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COnline - 2007

1921년 크론슈타트 이해하기

 

(Understanding Kronstadt)[1]

1917년 러시아에서 노동자 계급이 10월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잡고 난 뒤 4년째,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21년 3월, 볼셰비키 당은 페트로그라드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핀란드 만의 작은 섬 코틀린에 주둔하고 있는 발트 함대의 크론슈타트 수비대가 일으킨 폭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볼셰비키 당은 러시아와 외국 부르주아지의 반혁명 군대에 맞선 몇 년 동안 피로 물든 내전을 치러온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크론슈타트 수비대의 봉기는 새롭고 달랐다. 이는 소비에트 정권의 노동계급 지지자가 내부로부터 일으킨 봉기였다. 그들은 10월 혁명의 전위였고, 이제 여러 가지 참을 수 없는 왜곡과 새로운 권력의 남용을 바로잡으려는 계급의 요구를 들고 나왔다. 

볼셰비키가 이 투쟁을 무력으로 짓누른 것은 그때 이래 줄곧 혁명적인 프로젝트가 지닌 뜻을 이해하는 데서 하나의 기준점을 제공해왔다. 부르주아지가 노동계급에게 맑스와 레닌을 스탈린과 굴락에 연결하는 끊어질 수 없는 고리가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게 모든 것을 하고 있는 오늘날, 크론슈타트 사건에 대한 이해는 더욱 더 중요하다.

우리의 의도는 모든 세세한 내용을 검토하려는 게 아니다. 『국제 리뷰』(International Review)에 실린 이전의 논문들은("크론슈타트의 교훈들," International Review n°3과 "1921: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이행기 계급," International Review n°100) 이미 상세하게 그 사건을 다루어왔다.

그와 달리 우리는 이번 기념일을 기회로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는 크론슈타트 봉기에 대한 두 가지 종류의 주장에 집중하려고 한다. 첫 번째로 아나키스트는 크론슈타트 사건을 맑스주의와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행동한 당이 지닌 권위주의적 반혁명의 본질을 입증하는데 쓴다. 두 번째로 오늘날 프롤레타리아 진영에 여전히 있는 생각, 즉 반란을 짓누른 것은 10월 혁명의 성과물을 방어하려는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아나키스트 견해

아나키스트 역사학자 볼리네(Voline)에 따르면:

레닌은 크론슈타트 운동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거나, 또는 차라리 그 어떤 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와 그의 당에 꼭 필요한 것은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그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

맑시스트, 권위주의자, 국가주의자로서, 볼셰비키는 대중에게 어떠한 자유 또는 독자적인 행동을 허용할 수 없었다. 볼셰비키는 자유로운 대중을 믿지 않았다. 볼셰비키는 그들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자신들의 독재가 무너지는 것이 지금까지 해 왔던 모든 일을 무너트리고 혁명을 위험에 맞닥뜨리게 하는 것을 뜻한다고 믿었다. ......

크론슈타트는 모든 멍에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사회 혁명을 이루려고 하는 인민이 처음으로 혼자의 힘으로 일으킨 시도였다. 그 시도는 정치적 지도자나 교사 없이 노동자계급 자신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단호하게, 대담하게 이루어졌다. 그것은 제3의 혁명, 사회 혁명으로 향하는 첫 걸음이었다.

크론슈타트는 무너졌지만, 크론슈타트 봉기한 사람들은 과업을 해냈다. 바로 그 점이 중요한 것이다. 봉기에 참여한 대중 앞에 펼쳐진 복잡하고 흐릿한 미로에서, 크론슈타트는 올바른 길을 밝혀주는 밝은 횃불이었다. 봉기한 사람들이 스스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고 있는 환경에서 그들이 권력이라는 말과 생각을 모두 없애지 않고 그 대신에 협력과 조직화, 관리를 말하면서 여전히 권력(소비에트 권력)에 대해 말했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과거에 바친 마지막 찬사였다. 노동계급 스스로가 토론과 조직화와 행동의 완전한 자유를 얻어낸다면, 대중이 독자적인 행동에서 참된 길을 찾아낸다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다.[2]

아나키스트들은 Voline가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에게 크론슈타트 봉기에 대한 진압은 볼셰비키가 지닌 맑스주의 사상의 당연하고 논리적인 결과였던 것이다. 당의 대리주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를 당의 독재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 그리고 이행기 국가의 형성은 볼셰비키가 믿지 않았던 대중에 대한 지나친 권력과 권위 욕구를 표현한 것이었다. Voline에 따르면, 볼셰비즘은 억압의 한 형태를 다른 형태로 대체한 것을 뜻했다.

그러나 볼리네는 크론슈타트를 그저 봉기였다고만 여기지 않았다. 그에게 크론슈타트는 미래를 위한 모델이었다. 만일 크론슈타트 소비에트가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과업(협력, 조직화, 관리)에 몰두한 나머지 정치적 과업에 대해 잊었다면(소비에트의 권력에 대한 발언), 그것을 교훈삼아 우리는 진정한 사회혁명이 무엇이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그림, 이를테면 지도자 없고, 당이 없는, 국가가 없는, 그리고 어떤 종류의 권력도 없는 사회, 즉각적이고 완전한 자유의 사회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아나키스트가 이끌어낸 첫 번째 교훈은 공산주의 혁명이 새로운 형태의 폭정으로 이끌 수 있다고 한 세계 부르주아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매우 밀접하게 일치한다.

아나키스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이러한 견해의 일치는 우연이 아니다. 양쪽 모두 위계제와 폭정과 독재에 맞서는 평등과 연대와 우애라는 추상적 개념에 따라 역사를 평가한다. 부르주아지는 1918년에서 1920년 사이에 러시아에 맞서 무력으로 개입하고 경제 봉쇄를 이끌었던 반혁명 세력의 잔인성을 정당화하려고 10월 혁명에 반하는 이러한 도덕적 원리를 냉소적이고 위선적으로 이용했다. 다른 한편 아나키스트가 볼셰비즘에 대한 실천적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부닥쳐야만 했던 역사적 어려움을 이해할 수 없게 녹여 없애는 순진한 유토피아이다.

그러나 1936년 스페인에서 일어난 사건이 확증한 것처럼, 아나키스트가 지닌 순진성 때문에, 그들은 맑스가 세운 혁명에 대한 역사 개념을 거부하고 나서 부르주아 진영이 일으킨 실제 반혁명 앞에 어쩔 수 없이 투항하게 되었다. 

만일 볼셰비키가 볼리네가 주장하는 것처럼 전적으로 권력욕 때문에 근본적으로 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다 하더라도, 아나키즘은 그와 견주어 볼 때 역사의 진실에서 제기되는 일련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다. 만일 볼셰비키가 끝내 권력만을 탐했다면, 왜 그들은 사회민주당의 다수와는 달리, 제국주의 전쟁을 규탄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되도록 요구함으로써 1914년과 1917년 사이에 추방당할 운명을 지웠는가? 왜 볼셰비키는 멘셰비키와 사회 혁명당과는 달리, 1917년 2월 혁명이 성공하고 난 뒤 러시아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함께 임시 정부를 꾸리는 데 참여하지 않고 그 대신에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전할 것을 요구했을까?

왜 볼셰비키는 노동자계급이 아주 뒤떨어졌고 부르주아지를 뒤엎기에는 수적으로도 모자라다고 여긴 대부분의 국제 사회민주주의자들과는 달리, 10월에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시작할 수 있는 러시아 노동계급의 역량을 믿었는가?

왜 볼셰비키는 노동계급이 모든 희생을 해서라도 연합국의 봉쇄를 이겨내고 반혁명 군대에 맞서 무기를 들고 저항할 것이라고 믿었는가, 그리고 그러한 노동계급의 지지를 얻고 유지할 수 있었는가?

왜 볼셰비키는 유럽과 나머지 세계 전체에서 일어난 혁명의 시도에서 러시아의 지도를 따르도록 세계 노동자계급을 고취시켰는가? 어떻게 볼셰비키 당은 세계적 규모에서 새로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창건을 주도할 수 있었는가?

마지막으로 왜 당을 국가 기구로 통합하는 과정과, 소비에트와 공장 위원회와 같은 노동자 권력의 대중 조직에 대한 귄리침탈, 그리고 마지막으로 계급투쟁에 맞서 무력의 사용은 하룻밤 새에 일어난 게 아니라, 그저 질질 끌다 일어난 것인가?

