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Conline - 2016

로자 룩셈부르크의 독일사회민주당의 위기(“유니우스팸플렛”) 한국어판 서문

2015년 7월 6일, ICC

ICC100년전 제 1차 세계대전의 대학살에 대항에 쓰여진 로자 룩셈부르크의 유니우스팸플렛이 최초로 한국어 번역본으로 나오는데 여했다. 그 새로운 한국어본을 위해 작성된 서문을 여기에 공개한다. 지배계급과 그 선동기기가 1차대전 발발 100주년을 '기념하여' 다양한 형식으로 그 대학살에 대한 변명들을 늘어놓는다. 다른 한편의 혁명가들은 전쟁반대와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위해 맞섰던 그 국제주의자들의 도덕적 지적 용기를 자랑스럽게 칭송할 수 있을 것이다.

 


유니우스팸플렛은 세계의 역사적 변화의 개막을 열었던 제 1차 세계대전에 대한 최초의 주요한 이론적-정치적 분석의 하나로 쓰여졌다. 이 전쟁에서 파괴의 기계가 작동되어 전대미문의 규모로 인류를 학살했다. 예를 들어 북프랑스와 플랑드르(벨기에)에서 독가스와 같은 신무기의 사용으로 단 몇 주 동안 수만명의 병사들이 살해되었다. 종전까지 사망자가 약 2천만명에 달했다. 그리고 종전 직후, 지치고 영양실조에 시달리던 사람들 2천만명이 이후 '스페인독감'이라 알려지게 되는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1914년 8월 4일, 독일사회민주당 소속 제국의회 의원들은 전쟁차관 승인에 찬성했다. 처음으로, 프롤레타리아당의 지도부가, 이 경우에는 제 2인터네셔널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영향력있는 당 중의 하나가 국제주의의 가장 결정적인 원칙, 즉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라는 원칙을 배반했다. 그 배반자들에 대항해 독일에서 몇몇 남지 않은 국제주의자들이 로자 룩셈부르크의 거처에 모여서 국제주의의 옹호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 1년 후 국제주의자들의 최초의 국제대회가 스위스의 찜머발트1에서 조직되었다. 전쟁의 발발과 사회민주당지도부의 배반에 대응해 혁명가들은 그 전쟁의 뿌리와 그 귀결들의 분석을 시작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팸플렛, 사회민주당의 위기 그녀가 초안한 국제사회민주당의 임무에 대한 테제는 인류에게 있어 새로운 그 상황을 이해하고 혁명가들의 활동에 전망을 그려내려는 이러한 국제적 노력들의 일부였다. 그녀는 전쟁이 발발한지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915년 4월 감옥 안에서 '유니우스'라는 가명으로 이 팸플렛을 썼다. 전쟁 조건들 때문에 그 글은 즉시 출판될 수 없었고 1916년 1월에야 독일 밖에서 출판될 수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사적 상황를 놓고 볼 때, 그녀의 슬로건은 무엇보다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왜 그 전쟁이 시작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실수로부터 배우는 것이었다. 가차없고 대담한 자기비판을 행할 필요가 있었다.

근원을 찾아서

그 팸플렛의 여러 장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을 분석했다. 그녀는 자본주의가 세계적으로 팽창하면서 어떻게 그리고 왜 끊임없이 새로운 시장을 정복해야만하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너무) 뒤늦게 도착한”나라들이 어떻게 해서“먼저 도착한”나라들로부터 무력으로, 즉 전쟁을 통해서 정복물들을 빼앗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지를 보여주었다. 제국주의의 상승을 다룬 이 장들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전쟁의 역할을 보여준다. 그녀는 모든 국가들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폭로했고 이러한 발전은 어느 한 나라만에 의해서 개시되는 것이 아님을 인식했다. “(…)제국주의 정치는 어떤 한 국가 또는 몇몇 국가들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세계 발전에서 특정 성숙도의 산물이다. 그것은 국내에서부터도 국제적인 현상이자 그 모든 상호관계들 속에서만 인식될 수 있고 그로부터 어떤 국가도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분할될 수 없는 전체이다.”(본문 제 7장)

1890년대에 행한 분석에서 그녀는 폴랜드는 더 이상 독립국가가 될 수 없고 그래서 혁명가들은 더 이상 민족자결요구를 지지할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점은 1차 세계대전의 사건들로 확인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진영 안에서 국가방어전쟁에 대한 그 어떤 지지도 거부한 선구자들 중의 하나였다.“이러한 결정적인 역사적 환경을 도외시하며 세계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나라의 고립된 관점에 따라 좌우되는 모든 사회주의 정치는 이미 사상누각인 것이다.”(본문 제 7장)

전쟁 발발 후 몇 달만에 로자 룩셈부르크 참여국가들의 경제적 폐허를 초래하는 이 전쟁의 새로운 특성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새로운 역사적 조건들과 이러한 질적으로 새로운 시기가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분석한 후, 그녀는 전쟁의 발발에 있어서 주관적 조건들을 강조했다. 그녀의 결론은,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노동자당인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배반이 없었다면, 그리고 노동조합이 자본가들과 함께 서명한, 공장들에서의 당쟁중지(즉, 파업금지) 선언이 없었다면, 간단히 말해서,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이 노동자계급을 전쟁에 동원하지 않았다면 그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노동자계급과 인류에게 있어서의 귀결들

독일에서 사회민주당이 조국을 위한 지원을 호소하는 동안, 룩셈부르크는 전쟁의 종결에 있어 노동자계급의 결정적 역할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본주의가 자체의 전쟁 및 파괴충동을 제거할 것이라는 평화주의적 희망에 대해 경고했다. 그녀는 자본주의가 존속한다면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당할 것이라는 위험을 인식했다. 인류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양자택일과 직면했다.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귀결들

SPD 지도부의 배반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트, 프란츠 메링 등등을 중심으로 한 결연한 독일국제주의자들은, 당의 다수의 지지를 확보하지 않은 SPD 지도부가 당 전체를 지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룩셈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그 그룹은 모든 국제주의적 역량을 하나의 당으로 재조직하고 새로운 기초 위에 새로운 인터네셔널을 준비하기를 원했다. 룩셈부르크는 유니우스팸플렛에 부록으로서 출판된“국제사회민주당의 임무에 대한 테제”를 초안했다. 이 초안은 몇몇 변경을 거쳐 새로이 창립된 스파르타쿠스연맹에 의해 그 그룹의 가이드라인으로 채택되었다.

유니우스팸플렛의 중요성

룩셈부르크의 이팸플렛은 자본주의가 들어선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에 대한 역사적-이론적 틀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혁명가들의 활동에 대해 정치적 틀을 제공했다. 그것의 주요한 견해들 (제국주의의 역사적 발전, 쇠퇴기 자본주의사회의 전망들, 사회주의냐 야만이야, 노동자운동에서 국제주의의 문제 그리고 혁명가들의 임무)과 방법(모든 문제를 뿌리까지 파고들어 그 원칙들을 규명하는것, 가차없는 자기비판, 혁명가들의 임무에 대한 장기적 관점)은 모든 면에서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유니우스팸플렛의 이론적-역사적 기능들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 1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 쓴 다른 저작,자본의 축적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이 글에서 그녀는 자본주의의 추동력들과 그 기본 모순들 그리고 왜 자본의 축적이 특정 시기부터는 불가피하게 전쟁과 파괴를 초래하게 되는지의 윤곽을 보여주었다.

자본의 축적 출판이 이미 노동자운동 내부에서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것과 마찬가지로, 유니우스팸플렛의 출판도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 열정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제국주의의는 크든 작든 간에 모든 국가들의 암이 되었고 그래서 '민족자결' 요구는 더 이상 의제가 아니라는 룩셈부르크의 결론은 큰 논쟁을 유발했다. 전쟁 중에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 거센 논쟁이 시작되었고, 이 논쟁에서 레닌은 룩셈부르크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들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 논쟁이 공통된 국제주의의 입장, 즉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공유된 전망의 틀 안에서 이뤄졌음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제국주의 발전의 근원들 및 국제주의에 대한 배반의 근원들에 관한 그리고 혁명의 전망들에 관한 그 토론은, 억압과 추방등 가장 어려운 조건들 아래에서도 그들이 같은 방향을 향해 줄을 당기는 것을, 즉 자본주의체제의 전복을 위해 투쟁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전쟁 동안의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정신

인류에게 있어 이러한 역사적 재앙에 직면하여, 예전의 노동자당에 의한 이러한 배반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정신의 본보기, 지칠줄 모르는 결연함과 장기적 관점에서 이론적-정치적 분석을 이뤄내는 역량의 한 본보기였다.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전개된 야만성과 당의 배반은 혁명가들에게 진정한 충격이었고 그들 중의 일부는 침울함에 빠졌다. 독일의 많은 혁명가들이 수감되거나 추방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 자신도 전쟁기간 대부분 동안 감옥에 억류되었다. 4년 4개월간의 전쟁기간동안 총 3년 4개월을 그녀는 감옥에서 보내야했다. 그러나 그녀의 결연함을 굴복시키고 그녀를 침묵하게 하려는 것이 그 수감의 의도였다면, 수감된 후 그녀의 반응은 이론이라는 무기로 반격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책, 자본의 축적에 대한 비판들에 대한 대답으로 반비반을 썼다. 전쟁발발전 독일사회민주당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는 동안 그녀는 정치경제학에 관한 강의를 했었다. 수감 중에 그녀는 당 학교 교사로서 사용했던 초기의 그 강의자료로 정치경제학입문을 썼다. 그리고 그녀는 문학과 문화 문제들도 다루었는데, 러시아 작가 코로렌코의 내 동시대인의 이야기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그 서문을 작성했기도 했다. 그녀가 그녀의 최초의 러시아혁명에 대한 분석, 러시아혁명에 대하여를 작성하고 러시아에서의 혁명에서 행해진 실수들에 대한 비판을 위한 최초의 몇몇 중요점들을 발전시킨 것도 수감 중인 상태에서 였다.

물론 룩셈부르크는 감옥에 갇힌 상태로 고통받았지만, 이것은 결코 그녀의 의지를 꺾거나 사기을 저하시킬 수 없었다. 그녀가 수감 중에 쓴 기록들이나 서신들을 읽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그녀가 감옥 속에서 다룬 화제들의 다양성과 예술과 문학에 대한 일련의 편지들은 길들여질 수 없는 창조적 정신을 증언한다.“나는 종종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책읽기와 글쓰기로만 하루를 보냅니다2

자본주의의 도덕적 파산과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전망에 직면하여 그녀는 스스로 가장 결연한 투쟁에 투신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깊은 슬픔을 겪으면서도 용감한 정신을 유지했다. 그녀가 강인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이론적인 노력과 다른 열정들(예를 들어 그림그리기나 식물학)을 추구하는 능력을 통해서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거대한 지원망을 통해서 였다. 위장이 약해서 특별식이요법이 필요했던 그녀는 감옥 밖으로부터 음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녀의 저작들은 반복적으로 감옥밖으로 밀반출되었고, 이는 때때로 간수들의 묵인하에 이뤄졌다. 수감 중에 그녀는 많은 동지들과 서신교류를 했고, 그들에게 충고를 주고 감옥에 갇힌채 할 수 있는 한 최선 다해 그들을 지원했다. 감옥을 둘러싼 그 어떤 벽도 그녀를 침묵시키고 그녀가 개인들에게, 그녀의 동지들에게 그리고 노동자계급 전체에게 그녀의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막을 만큼 두껍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목소리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감옥 밖에서도 '들릴수' 있었다. 그녀가 감옥에서 풀려나는 날 약 천명의 노동자들(그 대부분이 여성들)이 감옥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가 집까지 동행했다.

그녀의 수감시기 동안의 삶은 그녀의 전체 삶의 연속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애

로자 룩셈부르크는 1871년 3월 자모치(폴랜드)에서 한 유태인 가정의 다섯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1871년은 파리코뮌의 해였고, 제 1인터네셔널 내에서 바쿠닌의 음모에 대항한 투쟁이 있었던 때였다. 17살 소녀로서 그녀는 폴랜드에서의 억압 때문에 스위스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고, 취리히대학에서 몇몇 과목들(식물학, 수학, 경제학, 역사 및 법학 등등)을 수학했다. 1897년 그녀는 '폴랜드의 산업발전'에 관한 박사논문을 제출했다. 1890년대에 이미 그녀는 폴랜드출신의 다른 동지들과 함께 제 2인터네셔널의 오래된 원칙들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녀는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발달을 감지할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제 2인터네셔널의 저항에 맞서, 폴랜드의 민족자결권이 더 이상 의제가 아니라고 결론지을 용기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입장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지배적인 입장과, 특히 레닌의 입장과 마찰을 일으켰다.

1898년 그녀는 독일로 이주하여SPD에 참여했다. SPD내부에 하나의 경향이 출현했는데 그 주요 대표자가 베른슈타인이었다. 그 경향은 자본주의가 다소 위기로부터 자유롭다는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평화로운 수단을 통해 가능하다는 생각을 옹호했다. 사실상 베른슈타인은 운동의 목표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녀의 답변,“혁명이냐 개량이냐”(1899)를 썼다. 그 시기 동안에 이미 그녀는 기회주의에 대항한 투쟁에 앞장섰다.

1903 년 그녀의 글“마르크시즘의 침체와 진전”에서 그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죽음 이후 마르크스주의 운동에서의 침체를 비탄하며 새로운 이론적 노력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그녀는 1916년 옥중에서 쓴“반비판”의 끝머리에서 다시 한번 강조하기를,“마르크스주의는 언제나 새로운 인식을 얻으려고 애쓰는 혁명적인 세계관이다. 이는 한번 유용했던 표식에 형식적으로 되는 것을 철저히 혐오하며, 자기비판이라는 정신적인 격렬한 울림에서, 그리고 정신적인 천둥번개에서 생명력을 가장 잘 유지한다.3

1904년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에 뒤이어 러시아에서 최초로 대대적 파업의 큰 물결이 일어났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20세기 계급투쟁의 새로운 원동력을 최초로 발견한 이들 중의 하나였는데, 이제는 노동자들의 주도성이 특징적인 요소가 되고 계급투쟁은 노동조합이나 당 기구에 의해 '계획될' 수가 없다. 비록 그녀가 노동자평의회의 역할을 아직 이해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책,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에서 그녀는 이러한 대중 활동을 강조했다. 계급투쟁의 이러한 새로운 원동력을 노동조합과 증가되는 사회민주당 내부 인자들은 격렬한 투쟁으로 꺽어버리려 했다. 노동조합 기구와 밀접하게 협력하면서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당 내부에서 대대적 파업에 대한 논쟁을 금지했다. 1906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대적파업에 관한 그녀의 책 출판 후“계급 증오를 조장했다”는 선고를 받고 2개월 동안 수감되어야만 했다. 사회민주당의 이전의 지도자로 마르크시즘의 정통적인“교황”으로서 알려진, 칼 카우츠키는 로자의 과격한 노선에 점점 더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 시기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를 “평화롭고”, “조화를 사랑하는”사회민주당 안에 곤란을 유발하는“유태인”, “외국인”, 그리고 “노처녀”라고 비방하는 캠페인과 중상모략이 강화되었다.

1907년 점증하는 전쟁위협에 대응하여 조직된 제 2인터네셔널 슈튜트가르트대회에서 룩셈부르크, 레닌 그리고 마르토프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자본주의 계급지배의 철폐를 촉진한다”는 공통된 지향을 위해 투쟁했다. 1912년 그녀의 책, 자본의 축적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의 저작들 속에 존재하는 한계와 모순들을 용감하게 지목했었다.그녀의 책은 아직 자본주의에 포섭되지 않고 그 외부에 존재하는 시장들의 역할과 군국주의의 특수한 기능을 파악하는데 기본을 제공한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2년전에 쓰여진 그 책은 자본주의의 기본모순들에 대한 필요불가결한 통찰을 제공한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1914년 8월 SPD 지도부의 배반이 있은 직후 룩셈부르크는 전쟁 반대 투쟁에서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유니우스팸플렛은 그래서 1890년대 이래 새로운 조건들을 이해하려는 그녀의 투쟁, 제1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게 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조건들을 설명하려는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한 도전을 설명하려는 그녀의 투쟁과 직접적인 연장선 속에 놓여있다.

1917년 여전히 감옥 속에 있으면서 그녀는 러시아에서 그때 막 시작된 그 혁명의 중요성에 대해 최초의 분석을 제공했다. 러시아에서 혁명의 문제가 제기되긴 했지만 러시아 자체에서 해결될 수는 없음이 그녀에게는 분명했다. 룩셈부르크가 1918년 11월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지배계급은 그녀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두려워했다. 특히 사회민주당 은 노동자계급에 반대한 그당의 투쟁의 표적으로 그녀를 삼았다. 1918년 12월 베를린 노동자평의회에 그녀와 독일 노동자계급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중 하나였던 칼 리프크네히트의 참여가 허용되지 않았는데, 그 핑계는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1918년 12월 독일공산당, KPD의 창립대회에서 강령에 대해 행한 연설에서 그녀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역사적 차원을 강조하면서 혁명이 테러로 복귀할 수 없으며 노동자계급 전체의 모든 에너지와 의식을 동원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매우 교활한 적에 대항한 재빠르고 쉬운 승리라는 즉각주의적 환상에 대항해 목소리를 높인 극소수 중의 하나였다. 결국 그녀를 겨냥한 중상 비방 캠페인은 1919년 1월 그 극에 달했다. 1919년 1월 중렵 소위 스파르타쿠스봉기가 진압되고 수천명의 노동자들이 학살된 뒤 로자 룩셈부르크도 암살되었다. 지배계급은 당시 가장 용감하고 통찰력있는 혁명가들중 하나를 일소해버리는데 마침내 성공하고 만 것이다.

유니우스팸플렛은 20세기와 21세기를 거치면서 점점 더 심각해지는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파악하고 착취당하는 계급에 의한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을 위한 전망을 발전시키는데 필요불가결한 그녀의 대작들 중의 하나로 남아있다. D


2 로자 룩셈부르크가 클라라 체트킨에게 보낸 1916년 7월 11일자 편지

3자본의 축적 II( 로자 룩셈부르크; 황선길 옮김,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3)에 실린“비판에 대한 반비판, 자본의 축적, 또는 아류들이 마르크스 이론으로 무엇을 만들었는가?”, 974쪽

 

브렉시트, 트럼프 : 프롤레타리아에게 좋을 것 전혀 없는 지배계급을 위한 후퇴

통제 불능에 이른 국민 투표

우리는 30년도 더 전에 "해체에 대한 테제(Theses on Decomposition)"1)를 통해 부르주아지가 그 자신의 정치 기관 중심에서 바깥으로 해체되어 가는 원심력 경향을 더욱더 통제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것의 구체적인 의미가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 투표와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 후보가 된 것으로 표현되었다. 지배계급으로부터 나온 파렴치한 정치적 모험가들은 두 경우 모두에서 지난 30년 동안 경제적 대변동에 고통받아왔던 이들의 포퓰리즘적 저항을 자신들만의 자기-확장에 이용해왔다.  

국제공산주의흐름(ICC)은 포퓰리즘의 확장에 대해 인식하고 그 결과를 설명하는데 뒤늦었다. 이것이 우리가 왜 이제야 포퓰리즘에 대해 - 여전히 조직 내에서 토론이 진행되고 있지만2) - 전반적인 글을 출간하는 이유이다. 이 글은 토론에서 제기된 문제의식을 영국과 미국의 특수한 상황에 적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빠르게 진화하는 국제 상황에서 완벽한 분석을 내놓으려는 의도는 없지만, 우리는 이 글이 새로운 사상과 토론 심화를 위한 좋은 밑거름이 되길 희망한다. 

지배계급이 통제력을 상실한 것이 영국에서의 EU 국민투표와 그 이후의 일들로 나타난 전례 없는 혼잡과 무질서의 광경만큼 너무나 명백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때까지 영국의 자본주의자들은 민주주의 절차에 대한 통제를 놓쳐본 적이 없었고, 자신들의 매우 중요한 이해관계가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이나 나이젤 파라지(Nigel Farage)와 같은 모험가들 손에 좌지우지된 적도 없었다. 

모든 면에서 브렉시트 결과에 대한 준비의 실패는 영국 지배 계급 내부의 혼란을 보여준다. 결과가 발표되고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주요한 탈퇴 운동가들은 그들의 지지자들에게 그들이 약속했던, 그리고 탈퇴 캠페인 버스의 모든 벽에 붙어있었던, 브렉시트 투표가 가져다줄 NHS3)를 위한 매주 3억 5천만 파운드 추가 자금은 본질적으로 '오타'였음을 설명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파라지는 UKIP4)대표 자리에서 사임했고, 모든 브렉시트 쓰레기더미를 그를 따르던 탈퇴 찬성자들의 무릎에 던져버렸다. 보리스 존슨은, 전임 의사소통 담당국장(director of communications) 구토 하리(Guto Harri)는 존슨의 "심장은 브렉시트 운동에 있지 않았다"며, 존슨이 브렉시트를 지지한 대의는 순수하게 기회주의적인 것이며,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에 도전하는 그의 리더십을 부흥시키기 위해 고안된 자위적 조작이라는 강한 의혹을 제기했다. 국민투표의 모든 기간 존슨의 선전부장이었으며, 존슨이 영국 총리가 되기 위한 운동을 운영할 예정이었던(그러나 반복적으로 그 일에 관심이 없음을 선언해왔던) 마이클 고브(Michael Gove)는 그의 오랜 친구 존슨이 총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근거로 후보자 등록 마감 고작 2시간 전에 스스로 총리 후보에 이름을 올리며 존슨의 등에 칼을 꽂았다. 앤드레아 리드섬(Andrea Leadsom)은 고작 3년 전에는 탈퇴가 영국에게 '재앙'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으면서 토리당 대표 경선에 확고한 탈퇴 지지자로 입후보했다. 거짓말, 위선, 말 바꾸기들 - 이 모든 것들은 지배계급의 정치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다. 충격적인 것은 세계에서 가장 노련한 지배계급이 어떤 의미에서건 국가에 대한 개인의 야망이나 사소한 맞수들의 비판 너머에 있는 압도적인 역사적, 국가적 이해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영국 지배계급의 역사에서 이와 비견할만한 사건을 찾아보자면, 우리는 쇠퇴하는 중세 질서에 대한 마지막 갈망을 보여준 장미 전쟁(셰익스피어의 헨리 6세로 극화된)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탈퇴 의견이 승리한 것에 대해 금융과 산업의 사장들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 역시 충격적이다. 결과에 대한 모든 징후가 "당신의 인생에서 보았던 가장 아슬아슬한 승부"(만약 이를 인용해도 된다면, 워털루 전쟁 이후의 웰링턴 대공)5)임을 보여주는 상황이었는데에도. 20%, 그 이후 30%로 달러에 대한 파운드화(Sterling)가 즉각적으로 붕괴했던 것은 브렉시트가 기대한 결과가 아님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파운드화의 가치는 국민 투표 이전에 반영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은행과 사업가들이 사무실을, 또는 사업체를 더블린이나 파리로 옮기는 것과 같이 탈출을 향해 질주하는 가감 없는 장관에 배가 부를 정도였다. 세계에서 해외 직접투자(Foreign Direct Investment, FDI) 의존도가 가장 높은 영국경제 상황에서 조지 오스본(George Osborne)이 즉각적으로 법인세를 15%로 내리기로 한 것은 영국에 기업들을 잡아두기 위한 명백한 긴급 비상조치였다.

제국의 반격

영국의 지배계급은 아직 쓰러지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분별력 있게 존속을 지지해왔던 확고하고 역량이 뛰어난 정치인인 테리사 메이(Theresa May)가 캐머런의 즉각적인 후임 총리가 되었고(애초에 9월 이전에는 그렇게 기대되지 않았다), 언론과 토리당의 국회의원들에 의해 그녀의 반대편인 앤드리아 리드섬과 마이클 고브가 직장을 잃은 것은 국가의 유력한 지배계급 일부에 대해 신속하고 통일된 반응을 할 수 있다는 그들의 진정한 역량을 보여준다.

