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Conline - 2012

ICConline 2012

2011년: 분노에서 희망으로

년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자본주의 세계위기의 첨예화 그리고 튀니지, 이집트, 스페인 그리스, 이스라엘, 칠레, 미국, 영국에서의 사회운동들이다.(1)

 

국제적인 차원의 분노

자본주의의 위기의 결과들은 세계인구의 절대다수에게 매우 혹독하다. 생활조건들이 악화되고, 실업은 점점 양상을 띠고 지속기간 또한 길어저서, 최소한의 안정성도 기대할 없는 비정규직화가 점점 깊이 잠식하고 있다. 극도의 가난과 굶주림이 만연한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안정적이고 정상적인삶의 가능성이 그리고우리 아이들을 위한 미래 가능성이 사라져가는 것을 근심어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이는 심각한 분노를 야기했고 수동성을 돌파하고 광장과 거리들을 점거하려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지난 5 이래 극도로 첨예화된 위기의 원인들에 관한 문제들을 토론하려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러한 분노는 은행가들과 정치가들 그리고 기타의 자본가계급 대표자들이 명백히 드러낸 오만과 소유욕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한층 격화되었다. 그러나 심각한 사회문제들에 대해 정부들이 보여준 무능력으로 인해서도. 정부들의 대책들은  어떤 해답도 제시하지 못한 오직 빈곤과 실업만을 심화시키고 있다.

분노한 사람들의 운동은 국제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사회주의적 정부가 최초의 혹독한 긴축정책을 펼치려 안간힘을 쓰던 스페인에서 시작되었다. 그런 다음 부채위기의 상징인 그리스에서, 세계자본주의의 전당인 미국에서, 근동의 가장 극심하고 가장 오랜 제국주의적 충돌의 인접국가들인 이집트와 이스라엘에서.  특히 이집트에서는 아랍의 봄이후 운동의 새로운 동력으로 작용했다.

이것이 세계적인 운동이라는 의식은, 민족주의의 파괴적인 무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와 이집트, 그리고 미국에서 국기를 흔들었던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널리 확산되었다. 스페인에서는 그리스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가 다음과 같은 슬로건들로 표현되었다. „아테네여 견뎌라, 마드리드가 떨쳐 일어난다!“  2011 11 미국 오클랜드에서 파업노동자들은전세계의 점거(Occupy)운동과의 연대 외쳤다. 이집트에서는 미국의 운동에 대한 카이로의 연대선언이 의결되었다. 이스라엘에서는네탄야후, 무바라크, 아사드는 모두 똑같은 도당들이라고 외쳐졌고 팔레스타인의 노동자들과 연락을 취했다.

현재로서는 투쟁들의 최절정이 지난 상태이다. 그리고 비록 새로운 투쟁들의 증후들이 스페인과 그리스와 멕시코등에서 있긴 하지만, 많은 이들은 다음과 같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분노의 저항물결이 무슨 소용이 있었는가?“, „우리가 무언가를 얻었는가?“

운동의 긍정적인  측면들뿐만 아니라 약점과 한계 또한 알아보기 위해서 대차대조를 통한 결산을 해볼 필요가 있다.

광장을 점거하자“ – 운동의 공통된 슬로건

그처럼 광범위하고 다양한 주도성들은, 자체의 이해를 모도하며 우리를 통제하는 환상과 혼란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서 거리와 광장을 점거하는 같은 주도성들은 지난 30여년 이래 처음이었다.

패배한, 무관심하고 무기력한사람들로 표현되었던 사람들, 노동자들, 착취당하는 자들, ‚주도성을 발휘하고 무언가를 함께 이뤄내기에는 무능한 그자들이 결집하고 공동으로 주도성을 발휘해서 체제의 일상성이 우리에게 부과한 수동성을 깨뜨릴 있었다.

이는 우리의 기운을 북돋웠고, 우리 자신의 능력들에 대한 자신감을 강화시켰다. 우리는 대중의 공동 행동이 발산하는 권력을 발견했다. 사회적인 분위기가 바꼈다. 공공의 주제들에 대한 정치가와 전문가와대지도자들의 독점이 서서히, 스스로 발언하기를 원하는 수많은 무명인들에 의해 의문시되었다.(2)

확실히 이는 여전히 쉽게 부서져버릴 모르는 여린 출발점이다.  환상, 혼란,  기운의 불가피한 기복, 억압, 탄압력들과 자본주의 국가들이 우리를 유인하려는 위험한 함정들 ( 선두에 좌파정당과 노동조합들이 있는) 반동과 쓰디쓴 패배를 야기할 것이다. 우리는 길고 험난한 앞에 있다. 난관으로 가득찬 하지만 승리의 보장이 없는.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첫번째 승리이다.

 집회운동의 심장

집회들은 단지 불만들을 표출하는 수동적인 태도에 스스로를 국한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집회들 속에서 조직한다는 능동적인 태도가 발전했다. 다양한 집회들은 1864년의 1 인터네셔널(국제노동자연합) 주요이념, ,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들 스스로의 일이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렇게 해서, 파리콤뮨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1905년과 1917 러시아에서 최고조에 도달했으며 1918 독일에서 그리고  1919년과 1956 헝거리에서, 그런 다음 1980 폴란드로 이어져 노동자계급의 이러한 전통이 계속된다. 

총회와 노동자평의회는 노동자투쟁의 진정한 조직형식이며 새로운 사회 조직형식의 핵심이다.

총회들을 통해 우리는 대대적으로 결합하고, 우리를 임금노예제에 얽매고 있는 사슬들을 파괴하며, 파편화, 각자 살궁리만 하는 폐기하고, 제각각의 영역들이나 사회적 범주들의 게토 속으로의 고립을 극복하는 것을 도모할 있다.

총회들을 통해 우리는 공동으로 고민하고, 토론하며 결정하는 것을 도모할 있다. 이루어진 결정들에 대해 집단적으로 책임을 지며, 결정과 실행에 모두가 참여할 있다.

총회들을 통해 우리는 투쟁의 추진에 필수 불가결할 뿐만 아니라 미래의 계급과 착취없는 사회의 기둥 역할을 상호신뢰와 전반적인 공감과 연대를 만들어갈 있다.

2011년에 폭발적인 전정한 연대가 있었는데, 이는 지배계급이 설교하는 위선적이고 이기적인연대와는 전혀 무관하다. 예를 들어, 마드리드에서는 체포된 사람들의 방면을 위하거나 경찰이 난민들을 체포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시위들이 있었다. 또한 스페인과 그리스 그리고 미국에서는 주거장소로부터의 강제이주를 막기 위한 대대적인 회합들이 있었다. 미국 켈리포니아의 오클랜드에서는, „파업집회에서 다른 작업장들로 파업파괴저지원파견이 결정했고, 직원들이나 학생들을 11 2일의 총파업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처벌한 작업장이나 대학을 점거할 것이 결정되었다. “  또한, 비록 아주 간헐적이고 짧게 지속되긴 했어도,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가진 동지들에 의해 지지되고 보호된다는 느낌을 함께 느꼈던 순간들이 있었고, 이는 불안감과 무방비상태와 가망없음이 지배적인 사회의정상적인 상태와는 전적으로 정반대였다.     

 논쟁문화는 미래을 밝히는 능불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세계를 변혁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의식은 우리가 계몽된 지도자의 말을 귀기울여 듣거나 그의 지침들을 따른다고 해서 도달될 없다. 오히려 대대적인 논쟁에 의해 동반되고 그러한 논쟁으로 이끌어지는 투쟁들을 경험함으로써 발생한다. 예전의 투쟁경험이 참작되지만 또한 시선은 앞에 놓인 미래를 향하게 됨으로써 이뤄진다. 이는 스페인에서, „혁명없이는 어떤 미래도 없을 것이다 같은 슬로건들로 표현되었다.

논쟁문화, 상호존중과 경청에 기반한  공개토론은 총회 안에서 싹트기 시작할 뿐만 아니라 주변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동도서관과 소모임과 회합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많지 않은 기술적인 설비로 수많은 인문적 활동들이 크다란 즉흥적 창의력을 바탕으로 거리와 광장들에서 시작되었다.  총회들에서 그렇듯이 이는 노동자운동의 이전 경험들로의 재연결을 의미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억압되어 있던 지식열이 혁명 속에서 격렬하게 분출되어 나왔다. 스몰리대학으로부터만도 6개월동안 매일 수톤에 달하는 트럭의 책들이 지방으로 보내졌다.  러시아는 뜨거운 모래가 물을 빨아들이 듯이 물릴줄 모르게 모든 읽을 거리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그렇게 삼키듯 읽힌 책들은 우화집들이 아니었다, 거짓된 역사책도  지루한 종교책도 아니였다, 풍기문란을 유발하는 소설책도 아니였다.  그것은 사회 경제 이론들, 철학서들, 톨스토이와 고골과 고리키의 책들이었다…“( 리드,“ 세계를 뒤흔든 10“, 1)

성공모델 위해 투쟁하는 듯하지만 자꾸 수백만번 실패하는 사회의 문화에 대해서, 지배 이데올로기와 매체가 우리에게 주입시키려드는  소외된 전형들과 위조에 대항해서, 수천의 사람들이 자체의 비판적이고 독립적인 척도를 제시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그들 스스로가 담지하는 전정한 민중문화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이러면서 위기와 뿌리, 은행의 역할 등과 같은 주제들이 다뤄졌다. 마찬가지로 혁명에 대해서 토론되었는데, 이때 문제에 대한 모든 가능한 견해들이 출현했는데, 이는 많은 혼란들을 표현했다.  민주주의와 독재에 대해서도 논의되었다. 그렇게 해서 상호보완적인 다음과 같은 문구들이 출현했다. „그들은 그것을 민주주의라 부르지만 그것은 전혀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독재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 계략과 거짓과 모호함, 지배계급의 정치를 특징짓는 짓거리들의 세계와는 전혀 무관한, 다수의 진정한 정치가 시작되기 위한 최초의 발걸음이 내디뎌졌다. 이러한 접근법에서, 경제나 정치분야뿐만 아니라 환경파괴나 윤리, 문화, 교육, 건강부문등 우리와 관련된 모든 주제들이 모두 다뤄진다.       

 미래는 노동자계급의 손에 놓여있다

지금까지 서술된 것과 같은 2011년의 운동의 전개가 해를 희망의 시작의 해로 만든다면,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운동들의 매우 크다란  한계와 약점들을 인식하기 위해 진지하고 혜안적이며 비판적인 시선을 운동들에 던질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가  낡은 체계임을 그리고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본주의가 극복되어야   전세계의 점점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는 반면, 많은 이들은 여전히 자본주의를 한줌의“ (가차없음, 금융상어, 비정한 독재자들 )으로 환원시킨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전체적으로 심원하게 변혁되어야만 하는 복잡한 사회관계망이다.  다양한 현상들 (금융, 투기, 정치경제계 지도자들의 부정부패) 인해 혼돈에 빠져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힘을 허비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든 구멍들을 통해 휘몰아쳐 나오는 폭력(억압, 테러와 테러리즘, 윤리적 야만) 마땅이 거부되어야 하지만, 체제가 오직시민들 평화로운 압력만으로 척결될 있을거라고 믿어서는 안된다. 소수일 밖에 없는 지배계급은 그들의 권력을 순순히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4년이나 5년마다 있는 선거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국가의 배후에 있다. 결코 지키지않을 공약을 내세우고 예고하지 않은 일들을 처리해버리는 정당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지배계급의 다른 기둥들은  기상을 저하시키기위해 노동자들을 동원하고 지배계급이 서명하라고 내놓는 모든 것에 서명하는 노조이다. 오직 대대적이고 집요하며 끈질긴 투쟁만이, 국가의 존재를 떠받치고 있는 억압수단을 파괴하는데 필수적인 힘을 착취받는 사람들에게 제공할 있다. 오직 그렇게만 그들은 스페인에서 항상 다시 등장하는 슬로건, „모든 권력을 총회로  실현할 있다.

비록 미국의 점거(occupy)운동에서 그렇게 인기가 있었던 슬로건우리가 99%(상위의 소수 1% 대비해서)“ 통해,  사람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깊은 계급격차들을 서서히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긴 할지라도, 저항운동 참가자 대부분은 스스로를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 사는 사회에서 인정받기를 원하는아래로부터의 시민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는 계급들로 나누어져 있다. 편에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는 자본가계급이, 다른 한편에는 모든 것을 생산하지만 점점 빈곤해져가는 착취받는 계급, 노동자계급이 존재한다. 사회발전의 동력은 대다수 시민의 결정이라는 민주주의 놀음 ( 놀음은 오히려 지배계급의 독재를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가면에 다름 아님) 아니다, 그것은 계급투쟁이다.

사회운동은  가장 중요한 착취받는 계급,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참조점으로 하여 수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계급은 함께 사회의 주요한 부를 생산하고, 공장, 병원, 학교와 유치원, 대학들, 사무실, 항구, 건설산업, 운송 우편등  사회생활이 기능하도록 담보한다. 2011년의 몇몇 운동들에서 힘이 싹틈을 예감할 있었다.  이집트에서 분출해서 무바라크의 퇴진을 결과시킨 투쟁물결.  미국 켈리포니아의 오클랜드에서 점거자들은 총파업을 외쳤고, 항만이 마비되었으며 항구의 종사자들과 화물차운전자들에게 능동적인 지원이 요구되었다. 런던에서는 파업중의 전기기사들과 세인트 성당의 점거자들이 공동의 행동을 위해 함께 모였다. 스페인에서는 광장 집회들에서 투쟁중인 특정 영역들을 단합시키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현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과 자본주의사회의 억압에 고통받는 사회계층들의 근본적 욕구들사이에는 어떤 대립도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결코 이기적인 운동이 아니라, 오히려엄청난 다수의 이해를 위한 엄청난 다수의 자립적인 운동 기초이다. (공산주의 선언, MEW, 4, 472)

현재의 운동은 2백년간의 노동자투쟁의 경험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여 교훈을 얻음으로써 이전의 투쟁들과 해방시도들로부터 배울 있다. 길은 기나 길고 장해물로 가득차 있다. 그로부터 스페인에서 항상 다시 들리는 슬로건이 생겨났다. , „우리가 천천히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길이 것이다(No es que vamos despacio, es que vamos muy lejos)“   우리는 집요하게 새로운 운동을 준비하기 위해서  어떤 염려나 두려움 없이 가능한한 광범위하고 깊이 있게 논쟁해야 한다.  오직 그렇게만이 자본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를 위한 기초가 세워질 있다.

2012 3 12

ICC  

 

(1)    인터네셔널리뷰 148호의 , „경제위기는 끝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체계의 종말을 그리고 세로운 세계를 위한 토쟁을 고시한다참조. 체계의 세계적 위기와 연관되어 후쿠시마사태는 인류가 직면한 거대한 위험들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2)    시사잡지 타임(The Times) „2011년의 인물분노한 자들운동의 참가자들을 선택한 것은 시사하는 점이 많다.

