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Conline - 2000s

ICConline - 2001

제국주의 전쟁의 유일한 해답 : 국제적인 계급투쟁!

아프가니스탄전쟁

민간인 60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지난 9월 11일의 끔찍한 전쟁범죄에 대해 새로운 그리고 마찬가지로 끔찍한 전쟁범죄들이 미국과 그 '연합국들'에 의해 자행되고 있다.

황폐화된 아프가니스탄에 최초의 공격이 개시되기 이전 이미 수 만 명의 아프간 난민들은 기아와 질병으로 인한 죽음에 선고되어 있었다. 군사적인 공격이 시작된 현재, 그 사망자 목록은 극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폭탄과 미사일은 굶주린 사람들에 대한 식량공급을 방해할 뿐이며, 이 점에 있어서 미국이 비행기로 투하하는 극소량의 식량 공급이라는 선전용 곡예로는 아무 것도 변화될 수 없다. 우리는 '정확한 공습'에 관한 소문의 모든 진상을 이미 1991년 이라크전과 1999년 사라예보전의 예에서 들어왔다. 이 두 나라의 주민들은 아직도 그러한 '인도주의적인' 폭탄세례의 비참한 결과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이 새로운 전쟁은 빈 라든이 이끄는 이슬람 광신도들의 네트웍에 대항해 소위 민주주의와 문명세계를 방어하기 위한 전쟁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빈 라든과 그 도당들은, 가능한 많은 민간인들의 고의적인 참살을 시도함으로써, 단지 소위 '문명화된' 국가들이 이미 보여주었던 인상적인 사례를 따랐다. 전 세계를, 즉 '서구' 세계와 '이슬람세계'를 지배하는 문명은 자본주의문명이기 때문이고; 이것은 또한 제 1차 세계대전이래 심각한 쇠퇴 과정에 놓여있는 사회체계이기 때문이다. 그 몰락의 세기에, 자본주의문명은 나찌즘과 스탈리니즘하의 죽음의 수용소와 더불어, 런던(공습)의, 드레스던과 함부르크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테러 폭격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학살들의 대부분은 민주주의와 문명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지난 10년간 만에도 자본주의문명은 우리에게 이라크와 쿠웨이트에서의, 보스니아, 세르비아 그리고 코소보에서 대학살들을 목격하게 했고, 알제리아, 르완다, 콩고, 체첸 및 중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테러-사례들에서, 도피가 강요당하고, 고문당하고, 강간당하고, 폭격당하고,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이들은 무엇보다도 민간인 대중들이었다. 이것이 우리가 방어하도록 요청되고 있는 그 문명 - 현재 끊임없는 전쟁 상태에 살고 있는,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며 그 자체의 붕괴로 더 깊이 더 깊이 가라앉고 있는 그 문명인 것이다.

사실상의 전쟁목적

이 '테러리즘에 대항한 전쟁'은 완전한 기만이다. 거대한 민주주의 권력들이 스스로 테러리즘이라는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만이 아니라(예를 들어, 미국은 IRA, 콘트라, 알제리의 이슬람근본주의자들 및 ... 빈 라든까지도 지원했는데,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러시아에 대항한 CIA요원으로서 그의 경력을 시작했다), '테러리즘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 현재 군사적 행동의 진정한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89년 동구권의 붕괴는 또한 서구권의 해체를 가져왔다. 그래서 미국의 이전의 거대한 권력 연합국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더 작은 권력들마저도 미국의 지도력에 도전하고 그들 자신의 제국주의적 야망들을 추구하려 시도하는 세계적 상황에 미국은 직면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미국이 과거 10년간 3차례에 걸쳐, 즉 이라크에 대해, 세르비아에 대해 그리고 지금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자신의 거대한 군사력을 과시하게 되었다. 각각의 경우에, 프랑스, 영국 및 독일과 같은 미국의 '연합국들'은 미국주도의 동맹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렇지 않으면 전지구적인 제국주의의 체스-게임에서 전적으로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미국이 그 자신의 권위를 강요하려 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 많은 긴장과 불일치를 불러일으킨다. 9월 11일 이전, 미국은 교토협약, 미사일방어(NMD) 및 '유럽-군대'와 관련하여, 유럽에 있는 자신의 이전 연합국들로부터 증가되는 적대감에 직면해 있었다. 지금 미국은, 중동에서 인도 아대륙에 이르는 아프가니스탄 주위를 둘러싼 전 지역에서 주요한 전략적 획득을 이뤄 내는데 뿐만 아니라, 미국의 '친구들'을 다시 불러들여 자신의 뒤에 줄 세우는 데 '테러리즘에 대항한 전쟁'을 이용하고 있다.

우선 '테러리즘에 대항한 연합'이 미국과 다른 권력들 사이의 분열들을 은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열들은 앞으로 훨씬 더 공개적으로 다시 발생할 것이다. 이미 이 전쟁은 전 '이슬람' 세계를 두루 심각하게 불안정화하는 효과를 낳고 있으며, 미국의 라이벌들에 의해 다시 이용될 새로운 충돌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더 안전한' 세계를 만들어내기는커녕, 지금의 이 전쟁은 군사적인 무질서로 향한 활주로를 넓힐 뿐일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후속적으로 잔인하고 폭력적인 기도들을 포함할 것인데, 이들은 오늘날의 제국주의간 전쟁의 일상적인 방법이 되어버렸다.

자본주의전쟁의 주요 희생자는 노동계급이다

지난 9월 11일의 대학살로 인해 우리는 전지구적인 제국주의적 충돌에 있어서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 이 단계에서는 전쟁이 더욱 더 영구적으로 될 것이며 1945년이래 어느 시기보다도 더 광범위하게 확산될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모든 전쟁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노동계급과 사회의 가장 빈곤층이 그 주요 희생자가 될 것이다. 뉴욕의 쌍둥이 빌딩에서 사망자 대부분은 사무실 노동자들, 청소부들, 소방대원들, 즉 프롤레타리아들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비싼 값을 치르게 될 이들은, 완전히 내쫓기고, 탈리반 군대에 강제 징집되거나, 또는 정부와 미국의 맹공격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도피해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노동계급은 육체적인 희생자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 의식에 있어서 희생자이다. 미국에서, 부르조아지는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만들어진 정당한 분노와 혐오를 이용하여, 애국적 히스테리의 최악의 형식들을 야기하고, '국가적 화합'을, 착취당하는 이들과 착취자들 사이의 연대를 요청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우리는 지금 모두 미국인이다'라고들 하면서, 망자들을 위한 인간적인 동정심을 새로운 전쟁 동기에 대한 지지로 전환하려 시도하고 있다. 또한 노동자들은 테러리즘에 대항해 문명의 편에 서도록 요구되거나, 아니면,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중동에서 또는 주요 국가들의 이슬람 대중들 사이에서처럼 빈 라든을 억압에 대항하는 '저항'의 상징으로 여기고 성전을 준비하도록 요구된다. 이들 해석으로는, 지난 9월 11일에 '미국인들은 제 값을 치렀다'. 이러한 '반미주의'이데올로기는 인종주의와 국수주의의 다른 방식에 불가하며, 노동자들이 그들의 진정한 계급 정체성을 인식하는 것을 방해하는 또 다른 방식에 불가하다. 이것은 모든 민족주의적 전선들을 가로지르고 있다.

전 세계에 걸쳐, 프롤레타리아계급은 테러리즘에 대항한 투쟁이라는 이름으로 국가 테러의 지배하에 놓여 있다. 민족주의적 광란의 분위기로 강요된 테러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도처에 도입될 매우 구체적인 억압대책들을 통해서.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에 의해 야기된 진정한 공포는 지배계급에게 경찰통제, 신분검증, 전화도청 및 기타 '보안' 대책들의 전 체계를 강화시키기 위한 완벽한 분위기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체계는 향후 테러리스트 혐의자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항해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혁명가들에 대해 사용될 것이다. 영국과 미국에서의 신분카드 발급은 이제 이러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전쟁에 대한 해답은 평화주의가 아니라 계급투쟁이다.

지배계급은, 그 제국주의적 계획들을 새로운 수준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전체 인구의, 그 무엇보다도 노동계급의 충성스러운 지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전쟁의 유일하고 진정한 장해가, 광범위한 대부분의 사회적 부를 생산하며 제국주의 전쟁에서 제일 먼저 죽어가야 하는 노동계급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이것이 정확히 왜 노동자들이 어떤 민족적 이해와의 어떤 자기동일시도 거부해야하는 이유이다. 전쟁을 향한 행진에 대항해 투쟁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의 계급적 이해를 위한 투쟁을 재생시키고 발전시켜야 한다. 경기침체의 결과로서 뿐만 아니라 테러리스트 공격들의 귀결의 하나로서 요구되고 있는 해고에 대항한 투쟁을. 앓고 있는 국가 경제 또는 전쟁 노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강요되는 작업장에서의 희생들에 대항한 투쟁을. 이러한 투쟁을 통해서만이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의 위기와 황폐화의 모든 희생자들과의 국제적 계급 연대의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고, 이러한 투쟁만이 착취와 전쟁이 사라진 새로운 사회의 전망을 열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은 '평화'그룹들과 환경 정당들, 트로츠키주의자들 및 기타에 의해 제기되고 있는 '전쟁중지'에의 다양한 연합들이 예시하는 평화주의와 아무런 공통점도 갖지 않는다. 평화주의자들은 유엔에 그리고 국제법에 호소하는 반면,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은 그 법의 장벽들을 파괴할 때에만 확장될 수 있다. 이미 가장 '민주적인' 나라들에서, 투쟁의 진정으로 효과적인 형식들은(다른 부문들로의 파업의 확대 시도, 노조투표가 아니라 총집회에 의한 의사결정 등) 노동조합들의 협조아래 불법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계급투쟁의 불법화는 전쟁이 지배하는 시기에 훨씬 더 분명해 진다.

평화주의자들은 또한 '모든 양심적인 사람들'에, 부시, 블레어, 및 그 동료들의 입장에 반대하는 모든 계급들의 연합에 호소한다. 그러나 이는, 노동계급의 뚜렷한 사회적 - 및 정치적-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노동계급을 위해 급선무인 정확히 이 시기에, 단지 노동자들을 일반대중 속에 침몰시키는 또 다른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평화주의는 민족적 이해에 결과 반대하지 않았고, 이러한 이해는 제국주의시기에 제국주의의 수단들에 의해 단지 옹호될 수 있다. 이것은 '존중할 만한' 평화주의자들뿐만 아니라 평화주의자의 과격파, 즉 트로츠키주의자들에도 해당되는데, 이들은 노동자들이 하나의 민족주의를 다른 하나의 민족주의에 대항해 옹호하게 만들도록 항상 시도했다. 골프전 당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라크를 지지했고, 발칸 전쟁 당시 그들은 세르비아군을 아니면 코소보 해방군( 및 그래서 NATO)을 지지할 지를 놓고 논쟁했으며, 현재 그들은 지지할 어떤 '반제국주의' 부문을, 만약 빈 라든과 탈리반이 아니라면, 이상과 방법에 있어서 정확히 동일한 '팔레스타인 저항군'과 같은 무장단체를 발견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전쟁에 반대하기는커녕, 평화주의는 부르주와지의 군사적 연합에 필수불가결한 부수물이며, 이 사회에서 전쟁의 의미에 관한 진정한 계급 의식을 파괴하고 교란시키는 방법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인류는 전쟁과 평화의 양자택일에 직면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제국주의 전쟁의 미치광이 같은 나선구도와 계급투쟁의 전개 사이의, 야만주의로의 전락과 공산주의 혁명의 승리 사이의 양자택일에 직면해 있다. 이것은 1914년 레닌과 룩셈부르크에 의해 선언되었고, 최초의 제국주의 세계대전을 종결시킨 파업과 봉기와 혁명에 의해 대답되었던 그 양자택일이었다. 자본주의의 쇠퇴와 자기파괴의 대략 100년이 흐른 지금, 그 양자택일은 훨씬 더 선명하게 우리 앞에 놓여있다.

전쟁, 가난, 기아 및 오늘날 세계의 모든 야만주의를 결과시킨 자본주의에 대항해, 노동자 운동의 영원한 슬로건들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지금 더 적절하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자 스스로의 임무이다!

국제공산주의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2001. 10.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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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Conline - 2003

제국주의 전쟁에 대항하여 ! 평화주의 환상들에 대항하여!

다시 한번 더 중동이 공포에 빠져 있다. 1991년의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조지 W. 부시는 우리에게 깨끗한 전쟁을 약속하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약속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냉소적인가를 알고 있다. 다시 한번 더 폭탄세례가 이라크를 엄습하고 있다. 한편에서 '문명화된' 세력들이 이미 굶주릴 대로 굶주린 한 나라의 국민들에게 죽음과 비참함을 부과하고 있을 때, 세계의 나머지 나라들에서는 이 전쟁을 정당화하거나, 이에 대한 어떤 진정한 대항도 혼란시키고 파괴하기 위해서 거짓말들이 쇄도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의 거짓말들

그들은 우리에게 이것은 대량파괴무기의 제거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량파괴무기에 의해 자행되는 것이고, 결국 이 전쟁의 주요 목적들 중 하나는, 미국의 세계 '지도력'에 도전하려는 어떤 세력들도 좌절시키기 위해, 미국의 무기들이 얼마나 강력하고 파괴적인가를 단지 과시하려는 것이다. 게다가, 사담 후세인의 화학무기들은 1980년대에 미국과 영국에 의해 공급되었다; 그들은 사담이 1980-88년의 이란-이라크전쟁 때 이 무기들을 사용하도록 도왔고 그가 1988년 3월 할라브야의 쿠르드족에게 이 가스를 사용했을 때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것은 테러리즘에 대항한 전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국가들 -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와 같은 '낙제' 국가들 또는 PLO와 같은 예비국가들뿐만 아니라 - 은 전쟁의 한 도구로서 테러리즘을 사용한다. 영국은 얼스터에 있는 왕당파 갱들을 이 지저분한 일에 오랫동안 이용해 오고 있다. 미국의 현재 '오랜 숙적', 빈 라든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러시아에 대항해 싸우도록 CIA에 의해 조련되었다. 오늘날 영국과 미국과 제휴한 스페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ETA의 테러리스트들을 재판없이 제거하기 위해 GAL 죽음의 군대를 이용했다. 그 무엇보다도 나쁜 것은 : 테러리스트의 위험에 대해서 세계에 설교하는 바로 그 국가가, 그들 자신의 시민들에게 가해진 테러리스트 공격을, 전쟁에 대한 지지의 동원에 최대한 이용한 점이다. 미국영토에 대한 알카이다의 공격계획에 대해 사전에 미국이 이미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증거들이 쌓이고 있다.

시락, 슈뢰더, 푸틴도 전쟁도발자들!

이러한 거짓말들은 오늘날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그러나 '전쟁 반대'를 주장한 나라들이나 정치가들은 훨씬 더 위험한 거짓말들을 확산시키고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 전쟁은 유엔에 의해 인가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1991년의 전쟁, 수 십만 명의 이라크인들을 대량학살했고, 사담 후세인에 대항해 봉기했던 사람들을 그가 학살하도록 묵인했던 그 전쟁은 유엔에 의해 승인된 '합법적' 전쟁이었다. 유엔은 국제적인 정의의 수호자가 아니라, 거대한 권력들이 그들의 더러운 음모들과 경쟁들을 펼치는 도적들의 수호자이다.

오늘날, 시락, 슈뢰더 및 푸틴은 뻔뻔스럽게 '평화의 친구들'로서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반미 '동맹'의 평화주의적인 자격증명서는 사기이다: 바로 이 순간 프랑스 - 르완다에서 후투족 죽음의 군대를 무장시키고 훈련시킨 것에 주요한 책임이 있는 - 는 아프리카의 상아해안에서 프랑스 자신의 제국주의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군사적 개입을 수행하고 있다. 독일은, 지중해와 중동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시킬 목적으로, 유고슬라비아로부터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분리를 고무함으로써, 10여년 간 지속된 발칸전쟁을 야기했다. 러시아 군대는 아직도 체첸을 황폐화시키고 그 민중들을 학살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미국의 전쟁계획을 차단하려 노력해 오고 있는 나라들은 그들 자신의 국가적 및 제국주의적 이유들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다. 그들은 '테러에 대한 전쟁'의 진정한 표적이 사담이나 빈 라든이 아니라 자신들임을 알고 있다.

미국은 그들의 전체적인 제국주의적 전략들을 숨기지 않는다. 1980년대 말 러시아 제국주의블록의 붕괴이래, 미국은 자신과 경쟁할 만한 어떤 새로운 슈퍼파워나 연합의 등장도 방지하기 위해서, 그것의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이용할 것을 다짐해 오고 있다. 이것은 1991년이래 미국의 모든 대규모의 군사행동들 - 91년의 걸프전, 99년의 코소보, 2001년의 아프가니스탄 - 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각각의 군사행동은 미국의 권위에 대한 다른 크고 작은 권력들의 도전을 증가시킬 뿐이었다. 이것은 다시 미국으로 하여금 그것의 전략을 훨씬 더 대규모로 추구하도록 만들었다. 미국은 이제 중앙아시아와 중동을 직접적으로 지배하고, 또한 그 행동영역을 극동까지 확장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것의 주요 경쟁상대들 - 특히 프랑스와 독일 - 이 규율에 따르지 않는 것에 직면해서, 유럽의 포위를 모색하고 있고, 이는 유럽의 권력들과 일본에 대항한 무기로서의 중동의 석유 통제를 사용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프랑스, 독일과 그 나머지 나라들은 방어자의 입장에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이 거대한 제국주의 게임의 활동적인 행위자들이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그들이 사악한 또는 멍청한 지도자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1914년이래 즉 제 1차 세계대전이래, 전 지구적인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인 전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상이한 국가 권력들은, 자신들 사이에서 세계를 분할해 가진 후, 그들 경쟁상대들의 시장과 자원을 강탈함이 없이 평화적으로는 더 이상 확장될 수가 없었다. 오늘날 모든 국가들은 제국주의적이고, 20세기와 21세기의 모든 전쟁들은 - 39-45년의 소위 반파시즘 전쟁을 포함해서, 모든 소위 '민족해방전쟁들'을 포함해서, 그리고 빈 라든 일당에 의해 설교되는 '성스러운 전쟁'을 포함해서 -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자본주의는 전쟁에 의해서만 생존할 수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인류의 진보에 오랫동안 장해물이 되어오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것의 존재가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모든 평화주의 환상들에 대항하여!

지난 2월, 수백만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아가, 이것이 '전쟁을 중지하는' 방법이라 주장하는 데모들에 합류했다. 그러나 전쟁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 유엔에서의 거부권도, 민주주의와 평화에 대한 아름다운 이상들에 대한 호소도 전쟁기계의 포효를 막지 못하고 있다.

백년간의 제국주의적 충돌은 평화주의가 결코 자본주의의 전쟁으로의 행진을 막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상, 평화주의는 모든 종류의 위험한 환상들을 확산시킴으로써 전쟁으로의 길을 준비하는데 항상 이용되어오고 있다:

- 어떤 자본주의 국가들의, 어떤 자본주의 정당들의, 또는 유엔의 평화적인 이해관계에 대한 환상;

-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법들에 의해 전쟁이 반대될 수 있다는 환상들;

- '민주주의'가 전쟁충동에 대한 해독제라는, '민중의 의지'가 지도자들이 전쟁으로 나아가는 것을 중단시킬 수 있다는 환상들;

- 자본주의 체제를 제거함이 없이 언젠가 세계 평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환상들

이러한 환상들은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전쟁 충동에 대한 어떤 진정한 대항을 단지 무장해제 시킬 수 있을 뿐이다. 한층 더, 그들은 민중들을 전쟁에 참여하도록 준비시킨다: 왜냐면, 만약 하나의 자본주의가 '선하고' 그리고 '평화스러우며' 그리고 '민중의 이해관계를 존중한다면', 우리는 그 자본주의가 '사악한' '반민주적인' ,'전쟁도발적인' 자본주의에 의해 위협받을 때, 그것의 방어를 위해 무기를 들도록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이러한 환상들은 지배계급의 모든 정치권력들에 의해, 특히 사회민주주의당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에 이르는, 소위 '좌파' 정당들에 의해 교묘히 권장 고무된다.

제국주의 전쟁에 대항하여 - 국제적인 계급투쟁을!

자본주의 국가들간의 전쟁은, 오직, 방어 할 어떤 국가적인 이해관계도 가지지 않은 운동에 의해서만 - 노동계급의 국제적인 운동에 의해서만 - 저지될 수 있다.

모든 전쟁들에서, 직접적인 전선의 군인으로서 또는 민간인으로서, 또는 국가적인 이해를 위해 더 힘들게 일하고 덜 먹도록 요구되는 생산자와 소비자로서, 가장 비싼 값을 치르는 것은 착취당하는 대다수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전쟁의 단순히 수동적인 희생자가 아니다. 제 1차 세계대전을 종결시킨 것은 1917 -18년의 대중파업들과 폭동들이었다; 오직 혁명물결이 좌절되었을 때에, 자본주의는 제 2의 세계 학살을 감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60년대 말 노동계급이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했을 때,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노동계급의 저항이 제 3차 세계 대전을 저지했다. 실상, 현재의 충돌들이 지금의 형식 - 사담 후세인과 같은 속죄양에 향해진 '경찰'행동들- 을 띠는 주요 이유는, 자본주의가 오늘날 노동계급을 거대 자본주의 권력들 사이의 공개적인 충돌로 용병화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은 우리를 착취하는 체계와의 대결을 피할 수 없다. 자본주의가 전쟁 속으로 질주하는 바로 그 근원- 경제적 번영을 전개시킬 수 없는 무능력, 그것의 위기 - 은 증가된 착취, 실업 및 사회적 이익의 삭감 등을 통한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에 대한 끝없는 공격을 초래한다. 전쟁을 향한 행진은 이러한 공격들을 더욱 가속할 것이고, 피착취자들로부터 훨씬 더 큰 희생을 요구할 것이다. 그래서 경제적인 위기의 결과들에 대항한 불가피한 투쟁은 또한 전쟁에 대항한 투쟁이다.

오늘날 노동계급은 단지 방어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공격적이고 혁명적인 투쟁의, 전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한 계급전쟁의 씨앗을 포함하고 있다. 그 투쟁만이 자본주의 전쟁기계를 파괴하고, 제국주의 전쟁들과 국경들을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릴 하나의 세계 공동체로 인류를 이끌 수 있다.

- 우리 자신의 착취자들과의 어떤 연대에도 대항하여, 그들이 오늘 이 전쟁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그들이 미국인이거나 영국인이거나 스페인인이거나, 프랑스인이거나 독일인이거나 중국인이거나 러시아인이거나 또는 이라크인이거나에 상관없이!

- 노동계급의 국제적인 연대를 위하여!

국제공산주의 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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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영문 원본으로부터, 국제공산주의 흐름(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에 공감하는 이에 의해 번역되었다. 번역과정에 실수가 있을 수 있음을 밝힌다. 

좌파공산주의와 맑스주의의 연속성

프롤레타리아 트리뷴(러시아)에 실린 글

1. 1920년대 중반 국제적 혁명물결이 패배한 이래, 사회주의, 공산주의 및 맑스주의라는 용어보다 더 왜곡되고 남용된 예도 없을 것이다. 이전의 동구권의 스탈린주의적 체제들 또는 현재의 중국, 쿠바 및 북한과 같은 나라들이 공산주의나 맑스주의의 표현들이라는 생각은, 극우에서 극좌에 이르는 지배계급의 모든 정파들에 의해 영구적으로 보존된, 20세기의 진정 가장 크다란 허위이다. 1935년에서 45년까지의 제국주의 세계대전동안, "반파시즘" 및 "민주주의의 수호"와 함께 "사회주의조국의 수호"라는 신화가 인류역사상 가장 크다란 살육을 위해 노동자들을 동원하는데 러시아 안팎에서 이용되었다.

그 허위는, 미국과 러시아의 주도권아래 두 개의 거대한 제국주의 블록들 사이의 경쟁들이 지배적이었던 1945 -89년 사이의 기간동안 훨씬 더 강력하게 이용되었다: 동구권에서는 러시아 자본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서구권에서는 제국주의적 충돌에 대한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차폐물이자("소비에트 전체주의에 대항한 민주주의의 수호") 노동자계급의 의식을 음해하는 수단으로서: 러시아 강제노동수용소를 지적하고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주입하는 것 - 만약 저것이 사회주의라면, 그 모든 결함들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를 선택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리고 이 주제는, 동구 블록의 붕괴가 "공산주의의 사망", "맑스주의의 파산" 그리고 심지어는 노동자계급 자체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야기되었을 때, 더욱더 귀청을 울리게 하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부르조아의 선전에 부가적인 역할은 자본주의의 "극" 좌파, 특히 트로츠키주의자들에 의해 행해졌는데, 이들은 스탈린주의 체계 안에서 지속적으로 노동자 계급적인 토대를 인정했다.

2. 이러한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왜곡들은 또한 20세기에 맑스주의의 진정한 연속성과 발전을 가로막는 역할을 했다. 맑스주의의 잘못된 옹호자들 - 스탈린주의자들, 트로츠키주의자들, 모든 종류의 학자적인 "맑스학주의자들", 근대화자들 및 철학자들 -이 집중조명을 점유한 반면에 그 진정한 옹호자들은, 더 직접적으로 억압되고 침묵되거나 그렇지 않았다면, 무의미한 파벌들로, 차츰 더, 잃어버린 세계로부터의 화석들로 격화된 채 주변화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이 세기에 맑스주의의 진정한 연속성을 재구축하기 위해서는 맑스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1848년 공산주의 선언 Communist Manifesto 속에 나타난 최초의 위대한 선언에서부터, 맑스주의는 고립된 천재적 "사상가들"의 산물로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실제적인 운동의 이론적인 표현으로서 스스로를 정의했다.

그래서, 그것은 피착취계급의 직접적이고 역사적인 이해관계의 비타협적인 옹호를 통해서 피착취계급의 운동에 대한 그것의 충실성을 증명하는 그러한 투쟁이론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옹호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같은 근본적이고 변경할 수 없는 원칙들에 대해 충실할 수 있는 능력에 기반함과 동시에, 노동자계급의 경험들과 직접적이고 생생하게 결합된 맑스주의 이론의 지속적인 풍부화를 또한 포함한다. 게다가, 집단적인 노동과 투쟁을 체화화는 계급의 산물로서 맑스주의 자체는 단지 조직화된 집합체들을 통해서 - 혁명적 부분들과 정당들을 통해서 -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공산주의 선언은 역사상 최초의 맑스주의 조직 즉, 공산주의 연맹 Communist League의 강령으로서 나타났다.

3. 자본주의가 여전히 팽창하고 상승하는 체계였던 19세기에, 부르조아는, 검은 것이 마치 흰 것인 양, 자본주의가 진정 사회주의인 양 꾸밈으로써 그 자신의 지배의 착취적 본성을 숨길 필요가 덜했다. 이러한 유형의 이데올로기적 도착들은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의 역사적 쇠퇴에 있어서 전형적이고 "맑스주의" 자체를 신비화의 일종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부르조아의 노력들에 의해 가장 극명하게 표현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상승기에도,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가차없는 압력은, 노동자들의 운동 속으로 밀수입되는 사회주의의 잘못된 판본들의 형태를 빈번하게 취했다. 이러한 이유로 공산주의 선언은 스스로를 "봉건적", "부르조아적" 및 "소부르조아적" 사회주의로부터 구별해야만 했고, 제 1 인터네셔널 내부의 맑스주의 부분들은 한편으로는 바쿠닌주의에 대항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라살레의 "국가사회주의"에 대항한 두 방면의 전투를 벌려야만 했다.

4. 제 2 인터네셔널의 정당들은 맑스주의를 기본으로 하여 창설되었고, 이러한 의미에서, 노동자운동 내부의 상이한 경향들의 일종의 연합이었던 제 1 인터네셔널로부터의 중요한 한 걸음 전진을 나타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에너지에 있어서, 개혁을 위한 투쟁이 핵심점이었던 거대한 자본주의 성장기에 그들이 활동했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자본주의 체계 속으로의 통합에 대한 압력들에 특히 취약했다. 이러한 압력들은, 자본주의의 불가피한 붕괴에 대한 맑스주의의 예언들은 "수정되어"야 하고 어떤 혁명적인 단절 없이도 사회주의를 향해 평화적으로 진화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 주장하기 시작한 개혁주의적 흐름들의 발전을 통해 이러한 당들 내부에서 표현되었다.

이 시기동안 - 특히 1890년대 말엽과 1900년대 초엽 - 맑스주의의 연속성은, 기본적인 맑스주의의 원칙들의 옹호에 있어서 가장 비타협적이었으며, 자본주의가 그 상승기의 한계에 도달하면서 나타나고 있었던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새로운 조건들을 최초로 인지했던 "좌파" 흐름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사회민주주의의 좌익을 구현하는 이름들은 잘 알려져 있다 - 러시아의 레닌 Lenin, 독일의 룩셈부르크 Luxemburg, 네덜란드의 판네코크 Panneko ,이태리의 보르디가 Bordiga - 그러나 이러한 투쟁가들 중 어느 누구도 고립되어 활동하지 않았음을 기억하는 것도 또한 중요하다. 기회주의의 회저가 인터네셔널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점점 더 그들은 그들 각각의 정당들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조직된 정파들 - 러시아의 볼세비키, 네덜란드의 트리뷴그룹 등등 - 로서 활동해야만 했다.

5. 1914년의 제국주의 전쟁과 1917년 러시아혁명은, 자본주의가 불가피하게 "사회혁명의 세기"에 돌입할 것이라는 맑스주의의 비젼을 확인했고, 노동자운동 내부에서의 근본적인 분열을 촉진했다. 맑스와 엥겔스에 그 기원을 가진 조직들이 처음으로 바리케이트의 서로 다른 편에 서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그 대부분이 예전의 "개혁주의자들"의 수중에 떨어졌던 공식적인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이전 시기의 맑스의 저술들을 환기시키면서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했고, 러시아는 여전히 부르조아 발전기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10월 혁명을 비난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돌이킬 수 없이 부르조아의 진영으로 들어갔고, 1914년의 전쟁을 위한 신병소집 하사관들이자 1918년 반혁명의 경찰견들이 되었다.

이것은, 맑스주의에의 충실성은 위선적인 선언들이나 정당의 간판에 의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실천에 의해서 입증된다는 사실을 매우 결정적으로 보여주었다. 제국주의의 대학살동안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깃발을 홀로 나부끼게 한 것도, 러시아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수호로 다시 모여든 것도, 전쟁 발발시 수많은 나라들에서 발생했던 파업들과 봉기들을 주도한 것도 모두 좌익 흐름들이었다. 그리고 1919년 창설된 새로운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의 핵심을 제공한 것도 이들 동일한 흐름들이었다.

6. 1919년은 전후 혁명물결의 최고정점이었고 그 창설총회에서의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의 입장들은 프롤레타리아운동의 가장 진보된 입장들을 표현했다: 사회-애국주의적 반역자들과의 전적인 단절, 자본주의 쇠퇴의 새로운 시기에 의해 요구되는 대중행동의 방법들, 자본주의 국가의 파괴 및 노동자 소비에트의 국제적인 독재. 이러한 강령적인 명확성은 혁명물결의 거대한 기세를 반영했지만, 그것은 낡은 정당들 내부의 좌익 정파들의 정치적 이론적 공헌들에 의해 그 이전에 준비되어 있었다: 그래서, 권력에로의 길에 대한 카우츠키의 합법주의적이고 점진주의적 비젼에 대항해 룩셈부르크와 판네코크는 혁명의 토양으로서의 대중파업개념을 구상해 냈다; 카우츠키의 의회주의적 백치주의 Parliamentary cretinism에 대항하여 판네코크, 부하린 및 레닌은 부르조아 국가의 파괴와 "코뮨국가"의 창설의 필요성에 대한 맑스의 주장을 부활시키고 정교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이론적 발전들은 혁명의 시간이 시작되면 실천적인 정책들의 문제로 될 수 있었다.

7. 혁명물결의 퇴조와 러시아혁명의 고립은 공산주의 인터네셔널과 러시아의 소비에트권력 내부에서 변질과정을 야기했다. 볼세비키당은 프롤레타리아 자신의 권력 및 참여기관들 - 소비에트, 공장위원회 및 적군- 에 대해 역비례로 성장한 관료적 국가 기구들과 점점 더 융합되었다. 인터네셔널 내부에서는, 감소해가는 대중활동의 시기에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는 시도들이 기회주의적인 "해결책들" - 의회 및 노동조합 내부에서의 활동에 대한 증가하는 강조, "동양의 인민들"에게 제국주의에 대항해 봉기할 것의 호소 및 무엇보다도, 사회애국자들의 자본주의적 본성에 관한 힘들게 획득된 명확성을 모두 내던져 버린 통일전선 정책 -을 초래했다.

그러나 제 2 인터네셔널 내부의 기회주의의 성장이, 좌파 흐름들의 형태로 프롤레타리아의 반작용을 자극했듯이,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좌파 흐름들이 제 3 인터네셔널 내부의 기회주의 풍조에 대항해 저항했다 - 판네코크와 보르디가와 같은 많은 대변자들은 이미 그 이전의 인터네셔널 내부에서 맑스주의의 최고의 옹호자들로서 스스로를 증명했었다. 공산주의 좌파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국제적 흐름이었고, 불가리아에서 영국까지 그리고 미국에서 남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들에서 그 표현들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의 가장 중요한 대표자들은 맑스주의의 전통이 가장 강했던 바로 그 나라들, 즉 독일, 이태리 및 러시아에서 발견될 수 있었다.

8. 독일에서,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실제 운동으로부터 나오는 거대한 기세와 결합된 맑스주의 전통의 깊이는 이미, 혁명물결의 절정 당시, 특히 의회 및 노동조합 문제에 대해서 가장 진보된 정치적 입장들의 일부를 결과시켰었다. 그러나 그러한 좌파 공산주의는 독일공산당KPD과 인터네셔널 내부의 기회주의의 최초의 징후들에 대한 대응으로서 출현했고, KPD 내부의 좌익 야당파가 불원칙적인 책략에 의해 축출된 1920년 형성된 KAPD에 의해 선도되었다. 비록 공산주의 인터네셔널(CI) 지도부에 의해 "소아적"이고 "무정부 노동조합지상주의적"이라고 비판되었을 지라도, 낡은 의회 및 노동조합 전술들에 대한 KAPD의 거부는, 자본주의의 쇠퇴에 관한 심오한 맑스주의적 분석에 기반하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쇠퇴는 이러한 전술들을 진부한 것으로 만들었고 계급조직의 새로운 형태들, 즉 공장위원회와 노동자평의회를 요구했다; 볼세비즘으로부터 그대로 물려받은, 강령적으로 명료한 핵으로서의 당 개념을 위해서, 사회민주주의의 낡은 "대중당" 개념에 대한 KAPD의 거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KAPD는, 낡은 사회민주주의적 전술들로의 회귀에 대항한 이러한 성과물들에 대한 그들의 비타협적인 옹호를 통해, 특히, 그 혁명운동이 판네코크와 고타Gorter의 작업을 통해 독일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네덜란드 및 여러 나라들에서 표현된 하나의 국제적인 흐름에서 핵심이 되었다.

이것은, 20세기초 독일의 좌파공산주의가 주요한 약점들로부터 고통받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쇠퇴를 장기간의 몰락과정으로가 아니라 하나의 최종적인 "죽음의 위기"의 형태로 바라보는 그것의 기조 때문에, 그것은 혁명물결의 퇴조를 인식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자발주의voluntarism의 위험에 노출되었다: 공산주의 인터네셔널과의 영구적인 단절을 결과시킨 조직문제에 대한 약점들 및 1922년에 새로운 인터네셔널을 창립하려던 헛된 노력도 이점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 갑옷에 난 이러한 틈새들로 인해, 그것은 1920년대 동안 시작된 반혁명의 조류에 저항하는데 방해를 받았고 결과적으로는 파편화라는 재앙적인 과정을 겪어야만 했으며, 이는 별개의 정치조직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평의회주의councilism" 이데올로기를 통해 대부분 이론화되었다.

9. 한편, 이태리에서 공산좌파 - 처음에 이태리공산당 내부에서 주요한 위치를 점유했던-는 조직문제에 있어서 특히 명료했으며 이 때문에 그것은, 변질되는 인터네셔널 내부의 기회주의에 대항해 용감한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혁명운동의 난파를 무사히 살아남아 반혁명의 어두운 시기동안 맑스주의 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하나의 공산주의자 정파를 발생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초엽 동안, 부르조아 의회로부터의 기권주의를 위하고, "대중적인 영향력"의 환상을 주기 위한 중심주의적 거대 정당들과 공산주의 전위 사이의 융합에 대항하며, 통일전선 및 "노동자정부"의 슬로건에 대항한 그것의 주장들 또한 맑스주의적 방법론의 심오한 파악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는, 파시즘이라는 새로운 현상 분석 및 결과적으로 "민주주의" 부르조아 정당들과의 모든 반파시즘 전선에 대한 거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보르디가의 이름은 이태리 공산좌파의 역사에서 이 시기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이 투쟁가의 공헌의 거대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태리 좌파는, 볼세비즘이 레닌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르디가로 환원 될 수는 없다. 이태리 좌파와 볼세비즘 양자는 프롤레타리아 정치운동의 유기적 산물들이다.

10. 러시아에서 혁명의 고립은, 우리가 이미 언급했듯이, 노동자계급과 더욱 더 관료적인 국가 기계사이의 점증하는 괴리를 초래했다 - 이러한 괴리의 가장 비극적인 표현은, 프론슈타트 노동자 병사 반란에 대한, 점점 더 국가와 뒤엉켜가던, 프롤레타리아 자신의 볼세비키당에 의한 진압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정당이었기 때문에, 또한 볼세비즘은 그 자체의 변질에 대항한 수많은 내부적인 반응을 만들어냈다. 레닌 자신- 1917년에 그 당의 좌익의 가장 분명한 대변인이었던-은 당이 관료주의에 잠식되어 가는 것에 대해, 특히 그의 생애의 말기에, 매우 적절히 비판했다; 그리고 거의 동일한 시기에, 트로츠키는 당 내부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규범들을 회복하려 시도했던 좌파의 주요한 대표자가 되었는데, 이 좌파는 스탈린주의의 반혁명의 가장 악랄한 표현들에 대항한, 특히 "일국 사회주의" 이론에 대항한 전투를 계속했다. 그러나 대부분에 있어서 볼세비즘이 국가와의 융합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의 전위로서의 그 자신의 역할을 침식했기 때문에, 당 내부의 가장 중요한 좌파 흐름들은 국가기계에 대해서보다는 계급에 대해 친밀하게 남아있을 수 있었던 덜 유명한 인물들에 의해 주도되는 경향이었다.

이미 1919년에, 오신스키Ossinski, 스미르노프Smirnov 및 사프라노프Sapranov에 의해 주도된 민주중심주의 Democratic Centralism 그룹은 소비에트의 "위축"에 대해 그리고 파리콤뮨의 원칙으로부터의 점증하는 이탈에 대해 경고하기 시작했다. 유사한 비판들이 1921년 콜론타이Kollontai와 슬리아프니코프Shliapnikov의 주도하의, 노동자들의 반대 Workers' Opposition그룹에 의해 제기되었지만, 이것은 "데시스트Decist"그룹에 비해서 덜 엄밀하고 덜 영속적인 임이 판명되었다. 데시스트그룹은 20년대 동안 줄곧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이태리 좌파의 그것과 유사한 접근법을 발전시키게 된다. 1923년 미아스니코프Miasnikov에 의해 주도된, 노동자들의 그룹Workers' Group은 그것의 선언을 발행했고 그 해에 있었던 노동자들의 파업들에 중요하게 개입했다. 그 입장들과 분석들은 KAPD의 그것과 가까웠다.

이 모든 그룹들은 볼세비키당으로부터 출현했을 뿐만 아니라, 혁명의 원래 원칙들로의 회귀를 위해서 계속적으로 당 내부에서 투쟁했다. 그러나 부르조아 반혁명 세력들이 당 내부에서 입지를 획득해감에 따라서, 다양한 반대파들이 이 반혁명의 실체를 인식하고 그것의 조직화된 표현들에 대한 어떤 감상적인 충성과도 단절하는 능력이 핵심적인 논점이 되어갔다. 이것은 트로츠키와 러시아공산좌파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입증하게 된다: 트로츠키가 소련의 옹호 관념에 심지어는 스탈린주의 당들의 노동자 계급적 본질에 집착한 채 평생동안 남아있었던 반면에, 좌파공산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의 승리 - 많은 트로츠키 추종자들을 혼란시켰던 그것의 "좌편으로의" 전향을 포함해서 -가 계급의 적의 승리를 의미하며 새로운 혁명의 필요성을 암시함을 인식했다.

그런데, 트로츠키주의적 반대파 중에서 많은 우수한 자들 -소위 "비타협적인 자들"- 자신들이 20년대 후반 및 30년대 초반에 공산좌파의 진영들로 넘어갔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의 테러는 30년대의 말엽 즈음에 이들 그룹들을 거의 확실하게 제거해버렸다.

11. 1930년대는, 빅터 세르즈 Victor Serge의 말에 따르면, "그 세기의 자정"이었다. 혁명물결의 마지막 파고- 1926년 베를린에서의 총파업, 1927년 상하이봉기-는 이미 소멸되고 말았다. 공산당들은 민족수호의 정당들로 되어버렸고,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적 테러들이, 혁명운동이 그 최고점에 도달했었던 특히 그 나라들에서 가장 극심했으며, 자본주의 세계 전체가 또 다른 제국주의적 대학살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혁명적 소수들은 추방과 억압과 증가되는 고립에 직면에 해야만 했다. 계급 전체가 사기저하와 부르조아의 전쟁이데올로기에 침식되어 있었기 때문에, 혁명가들은 계급의 즉각적인 투쟁들에 대한 광범위한 영향력의 발휘를 바랄 수가 없었다.

트로츠키가 이점을 이해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그의 좌익반대파는 "대중의 정복"이라는 헛된 희망으로 점점 더 기회주의적 방향으로 기울었다 - 사회민주주의적 정당들 속으로의 "프렌치 턴French turn" 회귀, 반파시즘으로의 투항 등등. 이러한 노정의 최종 결과는, 트로츠키 자신에게 있어서 보다는 트로츠키주의에 있어서, 1940년대 동안 부르조아 전쟁기계로의 편입이었다. 그이래 트로츠키주의는, 사회민주주의 및 스탈린주의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정치도구의 일부가 되었고, 그것의 모든 가장들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의 연속성과는 아무런 연관성도 갖지 않는다.

12. 이러한 궤도와는 반대로, 평론지 빌랑Bilan 주변의 이태리좌파 부분은 당시의 임무들을 정확히 정의했다: 첫째, 전쟁으로의 행진에 직면해서,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의 기본적인 원칙들을 배신하지 않을 것; 둘째, 혁명물결의 특히 러시아 혁명의 실패의 "대차 대조표balance sheet"를 초안할 것, 그리고 미래에 계급투쟁 부활시 나타나게 될 새로운 당들에게 이론적인 기초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적절한 교훈들을 이끌어낼 것.

스페인에서의 전쟁은 당시 혁명가들에게 특히 혹독한 시험이었고, 많은 혁명가들이 반파시즘의 나팔소리에 사로잡혀서, 그 전쟁이 양 진영 모두에 있어서 제국주의적이며, 다가오는 세계대전의 총연습에 불가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빌랑Bilan은 꿋꿋히 나서서, 제 1차 대전시 레닌이 양쪽 진영 모두를 비판했듯이, 파시스트들과 부르조아의 공화파들 양자 모두에 대항한 계급투쟁을 호소했다.

동시에, 이 흐름 - 이후에 벨기에, 프랑스 및 멕시코에서 부분들을 포함하는-에 의한 이론적 공헌들은 매우 거대하며 진정 대체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러시아혁명의 변질에 관한 그것의 분석 - 1917년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에 대해 결코 의심하지 않았던-에서, 미래의 과도기 문제들에 대한 그것의 연구들에서, 경제위기와 자본주의쇠퇴의 기초들에 대한 그들의 작업들에서, "민족해방"투쟁들을 위한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의 옹호입장에 대한 그들의 거부에서, 당과 분파의 이론의 정교화에서, 다른 프롤레타리아 정치 흐름들과의 부단한 하지만 형제애적인 논쟁들에서, 이러한 그리고 다른 많은 분야들에서 이태리 좌파부분은 미래의 프롤레타리아 조직들을 위한 강령적 기초들을 세우는 그 임무를 의심할 여지없이 수행해냈다.

13. 독일에서 공산좌파 그룹들의 파편화는, 비록 몇몇 은밀한 혁명활동이 히틀러 치하에서 여전히 수행되었을 지라도, 나치 테러에 의해 완결되었다. 1930년대 동안, 독일좌파의 혁명적 입장들의 옹호는, 비록 파울 마틱 Paul Mattick에 의해 주도된 그룹에 의해서도 미국에서도 이루어졌지만, 대부분 네덜란드에서, 특히 국제공산주의자그룹the Group of International Communists의 작업을 통해서였다. 빌랑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좌파는 국제적인 학살로의 길을 준비하는 모든 지역적 제국주의 전쟁들에 직면해서, "민주주의의 수호"라는 유혹에 저항하여 국제주의를 견지했다.

네덜란드좌파는 노동조합문제에 관한, 자본주의의 쇠퇴기에 있어서 노동자조직의 새로운 형식에 관한, 자본주의의 위기의 물질적 근원들에 관한, 국가자본주의로의 경향에 관한 이해를 계속해서 심화시켰다. 또한 그것은 계급투쟁에, 특히 실업자운동에 지속적으로 중요하게 개입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좌파는 러시아혁명의 패배에 의해 충격을 받은 채, 정치조직에 대한 - 그리고 그러한 조직의 어떤 분명한 역할에 대해서도- 평의회주의적 거부로 점점 더 빠져들었다. 그것이 볼세비즘과 러시아혁명을 처음부터 부르조아적이었던 것으로 비판하면서 전적으로 부정한 것도 이점과 결합되어 있었다. 이러한 이론화들은 미래의 그것의 죽음의 씨앗들이었다. 비록 네덜란드에서의 좌파공산주의가 나치점령 하에서도 계속되었고 전후의 중요한 한 조직- 당을 찬성했던 KAPD의 입장들로의 복귀했던 스파르타쿠스연맹 Spartacusbund-이 탄생하게 했을 지라도, 네덜란드좌파의, 조직문제에 있어 무정부주의에 대한 용인 때문에, 이후에 그것이 어떤 종류의 조직화된 연속성으로 남아있는 것을 점점 어렵게 되었다. 현재 이 흐름은 거의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다.

14. 한편, 이태리좌파는 비록 반혁명에게 그 값을 치르긴 했지만, 일종의 조직적 연속성을 유지했다. 전쟁 직전, 이태리좌파는 세계대전의 절박한 위험을 부정하는 "전쟁경제이론"에 의해 혼란에 빠져들었지만, 그것의 확동은 제국주의적 충돌의 시기에, 특히 한 프랑스부분의 출현에 의해 계속되었다. 전쟁의 말기에 즈음하여, 이태리에서의 주요한 프롤레타리아 투쟁들의 발생은 그 프랑스부분의 위상에 있어서 한 층 더한 혼란을 유발했고, 그 다수는 이태리로 되돌아가서, 20년대 후반이래 정치적으로 비활동적이었던 보르디가와 함께 이태리국제공산당the International Communist Party in Italy를 창립했다. 이 당은 비록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여 불명확한 강령적 기초 위에 그리고 그 시기에 대한 잘못된 분석을 가지고 창립되긴 했지만, 혁명전투의 일종의 준비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방향은, 그 시기가 승승장구하는 반혁명의 시기로 남아있고 그래서 자신의 임무들이 아직 완수되지 않았음을 더 재빠르게 인식한 프랑스부분의 대다수에 의해 반대되었다. 프랑스공산좌파 the Gauche Communiste de France는 빌랑의 정신에 입각하여 활동을 계속했고, 한편으로 계급의 직접적인 투쟁들에의 개입에 대한 사명감에 태만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및 이론적 규명작업에 총력을 집중하여, 많은 진전을, 특히 국가자본주의의 문제, 전이기, 노동조합과 당에 관해 수많은 진전들을 이뤄냈다. 이태리좌파에 매우 전형적이었던 확고한 맑스주의적 방법을 유지하는 한편, 그것은 독일-네덜란드좌파의 가장 훌륭한 공헌들의 일부 또한 그것의 전체 강령적 병기고에 통합할 수 있었다.

15. 그런데, 1952년경, 프랑스공산좌파GCF는 제 3차 대전의 촉박한 위험에 대한 잘못된 확신으로 사실상 해체되었다. 같은 해에 이태리국제공산당ICP은 "보르디가주의" 경향과, 파시즘시기 도안 이태리에서 정치적으로 활동적으로 남아있었던 투쟁가인 오나라토 다멘 Onarato Damen에 의해 주도된 한 경향 사이의 불화에 의해 분열되었다. "보르디가주의" 경향은 그 시기의 반동적인 본질의 이해에 있어서 더 명료했지만, 맑스주의를 확고히 옹호하려는 그것의 노력 속에서 독단주의로 퇴보하는 경향이 있었다. "맑스주의의 불변성"에 관한 그 경향의 (새로운!) 이론은 그것이 30년대에 그 부분에 의해 이루어진 진전들을 점점 더 외면하고 많은 논점들에 있어서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의 "정통"으로 회귀하도록 만들었다. 현재의 다양한 보르디가주의 그룹들(그것들 중 적어도 3개의 그룹은 스스로를 "국제공산당International Communist Party"로 칭한다)은 이 경향의 직접적인 후예들이다.

다멘Damen 경향은 당의 역할, 노동조합, 민족해방 및 국가자본주의 등과 같은 기본적 정치적 문제들에 있어서 훨씬 더 명료했지만, ICP의 창립 시에 의해 행해진 실수들의 근원들에 결코 접근하지 않았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이러한 그룹들은 정치적으로 정체되었고, 특히 보르디가주의 경향은 파벌주의의 장막 뒤에서 자기를 "방어"했다. 부르조아는, 현재의 혁명조직들을 노동자운동의 위대한 전통들로 연결하는 생명선을 절단함으로써, 맑스주의의 모든 조직화된 표현들을 거의 모두 제거하는 정도까지 나아갔다.

16. 그러나 1960년대 말, 프롤레타리아는, 1968년 5월 프랑스에서의 총파업과 그에 이은 전 세계에 걸친 노동자들의 투쟁의 폭발과 함께 역사의 무대 위에 재등장했다. 이러한 부활은 공산주의 입장들의 명료성을 추구하는 정치적 인자들의 새로운 새대를 낳았고, 기존의 혁명그룹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결국은, 좌파공산주의의 유산들의 쇄신을 모색하는 새로운 조직들을 출현시켰다. 처음에, 이 새로운 정치적 환경은, 볼세비즘의 "권위주의적" 이미지에 대항하여 평의회주의에 의해 깊이 고취되었지만, 그것이 성숙함에 따라서, 점점 더 그것의 반조직적인 편견들을 버리고 맑스주의적 전통 전체와의 연속성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현존하는 혁명적 환경 내부의 대부분의 그룹들이, 조직문제 및 손상되지 않은 혁명전통의 보존필요성에 대해 그렇게 강조했던 이태리좌파경향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보르디가주의 그룹들과 혁명당국제사무국 International Bureau for the Revolutionary Party 양자 모두가 이태리국제공산당의 상속자들인 한편, 국제공산주의흐름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은 대부분에 있어서 프랑스공산좌파의 후예이다.

17. 60년대 말의 프롤레타리아의 부활은 험난한 길을 걸어왔고, 전진과 후퇴의 운동들을 거치며, 노정에 많은 장해물들, 특히 그 어떤 것보다도 커다란 장해물이었던, 공산주의 자체의 죽음에 대한 부르조아의 거대한 켐페인- 그 일부가 공산주의좌파에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포함했던-과 직면하였으며, 나치가스실의 존재를 부정하는 "부정주의적 negationist" 흐름의 원천으로서 잘못 비난되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의 곤경들은 혁명적 환경 자체의 노정에 많은 곤경들을 부과했고, 그것의 성장을 지연시키고 그 단일화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이러한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좌파공산주의"운동은 진정한 맑스주의의 유일하게 살아있는 연속성이자, 미래의 세계공산당의 형성에 대해 유일하게 가능한 "가교"로서 남아있다. 이 시기에 전세계에 걸쳐 계속 발전하는 새로운 투쟁가들이 공산주의좌파의 그룹들과 대면하여, 그들과 논쟁하고, 궁극적으로 그들과 합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새로운 투쟁가들은 혁명당의 구성에 스스로 공헌하게 될 것이고, 그것 없이는 어떤 성공적인 혁명도 불가능할 것이다.

국제공산주의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1998년 9월

ICConline - 2006

전쟁위협에 대항하여 한국으로부터의 국제주의선언

2006년 10월말, 국제주의적 조직들, 그룹들 및 투쟁가들의 대회가 남한의 서울과 울산에서 사회주의정치연대(SPA)에 의해 개최되었다. 참가자의 수적인 면에서 소규모이긴 하지만 SPA는 극동에 있어서 좌파공산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우리가 아는 한) 최초의 표현이고, 이 대회는 확실히 이런 종류로서는 최초의 것이다. 이렇게 이것은 역사적인 의의를 가지며 ICC는 대표단을 파견함으로써 진심으로 이 대회를 지지하였다.

그런데 대회 며칠 전 북한의 최초의 핵폭탄의 폭발에 의해 그리고, 특히 이 지역의 여러 국가들(USA, 중국, 일본, 러시아, 남한) 측에서 이어진 기동연습에 의해 야기된 이 지역에서의 제국주의간 긴장의 극적 첨예화에 의해 이 대회의 목표들의 장기적인 정치적 중요성이 그늘지워졌다. 그래서 이 문제는 대회에서 상세히 토론되었다. 그 결과로, 아래에 그 명단이 공개된 대회 참가자들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표명하기로 결정했다.

전쟁위협에 대항하여 한국으로부터의 국제주의 선언

북한의 핵실험에 관한 소식에 이어, 서울과 울산에서 회합을 갖고 있는 우리들, 공산주의 국제주의자들은:

  1. 또 하나의 자본주의국가의 손 안에서의 새로운 핵무기 개발을 비난한다: 핵폭탄은 제국주의자들 간의 전쟁에서 최종적인 무기이다. 그 유일한 기능은 일반 민간인의 특히 노동자계급의 대량학살이다.

  2. 자본주의국가 북한에 의해 자행된 전쟁으로 향한 이러한 새로운 단계를 전적으로 비난한다. 이때 북한은 자신이 노동자계급이나 공산주의와는 전혀 무관함을 그리고 군사적인 야만주의로 향한 쇠퇴한 자본주의의 전반적 경향의 가장 극단적이자 괴기한 판본에 지나지 않음을 (필요하기라도 한 것처럼 )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3. 그들의 적 북한에 대항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위선적인 켐페인을 가차없이 비난한다. 그러한 켐페인은, 오늘의 이라크에서와 같이 노동인민이 결국은 그 주요 희생자가 될 선제공격들의 개시 – 그들이 이렇게 할 능력을 갖고 있다면 –를 위한 그들의 이데올로기적인 준비에 불가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민간인을 절멸했을때의 그 미국이 지금까지 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한 유일한 세력임을 우리는 잊지 않고 있다.

  4. 중국과 같은 다른 제국주의 갱스터들의 비호 아래 출현할 수 밖에 없는 소위 „평화발의 peace initiative“들을 가차없이 비난한다. 이것들은 이 지역에서의 평화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의 옹호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노동자들은 어느 자본주의 국가의 어떤 „평화적인 의도들“도 믿을 수 없다.

  5. 국가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옹호라는 미명아래 남한 부르조아계급이, 국제주의적 원칙을 방어하는 노동계급에 또는 그 활동가들에 대항하여 억압적 조치들을 취하려는 모든 시도들 가차없이 비난한다.

  6. 발생하게 될 군사행동으로 인해 제일 먼저 고통당할, 남북한의, 중국의, 일본의 그리고 러시아의 노동자들과의 우리의 전적인 연대를 선언한다.

  7. 자본주의 아래의 인류를 엄습하는 야만주의의의, 제국주의 전쟁의, 그리고 핵파괴의 위협을 영원히 종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노동자들의 전세계적인 투쟁임을 선언한다.

 

노동자들에게 있어 수호해야할 국가는 없다!

전 세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이 선언은 다음의 조직들과 그룹들에 의해 서명되었다:

국제공산주의흐름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사회주의정치연대 Socialist Political Alliance, 2006년 10월 26일자 서울회의

국제주의 전망 Internationalist Perspectives

이번 국제대회에 참석한 많은 동지들도 개인적으로 이 선언에 서명했다:

SJ(노동자평의회 서울그룹)

MS(노동자평의회 서울그룹)

LG

JT

JW(울산)

SC(울산)

BM

 

ICConline - 2007

1921년 크론슈타트 이해하기

 

(Understanding Kronstadt)[1]

1917년 러시아에서 노동자 계급이 10월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잡고 난 뒤 4년째,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21년 3월, 볼셰비키 당은 페트로그라드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핀란드 만의 작은 섬 코틀린에 주둔하고 있는 발트 함대의 크론슈타트 수비대가 일으킨 폭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볼셰비키 당은 러시아와 외국 부르주아지의 반혁명 군대에 맞선 몇 년 동안 피로 물든 내전을 치러온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크론슈타트 수비대의 봉기는 새롭고 달랐다. 이는 소비에트 정권의 노동계급 지지자가 내부로부터 일으킨 봉기였다. 그들은 10월 혁명의 전위였고, 이제 여러 가지 참을 수 없는 왜곡과 새로운 권력의 남용을 바로잡으려는 계급의 요구를 들고 나왔다. 

볼셰비키가 이 투쟁을 무력으로 짓누른 것은 그때 이래 줄곧 혁명적인 프로젝트가 지닌 뜻을 이해하는 데서 하나의 기준점을 제공해왔다. 부르주아지가 노동계급에게 맑스와 레닌을 스탈린과 굴락에 연결하는 끊어질 수 없는 고리가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게 모든 것을 하고 있는 오늘날, 크론슈타트 사건에 대한 이해는 더욱 더 중요하다.

우리의 의도는 모든 세세한 내용을 검토하려는 게 아니다. 『국제 리뷰』(International Review)에 실린 이전의 논문들은("크론슈타트의 교훈들," International Review n°3과 "1921: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이행기 계급," International Review n°100) 이미 상세하게 그 사건을 다루어왔다.

그와 달리 우리는 이번 기념일을 기회로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는 크론슈타트 봉기에 대한 두 가지 종류의 주장에 집중하려고 한다. 첫 번째로 아나키스트는 크론슈타트 사건을 맑스주의와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행동한 당이 지닌 권위주의적 반혁명의 본질을 입증하는데 쓴다. 두 번째로 오늘날 프롤레타리아 진영에 여전히 있는 생각, 즉 반란을 짓누른 것은 10월 혁명의 성과물을 방어하려는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아나키스트 견해

아나키스트 역사학자 볼리네(Voline)에 따르면:

레닌은 크론슈타트 운동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거나, 또는 차라리 그 어떤 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와 그의 당에 꼭 필요한 것은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그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

맑시스트, 권위주의자, 국가주의자로서, 볼셰비키는 대중에게 어떠한 자유 또는 독자적인 행동을 허용할 수 없었다. 볼셰비키는 자유로운 대중을 믿지 않았다. 볼셰비키는 그들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자신들의 독재가 무너지는 것이 지금까지 해 왔던 모든 일을 무너트리고 혁명을 위험에 맞닥뜨리게 하는 것을 뜻한다고 믿었다. ......

크론슈타트는 모든 멍에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사회 혁명을 이루려고 하는 인민이 처음으로 혼자의 힘으로 일으킨 시도였다. 그 시도는 정치적 지도자나 교사 없이 노동자계급 자신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단호하게, 대담하게 이루어졌다. 그것은 제3의 혁명, 사회 혁명으로 향하는 첫 걸음이었다.

크론슈타트는 무너졌지만, 크론슈타트 봉기한 사람들은 과업을 해냈다. 바로 그 점이 중요한 것이다. 봉기에 참여한 대중 앞에 펼쳐진 복잡하고 흐릿한 미로에서, 크론슈타트는 올바른 길을 밝혀주는 밝은 횃불이었다. 봉기한 사람들이 스스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고 있는 환경에서 그들이 권력이라는 말과 생각을 모두 없애지 않고 그 대신에 협력과 조직화, 관리를 말하면서 여전히 권력(소비에트 권력)에 대해 말했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과거에 바친 마지막 찬사였다. 노동계급 스스로가 토론과 조직화와 행동의 완전한 자유를 얻어낸다면, 대중이 독자적인 행동에서 참된 길을 찾아낸다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다.[2]

아나키스트들은 Voline가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에게 크론슈타트 봉기에 대한 진압은 볼셰비키가 지닌 맑스주의 사상의 당연하고 논리적인 결과였던 것이다. 당의 대리주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를 당의 독재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 그리고 이행기 국가의 형성은 볼셰비키가 믿지 않았던 대중에 대한 지나친 권력과 권위 욕구를 표현한 것이었다. Voline에 따르면, 볼셰비즘은 억압의 한 형태를 다른 형태로 대체한 것을 뜻했다.

그러나 볼리네는 크론슈타트를 그저 봉기였다고만 여기지 않았다. 그에게 크론슈타트는 미래를 위한 모델이었다. 만일 크론슈타트 소비에트가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과업(협력, 조직화, 관리)에 몰두한 나머지 정치적 과업에 대해 잊었다면(소비에트의 권력에 대한 발언), 그것을 교훈삼아 우리는 진정한 사회혁명이 무엇이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그림, 이를테면 지도자 없고, 당이 없는, 국가가 없는, 그리고 어떤 종류의 권력도 없는 사회, 즉각적이고 완전한 자유의 사회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아나키스트가 이끌어낸 첫 번째 교훈은 공산주의 혁명이 새로운 형태의 폭정으로 이끌 수 있다고 한 세계 부르주아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매우 밀접하게 일치한다.

아나키스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이러한 견해의 일치는 우연이 아니다. 양쪽 모두 위계제와 폭정과 독재에 맞서는 평등과 연대와 우애라는 추상적 개념에 따라 역사를 평가한다. 부르주아지는 1918년에서 1920년 사이에 러시아에 맞서 무력으로 개입하고 경제 봉쇄를 이끌었던 반혁명 세력의 잔인성을 정당화하려고 10월 혁명에 반하는 이러한 도덕적 원리를 냉소적이고 위선적으로 이용했다. 다른 한편 아나키스트가 볼셰비즘에 대한 실천적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부닥쳐야만 했던 역사적 어려움을 이해할 수 없게 녹여 없애는 순진한 유토피아이다.

그러나 1936년 스페인에서 일어난 사건이 확증한 것처럼, 아나키스트가 지닌 순진성 때문에, 그들은 맑스가 세운 혁명에 대한 역사 개념을 거부하고 나서 부르주아 진영이 일으킨 실제 반혁명 앞에 어쩔 수 없이 투항하게 되었다. 

만일 볼셰비키가 볼리네가 주장하는 것처럼 전적으로 권력욕 때문에 근본적으로 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다 하더라도, 아나키즘은 그와 견주어 볼 때 역사의 진실에서 제기되는 일련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다. 만일 볼셰비키가 끝내 권력만을 탐했다면, 왜 그들은 사회민주당의 다수와는 달리, 제국주의 전쟁을 규탄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되도록 요구함으로써 1914년과 1917년 사이에 추방당할 운명을 지웠는가? 왜 볼셰비키는 멘셰비키와 사회 혁명당과는 달리, 1917년 2월 혁명이 성공하고 난 뒤 러시아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함께 임시 정부를 꾸리는 데 참여하지 않고 그 대신에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전할 것을 요구했을까?

왜 볼셰비키는 노동자계급이 아주 뒤떨어졌고 부르주아지를 뒤엎기에는 수적으로도 모자라다고 여긴 대부분의 국제 사회민주주의자들과는 달리, 10월에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시작할 수 있는 러시아 노동계급의 역량을 믿었는가?

왜 볼셰비키는 노동계급이 모든 희생을 해서라도 연합국의 봉쇄를 이겨내고 반혁명 군대에 맞서 무기를 들고 저항할 것이라고 믿었는가, 그리고 그러한 노동계급의 지지를 얻고 유지할 수 있었는가?

왜 볼셰비키는 유럽과 나머지 세계 전체에서 일어난 혁명의 시도에서 러시아의 지도를 따르도록 세계 노동자계급을 고취시켰는가? 어떻게 볼셰비키 당은 세계적 규모에서 새로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창건을 주도할 수 있었는가?

마지막으로 왜 당을 국가 기구로 통합하는 과정과, 소비에트와 공장 위원회와 같은 노동자 권력의 대중 조직에 대한 귄리침탈, 그리고 마지막으로 계급투쟁에 맞서 무력의 사용은 하룻밤 새에 일어난 게 아니라, 그저 질질 끌다 일어난 것인가?

볼셰비키가 태어날 때부터 그런 더러운 속성을 지녔다는 이론으로는 일반적으로 러시아 혁명의 타락을 또는 구체적으로 크론슈타트를 설명하지 못한다.

1921년쯤 러시아에서 혁명, 그리고 그것을 이끌었던 볼셰비키 당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독일과 다른 국가로 혁명의 확산은 1919년과 견주어 볼 때 훨씬 가망 없는 것으로 보였다. 세계 경제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었고 독일에서 스파르타쿠스동맹이 일으킨 봉기는 실패했다. 러시아 안에서 내전을 이겨냈지만, 반혁명 군대의 거듭된 공격과 국제 부르주아지가 의식적으로 조직한 경제적 질식 때문에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공업 기반은 무너져 버렸고, 노동자 계급은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에서 희생되었거나 또는 살아남으려고 어쩔 수 없이 도시를 떠나 시골로 떼 지어 몰려갔기 때문에 크게 줄어들었다. 볼셰비키 정권은 지방에서 일련의 폭동을 일으킨 농민층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무엇보다도 1921년 2월 중순에 페트로그라드에서 파업을 일으켰던 노동계급 사이에서도 점점 더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그 때 크론슈타트가 일어났다.

