 미국의 지도력 하에 서구권의 안정성과 ‘부드러운 힘(soft power)’을 유지하도록 고안되었다.

    이러한 국제 조직들의 해체와 약화 과정은 2016년 미국 대통령 트럼프의 선출로 특히 강화되었다.

    팬데믹 동안 WHO의 상대적인 무기력은 이러한 측면에서 웅변적이고, 각 나라가 각자 자신만의 게임을 무질서하게 진행해서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치명적인 결과들을 낳게 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마스크 전쟁’과 이제 곧 있을 백신 전쟁, US의 WHO 탈퇴선언, 이 기구를 자신의 이득을 위해 조작하려는 중국의 시도 등에 대해서는 부연 설명이 따로 필요 없을 것이다.

    국제기구들의 무기력과 결과적인 경쟁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각자-나홀로 (every-man-for-himself) 경향은 병원균의 위협을 국제적인 재앙으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국제 경제 차원에서, 무역 전쟁과 지역화 경향의 가속화에도 불구하고, 부르조아지는, 예를 들어 경제 폐쇄 초기인 3월에 전세계적으로 달러의 유동성을 유지하기 위한 연방 준비은행의 행동과 같은 본질적인 대책을 조정할 수 있었다. 독일은, 처음 좀 머뭇거린 후에는 프랑스와 함께 유럽연합 전체에 대한 경제적 구제 패키지를 조정하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 부르조아지가 세계 경제의 주요 부분들의 완전한 파국을 여전히 방지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코로나19에 대한 지연되고 무질서한 반응으로 인해 요구된 폐쇄로 발생한, 경제성장 및 세계무역에 가해진 엄청난 장기적 피해를 피할 수는 없었다. 2008 금융 위기에 대한 G7의 대응과 비교해서 현 상황은 경제위기를 감속하기 위해 행동들을 조정하는 부르조아지의 능력이 장기적으로 소진되어감을 보여준다.

    물론, ‘각자-나홀로(every man for himself)’ 경향은 항상 자본주의의 경쟁적 성질이고 그것의 국가들로의 분할의 한 특징이다. 그러나 오늘날 제국주의 블록 규율과 전망의 부재는 경제적 난국과 쇠락의 시기에 이 경향이 소생하도록 자극했다. 예전에는 특정 분량의 국제적인 협력이 유지되었지만, 코로나19는 그것이 점점 부재함을 보여준다.

국내적 차원에서

    해체에 대한 테제 제 10항에서 우리는 세계 전쟁이라는 전망의 소멸은 국가들 자체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각 국가 내부에서 파벌들 간의 경쟁을 격화시킨다고 지적했다. 코로나19와 관련해서 국제적 차원에서의 혼란과 준비 부재는 각 국가 내부에서, 특히 행정 차원에서 다소 재현되었다:

우리가 강조해야할 자본주의 사회의 해체의 주요 특징의 하나는 정치상황의 진화를 통제하는것이 점점 곤란해지는 것이다.제 9항.

    이것은 스탈린 체제(지배 계급 자체를 정의하는 일당 국가)의 기형적 본질에 의해 심화된 동구권의 몰락에서 주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만성적인 경제위기, 전략적 전망의 손실 그리고 외교 정책상의 대실수, 국민의 혐오 등과 같이,  전체 부르조아지의 ‘행정 위원회’ 안에서의 충돌들의 기본 원인들은 이제 선진 자본주의를 강타하고 있는데, 이점은 그 어느 곳에서보다도 대중추수주의적이거나 대중추수주의의 영향을 받는 정부들, 특히 도널드 트럼프나 보리스 존슨이 이끄는 당들이 권력을 잡은 주요 국가들에서의 현 위기에서 더 분명하게 보여진다. 이러한 주요 국가들에서 충돌들은, 당분간 더 민족주의적 정책을 따르는 다른 국가들에서 불가피하게 반향을 일으킨다.

    이전에 이 두 나라들은 세계 자본주의의 상대적 안정성과 설득력의 상징이었다. 오늘날 그 부르조아지의 한심한 행태는 그들이 이제 불합리와 무질서의 횃불이 되었음을 보여 준다.

    미국 행정부와 영국 정부는 민족주의자들의 호령의 안내를 받으며 코로나 재앙에 대한 대응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지체했으며 심지어 국민들이 이 위험을 경시하도록 부추겼다. 그들의 학계 권위자들의 충고를 그 토대부터 약화시키고 바이러스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동안 경제를 개방하고 있다.

