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민주당의 위기(유니우스팜플렛) - 로자 룩셈부르크

역자 노트

로자 룩셈부르크는1차 세계대전 발발 이듬해인 1915년 4월 옥중에서 쓴 이글을 썼다. 그후 이글은 국제사회민주당의 임무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부록으로 하여 1916년 1월 유니우스라는 가명으로 스위스 취리히에서 처음 출판되었다.이 번역의 원본은 베를린 디이츠출판사가 1974년 펴낸 로자 룩셈부르크 저작선집 제 4권(1914년 8월부터 1919년 1월까지), 51쪽부터 164쪽이다. 역자의 번역 의도는 되도록 많은 이들이 로자 룩셈부르크의 통찰이 빛나는 이 글을 한국어로 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흡한 점이 많은 상태지만 지금 이렇게 공개하게 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독일어 원본의 맛이 완전히 전달되기는 불가능하더라도, 앞으로 독자들의 많은 충고와 교정제안을 통해 이 한국어 번역본이 차츰 더 다듬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메일: https://ko.internationalism.org/contact)

이 글은 모두에게 열려 있으며, 단지 퍼갈 때는 가능하면 출처를 밝혀, 원한다면 모든 읽는 이들이 번역본의 개선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또 개선된 번역본을 접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참고로, 로자 룩셈부르크의 원주는 그 주가 속한 각 페이지의 끝에 별표와 숫자가 함께 표시되어 있고 역주는 각 장의 마지막에 실려있다.

제1장 세계대전과 국제사회민주당의 항복

장면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6주 안에 파리로의 진군계획i은 세계적인 사건으로 발전했다. 해결의 진전도 후퇴도 없이 대량학살은 지루하고 단조로운 일상이 되어버렸다. 부르주아 정치는 스스로의 족쇄에 묶인 채 궁지에 몰려있다. 이미 불러낸 망령들을 더 이상 쫓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열광은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다. 거리의 애국주의 소음도 없어졌다. 황금자동차사냥ii도, 추적하고 추적당하는 거짓 전문들도, 콜레라균으로 오염된 우물들도, 베를린 철교 위를 폭격하는 러시아학생들도, 뉘른베르크 상공을 비행하는 프랑스인들도, 스파이를 색출하는 군중들의 거리폭력도, 귀청을 때리는 음악과 애국주의 노래가 최고의 볼륨으로 흘러나오는 제과점으로 몰려들던 군중도, 시민 전체가 폭민으로 변한 채 밀고하고 여성을 학대하며 만세를 외치고 한갓 풍문에도 광란에 빠져들 태세였던 것도, 일종의 인신제물의 분위기, 길모퉁이의 순경이 인간다움을 유일하게 대변하던 일종의 키쉬뇨프의 공기iii도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다.

연출은 끝났다. 독일의 학자들, “비틀거리는 레무르들”iv은 오래 전에 벌써 소환되었다. 젊은 처녀들은 더 이상 예비병을 실은 기차들을 뒤따르며 떠들썩한 환호를 보내지 않고, 차창 너머로 예비병들이 사람들에게 기쁘게 인사를 하지도 않는다. 이제 예비병들은 각자의 짐꾸러미를 손에 든 채 묵묵히, 군중이 불쾌한 표정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거리에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창백한 대낮의 차가운 대기 속으로 또 다른 합창들이, 전장의 독수리와 하이에나의 목쉰 외침이 울려 퍼진다. 천막천 1만폭, 정품임을 보장함! 베이컨 10만 킬로그램, 코코아가루, 커피대용품, 현금거래에 한함, 즉시 조달가능! 수류탄, 회전총좌, 탄약통, 전몰미망인 중매, 가죽혁대, 군납품 주선, 진지한 입찰에 한함! 지난 8월, 9월에 차곡차곡 적재되어 애국주의적 분위기로 환영받았던 포탄받이들이 벨기에에서, 보주산맥v에서, 마주른지역vi에서 개죽음 당한 채 썩어가는 그 죽음의 땅 위에서 이윤이 가지도 무성하게 번창한다. 추수한 곡식을 창고에 채울 때인 것이다. 약탈에 동참하려는 수 천개의 탐욕스런 손들이 대양을 건너 내뻗치고 있다.

사업이 폐허 위에서 성장하고 있다. 도시들은 잿더미로 변했다. 마을은 묘지로, 들녘은 불모지로, 주민은 거지떼로, 교회는 마굿간으로. 국제법, 조약, 동맹, 성스러운 맹세, 최고의 권위는 산산조각이 났다. 군주들은 상대편에 가담한 사촌을 백치이자 믿을 수없는 악당으로, 외교관들은 상대편 동료외교관을 교활한 불량배로, 정부들은 상대편 정부를 국민의 재앙이라며 전적으로 경멸한다. 그리고 베니스, 리스본, 모스크바, 싱가포르에는 굶주림 때문에 소요가 끊이질 않는다. 러시아에는 페스트가 그리고 모든 곳에 비참과 절망이 퍼져 있다.

모욕당하고 명예가 손상된 채, 피에 잠기고 진탕에 빠진 채 그렇게 부르주아 사회가 서 있다. 이것이 부르주아 사회이다. 깨끗하고 정숙하게 문화, 철학과 윤리, 질서, 평화와 법치국가를 연기하던 때의 부르주아 사회가 아니다. 찢어발기는 야수로서, 무질서의 대혼란으로서, 문화와 인류에 대한 독기운으로서 그렇게 부르주아 사회는 벌거벗은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대혼란의 한 가운데에서 세계사의 대재앙이 발생했다, 국제 사회민주당이 항복하고 만 것이다. 이점에 대해 스스로를 기만하고 사실을 은폐하려 한다면,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어리석고 심각한 일이 될 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민주주의자(즉, 혁명적인 쁘띠 부르주아 - 로자 룩셈부르크가 덧붙임)는 “가장 굴욕적인 패배로부터도, 처음에 순진무구하게 그 속으로 빠져들었듯이 그렇게 오점 하나 없이, 자신이 승리해야 한다고, 자신과 자신의 당이 이전의 입장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상황이 자신에 맞춰 성숙해야 한다고 새롭게 확신하며 그 패배로부터 빠져나간다”vii. 현대 프롤레타리아트는 그와는 다르게 역사적 시험대를 통과한다. 그 과제 만큼이나 오류도 크다. 가야할 길을 알려주는 것은 미리 주어진 그 어떤 지시도 아니고, 모든 경우에 적용 가능한 그 어떤 본보기도 아니며, 틀림없이 확실한 그 어떤 지도자도 아니다. 역사적 경험만이 유일한 스승이며, 자기해방으로 가는 가시밭길 위에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고난뿐만 아니라 무수한 오류도 놓여 있다. 그 자신의 여정의 목표, 즉 자기해방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스스로의 오류들로부터 배울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 자기비판, 가차없고 혹독하며 밑바닥까지 철처히 파고드는 자기비판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동에 있어 생명의 공기이자 등불이다. 현재의 세계대전에서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몰락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으며 인류에게 있어 하나의 불행이다. 그러나 국제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러한 전락의 깊이를 가늠하고 그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이는 사회주의의 패배를 의미할 것이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현대 노동자운동의 발전에 있어 최근 45년간의 시기이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거의 반세기 이래 우리의 활동에 대한 비판이자 완결이고 총합이다. 파리코뮌viii의 무덤은 유럽 노동자운동의 제 1기 및 제 1 인터내셔널ix을 마감했다. 그 뒤 새로운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전에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연발생적인 혁명들, 봉기들, 바리케이트전투들이 있은 후 늘 다시 수동적 상태로 빠져들었었다. 이제 그러한 투쟁들 대신에 체계적인 일상투쟁이 시작되었다. 부르주아 의회주의의 활용, 대중조직,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결합 그리고 가장 근접한 일상적 이해관계의 끈질긴 방어와 사회주의의 이상의 결합이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심사와 그 해방에 엄정한 과학의 등불이 그 길을 비추었다. 나라마다 제 각각인 파벌들, 학파들, 공상들, 실험들 대신에 여러 나라를 하나의 책 속의 문장들처럼 하나로 묶는 통일되고 국제적인 이론적 토대가 탄생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인식은 전세계 노동자계급의 손에 나침반을 쥐어주어 이 계급이 일상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바른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순간 순간의 투쟁전술을 확고부동한 최종목표에 따라 설정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새로운 방법론의 담지자이자 주장자이자 보호자가 독일사회민주당이었다. 1870년 전쟁과 파리코뮌의 패배로 인해 유럽 노동자운동의 중심은 독일로 이동했다. 프랑스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 제 1기의 전형적인 장소였던 것처럼, 파리가 그 당시 유럽 노동자계급의 고동치고 피흘리는 심장이었던 것처럼, 독일 노동자계급은 제 2기의 전위가 되었다. 독일 노동자계급은 지칠줄 모르는 작은 활동들의 수 많은 희생자들을 통해 가장 강력하고 모범적인 조직을 건설해 냈고, 가장 대규모의 신문을 창간했으며, 가장 효과적인 교육 및 선동 수단을 창출해냈고, 엄청난 수의 유권자들을 결집해서 의회 내에 가장 많은 의석을 확보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의 순수한 체화로 여겨졌으며, 제 2 인터내셔널x 안에서 스승이자 지도자로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했다. 1895년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마르크스의『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 대한 그의 유명한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다른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독일 사회민주당은 특별한 지위를 갖고 그와 더불어 적어도 우선은 특별한 과제 또한 가진다. 이 당이 투표소로 보내는 2백만의 유권자들 그리고 그들이 거느린 비유권자인 젊은이들과 여자들은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단단한 집단을, 국제 프롤레타리아 군대의 결정적인 ‘권력집단’을 형성한다.”xi 1914년 8월 5일자『비엔나 노동자신문』에 표현된 것처럼, 독일사회민주당은 “계급의식적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있어서 조직의 보석”이었다. 그것을 본보기로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벨기에 사회민주당이,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스위스, 미국의 노동자운동이 항상 열심히 뒤따랐다. 그리고 슬라브계의 나라들, 러시아인들, 발칸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무한하고 거의 무비판적인 경탄과 더불어 독일사회민주당을 우러러보았다. 제 2 인터내셔널에서 그 독일 ‘권력집단’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표자회의에서, 국제사회주의사무국의 회합에서 모두는 독일의 의견을 기다렸다. 특히, 군국주의와 전쟁에 맞선 투쟁 문제에 있어서 독일 사회민주당은 언제나 결정적인 힘으로 나타났다. 인터내셔널의 나아갈 방향의 결정하기 위해서는, “우리 독일인에게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면 대개의 경우 충분했다. 인터내셔널은 맹목적인 신뢰로써 경외의 대상인 막강한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도에 스스로를 내맡겼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모든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자랑이자 모든 나라 지배계급들에게는 두려움이었다.

그런데 거대한 역사의 시험대가 다가왔을 때, 우리는 독일에서 무엇을 경험했는가? 가장 깊은 몰락, 가장 엄청난 붕괴를 경험한 것이다. 그 어디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이 독일에서처럼 그렇게 완전히 제국주의에 봉사하며 발묶이지 않았고, 그 어디에서도 계엄상태가 그렇게 아무 저항없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그 어디에서도 언론이 그렇게 재갈 물리지 않고, 여론이 그렇게 질식당하지 않으며, 노동자계급의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투쟁이 그렇게 전적으로 희생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독일 사회민주당은 가장 강력한 전위였을 뿐만 아니라 인터내셔널의 사고하는 두뇌였다. 그래서 독일 사회민주당과 그것의 몰락에 대한 분석이, 자각의 과정이 시작되어야 한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국제사회주의의 구원을, 즉 가차없는 자기비판을 선도해나갈 도의적인 책임을 지니고 있다. 부르주아 사회의 다른 어떤 정당도, 다른 어떤 계급도 자신의 오류, 자신의 약점을 모두의 앞에서 비판이라는 명징한 거울 속에 감히 드러내지 못한다. 거울이 그와 동시에 자신의 앞에 놓인 역사적 한계와 뒤에 놓인 역사적인 재앙을 반영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은 항상 기탄없이 진실을, 또한 가장 비참한 자책마저도 직시하길 피할 이유가 없다. 그의 약점은 단지 길을 잃고 헤맴을 의미할 뿐이며, 역사의 엄정한 법칙이 그에게 힘을 되돌려주고 그 궁극적인 승리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가차없는 자기비판은 노동자계급의 생존권일 뿐만 아니라 최상의 의무이다. 우리는 뱃전에, 그 보호자 역할을 프롤레타리아트가 위임받은 인류 최상의 보물들을 이끌었다! 그리고 부르주아 사회가 그 피의 방종 때문에 굴욕당하고 명예가 훼손된 채 자신의 불운을 향해 계속 질주하는 동안, 국제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신을 수습하여 세계대전의 사나운 소용돌이 속에서 한 순간의 혼미와 나약함 때문에 바닥을 떨어뜨린 그 황금의 보물들을 다시 건져내야만 하고 또 그렇게 할 것이다.

이 세계대전이 세계사에서 전환기라는 점 한가지는 분명하다. 나중에 명랑하게 이전의 습관에 다시 젖어들기 위해 덤불 아래에서 천둥번개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토끼처럼 이 전쟁에서 그저 살아남기만 하면 될거라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대전으로 인해 우리의 투쟁조건이 변했고, 우리들 자신이 가장 많이 변했다. 자본주의 발전의 기본법칙이, 자본과 노동 사이의 생사를 건 전쟁이 마치 그 궤도를 이탈하거나 유화되기라도 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이미, 전쟁의 도중에 그 가면들을 벗어버린 이전의 익숙한 모습들이 비웃고 있다. 그러나 발전속도는 제국주의의 화산 분출로 인해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사회내부에서의 충돌의 격렬함과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한 과제의 규모, 그것들은 노동자운동의 역사에서 이전까지의 모든 것들을 한가로운 전원생활처럼 보이게 한다.

역사적으로 이 전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심사를 크게 고무하기에 적절했다. 마르크스는 예언자적 시각으로 많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미래와의 연관 속에서 발견해 냈다. 그의『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는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프랑스에서 쁘띠부르주아는, 일반적으로 산업부르주아가 해야 했을 일(의회주의적 권리 획득을 위한 투쟁 – 로자 룩셈부르크가 덧붙임)을 하고, 노동자는, 보통의 경우라면 쁘띠부르주아의 과제였을 일 (민주공화국의 쟁취-로자 룩셈부르크가 덧붙임)을 하는데, 노동자의 과제는 누가 해결할 것인가? 그 누구도 아니다. 프랑스 안에서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프랑스에서 선언된다. 그것은 국가의 테두리 내에서는 어디에서도 해결되지 않고, 프랑스사회 내부의 계급전쟁은 여러 국가들이 서로 맞서 싸우게 되는 세계대전으로 전환되게 된다. 해결은, 그러한 세계대전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가, 세계시장을 지배하는 그 나라의 최정상을, 즉 영국의 최정상을 점하게 되는 그 순간에야 비로소 시작된다.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시작되는 그 혁명은 결코 단숨에 이루어질 혁명이 아니다. 지금 세대는 모세가 사막을 가로질러 이끌었던 유태인들과 같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를 정복해야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계에 알맞게 성장하는 그 인류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몰락해가야 한다.”xii

이 글을 마르크스는 영국이 자본주의적으로 발전한 유일한 나라이자 영국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국의 경제호황으로 인해 국제 노동자계급을 이끌기에 적당한 것 처럼 보였던 1850년에 썼다. 영국 대신에 독일로 바꿔 읽게 되면 마르크스의 말은 현재의 세계대전에 대한 천재적인 예언으로 된다. 이 세계대전은 독일 프롤레타리아트를 그 나라의 선두에 나서도록 하기에 그리고 그와 더불어 노동과 자본이 국가 정치권력를 놓고 벌이는 거대한 국제적 전면대결을 위해 “조직적으로 시작” 하기에 적격이다.

그러면 우리는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노동자계급의 역할을 이와 다르게 생각했단 말인가? 우리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가올 그 일에 대해 어떻게 묘사하곤 했는지 상기해보자.

“그런 다음 대재앙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유럽에 거대한 비상 경보가 울리고, 그 경보에 맞춰 1600 ~1800만명의 남자들이, 최고의 살인무기로 무장한 여러 나라의 핏줄들이 서로를 적으로 하여 전장으로 이동할 것이다. 그 거대한 비상 경보의 배후에 거대한 파멸이 놓여있음을 나는 확신한다.… 그것은 우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신들 자신에 의해 다가온다. 당신들이 형세를 극단으로 몰고간다. 당신들이 그로부터 대재앙을 초래한다.… 당신들이 뿌린대로 당신들이 거두리라. 부르주아세계의 멸망이 다가오고 있다. 그것이 다가오고 있음이 확실하다!”xiii [강조-로자 룩셈부르크(R.L.)]

이렇게 우리당의 원내대변인, 베벨은 제국의회의 모로코논쟁에서 말했다.

몇 해 전 수십만 부가 배포되었던, 당의 공식팜플렛, 『제국주의냐 사회주의냐?』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고 있다.

“그렇게 제국주의에 대항한 투쟁으로부터 점점 더 자본과 노동 사이의 결정적인 투쟁이 성장해 나온다. 한편에는 전쟁위험, 인플레이션, 그리고 자본주의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평화, 모두를 위한 번영, 사회주의! 이렇게 문제가 제기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끊임 없이 자신의 세계사적인 임무를 수행해 나가고, 자신의 조직의 힘, 자신의 인식의 명확성을 강화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다가올 그일이 다가온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을 통해 인류가 세계대전의 끔찍한 공포를 모면하게 되거나, 아니면 자본주의세계가 역사 속으로 침몰할 것이다, 그것이 탄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피와 폭력 속으로. 그 역사적 순간에 노동자계급은 준비태세가 되어있을 것이고, 준비태세가 되어있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xiv

지난 제국의회선거를 위한 1911년의 공식적인『사회민주주의 유권자를 위한 지침서』의 42쪽에는 예상되는 세계대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우리의 지배자들과 지배계급들은 이 엄청난 일을 민중들에게 감히 부당하게 요구해도 된다고 믿고 있단 말인가? 경악과 분노와 격분에 사로잡힌 민중들이 그 살인에 종지부를 찍지 않을 것 같은가?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이라고 민중들이 질문하지 않을 것 같은가?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취급될 만큼 아니면 이렇게 우리들을 취급하도록 내버려둘 만큼 그렇게 백치들이란 말인가?

거대한 유럽전쟁의 발생확률을 조용히 계산 중인 자라면 바로 여기에 인용된 그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이 다음의 유럽전쟁은, 세계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사생결단의 승부가 될 것이다, 그것은 예상컨대 최후의 전쟁이 될 것이다.”xv

이런 말로 우리당의 현직 제국의회의원들이 110의 의석의 확보를 놓고 유세를 했었다.

1911년 여름 전함 판터호가 아가디어로 출격xvi하고 독일 제국주의자들의 떠들석한 부추김으로 인해 유럽전쟁의 위기가 한층 고조되었을 때, 8월 4일 파리xvii에서 열린 한 국제회의는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독일,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 그리고 프랑스 노동자 조직들의 대위원들은, 어떤 전쟁포고에 대해서도,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해 대항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선언한다. 대표된 각 나라들은 국내와 국제 회의의 결정들에 따라서, 지배계급의 모든 범죄적인 음모에 대항해 행동할 의무를 가진다.”

그러나 1912년 11월 바젤의 인터내셔널대회에서 노동자대표자들이 긴 행렬을 이루며 행사장인 교회당에 도착했을 때, 그때에는 다가올 운명의 순간의 거대함에 대한 전율과 영웅적인 결의가 모든 참석자들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냉철하고 회의적인 빅터 아들러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동지들이여,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여기에, 우리 힘의 공동의 근원에 있다는 점이다. 각자가 할 수 있는 것을 각자의 나라에서 시행할 힘을, 우리가 가진 방법과 수단을 총 동원하여,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다해서 전쟁이라는 범죄에 대항해 저항할 힘을 우리가 여기에서 얻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범죄가 일어난다면, 참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다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의 장해물, 최종의 장해물이 되도록 모든 힘을 다 기우려야 할 것이다 [강조-R.L.].

이것이 전체 인터내셔널에 혼을 불어넣는 신념이다.…

그리고 살인과 방화와 페스트가 문명화된 유럽전역을 휩쓴다면, 우리는 그에 대한 상상만으로도 전율할 수밖에 없고, 격노하고 실망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묻게 된다. 그러면 인류는, 그리고 프롤레타리아들은, 오늘날 묵묵히 도살장으로 끌려갈 만큼 진정 그렇게 어리석은 양떼들에 불과하단 말인가?”xviii[강조-R.L.].

트로엘스트라는 ‘약소국’의 이름으로, 그리고 벨기에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약소국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쟁을 막기 위해서 인터내셔널이 내리게 될 모든 결정들에 전적으로 모든 것을 다 바쳐 따를 것이다. 더불어 우리는, 약소국의 피로 그리고 약소국의 땅 위에서 자기 정부의 소유욕과 지배욕을 채우기 위해 강대국의 지배계급들이 자기 나라 프롤레타리아트의 아들들을 전쟁터로 불러낸다면, 프롤레타리아인 그 아들들은 프롤레타리아인 그 부모들, 계급투쟁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언론의 막강한 영향으로 인해서, 그 반문명적 행위로 자신들의 형제들이자 친구들인 우리들에게 해를 입히기 이전에 3번은 심사숙고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표명한다.”xix[강조-R.L.]

그 다음 조레스는 인터내셔널 사무국의 이름으로 전쟁반대 선언xx을 낭독한 후 자신의 연설을 다음과 같이 끝맺었다.

“인터내셔널은 세계의 모든 도의적인 힘들을 대표한다!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를 완전히 내맡겨야할 그 비극적인 순간이 언젠가 오게 된다면, 이 생각이 우리를 지탱하고 강화시킬 것이다. 그냥 가볍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다,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그 곳에서부터 우리는 선언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xxi[강조-R.L.]

그것은 의형제의 도원결의xxii와 같았다. 노동의 군대와 자본의 권력 사이에서 미래에 벌어질 거대한 전투를 알리는 종소리가 진지하고 엄숙하게 울려퍼진 그 바젤의 교회당을 전 세계가 주시했다.

1912년 12월 3일 사회민주당의 원내대변인 다비트는 독일 제국의회에서 말했다.

“그 때가 내 생애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 중의 하나였음을 나는 고백한다. 그 교회당의 종소리가 국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행렬을 동행할 때, 합창단석에 붉은 깃발들이 제단 둘레로 줄지어 세워질 때, 평화를 포고하길 원하는 여러 나라들에서 온 특사들을 오르간소리가 환영할 때, 그것이야 말로 내가 결코 잊지 못할 인상이었다.… 여기서 일어난 일, 이것은 당신들에게 매우 분명해질 것이다. 대중이, 의지박약하고 아무 생각도 없는 무리로서 존재하기를 그만둔 것이다. 이것은 역사상 새로운 일이다. 이전에는 전쟁에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대중을 맹목적으로 서로 반목하도록 선동하고 대량학살에 동원했었다. 이제 그것은 끝났다. 대중들은 어떤 전쟁당사자들의 의지박약한 도구나 하인이기를 거부한다.”xxiii[강조-R.L.]

전쟁 발발 1주일전인, 1914년 7월 26일에만 해도 독일의 사회민주당 간행물들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꼭두각시들이 아니다, 맹목적으로 좌우하는 상황들의 의지없는 도구로 인류를 전락시키는 이 체제에 대항하여, 평화를 갈망하는 유럽을 악취나는 도살장으로 탈바꿈시킬 채비를 하고 있는 이 자본주의에 맞서 우리는 모든 힘을 다해 투쟁할 것이다. 이 범죄가 시작된다면, 앞으로 며칠 안에 막강한 시위들을 통해 명백하게 드러날, 독일 및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단호한 평화의지가 세계대전을 막을 수 없게 된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적어도 최후의 전쟁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파멸이 될 것이다.”(『프랑크푸르트 민중의 소리』)

1914년 7월 30일에만 해도 여전히 독일 사회민주당의 중앙기관지,『전진』은 다음과 같이 외쳤다.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는 광기에 새로잡힌 지배계급이 야기하는 사건들에 대해 어떤 책임도 거부한다. 그 폐허로부터 자신에게 새로운 삶이 꽃필 것임을 안다. 모든 책임은 현재의 권력자들에게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다! 세계역사가 세계의 심판정이다!”xxiv

그리고 전대미문의, 전례가 없는 1914년 8월 4일이 다가왔다.

그것이 그렇게 일어나야만 했을까? 이러한 의미를 갖는 사건은 절대로 우연의 산물일 수가 없다. 심오하고 포괄적이며 객관적 원인들이 뿌리에 놓여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원인들은 또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들과 사회민주당의 과오들에도, 우리들의 투쟁의지의 부족에, 용기의 부족에, 신념에 대한 충실함의 부족에도 놓여 있을 수 있다. 과학적인 사회주의는 역사발전의 객관적인 법칙들을 파악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쳤다. 인간은 역사를 자유자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행동에 있어 그때 그때의 역사발전의 성숙도에 의존하지만, 역사발전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저편에서 무관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역사발전의 산물이자 결과인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발전의 추동력이자 원인이다. 그것의 활동은 역사를 함께 결정하는 일부이다. 인간이 자신의 그림자를 뛰어넘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역사발전을 건너뛸 수는 없지만, 그것을 가속하거나 감속할 수는 있다.

사회주의는 인간의 사회적인 행동에 의식적인 의미를, 계획적인 사고를 그와 더불어 자유의지를 도입하는 것을 스스로 목표로 하고 또 역사에 의해 그렇게 소명된, 세계사상 최초의 민중운동이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종국의 승리를, 동물계로부터 자유세계로의 인류의 도약으로 지칭했다. 이러한 ‘도약’도 역사의 엄정한 법칙들에, 이전의 고통스럽고 매우 느린 수천의 발전단계들에 연계되어있다. 그러나 그 발전으로 함께 모아진 물질적 전제조건들이라는 이 모든 재료로부터 거대한 민중의 의식적인 의지라는 점화의 불꽃이 피어오르지 않는 한 그러한 도약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사회주의의 승리는 운명처럼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오직 낡은 권력과 새로운 권력 사이의 길고 긴 일련의 거대한 힘겨루기를 통해서만 쟁취될 수 있고, 그 힘겨루기 동안 국제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민주당의 지휘 아래에,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의 손에 거머쥐는 것을, 사회적 삶의 운전대를 잡는 것을, 자기의지가 없는 장난감이기를 벗어나 자기 자신의 역사의, 목표가 분명한 조종사가 되는 것을 배우고 또 그렇게 되려고 시도할 것이다.

언젠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말했다. 부르주아사회는, 사회주의로 이행하느냐 아니면 야만으로 복귀하느냐의 딜레마 앞에 서 있다고. 우리시대의 유럽 문명 수준으로 볼때 ‘야만으로의 복귀’는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우리는 모든 말들을 지금까지 아무 생각 없이, 그 엄청난 중요성은 모른 채 읽고 반복해 왔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주위를 한번 돌아보면, 부르주아 사회의 야만으로의 복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해진다. 이 세계대전, 이것이 야만으로의 복귀이다. 제국주의의 승리는 문화의 절멸을 초래한다. 현대전의 전쟁 진행기간 동안은 산발적으로, 그리고 지금 시작된 세계대전의 시기가 억제되지 않은 채 그 최종 결론에 이르기까지 진행된다면 최종적으로. 우리는 그래서 오늘날,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정확히 한 세대 이전인 40년 전에 예언했던 것처럼,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제국주의의 승리 및 고대 로마에서처럼 모든 문화의 몰락, 민족절멸, 황폐, 퇴행, 일종의 거대한 묘지이냐, 아니면 사회주의의 승리, 즉 제국주의와 그것의 수단인 전쟁에 대항한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인 투쟁활동의 승리냐. 이것이 세계사의 딜레마, 일종의 양자택일이고, 그 저울대는 계급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결정 앞에서 떨며 흔들리고 있다. 문화와 인류의 미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용감한 결의로써 혁명투쟁의 칼을 저울의 접시 위로 던지는가에 달려 있다. 이 전쟁에서는 제국주의가 승리했다. 그 민중학살의 피묻은 칼이 잔인한 초과중량으로 저울대를 비참과 치욕의 편으로 끌어내렸다. 그 모든 비참과 그 모든 치욕은 오직, 이 전쟁으로부터 그리고 이 전쟁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계급의 손아귀에 놓인 하인의 역할에서 벗어나 정신을 수습하여 스스로 운명의 지배자가 될 것인가를 배움으로써만 상쇄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노동자계급은 그들의 역사적 소명의 모든 인식들을 비싼 값을 치르고 얻는다. 계급해방의 골고다의 길은 엄청난 희생들로 덮혀있다. 6월의 투사들, 코뮌의 희생자들, 러시아혁명의 순교자들 – 거의 셀 수 없이 많은 피묻은 그림자들의 윤무.xxv 그러나 그들은 명예로운 전장에서 스러져갔고, 마르크스가 코뮌의 영웅들에 대해 썼듯이, 그들은 영원히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심장 속에 새겨져 있다.”xxvi 지금 각국의 수백만 프롤레타리아들이 노예의 노래를 부르며 치욕과 형제살해와 자기도륙의 전장에서 죽어가고 있다. 그것도 우리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세가 사막을 건너 인도했던 유태인들과 같다. 그러나 배우기를 잊지 않는 한, 우리는 가망이 있고, 승리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현재의 지도자, 사회민주당이 더 이상 배울 줄 모른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새로운 세계에 어울리게 성장한 그 인류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xxvii 몰락하고 말 것이다.


i1차 대전 발발 당시 독일의 슐리펀계획(Schlieffen Plan)이 서부전선의 승리에 할당한 시간이 6주였다. 하지만 총사령부는 1914년 10월 전쟁의 양상이 지루한 참호전으로 발전하자 이 계획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ii1차 대전당시,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이뤄진 반독일동맹의 결과로 프랑스가 러시아에 제공하는 자금(황금)이 독일지역을 통과해서 자동차로 운반된다는 정보가 있어 이러한 자동차를 색출하려는 사냥이 독일 곳곳에서 벌어졌다.

iii러시아차르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무장조직 검은 백인단(Schwarzhunderter)이 1903년 4월 차르 통치하의 몰다비아의 키쉬뇨프에서 유태인들, 대학생들, 혁명가들 및 계급의식적 노동자들에게 테러를 가했다. 이러한 학살들은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에 대한 차르정원의 대응이었다.

ivDie “wankenden Lemuren“, 괴테의 파우스트 2편에 나오는 구절,“ihr schlotternden Lemuren“에서 인용된 어구로 보인다. 이때 Lemuren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 놓인 채 육체적 부패가 진행되는 마당에도 보잘것 없는 기교를 계속 보여주고 있는 형상들을 일컫는다. 한편 Lemuren는 동물도감에 따르면, 원숭이의 손발을 가졌으나 머리는 원숭이가 아닌 반원숭이(Halbaffe), 여우원숭이를 말한다

v독일어로는 Vogesen, 프랑스명은 Vosges, 프랑스동부에 위치한 산맥으로, 알자스-로렌지방에 걸쳐있다.

viMasuren, 옛 동프로이센 그리고 현재는 폴란드의 북쪽에 위한 지역으로 2000여개의 호수가 산재되어 있다. 1차 대전 당시 1914년 1915년 러시아군과 독일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들이 있었다.

vii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미에르 18일 (Karl Marx, “Der achtzehnte Brumaire des Louis Bonaparte”). In: Karl Marx/Friedrich Engels: Werke, Bd. 8, Berlin, 1969, S.145

viiiParis commune, 프로이센-프랑스전쟁(1870~71) 중인 1871년 파리노동자들의 봉기 후 자생적으로 형성된 혁명적 파리시평의회(1871년 3월 18일~5월 28일). 보르도에 위치한 보수적 중앙정부의 의지에 반대해 사회주의적 정책들을 실천하려했다. 거의 10주동안 유지되다 프랑스과 교전중이던 독일제국과 그외 외국군대의 도움을 받은 정규프랑스군에 대항해 치열한 바리케이트전 끝에 유혈 진압되었다. 파리코뮌은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예로, 평의회민주주의의 모범으로 통하며 이후 사회주의 및 코뮤니스트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ixDie erste Internationale, 또는 국제노동자협회(Die Internationale Arbeiterassoziation: IAA, 1864 ~1874). 최초의 국제노동자조직으로 1863년 1월 폴란드에서 일어난 노동자봉기와 그 진압에 반대한 시위를 계기로 여러나라 노동자들의 공동활동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864년 런던에서 창립되었다. 사회주의자, 코뮤니스트, 아나키스트등 다양한 경향들이 참여했다. 카를 마르크스는 그 결성선언문과 규약을 작성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그 결성을 적극 도왔다. 파리코뮌의 붕괴 후 쇠퇴하기 시작해서 결국 1874년 필라델피아대회를 마지막으로 해체되었다.

xDie zweite Internationale, 일명 사회주의인터내셔널(1889~1914). 제 1인터내셔널에 참여했던 아나키스트들을 배제하고 유럽내의 거의 모든 사회민주당들이 참여해 파리에서 창립되었다. 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거의 모든 사회민주당들이 자국내에서 당쟁중지와 계급투쟁중지를 선언하고 전쟁에 관여하게 되면서 존재이유를 잃고 해체되었다.

xi프리드리히 엥겔스“Einleitung zu Marx’ Klassenkämpfe in Frankreich(마르크스의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서문),” in Karl Marx u. Friedrich Engels, Werke, Bd.22, S.524

xii칼 마르크스 Karl Marx, “Klassenkämpfe in Frankreich(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in Karl Marx u. Friedrich Engels, Werke, Bd. 7, S. 79.

xiii제국의회심리 속기록(Verhandlungen des Reichstags, XII. Legislaturperiode. II.Session, Bd.268, Stenographische Berichte, Berlin 1911, S.7730.)

xivJulian Marchlewski(J. Karski), “Imperialismus oder Sozialismus(제국주의냐 사회주의냐)? ”, Berlin 1960, S. 48–49.

xvHandbuch für sozialdemokratische Wähler, Berlin 1911, S. 42.

xvi1911년 초, 프랑스제국주의가 지배력을 모로코 전체로 확대하고 공고히 하려는 시도에 대해 독일제국주의는 전함„판터(Panther)“호와 „베를린(Berlin)“호를 모로코의 아가디어(Agadir)로 출격시킴으로써 대응했다. 이러한 도발로 인해 즉각적인 전쟁위협이 조성되었다. 영국이 프랑스편을 들며 참견함으로써 독일 식민정책이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xvii원저에는 런던으로 되어있으나, 1911년 8월 4일 파리에서 노동총연맹 주도의 시위가 있었다. 여기에 독일노동조합총위원회 회원들과 독일사민당 간부들, 그리고 영국, 스페인 및 네덜란드 노동조합의 대표단들이 참가했다.

xviiiAußerordentlicher Internationaler Sozilaisten-Kongreß zu Basel am 24. und 25. November 1912, Berlin 1912, S.18

xix위와 같은 책, S33.

xx바젤에서 1912년 24일에서 25일까지 개최된 인터내셔널 사회주의자특별회의에서 채택된 “현 상황에 대한 인터네셔널의 선언(Manifest der Internationale zur gegenwärtigen Lage)”은 1907년 슈투트가르트대회와 1910년 코펜하겐대회의 결정들을 강화했다. 그리고 모든 효과적 수단을 동원해서 전쟁발발을 저지할 것을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전쟁이 발발할 경우, 자본주의의 계급지배를 붕괴시킴으로써 그 전쟁을 끝낼 것을 프롤레타리아트에 호소했다.

xxiAußerordentlicher Internationaler Sozilaisten-Kongreß zu Basel am 24. und 25. November 1912, Berlin 1912, S.27

xxii원문에는 Rütlischwur, 중세시대에 스위스 뤼틀리에서 이뤄졌다는 반합스부르크동맹결의. 이후 스위스 근대민족국가의 형성신화로 발전했다. 도원결의는 중국 촉나라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에서 결의 형제한 고사에서 유래한 말, 의형제를 맺음을 의미한다.

xxiiiVerhandlungen des Reichstags. XII. Legislaturperiode. I. Session, Bd.286, Stenographische Berichte, Berlin 1911, S.2517-18

xxiv “Vor der Katastrophe,” in Vorwärts (Berlin), Nr. 295, 30. Juli 1914.

xxv1848년 프랑스의 오를레앙왕정이 2월 혁명에 의해 전복된지 네달만인 6월 보수적 부르주아세력이 파리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게 되는데, 이때 격렬한 시가전과 유혈사태가 있었다. 1871년 파리의 코뮌주의자들이 프랑스정규군에 의해 패배당했을 때 대대적인 처형과 추방이 뒤따랐다. 여기서 룩셈부르크가 언급하는 러시아혁명은 1905년에 일어났다. 당시 노동자계급소비에트(평의회)가 페테스부르크와 모스크바의 통제권을 장악했지만 차르정권은 무력으로 혁명가들을 진압하고 약간 수정보완된 독재정치를 재확립했다.

xxviKarl Marx, “Der Bürgerkrieg in Frankreich(프랑스내전),” in Karl Marx u. Friedrich Engels, Werke, Bd.17, Berlin 1971, S.362

xxviiKarl Marx, “Klassenkämpfe in Frankreich 1848 bis 1850 (1848년부터 18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 in Karl Marx u. Friedrich Engels, Werke, Bd.7, S.79

 

제2장 독일사회민주당의 전쟁 참여와 그 정당화

“지금 우리는 전쟁이라는 엄연한 사실 앞에 있다. 적의 침략이라는 소름끼치는 사실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결정해야 할 것은 전쟁지지냐 반대냐가 아니라 국가 방어를 위해 필요한 수단의 문제에 대해서이다.… 스스로의 가장 고귀한 피로 점철된 러시아 전제주의가 승리할 경우, 우리 민족과 그 자유로운 미래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많은 것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 위험을 막아야 한다. 우리 나라의 문화와 독립을 공고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늘 강조해왔던 것을 실행한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 조국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때 우리는, 모든 정복전쟁을 비난할 때 그러하듯이, 각 민족의 독립과 자위권을 언제나 인정해 온 인터내셔널의 견해와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원칙하에 우리는 요구된 전쟁차관을 승인한다.”i

이러한 선언과 더불어 8월 4일 우리당의 제국의회 원내분파는 전쟁기간 동안 독일노동자의 태도를 결정하고 지배하게 될 슬로건을 제공했다. 위험에 처한 조국, 국가방어, 존립과 문화와 자유가 걸린 민족전쟁, 이것이 사회민주당의 원내분파가 제공한 표어이다. 다른 모든 것은 그 단순한 결과로서 초래되었다. 당 언론과 노동조합 언론의 태도, 대중의 애국적 도취, 당쟁중지, 인터내셔널의 갑작스런 해체, 이 모든 것은 제국의회에서 내려진 최초 지침의 불가피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민족국가의 존립이 진정 문제라면, 자유가 문제라면, 만약 이것이 오직 총칼로만 수호될 수 있다면, 만약 전쟁이 성스러운 민족적 사안이라면, 그렇다면 모든 것은 당연하고 분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감수되어야 할 것이다. 목적을 원하는 자는 수단을 원하기 마련이다. 전쟁은 방법적이고 조직화된 거대한 살인이다. 체계적인 살인을 위해선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우선 적절한 도취가 조장되어야 한다. 이것은 오래 전부터 전쟁하는 자들의 잘 증명된 방법이다. 실행의 잔인성은 그에 상응하는 사고와 신념의 잔인성을 요구하고, 후자가 전자를 준비하고 동행해야 하는 법이다. 그리하여 독일판 “타작하는 사람들” 그림을 실은 8월 28일자의『진정한 야콥』ii이, 특히 애국적인 선동 시와 산문들을 실은 캠니츠, 함부르크, 키일, 프랑크푸르트, 코부르크 등등의 당 신문들이야 말로 바로, 죽음의 총탄을 러시아인, 프랑스인, 그리고 영국인 형제들의 가슴에 쏘아댐으로써만 스스로의 존재와 자유를 구원할 수 있다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있어 그러한 상응하는 필수적 정신적 마취제인 것이다. 이처럼 산봉우리와 골짜기를 한데 모으려 들고, 전쟁과 “인간성”을, 살인과 형제애를, 전쟁차관 승인과 민족들의 사회주의적 결연을 뒤섞으려는 것에 비하면, 공공연하게 교사 선동하는 보수 언론들은 그런대로 훨씬 더 일관성은 있는 편이다.