어떻게 러시아는 다른 국가들, 특히 유럽의 노동자 계급 혁명에서 지연된 도움을 기다리면서 세계 혁명의 요새로 남고 노동계급의 불만과 경제적 붕괴를 이겨낼 수 있는가? 아나키스트는 혁명이 어떻게 타락했는가에 대해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정치적 우위, 권력의 집중화, 혁명의 국제적 팽창, 그리고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기의 문제에만 집중했다. 이것은 볼셰비키가 크론슈타트 봉기를 군사적으로 해결하게 하고 노동계급의 저항을 배반과 반혁명 행위로 다루게 한 재앙과도 같은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바꾸어 놓지 못한다. 그러나 볼셰비키 당은 오늘날 혁명가들이 지닐 필요가 있는 것처럼 가늠자를 갖지도 못했다. 그들은 그때 그저 노동자 운동의 이득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 노동자 운동은 결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계에서 권력을 보유하는 아주 어려운 과업에 부닥쳐야만 했다. 성공적인 권력 장악 뒤 볼셰비키는 노동계급의 당에 대한 소비에트의 관계도, 부르주아 국가를 필연적으로 분쇄하게 될 이행기 국가에 대한 이러한 두 계급 조직의 관계도 이해하지 못했다.

정권을 잡고, 차츰 노동자 평의회와 공장 위원회를 국가에 통합하면서, 볼셰비키 당은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노동자 운동 안에서 지배적인 의견에 따르면, 혁명에 대한 주요한 위험은 새로운 국가 기구 밖에서, 즉 국제 부르주아지와 추방된 소작농과 러시아 부르주아지에게서 나왔다. 비록 볼셰비키 당 내부에 그때 정권의 관료화에 맞서 경고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공산주의 운동에서 어떠한 경향들도, 심지어 좌파도 대안의 전망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처방은 제한되어 있었고 다른 위험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콜론타이와 쉴라프니코프의 노동자 반대파는 노동자 평의회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 조직으로서 국가를 초월했다는 것을 잊어버린 국가의 과도함에 맞서 노동자를 방어할 것을 노동조합에 요구했다.

볼셰비키 당 내부에는 봉기를 분쇄하는 데 반대했던 몇몇 사람들이 있다. 운동에 결합했던 크론슈타트 당원들도 있고 훗날 노동자 그룹을 조직하고 군사적 해결을 반대했던 가브릴 먀스니코프(Gavriil Miasnikov)와 같은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당과 코민테른 내 있는 좌파 경향은 볼셰비키 정권을 비판했지만, 폭력의 사용을 도왔다. 심지어 노동자 반대파도 진압 세력에 자원했다. 당의 독재에 반대했던 독일 공산당은 크론슈타트 반란에 맞선 군사적 행동에 동의했다.

마지막으로 크론슈타트 소비에트의 요구는, 볼리네의 의견과는 달리 대안의 전망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즉각적이고 지역적인 맥락 안에서 주로 틀지어졌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요새(보루)와 세계적 상황에 대한 더 폭넓은 내포(함의)들을 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그러한 요구들은 전위당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답변하지 못했다.[3]

러시아 혁명의 패배와 그것을 주도했던 혁명적 흐름에서 모든 교훈을 이끌어내려고 애쓴 혁명가들이 이 비극적 사건의 진정한 교훈들을 지적할 수 있었던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어떤 환경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 그리고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적들에 의한 책략의 희생자일 수도 있다는 것을 심지어 인정할 것이다. - 프롤레타리아 국가에 맞서 투쟁할 수도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사회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에게 폭력과 강압에 의해 강요될 수 없다는 원칙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크론슈타트를 잃어버리는 편이 지리적 관점에서 그것을 지키는 것보다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러한 승리가 실질적으로 한 가지 결과만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바로 그 바탕, 프롤레타리아트가 수행했던 행동의 내용을 바꾸는 결과이다. (Octobre, 1938년, Italian Fraction of the Communist Left에 의해 편찬됨)

좌익 공산주의는 본질적인 문제를 정확히 지적했다. 즉 국가가 노동자 계급에 맞서 폭력을 쓰는 데서 볼셰비키 당은 자신을 반혁명의 수장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크론슈타트에서 거둔 승리는 볼셰비키 당이 노동자 계급에 맞서 러시아 국가의 도구로 되었다는 경향을 가속화시켰다. 이러한 견지에서, 좌익 공산주의는 또 다른 대담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전위로 남으려는 좌익 공산주의는 현상을 유지하고 혁명의 과정에 대한 진보를 막으려는 필연적인 경향을 반영하는 혁명 뒤에 들어선 국가에서부터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자율성을 지켜야만 한다.

보르디가주의자(Bordigist)의 견해

그러나 오늘날 좌익 공산주의에서 이러한 결론은 전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사실, 좌파의 몇몇 부분은, 특히 보르디가주의자(Bordigist)는 1938년 Italian fraction의 태도와는 완전히 모순되게, 레닌과 트로츠키가 크론슈타트를 탄압한 것을 정당화했다.

볼셰비키가 어쩔 수 없이 크론슈타트를 진압하게 한 끔찍한 상황을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탄생이나 강화의 과정에서 노동자를 향해 발포할 수 있다는 원칙을 거부하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토론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할 수도 있다.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부닥쳐야만 한 끔찍한 문제의 제거는 장밋빛이 감도는 안경과, 이러한 반란에 대한 진압이, 트로츠키에 따르면, "비극적 필요"였지만 필요이고 심지어 의무였다는 이해를 통해 혁명의 비전에 대한 비판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크론슈타트 :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 Programme Communiste n°88, 국제 공산주의자 당의 이론적 기구, 1982년 5월).

그들이 속해 있다고 주장하는 전통을 회피한, Bordigist 경향은 볼셰비키 당의 비타협적인 국제주의를 방어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경향은 또한 볼셰비키의 실수를 열정적으로 방어하고, 당과 혁명이 왜 타락했는지 하는 문제에서 배울 수 없게 한다.[4]

그들에 따르면, 혁명 과정에서 계급과 혁명 뒤에 들어선 국가에 대한 당의 관계는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편의주의의 문제, 즉 어떻게 각각의 상황에서 혁명적 전위가 자신의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 커다란 투쟁은 그저 프롤레타리아 계급 안에서 끔찍한 긴장을 일으킬 수 있을 뿐이다. 사실상, 당이 혁명을 만들 수 없거나 또는 대중없이 또는 대중에 반하여 독재를 지도할 수 없다는 것은 틀림없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의 의지는 ‘수적 다수' 또는 심지어 더 모순되는 것으로서 만장일치 합의를 찾기 위해 선거 협의체나 의견 투표(여론 조사)에 의해 나타내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의지는 투쟁의 등장과 좀 더 정확한 투쟁 방향을 통해 표현된다. 그러한 투쟁은 가장 중요한 분파가 머뭇거리고 우유부단하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반대파를 제거하는 것이다. 내전과 독재의 변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층위의 태도와 관계는 바뀔 수도 있다. 그리고 몇몇 ‘소비에트 민주주의'에 의해 노동자, 준-노동자 또는 쁘띠 부르주아지의 모든 계층에 대한 똑같은 무게와 똑같은 중요성이 받아들여지기는커녕, 트로츠키는 자신의 책 『테러리즘 또는 공산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기구인 소비에트에 참가할 권리가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태도에 따라 달려있다고 설명한다.

 어떠한 ‘헌법상의 규칙'도 어떠한 ‘민주주의 원칙'도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내부의 관계를 조화시킬 수 없다. 어떠한 비책도 지역적 필요와 국제적 혁명의 요구 사이의, 직접적 필요와 역사적 계급투쟁의 요구 사이에 있는 모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다양한 분파들의 반대 속에서 드러났던 모순을 풀 수 없다. 어떠한 형식주의도 계급의 가장 진보적인 분파와 계급의 혁명적 투쟁 조직인 당과, 지역적이고 직접적인 조건들의 압력을 통해 서로 다른 정도로 영향을 받는 대중 사이의 관계를 분류할 수 없다. 레닌이 말했듯이, ‘대중의 정신을 관찰하고 대중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당도 때때로 대중에게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해야 한다. 좀 더 정확히, 당은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쓰는 것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한계'를 찾고 있다. (ibid.)

1921년에 볼셰비키 당은 그들을 지도할 이전의 경험이나 요소 없이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 오늘날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불합리하게도 볼셰비키의 실수에서부터 장점을 끌어오고 "원칙은 없다."고 선언한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모든 계급의 공통된 지위에 도달하기 위한 형식주의적이고 추상적인 방법을 비웃음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실행하는 문제를 마술로 쫓아버린다.

아주 유동적인 상황에서 합의를 세울 수 있는 결코 완벽한 수단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인 반면에, 노동자 평의회 또는 소비에트가 전체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 의지를 담아내고 발전하게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비록 1918년의 독일과 다른 지역에서 드러난 경험이 노동자 평의회나 소비에트가 부르주아지에 의한 회복에 취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긴 했지만.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당이 대중없이 혁명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만큼 너그러웠지만, 당을 통해 그리고 당의 허락하는 것을 빼고는 대중은 전체 계급으로서 그들의 혁명적 의지를 표현할 수단을 지니지 못했다. 그리고 당은 필요하다면 크론슈타트에서처럼 기관총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바로잡을 수 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두 가지 모순적인 표어(슬로건)를 갖는다. 즉 혁명 전에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혁명 후에는: "모든 권력은 당으로."

Octobre의 편집진과 달리,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 혁명과는 대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과업이 소수집단에 대표될 수 없지만, 자기 의식적인 다수를 통해 수행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잊었다.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자 계급 스스로의 과업이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둘 다 마치 기만인 것처럼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노동자 민주주의를 모두 거부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자본주의의 전복을 위해 스스로를 동원하는 수단인 소비에트와 노동자 평의회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내의 긴장과 차이를 담아내고 조절하는, 그리고 이행기 국가를 통한 무장 권력을 유지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조직이어야만 한다. 당은, 특정 시기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나머지보다 명확히 앞 서 있는, 없어서는 안 될 전위는, 이러한 권력을 노동자계급 자체와 대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실제로, 비록 "원칙적이지" 않지만 당이 노동자를 쏠 수 있는 권리를 입증하면서,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마치 이러한 결론의 끔찍함에서 피하려는 것처럼, 크론슈타트 봉기가 어쨌든 프롤레타리아의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 때 레닌의 규정 가운데 하나에 따르면, 크론슈타트는 백군 반동세력을 위해 문을 열어주는 "쁘띠 부르주아적 반-혁명"이었다.      

모든 종류의 혼란되고 심지어 반동적 생각들이 크론슈타트의 모반자들에 의해 표현되었다는 것은 확실히 진실이다, 그리고 몇몇 내용은 강령에 반영되어 있기도 했다. 반혁명 세력의 조직된 군대가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반란을 이용하려고 애썼다는 것도 진실이다. 그러나 크론슈타트의 노동자는 그들 자신을 1917년 혁명과 연속성을 지니고 있고 세계적 규모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 운동의 통합 부분으로서 계속 생각해왔다:

전 세계 노동자에게 소비에트의 권력의 방어자인 우리가, 사회 혁명의 획득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자.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대의를 위해 투쟁하면서 크론슈타트의 폐허 속에서 이기거나 죽을 것이다.(the Kronstadt Pravda, p. 82)

크론슈타트 반란자들이 아무리 혼동을 표현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내건 요구는 또한 끔찍한 생활조건, 국가 관료제의 점점 늘어나는 억압과 쇠퇴한 소비에트에서 정치적 권력의 손실에 부닥쳤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해들을 반영하고 있었다는 것을 절대로 부인할 수 없다. 그때 볼셰비키가 반란자를 쁘띠 부르주아지와 반혁명 세력의 정치적 대리인으로서 낙인을 찍은 시도는 물론 힘에 의해 프롤레타리아 계급들 안에 있던 끔찍한 위험과 복잡성의 상황을 해결하고자 하는 핑계였다.

좌익 공산주의가 역사적으로 뒤늦게 알게 된 지혜와 이론적 작업 때문에, 우리는 일련의 추론이 지닌 기본적 오류를 볼 수 있다. 즉 볼셰비키가 크론슈타트 반란을 진압했고 반-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자본주의 관료주의의 절대 권력인 스탈린이즘이 아직도 공산주의자를 대량으로 학살했다는 것이다. 사실, 소비에트를 다시 세우려는 크론슈타트 노동자의 노력들을 진압하고, 그들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하면서, 볼셰비키는 알지도 못한 채 스탈린주의로 가는 길을 닦고 있었다. 볼셰비키는 백군의 복원보다 노동계급에 훨씬 더 끔찍하고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 반혁명 과정의 가속화를 도왔다. 러시아에서 반혁명 세력은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선언하면서 승리했다. 스탈린주의 러시아가 살아있는 사회주의의 체현이며 10월 혁명과 직접적인 연결선 상에 있다는 생각은, 전 세계에 있는 모든 노동자 계급 대중에게 끔찍한 혼동과 막대한 혼란을 낳았다. 우리는 여전히 1989년 이래로 부르주아지가 공산주의의 죽음과 스탈린주의의 사망을 같다고 하는 것처럼 실재에 대한 이러한 왜곡의 결과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보르디가주의자들은 이런 경험을 했지만 여전히 1921년의 비극적인 실수와 동일시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 거의 "비극적" 필요가 아니라, 되풀이되어야만 할 공산주의자의 의무이다!

아나키스트들과 같이, 보르디가주의자들은 소비에트에서 조직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무장된 의지를 이끌기도 하고 연기하기도 하고 의지하기도 한 1917년 볼셰비키 당과, 소비에트를 그들의 이전 권력의 그림자로 축소시키고 노동자 계급에 맞선 국가의 폭력으로 전환시켰던 1921년의 볼셰비키 당 사이에 있는 모든 모순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이 그들의 현재 캠페인들에서 볼셰비키를 마키아벨리적인 압제자들로서 묘사함으로써 부르주아지를 돕는 반면에, 보르디가주의자들은 이러한 부정적 이미지를 혁명적 비타협의 극치로서 찬양한다.

그러나 좌익 공산주의는 볼셰비키 유산에 관계하면서도 그 이름에 걸맞게 실수를 비판할 수 있어야만 한다. 크론슈타트 반란의 진압은 가장 해롭고 끔찍한 것들 가운데 하나였다.

Como 8. 1. 2001

옮긴이: 이건민


[1] International Review, 2001, vol. 104

[2] Voline,『알려지지 않은 혁명』(The Unknown Revolution), Black Rose Books, 1975, p. 534-538.

[3] 크론슈타트 반란이 내건 강령(platform)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International Review 3, 51쪽을 참조하시오.

[4] 공산주의자 좌파의 또 다른 지국인, 혁명정당을 위한 국제적 국(局)은 크론슈타트에 대한 모호한 태도를 갖고 있다. Revolutionary perspectives No 23(1986)에 출판된 논문은 10월 혁명과 볼셰비키 당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재확인하고, 크론슈타트 반란이 깊이 불리한 조건들을 반영했고, 그것이 많은 혼란스럽고 반동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크론슈타트 반란의 아나키스트적 이상화를 거부한다. 동시에 그 논문은 크론슈타트에 대한 습격이 당의 독재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성이었다고 하는 Bordigist의 생각을 비판한다. 그것은 크론슈타트의 기본적인 교훈들 중 하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그 계급 자체에 의해서 즉, 당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동자 협의회를 통해서 수행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또한 프롤레타리아 요새의 고립이라는 전체적 정황에서, 당과 소비에트 당국 모두의 내부적 타락을 가속화시켰던, 당과 계급 사이의 관계에 관한 볼셰비키 세력의 실책들을 보여준다. 그 논문이 그 반란을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으로 특징화 짓지 않고 근본적인 물음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노동자 계급의 불만에 대항하여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답하지 않음에도, 그들은 그것이 노동자 운동에서 느린 고투의 장으로 열릴지라도 그것을 반혁명의 조종의 결과로서, 그 반란의 진압은 더욱 정당화된다고 심지어 말한다.

2006년 10월 한국에서의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

 

2006년 10월 한국의 „사회주의정치연합"그룹은, 한국의 노동자계급과 그 정치적 소수들 내부에서 좌파공산주의의 입장들의 존재를 강화시킨다는 명백한 목적을 갖고 서울과 울산에서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라는 명칭을 가진 대회를 개최했다.

한국에서의 그 대회는 그 나라의 노동운동사에서 그리고 진정 동아시아 전체에서 그러한 종류로서는 최초의 대회였다. 그러한 대회가 오늘날에 그것도 50여년 전에 개시된 제국주의전쟁의 결과로 여전히 분할된 채 있는 한 나라에서 개최된 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그것은 제 3인터네셔널의 짧은 경험 이래 최초로 동서양 사이의 노동운동의 국제적인 단합의 발전에 대한 전망을 열어준다. 그런데 겸손하게 보자면 그것은 동양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역사적 단계의 상황을 나타낸다.

이것을 인정하면서 ICC는, 발제를 하고 토론에 능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 대회에 공헌하려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아래에 몇가지 자료들을 공개하는데, 토론주제들에 대한 ICC의 발제문들, 북한핵실험을 계기로 유발된 전쟁위협에 대항한 (ICC와 SPA에 의해 공동으로 제시된) 선언문 그리고 그 대회에 대한 그리고 그곳에서 있었던 토론들에 대한 ICC의 보고서가 포함되어 있다. 이 보고서는 SPA 내부에서 토론되었고 그 동지들은 보고서에 전적으로 동의를 표했다.

논쟁의 주제들, 즉 자본주의의 데카당스, 계급투쟁에 대한 그리고 혁명조직에 대한 전망들에 관련하여 특별히 한국적이거나 심지어는 아시아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아래에 공개하는 자료들은 새로운 그리고 출현 중에 있는 혁명운동에서 국제적인 논쟁의 일부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전 세계의 동지들의 논평과 토론을 바라며 이들을 제시한다.

한국의 국제대회 보고서

2006년 6월, ICC는 남한에 있는,  좌파공산주의 전통과 관련된 그룹, 사회주의정치연합(SPA)으로부터, 동년 10월 서울과 울산에서 개최될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에 참가를 초청받았다. 우리는 이미 1여년정도 SPA와 접촉하고 있으면서, 언어문제로 인한 불가피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특히 자본주의의 데카당스 문제에 관해 그리고 현시기의 공산주의조직들의 발전 전망에 관해 토론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 대회가 불러일어킨 정신은 SPA에 의한 서문에서 강력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지금까지 세계 여러 곳에서 정기적으로 맑스주의자 대회(모임) 열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강단의 추상적인 논의나 자본주의의 좌파에 속하는 정치적 세력들의 연대를 위한 행사라는 것도 알고 있다. 자본주의 데카당스 시대의 객관적이고 주체적 조건이 야만과 전쟁을 넘어서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더욱더 깊이 인식하고 있다.

한국의 노동계급은 현장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고 혁명적 정치세력은 전망을 분명하게 열어젖히지 못하고 있지만 과거 혁명운동이 국제주의의 원칙을 저버리면서 참담한 패배를 경험했던 역사를 뿌리로부터 반성하면서 우리는 하나의 현장,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을 넘어서는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이루어내야만 한다."

한번 극동의 역사를 잠시만 생각해보는 것도 이러한 발의의 엄청난 중요성을 감지하기엔 충분하다. 이 대회를 위한 환영사에서 우리가 이미 언급했듯이, „1927 상해노동자학살은 1917 러시아에서의 10월혁명이래 10년간 세계를 뒤흔든 혁명투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세계노동자계급은 그리고 인류 전체는 역사상 유래없이 혹독한 반혁명의 모든 공포를 겪었다. 동양에서 노동인민은 2 세계대전의 서막이었던 일본의 만주침략을, 그런 다음은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파괴로 정점을 이루는 2 세계대전을, 중국내전을, 한국전쟁을, ‚대약진Great Leap Forward' 동안 중국에서의 참혹한 기아를, 그리고 베트남전쟁 등을 경험했다.

모든 무시무시하고, 충격적인 사건들은 , 동양에서는 여전히 역사가 짧고 경험이 적였던 그리고 서양에서의 공산주의이론의 발전과 접촉이 극히 적었던 프롤레타리아계급을 휩쓸었다. 적어도 우리가 알기로는, 좌파공산주의의 어떤 표현들도 동양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생존하거나  출현할 없었다.

결국, 동양에서 좌파공산주의와 명백히 공명하는 조직에 의해 소집된 공산주의 국제주의자들의 오늘의 회의는 노동자계급에게 있어서 역사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이것은 - 아마도 역사상 최초로 - 동서양의 노동자들 사이의 진정한 단결이라는 희망을 갖게 한다. 이것은 하나의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프롤레타리아계급과 그것의 정치적 소수들에서 천천히 진행되고 있는 전세계적인 의식 자각의 일부이다." 그래서 ICC의 대표단은 이 대회에 참가하면서, 국제주의적 좌파공산주의의 목소리가 극동에서 출현하는데 우리의 모든 역량을 다해 도울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배우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한국의 노동자들과 혁명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안들은 무엇인가? 모든 노동자들과 관련된 문제들이 그곳에서는 어떻게 제기되는가? 한국 노동자들의 경험들은 다른 곳의 노동자들에게, 특히 극동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노동자들에게 어떤 교훈들을 주는가? 그리고 한국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세계의 다른 지역의 계급형제들의 경험들로부터 어떤 교훈들을 이끌어내는가?

이 대회의 원래 계획은 다음의 주제들을 토론하는 것이었다:자본주의의 데카당스, 계급투쟁의 상황 및 현 상황에서 혁명가들이 취할 전략. 그런데, 대회 며칠 전에 이 목표들의 장기적인 정치적 중요성이, 북한의 최초의 핵폭탄실험에 의해, 그리고 이에 뒤이은 그 지역에 존재하는 다른 세력들(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남한) 측의 기동훈련에 의해 그 지역내의  제국주의간 긴장이 극적으로 첨예화됨으로써 그늘지게 되었다. 대회 이전에 가진 회합에서 ICC대표단과 SPA의 서울그룹은, 국제주의자들이  이 상황에 대해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데 동의했고 전쟁위협에 대항한 국제주의선언을 공동으로 대회에 제출할 것을 결정했다. 우리가 앞으로 살펴 보게될 바와 같이, 이렇게 제안된 선언에 의해 촉발된 토론은 대회 자체 동안의 논쟁들 중에서 중요한 일부를 차지했다.

이 보고서에서 우리는 대회의 논쟁들의 몇몇 주요 테마을 살펴보고자 한다. 토론 자체를 폭넓게 묘사할 뿐만 아니라,한국의 동지들에게 그들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국제적인 전망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숙고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역사적인 배경

그런데 우리가 대회 자체로 들어가기 이전에, 한국의 상황을 간략히 그 역사적인 배경 속에 자리매김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본주의가  극동으로 팽창하기 이전  수세기 동안 한국은 중국과 일본이라는 2개의 역사적인 강대국들 사이에 놓인 약소국이라는 그 지리적 입지로 인해 이득을 보기도 하고 해를 입기도 했다. 한편으로, 그것은 그 두나라를 위한 교량이자 문화적 촉매로서의 역할을 했는데, 예를 들어 중국 그리고 특히 일본의 도자기예술의 경우 지금은 잊혀진 청자유약기법을 개발한 한국의 도공들에게 크게 빚지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1]. 다른 한편으로, 이 나라는 이웃의 강력한 두 나라들에 의한 빈번하고 잔인한 침략들로 인해 고통당했으며, 근대사의 대부분 동안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한자를 썼던 그리고 유럽열강들이 그 지역에 도착함과 더불어 진행된 새로운 사상들의 유입에 저항했던 유교적 학자층에 의해 지배되었다. 19세기동안 중국, 일본 및 러시아-후자의 식민지 세력은 이때 중국의 국경과 태평양까지 확대됨- 사이의 점점 더 치열해진 라이벌의식은 한국 자체 내의 영향력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초래했다. 그런데 이러한 세력들이 추구한 영향력은 본질적으로 전략적인 것이었다: 투자회수의 관점에서 보자면 중국과 일본이 제공하는 가능성들은 한국에서 가능한 그것들보다 훨씬 더 막대했는데, 이는 한국지배계급들의 상이한 분파들 사이의 상살적인 투쟁들에 의해 야기된 정치적인 불안정을 감안하면 특히 그러했다. 이 지배계급들은 „근대화"의 이득을 놓고 그리고 한국의 제국주의 이웃들의 영향력을 이용해 그들 자신의 권력의 입지를 다지려는 노력들에 의해 분열되었다. 20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한국에 해군기지를 확립하려는 러시아의 시도가 강화되었고, 이것은 다시 일본의 독립성에 있어서 치명적인 위협으로 보여졌다. 이러한 경쟁은 1905년의 러일전쟁으로 이어지고, 이 전쟁동안 일본은 러시아의 함대를 전멸시켰다. 1910년 일본은 한국을 침략하여 식민정권을 세우는데 이것은 1945년의 일본의 패배까지 존속하게 된다.

그래서 일본의 침략 이전의 산업발전은 극도로 지연되었었고, 그 이후의 산업화는 거의 일본의 전쟁경제의 필요에 따라 조율되었다. 1945년경 한국에는 대략 2백만명의 산업노동자가 있었는데 그 대부분이 북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나라의 남부지역은 본질적으로 농촌지역으로 남은 채 혹독한 빈곤에 시달렸다. 한국의 노동대중들이 식민 지배, 강요된 산업화 그리고 전쟁[2]으로 인해 당하게 된 그러한 고통도 모자랐던지, 그들은 1989년까지 전 세계를 지배하게되는 새로운 제국주의적 충돌, 즉 미국과 소련이라는 2개의 거대한 제국주의 블록 사이의 지구분활의 경계영역에 놓이게 되었다. 스탈린주의적인 „조선노동당"에 의해 시작된 폭동을 지지한 소련의 결정은, 1945년 이후 그리스에서 그랬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결국은 미국의 제국적 지배의 새로운 변방을 시험해보려는 시도였다. 그 결과는, 비록 훨씬 더 크고 더 파괴적인 규모였긴 했으나 마찬가지로 남북한 사이의 맹렬한 내전이었다. 이 전쟁에서 남북한의 권력자들은-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자신의 부르조아 이해관계를 옹호하기 위해 싸웠던 간에- 세계 패권을 놓고 투쟁하는 강대국들의 앞잡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 전쟁은 3년(1950-1953)간 지속되었고 그 동안 한반도 전역은 교전중인 군대들의 계속된 전진과 후퇴에 의해 완전히 황폐화되었으며 결국 남한과 북한이라는 2개의 개별 국가들로의 영구적인 분할로 끝나고 말았다. 미국은 남한에 지금까지도 군사적 현존을 유지하고 있어서 대략 30,000명의 미군이 현재 주둔중이다.

전쟁이 종결되기도 전에 이미 미국은 군사적인 점령 자체는 그 지역을 안정화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고[3], 동남아시아와 극동을 위한 마샬계획에 해당하게 될 것을 제정하기로 결정했다. „경제적 사회적 빈곤이, 특정 아시아 국가들에서 권력을 잡게 친소련적인 민족주의 분파들이 사용하는 주요한 주장들의 하나임을 인식한 미국은 중국의 접경지역(대만, 홍콩, 한국 일본) 서구의 번영의 전초지로서 기능할 있는 지대들을 형성했다. 미국에게 있어서 최우선은 아시아에서 소련블록의 진군에 대항할 일종의 방역선을 확립하는 것이었다.[4]" 이 정책은 남한에게 중요한 함의를 가졌다: „원자재가 부족하고, 그것의 산업적 기반의 대부분이 북부에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나라는 전쟁의 말기에 고갈되어 버렸다. 생산은 44%, 고용은 59%  하락했으며, 신규 자본의 원천, 생산의 중간수단들, 기술력 경영역량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1945년에서 1978년까지 남한은 대략130 달러 또는 인구당 600달러를 대만은 56억달러 또는 인구당 4.5달러를 지원받았다. 1953년과 1960 사이에 외국의 원조가 남한 고정자본의 90% 차지했다. 미국에 의해 제공된 원조는 1957년에 GNP 14% 달했다. 그러나 미국은 나라에 대한 군사적, 재정적 기술적 원조에만 그치지 않고, 국가와 경제의 전체 경영을 또한 담당했다. 사실상의 민족부르조아가 부재한 상황에서 미국이 원하는 근대화를 수행할 있는 유일한 실체는 군대였다.국가자본주의의 고도로 효과적인 형태가 나라 모두에서 설치된 것이었다.유사-군대식의 집중화를 통해 하지만 시장을 인정하면서 공적부문과 사적부문을 밀접하게 연결하는 체계에 의해 경제성장에 박차가 가해졌다. 터무니 없이 과도한 관료제를 가진 동구식의 국가자본주의와는 반대로 이들 국가들은 국가적 집중화를 가치법칙의 인정과 결합시켰다. 수많은 중재주의적 정책(interventionist policies)들이 시행되었다. 경제적 집적체의 형성, 내수시장을 보호하는 법률들, 변경에서의 무역제한, 명령적이긴 했지만 또한 미래의 노력을 장려한 계획형태, 크레딧분배의 국가관리, 자본과 자원을 핵심산업으로 돌리기, 배타적인 면허의 발행, 경영독점등등. 그래서 남한에서는, 국가원조나 발의를  통해 종종 만들어지는 거대한 경제집적체인 재벌[5](일본어의 자이바추스와 동일)과의 독특한 관계 덕분으로 공공 당국이 경제 발전의 방향제시를 했다.. "

그래서 남한의 노동자계급은, 불안정하게 연속된 반-민주적(semi-democratic)이고 권위주의적인 군사정권들에 의해 시행된  잔인한 착취와 강제된 산업화 정책에 직면했다. 이러한 정권들은, 1980년 초의 광주에서의 대중봉기의 예에서와 같이 노동자들의 파업과 소요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함으로써 그들의 권력을 유지했다[6]. 광주사건 이후, 한국의 지배계급은 장성 전두환(한국정보부의 이전 우두머리)의 대통령직 하에서, 본질적으로 군사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권으로 남아있는 것에 민주주의적인 겉치례를 부여하여 상황을 안정시키려 했다. 그러한 시도는 무참히 실패했다: 1986년에는 서울, 인천, 광주, 대구 및 부산에서 대대적인 반대가 연이었으며, 한편 1987년에는 „3,300이상의 산업쟁의가 발생했는데, 이는 임금인상, 처우개선 작업조건개선에 대한 노동자들의 요구를 포함하면서 정부가 그들 요구의 일정부분을 수용하는 타협을 하도록 강제했다[7]" 무력으로 사회적 평화를 유지함에 있어서 전두환의 부패한 군사정권의 무능력은 방향전환을 초래했다. 전정권은,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총수, 장성 노태우의  „민주화 프로그램"을 수용했고, 노태우는 1987년 12월에 치뤄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하게 된다. 1992년의 대선을 통해,  민주 야당에서 오랫동안 총수를 지내고 있던 김영삼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의 전통이 완성되었다. 또는, SPA의 동지들이 우리에게 말했듯이, 한국의 부르조아계급은, 군부와 재벌과 보안기관 사이의 연합의 계속된 권력을 숨기기에 그럴듯한 민주적 겉모양새를 마침내 선출해낸 것이었다.

역사적 배경의 귀결

정치적 소수들의 최근 경험들의 측면에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주변부의 다른 나라들에서, 즉 아시아에서 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유사하다[8]. 그것은 한국에서의 국제주의운동의 출현 자체에 대해서도 중요한 귀결을 가졌다.

우리가 계급의 „집단적 기억"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의 수준에서 볼때,  유럽에서의 노동자계급의 축적된 정치적 그리고 조직적 경험들과 한국에서 계급의 경험사이에는 분명히 중요한 차이가 있다. 유럽에서 노동자계급은 1848년(영국의 인민헌장운동의 „완력(physical force)"분파)에 이미 사회의 독립적인 세력으로 스스로를 주장하기 시작했었다. 우리가1980년대 유럽에서의 계급투쟁의 물결동안 노동조합에 대한 일반적인 불신이 서서히 발달한 것을 그리고 노동자들이 자신의 투쟁들을 스스로의 손으로 행하려는 경향을 보여준 것을  기억한다면, 동일한 시기에 한국에서의 운동은 노동자 자신의 계급적 요구들을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부르조아 국가기구의 재조직을 위한 „민주주의 운동"의 요구들과 융합하려는 경향으로 특징지워진다는 점이  특히 놀랍다. 결과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와 부르조아계급의 민주적 분파들의 이해관계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이, 이 시기에 정치적 활동을 시작한 투쟁가들에게 즉각적으로 명백하지 않았다.

언어장벽에 의해 유발된 어려움들을 우리는 또한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집단적 기억"은 그것이 기록되고 이론적인 형태를 띨때 가장 강력하다. 1970년대에 유럽에 출현한 정치적 소수들이, 원문이든 번역본이든간에  사회민주주의 좌파(레닌, 룩셈부르크)의 저작들과 제 3인터네셔널좌파와 그로부터 출현하게 되는 좌파공산주의자들(보르디가, 판네콕, 고어타, 빌랑그룹 및 프랑스좌파공산주의자들)의 저작들을 접할 수 있었던 반면, 한국에서는 겨우 판네콕의 저작(노동자평의회)과 룩렘부르크의 저작(자본축적론)이 출판되기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노동자평의회를 위한  서울그룹(SGWC)와 이 그룹과 밀접히 관련된 SPA의 공동노력의 덕분이다[9]

한국의 상황에서 가장 특이적인 것은, 미국과 소련블록사이의 제국주의적 충돌에 의해 야기된 남북사이의 분단의 결과, 즉 남한에서의 미군주둔과 1988년말에 종결되게 되는 일련의 군사정권들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었다. 이것은, 한국노동자계급의 전반적인 경험부족, 계급 내부에서 분명한 국제주의적 목소리의 부재, 이에 더불어  우리가 위에서 설명했던, 노동자 운동과 부르조아적 민주적 재야 사이의 혼동 등과 조합된 채, 침투적인 한국민족주의가 종종 „반제국주의"로 가장된 채 사회를 전반적으로 감염시기는 것을 초래했다. 이에 따르면 단지 미국과 그 동맹국들만이 제국주의세력으로 보여진다. 군사정권에 대한 반대, 그리고 진정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는 미국에 대한 반대와 동일시되는 경향이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정치적 환경 내부에서의 논쟁의 중요한 특징 하나는 노동조합문제이다. 특히 현재의 활동가 새대들에게 있어서 노동조합주의(trade unionism)의 경험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의 투쟁들에 기반하고 있다.  이때의 노동조합은 대부분 비합법적이고 아직은 „관료주의화"되지 않았으며 확실히 매우 헌신적인 투쟁가들(현재 SPA와 SGWC에 관계된 동지들을 포함)에 의해 활성화되고 지도되었다. 노동조합의 „프로그램들"이 혁명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옹호할 수조차 없다는 점은, 그 당시 비합법성과 탄압이라는 조건으로 인하여 관련 동지들에게 분명하지 않았다. 1980년대 동안, 노동조합은 군사정권에 대항한 민주적 야권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는데, 후자의 야심은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것이 아나라 오히려 정반대로 군사정권을 타도하고 국가자본주의적 기구를 스스로 장악하는 것이었다. 반대로, 1990년대 이후의 한국사회의 „민주화"는 노동조합의 국가로의 이러한 통합을 공공연하게 만들었고 어떻게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 대처할 것인가를 놓고 투쟁가들 사이에 상당한 혼란을 초래했다. 한 동지의 진술에 따르면, „노동조합은 민주 국가의 가장 좋은 옹호자임이 밝혀졌다" 결과적으로, 노동조합에 대한 전반적인 „실망"감이 존재하고 노동자계급 내에서 투쟁활동을 위한 어떤 다른 방법이 모색되고 있다. 대회에서의 그리고 비공식적인 토론들에서의 발언들에서 반복적으로 우리는, 한국의 동지들이 자본주의 데카당스에서 노동조합의 본질에 대한 숙고를 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숙고는 러시아혁명이래, 특히 독일에서의 혁명 실패이래 유럽노동자운동에 대한 숙고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새로운 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스탈린주의와 부르조아민주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강하게 영향을 받았던 자신들의 과거 활동의 기반들에 의문을 제기하려는 진정한 노력들이 많은 한국의 투쟁가들 사이에서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 관여된 이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단결을 유지하고 토론 공간을 제공하려는 노력 속에서 몇몇 그룹들과 개인들이 다소 공식적인 „혁명적 맑스주의자 네트워크[10]"의 건설을 발의했다.  불가피하게도, 과거와의 결별은 극도로 어렵고 그래서 이 네트워크 내의 상이한 그룹들 간에 대단한 이질성을 결과시켰다. 위에서 우리가 간략히 기술한 역사적 배경들은,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의 원칙들과, 스탈린주의와 트로츠키주의를 특징짓는 부르조아적, 특히 민족주의적 전망 사이의 분화가, 1990년대의 실천적 경험을 기반으로 그리고 네트워크 내부에 좌파공산주의의 사상과 입장을 소개하려는 SPA의 노력 덕분으로 겨우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이러한 문맥 속에서, 이 대회에 대한 SPA의 서문에는 우리가 보기에 절대적으로 근본적인 2가지 측면들이 있다:

  • 첫째, 한국의 혁명가들이 한국 노동자들의 경험을 국제노동자계급의 더 넓은 역사적 이론적 틀 속에 자리매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선언한 것이다: „대회의 주제를 이론, 실천, 전망으로 구분하고 이를 꿰뚫는 인식의 지평을 넓혀 나가는 것이 이번 대회의 주요 목표이다. 우리는 이번 대회를 시작으로 세계의 혁명적 맑스주의 세력이 연대하고 단결하여 세계혁명을 향한 힘을 축적하고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역사적 과업을 완수하기를 바란다."
  • 둘째, 이것은 좌파공산주의의 원칙을 기본으로 해서만 수행될 수있다는 점을 분명히 선언한 것이다: „이번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는 한국의 혁명적 맑스주의자들과 세계의 좌익공산주의자들과의 소중한 만남과 토론의 마당이며 혁명적 맑스주의[즉, 좌파공산주의] 진영내의 입장과 노선 차이를 드러내고 소통하는 번째 경험이 것이다."

대회에서의 논쟁들

이 글은 이 대회의 토론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하기에 너무 짧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떠오른 가장 중요한 요점들로 보이는 것들을 조명하려 할 것이다. 이때, 우리는 그 대회에서 시작된 논쟁들이 한국의 동지들 사이에서 그리고 더 전반적으로는 전세계의 국제주의운동 내부에서 계속되는데 공헌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자본주의의 데카당스에 대하여

이것은 토론의 첫번째 주제였다. 논쟁 자체를 살펴보기전에 우리는, SPA의 근본적인 노고를, 즉 계급투쟁의 상황과 혁명전략이라는 토론될 다른 문제들에  견고한 이론적 기초지식을 제공함으로서 대회를 시작한 SPA의 근본적 노력을 진심으로 지지한다는 점을 먼저 말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좌파공산주의 내부에 존재하는 상이한 시각들을 간략히 요약 제시하려한 SPA 동지의 영웅적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이 문제의 복잡성-20세기가 시작된 이래 노동운동 내부의 논쟁의 주제가 되었고 여러 위대한 정신들을 단련시킨-을 감안하면, 이것은 극히 담대한 시도였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것은 너무 과감한 것이었다! 자본주의 데카당스 개념이 „본능적으로" 우호적으로 수용된 점(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을 보게 된 것은 매우 놀라웠던 한편, 토론 중에 그리고 그 이후에 비공식적으로 제기된 질문들로 볼때, 대부분의 참가들에게 있어서 이 문제와 깊이 씨름하기에는 이론적인 기초가 부족하다는 점 또한 명백했다[11]. 이렇게 말하는 것은 결코 비판이 아니다: 여러 기본적 텍스트들이 한국어로 입수될 수 없는데, 이는 그 자체가 -우리가 이미 언급했듯이- 한국의 노동운동의 객관적인 경험부족의 표현이다. 우리는, 제기된 문제들과, 특히, SPA와 ICC에 의해 제출된 발제문들을 통해, 동지들이 그 논쟁 속에서 스스로의 입장을 세우기 시작하고 또한 -  마찬가지로 중요하게도 - 이러한 이론적 문제가 실제 세계와 구체적인 투쟁 노력들의 외부로부터 부과된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상황의 기본적이고 결정적인 요소라는 점을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12].

한 젊은 학생이 제기한 질문 하나는 제시할 만한데, 이것은 현재의 자본주의에서의 외양과 실체 사이의 충격적인 모순을 몇 마디로 표현했다: „많은 사람들이 데카당스를 느끼고 있다, 우리들-대학생들-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에 빠지기 쉽다, 풍족한 사회가 존재한다는 느낌이 있다, 어떻게 우리는  데카당스를 구체적으로 표현할 있을까?"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적어도 산업국가들에서)의 한 측면은, 우리가 „소비적인 풍족"한 세상에 살고 있는 체 하는 것임은 사실이다.  그리고 참으로 서울의 도심거리들, 전자제품으로 가득 채워진 상점들은 현실이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일치하는 듯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한국의 젊은이들도 다른 곳의 젊은 프로레타리아들과 동일한 문제들, 즉, 실업, 임시고용계약, 구직난, 높은 주거비용이라는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오늘의 노동자계급 젊은이들에게,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서면상의 답변에서 지적하려 했던 점, 즉 그들이 겪고 있는 대량실업과 자본주의의 데카당스의 또 다른 근본적 측면인 전면화되고 영구적인 전쟁사이의 연관성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과업의 일부이다.   

계급투쟁에 대하여

확실히, 대회 도중 뿐만 아니라 한국 운동 전반에 있어서 토론중인 가장 중요한 쟁점들의 하나는 계급투쟁과 그 방법의 문제였다. 대회 중의 발언들과 비공식적인 토론으로부터 우리가 이해하기로는, 노동조합 문제는 1980년대 말에 투쟁에 가담하게 된 투쟁가들에게 있어서 실제적인 문제를 부과한다. 어쩐지 한국의 상황은, 연대노조의 결성 이후의 폴란드에서의 상황과 유사하다- 그리고 좌파공산주의의 원칙이, 즉 자본주의의 데카당스에서 노동자계급의 영구적인 대중 조직 건설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심히 옳다는 것의 또다른 표현이다. 한국에서의 경우처럼, 투쟁의 열기 속에서 건설된 노동조합들 조차도 종국에는 국가의 부속물이, 노동자의 투쟁을 강화하는 수단이 아니라 노동자의 투쟁에 대한 국가의 장악을 강화하는 수단이 되어버릴 수 밖에 없다. 왜 그럴까? 근본적으로 그 이유는, 데카당스 시기에는 자본주의로부터 지속적인 개선을 얻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우리가 이전에 언급했듯이- 민족적 부르조아계급의 상이한 분파들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노동자들에게 공통적인 국제적 관점이 아니라 종종 단일 업종이나 산업 또는 한정된 민족적 관점을 필연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다. 불가피하게 그것들은 „무엇을 국가가 부담할 수 있는가"라는, „무엇이 국민경제에 좋은가?"라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머리를 숙인다. 이것은 실상 우리가 들을 수 있었던  한국 노동조합에 대한 비난의 하나였다- 그것들은, 노동자 자신들의 요구들에 그 기반을 두기는 커녕 노동자들의 요구를 사장들이 지불할 준비가 된 것에 맞춰 제한하도록 노동자들에게 촉구하는 지점까지 도달했다는 것이다[13].

노동조합의 불가피한 배반과 민주적 국가 기구로의 편입에 직면하여, 한국의 동지들은 좌파공산주의의 사상에서 그 해답을 모색하고 있었다. 결국, „노동자평의회(workers' councils)"개념이 그곳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어켰다. 문제는, 노동자평의회를 혁명적 상황에서 노동자권력의 기관으로서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내부에서 영구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하나의 새로운 종류의 노동조합으로서 바라보는 일반적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진정 이러한 생각은 심지어 „혁명적 노동자당을 위한 투쟁가그룹„에 의해 이뤄진 „남한에서의 현시기에서 평의회운동전략 및 그 실천 방안"에 관한 발제에서 역사적으로 이론화되어 있었다. 이 발제는 1919년의 독일혁명 동안에 건설되었던 노동자평의회가 사실상 노동조합으로부터 진화되었다고, 실제와는 완전히 정반대를 주장함으로써 역사를 완전히 전도시켰다는 점을 말할 수 밖에 없다[14]. 우리의 견해로는, 이것은 단지 학구적인 논쟁에 의해 정정될 수 있는 종류의 역사적 부정확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더 심오하게는,  혁명적 시기 이외에는 노동자들이 영구적으로 투쟁상태에 있는 것이 단순히 불가능하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극도로 어렵다는 사실로부터 유래한다. 그러한 논리에 사로잡힌 투쟁가들은-노동자계급을 위해 일하려는 그들의 진실한 열망과는 상관없이 그리고 그들이 진정으로 옹호하는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입장들과는 상관없이- 즉각주의(immediatism)의 함정에 빠질 위험에, 즉, 있는 그대로의 실제 역사적 상황 이내에서 구체적으로 가능한 것과는 전혀 어떤 연관도 없는 „실천" 활동들의 꽁무니만 끊임없이 찾아다닐 위험에  처해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세계관으로 볼때,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제기하는 것은 그에 대답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ICC 대표단 한명이 표현했듯이, „노동자들이 투쟁 중에 있지 않으면, 그들의 머리에 총을 들이대며 ‚너희들은 투쟁해야 돼!'라고 명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혁명가들이 노동계급을 „대신하여" 투쟁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혁명가들은 계급투쟁을 선동할 수 없는데, 이것은 하나의 원칙이 아니라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계급 자신이 스스로를 의식하는 것,그들 자신의 이해를 가진 그리고 특히 즉각적인 투쟁을 넘어서는,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실업수당대열에서의 노동자들의 즉각적인 상황들을 뛰어넘는 혁명적인 목표를 가진 하나의 계급으로서 사회 속에서 그 자신의 자리를 자각하는 것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1905년의 러시아에서와 같은 외관상으로는 „자연발생적인" 프롤레타리아 폭동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것들의 하나이다. 그 당시 혁명가들이 투쟁 초기의 급격한 고조에 작은 부분적인 역할 밖에 수행하지 않았긴 하지만, 그 지형은 사회-민주당(그 당시의 혁명가들)의 체계적인 개입활동에 의해 수년간 준비되어 왔었고, 그것은 노동자들이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자각을 발전시키는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15]. 간단히 표현하자면, 노동자들의 공공연한 투쟁의 시기 이외의 시기에 혁명가들의 본질적인 임무는, 다가올 투쟁을 강화시킬 그러한 사상들을 선전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로렌 골드너와 국제주의전망 대표단의 발제들에서 제기된, 우리가 생각하기에 대답되어야 될 것 같은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즉, 노동자계급의 „재구성(recomposition)" - 다시 말해, 한편으로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의 특징인 대공장들이 지리적으로 광범위하게 분산된 생산을 위해 사라지는 경향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들에게, 특히 젊은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점점 더 비정규의 노동 조건들(단기계약, 실업, 시간제 노동, 등등) - 은 „작업장을 초월" 하는 „새로운 투쟁방법들"의 발견을 결과시켰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투쟁방법들"의 가장 유명한 예들는 2001년 아르헨티나에서의 피케테로스(piqueteros)운동에 의해 고안된 것으로 추정되는 „플라잉 피켓츠(flying pickets)" 그리고 2005년의 프랑스 근교지역에서의 폭동들이라 한다. 우리의 관점에서는 심히 오해된 듯 보이는 프랑스의 폭동들과 피케테로스운동에 대한 그 동지들의 열광에 우리가 지금 이글에서 대답할 생각은 없다[16]. 하지만 이러한 입장들에서 표현된 좀 더 일반적인 정치적 오류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노동자들의 혁명의식은 결국 작업장에서의 그들의 즉각적인 일상 경험에 의존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상, 비정규의 노동조건들과 „플라잉 피켓츠"는 역사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17], 우리를 놀래키기 위해 제시된  소위 „새로운 투쟁형식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무력함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2005년의 프랑스 근교들의 젊은이 폭동들이 고전적인 실례이다. 실제(reality)는, (자본주의의 데카당스 시기에) 노동자 투쟁이 특정한 독립성을 획득할 때면 언제나 그것은 노동조합에서가 아니라, 선출된 대표단을 가진 대중집회들에서, 바꿔 말하자면 평의회로부터 유래하고 또 그러한 평의회의 맹아를 간직한 조직형태 속에 스스로를 조직하는 경향이었다는 점이다. 최근 역사의 가장 인상적인 실례는 물론 1980년의 폴란드에서의 투쟁들인데, 역시 1980년대의 또 다른 경험은, 이태리에서의 교사들(„전통적인" 산업부문이라고 말할 수 없는!)의 대대적인 투쟁동안에 형성된 코바스(Cobas)(기초위원회(rank-and-file committees))였다. 시기적으로 더 최근의 예로서 우리는 2006년 스페인 비고(Vigo)에서의 파업을 들 수 있다[18]. 여기서 파업을 시작한 기술노동자들은 대부분이 소규모 기업에서 비정규직 노동계약으로 일했다. 투쟁의 구심점을 형성할 수 있을 어떤 단일한 대규모 공장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작업장이 아니라 그 지역의 광장에서 매일의 대중집회를 가졌다. 이러한 대중 집회들은 다시 동일한 지역에서 1972년에 이미 활용된 조직형태로 소급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렇다면 이것이다: 왜19세기말에는 대대적인 비정규 노동력의 발전이 비숙련노동자들의 최초의 대중노조들의 설립을 초래한 반면, 21세기에는 더 이상 그렇지 않은 것인가?

왜 1905년의 러시아 노동자들은, 레닌이 „프롤레타리아계급 독재의 최종적으로 발견된 형식"라고 불렀던 노동자평의회 - 소비에트(the soviet) - 를 창안해 냈는가?

왜 노동자들이 그들의 자치성(autonomy)과 세력을 발전시키는데 성공했을 때마나 대중집회가 노동자조직의 전형적인 형태가 되는가?

우리의 견해로는, 이미 말했듯이, 그 해답은 사회학적 비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20세기 초에 발생한 역사적 시기의 변화를 훨씬 광범위하게 정치적으로 파악하는 데에 있다. 이러한 변화를 제 3인터네셔널은 „전쟁과 혁명의 세기"의 시작으로서 묘사했다.

게다가, IP와 로렌 골드너가 옹호하는 노동자계급의 사회학적 비젼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정치적, 이론적 능력을 완벽히 과소평과하는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는 충격적이다. 그것은 마치 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 관해서만 사고할 수 있기나 하듯이, 마치 그들이 일터를 떠나자마자 그들의 뇌가 꺼져버리기나 하듯이, 마치 자신들의 아이들의 미래(학교, 교육, 사회적인  해체의 문제들)에 관하여, 그리고 노약자와의 또 미래세대들과의 연대(악화되는 의료시설 문제, 연금문제 등등)에 관해 그들이 전혀 무관심하기라도 하듯이, 마치 그들이 환경문제나 전쟁의 끊임없는 야만성을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없기나 하듯이, 그래서 그들이 넓은 세상에 대해 배운 것을 작업장에서의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자신들의 직접적 경험에 관련지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나 한 듯이.

또한, 세계에 대한 이러한 폭넓은 정치적 역사적 이해는 즉각적인 투쟁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세계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자본주의를 타도하는데 성공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 대신에 전혀 새로운 사회를, 인류역사상 전혀 존재한 적이 없는 그런 종류의 사회를 건설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류 역사에 대한 가장 심오한 이해를 발전시킬 수 있어야만 한다, 예술과 과학과 철학에서 인류의 가장 위대한 성취들을 자신이 물려받은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노동자계급의   정치조직들이 지향하는 정확히 그 것이다. 이러한 조직들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조건과 그들에게 열려있는 전망들에 관해 더 총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수단이다[19].

전쟁위협에 대한 반대선언

우리는 이미 그 선언의 텍스트를 우리의 웹싸이트에 공개했기에 그 내용을 여기서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20]. 그 내용을 둘러싼 논쟁은 울산 노동자 배움터의 한 회원에 의해 제기된 제안, 즉 그 지역의 증대하는 긴장에 대한 주요한 책임을 미국에게 묻자는 그래서 결국은 북한을 미국의 봉쇄정책의 „희생자"로 제시하자는 제안에 집중되었다.이 제안과, 대회에 참가한 많은 트로츠키주의 경향들 몇명으로부터 이 제안에 부여된 지지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많은 한국 동지들이 1980년대의 „반제국주의"(근본적으로는 „반미주의"로 읽히는) 이데올로기들과 단절하는데 겪는 어려움을 그리고,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이 진심으로 스탈린주의를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옹호에, 그래서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계속된 애착을 잘 나타낸다.

ICC와 몇몇 SPA 동지들은 선언의 주요 취지를 변경하는데 강력히 반대했다. 서울과 울산에서 있었던 데카당스에 관한 논쟁에서 우리가 지적했듯이, 하나의 제국주의적 충돌에서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서 „더 비난당해야" 한다는 생각은, 사회-민주주의적 반역자들이1914년에 노동자들로 하여금, 즉 독일노동자들은 „짜르의 야만주의"에 대항하여, 프랑스노동자들은 „프러시아의 군국주의"에 대항하여, 영국노동자들은 „용감한 꼬마 벨기에"를 지원하기 위해서 등등„그들의" 국가를 지지할 것을 호소할 있게 했던 그것과 정확히 동일한 생각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자본주의의 데카당스 시기는, 제국주의는 이런 저런 국가의 실수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의 근본적인 특성이고, 이 세기에 모든 국가는 제국주의적이라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분석의 심오한 진리를 보여주었다. 미국이라는 거인과 북한이라는 피그미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그들의 제국주의적 식욕의 크기이자 그것을 만족시킬 능력이다.

또 다른 2개의 반대 의견이 토론 동안 제기되었는데, 이것은 거론할 만하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그러한 긴장상황을 억압적 대책을 수립하는 빌미로 삼고 있는 남한 정부를 비난하자는  „노동해방연대"그룹의 한 동지의 제안이었다. 이 매우 정당한 제안은 서울에서의 토론에서 이뤄졌고 그 다음 날 울산에서 논쟁된(및 그 이래 공개된) 최종판은 그에 따라 변경되었다.

두번째 반대 의견은, „사회주의노동자[21]"그룹의 한 동지로부터 였는데, 현상황은 사실상 그렇게 심각하지 않으며, 지금 전쟁을 비난하는 것은, 부르조아계급에 의해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 협연되고 있는 전쟁공포를 신임하는 결과가 되어버릴 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 반론은 합리적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점으로 보자면 잘못된 것이었다. 어떻든 극동에는 임박한 전쟁위협이 존재하고, 전쟁위협이 이 지역에 걸려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제국주의의 장면 속의 상이한 주연 배우들(중국, 대만, 일본, 미국, 러시아)사이의 긴장들은 증대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국제주의자들이 모든 제국주의 진영들의 책임성을 비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1907년 슈투트가르트회의에서 결정된 국제주의결의를 지키기 위해 투쟁했던 레닌, 룩셈부르크 및 제 2 인터네셔널좌파의 모범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제국주의적 충돌의 결정적인 사건들이나 계급투쟁에 대하여 프롤레타리아계급 내부에서 입장을 취하는 것은 혁명조직들의 제일의 책무이다[22].  

이 점에 대한 결론으로써, 우리는 이 선언에 대해 IP대표단과 대회에 개인자격으로 참가한 다른 동지들이 보여준 우애적이고 국제주의적인 지지를 환영한다.

결산

우리 대표단이 출국하기전에 있었던 마지막 모임에서 ICC와 SPA는 그 대회에 대한 총괄평가에 있어서 전적으로 동의했다. 제기된 중요한 점들은 다음과 같다:

  1. 이 대회가 개최된 자체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라는 사실. 왜냐하면 그것은, 극동의 고도로 산업화된 나라에서 좌파공산주의의 입장들이 옹호되고 또 뿌리를 내기리기 시작한 그 처음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2. SPA은 대회 동안의 토론들이 좌파공산주의와 트로츠키주의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실천적으로 보여준 점에 있어서 특히 중요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대회는 좌파공산주의의 원칙들에 대한 그들 사진의 이해를 발전시키려는 그래서 이러한 원칙들을 한국 노동운동 속에서 널리 알려지게 하겠다는  SPA의 결심을 강화시켰다.
  3.  북한의 핵실험에 관한 공동선언은 좌파공산주의의, 특히 SPA와 ICC의 국제주의적 입장들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그 선언에 관한 논쟁은 한국노동운동에 잔존하는 민족주의적 경향들의 문제를 노출시켰다. „네트워크" 내부에는 이점에 대한 견해차이가 존재하고, 이 문제는 그 환경에서 풀리지 않은 채 이며 SPA는 장래에 이 문제의 극복을 위해 일할 결심이다.
  4. 미래의 논쟁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들 중의 하나는 노동조합문제이다. 한국의 동지들이, 특히 1980년대 이래의 그곳에서의 노동조합의 역사를, 좌파공산주의에 의해 옹호된 입장들 속에 집적되어 있는 것과 같이 세계프롤레타리아계급의 역사적 경험의 견지에서 분석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전망

그 모든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대회가 극동에서 좌파공산주의 원칙의 존재를 그리고 동서양의 혁명가들 사이의 공동작업을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단지 한 걸음을 내디딘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안다. 즉, 우리는 이 대회가 개최되었다는 사실과 그 속의 논쟁들이, ICC가 항상 주장해 오고 있으며 또 노동자계급의 미래 세계공산당의 건설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 될 2가지 점들을 확인시켜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 첫째는 그러한 조직이 건설될 정치적 기반이다. 모든 근본적인 문제들-노동조합문제, 의회문제, 민족주의의 문제 및 노동해방투쟁-에 대해서 새로운 국제주의운동의 발전은 1920년대에서 50년대 사이에 좌파공산주의의 작은 그룹들(특히, 빌랑(Bilan), KAPD, GIK, GCF)에 의해 이뤄진 기초작업을 기반으로 성취될 수 밖에 없다. 이 그룹들로부터 ICC는 기원을 갖는다[23].

두번째, 한국에서의 이번 대회는 그리고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연대를 완수하자"라는 SPA의 명쾌한 요청은 또한 , 국제주의운동이 기존의 국가적 정당들의 연방을 기초로 해서가 아니라 곧 바로 국제주의적 수준에서 발전하고 있음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24].

이것은, 혁명의 와중에 그리고 제 2인터네셔널의 국가적 정당들로부터 출현한 좌파 분파들을 기반으로 제 3인터네셔널이 창건되었을때의 그 상황을 너머선 역사적 진보이다. 그것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세계적인 생산 과정에서, 그리고 세계적 규모로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함으로써만 그 모순들이 극복될 수 있는, 세계적인 인류공동체에 의해 대체될 세계적인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단결된 하나의 계급이라는, 현재 노동자계급의 본성을 또한 반영한다.

존 던/하인리히 쉴러


[1]    우리는 15세기에 이뤄진 한글의 발명을 또한 언급해야 겠는데, 이는 구어형의 언어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에 근거해 표기법을 창조한 아마도 최초의 시도일 것이다

[2]    이것은 수 천명의 한국여성들이 일본 군대의 사창가에서 겪어야 했던 강요된 매춘을 포함했고, 한국농업이 일본 자체의 식량필요에 의해 점점 더 직접적으로 지배되면서 이뤄진 전통적인 농업경제의 파괴를 포함했다.

[3]    „미국은 비공산주의 영역과 공산주의 영역 사이에 군사적인 장벽을 만드는데 관심을 갖고 있다. 장벽이 효과적이라면 뒤에 놓인 영역은 안정적일 것이다(...) 미국은 동요의 특정 원인들을 결정해야만 하고 그것들을 제거하는데 있어서 지능적이고 대담하게 조력해야 한다. 중국에서의 우리의 경험은 동요의 원인들과 타협하는 것이 쓸모없음을, 일시적인 안정을 추구하는 정책은, 일반적인 요구가 영구적인 변화를 갈망하기 시작하면 실패할 밖에 없음을 보여주었다. " 멜빈 코넌트 주니어, „JCRR: 구체적 실례(an object lesson)", 극동 조사(Far Eastern Survey)에서, 5월 2일, 1951

[4]    아시아의 용들이 기운을 잃어간다" 인터네셔널리뷰 제 89호(1997)

[5]    분배된 적산을 그 가치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재벌이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 제일이자 가장 중요한 재정적 원천이었다. 전쟁직후 이것은 남한이 일본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의 30%에 달했다. 초기에 미군정의 적산분배에 대한 통제 하에서 그것들은 군정 자체에 의해 그리고 한국정부에 의해 분배되었다.

[6]    이 글에서 우리는, 초강력-군국주의적 스탈린주의적인 체제의 모든 공포를 경험하고 있는 북한의 노동자계급의 상황을 다루지는 않겠다.

[7]    앤드류 남, 한국민중의 역사

[8]   즉각 생각나는 예로서 필리핀과 브라질을 들수 있다.

[9]    SGWC의 몇몇 동지들은 이번 대회에 개인자격으로 참가했다.

[10]   SPA 이외에 네트워크에 속하는 다음과 같은 한국그룹들이 대회에서 발제를 했다: 노동해방연대, 울산 노동자 배움터, 당건투. 계급투쟁에 대한 발제문 하나는  개인 자격으로 참여한 로렌 골드너에 의해 제시되었다.

[11]    이는 서울에서 열린, 데카당스에 관한 토론에서 특히 그러했다. 이때의 토론은 대중에게 공개된 것이어서 청중 속에는 정치적 경험이 적거나 거의 없는 젊은 학생들이 많았다.

[12]    우리는 국제주의전망(Internationalist Perspective) 그룹의 „자본의 형식적이고 실제적인 지배"에 대한 강박관념을 여기서 검토할 생각은 없다. 우리는, IP가 여전히 „ICC의 외부분파(External Fraction of the ICC)"라 자칭하던 1990년에 발간된 인터네셔널리뷰 제 60호에 이 주제를 이미 길게 다룬바 있다(https://en.internationalism.org/ir/060_decadence_part08.html 을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새로운" 이론적 통찰의 우월성을 실상에서 과시하려는 IP의 최초의 노력이 거의 신빙성이 없었다는 점은 언급할 만한데,  IP가 동유럽에서의 사건들은 사실상 소련의 강화를 나타낸다는 주장을 베를린 장벽 붕괴 3년후에도 계속했기 때문이다!

[13]    불가피하게, 이러한 설명은 극도록 도식적으로 남아있고, 교정되고 상세화될 여지가 열려있다. 울산노동자 배움터의 동지가 행한 한국노동운동사에 관한 발제가 영어로 번역되기에는 너무 길어서 우리가 접할 수 없었던 점을 우리는 매우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 동지가 그것의 요점을 요약하는 그 텍스트의 축약본을 준비해서 번역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14]    사실상, 독일혁명 동안의 노동조합은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의 최악의 적이었다. 독일혁명에 대한 설명으로는 인터네셔널리뷰 제80-82호에 실린 기사들을 참조.

[15]    인터네셔널리뷰 제 120, 122, 123, 125호에 실린, 1905년혁명에 관한 우리의 일련의 기사들을 참조:

https://en.internationalism.org/taxonomy/term/340

[16]  이 주제에 관한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프랑스 근교들에서의 폭동: 절망과 마주하여, 계급투쟁만이 미래를 제시한다(Riots in the French suburbs: in the face of despair, only the class struggle offers a future)"와 „아르헨티나: ‚피케테로'운동의 신비화(Argentina: the mystification of the ‚piquetero' movement)" 을 참조. 이 글들은 각각 en.internationalism.org/icconline/2005_suburbs 와 인터네셔널리뷰 제 119호(https://en.internationalism.org/ir/119_piqueteros.html )에 실려있다. 대규모의 산업노동력의 „소멸"이라는 생각을 제안하는 것은 울산에서는 어쩐지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였다는 점을 말해야 겠다. 이곳에는 현대공장 단독으로도 2만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다!

[17]    예를 들어, „비정규의 노동"이 „새로운 투쟁형태"로서의 „플라잉 피켓츠"의 창안을 결과시켰다는 생각을 살펴보면, 우리는 이 생각이 단순히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다는 점을 볼 수 있다. 플라잉 피켓(즉, 투쟁중인 노동자들의 대표단이 다른 노동자들을 투쟁에 합류시키기 위해 다른 작업장으로 가는 것)은 이미 오랫동안 시행되고 있다. 영국의 예만 보더라도 플라잉 피켓은 1970년대에 있었던 2개의 중요한 파업들에서 유명하게 사용되었다. 즉, 광부들이 발전소에 피켓을 보냈던 1972년과 1974년의 광부파업들에서, 그리고 건설노동자들이 다른 공사장으로 파업을 확산시키기 위해서 피켓을 보냈던 1972년의 건설노동자파업에서. „비정규의" 노동력의 존재도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사실상, 혁명적 노동조합주의자 톰 만(Tom Mann)의 „총노동자조합(General Labourers' Union)"(엥겔스 그리고 맑스의 딸 엘레노어도 이 노조의 발전에 관계했었음)이 1889년에 설립되게 만든것이 정확히 정확히 바로 이러한 대규모의 비숙련의 비정규 노동력의 출현이었다.

[18]    세계혁명 제 295호에 실린 기사를 참조: https://en.internationalism.org/wr/295_vigo

[19]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의 운동을 거기에 맞추고자 하는 바의 특수한 원리들을 세우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이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의 다양한 일국적 투쟁들에 있어서 국적에 상관없는,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공동 이해를 내세우고 주장한다는 점에서만, 다른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조아지 사이의 투쟁이 경과하는 다양한 발전 단계들에 있어서 항상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만 다른 프롤레타리아 정당들과 구별된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은 실천적으로는 모든 나라의 노동자 정당들 중에서 가장 단호한 부분, 언제나 운동을 추동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부분이다: 그들은 이론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조건들, 진행 일반적 결과들에 대한 통찰을 여타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에 앞서서 가진다(공산주의당 선언, 맑스-엥겔스저작선집 1권, 412-3쪽,박종철출판사)"

[20]    이 선언은 온라인상으로 en.internationalism.org/icconline/2006-north-korea-nuclear-bomb 에서 찾아볼 수 있다.

[21]    이 그룹의 영어명은 Socialist Worker이다. 그 명칭에도 불구하고, 이 그룹은 영국의 „사회주의 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와는 무관하다. 만약 우리가 그 동지의 생각을 잘못 제시했다면 먼저 사과한다-언어 장벽때문에 우리가 해석의 오류를 범했을 지도 모른다.

[22]    이 대회에서 국제주의자들이 전쟁위협에 직면하여 침묵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보기에는 1970년대 말의 좌파공산주의대회에 비해서 한 걸음 진보 한 것이다. 그 당시에는 다른 참가자들-그리고 특히 바타글리아 코뮤니스타와 CWO-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어떤 공동선언도 거부했다.