             

      

 

 

               

 

 

 

애국의 서커스

:ICC

번역: 사노신(https://sanosin.jinbo.net)

[국제],[ 번역]

애국의 서커스

2012 런던 올림픽이 한창이다. 이에 따라 한국의 모든 언론들 역시 올림픽 메달 소식과 오심 소식을 전하느라 바쁘다. 사람들의 시선이 올림픽에 집중되어 있는 동안컨택터스라는 경비업체는 SJM 노동자들에게 극도의 폭력을 가했고 사실을 보도한 언론은 많지 않았다. 올림픽 이슈가 다른 중요한 사안들을 덮어버리는 일은 한국에서만의 일은 아닌 같다. 올림픽이 진행 중인 영국도 예외가 아니다. 이에 사노신은 ICC(국제공산주의흐름) 런던올림픽과 관련한 기사를 번역해서 싣는다. 기사는 2012 6 12일에 작성되었다.

기사의 내용은 본지의 입장과 다를 있습니다.

2012 런던 올림픽이 한창이다. 이에 따라 한국의 모든 언론들 역시 올림픽 메달 소식과 오심 소식을 전하느라 바쁘다. 사람들의 시선이 올림픽에 집중되어 있는 동안컨택터스라는 경비업체는 SJM 노동자들에게 극도의 폭력을 가했고 사실을 보도한 언론은 많지 않았다. 올림픽 이슈가 다른 중요한 사안들을 덮어버리는 일은 한국에서만의 일은 아닌 같다. 올림픽이 진행 중인 영국도 예외가 아니다. 이에 사노신은 ICC(국제공산주의흐름) 런던올림픽과 관련한 기사를 번역해서 싣는다. 기사는 2012 6 12일에 작성되었다.

기사의 내용은 본지의 입장과 다를 있습니다.

지난 , 영국 지배계급은 우리로 하여금 국수주의와 애국심, 영국인의 자부심이라는 진흙탕에 시달리게 하고 있다. 지배계급은 영국 국기와 잉글랜드의 기장을 우리의 머릿속에 쑤셔 넣고 있다. 언론, 신문, TV 라디오는 순간도 멈추지 않고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했다. , 지위, 계급과 상관없이 우리는 영국인임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캠페인(부르주아지가 짜놓은 캠페인) 지금까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각기 다른 이벤트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참가했다. 여왕즉위 60주년 행사에는 수억 파운드가 지출되었고 수십억 파운드가 올림픽 개최에 소요되었다.

여왕즉위 60주년 행사를 위해 여왕은 가두행진을 했다. 거리에서의 파티와 깃발의 물결, 특히 아이들이 흔드는 깃발에 대한 언론의 보도 세례가 이어졌다. 모든 것은 1952년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행사는 자애로운 여왕 폐하가 인기 스타들이 총출동하는 콘서트 장소로 버킹검 궁을 개방한 것에서 절정을 이뤘다. 즉위 60주년 행사 직후에는 유로 2012 축구경기가 열렸다. 분위기를 띄우려는 사람들은 응원 복장을 했고우리는 하나의 팀을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나라를 응원하는 이라는 광고캠페인이 울려 퍼졌다. 우리 영국인들은 영국 팀이 틀림없이 패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역경에 맞서 단결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패배하는 역시영국적 특성임을 알고 있다.) 이제 우리는 올림픽준비 기간 동안 영국 전역을 도는 성화 봉송과 함께 번째 애국심의 향연을 준비하고 있다.

서커스의 이면의 현실은 때때로 검열된 채로 보도된다. 번째로 일군의 실업자들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로열 플로틸라(템즈강에서 벌어지는 선박 퍼레이드) 행사 당일, 관객들을 상대하는 스태프를 하기 위해 런던으로 버스를 타고 실업자들에 대한 논란이었다. 이들은 적절한 숙소와 보호장비는 고사하고 식사(당연히 임금 역시)조차 제공받지 못했다. 근로복지제도 그와 유사한 제도를 통해 노예노동과도 같은 조건에서 일하는 실업자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건보다 명백히 보여주는 고발은 없을 것이다.

(여왕의) 세습된 부와 지위를 축하하는 거창한 행사 이후, 6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권리의 문화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연설을 통해 그는 복지수당을 받으면서 많은 자녀를 사람들을 비난하면서 사회보장예산개혁 번째 국면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마련했다. 카메론 총리는 25 미만인 사람들에 대한 주택보조금 지급 중단, 실업수당을 받을 있는 기한 축소, 다자녀 가구에 대한 보조금 지급 제한을 골자로 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캐머런 총리에 따르면권리의 문화 심각한 사회 분열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듣자하니 그런 분열은 상층의권리를 가진극소수와 점점 늘어나는 하층의 대중들 사이의 물질적 격차로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캐머런이 말한바람직하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 그들의 노동에 기대어 무임승차하는 복지수혜자 사이에 진짜 분열이 존재한다고 한다. 노동계급 내부의 고용된 사람과 고용되지 못한 집단 분열이라는 것이다.

계급투쟁이 축제를 망치다

그러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거대한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맑스가 말한 역사의노련한 두더지(Old mole)’ 계급투쟁은 사라지지 않았다. 6, 에식스 주의 코리튼 정유공장(2007년에 페트로플러스 소유가 되었으나 페트로플러스가 파산신청을 하면서 앞날이 불투명해졌다.-역주)에서는 피켓시위 경찰과의 전투가 진행되었다. 180명의 노동자들은 스위스 기업인 페트로플러스(유럽최대의 정유업체-역주)로부터 정리해고될 예정이었다. 투쟁에 린지 지역(영국 중동부의 링컨셔 내의 지역-역주) 그레인지머스(스코틀랜드 중부의 Forth () 면한 도시-역주) 있는 공장 노동자도 함께했다.

6 에섹스에서는 소방관들의 파업도 벌어졌다. 소방당국의 현장대응 서비스(frontline service) 축소에 반대하는 투쟁 과정에서 5차례로 예정된 파업 계획 번째 파업을 진행한 것이다. (에섹스 소방관들은 10월까지 1시간~24시간의 파업을 다섯 차례 벌일 것이라고 발표했다.-역주)

우리는 런던 버스의 하루 파업으로 인해 33 도로가 정체된 것을 보았다. 버스회사 직원들은 올림픽 기간 동안의 보너스를 요구하며 하루 파업을 하고 있었다. 런던 지하철 기관사 역시 올림픽 기간 동안의 보너스 지급을 요구하며 투쟁을 하고 있었다.

런던 버스 운전사들이 파업한 , 바로 그날에 의사들은 연금과 관련하여 전국적인쟁의 행위 벌였다. 흔히 없는 풍경이었다.

이러한 투쟁은 모두 작고 고립돼 있으며 노동조합이 강화해 놓은 단사주의적인 전망이 득세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투쟁은 여전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투쟁들이 우리 모두를조국으로 포섭하려는 대대적인 캠페인에 직면하여 벌여졌기 때문이다. 이런 투쟁이 발생한 자체가 우리가 계급, 중에서도 노동계급에 속해있다는 증거다. 노동계급이란 정의상 국제적일 수밖에 없다. 세계 어디에서나 노동계급은 똑같은 착취의 체제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체제는 현재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고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의 노동계급과 같은 정도의 위기에 휩싸이게 것이다. 지배계급은 국익을 위해 커다란 희생을 감수할 것을 우리에게 기대할 것이다. 사실 그들은 이미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맞서 우리는 오로지 계급투쟁, 우리의 계급정체성, 계급의식만을 믿을 있을 뿐이다.

 

 

 

 

이일재 동지에게 존경을 표하며

이일재 동지에게 존경을 표하며

 

 

 

국제공산주의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2012 75

 

 

우리는 한국 좌익공산주의 그룹의 투사 이일재 동지가 병원에서 89세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에 잠겼다. 그는 1923 대구 출생이다. 대구는 현재 남한의 도시지만, 당시에는 조선의 역사적 이름을 갖는 곳이었다. 당시 한국 전역은 원자재와 농업의 풍부한 값어치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였으며,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노력을 지원하는 운명이었다. 일본의 공식적인 정책은 한국 문화를 우민화하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일본어를 배워야 했고, 그래서 이일재는 일본어에 유창했다.

전쟁 와중에, 스무 살이 안된 이일재는 이미 노동자 투쟁에 참가하고 있었다. 1945 8 일본 점령군의 철수로, 한국은 혼란이 줄어들면서, 도처에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생산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일재 동지는 노동자평의회 (전평 혹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설명한다. 비록 시대적 조건 때문이지만, 그러한 평의회들은 전쟁으로 와해된 나라에서 기본 생활필수품 생산 보다 많이 생산하기는 불가능 했다.

이일재는 1946 9 공산당에 가입하고, 같은 대구에서 발발한 총파업 투쟁을 이끄는 중요한 구성원이 된다. 점령군 당국이 노동자 투쟁을 진압하면서, 이일재는 남한 빨치산 투쟁에 참가하면서, 1950 다리에 총상을 입는다.

1968 박정희 독재 하에서도 이일재는 지속적인 정치 활동을 하는데, 때문에 체포되고 종신형을 선고 받는다. 투옥 기간 중에 그는 건강에 씻을 없는 피해를 받는데, 그의 얼굴에는 옥중 고문과 고통의 흔적이 여전히 담겨있다. 이일재는 1988 가석방된다. 가석방이 대구에서 즉각적인 그의 정치 활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97 이일재는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된다.

1946년에 청년 노동자가 공산당에 가입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동지 대부분이 의심할 없이 어떠한 용기와 신실함으로 있었을지라도, 그때 한국 전쟁 말기에, 한국의 당은 사실상 러시아와 중국 제국주의의 수단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특히 기괴하고 야만적인 스탈린주의 캐리커쳐였다. 가족의 세습독재였다.

그의 속에 남은 모든 것들을 우리는 애도의 글에 모두 담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역사는 나쁜 원인들의 영향으로 영웅주의로 가득 있다. 그러나 이일재는 80세에 가까웠을 때에도 일생의 투쟁에 의문을 던질 있는 실로 대단한 존재였다. 2002 그는 사회주의정치연합(the Socialist Political Alliance) 활동가가 된다. 새롭게 결성된 단체는 좌익공산주의의 이념을 한국에 소개하고 있었다. ICC 대표단이 2006 8 사회주의정치연합이 조직한 국제 마르크스주의자 대회 참석하기 위해 내한했을 당시, 우리는 이일재 동지를 만났다. 국제 마르크스주의자 대회 토론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문제 - 특히 노동자 투쟁을 위한 조직형태로서 노동조합의 재건이 가능하다-에서 이일재 동지와 의견이 달랐다. 우리는 진정한 국제주의자로서 문제를 분명히 했다. 무엇보다 북한 문제에 대해서, 그는 혐오스러운 정권이라며 어떤 지지도 거부했다.

이듬 (2007), 이일재 동지와 토론할 , 그는 무엇보다 가지 문제에 관심을 표명했다. 첫째는 노동계급의 국제적 단결이고 둘째는 한국에서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한국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방글라데시와 필리핀 이주 노동자들 간의 장벽을 허무는 것이었다. 이일재 동지는 노동조합 조직형태를 이용하는 희망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지만, 둘째 문제 때문에 그가 생각했던 노조와 단절했다. 이일재 동지는 2007 국제공산주의흐름 (ICC) 17 대회에 참석했다. 2008년에는 ICC 대표단과 일본에 동행하기를 희망했다. 애석하게도 그는 악화된 건강 때문에 일본에 가지 못했다.

이일재 동지는 프롤레타리아 대의를 향한 불굴의 투사였으며, 그의 정신은 고난과 투옥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남아있다.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국제주의자로 남아있었다. 이일재 동지는 지난 세월 역경과 투쟁을 통해 지키고자 했던 이념에 질문을 던지면서, 진실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도덕적 용기를 지녔다. 노동계급은 이일재 동지를 잃고서 빈곤해졌지만, 그의 삶의 본보기로 풍부해졌다.

 

 

 

자본주의를 민주화할 것인가 아니면 파괴할 것인가?

‘자본주의를 민주화하자'라는 슬로건이 세인트 파울성당의 점거시 텐트시티 유니버시티 측에서 나타나서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결국은 그 기치가 내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세인트 파울성당, UBS 그리고 다른 모든 곳에서의 점거들이 현사회체제에 불만을 갖고 대안을 모색하는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풍요로운 토론공간을 제공했음을 보여준다. ‘자본주의를 민주화하는 것'은 실제적인 옵션은 아니지만, 점거운동과 그로 인해 생겨난 회합들에 참가하는 많은 사람들의 시각을 반영한다. 부자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도록 만든다면, 은행가들이 보너스를 포기한다면, 금융시장들이 더 잘 통제된다면 또는 국가가 좀더 직접적으로 경제의 운영에 관여한다면 자본주의가 더 인간적으로 되도록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이러한 생각은 반복해서 제기되어왔다.

그러나 자본의 정치가들로부터 유래하는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자본주의가 무엇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알아보는 것을 방해하려는 공허한 잡담, 연막에 불과하다.

자본주의는 사사로운 개인들에 의한 부의 소유로 축소될 수 없다. 그것은 단순히, 훨씬 적은 노력에 비해 훨씬 많은 보상을 받는 은행가나 부유한 엘리트들의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인류문명사에서 한 단계 전체이다. 소수에 의한 다수의 착취에 기반한 일련의 사회들 중에서 마지막 사회이다. 모든 생산이 시장에서 이윤실현욕구에 의해 추동되는 최초의 인류 사회이다. 그래서 모든 피착취자들이 그들의 노동할 능력,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자들에게 팔아야하는 최초의 계급으로 양분된 사회이다. 봉건사회에서 농노들이 그들의 노동이나 생산물을 영주에게 직접적으로 받치도록 무력적으로 강제당했던 반면, 자본주의에서 우리의 노동시간은 더 교묘하게 임금체제를 통해 우리들로부터 뽑아내진다.

그래서, 착취자들이 사적인 보스들로서 조직되어 있건 아니면 중국이나 북한에서와 같이 ‘공산당' 관리들로 조직되어있건 전혀 차이가 없다. 임노동이,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맑스가 썼듯이, "자본은 임노동을 전제로 한다. 임노동은 자본을 전제로 한다"(임노동과 자본)

자본은, 그 본질에 있어서 임노동자계급(실업은 이 계급의 조건의 일부이기에 실업자를 포함)과 착취계급사이의 사회관계이다. 자본은 노동자들에 의해 생산된 소외된 부 - 그들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그들에 대항해 무자비한 적으로서 마주선 힘 - 이다.

자본주의는 위기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자들이 이러한 조정을 통해 이득을 보는 반면 그것을 진정으로 통제하지는 못한다. 자본은 궁극적으로 자본가들의 손에서 빠져나가고 그들을 지배하는 일반적인 힘이다. 이때문에 바로 자본주의의 역사가 경제위기의 역사이다. 20세기초 자본주의가 세계적인 체제가 된 이래, 이 위기는 세계대전의 형태로든 세계대공항의 형태로든 간에 다소 영구적으로 되어버렸다.