근본적으로 이 상황은 세계 자본주의의 진화와 계급 사이 힘의 균형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은 자본주의 쇠퇴기라는 현 단계에서 통일된 부르주아 정책이 분해되어가는 더욱 전반적인 움직임의 산물이다. 포퓰리즘으로 기울어지는 경향 너머의 추동력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포퓰리즘의 문제에 기여한 토론"에서 분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반적인 국제 현상은 특정 국가의 역사와 특징들의 영향 아래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띤다. 그래서 토리당은 항상 그 EU에서 영국의 구성원 자격을 실제로 허락한 적이 없는, "유럽연합에 대해 회의적인" 한 측면을 담당해 왔고, 그 근원은 우리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1. 유럽의 해안에서 떨어져 있는 영국의 - 그리고 그 전에는 잉글랜드의 - 지리학적 위치는 영국이 대륙의 국가들이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유럽의 경쟁으로부터 분리된 채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해 왔다.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 지주 권력의 부재 또한 프랑스가 19세기 이전, 또는 독일이 1870년 이후 그러했던 것처럼 유럽 지배를 바랄 수 없도록 했고, 오직 주요 강국들이 서로가 서로를 적대하도록 하고, 그들 중 어느 나라와도 연루되는 것을 회피함으로써 그들의 생존의 이해를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
  2. 영국의 섬으로서의 지리학적 위치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산업화한 국가의 지위는 대항해시대, 세계 제국주의의 개막을 결정지었다. 적어도 17세기부터 영국의 지배계급들은 전 세계에 모양새를 갖추었고, 그것은 다시 그들에게 유럽 정치로부터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러한 상황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격하게 변했다. 영국의 세계 강대국으로서의 지배적인 지위는 더는 유지 가능하지 않았고, 근대적 전쟁 기술들 - 공군, 장거리 미사일, 핵무기 – 로 인해 유럽 정치로부터의 고립이 더는 선택사항이 아님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를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 중 하나가 윈스턴 처칠(Winston Curchill)이다. 그는 1946년 "유럽 연방국(United States of Europe)"을 만들자고 요구하였으나 보수당 내에서 그의 입장은 전적으로 승인되지 못했다. <편집자 주 : 처칠의 구상에서 유럽연방국에 영국이 포함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아 논쟁이 되고 있다.특히 소련(USSR)의 몰락과 1990년대 독일 통일이 실질적으로 유럽에서 독일의 권력을 증가시킴에 따라 EU의 구성원이 되는 것에 대한 반대의견이 증가했다.6) 국민투표 운동 동안 보리스 존슨은 EU가 “히틀러” 독일 지배의 도구라고 이야기하는 중상모략을 하였으나, 이러한 사건은 그가 처음이 아니었다. 거의 똑같은 언어로, 그와 똑같은 감수성들을 이미 1990년에 니콜라스 리들리(Nicholas Ridley)가, 그 이후에는 대처 정부의 총리가 표현한 바 있다. 그것은 전후 정치 기관 내에서 권위와 규율의 상실을 의미하는 상징이었다. 다만 리들리는 정부로부터 즉각 사임할 수밖에 없었던 반면, 존슨의 반향은 새로운 내각의 구성원에게 영향을 주었다.

영국이 세계의 가장 위대한 제국주의 국가로서 한때 누렸던 지위. 그 지위의 상실은 영국 국민들(노동계급을 포함하여)의 심리적, 문화적 현상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국가적 집착은 - 영국이 마지막으로 독립적인 세계 강대국으로서 행동할 수 있었던 - 이를 완벽하게 묘사한다. 영국 부르주아지의 일부와 더 많은 소부르주아지는 영국이 오늘날 오직 2등급, 또는 3등급의 강대국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탈퇴 운동가들의 다수가 EU의 "족쇄"로부터 영국이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세계는 영국의 상품과 서비스를 사러 몰려들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영국 경제가 매우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가능성이 큰 환상에 불과하다.

제국주의 권력의 상실에 대해 바깥 세계로 향하는 분노와 적개심은 미국 국민이 자신들의 지위 일부를 잃었다고 인식한 결과(트럼프의 "다시 위대한 아메리카를 만들자"는 지속적인 테마)로서의 감성들, 그리고 냉전 시기 그들이 자신들의 법칙을 부여할 수 있었던 능력의 상실에서 비롯되는 감성들에 비견할 만하다.

포퓰리즘에 대한 양보로서의 국민투표

보리스 존슨의 포퓰리즘 광대 짓은 더욱 극적이었고, 더욱 많은 미디어로부터의 주목을 받았다. 그 후 데이비드 캐머런의 낡은, 최상위 계급의 "책임감 있는" 페르소나가 발휘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캐머런은 지배 계급 내에서 얼마나 부패가 진행되었는지를 더 잘 보여주는 지표이다. 하지만 지난 총선에서 이기려고 당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국민투표라는 카드를 이용한 무대를 만든 것은 캐머런이었다. 바로 그 성격으로 인해 국민투표는 의회 선거보다 통제하기 훨씬 어렵고, 그러하기에 언제나 도박을 의미한다.7)카지노에 중독된 것처럼, 캐머런은 반복하여 스스로 도박사임을 드러내었는데, 처음에는 아슬아슬하게 그가 승리했던 스코틀랜드 독립에 대한 국민투표였고, 그다음이 브렉시트였다. 그의 보수당은 언제나 경제, 영국(연합 왕국)8), 그리고 국방의 최고의 보호자임을 자처해 왔는데 이번에는 이 세 가지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고 말았다. 

결과 조작이 어려운 상황에서, 국가 이해의 중요한 문제에 대한 국민투표는 지배계급에 있어서 대부분 결과를 보장할 수 없는 위험이다. 의회 민주주의는 전통적, 이데올로기적 의미에서, 그리고 심지어 쇠퇴기의 그릇된 형식에서도 그러한 문제에 대한 결정은 전체 대중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문가들과 이해관계자 그룹들의 조언을 받은(로비를 받은) “선출된 대표자들”에 의해 내려지게 되어 있다. 부르주아지의 관점에 의하면, 이를테면 2004년 EU의 헌법 조약(Constitutional Treaty)과 같은 복잡한 문제에 대해, 대부분의 투표자들이 조약 문서를 읽으려고도 그리고 읽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물어서 결정하는 것은 완전히 미친 짓이다. 국민투표들에서 자주 “잘못된” 결과를 얻었던 지배계급이 이 조약을 연기시켰다는 것은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프랑스, 네덜란드, 최초에는 아일랜드에 대해).9)

오늘날 영국 부르주아 정당 내부에 메이 정부가 프랑스와 아일랜드 정부가 헌법 조약에 대한 국민투표를 망친 뒤 했던 것과 같은 속임수를 쓰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국민투표를 무시하거나 뒤집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단기간에 그렇게 될 가능성이 적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영국 부르주아지가 그 추종자들보다 더 민주주의를 신뢰해서가 아니라, 정확하게는 “대중의 의지”의 “민주주의적 표현”을 무시하는 것이 오직 포퓰리즘 사상에 신뢰를 부여하고 그들을 보다 위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테리사 메이의 전략은 EU로부터 탈퇴하게 된 영국을 조직할 책임을 떠맡은 채, 장관직에서 최대한 잘 해보려고 애쓰고, 가장 잘 알려진 탈퇴 찬성자 셋과 함께 브렉시트의 길을 멈추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광대인 존슨을 국제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것 - 해외 인사들을 공포와 유쾌함과 불신이 뒤섞인 감정으로 환영하는 것 - 도 분명 이러한 폭넓은 전략의 일부이다. 존슨을 EU 탈퇴 협상이라는 논란이 많은 자리에 앉힘으로써, 메이는 탈퇴 운동가들의 주요한 발언들이 거의 확실하게 적대적인 언어로 가득할 대부분의 격렬한 비난 - 그리고 불신 - 에 직면할 것임을, 그리고 이는 측면 저격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 것임을 확신했다.

특히 유럽이나 미국의 포퓰리즘 운동에 찬성하는 이들이 갖는, 엘리트가 단순히 그들에게 불편한 결과를 무시하기 때문에 모든 민주주의 과정은 협잡이라는 인식은 지배계급의 체계로서의 민주주의 효율성에 실질적인 위협이다. 정치에 대한 포퓰리즘 개념에서는 “사람들에 의한 직접적인 결정”이 기존의 정치 엘리트에 의한 선출된 대표자들의 부패를 피하도록 해 줄 것이다. 이것이 독일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부정적 경험과 나치 독일이 국민투표를 이용했던 경험 이후 전후(post-war) 헌법에서 그러한 국민투표를 배제한 까닭이다.10)

탈선한 선거

만약 브렉시트가 통제에서 벗어난 국민투표였다면, 2016년 미 대선 후보로 트럼프가 당선된 것은 정도를 벗어난 선거이다. 트럼프가 후보가 되었다는 것이 처음 공언되었을 때에는 그 사실이 거의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선두는 부시 왕가, 공화국 귀족들의 선호하는 선택, 그리고 잠재적인 강력한 기금 조달자(언제나 미국 선거에서 결정적인 고려사항)는 젭 부시(Jeb Bush)였다. 그러나 모든 기대를 저버리고, 트럼프는 초반 프라이머리에서 승리했고, 그다음 주(state) 선거에서 계속 이겨나갔다. 부시는 ‘픽’ 소리를 내며 쓰러져 나갔고, 다른 후보들도 다르지 않았다. 공화당 대표자들은 트럼프를 이길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후보는 테드 크루즈(Ted Cruz) 뿐이라는 불쾌한 전망에 직면해야 했다. 그는 자기네 상원 의원들로부터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그리고 트럼프보다 아주 조금 덜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사람으로 여겨지는 인물이었다.

트럼프가 클린턴을 이길 가능성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상황이 얼마나 비정상적으로 돌아가는지 보여주는 지표이다. 그러나 벌써 트럼프 후보는 제국주의 동맹들의 모든 시스템을 통해 충격을 선사하고 있다. 미국은 70년 동안 그 효과성이 상호 방어의 불가침 - 하나에 대한 공격은 모두에 대한 공격 - 에 의존하는 나토(NATO, 북대서양 조약기구) 동맹의 보증국이었다. 트럼프가 만약 러시아가 발트 해 국가들을 공격했을 때 “그들이 대가를 치렀는지”에 대한 그의 판단에 미국의 반응이 달려있을 것이라고 선언한 방식으로, 미래의 미국 대통령이 NATO 동맹과 그 조약의 의무를 존중할 준비가 되었음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때가 온다는 것은, 푸틴의 마피아 국가에 직접적으로 대면하고 있는 동유럽 지배계급의 등골을 오싹하게 할 것이며, 중국이라는 용으로부터 보호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일본, 대한민국, 베트남, 필리핀 등의 아시아 국가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그러할 것이다. 우크라이나에 러시아 군대는 없다는 트럼프의 최근의 발언(러시아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크리미아(크림 반도)가 우크라이나의 일부라고 여긴다는 사실을 완전히 모르는 것)을 보았을 때, 트럼프가 단순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것이라는 가능성은 높은데 이것 역시 다른 이들에게 매우 위급한 상황임을 알려주는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트럼프는 러시아 정보국의 민주당 IT 시스템 해킹을 환영하고 푸틴을 초대하기까지 했다. 그것이 트럼프에 조금이라도 얼마나 피해를 줬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1945년 이후 공화당이 극단적으로까지는 아니어도 격렬하게 반러시아적이었으며, 어떤 비용을 들여서라도 강력한 군대 조직과 세계 각지에 배치된 다수의 군대 존재를 옹호하는 것(이것은 재정 적자 수준을 급등하게 한 레이건의 엄청난 군비 증강이었다)을 떠올려 볼 가치는 있을 것이다.

공화당이 그 후보를 극단적으로 위험하게 취급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1964년, 프라이머리에서 종교적 우익과 “보수 연합”의 지지로 인해 승리한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는 오늘날 티 파티 운동의 선구자였다. 그의 정책은 적어도 일관적이었다. 연방 정부 예산, 특히 사회 안전망에 대한 예산의 대대적인 감축, 군비 증강, 소련에 대항하는 핵무기의 사용 준비 등. 그것은 전통적인 극우 정책이었으나, 미국의 국가 자본주의의 필요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골드워터는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패배했는데, 이는 공화당의 지배층이 그를 지원하는 데 실패한 것에 부분적인 원인이 있었다.

트럼프는 단지 골드워터 2.0 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 차이는 유익하다. 골드워터 후보는 그 시기 “티 파티 운동”에 의해 대표되는, 골드워터의 패배 이후 몇 년 동안 물러서야 했던 - 보수당의 권력 장악을 대표한다. 최근의 10~20년 동안 이러한 경향이 돌아왔으며, 이 경향이 GOP11) 권력을 다소간 성공적으로 차지해 왔음은 비밀도 아니다. 그러나 골드워터 지지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보수 연합”이었다. 그들은 심각한 사회 변화(페미니즘, 시민권 운동, 베트남 전쟁 반대의 시작, 전통적인 가치의 몰락)를 경험하는 미국 내에서 진정으로 보수적인 경향을 대표했다. 비록 많은 티파티의 “원인”이 골드워터와 같을지라도, 맥락은 그렇지 않다. 그가 반대하는 사회적 변화는 이미 일어난 것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티파티는 보수의 연합이라기보다 신경증적인 반응의 동맹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문제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고 기본적으로 미국의 군사력과 이윤을 가져다주는 자유 무역에만 관심이 있는 대(大)부르주아지의 어려움을 증가시켰다. 공화당 프라이머리에 나서는 자가 스스로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 “완전무결함”을 증명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가 되었다: 낙태(당신은 “생명을 존중하는 이”가 되어야 한다), 총기 규제(총기에 저항하기 위해), 재정적 보수주의와 낮은 세금, “오바마케어”(사회주의, 이는 철폐되어야 한다. 실제로 테드 크루즈의 신용 일부는 상원에서 오바마케어에 저항하는 대중 호소 필리버스터를 한 것에 기반을 뒀다), 결혼(신성한), 민주당(만약 사탄이 당을 만든다면, 그것은 민주당일 것이다). 자, 짧은 몇 달의 기간 트럼프는 효과적으로 당의 핵심골자를 빼버렸다. 우리는 그 스스로 낙태, 총기 규제, 결혼(그 스스로 세 번이나 했다)에 대해 “신뢰할 수 없음”을 보여준 인물, 과거 스스로 악마 힐러리 클린턴에게 기부했던 인물이 후보가 되었음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그는 최저 임금의 인상,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오바마케어의 유지, 고립주의 해외 정책으로의 회귀, 재정 적자 폭의 증대, 그리고 미국 경제에 필수적인 저임금 노동을 제공해 온 천백만의 이민자들의 추방을 제안한다.

브렉시트에서의 영국의 토리당처럼, 공화당과 잠재적인 미국의 모든 지배 계급은 자신들의 제국주의적인 입장과 경제적 계급의 이해관계에 대해 완전히 불합리한 정책을 가진 말안장 위에 스스로 올라탔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함의

우리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후보 당선이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제국주의적 수준에서 더욱 불안정한 시대로 안내할 것이라는 점이다. 경제적 수준에서 유럽 국가들 - 우리는 이들이 세계 경제의 중요한 부분이며 가장 큰 단일 시장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은 이미 허약한 상황에 부닥쳐있다. 그들은 2007/8년의 금융 위기와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위협을 경험하였으나, 그것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영국은 주요 유럽 경제권에 남아있지만, EU와의 연결을 끊어내는 오랜 과정은 예측할 수 없게 파탄 날 것이며, 이는 적어도 금융 수준에만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브렉시트가 유럽의 은행, 보험, 그리고 주식거래의 중심지인 런던에 어떠한 영향을 가져올지 아무도 모른다. 정치적으로 브렉시트의 성공은 유럽 대륙의 포퓰리즘 정당들만을 고취시키고 그들에게 큰 힘을 실어줄 것이다. 내년 반유럽주의자이며 포퓰리스트인 마린 르 펜(Marine Le Pen)이 있는 국민 전선이 프랑스 대선에서는 가장 큰 단독 정당이다. 유럽 강대국들의 정부는 영국의 유럽으로부터의 분리를 가능한 부드럽고 마찰 없이 이뤄내려는 열망과 영국에 대한 어떤 양보(이를테면 인구의 이동은 제한한 채 시장에의 접근은 허락하는)도 다른 이들에게 - 지적하자면 폴란드와 헝가리와 같은 국가들에게 - 같은 생각을 하게 할 수 있다는 실질적 두려움 사이에서 갈가리 찢겨졌다. 과거 유고슬라비아 국가들을 통합함으로써 유럽의 남동쪽 국경을 안정시키려는 시도는 완전히 중단될 것이다. 터키 에르도안(Erdogan)의 쿠데타와 시리아 난민들을 공갈·협박의 비열한 게임의 말로써 쓰는 것에 대해 EU는 통일된 반응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비록 EU 그 자체가 제국주의 동맹이었던 적은 없으나 그 구성원의 대부분은 NATO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따라서 유럽의 단합을 약화시키는 어떤 것도 러시아가 동유럽의 측면, 우크라이나와 발트 해 국가들을 무너뜨리는 압력에 반격하는 NATO의 능력에 도미노 효과를 불러올 것이다. 러시아가 가끔 프랑스의 국민 전선에 자금을 지원하고, 독일의 페기다(Pegida: Patriotische Europäer gegen die Islamisierung des Abendlandes, 서양의 이슬람화를 반대하는 애국 유럽인) 운동에는 자금을 지원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브렉시트 국민투표의 유일한, 가장 뚜렷한 승자는 사실 블라디미르 푸틴이다.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트럼프 후보자는 이미 미국의 신뢰성에 한 방 펀치를 날렸다. 핵무기 버튼에 손가락을 얹은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생각은, 반드시 말해둬야겠는데, 매우 두려운 전망이다.12) 그러나 우리가 수차례 이야기한 것처럼, 오늘날 불안정과 전쟁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그 지배적인 제국주의적 지위를 모든 이민자에 저항하여 유지하고자 하는 미국의 결의이며 이 상황은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기구에 대한 분노

보리스 존슨과 도널드 트럼프는 수다쟁이라는 것 외에 다른 것도 공유하고 있다. 둘 다 정치적 모험주의자이며 국가의 이해를 넘어서는 어떤 원칙이나 감성도 결여하고 있다. 둘 다 자신들의 메시지를 왜곡시키든 바꾸든 그들의 청중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들려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의 익살은 그것들이 터무니없어 보일 때까지 미디어에 의해 부풀어 오른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완전히 하찮은 것들이며 세계화의 패배자들의 울부짖는 분노, 절망, 그리고 부유한 엘리트와 자신들의 비참함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민자들에 대한 증오를 쏟아내는 창구일 뿐이다. 그러므로 트럼프는 가장 무도하고 모순적인 발언을 대충 지껄여버린다. 그의 지지자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이 듣길 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존슨과 트럼프가 똑같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차이는 개인적인 인격의 차이라기보다 그들이 속한 지배계급의 차이와 관계가 있다. 영국 부르주아지는 수 세기 동안 세계무대에서 중요한 지배적인 역할을 해 왔다. 이에 비해 미국의 거칠고 대담하며, 자기-몰입적인 국면은 제2차 세계대전에 진입하는, 루스벨트의 고립주의자들에 대한 승리와 더불어 끝났다. 미국 지배 계급의 중요한 분파는 여전히 바깥 세계에 대해 무지한 채로 남아있다. 어떤 이는 그들이 발달이 늦은 성인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선거의 결과는 우리에게 노동 계급의 상황에 대해 무엇인가를 이야기해 줄지언정 절대 계급의식의 표현은 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되었든 미국에서의 트럼프에 대한 지지가 되었든, 프랑스의 국민 전선의 마린 르 펜이 되었든, 또는 독일의 포퓰리즘인 페기다와 독일을 위한 대안(Alternative für Deutschland, AfD)이 되었든, 이러한 당과 운동이 노동자의 지지를 얻는 곳에는 지난 40년 동안 자본주의 경제 변화로부터 가장 고통받은 이들이 있음을, 그들의 삶의 조건에 대한 좌우익을 막론하고 정부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고 패배한 수년의 경험이 그들로 하여금 지배 엘리트를 위협할 수 있는 방법은 똑같은 엘리트에 대한 저주를 정책으로 하는 무책임한 정당을 향해 보란 듯이 투표하는 것일 뿐임을, 합리적으로 결론내린 이들이 있는 곳임을 모든 투표 수치는 보여준다. 비극이라면, 이러한 노동자들이 정확히 1970년대 투쟁에 가장 대중적으로 참여했던 이들이라는 점이다.

브렉시트와 트럼프 선전의 공통 주제는 “우리”는 “다시 통제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무엇이 되었든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 실제로 통제해 본 적 없다. 보스턴 UK 의 한 거주자가 “우리는 단지 모든 것들을 원래 있었던 자리로 되돌리고 싶을 뿐입니다”고 이야기한 것처럼. 그때란, 일자리가 있었을 때, 그 일자리가 적절한 임금을 보장해 줄 때, 노동 계급 공동체의 사회적 연대가 실업과 태만으로 무너지지 않았을 때, 변화가 뭔가 긍정적이고 조절 가능한 속도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을 때이다.

브렉시트 투표가 영국에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자가 목조 뒤에서 기어 나오는 것이 더욱 자유롭다고 느끼는 새롭고 추악한 분위기를 조장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진실이다. 그러나 브렉시트 또는 트럼프에 이민을 멈추라고 투표한 많은 - 아마도 절대다수 - 이들은 그렇게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다. 그보다 그들은 외국인 혐오로부터 고통받고 있다. 외국인에 대한 공포, 알려지지 않은 자에 대한 공포. 그리고 이 ‘알려지지 않은 자’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경제 그 자체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생산의 과정에서 실제의 사회관계를 마치 자연적인 힘으로, 요소로, 마치 날씨와 같이 통제 불가능한 것으로, 그러나 노동자들의 생활에의 영향력은 훨씬 파괴적일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여, 본질적으로 신비스럽고 이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시대와 같은 과학적 발견의 시대, 사람들이 더는 궂은 날씨를 마녀가 일으킨 것이라고 믿지 않는 시대에, 그들의 경제적인 비통함이 그들의 불행한 이민자 동료들에 의해 일어났다고 믿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다는 사실은 매우 끔찍한 아이러니이다.

우리가 직면한 위험

우리는 이 글을 “해체에 대한 테제”를 언급하면서 시작했다. 해체에 대한 테제는 거의 30년 전인 1990년에 썼다. 우리는 그 테제를 인용하며 결론을 짓고자 한다.

“우리는 특히 프롤레타리아가 스스로 그 역사적 책무의 수준에 도달하는 능력이 해체될 위험에 대해 명확히 해야 한다. (…) 노동계급의 힘을 구성하는 서로 다른 요소들은 바로 이 이데올로기 해체의 다양한 측면들에 직면한다.”

  • 연대와 집단적 행동은 ‘자신의 이익을 찾는’ 원자화에 직면한다.
  • 조직의 필요는 모든 사회적 삶의 기반이 되는 관계의 파괴, 사회적 해체에 직면한다.
  • 프롤레타리아의 미래에 대한 신뢰와 그 자신의 힘은 지속해서 사회에 만연한 절망과 허무주의에 의해 활력을 잃는다. 의식, 명석함, 일관되며 통일된 생각, 이론의 달콤함은 환상, 마약, 분파주의, 신비주의,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에 대한 거부 또는 파괴의 가운데로 곤두박질치는 어려운 시기를 겪을 것이다."

그 위험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것들이다.

포퓰리즘의 유행은 지배계급에 위험한데, 포퓰리즘이 지배계급의 정치 기관들을 통제할 능력을 위협하는 동시에, 지배계급의 사회적 지배를 지탱하는 기둥인 민주주의의 신비화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프롤레타리아에게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반대로,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혼란에 대해 어떤 대안적 전망도 제공하지 못하는 무능력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의 허약함이며, 그것이 포퓰리즘의 유행을 가능하게 했다. 프롤레타리아만이 오늘날 사회가 직면한 막다른 길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스스로 유혹의 말 - 포퓰리스트 선동가들이 약속하는, 어떤 경우에라도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과거로의 회귀라는 불가능한 약속에 스스로를 맡긴다면,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2016년 8월, Jens

국제공산주의흐름

<주>

1) International Review 107, 2001년 출판

2) International Review의 이 주제를 보라.

