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당트자본주의에서의 프롤레타리아투쟁

우리가 2007 현재 재인쇄하는 글은 원래 1980년에 작성된 것이어서, 확실히   25년이 넘은 지금이라면 우리가 다른식으로 설명했을 만한 그런 점들이 몇가지 있다.

특히 2가지 점들이 정정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새로이 산업화하는 국가들의 출현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1980년에 우리는, 데카당스 자본주의의 조건 하에서 새로이 산업화된 국가들이 출현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함에 있어서  의심의 여지없이 너무 범주적이었다. 한국-다른 나라들중에서도- 예는 이것이 사실상 맞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 1997년에 작성된 („아시아의 용들의 기운이 다하고 있다“, 인터네셔널리뷰 89)에서 우리가 지적했듯이, 2 세계대전에 뒤이은 한국, 대만 일본의 확장은,  소련지대의 확장에 대항한 완충지대를 만들려던 미국 제국주의의 필요와 경제적 개입에의 의해 대부분 결정되었다.

이글에서 매우 도식적으로 남아 있는 다른 측면은, 데카당스의 경제적인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 특히 1 세계대전이래 존재하는 위기, 전쟁 재건시기들 사이의 관계들이다. 특히, 전쟁에 의해 야기된 파괴의 역할이 전후 재건붐을 가능하게 만드는데 매우 결정적인 것으로서 제시한 바로 그러한 도식적인 방식은 확실히 정정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글의 나머지부분과 관련하여 우리는, 그것이 전적으로 유효하며, 무엇보다도 계급투쟁에 대한 그것의 결론들에서 그리고 자본주의의 상승기와 데카당스기에서 노동자 투쟁의 방법들에 있어서의 차이들에 있어서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글에 포함된 분석은 이것이 씌여진 이래 노동자투쟁들의 구체적인 경험에 의해 더욱 강화되어오고 있다. 

ICC, 28/01/2007



„모든 죽은 세대들의 전통은 마치 속의 악마처럼, 살아 있는 세대들의 머리를 짖누른다. 그리고 살아 있는 세대들이 자기 자신과 사물을 변혁하고 지금껏 존재한 적이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몰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때, 바로 그러한 혁명적 위기의 시기에 그들은 노심초사하며 과거의 망령들을 주문으로 불러내어 자신에게 봉사케하고, 그들에게서 이름과 전투 구호와 의상을 빌린다…“

(맑스,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 1852,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2, 287, 박종철출판사) 

계급투쟁이 되살아나고 있는 시기에,  프롤레타리아계급은,  부르조아계급이 고의적으로 직접적이고 공공연하게 만들내는 이데올로기의 무게 뿐만 아니라, 자체의 과거 경험에서 오는 전통의 무게에 직면해 있다. 노동자계급이 스스로의 해방을 위해서 이러한 경험들을 소화 흡수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은 자본주의에 종지부를 찍게 결정적인 대결에 요긴한 무기들을 준비할 있는 유일한 길이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이 과거의 경험과 죽은 전통들을 혼동할 위험도 있기에, 살아 남은 것을, 과거 투쟁들에서 영구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전적으로 과거에 속하는 상황적이고 일시적인 그러한 측면들로부터 구별해내는데 실패할 지도 모른다.

마르크스가 종종 강조했듯이, 이러한 위험은 그가 살아있을 당시인 19세기의 노동자계급에게도 있었다.  급속한 진화를 겪고 있던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에게는,  장인회( journeyman’s society), 바뵈프시대의  그리고 부르조아계급과 함께 봉건제에 대항한 자신들의 투쟁의 자취들과 같이 발생 초기의 낡은 전통들이 오랫동안 짐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1848 이전 시기의 종파적, 음모적 공화적 전통들의 무게가 1864년에 창립된 1 인터네셔널에서도 여전히 감지될 있었다.  그런데  세기는, 급속하게 진행된 변화들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일대기로 볼때 시기,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상승기에  위치하고  있었다. 시기 전체는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있어서 매우 특이적인 조건들을 부여했다. 번영하는 자본주의로부터 실제적이고 지속적인 생활조건의 개선을 획득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그와 동시에,  체계가 번창했기 때문에 것을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러한 틀의 통일성이 19세기 노동운동의 상이한 단계들에 연속성을 부여했다. 계급투쟁의 방법들과 도구들은 점진적으로, 특히 조직화에 있어서 노동조합이라는 형식으로 고안되고 개선되었다. 각각의 단계들에서는 이전 단계와의 유사성이 상이성보다 컸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통들의 무게는 당시 노동자세대들에게 있어서 그리 짐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가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급격히 변했다. 노동자계급이 수십년에 걸쳐 창출해낸 도구들의 대부분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렸고, 심지어는 계급에게 등을 돌려 자본의 무기가 되어버렸다. 노동조합, 대중정당들,  선거참여 의회주의가 그것들이었다.  이는 자본주의가 진화에 있어서 완전히 상이한 시기, 그것의 데카당스 시기에 돌입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제 프롤레타리아투쟁의 문맥이 완전히 변형되었다. 이제부터는 사회 내부에서의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개선들을 위한 투쟁이 무의미해졌다. 자본주의는 한계의 끝에서 어떤 것도 양보할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발작들은  프롤레타리아계급에 의해 과거에 이루어진 많은 획득물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1 세계대전은 자본주의의 생애에서 시기 사이의 이러한 단절의 신호탄이었다. 혁명가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을 혁명가들로 만든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체계가 쇠퇴의 시기로 돌입했음을 인식했다.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은 1919년의 강령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새로운 세기가, 자본주의의 해체의, 그것의 내부적인 분해의 세기가 탄생했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공산주의혁명의 세기가.“

그런데, 대다수의 혁명가들은 여전히 과거의 전통의 심각한 영향하에 있었다. 지대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3 인터네셔널은 자체에 의해 이뤄진 분석이 갖는 함의들로부터  논리적인 결론을 끌어낼 수가 없었다. 노동조합의 배반에 직면하여 그것은 노동조합의 파괴 대신에 그것의 새로운 재건설을 제안했다.  의회주의적 개혁들은 노동대중에게 있어서  모든 실천적인 중요성을 상실했음“을 그리고 „정치적 삶의 무게중심이 완전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의회로부터 이동해 버렸음“( 2차대회의 테제) 3인터네셔널은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도에의 참여를 옹호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1852년의 말들은 명중으로 하지만 비극적으로 확인되었다. 1914 제국주의전쟁이 발발하자 프롤레타리아계급을 혼란에 빠뜨렸던 과거의 무게는, 1917년에 시작된 혁명물결의 실패에 대해서도 그리고 다음 반세기동안 뒤따르게 되는 무서운 반혁명에 대해서도 대부분의 책임이 있다.