[23]    IP에 따르면, 우리는 „좌파공산주의"를 넘어서야 한단다. 적어도 우리가 거명한 모든 그룹들 중에서 그 누구도, 그들이 이런 저런 문제들에 대해 최종의 말을 한 것인 체 하지 않았다. 역사는 전진하고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토대를 세우지 않고 집을 짓는 것은 불가능하며, 우리의 관점에서 볼때 그러한 건설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토대들은 좌파공산주의의 선구자들의 그것이다. IP의 입장의 논리는 우리가 출현한 그 역사를 내던져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는 우리와 더불어 시작된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IP가 이 생각을 얼마나 싫어하든 간에, 이것은 „당(the Party)"(IBRP의 경우에는, „사무국(the Bureau)")이 지혜의 유일한 원천이고 다른 누구로부터도 어떤 것도 배울 필요가 없다라는 보르디가주의의 입장의 한 변형에 불과하다.

[24]    미래의 국제주의 조직의 발전의 이러한 측면은 1980년대에 ICC와 IBRP사이의 논쟁의 한 주제였다. IBRP는 국제주의 조직은 상이한 나라들에서 이미 존재하는 독립적인 정치조직들을 기반으로 형성될 수 밖에 없다는 견해를 고수했다. 이 „이론"을 현재의 국제주의운동의 진정한 실천이 완전히 무효화시킨 점은 IBRP의 실천적 이론적 파산을 보여준다. 

데카당스(쇠퇴)이론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조건과 원칙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1) 역사적 유물론의 구체화

데카당스 이론은 원시 공산제, 고대 노예제, 봉건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등의 생산양식의 발전을 분석하는 역사유물론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따라서 데카당스 이론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 시기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틀이다. 사회가 아직도 진보하고 있는지 또는 사회가 진보를 완결하여 ‘역사'로 되었는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정치, 사회, 경제적인 수준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모든 과거에 존재하였던 사회처럼, 자본주의의 상승 단계는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생산관계의 역사적으로 필요한 성격, 즉 사회의 생산력 확대에서 생산관계가 하는 중대한 역할을 나타내 준다. 이와 대조적으로, 데카당스 단계에서 생산관계는 생산력을 확대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생산력 확대를 막는다. 이것은 맑스와 엥엘스가 우리에게 남겨준 주요한 이론적 성과 가운데 하나이다.

20세기는 인류의 역사에서 보기를 찾을 수 없는 참으로 잔인한 시기였다. 20세기에 일어난 수많은 전쟁은 규모와 빈도, 기간에서, 그리고 그 결과 인간들에게 안겨준 재앙의 폭에서 다른 어떤 시기와 비교할 수 없었다. 즉 전쟁은 지구 전체를 뒤흔들고 수천만 명의 프롤레타리아트와 인류를 절망적인 가난으로 몰아넣은 경제위기를 가져왔고, 역사에서 가장 커다란 기근에서 체계적인 집단학살까지도 낳았다. 19세기와 20세기는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시대였다.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Belle Epoque)」동안 부르주아 생산양식은 비할 바 없이 가장 전성기를 누렸다. 이 때 부르주아 생산양식은 전에는 꿈으로만 꾸어왔던 생산성과 기술의 정교화를 이루면서 지구를 하나로 묶어 놓았다. 사회의 토대에 긴장이 쌓여가고 있었지만, 자본주의가 성장한 지난 20년(1894-1914)은 가장 번영한 시기였다. 자본주의는 적이 없는 것처럼 보였고, 군사적 갈등은 주변부에 한정되어 있었다. 거의 끊이지 않고 도덕적, 지적, 물질적 진보를 이룬 "긴 19세기" (역사가 홉스봄의 표현)와 달리, 1914년 이후의 20세기에는 모든 면에서 뚜렷한 퇴보가 있었다. 지구를 가로질러 더욱 더 세계의 종말을 방불케 하는 경제와 사회생활의 성격, 끝없이 이어지는 갈등 속에서 자멸의 위협, 그리고 심상치 않은 생태계의 재앙은 당연한 숙명도 아니고 단순히 인간의 광기의 산물도 아니며, 자본주의 발생과 더불어 시작된 자본주의의 특성도 아니다. 그러한 퇴보는 처음부터, 즉 16세기에서 1차 세계대전까지 경제, 사회, 정치 발전의 강력한 요인인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데카당스의 징후였다. 그리고 이는 모든 그러한 발전의 족쇄가 되었으며, 인류의 생존 그 자체에 대한 위협이 되었다.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물질적 가난 없는 세상을 향해, 인류의 필요와 욕망, 그리고 의식을 근거로 하여 인류가 활동할 수 있는 통일된 사회를 향해 움직일 수 있게 한 수준으로 생산력이 발전했던 바로 그 순간에 왜 인류는 생존의 문제와 마주하게 되었는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는 정말로 자본주의가 이끌어온 막다른 골목에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혁명세력을 이루는가? 왜 우리 시대에 노동자 투쟁의 대부분의 형식은 특정한 민족국가의 헌법이나 부르주아지의 진보적인 특정분파를 지지하면서 노동조합주의와 의회주의를 통한 점진적 개혁을 위한 투쟁과 같은. 지난 세기에 두드러진 노동자 투쟁의 형식일 수밖에 없는가? 이러한 초보적이지만 중요한 질문에 답변할 수 있는 지구적이고 일관된 전망도 없고, 여전히 전위 역할을 할 수 없는 현재의 역사적 상황에서 우리의 방향을 찾는 것은 힘든 일이다. 맑스주의, 즉 역사유물론은 그러한 질문을 풀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세계관이다. 대답은 명확하고 단순해서 몇 마디로 할 수 있다. 앞 선 생산양식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는 영원한 체제가 아니다.

"어느 선을 지나면, 생산력의 발전은 자본에 대한 장애요소가 되고, 결과적으로 자본 또한 노동의 생산력 발전의 장애 요소가 된다. 일단 이러한 관계가 형성되면, 족쇄로서의 길드체제, 농노제, 그리고 노예제가 해체되었던 것처럼 자본, 다시 말하면 임금 노동은 사회적 부의 발전과 생산력과 같은 관계로 시작된다. 노예체제의 마지막 형태, 한편으로는 임금 노동, 다른 한편으로 자본으로 구성된 형태가 분출되고 이 분출은 자본에 대응하는 생산양식의 결과이다. 그것은 임금노동과 자본의 부정, 부자유한 사회적 생산의 이전 형태에 대한 부정을 위한 물질적 그리고 정신적 조건들을 발생시키는 자본의 생산과정이다.

사회의 생산력 발전과 그것을 특징 지워 주는 생산관계들 사이에 증가되는 부조화는 모순, 위기, 변동으로 표현된다."(칼 맑스,「요강」 전집 29권, 133-4쪽)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충분히 발전하지 않는 한,  프롤레타리아 투쟁은 세계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투쟁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생활조건을 실질적으로 개혁하고 영원히 개선하기 위하여 노동조합과 의회의 투쟁을 경험하면서 스스로를 계급으로 인식하고 주장할 수 있게 했다. 자본주의 체제가 데카당스로 들어간 순간부터, 세계 공산주의 혁명은 가능하고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프롤레타리아의 투쟁형식은 완전히 달라졌다. 당면 수준에서도, 방어투쟁은 형식으로나 내용으로나 노동조합주의와 노동자 정치조직을 위한 의회주의 대의제와 같은 지난 세기를 이끌었던 투쟁 수단을 통해 더 이상 나타낼 수 없었다.

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는 혁명운동이 전개되면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the Communist International : 코민테른)은 부르주아지가 더 이상 역사적으로 진보 계급이 아니라는 인식을 중심으로 하여 1919년에 세워졌다.

"2. 자본가 계급의 쇠퇴기 - 세계경제상황의 평가에 기초하여 제3회의는 자본주의가 생산력 발전의 사명을 수행해 왔으며 현재 역사적 발전뿐만 아니라 인간 생존의 가장 기초적인 필수조건들과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의 단계에 도달했음을 단언할 수 있다. 이런 기본적 모순은 최근의 제국주의 전쟁에 반영되었고, 그 전쟁이 생산과 분배의 조건에 가한 심각한 손해에 의해 날카로워 졌다. 자본주의적 노예제라는 족쇄에도 불구하고 진부한 자본주의는 그것의 억제할 수 없는 힘으로 야기된 파괴행위가 노동자계급에 의해 이루어진 경제적 성과물들을 무능케 하고 황폐화시키는 단계에 있다. 현재의 자본주의라는 것은 그 자본주의의 소멸의 고통이다."(「코민테른 첫 4차 대회의 결의와 선언」에서 "코민테른 전술에 대한 테제", Hessel, 388-9쪽)

그때부터는, 제1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 체제를 쇠퇴 국면으로 들어서게 했다. 이러한 이해는 공산주의 좌파그룹 대다수의 공동 전술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나침반 덕택에 공산주의 좌파는 비타협적이고 일관된 계급지형에 남아있을 수 있었다. 단지 ICC는 1930년대와 40년대에 이탈리아와 독일, 네덜란드 좌파, 그리고 1940년대와 1950년대의 GCF(The Gauche Communiste de France)가 가치를 풍부하게 하여 전달한 유산을 받아 발전시켰다.

결정적인 계급 전투가 임박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거의 2세기에 걸친 노동자 투쟁과 노동자 정치 조직의 이론작업을 통해 발전했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세계관을 다시 갖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야만의 가속화와 착취의 끊임없는 증가가 당연한 사실이 아니라, 20세기 시작 이래 역사적으로 쓸모없는 것이 되었지만 세계를 계속해서 지배한 자본의 경제·사회적 법칙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19세기에 배웠던 투쟁형식(개량투쟁의 최소강령, 부르주아지의 진보적 분파에 대한 지지 등)이 사회 안에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존재를 "견뎌낼" 수 있었던 자본주의의 상승 시기에는 상식이었지만, 자본주의의 쇠퇴기에는 19세기의 투쟁 형식이 막다른 골목으로 이끌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노동계급이 아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공산주의 혁명이 쓸데없는 꿈이나 유토피아가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데카당스를 이해하는 과학적 근거였던 "필연"이자 "가능성"임을 아는 것이 프롤레타리아트로서는 훨씬 더 중요하다.

2)자본주의의 데카당스

① 역사적 진화의 결과로서, 노동력은 하나의 상품이 된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력은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

"고대시기에, 우리는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잉여노동을 착취하는 것을 보았다. 고대의 노예제나 중세의 농노제 모두 도달된 생산성 수준, 즉 다수의 개인을 지탱하기 위해 한 개인의 노동력에 의존한다. 노예제나 농노제는 한 사회계급이 다른 사회계급의 노동력에 의지하는 생산성으로부터 이윤을 추구하는 방식의 다른 표현이다. 이런 점에서, 고대사회의 노예나 중세 농노는 현재 임금노동자의 선조격이다. 그러나 고대나 중세의 노동력은 그것의 생산성과 착취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상품화되지 않았다.

상품으로서 노동력의 판매는 일련의 특수한 역사적 그리고 사회적 관계들을 뜻한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시장의 출현은 다음을 뜻한다.

  1. 노동자는 개인으로 자유롭다.
  2. 노동자는 생산수단과는 분리되고, 이후에 노동하지 않는 자의 소유 하에 합쳐진다.
  3. 노동 생산성은 최고 수준에 이른다. 다른 말로, 잉여노동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시장경제는 지배적인 체제가 된다. 다시 말해, 상품의 형태로서 잉여 노동의 창출은 노동력 구매의 목적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정치경제 입문」 제5장 「임노동」)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노동력이 상품으로 된 것은 지난 시대와 견주어 볼 때 전혀 새로운 차원의 빈곤이다.

"원시부족은 자연환경이 호의적이지 않을 때 배고픔을 겪었다. 원시부족의 빈곤은 대체적으로 사회의 빈곤이었다. 어떤 부족 구성원이 빈곤한 반면에, 다른 구성원이 부유하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생활수단들은 사회전반에 쓰일 수 있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평등하게 쓰일 수 있었다. 이것은 고대와 동양 노예제에도 해당된다. 그러나 이집트의 공공 노예나 그리스 사노예들은 강제되고 착취되었으며, 그들의 빈약한 생활환경과 주인들의 풍요로움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예로서의 그들의 조건들은 그의 존재를 확인시켰다. 어떤 사람도 그들의 말이나 가축이 굶어 죽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는 것처럼 노예들도 굶어 죽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중세 노동제도 여기에 해당된다. 소작농이 토지에 밀착되고, 모든 개개인이 주인이거나 다른 사람의 하인인 봉건적 종속 체제는 개개인들로 하여금 사회적 위치를 결정지었다. 농노는 강제되었지만, 어떤 지주도 농노를 토지로부터 쫓아내고 따라서 농노로부터 생존수단을 박탈할 권리를 가지지 않았다. 봉건적 관계는 지주로 하여금 대재앙, 화재, 홍수, 해일 등이 발생할 경우 소작농을 도와주도록 강제하고 있었다. 봉건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자본주의가 출현하기 시작하는 중세 후기 상황은 변화한다.

(.....)

자본주의 상품 생산은 인간역사에서 노동과 인구 대다수의 생존 수단의 부재, 그리고 인구의 다른 부분에서의 가난의 결과임과 동시에 필요조건이고 경제의 생존 조건인 새로운 경제 형태이다."(로자 룩셈부르크, 앞의 글)

②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의 조건을 창조한다.

『공산주의자 선언』은 부르주아지가 했던 탁월한 혁명적 역할을 강조한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낡고 제한된 사회형태를 쓸어버리고 결코 본 적 없는 가장 역동적이고 팽창적인 생산양식으로 바꾸어 놓았다. 즉 그러한 생산양식은 지구 전체를 정복하고 통일시킴으로써, 그리고 엄청난 생산력으로 추진함으로써 마침내 계급적대를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좀 더 높은 사회형태의 토대를 놓았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그 자체에 의한 전대미문의 생산력의 발전 때문에 물질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보편적 상품생산에 기초한 사회는 필연적으로 그 자신의 내적 기능의 논리에 따라 쇠퇴하여 결국 몰락하는 것으로 운명 지워 졌다. 『선언』에는 자본주의의 몰락을 이끌 내적 모순이 이미 확인되었다.

"부르주아적 생산 관계들과 교류 관계들, 부르주아적 소유 관계들, 즉 그토록 강력한 생산 수단과 교류 수단을 마법을 써서 불러내었던 현대 부르주아 사회는, 주문을 외워 불러내었던 지하 세계의 힘에 더 이상 군림할 수 없게 된 마법사와 같다. 지난 수십 년 이래로 공업과 상업의 역사는 현대의 생산관계들에 대한,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지배의 존립 조건들인 그 소유 관계들에 대한, 현대 생산력들의 반란의 역사일 뿐이다. 주기적으로 재발하며 점점 더 위협적으로 부르주아 사회 전체의 존재를 문제 삼는 상업공황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상업 공황 때에는 제조된 생산물들뿐만 아니라 이미 있는 생산력들까지도 으레 태반이 절멸된다. 공황 때에는, 이전의 모든 시기에는 어불성설로 보였을 하나의 사회적 전염병이 돌발한다. 과잉 생산이라는 전염병이 그것이다. 사회는 갑자기 순간적인 야만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기아와 전면적인 섬멸전은 사회에 대한 모든 생활 수단들의 보급을 차단해버린 것처럼 보인다. 공업과 상업은 절멸된 듯이 보인다. 왜 그런가? 사회가 너무 많은 문명, 너무 많은 생활 수단, 너무 많은 공업, 너무 많은 상업 따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칼 맑스, 『공산주의자 선언』, Pelican Marx Library, 72-73쪽)

『선언』을 쓴 뒤 맑스는 몇 년 동안 잉여가치의 추출과 실현 사이의 관계, 그리고 십년 또는 그 이상 자본주의 사회의 기초를 흔들었던 과잉생산의 주기적 위기를 좀 더 면밀히 분석하였다.  잉여가치의 비밀을 벗기면서, 맑스는 자본주의를 쇠퇴와 필연적으로 최종적 붕괴로 이끌게 될 엄청난 모순이 자본주의의 특징이었다는 점을 밝혀냈다. 이 모순은 임노동의 본질에 기초한 것이다.

  • 과잉생산의 위기 : 자본주의 하에서 인구 대부분은 잉여가치의 본질에 따라 과잉생산자와 과소소비자로 구성된다. 자본주의는 그 자신의 생산관계의 폐쇄회로 속에서 생산된 모든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
  • 이윤율 하락의 경향 : 인간의 노동력만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경쟁 때문에 자본주의는 이윤율이 하락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죽은 노동(기계, 원료)과의 관계에서 살아있는 노동의 양을 줄일 수밖에 없다.

지구 전체를 그 자신의 법칙에 종속시키는 믿을 수 없는 팽창적인 본질과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로마 노예제나 중세 봉건제처럼 역사적으로 이행기적인 생산양식이다. 자본주의는 선행한 모든 생산양식처럼, 거대한 역사 운동이 다하여, 사라지도록 운명 지워졌다. 그러한 운명은 도덕적 파산이 아니라 스스로를 파괴하도록 강제한 내적 모순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자본주의를 좀 더 높은 사회조직의 형식으로 대체할 수 있는 계급을 자본주의가 그 자체 내에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그러한 모순의 해결도 암시했다 : 즉 공산주의가 그것이다. 상품관계의 지배로 혼돈에 빠져든 사회는 오직 임노동과 교환을 위한 생산을 폐지한 사회, 즉 인간사이의 관계가 더 이상 불명료하지 않고 단순하고 명백하게 될, 인간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유롭게 연합한 생산자" 사회를 통해 대체될 수 있다.

생애 말년 동안, 맑스는 그의 지적 힘의 대부분을 고대사회 연구에 바쳤다. 모건(Morgan)의 『고대사회(Ancient society)』가 출판되고 러시아의 노동자 운동이 러시아에서 혁명 전망에 대한 문제를 던지자, 맑스는 강도 높은 연구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 연구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아주 중요한 『민족지 노트(Enthnographic Notes)』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전해졌다. 이 연구는 엥엘스의 위대한 인류학적 작업인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의 버팀목이 되었다.

맑스와 엥엘스에게, 미국 인디언에 대한 모건의 연구는 원시공산주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분명히 확증시킨 것이었다. 즉 사유재산, 사회적 위계 그리고 성의 불평등이 인간 본성에 내재해있다는 전통적인 부르주아 개념과 반대로, 모건의 연구는 사회구성이 원시적일수록 재산은 더욱 공동소유가 되고, 의사결정 과정은 더욱 집합적이 되며, 남녀 사이의 관계는 더욱 서로의 존경에  기초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원시사회에 대한 맑스주의적 접근은 사회의 역사적 진화가 마지막 순간에 사회의 경제적 하부구조의 변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유물론적 방법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동은 원시공동체의 종말을 가져왔고 더욱 발전된 사회형태가 출현하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역사 진보에 대한 맑스의 견해는 어둠에서 빛으로의 직선의 상승, 즉 부르주아 문명의 찬란한 광채가 그 정점을 이룬 상승을 순진하게 상상했던 사소한 부르주아 진화론에 철저히 반대한 것이었다. 맑스의 관점은 아주 변증법적이다. 즉 원시공산주의를 인간이하로 보며 거부하는 것과 달리, 그의 『노트』에는 부족공동체가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그 공동체가 지닌 질적인 특징은 스스로 다스리는 능력, 상상력과 예술창조의 힘 그리고 성의 평등이다. 원시사회의 불가피한 한계, 특히 개인과 부족단위에서 인간의 분화에 부과되는 제약은 역사의 진보를 통해 극복되었다. 그러나 이들 사회의 긍정적 측면은 역사의 진보 과정에서 상실되었고 공산주의의 미래에서 좀 더 높은 수준으로 복원되어야 할 것이다.

수십만 년 동안 인류가 계급 없고 국가 없는 사회에서 살면서 얻은 발견은 노동자 운동의 수중에서 강력한 무기로 될 것이고, 사유재산에 대한 사랑과 위계제의 필요성이 인간본성의 타고난 부분이라는 모든 주장들을 상쇄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3) 제국주의 단계, 자본주의의 정점이자 데카당스의 서곡

『공산주의자 선언』이 쓰여 졌을 당시, 과잉생산의 순환적 위기는 아직 "새로운 시장의 정복과 옛 시장의 보다 철저한 착취를 통해" 극복될 수 있었다. 즉 자본주의의 앞에는 여전히 긴 팽창의 단계가 놓여 있었다.

1870년대와 1880년대 동안 자본주의 삶에 새로운 국면이 펼쳐졌다. 자본주의 체제는 이제 더 이상 국민국가를 세우기 위해 등장한 부르주아지의 계급투쟁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식민지정복의 방법을 사용하는 팽창과 세계 정복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섰다. 19세기 마지막 30년 동안 지구의 대부분이 정복되어 거대한 제국주의 열강 사이에서 분할되었다.

 엥엘스가 1891년 주목할 만하게 통찰한 바와 같이, 자본주의 데카당스의 첫 조짐이 나타나자, 강대국 사이에는 긴장이 점점 늘었고 주변부에서는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위의 모든 것은 독일이 평화적으로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발전을 수행할 수 있다는 조건부로 언급되었다. 전쟁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전쟁은 어느 순간에도 발발할 수 있다. 현재 모든 사람들은 전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다. 만약 전쟁이 발발한다면,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전쟁은 1,500만-2,000만 군인들이 서로 죽이고 이전에는 없었던 유럽의 황폐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 전쟁은 사회주의의 즉각적인 승리를 이끌거나 구질서에서의 대변동을 야기할 것이다."(프리드리히 엥엘스, "독일에서의 사회주의", MEW, vol. 27, 1891, 241쪽, 245쪽)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사회적 재난이 터지기 전에, 노동자 운동내부에서 많은 영향력 있는 목소리들은 노동계급에게 자본주의가 개혁을 통해 평화적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점을 확신시키려 애썼다.

다행히 그 당시에, 맑스주의 좌파는 자본주의의 경제 통계에서 나타난 것처럼 자본주의가 명백하게 건강한 상태라는 것을 통찰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자본주의는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하였다. 맑스주의 좌파가 사회민주주의 내의 개량주의에 맞서 화해할 수 없는 투쟁을 할 수 있었고 체제의 악화되는 모순을 고려할 수 있었던 것은 엥엘스의 발자국을 따라 걸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데카당스 단계에 대한 이해는 맑스의 계승자들, 그리고 특히 로자 룩셈부르크가 좀 더 발전시켰다.

4) 20세기 : 전쟁과 혁명의 세기

비록 맑스주의 좌파가 자본주의를 - 사회생활에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새로운 현상인-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끈 기본 이유에 대해 결코 통일된 의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 이것은 세계를 분할하려는 거대한 제국주의 열강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었다. 분명히 세계의 새로운 분할에 가장 관심이 많았고, 전쟁에 참전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제국주의 국가들은 가장 적은 식민지를 지닌 국가들이었다. 특히 독일이 그러했다. 다른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과 프랑스도 똑같이 자신들의 식민제국을 잃지 않으려고 참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야만에 대항한 국제적 분노의 물결이 부르주아지의 전복과 공산주의 사회의 창설을 역사적 의제로 삼은 세계의 혁명적 물결로 전환되었을 때, 노동자 운동 내부에는 러시아에서 부르주아지의 정치권력 장악이 아직 선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계급에 의한 권력 장악이 너무 이른 것이었다고 선언하기 위해 "맑스주의 정통"으로 도피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러시아에서 혁명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무르익지 않았다는 추정을 둘러싼 이러한 양극화는 그 나라에서 산업과 노동계급의 발전을 볼 때 완전히 오류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세계 혁명의 조건이 무르익었다는 근본적인 국면을 완전히 놓치는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혁명운동의 물결로 추진된 1919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이미 살펴보았듯이 역사적으로 부여된 부르주아지의 진보적 역할이 끝났다는 합의를 기초로 하였다.

어쨌든 혁명이 패배했다는 사실은 혁명의 객관적 조건이 이 시기에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결코 아니었다. 생산력의 발전 덕분에 풍요로운 사회를 위한 전제조건이 존재했을 뿐 아니라, 노동계급은 이미 1905년의 러시아와 1917년 이후 몇몇 공업국에서 부르주아지를 전복하고 세계적으로 자신의 정치권력을 세울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근본적으로 독일 혁명의 실패에 기인한 이러한 패배는 사실 혁명을 위한 주체 조건의 미성숙, 특히 전쟁 동안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대부분이 사회 민주주의에 여전히 환상을 갖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5) 자본주의 데카당스의 경제적 토대

세계대전은 자본주의가 데카당스 단계로 들어섰음을 알리는 첫 번째 잔인한 조짐이다. 그 전쟁은 사회의 경제적 토대 안에서 발전했던 모순과 분명히 연관되어 있었다. 실제로 전쟁은 이러한 모순의 순수한 산물이다.

A) 데카당스시기에 전쟁의 근원적인 경제적 원인

이미 우리가 지적한 바와 같이, 맑스는 자본주의는 잉여가치 일부의 실현을 위하여 비자본주의 국가와의 교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과, 그리고 이 필요가 자본주의에 특수한 잉여가치, 즉 임노동에 대한 전유양식의 결과라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자본가에게 노동자의 임금을 가능한 한 최소로 줄이도록 강제하는 것은 이러한 전유양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는 자신들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필요하지 않은 상품을 살 수 없고, 따라서 자본주의 안에 구매력을 가진 시장을 확대하는데 하나의 요소를 이룰 수 없었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자신의 생산관계 영역 밖에서 끊임없이 상품의 판로를 찾아야 했다.

"두 번째로 그는 생산수준이 임의적으로 선택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전하면 할수록, 즉각적 수요에 관계없는 세계시장의 지속적 팽창에 의존하는 규모로 생산을 하게 된다. 그는 세이(Say)의 사소한 가정에 의지한다. 즉 자본가는 이윤이나 잉여가치를 위해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가치를 위해 생산한다. 그는 상품이 화폐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노동자의 수요는 충분하지 않다. 이윤은 노동자의 수요가 그들의 생산가치보다 작다는 사실로부터 발생한다."("잉여가치론 제2부 ‘리카도의 이윤이론 - (e) 이윤율 저하와 지대이론과의 연관에 대한 리카도의 설명", 468쪽)

지구적 자본주의는 비자본주의 세계와 교환해야 한다. 이러한 필요는 힘을 적게 가지거나 많이 가진 각각의 자본주의 국가에 강제로 영향을 끼치고, 다른 강대국의 힘을 빌리지 않고 그러한 시장에 접근하기 위해 자신의 식민제국을 확보하도록 한다. 그 결과,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세계와 식민지 시장은 모두 경제 강대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때부터는 어떤 국가든지 새로운 식민지를 얻으려면 자신의 경쟁 상대를 희생시켜야만 했다.

따라서 세계전쟁은 자본주의의 극복할 수 없는 경제 모순에서 빚어진 경제위기의 직접적 결과가 아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경제위기의 산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도, 그 뒤 일어난 전쟁들도 경제위기의 산물이었다.

자본주의가 점점 더 그 자신의 모순에 빠져들 때, 그 모순이 경제적 관점에서 점점 더 비합리적이 되자, 전쟁의 성격은 질적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비합리성은 자본주의가 발전하게 하기는커녕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차 없이 멈추게 하였으므로 이미 제1차 세계대전 때에도 있었다. 어느 진영에서 싸웠든지 간에 전투에 참여한 대부분의 경제는 전쟁으로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미국만이 총체적인 승자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뒤, 전쟁의 경제적 목적은 - 다른 말로 하면 경쟁자의 시장을 점령하는 것은- 그 자신의 득이 되게 세력균형을 유지하거나 개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순수한 전략적 고려에 길을 내어주는 경향이 있었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은 이를 뒷받침하는 현저한 보기이다. 왜냐하면 석유에 대한 통제는 근본적으로 경제적이 아닌 전략적 동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구적 수준에서, 모든 국가를 군사주의와 전쟁으로 몰고 가는 것은 경제적으로는 출구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B) 1929년과 1930년대의 위기 그리고 구조적인 대량실업의 폭발

자본주의의 역사는 지구에 대한 정복의 역사다. 이 발전은 비자본주의 경제와의 교역의 발전, 그리고 비자본주의 경제가 자본주의 생산관계로 통합되는 것과 뒤얽혀 있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생산 도구들의 급속한 개선과 한없이 편리해진 교통을 통해 모든 국민들을, 가장 미개한 국민들까지도 문명 속으로 잡아당긴다. 부르주아지의 값싼 상품 가격은, 부르주아지가 모든 만리장성을 쏘아 무너뜨리고 외국인에 대한 야만인들의 완고하기 그지없는 증오를 굴복시키는 중포(重砲)이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국민들에게 망하고 싶지 않거든 부르주아지의 생산 방식을 취하라고 강요하며, 이른바 문명을 자국에 도입하라고, 다시 말해 부르주아가 되라고 강요한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자기 자신의 형상을 따라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칼 맑스, 『공산주의자 선언』, Pelican Marx Library, 71쪽)

이 운동의 결과는 자본주의 경제가 "정상적" 조건에서 축적을 계속할 수 있도록 생산의 일부를 흡수할 수 있는 비자본주의 시장이 존재하여야 한다는 필요성에는 어떠한 감소도 없이 비자본주의 시장의 크기가 감소하는 것이다.

1929년의 위기는 순전히 경제적 수준에서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극복 될 수 없는 모순이 처음으로 노골적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1929년의 위기는 자본주의 상승기의 순환적 위기와 마찬가지로, 과잉생산의 위기였다. 그러나 상승기의 순환적 위기와 달리, 1929년의 위기는 새로운 성장을 위한 지속적인 근거를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을 개방함으로써 해결될 수 없었다. 그 위기는 새로운 축적의 순환에 불을 지피기 위하여 잉여가치를 실현할 자본주의의 필요에 비례하는 비자본주의 시장의 포화상태로 향하는 지구적이고 증가하는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1930년대 동안 경제 상황의 미미한 개선은 사실 경제를 통제하고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세계전쟁에서 군수생산의 필요를 충족시키도록 그 경제를 변형시키기 위한 국가자본주의 조치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조치들은 자본주의의 이겨낼 수 없는 모순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하기는커녕 당분간 모순을 미루어 놓는 것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미 수많은 국가자본주의적인 조치들을 채택하도록 자본주의를 강제했다. 그러나 분쟁이 끝나자, 부르주아지는 아직도 전쟁 전 황금시대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환상 속에서 애를 썼다. 그 후 몇 년 동안 사회ㆍ경제생활 전반에 대한 국가의 지배(국가자본주의)를 향한 경향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1929년의 위기는 제2차 세계대전의 뒤에 일어났던 유례없는 번영의 날들에 의해서만 단절되었던 영구적인 경제 위기의 시대를 열어 놓았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위기는 구조적인 대량 실업의 발생으로 특징 지워 졌다. 그러한 대량 실업은 1930년대 동안 공공사업과 무기 생산 정책, 1939-1945년 동안 전쟁, 그리고 그 뒤 제2차 세계대전 뒤에 일어났던, 비교적 짧은 시기에 있었던 재건을 통해서 일시적으로 해소되었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1929년 이래 실업은 실업자가 자본에 필요한 산업예비군을 형성했을 때인 20세기의 실업과 달랐다. 그것은 세계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과잉생산의 영구적 위기의 표현이다. 세계경제가 발전할 여지가 충분하지 않다는 정황에서는, 각각의 국민 자본과 개별 자본가는 경쟁력을 갖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이 노동력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영구적 과잉생산의 표출은 다음의 두 가지 수준에서 자본주의 모순의 전체를 폭로한 것이다.

첫째, 사회 안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가 가장 집중되어 있고 가장 경험이 많은 국가에서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도 실업구제를 도입하여야 하였다. 이러한 실업구제는 경제에 엄청난 부담을 주는 비생산적 비용이다.

둘째, 유일하게 가치를 생산하는 생산력인 프롤레타리아트를 생산과정에서 축출함으로써 부르주아지는 노동계급의 착취에 기반을 둔 체제의 기초를 끊임없이 약화시킨다.

1945년 뒤 재건 시기 : 자본주의 삶의 새로운 임차인가, 또는 병든 사회체제의 반응인가?

제2차 세계대전의 뒤를 이은 20년 동안 성장률은 자본주의 상승기 동안 이루었던 가장 높은 성장률보다 더 높았다. 이러한 성장률은 자본주의가 그 위기를 결정적으로 극복했다고 주장하는 지지자들이 즐겨 쓰던 ‘단골 메뉴'였다. 전쟁이 끝난 뒤 자본주의가 높은 성장률을 이루자, 혁명 진영에서는 자본주의 데카당스의 실재를 둘러싸고 회의주의가 널리 퍼졌다.

이러한 성장률은 사실 노동생산성의 실질적 증가로 가능했다. 물론 이 노동생산성의 증가는 어느 정도 노동계급의 생활조건을 함께 개선시키기도 했다. 또한 자본주의가 공공연한 위기로 선회한 첫 조짐은 1960년대 말에 나타났지만, 1970년대에는 성장률이 상대적으로 높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21세기 초에 우리의 위치가 허용한 뒤늦은 지혜를 가지고 총체적으로 20세기를 돌이켜 볼 때, 재건의 시기가 사실은 자본주의가 불가피하게 위기로 미끄러지는 것을 특징으로 한 시기에서 하나의 예외라는 점을 우리는 좀 더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또한 다음을 지적해야 한다.

첫째, 옛 사회와 달리, 그리고 트로츠키가 1930년대 믿었던 것과 반대로, 자본주의의 데카당스로의 진입은 생산력 발전의 중지가 아니라, 생산력 발전에 대한 항구적인 족쇄가 존재한다는 것으로 특징 지워 진다. 이것은 기술 발전의 완전한 이용이 시장의 부적합성에 의하여 제한받을 때에도, 옛 사회에서와 달리, 중대한 기술 발전이 자본주의의 존재에 결정적이기 때문에 본질적이다.

둘째, 데카당스의 일반 시기는 지배계급이 국가 개입을 통해 생산양식의 하강을 막으려하기 때문에 단기간의 번영시기와 모순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재건시기의 경제적 경기상승에 대한 일반적 설명을 하기로 한다.

첫째, 우리는 성장의 전체통계에 비생산적 자본, 특히 무기생산에서의 상당한 몫을 포함하고 있다는 현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국민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 덕분에 노동생산성의 중요한 증가로부터 부르주아지가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지만, 이러한 생산성 증가는 부분적으로 비생산적 자본으로의 쓸데없는 낭비에 기인한 자본주의적 축적으로 "상실"되었다.

둘째, 이러한 상대적 번영시기의 밑에 깔린 다음의 요인들을 강조해야 한다.

① 본질적으로 「마샬플랜」의 제국주의 계획 덕택으로 서유럽과 일본의 재건에 의한 힘

② 각국내의 국가자본주의의 발전과 제국주의 블록(IMF, EEC, 세계은행, COMECON 등)의 수준에서 국가자본주의 조치의 채택은 커지는 경제모순을 조절하고 시장의 제재를 잠정적으로 피하게 했다.

③ 부채가 상당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④ 남아있는 비자본주의 시장의 보다 효율적인 착취, 기술발전, 통신과 교통비 하락은 살아있는 비자본주의 시장에 대한 집중적 침투를 촉진시켰다. 게다가 강대국은 탈식민정책을 펼쳐 자신들이 짊어진 비싼 짐(식민지 관리와 그 지원에 필요한 주둔군의 비용)을 줄였고 옛 식민지에 대한 판매를 늘릴 수 있었다.

재건시기의 경제호황의 밑에 깔려있는 구체적 요인들이 소진되자, 부채의 일반적 증가는 지불능력 있는 시장의 부적합성에 대한 중요한 완화제가 되었다. 자본주의 모순에 대한 기적적인 치료가 되는 것과 달리, 이것은 1970년대 동안 수많은 아프리카 국가로부터 시작해서 1998년 많은 ‘호랑이'와 ‘용'에게 퍼져나가면서 채무국 사이에 오랫동안 일련의 파산으로 이끌게 했다. 파산 국가의 목록은 분명히 완전히 공개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비밀로 유지되지도 않았다.

6) 인류가 지금까지 알아온 가장 야만적인 세기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가장 열성적으로 변명하는 사람들조차 20세기를 인류가 지금까지 고통스럽게 겪었던 가장 어두운 시기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인류역사는 온갖 종류의 잔인성, 즉 종교, 언어, 문화, 인종을 기반으로 고문, 학살, 대량추방 또는 전 인류의 절멸로 가득 차 있다. 로마군대에 의한 카르타고의 소멸, 15세기 중엽 아틸라의 침공, 782년 하루에 4천5백 명 생존 포로에 대한 샤르만느의 처형, 종교재판 때 고문과 화형, 미국에서 인디언 절멸 그리고 16세기와 19세기 사이의 아프리카인 수백만의 노예매매는 어떤 학생도 역사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조그만 보기에 불과하다. 비슷하게 인류역사는 이미 쇠퇴와 재난의 길고 비극적인 시기의 다른 보기도 보여주었다. 즉 로마제국의 쇠퇴와 몰락, 중세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백년전쟁, 18세기 동안 독일을 초토화한 30년 전쟁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인류에게 들이닥친 이러한 종류의 모든 재난을 고려한다하더라도, 우리는 20세기에 자본주의가 가져다준 고통과 동일한 것을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첫째, 제1차 세계대전 : 5백만 피난민, 천만의 사상자, 그 두 배의 부상자와 불구자 그리고 인류에게 전쟁의 궁핍으로 악화시키고 전쟁 그 자체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든 질병(1918년의 인플루엔자 전염병)의 영향

둘째, 1918년과 1921년 사이에 러시아 혁명에 맞서 부르주아지가 저지른 끔직한 내전에서 6백만이 죽었다.

셋째,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벌어진 전쟁(중일전쟁, 스페인 내전) 그리고 스탈린 병영에서 2천만 명 이상이 죽었다.

넷째, 제2차 세계대전 : 4천만 명의 피난민, 5천만 명 이상의 사망자, 그 이상의 부상자와 불구자

다섯째, 1945년에 시작된 "평화의 시기"는 실제로는 결코 평화의 시기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150내지 200번의 국지전(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같은 주요 분쟁을 포함하여)이 있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야기한 수보다 더 많은 사망자를 기록했다.

단순한 숫자를 떠나서 우리가 오늘날 강조해야 하는 두 가지 특별한 측면이 있다.

  1. 역사상 최초로 역사적으로 쇠퇴하는 사회에 의해 인류에 닥친 재난이 어느 구석도 남기지 않고 어떤 종(種)도 남기지 않고 온 지구를 덮고 있다는 사실
  2. 존재하는 사회와 역사적으로 창조된 부의 발전에 의해 열려진 가능성 사이에 거대한 간극이 지금까지 결코 없었다는 사실

과학의 지배와 노동생산성의 예외적 증가를 통해 이러한 잠재적 부의 기초를 놓은 것은 자본주의 사회이다. 노동계급에 대한 잔인한 착취 덕으로, 자본주의는 이윤욕구와 소수의 욕구만족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끊임없이 확장하는 욕구의 만족에 의해, 앞으로 나아갈 사회에 의해 대체되도록 하게 만드는 물질적 조건을 창조했다. 이러한 물질적 조건은 20세기 초부터 존재해 왔다. 자본주의는 노동계급이라는 가장 주요한 생산력을 포함하는 생산력의 전대미문의 확장을 허용하는 역사적 과업을 완수했다. 그 전에 존재했던 노예사회나 봉건사회처럼 자본주의가 역사의 단계를 떠날 만큼 긴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사라질 수 없다. 1848년 『공산주의자 선언』에 제시되었듯이, 역사가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 선언한 사형선고를 프롤레타리아트가 집행하는 것이다.

7) 자본주의 데카당스의 함의

자본주의 사회의 데카당스의 실재를 이해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상승기로부터 쇠퇴기로의 이행이 프롤레타리아트가 투쟁하는 물질적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국제주의, 그리고 투쟁이 역사적으로 나아가는 공산주의의 미래라는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기본원칙은 똑같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들이 투쟁으로 실천되는 방식은 크게 달라졌다. 투쟁을 위한 노동자 조직(노동조합 문제, 의회 활동 문제), 사회 속에서 다른 계급과의 관계(민족문제, 이른바 "부분투쟁"의 문제)는 오늘날 1914년 제1차 세계 제국주의전쟁과 1917년 러시아에서 시작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첫 번째 권력에 대한 세계적 공격이 열어 놓은 자본주의 역사에서의 새로운 시대가 결정짓게 된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데카당스 시대가 열리자, 노동자 투쟁의 이해관계에 관련된 문제가 제기되었다. 19세기에 노동자들은 생활조건을 보호하고 자본가 계급에 의한 착취를 줄이기 위해 싸웠다. 그런데 오늘날 자신을 방어하려는 노동자 투쟁은 일반화된 전쟁과 야만으로의 미끄러짐에 대항하는 유일한 장애물이다. 19세기에 노동자들은 사회에서 일정한 "위치"를 허락하는 확장된 경제체제 안에 자기방어를 조직했다. 그런데 오늘날 모든 노동자 투쟁은 노동자와 이런 저런 기업의 사주사이가 아닌 전체 노동계급과 자본가 계급 사이의 힘의 균형, 즉 권력의 문제를 즉각적으로 제기한다.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2006년 10월)

세계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재기 및 계급투쟁의 전망

이 발제문에서 우리가 제기하려는 질문은 우리가 계급투쟁을 어떻게 분석해야 하는가이다.  어떻게 우리는  주어진 시기에 - 특히 현재 -  노동계급의 일반적 조건을 그리고 계급역량의 균형에 의해, 즉 부르조아계급과 프롤레타리아계급 사이의 역균형에 의해 결정되는 가능성들을 결정해야 하는가?

계급 역균형을 파악하는 것은 단순히 파업 일수를 헤아리는 문제나 노동자의 전투성의 정도를 가늠하는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1930년대의 프랑스를 보면, 1938년의 인민전선의 선거승리이후 대중파업들과 시위들과 심지어는 공장점거들이 발생하여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포함하면서 몇주간이나 지속되었지만 여기서 우리는 노동자들의 전투성의 강력한 정도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그 자신의 목표를 위한 투쟁의 정도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볼 수 있다. 파업들이 있은 후  7월 14일(프랑스 민족주의의 기념일)의 시위들에서 노동자들은 최초로 노동자운동의 붉은 깃발과 부르조아국가의 삼색기 두가지 모두의 뒤에서 행진했다. 노동자들은 고용주들을 양보하게 만든것이 그들의 „옹호자들"이 권력에로 선출된 덕분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인민전선이 권력을 잡은 뒤  3년후 그리고 노동계급의 이러한 대규모의 동원이 있은 지 3년후 노동계급은  부르조아계급의 민족국가적 이익의 수호를 위한  6년간의 제국주의적 살육으로 끌려갔다.   

그래서 역사적 유물론의 방법을 충실히 유지하는 것과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 시기에 대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계급과 부르조아계급 사이의 역균형을 결정하는 상이한 요소들에 대한 전반적이고 총체적인 이해를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예를 들어 공산당선언의 1888년 영어판 서문을 위해 엥겔스가 쓴 다음과 같은 말을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은 맑스와 엥겔스의 방법이었다: „ 선언은, 처음에는 전적으로 독일의, 나중에는 국제적인 그리고 1848 이전의 대륙의 정치적 상황때문에 불가피하게 비밀조직이었던 노동자단체공산주의자동맹Communist League 강령으로서 출판되었다. (...) 1848 6월의 파리폭동 - 프롤레타리아계급과 부르조아계급사이의 최초의 대전투 - 패배는 유럽노동계급의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야망을 당분간은 다시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 독립적인 프롤로레타리아운동이 계속 생명을 유지하는 곳마다 그것은 무자비하게 추적당하고 사냥되었다. (...) 유럽노동자들이 지배계급에 대한 재공격을 위한 충분한 힘을 회복했을때 국제노동자협회 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 솟아났다. 그러나 협회는 유럽과 아메리카의 전투적인 프롤레타리아계급 전체를 하나의 조직체로 주조해 낸다는 명백한 목적을 갖고 건설되었기에 선언에 담긴 원칙들을 당장 선포할 수가 없었다..."(자체번역).

맑스와 엥겔스의 모든 작업으로부터 그리고 노동계급의 구체적인 경험으로부터 우리가 도출해내는 교훈은,  혁명적 행동은 어떤 순간에라도 가능한 그런 것이 아니며 혁명가들의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1848년에 그랬듯이 노동계급이 중대한 패배를 당하면 계급 역량의 균형은 한 시기동안 부르조아계급에 유리하도록 결정적으로 이동한다. 노동계급이 패배로부터 회복하는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한가지 점은 자본주의사회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부르조아계급은 맑스의 표현대로 그 자신의 무덤파는 자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을 착취함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고 결과적으로 프롤레타리아계급은 항상 투쟁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이 패배했을 때는, 항상 새로운 힘, 새로운 세대가 과거의 패배로부터 일어나서 투쟁을 다시 이어왔다.

새로운 시기를 연 1914년

1914년에 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자본주의 사회의 생존에 있어 하나의 새로운 시기, 자본주의의 쇠퇴기가 개막되었다. 갑자기 프롤레타리아투쟁이 역사상 그 이전의 어떤 시기보다도 첨예하게 전개되었다.  선택은 더 이상 더 강도가 높거나 낮은 착취사이의, 더 하거나 덜한 반동시기들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전쟁과 혁명사이에, 프롤레타리아계급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가 사느냐 죽느냐 사이에 있었다. 전세계적 혁명을 이끌기 위해 1919년 창설된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은  이 새로운 시기를 „전쟁들과 혁명들의 시기"로 묘사하고 그 함의들을 너무나 분명하게 이해했다: 만약 노동계급이 기회주의자들의 설교에 의해 기만당한다면, „자본주의적 발전은 수많은 새대들의 위에 새롭고 집약된 그리고 괴물같은 형태들로써 회복을찬양하게 것이고 전망은 새로운 그리고 불가피한 세계전쟁이 것이다. "  

이새로운 시기- 우리가 여전히 살고 있는-  의  현재 우리와 관계된 주요한 특징들은 무엇인가?

  1. 전 세계적 제국주의간의 전쟁으로의 경향은 자본주의 사회의 영구적인 특징이 되었다.
  2. 제국주의 전쟁 와중에 혁명을 개시하는 것이 이제는 더 이상 불가능할 것이다. 1914년의 노동계급의 불완전한 패배이후, 이는  노동계급이 1917년 러시아에서 그리고 1919년 독일에서  혁명적 급습을 개시할 수 있었음을 의미했는데, 그 이후 지배계급은 혁명의 위험을 알게 되었다. 러시아와 독일에서의 혁명들의 패배 이후  프롤레타리아계급이 경험한 가장 야만적인 반혁명들이 뒷따랐지만 부르조아계급은 노동계급의 위협에 직면해서 그것이 느꼈던 공포를 결코 잊지 않았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종결은 특히 패전국들에서의 노동자폭동의 모든 가능성들을 체계적으로 제거한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연합군은 1943년 이탈리아노동자들의 폭동들을 독일군이 무자비하게 진압하도록 내버려두었고,  스탈린의 적군은 바르샤바 앞에서 멈춤으로써 나치가 바르샤바봉기를 절멸할 시간을 주었으며 영국군과 미군은 고의적으로 공장들이 아니라 노동계급지구들을  표적으로 하여 독일의 산업도시들을 대대적으로 폭격했다.  독일이 붕괴되었을 때,  연합군은 전쟁이 노동자와 병사의 반란으로 종결되었던 1918년의 그것과 유사한 상황에 직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독일군과 첩보부들가 제시한 항복을 위한 모든 비밀제안들을 무시한 채 그 나라 전체를 점령했다.
  3. 어느 때보다도, 계급역량의 총체적인 균형은 나라 마다가 아니라 국제적으로 결정된다. 우리는 세계대전과 세계혁명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은 한 국가에서의 명백히 혁명적 상황(1936년의 프랑스나 스페인의 예에서와 같은)이 노동계급의 국제적인 패배에 의해 결정된, 전쟁으로 향한 진로를 전도시킬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역으로, 한 국가에서의 노동계급의 패배가 반드시 혁명으로 향한 진로의 전반적 패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4. 1870년 파리코뮨의 경험을 근거로 혁명가들이 생각했던 (그리고 1905년과 1917년 러시아혁명들의 경험들에 의해 확인된 듯이 보이는 ) 것과는 반대로, 전쟁으로 향하는 역사적 진로와 혁명으로 향하는 역사적 진로는 동시적일 수 없다.  오히려 그것들은 대조적이다. 부르조아계급이 총력을 다해 전면화된 제국주의전쟁을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이 전쟁터에서 죽을 각오가 그리고 후방에서는 최대의 물질적 궁핍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해서 그것이 완전히 패배당했어야 한다.

우리가 말했듯이, 1917년에 시작된 혁명물결의 패배를 이어 역사상 가장 지독한 반혁명이 뒤따랐다.  계급이 물리적으로 분쇄당했을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재앙은 더더욱 심각했다. 한때 노동계급의식의 최고의 표현이었던 것들(1914년까지의 사회민주당, 1919년 이후의 공산주의인터네셔널)이 파괴되었거나, 심지어는, 만연한 반혁명을 여전히 노동계급 자체의 이름으로 방어하고 있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을 가능케 했던 그 패배-노동계급이 3년뒤 극복했던- 와 혁명물결을 뒤 이은 그 물리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패배를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패배는 소련에서 „사회주의조국"가 존재한다라는 많은 노동자들의 믿음에 의해 훨씬 더 심각했고 그 결과들은 중첩적이었다: 그들은 스탈린주의 당의 영향하에서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이해의 주체로 만들어짐과 동시에, 스탈린주의적 소련의 야만성을 거부하며 사회민주당들로의 회귀 이외에는 어떤 다른 해답도 찾을 수 없었던 다른 노동자들로부터 분리되었다.  파시즘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가 제국주의 세력의 승리로서가 아니라 노동계급의 승리로서 제시되었을때 사태는 한층 더 악화되었다. 국제주의자들은 그들의 계급의 행동에 있어서 어떤 영향력도 완전히 상실한 작은 그룹들 안의 극소수의 투쟁가들로 남게 되었다.

그 패배는 매우  심각해서 그 결과 전후재건기의 경제붐 동안 마르쿠제와 같은 자칭 혁명적 공론가가 노동계급의 혁명적 본성의 소실을 선언하는 것이 대단한 유행이었다. 노동계급의 자리는 앞으로는  추측컨대 다른 사회계층들, 즉 학생들, 미국에서의 흑인민중들, 제 3세계의 농민들 등등에 의해 차치될 터였다.      

재건기는 또한 부르조아계급 내부에서, 그것이 자신의 경제적 문제들을 확실히 극복했다는 그리고 1929년의 지독한 위기는 이제 추억에 불과하다는 또 다른 환상을 낳았다. 그러나 1960년대 말엽  경제위기의 귀환의 첫 징후들이 재발하여 자본주의세계를 괴롭히면서 이 환상은 희박해졌다.  그리고 위기의 귀환과 더불어 전쟁의 새로운 위험이 나타났다. 1939년의 독일처럼 1960년대말의 소련은 자신의 주요한 제국주의적 경쟁자들에 의해 군사적으로 포위당하고, 승리한 전쟁의 열매들에 의해서만 보상될 수 있는 엄청난 비용의 전쟁무기로 부담지워진 자신을 발견했다. 2개의 세계적으로 강력한 제국주의세력들의 군대들과 대리자들이 „민족해방"의 무수한 충돌들 속에서 서로 싸웠고, 독일에서 그들은 핵전쟁의 세기말적인 위협을 등에 업고서 세계사상 가장 거대한 군사력의 축적을 가진 „철의 장막"의  양쪽에서 대치했다.

제국주의 전쟁은 아직 발발하지 않았다.  왜?

대답은 프랑스에서의 1968년 5월의 사건에 있다 - 또는 오히려 노동계급의 재각성에 그리고 이 사건이 그 한 표현인 반혁명의 종결에 있다.

부르조아계급의 공론가들은 1968년 5월을 „학생폭동"으로 생각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래서 이 사건들의 실체를 한번 기억할 만 하다: 사실, 1968년 프랑스는 9백만 이상의 노동자들이 파업하여 나라 전체가 완전히 정지함으로써 역사상 가장 큰 파업을 보여주었다. 겁에 질린 프랑스 대통령(드 골)이 군대를 통한 폭동의 진압이 필요시 군대의 지지를 확신하기 위해서 독일의 프랑스점령군을 휘령하는 장교들을 만나기 위해 독일로 떠날 정도였다.   그리고 프랑스는 단지 그 시작에 불과했다: 1969년의 이탈리아, 1970년 그런 다음 1976년의  폴란드에서의 노동자폭동, 발전소의 석탄부족으로 인해 정부가 주 3일근무를 강요할 수밖에 없었던  1973년 영국의 광부파업,  코르도바의 산업지역의 통제권을 노동자들이 사실상 거머쥐었던 1969년 5월 아르헨티나의 그 유명한 „코르도바사". 이들은선진국과 제 3세계국가 양자 모두에서 있어서  그리고 2개의 제국주의 블록들을 분할하는 철의 장막의 양 측 모두에서  있어서 세계의 산업지역들을 휩쓴 계급투쟁의 물결의 단지 몇몇 예들에 불과하다. 

동시에,  노동계급의 이러한 각성과 더불어, 기존의 그룹들의 발전과 새로운 그룹들의 출현들에서 표현되는 바와 같이 정치의식이 고양되었다. 프롤레타리아의 이러한 새로운 정치운동의 가장 중요한 측면들 중의 하나가 세대간의 괴리를 극복하려는 노력이었다. 혁명가들이 과거의 계급투쟁과의 연결을 쇄신하려 하면서 공산주의좌파의 입장들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판네쿡, 고르타, KAPD, 로자 룩셈부르크 및 보르디가가 재출간되었다. 그들은 또한 반혁명에 의해 끊어진 국제적 유대를 쇄신하게 되었다. 한 가지 예는 통신과 토론의 국제적 네트워그로서 그것은 1975년 ICC의 창립을 결과시켰다.

분명히, 이 그룹들은 극소수였고 계급투쟁 자체에 대해 어떤 중대하고 직접적인 영향력도 갖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노동계급 내부에서 그리고 특히 반혁명과 세계대전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새대의 노동자들에게서 진행되는 한 과정의 전조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세대는 전후의 붐과 경제위기의 시작과 대면하여 이에 대해 미래를 위한 크다란 희망을 품은 투쟁의 물결 속에서 대응하였다.

그 10년 후 1979년에 계급투쟁의 이러한 고조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침공에 의해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그 이래 발생한 모든 것과 더불어 이 사건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를 잊거나 소홀히 하기 쉽다: 1945년 이래 최초로 소련이 그 자신의 블록 외부에 위치한, 그 자신의 직접적인 영향력권 밖의 국가를 침공한 것이다. 소련은 경제위기에 의해서 그리고 그보다 더 강한 경쟁자 미국에 대항해 세계 제 2위의 제국주의 권력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가 위해서 요구되는 무기생산의 엄청난 무게에 의해 점점 더 불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1914년과 1939년의 독일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권력들 중에서 더 약한 자가 다시 한번 세계를 전면전의 위험에로 위협했다. 이번에는 배후에서 아른거리는 핵전쟁의 위협을 가지고서. 세계는 중대한 질문에 직면했다: 노동계급의 반응이 어떠할 것인가? 1970년대의 투쟁들에 의해 열려진, 혁명으로 향한 진로가 전도될 것인가? 부르조아계급이 쇠퇴한 자본주의의 경제위기에 대한 그 자신의 해답, 즉 세계대전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대답은 1980년 폴란드노동자들의 장대한 투쟁에 의해 주어졌다. 그들은 유럽 - 두 블록사이의 결정적인 대치가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 의 노동계급이 소련 블록의 „사회주의"국가이든 아니면 미국블록의 „민주주의"국가이든 상관없이 민족국가의 이해를 위해  그들 자신의 이해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노동자평의회와 동일한 기초(대중집회들, 그들을 선출한 대중집회를 책임지는 선출되고 재소환가능한 대리자들,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열린 공간에서 진행된 정부와의 협상들... )위에 그들 자신의 조직들을 발전시킨 폴란드 노동자들은 확실히 바르샤바조약의 군대들로 끌려가서 전쟁으로 진군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1970년대와 1980년대초의 역사가 ICC로 하여금 역사적 양자택일, 전쟁으로 향한 진로냐 아니면 혁명으로 향한 진로냐에 대한  그것의 관점을 수정하도록 만들었음을 언급해야 한다. 전쟁으로 향한 진로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물리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패배당했어야 함과 전쟁의 발발을 방지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함을 의미하는 반면, 그 역이 혁명으로 향한 진로에 있어서 참인 것은 아니다. 이는 전세계적인 권력장악의 정확히 그 시점까지 부르조아계급이 자본주의사회의 지배적인 계급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에서 인용했던 공산주의인터네셔널의 난관적인 예언들에도 불구하고 러시아혁명의 승리조차도 전세계의 혁명의 승리를 보장할 수 없었다.  결국, 1983년의 ICC 제 5차 회의는 역사적 실상에 더 알맞은 용어를 채택했다: „계급대치를 향한 진로의 존재는, 우선 노동계급과 대결하여 패배시켜야 하기에 부르조아계급이 새로운 세계대학살을 개시할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식으로든 이러한 대치의 결과를 미리 판결하지 않는다. 때문에 혁명으로 향한 진로'라기 보다는 오히려계급대치를 향한 진로'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국제상황에 대한 결의, 인터네셔널리뷰 제 35호에 출간됨)

1980년의 폴란드투쟁들은 제국주의전쟁의 위협을 막았다 - 하지만 역사는 중단되지 않았고, 노동계급이 계속적으로 위기의 전개에 저항하고 전쟁으로의 길을 막을 것인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미결로 남았다. 결국, 1980년대 동안 계속된 평탄하지 않은 계급투쟁의 발전은 노동계급이 패배하지 않았고 세계대전으로의 길은 닫힌채 남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의 어떤 투쟁들은 20세기의 시작이래 볼 수 없었거나 어떤 경우에는 그때까지 전혀 볼 수 없었던 높이에 도달했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 1980년대 네덜랜드를 강타한 파업물결은 1903년의 대중파업이래 그 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 영국광부들은 1985년 파업에 들어가서, 대처정부가 거의 그 광산지역의 군점령을 방불케하는 대책을 마련하는 동안 1년간 계속했다.
  • 1985년에는 덴마크사상 최대의 파업이 있었다.
  • 1986년말 프랑스에서는 몇 주간이나 지속된 대중철도파업이 있었고, 1988년말에는 병원노동자들의 대대적인 파업이 있엇다. 두 경우 모두에서 노조들은 사건들에 보조를 맞추는데 큰 곤란을 겪었다.
  • 1987년에는 이탈리아의 모든 교육부문이 일련의 대대적인 대정부투쟁을 전개했다: 여기서도 노동자들은 „고전적인" 노조조직들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투쟁의 물결은, 1980년대 한국노동운동과 광주에서의 투쟁의 예에서 우리가 볼 수 있듯이  결코 유럽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양 블록의 부르조아계급이 제국주의 전쟁을 개시할것인가를 결정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유럽에서의 투쟁들이었고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 노동계급이 가장 집중되어있고 정치적 조직적으로 가장 긴 역사적 경험을 가진 곳이 유럽이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은 그 주요 대대가 격파됨이 없이는 전체적으로 패배당할 수 없을 것이다;
  • 부르조아계급이 가장 집중되어 있고 노동계급을 다루는데 가장 경험이 많은 곳 또한 유럽이기 때문이다;
  • 그 당시에 지구상에서 가장 집중되고 산업화된 지역인 유럽은 소련 부르조아계급에게 있어 주요 포획물 즉, 러시아 부르조아계급으로 하여금 그 미국경쟁자를 유럽대륙에서 몰아내고 소련에 결여된 선진산업역량을 움켜쥘 수 있게 해줄 그래서 그 자체의 군사적 잠재력을 증강시킬 그러한 포획물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주요 특성들은 무엇이었는가?

  • 생활수준의 방어에 있어서, 특히 해고에 대항한 투쟁들에서의 끊임없이 재확인된 노동자들의 전투성
  • 정부에 대한 깊은 불신
  • 투쟁의 „조직자"로서의 노조에 대한 증대하는 불신, 이는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일반조합원 유니온 구조들(극좌 정치조직들에 의해 통제된)의 발달을 초래했는데, 그 목적은 노동자들 자신의 대중집회를 사전중지시키고 투쟁의 조직을 전적으로 노조의 손 안에 유지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의 시기는 그래서 노동계급의 근본적인 강점과 근본적인 약점 양자 모두를 특징으로 했다:

  • 한편으로, 계급투쟁의 강함은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이 -1930년대와는 달리- 그들 자신의 생활조건 방어를 위해서 끊임없이 투쟁했고 „사회주의 조국의 수호"나 „민주주의의 수호"의 깃발아래 스스로를 편입시키도록 허용하는 것을 거부한 사실은 지배계급이 그들의 위기에 대한 그들 자신의 „해법" , 즉 제국주의 전쟁을 개시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의미했다.
  • 다른 한편으로는, 전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자본주의 내부에서의 그것의 존재를 즉각적으로 옹호하는 것을 넘어서는 투쟁을 발전시킬 수 없었다. 대부분 노동자들은 1960년대와 재건기의 조건들로의 회귀가 가능해서 자본가계급의 공격을 물리치기 위해 임금인상을 위해 또는 해고를 반대하여 파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환상을 여전히 갖고 있었다. 그들은 부르조아계급의 공격들이 이런 저런 국가수반(예를 들어 마가렛 대처나 로날드 레이건같은 „반동들")의 „나쁜 정책들" 때문이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가 해결불가능한 위기 속으로 가차없이 전락한 것 때문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과소평가했다. 세계 전역에서 공산주의 좌파의 계속된 약세는 그 자체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자본주의의 전복과 새로운 공산주의사회의 건설이라는 그 자신의 역사적으로 결정된 목표를 재발견할 수 없음의 한 표현이었다.

사실상, 1980년대의 사회적 상황은 하나의 궁지에 의해 특징지워지는데, 즉, 부르조아계급은 전쟁으로 나아갈 수 없었고, 프롤레타리아계급은 혁명적인 공세를 개시할 수 없었다.

이러한 궁지의 한 결과로서, 냉전은 1914년이나 1939년의 그것과 같은 전면적인 제국주의적 대학살에 의해서가 아니라, 두개의 제국주의 블록들 중 하나의 붕괴라는 역사적으로 전대미문의 사건에 의해 종결되고 결국 제국주의 라이벌의 부재로 인해 다른 하나의 해체를 야기시켰다.

이에 뒤이은 시기는 노동계급에게 있어서 심각한 혼란의 시기가 되어야만 했다:

  • 스탈린주의의 붕괴 그리고 전 세계 노동자들의 눈 앞에서 스탈린주의체제의 약점과 부패와 후진성의 폭로는 세계 전역의 승승장구하는 민주적 부르조아계급으로 하여금 사실상, „봐라! 이것이야 말로 너희들이 공산주의를 건설하려 노력할 때 얻게될 그것이다" 또는 대안적으로 „공산주의는 멋진 이상이지만 현실에서는 결코 기능할 수 없을 것이다- 소련을 한번 보아라"라고 말하는 거대한 캠페인을 벌이도록 허용했다.
  • „공산주의의 패배"에 대조되는 것은 물론 „자본주의의 승리"였다. 자본주의는 완벽하지 않을 지 모르나 유일하게 가능한 사회이고 그것의 영향들에 대항해서 투쟁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라고들 말했다. 참으로, 한 부르조아 공론가는 심지어 „역사의 종말"을 선언할 정도였다. 그것이 인류 전체에게 특히 노동계급에게 얼마나 많은 비참을 만들어내든 상관없이 자본주의 경제의 계속된 발전 이외의 어떤 가능한 전망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 역사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의 자의식에 대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타격은 인터넷에 의해 연료를 공급받은 소위 „신경제 new economy"의 외견상의 붐과 결합되었다. 이는 자본주의 외부에서는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는 관념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요소들이,  수 많은 나라들에서의 노동계급 의 전투성의 계속된 표현들에도 불구하고 왜 1990년대가 명백한 계급투쟁 그리고 공산주의좌파의 조직들의 운명 양자 모두에 있어서 심각한 퇴조를 표시하는지를 설명한다.  프롤레타리아혁명과 국제주의의 깃발을 여전히 높이 들고 있는 이들은, 최악의 경우에는 스탈린주의의 하수인들로 그리고 기껏해야 회복불가능한 과거에 사로잡힌 몽상가들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것에도 불구하고, 전체로서의 노동계급-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정치적 조직적 경험이 가장 큰 그러한 가장 발전된 나라들에서 특히 - 은 자본과의 맞대결에서 패배당하지도 않았고  부르조아계급이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부르조아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자발적이거나 열광적으로  고수하게 만드는 데 성공하지도 못했다.  간단히 말해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이 패배당하지 않은 채 남았다. 전면화된 제국주의전쟁으로의 진로는 닫힌채로 남겨졌다.

계급투쟁에서의 전환점

2003년 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의 대규모 동원들은 1989년 이래의 계급투쟁들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나타냈다. 그것들은 1968년이래 가장 긴 퇴조기 이후 노동자들의 전투성의 회복에서 첫번째 중요한 한 단계였다. 물론 1990년대에 이미 이러한 전투성의 간헐적인 표현들이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의 운동들의 동시성은 새천년의 시작이래 상황의 진화를 보여주었다. 실상, 이러한 사건들은 계급이 - 자신감의 계속적인 결여에도 불구하고 -  위기의 극적인 악화에 그리고 공격의 더욱 대대적이고 전면화된 성격에 직면하여 투쟁의 필요성을 회피하는 것이 점점 더 불가능함을 드러냈다. 이러한 변화는 계급의 전투성뿐만 아니라 그것의 대오 내에서의 기세에도, 그 행동들이 자리매김되는 전망에도 영향을 준다. 우리는 1990년대의 전형적인 신비화들(신기술혁명, 주식을 통한 개인적 부의 축적, „석유를 위한 전쟁들"의 이윤성)과 관련해서 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더 나은 삶에 관한 그리고 임노동의 공포를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상당히 괜찮은 연금에 관한  제 2차 세계대전 전후세대의 희망과 관련한 환상의 상실의 징후들을 목격하고 있다.   

