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0월 한국에서의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

 

2006년 10월 한국의 „사회주의정치연합"그룹은, 한국의 노동자계급과 그 정치적 소수들 내부에서 좌파공산주의의 입장들의 존재를 강화시킨다는 명백한 목적을 갖고 서울과 울산에서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라는 명칭을 가진 대회를 개최했다.

한국에서의 그 대회는 그 나라의 노동운동사에서 그리고 진정 동아시아 전체에서 그러한 종류로서는 최초의 대회였다. 그러한 대회가 오늘날에 그것도 50여년 전에 개시된 제국주의전쟁의 결과로 여전히 분할된 채 있는 한 나라에서 개최된 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그것은 제 3인터네셔널의 짧은 경험 이래 최초로 동서양 사이의 노동운동의 국제적인 단합의 발전에 대한 전망을 열어준다. 그런데 겸손하게 보자면 그것은 동양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역사적 단계의 상황을 나타낸다.

이것을 인정하면서 ICC는, 발제를 하고 토론에 능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 대회에 공헌하려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아래에 몇가지 자료들을 공개하는데, 토론주제들에 대한 ICC의 발제문들, 북한핵실험을 계기로 유발된 전쟁위협에 대항한 (ICC와 SPA에 의해 공동으로 제시된) 선언문 그리고 그 대회에 대한 그리고 그곳에서 있었던 토론들에 대한 ICC의 보고서가 포함되어 있다. 이 보고서는 SPA 내부에서 토론되었고 그 동지들은 보고서에 전적으로 동의를 표했다.

논쟁의 주제들, 즉 자본주의의 데카당스, 계급투쟁에 대한 그리고 혁명조직에 대한 전망들에 관련하여 특별히 한국적이거나 심지어는 아시아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아래에 공개하는 자료들은 새로운 그리고 출현 중에 있는 혁명운동에서 국제적인 논쟁의 일부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전 세계의 동지들의 논평과 토론을 바라며 이들을 제시한다.

한국의 국제대회 보고서

2006년 6월, ICC는 남한에 있는,  좌파공산주의 전통과 관련된 그룹, 사회주의정치연합(SPA)으로부터, 동년 10월 서울과 울산에서 개최될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에 참가를 초청받았다. 우리는 이미 1여년정도 SPA와 접촉하고 있으면서, 언어문제로 인한 불가피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특히 자본주의의 데카당스 문제에 관해 그리고 현시기의 공산주의조직들의 발전 전망에 관해 토론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 대회가 불러일어킨 정신은 SPA에 의한 서문에서 강력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지금까지 세계 여러 곳에서 정기적으로 맑스주의자 대회(모임) 열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강단의 추상적인 논의나 자본주의의 좌파에 속하는 정치적 세력들의 연대를 위한 행사라는 것도 알고 있다. 자본주의 데카당스 시대의 객관적이고 주체적 조건이 야만과 전쟁을 넘어서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더욱더 깊이 인식하고 있다.

한국의 노동계급은 현장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고 혁명적 정치세력은 전망을 분명하게 열어젖히지 못하고 있지만 과거 혁명운동이 국제주의의 원칙을 저버리면서 참담한 패배를 경험했던 역사를 뿌리로부터 반성하면서 우리는 하나의 현장,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을 넘어서는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이루어내야만 한다."

한번 극동의 역사를 잠시만 생각해보는 것도 이러한 발의의 엄청난 중요성을 감지하기엔 충분하다. 이 대회를 위한 환영사에서 우리가 이미 언급했듯이, „1927 상해노동자학살은 1917 러시아에서의 10월혁명이래 10년간 세계를 뒤흔든 혁명투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세계노동자계급은 그리고 인류 전체는 역사상 유래없이 혹독한 반혁명의 모든 공포를 겪었다. 동양에서 노동인민은 2 세계대전의 서막이었던 일본의 만주침략을, 그런 다음은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파괴로 정점을 이루는 2 세계대전을, 중국내전을, 한국전쟁을, ‚대약진Great Leap Forward' 동안 중국에서의 참혹한 기아를, 그리고 베트남전쟁 등을 경험했다.

모든 무시무시하고, 충격적인 사건들은 , 동양에서는 여전히 역사가 짧고 경험이 적였던 그리고 서양에서의 공산주의이론의 발전과 접촉이 극히 적었던 프롤레타리아계급을 휩쓸었다. 적어도 우리가 알기로는, 좌파공산주의의 어떤 표현들도 동양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생존하거나  출현할 없었다.

결국, 동양에서 좌파공산주의와 명백히 공명하는 조직에 의해 소집된 공산주의 국제주의자들의 오늘의 회의는 노동자계급에게 있어서 역사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이것은 - 아마도 역사상 최초로 - 동서양의 노동자들 사이의 진정한 단결이라는 희망을 갖게 한다. 이것은 하나의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프롤레타리아계급과 그것의 정치적 소수들에서 천천히 진행되고 있는 전세계적인 의식 자각의 일부이다." 그래서 ICC의 대표단은 이 대회에 참가하면서, 국제주의적 좌파공산주의의 목소리가 극동에서 출현하는데 우리의 모든 역량을 다해 도울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배우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한국의 노동자들과 혁명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안들은 무엇인가? 모든 노동자들과 관련된 문제들이 그곳에서는 어떻게 제기되는가? 한국 노동자들의 경험들은 다른 곳의 노동자들에게, 특히 극동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노동자들에게 어떤 교훈들을 주는가? 그리고 한국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세계의 다른 지역의 계급형제들의 경험들로부터 어떤 교훈들을 이끌어내는가?

이 대회의 원래 계획은 다음의 주제들을 토론하는 것이었다:자본주의의 데카당스, 계급투쟁의 상황 및 현 상황에서 혁명가들이 취할 전략. 그런데, 대회 며칠 전에 이 목표들의 장기적인 정치적 중요성이, 북한의 최초의 핵폭탄실험에 의해, 그리고 이에 뒤이은 그 지역에 존재하는 다른 세력들(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남한) 측의 기동훈련에 의해 그 지역내의  제국주의간 긴장이 극적으로 첨예화됨으로써 그늘지게 되었다. 대회 이전에 가진 회합에서 ICC대표단과 SPA의 서울그룹은, 국제주의자들이  이 상황에 대해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데 동의했고 전쟁위협에 대항한 국제주의선언을 공동으로 대회에 제출할 것을 결정했다. 우리가 앞으로 살펴 보게될 바와 같이, 이렇게 제안된 선언에 의해 촉발된 토론은 대회 자체 동안의 논쟁들 중에서 중요한 일부를 차지했다.

이 보고서에서 우리는 대회의 논쟁들의 몇몇 주요 테마을 살펴보고자 한다. 토론 자체를 폭넓게 묘사할 뿐만 아니라,한국의 동지들에게 그들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국제적인 전망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숙고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역사적인 배경

그런데 우리가 대회 자체로 들어가기 이전에, 한국의 상황을 간략히 그 역사적인 배경 속에 자리매김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본주의가  극동으로 팽창하기 이전  수세기 동안 한국은 중국과 일본이라는 2개의 역사적인 강대국들 사이에 놓인 약소국이라는 그 지리적 입지로 인해 이득을 보기도 하고 해를 입기도 했다. 한편으로, 그것은 그 두나라를 위한 교량이자 문화적 촉매로서의 역할을 했는데, 예를 들어 중국 그리고 특히 일본의 도자기예술의 경우 지금은 잊혀진 청자유약기법을 개발한 한국의 도공들에게 크게 빚지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1]. 다른 한편으로, 이 나라는 이웃의 강력한 두 나라들에 의한 빈번하고 잔인한 침략들로 인해 고통당했으며, 근대사의 대부분 동안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한자를 썼던 그리고 유럽열강들이 그 지역에 도착함과 더불어 진행된 새로운 사상들의 유입에 저항했던 유교적 학자층에 의해 지배되었다. 19세기동안 중국, 일본 및 러시아-후자의 식민지 세력은 이때 중국의 국경과 태평양까지 확대됨- 사이의 점점 더 치열해진 라이벌의식은 한국 자체 내의 영향력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초래했다. 그런데 이러한 세력들이 추구한 영향력은 본질적으로 전략적인 것이었다: 투자회수의 관점에서 보자면 중국과 일본이 제공하는 가능성들은 한국에서 가능한 그것들보다 훨씬 더 막대했는데, 이는 한국지배계급들의 상이한 분파들 사이의 상살적인 투쟁들에 의해 야기된 정치적인 불안정을 감안하면 특히 그러했다. 이 지배계급들은 „근대화"의 이득을 놓고 그리고 한국의 제국주의 이웃들의 영향력을 이용해 그들 자신의 권력의 입지를 다지려는 노력들에 의해 분열되었다. 20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한국에 해군기지를 확립하려는 러시아의 시도가 강화되었고, 이것은 다시 일본의 독립성에 있어서 치명적인 위협으로 보여졌다. 이러한 경쟁은 1905년의 러일전쟁으로 이어지고, 이 전쟁동안 일본은 러시아의 함대를 전멸시켰다. 1910년 일본은 한국을 침략하여 식민정권을 세우는데 이것은 1945년의 일본의 패배까지 존속하게 된다.

그래서 일본의 침략 이전의 산업발전은 극도로 지연되었었고, 그 이후의 산업화는 거의 일본의 전쟁경제의 필요에 따라 조율되었다. 1945년경 한국에는 대략 2백만명의 산업노동자가 있었는데 그 대부분이 북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나라의 남부지역은 본질적으로 농촌지역으로 남은 채 혹독한 빈곤에 시달렸다. 한국의 노동대중들이 식민 지배, 강요된 산업화 그리고 전쟁[2]으로 인해 당하게 된 그러한 고통도 모자랐던지, 그들은 1989년까지 전 세계를 지배하게되는 새로운 제국주의적 충돌, 즉 미국과 소련이라는 2개의 거대한 제국주의 블록 사이의 지구분활의 경계영역에 놓이게 되었다. 스탈린주의적인 „조선노동당"에 의해 시작된 폭동을 지지한 소련의 결정은, 1945년 이후 그리스에서 그랬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결국은 미국의 제국적 지배의 새로운 변방을 시험해보려는 시도였다. 그 결과는, 비록 훨씬 더 크고 더 파괴적인 규모였긴 했으나 마찬가지로 남북한 사이의 맹렬한 내전이었다. 이 전쟁에서 남북한의 권력자들은-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자신의 부르조아 이해관계를 옹호하기 위해 싸웠던 간에- 세계 패권을 놓고 투쟁하는 강대국들의 앞잡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 전쟁은 3년(1950-1953)간 지속되었고 그 동안 한반도 전역은 교전중인 군대들의 계속된 전진과 후퇴에 의해 완전히 황폐화되었으며 결국 남한과 북한이라는 2개의 개별 국가들로의 영구적인 분할로 끝나고 말았다. 미국은 남한에 지금까지도 군사적 현존을 유지하고 있어서 대략 30,000명의 미군이 현재 주둔중이다.

전쟁이 종결되기도 전에 이미 미국은 군사적인 점령 자체는 그 지역을 안정화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고[3], 동남아시아와 극동을 위한 마샬계획에 해당하게 될 것을 제정하기로 결정했다. „경제적 사회적 빈곤이, 특정 아시아 국가들에서 권력을 잡게 친소련적인 민족주의 분파들이 사용하는 주요한 주장들의 하나임을 인식한 미국은 중국의 접경지역(대만, 홍콩, 한국 일본) 서구의 번영의 전초지로서 기능할 있는 지대들을 형성했다. 미국에게 있어서 최우선은 아시아에서 소련블록의 진군에 대항할 일종의 방역선을 확립하는 것이었다.[4]" 이 정책은 남한에게 중요한 함의를 가졌다: „원자재가 부족하고, 그것의 산업적 기반의 대부분이 북부에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나라는 전쟁의 말기에 고갈되어 버렸다. 생산은 44%, 고용은 59%  하락했으며, 신규 자본의 원천, 생산의 중간수단들, 기술력 경영역량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1945년에서 1978년까지 남한은 대략130 달러 또는 인구당 600달러를 대만은 56억달러 또는 인구당 4.5달러를 지원받았다. 1953년과 1960 사이에 외국의 원조가 남한 고정자본의 90% 차지했다. 미국에 의해 제공된 원조는 1957년에 GNP 14% 달했다. 그러나 미국은 나라에 대한 군사적, 재정적 기술적 원조에만 그치지 않고, 국가와 경제의 전체 경영을 또한 담당했다. 사실상의 민족부르조아가 부재한 상황에서 미국이 원하는 근대화를 수행할 있는 유일한 실체는 군대였다.국가자본주의의 고도로 효과적인 형태가 나라 모두에서 설치된 것이었다.유사-군대식의 집중화를 통해 하지만 시장을 인정하면서 공적부문과 사적부문을 밀접하게 연결하는 체계에 의해 경제성장에 박차가 가해졌다. 터무니 없이 과도한 관료제를 가진 동구식의 국가자본주의와는 반대로 이들 국가들은 국가적 집중화를 가치법칙의 인정과 결합시켰다. 수많은 중재주의적 정책(interventionist policies)들이 시행되었다. 경제적 집적체의 형성, 내수시장을 보호하는 법률들, 변경에서의 무역제한, 명령적이긴 했지만 또한 미래의 노력을 장려한 계획형태, 크레딧분배의 국가관리, 자본과 자원을 핵심산업으로 돌리기, 배타적인 면허의 발행, 경영독점등등. 그래서 남한에서는, 국가원조나 발의를  통해 종종 만들어지는 거대한 경제집적체인 재벌[5](일본어의 자이바추스와 동일)과의 독특한 관계 덕분으로 공공 당국이 경제 발전의 방향제시를 했다.. "

그래서 남한의 노동자계급은, 불안정하게 연속된 반-민주적(semi-democratic)이고 권위주의적인 군사정권들에 의해 시행된  잔인한 착취와 강제된 산업화 정책에 직면했다. 이러한 정권들은, 1980년 초의 광주에서의 대중봉기의 예에서와 같이 노동자들의 파업과 소요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함으로써 그들의 권력을 유지했다[6]. 광주사건 이후, 한국의 지배계급은 장성 전두환(한국정보부의 이전 우두머리)의 대통령직 하에서, 본질적으로 군사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권으로 남아있는 것에 민주주의적인 겉치례를 부여하여 상황을 안정시키려 했다. 그러한 시도는 무참히 실패했다: 1986년에는 서울, 인천, 광주, 대구 및 부산에서 대대적인 반대가 연이었으며, 한편 1987년에는 „3,300이상의 산업쟁의가 발생했는데, 이는 임금인상, 처우개선 작업조건개선에 대한 노동자들의 요구를 포함하면서 정부가 그들 요구의 일정부분을 수용하는 타협을 하도록 강제했다[7]" 무력으로 사회적 평화를 유지함에 있어서 전두환의 부패한 군사정권의 무능력은 방향전환을 초래했다. 전정권은,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총수, 장성 노태우의  „민주화 프로그램"을 수용했고, 노태우는 1987년 12월에 치뤄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하게 된다. 1992년의 대선을 통해,  민주 야당에서 오랫동안 총수를 지내고 있던 김영삼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의 전통이 완성되었다. 또는, SPA의 동지들이 우리에게 말했듯이, 한국의 부르조아계급은, 군부와 재벌과 보안기관 사이의 연합의 계속된 권력을 숨기기에 그럴듯한 민주적 겉모양새를 마침내 선출해낸 것이었다.

역사적 배경의 귀결

정치적 소수들의 최근 경험들의 측면에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주변부의 다른 나라들에서, 즉 아시아에서 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유사하다[8]. 그것은 한국에서의 국제주의운동의 출현 자체에 대해서도 중요한 귀결을 가졌다.

우리가 계급의 „집단적 기억"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의 수준에서 볼때,  유럽에서의 노동자계급의 축적된 정치적 그리고 조직적 경험들과 한국에서 계급의 경험사이에는 분명히 중요한 차이가 있다. 유럽에서 노동자계급은 1848년(영국의 인민헌장운동의 „완력(physical force)"분파)에 이미 사회의 독립적인 세력으로 스스로를 주장하기 시작했었다. 우리가1980년대 유럽에서의 계급투쟁의 물결동안 노동조합에 대한 일반적인 불신이 서서히 발달한 것을 그리고 노동자들이 자신의 투쟁들을 스스로의 손으로 행하려는 경향을 보여준 것을  기억한다면, 동일한 시기에 한국에서의 운동은 노동자 자신의 계급적 요구들을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부르조아 국가기구의 재조직을 위한 „민주주의 운동"의 요구들과 융합하려는 경향으로 특징지워진다는 점이  특히 놀랍다. 결과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와 부르조아계급의 민주적 분파들의 이해관계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이, 이 시기에 정치적 활동을 시작한 투쟁가들에게 즉각적으로 명백하지 않았다.

언어장벽에 의해 유발된 어려움들을 우리는 또한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집단적 기억"은 그것이 기록되고 이론적인 형태를 띨때 가장 강력하다. 1970년대에 유럽에 출현한 정치적 소수들이, 원문이든 번역본이든간에  사회민주주의 좌파(레닌, 룩셈부르크)의 저작들과 제 3인터네셔널좌파와 그로부터 출현하게 되는 좌파공산주의자들(보르디가, 판네콕, 고어타, 빌랑그룹 및 프랑스좌파공산주의자들)의 저작들을 접할 수 있었던 반면, 한국에서는 겨우 판네콕의 저작(노동자평의회)과 룩렘부르크의 저작(자본축적론)이 출판되기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노동자평의회를 위한  서울그룹(SGWC)와 이 그룹과 밀접히 관련된 SPA의 공동노력의 덕분이다[9]

한국의 상황에서 가장 특이적인 것은, 미국과 소련블록사이의 제국주의적 충돌에 의해 야기된 남북사이의 분단의 결과, 즉 남한에서의 미군주둔과 1988년말에 종결되게 되는 일련의 군사정권들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었다. 이것은, 한국노동자계급의 전반적인 경험부족, 계급 내부에서 분명한 국제주의적 목소리의 부재, 이에 더불어  우리가 위에서 설명했던, 노동자 운동과 부르조아적 민주적 재야 사이의 혼동 등과 조합된 채, 침투적인 한국민족주의가 종종 „반제국주의"로 가장된 채 사회를 전반적으로 감염시기는 것을 초래했다. 이에 따르면 단지 미국과 그 동맹국들만이 제국주의세력으로 보여진다. 군사정권에 대한 반대, 그리고 진정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는 미국에 대한 반대와 동일시되는 경향이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정치적 환경 내부에서의 논쟁의 중요한 특징 하나는 노동조합문제이다. 특히 현재의 활동가 새대들에게 있어서 노동조합주의(trade unionism)의 경험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의 투쟁들에 기반하고 있다.  이때의 노동조합은 대부분 비합법적이고 아직은 „관료주의화"되지 않았으며 확실히 매우 헌신적인 투쟁가들(현재 SPA와 SGWC에 관계된 동지들을 포함)에 의해 활성화되고 지도되었다. 노동조합의 „프로그램들"이 혁명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옹호할 수조차 없다는 점은, 그 당시 비합법성과 탄압이라는 조건으로 인하여 관련 동지들에게 분명하지 않았다. 1980년대 동안, 노동조합은 군사정권에 대항한 민주적 야권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는데, 후자의 야심은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것이 아나라 오히려 정반대로 군사정권을 타도하고 국가자본주의적 기구를 스스로 장악하는 것이었다. 반대로, 1990년대 이후의 한국사회의 „민주화"는 노동조합의 국가로의 이러한 통합을 공공연하게 만들었고 어떻게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 대처할 것인가를 놓고 투쟁가들 사이에 상당한 혼란을 초래했다. 한 동지의 진술에 따르면, „노동조합은 민주 국가의 가장 좋은 옹호자임이 밝혀졌다" 결과적으로, 노동조합에 대한 전반적인 „실망"감이 존재하고 노동자계급 내에서 투쟁활동을 위한 어떤 다른 방법이 모색되고 있다. 대회에서의 그리고 비공식적인 토론들에서의 발언들에서 반복적으로 우리는, 한국의 동지들이 자본주의 데카당스에서 노동조합의 본질에 대한 숙고를 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숙고는 러시아혁명이래, 특히 독일에서의 혁명 실패이래 유럽노동자운동에 대한 숙고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새로운 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스탈린주의와 부르조아민주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강하게 영향을 받았던 자신들의 과거 활동의 기반들에 의문을 제기하려는 진정한 노력들이 많은 한국의 투쟁가들 사이에서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 관여된 이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단결을 유지하고 토론 공간을 제공하려는 노력 속에서 몇몇 그룹들과 개인들이 다소 공식적인 „혁명적 맑스주의자 네트워크[10]"의 건설을 발의했다.  불가피하게도, 과거와의 결별은 극도로 어렵고 그래서 이 네트워크 내의 상이한 그룹들 간에 대단한 이질성을 결과시켰다. 위에서 우리가 간략히 기술한 역사적 배경들은,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의 원칙들과, 스탈린주의와 트로츠키주의를 특징짓는 부르조아적, 특히 민족주의적 전망 사이의 분화가, 1990년대의 실천적 경험을 기반으로 그리고 네트워크 내부에 좌파공산주의의 사상과 입장을 소개하려는 SPA의 노력 덕분으로 겨우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이러한 문맥 속에서, 이 대회에 대한 SPA의 서문에는 우리가 보기에 절대적으로 근본적인 2가지 측면들이 있다:

  • 첫째, 한국의 혁명가들이 한국 노동자들의 경험을 국제노동자계급의 더 넓은 역사적 이론적 틀 속에 자리매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선언한 것이다: „대회의 주제를 이론, 실천, 전망으로 구분하고 이를 꿰뚫는 인식의 지평을 넓혀 나가는 것이 이번 대회의 주요 목표이다. 우리는 이번 대회를 시작으로 세계의 혁명적 맑스주의 세력이 연대하고 단결하여 세계혁명을 향한 힘을 축적하고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역사적 과업을 완수하기를 바란다."
  • 둘째, 이것은 좌파공산주의의 원칙을 기본으로 해서만 수행될 수있다는 점을 분명히 선언한 것이다: „이번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는 한국의 혁명적 맑스주의자들과 세계의 좌익공산주의자들과의 소중한 만남과 토론의 마당이며 혁명적 맑스주의[즉, 좌파공산주의] 진영내의 입장과 노선 차이를 드러내고 소통하는 번째 경험이 것이다."