이미 이전 투쟁에서 장해물이었던 „죽은 세대들의 전통“은 우리의 세기에서는 훨씬 무서운 적이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종국에 승리하게 것인가는, 그것이 과거의 낡은 옷을 벗고서 그것의 투쟁에 대해 자본주의의 „새로운 세기“가 부과하는 요구들에 알맞게 스스로를 무장하느냐에 달려있다. 자본의 일생과 관련하여 그리고 프롤레타리아계급 자신의 투쟁의 목적과 방법과 관련하여, 자본주의의 상승기를 데카당스시기로부터 구분하는 차이들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다음의 글은 이러한 이해에 공헌하기 위한 것이다. 이글이 약간 평범하지 않은 방식으로 제시된 것은, 시기들 각각의 내부에 존재하는 통일성 그리고 두시기들의 표현들 사이에 종종 간주되는 차이들 양자 모두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두시기들의 특징들을 나란히 제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상승기의 특징들은 페이지의 왼쪽난에 데카당스기의 특징들은 오른쪽 난에 제시되었다). 

상승기 자본주의

데카당스기 자본주의

민족국가(nation)

19세기의 특징들중 하나는 새로운 민족국가들의 창건(독일, 이태리…) 또는 그것을 만들기 위한 치열한 투쟁(폴란드, 헝가리)이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발전에 가장 적절한 틀로서  민족국가를 발견한 동적인 자본주의의 경제의 필요성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세기에 민족국가의 독립은 실질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생산력의 발전의 일부이자, 반동의 요새였던 봉건제국들(러시아, 오스트리아) 파괴의 일부였다.♣

20세기에 민족국가는 생산력을 담아내기에는 너무 좁은 틀이 되어버렸다. 자본주의 생산관계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생산력을 억누르는 진정한 감옥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각각의 민족자본의 이해관계들로 인해 그러한 국가들이 하나 또는 다른 하나의 거대한 제국주의적 블록에 가담하며 독립성을 단념할 밖에 없게되자마자, 민족국가의 독립은 하나의 신기루가 되어버렸다. 세기에 소위 „민족국가의 독립“의 예들은 결국은 해당 국가가 영향권에서 다른 영향권으로 이동한 것을 의미했다. ♣ 

자본주의의 새로운 편제단위(units)들의 발달

자본주의 상승기의 전형적인 현상들의 하나는, 나라에 따른 그리고 그것의 특정한 역사적 조건들에 따른 불균등한 발전이었다. 가장 발달한 국가들은 다른 국가들에게 앞으로의 길을 보여주었고, 다른 국가들의 후진성은 반드시 극복불가능한 장해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후자들은 전자들을 따라잡거나 초월할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실상 거의 일반규칙이었다:

거대한 성장의 문맥 안에서 개별 국가들의 성장 규모는 매우 달랐다. 1860년대에 가장 강력하게 발달했던 유럽의 산업국가들은 시기에 보다 미미한 발전을 보였다. 영국의 생산이 ‚겨우’ 세배 성장하고, 프랑스의 생산이 ‚겨우’ 네배 성장한 반면, 독일의 생산은 일곱배 이상 그리고 미국의 생산은 열두배이상으로 성장했다. 상승의 상이한 속도로 인해, 1860년에서 1913 사이의 중요한  산업국가들의 서열이 변동했다. 1880 영국은 세계생산에서의 선두자리를 미국에게 내주었다. 동시에 프랑스는 독일에 의해 추월당했다. 1900년경 영국은 독일에 의해 추월당해 3위가 되었다“(F. 슈테른베르크, 세계심판정 앞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1951, 자체번역)

동일한 시기에 다른 국가들은 근대적인 산업강국으로 성장했다.  일본과 러시아는 매우 빠른 산업화 과정을 겪었지만, 이것은 자본주의가 데카당스기에 진입함에 의해 억제된다.

후진국가들이 이런 식으로 따라잡을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의 결과였다:

 

1)  그들의 내부시장이 산업자본발달을 위한 출구로서 가능성을 가졌다. 거대한 그리고 상대적으로 번성한 전자본주의 부문들(수공업과 특히 농업) 자본의 성장에 필수적인 비옥한 토양을 형성했다.

2)  선진국가들의 값싼 상품들에 대항한 보호무역주의의 활용을 통해, 국내생산을 위한 시장을 그들 자신의 국경 내부에서 잠시나마 유지할 있었다.

3) 세계규모로 볼때, 광대한 자본주의외부(extra-capitalist) 시장이, 특히, 정복과정에 놓여 있던 식민지영토들 내에 여전히 존재했다. 이것들은 산업국가들에서 제조된 ‚과잉’ 상품들을 흡수했다.

4)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발달된 국가들의 실제적인 발달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시기에는 전반적으로 수요가 공급을 초과할 정도여서, 상품들의 가격은 높은 생산비용들에 의해, 발달된 국가들의 생산비용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를 통해 이들 국가들에서의 자본은, (가장 발달된 국가들이 초과-이윤(super-profit) 끌어모으는 것과는 달리) 실제적인 축적을 행하기에 충분한 이윤을 실현할 있었다.

5) 상승기에 군사비지출은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었고 용이하게 보상될 있었으며, 심지어는 발달된 산업국가들에 의해서는 식민지정복의 형태로 이득이 되기도 했다.