계급투쟁에서 전환점들이 모두 1917년이나 1968년의 그것만큼 중요하거나 극적인 것은 아니다. 이러한 연도들은 역사적 진로에서의 교체들을 나타내는 반면, 2003년은 대대적인 계급 대치를 향한 진로의 연속성 안에서 한 퇴조기의 끝이 시작됨을 표시할 뿐이다. 더 일반적으로, 우리는,  말하자면, 다음날 깨어났을 때 세상이 더 이상 그 이전과 동일하지 않은 그러한 상황들과,  조수의 밀물과 썰물사이의 거의 비가시적인 교체처럼 세계 전반으로 볼때 처음에는 거의 알아챌 수 없게 발생하는 변화들 사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2003년에 시작되어 3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는 그 진화는 의심의 여지없이 후자의 유형에 속한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의  2003년 투쟁들의 특히 중요한 측면은 그것들이 노동자들의 연금에 대한 국가의 공격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점이다.  위기의 악화로 인해 부르조아계급은 정년퇴직연령을 높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면서 그것은 노동계급이 최근 몇십년간 부과된 점점 참을 수 없는 착취수준을 감내하게 하는데 주요한 부분을 담당했던 사회적 완충장치를  희생시켰다.

부르조아계급은 1970년대 대량실업의 도래에 대해 일련의 국가자본주의적 복지대책으로 대응했는데, 그것은 경제적 관점에서 볼때 전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았고 오늘 국가부채의 엄청난 증가의 주요 요소들중의 하나이다.  현재 일어나는 복지국가의 분해는 자본주의가 사회에 제공하는 진정한 전망에 관한 심오한 문제제기만을 자극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모든 공격들이 노동계급으로부터 동일한 방어적 반응을 자극하는 것은 아니다. 인금삭감이나 노동시간연장에 대항해 투쟁하는 것은, 자본축척과정의 일부인,  노동생산성상승(기술적 개선의 덕으로)의 결과로서의 상대적 임금의 감소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것보다 더 용이하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표현처럼: „노동자의 실제적인  생활수준의 저하를 초래하는 임금삭감은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가들의 가시적인 급습이고 일반적으로 (...) 즉각적인 투쟁과 같은 것으로써 대응될 것이며, 최상의 경우에 물리쳐질 것이다. 이것과는 반대로, 상대적 임금의 저하는 외관상으로는 자본가들의 어떤 인격적인 개입도 없이 발생하며, 이에 대항하여 노동자들은 임금체계내부에서, 상품생산의 영역에서 투쟁과 저항의 어떠한 작은 가능성도 갖고 있지 않다(국민경제에 대한 개요). " (자체번역)

실업의 증가는 노동계급에게 있어서 착취의 강화(상대적 임금에 대한 공격)와 마찬가지의 어려움을 제시한다. 실업이 지금까지 노동해 본 적이 없는 젊은 이들을 공격하면, 그것은 해고의 경우에서와 같은 폭발적인 효과를 갖지 않는다. 대량실업의 존재는 사실상 노동계급의 즉각적인 투쟁을 방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증대하는 수의 여전히 노동하고 있는 이들에 대해 그것이 항상적인 위협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과격한 사회변혁을 쟁점화함이 없이는 대답될 수 없는 질문들을 제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임금의 상대적 감소에 대항한 투쟁과 관련하여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상대적 임금의 저하에 대항한 투쟁은 그러므로 노동력의 상품적 성격에 대항한,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생산 전반에 대항한 투쟁을 또한 의미한다. 상대적 임금의 하락에 대항한 투쟁은 그래서 상품생산의 영역에서의 투쟁이 이상 아니라 이러한 경제의 존재에 대항한 혁명적, 반란적 운동이며, 그것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사회주의운동이다" (같은책). (자체번역)  

1930년대는 대량실업과 더불어 어떻게 절대적 빈민화가 폭발하는지를 보여주었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이 그 이전에 패배함이 없이, „자본축척의 전반적이고 절대적인 법칙"은 그것의 반대항, 즉 혁명의 법칙이 될 위험으로 치달았다.  1970년대 이래  대량실업의 재출현과 더불어 부르조아계급은 국가자본주의적 복지주의라는 방책으로 대응했는데,  이 방책은 경제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고 오늘의 잴 수 없이 많은 공공부채의 주요 원인들 중 하나이다.  노동계급은 역사적 기억을 갖고 있다.  계급정체성의 상실에도 불구하고, 악화되는 위기로 인해 이 기억이 서서히 활성화되기 시작하고 있다. 대량실업과 사회적 임금의 삭감은 오늘 1930년대의 기억들을, 전면화된 불안정과 빈곤화의 영상들을 환기시킨다. „복지국가"의 파괴는 맑스주의자들의 예언들을 확인시킬 것이다.

룩셈부르크가 노동자들은 상품생산의 영역에서는 상대적 임금의 저하에 대항한 저항의 어떤 조그만 가능성도 갖고 있지 않다라고 쓸 때, 이것은 단념된 숙명론도, KAPD의 후기 에센경향의 „혁명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유사과격주의도 아니라, 이 투쟁이 „최소 강령"(즉각적 경제적 요구들)의 경계선 내부에 남아있어서는 않되고 가능한 가장 큰 정치적 명확성을 가지고 시작되어야 한다는 인식이다. 1980년대에 실업과 착취증대의 문제들이 이미 제시되었지만 예를 들어서, „영국 광부의 일터 지키기" 와 같이 종종 협소하고 지역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오늘 위기의 질적인 진전은 실업, 빈곤, 착취와 같은 문제들이 좀더 세계적 차원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제기되도록 만들 수 있는데,  연금, 건강, 실업자후원, 노동조건, 노동수명연장, 그리고 세대간 유대의 문제들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매우 맹아적인 형태로, 연금공격에 대한 반응인 최근의 운동들에 의해 노출된 잠재력이다. 이러한 장기적 교훈은 매우 중요한 것이고, 계급의 즉각적인 전투성이 회복되어가는 속도와 같은 그러한 문제들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실상, 룩셈부르크가 설명하는 바와 같이,  자본주의의 객관적 메카니즘들의 파괴적인 영향들(대량실업, 상대적인 착취의 강화)과 직접적으로 직면하는 것은 투쟁에 돌입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이유로, 투쟁들의 전개가 더 느리고 더 비틀리게 될 지라도 그 투쟁들 자체는 정치적으로 더 중요하다.

계급투쟁의 중심에서의 연대

ICC가 그 간행물에서 조명했던, 최근 투쟁들의 뚜렷한 특징 하나는 투쟁들의 목적과 방법 모두에 있어서 노동자들의 연대의 중심적인 성격이다:

  • 2004년 진델핑엔과 브레멘의 다임러-크라이슬러 노동자들의 파업에서 - 그리고 스페인의 동지들로부터 그들이 받은 지지에서 - 우리가 보았듯이, 경영진의 협박 시도에 대항하여 상이한 공장들의 노동자들간의 연대;
  • 예를 들어 히드로우공항에서의 게이트 고멧Gate Gourmet 파업(2005년 8월)에서 그리고 스페인의 시트SEAT 파업(2005년 12월)에서의 해고노동자들과의 연대;
  • 미래의 노동자들의 임금을 방어하기 위한 뉴욕 운송시스템에서의 파업(2005년 12월)에서 그리고 강력하게는 프랑스에서 연금을 방어하거나 CPE노동계약에 대항하기 위한 투쟁들(2006년 봄)에서 표현된 세대들간의 연대.

이러한 투쟁들의 목적들과 구호들 안에는 노동계급 내부에서 천천히 성숙하는 정치의식의 분명한 징후가, 즉,  자본주의의 지속된 생존이 인류의 미래를 위협한다는 그리고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본성의 심장에 놓인 연대는 투쟁 그 자체에 있어서 중요한 인자이자 새로운 사회인 공산주의에로의 열쇠라는 자각의 분명한 징후가 있다.  공산주의사회는 모든 인간 사회의 근본적 토대의, 즉 세계 인류 공동체의 구축을 위한 기초가 될 연대의 더 높고, 전 세계적 수준에서의 재발견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위기가 그리고 제국주의전쟁과 생태적 재앙이라는 지옥속으로의 자본주의의 추락이 굽힐 수 없게 전개되는 것과, 노동자들의 투쟁 속에서 연대를 노동계급의 근본적인 무기로서 주장하는 것은 혁명가들에게 열린 가능성들을 결정하는 객관적인 조건과  주관적인 조건을 형성한다. 이러한 조건들은 혁명가들이 프롤레타리아혁명 자체로 향한 길을 열게될 결정적 계급대치를 향한 진로의 발달에 그들의 최대한의 능력들을 다해서 참여와 더불어 직면하게 되는 거대한 책임감을 또한 결정한다.

ICC, 2006년 10월

(이 글은 ICC에 동감하는 사람에 의해 번역되었다. 번역상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밝힌다.)

혁명역량의 국제적인 재편이 프롤레타리아혁명 승리의 전제조건이다

혁명전략이라 할때 우리는 무엇을 의미하는 가? 근본적으로 오늘 우리가 제기하려는 문제는, 현재 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국제주의 그룹들과 조직들이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을 위한 노동계급투쟁에서 어떻게 그들의 역할을 수행하고 기능할 수 있는가를 이해하는 그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혁명전략을 결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다음의 2가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 먼저, 이러한 혁명조직들이 정확이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우리의 전략이 겨냥하는 목표가 무엇인가?
  • 둘째,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바꿔 말해서 우리가 작업하고 있고 또 우리의 공통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용가능한 수단들는 결정하게 될 물질적인 조건들이 무엇인가?

혁명조직은 정확히 무엇인가?

우리는 공산당선언에 있는 맑스의 말을 기억하면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공산주의자의 이론적 명제들은 결코 자칭 보편적 개혁가가 발명 또는 발견한 사상이나 원칙들에 기초하지 않는다. 명제들은 단지 일반적인 견지에서 현존하는 계급투쟁으로부터, 바로 우리 앞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운동으로부터 솟아나오는 실제적 관계들을 표현할 뿐이다. 현존하는 소유관계의 폐지는 결코 공산주의의 명백한 특질이 아니다"(공산당선언 제 91~93페이지, 백산고전대역, 1989).

여기서 맑스의 말은 조직의 본질과 기능 모두에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양자 모두 노동계급의 역사적 본질과 경험에 의해 그리고 그 투쟁의 물질적 조건들에 의해 결정된다.

그의 역사 전반에 걸처 프롤레타리아는 다음과 같은  2가지 유형의 조직을 만들어냈다:

  • 그 대중조직, 이 조직의 목적은 모든 노동자들을 공동의 투쟁 속에 결집하고 그들의 즉각적인 경제적 요구들을 옹호하는 것이다
  • 그 정치조직, 이 조직의 목적은 계급의식의 발전에 특히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스스로를, 그 자체의 혁명적 본성과 목표들을 의식하게 되는데 기여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 점은 프롤레타리아계급에게 결정적이다.  과거의 모든 혁명계급들 - 즉, 역사의 특정순간에  낡은 생산양식이 사회를 위협한 그 모순들을 극복가능한 새로운 생산양식의 담지자였던 그러한 계급들 - 은 낡은 사회 내에서 재산소유에 근거한 경제력을 갖고 있어서 그것을 정치력의 장악에 지렛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계급은 그러한 경제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것의 유일한 물질적 힘은 그것의 조직에 있다.

더욱이, 모든 혁명계급들이 그들의 미래의 프로젝트를 어떤 식으로든 자각해야 할 지라도, 프롤레타리아계급에 있어서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결정적이다:

  • 그것은 모든 착취를 끝장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피착취계급으로서 자신의 혁명의 목적을 숨길 필요도 또 그것이 창조하려는 새로운 공산주의사회의 본질을 감출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경제력이나 소유권도 갖지 않은 피착취계급으로서 계급에 대한 그리고 그 자신의 목표들에 대한 자각이 자신의 승리에서 결정적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2가지 유형의 조직들 - 대중투쟁조직 및 정치조직 - 은 역사속에 항상 존재했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그 형태들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역사적 조건들의 변화와 더불어 변화했다. 우리는 이 2가지 형태들이 노동계급의 시초부터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의 세계최초 노동계급의 역사를 살펴볼면, 한편으로는 18세기말 지독한 억압조건하에서 특히 파업들 조직하기 위해 그리고 임금과 작업조건 방어를 목표로 한 일정 정도의 무력적인 행동들을 조직하기 위해서 생겨난 비밀대중조직들을 찾아볼 수 있다. 두번째로 우리는 그 당시 "통신회들"(이들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런던통신회였다)로 불려졌던 것의 출현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선동그룹들로서 노동계급에서 가장 결연한 혁명적 일원들을 하나의 단일한 국가적 네트워크 안에 단합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1].

먼저 노동계급대중조직들의 진화를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19세기동안 노동계급의 출현 그리고 확장 상승하는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이계급이 어느 정도는 향상된 생활조건을 획득하려는 요구로 인해, 여러 상이한 형태들을 띠는 대중조직들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노동조합이었지만, 동시에 우리는 노동조합과 나란히, 실업이나 질환시의 상호부조를 위해 고안된 "친목회들"인 노동자협동회들 그리고 심지어는 스포츠클럽이나 문화협회와 같은 모임들이 발달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들은 노동자 대중의 교육수준을 향상시킨다는 중요한 목적을 또한 갖고 있었다.

그런데 20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계급투쟁의 역사적 조건들의 변화는 계급조직의 형태들에도 그에 상당하는 변화를 초래했다.

무엇보다도 1914년의 세계대전발발과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혁명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이 시기는 프롤레타리아계급과 부르조아계급사이의 계급투쟁을 첨예화 시켰다. 이제 문제는 더 이상 노동계급의 생활조건의 방어만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그리고 인류 자체의 파멸만을 초래하게 될 수 있는 자본주의 국가들간의 전 세계적인 반복되는 충돌들이냐 아니면 세계 노동계급에 의한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과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이냐라는 역사적 양자택일이다.

자본주의 내부에서의 투쟁을 위해 만들어진 노동조합은 권력을 향한 혁명투쟁에는 전적으로 부적절함이 판명되었다. 그리고 1905년과 1917년 러시아에서 프로레타리아계급은 쇠퇴하는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시기에 있어서의 대중조직을 창조했다. 자본주의 사회내부에서의 노동자들의 이해를 옹호하기 위한 단순한 그러한 조직이 더 이상 아니라 노동계급에 의한 권력의 장악과 자본주의 질서의 전복을 위한 조직으로서 노동자소비에트가 그것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상승기의 종말은 계급투쟁의 조직적 형태의 변화로써 특징지워진다. 대중집회에 그리고 선출되고 철회가능한 대리자들에 근거한 소비에트형태는 자본주의의 쇠퇴기의 모든 노동자 투쟁에서 나타나는 경향으로, 가장 극적으로는 1980년 폴란드에서의 투쟁에서 나타난다.

노동자의 대중조직들의 경우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노동계급의 정치조직들의 형태와 기능도 물질적 조건들의 변화의 결과로서 변화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들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보기 이전에 공산당선언에 표현된 총체적인 조망은 상기할만한 가치가 있다:

"공산주의자는 전체 프롤레타리아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공산주의자는 노동계급의 당들과 대립하는 별도의 당을 결성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지는 이해와 별도로 분리된 이해를 가지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자신만의 분파적 원칙을 세워 프롤레타리아운동을 원칙에 뜯어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오직 다음과 같은 점에서만 다른 노동계급의 당들과 구별된다: (1) 각국 프롤레타리아의 일국적 투쟁에서, 일체의 국적으로부터 독립된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공동이해를 제기하고 전면에 내세운다. (2) 부르조아지에 반대하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거치는 다양한 발전단계에서, 언제 어디서나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는 한편으로 실천적인 면에서는 모든 나라 노동계급 당들 가운데 가장 선진적이고 결의에 부분으로서 다른 모든 당들을 밀고 나아가며, 다른 한편으로 이론적인 면에서는 거대한 프롤레타리아 대중에 비해 프롤레타리아운동의 진행노선, 조건, 궁극적인 전반적 결과들을 명확히 알고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공산당선언, 제 89~91페이지, 백산고전대역, 1989)

매우 도식적으로 - 그리고  그러한 도식들이 역사적 실재의 풍부함을 포괄할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안다 - 노동계급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이래 출현한, 노동계급의 다음과 같은 종류의 정치조직들을 우리는 구별할 수 있다.

먼저 1848년까지의 시기와 이당시 유럽대륙을 휩쓴 혁명들과 혁명시도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시기에 노동계급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갖는 개별적인 계급으로서의 자각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전복에 직면하게 될 그 날까지의 노정이 얼마나 기나긴지는 알지 못한 채 처음으로 독립된 행위자로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결국 노동계급이 생성한 정치조직들은 여전히 매우 작고 사실상 극소수에 불과했으나 동시에 그들은 계급투쟁의 즉각적인 가능성들을 넘어 노동계급이 자체내에 잠재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미래까지 내다볼 수 있었고, 이러한 경향의 가장 분명하고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표현은 물론 공산주의자동맹(Communist League)이었다. 이것은 세계혁명이라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궁극적 목표에 이론적인 형식을 부여할 수 있었고 특히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의대한 원칙을 그 유명한 말인,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로 선언할 수 있었다.   

그 이후의 시기는 자본주의 사회내부에서의 노동계급의 대중형성의 시작으로 묘사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가 바로 노동계급이 쁘띠부르조아계급의 영향으로부터 여전히 이탈하고 있던 시기이자,  지배계급에 의한 억압 그리고 독립된 수공업자로서의 상실된 지위를 살피는 새로이 프롤레타리아화된 계층들의 정치적 영향 이 두가지 모두에 대항한 끊임없는 투쟁과정 속에서 모든 종류의 새로운 조직형태들을 실험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의 최고의 표현은, 파업동안 파업파괴자들의 수입에 저항하기 위해 영국 및 프랑스노동자들에 의해 설립된 제 1 인터네셔널이다. 제 1인터네셔널의 가장 중요한 유산들 중의 하나는, 노동계급에 의한 권력의 장악은 작은 그룹의 헌신적인 혁명가들에 의해 "인민을 위해" 수행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님을 이해한 점이었다. 오구스트 블랑키(Auguste Blanqui)와 바쿠닌(Bakunin)과 같은 인물들에 의해 영감을 받은 그룹들을 특징짖는 이러한 시각에 반대해서 제 1인터네셔널은 그것의 1864년의 법규의 첫 문장 속에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에 의해 획득되어야 한다".

제 1인터네셔널은 1871년의 파리 코뮨의 패배와 이에 뒤이은 반동의 물결에 따라 사라졌다.  1880년대 동안 유럽에서의 계급투쟁의 재생은 제 2 인터네셔널의 형성을 낳았다. 이 자리는 제 2 인터네셔널의 역사를 논할 자리가 아니지만 이 발제의 문맥 안에서 그것의 가장 중요한 성취점들 중의 하나를 지적할 수 있다: 제 2 인터네셔널과 더불어 맑스주의가 하나의 광범위한 이론적 실천적 정치경향이 된 것이다. 19세기동안

맑스와 엥겔스의 거대한 이론적 성취의 상속자들은 제 2 인터네셔널의 맑스주의 좌익이다: 독일의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와 칼 리프그네히트(Karl Liebknecht); 네덜랜드의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과 헤르만 고르타(Herman Gorter); 이탈리아의 아메데오 보르디가(Amadeo Bordiga); 영국의 존 메클린(John Meclean); 러시아의 레닌(Lenin), 부하린(Bukharin) 및 트로츠키(Trotsky)- 이들은 역사 속에서 우리들에게 전해진 이름들이지만, 러시아 혁명이라는 도전에 부응하고 제 3인터네셔널을 만들게 되는 혁명적 맑스주의 좌익의 한 경향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들일 뿐이다.  

제 3인터네셔널은 자본주의가 세로운 세기에 진입했음을 선언했다: "우리의 세기는 자본의 몰락, 내부적인 해체의 세기이자,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공산주의혁명의 세기이다"(인터네셔널강령). 역사상 처음으로 제 3 인터네셔널은 노동자의 권력장악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될,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하나의 세계적으로 집중화된 정치조직의 건설을 목표로 했다- 하나의 먼 전망으로서가 아니라 즉각적이고 긴급한 그리고 실천적인 필요성으로서.

1917년 러시아에서 시작된 세계혁명은 패배했지만 자본주의의 쇠퇴기는 여전히 존재하며 공산주의에 대한 인류의 필요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긴급하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이 권력을 획득하려 한다면, 그것은 그 자신의 국제적인 정치조적을 창조해야하고 이는 제 3 인터네셔널의 경험으로부터 배운 교훈들을 토대로만 이뤄질 수 있다.  그런다음 우리는, 코민테른이 그 프롤레타리아적 내용을 잃어버리고 스탈린의 반혁명의 제국적 야심의 단순한 도구로 변질되면서 그 코민테른으로부터 축출된 3가지 좌파경향들로 향할 것이다.

인터네셔널의 변질과 스탈린주의의 반혁명에 대항해 싸운 것은 트로츠키주의 경향이 최초가 아니였다(시간상으로 그리고 10월혁명의 변질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  우리가 나중에 살펴볼 네덜란드/독일 및 이탈리아좌파 그리고 러시아좌파도 이 경향에 선행했다). 트로츠키의 암살까지의 트로츠키주의의 역사는 계급역량의 균형의 실상황 - 우리가 계급투쟁에 대한 이전의 발제에 포함시켰 듯 역사의 진로 - 의 착오가 낳은 비참한 결과 모두를 너무나 명백하게 보여준다. 트로츠키는 노동계급이 국제적으로 결정적인 패배로 고통당하고 있음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소련이 또 다른 자본주의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계급을 다가오는 세계전쟁에서 이런 저런 진영에 연결하는 모든 새로운 고리들을 그때마다  잠재적인 혁명적 융기로 끊임없이 착각했다. 당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계급을 "창조"하지 않고 그 반대로 당의 출현 자체가 프롤레타리아계급 내부에서 성숙하는 의식의 한 표현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프롤레타리아의 심각한 패배의 시기에 "제 4인터네셔널"을 건설하려 시도했을 때, 그는  하나의 기회주의적 책략에서 다른 하나로 이끌려 다렸다.  트로츠키주의의 비극은 1917년 혁명에서 그렇게 결정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그리고 활동하는 소비에트에 대한 가장 명쾌한 묘사들을 남긴 그 위대한 혁명가가 반혁명기에 종지부를 찍어야 했던 그 세대에게 어떤 기여도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트로츠기주의 운동은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민주주의적 제국주의들을 지지함으로써 그리고 스탈린주의의 극악한 체제에 의해 야기된 모든 전쟁을 지지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진영을 버렸다.[2]

네덜랜드와 독일에서의 노동자운동은 지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두 나라에서 혁명적 맑스주의 경향들 사이의 관계들의 측면에서도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3]. 네덜랜드/독일 공산주의 좌파의 입장들은 판네쿡, 고르타 및 얀 아펠[4]과 같은 이름들과 연관된다. 그들은 처음부터 독일노동계급의 혁명투쟁의 열기 속에서 단련되어 반동적인 짜리즘에 대항해서가 아니라 독일혁명의 사회민주주의적 사행집행인과 그들의 노동조합 심복에 대항했다. 네덜랜드/독일좌파공산주의자들은 전쟁 및 러시아와 독일에서의 혁명들에 의해 결과된 시대변화의 여러 함축들을 가장 먼저 파악하게 되었다: 노동계급 이해의 옹호를 위한 의회의 이용불가능성, 사회민주주의의 배반과 반동적 본질, 노동조합이 자본주의 국가의 옹호자이자 제국주의 전쟁의 신병모집하사관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사실, 새로운 시기의 프롤레타리아 투쟁은 소비에트와 동일한 원칙들에 근거한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필요로한 다는 점.

그러나 네덜랜드/독일 좌파는  정치조직 자체의 문제에 있어서 그리고 역사적 진로(계급 역량의 균형)의 문제에 있어서 취약했다.  1930년대 동안,  러시아에서의 혁명의 패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결정적인 문제와 직면하여 그것은 볼세비키당이 국가자본주의의 기관으로 변형된 것을 그 혁명 패배의 결과이기 보다는 원인이라고 잘못 파악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당의 반혁명적 본질을 이론화하고 노동자평의회를 현 시기에 유일하게 가능한 프롤레타리아조직형태로 간주했다. 결국, "평의회주의"경향으로 된 그것은 노동운동에 대한 그 자신의 무용성 - 아니 훨씬 심각하게도 그 자체의 파괴성 -을 이론화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탈리아좌파의 이론적 발전은 본질적으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를 떠나서 프랑스와 벨기에로 도피할 수 밖에 없었던 일군의 젊은 이탈리아 노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스탈린주의화된 이탈리아공산당에서 축출된 채 그들은 미래의 당을 위한 이론적 틀을 준비하기 위해 러시아 혁명의 패배로부터 교훈을 배운다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빌랑Bilan그룹을 형성했다. 이 경향 -  나중에는 벨기에, 프랑스 및 멕시코의 분파들도 포괄하게 되는 - 의 이론적 공헌들은 거대하고 진정 대체될 수 없는 것이었다. 러시아혁명의 변질에 대한 분석 - 1917년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결코 의문시하지 않았던- 에 있어서, 미래의 전이시기(period of transition)의 문제들에 대한 탐구들에 있어서,  경제위기와 자본주의 쇠퇴의 토대들에 대한 작업에 있어서,  "민족해방"투쟁을 지지하는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의 입장에 반대함에 있어서. 그러나 혁면전략의 문제와 관련된 한에 있어서, 그 가장 중요한 공헌의 하나는 당과 분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었다.  빌랑그룹은 당을 계급의식의 능동적 인자이자 동시에  계급 전체 내에서의 의식 발전의 표현으로서 파악했다. 빌랑이 혁명은 당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했을때 이것은 혁명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당을 만드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당의 창건 자체가 혁명문제를 제기하는 프롤레타리아계급 전체의 능력의 표현이라는  의미였다.

비극적이게도,  이러한 심오한 이해는, 전쟁기간을 이탈리아 안에서 무솔리니의 목적들 안에서 또는 "내부적인" 망명으로 보냈고 이탈리아 밖의 좌파부문에 의해 성취된 이론적 발전에 참여하지 않았던 "내부의" 국제주의적 이탈리아좌파에 의해 공유되지 못했다.  제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이탈리아 내부의 국제주의자들은 트로츠키가 30년대에 저지른 동일한 오류의 희생자로 전락해서, 전쟁의 영향들과 독일에 의한 점령에 대항한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대중 파업들을 이탈리아에서의 새로운 당의 창건을 정당화할 수 있을 새로운 혁명적 상황으로 착각했다.  노동계급 전체 내부의 의식수준이 당의 존재를 위한 어떤 물질적 토대도 제공하지 못한 상황에서 새로운 국제주의공산당(다양한 보르디가주의 "당들" 그리고 오늘의 혁명당국제사무국(International Bureau for the Revolutionary Party)의 주요 구성요소인 바타글리아 코뮤니스타(Battaglia Comunista)그룹을 출현시키게 될)의 창건은 반파시스트 파르티잔과 스탈린주의 당으로부터 인원들을 유입하려 시도했을때 고도의 기회주의에 의해 그리고 그들을 따라 이길을 가는 것을 거부한 좌파부문을 향한 격한 종파주의에 의해 불가피하게 특징지워졌다.

평의회주의경향의 유니언(union) 문제 및 소비에트의 중요성에 대한 명확성은 이탈리아좌파의 조직문제에 관한 명확성과의 종합을 통해서만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라고 말할때 우리는  이탈리아 좌파와 네덜랜드/독일좌파 사이의 관계를 가장 잘 가장 잘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종합은 빌랑(특히 민족문제에 있어서 독일좌파의 원칙들을 통합했던)에 의해 시작되었고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시기에는 극소의 프랑스공산주의좌파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것은 1975년 국제공산주의흐름(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의 창건과 더불어 하나의 완전한 조직적 형태를 얻게 되었다.

결국 다음의 인터네셔널이 될 세계공산당의 미래 발전에 열쇠를 쥐고 있다고 우리가 믿고 있는 공산주의좌파의 이러한 종합의 모든 요소들에 대해 하나의 완전한 견해를 이 짧은 발제 속에서 우리가 제시하는 것은 분명 불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단지 이탈리아좌파의 방법으로부터 우리가 취할 필요가 있는 핵심점들로 여겨지는 것들을 강조하고자 한다:

  • 미래의 당 자체의 본질에 대하여:
    • 당은 계급을 대신하여 권력을 장악하지 않는다,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행사하는 것은 전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이다, 하지만 당은 계급의 의식과 조직의 발전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이다.
    • 당은 국제적이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수행할 어떤 "민족적 임무"도 더 이상 갖지 않으며 세계적 기초 위에서만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 그래서 당 자체는 국가그룹들이나 정당들의 일종의 연합이 아니라 곧바로 세계적 기초 위에 건설될 것이다.
    • 당의 건설은 노동계급 자신의 의식과 투쟁성의 발달에 의존할 것이다: 당이 가능하기 위해서, 노동계급이 그 당을 그 자신의 것으로 인정할 수 있고 그 정치적 지향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이라고 할때, 우리는 사건들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하나의 국제적 조직을 의미한다.
    • 당의 강령은 공산주의좌파에 의해 이루어진 작업과 입장들에 근거하게 될 것이다.
  • 당의 건설로 이끌게 될 과정에 대하여:
    • 당건설의 가능성은 계급의식의 발전에 의존한다 - 그러나 이것이 "자동적인" 과정이 될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또한 오늘의 혁명적 그룹들과 조직들에 의해 행해지는 의식적인 노력들에 의존할 것이다. 결국, 그들은 분파들로서의 그들의 역할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회의의 작업은 미래의 당의 건설을 향한 전 세계적인 노력의 일부이다.
    • 오늘의 혁명적 그룹들이 이러한 과정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들은 국제주의 원칙에 대한 확고함과 더불어, 경청하고 타인으로부터 배울 태세로, 논쟁에서의 개방성을 결합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작업하고 있는 물질적 조건들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미 이전의 발제에서 우리가 그 안에서 행동하고 또 오늘의 혁명적 그룹들의 잠재력과 책무들을 결정하는 계급투쟁의 물질적 조건들을 개괄하였다.

여기서는 공산주의좌파의 진화와 더 넓게는 우리가 "국제주의진영"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의 상황을 살펴보려 한다.

프랑스에서의 1968년 5월 파업에 뒤이은 계급투쟁의 엄청난 급증을 새로운 혁명가세대에 의한 공산주의좌파의 입장들의 재발견이 - 그리고 결과적으로 기존의 조직들의 중요한 성장과 새로운 조직들의 출현이 동행했다. 그 이후 이 조직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네덜랜드/독일좌파공산주의자들의 "평의회주의적" 계승자들

위에서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 평의회주의자들의 조직적 약점은 그들이 정치조직의 "무용성"을 이론화한다는 점이다. 정규적인 조직적 존재(계급투쟁에의 개입과 이론적 발전)를 단지 유지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과업인 그러한 상황에서 이것은 심각한 약점이다[5]. 1970년대 이래 2개의 주요한 역사적 조직들 (스파르타쿠스연맹 (Spartakusbund) 및 행동과 사상(Daad en Gedachte))은 예를 들어, 1968년에 존재한 가장 중요한 평의회주의그룹들중의 하나로서 프랑스에서의 5월 사건들 동안과 그 이후에 상당한 확장을 이뤘던 ICO(노동자의 정보 및 통신Informations et Correspondances Ouvrières)와 마찬가지로 사라졌다. 비록 평의회주의 전통은 소그룹들과 토론써클들에서 계속 존재하지만,  하나의 조직을 형성하는 것의 "위험"에 대한 그리고  모든 조직이 관료화되는 것의 불가피성에 대한  강박에 의해 제한된다. 평의회주의 그룹들이 하나의 국제적 조직의 발전에 긍정적 역할을 수행하려면 그들 자신의 과거경험에 대한 비판을 행하고 이탈리아좌파의 경험을 다시 - 그리고 아무런 금기없이 - 고찰할 필요가 있다.

PCint 후예들

국제주의공산당(Partito Comunista Internazionalista)의 오늘의 후예들은 제 2차 세계대전의 말에 창립되었고, 이 모두는  "보르디가주의" 국제주의공산당과 바타글리아 코뮤니스타(Battaglia Comunista)를 형성하게 되는 1952년의 분열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데, 후자는1983년에 만들어진 혁명당국제사무국(International Bureau for the Revolutionary Party: IBRP)의 2개의 주요 창립그룹들 중의 하나가 된다.

이 조직들은 그 창립을 지배했던 그리고 그들이 빌랑그룹에 의해 발전된 이탈리아좌파의 경험과 이론적 유산을 거부하게 만들었던 근본적인 기회주의와 종파주의를 결코 극복할 수 없었다.

1970년대 동안,  상이한 PCI들[6]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상히 성장한다 - 그러나 이 성장의 상당부분은, "민족해방"운동들, 특히 아랍(특히 팔레스타인)민족주의에 대한 극도의 기회주의적 태도에 기반했다. 그 결과로 PCI는 1982년 공중분해되어 한때는 공산주의좌파의 최대 조직이던 것이 모두가 자신속에 철저히 폐쇄된 채 머무르는 몇몇의 극소의 분산된 그룹들로 되어버렸다 - 그리고 그 모두가 "그당"이라 자칭한다.   

바타글리아 코뮤니스타(Battaglia Comunista)그룹은 초기에는 1970년대의 새로운 상황에 대해 더 개방적임을 증명했고 1970년대동안 3차례의 공산주의좌파국제회의에서 다른 조직들(특히 ICC와 CWO)과의 함께 일할 태세를 보이다가 결국 CWO와 함께 IBRP를 창건함으로써 그 이래 자신의 "첫사랑"에게로 되돌아갔다. 스스로를 "미래의 당을 위한 유일하게 가능한 기초"라고 선언함으로써 그것은 새로운 시기에 의해 제시된 도전에 응할수 없음을 증명했고 - 비록 다른 방향으로는 수많은 관심표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 공산주의좌파의 다른 조직들과는 어떤 유형의 공동작업도 체계적으로 거부했다.[7]

결국, PCInt의 후손에 의해 형성된 전통은 프롤레타리아운동의 코엘라칸트[8]가 되어버렸다.  그 자신의 종파주의의 깊은 곳으로부터 이따금 출현은 하지만, 특히 오늘의 국제주의 운동의 발전 속에 표현되는 바와 같이 새롭고 천천히 숙성하는 계급투쟁의 강화에 적응할 수 없는  살아있는 화석이.

새로운 국제주의운동

"새로운 국제주의운동"이라 할때 우리는 무엇을 의미하는 가?  지난 5년간 ICC는 전세계적으로 점증하는 수의 새로운 그룹들과 사람들과 접촉해 오고 있다 - 그러나 우리가 "새로운"이라고 말할때 이는 "우리에게 새로운"을 의미한다: 어떤 경우에 그것은 수년동안 존재해 왔지만 이제서야 우리와 만나게된 그룹들이다. 여기에는  2가지 요인들이 있는데, 한편으로는 새로운 그룹들의 출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그리고 기존의 그룹들과 개인들 측에서 국제적 접촉을 향한 전반적인 기동력이 그것이다.

부분적으로, 새로운 접촉의 이러한 발전은 인터넷 덕분이지만 단지 부분적으로만 그러하다.[9] 근본적으로 그것은 이번 10년의 시작 이래 국제적인 계급투쟁의 새로운 발전의 표현이다- 매우 천천히 발전하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의 투쟁들보다 훨씬 더 멀리 그리고 더 깊이 나아가려는 욕구를 이미 만족시킬 수 있는 계급투쟁의. ICC는 라틴아메리카의 거의 모든 나라들에, 터어키에, 러시아에 그리고 우크라이나에, 그리고 아시아 - 그리고 물론 한국 - 에 있는 그룹들과 개인들과 현재 접촉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그러한 그룹들이 공산주의좌파와 자신들을 명백히 동일시한다: 이는 예를 들어 SPA의 동지들의 경우뿐만 아니라 터어키의 EKS의 경우이다.  어떤 경우에 그들은 개별적으로 진화해왔고 단지 최근에 공산주의좌파의 사상들- 그들이 반드시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 사상들- 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는 브라질의 OPOP 그리고  러시아의 ISPRC의 경우이다.  다른 경우에 그들은 트로츠키주의나 마오주의의 위기로부터 출현했다. 그러나  이 모든 동지들은,  항상 노동자운동의 시금석이 되어온 근본 원칙인 국제주의를 공유한다.  그들은 또한 이탈리아좌파의 가장 근본적인 유산들 2가지를 공유하는데, 이는 노동계급은 국제적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확신과, 그래서 국제적인 접촉들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며 세계공산당, 즉 이것 없이는 노동계급이 "하늘을 휘몰아쳐"서 이 쇠퇴하고 야만적인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하고 새로운 세계적인 인류공동체를 창조할 수 없을 그런 새로운 인터네셔널을 미래에 건설하기 위한 조건들을 우리는 단지 우애적이고 열린 논쟁을 통해서만 준비할 수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국제공산주의흐름(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2006



[1]      대중단일조직들과 정치조직들사이의 이러한 구분은 19세기동안 다소 분명하게 남아 있었던 점이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IWA는 정치조적들과 노동조합들 양자 모두를 함께 규합했던 한편, 심지어 제 2인터네셔널에서도 우리는 영국노동당의 경우를 인용할 수 있는데, 이 당은 원래는 의회내에서 노동조합의 대표를 조직하기 위한 „노동대표위원회(Labour Representation Committee)"로서 만들어졌다.

[2]     여기서 나탈리아 트로츠키가 , 1951년 제 4인터네셔널의  스탈린주의  지지를  훈계하기를 더 이상 거부했을 때의 그녀의 말을 인용할 만하다: „가장 참을 없는 것은 당신들이 밝힌 전쟁에 대한 입장입니다. 인류를 위협하는 3 세계대전이 혁명운동을 가장 어렵고 복잡한 상황들, 가장 중대한 결정들 앞에 세웁니다(...) 그러나 최근 몇년의 사건들에 직면해서 당신들은 스탈린주의 국가의 옹호를 끊임없이 요청하고 그리고 전체 운동을 그것에 맡깁니다. 이제, 당신들이 한국의 인민들을 십자가에 매달고 있는 전쟁에서 스탈린의 군대를 비록 지지하더라도(...) 나는 점에 있어서 당신들을 따를 없고 그러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나는우리의 의견불일치로 인해 당신들의 대오에 더이상 머무를 없음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이외의 어떤 출구도 찾을 없음을 당신들에게 말해야만 할것 같습니다."

[3]       예를 들어 판네쿡은 네덜랜드인이지만 그 일생의 대부분을 독일에서 투쟁가로서 보냈다.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했을때, 독일좌파의 많은 투쟁가들이 네덜랜드의 동지들에게로 피신했고, 독일에서의 계속된 비밀활동을 위한 토대로 네덜랜드를 이용했다.

[4]       얀 아펠은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의 제 3차 회의에 파견된  KAPD(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 의 대리인이었다. 그는 1979년 ICC의 창립회의에 참석하여 새로운 혁명가세대에게 횟불을 넘겨주었다.

[5]       참으로, 하나의 혁명적 조직을 유지하는 것은 그것이 진정 혁명적이기 때문에 항상 그리고 불가피하게 험난한 과업일 것임이라 말할 수 있다.

[6]      PCI의 종파주의는 일련의 부조리한 분열들을 낳았다 - 이 모두는  세계에서  단일하고 유일한 „그" 당이라고 자칭한다.

[7]      예를 들어, 이라크전과 코소보전에 반대하는 공동팜플렛을 만들자는 그리고 그것이 아르헨티나의 NCI에 의해 제안된 회의들에의 어떤 참여도 거부했기 때문에 그러면 독일에서 공동모임을 갖자는 ICC의 모든 제안들을 거부했다. 이번 회의에의 불참(적어도 이 글을 작성하는 시점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은 마찬가지로 주목할만 하다.

[8]       지금은 단지 2가지의 살아있는 종으로 대표되지만, 하나의 그룹으로서 코엘라칸트들은 한때는 데본기로부터 크레타세기 말엽까지 풍부한 화석기록을 남긴 여러 속과 종을 거느리면서 매우 성공적이였는데,  이 시점에서 그들은 거의 완전하게 멸종된 것 같고 그 이후로는 어떤 화석도 알려져 있지 않다.

[9]     우리는 여기에 선언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때때로 노동자는 승리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다. 싸움의 실제적 결실은 직접적인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팽창하는 노동자들의 단결에 있다. 현대산업이 만들어낸 전달수단으로 인해 여러지역의 노동자들이 서로 접촉할 있게 됨으로써 단결은 한층 확대된다.(...) 중세시기의 시민이 옹색한 도로를 가지고 수백년의 기간을 거쳐 달성한 단결을 현대 프롤레타리아는 철도에 힘입어 수년간에 이룩한다"(공산당선언, 제 79페이지, 백산고전대역, 1989)

국제 상황에 대한 결의문

 

ICC(국제 공산주의 흐름) 제17차 대회(2007년 5월)
(ICC's 17th Congress: Resolution on the international situation)

자본주의의 데카당스(쇠퇴)와 해체

1.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삶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자본주의가 해체단계에 들어섰다는 사실이다. 1980년대 말 이래 ICC는 이 해체 단계의 원인과 특징을 지적해왔다. 특히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요약된다.

  a)해체단계는 1차 세계대전(그 당시 혁명가들의 절대다수가 지적한 것처럼)으로 시작된 자본주의 체제의 쇠퇴의 완전한 부분이다. 이러한 면에서 그것은 유례없는 요소들을 가져온 자본주의 쇠퇴의 주요특징을 담고 있다.

  b)그것은 그전 단계의 모든 파국적 특성을 쌓아왔을 뿐 아니라 우리가 발끝까지 썩은 모든 사회적 구조를 볼 수 있는, 쇠퇴의 마지막 단계를 구성하고 있다.

  c)실천적으로 인간 사회의 모든 국면은 제국주의 갈등과 계급투쟁 같이 인류 생존에 결정적인 해체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국제 상황에서의 현재 순간 주요 국면을 검토하는 시작점으로 해체단계를 사용하고자 한다. 그 주요 국면은 자본주의 체제의 경제적 위기, 특히 제국주의 전쟁터에서의 지배계급 내의 갈등,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사회의 두 주요 계급 사이의 투쟁이다.

2. 모순적이게도 자본주의 경제 상황은 해체에 의해 가장 덜 영향을 받는 이 사회의 국면이다. 왜냐하면 최종순간에 해체에 관련된 것들을 포함하는 이 해체의 삶의 다른 국면을 결정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경제 상황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선행했던 다른 생산양식처럼 19세기 말 절정에 달했던 상승기를 거쳐 온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20세기 초에 쇠퇴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다른 경제체제처럼 이러한 데카당스의 기원에는 생산력의 발전과 상관관계의 점증하는 갈등이 있다. 구체적으로 자본주의의 경우, 그 발전이 자본주의 외적 시장의 정복에 의해 조건 지워졌는데, 1차 세계대전은 데카당스의 첫 번째 중요한 표현으로 나왔다. 자본주의 중심부에 의한 세계의 식민적, 경제적 정복이 끝나면서 중심국들은 서로의 시장에 대한 분쟁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자본주의는 1919년 코민테른이 전쟁과 혁명의 시대로 부른 역사의 새로운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으로부터 터져 나온 혁명적 물결의 실패는 자본주의 사회의 점증하는 격동으로 문을 활짝 열게 하였는데 1930년대의 대공황과 그 결과로서의 2차 세계대전은 1차 세계대전보다 더욱 유혈적이고 야만적이었다. 일부 부르주아 "전문가들"이 "영광스런 30년"이라고 기술한 그 이후 시기는 자본주의가 숙명적 모순을 극복했다는 환상을 주었고 심지어 공산주의 혁명이 올 것이라고 주장했던 조류들까지도 그러한 환상을 공유하게 되었다. 실제로 상황적 요인과 경제위기의 효과를 진정시키는 조치들의 발전의 결합으로 허용된 이러한 "번영"의 시기는 다시 한 번 1930년대 강력하게 가속화된 1960년대 말에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열린 위기로 나아가게 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이러한 열린 위기는 이미 코민테른이 선언한 대안, 즉 자본주의의 전복으로 나아가게 하는 세계전쟁이나 노동자 투쟁의 발전에 다시 한 번 길을 열어 놓았다. 좌익공산주의의 일부 그룹이 생각하는 것과 반대로 세계전쟁은 자본주의를 재생시키고 역동적 성장을 새롭게 하는,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해법"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것은 체제가 직면한 막다른 골목이며 그 최종적 결과가 세계전쟁인, 군사수준에서 돌이킬 수 없는 쏜살같은 질주로 이끄는, 자본주의의 민족부문 사이의 긴장을 첨예화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자본주의의 경제적 격동의 가속의 결과로서 1970년대 초에 제국주의적 긴장의 명백한 격렬함이 있었다. 그러나 1968년 이후 노동계급의 역사적 부활 때문에 세계전쟁으로 절정에 달할 수 없었다. 동시에 부르주아지의 유일하게 가능한 전망(물론 그것을 "전망"이라 부를 수 있다면)을 상쇄할 수 있었지만, 수십 년간 볼 수 없었던 전투성의 수준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은 그들 자신의 전망인 공산주의 혁명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사회의 삶의 결정적인 두 계급 중 어느 하나도 자신의 전망을 밀고 나갈 수 없는 상황, 자본주의를 해체의 단계로 들어서게 한 기원이었던, 이겨낼 수 없는 위기로 자본주의 체제를 매일매일, 매번의 타격으로부터 지배계급이 "관리하도록"하게 하는 상황이었다.

3. 이러한 역사적 전망의 부재의 주요 표현중의 하나는 개인으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모든 수준에 영향을 미치는 "자신만을 위한 모든 사람"의 경향의 발전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경제적 삶의 수준에서, 우리는 사회가 해체의 단계에 들어선 이래 이 영역에서 주요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사실 "자신만을 위한 모든 사람"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선천적인 특징이다. 쇠퇴의 시기에 들어섰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1차 세계대전 동안 그리고 1930년대에 특히 파시스트 정책과 케인즈주의적 정책을 통하여, 경제에 대한 국가의 대대적인 개입을 통하여 이러한 특성들은 길들여야만 했다. 국가에 의한 이러한 개입은 1929년 "검은 목요일"에 우리가 본 것처럼 전반적 재앙으로 이끄는 경제적 모순을 막으려고 IMF, 세계은행 그리고 OECD와 EU같은 국제조직을 설립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끝났다.

오늘날 자유주의의 승리와 시장의 자유로운 움직임에 대한 연설에도 불구하고 국가들은 각각의 국가의 경제에의 개입, 그들 사이의 관계를 가능한 한 규제하는 과업인 구조의 사용, 심지어 ‘세계무역기구'같은 새로운 기구를 창설하는 것을 비난하지 않았다. 이러한 정책과 기구들이 자본주의 위기로 나아가는 것을 늦추지만, 세계경제의 "역사적" 성장수준과 아시아의 거인, 인도와 중국의 성과를 환영하는 설교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위기를 결코 극복할 수 없다.

경제위기 : 부채로의 쏜살같은 질주

4.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지적 추종자들의 행복감을 자극했던 최근 몇 년간의 지구적 GNP 성장률의 기초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다. 60년대 말 열린 위기의 뿌리였던 시장의 포화가 세계경제를 완전하게 질식시키지 않았음을 보증하게 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들은 늘어나는 부채라고 요약할 수 있다. 현재 세계 성장의 주요 "기관차"는 미국 경제의 부채가 국가예산과 무역수지에서 모두 엄청나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자본주의 모순에 대한 명확한 해법을 내는 것과는 멀게, 더욱 고통스런 미래로 길을 닦을 수밖에 없는 진정한 질주를 우리는 보고 있다. 그것은 특히 지난 30년 동안 우리가 보아왔던 보기 중에서 잔인한 성장둔화이다. 지금 미국 경제의 동력중의 하나였고 파국적인 은행 실패의 위험을 일으키는 미국의 주택 붐에 대한 위협은 경제평론가들 사이에 상당한 불안을 야기 시키고 있다. 이러한 불안은 2006년 10월 아마란스(Amaranth)의 몰락에 이은 이른바 "헤지펀드"(투기기금)를 타격하면서 또 다른 실패에 대한 전망과 함께 증폭되었다. 그 위협은 아주 심각한데 왜냐하면 그 존재이유가 환율변동이나 원료가격으로 엄청난 단기 이윤을 얻는 이러한 조직들이 국제금융 체제의 단순한 호위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그들 자산의 일부를 헤지펀드에 넣어왔던 가장 "심각한" 금융기관이다. 더 나아가 이들 기관에 투자된 총액은 엄청나 프랑스 같은 국가의 일 년 GNP와 맞먹는다. 그리고 그들은 자본운동의 "지렛대"로 역할을 한다. (2002년에 거의 7.000.000억불에 달해 상품과 서비스, 즉 "실질" 상품거래의 거의 20배에 달한다.) 이들 어떤 것도 "대안 세계화 주의자들"과 경제 "금융화"에 대한 다른 비판자들의 비판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흐름들은 투기에 등을 돌리는 깨끗하고 공정한 자본주의를 보려고 한다. 실제로 투기는 진정으로 생산적인 부문에 투자할 책임을 잊어버린 자본주의의 "나쁜" 유형의 산물이 아니다. 맑스가 이미 19세기에 보여준 것같이 투기는 생산적 투자의 충분한 출구의 부족을 전망할 때, 자본의 소유자가 오늘날 자본주의를 지구의 카지노로 만든 거대한 제비뽑기에서 단기 이익을 얻으려는 사실로부터 나온다. 현 세기에서 자본주의가 투기를 포기하기를 원하는 것은 호랑이에게 채식을 원하고 용이 불을 뿜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과 같다.

5. 현재 인도와 중국 같은 국가에서 우리가 보는 예외적인 성장률은 그들이 지난 시기 높은 성장률로 상당한 공헌을 했더라고 세계경제에 새로운 생명이 있음을 결코 증명하지 않는다. 이러한 예외적 성장의 뿌리에는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의 위기가 있다. 이 성장은 두 가지 요인, 즉 수출과 가장 발전한 국가로부터의 자본투자로부터 본질적 역동성을 얻고 있다. 선진국에서의 무역망이 점점 중국에서 생산된 제품을 배포하는 쪽으로 간다면, 이것은 시장이 점점 포화되고 점점 상업적 경쟁을 악화시키는 시점에서 절대적인 필요가 되었던, 낮은 가격으로 그 제품을 팔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과정은 가장 발전한 국가들에서 노동력 비용을 감소시킬 수 있다. 같은 논리는 "아웃소싱"에도 숨어있는데, 노동력이 선진국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싼 제3세계 국가들에게 대기업의 산업 활동이 이전되는 경우이다. 중국 경제가 그 자신의 영역에서 이러한 "아웃소싱"으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반면, 반대로 아프리카처럼 임금이 더 낮은 국가들에게 똑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6. 중국, 특히 산업에서 "두 자리 숫자의 성장" 뒤에는 노동계급의 광폭한 착취가 있다. 그 착취는 1844년 엥겔스의 빼어난 저작에서 비난한 19세기 전반기에 영국의 노동계급이 경험한 것과 비교되는 삶의 조건을 견뎌야 하는 것과 같다. 그 자체로는 이것이 자본주의 몰락의 징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본주의가 지구를 정복한 야만적 착취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말은 19세기 자본주의 국가와 오늘날 중국에서의 노동계급과 자본주의 성장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첫째, 이런 저런 국가의 산업노동자 수의 증가는 다른 국가들에서의 감소에 상응하지 않았다. 즉 영국, 프랑스, 독일 또는 미국의 산업부문은 나란히 발전했다.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저항 투쟁 덕분에 노동자의 생활조건은 19세기 후반부에 점진적으로 개선되었다.

둘째, 오늘날 중국의 경우, 산업의 성장은 (제3세계 국가들처럼) 점점 사라져 왔던 옛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수많은 산업부문의 손실에서 발생하고 있다. 동시에 아웃소싱은 이러한 국가의 노동계급에 대한 전면적 공격을 수행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공격은 아웃소싱이 공통적 실행이 되기 전에 시작되었지만 실업, 탈숙련, 불확실성과 낮은 생활수준을 통해 더욱 강화될 수 있었다. 그리고 수백만 노동자가 집중되어 있는 중국의 공업지역에서 미래에 대한 유일한 전망은 그들의 노동력의 잔인한 착취와 빈곤화의 고통을 겪는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경제의 숨 쉴 곳들과는 거리가 멀게 중국과 몇몇 제3세계 국가들에서의 "기적"은 자본주의 쇠퇴의 또 다른 구체화이다. 더구나 중국 경제의 수출에 대한 극단적 의존은 현 고객 요구의 취소에도 취약할 수 있는 원천이 되고 그것은 미국 경제가 지구적 요구에 대해 기관차 역할을 수행하게 하는 거대한 부채에 대해 무엇이던 할 의무를 지려고 하는 것을 보는 것이 일어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1997년 말 아시아의 용과 호랑이의 두 자리 숫자의 성장의 ‘기적'이 끝난 것처럼, 현재의 중국의 기적은 그것이 동일한 기원을 갖지 않고 처분할 자산을 더 많이 가지고 있지만, 조만간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역사적인 막다른 골목의 가혹한 현실에 부딪칠 것이다.

혼돈의 악화와 제국주의적 긴장

7. 부르주아 사회의 경제적 삶은 자본주의 쇠퇴의 법칙을 어디서도 피할 수 없다. 이 수준에서 쇠퇴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처음이자 가장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이유로 해체의 주요 징표는 아직까지 경제 영역을 아껴왔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 영역이 지배계급의 부문 사이의 적대 영역이고 무엇보다 제국주의의 적대 영역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자본주의가 해체의 국면에 진입한 최초의 큰 징표는 제국주의 갈등의 영역이었다. 즉 재빠르게 서구 블록의 소멸을 이끈 80년대 말 동구 제국주의 블록의 몰락이다. 해체단계의 주요 특징인 "모두 스스로를 위하는" 현상을 우리가 명확하게 보는 것은 국가 사이의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관계의 수준에서다. 블록의 체제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1960년대 말부터 장애물이 아니라면 틀림없이 일어났을 3차 세계전쟁의 위험을 체제 내에 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지배 권력에 의해 각 블록 내에 부과된 규율을 통해 제국주의적 긴장의 일정한 "조직"을 대표했다. 1989년에 열려진 상황은 매우 다르다. 분명히 세계전쟁의 유령은 더 이상 지구에 출몰하지 않지만 동시에 우리는 강대국들을 휩쓸리게 하는, 특히 가장 최대강국인 미국을 직접 개입하게 하는 제국주의적 적대와 지역전쟁을 보아 왔다. 수십 년 "세계경찰"이었던 미국은 냉전이 끝나고 온 "새로운 세계 혼란"에 직면하여 이러한 역할을 강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을 분명히 가슴에 담았지만 지구의 안정에 공헌할 목적으로 하지 않았고 지구적 지도력을 보존하려는 것이었다. 경쟁 불록의 위협, 즉 두 제국주의 불록을 붙들어 매는 접착제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지구적 지도력은 문제가 되었다. "소련 위협"이라는 명백한 부재 속에서 미국이 부과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군사수준의 거대한 우월성이라는 힘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데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은 지구적 불안정의 주요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1990년대가 시작한 이후 이러한 몇 가지 보기가 있다. 서구 블록의 동맹 사이의 약화되는 연결고리를 묶으려는 목적으로 벌인 1991년 첫 번째 걸프 전쟁이 그것이다. (구실이었던 쿠웨이트에 대한 이라크 침공으로 모욕당한 "국제법에 대한 존중"을 시행할 목적이 아니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유고슬라비아에서 옛 서구 블록의 주요 동맹 사이의 통일은 산산조각이 났다. 독일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도록 밀어붙여 불을 댕겼으며, 미국이 보스니아 무슬림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동안 프랑스와 영국은 세르비아의 제국주의적 이해를 지지함으로써 20세기 초 "앙탕트 코르디알레(Entente Cordiale - 1904년 체결된 영불 화친협정)"를 재가동 했다.

8. 1990년대를 통해 일련의 군사작전 후 지속적으로 권위를 부여하려는 미국 부르주아지의 실패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새로운 적을 찾게 했고 그의 동맹이었던 강대국들을 이슬람 테러주의에 대해 줄서게 했다. 미국 국가기구가 실제로 준비하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원한 것처럼 보인(미국인의 3분의 1과 뉴욕 인구의 반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2001년 9월 11일의 공격은 이러한 새로운 십자군 원정을 위한 출발지점 이었다. 5년 후 이러한 정책은 실패한 것이 분명하다. 9.11 공격이 미국으로 하여금 프랑스와 독일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개입으로 끌어들이게 했다면, 2003년의 이라크 모험으로 끌어들이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사실은 이라크에 대한 개입에 반대하는 프랑스, 독일과 러시아의 상황적 동맹을 만드는데 자극제가 되었다. 그 후 이라크에 개입했던 "연합"에서 주요 동맹이었던 스페인과 이태리는 가라앉는 배를 떠났다. 미국 부르주아지는 이라크에서의 공식목적인 "대량살상무기"의 제거 및 평화적 "민주주의"의 확립, 미국 후원아래 안정과 지역평화, 테러리즘의 후퇴, 그리고 미국 정부의 군사개입에 대한 미국 국민의 지지 등 어느 것도 달성하지 못했다.

  "대량살상무기"의 문제는 곧 풀렸다. 즉 이라크에서 발견된 것은 연합세력이 가져온 것이었음이 명백해졌다. 이는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침공을 위해 날조한 거짓말임이 드러났다.

테러리즘의 후퇴에 대해서는 우리가 2004년 3월 마드리드와 2005년 7월 런던에서 본 바와 같이, 이라크 침공이 결코 그를 무력화시키지 않고 반대로 이라크와 세계 다른 국가에서의 테러 발전의 강력한 요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라크에서 평화적 민주주의의 확립은 미국 군대의 대대적 지지 없이는 최소한의 통제도 유지할 수 없는 괴뢰정부를 세우는 형식을 취했다. 그 통제는 어떤 경우든 시아파와 수니파 사이의 학살과 사담후세인의 전복이며 수만 명의 희생자를 낸 테러 공격으로부터 이라크 전역을 방치하면서 소수의 "안전지역"에 한정하고 있다.

  중동의 안정화와 평화는 결코 멀리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50년 갈등에서 지난 몇 년간 하마스와 파타 사이의 팔레스타인 내부의 충돌 그리고 점증하는 이스라엘 정부의 신용실추에 의해 더욱 극적이 되면서 상황을 지속적으로 악화시키고 있다. 이라크에서의 산산 조각난 패배에 이은 미국의 이 지역에서의 권위의 상실은 분명히 주요 옹호자였던 "평화과정"의 실패와 이러한 권위의 내리막길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권위의 상실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나토 세력이 당면하는 어려움과 탈레반에 맞서는 카이자이 정부의 통제 상실이 부분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더구나 핵무기를 얻으려고 준비하는 이란의 담대함은 당분간 여러 곳에 대대적 군대사용을 가로막는, 이라크에서 미국을 수렁으로 빠지게 한 직접적 결과이다.

  마지막으로 미국 부르주아지가 "베트남 신드롬" 즉 전쟁터로 군대를 보내는 것을 지지하는데 미국 국민의 신중함을 한꺼번에 묻으려는 시도는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왔다. 초기에 9.11 공격으로 촉발된 감정은 국가통일에 대한 열망과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할 결단을 부추기면서, 미국 국민에게 민족주의적 정서를 대대적으로 강화시켰지만, 최근 전쟁과 미국 군대의 해외파견에 대한 거부는 효력이 있었다.

  오늘날 이라크에서 미국 부르주아지는 진정으로 막다른 골목에 서 있다. 한편으로 엄격한 군사적 관점과 경제·정치적 관점에서 모두 실질적으로 "질서를 재확립" 하도록 하는 힘을 얻을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정책의 총체적 실패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이라크의 탈구와 전 지역의 탈 안정화에 대한 문을 열지 않고서는 이라크로부터 단순히 철수할 수 없다는 것이다.

9. 부시2세의 명령의 대차대조표는 확실히 미국의 역사상 가장 재앙적인 것 중의 하나이다. 미국 정상에 "네오콘"의 취임은 미국 부르주아지에게 진정한 파국을 의미한다. 제기된 문제는 다음과 같다. 세계의 지도적 부르주아지가 어떻게 그들의 이해를 방어하기 위해 이와 같은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모험가들의 일단에게 요청하는 것이 가능했는가? 지도적 자본주의 국가의 지배계급의 맹목성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실 체니, 럼스펠드 사단의 권력 장악은 지배계급이 저지른 기념비적 실수의 단순한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이 제국주의 수준에서 미국의 상황을 상당히 약화시켰지만, 해체단계를 특징짓는 국제관계에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발전을 전제로 한, 그리고 그 지도력의 약화를 전제로 한, 미국이 직면한 막다른 골목의 표현이었다.

  이것의 가장 좋은 증명은 세계에서 가장 숙련되고 지적인 부르주아지인 영국 부르주아지가 이라크에서의 막다른 모험으로 스스로 끌려들어갔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군사력을 아직까지 능란하게 사용하는 가장 "효율적인" 부르주아지에 의한 재앙적인 제국주의적 선택에 대한 다른 보기는 워싱턴 전략가들의 일련 신호를 전제로 공격한 2006년 여름 레바논에 대한 이스라엘의 파국적 모험이 소규모로 보인바 있다.

가속화되는 환경파괴

10. 중동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아프리카에서 광대한 지역을 지옥 같은 폐허로 만드는 군사적 혼돈은 자본주의가 가져온 역사적인 막다른 골목의 유일한 표출이 아니며 인류의 가장 위험한 것도 아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 유지는 인류의 부흥을 가능하게 했던 환경 파괴의 위협도 함께 가져온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지구를 온난화시키는, 현재수준의 온실가스의 지속적 방출은 몸서리치는 인류의 참상(기근, 수천만 인간의 대체, 기후변화에 덜 영향 받는 지역의 인구과잉)이라는 전반적 진행을 가져오는 예측할 수 없는 파국(혹서, 폭풍, 사막화, 홍수 등)의 해방을 예고하고 있다. 환경 퇴화의 가시적인 첫 번째 효과에 직면하며, 부르주아지의 정부와 지도 서클들은 이러한 상황의 심각성과 파국적 미래를 더 이상 숨길 수 없다. 지금부터 가장 강력한 부르주아지들과 거의 모든 정당들은 스스로 환경 친화적으로 포장하면서 위협적 재앙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필요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 문제처럼 환경파괴 문제도 마찬가지지다. 부르주아지의 모든 부문에서 전쟁에 반대한다고 선언하지만, 자본주의 체제가 쇠퇴기에 들어섰기 때문에 이 계급은 평화를 보장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좋고 나쁜 의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전쟁을 가장 강경하게 밀고 나가는 부문 뒤에는 가장 더러운 이해를 발견할 수 있을 지라도) 가장 "평화주의적" 부르주아 지도자들조차도 그들의 "인간주의적"이고 "합리적"인 주장을 침해할 객관적인 논리를 피할 수 없다. 같은 방식으로 그들이 선거에서 표를 얻고자하지 않을 때라도, 환경을 보호하는데 부르주아지의 지도자들에 의해 주창되는 선량한 의도는 자본주의 경제의 해약에 반대하는 어떤 것도 의중에 없다. 온실가스 방출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산업생산, 에너지 생산, 교통, 거주와 이 부문에 대한 대대적이고 우선순위 있는 투자에 대한 정밀검사를 요구한다. 이는 거대기업 수준뿐만 아니라 국가 수준에서 주요한 경제적 이해를 따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 국가가 이러한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한다면, 이는 즉각 세계시장에서의 경쟁 앞에서 무자비하게 벌을 받을 것이다. 지구온난화와 싸우려는 조치를 국가들이 취할 때, 임금인상에 부르주아지가 부딪치는 동일한 문제를 일으킨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살아있는 한, 인류는 그 생존을 위협하면서 이 죽어가는 체제가 부과하는 파국의 증대를 감수할 운명에 처해있다.

  이처럼 ICC가 15년 동안 보인 것 같이, 자본주의 체제는 인류의 존재에 대한 주요 위협을 가져온다. 19세기 말 엥겔스가 선언한 대안, 사회주의인가 야만인가는 20세기 동안 불길한 현실이었다. 21세기가 우리에게 하나의 전망으로 제시하는 것은 사회주의인가 아니면 인류의 파괴인가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들이 자본주의를 전복할 수 있는 사회의 유일한 세력, 즉 세계 노동계급이 직면한 진정한 이해관계이다.

계급투쟁의 지속과 의식의 성숙

11. 우리가 본대로 프롤레타리아트는 수십 년 동안 이러한 이해관계에 부딪쳐 왔다. 경제위기에 대한 스스로의 대응인 세계전쟁으로부터 자본주의를 가로막는, 가장 심각한 반혁명에 끝장을 내는 1968년 이후의 역사적 부활 이래로 그러했다. 20년 동안 노동자 투쟁은 노동조합의 사보타지 하는 역할에 대해, 노동자들이 투쟁의 총체적 경험을 얻도록, 전진과 후퇴를 하면서 강하고 그리고 약하게 그 투쟁을 지속했다. 동시에 노동계급은 왜 고전적 노동조합주의의 거부가 이러한 투쟁 속에서 이기주의적 정신의 비중으로 검증한 노사협조주의로 후퇴했는지를 설명하는 해체의 무게에 점점 종속되었다. 오늘날까지 가장 눈부신 표현 즉 1989년 동쪽 블록과 스탈린 체제의 몰락을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명백한 승리", "계급투쟁의 종말" 그리고 심지어 노동계급 자체의 종말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귀청이 터질 것 같은 캠페인은 프롤레타리아트를 그 의식과 전투성 수준에서 심각하게 후퇴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후퇴는 십년동안 심화되었고 지속되었다. 이는 모든 세대의 노동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의기소침하게 했다. 이러한 혼한은 80년대 말에 일어났던 사건뿐만 아니라 1991년 1차 걸프전쟁, 이전의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전쟁 같이 그 80년대 사건으로부터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냉전의 종말과 함께 평화와 번영의 "새로운 질서"로 들어섰다고 말한 아버지 부시의 행복한 선언에 대한 반박이었다. 그러나 계급에서의 혼란이라는 일반적 맥락에서 보면 노동계급은 이로부터 이득을 얻을 수 없었고 계급의식을 회복할 수 없었다. 반대로 이러한 사건들은 이미 고통 받고 있는 무력감을 증폭시켰고 자신감과 투쟁정신을 손상시켰다.

