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의 본질

공산주의는 유토피아라든가, 추상적인 이상향이 아니기 때문에, 그 뿌리를 그 이전 사회에 두고 있다. 공산주의의 가능성과 공산주의를 이루기 위한 객관적인 조건들은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하려는 혁명적 계급의 정치적 역량, 이 두 가지로부터 나온다. 미래 사회의 자양이 되는 것은, 생산력의 발전 정도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구체화된 사회관계의 본질, 이 두 가지 모두이다. 공산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객관적 필요성(necessity)이 되는 시기는 오직, 생산력의 발전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렀을 때, 생산력의 계속된 발전과 자본주의의 생산 관계 사이의 모순이 발전함에 따라 이전 사회가 더 이상의 발전할 가능성이 없을 때이다.

 

사회가 모든 생산 수단의 통제를 장악하는 것은 “이것이 일어날 수 있는 물질적 조건들이 존재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해지고, 역사적 필요성으로 될 수 있다. 다른 모든 사회적 진보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계급들이 존재함이 정의나 평등 등등에 모순된다는 통찰이 얻어진다고 해서, 이러한 계급들을 폐지하겠다는 단순한 의지가 있다고 해서 실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새로운 경제적 조건들에 의해서만 실행 가능한 것으로 된다.”

(엥겔스, 『반뒤링론』1894)

 

이러한 새로운 객관적 조건들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구별을 철폐하고 자본과 임금 체계, 상품 생산, 그리고 모든 민족적이며 계급적인 분리들을 철폐할 수 있는 그러한 사회관계들만이, 생산력의 진보적 발전을 허용하고 인류의 현재 필요에 대응하게 될 사회관계들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다:

공산주의는 계급,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어떤 종류의 개인적, 집단적 소유도 없는 사회여야만 한다. 자본주의에 의해 이뤄진 생산의 사회화의 유일한 최절정은 사회 전체에 의한, 생산 수단의 사회적인 몰수이다. 오직 계급 특권과 사적인 몰수의 철폐만이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사회관계의 자본주의적 성격 사이의 현존하는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 모든 생산력과 생산 수단의 사회적 몰수는 오직, 경제적으로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으면서 하나의 생산적인 집단으로서만 기능하는 피착취 계급,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수행할 수 있다.

공산주의 사회는 그러므로 결핍의 철폐와 인류의 필요를 위한 생산에 근거한다. 공산주의는 풍요의 사회이며, 이 사회는 인류의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켜줄 것이다. 생산력, 인문학, 기술과 지식의 수준을 통해서 인간들은 보이지 않는 경제적 힘들의 지배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들은 자신들의 삶과 재생산을 결정짓는 조건들에 대한 통제력을 의식적으로 획득함으로써, “필요가 지배하는 시대로부터 자유가 만연한 시대로” 나아갈 것이다.

인간의 필요를 위한 생산은, 인류의 해방은 오직 세계적 규모로 그리고 경제적 사회적 삶의 모든 측면에서 혁명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는 가치 법칙(the law of value)철폐한다. 모든 인간들에 의해 모든 수준에서 사회화되고 계획되는 공산주의적 생산은 오로지 사용가치의 생산에만 기반하며, 그 사용가치의 사회화된 직접적 분배는 교환, 시장, 화폐(…) 등을 배제한다.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사회, 경제적 경쟁과 경제적 무질서의 사회, 그러므로 개개인과 계급들이 서로 충돌하고 경쟁하는 사회로부터, 인류는 공산주의 아래에서 인류 공동체가 지배하는 사회로 진입한다.

이 공동체에서는, 하나의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는 체제를 유지하는 정치권력의 모든 형식들(정부, 국가, 경찰 등)은 착취와 계급 분리가 사라짐과 동시에 사라질 것이다. 통치권들의 존재는, 인간성과 인간의 창조성을 억압하는 모든 방식들의 존재는 사물의 단순한 관리,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an association of free producers)”에게 자리를 내줄 것이다.