6) 19세기에 기술수준은 이전 시기에 비해서 상당한 진전을 보여주긴 하지만 거대한 양의 자본의 투자를 요구하지 않았다. ♣ 

자본주의 데카당스의 시기는 어떤 새로운 산업화된 국가의 출현도 불가능하다는 점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1 세계대전 이전에 잃어버린 시간을 보충하지 못한 나라들은 결국 전적인 미개발 상태에 정체하거나 아니면 모래성의 정상에 있는 나라들에 비해서 연대적으로 뒤처진 남아 있을 밖에 없었다.이것은 인도나 중국과 같은 대국들의 경우인데, 그들의 ‚국가독립’이나 심지어 소위 ‚혁명’(, 가혹한 국가자본주의의 도입)으로도 그들은 저개발이나 빈곤을 타파할 없었다. 소련조차도 규칙을 벗어날 없었다. 러시아의  농부들에게  특히 노동자들에게 부과된 엄청난 희생들, 강제노동수용소에서 거의 공짜 노동력의 대대적인 사용, 국가계획 무역에서의 독점(트로츠키주의자들에 의해 ‚위대한 노동자계급의 획득물’로서 그리고 ‚자본주의의 폐지’의 표시들로서 제시됨),  동유럽 완충지대 국가들의 체계적인 경제적 수탈 모든 것으로도 소련이 완전히 산업화된 나라들을 따라잡을 있기에는,  저개발과 후진성의 흔적들을 제거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소련의 위기에 관한 인터네셔널리뷰의 기사들을  참조할 ).

시기에는 어떠한  자본주의적 편제단위도 출현할 없다는 점은, 오늘의 6 산업강국들(미국, 일본,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영국) 1 세계대전 전야에 이미 (다른 서열로 이긴 하지만)  선도적인 경제세력들이었던 사실로도 표현된다.

저개발국가들이 선진국들의 수준으로 성장할 없음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설명된다:

 

1)  산업화된 국가들의 자본주의외부 부문들(extra-capitalist sectors) 농업의 자본주의화와 수공업의 거의 전적인 황폐화로 인해 완전히 소진되었다.

2) 20세기에 있어서 보호무역주의적 정책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발달된 경제에게 숨쉴 여지를 주기는 커녕 국민경제의 질식을 초래했다.

3)  자본주의외부의 시장들은 세계 수준에서 이미 포화되어 있다. 3세계의 거대한 필요들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결핍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산업화를 성취하지 못한 경제들은, 그것의 완전한 황폐화로 인하여 지불능력이 있는 시장을 형성하지 못한다.

4) 수요와 공급의 법칙은 새로운 국가의 발전에 있어서  불리하게 작용한다. 시장이 이미 포화된 세계에서 공급은 수요를 초과하고 가격은 최소생산비용에 의해 결정된다. 때문에, 최고의 생산비를 가진 국가들은 이윤의 축소나 손해를 감수하면서 상품을 밖에 없다. 이것은 그들에게 극도의 낮은 축적율을 담보하며, 심지어는 값싼 노동력으로도 그들은 현대기술의 대대적인 획득에 요구되는 투자를 실현할 없다. 결과, 이들과 거대산업열강들 사이의 간극은 넓어질 뿐이다.

5) 전쟁이 점점 영구화되어가는 시기에 군사비지출은 심지어는 가장 발달된 국가들에게도 극도로 무거운 부담이 된다. 그것은 저개발 국가들의 완전한 경제적 파산을 초래한다.

6)  오늘, 현대 산업생산은 지난 세기와 비교될 없을  정도로 훨씬 정교한 기술을 요구한다. 이것은 상당한 수준의 투자를 의미하며 단지 선진국들만이 이것을 부담할 있다. 그래서 순수한 기술적인 요소도 경제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

상승기 자본주의

데카당스기 자본주의

국가(State) 사회의 관계

자본주의의 상승기에는, 정치의 전문가들에게 할당된 영역인 정치와, 자본과 사적 자본가들의 영역인 경제 사이는 매우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시기에 국가는, 비록 사회를 지배하는 경향이 있긴 해도, 대체로 국가의 입법부에서 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자본의 이해그룹들과 분파들에 의해 여전히 지배되었다. 입법부가 여전히 분명하게 행정부를 지배했다. 의회제도, 대표제 민주주의가 여전히 실제성을 갖고 있어서 상이한 이해를 갖는 그룹들이 서로 대적할 있는 그러한 무대였다.

국가의 기능이 사회질서를 장기적으로 그리고 전체로서의 자본주의 체제의 이해 속에서 유지하는 것이였기에,  국가는 노동자들에는 이롭고 사적 자본가들의 채워질 수없는 즉각적인 탐욕이 요구하는 야만적인 과잉착취에는 대항한  특정한 개혁들의 원천이 있었다(영국의 10시간노동법, 아동노동금지법 등등을 참조). ♣    

자본주의의 데카당스기는 사회의 국가로의 흡수를 특징으로 한다. 이것로 인해서, 사회를 대표하는 것이 원래 기능이었던 입법부는,  국가라는 피라미드의 정상에 위치한 행정부의 면전에서 어떤 중요성도 상실해 버렸다.

시기에 정치와 경제는 통합되어, 국가는 국민경제의 주요 역량이, 그것의 사실상의 지도부로 된다.

점진적인 통합(혼합경제) 통해서건 아니면 갑작스런 변혁을 통해서이건 국가는 이상 자본가들과 이해그룹들의 대리기구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특정한 이해그룹들을 자신의 강철규율에 복속시키면서 집단적인 자본가가 되었다.

국민경제의 실현된 단위체로서의 국가는 특정한 제국주의블록 내에서뿐만 아니라 라이벌블록에 대항해서도 국가의 이해를 옹호한다. 더구나 그것은 직접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착취와 종속의 확보를 담당한다.     

상승기 자본주의

데카당스기 자본주의

전쟁(War)

19세기에 전쟁의 기능은 대체로, 자본주의 국가에게 그것의 발전에 요구되는 통일성과 영토 확장을 담보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전쟁은 그것으로 인해 초래되는 비참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진보적인 성격의 측면이었다.