  1990년대 동안 노동계급은 투쟁을 전적으로 포기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적 공격의 지속은 저항투쟁을 하도록 했으나 이러한 투쟁은 지난 시기의 투쟁이었던 노동조합에 대적할 폭이나, 의식 그리고 능력도 지니지 못했다. 2003년까지 그렇지 못했지만 1989년 이래 프롤레타리아트가 실제로 후퇴로부터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의 연금에 대한 공격에 대규모 반대 동원을 한 투쟁이 전기가 되었다. 그 이후 계급투쟁의 소생과 계급의식의 발전을 향한 이러한 경향은 더욱 검증되고 있다. 노동자의 투쟁은 대부분의 중심 국가에 영향을 주었는데 미국(2005년 보잉과 뉴욕 교통), 독일(2004년 다임러와 오펠, 2006년 봄 의사, 2007년 봄 독일텔레콤), 영국(2005년 8월 런던공항), 프랑스(2006년 CPE에 반대하는 대학생과 고등학생 운동)가 있고 주변부 국가들로는 두바이(2006년 봄 건설 노동자), 방글라데시(2006년 봄 방직 노동자), 이집트(2007년 봄 방직, 운수 및 기타 노동자)의 투쟁이 있다.

12. 엥겔스는 노동계급이 세 가지 수준 경제, 정치, 이론 수준에서 투쟁한다고 썼다. 이 세 가지 수준에서 1968년에 시작한 투쟁의 물결과 2003년에 시작한 투쟁의 차이를 비교하면서 전망을 이끌어 낼 수 있다.

  1968년 시작된 투쟁의 물결은 상당한 정치적 중요성이 있다. 특히 그것은 반혁명 시기의 종말을 의미했다. 동시에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이론적 성찰을 불러일으켰는데 왜냐하면 1975년 ICC의 결성이 가장 중요한 표현이었던, 좌익공산주의 흐름의 재출현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1968년 5월 프랑스에서의 전투, 1969년 이태리의 "뜨거운 가을"은 그들이 표현한 정치적 열정 때문에 그 이후의 투쟁동안 국제 노동계급의 중요한 정치의식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러한 잠재력은 실현되지 않았다. 이러한 투쟁의 과정동안 프롤레타리아트 내에 발전한 계급 정체성은 사회내의 정치세력 보다는 경제적 범주로 규정되었다. 특히 부르주아지가 3차 세계대전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그들 스스로의 투쟁이었다는 사실은 노동계급에게 전적으로 인식되지 않은 채 지나갔다.(절대다수의 혁명가 그룹도 마찬가지였다.) 동시에 1980년 폴란드에서의 대중파업의 출현은 오늘날까지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적 능력의 최고의 표현이었지만(1차 세계대전 이후의 혁명 시기가 끝난 이래), 엄청난 정치적 취약성을 보였다. 그것이 달성할 수 있었던 유일한 "정치의식화"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주제와 민족주의에 대한 집착이었다.

  이렇게 되 이유는 ICC가 이미 분석한 수많은 요인 때문이다.

첫째, 첫 번째 혁명적 물결이 일어났던 제국주의 전쟁과 반대로 체제의 몰락을 즉각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경제위기의 느린 속도, 따라서 노동계급에게 품위 있는 생황표준을 보장해줄 수 있는 체제의 능력에 대한 환상의 토양이 마련되었다는 것.

둘째, 스탈린주의의 외상적 경험의 결과(러시아 불럭의 노동자 사이에서의 전통적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이득에 대한 깊은 환상의 형식을 위한)로서, 혁명적 정치조직에 대한 불신.

셋째, 혁명조직을 그들의 계급과 단절시킨 과거와 오늘날의 혁명조직들 사이의 유기적 균열의 무게.

13. 계급 전투의 새로운 물결이 발전시키고 있는 상황은 매우 다르다.

  첫째, 거의 40년의 열린 위기와 노동계급의 생활조건에 대한 공격, 특히 실업과 불안정 노동의 증가는 "미래는 좋아질 것이다"는 환상을 날려버렸다. 나이든 세대나 젊은 세대의 노동자들 모두 점점 "미래는 더 나빠질 것이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

둘째, 더 일반적으로, 점점 야만적 형식을 취하는 군사갈등의 영구화뿐만 아니라 환경파괴에 대한 가시적 위협은 아직 혼란스럽고 표면 밑에 가려져있지만,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만들 필요가 있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반자본주의" 운동과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그들의 슬로건의 재출현은 이러한 감정을 빗나가게 하려는 부르주아지가 숨긴 일종의 항체이다.

셋째, 스탈린주의나 20년 전 그 몰락 이후의 캠페인이 만든 외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고 있다. 지금 노동의 삶을 시작하는 새로운 세대는 "공산주의 죽음"에 대한 거대한 캠페인이 벌어졌을 때 어린이였다.

  이러한 조건들은 현제 투쟁의 물결과 1989년에 끝난 것 사이의 전반적 차이의 결과이다.

따라서 그들이 첫 번째 물결의 대규모적 부활을 자극했던 것보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심각하고 보편적인 경제적 공격에 대한 반응이라 하더라도 현재의 투쟁은 적어도 자본주의의 중심국에서는 똑같은 대중적 성격에 도달하지 않았다. 이는 다음의 두 가지 본질적 이유 때문이다.

  첫째, 1960년대 말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부활은 부르주아지를 놀라게 했지만 오늘날은 그럴 수 없다. 그리고 특히 뉴스의 차단이라는 체계적 이용을 통하여 계급운동을 예상하고 그 확산을 제한하는 일련의 조치들을 취하기 때문이다.

둘째, 파업이라는 무기의 사용은 오늘날 더욱 어려운데, 왜냐하면 노동자들을 협박하는 근거로 작용하는 실업의 무게가 크기 때문이고 노동자들은 점점 부르주아지가 재빨리 그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책략의 여유가 줄어들고 있음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마지막 국면 때문에 노동자들이 대중투쟁을 주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를 전복할 필요에 대한 이해의 전제 조건인, 자본주의의 명백한 몰락에 대한 의식 발전의 가능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 매우 혼란스러운 방법이지만, 어느 정도 오직 공산주의 혁명인 계급투쟁에 이해관계가 걸린 것의 규모는 노동계급이 이러한 투쟁을 전개하는데 주저하게 만든다.

  이처럼 계급의 경제투쟁이 첫 번째 물결보다는 당분간 덜 대규모적일지라도 그것은 암묵적으로 더욱 중요한 정치적 차원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차원은, 점점 연대의 문제를 통합하고 있는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명시적 형식을 취해왔다. 이는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체제의 전형적인 태도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대한 해독제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현재 투쟁을 발전시킬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를 전복할 수 있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능력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첫째, 슈투트가르트 지부의 노동자들을 협박하는 다임러 사측의 시도에 대응하여 자발적으로 파업을 일으킨 브레멘의 다임러 공장 노동자들.

둘째, 비합법적 파업임에도 불구하고 음식물 운반 노동자에 대한 착복에 대항하는 런던공항의 수하물 운반 노동자들에 의한 연대파업.

셋째, 불리한 계약을 부과하려는 상사에 맞서 새로운 세대와 연대한 뉴욕 운수 노동자들의 파업.

14. 이러한 연대의 문제는 대학생과 고등학생이 주로 포함되었지만 분명히 계급영역에 위치했던, 2006년 봄 프랑스에서의 CPE 반대 운동의 핵심이었다.

  첫째, 다른 대학의 동지들을 지지하기 위해 전선에 선 대학생들의 적극적 연대.

둘째, 2005년 가을 절박한 저항이 매일매일 고통스런 끔찍한 조건과 자본이 제시한 전망의 부재를 드러낸 노동계급의 자녀들에 대한 연대.

셋째, 세대 사이, 실업하거나 불안정 노동자가 될 사람과 이미 임노동의 상황의 참여한 사람 사이, 그리고 막 계급투쟁으로 깨어난 사람과 이미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 사이의 연대.

15. 이 운동은 그들에게 책임 있는 총회와 파업위원회를 통해 스스로의 투쟁을 책임질 계급의 능력에 대해 본보기가 되었다. (그 능력을 모든 공장 노동자가 거리에서 일일집회를 연 2006년 봄 스페인의 비고에서의 금속 노동자 투쟁에서 우리는 보았다.) 이는 노동조합이 학생의 환경에서는 극도로 취약하고 투쟁을 사보타지 할 전통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그 역할을 혁명까지 계속해서 수행할 것이다. 노동조합이 행할 반노동계급적 역할의 보기는 지금까지 우리가 본 대규모 투쟁이 주로 노동조합이 매우 약하거나(방글라데시의 경우) 전적으로 국가기관으로 확인된(이집트의 경우) 제3세계 국가들에 주로 영향을 미쳤다.

16.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부활이라는 최초의 가장 장관의 전투로서의 프랑스에서의 1968년 5월 총파업과 같이, CPE 반대 투쟁은 옛 투쟁과 현재 투쟁의 물결 사이의 차이에 대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첫째, 1968년에는 학생 운동과 노동자 운동은 서로를 이어받고 서로에게 동정적이었지만 자본주의의 열린 위기로의 진입에 대해 두 가지 서로 다른 실재를 드러냈다. 즉 학생에게는 사회에서의 지위의 퇴화라는 전망에 직면한 지식인 부르주아의 항거였고, 노동자에게는 그들의 생활표준의 저하가 시작됐다는 것에 대한 경제투쟁이었다. 2006년에는 학생 운동은 프랑스 같은 국가에서 봉급유형의 수정(산업부문을 희생한 제3부문의 성장)이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투쟁에 참여할 능력을 의문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예시한 노동계급의 운동이었다.

  둘째, 1968년 운동에서 혁명의 문제는 일상적 기초위에서 토론되었지만, 그것은 주로 학생의 관심이었다. 그리고 그들 다수의 생각은 쿠바의 카르트로주의나 중국의 마오주의 같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부터 나왔다. 2006년 운동에서는 혁명의 문제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임금 소득자의 동원과 통일만이 부르주아지의 공격을 뒤로 밀어낼 수 있다는 명확한 이해가 있었다.

17. 이러한 마지막 문제는 엥겔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세 번째 국면인 이론투쟁으로 돌아온다. 이는 전투의 일반적 전망에 대한 계급내의 성찰의 발전과 이러한 노력을 하는 산물과 적극적 요소인 인자들과 조직의 발전을 의미한다. 오늘날 1968년에서와 같이 계급투쟁의 회복은 깊은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고 공산주의 좌파의 입장으로 향하는 새로운 인자들의 출현은 빙산의 일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의 성찰의 과정과 1968년 이후 전개된 과정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 당시 시작된 성찰은 대대적이고 장관의 투쟁을 가져왔지만, 현재의 과정은 노동계급이 시작하기 이전에 그러한 규모의 투쟁을 수행하기 위해 기다리지 않는다. 이는 1960년대 말과 비교하여 오늘날 프롤레타리아트가 당면한 조건의 차이의 결과이다.

1968년 열린 투쟁물결의 특성 중의 하나는 그 폭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가능성, 즉 반혁명의 깊이와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의 "번영"에 대한 환상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사라졌던 가능성을 보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그것은 성찰과정에서 주요 메뉴인 혁명의 가능성이 아니지만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주는 파국적 전망의 관점에서는 혁명의 필요성이다. 사실 1970년대보다 덜 빠르고 덜 기계적이지만, 이 과정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고 노동자 투쟁의 후퇴의 순간에도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사실 68 운동을 결정한 기반 때문에, 1968년과 그 이후의 사상으로 표현된 열광은 좌파 그룹들에 의해 그 운동을 고수하는 대다수의 인자들을 충원하는데 유리하게 했다. 학생 운동으로부터 퍼진 급진적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당면주의 의해 덜 영향 받은 극소수의 인자들만이 좌익공산주의 입장으로 이동하고 프롤레타리아 조직의 혁명가가 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노동계급 운동이 직면한 어려움은, 특히 지배계급의 상이한 역공을 수반하면서 자본주의가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환상의 무게가 실려 있다는 맥락에서, 점점 신뢰를 잃어갔던 공식적 스탈린주의의 좌파에게 "급진"좌파 그룹들이 선전한 개량주의 이데올로기의 의미 있는 회귀를 초래했다. 오늘날 스탈린주의의 역사적 몰락에 뒤를 이어 좌파적 흐름들은 점점 더 개량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자리를 내주는 경향이 있다. 부르주아 정치 게임에서 "공식적" 참여자가 되려는 이러한 흐름들의 경향은 진정한 계급입장을 찾기 시작한 가장 진지한 혁명가들 사이에 반응을 자극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노동계급 내의 성찰의 노력은 곧바로 좌익공산주의자가 된 매우 젊은 인자들의 출현으로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극좌파 조직 내에서 경험을 가진 나이 많은 인자들에게도 나타났다. 그 자체로 이것은 계급이 투쟁을 발전시킬 때 반드시 일어나는 혁명적 에너지가 흡수되지 않고 쉽게 메마르지 않으며 1970년대에 있었던 숫자로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 그리고 그들의 다수가 공산주의 좌파의 조직에 합류할 것이라는 약속을 가져오는 가장 긍정적인 현상이다.

  발전하기 시작한 투쟁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할 뿐만 아니라, 투쟁에 참여하려는 그룹과 인자들의 발전을 자극하는데 개입함으로써, 이미 계급 내에 진행되고 있는 성찰의 과정에서 적극적 역할을 하는 것은 혁명조직, 특히 ICC의 책임이다.

당 건설에 대한 맑스주의와 기회주의 견해: IBRP와의 논쟁

토론방법의 문제

요즘 우리는 "ICC와 같은 조직은 미래의 당 건설을 위한 활동 방법과 전망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IBRP의 테제에 대한 답변"을 심도 있게 다룬 기사[1]를 실은 바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옮긴이 첨가) "(우리는) 답변을 위해 조직 문제가 불러일으키는 점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점에서 고려해 보았다. 1) 미래의 인터내셔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2) 조직 건설과 혁명가들을 다시 조직하려면 어떤 정책을 추구해야 할 것인가. 두 가지 점에서 우리는 이탈리아와 국제 공산주의 좌파의 전통을 포기한 것은 ICC가 아니라 바로 IBRP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사실상 IBRP의 재조직화 정책을 지배하는 선거주의는 제4인터내셔널을 설립할 때 트로츠키가 쓴 정책과 비슷하다. 반면 ICC의 전망은 늘 선명성을 가진 재조직화를 위해 싸우고 중도주의와 우유부단함에서 인자들을 구해낼 수 있게 하는 기반 위에서 투쟁했던 이탈리아 분파의 정책이다."

7쪽짜리 기사의 끝에 나오는 이러한 결과들은 비합리적이고 심리적 결실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활동방식을 방어하고 우리와 같이 계급 노선의 편에 서있는 정치그룹을 단호하지만 동지적으로 비판하려는 시도의 표현이다. IBRP를 비판하는데서, 우리의 출발점은 늘 IBRP의 텍스트 그 자체였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그들의 텍스트를 우리의 기사에 다시 옮기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우리의 주장은 공산주의 좌파의 공통의 전통과 대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혁명적 전위를 만드는 어려운 작업에서 이러저러한 가설들의 유효성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답변에서 IBRP를 이루고 있는 두 정치그룹 가운데 하나인 <공산주의투사>(이하 BC)는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기사[2]를 출판했다. 사실 그 기사는 ICC에 대한 답변이긴 하지만 ICC라는 명의는 그저 꼭 필요할 때에만 언급되었다. 기사는 전체적으로는 피상적이고 우리의 견해를 전혀 따오지도 않았다. 그 대신에 BC는 완전히 그것들의 몇몇 개념을 명백히 혼동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기사를 끼워 맞췄다. (우리는 그게 그들이 정직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또한 공개적으로 그 쟁점의 문제들을 제기하기 보다는 어떤 효과를 내려고 의도적인 헛소리로 기사에 대한 공감을 끌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기사에서 BC는 유일하게 가능한 방식, 즉 우리의 답변하고 있는 역사에 기초한 방식으로 접근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들은 오히려 즉흥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우며 사실상 결론이 없는 답변만을 하고 있다. 우리 기사가 "불쾌"하다, 그것이 IBRP에 대한 "공격과 중상모략"을 포함하고 있다는 식의 관점은 이러한 태도[3]에 동조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 예전에 IBRP의 기회주의에 대한 우리의 비판이 올바름을 확신시켜준다. 역사적으로 기회주의는 정치에 대한 직시를 하는 것이 기회주의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므로 그것을 피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독자들이 BC의 이러한 태도가 어느 정도 거짓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 우리의 예전 기사들을 언급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없다. 사실상 배신[4]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 기사나 앞으로 나올 기사에 나타난 BC의 왜곡을 따르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익하고 끝없는 논쟁에 발목 잡히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사와 함께 우리는 혁명가 조직을 건설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관점을 더욱 가다듬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특히 다음의 다음 두 지점을 충분히 고려하도록 하겠다.

a) BC의 기사에 나타난 논점에 대한 답변.

b) 우리를 관념론이라고 보는 IBRP의 비판에 대한 답변. 우리를 관념론이라고 보는 것은 IBRP의 변명이다. 그것은 우리가 세계당 건설에 참여하는 데 상응하는 힘을 기를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더 당 건설에 대하여

BC 기사의 두 번째 부분은 국제당을 건설하는 문제에서 우리의 활동방식과 반대되는 그들의 기회주의적 정책을 옹호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서 살펴보았던 근본적인 요소들을 떠올려 보도록 하자. 이것은 국제조직의 국내 지부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IBRP의 비판이다.

우리는 다른 대회 결의에 기초할 뿐만 아니라 원칙적으로 하나의 이미 존재하는 조직 복제물로서 일국 조직들을 만든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이는 심지어 우리 조직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프롤레타리아트 국제당의 일국 조직은 매우 인위적인 방식으로 일국 내에서 다른 곳에서, 더군다나 그 나라 자체의 진정한 정치와 사회의 투쟁 바깥에서 편집된 출판물들을 번역하는 중앙조직을 만듦으로서 건설되어서는 안 된다.(강조는 우리)[5]

이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국제적인 재조직화를 위한 우리의 전략은 물론 그것을 ‘다른 곳에서 편집된 출판물을 번역하는 중앙조직을 만듦'으로 희화화된다. 독자들에게 자동으로 ICC전략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이다. ...... IBRP에게, 만약 새로운 그룹의 동지들이 나타난다면, 보기를 들어 캐나다에서, 그들이 국제주의자의 태도로 견인되고 있다면, 이 그룹은 비판적이고 동지적인 투고들, 심지어는 반박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그룹은 그들의 나라의 정치 맥락에서 성장하고 발전해야만 한다. 즉 ‘그 나라 자체의 진정한 정치와 사회의 투쟁' 내부에서 말이다. 이것은 IBRP에게는 주어진 나라의 현재 및 지역의 상황이 노동자 운동의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 국제적ㆍ역사적 틀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 국제적인 수준에서 조직 건설 전략은 무엇인가? 어떤 새로운 나라에 떠오르는 투사들이 한명이 있든 백 명이 있든 간에, "그 나라 자체의 진정한 정치와 사회 투쟁"을 통해서, 그러나 이 새로운 투사들을 즉각 조직의 국제 활동으로 통합하기 위해서, 우리의 전략은 지역적으로 이 동지들이 사는 나라에서 중앙집중화된 개입의 한 측면을 발전시키는 그룹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심지어 우리의 자원이 작다고 할지라도, 우리 조직이 새로운 그룹의 동지들의 책임 하에서 지역 출판물을 즉각 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것이 한편으로 우리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에 있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적으로 혁명가 조직의 건설을 진행하는 것에 있어서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위적인가? 어떤 점에서 ‘하나의 이미 존재하는 조직의 복제품'이라고 이야기하는가? 이것은 여전히 설명이 필요하다.

정말로 놀라운 것은 BC가 그들이 우리 주장의 논리에 최소한의 반대 주장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비록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 사실상 이것이 그들의 견해이다.

조직을 더 힘 있고 대표적인 여러 나라로 ‘넓힐'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혁명 정치는 진지한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한 나라에 있는 몇몇 동지들의 한 분파가 모체 조직보다도 구체적으로 실제 조직의 요소가 될 것이라는 점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왜 못하는가?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싶다.]

우리는 용기를 갖고 정말로 전국적 수준에서 기능을 하는 조직을 만드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전국적 수준으로 하나의 ‘캠페인'을 공동으로 하는 것이 늘 완벽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수적으로 별로 없다'는 주어진 조직적 조건에서, 출판물의 배포는 투사들의 가망성에서 가장 작은 변화를 반영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구체적인 조직의 보기를 제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그 문제의 진실이다! BC는 국제 조직의 구성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저 일국 수준에서 그 자신의 조직을 통제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BC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ICC의 존재는 명확하게 이러한 식의 주장이 거짓말임을 보여준다. BC는 일국 수준에서 출판물 배포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하지만, 보기를 들어, ICC의 영어와 스페인어 출판물(특히 <국제평론>)이 전 세계 약 20개 나라에서 배포되고 있다는 것은 계산에 넣지도 않는다. BC는 또한 필요할 때, 우리 조직이 같은 리플릿을 즉시, 동시에 회원이 존재하는 모든 나라와 또한 다른 나라들에서 배포할 수 있으며 그리고 그 전에도 필요할 때마다 이를 증명해 왔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게다가 BC는 자신의 눈앞의 사실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만약 그들이 자신의 눈을 뜨고 있으려고 노력만 한다면 ICC는 진정으로 단일한 국제조직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이 나라, 저 나라에 있는 지부들의 규모에는 상관없이 말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 진정으로 기능하는 조직을 만드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BC의 주장이 과학적 기초라기보다는 오히려 단지 오늘날 국제조직을 건설할 가능성을 부정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인상을 받게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더 많은 것들이 있다. BC의 기사에서 혁명조직이 왜 일국에서만 건설되어야 하는가에 관한 다른 불순한 생각이 나타난다.

더욱이 한 나라에 낙하한 작은 분파 한 개로는 그 나라의 정치권 안에 그 자신을 이식할 가능성이 없다. 그 나라의 정치권 그 자체에서 나타난 조직은 비록 작지만 혁명적 입장에 순응하지만 말이다. ...... 정치의 정체성만으로는 혁명가 조직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러한 척 하는 사람은 조직에 대해서 분별력이 없거나 너무 조직 경험이 부족해서 그 주제가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만약 동지가 계급 안에 뿌리 내리고자 하는 근본적인 활동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심지어 오늘날 그러한 활동들이 불행하게도 제한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동지는 이러한 임무를 할 만한 자격이 없는 것이다.[6]

이 문단이 지닌 뜻은 솔직히 걱정스럽다. BC의 설명은 "그 나라의 정치권 그 자체에서(즉 지역에서) 나타난, 혁명적 입장에 순응한" 그룹을 만드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초기에 그러한 조직이 얼마나 혼란스러울 것인지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같은 지역에서 "한 나라에 낙하한 작은 분파 하나"보다는 말이다. 그러나 한 조직의 실제 계급 내에서의 "뿌리"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얼마나 일시적으로 인기 있을 것인가에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은 모든 것을 당면한 인기로 파악하는 것이자 기회주의의 접근법이다. 실제로 뿌리를 내리는 것은 역사적 수준에서 판단해야 한다. (그것은 계급의 과거 경험과 앞으로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뿌리를 내리는 것"의 주요 척도는 강령과 분석 수준의 명확함이며, 이는 다음의 것들을 가능하게 만든다.

  • 어떠한 혼란이 노동자들에게 있던지 진정한 공헌을 하는 것
  • 미래에 대비하여 튼튼하게 건설하는 것

이것은 레닌과 멘셰비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의 핵심 지점이었다. 멘셰비키는 당의 문호를 잡다한 머뭇거리는 분자들에게 개방하여 커다란 영향력을 얻고 싶어 했다. 그것은 또한 이탈리아 좌파와 코민테른 다수파 사이에 벌어진 공산당 당헌에 관한 논쟁의 핵심지점이기도 하다.(엄격한 조직인가 아니면 느슨한 조직인가가 코민테른이 가능한 빠르게 노동대중 내에서 "뿌리"를 내리기를 바란 이래로 이 논쟁의 핵심지점이었다.) 이탈리아 좌파는 1930년대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반대하여 같은 입장을 주장했다. 혁명가 조직은 결코 자신의 원칙을 청산하고 적당히 처리하여 "뿌리"를 내려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IBRP가 오늘날 망각한 이탈리아 좌파의 투쟁의 위대한 교훈이다. 마치 PCInt가 1945년에 원칙을 잊어버렸던 것처럼 말이다.

BC 주장의 모순은 우리가 앞선 기사에서 제기했던 질문들에 그 그룹이 답변을 거부한 사실의 귀결지점이다.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a) BC는 노동자 운동이 한층 공들여 만들어낸 조직 문제에 대한 입장이 틀렸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왜인가?

b) 그렇지 않다면 레닌과 빌랑의 시대와 관련하여 역사의 시기가 바뀌었으며 따라서 다른 형태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왜인가?

우리는 아직도 답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를 관념론으로 보는 것에 대하여

BC가 우리를 관념론자라고 비판하고 관념론의 시각을 반영하여 지금 상황을 분석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요사이 나폴리에서 BC가 연 대중 집회에서 그들은 우리를 관념론이라고 ‘상상'했다. 이에 대해 우리는 BC에 답변을 요청했다. BC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ICC를 관념론이라고 규정하는 데에는 세 가지 점이 있다.

첫째로 데카당스 개념이다. 이것은 우리도 쓰고 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사회학 요소에만 기초하여 데카당스의 경제 개념은 설명할 수 없다. 문제는 데카당스가 이윤율 저하 경향으로부터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데카당스를 겪고 있다고 말했지만 위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주기적인 위기는 늘 있었다) 아주 심각한 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ICC가 관념주의자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데카당스 개념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제국주의에 대한 분석 때문이다. 소련이 있었을 때, 우리는 제국주의를 두 가지 면으로 보는 것에 익숙했다. 하나는 소련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이었다. 제국주의 양국 중 하나가 몰락하면서 나머지 다른 쪽이 군사적, 경제적 지위, 기타 등등에서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상환 내에서 유럽에서는 제국주의적 재편의 시도가 있다. ICC는 단지 혼란에 대해서 말하면서 어떻게 이러한 새로운 국면을 설명할 수 있는가? ICC는 제국주의 무대를 지배하고 있는 명백한 의도와 혼돈을 혼동하고 있다.

세 번째 이유는 의식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몇 가지 믿을 수 없는 것들을 들은 적이 있다. 예를 들어 노동계급이 제3차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는 수준의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BC가 우리를 관념론이라고 비판해서 우리 조직이 사실의 문제들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공상으로 빠지고 있으며 사실상 관념론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비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앞으로 논증하려고 하는 바에서처럼, BC의 그 부분에 대한 이러한 비판이 우리의 정치 분석에 대한 게으르고 부정확한 이해에서 만들어졌다고 본다. 그들 자신을 우리 조직가 구분하려는 통제할 수 없는 욕망만이 그러한 몰이해를 정당화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설령 우리가 명확히 그러한 넓은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룰 수 없다고 하더라도 몇몇 분자들에게 다음과 답변하고자 한다.

자본주의의 데카당스 : ICC의 분석이 BC의 분석과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데카당스의 경제적 개념을" "사회학적 개념에만 기초하여"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완전히 거짓이다. BC의 동지들은 그들의 이론적 틀이 이윤율 저하 경향에 기초하고 있는데 반하여, ICC는 여분의 자본주의적 시장의 포화상태에 관한 룩셈부르크의 후기의 이론적 발전[7]을 인용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론은 그럼에도 변덕스러운 이윤율 저하 경향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론적 틀 또한 경제학적 기초를 가지고 있으며 사회적 기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쨌든, 두 가지 다른 경제학적 설명에 덧붙여서, 기본적인 관점은 두 개의 분석 모두 같은 상황, 즉 자본주의의 데카당스를 설명하려는 시도이며, 우리는 그것에 대해 완전히 동의한다. 그렇다면 어디에 관념론이 있는가?

제국주의와 혼돈 : 만약 ICC가 진실로 BC가 서술하는 입장을 방어한다면, 그것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혼돈의 문제는 그 자체의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1989년 두 제국주의 블록의 붕괴와 그들이 각각 통제하고 있는 나라들에 가했던 규율이 약화된 결과였다. 냉전 시기에 제국주의 블록 내에서의 규율은 전반적으로 세계대전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특수한 "평화조약"을 개별 블록 내부와 국제무대 내에서 보증해주었다. "ICC는 제국주의 무대 지배하고 있는 명백한 의도와 혼돈을 혼동하고 있다?" 전혀!!! 강대국뿐만 아니라 좀 더 약한 나라들의 세계 제국주의 무대를 지배하려는 명백한 의도에서 출발하여, ICC는 현상황에서 점차 확산되는 경향과 다각도의 갈등을 본다. 각국은 나머지 모든 나라들과 갈등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 안에서는 더 이상, 적어도 현재에는, 개별 국가의 제국주의 야망을 결집하고 특정한 방향으로 향하게 만들 새로운 제국주의 블록은 없다. 솔직히, 우리는 단기간에 그 대형의 미래를 예상하는 게 어렵다.[8]

전술한 규율이 약화되는 이 새로운 상황에서 개별 국가들은 점차 다른 나라들과 갈등에 빠져드는 제국주의적 모험을 시작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혼돈이 발생하는 것이다. 혼돈은 즉 과거의 통제와 규율이 없고 그 기본적인 역동성이 매우 명확해지는 상황이다. 이러한 우리의 입장이 정말로 그렇게 멍청한가? 아니면 관념론인가?

마지막으로 노동계급이 전쟁을 막는다는 것에 대하여 : 우리가 계급투쟁의 역사적 부활이 부르주아지가 자본주의의 위기, 즉 세계대전을 낳는 것을 막았다고 할 때, 우리는 확실히 노동계급이 전쟁의 위험을 인식하고 있고 그렇게 의식적으로 반대했다는 것이 아니라고 되풀이하여 이야기한다. 만약 그렇다고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확실히 혁명직전 시기에 있을 것이다. 증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것은 투쟁의 부활이 194~50년대보다 계급을 더 민감하고 덜 순응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완전히 프롤레타리아트의 통제와 지지에 의존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부르주아지에게 골칫거리를 낳고 그들이 제국주의적 갈등을 추진하는 것으로 막지 못한다.

사실상, 현 시기, 비록 계급의 전투성과 의식성이 낮은 수준에 있을지라도, 부르주아지는 전쟁이데올로기-민족, 반파시즘, 반제국주의 등 어느 것이든지 간에-하에 선진국 노동자들을 동원할 능력이 없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이 전투적이지 않은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를 위해서는 몇몇 부르주아적 이상에 자신의 목숨을 무릅쓸 준비가 된 노동자들이 필요하다.

IBRP가 현재 매우 현명한 척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과거에도 지금(!)에도 국제 정세를 분석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보기를 들어, 동구권이 무너질 때, BC는 처음에 명확한 생각을 가지지 못했다. 그리고 "붕괴"를 고르바초프가 제국주의 블록들 사이에서 카드를 되 섞고 미 제국주의에 맞서서 점수를 올리기 위하여 추진한 과정 탓으로 돌렸다.

폭발하고 있거나 이미 폭발해 버린 것은 얄타협약이다. 카드는 위기에 상황에서 다시 섞이고 있다. 비록 위기가 루블화 지대를 극적으로 파괴하고 있지만, 확실히 위기는 달러지대로 주저하지 않고 이식되어오고 있다.......고르바초프는 유럽과의 테이블에서 그리고 다른 초강대국과의 협상에서 유능하게 활약하고 있다. 동유럽과 서유럽의 친선관계를 향한 진전들은 미국의 조용함에 기인한 현상이 아니다. 그리고 고르바초프도 그것을 알고 있다.(「제국주의 블록들 사이의 카드가 뒤섞이다 : 현존 사회주의 붕괴의 환상」, BC 12호 1989년 12월)[9]

동시에 그들은 동유럽 국가들에 한 모금의 산소를 줄 수도 있는 새로운 시장이 열리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자본주의 주변부, 보기를 들어 라틴 아메리카에서, 시장의 붕괴가 자본의 지불 불능 문제를 만들어냈다? 동유럽에서 열린 새로운 기회들은 투자 욕구를 위한 안전밸브를 나타낸다? 만약 이러한 동유럽과 서유럽의 협력이라는 커다란 진전이 구체화된다면, 그것은 국제자본을 위한 한 모금의 산소로 작용할 것이다."(「서구 부르주아지가 동구권의 개방에 박수치다」, BC, 1989년 10월)[10] 1990년 초에 루마니아 부르주아지는 인민의 민주주의-부르주아 독재의 최악의 형태이다-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는 믿을 수 없는 드라마를 보여주며 독재자 차우셰스쿠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BC는 "사회혁명으로 발전할 수 있는 모든 객관적 조건과 거의 모든 주관적 조건이 있지만 진정한 계급의 힘이 부재한 나라는 부르주아적 생산관계의 유지를 의미하는 그 힘들을 위해 자유로운 영역을 남겨둔다"고 루마니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BC, 제1호, 1990년 1월)

마지막으로, 우리는 콜롬비아의 동조자들의 기사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그런데 BC는 그 기사를 그 첫 번째 페이지에서 그 기사를 한 줄의 언급이나 비평 없이 실었다. 그 기사는 콜롬비아를 거의 봉기 상태에 있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콜롬비아의 사회운동은 ...... 특이한 급진성과 폭넓은 경험을 얻게 되었다. ...... 오늘날 파업들은 폭동으로 전화된다. 도시들은 반란으로 마비된다. 도시대중의 시위는 결국 폭력적인 거리폭동이 된다. 요약하자면, 콜롬비아에서 자본주의적 메커니즘과 두 개의 자본주의 군사전선 사이에서 갈등의 악화와 확장에 의해서 불붙은 봉기의 과정이 나타나고 있다.(BC, 제9호, 2000년 9월)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어디에서 관념론이 발견되는지에 대해서 묻고 싶다. 우리의 기사인가, IBRP의 공상적인 분석들인가?[11]

가장 최근에 나온 데카당스에 관한 오류들

불행하게도 더 많은 것들이 있다. 지금까지 얼마 동안, 그들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 프롤레타리아 정치진영을 경멸함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그 역사적 시기의 기본 분석에 의문을 품어 온 것은 사실 BC였다. 그들의 현실에 대한 평가는 누가 기사의 초고를 집필하던지 간에, 점차 즉흥적인 해석에 의지한다. 아주 최근에 우리가 현 시기[12] 노동조합의 역할에 대한 심각한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서 BC를 비판했다. 그 오류는 BC 자신의 역사적 태도와 반대인 것이었다. 그러나 『프로메테오』 제2호에 실린 같은 기사에서 우리는 그 문제로 퇴보하고-우리는 과거 우리의 반론을 인용하지는 않을 것이다-자본주의 데카당스 개념에 의문을 던지는 일련의 문단들을 발견한다. 데카당스에 대한 승인은 IBRP와 ICC를 이어주는 입장이며 맑스와 엥겔스 이래로, 제3인터내셔널에서부터 로자 룩셈부르크와 레닌-누가 그를 따르든 간에-까지 그리고 1920년대 혁명적 조류의 퇴보 이후 코민테른에서 나온 좌익 공산주의까지 노동자 운동의 유산이다. 사실상 그 기사는 현재 정세를 위기를 수반했지만 일반적으로 발전의 시기였던 과거 역사의 국면과 대조되는 되돌아 갈 수 없는 자본주의 데카당스의 역사적 시기라기보다는 "축적 주기의 상승 국면"이자 축적의 "주기에서 데카당스 국면"이라고 성격 규정한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역사를 두 시대로 구분하는 도식이 있다. 상승기와 하강기. 전자의 시기 동안 공산주의자들에게 유효했던 거의 모든 것이 더 이상 후자의 시기 동안에는 그렇지 않다. 단지 더 이상 성장은커녕 하강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로 노동조합을 들 수 있다. 노동조합은 과거에는 그 안에 들어가서 활동하고 통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올바랐지만 그것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노동조합의 중재자로서의 역사적이고 제도적인 역할에 대하여 문헌을 참고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역할과 자본주의 각각의 국면들 사이의 관계나 이윤율과 구매력 사이의 반대되는 역할에 대해 참고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 축적주기의 상승 국면에서 노동조합은 ‘변호인'으로서 임금과 노동조건의 양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비록 자본이 즉각 그것을 다시 빼앗아갔지만.) 축적주기의 하강 국면에서 중재를 할 만한 여유는 0으로 줄어들고, 노동조합은 그들의 역사적 기능을 이어가지만 사실상 자신의 보존을 위해 협상하고 노동계급 내에서 자본의 이익을 위한 대리인으로 기능하게 된다.

반면에 ICC는 역사를 두 부분으로 나눈다. 노동조합이 노동계급에게 긍정적이었던 때-노동조합이 어떻게 무엇에 기초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상술하지 않더라도-와 그들이 부정적이 되었을 때이다.

우리는 민족해방전쟁 문제에 대해서도 비슷한 도식을 본다.

그러므로 의문의 여지가 없고 상당히 명백하게 공유된 입장들의 형식적인 제안은 만약 멀리하지 않는다면 역사유물론으로부터 상당한 일탈과 객관적인 상황을 조사하는 데 있어서 무능력을 수반하게 된다.[13]

기사의 이러한 부분이 명백하게 ICC에 대한 답변으로 만들어졌지만, 우리는 BC가 정말로 기억력이 좋지 않다는 것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ICC가 수십 개의 기사에서 그리고 특히 노동조합 문제[14]에 대해 상세히 다룬 팸플릿에서 밝힌 노동조합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를 기억도 못한다면 말이다. 그 팸플릿은 "노동조합의 중재자로서 역사적이고 제도적인 역할에 대하여 문헌"을 "이러한 역할과 자본주의 각각의 국면들 사이의 관계"로까지 확장하고 있다. 우리는 동지들이 우리 팸플릿을 읽고 또 읽어서 BC의 부정확성을 확인해 주시길 바란다.

그러나 우리는 맑스와 엥겔스가 한 세기 반전에 이야기했던 것을 상기하는 것이 도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정 발전 단계에서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들은 지금까지 그것이 그 틀 안에서 작동해왔던 현존하는 생산관계들 또는 이것이 비록 법률 용어로 같은 것을 표현할 따름이지만 소유관계들과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생산력들이 발전하는 형태들로부터 이러한 관계들은 그들의 족쇄로 변한다. 그리고 나서 사회 혁명의 시기가 시작된다."(맑스, 엥겔스, 『정치경제학비판』서문, 프로그레스 출판사, p.21)

우리는 BC가 단지 펜의 실수를 했을 뿐이라고 믿고 싶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의 주장에 답변을 시도하면서 부적절한 용어를 사용했을 뿐이라고 믿고 싶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BC가 이러한 문구들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물어보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후퇴의 시기 다음에 그리고 축적 주기의 회복과 함께 노동계급은 노동조합이 "임금과 노동조건의 양보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다시 믿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일 게다. 만약 BC가 말하려는 것이 그러한 것이라면, 우리는 BC가 자신의 의견으로 최근 10년 동안 "축적 주기의 상승 국면"이라고 말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그리고 노동조합 관련 부분에서 말한 "임금과 노동조건의 양보"에 상응하는 것이 노동계급에게 무엇인지를 말해 줬으면 좋겠다.

더욱이, 민족해방 투쟁에 관하여, ICC가 "유사한 도식"이라고 표현한 부분에 대하여 BC의 동지들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가? 이러한 경우에도 자본 축적 주기가 확실하고 경기후퇴가 없다면 우리는 아라파트나 그와 같은 자들을 지지해야 하는가? 만약 이것이 올바른 해석이 아니라면 BC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결론

이 기사에서, 우리는 현실에 대해 관념론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ICC가 아니라 오히려 이론적 혼란을 겪고 있으며 개입에서 기회주의적으로 접근하는 BC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더 이상 그 임무를 다하지 않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온 프롤레타리아 정치진영"에 대한 반론으로 BC가 내놓은 견해가 그 자신의 기회주의로 변화와 강령적 수준에서 일탈을 숨기려는 연막 말고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점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우리에게 많은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정치진영이 자신의 역할을 하지 않았지만 특히 IBRP의 현재 경향이 자신을 "세계에서 오직 하나다"고 여긴다면, 동지들은 보르디가주의자들에 대한 반박으로 썼던 책자들과 수많은 글들로 돌아가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 책자들에서 동지들은 각각의 보르디가주의 그룹이 그 스스로를 당으로 여기고 다른 그룹들을 무의미하다고 반대했던 사실을 올바르게 비판한 바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우리는 BC가 우리의 비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터무니없는 분노와 정직하지 못함으로 숨기지 말 것을 권유하는 바이다. 우리 모두 자신의 임무를 다하기 위하여 노력하자.       

옮긴이: 김정호



[1]「당 건설 정책에 있어서 맑스주의와 기회주의의 관점」, 『국제평론』제103호, 2000년 4분기 

[2]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당일 것이다」, 『프로메테오』제2호, 2000년 12월

[3] 우리는 노동자 운동에서 "비방", "분노", 기타 등등의 비난들이 전형적으로 중도주의자들과 기회주의자들이 그들에 대한 좌익조류들의 비판에 대해서 사용되었다는 점을 이야기해야만 한다.(레닌이 멘셰비키에 맞서서 투쟁에 돌입했을 때 그의 말은 "사악한 비방"으로 알려졌으며, 로자 룩셈부르크 역시 그녀가 베른슈타인과 나중에는 카우츠키에 맞서서 대중파업 문제에 대해서 투쟁했을 때, "신경질적"이라고 비난당했다.) 이러한 비난을 하기보다는 IBRP는 왜 우리의 비판이 거짓이고 심지어 "비방"인지에 대해서 설명해야만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반면에 IBRP는 이러한 종류의 비난을 우리에게 잘못 맞추고 있다. 그들이 그들 자신이 그러한 묘사를 하는 것에는 망설이지 않는데도 말이다. 특히, 어떤 증거 없이 우리가 프롤레타리아 진영의 일부가 아니라는 주장에서 그러하다. 이것은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눈의 티끌만을 보는 것이다.

[4] BC의 동지들이 "기회주의자"라는 표현을 "반혁명적"이라는 표현과 동일시하면서 우리의 처음 답변에 대하여 특별히 증오심을 가지고 반응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노동자운동의 역사를 아는 어느 누구라도 이러한 동일시가 오류이며 사실 무근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기회주의는 언제나 노동자 운동 내에 존재하는 혁명적 입장의 퇴보로 이해되어져 왔다. 보르디가주의와 BC가 기회주의적인 정치 형태,즉 다양한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처럼 이미 반혁명의 편으로 넘어간 것으로 나타나게 만들어 온 것은 단지 그들의 모호함과 명확함의 부족이었다. 그 결과 기회주의는 반혁명과 동일시되었던 것이다.

[5] IBRP,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향하여」

[6]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당일 것이다」, 같은 책, p.10

[7]특히 이러한 이론적 발전이 나타난 로자 룩셈부르크의 다음 두 저작을 보시오. 『자본축적과 자본축적에 대한 반 비판』, 먼슬리 리뷰 출판사 

[8] 제국주의 블록의 재구성이 오늘날의 의제가 아닌 주요한 이유는 군사적인 측면에서 미국에 도전할 수 있는 나라가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독일 같은 나라는 믿을만한 군사적 잠재력을 가지려면 (확실히 12년 이상의) 매우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9] 이러한 "탈선"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보려면 우리의 기사 「동유럽에서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혁명가들의 대응」을 보시오.(『국제평론』 제61호)

[10] 같은 글

[11] 우리는 다시 한번 더, 1980년 8월 폴란드에서 파업이 일어났을 때, CWO가 "지금 혁명을"이라는 슬로건을 그들의 신문에 실었던 것을 언급할 것이다. 그런데 그때, 사실상 한 명의 혁명가도 없었다. CWO 동지들은 우리에게 이것은 사고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제목과 기사는 한 투상 의해서 만들어졌으며, 그는 다른 회원들의 동의를 얻지 못했고 그 신문은 배포되었다가 즉각 회수되었다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그 설명을 받아들이지만 그럼에도 한 명의 회원이 그러한 멍청한 짓을 했던지, 조직이 출판을 막지 못했던지 간에 그 당시에 정치적·조직적 명확성이 없었음을 BC는 인정해야한다. 그 관련 투사는 아마도 CWO가 조직이나 출판위원회에 의해 사전에 통제되지 않은 신문을 출판할 권한을 주었던 사람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류의 심각한 개인의 실책이 가능한 것은 아나키스트 서클들이거나 1914-15년 이탈리아 사회당에서일 것이다. 그 당시 무솔리니는 사전에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아반띠에 전쟁 참여를 촉구하는 기사를 발표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무솔리니는 적어도 신문의 감독자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카쉥이 프랑스 정부에서 받은 돈을 전달해 주었다.) 어쨌든 CWO의 국제조직은 그 당시에 유감스러운 점이 많았다. 우리는 그 이래로 개선되었기를 바란다.

[12] 『국제혁명』 제116호에 실린 「I sindacati hanno cambiato ruolo con la decadenza del capitalismo?」를 보시오

[13]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당일 것이다」, p.8~9

[14] 「노동계급에 반하는 노동조합들」, 현재 모든 주요 유럽어로 출판되었다.

데카당트자본주의에서의 프롤레타리아투쟁

우리가 2007 현재 재인쇄하는 글은 원래 1980년에 작성된 것이어서, 확실히   25년이 넘은 지금이라면 우리가 다른식으로 설명했을 만한 그런 점들이 몇가지 있다.

특히 2가지 점들이 정정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새로이 산업화하는 국가들의 출현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1980년에 우리는, 데카당스 자본주의의 조건 하에서 새로이 산업화된 국가들이 출현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함에 있어서  의심의 여지없이 너무 범주적이었다. 한국-다른 나라들중에서도- 예는 이것이 사실상 맞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 1997년에 작성된 („아시아의 용들의 기운이 다하고 있다“, 인터네셔널리뷰 89)에서 우리가 지적했듯이, 2 세계대전에 뒤이은 한국, 대만 일본의 확장은,  소련지대의 확장에 대항한 완충지대를 만들려던 미국 제국주의의 필요와 경제적 개입에의 의해 대부분 결정되었다.

이글에서 매우 도식적으로 남아 있는 다른 측면은, 데카당스의 경제적인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 특히 1 세계대전이래 존재하는 위기, 전쟁 재건시기들 사이의 관계들이다. 특히, 전쟁에 의해 야기된 파괴의 역할이 전후 재건붐을 가능하게 만드는데 매우 결정적인 것으로서 제시한 바로 그러한 도식적인 방식은 확실히 정정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글의 나머지부분과 관련하여 우리는, 그것이 전적으로 유효하며, 무엇보다도 계급투쟁에 대한 그것의 결론들에서 그리고 자본주의의 상승기와 데카당스기에서 노동자 투쟁의 방법들에 있어서의 차이들에 있어서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글에 포함된 분석은 이것이 씌여진 이래 노동자투쟁들의 구체적인 경험에 의해 더욱 강화되어오고 있다

ICC, 28/01/2007



„모든 죽은 세대들의 전통은 마치 속의 악마처럼, 살아 있는 세대들의 머리를 짖누른다. 그리고 살아 있는 세대들이 자기 자신과 사물을 변혁하고 지금껏 존재한 적이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몰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때, 바로 그러한 혁명적 위기의 시기에 그들은 노심초사하며 과거의 망령들을 주문으로 불러내어 자신에게 봉사케하고, 그들에게서 이름과 전투 구호와 의상을 빌린다…“

(맑스,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 1852,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2, 287, 박종철출판사

계급투쟁이 되살아나고 있는 시기에,  프롤레타리아계급은,  부르조아계급이 고의적으로 직접적이고 공공연하게 만들내는 이데올로기의 무게 뿐만 아니라, 자체의 과거 경험에서 오는 전통의 무게에 직면해 있다. 노동자계급이 스스로의 해방을 위해서 이러한 경험들을 소화 흡수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은 자본주의에 종지부를 찍게 결정적인 대결에 요긴한 무기들을 준비할 있는 유일한 길이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이 과거의 경험과 죽은 전통들을 혼동할 위험도 있기에, 살아 남은 것을, 과거 투쟁들에서 영구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전적으로 과거에 속하는 상황적이고 일시적인 그러한 측면들로부터 구별해내는데 실패할 지도 모른다.

마르크스가 종종 강조했듯이, 이러한 위험은 그가 살아있을 당시인 19세기의 노동자계급에게도 있었다.  급속한 진화를 겪고 있던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에게는,  장인회( journeyman’s society), 바뵈프시대의  그리고 부르조아계급과 함께 봉건제에 대항한 자신들의 투쟁의 자취들과 같이 발생 초기의 낡은 전통들이 오랫동안 짐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1848 이전 시기의 종파적, 음모적 공화적 전통들의 무게가 1864년에 창립된 1 인터네셔널에서도 여전히 감지될 있었다.  그런데  세기는, 급속하게 진행된 변화들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일대기로 볼때 시기,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상승기에  위치하고  있었다. 시기 전체는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있어서 매우 특이적인 조건들을 부여했다. 번영하는 자본주의로부터 실제적이고 지속적인 생활조건의 개선을 획득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그와 동시에,  체계가 번창했기 때문에 것을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러한 틀의 통일성이 19세기 노동운동의 상이한 단계들에 연속성을 부여했다. 계급투쟁의 방법들과 도구들은 점진적으로, 특히 조직화에 있어서 노동조합이라는 형식으로 고안되고 개선되었다. 각각의 단계들에서는 이전 단계와의 유사성이 상이성보다 컸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통들의 무게는 당시 노동자세대들에게 있어서 그리 짐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가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급격히 변했다. 노동자계급이 수십년에 걸쳐 창출해낸 도구들의 대부분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렸고, 심지어는 계급에게 등을 돌려 자본의 무기가 되어버렸다. 노동조합, 대중정당들,  선거참여 의회주의가 그것들이었다.  이는 자본주의가 진화에 있어서 완전히 상이한 시기, 그것의 데카당스 시기에 돌입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제 프롤레타리아투쟁의 문맥이 완전히 변형되었다. 이제부터는 사회 내부에서의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개선들을 위한 투쟁이 무의미해졌다. 자본주의는 한계의 끝에서 어떤 것도 양보할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발작들은  프롤레타리아계급에 의해 과거에 이루어진 많은 획득물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1 세계대전은 자본주의의 생애에서 시기 사이의 이러한 단절의 신호탄이었다. 혁명가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을 혁명가들로 만든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체계가 쇠퇴의 시기로 돌입했음을 인식했다.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은 1919년의 강령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새로운 세기가, 자본주의의 해체의, 그것의 내부적인 분해의 세기가 탄생했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공산주의혁명의 세기가.“

그런데, 대다수의 혁명가들은 여전히 과거의 전통의 심각한 영향하에 있었다. 지대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3 인터네셔널은 자체에 의해 이뤄진 분석이 갖는 함의들로부터  논리적인 결론을 끌어낼 수가 없었다. 노동조합의 배반에 직면하여 그것은 노동조합의 파괴 대신에 그것의 새로운 재건설을 제안했다.  의회주의적 개혁들은 노동대중에게 있어서  모든 실천적인 중요성을 상실했음“을 그리고 „정치적 삶의 무게중심이 완전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의회로부터 이동해 버렸음“( 2차대회의 테제) 3인터네셔널은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도에의 참여를 옹호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1852년의 말들은 명중으로 하지만 비극적으로 확인되었다. 1914 제국주의전쟁이 발발하자 프롤레타리아계급을 혼란에 빠뜨렸던 과거의 무게는, 1917년에 시작된 혁명물결의 실패에 대해서도 그리고 다음 반세기동안 뒤따르게 되는 무서운 반혁명에 대해서도 대부분의 책임이 있다.

이미 이전 투쟁에서 장해물이었던 „죽은 세대들의 전통“은 우리의 세기에서는 훨씬 무서운 적이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종국에 승리하게 것인가는, 그것이 과거의 낡은 옷을 벗고서 그것의 투쟁에 대해 자본주의의 „새로운 세기“가 부과하는 요구들에 알맞게 스스로를 무장하느냐에 달려있다. 자본의 일생과 관련하여 그리고 프롤레타리아계급 자신의 투쟁의 목적과 방법과 관련하여, 자본주의의 상승기를 데카당스시기로부터 구분하는 차이들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다음의 글은 이러한 이해에 공헌하기 위한 것이다. 이글이 약간 평범하지 않은 방식으로 제시된 것은, 시기들 각각의 내부에 존재하는 통일성 그리고 두시기들의 표현들 사이에 종종 간주되는 차이들 양자 모두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두시기들의 특징들을 나란히 제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상승기의 특징들은 페이지의 왼쪽난에 데카당스기의 특징들은 오른쪽 난에 제시되었다). 

상승기 자본주의

데카당스기 자본주의

민족국가(nation)

19세기의 특징들중 하나는 새로운 민족국가들의 창건(독일, 이태리…) 또는 그것을 만들기 위한 치열한 투쟁(폴란드, 헝가리)이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발전에 가장 적절한 틀로서  민족국가를 발견한 동적인 자본주의의 경제의 필요성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세기에 민족국가의 독립은 실질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생산력의 발전의 일부이자, 반동의 요새였던 봉건제국들(러시아, 오스트리아) 파괴의 일부였다.♣

20세기에 민족국가는 생산력을 담아내기에는 너무 좁은 틀이 되어버렸다. 자본주의 생산관계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생산력을 억누르는 진정한 감옥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각각의 민족자본의 이해관계들로 인해 그러한 국가들이 하나 또는 다른 하나의 거대한 제국주의적 블록에 가담하며 독립성을 단념할 밖에 없게되자마자, 민족국가의 독립은 하나의 신기루가 되어버렸다. 세기에 소위 „민족국가의 독립“의 예들은 결국은 해당 국가가 영향권에서 다른 영향권으로 이동한 것을 의미했다. ♣ 

자본주의의 새로운 편제단위(units)들의 발달

자본주의 상승기의 전형적인 현상들의 하나는, 나라에 따른 그리고 그것의 특정한 역사적 조건들에 따른 불균등한 발전이었다. 가장 발달한 국가들은 다른 국가들에게 앞으로의 길을 보여주었고, 다른 국가들의 후진성은 반드시 극복불가능한 장해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후자들은 전자들을 따라잡거나 초월할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실상 거의 일반규칙이었다:

거대한 성장의 문맥 안에서 개별 국가들의 성장 규모는 매우 달랐다. 1860년대에 가장 강력하게 발달했던 유럽의 산업국가들은 시기에 보다 미미한 발전을 보였다. 영국의 생산이 ‚겨우’ 세배 성장하고, 프랑스의 생산이 ‚겨우’ 네배 성장한 반면, 독일의 생산은 일곱배 이상 그리고 미국의 생산은 열두배이상으로 성장했다. 상승의 상이한 속도로 인해, 1860년에서 1913 사이의 중요한  산업국가들의 서열이 변동했다. 1880 영국은 세계생산에서의 선두자리를 미국에게 내주었다. 동시에 프랑스는 독일에 의해 추월당했다. 1900년경 영국은 독일에 의해 추월당해 3위가 되었다“(F. 슈테른베르크, 세계심판정 앞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1951, 자체번역)

동일한 시기에 다른 국가들은 근대적인 산업강국으로 성장했다.  일본과 러시아는 매우 빠른 산업화 과정을 겪었지만, 이것은 자본주의가 데카당스기에 진입함에 의해 억제된다.

후진국가들이 이런 식으로 따라잡을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의 결과였다:

 

1)  그들의 내부시장이 산업자본발달을 위한 출구로서 가능성을 가졌다. 거대한 그리고 상대적으로 번성한 전자본주의 부문들(수공업과 특히 농업) 자본의 성장에 필수적인 비옥한 토양을 형성했다.

2)  선진국가들의 값싼 상품들에 대항한 보호무역주의의 활용을 통해, 국내생산을 위한 시장을 그들 자신의 국경 내부에서 잠시나마 유지할 있었다.

3) 세계규모로 볼때, 광대한 자본주의외부(extra-capitalist) 시장이, 특히, 정복과정에 놓여 있던 식민지영토들 내에 여전히 존재했다. 이것들은 산업국가들에서 제조된 ‚과잉’ 상품들을 흡수했다.

4)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발달된 국가들의 실제적인 발달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시기에는 전반적으로 수요가 공급을 초과할 정도여서, 상품들의 가격은 높은 생산비용들에 의해, 발달된 국가들의 생산비용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를 통해 이들 국가들에서의 자본은, (가장 발달된 국가들이 초과-이윤(super-profit) 끌어모으는 것과는 달리) 실제적인 축적을 행하기에 충분한 이윤을 실현할 있었다.

5) 상승기에 군사비지출은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었고 용이하게 보상될 있었으며, 심지어는 발달된 산업국가들에 의해서는 식민지정복의 형태로 이득이 되기도 했다.

6) 19세기에 기술수준은 이전 시기에 비해서 상당한 진전을 보여주긴 하지만 거대한 양의 자본의 투자를 요구하지 않았다. ♣ 

자본주의 데카당스의 시기는 어떤 새로운 산업화된 국가의 출현도 불가능하다는 점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1 세계대전 이전에 잃어버린 시간을 보충하지 못한 나라들은 결국 전적인 미개발 상태에 정체하거나 아니면 모래성의 정상에 있는 나라들에 비해서 연대적으로 뒤처진 남아 있을 밖에 없었다.이것은 인도나 중국과 같은 대국들의 경우인데, 그들의 ‚국가독립’이나 심지어 소위 ‚혁명’(, 가혹한 국가자본주의의 도입)으로도 그들은 저개발이나 빈곤을 타파할 없었다. 소련조차도 규칙을 벗어날 없었다. 러시아의  농부들에게  특히 노동자들에게 부과된 엄청난 희생들, 강제노동수용소에서 거의 공짜 노동력의 대대적인 사용, 국가계획 무역에서의 독점(트로츠키주의자들에 의해 ‚위대한 노동자계급의 획득물’로서 그리고 ‚자본주의의 폐지’의 표시들로서 제시됨),  동유럽 완충지대 국가들의 체계적인 경제적 수탈 모든 것으로도 소련이 완전히 산업화된 나라들을 따라잡을 있기에는,  저개발과 후진성의 흔적들을 제거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소련의 위기에 관한 인터네셔널리뷰의 기사들을  참조할 ).

시기에는 어떠한  자본주의적 편제단위도 출현할 없다는 점은, 오늘의 6 산업강국들(미국, 일본,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영국) 1 세계대전 전야에 이미 (다른 서열로 이긴 하지만)  선도적인 경제세력들이었던 사실로도 표현된다.

저개발국가들이 선진국들의 수준으로 성장할 없음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설명된다:

 

1)  산업화된 국가들의 자본주의외부 부문들(extra-capitalist sectors) 농업의 자본주의화와 수공업의 거의 전적인 황폐화로 인해 완전히 소진되었다.

2) 20세기에 있어서 보호무역주의적 정책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발달된 경제에게 숨쉴 여지를 주기는 커녕 국민경제의 질식을 초래했다.

3)  자본주의외부의 시장들은 세계 수준에서 이미 포화되어 있다. 3세계의 거대한 필요들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결핍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산업화를 성취하지 못한 경제들은, 그것의 완전한 황폐화로 인하여 지불능력이 있는 시장을 형성하지 못한다.

4) 수요와 공급의 법칙은 새로운 국가의 발전에 있어서  불리하게 작용한다. 시장이 이미 포화된 세계에서 공급은 수요를 초과하고 가격은 최소생산비용에 의해 결정된다. 때문에, 최고의 생산비를 가진 국가들은 이윤의 축소나 손해를 감수하면서 상품을 밖에 없다. 이것은 그들에게 극도의 낮은 축적율을 담보하며, 심지어는 값싼 노동력으로도 그들은 현대기술의 대대적인 획득에 요구되는 투자를 실현할 없다. 결과, 이들과 거대산업열강들 사이의 간극은 넓어질 뿐이다.

5) 전쟁이 점점 영구화되어가는 시기에 군사비지출은 심지어는 가장 발달된 국가들에게도 극도로 무거운 부담이 된다. 그것은 저개발 국가들의 완전한 경제적 파산을 초래한다.

6)  오늘, 현대 산업생산은 지난 세기와 비교될 없을  정도로 훨씬 정교한 기술을 요구한다. 이것은 상당한 수준의 투자를 의미하며 단지 선진국들만이 이것을 부담할 있다. 그래서 순수한 기술적인 요소도 경제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

상승기 자본주의

데카당스기 자본주의

국가(State) 사회의 관계

자본주의의 상승기에는, 정치의 전문가들에게 할당된 영역인 정치와, 자본과 사적 자본가들의 영역인 경제 사이는 매우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시기에 국가는, 비록 사회를 지배하는 경향이 있긴 해도, 대체로 국가의 입법부에서 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자본의 이해그룹들과 분파들에 의해 여전히 지배되었다. 입법부가 여전히 분명하게 행정부를 지배했다. 의회제도, 대표제 민주주의가 여전히 실제성을 갖고 있어서 상이한 이해를 갖는 그룹들이 서로 대적할 있는 그러한 무대였다.

국가의 기능이 사회질서를 장기적으로 그리고 전체로서의 자본주의 체제의 이해 속에서 유지하는 것이였기에,  국가는 노동자들에는 이롭고 사적 자본가들의 채워질 수없는 즉각적인 탐욕이 요구하는 야만적인 과잉착취에는 대항한  특정한 개혁들의 원천이 있었다(영국의 10시간노동법, 아동노동금지법 등등을 참조). ♣    

자본주의의 데카당스기는 사회의 국가로의 흡수를 특징으로 한다. 이것로 인해서, 사회를 대표하는 것이 원래 기능이었던 입법부는,  국가라는 피라미드의 정상에 위치한 행정부의 면전에서 어떤 중요성도 상실해 버렸다.

시기에 정치와 경제는 통합되어, 국가는 국민경제의 주요 역량이, 그것의 사실상의 지도부로 된다.

점진적인 통합(혼합경제) 통해서건 아니면 갑작스런 변혁을 통해서이건 국가는 이상 자본가들과 이해그룹들의 대리기구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특정한 이해그룹들을 자신의 강철규율에 복속시키면서 집단적인 자본가가 되었다.

국민경제의 실현된 단위체로서의 국가는 특정한 제국주의블록 내에서뿐만 아니라 라이벌블록에 대항해서도 국가의 이해를 옹호한다. 더구나 그것은 직접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착취와 종속의 확보를 담당한다.     

상승기 자본주의

데카당스기 자본주의

전쟁(War)

19세기에 전쟁의 기능은 대체로, 자본주의 국가에게 그것의 발전에 요구되는 통일성과 영토 확장을 담보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전쟁은 그것으로 인해 초래되는 비참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진보적인 성격의 측면이었다.

그래서 전쟁은 세나라에 국한되었고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다:

-          단기적 이었다

-          많은 파괴를 초래하지 않았다

-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새로운 약진을 결과시켰다( 예를 들어 독불전쟁, 오스트리아-이태리전쟁, 오스트리아-프로이센전쟁 크림전쟁등이 그러했다)

 

1870/71년의 독불전쟁은 전형적으로 이러한 종류의 전쟁이었다:

-          그것은 독일 민족국가의 성립에 있어서, 생산력의 엄청난 발전의 토대를 창조함에 있어서 그리고 유럽의, 정치적 역할을 참작한다면  전세계의  산업프롤레타리아계급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형성함에 있어서 결정적인 단계를 표현했다.

-          동시에, 전쟁에는 1년보다 짧은 시간이 걸렸다. 또한 그렇게 많은 희생자를 결과시키지도 않았다. 패배한 프랑스에게 조차도 그리 중요한 장해를 가져오지 않아서 1871 이후 프랑스는 , 2제국 하에서 개시된 산업발전을 계속해 나갔고 거대한 식민지 소유를 획득했다.

 

식민지전쟁에 있어서, 목적은 새로운 시장과 원자재보유고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전쟁들은, 팽창하려는 그리고 세계의 새로운지역을 분할하려는 욕구로 추동된 자본주의국가들 사이의 경쟁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전체 자본주의의 팽창의, 세계 생산력의 팽창의 일부였다. ♣   

생존가능한 새로운 민족국가 단위의 형성이 이상 불가능한 시기에, 새로운 국가의 형식적인 독립이 본질적으로는 제국주의 강대국들 사이의 관계들의 결과인 그러한 시기에,  전쟁은 더이상 사회의 생산력의 발전을 위한 경제적 필요로부터 발생하지 않으며, 오히려, 블록들 사이의 역량균형이라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요인을 갖는다. 이러한 전쟁은 이상 19세기에서와 같은 ‚민족국가전쟁(national war)’ 아니라 제국주의 전쟁(imperialist war)이다. 그것은 이상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팽창의 측면이 아니라 팽창의 불가능성을 표현한다.

목적은 이상 세계를 분활하는 것이 아니라, 재분활하는 것이다. 계속적인 발전이 절대적으로 이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블록의 국가들은 오직 라이블 블록을 댓가로 하여 자신의 자본 활용을 유지할 있을 뿐이다. 최종 결과는 세계 자본 전체의 약화이다.

전쟁은 이제 전세계적으로 일반화되어 있고  전세계경제의 엄청난 규모의 파괴를 초래하면서 전면화된 야만주의로 치닫고 있다.

 

1870년에서와 마찬가지로 1914년과 1939년의 전쟁들에서 프랑스는 독일에 대항해 싸웠지만, 차이들은 뚜렸하고, 정확히 바로 차이들이 19세기에서 20세기로의 전쟁의 본질에 있어서의 변화를 보여준다: 

-          전체 유럽을 그런 다음 세계를 휩쓸었다

-          전면전으로서, 수년동안 전체 인구와 경제 물자를 동원했고, 수십년간의 인간 노동을 단기간에 무화시켰으며 수백만의 프롤레타리아를 학살하고 수억의 인류를 기근으로 몰아넣었다.

20세기의 전쟁은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그러한 „젊음의 질병(youthful maladies)“ 아니다. 그것은 죽어가는 체계의 경련이다. ♣  .

상승기 자본주의

데카당스기 자본주의

위기(Crises)

위기는, 불균등한 내부 시장들과, 불균일한 발전에 기초한 세계에서 상이한 국가들과 상이한 생산부문에서의 생산력의 불균등한 발달에 의해 표시되었다.

그것은  내부시장이 포화되어 새로운 팽창이 요구된다는 사실의 표현이다. 그래서 주기적(7년에서 10 간격 - 고정 자본의 활부상환 기간에 해당) 이고 새로운 시장의 개방과 함께 해결되었다.

