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Conline - 2020

신종코로나폐렴 펜데믹(Covid-19-Pandemic): 자본주의 몰락의 종결기의 증상

코로나-19전염병에 관한 우리의 첫 번째 기사의 끝머리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 새로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스(SARS)의 경우처럼, 새로운 펜데믹으로 되든, 아니면 계절성 호흡기질환을 유발하는 바이러스로 남든, 이 새로운 질병은 자본주의가 인류와 지구 상의 생명에 위협이 되어버렸음을 나타내는 또 다른 경고의 하나이다. 질병들로부터 우리들을 지킬 수 있는 의학을 포함한 생산력의 엄청난 능력들은 전 세계 인구의 대부분이 불모지와 같은 도시들에 살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새로운 전염병들의 발생 위험들에 노출될 수 밖에 없는 이윤 추구와 충돌한다.“

오늘날 이 판데믹은 전세계에서 중요한 문제가 되었고 심각한 결과들을 갖는 제대로 된 경제적“쓰나미”를 유발했다. 제한된 지면 때문에 경제에 미치는 영향들의 이러한 차원을 자세히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 부분은 앞으로 다른 기사에서 다뤄질 것이다. 현 기사에서 우리는 이 전염병이 어떻게 자본주의의 질병을 폭로하는가의 분석에 집중할 것이다.

신종코로나폐렴( Covid-19)는 자본주의 붕괴의 한 표현임이 확인되다

오늘 (2020년 3월 13일) 가장 암울한 징조가 확인 되었고, 세계보건기구(WHO)는 그것이 이미 모든 대륙의 117개 국가에 확산된 전세계적인 유행병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공식적인 통계에 의하면 감염자수가 12만명 이상이고, 팬데믹로 불리게 된 이번 첫 주에 사망자 수가 4천명이 넘었다. 중국에서 “문제”로 시작된 것이 오늘날 지구 상에서 주요 자본주의 열강들(일본, 미국, 서유럽 등)에서 사회적 위기가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만도 사망자 수가 2002-2003년에 SARS-전염병으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발생한 사망자 수를 넘어섰다. 그리고 한 달 전 “독재적인” 중국 당국이 국민들의 통제를 위해 시행한 가혹한 대책들, 예를 들어 수백만의 격리1 ,그리고 질병 확산방지를 위한 투쟁에“우선적”이지 않은 모든 이들을 병원치료로부터 배제하는 것과 같은 진정 “사회다윈주의(social darwinism)”의 전형적인 정책들은 이제 모든 대륙 모든 해당국들의 많은 주요 도시들에서 현안이 되었다.

부르주아 “언론 매체”는 일종의 역병으로 새로운 “자연”-재앙으로 설명하려고 자료들과 추천들과 “해명들”로 우리들에게 지속적이고 대대적으로 폭탄 세례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재앙 대해 “자연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자연과 이 자연의 일부인 인류에 대한 이미 늙고 낡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질식할 것 같은 독재의 결과이다.

혁명가들은 질병 과정에 대한 역학 연구나 예후를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우리의 과제는 물질적인 토대 위해서 이러한 치명적인 결과들의 출현을 가능케 하고 불가피하게 만드는 사회적 조건들을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주의 제체의 본질이 인간적인 필요보다 착취와 이윤과 축적을 우위에 내세우는 것임을 명확히 했다. 그리고 도 다른 자본주의는 불가능함을 명확히 했다. 또한, 역사상의 특정 시기에 ( 자연이 인간에게 부과한 고난을 제한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자연을 지배한 과학의) 생산력의 거대한 진보를 가능하게 했던 바로 그 자본주의 생산 관계들이 오늘날 생산력의 발전에 장해물로 되어버렸음을 규명했다. 우리는 또한 혁명적 해결 없이 자본주의 쇠퇴의 이 시기가 몇 십년간 연장됨으로써 어떻게 하나의 새로운 시기, 즉 사회적인 해체 2(social decomposition)의 시기로의 진입이 초래되었는지를 설명했다. 이 새로운 시기에 그 모든 파괴적인 경향들은 더 강력하게 집중되고, 혼돈과 야만 그리고, 사회 결속을 최소한 보장하는 그 사회 구조의 계속적인 파괴가 배가되면서 지구 상의 생명의 생존 자체를 위협한다.

