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년 5월 – 제 3편 - (출처: ICC의 프랑스지부 신문) -노동자계급의 소생

노동자계급의 소생

68년 5월에 관해 오늘날 확산되는 모든 거짓말들에 대항해서, 혁명가들은 진실을 회복시켜야 한다. 그들은 또한 이러한 사건들의 의미와 교훈들을 파악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 특히, 그러한 사건들의 교훈들이 꽃과 화환 더미에 묻혀버리는 것을 막아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68년 8월에 관해서, 그것의 첫번째 구성요소, 즉 학생운동을 다룬 2개의 글들(이 1, 2편은 하나의 글로 재편집되어 영어판 International Review133에 개재되었고, 한국어 번역판에서는 제 1부로서 표시됨)로써 그러한 노력을 시작했다. 이번 글에서 우리는 그 사건들의 본질적인 구성요소, 즉 노동자계급 운동을 다룰 것이다.

이 시리즈의 전편에서 프랑스에서의 사건들에 대한 결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5 14일에 토론은 많은 직장에서 계속 진행되었다. 모든 열광과 자신들의 강력함에 대한 느낌이 표면화된 폭력적인 시위들이 전날밤에 있은 ,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일을 손에 잡는 것은 어려웠다. 낭트에서 쉬드-아비아시옹(Sud-Aviation) 노동자들이 자생적인 파업에 들어갔고 작업장을 점거하기로 결정했다. 특히 젊은 노동자들이 운동을 추진했다. 노동자계급이 다시 무대 위에 등장했다."

이러한 묘사를 우리는 여기서 계속하겠다.  

파업의 확산 

낭트에서는, 학생들 또래의 노동자들이 운동에 동참했다. 그들의 논거는 단순하면서도 명료했다: „ 학생들이 결코 파업을 통해서 압력을 가할 없음에도 정부를 강제하여 승복하도록 만들 힘을 가지고 있다면, 노동자들도 정부를 승복하게 만들 있다. " 그 도시의 학생들 측에서도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선언하고, 노동자들의 파업초소에, 결연에 가담했다. CGT(프랑스노조총연맹)와 CPF(프랑스공산당)은, 학생들 속에 스며들어서 „고용주들과 내무부를 위해 일하는 좌파 선동자들"에 대해 경고했지만 이러한 캠페인은 그다지 큰 효과가 없었다.

5월 14일 저녁에 총 3,100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다.

5월 15일에는 노르망디의 클레옹에 소재한 르노작업장과, 그 지역의 다른 두 작업장으로 운동이 확산되어서, 전체적인 파업, 무제한의 공장점거가 이뤄지고, 공장정문에는 붉은 깃발이 내걸렸다. 이날이 저물 무렵에는 파업자가 총 11,000명에 달했다.  

5월 16일 다른지역 르노작업장의 노동자들이 동참해서, 플랭, 상두빌, 르 망 과 빌랑꾸르에 붉은 깃발이 나부꼈다. 이날 저녁에는 총 75,000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르노-빌랑꾸르의 노동자들의 투쟁 참여는 매우 분명한 신호탄이 되었다. 그것은 프랑스에서 가장 큰 작업장(35,000명이 고용된)으로서 오랫동안 다음과 같은 말이 통용되어왔다: „르노가 재채기를 하면, 프랑스가 감기에 걸린 것이다"  

5월 17일에는 총 215,000명의 파업자가 있었다.

파업물결은 이제 프랑스 전역에, 특히 프로방스에 도달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생적인 운동이었고 노조들은 그 꽁무니를 뒤따랐다. 전 지역에서 젊은 노동자들이 선두에 서 있었다. 빈번하게 학생들과 젊은 노동자들이 결연했다. 젊은 노동자들은 점거된 대학교들로 가서,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공장 구내식당에 식사하러 올 것을 권했다.  

정확한 요구사항들은 없었다. 그 대신에 오히려 불만이 표현되었다. 노르망디의 한 공장벽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삶을 영위할 시간과 많은 존엄이 필요하다."  이 날 CGT는 „파업의 확산"을 요구했다. 그것은 „기층에 의해" 추월당할 까봐 그리고 지금까지의 초기 며칠 동안 훨씬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던 CFDT에 의해 뒤로 밀려날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 이야기되었듯이, 그것은 „달리고 있는 기차에 뛰어올라 탔다." 그 호소는 그 다음날에야 알려졌다.

5월 18일 정오에, 즉 CGT의 파업호소가 알려지기 전에 이미 백만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 날 저녁에는 이백만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5월 20일에는 6백만명이 5월 21일에는 6백 50만명이 일손을 멈추었다.