그래서 전쟁은 세나라에 국한되었고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다:

-          단기적 이었다

-          많은 파괴를 초래하지 않았다

-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새로운 약진을 결과시켰다( 예를 들어 독불전쟁, 오스트리아-이태리전쟁, 오스트리아-프로이센전쟁 크림전쟁등이 그러했다)

 

1870/71년의 독불전쟁은 전형적으로 이러한 종류의 전쟁이었다:

-          그것은 독일 민족국가의 성립에 있어서, 생산력의 엄청난 발전의 토대를 창조함에 있어서 그리고 유럽의, 정치적 역할을 참작한다면  전세계의  산업프롤레타리아계급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형성함에 있어서 결정적인 단계를 표현했다.

-          동시에, 전쟁에는 1년보다 짧은 시간이 걸렸다. 또한 그렇게 많은 희생자를 결과시키지도 않았다. 패배한 프랑스에게 조차도 그리 중요한 장해를 가져오지 않아서 1871 이후 프랑스는 , 2제국 하에서 개시된 산업발전을 계속해 나갔고 거대한 식민지 소유를 획득했다.

 

식민지전쟁에 있어서, 목적은 새로운 시장과 원자재보유고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전쟁들은, 팽창하려는 그리고 세계의 새로운지역을 분할하려는 욕구로 추동된 자본주의국가들 사이의 경쟁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전체 자본주의의 팽창의, 세계 생산력의 팽창의 일부였다. ♣   

생존가능한 새로운 민족국가 단위의 형성이 이상 불가능한 시기에, 새로운 국가의 형식적인 독립이 본질적으로는 제국주의 강대국들 사이의 관계들의 결과인 그러한 시기에,  전쟁은 더이상 사회의 생산력의 발전을 위한 경제적 필요로부터 발생하지 않으며, 오히려, 블록들 사이의 역량균형이라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요인을 갖는다. 이러한 전쟁은 이상 19세기에서와 같은 ‚민족국가전쟁(national war)’ 아니라 제국주의 전쟁(imperialist war)이다. 그것은 이상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팽창의 측면이 아니라 팽창의 불가능성을 표현한다.

목적은 이상 세계를 분활하는 것이 아니라, 재분활하는 것이다. 계속적인 발전이 절대적으로 이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블록의 국가들은 오직 라이블 블록을 댓가로 하여 자신의 자본 활용을 유지할 있을 뿐이다. 최종 결과는 세계 자본 전체의 약화이다.

전쟁은 이제 전세계적으로 일반화되어 있고  전세계경제의 엄청난 규모의 파괴를 초래하면서 전면화된 야만주의로 치닫고 있다.

 

1870년에서와 마찬가지로 1914년과 1939년의 전쟁들에서 프랑스는 독일에 대항해 싸웠지만, 차이들은 뚜렸하고, 정확히 바로 차이들이 19세기에서 20세기로의 전쟁의 본질에 있어서의 변화를 보여준다: 

-          전체 유럽을 그런 다음 세계를 휩쓸었다

-          전면전으로서, 수년동안 전체 인구와 경제 물자를 동원했고, 수십년간의 인간 노동을 단기간에 무화시켰으며 수백만의 프롤레타리아를 학살하고 수억의 인류를 기근으로 몰아넣었다.

20세기의 전쟁은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그러한 „젊음의 질병(youthful maladies)“ 아니다. 그것은 죽어가는 체계의 경련이다. ♣  .

상승기 자본주의

데카당스기 자본주의

위기(Crises)

위기는, 불균등한 내부 시장들과, 불균일한 발전에 기초한 세계에서 상이한 국가들과 상이한 생산부문에서의 생산력의 불균등한 발달에 의해 표시되었다.

그것은  내부시장이 포화되어 새로운 팽창이 요구된다는 사실의 표현이다. 그래서 주기적(7년에서 10 간격 - 고정 자본의 활부상환 기간에 해당) 이고 새로운 시장의 개방과 함께 해결되었다.

이러한 위기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졌다:

1)       일반적으로 증권시장의 붕괴 후에 갑작스럽게  발생했다

2)       단기간 지속되었다( 길어도 1-3 지속)

3)       모든 나라로 일반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          1825년의 위기는 주로 영국에 국한되었고 프랑스나 독일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          1830년의 위기는 주로 미국의 위기로서 프랑스와 독일은 다시 이것을 모면했다

-          1847년의 위기는 미국에는 전혀 그리고 독일에도 단지 약간만 영향을 미쳤다.

-          1866년의 위기는 독일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1873년의 위기는 프랑스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이후, 산업순환주기(주식시장붕괴와 사이의) 모든 발달한 국가들로 일반화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때도 미국은 1900-1903년의 경기침체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프랑스는 1906년의 경기침체를 모면할 있었다. 한편, 1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1913년의 위기는 사실상 모든 국가들을 강타했다.

4)       모든 산업부문로 전반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          1825년과 1836년의 위기에 의해 타격을 받은 것은 근본적으로 순면산업이었다.

-          그후는, 직물이 위기에 의해 영향을 받기는 했어도, (특히 1873년의 위기) 가장 고통을 당한 것은 금속산업과 철도였다.

그래서, 어떤 부문은 다른 부문의 침체기 동안에도 주요한 붐을 겪기도 했다.

5)       새로운 산업성장기를 결과시켰다(위에서 인용된 슈테른베르크의 상장수치들은 이런 측면에서 의미심장하다)

6)       프롤레타리아혁명 발생의 조건들은 커녕, 체계의 정치적 위기의 조건들을 생성하지 않았다.

마지막 점에 있어서, 1847-48년의 경험 이후 다음과 같이 썼을 때의 마르크스의 오류를 우리는 지적할 밖에 없다: „새로운 혁명은 오직 새로운 위기 이후에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마찬가지로 불가피하다“(신라인신문, 1850). 그의 실수는, 혁명이 가능하기 위해 위기가 필요하다는 점의 인식에 있는 것도, 새로운 위기가 뒤따를 것을 선언한데 있는 것도 아니다(1857년의 위기는 1847년의 그것보다 훨씬 격심했다). 그것은, 이시기의 위기가 이미 체계에 있어서 치명적인 위기라는 생각에 있었다.

오류를 마르크스는 이후 당연히 교정했다.  그는 혁명의 객관적 조건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음을 인식했고, 바로 이때문에 나중에 1인터네셔널(IWA)내부에서, 혁명으로의 노정에서 현단계를 건너뛰기를 원했던 아나키스트들과 충돌했다.  동일한 이유로, 1870 9 9 그는 파리의 노동자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새로운 정부를 전복하려는 어떤 시도도 (…)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마르크스, -불전쟁에 관한 2 연설, 마르크스엥겔스전집, 17, 277, 자체번역).