그런데 8월 4일 독일 제국의회 사회민주당 원내분파가 제시한 슬로건이 맞다면, 그렇다면 그와 더불어 노동자인터내셜에 대한 판단은 이 전쟁 뿐만 아니라 전쟁 일반에 대해 내려진 것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현대 노동자운동이 존재 한 이래 최초로, 한편에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연대라는 계명과 다른 한편에는 민족들의 자유와 국가적 존립의 이해 사이에 심연이 놓이게 된다. 최초로 우리는 민족국가들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선 국적이 다른 프롤레타리아트가 서로를 무찌르고 절멸시켜야만 한다는 새로운 발견 앞에 서 있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민족국가들의 이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이해가 조화롭게 결합되고 결국 동일하며, 서로를 대립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신념으로 살아왔다. 이것이 우리의 이론과 실천의 기초이자 우리의 민중에 대한 선동의 혼이었다. 그러면 우리의 세계관의 이 주요점에 있어 우리는 오류에 빠져 있었던 것인가? 지금 우리는 국제사회주의의 사활의 문제 앞에 서 있다.

이 세계대전은 우리의 국제적 원칙의 사례를 보여주는 최초의 시험대는 아니다. 최초의 시험을 우리당은 45년 전에 통과했다. 1870년 7월 21일 그 당시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아우구스트 베벨은 북독일제국의회에서 다음과 같은 역사적 선언을 했다.

“현재의 전쟁iii은 일종의 왕조전쟁으로서, 1866년의 전쟁iv이 호엔쫄레른왕조의 이해관계에 따랐던 것처럼 보나파르트왕조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행되고 있다.

전쟁의 수행을 위해서 제국의회에 요청된 자금을 우리는 가결할 수 없는데, 이는 이것이 1866년의 행위로 지금의 전쟁을 준비해온 프로이센 정부에 대한 신임투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요구된 자금을 부결할 수 없는데, 이는 보나파르트의 오만하고 범죄적인 정치를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왕조전쟁의 원칙적인 반대자로서, 사회-공화주의자로서, 그리고 국적에 상관없이 모든 억압자들에 대항해 투쟁하며 모든 억압받는 자들을 하나의 형제연맹으로 단결시키려 노력하는 국제노동자연맹의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현재의 전쟁을 지지할 수 없다. 그래서 유럽의 민족들이 현재의 처참한 사태로부터 교훈을 얻어, 자결권을 획득하고 모든 국가적이고 사회적인 악의 근원인 오늘의 무단정치와 계급지배를 철폐하는데 전력을 다할 것이라는 확고한 기대를 표명하며 이 표결에서 기권한다.”v

이러한 선언과 더불어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대표자들은 자신들의 본분을 매우 분명히 인터내셔널의 깃발 아래 자리매김했고 프랑스에 대항한 전쟁에 대해 자유를 건 민족전쟁이라는 성격을 완전히 거부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베벨은 만약 그후 수년간 밝혀지게 된 그 모든 사실들을 자신이 표결 당시 알았더라면 그 차관의 승인에 반대했을 것이라 회고록에서 말하고 있다.

그 전쟁에 대해, 즉 전체 부르주아 여론 및 국민의 절대다수가 그 당시 비스마르크의 술수의 영향을 받아 독일의 민족국가적 생존의 이해로 여겼던 그 전쟁에 대해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민족국가 생존의 이해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이해는 하나이고, 그 양자는 모두 전쟁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대변했다. 기껏해서 현재의 전쟁이, 사회민주당 제국의회 원내분파의 1914년 8월 4일 선언이 처음으로 엄청난 딜레마를 폭로한 것이다. 한쪽에는 민족의 자유, 다른 한쪽에는 국제연대라는 딜레마를!

지금, 우리당의 제국의회 원내분파의 선언에 포함된 근본적인 사실, 즉 프롤레타리아 정치의 원칙적으로 새로운 지향은 어쨌든 우리에게는 완전히 갑작스런 깨달음이었다. 그것은 8월 4일 황제연설 및 수상연설의 단순한 메아리였다. 황제의 연설에 따르면, “우리의 동기는 정복욕이 아니다, 신이 우리에게 배정한 자리를 우리와 우리 후손들을 위해 지키고자하는 불굴의 의지가 우리에게 용기를 불어넣는다. 그대들에게 제시된 문건들을 통해서 그대들은, 나의 정부, 특히 나의 수상이 최악의 사태를 막으려고 마지막 순간까지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강요된 정당방위의 상황에서 깨끗한 양심과 깨끗한 손으로 우리는 칼을 빼어 든다.”vi 그리고 독일제국의 수상 베트만 홀벡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신사여러분, 우리는 지금 긴급한 정당방위의 상황에 놓여있고 긴급은 어떤 계명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처럼 이렇게 위협을 느끼며 황제폐하를 위해 투쟁하는 자라면, 어떻게 자신 앞의 장해물을 치울 것인가만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평화로운 노동의 결실을 위해, 위대한 과거유산을 위해 그리고 우리 미래를 위해 우리는 투쟁합니다.”vii

이것은 사회민주당의 선언 내용 그대로이다. 1. 우리는 평화를 유지하려고 최선을 다했고, 다른 자들이 우리에게 전쟁을 강요했다. 2. 지금 전쟁이 일어난 이상 우리는 스스로를 방어해야 한다. 3. 이 전쟁에서 독일 민족의 모든 것이 위험에 처해 있다. 우리당의 제국의회 원내분파의 선언은 정부가 선언한 것의 약간 다른 양식화에 불과하다. 정부의 선언이 베트만 홀벡의 외교적인 평화노력, 황제의 전보를 거론하는 것처럼, 원내분파는 전쟁발발 이전의 사회민주당 주도의 평화시위들을 거론한다. 황제연설이 어떤 정복욕도 부인하듯이 그렇게 이 분파도 정복전쟁임을 사회주의라는 이름 아래 부인한다. 그리고 황제와 수상이, ‘황제폐하를 위하여 우리는 투쟁한다! 나는 어떤 정당도 모른다, 나는 단지 독일인만을 안다’viii고 외친다면, 사회민주당 선언의 메아리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 모든 것이 위험에 처해 있다, 우리는 위험의 순간에 조국을 저버리지 않는다’라고 대답한다. 단지 한 부분에 있어서 사회민주당의 선언은 정부의 견해에서 벗어난다. 그것은 러시아 전제주의를 독일의 자유에 대한 위험으로서 상황 파악의 전면에 내세운다. 황제연설은 러시아와 관련 다음과 같이 유감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무거운 심정으로 나의 군대를, 수많은 전장에서 나란히 함께 싸워왔던 그 이웃에 대항해 동원해야 했다. 솔직히 매우 유감스럽게도 나는 독일이 충실하게 유지해 왔던 우정이 깨어지는 것을 보았다.”ix

사회민주당 원내분파는 충실하게 유지되어왔던 러시아 차리즘과의 우정의 고통스런 단절을 전제주의에 대항한 자유의 팡파르로 탈바꿈시켰다. 이렇게 정부의 선언에 대해 독창성을 보이는 이 유일한 부분에서 전쟁을 민주적인 것으로 미화하고 그것에 일종의 민족적인 영광을 부여하기 위해 사회주의의 혁명적 전통을 이용했다.

이미 말했듯이, 이 모든 것이 8월 4일 사회민주당에게 갑작스럽게 분명해졌다. 그날까지 전쟁발발 전야까지 말해 왔던 모든 것은 그 분파의 선언과 정확히 상반된 것이었다. 7월 26일 이 전쟁의 도화선이 된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x이 공개되었을 때,『전진』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들은 전쟁을 원한다, 비엔나의 궁정에서 영향력과 결정권을 가진 비양심적인 자들은. 그들은 전쟁을 원한다. 원색적인 비방 교사 언론으로부터 벌써 몇 주째 울려 퍼지고 있다. 그들은 전쟁을 원한다.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은 그것을 만천하에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한 미치광이의 총격으로 프란츠 패르디난트와 그 부인의 피가 흘렸기 때문에, 수천의 노동자와 농민의 피가 흘러야 한단다, 부조리한 범죄가 한 층 더 부조리한 범죄로 극복되어야 한단다.…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은, 유럽 전역을 온통 불바다로 만들어버릴 그 불씨가 될 지도 모른다!

이 최후통첩은 이에 고분고분하게 굴복하는 세르비아의 정부라면 그 국민들에 의해 순식간에 불신임당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할 정도로 그 이해와 요구에 있어서 파렴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 국수주의 언론의 오만불손이, 전쟁야욕에 사로잡혀 소중한 동맹국을 극한의 사태로 자극하였고, 아무 의심없이 베트만 홀벡씨는 베르흐톨트씨에게 도움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때 베를린에서도 비엔나에서와 마찬가지로 위험한 게임을 벌이고 있다.… ”xi[강조-R.L.]

『라이프치히 민중신문』은 7월 24일 다음과 같이 썼다.

“오스트리아의 군사정당은... 모든 것을 한장의 카드에 건다, 왜냐하면 민족적이고 군국주의적인 국수주의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전혀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에서 국수주의 단체들은 특히 파산했고, 그들의 민족적 포효가 자신들의 경제적 페허를 은폐하고 전쟁의 강탈과 살인이 그들의 주머니를 채울 것이라 한다.… ”xii[강조-R.L.]

『드레스덴 민중신문』은 같은 날 다음과 같이 의견을 표했다.

“지금으로서는 비엔나 권력층의 전쟁교사자들은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제시하는 요구조건을 정당화할 만한 어떤 적절한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정부가 그럴 입장에 있지 않는 한, 전체 유럽 앞에서 선동적이고 모욕적으로 세르비아에게 시비를 거는 것은 부당하다. 비록 세르비아 정부의 과오가 증명된다 할지라도, 그리고 세르비아 정부의 묵인아래 사라예보에서의 암살이 준비되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이 통첩에 제시된 요구들은 모든 보통의 한계를 넘어서 있다. 한 정부의 뻔뻔스러운 전쟁 의도만이 다른 국가에게 그 같은 무리한 요구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

『뮌헨 포스트』는 7월 25일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오스트리아의 이 통첩은 지난 2백년의 역사에서 유사한 예를 찾아 볼 수 없는 공문서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유럽의 여론에 공개되지 않은 조사서류를 근거로 그리고 황태자 부부의 암살자에 대해 공개적으로 재판을 진행하지도 않고서, 만약 받아들이게 된다면 자살이나 다름없은 그러한 요구들을 세르비아에게 제시한다.… ”

『슐레스빅-홀슈타인 민중신문』은 7월 24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를 자극하고 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전쟁을 원하고, 전체 유럽을 피로 물들일 수 있는 범죄를 저지른다.…

오스트리아는 모든 것을 건 도박을 하고 있다. 그것은 세르비아가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아니라면 잠자코 내버려 둘 수 없을 정도로 세르비아를 자극하고 있다.…

문명인이라면 누구라도 오스트리아 권력자의 이러한 범죄적인 행동에 대해 결연히 항의해야 한다. 특히 노동자의 임무는 그리고 자유와 문화를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그 모든 사람들의 임무는, 비엔나에서 유발된 엄청난 광기의 결과를 막기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임에 틀림없다. ”

7월 25일자 막데부르크의『민중의 목소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냥 저 멀리서 이 요구사항들에 진지하게 접근하려는 기색만 보이는 세르비아정부라도 그와 동시에 의회와 국민들에 의해 타도되고 말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구실은 베르흐톨트가 공허한 주장으로 세르비아 정부 앞에 그리고 그와 더불어 유럽 앞에 나설수록 그 만큼 더욱더 비난받아 마땅하다.…

일어난다면 세계대전이 될 그런 전쟁이 더 이상 이런 식으로는 책동될 수 없다. 전 세계의 평온을 교란하려 하지 않고서야 이런식으로 행동할 수 없다. 이런식으로는 도덕적으로 정복할 수도 없고 제 3자에게 자신의 정당성을 확신시킬 수도 없다. 그래서 유럽의 언론과 정부들이 자만심 강하고 고삐가 풀린 비엔나의 정치가들을 강력하고 분명하게 자제시킬 것으로 여겨진다.”

프랑크푸르트의『민중의 목소리』는 7월 24일 다음과 같이 썼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죽음으로 그들의 가장 친한 친구를 잃은 그래서 그의 죽음을 세르비아의 국민들에게 복수하길 바라는 교황지상권주의적 언론xiii의 사주에 의지한 채, 나날이 그 언어가 위협적이고 야비해져가는 독일의 일부 부유한 전쟁교사자들에 의지한 채, 오스트리아정부는 세르비아왕국에 최후통첩을 내리도록 유인되고 말았다, 더할 나위없이 오만불손한 어투로 작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르비아정부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몇몇 요구사항들을 포함하는 최후통첩을.”

엘버펠트의『자유언론』은 같은 날 다음과 같이 썼다.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볼프통신xiv의 전보 하나가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요구사항들을 제시한다. 그로부터, 비엔나의 권력자들이 총력을 다해 전쟁으로 치닫고 있음이 명백하다. 어제 저녁 베오그라드에 전해진 통첩 속에서 요구된 것은 이미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일종의 보호정치이기 때문이다. 독일은 그와 같은 부당한 요구들을 지지하기 위해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다. 그래서 오스트리아가 그 요구를 철회할 것을 독일이 분명하게 요청한다는 점을 베를린의 외교관들이 비엔나의 교사자들에게 명백히 알리는 것이 절실히 요구된다.”

졸링엔의『베르기쉬 노동자의 목소리』는 쓰기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와의 충돌을 원하고, 사라예보의 암살을 단지 세르비아를 도덕적으로 부당한 것으로 몰아 세우기 위한 핑계로 이용한다. 그러나 이 일은 유럽의 공론을 성공적으로 속이기에는 너무 조야하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비엔나 권력층의 전쟁교사자들이, 러시아도 개입하게 될 그러한 충돌이 있을 경우 3국동맹xv의 동맹국인 이탈리아와 독일이 그들을 도우려 와야만 될거라고 믿는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공허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아드리아해와 발칸반도에서의 경쟁자인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무력함은 이탈리아에게는 매우 유리하다. 따라서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손해가 될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독일에서는 권력자들이 감히 그것을 원할 만큼 어리석다할 지라도, 합스부르크의 범죄적인 정치를 위해서, 민중의 분노를 사는 일 없이는 단 한명의 병사의 목숨이라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 생겨서는 안된다.”

우리 당의 간행물들 전체는 전쟁발발 1주일 전만 해도 예외 없이 전쟁을 이렇게 비난했다. 이에 따르면 독일의 존립도 자유도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전쟁정당의 범죄적인 모험의 문제었다. 정당방위도, 국가방어도, 자신의 자유의 이름으로 강요된 성스러운 전쟁도 아니었다. 파렴치한 선동이자, 타국 세르비아의 독립과 자유에 대한 뻔뻔스런 위협의 문제였다.

사회민주당의 이렇게 날카롭게 뚜렷한, 이렇게 일반적으로 확산된 견해를 갑자기 뒤집기 위해서 도대체 8월 4일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단지 새로운 사실 하나가 덧붙여 일어났다. 그것은 같은 날 독일정부가 제국의회에 제출한 백서였다. 이 백서 4쪽에 다음과 같은 사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스트리아는, 국경 건너편의 소요를 무작정 계속 주시만 하는 것은 왕정의 위신에도 그것의 유지에도 걸맞지 않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정부는 이러한 견해를 우리에게 전하며 우리의 의견을 물었다. 우리는 진심으로 우리 동맹국의 판단에 의견일치를 표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군주국의 존재에 대항에 세르비아에서 일어난 움직임을 종결짓기 위해, 이 동맹국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게 될 그 행동을 우리가 승인할 것임을 보장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어쩌면 전쟁이 될지도 모르는 행동이 러시아를 불러들이고 이와 더불어 우리의 동맹의무에 따라 우리를 전쟁에 끌어들일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위기에 처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중요한 이해관계를 알기에 이 동맹국이 그 자신의 위엄에 어울리지 않게 승복하도록 권할 수도 없었고, 이 어려운 순간에 우리의 원조를 거절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가장 민감한 부분에 대한 세르비아의 지속적이고 음험한 선동이 우리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협하기에 더욱 더 그럴 수가 없었다. 세르비아가 러시아와 프랑스의 도움으로 이웃 군주국의 존재를 위협하도록 계속 방치해 둔다면, 이것은 차츰 오스트리아의 붕괴를 가져올 것이고 그 결과 슬라브권이 러시아의 지배하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이렇게 되면 중유럽에서의 게르만족의 지위를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우리의 동서쪽 이웃들의 움직임이 점점 더 위협적으로 되어가는 현상황에서 우리는 믿고 의지할 동맹국이 필요하다. 그런데 기세가 약화된,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의 돌진에 의해 붕괴되어가는 오스트리아는 더 이상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동맹국의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르비아에 대한 행동에 있어서 오스트리아가 전적으로 자유롭게 결정하도록 위임했다. 우리는 그 준비에 참여하지 않았다.”xvi[강조 - R.L.]

이것이 8월 4일 사회민주당의 제국의회 원내분파에게 제출되었다. 백서 전체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결정적 위치를 차지하는 이말들이, 전쟁의 외교적인 이면사와 원동력들에 대한 나머지 황-, 녹-, 회-, 청-, 주황서들에, 전적으로 사소하고 하찮은 독일정부의 총천연색 설명들에 곁들여 제출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제국의회 원내분파는 상황판단을 위한 열쇠를 손에 쥐었다. 사회민주당 언론 전체는 일주일 전만해도,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이 범죄적으로 세계대전을 선동하는 것이라 외쳤고, 비엔나의 이러한 전쟁선동을 독일정부가 억제하고 제한하는 영향력을 발휘하길 기대했었다. 모든 사회민주당원들과 독일 여론 전체는,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이 있은 뒤 독일정부가 유럽 평화의 유지를 위해 땀흘려 일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사회민주당 언론매체 전체는 이 최후통첩이 독일 여론에게와 마찬가지로 독일 정부에게도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이 백서는 분명하게 다음과 같은 점을 설명했다. 1. 오스트리아 정부는 세르비아에 대한 대응에 앞서 독일의 승인을 받았다는 것. 2. 오스트리아의 대응이 세르비아와의 전쟁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유럽전쟁이 될 수도 있음을 독일 정부는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 3. 독일정부가, 오스트리아에게 승복하도록 충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굴복하는 약화된 오스트리아는 독일에게 결코 중요한 동맹국이 될 수 없음을 선언했다는 것. 4.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에 대한 대응에 앞서 독일 정부가 오스트리아에게 그 어떤 경우에도 전쟁에 원조를 보장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5. 독일정부가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결정적인 최후통첩에 대해 통제권을 갖지 않고 오히려 오스트리아에게 “전적으로 자유롭게 결정하도록 위임했다”는 것.

이 모든 것을 우리당의 제국의회 원내분파는 8월 4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독일군이 이미 벨기에에 진군했음을 정부의 입으로부터 같은 날 알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사회민주당의 분파는 이것이 외국의 침략에 대항한 독일의 방어전쟁의 문제라고, 조국의 생사가 걸린 문제라고, 문화와 러시아 전제주의에 대항한 자유전쟁의 문제라고 결론지었다.

전쟁의 분명한 배경, 이 배경을 불가피하게 숨기는 베일, 전쟁 발발을 휘감은 모든 외교놀음, 모두가 독일의 목숨을 노리며 독일을 약화시키고 모욕하며 굴복시키길 원하는 적들 세계의 아우성, 이 모든 것이 독일 사회민주당에게 갑작스런 사실일 수 있었을까? 그의 판단력과 비판적 통찰력을 무리하게 요구하는 일일 수 있었을까? 특히 우리 당에게는 더더욱 그럴리가 없었다! 우리당은 독일이 치른 큰 전쟁 2개를 이미 경험했고 이로부터 중요한 교훈들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역사에 관한 초보자라도 오늘날 알고 있다. 오스트리아에 대항한 1866년의 첫번째 전쟁이 비스마르크에 의해 계획적이고 장기적으로 준비되었음을, 처음부터 그의 정책은 오스트리아와의 단절을, 전쟁을 향하고 있었음을. 그 당시 왕세자이자 후일 황제가 된 프리드리히는 그해 11월 14일자 일기에 수상의 이런 의도를 기록했다고 한다. 아우어는 그의 팜플렛『세당기념식xvii과 사회민주당』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비스마르크)는 수상직에 오르면서 이미,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하도록 만들 계획이었지만 그 때는 아니, 그가 적절하다고 여기는 순간까지는 어쨌든 너무 일찍 국왕폐하와 그 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도록 조심했다고 한다.’ 이 고백을 지금 사람들은 당시의 빌헬름 프로이센국왕이… ‘그의 국민에게’ 한 호소문의 취지와 비교한다고들 한다. 그 호소문의 표현은 다음과 같다.

‘조국이 위험에 처해 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대부분이 동일한 적에 대항해 무장해 있다!

내가 독일인 국가 하나를 외세로부터 해방시킬 필요 때문에 자유로운 결정으로 그리고 이전의 부당함에 원한을 품지 않고 오스트리아의 황제에게 동맹의 손길을 내민 지 겨우 몇 년이 지났을 뿐이다... 그러나 기대는 어긋나고 말았다. 오스트리아는 자신의 제후들이 한 때 독일을 지배했음을 잊으려 하지 않는다. 더 젊지만 왕성하게 발전하고 있는 프로이센을 오스트리아는 결코 자연스런 동맹국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적대적인 경쟁자로 인식하고자 한다. 프로이센에 이로운 것은 오스트리아에 해롭게 된다는 이유를 들어서 프로이센을 무슨 일에서든 척결되어야 하는 것으로 본다. 오래되고 불행한 질시가 다시 활활 타오른다. 프로이센이 약화되고, 절멸되고, 폐위되기를 바란다. 프로이센에 대해 어떤 조약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연방xviii의 제후들에게 프로이센에 반대할 것을 호소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연방을 탈퇴하도록 유인한다. 독일 지역 그 어디를 둘러보더라도, 우리는 적들에 둘러싸여 있고, 그들의 투쟁구호는 프로이센의 굴복이다.’

이 정당한 전쟁에 하늘의 축복을 간구하기 위해 국왕 빌헬름은 6월 18일을 거국적인 국가-기도-및-속죄의 날로 정하는 칙령을 내렸다. 그는 그 칙령 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국민이 평화의 축복을 누리게 해주려는 내 노력을 성공으로 장식하는 것이 신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xix

우리당의 원내분파가 당역사를 완전히 잊지 않았다면, 8월 4일의 전쟁발발의 반주음악이 예전부터 잘 알려진 멜로디와 노랫말들을 생생하게 환기시키는 것으로 여겨졌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면. 1870년 프랑스와의 전쟁이 연이어 일어났고, 그 발발과정은 역사 속에 문서 하나와 확고히 연계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엠스의 전보』xx 이다. 이 문서는 전쟁만들기에 있어 모든 부르주아정치에 고전적인 군호의 하나가 되어버렸고 또 우리당의 역사에서 기억할 만한 일화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때 “어떻게 전쟁이 만들어지는가”를 밝혀내서 민중에게 보여주는 것을 과제와 책무로 여겼던 사람이 바로 원로 리프크네히트였고, 독일사회민주당이었다.

그런데 위협당한 조국의 수호만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 만들기 자체는 비스마르크가 고안한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그 특유의 치밀함으로 부르주아정치의 오래되고 일반적이며 진정으로 국제적인 기술 하나를 따랐을 뿐이다. 정부들의 계산에 이른바 여론이 한 몫 하게 된 이래, 언제 어디엔들 교전하는 각 측이 오직 조국의 방어만을 위해 그리고 상대측의 비열한 침략 앞에서 자신의 정당한 일을 위해 무거운 마음으로 칼집에서 칼을 뽑지 않은 그런 전쟁이 하나라도 있었던가? 그 전설은 그래서 탄약과 마찬가지로 작전에 속한다. 이 게임은 오래된 것이다. 새로운 것은 단지, 사회민주당이 이 게임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iVerhandlungen des Reichstags, XIII. Legislaturperiode, II. Session, Bd. 306, Stenographische Berichte, Berlin 1916, S.8-9

ii<진정한 야콥(Der Wahre Jacob)>, 독일사회민주당의 풍자잡지, 빌헬름 블로스(Wilhelm Blos)에 의해 1879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창간되어 1900년부터는 혁명주의대신 개량주의노선을 견지했다. 몇몇 단절을 겪으며 1933년까지 유지되다 나치정권에 의해 폐간당했다.

iii프랑스-프로이센전쟁(1870~1871). 전쟁발발 당시 프랑스는 보나파르트왕가의 나폴레옹 3세가 통치하는 제국이었다.

iv1866년 6월부터 7월까지 지속된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왕가)와 프로이센(호엔졸레른왕가) 사이의 전쟁은 독일에서의 주도권을 놓고 벌인 경쟁에서 프로이센이 유리하도록 결정났다. 1866년 8월 23일 프라하평화협정에서 오스트리아는 독일연방의 해체에 동의해야만 했고 이후의 독일국가연방에서 제외되었다.

vAugust Bebel, Ausgewählte Reden und Schriften, Bd.1, Berlin 1970, S.117

viVerhandlungen des Reichstags, XIII. Legislaturperiode, II. Session, Bd. 306, Stenographische Berichte, Berlin 1916, S.2

vii위과 같은 책, S.6-7

viii1914년 8월 4일 독일제국의회 개막회의에서 빌헬름 2세는 선동적으로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어떤 정당도 모른다, 오직 독일인만을 안다.”

ixVerhandlungen des Reichstags, XIII. Legislaturperiode, II. Session, Bd. 306, Stenographische Berichte, Berlin 1916, S.2

x1914년 7월 23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세르비아민족주의자들에 의한 프란츠 페르디난트대공의 암살과 관련해여 보낸 최후통첩에서 세르비아정부에게 자백을 요구했다. 이는 민족자결권에 위배되게 세르비아의 국내문제에의 개입을 의미했다. 이 최후통첩을 세르비아가 거부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이를 전쟁도발의 계기로 삼았다.

xiKrieg? Ultimatum, in Vorwärts(Berlin), Nr.200, 25. Juli 1914

xiiKrieg?, in Leipziger Volkszeitung, Nr.168, 24. Juli 1914

xiii 카톨릭교회 내에서 국가적 교회나 교구의 독립성에 반대하고 교황청으로의 권력 집중과 그 영향력 강화를 지지하는 언론

xivDas Wolffsche[Telegraphen- ]Bureau(W.T.B.). 베른하르트 볼프(Bernhard Wolff)에 의해 1849년 설립된 독일의 정보통신사

xvDer Dreibund, 1879년 독일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사이에 체결된 2국동맹에, 1882년 프랑스와 이해의 충돌에 빠진 이탈리아왕국이 가담하면서 3국동맹으로 확대되었다.

xviDas deutsche Weißbuch über den Ausbruch des Weltkrieges, Pößneck in Thür. 1914. S.3-4.

xviiSedanfeier, 1870/71년의 프로이센-프랑스전 당시 프로이센군이 프랑스군을 대파하고 나폴레옹 3세와 대약 8만 3천명의 프랑스군사들을 생포함으로써 전승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세당전투(1871년 9월1일~2일)를 기리는 기념식. 독일제국 당시 9월 2일이 세당일(Sedantag)로 기념되었다.

xviiiDeutscher Bund, 1806년 붕괴된 신성로마제국의 영방국가(Territorialstaat)들을 포괄하여 현재의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룩셈부르크지역에 1815년 성립되었다. 오스트리아제국과 프로이센왕국이 주도국가들이었고, 오스트리아의 영토중 일부(헝가리, 롬바르디아, 베네치아 및 달마치아)와 프로이센의 영토중 일부(동프로이센, 포센)는 신성로마제국의 영토가 아니였다는 이유로 제외되어 이 두나라는 각각 독립국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 이 연방은 1866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전쟁의 결과 해체되었다.

xixI. Auer, Sedanfeier und Sozialdemokratie, 1895년 9월 4일 베를린의 한 집회에서 한 연설문, Berlin 1895, S. 12-13

xxDie Emser Depesche, 프로이센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870년 7월 14일 자신이 위조한 전보 하나를 공개토록 했다. 이는 빌헬름 1세가 프로이센 주재 프랑스대사와 1870년 7월 13일 바트 엠스(Bad Ems)에서 나눈 담화에 대해 보고하는 것이었다. 이 엠스의 전보는 비스마르크가 바라던,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전쟁포고를 유발했다.

 

제3장 독일제국주의의 대두와 공공연히 준비된 전쟁

우리당은 휠씬 더 깊은 연관과 더 근본적인 통찰만으로도 이 전쟁의 진정한 본질과 실제 목적을 간파하고 그래서 이 전쟁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놀라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14년 8월 4일을 초래한 과정들과 추동력들은 전혀 비밀이 아니었다. 이 세계대전은 몇 십 년동안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한걸음씩 시시각각 준비되고 있었다. 현재 다양한 사회주의자들이, 베일 뒤에서 이 악행을 빚어낸 “비밀외교”에 격분해서 그것의 폐지를 선언한다면, 그렇게 그들은, 뇌우를 일으키려 자신들의 주물을 때리는 보토쿠데인디언마냥, 그 가련한 무뢰한들이 마치 비밀스런 마법을 가진 듯이 치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국가 운명의 이른바 조종자들은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부르주아 사회의 지각 내의 압도적인 역사적 사건과 변위를 통해 떠밀린 체스 조각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 이런 사건과 변위를 명확히 파악하려 내내 노력해 왔고 또 그럴 능력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독일 사회민주당이었다.

최근 역사발전에서 2개의 가닥들이 곧바로 지금의 이 전쟁으로 연결된다. 그 하나는 이른바 민족국가들, 즉 근대적인 자본주의국가들의 확립시기에서, 프랑스에 대한 비스마르크의 전쟁에서 유래한다. 1870년의 전쟁은 알자스-로렌의 합병으로 인해 프랑스공화국을 러시아의 품안에 뛰어들게 만들었고 유럽을 2개의 적대진영들로 양분했으며 광적인 군비경쟁의 시대를 열었다. 이렇게 해서 현재의 세계 대화재로 이어지게 될 최초의 불씨를 당긴 것이었다. 비스마르크의 군대가 아직 프랑스에 있는 동안 마르크스는 브라운슈바이크위원회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순간의 함성들 때문에 완전히 귀가 먹어버리지 않은 자라면, 아니 독일민중을 마비시켜야할 이해관계를 갖지 않은 사람이라면, 1866년의 전쟁이 1870년의 전쟁을 품고 있었듯이 1870년의 전쟁은 독일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을 반드시 품고 있음을 통찰해야 한다. 나는 반드시, 불가피하게라고 말하는데, 이는 있음직 하지 않지만 그래도 혹시 그 이전에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생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이 있음직 하지 않은 경우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독일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은 지금 이미 하나의 기정사실로 여겨져야 한다. 이 전쟁이 이로울지 해로울지는 전적으로 승리자인 독일의 현재 행보에 달려 있다. 그들이 알자스와 로렌을 취한다면, 프랑스는 러시아와 함께 독일에 대항해 싸울 것이다. 그 파멸적인 결과들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i

이 예언은 그 당시에는 비웃음을 샀다. 사람들은 프로이센을 러시아와 연결하는 유대가 너무나 강해서 전제주의 러시아가 공화주의 프랑스와 제휴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마저도 망상이라 여길 정도었다. 이러한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완전히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예측한 그 모든 것은 마지막 글자 하나까지 들어맞았다. 아우어는 자신의『세당기념식』에서 말하기를, “…무엇인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그래서 그 점에 있어서, 성공을 위해선 맹목적으로 굴복하는 일상적인 정치와는 구별되는 것, 그것이 바로 사회민주당의 정치이다.”ii

그렇지만 프랑스가 마치 비스마르크가 자행한 강탈에 대항해 1870년 이래 만기된 설욕 때문에 지금 더욱 더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독일제국과의 힘겨루기로 휘몰린 것인 양, 오늘의 전쟁이 그 핵심에 있어서 알자스-로렌에 대한 이미 많이 비방된 그 “복수”인 것인 양 그런 식으로 연관성이 파악되어서는 안된다. 이런 것은 독일 전쟁선동자들이 꾸며낸 안일한 민족주의적 전설로서, 패배를 “잊을 수 없어” 복수를 꾀하는 음흉한 프랑스에 대하여 떠들어댄다. 비스마르크의 언론 친위병들이 1866년에, 매력적인 신데렐라 프로이센보다 높았던 자신의 이전 지위를 “잊을 수 없어 하는” 폐위된 공주 오스트리아에 대해 꾸며댔던 것처럼. 사실 알자스-로렌에 대한 복수는 겨우 몇몇 애국적인 어릿광대들의 극적인 필수품, 낡은 방패 문장의 동물, “벨포르의 사자”iii 정도로 되어버렸다.

프랑스의 정치에서 그 합병은 벌써 극복되고, 새로운 걱정에 의해 추월당했다. 프랑스정부도 다른 그 어떤 진지한 정당도 그 땅 때문에 독일과 전쟁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비스마르크의 유산이 현재 세계 대화재로의 최초의 장작 조각이 되었다면, 이는 오히려 한편으로는 프랑스와 독일을 그리고 이와 더불어 유럽 전체를 군비경쟁의 급격한 광기로 몰아 넣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의 러시아와의 동맹을 그리고 독일의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어쩔 수 없는 귀결로 초래했다는 의미에서 이다. 그렇게 해서 한편으로는 유럽정치의 권력요소로서 러시아 차리즘이 비상하게 강화되었고, 바로 그 이후 러시아의 총애를 얻기 위한 프로이센-독일과 프랑스공화국 사이의 체계적인 아첨경쟁이 시작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의 정치적인 결탁이 야기되어, 독일정부의 백서에서의 내용이 보여주듯이, 오늘의 전쟁에서의 “전우관계”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이렇게 1870년의 전쟁은 그 결과로서 독일-프랑스 대립축을 둘러싼 유럽의 외적인 정치적 그룹화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내 민족들의 삶에 군국주의의 형식적 지배를 도입했다. 이러한 지배와 그룹화는 역사적으로 발전해 온 것이지만 그 전쟁 이래 전혀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졌다. 한편 오늘의 전쟁에 맞닿아 있으면서 마르크스의 예언을 빛나게 확인해주는 두번째 가닥은, 마르크스가 더 이상 경험하지 못한, 국제적 성격의 사건들로부터, 즉 지난 25년간의 제국주의의 발전으로부터 나온다.

1860년대와 1870년대의 전쟁기 이후 새로이 개편된 유럽에서 기초를 다진 자본주의의 약진은, 특히 창설열기iv와 1873년 공항에 뒤이은 오래 동안의 침체를 극복한 뒤 90년대의 호황 속에서 전대미문의 절정에 도달했다. 이것은 알려져 있는 것처럼, 유럽국가들의 새로운 질풍노도의 시기를, 세계의 비자본주의적 국가들과 지대를 찾아 벌이는 경쟁적인 팽창의 시기를 열였다. 1880년대 이래 이미 식민지 정복을 향한 새롭고 특히 정력적인 열망이 대두했다. 영국은 이집트를 점령하고 남아프리카에서 엄청난 식민제국을 건설했다. 프랑스는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와 동아시아의 통킹을 점령했다. 이탈리아는 아베시니언v 을 차지했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에서 정복을 마무리하고 만주로 돌입했다. 독일은 아프리카와 남태평양에서 최초의 식민지들을 획득했다. 마지막으로 미국도 그 윤무에 끼어들어 필리핀을 통해 동아시아에서의 “이해관계”를 손에 넣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치열하게 찢어발긴 이 시기, 1895년 청일전쟁 vi부터 시작해서 거의 끊임없이 연쇄적으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들을 초래했던 이 시기는 거대한 중국원정vii에서 절정을 이루며 1904년의 러일전쟁viii으로 마감된다.

연이어 발생한 이 모든 사건들은 유럽 외부의 새로운 적대관계들을 세계 곳곳에 만들어냈다. 북아프리카에서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사이에, 이집트에서는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중앙아시아에서는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동아시아에서는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태평양에서는 미국과 일본 사이에. 그것은 생동하는 바다, 즉 날카로운 대립관계와 일시적 연합의, 긴장과 이완의 출렁임이었다. 이때 수년 마다 유럽세력들 사이에 부분적인 전쟁의 발발 위협이 생겨났다가 또 다시 사라졌다. 이로부터 누가 보아도 다음 사항들은 분명했다. 1, 아시아와 아프리카 민족들의 등 뒤에서 자본주의국가들 모두가 모두에 대항해 조용히 진행하는 비밀스런 그 전쟁이 언젠가는 전반적인 담판을 초래해서,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뿌려진 바람이 언젠가는 무시무시한 폭풍이 되어 유럽으로 몰아칠 수 밖에 없다는 점, 그것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의 사건들의 지속적인 침전물들이 유럽에서의 점점 더 늘어가는 군무장들로 나타나면 나타날 수록 더 끔찍하게. 2, 제국주의국가들 사이의 변화하는 부분적 대립관계들이 잠정적으로 그룹화할 수 있는 하나의 중심축, 즉 하나의 압도적으로 강력한 대립관계를 발견하게 되자마자 유럽의 세계대전이 폭발하게 될거라는 점. 이 상황은 독일제국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형성되었다.

독일에서 짧은 기간 내에 압축되어 이뤄진 제국주의의 대두는 순수배양 속에서 관찰될 수 있다. 제국창건 그 이후 대공업과 무역의 전례 없는 약진으로 1880년대에 여기에서 자본축적의 두 가지 특징적인 고유형식들이 생겨났다.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카르텔의 발달과 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은행업의 형성과 집중이 바로 그것들이다. 전자를 통해 중공업, 즉 국가납품과 군무장과 제국주의적 계획들(철도건설, 광산채굴 등)에 직접적 관심을 둔 자본부문이 국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요소로 조직화되었다. 후자를 통해 금융자본이 항상 긴장되고 더 거대한 에너지를 가진 하나의 폐쇄된 세력으로 압착되었다. 국가의 산업과 통상과 크레딧에서 영역적으로 제멋대로 행동하면서, 국가경제와 사적 경제에서 똑같이 결정적이고, 제한없이 그리고 비약적으로 팽창가능하며, 항상 이윤과 활동에 굶주리고, 간접적이며 그래서 관대하고 대담하며 가차없고, 처음부터 국제적이며, 기질 전체로 볼 때 활동의 장으로는 세계무대가 적격인 그러한 세력으로 금융자본이 압착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강력하며 정치적 주도성에 있어 가장 도전적인 인물의 지배와 어떤 반대도 불가능한 가장 약한 의회주의, 게다가 노동자계급과는 극히 대조적이게 단합되어 정부를 방패로 삼고 있는 모든 부르주아 계층을 덧붙인다면, 세계가 이미 분할될 대로 분할되어 있는 때 엄청난 식욕을 갖고 세계무대에 출현한 젊고 힘에 넘치며 어떤 억제로도 곤란을 겪지 않는 이 제국주의가 재빨리 전반적 불안정화의 예상할 수 없는 요소가 될 수 밖에 없음은 누구나 예견할 수 있었다.

이는 이미1890년 말 제국 군사정책의 과격한 돌변을 통해, 1898년과 1899년 연이어 급히 진행된 해군법안들과 더불어 나타났었다. 그 법안들은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이뤄진 전함의 급작스런 배가, 환산하면 거의 20여년에 해당하는 엄청난 해군무장의 건축계획을 의미했다.ix 이는, 1902년의 관세율x이 그 두개 해군법안을 반영한 것에 불과한 것처럼 제국의 재정정책과 통상정책의 광범위한 전환, 한발 더 나아간 논리적 귀결로 볼 때, 사회정책과 내부 계급관계 및 정당관계들 전체의 광범위한 전환일 뿐만이 아니었다. 해군법안들은 특히, 독일제국 창건이래 결정적 역할을 해온 대외정책에서의 과시적인 노선 전환을 의미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제국이 일종의 내륙세력이고 또 그렇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바탕을 둔 정책을 펼쳤었다. 그래서 독일 해군은 기껏해야 해안선 방어를 위한 쓸데 없는 부속품 정도로 여겨졌다. 당시 차관 홀만 스스로도 1897년 3월 제국의회 예산위원회에서, “해안선 방어를 위해 우리는 해군이 필요 없다. 해안선은 저절로 방어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독일이 육지뿐만 아니라 해양에서도 제 1의 세력이 되어야 한다는 완전히 새로운 강령이 세워졌다. 더불어 비스마르크의 대륙정책이 세계정책으로 전환되었고, 군무장의 목적이 방어에서 공격으로 변화되었다. 그러한 사실들이 너무 분명했기 때문에, 부득이한 코멘트가 독일제국의회 자체 내에서 제공되었다. 이미 1896년 3월 11일에, 독일제국 창립 25주년 기념식에서 해군법안의 전조로서 새로운 강령을 황제가 언급한 그 유명한 연설xi이 있은 뒤 중앙파xii의 당시 지도자 리버는, “무제한의 해군계획들”을 거론하며 이에 대항해 결연히 저항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앙파의 또 다른 지도자 쇄들러는 1898년 3월 23일 제국의회에서 첫 번째 해군법안을 놓고, “우리가 육지에서 제1의 세력이면서 해양에서도 제1의 세력일 수는 없다는 것이 국민의 견해요. 지금 당신들이 나에게 우리는 그것을 전혀 원하지 않는다라고 외친다면—그렇소, 신사여러분, 당신들은 그 시작에 서 있소, 그것도 아주 대단한 시작에”라고 외쳤다. 그리고 두 번째 법안이 나오자, 바로 그 쇄들러는 1900년 2월 8일 제국의회에서, 어떤 새로운 해군법안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이전의 해명들을 지적한 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리고 현재의 이 수정법령은 다른 무엇도 아니라, 발 묶인 우리 해군을 20여년을 앞질러 두 배로 증강시킴으로써 세계정치의 토대로서의 세계해군 창설을 개시하는 것이다.” 한편, 정부 자체도 새로운 노선의 정치 강령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1899년 12월 당시 외무차관 폰 뷜로프는 두번째 해군법안의 근거를 들면서 이렇게 말했다. “영국인들이 그레이트브리튼(위대한 영국 – R.L.)에 대해 말한다면, 프랑스인들이 뉴벨 프랑스(새로운 프랑스 – R.L.)에 대해 논한다면, 러시아가 아시아를 합병한다면, 우리도 위대한 독일에 대한 요구가 있다.… 우리가…우리의 통상과 다른 곳에 있는 우리 동족과 우리의 선교사들 그리고 우리 해안선의 안전을 보호하는 데 충분한 해군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렇게 우리는 국가의 치명적인 이해관계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다음 세기에 독일민족은 망치 아니면 정이 될 것이다.”xiii[강조 – R.L.] 해안선 방어, 선교사들과 통상이라는 미사여구를 빼고나면, 더 위대한 독일, 다른 민족들에 대한 망치의 정치라는 간결하고 힘찬 강령이 남는다.