5월 22일에는 8백만명이 무기한 파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것은 국제 노동자운동 사상 최대의 파업이었다. 이 파업은, 유명하게 된 이전의 파업들 - 1926년 5월 영국의 ‚총파업'(1주일에 걸친) 1936년 5월과 6월에 있은 프랑스의 파업들 -에 비해서 훨씬 더 대규모였다.

모든 부문이 해당되었다: 산업, 운송 및 교통, 에너지, 우편 및 텔레커뮤니케이션, 교육, 행정(정부의 여러 기관들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언론매체(국영테레비전이 파업을 했고, 종사자들은 특히, 강요된 검열을 탄핵했다), 연구소 등등.

장례사업장 마저도 파업했다(68월 5월은 사망하기에 좋은 시기가 아니었다).  심지어는 프로 스포츠 선수들도 그 운동에 동참했다. 프랑스축구협회 건물에 붉은 깃발이 나부꼈다. 예술가들도 참여해서, 칸느영화제가 감독들의 권유로 중단되었다.

이 시기에, 점거된 대학들(파리의 오데옹극장과 같은 다른 공공건물들과 마찬가지로)은 끊임없는 정치적인 논쟁 공간이 되었다. 많은 노동자들, 특히 젊은 노동자들이, 물론 이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토론들에 참여했다. 노동자들은 혁명의 필요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점거된 공장들을 방문해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할 것을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나중에 프랑스에서의 ICC 분파를 창립하게 될 소 규모의 사람들은, 점거된 공장 JOB에서 노동자평의회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설명하도록 요청받았다. 가장 의미있는 것은, 이러한 초대가 CGT와 CPF...의 회원들의 입을 통해 이루어진 점이었다. 이 회원들은, JOB의 파업초소를 ‚강화하기' 위해서 온  쉬드- 아비아시옹(Sud-Aviation) 대공장의 CGT 주요관료들과 한 시간동안 협상을 한 후에야 비로소 ‚과격한 좌파'를 공장에 들어놓는데 동의를 얻어낼 수 있었다.  6시간이상 동안 노동자들과 혁명가들은, 종이뭉치위에 앉아서, 혁명과 노동자운동의 역사와 소비에트에 대해서 심지어는 CPF와 CGT의... 배신에 대해서 토론했다.

마찬가지로 거리에서 보도에서 많은 토론들이 이뤄졌다(68년 5월에는 도처에 날씨가 매우 좋았다). 그러한 토론들은 매우 즉흥적으로 생겨났다. 각자가 할 말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서로 대화를 나눈다"가 슬로건의 하나였다). 도처에서 축제분위기 같은 것이 지배했지만, 예외적으로 ‚부유층구역들'에서는 공포와 증오가 쌓여갔다.

프랑스 도처에서, 도시구역들에서, 몇몇 큰 작업장들이나 그 인근관할 구역들에서 „행동위원회"가 출현했다. 그곳에서는 어떻게 투쟁해야할지, 혁명적 전망이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지에 대해 토론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토론들에는 좌파 그룹들이나 아나키스트 그룹들이 왕성하게 참여했지만, 그곳에는 이러한 그룹들의 회원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국영 라디오 및 TV 방송국, ORTF에서 조차도, 행동위원회가 출현했는데, 특히 미셜 드루커가 이것을 함께 고무했고 티에리 롤랑이 크게 관여했다.

부르조아지의 반응들

이러한 상황을 놓고 볼때, 지배계급은 방황하는 시기에 있었고, 이러한 방황은 혼동되고 비효과적인 발의들을 통해 나타났다.

그렇게 해서 우파가 지배하는 의회는 좌파가 2주 전에 제시한 검열안을 토론한 다음 거부했다. 프랑스공화국의 공식적인 제도권들은 딴 세상에 사는 것처럼 보였다. 정부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같은 날, 독일로 출국했던 다니엘 콘벤디트의 재입국을  금지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불만을 한층 더 들끓게 만들었다. 5월 24일 여러 시위들이, 특히 콘벤디트의 체류금지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서 많은 많은 시위들이 있었다: „국경 타도!", „우리 모두가 독일 유태인이다!"

CGT가 „모험가들"과 „선동가들"(즉, „과격한" 학생들)에 대해 설치한 저지선에도 불구하고 많은 젊은 노동자들이 이러한 시위들에 합류했다.

이날 저녁 공화국 대통령 드골장군은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는 프랑스인들이 (일종의 자본-노동 연합으로서) „참여"를 표명할 수 있도록 국민투표를 제안했다. 상황을 그보다 더 잘못 파악할 수는 없었다. 이 담화문은 쇠귀에 경읽기와 마찬가지였고, 정부와 부르조아지의 전반적인 혼란스러움을 나타냈다[1].