오늘날, 아나키스트들이나 보르디가주의자들이나 ‚혁명은 아무때나 가능하다’라거나 혁명의 물질적 조건이 1848년이나 1871년에 이미 존재했다라고 믿을 것이다. ♣

 

20세기가 시작된 이래, 시장은 단일화되고 국제적으로 되었다. 내부시장은 (주로, 전자본주의(precapitalist) 부문들의 소멸로 인해) 중요성을 상실했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위기는 이제 시장이 잠정적으로 너무 협소함을 명시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전세계적인 팽창의 어떤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음을 나타냈다. 그래서 위기는 오늘 전면화되고 영구적인 성격을 띤다.

특히 경기는, 이상 생산능력과 주어진 시기의 시장상황 사이의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원인, 전쟁-파괴-재건-위기의 순환주기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문맥으로 볼때, 경제발전기의 지속기간을 결정하는 것은, 자본의 활부상환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이전에 있었던 전쟁이 초래한 파괴의 정도이다. 그래서 재건에 기초한 팽창의 지속기간이 2 세계대전이후(17) 경우에 1 세계대전이후(7) 비해서 2 이상으로 길었던 점이 납득이 된다.

자유방임(laisser-faire)’ 특징으로 19세기와  대조적으로,  20세기의 경기침체의 규모는 국가와 연구 조사 기구들에 의해 행해지는 인공적인 대책들에 의해, 전면적인 위기의 지연을 목적으로 대책들에 의해 제한되었다. 이것은 지역전쟁들, 무기생산의 발달과 전쟁경제,  은행권 발행과 크레딧 판매를 위한 체계적 방편, 일반화된 부채 등과 같이, 자본주의의 엄격히 경제적인 기능과는 거리가 있는 모든 정치적인 방편들에도 적용된다.

 

이렇게 해서, 20세기의 위기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1)       이상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발전한다. 이런 의미에서, 1929년의 위기는 초기에 이전 세기의 위기의 특정 특징들(증권시장의 붕괴 이후의 갑작스런 발생) 보여주었다. 이것은 경제적 조건들이 과거의 그것과 유사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의 정치적 기구들의 후진성, 새로운 경제적 조건들에 보조를 맞출 없음의 결과였다. 그러나  이후에 대대적인 국가의 개입(미국의 뉴딜정책, 독일의 전쟁 생산 등등…) 위기의 영향들을 10 넘게 분산시켰다.

2)        일단 시작되면, 장기간 지속된다. 그래서 19세기에는 침체와 번영사이의 비율이 1:4(10년의 순환주기 동안에 2년의 위기)였던 반면에,  20세기에  디플레이션기와 회복기 사이의 비율은 2:1이다. 1914년과 1980 사이에 10년간의 전면전쟁(영구적인 지역전쟁들을 제외하고도) 있었고, 32년간의 디플레이션(1918-22, 1929-39, 1945-50, 1967-80) 있어서 총합하여 42년의 전쟁과 위기가 있었던 반면 재건기(1922-29, 1950-67) 단지 24년에 불과했다. 그리고 위기의 순환주기는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

3)       19세기에는 경제 기관이 위기의 종결시 자체의 역량으로 회복되었던 반면, 20세기의 위기는 자본주의적 관점으로 볼때, 전면화된 전쟁 이외에는 어떤 해결책도 없다.

이러한 위기는 죽음의 병에 걸린 체계에 있어서 불가피한 것으로서,  프롤레타리아계급에 공산주의 혁명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부여한다.

20세기는 진정,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이 창립대회에 말했던 „전쟁과 혁명의 시대“이다. ♣

 

상승기 자본주의

데카당스기 자본주의

계급투쟁(Class struggle)

19세기 계급투쟁의 형식은 시기 자본의 특성들과 노동계급 자체의 특성들 양자에 의해 결정되었다.

1) 19세기의 자본은 수많은 자본들로 여전히 분산되어 있었다. 100명이상의 노동자를 가진 공장들은 드물었고, -수공업적인(semi-artisanal) 기업들이 훨씬 일반적이었다. 19세기 후반기에 이르러서야 , 철도의 출현, 기계의 대대적인 도입, 광산의 번성과 더불어, 우리가 오늘 알고 있는 대규모의 산업이 우세하게 되었다.

2) 이러한 조건하에서 경쟁은 많은 자본가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3) 게다가, 기술이 그리 높이 발달하지 않았다. 1세대 노동자의 대부분은 농촌지역에서 영입된 미숙련 노동인력들이었다. 가장 숙련된 노동자들은 수공업자들이었다.

4) 착취는 노동시간과 대우 낮은 인금을 통한 절대잉여가치(absolute surplus value) 추출에 기반하고 있었다. 

5) 공장주 또는 각각의 공장은 그가 착취하는 노동자들과 직접적이자 개별적으로 대면했다. 19세기의 2/3 지날때까지는 기업가들의 단일조직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개별적인 충돌들 속에서 자본가들은 흔히 산업 충돌의 타격을 입은 라이벌 공장들의 곤경들에 투기를 하고 그러한 상황을 이용해 라이벌의 고객들을 가로챘다.

6) 국가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충돌들의 외부에 머물렀다. 그러한 충들이 ‚공공 질서를 위협’하는 경우에 한해,  최후의 방편으로서 개입했다.  

 

노동자 계급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관찰될 있다:

1) 자본과 마찬가지로, 매우 분산되어 있는 그리고 여전히 형성되고 있는 계급이었다. 가장 전투적인 부문은 훨씬 수공업에 관련되어 있어서 동업조합주의(corporatism) 성격이 강했다.