그리고 지배계급과 그것의 국가가 어떤 경제정책을 시도하든, 케인즈주의든, 스탈린주의 또는 국가를 등에 업은 ‘신자유주의'든 간에, 이 위기는 더 심화되고 해결이 더 불가능해졌을 뿐이다. 경제의 막다른 골목으로 인해 절망에 내몰린 채, 지배계급의 상이한 분파들과 이러한 분파들이 조직된 여러 민족국가들은 무자비한 경쟁, 군사적 충돌 그리고 환경파괴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고, 이로 인해 그들은 이윤과 전략적 잇점의 사냥에서 점점 덜 ‘도덕적'으로 되고 점점 더 ‘약탈자'의 면모를 띨 수 밖에 없다.

자본계급은 침몰하는 선박의 선장이다. 지구에 대한 그것의 명령권을 박탈할 필요성이 이렇게 절박한 적은 결코 없었다.

그러나 인간의 소외에서 그 최극점인 이 체제는 또한 새롭고 진정으로 인간적인 사회의 가능성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변모시켜 모두의 이득을 위해 사용될 수 있는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켰다. 그래서 화폐나 시장의 매개없이 직접적으로 소비를 위해 조정될 수 있는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세계를 통합했거나 적어도 그 진정한 통합을 위한 전제들을 마련했다. 그래서 전 체계안에서 민족국가들을 그들간의 끊임없는 전쟁들과 함께 제거하는 것이 실행가능하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세계인류공동체라는 오랜 꿈을 필요성이자 가능성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를 공산주의라 부른다.

피착취계급, 즉 임노동계급은 그것이 맞서있는 현체제에 관한 환상들에 빠져드는데 어떤 관심도 없다. 그것은 잠재적으로 이 사회의 무덤을 파는 자이자 새로운 사회의 건설자이다. 자본을 개량하거나 ‘민주화'하는 것에 대한 생각들은 이러한 선명성에 많은 장해물들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자본주의를 더 인간적으로 만드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은 오늘날 민주주의를 찬성한다고 주장하고 사회가 더 민주주의적으로 되기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관념을 그것의 액면가대로 받아들일 수 없고,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어떤 추상적인 관념으로 생각한다.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에도 역사가 있다. 정치체제의 하나로서의 고대 아테네에서의 민주주의는 노예제 그리고 여성배제와 공존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하에서 의회민주주의는 경제적인 부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사고 (그리고 투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도구들까지도 독식한 소수에 의한 권력독점과 공존할 수 있다.

자본주의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사회를 반영하는데, 이는 다시 우리 모두를 시장에서 경쟁하는 고립된 경제단위들로 만들어버린다. 이론상으로 우리 모두는 동등한 여건에서 경쟁하지만, 실제로는 부가 점점 더 소수의 손안에 집중된다. 우리는 개개 시민으로서 투표소에 들어갈 때 고립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실제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것으로부터도 거리가 멀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스페인, 그리스 및 미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점거와 공공집회운동으로 활성화된 논쟁들에서 두가지 입장들사이에서 다소 지속적인 대립이 있어 왔다. 한편으로 현체제를 좀 더 민주적으로 만드는 것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무바라크와 같은 폭군을 제거하고 의회제도를 도입하거나 또는 기성의 정당들에 압력을 행사해서 그들이 거리의 요구들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게 만든다는 목표에서 멈춰버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비록 지금 소수이긴 하지만,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집회들에서 스스로를 직접적으로 조직할 수 있다면 왜 의회가 필요한가? 의회선거가 뭔가를 바꿀 수 있는가? 우리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도록 공공광장에서뿐만 아니라 들판에서, 공장에서, 작업장에서 집회와 같은 형식들을 사용할 수는 없을까?

이러한 논쟁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1차 세계대전 말 러시아혁명과 독일혁명 당시에 있었던 논쟁들을 반향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전쟁터에서 수백만을 살육함으로써 인류를 위해 유용한 역할을 해내기를 멈췄음을 이미 보여주었고, 이 체제에 대항해 수백만이 일어났었다. 그러나 어떤이들은 그 혁명들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상 더 나아가서는 안된다고 말했던 반면, 그 당시 당상수에 달했던 다른 이들은 의회는 지배계급에 속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집회를, 즉 공장위원회들을, 소비에트들(선출되고 소환될 수 있는 파견위원들 가진 총회에 기반한 조직들)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 조직들이 권력을 잡게 될 것이라고 그러면 그 권력은 우리의 손안에 남아 있을 수 있고 이는 사회의 완전한 재조직화의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혁명들이 고립과 내전 그리고 내부 퇴행으로 인해 파괴되기 전 아주 잠깐 동안, 노동자계급의 기관, 소비에트는 러시아에서 권력을 장악했다.

그것은 인류에게 전대미문의 희망의 순간이었다. 그것이 패배당했다는 사실이 우리를 막을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패배로부터 그리고 과거의 실수로 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민주화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괴물같고 파괴적인 힘이어서 우리가 그것을 파괴하지 않은 다면 세계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괴물을 자본주의 자체의 제도들을 이용해서 제거할 수 없다. 우리는 새로운 조직들이 필요하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고 우리의 유일하게 진정한 희망으로 남은 혁명적 변화를 향하게 할 수 있는 조직들이 필요하다.

Amos 25/1/12      

제국주의적 꼼수, 긴축조치, 억압의 이야기

제국주의적 꼼수, 긴축조치, 억압의 이야기

2012 런던 올림픽이 한창이다. 이에 따라 한국의 모든 언론들 역시 올림픽 메달 소식과 오심 소식을 전하느라 바쁘다. 사람들의 시선이 올림픽에 집중되어 있는 동안 ‘컨택터스’라는 경비업체는 SJM 노동자들에게 극도의 폭력을 가했고 이 사실을 보도한 언론은 많지 않았다. 올림픽 이슈가 다른 중요한 사안들을 덮어버리는 일은 한국에서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 올림픽이 진행 중인 영국도 예외가 아니다. 이에 사노신은 ICC(국제공산주의흐름)의 런던올림픽과 관련한 기사를 번역해서 싣는다. 이 기사는 6월 12일에 작성되었다.
본 기사의 내용은 본지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글:ICC
번역:사노신https://sanosin.jinbo.net


[국제][번역]런던 올림픽
제국주의적 꼼수, 긴축조치, 억압의 이야기

2012 런던 올림픽이 한창이다. 이에 따라 한국의 모든 언론들 역시 올림픽 메달 소식과 오심 소식을 전하느라 바쁘다. 사람들의 시선이 올림픽에 집중되어 있는 동안 ‘컨택터스’라는 경비업체는 SJM 노동자들에게 극도의 폭력을 가했고 이 사실을 보도한 언론은 많지 않았다. 올림픽 이슈가 다른 중요한 사안들을 덮어버리는 일은 한국에서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 올림픽이 진행 중인 영국도 예외가 아니다. 이에 사노신은 ICC(국제공산주의흐름)의 런던올림픽과 관련한 기사를 번역해서 싣는다. 이 기사는 6월 12일에 작성되었다.

본 기사의 내용은 본지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올해 역대 세 번째 런던 올림픽이 개최된다. 각각의 런던 올림픽들은 저마다 당대 자본주의 사회의 변화하는 상황을 보여주었다.
강대국의 지배
1908년 올림픽은 원래 로마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1906년 4월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는 바람에 나폴리를 재건하는데 재원을 쏟아 부아야 하게 되었다. 영국은 세계 육지의 약 1/4, 인구의 1/5를 지배하고 있는 강대국으로서 급작스럽게 올림픽 개최를 떠맡게 되었다.
10개월 후, 영국은 재정과 부지 마련에 성공하여 최신식 경기장을 지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1908년 올림픽은 약 15,000 파운드를 지출해서 21,377 파운드를 벌어들였다. 첫 번째 런던 올림픽은 흑자를 달성했다는 면에서 성공적이었다. <더 타임즈>(1908년 7월 27일자)는 “모두가 바란 완벽한 조화는 심판의 판정에 대한 몇몇 유감스러운 논란, 항의, 반대로 인해 훼손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신문들이 폭발적으로 국민감정을 쏟아냈으며 각국 국민들은 비난에 비난으로 맞섰다.”며 애석해했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1905년 러일전쟁, 1차 세계대전을 불러일으킨 그 모든 적대감에서 알 수 있듯이 제국주의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유일한 방법이 되었을 때 국가 간 갈등이 증폭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은 아니다.
1908년 올림픽에서 모든 심판은 영국인이었으며 이에 대해 미국팀은 하루에 한 번꼴로 불만을 표했다. 갈등은 개막식에서 미국이 영국 국왕에게 국기로 경례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런 갈등은 올림픽 내내 계속되었다. 줄다리기 종목에서 미국 팀은 영국대표로 나온 리버풀 경찰 팀이 신고나온 스파이크 화에 불만을 표시했다. 항의가 묵살되자 미국 팀은 경기를 포기했다. 400미터 육상 결승에서는 미국 선수가 영국 선수를 팔꿈치로 밀쳤다는 이유로 영국 심판들이 재경기를 결정하기도 했다. 미국은 재경기를 보이콧했다. 결국 이 올림픽에서 영국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메달을 땄다. 22개국 2000명의 선수들이 출전한 가운데 영국대표팀은 역대 올림픽 출전 사상 가장 많은 146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이에 앞서 <더 타임즈>(1908년 7월 13일자)는 “올해 올림픽에서 우리나라의 꼼수가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상대국 경쟁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 선견지명을 발휘했다.
긴축 게임

1948 런던 올림픽 공식포스터    
1948년 두 번째 런던 올림픽이 열리기까지 40년 동안, 영국 제국주의의 위치는 많이 변했다. 영국·러시아·미국의 제국주의 연합은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이제는 미국이 서구에서 지배국의 위치를 차지했고 영국은 부차적인 지위로 떨어졌다.
영국은 올림픽 개최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경제는 초토화되었고 (식량, 휘발유, 의류 등의) 배급은 전시보다 더 혹독해졌다. 실업률은 높았으며 노숙자가 만연했고 노동자들의 파업이 잇따랐다. 이 때문에 영국은 마셜 플랜을 통한 미국의 기금지원이 절실했으나 올림픽 개최가 자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올림픽 개최를 겨우 한 달 남겨둔 시점에서 런던 부두노동자들의 비공인 파업이 터졌다. 새로 징집된 부대가 항구로 파견되었다. 영국정부가 파업을 탄압하기 위해 1920년에 제정된 비상대권법(Emergency Powers Act)에 따른 권한을 행사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긴축조치를 강제하는 전후 노동당 정권에 맞서 노동자가 투쟁한 사례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올림픽 준비에는 최소한 2년이 걸렸다. 새로운 경기장이 건립되지는 않았지만 웸블리 경기장으로 이어지는 도로 건설 등 몇몇 건설 프로젝트에서 독일 전쟁포로들이 강제 노역을 했다.
1948년 런던 올림픽이 긴축 올림픽으로 알려진 데는 이유가 있다. 경기 참가자들에게는 광부들에게 지급되는 수준의 배급이 허용되었으나 그래도 각국은 필요한 식량을 직접 가져오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를 받았다. 남자 선수들의 숙소는 영국 공군 캠프였고 여자 선수 숙소는 런던 대학교였다. 영국 선수들은 필요한 복장과 장비를 자신들이 직접 사거나 만들어야 했다.
59개국 4000명의 선수들이 참여한 1948년 올림픽 개최에는 (예산보다 적은) 732,268 파운드가 들었고 761,688 파운드를 벌어들였다. 다소 이익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전체 메달 개수를 합산했을 때 영국은 12위에 그쳤다. 올림픽이 시작되기 전부터 모든 사람들은 미국이 1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채와 억압

몇몇 나라들은 올림픽 개최를 통해 본전치기 또는 흑자를 남겼다고 주장한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대한 중국의 미심쩍은 주장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최근 대부분의 개최지들에게 올림픽은 재정적 재앙이었다. 몬트리올의 부채 규모는 너무나 커서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30년이 지나서야 모든 부채를 청산할 수 있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원래 예산은 16억 달러였다. 그러나 투입된 공적자금은 160억 달러에 달했으며, 거의 사용되지 않고 방치된 경기장들의 유지와 보안을 위해 지금도 수백만 달러가 소요되고 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 그리스 경제위기가 커지는 데 영향을 준 요인 중 하나란 점은 명백하다.
처음 2012년 런던올림픽의 예산은 23억 7천 파운드였다. 그러나 올림픽을 유치한 지 7년 후, 최종 비용이 얼마나 될지에 대해서는 최초 예산의 4배에서 10배까지 다양한 추정치가 나오고 있다. 현재 영국정부는 93억 파운드의 예산 중에서 4억 7천 6백 파운드를 사용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아직 전혀 시작되지도 않은 여러 행사들의) 운영경비를 고려한다면 적어도 122억 파운드는 소요될 것이 분명하다. 물론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지출 비용을 만회할 방안을 아무것도 고민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런던이 물가가 높은 도시라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입장료, 음식, 음료 등 올림픽 경기장과 관련한 모든 것들이 터무니없이 비싸다. 공식스폰서의 이해는 매우 엄격하게 보호되고 있다. 매복마케팅 광고는 엄하게 규제되고 있다. 매복마케팅이란 공식스폰서가 아닌 회사명이 들어간 물품을 노출시키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개인 복장의 소품들까지 모두 포함된다.
하지만 2012년 런던 올림픽이 신기록을 경신할 종목은 무엇보다 공권력에 의한 억압 종목일 것이다. 가장 바쁜 날들에는 경찰 12000명이 근무를 서고, 군인 13500명이 대기할 것이다. 이는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된 영국군 9500명보다 많은 인원이다. 사설경비원 13,300명을 고용할 계획도 나와 있다. 사설경비원들은 며칠 동안 군인들과 같이 훈련할 것이다. 관련 경비업체 대변인은 “이번 경기장 훈련은 부분적인 목표는 두 집단 사이에 경호의 ‘질을 동등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관람객들은 군인과 사설경비대로부터 같은 질의 경호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파이낸셜타임즈> 2012년 5월 24일자)”라고 밝혔다.
이 모든 억압의 최정상에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올림픽 주요 경기장 근처 6개의 주거지역에 고속 지대공미사일 시스템을 설치하려는 계획이 놓여있다. 아마도 이는 인구가 밀집한 주거지역 위에서 비행기를 격추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전문가들’은 남부유럽 아나키스트들이 조직적 활동을 수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해왔다. 그러나 이 전문가들은 “공격 계획에 대한 구체적 낌새는 아무것도 없다(<텔레그래프지> 2012년 6월 21일자)”는 말도 덧붙여 놓았다.
런던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영국정부와 함께 모든 보안방안들을 다 고려해본 것 같다. 내무부는 실제로 다 진행하진 못한다 할지라도 참가선수, 심판, 노동자, 언론사 직원 등 올림픽과 관련된 38만 명 전부에 대해 보안 검사를 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승인된 차량만 다닐 수 있는 특별한 올림픽 차선도 마련될 예정이다. 이 차선을 침범하는 사람은 135파운드의 벌금을 물게 된다. 또한 올림픽 경기장 입장 시에 소지품 검사를 받아야 하고 물 반입은 금지되어 있다. 또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 어떠한 방식으로든 올림픽 행사 사진을 공유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이번 런던올림픽에는 200개 이상의 나라들이 참가하게 될 것이고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지금까지 그래 온 대로 애국주의 광란을 위한 판을 깔아주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다. 코카콜라, 맥도날드, 파나소닉, 삼성, 비자카드, 제너럴 일렉트릭, P&G, BMW, EDF, UPS 등등 자본가 패거리들에게 광고 기회를 주기 위해서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애국주의와 상업주의는 근대 올림픽의 흔한 메뉴가 되어버렸다. 한편 2012년 런던올림픽의 준비 도중, 올림픽 경기장이 있는 뉴엄(Newham) 지구 의회는 500가구를 150마일(약 240km) 떨어진 스톡-온-트렌트(Stoke-on-Trent)로 ‘이주(relocate)’시키려 하고 있다. 지역의 건물주들이 엄청나게 오른 가격에 세를 놓을 수 있도록 세입자들이 쫓겨나고 있다. 올림픽은 젊은이들에게 영감을 주어야 한다고 한다. 뉴엄은 잉글랜드와 웨일즈 전역을 통틀어 돌도 지나지 않은 신생아의 비율이 가장 높으며 저연령층이 가장 많은 인구구조를 가지고 있다. 가족의 평균 규모가 가장 크고, 런던에서 질병율과 조기사망률이 가장 높으며 복지지원금을 받는 인구 비율 역시 가장 높다. 뉴엄의 아이들은 올해 올림픽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지만 이 아이들의 미래가 스펙터클한 메달 전쟁을 통해 더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토론 문화: 계급투쟁의 무기