공산주의의 이러한 특징들은 최소한의 윤곽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넘어서 (위에서 이야기했던 것들을 가슴속에 품고), 더 이상 서술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광범위한 일반화에 국한된다. 더구나, 이러한 간단한 묘사 속에는 인간관계와 관련된 새로운 삶의 방식들의 결과들이 다뤄지지 않았다. 또한 사회 내부의 분리와 차별, 소외, 인간 사이의 세력 관계 등을 철폐가 담고 있는 의미도 다뤄지지 않는다.

그러나 심지어 이렇게 대략적인 개괄을 통해서도 자본주의 사회와 이전에 있었던 모든 사회들과 미래 세계 사이의 엄청난 차이를 볼 수 있다.

착취가 없는 사회! 우리의 필요와 욕구에 따라 살 수 있는 곳!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분리가 없는 곳! 자유의 의미가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있는 자유 이상을 의미하는 곳! 놀랄만하지 않은가!

비록 이렇게 인류가 만들어 가야할 거대한 도약의 자세한 부분까지 생각할 수는 없을 지라도, 인류의 역사상 아직까지 이와 같은 종류의 질적 도약을 위한 필요성은 없었다는 점, 이것 하나는 명확하다.

이 발언은 양날의 칼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런 종류의 도약은 오직 한 사회 계급이 자신의 역사적 과업을 완벽하게 의식하고 있을 때야 비로소 성취될 수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의식 수준을 성취할 수 있는 계급인 노동자계급은 가장 극단적인 박탈, 가장 사나운 착취, 영속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압력에 종속되어 있는 바로 그 계급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가 이전의 모든 사회들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 이르도록 하는 공산주의의 모든 특징들 그 자체는 프롤레타리아트 존재의 취약함, 궁핍, 그리고 비인간성에 달려있다. “사회 존재의 모든 비인간성이 프롤레타리아의 존재 조건에 집중된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은 “현재 그 자신의 상황에 집중되어 있는 사회의 모든 비인간적 측면을 극복하지 않고는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없다.”(맑스, 엥겔스, 『신성 가족』, 1844) 착취당하는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바로 그 입장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사회를 해방시키고, 또한 계급이나 착취 없는 사회를 만들도록 강제되는 것이다.

사회 내부에서 어떤 경제적 권력도 소유하지 않고, 생산의 지점에서 착취 받는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자신의 해방을 위해서 오직 스스로에게만 기대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연대(solidarity), 자신들의 의식(consciousness)으로써만 자본주의에 반대할 수 있다. 이 두 무기는 그 자체가 미래 사회의 특징적인 원칙들의 체화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반대가 매우 취약하고 깨지기 쉽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지 사회와 대결할 때 기반으로 삼을 수 있는 경제적 특권들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해방을 위한 최종적 투쟁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계속적인 압력에 극단적으로 취약하다.

이것이 공산주의를 향한 길이 필연적이지 못한 이유이다. 공산주의는 길고 고통스러운 투쟁의 열매다. 이것이 어째서, 잃을 것은 그 쇠사슬뿐이며 쟁취할 것은 세계라는 프롤레타리아의 특별한 혁명적 역량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승리를 절대적으로 보장할 수 없는지, 그 발전에 대한 결정론적인 전망이 있을 수 없는지 이유다. 그러나 만약 이 새로운 역사적 신기원이 쟁취되지 못한다면, 인간성은 이름 없는 야만으로 전락하고, 아마도 그 최종적 파멸에까지 이를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를 향한 길, 계급투쟁은, 일련의 승리와 패배로서, 한 발 퇴진과 그에 뒤이은 새로운 승리라는 패턴의 연속으로서 나타난다. 이것은 의지와 의식 사이의 긴장, 끊임없는 재평가와 자기비판 사이의 긴장이라는 형태를 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