대회에서의 논쟁들

이 글은 이 대회의 토론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하기에 너무 짧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떠오른 가장 중요한 요점들로 보이는 것들을 조명하려 할 것이다. 이때, 우리는 그 대회에서 시작된 논쟁들이 한국의 동지들 사이에서 그리고 더 전반적으로는 전세계의 국제주의운동 내부에서 계속되는데 공헌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자본주의의 데카당스에 대하여

이것은 토론의 첫번째 주제였다. 논쟁 자체를 살펴보기전에 우리는, SPA의 근본적인 노고를, 즉 계급투쟁의 상황과 혁명전략이라는 토론될 다른 문제들에  견고한 이론적 기초지식을 제공함으로서 대회를 시작한 SPA의 근본적 노력을 진심으로 지지한다는 점을 먼저 말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좌파공산주의 내부에 존재하는 상이한 시각들을 간략히 요약 제시하려한 SPA 동지의 영웅적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이 문제의 복잡성-20세기가 시작된 이래 노동운동 내부의 논쟁의 주제가 되었고 여러 위대한 정신들을 단련시킨-을 감안하면, 이것은 극히 담대한 시도였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것은 너무 과감한 것이었다! 자본주의 데카당스 개념이 „본능적으로" 우호적으로 수용된 점(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을 보게 된 것은 매우 놀라웠던 한편, 토론 중에 그리고 그 이후에 비공식적으로 제기된 질문들로 볼때, 대부분의 참가들에게 있어서 이 문제와 깊이 씨름하기에는 이론적인 기초가 부족하다는 점 또한 명백했다[11]. 이렇게 말하는 것은 결코 비판이 아니다: 여러 기본적 텍스트들이 한국어로 입수될 수 없는데, 이는 그 자체가 -우리가 이미 언급했듯이- 한국의 노동운동의 객관적인 경험부족의 표현이다. 우리는, 제기된 문제들과, 특히, SPA와 ICC에 의해 제출된 발제문들을 통해, 동지들이 그 논쟁 속에서 스스로의 입장을 세우기 시작하고 또한 -  마찬가지로 중요하게도 - 이러한 이론적 문제가 실제 세계와 구체적인 투쟁 노력들의 외부로부터 부과된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상황의 기본적이고 결정적인 요소라는 점을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12].

한 젊은 학생이 제기한 질문 하나는 제시할 만한데, 이것은 현재의 자본주의에서의 외양과 실체 사이의 충격적인 모순을 몇 마디로 표현했다: „많은 사람들이 데카당스를 느끼고 있다, 우리들-대학생들-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에 빠지기 쉽다, 풍족한 사회가 존재한다는 느낌이 있다, 어떻게 우리는  데카당스를 구체적으로 표현할 있을까?"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적어도 산업국가들에서)의 한 측면은, 우리가 „소비적인 풍족"한 세상에 살고 있는 체 하는 것임은 사실이다.  그리고 참으로 서울의 도심거리들, 전자제품으로 가득 채워진 상점들은 현실이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일치하는 듯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한국의 젊은이들도 다른 곳의 젊은 프로레타리아들과 동일한 문제들, 즉, 실업, 임시고용계약, 구직난, 높은 주거비용이라는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오늘의 노동자계급 젊은이들에게,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서면상의 답변에서 지적하려 했던 점, 즉 그들이 겪고 있는 대량실업과 자본주의의 데카당스의 또 다른 근본적 측면인 전면화되고 영구적인 전쟁사이의 연관성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과업의 일부이다.   

계급투쟁에 대하여

확실히, 대회 도중 뿐만 아니라 한국 운동 전반에 있어서 토론중인 가장 중요한 쟁점들의 하나는 계급투쟁과 그 방법의 문제였다. 대회 중의 발언들과 비공식적인 토론으로부터 우리가 이해하기로는, 노동조합 문제는 1980년대 말에 투쟁에 가담하게 된 투쟁가들에게 있어서 실제적인 문제를 부과한다. 어쩐지 한국의 상황은, 연대노조의 결성 이후의 폴란드에서의 상황과 유사하다- 그리고 좌파공산주의의 원칙이, 즉 자본주의의 데카당스에서 노동자계급의 영구적인 대중 조직 건설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심히 옳다는 것의 또다른 표현이다. 한국에서의 경우처럼, 투쟁의 열기 속에서 건설된 노동조합들 조차도 종국에는 국가의 부속물이, 노동자의 투쟁을 강화하는 수단이 아니라 노동자의 투쟁에 대한 국가의 장악을 강화하는 수단이 되어버릴 수 밖에 없다. 왜 그럴까? 근본적으로 그 이유는, 데카당스 시기에는 자본주의로부터 지속적인 개선을 얻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우리가 이전에 언급했듯이- 민족적 부르조아계급의 상이한 분파들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노동자들에게 공통적인 국제적 관점이 아니라 종종 단일 업종이나 산업 또는 한정된 민족적 관점을 필연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다. 불가피하게 그것들은 „무엇을 국가가 부담할 수 있는가"라는, „무엇이 국민경제에 좋은가?"라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머리를 숙인다. 이것은 실상 우리가 들을 수 있었던  한국 노동조합에 대한 비난의 하나였다- 그것들은, 노동자 자신들의 요구들에 그 기반을 두기는 커녕 노동자들의 요구를 사장들이 지불할 준비가 된 것에 맞춰 제한하도록 노동자들에게 촉구하는 지점까지 도달했다는 것이다[13].

노동조합의 불가피한 배반과 민주적 국가 기구로의 편입에 직면하여, 한국의 동지들은 좌파공산주의의 사상에서 그 해답을 모색하고 있었다. 결국, „노동자평의회(workers' councils)"개념이 그곳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어켰다. 문제는, 노동자평의회를 혁명적 상황에서 노동자권력의 기관으로서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내부에서 영구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하나의 새로운 종류의 노동조합으로서 바라보는 일반적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진정 이러한 생각은 심지어 „혁명적 노동자당을 위한 투쟁가그룹„에 의해 이뤄진 „남한에서의 현시기에서 평의회운동전략 및 그 실천 방안"에 관한 발제에서 역사적으로 이론화되어 있었다. 이 발제는 1919년의 독일혁명 동안에 건설되었던 노동자평의회가 사실상 노동조합으로부터 진화되었다고, 실제와는 완전히 정반대를 주장함으로써 역사를 완전히 전도시켰다는 점을 말할 수 밖에 없다[14]. 우리의 견해로는, 이것은 단지 학구적인 논쟁에 의해 정정될 수 있는 종류의 역사적 부정확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더 심오하게는,  혁명적 시기 이외에는 노동자들이 영구적으로 투쟁상태에 있는 것이 단순히 불가능하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극도로 어렵다는 사실로부터 유래한다. 그러한 논리에 사로잡힌 투쟁가들은-노동자계급을 위해 일하려는 그들의 진실한 열망과는 상관없이 그리고 그들이 진정으로 옹호하는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입장들과는 상관없이- 즉각주의(immediatism)의 함정에 빠질 위험에, 즉, 있는 그대로의 실제 역사적 상황 이내에서 구체적으로 가능한 것과는 전혀 어떤 연관도 없는 „실천" 활동들의 꽁무니만 끊임없이 찾아다닐 위험에  처해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세계관으로 볼때,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제기하는 것은 그에 대답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ICC 대표단 한명이 표현했듯이, „노동자들이 투쟁 중에 있지 않으면, 그들의 머리에 총을 들이대며 ‚너희들은 투쟁해야 돼!'라고 명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혁명가들이 노동계급을 „대신하여" 투쟁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혁명가들은 계급투쟁을 선동할 수 없는데, 이것은 하나의 원칙이 아니라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계급 자신이 스스로를 의식하는 것,그들 자신의 이해를 가진 그리고 특히 즉각적인 투쟁을 넘어서는,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실업수당대열에서의 노동자들의 즉각적인 상황들을 뛰어넘는 혁명적인 목표를 가진 하나의 계급으로서 사회 속에서 그 자신의 자리를 자각하는 것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1905년의 러시아에서와 같은 외관상으로는 „자연발생적인" 프롤레타리아 폭동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것들의 하나이다. 그 당시 혁명가들이 투쟁 초기의 급격한 고조에 작은 부분적인 역할 밖에 수행하지 않았긴 하지만, 그 지형은 사회-민주당(그 당시의 혁명가들)의 체계적인 개입활동에 의해 수년간 준비되어 왔었고, 그것은 노동자들이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자각을 발전시키는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15]. 간단히 표현하자면, 노동자들의 공공연한 투쟁의 시기 이외의 시기에 혁명가들의 본질적인 임무는, 다가올 투쟁을 강화시킬 그러한 사상들을 선전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로렌 골드너와 국제주의전망 대표단의 발제들에서 제기된, 우리가 생각하기에 대답되어야 될 것 같은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즉, 노동자계급의 „재구성(recomposition)" - 다시 말해, 한편으로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의 특징인 대공장들이 지리적으로 광범위하게 분산된 생산을 위해 사라지는 경향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들에게, 특히 젊은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점점 더 비정규의 노동 조건들(단기계약, 실업, 시간제 노동, 등등) - 은 „작업장을 초월" 하는 „새로운 투쟁방법들"의 발견을 결과시켰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투쟁방법들"의 가장 유명한 예들는 2001년 아르헨티나에서의 피케테로스(piqueteros)운동에 의해 고안된 것으로 추정되는 „플라잉 피켓츠(flying pickets)" 그리고 2005년의 프랑스 근교지역에서의 폭동들이라 한다. 우리의 관점에서는 심히 오해된 듯 보이는 프랑스의 폭동들과 피케테로스운동에 대한 그 동지들의 열광에 우리가 지금 이글에서 대답할 생각은 없다[16]. 하지만 이러한 입장들에서 표현된 좀 더 일반적인 정치적 오류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노동자들의 혁명의식은 결국 작업장에서의 그들의 즉각적인 일상 경험에 의존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상, 비정규의 노동조건들과 „플라잉 피켓츠"는 역사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17], 우리를 놀래키기 위해 제시된  소위 „새로운 투쟁형식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무력함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2005년의 프랑스 근교들의 젊은이 폭동들이 고전적인 실례이다. 실제(reality)는, (자본주의의 데카당스 시기에) 노동자 투쟁이 특정한 독립성을 획득할 때면 언제나 그것은 노동조합에서가 아니라, 선출된 대표단을 가진 대중집회들에서, 바꿔 말하자면 평의회로부터 유래하고 또 그러한 평의회의 맹아를 간직한 조직형태 속에 스스로를 조직하는 경향이었다는 점이다. 최근 역사의 가장 인상적인 실례는 물론 1980년의 폴란드에서의 투쟁들인데, 역시 1980년대의 또 다른 경험은, 이태리에서의 교사들(„전통적인" 산업부문이라고 말할 수 없는!)의 대대적인 투쟁동안에 형성된 코바스(Cobas)(기초위원회(rank-and-file committees))였다. 시기적으로 더 최근의 예로서 우리는 2006년 스페인 비고(Vigo)에서의 파업을 들 수 있다[18]. 여기서 파업을 시작한 기술노동자들은 대부분이 소규모 기업에서 비정규직 노동계약으로 일했다. 투쟁의 구심점을 형성할 수 있을 어떤 단일한 대규모 공장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작업장이 아니라 그 지역의 광장에서 매일의 대중집회를 가졌다. 이러한 대중 집회들은 다시 동일한 지역에서 1972년에 이미 활용된 조직형태로 소급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렇다면 이것이다: 왜19세기말에는 대대적인 비정규 노동력의 발전이 비숙련노동자들의 최초의 대중노조들의 설립을 초래한 반면, 21세기에는 더 이상 그렇지 않은 것인가?

왜 1905년의 러시아 노동자들은, 레닌이 „프롤레타리아계급 독재의 최종적으로 발견된 형식"라고 불렀던 노동자평의회 - 소비에트(the soviet) - 를 창안해 냈는가?

왜 노동자들이 그들의 자치성(autonomy)과 세력을 발전시키는데 성공했을 때마나 대중집회가 노동자조직의 전형적인 형태가 되는가?

우리의 견해로는, 이미 말했듯이, 그 해답은 사회학적 비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20세기 초에 발생한 역사적 시기의 변화를 훨씬 광범위하게 정치적으로 파악하는 데에 있다. 이러한 변화를 제 3인터네셔널은 „전쟁과 혁명의 세기"의 시작으로서 묘사했다.

게다가, IP와 로렌 골드너가 옹호하는 노동자계급의 사회학적 비젼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정치적, 이론적 능력을 완벽히 과소평과하는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는 충격적이다. 그것은 마치 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 관해서만 사고할 수 있기나 하듯이, 마치 그들이 일터를 떠나자마자 그들의 뇌가 꺼져버리기나 하듯이, 마치 자신들의 아이들의 미래(학교, 교육, 사회적인  해체의 문제들)에 관하여, 그리고 노약자와의 또 미래세대들과의 연대(악화되는 의료시설 문제, 연금문제 등등)에 관해 그들이 전혀 무관심하기라도 하듯이, 마치 그들이 환경문제나 전쟁의 끊임없는 야만성을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없기나 하듯이, 그래서 그들이 넓은 세상에 대해 배운 것을 작업장에서의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자신들의 직접적 경험에 관련지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나 한 듯이.

또한, 세계에 대한 이러한 폭넓은 정치적 역사적 이해는 즉각적인 투쟁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세계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자본주의를 타도하는데 성공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 대신에 전혀 새로운 사회를, 인류역사상 전혀 존재한 적이 없는 그런 종류의 사회를 건설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류 역사에 대한 가장 심오한 이해를 발전시킬 수 있어야만 한다, 예술과 과학과 철학에서 인류의 가장 위대한 성취들을 자신이 물려받은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노동자계급의   정치조직들이 지향하는 정확히 그 것이다. 이러한 조직들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조건과 그들에게 열려있는 전망들에 관해 더 총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수단이다[19].

전쟁위협에 대한 반대선언

우리는 이미 그 선언의 텍스트를 우리의 웹싸이트에 공개했기에 그 내용을 여기서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20]. 그 내용을 둘러싼 논쟁은 울산 노동자 배움터의 한 회원에 의해 제기된 제안, 즉 그 지역의 증대하는 긴장에 대한 주요한 책임을 미국에게 묻자는 그래서 결국은 북한을 미국의 봉쇄정책의 „희생자"로 제시하자는 제안에 집중되었다.이 제안과, 대회에 참가한 많은 트로츠키주의 경향들 몇명으로부터 이 제안에 부여된 지지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많은 한국 동지들이 1980년대의 „반제국주의"(근본적으로는 „반미주의"로 읽히는) 이데올로기들과 단절하는데 겪는 어려움을 그리고,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이 진심으로 스탈린주의를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옹호에, 그래서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계속된 애착을 잘 나타낸다.

ICC와 몇몇 SPA 동지들은 선언의 주요 취지를 변경하는데 강력히 반대했다. 서울과 울산에서 있었던 데카당스에 관한 논쟁에서 우리가 지적했듯이, 하나의 제국주의적 충돌에서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서 „더 비난당해야" 한다는 생각은, 사회-민주주의적 반역자들이1914년에 노동자들로 하여금, 즉 독일노동자들은 „짜르의 야만주의"에 대항하여, 프랑스노동자들은 „프러시아의 군국주의"에 대항하여, 영국노동자들은 „용감한 꼬마 벨기에"를 지원하기 위해서 등등„그들의" 국가를 지지할 것을 호소할 있게 했던 그것과 정확히 동일한 생각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자본주의의 데카당스 시기는, 제국주의는 이런 저런 국가의 실수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의 근본적인 특성이고, 이 세기에 모든 국가는 제국주의적이라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분석의 심오한 진리를 보여주었다. 미국이라는 거인과 북한이라는 피그미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그들의 제국주의적 식욕의 크기이자 그것을 만족시킬 능력이다.

또 다른 2개의 반대 의견이 토론 동안 제기되었는데, 이것은 거론할 만하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그러한 긴장상황을 억압적 대책을 수립하는 빌미로 삼고 있는 남한 정부를 비난하자는  „노동해방연대"그룹의 한 동지의 제안이었다. 이 매우 정당한 제안은 서울에서의 토론에서 이뤄졌고 그 다음 날 울산에서 논쟁된(및 그 이래 공개된) 최종판은 그에 따라 변경되었다.

두번째 반대 의견은, „사회주의노동자[21]"그룹의 한 동지로부터 였는데, 현상황은 사실상 그렇게 심각하지 않으며, 지금 전쟁을 비난하는 것은, 부르조아계급에 의해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 협연되고 있는 전쟁공포를 신임하는 결과가 되어버릴 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 반론은 합리적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점으로 보자면 잘못된 것이었다. 어떻든 극동에는 임박한 전쟁위협이 존재하고, 전쟁위협이 이 지역에 걸려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제국주의의 장면 속의 상이한 주연 배우들(중국, 대만, 일본, 미국, 러시아)사이의 긴장들은 증대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국제주의자들이 모든 제국주의 진영들의 책임성을 비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1907년 슈투트가르트회의에서 결정된 국제주의결의를 지키기 위해 투쟁했던 레닌, 룩셈부르크 및 제 2 인터네셔널좌파의 모범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제국주의적 충돌의 결정적인 사건들이나 계급투쟁에 대하여 프롤레타리아계급 내부에서 입장을 취하는 것은 혁명조직들의 제일의 책무이다[22].  

이 점에 대한 결론으로써, 우리는 이 선언에 대해 IP대표단과 대회에 개인자격으로 참가한 다른 동지들이 보여준 우애적이고 국제주의적인 지지를 환영한다.