볼셰비키가 태어날 때부터 그런 더러운 속성을 지녔다는 이론으로는 일반적으로 러시아 혁명의 타락을 또는 구체적으로 크론슈타트를 설명하지 못한다.

1921년쯤 러시아에서 혁명, 그리고 그것을 이끌었던 볼셰비키 당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독일과 다른 국가로 혁명의 확산은 1919년과 견주어 볼 때 훨씬 가망 없는 것으로 보였다. 세계 경제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었고 독일에서 스파르타쿠스동맹이 일으킨 봉기는 실패했다. 러시아 안에서 내전을 이겨냈지만, 반혁명 군대의 거듭된 공격과 국제 부르주아지가 의식적으로 조직한 경제적 질식 때문에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공업 기반은 무너져 버렸고, 노동자 계급은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에서 희생되었거나 또는 살아남으려고 어쩔 수 없이 도시를 떠나 시골로 떼 지어 몰려갔기 때문에 크게 줄어들었다. 볼셰비키 정권은 지방에서 일련의 폭동을 일으킨 농민층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무엇보다도 1921년 2월 중순에 페트로그라드에서 파업을 일으켰던 노동계급 사이에서도 점점 더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그 때 크론슈타트가 일어났다.

어떻게 러시아는 다른 국가들, 특히 유럽의 노동자 계급 혁명에서 지연된 도움을 기다리면서 세계 혁명의 요새로 남고 노동계급의 불만과 경제적 붕괴를 이겨낼 수 있는가? 아나키스트는 혁명이 어떻게 타락했는가에 대해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정치적 우위, 권력의 집중화, 혁명의 국제적 팽창, 그리고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기의 문제에만 집중했다. 이것은 볼셰비키가 크론슈타트 봉기를 군사적으로 해결하게 하고 노동계급의 저항을 배반과 반혁명 행위로 다루게 한 재앙과도 같은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바꾸어 놓지 못한다. 그러나 볼셰비키 당은 오늘날 혁명가들이 지닐 필요가 있는 것처럼 가늠자를 갖지도 못했다. 그들은 그때 그저 노동자 운동의 이득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 노동자 운동은 결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계에서 권력을 보유하는 아주 어려운 과업에 부닥쳐야만 했다. 성공적인 권력 장악 뒤 볼셰비키는 노동계급의 당에 대한 소비에트의 관계도, 부르주아 국가를 필연적으로 분쇄하게 될 이행기 국가에 대한 이러한 두 계급 조직의 관계도 이해하지 못했다.

정권을 잡고, 차츰 노동자 평의회와 공장 위원회를 국가에 통합하면서, 볼셰비키 당은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노동자 운동 안에서 지배적인 의견에 따르면, 혁명에 대한 주요한 위험은 새로운 국가 기구 밖에서, 즉 국제 부르주아지와 추방된 소작농과 러시아 부르주아지에게서 나왔다. 비록 볼셰비키 당 내부에 그때 정권의 관료화에 맞서 경고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공산주의 운동에서 어떠한 경향들도, 심지어 좌파도 대안의 전망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처방은 제한되어 있었고 다른 위험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콜론타이와 쉴라프니코프의 노동자 반대파는 노동자 평의회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 조직으로서 국가를 초월했다는 것을 잊어버린 국가의 과도함에 맞서 노동자를 방어할 것을 노동조합에 요구했다.

볼셰비키 당 내부에는 봉기를 분쇄하는 데 반대했던 몇몇 사람들이 있다. 운동에 결합했던 크론슈타트 당원들도 있고 훗날 노동자 그룹을 조직하고 군사적 해결을 반대했던 가브릴 먀스니코프(Gavriil Miasnikov)와 같은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당과 코민테른 내 있는 좌파 경향은 볼셰비키 정권을 비판했지만, 폭력의 사용을 도왔다. 심지어 노동자 반대파도 진압 세력에 자원했다. 당의 독재에 반대했던 독일 공산당은 크론슈타트 반란에 맞선 군사적 행동에 동의했다.

마지막으로 크론슈타트 소비에트의 요구는, 볼리네의 의견과는 달리 대안의 전망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즉각적이고 지역적인 맥락 안에서 주로 틀지어졌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요새(보루)와 세계적 상황에 대한 더 폭넓은 내포(함의)들을 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그러한 요구들은 전위당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답변하지 못했다.[3]

러시아 혁명의 패배와 그것을 주도했던 혁명적 흐름에서 모든 교훈을 이끌어내려고 애쓴 혁명가들이 이 비극적 사건의 진정한 교훈들을 지적할 수 있었던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어떤 환경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 그리고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적들에 의한 책략의 희생자일 수도 있다는 것을 심지어 인정할 것이다. - 프롤레타리아 국가에 맞서 투쟁할 수도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사회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에게 폭력과 강압에 의해 강요될 수 없다는 원칙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크론슈타트를 잃어버리는 편이 지리적 관점에서 그것을 지키는 것보다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러한 승리가 실질적으로 한 가지 결과만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바로 그 바탕, 프롤레타리아트가 수행했던 행동의 내용을 바꾸는 결과이다. (Octobre, 1938년, Italian Fraction of the Communist Left에 의해 편찬됨)

좌익 공산주의는 본질적인 문제를 정확히 지적했다. 즉 국가가 노동자 계급에 맞서 폭력을 쓰는 데서 볼셰비키 당은 자신을 반혁명의 수장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크론슈타트에서 거둔 승리는 볼셰비키 당이 노동자 계급에 맞서 러시아 국가의 도구로 되었다는 경향을 가속화시켰다. 이러한 견지에서, 좌익 공산주의는 또 다른 대담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전위로 남으려는 좌익 공산주의는 현상을 유지하고 혁명의 과정에 대한 진보를 막으려는 필연적인 경향을 반영하는 혁명 뒤에 들어선 국가에서부터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자율성을 지켜야만 한다.

보르디가주의자(Bordigist)의 견해

그러나 오늘날 좌익 공산주의에서 이러한 결론은 전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사실, 좌파의 몇몇 부분은, 특히 보르디가주의자(Bordigist)는 1938년 Italian fraction의 태도와는 완전히 모순되게, 레닌과 트로츠키가 크론슈타트를 탄압한 것을 정당화했다.

볼셰비키가 어쩔 수 없이 크론슈타트를 진압하게 한 끔찍한 상황을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탄생이나 강화의 과정에서 노동자를 향해 발포할 수 있다는 원칙을 거부하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토론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할 수도 있다.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부닥쳐야만 한 끔찍한 문제의 제거는 장밋빛이 감도는 안경과, 이러한 반란에 대한 진압이, 트로츠키에 따르면, "비극적 필요"였지만 필요이고 심지어 의무였다는 이해를 통해 혁명의 비전에 대한 비판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크론슈타트 :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 Programme Communiste n°88, 국제 공산주의자 당의 이론적 기구, 1982년 5월).

그들이 속해 있다고 주장하는 전통을 회피한, Bordigist 경향은 볼셰비키 당의 비타협적인 국제주의를 방어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경향은 또한 볼셰비키의 실수를 열정적으로 방어하고, 당과 혁명이 왜 타락했는지 하는 문제에서 배울 수 없게 한다.[4]

그들에 따르면, 혁명 과정에서 계급과 혁명 뒤에 들어선 국가에 대한 당의 관계는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편의주의의 문제, 즉 어떻게 각각의 상황에서 혁명적 전위가 자신의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 커다란 투쟁은 그저 프롤레타리아 계급 안에서 끔찍한 긴장을 일으킬 수 있을 뿐이다. 사실상, 당이 혁명을 만들 수 없거나 또는 대중없이 또는 대중에 반하여 독재를 지도할 수 없다는 것은 틀림없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의 의지는 ‘수적 다수' 또는 심지어 더 모순되는 것으로서 만장일치 합의를 찾기 위해 선거 협의체나 의견 투표(여론 조사)에 의해 나타내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의지는 투쟁의 등장과 좀 더 정확한 투쟁 방향을 통해 표현된다. 그러한 투쟁은 가장 중요한 분파가 머뭇거리고 우유부단하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반대파를 제거하는 것이다. 내전과 독재의 변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층위의 태도와 관계는 바뀔 수도 있다. 그리고 몇몇 ‘소비에트 민주주의'에 의해 노동자, 준-노동자 또는 쁘띠 부르주아지의 모든 계층에 대한 똑같은 무게와 똑같은 중요성이 받아들여지기는커녕, 트로츠키는 자신의 책 『테러리즘 또는 공산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기구인 소비에트에 참가할 권리가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태도에 따라 달려있다고 설명한다.