3) 국가 의료 제도(National Health Service)

4) 영국 독립당(United Kingdom Independence Party): 1991년 세워진 포퓰리즘 정당. 그 선전은 본질적으로 EU 탈퇴와 이민 반대이다. 역설적으로 유럽 의회에서 가장 거대한 단독 영국 정당을 구성하는 22명의 MEPs 를 보유하고 있다.

5) EU와 영국 재무부가 탈퇴 캠프가 승리할 경우 상황에 대한 계획에 대해 일정정도 노력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준비가 부적절하며 - 아마도 보다 적절하게는 - 아무도 탈퇴파가 국민투표에서 승리할 것이라도 진실로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이것은 탈퇴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진실이었다. 명백히, 파라지는 국민투표 날 잔류파의 승리를 인정했으나, 잔류파가 패배한 다음 날이 되어서야 그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6) 1973년 보수당 정권 아래 영국은 유럽 경제 공동체(EEC)에 가입했다. 그 구성원 자격은 1975년 노동당 정부의 국민투표에 의해 승인되었다.

7) 대처가 의회 선거에서 40% 이상의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10년 넘게 권력을 유지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8)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그리고 북아일랜드의 통합 왕국 연합이라고 이야기된다.

9) 이러한 불편한 결과에 따르면, 유럽 정부들은 헌법 조약을 채택하지 않았고, 2009년 리스본 조약으로 기존의 협정을 단순히 수정함으로써 가장 본질적인 요인을 구했다.

10) 스위스와 캘리포니아에서 있었던 국민투표와 구분해야 한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정립된 정치적인 과정의 일부였다.

11) “Grand Old Party”,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사용된 공화당의 구어식 표현이다.

12) 골드워터 패배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전술적 핵무기를 사용할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한 것이다. 존슨의 선전은 골드워터의 슬로건 “당신의 가슴 속에서 당신은 그가 옳음을 알고 있다”와 대비되게 “당신의 창자에서, 당신이 그가 괴짜임을 안다”라는 슬로건으로 맞받아쳤다.

 본 기사는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원문출처┃http://en.internationalism.org/international-review/201608/14087/brexit-trump-setbacks-ruling-class-nothing-good-proletariat

 

트럼프대통령 : 사멸해가는 사회체계의 상징

고대로마 시대가 기울어갈 무렵 로마황제들의 광기는 예외적이 아니라 지배적인 현상이었다. 그것이 로마가 노쇠하고 있다는 징후였음을 역사가들은 의심하지 않는다. 오늘 무시무시한 광대 하나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에서 왕이 되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 사실은 자본주의 사회가 그 자체의 쇠퇴에서 더 진전된 단계에 도달했음의 징후로서 이해되지 않는다. 그 체제의 진원지에서 대중추수주의(Populism)의 쇄도는 단기간에 연이어 브렉시트와 도달드 트럼트의 승리를 초래했는데, 이 사실은 지배계급이 지금까지 몇 십년 동안 자본주의에 내재적인 붕괴경향을 억제하는데 활용해 온 정치기구에 대한 장악력을 잃고 있음을 표현한다. 우리는 지금 사회질서의 가속된 해체에 의해서, 지배계급이 인류에게 미래의 전망을 제시할 수 없는 그 완전한 무능함으로 인해 생겨난 거대한 정치적 위기를 목격하고 있다. 그러나 대중추수주의는 또한 피착취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적 대안을 추진하지 못함으로 해서 결과되는 산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기력한 분노와 공포, 소수자들의 희생양화, 그리고 실제로 결코 실존한 적이 없는 과거에 대한 허상적 추구에 기반한 반동에 말려들어갈 심각한 위험이 있다. 전세계적인 현상으로서의 대중추수주의의 근원들에 대한 이러한 분석은 '대중추수주의 문제에 대하여(On the question of populism)'라는 글에서 더 깊이 전개되어 있다. 우리는 독자들이 그 글이 제공하는 일반적인 틀을 브렉시트 결과와 대통령후보로 떠오른 트럼프에 대한 우리의 초기의 좀 더 구체적인 대응, '브렉시트, 트럼프 : 프롤레타리아에게 좋을 것 전혀 없는 지배계급을 위한 후퇴(Brexit, Trump: setbacks for the ruling class, nothing good for the proletariat)'와 함께 검토할 것을 권한다. 이 두 글은 우리의 국제평론(International Review) 157 호에 실려있다.

우리는 또한 ' 트럼프 대 클린턴: 부르조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나쁜 선택들일뿐(Trump v. Clinton: nothing but bad choices for the bourgeoisie and the proletariat) '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10월초에 작성된 이 기사는 트럼프가 백악관에 입성하는 것을 막기 위해 US부르조아지의 좀 더 '책임감있는' 분파들이 민주당과 공화당을 막론하고 거의 미친듯이 노력하는 것을 살펴보았다1. 이러한 노력들은 명백하게 실패했는데 이 실패를 초래한 더 즉각적인 요소들 중의 하나로는, 클린턴이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바로 그 순간에 연방수사국의 국장, 제임스 코메이(Comey)가 어이없게 개입한 것을 들 수 있다. US정보기구의 심장인 FBI는 클린턴이 국가안보의 기본적인 법규들에 위배되게도 사적인 이멜 서버를 사용한 점을 더 조사한 뒤 그녀가 이후에 형사소송에 관여될 지도 모른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녀의 당선 기회를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그 일주일 정도 뒤 코메이(Comey)는 FBI가 점검한 모든 자료들에서 그 어떤 불리한 점도 없었다고 선언함으로써 후퇴를 시도했다. 그러나 피해는 이미 발생해버렸고 ' 그녀를 감옥에'라고 집회들에서 끊임없이 반복해서 주장해 온 트럼프 캠페인에 FBI는 주요한 기여를 했다. 그런데 FBI의 그 기념비적인 실수는 국가기구의 중심에서 정치적 통제력이 점점 더 상실되어감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표현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차악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

'트럼프 대 클린턴(Trump v. Clinton) ' 기사는 역사의 현시기에 부르조아 민주주의와 선거는 노동자계급에게 어떤 선택도 제공하지 않는 거대한 사기극이라는, 그것들에 대한 공산주의의 입장을 선명하게 재언급하면서 시작한다. 이렇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은 이번 선거에서 아마도 가장 심했던 것 같은데, 이는 명백하게 인종차별적이고 여성혐오적인 사안을 가진 오만한 쇼맨 트럼프와 지난 30년 동안 국가자본주의의 지배적인 형식인 '신자유주의'를 체화하는 클린턴 사이에 이뤄졌기 때문이다. 두가지 악 사이에서 선택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해 유권자들의 상당부분은 미국선거들에서 늘 그렇듯이 아예 투표를 하지 않았다. 초기의 추정투표율은 57%이하로서, 투표하러 가라는 그 모든 압력들에도 불구하고 2012년의 투표율보다 낮았다. 동시에 두 진영 모두에 비판적이지만 특히 트럼프에 비판적인 많은 이들은 결국 차악으로서의 클린턴에 투표했다. 우리는 부르조아가 제공하는 것에 대한 환상이 깨짐으로 인해 부르조아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기껏해야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비록 노동자계급이 계급으로서 행동하지 않을 때 극도로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자본주의 국가의 해체를 관통하게 될 또 다른 사회조직방식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은 본질적이다. 그리고 선거 이후의 시기에, 기존의 정치사회질서를 이렇게 거부하는 것, 부르조아국가라는 감옥의 밖에서 그리고 그것에 대항하여 노동자계급이 그 자신의 이해를 위해 투쟁할 필요성을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그 만큼 적절하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트럼프반대주의, 일종의 개편된 반파시즘2 쪽으로 이끌려가게 될 것이고 이것은 다시 부르조아의 좀 더 '민주적인' 분파들, 가장 그럴듯하게는 민주당 대선후보지명전에서 버니 샌더스3가 그랬던 것처럼 노동자계급과 사회주의의 언어를 말하는 그런 분파들의 입장을 취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트럼프주의의 사회적 기초

이글은 트럼프에 투표한 사람들의 동기와 사회적 구성을 자세하게 분석하는 자리가 아니다. 트럼프 캠페인에 그렇게 결정적인 여성반대 수사학인, 여성혐오주의는 자체의 역할을 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점은 특히 지난 몇 십년 동안 성별관계에 나타난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변화들에 대항한 훨씬 더 세계적인 '남성의 반격' 의 일부이기에 그 자체로 연구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모든 중심부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인종차별주의와 외국인혐오증이 불길하게 성장해 왔고 이점은 트럼프 갬페인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아메리카의 인종차별주의에는 이해될 필요가 있는 그 특유한 요소들이 또한 존재한다. 즉, 단기적으로는, 오바마의 대통령직과 미국판 '이민자 위기'에 대한 반응,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노예제와 차별의 유산 전체가 그러한 요소들이다. 초기의 통계로 볼 때, 대략 88% 의 흑인 유권자들이 클린턴진영을 선택한 반면 친트럼프표는 압도적으로 백인들( 비록 상당수의 '히스페닉'들을 동원하긴 했지만) 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미국 인종분리의 긴 역사는 극명하게 보여질 수 있다. 우리는 앞으로 작성될 기사들에서 이 문제들을 다시 다룰 것이다.

그러나 대중추수주의에 관한 우리의 기사에서 주장하듯이 트럼프의 승리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는 대다수를 희생하여 특히 오래된 제조 및 생산산업의 노동자계급을 희생하여 작은 소수만을 부유하게 만드는 거시경제적인 과정들인 경제지구화와 금융화와 동일시되는 신자유주의 '엘리트'에 대한 분노였다고 생각된다. '지구화(Globalisation)'는 자동차와 철강같은 산업들이 도매식으로 분해되어 노동력이 더 값싸고 이윤이 훨씬 더 높은 중국과 같은 나라들로 이전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또한,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을 의미했는데, 이는 자본주의에 있어 '빈곤한' 나라에서 '부유한' 나라로의 이주를 통해 노동력을 값싸게 만드는 또다른 수단이었다. 금융화는 대다수에게는 경제생활을 점점 더 신비스런 시장의 법칙들이 지배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더 구체적으로는 많은 작은 투자자들과 희망찬 주택소유자들을 파산하게 만들었던 2008년의 대폭락을 의미했다.

다시 말하자면, 앞으로 좀 더 자세한 통계적 연구들이 필요하겠지만, 트럼프 캠페인의 핵심적 강점은 대학교육을 받지않은 백인들로부터, 특히 소위 '대도시의 자유주의 엘리트' 안에 체화되어 있는 기존의 정치질서에 반대하는 저항의 하나로 트럼프에게 투표한 새로운 산업 황무지들인 '녹슨 지대(Rust Belt)'의노동자들로부터 받은 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노동자들이나 이 지역들의 다수는 이전의 대선에서 오바마에게 투표했고 몇몇은 민주당의 대선후보경선에서 버니 샌더스를 지지했다. 그들의 표는 무엇보다도 부의 점점 더 커져가는 불평등에 대항한, 그들 자신과 자식들에서 어떤 미래도 보장하는 않는다고 느껴지는 그 체계에 대항한 그러한 반대의 표였다. 그러나 진정한 노동자계급운동의 완전한 부재라는 틀 안에 결국 이러한 반대는 엘리트가 외국 투자자들에게 나라를 팔아먹는고, '순진한' 노동자계급을 댓가로 이민자와 난민들과 소수자들에게, 남성노동자들을 댓가로 여성노동자들에게 특별한 잇권들을 준다고 비난하는 대중추수주의적 세계관에 자양분을 제공했다. 트럼프주의의 인종차별적 여성혐오적인 요소들은 '엘리트'에 대한 언사적인 공격과 연관되어 있다.

트럼프의 집권: 평탄하지 않는 주행

우리는 트럼프의 대통령직이 어떨지 그가 어떤 정책들을 구현하려 할지에 관해 추측할 생각은 없다. 트럼프에게 무엇보다도 특징적인 것이 바로 예측불가능성이라서 그의 통치의 결과들을 예언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트럼프는 아침밥도 먹기전에 벌써 몇 십개의 모순적인 말들을 할 수 있는 반면 이점이 선거캠페인에서 그의 지지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도 있다. 하지만 캠페인에서 작용했다고 해서 재임기간에도 그렇게 잘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트럼프는 전형적인 자수성가한 기업가로 자신을 소개하고 미국 기업인들을 관료주의로부터 해방하는 것에 대해 말하지만, 그는 또한 내륙도시들에서의 인프라구조들을 회복하고 도로와 학교와 병원을 건설하며 환경보호제한들의 폐지를 통해 화석연료산업을 재활성화하는 등의 대대적인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 모두는 경제에 대한 중대한 국가자본주의적 개입을 함의한다. 그는 수백만의 불법이민자들을 추방하겠다고 맹세하지만 US경제의 많은 부분이 그들의 값싼 노동에 의존하고 있다. 외교정책에서 그는 고립주의와 철병(나토에서의 US의 참여규모를 축소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에서 보여지듯이)의 언어를, 군비예산증가를 약속하며 'IS에 폭탄을 퍼붓는것'에 관한 그의 허세에서와 같은 개입주의의 언어와 조합한다.

확실해 보이는 것은 트럼프의 대통령직의 특징이 지배계급 내부 그리고 국가와 사회 이 둘 모두에서의 충돌로 드러날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트럼프의 승리연설이 화해의 전형이었고 그는 '모든 미국인의 대통령'이되고 싶어한다. 그리고 트럼프를 백안관에서 맞이하기전 오바마는 가능한한 원만한 이행기를 보장하고 싶다고 말했다. 게다가, 상원과 하원에서 공화당이 대다수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만약 공화당 기존 세력이 트럼프에 대한 그들의 반감를 극복한다면 그는 더 선동적인 정책들은 대기 중에 놓더라도 많은 정책들에 대한 지지를 확보할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장래의 긴장과 충돌의 징후들은 어렵지 않게 발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트럼프가 나토에 관한 회의감을 유지한다면 또는 강력한 지도자로서 푸틴에 대한 그의 존경이 동유럽과 중동에서 러시아 제국주의의 위험스런 재활에 맞서는 US의 시도들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야기한다면 군위계질서의 일부들은 그의 몇몇 대외정책에 아마도 매우 적대적일 것이다. 그의 몇몇 국내정책들에 대한 반대는 또한 정보기구, 연방관료 및 대자본관계자들의 내부로부터도 발생할 수 있을 터이고 이때 이들은 트럼프가 광란스럽게 마구날뛰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보장하는 것이 자신들이 할 역할이라 여길지도 모른다. 한편, 아마도 민주당내부에서는 '클린턴왕조'의 정치적 소멸로 새로운 반대파들이 출현하고 심지어는 분열을 일으켜서, 버니 샌더스와 같은이들 주변에 좌익이 출현해서 경제적 정치적인 기존 세력들에 대한 적대 기운을 이용하길 희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의 수준에서, 브렉시트 이후의 영국과 비교하자면, 명백히 인종차별주의적 그룹들이 이제 그들의 폭력과 지배의 환상을 실현할 권한을 부여받은 듯이 느끼면서 '대중적인' 외국인혐오증이 불길하게 꽃피는 것을 우리는 아마도 보게 될 것 같다. 그리고 만약 트럼프가 '불법자들'의 억류와 추방 프로그램을 진지하게 시작한다면, 이 모든 발전들은 지난 몇 년간 경찰에 의한 흑인살해 후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거리에서의 저항들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터이다. 실제로, 선거결과가 발표된 바로 그날부터 미국전역의 도시들에서 일련의 매우 분노한 시위들이 있어 왔는데, 전반적으로 이 시위들에는 트럼프가 이끄는 정부라는 전망에 역겨움을 느끼는 젊은이들이 참여하고 있다.

국제적인 영향

국제수준에서, 트럼프의 승리는 그 스스로가 말하는 것처럼 '브렉시트 플러스 플러스 플러스(Brexit plus plus plus)'가 될 것이다. 그것은 이미 서유럽의 우익대중추수주의적 정당들에, 특히 2017년 선거를 치르게 될 프랑스의 민족전선(Front National)에 강력한 후원를 제공했다. 이들은 다국적인 무역 조직들로부터 탈퇴를 원하고 경제보호주의를 선호하는 정당들이다. 트럼프의 가장 공격적인 선언들은 중국의 경제적 경쟁을 겨냥한 것이었는데, 이는 우리가 1930년대의 경우처럼 이미 포화된 세계 시장을 더 위축하게 될 무역전쟁을 향해 가고 있음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모델은 지난 20년간 세계자본주의에 잘 기여했지만 이제 그 한계에 도달해가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제국주의의 수준에서 우리가 목격해온 ' 각자 나홀로(every man for himself)' 경향을 지금까지는 그것이 더 단단히 억제되어 온 경제 영역으로 전파할 위험이 있다. 또한 트럼프는 지구온난화가 단지 중국인들이 그들의 수출추세를 지원하기 위해 고안해낸 장난이라고 선언했고, 기후변화에 대해 존재하는 모든 국제조약들에서 철수하겠다고 말한다. 이러한 조약들이 이미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우리는 알지만, 그것들을 없애버리는 것은 우리를 산적한 세계환경재앙들에 훨씬 더 깊이 빠뜨리는 것과 같다.

반복하자면, 트럼프는 사회운영에 대한 그 모든 전망들을 완전히 잃어버린 부르조아지를 상징한다. 그 모든 허영과 자아도취주의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자신은 미치지 않았으나, 점점 선택의 여지가 없어져가는 심지어 세계대전의 선택의 여지마저 없어져가는 체계의 광기를 그는 체화한다. 자본주의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지배계급은 자체의 정치적 군사적 기구들을 이용하여, 달리 말해서 한 계급으로서의 의식적 개입을 통해 완전한 통제상실, 즉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카오스로의 충동이 최종적으로 발현되는 것을 거의 한 세기동안 막아낼 수 있었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통제의 한계들을 목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의 적들이 새로운 일시적 수리를 통해 살아남는 능력이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 계급의 문제는 경제적 정치적 윤리적으로 그 모든 수준에서 부르조아지의 명백한 파산이, 아주 작은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체계에 대한 혁명적 비판을 결과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대열에서 오도된 분노와 유해한 분열들을 생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자본주의를 미래에 하나의 인류사회로 대체할 가능성에 심각한 위협을 나타낸다.

한편 자본주의의 위기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세계대전이 오늘날 의제가 아닌 이유들 중 하나는 노동자계급이 큰 전투에서 패배당함이 없이 여전히 마르지 않은 저항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를 들어 2006년의 프랑스학생투쟁과 2011년 스페인의 인디그나도스(Indignados: 분노한 자들)반란들처럼 지난 십년동안 나타난 다양하고 대대적인 운동들 속에서 그것을 목격해왔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저항의 전조들은 경찰에 의한 살해에 반대하는 항의시위와 트럼프에 반대해 이뤄지는 선거후 데모들에서 발견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위들은 분명한 노동자계급 성격을 띠지는 않고, 좌익의 직업정치인들에 의해서 그리고 다양한 민족주의적이거나 민주주의적 이데올로기에 흡수될 수 있는 취약점을 갖고 있다. 노동자계급이 대중추수주의의 위협과 자본의 좌익이 제공하는 잘못된 대안 이 두가지 모두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깊이 있는 무언가가 요구된다. 그것은 바로, 정치적으로 자기 스스를 이해하고 우리 계급의 공산주의의 전통들과 재접촉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독립(proletarian independence)을 위한 투쟁이다. 이것은 당장에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혁명가들은 오늘날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만연한 스모그를 특히 모든 가장된 형식들까지 관통해서 길을 비춰줄 수 있는 정치적이고 이론적인 명료성을 위해 투쟁함으로써 그러한 발전을 준비하는 역할을 갖는다.

Amos 11.11.16

*번역원본은ICC 웹사이트 www.internationalism.org 기사'President Trump: symbol of a dying social system'이다

1 트럼프에 대한 공화당의 반대가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로, 그 당의 좌익의 일부로 여겨지기 어려운 조지 W 부시 전대통령은 트럼프에게 투표하느니 차라리 백지를 제출하겠다고 선언했다.

2 지배계급의 한 종파에 대항해 다른 한 종파와 '반파시즘'연합을 결정하는 정책을 우리가 거부하는 것은 특히 이탈리아좌파공산주의(Italian communist left)로부터 물러받은 유산이다. 이것은 반파시즘이 노동계급을 전쟁에 동원하려는 수단임을 정확히 인식했다. 우리의 국제평론(International Review) 101호에 재간행된 빌랑(Bilan)지의 기사, '반파시즘: 혼돈을 위한 공식(Anti-fascism: a formula for confusion)'을 참조하기 바란다.

3샌더스에 대해 더 자세한 것은 '트럼프 대 클린턴(Trump v Clinton)' 기사를 참조 바란다.

 

1919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창설

국제공산주의흐름

 

우리가 기념해야 할 수많은 기념일 가운데 매체와 역사가들이 짧게 언급하고 그 의미를 의도적으로 왜곡하면서 제대로 다루지 않는 기념일이 있다. 1919년 3월 열린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하 코민테른)>의 창립대회가 그것이다.

코민테른 창설의 기념은 계급투쟁이 오늘날 위기로 고통받는 자본주의의 현실이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착취받는 계급일 뿐 아니라 혁명계급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부르주아지 자체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을 현재의 부르주아지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1. 1919년 국제적인 혁명물결

 

코민테른의 창설은 전체 자본가계급과 그들의 열광적 하수인들에게는 불쾌한 기억을 일깨우고 있다. 특히 그들에게는 국제적인 혁명 물결의 솟구치고 피할 수 없는 조류에 직면한 1차 세계대전 말의 공포를 상기시키고 있다. 그것은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 참호에서의 반란, 독일에서 빌헬름 황제의 퇴위와 노동계급의 반란과 폭동에 직면한 휴전 서명, 그리고 독일 노동자들의 봉기, 러시아 노선에 따른 바바리아와 헝가리에서의 노동자평의회 공화국 건설,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노동 대중 사이의 파업,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적대적 개입을 거부한 몇몇 영국 군대뿐만 아니라 프랑스 함대와 군대의 반란 등이었다.

그 당시 영국 정부의 수상인 로이드 죠지는 만일 그가 러시아 정복을 돕기 위해 천 명의 영국 군대를 파견한다면 그 군대는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만약 영국의 군사점령이 볼셰비키에 맞서 이루어진다면 영국은 볼셰비키가 되고 런던에 소비에트가 건설될 것이라고 1919년 1월 선언했다. 그것은 러시아 노동자평의회 권력에 대한 국제 부르주아지의 경악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었다.

 

“유럽 전체는 혁명정신으로 가득 찼다. 노동자들 사이에는 전쟁 조건에 반대하는 불만감뿐만 아니라 분노와 반항감이 깊이 쌓여 있다. 정치적·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모든 기존 질서에 대해 유럽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모든 인민대중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E. H. 카의 「볼셰비키 혁명」 3권, 135쪽에서 인용)

 

우리는 오늘날 코민테른의 창설이 1917년으로부터 적어도 1923년 말까지, 유럽으로부터 아시아(중국)로, 그리고 캐나다(위니페그)와 미국(시애틀)의 ‘신’세계로부터 라틴아메리카에 이르는 전 세계의 혁명물결에서 정점이었다고 알고 있다. 이러한 혁명 물결은 세계를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분할로 이끈 1차 세계대전, 4년간의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응답이었다. 1914년 전쟁이 꿀꺽 삼킨 제2인터내셔널 사회민주주의의 당들과 개별 투사들이 제국주의 전쟁에 대해 취한 태도는 그들이 혁명과 코민테른을 맞아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결정했다.