결산

우리 대표단이 출국하기전에 있었던 마지막 모임에서 ICC와 SPA는 그 대회에 대한 총괄평가에 있어서 전적으로 동의했다. 제기된 중요한 점들은 다음과 같다:

  1. 이 대회가 개최된 자체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라는 사실. 왜냐하면 그것은, 극동의 고도로 산업화된 나라에서 좌파공산주의의 입장들이 옹호되고 또 뿌리를 내기리기 시작한 그 처음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2. SPA은 대회 동안의 토론들이 좌파공산주의와 트로츠키주의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실천적으로 보여준 점에 있어서 특히 중요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대회는 좌파공산주의의 원칙들에 대한 그들 사진의 이해를 발전시키려는 그래서 이러한 원칙들을 한국 노동운동 속에서 널리 알려지게 하겠다는  SPA의 결심을 강화시켰다.
  3.  북한의 핵실험에 관한 공동선언은 좌파공산주의의, 특히 SPA와 ICC의 국제주의적 입장들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그 선언에 관한 논쟁은 한국노동운동에 잔존하는 민족주의적 경향들의 문제를 노출시켰다. „네트워크" 내부에는 이점에 대한 견해차이가 존재하고, 이 문제는 그 환경에서 풀리지 않은 채 이며 SPA는 장래에 이 문제의 극복을 위해 일할 결심이다.
  4. 미래의 논쟁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들 중의 하나는 노동조합문제이다. 한국의 동지들이, 특히 1980년대 이래의 그곳에서의 노동조합의 역사를, 좌파공산주의에 의해 옹호된 입장들 속에 집적되어 있는 것과 같이 세계프롤레타리아계급의 역사적 경험의 견지에서 분석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전망

그 모든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대회가 극동에서 좌파공산주의 원칙의 존재를 그리고 동서양의 혁명가들 사이의 공동작업을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단지 한 걸음을 내디딘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안다. 즉, 우리는 이 대회가 개최되었다는 사실과 그 속의 논쟁들이, ICC가 항상 주장해 오고 있으며 또 노동자계급의 미래 세계공산당의 건설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 될 2가지 점들을 확인시켜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 첫째는 그러한 조직이 건설될 정치적 기반이다. 모든 근본적인 문제들-노동조합문제, 의회문제, 민족주의의 문제 및 노동해방투쟁-에 대해서 새로운 국제주의운동의 발전은 1920년대에서 50년대 사이에 좌파공산주의의 작은 그룹들(특히, 빌랑(Bilan), KAPD, GIK, GCF)에 의해 이뤄진 기초작업을 기반으로 성취될 수 밖에 없다. 이 그룹들로부터 ICC는 기원을 갖는다[23].

두번째, 한국에서의 이번 대회는 그리고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연대를 완수하자"라는 SPA의 명쾌한 요청은 또한 , 국제주의운동이 기존의 국가적 정당들의 연방을 기초로 해서가 아니라 곧 바로 국제주의적 수준에서 발전하고 있음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24].

이것은, 혁명의 와중에 그리고 제 2인터네셔널의 국가적 정당들로부터 출현한 좌파 분파들을 기반으로 제 3인터네셔널이 창건되었을때의 그 상황을 너머선 역사적 진보이다. 그것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세계적인 생산 과정에서, 그리고 세계적 규모로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함으로써만 그 모순들이 극복될 수 있는, 세계적인 인류공동체에 의해 대체될 세계적인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단결된 하나의 계급이라는, 현재 노동자계급의 본성을 또한 반영한다.

존 던/하인리히 쉴러


[1]    우리는 15세기에 이뤄진 한글의 발명을 또한 언급해야 겠는데, 이는 구어형의 언어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에 근거해 표기법을 창조한 아마도 최초의 시도일 것이다

[2]    이것은 수 천명의 한국여성들이 일본 군대의 사창가에서 겪어야 했던 강요된 매춘을 포함했고, 한국농업이 일본 자체의 식량필요에 의해 점점 더 직접적으로 지배되면서 이뤄진 전통적인 농업경제의 파괴를 포함했다.

[3]    „미국은 비공산주의 영역과 공산주의 영역 사이에 군사적인 장벽을 만드는데 관심을 갖고 있다. 장벽이 효과적이라면 뒤에 놓인 영역은 안정적일 것이다(...) 미국은 동요의 특정 원인들을 결정해야만 하고 그것들을 제거하는데 있어서 지능적이고 대담하게 조력해야 한다. 중국에서의 우리의 경험은 동요의 원인들과 타협하는 것이 쓸모없음을, 일시적인 안정을 추구하는 정책은, 일반적인 요구가 영구적인 변화를 갈망하기 시작하면 실패할 밖에 없음을 보여주었다. " 멜빈 코넌트 주니어, „JCRR: 구체적 실례(an object lesson)", 극동 조사(Far Eastern Survey)에서, 5월 2일, 1951

[4]    아시아의 용들이 기운을 잃어간다" 인터네셔널리뷰 제 89호(1997)

[5]    분배된 적산을 그 가치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재벌이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 제일이자 가장 중요한 재정적 원천이었다. 전쟁직후 이것은 남한이 일본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의 30%에 달했다. 초기에 미군정의 적산분배에 대한 통제 하에서 그것들은 군정 자체에 의해 그리고 한국정부에 의해 분배되었다.

[6]    이 글에서 우리는, 초강력-군국주의적 스탈린주의적인 체제의 모든 공포를 경험하고 있는 북한의 노동자계급의 상황을 다루지는 않겠다.

[7]    앤드류 남, 한국민중의 역사

[8]   즉각 생각나는 예로서 필리핀과 브라질을 들수 있다.

[9]    SGWC의 몇몇 동지들은 이번 대회에 개인자격으로 참가했다.

[10]   SPA 이외에 네트워크에 속하는 다음과 같은 한국그룹들이 대회에서 발제를 했다: 노동해방연대, 울산 노동자 배움터, 당건투. 계급투쟁에 대한 발제문 하나는  개인 자격으로 참여한 로렌 골드너에 의해 제시되었다.

[11]    이는 서울에서 열린, 데카당스에 관한 토론에서 특히 그러했다. 이때의 토론은 대중에게 공개된 것이어서 청중 속에는 정치적 경험이 적거나 거의 없는 젊은 학생들이 많았다.

[12]    우리는 국제주의전망(Internationalist Perspective) 그룹의 „자본의 형식적이고 실제적인 지배"에 대한 강박관념을 여기서 검토할 생각은 없다. 우리는, IP가 여전히 „ICC의 외부분파(External Fraction of the ICC)"라 자칭하던 1990년에 발간된 인터네셔널리뷰 제 60호에 이 주제를 이미 길게 다룬바 있다(https://en.internationalism.org/ir/060_decadence_part08.html 을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새로운" 이론적 통찰의 우월성을 실상에서 과시하려는 IP의 최초의 노력이 거의 신빙성이 없었다는 점은 언급할 만한데,  IP가 동유럽에서의 사건들은 사실상 소련의 강화를 나타낸다는 주장을 베를린 장벽 붕괴 3년후에도 계속했기 때문이다!

[13]    불가피하게, 이러한 설명은 극도록 도식적으로 남아있고, 교정되고 상세화될 여지가 열려있다. 울산노동자 배움터의 동지가 행한 한국노동운동사에 관한 발제가 영어로 번역되기에는 너무 길어서 우리가 접할 수 없었던 점을 우리는 매우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 동지가 그것의 요점을 요약하는 그 텍스트의 축약본을 준비해서 번역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14]    사실상, 독일혁명 동안의 노동조합은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의 최악의 적이었다. 독일혁명에 대한 설명으로는 인터네셔널리뷰 제80-82호에 실린 기사들을 참조.

[15]    인터네셔널리뷰 제 120, 122, 123, 125호에 실린, 1905년혁명에 관한 우리의 일련의 기사들을 참조:

https://en.internationalism.org/taxonomy/term/340

[16]  이 주제에 관한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프랑스 근교들에서의 폭동: 절망과 마주하여, 계급투쟁만이 미래를 제시한다(Riots in the French suburbs: in the face of despair, only the class struggle offers a future)"와 „아르헨티나: ‚피케테로'운동의 신비화(Argentina: the mystification of the ‚piquetero' movement)" 을 참조. 이 글들은 각각 en.internationalism.org/icconline/2005_suburbs 와 인터네셔널리뷰 제 119호(https://en.internationalism.org/ir/119_piqueteros.html )에 실려있다. 대규모의 산업노동력의 „소멸"이라는 생각을 제안하는 것은 울산에서는 어쩐지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였다는 점을 말해야 겠다. 이곳에는 현대공장 단독으로도 2만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다!

[17]    예를 들어, „비정규의 노동"이 „새로운 투쟁형태"로서의 „플라잉 피켓츠"의 창안을 결과시켰다는 생각을 살펴보면, 우리는 이 생각이 단순히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다는 점을 볼 수 있다. 플라잉 피켓(즉, 투쟁중인 노동자들의 대표단이 다른 노동자들을 투쟁에 합류시키기 위해 다른 작업장으로 가는 것)은 이미 오랫동안 시행되고 있다. 영국의 예만 보더라도 플라잉 피켓은 1970년대에 있었던 2개의 중요한 파업들에서 유명하게 사용되었다. 즉, 광부들이 발전소에 피켓을 보냈던 1972년과 1974년의 광부파업들에서, 그리고 건설노동자들이 다른 공사장으로 파업을 확산시키기 위해서 피켓을 보냈던 1972년의 건설노동자파업에서. „비정규의" 노동력의 존재도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사실상, 혁명적 노동조합주의자 톰 만(Tom Mann)의 „총노동자조합(General Labourers' Union)"(엥겔스 그리고 맑스의 딸 엘레노어도 이 노조의 발전에 관계했었음)이 1889년에 설립되게 만든것이 정확히 정확히 바로 이러한 대규모의 비숙련의 비정규 노동력의 출현이었다.

[18]    세계혁명 제 295호에 실린 기사를 참조: https://en.internationalism.org/wr/295_vigo

[19]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의 운동을 거기에 맞추고자 하는 바의 특수한 원리들을 세우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이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의 다양한 일국적 투쟁들에 있어서 국적에 상관없는,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공동 이해를 내세우고 주장한다는 점에서만, 다른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조아지 사이의 투쟁이 경과하는 다양한 발전 단계들에 있어서 항상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만 다른 프롤레타리아 정당들과 구별된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은 실천적으로는 모든 나라의 노동자 정당들 중에서 가장 단호한 부분, 언제나 운동을 추동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부분이다: 그들은 이론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조건들, 진행 일반적 결과들에 대한 통찰을 여타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에 앞서서 가진다(공산주의당 선언, 맑스-엥겔스저작선집 1권, 412-3쪽,박종철출판사)"

[20]    이 선언은 온라인상으로 en.internationalism.org/icconline/2006-north-korea-nuclear-bomb 에서 찾아볼 수 있다.

[21]    이 그룹의 영어명은 Socialist Worker이다. 그 명칭에도 불구하고, 이 그룹은 영국의 „사회주의 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와는 무관하다. 만약 우리가 그 동지의 생각을 잘못 제시했다면 먼저 사과한다-언어 장벽때문에 우리가 해석의 오류를 범했을 지도 모른다.

[22]    이 대회에서 국제주의자들이 전쟁위협에 직면하여 침묵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보기에는 1970년대 말의 좌파공산주의대회에 비해서 한 걸음 진보 한 것이다. 그 당시에는 다른 참가자들-그리고 특히 바타글리아 코뮤니스타와 CWO-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어떤 공동선언도 거부했다.

[23]    IP에 따르면, 우리는 „좌파공산주의"를 넘어서야 한단다. 적어도 우리가 거명한 모든 그룹들 중에서 그 누구도, 그들이 이런 저런 문제들에 대해 최종의 말을 한 것인 체 하지 않았다. 역사는 전진하고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토대를 세우지 않고 집을 짓는 것은 불가능하며, 우리의 관점에서 볼때 그러한 건설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토대들은 좌파공산주의의 선구자들의 그것이다. IP의 입장의 논리는 우리가 출현한 그 역사를 내던져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는 우리와 더불어 시작된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IP가 이 생각을 얼마나 싫어하든 간에, 이것은 „당(the Party)"(IBRP의 경우에는, „사무국(the Bureau)")이 지혜의 유일한 원천이고 다른 누구로부터도 어떤 것도 배울 필요가 없다라는 보르디가주의의 입장의 한 변형에 불과하다.

[24]    미래의 국제주의 조직의 발전의 이러한 측면은 1980년대에 ICC와 IBRP사이의 논쟁의 한 주제였다. IBRP는 국제주의 조직은 상이한 나라들에서 이미 존재하는 독립적인 정치조직들을 기반으로 형성될 수 밖에 없다는 견해를 고수했다. 이 „이론"을 현재의 국제주의운동의 진정한 실천이 완전히 무효화시킨 점은 IBRP의 실천적 이론적 파산을 보여준다. 

데카당스(쇠퇴)이론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조건과 원칙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1) 역사적 유물론의 구체화

데카당스 이론은 원시 공산제, 고대 노예제, 봉건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등의 생산양식의 발전을 분석하는 역사유물론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따라서 데카당스 이론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 시기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틀이다. 사회가 아직도 진보하고 있는지 또는 사회가 진보를 완결하여 ‘역사'로 되었는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정치, 사회, 경제적인 수준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모든 과거에 존재하였던 사회처럼, 자본주의의 상승 단계는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생산관계의 역사적으로 필요한 성격, 즉 사회의 생산력 확대에서 생산관계가 하는 중대한 역할을 나타내 준다. 이와 대조적으로, 데카당스 단계에서 생산관계는 생산력을 확대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생산력 확대를 막는다. 이것은 맑스와 엥엘스가 우리에게 남겨준 주요한 이론적 성과 가운데 하나이다.

20세기는 인류의 역사에서 보기를 찾을 수 없는 참으로 잔인한 시기였다. 20세기에 일어난 수많은 전쟁은 규모와 빈도, 기간에서, 그리고 그 결과 인간들에게 안겨준 재앙의 폭에서 다른 어떤 시기와 비교할 수 없었다. 즉 전쟁은 지구 전체를 뒤흔들고 수천만 명의 프롤레타리아트와 인류를 절망적인 가난으로 몰아넣은 경제위기를 가져왔고, 역사에서 가장 커다란 기근에서 체계적인 집단학살까지도 낳았다. 19세기와 20세기는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시대였다.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Belle Epoque)」동안 부르주아 생산양식은 비할 바 없이 가장 전성기를 누렸다. 이 때 부르주아 생산양식은 전에는 꿈으로만 꾸어왔던 생산성과 기술의 정교화를 이루면서 지구를 하나로 묶어 놓았다. 사회의 토대에 긴장이 쌓여가고 있었지만, 자본주의가 성장한 지난 20년(1894-1914)은 가장 번영한 시기였다. 자본주의는 적이 없는 것처럼 보였고, 군사적 갈등은 주변부에 한정되어 있었다. 거의 끊이지 않고 도덕적, 지적, 물질적 진보를 이룬 "긴 19세기" (역사가 홉스봄의 표현)와 달리, 1914년 이후의 20세기에는 모든 면에서 뚜렷한 퇴보가 있었다. 지구를 가로질러 더욱 더 세계의 종말을 방불케 하는 경제와 사회생활의 성격, 끝없이 이어지는 갈등 속에서 자멸의 위협, 그리고 심상치 않은 생태계의 재앙은 당연한 숙명도 아니고 단순히 인간의 광기의 산물도 아니며, 자본주의 발생과 더불어 시작된 자본주의의 특성도 아니다. 그러한 퇴보는 처음부터, 즉 16세기에서 1차 세계대전까지 경제, 사회, 정치 발전의 강력한 요인인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데카당스의 징후였다. 그리고 이는 모든 그러한 발전의 족쇄가 되었으며, 인류의 생존 그 자체에 대한 위협이 되었다.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물질적 가난 없는 세상을 향해, 인류의 필요와 욕망, 그리고 의식을 근거로 하여 인류가 활동할 수 있는 통일된 사회를 향해 움직일 수 있게 한 수준으로 생산력이 발전했던 바로 그 순간에 왜 인류는 생존의 문제와 마주하게 되었는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는 정말로 자본주의가 이끌어온 막다른 골목에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혁명세력을 이루는가? 왜 우리 시대에 노동자 투쟁의 대부분의 형식은 특정한 민족국가의 헌법이나 부르주아지의 진보적인 특정분파를 지지하면서 노동조합주의와 의회주의를 통한 점진적 개혁을 위한 투쟁과 같은. 지난 세기에 두드러진 노동자 투쟁의 형식일 수밖에 없는가? 이러한 초보적이지만 중요한 질문에 답변할 수 있는 지구적이고 일관된 전망도 없고, 여전히 전위 역할을 할 수 없는 현재의 역사적 상황에서 우리의 방향을 찾는 것은 힘든 일이다. 맑스주의, 즉 역사유물론은 그러한 질문을 풀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세계관이다. 대답은 명확하고 단순해서 몇 마디로 할 수 있다. 앞 선 생산양식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는 영원한 체제가 아니다.

"어느 선을 지나면, 생산력의 발전은 자본에 대한 장애요소가 되고, 결과적으로 자본 또한 노동의 생산력 발전의 장애 요소가 된다. 일단 이러한 관계가 형성되면, 족쇄로서의 길드체제, 농노제, 그리고 노예제가 해체되었던 것처럼 자본, 다시 말하면 임금 노동은 사회적 부의 발전과 생산력과 같은 관계로 시작된다. 노예체제의 마지막 형태, 한편으로는 임금 노동, 다른 한편으로 자본으로 구성된 형태가 분출되고 이 분출은 자본에 대응하는 생산양식의 결과이다. 그것은 임금노동과 자본의 부정, 부자유한 사회적 생산의 이전 형태에 대한 부정을 위한 물질적 그리고 정신적 조건들을 발생시키는 자본의 생산과정이다.

사회의 생산력 발전과 그것을 특징 지워 주는 생산관계들 사이에 증가되는 부조화는 모순, 위기, 변동으로 표현된다."(칼 맑스,「요강」 전집 29권, 133-4쪽)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충분히 발전하지 않는 한,  프롤레타리아 투쟁은 세계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투쟁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생활조건을 실질적으로 개혁하고 영원히 개선하기 위하여 노동조합과 의회의 투쟁을 경험하면서 스스로를 계급으로 인식하고 주장할 수 있게 했다. 자본주의 체제가 데카당스로 들어간 순간부터, 세계 공산주의 혁명은 가능하고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프롤레타리아의 투쟁형식은 완전히 달라졌다. 당면 수준에서도, 방어투쟁은 형식으로나 내용으로나 노동조합주의와 노동자 정치조직을 위한 의회주의 대의제와 같은 지난 세기를 이끌었던 투쟁 수단을 통해 더 이상 나타낼 수 없었다.

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는 혁명운동이 전개되면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the Communist International : 코민테른)은 부르주아지가 더 이상 역사적으로 진보 계급이 아니라는 인식을 중심으로 하여 1919년에 세워졌다.

"2. 자본가 계급의 쇠퇴기 - 세계경제상황의 평가에 기초하여 제3회의는 자본주의가 생산력 발전의 사명을 수행해 왔으며 현재 역사적 발전뿐만 아니라 인간 생존의 가장 기초적인 필수조건들과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의 단계에 도달했음을 단언할 수 있다. 이런 기본적 모순은 최근의 제국주의 전쟁에 반영되었고, 그 전쟁이 생산과 분배의 조건에 가한 심각한 손해에 의해 날카로워 졌다. 자본주의적 노예제라는 족쇄에도 불구하고 진부한 자본주의는 그것의 억제할 수 없는 힘으로 야기된 파괴행위가 노동자계급에 의해 이루어진 경제적 성과물들을 무능케 하고 황폐화시키는 단계에 있다. 현재의 자본주의라는 것은 그 자본주의의 소멸의 고통이다."(「코민테른 첫 4차 대회의 결의와 선언」에서 "코민테른 전술에 대한 테제", Hessel, 388-9쪽)

그때부터는, 제1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 체제를 쇠퇴 국면으로 들어서게 했다. 이러한 이해는 공산주의 좌파그룹 대다수의 공동 전술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나침반 덕택에 공산주의 좌파는 비타협적이고 일관된 계급지형에 남아있을 수 있었다. 단지 ICC는 1930년대와 40년대에 이탈리아와 독일, 네덜란드 좌파, 그리고 1940년대와 1950년대의 GCF(The Gauche Communiste de France)가 가치를 풍부하게 하여 전달한 유산을 받아 발전시켰다.