이러한 위기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졌다:

1)       일반적으로 증권시장의 붕괴 후에 갑작스럽게  발생했다

2)       단기간 지속되었다( 길어도 1-3 지속)

3)       모든 나라로 일반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          1825년의 위기는 주로 영국에 국한되었고 프랑스나 독일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          1830년의 위기는 주로 미국의 위기로서 프랑스와 독일은 다시 이것을 모면했다

-          1847년의 위기는 미국에는 전혀 그리고 독일에도 단지 약간만 영향을 미쳤다.

-          1866년의 위기는 독일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1873년의 위기는 프랑스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이후, 산업순환주기(주식시장붕괴와 사이의) 모든 발달한 국가들로 일반화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때도 미국은 1900-1903년의 경기침체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프랑스는 1906년의 경기침체를 모면할 있었다. 한편, 1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1913년의 위기는 사실상 모든 국가들을 강타했다.

4)       모든 산업부문로 전반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          1825년과 1836년의 위기에 의해 타격을 받은 것은 근본적으로 순면산업이었다.

-          그후는, 직물이 위기에 의해 영향을 받기는 했어도, (특히 1873년의 위기) 가장 고통을 당한 것은 금속산업과 철도였다.

그래서, 어떤 부문은 다른 부문의 침체기 동안에도 주요한 붐을 겪기도 했다.

5)       새로운 산업성장기를 결과시켰다(위에서 인용된 슈테른베르크의 상장수치들은 이런 측면에서 의미심장하다)

6)       프롤레타리아혁명 발생의 조건들은 커녕, 체계의 정치적 위기의 조건들을 생성하지 않았다.

마지막 점에 있어서, 1847-48년의 경험 이후 다음과 같이 썼을 때의 마르크스의 오류를 우리는 지적할 밖에 없다: „새로운 혁명은 오직 새로운 위기 이후에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마찬가지로 불가피하다“(신라인신문, 1850). 그의 실수는, 혁명이 가능하기 위해 위기가 필요하다는 점의 인식에 있는 것도, 새로운 위기가 뒤따를 것을 선언한데 있는 것도 아니다(1857년의 위기는 1847년의 그것보다 훨씬 격심했다). 그것은, 이시기의 위기가 이미 체계에 있어서 치명적인 위기라는 생각에 있었다.

오류를 마르크스는 이후 당연히 교정했다.  그는 혁명의 객관적 조건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음을 인식했고, 바로 이때문에 나중에 1인터네셔널(IWA)내부에서, 혁명으로의 노정에서 현단계를 건너뛰기를 원했던 아나키스트들과 충돌했다.  동일한 이유로, 1870 9 9 그는 파리의 노동자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새로운 정부를 전복하려는 어떤 시도도 (…)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마르크스, -불전쟁에 관한 2 연설, 마르크스엥겔스전집, 17, 277, 자체번역).

오늘날, 아나키스트들이나 보르디가주의자들이나 ‚혁명은 아무때나 가능하다’라거나 혁명의 물질적 조건이 1848년이나 1871년에 이미 존재했다라고 믿을 것이다. ♣

 

20세기가 시작된 이래, 시장은 단일화되고 국제적으로 되었다. 내부시장은 (주로, 전자본주의(precapitalist) 부문들의 소멸로 인해) 중요성을 상실했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위기는 이제 시장이 잠정적으로 너무 협소함을 명시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전세계적인 팽창의 어떤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음을 나타냈다. 그래서 위기는 오늘 전면화되고 영구적인 성격을 띤다.

특히 경기는, 이상 생산능력과 주어진 시기의 시장상황 사이의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원인, 전쟁-파괴-재건-위기의 순환주기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문맥으로 볼때, 경제발전기의 지속기간을 결정하는 것은, 자본의 활부상환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이전에 있었던 전쟁이 초래한 파괴의 정도이다. 그래서 재건에 기초한 팽창의 지속기간이 2 세계대전이후(17) 경우에 1 세계대전이후(7) 비해서 2 이상으로 길었던 점이 납득이 된다.

자유방임(laisser-faire)’ 특징으로 19세기와  대조적으로,  20세기의 경기침체의 규모는 국가와 연구 조사 기구들에 의해 행해지는 인공적인 대책들에 의해, 전면적인 위기의 지연을 목적으로 대책들에 의해 제한되었다. 이것은 지역전쟁들, 무기생산의 발달과 전쟁경제,  은행권 발행과 크레딧 판매를 위한 체계적 방편, 일반화된 부채 등과 같이, 자본주의의 엄격히 경제적인 기능과는 거리가 있는 모든 정치적인 방편들에도 적용된다.

 

이렇게 해서, 20세기의 위기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1)       이상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발전한다. 이런 의미에서, 1929년의 위기는 초기에 이전 세기의 위기의 특정 특징들(증권시장의 붕괴 이후의 갑작스런 발생) 보여주었다. 이것은 경제적 조건들이 과거의 그것과 유사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의 정치적 기구들의 후진성, 새로운 경제적 조건들에 보조를 맞출 없음의 결과였다. 그러나  이후에 대대적인 국가의 개입(미국의 뉴딜정책, 독일의 전쟁 생산 등등…) 위기의 영향들을 10 넘게 분산시켰다.

2)        일단 시작되면, 장기간 지속된다. 그래서 19세기에는 침체와 번영사이의 비율이 1:4(10년의 순환주기 동안에 2년의 위기)였던 반면에,  20세기에  디플레이션기와 회복기 사이의 비율은 2:1이다. 1914년과 1980 사이에 10년간의 전면전쟁(영구적인 지역전쟁들을 제외하고도) 있었고, 32년간의 디플레이션(1918-22, 1929-39, 1945-50, 1967-80) 있어서 총합하여 42년의 전쟁과 위기가 있었던 반면 재건기(1922-29, 1950-67) 단지 24년에 불과했다. 그리고 위기의 순환주기는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

3)       19세기에는 경제 기관이 위기의 종결시 자체의 역량으로 회복되었던 반면, 20세기의 위기는 자본주의적 관점으로 볼때, 전면화된 전쟁 이외에는 어떤 해결책도 없다.

이러한 위기는 죽음의 병에 걸린 체계에 있어서 불가피한 것으로서,  프롤레타리아계급에 공산주의 혁명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부여한다.

20세기는 진정,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이 창립대회에 말했던 „전쟁과 혁명의 시대“이다. ♣

 

상승기 자본주의

데카당스기 자본주의

계급투쟁(Class struggle)

19세기 계급투쟁의 형식은 시기 자본의 특성들과 노동계급 자체의 특성들 양자에 의해 결정되었다.

1) 19세기의 자본은 수많은 자본들로 여전히 분산되어 있었다. 100명이상의 노동자를 가진 공장들은 드물었고, -수공업적인(semi-artisanal) 기업들이 훨씬 일반적이었다. 19세기 후반기에 이르러서야 , 철도의 출현, 기계의 대대적인 도입, 광산의 번성과 더불어, 우리가 오늘 알고 있는 대규모의 산업이 우세하게 되었다.

2) 이러한 조건하에서 경쟁은 많은 자본가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3) 게다가, 기술이 그리 높이 발달하지 않았다. 1세대 노동자의 대부분은 농촌지역에서 영입된 미숙련 노동인력들이었다. 가장 숙련된 노동자들은 수공업자들이었다.

4) 착취는 노동시간과 대우 낮은 인금을 통한 절대잉여가치(absolute surplus value) 추출에 기반하고 있었다. 

5) 공장주 또는 각각의 공장은 그가 착취하는 노동자들과 직접적이자 개별적으로 대면했다. 19세기의 2/3 지날때까지는 기업가들의 단일조직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개별적인 충돌들 속에서 자본가들은 흔히 산업 충돌의 타격을 입은 라이벌 공장들의 곤경들에 투기를 하고 그러한 상황을 이용해 라이벌의 고객들을 가로챘다.

6) 국가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충돌들의 외부에 머물렀다. 그러한 충들이 ‚공공 질서를 위협’하는 경우에 한해,  최후의 방편으로서 개입했다.  

 

노동자 계급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관찰될 있다:

1) 자본과 마찬가지로, 매우 분산되어 있는 그리고 여전히 형성되고 있는 계급이었다. 가장 전투적인 부문은 훨씬 수공업에 관련되어 있어서 동업조합주의(corporatism) 성격이 강했다.

2) 노동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직접적이고 전적으로 지배했다. 노동자의 부족을 초래하게 되는  생산의 급속한 팽창의 시기에 가서야, 노동자들은 자본의 공격에 대항해 효과적으로 저항할 있었고, 임금과 노동조건과 관련 상당한 개선을 획득할 있었다. 위축의 시기에 노동자들은 그들의 위력을 잃었고 기세가 껶였으며 그들이 이전에 성취한 것의 어느 정도를 다시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상의 표현으로서, 1 2 인터네셔널 –계급의  높은 전투성의 표시였던- 경제 번영의 시기들( 1 인터네셔널(IWA) 1867 위기가 있기  3년전인 1864, 2 인터네셔널(Socialist International) 1890-93 위기의 전야인 1889) 창립되었던 사실을 있다.

3) 19세기에는 외국으로의 이민이,  주기적인 위기 동안 프롤레타리아계급을 강타한 실업과 엄청난 빈곤에 대한  해결책이었다. 유럽의 자본주의 중심지들에서 생존조건이 이상 견딜 없게 되었을 계급의 중요한 부분들이 신세계로 도피할 있었던 점이, 순환적인 위기가 1848 6월과 같은 폭발적인 상황을 자극하지 않도록 방지한 요소였다.

4)  이러한 특별한 조건들로 인해 노동자들은 경제적 저항을 위한 조직들, 노동조합들을 창조할 있었는데, 이것들은 지역적, 업종별 형태를 가질 밖에 없었고 소수의 노동자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었다. 투쟁의 주요 형태인 파업은 개별화되어 이전에 오랫동안 준비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자본의 이런 저런 부문과, 심지어는 단일한 공장과 대치하기 위해서 번영기가 때까지 기다렸다. 이러한 모든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은, 여전히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기관이었다. 자본에 대항한 경제투쟁에서 뿐만 아니라, 계급의 삶의 중심으로서, 노동자들이 공통의 관심사, 공동의 목표를 추구함을 배우게 되는 연대의 학교로서, 그리고 혁명적 선동에 개방된,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자면 ‚공산주의의 학교’로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5)19세기에는 파업이 일반적으로 장기간 지속되었고 이점이 파업의 유효성의 전제조건들 하나였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굶주릴 위험을 해야 했고 이때문에 지원기금, 즉‚저항금(caisses de resistance)’ 준비하고 다른 노동자들에게 재정적은 원조를 호소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다른 노동자들이 작업을 계속한다는 바로 사실이 파업중인 노동자들에게는 긍정적인 요소가 있었다(예를 들어, 충돌에 관여된 자본가의 시장을 위협함으로써).

6) 이러한 조건들 아래에서, 조직화 이전에 물질적, 재정적 문제가  노동자들이 효과적으로 투쟁하기 위해서는 결정적이었다. 매우 빈번히 문제는, 투쟁의 실제 성취물보다 우선권을 가졌고,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렸다( 조직이 자본으로부터 얻어낼 있는 것보다 많은 돈을 노동자들이 그들의 조직에게 지출해야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본가들에게 대답하면서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  

데카당스기의 자본주의에서 계급투쟁은 자본의 관점에서 볼때, 다음과 같은 특성들에 의해 결정된다:

1)  자본은 고도의 집약과 중심화에 도달했다

2)  19세기에 비해서 경쟁은 수적인 면에서는 편이지만 강도는 높다.

3) 기술이 고도로 발달했다. 노동력은 더욱 숙련되었고 단순작업은 기계에 의해 수행된다. 노동자계급의 연속적인 세대들이 존재한다. 계급의 단지 작은 일부만이 농촌지역으로부터 영입되고 대부분은 노동자들의 자식들이다.

4) 착취의 주요한 기반은 속도강화와 생산성의 증가를 통한 상대적 잉여가치(relative surplus value) 착취이다.

5) 노동자계급에 대항하여 자본가들은 이전에 비해서 높은 정도의 단결과 연대를 가진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개인적으로 대면할 필요가  없도록 특수한 조직들을 창조했다.

6) 국가는 사회적 충돌들에 자본가 자체로서든 아니면 ‚조정자’, 통제자로서든 그러한 대치의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수준들 양자 모두에서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그러한 충돌들을 ‚수용가능한한’ 경계 내부에 유지하거나  아니면 진압한다.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지적될 있다:

1) 노동자계급은 단일화되고 높은 지적 수준으로 숙련되어 있다. 그것은 수공업과 아주 멀게만 관련되어 있다. 전투성의 중심은 그래서 대규모의 현대적 공장들에서 발견되고, 투쟁은 동업조합주의를 벗어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2) 이전 시기와는 대조적으로, 결정적인 투쟁들은 사회가 위기에 처했을 발생하고 발전한다(러시아에서 1917년과 1905년의 혁명들은 전쟁이라는 위기의 급성형태로부터 출현했고, 1917년과 1923 사이의 국제적인 거대한 투쟁물결은 1 세계대전 그리고 그에 뒤이은 경제적 위기라는 동요의 시기동안 발생하고 재건이 가져온 경제회복과 더불어 마감되었다.)

이것이 바로, 이전의 인터네셔널과는 반대로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이, 가장 극심한 위기의 시기인  1919 창립되어 이를 통해 계급 전투성의 강력한 고조를 가져온 이유이다.

3) 20세기에, 특히 2 세계대전 이후에 보여지는 경제적 이민 현상은 그것의 기원이나 함의의 측면에서 지난 세기의 커다란 이민물결에 필적할 없다. 그것은 자본의 새로운 영토로의 역사적인 팽창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식민지들에서의 경제발전의 블가능성을  드러낸다. 전식민지들(ex-colonies)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그들의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나 과거의 노동자들이 떠난 바로 그러한 중심지로 향할 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체계가 급성 위기에 돌입하면 어떤 안전가치(safety-value) 제공하지 않는다. 재건이 일단 종결되면 이민은 실업에 대한 해결책이 이상 되지 못하며, 실업은 이전에 저개발 국가들을 타격했듯이 이제는 선진국들을 타격한다. 위기는 어떤 탈출구의 전망도 없이  노동자계급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몬다.

4) 노동자계급에 의해 성취되는 지속적인 개선이 이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것의 경제적인 이해관계에 근거한 특이적이고 영구적인 조직들을 유지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노동조합은 그것의 창립을 있게 했던 기능을 상실했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학교’이기는 커녕 이상은 계급의 기관일 수도 없게 되어 자본에 의해 영입되어 국가에 통합되어 버렸다. 이러한 현상은 국가가 사회를 흡수하는 일반적 경향에 의해 더욱 용이해진다.

5) 프롤레타리아투쟁은 엄격히 경제적인 범주를 넘어서는 경향이 있고, 국가와 직접적으로 대치하고 스스로를 정치화하고 계급의 대대적인 참여를 요구함으로써 사회투쟁이 된다.   이것이 로자 룩셈부르크가 1 러시아혁명이후 그녀의 대중파업 (Mass Strike)팜플렛 안에서 지적해낸 것이다.  동일한 생각이, „ 파업 뒤에는 혁명의 히드라가 고개를 든다“라는 레닌의 표현속에 들어 있다.

6) 데카당스기에 발생하는 투쟁 유형은 조직 수준에서 미리 준비될 수가 없다.  투쟁들은 자연발생적으로 폭발하고, 전면화되는 경향이 있다. 산별적으로 보다는 지역적 영토적 수준에서 발생하고 그것의 진화는 수직적이기 보다는 수평적이다. 이것들은 혁명적 대치국면을 미리 보여주는 특징들이다.  상황에서 행동에 돌입하는 것은 단순히 직업별 범주들이나 이런 저런 기업의 노동자들이 아니라 지리-정치적인 단위(지방, 국가) 수준에서의 전체로서의 노동자계급이기에 그러하다.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은 투쟁에 요구되는 물질적인 수단을 이상 미리 준비할 수가 없다. 자본주의가 지금 조직된 방식으로 볼때 파업의 길이는 전반적으로 효과적인 무기가 아니다(나머지 자본가들이 관련된 자본가를 원조할 수있기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 파업의 성공은 더이상, 노동자들에 의해 모아지는 재정자금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확장할 수있는 그들의 능력에 근본적으로 달려있다. 이러한 확장을 통해서만 전체 국가자본에 의협을 가할 있는 것이다.

시기에 투쟁중인 노동자들과의 연대는 노동자들의 다른 부분들로부터의 금전적인 지원의 문제가 이상 아니다(이러한 지원은 노동자들을 그들의 진정한 투쟁방법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노동조합이 제공할 있는 대용연대(ersatz solidarity)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다른 부분들이 투쟁에 동참하는 것이다.

7) 투쟁의 조직이 투쟁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라 투쟁으로부터 탄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의 자기방어,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무장도, 국제공산주의그룹(Groupe Communiste International) 같은 그룹들이 생각하듯이 총기류 몇개를 지하실에 숨김으로써 미리 준비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이전의 단계들을 통과하지 않고는 도달될 없는 하나의 과정의 단계들이다. ♣

상승기 자본주의

데카당스기 자본주의

혁명조직(revolutionary organisation) 역할

계급에 의해 그리고 그것의 투쟁에 의해 만들어진 혁명가조직은 강령을 기반으로 구축되고 소수로 이뤄진 조직이다.

기능들은 다음과 같다:

1) 자본주의 사회의 비판을 이론화해 낸다.

2) 강령, 계급투쟁의 최종목적들을 작성해 낸다

3) 계급 내부에 강령을 전파한다.

4) 계급의 즉각적인 투쟁의 모든 시기들에,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항한 계급의 자기 방어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마지막 점과 관련하여, 19세기에 혁명조직은, 이전 투쟁들에 의해 만들어진 조직의 특정 맹아적인 수준을 기반으로하여 계급의 단위적인 경제적 기관들을 발의하고 조직하는 기능을 가졌다.

이러한 기능때문에, 그리고 시기의 상황-개량의 가능성과 계급 내부에서 개량주의적 환상으로의 선동 경향- 으로 인해 혁명가들의 조직( 2 인터네셔널의 정당들) 자체가 개량주의에 감염되었는데, 이것은 결국 즉각적인 개량을 위해서 혁명의 최종목표를 포기했다.  결과 경제적 조직들(노동조합) 유지와 발전이 유일한 임무로 여겨졌다(이는 경제주의로 알려져 있다).

혁명가들의 조직 내부에서 오직 소수만이 이러한 진화에 저항하고 사회주의 혁명의 역사적 강령의 원래 모습을 옹호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 소수 일부는 개량주의의 발달에 대항한 반작용으로, 프롤레타리아계급에 있어서는 이질적인 견해를 발달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견해에 따르면, 당이 의식의 유일한 자리, 완성된 강령의 단독 소유자 이며, 부르조아계급과 정당들의 도식에 따라서 당의 기능이 계급을 ‚대표하는’ 것이어서, 계급의  결정기관, 권력장악을 위한 계급기관이 권리를 가지는 것으로 본다.  대리주의(substitutionism) 불리는 이러한 견해는, 2 인터네셔널 내부의 대다수 혁명좌파에 영향을 끼쳤고 특히 레닌이 주요한 이론가였다(무엇을 것인가? 일보 전진, 이보 후퇴). ♣

데카당스시기에 혁명가들의 조직은 이전 시기의 일반적인 특징들을 유지하지만, 노동자들의 즉각적인 이해관계의 옹호가, 이제까지 역사적인 사안으로 여겨져 왔던 최종목적으로부터  이상 분리될 없다는 점이 추가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마지막 때문에, 그것은 이상 계급을 조직하는 역할을 갖지 않는다. 이것은 투쟁중의 계급 자체에 수행되어야 과업이다.  이때 계급은 경제적인-즉각적인 저항과 옹호를 위한 조직- 그리고 정치적인 측면들 모두에 있어서 새로운 유형의 조직을 창조하고 권력의 장악을 지향하게 된다. 이러한 조직 유형이 노동자평의회(workers’ council)이다.

노동자 해방은 노동자들 자신의 과업이다“라는 노동운동의 오래된 구호를 내걸고, 혁명조직은 혁명에 대한 부르조아적 관점에 근거한 모든 대리주의적 관념들에 대항해 투쟁해야 한다. 하나의 조직으로서 혁명적인 소수는 계급을 동원하기 위해서 즉각적인 요구들의 정강(platform) 미리 준비할 과업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모든 투쟁들에 결연히 참여하고, 투쟁을 위한 전반적인 방향을 선동하며, 계급 내부의 부르조아적 요소와 이데올로기를 비판해야 한다. 투쟁 동안 그것은 운동의 불가피한 절정인 혁명으로의 유일한 길인 전면화(generalisation)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방관자도  단순한 일꾼도 아니다.

혁명가들의 조직은 노동자들의 써클이나 그룹들의 출현을 고무하고 속에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때 이러한 조직은, 어떤  노동조합의 건설도 불가능한 상황에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아직 그것의 완전한 형태의 단일기관들, 평의회들을 창조할 처지에 있지 못하는 동안, 그러한 써클이나 그룹들은 계급 속에 존재하는 재편과 토론을 향한 실제적인 필요에 부응하는 임시적이고 미완성된 형태들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써클들의 성질에 따라서 혁명가들의 조직은 그것들을 인공적으로  만들려는 시도들에 대해서도, 그러한 그룹들을 당들의 전이벨트(transmissions belts) 전환시키려는  생각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것들을 평의회나 기타의 정치-경제적 기관들의  맹아로 바라보는 견해들에 대해서도 대항해 투쟁해야 한다.  모든 견해들은 계급의식의 성숙과 단위적인 자기조직화(unitary self-organisation) 과정의 발전을 마비시킬 뿐이다. 이러한 써클은, 설익은 정강을 결정함으로써 스스로가 목적이 되어버리는 것을 피한다면, 자신의 계급이 직면한 문제들에 흥미를 가진 모든 노동자들에게 열려 있는 만남의 장으로 남아 있는 , 가치를 가질 있으며 그것들의 중요하나 임시적인 기능을 수행할 있다.   

마지막으로, 반세기동안 프롤레타리아계급을 짖누른 반혁명 시기의 결과로 혁명가들이 극도로 분산되어 있는 상황에서, 혁명가들의 조직은, 국제적인 수준에서 정치적 상황의 전개를 능동적으로 지원하고, 계급의 국제적인 정치정당의 건설을 향한 과정을 개시하게 논쟁과 대면을 고무할 임무를 갖는다. ♣

노동자계급의 역사상 가장 심각한 반혁명은  혁명가들의 조직 자체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시험이었다.

그러한 폭풍 속에서 공산주의 강령의 근본 원칙들을 지켜낼 알았던 경향들만이 오직 살아남을 있었다. 그런데 승승장구하는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의 압력하에 계급의 입장을 포기하는 도구로서 대체적로 기능했던 ‚새로운 생각들(new conceptations)’ 대해 불신적인 이러한 태도는, 불가피하게도 혁명가들이 자본의 일대기에 있어서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있어서 생겨나는 변화들의  모든 함의들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이러한 현상의 가장 풍자화적인 형태는, 계급의 입장은 ‚불변적이고’ 1848년에 한번 공식화된 공산주의 강령은 ‚마침표 하나도 변경될 필요가 없다’라는 생각이다. 

혁명가들의 조직은, 종종 낡은 내용물을 새롭게 포장하여 선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모더니스트 이데올로기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하는 한편, 조직이 계급에 의해 만들어진 이유인 그러한  임무에 따라 행동해야할 경우에, 사회의 삶에 있어서의 변화를 그리고 그러한 변화들이 계급에게 그리고 그것의 공산주의적 선봉에게 있어서 갖는 함의들을 파악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모든 국가들이 분명하게 반동적인 지금, 혁명가들의 조직은 소위 ‚민족해방’운동들을 지지하는 어떤 생각들에 대항해서 투쟁해야 한다. 모든 전쟁이 제국주의적 성격을 띠는 지금,  그것이 어떤 구실로든 상관없이 오늘날의 전쟁에 참여한다는 어떤 생각도 비난해야 한다. 사회가 국가에 의해 흡수된 지금, 자본주의가 어떤 실제적인 개량도 허용할 없는 지금,  선거라는 가면극과 의회에의 참여라는 어떤 생각에도 대항해 투쟁해야 한다.

계급투쟁이 오늘날 직면한 모든 새로운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조건들과 더불어, 혁명가들의 조직은, 노동조합과 같이 투쟁에 있어서 장해물일 밖에 없는 조직들의 부활에 관한 계급 내부의 환상을 분쇄해야 한다. 20세기의 혁명물결 동안 계급의 경험으로부터 출현한 투쟁방법들과 조직형태들, 대중파업(mass strike), 총집회(general assemblies),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통일, 노동자평의회등을   주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공산주의조직은 투쟁을 자극하고 투쟁을 혁명적인 결론으로 지향시킨다는 자신의 역할을 진정으로 수행할 있기 위해서는, 계급을 ‚조직’한다거나 ‚대표’하는 것과 같은 자신에게 더이상 속하지 않는 과제들 포기해야 한다.

‚19세기 이래로 아무것도 변화지 않았다’라고 주장하는 혁명가들은 마치 프롤레타리아계급을  톨스토이의 동화 속의 등장인물인  바빈(Babine) 취급하기를 원하는 같다. 바빈은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가  이전에 만났던 사람에게  말하라고 들을 것을 되풀이 한다. 그래서 그는 몇번이고 몰매를 맞는다. 독실한 신자에게는 악마에게나 했어야할 말들을 하고, 곰에게는 은둔자에게처럼 말을 했다. 그리고 불쌍한 바빈은 아둔함때문에 생명을 잃게 된다.

여기에 제시된 입장들의 정의와 혁명가들의 역할은 결코 마르크스주의의 포기나 ‚수정’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의 본질적인 것에  대한 진정한 충실함에 기반하고 있다. 레닌과 볼셔비키는, 멘셔비키의 생각에 대항해서, 투쟁의 새로운 조건들을 그리고 그것들이 강령에 있어서 갖는 함의들을 파악할 있었기 때문에1917 10월혁명에 능동적이고 결정적으로 기여할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1906년에 그녀의 당의 ‚정통’주의자들에 대항해 다음과 같이 썼을 , 그녀도 마찬가지로 혁명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따라서 만일 러시아혁명 때문에 대중파업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낡은 관점을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한다면, 그것 또한 마르크스주의의 일반적인 방법과 견해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의 영예를 획득하는 일이 것이다“(대중파업론, [룩셈부르크주의] 152, 풀무질, )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4th Quarter 1980

크론슈타트가 남긴 역사적 교훈들

 

(Historical lessons of the Kronstadt revolt)[1]

최근에 『국제주의』는 <시카고 혁명가 네트워크>(이하 CHIREVNET)에서부터 「1921년 3월 러시아 크론슈타트의 수병들과 노동자들의 혁명적 봉기」라는 팸플릿 하나를 받았다. 우선 우리는 팸플릿 작가의 노고에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는 노동자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교훈을 가지고 있는 사건을 검토하고 있다. 그 사건의 교훈이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혁명가들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이다. 이 팸플릿은 최근에 영어로 번역된 우리의 책 『네덜란드ㆍ독일 공산주의 좌파』를 인용하고 있다. 이 책은 크론슈타트 봉기 사건에 대한 평가에서 기인하는 혁명운동의 역사에 관한 저작이다. 그러나 CHIREVNET의 팸플릿은 ICC가 볼셰비키가 반란을 진압한 것을 "어쩔 수 없는 비극"으로 여기는 것 아니냐며 비판한다. 이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이 팸플릿은 우리의 크론슈타트 사건에 대한 분석을 완전히 잘못 알고 있고, 오해하고 있으며 잘못 표현하고 있다. 수 년 동안, ICC는 지속적으로 날카롭게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한 무력 진압을 "어쩔 수 없는 비극"이라며 잘못된 시각을 방어하는 정치그룹들을 비판해왔다. 그 비판들은 아래 글이나, 『국제평론』 제103호와 제104호에서 두 부분으로 된 연재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CHIREVNET의 팸플릿은 또한 여러 가지 본질적으로 아나키스트적이고 평의회주의적인 크론슈타트에 관한 신화들과 그로부터 나온 교훈들을 반영한다. 이것은 특히 반란을 진압하는데 있어서 볼셰비키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볼셰비키의 가상의 "국가주의적 권위주의"에서부터 반당적 교훈들 역시 끌어내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면, 그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혁명정당은 아무런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이는 자본주의 선거 놀음에 참여하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그것은 대자본가 지배계급에 의한 낡은 자본주의, 권위주의 독재, 즉 국가권력을 위한 욕구에 다름 아니다." 이 과도하게 단순화된 반당 정치적 결론은 완전히 혁명정당의 역할과 의식화과정에서 당과 계급 사이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다. 당의 역할은 부르주아지가 퍼뜨리고 다니는 선거를 신비하게 만드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더욱이, 팸플릿의 방법론적 준거의 틀은, CHIREVNET이 자주 다른 모든 곳[2]에서 맑스주의 변증법에 호소함에도, 이 사건들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는데 유효하지 않다. 보기를 들어, CHIREVNET은 크론슈타트 반란을 역사적 맥락에서 평가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저자는 이점을 처음부터 인정한다. 크론슈타트 반란의 의미와 중요성을 프롤레타리아트가 더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그들 나름의 목적에도 불구하고, 그 팸플릿은 이 사건을 역사적 전망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사회ㆍ정치ㆍ역사적 사건들을 과학적이고 맑스주의적으로, 즉 프롤레타리아의 시각에서 이해하는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이러한 기초지식의 부족 때문에 당연하게도 CHIREVNET은 레닌과 볼셰비키에 관하여 아나키스트적인 도덕주의적 설교에 사로잡혀 있다. 아나키스트들의 판에 박힌 도덕주의적 근본주의 때문에 그 의미가 희석되어, 그 팸플릿은 크론슈타트 반란과 자본주의에 맞선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던 러시아 혁명 그 자체의 전반적인 관계에 있어서 진정한 역사적 공과(功過)를 이해하는데 실패한다. 이처럼 비판적 준거의 틀이 없기 때문에 그 팸플릿은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이 단지 볼셰비키의 특정한 이론적 오류나 레닌의 "대리주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비록 이것이 분명 중요한 요인들이기는 하지만-궁극적으로 혁명을 다른 나라로 확산시키는데 실패하고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의 노동자대중운동으로부터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요새가 고립되었다는 맥락적 사실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CHIREVNET에게 러시아 혁명의 퇴보를 낡은 아나키스트적인 도덕주의로 설명하는 것은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이러한 훗날의 퇴보는 볼셰비키 지도부의 권위주의적 경향 때문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문제를 역사상 인물들의 선악대립으로, 올바른 도덕적 관점의 소유 또는 부족의 문제로 제한한다. 즉 이러한 이론은 결국 역사유물론에 대한 이상주의적이고 소부르주아적인 거부감을 반영한다.

이 팸플릿에 대한 답변으로 우리는 두 편의 기사를 번역하여 출판한다. 이 기사들은 앞서서 2001년 3월 ICC 프랑스 지부의 매체인 『국제혁명』 310호에 실렸다. 이 기사들은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에 대한 ICC의 입장을 상세하게 잘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기사는 스탈린주의 반혁명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타락한 제3인터내셔널에서 분리한 좌익분파들에 속한 우리의 선배들이 만든, 러시아혁명에 대한 맑스주의적 대차대조표에 나타난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정치적 입장의 기원을 보여주고 있다.

부디 CHIREVNET이 우리의 답변을 동지적 관점에서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계속해서 논쟁과 토론을 이어나가기를 바란다. 논쟁과 토론은 노동자 운동 내에서 정치적 명확화를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독자들이 투고하여 이 논쟁에 개입하고 그들 가운데에서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을 확산시키기를 촉구한다. 이 논쟁에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그룹의 투사들도 참여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한 <로스앤젤레스 노동자의 목소리>(이하, LAWV)가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한 긴 문서를 발표했다는 것을 언급하는 게 중요하다. 여기에서 그들이 과거 알바니아 스탈린주의의 지지자들에서 현재 프롤레타리아 투사들에 대한 기생충 같은 공격으로 다소 정치적 입장이 변화했다는 것을 다시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이번 호와 『국제주의』122호를 보시오.) 그것은 LAWV와 CHIREVNET이 이야기하는 크론슈타트에 대한 분석이 분명히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두 그룹이 현재 완전히 다른 정치적 궤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두 출판물의 기사들 모두 비슷하게 심각한 자유주의적이고 아니키스트적인 혼란에 빠져있음에도 불구하고, CHIREVNET의 입장은 명백히 노동자 투쟁이 직면하고 있는 쟁점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정치적 명확성을 찾고 있는 것이다. 반면 LAWV의 러시아 혁명에 대한 현재 입장은 1917년 10월 봉기가 일어난 직후인 1918년부터 러시아 혁명이 타락하였으며 볼셰비키는 반혁명세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주장은 지난 5년 동안 IBRP와 제휴하면서 그들이 방어했던 공산주의적 좌파의 역사적 입장으로부터 확실히 갑작스럽게 퇴보한 것이다.

우리는 LAWV가 크론슈타트에 대한 입장에 있어서 자유주의적 정치세력의 입장으로 도약한 이유는 자유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로부터 영향 받은 그룹들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해서라고 본다. 이 그룹들은 현재 ICC와 IBRP와 같은 좌익 공산주의 조직들의 명예를 더럽히는 기생충 같은 캠페인을 해대고 있다. LAWV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출처를 밝히지 않고 『신국제주의자』의 최근호 표지로 CHIREVNET의 팸플릿 표지를 다시 사용했다. 더군다나 같은 제목으로 ICC를 공격하는 그 기사에서 LAWV는 ICC가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한 진압을 "어쩔 수 없는 비극"으로 옹호한다고 아무런 근거 없이 단언하면서, 그러한 옹호는 "우리 자신에서 권력을 부여"하여 "프롤레타리아트 위에 군림하는 당-국가 독재"를 향한 우리의 욕망을 증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CHIVREVNET이 단지 우리의 입장에 대해서 단지 오독을 한 반면에 LAWV는 뻔뻔스럽게 거짓말하고 중상모략을 저질렀다.

우리는 진정으로 노동계급과 관련된 이슈들을 진지하게 이해하고 과거의 투쟁에서 교훈들을 끌어내려고 노력하는 그룹들과는 긍정적인 태도로 논쟁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LAWV처럼 적대적이고 파괴적인 기생충 같은 분자들에 대해서 효과적인 평형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CHIREVNET은 다음 연락처로 접촉할 수 있다. 페리 샌더스 PO BOX 578042 Chicago, IL 60657-8042, [email protected]

1921년 3월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 : 노동자운동에서 비극적인 실수

80여 년 전, 1921년 3월에, 1917년 10월 혁명으로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은 지 4년이 채 못 되어, 볼셰비키는 무력으로 페트로그라드에서 30KM떨어진 작은 코틀린 섬에 있는 크론슈타트 수비대의 봉기를 진압했다.

수년 동안 소비에트 러시아는 여러 해외 열강들의 지원을 받는 백군의 반혁명 책동에 맞선 내전에서 피의 투쟁을 벌여야 했다. 그럼에도, 크론슈타트 수비대의 반란은 이러한 반혁명 시도의 일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10월 혁명의 선두에 섰던 소비에트 정부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같은 노동계급 당파의 반란이었다. 이 노동자들은 새로운 집권세력의 수많은 권력남용과 참을 수 없는 탈선을 교정하려는 목적으로 반란에 앞장섰다. 크론슈타트에 대한 유혈진압은 전반적으로 노동자운동에 커다란 비극을 야기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었다. 그것은 1914~1918년 사이에 벌어진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국제노동계급의 응답이었던 세계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발전 도상에서 최초의 승리였다. 10월 봉기는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수립 과정의 일부였다. 볼셰비키는 이 사건을 열정적으로 두둔했다. 봉기의 중요한 의미는 그것이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 즉 부르주아지에 맞선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전쟁에서 최초의 결정적인 순간을 기록했다는 것이었다.

고립은 러시아 혁명의 퇴보의 진정한 원인이다.

1917년 러시아에서 처음 일어난 혁명은 전(全)유럽과 다른 곳으로 투쟁을 확산시키려는 노동계급의 여러 노력에도 국제적 차원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러시아 그 자체는 기나긴 피의 내전에 의해서 찢겨져나가서 경제는 황폐해졌고 소비에트 권력을 떠받드는 기둥인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는 해체되었다.

공장위원회가 제거되고, 점차 소비에트가 국가기구에 종속되었으며, 노동자 민병대가 파괴되었다. 내전동안 긴장된 시기가 이어지면서 점차 사회전반이 군사화되었고, 이와 함께 여러 관료적 위원회들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것들 전반이 러시아 혁명이 타락하고 있다는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이러한 요인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내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할지라도, 타락이 만개하여 진행된 것은 그 이후의 시기였다. 차츰 "당-국가"의 지도부는 노동계급의 자기조직화가 기본적으로 올바르지만 현재 당면한 시기에는 반혁명 세력에 맞서서 군사적 투쟁을 하는데 모든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을 발전시켰다. "효율성"의 원칙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원칙들을 약화시키기 시작했다. 효율성의 원칙이 지배하면서 국가는 노동의 군사화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감시와 극단적인 착취의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복종시켰다. 공장위원회를 이미 약화시켰기 때문에 국가가 "일인관리"와 테일러주의 착취 시스템을 현장에 도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과거에 레닌은 테일러주의 시스템을 인간을 기계의 노예로 만드는 방식이라고 비난한 바 있었다. 전쟁경제의 혼란은 국제적인 고립으로 더욱 증폭되어 국가전체를 기근의 위기에 빠뜨렸다. 노동자들은 점점 더 부족해지는 배급에 의존해야만 했으며 그 조차도 종종 불규칙하게 이루어졌다. 많은 공업지대들이 전반적으로 조업을 중단했고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 소유의 자원에 의존해야 했다. 많은 노동자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은 시골에서 생계수단을 찾기 위해서 함께 도시를 떠나는 것이었다.

내전이 격렬하게 진행되는 동안, 소비에트 국가는 주민 다수의 지지를 유지했다. 왜냐하면 소비에트 국가는 구(舊)소유계급에 대항한 투쟁으로 자신을 검증받았기 때문이다. 노동자, 미숙련공, 소농 등 각 부문에 따라서 내전의 고통을 견뎌내는 의지는 상대적이었다. 그러나 백군을 물리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생활 조건이 앞으로 덜 가혹해질 것이며, 경제와 사회생활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느슨해질 것이라고 기대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 지도부는 항상 전쟁으로 야기된 생산의 파괴에 직면하여, 사회생활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느슨하게 하는 어떠한 조치를 실시하는 것도 다소 내키지 않아 했다.

크론슈타트 봉기

1920년 말, 탐보프 주, 중부 볼가, 우크라이나, 서부 시베리아와 다른 지역들을 가로질러 농민봉기가 퍼져나갔다. 군복 입은 농민인 적군이 빠르게 무장해제하면서 그들은 자신의 마을로 돌아와 반란의 불길을 부채질했다. 이 반란의 주요 요구는 곡물징발 중단과 농민 스스로 자신의 생산물 처분 결정권을 갖게 하라는 것이었다. 1921년 초, 반란의 기운은 10월 봉기의 선두에 섰던 페트로그라드, 모스크바, 크론슈타트 등 도시의 노동자들에게도 퍼져나갔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일련의 중요한 자발적인 파업들이 일어났다. 공장 집회와 거리 시위에서 식량과 의복 배급 증가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다수의 노동자들이 추위와 배고픔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제적 불만들과 결합되어 다른 좀 더 정치적인 요구들 또한 나타났다. 노동자들은 도시 바깥으로 나가는 것에 대한 제한 조치를 중단하고, 투옥된 노동자들을 석방하며,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는 등의 조치들을 원했다. 틀림없이 몇몇 반혁명 분자들, 즉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이러한 사건들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페트로그라드의 파업운동은 본질적으로 가혹한 생활조건에 대한 자발적인 프롤레타리아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볼셰비키 당국은 노동자들이 봉기 이후의 국가, 그들에 의하면 "노동자국가"에 맞서서 파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어서 파업 노동자들을 선동자, 게으름뱅이, 개인주의자로 비난했다.

이러한 것들이 크론슈타트에서 수병 반란을 야기했던, 러시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크론슈타트의 사회적 문제들이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파업이 일어나기 전에조차, 트로츠키가 "혁명의 영광과 명예"라고 묘사했던 크론슈타트 수병들은 이미 관료적 경향과 붉은 함대 내에서의 군사적 규율 강화에 맞서서 저항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페트로그라드의 반란 소식이 도달하고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수병들은 즉시 결집하기 시작했다. 2월 28일에 그들은 페트로그라드 공장들에 대표를 보냈다. 같은 날 순양함 "페트로파블로프스크"의 선원들은 회합을 갖고 크론슈타트 반란자들의 강령이 될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경제적∙정치적 요구안들을 제출했다. 특히 요구안에는 가혹한 "전시 공산주의" 방책들의 중단과 연설의 자유, 출판의 자유, 그리고 모든 정당 활동의 권리를 보장하는 속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재선출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3월 1일 두 명의 볼셰비키 대표들은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승무원들과 만나서 그들의 결의안을 규탄하고 만약 수병들이 그들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즉각 진압에 나설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 건방지고 자극적인 볼셰비키 지도부의 태도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으로 수병들의 분노를 더욱 불러일으켰다. 3월 2일에는 크론슈타트 소비에트 재선거를 실시하였으며, 300명의 대표들이 페트로파블로프스크 결의안에 찬성투표하고 "소비에트 정부의 평화로운 재편"을 위한 동의안을 채택했다. 대표들은 시행정부를 떠맡는 "지역 혁명위원회"와 어떠한 정부의 무장개입에라도 맞서기 위한 방어조직을 만들었다. 이렇게 크론슈타트 코뮌이 탄생했다. 크론슈타트 코뮌은 그 자신의 『이즈베스치야』(정부 기관지, 역자)를 발행하기 시작해서 첫 호에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이 나라의 지배자인 공산당은 혼란으로부터 나라를 구출하는데 무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최근에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서 발생한 셀 수 없는 사건들은 공산당이 노동대중의 신뢰를 상실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공산당은 노동계급의 요구들을 무시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불만들이 반혁명 행위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으로 공산당은 심각한 실책을 저지르고 있다."

그러나 크론슈타트 코뮌의 반란은 완전히 고립된 채로 남았다. 그들이 "세 번째 혁명"이라고 부른 반란을 확대해기 위한 반란자들의 소집 요청에 응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페트로그라드의 공장들에 대표를 파견했음에도, 소책자들과 페트로파블로프스크 결의안을 배포했음에도, 붉은 함대의 요청은 전체 러시아 노동계급을 결집시키는데 실패했다. 러시아 노동계급은 반란자들의 강령에 공감했을 수도 있으며 그 반란을 완전히 지지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은 그들의 파업 투쟁을 중단했으며 계엄령 하의 일터로 돌아갔다. 내전의 혼란은 러시아 노동계급을 파괴하고 사기를 꺾어놓았으며 분해시켜버렸다.

크론슈타트 코뮌의 분쇄

반란에 대한 볼셰비키 정부의 즉각적인 반응은 반란을 소비에트 권력에 맞선 반혁명 음모의 일부로 비난하는 것이었다. 분명히 백군에서 사회혁명당에 이르기까지 모든 반혁명 세력들은 반란을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고 시도했으며 "원조"를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명객들이 통제하는 러시아 적십자 채널을 통해 제공된 인도적 지원을 제외하고 혁명위원회는 반혁명세력의 모든 제의를 거절했다. 혁명위원회는 자신들이 전제정부의 복귀 또는 제헌의회-1918년 초에 혁명의 적들에 의해서 소집된 적이 있다-의 복귀가 아니라 관료적 지배로부터 해방된 소비에트의 재선출을 위해서 투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자의 성벽은 소비에트이지 제헌의회가 아니다. 크론슈타트에서 권력은 수병과 적군병사, 혁명적 노동자들의 손에 있다. 모스크바 라디오가 기만적으로 주장하듯이 권력은 코즐로프스키가 이끄는 백군의 수중에 있지 않다."라고 크론슈타트 『이즈베스치야』는 선언했다.

해군과 육군 병사의 계급구성뿐만 아니라 반란자들의 강령과 이데올로기에도 소부르주아적 요소들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사실상 이 반란은 볼셰비키가 1917년 혁명의 선봉에 섰기 때문에 그들을 혐오하는 자들이 그들의 경멸감을 드러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의 존재가 운동 그 자체의 근본적인 성격을 바꾸지는 못한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해서 극도로 완고한 태도로 대응했다. 볼셰비키의 완고한 태도 때문에 토론이나 타협의 가능성은 빠르게 사라졌다. 요새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하는 동안, 반란을 분쇄하기 위해서 파견된 적군 부내들은 항상 사기가 바닥을 때렸다. 몇몇 부대들은 반란자들에게 동조했다. 군대의 충성심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걸출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그 당시 모스크바에서 열리던 10차 당 대회에서 급파되었다. 동시에, 체카의 소총부대들이 어떠한 사기저하도 퍼져나갈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병사들의 뒤에서 그들을 겨누었다. 요새가 완전히 함락되었을 때, 체카는 약식재판을 실시하여 처형하거나 빠르게 사형을 언도하는 방식을 일부 반란자들을 학살했다. 다른 사람들은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다. 진압은 체계적이었고 무자비했다.

이 사건 당시에 백군이 볼셰비키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크론슈타트 반란을 이용할 위험성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 때문에 볼셰비키 권력 내부의 가장 비판적인 분파들조차도 반란을 분쇄하는데 협력하게 되었다.

전체 노동자운동의 오류

크론슈타트 반란에서 대해서 모든 반(反)레닌주의 조류들이 계속해서 숨기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있다면, 그 당시에 볼셰비키의 오류를 전체 노동자운동이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코민테른으로부터 추방된 좌익 공산주의 분파들과 조류들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볼셰비키 지도부에 대한 반대 분파인 노동자 반대파는 반란 진압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표명했다. 그리고 이 분파를 이끌었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그녀의 분파 성원들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출병에 앞장서서 지원해야 한다고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독일-네덜란드 좌파는 심지어 그들의 입장이 콜론타이처럼 반란의 진압을 열렬히 지지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지만, 볼셰비키의 정책을 비난하거나 비판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때 KAPD[3]는 크론슈타트 반란이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반혁명 음모라는 주장을 두둔했으며 진압을 비난하지 않았다. 네덜란드 좌파의 투사인 헤르만 호르터는 볼셰비키의 방책이 크론슈타트 반란에 직면하여 "어쩔 수 없는"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는 크론슈타트 반란이 농민들에 의해서 일어난 반혁명 봉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 내에서, 빅토르 세르쥬는, 비록 그가 크론슈타트 수병들에 맞서서 무장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당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진압에 맞서서 저항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 비극적인 오류는 볼셰비키 당과 그 지도부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이 명백하다. 사실상 볼셰비키는 단지 비극적으로 잘못된 정책을 수행했을 뿐이다. 다만 이 정책은 당시 전체 노동자운동이 반혁명은 봉기 이후에 국가 그자체로부터 자라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함으로부터 발생한 당연한 결과였다. 이는 아나키스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1917년에 "구더기는 이미 과일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그들에 의하면 계급 정당의 존재가 언제라도 그 안에 반혁명의 씨앗을 담고 있다.) 그것은 러시아 혁명의 국제적인 고립 때문에 볼셰비키가 국가로 흡수되고, 국가 그 자체가 자신을 노동계급에 맞선 국가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 당시의 전체 노동자운동의 오류는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출현한 제도장치가 "프롤레타리아 국가"라는 생각을 둘러싸고 일반적인 혼란으로 나타났다.

옮긴이 김정호



[1] Internationalism, Vol. 123, 2002년 가을

[2] 그들의 팸플릿,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위한 혁명적 계급투쟁에서 국제노동계급의 중요한 몇 가지 교훈들 :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행동에 의해서 이루어진다!』을 보시오.

[3]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 그들은 1920년에 코민테른의 입장들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고, 특히 "공동전선"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에 코민테른에서 축출되었다.

ICConline - 2008

Publication during 2008

1929 - 2008: 자본주의는 파산한 체제다. 하지만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바로 공산주의다!

정치가들과 경제학자들은 이상황의 중요성을 묘사할 말을 더이상 찾지 못하고 있다. „심연의 가장자리“, „경제적인 진주만습격“, „밀려오는 쓰나미“, „금융계의 9.11사건등등…(재앙과 관련한 표현들 중에서) 타이타닉호의 침몰에 대한 언급만 빠졌을 뿐이다! 진정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누구나 경제적인 대충격으로 인해 불안스런 질문들에 직면하게 된다. 지금 우리는 1929년과 같은 새로운 공황을 앞두고 있는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렸는가? 스스로를 지키려면 우리는 무엇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생활조건이 야만적인 악화로 치닫는다.

환상을 가져서는 안된다. 전세계적으로 인류 전체가 달안에 생활조건의 끔찍한 악화를 겪어야만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최근보고서에 따르면, „2009년초까지 50개국이기근을 당하는 국가들의 대열에 합류할 것이다. 그들 중에는 많은 아프리카국가들, 라틴아메리카나라들, 카리브해연안 국가들 그리고 심지어는 아시아국가들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이디오피아에서는 공식적 발표에 따르면 이미 12백만명이 기아로 인해 죽음에 직면해 있다. 자본주의의 새로운 엘도라도, 인도와 중국에서는 수억의 노동자들이 대빈곤에 빠진다. 미국과 유럽에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견딜 없는 가난으로 떨어지게 것이다.

경제의 모든 부문이 해당된다. 사무실에서, 은행에서, 공장에서, 병원에서, 자동차산업에서, 건설분야에서, 운송에 있어서 도처에서 수백만명이 해고될 것이다. 실업률이 폭등할 것이다! 2008년초 이래 미국에서만도 대략 백만명이 이미 일자리를 잃었다. 모든 것은 단지시작에 불과하다. 이러한 해고의 물결은, 점점 많은 노동자가정에게 있어서 집세를 내고, 의료혜택을 받고, 입에 풀칠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질 것임을 의미한다. 젊은 이들에게 이것은 또한, 자본주의가 그들에게 어떤 미래도 제공할 없다는 말이다!

 

어제 우리를 속인 자들이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기만한다!

자본주의 세계의 지도자들, 정치가들, 지배계급을 위해 일하는 언론인들, 모두는 이러한 재앙같은 전망을 감추려 들지도 않는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기나 하겠는가? 세계최대의 은행들이 파산하고, 중앙은행들, 국가가 그들에게 제공한 수천억 달러와 유로의 구제방안 덕분에 살아남았다. 미국의, 아시아의, 그리고 유럽의 주식시장들에서 주가곡선이 계속해서 급추락하고 있다. 증시는 2008 1 이래 25 달러, 말하자면 미국의 2년치 GNP 잃었다. 모든 것은 전세계의 도처에서 지배계급을 엄습한 진정한 공포를 반영한다. 오늘날 주식시장들이 붕괴되면, 이는 은행들의 재앙적 상황 때문만이 아니라, 경제의 대대적인 위축, 파산기업들의 폭발적인 증가로 인한 이윤의 엄청난 감소, 우리가 지난 40년간 경험해온 모든 것들보다 훨씬 심각할 경기침체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세계의 주요지도자들인, 부시, 메아켈, 브라운, 사르코지, 후진따오는 최악의 상황을 막고 피해제한을 시도하려는 희망으로 연이어 정상회담(G4, G7, G8, G27, G40) 가지고 있다. 11 중순에 계획되어 있는 새로운 정상회담 어떤 이들에 따르면 자본주의를 새로이 구축하는데 기여하게 것이라고 한다. 세계지도자들의 격앙은 언론인들과 전문가들 격앙과 비슷한다. 텔레비젼, 라디오, 신문 등등- 모든 곳에서 위기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이렇게 야단법석인가?

지배계급은 그들 경제의 재앙스런 상태를 이상 은폐할 수는 없지만,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체제가 문제시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단지 과도함 잘못된 태도 대항하는 것의 문제라는 점을 그래도 우리가 믿게 하려고 애쓰고 있다. 투기꾼들 탓이란다! 사장들의 탐욕 탓이란다! 탈세천국 탓이란다! „신자유주의탓이라고 한다!

이러한 동화가 우리에게 먹혀들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전문적인 협잡꾼들이 총동원된다. 경제는 건강하고 은행들은 튼튼하다고 어제 우리에게 말했던 바로 전문가들 지금은 매스미디어에서 쉴새없이 그들의 새로운 거짓말을 퍼뜨리고 있다. ‚신자유주의 해답이라고, 국가는 경제에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우리에게 말하던 바로 사람들이 지금은 만큼 강력하게 국가의 개입을 외치고 있다. 많은 국가개입과 많은 도덕성“, 그러면 자본주의는 다시 완전하게 기능할 있을 것이란다. 이러한 거짓말을 그들은 지금 우리에게 주입시키려 한다!

 

자본주의가 위기를 극복할 있는가?

오늘날 세계자본주의를 뒤흔드는 위기는 겨우 2007 여름 미국에서 터진 비우량주택담보대출위기의 시작과 더불어 출현한 것이 아니다. 40여년전이래 경기침체가 1967, 1974, 1981, 1991, 2001 차례로 있었다. 수십년 이래 실업은 사회의 지속적인 현상의 하나가 되었다, 수십년 이래 피착취자들은 그들의 생활수준이 점점 공격당하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인간의 필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시장과 이윤을 위해서 생산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만족되지 않는 필요들은 엄청나지만 사람들은 지불능력이 없다. 다시 말해서, 세계인구의 절대다수는 생산된 상품을 구매력이 없다.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한다면, 수백만, 수십억의 사람들이 견딜 없는 빈곤에 빠지게 되고 기아에 직면하게 된다면, 그것은 체제가 충분히 생산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판매할 있는 것보다 많은 상품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매번 지배계급은 크래딧의 대대적인 상환청구와 인위적인 시장의 창출을 통해서 잠시 숨통을 튀울 있었다. 그렇기에 이러한 재호황 많은 피눈물을 초래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어디선가 계산서가, 모든 빚들이 지불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바로 그것이 오늘날 일어나고 있다. 지난 시기의 굉장한 성장전체는 전적으로 부채에 의지한 것이었다. 세계경제는 빚으로 살았고, 지금 상환의 시기가 오자, 모든 것은 마치 카드로 집처럼 무너지고 있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지금의 혼란은 정치지도자들에 의한 잘못된 관리, „상업인들의 투기나 은행가들의 무책임한 행동 때문이 아니다. 모든 이들은 단지 자본주의의 법칙들을 이용했을 뿐이고, 체제에 재앙이 것은 바로 이러한 법칙들인 것이다. 그래서 모든 국가들과 중앙은행들이 경제에 공급한 모든 수조 달러는 상황을 전혀 변화시키지 않을 것이다. 빚더미를 키울 뿐일 것이다. 이는 마치 기름으로 불을 끄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절망적이고 무효한 수단을 취하는 것은 지배계급이 속수무책임을 보여준다. 모든 구제계획들은 실패할 밖에 없다. 자본주의 경제의 진정한 획복은 없을 것이다. 어떤 정책도, 그것이 좌파의 것이든 우파의 것이든, 자본주의를 구할 없는데, 왜냐하면 체제는 치명적이고 불치의 병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빈곤의 극심화에 대해 우리는 투쟁과 연대로서 대항해야 한다.

여기저기에서 1929년의 공황, 그리고 1930년대의 대불황과 비교되고 있다. 끊임없는 실업자들의 행렬, 무료급식소앞의 빈민들, 파산하여 문을 닫은 공장들등등, 당시의 그림들은 여전히 머리속에 뚜렷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이 정말로 똑같은가? 대답은 아주 분명하게, 아니다! 설사 자본주의가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고 국가의 개입과 나은 국제적인 협력 덕분에 끔찍한 붕괴를 막을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의 상황은 훨씬 나쁘다.

그러나 다른 차이가 있다. 1930년대의 공포스런 불황은 2 세계대전을 초래했다. 현재의 위기가 3 세계대전으로 연결될 것인가? 전쟁으로의 도피는 자본주의의 극복될 없는 위기에 대한 지배계급측의 유일하게 가능한 해답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항할 있는 유일한 세력은 그것의 숙적, 세계 노동자계급이다. 노동자계급은 1930년대에 러시아의 1917년혁명이 고립된 이후 끔찍한 패배를 겪었고, 제국주의적 학살에 끌려갔다. 그러나 지금의 노동자계급은 1968년의 대투쟁들 이래, 착취자계급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을 태세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지난 40 이래, 노동자계급은 종종 고통스런 패배들을 감수할 밖에 없었지만, 계속해서 패배당하지는 않았고 특히 2003 이래 그들은 점점 저항에 나서고 있다. 경제위기의 가속은 저개발국가들에서 뿐만 아니라 선진국들에서도 수억의 노동자들에게 끔찍한 고통, 실업, 빈곤, 기아등등을 유발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와 마찬가지로 피착취자들 측의 방어투쟁들을 불가피하게 유발하게 것이다.

이러한 투쟁들은 지배자들측의 경제적 공격을 제한하여 이들이 피착취자들을 절대적인 빈곤상태로 빠뜨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나 그러한 투쟁들이 자본주의가 점점 위기로 빠져드는 것을 막을 수없음은 명백하다. 이를 통해 피착취자들은 그들의 집단적인 강력함을 발전시킬 있다, 그들의 단결을, 그들의 연대를, 그들의 의식을 인류에게 미래를 보장할 있는 유일한 대안,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과 그와는 완전히 다른 기초를 갖는 사회로써 그것을 대체하는 것과 관련하여 발전시킬 있다. 이상 착취와 이윤, 시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필요를 위해서 생산하는 사회로써. 이러한 사회는 노동자들 자신들에 의해서지 소수의 특권층에 의해서 꾸려나가지지 않을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80여년 동안 자본가계급의 모든 부분들은, 좌우익을 막론하고, 그당시 동유럽과 중국을 지배하던 체제를 공산주의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은 국가자본주의의 특히 야만적인 형태에 불과했다. 그들은 다른 세계를 꿈꾸는 것은 헛됨을, 자본주의 이외의 다른 세계는 있을 없음을 피착취자들에게 확신시키려 시도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파산이 명백해진 이후, 공산주의사회의 전망이 노동자들의 투쟁에 점점 영감을 주어야 한다.

 

극도의 곤경에 처한 자본주의의 공격에 직면하여, 착취와 빈곤과 전쟁의 야만을 극복하기 위해서,

전세계의 노동자계급의 투쟁만세!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국제공산주의흐름 2008 10 25

 

전단지는 여러나라들에서 각나라의 언어로 배포된다. 우리의 웹싸이트를 참조.

68년 5월 – 제 3편 - (출처: ICC의 프랑스지부 신문) -노동자계급의 소생

노동자계급의 소생

68년 5월에 관해 오늘날 확산되는 모든 거짓말들에 대항해서, 혁명가들은 진실을 회복시켜야 한다. 그들은 또한 이러한 사건들의 의미와 교훈들을 파악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 특히, 그러한 사건들의 교훈들이 꽃과 화환 더미에 묻혀버리는 것을 막아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68년 8월에 관해서, 그것의 첫번째 구성요소, 즉 학생운동을 다룬 2개의 글들(이 1, 2편은 하나의 글로 재편집되어 영어판 International Review133에 개재되었고, 한국어 번역판에서는 제 1부로서 표시됨)로써 그러한 노력을 시작했다. 이번 글에서 우리는 그 사건들의 본질적인 구성요소, 즉 노동자계급 운동을 다룰 것이다.

이 시리즈의 전편에서 프랑스에서의 사건들에 대한 결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5 14일에 토론은 많은 직장에서 계속 진행되었다. 모든 열광과 자신들의 강력함에 대한 느낌이 표면화된 폭력적인 시위들이 전날밤에 있은 ,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일을 손에 잡는 것은 어려웠다. 낭트에서 쉬드-아비아시옹(Sud-Aviation) 노동자들이 자생적인 파업에 들어갔고 작업장을 점거하기로 결정했다. 특히 젊은 노동자들이 운동을 추진했다. 노동자계급이 다시 무대 위에 등장했다."

이러한 묘사를 우리는 여기서 계속하겠다.  

파업의 확산 

낭트에서는, 학생들 또래의 노동자들이 운동에 동참했다. 그들의 논거는 단순하면서도 명료했다: „ 학생들이 결코 파업을 통해서 압력을 가할 없음에도 정부를 강제하여 승복하도록 만들 힘을 가지고 있다면, 노동자들도 정부를 승복하게 만들 있다. " 그 도시의 학생들 측에서도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선언하고, 노동자들의 파업초소에, 결연에 가담했다. CGT(프랑스노조총연맹)와 CPF(프랑스공산당)은, 학생들 속에 스며들어서 „고용주들과 내무부를 위해 일하는 좌파 선동자들"에 대해 경고했지만 이러한 캠페인은 그다지 큰 효과가 없었다.

5월 14일 저녁에 총 3,100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다.

5월 15일에는 노르망디의 클레옹에 소재한 르노작업장과, 그 지역의 다른 두 작업장으로 운동이 확산되어서, 전체적인 파업, 무제한의 공장점거가 이뤄지고, 공장정문에는 붉은 깃발이 내걸렸다. 이날이 저물 무렵에는 파업자가 총 11,000명에 달했다.  

5월 16일 다른지역 르노작업장의 노동자들이 동참해서, 플랭, 상두빌, 르 망 과 빌랑꾸르에 붉은 깃발이 나부꼈다. 이날 저녁에는 총 75,000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르노-빌랑꾸르의 노동자들의 투쟁 참여는 매우 분명한 신호탄이 되었다. 그것은 프랑스에서 가장 큰 작업장(35,000명이 고용된)으로서 오랫동안 다음과 같은 말이 통용되어왔다: „르노가 재채기를 하면, 프랑스가 감기에 걸린 것이다"  

5월 17일에는 총 215,000명의 파업자가 있었다.

파업물결은 이제 프랑스 전역에, 특히 프로방스에 도달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생적인 운동이었고 노조들은 그 꽁무니를 뒤따랐다. 전 지역에서 젊은 노동자들이 선두에 서 있었다. 빈번하게 학생들과 젊은 노동자들이 결연했다. 젊은 노동자들은 점거된 대학교들로 가서,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공장 구내식당에 식사하러 올 것을 권했다.  

정확한 요구사항들은 없었다. 그 대신에 오히려 불만이 표현되었다. 노르망디의 한 공장벽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삶을 영위할 시간과 많은 존엄이 필요하다."  이 날 CGT는 „파업의 확산"을 요구했다. 그것은 „기층에 의해" 추월당할 까봐 그리고 지금까지의 초기 며칠 동안 훨씬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던 CFDT에 의해 뒤로 밀려날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 이야기되었듯이, 그것은 „달리고 있는 기차에 뛰어올라 탔다." 그 호소는 그 다음날에야 알려졌다.

5월 18일 정오에, 즉 CGT의 파업호소가 알려지기 전에 이미 백만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 날 저녁에는 이백만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5월 20일에는 6백만명이 5월 21일에는 6백 50만명이 일손을 멈추었다.

5월 22일에는 8백만명이 무기한 파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것은 국제 노동자운동 사상 최대의 파업이었다. 이 파업은, 유명하게 된 이전의 파업들 - 1926년 5월 영국의 ‚총파업'(1주일에 걸친) 1936년 5월과 6월에 있은 프랑스의 파업들 -에 비해서 훨씬 더 대규모였다.

모든 부문이 해당되었다: 산업, 운송 및 교통, 에너지, 우편 및 텔레커뮤니케이션, 교육, 행정(정부의 여러 기관들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언론매체(국영테레비전이 파업을 했고, 종사자들은 특히, 강요된 검열을 탄핵했다), 연구소 등등.

장례사업장 마저도 파업했다(68월 5월은 사망하기에 좋은 시기가 아니었다).  심지어는 프로 스포츠 선수들도 그 운동에 동참했다. 프랑스축구협회 건물에 붉은 깃발이 나부꼈다. 예술가들도 참여해서, 칸느영화제가 감독들의 권유로 중단되었다.

이 시기에, 점거된 대학들(파리의 오데옹극장과 같은 다른 공공건물들과 마찬가지로)은 끊임없는 정치적인 논쟁 공간이 되었다. 많은 노동자들, 특히 젊은 노동자들이, 물론 이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토론들에 참여했다. 노동자들은 혁명의 필요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점거된 공장들을 방문해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할 것을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나중에 프랑스에서의 ICC 분파를 창립하게 될 소 규모의 사람들은, 점거된 공장 JOB에서 노동자평의회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설명하도록 요청받았다. 가장 의미있는 것은, 이러한 초대가 CGT와 CPF...의 회원들의 입을 통해 이루어진 점이었다. 이 회원들은, JOB의 파업초소를 ‚강화하기' 위해서 온  쉬드- 아비아시옹(Sud-Aviation) 대공장의 CGT 주요관료들과 한 시간동안 협상을 한 후에야 비로소 ‚과격한 좌파'를 공장에 들어놓는데 동의를 얻어낼 수 있었다.  6시간이상 동안 노동자들과 혁명가들은, 종이뭉치위에 앉아서, 혁명과 노동자운동의 역사와 소비에트에 대해서 심지어는 CPF와 CGT의... 배신에 대해서 토론했다.

마찬가지로 거리에서 보도에서 많은 토론들이 이뤄졌다(68년 5월에는 도처에 날씨가 매우 좋았다). 그러한 토론들은 매우 즉흥적으로 생겨났다. 각자가 할 말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서로 대화를 나눈다"가 슬로건의 하나였다). 도처에서 축제분위기 같은 것이 지배했지만, 예외적으로 ‚부유층구역들'에서는 공포와 증오가 쌓여갔다.

프랑스 도처에서, 도시구역들에서, 몇몇 큰 작업장들이나 그 인근관할 구역들에서 „행동위원회"가 출현했다. 그곳에서는 어떻게 투쟁해야할지, 혁명적 전망이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지에 대해 토론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토론들에는 좌파 그룹들이나 아나키스트 그룹들이 왕성하게 참여했지만, 그곳에는 이러한 그룹들의 회원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국영 라디오 및 TV 방송국, ORTF에서 조차도, 행동위원회가 출현했는데, 특히 미셜 드루커가 이것을 함께 고무했고 티에리 롤랑이 크게 관여했다.

부르조아지의 반응들

이러한 상황을 놓고 볼때, 지배계급은 방황하는 시기에 있었고, 이러한 방황은 혼동되고 비효과적인 발의들을 통해 나타났다.