토론 문화”는 노동운동이나 ICC(국제공산주의흐름)에게 이상 새로운 주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21세기 이후 역사의 변화를 겪으면서 우리 조직은 문제를 보다 자세히 재검토하고 성찰해야 절실한 필요성을 느꼈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두가지 주요 발전은 새로운 혁명세대의 등장과 21세기 초반에 겪었던 내부 위기였다.

새로운 세대와 정치적 대화

  새로운 혁명세대와의 접촉은 ICC 외부세계와 소통하고 정치적 대화능력을 더욱 발전시키도록 계기가 되었다.

  인류역사의 고리 안에서 저마다 하나의 사슬을 구성하고 있는 세대들은 가지 중요한 임무에 직면하고 있다. 첫째, 이전 세대가 남긴 유산을 이어받고, 둘째, 이들 고유의 경험에 기반하는 유산들을 세대에서 더욱 풍요롭게 하며, 셋째, 다음 세대가 자기 세대보다 더욱 발전할 있도록 이들 유산을 다시 전수하는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이 임무들은 특별한 도전이다. 이는 노동운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이다.  구세대들은 제공할 수있는 자신들의 경험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역시 투쟁과정에서 상처와 트라우마를 얻었고 패배와 실망을 겪은 있다. 따라서 이들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영속적으로 집단투쟁을 하기 위해서는 세대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자각했다(1). 이를 위해서는 다음 세대의 열정과 에너지, 이들이 제기하는 새로운 문제점,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신세대들의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세대가 서로를 필요로 할지라도 세대 간의 통합능력은 저절로 얻어지는 아니다. 사회가 전통적인 자연경제에서 멀어질수록 자본주의는 생산력과 사회전체를 더욱 빠르고 집요한 방식으로 “혁신”하고, 세대와 다음 세대의 경험은 더욱 차이가 커진다. 이처럼 최고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경쟁체제는 모두에 대항한 각자의 투쟁 속에서 세대들간의 반목까지도 유발시킨다.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우리조직은 세대 간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토론 문화”가 얼마나 특별한 의미를 지닌 주제인가를 깨닫게 계기는 작업의 준비과정에서 보다는 실제로 직접적인 새로운 세대들과의 만남을 통해서이다. 우리는토론 문화”에 68세대의 경우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세대를 만나게 되었다. 노동자계급내의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는 2006 고용의 “불안정화(precarisation)”에 반대하는 프랑스 대학생 고교생들의 집단 운동이다. 과정에서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이들이 집회 때마다 최대한 자유롭고 넓은 토론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60년대 학생운동은 정치적 대화에 무능했다는 점을특징으로 있다. 같은 차이점은 바로 오늘날 학생집단이 40 전에 비해 훨씬 더 프롤레타리아화() 됐음을 표현한다. 넓고 심도 있는 토론은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중요한 특성이자 1968 프랑스와 1969 이탈리아 노동자 집회를 특징짓는 요인이다. 그러나 2006년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은 투쟁을 하는 있어 젊은 세대들이 나이든 세대들과 소통을 하며 그들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열의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60년대 말에 있었던 학생운동, 특히 독일 학생운동과는 극명히 다른 차이점을 드러낸다. 당시 시대정신 상태를 가장 희화적으로 표현한 슬로건 중의 하나가 바로 30 이상의 사람들은 집단 수용소로!”이다. 실제로 이러한 생각은 서로에게 야유를 보내고 “라이벌”모임들을 폭력적으로 해산시키는 등의 행위로 구체적으로 표출됐다. 여기에 심리적 수준에서, 독일뿐만 아니라 이태리에서 저항의 한 형태로서 테러리즘이 발전하게 되는 그 뿌리들 중 하나가 놓여 있다. 노동자계급의 세대간 연속성의 단절이 이 문제의 뿌리들 중의 하나였다. 왜냐하면 세대 간의 관계는 이미 오래 전부터 대화능력을 단련시키는 특별한 토대였기 때문이다. 68혁명의 투쟁가들은 자기 부모세대를 자본주의에 “팔린” 세대, 혹은 이태리와 독일의 경우처럼 전체주의와 전범의 세대로 간주하였다. 자식들만큼은 자기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기만을 바라며 1945 이후 계속된 끔찍한 착취를 견뎌냈던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3세계를 착취하며 살아가는 “기생충”이라고 자기 자식들이 비난할 쓰디 실망감을 맛봐야만 했다. 그러나시대를 살았던 부모세대가 대화 능력을 크게 상실했거나 이를 가져본 적도 없었던 것은 부인할 없는 사실이다. 이들 세대는 2 세계대전과 냉전시대으로 또한, 전체주의적,  스탈린주의적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적 반혁명으로 인해 상처와 충격을 입었다.

  반면 2006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은 새롭고 풍요로운 무언가의 출현을 예고했다(2). 새로운 세대의 이러한 관심은 이미 전부터 노동자계급 내 혁명적 소수들(revolutionary minorities)에 의해  예고되었었다.  이 소수들은 정치무대에 등장하자마자, 토론을 거부하는 태도와 분리주의를 그 나름의 논리로 강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내세운 처음의 요구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되었다. 첫째, 토론은 사치품이나 장식요소로서가 아니라 절대적인 필요성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둘째, 토론에 참여하는 이들은 다른 참가자들을 진지하게 대하고 그 의견을 신중히 듣는 것을 배워야 한다. 셋째, 토론의 무기는 논증이지 강제적인 힘이나 도덕적, 또는 “이론적” 권위에의 호소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자 진영과 관련해서, 이 혁명적 소수들은 일반적으로 (또한 매우 정당한 이유로) 현존하는 그룹들 사이에 우애적인 토론이 부재하는 현실에 크게 놀라며 이를 비판했다. 또한 이들은 마르크스주의는 신세대가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받아들여야하는 일종의 도그마라는 생각을 단호하게 거부했다.(3).

  한편, 우리 조직은 새로운 세대들이  ICC 대해 보이는 반응에 놀랐다. 우리의 공개토론모임에 참석했던 새로운 동지들,  ICC 교류를 시작한 세계로부터의 공감자들, 함께 토론할 기회가 있었던 다른 그룹과 써클들, 그 모두는 ICC의 강령적 입장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동, 특히 토론방식에서 ICC프롤레타리아적 본질을 알아볼 수 있었다고 우리에게 차례 말했다.

  토론에 관한 새로운 세대들의 깊은 관심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우리는 이것이 1968 당시보다 더욱 심각하고 가중된 자본주의의 역사적 위기에서 도래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은 자본주의에 대해 철저히 비판할 것은 물론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파악할 것을 요구한다. 부르주아 개인주의의 가장 부식적인 영향들 하나는 토론 능력을 파괴한 방식, 특히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는 능력을 파괴한 방식이다. 대화 대신 “잡담”이 난무하고 (부르주아 선거 캠페인에서 있듯이), 가장 소리로 떠드는 이가 승자가 된다. 토론 문화는 인류의 미래를 짊어질 유일한 계급,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쟁무기인 의식을 발달시키기 위한 중요수단이다. 또한, 이들이 고립과 조급함을 극복하고, 통합된 투쟁을 있게 도와주는 유일한 수단이다.

오늘날 이러한 관심의 또 다른 측면은 스탈린주의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이다. 오늘날 국제주의적 입장을 획득하려 애쓰는 수많은 투쟁가들은 직접적으로 어느 한 좌파 그룹 출신이고 좌파의 영향을 받았다. 이 그룹은 사회주의라는 옷을 입은  쇠퇴적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행동이라는 캐리커쳐를 나타낸다.  이들은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것은 “부르주아 자유주의”라고 믿도록 정치적 교육을 받았다. “좋은 공산주의자”는 “입을 다물고” 자신의 의식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자라고 그들은 배웠다. 반혁명의 이러한 소멸해가는 산물의 영향들을 떨쳐버리고자 결심한 동지들은 이를 위해서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뿐만 아니라 정신구조까지 버려야 한다는 것을 더욱 이해하게 됐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운동에서 있어서 그 전통의 유기적 연속성에 반혁명이 유발한 균열이 생기면서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전통 하나를 재확립하는데 기여하고 있다.(4).

조직위기와  만장일치성(monolithism)의 경향

  ICC 토론 문화를 다시 성찰할 수밖에 없었던 번째 핵심 이유는 21세기 초반에 나타났던 조직의 내부적 위기 때문이다. 위기는 우리 조직에서 동안 결코 없었던 가장 추악한 행동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ICC 창설 이후 처음으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멤버들을 제명해야만 했다(5). 내부위기가 일어났던 초반에는 중앙집권이라는 조직 원리에 대한 견해 차이와 이에 따른 여러 어려움들이 프랑스 지부에서 나타났다. 이러한 유형의 견해 차이 자체는 조직의 위기로 이어진 질 이유가 전혀 없었고 그 원인도 아니였다. ICC 위기를 초래한 것은 내부적인 토론의 거부, 특히 서로를 고립시키고 헐뜯는, 자신과 의견을 달리 하는 동지들을 공격하는 술책이었다.

  이후 우리 조직은 이러한 위기와 분열의 근본적인 원인을 파헤칠 것을 결심하였고 이에 대한 조사를 실시해서 몇몇 기사들을 공개했다(6). 우리가 도달한 결론 중의 하나는 동안 겪었던 모든 분열에는 만장일치성의 경향이 중요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견해 차이가 생기자마자 이미 몇몇 조직원들은 이상 다른 이들과는 함께 일할 없다고 단언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ICC 스탈린주의 조직으로 변질되어가고 있거나 조직 자체가 타락해 가는 중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위기는, 만장일치가 요구되지 않는 (non-monolithic) 조직 안에서라면 대부분 전혀 문제 없이 존재할 수 있고, 분열이 생기기에 앞서 함께 논의되고 규명되어야할 의견 차이와 관련해서 발생하고 말았다.

  이러한 만장일치성 경향이, 특히 “ 좌파공산주의 이태리 분파(Italian Fraction of the Left Communism)”의 전통들에 기반을 두고 있는 조직에서 반복적으로 출현한 점은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태리 분파는  근본적 원칙에 관한 어떤 의견 차이에 있어도 토론을 통해 심도 깊고 통합적으로 문제점을 명확히 밝히는 것이 조직적 분열에 앞서야 한다는 것을 항상 옹호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ICC “좌파공산주의 이태리 분파(Bilan이라고도 함)”와 “프랑스좌파공산주의(GCF)”의 조직적 전통을 승계하는 유일한 좌파 공산주의 조직이다. “좌파공산주의 이태리분파(이하 이태리분파)”는 2 세계대전 이태리에서 창립된 국제 공산당(PCint)에서 유래하는 다른 그룹들과는 달리 스탈린주의의 반혁명에 대한응으로 출현한 “좌파공산주의”의 다른 국제적 흐름들, 특히 “독일 좌파공산주의”와 “네덜란드 좌파공산주의”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인정하였다. 이태리분파는 집단들을 “무정부-자연발생주의자(anarcho-spontaneist)” 또는 노동조합주의자 (syndicalist)”라고 배척하기 보다는 이들로부터 배울 있는 것들은 모두 받아들였다. “평의회주의(councilist)” 경향으로 된 것들에 대해 이태리분파가 가한 주된 비판은  그것이 제 2 인터내셔널의 공헌들 특히 볼셰비즘의 공헌들을 인정하길 거부한데서 나타난 종파주의에 대해서 였다(7). 그렇게 해서 이태리분파는 반혁명의 시대에서 계급의식은 집단적으로 발달하며 어떤 정당이나 어떤 전통도 독점권을 주장할 없다는 마르크스주의 입장을 유지할 있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의식이라는 것이 우애적, 공개적, 국제적인 토론 없이는 발전할 없다는 것을 있다(8).

  그러나 이러한 근본적인 이해는 ICC가 계승한  기본 유산의 일부이긴 하지만 실천에 옮기기에 쉽지 않다. 토론 문화는 부르주아 사회의 흐름에 대항해서만 발달할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경향은 어떤 생각들을 명확히 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 조작, 다수의 표를 얻으려는 싸움(부르주아 민주주의 선거가 보여주는 서커스가 가장 좋은 예다)등이다. 그래서 이러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프롤레타리아 조직에 침투할 경우 위기와 쇠퇴의 씨앗을 늘 품고 있게 된다. 볼셰비키 정당의 역사는 이를 명백히 보여준다. 혁명의 첨병이었던 이들에게 있어 활발하고 때로는 격렬하기까지 토론은 당의 주요 원동력이었다. 반면에 1921 크론슈타트 학살사건 이후 진정한 분파(fraction)들의 구성이 금지되었는데 이것은 볼셰비키 쇠락의 영구적인 징후이자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미 국제공산당(PCint) 창립 과정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 여러 대립적 입장들 “평화적 공존”(다시 말해 “토론의 부재”)이라는 관행, 또는 보르디가(Bordiga) 그의 추종자들에 의한 만장일치라는 미덕의 이론화는 20세기 중반에 있었던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패배라는  상황을 통해서만 이해될 있다.