결정적인 계급 전투가 임박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거의 2세기에 걸친 노동자 투쟁과 노동자 정치 조직의 이론작업을 통해 발전했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세계관을 다시 갖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야만의 가속화와 착취의 끊임없는 증가가 당연한 사실이 아니라, 20세기 시작 이래 역사적으로 쓸모없는 것이 되었지만 세계를 계속해서 지배한 자본의 경제·사회적 법칙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19세기에 배웠던 투쟁형식(개량투쟁의 최소강령, 부르주아지의 진보적 분파에 대한 지지 등)이 사회 안에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존재를 "견뎌낼" 수 있었던 자본주의의 상승 시기에는 상식이었지만, 자본주의의 쇠퇴기에는 19세기의 투쟁 형식이 막다른 골목으로 이끌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노동계급이 아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공산주의 혁명이 쓸데없는 꿈이나 유토피아가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데카당스를 이해하는 과학적 근거였던 "필연"이자 "가능성"임을 아는 것이 프롤레타리아트로서는 훨씬 더 중요하다.

2)자본주의의 데카당스

① 역사적 진화의 결과로서, 노동력은 하나의 상품이 된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력은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

"고대시기에, 우리는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잉여노동을 착취하는 것을 보았다. 고대의 노예제나 중세의 농노제 모두 도달된 생산성 수준, 즉 다수의 개인을 지탱하기 위해 한 개인의 노동력에 의존한다. 노예제나 농노제는 한 사회계급이 다른 사회계급의 노동력에 의지하는 생산성으로부터 이윤을 추구하는 방식의 다른 표현이다. 이런 점에서, 고대사회의 노예나 중세 농노는 현재 임금노동자의 선조격이다. 그러나 고대나 중세의 노동력은 그것의 생산성과 착취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상품화되지 않았다.

상품으로서 노동력의 판매는 일련의 특수한 역사적 그리고 사회적 관계들을 뜻한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시장의 출현은 다음을 뜻한다.

  1. 노동자는 개인으로 자유롭다.
  2. 노동자는 생산수단과는 분리되고, 이후에 노동하지 않는 자의 소유 하에 합쳐진다.
  3. 노동 생산성은 최고 수준에 이른다. 다른 말로, 잉여노동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시장경제는 지배적인 체제가 된다. 다시 말해, 상품의 형태로서 잉여 노동의 창출은 노동력 구매의 목적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정치경제 입문」 제5장 「임노동」)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노동력이 상품으로 된 것은 지난 시대와 견주어 볼 때 전혀 새로운 차원의 빈곤이다.

"원시부족은 자연환경이 호의적이지 않을 때 배고픔을 겪었다. 원시부족의 빈곤은 대체적으로 사회의 빈곤이었다. 어떤 부족 구성원이 빈곤한 반면에, 다른 구성원이 부유하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생활수단들은 사회전반에 쓰일 수 있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평등하게 쓰일 수 있었다. 이것은 고대와 동양 노예제에도 해당된다. 그러나 이집트의 공공 노예나 그리스 사노예들은 강제되고 착취되었으며, 그들의 빈약한 생활환경과 주인들의 풍요로움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예로서의 그들의 조건들은 그의 존재를 확인시켰다. 어떤 사람도 그들의 말이나 가축이 굶어 죽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는 것처럼 노예들도 굶어 죽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중세 노동제도 여기에 해당된다. 소작농이 토지에 밀착되고, 모든 개개인이 주인이거나 다른 사람의 하인인 봉건적 종속 체제는 개개인들로 하여금 사회적 위치를 결정지었다. 농노는 강제되었지만, 어떤 지주도 농노를 토지로부터 쫓아내고 따라서 농노로부터 생존수단을 박탈할 권리를 가지지 않았다. 봉건적 관계는 지주로 하여금 대재앙, 화재, 홍수, 해일 등이 발생할 경우 소작농을 도와주도록 강제하고 있었다. 봉건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자본주의가 출현하기 시작하는 중세 후기 상황은 변화한다.

(.....)

자본주의 상품 생산은 인간역사에서 노동과 인구 대다수의 생존 수단의 부재, 그리고 인구의 다른 부분에서의 가난의 결과임과 동시에 필요조건이고 경제의 생존 조건인 새로운 경제 형태이다."(로자 룩셈부르크, 앞의 글)

②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의 조건을 창조한다.

『공산주의자 선언』은 부르주아지가 했던 탁월한 혁명적 역할을 강조한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낡고 제한된 사회형태를 쓸어버리고 결코 본 적 없는 가장 역동적이고 팽창적인 생산양식으로 바꾸어 놓았다. 즉 그러한 생산양식은 지구 전체를 정복하고 통일시킴으로써, 그리고 엄청난 생산력으로 추진함으로써 마침내 계급적대를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좀 더 높은 사회형태의 토대를 놓았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그 자체에 의한 전대미문의 생산력의 발전 때문에 물질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보편적 상품생산에 기초한 사회는 필연적으로 그 자신의 내적 기능의 논리에 따라 쇠퇴하여 결국 몰락하는 것으로 운명 지워 졌다. 『선언』에는 자본주의의 몰락을 이끌 내적 모순이 이미 확인되었다.

"부르주아적 생산 관계들과 교류 관계들, 부르주아적 소유 관계들, 즉 그토록 강력한 생산 수단과 교류 수단을 마법을 써서 불러내었던 현대 부르주아 사회는, 주문을 외워 불러내었던 지하 세계의 힘에 더 이상 군림할 수 없게 된 마법사와 같다. 지난 수십 년 이래로 공업과 상업의 역사는 현대의 생산관계들에 대한,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지배의 존립 조건들인 그 소유 관계들에 대한, 현대 생산력들의 반란의 역사일 뿐이다. 주기적으로 재발하며 점점 더 위협적으로 부르주아 사회 전체의 존재를 문제 삼는 상업공황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상업 공황 때에는 제조된 생산물들뿐만 아니라 이미 있는 생산력들까지도 으레 태반이 절멸된다. 공황 때에는, 이전의 모든 시기에는 어불성설로 보였을 하나의 사회적 전염병이 돌발한다. 과잉 생산이라는 전염병이 그것이다. 사회는 갑자기 순간적인 야만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기아와 전면적인 섬멸전은 사회에 대한 모든 생활 수단들의 보급을 차단해버린 것처럼 보인다. 공업과 상업은 절멸된 듯이 보인다. 왜 그런가? 사회가 너무 많은 문명, 너무 많은 생활 수단, 너무 많은 공업, 너무 많은 상업 따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칼 맑스, 『공산주의자 선언』, Pelican Marx Library, 72-73쪽)

『선언』을 쓴 뒤 맑스는 몇 년 동안 잉여가치의 추출과 실현 사이의 관계, 그리고 십년 또는 그 이상 자본주의 사회의 기초를 흔들었던 과잉생산의 주기적 위기를 좀 더 면밀히 분석하였다.  잉여가치의 비밀을 벗기면서, 맑스는 자본주의를 쇠퇴와 필연적으로 최종적 붕괴로 이끌게 될 엄청난 모순이 자본주의의 특징이었다는 점을 밝혀냈다. 이 모순은 임노동의 본질에 기초한 것이다.

  • 과잉생산의 위기 : 자본주의 하에서 인구 대부분은 잉여가치의 본질에 따라 과잉생산자와 과소소비자로 구성된다. 자본주의는 그 자신의 생산관계의 폐쇄회로 속에서 생산된 모든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
  • 이윤율 하락의 경향 : 인간의 노동력만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경쟁 때문에 자본주의는 이윤율이 하락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죽은 노동(기계, 원료)과의 관계에서 살아있는 노동의 양을 줄일 수밖에 없다.

지구 전체를 그 자신의 법칙에 종속시키는 믿을 수 없는 팽창적인 본질과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로마 노예제나 중세 봉건제처럼 역사적으로 이행기적인 생산양식이다. 자본주의는 선행한 모든 생산양식처럼, 거대한 역사 운동이 다하여, 사라지도록 운명 지워졌다. 그러한 운명은 도덕적 파산이 아니라 스스로를 파괴하도록 강제한 내적 모순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자본주의를 좀 더 높은 사회조직의 형식으로 대체할 수 있는 계급을 자본주의가 그 자체 내에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그러한 모순의 해결도 암시했다 : 즉 공산주의가 그것이다. 상품관계의 지배로 혼돈에 빠져든 사회는 오직 임노동과 교환을 위한 생산을 폐지한 사회, 즉 인간사이의 관계가 더 이상 불명료하지 않고 단순하고 명백하게 될, 인간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유롭게 연합한 생산자" 사회를 통해 대체될 수 있다.

생애 말년 동안, 맑스는 그의 지적 힘의 대부분을 고대사회 연구에 바쳤다. 모건(Morgan)의 『고대사회(Ancient society)』가 출판되고 러시아의 노동자 운동이 러시아에서 혁명 전망에 대한 문제를 던지자, 맑스는 강도 높은 연구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 연구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아주 중요한 『민족지 노트(Enthnographic Notes)』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전해졌다. 이 연구는 엥엘스의 위대한 인류학적 작업인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의 버팀목이 되었다.

맑스와 엥엘스에게, 미국 인디언에 대한 모건의 연구는 원시공산주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분명히 확증시킨 것이었다. 즉 사유재산, 사회적 위계 그리고 성의 불평등이 인간 본성에 내재해있다는 전통적인 부르주아 개념과 반대로, 모건의 연구는 사회구성이 원시적일수록 재산은 더욱 공동소유가 되고, 의사결정 과정은 더욱 집합적이 되며, 남녀 사이의 관계는 더욱 서로의 존경에  기초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원시사회에 대한 맑스주의적 접근은 사회의 역사적 진화가 마지막 순간에 사회의 경제적 하부구조의 변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유물론적 방법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동은 원시공동체의 종말을 가져왔고 더욱 발전된 사회형태가 출현하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역사 진보에 대한 맑스의 견해는 어둠에서 빛으로의 직선의 상승, 즉 부르주아 문명의 찬란한 광채가 그 정점을 이룬 상승을 순진하게 상상했던 사소한 부르주아 진화론에 철저히 반대한 것이었다. 맑스의 관점은 아주 변증법적이다. 즉 원시공산주의를 인간이하로 보며 거부하는 것과 달리, 그의 『노트』에는 부족공동체가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그 공동체가 지닌 질적인 특징은 스스로 다스리는 능력, 상상력과 예술창조의 힘 그리고 성의 평등이다. 원시사회의 불가피한 한계, 특히 개인과 부족단위에서 인간의 분화에 부과되는 제약은 역사의 진보를 통해 극복되었다. 그러나 이들 사회의 긍정적 측면은 역사의 진보 과정에서 상실되었고 공산주의의 미래에서 좀 더 높은 수준으로 복원되어야 할 것이다.

수십만 년 동안 인류가 계급 없고 국가 없는 사회에서 살면서 얻은 발견은 노동자 운동의 수중에서 강력한 무기로 될 것이고, 사유재산에 대한 사랑과 위계제의 필요성이 인간본성의 타고난 부분이라는 모든 주장들을 상쇄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3) 제국주의 단계, 자본주의의 정점이자 데카당스의 서곡

『공산주의자 선언』이 쓰여 졌을 당시, 과잉생산의 순환적 위기는 아직 "새로운 시장의 정복과 옛 시장의 보다 철저한 착취를 통해" 극복될 수 있었다. 즉 자본주의의 앞에는 여전히 긴 팽창의 단계가 놓여 있었다.

1870년대와 1880년대 동안 자본주의 삶에 새로운 국면이 펼쳐졌다. 자본주의 체제는 이제 더 이상 국민국가를 세우기 위해 등장한 부르주아지의 계급투쟁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식민지정복의 방법을 사용하는 팽창과 세계 정복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섰다. 19세기 마지막 30년 동안 지구의 대부분이 정복되어 거대한 제국주의 열강 사이에서 분할되었다.

 엥엘스가 1891년 주목할 만하게 통찰한 바와 같이, 자본주의 데카당스의 첫 조짐이 나타나자, 강대국 사이에는 긴장이 점점 늘었고 주변부에서는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위의 모든 것은 독일이 평화적으로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발전을 수행할 수 있다는 조건부로 언급되었다. 전쟁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전쟁은 어느 순간에도 발발할 수 있다. 현재 모든 사람들은 전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다. 만약 전쟁이 발발한다면,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전쟁은 1,500만-2,000만 군인들이 서로 죽이고 이전에는 없었던 유럽의 황폐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 전쟁은 사회주의의 즉각적인 승리를 이끌거나 구질서에서의 대변동을 야기할 것이다."(프리드리히 엥엘스, "독일에서의 사회주의", MEW, vol. 27, 1891, 241쪽, 245쪽)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사회적 재난이 터지기 전에, 노동자 운동내부에서 많은 영향력 있는 목소리들은 노동계급에게 자본주의가 개혁을 통해 평화적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점을 확신시키려 애썼다.

다행히 그 당시에, 맑스주의 좌파는 자본주의의 경제 통계에서 나타난 것처럼 자본주의가 명백하게 건강한 상태라는 것을 통찰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자본주의는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하였다. 맑스주의 좌파가 사회민주주의 내의 개량주의에 맞서 화해할 수 없는 투쟁을 할 수 있었고 체제의 악화되는 모순을 고려할 수 있었던 것은 엥엘스의 발자국을 따라 걸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데카당스 단계에 대한 이해는 맑스의 계승자들, 그리고 특히 로자 룩셈부르크가 좀 더 발전시켰다.

4) 20세기 : 전쟁과 혁명의 세기

비록 맑스주의 좌파가 자본주의를 - 사회생활에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새로운 현상인-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끈 기본 이유에 대해 결코 통일된 의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 이것은 세계를 분할하려는 거대한 제국주의 열강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었다. 분명히 세계의 새로운 분할에 가장 관심이 많았고, 전쟁에 참전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제국주의 국가들은 가장 적은 식민지를 지닌 국가들이었다. 특히 독일이 그러했다. 다른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과 프랑스도 똑같이 자신들의 식민제국을 잃지 않으려고 참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야만에 대항한 국제적 분노의 물결이 부르주아지의 전복과 공산주의 사회의 창설을 역사적 의제로 삼은 세계의 혁명적 물결로 전환되었을 때, 노동자 운동 내부에는 러시아에서 부르주아지의 정치권력 장악이 아직 선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계급에 의한 권력 장악이 너무 이른 것이었다고 선언하기 위해 "맑스주의 정통"으로 도피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러시아에서 혁명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무르익지 않았다는 추정을 둘러싼 이러한 양극화는 그 나라에서 산업과 노동계급의 발전을 볼 때 완전히 오류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세계 혁명의 조건이 무르익었다는 근본적인 국면을 완전히 놓치는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혁명운동의 물결로 추진된 1919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이미 살펴보았듯이 역사적으로 부여된 부르주아지의 진보적 역할이 끝났다는 합의를 기초로 하였다.

어쨌든 혁명이 패배했다는 사실은 혁명의 객관적 조건이 이 시기에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결코 아니었다. 생산력의 발전 덕분에 풍요로운 사회를 위한 전제조건이 존재했을 뿐 아니라, 노동계급은 이미 1905년의 러시아와 1917년 이후 몇몇 공업국에서 부르주아지를 전복하고 세계적으로 자신의 정치권력을 세울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근본적으로 독일 혁명의 실패에 기인한 이러한 패배는 사실 혁명을 위한 주체 조건의 미성숙, 특히 전쟁 동안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대부분이 사회 민주주의에 여전히 환상을 갖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5) 자본주의 데카당스의 경제적 토대

세계대전은 자본주의가 데카당스 단계로 들어섰음을 알리는 첫 번째 잔인한 조짐이다. 그 전쟁은 사회의 경제적 토대 안에서 발전했던 모순과 분명히 연관되어 있었다. 실제로 전쟁은 이러한 모순의 순수한 산물이다.

A) 데카당스시기에 전쟁의 근원적인 경제적 원인

이미 우리가 지적한 바와 같이, 맑스는 자본주의는 잉여가치 일부의 실현을 위하여 비자본주의 국가와의 교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과, 그리고 이 필요가 자본주의에 특수한 잉여가치, 즉 임노동에 대한 전유양식의 결과라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자본가에게 노동자의 임금을 가능한 한 최소로 줄이도록 강제하는 것은 이러한 전유양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는 자신들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필요하지 않은 상품을 살 수 없고, 따라서 자본주의 안에 구매력을 가진 시장을 확대하는데 하나의 요소를 이룰 수 없었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자신의 생산관계 영역 밖에서 끊임없이 상품의 판로를 찾아야 했다.

"두 번째로 그는 생산수준이 임의적으로 선택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전하면 할수록, 즉각적 수요에 관계없는 세계시장의 지속적 팽창에 의존하는 규모로 생산을 하게 된다. 그는 세이(Say)의 사소한 가정에 의지한다. 즉 자본가는 이윤이나 잉여가치를 위해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가치를 위해 생산한다. 그는 상품이 화폐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노동자의 수요는 충분하지 않다. 이윤은 노동자의 수요가 그들의 생산가치보다 작다는 사실로부터 발생한다."("잉여가치론 제2부 ‘리카도의 이윤이론 - (e) 이윤율 저하와 지대이론과의 연관에 대한 리카도의 설명", 468쪽)

지구적 자본주의는 비자본주의 세계와 교환해야 한다. 이러한 필요는 힘을 적게 가지거나 많이 가진 각각의 자본주의 국가에 강제로 영향을 끼치고, 다른 강대국의 힘을 빌리지 않고 그러한 시장에 접근하기 위해 자신의 식민제국을 확보하도록 한다. 그 결과,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세계와 식민지 시장은 모두 경제 강대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때부터는 어떤 국가든지 새로운 식민지를 얻으려면 자신의 경쟁 상대를 희생시켜야만 했다.

따라서 세계전쟁은 자본주의의 극복할 수 없는 경제 모순에서 빚어진 경제위기의 직접적 결과가 아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경제위기의 산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도, 그 뒤 일어난 전쟁들도 경제위기의 산물이었다.

자본주의가 점점 더 그 자신의 모순에 빠져들 때, 그 모순이 경제적 관점에서 점점 더 비합리적이 되자, 전쟁의 성격은 질적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비합리성은 자본주의가 발전하게 하기는커녕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차 없이 멈추게 하였으므로 이미 제1차 세계대전 때에도 있었다. 어느 진영에서 싸웠든지 간에 전투에 참여한 대부분의 경제는 전쟁으로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미국만이 총체적인 승자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뒤, 전쟁의 경제적 목적은 - 다른 말로 하면 경쟁자의 시장을 점령하는 것은- 그 자신의 득이 되게 세력균형을 유지하거나 개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순수한 전략적 고려에 길을 내어주는 경향이 있었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은 이를 뒷받침하는 현저한 보기이다. 왜냐하면 석유에 대한 통제는 근본적으로 경제적이 아닌 전략적 동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구적 수준에서, 모든 국가를 군사주의와 전쟁으로 몰고 가는 것은 경제적으로는 출구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B) 1929년과 1930년대의 위기 그리고 구조적인 대량실업의 폭발

자본주의의 역사는 지구에 대한 정복의 역사다. 이 발전은 비자본주의 경제와의 교역의 발전, 그리고 비자본주의 경제가 자본주의 생산관계로 통합되는 것과 뒤얽혀 있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생산 도구들의 급속한 개선과 한없이 편리해진 교통을 통해 모든 국민들을, 가장 미개한 국민들까지도 문명 속으로 잡아당긴다. 부르주아지의 값싼 상품 가격은, 부르주아지가 모든 만리장성을 쏘아 무너뜨리고 외국인에 대한 야만인들의 완고하기 그지없는 증오를 굴복시키는 중포(重砲)이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국민들에게 망하고 싶지 않거든 부르주아지의 생산 방식을 취하라고 강요하며, 이른바 문명을 자국에 도입하라고, 다시 말해 부르주아가 되라고 강요한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자기 자신의 형상을 따라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칼 맑스, 『공산주의자 선언』, Pelican Marx Library, 71쪽)

이 운동의 결과는 자본주의 경제가 "정상적" 조건에서 축적을 계속할 수 있도록 생산의 일부를 흡수할 수 있는 비자본주의 시장이 존재하여야 한다는 필요성에는 어떠한 감소도 없이 비자본주의 시장의 크기가 감소하는 것이다.