 어떠한 ‘헌법상의 규칙'도 어떠한 ‘민주주의 원칙'도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내부의 관계를 조화시킬 수 없다. 어떠한 비책도 지역적 필요와 국제적 혁명의 요구 사이의, 직접적 필요와 역사적 계급투쟁의 요구 사이에 있는 모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다양한 분파들의 반대 속에서 드러났던 모순을 풀 수 없다. 어떠한 형식주의도 계급의 가장 진보적인 분파와 계급의 혁명적 투쟁 조직인 당과, 지역적이고 직접적인 조건들의 압력을 통해 서로 다른 정도로 영향을 받는 대중 사이의 관계를 분류할 수 없다. 레닌이 말했듯이, ‘대중의 정신을 관찰하고 대중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당도 때때로 대중에게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해야 한다. 좀 더 정확히, 당은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쓰는 것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한계'를 찾고 있다. (ibid.)

1921년에 볼셰비키 당은 그들을 지도할 이전의 경험이나 요소 없이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 오늘날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불합리하게도 볼셰비키의 실수에서부터 장점을 끌어오고 "원칙은 없다."고 선언한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모든 계급의 공통된 지위에 도달하기 위한 형식주의적이고 추상적인 방법을 비웃음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실행하는 문제를 마술로 쫓아버린다.

아주 유동적인 상황에서 합의를 세울 수 있는 결코 완벽한 수단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인 반면에, 노동자 평의회 또는 소비에트가 전체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 의지를 담아내고 발전하게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비록 1918년의 독일과 다른 지역에서 드러난 경험이 노동자 평의회나 소비에트가 부르주아지에 의한 회복에 취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긴 했지만.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당이 대중없이 혁명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만큼 너그러웠지만, 당을 통해 그리고 당의 허락하는 것을 빼고는 대중은 전체 계급으로서 그들의 혁명적 의지를 표현할 수단을 지니지 못했다. 그리고 당은 필요하다면 크론슈타트에서처럼 기관총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바로잡을 수 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두 가지 모순적인 표어(슬로건)를 갖는다. 즉 혁명 전에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혁명 후에는: "모든 권력은 당으로."

Octobre의 편집진과 달리,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 혁명과는 대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과업이 소수집단에 대표될 수 없지만, 자기 의식적인 다수를 통해 수행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잊었다.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자 계급 스스로의 과업이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둘 다 마치 기만인 것처럼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노동자 민주주의를 모두 거부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자본주의의 전복을 위해 스스로를 동원하는 수단인 소비에트와 노동자 평의회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내의 긴장과 차이를 담아내고 조절하는, 그리고 이행기 국가를 통한 무장 권력을 유지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조직이어야만 한다. 당은, 특정 시기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나머지보다 명확히 앞 서 있는, 없어서는 안 될 전위는, 이러한 권력을 노동자계급 자체와 대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실제로, 비록 "원칙적이지" 않지만 당이 노동자를 쏠 수 있는 권리를 입증하면서,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마치 이러한 결론의 끔찍함에서 피하려는 것처럼, 크론슈타트 봉기가 어쨌든 프롤레타리아의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 때 레닌의 규정 가운데 하나에 따르면, 크론슈타트는 백군 반동세력을 위해 문을 열어주는 "쁘띠 부르주아적 반-혁명"이었다.      

모든 종류의 혼란되고 심지어 반동적 생각들이 크론슈타트의 모반자들에 의해 표현되었다는 것은 확실히 진실이다, 그리고 몇몇 내용은 강령에 반영되어 있기도 했다. 반혁명 세력의 조직된 군대가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반란을 이용하려고 애썼다는 것도 진실이다. 그러나 크론슈타트의 노동자는 그들 자신을 1917년 혁명과 연속성을 지니고 있고 세계적 규모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 운동의 통합 부분으로서 계속 생각해왔다:

전 세계 노동자에게 소비에트의 권력의 방어자인 우리가, 사회 혁명의 획득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자.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대의를 위해 투쟁하면서 크론슈타트의 폐허 속에서 이기거나 죽을 것이다.(the Kronstadt Pravda, p. 82)

크론슈타트 반란자들이 아무리 혼동을 표현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내건 요구는 또한 끔찍한 생활조건, 국가 관료제의 점점 늘어나는 억압과 쇠퇴한 소비에트에서 정치적 권력의 손실에 부닥쳤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해들을 반영하고 있었다는 것을 절대로 부인할 수 없다. 그때 볼셰비키가 반란자를 쁘띠 부르주아지와 반혁명 세력의 정치적 대리인으로서 낙인을 찍은 시도는 물론 힘에 의해 프롤레타리아 계급들 안에 있던 끔찍한 위험과 복잡성의 상황을 해결하고자 하는 핑계였다.

좌익 공산주의가 역사적으로 뒤늦게 알게 된 지혜와 이론적 작업 때문에, 우리는 일련의 추론이 지닌 기본적 오류를 볼 수 있다. 즉 볼셰비키가 크론슈타트 반란을 진압했고 반-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자본주의 관료주의의 절대 권력인 스탈린이즘이 아직도 공산주의자를 대량으로 학살했다는 것이다. 사실, 소비에트를 다시 세우려는 크론슈타트 노동자의 노력들을 진압하고, 그들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하면서, 볼셰비키는 알지도 못한 채 스탈린주의로 가는 길을 닦고 있었다. 볼셰비키는 백군의 복원보다 노동계급에 훨씬 더 끔찍하고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 반혁명 과정의 가속화를 도왔다. 러시아에서 반혁명 세력은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선언하면서 승리했다. 스탈린주의 러시아가 살아있는 사회주의의 체현이며 10월 혁명과 직접적인 연결선 상에 있다는 생각은, 전 세계에 있는 모든 노동자 계급 대중에게 끔찍한 혼동과 막대한 혼란을 낳았다. 우리는 여전히 1989년 이래로 부르주아지가 공산주의의 죽음과 스탈린주의의 사망을 같다고 하는 것처럼 실재에 대한 이러한 왜곡의 결과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보르디가주의자들은 이런 경험을 했지만 여전히 1921년의 비극적인 실수와 동일시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 거의 "비극적" 필요가 아니라, 되풀이되어야만 할 공산주의자의 의무이다!

아나키스트들과 같이, 보르디가주의자들은 소비에트에서 조직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무장된 의지를 이끌기도 하고 연기하기도 하고 의지하기도 한 1917년 볼셰비키 당과, 소비에트를 그들의 이전 권력의 그림자로 축소시키고 노동자 계급에 맞선 국가의 폭력으로 전환시켰던 1921년의 볼셰비키 당 사이에 있는 모든 모순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이 그들의 현재 캠페인들에서 볼셰비키를 마키아벨리적인 압제자들로서 묘사함으로써 부르주아지를 돕는 반면에, 보르디가주의자들은 이러한 부정적 이미지를 혁명적 비타협의 극치로서 찬양한다.

그러나 좌익 공산주의는 볼셰비키 유산에 관계하면서도 그 이름에 걸맞게 실수를 비판할 수 있어야만 한다. 크론슈타트 반란의 진압은 가장 해롭고 끔찍한 것들 가운데 하나였다.

Como 8. 1. 2001

옮긴이: 이건민

[1] International Review, 2001, vol. 104

[2] Voline,『알려지지 않은 혁명』(The Unknown Revolution), Black Rose Books, 1975, p. 534-538.

[3] 크론슈타트 반란이 내건 강령(platform)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International Review 3, 51쪽을 참조하시오.

[4] 공산주의자 좌파의 또 다른 지국인, 혁명정당을 위한 국제적 국(局)은 크론슈타트에 대한 모호한 태도를 갖고 있다. Revolutionary perspectives No 23(1986)에 출판된 논문은 10월 혁명과 볼셰비키 당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재확인하고, 크론슈타트 반란이 깊이 불리한 조건들을 반영했고, 그것이 많은 혼란스럽고 반동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크론슈타트 반란의 아나키스트적 이상화를 거부한다. 동시에 그 논문은 크론슈타트에 대한 습격이 당의 독재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성이었다고 하는 Bordigist의 생각을 비판한다. 그것은 크론슈타트의 기본적인 교훈들 중 하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그 계급 자체에 의해서 즉, 당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동자 협의회를 통해서 수행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또한 프롤레타리아 요새의 고립이라는 전체적 정황에서, 당과 소비에트 당국 모두의 내부적 타락을 가속화시켰던, 당과 계급 사이의 관계에 관한 볼셰비키 세력의 실책들을 보여준다. 그 논문이 그 반란을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으로 특징화 짓지 않고 근본적인 물음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노동자 계급의 불만에 대항하여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답하지 않음에도, 그들은 그것이 노동자 운동에서 느린 고투의 장으로 열릴지라도 그것을 반혁명의 조종의 결과로서, 그 반란의 진압은 더욱 정당화된다고 심지어 말한다.