이것은 과거 속에 살고 있는 몇몇 맑스주의자의 허상들에 불과한 것인가? 분명 그렇지 않다. 현재의 코로나-19유행전염병에 대해 더 엄격하게 학문적으로 이야기하는 학자들은 이런 종류의 전염병의 확산은 무엇보다도, 생존을 위해 인간 거주지로 근접하는 동물에 의해 더 큰 규모의 감염(동물원성)을 초래하는 가속된 환경 파괴에 그 근원이 있고, 그와 동시에 수 백 만명이 거대 도시들에 거주하는 인구 과밀로 인해 아찔하게 상승하는 감염 곡선이 초래된다고 주장한다. 코로나-19에 대한 이전 기사3에서 이미 우리가 설명했듯이, 사실 중국에서 일부 의사들이 이미 2019년 12월부터 사스-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한 새로운 전염병에 대해 경고하려 시도했었지만, 중국의 자본이 보여 주길 원했던 지도적 세계 열강의 이미지를 위협했기 때문에 그들은 국가에 의해 직접 검열과 억압을 당했다.

또한, 자본주의 특징들 중의 하나인, 점점 더 심해지는 여러 나라들 사이 대책들의 조정 부족을 이 전염병 확산의 주요 동력의 하나로 파악하는 것이 ICC가 처음인 것도 아니다. 한편, 이러한 조정 부족은 자본주의 특징들 중의 하나이긴 하지만, 체제 해체의 시기에 놓인 국가와 자본가들의 경향성으로서 모든 사회 관계들에 침투하게 되는 “제 각각”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로의 후퇴”가 진전됨으로써 더욱 더 심해진다.

우리가 이 질병의 위험이 그 바이러스 자체 보다는 수 십 년 간 전세계적으로 건강 보건 체계가 심각하게 악화된 상황에서 이 유행성 전염병이 출현한 사실에 있다는 점을 지적할 때,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한 것도 아니다. 실상, 상이한 국가들의 정책은 유행성 전염병의 영향이 시간적으로 연장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하게 될 지라도 새로운 발병케이스들의 출현 방지를 위해서, 점점 더 희소해지고 더 이상 제대로 기능하지도 않는 이러한 구조물들의 “관리”를 지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수 십 년 동안의 인간의 노동으로 축적된 지식과 기술 등등 자원의 상태가 이렇게 무책임하게 악화된 것은 해체에 처한 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에 특징적인, 전망의 부재를 그리고 인류의 미래에 대한 관심의 전적인 부재를 명백하게 드러내면서 문제 해결의 새로운 실마리가 필요함을 나타내지 않는가?

21세기의 한가운데에서 세계 최강국들이 억제할 수 없는 전염병이 출현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물론, 인류의 역사상에 극히 치명적인 또 다른 전염병들이 있었다. 오늘날 부르조아 “언론”에서 천연두, 홍역, 콜레라 또는 흑사병이 어떻게 수백만의 사망자들을 유발했는지에 대해 보고서들이나 보충 글들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사망예들의 원인이 근본적으로, 물질적인 조건의 측면 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지식의 측면에서도 근본적으로 인류의 나쁜 생활조건들이었다고 설명하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자본주의는 바로 이러한 물질적 결핍 단계를 극복하고 생산력의 발전을 통해서 풍요의 토대를 놓을 역사적 가능성을 제공하고 또 필요로 한다. 이러한 풍요는 하나의 코뮤니스트사회 안에서 인류를 진정으로 단합시키고 해방시킬 수 있다. 최대의 자본주의적 팽창이 있었던 19세기를 살펴보면, 어떻게 건강이, 그리고 사망사례로서가 아니라 질병이 인식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연구에서 뿐만 아니라 상이한 연구자들 사이의 소통에서도 진보가 이뤄졌는지, 어떻게 의학에서 과학적인 접근으로의 진정한 변화가 있었는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공중위생의 개선을 위한 대책들로부터 예방 백신의 개발과 투입에 이르기까지, 의학적인 전문가들의 교육에서 병원 설립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일상적인 삶에서 활용되었다. 인구 증가(10억에서 20억으로) 그리고 특히 기대 수명 증가(19세기초 30~40세에서 1900년 50~65세)의 주요 원인은 과학과 위생에서의 이러한 진보였다. 하지만 이 어떤 것도, 민중의 필요를 배려한 지배계급의 이타심의 결과가 아니었다. 맑스가 말했듯이 “자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구멍들로부터 피와 흙탕물을 뚝뚝 흘리면서” 세상에 나왔다. 그리나 이러한 공포 속에서 자본의 목표는 노동력의 최대 수익성을 달성하고, 그리고 임금 노예들이 새로운 생산 공정들을 몇 십 년간 습득하면서 획득한 지식의 최대 수익성을 달성하는 것, 상품 공급과 화물 운송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것 등등이다. 이 때문에 착취자 계급은 직원들의 활동 수명을 가능한 한 저렴하게 연장하고,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재생산을 확보하며 피착취 계급의 생산성 증가를 통해 그 상대적인 잉여가치를 높이려 노력한다.