1929년의 위기는 순전히 경제적 수준에서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극복 될 수 없는 모순이 처음으로 노골적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1929년의 위기는 자본주의 상승기의 순환적 위기와 마찬가지로, 과잉생산의 위기였다. 그러나 상승기의 순환적 위기와 달리, 1929년의 위기는 새로운 성장을 위한 지속적인 근거를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을 개방함으로써 해결될 수 없었다. 그 위기는 새로운 축적의 순환에 불을 지피기 위하여 잉여가치를 실현할 자본주의의 필요에 비례하는 비자본주의 시장의 포화상태로 향하는 지구적이고 증가하는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1930년대 동안 경제 상황의 미미한 개선은 사실 경제를 통제하고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세계전쟁에서 군수생산의 필요를 충족시키도록 그 경제를 변형시키기 위한 국가자본주의 조치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조치들은 자본주의의 이겨낼 수 없는 모순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하기는커녕 당분간 모순을 미루어 놓는 것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미 수많은 국가자본주의적인 조치들을 채택하도록 자본주의를 강제했다. 그러나 분쟁이 끝나자, 부르주아지는 아직도 전쟁 전 황금시대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환상 속에서 애를 썼다. 그 후 몇 년 동안 사회ㆍ경제생활 전반에 대한 국가의 지배(국가자본주의)를 향한 경향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1929년의 위기는 제2차 세계대전의 뒤에 일어났던 유례없는 번영의 날들에 의해서만 단절되었던 영구적인 경제 위기의 시대를 열어 놓았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위기는 구조적인 대량 실업의 발생으로 특징 지워 졌다. 그러한 대량 실업은 1930년대 동안 공공사업과 무기 생산 정책, 1939-1945년 동안 전쟁, 그리고 그 뒤 제2차 세계대전 뒤에 일어났던, 비교적 짧은 시기에 있었던 재건을 통해서 일시적으로 해소되었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1929년 이래 실업은 실업자가 자본에 필요한 산업예비군을 형성했을 때인 20세기의 실업과 달랐다. 그것은 세계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과잉생산의 영구적 위기의 표현이다. 세계경제가 발전할 여지가 충분하지 않다는 정황에서는, 각각의 국민 자본과 개별 자본가는 경쟁력을 갖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이 노동력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영구적 과잉생산의 표출은 다음의 두 가지 수준에서 자본주의 모순의 전체를 폭로한 것이다.

첫째, 사회 안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프롤레타리아가 가장 집중되어 있고 가장 경험이 많은 국가에서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도 실업구제를 도입하여야 하였다. 이러한 실업구제는 경제에 엄청난 부담을 주는 비생산적 비용이다.

둘째, 유일하게 가치를 생산하는 생산력인 프롤레타리아트를 생산과정에서 축출함으로써 부르주아지는 노동계급의 착취에 기반을 둔 체제의 기초를 끊임없이 약화시킨다.

1945년 뒤 재건 시기 : 자본주의 삶의 새로운 임차인가, 또는 병든 사회체제의 반응인가?

제2차 세계대전의 뒤를 이은 20년 동안 성장률은 자본주의 상승기 동안 이루었던 가장 높은 성장률보다 더 높았다. 이러한 성장률은 자본주의가 그 위기를 결정적으로 극복했다고 주장하는 지지자들이 즐겨 쓰던 ‘단골 메뉴'였다. 전쟁이 끝난 뒤 자본주의가 높은 성장률을 이루자, 혁명 진영에서는 자본주의 데카당스의 실재를 둘러싸고 회의주의가 널리 퍼졌다.

이러한 성장률은 사실 노동생산성의 실질적 증가로 가능했다. 물론 이 노동생산성의 증가는 어느 정도 노동계급의 생활조건을 함께 개선시키기도 했다. 또한 자본주의가 공공연한 위기로 선회한 첫 조짐은 1960년대 말에 나타났지만, 1970년대에는 성장률이 상대적으로 높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21세기 초에 우리의 위치가 허용한 뒤늦은 지혜를 가지고 총체적으로 20세기를 돌이켜 볼 때, 재건의 시기가 사실은 자본주의가 불가피하게 위기로 미끄러지는 것을 특징으로 한 시기에서 하나의 예외라는 점을 우리는 좀 더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또한 다음을 지적해야 한다.

첫째, 옛 사회와 달리, 그리고 트로츠키가 1930년대 믿었던 것과 반대로, 자본주의의 데카당스로의 진입은 생산력 발전의 중지가 아니라, 생산력 발전에 대한 항구적인 족쇄가 존재한다는 것으로 특징 지워 진다. 이것은 기술 발전의 완전한 이용이 시장의 부적합성에 의하여 제한받을 때에도, 옛 사회에서와 달리, 중대한 기술 발전이 자본주의의 존재에 결정적이기 때문에 본질적이다.

둘째, 데카당스의 일반 시기는 지배계급이 국가 개입을 통해 생산양식의 하강을 막으려하기 때문에 단기간의 번영시기와 모순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재건시기의 경제적 경기상승에 대한 일반적 설명을 하기로 한다.

첫째, 우리는 성장의 전체통계에 비생산적 자본, 특히 무기생산에서의 상당한 몫을 포함하고 있다는 현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국민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 덕분에 노동생산성의 중요한 증가로부터 부르주아지가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지만, 이러한 생산성 증가는 부분적으로 비생산적 자본으로의 쓸데없는 낭비에 기인한 자본주의적 축적으로 "상실"되었다.

둘째, 이러한 상대적 번영시기의 밑에 깔린 다음의 요인들을 강조해야 한다.

① 본질적으로 「마샬플랜」의 제국주의 계획 덕택으로 서유럽과 일본의 재건에 의한 힘

② 각국내의 국가자본주의의 발전과 제국주의 블록(IMF, EEC, 세계은행, COMECON 등)의 수준에서 국가자본주의 조치의 채택은 커지는 경제모순을 조절하고 시장의 제재를 잠정적으로 피하게 했다.

③ 부채가 상당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④ 남아있는 비자본주의 시장의 보다 효율적인 착취, 기술발전, 통신과 교통비 하락은 살아있는 비자본주의 시장에 대한 집중적 침투를 촉진시켰다. 게다가 강대국은 탈식민정책을 펼쳐 자신들이 짊어진 비싼 짐(식민지 관리와 그 지원에 필요한 주둔군의 비용)을 줄였고 옛 식민지에 대한 판매를 늘릴 수 있었다.

재건시기의 경제호황의 밑에 깔려있는 구체적 요인들이 소진되자, 부채의 일반적 증가는 지불능력 있는 시장의 부적합성에 대한 중요한 완화제가 되었다. 자본주의 모순에 대한 기적적인 치료가 되는 것과 달리, 이것은 1970년대 동안 수많은 아프리카 국가로부터 시작해서 1998년 많은 ‘호랑이'와 ‘용'에게 퍼져나가면서 채무국 사이에 오랫동안 일련의 파산으로 이끌게 했다. 파산 국가의 목록은 분명히 완전히 공개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비밀로 유지되지도 않았다.

6) 인류가 지금까지 알아온 가장 야만적인 세기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가장 열성적으로 변명하는 사람들조차 20세기를 인류가 지금까지 고통스럽게 겪었던 가장 어두운 시기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인류역사는 온갖 종류의 잔인성, 즉 종교, 언어, 문화, 인종을 기반으로 고문, 학살, 대량추방 또는 전 인류의 절멸로 가득 차 있다. 로마군대에 의한 카르타고의 소멸, 15세기 중엽 아틸라의 침공, 782년 하루에 4천5백 명 생존 포로에 대한 샤르만느의 처형, 종교재판 때 고문과 화형, 미국에서 인디언 절멸 그리고 16세기와 19세기 사이의 아프리카인 수백만의 노예매매는 어떤 학생도 역사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조그만 보기에 불과하다. 비슷하게 인류역사는 이미 쇠퇴와 재난의 길고 비극적인 시기의 다른 보기도 보여주었다. 즉 로마제국의 쇠퇴와 몰락, 중세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백년전쟁, 18세기 동안 독일을 초토화한 30년 전쟁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인류에게 들이닥친 이러한 종류의 모든 재난을 고려한다하더라도, 우리는 20세기에 자본주의가 가져다준 고통과 동일한 것을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첫째, 제1차 세계대전 : 5백만 피난민, 천만의 사상자, 그 두 배의 부상자와 불구자 그리고 인류에게 전쟁의 궁핍으로 악화시키고 전쟁 그 자체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든 질병(1918년의 인플루엔자 전염병)의 영향

둘째, 1918년과 1921년 사이에 러시아 혁명에 맞서 부르주아지가 저지른 끔직한 내전에서 6백만이 죽었다.

셋째,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벌어진 전쟁(중일전쟁, 스페인 내전) 그리고 스탈린 병영에서 2천만 명 이상이 죽었다.

넷째, 제2차 세계대전 : 4천만 명의 피난민, 5천만 명 이상의 사망자, 그 이상의 부상자와 불구자

다섯째, 1945년에 시작된 "평화의 시기"는 실제로는 결코 평화의 시기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150내지 200번의 국지전(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같은 주요 분쟁을 포함하여)이 있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야기한 수보다 더 많은 사망자를 기록했다.

단순한 숫자를 떠나서 우리가 오늘날 강조해야 하는 두 가지 특별한 측면이 있다.

  1. 역사상 최초로 역사적으로 쇠퇴하는 사회에 의해 인류에 닥친 재난이 어느 구석도 남기지 않고 어떤 종(種)도 남기지 않고 온 지구를 덮고 있다는 사실
  2. 존재하는 사회와 역사적으로 창조된 부의 발전에 의해 열려진 가능성 사이에 거대한 간극이 지금까지 결코 없었다는 사실

과학의 지배와 노동생산성의 예외적 증가를 통해 이러한 잠재적 부의 기초를 놓은 것은 자본주의 사회이다. 노동계급에 대한 잔인한 착취 덕으로, 자본주의는 이윤욕구와 소수의 욕구만족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끊임없이 확장하는 욕구의 만족에 의해, 앞으로 나아갈 사회에 의해 대체되도록 하게 만드는 물질적 조건을 창조했다. 이러한 물질적 조건은 20세기 초부터 존재해 왔다. 자본주의는 노동계급이라는 가장 주요한 생산력을 포함하는 생산력의 전대미문의 확장을 허용하는 역사적 과업을 완수했다. 그 전에 존재했던 노예사회나 봉건사회처럼 자본주의가 역사의 단계를 떠날 만큼 긴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사라질 수 없다. 1848년 『공산주의자 선언』에 제시되었듯이, 역사가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 선언한 사형선고를 프롤레타리아트가 집행하는 것이다.

7) 자본주의 데카당스의 함의

자본주의 사회의 데카당스의 실재를 이해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상승기로부터 쇠퇴기로의 이행이 프롤레타리아트가 투쟁하는 물질적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국제주의, 그리고 투쟁이 역사적으로 나아가는 공산주의의 미래라는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기본원칙은 똑같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들이 투쟁으로 실천되는 방식은 크게 달라졌다. 투쟁을 위한 노동자 조직(노동조합 문제, 의회 활동 문제), 사회 속에서 다른 계급과의 관계(민족문제, 이른바 "부분투쟁"의 문제)는 오늘날 1914년 제1차 세계 제국주의전쟁과 1917년 러시아에서 시작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첫 번째 권력에 대한 세계적 공격이 열어 놓은 자본주의 역사에서의 새로운 시대가 결정짓게 된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데카당스 시대가 열리자, 노동자 투쟁의 이해관계에 관련된 문제가 제기되었다. 19세기에 노동자들은 생활조건을 보호하고 자본가 계급에 의한 착취를 줄이기 위해 싸웠다. 그런데 오늘날 자신을 방어하려는 노동자 투쟁은 일반화된 전쟁과 야만으로의 미끄러짐에 대항하는 유일한 장애물이다. 19세기에 노동자들은 사회에서 일정한 "위치"를 허락하는 확장된 경제체제 안에 자기방어를 조직했다. 그런데 오늘날 모든 노동자 투쟁은 노동자와 이런 저런 기업의 사주사이가 아닌 전체 노동계급과 자본가 계급 사이의 힘의 균형, 즉 권력의 문제를 즉각적으로 제기한다.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2006년 10월)

세계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재기 및 계급투쟁의 전망

이 발제문에서 우리가 제기하려는 질문은 우리가 계급투쟁을 어떻게 분석해야 하는가이다.  어떻게 우리는  주어진 시기에 - 특히 현재 -  노동계급의 일반적 조건을 그리고 계급역량의 균형에 의해, 즉 부르조아계급과 프롤레타리아계급 사이의 역균형에 의해 결정되는 가능성들을 결정해야 하는가?

계급 역균형을 파악하는 것은 단순히 파업 일수를 헤아리는 문제나 노동자의 전투성의 정도를 가늠하는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1930년대의 프랑스를 보면, 1938년의 인민전선의 선거승리이후 대중파업들과 시위들과 심지어는 공장점거들이 발생하여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포함하면서 몇주간이나 지속되었지만 여기서 우리는 노동자들의 전투성의 강력한 정도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그 자신의 목표를 위한 투쟁의 정도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볼 수 있다. 파업들이 있은 후  7월 14일(프랑스 민족주의의 기념일)의 시위들에서 노동자들은 최초로 노동자운동의 붉은 깃발과 부르조아국가의 삼색기 두가지 모두의 뒤에서 행진했다. 노동자들은 고용주들을 양보하게 만든것이 그들의 „옹호자들"이 권력에로 선출된 덕분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인민전선이 권력을 잡은 뒤  3년후 그리고 노동계급의 이러한 대규모의 동원이 있은 지 3년후 노동계급은  부르조아계급의 민족국가적 이익의 수호를 위한  6년간의 제국주의적 살육으로 끌려갔다.   

그래서 역사적 유물론의 방법을 충실히 유지하는 것과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 시기에 대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계급과 부르조아계급 사이의 역균형을 결정하는 상이한 요소들에 대한 전반적이고 총체적인 이해를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예를 들어 공산당선언의 1888년 영어판 서문을 위해 엥겔스가 쓴 다음과 같은 말을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은 맑스와 엥겔스의 방법이었다: „ 선언은, 처음에는 전적으로 독일의, 나중에는 국제적인 그리고 1848 이전의 대륙의 정치적 상황때문에 불가피하게 비밀조직이었던 노동자단체공산주의자동맹Communist League 강령으로서 출판되었다. (...) 1848 6월의 파리폭동 - 프롤레타리아계급과 부르조아계급사이의 최초의 대전투 - 패배는 유럽노동계급의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야망을 당분간은 다시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 독립적인 프롤로레타리아운동이 계속 생명을 유지하는 곳마다 그것은 무자비하게 추적당하고 사냥되었다. (...) 유럽노동자들이 지배계급에 대한 재공격을 위한 충분한 힘을 회복했을때 국제노동자협회 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 솟아났다. 그러나 협회는 유럽과 아메리카의 전투적인 프롤레타리아계급 전체를 하나의 조직체로 주조해 낸다는 명백한 목적을 갖고 건설되었기에 선언에 담긴 원칙들을 당장 선포할 수가 없었다..."(자체번역).

맑스와 엥겔스의 모든 작업으로부터 그리고 노동계급의 구체적인 경험으로부터 우리가 도출해내는 교훈은,  혁명적 행동은 어떤 순간에라도 가능한 그런 것이 아니며 혁명가들의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1848년에 그랬듯이 노동계급이 중대한 패배를 당하면 계급 역량의 균형은 한 시기동안 부르조아계급에 유리하도록 결정적으로 이동한다. 노동계급이 패배로부터 회복하는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한가지 점은 자본주의사회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부르조아계급은 맑스의 표현대로 그 자신의 무덤파는 자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을 착취함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고 결과적으로 프롤레타리아계급은 항상 투쟁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이 패배했을 때는, 항상 새로운 힘, 새로운 세대가 과거의 패배로부터 일어나서 투쟁을 다시 이어왔다.

새로운 시기를 연 1914년

1914년에 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자본주의 사회의 생존에 있어 하나의 새로운 시기, 자본주의의 쇠퇴기가 개막되었다. 갑자기 프롤레타리아투쟁이 역사상 그 이전의 어떤 시기보다도 첨예하게 전개되었다.  선택은 더 이상 더 강도가 높거나 낮은 착취사이의, 더 하거나 덜한 반동시기들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전쟁과 혁명사이에, 프롤레타리아계급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가 사느냐 죽느냐 사이에 있었다. 전세계적 혁명을 이끌기 위해 1919년 창설된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은  이 새로운 시기를 „전쟁들과 혁명들의 시기"로 묘사하고 그 함의들을 너무나 분명하게 이해했다: 만약 노동계급이 기회주의자들의 설교에 의해 기만당한다면, „자본주의적 발전은 수많은 새대들의 위에 새롭고 집약된 그리고 괴물같은 형태들로써 회복을찬양하게 것이고 전망은 새로운 그리고 불가피한 세계전쟁이 것이다. "  

이새로운 시기- 우리가 여전히 살고 있는-  의  현재 우리와 관계된 주요한 특징들은 무엇인가?

  1. 전 세계적 제국주의간의 전쟁으로의 경향은 자본주의 사회의 영구적인 특징이 되었다.
  2. 제국주의 전쟁 와중에 혁명을 개시하는 것이 이제는 더 이상 불가능할 것이다. 1914년의 노동계급의 불완전한 패배이후, 이는  노동계급이 1917년 러시아에서 그리고 1919년 독일에서  혁명적 급습을 개시할 수 있었음을 의미했는데, 그 이후 지배계급은 혁명의 위험을 알게 되었다. 러시아와 독일에서의 혁명들의 패배 이후  프롤레타리아계급이 경험한 가장 야만적인 반혁명들이 뒷따랐지만 부르조아계급은 노동계급의 위협에 직면해서 그것이 느꼈던 공포를 결코 잊지 않았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종결은 특히 패전국들에서의 노동자폭동의 모든 가능성들을 체계적으로 제거한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연합군은 1943년 이탈리아노동자들의 폭동들을 독일군이 무자비하게 진압하도록 내버려두었고,  스탈린의 적군은 바르샤바 앞에서 멈춤으로써 나치가 바르샤바봉기를 절멸할 시간을 주었으며 영국군과 미군은 고의적으로 공장들이 아니라 노동계급지구들을  표적으로 하여 독일의 산업도시들을 대대적으로 폭격했다.  독일이 붕괴되었을 때,  연합군은 전쟁이 노동자와 병사의 반란으로 종결되었던 1918년의 그것과 유사한 상황에 직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독일군과 첩보부들가 제시한 항복을 위한 모든 비밀제안들을 무시한 채 그 나라 전체를 점령했다.
  3. 어느 때보다도, 계급역량의 총체적인 균형은 나라 마다가 아니라 국제적으로 결정된다. 우리는 세계대전과 세계혁명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은 한 국가에서의 명백히 혁명적 상황(1936년의 프랑스나 스페인의 예에서와 같은)이 노동계급의 국제적인 패배에 의해 결정된, 전쟁으로 향한 진로를 전도시킬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역으로, 한 국가에서의 노동계급의 패배가 반드시 혁명으로 향한 진로의 전반적 패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4. 1870년 파리코뮨의 경험을 근거로 혁명가들이 생각했던 (그리고 1905년과 1917년 러시아혁명들의 경험들에 의해 확인된 듯이 보이는 ) 것과는 반대로, 전쟁으로 향하는 역사적 진로와 혁명으로 향하는 역사적 진로는 동시적일 수 없다.  오히려 그것들은 대조적이다. 부르조아계급이 총력을 다해 전면화된 제국주의전쟁을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이 전쟁터에서 죽을 각오가 그리고 후방에서는 최대의 물질적 궁핍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해서 그것이 완전히 패배당했어야 한다.