 

“코민테른은 각기 다른 나라들의 제국주의 부르주아지가 2천만 명을 희생시킨 1914~18년의 제국주의 전쟁이 끝난 후 만들어졌다. ‘제국주의 전쟁을 기억하라’ 이 말은 코민테른이 모든 남성 노동자와 모든 여성 노동자에게 한 첫 번째 말이다. 그들이 어디에 살건 어떤 언어로 말하든지 그들에게 한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한줌의 제국주의자들이 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각기 다른 나라들의 노동자들이 서로의 목을 베도록 강제했다는 점을 기억하라. 부르주아지의 전쟁이 유럽과 전 세계에서 가장 가공할 기근과 가장 소름끼치는 참상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을 기억하라. 자본주의를 전복하지 않고는 이러한 강도 같은 전쟁의 반복이 가능할 뿐 아니라 불가피함을 기억하라” (2차 대회에서 채택한 코민테른의 문건, 제인 데그라스, 「코민테른 1919-43: 문헌집」)

 

2. 코민테른의 제2인터내셔널과의 연속성

 

(1) 제2인터내셔널과 제국주의 전쟁


1848년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칼 맑스는 “노동자는 조국이 없다”라고 자본주의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근본적 원칙 하나를 정립했다. 이 원칙은 노동자들이 민족 국가의 문제에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반대로 민족문제와 그들의 역사적 투쟁의 하나의 기능으로서 민족 전쟁의 문제에 대해 노동자의 입장과 태도를 규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전쟁의 문제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는 제1인터내셔널(1864~73)과 제2인터내셔널(1889~1914)에서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19세기 동안 프롤레타리아트는 특히 러시아 짜르 체제와 같은 봉건적이고 군주적 반동에 맞서는 민족해방 전쟁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제2인터내셔널 내에서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는 선두에 서서 20세기 벽두에 발생한 자본주의의 시기 변화를 인식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정점에 다다랐으며 전 지구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제 레닌이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가장 높은 단계인 제국주의”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다가올 유럽전쟁은 식민지의 분할과 그 영향력을 둘러싼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제국주의 세계 전쟁일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원칙을 저버렸던 기회주의 진영에 맞서서,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서 인터내셔널과 프롤레타리아트가 무장하는 전투로 이끈 것은 제2인터내셔널의 좌익이었다. 이 투쟁의 중대한 순간에 러시아 1905년 대중파업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낸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국주의 전쟁을 대중파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연결시킨 1907년 슈투트가르트의 인터내셔널 대회가 있었다.


“나는 이 문제[러시아에서의 대중파업과 전쟁(편집자)]에 대해서 우리가 위대한 러시아 혁명[1905년(편집자)]의 교훈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을 여러 동지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을 러시아와 폴란드 대표들의 이름으로 말하라고 요청받았습니다. … 러시아 혁명은 전쟁의 결과로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 전쟁을 끝내려고 일어났습니다. 혁명이 없었다면 짜르 체제는 의심할 여지없이 전쟁을 지속시켰을 것입니다.” (로자 룩셈부르크, BD 울프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에서 인용)

 

좌파는 룩셈부르크와 레닌이 제출한 대회의 중대한 수정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래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사회주의자들은 가능한 한 빨리 그 전쟁을 끝내고 전쟁이 촉발시킨 경제적·정치적 위기를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인민에게 일깨우고, 그럼으로써 자본주의 지배의 몰락을 서두를 의무가 있다.” (코민테른 1차 대회에서 채택한 「사회주의 경향들과 그들의 베른대회에 대한 결의문」에서 인용)

 

1912년 제2인터의 바젤 대회는 유럽에서 점증하는 제국주의 전쟁의 위협에 맞서는 위와 같은 입장을 다시 확인했다.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이 코뮌의 혁명적 반란을 탄생시켰고, 러일전쟁이 러시아에서 혁명세력을 움직였다는 것을 부르주아 정부들이 잊지 않게 하자. 노동자계급의 눈으로 볼 때, 자본가들의 이익, 왕조의 경쟁, 그리고 외교 협정의 남발을 위해 노동자계급이 스스로를 학살하는 것은 범죄다.” (앞 글)

(2) 제2인터내셔널의 배반과 죽음

 

1914년 8월 4일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기회주의 때문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애국주의 홍수와 전쟁열에 쓸려 제2인터는 깨어져 부끄럽게 목숨을 다했다. 주요 당들은 (특히 누구보다 기회주의자들 수중에 있었던 프랑스와 독일 사민당과 영국의 노동당은) ‘조국방어’와 ‘외세침략’에 맞서기 위한 부르주아지와의 ‘신성한 동맹’을 요구하며 전쟁채권에 찬성표를 던졌다. 프랑스에서는 계급투쟁을 포기하면서 장관직을 보상으로 받기까지 했다. 그들은 “맑스주의의 황제”라고 불렸던 카우츠키가 계급투쟁은 “평화 시기”에만 가능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면서 전쟁과 계급투쟁을 구분했을 때, “중도주의”(인터내셔널의 좌파와 우파 사이의 중간)로부터 이론적 지원을 받았다.

“계급의식이 있는 노동자들은 인터내셔널 붕괴에 대해 슈투트가르트와 바젤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대회의 발언들과 결의문들 속에 담긴 가장 거룩한 선언들, 그리고 그들의 신념을 공식 사민당들의 다수가 명백하게 배신한 것으로 이해한다.” (레닌, 「제2인터내셔널의 몰락」)

소수의 당들만이 이러한 폭풍 속에서 우뚝 섰다. 특히 이탈리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고 러시아의 당들이 그랬다. 다른 곳에서는 고립된 혁명가들과 혁명 그룹이 있었는데, 로자 룩셈부르크와 호르터와 판네쿡 주위의 네덜란드 “트리뷴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계급투쟁에 충실했으며 재조직화를 시도했다.

제2인터내셔널의 죽음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심대한 패배였다. 이는 그들이 참호 속에서 피를 흘리게 했다. 수많은 혁명적 노동자들이 살육당했다.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들의 국제 조직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재건해야 했다.

“제2인터는 기회주의에 패배해 죽었다. 기회주의자를 타도하자. 변절자뿐 아니라 기회주의로부터 해방된 제3 인터내셔널 만세!” (레닌,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정세와 임무」, 1914. 1. 10)

(3) 찌머발트와 키엔탈 대회: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건설을 향한 발걸음

1915년 9월 “국제사회주의자들의 찌머발트 대회”가 열렸다. 이어서 스위스의 키엔탈에서 1916년 4월 2차 대회가 열렸다. 전쟁과 억압이라는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를 포함한 11개국의 대표들이 참여했다. 찌머발트 대회는 전쟁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식했다. 대회의 다수파는 ‘거룩한 동맹’의 진영으로 넘어갔거나 그들과 분리되어 관망하는 사민당들의 기회주의 우파를 비난하기를 거부했다. 이러한 중도주의 다수파는 “평화”라는 표어를 방어하는 평화주의자였다.

볼셰비키 분파의 대표인 레닌과 지노비예프의 주도 아래 통일된 “찌머발트 좌파”는 분립의 필요성과 제3인터내셔널의 건설을 주창했다. 평화주의에 맞서 그들은 “혁명적 행동이 없는 평화 투쟁은 공허하고 기만적인 문구”(레닌)라고 선언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자”는 슬로건으로 중도주의를 반대했다. “이 슬로건은 구체적으로 슈투트가르트와 바젤대회의 결의문으로 나타난다.”(레닌)

이들 대회를 통해 <좌파>는 힘을 얻었지만, 다른 대표들을 깨닫게 할 수 없어 소수파로 남았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었다.

“두 번째 찌머발트 대회(키엔탈)는 의심할 여지없이 한 걸음 진전이다. (…) 그러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앞으로 우리는 우리의 결의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제3인터내셔널을 위한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 찌머발트와 키엔탈 대회는 우리의 길이 올바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노비예프, 1916. 10. 6)

지노비예프가 1918년 3월에 말했듯이, 각기 다른 나라 좌파 사이의 회의와 그들 사이의 공동투쟁을 통해 “형성 중인 제3인터내셔널의 첫 번째 핵”을 만들 수 있었다.

 

(4) 프롤레타리아트가 슈투트가르트와 바젤 대회의 결의문을 수행하다

1917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유럽 전역에 혁명적 물결을 열어 젖혔다. 프롤레타리아의 위협은 제국주의 대학살이 종지부를 찍었다는 점을 국제 부르주아지에게 확인시켰다. 레닌의 슬로건은 현실이 되었다. 러시아 그리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가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시켰다. 이처럼 프롤레타리아트는 유명한 슈투트가르트 결의를 적용함으로써 제2인터내셔널 좌파의 명예를 드높였다.

1차 세계대전은 사회민주당의 의회주의적 우파를 부르주아지 진영으로 결정적으로 몰아넣었다. 혁명적 물결은 중도주의의 평화주의자들이 부르주아지에 맞서 싸우도록 했지만 그들의 다수는 특히 카우츠키 같은 지도자들은 부르주아지 진영으로 뛰어들었다. 더 이상 인터내셔널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민주주의로부터 분리된 분리파들이 만든 새로운 당들은 “공산주의”당이라는 이름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혁명적 물결은 고무되었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당, 제3인터내셔널의 건설을 요구했다.


(5) 코민테른의 건설 : 제2인터내셔널의 정치와 원칙과의 연속성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라는 이름을 채택한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이미 죽은 제2인터내셔널 당들의 우파로부터 조직적으로 분리하는 것을 기반으로 1919년 3월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제2인터내셔널의 원칙과 그 공헌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에 생명을 다한 공식적 사회주의당들의 냉담, 거짓 그리고 부패를 쓸어버리면서,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제3인터내셔널에서 하나가 되어 바베프로부터 칼 리프크네히트,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로 기다랗게 이어지는 혁명 세대들의 영웅적 노력과 순교의 직접적 계승자라고 우리를 생각한다.

제1인터내셔널이 발전의 미래 경로를 미리 비추고 그 도정을 가리켰다면, 그리고 제2인터내셔널이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모으고 조직했다면, 제3인터내셔널은 열린 대중행동의 인터내셔널이고 혁명적 실현의 인터내셔널이며, 행위[실천]의 인터내셔널이다.” (코민테른의 선언)

코민테른의 기반을 이룬 흐름, 분파, 전통 그리고 입장은 제2인터내셔널의 좌파가 발전시키고 방어한 것들이었다.

“1차 대전 이전에 프롤레타리아트가 발전시킨 제2인터내셔널이라는 역사적 대열로부터 선발해 재편한 그룹을 통해서만,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음을 우리의 경험은 증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그룹만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선진적 강령을 만들 수 있고 그래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기초를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빌랑������(공산주의 좌파의 이탈리아 분파의 이론지), 1936년 8월, 34호, 1128쪽)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 안톤 판네쿡 같은 개인은 물론이고 볼셰비키,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좌파 같은 사회민주당들의 그룹과 분파를 보더라도, 제2인터내셔널과 찌머발트의 좌파와 제3인터내셔널의 좌파 사이에는 정치적이고 유기적인 연속성이 있다. 코민테른의 첫 번째 대회는 제2인터내셔널의 부분이었던 러시아 공산주의당(볼셰비키)(이전의 러시아 노동자 사회민주주의당(볼셰비키))과 독일 공산주의당(이전의 스파르타쿠스)의 주도로 소집되었다. 볼셰비키는 찌머발트 좌파의 주도 세력이었다. 찌머발트 좌파는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 사이의 진정한 유기적·정치적 연결고리였는데, 그들은 제2인터내셔널의 좌익으로서 과거에 벌였던 투쟁을 평가하면서 그 시대의 요구를 다음과 같이 정립했다.

“찌머발트와 키엔탈 대회는 제국주의 살육에 항의하기 위해, 결의가 있는 모든 프롤레타리아 세력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통일시키는 것이 필요했던 상황에서 열린 매우 중요한 대회였다. (…) 찌머발트 그룹은 자기 전성기를 가졌다. 찌머발트에 모인 진실로 혁명적인 세력은 모두 더 전진해 코민테른에 합류한다.” (찌머발트 대회 참가자 선언)

우리는 두 인터내셔널 사이의 연속성을 강력히 주장한다. 우리가 계통적 측면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코민테른은 느닷없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 강령과 정치적 원칙도 마찬가지다. 두 인터내셔널 사이의 역사적 연결고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역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무정부주의에 굴복하는 것이다. 또한 코민테른을 단지 노동자 대중의 혁명운동의 산물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연속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코민테른이 왜 그리고 어떻게 제2인터내셔널과 결별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슈투트가르트 결의에 표현된 두 인터내셔널 사이의 연속성이 있지만, 두 인터내셔널 사이에는 단절도 있기 때문이다. 그 단절은 코민테른의 정치 강령 속에, 그 정치적 입장에, 그리고 “세계 공산주의당”으로서의 조직적이고 전투적인 실천 속에 구체화되었다. 사실 단절은 물리적인 유혈 탄압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것은 제2인터내셔널의 성원인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참여한 케렌스키 정부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와 볼셰비키를 억압하고, 독일에서는 노스케-샤이드만 사민주의 정부가 프롤레타리아트와 공산주의당을 억압해서 단절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연속성 속의 단절”을 인식하지 않으면, 1920년대의 코민테른의 퇴행, 그리고 그 내부의 투쟁, 그리고 1930년대 ‘이탈리아’, ‘독일’ 및 ‘네덜란드’ 공산주의 좌파의 외부투쟁 및 그들 세력의 배제를 이해할 수 없다. 오늘날 공산주의 그룹들과 그들이 방어하는 입장은 이런 좌파들이 공산주의 원칙을 지키고, 코민테른 및 1917~23년의 혁명적 물결을 비판적으로 재평가했던 그들의 노력의 산물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유산인 제2인터내셔널의 유산을 인식하지 않으면, 코민테른의 기반, 오늘날까지 중요한 몇몇 기반의 타당성, 1930년대 공산주의 좌파의 공헌을 이해할 수 없다. 다른 말로 그것은 오늘날 혁명적 입장을 지속적으로, 확신과 결단을 가지고 방어할 수 없음을 뜻한다.


 

3. 코민테른의 제2인터내셔널과의 단절


(1) 코민테른의 정치 강령

1919년 1월 말 트로츠키는 코민테른 창립대회의 초대장을 썼다. 그 대회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채택할 정치 강령의 원칙을 결정했다. 사실 이 편지는 제안된 ‘코민테른 강령’이고 그를 잘 요약하고 있다. 그것은 두 개의 주요 공산주의당들의 강령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 의견으로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여기서 강령으로 제시되었고, 독일 스파르타쿠스 동맹과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강령에 기초해서 구성된 다음의 제안들에 기초해야만 한다.” (데그라스, 앞글)

사실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1918년 12월 29일 독일 공산주의당이 창설된 이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1919년 1월 베를린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끔찍한 탄압기 동안에, 사민주의 세력이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죽여 독일 공산주의당은 두 명의 주요 지도자를 잃었다. 이처럼 바로 창립 순간에 코민테른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첫 번째 패배의 고통을 겪었다. 창립 두 달 전 코민테른은 그의 명성, 힘 그리고 이론적 능력에서 레닌과 트로츠키에 필적할 두 명의 지도자를 잃었다. 지난 세기 말 그녀의 저작에서 코민테른의 정치 강령의 기초가 될 핵심들을 가장 많이 발전시킨 사람은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2) 돌이킬 수 없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쇠퇴

로자 룩셈부르크에게는 1914년 전쟁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쇠퇴기를 열어 놓았다는 점이 명백했다. 제국주의 살육 이후 이러한 입장은 더 이상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오늘날 인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혼돈 속에서 멸망하느냐 아니면 사회주의에서 구원을 발견하느냐” (독일 공산주의당 창립대회에서 강령에 대한 연설)

이러한 입장은 코민테른에서 강력하게 재확인되었다.

“1. 현 시대는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지닌 자본주의가 파괴되지 않는다면, 그와 함께 유럽 문명의 전체를 끌어내릴, 전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몰락과 해체의 시대이다.” (「초청장」, 데그라스, 앞글)

“새로운 시대가 태어난다! 자본주의 소멸과 내부 해체의 시대가! 프롤레타리아트의 공산주의 혁명의 시대가!” (코민테른 강령, 앞글)

(3) 자본주의 쇠퇴 시대의 정치적 함의

코민테른의 지형 위에 서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의 쇠퇴는 삶의 조건과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에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보기를 들어 카우츠키와 같은 중도주의 평화주의의 사상과는 반대로 전쟁의 끝은 전쟁 전 시기의 삶과 강령으로 회귀하는 걸 의미할 수 없었다. 이는 죽은 제2인터내셔널과 코민테른 사이의 단절의 한 지점이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세계대전은 세상의 전환점이다. (…) 우리의 투쟁을 위한 조건과 우리들 자신은 세계대전으로 발본적으로 변화되었다.” (룩셈부르크, 「유니우스 팜플렛」으로 알려진 「사회민주주의의 위기」, 1915)


 

제국주의 전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쇠퇴기가 열렸다는 것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삶과 투쟁의 새로운 조건을 의미했다. 1905년 러시아 대중파업, 그리고 노동대중 단일 조직의 새로운 형태인 소비에트가 최초로 등장한 것이 자본주의 쇠퇴기의 개막을 예고했다. 룩셈부르크(「대중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 1906)와 트로츠키(1905년 그의 책)는 이러한 대중운동의 본질적 교훈을 끌어냈다. 룩셈부르크와 함께 모든 좌파는 제2인터내셔널 내에서 대중파업에 대한 논쟁을 이끌었으며 노동조합과 사민당 지도부의 기회주의에 맞서서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평화적이고 점진적 진화라는 그들의 전망에 맞서서 정치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사민주의적 실천과 결별하면서 코민테른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기본적인 투쟁방법은 자본의 정치권력에 맞서 공개적인 무장투쟁으로 나아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행동이다” (「초청장」, 데그라스, 윗글)

(4)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노동대중의 행동은 부르주아 국가와의 충돌로 나아간다. 코민테른의 가장 소중한 공헌은 국가에 대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사민주의의 “개량주의”와 결별하고 파리코뮨과 1905년 러시아 그리고 무엇보다 자본주의 국가를 파괴하고 노동자 평의회로 권력을 행사한 1917년 10월 혁명의 역사적 경험의 교훈과 맑스주의 방법을 새롭게 함으로써, 코민테른은 스스로 명쾌하게 그리고 어떠한 모호함도 없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노동자 평의회 안에 조직된 노동대중의 독재를 선언했다.

“2.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는 지금 즉각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국가권력의 장악은 부르주아지의 국가기구의 파괴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권력기구의 조직을 의미한다.

3. 이러한 새로운 권력기구는 노동계급의 독재를 구현해야 하고 몇몇 곳에서는 농촌의 반(半)프롤레타리아트, 빈민의 독재를 구현해야 한다. (…) 소비에트 및 그와 비슷한 기구의 권력을 통해 그 구체적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4.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자본의 즉각적 전유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폐지와 국가 재산으로의 전환을 위한 지렛대여야 한다.” (윗글)

이 문제는 레닌이 제안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테제”를 채택했던 창립대회에서 본질적인 문제였다.

(5)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에 대한 테제

이 테제는민주주의와 독재 사이의 그릇된 대립을 비난하면서 시작한다.

 

“어떤 문명화된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추상 속의 민주주의’는 없다. 오직 부르주아 민주주의만 있을 뿐이다” (윗글)

 

파리코뮌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독재적 성격을 드러냈다. 자본주의에서 ‘순수한’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것은 사실 기껏해야 자본의 독재의 형식인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방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회의 자유나 출판의 자유는 노동자들에게 무엇인가?

 

“‘출판의 자유’는 ‘순수 민주주의’의 또 다른 대표적 슬로건이다. 여기에서도 또 가장 좋은 인쇄소와 막대한 종이더미를 자본가가 장악하고 있는 한, 또 자본이 신문·잡지에 대한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한, 그리고 이 권력은 세계에서, 예를 들어 미국처럼 민주주의와 공화제도가 발전하면 할수록, 더욱 더 명확하게, 더욱 더 첨예하게, 더욱 더 냉소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런 조건이 계속되는 한 이 자유가 기만이라는 것을 … 노동자는 알고 있다. 노동자를 위한,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참된 평등과 진정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문필가를 고용하거나 출판소를 사들이거나 신문을 매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자본으로부터 박탈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의 멍에를 뒤집어버리고, 착취자를 타도하고 그들의 반항을 분쇄할 필요가 있다.” (「테제」, 윗글)

 

전쟁과 혁명을 경험한 후 카우츠키주의자들이 한 것처럼 순수한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방어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는 범죄라고 「테제」는 계속 말하고 있다. 각기 다른 제국주의와 소수 자본가들의 이해 때문에 수백만의 인민이 참호에서 학살당했고 ‘부르주아지의 군사독재’는 민주적이건 아니건 간에 모든 나라에 세워졌다. 사민주의 정부가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체포하고 투옥한 것처럼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그들을 학살했다.

 

“이러한 사태 하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착취자를 압도하고, 그들의 저항을 극복하는 수단으로서 완전히 정당할 뿐만 아니라, 전쟁을 일으켰고 지금도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부르주아 독재에 대한 유일한 방위수단으로서 노동대중 전체에게 절대로 필요하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다른 계급의 독재 사이의 근본적 차이는 (…) 이를 포함한다. 즉 (…)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는 착취자 즉 주민 중에서 극소수인 대지주와 자본가의 반항을 무력으로 억누르는 것이다. (…)

사실, 이미 실제로 창출되어 있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여러 형태, 즉 러시아 소비에트권력, 독일의 노동자평의회, 직장위원회, 이와 유사한 다른 나라의 또 다른 소비에트적 제도, 이 모두는 다름 아닌 노동자계급, 즉 주민 대다수에게 민주적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한다. 그것은 가장 민주적인 부르주아 공화국조차 전혀 보장할 수 없었던 또 그와 유사한 것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민주적 권리와 자유가 실제로 가능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윗글)

 

오직 세계적 차원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만이 자본주의를 파괴하고, 계급을 폐지하며 공산주의로 가는 길을 보증할 수 있다.

 

“국가권력의 폐지는 맑스를 포함해서 모든 사회주의자들의 목표다. 이러한 목표가 달성되지 않으면 자유와 평등의 진정한 민주주의는 달성될 수 없다. 그러나 오직 소비에트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만이 실제로 이 목표로 나아가게 한다. 왜냐하면 노동인민의 대중조직을 국가행정에 지속적이고 제한 없이 참여하게 함으로써 어떤 종류의 국가도 완전히 소멸시킬 준비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윗글)


국가의 문제는 혁명적 물결이 유럽을 휩쓸고 모든 나라의 부르주아지가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 내전을 벌일 때, 그리고 자본과 노동,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적대감이 극에 달할 때 중요한 문제였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와 혁명의 확장, 즉 소비에트 권력을 유럽에 국제적으로 확장할 필요성은 혁명가들에게 구체적으로 제기되었다. 그것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국가와 혁명적 물결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그에 맞설 것인가의 문제였다. ‘[프롤레타리아 독재]편에 선다는 것’은 코민테른에 가입해 사회민주주의와는 체계적으로 정치적으로 단절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맞선다는 것’은 부르주아 국가를 방어하고 결정적으로 반혁명 진영을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둘 사이에서 머뭇거렸던 중도주의 흐름에게는 그것이 단절과 소멸을 뜻했다. 혁명 시기는 ‘중도 기반’의 멍청한 정책을 가질 어떤 틈도 남겨두지 않았다.

4. 오늘과 내일 : 코민테른의 과업을 지속하기

1914~18년 전쟁이 결정적으로 보여준 시기 변화는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 사이의 단절을 결정짓는다. 우리는 이를 국가의 문제에서 살펴보았다. 자본주의의 쇠퇴,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삶과 투쟁 조건에 미친 결과는 일련의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즉, 아직도 선거 참여와 의회의 활용이 가능한가, 노동자평의회가 출현했는데도, 자본가들과 ‘성스런 동맹’에 참여했던 노동조합이 아직도 노동계급의 조직인가, 제국주의 전쟁의 시대에 민족해방투쟁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가 그런 문제들이었다.