이러한 자극이 제일 먼저 누구를 겨냥한 것인가는 모두에게 분명했다. 새롭고 공격적인 해군정책은 독일을 세 1의 해상세력인 영국의 경쟁자로 만들 것이었다. 그리고 영국에서도 바로 이렇게 이해되었다. 해군개혁과 이와 관련된 강령 연설들은 영국에서 큰 동요를 유발했고, 그 이래 잦아들지 않았다. 1910년 영국 하원의 해군논쟁에서 로버트 세실경은 영국과 싸움을 시작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도대체 독일이 거대한 해군을 만들려는 그럴듯한 이유를 그 누가 한번 알려 주길 바란다고 거듭 말했다. 지난 15년간 양 측에서 계속되어온 해상권 경쟁은, 마지막으로 전함과 초전함의 열띤 건축은 이미 독일과 영국간의 전쟁이었다. 1899년 12월 11일의 해군법안은 독일의 선전포고였고, 영국은 이를 1914년 8월 4일 접수했다.

정확히 말해서, 이 해상권 경쟁과 세계시장을 놓고 벌이는 경제적 경쟁 투쟁 사이에는 전혀 공통점이 없다. 이른바 독일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억제했다는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많이들 떠들어대는 그 ‘영국의 독점’은, 격분한 프랑스의 ‘복수’도 여전히 포기할 수 없어 하는 애국주의적 전쟁전설들의 왕국에 속한다. 저 ‘독점’은 영국 자본가들에게는 고통스럽게도 이미 1880년대 이후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러시아, 인도, 일본, 특히 독일과 미국의 산업발전은 19세기 전반부에서 1860년대까지의 영국의 독점에 종지부를 마련했다. 영국 외에도 각 나라들이 지난 몇 십년간 차례로 세계시장에 뛰어들었고, 자본주의는 그 본질상 당연하게 그리고 질풍처럼 자본주의 세계경제로 발전했다.

그러나 오늘날 심지어는 여러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밤잠을 설치게 하고 또 이 기특한 자들에 따르면 국제 사회주의의 안녕을 위해 타도되어야 마땅할 것으로 보이는, 영국의 해상권, 이 해상권은 세계 5개 부분들로 대영제국이 팽창한 결과의 하나로서 지금까지 독일자본주의를 거의 방해하지 않았다. 독일자본주의는 오히려 그 ‘멍에’ 아래에서 엄청난 속도로 성장해서 튼실한 엉덩이를 가진 매우 건장한 젊은이가 되었다. 참으로, 바로 영국 자체와 그 식민지들은 독일의 대공업적 약진의 가장 중요한 초석들이고 역으로 독일은 대영제국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없어서는 안될 고객이다. 서로 방해가 되기는 커녕 영국과 독일의 대자본주의적 발전은 극도로 상호의존적이며 광대한 분업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특히 영국의 자유무역을 통해 장려된다. 독일의 상품무역과 세계시장에서의 이해관계는 그래서 독일정치에서의 전선변경과 해군건설과는 전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마찬가지로 지금까지의 독일 식민지 소유 자체도 영국과의 세계적 적대관계와 해양경쟁을 초래하지 않았다. 독일 식민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제1의 해상력은 필요가 없었다. 그 특성상 어느 누구도 독일제국을 시기하지 않았고 영국은 더더욱 독일을 시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식민지들을 지금 전쟁중에 영국과 일본이 빼앗아간 것은, 노획물의 주인이 바뀐 것은 전쟁의 일상적인 대응이고 작용에 불과하다. 이전에 평화시에는 정신병원에 감금되고 싶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벨기에를 삼키겠다는 계획따위는 감히 세우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독일 제국주의의 탐욕이 광포하게 벨기에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남동- 과 남서아프리카를, 빌헬름스란트와 칭타오를 놓고라면 결코 독일과 영국사이에 육지에서든 해양에서든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의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독일과 영국사이에는 심지어 조약 하나의 준비가 끝난 상태였는데, 이에 따라 두 세력은 아프리카에 있는 포르투갈의 식민지들을 편안하게 분배할 예정이었다.xiv

독일측의 해상력 발달과 세계정치적인 목표는 세계에서 독일 제국주의의 새롭고 대단한 편력을 예고했다. 일류의 공격적 해군과 그 확장에 병행하여 이뤄진 상호보완적인 육군의 증강을 통해 일단 미래의 정치를 위한 도구가 마련되었고, 그 정치의 방향과 목표에게는 가늠할 수 없는 가능성들의 문이 열렸다. 해군력 강화와 군무장 그 자체는 독일중공업에게 광대한 사업이 되었고, 동시에 카르텔자본과 은행자본에게도 드넓은 세계 속에서 장래의 작전욕구를 위한 무한한 전망이 펼쳐졌다. 이로써 모든 부르주아정당들이 제국주의의 깃발 아래로 선회하는 것은 보장되었다. 제국주의적 중공업의 핵심부대인 민족자유주의자들의 예를 중앙파가 따랐다. 그렇게 소리 높여 비난했던 세계정치적 해군법안을 1900년 받아들임으로써 중앙파는 결정적으로 정부의 당으로 전락했다. 그 전철을 해군법안의 낙오병, 즉 격심한 관세률 법안의 경우에서 자유주의자들이 밟았다. 그리고 이 행렬을 완성시킨 것은 귀족층으로서, 운하건설xv과 ‘무서운 해군’에 대한 반항적인 반대자에서, 해양군국주의와 식민지 강탈 그리고 이와 연계된 관세정책의 열성적인 식객이자 기생충으로 전향했다. 이른바 호텐토텐선거라 불린 1907년의 제국의회선거xvi는, 하나의 깃발 아래 단합되어 제국주의적 열광으로 발작하는 부르주아적 독일 전체를, 뷜로프의 독일을, 즉 세계의 망치로서 등장할 것을 소명으로 생각하는 그러한 독일을 드러냈다. 또한 이 선거는, 정신적인 타민족박해 분위기에 있어서 8월 4일 독일의 전주곡이었던 이 선거는 독일노동자계급에 대해 뿐만 아니라 나머지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에 대한 도전이자, 특별히 누구 하나가 아닌 모두를 향해 내뻗은 주먹이었다.


iKarl Marx, Brief vom 1.September 1870 an den Braunschweiger Ausschluß der sozialdemokratischen Arbeiter-Partei in Lötzen und vor dem Gericht, Braunschweig, 1872, S.9

iiI. Auer, Sedanfeier und Sozialdemokratie, 1895년 9월 4일 베를린의 한 집회에서 한 연설문, Berlin 1895, S.9

iiiDer Lion de Belfort, 프로이센-프랑스전쟁 당시 프로이센군의 포위에 대항해 벨포르시민들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103일 동안(1870년 11월 3일~ 1871년 2월1 3일) 시를 방어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벨포르는 그러나 이런 성공적인 방어에도 불구하고 당시 프랑스정부가 강력하게 시민들에게 항복을 권유하여 결국 프로이센군에 점령당하게 된다. 이 사자상은 점령된 당시인 1871년 12월 시의회에 의해 건립계획이 이뤄져 1880년 완성되었고, 이후 프랑스의 자유- 와 투쟁의지의 상징이 되었다.

ivGründerfieber, 1848년부터 시작되어 주식시장붕괴가 일어난 1873년까지 오스트리아와 특히 독일의 경제붐 시대, 창설시기의 열기. 당시 수많은 주식회사들이 마구 창설되었고 투기가 만연했다.

vAbessinien, 북아프리카 홍해연안, 현재의 에티오피아와 에트루리아지역에 기원전 980년부터 기원후 1974년까지 존재했던 국가. 1931년까지는 제국, 그 이후부터 1974년까지는 입헌군주국으로서 에티오피아라 불리기도 했다. 1974년 쿠테타에 의해 제국이 폐지되고 에티오피아인민민주공화국으로 되었다.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19세기의 열강들의 식민지분할정책에 대항해 살아남았었고 존재할 당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였다.

vi한반도에 대한 우세권을 놓고 벌인 청일전쟁은 1894년 8월 1일 일본이 중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되어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평화조약과 함께 일본이 유리하게 끝났다. 중국은 일본의 요구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제국주의 세력들의 영향권 안에서 중국이 분할되는 단계가 시작되었다.

vii1899년 북중국에서 위화단(Ihotuan)의 반제국주의 민중봉기가 발생했고, 1900년 독일제독 알프레드 발더제 백작 휘하의 제국주의 8개국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1901년 종결회의록에서 중국은 특히 약 14억 마르크의 배상금을 내고 개입군대를 위한 방호기지들을 구축하는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viii1904년 2월부터 1905년 9월까지 중국지역들에 대한 우세권을 놓고 벌어진 러일전쟁은 러시아제국주의의 패배로 끝났다.

ix1898년 3월 28일 제국의회에서 가결된 첫번째 해군법안에 따르면 독일전투해군은 1904년까지 4억 8천 2백만 마르크의 비용을 들여 근본적으로 강화될 계획이었다. 이렇게 독일제국주의는 독일제국주의와 영국제국주의사이의 대립관계의 첨예화를 초래할 해양에서의 군비경쟁을 시작했다. 1900년 6월에 의결된 해군법은 1898년의 해군법안으로 정해졌던 전투해군을 다시 배가할 준비를 했다.

x1902년 12월 14일 독일제국의회에서 의결되고 1906년에 발효된 관세율은 모든 수입 상품들, 특히 모든 농산물에 대해 매우 증가된 세율을 적용했다. 이를 통해 생계유지비가 갑작스럽게 상승했다.

xi독일제국 황제 빌헬름 2세는 1896년 1월 18일 제국창건 제 25주년을 기념하는 한 연회에서, 해외 거주 독일인과 무역함선들을 보호하고 식민지들을 제국에 단단히 연결해야 한다는 핑계로 더 이상의 군무장을 위한 증가된 자금을 간접적으로 요구했다.

xiiZentrum, die deutsche Zentrumspartei(1870 -1933) . 독일의 카톨릭과 정치적 카톨릭주의를 대표한 정당중의 하나. 입장은 보수와 진부의 그 중간위치에 있었고 제국의회에서 ¼에 달하는 의석을 확보하여 과반수를 획득해야 하는 경우 작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xiiiStenographische Berichte. Verhandlungen der Reichstags, X. Legislaturperiode, I. Session, 1898/1900, Vierter band, Berlin 1900, S. 3293–3295.

xiv1914년 6월 15일, 바그다드철도 와 포르투갈의 식민제국의 분할과 관련, 독일과 영국의 이해관계를 규정하기 위한 협상들이 종결되었다. 준비된 조약서는 전쟁의 발발로 인해 서명되지 않았다.

xv1899년과 1901년 프로이센의 하원에서 기업권과 군사권의 지지를 업고 프로이센정부가 입안한 , 라인강과 엘베강 사이의 연결운하 건설에 관한 법안이 엘베강 동쪽지역 귀족들의 저항으로 인해 부결되었다. 그 이유는 외국산 곡물이 값싸게 운송되어 곡물가격이 하락할 것을 농부들이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귀족들이 다시 저항하여 정부가 결정적인 중간부분인, 하노버와 엘베강사이의 연결운하를 포기한 후인 1905년 2월에야 이 법안은 받아들여졌다.

xviHottentottenwahlen. 1907년 1월 25일의 제국의회 총선을 놓고 제국수상 베른하르트 폰 뷜로프의 지휘 하에 이뤄진 선거전은 모든 반대세력, 특히 사회민주당을 비방하는 캠페인과 아프리카의 헤레로스와 호텐토텐에 대항한 식민지전쟁 지속을 표방하는 국수주의적 선동을 그 특징으로 했다. 사회민주당은 최대의 유권자수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낡은 선거구할당방식으로 인해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대항한 부르주아정당들의 결선투표동맹 때문에 1903년의 81석에 비해 훨씬 적은 43의 의석만을 확보했다.

 

제4장 전쟁의 뿌리: 제국주의 이해관계의 대립

독일제국주의의 가장 중요한 활동 마당은 터키였다. 그 페이스메이커는 도이취방크i와 이 은행이 아시아에서 벌이는 막대한 사업들이었다. 이러한 사업들은 독일 동방정책의 핵심을 이루었다. 1850년과 1860년 터키의 아시아부분에서는 주로 영국 자본이 활동했다. 이 자본은 스미르나ii부터 철로를 건설하고 아나톨리아 철도의 첫번째 구간을 이스미트iii까지 임차했었다. 1888년 독일 자본이 그 계획에 뛰어들어, 영국인들이 이미 건설한 구간의 경영권을 술탄 압뒬하미드로부터 얻어냈다. 그리고 이스미트에서 앙고라iv까지의 새로운 구간의 건설권도 따냈다. 이 새로운 구간에서는 스쿠타리v, 브루싸vi, 코니아vii 그리고 카이자릴방향으로 이중노선이 놓이게 되어 있었다. 1899년 도이취방크는 하이다르 파샤viii에 있는 한 항구와 그 시설들의 건설 및 경영 인가를 그리고 그 항구에서의 통상과 관세부문에 대한 독점지배권을 얻었다. 1901년 터키정부는 페르시아만까지의 거대한 바그다드철도ix의 건설을, 1907년에는 카라비란호수의 간척과 코니아평야의 관개를 도이취방크에 인가해 주었다.

이러한 거대한 ‘평화적인 문화 사업들’의 이면에는 소아시아 농민층의 ‘평화적이고’ 거대한 몰락이 있었다. 엄청난 사업들의 비용은 당연히 널리 가지를 친 공채 시스템을 통해 도이취방크가 미리 지불했다. 터키국가는 이전에 영국자본, 프랑스자본 그리고 오스트리아자본의 경우에 그랬듯이, 영원히 지멘스x, 그비너xi, 헬페리히xii등과 같은 주인들의 채무자가 되었다. 이 채무자는 그 때부터 채무의 이자를 갚기 위해 국가로부터 끊임없이 거대한 총액을 뽑아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렇게 건설된 철로의 총이익도 보장해야 했다. 가장 현대적인 교통수단과 시설들이 여기서 전적으로 후진적이며 부분적으로는 자연경제적인 상태들에, 원시적인 농업경제에 강요되었다. 동양의 전제정치로 이미 수 백 년 동안 무자비하게 착취당해서, 국세를 제하고 나면 농민들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을 것이라고는 거의 없도록 생산하는 이러한 농업 경제의 메마른 대지로부터는 철도를 위해 필요한 거래와 이윤이 생겨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상품거래와 여객운수는 그 나라의 경제적 문화적 여건에 걸맞게 그 발전 정도가 낮았고 아주 느리게 증가했다. 요구되는 자본주의적 이윤의 형성에 있어서 모자라는 것은 이제 이른바 ‘킬로미터 개런티’xiii라는 형태로 터키정부가 철도회사를 매년 지원했다. 터키의 유럽부분에서 오스트리아자본과 프랑스자본이 바로 그 방식으로 철로를 건설했는데, 터커의 아시아부분에서는 도이취방크가 그 시스템을 사업들에 이용했다. 보조금 지불을 담보하고 보장하기 위해 터키정부는 유럽자본의 대리자, 즉 이른바 공채행정위원회에 터기 국가수입의 주요 원천인 십일조를 일련의 지방들로부터 송금했다. 1893년부터 1910년까지 터키정부는 예를 들어 앙고라까지의 철도구간에 대해 또 에스키-쉐히르-코니아xiv구간에 대해 그런 식으로 약 9천만 프랑스 프랑을 ‘보조’했다. 터키국가가 유럽의 채권자들에게 늘 다시 저당잡힌 ‘십일조’는 곡물, 양, 비단 등 아주 옛적부터 이뤄져온 농업 공물들이었다. 그러한 십일조는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세금임차인들에 의해, 대혁명 이전 프랑스의 그 악명높은 징세관의 방식으로 걷혀졌다. 이때 국가가 각 빌라엣츠(지방)의 세금수익을 사전에 개별적으로 경매를 통해, 즉 최고 값을 부르는 이들에게 현금지불을 전제로 팔았다. 한 빌라엣츠의 십일조가 한 투기꾼이나 신디케이트에 의해 낙찰되면, 이 낙찰자는 다시 그 빌라엣츠를 분할해서 개별 산트샥스(군)의 십일조를 다른 투기꾼들에게, 그리고 이들은 다시 그들의 몫을 분할해서 다른 더 작은 중개업자들에게 양도했다. 누구나 자신의 부담금을 충당하고 가능한 한 많은 이득을 얻으려 하기에, 그 십일조는 농부들에게 가까이 다가올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임차인이 잘못 계산했다면, 그는 농부를 희생해서 배상할 궁리를 했다. 농부는 거의 항상 빚을 진 채 자신의 수확물을 팔 수 있을 순간을 초조하게 기다리지만, 추수를 해도 탈곡을 못한 채 십일조임차인이 제몫을 챙겨갈 적절한 시기를 정할 때까지 종종 몇 주씩 기다려야만 했다. 보통의 경우 그 임차인은 동시에 곡물거래상이기도 하기에, 최저가로 그 수확물을 쥐어짜내기 위해서, 수확물이 모두 들판에서 썩을 위기에 처한 농부들의 이러한 절박한 사정을 이용했다. 그는 불평하는 농부들의 불만에 대해 관리들 특히 묵타스(지역장)의 도움을 확보할 줄도 알았다. 임차인을 찾기 힘든 경우에 정부는 그 십일조를 정부가 현물로 걷어서 창고에 옮긴 뒤 빚진 ‘보조금’으로 자본가들에게 보냈다. 이것이 유럽자본의 문화활동을 통한 ‘터키의 경제적인’ 재생의 내부 메커니즘이다.

이러한 작업들을 통해 이중의 결과가 성취되었다. 소아시아의 농업이 유럽자본, 이경우에는 특히 독일의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의 이득을 위해 잘 조직화된 착취과정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독일의 ‘이해관계의 영역들’이 터키에 성장했다. 이것은 다시 터키를 정치적으로 ‘보호’할 토대이자 계기를 제공했다. 동시에, 농부층을 경제적으로 착취하는데 필요한 착취기구, 즉 터키정부는 독일외교정책의 순종적인 도구이자 노예가 되었다. 이전부터 이미 터키의 재정, 관세정책, 세금정책, 국가지출은 유럽의 통제 아래 있었다. 독일의 영향력은 특히 군사조직에서 강력해졌다.

이 모든 것으로 볼 때, 독일 제국주의의 이해관계를 방어하려면 터키의 국가권력을 강화해야 했고, 그래서 이 권력의 때 이른 붕괴가 방지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터키가 급속히 해체된다면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그리고 그리스 사이에서 분할될 것이고 그러면 독일자본의 원대한 활동의 유일한 토대가 사라지고 말 것이었다. 그와 함께 지중해 국가들 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영국의 세력이 놀랍게 커질 것이었다. 그래서 독일 제국주의는 터키가 독일자본에 의해 안으로부터 갉아먹혀 결국 독일의 품안에 익은 과일로서 떨어질 때까지 ‘독립 터키국가’라는 편리한 기구를, 터키의 ‘통합성’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전에 이집트에서 영국인들이 그랬듯이, 그리고 최근에 모로코에서 프랑스인들이 그랬듯이. 예를 들어 제국주의의 유명한 대변인 파울 로어바흐는 공공연하고 솔직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터키가 사방에 탐욕적인 이웃들로 둘러싸인 채, 동양에서 되도록 어떤 영토적인 이해관계도 갖지 않는 세력에게서 도움을 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이 독일이다. 우리는 한편 터키가 사라지면 큰 손해를 입을 것이다. 러시아와 영국이 터키의 주요 상속자들이라면, 그렇게 해서 이 두 국가들의 세력이 상당히 강화될 것임은 자명하다. 하지만 그 상당한 부분이 우리에게 돌아오도록 터키가 분할된다 할지라도, 이것은 우리에게 끝없는 어려움을 의미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와는 달리 러시아와 영국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현재 터키 소유지의 이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육로로든 해로로든 또는 양쪽 모두로든 그들의 몫을 점령하고 방어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와는 달리 동양과 어떤 식으로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독일의 소아시아나 메소포타미아는, 먼저 적어도 러시아와 그와 더불어 프랑스가 현재 정치적인 목표와 이상을 포기하도록 강제된 경우에만, 즉, 먼저 세계대전의 결과가 결정적으로 독일의 이해관계에 유리하게 결정될 경우에만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전쟁과 독일정치』, [드레스덴 1914.] 36/37쪽) [강조-R.L.]

독일은 1898년 11월 8일 다마스쿠스의 큰 살라딘나무 그늘 아래에서 마호메트의 세계와 그 예언자의 녹색기를 보호하고 감싸겠다고 엄숙하게 맹세했다.xv 그래서 독일은 10년 동안 피의 술탄 압뒬하미드의 군대를 열심히 강화했고, 짧은 기간의 소원한 휴식기를 거친 뒤 청년터키xvi 체제에서도 활동을 계속했다. 그 사명은 도이취방크의 수익성 있는 사업들 이외에 주로 골츠-파샤를 수뇌로 한 독일 교관들이 터키 군국주의를 재편하고 훈련시키는 일이었다. 군대의 이러한 근대화로 인해 당연히 새로운 억압적 부담이 터키농민들의 등을 더 휘게 만들었지만, 크룹xvii과 도이취방크에게는 새로운 멋진 사업기회가 열렸다. 동시에 터키군국주의는 프로이센-독일 군국주의의 부속물이 되었고, 지중해와 소아시아에서 독일정책의 중점지역이 되었다.

독일이 진행한 터키의 ‘재생’이 시체에 시행된 이른바 인위적인 전기충격요법 시도라는 점은 터키혁명의 운명이 가장 잘 보여준다. 그 첫째 단계에서는 이데올로기적인 요소가 청년터키 운동에서 압도적이었다. 그 혁명은 생명을 기약하는 진실한 봄에 대해 그리고 터키의 내부적 쇄신에 대해 비상하는 계획들과 자기환상을 품고 있었다. 바로 그 첫번째 단계에는 청년터키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눈에 자유주의적 근대국가로 보였던 영국을 향해 정치적으로 결연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반면에 낡은 술탄의 신성한 체제의 오랜 공식적 보호자 독일은 적대자로서 등장했다. 1908년 혁명은 독일동방정책의 파산처럼 보였고 전반적으로 그렇게 이해되었다. 압뒬하미드의 폐위는 독일 영향력의 폐위처럼 보였다. 그런데 청년터키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면 할 수록, 어떤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민족적인 거창한 현대적 개혁을 하기에도 전적으로 무능함을 내보일 수록, 그들의 반동적인 마각이 드러나면 날 수록, 그들은 필연적으로 압뒬하미드의 낡은 지배방식으로, 즉 그 나라를 떠받치는 두개의 주춧돌들로 회귀했다. 그 주춧돌 중 하나는 연이어 서로 사주당한 피정복민족들 사이에서 주기적으로 조직화된 학살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나라 농민층에 대한 무제한적이고 근동적인 수탈이었다. 이로써 다시 그 폭력체제의 인위적인 유지는 ‘청년터키’에게도 주요한 근심거리가 되었고, 외교정책에 있어서도 재빨리 압뒬하미드의 전통들로, 즉 독일과의 제휴로 회귀했다.

터키 국가 내부에는 아르메니아, 쿠르드, 시리아, 아랍, 그리스(얼마 직전까지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등의 여러 민족문제들이 폭발적으로 존재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제국 내 여러지역들에서는 다양한 경제-사회문제들이 있었다. 이웃 신생 발칸국가들에 유포되는 강력하고 생명력있는 자본주의도 문제였고, 특히 국제자본과 국제외교에 의해 오랫동안 해체당해 온 터키경제도 문제였다. 이 모든 것을 놓고 볼 때 터키국가의 진정한 재생은 전혀 가망 없는 시작이며, 썩고 무너진 파편더미를 결합시키려는 그 모든 시도는 반동적인 계획으로 나아갈 것임은 누구에게나 분명했다. 이미 1896년의 크레타대봉기xviii 를 계기로 독일 사회민주당 언론에서는 동양문제에 대한 철저한 고찰이 이뤄졌고 그 결과, 크림전쟁xix시대로부터 유래하고 한 때 마르크스가 옹호했던 입장이 수정되었다. 그리고 유럽 반동의 유산의 하나인 ‘터키 통합성’이 결정적으로 폐기되었다. 청년터키 체제의 내적 사회적 불모성과 그 반혁명적 성격은 그 어디에서보다도 독일 사회민주당 언론이 빠르고 정확하게 인식했다. 터키국가처럼 그렇게 썩은 병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단지 신속한 동원을 위한 전략적 철도와 단호한 군사교관들만이 필요할 뿐이라는 것은 참으로 프로이센적인 발상이었다. 1*

이미 1912년 여름에 청년터키 체제는 반혁명세력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이 전쟁에서 터키를 ‘재생’시키려는 최초 행동은 특징적이게도 쿠테타, 헌법의 폐기였다. 말하자면 이 측면으로도 압뒬하미드 체제로의 공식적인 복귀였다.

독일측이 훈련시킨 터키군국주의는 제 1차 발칸전쟁xx에서 이미 비참하게 파산했다. 그리고 지금의 전쟁, 터키가 독일의 ‘심복’으로서 그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들어간 이 전쟁은 터키제국을 계속적으로 아니 심지어 결정적으로 해체시킬 것이다.

독일제국의의 입지로 인해, 그리고 그 핵심에 놓인 도이취방크의 이해관계로 인해 독일제국은 동양에서 모든 다른 나라들과, 특히 영국과 적대관계에 빠지게 되었다. 영국은 아나톨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의 경쟁적 사업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기름진 자본이윤을 경쟁자 독일에게 내줘야 했고 결국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독일의 영향 아래 이뤄진 전략적인 철도건설과 터키군국주의의 강화가 영국에게 있어 세계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지점인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와 인도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집트가 놓이게 되는 교차지점인 바로 이곳에서.

로어바흐가『바그다드철도』에서 쓴 것에 따르면, “영국은 유럽으로부터는 육로로 단지 한 지점, 즉 이집트를 통한 공격으로 심각하게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이집트와 더불어 영국은 수에즈운하에 대한 지배권 그리고 인도와 동아시아와의 연결뿐만 아니라, 아마도 중앙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에 있는 그의 점령지들을 잃게 될 것이다. 터키와 같은 회교 세력이 이집트를 정복한다면 또한, 인도에 있는 영국의 6천만 회교도 백성들에게 그리고 그와 더불어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에게 위험한 반작용을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터키는 첫째, 소아시아와 시리아에 증축된 철도체계를 가지고, 둘째, 아나톨리아 철도를 연장함으로써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영국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으며, 셋째, 그 군대를 증대 및 개선하고, 마지막으로 그 전반적인 경제상태와 재정이 진전된다는 그런 전제들 아래에서만 이집트에 대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xxi

또한 세계대전의 시작 즈음에 출간된 그의 책,『전쟁과 독일정치』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그다드철도는 처음부터, 콘스탄티노플 및 터키제국의 소아시아 내 군사적 요충지들을 시리아와 그리고 유프라티스 및 티그리스지역의 지방들과 직접적으로 연결할 목적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당연히, 그 철도가 부분적으로는 계획된 상태이고 부분적으로는 공사 중에 있거나 이미 완성된 시리아와 아라비아 내의 철도노선들과 결합되어 터키군대를 이집트 쪽으로 이동시킬 가능성을 보장할 것임은 예견될 수 있었다.… 독일-터키동맹을 전제하여 그리고, 그 동맹에 비해서 실현하기에 어느 정도 더 간단한 기타의 조건들을 전제로 할 때 바그다드철도는 독일에게 있어서 일종의 정치적인 생명보험을 의미함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xxii

그렇게 공공연하게 독일제국주의의 반공식적인 옹호자는 동양에서의 계획들과 의도들을 말했다. 여기서 독일정치는 확고하고 원대한 윤곽을 드러냈다. 즉 지금까지의 세계정치의 균형에 대해 극도로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경향과 영국에 대한 공격성을 뚜렷히 드러낸 것이다. 독일의 동방정책은 그렇게 1899년 개시된 해군정책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 것이었다.

동시에 독일은 터키 통합성 유지 강령으로 인해, 그 국가들의 역사적 성립 및 내적 도약이 터키의 유럽부분의 해체와 동일시될 수 있는 발칸국가들과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독일은, 제국주의적 탐욕이 우선적으로 터키의 소유지들로 향해 있던 이탈리아와 적대관계에 빠졌다. 1906년 알제시라스에서 개최된 모로코회의xxiii에서 이탈리아도 이미 영국과 프랑스의 편에 서 있었다. 그리고 6년 뒤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합병에 연이어 일어나 제 1차 발칸전쟁에 발단을 제공한 이탈리아의 트리폴리원정xxiv은 이미 이탈리아의 도전이었다. 여기에서도 3국동맹의 파괴와 독일의 고립을 의미했다.

독일의 팽창노력의 두번째 방향은 모로코사건을 통해 서쪽에서 드러났다. 이곳에서는 다른 그 어느 지역보다도 더 과격하게 비스마르크의 정책으로부터의 방향전환이 표현되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비스마르크는 내륙에서의 쟁점, 즉 알자스-로렌으로부터 프랑스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프랑스의 식민지 확장 노력을 이롭게 했었다. 독일의 새로운 노선은 그와 달리 프랑스의 식민지 확장을 직접적으로 겨냥했다. 모로코에서의 체스판은 이제 터키의 아시아부분에서의 그것과는 특히 다르게 짜여졌다. 독일자본의 정당한 이해관계라고는 모로코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모로코위기 동안 비상책으로 독일제국주의자들은, 모로코의 술탄에게 돈을 꾸어주고 대신 광산채굴 허가를 받은 렘사이드의 자본회사 마네스만xxv의 요구들을 마치 세력 확대를 위한 ‘조국의 생사가 걸린 이해관계’인 것 처럼 과장했다. 그런데 모로코에서 경쟁하는 두 자본그룹들, 즉 마네스만그룹과 크룹-슈나이더xxvi사는 모두 독일, 프랑스 및 스페인기업가들의 국제적인 혼합체라는 공공연한 사실로 볼 때, 진지하고 성공적으로 ‘독일의 이해영역’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독일제국이 모로코문제의 결정에 공동 영향권을 주장하며 그리고 프랑스의 모로코 지배에 대해 항의하며 보여준 그 결연함이 한층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는 독일과 프랑스의 첫번째 세계정치적인 충돌이었다. 1895년에만 해도 아직 독일은 프랑스와 러시아와 함께, 일본이 중국에 대해 거둔 승리를 제맘대로 이용하지 못하도록 시모노세키에서 방해하기 위해 승리한 일본의 품에 안겼었다. 이제, 모로코에서 프랑스와의 관계에 있어 독일 정책의 극히 새로운 지향이 드러나게 되었다. 7년 동안 지속되면서 2번씩이나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 위기로 아슬아슬하게 치달았던 모로코위기에서는 더 이상 ‘복수’의 문제가 아니었고 그 두 국가들 사이의 그 어떤 대륙적인 적대의 문제가 아니었다. 여기서는 독일제국주의가 프랑스제국주의의 영역을 침해함으로써 초래된 완전히 새로운 적대관계가 드러났다. 그 위기의 결과 독일은 프랑스의 콩고지역을 얻음으로써 만족했고, 그럼으로써 모로코에는 방어해야할 자체의 어떤 이해관계도 없음을 스스로 시인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모로코사건에서 독일의 돌격은 계속적인 정치적 의미를 획득했다. 장악목표와 요구가 불확실하다는 바로 그 점에서 독일의 모로코정책 전체는 무제한의 식욕을, 사냥감에 대한 염탐과 탐색을 나타냈다. 그것은 프랑스에 대해 완전히 총체적으로 이뤄진 제국주의적 선전포고였다. 이 두 나라들의 대조는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한쪽은 느린 산업발전, 침체하는 인구, 간신히 결합된 채 있는 거대한 식민제국을 거느리고 주로 외부로의 재정사업을 하는 정년퇴직자들의 국가이고, 다른 한쪽은 자본주의의 제 1위의 자리를 노리며 식민지 사냥을 위해 세상으로 이제 막 나선 막강하고 젊은 국가였다. 영국의 식민지를 정복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굶주린 독일제국주의는 터키의 아시아부분을 제외하면 우선적으로 프랑스의 유산들을 겨냥할 수 밖에 없었다. 바로 그 유산은 또한 만일의 경우, 발칸에서 오스트리아의 팽창욕구에 대해 프랑스를 댓가로 이탈리아에게 보상해 줄 수 있는, 그래서 공동사업을 통해 이탈리아를 3국동맹에 묶어두기에 편리한 미끼를 제공했다. 만약 독일이 모로코의 어느 한 지역에 자리잡고 무기를 공급한다면, 그 국민들이 만성적인 전쟁상태에 살고 있는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제국 전체를 정복자 프랑스에 대항하도록 사방에서 불지르는 것을 독일이 계속 좌지우지 할 수 있을 터였다. 이런 걱정을 놓고 보면 모로코에 대해 독일이 제기한 요구가 프랑스제국주의를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 수 밖에 없었음은 자명했다. 독일이 결국 그 요구를 포기하고 만족함으로써 즉각적인 위험은 해결된 셈이었지만 프랑스의 전반적 불안과 일단 형성된 세계정치적 적대관계는 계속 존재했다.2*

하지만 모로코정책을 통해 독일은 프랑스와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영국과 다시 적대관계에 빠졌다. 이곳 모로코에, 즉 대영제국의 세계정치적 대로들에서 두번째로 중요한 교차점이 있는 지브랄타에 매우 가까운 이곳에 독일제국주의가 갑자기 나타나 그 권리를 주장하며 단호하고 강력하게 행동하는 것을 영국은 자신에 대한 일종의 시위로 여길 수 밖에 없었다. 공식적으로도 독일의 첫번째 항의는 모로코와 이집트를 놓고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1904년 만들어진 합의xxvii를 직접적으로 겨냥했다. 독일의 요구는 모로코문제의 결정에서 영국을 제외할 것을 매우 분명하게 지향했다. 이러한 입장이 독일-영국관계에 미치게 될 불가피한 영향은 그 누구에게도 비밀일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 형성된 상황은 1911년 11월 8일자 『프랑크푸르트신문』의 영국통신문 속에서 다음과 같이 뚜렷하게 묘사되어 있다.

“결국, 콩고의 1백만명의 검둥이들, 대단한 회한, 그리고 ‘음흉한 영국인들’에 대한 강한 분노로 종합된다. 그러한 회한을 독일인들은 극복할 것이다. 하지만 영국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되든지, 지금 이대로는 절대로 지속될 수 없다. 모든 역사적 확율을 계산해 보면, 악화되거나, 즉 전쟁을 초래하든가 아니면 곧 개선되어야만 할 것이다. … 전함 ‘판터’호의 출항은 『프랑크푸르트신문』의 베를린통신문이 최근 정확하게 표현했듯이, 독일도 이제 여기에 있다는 것을 프랑스에게 알리려는 일종의 옆구리 찌르기였다.… 이러한 돌출 행동이 여기에서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 지는 베를린의 그 어느 누구에게도 너무나 분명할 것이다. 적어도 이곳 신문사통신원이라면 그 누구도 영국이 정력적으로 프랑스 측으로 갈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어떻게『북독일 일반신문』에서는 여전히, 독일은 ‘프랑스 하나와’ 담판하면 된다는 논조를 유지할 수 있는지! 지난 몇 백 년 이래 유럽에서는 정치적인 이해관계들의 분규가 끊임없이 증가되어 왔다. 하나가 학대당하면, 그것이 우리들에게도 영향을 끼치는 정치의 자연법칙에 따라 다른 이들을 부분적으로는 기쁘게 또 부분적으로는 근심하게 만든다. 2년전에 오스트리아인들이 러시아와 보스니아협상을 했을 때, 나중에 들리는 바에 따르면 비엔나에서는 혼자서 대적하면 더 좋았겠는데도, 독일이 ‘군사적으로 참견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영국인들은 이제 겨우 결연히 반독일적인 기운의 시기를 극복한 상태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베를린에서는 이 영국인들이 프랑스와 우리의 협상들이 전혀 그들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설득되리라 생각하는지 이해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결국은 세력문제에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아직은 아무리 우애적으로 보일지라도 옆구리 찌르기는 구체적 행동이고 그에 뒤이어 어떻게 곧 이빨에 주먹이 날아올지 아무도 예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래 상황은 덜 심각해졌다. 로이드 조오지가 말한 그 순간에는, 우리가 매우 정확한 정보를 통해 알고 있듯이, 독일과 영국 사이에 전쟁의 시급한 위험이 존재했다.… 에드워드 그레이경과 그의 대변자들이 오랜동안 주시해온 그리고 그 정당성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하지 않을 이러한 정책 이후에 모로코문제에 있어 그들로부터 다른 태도를 기대할 수 있을까? 베를린에서 그렇게 행동한다면 베를린의 정책은 이를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근동에서 뿐만 아니라 모로코에서 제국주의정책은 프랑스와 뿐만 아니라 영국과 독일 사이에 날카로운 적대관계를 형성했다. 그런데 독일과 러시아의 관계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여기에는 충돌의 뿌리에 무엇이 놓여 있는가? 전쟁의 첫 몇 주 동안 독일여론을 사로잡았던 박해 분위기 속에서는 사람들은 무엇이든 믿었다. 벨기에 여자들이 독일 부상병들의 눈을 찌른다고, 코사크인들이 스테아린초를 먹어치우고 갓난아이의 팔다리를 잡고 갈기갈기 찢는다고 믿었다. 또한 사람들은 러시아의 전쟁목적이 독일제국을 합병하고 독일문화를 말살하여 바르테강에서 라인강까지, 키일에서 뮌헨까지 독일 전역에 전제정치를 도입하려는 것이라고 믿었다.

사회민주주의적인의 캠니츠의『민중의 소리』는 8월 2일자에 다음과 같이 썼다.

“지금 이순간 우리 모두는 무엇보다도 러시아의 압제에 대항해 투쟁할 책무를 느낀다. 독일 여자들과 아이들이 러시아의 잔악함에 희생되어서는 안된다, 독일국가가 코사크인의 사냥감이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3국협상xxviii이 승리하면 영국 지사나 프랑스 공화주의자가 아니라 러시아의 차르가 독일을 지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순간,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적에 대항해, 독일의 문화와 자유의 모든 것을 지킨다.”

같은 날『프랑크일보』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우리는 모든 국경지역을 이미 장악한 코사크인들이 우리나라로 몰려와서 우리의 도시들을 타락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평화선언이 공표된 그날에 조차 그의 평화사랑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믿지 않았던, 러시아 민중들의 최대의 적인 러시아의 차르가 독일민족에게 명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쾨니히스베르크민중신문』은 8월 3일자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나 군역의 의무가 있든 없든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는 점은, 전쟁이 치뤄지는 동안 저 비열한 차르 무리가 우리의 국경에 근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일을 다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승리한다면 수천의 우리 동지들이 러시아의 잔혹한 감옥으로 유배될 것이다. 러시아의 지배하에서는 민족자결권이란 흔적조차 없으며, 어떤 사회민주주의적 언론도 그곳에는 허락되어 있지 않고, 사회민주주의적 협회나 회합은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들 중 누구도 러시아의 승패가 지금 중요한 문제가 되도록 내버려둘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모두는 전쟁 반대 입장을 유지하면서, 러시아에 군림하는 저 철면피들의 전율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지키는데 협력하길 원한다.”

