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론슈타트가 남긴 역사적 교훈들

 

(Historical lessons of the Kronstadt revolt)[1]

최근에 『국제주의』는 <시카고 혁명가 네트워크>(이하 CHIREVNET)에서부터 「1921년 3월 러시아 크론슈타트의 수병들과 노동자들의 혁명적 봉기」라는 팸플릿 하나를 받았다. 우선 우리는 팸플릿 작가의 노고에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는 노동자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교훈을 가지고 있는 사건을 검토하고 있다. 그 사건의 교훈이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혁명가들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이다. 이 팸플릿은 최근에 영어로 번역된 우리의 책 『네덜란드ㆍ독일 공산주의 좌파』를 인용하고 있다. 이 책은 크론슈타트 봉기 사건에 대한 평가에서 기인하는 혁명운동의 역사에 관한 저작이다. 그러나 CHIREVNET의 팸플릿은 ICC가 볼셰비키가 반란을 진압한 것을 "어쩔 수 없는 비극"으로 여기는 것 아니냐며 비판한다. 이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이 팸플릿은 우리의 크론슈타트 사건에 대한 분석을 완전히 잘못 알고 있고, 오해하고 있으며 잘못 표현하고 있다. 수 년 동안, ICC는 지속적으로 날카롭게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한 무력 진압을 "어쩔 수 없는 비극"이라며 잘못된 시각을 방어하는 정치그룹들을 비판해왔다. 그 비판들은 아래 글이나, 『국제평론』 제103호와 제104호에서 두 부분으로 된 연재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CHIREVNET의 팸플릿은 또한 여러 가지 본질적으로 아나키스트적이고 평의회주의적인 크론슈타트에 관한 신화들과 그로부터 나온 교훈들을 반영한다. 이것은 특히 반란을 진압하는데 있어서 볼셰비키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볼셰비키의 가상의 "국가주의적 권위주의"에서부터 반당적 교훈들 역시 끌어내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면, 그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혁명정당은 아무런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이는 자본주의 선거 놀음에 참여하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그것은 대자본가 지배계급에 의한 낡은 자본주의, 권위주의 독재, 즉 국가권력을 위한 욕구에 다름 아니다." 이 과도하게 단순화된 반당 정치적 결론은 완전히 혁명정당의 역할과 의식화과정에서 당과 계급 사이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다. 당의 역할은 부르주아지가 퍼뜨리고 다니는 선거를 신비하게 만드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더욱이, 팸플릿의 방법론적 준거의 틀은, CHIREVNET이 자주 다른 모든 곳[2]에서 맑스주의 변증법에 호소함에도, 이 사건들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는데 유효하지 않다. 보기를 들어, CHIREVNET은 크론슈타트 반란을 역사적 맥락에서 평가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저자는 이점을 처음부터 인정한다. 크론슈타트 반란의 의미와 중요성을 프롤레타리아트가 더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그들 나름의 목적에도 불구하고, 그 팸플릿은 이 사건을 역사적 전망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사회ㆍ정치ㆍ역사적 사건들을 과학적이고 맑스주의적으로, 즉 프롤레타리아의 시각에서 이해하는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이러한 기초지식의 부족 때문에 당연하게도 CHIREVNET은 레닌과 볼셰비키에 관하여 아나키스트적인 도덕주의적 설교에 사로잡혀 있다. 아나키스트들의 판에 박힌 도덕주의적 근본주의 때문에 그 의미가 희석되어, 그 팸플릿은 크론슈타트 반란과 자본주의에 맞선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던 러시아 혁명 그 자체의 전반적인 관계에 있어서 진정한 역사적 공과(功過)를 이해하는데 실패한다. 이처럼 비판적 준거의 틀이 없기 때문에 그 팸플릿은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이 단지 볼셰비키의 특정한 이론적 오류나 레닌의 "대리주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비록 이것이 분명 중요한 요인들이기는 하지만-궁극적으로 혁명을 다른 나라로 확산시키는데 실패하고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의 노동자대중운동으로부터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요새가 고립되었다는 맥락적 사실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CHIREVNET에게 러시아 혁명의 퇴보를 낡은 아나키스트적인 도덕주의로 설명하는 것은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이러한 훗날의 퇴보는 볼셰비키 지도부의 권위주의적 경향 때문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문제를 역사상 인물들의 선악대립으로, 올바른 도덕적 관점의 소유 또는 부족의 문제로 제한한다. 즉 이러한 이론은 결국 역사유물론에 대한 이상주의적이고 소부르주아적인 거부감을 반영한다.