혁명조직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주요 임무인 계급의식의 발달과 확장을 완수하려면, 집단적이며 국제적이고 우애적이며 공개적인 토론 문화의 배양은 필수불가결하다. 물론 이것이 정치적 성숙(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인간적 성숙) 요구하는 것은 사실이다. ICC 역사는 이러한 성숙함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진보의 산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 성숙의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이들이 바로 신세대들이다.

 

역사 속에서의 토론의 문화

  토론 능력은 노동운동의 핵심적인 특징이나, 노동운동 자체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은 인류의 가장 훌륭한 업적을 흡수하고 자신의 필요에 맞춰 이들을 채택하는 능력을 지녔다. 또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훌륭한 장점들을 나은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근본적으로 토론 문화는 인간의 뛰어난 사회적 본질의 표현이며 특히 언어사용으로 인해 나타난 산물이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다른 몇몇 동물들도 정보교환의 수단으로써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인간은 과학과 논리의 발달로 함께 토론하는 능력을 발전시키고, 특히 예술의 발달과 관련된 감정이입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알아간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들과 구별된다.

  인간의 토론능력은 어느 갑자기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며 계급사회 이전부터 존재했고 인류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엥겔스는 호머(Homer)시대의 그리스 사회와 게르만 초기 부족사회, 북미 이로쿼이(Iroquois)족의  부족 총회(general assembly) 역할을 언급하면서, 특히 이로쿼이족의 토론문화를 칭송하였다(9). 19세기 루이스 헨리 모르간(Luis Henri Morgan) 그의 동료들 그리고 이후 다른 학자들이 행한 이들에 대한 연구들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우리는 분야에서 초기의 확실히 가장 결정적인 발달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

  반면에, 우리는 철학 과학적 사고의 시초가 “신화”와 “순진한 사실주의”라는 모순적이면서도 분리될 수 없는 한 쌍을 이루는 고대의 요소가 의문시 됐을 때 번영하기 시작했음을 알고 있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가지 단순한 방식은 직접적인 경험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오류에 빠져있었다. 고대인들이 실제경험에 근거하여 형성한 사고는 천성적으로 종교적일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가 어떻게 구성됐는지는 알지 못한 꿈속에 나타나는 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던 아주 시대부터, 자신들의 사고와 감각이 어떤 육체적 활동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에 있다가 죽음의 순간 육체를 떠나는 어떤 특별한 영혼의 활동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죽음이 찾아 영혼과 외부 세계의 관계에 관한 무언가를 만들어낼 필요성을 느꼈다. 만약 죽음의 순간에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된다면 그 영혼 자체의 개별적인 죽음을 상상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영혼불멸 개념이 생겨났다.  인류발달의 이 단계에서 이 개념은 어떤 위안을 위해서 생겨난 것이 전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없는 운명으로서 생겨났다.  특히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영혼 불멸을 불행으로 여겼다.(10)

바로 이러한순진한 사실주의”라는 체계 안에서 문화와 생산력의 매우 느린 발전의 첫걸음이 시작됐다. 마법적 사고(magical thought)는 어느 정도의 심리적 지혜를 지니고 있으면서 불가해한 현상을 설명하고 그렇게 해서 공포를 제한하는 것을 가장 최우선의 임무로 여겼다. 이 두가지 즉, 순진한 사실주의와 마법적 사고는 인류 발전에 중요하게 공헌했다. 하지만, 순진한 사실주의가 유물론 철학과 특별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거나 유물론 철학이 순진한 사실주의에서부터 시작되어 발전했다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대중의 의식 속에는 변증법의 오래된 가정(postulate) 하나, 즉 극과 극은 통한다라는 가정이 전해져 오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공상적 정신과 고지식함, 미신의 극한 점을 찾을 때, 독일 자연철학의 경우에서와 같이 객관적 세계를  자신의 주관적 사고의 틀에 강제로 밀어넣어 이해하려  노력하는 과학적인 방향에서 찾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방향에서 즉, 오로지 경험만을 중요시 하고 관념을 극도로 경멸함으로써 무모함에 있어 가장 멀리까지 나아간 그 곳에서 찾으면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학파가 영국에서 지배적이다.”(11)

  엥겔스가 지적했듯이 종교는 마법적 세계관에서 생겨났을 뿐만 아니라 순진한 사실주의에서도 출발했다. 순진한 사실주의는 처음으로 대담하게 세계를 일반화하여 바라보았고, 그럼으로써  당연하게  권위적 성격을 획득했다.

  예를 들어, 초기 농경 공동체들은 농사를 지으려면 비가 필요하다는 것은 곧 이해했으나 정작 비를 내리게 하는 조건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들이 비의 () 만들어 것은 선물이나 숭배를 통해 자연의 변화에 영향을 있을 거라 생각하며 스스로 안심하고자 만든 창조적 행위이다. 자신의 생존을 확고히 하기 위해 의식의 발전에 기대를 (species)이 바로 호모 사피엔스이다. 이들은 일찍이 존재하지 않던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바로 낯선 것에 대한 무력한 공포가 그것이다. 미지(未知) 것에 대한 설명은 어떤 의심도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필요로부터 가장 발전된 표현으로서  계시종교들(religions of revelation)이 출현했다. 세계관의 감정적 기반 전체는 믿음이지 지식이 아니다.

  순진한 사실주의는 이 똑 같은 동전의 다른 면에 불과하며 일종의 초보적인 정신적 “분업(division of labour)”이다. 즉각적이고 실제적인 의미에서 설명할 없던 모든 것은 당연히 마법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게다가 실제적 이해 자체는 원래 애니미즘 세계관이었던 종교적 세계관에 기반을 둔다. 여기서 모든 것은 물신(物神)화된다. 인간이 의식적으로 생산하고 재생산할 수 있는 과정들조차 우리의 의지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인격화된 힘의 협력에 의해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세상에서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로서 토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없다. 2,500 , 새로운 특성 하나가 종교와 “상식(common sense)”이라는 쌍둥이에게 직접적으로 도전하며 나타났다. 특성은, 전통적인 사고방식이 자신의 반대방향으로 전환했다는 의미로 볼 때, 전통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 발달하였다. 따라서 예를 들어 중국에서 있는 여성과 남성의 원리들 사이의 극성 사상, 즉 음양(陰陽)사상과 같이, 계급사회의 출현에 앞서 존재했던 초기 변증법적 사고는 과학과 철학, 유물론에 근거를 비판적 사고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우리가 토론 문화라고 부르는 것의 출현 없이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리스어로 변증법은 대화, 혹은 토론을 의미한다.

  무엇이 이러한 새로운 접근법을 가능케 했을까?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사회적 관계와 지식  세계의 확장 덕분이었다. 엥겔스가 즐겨 말했듯이 상식은 자신의 안에 머물러 있을 때는 강하고 힘센 소년이지만 세상으로 모험을 떠나는 순간 온갖 실패와 환멸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종교는 공포를 경감시키는 능력에 있어서 자신의 한계를 드러냈다. 사실상 종교는 공포를 없애는 대신 그저 밖으로 던져버리기만 했었다. 이 메커니즘을 통해 인류는 다른 자기 방어 수단이 없던 그 순간에 그렇지 않았다면 짓눌림을 당하고 말았을 그 공포에 대적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인류는 그 자신의 공포로부터 그것을 지배하는 부가적인 힘을 만들어냈다.

  여전히 설명 불가능한 것을 “설명”하는 것은 진정한 탐구의 포기를 의미한다. 그래서 바로 여기에서 종교와 과학 사이의 충돌, 혹은 스피노자가 말했듯이종과구 사이의 충돌이 일어난다.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은 원래 종교에 반대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는 이미 신비주의적 세계관에서 탈피했었고, 그의 제자인 아낙시만드로스는 자연이 자연 자체로부터 설명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은 순진한 사실주의에 대항한 전쟁선포이기도 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물의 본질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연은 숨기를 좋아한다”라고 말했고, 마르크스는 “사물의 본질과 겉모습이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12) 공언했다.

  이러한 새로운 접근은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신앙과 편견, 전통에 도전했다. (독일어로 신앙(Glaube)과 미신(Aberglaube)은 연관된  단어이다). 이들에 반대되는 개념이 바로 이론과 변증법이다. 얼마나 모든 이론적 사고가 경멸될 지언정 이들 없이는 자연의 사실 사이가 연관될 수 없고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가 이해될 수는 없다.(13)

  사회적 교류의 증대는 물론 생산력 발전과 연계되어 있었다. 따라서 예를 들어 기존 사고방식들의 부적절함과 같은 문제점이 드러났을 이를 해결할 있는 수단도 함께 등장했다. 자신감의 증대, 특히 인간 사고력의 증대가 바로 그것이었다. 과학은 의혹과 불확실함의 존재를 받아들일 능력과  준비상태가 있을 때에만 비로소 발전할 있다. 종교와 전통의 권위와는 반대로 과학의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교환할 가능성뿐만 아니라 그 필요성이 생긴다.

  지식의 지배라는 주장은 (가장 넓은 문화적 의미에서의) 생산력이 어느 정도의 성숙도에 이르렀을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음은 분명하다. 지식의 지배는 예술, 교육, 문학, 자연관찰, 언어, 모든 것이 상응하게 발전하지 않고서는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이것은 역사의 특정 단계에서 계급사회와 물질적 생산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운 지배계층의 출현과 나란히 진행된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들이   새롭고 독립적인 접근을 자동적으로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이집트인들과 바빌로니아인들은 그들의 과학적인 진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들만큼 멀리 나아가진 못했다. 현대 알파벳 발달의 선구자 페르시아인들도 이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 였다.

  그리스에서 노예제의 발달은 사제와 더불어 자유 시민계급의 출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종교의 힘을 약화시킬 물질적 기초를 제공했다(이를 통해 우리는 엥겔스의 “안티 뒤링”에 나오는 문장,  “고대사회의 노예제도가 없었다면 현대 사회주의도 없었을 것이다”를 이해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인도에서는 철학, 유물론(이른바 로카야타(Lokayata))과 자연에 관한 연구의 발달이 있었다. 이것은   브라만 신정(神政)정치에 반대하고 농노제에 일정 기반을 무사(武士) 귀족계급의 형성 및 강화와  때를 같이 한다.  종교, 불멸 그리고 육체적 쾌락에 대한 비난에 반대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싸움이 전제군주와 억압된 민중 양측 모두의 편견에 대항해 이뤄졌던 그리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도에서 행해진전투적이고 새로운 접근은 귀족계급으로부터 유래했다.  같은 시기에 출현한 불교와 자이니즘은 노동계급에서 많이 퍼졌으나 영혼의 환생이라는 개념과 함께 종교적 안에서 머물렀. 이 영혼 환생의 개념은 이들 종교가 반대했던 카스트 사회에서 전형적이었고 그 비슷한 유형은 이집트에서도 발견된다.

  반면, 과학과 일종의 초보적 유물론(예를 들어 모티의 “논리학”) 발달했던 중국에서 그 발달이 어느 정도의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유는 반란이 일어나려면 이에 대항해야 지배계층이 있어야 하는데 중국에는 반란의 씨앗일 있는 사제지배계층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사회는 자국을 둘러싸고 있던 외적들과의 전투를 통해 훈련된 군사관료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인도의 경우처럼 어떤 보충적이고 결정적인 요인이 작용했는데 바로 상품생산이 앞서 발달했다는 점이다. 그리스 철학은 그리스 자체에서가 아닌 소아시아 항구 식민지에서 출발하였다. 상품생산은 재화뿐 아니라 생산을 통해 얻은 경험도 교환할 있게 도와주며, 변증법적 사고에 있어서 더 고차원의 표현들의 등장을 촉진하면서 역사발전을 가속화한다. 또한 생각의 교환이 보다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지려면 일정 정도의 개인화가 필요한데 상품생산은 바로 이러한 개인화(individualisation)를 가능케 했다. 지금까지 사회적 진보가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이루어졌다면 상품생산을 통해 고립화가 끝나기 시작한다. 자연경제에 기반을 모든 농업사회의 기본적 경제단위는 마을, 조금 낫게는 자치적 지방이었다. 그러나 종종 관개작업을 위해 더 넓은 협업에 기초한 최초의 착취사회는 여전히 근본적으로는 농경사회의 성격을 띠었다. 반면에 그리스 사회는 상업과 항해를 통해 세계로 나아갔다. 이를 통해 그리스는 유목사회의 특징인 다른 세계를 발견하고 정복해 나가는 태도를, 하지만 더 높은 수준으로 획득했다. 일정수준의 역사 발전단계에 이르면 열린 토론의 출현이 국제적 발전(비록 지역에 집중된다 할지라도)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과, 어떤 의미에서는 토론의 출현이 어떤 의미에서는 “국제주의적 (inter-nationalist)” 성격을 지닌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디오게네스와 견유학파 철학자들은 헬라스 사람과 이민족 “야만인”을 구분하는 것에 반대하고 스스로를 세계시민이라 선언하였다. 데모크리토스는 이집트, 바빌론, 페르시아, 인도로 교육여행을 떠나기 위해 자신이 받은 유산을 낭비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았다. 그는 여행의 결실인 자신의 저서의 일부를 읽으면서 스스로를 변론했고 무죄를 주장하였다.

토론은 실천적인 필요성에 답하기 위해 생겨났다. 그리스에서 토론은 지식의 여러 다른 근원들을 비교하는 데서 발달했다. 그리스인들은 다른 사고방식, 다른 연구방식과 결과들, 생산의 방법들, 관습과 전통들을 비교했고, 이를 통해 이들이 서로 모순되거나 확인하거나 상호 보완한다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들은 서로 대립하여 투쟁하거나 서로를 지지하고, 혹은 가지를 다한다. 절대적 진리는 비교를 통해서 상대화된다.

  이러한 토론은 공개적이어서,  항구, 시장이 서는 광장(포럼), 학교, 아카데미 에서 이루어졌다. 이렇게 이뤄진 토론은 기록된 형태로 여러 도서관에 보관되었고 이는 세계로 퍼져나갔다.