독일문화의 러시아 차리즘에 대한 관계, 즉 이 전쟁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의 태도에 있어서 그 자체로 한 장을 표현하는 그 관계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그런데 독일제국에 대한 차르의 합병야욕과 관련해서는, 그것은 마치 러시아가 유럽이나 달나라를 합병하려 애쓴다고 추측하는 것만큼이나 터무니 없는 생각이었다. 현재의 전쟁에서 오직 두 나라, 즉 벨기에와 세르비아에게만 그 존립이 문제가 된다. 독일의 존립이 걸린 문제라는 외침 아래 독일의 대포들이 이 두 나라들을 향해서 조준되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인신제물의 열렬신자들과는 어떤 토론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서민본능 또는, 서민을 노려서 민족주의적인 선동언론들이 마련한 대단한 구호들이 아니라 정치적인 견지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러시아의 차리즘이 달나라를 합병할 생각을 하지 않듯이 독일합병이라는 목표도 추구하지 않음은 틀림없이 분명할 것이다. 러시아 정치의 정점에는 노회한 불한당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미치광이들은 아니다. 절대주의의 정책은 그 모든 고유한 특성들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허공에 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정책도 사물들이 서로 심하게 충돌하는 실제적인 가능성들의 세계에서 움직인다. 독일동지들의 염려스런 체포와 시베리아로의 무기한의 유배 그리고 러시아 절대주의의 독일제국으로의 도입과 관련하여, 잔혹한 차르의 정치가들은 모든 정신적인 열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당의 편집자들 보다는 더 나은 역사적 유물론자들이다. 왜냐하면 그 정치가들은 어떤 정치적인 국가형태를 어디에든 마음대로 ‘도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 국가형태는 특정한 경제적-사회적 기초에 상응한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러시아 자체에서 조차도 그들의 지배관계들이 거의 낡았음을 스스로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결국 그들은 각 나라에서 지배적인 반동은 그들에게 적합한 형태들만을 필요로 하고 견뎌낼 수 있음을 그리고 독일의 계급관계와 당관계에 알맞는 절대주의의 변종이 호엔쫄러의 경찰국가이고 프로이센의 3등급선거권xxix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냉철하게 살펴보면, 러시아의 차리즘이 진지하게 독일문화의 이러한 산물들을 털어버리지나 않을까 조바심할 근거라곤 전혀 없었다. 심지어 러시아가 완전히 승리한다는 전혀 그럴듯하지 않은 경우에 마저도 그럴 필요가 없었다.

사실 러시아와 독일 사이에는 전혀 다른 대립관계가 걸러 있었다. 이 두 나라 사이에는 공통적인 경향과 내적 연결관계로 인해 백 여년이나 전통적인 친교가 지속되어 왔었다. 그래서 이들은 그러한 친교가 받치고 있는 내부정치 부분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내부정치의 연대와는 상반되게 그리고 그러한 연대에도 불구하고 외부정치의 영역에서, 세계정치적 사냥터에서 충돌했다.

러시아에서 제국주의는 서구국가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상이한 종류의 요소들로 직조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직조물을 이루는 가장 강력한 실은 독일이나 영국에서와는 달리 축적에 굶주린 자본의 경제적 팽창이 아니라, 국가의 정치적 이해관계였다. 러시아의 산업은 자본주의 생산 자체에 전형적이듯, 내수시장의 미완성으로 인해 이미 오래 전부터 동양으로, 즉 중국, 페르시아, 중앙아시아로 수출로를 찾아야 했다. 차르정부는 이러한 수출을 자신의 “이해관계 영역”에 대한 바람직한 토대로 여기고 모든 수단을 다해 지원하려 했다. 그러나 국가정책은 여기서 추동되는 부분이 아니라 추동하는 부분이다. 한편으로는 차리즘의 정복 경향 속에서 이 거대 제국의 전통적인 팽창이 드러난다. 현재 1억 7천만에 달하는 인구를 가진 이 제국은 전략적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이유들로 인해, 열린 세계대양으로, 즉 동으로는 태평양, 남으로는 지중해로의 진입로를 얻으려 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절대주의의 생사가 걸린 이해관계가 여기서 동시에 문제가 되고 있다. 자본주의적 외국에서 재정차관을 확보하기 위해 세계정치 마당에서 강대국들의 전반적 경쟁 속에서 존경받는 지위를 유지할 필요성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차관 없이 차리즘은 절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모든 군주국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왕조의 이해관계가 걸려있다. 정부형태가 대다수의 국민들에 대해 점점 더 살벌하게 대립함에 따라, 내부적 곤란들로부터 국민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과 외형적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 정치에서 없어서는 안될 일종의 가정상비약처럼 지속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근대적인 부르주아의 이해관계들만도 차르제국의 제국주의의 한 요소로서 점점 주의 깊은 고려의 대상이 된다. 절대주의체제 아래에서는 당연히 완전하게 발전할 수 없고 대략적으로 원시적 약탈체제의 단계를 벗어날 수 없는 젊은 러시아 자본주의는 그래도 그 거대제국의 무수한 천연자원들에서 자기 앞에 놓인 거창한 미래를 본다. 절대주의가 제거되자마자 러시아는, 계급투쟁의 국제적인 상황이 아직도 이 시한을 보장한다는 전제 하에, 급속히 제 1위의 근대적 자본주의국가로 발전할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미래에 대한 인식과 말하자면 앞당겨진 축적탐욕으로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매우 뚜렷한 제국주의 열망에 가득 차서 세계분할에서 열심히 요구를 제기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열망은 동시에 러시아 부르주아지의 현재의 매우 강렬한 이해들로부터 지원을 받는다. 첫째, 군수산업과 그 납품자들의 구체적인 이해관계들인데, 러시아에서도 카르텔화된 중공업이 큰 역할을 한다. 두번째, ‘내부의 적’에 대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대립관계가 그것이다. 이 때문에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군국주의와 그 세계정치적 복음이 갖는 주의분산 작용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고 그래서 그 반혁명적 체제 아래에 결집했다. 러시아에서 부르주아권의 제국주의, 특히 자유주의적 부르주아권의 제국주의가 혁명의 뇌우 기운 속에서 현저하게 성장했고, 이러한 근대적 세례를 통해 차르제국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에 일종의 근대적 인상을 부여했다.

이제 차리즘의 전통적 정책 뿐만 아니라 러시아 부르주아지의 근대적 탐욕의 주요 목표는, 비스마르크의 유명한 말에 따르면 흑해 연안의 러시아 소유지들로 향한 열쇠에 해당한다는 다르다넬스해협이었다. 이 목표를 위해 러시아는 18세기 이후 일련의 유혈전쟁을 터키와 치뤘다. 발칸에서는 해방자의 사명을 떠안았다. 그러면서 이스마일xxx에서, 나바린xxxi에서, 시노페xxxii와 실리스트리아xxxiii와 세바스토폴xxxiv에서, 플레브나xxxv와 쉬프카xxxvi에서 거대한 시체언덕을 쌓았다. 슬라브의 형제들과 기독교도들을 터키의 공포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은, 지금 독일사회민주당에서 러시아의 공포에 대항해 독일문화와 자유를 지킨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농부들에게는 흡인력있는 전쟁전설로 기능했다.

그러나 러시아 부르주아지도 만주와 몽고에서의 문화적 사명보다는 지중해로의 전망에 훨씬 더 열을 올렸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은 일본과의 전쟁을 특히 무의미한 모험이라며 날카롭게 비난했다. 이는 그 전쟁이 러시아정책의 가장 중요한 과제, 즉 발칸으로부터 주의를 분산시켰기 때문이었다. 일본에 패배한 전쟁은 또 다른 측면에서도 동일한 방향으로 영향을 미쳤다. 동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에서, 티벳까지 그리고 페르시아쪽으로까지 뻗어나간 러시아세력의 확장은 영국제국주의의 경각심을 강하게 불러일으켰다. 거대한 인도제국에 대해 염려하면서 영국은 러시아제국의 이러한 아시아진출의 추이를 점점 더 의심스런 눈초리로 주시했다. 사실 아시아에서 러시아-영국의 대립관계는, 오늘날의 이 전쟁 이후 장래 제국주의 발전의 촛점이 될 것이 아주 확실하듯이 20세기 초 국제상황의 가장 강력한 세계정치적 대립관계였다. 1904년 러시아의 떠들썩한 패배와 혁명xxxvii의 발발은 상황을 변화시켰다. 차르제국이 현저하게 약화됨에 따라 영국과의 긴장이 완화되었다. 심지어 1907년에 두 나라는 페르시아를 공동으로 먹어치는 것xxxviii과 중앙아시아에서의 친선관계에 관한 조약xxxix을 체결하기도 했다. 이렇게 동쪽에서 러시아의 중대한 활로가 차단되자 그 에너지는 그만큼 더 강렬하게 오랜 목표, 즉 발칸정책으로 이동했다. 이제 바로 여기에서, 차르의 러시아는 지난 백년 동안 독일문화와 소중한 우정을 잘 다져온 이래 처음으로 독일과의 고통스런 대립관계에 빠져 있었다. 다르다넬즈해협으로의 길은 터키의 시체 위로 지나가는데, 독일은 지난 10여년간 이 시체의 ‘통합성’을 자신의 가장 귀중한 세계정치적 과제로 여기고 있었다. 물론 러시아의 발칸정책에서 방법의 변경이 이미 여러 차례 있었다. 러시아도 한 동안은 터키의 ‘통합성’ 강령을 대변하기도 했었다. 터키로부터 해방된 발칸 슬라브인들이 차르제국의 노예신세을 벗어나려 하는 ‘배은망덕’에 분노해서 그리고 마찬가지로, 유리한 시기가 될 때까지 분할이 미뤄져야 함을 암묵적으로 염두에 두고서. 하지만 지금은 터키의 종국적 해체가 러시아의 계획에 뿐만 아니라 영국의 정책에도 적절했다. 이때 영국은 인도와 이집트에서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그 중간에 놓인 터키지역들인 아라비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영국이 통치하는 거대한 회교제국으로 통합하려 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동양에서 러시아 제국주의는 이전에 이미 영국 제국주의가 그랬듯이 터키 해체의 특혜받은 부당이득자로서, 터키의 보초역할을 떠맏아 보스포러스에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독일 제국주의와 충돌하게 되었다.3*

그러나 러시아의 발칸정책은 직접적으로 독일보다는 오스트리아와 더 충돌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주의는 독일 제국주의의 정치적 보완물로서, 샴쌍둥이 형제이자 불행이었다.

자신의 세계정책 때문에 사방으로 고립된 독일은 오직 오스트리아에서만 동맹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은 1879년 비스마르크 당시에 이뤄져서 오래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 그 성격은 완전히 변했다. 프랑스와의 대립관계와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와의 동맹도 지난 몇 십 년 동안의 발전을 통해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졌다. 비스마르크는 1864~1870년 전쟁들xl로 생성된 소유물을 보호하는 것만 생각했었다. 그가 체결한 3국동맹은 철저히 보수적 성격을 띠었다. 오스트리아의 발칸편향은 비스마르크에게는 독일이 남아프리카를 얻으려하는 것만큼이나 못마땅했다. 그의 회고록,『상념과 회상』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나우분지의 주민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주국의 지금의 국경 너머로 확장해 나가기를 바라고 계획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독일 제국헌법은 오스트리아가 정치적 이해관계와 물질적 이해관계의 화해를 이룰 수 있는 길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해관계는 루마니아 민족의 동쪽 경계와 카타로만xli사이에 존재한다. 그러나 이웃의 소원 성취를 위해서 제 백성들의 목숨과 재산을 빌려주는 것은 독일제국의 임무가 아니다.”[강조- R.L.]

그가 한 때, 보스니아는 단 한명의 포머른 척탄병이라도 희생할 가치가 없다는 유명한 말로 매우 단호히 표현하려던 것이 무엇이었든, 비스마르크가 그 3국동맹을 오스트리아의 팽창노력을 위해 내줄 생각은 사실상 하지 않았음은 1887년 러시아와 체결된 ‘상호보장조약’xlii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이 조약에 따르면 독일제국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전쟁시 후자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우호적인’ 중립을 지켜야 했다.

독일의 제국주의 전환정책이 완성된 이래, 오스트리아에 대한 독일의 관계도 변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독일과 발칸 사이에 놓여 있다. 즉, 독일 동방정책의 중심으로 향한 길에 방해가 되는 것이다. 오스트리아를 적대자로 삼는다는 것은 독일이 자신의 정책을 통해 초래한 전반적인 고립으로 볼 때, 모든 세계정치적 계획들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군주국이 약화될 경우, 그리고 터키의 즉각적 해체와 그와 더불어 러시아와 발칸국가들과 영국의 엄청난 강화를 의미하게 되는, 그 군주국의 붕괴의 경우 독일제국의 국가적 통일과 강화는 실현될지 몰라도 제국주의정책에서 생명의 빛이 사라져버릴 것이다.4* 터키의 유지가 독일의 주요과제인 것 만큼 합스부르크군주국의 구제와 유지는 논리적으로 독일제국주의에게 부수적 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발칸에서 항상적인 잠재적 전쟁상태를 의미했다. 터키의 해체라는 제어할 수 없는 과정을 통해 오스트리아의 옆에 발칸국가들이 형성되고 강화되었다. 그 이후 이 합스부르크국가와 젊은 이웃나라들 사이에 대립이 존재하기 시작했다. 독립적이고 생명력이 왕성한 민족국가들이, 자신들과 동일한 민족들의 파편들로 구성된 그리고 이러한 민족들을 독재적인 조항의 창칼로 다스릴 줄만 아는 이 군주국의 아주 가까이에 출현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흔들릴 대로 뒤흔들린 그 나라의 해체가 가속될 수 밖에 없음은 명백하다. 오스트리아 내부에 생명력이 없음은 바로 발칸정책에서, 특히 세르비아와의 관계에서 잘 나타났다. 오스트리아는 때로는 살로니키xliii로 때로는 듀라쪼xliv로 마구 덤벼들던 그 제국주의적 탐욕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를 합병할 수가 없었다. 아직 세르비아가 두 차례의 발칸전쟁을 통해 힘과 규모를 확대하기 이전에도 그럴 수가 없었다. 만약 세르비아를 합병했다면, 오스트리아는 자체의 잔인하고 우둔한 반동체제로는 거의 길들이기 불가능한 가장 저항적 남슬라브민족 하나를 위험스런 방식으로 오스트리아의 내부에 강화시켰을 터였다.5*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의 독립적이고 정상적 발전을 묵인하며 정상적 통상관계를 통해 세르비아를 이용할 수도 없었다. 이는 합스부르크군주국이 부르주아국가의 정치조직이 아니라 사회적 기생충 몇몇 패거리들의 엉성한 신디케이트이기 때문이다. 이 패거리들은 그 군주국의 썩은 구조물이 아직 지탱하는 한 국가권력의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풍족하게 강탈하길 원했다. 헝가리의 농업을 위해 그리고 농산물의 인위적 가격등귀라는 이득을 위해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로부터의 가축과 과일 수입을 금지했다. 그렇게 해서 그 농업국에겐 생산물의 주요 판로가 두절되었다. 오스트리아 카르텔 산업의 이득을 위해서는 세르비아에게 오직 오스트리아로부터만 그것도 최고의 가격으로 공산품을 공급받도록 강요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가 경제정치적으로 계속 종속되어 있도록, 세르비아가 동쪽으로 불가리아와 동맹을 맺어 흑해로 진출하는 것을 막았고, 서쪽으로 알바니아의 항구를 얻어 아드리아해로 진출하는 것도 방해했다. 오스트리아의 발칸정책은 한 마디로 세르비아의 목죄기를 지향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발칸국가들을 통틀어 그들 사이에 어떤 상호간의 친교나 내적 도약도 일어나지 않게 막는 것을 지향했다. 그 정책은 발칸국가들에게는 항구적인 위험을 의미했다. 하여간 오스트리아 제국주의는 한 때는 보스니아를 합병함으로써, 한 때는 산트샥 노비라자르xlv와 살로니키를 요구함으로써, 또 한 때는 알바니아해안을 요구함으로써 발칸국가들의 존립과 발전가능성을 위협했다. 이러한 오스트리아의 경향으로 그리고 이탈리아의 경쟁 결과로, 제 2차 발칸전쟁 이후 한 독일 제후의 휘하에 ‘독립 알바니아’라는 비웃음거리가 창립되었다. 이 나라는 그 첫 순간부터 제국주의 경쟁자들의 음모의 노리개에 불과했다.

이렇게 지난 10년간 오스트리아의 제국주의정책은 발칸의 정상적이고 진보적인 발전에 족쇄가 되었다. 합스부르크군주국이냐 발칸국가들의 자본주의적 발전이냐라는 불가피한 딜레마를 스스로 초래했다. 터키의 지배에서 해방된 발칸은 여전히 오스트리아라는 장해물을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해체는 역사적으로 볼 때 터키붕괴의 계속에 불과하고, 그 붕괴와 함께 역사 발전과정에서 요구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딜레마에 대해 전쟁, 그것도 세계대전 이외의 어떤 해답도 없었다. 세르비아의 뒤에는, 동양에서 자신의 제국주의 강령 전체를 포기하지 않는 한 발칸에 대한 영향력과 ‘보호자’역할을 내줄 수가 없었던 러시아가 있었다. 러시아의 정책은 당연히 발칸국가들을 러시아의 보호령 아래 결합시키는 것이었는데, 이는 오스트리아의 정책에 직접적으로 대립되었다. 1912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터키의 유럽부분을 거의 완전히 없애버린 발칸연맹은 러시아의 작품이었고, 그 러시아의 의도에 따라 오스트리아를 자신의 적으로 삼아야 했다. 곧이어 제 2차 발칸전쟁에서는 러시아의 그 모든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발칸연맹은 공중분해되어버렸다. 하지만 이 전쟁의 승리자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가 숙적인 것인 만큼 러시아와의 동맹관계에 의존하고 있었다. 독일은 합스부르크왕정의 운명과 함께 묶인 채, 그 왕정의 철저히 반동적인 발칸정책을 한발 한발 엄호하며 이제 러시아에 대해 이중으로 첨예한 대립관계에 놓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오스트리아의 발칸정책은 게다가, 오스트리아와 터키 양쪽 모두의 해체에 많은 관심이 있던 이탈리아와의 대립을 초래했다. 이탈리아 제국주의는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내 소유지 안에서 자신의 팽창욕구에 대해 가장 가까이 있고 가장 대중적이기에 가장 편리한 구실을 발견했다. 이탈리아의 팽창욕구는 새로운 방침의 결정과 함께 발칸을, 특히 건너편 알바니아해안을 겨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트리폴리전쟁에서 큰 타격을 입었던 3국동맹은 두 번의 발칸전쟁 이후 존재하는 긴급한 위기로 인해 완전히 빈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그 중심세력 둘은 전 세계와 날카로운 대립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독일 제국주의는 두개의 썩어가는 시체들에 결박된 채, 세계대전으로 향한 직항로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운항은 철저히 의식적이었다. 특히 추동력으로서 오스트리아는 이미 몇 년 전부터 매우 맹목적으로 파멸로 치닫고 있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대공과 그 하수인 폰 클루미에츠키남작을 우두머리로 하여 오스트리아의 카톨릭-군국주의적 지배집단은 돌격을 위한 형식적 핑계를 찾기에 급급했다. 1909년는 필요한 전쟁열을 독일 내에서 부추기기 위해 특별히 프리드만교수가 그 유명한 문서를 작성하게 만들었다. 이 문서는 합스부르크군주국에 대한 세르비아의 전세계에 걸친 악독한 결사를 폭로했는데, 단지 그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조작된 것이라는 작은 결점만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몇 년 뒤, 오스트리아영사 프로하스카가 윜스퀴브에서 순교했다는 황당한 소식xlvi이 며칠 동안 울려 퍼졌다. 이 소식은 점화의 불씨처럼 화약통에 떨어질 판이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프로하스카는 건강하고 명랑하게 휘파람을 불며 윜스퀴브를 산책하고 있었다. 결국,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격분스런 진짜 범죄, 사라예보 암살사건이 터졌다. “어떤 유혈사태의 희생자가 해방적인, 구원적인 영향력을 가졌다면 이것이 바로 그러하다”라며 독일 제국주의의 옹호자들은 환호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주의는 더 크게 환호하며 대공의 죽음이 아직 생생한 동안에 결연히 이를 이용하려 했다.6* 베를린과 신속히 협의한 뒤 전쟁이 결정되었고 그 최후통첩이 자본주의 세계 전역을 불붙히게 될 성냥개비로서 전달되었다.

그러나 사라예보에서의 사건은 핑계만을 제공했다. 원인들, 대립들과 관련해서는 오래전 부터 전쟁을 위한 모든것이 성숙해 있었다. 우리가 오늘 접하는 상태는 이미 십년 전에 준비되어 있었다. 지난 시기의 매년은, 터키혁명, 보스니아합병, 모로코위기, 트리폴리원정 그리고 두 차례의 발칸전쟁과 같은 매번의 정치적 사건은 전쟁을 한 걸음씩 더 가까이 다가오게 만들었다. 지난 시기의 모든 군사법안들은 이 전쟁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불가피한 총정산을 위한 의식적 준비로서 입안되었다. 이 전쟁은 지난 여러 해 동안 다섯 차례나 간발의 차이로 발발할 뻔했다. 1905년 여름 처음으로 독일이 모로코 사안에 대해 결정적 형식으로 자신의 요구를 제기했을 때, 1908년 영국, 러시아 그리고 프랑스가 모로코문제로 레발에서 군주회동xlvii을 가진 뒤 터키에 최후통첩을 하자 독일이 터키 방어를 목적으로 전쟁에 돌입하려 했으나 갑자기 터키혁명이 일어나서 이 한번만은 전쟁을 방해했을 때7*, 1909년 초 러시아가 동원령으로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합병에 대응하고 이에 독일이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어 전쟁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페테스부르크에 모든 형식으로 선언했을 때, 1911년 여름 독일이 모로코에서 자신의 몫을 포기하고 콩고로 만족하지 않았다면 기필코 전쟁을 초래했을 뻔 했던 전함 판터호의 아가디어 파견이 있었을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1913년 초 러시아의 아르메니아로의 진군계획xlviii을 놓고, 독일이 전쟁태세가 되어있음을 두번째로 페테스부르크에서 모든 형식으로 선언했을 때가 그러했다.

그런 식으로 오늘의 전쟁은 지난 8년간 계속 발발 직전에 있었다. 항상 다시 지연될 때 마다, 그것은 단지, 늘 관련국 중 하나의 전쟁준비가 아직 끝나지 않은 그 때문이었다. 특히, 1911년의 ‘판터’모험에서는 이미 지금의 이 전쟁이 성숙해 있었다. 암살된 대공부부 없이도, 뉘른부르크 상공의 프랑스 전투기 없이도 그리고 러시아의 동프로이센 침략 없이도. 독일은 자신에게 더 적당한 순간까지 그것을 그냥 지연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다음과 같이 독일 제국주의자들의 허심탄회한 서술을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 “만약 지금 이른바 범독일주의 측이 1911년 모로코위기 동안 독일정책의 약점을 비난한다면,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함 ‘판터’호를 아가디어로 보낼 당시 북동해운하xlix의 개조는 아직 진행중이었고 헬골란트l의 거대한 해군요새로의 확장은 완성되려면 한참이나 남았으며 우리 해군은 노급전함과 보조병기에 있어서 영국해군력에 비해서 그 3년 이후보다 상당히 불리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 운하와 헬골란트뿐만 아니라 해군력도 올해1914년에 비해서 부분적으로는 매우 뒤쳐져 있었고, 또 부분적으로는 전혀 전쟁에서 이용될 수 없었다. 나중에 훨씬 더 유리한 기회가 있음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결정적인 전쟁을 자극하길 원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 되었을 것이다.”8*[강조-R.L.] 먼저 독일 해군이 정리되고 그 중요한 군사법안들이 제국의회li에서 명확해져야 했다. 1914년 여름, 독일은 전쟁준비가 완료된 것으로 생각되었던 반면, 프랑스는 3년 복무제를 실험하고 러시아는 해군강령도 육군도 준비가 끝나지 않았다. 그 상황을 정력적으로 활용할 때였다. 독일에서 제국주의의 가장 진지한 옹호자이자 독일 정책의 지도권과의 정확한 접촉에 있어서 거의 그들의 공식적인 입에 해당했던 바로 그 로어바흐는 1914년 7월 이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에게, 즉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있어서 이번에 주된 걱정거리는 러시아의 잠정적이고 표면상의 승복으로 인해서 우리가 러시아와 프랑스의 준비가 진정으로 완료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으면 어쩌나 하는 데 있다.”9* 다시 말해, 1914년 7월의 주된 걱정거리는 러시아와 세르비아가 승복해서 독일정부의 ‘평화노력’이 성공을 거두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그들이 전쟁을 하도록 강제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일은 성공했다. “매우 고통스럽게도 우리는 세계평화유지를 향한 우리의 부단한 노력이 실패하는 것을 보았다” 등등.

독일 군대가 벨기에로 진군했을 때는, 독일제국의회가 전쟁의 이러한 완결된 사실과 점령상태를 마주했을 때는, 이미 이 모든 것이 진행된 뒤였기에 그것은 전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아니였다. 새롭고 전대미문인 상황이 전혀 아니였다. 그 정치적 연관성들을 사회민주당 원내분파가 일종의 경악스런 것으로 받아드릴 수 밖에 없을 그런 사건이 전혀 아니였다. 8월 4일 공식적으로 개시된 세계대전은 독일 제국주의의 정치와 국제적인 제국주의 정치가 몇 십년에 걸쳐 부단하게 준비해온 바로 그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부단히 독일사회민주당은 이 전쟁이 다가오고 있음을 지난 10년간 거의 매년 예언해왔다. 사회민주당의 의원들과 신문들과 팜플렛들은 그것이 문화와도 민족의 이해관계와도 전혀 상관 없고 오히려 이 양자에 정반대하는 야비한 범죄에 다름 아니라고 수 천 번이나 낙인찍어 왔다.

그리고 사실이 그러했다. 이 전쟁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민주당 제국의회 원내분파가 말하듯이 “독일의 생존과 자유스런 발전”도 아니고, 사회민주당의 언론이 쓰듯이 독일문화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터키의 아시아부분에서 도이취방크의 현재의 이윤이고, 모로코에서 마네스만과 크룹의 미래의 이윤이다. 그것은,『전진』이 1914년 7월 26일자에 썼듯이, 오스트리아, 즉 합스부르크군주국이라 자칭하는 이 “조직화된 부폐 더미” 의 존재와 반동이며, 헝가리산 돼지와 자두이고, 제 14조항, 어린이트럼펫과 프리드만-프로하스카문화이며, 소아시아에서 터키의 바쉬-보수크lii의 패권과 발칸에서의 반혁명의 유지이다.

대부분의 우리 당 신문들은 독일의 적들이 ‘유색인들과 미개인들’, 즉 흑인들, 시크교도들, 마오리인들을 전쟁에 나서도록 선동하는 것에 대해 도덕적으로 격분했다. 지금, 오늘의 이 전쟁에서 이러한 민족들은 유럽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들과 거의 동일한 역할을 행한다. 또한,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뉴질랜드의 마오리족들 사람들이 영국왕을 위해 두개골이 으깨지도록 내달리고자 열망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그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의식함에 있어서 독일 사회민주당의 제국의회 원내분파와 같다. 이 분파는 합스부르크군주국과 터키와 도이취방크 돈궤의 유지를 독일민족의 존립, 자유 및 문화와 혼동했으니 말이다. 이 모든 것에서 큰 차이 하나는 단지 마오리족들은 한 세대 이전만 해도 식인관행을 행했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실천하지는 않았다는 점에 있다.


1* 로자 룩셈부르크의 주(앞으로 저자의 원주는 *표시를 덧붙힘, 단 (*)표시는 룩셈부르크의 원주 속의 내용에 대한 역자의 주를 나타냄): 제 1차 발칸전쟁 이후 1912년 12월 3일에 사회민주당 원내 대변인 다비트는 제국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했다.

“어제 여기서, 독일의 동양정책은 터키의 붕괴에 대해 책임이 없다, 독일의 동양정책은 좋았다라고 언급되었소. 제국수상은 우리가 터키에게 좋은 일을 했다고 말했으며 바서만은 우리때문에 터키가 합리적인 개혁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말했소. 후자에 대해는 나에게 전혀 알려진 바가 없고(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 통쾌한 웃음), 좋은 일이라는 것의 뒤에 나는 물음표를 붙이고 싶소. 왜 터키는 붕괴했는가? 그곳에서 붕괴한 것, 그것은 우리의 엘베강 동쪽지역에 존재하는 것과 유사한 그런 융커체제였소.(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 ‚참으로 옳소!’라는 외침. – 오른쪽에서는 웃음). 터키의 붕괴는 중국 만주의 융커체제의 붕괴(1*1)에 병행한 현상의 하나요. 그런 귀족체제들이 도처에서 점점 종국으로 치닫는 것 같소(사회민주주의자들의 외침, ‚바라건대!’): 그런 체제들은 현대의 요구들에 더이상 부응하지 않소.

나는 터키의 관계들이 어느 정도 동엘베지역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말했소. 터키인들은 지배하는 정복자카스트로서 단지 극소수에 불가하오. 그들 이외에, 회교를 받아들인 비터키인들이 있소. 그러나 원래의 토종터키인들은 극소수이며, 전사카스트로서, 프로이센에서와 마찬가지로 행정과 외교와 군사등에서 모든 지도적인 지위들을 차지한 카스트요, 그 경제적 지위를, 바로 동엘베지역에서처럼 대토지에 기반한 그리고 그에 속한 농민들의 소유에 기반하고 있는 그런 카스트요, 낯선 종족과 낯선 종교를 갖는 소작농들에 대해,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농민들에 대해, 동엘베지역에서 우리의 터키기병들처럼 똑같이 무자비한 지주정책으로 박해를 가했던 그 카스트요(유쾌한 웃음들). 터키에 자연경제가 존재하던 동안은, 그래도 괜찮았소.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지주가 그들의 소농들을 그렇게 족치지 않아서 그런 지주체제가 그런대로 견딜만 했으니까, 그는 먹고 살기에 좋으면 만족했으니까. 하지만 터키가 유럽과의 접촉을 통해 근대적인 화폐경제로 들어선 그 순간에, 터키귀족들이 그들의 농민들에 가한 압력은 점점 더 참을 수 없게 되었소. 이러한 농민들에 대한 수탈이 생기고, 농민들 대부분은 거지가 되도록 억눌려졌소, 많은 수가 도적이 되었소. 이들이 바로 코미타치시(1*2)들이요!(오른편의 웃음). 터키의 귀족들은 외부적인 적에 대항해서 전쟁을 한 것만이 아니오, 아니오, 외부의 적에 대항한 전쟁중에, 터키에서는 농민반란이 생겨났소. 그것이 바로, 터키인들의 등뼈를 부쉰 것이요, 그것은 바로 그들 귀족체제의 붕괴였소!

독일정부가 좋은 일을 했다고 이제 누군가 말한다면- 지금, 그들이 터키에게 또 청년터키 체제에게 할 수 있었던 가장 좋은 그일을 독일정부는 하지 않았소. 그것은 그들에게, 베를린의정서(1*3)에 따르면 터키의 의무인 그 개혁을 수행하고, 불가리아와 세르비아가 그랬듯이 그 농민들을 진정으로 해방하도록 충고했어야 했소. 그러나 어떻게 프로이센-독일외교가 그일을 할 수 있었겠소! …

폰 마샬(1*4)씨가 베를린에서 받은 지령들은 어쨌듯, 청년터키주의자들에게 진정으로 좋은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은 아니었소. 그것이 그들에게 가져다 준 것은, 나는 군사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싶지 않소, 그것이 터키 장교들의 몸에 불어 넣은 특정한 정신, 즉 ‘엘레얀트 야더오피찌어(1*5)’의 정신(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 유쾌한 웃음)이었소, 이 투쟁에서 터키군 사이에서 특히 퇴폐적으로 드러난 그 정신이었소. 에나멜가죽구두를 신은 장교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고들 하오. 무엇보다도, 민중들 위에, 장병 대중들 위에 군림하는 장교들의 월권, 이러한 상명하달이 터키군대에서 신뢰를 뿌리째 파괴했고, 그렇게 해서 이러한 정신이 그와 더불어 터키군대의 내부적인 해체를 초래하는데 기여했음은 자명하오.

신사 여러분, 누가 터키의 붕괴에 책임이 있는가에 대한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그래도 이견들을 갖고 있소. 특정한 프로이센의 정신의 도움만이 터키의 붕괴에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물론 그렇지야 않지요, 그러나 그 정신은 붕괴 과정에 기여했고, 가속했소. 그 붕괴의 근본적인 원인은, 내가 이미 설명한 것처럼, 경제적인 원인들이었소.“[제국의회의 심리들, 제 13임기, 제 1회기, 286권, 속기록, 2513/2514쪽.][강조-R.L.]

(1*) 1911년 10월 우창봉기와 더불어 중국에서 부르주아혁명이 시작되었다. 봉기의 지도자들은 공화국선포를 결정하고, 봉기에 참여할 것을 중국 전역에 요구했다. 1911년 11월말까지 15지역(Provinzen)이 만주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1912년 1월 1일 중국공화국이 선포되고 손문이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2) Komitatschi, 세르비아의 자원민병대, 제 2차 대전때는 tschetniks로 불리게 된다.

(1*3) das Berliner Protocol, 1878년 6월 13일부터 7월 13일까지의 베를린회의의 결과로서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헝거리,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그리고 터어키에 의해 1878년 7월 13일 서명된 베를린회의 의결서에 따르면 터어키는 종교의 자유와, 모든 제의식의 자유 그리고 그 제의식을 공공연히 행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지방들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작성하여 크레타섬에 대한 1868년의 규정을 변경할 의무를 가졌다.

(1*4) Adolf Freiherr Marschall von Bieberstein, 1897년부터 1912년까지 터키주재 독일제국대사로서 독일 제국주의 정책을 대변했다.

(1*5) elejanter Jardeoffizier, 근사한 근위장교(eleganter Gardeoffizier)라는 말을 프로이센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2* 독일제국주의 측이 모로코전쟁 때문에 수년간 자행한 소란스런 교사 및 선동도 프랑스의 걱정을 진정시키기에 적절하지 않았다. 전독일협회(der Alldeutsche Verband)는 독일에게는 당연한 ‘생사의 문제’로서 모로코합병 프로그램을 소리높혀 주창하며 협회장 하인리히 클라스가 작성한 「모로코 서부는 독일의 것!(Westmarokko deutsch!)」이라는 제목의 전단지를 유포했다. 콩고협상이 타결된 후 쉬만교수가 외무부의 그 결정과 모로코 포기를 「십자가-신문(Kreuz-Zeitung)」에서 옹호하려 했을 때, ‘보도(die Post)’는 그를 다음과 같이 공격했다.

“쉬만 교수는 태생이 러시아인으로, 아마 순수한 독일계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가 모든 제국독일인의 가슴에 있는 민족의식과 애국적 긍지를 가장 예민하게 건드리는 그 문제들에 대해 냉정하고 경멸적이라 해서 아무도 그를 나쁘게 여길 수 없다. 독일민족의 두려운 영혼의 고통스런 떨림과 애국적 심장고동에 대해서 정치적인 환상이니 콘지스타도르적 모험이니 하고 말하는 이방인의 판단은, 이 이방인이 베를린대학의 선생으로서 프로이센의 손님에 대한 후대를 향유하는 만큼 더 우리의 정당한 분노와 경멸을 살 수 밖에 없다. 이 사람이, 독일보수당의 주도적 기관지에 감히 독일민족의 가장 성스러운 감정을 그런 식으로 비난하는 이 사람이 선생이자 우리 황제의 정치고문이고, 정당하든 부당하든 하여튼 황제의 대변자로 통한다는 점을 우리는 가슴 아프게 여길 수 밖에 없다.”

 

3* 1908년 독일언론에 따르면 러시아의 자유주의정치가 페터 폰 스트루베는 이렇게 썼다: “대러시아를 건설하려면 오직 하나의 길이 있을 뿐임을 이제는 말할 때이다. 그 길은 러시아문화의 실제적 영향력이 미칠 수 있는 한 지역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다. 이지역은 흑해 분지 전체, 즉 유럽과 아시아에서 흑해로의 출구를 갖는 모든 국가들이다. 여기에 우리의 확고한 경제적 지배를 위한 진정한 기반, 즉 인력과 석탄과 철이 있다. 이러한 실제적 토대 위에서, 오직 그러한 토대 위에서만 사방에서 국가지원을 요구하는 끈길긴 문화작업을 통해 경제적으로 강력한 대러시아가 건설될 수 있다. “

오늘의 이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바로 그 스트루베는 아직 터키공격이 있기도 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독일정치가들 사이에서 항구적인 터키정책 하나가 출현했다. 이는 독일의 보호 아래 터키를 이집트화한다는 생각과 프로그램으로 축약되었다. 보스포러스와 다르다넬즈해협은 독일의 수에즈로 탈바꿈할 터었다. 터키를 아프리카로부터 내쫓은 이탈리아-터키전쟁 이전에 그리고 터키를 유럽에서 거의 내쫒아버린 발칸전쟁 그 이전에 이미 독일에게는, 자신의 경제정치적 확고한 입지를 다진다는 이해관계를 위해 터키와 터키의 독립성을 유지한다는 과제가 생겼다. 이미 언급된 전쟁들 뒤에 이 과제는, 터키의 외부적 약점들이 드러난 단지 그만큼만 변경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 사실상의 연맹은 일종의 보호령이나 후견으로 변형되어야 했다. 이것은 오스만제국을 결국 이집트 수준으로 만들 수 밖에 없었다. 흑해와 마르마라해에 있는 독일의 이집트는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전혀 참을 수가 없는 것임은 전적으로 분명했다. 그래서, 당장 그러한 정책을 목표로 한 발걸음을 위해 터키군대를 재편할 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노플의 군대를 명령하게 될 리만 폰 산더스장군의 사절단에 대해 러시아정부가 항의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형식적으로 러시아는 이 문제에 대해 보상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사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1913년 12월 러시아와 독일사이에 전쟁 발발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리만 폰 산더스의 군사절단의 경우가 터키의 이집트화를 지향하는 독일정책을 폭로했던 것이다.

독일과 러시아 사이의 무력 충돌을 초래하기에 독일정책의 이런 새로운 지향이면 이미 충분했을 것이다. 우리는 1913년 12월에, 불가피하게 세계적 충돌의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충돌 하나가 성숙하는 시기에 진입했다.”

 

4* 제국주의적 전단, 『왜 그것은 독일의 전쟁인가(Warum es der deutsche Krieg)?』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읽게 된다.

“러시아는 전에 이미, 1866년과 1870/71년의 우리민족의 국가적 통일로 인해 바깥에 남게 된 1천만 독일인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독일-오스트리아를 제안함으로써 우리를 유혹하려 했다. 우리가 그들에게 낡은 합스부르크 군주국을 넘겨준다면, 우리는 그 배반에 대한 대가를 받을 거라 한다.”

5* 『쾰른신문』은 사라예보의 암살사건이 있은 뒤, 즉 전쟁전야에, 공식적인 독일정책의 카드들이 아직 들춰지지 않았을 때 다음과 같이 썼다.

“관계들에 대해 문외한이라면,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에서 행한 자선행위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에서 전혀 사랑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42%의 인구를 차지하는 세르비아인들의 미움을 받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을 것이다. 그 답은 진정으로 그 민족과 그 관계들을 알고 있는 자만이 이해할 수 있고, 국외자들, 특히 유럽의 개념들과 상태들에 익숙한 자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대답은 명명백백하다. 즉, 보스니아의 행정은 그 기획과 근본이념에 있어서 완전히 서투르게 망가졌다. 이에 대한 책임은, 부분적으로는 (점령이래) 거의 한 세대가 지난 오늘에도 그 나라의 실제적인 상황을 지배하는 바로 그 터무니없는 무지 바로 그것에 있다.”