우리가 말했듯이, 1917년에 시작된 혁명물결의 패배를 이어 역사상 가장 지독한 반혁명이 뒤따랐다.  계급이 물리적으로 분쇄당했을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재앙은 더더욱 심각했다. 한때 노동계급의식의 최고의 표현이었던 것들(1914년까지의 사회민주당, 1919년 이후의 공산주의인터네셔널)이 파괴되었거나, 심지어는, 만연한 반혁명을 여전히 노동계급 자체의 이름으로 방어하고 있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을 가능케 했던 그 패배-노동계급이 3년뒤 극복했던- 와 혁명물결을 뒤 이은 그 물리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패배를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패배는 소련에서 „사회주의조국"가 존재한다라는 많은 노동자들의 믿음에 의해 훨씬 더 심각했고 그 결과들은 중첩적이었다: 그들은 스탈린주의 당의 영향하에서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이해의 주체로 만들어짐과 동시에, 스탈린주의적 소련의 야만성을 거부하며 사회민주당들로의 회귀 이외에는 어떤 다른 해답도 찾을 수 없었던 다른 노동자들로부터 분리되었다.  파시즘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가 제국주의 세력의 승리로서가 아니라 노동계급의 승리로서 제시되었을때 사태는 한층 더 악화되었다. 국제주의자들은 그들의 계급의 행동에 있어서 어떤 영향력도 완전히 상실한 작은 그룹들 안의 극소수의 투쟁가들로 남게 되었다.

그 패배는 매우  심각해서 그 결과 전후재건기의 경제붐 동안 마르쿠제와 같은 자칭 혁명적 공론가가 노동계급의 혁명적 본성의 소실을 선언하는 것이 대단한 유행이었다. 노동계급의 자리는 앞으로는  추측컨대 다른 사회계층들, 즉 학생들, 미국에서의 흑인민중들, 제 3세계의 농민들 등등에 의해 차치될 터였다.      

재건기는 또한 부르조아계급 내부에서, 그것이 자신의 경제적 문제들을 확실히 극복했다는 그리고 1929년의 지독한 위기는 이제 추억에 불과하다는 또 다른 환상을 낳았다. 그러나 1960년대 말엽  경제위기의 귀환의 첫 징후들이 재발하여 자본주의세계를 괴롭히면서 이 환상은 희박해졌다.  그리고 위기의 귀환과 더불어 전쟁의 새로운 위험이 나타났다. 1939년의 독일처럼 1960년대말의 소련은 자신의 주요한 제국주의적 경쟁자들에 의해 군사적으로 포위당하고, 승리한 전쟁의 열매들에 의해서만 보상될 수 있는 엄청난 비용의 전쟁무기로 부담지워진 자신을 발견했다. 2개의 세계적으로 강력한 제국주의세력들의 군대들과 대리자들이 „민족해방"의 무수한 충돌들 속에서 서로 싸웠고, 독일에서 그들은 핵전쟁의 세기말적인 위협을 등에 업고서 세계사상 가장 거대한 군사력의 축적을 가진 „철의 장막"의  양쪽에서 대치했다.

제국주의 전쟁은 아직 발발하지 않았다.  왜?

대답은 프랑스에서의 1968년 5월의 사건에 있다 - 또는 오히려 노동계급의 재각성에 그리고 이 사건이 그 한 표현인 반혁명의 종결에 있다.

부르조아계급의 공론가들은 1968년 5월을 „학생폭동"으로 생각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래서 이 사건들의 실체를 한번 기억할 만 하다: 사실, 1968년 프랑스는 9백만 이상의 노동자들이 파업하여 나라 전체가 완전히 정지함으로써 역사상 가장 큰 파업을 보여주었다. 겁에 질린 프랑스 대통령(드 골)이 군대를 통한 폭동의 진압이 필요시 군대의 지지를 확신하기 위해서 독일의 프랑스점령군을 휘령하는 장교들을 만나기 위해 독일로 떠날 정도였다.   그리고 프랑스는 단지 그 시작에 불과했다: 1969년의 이탈리아, 1970년 그런 다음 1976년의  폴란드에서의 노동자폭동, 발전소의 석탄부족으로 인해 정부가 주 3일근무를 강요할 수밖에 없었던  1973년 영국의 광부파업,  코르도바의 산업지역의 통제권을 노동자들이 사실상 거머쥐었던 1969년 5월 아르헨티나의 그 유명한 „코르도바사". 이들은선진국과 제 3세계국가 양자 모두에서 있어서  그리고 2개의 제국주의 블록들을 분할하는 철의 장막의 양 측 모두에서  있어서 세계의 산업지역들을 휩쓴 계급투쟁의 물결의 단지 몇몇 예들에 불과하다. 

동시에,  노동계급의 이러한 각성과 더불어, 기존의 그룹들의 발전과 새로운 그룹들의 출현들에서 표현되는 바와 같이 정치의식이 고양되었다. 프롤레타리아의 이러한 새로운 정치운동의 가장 중요한 측면들 중의 하나가 세대간의 괴리를 극복하려는 노력이었다. 혁명가들이 과거의 계급투쟁과의 연결을 쇄신하려 하면서 공산주의좌파의 입장들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판네쿡, 고르타, KAPD, 로자 룩셈부르크 및 보르디가가 재출간되었다. 그들은 또한 반혁명에 의해 끊어진 국제적 유대를 쇄신하게 되었다. 한 가지 예는 통신과 토론의 국제적 네트워그로서 그것은 1975년 ICC의 창립을 결과시켰다.

분명히, 이 그룹들은 극소수였고 계급투쟁 자체에 대해 어떤 중대하고 직접적인 영향력도 갖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노동계급 내부에서 그리고 특히 반혁명과 세계대전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새대의 노동자들에게서 진행되는 한 과정의 전조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세대는 전후의 붐과 경제위기의 시작과 대면하여 이에 대해 미래를 위한 크다란 희망을 품은 투쟁의 물결 속에서 대응하였다.

그 10년 후 1979년에 계급투쟁의 이러한 고조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침공에 의해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그 이래 발생한 모든 것과 더불어 이 사건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를 잊거나 소홀히 하기 쉽다: 1945년 이래 최초로 소련이 그 자신의 블록 외부에 위치한, 그 자신의 직접적인 영향력권 밖의 국가를 침공한 것이다. 소련은 경제위기에 의해서 그리고 그보다 더 강한 경쟁자 미국에 대항해 세계 제 2위의 제국주의 권력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가 위해서 요구되는 무기생산의 엄청난 무게에 의해 점점 더 불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1914년과 1939년의 독일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권력들 중에서 더 약한 자가 다시 한번 세계를 전면전의 위험에로 위협했다. 이번에는 배후에서 아른거리는 핵전쟁의 위협을 가지고서. 세계는 중대한 질문에 직면했다: 노동계급의 반응이 어떠할 것인가? 1970년대의 투쟁들에 의해 열려진, 혁명으로 향한 진로가 전도될 것인가? 부르조아계급이 쇠퇴한 자본주의의 경제위기에 대한 그 자신의 해답, 즉 세계대전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대답은 1980년 폴란드노동자들의 장대한 투쟁에 의해 주어졌다. 그들은 유럽 - 두 블록사이의 결정적인 대치가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 의 노동계급이 소련 블록의 „사회주의"국가이든 아니면 미국블록의 „민주주의"국가이든 상관없이 민족국가의 이해를 위해  그들 자신의 이해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노동자평의회와 동일한 기초(대중집회들, 그들을 선출한 대중집회를 책임지는 선출되고 재소환가능한 대리자들,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열린 공간에서 진행된 정부와의 협상들... )위에 그들 자신의 조직들을 발전시킨 폴란드 노동자들은 확실히 바르샤바조약의 군대들로 끌려가서 전쟁으로 진군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1970년대와 1980년대초의 역사가 ICC로 하여금 역사적 양자택일, 전쟁으로 향한 진로냐 아니면 혁명으로 향한 진로냐에 대한  그것의 관점을 수정하도록 만들었음을 언급해야 한다. 전쟁으로 향한 진로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물리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패배당했어야 함과 전쟁의 발발을 방지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함을 의미하는 반면, 그 역이 혁명으로 향한 진로에 있어서 참인 것은 아니다. 이는 전세계적인 권력장악의 정확히 그 시점까지 부르조아계급이 자본주의사회의 지배적인 계급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에서 인용했던 공산주의인터네셔널의 난관적인 예언들에도 불구하고 러시아혁명의 승리조차도 전세계의 혁명의 승리를 보장할 수 없었다.  결국, 1983년의 ICC 제 5차 회의는 역사적 실상에 더 알맞은 용어를 채택했다: „계급대치를 향한 진로의 존재는, 우선 노동계급과 대결하여 패배시켜야 하기에 부르조아계급이 새로운 세계대학살을 개시할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식으로든 이러한 대치의 결과를 미리 판결하지 않는다. 때문에 혁명으로 향한 진로'라기 보다는 오히려계급대치를 향한 진로'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국제상황에 대한 결의, 인터네셔널리뷰 제 35호에 출간됨)

1980년의 폴란드투쟁들은 제국주의전쟁의 위협을 막았다 - 하지만 역사는 중단되지 않았고, 노동계급이 계속적으로 위기의 전개에 저항하고 전쟁으로의 길을 막을 것인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미결로 남았다. 결국, 1980년대 동안 계속된 평탄하지 않은 계급투쟁의 발전은 노동계급이 패배하지 않았고 세계대전으로의 길은 닫힌채 남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의 어떤 투쟁들은 20세기의 시작이래 볼 수 없었거나 어떤 경우에는 그때까지 전혀 볼 수 없었던 높이에 도달했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 1980년대 네덜랜드를 강타한 파업물결은 1903년의 대중파업이래 그 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 영국광부들은 1985년 파업에 들어가서, 대처정부가 거의 그 광산지역의 군점령을 방불케하는 대책을 마련하는 동안 1년간 계속했다.
  • 1985년에는 덴마크사상 최대의 파업이 있었다.
  • 1986년말 프랑스에서는 몇 주간이나 지속된 대중철도파업이 있었고, 1988년말에는 병원노동자들의 대대적인 파업이 있엇다. 두 경우 모두에서 노조들은 사건들에 보조를 맞추는데 큰 곤란을 겪었다.
  • 1987년에는 이탈리아의 모든 교육부문이 일련의 대대적인 대정부투쟁을 전개했다: 여기서도 노동자들은 „고전적인" 노조조직들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투쟁의 물결은, 1980년대 한국노동운동과 광주에서의 투쟁의 예에서 우리가 볼 수 있듯이  결코 유럽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양 블록의 부르조아계급이 제국주의 전쟁을 개시할것인가를 결정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유럽에서의 투쟁들이었고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 노동계급이 가장 집중되어있고 정치적 조직적으로 가장 긴 역사적 경험을 가진 곳이 유럽이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은 그 주요 대대가 격파됨이 없이는 전체적으로 패배당할 수 없을 것이다;
  • 부르조아계급이 가장 집중되어 있고 노동계급을 다루는데 가장 경험이 많은 곳 또한 유럽이기 때문이다;
  • 그 당시에 지구상에서 가장 집중되고 산업화된 지역인 유럽은 소련 부르조아계급에게 있어 주요 포획물 즉, 러시아 부르조아계급으로 하여금 그 미국경쟁자를 유럽대륙에서 몰아내고 소련에 결여된 선진산업역량을 움켜쥘 수 있게 해줄 그래서 그 자체의 군사적 잠재력을 증강시킬 그러한 포획물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주요 특성들은 무엇이었는가?

  • 생활수준의 방어에 있어서, 특히 해고에 대항한 투쟁들에서의 끊임없이 재확인된 노동자들의 전투성
  • 정부에 대한 깊은 불신
  • 투쟁의 „조직자"로서의 노조에 대한 증대하는 불신, 이는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일반조합원 유니온 구조들(극좌 정치조직들에 의해 통제된)의 발달을 초래했는데, 그 목적은 노동자들 자신의 대중집회를 사전중지시키고 투쟁의 조직을 전적으로 노조의 손 안에 유지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의 시기는 그래서 노동계급의 근본적인 강점과 근본적인 약점 양자 모두를 특징으로 했다:

  • 한편으로, 계급투쟁의 강함은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이 -1930년대와는 달리- 그들 자신의 생활조건 방어를 위해서 끊임없이 투쟁했고 „사회주의 조국의 수호"나 „민주주의의 수호"의 깃발아래 스스로를 편입시키도록 허용하는 것을 거부한 사실은 지배계급이 그들의 위기에 대한 그들 자신의 „해법" , 즉 제국주의 전쟁을 개시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의미했다.
  • 다른 한편으로는, 전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자본주의 내부에서의 그것의 존재를 즉각적으로 옹호하는 것을 넘어서는 투쟁을 발전시킬 수 없었다. 대부분 노동자들은 1960년대와 재건기의 조건들로의 회귀가 가능해서 자본가계급의 공격을 물리치기 위해 임금인상을 위해 또는 해고를 반대하여 파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환상을 여전히 갖고 있었다. 그들은 부르조아계급의 공격들이 이런 저런 국가수반(예를 들어 마가렛 대처나 로날드 레이건같은 „반동들")의 „나쁜 정책들" 때문이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가 해결불가능한 위기 속으로 가차없이 전락한 것 때문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과소평가했다. 세계 전역에서 공산주의 좌파의 계속된 약세는 그 자체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자본주의의 전복과 새로운 공산주의사회의 건설이라는 그 자신의 역사적으로 결정된 목표를 재발견할 수 없음의 한 표현이었다.

사실상, 1980년대의 사회적 상황은 하나의 궁지에 의해 특징지워지는데, 즉, 부르조아계급은 전쟁으로 나아갈 수 없었고, 프롤레타리아계급은 혁명적인 공세를 개시할 수 없었다.

이러한 궁지의 한 결과로서, 냉전은 1914년이나 1939년의 그것과 같은 전면적인 제국주의적 대학살에 의해서가 아니라, 두개의 제국주의 블록들 중 하나의 붕괴라는 역사적으로 전대미문의 사건에 의해 종결되고 결국 제국주의 라이벌의 부재로 인해 다른 하나의 해체를 야기시켰다.

이에 뒤이은 시기는 노동계급에게 있어서 심각한 혼란의 시기가 되어야만 했다:

  • 스탈린주의의 붕괴 그리고 전 세계 노동자들의 눈 앞에서 스탈린주의체제의 약점과 부패와 후진성의 폭로는 세계 전역의 승승장구하는 민주적 부르조아계급으로 하여금 사실상, „봐라! 이것이야 말로 너희들이 공산주의를 건설하려 노력할 때 얻게될 그것이다" 또는 대안적으로 „공산주의는 멋진 이상이지만 현실에서는 결코 기능할 수 없을 것이다- 소련을 한번 보아라"라고 말하는 거대한 캠페인을 벌이도록 허용했다.
  • „공산주의의 패배"에 대조되는 것은 물론 „자본주의의 승리"였다. 자본주의는 완벽하지 않을 지 모르나 유일하게 가능한 사회이고 그것의 영향들에 대항해서 투쟁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라고들 말했다. 참으로, 한 부르조아 공론가는 심지어 „역사의 종말"을 선언할 정도였다. 그것이 인류 전체에게 특히 노동계급에게 얼마나 많은 비참을 만들어내든 상관없이 자본주의 경제의 계속된 발전 이외의 어떤 가능한 전망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 역사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의 자의식에 대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타격은 인터넷에 의해 연료를 공급받은 소위 „신경제 new economy"의 외견상의 붐과 결합되었다. 이는 자본주의 외부에서는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는 관념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요소들이,  수 많은 나라들에서의 노동계급 의 전투성의 계속된 표현들에도 불구하고 왜 1990년대가 명백한 계급투쟁 그리고 공산주의좌파의 조직들의 운명 양자 모두에 있어서 심각한 퇴조를 표시하는지를 설명한다.  프롤레타리아혁명과 국제주의의 깃발을 여전히 높이 들고 있는 이들은, 최악의 경우에는 스탈린주의의 하수인들로 그리고 기껏해야 회복불가능한 과거에 사로잡힌 몽상가들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것에도 불구하고, 전체로서의 노동계급-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정치적 조직적 경험이 가장 큰 그러한 가장 발전된 나라들에서 특히 - 은 자본과의 맞대결에서 패배당하지도 않았고  부르조아계급이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부르조아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자발적이거나 열광적으로  고수하게 만드는 데 성공하지도 못했다.  간단히 말해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이 패배당하지 않은 채 남았다. 전면화된 제국주의전쟁으로의 진로는 닫힌채로 남겨졌다.

계급투쟁에서의 전환점

2003년 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의 대규모 동원들은 1989년 이래의 계급투쟁들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나타냈다. 그것들은 1968년이래 가장 긴 퇴조기 이후 노동자들의 전투성의 회복에서 첫번째 중요한 한 단계였다. 물론 1990년대에 이미 이러한 전투성의 간헐적인 표현들이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의 운동들의 동시성은 새천년의 시작이래 상황의 진화를 보여주었다. 실상, 이러한 사건들은 계급이 - 자신감의 계속적인 결여에도 불구하고 -  위기의 극적인 악화에 그리고 공격의 더욱 대대적이고 전면화된 성격에 직면하여 투쟁의 필요성을 회피하는 것이 점점 더 불가능함을 드러냈다. 이러한 변화는 계급의 전투성뿐만 아니라 그것의 대오 내에서의 기세에도, 그 행동들이 자리매김되는 전망에도 영향을 준다. 우리는 1990년대의 전형적인 신비화들(신기술혁명, 주식을 통한 개인적 부의 축적, „석유를 위한 전쟁들"의 이윤성)과 관련해서 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더 나은 삶에 관한 그리고 임노동의 공포를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상당히 괜찮은 연금에 관한  제 2차 세계대전 전후세대의 희망과 관련한 환상의 상실의 징후들을 목격하고 있다.   

계급투쟁에서 전환점들이 모두 1917년이나 1968년의 그것만큼 중요하거나 극적인 것은 아니다. 이러한 연도들은 역사적 진로에서의 교체들을 나타내는 반면, 2003년은 대대적인 계급 대치를 향한 진로의 연속성 안에서 한 퇴조기의 끝이 시작됨을 표시할 뿐이다. 더 일반적으로, 우리는,  말하자면, 다음날 깨어났을 때 세상이 더 이상 그 이전과 동일하지 않은 그러한 상황들과,  조수의 밀물과 썰물사이의 거의 비가시적인 교체처럼 세계 전반으로 볼때 처음에는 거의 알아챌 수 없게 발생하는 변화들 사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2003년에 시작되어 3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는 그 진화는 의심의 여지없이 후자의 유형에 속한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의  2003년 투쟁들의 특히 중요한 측면은 그것들이 노동자들의 연금에 대한 국가의 공격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점이다.  위기의 악화로 인해 부르조아계급은 정년퇴직연령을 높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면서 그것은 노동계급이 최근 몇십년간 부과된 점점 참을 수 없는 착취수준을 감내하게 하는데 주요한 부분을 담당했던 사회적 완충장치를  희생시켰다.