거리에서 시위대들은 그 담화문을 트렌지스터라디오를 통해서 전해들었다. 즉시 분노가 더 고조되었다: „우리는 그의 담화문을 야유했다." 파리 시내 전체에 그리고 몇몇 지방도시들에서 폭력적인 대결들이 일어났고 바리케이트가 세워졌다. 수많은 쇼윈도우가 깨여지고, 자동차들이 불태워졌다. 이렇게 해서 여론의 일부가 학생들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고, 이들은 이제 „폭동자들"로 비춰졌다. 그런데 시위대들 중에, 불길에 기름을 붓고 국민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드골주의 민병대 대원들이나 경찰들이 섞여있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많은 학생들이, 바리케이트를 세우거나, ‚소비사회'의 상징인 자동차를 불태움으로써 자신들이 ‚혁명을 만들 것'이라고 믿었던 점은 분명했다. 이러한 행위들은 특히, 역사상 최대의 파업물결에 대한 당국의 한심스럽고 도전적인 반응들에 대해 시위대, 학생들과 젊은 노동자들이 갖는 분노를 드러냈다. 체제에 대한 이러한 분노의 한 표현으로서, 자본주의의 상징인 파리주식거래소가 화염에 휩싸였다.

결국 부르조아지는 그 다음날에야 효과적인 대책을 마련했다. 토요일인 5월 25일에 노동부(그르넬가에 위치한)에서 노동조합, 고용주들 그리고 정부 사이에서 협상이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고용주들은 노동조합이 기대했던 것 이상을 제공할 용의가 있었다. 부르조아지가 겁에 질려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퐁피두 수상이 그 협상을 지휘했다. 그 일요일 저녁 그는 CGT 의 총수 세귀와 한 시간동안 단독면담을 했다. 프랑스에서의 자본주의 사회질서 유지의 중책을 맡고 있는 이 두 사람은, 질서를 다시 확보하기 위해서 아무런 증인 없이 상의할 시간이 필요했다[2].

 5월 26일밤에 „그르넬협정"이 서명되었다:

  • 모두에게 6월 1일부터 7% 그리고 10월 1일부터 부가적으로 3%의 임금인상;
  • 최저임금 25%인상;
  • 보건의료부문에서 ‚본인부담'을 30%에서 25%로 감축(특히, 사회보험의 적용을 받지 않는 의료비지출에서);
  • 회사들에서 노조의 인정;
  • 그 외에, 특히 노동시간에 관련해서, 협상초기의 일련의 매우 불분명한 언약들(그당시 노동시간은 주당 평균 47시간이었다).

운동의 강력함을 놓고 볼때, 그것은 순전히 도발에 지나지 않았다:

  • 10%의 임금인상은 인플레이션에 의해 재빨리 잠식당할 것이었다(그 당시 인플레이션 비율이 높았다);
  • 인플레이션에 대한 임금보상 문제에 대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 노동시간 단축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것도 없었다. 주당 40시간(공식적으로는 이미 1936년에 달성된)으로의 „단계적인" 회귀를 목표로 선언함으로써 만족했다. 정부가 제안한 그 리듬에 따랐다면 그 목표는 2008년에나 도달되었을 것이다!     
  • 본질적인 어떤 것을 획득해낸 유일한 부분은 저임금 노동자들(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키고 그들이 작업을 개시하게 할 희망에 의해)과 노동조합들(그들의 사보타지 역할에 보상으로써)이었다.  

5월 27일 총회는 „그르넬협정"을 만장일치로 거부했다.

르노 빌랑꾸르에서 노동조합은 ‚전시적인 행사'를 조직했고, 언론매체는 이를 크게 보도했다. 세귀는 협상에서 돌아왔을 때 기자들에게, „작업 복귀가 곧 이뤄질 것"이며, 빌랑꾸르의 노동자들이 모범을 보일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침부터 모여든 10,000명의 직원들은, 노조지도자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파업을 계속할 것을 결정했었다.  

CGT의 ‚역사적인' 지도자, 베누아 프라숑(1936년의 협상에 이미 참가한 적이 있는)은 선언했다: „그르넬의 협정은 수백만의 노동자들에게 기대하지 않았던 복지를 제공할 것이다."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CFDT의 앙드레 장송은, 파업 계속에 관한 처음의 결정을 환영하며 노동자들과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의 연대에 대해 언급했다. 열렬한 박수갈채가 있었다.