이러한 상황은 자본주의의 상승기에서 그 쇠퇴기로 역사시기가 변함으로써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쇠퇴는 코뮤니스트인터네셔널 이래 혁명가들이 제 1차 세계대전4에서 확인했다. 인류 사상 최대로 치명적인 전염병들 중의 하나인, 1918-19년의 소위 “스페인독감”이 1918년에 출현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전염병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병원체의 독성 자체보다 오히려 훨씬 더, 자본주의 쇠퇴기 제국주의 전쟁에 특징적인 (충돌의 세계적 차원, 주요 국가들의 민간인들에 끼친 전쟁의 영향들 등등) 사회적 조건들이 1차 세계대전 참호전의 사망자 수의 두 배에 가까운 5천만명의 사상자를 낸 그 재난의 정도를 설명한다는 점이다.

이 전쟁과 이 공포는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두 번째로 그리고 더 끔찍한 에피소드를 접하게 된다. 독가스의 사용과 같은 첫 번째 제국주의 전쟁의 잔학 행위는 두 세계 대전 사이의 기간에 줄어들었지만 다시 2차 세계대전에서 생물학적 무기의 투입(예를 들어 안트락스는 영국에 의해 실험되었다)까지 독일과 일본에 의한 인체 실험들,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계적인 파괴 기계들 그리고 최종적으로 전쟁 말의 미국에 의한 원자탄의 투하 등 야만은 날뛰게 되었다. 인간 생활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 없지 않았으나 이것 만으로 자본주의 군국주의의 완전한 파괴적인 잠재력이 전개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뒤이은 “평화”? 자본주의 열강들이 1948년에 설립된 소위 “복지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의 하나로 여겨지는 영국의 NHS(National Health Service:국민건강관리국)를 모범으로 삼아서 보건 체계를 세운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보건 체계의 목적은 “보편적인”건강 관리를 보장하는 것, 무엇보다도 스페인 독감과 같은 전염병을 예방하는 것이었다. 그 인도주의적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에게 진보이자 이득이 되었던가? 확실히 말해서 그렇지 않다. 이러한 보건 체계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전쟁에서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사망한 뒤 ‘부족해진’ 상품인)노동력의 수리를 최소한의 비용으로 보장하는 것 그리고 재건설 동안 전체 생산 공정을 확보하는 것에 있었다. 이는 투입된 “구제책”이 새로운 고통의 원천이 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감염을 통제하기 위해 처방되는 항생제요법은 자본주의의 생산성의 요구를 고려해서 노동할 수 없는 시간의 단축에 오용됨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점은 그 감염에 대항해 싸울 치료적인 무기들을 결국 축소시키는 소위“슈퍼버그”, 세균의 내성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그것은 또한, 자본주의의 식량 기술이 빈곤층의 비만을 야기할 정도까지의 사용되는 것은 노동 계급과 사회극빈층의 식습관의 악화, 즉, 피착취 계급의 재생산 비용의 감소로 인한 비만 및 당뇨병과 같은 질병의 증가로 나타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 착취체계가 노동하는 인구에게 부과하는 점증하는 고통을 다소 견딜만 하게 만드려고 분배된 약물이 어떻게 해서 소위 "아편 전염병()"과 같은 현상을 일으켜서 예를 들어,코로나 바이러스가 도착할 때까지 미국 최대의 건강 문제로서 베트남 전쟁의 사상자보다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게 되었는지도 드러난다.