    두 정부들은 코로나 위기의 전야에 팬데믹 테스크포스를 해체했다. 흑인 삶도 소중하다(BLM) 시위들에 대한 대응에서 트럼프가 군사적 규약을 폐기하고 사법부를 허위적으로 조작한 것이나, 존슨이 민간서비스국을 최근에 분열시킨 것 등의 예에서 보여지듯이, 이 두 정부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고의적으로 민주국가의 확립된 절차들을 훼손하고 상이한 국가부서들 사이에 불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각자-나홀로(every man for himself)의 시기에 각 민족 국가들이 제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다른 국가들에 비해 더 현명했던 국가들 마저 점점 더 분열과 통제력 상실에 직면하고 있다.

    해체에 대한 테제에서 언급된, 노쇠한 자본주의는 ‘제 2의 아동기’로 회귀하고 있다는 생각을 대중추수주의는  증명하고 있다. 대중추수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이 체제가 단순히 선동적인 구호들과 분열적인 창발등을 통해서  자본주의적 역동성과 더 작은 관료주의라는 어린시절로 되돌아 갈 수는 것처럼 가장한다. 그러나 실상은 해체기에 놓인 쇠퇴한 자본주의가 모든 임시방편들을 소진해 가고 있다.

    대중추수주의가 프롤레타리아의 재기의 부재로 인해 일시적으로 방향성을 잃은 불만스런 사람들의 인종혐오와 쁘티부르조아적인 환상들에 호소한다면, 대중추수주의의 강령 또는 반대강령은 부르조아지와 그것의 국가 자체의 내부에서 발전했음은 현재의 건강위기로 볼 때 분명하다.

    선진국들 중에서 미국과 영국이 이 팬데믹에서 최대의 사상자 비율을 갖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대다수 선진국들에서 국가의 경제기관들은 대조적으로 안정성을 유지하며 그들의 경제가 자유낙하 상태에 빠지는 것을 방지할 급속한 비상대책들을 펼쳤고 국민에 대한 대량실업의 효과를 지연시켰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참으로, 우리는 중앙은행들의 행동들의 결과의 하나로서,경제에 대한 국가의 역할이 커지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모건스탠리(투자은행)은 G4국가(미국, 일본, 유럽 영국)중앙은행들이 회기 중에 그들의 대차대조표를 다합쳐서 국내총생산(GDP)의 28%확장할 것으로 본다. 2008금융위기 당시 동안에 해당 수자는 7%였다”(출처, 파이넨셜타임즈, 2020년 6월 27일).   

     그런데, 그 근저에 국가 자본주의의 발전 전망은 위기와 자본주의의 해체에 대한 국가의 통제 능력이 점점 약화되고 있다는 징후이다.

    사회생활 전반의 모든 측면으로의 국가 개입의 증가하는 무게는 사회 전반의 점증하는 해체에 대한 해답이 아니다. 

     전통적인 진보당(Liberal)들 또는 그들 중의 중요한 부분들이 대중추수주의가 자행하는 파괴 행위에 대항해 이 나라들 내부에서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 나라들에서 국가 부르조아지의 이 부분은 특히 대중 매체를 통해서 반대의 목소리를 형성하는데, 이러한 반대는 우스꽝스런 대중추수주의적 광대짓과 마찬가지로, 대중추수주의의 판도라 상자를 지금 닫을 수 있는 실제 역량은 없을 지라도 민주적 질서와 합리성으로의 회귀에 대한 희망을 대중들에 제공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나라들에서 부르조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를 결코 잊지 않았고 때가 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그 모든 헌신적인 기관들을 활용할 수 있을 것임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해체의 시기에 경험된 ‘부메랑’효과

    2017년의 해체에 관한 보고서는  60년대 말 경제위기의 출현 후 첫 몇 십 년 동안 부유한 국가들은 그 위기의 효과들을 체제의 말단부로 밀어낸 반면 해체기에는 이 경향이 역전되거나 자본주의의 핵심국가들로 되돌아오는 것 같다는 점을 강조한다. 테러리즘의 확산, 난민과 이주민의 대대적인 유입, 대량 실업, 환경 파괴 및 이제 치명적인 역병들이 유럽과 아메리카의 문제가 된 것에서 그 예를 들 수 있다. 세계 최강의 자본주의국가가 팬데믹으로 가장 고통받는 현 상황은 이러한 경향의 확인이다.