그렇게 해서 우파가 지배하는 의회는 좌파가 2주 전에 제시한 검열안을 토론한 다음 거부했다. 프랑스공화국의 공식적인 제도권들은 딴 세상에 사는 것처럼 보였다. 정부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같은 날, 독일로 출국했던 다니엘 콘벤디트의 재입국을  금지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불만을 한층 더 들끓게 만들었다. 5월 24일 여러 시위들이, 특히 콘벤디트의 체류금지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서 많은 많은 시위들이 있었다: „국경 타도!", „우리 모두가 독일 유태인이다!"

CGT가 „모험가들"과 „선동가들"(즉, „과격한" 학생들)에 대해 설치한 저지선에도 불구하고 많은 젊은 노동자들이 이러한 시위들에 합류했다.

이날 저녁 공화국 대통령 드골장군은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는 프랑스인들이 (일종의 자본-노동 연합으로서) „참여"를 표명할 수 있도록 국민투표를 제안했다. 상황을 그보다 더 잘못 파악할 수는 없었다. 이 담화문은 쇠귀에 경읽기와 마찬가지였고, 정부와 부르조아지의 전반적인 혼란스러움을 나타냈다[1].

거리에서 시위대들은 그 담화문을 트렌지스터라디오를 통해서 전해들었다. 즉시 분노가 더 고조되었다: „우리는 그의 담화문을 야유했다." 파리 시내 전체에 그리고 몇몇 지방도시들에서 폭력적인 대결들이 일어났고 바리케이트가 세워졌다. 수많은 쇼윈도우가 깨여지고, 자동차들이 불태워졌다. 이렇게 해서 여론의 일부가 학생들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고, 이들은 이제 „폭동자들"로 비춰졌다. 그런데 시위대들 중에, 불길에 기름을 붓고 국민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드골주의 민병대 대원들이나 경찰들이 섞여있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많은 학생들이, 바리케이트를 세우거나, ‚소비사회'의 상징인 자동차를 불태움으로써 자신들이 ‚혁명을 만들 것'이라고 믿었던 점은 분명했다. 이러한 행위들은 특히, 역사상 최대의 파업물결에 대한 당국의 한심스럽고 도전적인 반응들에 대해 시위대, 학생들과 젊은 노동자들이 갖는 분노를 드러냈다. 체제에 대한 이러한 분노의 한 표현으로서, 자본주의의 상징인 파리주식거래소가 화염에 휩싸였다.

결국 부르조아지는 그 다음날에야 효과적인 대책을 마련했다. 토요일인 5월 25일에 노동부(그르넬가에 위치한)에서 노동조합, 고용주들 그리고 정부 사이에서 협상이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고용주들은 노동조합이 기대했던 것 이상을 제공할 용의가 있었다. 부르조아지가 겁에 질려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퐁피두 수상이 그 협상을 지휘했다. 그 일요일 저녁 그는 CGT 의 총수 세귀와 한 시간동안 단독면담을 했다. 프랑스에서의 자본주의 사회질서 유지의 중책을 맡고 있는 이 두 사람은, 질서를 다시 확보하기 위해서 아무런 증인 없이 상의할 시간이 필요했다[2].

 5월 26일밤에 „그르넬협정"이 서명되었다:

  • 모두에게 6월 1일부터 7% 그리고 10월 1일부터 부가적으로 3%의 임금인상;
  • 최저임금 25%인상;
  • 보건의료부문에서 ‚본인부담'을 30%에서 25%로 감축(특히, 사회보험의 적용을 받지 않는 의료비지출에서);
  • 회사들에서 노조의 인정;
  • 그 외에, 특히 노동시간에 관련해서, 협상초기의 일련의 매우 불분명한 언약들(그당시 노동시간은 주당 평균 47시간이었다).

운동의 강력함을 놓고 볼때, 그것은 순전히 도발에 지나지 않았다:

  • 10%의 임금인상은 인플레이션에 의해 재빨리 잠식당할 것이었다(그 당시 인플레이션 비율이 높았다);
  • 인플레이션에 대한 임금보상 문제에 대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 노동시간 단축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것도 없었다. 주당 40시간(공식적으로는 이미 1936년에 달성된)으로의 „단계적인" 회귀를 목표로 선언함으로써 만족했다. 정부가 제안한 그 리듬에 따랐다면 그 목표는 2008년에나 도달되었을 것이다!     
  • 본질적인 어떤 것을 획득해낸 유일한 부분은 저임금 노동자들(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키고 그들이 작업을 개시하게 할 희망에 의해)과 노동조합들(그들의 사보타지 역할에 보상으로써)이었다.  

5월 27일 총회는 „그르넬협정"을 만장일치로 거부했다.

르노 빌랑꾸르에서 노동조합은 ‚전시적인 행사'를 조직했고, 언론매체는 이를 크게 보도했다. 세귀는 협상에서 돌아왔을 때 기자들에게, „작업 복귀가 곧 이뤄질 것"이며, 빌랑꾸르의 노동자들이 모범을 보일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침부터 모여든 10,000명의 직원들은, 노조지도자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파업을 계속할 것을 결정했었다.  

CGT의 ‚역사적인' 지도자, 베누아 프라숑(1936년의 협상에 이미 참가한 적이 있는)은 선언했다: „그르넬의 협정은 수백만의 노동자들에게 기대하지 않았던 복지를 제공할 것이다."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CFDT의 앙드레 장송은, 파업 계속에 관한 처음의 결정을 환영하며 노동자들과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의 연대에 대해 언급했다. 열렬한 박수갈채가 있었다.

결국 세귀는 „그르넬의 성과들"에 대한 „객관적인 보고"를 제시했고, 몇 분동안 야유를 받았다. 그런 다음 세귀는 상황에 적응했다: „여기서 들은 것에 따라서 판단해 보건데, 여러분들은 순순히 물러서지 않을 것 같습니다! "  박수갈채, 하지만 그 무리들 속에서 한 목소리가 외쳤다: „그는 우리를 속인다."

„그르넬의 협정"을 거부한 가장 좋은 증거는,  5월 27일에 파업자 수가 9백만으로 증가한 것을 들 수 있다.

5월 29일 파리의 샤르레티 스타디움에서 대규모의 집회가 있었다. 그것은 학생조합 UNEF와 CFDT(CGT보다 더 과격한 것처럼 보여진), 그리고 좌파그룹들이 주관했다. 연설중에 혁명적인 논조들이 울려퍼졌다. 증가하는 불만들에 대해서 CGT와 CPF로써 배출구를 마련하려 했다. 극좌파들의 대변인들 곁에 망데-프랑스(1950년대의 전직 정부수반)와 같은 사회민주주의자들도 참석해 있었다. 머리를 검은 색으로 염색하고서 독일로부터 돌아온 콘벤디트도 등장했다(그는 전날 저녁에 소르본느에 나타났었다).

5월 28일은 좌파 당들의 작전과 조처들이 있는 날이었다.  

아침에," 좌파 민주주의자 및 사회주의자 연합"(사회당, 과격당 그리고 상이한 작은 좌파그룹들을 대표하는)의 총수 프랑스와 미테랑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가 보기에, 권력의 진공상태가 존재하며 그래서 그 자신이 공화국 대통령 후보로서 출마할 것임을 선언했다. 오후에는 CPF의 지도자, 발덱-로쉐는 „공산주의자들의 참여"를 포함하는 정부를 제안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혼자서 그 상황을 자신들이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는 것을 막는 것이 관건이었다. 5월 29일에 큰 시위가 있었는데, CGT가 그것을 주관하고 „국민정부"를 요구했다. 우파들은 즉시 „공산주의의 음모"에 대해 경고했다.   

이날 드골 장군이 „사라졌"다. 그가 퇴위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사실 그는 독일로 날아가서, 그곳 프랑스점령군을 지휘하고 있던 마수(Massus) 장군의 지지와 군대의 충성을 확실히 하려했다.

5월 30일은 부르조아지가 상황에 대한 주도권을 다시 장악하려는 시도에서 일종의 결정적인 날을 표현했다. 드골은 다시 담화문을 발표했다. „ 상황에서 나는 결코 퇴위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 국회를 해산한다..."

동시에 파리의 샹젤리제거리에서 드골을 지지하기 위한 엄청한 규모의 시위가 있었다. 부유층구역들에서, 잘 사는 교외지역에서, 그리고 시골에서 군용트럭으로 „국민"이 운송되어 왔다.  겁먹은 자들과 가진자들, 서민들, 부유층 자제들을 위한 지역학교 대리자들, 자신들의 ‚우월함을' 의식하고 있는 지도층들, 쇼윈도우가 파괴될까 조바심하는 작은 상점주인들이 모두 한 곳에 모였다. 국기에 대한 공격 때문에 격노한 참전용사들, 은폐물 아래에서 지하 세계와 더불어 잠복하는 비밀경찰들 그리고 알제리정착민들, 파시스트적인 옥시당 그룹의 젊은 회원들인 OAS와 비시(Vichy)에 대해 향수를 느끼는 늙은 추종자들(이 모두는 드골을 경멸하지만)이 함께 모였다. 이 모든 순량한 사람들이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신들의 증오와 „질서 사랑"을 알리기 위해서 보여들었다. „자유 프랑스"의 투사들도 속해 있던 그 군중들로부터 „콘벤디트를 다하우(Dachau)로 보내라!"와 같은 구호들이 퍼져나왔다. 그러나  그 „질서의 당"은 샹제리제에서의 시위들로 그친 것이 아니었다. 같은 날 CGT는 „그르넬의 성과들의 개선"을 위해 부문별 협상들을 요구했다. 이는 운동을 절멸하기 위해 그 운동을 분열시키는 수단이었다.

조업 재개 

그 목요일부터 조업이 재개되긴 했지만 이것은 느리게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6월 6일에도 여전히 약 6백만명이 파업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업은 매우 분산적으로 재개되었다.

5월 31일: 로트링엔의 강철산업, 북프랑스의 직물산업

6월 4일: 병기창, 보험

6월 5일: 발전소, 탄광소

6월 6일: 우체국, 텔레커뮤니케이션, 운송(파리에서 CGT는 조업재개를 위해 압력수단을 동원했다. 각 작업장에서 노조지도자들은, 다른 정거장들에서는 조업이 이미 재개되었다고 알렸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6월 7일: 초등학교

6월 10일: 플랭스의 르노 작업장이 경찰에 의해 점령되었다. 경찰에 의해 폭행을 당한 고등학생들 중의 한명이 센느강에 추락해서 익사했다.

6월 11일: 소쇼의 푸조 작업장(프랑스에서 두번째로 큰 작업장)에 CRS(내전경찰)이 개입. 2명의 노동자가 살해당함.

프랑스 전역에 다시 한번 엄청난 시위들이 발생했다. „그들이 우리 동지들을 살해했다." 노동자들의 결연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CRS는 소쇼 작업장을 정리했다. 하지만 조업은 그 이후 10일이 지나서야 재개되었다.

그러한 분노가 다시 파업의 부활(아직 3백만이 여전히 파업중이었다)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노동조합들(CGT를 그 선두로 한)과 좌파정당들(CPF를 선두로 한)은,  „선거가 실시될 있고  그래서 노동자계급의 승리가 완성될 있기 위해서" 조업을 재개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CPF의 일간지, 뤼마니테(l'Humanité)는, „그들의 승리로써 강력해진 수백만의 종사자들이 조업을 재개하다" 를 표제로 삼았다.

노동조합들에 의해 5월 20일에 체계적으로 이뤄진 파업 호소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었다: 그들은 그 운동을 통제해서,  덜 전투적인 부분들에서 조업재개를 그렇게 손쉽게 이뤄낼 수 있도록 그래서 다른 부문들로 그러한 사기저하를 확산시킬 수 있도록 만들길 원했다.

발덱-로쉐는  선거운동동안 자신의 연설에서, „공산당은 질서의 당"이라고 선언했다. 사실상 부르조아적인 „질서"가 서서히 회복되었다.

6월 12일: 중고등학교에서의 업무 재개

6월 14일: 에어 프랑스와 해운

6월 17일: 르노 빌랑꾸르에서 조업의 혼돈스런 재개

6월 18일: 드골은 아직 수감중에 있던 OAS 지도자들을 석방하게 함.

6월 23일: 국회의원선거의 첫 투표일, 우파가 크게 득표함.

6월 24일: 파리 중심에 위치한, 시트로엥 쟈벨에서 조업재개(CGT의 제 2인자인 크라수키가 총회 앞에 나서서 파업중단을 외침.)

6월 26일: 우시노 뒨키르션

6월 30일: 결선투표, 우파의 역사적인 승리.

마지막으로 업무를 재개한 직장 중의 하나로서 라디오 및 TV방송국이 7월 12일에 업무를 재개했다. 많은 언론인들은 이전에 정부에 의해 이뤄졌던 것처럼 다시 그렇게 후견되고 검열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업무가 재개된 후 그들 중 많은 이들이 해고당했다. 도처에서 질서가 다시 회복되었고, 특히 목적에 알맞게 국민을 „설득하는데" 중요한 언론매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해서 역사상 가장 큰 파업은 CGT와 CPF의 주장과는 반대로 패배로 끝났다. 그 심각한 패배는, 그 운동 동안 분노와 경멸을 샀던 당들과 „권위들"의 복귀에 의해 확증되었다. 그러나 노동자운동은 오래전부터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의 투쟁들의 참된 결과는 직접적인 결과가 아니라, 점점 결속해가는 노동자들의 단결이다"(공산주의 선언).

그러나 직접적인 패배와는 상관없이 1968년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서도 크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들을 우리는 다음 번의 글에서 보여줄 것이다. 그 글에서 우리는 프랑스에서의 이 „아름다운 5월"의 심층에 놓인 원인들과 역사적 그리고 국제적인 차원들을 밝혀내려 시도할 것이다.

파비안느(27/04/2008)


[1]   이 담화문이 발표된 다음 날 많은 도시들의 코뮨들의 종사자들이, 국민투표를 조직하기를 거부한다고 공표했다. 당국들은 투표용지를 어떻게 인쇄해야할지도 몰랐다- 국영 인쇄소는 파업중이었고, 파업하지 않았던 사립 인쇄소들은 그 인쇄주문을 거부했다. 고용주들은 자신들의 종업원들과의 부가적인 마찰을 원치 않았다.

[2]   사회부 차관이던 시락(Chirac) 역시 CGT의 제 2인자 크라수키를 (어느 다락방에서!) 만났다는 것이 이후에 알려졌다.

68년 5월과 혁명적 전망(제 1부) - 1960년대의 세계학생운동

1969년 1월 미국의 리차드 릭슨 대통령은 취임시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지속적 성장이 보장되도록 경제를 조성하는 것을 마침내 알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이러한 낙관론이 잔인한 현실에 의해 얼마나 반증되었는지를 볼 수 있다. 그 4년 후, 즉 그의 두번째 임기가 시작될 때 이미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래 최악의 불경기에 빠져들었다. 이에 따라 다른 많은 것들이 결과되었는데, 그 모두는 각각 그 전에 앞섰던 것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었다. 하지만 세상 물정에 어두운 낙관주의와 관련해서, 그 한 해 전에 이미 훨씬 더 경험많은 국가수반 하나가 닉슨을 능가했다. 그 사람은 바로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였고1958년 이래 프랑스공화국의 대통령이던 드골이었다. 이 위대한 지도자는 신년사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지 않았던가: „1968년, 나는 올해를 평온하게 맞이한다 " 그의 경우에는 그러한 낙관주의가 사라지기까지 4년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그 장군의 평온이 가장 큰 혼란에게 자리를 내어 주기까지 4개월이면 충분했다. 드골은 폭력적이고 대규모의 학생폭동들뿐만 아니라 국제노동자운동 역사상 가장 큰 파업을 상대해야만 했다. 1968년은 그래서 프랑스에게 있어 전혀 평온하지 않은 해였을 뿐만 아니라,  제 2차 세계대전 이래 가장 큰 격동의 해였고 오늘날까지도 그런 해로 남아 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만 그해에 크다란 격동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야가 프랑스에만 국한 되었다고는 절대로 비난될 수 없는 저자 2명, 즉 영국인 데이비드 쿠테 그리고 미국인 마아크 퀄란스키는 그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진술한다: „1968년은 2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래 가장 격렬한 해였다. 미국과 서유럽에서, 체코슬로바키아에서까지 연이어 봉기들이 일어났다. 이러한 봉기들을 통해서 전후질서가 문제시되었다."[1]  „ 이전까지는 1968년과 같은 해는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러한 사건들이 해에 일어나는 일은 앞으로도 이상 없을 것이다. 민족국가들과 문화들이 여전히 나뉘어 있고 서로 매우 다른 시기에, (...) 하나의 반항적인 정신이 전세계에 걸쳐 자생적으로 나타났다. 이전에도  다른 혁명의 해가 예를 들어  1848년처럼 있었지만, 1968년과 견주어 볼때 그러한 사건들은 유럽에만 국한된 채로 머물렀다..."[2]  이 „뜨거운 해" 이후 40년이 지난 현재 여러 나라에서 이 주제를 놓고 신문과 텔레비젼등에서 보도들이 그야말로 홍수를 이루는 동안, 혁명가들은 1968년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것들을 여기서 면밀하고 빠짐없이 다시 펼쳐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사건들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해내기 위해서.[3]  특히, 그들은 오늘날 매우 널리 확산되어 있고 퀄란스키의 책 표지에도 실려있는 한 생각에 대해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 „역사학자들뿐만 아니라 정치학자들도 - 전세계의 사회학 전문가들이 동의하는 것은, 1968년이전과 1968년이후가 구분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우선 말하자면, 우리는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지만,항상 반복해서 듣게 되는 다음 과 같은 이유들과는 확실히 다른 이유들 때문이다:  „성해방"이, „여성해방"이, 가족의 권위주의적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가, (대학교와 같은 )특정 제도들의 „민주화"가, 새로운 예술형식들의 발전 등등이 출현했기 때문이라는. 그래서 우리는 이 글에서 ICC의 관점에서 볼때1968년에 발생한 진정한 혁명들을 보여주고자 한다.    

상당히 중요한 사건들(예를 들어, 미군이 방어해내긴 했지만 그래도베트남전에서 미국이 결코 승리할 수 없을 것임을 분명하게 만들었던1968년 2월의 베트콩의 구정공세 또는, 같은 해 8월 소련 탱크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이외에도 1968년은 - 코테와 퀄란스키가 강조하듯이 - 이러한 „전세계에서 느껴질 수 있었던 반항정신에 의해 각인되었다." 기존 질서에 대한 이러한 문제제기에서, 그 정도에 있어서도 또 의미에 있어서도 상이한 두가지 구성요소들을 구분지어야 한다.

한편으로 서구권 지역의 거의 모든 나라들을 휩쓴 그리고 심지어 어느 정도는 그 당시 동구권국가들로도 확산된 학생반란이 그것이었다. 다른 한 요소는, 1968년 근본적으로는 오직 한 나라, 즉 프랑스에서만 발전했던 노동자계급의 대대적인 투쟁이었다.

이 첫번째 글에서 우리는 오직 첫번째 요소만 검토할 것인데, 이는 그것이 가장 중요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것은 노동자 투쟁들에 앞서 전개되었을 뿐이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학생반란의 의미를 훨씬 능가하는 역사적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세계의 학생운동

지구상에서 가장 큰 나라, 미국에서 그 당시 1964년부터 그 시기 가장 대대적이고 가장 격렬한 운동들이 전개되었다. 특히 북부 켈리포니아의 버클리 대학교에서 학생들의 항의가 최초로 더 큰 규모로 확대되었다. 학생들이 주요하게 제기한 것은, 대학들에서 자유로운 정치적 발언을 위한  „자유로운 발언 운동(free speech movement)"(언론자유를 위한 운동)의 요구였다.   

미군의 잘 무장된 신병모집자들에 대해 항의하는 학생들은 베트남전 반대 그리고 인종분리 반대를 선동하려 했다(이 모든 것은, 마틴 루터 킹이 그의 유명한 연설, „나는 꿈이 있습니다"를 행한,  1963년 8월 28일 워싱턴에서의 „시민권을 위한 행진"이 있은 1년 후에 일어났다). 처음에 당국은,  매우 억압적으로, 특히 경찰력을 통원해서 „씻트-인(sit-ins)", 즉 대학공간들의 평화로운 점거에 대해 대응했고, 이때 800명의 학생들이 체포되었다. 1965년초 대학측은 대학내에서의 경찰들의 활동을 허가했고, 그렇게 해서 이 대학교는 미국내 학생저항운동의 주요중심지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동시에 그당시 로날드 레이건이 „버클리에서의 무질서를 일소하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1965년 예상치 않게 켈리포니아 주지사가 되었다. 운동은 강한 자극을 받았고 그 다음해에 인종분리 반대, 여성권리 옹호 그리고 특히 베트남전쟁 반대 항의시위를 통해서 과격화되었다. 같은 시기에 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특히 학생들이 베트남으로의 징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떼지어 외국으로 도피하는 한편, 그 나라의 대부분은 대학교들은 반전운동의 무대가 되었고, 대도시의 흑인게토들에서는  폭력 봉기들이 불타올랐다(베트남전에 보내진 흑인 젊은이들의 비율은 베트남전에 소집된 국가평균보다 훨씬 높았다).

이러한 항의운동은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그렇게 1967년 말 952명의 학생들이 베트남으로의 소집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다는 이유로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68년 2월 8일 사우스 케롤라이나에서 시민권을 위한 시위 도중에 3명의 학생들이 살해당했다. 그운동은1968년에 가장 강력히 확대되었다. 3월에 흑인 학생들이 워싱턴의 호워드 대학교에서 4일동안 그학교 일대를 점거했다. 1968년 4월 23일에서 30일까지 뉴욕의 콜럼비아대학교가, 국방부와의 합력대한 항의로 그리고 할렘의 흑인 게토 주민들과의 연대를 이유로 점거되었다. 불만과 과격화는 4월 4일 마틴 루터 킹의 암살에 의해 한 층 더 증폭되었는데, 이 사건은 그 나라의 흑인 게토들에서 수많은 폭력충돌들을 불러일으켰다. 콜럼비아대학교의 점거는 미국 학생운동의 최절정점들 중의 하나로서, 다시금 새로운 충돌들을 초래했다.

5월에 동맹휴학중인 12개 대학교 학생들이, 인종주의와 베트남전에 반대해 항의하기 위해 만났다. 그여름에 켈리포니아는 운동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이틀 밤동안 경찰과 버클리대 대학생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고, 그런다음 켈리포니아의 주지사, 로날드 레이건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이러한 새로운 충돌 물결은, 민주당 대회 기간 동안 큰 무력충돌이 발생한, 8월 22일에서 30일사이 시카고에 그 절정에 도달했다.

미국 대학생들의 반란은 같은 시기에 많은 다른 나라들로 확산되었다. 

아메리카대륙의 다른 나라들중에서는 브라질과 멕시코의 학생들이 가장 활동적이었다. 

1967년 브라질에서는 브라질 정부와 미국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들이 늘 다시 발생했다. 3월 28일 경찰이 학생들에 반대해 투입되어 그들 중에 루이스 에드손이라는 학생이 살해되었고, 중상을 입은 여러 학생들 중에서 한명이 다시 그 며칠후 사망했다. 3월 29일의 루이스 에드손의 장례은 엄청난 시위로 바뀌었다. 무기한 동맹휴업중이던 리오 데 자네로대학에서부터 운동은 상파울로의 대학들로 확산되어 그곳에서는 바리케이트가 세워졌다.  3월 30일과 31일에 다시 시위들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4월 4일에 리오에서 대략 600명이 검거되었다. 엄청난 진압과 대대적인 검거에도 불구하고1968년 10월까지 거의 매일 시위들이 있었다.

몇 달 후 멕시코가 휩쓸렸다.

7월말 멕시코시티에서 학생반란이 일어났다. 그 대응으로써 경찰은 탱크를 투입했다. 수도의 경찰총수는 그 진압을 다음과 같이 정당화했다: „제 19회 올림픽 대회 전야에 우리 정부에 대해 적대적 분위기를 만들어낼 경향이 있는 하나의 파괴적인 운동"에 대응해야만 한다. 진압은 계속되었고 심지어는 더욱 극심해졌다. 9월 18일 대학캠퍼스가 경찰에 의해 점령되었다. 9월 21일 경찰은 수도에서 있었던9건의 충돌 동안 736명을 검거했다. 9월 30일에는 베라크루스대학교가 점거되었다. 10월 2일 마침내 정부는 멕시코시티의 3문화광장에서 10,000명의 학생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도록  했는데, 이때 사복차림의 준군사조직이 투입되었다. „틀라텔롤코의 학살"로서 기억에 새겨진 이 진압시 최소한 200명이 살해당하고 500명 이상이 중상을 입었으며 2000명 이상이 검거되었다. 그렇게 해서 디아스 오르다스 대통령은 10월 12일에 시작된 올림픽대회를 „조용하게" 치를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학생들은 올림픽대회라는 „강제된 휴식" 이 있은 후 몇 달동안 운동을 계속 펼쳤다.

하지만 아메리카대륙만이 학생운동의 이러한 물결에 휩싸인 것은 아니었다. 사실 모든 대륙이 해당되었다.

그렇게 해서 아시아에서는 일본에서 특히 극적인 운동이 출현했다. 1963년이래 미국에 반대하는 그리고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폭력적인 시위들이 발생했는데, 이는 주로 전학련(전국일본학생자치위원회연합)에 의해 주도되었다. 1968년 봄이 끝날 무렵, 그 학생저항운동은 학교들과 대학교들에 도달했다. 투쟁구호 하나는 다음과 같았다: „칸다[도쿄의 대학지구]를 라탱지구로 탈바꿈시키자." 노동자들이 운동에 가담한 후 이 운동은 1968년 10월에 절정에 달했다. 10월 9일에 도쿄, 오사카 그리고 교토에서 경찰과 학생들이 충돌했다 - 80명이 부상당하고 188명이 검거되었다. 반봉기법이 통과되었다- 이에 반대해서 약 800,000명이 거리에서 시위를 했다. 도쿄대학의 점거에 대항해 경찰이 그 대학에 진입한 것에 대응하여 10월 25일 6000명의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했다.  1969년 1월 중순 학생운동의 마지막 요새, 도쿄대학이 무너졌다.  

아프리카에서는 특히 세네갈과 튀니지가 두드러졌다.

세네갈에서 학생들은 정부의 우익성향과 프랑스의 신식민주의적 영향력을 탄핵하고 대학들의 구조변경을 요구했다. 1968년 5월 29일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사회주의 인터네셔널'의 회원인 레오폴드 세다르 셍호르에 의해 군부의 도움으로 진압당했다. 그러한 진압시에 다카르 대학교에서 1명이 살해당했고 20명이 부상당했다. 6월 12일 다카르 근교에서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의 시위에서 다시 1명이 살해당했다.

튀니지에서는 그 운동이 1967년에 시작되었다. 6월 5일, 아랍국가들에 대항해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것으로 비난된 미국과 영국에 반대하는 한 시위중에 미문화원이 파괴되었고 영국대사관이 공격당했다. 모하마드 벤 제넷이라는 학생이 검거되어 2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1월 17일에 수 많은 학생들이 베트남전에 반대해서 항의했다. 1968년 3월 15일부터19까지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했고 모하마드 벤 제넷의 석방을 요구했다. 결국 이 운동은 일련의 검거를 통해서 진압되었다.

...유럽에서...

그러나 가장 거대하고 극적인 운동은 유럽에서 전개되었다.

영국에서는 이미 1966년 말에, 부르조아 경제학파들의 중심지인 매우 권위있는 „런던경제학교(LSE, 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들끓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학생들은  당시 로데지아와 남아프리카에서 인종차별주의적 정부들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진 한 인물이 그 학교의 학장으로 지명되는 것에 반대해 항의했다. 항의운동은 그 이후에도 계속 LSE를 엄습했다. 그렇게 해서 예를 들어 1967년 3월에는 징계대책들에 반대해서 5일간의 점거(sit-in)가 있었고, 이에 후속적으로, 미국의 예를 본받아 „자유대학"이 만들어졌다. 12월에 리전트 스트리트 폴리테크닉에서 그리고 홀번 법 및 상업대학에서 점거가 일어났다. 이것은 대학 지도부 내에 학생대표를 둘 것을 요구했다. 5월에 에섹스 대학교가, 호른세이미술대학이, 헐, 브리스톨 및 클레에서 점거당했다: 이에 뒤어어 크로이던, 버어밍햄, 리버풀, 길드포드 에서 그리고 왕립예술대학에서 운동이 일어났다.

가장 극적인 시위들(출신과 견해에 있어서 상이한 많은 사람들이 참가한)은 베트남전에 반대하여, 1967년 3월과 10월에, 1968년 3월과 10월(가장 나중 것이 참가자수에 있어서 가장 대규모였음)에 일어났는데, 이 모두는 경찰과의 폭력적인 충돌을 초래했다. 이때 미국대사관과 그로스베노르 광장 앞에서는 각각 수백명의 부상자와 검거자가 발생했다.

벨기에에서는 학생들이 베트남전에 반대하여 항의하고 교육부문의 개선을 요구하기 위해서1968년 4월부터 여러번 가두로 나섰다. 5월 22일에는 브뤼셀자유대학교가 점거되어 „민중을 위해 열린 대학교"라 선언되었다. 그 일대는, 그학교의 대학위원회가 학생들의 요구들 중 몇몇을 수용하고 나서  6월 말에 다시 정리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1967년부터 여러 대학교들이 점거되었고, 경찰과 학생들 사이에 정기적인 충돌도 있었다. 로마대학교가 1968년 2월에 점거되었다. 경찰이 그 일대를 정리하자 학생들은 보르게제거리에 있는 건축과 건물들로 이동했다. 결국 „그룰랴 계곡의 전투"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폭력적인 충돌들이 일어났다. 동시에노동조합이 허약한 산업부문의 종사자들이 (베니스의 마르쪼토-작업장에서) 자생적으로 저항했다. 이에 대해 노동조합들은 그 산업에서 하루동안의 총파업을 선언했고 많은 종사자들이 이에 참여했다. 결국 5월에 열린 선거들은 이미 봄부터 기울어져가던 그 운동의 종말을 의미했다.

프랑코 지배하의 스페인에서는 1966년부터 노동자들의 파업과 대학교점거의 물결이 전개되었다. 1967년에 그 운동은 한층 강하게 성장했고 1968년까지 지속되었다.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서로에게 연대를 표시했다. 예를 들어 1967년 1월 27일 100,000명의 시위자들이 마드리드에서 있었던 한 시위 참가자들에 대한 잔혹한 진압에 반대하여 항의했는데, 이때 경제학과 건물로 피신한 학생들은 경찰과 6시간동안이나 대치상태에 있었다. 당국은 시위자들에 대해 모든 수단을 총 동원했다. 언론은 통제되었고, 운동 관련자와 지하에서 활동하던 노동조합활동가들이 검거되었다. 1968년 1월 정부는 각 대학교에 „대학교경찰"을 설치했다. 그러나 이것은 학생운동이 베트남전과 프랑코체제에 반대해 계속 저항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해서 마드리드 대학교는 3월에 폐쇄되었다.

유럽의 모든 나라들 중에서 독일에서의 학생운동이 가장 강력했다.

독일에서는 1966년 말, 무엇보다도 사회민주당이 정권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반응으로서, „의회외부의 반대파(APO)" 하나가 출현했다. 그 APO는 특히 학생들의 총회에 기반하고 있었고, 그 회의에서는 저항의 수단과 방법에 관한 열띤 논쟁들이 이루어졌다. 많은 대학교들에서 - 미국의 모범을 따라서 - 토론그룹들이 만들어졌고, „기성의" 부르조아적인 것에 대한 반대극으로서 „비판적인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시기에, 논쟁의 오랜 전통, 즉 공개적인 총회에서의 토론 전통이 일부 부활했다. 많은 이들이 비록 극적인 행동에 대한 충동에 의해 이끌리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래도 이론에 대한, 혁명운동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다시 출현했고 그러한 관심과 더불어 자본주의의 극복을 생각할 용기도 다시 나타났다. 독일에서의 항의운동은 국제적으로 „가장 이론적이며,  토론들에 있어서 가장 깊이 파고들었고 가장 정치적이었던 "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토론들에 병행하여 수많은 항의시위들이 있었다. 베트남전 문제는 확실히, 미국의 군사력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정부를 가진, 그리고 2차대전의 영향이 지속적으로 남아 있는 나라에서 주요 원동력이었다. 1968년 2월 17일과 18일 서베를린에서 국제베트남대회가 개최되었고 그에 뒤어어 12,000명이 참가한 시위가 있었다. 1965년이래 일어난 시위들은 마찬가지로 비상사태법령의 제정을 탄핵했는데,  이 법령으로써 국가는 내부적인 군국주의화와 강화된 진압에 대한 포괄적인 권리들을 갖게 될 터였다. 1966년 대연정에 참가한 SPD는 이러한 기획을 주장하면서, 그들이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유혈진압을 지휘했던 1918-1919의 자신들의 오랜 전통을 이어갔다. 1967년 6월 2일 페르시아의 샤의 베를린방문에 반대해 있었던 한 시위가, 이 피에 굶주린 독재자와 가장 좋은 관계들을 맺고 있던 „민주적인" 독일 국가에 의해 가장 잔혹하게 공격당했다. 그러한 무력적 충돌에서 한 사복경찰에 의해서 베노 오네조르그라는 학생이 등에 총을 맞고 살해되었다. (그 경찰은 이후 사면되었다.) 이러한 살인이 있은 후 시위대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선동되었고, 특히 지도자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했다. 빌트-신문은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이제 젊은 빨갱이들의 테러를 끝장내라!" 1968년 2월 21일 베를린 참의회의 하나에 의해 조직된 „친미 데모"에서 참가자들은 „국민의 적 1호: 루디 두취케"라는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는데, 그는 저항운동의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다. 이 시위 도중에 두취케로 오인된 한 행인은 시위참가자들에 의해 때려죽이겠다는 위협을 받았다. 미국에서 마틴 루터 킹이 암살된 1주일 후인 4월 11일 „푸른 목요일(Gründonnerstag)"에 결국 독일에서도 그러한 선동캠페인은, 스프링어[빌트-신문의 발행사]-출판물에 의해 선동당한 한 젊은 자객이 베를린에서 루디 두취케를 암살을 시도한 후 그 절정에 달했다.  그에 뒤어은 부활절의 소요는 주로 스프링어출판사를 겨냥했다. 몇 주 동안 독일에서의 학생운동은, 그런 다음 프랑스가 눈길을 끌기전까지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게 참조점 역할을 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프랑스 학생반란의 주요 일화는 1968년 3월 22일 파리 서편 근교인 낭트르에서 시작되었다.

그날의 사건들은 그 자체로서는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파리에서 베트남전에 반대해 많은 폭력적인 시위들이 벌어졌던 시기에 파리의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사무실을 겨냥한 암살계획에 한때 관여한 것으로 의심되는 낭트르대학교 소속 극좌파 학생 한명의 검거에 대항해 그의 동료 학생 300명이 한 강의실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들 중 142명이 그 대학의 대학위원회 건물을 그날밤 점거하기로 결정했다. 낭트르 대학교 학생들이 그들의 불만을 표현한 것이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 얼마전에 이미, 남학생들에게는 금지되어 있는 여학생 기숙사에의 출입문제를 놓고 학생들과 경찰들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1967년 3월 16일에는 500명의 기숙사생으로 이뤄진 회합, ARCUN이, 무엇보다도 여학생들이 (21세가 되어야 성년으로 인정되던 그당시에 이미 성년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미성년자로 간주되어야 함을 의미하고 있던 거주규칙의 폐지를 결정했다. 그결과 경찰은 1967년 3월 21일 대학 행정처의 요청에 따라, 그 건물에 남아서 맨 위층에 바리케이트를 쳐놓고 있던 150명의 학생들을 그곳에서 체포하기 위해서 그 여학생기숙사를 포위했다. 그러나 다음날 경찰관들 자신들이 수천명의 학생들에 의해 포위되어 버렸다. 이들은 그래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던 학생들이 어떤 장해도 없이 밖으로 나오게 내버러 두도록 명령받았다. 이 사건 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그들의 분노를 특히 1967년 가을에 공표된 대학교개선을 위한 ‚푸셔-플랜(Fouchet-Plan)'에 반대해 분노를 분출했던 시위들도 성과가 없었다. 그러나 1968년 3월 22일 이후 모든 것은 다르게 진행되었다. 몇 주 사이에 일련의 사건들이 전쟁 후 최대로 학생들을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 노동자 운동 사상 최대의 파업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 대학교의 대학위원회 건물을 점거한 142의 점거자들은 그 건물을 떠나기 전에, 그와 같은 선동을 유지하고 추진하기 위해서 3월 22일 운동(M22)의 성립을 결정했다. 그것은 트로츠키주의 성향의 혁명적 공산주의 연맹(LCR)과 아나키스트들(이 속에 특히 다니엘 콘벤디트가 속했다)이 초기에 속했던 비공식적인 운동의 하나였다. 4월 말 맑스-레닌주의적 공산주의 청년연합(UCJML)의 마오주의자들이 가담했다. 그에 뒤이은 몇 주 안에 총합하여 대략 1,200명의 학생들이 참여했다. 대학교 벽면에는 점 점 더 많은 플래카드와 낙서들이 등장했다: „교수들, 너희들은 낡았고 너희의 문화도 마찬가지이다 "; „삶을 살자!"; „너희의 꿈을 실현하라!" M22는 3월 29일을 „비판적인 대학교"의 날로 선언하고 이와 더불어 독일 학생들의 전철을 밟았다. 총장은 학교를 4월 1일까지 폐쇄하기로 결정했지만, 선동은 학교를 개방한 후 다시 타올랐다. 1000명의 학생들 앞에서 콘벤디트는 선언했다: „우리는 자본주의 착취의 장래 매니져들이 되길 원치 않는다." 대부분의 교수진은 상당히 보수적으로 대응해서, 4월 22일 그들 중에서 „좌파 강사들"을 포함한 18명은 „선동자들이 색출되고 처벌되도록 대책과 수단을" 요구했다. 총장은 일련의 억압대책들을 결정했고, 특히 경찰들에게 대학캠퍼스에의 자유로운 접근과 활동의 자유를 부여했다. 동시에 신문들은 „분노한 자들", „종파들"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에 반대를 부추겼다. 프랑스 „공산주의" 당(PCF)도 같은 방식으로 반응했는데, 4월 26일 중앙위원회 위원 피에르 쥬켕이 낭트르 모임에 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복한 마마보이 소요자들이 노동자의 자식들이 시험치지 못하게 방해한다 " 그는 자신의 연설을 다 끝마치지도 못하고 피신해야만 했다. PCF의 제 2인자  죠르쥬 마르세는 뤼마니테(l'Humanité)에서 다시 다음과 같이 부추겼다: „이러한 거짓 혁명가들은 끈기 있게 폭로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객관적으로 그들은 드골주의자들의 권력과 대자본 독점의 이해관계를 위해 봉사하기 때문이다"  

낭트르 캠퍼스에서는 극좌파 학생들과, „볼세비키들을 혼내주기 위해서" 파리에서 원정온 그룹 옥시당(Gruppe Occident) 소속 파시스트들 사이에 점점 더 빈번하게 격투가 벌어졌다. 이러한 상황을 놓고 총장은 5월 2일 그 대학교를 다시 폐쇄하기로 결정했고, 그래서 그 학교는 경찰에 의해 봉쇄되었다. 낭트르학생들은, 대학 폐쇄에 반대하고 콘벤디트를 포함해M22 구성원 8명에 대한 대학위원회의  징계대책에 반대해 항의하기 위해서 그 다음날 소르본느대학 마당에서 집회를 갖기로 결정했다.

그 모임에는 300명만이 참가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열심히 학년말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러한 선동을 끝장내길 바라던 정부는 결정적으로 큰 타격을 가하기로 마음먹고, 경찰로 하여금 라탱지구(파리의 대학가)를 점령하고 소르본느를 포위하도록 명령했다. 경찰이 수백년 이래 처음으로 소르본느대학교에 난입했다. 소르본느로 피신했던 학생들에게는 자유로운 귀가가 약속되었다. 여학생들이 걱정없이 귀가할 수 있었던 반면 남학생들은 캠퍼스를 떠나자마자 경찰차 안에 차곡차곡 채워졌다. 순식간에 수백명의 학생들이 소르본느광장에 모여들어서 경찰관들을 욕했다. 경찰은 그 학생들에게 최루탄을 쏘았다. 그 학생들은 광장로부터 강압적으로 쫓겨났지만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이 경찰관들과 그들의 차량들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충돌은 그날 저녁 4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경찰관 72명이 부상당했고 시위대 400명이 체포되었다. 그 다음날 경찰은 소르본느 일대를 완전히 봉쇄했다. 그와 동시에 학생 4명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단호한 손" 정책은 정부가 바라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했다: 선동을 끝장내기는 커녕 그것은 점점 더 대대적으로 되어갔다. 5월 6일, 월요일부터, 소르본느 주위에 결집한 경찰력과 수적으로 점점 더 확대되어가는 시위들 사이에는 되풀이 하여 충돌이 발생했다. M22, UNFEF(학생노동조합) 그리고 SNESup(대학교원노동조합)가 이러한 시위들을 호소했다. 45,000여명의 학생들이 „소르본느는 학생들에게 속한다", „경찰들은 라탱지구에서 물러나라" 그리고 특히 „우리의 동지들을 석방하라"라는 투쟁구호를 외치며 그러한 시위들에 참가했다. 대학생들에게 점점 더 많은 학생들, 선생들, 노동자들과 실업자들이 동참했다. 5월 7일 시위행렬은 갑자기 센느강을 건너서 샹젤리제를 따라 이동했고 대통령궁 근처까지 나아갔다. 대개는 라 마르세예즈나 장례의 조종이 들리던 그 개선문 아래에서 인터네셔널가가 불리기 시작했다. 몇몇 지방도시들에도 시위들이 번져나갔다. 정부는 자신의 좋은 의지를 증명해 보이고 싶어서 5월 10일 낭트르 대학교를 개방했다. 그날 저녁 만명의 시위대들이 라탱지구에 모여들어서, 소르본느를 봉쇄했던 그 경찰력과 대치했다. 21시에 몇몇 시위대들이 바리케이트를 치기 시작했다(총합하여 대략 60개가 세워졌다). 자정에 3명의 학생대표들(콘벤디트가 포함된)이 파리 대학위원회 총장의 영접을 받았다. 총장은 소르본느의 재개방을 확약했지만, 5월 3일에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에 대해서는 어떤 약속도 할 수 없었다. 오전 2시에 CRS(내전경찰)는 그 이전에 많은 최루탄을 발사한 후 바리케이트를 향해 돌격했다. 그 충돌은 매우 폭력적이었다. 양측에서 수백명이 부상당했다. 시위대중 500명이상이 체포되었다. 라탱지구에서는 많은 주민들이 학생들에게 호의를 보여서, 경찰의 최루탄이나 다른 공격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집으로 피신하게 하거나 거리에 물을 뿌려주었다. 이 모든 사건들, 특히 진압세력의 잔인성에 관한 보도들을 수십만의 사람들이 라디오를 통해 주목했다. 오전 6시에 라탱지구에 „질서가 지배했다". 하지만 그것은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처럼 보였다.

5월 11일 파리와 프랑스 전역에서 분노가 거세졌다. 도처에서 사람들이 자생적으로 시위행렬에 모여들었다. 이러한 시위들에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상이한 출신의 수십만의 시위자들, 특히 젊은 노동자들과 학부모들이 동참했다. 지방에서 많은 대학들이 점거되었고, 도처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사람들은 토론하기 시작했고 진압세력의 소행을 비난했다.

사건이 이렇게 전개되자 그날 저녁 죠르쥬 퐁피두 수상은, 5월 13일부터 경찰력이 라탱지구에서 철수하고 소르본느도 다시 개방될 것이며 체포된 학생들도 석방될 것임을 발표했다.   

같은 날, CGT(그때까지는 ‚극좌파 학생들'을 탄핵했었던 )를 포함한 노동조합중앙조직들과 몇몇 경찰노동조합들은, 진압과 정부정책에 항의하기 위해서 5월 13일에 파업과 시위를 하자고 외쳤다.

5월 13일 전국의 모든 도시들에서 제 2차 세계대전이래 최대규모의 시위들이 일어났다. 노동자계급은 학생들 곁에서 대대적으로 참가했다. 가장 널리 확산된 구호들 중의 하나가, „10년, 그것으로 충분하다"(드골이 다시 권력을 잡게된 1958년 5월 13일과 관련지어서)였다. 시위 끝에 거의 모든 대학교들이 수많은 학생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젊은 노동자들에 의해서 점거되었다. 도처에서 사람들이 발언했다. 토론은 대학 관련 문제들이나 진압에 관련된 것만에 한정되지는 않았다. 노동조건들, 착취, 사회의 미래 등등 가능한 모든 사회문제들을 다루기 시작했다.

5월 14일에 토론은 많은 직장에서 계속 진행되었다. 모든 열광과 자신들의 강력함에 대한 느낌이 표면화된 폭력적인 시위들이 전날밤에 있은 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일을 손에 잡는 것은 어려웠다. 낭트에서 쉬드-아비아시옹(Sud-Aviation)의 노동자들이 자생적인 파업에 들어갔고 그 작업장을 점거하기로 결정했다. 특히 젊은 노동자들이 운동을 추진했다. 노동자계급이 다시 무대 위에 등장했다.

1960년대 학생운동의 의미

당연히 이 운동 전체의 특징은 특히 베트남전쟁 반대에 있었다. 그러나 하노이나 모스크바 정권과 연계된 스탈린주의 당들이 그 이전 1950년대 초 한국전쟁동안 있었던 반전운동에서처럼 운동의 주도권을 쥘 것으로 애초에 생각되었던 반면에,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이러한 당들은 사실상 어떤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했고, 아주 빈번히 그 운동에 전적으로 대립했다.[4] 이점이 1960년대 말 학생운동의 특징들 중의 하나였고, 이는 그러한 운동들이 그후 가지게 될 근본적인 의미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의미를 우리는 지금 제시하려 시도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당연히 학생들을 움직인 그 당시 테마들을 반드시 상기해야 한다.

1960년대 미국 학생반란의 테마들

미국의 베트남전에 반대한 저항이, 서방 세계 모든 나라들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널리 확산된 동인이었다면, 학생반란이 지구상의 가장 중요한 나라들에서 일어난 것이 확실히 우연은 전혀 아니다. 미국의 젊은 세대는 전쟁문제와 직접적으로 대면했는데, 왜냐하면 젊은이들이 차례로 징집되어 „자유세계"를 수호하기 위해서 전쟁터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수만명의 미국 젊은이들이 그들 정부의 정책을 위해 목숨을 잃었고, 수십만명이 부상당하고 불구가 되어 베트남에서 돌아왔으며, 수백만명은 그들이 그 나라에서 겪은 것에 의해 평생동안 후유증을 앓았다. 그들이 현지에서 경험한 공포를 제외하더라도, 많은 이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직면했다: 우리가 베트남에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가? 공식적인 설명에 따르자면 그들은 ‚민주주의', ‚자유 세계' 그리고 ‚문명'을 수호하기 위해서 그곳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현지에서 경험한 것은 공식적인 정당화와는 완전히 모순되었다: 그들이 소위 방어해야할 정권, 즉 사이공의 정부는 ‚민주적'이지도 ‚문명적'이지도 않았다. 그것은 군사독재로서 부정부패가 극에 달해 있었다. 현지에서 병사들은, 무장하지 않은 가난한 농민들, 여자들 그리고 아이들과 노인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살해해야만 하도록, 자신들이 마치 야만인처럼 행동해야만 되도록 요구되는 그때에, 자신들이 ‚문명'을 수호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현지의 병사들뿐만이 아니라 전체 미국 젊은이들의 점점 더 많은 수가 그 전쟁의 경악스러움에 진저리를 쳤다. 단지 젊은 남자들이 전쟁터에 보내질 것을 두려워하고 젊은 여자들이 자신들의 친구들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은 귀환하는 ‚참전군인들'로부터 또는 그냥 테레비젼을 통해서, 그곳을 지배하고 있는 야만을 점점 더 많이 알게 되었다.[5]  미국 정부가 증거로서 제시하는 ‚문명과 민주주의의 수호'라는  공식적인 말과 베트남에서 그것의 실제 행동사이의 엄청난 모순은, 미국-부르조아지의 권위와 전통적인 가치들에 반대한 반란을 초래한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였다.[6]  이러한 반란은 첫 번째 시기에 히피운동을 함께 결과시켰는데, 이것은 비폭력적이고 평화주의적 운동의 일종으로서 „플라워 파워(flower power)"(꽃의 힘)을 주장했다. 그 슬로건들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았다: „메이크 러브, 낫 워(make love, not war)"(사랑을 해, 전쟁을 하지 말고).학생들이 규모 버클리대학교에서, 즉 당시 히피들의 메카였던 샌프란시스코 근교에서 최초로 더 대규모로 운집한 것은 아마도 전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운집의 테마들과 특히 수단은 여전히 이러한 히피운동을 닮은 „점거(Sit-in)"였는데, 이는 대학들에서 정치적인 선동을 위한 „자유로운 발언(free speech)"(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기 위해서, 또한 특히 흑인들의 ‚민권'을 지지하고, 대학내에서 이뤄지는 모병캠페인을 탄핵하기 위한 비폭력적인 방법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다른 나라들, 특히 1968년 프랑스에서와 같이 버클리에서의 진압은 그 운동의 ‚과격화'의 중요한 한 요소였다. 1967년부터, 애비 호프만(Abbie Hoffman)과, 비폭력운동에 잠시 함께 했던 제리 루빈(Jerry Rubin)에 의해 국제청년당(Youth International Party)이 창립된 이후, 그 반란운동은 ‚자본주의'에 대항한 일종의 ‚혁명적인' 전망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운동의 새로운 ‚영웅들'은 더 이상 밥 딜런이나 조안 배스가 아니라, (루빈이 1964년 하바나에서 만났던) 체 게바라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 운동의 이데올로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뒤죽박죽이었다. 여기에는 (자유숭배, 특히 섹스의 자유나 마약소비의 자유와 같은) 아나키스트적인 면모들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쿠바와 알바니아가 모범으로서 찬양되는) 스탈린주의적인 면도 있었다. 행동들은 아나키스트들의 그것 - 조롱과 도발 - 에 흡사했다. 그렇게 호프만-루빈 공동팀의 초기의 극적 행동들 중의 하나는, 위조지폐 뭉치들을 뉴욕주식거래소에 배포하는 것이었는데, 그에 이어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 지폐들을 줍기 위해 사납게 몰려들었다. 1968년 여름 민주당 대회동안 그들은, 한편으로 경찰과의 무장된 충돌을 준비하는 동시에,  페가수스라는 이름의 돼지를 대통령후보로 제안했다.[7] 요약해서, 1960년대 미국에서 확산된 저항운동의 주요특징들을 말하자면, 그것은 베트남전에 반대했을 뿐만아니라 인종차별에도 반대했으며, 성별에 따른 불평등한 대우에 반대하고 미국의 전통적인 도덕과 가치들에 반대했다. 참여자들 대부분이 (마치 자신들이 반항하는 서민 자녀들인양 행동할 때) 확인했듯이, 이러한 운동은 결코 노동자계급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들의 ‚이론가'인 철학교수 헤르베르트 마르쿠제가, 노동자계급은 ‚흡수 통합'되어 버렸다고,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항한 혁명적 세력은 다른 사회계층들, 예를 들어 인종차별 희생자들인 흑인들이나 제 3세계의 농민들이나 반항하는 지식인들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확실히 결코 우연은 아니다.

... 그리고 다른 나라들에서

서양의 대부분의 다른 나라들에서 1960년대의 학생운동들은 미국에서와 흡사했다: 미국이 베트남에 관여하는 것의 비난, 권위에 대해, 특히 대학의 권위에 대한, 권위주의 일반에 대한, 전통적인 도덕에 대한, 특히 성도덕에 대한 반란. 이것이 바로, 권위주의의 상징이었던 스탈린주의 당들이, 비록 미국의 베트남 개입을 강력히 탄핵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란자들 사이에서 전혀 반향을 얻을 수 없었던 이유였다. 그런데 베트남에서 미국의 투쟁상대, 즉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것으로서 행동했던 군사 세력은 전적으로 소련블록에 의해 지원되었다. 소련의 명성이 1956년 헝가리 봉기의 진압으로 매우 크게 손상당한 것은 사실이고, 브레지네프의 낡은 기관원들이 어떤 원대한 꿈도 질식시킨 것은 사실이다. 1960년대의 반란자들은 호치민(오랜 기관원였지만 훨씬 더 모범적이었고 ‚영웅적인' 것처럼 보였던)의 포스터를 걸어놓길 더 좋아했고, 체게바라(마찬가지로 스탈린주의 당의 당원었지만 ‚이국적'으로 여겨졌다)나 안젤라 데이비스(미국의 스탈린주의 당의 당원이었지만 흑인인데다가 여성이라는 이중의 장점을 갖고 있었고 체게바라와 마찬가지로 ‚멋진' 외모의 소유자였다)의 낭만적인 사진을 걸어두길 가장 좋아했다.

베트남전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자유스러워' 보이는 이러한 요소는 마찬가지로 독일에도 나타났다. 운동의 가장 유명한 인물, 루디 두취케는 구DDR출신으로서, 그곳에서 그는 젊은 나이에 벌써 헝가리봉기의 진압에 항거했었다. 그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은 청년 ‚맑스'와 프랑크푸르트학파(마르쿠제가 속했던) 그리고 상황주의 인터네셔널(그가1962년에 그것의 베를린 지부를세웠던 바로 그 „전복적인 행동(Subversive Aktion)" 그룹의 기반이었던)이었다.[8]

1965년이래 독일 대학들에서 전개된 토론 과정 동안, „반권위주의적인 진정한 맑스주의"에 대한 모색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당시 평의회주의운동의 많은 텍스트들이 다시 진열되었다.

프랑스에서 1968년 전개된 학생운동의 테마들과 요구들도 근본적으로는 동일했다. 그러한 전개 과정에서, 베트남전에 반대한 저항은 상황주의적이거나 아나키스트적으로 영감을 받은 (또는 초현실주의적이기까지 한) 그리고 더 빈번하게 담벼락 위에서 읽을 수 있었던(„벽도 할말을 갖고 있다")  일련의 슬로건들에 의해 뒷자리로 물러나게 되었다. 아나키스트적인 실행은 특히 다음과 같은 슬로건들에서 뚜렷했다:

파괴의 열정은 일종의 창조적인 희열이다"(바쿠닌)   

금지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자유는 모든 범죄들을 포함하는 범죄이다"

선거는 어리석은 자들을 위한 함정이다"

불손하고 파렴치하다는 것은 새로운 혁명 무기이다"

이것들은 „성혁명(sexual revolution)"을 호소하는 요구들로써 보완되었다:

아래 위로 포개 누워서 서로 사랑하라!"

너희들의 바지 지프를 여는 그만큼 자주 너희들의 두뇌도 열어라 "

나는 섹스를 하면 할수록 그만큼 혁명을 만들고 싶다. 혁명을 만들면 만들 수록 그만 섹스를 하고 싶다."

상황주의(Situationism)의 영향은 다음과 같이 반영되었다:

소비사회 타도!"

볼거리의 상품사회 타도!"

소외를 타도하자!"

절대로 일하지 말라!"

각자의 소망을 현실로 여기자, 왜냐하면 나는 나의 소망들의 현실성을 믿으니까 "

우리는 굶어죽지않을 안전함이 지루해서 죽을 위험과 맞바꿔지는 그런 세상은 원하지 않는다."

지루함은 반혁명적이다."

우리는 정체됨이 없이 살고 무제한으로 즐기고 싶다"

 „현실적이 되자, 비현실적인 것을 요구하자!"

그 밖에 세대 문제(미국과 독일에서 크게 다가왔던)도 상이한 슬로건들(종종 매우 유해한 방식으로)에 나타났다:

달려라 동지, 낡은 세계가 뒤에 있다!"

젊은 이들은 성교를 하고, 늙은 이들은 음란한 몸짓을 한다."

바리케이트가 세워졌던 68년 5월 프랑스에서는 다음과 같은 슬로건들을 들을 수 있었다:

바리케이트는 거리들을 차단하지만 길을 연다."

모든 생각의 결론은, CRS[내전경찰], 아가리 안에 포석(paving stone) 쳐넣는 것이다. " 

포석을 겉어내라, 아래에 해변이 놓여 있다."  

이시기에 발견될 수 있는 가장 큰 혼란은, 다음의 두가지 슬로건들에서 표현된다:

혁명적인 사고란 없다. 오직 혁명적인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할말이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1960년대 학생운동의 계급적 본질

이러한 슬로건들이 다른 나라들에서 유포된 대부분의 슬로건들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1960년대의 학생운동은 비록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나 스페인 또는 세네갈과 같은) 여러 나라들에서 노동자투쟁으로의 가교를 만드려는 의지가 있었을 지라도, 노동자계급의 본질을 반영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밖에 이러한 접근방식은, 잘못 소화된 맑스주의 고전 텍스트들의 영웅이었던 육체노동자(blue-collar worker)로서의 노동자에 대한 어느 정도의 매혹과 뒤섞인, 노동자계급에 대한 오만을 반영했다.  

그 핵심에 있어서 1960년대 학생운동은 쁘띠부르조아적인 성격을 띠었다. 아나키스트적인 표현형 이외에 가장 분명한 측면들 중의 하나는 „삶을 즉시 변혁하려는" 의지였다. 조급함과 그러한 „모든 것을 당장에"는 역사에서 어떤 미래도 없는 쁘띠부르조아와 같은 사회계층의 특징들이다.

이 운동 지도부의 ‚혁명적인' 과격주의 그리고 운동의 몇몇 일부들에 의한 폭력미화는 마찬가지로 그것의 쁘띠부르조아적인 본질을 반영한다. 1968년의 학생들의 ‚혁명적' 관심사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옳았지만, 그것들은 제3-세계-전망(게바라주의와 마오주의)으로부터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 하나에 의해, 그리고 파시즘에 의해 강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 운동은, 혁명을 초래하는 노동자계급운동의 실제적인 발전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채, 혁명에 관한 낭만적인 관점을 갖고 있었다. 스스로를 ‚혁명적이라고' 여겼던 프랑스의 학생들은68년 5월 운동이 이미 혁명이었다고 믿었고, 날마다 세워졌던 바리케이트들은 1848년 그리고 1871년 코뮨의 바리케이트의 유산으로서 묘사되었다.

1960년대말의 학생운동의 특징들 중 하나는, „세대간의 갈등", 즉 새로운 세대와 그들에 의해 여러가지로 비난받는 부모세대들 사이에 존재한 매우 큰 간극이었다. 특히 부모세대들은, 제 1차 세계대전에 의해 초래된 가난과 굶주림을 극복하기 위해 힘들게 일해야 했다는 이유로, 오로지 물질적인 번영에만 신경을 썼다고 비난당했다. 그래서 „소비사회"에 관한 환상들과 „절대로 일하지 말라!"와 같은 슬로건들이 그렇게 성공을 거두었다. 반혁명을 철저히 경험한 세대의 자녀들로서 1960년대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부모들이 자본주의의 요구들에 무릎을 꿇고 순응했다고 비난했다. 반면 많은 부모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것보다는 더 나은 경제적 형편을 자녀들에게 가능하게 하려고 자신들이 치를 수 밖에 없었던 그 희생에 대해  자녀들이 경멸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이기도 어려워했다.

그렇지만 1960년대 학생반란들에게는 진정한 경제적인 결정요인이 있었다. 오늘의 상황과 비교할 때, 그당시에는 대학졸업 후 실업으로 인한 또는 불안정한 노동조건들으로 인한 더 큰 위협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당시 젊은 대학생들의 주요한 근심은, 자신들은 그 이전 세대의 대학졸업자들과 같은 동일한 사회적인 지위상승을 더 이상 이룰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1968년 세대는, 그 당시의 사회학자들에 의해 상세하게 연구된, „사무관리직 인력들의 프롤레타리아화" 현상에 어느 정도 혹독하게 직면한 최초의 세대였다. 이현상은, 학생수가 현저히 늘어나자 마자(그래서 예를 들어 독일의 학생수는 1964년에서 1974년 사이에 330,000명에서 1백 10만명으로 증가됨), 위기가 공공연하게 드러나기 그 몇년전 부터 이미 확산되었었다. 이러한 증가는 경제의 필요에 부응한 것이긴 했지만 또한 그 부모들이자신들의 경우보다는 더 나은 경제적 사회적 처지를 자녀들에게 부여하려는 의지와 능력에도 부합했다.

특히 학생수의 대규모 증가는 불편의 증대를 초래했었다. 이는, 대학들의 구조들과 관행들이 단지 엘리트들만이 대학을 다닐 수 있었고 강한 권위주의적 구조들이 지배했던 시대의 소산으로서 그대로 존속했기 때문이었다.

1964년에 시작된 학생운동이 자본주의의 „번영" 시대에 전개되었던 반면, 경제적 상황이 벌써 매우 심각하게 악화되었던 - 그래서 학생들의 불편도 더 커졌던 -

 1967년의 상황은 이미 달라 보였다. 이것이 바로, 그 운동이 1968년에 그 절정을 경험하게 되는 이유들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왜 1968년 5월에 노동자계급이 무대 위에 등장하여 운동을 이끌어나가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이점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번 글에서 논할 것이다.   


[1]  David Caute, 1968 dans le monde, Paris, Laffont, 1988, 번역원본: Sixty-Eight: The Year of the Barricades, London, Hamilton, 1988. 미국에서도 출간됨: „The Year of the Barricades - A Journey through 1968", New Yorker, Harper & Row, 1988

[2]   Mark Kurlansky, 1968: l'année qui ébranla le monde, Paris, Press De La Cite, 2005, 번역원본 - 1968 :The Year That Rocked the World. New York: Ballantine Books, 2004.

[3]  우리의 몇몇 지역 출판물이 각 나라들에서의 사건들에 대한 글을 이미 실었거나 실을 예정이다.

[4]  학생운동은 1968년에 스탈린주의 체제도 엄습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그것은 스탈린주의 당의 일부에 의해 선전된 „프라하의 봄"의 일부였다. 체제를 문제삼은 하나의 운동으로서 간주될 수는 없다. 폴란드에서 그 운동은 다른 성격을 띠었다. 3월 8일 러시아에 적대적으로 간주된 공연 하나가 금지된 것에 항의하는 학생시위가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다. 3월에 긴장이 더 증폭되었다. 점점 더 많은 대학교들이 학생들에 의해 점거되었고, 점점 더 많은 시위가 있었다. 이러한 시위들은 „파르티잔파"의 지도자, 내무부장관 모자르장군의 지휘아래 잔인하게 진압당했고, 동시에 당내에서는 유태인들이 ‚시오니즘비난'을 이유로 쫒겨났다.

[5]  베트남전 동안 미국언론은 군사당국에 굴종하지 않았다. 이러한 ‚실수'를 미국정부는 1991년과 2003년의 이라크전 동안에는 더이상 저지르지 않았다.

[6] 그러한 현상은 제 2차 세계대전 후에는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병사들은, 특히 1944년 노르망디에 상륙했던 이들은 마찬가지로 지옥을 경험했지만, 거의 모든 병사들과 국민들 모두는 나치-정권의 야만성을 보고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7]   20세기 초에 프랑스 아나키스트들은 의회선거에 후보로 당나귀를 지명했다. 

[8]   상황주의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종합적인 서술과 관련해서는 우리의 글: „ 드보르 - 상황주의 인터네셔널의 두번째 죽음", revue internationale, 80호 참조할 것.

오늘의 대대적 파업, 노동조합 그리고 분업

 

Massenstreik, Gewerkschaften und Arbeitsteilung heute

- 이글은 사회주의노동자 제 8호에 사노신의 간단한 편집서문과 함께 실려있다. 참고로, 그 서문에서 이 토론모임이 ICC 산하 인듯한 오해를 불러일어킬 수 있는 소개가 있는데, 이 토론 모임은 ICC가 구성원의 일부로서 참여하고 개입하지만 그것과는 독립적임을 밝힌다.

 

2007년 여름 라인란트 토론모임에서 대대적 파업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이 토론의 기본자료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1906년에 쓴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Massenstreik, Partei und Gewerkschaften]이었다. 그후 토론잡지 [아우프헤벤Aufheben]의 편집진으로부터 대대적 파업에 관한 글을 청탁받고 우리는 여러가지 이유로 매우 기뻤다. 먼저, 우리는 이 잡지가 독일어권에서, 여러가지 견해들이 표현될 수 있는, 정치적으로 의식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개방적이고 풍부한 의견교환의 장이라는 것을 높이 사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대대적파업의 문제가 대단히 현재성을 띤다고 여기며 이에 대해 가능한 폭넓고 열린 논쟁을 희망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모임 홈페이지를 위해 우리 모임에서 이뤄진 토론에 대한 요약문을 작성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모임의 한 구성원에게 우리들의 토론을 기초로 아우프헤벤을 위한 글을 작성하도록 위임하기로 결정했다.

1905, 사회적 지진

로자 룩셈부르크가 1906년 그녀의 팜플렛을 쓸 당시, 그녀에게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나라에서 막 일어났던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 그 규모에 있어서 엄청난 어떤 것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특히 1905년 러시아에서 홍수를 이룬 대대적파업들의 물결 전체를 분석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 물결은 계급투쟁의 전대미문의 폭발이었고,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대해 그때까지 상상할 수 있던 모든 것을 깨고 나온 것이었다. 서로 다른 직업군들 사이의 구별이 무너졌다. 정치투쟁과 경제투쟁 사이의 구별이 무너졌다. 즉각적인 요구들과 혁명투쟁사이의 구분도 낡은 것이었다. 갑자기, 전자본주의적 약탈을 제거하는 것은 더 이상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과 나란히 해결할 수 있는 과제의 하나로서가 아니라 사회주의혁명의 자체의 과제로 보였다. 결국 1905년의 투쟁들은 완전히 새로운 조직원칙을 낳았다. 투쟁을 조직하고 대중을 동원하는 것은 더 이상 노동조합의 임무도 그리고 노동자정당의 임무도 아니었다. 오히려 노동자대중들이 이 임무를 스스로 넘겨받았다. 소비에트가 , 독일어로는 노동자평의회가 탄생했다.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오직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일일 수 밖에 없다는 맑스의 표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분명해졌다. 그것은 짜르제국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질서를 뒤흔든 역사적인 지진이었다. 또한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주의혁명을 현재의 사안으로 세움으로써 그리고 수십년간 통용되던 전제들의 기반을 허물어 버림으로써 맑스주의 노동자운동을 뒤흔들었다.

대대적 파업 - 지금 더이상 논할 필요도 없는가?