코로나-19 전염병은 인류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문제들과 분리 될 수 없다. 반대로, 그러한 문제들은 21 세기 자본주의 건강관리와 같은 비인간화되고 상업화된 건강 관리의 대상이되는 경우에만 악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질병의 기원은 인류의 지식이나 기술의 부족에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역학에 대한 현재의 지식이면 새로운 전염병의 격리가 가능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질병이 발견 된 지 2 주 만에 연구소는 이미 코로나-19의 원인이 된 바이러스의 서열을 분석 할 수 있었다. 인류가 그것을 극복하는 데 장해물은 착취적인 소수에 도움이되고 그 싸움에서 브레이크 역할을 하는 생산양식에 사회가 종속되어 있다는 점이다. 백신개발 경쟁에서 보여지는 것은 공동 협력 작업이 아니라 실제로는 실험실 간의 상업적 전쟁이라는 점이다. 진정한 인간의 요구는 자본주의 정글의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 시장에 의해 치열한 경쟁법칙에, 시장에 최초로 도달한 자본가가 그 이점을 달성 할 수 있다는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

누가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가? 개인의 "무책임 성"인가 아니면 해체기 사회 체제의 부과인가? 최근 23 차 국제 대회에서 우리는 국제 상황에 대한 결의안을 승인했는데, 그 안에서 우리는 해체에 관해 우리가 썼던 테제를 다시 다루면서 그 내용의 타당성을 재차 주장했다: «1990 5 해체(decomposition)에 관한 논문은 사회의 진화에서 자본주의가 이 마지막 존재 단계에 진입 한 결과 발생하는 일련의 특성들을 강조한다. 22 차 의회가 승인 한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이러한 모든 특성들이 악화되었음을 보여준다:

"3 세계 국가의 기근의 증가";