  시장이 서는 광장에서 토론하는 모든 시간을 보낸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철학자이다. “어떻게 하면 도덕적으로 참된 지식에 이를 있을까?”라는 그의 주된 관심 자체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이미 나와 있다고 생각하는 편견과 종교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는 지식이야말로 올바른 윤리를 위한 주요조건이며 무지는 이를 방해하는 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도덕적 발전을 가능케 하는 것은 벌이 아니라 양심의 발달인데, 이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의 양심의 목소리에 거슬러서 다른 방향으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더욱 멀리 나아가서 모든 과학과  모든 집단적 규명 이론적 기초를 놓았다. , 그는 지식의 출발점은 모든 편견의 폐기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는 본질적인 것, 즉 탐구(연구)를 위한 길을 열어준다. 소크라테스는 성급한 결론, 비판적이지 않고 스스로 만족하는 의견, 건방짐과 자만에 단호히 반기를 들었다. 또한 “알지 못하는 겸손함”과 어떤 비젼, 확신에 근거한 참된 지식으로부터 나오는 열정을 믿었다. 이것이 바로소크라테스와의 대화 출발점이다. 진리는 모든 학생들, 또한 모두가 학생인 동시에 선생인 이들의 대화에서 이루어지는 집단적 탐구의 결과이다. 철학자는 어떤 새로운 사실을 알리는 예언자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지도자에 대한 새로운 개념, “지도자는 자신의 최종목표를 결코 잊지 않고 진리를 밝혀내는 일을 앞당기는 결연한 사람이다”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놀라운 점은 공산당 선언 정의된 계급투쟁을 위한 공산당의 역할이 이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토론을 이끌고 활기차게 만드는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공개토론을 예술 혹은 과학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렸고 그의 제자 플라톤은 이전에는 도달하지 못했던 수준으로 대화를 발달시켰다.

  엥겔스는자연변증법서론에서 지금까지 행해졌던 자연에 관한 연구의 역사 가지 중요한 시기에 대해 언급했다. 첫째, 고대 그리스인의 “천재적인 직관(genius of intuition), 둘째, 르네상스 시대를 예고한 아랍인들의 “매우 의미가 크지만 산발적인” 결과들, 셋째, 르네상스 시대에 발자국을 내디딘 근대과학이 바로 그것이다. “이슬람 아랍문화 시대”에서 주목할 점은 고대 다른 문화들의 지식들을 흡수하고 이를 집대성한 그들의 놀라운 능력과 토론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이다. 아우구스트 베벨(August Bebel) 바그다드에서 있었던 공개토론의 생생한 목격담을 예로 들었다. “첫 회의에는 모든 이슬람 종파 대표들, 그리스 정교도 정통파와 이단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배화교도, 유물론자, 무신론자, 유대교도, 기독교인들, 한마디로 말해서 각종 이교도들이 참석했습니다. 종파는 자신들의 대변인이 있었는데, 어떤 그룹의 지도자들 명이 회의장에 들어오면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정중히 일어났고 그가 착석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앉지 않았습니다. 회의장이 거의 찼을 무렵, 이교도 명이 말했습니다. ‘모두들 규칙을 알고 계시죠. 이슬람교도들은 자기들 경전에서 나온 증거나 예언자들의 연설에 근거하여 우리와 토론할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경전도 예언자들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는 인간의 이성에 기초한 논쟁만 가능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발언에 기꺼이 동의했습니다.(15) 베벨은 이에 덧붙여 “아랍문화와 기독교 문화의 차이점은 아랍인들이 세계를 정복하면서 자신들의 연구에 도움이 되고 자국민들과 자신들이 정복한 국가의 국민들을 가르칠 있는 저서들을 수집했던 반면,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교리를 전파하면서 모든 문화유적들을 악마의 산물, 혹은 혐오스러운 우상숭배로 취급하면서 파괴했다는 점입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슬람 아랍 문화시대는 그리스 로마 문화와 고대 문화를 르네상스 이후 피었던 유럽 문화에 연결시켜준 고리입니다. 이슬람 아랍 문화가 없었다면 유럽문화는 현재의 위치에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반면, 기독교는 모든 문화발달에 적대적이었습니다.”라고 결론지었다.

  하인리히 하이네는 기독교가 만들어내고, 이후 노동운동에 의해 확인된 종교적 광신과 맹목적인 종파주의의 원인 하나는 문화가 다른 문화의 희생과 포기를 요구하면 할수록 문화의 사상과 원칙은 더욱 냉혹해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엥겔스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인류가 경험하지 못했던 전대미문의 가장 진보주의적 변혁”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사건에서 사상 발달뿐만 아니라 감정, 인격, 인간의 잠재성, 투쟁성의 역할 또한 강조하였다. “당시는 사상, 열정, 인격, 보편성과 학식의 거장이 필요했던 시대였고 결국 이들을 배출한 시대였다.(…) 시기의 영웅들은 그들의 후손들이 종종 느끼는 한계와 편협성을 지닌 노동 분업의 노예가 아니었다. 그러나 특히 특징적인 것은, 거의 그들 모두는 당시의 운동의 와중에서 입장을 세우고 투쟁한, 실천적 투쟁들의 본질적인 부분이었다는 점이다. 때로는  글로 때로는 검으로 아니면 종종 두가지 모두를 가지고서.” (엥겔스,자연변증법서론)

 

토론과 노동자 운동

  엥겔스에 따르면 현대과학 발달에 공헌을 인간사상의 영웅적” 시대를 관찰해 보면, 이 시기가 얼마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았던가를 인식하게 된다. 우선, 시대는 전체적 인간 역사로 놓고 볼 때 매우 늦게 시작되었다. 우리가 중국과 인도의 경우까지 포함한다고 할지라도 지리적 측면에서도 제한이 있었다. 게다가 시대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르네상스와 독일에서의 종교개혁은 고작 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또한 운동에 활동적으로 참여했던 착취계급(그들 자체가 소수였던) 수도 극히 적었다.

  점에 관련하여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들 수 있다. 첫째, 급격한 변화와 모든 곤경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인 토론과 과학이 출현했고 영향력 또한 매우 중요하고 지속적이었다는 점. 둘째, 20세기 중반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유기적 연속성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또한 자본주의 쇠퇴기에 영구적인 대중조직의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토론의 목표를 확장시키고 유지하려는 보여준 프롤레타리아의 능력. 노동자 운동은 여러 번의 중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전통을 거의 2세기 동안 유지했다. 프랑스, 독일, 러시아에서 일어난 여러 혁명운동에서처럼 어느 순간에는 이러한 발전이 수백만의 사람들을 결집시켰다. 여기에서 () () 변화한다.

  그러나 () 적어도 산업화된 국가에서는 프롤레타리아가 인구의 다수를 구성한다는 사실의 산물만은 아니다. 우리는 현대과학과 이론이 르네상스 시대의 영광스러운 출발 이후 부르주아적 분업으로 인해 어떻게 망쳐지고 족쇄가 채어졌는지 이미 목격했다. 이 문제의  중심에는 이슬람 아랍시대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생산자로부터의 과학의 분리가 위치한다. 이러한 괴리는 “근대 산업에서 완성되는데, 이것은 과학을 노동으로부터 분리된 생산력으로 만들어 자본에 봉사하도록 강요한다.(16)

  마르크스는 베라 자수리치에게 보내는 답장의 초안에 과정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이 사회는 과학과 민중, 그리고 사회 자체가 만들어낸 생산력에 대항하는 전쟁을 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과학을 생산에 체계적으로 적용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없는 최초의 경제체제이다.계급지배를 지속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의 교육을 “제한”해야만 하는 체제이다. 또한 자신의 경제적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는 프롤레타리아 교육을 “발전”시켜야 한다. 오늘날, 부르주아 계급은 점점 교양이 없고 원시적인 계급이 되어가는 반면에 과학과 문화는 프롤레타리아 또는, 혹은 경제사회적 측면에서 점점 노동자 계급과 닮아가는 부르주아 계급 임금을 받는 대표자들의 소유가 되어간다.

  사회계급의 폐지는 (…) 그래서 생산발달의 상승을 전제로 하는데, 그러한 생산의 발달 정도에서는 특정한 사회계급의 생산수단과 생산물의 점유, 정치적 지배 문화와 지식 독점이 쓸모 없어질 뿐만 아니라 경제, 정치, 지적 측면에서 발달의 장애가 된다. 이 지점에 지금 도달했다.(17)

  프롤레타리아는 인류 과학전통의 계승자이다. 미래의 프롤레타리아 혁명투쟁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 더욱 토론이 발달하고 과학과 노동의 연합을 위한 움직임, 시대의 요구를 앞서는 총체적 이해가 수반될 것이다.

  새로운 정점에 이를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능력은 인간사회 역사와 관련된 과학적 시도인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이미 증명되었다. 오직 프롤레타리아만이 부르주아 철학사상 가장 최고의 지식인 헤겔 철학을 소화 흡수할 있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가장 널리 알려진 가지 변증법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의 변증법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상호작용의 변증법이었다. 오직 헤겔만이 가지 변증법을 결합시켰고 역사적으로 진정한 변증법의 토대를 창조하였다.

  헤겔은 참과 거짓 사이의 엄격하고 형이상학적인 대립을 그 어느 때보다도 심오하게  공격하면서 토론의 개념 전체에 새로운 차원을 부가했. 정신현상학서론에서 그는 꽃과 과일의 관계처럼 어떤 발달과정(예를 들면 철학의 역사 같은) 상이하고 대립된 단계들이 어떻게 유기적 연합을 이루는가를 보여주었다. 헤겔은 연합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모순”에만 집중하고 “발달”은 외면시하는 경향에 있다고 설명하였다. 쓰러진 변증법을 다시 일으켜 세우면서 마르크스주의는 헤겔 철학의 가장 진보적인 부분, 미래로 이끄는 과정을 이해하고 흡수하였다.

  프롤레타리아는 최초로 피착취계급인 동시에 혁명적인 계급이다. 착취자였던 이전 혁명계급과는 달리 프롤레타리아의 진리탐구는 계급으로서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어떤 이해관계에도 제한되지 않는다. 환상을 품으며(특히 종교적인)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생존했던 이전의 피착취계급과는 달리 프롤레타리아의 관심은 환상을 버리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일단 그들이 숙고하고, 조직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투쟁하자 마자  그 자연스런 경향이 진리의 규명(clarification)을 지향하는 최초의 계급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이러한 독특한 특성은  보르디가주의(Bordigism)불변성(invariance) 개념을 창조할 때 망각되었.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대항해 마르크스주의 기초원칙에 충실하겠다는 그들의 출발점은 옳았다. 그러나 계급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토론을 제한하거나 폐지할 필요성이 있다는 그들의 결론은 반혁명의  산물이다. 부르주아 계급은 자본의 영역으로 프롤레타리아를 끌어들이기 위해  무엇보다 토론을 전부 억누르고 없애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이해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초기에는 이들이 폭력적인 억압을 시도했다면, 이후에는 의회 “민주주의”와 좌파 자본주의 사보타지라는 더욱 효과적인 무기를 발달시켰다. 기회주의자들 역시 점을 이미 오래 전부터 이해했었다. 이들은 말과 사상의 불일치라는 핵심적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스스로를 숨겨야 하며 토론은 이들에게 있어 회피해야 어떤 것이었다. 그러므로 () 기회주의 투쟁과 토론 문화의 필요성은 양립적인 것일 아니라 서로 불가분의 관계일 수밖에 없다.

  토론 문화는 다양한 정치적 입장들 사이의 격렬한 대립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 토론이 “필연적으로” 트라우마적이고 분열과 단절을 낳는다는 말은 아니다. 역사 속에서 토론의 “예술” 혹은 토론의 “과학”의 가장 모범적인 예는 1917 2월에서 10월까지 있었던 볼셰비키당의 토론이다. 각종 낯선 이데올로기가 대량으로 끼어드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토론들은 열정적이지만 매우 친밀한 분위기에서 진행됐으며, 모든 참가자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토론들은 트로츠키가 정당의 “재무장(再武裝)”이라고 불렀던, 승리를 위해 혁명과정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정치적 중재를 가능케 했다.

  볼셰비키적 대화”가 가능 하려면 모든 토론이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푸르동(Proudhon) 반대하는 마르크스의 논쟁은 “파괴적인” 성격의 논쟁이였다. 그에게 있어 푸르동의 이론은 노동운동의 의식 발달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므로 역사의 쓰레기통에 버려 없애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은 마르크스는 헤겔과 유토피아 사회주의에 대항하는 거대한 싸움 중에도 그가 인류의 영원한 공동유산으로 여긴 헤겔과 푸리에(Fourier), 시몽(Saint Simon) 오웬(Robert Owen) 향한 무한한 존경심을 결코 잃지 않았다. 엥겔스는 헤겔 없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없었을 것이며, 유토피아주의자 없이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사회주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ICC 포함하여 노동운동에 있어 가장 심각한 위기는 대부분 각각의 의견들의 대립에서가 아니라 (물론 문제점이 근본적이기는 하지만) 토론하기를 거부하고 사실을 명확히 밝혀내는 과정을 무시하는 데서 왔다. 기회주의자들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사용한다. 이들은 중요한 대립들을 최소화할 아니라 부차적인 대립들을 과장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대립들을 만들어낸다. 또한 개인적인 공격은 물론 중상모략과 비방도 서슴지 않는다.

  노동운동이 짊어져야 무거운 , 한편으로는 일상적인 “상식”, 다른 한편으로는 관습과 전통을무”비판적으로, 거의 종교에 가깝게 존중하는 태도의 짐은 레닌이 써클정신(the circle spirit)이라고 불렀던 것과 관련이 있다. 조직의 건설과정과 정치적 삶을 일상적인 상식과 그 귀결들의 “자연발생성(spontaneity)”에 내맏겨버리는 것과 관련한 레닌의 생각은 전적으로 옳았다. “가장 저항이 작은 방향으로의 자연발생적인 운동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초래한다, 왜 ? 그것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고, 더 다면적으로 완성되었으며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전파시킬 있는 많은 수단을 지니고 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18)

  토론을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과 관련시키는 것(personalisation) 바로 레닌이 말한 써클정신의 특징인데 이는 정치적 논쟁의 중심을 “말해진 것”이 아닌 “누가 그것을 말하는가”에 두는 것이다. 토론을 이렇게  개인화하는 것이 유익한 전체토론에 엄청난 구속이 되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소크라테스와의 대화 통해 토론의 발달이 단지 사고의 문제가 아닌 윤리의 문제라는 것을 이해할 있다. 오늘날, 어떤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자 하는 노력은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만 사보타주를 하는 것은 그들에게 오히려 해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자 계급은 계몽주의 시대의 독일인 레싱(Lessing) 슬로건, 그가 진리보다 사랑하는 것은 “진리를 위한 탐구”라는 말을 유념해야 것이다.