이 팸플릿에 대한 답변으로 우리는 두 편의 기사를 번역하여 출판한다. 이 기사들은 앞서서 2001년 3월 ICC 프랑스 지부의 매체인 『국제혁명』 310호에 실렸다. 이 기사들은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에 대한 ICC의 입장을 상세하게 잘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기사는 스탈린주의 반혁명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타락한 제3인터내셔널에서 분리한 좌익분파들에 속한 우리의 선배들이 만든, 러시아혁명에 대한 맑스주의적 대차대조표에 나타난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정치적 입장의 기원을 보여주고 있다.

부디 CHIREVNET이 우리의 답변을 동지적 관점에서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계속해서 논쟁과 토론을 이어나가기를 바란다. 논쟁과 토론은 노동자 운동 내에서 정치적 명확화를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독자들이 투고하여 이 논쟁에 개입하고 그들 가운데에서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을 확산시키기를 촉구한다. 이 논쟁에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그룹의 투사들도 참여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한 <로스앤젤레스 노동자의 목소리>(이하, LAWV)가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한 긴 문서를 발표했다는 것을 언급하는 게 중요하다. 여기에서 그들이 과거 알바니아 스탈린주의의 지지자들에서 현재 프롤레타리아 투사들에 대한 기생충 같은 공격으로 다소 정치적 입장이 변화했다는 것을 다시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이번 호와 『국제주의』122호를 보시오.) 그것은 LAWV와 CHIREVNET이 이야기하는 크론슈타트에 대한 분석이 분명히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두 그룹이 현재 완전히 다른 정치적 궤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두 출판물의 기사들 모두 비슷하게 심각한 자유주의적이고 아니키스트적인 혼란에 빠져있음에도 불구하고, CHIREVNET의 입장은 명백히 노동자 투쟁이 직면하고 있는 쟁점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정치적 명확성을 찾고 있는 것이다. 반면 LAWV의 러시아 혁명에 대한 현재 입장은 1917년 10월 봉기가 일어난 직후인 1918년부터 러시아 혁명이 타락하였으며 볼셰비키는 반혁명세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주장은 지난 5년 동안 IBRP와 제휴하면서 그들이 방어했던 공산주의적 좌파의 역사적 입장으로부터 확실히 갑작스럽게 퇴보한 것이다.

우리는 LAWV가 크론슈타트에 대한 입장에 있어서 자유주의적 정치세력의 입장으로 도약한 이유는 자유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로부터 영향 받은 그룹들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해서라고 본다. 이 그룹들은 현재 ICC와 IBRP와 같은 좌익 공산주의 조직들의 명예를 더럽히는 기생충 같은 캠페인을 해대고 있다. LAWV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출처를 밝히지 않고 『신국제주의자』의 최근호 표지로 CHIREVNET의 팸플릿 표지를 다시 사용했다. 더군다나 같은 제목으로 ICC를 공격하는 그 기사에서 LAWV는 ICC가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한 진압을 "어쩔 수 없는 비극"으로 옹호한다고 아무런 근거 없이 단언하면서, 그러한 옹호는 "우리 자신에서 권력을 부여"하여 "프롤레타리아트 위에 군림하는 당-국가 독재"를 향한 우리의 욕망을 증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CHIVREVNET이 단지 우리의 입장에 대해서 단지 오독을 한 반면에 LAWV는 뻔뻔스럽게 거짓말하고 중상모략을 저질렀다.

우리는 진정으로 노동계급과 관련된 이슈들을 진지하게 이해하고 과거의 투쟁에서 교훈들을 끌어내려고 노력하는 그룹들과는 긍정적인 태도로 논쟁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LAWV처럼 적대적이고 파괴적인 기생충 같은 분자들에 대해서 효과적인 평형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CHIREVNET은 다음 연락처로 접촉할 수 있다. 페리 샌더스 PO BOX 578042 Chicago, IL 60657-8042, [email protected]

1921년 3월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 : 노동자운동에서 비극적인 실수

80여 년 전, 1921년 3월에, 1917년 10월 혁명으로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은 지 4년이 채 못 되어, 볼셰비키는 무력으로 페트로그라드에서 30KM떨어진 작은 코틀린 섬에 있는 크론슈타트 수비대의 봉기를 진압했다.