우리가 현재 로자 룩셈부르크의 팜플렛을 토론할 때, 당연히 우리에게는 역사에 대해 그리고 역사로부터 어떤 것을 배우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백년 전 로자에게, 트로츠키에게 또는 레닌이게 있어서 만큼 우리들에게도 오늘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대적 파업의 문제가 우리의 현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언뜻 보기엔 참으로 별 상관이 없는 듯하다. 1905년의 그것과 같은 지진은 아무리 둘러봐도 눈에 띄지 않는다. 임노동자들은 전체 전선에서 지독한 방어전에 내몰려져 있다. 인원감축, 대량해고, 폐업 그리고 생산의 이전 등이 피해자들이 그에 대항해 많이 손써 볼 수도 없이 결정되고 시행된다. 실업자들은 체계적으로 압박당한다. 그들은 절대적인 빈곤에 뿐만 아니라 개별화에 내몰려서, 자신이 국가의 공격에 대해 의지할 데 없이 내던져진 것처럼 대부분 느낀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를 방어하기 위해 변질된, 한 때의 노동자조직이었던 노동조합은 1905년에 처음으로 러시아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대중들에 의한 자체조직화에 의해 범람되었다. 그들은 도처에서 상황의 주인이 아닌가? 지금 우리는, 어떻게 DGB와 같은 거대한 노동조합중앙협회들을 조합원들이 무더기로 떠나버리는지를 경험하고 있긴 하다. 그들이 실업자가 되어서 결국 노동조합귀속성의 의미를 더 이상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든 또는 그들이 이러한 노동조합들에 대해 실제로 어떤 신뢰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든. 그러나 우리는, 그 대신에 의사들, 항공기조종사들 또는 기차기관사들의 경우와 같이 공공연한 탈연대와 제각각의 투쟁을 선동하는 작은 부문노동조합들이 어떻게 세를 확대해 가는지를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또한, (철도노동자들의 파업과 같이) 사실상 국민경제에 해를 끼칠 수 있을 파업을 국가는 당장에 그냥 법원의 판결로 금지할 수 있지 않은가?

미래의 대대적 파업이 현재에 준비되는가?

지난 몇년간의 작은 충돌들 - 독일에서의 메르세데스, 오펠, AEG, 텔레콤의 경우 또는 뉴욕과 런던 지하철의 경우-을 1905년 러시아에서의 거대하고 영웅적인 파업들과 비교한다면, 현재는 사실 참 암담해 보인다. 그러나 이미 여기에서도 로자 룩셈부르크의 팜플렛으로부터 배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현재를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법일 것이다. 오늘의 세계를 1905년의 대대적 파업의 절정점과 비교한다면, 대대적 파업은 하나의 과정으로서 수년에 걸쳐 준비된다는 점을 간과하게 될 수 있다. 로자에 따르면 대대적 파업은 소위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는 그런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자체의 역사와 그 이전의 역사를 갖는 여러 해에 걸친 성장을 거친다. 대대적 파업의 시작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것들은 종종 나중에 가서야 그런 것으로 인식된다. 러시아에서 그것은 1896에서 1906까지 10년에 걸친 한 시기였다. 그것은 성페터스부르크에서 „순전히 경제적인 부분적 임금투쟁"으로서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4만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한 총파업이되었다. „지금은 사건이, 혁명의 엄청난 대대적 파업들에 비해서 사소해 보일지 모른다. 당시 러시아의 얼음같이 경직된 정치적 분위기에서 총파업이란 전례없는 어떤 것이었고, 그것 자체가 일종의 축소판의 온전한 혁명 이었다 (룩셈부르크저작집(독어판), 제 2권, 104쪽, 풀무162,163쪽 참조 :이것과 이후 모든 인용문은 역자가 직접 번역했고 쪽수는독어판, 로자 룩셈부르크저작집(Rosa Luxemberg Gesammelte Werke)의 쪽수임, 참조할 풀무질번역판의 쪽수는 풀무표시가 첨가됨-역주 )" 아마 우리는 언젠가는, 회고하면서 2004년 보쿰의 오펠에서의 6일동안 지속된 자생적 공장점거파업의 예가 일종의 „축소판의 혁명"이었음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공산주의의 종말을 공개적으로 승인하는 겉모습이 그리고 계급투쟁이 추월당한 것 같던 겉모습이 삐걱거리기 시작했을때, 그 파업이1989년이래 시기의 „얼음같이 경직된 정치적 분위기" 의 종결의 시작을 알렸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종류의 작은 충돌들에 대해 로자 룩셈부르크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것의 발단은 사소한 의미를 지닌다. 그 발생은 초보적이다. 그것들은 단지 겉으로 보기에 순전히 경제적이다. 그것들이 대부분 겪게되는 패배는 지속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왜 이러한 작은 전투들으로부터 막강하고 전반적인 운동이 되는가? 왜냐하면 그것은, 계급 전체에 쌓이는 어떤 것의 표면을 때리는 가시적이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부르조아계급이 자본을 축적하는 동안, 노동자계급은 궁핍과 비참을, 피폐와 수모를, 소외와 비인간화를, 증오와 분노를 축적한다. 노동자들은 대대적파업에 돌입하면 그제야, 로자가 썼듯이,그들의 고통이 얼마나 참을 수 없어졌는가를 포괄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의식적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고통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로 인한 고통이자 임금노동체제로 인한 고통 이다. 고통 그 자체보다는 그 고통에 대한 인식이, 그 원인의 인식이 노동자투쟁을 더 높은 단계로 이끄는 것이다. 대대적 투쟁의 세기에는, 임금노예제를 본래 특징짓는 모든 것들이 피부로 느껴지게 될 것이고 쟁점화될 것이다. 정체되거나 삭감되는 임금, 노동시간의 연장이나 강화 또는 두가지 모두, 직장지도부의 교만한 태도와 상사의 잔인성, 문화결핍 또는 그러한 문화에의 노동자들의 접근차단, 직장밖의 주거- 및 생활조건, 국가의 억압과 사법체계의 소란스런 불공평, 부르조아민주주의의 부패와 와해, 특히 임노동의 전반적이고 증대되는 불안정성 - 이 모든 것과 더 많은 것들이 쌓여간다. 이 모든 것들이 점점 더 피부에 와닿게 되고 의식된다. 불만이 분노로 바뀌는 시점까지, 어떤 것을 일으키기에 한점 불꽃이면 충분할 시점까지, 계급의 일부분에 대한 -개별적인 노동자 한 명에 대한 -어떤 공격이라도 계급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질 그 시점까지. 이렇게 집단적으로 저장된 경험은 노동자대중이 때때로 몽유병자같은 확신으로-행동하게 만든다 - 이것이 의식의 일부인 직관이다. 결국, 그러한 운동은 자본주의의 가장 깊은 내부의 경향 안에 강하게 뿌리박음으로써 그 자체의 힘을 얻는다.1905년의 사건은 준비된 것이었고, 그것을 위한 준비투쟁들은 무역- 및 산업위기에 의해, 실업에 의해 그리고 제국주의 전쟁에 의해 초래되었다.

현재의 잠재력의 인식

룩셈부르크의 팜플렛이 대대적 파업의 문제를 100여년전에 고찰했듯이, 그렇게 우리가 현재 그것을 고찰하자면, 우리는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와 현재가 얼마나 유사한지를 확인하게 될 뿐만이 아니다. 심지어는 오늘 쌓이고 있는 사회적인 시한폭탄은 1905년에 축적되었던 그것을 훨씬 능가한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위기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깊고, 실업의 위험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확산되어 있다. „사회적 국가"가 허물어지는 시기인 지금, 실업은 점점 더 그것 본래의 공포를 되찾고 있다. 또한 제국주의전쟁- 당시는 극동에서의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충돌, 지금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충돌-은 체제의 본질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게 만든다. 게다가 오늘의 전쟁은 현존하는 무기체계와 테러리즘으로 볼 때 점점 더 직접적으로 민간인들에게도 피해를 주고 있다. 또한 오늘은 자본주의에 의해 유발된 재앙과 같은 환경문제로 인한 멸망위협 등과 같은 새로운 위협들이 의식된다. 이미 그 당시에도 특수하게 러시아 적이 아니라 국제적이었던 이러한 과정이 오늘은 훨씬 더 분명하게 하나의 전세계적인 전개라는 점이 또한 부가된다.

독일의 예는 이러한 전개를 잘 보여준다. 한 때 전후독일은 자본주의 복지수준의 그리고 사회적 평화의 성채었다. 이제 한 때의 모범국가였던 이 나라를 노동자투쟁이 엄습하고 있다. 이 투쟁은 아직은 점점이 고립되고 또 노동조합에 의해 통제당한 채 머물러 있긴 하지만 계급의 더욱 더 많은 부분들을 포괄하면서 자본주의의 비참함의 점점 더 많은 측면들을 쟁점화하고 있다. 역시 여기에서도 우리는 100년전의 러시아와 유사점들을 보게 된다. 그 당시 상업종업원들이, 은행의, 사무실의 그리고 관청의 직원들이, 음식점계의 종사자들이 그리고 부유층의 집안고용인들이 심지어는 경찰의 최하층이 투쟁속에서 어떤 역할을 행했는지를 보는 것은 놀랍다. 현재는 병원근무의사들이나 기관사들의 파업을 통해서야 , 지금까지 특권을 가진 것으로 통해왔던 이런 직업들이 얼마나 한심한 급료를 받고 있는지가 일반인들에게 알려진다. 이 직업군에 속하는 이들도 자신들이 „노동하는 빈곤층(working poor)"에 속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스스로도 놀란다.

2007년 여름 독일에서는 , 실업자와 연금생활자들이 증가된 세금부담과 식료품물가상승 그리고 생활비삭감으로 인해 일년전에 비해 15% 적게 받은 점이 심지어는 공식적인 통계 속에서도 인정될 수 밖에 없었다. 그 대신에 작센주의 주립은행은 즉각 170억유로를 지원받았는데, 이는 그 은행이 미국의 부동산시장에 잘못 투자했기 때문이었다. 철도노동자의 파업은 , 파업이 즉각적인 행동이긴 하지만 (판결근거에 따르면) 국민경제에 해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이유로.법원판결을 통해 금지되었다. 실업율감소와 경제호황에 대한 모든 승리의 함성에도 불구하고 해고의 물결은 계속되고 있고, 노동자들에 대한 협박들(경영합의라 불리는)은 증가한다. 또한 경제전문가들은 피닉스-TV의 심야 토론프로그램에서, 앞으로 몇년간 실질임금이 부가적으로 30% 더 떨어지게 될 것이란 점을 어떻게하면 노동자들에게 무리없이 전달할 지를 놓고 씨름한다.

게다가 68년세대인 부모보다는 패배를 덜 당한 새로운 세대가 사회적 투쟁의 장면에 등장하고 있다. 이 대세는 1년전 프랑스에서 정부의 고용불안정화법에 대항한 학교와 대학교에서의 대대적 투쟁들에서 볼 수 있었다. 또한 로스톡과 하일리겐담에서도 이 체제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고 대안을 찾는 정치적으로 의식화된 젊은 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로자 룩셈부르크의 눈으로 주시하자면, 우리가 다시 대대적 파업의 시기에 접어들었다는 가정을 세울 수 밖에 없다. 대대적 파업으로의 성숙시기는 아마도 부르조아계급의 노련함과, 민주주의와 노동조합이라는 국가의 통제기계의 효과성 그리고 대대적인 실업의 섬뜩한 영향때문에 훨씬 더 오래 걸릴 지 모르지만 전개의 방향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노동조합의 역할

참으로 노동조합은 오늘날 계급투쟁의 전개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제어요소이다. 1905년 러시아에서 그것은 달랐다. 그 당시는 대대적 파업이 노동조합의 전반적인 창립을 위한 최초의 동력을 창조해냈다. 그러나 이 노동조합들은 처음부터, 본래 투쟁의 조직자들, 즉 노동자평의회들의 그늘 안에 있었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1905년은, 계급이 단지 공동으로, 투쟁의 확대를 통해서만 어떤 것을 획득할 수 있는 그러한 새로운 시기에로의 진입을 알렸다. 노동조합적인 투쟁방법은 그래서 역사적으로 낡은 것이 되었다. „혁명적 시기의 뇌우의 기운 속에서만 노동과 자본 사이의 소위 어떤 부분적이고 작은 충돌도 하나의 전면적인 폭발로 자라날 있다. 독일에는 매년 그리고 매일 노동자들과 기업가들 사이에 치열하고 잔인한 충돌들이 발생하지만 투쟁은 관련된 개별 분야나 개별 도시, 공장의 장벽을 뛰어넘어 솟아오르지 않는다 " (129쪽, 풀무195쪽)

독일에서 대대적 파업의 전개는 그 당시에도 이미 러시아에서보다 휠씬 어려웠는데, 그곳에는 막강하고 종종 사회민주주의적이기도한 노동조합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곳의 상황은 그래서 모든 오랜된 산업국가들에서의 현재의 상황과 더 유사했다. 그래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1905년에 관한 팜플렛을 쓰면서 독일의 상황을 러시아의 상황 만큼이나 주시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대대적 파업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에 대하여 썼던 것이다.

제 1차 세계대전의 말에 있었던 혁명의 실패에 대한 반작용으로 평의회공산주의라는 정치적 경향이 출현했다. 그것의 특징은 노동자평의회를 선전하는데(이런 선동은 다른 경향들도 했다) 있는것이 아니라 계급당의 기구들을 모든 악의 근원이라며 거부하는데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 1차 세계대전 이전 시기에, 사회민주주의 노동자운동 내부에서 노동조합이 당보다 훨씬 더 기회주의적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당 내부의, 심지어 당의 의회분파 내부의 많은 이들이 전쟁에 반대했었다. SPD쪽에서는 3년동안 전쟁찬성파와 전쟁반대파사이의 투쟁이 벌어지다가 결국 전쟁찬성파가 승리하고 그 반대파는 당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그와는 달리 노동조합은 전쟁발발 이전에 이미, 향토전선에의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기로 정부와 협정을 맺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노동조합은 전쟁경제와 공장에서의 전시법의 수행을 더 많이 넘겨받았다. 뿐만 아니라 소위 노동조합측은 자본이 당을 정복할 때 추진력이었고, 독일에서 혁명의 실패에 있어서 그리고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중요한 두뇌들의 살해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독일에서 노동조합은 본래 사회민주당의 창조물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당의 정치적인 지도 아래 놓여 있었다. 제 1차 세계대전 이전의 호황기에- 베른슈타인이 당의 맑스주의적 기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을 때- 그 당시 노동자운동에서 기회주의의 발전은 특히 노동조합이 „후견인"으로서의 당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여 정치적으로 „중립성"의 태도를 가지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노력은 러시아의 혁명적 사건들에 의해 새로운 양분을 공급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녀의 글에서 당이 이제 노동조합에 대한 지도적인 위치를 되찾을 것을 요구했다. 1906년 SPD의 만하임 전당대회에서 카우츠키와 32명의 동지들은 -룩셈부르크의 혁명적인 채찍질에 의해 또 러시아로부터 전해지는 기운에 고무되어- 당수뇌의 결정에 대한 한 보충안에서, 모든 사회민주주의자는 전당대회의 결정들을 따라야하고 SPD는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최고이자 가장 포괄적인 형식임을 주장했다. 그런데 그 제안에서 결정적인 이 문구를 카우츠키는 노동조합측의 대표자들이 이빨을 드러내자 철회해버렸다. 카우츠키의 중심주의의 본질은, 당내의 통일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당과 노동조합 사이의 통일을 위해서 기회주의에 굴복하고 이러면서 당의 맑스주의적 이론적 기초를 내부로부터 스스로 파괴한 것에 있다.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통일

로자 룩셈부르크는 좌파의 이러한 요구에 대해 러시아에서의 투쟁 결과들을 그 근거로 들었다. 이 투쟁들은, 그녀의 논거에 따르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사이의 오랜 구분을 낡은 것이 되어버렸음을 증명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사회민주주의적 대중정당들에게 있어서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들에 있어서도 단호한 귀결을 갖는다고 한다. 우리가 여기서 좀더 자세히 인용하자면: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사이의 구분은 그리고 두가지의 독립은 의회주의시대에 역사적으로 생겨난 산물이긴 하지만 인위적인 것에 불과하다. 한편으로 여기서, 부르조아사회의 평화롭고 정상적인' 시기에 경제투쟁은 분산되고 기업, 산업분야에서의 여러 개별적인 투쟁으로 해체된다. 다른 한편으로 정치투쟁은 대중 자신들에 의해 직접적인 행동으로 수행되지 않고 대신에 부르조아국가의 형식들에 알맞게 입법적인 대리자들에 대한 압력을 통해서 이뤄진다. 혁명 투쟁의 시기가 시작되자마자 , 대중이 투쟁의 장에 출현하자마자, 경제투쟁의 분산뿐만 아니라 정치투쟁의 간접적인 의회주의적인 형식도 사라지게 된다. 혁명의 대대적 행동 속에서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은 하나이며, 분리되고 전적으로 독립적인 두개의 형태로서의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 사이의 인위적인 경계도 사라질 것이다. (...) 하나는 경제투쟁 하나는 정치투쟁이라는, 노동자계급의 두가지 상이한 계급투쟁들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직 하나의 투쟁만이 있다. 그것은 부르조아사회 내부에서 자본주의의 착취를 제한하는 것을 그리고 부르조아사회와 착취의 폐지를 동시에 겨냥한 투쟁이다. (...) 노동조합의 투쟁은 현재의 이해를, 사회민주당의 투쟁은 노동자운동의 미래의 이해를 포괄한다. (...) 노동조합들은 그룹들의 이해를 그리고 노동자운동 발전의 단계를 대표한다. 사회민주당은 노동자계급을 그리고 그들의 해방이라는 이해 전체를 대표한다."(155, 156쪽, 풀무228, 229쪽)

대대적 파업은, 계급정당이나 노동조합 중 어떤 것도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는 자들이 스스로를 투쟁 중에 조직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당은 자신의 가장 근원적인 과제에, 즉 „정치적인" 지도에, 계급의식의 옹호와 확산과 한층 더한 발전에 집중해야 한다. 노동조합의 역할은 이와는 반대로 점점 더 축소되는데, 이는 파업기금을 통한 파업준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 노동조합들의 대대적 파업에 대한 공공연한 적대는 그 당시에도 있었다. 그것들이 노동자투쟁에 쓸모 없어질 수 록 그 만큼 더 계급의 적의 진영에서 그들의 안전을 찾는다. 그곳에서 그들은 계급투쟁에 대항한 장해물로 잘 활용될 수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06년에 소비에트의 완전한 의의를 파악하지 못했듯이 노동조합의 이러한 발전의 종결점을 아직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참 대단하게도 그녀는 이미 매우 광범위하고 깊이 있게 노동조합투쟁의 한계를 파악해냈다. 그녀는, 체제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소위 평화적으로 팽창하는 시기에 마저도 (노동조합운동의 고향인 영국에서 마저도) 노동계급의 총체는 결코 노동조합적으로 포착되지 않았음을 제시했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많은 주요부문들 자체를 포함하는, 계급의 특히 억눌린 부분들, 즉„서로 뒤엉켜진 노예 무리들(die zusammengeknaeulte Masse der Heloten)", 이들에서는 노동조합적인 조직화가 전혀 접근불가능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여기에는 그당시 독일제국에서는 광부들, 직조공들, 철도노동자들과 우편노동자들 그리고 농촌노동자들이 포함되었다. 로자는 조직화되지 않은 대중과 그들의 정치적인 성숙도를 과소평가하는 것에 대해 호통을 쳤다. 심지어 그녀는 다가올 혁명투쟁에서 이러한 부문들이 선두적인 역할을 할 것임을 예언했다 - 이 예언은 독일혁명에서 정확히 명중했다. 로자에 따르면, 대대적 파업은 계급 전체가 포함되지 않는 한 좌절로 끝나게 된다. 하지만 노동자 대중의 이러한 포괄은, 투쟁 속에서의 그들의 결집은 결코 노동조합적인 방법으로는 도달될 수 없다. 바로 이점에 소비에트의 비밀이 놓여있다, 즉 소비에트는 상이한 노동조합들의 구성원들을, „조직된 자들"과 „조직되진 않은 자들"을, 직장인들과 실업자들을 결합시킨 것이다.

왜 이 모든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왜냐하면, 노동조합이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계급투쟁의 이해를 위해 활용되도록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여전히 널리 확산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노동조합투쟁의 표현이라 환영되는, 독일에서의 부문노동조합의 재탄생은 실은 오래동안 존재해온 그리고 반동이 되어버린 노동조합적인 편협성이 표현된 것에 불과하다. 이를 로자는 백년전에 이미 비난했었다:

노동조합 지도자로서의 업무의 전문화 그리고 평화로운 시기에 분산된 경제투쟁들과 관련하여 당연히 좁을 밖에 없는 시야는 노동조합관료들을 생각의 편협성과 관료주의로 이끈다."(163쪽, 풀무237쪽)

다수의 동지들은 주로 규율' 미덕, 수동적인 복종의 미덕을 의무로 가지는 판단력이 없는 대중으로 폄하된다. 사회민주당과는 반대로 (...) 노동조합에서는 종속된 대중에 대한 상관이라는 관계가 정도에 있어서 휠씬 심각하다 "(165쪽, 독일어판 초안에만 있는 부분임-역주)

이러한 편협성이 혁명가들을 향한 순전한 살인욕으로 바뀔 것임을 비록 로자 룩셈부르크로서는 그 당시 알 수 없었음에도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옳은지!

대대적 파업과 분업

노동조합운동은 노동자운동의 발전에서 일시적인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전복이, 계급사회의 극복이 역사의 현안이 된 시기에 노동조합은 계급투쟁의 족쇄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노동자계급 자체 내부의 분업의 특정 단계를 체화하고 영구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업 자체는 그것이 역사적으로 발전한 것과 같이, 그것을 초래한 계급사회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투쟁은 물질적 비참함에 대항한 투쟁 그 이상이다. 이는 분업 자체를 그 주요한 희생자들인 임금노예들의 주도로 폐지하는 것이다. 대대적 파업의 비밀은 프롤레타리아가 다시 전인적인 인간으로 되려는 노력인 것이다. 대대적 파업에서는 직업, 산업부분, 국가 등의 구분들이 없어진다. 경쟁을 부추기는 -또 사고와 감정사이에서의- 이러한 분리들이 의문시 될 것이다. 그렇게 로자는 러시아에서 투쟁하는 이들이 어떻게 웃고 노래했는지를 묘사하며 그녀의 기쁨을 표현했다. 그들은 서로 얼싸안았고, 밤이 되어도 각자 자기 집으로 들어가서 개별화될 필요가 없도록 거리에 남아있었다.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깊은 집단적인 이상주의가 준비되었다. „그러나 혁명시기의 폭풍속에서 바로 노동자는 (노동조합의) 도움을 청하는 신중한 가장에서혁명의 낭만주의자' 변하고, 그에게 있어서 물질적인 행복은 말할 것도 없고 가장 최고의 재산 , 자신의 목숨 마저도 투쟁의 이상에 비해서는 하찮게 보인다."(133쪽, 풀무199쪽)

대대적 파업의 결과는 특히 „노동자계급의 ,, 생활수준의 전반적인 상승,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지적인 수준의 전반적인 상승"이다.(114쪽, 풀무175쪽) 이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로자 룩셈부르크는 마찬가지로 분명히 했다: „실제로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의 전반적인 상승만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행복의 지속적인 단계로서의 물질적인 생활수준은 혁명속에서 설자리가 없다. (...) 혁명의 상승하고 하강하는 이러한 날카로운 물결속에서도 존속하기에 가장 소중한 것은 정신적인 결정체(강조는 로자 룩셈부르크에 의함-역주)이다, 노동자계급의 도약적인 지적 문화적 성장이다. 이것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에서의 계속적 전진을 확고하게 담보한다."(117쪽, 풀무179쪽)

2007년 10월. 토론모임 라인란트( de.geocities.com/zirkelrunde )

 

한국의 „촛불시위“에 대하여

한국의 촛불시위에 대하여

ICC에 의한 서문

한국에서 새로이 선출된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쇠고기 수입(몇년전 광우병의 공포때문에 금지되었던)의 허용을 결정한 것에 항의하는 최근의 촛불시위6월에 거대한 규모에 이르러 서울에서만도 백만명의 사람들이 시위에 참가했다. 대중의 건강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실제적이든 간에 분명히 이 시위들에는 그 이상의 더 많은 것이 있다. 노동자들의 생활 조건의 전반적인 악화는 정규직 업무가 점점 더 비정규직과 시간제노동에 의해 대체되는 것과 더불어 전세계적인 현상으로서 한국 노동자들을 심하게 타격해 오고 있다. 게다가 새로이 구성된 이명박정부는 노동자들의 삶과 생활조건에 대한 일련의 공격을 개시함에 있어서 특히 더 오만하고 압제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더우기, 2007 미국과 조인된 자유무역협정(FTA)은 한국의 소농민들의 존재에 직접적인 위협이다.이 협정이 공공연히 리버럴하고“, „친자본가적인정부(이명박은 한때 현대그룹의 회장이었다)에 의해 조인되었다는 사실은 반미주의적 경향을 강화시켰는데, 이러한 경향 자체는 단지 민족주의의 한 형태일 뿐이다.

아래에 우리가 실는 글은 이전에 사회주의정치연합(SPA)“으로 알려졌던 좌익 공산주의 그룹“(LCG)의 한 동지가 보낸 것이다. 독자들이 기억하겠듯이, SPA는 그룹은2006 10월 서울과 울산에서 개최된 맑스주의자대회를 조직했었다. 우리는 몇가지 이유로 이 글을 강력히 환영한다.

첫째, 우리가 이미 여러 차례 말해오듯이,노동자 계급 일반에게뿐만 아니라 계급투쟁이 부활된 이시기에 국제주의적 전망을 발전시키려 하고 있는 투쟁가들에게도 매우 실제적인 언어적인 곤란으로 인해 또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서의 노동자 운동 관련 문건들을 접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 한국에서의 노동자투쟁의 특이한 역사적 경험들이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건들과 지난 30년간의 한국역사에 관한 국제주의적 전망을 발전시키고 무엇보다도 이것들을 전세계 노동자투쟁의 국제주의적 맥락 속에 자리매김하려는 LCG 동지들의 노력은 우리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계급투쟁의 운명, 공산주의혁명의 운명은 다른 어느 한 나라에서 결정되지 않을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결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글에서의 국제주의적 시각의 전개는 그래서 강력하게 환영되어야 한다.

둘째, 이 글은 노동자들의 행동이 가두의 축제나 부르조아정치로 해소되어(dissolved into street festivals or bourgeois politics)버려서 노동자계급의 독립적인 행동이 사회의 다른 비착취계층들을 분명하게 선도할 수 있는 그러한 계급적 기초 위에 스스로를 확립하는데 실패할 위험을 명확하게 파악한다. 이문제도 결코 한국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LCG동지가 „87 6월 항쟁도 직선제라는 부르주아 선거의 환상에 민중의 폭발적 투쟁요구를 빠뜨림으로써 6.29기만선언에 굴복하게 만든 뼈아픈 역사가 되었다(Even the June Struggles of 1987 were to be a painful historical experience of surrender through achieving direct voting, an illusion of bourgeois democracy and dropping the masses' explosive demands for struggles)라고 말할 때 그와 우리의 의견이 일치함을 강조하길 원한다. 종종 들리는 바와는 반대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조직화에 기회들을 열어주지 않는다. 브라질과 같이 군사독재를 당한 다른 나라들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역사는 정확히 그와는 반대의 경우임을 보여준다. 민주주의의 확립은 관료주의적 노동조합이 번성할 수 있게 했고, 그 이래 계급투쟁을 맨 먼저 사보타지하는 것들이 바로 이러한 노동조합들인 것으로 드러났다.

셋째, 이 글은 부르조아정치인을 선택하는 길이 곧 정치민주화의 길이라는(that the way which the bourgeois politicians chose would be the very way toward political democratization)“ 1987 6월의 환상 뒤에 놓인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상당히 적확하게 제기한다. 사실상,1980년대의 투쟁에 관여한 상이한 계급들은 그것을 완전히 의식하고 있었든 그렇지 않았든 상이한 목표들을 갖고 있었다. 군사독재에 대한 순전히 민주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 반대파에게 있어서는, 이명박에 의해 대표되는 현실이 얼마나 1987년의 달콤한 꿈을 실망시킬지언정 한국에 민주적인 정부를 확립하려는 것이 진정 그것-부르주아-의 야망의 한계이다! 그런데 노동자계급의 목표는 군사독재뿐만이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체제전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오직 전세계적으로 수행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글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 투쟁과 함께하고 방향을 제시할 혁명적 정치세력은 없었다(there was no revolutionary political force which would be together with and give orientations to the struggles) 는 사실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인 문제로서, 전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새로운 인터네셔널을 아직 발전시킬 수 없었다는 사실의 지역적인 표현이다. 그러한 인터네셔널의 존재 자체가 계급 전체 내부의 혁명투쟁과 의식의 전세계적인 발전의 표현일 것이다. 오늘날 국제주의자들 사이에 유대와 공동작업을 발전시키는 것은 그 직접적인 결과들을 놓고 볼때 이것이 얼마나 하찮아 보일지라도 미래에 프롤레타리아트가 새로운 인터네셔널을 창건할 수 있는데 결정적이 될 것임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다.


넷째
, 투쟁의 당면한 전망과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 사항들을 강조하고자 한다.

우리는 노동자들이 작업 현장 수준에서 스스로 조직할 필요에 대해서 뿐만아니라, 계급연대를 발전시키고 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공장 점거로 고립되는 것을 피하고 가능한 한 거리시위를 활용할 필요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 또한 우리는 노동자들이 계급전체에 일반적인 요구사항들을 제기하고 공장에 따라, 산업무분에 따라 특이적인 요구사항들이 운동을 분열하도록 허용하는 덫-노동조합술책에서 전형적인-을 피할 필요성에도 동의한다.

우리는 노동자들이 촛불집회에서 노동자의 고통이 건강이나 교육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총체적 삶과 연관되어 있음을 주장하고 서로 토론하는 적극적인 마당을 만들어야 한다(at the candlelight meetings (...) prepare actively places to discuss with one another and argue that the pains of workers reside not only in the health or educational problems but are related also to the entire living conditions of workers)라는 생각에 강력하게 동의한다. 토론그룹과 써클의 발전은 노동자들이 스스로에 대한 신뢰와 독립적으로 조직화하는 그들 자신의 능력을 획득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의 활동에 대한 더 광범위한 정치적 국제적 비젼을 획득하기 위해서 매우 필수적이다.

이 모든 것을 말하고 나서, 우리가 한국에서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는 국제주의운동에서 논쟁에 붙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몇가지 불일치점들도 있다.

그 첫째는 글의 마지막 구절에서, „조직된“(, 노동조합에 조직된) 노동자들과 미조직된“(, 노동조합에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들에게 개별적인 임무들이 있다고 표현된 것같은 그 생각을 들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이전에 말했듯이, 결코 순전히 한국의 문제가 아니다. 비정규노동자들의 조직화가 오늘날 한국의 동지들에게 주요한 관심사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실상, 전세계 노동자계급에게 있어서 주요한 어려움은 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 지배계급이 만들고 노동조합들이 유지하고 있는 분할들에 정확히 어떻게 맞설 것인가?라는 것이다. 운동이 강력해질 수 있는 전제조건은 비정규직과 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들의 공동의 이해관계를 인식하고서 모든 노동자들에게 열린 대중집회들에서 함께 투쟁하는 것이다. 이것을 해결함에 있어서 절대로 피해야 할 방법은 미조직노동자들과 조직노동자들이 이러한 분열들을 영속하게 만들어서 개별적으로 조직화하고, 더구나 비정규직노동자들을 위한 별개의 노동조합을 세우려 노력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계급투쟁에 또 하나의 분열을 도입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강조하고자 하는 두번째 사항은 노동자투쟁과 민족투쟁 사이의 절대적인 양립불가능성이다. 우리는 태극기와 애국가 등으로 표현되는 순수한 애국주의도 노동계급의 총체적 삶의 요구를 통해 계급적 요구로 모아질 가능성이 많다(Through the general demands for the defence of living conditions of the working class even pure patriotism represented by Tae- gk –gi and Ae-guk-ga, the korean national flag and anthem, could possibly be welded together and transformed into demands of the class)“라는 문장과 관련하여 번역의 어려움을 겪었다. 우리가 이것을 잘못 번역했을 수 있고, 그 경우에는 LCG동지들이 교정해 주기를 바란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애국적인 요구들을 노동자계급 요구들 속으로 모아지기(be welded together and transformed into)“가 절대로 불가능함을 분명하고 명백하게 언급하고 싶다. 민족주의-애국주의-와 국제주의는 반대극들이다. 그들은 사회의 두가지 주요한 적대계급들의 이해관계를 표현하고, 그들중에 오직 하나만이 다른 하나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다.

여기에서 전개하기에는 너무 길지도 모를 마지막 사항은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autonomous and democratic unions)“을 위한 투쟁 문제 전체이다. 이것은 확실히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의 노동자투쟁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우리가 보기에, 그러한 노동조합을 건설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일종의 환상이다-그 당시 지배적이던 조건들 하에서 자연스럽고 이해될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상일 뿐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한국의 동지들은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을 위한 20년간의 투쟁이 어떻게 오늘날 한국과 전세계의 노동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계급투쟁을 사보타지하는 관료화된 노동조합의 건설을 초래했는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한국에서의 계급의 경험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서, 특히 폴란드에서1980년의 대대적 파업들이후의 경험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우리로서는 최선을 다해 이러한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다.

ICC, 2008 7월 중순


P.S.이서문을 LCG의 동지들에게 보낸 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받았다. 이 의견교환의 계속을 진행되는 대로 신속히 실을 수 있게 되길 바란다.

ICC동지들에게

우리의 글을 영어로 번역한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동지들이 그글에 대해 쓴 서문과 관련하여, 특히 두번째 항목, 애국주의에 대하여, 동지들이 동의하지 않는 그 문장에 관하여 더 명확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촛불시위에 함께하는 쁘띠부르주아적 참가자들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가 노동자계급에 기반한 이해관계들로 전환될 수 있을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시위들이 이제 거의 70일이상 계속되고 있습니다. 요구사항들과 슬로건들이 이명박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들과 자본주의 자체의 근본적인 쟁점들에 대한 반대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급의 이해관계에 대해 한달 반 사이에 쁘띠부르주아적 참가자들의 태도변화를 인식했습니다. 촛불시위가 대중과 이명박정부사이의 충돌로 이어져서 더 격렬한 대중운동이 전개되기를 우리는 기대합니다. 그 운동의 진행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전체과정의 진화를 토론할 것입니다.

가장 따뜻한 공산주의자의 인사를 보내며, LCG

ICConline - 2009

라틴아메리카 회합의 선언

라틴아메리카 회합의 선언

 

ICC 서문

 

우리는 8개의 라틴아메리카 국가에 존재하는 7 조직들이 채택한 공동선언을 아래에 공개한다[1]. 선언은 최근에 개최된 국제적인 회합에 대해서 보고한다[2].

 

1년전에 기획된 회합은 무엇보다도 참가그룹들의 창설과 더불어 가능하게 되었는데, 이들 참가그룹들 대부분은 (OPOP ICC 제외하고) 3년전까지만 해도 아직 존재하지 않았었다. 둘째로 회합은 모든 참가자들이 고립을 뚫고 공동작업을 전개하려는 공통된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3].

 

이러한 작업의 기초는 참가자들이, 선언속에 상술된 그러한 범주들을 받아들이고, 이러한 범주들을 프롤레타리아 진영과 부르주아진영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데 있어서 구성요소들로 바라보는데 있었다.

회합의 첫단계는 필수적으로, 참가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일치점과 불일치점을 밝히게 정치적인 토론이었는데, 목적은 불일치점의 해명을 위한 토론의 틀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회합이 개최되고 중요한 토론들, 예를 들어 국제적 계급투쟁의 현황 그리고 자본주의를 뒤흔들고 있는 현재의 위기의 본질과 같은 주제를 다룬 토론들이 이뤄질 있었던 점을 열렬히 환영한다. 논쟁의 계속과 더불어 풍부한 결실을 가져오는 해명이 이뤄질 것임을 우리는 전적으로 확신한다[4].

 

우리는 회합이 국제적인 참조 극점의 건설에 있어서 작은 걸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한 참조 극점의 존재는 공개적인 논쟁과 개입을 가능케 하고, 지금 세계 도처에서 출현하고 있고 자본주의가 인류를 몰아가고 있는 점점 악화되는 상황에 대해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주의적 해답을 모색하고 있는 동지들과 집단들과 그룹들에게 방향을 제시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전의 경험들 예를 들어 30년전의 좌익공산주의의 국제대회 [5] 비교해서, 이번 회합은 당시 나타났던 약점들이 극복되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인류에게 크다란 위협을 표현했던 아프가니스탄전쟁에 대해 국제대회가 공동선언을 결의할 없었던 반면, 참가자 전원 만장일치로 채택된 지금의 선언은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명백한 프롤레타리아의 입장을 옹호한다.

 

우리는 아메리카대륙 도처에서 유행하며 전세계적으로 적지 않은 환상을 유포하고 있는, ‚좌익들 자본주의적 대안들을 선언이 결연하게 탄핵한 점을 특히 강조하고 싶다. 오바마현상들이 일고 있는 미국을 위시해서 아르헨티나의 파타고니언까지, 오늘날 아메리카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정부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자들과 주변화된 사람들을 옹호한다고 주장하거나, 스스로를 사회적’, ‚인간적인자본주의의 수호자로 표현하거나, 베네주엘라의 차베스,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그리고 에쿠아도르의 코레아와 같은 과격한형태들에서는 „21세기의 사회주의 체화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기만자들에 대항해서, 국제적인 연대를 위한 토론과 선언을 위한 길을, 세계혁명을 위한 불굴의 계급투쟁을 위한 길을 넓혀가고 있는 국제주의적 소수들의 단합되고 우애적이며 집단적인 극점 하나가, 국가자본주의에 대항해서, 민족주의에 대항해서, 이러한 예언자들 체화하는 착취 영구화에 대항해서 목소리를 높히는 것은 매우 중요해 보인다. ICC, 2009 4 26

 

 

라틴아메리카 회합의 선언

 

우리는 국제주의자 회합에서 채택된 선언을 다음과 같이 공개한다. 차후에 우리는 회합 준비를 위해 여러 참가자들이 준비한 글들과, 회합중에 이뤄진 토론들의 요약본을 공개할 것이다.

 

공동선언

진정한 공산주의, 빈곤과 전쟁이 없는 무계급사회를 위한 투쟁은 전세계의 소수들에게서 점점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증인으로서, 2009 3, 국제공산주의흐름(ICC) 라틴아메리카의 Oposição Operaria(OPOP) 발의를 토대로 국제주의자 토론회합이 개최되었다. 여기에는 국제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의 입장을 옹호하는 여러 상이한 라틴아메리카의 그룹들과 써클들과 개별적인 동지들이 참여했다. ICC OPOP 이외에 참가 그룹들은 다음과 같다.

- Grupo de Lucha Proletaria (페루)

- Anarres (브라질)

- Liga por la Emancipación de la Clase Obrera (코스타리카와 니카라과)

- Núcleo de Discusión Internationalista(도미니카공화국)

- Grupo de Discusión Interanacionalista de Ecuador (에쿠아도르)

 

뿐만 아니라 페루와 브라질의 개별적인 동지들도 회합의 작업에 참여했다. 다른 나라들의 동지들도 참여를 원했지만, 재정적 행정적인 곤란들로 인해 그렇게 없었다. 모든 참가자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되는 범주들을 인정했는데, 이는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좌익공산주의그룹들의 대회 진행에서 마찬가지로 수용되었었다.

1) 1917 10월의 그리고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인정한다. 이때 이러한 경험들은 비판적으로 대차대조표가 만들어져야 하고, 다시 프롤레타리아트의 새로운 혁명적 돌진을 선도하게 것이다.

2) 퇴행된이라고 표시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사회주의적이거나 노동자정부에 의해 이끌어지는 나라들이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어떤 생각도 무조건으로 거부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국가자본주의적 정부형태도 그리고 „21세기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도 무조건적으로 거부한다.

3) 사회주의 공산주의 당들 그리고 모든 따라지들을 자본의 당들로 파악하며 거부한다.

4)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의회주의 그리고 선거를 범주적으로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거릇되게도 민주주의와 독재, 파시즘과 반파시즘사이에서 선택을 요구함으로써 지배계급이 노동자투쟁을 억누르고 관심을 분산시키는데 계속해서 성공하는데 사용되는 무기들이기 때문이다.

5) 국제주의적인 혁명가들이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승리에 필수불가결한 무기인 국제적인 정치적 전위조직의 건설을 위해 노력해야할 필요성을 옹호한다.

6) 노동자권력으로서의 노동자평의회의 역할을 옹호하고 여타 사회계급과 계층들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자치를 옹호한다.

 

다음과 같은 점들이 토론의제들이었다.

1) 프롤레타리아트의 역할과 현상황, 계급역량관계

2) 자본주의의 상황[현재 투쟁 발전을 위한 배경] 그리고 전반적인 고려점으로써 자본주의쇠퇴 개념 그리고/또는 자본주의의 구조위기

3) 체제가 우리를 몰아가고 있는 첨예화되어 가는 환경재앙. 비록 이점은 시간부족으로 인해 이상 다뤄질 없었을 지라도, 이에 대한 토론을 인터넷상에서 전개할 것이 결의되었다.

 

첫번째 점과 관련해서, 현재의 계급투쟁발전을 분석하기 위해서 라틴아메리카의 실례들이 이용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이것을 국제적 차원에서의 노동자투쟁의 전반적인 조건들 속에 위치시키길 원했다. 그렇더라도 회합은, 스스로를 좌익이라 주장하는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여러 정부들의 실체 폭로를 강조할 것을 결의했다. 그들은 노동자계급과 투쟁에 있어서 숙적이다. ‚좌익정부들을 비판적으로지지하는 세력들도 탄핵되었다. 마찬가지로 회합은 이러한 정부들에 의해 노동자투쟁이 범죄화되는 것을 거부했다. 노동자계급은 합법적이고 민주주의적인 투쟁수단에 대해 어떤 환상도 가져서는 안되고, 오직 그들 자신의 자치적인 투쟁에 대한 신념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때 특히 다음과 같은 정부들이 탄핵되었다.

- 아르헨티나의 키르히너

- 볼리비아의 몰랄레스

- 브리질의 룰라

- 에쿠아도르의 코레아

- 니카라과의 오르테가

- 그리고 특히 베네주엘라의 차베스. 그가 선언한 „21세기의 사회주의 나라의 노동자투쟁을 방해하고 진압하고 다른 나라 노동자들의 눈을 가리는데 이용되는 커다란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

 

두번째 점에서, 모든 참가자들은 자본주의의 현위기의 심각함과 관련하여 그리고 이것을 하나의 이론적이고 역사적인 전망의 안에서 깊이 파악할 필요성과 관련해서 의견이 일치했다. 결론적으로 참가자들은 의견일치하에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 회합의 개최는 국제적 수준에서 프로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의식화와 투쟁전개를 향한 현재의 경향을 표현한다.

- 자본주의의 위기의 현저한 첨예화는 장기적으로 노동자투쟁의 전개를 향한 이러한 경향을 강화시킬 있을 뿐이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에서 혁명적 입장의 옹호가 점점 필수적으로 된다.

-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참가자들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할 목적으로 회합이 보여주는 이러한 노력들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노력들의 첫번째 걸음으로써 다음 같이 결의했다

1) 회합 참가그룹들의 공동 책임하에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로 인터넷 웹사이트를 설치한다. 또한 우리는 웹사이트의 글들을 스페인어로 팜플렛으로 간행할 여지를 검토했다.

2) 웹싸이트에는 공개될 것들로는

- 선언( 이것은 참가그룹들의 웹사이트에도 공개될 것임)

- 회합의 준비를 위한 글들

- 상이한 토론들의 진행기록의 요약

- 참가 그룹들과 개인들 그리고 회합의 중심에 놓여 있는 원칙과 관심사와 일치하는 다른 그룹들이나 개인들의 .

 

회합은 혁명가들 사이에서 개방적이고 우애적인 논쟁의 필요성에 특히 가치를 부여하며 종파주의와 편협성을 거부한다.

 


[1] 멕시코, 도미니카공화국, 브라질,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에쿠아도르, 페루 베네주엘라

[2] OPOP, ICC, LECO(Liga por la Emancipación de la Clase Obrera, Costa Rica-Nicaragua), Anarres(브라질), GLP(Grupo de Lucha Proletaria, 페루), Grupo de Discusión Interanacionalista de Ecuador, 도미니카공화국의 Núcleo de Discusión Internationalista, 개별적으로 참여한 동지들 )

[3] 우리는 이러한 새로운 움직임들에 대해서 „2개의 새로운 ICC지부들 이라는 속에서 전했다. es.internationalism.org/cci-online/200902/2494/salud-a-las-nuevas-secciones-de-la-cci-en-turquia-y-filipinas 참조.

[4] 회합의 결정들중의 하나는 공동입장표명과 논쟁들이 공개될 인터넷포럼을 만드는 것이었다. encuentro.internationalist-forum.org 참조.

쌍용투쟁의 실패는 투쟁이 확산될 필요성을 보여준다

쌍용투쟁의 실패는 투쟁이 확산될 필요성을 보여준다

한국에서 지난 수년간 발생한 계급투쟁중에서 가장 중요한 투쟁의 하나로서, 서울 근교의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점거투쟁이 8월초에 종결되었다.

식량과 식수, 가스와 전기도 차단된 포위상태에서 77일간 공장을 점거한 , 용력깡패와 구사대의 지원을 받은 경찰의 반복된 맹공격에 저항해야만 했던 노동자들은 많은 핵심적인 요구사항들이 충족되지 않았음에도 점거를 포기할 밖에 없었고, 즉시 체포와 심문 그리고 가능한 손해배상의 형태로 이뤄진 억압의 물결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국경제는 지금의 신용 위기 전신인 1997 아시아의 추락 사태로부터 결코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전세계 자동차 산업의 침체와 더불어, 이제는 중국자동차 복합기업에 의해 콘트롤되는 쌍용자동자는 점차적으로 인력을 줄여왔고, 파산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대출금 확보를 위해 공장을 담보로 제시하는 계획을 제안하게 되었다. 이계획은 많은 해고 – 1700명의 강제조기퇴직 비정규직 노동자 300명의 해고 한국의 강력한 이웃인 중국의 값싼 노동시장으로의 결과적으로는 완전한 아웃쏘싱을 목적으로 하는 중국으로의 기술이전을 포함했다.

5 22일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파업과 공장점거는 해고반대, 비정규직반대 그리고 아웃쏘싱 반대라는 요구를 내걸었다. 점거기간 내내, 공장을 차지한 수천명의 노동자들은 헬기와 최류탄과 스턴총과 밖의 다른 무기들로 중무장한 경찰력에 대항해 스스로를 방어함에 있어서 모범적인 용기와 발명력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저항에는 임기응변식의 무기들 (쇠파이프, 화염병, 새총) 만들 필요 뿐만 아니라 계획과 전략감각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최근 서울 용산에서 경찰과 충돌중에 일어난 화재로 5명이 사망한 비극을 특히 염두에고 인화성물질 때문에 경찰들이 최류탄발사를 못할 것임을 (정확히) 계산하여 도장공장으로 후퇴함으로써 압도적인 경찰력에 대응했다.

이러한 활동들은 주도성과 자체조직화를 요구한다. 그노동자들은 그룹당 10명으로 구성된 50 – 50개의 그룹들로 조직되고 행동을 일치조정하기 위해 그룹은 대표자를 선출했다.

점거투쟁은 또한 대다수가 똑같은 전망에 직면한 다른 노동자들로부터 연대행동을 불러일으켰다. 근처의 기아자동차공장 노동자들이 특히 적극적이어서 그들 수백명은 경찰의 공격에 대항해 점거투쟁을 방어하기 위해 쌍용자동차공장으로 왔다. 공장문으로 접근하여 점거노동자들에게 음식과 기타 보급품들을 전달하려는 시도들은 안의 노동자들에게 행해진 것과 똑같이 잔인한 폭력적 대응에 직면했다. 점거투쟁이 전체 한국노동자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은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는 민주노총(KCTU) 7월에 2일간의 총파업과 전국연대집회를 호소한 것에 비춰볼 있다.

패배

그러나 사용자측이 원래 제기했던 방책들 몇몇이 파업 종결시 무효화되긴 했을 지라도, 점거는 패배로 끝났다. 점거를 끝내고 나오는 노동자들은 구타당하고 상처입은 채였고, 몇몇은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노동자들이나 가족들 사이에 자살 사례들도 있었다.

최종협상에서 지역 노조 지부장은 점거노동자들의 52% 대해 조기퇴직(, 보상금 지급 해고) 48% 1년간 무급해고 이후 경제사정이 허락하는 재고용에 합의했다. 회사는 판매직으로 전직하는 노동자들에게 1년간 매월 550,000원의 보조금을 지급할 것이다.

이후, 부상에 더하여 다수 노동자들의 구금과 임박한 기소, 회사가 금속노조(KMWU) 청구한 5억원(4 5백만 미달러)배상소송등의 모욕이 쌓였다. 과거에 파업노동자들을 빈곤에 빠뜨렸던, 한국노동법하에 가능한 기타의 개인적인 소송들이 뒤이을 것이다. 회사는 파업으로 인한 3 1 6십억원(25 8 6백만 달러) 손해와 1 4 6백대의 자동차생산 손실의 손해배상을 요구한다 “[[1]]

패배가 보여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점거된 공장을 방어하하기 위해 얼마나 조직되었든 간에 투쟁이 확산되지 않으면 대다수의 경우에서 그것은 진압되고 만다는 점이다. 해고위기에 처한 모든 노동자 그룹들이 중점적으로 해야할 일은 다른 노동자들에게로, 다른 공장과 사무실로 가서 공동행동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그렇게 해서 사장들과 국가가 한걸음 물러서도록 강제할 있는 힘의 균형을 형성하는 것이다. 공장문 밖에서 기아노동자들과 다른 노동자들이 보여준 적극적인 연대는 이것이 공상적이 아님을 보여준다. 하지만 점거된 공장에 대한 경찰 공격에 저항하는 것이 얼마나 절실하든 간에 단순히 그렇게 저항하는 보다는 투쟁확산에 강조점이 놓일 필요가 있다. 패배에 대해 반성하는 노동자들은 질문해 봐야 한다. 이러한 진정한 연대의 표현들이 기아나 다른 현장들로 투쟁이 직접적으로 확산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았는가? 라고.

우리가 보기에, 여기서 핵심은 확산문제가 노조의 손에 달려있었다는 점인데, 그러한 노조의 총파업 닳고 닳은 의례의 일부이자, 그들 자체의 요구들을 걸고 투쟁을 확산시키기는 커녕 쌍용점거투쟁에 대한 지지를 보여주기위해 많은 노동자들을 동원할 목적이 전혀 아닌 그저 상징적인 행동에 불과했다. 공장 안에서, 노조(금속노조) 상황전체에 대해 통제를 유지했던 같다. 투쟁이 시작되었을 당시 한국에 있었고 공장을 방문했던 로렌 골드너는 점거에 참가한 노동자들과의 자신의 토론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한다.

점거에 참여중이고 노조의 역활에 대해 비판적인 활동가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의견으로는 금속노조가 파업을 통제하고 있다. 그런데, 영국에서의 비스테온파업에서 미국자동차산업의 분해에서 노조가 행한 역할과는 정반대로, 금속노조는 공장을 점거하고 그것의 무장방어를 준비하는 불법적 행위들을 지지했다. 다른 한편으로 회사측과의 협상에서 노조는 해고반대요구와 모두를 위한 일자리 보장 아웃소싱 반대라는 약화된 요구에 집중했다.

투쟁확산은 노조의 손에 내맡겨질 없다. 노동자들 스스로만이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있다. 노조가 불법행동들을 지원한다 해서 그리고 그들의 지역 대표자들이 투쟁에 참가한다고 해서, 이는 노조가 가끔은 투쟁의 진영에 가담할 있음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기껏해야 그것은, 금속노조의 지부장의 경우에서 있듯이, 낮은 지위의 노조간부들도 종종 노동자들이고 그래서 여전히 노동자로서 행동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 그것은 노조가 적어도 지역 수준에서는 여전히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하는 조직들이라는 환상을 유지하는데 봉사한다.

골드너는 패배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쌍용투쟁의 패배는 단순히, 처음부터 협상을 해고반대라는 협소한 촛점에 맞추게 했던 금속노조 전국조직의 절름발이같은 역할 탓으로만 돌릴 없다…. 또한 패배는 경제위기 분위기로도 완전히 설명될 없다. 의심의 여지없이 요소들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것들의 부정할 없는 영향을 넘어서, 특히, 지금 노동력의 50%이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비정규직화를 통한 한국노동계급의 계속적인 후퇴가 그것이다. 근처 공장으로부터의 수천만의 노동자들이 쌍용파업을 반복적으로 도왔지만 그것으로는 불충분했다. 쌍용파업 노동자들의 영웅성과 끈기에도 불구한 패배는 이러한 방어적인 투쟁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공격적인 투쟁으로 나아갈 있을 만큼 충분히 광범위한 지지층을 동원할 있는 전략이 발전되기까지는, 팽배하는 사기저하만을 심화시키게 것이다.

경제위기의 분위기가 많은 노동자들에게 마비 효과를 가질 있고 그런 효과를 가진다는 점에 확실히 동의한다. 그러한 노동자들은 파업이라는 무기가 공장폐쇄로 인해 종종 무력해 지는 것을 있고, 공장폐쇄에 대항한 많은 점거투쟁들이 오랜 포위 후에 진압당하는 것을 보아왔다. 비정규직화 과정은 노동력의 원자화에 있어서 일부분의 역할을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결정적인 요소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단지 한국에만 적용되는 것이라고도 보지 않는다. 어쨌든, 자체는 위기의 측면으로서, 사용주들이 노동력비용을 감소시키고 저항을 분산시키려고 사용하는 많은 방책들중의 하나이다.

결국, 골드너는 노동자들이 공격적인 투쟁으로, 자본주의 전복을 목표로 행해지는 대대적 파업의 개시로 나아가야할 것이라고 말하는 점에서 옳다. 하지만 과업의 거대함을 알기 때문에 초기에는 노동자들이 어떤 투쟁에라도 참여하는 자체를 망설일 수도 있다.

한가지는 분명하다. 방어투쟁에서 공격 투쟁으로의 통과는 한국에서만 단독으로 제기될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것은 오직, 계급투쟁의 국제적인 성숙의 결과일 밖에 없고, 이런 의미에서 쌍용에서의 패배는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끌어낼 있는 교훈들은 이러한 과정에 진정으로 공헌할 있다.

아모스 1/9/09.



[1] 파업에 대해 로렌 골드너가 쓰고 Libcom.org 있는 상세한 파업대차대조표에서 인용됨.

정유소와 발전소 파업: 노동자들이 민족주의를 문제시하기 시작하다.

린제이 정유소의 건설노동자 투쟁으로 시발된 비공인파업의 물결은 지난 20년래 영국의 가장 중요한 노동자투쟁들 중의 하나였다. 다른 정유소들과 발전소들의 노동자들 수천명이 연대파업에 들어갔고 대중집회들이 정기적으로 열렸다. 일자리를 잃은 건설-, 철강- 항만노동자들 그리고 여타의 노동자들이 파업대오에 가담해서 여러 발전소와 정유소 밖에서 시위를 벌였다. 노동자들이 파업중인 동료노동자들에게 연대감을, 그리고 부풀어오르는 실업률과 대응에 있어서 무능력한 정부에 분노를 드러낼때, 그들은 그것이 불법적 방법이라해서 꺼리지는 않았다. 200명의폴란드인 건설노동자들이 투쟁에 가담하자, 줄곧 운동에 그늘을 드리웠던 민족주의가 정면으로 문제시되면서 운동은 절정에 이러렀다.

린제이 정유소에서 시간제노동자 300명이 해고되고, 다른 하청업자가 위탁을 인수하여 300명의 이탈리아와 포르투갈 출신의 노동자들( 나쁜 작업조건과 낮은 임금을 받는) 투입되어야 할거라는 제안이 이뤄지고, 하청직에는 어떤 영국인 노동자도 투입되지 않을 거라는 점이 알려지자 건설노동자들의 불만의 화약고는 폭발하고 말았다. 이미 수년전부터 점점 많은 건설노동자들이 영국으로 유입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낮은 임금과 나쁜 작업조건을 가졌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자리를 놓고 벌이는 경쟁이 치열해지고 모든 노동자들의 임금과 작업조건이 악화되었다. 이는 경제위기로 인해 건설부문과 여타 부분들에서 생겨난 해고의 물결과 함께 투쟁태세를 깊히 일깨웠고 이는 이제 이러한 투쟁들에서 나타나고 있다.

처음부터 운동은 파업중인 노동자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노동자계급 전체에 해당되는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앞에 있었다. , 우리는 스스로를 영국인 노동자 여기고 외국인 노동자에게 반감을 가지면서 실업과 여타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있는가, 그게 아니라 우리는 어느 나라 출신이든간에 모든 다른 노동자들과 공동의 이해관계를 갖는 노동자로서 스스로를 파악해야 필요가 있지 않은가라는 물음이 그것이다. 이는 이운동이 짚고 넘어가야할 철저히 정치적인 문제이다.

처음부터 투쟁들은 민족주의에 의해 지배당하는 했다. „영국의 일자리는 영국인 노동자에게 같은 구호를 담은 직접 만든 프래카드를 노동자들의 사진들이 보여졌고, 전문적으로 제작된 노조의 프래카드들도 동일한 요구들을 담고 있었다. 공식적인 노조대표자들은 다소 공공연하게 이러한 요구를 했고, 언론들은 외국인 노동자반대투쟁에 대해 떠들면서, 이러한 의견에 동의하는 노동자들을 보여주었다. 노동자들이 서로에 대항해서 투쟁하고 대대적으로 민족주의적 요구사항들을 옹호했다면, 얼마되지 않은 일자리를 영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남겨두어야 한다고, 그래서 이탈리아인, 포르투갈인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어야한다고 요구했다면, 비공인파업 운동은 잠재적으로 민족주의에 의해 익사당한 노동자계급에게는 하나의 패배로 끝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노동자계급 전체의 방어투쟁력은 약화되고 지배계급에게는 노동자계급을 날카롭게 공격하고 분열시키기가 만큼 손쉽게 여져졌을 것이다.

언론의 보도를 접하고 (그리고 몇몇 노동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린제이의 요구들이 정말로 영국의 일자리는 영국인 노동자에게였다고 쉽게 믿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것이었다. 총회에서 토론되고 표결된 요구사항들은 결코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고, 외국인 노동력에 대한 적대감도 없었다. 언론들이 이점을 놓친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것들은 고용주가 노동자들 사이를 갈라놓지 못하게 하지만 민족주의를 공공연하게 드러내지는 않는 노조의 역량에 대한 환상을 표현했다. 하지만 언론에 의해 조성된 전반적인 인상으로는 노동자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에 반대하는 하였다.

민족주의의 지속적인 무게

민족주의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본질적인 일부분이다. 민족의 자본계급은 경제적으로 그리고 군사적으로 그들의 경쟁자들과 경쟁함으로써만 생존할 있다. 그들의 문화, 언론, 교육, 오락 스포츠산업들은 노동자계급을 민족국가에 묶어 두기 위해서 항상 이러한 독을 퍼뜨린다. 노동자계급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운동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운동이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물질적 이해관계를 방어하기 위한 투쟁 속에서 문제와 씨름하게 되면서 민족주의의 무게가 도전받고 있음을 보았다는 것이다.

영국의 일자리는 영국인 노동자에게라는 민족주의적 슬로건은 고든 브라운이 영국민족당(British National Party)로부터 도용한 것으로서 파업노동자들과 계급에게서 많은 불편한 심기를 불러 일으켰다. 많은 파업자들은 자신들이 인종차별주의자도 아니고 BNP 지지하지도 않음을 분명히 했다. 노동자들을 주도하기 위해서 투쟁에 개입하려던 BNP 시도들을 노동자들은 대부분 내쫓아 버렸다.

BNP 거부하는 한편, 텔레비젼에서 인터뷰를 했던 많은 노동자들은 그들의 투쟁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려 분명하게 노력하고 있었다. 그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고, 자신들도 외국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지만 이제 실업자거나 자신들의 아이들이 일자리를 얻기를 바랬다. 그래서 일자리는 먼저 영국인노동자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느꼈다. 그러한 시각들은 여전히 영국인노동자와 외국인노동자들이 공동의 이해관계를 갖지 않는 것으로 결국 바라보았고 그래서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있긴 하지만, 반성의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분명한 징표였다.

다른 한편으로, 다른 노동자들은 결연히 노동자들 사이의 공동의 이해관계를 강조했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모든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얻을 기회라고 말했다. „나는 2주전에 부두에서 하역인부자리를 잃었다. 커디프와 배리항만에서 11년간 일했는데, 우리가 정부를 뒤흔들 있을거라는 희망으로 나는 오늘 여기에 왔다. 모든 영국 산업을 잃고 있는 마당에 나라가 파업에 들어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반감이 없다. 그들이 일거리가 있는 곳으로 찾아간다고 해서 나는 그들을 비난할 수가 없다.“ (가디언 온라인, 2009 1 20). 민족주의가 진정한 위험이라고 주장하는 노동자들도 있었다. 외국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민족적인 분할을 이용하는 고용주들에 대해 건설노동자들의 웹포럼에서 경고했다. „민족주의적 요소들을 휘저어대는 동조적 언론들은 그다음 당신들을 겨냥해서 시위자들을 가능한한 나쁘게 묘사할 것이다 . 게임은 끝이다. 고용주들과 정부가 가장 바라지 않은 것은 영국인 노동자들이 외국인 노동자들과 단결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일자리를 놓고 서로 싸우도록 만들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 다는 것을 확인하면 그들은 등줄이 서늘해질 것이다. “ 그리고 다른 글에서 그는 이투쟁을 프랑스와 그리스에서의 투쟁들과 연결짓고 노동자들 사이에서의 국제적인 단결의 필요성과 연결지었다. „프랑스와 그리스에서의 대대적인 저항들은 우리가 앞으로 보게될 것들의 전주곡에 불가하다. 당신들은 이러한 노동자들과 접촉해서 연락을 취하고 그렇게 해서 노동자들에 대한 공격에 대항한 전유럽 차원의 저항을 전개한다는 생각을 한번이라도 해본적이 있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야 말로, 사실상 문제에 책임이 있는 정당들, 기업가협회, 부패한 노조지도부 그리고 신노동당이 계속해서 노동자들의 약함으로부터 이득을 보도록 내버려두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길처럼 보인다. “ (Thebearfacts.org). 다른 부문의 노동자들도 민족주의적 슬로건들에 반대하여 이포럼에서 의견을 제시했다.

민족주의적 슬로건들의 문제에 대해 파업참가자들과 계급전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토론들은, 폴란드 출신의 노동자 200명이 플리무스의 랭기지 발전소 건설현장에서 린제이노동자들을 지지하기 위한 400명의 다른 노동자들의 비공인파업에 동참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언론은 국제적인 연대의 발걸음을 은폐하기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지역의 BBC 스튜디오는 파업을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았고 전국적인 차원에서도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이러한 폴란드노동자들의 연대는 그들이 지난해 비슷한 투쟁에 참여했었기 때문에 특히 중요했다. 그당시 18명의 노동자들이 해고되었고, 폴란드인 노동자들을 포함한 다른 노동자들은 연대감에서 일손을 놓았다. 당시에 노조는 투쟁을 외국인노동자들의 존재에 반대하는 저항으로 탈바꿈시키려 노력했지만 폴란드인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함으로써 이러한 계획은 무산되었다.

랭기지의 노동자들은 노조가 어떻게 민족주의를 이용해서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려 했는가를 분명하게 의식하고 투쟁을 시작했다. 조업중단 하루 린제이의 총집회에서 랭기지발전소 폴란드인 노동자 공동 파업:연대라는 직접 제작된 현판 하나가 높이 내걸렸다. 이것은 폴란드인 노동자들 한명 또는 여러명이 7시간 걸리는 거리를 달려서 그곳까지 갔거나 또는 린제이의 노동자가 행동을 조명하고 싶어했음을 의미했다.

동시에 린제이 피켓에 이탈리아인 노동자들의 파업 참여를 호소하는 기치가 등장했다. 그것은 영어와 이탈리아어로 되어 있었고, 몇몇 노동자들이 전세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라는 포스터를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졌다(가디언, 2009 2 5).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추진하려는 몇몇 노동자들의 의식적인 노력의 시작을 보고 있었다. 계급내에서 훨씬 많은 반성과 토론을 불러일으키게 걸음을.

모든 것은 투쟁이 새로운 차원에 도달해서, 투쟁을 일종의 민족주의적인 반발로 묘사하려는 켐페인에 정면으로 도전할 것을 요구했다. 폴란드인 노동자들의 예는, 동런던의 올림피아드건설현장과 같은 영국에서 가장 건설현장들에서의 투쟁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동참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언론이 국제주의적 슬로건들을 은폐할 없을 위험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지배계급이 투쟁노동자들과 계급 사이에 가로놓은 민족주의적 장해물들이 극복되었을 터이다. 충돌이 그렇게 재빨리 해결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24시간 만에 노조와 기업주와 정부는 파업을 해결하는데 몇일이고 몇주고 걸릴거라고 말하던 처음의 논조를 바꾸어서, „영국인노동자들이 지원할 있는 일자리 102개를 부가적으로 약속함으로써 해결하려 했다. 해결책으로 대부분의 파업자들은 만족하는 같았는데, 이는 이탈리아인 그리고 포르투갈인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지 않게 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업자는 우리는 일을 얻기 위해서만 파업을 해야 하는가?“라고 말했다.

동안 우리는 지난 10년이래 가장 확산된 비공인파업을 보았고, 노동자들이 대중집회를 갖는 것을 그리고 조금도 주저없이 불법적인 연대행동을 취하는 것을 보았다. 민족주의에 익사했을 지도 모를 투쟁이 독약을 문제시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민족주의의 위험이 사라졌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지속적인 위험이지만 운동은 미래의 투쟁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제공했다. 추측대로는 민족주의적인 피켓라인 위에 전세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주장하는 기치가 보이는 것은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앞으로 다가올 것을 두려워하게 만들 것이다.

Phil. 2009 2 7, ICC 영국 간행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