결국 세귀는 „그르넬의 성과들"에 대한 „객관적인 보고"를 제시했고, 몇 분동안 야유를 받았다. 그런 다음 세귀는 상황에 적응했다: „여기서 들은 것에 따라서 판단해 보건데, 여러분들은 순순히 물러서지 않을 것 같습니다! "  박수갈채, 하지만 그 무리들 속에서 한 목소리가 외쳤다: „그는 우리를 속인다."

„그르넬의 협정"을 거부한 가장 좋은 증거는,  5월 27일에 파업자 수가 9백만으로 증가한 것을 들 수 있다.

5월 29일 파리의 샤르레티 스타디움에서 대규모의 집회가 있었다. 그것은 학생조합 UNEF와 CFDT(CGT보다 더 과격한 것처럼 보여진), 그리고 좌파그룹들이 주관했다. 연설중에 혁명적인 논조들이 울려퍼졌다. 증가하는 불만들에 대해서 CGT와 CPF로써 배출구를 마련하려 했다. 극좌파들의 대변인들 곁에 망데-프랑스(1950년대의 전직 정부수반)와 같은 사회민주주의자들도 참석해 있었다. 머리를 검은 색으로 염색하고서 독일로부터 돌아온 콘벤디트도 등장했다(그는 전날 저녁에 소르본느에 나타났었다).

5월 28일은 좌파 당들의 작전과 조처들이 있는 날이었다.  

아침에," 좌파 민주주의자 및 사회주의자 연합"(사회당, 과격당 그리고 상이한 작은 좌파그룹들을 대표하는)의 총수 프랑스와 미테랑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가 보기에, 권력의 진공상태가 존재하며 그래서 그 자신이 공화국 대통령 후보로서 출마할 것임을 선언했다. 오후에는 CPF의 지도자, 발덱-로쉐는 „공산주의자들의 참여"를 포함하는 정부를 제안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혼자서 그 상황을 자신들이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는 것을 막는 것이 관건이었다. 5월 29일에 큰 시위가 있었는데, CGT가 그것을 주관하고 „국민정부"를 요구했다. 우파들은 즉시 „공산주의의 음모"에 대해 경고했다.   

이날 드골 장군이 „사라졌"다. 그가 퇴위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사실 그는 독일로 날아가서, 그곳 프랑스점령군을 지휘하고 있던 마수(Massus) 장군의 지지와 군대의 충성을 확실히 하려했다.

5월 30일은 부르조아지가 상황에 대한 주도권을 다시 장악하려는 시도에서 일종의 결정적인 날을 표현했다. 드골은 다시 담화문을 발표했다. „ 상황에서 나는 결코 퇴위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 국회를 해산한다..."

동시에 파리의 샹젤리제거리에서 드골을 지지하기 위한 엄청한 규모의 시위가 있었다. 부유층구역들에서, 잘 사는 교외지역에서, 그리고 시골에서 군용트럭으로 „국민"이 운송되어 왔다.  겁먹은 자들과 가진자들, 서민들, 부유층 자제들을 위한 지역학교 대리자들, 자신들의 ‚우월함을' 의식하고 있는 지도층들, 쇼윈도우가 파괴될까 조바심하는 작은 상점주인들이 모두 한 곳에 모였다. 국기에 대한 공격 때문에 격노한 참전용사들, 은폐물 아래에서 지하 세계와 더불어 잠복하는 비밀경찰들 그리고 알제리정착민들, 파시스트적인 옥시당 그룹의 젊은 회원들인 OAS와 비시(Vichy)에 대해 향수를 느끼는 늙은 추종자들(이 모두는 드골을 경멸하지만)이 함께 모였다. 이 모든 순량한 사람들이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신들의 증오와 „질서 사랑"을 알리기 위해서 보여들었다. „자유 프랑스"의 투사들도 속해 있던 그 군중들로부터 „콘벤디트를 다하우(Dachau)로 보내라!"와 같은 구호들이 퍼져나왔다. 그러나  그 „질서의 당"은 샹제리제에서의 시위들로 그친 것이 아니었다. 같은 날 CGT는 „그르넬의 성과들의 개선"을 위해 부문별 협상들을 요구했다. 이는 운동을 절멸하기 위해 그 운동을 분열시키는 수단이었다.

조업 재개 

그 목요일부터 조업이 재개되긴 했지만 이것은 느리게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6월 6일에도 여전히 약 6백만명이 파업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업은 매우 분산적으로 재개되었다.