2006년 10월 한국에서의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

 

2006년 10월 한국의 „사회주의정치연합"그룹은, 한국의 노동자계급과 그 정치적 소수들 내부에서 좌파공산주의의 입장들의 존재를 강화시킨다는 명백한 목적을 갖고 서울과 울산에서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라는 명칭을 가진 대회를 개최했다.

한국에서의 그 대회는 그 나라의 노동운동사에서 그리고 진정 동아시아 전체에서 그러한 종류로서는 최초의 대회였다. 그러한 대회가 오늘날에 그것도 50여년 전에 개시된 제국주의전쟁의 결과로 여전히 분할된 채 있는 한 나라에서 개최된 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그것은 제 3인터네셔널의 짧은 경험 이래 최초로 동서양 사이의 노동운동의 국제적인 단합의 발전에 대한 전망을 열어준다. 그런데 겸손하게 보자면 그것은 동양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역사적 단계의 상황을 나타낸다.

이것을 인정하면서 ICC는, 발제를 하고 토론에 능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 대회에 공헌하려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아래에 몇가지 자료들을 공개하는데, 토론주제들에 대한 ICC의 발제문들, 북한핵실험을 계기로 유발된 전쟁위협에 대항한 (ICC와 SPA에 의해 공동으로 제시된) 선언문 그리고 그 대회에 대한 그리고 그곳에서 있었던 토론들에 대한 ICC의 보고서가 포함되어 있다. 이 보고서는 SPA 내부에서 토론되었고 그 동지들은 보고서에 전적으로 동의를 표했다.

논쟁의 주제들, 즉 자본주의의 데카당스, 계급투쟁에 대한 그리고 혁명조직에 대한 전망들에 관련하여 특별히 한국적이거나 심지어는 아시아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아래에 공개하는 자료들은 새로운 그리고 출현 중에 있는 혁명운동에서 국제적인 논쟁의 일부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전 세계의 동지들의 논평과 토론을 바라며 이들을 제시한다.

한국의 국제대회 보고서

2006년 6월, ICC는 남한에 있는,  좌파공산주의 전통과 관련된 그룹, 사회주의정치연합(SPA)으로부터, 동년 10월 서울과 울산에서 개최될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에 참가를 초청받았다. 우리는 이미 1여년정도 SPA와 접촉하고 있으면서, 언어문제로 인한 불가피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특히 자본주의의 데카당스 문제에 관해 그리고 현시기의 공산주의조직들의 발전 전망에 관해 토론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 대회가 불러일어킨 정신은 SPA에 의한 서문에서 강력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지금까지 세계 여러 곳에서 정기적으로 맑스주의자 대회(모임) 열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강단의 추상적인 논의나 자본주의의 좌파에 속하는 정치적 세력들의 연대를 위한 행사라는 것도 알고 있다. 자본주의 데카당스 시대의 객관적이고 주체적 조건이 야만과 전쟁을 넘어서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더욱더 깊이 인식하고 있다.

한국의 노동계급은 현장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고 혁명적 정치세력은 전망을 분명하게 열어젖히지 못하고 있지만 과거 혁명운동이 국제주의의 원칙을 저버리면서 참담한 패배를 경험했던 역사를 뿌리로부터 반성하면서 우리는 하나의 현장,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을 넘어서는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이루어내야만 한다."

한번 극동의 역사를 잠시만 생각해보는 것도 이러한 발의의 엄청난 중요성을 감지하기엔 충분하다. 이 대회를 위한 환영사에서 우리가 이미 언급했듯이, „1927 상해노동자학살은 1917 러시아에서의 10월혁명이래 10년간 세계를 뒤흔든 혁명투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세계노동자계급은 그리고 인류 전체는 역사상 유래없이 혹독한 반혁명의 모든 공포를 겪었다. 동양에서 노동인민은 2 세계대전의 서막이었던 일본의 만주침략을, 그런 다음은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파괴로 정점을 이루는 2 세계대전을, 중국내전을, 한국전쟁을, ‚대약진Great Leap Forward' 동안 중국에서의 참혹한 기아를, 그리고 베트남전쟁 등을 경험했다.

모든 무시무시하고, 충격적인 사건들은 , 동양에서는 여전히 역사가 짧고 경험이 적였던 그리고 서양에서의 공산주의이론의 발전과 접촉이 극히 적었던 프롤레타리아계급을 휩쓸었다. 적어도 우리가 알기로는, 좌파공산주의의 어떤 표현들도 동양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생존하거나  출현할 없었다.

결국, 동양에서 좌파공산주의와 명백히 공명하는 조직에 의해 소집된 공산주의 국제주의자들의 오늘의 회의는 노동자계급에게 있어서 역사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이것은 - 아마도 역사상 최초로 - 동서양의 노동자들 사이의 진정한 단결이라는 희망을 갖게 한다. 이것은 하나의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프롤레타리아계급과 그것의 정치적 소수들에서 천천히 진행되고 있는 전세계적인 의식 자각의 일부이다." 그래서 ICC의 대표단은 이 대회에 참가하면서, 국제주의적 좌파공산주의의 목소리가 극동에서 출현하는데 우리의 모든 역량을 다해 도울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배우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한국의 노동자들과 혁명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안들은 무엇인가? 모든 노동자들과 관련된 문제들이 그곳에서는 어떻게 제기되는가? 한국 노동자들의 경험들은 다른 곳의 노동자들에게, 특히 극동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노동자들에게 어떤 교훈들을 주는가? 그리고 한국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세계의 다른 지역의 계급형제들의 경험들로부터 어떤 교훈들을 이끌어내는가?

이 대회의 원래 계획은 다음의 주제들을 토론하는 것이었다:자본주의의 데카당스, 계급투쟁의 상황 및 현 상황에서 혁명가들이 취할 전략. 그런데, 대회 며칠 전에 이 목표들의 장기적인 정치적 중요성이, 북한의 최초의 핵폭탄실험에 의해, 그리고 이에 뒤이은 그 지역에 존재하는 다른 세력들(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남한) 측의 기동훈련에 의해 그 지역내의  제국주의간 긴장이 극적으로 첨예화됨으로써 그늘지게 되었다. 대회 이전에 가진 회합에서 ICC대표단과 SPA의 서울그룹은, 국제주의자들이  이 상황에 대해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데 동의했고 전쟁위협에 대항한 국제주의선언을 공동으로 대회에 제출할 것을 결정했다. 우리가 앞으로 살펴 보게될 바와 같이, 이렇게 제안된 선언에 의해 촉발된 토론은 대회 자체 동안의 논쟁들 중에서 중요한 일부를 차지했다.

이 보고서에서 우리는 대회의 논쟁들의 몇몇 주요 테마을 살펴보고자 한다. 토론 자체를 폭넓게 묘사할 뿐만 아니라,한국의 동지들에게 그들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국제적인 전망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숙고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역사적인 배경

그런데 우리가 대회 자체로 들어가기 이전에, 한국의 상황을 간략히 그 역사적인 배경 속에 자리매김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본주의가  극동으로 팽창하기 이전  수세기 동안 한국은 중국과 일본이라는 2개의 역사적인 강대국들 사이에 놓인 약소국이라는 그 지리적 입지로 인해 이득을 보기도 하고 해를 입기도 했다. 한편으로, 그것은 그 두나라를 위한 교량이자 문화적 촉매로서의 역할을 했는데, 예를 들어 중국 그리고 특히 일본의 도자기예술의 경우 지금은 잊혀진 청자유약기법을 개발한 한국의 도공들에게 크게 빚지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1]. 다른 한편으로, 이 나라는 이웃의 강력한 두 나라들에 의한 빈번하고 잔인한 침략들로 인해 고통당했으며, 근대사의 대부분 동안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한자를 썼던 그리고 유럽열강들이 그 지역에 도착함과 더불어 진행된 새로운 사상들의 유입에 저항했던 유교적 학자층에 의해 지배되었다. 19세기동안 중국, 일본 및 러시아-후자의 식민지 세력은 이때 중국의 국경과 태평양까지 확대됨- 사이의 점점 더 치열해진 라이벌의식은 한국 자체 내의 영향력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초래했다. 그런데 이러한 세력들이 추구한 영향력은 본질적으로 전략적인 것이었다: 투자회수의 관점에서 보자면 중국과 일본이 제공하는 가능성들은 한국에서 가능한 그것들보다 훨씬 더 막대했는데, 이는 한국지배계급들의 상이한 분파들 사이의 상살적인 투쟁들에 의해 야기된 정치적인 불안정을 감안하면 특히 그러했다. 이 지배계급들은 „근대화"의 이득을 놓고 그리고 한국의 제국주의 이웃들의 영향력을 이용해 그들 자신의 권력의 입지를 다지려는 노력들에 의해 분열되었다. 20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한국에 해군기지를 확립하려는 러시아의 시도가 강화되었고, 이것은 다시 일본의 독립성에 있어서 치명적인 위협으로 보여졌다. 이러한 경쟁은 1905년의 러일전쟁으로 이어지고, 이 전쟁동안 일본은 러시아의 함대를 전멸시켰다. 1910년 일본은 한국을 침략하여 식민정권을 세우는데 이것은 1945년의 일본의 패배까지 존속하게 된다.