2) 노동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직접적이고 전적으로 지배했다. 노동자의 부족을 초래하게 되는  생산의 급속한 팽창의 시기에 가서야, 노동자들은 자본의 공격에 대항해 효과적으로 저항할 있었고, 임금과 노동조건과 관련 상당한 개선을 획득할 있었다. 위축의 시기에 노동자들은 그들의 위력을 잃었고 기세가 껶였으며 그들이 이전에 성취한 것의 어느 정도를 다시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상의 표현으로서, 1 2 인터네셔널 –계급의  높은 전투성의 표시였던- 경제 번영의 시기들( 1 인터네셔널(IWA) 1867 위기가 있기  3년전인 1864, 2 인터네셔널(Socialist International) 1890-93 위기의 전야인 1889) 창립되었던 사실을 있다.

3) 19세기에는 외국으로의 이민이,  주기적인 위기 동안 프롤레타리아계급을 강타한 실업과 엄청난 빈곤에 대한  해결책이었다. 유럽의 자본주의 중심지들에서 생존조건이 이상 견딜 없게 되었을 계급의 중요한 부분들이 신세계로 도피할 있었던 점이, 순환적인 위기가 1848 6월과 같은 폭발적인 상황을 자극하지 않도록 방지한 요소였다.

4)  이러한 특별한 조건들로 인해 노동자들은 경제적 저항을 위한 조직들, 노동조합들을 창조할 있었는데, 이것들은 지역적, 업종별 형태를 가질 밖에 없었고 소수의 노동자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었다. 투쟁의 주요 형태인 파업은 개별화되어 이전에 오랫동안 준비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자본의 이런 저런 부문과, 심지어는 단일한 공장과 대치하기 위해서 번영기가 때까지 기다렸다. 이러한 모든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은, 여전히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기관이었다. 자본에 대항한 경제투쟁에서 뿐만 아니라, 계급의 삶의 중심으로서, 노동자들이 공통의 관심사, 공동의 목표를 추구함을 배우게 되는 연대의 학교로서, 그리고 혁명적 선동에 개방된,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자면 ‚공산주의의 학교’로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5)19세기에는 파업이 일반적으로 장기간 지속되었고 이점이 파업의 유효성의 전제조건들 하나였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굶주릴 위험을 해야 했고 이때문에 지원기금, 즉‚저항금(caisses de resistance)’ 준비하고 다른 노동자들에게 재정적은 원조를 호소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다른 노동자들이 작업을 계속한다는 바로 사실이 파업중인 노동자들에게는 긍정적인 요소가 있었다(예를 들어, 충돌에 관여된 자본가의 시장을 위협함으로써).

6) 이러한 조건들 아래에서, 조직화 이전에 물질적, 재정적 문제가  노동자들이 효과적으로 투쟁하기 위해서는 결정적이었다. 매우 빈번히 문제는, 투쟁의 실제 성취물보다 우선권을 가졌고,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렸다( 조직이 자본으로부터 얻어낼 있는 것보다 많은 돈을 노동자들이 그들의 조직에게 지출해야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본가들에게 대답하면서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  

데카당스기의 자본주의에서 계급투쟁은 자본의 관점에서 볼때, 다음과 같은 특성들에 의해 결정된다:

1)  자본은 고도의 집약과 중심화에 도달했다

2)  19세기에 비해서 경쟁은 수적인 면에서는 편이지만 강도는 높다.

3) 기술이 고도로 발달했다. 노동력은 더욱 숙련되었고 단순작업은 기계에 의해 수행된다. 노동자계급의 연속적인 세대들이 존재한다. 계급의 단지 작은 일부만이 농촌지역으로부터 영입되고 대부분은 노동자들의 자식들이다.

4) 착취의 주요한 기반은 속도강화와 생산성의 증가를 통한 상대적 잉여가치(relative surplus value) 착취이다.

5) 노동자계급에 대항하여 자본가들은 이전에 비해서 높은 정도의 단결과 연대를 가진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개인적으로 대면할 필요가  없도록 특수한 조직들을 창조했다.

6) 국가는 사회적 충돌들에 자본가 자체로서든 아니면 ‚조정자’, 통제자로서든 그러한 대치의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수준들 양자 모두에서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그러한 충돌들을 ‚수용가능한한’ 경계 내부에 유지하거나  아니면 진압한다.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지적될 있다:

1) 노동자계급은 단일화되고 높은 지적 수준으로 숙련되어 있다. 그것은 수공업과 아주 멀게만 관련되어 있다. 전투성의 중심은 그래서 대규모의 현대적 공장들에서 발견되고, 투쟁은 동업조합주의를 벗어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2) 이전 시기와는 대조적으로, 결정적인 투쟁들은 사회가 위기에 처했을 발생하고 발전한다(러시아에서 1917년과 1905년의 혁명들은 전쟁이라는 위기의 급성형태로부터 출현했고, 1917년과 1923 사이의 국제적인 거대한 투쟁물결은 1 세계대전 그리고 그에 뒤이은 경제적 위기라는 동요의 시기동안 발생하고 재건이 가져온 경제회복과 더불어 마감되었다.)

이것이 바로, 이전의 인터네셔널과는 반대로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이, 가장 극심한 위기의 시기인  1919 창립되어 이를 통해 계급 전투성의 강력한 고조를 가져온 이유이다.

3) 20세기에, 특히 2 세계대전 이후에 보여지는 경제적 이민 현상은 그것의 기원이나 함의의 측면에서 지난 세기의 커다란 이민물결에 필적할 없다. 그것은 자본의 새로운 영토로의 역사적인 팽창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식민지들에서의 경제발전의 블가능성을  드러낸다. 전식민지들(ex-colonies)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그들의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나 과거의 노동자들이 떠난 바로 그러한 중심지로 향할 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체계가 급성 위기에 돌입하면 어떤 안전가치(safety-value) 제공하지 않는다. 재건이 일단 종결되면 이민은 실업에 대한 해결책이 이상 되지 못하며, 실업은 이전에 저개발 국가들을 타격했듯이 이제는 선진국들을 타격한다. 위기는 어떤 탈출구의 전망도 없이  노동자계급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몬다.

4) 노동자계급에 의해 성취되는 지속적인 개선이 이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것의 경제적인 이해관계에 근거한 특이적이고 영구적인 조직들을 유지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노동조합은 그것의 창립을 있게 했던 기능을 상실했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학교’이기는 커녕 이상은 계급의 기관일 수도 없게 되어 자본에 의해 영입되어 국가에 통합되어 버렸다. 이러한 현상은 국가가 사회를 흡수하는 일반적 경향에 의해 더욱 용이해진다.