수년 동안 소비에트 러시아는 여러 해외 열강들의 지원을 받는 백군의 반혁명 책동에 맞선 내전에서 피의 투쟁을 벌여야 했다. 그럼에도, 크론슈타트 수비대의 반란은 이러한 반혁명 시도의 일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10월 혁명의 선두에 섰던 소비에트 정부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같은 노동계급 당파의 반란이었다. 이 노동자들은 새로운 집권세력의 수많은 권력남용과 참을 수 없는 탈선을 교정하려는 목적으로 반란에 앞장섰다. 크론슈타트에 대한 유혈진압은 전반적으로 노동자운동에 커다란 비극을 야기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었다. 그것은 1914~1918년 사이에 벌어진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국제노동계급의 응답이었던 세계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발전 도상에서 최초의 승리였다. 10월 봉기는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수립 과정의 일부였다. 볼셰비키는 이 사건을 열정적으로 두둔했다. 봉기의 중요한 의미는 그것이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 즉 부르주아지에 맞선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전쟁에서 최초의 결정적인 순간을 기록했다는 것이었다.

고립은 러시아 혁명의 퇴보의 진정한 원인이다.

1917년 러시아에서 처음 일어난 혁명은 전(全)유럽과 다른 곳으로 투쟁을 확산시키려는 노동계급의 여러 노력에도 국제적 차원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러시아 그 자체는 기나긴 피의 내전에 의해서 찢겨져나가서 경제는 황폐해졌고 소비에트 권력을 떠받드는 기둥인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는 해체되었다.

공장위원회가 제거되고, 점차 소비에트가 국가기구에 종속되었으며, 노동자 민병대가 파괴되었다. 내전동안 긴장된 시기가 이어지면서 점차 사회전반이 군사화되었고, 이와 함께 여러 관료적 위원회들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것들 전반이 러시아 혁명이 타락하고 있다는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이러한 요인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내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할지라도, 타락이 만개하여 진행된 것은 그 이후의 시기였다. 차츰 "당-국가"의 지도부는 노동계급의 자기조직화가 기본적으로 올바르지만 현재 당면한 시기에는 반혁명 세력에 맞서서 군사적 투쟁을 하는데 모든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을 발전시켰다. "효율성"의 원칙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원칙들을 약화시키기 시작했다. 효율성의 원칙이 지배하면서 국가는 노동의 군사화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감시와 극단적인 착취의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복종시켰다. 공장위원회를 이미 약화시켰기 때문에 국가가 "일인관리"와 테일러주의 착취 시스템을 현장에 도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과거에 레닌은 테일러주의 시스템을 인간을 기계의 노예로 만드는 방식이라고 비난한 바 있었다. 전쟁경제의 혼란은 국제적인 고립으로 더욱 증폭되어 국가전체를 기근의 위기에 빠뜨렸다. 노동자들은 점점 더 부족해지는 배급에 의존해야만 했으며 그 조차도 종종 불규칙하게 이루어졌다. 많은 공업지대들이 전반적으로 조업을 중단했고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 소유의 자원에 의존해야 했다. 많은 노동자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은 시골에서 생계수단을 찾기 위해서 함께 도시를 떠나는 것이었다.

내전이 격렬하게 진행되는 동안, 소비에트 국가는 주민 다수의 지지를 유지했다. 왜냐하면 소비에트 국가는 구(舊)소유계급에 대항한 투쟁으로 자신을 검증받았기 때문이다. 노동자, 미숙련공, 소농 등 각 부문에 따라서 내전의 고통을 견뎌내는 의지는 상대적이었다. 그러나 백군을 물리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생활 조건이 앞으로 덜 가혹해질 것이며, 경제와 사회생활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느슨해질 것이라고 기대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 지도부는 항상 전쟁으로 야기된 생산의 파괴에 직면하여, 사회생활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느슨하게 하는 어떠한 조치를 실시하는 것도 다소 내키지 않아 했다.

크론슈타트 봉기

1920년 말, 탐보프 주, 중부 볼가, 우크라이나, 서부 시베리아와 다른 지역들을 가로질러 농민봉기가 퍼져나갔다. 군복 입은 농민인 적군이 빠르게 무장해제하면서 그들은 자신의 마을로 돌아와 반란의 불길을 부채질했다. 이 반란의 주요 요구는 곡물징발 중단과 농민 스스로 자신의 생산물 처분 결정권을 갖게 하라는 것이었다. 1921년 초, 반란의 기운은 10월 봉기의 선두에 섰던 페트로그라드, 모스크바, 크론슈타트 등 도시의 노동자들에게도 퍼져나갔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일련의 중요한 자발적인 파업들이 일어났다. 공장 집회와 거리 시위에서 식량과 의복 배급 증가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다수의 노동자들이 추위와 배고픔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제적 불만들과 결합되어 다른 좀 더 정치적인 요구들 또한 나타났다. 노동자들은 도시 바깥으로 나가는 것에 대한 제한 조치를 중단하고, 투옥된 노동자들을 석방하며,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는 등의 조치들을 원했다. 틀림없이 몇몇 반혁명 분자들, 즉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이러한 사건들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페트로그라드의 파업운동은 본질적으로 가혹한 생활조건에 대한 자발적인 프롤레타리아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볼셰비키 당국은 노동자들이 봉기 이후의 국가, 그들에 의하면 "노동자국가"에 맞서서 파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어서 파업 노동자들을 선동자, 게으름뱅이, 개인주의자로 비난했다.