그래서 일본의 침략 이전의 산업발전은 극도로 지연되었었고, 그 이후의 산업화는 거의 일본의 전쟁경제의 필요에 따라 조율되었다. 1945년경 한국에는 대략 2백만명의 산업노동자가 있었는데 그 대부분이 북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나라의 남부지역은 본질적으로 농촌지역으로 남은 채 혹독한 빈곤에 시달렸다. 한국의 노동대중들이 식민 지배, 강요된 산업화 그리고 전쟁[2]으로 인해 당하게 된 그러한 고통도 모자랐던지, 그들은 1989년까지 전 세계를 지배하게되는 새로운 제국주의적 충돌, 즉 미국과 소련이라는 2개의 거대한 제국주의 블록 사이의 지구분활의 경계영역에 놓이게 되었다. 스탈린주의적인 „조선노동당"에 의해 시작된 폭동을 지지한 소련의 결정은, 1945년 이후 그리스에서 그랬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결국은 미국의 제국적 지배의 새로운 변방을 시험해보려는 시도였다. 그 결과는, 비록 훨씬 더 크고 더 파괴적인 규모였긴 했으나 마찬가지로 남북한 사이의 맹렬한 내전이었다. 이 전쟁에서 남북한의 권력자들은-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자신의 부르조아 이해관계를 옹호하기 위해 싸웠던 간에- 세계 패권을 놓고 투쟁하는 강대국들의 앞잡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 전쟁은 3년(1950-1953)간 지속되었고 그 동안 한반도 전역은 교전중인 군대들의 계속된 전진과 후퇴에 의해 완전히 황폐화되었으며 결국 남한과 북한이라는 2개의 개별 국가들로의 영구적인 분할로 끝나고 말았다. 미국은 남한에 지금까지도 군사적 현존을 유지하고 있어서 대략 30,000명의 미군이 현재 주둔중이다.

전쟁이 종결되기도 전에 이미 미국은 군사적인 점령 자체는 그 지역을 안정화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고[3], 동남아시아와 극동을 위한 마샬계획에 해당하게 될 것을 제정하기로 결정했다. „경제적 사회적 빈곤이, 특정 아시아 국가들에서 권력을 잡게 친소련적인 민족주의 분파들이 사용하는 주요한 주장들의 하나임을 인식한 미국은 중국의 접경지역(대만, 홍콩, 한국 일본) 서구의 번영의 전초지로서 기능할 있는 지대들을 형성했다. 미국에게 있어서 최우선은 아시아에서 소련블록의 진군에 대항할 일종의 방역선을 확립하는 것이었다.[4]" 이 정책은 남한에게 중요한 함의를 가졌다: „원자재가 부족하고, 그것의 산업적 기반의 대부분이 북부에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나라는 전쟁의 말기에 고갈되어 버렸다. 생산은 44%, 고용은 59%  하락했으며, 신규 자본의 원천, 생산의 중간수단들, 기술력 경영역량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1945년에서 1978년까지 남한은 대략130 달러 또는 인구당 600달러를 대만은 56억달러 또는 인구당 4.5달러를 지원받았다. 1953년과 1960 사이에 외국의 원조가 남한 고정자본의 90% 차지했다. 미국에 의해 제공된 원조는 1957년에 GNP 14% 달했다. 그러나 미국은 나라에 대한 군사적, 재정적 기술적 원조에만 그치지 않고, 국가와 경제의 전체 경영을 또한 담당했다. 사실상의 민족부르조아가 부재한 상황에서 미국이 원하는 근대화를 수행할 있는 유일한 실체는 군대였다.국가자본주의의 고도로 효과적인 형태가 나라 모두에서 설치된 것이었다.유사-군대식의 집중화를 통해 하지만 시장을 인정하면서 공적부문과 사적부문을 밀접하게 연결하는 체계에 의해 경제성장에 박차가 가해졌다. 터무니 없이 과도한 관료제를 가진 동구식의 국가자본주의와는 반대로 이들 국가들은 국가적 집중화를 가치법칙의 인정과 결합시켰다. 수많은 중재주의적 정책(interventionist policies)들이 시행되었다. 경제적 집적체의 형성, 내수시장을 보호하는 법률들, 변경에서의 무역제한, 명령적이긴 했지만 또한 미래의 노력을 장려한 계획형태, 크레딧분배의 국가관리, 자본과 자원을 핵심산업으로 돌리기, 배타적인 면허의 발행, 경영독점등등. 그래서 남한에서는, 국가원조나 발의를  통해 종종 만들어지는 거대한 경제집적체인 재벌[5](일본어의 자이바추스와 동일)과의 독특한 관계 덕분으로 공공 당국이 경제 발전의 방향제시를 했다.. "

그래서 남한의 노동자계급은, 불안정하게 연속된 반-민주적(semi-democratic)이고 권위주의적인 군사정권들에 의해 시행된  잔인한 착취와 강제된 산업화 정책에 직면했다. 이러한 정권들은, 1980년 초의 광주에서의 대중봉기의 예에서와 같이 노동자들의 파업과 소요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함으로써 그들의 권력을 유지했다[6]. 광주사건 이후, 한국의 지배계급은 장성 전두환(한국정보부의 이전 우두머리)의 대통령직 하에서, 본질적으로 군사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권으로 남아있는 것에 민주주의적인 겉치례를 부여하여 상황을 안정시키려 했다. 그러한 시도는 무참히 실패했다: 1986년에는 서울, 인천, 광주, 대구 및 부산에서 대대적인 반대가 연이었으며, 한편 1987년에는 „3,300이상의 산업쟁의가 발생했는데, 이는 임금인상, 처우개선 작업조건개선에 대한 노동자들의 요구를 포함하면서 정부가 그들 요구의 일정부분을 수용하는 타협을 하도록 강제했다[7]" 무력으로 사회적 평화를 유지함에 있어서 전두환의 부패한 군사정권의 무능력은 방향전환을 초래했다. 전정권은,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총수, 장성 노태우의  „민주화 프로그램"을 수용했고, 노태우는 1987년 12월에 치뤄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하게 된다. 1992년의 대선을 통해,  민주 야당에서 오랫동안 총수를 지내고 있던 김영삼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의 전통이 완성되었다. 또는, SPA의 동지들이 우리에게 말했듯이, 한국의 부르조아계급은, 군부와 재벌과 보안기관 사이의 연합의 계속된 권력을 숨기기에 그럴듯한 민주적 겉모양새를 마침내 선출해낸 것이었다.

역사적 배경의 귀결

정치적 소수들의 최근 경험들의 측면에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주변부의 다른 나라들에서, 즉 아시아에서 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유사하다[8]. 그것은 한국에서의 국제주의운동의 출현 자체에 대해서도 중요한 귀결을 가졌다.

우리가 계급의 „집단적 기억"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의 수준에서 볼때,  유럽에서의 노동자계급의 축적된 정치적 그리고 조직적 경험들과 한국에서 계급의 경험사이에는 분명히 중요한 차이가 있다. 유럽에서 노동자계급은 1848년(영국의 인민헌장운동의 „완력(physical force)"분파)에 이미 사회의 독립적인 세력으로 스스로를 주장하기 시작했었다. 우리가1980년대 유럽에서의 계급투쟁의 물결동안 노동조합에 대한 일반적인 불신이 서서히 발달한 것을 그리고 노동자들이 자신의 투쟁들을 스스로의 손으로 행하려는 경향을 보여준 것을  기억한다면, 동일한 시기에 한국에서의 운동은 노동자 자신의 계급적 요구들을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부르조아 국가기구의 재조직을 위한 „민주주의 운동"의 요구들과 융합하려는 경향으로 특징지워진다는 점이  특히 놀랍다. 결과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와 부르조아계급의 민주적 분파들의 이해관계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이, 이 시기에 정치적 활동을 시작한 투쟁가들에게 즉각적으로 명백하지 않았다.