동일한 "3 세계"가 수억 명의 인간이 하수구의 쥐처럼 생존하는 거대한 응집체로 변형되는 것;"선진"국가의 대도수 중심부에서 동일한 현상의 발달;"우연한" 재난의 수적 증가 (...) 인간, 사회 및 경제에 대한 "자연" 재해의 점점 더 치명적인 효과 ;놀라운 비율로 진행되는 환경악화”(해체에 관한 논문, 7)». 오늘날 우리가 볼 수있는 것은 이러한 표현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에 결정적인 요소가되었으며, 주요한 규모의 사회적 사건의 출현과 발전은 이러한 표현에 기초해서 만 해석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Covid 19 전염병과 관련해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살펴보면, 자본주의의 이 마지막 단계의 특징 인 두 요소의 영향의 중요성을 볼 수 있다. 첫째, 중국이 최근 전염병의 단순히 지리적 원천인 것 만이 아니다. 2002-2003 의 SARS 전염병 또는 코로나-19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실요소를 넘어 세계 자본주의의 분해 단계에서 중국 자본주의 발전의 특성과 현재 상황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해야한다. 제국주의 블록의 변경 (1972) 이후 그리고 1989 년 이러한 블록의 소멸 이후 소위 세계화의 주요 수혜자로서 중국은 미국의 지원을 이용해서 단 몇 년 만에 세계 무역과 경제에서 엄청난 중요성을 가진 제 2 세계 강국이되었다. 하지만 정확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중국의 힘은 말기 자본주의의 모든 낙인을 지니고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노동의 과도한 착취,"군사-민간 융합 "이라는 국가 프로그램의 전쟁 경제의 무제한적 발전에 기반을두고 있으며 치명적인 환경 파괴와 맞물려있다. 다른 한편, "국가 응집력”은 당의 정치 교육을받는 대중에 대한 경찰의 통제에 기반을두고있다. (...) 사실, 중국은 전체 자본주의 체제라는 광범위한 확산된 군사주의적 암의 거대한 전이일 뿐이다. 중국의 군사 생산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으며 그 국방 예산은 20 년 만에 6 배 증가해서 2010 년 이래 세계에서 제 2위의 자리를 차지한다.»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강점의 예가되는 중국의 이러한 발전은 사실상 붕괴 과정의 주요 징후이다. 우리는 기술적인 정복의 "웅대함"이나 새로운 실크로드와 같은 이니셔티브를 통한 전 세계로의 팽창에 눈이 멀어서 실상 얼마나 엄청난 과잉 착취 조건 (과도한 노동일, 비참한 급여 등)과 생활, 영양 및 문화 측면에서 얼마나 후진적이고 점점 고갈되는 환경조건 아래에서 수억 명의 근로자가 생존하는지를 잊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이미 낮은 일인당의료비는 2.3% 감소했다. 예를 들어, 야생 동물 고기를 먹을 때와 같이 식품들이 위생 기준이 거의 없이 또는 직접 그 외부에서 생산된다. 지난 2 년 동안 "아프리카 돼지 독감"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이 중국에서 퍼져서이 동물의 30 %가 도살되고 돼지 고기 가격이 70 % 상승했다. 자본주의 해체의 영향이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두 번째 요소는 다른 국가의 자본들 간의 최소한의 조정 마저도 약화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가 분석 한 것처럼 자본주의가 마지 못해 노력할 수있는 최대의 통일성이 민족 국가(national state)이기 때문에 초 제국주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세계가 제국주의 블록으로 나눠진 단계에서 다양한 국가 구조 사이에서 최소한의 공통 관심사를 관리하려고 시도한, 유네스코에서 세계 보건기구 (WHO)에 이르기까지 모든 구조가 만들어 졌던 사실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본주의 해체가 진행됨에 따라 최소한의 조정을 향한 이러한 경향은 악화되고있다. 위에서 언급 한 제 23 차 의회의 국제 상황에 대한 결의에서 우리가 분석 한 바와 같이 : «(제국 주의적 경쟁의 요구뿐만 아니라) 위기의 악화 는 다자간기구와 메커니즘을 시험하고 있다 »(제 20 항). 이것은 예를 들어 세계 보건기구 (WHO)의 역할에서 보여졌다. 2002-2003 년 SARS 전염병에 직면 한 국제적인 조정은 전 세계 실험실에서 발견 된 몇 가지 연구의 속도와 함께 현재 Covid-19와 매우 유사한 가족 바이러스의 낮은 발현률을 설명한다. 그러나 그러한 역할은 2009 년 인플루엔자 A 전염병에 대한 WHO의 불균형한 반응으로 인해 도전 받았는데, 그 당시 WHO의 경보는 도널드 럼스펠드 전 국방 장관이 직접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실험실에서 제조 된 항 바이러스 약물 "타미플루(Tamiflu)"의 대량 판매를 촉발하는데 사용되었다. 그 이후로 WHO는 "최고의"추천을하는 NGO의 역할을 거의 추진했지만 경쟁하는 국가 자본에게 그것을 따르도록 강요 할 수는 없다.이 조직은 심지어 감염 기록에 대한 통계적 기준을 통일 할 수 조차 없었기 때문에 모든 국가 자본들이 가능한 한 오랫동안 각 국가에서 전염병의 영향을 숨기려고 시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이것은 전염병의 첫 징후를 숨기려고 시도한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미국민의 거의 30%가 실질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개인 보험 기반의 건강 보험 시스템을 보호하려는 미국에서도 발생했다. 진단 테스트 사용에 대한 기준의 이질성 또는 다양한 단계에서의 측정에 대한 프로토콜의 차이는 의심 할 여지없이 전 세계적 유행병의 확산을 억제하는 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더 나쁜 것은 의료인들을 위한 보호마스크나 보호복의 조달에 있어서 메르켈의 독일과 마찬가지로 모든 국가 자본이 보호 조치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1전염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여행하는 것을 막는 것과 그들이 집안에 머무는 것이 필요함은 자명하다. 그러나 아동이나 노인들의 돌봄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이 충분하지 않고, 게다가 예를들어 공장에서의 작업은 이에 해당되지 않은 것과 같이 선택적 격리 그리고 동시에 국민에 대한 경찰력을 통해 감시처럼, 그 격리정책이 시행된 방식은 자본주의적 국가전체주의의 기능적 특징을 나타낸다. 우리는 이러한 행태들이 전 세계의 착취받는 이들의 일상 생활에 미치는 영향들에 대해 앞으로 다른 한 기사에서 다룰 예정이다.