부르조아계급은 1970년대 대량실업의 도래에 대해 일련의 국가자본주의적 복지대책으로 대응했는데, 그것은 경제적 관점에서 볼때 전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았고 오늘 국가부채의 엄청난 증가의 주요 요소들중의 하나이다.  현재 일어나는 복지국가의 분해는 자본주의가 사회에 제공하는 진정한 전망에 관한 심오한 문제제기만을 자극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모든 공격들이 노동계급으로부터 동일한 방어적 반응을 자극하는 것은 아니다. 인금삭감이나 노동시간연장에 대항해 투쟁하는 것은, 자본축척과정의 일부인,  노동생산성상승(기술적 개선의 덕으로)의 결과로서의 상대적 임금의 감소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것보다 더 용이하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표현처럼: „노동자의 실제적인  생활수준의 저하를 초래하는 임금삭감은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가들의 가시적인 급습이고 일반적으로 (...) 즉각적인 투쟁과 같은 것으로써 대응될 것이며, 최상의 경우에 물리쳐질 것이다. 이것과는 반대로, 상대적 임금의 저하는 외관상으로는 자본가들의 어떤 인격적인 개입도 없이 발생하며, 이에 대항하여 노동자들은 임금체계내부에서, 상품생산의 영역에서 투쟁과 저항의 어떠한 작은 가능성도 갖고 있지 않다(국민경제에 대한 개요). " (자체번역)

실업의 증가는 노동계급에게 있어서 착취의 강화(상대적 임금에 대한 공격)와 마찬가지의 어려움을 제시한다. 실업이 지금까지 노동해 본 적이 없는 젊은 이들을 공격하면, 그것은 해고의 경우에서와 같은 폭발적인 효과를 갖지 않는다. 대량실업의 존재는 사실상 노동계급의 즉각적인 투쟁을 방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증대하는 수의 여전히 노동하고 있는 이들에 대해 그것이 항상적인 위협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과격한 사회변혁을 쟁점화함이 없이는 대답될 수 없는 질문들을 제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임금의 상대적 감소에 대항한 투쟁과 관련하여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상대적 임금의 저하에 대항한 투쟁은 그러므로 노동력의 상품적 성격에 대항한,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생산 전반에 대항한 투쟁을 또한 의미한다. 상대적 임금의 하락에 대항한 투쟁은 그래서 상품생산의 영역에서의 투쟁이 이상 아니라 이러한 경제의 존재에 대항한 혁명적, 반란적 운동이며, 그것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사회주의운동이다" (같은책). (자체번역)  

1930년대는 대량실업과 더불어 어떻게 절대적 빈민화가 폭발하는지를 보여주었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이 그 이전에 패배함이 없이, „자본축척의 전반적이고 절대적인 법칙"은 그것의 반대항, 즉 혁명의 법칙이 될 위험으로 치달았다.  1970년대 이래  대량실업의 재출현과 더불어 부르조아계급은 국가자본주의적 복지주의라는 방책으로 대응했는데,  이 방책은 경제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고 오늘의 잴 수 없이 많은 공공부채의 주요 원인들 중 하나이다.  노동계급은 역사적 기억을 갖고 있다.  계급정체성의 상실에도 불구하고, 악화되는 위기로 인해 이 기억이 서서히 활성화되기 시작하고 있다. 대량실업과 사회적 임금의 삭감은 오늘 1930년대의 기억들을, 전면화된 불안정과 빈곤화의 영상들을 환기시킨다. „복지국가"의 파괴는 맑스주의자들의 예언들을 확인시킬 것이다.

룩셈부르크가 노동자들은 상품생산의 영역에서는 상대적 임금의 저하에 대항한 저항의 어떤 조그만 가능성도 갖고 있지 않다라고 쓸 때, 이것은 단념된 숙명론도, KAPD의 후기 에센경향의 „혁명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유사과격주의도 아니라, 이 투쟁이 „최소 강령"(즉각적 경제적 요구들)의 경계선 내부에 남아있어서는 않되고 가능한 가장 큰 정치적 명확성을 가지고 시작되어야 한다는 인식이다. 1980년대에 실업과 착취증대의 문제들이 이미 제시되었지만 예를 들어서, „영국 광부의 일터 지키기" 와 같이 종종 협소하고 지역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오늘 위기의 질적인 진전은 실업, 빈곤, 착취와 같은 문제들이 좀더 세계적 차원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제기되도록 만들 수 있는데,  연금, 건강, 실업자후원, 노동조건, 노동수명연장, 그리고 세대간 유대의 문제들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매우 맹아적인 형태로, 연금공격에 대한 반응인 최근의 운동들에 의해 노출된 잠재력이다. 이러한 장기적 교훈은 매우 중요한 것이고, 계급의 즉각적인 전투성이 회복되어가는 속도와 같은 그러한 문제들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실상, 룩셈부르크가 설명하는 바와 같이,  자본주의의 객관적 메카니즘들의 파괴적인 영향들(대량실업, 상대적인 착취의 강화)과 직접적으로 직면하는 것은 투쟁에 돌입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이유로, 투쟁들의 전개가 더 느리고 더 비틀리게 될 지라도 그 투쟁들 자체는 정치적으로 더 중요하다.

계급투쟁의 중심에서의 연대

ICC가 그 간행물에서 조명했던, 최근 투쟁들의 뚜렷한 특징 하나는 투쟁들의 목적과 방법 모두에 있어서 노동자들의 연대의 중심적인 성격이다:

  • 2004년 진델핑엔과 브레멘의 다임러-크라이슬러 노동자들의 파업에서 - 그리고 스페인의 동지들로부터 그들이 받은 지지에서 - 우리가 보았듯이, 경영진의 협박 시도에 대항하여 상이한 공장들의 노동자들간의 연대;
  • 예를 들어 히드로우공항에서의 게이트 고멧Gate Gourmet 파업(2005년 8월)에서 그리고 스페인의 시트SEAT 파업(2005년 12월)에서의 해고노동자들과의 연대;
  • 미래의 노동자들의 임금을 방어하기 위한 뉴욕 운송시스템에서의 파업(2005년 12월)에서 그리고 강력하게는 프랑스에서 연금을 방어하거나 CPE노동계약에 대항하기 위한 투쟁들(2006년 봄)에서 표현된 세대들간의 연대.

이러한 투쟁들의 목적들과 구호들 안에는 노동계급 내부에서 천천히 성숙하는 정치의식의 분명한 징후가, 즉,  자본주의의 지속된 생존이 인류의 미래를 위협한다는 그리고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본성의 심장에 놓인 연대는 투쟁 그 자체에 있어서 중요한 인자이자 새로운 사회인 공산주의에로의 열쇠라는 자각의 분명한 징후가 있다.  공산주의사회는 모든 인간 사회의 근본적 토대의, 즉 세계 인류 공동체의 구축을 위한 기초가 될 연대의 더 높고, 전 세계적 수준에서의 재발견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위기가 그리고 제국주의전쟁과 생태적 재앙이라는 지옥속으로의 자본주의의 추락이 굽힐 수 없게 전개되는 것과, 노동자들의 투쟁 속에서 연대를 노동계급의 근본적인 무기로서 주장하는 것은 혁명가들에게 열린 가능성들을 결정하는 객관적인 조건과  주관적인 조건을 형성한다. 이러한 조건들은 혁명가들이 프롤레타리아혁명 자체로 향한 길을 열게될 결정적 계급대치를 향한 진로의 발달에 그들의 최대한의 능력들을 다해서 참여와 더불어 직면하게 되는 거대한 책임감을 또한 결정한다.

ICC, 2006년 10월

(이 글은 ICC에 동감하는 사람에 의해 번역되었다. 번역상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밝힌다.)

혁명역량의 국제적인 재편이 프롤레타리아혁명 승리의 전제조건이다

혁명전략이라 할때 우리는 무엇을 의미하는 가? 근본적으로 오늘 우리가 제기하려는 문제는, 현재 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국제주의 그룹들과 조직들이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을 위한 노동계급투쟁에서 어떻게 그들의 역할을 수행하고 기능할 수 있는가를 이해하는 그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혁명전략을 결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다음의 2가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 먼저, 이러한 혁명조직들이 정확이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우리의 전략이 겨냥하는 목표가 무엇인가?
  • 둘째,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바꿔 말해서 우리가 작업하고 있고 또 우리의 공통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용가능한 수단들는 결정하게 될 물질적인 조건들이 무엇인가?

혁명조직은 정확히 무엇인가?

우리는 공산당선언에 있는 맑스의 말을 기억하면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공산주의자의 이론적 명제들은 결코 자칭 보편적 개혁가가 발명 또는 발견한 사상이나 원칙들에 기초하지 않는다. 명제들은 단지 일반적인 견지에서 현존하는 계급투쟁으로부터, 바로 우리 앞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운동으로부터 솟아나오는 실제적 관계들을 표현할 뿐이다. 현존하는 소유관계의 폐지는 결코 공산주의의 명백한 특질이 아니다"(공산당선언 제 91~93페이지, 백산고전대역, 1989).

여기서 맑스의 말은 조직의 본질과 기능 모두에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양자 모두 노동계급의 역사적 본질과 경험에 의해 그리고 그 투쟁의 물질적 조건들에 의해 결정된다.

그의 역사 전반에 걸처 프롤레타리아는 다음과 같은  2가지 유형의 조직을 만들어냈다:

  • 그 대중조직, 이 조직의 목적은 모든 노동자들을 공동의 투쟁 속에 결집하고 그들의 즉각적인 경제적 요구들을 옹호하는 것이다
  • 그 정치조직, 이 조직의 목적은 계급의식의 발전에 특히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스스로를, 그 자체의 혁명적 본성과 목표들을 의식하게 되는데 기여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 점은 프롤레타리아계급에게 결정적이다.  과거의 모든 혁명계급들 - 즉, 역사의 특정순간에  낡은 생산양식이 사회를 위협한 그 모순들을 극복가능한 새로운 생산양식의 담지자였던 그러한 계급들 - 은 낡은 사회 내에서 재산소유에 근거한 경제력을 갖고 있어서 그것을 정치력의 장악에 지렛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계급은 그러한 경제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것의 유일한 물질적 힘은 그것의 조직에 있다.

더욱이, 모든 혁명계급들이 그들의 미래의 프로젝트를 어떤 식으로든 자각해야 할 지라도, 프롤레타리아계급에 있어서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결정적이다:

  • 그것은 모든 착취를 끝장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피착취계급으로서 자신의 혁명의 목적을 숨길 필요도 또 그것이 창조하려는 새로운 공산주의사회의 본질을 감출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경제력이나 소유권도 갖지 않은 피착취계급으로서 계급에 대한 그리고 그 자신의 목표들에 대한 자각이 자신의 승리에서 결정적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2가지 유형의 조직들 - 대중투쟁조직 및 정치조직 - 은 역사속에 항상 존재했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그 형태들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역사적 조건들의 변화와 더불어 변화했다. 우리는 이 2가지 형태들이 노동계급의 시초부터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의 세계최초 노동계급의 역사를 살펴볼면, 한편으로는 18세기말 지독한 억압조건하에서 특히 파업들 조직하기 위해 그리고 임금과 작업조건 방어를 목표로 한 일정 정도의 무력적인 행동들을 조직하기 위해서 생겨난 비밀대중조직들을 찾아볼 수 있다. 두번째로 우리는 그 당시 "통신회들"(이들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런던통신회였다)로 불려졌던 것의 출현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선동그룹들로서 노동계급에서 가장 결연한 혁명적 일원들을 하나의 단일한 국가적 네트워크 안에 단합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1].

먼저 노동계급대중조직들의 진화를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19세기동안 노동계급의 출현 그리고 확장 상승하는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이계급이 어느 정도는 향상된 생활조건을 획득하려는 요구로 인해, 여러 상이한 형태들을 띠는 대중조직들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노동조합이었지만, 동시에 우리는 노동조합과 나란히, 실업이나 질환시의 상호부조를 위해 고안된 "친목회들"인 노동자협동회들 그리고 심지어는 스포츠클럽이나 문화협회와 같은 모임들이 발달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들은 노동자 대중의 교육수준을 향상시킨다는 중요한 목적을 또한 갖고 있었다.

그런데 20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계급투쟁의 역사적 조건들의 변화는 계급조직의 형태들에도 그에 상당하는 변화를 초래했다.

무엇보다도 1914년의 세계대전발발과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혁명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이 시기는 프롤레타리아계급과 부르조아계급사이의 계급투쟁을 첨예화 시켰다. 이제 문제는 더 이상 노동계급의 생활조건의 방어만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그리고 인류 자체의 파멸만을 초래하게 될 수 있는 자본주의 국가들간의 전 세계적인 반복되는 충돌들이냐 아니면 세계 노동계급에 의한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과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이냐라는 역사적 양자택일이다.

자본주의 내부에서의 투쟁을 위해 만들어진 노동조합은 권력을 향한 혁명투쟁에는 전적으로 부적절함이 판명되었다. 그리고 1905년과 1917년 러시아에서 프로레타리아계급은 쇠퇴하는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시기에 있어서의 대중조직을 창조했다. 자본주의 사회내부에서의 노동자들의 이해를 옹호하기 위한 단순한 그러한 조직이 더 이상 아니라 노동계급에 의한 권력의 장악과 자본주의 질서의 전복을 위한 조직으로서 노동자소비에트가 그것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상승기의 종말은 계급투쟁의 조직적 형태의 변화로써 특징지워진다. 대중집회에 그리고 선출되고 철회가능한 대리자들에 근거한 소비에트형태는 자본주의의 쇠퇴기의 모든 노동자 투쟁에서 나타나는 경향으로, 가장 극적으로는 1980년 폴란드에서의 투쟁에서 나타난다.

노동자의 대중조직들의 경우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노동계급의 정치조직들의 형태와 기능도 물질적 조건들의 변화의 결과로서 변화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들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보기 이전에 공산당선언에 표현된 총체적인 조망은 상기할만한 가치가 있다:

"공산주의자는 전체 프롤레타리아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공산주의자는 노동계급의 당들과 대립하는 별도의 당을 결성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가 가지는 이해와 별도로 분리된 이해를 가지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자신만의 분파적 원칙을 세워 프롤레타리아운동을 원칙에 뜯어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오직 다음과 같은 점에서만 다른 노동계급의 당들과 구별된다: (1) 각국 프롤레타리아의 일국적 투쟁에서, 일체의 국적으로부터 독립된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공동이해를 제기하고 전면에 내세운다. (2) 부르조아지에 반대하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거치는 다양한 발전단계에서, 언제 어디서나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는 한편으로 실천적인 면에서는 모든 나라 노동계급 당들 가운데 가장 선진적이고 결의에 부분으로서 다른 모든 당들을 밀고 나아가며, 다른 한편으로 이론적인 면에서는 거대한 프롤레타리아 대중에 비해 프롤레타리아운동의 진행노선, 조건, 궁극적인 전반적 결과들을 명확히 알고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공산당선언, 제 89~91페이지, 백산고전대역, 1989)

매우 도식적으로 - 그리고  그러한 도식들이 역사적 실재의 풍부함을 포괄할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안다 - 노동계급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이래 출현한, 노동계급의 다음과 같은 종류의 정치조직들을 우리는 구별할 수 있다.

먼저 1848년까지의 시기와 이당시 유럽대륙을 휩쓴 혁명들과 혁명시도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시기에 노동계급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갖는 개별적인 계급으로서의 자각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전복에 직면하게 될 그 날까지의 노정이 얼마나 기나긴지는 알지 못한 채 처음으로 독립된 행위자로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결국 노동계급이 생성한 정치조직들은 여전히 매우 작고 사실상 극소수에 불과했으나 동시에 그들은 계급투쟁의 즉각적인 가능성들을 넘어 노동계급이 자체내에 잠재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미래까지 내다볼 수 있었고, 이러한 경향의 가장 분명하고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표현은 물론 공산주의자동맹(Communist League)이었다. 이것은 세계혁명이라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궁극적 목표에 이론적인 형식을 부여할 수 있었고 특히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의대한 원칙을 그 유명한 말인,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로 선언할 수 있었다.   

그 이후의 시기는 자본주의 사회내부에서의 노동계급의 대중형성의 시작으로 묘사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가 바로 노동계급이 쁘띠부르조아계급의 영향으로부터 여전히 이탈하고 있던 시기이자,  지배계급에 의한 억압 그리고 독립된 수공업자로서의 상실된 지위를 살피는 새로이 프롤레타리아화된 계층들의 정치적 영향 이 두가지 모두에 대항한 끊임없는 투쟁과정 속에서 모든 종류의 새로운 조직형태들을 실험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의 최고의 표현은, 파업동안 파업파괴자들의 수입에 저항하기 위해 영국 및 프랑스노동자들에 의해 설립된 제 1 인터네셔널이다. 제 1인터네셔널의 가장 중요한 유산들 중의 하나는, 노동계급에 의한 권력의 장악은 작은 그룹의 헌신적인 혁명가들에 의해 "인민을 위해" 수행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님을 이해한 점이었다. 오구스트 블랑키(Auguste Blanqui)와 바쿠닌(Bakunin)과 같은 인물들에 의해 영감을 받은 그룹들을 특징짖는 이러한 시각에 반대해서 제 1인터네셔널은 그것의 1864년의 법규의 첫 문장 속에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에 의해 획득되어야 한다".

제 1인터네셔널은 1871년의 파리 코뮨의 패배와 이에 뒤이은 반동의 물결에 따라 사라졌다.  1880년대 동안 유럽에서의 계급투쟁의 재생은 제 2 인터네셔널의 형성을 낳았다. 이 자리는 제 2 인터네셔널의 역사를 논할 자리가 아니지만 이 발제의 문맥 안에서 그것의 가장 중요한 성취점들 중의 하나를 지적할 수 있다: 제 2 인터네셔널과 더불어 맑스주의가 하나의 광범위한 이론적 실천적 정치경향이 된 것이다. 19세기동안

맑스와 엥겔스의 거대한 이론적 성취의 상속자들은 제 2 인터네셔널의 맑스주의 좌익이다: 독일의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와 칼 리프그네히트(Karl Liebknecht); 네덜랜드의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과 헤르만 고르타(Herman Gorter); 이탈리아의 아메데오 보르디가(Amadeo Bordiga); 영국의 존 메클린(John Meclean); 러시아의 레닌(Lenin), 부하린(Bukharin) 및 트로츠키(Trotsky)- 이들은 역사 속에서 우리들에게 전해진 이름들이지만, 러시아 혁명이라는 도전에 부응하고 제 3인터네셔널을 만들게 되는 혁명적 맑스주의 좌익의 한 경향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들일 뿐이다.  

제 3인터네셔널은 자본주의가 세로운 세기에 진입했음을 선언했다: "우리의 세기는 자본의 몰락, 내부적인 해체의 세기이자,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공산주의혁명의 세기이다"(인터네셔널강령). 역사상 처음으로 제 3 인터네셔널은 노동자의 권력장악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될,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하나의 세계적으로 집중화된 정치조직의 건설을 목표로 했다- 하나의 먼 전망으로서가 아니라 즉각적이고 긴급한 그리고 실천적인 필요성으로서.

1917년 러시아에서 시작된 세계혁명은 패배했지만 자본주의의 쇠퇴기는 여전히 존재하며 공산주의에 대한 인류의 필요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긴급하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이 권력을 획득하려 한다면, 그것은 그 자신의 국제적인 정치조적을 창조해야하고 이는 제 3 인터네셔널의 경험으로부터 배운 교훈들을 토대로만 이뤄질 수 있다.  그런다음 우리는, 코민테른이 그 프롤레타리아적 내용을 잃어버리고 스탈린의 반혁명의 제국적 야심의 단순한 도구로 변질되면서 그 코민테른으로부터 축출된 3가지 좌파경향들로 향할 것이다.