언어장벽에 의해 유발된 어려움들을 우리는 또한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집단적 기억"은 그것이 기록되고 이론적인 형태를 띨때 가장 강력하다. 1970년대에 유럽에 출현한 정치적 소수들이, 원문이든 번역본이든간에  사회민주주의 좌파(레닌, 룩셈부르크)의 저작들과 제 3인터네셔널좌파와 그로부터 출현하게 되는 좌파공산주의자들(보르디가, 판네콕, 고어타, 빌랑그룹 및 프랑스좌파공산주의자들)의 저작들을 접할 수 있었던 반면, 한국에서는 겨우 판네콕의 저작(노동자평의회)과 룩렘부르크의 저작(자본축적론)이 출판되기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노동자평의회를 위한  서울그룹(SGWC)와 이 그룹과 밀접히 관련된 SPA의 공동노력의 덕분이다[9]

한국의 상황에서 가장 특이적인 것은, 미국과 소련블록사이의 제국주의적 충돌에 의해 야기된 남북사이의 분단의 결과, 즉 남한에서의 미군주둔과 1988년말에 종결되게 되는 일련의 군사정권들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었다. 이것은, 한국노동자계급의 전반적인 경험부족, 계급 내부에서 분명한 국제주의적 목소리의 부재, 이에 더불어  우리가 위에서 설명했던, 노동자 운동과 부르조아적 민주적 재야 사이의 혼동 등과 조합된 채, 침투적인 한국민족주의가 종종 „반제국주의"로 가장된 채 사회를 전반적으로 감염시기는 것을 초래했다. 이에 따르면 단지 미국과 그 동맹국들만이 제국주의세력으로 보여진다. 군사정권에 대한 반대, 그리고 진정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는 미국에 대한 반대와 동일시되는 경향이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정치적 환경 내부에서의 논쟁의 중요한 특징 하나는 노동조합문제이다. 특히 현재의 활동가 새대들에게 있어서 노동조합주의(trade unionism)의 경험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의 투쟁들에 기반하고 있다.  이때의 노동조합은 대부분 비합법적이고 아직은 „관료주의화"되지 않았으며 확실히 매우 헌신적인 투쟁가들(현재 SPA와 SGWC에 관계된 동지들을 포함)에 의해 활성화되고 지도되었다. 노동조합의 „프로그램들"이 혁명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옹호할 수조차 없다는 점은, 그 당시 비합법성과 탄압이라는 조건으로 인하여 관련 동지들에게 분명하지 않았다. 1980년대 동안, 노동조합은 군사정권에 대항한 민주적 야권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는데, 후자의 야심은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것이 아나라 오히려 정반대로 군사정권을 타도하고 국가자본주의적 기구를 스스로 장악하는 것이었다. 반대로, 1990년대 이후의 한국사회의 „민주화"는 노동조합의 국가로의 이러한 통합을 공공연하게 만들었고 어떻게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 대처할 것인가를 놓고 투쟁가들 사이에 상당한 혼란을 초래했다. 한 동지의 진술에 따르면, „노동조합은 민주 국가의 가장 좋은 옹호자임이 밝혀졌다" 결과적으로, 노동조합에 대한 전반적인 „실망"감이 존재하고 노동자계급 내에서 투쟁활동을 위한 어떤 다른 방법이 모색되고 있다. 대회에서의 그리고 비공식적인 토론들에서의 발언들에서 반복적으로 우리는, 한국의 동지들이 자본주의 데카당스에서 노동조합의 본질에 대한 숙고를 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숙고는 러시아혁명이래, 특히 독일에서의 혁명 실패이래 유럽노동자운동에 대한 숙고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새로운 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스탈린주의와 부르조아민주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강하게 영향을 받았던 자신들의 과거 활동의 기반들에 의문을 제기하려는 진정한 노력들이 많은 한국의 투쟁가들 사이에서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 관여된 이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단결을 유지하고 토론 공간을 제공하려는 노력 속에서 몇몇 그룹들과 개인들이 다소 공식적인 „혁명적 맑스주의자 네트워크[10]"의 건설을 발의했다.  불가피하게도, 과거와의 결별은 극도로 어렵고 그래서 이 네트워크 내의 상이한 그룹들 간에 대단한 이질성을 결과시켰다. 위에서 우리가 간략히 기술한 역사적 배경들은,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의 원칙들과, 스탈린주의와 트로츠키주의를 특징짓는 부르조아적, 특히 민족주의적 전망 사이의 분화가, 1990년대의 실천적 경험을 기반으로 그리고 네트워크 내부에 좌파공산주의의 사상과 입장을 소개하려는 SPA의 노력 덕분으로 겨우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이러한 문맥 속에서, 이 대회에 대한 SPA의 서문에는 우리가 보기에 절대적으로 근본적인 2가지 측면들이 있다:

  • 첫째, 한국의 혁명가들이 한국 노동자들의 경험을 국제노동자계급의 더 넓은 역사적 이론적 틀 속에 자리매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선언한 것이다: „대회의 주제를 이론, 실천, 전망으로 구분하고 이를 꿰뚫는 인식의 지평을 넓혀 나가는 것이 이번 대회의 주요 목표이다. 우리는 이번 대회를 시작으로 세계의 혁명적 맑스주의 세력이 연대하고 단결하여 세계혁명을 향한 힘을 축적하고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역사적 과업을 완수하기를 바란다."
  • 둘째, 이것은 좌파공산주의의 원칙을 기본으로 해서만 수행될 수있다는 점을 분명히 선언한 것이다: „이번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는 한국의 혁명적 맑스주의자들과 세계의 좌익공산주의자들과의 소중한 만남과 토론의 마당이며 혁명적 맑스주의[즉, 좌파공산주의] 진영내의 입장과 노선 차이를 드러내고 소통하는 번째 경험이 것이다."

대회에서의 논쟁들

이 글은 이 대회의 토론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하기에 너무 짧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떠오른 가장 중요한 요점들로 보이는 것들을 조명하려 할 것이다. 이때, 우리는 그 대회에서 시작된 논쟁들이 한국의 동지들 사이에서 그리고 더 전반적으로는 전세계의 국제주의운동 내부에서 계속되는데 공헌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자본주의의 데카당스에 대하여

이것은 토론의 첫번째 주제였다. 논쟁 자체를 살펴보기전에 우리는, SPA의 근본적인 노고를, 즉 계급투쟁의 상황과 혁명전략이라는 토론될 다른 문제들에  견고한 이론적 기초지식을 제공함으로서 대회를 시작한 SPA의 근본적 노력을 진심으로 지지한다는 점을 먼저 말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좌파공산주의 내부에 존재하는 상이한 시각들을 간략히 요약 제시하려한 SPA 동지의 영웅적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이 문제의 복잡성-20세기가 시작된 이래 노동운동 내부의 논쟁의 주제가 되었고 여러 위대한 정신들을 단련시킨-을 감안하면, 이것은 극히 담대한 시도였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것은 너무 과감한 것이었다! 자본주의 데카당스 개념이 „본능적으로" 우호적으로 수용된 점(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을 보게 된 것은 매우 놀라웠던 한편, 토론 중에 그리고 그 이후에 비공식적으로 제기된 질문들로 볼때, 대부분의 참가들에게 있어서 이 문제와 깊이 씨름하기에는 이론적인 기초가 부족하다는 점 또한 명백했다[11]. 이렇게 말하는 것은 결코 비판이 아니다: 여러 기본적 텍스트들이 한국어로 입수될 수 없는데, 이는 그 자체가 -우리가 이미 언급했듯이- 한국의 노동운동의 객관적인 경험부족의 표현이다. 우리는, 제기된 문제들과, 특히, SPA와 ICC에 의해 제출된 발제문들을 통해, 동지들이 그 논쟁 속에서 스스로의 입장을 세우기 시작하고 또한 -  마찬가지로 중요하게도 - 이러한 이론적 문제가 실제 세계와 구체적인 투쟁 노력들의 외부로부터 부과된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상황의 기본적이고 결정적인 요소라는 점을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12].