5) 프롤레타리아투쟁은 엄격히 경제적인 범주를 넘어서는 경향이 있고, 국가와 직접적으로 대치하고 스스로를 정치화하고 계급의 대대적인 참여를 요구함으로써 사회투쟁이 된다.   이것이 로자 룩셈부르크가 1 러시아혁명이후 그녀의 대중파업 (Mass Strike)팜플렛 안에서 지적해낸 것이다.  동일한 생각이, „ 파업 뒤에는 혁명의 히드라가 고개를 든다“라는 레닌의 표현속에 들어 있다.

6) 데카당스기에 발생하는 투쟁 유형은 조직 수준에서 미리 준비될 수가 없다.  투쟁들은 자연발생적으로 폭발하고, 전면화되는 경향이 있다. 산별적으로 보다는 지역적 영토적 수준에서 발생하고 그것의 진화는 수직적이기 보다는 수평적이다. 이것들은 혁명적 대치국면을 미리 보여주는 특징들이다.  상황에서 행동에 돌입하는 것은 단순히 직업별 범주들이나 이런 저런 기업의 노동자들이 아니라 지리-정치적인 단위(지방, 국가) 수준에서의 전체로서의 노동자계급이기에 그러하다.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은 투쟁에 요구되는 물질적인 수단을 이상 미리 준비할 수가 없다. 자본주의가 지금 조직된 방식으로 볼때 파업의 길이는 전반적으로 효과적인 무기가 아니다(나머지 자본가들이 관련된 자본가를 원조할 수있기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 파업의 성공은 더이상, 노동자들에 의해 모아지는 재정자금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확장할 수있는 그들의 능력에 근본적으로 달려있다. 이러한 확장을 통해서만 전체 국가자본에 의협을 가할 있는 것이다.

시기에 투쟁중인 노동자들과의 연대는 노동자들의 다른 부분들로부터의 금전적인 지원의 문제가 이상 아니다(이러한 지원은 노동자들을 그들의 진정한 투쟁방법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노동조합이 제공할 있는 대용연대(ersatz solidarity)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다른 부분들이 투쟁에 동참하는 것이다.

7) 투쟁의 조직이 투쟁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라 투쟁으로부터 탄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의 자기방어,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무장도, 국제공산주의그룹(Groupe Communiste International) 같은 그룹들이 생각하듯이 총기류 몇개를 지하실에 숨김으로써 미리 준비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이전의 단계들을 통과하지 않고는 도달될 없는 하나의 과정의 단계들이다. ♣

상승기 자본주의

데카당스기 자본주의

혁명조직(revolutionary organisation) 역할

계급에 의해 그리고 그것의 투쟁에 의해 만들어진 혁명가조직은 강령을 기반으로 구축되고 소수로 이뤄진 조직이다.

기능들은 다음과 같다:

1) 자본주의 사회의 비판을 이론화해 낸다.

2) 강령, 계급투쟁의 최종목적들을 작성해 낸다

3) 계급 내부에 강령을 전파한다.

4) 계급의 즉각적인 투쟁의 모든 시기들에,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항한 계급의 자기 방어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마지막 점과 관련하여, 19세기에 혁명조직은, 이전 투쟁들에 의해 만들어진 조직의 특정 맹아적인 수준을 기반으로하여 계급의 단위적인 경제적 기관들을 발의하고 조직하는 기능을 가졌다.

이러한 기능때문에, 그리고 시기의 상황-개량의 가능성과 계급 내부에서 개량주의적 환상으로의 선동 경향- 으로 인해 혁명가들의 조직( 2 인터네셔널의 정당들) 자체가 개량주의에 감염되었는데, 이것은 결국 즉각적인 개량을 위해서 혁명의 최종목표를 포기했다.  결과 경제적 조직들(노동조합) 유지와 발전이 유일한 임무로 여겨졌다(이는 경제주의로 알려져 있다).

혁명가들의 조직 내부에서 오직 소수만이 이러한 진화에 저항하고 사회주의 혁명의 역사적 강령의 원래 모습을 옹호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 소수 일부는 개량주의의 발달에 대항한 반작용으로, 프롤레타리아계급에 있어서는 이질적인 견해를 발달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견해에 따르면, 당이 의식의 유일한 자리, 완성된 강령의 단독 소유자 이며, 부르조아계급과 정당들의 도식에 따라서 당의 기능이 계급을 ‚대표하는’ 것이어서, 계급의  결정기관, 권력장악을 위한 계급기관이 권리를 가지는 것으로 본다.  대리주의(substitutionism) 불리는 이러한 견해는, 2 인터네셔널 내부의 대다수 혁명좌파에 영향을 끼쳤고 특히 레닌이 주요한 이론가였다(무엇을 것인가? 일보 전진, 이보 후퇴). ♣

데카당스시기에 혁명가들의 조직은 이전 시기의 일반적인 특징들을 유지하지만, 노동자들의 즉각적인 이해관계의 옹호가, 이제까지 역사적인 사안으로 여겨져 왔던 최종목적으로부터  이상 분리될 없다는 점이 추가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마지막 때문에, 그것은 이상 계급을 조직하는 역할을 갖지 않는다. 이것은 투쟁중의 계급 자체에 수행되어야 과업이다.  이때 계급은 경제적인-즉각적인 저항과 옹호를 위한 조직- 그리고 정치적인 측면들 모두에 있어서 새로운 유형의 조직을 창조하고 권력의 장악을 지향하게 된다. 이러한 조직 유형이 노동자평의회(workers’ council)이다.

노동자 해방은 노동자들 자신의 과업이다“라는 노동운동의 오래된 구호를 내걸고, 혁명조직은 혁명에 대한 부르조아적 관점에 근거한 모든 대리주의적 관념들에 대항해 투쟁해야 한다. 하나의 조직으로서 혁명적인 소수는 계급을 동원하기 위해서 즉각적인 요구들의 정강(platform) 미리 준비할 과업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모든 투쟁들에 결연히 참여하고, 투쟁을 위한 전반적인 방향을 선동하며, 계급 내부의 부르조아적 요소와 이데올로기를 비판해야 한다. 투쟁 동안 그것은 운동의 불가피한 절정인 혁명으로의 유일한 길인 전면화(generalisation)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방관자도  단순한 일꾼도 아니다.