코민테른은 이러한 새로운 문제에 응답할 수 없었다. 그것은 1917년 10월 혁명 1년여 뒤, 그리고 베를린 프롤레타리아트가 겪은 첫 번째 패배로부터 두 달 뒤에 창설되었다. 그 뒤를 이은 여러 해 동안 국제 혁명의 물결은 패배하고 쇠퇴했으며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점점 고립되었다. 이러한 고립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의 퇴행에서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러한 사태들 때문에 코민테른은 기회주의의 성장에 저항할 수 없었다. 반대로 코민테른은 죽었다.

코민테른을 평가할 때, 우리는 그것이 <국제공산주의당>이었다고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것의 실질적 퇴행 때문에 그것을 부르주아 조직으로만 보려는 사람은 그걸 제대로 평가할 수 없고, 그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끌어낼 수도 없다. 트로츠키주의는 초기 4차 대회를 계승해야 한다고 무비판적으로 주장한다. 창립대회가 제2인터내셔널과 단절했던 지점들에서, 그 후속 대회는 퇴행했다는 점을 그들은 결코 보지 못했다. 1차 대회는 사회민주주의로부터 분리했다. 그런데 3차 대회는 그에 반대해 ‘통일전선’ 속에서 사회민주주의와 함께 할 것을 제안했다. 사회민주주의가 부르주아 진영으로 결정적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인식한 후인데도, 코민테른은 3차대회에서 사회민주주의를 부활시켰다. 사민주의당과의 동맹정책은 1930년대에 트로츠키주의가 ‘입당주의’ 정책을 채택하게 했다. 입당주의란 곧 코민테른 1차 대회의 원칙을 정면으로 무시하면서, 사민주의당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레닌이 말한 것처럼 이러한 동맹 또는 항복의 정책은 스페인 내전에서 부르주아 공화 정부를 지지하고, 찌머발트와 인터내셔널을 배신하고 제국주의 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는 반혁명으로 트로츠키 흐름을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미 1920년대에 코민테른 내부에서 이러한 퇴행에 맞서 투쟁하려는 새로운 좌파가 만들어졌다. 그들은 특히 이탈리아, 네덜란드 그리고 독일 좌파였다. 1920년대 동안 배제된 이러한 좌익 분파들은 코민테른과 혁명적 물결을 비판적으로 재평가함으로써 죽어가는 코민테른과 ‘미래의 당’ 사이에서 연속성을 보증할 정치투쟁을 지속했다. 1930년대에 공산주의 좌파의 이탈리아 분파의 잡지가 「빌랑(Bilan)」(“평가”)이었다는 것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인터내셔널의 원칙과 연속성을 갖고, 이들 그룹들은 제2인터내셔널과 단절하는 데에서 나타난 약점을 비판했다. 1930년대 동안의 반혁명과 2차 제국주의 전쟁의 암흑기 속에서 그들이 펼쳤던 이름 없는 노력 덕분에 오늘날 공산주의 그룹들이 부활해서 존재할 수 있게 됐다. 그들은 코민테른과 조직적 연속성을 지니지 않지만 정치적 연속성은 지니고 있다. 이들 그룹들이 만들어내고 방어한 입장들은 자본주의 쇠퇴의 새로운 시기를 맞아 코민테른 안에서 제기된 문제들에 답을 주고 있다.

따라서 ‘공산주의 좌파 분파들’이 이루어낸 비판적 재평가의 기초 위에서 코민테른은 오늘날 살아 있고, 미래의 <세계공산주의당>에서 살아있게 될 것이다.

오늘날 점증하는 착취와 가난에 직면해 프롤레타리아트는 다음과 같은 <찌머발트 좌파>의 입장과 동일한 입장을 채택해야 한다.

경제 전쟁에서 부르주아지와는 어떠한 신성한 동맹도 없다!

민족 경제를 구하기 위한 어떤 희생도 반대한다!

계급투쟁 만세!

경제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라!

경제적 파국, 사회적 해체 그리고 제국주의 전쟁의 전망에 직면해 1919년에서와 같이 오늘날도 역사적 대안은 똑같다. 그것은 자본주의 파괴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수립인가 아니면 인간성의 파괴인가, 사회주의인가 아니면 야만인가다.

미래는 공산주의의 것이다.

참조) 이 한국어번역본은 국제공산주의전망의 싸이트에 공개되었다.

 

원본출처(Orignial Text): International Review 57 - 2nd Quarter 1989 http://en.internationalism.org/node/3066

러시아의 좌익 공산주의: 러시아 공산당의 「노동자 그룹」의 선언

 

 우리는 여기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노동자 그룹」의 선언(강령)을 펴낸다. 이들은 가장 유명한 지도자들 중 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종종 “미아스니코프(Miasnikov) 그룹”(미주1을 보라)으로 불린다. 이 그룹은 소위 좌익 공산주의1)의 일부로, 그들은 한 편으로 러시아의 다른 그룹들과 기반을 공유하며, 또 다른 한 편으로 세계, 특히 유럽의 다른 그룹들과 기반을 공유한다. 이 경향은 그들의 기원을 제3인터내셔널의 당과 러시아의 소비에트 권력의 기회주의적 타락에 대한 반응에서도 찾는다. 그들은 좌익 경향 속에서의 프롤레타리아적 대응을 대표하며, 과거 제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의 발전에 직면했던 이들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우리의 서론

 

 1918년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2) 안에서부터 좌익 분파가 등장했는데, 이는 볼셰비키의 정치3)에 대한 의견차이의 표현이었다. 이것은 그 자체로 볼셰비키주의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의 증거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노동계급의 생생한 표현이었으며, 노동계급은 그 자신의 실천에 대해 급진적이고 지속적인 비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기 때문이다. 볼셰비키는 혁명적 분파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이에 저항하는 당 내부의 타락한 목소리가 제시될 때마다, 볼셰비키주의의 원래의 강령에 대한 배신을 비판하기 위해 당 내부에서 분파들이 생기거나 해체되었다. 스탈린주의가 당을 무덤에 파묻고 나서야 이러한 분파들의 끊임없는 발생은 멈췄다. 러시아 좌익 공산주의는 모두 볼셰비키였다. 볼셰비키주의의 본질을 부수는 이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칭송하며, 좌익 공산주의를 비난하고, 박해하고, 그리고 몰살시키려 할 때에도, 좌익 공산주의는 혁명의 영웅적 시기의 볼셰비키주의의 연속성을 방어했다.

 

 레닌이 그의 정치적 삶으로부터 물러난 것은 볼셰비키의 공개적 위기를 촉진한 한 요소였다. 한 편에서는 스탈린과 지노비예프, 카멘예프에 의한 “삼두 정치”의 형성 과정에서 관료적 분파가 당 내에서의 권력을 확고히 했다. 이 연합의 주요 유대는 트로츠키를 고립시키려는 의도였기 때문에 불안정했다. 트로츠키는 그 동안 상당한 우유부단함에도 불구하고 당 내에서 공공연히 반대파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볼셰비키 정권은 경제와 사회에서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했다. 1923년 여름, 신경제정책(NEP)의 도입에 의한 “시장 경제”의 명백한 첫 번째 위기가 전체 경제의 균형을 위협했다. NEP가 1921년의 위기로 귀결된 전시 공산주의의 과도한 국가 집중을 되돌리기 위해 소개된 것이었던 것만큼, 이제는 경제의 자유화가 러시아를 자본주의 생산의 좀 더 고전적인 위기에 노출시켰음이 명백해졌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과 “보통”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임금 삭감, 해고 정책과 같은 정부의 대응은 이미 궁핍해질 대로 궁핍해져 있던 노동계급의 상황을 악화시켰다. 1923년 8-9월, 동시적인 파업의 발발은 주요 산업 중심지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현상 유지에 관심이 있었던 삼두체제는 NEP를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왕도로 보기 시작했다. 이 관점은 특히 부하린에 의해 이론화되었는데, 부하린은 당의 극좌에서 우익으로 전향했으며, 스탈린 이전에 “사회주의” 시장 경제의 발전에 의한 “달팽이 걸음”으로 일국 사회주의가 가능하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다른 한 편, 트로츠키는 국가의 경제적 위기에 대해 더 강화된 국가 집중과 계획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의 지도적인 그룹 안에서부터 나온 첫 번째 명확한 발언은 「46인의 강령」이었다. 이 강령은 Poliburo(정치국)에 1923년 10월 제출된 것이다. 「46」은 트로츠키와 가까웠던 피아타코브(Piatakov), 프레오브라진스키(Preobrazhinsky)와 같은 인물들과 사프라노브(Sapranov), 스밀노프(V Smirnov), 그리고 오신스키(Ossinski)와 같은 민주 집중 그룹의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문서에 트로츠키의 서명이 없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분파의 일부로 여겨지는 것을 두려워한 까닭(분파는 1921년 이후 금지되었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중앙 위원회에 보낸 공개적인 편지는 1923년 11월 프라우다에, 그리고 그의 팸플릿 「새 길」(New Course)에도 실렸고, 이것은 46과 비슷한 관심을 표현하고 있었으며 그를 반대파의 중요인물로 명백히 위치짓게 해 주었다. 

 

 「46인의 강령」은 최초에는 정권이 직면한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 강령은 지배적인 계층의 실용주의적 경향과 NEP를 불변의 원칙으로 끌어 올리려는 경향에 대한 반대로서 더욱 강력한 국가 계획을 위한 몽둥이 역할을 맡았다. 이것은 우리가 앞으로 보겠지만, 트로츠키를 둘러싼 좌익 반대파가 견지한 주제였지, 그 힘이 아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당의 내적 생명을 질식시키는 것에 대해 제기한 긴급한 경고였다.4)

 

 동시에, 강령은 “병적인” 반대파로 불리는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물론 강령은 그 단어를 당 내 위기의 표현으로 보았지만 말이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던 미아스니코프와 보그다노프의 「노동자의 진실」(Workers' Truth) 주위의 노동자 그룹의 경향에 대한 것이었다. 곧 트로츠키도 비슷한 관점을 취했다. 그들의 분석이 너무 극단적이라거나, 동시에 당의 병적인 상태의 표현이라고 바라보는 관점을 거부한 것이다. 트로츠키는 이러한 그룹들을 제거하기 위해 억압적인 방법으로 협력하는 것에 대해서도 내켜하지 않았다.

 

 사실 이런 그룹들이 “병적인” 현상들로 해체될 리는 없다. 「노동자의 진실」 그룹이 패배주의, 심지어 멘셰비즘으로 나아가는 특정 경향을 표현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독일 좌파와 네덜란드 좌파 내에서의 대부분의 경향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러시아에서의 국가 자본주의의 부흥에 대한 통찰은 10월 혁명을 다소 진보적인 부르주아 혁명으로 바라보며 그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향에 의해 약화되었다.5)

 

 이것은 미아스니코프, 쿠즈네쵸프(Kuznetsov), 그리고 모이셰프(Moiseev)와 같은 오랜 볼셰비키들에 의해 지도되는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노동자 그룹」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이 그룹은 13차 볼셰비키 총회 직후 1923년 4-5월에 그 선언(강령)을 배포함으로써 처음으로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 문서를 검토하는 것은 그 그룹의 진지함, 그 정치적인 깊이와 전망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 문서에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국제 혁명의 후퇴, 그 귀결로서 노동 계급에 의한 방어적인 투쟁의 필요를 깨닫지 못한 “공격의 이론(theory of the offensive)”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것은 1921년을 후퇴로 보지만 그로부터 많은 기회주의적인 결론들을 이끌어 낸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분석의 동전의 뒷면이다. 더욱이, 이 선언(강령)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대에서 더 이상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없는 임금 상승을 위한 투쟁을 요구하는 잘못된 관점을 채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서의 강점은 그 약점을 압도한다.

 

 첫 째, 우선 단호한 국제주의다. 「콜론타이의 노동자 반대 그룹」과는 반대로 그 분석에 러시아 지역주의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강령의 전체 서론 부분은 국제적인 상황을 다루고 있으며 세계 혁명의 지연에 따른 러시아 혁명의 어려움을 언급하며, 러시아 혁명의 구원은 오직 세계 혁명의 부활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그 자신을 국제 프롤레타리아 세계 군대의 군인으로, 그의 계급 조직을 이 군대의 연대(regiment)로 보도록 배웠다. 10월 혁명의 운명에 대해 염려스런 질문을 제기할 때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러시아 국경 너머의, 혁명의 조건이 무르익었지만 아직 혁명이 발발하지 않은 곳을 응시한다.”

 

 둘 째, 이 강령은 「통일 전선」과 「노동자 정부」의 슬로건이라는 기회주의적 정책에 대해 맹렬히 비판한다. 우리는 여기서도 깊은 국제주의를 확인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 이것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정치에 대한 비판이기 때문이다. 그룹의 입장은 분파주의도 아니고 - 다른 공산주의 조직들(독일의 KPD와 KAPD과 같은) 사이의 혁명적 통일의 필요를 긍정한다 -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사회민주주의 배신자들과의 연합을 요구하면서, 볼셰비키가 러시아 혁명에서 통일 전선 전술을 사용한 것처럼 그 방법을 계승했다는 겉치례의 논의에도 반대한다. “봉기한 프롤레타리아를 승리로 이끄는 전술은 통일 전선이 아니다. 오히려 이 부르주아 분파와 그들의 혼란을 야기하는 용어에 반대하는 유혈낭자하고 타협하지 않는 싸움만이 승리로 이끌 수 있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사회주의 혁명가들, 인민주의자들, 그리고 멘셰비키와의 연합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반대하는 투쟁을 통해 이뤄진다. 통일 전선 전술을 폐기하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이 부르주아 분파 - 이 시기에는 제2인터내셔널의 정당들이다 - 가 결정적인 순간에 자본주의 체제를 방어하기 위해 무기를 들 것이라는 경고를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셋 째, 소비에트가 직면한 위험에 대한 해석이 강점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자본주의 과두정치로 교체”하려는 위협이 그 위험으로 지적된다. 강령은 관료 엘리트의 증가와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공민권 박탈이라는 현실을 보여주며, 공장 위원회와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비에트를 복구시켜 경제와 국가의 지도력을 접수할 것을 요구한다.6) 「노동자 그룹」에게 있어서는 노동자의 민주주의의 부활은 관료주의의 부흥에 반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고, 「노동자의 점검」(Workers' Inspection)을 통해 흔듦으로서 새로운 전진이 있다는 레닌의 생각을 관료주의적 수단을 통해 관료주의를 통제하려는 시도일 뿐이라는 점에서 명백히 거부한 것이었다.

 

 넷 째, 강령은 막중한 책임을 표현하고 있다. KAPD는 독일의 베를린에서 1924년 발표한 「강령」에 대해 비판적 주석을 덧붙이는데, 이는 러시아 혁명과 코민테른의 죽음에 대한 독일 좌파의 성급한 판단을 표현한다. 이에 반해 「노동자의 그룹」은 러시아에서의 반혁명이 명백히 승리했다거나 코민테른의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고 성급하게 주장하지 않는다. 1923년의 “커즌 위기(Curzon crisis)”는 영국이 러시아에 전쟁 선포를 한 것이었는데, 이 동안 「노동자의 그룹」의 구성원들은 전쟁에서 소비에트 공화국을 방어하는데 헌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에게서는 10월 혁명과 볼셰비키의 경험으로부터 단절했다는 어떤 단서도 발견할 수 없다. 사실 그 자신의 역할에 대한 앞서 언급한 의견은 이탈리아 망명 좌파에 의해 상술된 좌익 분파의 견해와 매우 닮아있다. 이 강령은 독립적으로, 심지어 비밀스럽게 스스로를 조직해야 할 필요를 인식하고 있으나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노동자 그룹」이라는 그 이름과 그 강령의 내용은 모두 그 스스로를 볼셰비키 당의 강령과 규칙의 연속선상에 위치 짓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강령은 당 내의 모든 건강한 구성원들, 리더부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진실」, 「노동자 반대파」, 그리고 「민주 집중파」와 같은 다른 반대 그룹에게서도 그룹을 재편성하고 당과 혁명의 재건을 위한 단호한 투쟁을 수행하자고 호소한다. 그리고 많은 측면에서 이것은 “46”이라는 당내 주도적인 분파가 그 자신에 의해 “우선적으로” 폐지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현실적이다.

 요약하자면, 「노동자 그룹」의 프로젝트 안에 어떠한 병적인 것은 없다. 그리고 이 「노동자 그룹」은 계급에 어떤 영향력도 갖지 못하는 분파 따위가 아니다. 이들은 모스크바에서의 그 구성원이 약 200명에 달하고, 관료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편을 일관적으로 지지했다. 따라서 1923년 여름과 가을에 걸친 비공인파업(wildcat strikes)에서도 적극적인 정치적 개입을 추구했다. 사실 당 기구가 이들을 최대로 억압하려 했던 데에는 당 내의 평당원들 사이에서 그룹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미아스니코프가 예견했듯이, “그가 탈출하려는 동안” 자신을 암살하려는 시도까지도 있었다. 미아스니코프는 살아남았고, 투옥된 뒤 추방되었지만, 외국에서 20년동안 혁명 활동을 계속 했다. 러시아 안에서의 「그룹」은 대대적 체포에 의해 다소 절룩거렸고, 그것은 20년대 후반 감옥에 갇힌 안테 실리가(Ante Ciliga)가 다룬 소중한 글 「러시아의 수수께끼」(Russian Enigma)에서 반대파에 대해 설명한 것에서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으며 “극좌” 반대파 운동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최초의 억압은 진실로 불길한 사건이었다. 이것은 공산주의 그룹이 볼셰비키 정권 아래에서 직접적인 국가 폭력에 고통받았다는 첫 번째 공공연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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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공산당 노동자 그룹 선언(강령)

Manifesto of the Workers' Group of the Russian Communist Party

 

● 서문

 

 자기 계급의 고통과 고뇌, 그리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투쟁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는 모든 의식 있는 노동자는 우리의 혁명 발전의 모든 단계에서 적어도 한 번 이상 그 운명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한다. 각각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운명이 세계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운명에 깊히 연관되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상업의 발전은 문명화된 세계의 국가들 사이의 깊은 관계를 만든다”, “프롤레타리아의 운동은 국제적이어야 하며 이미 그렇게 되고 있다”는 옛 사회민주주의의 강령을 아직도 읽고 있다.

 러시아 노동자는 스스로를 국제 프롤레타리아 세계 군대의 병사로, 그의 계급 조직을 이 군대의 연대 조직으로 여기도록 배운다. 10월 혁명의 운명에 대한 염려스런 질문을 제기할 때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러시아 국경 너머의, 혁명이 무르익었지만 아직 발발하지 않은 곳을 응시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는 혁명이 현재 주어진 시점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불평하거나 또는 그의 머리를 숙여서는 안된다. 반대로, 프롤레타리아는 이러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러시아 노동자가 그 자신의 나라를 보았을 때, 그는 노동계급이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하였고, NEP(신경제정책)의 가장 힘든 시련을 떠안았지만, 그들 앞에 NEP의 잘 사육된 영웅들이 서 있음을 본다. 그들의 상황과 자신의 상황을 비교하며, 러시아 노동자는 동요하여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윽고 가장 쓰디쓴 생각에 이른다. 노동자는 제국주의 전쟁과 내전의 모든 무게를 어깨에 지고 왔다. 노동자는 러시아의 신문에서 이 투쟁에서 피를 흘린 영웅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는 빵과 물로 궁핍하게 살아간다. 다른 한 편 타인들, 그리고 자신의 무기를 내려놓은 노동자들의 고통과 비참함으로 자신의 배를 채우는 이들은 사치와 호화스러움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대체 어딜 향해 가고 있으며, 어떻게 될 것인가? 정말로 “신경제정책”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의 착취」로 변해버렸는가? 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이 현장의 노동자에게 제기되었을 때, 그는 과거와 현재를 이을 연결을 찾아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이해하기 위해 뒤를 돌아본다. 그러나 이러한 쓰디쓰고 교훈적 경험들 속에서, 노동자는 복잡하게 얽혀 풀리지 않는 역사적 사건들의 그물망 속의 자신의 존재를 발견한다.

 우리는 우리의 힘이 닿는 한 사실을 이해하는 것을 돕고 싶고, 가능하다면 그에게 승리를 향한 길을 보여주고 싶다. 우리는 신성하거나 오류가 없는 마법사나 예언자인 척 하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에 대해 가장 날카로운 비판과 필요한 정정을 요구한다.

 

● 세계의 공산주의자 동지들에게!

 

 현재 선진국과 특히 그 중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의 생산력은 이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굳은 살 가득한 손에 권력을 쥐기 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공산주의 혁명이 되도록 하고 있다. 인류는 끊임없는 부르주아 민족 전쟁에 관계되어 야만에 삼켜지고 그 자신의 피 웅덩이에 빠져 죽거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여 권력을 획득하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계급 사이, 인간 사이, 국가 사이의 전쟁을 완전히 끝장내어, 노동과 번영의, 평화의 깃발을 심는, 둘 중 하나의 미래를 맞이할 것이다.

 군비 경쟁,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의 항공 함대의 신속한 강화는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혹독한 전쟁 발발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으며,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 전쟁으로 죽을 것이다. 마을, 공장, 기업, 그리고 모든 노동자들이 힘겨운 노동을 통해 창조한 모든 부가 파괴될 것이다.

 부르주아지를 전복시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다. 각 나라에서 더 빨리 부르주아지를 물리칠수록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는 더 빨리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실현시킬 것이다.

 착취와 억압, 그리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는 임금을 높이거나 노동 시간을 줄이기 위한 투쟁을 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투쟁은 과거에는 필요했다. 그러나 오늘날 투쟁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부르주아지와 가지각색의 모든 유형의 억압자들은 모든 나라의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지극히 만족해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그 본질적인 임무인 부르주아지와 그 착취 정권에 대항하는 투쟁으로부터 떨어뜨려놓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복종과 폭력에 대해 최소한의 저항조차 보여주지 않은 채 사소한 요구들만을 제안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은 특정 순간,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직면했을 때 부르주아지의 유일한 구원자가 된다. 노동자 대중은 그 억압자들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면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본다. 그러나 만약 같은 일이 그들의 이해에 맞는 것처럼, 사회주의 용어로 치장되어 제시된다면, 노동 계급은 그 언어에 현혹되어, 배신자들을 신뢰하고 그 힘을 쓸데없는 싸움에 낭비한다. 그러므로 부르주아지나 「사회주의자들」이나,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별로 다른 놈들이 아니다.

 공산주의자 전위는 무엇보다도 먼저 투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계급 동지들의 머릿속에서 모든 지독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제거하고 프롤레타리아 의식을 획득하도록 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부르주아 찌꺼기들을 태워버리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모든 문제와 노동을 공유할 때 가능하다. 지금까지 부르주아지와 한 패거리인 이들을 따라왔던 프롤레타리아트가 투쟁하고, 파업하기 시작할 때, 외부에 서서 그들을 경멸적으로 비난해서는 안된다. 반대로, 그들과 함께 그들의 투쟁 속에 있으면서, 이 투쟁이 오직 부르주아지만을 살찌울 뿐이라고 끊임없이 설명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진실된 말을 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정직한 혁명의 신발을 더럽히는 의미가 될지라도 때로는 똥 무더기 위에 서야만 할 때(선거에 입후보한다든가)도 있는 것이다.

 확실히, 모든 것은 각 나라의 힘의 균형에 달려 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는 선거에 나가거나 파업에 참여할 것 없이, 바로 전투에 돌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나라의 사정이 똑같지는 않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공감을 얻기 위한 모든 방법을 그대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모든 근본적인 원칙을 양보하고 망각하거나 포기하는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거부해야한다. 왜냐하면 지금 당장의 성공에 대한 관심이 진짜 해법을 포기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며, 우리를 대중들을 지도할 수 없도록 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따라하면서 끝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끌려 다니게 된다.

 우리는 움직이지 않은 채 남들을 기다려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혁명은 모든 나라에서 동시에 발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미성숙함의 탓으로 돌리거나 다음과 같이 말하며 변명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혁명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게다가 매우 강하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우리와 함께 행동하지 않은데도 우리가 우리의 부르주아지를 전복시킨다면, 그 후에는 어떻게 되겠는가?”