2해체(decomposition)에 대한 테제 그리고 “ICC 23차총회의 국제상황에 대한 결의문”

3우리의 웹싸이트 참조.

4우리 웹싸이트의 기사 참조.

합의 또는 결렬 :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사기다

모든 정치 영역에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키라고 강요당한다.

노딜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의 '반란연합'은 보리스 존슨(영국 총리, 보수당 대표)의 의회 정회 ‘쿠데타’를 규탄했다. 그들은 9월 10일부터 10월 14일까지 5주간 의회 정회에 반대하는 행진과 집회를 조직하고, 보리스가 의회 관습과 절차를 존중하도록 강제하기 위해 힘을 합쳤다.

나이절 패러지(브렉시트당 대표)에서 스파이크(Spiked, 영국 온라인 잡지)에 이르기까지 브렉시트 강경 찬성파들은, 오히려 반대파가 2016년 6월 국민투표에서 확인된 '국민의 의지'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모욕한다며 '잔류불평자들(Remoaners)'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EU 관료주의의 간섭에 맞선 영국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주의’와 ‘국민’이라는 바로 그 용어를 의미 없게 만드는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착취계급은 막대한 부를 손에 쥐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와 정치 권력은 언론, TV 그리고 주류 소셜 미디어와 같은 이데올로기 지배 수단과 마찬가지로 착취계급의 특권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 사회에서 ‘국민’은 이러한 계급 적대를 숨기는 데 사용되는 용어이고, ‘민주주의’는 지배계급의 권력독점을 감추는 역할을 한다.

반면, 피착취계급은 일반적으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자신들의 실질 요구를 관철하기 힘들다. 그동안 착취에 맞서 피착취계급을 조직화하려는 노력은 무력으로 진압되거나 회유와 협박으로 길들어 결국 국가에 편입되었다. 그것은 지난 100년 이상 동안 노동조합과 ‘노동자’ 정당(노동당 등)의 역사이기도 하다.

물론, 자본주의 초기와는 달리 노동자들은 대통령/의회/지방선거와 국민투표에서 자유롭게 투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극 권장 받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계급이 아닌 고립된 개인들의 집합으로 원자화된 ‘시민’으로서만 유권자 권리를 누릴 수 있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시민으로서 부르주아 선거에서 투표하는 바로 그 행위는 계급으로서 노동자계급의 부재(不在)에 따른 무력감의 표현이다.

또한, 선거와 국민투표에서의 이슈, 의회에서의 논쟁 주제는 우리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독점 아래 살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브렉시트 찬성 또는 반대? 이 토론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영국’이라는 국가 이익이 우리 이익이라고 가정해야 한다. 그러나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으며, 국가는 국민과 마찬가지로 타협할 수 없는 계급 적대를 감추는 거짓 공동체일 뿐이다. 게다가 브렉시트 분쟁에서 어떠한 선택도 세계 경제 위기가 초래한 생활 수준 하락에서 노동자들을 보호하지 못한다. 브렉시트가 진행된다면, 10월 31일 이전에 EU 거주자들이 그들의 ‘정착지위(settled status)’를 정리해야 한다는 최근의 규칙처럼 불법이든 합법이든 이주노동자들을 향한 야만스러운 공격이 벌어질 것이다. 그것은 미래의 ‘윈드러쉬(Windrush) 스캔들’(주1)에 대한 보증과 같다. 그러나 이른바 노동자 권리를 옹호한다는 EU는, 이미 노동자계급의 다른 부분에 엄격한 긴축을 강요할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리스의 경우가 여기서 가장 웅변적이다(그리고 EU가 요구하는 긴축을 실행한 것은 ‘좌파’ 시리자 정부였다).