5월 31일: 로트링엔의 강철산업, 북프랑스의 직물산업

6월 4일: 병기창, 보험

6월 5일: 발전소, 탄광소

6월 6일: 우체국, 텔레커뮤니케이션, 운송(파리에서 CGT는 조업재개를 위해 압력수단을 동원했다. 각 작업장에서 노조지도자들은, 다른 정거장들에서는 조업이 이미 재개되었다고 알렸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6월 7일: 초등학교

6월 10일: 플랭스의 르노 작업장이 경찰에 의해 점령되었다. 경찰에 의해 폭행을 당한 고등학생들 중의 한명이 센느강에 추락해서 익사했다.

6월 11일: 소쇼의 푸조 작업장(프랑스에서 두번째로 큰 작업장)에 CRS(내전경찰)이 개입. 2명의 노동자가 살해당함.

프랑스 전역에 다시 한번 엄청난 시위들이 발생했다. „그들이 우리 동지들을 살해했다." 노동자들의 결연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CRS는 소쇼 작업장을 정리했다. 하지만 조업은 그 이후 10일이 지나서야 재개되었다.

그러한 분노가 다시 파업의 부활(아직 3백만이 여전히 파업중이었다)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노동조합들(CGT를 그 선두로 한)과 좌파정당들(CPF를 선두로 한)은,  „선거가 실시될 있고  그래서 노동자계급의 승리가 완성될 있기 위해서" 조업을 재개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CPF의 일간지, 뤼마니테(l'Humanité)는, „그들의 승리로써 강력해진 수백만의 종사자들이 조업을 재개하다" 를 표제로 삼았다.

노동조합들에 의해 5월 20일에 체계적으로 이뤄진 파업 호소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었다: 그들은 그 운동을 통제해서,  덜 전투적인 부분들에서 조업재개를 그렇게 손쉽게 이뤄낼 수 있도록 그래서 다른 부문들로 그러한 사기저하를 확산시킬 수 있도록 만들길 원했다.

발덱-로쉐는  선거운동동안 자신의 연설에서, „공산당은 질서의 당"이라고 선언했다. 사실상 부르조아적인 „질서"가 서서히 회복되었다.

6월 12일: 중고등학교에서의 업무 재개

6월 14일: 에어 프랑스와 해운

6월 17일: 르노 빌랑꾸르에서 조업의 혼돈스런 재개

6월 18일: 드골은 아직 수감중에 있던 OAS 지도자들을 석방하게 함.

6월 23일: 국회의원선거의 첫 투표일, 우파가 크게 득표함.

6월 24일: 파리 중심에 위치한, 시트로엥 쟈벨에서 조업재개(CGT의 제 2인자인 크라수키가 총회 앞에 나서서 파업중단을 외침.)

6월 26일: 우시노 뒨키르션

6월 30일: 결선투표, 우파의 역사적인 승리.

마지막으로 업무를 재개한 직장 중의 하나로서 라디오 및 TV방송국이 7월 12일에 업무를 재개했다. 많은 언론인들은 이전에 정부에 의해 이뤄졌던 것처럼 다시 그렇게 후견되고 검열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업무가 재개된 후 그들 중 많은 이들이 해고당했다. 도처에서 질서가 다시 회복되었고, 특히 목적에 알맞게 국민을 „설득하는데" 중요한 언론매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해서 역사상 가장 큰 파업은 CGT와 CPF의 주장과는 반대로 패배로 끝났다. 그 심각한 패배는, 그 운동 동안 분노와 경멸을 샀던 당들과 „권위들"의 복귀에 의해 확증되었다. 그러나 노동자운동은 오래전부터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의 투쟁들의 참된 결과는 직접적인 결과가 아니라, 점점 결속해가는 노동자들의 단결이다"(공산주의 선언).

그러나 직접적인 패배와는 상관없이 1968년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서도 크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들을 우리는 다음 번의 글에서 보여줄 것이다. 그 글에서 우리는 프랑스에서의 이 „아름다운 5월"의 심층에 놓인 원인들과 역사적 그리고 국제적인 차원들을 밝혀내려 시도할 것이다.

파비안느(27/04/2008)

[1]   이 담화문이 발표된 다음 날 많은 도시들의 코뮨들의 종사자들이, 국민투표를 조직하기를 거부한다고 공표했다. 당국들은 투표용지를 어떻게 인쇄해야할지도 몰랐다- 국영 인쇄소는 파업중이었고, 파업하지 않았던 사립 인쇄소들은 그 인쇄주문을 거부했다. 고용주들은 자신들의 종업원들과의 부가적인 마찰을 원치 않았다.

[2]   사회부 차관이던 시락(Chirac) 역시 CGT의 제 2인자 크라수키를 (어느 다락방에서!) 만났다는 것이 이후에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