 독일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와 그에 봉사하는 이들을 모두 쫓아내 버렸다고 가정해 보자.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부르주아지와 사회적 배신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분노로부터 멀리 도망쳐 프랑스나 벨기에로 도망칠 것이고, 푸앵카레와 그 동료들에게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원한을 풀어달라고 간청할 것이다. 그들은 프랑스에게 「베르사유」 조약을 존중할 것을 약속하며, 그들에게 라인 지방과 루르 지방을 주겠다고 제안할 수도 있다. 그것은 그들이 러시아 부르주아지나 그 사회민주주의 동맹들이 했었고, 또 미래에 반복할 행동을 똑같이 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당연히 푸앵카레는 독일을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구원하고, 동시에 소비에트 러시아를 전 세계의 도둑들로부터 구원하는 그런 사업을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푸앵카레와 그 동료들에게는 불행히도 군대를 구성한 노동자 농민들은 그 사업이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 반대해 독일 부르주아지와 그 동맹자들을 돕는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자신의 총구를 주인들, 다시 말해 푸앵카레를 향해 돌릴 것이다. 푸앵카레는 자기 자신과 프랑스 부르주아지를 지키기 위해 그의 군대를 부를 것이고, 불쌍한 독일 부르주아지와 그 사회주의 동맹들을 그들의 운명에 내버려 둘 것이다. 이것은 독일 프롤레타리아트가 베르사유 조약을 깬다고 해도 그럴 것이다. 푸앵카레는 「라인」과 「루르」로부터 추격을 받아, 인민의 자기 결정권 원칙에 입각하여 합병이나 배상금 없는 평화를 공포할 것이다. 푸앵카레에게 「쿠노」와 파시스트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 평의회에 의해 운영되는 독일은 등이 휘도록 열심히 일할 것이다. 당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면, 당신을 같은 곳을 빙글빙글 돌지 말고 그것을 써야 한다.

 

 독일 혁명을 위협하는 다른 위험도 있다. 그것은 세력의 분산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 혁명의 이해에 따르면, 모든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는 단결해야만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가 노동계급의 적에 대한 결정적인 단절과 무자비한 전투 없이 상상할 수 없다면, 그것은 자신의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운동을 군사적으로 억압했던 제2 인터내셔널의 사회적 배신자들에게 이와 같은 승리는 공산주의 혁명의 목표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가진 모든 세력들에 참가하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과 같다. 이것이 왜 우리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노동자 그룹」이 조직적으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제3 인터내셔널에 속한 다른 정당들 사이에서 진실된 혁명적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들에게 마지막 결정적인 전투를 위해 힘을 모으라고 호소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제3 인터내셔널의 정당들 모두에게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인터내셔널에 가입되지 않았지만 공동의 목적을 추구하는 특정 정당들에게도 전투와 승리를 위해 통일 전선을 구성하자고 호소하기 위해, 「제4 공산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1)의 정당들에 대한 우리의 소신을 밝혔다. 

 

 첫 번째 단계가 가까워졌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공산주의의 원칙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조직에 기반하여 부르주아지와 열심히 그들을 비호해 온 모든 종류의 추종자들과 그 아류들(사회주의 혁명가당, 멘셰비키 등)을 끌어내렸다. 그리고 독일 프롤레타리아보다 훨씬 약함에도 불구하고 세계 부르주아지들이 이끌어온 모든 공격들, 부르주아지와 지주들, 그리고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된 모든 공격들을 물리쳤다.

 

 이제 서유럽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힘을 모아 권력 투쟁을 시작할 때이다. 소비에트 러시아, 10월 혁명, 그리고 세계 혁명을 위협하는 것으로부터 눈을 감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현재 소련은 매우 힘든 시기이다. 엄청난 결핍과 그 무게에 직면해 있으며, 그것들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와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에게 치명적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결핍은 러시아 노동자 계급과 세계 노동자 운동의 약함으로부터 비롯된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는 한 쪽에서는 NEP의 관료주의적 퇴보 경향, 다른 한 쪽에서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를 내외부에서 위협하는 경향에 대해 아직 맞서지 못하고 있다.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10월 혁명의 승리가 모든 위협으로부터 방어되는 데에 관심이 있다. 러시아와 같은 나라가 세계 공산주의 혁명의 기지로서 존재하는 것이 이미 승리를 보증함을 의미하며, 결과적으로 국제 프롤레타리아 군대 - 모든 국가의 공산주의자들 - 의 전위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의 군대(볼셰비키)가 겪은 결핍과 고통에 대해 여전히 침묵하는 대다수의 프롤레타리아를 대표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의견을 단호하게 표현해야 한다.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노동자 그룹」은 러시아의 상황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으며, 이 작업을 시작하려 한다.

 

 우리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는, 우리가 소비에트 러시아와 공산주의에 반대해서 이야기한 것들을 악용할 사회적 배신자들과 악당들이 있다는 이유로 우리의 잘못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공포는 전혀 근거가 없다. 우리의 적이 공개되어 있든, 숨겨져 있든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멍에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려 하는 우리들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들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재앙을 일으키는 주체로 언제나 그대로 존재한다. 이로부터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들이 있다는 이유로 우리의 문제와 잘못에 대해 침묵하고 논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뿌리 뽑을 조치도 취하지 않아야만 하는가? 우리가 스스로 사회적 배신자들이 테러를 저지르도록 버려둔다면, 우리가 계속 침묵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대로 간다면 우리가 기억하는 10월 혁명이 더 이상 승리가 아니게 될 것이다. 이는 사회적 배신자들에게는 매우 유익한 일이 될 것이며, 국제적 프롤레타리아 공산주의 운동에게는 죽음의 일격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노동자 그룹」이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노동계급의 이해에 따라 시작하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사회적 배신자들의 의견에 직면하여 공포에 떠는 일이 없이, 인터내셔널과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총체성에 대해 결정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국제적 운동과 러시아 운동의 약점으로 그 실패가 설명될 수 있음을 보았다. 다른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도움은 그들 나라에서의 혁명이나 적어도 하나 둘의 선진국에서의 혁명이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은 러시아 노동자 계급이 10월 혁명의 승리로부터 차지한 위치를, 다른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봉기하여 그들의 적을 패배시키는 시점까지 보존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러시아 노동 계급은 제국주의 전쟁, 내전과 기근으로 약해져 강력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 위협이 되는 위험들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기반으로 적확하게 투쟁을 준비할 수 있다. 이 경험은 그들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며, 다른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도움으로 그것을 계승할 것이다.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노동자 그룹」은 러시아 전역에서 경고하고 호소해 왔다. 러시아 공산당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편에서 생각하는 모든 이들은 함께 모여 투쟁을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10월 혁명의 승리가 직면할 운명에 대해 분명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에 앞서 깨달을 것이다. 투쟁은 어렵다. 우리의 활동은 지하활동에 제한되어 있으며, 우리는 비공개적으로 움직인다. 우리의 「선언」은 러시아에서 출간될 수 없다. 우리는 비합법적으로 선언을 복사하고 유포한다. 우리 그룹에 속한다고 의심이 되는 동지들은 당과 조합에서 제명되며, 체포되고 추방되며 해체된다.

 

 러시아 공산당 12차 당대회에서, 지노비예프 동지는 당과 소비에트 관료의 승인 아래 노동계급으로부터의 비판을 질식시키는 새로운 규칙을 공표했다. “러시아 공산당의 리더십에 대한 모든 비판은, 좌우를 막론하고 멘셰비키주의다.”(12차 대회에서의 그의 연설을 참고하라) 그것은 만약 리더십이 공산주의 노동자나 프롤레타리아에게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누군가 비판하기 시작하면, 그는 당과 노동조합에서 배제되어 GPU(체카)에게 넘겨질 것임을 의미했다. 러시아 공산당의 중앙 위원회는 그 스스로를 로마의 교황처럼 절대 오류가 있을 수 없는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어떤 비판도 원하지 않는다. 우리의 걱정들, 러시아 노동자들이 10월 혁명의 승리가 직면할 운명에 대해 걱정하는 모든 것들은 반혁명으로 선언된다. 우리, 「러시아 공산당의 노동자 그룹」은 모든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앞에서 소련이 국제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가장 위대한 성과 중 하나라고 선언한다. 우리가 소비에트 권력이,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그리고 러시아 노동계급의 10월의 승리가 자본주의 과두제로 변형되고 있다는 위협에 대해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해 소비에트의 권력을 되돌리려는 시도들을 막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들이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이름아래 우리를 체포하고 감옥에 가두더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러시아 공산당의 지도 그룹이 우리의 10월 혁명에 대한 고려가 불법이고 반혁명적이라고 선언한다면, 모든 국가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들과 제3 인터내셔널에 충실한 동지들은 동지들이 알고 있는 우리의 「선언」에 기초하여 스스로 결정적인 의견을 표현할 수 있다. 동지들, 10월 혁명을 위협하는 이 모든 위험들에 대해 걱정하는 모든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가 동지를 보고 있다. 동지가 회의에서 우리의 강령에 대해 논쟁하길 바라고 동지의 대표가 제3 인터내셔널의 5차 당대회에서 당내 분파에 대해, 러시아 공산당의 정책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동지들, 우리의 선언을 토론하고 혁명을 만들어라. 이해하라 동지들, 이것은 당신이 완전하고 늘 고통받는 러시아의 노동자 계급이 10월 혁명의 성과를 보존하는 것을 돕는 것임을. 우리의 10월 혁명은 세계 혁명의 일부이다.

 

노동 동지들에게!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10월 혁명의 승리 만세!

 

세계 혁명 만세!

 

***

미주1 : 선언의 앞 두 파트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의 성격”, “계급 투쟁의 변증법”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여기 공포하지 않기로 했다. 물론 우리의 책에는 포함되어 있다. 그것들은 마르크스가 1848년 공산주의 선언에서 명시적으로 선언했던 것처럼 역사의 관점과, 계급투쟁의 역할을 상기시킨다. 우리에게는 그 당시 「노동자 그룹」이 세계 프롤레타리아가 직면한 역사적 시기에 대해 한 분석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으로 곧바로 가는 것이 더 좋을 것처럼 보인다.

 

● 러시아 혁명에서의 사울과 바울

 

 의식 있는 노동자들은 혁명을 통해 어떻게 다른 계급들이 “기적적으로” 사울에서 바울로 변화하는지 보았다. 그것은 평화의 선동가에서 내전의 선동가로, 그 역으로의 변화이기도 하다. 최근 15-20년의 사건들을 기억하는 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변화를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다.

 

 부르주아지, 지주, 성직자, 사회주의 혁명가당과 멘셰비키를 보라. 성직자들과 지주들 사이에서 누가 1917년 이전의 내전을 지지했는가? 아무도 아니다. 보편적 평화와 은총(state of grace)을 지지하는 모든 이들은 인민들이 내전을 지지 선전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쳐넣고 쏴 죽이고 목매달아 죽였다. 10월 이후에는? 누가 그만한 열정으로 내전을 지지 옹호 했는가? 똑같은 기독교의 독실한 아이들이었다. 성직자, 지주, 그리고 공무원들.

 

 「헌정 민주주의자들」(Constitutional Democrats)로 대표되는 부르주아지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내전의 전사들이 아니었던가? 비보르크의 폭동을 기억하라. 임시 정부의 최고 행정관이었던 밀류코프는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우리은 우리 손에 붉은 깃발을 쥐었다. 이 붉은 깃발은 오직 우리의 시체를 밟고서만이 빼앗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진실이다. 그는 두마 앞에서는 매우 다른 이야기를 했다. “이 붉은 깃발은 우리의 눈에 거슬린다.” 그러나 우리는 1905년 이전에는 부르주아지가 내전에 호의적이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1917년, “평화, 평화, 사회의 모든 계급의 연합 : 이것이 국가의 구원이다!”고 악의를 갖고 공표했던 임시정부 깃발 아래에서 이야기했던 것은 바로 부르주아지, 카데츠였다. 그러나 10월 이후에는 어떠했는가? 오늘날 누가 광신도와 같이 계속해서 부르짖는가?: “소비에트를 무너뜨려라. 볼셰비키, 전쟁, 내전을 그만둬라! 이것이 국가의 구원이다!” 이들이 지금 갈채를 받고 있는 똑같은 선량한 주인들과 “혁명적” 코훌쩍이들이다.

 

 사회주의 혁명가당은 어떤가? 그들은 한때 플레베(Plehve),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Grand Duke Serge Alexandrovich), 보그다노비치(Bogdanovich)와 구 정권의 기둥들을 암살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러한 폭력적 혁명가들은 1917년 임시 정부 아래에서 연합과 시민 평화를 요구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그들은 요구했다! 10월 이후에는? 그들은 여전히 평화를 사랑했나? 그렇지 않다! 그들은 다시 폭력의 인간으로, 그러나 이번에는 반동적으로, 레닌에 반대하여 그러했다. 그들은 이제 내전을 외친다.

 

 멘셰비키들은? 그들은 1908년 이전에는 무장 봉기의 옹호자들이었으며, 1908년에서 1917년까지는 8시간 노동, 토지의 징발, 민주 공화국의 옹호자로서 독재에 저항하여 단체를 조직할 권리와 합법적인 투쟁을 쟁취하기 위한 일종의 “계급 연합”에 함께 했었다. 그들은 독재정권의 전복에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전쟁 동안에는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애국자들이었고, 심지어 “국제주의자”이기까지 했다. 1917년 10월 이전, 그들은 시민 평화를 지지했다. 그러나 10월 이후, 군국주의자들, 카데츠와 사회주의 혁명가당처럼 내전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우리 러시아에만 국한된 현상인가? 아니다. 중세 봉건주의를 전복하기 전 영국, 프랑스, 독일 부르주아지 등은 내전을 옹호하고 이끌었다. 봉건주의가 먼지가 되고, 부르주아지가 권력을 잡은 후, 그들은 시민 평화의 옹호자가 되었으며, 특히 전력을 다해서 싸웠던, 새롭게 권력을 쟁취하고자 등장한 노동계급에 대해서 그러했다.

 

 이제 어디 부르주아지가 내전에 호의적인지 보라. 어디에도 없다! 모든 곳에서, 소비에트 러시아를 제외하고서는 평화와 사랑을 선전한다. 이러한 태도가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취하는 순간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은 그대로 시민 평화의 옹호자로 남아 있을 것인가? 그들은 평화와 단합을 요구할 것인가? 아니다. 그들은 곧 내전을 옹호하는 폭력적인 선동가가 될 것이며, 그 전쟁을 끝까지 수행할 것이다.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여, 우리들은 여전히 이 법칙의 예외인가?

 

 전혀 아니다.

 

 또 다시 1917년으로 돌아간다면, 우리의 노동자 평의회의 대표자들은 내전의 핵심이 되었을까? 그랬다. 그들은 나아가 권력을 잡았다. 그들은 부르주아지, 지주, 성직자와 그 외 평의회에 적대적인 이들에게 함께 봉기하기를 원했을까? 아니다. 그들은 부르주아지와 그 크고 작은 모든 동맹들이 저항없이 복종하길 바랬을까? 그렇다. 그들은 그것을 원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러므로 권력을 쥐기 전에 내전을 옹호했고, 그 승리 이후에 내전이 아니라 시민 평화를 옹호했다.

 

 이 모든 변혁에서 역사적인 관성이 충분히 있었음은 진실이다. 군국주의자들에서 멘셰비키들, 사회주의 혁명가당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이 소비에트 권력에 대항해 내전을 지휘하던 시기에조차 그것은 “시민 평화”의 슬로건 아래 있었다. 사실 프롤레타리아트는 평화를 원했다. 그러나 다시 전쟁을 외칠 수 밖에 없었다. 1921년, 러시아 공산당의 중앙 위원회의 순환 중 하나에서도 이러한 불가해한 상황을 엿볼 수 있었다. 내전에 대한 슬로건은 심지어 1921년에도 강한 혁명적 정신의 지표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관점을 흔들지 못하는 단지 역사적인 경우임을 알 수 있다.

 

 만약 최근의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에 의해 쟁취한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시민 평화를 옹호한다면, 모든 솔직한 프롤레타리아들은 유혈낭자하고, 폭력적인, 세계 부르주아에 저항하는 시민 전쟁의 슬로건 아래 굳게 단결해야만 할 것이다.

 

 노동 계급은 실제로 부르주아 국가에서의 착취 계층이 요구하는 시민 - 보편적 평화, 은총이 얼마나 병적인지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약 내일 이 부르주아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잡게 되면, 지주에서부터 제2, 2 1/2 인터내셔널에 이르기까지 모든 오늘날의 평화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에 저항하는 내전을 일으킬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전력을 다해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모든 국가에서의 유혈낭자하고 무자비한 내전을 요구해야 한다. 우리는 바람을 일으킬 것이다. 태풍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하여 권력을 잡은 모든 곳에는 더욱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시민적, 보편적 평화, 은총을 선전할 것이다. 

 

 모든 나라의 지주들, 멘셰비키들, 사회주의 혁명가당은 자본주의 억압이 지배하는 모든 곳에서 시민 평화를 옹호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차지한 모든 곳에서 더욱 잔인하고 유혈낭자한 내전을 옹호할 것이다.

 

● 오늘날의 주요한 책무

 

 모든 나라들에서의 생산력의 발전은 자본주의가 스스로 그 생산력을 파괴하는 요소가 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세계대전과 뒤따른 모든 사건들, 베르사유 조약, 배상금 문제, 제노바, 헤이그, 로잔, 파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랑스에 의한 루르 점령, 대규모 실업에 더해 끝나지 않는 파업의 물결은 자본주의 착취의 마지막 시간이 도달했고, 징발자였던 자들이 이제 몰수당해야 할 때가 왔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인 임무는 자본주의가 던져놓은 야만으로부터 인류를 구하는 것이다. 이 임무는 임금 상승, 8시간 노동, 부분적인 양보 등 자본주의가 선사해 줄 수 있는 것들로는 성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를 결정적인 권력 투쟁을 목표로 하도록 조직화해야 한다.

 

 그러는 동안,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물질적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을 옹호하는 선전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활 수준에 진정한 개선이 있을 것이라는 환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악의적인 선전이다.

 

 선진 노동자들은 파업에 참여해야 하고, 상황이 허락하는 한 지도해야 한다. 그들은 이 길을 따라가면 생활 조건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에게 실질적인 요구를 제안해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확고히 이야기해야 한다. 이것은 구원을 위한 길, 노동계급의 삶의 조건을 증진시킬 수 있는 길이 아님을. 이 모든 자본에 대한 분쟁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투쟁에 대한 관점으로 프롤레타리아를 조직할 수 있다면, 이것이 거부될 리가 없다. 권력을 차지하지 못한다면 생존의 조건을 변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설명하는 것보다 이 운동의 우두머리가 되어 용감하고 단정적이며, 실질적이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이해할만한 요구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모든 파업, 모든 싸움이 정치적인 권력을 차지하고, 착취자들을 몰수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함을 증명하는 교훈이 될 것이다.

 

 여기 모든 나라에서 온 공산주의자들은 의회에 대해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다. 국회의원은 입법 과정을 통해 긍정적인 일을 해보려 할 것이 아니라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이러한 의회가 파괴될 수 있도록 선전하고 작업한다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

 

 이와 비슷하게, 임금, 시간에 대한 파업의 필요가 있는 곳에, 우리는 반드시 참여해야 하지만 노동자들의 경제적 조건이 진정으로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가서는 안된다. 대신 우리는 이러한 환상을 깨부셔야 하고 각 투쟁을 마지막 투쟁을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의 군대를 조직하기 위한 의식화의 준비로써 이용해야 한다. 한때는 8시간 노동 요구가 혁명적이었지만, 사회주의 혁명이 현안이 된 모든 나라들에서 그 요구는 더 이상 혁명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통일 전선에 대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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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국제 평론에 게재될 선언의 나머지 부분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사회주의 통일 전선

○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잡은 국가(노동자 민주주의)에서의 통일 전선에 대한 의문

○ 민족 문제

○ 신 경제 정책(NEP)

○ 신경제정책과 농촌

○ 신경제정책과 정치

○ 신경제정책과 산업 관리

 

 미주

1. 가브리엘 미아스니코프(Gabriel Miasnikov)는 우랄 출신의 노동자로 1921년 볼셰비키 당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때는 결정적인 10차 당대회 직후로, 그는 “군국주의자들부터 아나키스트들까지 모두 포함하는 언론의 자유”(Carr, 「The Interregnum」에서 인용)를 요구했다. 레닌이 이러한 주장을 단념시키기 위해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굽히지 않았고, 결국 1922년 초기 당으로부터 축출되었다. 1923년 3월, 그는 다른 동지들과 함께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의 노동자 그룹」 창설에 동참했으며, 그들은 RCP 12차 대회에 배포된 이 「선언」을 출간했다. 그룹은 당 내에서, 비당원 노동자들 사이에서 비합법 활동을 시작했고, 1923년 여름 파업의 물결 속에서 대중 파업을 요구하고 본질적으로 방어적인 계급 운동을 정치화하려고 시도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파업에서의 그들의 활동은 GPU가 그들을 실질적인 위협으로 인식하도록 하는데 충분했다. 주도적인 동지들의 체포가 잇따랐고, 이는 그룹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축소된 규모로 1930년 초반까지 그들의 지하 활동을 수행했다. 그 이후 미아스니코프의 인생사는 다음과 같다. ; 1923년에서 1927년까지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감옥이나 지하 활동을 위한 망명 생활로 보냈다. 1927년 러시아에서 탈출한 그는 페르시아, 터키로 도망 다녔고, 그곳에서 역시 수감생활을 하다가 결국 1930년 프랑스에 정착했다. 이 시기동안 그는 여전히 러시아에서의 그의 그룹을 조직하려 했다. 전쟁 후, 그는 스탈린에게 그가 소련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원했다. 그가 그의 나라로 돌아간 날 이후 그에 대한 소식은 없다. 왜냐하면 군사 법정에 의한 비밀 심판으로 인해 그는 1945년 11월 16일, 모스크바의 감옥에서 총살당했기 때문이다.

 

(주)

1) 우리의 글 “좌익 공산주의와 맑스주의의 연속성”을 보라.

   http://en.internationalism.org/the-communist-left

2) ICC는 이미 영어와 러시아어로 「러시아 공산주의 좌파」 소책자를 발간했다. 이 책은 러시아에서의 좌익 공산주의의 상이한 표현에 대한 연구에 기여한다. 현재 프랑스어 판이 준비중이다. 영어 판은 「노동자 그룹」의 강령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 당시 새로운 완벽한 강령이 러시아에서 발견되었다. 오늘 우리가 펴내는 판은 원래 프랑스 어로 쓰여진 가장 최신의 것이며 미래의 프랑스어 개정판에 포함될 것이다.

3) 「국제평론」 8, 9호에 실린 우리의 글 “러시아의 좌익 공산주의”와 「러시아 공산주의 좌파」를 읽을 것.

4) “중앙 위원회의 이런저런 결정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 당의 구성원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이런저런 의심을 품었고,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오류, 불규칙성, 무질서들을 기록해 두었지만, 그것을 당의 회의에서 밖으로 꺼내어 말하기를 두려워했으며, 그것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현재 지방 위원회와 RCP의 중앙 위원회의 구성원을 추천하고 선택하는 것은 당도 아니고, 그 대중도 아니다. 반대로, 당의 서기 위계는 전에 없을 정도로 엄청난 정도로 집행 위원회(executive assemblies)가 될 회의와 총회의 구성원들을 전에 없을 정도로 뽑았다... 새로 만들어진 자리는 정권이 당 내의 분파의 독재라는 것으로 설명이 된다. 분파적 정권은 폐지되어야 하며, 우선 첫째로 그것을 만든 이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 그것은 동지적인 통일과 당내 민주주의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5) 「국제평론」 8, 9호의 “러시아의 좌익 공산주의” 참조.

 

6) 그러나 선언(강령)은 또한 노동조합이 경제를 관리하는 중앙집중적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방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노동자 반대파」의 옛날 입장은 1921년 미아스니코프가 비판했었다.