민주주의라는 종교

오늘날 민주주의와 국가는 칼 맑스가 처음으로 ‘인민의 아편’이라는 용어를 만든 시대의 종교처럼 되었다. 민주주의와 국가 이익은 부르주아 사회의 ‘영적(靈的) 향기’이며, 이 세계의 도덕적 재가(載可)이며, 이 세계의 장엄한 보충이요, 이 세계의 일반적 위안 근거이자 정당화 근거이다.”(주2) 다시 말해, 이 사회의 궁극적인 실체인 노동과 전쟁에서 요구하는 모든 희생에 대한 정당성을 민주주의와 국가를 가정(假定)하지 않고서는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 ‘향기’는 이제 자본주의 사회 자체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의회도 심하게 부패했기 때문에 매우 나쁜 악취가 되었다. 맑스와 엥겔스 시대, 즉 자본주의 상승기에는 노동자정당의 부르주아 의회 참가가 적합한 활동이었다. 왜냐하면, 의회는 지배계급 내부의 진보와 반동이 실제로 대립하는 장이었고, 노동자들을 대신하여 지속적인 향상을 위해 싸울 조건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노동자 대표의 부패 위험성을 상시로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단지 부르주아 선거에서 노동자정당에 표를 모으면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의회 백치증’의 주요 수단이 되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쇠퇴기에, 지배계급 모든 분파는 똑같이 반동적이며, 생활 수준의 지속적인 향상의 여지는 전혀 없다. 그리고 전체로서의 전체주의 국가의 성장에 직면하여 의회 절차의 깊은 무기력은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 특히 현재 브렉시트 판토마임에서는 더욱 그렇다.

의회의 막다른 골목과 포퓰리즘 부상은, ‘엘리트’를 향한 가짜 비판과 함께, 많은 사람에게, 일을 해내는 사람, 즉 ‘독재자’의 통치 방식인 ‘비자유 민주주의’를 갖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자계급에게 여전히 또 다른 잘못된 선택이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대안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운동은 다른 방법을 보여준다. 1871년 파리 코뮨은 이미 의회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서, “3년에서 6년에 한 번 지배계급의 어떤 구성원이 의회에서 국민을 잘못 대변하는지를 결정하는 대신(주3) 노동자 집단은 별도 집회에서 스스로를 조직하기 시작했는데, 그 집회(총회)의 대표들은 선출되고 위임받았을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소환되었다. 1905년과 1917년 러시아에서 발생한 소비에트나 노동자평의회는 공장과 다른 작업장의 노동자들 집회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이러한 원칙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켜서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윤곽을 1871년 보다 더욱 뚜렷하게 만들었다.

 

1917~21년 전 세계 혁명운동 물결 속에서 노동자평의회는 의회(그리고 노동조합) 기구에 직접 반대하여 생겨났다. 그리고 부르주아지는 이것을 매우 잘 이해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세계혁명의 운명이 결정될 독일에서, 우선 평의회를 합병하고, 평의회를 의회와 지방정부의 무력한 부속물로 만든 다음, 1919년 베를린에서처럼 평의회의 실질 권력을 회복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격렬하게 분쇄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혁명, 피착취계급 해방에 치명적인 적(敵)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목표는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인민’ 아니 오히려 통일된 인류를 이야기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진정한 인간 공동체에서는 그리스인들이 ‘크라토스(kratos)’라고 부르는 힘, 지배, 통치가 어떤 종류의 국가나 정치 권력에도 필요치 않을 것이다.

Amos

2019년 9월 7일

국제코뮤니스트흐름

<주>

1. 윈드러쉬 스캔들이란, 2차 대전 이후 국가 재건을 위한 영국 정부의 장려로 대거 이주해 온 카리브해 이민자들의 후손, '윈드러쉬 세대'를 불법 이주자로 분류하는 행정 착오가 발생, 이들이 각종 복지 혜택에서 배제되고 추방 위기에까지 몰려 논란이 된 사건이다. 이로 인해 2018년 4월 앰버 러드 영국 내무장관이 사임했다.

2. 맑스, 「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 서설」, 1843

3. 맑스, 「프랑스 내전」, 1871

Source : ICC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731/deal-or-no-deal-capitalist-democracy-frau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