    그 보고서는 또한 선견지명적으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우리는 (해체)자본주의 위기의 진화에 어떤 실제적인 영향도 갖지 않는다고 간주했다. 만약 대중추수주의의가 지금처럼 기승을 부려서 유럽의 몇몇 주요국가들에서 이런 경향이 권력을 잡게 된다면, 해체의 그러한 영향이 발전하게 될 것이다.”

    현재의 재앙의 가장 중요한 측면들 중 하나는 해체가 실제로 파괴적인 방식으로 경제에 재반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경험은 미국과 중국 사이의 지속적인 경제 전쟁 또는 영국 정부가 자살적이고 파괴적인 브렉싯트 경로를 고수하려는 결정 등에서 보여지듯 더 이상의 경제적 혼란을 향한 대중추수주의의 취향을 감소시키지 않았다.

    상부구조의 해체는 그것을 낳은 자본주의적 경제 토대에게 ‘보복’을 하고 있다.

경제가 흔들리면, 그것에 기반한 모든 상부구조가 위기와 해체로 진입한다 …  체계의 귀결로 시작하지만 쇠퇴 과정에서 아주 종종 가속 요인으로 된다.” 자본주의의 쇠퇴(Decadence of Capitalism), 제 1장

2020년 7월 16일


[1]2020년 10월 9일 현재. (이 글은 2020년 7월에 작성되었다, 그리고 수치만 10월 9일에 업데이트되었다 – 역자주)

[2]이렇게 인지되는 문제는 2017년 ICC 제 22차 총회로부터 해체에 관한 보고서 (The Report on Decomposition), International Review 163호에서 언급되었다.

[3] 50여 년간 지속되어 오고 있는 이 장기적 경제위기는 선진국에서 20년 간 지속된 전후 번영기에 뒤이어 1960년대 말에 출현했다. 이 위기의 악화는 몇몇 경기 침체 및 회복들에 의해 잠시 중단되곤 했지만 이러한 중간 시기들은  근본적인 난국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4]International Review 107, 1990

[5]페니실린의 항진균적 성질은 1928년에 발견되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그 약은 미국에 의해 대량생산되었고 2백3십만 투여량 분량이 1944년 6월의 노르망디상륙작전을 위해 준비되었다.

[6]Gauche Communiste de France – ICC의 전신

트럼프와 바이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잘못된 선택

지구와 지구상의 모든 국가를 지배하는 생산체제인 자본주의는 깊은 쇠퇴의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한 세기의 쇠퇴기가 마지막 단계에 도달해 광적인 전쟁의 소용돌이, 경제 불황, 환경 재난 및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지구상 모든 국가는 이 죽어가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공공연한 친(親)자본주의 정부든 가짜 ‘사회주의’ 정부든, 민주적이든 독재의 옷을 걸쳤든, 모든 정부는 자본의 진정한 목표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인간의 필요 충족이라는 단 하나의 생산 목표를 가진 세계 공동체인 우리 종(種)에게 하나뿐인 미래를 희생하면서 이윤을 확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당과 대통령이 정권을 잡느냐를 선택하는 것은 자본주의 문명을 재앙으로 향하는 길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는 잘못된 선택이다. 이는 다른 선거 서커스와 마찬가지로 다가올 미국 대선에도 적용된다.

트럼프는 노동자의 친구가 아니다…

많은 사람에게 트럼프는 코로나-19의 현실과 기후 위기에 대한 부정에서부터 법과 질서라는 이름의 경찰 폭력에 대한 사과, 인종주의자와 극우세력에 대한 구애, 그리고 그의 측근 여성에 대한 역겨운 개인적인 대우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의 썩어가는 모든 것에 대한 공공연한 옹호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저격수 마이클 코헨(전 변호사)의 말에 따른 “거짓말쟁이, 사기꾼, 인종주의자”라는 사실이 자본가계급의 중요한 파벌들이 그를 지지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의 노골적인 국가주의적 경제와 환경 및 보건 서비스 규제 완화가 그들의 이윤을 증가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 선거에서 트럼프는 많은 미국 노동자들에게 ‘미국 우선’ 보호주의가 일자리를 구하고 전통 산업을 부활시킬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위기 이전부터 중국을 포함한 세계 경제는 이미 새로운 불황에 빠져들고 있었고, 대유행의 경제적 결과는 훨씬 더 심각할 것이다. 보호주의는 어떤 경제도 세계 시장의 무자비한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환상이며, 트럼프의 미국 노동자에 대한 약속은 2019년 불황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공허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하지만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트럼프에 따르면 조 바이든은 버니 샌더스와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Alexandria Ocasio-Cortez), 일한 오마르(Ilhan Omar) 등 주변의 '스쿼드(팀)'가 체현한 '급진 좌파'의 손에 있는 꼭두각시일 뿐이기 때문에 미국을 '사회주의 유토피아'로 만들 것이라고 위협하고 있다.(1)