종파주의와 조급함에 대항하는 투쟁

  프롤레타리아 대중운동의 핵심요소인 토론 문화의 가장 훌륭한 예는 러시아 혁명에서 있다(19). 혁명당은 서로 대립하는 대신 토론문화를 활성화시키는 선두에 섰다. 1917 볼셰비키당에서 이루어진 토론들은 혁명계급의 본질, 예를 들어 제국주의 전쟁을 계속하는 것을 지지할 것인가 말 것인가, 언제, 어떻게 권력을취해야 하는가 등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들은 세계 혁명의 운명과 더불어 인류의 운명이 걸려있던 정치적 위기에도 통일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 특히 조직적 노동운동의 역사는 토론 문화가 항상 이러한 수준에 도달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ICC 내에서 만장일치적 접근들이  반복적으로 침입했었다는 것을 이미 언급했다. 이러한 침입이 종종 조직의 분열을 초래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만장일치의 틀 안에서는 견해차이에 대해 분열 이외의 다른 해결책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문제는 이러한 접근법을 과장된 방식으로 받아들인 그러한 인자들이 분열해 나감으로써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러한 () 프롤레타리아적인 접근법이 등장하고 또 재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조직  자체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약점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약점들은 주로 삶과 일상적 대화에서 인식되기 쉽지 않은 작은 혼란들과 잘못된 생각들에 있지만, 그것들은 특정한 상황에서는 심각한 어려움을 일으킬 있다. 이러한 약점들 중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와 기회주의간의 대립의 측면으로, 또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논쟁적 투쟁의 측면으로 놓고 모든 토론을 행하려는 경향이다. 이로 인해 생기는 문제점으로는  첫째, 토론을 하는 동지들이 자신들이 절대 실수해서도, 자신들이 느끼는 혼란이나 서로간의 의견의 불일치를 말해서도 안된다는 심리적 압박을 가함으로써 토론을 방해한다. 둘째, 기회주의가 “진부하고 사소하게 되어(banalisation)”버린다. 우리가 기회주의를 어디서나 만나고 서로 조금의 대립이라도 있을 때마다 “늑대야!”라고 외친다면, 정작 정말로 기회주의가 나타났을 때는 이를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 문제점은 토론 나타나는 조급함인데 이러한 경우에는 결과적으로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들을 수 없으며, 토론을 독점하고 “적수”를 진압하여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른 이들을 설득하고자 한다(20).

  결국, 모든 것들의 공통점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내부에 쁘띠 부르주아적 조급함이 존재한다는 것과, 집단적인 진리규명의 생생한 실천에  필수 요건인 자신감이 결여됐다는 점이다. 이는 , 토론과 진리규명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준다. 그 과정은 사회적 삶의 모든 근본적 과정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내적인 리듬과  고유의 발전법칙을 지닌다. 또한 전개 과정은 진리를 밝혀나가는 있어 발생하는 혼란, 실수와 잘못된 방향, 이를 고치기 위한 노력이 필수적으로 동반된다. 그리고 진정으로 성숙한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모든 과정은 가속될 수는 있지만 단축되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참여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계급전체의 참여가 환영 받고 장려될수록 과정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베른슈타인(Bernstein)에 대항한 논쟁에서, 현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계급투쟁을 하되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성격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주장의 모순을 비판하였다(21). 계급투쟁을 위협하는 가지 주요 위험성이 바로 모순적 본질에서 생겨난다. 번째 위험은 기회주의로서, 노동자는 자신의 적들의 치명적인 영향력의 지배 아래에 놓일 있다. 계급투쟁으로부터의 이러한 일탈에 있어서는, “노동운동이 중요한 것이지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다”가 그 좌우명이다. 두 번째 위험은 종파주의(sectarianism), 자신의 계급인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삶의 영향력에 대한 개방성이 결여된 것이다. 엇나간 노선에 있어서는 “목적이 중요한 것이지 노동운동은 아무것도 아니다”가 그 좌우명이다.

1 세계대전 세계혁명의 패배를 낳게 끔찍한 반혁명의 진행 속에서, 종파주의가 기회주의를 억제할 있을 것이라는 잘못되고 치명적인 생각이 혁명진영의 잔존자들 사이에서 발달하였다. 혁명운동을 불모화시키고 화석화시킨 이러한 접근법은 종파주의와 기회주의 두가지 모두가 노동자 운동과 목표를 분리하기 때문에 똑같은 동전의 양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혁명적 소수들이 그들 계급의 실제적 삶과 운동에  완전히 참여하지 않는다면 공산주의의 목표는 결코 달성되지 못할 것이다.

 

 

 

·(1) 마르크스와 엥겔스처럼 이론적으로 성숙하고 명확했던의 젊은 혁명가들조차 당시에 곧 공산주의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1848 사회적 격변기에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은 곧바로 이러한 가정을 재검토하고 수정해야만 했다.

· (2)  인터내셔널 리뷰( International Review)125호, 2006 프랑스 학생운동에 관한 논문 참조

· (3) 프롤레타리아 진영 내에서 관점은 이른바보르디가주의(Bordigism)”에 의해 이론화되었다.

·  (4) 과거 혁명가들의 전기(傳記) 회상록에는 그들의 토론 능력, 특히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는 능력의 실례(實例) 가득 실려 있다. 관점에서 레닌은 유명했으나 그가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면, 프리츠 슈테른베르크(Fritz Sternberg)1963년에 작성한트로츠키와의 대화”에 관한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함께 대화를 나눌 트로츠키는 무척 예의 바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어떤 단어나 개념을 보다 상세히 설명해달라고 요청할 때만 제외하고는 나의 말을 도중에 끊어버리는 일은 결코 없었다.

· (5) 주제에 관해서 인터내셔널 리뷰( International Review)110 기사  ICC 특별총회: 조직원칙 수호를 위한 투쟁  114 기사  ICC 15 ICC총회: 시대의 도전에 직면한 조직의 강화  참조할 .

·  (6)  인터내셔널 리뷰( International Review)111, 112, 127, 128호에 실린 기사 프롤레타리아 투쟁에 있어서 신뢰와 연대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와 윤리 참조할

·  (7) 이탈리아 좌파공산주의 네덜란드 좌파공산주의 관해 ICC 저술한 책을 참조할

·(8) 프랑스 좌파공산주의는 좌파공산주의 이태리분파 해체 이후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려고 하였다. 예로  인터내셔널 리뷰( International Review)33호의  « 천재적인 지도자 »개념에 관한 비판과, 같은 잡지 34호에 실린 조직투사들을 조직의 정치적 방향은 논의할 필요가 없는 그저 단순한 집행자로 인식한 « 통제 » 개념에 관한 비판을 참조할

·(9)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10) 엥겔스, 포이어르 바흐에 관한 테제 

  (11) 엥겔스, 자연변증법  심령계에서의 자연연구

   (12) 마르크스,  자본론 37 48 : « 3 공식 »(3 초반)

    (13) 엥겔스, 자연변증법  심령계에서의 자연연구  마지막 부분

    (14) 기원전 500 아시아의 발달에 관해서 1927 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열린 학회 아우구스트 탈하이머(August Thalheimer) 발표 변증법적 유물론 입문  (1938 미국판 출간) 참조할

    (15) 아우구스트 베벨, 이슬람 아랍 문화시대 6과학 발달과 () 참조

    (16) 마르크스,  자본론 1 4 14: 분업과 매뉴팩처, 5: 매뉴팩처의 자본주의적 성격

    (17) 엥겔스,  안티 뒤링 ,3 « 사회주의 », « 이론적 개념 »

  (18) 레닌,  무엇을 것인가  2 « 대중의 자생성과 사회 민주주의 당의 의식성 »

   (19) 트로츠키의 저서  러시아 혁명 역사 』 또는 리드의 « 세계를 뒤흔든 10 참조

    (20) 주제에 관해 인터내셔널 리뷰( International Review)130호에 실린 ICC 17 총회 토론 보고서, « ICC 17 총회: 프롤레타리아 진영의 국제적 강화 » 참조

    (21)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인터내셔날리스메(Internationalisme), 1946 : 러시아적 경험 : 사유재산과 공동재산   빌랑(Bilan) 35 1936 9-10월호 : 공산주의(VII) : 전화기의 문제점          

후쿠시마 1년후

3 11 거대한 쓰나미가 일본 동부 해안을 휩쓸었다. 12- 15미터이상의 높은 파도가 믿을 없을 만큼 피해를 초래했다. 2만명 이상이 쓰나미로 사망했고, 아직도 수천명의 실종자들이 보고되어 있다. 무수한 사람들이 집을 잃었다. 전세계적으로 상당 수의 인구가 해안가나 해안 부근에 정착해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좁은 공간에 밀집해 살고 있으며, 돌이킬 없는 해수면 상승으로 점점 위협당하고 있다. 쓰나미의 높은 파도는 그렇게 해안선을 따라 밀집된 정착으로 야기되는 모든 위험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정부의 모든 예상과는 달리, 재앙적인 사건이 후쿠시마핵발전소에서 발생했다이번의 지진과 쓰나미는 해안선을 따라 이뤄진 정착으로 인해 기후변화시대에 야기되는 잠재적인 위험들과 지배계급의 원자력 취급방식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우리는 쓰나미의 파괴적 결과들을 무시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단지 공간의 제약으로 인해 글에서는 핵노심용융의 결과들에 촛점을 맞추고자 한다.

체르노빌, 후쿠시마 : 지배계급의 만연한 무력감과 부도덕

후쿠시마에서 대재앙적 사태가 발생한 , 주민의 대피는 너무 늦게 시작되었고 필요한 통행금지구역을 모두 포괄한 것도 아니었다. 구제대책과 대피가 쓰나미의 결과로 지연되고    방해받았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정부가 발생된 위험들의 규모를 완전히 의식하고 싶지 않았고 그것들을 과소포장하길 원했기에 광범위한 대피를 피하고 싶어했음은 부정할 없다. 일본의 책임자들(원전운영사 텝코와 국가) 그러한 일을 전혀 예기치 않았으며 안전대비책들도 그러한 규모의 지진과 쓰나미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불충분했음이 갑자기 밝혀졌다. 계획된 구제대책들과 용도로 제공된 구제수단들은 하이테크국가 일본을 빈약하게 무장된 무력한 거인처럼 보이게 했다.

  재앙이 발생한지 며칠이 지난 , 경우에 따라서는 3 5백만인구를 거느린 토쿄 광역권의 인구를  대피시켜야할 필요성의 문제가 제기되었을 , 정부는 생각을 즉시 포기했다. 일단 그렇게 수단이 없었고 그러한 대피가 국가의 붕괴위험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원자력발전소 안과 주변에서는 방사능측정치가 치명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재난이 시작되고 얼마지 않아 일본수상 칸은, “원자로내 압력을 수동으로 낮출 노동자들로 이뤄진 '자살부대'” 요청했다. 그곳 현장에서 작업하는 노동자들은 전적으로 충분한 보호장비 없이 재난에 대항해 싸워야만 했다. „종종 측정기과 허가된 적당한 보호장화가 부족했다. 노동자들은 대신에 플라스틱봉지를 신발 둘레에 테잎으로 붙혀 썼다고 보고했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잠을 자야했고 납으로 덮개 외에는 아무것도 덮을 것이 없었다.  비상상태에 남성 핵발전소노동자의 한해동안의 피폭한계치는 3 15 100mSv에서 250mSv 높게 책정되었다.  부분적으로는 노동자들은 원전에서 해체작업을 한지 그리고 달이 지난 후에야 건강검진을 받았다.

25년전 체르노빌의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했을 , 당시 몰락의 길에 들어서 있던 소련체제는 기술적 수단의 부족으로, 대부분 강제동원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피해복구작업을 위해 지옥으로 파견하는 밖에 없었다. 세계보건기구의 자료에 따르면 60만에서 80만명의 해체인력이 파견되었는데, 중에서 지금까지 수십만명이 피폭의 결과로 사망하거나 암을 앓고 있다. 그에 대한 통계숫자는 정부측에서 지금까지 결코 공개되지 않았다.

그후 25년이 지난 지금, 하이테크국가 일본은 무력하게 소방호스와 헬리콥터로 불을 끄고 설비를 냉각시키려 시도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기획된 구상들과는 반대로, 냉각을 위해 엄청난 양의 해수를 투입하고 이렇게 해서 방사능물질로 오염된 물을 다시 바다로 배출할 밖에 없었다. 소련정부가 25년전에 수백만명의 해체인력을 강제로 동원했던 반면, 일본의 경제적인 곤궁은 무수한 노동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게 만들었다.  텝코는, 예를 들어 오사카의 노동자구역인 카마가사키와 같은 곳에서 노숙자나 실직자를 대상으로 인력을 구했고, 그렇게 동원된 사람들에게는 투입지역이나 위험들에 대해서 종종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다.  그러나 해체인력들의 생명만이 위험에 처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생명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지역의 아이들은 아무 대책없이 높은 방사능량에 노출되었다. 방사능방출이 지금까지의 모든 측정치를 넘어섰기 때문에, 정부는 후쿠시마지역 학생들의 한해 피폭한계치를 20mSv까지로 상향조정했다. 스탈린주의적인 소련의 권력자들만 체르노빌의 폭발에 대해 처음 몇일 완전히 침묵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민주주의 정부도 후쿠시마의 경우에 진실을 말하지 않고 재앙의 규모를 과소포장하려 했다. 이런 점으로 , 냉소주의와 생명경시에 있어서 일본의 책임자들은 스탈린주의 소련의 권력자들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장기적인 결과를 오늘날 사실상 가늠해 보기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노심용융이 일어난 것은 용융된 연료봉들이 엄청난 방사능을 지닌 덩어리로 뭉쳐져 압력용기를 관통해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투입된 냉각수 자체는 극도로 오염되어 있고, 계속해서 다시 냉각되어야 하며 그때마다 다시 엄청난 양의 오염된 해수가 발생한다. 물뿐만 아니라 보호되지 않은 원자로들은 세슘, 스트론튬과 플루토늄 동위원소들을 방출한다. 물질들은  파티클스(뜨거운 입자들)” 불리는데, 나중에 일본 전역에서, 그래서 토쿄에서도 발견되었다.  지금까지의 기술적 수단으로는 후쿠시마에서 발생한 핵쓰레기의 처리는 불가능하다.  냉각하는 것만도 몇년이 걸릴 것이다. 체르노빌에서는 일종의 석관이 설치되었는데, 100년후헐어내고 다시 설치되어야 한다. 후쿠시마에 대해서는 아직 어떤 해답의 전망도 없다. 그러는 동안 방사능에 오염된 물이 점점 쌓여가고, 그것을 어디에 버려야할지 수가 없다. “대부분의 방사능은 냉각수를 통해서 후쿠시마를 빠져나가 곧장 바다로 들어가서 해류를 따라 곳곳으로 확산되기에, 태평양과 먹이사슬 그리고 그와 더불어 인간들에게 미치게 결과는 예측할 수가 없다. 일본의 북동부 해안 앞의 극히 풍부한 어장이 타격을 입었고, 예를 들어 베링해역의 바다연어로 확산되는 것이 가능성의 영역권에 놓여있다.” (1)

그렇게 많은 양의 방사능물질의 해양으로의 방출은 지금까지 없었다.”

  일본 이지역의 인구밀도가 우크라이나보다 15배나 높기때문에, 주민에 대한 영향은 지금 아직은 정확하게 가늠될 수가 없다.

그래서 노심용융은 그러한 핵재앙의 결과들이 전적으로 통제불가능함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책임자들은 페스트와 콜레라사이에서만 선택할 있는데, 노심용융을 방치한 보고만 있거나 아니면 해수로 냉각을 시도해서 결국은 소방물질을 통해 방사능이 광범위하게 확산되도록 하거나. 무력한 정부는 두번째의 경우, 높은 방사능으로 오염된 소방물질을 통한 해수의 오염을 선택했다.