인터네셔널의 변질과 스탈린주의의 반혁명에 대항해 싸운 것은 트로츠키주의 경향이 최초가 아니였다(시간상으로 그리고 10월혁명의 변질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  우리가 나중에 살펴볼 네덜란드/독일 및 이탈리아좌파 그리고 러시아좌파도 이 경향에 선행했다). 트로츠키의 암살까지의 트로츠키주의의 역사는 계급역량의 균형의 실상황 - 우리가 계급투쟁에 대한 이전의 발제에 포함시켰 듯 역사의 진로 - 의 착오가 낳은 비참한 결과 모두를 너무나 명백하게 보여준다. 트로츠키는 노동계급이 국제적으로 결정적인 패배로 고통당하고 있음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소련이 또 다른 자본주의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계급을 다가오는 세계전쟁에서 이런 저런 진영에 연결하는 모든 새로운 고리들을 그때마다  잠재적인 혁명적 융기로 끊임없이 착각했다. 당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계급을 "창조"하지 않고 그 반대로 당의 출현 자체가 프롤레타리아계급 내부에서 성숙하는 의식의 한 표현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프롤레타리아의 심각한 패배의 시기에 "제 4인터네셔널"을 건설하려 시도했을 때, 그는  하나의 기회주의적 책략에서 다른 하나로 이끌려 다렸다.  트로츠키주의의 비극은 1917년 혁명에서 그렇게 결정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그리고 활동하는 소비에트에 대한 가장 명쾌한 묘사들을 남긴 그 위대한 혁명가가 반혁명기에 종지부를 찍어야 했던 그 세대에게 어떤 기여도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트로츠기주의 운동은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민주주의적 제국주의들을 지지함으로써 그리고 스탈린주의의 극악한 체제에 의해 야기된 모든 전쟁을 지지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진영을 버렸다.[2]

네덜랜드와 독일에서의 노동자운동은 지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두 나라에서 혁명적 맑스주의 경향들 사이의 관계들의 측면에서도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3]. 네덜랜드/독일 공산주의 좌파의 입장들은 판네쿡, 고르타 및 얀 아펠[4]과 같은 이름들과 연관된다. 그들은 처음부터 독일노동계급의 혁명투쟁의 열기 속에서 단련되어 반동적인 짜리즘에 대항해서가 아니라 독일혁명의 사회민주주의적 사행집행인과 그들의 노동조합 심복에 대항했다. 네덜랜드/독일좌파공산주의자들은 전쟁 및 러시아와 독일에서의 혁명들에 의해 결과된 시대변화의 여러 함축들을 가장 먼저 파악하게 되었다: 노동계급 이해의 옹호를 위한 의회의 이용불가능성, 사회민주주의의 배반과 반동적 본질, 노동조합이 자본주의 국가의 옹호자이자 제국주의 전쟁의 신병모집하사관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사실, 새로운 시기의 프롤레타리아 투쟁은 소비에트와 동일한 원칙들에 근거한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필요로한 다는 점.

그러나 네덜랜드/독일 좌파는  정치조직 자체의 문제에 있어서 그리고 역사적 진로(계급 역량의 균형)의 문제에 있어서 취약했다.  1930년대 동안,  러시아에서의 혁명의 패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결정적인 문제와 직면하여 그것은 볼세비키당이 국가자본주의의 기관으로 변형된 것을 그 혁명 패배의 결과이기 보다는 원인이라고 잘못 파악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당의 반혁명적 본질을 이론화하고 노동자평의회를 현 시기에 유일하게 가능한 프롤레타리아조직형태로 간주했다. 결국, "평의회주의"경향으로 된 그것은 노동운동에 대한 그 자신의 무용성 - 아니 훨씬 심각하게도 그 자체의 파괴성 -을 이론화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탈리아좌파의 이론적 발전은 본질적으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를 떠나서 프랑스와 벨기에로 도피할 수 밖에 없었던 일군의 젊은 이탈리아 노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스탈린주의화된 이탈리아공산당에서 축출된 채 그들은 미래의 당을 위한 이론적 틀을 준비하기 위해 러시아 혁명의 패배로부터 교훈을 배운다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빌랑Bilan그룹을 형성했다. 이 경향 -  나중에는 벨기에, 프랑스 및 멕시코의 분파들도 포괄하게 되는 - 의 이론적 공헌들은 거대하고 진정 대체될 수 없는 것이었다. 러시아혁명의 변질에 대한 분석 - 1917년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결코 의문시하지 않았던- 에 있어서, 미래의 전이시기(period of transition)의 문제들에 대한 탐구들에 있어서,  경제위기와 자본주의 쇠퇴의 토대들에 대한 작업에 있어서,  "민족해방"투쟁을 지지하는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의 입장에 반대함에 있어서. 그러나 혁면전략의 문제와 관련된 한에 있어서, 그 가장 중요한 공헌의 하나는 당과 분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었다.  빌랑그룹은 당을 계급의식의 능동적 인자이자 동시에  계급 전체 내에서의 의식 발전의 표현으로서 파악했다. 빌랑이 혁명은 당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했을때 이것은 혁명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당을 만드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당의 창건 자체가 혁명문제를 제기하는 프롤레타리아계급 전체의 능력의 표현이라는  의미였다.

비극적이게도,  이러한 심오한 이해는, 전쟁기간을 이탈리아 안에서 무솔리니의 목적들 안에서 또는 "내부적인" 망명으로 보냈고 이탈리아 밖의 좌파부문에 의해 성취된 이론적 발전에 참여하지 않았던 "내부의" 국제주의적 이탈리아좌파에 의해 공유되지 못했다.  제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이탈리아 내부의 국제주의자들은 트로츠키가 30년대에 저지른 동일한 오류의 희생자로 전락해서, 전쟁의 영향들과 독일에 의한 점령에 대항한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대중 파업들을 이탈리아에서의 새로운 당의 창건을 정당화할 수 있을 새로운 혁명적 상황으로 착각했다.  노동계급 전체 내부의 의식수준이 당의 존재를 위한 어떤 물질적 토대도 제공하지 못한 상황에서 새로운 국제주의공산당(다양한 보르디가주의 "당들" 그리고 오늘의 혁명당국제사무국(International Bureau for the Revolutionary Party)의 주요 구성요소인 바타글리아 코뮤니스타(Battaglia Comunista)그룹을 출현시키게 될)의 창건은 반파시스트 파르티잔과 스탈린주의 당으로부터 인원들을 유입하려 시도했을때 고도의 기회주의에 의해 그리고 그들을 따라 이길을 가는 것을 거부한 좌파부문을 향한 격한 종파주의에 의해 불가피하게 특징지워졌다.

평의회주의경향의 유니언(union) 문제 및 소비에트의 중요성에 대한 명확성은 이탈리아좌파의 조직문제에 관한 명확성과의 종합을 통해서만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라고 말할때 우리는  이탈리아 좌파와 네덜랜드/독일좌파 사이의 관계를 가장 잘 가장 잘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종합은 빌랑(특히 민족문제에 있어서 독일좌파의 원칙들을 통합했던)에 의해 시작되었고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시기에는 극소의 프랑스공산주의좌파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것은 1975년 국제공산주의흐름(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의 창건과 더불어 하나의 완전한 조직적 형태를 얻게 되었다.

결국 다음의 인터네셔널이 될 세계공산당의 미래 발전에 열쇠를 쥐고 있다고 우리가 믿고 있는 공산주의좌파의 이러한 종합의 모든 요소들에 대해 하나의 완전한 견해를 이 짧은 발제 속에서 우리가 제시하는 것은 분명 불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단지 이탈리아좌파의 방법으로부터 우리가 취할 필요가 있는 핵심점들로 여겨지는 것들을 강조하고자 한다:

  • 미래의 당 자체의 본질에 대하여:
    • 당은 계급을 대신하여 권력을 장악하지 않는다,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행사하는 것은 전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이다, 하지만 당은 계급의 의식과 조직의 발전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이다.
    • 당은 국제적이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수행할 어떤 "민족적 임무"도 더 이상 갖지 않으며 세계적 기초 위에서만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 그래서 당 자체는 국가그룹들이나 정당들의 일종의 연합이 아니라 곧바로 세계적 기초 위에 건설될 것이다.
    • 당의 건설은 노동계급 자신의 의식과 투쟁성의 발달에 의존할 것이다: 당이 가능하기 위해서, 노동계급이 그 당을 그 자신의 것으로 인정할 수 있고 그 정치적 지향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이라고 할때, 우리는 사건들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하나의 국제적 조직을 의미한다.
    • 당의 강령은 공산주의좌파에 의해 이루어진 작업과 입장들에 근거하게 될 것이다.
  • 당의 건설로 이끌게 될 과정에 대하여:
    • 당건설의 가능성은 계급의식의 발전에 의존한다 - 그러나 이것이 "자동적인" 과정이 될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또한 오늘의 혁명적 그룹들과 조직들에 의해 행해지는 의식적인 노력들에 의존할 것이다. 결국, 그들은 분파들로서의 그들의 역할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회의의 작업은 미래의 당의 건설을 향한 전 세계적인 노력의 일부이다.
    • 오늘의 혁명적 그룹들이 이러한 과정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들은 국제주의 원칙에 대한 확고함과 더불어, 경청하고 타인으로부터 배울 태세로, 논쟁에서의 개방성을 결합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작업하고 있는 물질적 조건들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미 이전의 발제에서 우리가 그 안에서 행동하고 또 오늘의 혁명적 그룹들의 잠재력과 책무들을 결정하는 계급투쟁의 물질적 조건들을 개괄하였다.

여기서는 공산주의좌파의 진화와 더 넓게는 우리가 "국제주의진영"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의 상황을 살펴보려 한다.

프랑스에서의 1968년 5월 파업에 뒤이은 계급투쟁의 엄청난 급증을 새로운 혁명가세대에 의한 공산주의좌파의 입장들의 재발견이 - 그리고 결과적으로 기존의 조직들의 중요한 성장과 새로운 조직들의 출현이 동행했다. 그 이후 이 조직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네덜랜드/독일좌파공산주의자들의 "평의회주의적" 계승자들

위에서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 평의회주의자들의 조직적 약점은 그들이 정치조직의 "무용성"을 이론화한다는 점이다. 정규적인 조직적 존재(계급투쟁에의 개입과 이론적 발전)를 단지 유지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과업인 그러한 상황에서 이것은 심각한 약점이다[5]. 1970년대 이래 2개의 주요한 역사적 조직들 (스파르타쿠스연맹 (Spartakusbund) 및 행동과 사상(Daad en Gedachte))은 예를 들어, 1968년에 존재한 가장 중요한 평의회주의그룹들중의 하나로서 프랑스에서의 5월 사건들 동안과 그 이후에 상당한 확장을 이뤘던 ICO(노동자의 정보 및 통신Informations et Correspondances Ouvrières)와 마찬가지로 사라졌다. 비록 평의회주의 전통은 소그룹들과 토론써클들에서 계속 존재하지만,  하나의 조직을 형성하는 것의 "위험"에 대한 그리고  모든 조직이 관료화되는 것의 불가피성에 대한  강박에 의해 제한된다. 평의회주의 그룹들이 하나의 국제적 조직의 발전에 긍정적 역할을 수행하려면 그들 자신의 과거경험에 대한 비판을 행하고 이탈리아좌파의 경험을 다시 - 그리고 아무런 금기없이 - 고찰할 필요가 있다.

PCint 후예들

국제주의공산당(Partito Comunista Internazionalista)의 오늘의 후예들은 제 2차 세계대전의 말에 창립되었고, 이 모두는  "보르디가주의" 국제주의공산당과 바타글리아 코뮤니스타(Battaglia Comunista)를 형성하게 되는 1952년의 분열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데, 후자는1983년에 만들어진 혁명당국제사무국(International Bureau for the Revolutionary Party: IBRP)의 2개의 주요 창립그룹들 중의 하나가 된다.

이 조직들은 그 창립을 지배했던 그리고 그들이 빌랑그룹에 의해 발전된 이탈리아좌파의 경험과 이론적 유산을 거부하게 만들었던 근본적인 기회주의와 종파주의를 결코 극복할 수 없었다.

1970년대 동안,  상이한 PCI들[6]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상히 성장한다 - 그러나 이 성장의 상당부분은, "민족해방"운동들, 특히 아랍(특히 팔레스타인)민족주의에 대한 극도의 기회주의적 태도에 기반했다. 그 결과로 PCI는 1982년 공중분해되어 한때는 공산주의좌파의 최대 조직이던 것이 모두가 자신속에 철저히 폐쇄된 채 머무르는 몇몇의 극소의 분산된 그룹들로 되어버렸다 - 그리고 그 모두가 "그당"이라 자칭한다.   

바타글리아 코뮤니스타(Battaglia Comunista)그룹은 초기에는 1970년대의 새로운 상황에 대해 더 개방적임을 증명했고 1970년대동안 3차례의 공산주의좌파국제회의에서 다른 조직들(특히 ICC와 CWO)과의 함께 일할 태세를 보이다가 결국 CWO와 함께 IBRP를 창건함으로써 그 이래 자신의 "첫사랑"에게로 되돌아갔다. 스스로를 "미래의 당을 위한 유일하게 가능한 기초"라고 선언함으로써 그것은 새로운 시기에 의해 제시된 도전에 응할수 없음을 증명했고 - 비록 다른 방향으로는 수많은 관심표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 공산주의좌파의 다른 조직들과는 어떤 유형의 공동작업도 체계적으로 거부했다.[7]

결국, PCInt의 후손에 의해 형성된 전통은 프롤레타리아운동의 코엘라칸트[8]가 되어버렸다.  그 자신의 종파주의의 깊은 곳으로부터 이따금 출현은 하지만, 특히 오늘의 국제주의 운동의 발전 속에 표현되는 바와 같이 새롭고 천천히 숙성하는 계급투쟁의 강화에 적응할 수 없는  살아있는 화석이.

새로운 국제주의운동

"새로운 국제주의운동"이라 할때 우리는 무엇을 의미하는 가?  지난 5년간 ICC는 전세계적으로 점증하는 수의 새로운 그룹들과 사람들과 접촉해 오고 있다 - 그러나 우리가 "새로운"이라고 말할때 이는 "우리에게 새로운"을 의미한다: 어떤 경우에 그것은 수년동안 존재해 왔지만 이제서야 우리와 만나게된 그룹들이다. 여기에는  2가지 요인들이 있는데, 한편으로는 새로운 그룹들의 출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그리고 기존의 그룹들과 개인들 측에서 국제적 접촉을 향한 전반적인 기동력이 그것이다.

부분적으로, 새로운 접촉의 이러한 발전은 인터넷 덕분이지만 단지 부분적으로만 그러하다.[9] 근본적으로 그것은 이번 10년의 시작 이래 국제적인 계급투쟁의 새로운 발전의 표현이다- 매우 천천히 발전하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의 투쟁들보다 훨씬 더 멀리 그리고 더 깊이 나아가려는 욕구를 이미 만족시킬 수 있는 계급투쟁의. ICC는 라틴아메리카의 거의 모든 나라들에, 터어키에, 러시아에 그리고 우크라이나에, 그리고 아시아 - 그리고 물론 한국 - 에 있는 그룹들과 개인들과 현재 접촉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그러한 그룹들이 공산주의좌파와 자신들을 명백히 동일시한다: 이는 예를 들어 SPA의 동지들의 경우뿐만 아니라 터어키의 EKS의 경우이다.  어떤 경우에 그들은 개별적으로 진화해왔고 단지 최근에 공산주의좌파의 사상들- 그들이 반드시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 사상들- 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는 브라질의 OPOP 그리고  러시아의 ISPRC의 경우이다.  다른 경우에 그들은 트로츠키주의나 마오주의의 위기로부터 출현했다. 그러나  이 모든 동지들은,  항상 노동자운동의 시금석이 되어온 근본 원칙인 국제주의를 공유한다.  그들은 또한 이탈리아좌파의 가장 근본적인 유산들 2가지를 공유하는데, 이는 노동계급은 국제적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확신과, 그래서 국제적인 접촉들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며 세계공산당, 즉 이것 없이는 노동계급이 "하늘을 휘몰아쳐"서 이 쇠퇴하고 야만적인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하고 새로운 세계적인 인류공동체를 창조할 수 없을 그런 새로운 인터네셔널을 미래에 건설하기 위한 조건들을 우리는 단지 우애적이고 열린 논쟁을 통해서만 준비할 수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국제공산주의흐름(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2006



[1]      대중단일조직들과 정치조직들사이의 이러한 구분은 19세기동안 다소 분명하게 남아 있었던 점이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IWA는 정치조적들과 노동조합들 양자 모두를 함께 규합했던 한편, 심지어 제 2인터네셔널에서도 우리는 영국노동당의 경우를 인용할 수 있는데, 이 당은 원래는 의회내에서 노동조합의 대표를 조직하기 위한 „노동대표위원회(Labour Representation Committee)"로서 만들어졌다.

[2]     여기서 나탈리아 트로츠키가 , 1951년 제 4인터네셔널의  스탈린주의  지지를  훈계하기를 더 이상 거부했을 때의 그녀의 말을 인용할 만하다: „가장 참을 없는 것은 당신들이 밝힌 전쟁에 대한 입장입니다. 인류를 위협하는 3 세계대전이 혁명운동을 가장 어렵고 복잡한 상황들, 가장 중대한 결정들 앞에 세웁니다(...) 그러나 최근 몇년의 사건들에 직면해서 당신들은 스탈린주의 국가의 옹호를 끊임없이 요청하고 그리고 전체 운동을 그것에 맡깁니다. 이제, 당신들이 한국의 인민들을 십자가에 매달고 있는 전쟁에서 스탈린의 군대를 비록 지지하더라도(...) 나는 점에 있어서 당신들을 따를 없고 그러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나는우리의 의견불일치로 인해 당신들의 대오에 더이상 머무를 없음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이외의 어떤 출구도 찾을 없음을 당신들에게 말해야만 할것 같습니다."

[3]       예를 들어 판네쿡은 네덜랜드인이지만 그 일생의 대부분을 독일에서 투쟁가로서 보냈다.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했을때, 독일좌파의 많은 투쟁가들이 네덜랜드의 동지들에게로 피신했고, 독일에서의 계속된 비밀활동을 위한 토대로 네덜랜드를 이용했다.

[4]       얀 아펠은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의 제 3차 회의에 파견된  KAPD(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 의 대리인이었다. 그는 1979년 ICC의 창립회의에 참석하여 새로운 혁명가세대에게 횟불을 넘겨주었다.

[5]       참으로, 하나의 혁명적 조직을 유지하는 것은 그것이 진정 혁명적이기 때문에 항상 그리고 불가피하게 험난한 과업일 것임이라 말할 수 있다.

[6]      PCI의 종파주의는 일련의 부조리한 분열들을 낳았다 - 이 모두는  세계에서  단일하고 유일한 „그" 당이라고 자칭한다.

[7]      예를 들어, 이라크전과 코소보전에 반대하는 공동팜플렛을 만들자는 그리고 그것이 아르헨티나의 NCI에 의해 제안된 회의들에의 어떤 참여도 거부했기 때문에 그러면 독일에서 공동모임을 갖자는 ICC의 모든 제안들을 거부했다. 이번 회의에의 불참(적어도 이 글을 작성하는 시점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은 마찬가지로 주목할만 하다.

[8]       지금은 단지 2가지의 살아있는 종으로 대표되지만, 하나의 그룹으로서 코엘라칸트들은 한때는 데본기로부터 크레타세기 말엽까지 풍부한 화석기록을 남긴 여러 속과 종을 거느리면서 매우 성공적이였는데,  이 시점에서 그들은 거의 완전하게 멸종된 것 같고 그 이후로는 어떤 화석도 알려져 있지 않다.

[9]     우리는 여기에 선언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때때로 노동자는 승리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다. 싸움의 실제적 결실은 직접적인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팽창하는 노동자들의 단결에 있다. 현대산업이 만들어낸 전달수단으로 인해 여러지역의 노동자들이 서로 접촉할 있게 됨으로써 단결은 한층 확대된다.(...) 중세시기의 시민이 옹색한 도로를 가지고 수백년의 기간을 거쳐 달성한 단결을 현대 프롤레타리아는 철도에 힘입어 수년간에 이룩한다"(공산당선언, 제 79페이지, 백산고전대역,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