사실 바이든은 트럼프와 공통점이 많은 오바마와 클린턴의 주류 민주당 정책의 지속성을 대변하기 때문에 민주당 후보로 선택되었다: 중국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한 "동양으로 회귀"는 오바마 정권하에서 시작되었는데, 오바마는 ‘불법’ 이민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접근법 때문에 ‘최고의 추방자’로도 알려져 있었다. 물론 민주당은 트럼프와 차이가 있다: 그들은 푸틴 러시아에 대한 트럼프의 아첨을 의심하는 군사 및 안보 기득권 세력과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트럼프의 무분별한 국제조약과 동맹 파기로 미국의 외교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 때문에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미 제국주의를 위한 최선의 전략에 대한 차이점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민주주의적 신비화가 사회질서 유지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기에 트럼프가 ‘민주주의’ 규범을 경시하는 것에 반대한다.

민주당은 미국 자본주의의 양자택일 정당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몇 년간 「민주사회주의동맹」과 같은 내부 압력 단체와 그린뉴딜,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BLM), 그리고 공식 정당 안팎에서 다양한 형태의 정체성 정치 옹호자들이 성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급진 좌파”는 위기와 전쟁으로 황폐해진 세계에서 자유기업 우파와 광신도를 포함한 지배계급의 모든 파벌이 고수해야 하는 국가자본주의보다 좌파적 버전만을 제공한다. 좌파의 어떤 정책도 자본주의의 본질이자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의 근원인 민족국가, 이윤을 위한 생산, 임금 체제의 존재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노동계급이 미래의 열쇠를 쥐고 있다

자본주의 정치인이나 정당은 체제의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을 제시할 수 없다. 세계의 미래는 우리가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생산하는 계급에 달려있으며, 그들은 모든 나라에서 자본에 의해 착취당하고, 모든 곳에서 똑같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진정한 사회주의, 또는 맑스가 그것을 코뮤니즘이라고 부르기를 선호했던 것처럼, 인류는 마침내 국가, 국경, 그리고 임금 노예제도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이것은 아주 먼 전망으로 보일런지도 모른다. 일상생활 속에서 노동계급은 수천 가지 방식으로 분열된다: 일자리 경쟁, 국경, 성별, 인종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예제도와 인종주의의 해로운 유산을 가진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 말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집단으로 일하고 집단으로 자신을 방어해야 하는 연합의 계급이기도 하다. 그들이 고개를 들었을 때 패배를 피하려면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계급의 분열을 극복하는 경향이 있다. 인종주의와 민족주의는 노동자를 분열시키는 강력한 도구지만, 계급투쟁이 전진하려면 극복할 수 있고, 극복해야 한다. 코로나19 대유행이 처음 발생했을 때, 미국 노동자들은 자동차공장, 병원, 슈퍼마켓 또는 창고에서 감염 보호 대책 없이 일하도록 강요당하는 것에 반발했다: 그리고 ‘백인’, ‘흑인’, ‘라틴계’ 또는 다른 모든 노동자가 피켓 라인에서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러한 단결의 순간은 백인 우월주의와 자본주의의 썩어가는 몸에서 흘러나오는 파시스트 운동과 같은 인종 분열의 ‘고전적’ 표현과 상반된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인종을 계급보다 우선시하고 민주당에 의해, 맥도날드나 애플과 같은 대기업의 이익에 의해, 노동조합에 의해 - 한마디로 국가 체제에 의해 완전히 도구화하여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의 동원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인종에 기반을 둔 투쟁은 노동계급의 통일로 이어질 수 없다.: 지배계급 일부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는 사회로서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현실을 감추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기꺼이 무릎을 꿇고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을 축복한다.