 

 

 

 

우리는 「선언(강령)」의 첫 번째 부분을 국제 평론 지난 호에 실었다. 되짚어보면 「러시아 공산당의 노동자 그룹」은 이 강령을 작성했고, 제3 인터내셔널의 당과 러시아에서의 소비에트 권력의 기회주의적 타락에 대한 반응으로 출현한 좌익 세력들로 구성된, 소위 좌익 공산주의의 일부를 형성했다.

 

 아래 게재된 이 문서의 앞으로의 두 장은 기회주의적인 통일 전선 정책과 노동자 정부 슬로건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을 역사적 맥락 속에 위치지음으로써, 강령은 역사적인 시기의 변화를 이해하려는 시도로 읽어야 한다. 새로운 시대는 반동적일 뿐인 부르주아지의 여러 분파들과의 동맹 정책을 무효화하고 헛된 것으로 만들었다. 이와 유사하게, 반역자로 드러난 사회 민주주의와 같은 조직들과의 동맹들도 프롤레타리아트를 약화시키는 것일 뿐이었다. 나아가 「강령」은 새로운 시대에서 개혁을 위한 투쟁은 더 이상 화두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엄청난 역사적 변화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일어났기 때문에 그 변화가 정확하게 무엇이었는지 그런 혁명가들조차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관점을 갖추기 힘들었다. 이것은 「노동자 그룹」도 마찬가지여서, 개혁을 위한 투쟁과 자본의 영구적인 잠식에 직면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방어적 경제 투쟁을 구분하지 못했다. 이들은 방어적 경제 투쟁을 거부하지 않았지만, 정치적‧경제적 투쟁이 전부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연대 없이 권력을 쟁취하는 것만이 프롤레타리아트를 그 사슬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라 믿었다.

 마지막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가해진 언론의 자유에 대한 제한에 직면하여, 내전이 끝난 후에도 「강령」은 지도자에게 “당신은 어떻게 사회 경제의 엄청난 조직화 문제를 프롤레타리아트 없이 해결할 수 있는가?”라고 물을 때, 굳건하고 명확하게 답하고 있다.

 

 

 

사회주의 통일 전선

 

 이 문제의 본질적인 내용을 보기 전에, 지노비예프 동지의 통일 전선에 대한 테제가 러시아에서 토론되고, 받아들여진 상황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1921년 12월 19-21일에, RCP(러시아 공산당)의 12차 당대회가 있었고, 이 때 통일 전선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 때까지 이 문제에 대해 언론에 발표되거나 당 모임에서 토론이 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당대회에서, 발표된 테제에 대해 조잡한 공격은 있었으나 곧 잠잠해졌고, 당대회는 즉시 거수로 이 테제를 승인하게 되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이러한 배경들을 떠올리는 이유는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사실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첫 째, 통일 전선 전술은 매우 서둘러, 거의 “군대처럼” 이뤄졌다는 점, 둘 째, 러시아에서 이것은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수행되어졌다는 점이다.

 

 볼셰비키는 코민테른1) 내에서 이 전술의 발기인이었다. 그들은 외국 동지들에게 우리 러시아 혁명이 성공했고, 그것은 통일 전선 때문임을 명확히 했다. 또한 통일 전선은 러시아 안에 모든 혁명 전 시기의 경험들과, 특히 볼셰비키의 멘셰비키에 맞선 투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축되어 있었다고 설득했다.

 다른 나라에서 온 동지들은 단순히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들도 그들의 부르주아지에게 승리하길 원했다. 이제 그들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통일 전선 전술 탓으로 승리했다고 납득했다. 그들은 러시아 혁명의 역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레닌 동지가 이 단순한 이야기를 믿어버린 이들을 심각하게 비난했지만, 그는 누구도 그가 이러한 특별한 단어에 붙들려 있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러시아 혁명의 경험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한 때 볼셰비키는 독재에 반대하는 진보적인 운동을 지지했다.

 “a)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짜리즘에 대항하여 부르주아지가 혁명적이든, 단지 반대파일 뿐이든 그들을 지지해야 한다.

 

 b)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러시아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의식의 성장을 반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 앞에 부르주아 해방 운동의 제한적이고 부적절한 성격이 스스로 드러날 때마다 그 정체를 밝혀야만 한다.” (「러시아 사회 민주주의 노동당」 2차 당대회 결의문, ‘자유주의자에 대한 태도’, 1903년 8월)

 

 1905년 4월 열린 3차 당대회 결의문은 동지들에게 두 가지 지점을 지적하며 권고했다.

 

 1) 노동자들에게, 많은 지주층과 제조업자들로 대표되는 온건 자유주의자들부터 “해방 연합(Emancipation Union)”과 다양한 자유주의 전문직 그룹들로 알려진 급진적 경향들에 이르기까지 부르주아 민주주의 경향이, 뉘앙스에도 불구하고, 반혁명적, 반 프롤레타리아 본질을 갖고 있음을 설명할 것.

 

 2) 노동자 운동을 되돌리려는 일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시도에 저항해 싸우고,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다양한 그룹의 이름으로 이야기할 것. 1898년 이후 사회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지와의 “통일 전선”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이 통일 전선은 세 가지 단계가 있다.

 첫 째, 1901년, 사회 민주주의는 현재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진보적인 운동들”을 지지했다.

 둘 째, 1903년, 그들은 “부르주아 운동의 한계”를 넘어설 필요를 인식했다.

 셋 째, 1905년 4월, 그들은 “동지들로 하여금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경향의 반혁명적, 반 프롤레타리아적 본질과 그 영향력을 비판”하고 그들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영향에 대해 정력적으로 싸웠다.

 

 부르주아지를 지원하는 것이 어떤 형태가 되었든, 1905년 이전 특정 시기 볼셰비키가 부르주아지와 통일 전선을 형성했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러시아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통일 전선하는 “혁명가”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가?

 

 1905년 9월, “Boulyguine 두마”의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소집된 회의에서, 대회는 이 두마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태도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정의했다. “인민의 대표라는 이러한 환상으로, 독재는 노동 운동이 지쳐감에 따라 성장하고 질서를 열망한 부르주아지의 많은 요소들을 부추겼다. 그들의 이해와 지원을 약속하면서, 독재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운동을 박살내려 했다.”

 

 볼셰비키가 1906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자당」(RSDLP) 통일 대회에서 제안한 결의안은 볼셰비키 정책 변화의 비밀을 드러내 준다. 부르주아지를 지원하던 정책이 부르주아지에 대한 투쟁 정책으로 변화한 것이다. “거대한 자본가와 지주들의 계급들이 독재에 대해 반대하다가 혁명을 파괴하기 위해 얼마나 재빨리 독재와 연합하게 되었는지 볼 수 있다.” “민주주의 혁명 시기의 노동자 계급의 주요 임무는 그 혁명의 완수”였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이 혁명의 완수를 원하는 당과의 “통일 전선”을 형성해야만 했다. 이러한 이유로 볼셰비키는 카데츠의 우익과 했던 협정을 폐기하고, 그 좌익인 「사회주의 혁명가당」, 「인민 사회주의자들」과 「트루도빅스」(Trudoviks)와의 협정을 맺었다. 이에 따라 민주주의 혁명의 지속적인 진전을 위한 투쟁에서 “사회주의 통일 전선”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 볼계비키의 전술은 옳았는가? 10월 혁명의 적극적인 투사들 사이에 이러한 전술의 시비에 대해 논쟁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러므로 1906년에서 1917년까지 볼셰비키가 「제헌 의회」를 소집하기 위한 「임시 혁명 정부」의 형성으로 완수된 민주주의 혁명의 지속적인 진행을 위한 투쟁에서 “사회주의 통일 전선”을 옹호했다고 본다.

 

 아무도 이 혁명이 프롤레타리아적이거나 사회주의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였음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는 사회주의 혁명가당, 멘셰비키, 인민주의자들과 트루도빅스들과 실질적으로 단결하면서 “사회주의 통일 전선” 전술을 제안하고, 그에 따랐다.

 

 우리는 민주주의 혁명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가, 아니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볼셰비키의 전술은 무엇이었는가? 소비에트 권력을 위한 투쟁도 “사회주의 통일 전선”을 필요로 하는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 혁명가당」을 “모호한 사회주의 표현을 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분파”로 여긴다. 그것은 혁명 동안, 지금까지 그들의 활동을 통해 확인되어 왔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분파로서, 이 당은 사회주의 혁명, 사회주의을 위한 투쟁에서 실질적인 임무를 떠맡을 수 없었다. 대신에 그들은 “모호한 사회주의적”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 투쟁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되돌리려 했다. 만일 그러하다면 (그리고 그들은 그러했다) 봉기한 프롤레타리아를 승리로 이끌 전략은 사회주의 통일 전선일 리가 없다. 오히려 부르주아지 분파와 그들의 혼란스런 사회주의 용어들을 상관하지 않는 피튀기는 전투만이 승리로 이끌 전략일 것이다. 오직 이러한 전투만이 승리를 가져올 것이며, 승리는 반드시 그런 방식으로 이뤄져야만 할 것이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승리했다. 사회주의 혁명가당, 인민주의자들과 멘셰비키들과의 동맹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에 맞서 싸움으로써 승리했다.

 

 10월이 다가왔을 때 볼셰비키는 사회주의 혁명가당2), 멘셰비키3)의 사회주의적 수사들로부터 노동자 대중을 해방시킴으로써 사회주의 혁명가당과 멘셰비키와의 분리에 성공했다. 그리고 부르주아지 분파와의 통일 전선으로 취급하기 힘든 이러한 분리로부터 그들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러시아의 경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무엇인가?

 1) 특정 역사적 순간, 부르주아지와의 통일 전선은 1905년 이전의 러시아에 존재했던 상황과 유사한 조건의 지역에서 형성될 수 있다.

 2) 1906년과 1917년 사이의 러시아와 다소 유사한 상황의 나라들에서는 부르주아지와의 통일 전선을 포기하고 “사회주의 통일 전선” 전술을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위한 직접적인 투쟁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사회주의 통일 전선” 전술을 폐기하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모호한 사회주의적 용어를 쓰는 부르주아 분파”- 그 당시로서는 제2 인터내셔널의 모든 정당들이 해당될 것이다 -가 결정적인 순간 자본주의 체제를 방어하기 위해 무장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세계 자본주의 착취를 전복하려는 목적을 가진 모든 혁명적 인자들의 단결을 위해서는, 그들이 「독일 공산주의 노동자당」(KAPD), 「네덜란드 공산주의 노동자당」과 「제4 인터내셔널」4)에 속한 다른 정당들과의 동맹이 필수적이다. 모든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들은 그들을 투옥했던 모든 세력들- 제2 인터내셔널의 정당들, 제2 1/2 인터내셔널5)과 그들의 “모호한 사회주의적 용어”- 로부터 스스로 분리할 필요가 있다.  세계 혁명의 승리는 부르주아의 사회주의 캐리커쳐로부터의 원칙적인 분리와 그들에 대항하는 멈추지 않는 투쟁 없이는 불가능하다. 기회주의자들과 사회주의-쇼비니스트들은 부르주아지의 하인들로서, 결과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적들을 지휘했는데, 특히 오늘날, 자본가들과 연결되어, 그들의 나라에서, 해외에서 무장한 억압자가 되었다. (볼셰비키의 강령과 비교해 보라) 이것이 코민테른의 최고 위원회의 테제에 의해 지지된 사회주의 통일 전선 전술의 진실이다. 실제로는 기회주의적 전술이었던 것이다. 자국과 다른 나라들에서 행해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무장 억압을 수행한 적들과의 합동 전술은 러시아 혁명의 경험에 명백히 대립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깃발 아래 남아있기 위해, 우리는 부르주아지와 그 사회주의자 하인들에 대항하는 “통일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사회주의 통일 전선” 전술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지원되는 독재에 대항하여 일어날 때, 부르주아 민주 혁명을 목표로 할 때 그 혁명적인 가치를 갖고 있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도 반대하는 독재에 대해 싸울 때, 부르주아지와의 “통일 전선” 전술을 따라야 한다.

 

 코민테른이 모든 국가들의 공산당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회주의 통일 전선을 쓸 것을 요구한 것은 각 나라의 조건에 상응하도록 해결책을 내놓는 현실적 임무를 방해하고, 의심할 바 없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혁명적 운동들에 해를 끼쳤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집행위원회의 테제에 대하여

 

 이 테제는 프라우다(Pravda)에 게재되었는데, “이론가들”이 “사회주의 통일 전선”의 아이디어를 단 두 단어의 표현으로 이해했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통일 전선”. 1917년 러시아에서는 모든 나라들에서, 특히 샤이데만, 노스케를 비롯한 사회적 배신자들이 얼마나 “인기 있었는지” 모든 이들이 안다. 볼셰비키의 당원들은 거의 경험이 없었기에, 모든 곳에서 외쳤다. “이 노동자 계급의 배신자들아! 우리는 너희들을 전신주에 목 매달 것이다. 너희들은 모든 나라들의 노동자들을 수장시켜 죽인 그 피의 욕조에 책임을 져야 한다. 너희들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암살했다. 베를린의 거리에서, 너희들의 폭력적인 행동 덕에 착취와 자본주의 억압에 반대에 일어난 노동자들의 붉은 피가 흐른다. 너희들은 베르사유 평화의 저자들이지만 그것을 매번 배신함으로써, 너희들은 국제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셀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우리는 공산주의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 통일 전선”을 제안하는 것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고 덧붙인다. 그것은 노스케, 샤이데만, 반데벨드, 브란팅 등과의 연합전선을 이야기한다. 그러한 통일 전선은 일방적으로든 다른 방식으로든 위장될 것이며, 이것이 앞으로 일어날 일 들이다. 테제는 단순히 “사회주의 통일 전선”으로 명명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통일 전선에 대한, 그리고 제2 인터내셔널에 속한 노동자들, 「2와 1/2 인터내셔널」과 암스테르담, 유사하게 아나키스트와 생디칼리스트 조직에 속한 노동자들에 대한 태도에 대한 테제”라고 이름 붙여졌다. 왜 이렇게 장황한가? 여러분은 오래지 않은 시간 전에 우리를 제2 인터내셔널의 장례식에 초대한 지노비예프 동지가 이제는 우리를 제2 인터내셔널과의 결혼 축하연에 초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장황한 제목을 달아야 했는가 그 이유이다. 사실 이 테제는 노동자와의 협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2 인터내셔널과 2와 1/2 인터내셔널의 정당들과의 협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노동자들은 해외에 나가 본 적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중앙 위원회에 앉아있는 반데벨데, 브란팅, 샤이데만, 노스케 등에 의해 대표되는 당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협정이 이뤄지는 것은 그들과 함께이다. 누가 세 개의 인터내셔널의 대회를 위해 베를린에 가겠는가?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은 진심에서 우러나는 신뢰를 누구에게 줘야 하는가? 벨스(Wels)파에게, 반데벨테(Vandervelde) 파에게 

 

 그러나 KAPD와 협정을 맺으려 시도한 적이 있던가? 지노비예프 동지가 대부분의 훌륭한 프롤레타리아적 인물들이 있다고 인정한 그곳과? 없다. 그리고 KAPD는 아직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쟁취를 위해 싸우고 있다.

 

 지노비예프 동지의 이 테제의 목적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제2 인터내셔널의 혼합이 아니라고 확인했던 것은 사실이다. 제2 인터내셔널에 대해, 그는 조직적 자율성의 필요를 일깨워준다. “제2 인터내셔널과 2 1/2 인터내셔널과 이러저러한 협정들을 맺은 각 공산당의 위치는 절대적 자율성과 총체적 독립성이 설명해준다.” 공산주의자들은 실천에 있어서 자기 규율을 스스로 강제하지만, 그들은 노동자 조직의 정치에 대한 예외없는 권리와 가능성을 - 실천의 전후에, 가능하다면 실천하는 가운데 - 유지해야 한다. “자본주의 전선에 대항하는 실천적인 행동에서의 모든 노동자 조직의 최고 수위의 단결”이라는 슬로건을 지지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입장을 방어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1921년 러시아 공산당 대회에서 제출된 코민테른 중앙위원회의 테제를 보라)

 

 1906년 이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자당」에서는 위의 코민테른의 테제에서 인용된, 가능한 최대한의 자율성을 갖고 있는 두 분파가 있었다.

 

 협상에서의 규율, 당 내 활동에서의 판단의 자율성은 공식적으로 RCP의 규정에 인정되어 있었다. 다수가 정한 것은 해야만 하며, 개인은 비판의 권리만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었다. 명령된 것은 해야만 하지만, 그것이 세계 혁명에 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에 대해 분노했다면, 실천 이전에, 와중에, 그리고 이후에 자유롭게 그 분노를 표현할 수 있었다. 이것은 자율적 행동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Vandervelde가 베르사유 조약에 사인하고, 스스로 타협했을 때와 같다)

 

 이러한 같은 테제들에서, 집행위원회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대신하는 것임이 분명한 노동자 정부의 슬로건을 제안했다. 노동자의 정부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당의 정수인 중앙 위원회로 구성된 정부이다. 이러한 테제의 이상적인 실현은 사회주의자인 에버트(Ebert)가 대통령인, 그의 승인과 함께 정부가 형성된 독일에서 일어났다. 이 공식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공산주의자들은 스웨덴의 브란팅과 독일의 에버트와 같은 사회주의자 수상, 대통령을 지지하는 투표를 해야만 한다.

 

 코민테른의 의장, 지노비예프 동지는 사회민주당의 중앙위원회, 에버트, 노스케, 샤이데만을 만나 주먹을 쥐고 외쳤다. “노동 계급의 배신자, 변절자!” 그들은 친절하게 미소 짓고 그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당신들은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살해했다. 우린 당신을 교수대에 목매달 것이다.” 그들은 그를 향해 더욱 친절하게 미소 지으며 더욱 고개를 숙였다.

 

 지노비예프 동지는 그들에게 통일 전선을 제시하고,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노동자 정부를 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므로 그는 교수대를 수상의 자리와 바꾸어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노스케, 에버트, 샤이데만, 등등은 노동자 집회에 가서 코민테른이 자신들을 사면했으며, 교수대 대신 수상 자리를 제안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조건은 공산주의자들이 수상을 인정하는 것이다 [...]6) 그들은 모든 노동 계급에게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실현의 가능성이 오직 자신들과의 단결에 있지, 그들과의 대결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덧붙인다. 이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우리를 예전에 교수형에 처해 무덤에 묻었다. 이제 그들은 우리에게 왔다. 우리는, 선의로 그들을 용서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를 용서했기 때문이다. 상호 사면인 셈이다.

 

 코민테른은 제2인터내셔널에 그 정치적 성실함의 증거를 보여주었고, 정치적 열등함의 증거를 받았다. 실제 이 변화의 기원은 무엇인가? 지노비예프 동지는 어떻게 에버트, 샤이데만, 노스케에게 교수대 대신 수상 자리를 권할 수 있는가? 얼마 전에 그들은 제2 인터내셔널의 장송곡을 불렀는데, 이제 그들은 삶에 키스를 한다. 왜 그는 그런 노래를 부르는가? 우리는 정말 그 부활을 보고 그 주장을 들어야 하는가?

 

 지노비예프의 테제는 이러한 질문에 효과적으로 대답한다. “세계 경제 위기는 더더욱 첨예해지고, 실업은 늘어만 간다. 자본은 공세로 나아가고, 교묘하게 작전행동을 하고 있다. 노동계급의 조건은 손상되었다.” 그러므로 계급 전쟁은 피할 수 없고, 노동 계급은 더욱 왼쪽으로 나아갈 것이다. 개량주의적 환상은 파괴되었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공산주의 전위의 용기를 제대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로부터 샤이데만과의 통일 전선은 구성되어야 한다. 극악무도한! 결론은 전제와 일관되지 않다!

 

 우리는 지노비예프가 그의 테제에서 통일 전선을 방어하기 위해 내세웠던 주장들에 대해 좀 더 근본적인 것들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객관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지노비예프 동지는 놀라운 발견을 했다. “우리는 단결을 위한 노동 계급의 투쟁을 안다. 샤이데만과의 통일 전선을 통하지 않고서 어떻게 단결할 수 있는가?” 자신의 계급의 이해와 세계 혁명에 대해 생소하지 않은, 모든 의식 있는 노동자들은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노동 계급은 “통일 전선”을 주장할 필요가 생겼을 때에만 단결을 위해 투쟁하는가? 노동 계급이 정치 투쟁에 발을 디뎠을 때부터 노동자와 함께 한 이라면 누구나 모든 노동자를 괴롭히는 의심을 알고 있다. 왜 멘셰비키, 사회주의 혁명가당, 볼셰비키, Trudoviks(인민주의자) 들은 서로 싸우는가? 모두가 민중을 위하고 있으면서도.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서로 싸우게 하는가? 모든 노동자들은 스스로 독립적인 계급으로서 조직화해야 하고, 그 외 모든 계급들에 대해 반대해야 한다. 우리의 쁘띠 부르주아적 편견들은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그것은 진실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 호의적인 상황에 있는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우리는 노동 계급이 국제적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에 대항하는 무장 투쟁을 준비하도록 해야 한다. 이 경우, 확실히 러시아 혁명의 경험이 고려되어야 한다. 세계 노동 계급은 제2 인터내셔널과 2와 1/2 인터내셔널의 사회주의자들이 반혁명의 선두에 있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회주의의 배신자들과의 통일 전선에 대한 선전들은 어떤 뉘앙스에 상관없이 그들도 역시 사회주의를 위해 부르주아지와 싸우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오직 공개적이고 용기있는, 내전을 옹호하고 노동계급에 의한 정치 권력의 획득을 옹호하는 선전들만이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심을 끌 수 있다.

 

 노동 계급이 그 자신의 물질적 법적 권리를 파업과 의회를 통해 개량할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 이것은 밝혀져야 한다. 가장 시급한 투쟁은 권력 투쟁이다. 우리는 우리의 선전을 통해, 많은 경우 파업을 자극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동자의 조건을 개선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아직 옛날 개량주의적 환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스스로를 약화시키는 투쟁을 하고 있다. 우리는 노동자와 파업 동안 연대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이러한 운동은 노동자들을 노예 상태, 착취와 갈증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노동자의 굳은 살 박힌 손으로 권력을 쟁취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지노비예프 동지의 연대 결정은 통일 전선 전술을 정당화 했다. 우리는 “사회 혁명의 시대”라는 관념을 이해하는 데 익숙하다. 그것은 현재, 사회 혁명이 시대의 화두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제로, “사회 혁명의 시대는 장기적 관점에서 혁명 과정의 일부”라는 것을 보여줬다. 지노비예프는 우리가 현실에 발을 딛고 노동 대중을 끌어들이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과 1903년에서 1917년까지 다른 방식으로 단결함으로써 대중들을 설득했고,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우리의 승리로 끝맺었다. 이것이 왜 그가 에버트, 샤이데만, 씨에(Cie)를 극복하라고 하며 그들과 싸우지 말고 단결하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우리는 사회 혁명의 기간이 장기든 단기든, 그 기간이 어느 정도든 여기서 논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논쟁은 천사의 성별에 대한 수도사들의 논쟁이나 대머리가 되려면 몇 개의 머리카락이 없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 혁명의 시대”라는 개념을 정의하고자 한다.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먼저 물질적 생산력이 발전하여 소유권과 양립할 수 없게 된 상태이다. 사회 혁명이 필연적인 것이 되는 물질적 조건이 있는가? 그렇다. 무엇이 부족한가? 주체, 인적 조건이 부족하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 계급은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 이러한 혁명의 필요를 실현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 이미 이를 이뤄낸 선진 노동자들, 다시 말해 전위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경종을 울려야 한다.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공장 폐쇄, 파업, 급박한 전쟁, 생활조건의 추락 등) 내전을 옹호하는 선전을 통해 전투를 요구하고, 이러한 즉각적 투쟁에 대해 노동 계급을 준비시키고 조직해야 한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했다고, 그것이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과 단결했기 때문이라고 누가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것은 넌센스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에 대항하는 치열한 싸움을 통해 부르주아지와 지주들에게 승리했다.