 

6* 『왜 그것은 독일의 전쟁인가?』 21쪽을 참조, 대공 패거리의 기관지, 『대오스트리아』는 몇 주 내내 다음과 같은 식의 격분기사를 썼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대공-황태자의 죽음을 위엄 있는 그리고 스스로의 감정에 응당한 방식으로 보복하길 원한다면, 제국 남쪽의 관계의 불운한 발전으로 인한 무고한 희생자의 정치적인 유언을 가능한 신속히 집행하라. 지금까지 지난 6년간 우리는 이미, 우리가 우리 정치 전체에서 도처에서 고통스럽게 느끼고 있는 모든 억압적 긴장들의 궁극적 해결을 기다려 왔다. 전쟁에 의해서만 대오스트리아, 자기 국민을 만족시키는 행복한 대오스트리아가 탄생할 수 있음을 우리는 알기에, 그래서 우리는 전쟁을 원한다. 발칸민족들에게 자유와 문화를 가져다 주어야 한다는 오스트리아의 국가이념, 오스트리아의 사명의식이 위대하고 행복한 미래의 햇빛 속에 꽃피는 그런 강력한 대오스트리아라는 우리의 이상이 오직 전쟁을 통해서만, 과격하고 급작스런 방법으로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 내부 가장 깊숙이 자리한 신념이기에 우리는 전쟁을 원한다. 그의 강력한 손, 그의 불굴의 에너지가 대오스트리아를 창조한 이 거인이 서거한 이래, 그 이래 우리는 이제 그 무엇보다도 전쟁을 바란다. 이것이 우리가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마지막 카드이다! 이 암살사건 이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서 세르비아에 대해 만연한 엄청난 동요가 세르비아에 대항한, 더 나아가서는 러시아에 대항한 폭발을 유발할지도 모른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대공은 고독하게 이 제국을 준비해왔지만 그것을 관철 시킬 수는 없었다. 그의 죽음이 전오스트리아의 제국주의적 열망을 관철시키기 위해 필요했던 유혈적 희생이 되길 바란다.”

7*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해 독일정책 측은 당연히 보고를 받았고, 유럽의 다른 해군들과 마찬가지로 독일 해군력이 그 당시 즉각적인 전투동원태세에 있었음은 이제는 비밀이 아니다.” (로어바흐, 『전쟁과 독일정치』, 32쪽)(강조-R.L.)

8* Paul Rohrbach, Der Krieg und die deutsche Politik, Dresden 1914, S.41

9* Paul Rohrbach, Der Krieg und die deutsche Politik, Dresden 1914, S. 82-83

iDeutsche Bank, 해외무역과 사업에 중점을 두고 1870년에 설립된 독일은행. 현재 독일에서 가장 큰 금융회사이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은행들중의 하나다.

iiSmyrna, 현재 터기의 3대도시인 이즈미르의 옛이름. 이즈르는 이스탄불 다음으로 가장 큰 항구로 에게해의 이즈미르만에 위치하며 이즈미르주의 주도이다.

iiiIsmid, 터키도시Izmit의 영어식 이름, 터키의 아나톨리아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 코자엘리주의 주도. 마르마라해와 인접한 항만도시이다.

ivAngora, 1923년이래 터키의 현 수도인 앙카라의 옛이름

vSkutari, 터키의 현 윜스퀴다르의 옛이름. 이 도시는 터키 이스탄불주의 윜스퀴다르지방의 중심도시, 아나톨리아쪽에 위치한다

viBrussa, 현재의 이름으로는 Bursa, 터키의 아나톨리아북서쪽 마르마라지역에 위치한, 현재 터키에서 네번째로 큰 대도시, 같은 이름의 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viiKonya, 터키 아나톨리아 내륙에 위치한 도시

viiiHaidar Pascha, 터키 이스탄불의 보스포러스와 아시아쪽 마르마라 사이에 있는 항만지역

ixBagdadbahn, 1903년부터 1940년까지 오스만제국과 그 후계국가들에 의해 건설된 코니아(현재의 터키지역)에서 바그다드(현재 이라크지역)까지의 철도. 이스탄불-코니아의 아나톨리아철도의 연장. 독일자본과 기술의 주도와 그 정치적 군사적 함의때문에 1차 대전전 큰 쟁점중의 하나였다.

xSiemens

xiGwinner

xiiHelfferich

xiiiKilometergaranti: 아나톨리아 철도노선의 건설 초기에 모든 비용이 킬로미터당으로 환산되었다. 터키정부는 운영수입과 환산된 전체비용사이의 차액을 그 철도회사에 지불할 의무가 있었다. 이 금액의 지급을 보장하기 위해 터키국가 재정수입을 그 배상용으로 제공해야 했다.

xivEski-Schehir-Konia, Eskischehir-Konya

xv빌헬름2세는 1898년 10월과 11일 동양을 여행하는 동안 다마스쿠스에 도착하여, 자신이 터키의 술탄과 모든 회교도들의 후견인임을 천명했다.

xvi1908년 7월 시작된 부르주아적 청년터키혁명은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소집하여 술탄 압뒬하미드2세의 절대주의적 지배를 끝냈다. 이 술탄은 1909년 혁명을 진압하려 시도한 때문에 폐위되었다. 청년터키의 우익은 군사독재를 세웠고, 이 독재하에 민중과 민족주의운동이 억압당했다. 청년터키는 1912년 친영국-봉건 콤프라도르당에 의해 밀려나지만 1913년 1월 다시 권력을 잡았다.

xviiKrupp, 1811년 프리드리히 크룹에 의해 동명의 주식회사로 창립되어 한때 독일 최대 철강회사로 성장. 1999년 합병을 통해 현재 튀센크룹사로 되었다.

xviii1869년 크레타섬의 그리스민족들이 터키지배에 대항한 무장투쟁을 위해 봉기했다. 1897년 2월 그리스군대의 지원을 받은 봉기자들은 그리스로의 합병을 선언했다. 강대국들이 개입하여 크레타를 “유럽의 후견아래 있는” 자치국으로 선언했고,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및 러시아군대가 이 섬을 점령했다.

xixDer Krimkrieg(1853~1856),이 전쟁에서 러시아는 근동에서의 지배와 영향력을 걸고 터키에 맞서 싸웠다. 이때 터키는 영국, 프랑스 그리고 사르디니아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이 전쟁에서 러시아는 참담하게 패배했고 이와 더불어 터키에 대한 유력한 영향력을 잃게 된다.

xxDer erste Balkankrieg(1912년 10월 8일 ~1913년 5월 30일), 1912년 초 러시아의 지원 아래 불가리아, 그리스, 세르비아 및 몬테네그로 사이에 맺어진 발칸연맹(Balkanbund)이 터키에 맞서 치른전쟁, 이때 터키가 패배하면서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가 터키의 지배로부터 해방된다. 그러나 이 전쟁 후 발칸연맹은 터키로부터 해방된 지역의 분배를 놓고 발생한 내부분쟁으로 인해 해체된다.

xxiPaul Rohrbach, Die Bagdadbahn, Berlin 1911, S.18/19

xxiiPaul Rohrbach, Der Krieg und die deutsche Politik, Dresden, 1914, S.18/19

xxiii원저에는 1905년으로 되어있으나 정확히는 1906년. 4월 7일 알제시라스회의에서 1905년 1차 모로코위기를 종결짓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조약은 모로코의 공식적 독립을 보장했지만, 그 나라 경찰을 5년간 프랑스와 스페인의 통제하에 둠으로써 프랑스의 모로코에 대한 영향력을 공고히 했다. 독일은 제국주의적 모험정책 때문에 대외정책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다. 이때 이탈리아는 3국동맹의 파트너인 독일이 아니라, 북아프리카에서 영향권역 분할관련 비밀협정과 비밀중립협정을 맺은 프랑스를 지지했다.

xxiv1911년 9월 이탈리아는 터키에 대한 전쟁을 자극했다. 모로코를 둘러싼 제국주의적 적대관계들을 이용해 이탈리아는 1912년 10월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트리폴리와 씨레나이카를 합병할 수 있었다.

xxvMannesmann

xxviKrupp-Schneider

xxvii영국과 프랑스는 1904년 4월 8일 화친협정(Entente cordiale)에 서명함으로써, 분쟁의 원인이 된 식민지문제에 합의했다. 프랑스는 이집트에 대한 영국의 지배권에 동의한 한편, 영국은 모로코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권을 묵인했다.

xxviiiDer Dreiverband, 다른 이름으로는 트리플-앙탕트(Triple-Entente), 1차 세계대전 이전, 3국동맹에 대응해 1907년 대영제국과 러시아제국 그리고 프랑스는 비밀리에 군사동맹을 맺었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사이의 화친협정(Entente cordiale, 1904)과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의 프랑스-러시아연합(1894)을 한층 더 발전시킨 것이었다.

xxixDas Dreiklassenwahlsystem, 3등급선거시스템은 일종의 불평등한 간접선거방식으로서, 각 선거구의 유권자들은 자신들의 직접세의 크기에 따라 3등급으로 나뉜다. 각 등급은 공개적 의결에서 동일한 수의 선거인단을 선택하고 이 선거인단들이 의원들을 선출할 수 있었다. 이러한 비민주적 선거권은 1849년부터 1918년까지 프로이센주회의의 하원선거에 적용되었다.

xxxIsmail,우크라이나남서부의 도나우강변 도시, 1484년부터 1812년까지 오스만제국에 속했다. 1770년부터 1791년까지 러시아에의 의해 세차례 점령되고 오스만제국에 의해 재탈환되었다. 이후 러시아, 루마니아 결국 우크라이나에 속하게 되었다.

xxxiNavarin, 1827년 10월 20일의 나바리노해전의 장소, 그리스독립전쟁 당시 그리스 나바리노만에서 프랑스-영국- 러시아군대는 그리스편에서 오스만제국군대를 무찌르고 승리함으로써 그리스의 독립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xxxiiSinope, 1853년 11월 30일 터키북부의 항구도시, 시노페 해전에서 러시아제국함대가 오스만제국함대를 대파했다. 고전적인 의미의 해전의 마지막 예로, 크림전쟁 최초의 해전으로 간주된다.

xxxiiiSilistra, 도나우강변에 위치한 불가리아의 요새. 크림전쟁(1853~1856)당시 러시아는 2차례에 걸쳐 오스만제국에 속한 이 요새를 공격했으나 엄청난 인명피해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

xxxivSewastopol, 러시아 크림반도에 위치한 상업도시로 크림전쟁당시 이 도시를 놓고 치열한 전투가 이뤄졌다.

xxxvPlevna, 불가리아에 위치한 도시, 러시아-오스만전쟁(1877~78)당시 러시아-루메니아연합군은 이 전투에서 오스만제국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유럽의 다른 열강들은 이때 오스만제국을 도왔다.

xxxvi Schipka, 불가리아 남부의 도시, 러시아-오스만전쟁당시 결정적인 전투가 있었다.

xxxvii 1905년의 러시아혁명을 말한다.

xxxviii 먹어치우기(Verspeisung) – 원전에는 봉쇄하기(Versperrung)으로 되어 있다.

xxxix 1907년 8월 31일 영국과 러시아의 조약에 따라 페르시아는 이 두 나라 사이에 분할되어,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고, 중국의 티벳에 대한 지배권이 인정되었다. 그렇게 해서 1904년 만들어진 영프화친협정(Entente Cordiale)이 3국협상(Triple-Entente)으로 확대되었다.

xl 1864년 독일-덴마크전쟁, 덴마크지배하에 있던 슐레스비히공국을 놓고 일어난 분쟁이 계기가 되어 발발. 덴마크에 대항해 프로이센-오스트리아연합군이 싸운 이 전쟁 결과 덴마크는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및 라우덴부르크 지역을 포기하고 프-오가 이지역들을 공동 관리하게 된다. 1866년 프로에센-오스트리아전쟁과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전주곡과 같다.

xli Die Bucht von Cattaro, 현재명은 Kotor만. 달마시아의 아드리아해변지역에 위치한 만. 나폴레옹전쟁시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랑스 사이의 분쟁에 휘말렸으나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왕제국에 속하게되어 전쟁항만으로 재무장되었다. 현재 몬테네그로에 속한다.

xlii 원저에는 1884년으로 되어있으나 사실상은 1887년. 이해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상호보장조약(Rückversicherungvertrag)을 통해, 이 양국 중 하나가 제 3국과 전쟁을 하게 될 경우 그 다른 하나는 우호적인 중립을 지킬 의무를 가졌다.

xliii Saloniki, 현재 그리스의 도시 테살로니키의 옛이름. 제 1차 발칸전쟁 발발전까지 오스만제국에 속했었다.

xliv Durazzo, 현재 알바니아의 아드리아해안에 위치한 대도시, 두레스(Durrës)의 이탈리아식 명칭. 옛 오스만제국 영토였으나 1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알바니아에 속하게 되었다.

xlv Sandschak Novibaza, 남동유럽에 위치한 옛 오스만제국의 행정구역(sandschak)의 하나. 현재 세르비아의 남서부, 몬테네그로의 북동부 그리고 코소보의 일부에 해당된다.

xlvi 1차 발칸 전쟁 중 1912년 11월, 그 당시 터키의 지배하에 있던 도시 프리츠렌으로 세르비아군대가 진군할 때, 윜스퀴브(Üchsküb)에서 진군군대와 그곳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영사 프로하스카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고 영사는 포로가 되어 박해를 받았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 사건을 오스트리아-헝가리정부는 세르비아정부에 대한 외교적 조처의 빌미로 삼았다.

xlvii 1908년 6월 9일과 10일 당시의 러시아제국에 속했던 도시 레발(Reval)에서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2세와 영국 왕 에드워드 7세의 회동이 있었다. 이때 1907년 체결된 조약들과,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과 마케도니아의 상황에 관해 의견일치가 확인되었다. 한편, 1908년 7월 27일과 28일에는 프랑스의 A. 팔리에르가 프랑스-러시아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레발에서 차르를 만났다.

xlviii 터키는 1912년 12월 1차 발칸전쟁 당시 협상에서, 승전국인 발칸국가들의 요구들, 즉 에게해의 섬들을 포기하는 것, 그리고 불가리아의 요구에 따라 아드리아노펠시를 포기하는 것을 받아들일 의향이 없음을 표명했다. 이에 따라, 불가리아를 위해 특히 애쓰며 아드리아노펠의 운명에 관심이 많았던 러시아는 코카시아국경에 군대를 집결했다. 터키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독일은, 터키에 대한 러시아의 군사행동은 “유럽평화에의 위협”으로 간주된다고 페테스부르크에게 선언했다. 1913년 재집권한 청년터키정부는 이 선언에 고무되어 교전을 다시 시작하지만 또 다시 패배하고 말았다.

xlix Nordostseekanal, 독일의 북해와 동해를 덴마크를 경유하지 않고 직접 연결하는 운하, 키일운하(Kiel canal)라고도 불린다. 프로에센-덴마크전쟁(1864)년 당시 비스마르크에 의해 그 기획이 시작되어,1887년 착공, 1895년 완공되었다. 이 운하건설계획은 처음부터 군사적-전략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l Helgoland, 독일의 북해에 위치한 섬. 1807년 영국에 의해 점령되어 대영제국에 속했다가 독일과 영국간의 협정에 의해 1890년부터 다시 독일에 속하게 되었다.

li 1913년 3월말 독일제국의회에서는 독일제국 창건 이래 최대의 군대증강을 계획하는 군사법안과 자금준비법안이 마련되었다. 부가적으로 필요한 자금의 일부는 특별군사분담금을 통해, 그리고 만 마르크이상의 모든 재산에 대한 과세를 통해 충당되고 그 나머지는 노동하는 민중의 어깨에 놓여질 계획이었다. 1913년 6월 30일 제국의회는 그 법안들을 가결했다.

lii Basch-Bosuk, 그 잔혹한 행동과 약탈 때문에 악명 높았던 터키의 잘 무장된 비정규군대. 그들은 1853년 러시아-터키전에 최초로 등장했다.

 

제5장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과 마르크스의 유언

하지만 차리즘이 있지 않은가! 의심할 나위 없이 이것은 당의 태도에서, 특히 전쟁의 첫 시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회민주당 원내분파는 그들의 선언에서, <차리즘 반대!>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사회민주당 신문들은 이것으로부터 곧바로 전유럽의 ‘문화’를 위한 투쟁을 만들어냈다.

프랑크푸르트『민중의 목소리』는 벌써 7월 31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독일사회민주당은 차르정권을 오래 전부터 유럽반동들의 유혈적 피난처로 비난해 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예리한 눈으로 이 야만적인 체제의 모든 움직임을 주시했던 그때부터, 이 체제가 정치범들로 감옥을 가득 채우고서 그 어떤 노동자운동에 대해서도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지금까지. 이제 독일의 전쟁 깃발 아래 이 끔찍한 사회를 청산할 기회가 온 것이다.”

루드비히스하픈의『팔스 포스트』는 같은 날 다음과 같이 썼다.

“그것은 우리의 잊을 수 없는 아우구스트 베벨이 갖고 있던 원칙이다. 이제 비문화에 대항한 문화의 투쟁을 해야 하고, 여기에 프롤레타리아트도 함께 한다.”

『뮌헨 포스트』는 8월 1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잔혹한 차르정권에 대항해 나라를 수호하는 데서 우리는 2등 시민처럼 취급당하지 않을 것이다.”

할레『민중신문』은 8월 5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러시아가 우리를 공격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보고들로 볼 때 그렇게 볼 수 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방어를 위한 모든 수단을 사회민주당이 승인한 것은 당연하다. 차리즘은 모든 힘을 다해 내쫓아야 한다.”

그리고 8월 18일자에 쓴 것에 따르면,

“그러나 철의 주사위가 던져진 지금, 다른 모든 독일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손에 무기를 들 수 밖에 없는 것은 조국방어의 의무 때문만은 아니다. 지금 동양에서 우리가 대적해 싸우는 그 적과 싸움으로써 우리는 모든 진보의 적, 모든 문화의 적에 대항해 싸우고 있다는 자각 때문이다.… 러시아의 패배는 동시에 유럽 자유의 승리를 의미한다.”

브라운슈바익의『민중의 벗』는 8월 5일자에 이렇게 다음과 같이 썼다.

“군사적 무력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압력이 모두를 함께 휩쓸어간다. 그러나 계급의식적 노동자들은 외부적인 힘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이 발딛고 서 있는 그 땅을 동양의 침략으로부터 스스로 방어할 때 그들은 자신의 신념을 따르는 것이다.”

에센의『노동자신문』은 8월 3일에 이미 다음과 같이 썼다.

“지금 러시아의 결정이 이 나라를 위협한다면, 그렇다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러시아의 잔학한 차리즘에 대항해, 자유와 문화에 대한 백만번의 죄인에 대항해 싸워야 할 때, 의무완수와 희생각오에 있어서 이 나라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차리즘 타도! 야만의 도피처 타도! 그러면 이것이 구호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빌레펠트의『민중근위대』도 8월 4일자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모든 곳에서 구호는 똑같다. 러시아 전제정치와 음흉함 반대!”

엘베펠트 당신문은 8월 5일자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서유럽 전체는 혐오스럽고 살인적인 차리즘을 타파할 사활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류의 이해관계를, 지금까지 독일 자본이 수행하던 수익성있는 돈벌이들을 저지하려는 영국과 프랑스의 자본가계급들의 탐욕이 질식시킨다.”

쾰른의『라인신문』은 다음과 같이 썼다.

“친구들이여, 운명이 너희들에게 내세우는 그 만큼 너희들의 의무를 다하라! 너희들은 유럽의 문화를 위해, 너희들의 조국의 자유를 위해 그리고 너희 자신들의 안녕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슐레스빅-홀슈타인 민중신문』은 8월 7일자에 다음과 같이 썼다.

“물론 우리는 자본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다. 확실히 우리는 이 대전 이후에도 계급투쟁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급투쟁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는 더 자유로운 나라에서 이뤄질 것이다. 이러한 계급투쟁은 훨씬 더 경제적인 측면에 국한될 것이며,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소외된 자, 2등 시민, 정치권력이 없는 자로 취급하는 것은 미래에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러시아 차리즘이 사라지고 난다면 말이다.”

『함부르크의 메아리』는 8월 11일 다음과 같이 외쳤다.

“우리는 영국과 프랑스에 대항해 방어전쟁을 치뤄야 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차리즘에 맞서 전쟁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전쟁을 열광적으로 수행한다. 그것은 문화를 위한 전쟁이기 때문에.”

뤼벡의 당기관지는 9월 4일에도 여전히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유럽의 자유가 구원된다면, 그러면 유럽은 전쟁이 끝난 뒤 독일무기의 힘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우리 투쟁의 주요 상대는 모든 민주주의, 모든 자유에 있어서 불구 대천의 원수이다.”

이렇게 독일 당신문들의 합창이 한 목소리로 울려퍼졌다.

독일정부는 전쟁 초기에 이렇게 제공된 도움을 받아들였다. 유럽문화의 해방자라는 월계수를 태연하게 제 손으로 제 헬멧에 꽂았다. 그렇다, 분명히 불편해하기는 해도 그리고 상당히 서투르게 고마워하긴 했어도 “민족들의 해방자”라는 역할에 안주했다.

심지어 “양쪽 대군”의 총사령부들은 “절박한 나머지 그 어떤 규정도 고려치 않은 채” 야합하는 걸 배워서, 러시아-폴란드지역i의 “부랑자와 음모자”를 부추겼다. 마찬가지로 폴란드인들에게도 폴란드 천국화 계획이 제시되었다. 이는 당연히, 차르 정부에 대항해 그들이 “엄청난 배반”을 대대적으로 행한다는 전제하에 그 대가로서 제시된 것이다. 그런데 이른바 그와 같은 것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카메룬의 두알라족의 추장 만가 벨은 전쟁의 소음 속에서 소리 소문 없이 그리고 성가신 재판과정 없이 교수형 당했다.ii 곤경에 처한 독일 제국주의의 이 모든 재주넘기에 사회민주당의 당 언론이 동참했다. 사회민주당의 제국의회내 분파가 신중한 침묵으로 두알라족 추장의 주검을 덮어버리는 동안, 사회민주주의 신문들은 “독일의 무기”가 차리즘의 가련한 희생자들에게 가져다준 자유에 대해 환호하는 종달새의 지저귐으로 대기를 가득 채웠다. 당의 이론지,『새시대』는 8월 28일자 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차르 제국의 국경지역 국민들은 환호하며 독일 전초부대를 맞이했다. 폴란드 유태인 중 이 지역 정착자들은 이제까지 조국이라는 개념을 단지 부정부패와 채찍의 형태로만 맛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가련하고 참으로 국적 없는 자들, 잔혹한 니콜라이에게 착취당하는 이러한 신하들은 그들의 족쇄 외에 지킬 것이라곤 없다. 그래서 지금, 독일의 주먹이 휘두르는 독일의 무기가 차르체제 전체를 재빨리 때려 부셔버렸으면 하는 갈망과 희망으로 살고 있다.… 그들의 머리 위에서 세계대전의 천둥이 치고 있는 동안, 독일 노동자계급 안에는 목표가 분명한 정치의지가 또한 살아 있다. 명예로운 평화를 이뤄내기 위해서, 동쪽 야만주의의 동맹국들을 서쪽에서 막아내려는 그리고 차리즘을 절멸하는데 마지막 준마와 인명까지 바치려는 의지가 살아있다.”iii[강조 – R.L.]

사회민주당의 제국의회 원내분파가 독일 민족과 문화의 수호라는 성격을 이 전쟁에 부여한 뒤, 사회민주당 언론은 심지어 다른 민족의 해방자라는 성격까지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힌덴부르크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산 집행인이 되어버렸다.

그 기억은 지금 전쟁에서 우리당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당은 자신의 원칙, 국제대회의 칭송과 결의들, 이 모든 것을 실상 그것들이 적용되어야할 바로 그 순간에 완전히 잊은 반면에, 마르크스의 “유언” 하나를 불운하게도 기억해냈다. 마르크스가 “마지막 준마와 인명까지 바쳐서”라도 무찌르려 했던 그 프로이센 군국주의을 장식하는데 그 “유언”이 쓰일 수 밖에 없는 그 순간에 그것을 시간의 먼지로부터 끌어냈다. 니콜라이 1세 당시 봉건적 러시아에 대항한 1848년 독일 3월 혁명에 관한, 『신라인신문』의 얼어붙은 나팔소리들을 멀쩡한 1914년에 독일사회민주당에게 갑자기 들이대면서, 이제 프로이센의 호족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독일의 총검”을 대혁명의 러시아에 대항해 싸우라고 손에 쥐어주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수정”을 가할 때이다. 곧 70년이 될 그 역사적 경험의 도움으로 3월 혁명의 구호들을 점검할 때이다.

1848년 당시 러시아의 차리즘은 실제로 “유럽 반동들의 도피처”였다. 중세의 자연경제적인 토대에 단단히 뿌리를 둔 러시아 사회관계의 확고한 산물인 러시아 절대주의는, 부르주아 혁명으로 뒤흔들리고 특히 독일에서는 작은 공국들로 약화된 왕정주의적 반동들의 피난처이자 동시에 조종자였다. 1851년만 해도 니콜라이 1세는 베를린의 프로이센 사절, 폰 로호프를 통해서, “1848년 11월 브랑엘장군의 베를린 입성시에 혁명이 그 뿌리까지 진압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이고 “어떤 나쁜 헌법도 제공할 필요가 없었을 그런 다른 순간도 있었다는 것”을 전하게 했다. 다른 한번은 만토이펠에게 경고하면서, 그는 “호흐데로 휘하의 왕국부서가 의회에 대항해 결연히 왕의 권리를 수호하고 보수적 원칙들이 적용되도록 할 것이라 낙관적으로 기대한다”라고 전했다. 바로 그 니콜라이는 프로이센의 한 수상에게, “프로에센에서 법질서를 공고화하기 위한… 그의 지속적인 노력”을 인정하여 알렉산더-네프스키훈장을 수여했다.

크림전쟁은 이미 그 점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이 전쟁을 통해 그 낡은 체제는 군사적, 정치적으로 파산에 이르게 되었다. 러시아 절대주의는 개혁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음을, 스스로를 근대화하고 부르주아적 관계에 적응하는 것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것은 작은 손가락 하나를 악마에게 내밀었는데, 그 악마가 지금 벌써 팔을 단단히 붙잡고서 있어서 결국은 통째로 끌려들어가고 말 것이다. 크림전쟁의 결과는 그와 동시에, 종속된 민족에게 “총검”으로써 선사할 수 있는 해방이라는 도그마에 대한 교훈적인 시험대였다. 세당에서의 군사적인 파산은 프랑스에게 공화국을 선사했다. 그러나 이 공화국은 비스마르크 군대의 선물이 아니었다. 프로이센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그때에도 다른 민족에게 자신의 융커체제 말고는 선사할 것이라곤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 공화국은 프랑스에서 1789년 이래 사회투쟁과 3개의 혁명iv이 내부적으로 성숙된 열매였다. 세바스토폴에서의 파산v은 예나vi에서처럼 작용했다. 즉, 그 나라 내부에서 혁명 운동이 없었기 때문에 그 군사적 패배는 오직 개량적으로 낡은 체제를 새롭게 강화시킬 뿐이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을 터 놓은 러시아의 1860년대 개혁들vii도 부르주아-자본주의 경제의 자금을 통해서만 작동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자금은 서유럽 자본으로부터, 즉 독일과 프랑스로부터 조달되었다. 그 뒤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즉, 러시아 절대주의가 서유럽 부르주아지에 의해 부양되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러시아의 루블화”가 외교회의에, 그리고 프로이센의 빌헬름 왕세자가 1854년만 해도 통렬히 불평해 댔듯이, “왕의 전실에까지” 굴러다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일과 프랑스의 금이 페테르부르크로 굴러들어가서, 차르의 군대를 먹여 살렸다. 이러한 활력수가 없었다면, 이 군대는 오래 전에 이미 그 수명을 다했을 것이었다. 그 이후 차리즘은 더 이상 단순히 러시아 상황의 산물이 아니다. 그 두 번째 뿌리는 서유럽의 자본주의적 관계들이다. 그리고 그 관계는 그 뒤 십년마다 더욱 더 변화했다.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인해 러시아 전제정치의 내적인 확고한 뿌리 자체가 갉아먹혀 들어가는 그 만큼, 그 두 번째 뿌리, 즉 서유럽의 그것은 점점 더 강화되었다. 재정적 지원에 더하여, 1870년 전쟁 이후 프랑스와 독일의 경쟁 때문에 정치적 지원이 한층 더 강력히 덧붙혀졌다. 러시아 자체의 품 안에 혁명적 역량이 절대주의에 맞서 솟구치면 솟구칠수록 그만큼 더, 이러한 역량은 위협당하는 차리즘을 정치적 도덕적으로 후원하는 서유럽의 더 완강한 저항에 부딪치게 되었다. 1880년대 초, 오래된 러시아 사회주의의 테러리스트 운동이 차르 통치를 한 순간 강력하게 뒤흔들었을 때, 그 권위를 차례 차례 파괴해 버렸을 때, 바로 그 때 비스마르크는 러시아와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고 국제정치에서 러시아를 지원했다.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가 독일정치와 뒤얽히면 뒤얽힐수록 당연히 그만큼 더 무제한 적으로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돈지갑을 열어주었다. 이러한 두 가지 지원을 받으며, 러시아 절대주의는 내부로부터 밀물처럼 떠오르는 혁명운동에 대항한 투쟁 속에서 시한부의 삶을 근근이 이어갔다.

차리즘이 지금껏 제 손으로 가꾸고 돌본 자본주의 발전이 드디어 그 열매를 맺어 1890년대 이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대중운동이 시작되었다. 차리즘 아래에서 자국의 기반이 흔들이기 시작했다. 한 때의 “유럽반동의 도피처”는 스스로 “나쁜 헌법을 제공할” 처지에 놓여 있음을 발견하고, 제집에 밀어닥치는 홍수에 직면하여 스스로가 “도피처”를 찾아 나서야만 했다. 그리고 독일에서 그것을 발견한다. 뷜로프의 독일은 브랑엘과 만토이펠의 독일이 받은 은혜에 대한 빚을 갚게 된다. 관계는 직접적인 역전을 맞이한다. 즉, 독일 혁명에 대항한 러시아의 원조가 러시아혁명에 대항한 독일의 원조로 대체된 것이다. 염탐, 추방, 양도 등 신성동맹의 멋진 시절로부터 유래하는 본격적인 “선동 모함”이 독일에서 러시아 자유투사들에 대해 이뤄졌다. 그것은 이 투사들을 러시아혁명의 문턱까지 추적했다. 그러한 모함은 1904년 쾨니히스베르크 재판viii에서 절정에 달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마치 번갯불로 비추듯이 선명하게 1848년 이래 역사적 발전의 구간 전체를, 러시아 절대주의와 서유럽 반동 사이의 관계 역전을 드러냈다. 프로이센의 법무부장관은 독일지배계급에게 손가락으로 러시아의 차르체제의 흔들리는 지반을 가리키면서, <저 나라가 흔들리는 것을 보라(Tua res agitur)!> 라고 외쳤다. 쾨니히스베르크의 수석검사 쉬츠ix는 “러시아에 민주공화국이 설립되면 독일에 민감하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내 이웃집이 불타고 있으면, 내 집도 위험에 처하게 된다”고. 그리고 그의 조수 카스파는 “그건 그렇고, 절대주의라는 방호벽이 유지되느냐 마느냐는 당연히 독일의 공적인 이해관계에 대단한 영향을 미친다. 분명히 혁명 운동의 불꽃은 손쉽게 독일로 옮겨 붙을 수 있다”고 전했다. 여기서 결국, 두더지가 역사발전에서 어떻게 땅 밑을 파서 허물고, 뒤집어서 “유럽반동의 피난처”라는 낡은 문구를 파묻어 버렸는지가 생생하게 드러난다. 유럽의 반동, 즉 가장 선두에 있는 프로이센의 융커체제가 지금 바로 러시아 절대주의의 피난처인 것이다. 이 피난처 곁에서 절대주의는 여전히 유지되고 그 안에서 치명상을 당할 수 있다. 러시아혁명의 운명은 이점을 확인해 주게 된다.

그 혁명은 진압 당했다. 그러나 그 잠정적 패배의 바로 그 원인들을 더 심층적으로 살펴보면, 이는 현재 전쟁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의 태도에 대해 교훈적이다. 1905/6년에 있은 그 러시아 혁명이 혁명역량, 목표의 명료함 그리고 집요함에 있어서 전례가 없었음에도 패배한 점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하나는 그 혁명 자체의 내부적 성격에 있다. 즉, 거대한 역사적 강령에 있다. 그 혁명이 100년전 프랑스대혁명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경제적 정치적 문제들의 규모에, 즉 농업문제와 같이 현사회질서의 틀 안에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몇몇 문제들을 포함하는 그런 경제적 정치적 문제들의 규모에 있다. 제국의 부르주아지 전체의 반혁명적 저항에 맞서 부르주아 지배를 위한 국가형태를 창조하려는 데서 오는 어려움에 그 한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으로 볼 때, 러시아 혁명이 실패한 것은 그것이 부르주아 계급의 과업을 가진 프롤레타리아혁명이었기 때문이다. 또는 달리 말하자면, 프롤레타리아-사회주의적 투쟁수단을 가진 부르주아혁명이었기 때문이다. 천둥벼락 속에서 두 시대의 충돌이자, 러시아 계급관계의 지연된 발전뿐만 아니라 서유럽에서의 너무 익어버린 계급 관계의 열매였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으로 보면 또한, 1906년의 패배는 그 파산이 아니라 제 1장의 자연스런 결말에 불과하며, 그에 이어 다음 장들이 자연법칙에 따라 당연히 뒤따르게 된다. 1905년 러시아혁명 실패의 두번째 원인은 다시 외부적인 성질의 것이다. 즉, 그것은 서유럽에 있다. 유럽의 반동은 그들의 보호를 받고 있던 그 체제가 위험에 처하자 다시 서둘러 도움을 주었다. 이미 1905년에 “독일의 총구”가 “독일의 주먹 안에서”, 이웃 폴란드로 처들어가기 위해서 페테스부르크의 손짓만을 기다리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총탄”을 통해서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와 마찬가지로 효과적인 구조수단, 즉 재정지원과 정치적 연합을 통해 차리즘은 어깨걸어 부축되었다. 프랑스의 자금으로 차리즘은 러시아 혁명가들을 진압하는 데 쓰인 산탄을 마련했고 독일로부터는 일본의 어뢰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의 주먹이 가한 치욕으로부터 기상을 회복할 도덕적 정치적 힘을 얻었다. 1910년 포츠담에서 공식적으로 독일은 러시아의 차리즘을 두팔 벌려 환영했다.x 학살의 피로 더럽혀진 자를 독일제국 수도의 정문 앞에서 영접한 것은 페르시아를 교살한 것xi에 대해 뿐만 아니라, 특히 러시아 반혁명의 형리역할에 대한 독일의 축복이었다. 그것은 러시아혁명의 가상의 무덤 위에서 독일과 유럽 “문화”의 공식적 파산이었다. 참 이상하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그 당시 러시아 혁명의 대학살 위에 자신들의 고향인 독일에서 이러한 도전적인 장례식 후 성찬이 벌어졌을 때, 완전히 침묵했으니 말이다. 1848년으로부터 유래하는 “우리의 노장의 유언”을 철저히 잊고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의 이 전쟁이 시작될 즈음에는 아주 작은 당신문들 마저도 경찰의 허락을 받은 뒤, 러시아에서 자유를 학살한 자들에 대항해 온갖 처참한 표현을 즐겨 썼다. 그러나 1910년 그 학살자들이 포츠담에서 칭송될 그 당시에는 러시아 반혁명을 지지하는 것에 반대해 어떤 저항 행동도 없었고, 러시아의 자유를 위한 연대를 알리는 어떤 기사도 실리지 않았다! 그런데 1910년 차르의 바로 이 유럽여행은, 진압당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들은 그 나라 반동뿐만 아니라 서유럽 반동의 희생자들이라는 사실을 다른 그 무엇보다도 가장 잘 폭로했다. 그들은 1848년 3월의 투사들과 꼭 마찬가지로, 자국의 반동뿐만 아니라 그 반동의 외국 ‘피난처’에 대항해 피흘리며 싸운 것임을 잘 드러냈다.

그러나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의 혁명에너지의 생생한 원천은 차리즘과 자본주의라는 이중 학정의 고통의 잔만큼이나 마를 길이 없다. 반혁명의 비인간적인 십자군원정 시기가 지난 뒤 혁명적 발효가 다시 시작되었다. 1911년 이후, 레나의 학살xii이 있은 뒤 노동자 대중은 다시 기운을 차려 투쟁에 나섰다. 밀물이 다시 부상하여 부글거리며 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보고에 따르면, 러시아에서 1910년에 46,623명의 노동자들 256,385일에 걸쳐 경제파업을 했다. 1911년에는 96,730명의 노동자들이 768,556일에 해당하는 경제파업을, 그리고 1912년 첫 5개월 동안 98,771명의 노동자들이 1,214,881일에 해당하는 경제파업을 했다. 1912년 한 해 동안에 정치적인 대대적 파업xiii, 항의행위, 시위에 100,500명의 노동자들이 그리고 1913년에는 1,272,000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했다. 1914년 이러한 밀물은 희미하게 웅성거리면서 점점 더 위협적으로 되고 그 수위가 높아져 갔다. 1월 22일 혁명xiv시작을 기념하기 위해 200,000명의 노동자가 참여한 대대적 시위파업xv이 있었다. 6월에는, 1905년 당시 혁명이 시작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코카서스에서, 바쿠에서, 고지대에서 거대한 화염이 타올랐다. 40,000명의 노동자들이 여기에서 대대적 파업에 참가 했다. 그 불길은 곧바로 페테스부르크로 옮겨 붙어, 여기서 7월 17일에는 80,000명, 7월 20일에는 200,000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했다. 7월 23일에는 총파업이 제정러시아 전체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미 바리케이트가 설치되고 혁명이 진행중이었다. 그렇게 몇 달만 계속되었다면, 그랬다면 확실히 나부끼는 깃발로 진입했을 것이다. 그렇게 몇 년만 더 지속되었다면, 그랬다면 러시아 절대주의가 더 이상은1916년으로 계획된 모든 국가들의 제국주의적 춤판에 공헌할 수 없을 만큼 그 혁명은 절대주의를 마비시킬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아마도 세계정치구조 전체를 변화시키고, 제국주의의 계획을 망쳐놓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으로 독일의 반동이 다시 러시아운동의 혁명적 계획을 망쳐놓았다. 비엔나와 베를린은 전쟁을 시작했고 이 전쟁은 러시아혁명을 폐허 속에 파묻어 버렸다 - 아마 몇 년동안은. “독일의 총구”는 차리즘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자를 분쇄해버린 것이다. 그것은 러시아가 지난 백년간 치르고 있던 가장 전면화된 전쟁에서 차리즘을 도왔다. 비엔나와 베를린이 자행한, 독일 밖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라도 명백한 전쟁선동, 독일 내에서의 “당쟁중지”와 이로 인해 유발된 애국주의적 도취, 벨기에의 운명, 프랑스공화국을 원조할 필요성, 이 모든 것은 이번에 러시아정부의 도덕적인 후광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절대주의는 지금까지 결코 그 어느 유럽전쟁에서도 이렇게 전대미문으로 유리한 입장에 놓인 적이 없었다. 희망차게 나부끼던 혁명의 깃발은 전쟁의 거친 소용돌이 속에서 내려졌지만, 명예롭게 내려졌다. 그리고 살륙의 혼란으로부터 다시 휘날리게 될 것이다. 독일의 “총구”에도 불구하고, 전장에서 차리즘이 승리하든 패배하든 상관없이.

러시아에서의 민족 봉기들도 실패했다. 독일사회민주당에 비해서 확실히 그 “민족들”은 힌덴부르크의 공동방패라는 해방 사명에 덜 현혹당했다. 원래 현실적인 민족인 유태인들은, “독일의 주먹”이 자체의 프로이센 반동, 예를 들어 3등급선거권을 “분쇄하는” 데도 성공하지 못했으니 러시아 절대주의를 끝장낼 능력은 더더욱 없음을 간단한 주먹구구로도 파악해냈을 것이다. 전쟁의 3중 지옥의 희생자가 된 폴란드는, 폴란드 아이들의 몸에 피투성이 채찍자국으로 독일어 주기도문을 새겨넣는 브레쉔xvi으로부터 그리고 프로이센정착위원회xvii들이라는 “해방자”들에게 그 약속의 성스러운 메시지에 소리 높히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용히 괴츠 폰 베얼리힝엔의 독일어 격언xviii을 더 간결한 폴란드어로 번역한 것 같다. 러시아인뿐만 아니라 폴란드인과 유태인 모두는 그들의 머리통을 깨부수는 “독일의 총구”는 그들에게 자유가 아니라 죽음을 초래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곧 알아차렸다.