오염제거: 문제의 해결 대신 불운의 악화

 주변의 오염된 토양을 처리하려는 시도도 무력감과 부도덕을 백일하에 드러낸다. 30 인구의 도시 후쿠시마에서 8월초까지 334개의 학교와 유치원에서 마당의 오염된 토양을 제거하는 정화작업이 이뤄졌다. 후쿠시마지방의 코리야마시는 방사능으로 오염된 흙을 어디로 처리할지 몰라서, 많은 부모들이 경악하게도... 학교주변에 묻었다. 외에도 일본의 48개의 지방들 17 지방들이, 그중에는 토쿄도 속하는데, 방사능으로 오염된 진흙찌꺼기를 처리 못한 보유하고 있다고 전한다. 심지어 토쿄로부터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까지도 방사능으로 오염된 토양이 발견되었다. 한편 방사능입자들을 제거작업이 이뤄져야될 건물들이 수천개나 여전히 남아있다. 수목이 우거진 조차도 아마 오염제거작업이 이뤄져야만 것이다. 아마 많은 나무들을 베어내야만 것이다.

일본의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정부는 방사능으로 오염된 수백만 톤의 물질들을 위한 임시보관장소를 찾고 있다.  마땅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방사능 오염된 폐기물은 일부분 소각되었다. 그렇게 생겨난 매연을 통해 방사능이 광범위하게 확산될 것이다. 발생된 핵폐기물에 대한 이러한 속수무책은 방사능폐기물의 처리라는 풀릴 없는 근본적인 문제를 조명한다. 

핵폐기물처리  파괴적인 유산 또는 우리를 뒤따를 대홍수

원자력 발전에서 특별한 점은, 원자력발전소의 수명이 다해 가동 종결된다 하더라도 방사능의 발산이 끝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가동중지와 동시에 핵분열과정이 종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방사능물질과 접촉한 모든 것은 오염되는데, 원자력발전소에서 발생된 폐기물은 어떻게 것인가? 

세계원자력협회 제공 정보에 따르면, 매년 1 2천톤의 고방사능 폐기물이 발생한다. 모두 합치면 전세계적으로 2010 말까지 생겨난 고방사능폐기물은 이미 30만톤에 달한다. 몇몇 나라들에서 실행중이거나 계획중인 지리적인 저장, 옛광산에 저장하는 것은 위험성에 대해 눈가림식의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그런식으로, 독일의 아세(Asse) 저장된 12 5 통의 핵폐기물은 조만간 인접한 소금의 영향으로 침식될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 벌써 방사능으로 오염된 여과액이 흘러나오고 있다. 독일의 임시저장소 고어레벤(Gorleben)에서 전문가들은 지반함몰 위험을 조사했다. 비슷한 위험들이 전세계 대부분의 저장소灯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원자력발전소의 운전이 이미 위험 요소들과 관련되어 있다면, 그렇게 핵페기물의 처리는 전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지금의 책임자들은 모든 폐기물을 저장소나 임시보관소에 떠넘기는데, 이는 결국 문제의 해결을 무수한 미래의 세대들에게 미루는 것에 불과하다.

원자력발전소의 아주 정상적인灯 운행도 결코, 원자력산업의 옹호자들이 주장하듯이 그렇게  깨끗하지灯 않다. 사실상 원자력을 이용한 전력생산시에는 연료봉의 냉각을 위해 엄청난 양의 물이 요구된다. 그래서 원자력발전소는 주로 해변이나 강변에 건설된다. 14개월마다 원자로의 연료봉들을 교체하는데, 연료봉들은 아직 매우 뜨겁기때문에 계속해서 폐연료냉각수조 안에 저장되어  2-3년간 냉각되어야 한다. 강으로 유입된 냉각수는 물의 온도상의 오염을 가져와서 수초가 자라고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한다. 또한 화학물질들(특히 나트륨, 붕산, 암모니아등) 핵발전소로부터 강으로 유입된다.

대재앙 이후 1: 권력자들은 어떤 결론을 냈는가?

권력자들, 책임자들은 원인규명에 관심이 있는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사실은,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설계 전체가 지진에 제대로 대비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동안 밝혀진 바로는,  원전운영사 텝코는 이전에 많은 단순사고들을 얼버무렸고 지적된 안전결함들을 해결하지 않았으며, 특히 발전소는 40년간의 수명을 다해서 어차피 가동종결되었어야 했다.  하필이면, 자국 자본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MITI 같은 제도들을 통해 경제에 깊이 개입하는 일본국가가 바로 원자력산업에 백지수표를 줘어 주었다.  조사보고서 조작이나 사고 얼버무리기의 진상이 백일하에 들어났을 조차도 국가는 어떤 결정도 내지 않았다. 밖에도, 경쟁의 압력과 위기의 무게로 인해 감독과 유지에 점점 투자를 하게 되고, 점점 숙련된 인력을 투입하려는 경향은 전세계적으로 널리 확산되어 있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불충분하게 양성된 인력에 의해 안전기준이 낮아지게 됨으로써 원자로의 안전을 위협하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세계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442개의 원자력발전소중 많은 발전소가 지진발생위험지역에 놓여있음이 분명해졌다. 일본에서만도 50 이상의 원전이 지진발생위험지역에 세워져있다. 미국에서는 12 이상의 원전이 잠재적으로 비슷한 재앙발생에 노출되어 있다. 러시아에는 많은 원전들이 지진발생시 자동으로 작동되는 가동중지메커니즘 없이 가동되고 있다. 터어키에서는 아쿠유베이(Akkuyu Bay) 원자로가 활성  에세미스(Ecemis) 단층선 근처에 건설되었다. 한편 현재 27개의 새로운 원전을 건설중인 중국은 지진활동이 가장 왕성한 나라들 중의 하나이다. 많은 예들을 리스트에 포함시킬 있을 것이다. 자연재해의 위험을 고려하는 대신, 자본주의는 도처에 시한폭탄을 만들어냈다! 고도로 발전한 나라들에서 안전기준들이 이미 불충분한 것으로 드러난 마당에, 이제서야 원전의 운전에 뛰어드는 나라들은 안전기준들과 사고처리경험을 조롱한다. 지역에 사고가 발생했을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할 조차도 없다....

게다가 오래된 원자력발전소의 수명이 연장된다. 미국에서는 60년으로, 러시아에서는 45년으로 연장되었다. 국제적 수준에서는 엄격한 안전기준에 대한 저항이 그리고, 원자력산업에 대한 국가들의 허술한 통제를 넘어서는 국제감시기관의 개입에 대한 저항이 상당히 거세다. 국가의 독립성이 안전에 우선시되고 있다(3).

종합하자면, 후쿠시마사태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여전히 시한폭탄 위에 앉아있는데, 시한폭탄들은 곳곳에서 그리고 언제라도 지진이나 고장 또는 테러리즘 등에 의해 새로운 재앙으로 작용할 있다.    

원자력 전력  값싸고,  깨끗하며 다른 대안이 없는가?

사회를 댓가로 이윤

 원자력산업의 옹호자들은 반복해서, 원자력 전력은 값싸고, 깨끗하며 다른 대안이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사실은, 원자력발전소 하나를 세우는데 엄청난 비용이 들고, 이는 전력회사들에 의해 충당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다시 국가의 보조, 세금을 통해 지원된다핵페기물의 처리비용의 주요부분도 운영회사들에 의해 사회에 전가된다. 지금까지 핵페기물처리에 대한 어떤 해답도 없다는 점은 논외로 치더라도, 핵로비측의 계산 전체에 이러한 폐기물처리비용은 참작되어 있지 않다. 원전이 50년의 운전후에 가동중지되더라도, 지금까지 참작되지 않은 거대한 비용이 생겨난다.

단순사고이거나 대형사고이거나를 막론하고, 여기서도  비용은 사회에 전가된다. 후쿠시마에서는 규모가 지금으로선 현실적으로 산정되기 불가능한 결과비용들은 지금까지 2-3천억 유로로 추정된다. 금액은 텝코가 도저히 조달할 없는 것이다. 일본 국가는 텝코노동자들이 희생한다는 조건하에 이미 원조灯를 약속했다. 그렇게 해서 연금이 삭감되고 임금이 인하되며 수천개의 일자리가 없어질 것이다. 또한 일본의 전체 가정에 특별세도입이 계획되어 있다.

경제적 생태적인 측면에서 원전운행으로 발생하는 사실상의 비용과 폐기물처리라는 미해결 문제는 밑빠진 독과 같다. 원자력은 어떤 측면으로 보더라도 비합리적인 프로젝트이다. 원전사들은 전력생산으로 거대한 금액을 벌어들이지만 결과비용灯은 사회에 전가한다.  원자력발전소는 그래서 이윤추구 그리고 인류와 자연의 장기적 보호사이의 극복될 없는 대립을 체화하고 있다.

위기와 자연 남용

원자력이 환경에 대한 유일한 위협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자연 남용을 자행하고 있다. 전혀 보존에 대한 고민 없이 모든 자원을 강탈하고 환경을 창고처럼 취급한다.

사이에 점차 지역이 사람이 없게 되는 곳이 늘어나고, 바다는 쓰레기로 가득하며, 얼마전까지만 해도 도달불가능했던 자원들이 점점 정교화된 기술로 남김없이 약탈된다. 이때 투입되는 수단은 점점 폭력적이고 비용이 많이 뿐만 아니라 위험과 잠재적파괴력이 배가된다.  2010 4 멕시코만에서 원유시추선, 딮워터 호라이즌이 폭발했을 , 진상조사위원회는 안전규정상의 명백한 결함들을 발견했다.  엄청난 경쟁의 압력때문이기도 하고 바로 그때문에, 시설의 건설, 감독 운영에 거대한 투자를 했어야할 대기업은 결국 엄격한 긴축정책을 펼수 밖에 없었고, 이는 안전비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최근의 예로는 브라질해안이 원유로 오염된 것을 있다. 모든 과실들은 결코 기술적으로 후진적인 나라들에 국한될 없는 현상들이다.  오히려 고도로 발전된 나라들에서 믿을 없는 양상을 띠게 된다.

인류 전체에 대한 위협

1970년대 미국에서 발생한 쓰리마일아일랜드(Three Mile Island)사태나 체르노빌의 경우와는 달리후쿠시마사태는 인구가 밀집된 대지대, 3 5백만의 인구를 거느린 토쿄를 직접적으로 위협했다.

원자력은 2 세계대전시에 전쟁무기로서 개발되었다. 일본의 도시에 투하된 원자탄과 더불어, 쇠퇴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새로운 단계의 파괴가 도입되었다.  2 대전후 군비경쟁은 체계적인 고도의 핵무장과 더불어 이러한 군사적인 파괴무기를 더욱 강화시켜서 오늘날에는 한번의 핵무기전투에 인류가 절멸될 있을 정도가 되었다.  냉전 종결후 2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대략  20만개의 핵무기가 존재하고, 이는 인류를 몇십번이나 절멸시킬 수있는 파괴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쓰리마일아일랜드, 체르노빌 그리고 후쿠시마의 핵사고를 통해서, 인류가 군사상의 핵무기투입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원자력의  '비군사적이용을 통해서도 위협받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일본정부의 추산에 따르면, 후쿠시마 다이이치 원전사고의 결과로 대기중에 방출된 세슘-137 동위원소의 양은 1945 히로시마에 원폭투하로 야기된 양의 대략 168배에 해당된다고 한다.(4)

후쿠시마사태 발생 이후 사태수습의 전반적인 전개양상을 , 책임자들은 속수무책이었고 사태의 규모를 과소포장하려 했으며 사태로부터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은 , 비용에 대한 어떤 통제도 상실했다오히려, 원자력 문제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환경 전체의 보호에 있어서도 지배계급은 점점 가차없어진다. 환경파괴는 점점 위협적인 규모를 띠고 지배계급은 환경보호를 위해 책임있는 대책들을 시행함에 있어서 무능함을 점점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지구가, 인류가 이윤의 제단 위에 희생되고 있다.

게다가 지난 해에 첨예해진 세계경제위기로 인해자연유지를 위한 보호대책을 도입하기에는 지배계급의 재량권의 폭이 부가적으로 축소되었다자본주의는 위기를 통해서만, 기아, 빈곤, 전쟁등과 같은 위기의 재앙적인 결과들을 통해서만 인류를 파멸로 내모는 것이 아니다자본주의는 파괴력을 통해 전체 생태계의 존재를 위협하고 있다. 원자력발전소들은 단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시간과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자본주의가 지구 전체를 파괴하거나, 아니면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이 노동자계급을 선두로 하여 이체제를 극복하느냐가 문제이다자본주의는 인류를 다양한 수준들(위기, 전쟁, 환경)에서 위협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 원자력에 대항하는 것과 같이, 자본주의적 현실의 오직   측면에 대해서만 배타적으로 대항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모든 공포의 시나리오들과 자본주의 체제에 놓인 뿌리들 사이의 연관성들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성행했던 소위 “1-쟁점-운동들”(반핵운동, 가택점거, NATO무장반대운동) 투쟁을 내맡겨버리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가 것이다. 오늘날 어느때 보다도, 전세계적인 파산을, 체제가 막다른 골목에 다달았음을 세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위기와 전쟁과 환경파괴 사이의 이러한 연관성을 외면한다면, 어쩔 없이 개량주의라는 살얼음판 위에 도달하게 되고 체제에 의해 흡수되어버릴 위험에 빠지게 된다.  D. 2012 1


 

(1)     후쿠시마 북동쪽에서 2개의 해류들, 큐로시오난류와 오야시오한류가 만나서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어장들 중의 하나를 이룬다. 그곳에서 이뤄지는 일본의 어획은 일본에서 소비되는 생선제품의 반을 이룬다. 그렇게 해서 생선공급이 위태롭게 될수 있다.

(2)   Http://news.ippnw.de/index.php?id=72, 일본환경단체의 정보에 따르면, 일본정부는 후쿠시마지역으로부터의 오염된 토사들을 일본 지역으로 분배해서 소각할 계획이라고 한다. 일본환경성이 추산하기에, 이와테, 미야기 후쿠시마등 해안지대에서  3월의 재앙으로 인해 생겨난 건축폐기물은 대략 2 3 8십만톤에 달한다고 한다.  이미 이와테에서 토쿄로 대략 천톤의 폐기물의 첫운송이 지난 11월에 시행되었다고 마이니치신문은 보도했다. 이와테 지방정부가 추정하기에 폐기물은 133bq/kg 방사능물질을 함유한다.  2011 3월이전이라면 이것은 불법이었겠지만,  일본정부는 7월에 건축폐기물안전수준을 100bq/kg에서 8,000bq/kg으로,  10월에는 다시 10,000bq/kg으로 상향조정했다. 토쿄는 총합 500,000톤의 폐기물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밝혔다.

(3)     후쿠시마이후, 2022년까지 원전으로부터 하차하겠다는 독일 자본의 태도에 대해서는 세계혁명 168, 169호에 실린 우리의 기사를 참조.

마이니치신문, 2011 8 25일자 기사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