혁명가들의 조직은 노동자들의 써클이나 그룹들의 출현을 고무하고 속에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때 이러한 조직은, 어떤  노동조합의 건설도 불가능한 상황에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아직 그것의 완전한 형태의 단일기관들, 평의회들을 창조할 처지에 있지 못하는 동안, 그러한 써클이나 그룹들은 계급 속에 존재하는 재편과 토론을 향한 실제적인 필요에 부응하는 임시적이고 미완성된 형태들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써클들의 성질에 따라서 혁명가들의 조직은 그것들을 인공적으로  만들려는 시도들에 대해서도, 그러한 그룹들을 당들의 전이벨트(transmissions belts) 전환시키려는  생각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것들을 평의회나 기타의 정치-경제적 기관들의  맹아로 바라보는 견해들에 대해서도 대항해 투쟁해야 한다.  모든 견해들은 계급의식의 성숙과 단위적인 자기조직화(unitary self-organisation) 과정의 발전을 마비시킬 뿐이다. 이러한 써클은, 설익은 정강을 결정함으로써 스스로가 목적이 되어버리는 것을 피한다면, 자신의 계급이 직면한 문제들에 흥미를 가진 모든 노동자들에게 열려 있는 만남의 장으로 남아 있는 , 가치를 가질 있으며 그것들의 중요하나 임시적인 기능을 수행할 있다.   

마지막으로, 반세기동안 프롤레타리아계급을 짖누른 반혁명 시기의 결과로 혁명가들이 극도로 분산되어 있는 상황에서, 혁명가들의 조직은, 국제적인 수준에서 정치적 상황의 전개를 능동적으로 지원하고, 계급의 국제적인 정치정당의 건설을 향한 과정을 개시하게 논쟁과 대면을 고무할 임무를 갖는다. ♣

노동자계급의 역사상 가장 심각한 반혁명은  혁명가들의 조직 자체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시험이었다.

그러한 폭풍 속에서 공산주의 강령의 근본 원칙들을 지켜낼 알았던 경향들만이 오직 살아남을 있었다. 그런데 승승장구하는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의 압력하에 계급의 입장을 포기하는 도구로서 대체적로 기능했던 ‚새로운 생각들(new conceptations)’ 대해 불신적인 이러한 태도는, 불가피하게도 혁명가들이 자본의 일대기에 있어서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있어서 생겨나는 변화들의  모든 함의들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이러한 현상의 가장 풍자화적인 형태는, 계급의 입장은 ‚불변적이고’ 1848년에 한번 공식화된 공산주의 강령은 ‚마침표 하나도 변경될 필요가 없다’라는 생각이다. 

혁명가들의 조직은, 종종 낡은 내용물을 새롭게 포장하여 선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모더니스트 이데올로기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하는 한편, 조직이 계급에 의해 만들어진 이유인 그러한  임무에 따라 행동해야할 경우에, 사회의 삶에 있어서의 변화를 그리고 그러한 변화들이 계급에게 그리고 그것의 공산주의적 선봉에게 있어서 갖는 함의들을 파악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모든 국가들이 분명하게 반동적인 지금, 혁명가들의 조직은 소위 ‚민족해방’운동들을 지지하는 어떤 생각들에 대항해서 투쟁해야 한다. 모든 전쟁이 제국주의적 성격을 띠는 지금,  그것이 어떤 구실로든 상관없이 오늘날의 전쟁에 참여한다는 어떤 생각도 비난해야 한다. 사회가 국가에 의해 흡수된 지금, 자본주의가 어떤 실제적인 개량도 허용할 없는 지금,  선거라는 가면극과 의회에의 참여라는 어떤 생각에도 대항해 투쟁해야 한다.

계급투쟁이 오늘날 직면한 모든 새로운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조건들과 더불어, 혁명가들의 조직은, 노동조합과 같이 투쟁에 있어서 장해물일 밖에 없는 조직들의 부활에 관한 계급 내부의 환상을 분쇄해야 한다. 20세기의 혁명물결 동안 계급의 경험으로부터 출현한 투쟁방법들과 조직형태들, 대중파업(mass strike), 총집회(general assemblies),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통일, 노동자평의회등을   주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공산주의조직은 투쟁을 자극하고 투쟁을 혁명적인 결론으로 지향시킨다는 자신의 역할을 진정으로 수행할 있기 위해서는, 계급을 ‚조직’한다거나 ‚대표’하는 것과 같은 자신에게 더이상 속하지 않는 과제들 포기해야 한다.

‚19세기 이래로 아무것도 변화지 않았다’라고 주장하는 혁명가들은 마치 프롤레타리아계급을  톨스토이의 동화 속의 등장인물인  바빈(Babine) 취급하기를 원하는 같다. 바빈은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가  이전에 만났던 사람에게  말하라고 들을 것을 되풀이 한다. 그래서 그는 몇번이고 몰매를 맞는다. 독실한 신자에게는 악마에게나 했어야할 말들을 하고, 곰에게는 은둔자에게처럼 말을 했다. 그리고 불쌍한 바빈은 아둔함때문에 생명을 잃게 된다.

여기에 제시된 입장들의 정의와 혁명가들의 역할은 결코 마르크스주의의 포기나 ‚수정’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의 본질적인 것에  대한 진정한 충실함에 기반하고 있다. 레닌과 볼셔비키는, 멘셔비키의 생각에 대항해서, 투쟁의 새로운 조건들을 그리고 그것들이 강령에 있어서 갖는 함의들을 파악할 있었기 때문에1917 10월혁명에 능동적이고 결정적으로 기여할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1906년에 그녀의 당의 ‚정통’주의자들에 대항해 다음과 같이 썼을 , 그녀도 마찬가지로 혁명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따라서 만일 러시아혁명 때문에 대중파업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낡은 관점을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한다면, 그것 또한 마르크스주의의 일반적인 방법과 견해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의 영예를 획득하는 일이 것이다“(대중파업론, [룩셈부르크주의] 152, 풀무질, )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4th Quarter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