미국 노동계급은 선거를 앞두고 엄청난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직면해 있는데, 정치인과 미디어 슈퍼스타들은 진정한 권력이 투표소가 아닌 작업장과 거리에 있는 게 아니라 유일한 희망은 투표할 때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최근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시위에서 보았듯이, 흑인과 백인의 무장 '민병대' 사이 폭력적인 충돌에 휘말릴 위험에도 직면해 있다. 미국 사회는 베트남 전쟁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양극화되고 있으며, 특히 트럼프가 이미 암시한 대로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 전체 부르주아 지형에서 ‘내전’ 위험은 선거 이후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 이는 노동자들이 좌우 사이렌 소리를 거부하고, 민주적 슈퍼마켓(부르주아 투표)의 잘못된 선택을 거부하고, 자신의 계급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단결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할 뿐이다.

2020년 9월 26일
Amos

[1] 참조 : “트럼프 대 스쿼드(팀)” : 미국 정치기구의 악화 ; 세계혁명 384호, 2019년 가을

합의 또는 결렬 :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사기다

모든 정치 영역에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키라고 강요당한다.

노딜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의 '반란연합'은 보리스 존슨(영국 총리, 보수당 대표)의 의회 정회 ‘쿠데타’를 규탄했다. 그들은 9월 10일부터 10월 14일까지 5주간 의회 정회에 반대하는 행진과 집회를 조직하고, 보리스가 의회 관습과 절차를 존중하도록 강제하기 위해 힘을 합쳤다.

나이절 패러지(브렉시트당 대표)에서 스파이크(Spiked, 영국 온라인 잡지)에 이르기까지 브렉시트 강경 찬성파들은, 오히려 반대파가 2016년 6월 국민투표에서 확인된 '국민의 의지'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모욕한다며 '잔류불평자들(Remoaners)'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EU 관료주의의 간섭에 맞선 영국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주의’와 ‘국민’이라는 바로 그 용어를 의미 없게 만드는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착취계급은 막대한 부를 손에 쥐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와 정치 권력은 언론, TV 그리고 주류 소셜 미디어와 같은 이데올로기 지배 수단과 마찬가지로 착취계급의 특권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 사회에서 ‘국민’은 이러한 계급 적대를 숨기는 데 사용되는 용어이고, ‘민주주의’는 지배계급의 권력독점을 감추는 역할을 한다.

반면, 피착취계급은 일반적으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자신들의 실질 요구를 관철하기 힘들다. 그동안 착취에 맞서 피착취계급을 조직화하려는 노력은 무력으로 진압되거나 회유와 협박으로 길들어 결국 국가에 편입되었다. 그것은 지난 100년 이상 동안 노동조합과 ‘노동자’ 정당(노동당 등)의 역사이기도 하다.

물론, 자본주의 초기와는 달리 노동자들은 대통령/의회/지방선거와 국민투표에서 자유롭게 투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극 권장 받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계급이 아닌 고립된 개인들의 집합으로 원자화된 ‘시민’으로서만 유권자 권리를 누릴 수 있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시민으로서 부르주아 선거에서 투표하는 바로 그 행위는 계급으로서 노동자계급의 부재(不在)에 따른 무력감의 표현이다.

또한, 선거와 국민투표에서의 이슈, 의회에서의 논쟁 주제는 우리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독점 아래 살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브렉시트 찬성 또는 반대? 이 토론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영국’이라는 국가 이익이 우리 이익이라고 가정해야 한다. 그러나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으며, 국가는 국민과 마찬가지로 타협할 수 없는 계급 적대를 감추는 거짓 공동체일 뿐이다. 게다가 브렉시트 분쟁에서 어떠한 선택도 세계 경제 위기가 초래한 생활 수준 하락에서 노동자들을 보호하지 못한다. 브렉시트가 진행된다면, 10월 31일 이전에 EU 거주자들이 그들의 ‘정착지위(settled status)’를 정리해야 한다는 최근의 규칙처럼 불법이든 합법이든 이주노동자들을 향한 야만스러운 공격이 벌어질 것이다. 그것은 미래의 ‘윈드러쉬(Windrush) 스캔들’(주1)에 대한 보증과 같다. 그러나 이른바 노동자 권리를 옹호한다는 EU는, 이미 노동자계급의 다른 부분에 엄격한 긴축을 강요할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리스의 경우가 여기서 가장 웅변적이다(그리고 EU가 요구하는 긴축을 실행한 것은 ‘좌파’ 시리자 정부였다).