이러한 것들이 크론슈타트에서 수병 반란을 야기했던, 러시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크론슈타트의 사회적 문제들이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파업이 일어나기 전에조차, 트로츠키가 "혁명의 영광과 명예"라고 묘사했던 크론슈타트 수병들은 이미 관료적 경향과 붉은 함대 내에서의 군사적 규율 강화에 맞서서 저항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페트로그라드의 반란 소식이 도달하고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수병들은 즉시 결집하기 시작했다. 2월 28일에 그들은 페트로그라드 공장들에 대표를 보냈다. 같은 날 순양함 "페트로파블로프스크"의 선원들은 회합을 갖고 크론슈타트 반란자들의 강령이 될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경제적∙정치적 요구안들을 제출했다. 특히 요구안에는 가혹한 "전시 공산주의" 방책들의 중단과 연설의 자유, 출판의 자유, 그리고 모든 정당 활동의 권리를 보장하는 속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재선출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3월 1일 두 명의 볼셰비키 대표들은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승무원들과 만나서 그들의 결의안을 규탄하고 만약 수병들이 그들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즉각 진압에 나설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 건방지고 자극적인 볼셰비키 지도부의 태도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으로 수병들의 분노를 더욱 불러일으켰다. 3월 2일에는 크론슈타트 소비에트 재선거를 실시하였으며, 300명의 대표들이 페트로파블로프스크 결의안에 찬성투표하고 "소비에트 정부의 평화로운 재편"을 위한 동의안을 채택했다. 대표들은 시행정부를 떠맡는 "지역 혁명위원회"와 어떠한 정부의 무장개입에라도 맞서기 위한 방어조직을 만들었다. 이렇게 크론슈타트 코뮌이 탄생했다. 크론슈타트 코뮌은 그 자신의 『이즈베스치야』(정부 기관지, 역자)를 발행하기 시작해서 첫 호에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이 나라의 지배자인 공산당은 혼란으로부터 나라를 구출하는데 무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최근에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서 발생한 셀 수 없는 사건들은 공산당이 노동대중의 신뢰를 상실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공산당은 노동계급의 요구들을 무시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불만들이 반혁명 행위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으로 공산당은 심각한 실책을 저지르고 있다."

그러나 크론슈타트 코뮌의 반란은 완전히 고립된 채로 남았다. 그들이 "세 번째 혁명"이라고 부른 반란을 확대해기 위한 반란자들의 소집 요청에 응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페트로그라드의 공장들에 대표를 파견했음에도, 소책자들과 페트로파블로프스크 결의안을 배포했음에도, 붉은 함대의 요청은 전체 러시아 노동계급을 결집시키는데 실패했다. 러시아 노동계급은 반란자들의 강령에 공감했을 수도 있으며 그 반란을 완전히 지지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은 그들의 파업 투쟁을 중단했으며 계엄령 하의 일터로 돌아갔다. 내전의 혼란은 러시아 노동계급을 파괴하고 사기를 꺾어놓았으며 분해시켜버렸다.

크론슈타트 코뮌의 분쇄

반란에 대한 볼셰비키 정부의 즉각적인 반응은 반란을 소비에트 권력에 맞선 반혁명 음모의 일부로 비난하는 것이었다. 분명히 백군에서 사회혁명당에 이르기까지 모든 반혁명 세력들은 반란을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고 시도했으며 "원조"를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명객들이 통제하는 러시아 적십자 채널을 통해 제공된 인도적 지원을 제외하고 혁명위원회는 반혁명세력의 모든 제의를 거절했다. 혁명위원회는 자신들이 전제정부의 복귀 또는 제헌의회-1918년 초에 혁명의 적들에 의해서 소집된 적이 있다-의 복귀가 아니라 관료적 지배로부터 해방된 소비에트의 재선출을 위해서 투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자의 성벽은 소비에트이지 제헌의회가 아니다. 크론슈타트에서 권력은 수병과 적군병사, 혁명적 노동자들의 손에 있다. 모스크바 라디오가 기만적으로 주장하듯이 권력은 코즐로프스키가 이끄는 백군의 수중에 있지 않다."라고 크론슈타트 『이즈베스치야』는 선언했다.