이 전쟁에서 마르크스의 유언을 거론한 독일사회민주당의 해방전설은 그러나 평소의 농담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경솔한 짓이었다. 마르크스에게 러시아혁명은 하나의 세계적인 전환점이었다. 그의 모든 정치적 역사적 전망들은, “그 사이에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생하지 않는 한”이라는 조건에 연결되어 있었다. 마르크스는 눈앞에 봉건적 러시아를 놓고 있을 때조차도 러시아혁명을 믿고 기다렸다. 그 혁명이 그러는 동안에 다가왔다. 첫 번째 타격에 승리하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축출될 수 없는 것이었고, 의제가 되었고 이제 막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갑자기 독일사회민주당이 “독일의 총구”를 들이대며 러시아혁명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선언한 것이다, 역사로부터 그것을 지워버린 것이다. 그들은 갑자기 1848년의 기록부를, <러시아에 대항한 전쟁 만세!>라는 구호를 꺼냈다. 그러나 1848년 당시에는 독일에 혁명이, 러시아에는 경직되고 가망없는 반동이 있었다. 그때와 달리 1914년에는 러시아는 혁명을 잉태하고 있어지만 독일에는 프로이센의 융커체제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때 “유럽의 해방자” 독일인들은 1848년 마르크스 때 처럼 바리케이트로부터가 아니라, 고작 소위 한명이 그 문 밖을 지키고 서 있던 조그마한 지하창고 안에 갇혀있다가 곧바로 러시아에 맞선 문화사명을 위해 출동했다! 그들은 출동했다. 우애롭게 얼싸안고, 러시아 차리즘의 가장 강력한 도피처인 프로이센 융커체제나 민중이나 하나가 되어, 쾨니히스부르크의 장관들, 검사들과 “당쟁중지로 평화롭게” 얼싸 안고, 그렇게 그들은 차리즘에 맞서 출동하여 “총구”를 내밀었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의 머리에!

이보다 더 처참한 역사의 농담, 러시아혁명과 마르크스의 유언에 대해 이 보다 더 잔인한 조롱을 상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전쟁 동안 사회민주당의 정치적 행동에서 가장 암흑같은 시기를 형성한다.

이른바 유럽문화의 해방은 하나의 에피소드가 되고 말았다. 그 불편한 가면은 독일 제국주의로부터 곧 벗겨져서 전선은 공개적으로 프랑스, 특히 영국을 향했다. 몇몇 당신문들은 이러한 변화에 민첩하게 동조했다. 유혈적인 차르 대신에 음험한 영국인들과 그들의 소상인적인 기질이 전반적인 조롱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유럽문화를 러시아 절대주의로부터가 아니라 그 대신 영국의 해상지배로부터 해방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당이 놓이게 된 절망적으로 뒤엉킨 상황은 당신문들 중에서 몇몇 더 괜찮은 신문들의 발작적 노력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들은 반동적인 전선에 놀라서, 전쟁을 원래 목표로 되돌리려 안간힘을 다했다. 전쟁을 “우리의 노장의 유언”, 즉 그 자신들이, 사회민주당이 창조해냈던 신화에 못박아 두기 위해서! 황제는, “나는 무거운 심정으로 나의 군대를, 수많은 전장에서 나란히 함께 싸워왔던 그 이웃에 대항해 동원해야 했다. 솔직히 매우 유감스럽게도 나는 독일이 충실이 유지해 왔던 우정이 깨지는 것을 보았다”라고 말했었다. 그것은 단순하고 공공연하며 정직하기라도 했다. 사회민주당 제국의회 원내분파와 그 언론들은 이것을 변형해서『신라인신문』의 기사 하나로 만들었다. 전쟁 발발 후 첫 몇 주 동안의 온갖 수사학이 제국주의의 산문적 간경체로 대체된 이제 독일사회민주당의 태도에 대한 미약하나마 유일한 해명은 공중분해되어 버렸다.


i 1815년 비엔나 회의로 창조된 폴란드왕국은 러시아-폴란드(회의폴란드Kongreßpolen)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는 1915년까지 존속했고, 인적 결연을 통해 러시아와 결합된 채 차르지배하에 고통받았다.

ii 1914년 카메룬 해안의 두알라족이 독일의 식민지배에 저행해 봉기했다. 그 봉기는 유혈적으로 진압되었고, 만가 벨 추장은 1914년 8월 8일 처형되었다.

iii Volkskrieg. Die Neue Zeit(Stuttgart), 32. 1913/14, Zweiter Band, S.872

iv 프랑스대혁명(1789~1793), 7월혁명(1830), 그리고 2월혁명(1848)을 말한다.

v해군요새 세바스토폴은 크림전쟁 당시 러시아 군대와 해병들이 343일 동안 방어했으나 결국 1855년 8월 수적으로 우세한 프랑스와 영국의 전투력에 의해 점령당했다.

vi나폴레옹의 원정이 시작된 직후, 예나(Jena)와 아우어스테트(Auerstedt)에서의 이중전투에서 1806년 10월 14일 프로이센의 주력부대 2개가 나폴레옹 1세에게 패배했다.

vii 크림전쟁(1853~1856)에서의 패배로 러시아내부의 정치적 상황이 매우 악화되었다. 결국 지배계급은 1861년에서 1870년사이에 일련의 개혁을 추진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개혁들은 미완적이고 또 봉건적 잔재들 때문에 제한적이긴 했지만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추동했고(1861), 촌락지역과 도시지역의 자치기관들이 형성되었으며(1864), 국민교육계(1863)과 법원계(1864) 그리고 검열(1865)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viii Königsberger Prozeß, 1904년 7월 12일부터 25일까지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열린 한 재판에서 혁명서적을 러시아로 반입했다는 이유로 독일사회민주당원 9명이 러시아에 대한 반역, 차르모독 및 비밀결사관여죄로 기소되었다. 변호인중의 한명이었던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러시아에서의 잔인한 억압과 프로이센당국과 차르당국의 협력을 규탄했다.

ix Schüze – 원저에는 Schulze로 되어있음

x 차르는 1910년 11월 독일을 방문했다. 이때 포츠담에서 두 나라 외무장관들은 페르시아에서의 양국 이해관계의 구획과 바그다드철도에 대해 협상했다.

xi 1905년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페르시아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적 대중운동이 전개되어 절대주의를 제한하고 입헌정부형태를 도입했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남북쪽에서 혁명세력을 무력진압했던 영국과 차르 러시아의 적극적 지원에 힘입은 페르시아의 반혁명세력들은 1911년말 혁명을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xii 1912년 1월 29일 레나 골드필드유한회사(Lena Goldfields Co. Limited)의 한 광구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볼세비키가 주도한 이 파업은 6천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한 총파업으로 확대되었다. 노동자들이 체포된 파업위원들의 석방을 요구하자 군대가 발포하여 노동자 250명이 사망하고 270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학살에 대항해 러시아 전역에서 항의파업이 일어났다.

xiii Massenstreik

xiv 1905년 러시아혁명을 말한다

xv Demonstrationsmassenstreik

xvi 1901년 5월 20일 그 당시 포센(Posen)지방의 소도시 브레쉔(Wreschen)에서 한 교사가 폴란드아이들이 수업시간에 독일어로 대답하려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아이들을 심하게 학대했다. 이에 뒤이어 격분해 항의한 학부모들은 그 이후 “국가평화파괴”죄로 높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xvii 이른 바 정착위원회(Ansiedlungskommission) 활동의 법적 기초가 되는 정착법은 1886년 의결되어 1893년과 1902년에 더 보강되었다. 이 정착법에 따라 수백만 마르크가 “서프로이센과 포센에서의 독일인 인자들의 강화” 목적으로 제공되었다. 정착위원회는 독일인 대지주에게 양도하거나 독일인 정착민들에게 분할 제공할 목적으로 폴란드토지를 국가자금으로 매입했다.

xviii Kernspruch Götz von Berlichingens, 중세독일의 농민전쟁을 배경으로 한 괴테의 희곡, 괴츠 폰 베얼리힝엔(Götz von Berlichingen)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 지나치게 선동적이고 너무 직실적이게 황제를 비하하여 초판 이후부터는 부분적으로 삭제당하지만, 그 표현은 이미 잘 알려진 후였다. 농민전쟁에서 패배한 주인공 괴츠 폰 베를리싱엔은 쇠사슬에 묶인 채, “leck mich am Arsch(어디 해볼테면 해보라고: 직역하자면, 내 엉덩이나 핥으라고)!”라고 당당하게 외치며 이 말을 황제에게 전할 것을 요구한다.

 

제6장 독일사회민주당과 노조의 계급투쟁 방해활동

사회민주당이 보여준 태도의 또 다른 한 측면은 당쟁중지, 즉 전쟁기간 동안 계급투쟁의 중지를 받아들인 점이다. 8월 4일 제국의회에 제시된 원내분파의 선언 그 자체는 이미 계급투쟁을 포기하는 최초의 행위였다. 그 선언의 내부적인 표현 수위는 제국정부와 부르주아정당 대표자들과 사전에 합의되어 있었다. 8월 4일의 엄숙한 행위는 이미 비밀리에 준비된, 국민들과 외국에 내보인 애국주의적 연극이었다. 그 안에서 사회민주당은 이미 자신이 맡은 역할을 다른 참가자들 곁에서 연기했다.

사회민주당 제국의회 원내분파는 전쟁차관을 승인함으로써 노동자운동의 모든 주요 요구들에 구호를 제공했다. 노동조합지도자들은 당장 모든 임금투쟁을 중지하였고 이를 당쟁중지라는 애국적 의무와 분명하게 관련지으며 기업가들에게 공식적으로 전했다. 자본주의의 착취에 대항한 투쟁을 전쟁기간 동안 스스로 포기했다. 바로 그 노동조합지도자들은 도시노동자들을 농민들에게 조달해서 이들이 방해받지 않고 추수를 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 사회민주당 여성운동지도부는 공동의 “국민여성봉사”를 위해 부르주아 여성들과 동맹을 선언하여, 동원령 이래 국내에 남겨진 당작업 역량이 사회민주당의 선동 대신 스프배급과 상담 등의 국민구호임무를 하도록 지휘했다. 사회주의자법i이 있던 그 당시에 우리 당은 의회선거를 최대로 활용해서 사회민주당언론에 대한 그 모든 탄압과 계엄 상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입장을 널리 알리며 계몽하고 주장했었다. 지금 사회민주당은 제국의회 보궐선거, 주의회 및 지방의회선거에서 공식적으로 모든 선거운동, 말하자면 의회주의 계급투쟁의 의미에서 모든 선동과 계몽을 포기하고 선거를 단순한 부르주아적 내용, 즉 의석의 확보로 축소시켰고, 이점에서 부르주아정당들과 평화롭게 협력했다. 프로이센과 알자스-로렌 주의회를 제외한 모든 주의회와 지방의회들에서 사회민주당의원들이 당쟁중지를 엄숙히 환기하며 예산안에 동의한 점은 전쟁 발발 이전의 관행과의 엄청난 단절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기껏 몇몇 예외를 제하면 사회민주당 신문들은 국민단결원칙을 거창하게 독일민족 사활이 걸린 이해관계로 만들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곧 그 당언론은 은행에서 저금을 되찾는 것에 대해 경고했고, 그럼으로써 온 힘을 다해 국내 경제생활의 불안정화를 막고 저축금을 전쟁차관으로 손쉽게 끌어들일 수 있었다. 당언론은 프롤레타리아 부녀자들이 자신들과 자녀들의 곤궁에 대해 그리고 국가의 불충분한 배급에 대해 전쟁터의 남편들에게 전하지 말도록 경고했고, 전사들에게 사랑스런 가족의 행복을 서술하고 “지금까지 보장된 원조를 우호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안정적이고 고무적인 영향을 끼치도록” 권했다.1* 그 당언론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고전적인 예에서 현대 노동자운동의 교육사업을 전쟁수행의 탁월한 보조수단이라 칭송했다.

“진정한 친구가 누구인지는 곤란에 처했을 때 알아볼 수 있다. 이 오랜 격언은 이 순간 진실이 된다. 억눌리고 학대받고 난폭히 취급당했던 사회민주당원들은 일사불란하게 향토방위에 나섰고, 프로이센-독일에서 종종 괴롭힘 당하던 독일 노동조합 중앙은 그들의 가장 좋은 재목들이 나라를 위해 함께 투쟁하고 있음을 한 목소리로 보고하고 있다. 일반 신문류의 기업가 신문들도 이 사실을 보도하며 덧붙여, 이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책임을 완수할 것임을 확신한다고 그리고 아마도 가장 치열한 격전지에서 이들이 싸우고 있을 것임을 확신한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우리의 단련된 노동조합원들이 ‘내려치기’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음을 우리는 확신한다. 현대의 대군대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장군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거의 3천 미터까지, 정확히는 2천 미터까지 ‘적중’시킬 수 있는 현대의 포탄사격 때문에, 대군대 병력을 폐쇄된 행진 대열로 전진시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이전에 ‘분산’시켜야 하고, 이러한 분산은 다시 훨씬 더 많은 수의 정찰병과 대단한 규율과 시야의 명료함을 부대들에게 뿐만 아니라 개개인에게도 요구한다. 그래서 노동조합이 얼마나 교육적으로 작용했는지를 이 전쟁에서 진정으로 보여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과 같이 어려운 시기에 이러한 훈육이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냉철하고 침착하게 숙고해 보면, 러시아와 프랑스의 군인들이 기적적인 용맹을 떨칠 지언정 독일 노동조합원들이 그들보다 한 수 위에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조직된 사람들은 국경지역을 마치 자기 바지주머니 속처럼 잘 알고 있으며, 어떤 노조 간부는 외국어 능력도 갖추고 있다. 1866년 프로이센 군대의 전진이 선생들의 승리였다면, 이번에는 노동조합 간부들의 승리라 말할 수 있다.”(1914년 8월 18일자 프랑크푸르트의『민중의 소리』)

당의 이론지『새시대』(1914년 9월 25일자, 제 32호)의 설명에 따르면,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가 중요한 이상, 모든 다른 문제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된다. 심지어 전쟁의 목적 조차도. 그러니 군대 내에서 그리고 국민 내에서 모든 정당들, 계급들, 민족들의 차이도 당연히 부차적으로 된다.”ii[강조 –R.L.] 그리고 바로 그 이론지는 1914년 11월 27일자 제 8호의『인터내셔널의 한계』라는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계대전으로 사회주의자들은 서로 다른 진영으로, 특히 서로 다른 민족진영으로 분열된다. 인터내셔널은 이것을 막을 수 없다. [강조 –R.L.]

즉, 그것은 전쟁에서 효과적인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평화기구이다.”iii 그 “위대한 역사적 임무”는 “평화를 위한 투쟁, 평화시의 계급투쟁”이라고 한다.

계급투쟁은 그렇게 사회민주당에 의해 1914년 8월 4일에, 그리고 미래에 있을 평화체결까지는 없다고 선언되었다. 크룹사의 대포가 벨기에에 첫 번째 천둥을 내리침과 더불어 독일은 계급연대와 사회조화의 기적의 나라로 둔갑해버렸다.

어떻게 이 기적을 상상해야 할까? 알려져 있듯이, 계급투쟁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라는 시기에 마음대로 그냥 특정 시기 동안에 중지시킬 수 있도록 사회민주당이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은 사회민주당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계급사회의 기본적 산물로서 그것은 유럽에 자본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이미 부상했다. 사회민주당이 현대 프롤레타리아트를 계급투쟁으로 인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 자체가 계급투쟁의 여러 서로 다른 공간적 시간적 파편들 속에서 목적의식과 단결을 이루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를 통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전쟁 발발과 함께 그 점에서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설마 사유재산, 자본주의적 착취, 계급지배가 없어졌단 말인가? 설마 가진 자들이 애국주의의 도취 속에서, 이제 전쟁을 앞에 놓고 그 기간 동안 생산수단, 토지, 공장, 작업장을 공공의 소유로 내주고 상품의 단독 용익을 포기하며 모든 정치적 특권을 폐지하고 조국이 위험에 처해 있는 동안은 그 모든 것을 조국의 제단 앞에 희생하겠노라고 선언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이러한 가정은 극히 씁쓸한 동화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노동자계급이 계급투쟁을 중지한다고 뒤이어 선언할 수 있을 논리적으로 유일한 조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 어떤 일도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다. 그 반대로 모든 사적소유관계, 착취, 계급지배, 그리고 다양한 프로이센-독일식의 정치적 권리박탈도 그대로 유지된 채 있다. 독일의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구조에서 벨기에와 동프로이센에서의 대포의 천둥이 변화시킨 것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계급투쟁의 폐지는 그래서 완전히 일방적 조처였다. 노동자계급의 “내부의 적”인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지도자들인,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은 애국적인 아량으로 노동자계급을 이러한 적에게 전쟁기간 동안 투쟁없이 내어주었다. 지배계급이 그들의 소유권과 지배권으로 완전무장한 채 있는 동안,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민주당으로부터 “무장”해제를 명령받았다.

현대부르주아 사회에서 모든 계급의 형제결의의 기적, 계급조화의 기적은 이미 한번 경험되었다. 그것은 1848년 프랑스에서 였다.

마르크스는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 다음과 같이 썼다.

“재정귀족과 부르주아지를 도대체 혼동하는 프롤레타리아들의 생각 속에는, 계급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거나 기껏해야 입헌군주제의 결과 정도로 생각하는 공화주의적인 우직한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는, 그리고 지금까지 지배자들 편을 들었던 부르주아 분파들의 위선적인 문구들 속에서는 부르주아의 지배는 공화국의 도입과 더불어 폐지되었다. 모든 왕당파들은 그때 공화파로 둔갑했고, 파리의 모든 백만장자들은 노동자로 둔갑했다. 이렇게 상상된 계급관계의 폐지에 해당하는 문구는 박애iv, 즉 일반적인 형제결연과 의형제였다. 계급적대를 이렇게 기분좋게 추상해서 없애버리는 것, 서로 모순되는 계급 이해관계들을 감상적으로 상쇄해버리는 것, 계급투쟁 위로 꿈꾸듯이 날아올라버리는 것, 박애, 이것이 2월 혁명의 원래 구호였다.…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런 관대한 박애에 흠뻑 취해 있었다.… 공화국을 스스로의 창조물로 여긴 파리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들로 하여금 부르주아사회 안에서 더 손쉽게 제자리를 잡도록 만들어주는 임시정부의 모든 행위에 당연히 갈채를 보냈다. 파리의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코시디에르는 경찰임무에 그들을 기꺼이 활용할 수 있었고, 루이 블랑은 일반노동자와 장인 사이의 임금격차도 없앨 수 있었다. 유럽의 눈앞에 공화국의 부르주아적 명예를 고이 유지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의 명예의 문제로 여겨졌다.”v

1848년 2월 그렇게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순진한 환상 속에서 계급투쟁을 중단했지만, 자신들의 혁명 행동을 통해 7월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강제한 뒤 그랬다는 점을 잘 기억해야 한다. 1914년 8월은 거꾸로 된 2월 혁명이었다. 즉, 공화국이 아니라 군사왕정 아래에서, 반동에 대한 민중의 승리가 아니라 민중에 대한 반동의 승리 후에, 자유와 평등과 박애가 아니라 계엄령과 언론자유의 질식 그리고 헌법철폐를 공포하면서 계급대립이 폐지된 것이다! 정부는 당쟁중지를 엄숙하게 선언했고 모든 정당들로부터 이를 성실히 지킬 것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정부는 노련한 정치가로서 그 약속을 그대로 믿지 않고 명백한 군사독재의 수단을 통해서 이 “당쟁중지”를 확고히 했다. 사회민주당 원내분파는 이것 마저도 아무런 항의와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8월 4일에 있은 그리고 12월 2일에 있은 원내분파의 제국의회 선언은 계엄령이라는 따귀에 반대하는 그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사회민주당은 당쟁중지와 전쟁차관과 더불어 계엄령도 잠자코 승인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조국방어를 위해서 계엄령이, 민중에게 재갈을 물리는 것이, 군사독재가 필요함을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사회민주당 쪽에서만 저항, 곤란 및 전쟁에 대항한 항의행동이 기대될 수 있었던 점으로 보아, 계엄령은 바로 그 사회민주당을 겨냥한 것이었다. 사회민주당의 동의하에 당쟁중지, 계급적대의 폐지가 선언됨과 동시에 그 자체, 즉 사회민주당이 계엄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고, 노동자계급에 대한 투쟁이 그 가장 첨예한 형태, 즉 군사독재의 형태로 선언되었다. 결연히 저항하다 패배한 최악의 경우에 맞았을 것, 즉 계엄령을 사회민주당은 스스로의 항복의 결과로 받은 것이다! 사회민주당의 제국의회 원내분파의 엄숙한 선언은 차관승인의 근거로 민족자결권vi이라는 사회주의 원칙을 거론한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독일민족의 “자결”의 첫 단계가 사회민주당에게 입힌 계엄령이라는 결박조끼였다! 한 당에게 이보다 더 큰 자기기만은 역사상 거의 전례가 없었다.

당쟁중지를 받아들임으로써 사회민주당은 전쟁기간 동안 계급투쟁을 부정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사회민주당은 그 자체의 존재 기반을, 그 자체의 정치 기반을 부정했다. 이 당을 숨 쉬게 하는 것이 계급투쟁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 자신의 삶의 원칙인 계급투쟁을 희생한 뒤 이제 전쟁 동안 그 당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계급투쟁을 부인함으로써 사회민주당은 전쟁기간 동안 스스로 활동적인 정치 당으로서, 노동자정치의 대리인으로서 정체성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또한 그 가장 중요한 무기, 즉 특히 노동자계급의 입장에 서서 이 전쟁을 비판하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그것은 “조국 방어”를 지배계급에게 내맡기고 노동자계급을 지배계급의 휘하에 제공하며 계엄령 하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것, 즉 노동자계급에 대한 경찰 역할을 하는데 만족했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은 또한 그의 태도를 통해, 원내분파의 선언에 따르면 지금 크룹의 대포가 그 유지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독일의 자유문제를 지금 이 전쟁의 지속기간보다 훨씬 더 장기적으로 가장 심각하게 위험 속에 빠뜨렸다. 사회민주당의 지도부는 전쟁 이후 노동자계급의 자유가 의미있게 확대될 것이고, 전쟁중에 노동자계급이 보인 조국사랑의 행동에 대한 보상으로 부르주아적인 평등권이 제공될 것이라 전망했고, 많은 주장들의 바탕에는 이러한 전망이 깔려있었다. 그러나 역사상 지금까지 정치적 권리들이 피지배계급에게, 지배계급의 마음에 드는 태도를 보였다고 해서 결코 팁으로 주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전쟁발발 전에 엄숙하게 했던 약속마저도 지배계급이 그 뒤에 거만하게 깨어버린 예들이 역사에는 널려 있다. 사실, 사회민주당은 그것이 취한 태도를 통해 독일에서 장래의 정치권리를 확보한 것이 아니라 전쟁 전에 가졌던 권리들을 뒤흔들어 놓았다. 독일에서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그리고 공공 생활의 폐지가 계엄 상태와 마찬가지로 몇 달 동안 그 어떤 투쟁도 없이, 심지어 부분적으로는 바로 그 사회민주당의 갈채2*를 받으며 용인된 방식은 현대사회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다. 영국에서는 전적으로 언론의 자유가 지배하고, 프랑스에서도 언론은 독일에서처럼 그렇게 완전히 재갈 물리지 않았다. 그 어느 나라에서도 독일에서와 같이 여론이 그렇게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단순히 “거의 공식적이나 다름 없는 견해”에 의해, 정부의 명령으로 대체되지 않았다. 러시아에서도 반대파의 의견을 지워버리는 혐오스런 검열의 붉은 펜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와 달리, 반대파 언론들이 정부가 제공한 완결된 기사들을 찍어내야 하고 어떤 기사들에서는 정부당국이 “언론과 비밀리에 상의하여” 불러주고 지시하는 특정한 견해들을 대변해야 하는 것과 같은 제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독일 자체에서도 1870년의 전쟁 동안에 언론이 지금 상태와 비슷한 그 어떤 것도 경험하지 않았다. 그 당시 언론은 아무 제한 없이 자유를 즐겼었다. 비스마르크가 왕성한 불평을 늘어놓을 정도로 언론은 그 전쟁 사안을 주시하면서 부분적으로 날카롭게 비판하며 특히 전쟁목적과 합병문제 그리고 헌법문제 등등에 대해서도 활기차게 의견투쟁을 했었다. 그리고 요한 야코비가 체포되자, 분노의 폭풍이 독일 전역을 휩쓸었고, 비스마르크 자신도 반동 세력의 그 뻔뻔스런 범행을 하나의 중대한 실책으로 여기며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며 자신 옹호했다. 이것이 바로, 리프크네히트와 베벨이 독일 노동자계급의 이름으로, 지배적인 맹목적 애국자들과의 그 어떤 연합도 일체 거부한 뒤 독일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금, 4백 2십 5만명의 유권자를 거느린 애국적인 사회민주당, 당쟁중지라는 화합의 축제, 그리고 사회민주당 원내분파의 전쟁차관 동의, 이 모든 것이 있은 후, 성년의 그 어떤 한 민족이 지금까지 경험한 것 중에서 가장 극심한 군사독재가 시행되었다. 그와 같은 일이 오늘날 독일에서 가능하게 된 것은, 즉 부르주아 언론뿐만 아니라 꽤 발전하고 영향력이 큰 사회민주당 언론의 아무런 투쟁도 없이 그럴 듯한 저항의 시도조차 없이 감수된다는 이 사실은 독일의 자유의 운명에 불운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그렇게 쉽게 아무런 저항 없이 정치적 자유의 부재를 견딜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 독일 사회가 자체 내부에 정치적 자유를 위한 어떤 기반도 갖고 있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전쟁 전 독일제국 내에 존재했던 하찮을 정도의 정치권리들은, 거대하고 반복된 혁명투쟁의 결과로서 그런 권리들이 그러한 투쟁 전통을 통해 민족의 삶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프랑스나 영국에서와는 달리, 20여년 동안 승승장구하던 반혁명 이후 비스마르크 정책의 선물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독일헌법은 혁명의 펜대 안에서 성숙한 것이 아니라, 프로이센 군사왕정의 외교적인 게임 안에서, 이 왕정이 오늘날의 독일제국으로 증축되는데 도움을 준 시멘트로서 였다. 그래서 “독일에서 자유가 발전”하는 데 있어 위험은 제국의회 원내분파가 말하는 것처럼 러시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일 자체에 있다. 특히 그런 위험은 독일헌법의 반혁명적인 기원에 있다. 제국창립 이래 그 보잘 것 없는 “독일의 자유”에 대항해 끊임없이 조용한 전쟁을 치러 온 독일사회의 반동적 권력분파들에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바로, 엘베강 동쪽의 융커체제, 대산업적 모함자들, 철저히 반동적인 중앙파, 독일자유주의의 타락, 사적인 통치 그리고 이 모든 요소들로부터 유래한 군사지배, 전쟁직전에 독일에서 승리를 거둔 군사적 강경노선 등이다. 이것들이 바로 독일의 문화와 “자유의 발전”에 대한 진정한 위험들이다. 그리고 이 모든 요소들의 각각을 지금 전쟁이 강화시키고 있다. 계엄령, 그리고 사회민주당의 태도가 가장 극심하게 강화시키고 있다. 오늘날 독일이 교회의 묘지처럼 조용한 점에 대해 진짜 자유주의적인 핑계가 있긴 하다. 즉, 이는 단지 전쟁 진행 기간동안만 “잠정적으로” 포기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정치적으로 성숙한 국민은 살아있는 사람이 숨쉬기를 포기할 수 없듯이 정치권리와 공공의 삶을 “잠정적으로”라도 포기할 수 없다.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 전쟁기간 동안은 계엄령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그런 국민은 그럼으로써, 정치권리가 완전히 없어도 되는 그런 것이라고 인정하는 셈이다. 사회민주당이 오늘날 계엄 상태를 감내하며 동의한 것은, 무조건적으로 전쟁차관을 승인하고 당쟁중지를 받아들인 것과 함께, 지배계급 반동들, 즉 헌법의 적들에게 강력하게 고무적 영향을 미친 그 만큼 독일헌법의 유일한 지주인 민중들의 기상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계급투쟁을 포기함으로써 우리당은 그와 동시에 전쟁지속과 관련하여 그리고 평화체결과 관련하여 효과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중단했다. 여기에서 그 자체의 공식적 해명을 내팽개친 셈이다. 제국주의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그 전쟁이 유리하게 진행되는 한 불가피한 논리적 귀결이기 마련인 모든 합병들에 엄숙히 반대한 바로 그 당이 동시에 당쟁중지를 수용했다. 그럼으로써, 당 자체의 의지에 따라 민중과 여론을 동원할, 이를 통해 효과적으로 압력을 행사할, 그래서 전쟁을 통제하고 평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모든 수단과 무기를 내어주었다. 당쟁중지를 통해 오히려 사회민주당은 군국주의의 배후의 안정을 보장해 줌으로써 그 군국주의가 지배계급의 이해관계 이외의 어떤 다른 이해관계에도 구애됨이 없이 제 갈 길을 가도록 허용했다, 바로 합병을 모색하고 또 합병을 초래할 수 밖에 없는 억제되지 않은 내부의 제국주의적 경향을 해방시켰다. 다시 말해, 사회민주당은 당쟁중지를 수용하고 노동자계급을 정치적으로 무장해제함으로써 결국 모든 합병에 대한 그것의 엄숙한 반대가 무력한 문구로 남게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다른 하나, 즉 전쟁의 연장이 이뤄졌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익숙히 잘 알려진 도그마 안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책에 있어 얼마나 위험한 함정이 놓여 있는지를 자명하게 보여준다. 즉, 전쟁에 반대한 우리의 저항은 우선 전쟁의 위험이 존재하는 동안만 요구되는 것이지,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사회민주당의 정치적 역할은 끝나고, 이때는 오직 승리냐 패배냐만 문제라는, 즉 계급투쟁은 전쟁기간 동안 중지된다는 그 도그마 안에. 하지만 사실은 사회민주당의 정치에서 가장 큰 과업은 전쟁발발 뒤에 시작된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 인터내셔널대회vii에서 독일당 대표자들과 노조대표자들이 만장일치로 승인하고 1912년 바젤회의에서 다시 한 번 더 확인된 결정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신속한 종결을 위해 노력하는 것, 총력을 기우려 노력하는 것이 사회민주당의 책무이다. 전쟁이 초래한 경제적 정치적 위기를 민중을 일깨우는데 활용하고 이로써 자본주의의 계급지배의 철폐를 가속하는 것이 책무이다.”viii[강조 –R.L.]

이 전쟁에서 사회민주당은 무엇을 했는가? 사회민주당은 슈투트가르트 대회와 바젤회의의 계명과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즉, 당은 차관을 승인하고 당쟁중지를 준수함으로써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경제적 정치적 위기를 막는, 그 전쟁으로 인해 대중이 동요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했다. 전쟁이 가져온 무질서로부터 자본주의 사회를 구하는데 “총력을 기우려 노력”했고, 그럼으로써 전쟁이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지속되도록, 전쟁의 희생자 수가 더 늘어나도록 했다. 제국의회 의원들이 종종 하는 말에 따르자면, 사회민주당 분파가 전쟁차관을 승인하든 그렇지 않든 전장에서 병사가 한 명이라도 덜 죽어가지는 않았을 거라고 한다. 아니, 그런데 우리 당의 신문들이 전반적으로 대변한 견해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 이 전쟁의 처참한 희생자들의 수를 줄일 수 있는 한 줄이기 위해 우리는 바로 이 “조국방어”에 동참하고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실행된 정책이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사회민주당의 “애국적” 태도를 통해서야 비로소, 배후에서의 당쟁중지 덕분에야 비로소 이 제국주의 전쟁은 거리낌 없이 광포함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전까지는 내부적인 동요에 대한 두려움, 궁핍 속의 민중의 분노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적인 악몽이었고 그렇게 해서 지배계급의 전쟁야욕을 묶어놓는 효과적인 고삐였다. 지금은 사회민주당이 두려워서 그 어떤 전쟁이라도 되도록이면 미루려 애쓴다고 한 뷜로프의 말은 유명하다. 로어바흐가 그의『전쟁과 독일정치』의 7쪽에서 쓴 것에 따르면, “근본적인 재앙이 발생하지 않는 한, 독일에게 평화를 강요할 유일안 것은 가난한 자들의 굶주림이다.” 그는 분명히, 징후를 보이고 점점 더 뚜렷해져서 마침내 지배계급이 이를 참작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그러한 굶주림에 대해 생각했다. 결국, 전쟁의 탁월한 군인이자 이론가인 폰 베른하아디장군이 하는 말을 듣게 된다. 그는『지금의 전쟁에 대하여』라는 그의 대작 속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렇게 현대의 대규모 군대는 여러 모로 전쟁 수행을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이 밖에도 그 자체도 과소평가되서는 안 될 위험 동인이다.

그러한 종류의 군대의 메커니즘은 매우 위력적이고 복잡해서, 톱니바퀴들 전체가 대체로 충실하게 움직이고 강한 내적 동요가 더 넓은 범위에서 방지될 경우에만 작동가능하고 조정가능하게 유지된다. 그런데 변화가 많은 전쟁에서 그러한 종류의 현상들이 완전히 제거될 수 있을 거라고는, 전투가 명백하게 승리하는 것만큼이나 기대하기 힘들다. 이러한 현상들이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영향력을 갖는다면 극복될 수 있다. 그러나 거대하게 결집된 대중이 일단 지휘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된 곳에서는, 그들이 공포 상태에 빠진 곳에서는, 더 큰 범위에서 보급이 실패하고 부대 내에 불복종 정신이 지배적인 곳에서는 그러한 대중은 적에 저항하기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군율의 끈을 끊어버리고 작전 진행을 제 맘대로 교란함으로써 그리고 지도부에게 해결할 수 없는 과제를 부과함으로써 그들 자체가 스스로에게 그리고 군지도부에게 위험이 되어버린다.

대규모 군대로 치르는 현대의 전쟁은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그 국가의 인력과 재력을 극도로 요구하는 위험한 게임이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일단 발발하면, 그 전쟁을 신속히 종결지을 수 있고 전체 국민들의 동원으로 인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그 엄청난 긴장을 재빨리 해소할 수 있을 지시들이 도처에서 내려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강조 –R.L.]

이렇게 부르주아 정치가들과 군권위자들은 대규모 군대로 치르는 현대의 전쟁을 일종의 “위험한 게임”으로 보았고, 이 점이 오늘날의 권력자들로 하여금 전쟁을 책모하지 못하도록 막고 또 전쟁이 발발한 경우에는 재빠른 종결을 생각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동인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어느 모로 보아도 “엄청난 긴장”을 억누르는 작용을 한 사회민주당의 행태는 그러한 걱정거리를 없애버렸고 군사주의의 억제되지 않은 폭풍에 대항해 서있던 유일한 댐을 부숴버렸다. 그래, 베른하아디나 그 어떤 부르주아 정치가도 꿈 속에서도 그 가능성을 생각할 수 없었던 그 어떤 것이 등장해야만 했다. 즉, 사회민주당 진영으로부터 인류학살 “감내하기”, 즉 계속하기라는 구호가 울려퍼진 것이다. 그리고 몇 달 전 이래 전장을 뒤덮는 수천의 희생자들이 그래서 우리의 양심에 호소하고 있다.


1* 1914년 10월 6일『함부르크의 메아리』에 재수록된 뉘넨베르크당기관지의 기사를 참조

2* 캠니츠의『민중의 목소리』는 1914년 10월 21일자에 다음과 같이 썼다. :“어쨌든 독일의 군사검열은 전반적으로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더 점잖은 편이다. 종종 그 배후에 전쟁에 대한 확고한 입장의 부족을 숨기고 있는, 검열에 반대한 아우성은 독일의 적들이 하는 거짓말, 즉 독일이 제 2의 러시아라는 거짓말이 유포되는 것을 도울 뿐이다. 지금의 군사검열 아래에서 마음대로 쓸 수 없다고 진정으로 믿는 자는 펜대를 놓고 침묵하라.”

 

i Sozialistengesetz, 독일제국에서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제국수상 비스마르크에 의해 입안되어 1878년부터1890년까지시행되었다. 이법에 따라 노동조합, 노동자단체 및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등이 불법화되었다. 사회민주주의적 정치인들은 개인자격으로 제국의회나 주의회등에 선출될 수는 있었다.

ii K. Kautsky, “Wirkungen des Krieges”, in: Die Neue Zeit, 32. Jg.1913/14, Zweiter Band, S.975

iii K. Kautsky, “Die Internationalität und der Krieg,” in : Die Neue Zeit, 33.Jg.1914/15, Erster Band, S.248

iv fraternité

v Karl Marx, “Die Klassenkämpfe in Frankreich 1848 bis 1850,” in : Karl Marx u. Friedrich Engels, Werks. Bd. 7, S.21/22.

vi Das Selbstbestimmungsrecht der Nationen

vii 1907년 8월 18일부터 24일까지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사회주의자 인터내셔널대회(Der Internationale Sozialistenkongress)가 열렸다.

viii Erste Beilage zum Periodischen Bulletin des Internationalen Sozialistischen Bureaus, Brüssel 1912, S.7

 

제7장 모든 국가의 제국주의적 성격과 민족해방전쟁의 불가능성

그러면 지금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즉 우리가 전쟁 발발을 막을 수 없었다 치더라도, 전쟁이 일단 일어난 마당에 적이 나라를 침략한 마당에 그러면 우리는 우리나라를 무방비상태로 만들어 적에게 희생시켜야 한단 말인가? 독일인들을 러시아인들에게, 프랑스인들과 벨기에인들을 독일인들에게, 세르비아인들을 오스트리아인들에게 희생시켜야 한단 말인가? 사회주의의 원칙인 민족자결권은 각 민족이 자신의 자유와 독립을 지킬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 말하지 않았던가? 제 집이 불타고 있으면, 방화범을 가려내는 것보다는 우선 그 불을 꺼야하지 않는가? “불타고 있는 집”이라는 주장은 여기 저기에서, 프랑스뿐만 아니라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태도에서 큰 역할을 했다. 중립국가들에서도 그것은 학설을 만들었다. 즉, 네덜란드로 넘어가서는, 배에 물이 새고 있으면 우선 그 구멍을 막아야하지 않는가?라고.

확실히, 외부의 적에 항복하는 민족은 내부의 적에 항복하는 당만큼이나 수치스럽다. 그런데 “불타고 있는 집”의 소방관들은 단지 한 가지를 잊었다. 사회주의자가 말하는 조국 방어는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의 명령 아래 포탄받이 역할을 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점이다. 먼저 그러한 “침략”과 관련해서, 이것이 정말 마치 대단한 마법사가 축출하고 마비시켜버린 마냥 나라 안의 모든 계급투쟁이 그 앞에서는 꼼짝없이 사라져버릴 정도의 그런 공포의 화신이란 말인가? 부르주아 애국주의와 계엄령의 경찰이론에 따르면, 모든 계급투쟁은 국방이라는 이해관계로 볼 때 하나의 범죄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국가의 방어력을 위험에 빠뜨리고 약화시키기 때문이란다. 이러한 아우성에 공식적인 사회민주당은 위축되었다. 그런데 부르주아 사회의 현대 역사는 항상, 외부로부터의 침략은 지금 그려지듯 그러한 공포중의 공포가 아니라 오히려 “내부의 적”에 대항해 우선적으로 활용되는 효과적 수단임을 보여주었다. 프랑스대혁명 당시 부르봉왕가와 귀족들이 자코뱅에 대항해 그러한 침략을 나라 안으로 불러들이지 않았던가? 오스트리아의 교권 국가적 반혁명이 1849년 로마에 대항해 프랑스의 침략을, 부다페스트에 대항해 러시아의 침략을 불러들이지 않았던가? 프랑스에서 “질서의 당”이 1850년 국민회의를 길들이기 위해 코사크인의 침입을 가지고 위협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1871년 5월 18일 쥘 파브르, 티에르등과 비스마르크 사이에 체결된 그 유명한 조약을 통해서, 포로가 된 보나파르트 군대를 석방하고 프로이센 군대가 파리코뮌 진압을 직접 지원한다는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던가? 45년 전에 카를 마르크스에게는 현대 부르주아 국가들의 “민족전쟁”은 속임수임을 폭로하기에 이러한 역사적 경험만으로도 충분했다.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파리코뮌의 몰락에 대한 그의 연설에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에는 엄청난 전쟁이 있은 뒤 승리한 군대와 패배한 군대가 함께 프롤레타리아트를 격퇴하기 위해 연합한다. 전대미문의 이 사건은 비스마르크가 믿는 것과는 달리, 부상하는 새로운 사회를 최종적으로 억눌렀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낡은 부르주아 사회의 철저한 파편화를 증명한다. 낡은 사회가 여전히 행할 수 있던 최대로 영웅적인 도약은 민족전쟁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것은 오직 계급투쟁을 밀어내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고 계급투쟁이 내전으로 불붙자마자 한켠으로 비켜서 버리는 순전한 정부의 사기극임이 드러났다. 계급투쟁은 이제 더 이상은 어느 한 민족국가의 군복 아래에 자체를 숨길 수가 없다. 민족국가 정부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항해서는 하나이다!”i[강조 –R.L.]