한 젊은 학생이 제기한 질문 하나는 제시할 만한데, 이것은 현재의 자본주의에서의 외양과 실체 사이의 충격적인 모순을 몇 마디로 표현했다: „많은 사람들이 데카당스를 느끼고 있다, 우리들-대학생들-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에 빠지기 쉽다, 풍족한 사회가 존재한다는 느낌이 있다, 어떻게 우리는  데카당스를 구체적으로 표현할 있을까?"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적어도 산업국가들에서)의 한 측면은, 우리가 „소비적인 풍족"한 세상에 살고 있는 체 하는 것임은 사실이다.  그리고 참으로 서울의 도심거리들, 전자제품으로 가득 채워진 상점들은 현실이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일치하는 듯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한국의 젊은이들도 다른 곳의 젊은 프로레타리아들과 동일한 문제들, 즉, 실업, 임시고용계약, 구직난, 높은 주거비용이라는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오늘의 노동자계급 젊은이들에게,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서면상의 답변에서 지적하려 했던 점, 즉 그들이 겪고 있는 대량실업과 자본주의의 데카당스의 또 다른 근본적 측면인 전면화되고 영구적인 전쟁사이의 연관성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과업의 일부이다.   

계급투쟁에 대하여

확실히, 대회 도중 뿐만 아니라 한국 운동 전반에 있어서 토론중인 가장 중요한 쟁점들의 하나는 계급투쟁과 그 방법의 문제였다. 대회 중의 발언들과 비공식적인 토론으로부터 우리가 이해하기로는, 노동조합 문제는 1980년대 말에 투쟁에 가담하게 된 투쟁가들에게 있어서 실제적인 문제를 부과한다. 어쩐지 한국의 상황은, 연대노조의 결성 이후의 폴란드에서의 상황과 유사하다- 그리고 좌파공산주의의 원칙이, 즉 자본주의의 데카당스에서 노동자계급의 영구적인 대중 조직 건설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심히 옳다는 것의 또다른 표현이다. 한국에서의 경우처럼, 투쟁의 열기 속에서 건설된 노동조합들 조차도 종국에는 국가의 부속물이, 노동자의 투쟁을 강화하는 수단이 아니라 노동자의 투쟁에 대한 국가의 장악을 강화하는 수단이 되어버릴 수 밖에 없다. 왜 그럴까? 근본적으로 그 이유는, 데카당스 시기에는 자본주의로부터 지속적인 개선을 얻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우리가 이전에 언급했듯이- 민족적 부르조아계급의 상이한 분파들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노동자들에게 공통적인 국제적 관점이 아니라 종종 단일 업종이나 산업 또는 한정된 민족적 관점을 필연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다. 불가피하게 그것들은 „무엇을 국가가 부담할 수 있는가"라는, „무엇이 국민경제에 좋은가?"라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머리를 숙인다. 이것은 실상 우리가 들을 수 있었던  한국 노동조합에 대한 비난의 하나였다- 그것들은, 노동자 자신들의 요구들에 그 기반을 두기는 커녕 노동자들의 요구를 사장들이 지불할 준비가 된 것에 맞춰 제한하도록 노동자들에게 촉구하는 지점까지 도달했다는 것이다[13].

노동조합의 불가피한 배반과 민주적 국가 기구로의 편입에 직면하여, 한국의 동지들은 좌파공산주의의 사상에서 그 해답을 모색하고 있었다. 결국, „노동자평의회(workers' councils)"개념이 그곳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어켰다. 문제는, 노동자평의회를 혁명적 상황에서 노동자권력의 기관으로서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내부에서 영구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하나의 새로운 종류의 노동조합으로서 바라보는 일반적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진정 이러한 생각은 심지어 „혁명적 노동자당을 위한 투쟁가그룹„에 의해 이뤄진 „남한에서의 현시기에서 평의회운동전략 및 그 실천 방안"에 관한 발제에서 역사적으로 이론화되어 있었다. 이 발제는 1919년의 독일혁명 동안에 건설되었던 노동자평의회가 사실상 노동조합으로부터 진화되었다고, 실제와는 완전히 정반대를 주장함으로써 역사를 완전히 전도시켰다는 점을 말할 수 밖에 없다[14]. 우리의 견해로는, 이것은 단지 학구적인 논쟁에 의해 정정될 수 있는 종류의 역사적 부정확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더 심오하게는,  혁명적 시기 이외에는 노동자들이 영구적으로 투쟁상태에 있는 것이 단순히 불가능하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극도로 어렵다는 사실로부터 유래한다. 그러한 논리에 사로잡힌 투쟁가들은-노동자계급을 위해 일하려는 그들의 진실한 열망과는 상관없이 그리고 그들이 진정으로 옹호하는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입장들과는 상관없이- 즉각주의(immediatism)의 함정에 빠질 위험에, 즉, 있는 그대로의 실제 역사적 상황 이내에서 구체적으로 가능한 것과는 전혀 어떤 연관도 없는 „실천" 활동들의 꽁무니만 끊임없이 찾아다닐 위험에  처해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세계관으로 볼때,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제기하는 것은 그에 대답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ICC 대표단 한명이 표현했듯이, „노동자들이 투쟁 중에 있지 않으면, 그들의 머리에 총을 들이대며 ‚너희들은 투쟁해야 돼!'라고 명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혁명가들이 노동계급을 „대신하여" 투쟁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혁명가들은 계급투쟁을 선동할 수 없는데, 이것은 하나의 원칙이 아니라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계급 자신이 스스로를 의식하는 것,그들 자신의 이해를 가진 그리고 특히 즉각적인 투쟁을 넘어서는,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실업수당대열에서의 노동자들의 즉각적인 상황들을 뛰어넘는 혁명적인 목표를 가진 하나의 계급으로서 사회 속에서 그 자신의 자리를 자각하는 것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1905년의 러시아에서와 같은 외관상으로는 „자연발생적인" 프롤레타리아 폭동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것들의 하나이다. 그 당시 혁명가들이 투쟁 초기의 급격한 고조에 작은 부분적인 역할 밖에 수행하지 않았긴 하지만, 그 지형은 사회-민주당(그 당시의 혁명가들)의 체계적인 개입활동에 의해 수년간 준비되어 왔었고, 그것은 노동자들이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자각을 발전시키는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15]. 간단히 표현하자면, 노동자들의 공공연한 투쟁의 시기 이외의 시기에 혁명가들의 본질적인 임무는, 다가올 투쟁을 강화시킬 그러한 사상들을 선전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로렌 골드너와 국제주의전망 대표단의 발제들에서 제기된, 우리가 생각하기에 대답되어야 될 것 같은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즉, 노동자계급의 „재구성(recomposition)" - 다시 말해, 한편으로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의 특징인 대공장들이 지리적으로 광범위하게 분산된 생산을 위해 사라지는 경향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들에게, 특히 젊은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점점 더 비정규의 노동 조건들(단기계약, 실업, 시간제 노동, 등등) - 은 „작업장을 초월" 하는 „새로운 투쟁방법들"의 발견을 결과시켰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투쟁방법들"의 가장 유명한 예들는 2001년 아르헨티나에서의 피케테로스(piqueteros)운동에 의해 고안된 것으로 추정되는 „플라잉 피켓츠(flying pickets)" 그리고 2005년의 프랑스 근교지역에서의 폭동들이라 한다. 우리의 관점에서는 심히 오해된 듯 보이는 프랑스의 폭동들과 피케테로스운동에 대한 그 동지들의 열광에 우리가 지금 이글에서 대답할 생각은 없다[16]. 하지만 이러한 입장들에서 표현된 좀 더 일반적인 정치적 오류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노동자들의 혁명의식은 결국 작업장에서의 그들의 즉각적인 일상 경험에 의존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상, 비정규의 노동조건들과 „플라잉 피켓츠"는 역사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17], 우리를 놀래키기 위해 제시된  소위 „새로운 투쟁형식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무력함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2005년의 프랑스 근교들의 젊은이 폭동들이 고전적인 실례이다. 실제(reality)는, (자본주의의 데카당스 시기에) 노동자 투쟁이 특정한 독립성을 획득할 때면 언제나 그것은 노동조합에서가 아니라, 선출된 대표단을 가진 대중집회들에서, 바꿔 말하자면 평의회로부터 유래하고 또 그러한 평의회의 맹아를 간직한 조직형태 속에 스스로를 조직하는 경향이었다는 점이다. 최근 역사의 가장 인상적인 실례는 물론 1980년의 폴란드에서의 투쟁들인데, 역시 1980년대의 또 다른 경험은, 이태리에서의 교사들(„전통적인" 산업부문이라고 말할 수 없는!)의 대대적인 투쟁동안에 형성된 코바스(Cobas)(기초위원회(rank-and-file committees))였다. 시기적으로 더 최근의 예로서 우리는 2006년 스페인 비고(Vigo)에서의 파업을 들 수 있다[18]. 여기서 파업을 시작한 기술노동자들은 대부분이 소규모 기업에서 비정규직 노동계약으로 일했다. 투쟁의 구심점을 형성할 수 있을 어떤 단일한 대규모 공장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작업장이 아니라 그 지역의 광장에서 매일의 대중집회를 가졌다. 이러한 대중 집회들은 다시 동일한 지역에서 1972년에 이미 활용된 조직형태로 소급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렇다면 이것이다: 왜19세기말에는 대대적인 비정규 노동력의 발전이 비숙련노동자들의 최초의 대중노조들의 설립을 초래한 반면, 21세기에는 더 이상 그렇지 않은 것인가?