 

 통일 전선 전술의 필요에 대해서 트로츠키는 그의 연설에서 우리는 승리했지만 우리가 어떻게 승리했는지 분석해야만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우리는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과 통일 전선을 통해 진군했지만, 그것은 우리와 멘셰비키,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가당이 같은 위원회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통일 전선 전술이 같은 기관에 앉아있는 것이라면, 강제 노동의 우두머리들과 죄인들 또한 통일 전선에 포함된다. 그들은 모두 감옥에 있다.

 

 우리 공산당은 의회에 앉아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이 모든 대표들과 함께 통일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동지는 전 세계의 공산주의자에게, 다소 의심스런, 볼계비키, 멘셰비키,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가당의 소위 통일 전선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 볼셰비키가 1917년 8월 「사회 혁명적 케렌스키」가 소환한 “전-의회”나 사회주의자에 의해 주도된 임시 정부(유용한 교훈이었던)에 참가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밝혀야만 한다.

 

 우리는 볼셰비키가 부르주아지와 통일 전선을 꾸렸던 시기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인가? 1905년 전이다. 그렇다. 볼셰비키는 사회주의자들과의 통일 전선을 옹호했다. 이것은 언제인가? 1917년 전이다. 1917년, 노동계급의 권력을 위해 싸울 때, 볼셰비키는 사회주의 혁명가당 좌익에서부터 모든 종류의 아나키스트에 이르기까지 모든 혁명적 집단과 함께 무기를 들고 소위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통일 전선을 형성한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  그리고 부르주아지와 지주들과 싸웠다. 1917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있는, “사회 혁명의 시대” 최전선에 나섰다. 1917년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 전술은 뒤이은 나날들의 교훈을 설명해 준다. 부르주아지 분파들, 사회주의 혁명가당, 그리고 멘셰비키의의 격렬한 저항에 권력을 쟁취한 노동 계급은 직면하게 된 것이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을 단결시키는 것은 이 전술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아직 “개량주의적 환상을 제거”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이 전술은 제2인터내셔널이나 2와 1/2 인터내셔널과의 통일 전선이 아니라 그들과의 전쟁일 것이다. 이것이 세계 사회 혁명의 슬로건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쥔(노동자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통일 전선에 대한 문제

 

 이미 사회주의의 공격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 계급이 된 모든 나라들에서는 각 시기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물론 각각의 다른 나라들에서 혁명 과정의 모든 단계에 유효한 전략을 개발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같은 단계에 대한 정책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의 (그렇게 오래지 않은) 투쟁의 역사를 기억해 본다면, 적과의 싸움에 있어서 우리는 매우 다른 과정들을 겪어왔음을 알 수 있다.

 

 1906년과 그 후 몇 년동안은, “세 개의 기둥”이 있었다. 8시간 노동, 토지의 소유, 그리고 민주 공화국이 그것이다. 이러한 세 기둥은 언론과 집회, 파업,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포함하고 있었다.

 

 1917년 2월에는 어떠했는가? “독재 정치는 끝났다! 제헌 의회 만세!” 이것이 볼셰비키의 외침이었다.

 

 그러나 4-5월, 모든 것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집회, 언론의 자유는 있었지만 토지의 소유는 그대로였고, 노동자들은 권력을 잡지 못했다. 그래서 볼셰비키는 다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걸었다.

 

 이 시기, 우리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한 부르주아지의 시도들은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언론, 집회, 결사, 파업, 양심의 자유 만세! 토지를 몰수하라! 생산의 노동자 통제! 평화! 빵! 자유! 내전 만세!”

 

 그리고 10월의 승리. 노동 계급이 권력을 잡았다. 국가 억압의 오랜 작동원리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해방의 새로운 작동원리가 노동자, 군인 대표 평의회 속에 구조화되었다.

 

 이 시기에 와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언론, 결사의 자유는 주장되어야 했던 것일가? 군국주의자부터 멘셰비키, 사회주의 혁명가당이 내전을 지지하도록 허락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무엇보다도, 지배계급으로서 내전을 옹호하는 동지들에게 언론의 자유를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권력에 반대하는 어떤 내전에 대한 조직된 선전도 착취자, 억압자를 불러들일 수 있는 반혁명적 행위였다. 선전이 더욱 “사회주의”적일수록, 더욱 해악적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같은 프롤레타리아 가족의 이러한 선전들에 대한 가장 엄격하고 무자비한 제거”가 진행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착취자들의 저항을 억압할 수 있고, 스스로 조직하여 유일하게 권력을 쥐며, 모든 자본주의 정부들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국가를 건설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나타났다. 이들에게 부여된 새로운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국가 경제를 조직하고 가능한 한 많은 물질을 창조하는 것. 그리고 이 임무는 권력의 쟁취와 착취자들의 억압 만큼이나 엄청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권려의 쟁취와 착취자에 대한 억압은 그것 자체로 목적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로의 길은, 자본주의보다,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지배와 억압 하에서보다 더 나은 삶과 자유로의 길은 그것 자체로 목표였다.

 

 이전의 억압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조직의 형태와 실천의 수단들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접근이 필요했다.

 우리가 자원이 부족하다는 관점에서, 제국주의 전쟁과 내전으로 인한 끔찍한 황폐를 경험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동 계급과 동맹 그룹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주의 사회의 매력적인 힘들을 보여주기 위해 물품을 창조하는 임무가 우리에게 부과되었다. 더 이상 부르주아지, 경찰과 다른 기생충이 없을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가 주인이 되고 자유로우며, 모든 가치, 모든 상품, 모든 노동이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 그리고 굴욕받던 자의 삶을 개선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이것을 보여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것은 굶주림의 왕국이 아니며 오히려 전에 없던 풍요의 왕국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것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남겨진 임무이며, 선행된 것들을 능가해야할 임무이다.

 

 그렇다. 첫 번째 두 임무, 권력을 쟁취하고 억압자들의 저항을 제거했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앞선 이들을 뛰어넘었고(이것은 지주와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들의 강한 오를 설명한다) 그것은 위대한 일이지만 세 번째 목표보다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오늘날, 모든 노동자들은 질문해야 한다. 왜 이 모든 것을 해야 하는가? 이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토록 많은 피를 흘려야 했는가? 끝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는가? 이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우리 운명을 누가 결정하는가? 어떤 조직이 그것을 할 것인가?

 

 최고의 구세주는 없다.

 

 신도, 카이사르도, 호민관도 아니다.

 

 생산자, 우리 스스로를 구원하라!

 

 공통의 구권을 선포하라!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된 의지를 대표하는 조직이 필요하다. 우리는 부르주아지로부터 빼앗은 (국유화된), 그에 속한 거대한 계층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업이 속한 산업 조직 뿐만 아니라 노동자 대표의 평의회도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평의회는 무엇인가? 그들은 노동자 대표의 평의회, 다시 말해 “농장과 공장에서의 국가 권력의 핵심”을 조금이라도 닮았는가? 그들은 단결된 의지를 표현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평의회를 닮기는 했는가? 지금의 평의회는 그 의미와 산업 기반을 잃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압제자에 대한 저항과 그들의 파괴를 향한 목표에의 관심을 동원했던 오랜 내전은 연기되고 모든 다른 업무들을 제거하고 - 프롤레타리아트가 눈치채기도 전에 - 그 조직, 평의회를 변화시켰다. 공장의 노동자 대표의 평의회는 죽었다. 노동자 대표 평의회 만세!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도 보편적으로 이와 같지 않은가?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 언론의 자유에 대해 격렬한 내전과 노예 감독자의 봉기 때와 유사한 태도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권력을 차지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를 끔찍한 적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게 되어, 이제 그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 스스로 엄청난 생산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조직하고 생산과 전체 나라를 지도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고 있지 않은가?

 

 부르주아지는 확실히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그 누가 권력을 방어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언론의 자유를, 자신의 피를 흘리지 않고 논할 것인가?

 

 우리에게 언론의 자유는 무엇인가? 신인가 미신인가?

 

 우리는 우리를 위한 우상을 만들지 않는다.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아니다.

 

 우리는 누구 앞에서도 복종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진정한 민주주의, 절대적인 자유, 물적 숭배나 우상,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따위는 없다.

 

 민주주의는 전에도 그러했고 미래에도 모든 나라의 반혁명, 부르주아지, 지주, 성직자, 사회주의 혁명가당, 그리고 멘셰비키 등을 의미하는 미신이 될 수 없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의 계급적 목표를 달성하는 유일한 수단일 뿐이다.

 

 1917년 이전, 모든 시민의 언론의 자유는 우리의 진보적인 요구였다. 1917년에는, 우리는 이러한 자유를 쟁취하여 프롤레타리아트와 그를 따르는 지식인들과 농민들의 조직화와 선전에 썼다. 부르주아지를 이길 수 있는 조직을 만든 후, 우리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쟁으로 나아가 권력을 쟁취했다. 부르주아지가 언론의 자유를 우리를 반대하는 내전을 일으키는데 쓰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적 계급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부와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도 러시아의 부르주아지의 저항이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언론의 자유를 주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다수 노동자의 지원으로, 우리는 부르주아지의 저항을 분쇄했다. 이제 우리는 우리 프롤레타리아에게 말하도록 허락할 수 있지 않은가?

 

 1917년 이전과 1917년의 언론의 자유, 그리고 1918년에서 20년까지의 것과 1921년에서 1922년까지의 문제에 대한 우리 당의 태도는 필요하다.

 

 그러나 소비에트 권력의 적들이 이 자유를 소비에트를 전복시키기 위해 사용할 수 있지 않은가? 아마도 이 자유는 독일, 프랑스, 영국 등에서 이들이 혁명 과정의 같은 단계에 있다면 유용하고 필수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계급은 있지만 농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쟁과 경제적 재앙으로부터 살아남은 소수의 프롤레타리아가 춥고 배고픈 채로 피흘리며 지쳐 있다. 여기서는 그 자유가 소비에트 권력을 전복시키는 길의 첨단으로 몰고 가기는 힘들지 않을까? 프롤레타리아트에 더해 러시아에는 부유함과는 거리가 먼 대다수의 농민들이 간신히 삶을 연명하고 있다. 이 농민들에게 언론의 자유가 반혁명 군대를 형성하는데 쓰이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없다. 우리가 노동자들을 농민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조금이라도 먹이기라도 하면 우리는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길은 없다. 이것이 마음이 올바른 공산주의자들의 추론이다.

 

 우리들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 없이 사회 경제의 조직화라는 엄청난 임무를 해결할 것인가? 당신은 언제나 예, 아멘이라고 이야기하는 신의 어린양인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길 원하는가? 그럴 필요가 있는가?

 

 “당신들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조용히 있어라. 저항하지도, 생각하지도 마라. 왜냐하면 우리가 노동자와 농민들 중에서 용기 있는 이들에게 권력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당신들이 믿을 수 없는 방식으로 쓰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다보면 당신은 어느날 갑자기 사회주의 천국에 있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이야기하는 것은 개인, 영웅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지 계급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회색 대중과 그들의 평범한 생각들(적어도 지도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은 우리의 영웅들, 공산주의 공무원들이 공산주의 천국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재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웅을 믿지 않으며 모든 프롤레타리아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호소한다.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자 자신의 몫이다.

 

 그렇다. 우리 프롤레타리아트는 지치고, 배고프고, 춥고, 기진맥진해 있다. 그러나 우리 앞에 있는 문제는 어떤 계급도, 어떤 특수한 그룹도 우리를 대신해 풀어줄 수 없는 문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를 해결해야 한다. 당신이 우리들에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임무를 지식인들, 공산주의 지식인들이 풀어줄 것이라고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명을 당신에게 맡기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보여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지쳤고, 따라서 그 무엇을 알 필요도, 결정할 필요도 없다는 주장은 절대 옳지 않다.

 

 만약 1918년에서 20년까지 러시아의 상황이 달랐다면, 우리의 이 문제에 대한 태도 또한 달랐을 것이다.

 

 올바른 마음의 공산주의자 동지인 당신이 부르주아지의 얼굴을 후려갈기고 싶다면, 좋다. 그러나 문제는 손을 드는 것은 당신이고, 그들의 갈비뼈를 부수고 한 바가지의 피를 쏟아내도록 하는 것은 우리 프롤레타리아라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공산주의자 노동자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볼셰비키, 아나키스트, 사회주의 혁명가당, 그리고 다른 이들(이러한 당에는 속하지 않지만 그들의 기원을 여기서 찾을 수 있는 이들) 속에 노동 계급이 있을 뿐이다. 어떻게 그들을 공산주의에 연결시키는가? 부르주아 “카데츠”(헌정 민주주의자들), 교수들, 변호사들, 의사들과의 협상은 없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처방이 있을 뿐이다. 몽둥이. 그러나 노동 계급은 전혀 다르다. 우리는 그들을 협박할 것이 아니라 영향을 주고 지적으로 이끌어야 한다. 폭력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법과 행진의 진로를 명확히 함으로써.

 

 그렇다. 법은 법이지만 모두를 위한 법은 아니다. 마지막 당대회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의 투쟁에 대한 논쟁에서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는 180개의 부르주아지 출판사가 있었고, 지노비예프의 선언에 따라, 이들과 폭력적인 방법이 아니라 90% 열린 이데올로기적 설득력으로 싸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우리를 “설득”할 수 있는가? 지노비예프는 우리 중 일부를 설득하려하는지 안다. 부르주아지가 누리는 자유의 10분의 1만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노동자 동지들이여, 당신을 무엇을 생각하는가? 전혀 나쁘지 않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므로 1906년에서 1917년까지 첫 번째 전술, 1917년 10월까지 두 번째, 1917년 10월에서 1920년 후반까지 세 번째, 그리고 1921년 초부터 네 번째... [...]

 

각주

1) 편집자 주 ; 코민테른. 제3인터내셔널의 러시아 이름이다.

 

2) 편집자 주 ; 사회적 혁명가당 좌익. 이들은 소비에트에 우호적이었고, 사회주의 혁명가당으로부터 1917년 9월, 분리되어 나왔다.

 

3) 1917년 10월 25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110명의 멘셰비키 대표들은 소수였고(673명 중), 10월 혁명의 비준의 순간, “볼셰비키 쿠데타”라며 이를 비난하며 자리를 떠났다.

 

4) 편집자 주 ; KAI(공산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는 1922년에서 24년동안, KAPD의 제안에 의해 설립되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제4 인터내셔널과 혼돈하지 않길 바란다.

 

5) 편집자 주 ; 사회주의 당 국제 연합(the International Union of Socialist parties)의 별명은 제2와 1/2 인터내셔널이었다. “왜냐하면 제2 인터내셔널과 제3 인터내셔널 사이에 자신을 위치 지었기 때문이다.” 레닌의 글, ‘베를린에서의 제3 인터내셔널의 대표들’이 수록된 알프레드 로즈머(Alfred Rosmer)의 책, 「레닌의 모스크바」(Lenin’s Moscow)에서 이러한 재편성에 대한 비판을 보라(Pluto Press, 1971).

 

6) 편집자 주 ; 여기, 그리고 이 글의 다른 곳에서 [...]은 우리가 번역하지 못한 짧은 문구들을 의미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이다!

위대한 혁명가들은 살아생전에는 억압계급의 끊임없는 탄압을 받았고, 그들의 이론은 허위와 중상모략에 가득 찬 가장 야만적인 적의와 가장 표독스러운 증오 그리고 가장 파렴치한 구호로 대접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죽은 이후에는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변질되어 신성시되거나 결국에는 대부분 그들의 명성이 피억압계급을 회유하는 데 쓰이는 "위안"으로, 또는 후세에 기만하는 수단으로 숭배되는 등, 음모의 대상이 된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혁명적 이론은 그 혁명적 본질을 빼앗기고, 혁명적 이론이 지니는 무기로서의 예리함은 무디어지고 통속화되고 만다.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노동운동 내의 기회주의자들은 위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의 변조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레닌, 국가와 혁명, 1917)

1919115,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유 군단(Freikorps)에 의해, 투쟁의 동지 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암살되었다. 이 병사들은 "사냥개가 필요하다면 내가 될 것이다"! 라고 선언했던 독일 사회민주당(SPD) 당원 노스케 장관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 베를린에서 봉기한 노동자들의 유혈진압을 진두지휘했던 것도, 국제 노동자 운동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암살한 것도 권력을 잡은 그 사회주의자 당(독일 사회민주당)이었다.

이 끔찍한 살인은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한 일련의 중상모략을 통해 오랫동안 준비되었다. "붉은 로자", "선동자 로자", "피의 로자", "차리즘의 첩자 로자"...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한 거짓 비난이 그치지 않았고, 베를린에서 "피의 주간" 이었던 1918년 말 / 1919년 초에는 학살에 대한 요구가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로자 룩셈부르크를 살해하고 나서 불과 몇 달 후, 부르주아지와 노동자 운동의 기회주의자들은 그를 신성시하고, 그의 혁명적인 내용을 제거하고, 비하하고, 그리고 이 날카로운 혁명가를 무디게 하려고 그를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위해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원래 모습이었던 전투적이고 모범적인 혁명가로 남아있어서는 안 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일종의 평화주의자 그리고 페미니스트 민주주의자로 잘못 전해져, 두 번 살해되어야만 했다. 이것이 혁명을 위해 이 위대한 투사를 “명예 회복시키는”(, 다시 회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최근 몇 십 년간의 “기억”이라는 작업의 진정한 목적이다.

룩셈부르크와 레닌의 투쟁을 왜곡시키기 위한 꾸준한 캠페인

1930년대 프랑스의 예를 들면, 루시앙 라우렛(Lucien Laurat) 주변에서 발전한 모든 흐름은 민주주의의 유혹에 점점 더 양보했고, 이윽고 “볼셰비키 혁명” 처음부터 혁명 계획의 “과실” 안에 “벌레” 레닌이 있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 주장은 논리적으로 1936-39년의 스페인 전쟁에서 공화군을 위한 변명이 되었고, 파시즘에 대항하는 싸움이라는 구실로 제2차 세계 학살에 노동 계급을 용기병으로 참가하게 하는 변명이 되었다. 그것은 스페인의 POUM(스페인의 맑스주의 통합 노동자당 : 역주)과 그들, 민족 저항세력의 “영웅주의” 안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지지했다. 이 구역질이 나는 민주주의 선전은 스파르타쿠스 기관지 설립자인 르네 르페브레(Rene Lefeuvre)와 같은 인물들을 거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작을 한다. 나중에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 저작집[1]에서 완전히 이데올로기적인 머리말을 썼는데, 그것의 1946년 제목인 ‘독재에 반대하는 맑시즘’(로자 룩셈부르크는 절대 그 제목을 쓰지 않았다!)은 이 혁명을 위한 투사를 볼셰비즘에 근본적으로 적대적이라고 묘사했는데, 이는 역겨운 거짓말에 불과하다. 저작집 서문에서 르페브르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 “모든 위대한 맑스주의의 저명한 이론가들: 칼 카우츠키, 에밀 반데벨드, 루돌프 힐퍼딩, 칼 레너, 조지 플레하노프는 – 그리고 말하는 김에 우리 또한 –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레닌의 전체주의적 교조가 맑스주의의 원칙에 완전히 반대된다고 비판했다.”

스탈린은 레닌을 박제화했으며 그의 사상을 끔찍한 교리로 왜곡했다. "피의" 로자 룩셈부르크는 일종의 민주주의의 성인이 되었다. 스탈린주의 반혁명은 빠르게 두 개의 새로운 타락하고 상호 보완적인 이데올로기를 형성시켰다 : 한쪽은 매력적인 “룩셈부르크주의” 그리고 다른 쪽은 혐오스러운 "맑스-레닌주의". 정말 동전의 양면 또는 오히려 같은 결과를 가져올 함정으로 향하는 두 입구 : "피에 굶주린" 볼셰비키를 거부하고 "평화주의자" 로자로 묘사되는 인물을 존경하는 것은 철창 안의 사자를 존경하는 것과 같다.

1974년 서독(FRG)에서, 그들은 심지어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미지를 담은 우표를 발행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혁명 조직에 반대하는 새로운 캠페인

동유럽의 붕괴와 소련이 사라진 후, 이 광대한 이데올로기적 캠페인은 다시 발굴되었고,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부르주아지가 열광적으로 선언한 이른바 “공산주의의 죽음”을 부양하기 위해 확대되었다. 여기에서 공식 이데올로기는 역사의 가장 큰 거짓말로, 공산주의와 스탈린주의를 같은 것으로 여기는 사기를 목표로 했다. 그것은 지배 계급의 손에 있을 때 특히 효과적인 이데올로기적 무기이다. 왜냐하면, 1990년대 이후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을 하나의 사회적 세력으로 여기고 그 의식과 조직을 발전시키는데 수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는데, 이제 그 자신의 과거로부터 단절되어 정체성을 잃고, 스스로 어디서부터 왔는지 또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공산주의가 스탈린주의라면, 결국 실패한 공포였다면, 왜 그것을 위해 투쟁할까? 결국, 스탈린주의의 재앙으로 귀결될 뿐이라면 왜 노동자 운동의 역사를 공부하는가? 부르주아지가 우리의 머릿속에 집어넣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이 논리이며 독이다!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를 평화주의자,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 "스탈린의 정신적 아버지"인 레닌의 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이 비열한 선전에서 가장 악질적인 부분 중 하나이다. 그들이 그것을 의식하든 안하든, 이 가짜 싸움에 참여하는 사람은 노동계급에 반대하여 싸우는 것이다.

오늘날 유럽 전역과 세계 도처에 걸쳐 서점 및 가판대와 블로그, 포럼에서는 전투적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미지를 다시 왜곡시키기 위해 새로운 구역질이 나는 선전이 다시 떠오르고 있다. 그리하여, TV 프로그램에서부터 로자 룩셈부르크는 다시 "여성""평화"의 특성만을 가진 사람으로 등장한다. 아주 유명하고 명성 있는 신문 르몽드는 20139, ESCP 유럽의 교수인 장-마크 다니엘(Jean-Marc Daniel)이 쓴 글을 다음과 같이 잘 연상되는 제목으로 게재했다 : “로자 룩셈부르크, 맑스주의자-평화주의자” “맑스주의자”와 “평화주의자”라는 단어의 결합은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 지배 계급에 대항한 “진짜 맑스주의자”가 봉기와 자본주의의 전복을 포기하고 계급 전쟁으로부터 이탈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동문학을 포함하여 수많은 책이 지금 로자 룩셈부르크를 다시 볼셰비키와 “독재자” 레닌의 완고한 적으로 묘사하면서 출판되고 있다. 사회비판그룹의 “룩셈부르크주의자”인 민주적 역사학자들의 후원 아래 파리에서 있었던 것처럼, 회의와 토론들이 여기저기서 조직되었다. 예술계에서조차 2014 MAIF 상은 "로자 룩셈부르크"를 기획한 조각가 니콜라스 밀헤(Nicolas Milhe)가 수상했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 그녀가 혁명의 반대자로서 러시아 혁명, 볼셰비키에 대한 투쟁에서 그녀의 동지에게 반대했다는 조건으로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그녀를 변환시키기 위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재조명은 거대한 이데올로기 중독 사업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는 세계적인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라 더욱더 "민주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주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공산주의 흑서(Black Book of Communism)의 가증스러운 선전 후에는 매우 진지하고 공식적으로 학교 프로그램에서 배운 볼셰비키의 적으로서 여기는 것이 이제부터는 룩셈부르크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부르주아지를 위한 이해관계는 민주적인 부르주아지를 방어하는 것 외에 다른 미래가 없다는 것으로 가장 비판적이고 반항적인 구성원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왜곡 배후에 불신과 혁명 조직을 악마화하는 또 하나의 말 하지 않는 목적과 함께 모든 종류의 민주주의자들이 로자 룩셈부르크를 재조명하는 캠페인이 있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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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회주의 조직의 문제”(1904), “대중과 지도자”(1903), “비판의 자유와 과학의 자유”(1899).

http://en.internationalism.org/icconline/201505/13055/rosa-luxemburg-belongs-proletarian-revolution-not-social-democra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