민주주의라는 종교

오늘날 민주주의와 국가는 칼 맑스가 처음으로 ‘인민의 아편’이라는 용어를 만든 시대의 종교처럼 되었다. 민주주의와 국가 이익은 부르주아 사회의 ‘영적(靈的) 향기’이며, 이 세계의 도덕적 재가(載可)이며, 이 세계의 장엄한 보충이요, 이 세계의 일반적 위안 근거이자 정당화 근거이다.”(주2) 다시 말해, 이 사회의 궁극적인 실체인 노동과 전쟁에서 요구하는 모든 희생에 대한 정당성을 민주주의와 국가를 가정(假定)하지 않고서는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 ‘향기’는 이제 자본주의 사회 자체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의회도 심하게 부패했기 때문에 매우 나쁜 악취가 되었다. 맑스와 엥겔스 시대, 즉 자본주의 상승기에는 노동자정당의 부르주아 의회 참가가 적합한 활동이었다. 왜냐하면, 의회는 지배계급 내부의 진보와 반동이 실제로 대립하는 장이었고, 노동자들을 대신하여 지속적인 향상을 위해 싸울 조건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노동자 대표의 부패 위험성을 상시로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단지 부르주아 선거에서 노동자정당에 표를 모으면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의회 백치증’의 주요 수단이 되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쇠퇴기에, 지배계급 모든 분파는 똑같이 반동적이며, 생활 수준의 지속적인 향상의 여지는 전혀 없다. 그리고 전체로서의 전체주의 국가의 성장에 직면하여 의회 절차의 깊은 무기력은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 특히 현재 브렉시트 판토마임에서는 더욱 그렇다.

의회의 막다른 골목과 포퓰리즘 부상은, ‘엘리트’를 향한 가짜 비판과 함께, 많은 사람에게, 일을 해내는 사람, 즉 ‘독재자’의 통치 방식인 ‘비자유 민주주의’를 갖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자계급에게 여전히 또 다른 잘못된 선택이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대안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운동은 다른 방법을 보여준다. 1871년 파리 코뮨은 이미 의회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서, “3년에서 6년에 한 번 지배계급의 어떤 구성원이 의회에서 국민을 잘못 대변하는지를 결정하는 대신(주3) 노동자 집단은 별도 집회에서 스스로를 조직하기 시작했는데, 그 집회(총회)의 대표들은 선출되고 위임받았을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소환되었다. 1905년과 1917년 러시아에서 발생한 소비에트나 노동자평의회는 공장과 다른 작업장의 노동자들 집회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이러한 원칙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켜서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윤곽을 1871년 보다 더욱 뚜렷하게 만들었다.

 

1917~21년 전 세계 혁명운동 물결 속에서 노동자평의회는 의회(그리고 노동조합) 기구에 직접 반대하여 생겨났다. 그리고 부르주아지는 이것을 매우 잘 이해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세계혁명의 운명이 결정될 독일에서, 우선 평의회를 합병하고, 평의회를 의회와 지방정부의 무력한 부속물로 만든 다음, 1919년 베를린에서처럼 평의회의 실질 권력을 회복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격렬하게 분쇄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혁명, 피착취계급 해방에 치명적인 적(敵)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목표는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인민’ 아니 오히려 통일된 인류를 이야기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진정한 인간 공동체에서는 그리스인들이 ‘크라토스(kratos)’라고 부르는 힘, 지배, 통치가 어떤 종류의 국가나 정치 권력에도 필요치 않을 것이다.

Amos

2019년 9월 7일

국제코뮤니스트흐름

<주>

1. 윈드러쉬 스캔들이란, 2차 대전 이후 국가 재건을 위한 영국 정부의 장려로 대거 이주해 온 카리브해 이민자들의 후손, '윈드러쉬 세대'를 불법 이주자로 분류하는 행정 착오가 발생, 이들이 각종 복지 혜택에서 배제되고 추방 위기에까지 몰려 논란이 된 사건이다. 이로 인해 2018년 4월 앰버 러드 영국 내무장관이 사임했다.

2. 맑스, 「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 서설」, 1843

3. 맑스, 「프랑스 내전」, 1871

Source : ICC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731/deal-or-no-deal-capitalist-democracy-frau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