침략과 계급투쟁은 그래서 부르주아 역사에서는, 공식적인 전설에서 말하는 것과는 달리 대립항이 아니다. 하나는 다른 하나의 수단이자 표현이다. 지배계급에게 있어 침략이 계급투쟁에 대항한 효과적 수단이라면, 떠오르는 계급에게는 항상 가장 첨예한 계급투쟁이 침략에 대항한 최선의 수단임이 증명되었다. 근대의 문턱에 이미, 도시들의 수많은 내적 변화들과 대외적인 적대관계들로 점철된 도시들의 역사, 특히 이탈리아 도시들, 호엔스타우펜왕가ii에 대항해 100여 년 동안 씨름했던 밀라노, 플로렌스의 역사는 이를 보여주었다. 내부적인 계급투쟁의 위력과 격렬함 때문에 외부에 대항한 그 공동체의 방어력이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이러한 투쟁의 존재가 외부로부터의 적대적 충돌에 저항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하고 막강한 불꽃을 제공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모든 시대의 고전적인 예는 프랑스대혁명이다. 1793년 프랑스에서는 그 심장인 파리가 적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그때 연합된 유럽의 해일에 직면한 프랑스와 파리는 사방으로부터의 침략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커져가는 위험과 적의 침략에 맞서 전례없는 투쟁으로 위대하게 저항할 수 있었다. 적들의 새로운 연합에 맞서 마르지 않는 투쟁의지의 새로운 기적으로써 타격을 주었다. 이 모든 것은 거대한 계급대립 상태에서 사회 내부 역량들이 무제한적으로 방출된 덕분이었다. 오늘날 한 세기의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적들의 세계에 맞서 그러한 대립의 가장 첨예한 표현만이, 파리 민중의 독재와 그 가차없는 과격함만이 갓 태어난 부르주아 사회를 방어하고 공고히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수단과 역량을 국가의 지반으로 다져낼 수 있었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왕조의 계략, 귀족들의 매국적 음모, 승려계급의 획책, 방데봉기iii, 장군들의 배신, 60개의 현과 지방수도들의 저항에 맞서, 그리고 유럽 왕당파연맹의 연합군대와 전함에 맞서. 수 백년이 증명하듯이 민중의 자의식, 희생정신과 도의적 역량을 흔들어 일깨우는 것은, 외부의 적에 대항해 나라를 지키는 최선의 보호와 방어는 계엄령이 아니라 가차없는 계급투쟁이다.

그와 동일한 비극적인 오류가 사회민주당이 민족자결권을 이 전쟁에서 그들 태도의 근거로 거론할 때 일어났다. 사회주의는 각 민족에게 독립과 자유의 권리, 지속적인 자치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자본주의 국가들을 이러한 민족자결권의 표현으로 내세운다면 그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진정한 조롱일 것이다. 이 나라들 가운데 어느 나라에서 지금까지 민족이 그 나라의 국가적, 정치적 또는 사회적 현존의 형식과 조건을 결정했는가?

독일민족의 자결권이 뜻하는 것은, 무엇이라 주장되든 간에, 1848년 민주주의자들이,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선구자들인 마르크스, 엥겔스 그리고 라살레가, 베벨과 리프크네히트가 예고하고 옹호했던 바로 그것이다. 이는 대독일 단일공화국iv이다. 이러한 이상을 놓고 3월의 투사들은 비엔나와 베를린의 바리케이트 위에서 피흘렸고, 이 강령의 실현을 위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8년 프로이센이 러시아 차르와 전쟁을 하도록 강제하려 했다. 이 민족 강령의 성취를 위한 첫 번째 요건은 “조직화된 부패 더미”, 즉 합스부르크왕정의 해체였고, 프로이센 군사정권의 폐지와 독일 내의 이십 여개에 해당하는 난장이 왕국들의 폐지였다. 독일혁명의 실패로, 즉 독일 부르주아지가 그 자신의 민주주의적 이상을 배반함으로써 비스마르크의 통치가 초래되었고, 자칭 독일제국이라는, 하나의 프로이센식 투구아래 이십 여개의 작은 나라들을 거느린 대프로이센이 탄생했다. 오늘날의 독일은 3월 혁명의 무덤 위해, 독일민족의 자결권의 폐허 위에 세워졌다. 터키의 유지라는 목적 이외에도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지와 프로이센 군사왕정의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이번 전쟁은 3월의 희생자들과 독일의 민족강령을 다시 매장하는 것이다. 1848년 애국자들의 상속자인 사회민주당이 “민족자결권”이라는 깃발을 손에 들고 이 전쟁에 나서는 것은 정말 역사의 엄청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니면 설마 지구상의 네 지역에 식민지를 소유하고 두 지역에서 식민지 만행을 저지른 제 3공화국이 프랑스민족의 “자결권”의 표현이란 말인가? 아니면 인도를 소유하고 남아프리카에서 5백만 유색인 인구에 대한 1백만 백인의 지배체제를 가진 대영제국이 그렇단 말인가? 아니면 터키가, 차르제국이 그렇단 말인가? 식민지의 주인 종족들이 인류이고, 지배계급들이 민족이라고 보는 부르주아 정치가들이나 이러한 식민지 소유국가들에서 대해 일종의 “민족자결권”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민족이 그 국가적 존재를 다른 민족들의 노예화에 기초한다면, 이 말의 사회주의적 의미에서는 어떤 자유로운 민족국가도 없다. 왜냐하면 식민지 민족들도 그 국가의 민족들에 속하고 그 국가의 구성요소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주의는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평등한 민족들에게 그 권리를 인정하는데, 오직 국제 사회주의만이 그러한 민족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국제 사회주의가 있고서야 민족의 자결권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이 구호도 다른 모든 구호들과 마찬가지로 기성세력의 성스러운 약속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이고 변화를 유발하며 능동적인 정치를 위한 일종의 지표이자 자극이다. 자본주의 국가들이 존속하는 한, 특히 제국주의적 세계정치가 국가들의 내적, 외적 삶을 결정하고 형성하는 한, 민족자결권은 평화 시기와 마찬가지로 전쟁 시기에도 그 실행과는 거리가 멀다.

더욱이, 오늘날의 제국주의적 환경에서 민족방어전쟁이란 도대체 있을 수가 없다. 이러한 결정적인 역사적 환경을 도외시하며 세계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나라의 고립된 관점에 따라 좌우되는 모든 사회주의 정치는 이미 사상누각인 것이다.

우리는 독일이 그 적대자들과 오늘 이렇게 충돌하게 된 배경을 이미 제시해 보았다. 이때, 현 전쟁의 원래 추동력과 내적 연관을 더 자세히 조명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우리당의 제국의회 원내분파와 우리당 언론의 입장표명에서 독일의 존립, 자유와 문화가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독일 제국주의가 자체의 세계정치적 목표를 통해 지난 몇 십 년동안 준비해온 그리고 1914년 여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외교가 분명한 목적의식으로 초래한 예방적인 전쟁이라는 역사적 진실이 확고하게 포착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 세계대전을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정치에 대해 갖는 이 전쟁의 의미를 전반적으로 평가함에 있어 공격과 방어의 문제, 즉 “책임자”를 찾아내는 문제는 완전히 사소한 것이다. 자기방어가 독일에게 가장 덜 그럴듯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면, 프랑스와 영국에게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그들이 “방어”하는 것은 그들의 민족적 지위가 아니라 그들의 세계정치적 지위, 독일이라는 도전자의 공격으로 위협당한 제국주의적 소유자로서의 오랜 지위이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 제국주의의 침략이 세계 대화재를 확실히 점화했다면, 그것에 덧붙여 프랑스 제국주의는 모로코를 집어 삼킴으로써 그리고 영국 제국주의는 메소포타미아와 아랍지역을 약탈하려 함으로써 그리고 인도에서의 강제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모든 방책들을 통해서, 러시아 제국주의는 콘스탄티노플을 겨눈 발칸정책을 통해서 연료를 한조각 한조각 끌어 모아 쌓아올렸다. 군사적 무장경쟁이 그러한 재앙의 발발에 추동력으로서 근본적인 역할을 했다면, 그것들은 모든 국가들의 경쟁이었다. 그리고 독일이 1870년 비스마르크의 정책을 통해 유럽의 경쟁적인 군무장에 초석을 놓았다면, 프랑스의 정책은 그 이전 제 2 제국의 정책을 통해 장려되었고 그 뒤에는 제 3공화국의 군사적 식민주의적 모험정책에 의해, 동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의 팽창에 의해 지원되었다.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특히, 프랑스정부와 전체 국민은 1914년 6월에 전쟁 의도를 조금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어 “민족방어”의 환상에 빠져들어갔다. 조레스는 전쟁 전야에 브뤼셀의 민중의 집에서 한 그의 생애 마지막 연설에서, “프랑스에서는 오늘날 모두가 솔직하고 거리낌없이 조건없이 평화에 찬성한다”고 증언했다. 그 사실은 완전히 맞고, 그래서 그 범죄적 전쟁이 자신의 나라에 강요되었을 때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이 느낀 분노를 심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서의 세계전쟁을 비판하고 그것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정치의 입장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그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늘날의 전쟁이 탄생한 역사는 1914년 7월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자연법칙의 필연성으로 한 가닥, 한 가닥 짜여진 제국주의 세계정치의 촘촘한 그물망이 5대륙을 감싸게 된 그 몇 십년을 거슬러 오라간다. 이 그물망은 그 뿌리들을 경제발달의 지각 저 깊은 곳에 두고 있고 그 외부의 가지들은 어슴프레하게 동터오는 새로운 세상을 향해 손짓하는 현상들의 엄청난 복합체이다.

제국주의 정치는 어떤 한 국가 또는 몇몇 국가들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세계 발전에서 특정 성숙도의 산물이다. 그것은 국내에서부터도 국제적인 현상이자 그 모든 상호관계들 속에서만 인식될 수 있고 그로부터 어떤 국가도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분할될 수 없는 전체이다.

여기서부터 비로소 오늘날 전쟁에서의 “민족방어”의 문제가 평가될 수 있다. 민족국가, 민족적 통합과 독립, 그것은 지난 세기 중부 유럽 부르주아 대국들의 성립에 쓰인 이데올리기적 간판이었다. 자본주의는 작은 나라들의 난립을, 경제 정치적 분립을 견딜 수 없다. 자체의 발전을 위해서는 되도록 거대하고 내적으로 폐쇄된 영역을 필요로 하며, 사회의 욕구들을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에 상응하는 수준으로 상승시키고 현대 부르주아 계급지배의 메커니즘이 기능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정신문화를 요구한다. 자본주의가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세계경제로 완전히 성장할 수 있기 전에는 한 국가의 닫힌 국경 안에서 그러한 폐쇄적 영역을 만드려 했다. 이러한 기획은 봉건적 중세로부터 넘겨받은 정치적 민족적 체스판 위에서 오직 혁명적 방법으로만 실행될 수 있었기에 프랑스에서만 대혁명 안에서 실현되었다. 유럽의 기타 지역에서는, 부르주아 혁명 일반이 그러하듯 도중에 짜집기가 되어버렸다. 독일제국, 지금의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터키의 오늘날까지의 존속, 러시아제국 그리고 대영제국은 그 점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들이다. 민족적 강령은 상승하려 애쓰는, 국가 내에서 권력 장악을 목표로 하는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으로서, 부르주아 계급지배가 중부 유럽 대국들 안에서 진정으로 자리잡고 그 안에서 필요한 도구들과 조건들을 창출해 낼 때까지는 역사적 역할을 했다.

그 이후 제국주의는 모든 나라들의 부르주아 강령에 있어 민족적 연관성을 전혀 참작하지 않고 국경 너머로 팽창함으로써, 그러한 낡은 부르주아-민주주의적 강령을 무덤 속에 완전히 파묻어버렸다. 민족의 문구만 남았다. 하지만 그것의 진정한 내용, 그것의 기능은 정반대로 전도되었다. 즉, 그것은 이제 제국주의적 노력의 빈약한 구실로서만, 제국주의적 경쟁의 투쟁구호로서만 기능할 뿐이다. 민중이 제국주의 전쟁들에서 포탄받이의 역할로 동원될 수 있는 유일하게 최후의 이데올로기적 수단으로서만 기능할 뿐이다.

현재 자본주의 정치의 전반적 경향은 이때 막강하고 우세한 법칙으로서 개별 국가들의 정치를 지배한다. 경제적 경쟁이 개별 기업가들의 생산조건을 강제적으로 결정하는 듯이.

잠시, 사회민주당의 정책을 현재 지배하고 있는 “민족전쟁”이라는 허상을 점검해 보기 위해서, 오늘날의 국가들 중 어느 하나의 경우 전쟁이 그 출발점에서 실제로 순수하게 민족방어전쟁으로서 시작되었다고 가정해 보면, 그렇게 해서 특히 군사적 성공은 타 지역의 점령을 초래하게 된다. 그러나 제국주의적 획득에 관심을 둔 매우 영향력 있는 자본주의 그룹들이 존재하는 경우, 전쟁이 진행됨과 더불어 팽창의 탐욕이 일깨워지고, 전쟁 시작 당시에는 맹아로만 존재하거나 수면상태에 있던 제국주의의 경향은 전쟁 진행과 더불어 스스로 마치 온실 속에서처럼 성장하여 그 전쟁의 성격, 목적 및 결과들을 결정하게 된다. 게다가, 지난 몇 십 년 이래 국가들의 정치적 관계를 지배하는 군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동맹체제로 인해, 모든 교전국들은 전쟁의 진행과 더불어 처음에는 순수한 방어의 측면에서 나선 동맹국들을 자기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점점 더 많은 나라들이 그 전쟁에 연루되고, 이로써 불가피하게 세계정치의 제국주의권과 접촉하게 되며 새로운 제국주의권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래서 한편으로 영국은 일본을 끌어들였고, 전쟁을 유럽에서 동아시아로 확대하여 중국의 운명을 현안으로 만들었으며, 일본과 미국 사이의 경쟁, 영국과 일본 사이의 경쟁을 부추겼고, 장래의 충돌에 새로운 연료를 쌓았다. 그렇게 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이 터키를 전쟁에 끌어 들였고, 이로써 콘스탄티노플문제, 전체 발칸의 문제, 근동아시아의 문제가 청산을 위해 직접적으로 제기되었다. 이 세계대전은 이미 그 원인과 출발점에서 제국주의적이었음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쨌든 이러한 결과들이 초래된 이상 지금의 조건들 아래서 그것은 완전히 기계적으로, 불가피하게 제국주의적 세계분할과정으로 성장할 수 밖에 없었음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 전쟁은 거의 그 첫 순간부터 이미 그러한 분할과정으로 되어버렸다. 맞서 투쟁하는 진영들 사이의 역량의 끊임없이 흔들리는 균형으로 인해, 그러한 각 진영은 순수하게 군사적인 관점에서라도 자기의 입지를 강화하거나 새로운 대립 발생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중립국들도 격렬한 민족적- 및 국가적 이권찾기를 통해 고삐에 매어 둘 수 밖에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루마니아에서, 그리스와 불가리아에서, 한편으로 독일-오스트리아가, 다른 한편으로 영국-러시아가 한 “제안들”을 보라. 이른바 그 “민족방어전쟁”은 매우 의외적으로 작용하여 심지어는 관여되지 않는 국가들에서도 소유상태와 권력관계를 전반적으로 변화시켰다. 그 방향은 명백하게 팽창하는 쪽이었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소유하고 있어서 그 전쟁이 비록 “민족방어전쟁”으로 시작되었다하여도, 각 교전국이 상대편의 식민지를 점령하거나 적어도 그 안에서 소요를 유발하려 함으로써 순수하게 군사적인 견지에서라도 그 식민지들이 전쟁에 함께 이끌려 들어갔다는 사실 자체를 들 수 있다. 영국이 독일식민지를 징발한 것 그리고 독일이 영국식민지와 프랑스식민지에서 “성스러운 전쟁”을 불붙이려던 시도를 한번 보라. 바로 이러한 사실 자체는 동시에 오늘날의 그 어떤 전쟁도 자동적으로 제국주의적 세계대화재로 변화시킨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당의 제국의회 의원들과 편집진들의 머리 속에 아른거리는 소박하고 유덕한 애국적인 방어전쟁이라는 개념 자체는 순전한 허구로서, 전체에 대한 그리고 그 세계적 연관성에 대한 그 어떤 역사적 이해도 결여하고 있다. 전쟁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이른바 지도적인 정치가들의 엄숙한 선언들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들의 정직한 의도도 아니다, 오히려 그 사회와 그사회의 군사조직 각각의 역사적 상태이다.

순수한 “민족방어전쟁”이라는 도식은 첫눈에 아마도 스위스와 같은 나라에 알맞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위스는 하필이면 민족국가가 아니고 게다가 오늘날 국가의 전형도 아니다. 그 “중립적인” 현존과 풍부한 민병대 자체는 주변을 둘러싼 군사대국들의 잠재적 전쟁상태의 부정적인 열매에 불과하고 그 나라가 그 상태를 견딜 수 있는 동안만 유지될 수 있다. 그러한 중립성이 세계대전에서 제국주의의 군홧발에 어떻게 순식간에 짓밟히는 지를 벨기에의 운명이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특히 약소국의 상황을 보게 된다. “민족전쟁”의 예를 보여주는 정말 고전적인 표본은 바로 오늘날의 세르비아이다. 만약 어느 국가가 모든 외적 형식적인 특징을 통틀어서 민족방어권을 가진다면 그것이 곧 세르비아이다. 오스트리아에 의한 합병으로 민족적 통일성이 끝장나고, 오스트리아에 의해 전쟁을 강제당한 채 세르비아는 어느 면으로 보나 자기 민족의 존립과 자유와 문화를 걸고 진정한 민족방어전쟁을 하고 있다. 독일 사회민주당 원내분파가 그들의 입장표명과 더불어 정당했다고 친다면, 베오그라드 의회에서 전쟁에 반대해 항의하고 전쟁차관을 거부했던 세르비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정말로 자기 나라의 생사의 이해관계에 대한 배반자들이 되는 셈이다. 사실 세르비아의 랍췌비취와 카츨레로비취는 국제사회주의의 역사에 황금글씨로 자신들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이 전쟁의 진정한 연관들에 대한 예리한 역사적 통찰을 보여주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 자신들의 민족의 계몽에 가장 훌륭한 공헌을 했다. 세르비아는 물론 형식적으로만 민족방어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러나 세르비아의 왕가와 지배계급의 경향들은 오늘날 모든 국가들의 지배계급들과 마찬가지로 국경에 구애됨이 없는 팽창을 지향하고 이를 통해 공격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래서 세르비아의 그 경향은 알바니아해안을 향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세르비아는 알바니아의 등 뒤에서 이탈리아와 진정 제국주의적 경쟁을 할 수 밖에 없고 그 결과는 세르비아의 외부에서, 즉 강대국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의 배후에는 러시아 제국주의가 있다는 바로 그 점이다. 세르비아 자체는 세계정치라는 커다란 체스게임에서 체스말의 하나일 뿐이다. 이러한 커다란 연관성과 전반적인 세계정치적 배경을 도외시하고 세르비아에서의 전쟁을 판단하는 것은 확실한 근거가 없다. 자체만 분리해서 형식적으로만 보자면, 젊은 발칸국가들은 역사적으로 아주 정당하게 민족국가라는 오래된 민주주의적 강령을 실천에 옮겼다. 그런데 발칸을 제국주의적 세계정치의 초점이자 경쟁지역으로 만든 실제적인 역사적 연관성 속에서는 발칸전쟁들도 객관적으로 전반적 대결의 파편 하나에 불과하며, 치명적인 필연성으로 오늘의 세계대전을 초래한 사건들의 불운한 사슬 중 하나의 연결고리에 불과할 뿐이다. 국제 사회민주당 역시 발칸전쟁에 대한 어떤 도덕적 정치적 동조로 결연히 거부하고 그 전쟁의 진정한 외양을 폭로한 점에 대해 바젤에서 발칸 사회주의자들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제 사회민주당은 그 당시 이미 오늘날 전쟁에서 독일과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이 갖게될 태도를 미리 심판했다.

그런데 오늘날 모든 작은 국가들은, 예를 들어 네덜란드도 그 발칸국가들과 동일한 처지에 놓여있다. “배에 물이 새면, 무엇보다 먼저 새는 곳을 막을 궁리를 해야 한다.” 작은 네덜란드에서 이 순수한 민족방어, 나라의 존재와 독립의 방어가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일 수 있겠는가? 홀란드 민족의 그리고 그 지배계급 자체의 의도를 놓고 보면, 물론 순수한 민족방어가 문제이다. 그러나 역사적 인식에 기초한 프롤레타리아 정치는 어느 한 나라의 주관적 의도에 따라 방향을 잡는 것이 아니라, 세계정치적 상황의 총체적인 복합체에서 국제적으로 올바른 방향을 잡아야 한다. 네덜란드도 원하든 원치 않든 오늘날 세계정치와 외교라는 톱니바퀴 전체에서 작은 톱니 하나에 불과하다. 이점은 네덜란드가 이 세계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실제로 휘말려 들어간다면 당장 분명해질 것이다. 네덜란드가 전쟁을 치른다면 저절로 그것의 현재 소유물의 유지를 지향하게 될 것이고, 북해연안의 플랑드르민족의 방어와 민족독립성은 구체적으로 동인도제도에 있는 말레이에 대한 그 자체의 지배권과 착취권을 방어하는 것으로 확대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즉, 네덜란드의 군사주의는 의지할 데 없이 혼자서는 세계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치 호두껍질처럼 산산조각나고 말 것이다. 네덜란드는 또한 원하든 원치 않든 투쟁하는 대국들의 공범의 하나가 될 것이고, 이러한 측면으로도 순수하게 제국주의적 경향들의 담지체이자 도구가 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오늘날 제국주의의 역사적 환경은 다시 각국들에서 전쟁의 성격을 결정한다. 이러한 환경 때문에 오늘날에 민족방어전쟁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카우츠키도 몇 년 전인 1907년 라이프치히에서 그의 팸플릿『애국주의와 사회민주당』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애국주의가 두개의 완전히 다른 것이고, 바로 정반대의 현상들이라면, 그래도 그 두 종류의 애국주의가 심지어 하나의 전쟁에서 공동으로 작용하도록 함께 흘러들어갈 수 있을 그런 상황이 존재한다.

한 민족의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는 민족적 독립과 자주성에 있어, 다른 민족에 의한 어떤 종류의 억압과 착취라도 극복하고 방지하는 데서 똑같은 이해관계를 갖는다.… 그러한 노력들로부터 싹트는 민족투쟁들이 일어났을 때 항상 프롤레타리아트의 애국주의는 부르주아지의 애국주의와 합치되었다. …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가 하나의 세력이 된 이래, 즉 국가에 더 큰 동요가 일어날 때마다 지배계급들에게 위험스런 그러한 세력이 된 이래에는, 1871년 파리코뮌과 러시아-터키 전쟁 뒤 러시아 테러리즘이 보여주듯이 전쟁 끝에 혁명발생의 위협이 있게 된 뒤에는, 전혀 자립적이지도 통일되지도 않은 또는 충분히 그렇지 않은 그러한 나라들의 부르주아지들 마저도 그들의 민족적 목표가 정부의 전복을 통해서 획득될 수 있다면 그 목표를 사실상 포기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민족의 자립과 위대함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혁명을 증오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폴란드의 자립을 포기했고, 이미 한 세대 전에 멸망에 들어서는 듯 보였던 오스트리아와 터키 같이 케케묵은 국가구조가 존속하도록 했다.

이렇게 유럽의 문명화된 지역들에서 민족투쟁은 혁명이나 전쟁의 원인이길 멈추었다. 그곳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쟁이나 혁명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그러한 민족문제는 앞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 뒤에야 해결될 수 있다. 그때에는 그러한 문제들이 국제적인 연대 덕분에, 오늘날의 착취와 억압사회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실제로 투쟁이 일어날 때 더 이상 그런 문제들에 전념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온 힘을 다해 다른 문제들을 다뤄야 한다.” (12-14쪽)

“그 동안에 프롤레타리아 애국주의와 부르주아 애국주의가 제 민족의 자유의 방어를 위해 단결하게 될 확률은 점점 더 줄어든다.”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차리즘과 단결했다고 한다. 러시아는 혁명을 통해 약화되었기에 서유럽의 자유에 더 이상의 위험이 아니라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르주아 애국주의와 프롤레타리아 애국주의가 단결할 수 있을, 민족 자유의 방어를 위한 전쟁은 그 어디에서도 더 이상은 기대할 수가 없다.”(15/16쪽) [강조-R. L.]

“아직 19세기에만 해도 몇몇 자유주의적 민족들이 그 이웃들에 맞서 전쟁으로써 대항할 수 밖에 없었던 그러한 대립이 이제 중단되었음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오늘날의 군사주의가 중요한 민족 이해의 쟁취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윤의 쟁취를 위해 적용됨을 보았다. 정작, 그 누구로 부터도 위협받지 않는 자기 민족의 독립성과 신성불가침의 확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이윤의 촉진에 기여하는 해외정복의 강화와 확장을 위해서. 오늘날 국가들의 대립은 프롤레타리아 애국주의가 가장 결연히 맞싸워야할 그러한 전쟁을 더 이상 초래할 수 없다.” (23쪽) [강조 – R. L.]

그 모든 것들로부터, 오늘의 이 전쟁에서 사회민주당의 실천 행동과 관련해서 도대체 어떤 결론이 얻어질 수 있는가? 이 당은 설마, 이 전쟁이 제국주의 전쟁이라서, 이 국가가 사회주의적 민족자결권과 민족적 이상v에 부합하지 않아서, 그래서 우리는 이와 무관하고 그러므로 적에게 나라를 희생시킨다고 선언해야 했을 것인가? 수동적으로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두는 것, 일어나게 내버려두는 것은 결코 사회민주당과 같은 그러한 혁명당의 행동 지침이 될 수 없다. 지배계급의 지휘 아래 기존의 계급국가를 방어하기 위해 나서는 것도 아니라, 그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 옆으로 비켜서는 것도 아니라, 오히려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커다란 위기 때마다 지배계급이 앞으로 나아가도록 회초리를 때리는, 그 위기를 그것 자체 이상으로 몰아가는 독립적 계급정치를 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로서 사회민주당의 역할이다. 그러니까 제국주의전쟁에 민족방어라는 허구적인 외투를 입혀주는 대신에 바로 그 민족의 자결권과 민족방어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룰 때이다. 그것들을 제국주의전쟁에 맞서 혁명의 지렛대로 이용해야 한다. 민족방어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은 민족이 방어를 스스로의 손으로 담당하는 것이다. 그 첫 번째 단계가 민병이다. 이는 국민 가운데 모든 성인남자의 즉각적인 무장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특히 전쟁과 평화에 대해 민중이 결정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더 나아가서는 모든 정치적 권리박탈의 즉각적인 폐지를 의미한다. 최대의 정치적 자유가 민족방어의 기초로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정한 민족방어대책들을 선언하고 그것의 실현을 요구하는 것, 그것이 사회민주당의 첫 번째 과제였다. 40여 년 동안 우리는 민중과 지배계급에게, 조국을 진정으로 방어하고 패배할 수 없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오직 민병뿐임을 증명해왔다. 그리고 이제 첫 번째의 커다란 시험대에 오른 지금, 우리는 국방을 완전히 자명하다는 듯이 상비군들의 손에, 지배계급의 회초리 아래 있는 포탄받이들의 손에 넘겨주었다. 우리의 제국의회의원들은 조국의 진정한 방어에 대한 ‘열렬한 희망’과 더불어 이러한 포탄받이들을 전쟁터까지 동행했다. 그럼으로써, 프로이센의 왕립 상비군이 국가의 가장 위급한 순간에 그 진정한 구원자라고 그냥 인정해 버림으로써 우리의 정치 강령의 축인 민병을 그들은 깨끗이 희생시켜버렸다. 우리가 40년 동안 해온 민병에 대한 선동의 실제적인 의미를 연기처럼 사라지게 했다. 그 누구도 이제는 더 이상 진지하게 여기지 않을 교조적-유토피아적 변덕으로 만들어버렸으면서도 확실히 이의원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행동한다는 사실 자체를 전혀 깨닫지도 못했다.1*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거장은 조국방어를 다르게 이해했다. 1871년 프롤레타리아트가 프로이센 점령하의 파리에서 무기를 손에 들자, 마르크스는 그 행동에 열광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낡은 정부 권력의 중심이자 소재지, 그리고 동시에 프랑스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중심인 파리가, 그 파리가, 제국 체제로부터 넘겨받은 낡은 정부권력을 재건하고 영구화하려는 티에르와 그의 건달호족들의 시도에 대항해 무장봉기를 했다. 파리는 오직 점령의 결과로 군대가 없어지고 그 대신 주로 노동자로 이뤄진 국민군이 창설되었기 때문에 저항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을 이제 하나의 지속적인 제도 속에 변화시켜야 했다. 코뮌의 첫 번째 법령은 상비군을 금지하고 이를 무장한 민중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코뮌이 프랑스 사회의 모든 건강한 인자들의 진정한 대표자였다면, 그래서 진정한 민족정부였다면, 그래서 그것은 동시에 노동자정부로서, 노동해방의 용감한 선구자로서 그 단어의 완전한 의미에서 국제적이었다. 2개의 프랑스지방을 독일에 합병한 프로이센 군대의 눈앞에서 코뮌은 전 세계 노동자들을 프랑스에 합병했다.”(인터내셔널대회연설)vi[강조 - R.L.]

그리고 우리의 노련한 거장들은 오늘의 이 전쟁과 같은 전쟁에서 사회민주당의 역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던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92년, 큰 전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맡을 정치의 윤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러시아와 프랑스가 독일을 침략하는 그런 전쟁은 독일에게 생사가 걸린 투쟁일 것이고, 그 민족적 존재는 오직 혁명적 조처들을 통해서만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정부는 강제되지 않는 한 혁명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정부가 그렇게 하도록 강제하거나, 비상시에는 심지어 이 정부를 대체할 수 있는 강력한 당, 즉 사회민주당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프랑스가 1793년에 우리에게 보여준 위대한 모범을 잊지 않았다. 1793년의 100주년 기념일이 다가오고 있다. 차르의 정복욕과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국수주의적 조급함이 독일사회주의자들의 의기양양하지만 평화스런 전진을 가로막는다면, 이들은, 확신해도 좋다, 오늘날의 독일프롤레타리아들도 100년 전 프랑스의 상퀼로트에 결코 뒤지지 않음을 그리고 1893년도1793년에 필적될 수 있을 것임을 전세계에 증명할 태세가 되어 있다. 그러면 콘스탕씨의 병사들이 독일 땅에 발을 들여놓으면, 사람들은 라마르세예즈vii의 가사로써 그들을 맞이할 것이다.

뭐라고, 이 낯선 군대가 우리에게 비열한

폭력을 우리 집 안에서 행사한다고?viii

요컨대, 평화는 약 10년 안에 독일사회민주당의 승리를 보장한다. 전쟁은 2년이나 3년 안에 그 당의 승리를 가져오거나 아니면 완전한 폐허를 초래할 것이다, 적어도 15년에서 20년에 걸친 폐허를.”ix[강조 - R.L.]

이 글을 쓸 때 엥겔스는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옛날의 그 차르제국을 눈앞에 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뒤 거대한 러시아혁명x을 경험했다. 게다가 그는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이뤄지는 공격에 직면한 침략당한 독일의 진정한 국가방어전쟁을 생각했다. 진정한 투사들이 그 발전속도를 대부분 과대평가하곤 했듯이, 그는 결국 독일에서 상황의 성숙과 사회혁명에 대한 전망을 과대평가했다. 그의 상세한 설명으로부터 특히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엥겔스가 사회민주당 정치의 의미에서 국가방어를 프로이센-융커체제의 군사정부와 그 총사령탑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 자코뱅주의자들의 모범을 따른 혁명적 행동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그렇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큰 역사적 위기에서 자신의 나라를 방어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사회민주당 제국의회분파의 중요한 실책은 바로, 그것이 1914년 8월 4일에 “우리는 우리 조국을 위험의 순간에 외면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말을 부인한데 있다. 그것은 가장 최대의 위험의 순간에 조국을 외면했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 조국에 대한 제일의 책무는, 이러한 제국주의 전쟁의 진정한 배경을 보여주는 것, 이 범죄가 조국을 뒤덮는데 사용된 애국주의적이고 외교적인 거짓말의 직조물을 찢어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독일민족에게 승리는 패배만큼이나 불운한 것이라고 큰소리로 분명하게 말하는 것, 계엄령을 통한 조국의 결박에 끝까지 저항하는 것, 민중이 즉각적으로 무장할 그리고 전쟁과 평화에 대해 결정할 필요성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민중대표가 정부를 주의 깊게 통제하고, 민중이 민중대표를 통제하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전쟁기간동안 민중대표 상임회의를 힘차게 요구하는 것이었다. 자유로운 민중만이 자기 나라를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정치적 권리박탈의 즉각적인 폐지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오스트리아와 터키, 즉 유럽반동을 유지하려는 전쟁의 제국주의적 강령에 대항해, 1848년의 애국주의자와 민주주의자들의 오래된 진정한 민족강령을,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라쌀레의 강령을, 대독일 단일공화국의 구호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그것이야 말로 바로, 그 나라에 내세워야 했을, 진정 민족적이고 진정 진보적이었을 그 깃발이었다. 독일의 최상의 전통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정치와도 일치했을 깃발이었다.

세계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순간은 결연한 정치적 실행, 포괄적이고 대규모의 입장표명, 나라의 탁월한 방향설정을 명백히 요구했고, 이를 제시할 소명을 가진 것은 오직 사회민주당뿐이었다. 그러기는 커녕 그 순간에 발언했던 노동자계급 의회대표들의 처참하고 전례는 패배가 결과되었다. 사회민주당은 그 지도자들 덕분에 틀린 정책을 펼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런 정책도 펼치지 않았다. 그들은 세계관을 가진 특별한 계급당으로서 완전히 스스로를 배제해 버렸고, 나라를 아무 저항 없이 외부적으로는 제국주의 전쟁의 불운에 그리고 내부에서는 군홧발 독재의 끔찍한 불운에 희생시켜버렸으며, 게다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고 말았다. 제국의회 원내분파의 선언은 국방을 위한 수단만을 승인했다고 말하면서 전쟁에 대한 책임은 거부한다. 하지만 바로 그 정반대가 진실이다. 이러한 ‘방어’를 위한, 즉 군사왕정의 군대가 자행하는 이러한 제국주의적 인류 학살을 위한 수단은 사회민주당이 승인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회민주당의 손에 전혀 달려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수당으로서 이것은 부르주아 제국의회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빈틈없는 다수에 대립해 있었다. 자발적으로 승인함으로써 사회민주당의 제국의회 원내분파는 오직 한가지만을 성취했다. 그것은 전쟁에서 전국민의 단합의 과시, 당쟁중지의 선언, 즉 계급투쟁의 중단, 전쟁에서 사회민주당의 반대정치의 해체, 그러니까 전쟁에 대한 도덕적인 동반책임이었다. 그 수단을 자발적으로 승인함으로써 이 전쟁수행에 민주주의적 조국방어라는 스탬프를 찍어주었다. 조국방어의 진정한 조건들과 과제들과 관련해 대중을 오도하도록 지원하고 확증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의 제국의회의원들이 ‘무거운 마음으로’ 제국주의 전쟁 진영으로 가도록 만든 조국의 이해관계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연대 사이의 그 중대한 딜레마, 그 비극적인 대립은 순수한 환상이자, 부르주아-민족주의의 허구이다. 오히려 프롤레타리아 인터내셔널의 계급이해와 국가이해들 사이에는 평화 시와 마찬가지도 전쟁 시에도 완전한 조화가 존재한다. 즉, 양자 모두는 계급투쟁을 정력적으로 전개할 것과 사회민주적 강령을 강력하게 대변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당은 전쟁 반대를, 그 요구들을 강조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했을까? 대대적 파업xi을 선언해야 했을까? 아니면 병사들의 복무거부를 권유해야 했을까? 보통은 이렇게 질문들이 제기된다. 그러한 질문들에 긍정으로 답하는 것은 당이, ‘전쟁이 터지면 우리는 혁명을 만들 것이다’고 결정하려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다. 혁명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거대한 민중운동들이 당관할자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기술적 처방으로 획책되는 것도 아니다. 작은 음모자서클은 어느 특정일 특정 시간에 쿠데타를 ‘준비할’ 수 있고, 몇 십 명의 추종자들에게 필요한 순간에 ‘개시’ 신호를 내릴 수 있다. 하지만 거대한 역사적 순간에 대중운동은 그와 같은 원시적인 방법으로는 이끌어질 수 없다. ‘가장 잘 준비된’ 대대적 파업이라도 경우에 따라서 당장, 당 수뇌부가 그것에 ‘신호’를 내리면, 한심하게 실패하거나 시작되자마자 무너질 수 있다. 큰 민중시위와 대대적 파업이 그 어떤 형식이든 실제로 발생할 것인지 그렇지 않을지를 결정하는 것은 수많은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심리적 요인들이다. 계급대립들 각각의 긴장이며, 대중의 계몽수준이고 그 투쟁기운의 성숙도이다. 그런데 그러한 성숙도는 전혀 예측될 수 없고 그 어떤 당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잘 규율 잡힌 당이 평화 시에 ‘관할 부서’의 박자에 맞춰 깔끔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자잘한 과시적 행동들과 역사의 대위기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이다. 역사적 순간은 항상 그에 상응한 민중운동형태를 요구하고 그것을 스스로 새롭게 만들어낸다. 이전에는 몰랐던 투쟁수단을 즉석에서 만들어낸다. 당의 지시들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민중의 병기고를 정리하고 풍부하게 한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이 계급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로서 제공했어야 하는 것은 기술적 성격의 한심한 지시들이나 처방들이 아니라, 오히려 전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과제와 이해관계에 관한 정치적 구호, 정치적 명료함이었다. 러시아혁명에서 대대적 파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대중운동에도 해당된다.

“그러나 그 발생을 명령하고 또 그 비용을 계산하여 치른다는 의미에서 대대적 파업을 지도하는 것이 그 혁명시기 자체라면, 그렇다면 그 대신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 그것을 지도하는 것은 사회민주당과 그 지도기관들의 몫으로 돌아온다. 사회민주당은 대대적 파업의 기술적인 측면 때문에, 그 메커니즘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대신 혁명시기의 한가운데에서 정치적 지도를 떠안을 사명이 있다. 투쟁에 구호와 방향을 제공하는 것, 그 어느 시기, 그 어느 순간에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존재하는, 막 방출되기 시작한 그리고 활동하는 세력의 총합이 실현될 수 있도록 또 어떤 투쟁 위치에서도 그 결연함이나 강도에 있어 사회민주당의 전술이 결코 실제의 권력관계보다 수준 이하가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관계보다 훨씬 더 앞서감이 표현되도록 그렇게 정치투쟁의 전술을 세우는 것, 이것이 대대적 파업 시기에 ‘지도xii’의 중요한 과제이다. 이러한 지도는 어느 정도는 저절로 기술적인 지도로 변화된다. 사회민주당의 일관되고 결연하며 전진을 도모하는 전술은 대중 속에서 안정감과 자신감과 투쟁기운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동요하고 허약하며 프롤레타리아트를 과소평가하는 것에 기반을 둔 전술은 대중을 마비시키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작용을 한다. 첫 번째 경우에는 대대적 파업이 ‘저절로’ 그리고 항상 ‘제때에’ 일어나지만, 두 번째 경우에는 이와 달리 지도부가 대대적 파업을 직접 권유하는 것이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xiii

행동의 외적이고 기술적인 형식이 문제가 아니라 그 정치적인 내용이 문제라는 점은, 예를 들어 의회 연단은, 만약 사회민주당 대리자들이 이러한 위기에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와 임무와 요구사항들을 소리 높혀 분명히 표현하기 위해서 활용하기만 했다면, 유일하고 자유로우며 계속 경청되고 국제적으로 주목될 수 있는 위치로 민중을 일깨어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 잘 보여준다.

사회민주당의 이러한 구호들에 대해 대중이 그들의 행동을 통해 무게를 실어주었을까? 아무도 그점에 대해 성급하게 말할 수 없지만 그렇게 전적으로 결정적인 것도 아니다. 우리 의회의원들은 전쟁차관을 승인하기 전에 프로이센-독일군대의 장군들로부터 반드시 승리할 것이고 패배는 배제되어 있다는 이상한 확약을 사전에 받아두지 않고도 ‘맹신하며’ 자신들을 전쟁에 끌어들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던가? 군대에게 해당되는 것은 혁명군대에게도 해당된다. 그들은 사전에 승리의 확신을 요구하지 않고도 전투가 있는 곳에서는 전투에 임한다. 최악의 경우는 당의 목소리에 가시적인 작용이 전혀 없는 경우일 것이다. 그렇다, 최대의 박해는, 1870년 베벨과 리프크네히트에게 그랬듯이, 아마도 우리 당의 용감한 태도에 대한 포상일 것이다. 1895년 이그나츠 아우어는 세당기념식에 관한 그의 연설에서 말하기를 “…그러나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계를 정복하려는 당은 어떤 위험도 개의치 않고 자체의 원칙을 높이 치켜들어야 한다. 만약 이와 다르게 행동한다면, 끝장일 것이다!”xiv

노장 빌헬름 리프크네히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흐름을 거슬러 헤엄치는 것은 언제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흐름이 엄청난 나이아가라폭포의 속도와 힘으로 흐른다면, 그것은 정말로 작은 일이 아니다.