해군과 육군 병사의 계급구성뿐만 아니라 반란자들의 강령과 이데올로기에도 소부르주아적 요소들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사실상 이 반란은 볼셰비키가 1917년 혁명의 선봉에 섰기 때문에 그들을 혐오하는 자들이 그들의 경멸감을 드러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의 존재가 운동 그 자체의 근본적인 성격을 바꾸지는 못한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해서 극도로 완고한 태도로 대응했다. 볼셰비키의 완고한 태도 때문에 토론이나 타협의 가능성은 빠르게 사라졌다. 요새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하는 동안, 반란을 분쇄하기 위해서 파견된 적군 부내들은 항상 사기가 바닥을 때렸다. 몇몇 부대들은 반란자들에게 동조했다. 군대의 충성심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걸출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그 당시 모스크바에서 열리던 10차 당 대회에서 급파되었다. 동시에, 체카의 소총부대들이 어떠한 사기저하도 퍼져나갈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병사들의 뒤에서 그들을 겨누었다. 요새가 완전히 함락되었을 때, 체카는 약식재판을 실시하여 처형하거나 빠르게 사형을 언도하는 방식을 일부 반란자들을 학살했다. 다른 사람들은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다. 진압은 체계적이었고 무자비했다.

이 사건 당시에 백군이 볼셰비키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크론슈타트 반란을 이용할 위험성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 때문에 볼셰비키 권력 내부의 가장 비판적인 분파들조차도 반란을 분쇄하는데 협력하게 되었다.

전체 노동자운동의 오류

크론슈타트 반란에서 대해서 모든 반(反)레닌주의 조류들이 계속해서 숨기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있다면, 그 당시에 볼셰비키의 오류를 전체 노동자운동이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코민테른으로부터 추방된 좌익 공산주의 분파들과 조류들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볼셰비키 지도부에 대한 반대 분파인 노동자 반대파는 반란 진압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표명했다. 그리고 이 분파를 이끌었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그녀의 분파 성원들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출병에 앞장서서 지원해야 한다고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독일-네덜란드 좌파는 심지어 그들의 입장이 콜론타이처럼 반란의 진압을 열렬히 지지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지만, 볼셰비키의 정책을 비난하거나 비판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때 KAPD[3]는 크론슈타트 반란이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반혁명 음모라는 주장을 두둔했으며 진압을 비난하지 않았다. 네덜란드 좌파의 투사인 헤르만 호르터는 볼셰비키의 방책이 크론슈타트 반란에 직면하여 "어쩔 수 없는"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는 크론슈타트 반란이 농민들에 의해서 일어난 반혁명 봉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 내에서, 빅토르 세르쥬는, 비록 그가 크론슈타트 수병들에 맞서서 무장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당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진압에 맞서서 저항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 비극적인 오류는 볼셰비키 당과 그 지도부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이 명백하다. 사실상 볼셰비키는 단지 비극적으로 잘못된 정책을 수행했을 뿐이다. 다만 이 정책은 당시 전체 노동자운동이 반혁명은 봉기 이후에 국가 그자체로부터 자라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함으로부터 발생한 당연한 결과였다. 이는 아나키스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1917년에 "구더기는 이미 과일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그들에 의하면 계급 정당의 존재가 언제라도 그 안에 반혁명의 씨앗을 담고 있다.) 그것은 러시아 혁명의 국제적인 고립 때문에 볼셰비키가 국가로 흡수되고, 국가 그 자체가 자신을 노동계급에 맞선 국가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 당시의 전체 노동자운동의 오류는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출현한 제도장치가 "프롤레타리아 국가"라는 생각을 둘러싸고 일반적인 혼란으로 나타났다.

옮긴이 김정호


[1] Internationalism, Vol. 123, 2002년 가을

[2] 그들의 팸플릿,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위한 혁명적 계급투쟁에서 국제노동계급의 중요한 몇 가지 교훈들 :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행동에 의해서 이루어진다!』을 보시오.

[3]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 그들은 1920년에 코민테른의 입장들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고, 특히 "공동전선"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에 코민테른에서 축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