나이든 동지들에게는 아직도 가장 깊은 ‘민족 치욕’의 해인 1878년의 사회주의자 사냥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 때 수 백만의 사람들은 사회민주당원들을1870년에 조국배반자이자 철천지원수로 여겨졌던 것처럼 이제 살인자와 야비한 범죄자로 보았다. ‘인심’의 그런 폭발들은 그 엄청난 자연력으로써 당황시키고, 마비시키며, 우울하게 만드는 그 어떤 것이다. 더 높은 힘 앞에서는 무력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어떤 의혹도 배제된 진정 거대한 힘 앞에서는. 어떤 구체적인 반대자도 없이. 그것은 마치 전염병과도 같이 사람들 속에, 공기 속에, 도처에 존재한다.

그러나 1878년의 폭발은 그 강도나 격렬함에 있어서 1870년의 그것과 전혀 비교될 수가 없었다. 닥치는 대로 내리치고 깨부수는 인간 격정의 이러한 대폭풍 뿐만 아니라, 게다가 완전하고 가장 무서운 활동을 수행하는 군사주의의 무시무시한 도구들, 그리고 접촉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회전하는 강철톱니바퀴들 사이의 우리들, 우리 둘레를 빙빙 돌며 언제라도 덮칠 수 있는 강철 팔들 사이의 우리들. 그러한 풀려난 유령들의 자연력 외에도 세계가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완성된 살인기술 메커니즘. 그리고 모든 것이 가장 난폭하게 작동했다. 모든 보일러가 터질 듯이 가열되어 있었다. 이때 개별적인 힘이, 개별적인 의지가 어디에 있는가? 특히 한 줌의 소수에 불가하고 민중 자체에 그 어떤 확고한 근거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당은 겨우 성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는 필요한 조직이 갖춰지기도 전에,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시험에 빠졌었다. 사회주의자 몰이사냥이 일어났을 때는, 즉 우리의 적들에게는 치욕의 해이자 사회민주당에게는 영광의 해였던 그해에는, 우리는 이미 폭넓게 가지를 친 매우 강력한 당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나 든든한 배경을 가졌다는 의식으로 힘을 얻었고 이성을 가진 자라면 그 누구도 당의 패배를 생각할 수 없었다.

이렇듯 그때 흐름을 거슬러 헤엄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엇을 해야 했는가? 해야될 일은 해야만 했다. 그때에는, 이를 악물고 당당히 맞서자고 말했다. 두려워할 때가 아니었다.…

여하튼, 베벨과 나는… 한순간도 그 경고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우리는 퇴각할 수 없었고, 의연히 제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올 테면 와봐라 하고.”xv

그렇게 그들은 제자리를 지켰다. 그때 적들로 가득 찬 세상에 맞서 그들이 동원했던 그 도덕적 힘으로 독일사회민주당은 40년을 살아왔다.

이번에도 그렇게 진행되었을 텐데. 처음에는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명예가 구제되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얻어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지금 참호 속에서 밤낮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프롤레타리아들이 흐릿한 정신적 혼란 속에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일생에 가장 충실한 것이었던, 국제적이고 민족해방적인 사회민주당이 허상이 아니었다는 섬광을 담고 죽어갔을 거라는 것 외에는. 그러나 우리당의 용감한 목소리는 국수주의적 도취에 대한 그리고 군중의 몰지각에 대한 강력한 제동기로 작용하여 계몽된 민중이 그러한 혼망에 빠지지 않도록 막았을 것이고, 제국주의가 민중을 중독시키고 우둔하게 만드는 것을 방해했을 것이다. 사회민주당에 대항한 바로 그 십자군원정이 민중을 가장 빨리 깨어나게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전쟁이 계속 진행되면서 끊임없는 잔혹한 대량학살에 대한 참회가 모든 나라들에서 커질수록, 전쟁의 제국주의적 말발굽이 점점 더 뚜렷하게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피에 굶주린 투기꾼들의 장바닥 같은 소란이 더 염치없어질수록 그 만큼 모든 생동적인 사람들, 진솔한 사람들, 인간적인 사람들, 진보적인 사람들이 사회민주당의 깃발 주위로 모여들었을 텐데. 그리고 무엇보다도 독일사회민주당은 그 전반적인 소용돌이, 붕괴와 파멸 속에서 마치 거세게 출렁이는 바다 위의 바위처럼 인터내셔널의 드높은 등대로 남아 있었을 테고, 그것을 향해 곧 모든 다른 노동자 당도 방향을 잡았을 텐데. 독일사회민주당이 1914년 8월 4일까지 전체 프롤레타리아 세계에서 향유했던 거대한 도덕적 권위는 이러한 전반적인 혼미 속에서도 단기간에 변화를 초래했을 텐데. 그렇게 해서 평화기운과 민중의 평화에로의 압력이 모든 나라들에서 떠올랐을 것이고, 대량학살의 종식이 가속되고, 희생자 수가 감소되었을 텐데. 그렇게 독일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주의의 등대지기로 인류의 해방자로 남았을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라쌀레의 제자들로서 부끄럽지 않았을 애국적인 일일 것이다.

1* 뮌헨의 당 기관지는 8월 6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럼에도 사회민주당 제국의회 원내분파가 지금 한 목소리로 전쟁차관을 승인한 것, 독일제국의 방어를 위해 나선 모든 이들에게 승리의 열렬한 염원을 함께 빌어준 것은, 그렇게 해서 그것은 일종의 ‘전술적인 행보(taktischer Zug)’가 아니었다. 그것은 파렴치한 침략에 맞선 국방의지보다는 오히려 계급지배의 표현처럼 보였던 체제 대신에 민중군대(Volksheer)을 국방을 위해 내세울 준비가 되어 있던 한 당의 태도에서 나오는 전적으로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보였던 이라니!! –『새시대』에서는 심지어 오늘의 전쟁을 곧바로 ‘민족전쟁(Volkskrieg)’으로, 상비군을 ‘민중군대(Volksheer)’로 승격시켰다(1914년 8월/9월의 제 20호와 23호를 참조.) – 사회민주당의 군사저술가 휴고 슐츠는 1914년 8월 24일의 전쟁보도에서, 합스부르크 군대 안에 ‘살아’ 있다는 ‘강력한 민병정신(Milzengeist)’에 대해 칭찬했다!


i Karl Marx, “Der Bürgerkrieg in Frankreich,” in : Karl Marx u. Friedrich Engels, Werke, Bd. 17, S.360/361

ii Hohenstaufen

iii Vendée 봉기, 프랑스대혁명당시 프랑스의 방데지역에서 왕당파와 카톨릭승녀들의 주도 하에 농민들이 일어킨 반혁명봉기. 혁명정부에 의해 유혈진압되었다.

iv Die einige großdeutsche Republik

v nationale Ideal (민족적 이상), 원저에는 ideale Nation(이상적 민족)으로 되어 있다.

vi Karl Marx, “Der Bürgerkrieg in Frankreich(프랑스내전),” in : Karl Marx u. Friedrich Engels, Werke, Bd. 17, S.338, 346

vii La Marseillaise 프랑스국가

viii Quoi, ces cohortes étrangères

Feraient la loi dans nos foyers!

Wie, soll dies fremde Heer uns schnöde

Gewalt antun am eignen Herd?

ix Friedrich Engels,“Der Sozialismus in Deutschland(독일에서의 사회주의),” in : Karl Marx u. Friedrich Engels, Werke, Bd. 22, S.255/256

x 1905년의 러시아혁명을 말함

xi Massenstreik

xii Leitung

xiii R. Luxemburg, Massenstreik, Partei und Gewerkschaften(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 Hamburg 1907. In: Rosa Luxemburg Gesammelte Werke, Bd.2, Berlin 1972, S.133/134

xiv I. Auer: Sedanfeier und Sozialdemokratie, S.6

xv W. Liebknecht: Der Hochverratsprozeß wider Liebknecht, Bebel, Hepner vor dem Schwurgericht in Leipzig vom 11. bis 26. März 1872(1872년 3월 11일부터 26일까지 라이프치히 배심재판소에서 이뤄진 리프크네히트, 베벨 헤프너에 대한 대반역죄재판), Berlin 1894, S.8~9, 13.

 

제8장 1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 쇠퇴기의 서막

군사독재와 언론검열에도, 사회민주당의 기능상실에도, 형제살해적인 전쟁에도 불구하고, ‘당쟁중지’로부터 강력하게 계급투쟁이 그리고 전쟁터의 피안개로부터 노동자의 국제연대가 생겨나고 있다. 옛 인터내셔널을 인위적 전기요법을 통해 되살리려는 미약한 시도에서가 아니다. 전쟁 뒤에는 즉시 다시 결속하겠다는 여기저기서 새로이 이뤄지는 맹세에서가 아니다. 아니다, 지금, 전쟁 중에, 전쟁으로부터 완전히 새로운 힘과 무게로, 모든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는 하나의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이 되살아나고 있다. 세계대전은 그 자체가 만들어낸 속임수를 스스로 반증했다.

승리냐 패배냐! 이것이 모든 교전 국가에서 지배적인 군사주의의 구호이다. 그것을 메아리마냥 사회민주당지도자들은 받아들였다. 전쟁터에서 승리 아니면 패배가 문제라고 한다. 지금 프랑스뿐만 아니라 독일, 러시아뿐만 아니라 영국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있어서도 이 나라들의 지배계급에게 그러하듯 똑같이 그것이 문제란다. 대포가 천둥치듯 울려대자마자, 모든 프롤레타리아트는 자국의 승리에, 그러니까 타국의 패배에 관심을 두어여 한단다. 승리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무엇을 가져올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공식적인 설명에 따르면, 독일이 승리하면 방해받지 않는 무제한적인 경제활황이, 패배할 때에는 경제적인 폐허가 초래된다고 한다. 이러한 견해는 1870년 전쟁의 도식에 바탕한 것이다. 그러나 독일에서 1870년 전쟁 뒤에 나타난 자본주의적 개화는 전쟁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비스마르크가 창조한 독일제국이라는 기형적인 형태이긴 해도 어쨌든 그런 정치적 통일의 결과였다. 경제활황은 여기서 전쟁과 그 결과로 나타난 다양한 반동적인 방해들에도 불구하고 통일에서 비롯되었다. 승리한 전쟁이 그에 덧붙여 자체적으로 행한 것이라고는 독일에서 군사왕정과 프로이센 융커체제의 확립이었다. 그와 달리 프랑스의 패배는 제국의 해체와 공화국의 탄생을 가져왔다. 하지만 오늘날은 사정이 모든 관련 국가들에서 완전히 다르다. 오늘날 전쟁은 떠오르는 젊은 자본주의에게 그것의 ‘민족’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될 정치적 전제조건을 만들어주는 일종의 역동적인 수단으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이러한 성격을 이번 전쟁은 기껏해야 그것도 고립된 파편으로서 고찰될 때 세르비아에서만 가지고 있다. 그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로 환원하면, 전체로서의 지금의 세계전쟁은 이미 완전히 꽃필 대로 꽃핀 자본주의가 세계지배를, 마지막 남은 비자본주의적 세계지대의 착취를 놓고 벌이는 경쟁적 투쟁이다. 이로부터 이 전쟁 자체의 완전히 변화된 성격과 그 작용이 나온다. 자본주의 생산의 고도의 세계경제적 발전은 여기서 대단히 높은 기술, 즉 전쟁수단의 파괴력에서 뿐만 아니라, 그 기술 수준이 모든 교전국들에서 거의 완전히 동일하게 높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살인병기산업의 국제적인 조직화는 지금 군사적 균형 속에 반영되는데, 이러한 균형은 부분적 결정들과 저울접시의 흔들림을 통해서 항상 다시 이뤄지고 그래서 총체적인 결정이 항상 다시 뒤로 미뤄지게 된다. 전쟁의 승패가 결정나지 않기에 다시, 교전국의 국민 대중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중립을 지켜온 나라들도에 항상 새로운 예비군을 포화 속으로 보낸다. 제국주의적 탐욕과 대립에서 이 전쟁은 도처에서 쌓여있는 연료를 발견하고, 스스로 새로운 연료를 만들어내면서 마치 대초원의 산불마냥 퍼져나 간다. 그러나 더 많은 대중이 그리고 더 많은 나라가 사방에서 이 세계대전에 개입할수록, 전쟁의 지속기간은 더 연장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합치면, 군사적 승패가 결정되기 전에 이미 그 전쟁의 작용으로 인해 이전까지의 전쟁들에서는 알려진 바 없는 현상이 현대에는 나타나게 된다. 모든 관련국의 경제적 폐허, 그것도 점점 더 정도가 심하게, 그리고 또한 공식적으로 관여되지 않은 국가들의 경제적 폐허가 바로 그것이다. 전쟁이 한달 두달 더 지속될 수록, 이러한 폐허는 더 고착되고 더 강화되어, 그렇게 군사적으로 승리할 경우 기대되는 열매를 십년 앞서 빼앗아버린다. 이런 결과를 놓고 볼 때, 최종적으로 승리하든 패배하든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오히려 그 역으로 순수하게 군사적인 결정이 전적으로 의심스럽게 되어 모든 측에서 극도의 고갈로 인해 종국적인 전쟁종결이 초래될 것이 점점 더 확실해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하에서 독일이 승리한다 하더라도, 전쟁선동자들이 그러한 대량살해를 통해 모든 반대자를 완전히 진압하는데 성공한다고, 이러한 대담한 꿈이 이뤄진다고 가정하더라도, 많은 희생을 치르고 얻는 피로스의 승리i만을 얻게 될 것이다. 그 트로피는, 인구가 전멸되고 재정이 바닥난 합병지역 몇몇, 그리고 전쟁차관을 통해 이뤄진 재정관리로 그려진 커튼과 전쟁물자조달을 통해 운영되던 ‘튼실한 국민생활수준’이라는 포템킨촌ii의 겉치레를 걷어내자마자 즉시 드러나게 될 조롱하는 듯한 국내의 폐허가 전부일 것이다. 승전국이라 하더라도 이번 전쟁으로 생긴 상흔을 치유할 수 있기는 커녕 오늘날 어떤 전쟁배상도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은 가장 피상적인 관찰자에게도 분명하다. 그 대신에 그리고 그 ‘승리’에 위안을 제공하는 것은, 패배한 반대편, 즉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더 큰 경제적 폐허가 생겼다는 점일 것이다. 이 나라들과 독일은 경제적 관계들을 통해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이 나라들의 생활수준에 독일 자체의 재개화는 가장 많이 의존적이다. 그러한 틀 안에서, 독일 국민에게 있어서 전쟁 후, ‘승리한’ 전쟁 후라는 전제하에서, 애국적인 민중대변자가 미리 ‘승인한’ 전쟁비용을 나중에 실제로 치르는 것, 즉 강화된 군사적 반동뿐만 아니라 조세의 엄청난 부담을 ‘승리’의 유일하게 남은 구체적인 열매로서 스스로의 어깨에 부담하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패배라는 최악의 결과들을 상상해 본다면, 제국주의적 합병을 제외하고는, 승리의 불가피한 귀결들로 나타나게 될 것과 모양새가 비슷하다. 즉, 전쟁수행 자체의 영향은 오늘날 매우 근본적이고 광범위한 성질의 것이어서 그 군사적 결과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주 적다.

그런데 승리한 국가가 그래도 더 큰 폐허를 패배한 상대편에게 떠넘기고 그 편의 경제발달을 모든 장해물을 써서 묶어둘 수 있다고 잠시 한번 가정해 보자. 프랑스, 영국, 벨기에 그리고 이탈리아 노동자의 노동조합적 행동이 경제적 퇴보를 통해 저지당한다면, 독일노동자계급이 전쟁 후 노동조합투쟁에서 성공적으로 전진할 수 있을까? 1870년까지 노동자운동은 각 나라에서 독자적으로 진행되었고, 각 개별 도시들에서 자체적인 결정을 내렸다. 파리의 길거리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전투가 이뤄지고 결정되었다. 오늘날의 노동자운동은, 그 힘겨운 경제적 일상투쟁은, 그 대중조직은 자본주의 생산의 모든 나라의 공동작용에 기반하고 있다. 건강하고 강력하게 맥박 치는 경제생활의 지반 위에서만 노동자의 형편이 나아질 수 있다는 말이 옳다면, 그것은 독일에게 뿐만 아니라 프랑스, 영국, 벨기에, 러시아 그리고 이탈리아에게도 통용된다. 그리고 유럽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노동자운동이 침체되고, 그곳에서 저임금과 허약한 노동조합이 존재하고 착취당하는 이들의 저항력이 약하다면, 독일에서 노동조합운동은 꽃필 수 없다. 이러한 견지에서, 독일 자본주의가 프랑스 자본주의를 대가로 또는 영국 자본주의가 독일 자본주의를 대가로 강화된다면, 이는 경제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진영에게는 정확히 똑같은 손실이다.

그러나 전쟁의 정치적 사건들을 살펴보자. 여기서 구별하기가 경제영역에 비해서 훨씬 더 쉬울 것이다. 오래 전부터 사회주의자들은 반동에 맞서 역사적 진보를 위해 싸우는 그러한 쪽을 향해 공감대를 갖고 또 그에 가담하였다. 오늘의 세계대전에서 어느 쪽이 진보를 또 어느 쪽이 반동을 대표하는가? 분명히 이 문제는 ‘민주주의’나 ‘절대주의’라는 교전국들의 외적인 특징에 따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각 측이 옹호하는 세계정치적 입장의 객관적 경향에 따라서만 판단될 수 있다. 독일의 승리가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가져올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판단하기 전에, 우리는 어떻게 그 승리가 유럽의 정치 관계들의 전체적 조형에 영향을 끼칠 것인가를 주시해야 한다. 독일의 결정적인 승리는 그 즉각적인 결과로서 벨기에의 합병뿐만 아니라 아마도 동서쪽 몇몇 지역들과 프랑스식민지 몇 부분의 합병을 초래할 것이며, 동시에 합스부르크왕가의 유지와 그것의 새로운 지역 획득,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일 보호령 하에 터키의 허구적 ‘통합성’의 유지가 초래될 것이다. 즉, 소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가 동시에 이런 저런 형태로 사실상 독일지방으로 전환될 것이다. 그 이외의 결과로서 유럽에서 독일의 실제적인 군사적 경제적 헤게모니가 뒤따를 것이다. 독일의 철저한 군사적 승리가 가져오게 될 이러한 모든 결과가 예상될 수 있는 것은, 오늘의 전쟁에서 제국주의적 장담자들의 희망에 따라서가 아니라 독일이 일단 채택한 세계정치적 입장으로부터, 독일이 질주해온 그리고 전쟁이 진행되면서 그 시작 당시의 차원을 엄청나게 뛰어넘어버린, 영국에 대한, 프랑스에 대한 그리고 러시아에 대한 독일의 대립들로부터 이러한 것들이 결과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결과들이, 그 어떤 식으로든 유지될 수 있는 세계정치적 균형을 결코 초래하지 않을 것임을 통찰하기에는 이러한 결과들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전쟁이 모든 관련국들에게 얼마나 큰 페허를 의 미하든 간에, 그리고 패전국들에게는 아마도 훨씬 더한 정도의 폐허를 의미하든 간에, 유럽과 근동에 부담으로 작용할 프로이센-독일 군사주의의 질곡을 벗어나기 위해서 평화협정체결 그 다음날 바로 영국 주도하에 새로운 세계전쟁으로의 준비가 시작될 것이다. 독일의 승리는 그래서 곧 이어질 제2차 세계대전의 전주곡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치열한 군사적 무장 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들에서 하지만 최우선적으로 독일 자체에서 가장 어두운 반동들이 날뛰게 되는 신호탄에 불과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승리는 독일에게 거의 확실히 최소한 식민지와 제국의 몇 부분의 손실을 가져올 것이고 독일 제국주의의 세계정치적 지위를 파산시킬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파편화와 터키의 완전한 해체이다. 지금 그 두 나라는 극히 반동적인 구조물이다. 그 두 나라의 붕괴 자체는 진보적인 발전의 요구에 아주 부합한다. 오늘날의 구체적인 세계정치적 환경에서 합스부르크왕가와 터키 제국이 무너지면, 그곳의 나라들과 민족들은 러시아, 영국, 프랑스 및 이태리에게로 귀속될 수밖에 없다. 발칸과 지중해지역에서 이런 광대한 세계재분할과 권력이동에 뒤이어 아시아에서 또 다른 것, 즉 페르시아의 해체와 중국의 새로운 파편화가 끊임없이 뒤따를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영국-러시아의 대립뿐만 아니라 영국-일본의 대립이 세계정치의 전면에 나타날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오늘날 세계전쟁의 청산에 곧이어 콘스탄티노플을 놓고 벌이는 새로운 세계대전을 초래할 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것은 불가피한 앞으로의 전망이 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승리는 모든 국가들에서, 패전한 독일을 당연히 선두로 하여, 새로운 치열한 군무장을, 그래서 새로운 세계전쟁을 그 최종목표로 유럽전체에서 군사주의와 반동의 완전한 지배의 시대를 준비하게 된다.

이렇게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는 진보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오늘의 전쟁의 어느 한쪽의 편을 들게 된다면, 세계정치와 그 앞으로의 전망들 전체를 놓고 볼 때, 스킬라와 카리브디스iii사이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유럽 노동자계급에게 있어 승리냐 패배냐의 문제는 이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측면에서 두개의 심한 타격 사이에서 가망 없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독일의 군사적 패배가 군사주의에 아니 심지어는 제국주의에 일격을 가할 것이고 세계에 평화로운 민주주의의 길을 열 것이라고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이 생각한다면, 이것은 불운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제국주의와 그것에 봉사하는 군사주의는 오히려 이 전쟁이 승리하든 패배하든 상관없이 완전히 사회주의자들의 부담으로 돌아오게 된다. 오직 한 가지 경우만이, 즉 국제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적으로 개입하여 군사주의의 계획을 망쳐놓을 경우만이 그 예외이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와 관련 오늘의 전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프롤레타리아트는 독일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영국에서도 러시아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승리냐 패배냐>라는 구호의 무비판적인 메아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흔들릴 수 없는 사실이다. 이 구호는 오직 제국주의의 입장에서만 진정한 내용을 가지고, 모든 강대국에게 있어서 세계정치적 권력입지의 획득이냐 상실이냐의 문제와 동일하며, 합병과 식민지 그리고 군사적 지배의 문제와 동일하다. 유럽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에게 있어 오늘날 그 계급 입장으로 볼 때 각 교전 진영의 승리와 패배는 똑같이 불운한 것이다. 바로 그러한 전쟁 자체와 그 모든 군사적인 결과들은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가장 큰 패배를 의미한다.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행동을 통해 전쟁을 극복하고 신속히 평화를 요구하는 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안에 있어 유일한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승리 자체만으로도 벨기에뿐만 아니라 동시에 유럽의 민주주의를 진정으로 구제하는 작용을 할 수 있다.

오늘의 전쟁에서 계급의식적 프롤레타리아트는 어떤 군사 진영과도 자신의 사안을 동일시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설마 결과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가 오늘날 현상태의 유지를 요구하는 것이 되는가? 우리는 그러면 모든 것이 전쟁 전과 같이 옛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소망 외에 그 어떤 다른 행동강령도 갖지 않는단 말인가? 하지만 기존 상태는 결코 우리의 이상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민족자결주의의 표현이 아니다. 게다가 이전의 상태는 전혀 구제될 수도 없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국경이 유지된다 할지라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은 그 사건들을 공식적으로 청산하기에 앞서 이미 권력관계, 상호적인 권력평가, 제휴와 대립의 엄청난 혼합을 초래했다. 전쟁은 국가들 사이의 관계와 사회 내 계급들 사이의 관계를 첨예하게 바꿔 놓았다. 그렇게 많은 오랜 환상과 활력을 파괴하고 그렇게 많은 새로운 충동과 새로운 과제를 창조해서 1914년 8월 4일 이전의 유럽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마치 혁명이 진압된 뒤 혁명전 관계들로 되돌아가는 것만큼이나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는 결코 ‘후퇴’를 모른다. 오직 앞을 향해 노력할 뿐이다. 항상 기존의 것과 새로이 창조된 것을 넘어서 나아가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라도 제국주의적 세계대전의 두 진영에 대항해 프롤레타리아트 자체의 정치를 대립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각각 또는 공동으로 국제대회에서 경쟁적으로 기획안들을 만들어 내는 것에 있지 않고, 평화적 민주주의의적 발전을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하려면 어떻게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할지에 관한 처방을 부르주아의 외교를 위해 고안해 내는 것에 있지 않다. 완전한 또는 부분적인 ‘무장해제’, 비밀외교의 폐지, 모든 강대국을 작은 민족국가들로 조각내는 것 등등으로 이어지는 모든 요구는, 자본주의적 계급지배가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 모두가 그리고 특히 완전히 공상적이다. 게다가 현재의 제국주의 노선은 오늘날 군사주의, 비밀외교, 그리고 민족들이 혼합된 집중화된 대국을 포기하지 않기에 그와 관련된 요구들은 결국 그 모두가 더 결연하게 자본주의 계급국가들의 폐지라는 단호한 ‘요구’로 나아가게 된다. 제국주의가 부르주아 국가의 틀 안에서 부분적인 개량을 통해서 어떻게 완화되고 길들여지고 억제될 수 있을 지에 대한 공상적인 충고나 계획들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정치가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없다. 세계대전이 사회주의당 앞에 제기한 그리고 그 해답에 노동자운동의 앞으로의 운명이 달린 그 원래의 문제는 자본주의에 대항한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행동능력이다.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요구들, 강령들 그리고 구호들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위와 효과적인 저항, 제국주의를 결정적인 순간에 그것도 바로 전쟁 중에 공격하고 ‘전쟁에는 전쟁을!’이라는 오랜 구호를 실천에 옮길 능력이 없는 것이다. 여기가 바로 뛰어내려야할 곳인 바로 그 로도스iv다. 여기가 바로 프롤레타리아 정치와 그것의 먼 미래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제국주의는 잔인한 폭력정치와 그것로 유발된 일련의 끊임없는 사회적 재앙과 함께 현재 자본주의 세계의 지배계급에게는 확실히 역사적인 필요성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지금의 전쟁으로부터 자본주의의 앞으로의 목가적이고 평화스런 발전에 대한 그 어떤 최소한의 환상과 희망이라도 건져내게 된다면, 그보다 더 불운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정치가 제국주의의 역사적 필요성으로부터 끌어내어야 할 결론은, 그 계급이 제국주의의 그늘 안에서 그 승리의 자비로운 떡고물로 앞으로의 삶을 근근이 이어가기 위해 제국주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변증법은 바로 모순들 속에서 움직이고 모든 필요성에 대해 그것의 반대편을 창출한다. 부르주아 계급지배는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의 역사적 필요성이지만 그것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반란도 또한 그렇다. 자본은 하나의 역사적 필요성이지만 그것의 무덤을 파는 자, 즉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도 그렇다. 제국주의의 세계지배는 하나의 역사적 필요성이지만 프롤레타리아 인터내셔널에 의해 그것이 몰락하는 것도 그렇다. 단계마다 서로 모순에 빠진 두 가지의 역사적 필요성이 있고, 우리의 것, 즉 사회주의의 필요성은 더 긴 생명을 갖는다. 우리의 필요성은 다른 것, 즉 부르주아 계급지배가 역사적인 진보의 담지자이길 중단하는 순간, 사회의 앞으로의 발전에 방해물로, 위협으로 되는 순간과 더불어 완전히 정당하게 된다. 오늘날의 전쟁은 이 점을 자본주의 사회질서에서 들춰냈다.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팽창충동은 자본주의 성숙의 최고의 표현으로서, 그 삶의 마지막 단계의 표현으로서, 전 세계를 [하나의] 자본주의적으로 생산하는 세계로 변화시키고 전자본주의의 모든 낡은 생산방식과 사회형식을 없애버리며 지구상의 모든 부와 모든 생산수단을 자본으로 바꿔버리고 모든 지역의 노동하는 민중을 임금노예로 만들어버리는 경제적 경향성을 갖는다. 아프리카에서 그리고 아시아에서, 아메리카의 최북단에서부터 최남단까지 그리고 남태평양에서 오랜 원시공산주의적 연합체들, 봉건적 지배관계들, 가부장적인 농민경제, 아주 오랜 수공업생산들이 자본에 의해 파괴되고 짓밟히며, 전체 민족이 멸종되고 고대의 문화가 초토화 되어, 그 자리를 초현대적인 형태의 이윤 만들기가 차지한다. 세계에서 이러한 자본의 잔인한 전승 행렬을 모든 형태의 폭력, 강탈 그리고 파렴치가 길을 닦고 동행하면서 그래도 장점을 하나 갖고 있다. 즉, 그것은 그 자신의 결정적인 몰락의 전제조건을 창조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 뒤에라야 사회주의 세계혁명이 뒤따를 수 있는 자본주의의 세계지배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은 원시적인 나라들에서 시행된 자본주의의 이른바 위대한 문화작업의 유일하게 문화적이고 진보적인 측면이었다. 부르주아-자유주의 경제학자들과 정치가들에게는 철도, 스웨덴산 성냥, 하수도시설 그리고 백화점이 ‘진보’이자 ‘문화’이다. 원시적인 상태들을 희생시킨 그러한 작업들 그 자체는 문화도 진보도 아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민족의 갑작스런 경제적 문화적 폐허를 대가로 얻어지기 때문이다. 그 민족은 전통적인 자연경제적 지배관계와 최첨단의 가장 세련된 자본주의적 착취라는 두 시대의 그 모든 비참과 모든 공포를 한꺼번에 맛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의 자본주의적 전승 행렬은 자본지배의 철폐를 위한, 계급사회의 폐지를 위한 물질적인 전제조건들로서만 오직 광범위한 역사적 의미에서 진보의 낙인을 갖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국주의는 결국 우리를 위해 일했다.

오늘의 세계대전은 제국주의의 진로에서 하나의 전환점이다. 최초로 지금, 자본주의 유럽이 세계 곳곳에 풀어놓았던 흉포한 야수가 단번에 유럽 한 복판으로 침입했다. 유럽문화의 귀중한 작은 보석인 벨기에가, 북프랑스의 외경스런 문화유산들이 맹목적인 파괴력의 충돌로 쨍그랑거리며 산산조각났을 때, 경악의 외침이 전 세계를 휩쓸었다. 바로 그 제국주의가 수만 명의 헤레로v족에게 똑같은 몰락을 가져왔을 때 그리고 칼라하리사막이 목말라하는 자들의 외침으로, 죽어가는 자들의 신음으로 충만했을 때, 푸투마요vi에서 10년 만에 4만 명이 한 무리의 유럽 산업기사들에 의해 죽도록 수난을 당하고, 한 민족의 나머지가 불구가 되도록 매질 당할 때, 중국에서 아주 오랜 문화가 유럽 군인들에 의한 방화와 살인으로 파괴와 무질서의 모든 전율에 희생될 때, 페르시아가 점점 더 좁게 죄어오는 외부의 무력지배 속에서 무기력하게 질식당할 때, 트리폴리에서 불과 검을 가진 아랍인들이 자본의 질곡 아래 굴복당하고, 그들의 문화와 거주지가 초토화될 때, 그저 느긋하게 지켜보고만 있던 그 ‘문화세계’는 오늘에 와서야, 제국주의라는 야수의 물어뜯음이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 숨결이 극악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야수가 찢어발기는 발톱을 그 자신의 태내에, 유럽의 부르주아 문화에 할퀴자 그때야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도, 각 민족이 다른 민족의 군복을 입은 치욕만을 알아보는 그러한 부르주아의 위선의 왜곡된 형태로 겨우 얻어졌다. ‘독일 야만인들!’ – 마치, 조직화된 살인으로 나서는 거의 모든 민족이 그와 동시에 한 무리의 야만인들로 둔갑해버리지 않았던 것 마냥. ‘코사크인들의 만행!’- 마치, 전쟁 자체가 모든 만행 중의 만행이 아니라는 듯, 마치 한 사회주의 청소년잡지에서 살인을 영웅적인 행동으로 칭송한 것은 순수한 문화에서 정신적으로 코사크적이 아닌 듯이!

그러나 유럽의 마당에서 오늘날 제국주의의 야수성의 광란은 ‘문화세계’가 전혀 경악의 눈으로 바라보지도, 전혀 가슴아파하지도 않는 작용 하나를 갖고 있다. 그것은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대대적 몰락이다. 그 어떤 전쟁도 결코 이 정도로 완전한 민중층을 멸종시키지는 않았다. 그 어떤 전쟁도 수백 년 이래 결코 유럽의 크고 오래된 문명국가들을 그와 같이 완전히 휩쓸어버리지는 않았다. 수 백만의 인명이 보주산맥에서, 아르덴vii지역에서, 벨기에에서, 폴란드에서, 카르파티아viii산맥에서, 사브ix강가에서 죽어갔다. 수 백만이 불구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백만 중에서 10분의 9가 도시와 시골출신의 노동 민중이다. 그곳에서 낫질 아래 들풀처럼 차례로 날마다 잘려나가는 것은 우리의 인력이고, 우리의 희망이다. 국제사회주의의 가장 똑똑하고 가장 잘 훈련된 최상의 역량들이자, 가장 신성한 전통의 그리고 가장 대담한 영웅행위인 현대 노동자운동의 담지자들이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전위병들이 바로, 지금 무더기로 도륙당하고 있는, 영국의, 프랑스의, 벨기에의, 독일의, 러시아의 노동자들이다. 유럽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이러한 노동자들이야 말로 바로, 사회주의 변혁을 수행할 역사적 사명을 가진 이들이다. 유럽으로부터만, 가장 오래된 자본주의 국가들로부터만, 때가 무르익으면, 인류를 해방할 사회혁명으로의 신호가 나아갈 수 있다. 영국, 프랑스, 벨기에,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노동자들만이 힘을 합쳐 전 세계 5지역의 착취당하는 사람들과 노예화된 사람들의 군대를 이끌 수 있다. 오직 그들만이, 때가 되면, 모든 원시민족들에 대한 자본주의의 수백 년 묵은 범죄들에 대해, 지구상에서 그것의 파괴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고 앙갚음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전진과 승리를 위해서는 강력하고 행동력 있는 단련된 프롤레타리아트, 그 위력이 정신문화와 그 수에 놓여 있는 대중이 필요하다. 이러한 대중이 바로 지금 세계대전으로 큰 손실을 입었다. 생명의 그리고 젊음의 꽃들이, 그들의 사회주의적 단련이 영국과 프랑스에서, 벨기에와 독일과 러시아에서 수십 년 동안 이루어진 계몽과 선전 작업의 산물인 그러한 수십만이, 내일이면 사회주의의 편이 될 수 있었을 또 다른 수십만이 전장에서 전사하여 처참하게 썩어간다. 수세대의 수십 년에 걸친 희생과 노력의 열매가 몇 주 만에 파괴되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핵심부대가 뿌리 뽑혀가고 있다.

6월 전투의 피흘림이 프랑스 노동자운동을 15년간 마비시켰다. 코뮌 학살의 피흘림은 그것을 다시 10년 이상 후퇴시켰다. 지금 진행되는 것은 전대미문의 대량학살로서, 모든 선도적인 문화국가들의 성인 노동자인구를 점점 더 여자와 노인과 장애자로 축소시키며, 유럽 노동자운동이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를지도 모르게 위협하는 피흘림이다. 또 한번 그러한 세계대전이 있게 된다면, 그렇다면 사회주의의 전망은 제국주의적 야만이 쌓은 폐허더미 아래 파묻히고 말것이다. 그것은 루벵과 랭스대성당의 극심한 파괴 그 이상이다. 그것은 과거의 부르주아 문화에 대해서가 아니라 미래의 사회주의 문화에 대한 범행이다, 유일하게 과거의 귀중한 보물들을 더 나은 사회에 넘겨줄 수 있는, 인류의 미래를 품은 그러한 역량에 대한 치명타이다. 여기서 자본주의는 해골을 드러낸다. 여기서 자본주의는 그 역사적 생존권이 다했음을, 그것의 계속된 지배가 인류의 진보와 더 이상 화해될 수 없음을 폭로한다.

하지만 여기서 또한 오늘날의 세계대전은 하나의 엄청난 살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유럽 노동자계급의 자살로서도 드러난다. 자본의 명령 아래 몇 달 동안 서로 죽이고 서로의 가슴에 차가운 총구를 들이대며, 서로를 죽음의 팔로 함께 껴안으며 무덤 속으로 떨어져가는 자들은 바로 사회주의의 병사들이다. 영국의, 프랑스의, 독일의, 러시아의, 벨기에의 프롤레타리아들 자체이다.

“독일, 모두 위의 독일! 민주만세! 차르와 슬라브족 만세! 천막천 수만폭, 규정대로임을 보장! 베이컨 수십만 킬로그램, 커피대용품 즉시 조달가능!” …이윤은 올라가고 프롤레타리아들은 죽어 쓰러져간다. 그 한 명이 전쟁터에서 죽어갈 때마다 미래의 투사, 혁명의 전사, 자본주의의 질곡으로부터 인류를 구할 해방자 한 명이 무덤 속으로 떨어진다.

이러한 부조리가 끝나고 지옥의 피비린내 나는 저주가 사라지는 것은, 독일과 프랑스의, 영국과 러시아의 노동자가 도취에서 마침내 깨어나 서로에게 우애적으로 손을 내밀어 제국주의 전쟁 선동자들의 야수 같은 합창과 자본주의적 하이에나의 목쉰 외침을 다음과 같이 노동의 오래되고 막강한 구호로 뒤덮어 버릴 때에야 가능해질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의 단결하라!


i Pyrrhussieg, 많은 희생을 댓가로 하여 얻어진 승리를 말한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패배와 다름없는 승리를 일컫기도 한다. 이 표현은, 기원전 279년 에피루스(Epirus)의 왕 피로스 1세(Pyrrhus I.)가 로마제국의 군대에 맞서 현재의 남부 이탈리아지역인 아스쿨룸(Asculum)에서 힘겹게 얻은 승리후, “이렇게 한번만 더 승리했다간 우린 다 끝장이야”라고 말했다는데서 유래한다.

ii Die Potemkinschen Dörfer, 실상의 황폐함을 감추기 위해 겉으로만 거짓으로 잘 꾸며놓은 것을 말한다. 러시아의 여제 카테리나 2세가 1787년 당시 새로 정복한 지 얼마되지 않은 새러시아지역 (Neurussland지금의 우크라이나남부)순방하는 것을 계기로, 그 지역의 지사 포템킨(Potemkin)이 마을 그림을 그려 길주변에 세우게 하여 실상을 은폐하려 했다는 현대판 전설에서 유래한다.

iii Zwischen der Scylla und Charybdis, 두가지 악중에서 선택해야하는 것을 표현한다. 그리스신화에서 바다괴물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는 좁은 해협의 양쪽에 살면서 항해자들을 위협했다.

iv hic Rhodus, hic salta(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내려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지금 여기서 행동으로 보여주라는 요구을 표현한다. 이솝의 이야기, [허풍장이 5종경기선수(Der Fünfkämpfer als Prahlhans)] 안에서 자기가 얼마나 로도스에서 잘 뛰어내렸는지를 뽐내는 한 5종경기선수에게 그 허풍에 식상한 한 사람이 당장 그 자리에서 시범을 보여보라 요구하는 데서 유래한다.

v Hereros, 1884년 독일식민지가 된 남서아프리카의 원주민들로 주로 지금의 나미비아 지역에 살았다. 억압적인 식민정권에 대항해 1904년 봉기했다가 무참하게 진압당했다. 봉기와 진압 과정에서 인구의 거의 70%, 대략 8만명의 헤레로인이 희생되었다.

vi Putumayo, 아마존강의 지류, 남미의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및 브라질을 흐른다. 1879년에서 1912년 사이에 있었던 아마존고무붐시기 이지역의 많은 원주민이 노예화되어 비인간적으로 착취당하고 죽음을 맞기도 했다.

vii Ardenn지역, 벨기에 남동부와 룩셈부르크, 프랑스 동북부지역에 걸친 지역.

viii Carpathia산맥,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에서 폴란드 남동부와 우크라이나 남서부까지, 남동쪽으로는 루마니아 동부에서 세르비아남동부까지 뻗어있는 반달모양의 산맥이다.

ix Save강, 사바(Sava)강이라고도 불린다. 유럽 중남부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나 그리고 세르비아를 흐르는 강으로 도나우강의 주요 지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