왜 1905년의 러시아 노동자들은, 레닌이 „프롤레타리아계급 독재의 최종적으로 발견된 형식"라고 불렀던 노동자평의회 - 소비에트(the soviet) - 를 창안해 냈는가?

왜 노동자들이 그들의 자치성(autonomy)과 세력을 발전시키는데 성공했을 때마나 대중집회가 노동자조직의 전형적인 형태가 되는가?

우리의 견해로는, 이미 말했듯이, 그 해답은 사회학적 비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20세기 초에 발생한 역사적 시기의 변화를 훨씬 광범위하게 정치적으로 파악하는 데에 있다. 이러한 변화를 제 3인터네셔널은 „전쟁과 혁명의 세기"의 시작으로서 묘사했다.

게다가, IP와 로렌 골드너가 옹호하는 노동자계급의 사회학적 비젼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정치적, 이론적 능력을 완벽히 과소평과하는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는 충격적이다. 그것은 마치 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 관해서만 사고할 수 있기나 하듯이, 마치 그들이 일터를 떠나자마자 그들의 뇌가 꺼져버리기나 하듯이, 마치 자신들의 아이들의 미래(학교, 교육, 사회적인  해체의 문제들)에 관하여, 그리고 노약자와의 또 미래세대들과의 연대(악화되는 의료시설 문제, 연금문제 등등)에 관해 그들이 전혀 무관심하기라도 하듯이, 마치 그들이 환경문제나 전쟁의 끊임없는 야만성을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없기나 하듯이, 그래서 그들이 넓은 세상에 대해 배운 것을 작업장에서의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자신들의 직접적 경험에 관련지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나 한 듯이.

또한, 세계에 대한 이러한 폭넓은 정치적 역사적 이해는 즉각적인 투쟁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세계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자본주의를 타도하는데 성공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 대신에 전혀 새로운 사회를, 인류역사상 전혀 존재한 적이 없는 그런 종류의 사회를 건설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류 역사에 대한 가장 심오한 이해를 발전시킬 수 있어야만 한다, 예술과 과학과 철학에서 인류의 가장 위대한 성취들을 자신이 물려받은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노동자계급의   정치조직들이 지향하는 정확히 그 것이다. 이러한 조직들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조건과 그들에게 열려있는 전망들에 관해 더 총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수단이다[19].

전쟁위협에 대한 반대선언

우리는 이미 그 선언의 텍스트를 우리의 웹싸이트에 공개했기에 그 내용을 여기서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20]. 그 내용을 둘러싼 논쟁은 울산 노동자 배움터의 한 회원에 의해 제기된 제안, 즉 그 지역의 증대하는 긴장에 대한 주요한 책임을 미국에게 묻자는 그래서 결국은 북한을 미국의 봉쇄정책의 „희생자"로 제시하자는 제안에 집중되었다.이 제안과, 대회에 참가한 많은 트로츠키주의 경향들 몇명으로부터 이 제안에 부여된 지지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많은 한국 동지들이 1980년대의 „반제국주의"(근본적으로는 „반미주의"로 읽히는) 이데올로기들과 단절하는데 겪는 어려움을 그리고,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이 진심으로 스탈린주의를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옹호에, 그래서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계속된 애착을 잘 나타낸다.

ICC와 몇몇 SPA 동지들은 선언의 주요 취지를 변경하는데 강력히 반대했다. 서울과 울산에서 있었던 데카당스에 관한 논쟁에서 우리가 지적했듯이, 하나의 제국주의적 충돌에서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서 „더 비난당해야" 한다는 생각은, 사회-민주주의적 반역자들이1914년에 노동자들로 하여금, 즉 독일노동자들은 „짜르의 야만주의"에 대항하여, 프랑스노동자들은 „프러시아의 군국주의"에 대항하여, 영국노동자들은 „용감한 꼬마 벨기에"를 지원하기 위해서 등등„그들의" 국가를 지지할 것을 호소할 있게 했던 그것과 정확히 동일한 생각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자본주의의 데카당스 시기는, 제국주의는 이런 저런 국가의 실수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의 근본적인 특성이고, 이 세기에 모든 국가는 제국주의적이라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분석의 심오한 진리를 보여주었다. 미국이라는 거인과 북한이라는 피그미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그들의 제국주의적 식욕의 크기이자 그것을 만족시킬 능력이다.

또 다른 2개의 반대 의견이 토론 동안 제기되었는데, 이것은 거론할 만하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그러한 긴장상황을 억압적 대책을 수립하는 빌미로 삼고 있는 남한 정부를 비난하자는  „노동해방연대"그룹의 한 동지의 제안이었다. 이 매우 정당한 제안은 서울에서의 토론에서 이뤄졌고 그 다음 날 울산에서 논쟁된(및 그 이래 공개된) 최종판은 그에 따라 변경되었다.

두번째 반대 의견은, „사회주의노동자[21]"그룹의 한 동지로부터 였는데, 현상황은 사실상 그렇게 심각하지 않으며, 지금 전쟁을 비난하는 것은, 부르조아계급에 의해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 협연되고 있는 전쟁공포를 신임하는 결과가 되어버릴 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 반론은 합리적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점으로 보자면 잘못된 것이었다. 어떻든 극동에는 임박한 전쟁위협이 존재하고, 전쟁위협이 이 지역에 걸려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제국주의의 장면 속의 상이한 주연 배우들(중국, 대만, 일본, 미국, 러시아)사이의 긴장들은 증대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국제주의자들이 모든 제국주의 진영들의 책임성을 비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1907년 슈투트가르트회의에서 결정된 국제주의결의를 지키기 위해 투쟁했던 레닌, 룩셈부르크 및 제 2 인터네셔널좌파의 모범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제국주의적 충돌의 결정적인 사건들이나 계급투쟁에 대하여 프롤레타리아계급 내부에서 입장을 취하는 것은 혁명조직들의 제일의 책무이다[22].  

이 점에 대한 결론으로써, 우리는 이 선언에 대해 IP대표단과 대회에 개인자격으로 참가한 다른 동지들이 보여준 우애적이고 국제주의적인 지지를 환영한다.

결산

우리 대표단이 출국하기전에 있었던 마지막 모임에서 ICC와 SPA는 그 대회에 대한 총괄평가에 있어서 전적으로 동의했다. 제기된 중요한 점들은 다음과 같다:

  1. 이 대회가 개최된 자체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라는 사실. 왜냐하면 그것은, 극동의 고도로 산업화된 나라에서 좌파공산주의의 입장들이 옹호되고 또 뿌리를 내기리기 시작한 그 처음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2. SPA은 대회 동안의 토론들이 좌파공산주의와 트로츠키주의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실천적으로 보여준 점에 있어서 특히 중요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대회는 좌파공산주의의 원칙들에 대한 그들 사진의 이해를 발전시키려는 그래서 이러한 원칙들을 한국 노동운동 속에서 널리 알려지게 하겠다는  SPA의 결심을 강화시켰다.
  3.  북한의 핵실험에 관한 공동선언은 좌파공산주의의, 특히 SPA와 ICC의 국제주의적 입장들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그 선언에 관한 논쟁은 한국노동운동에 잔존하는 민족주의적 경향들의 문제를 노출시켰다. „네트워크" 내부에는 이점에 대한 견해차이가 존재하고, 이 문제는 그 환경에서 풀리지 않은 채 이며 SPA는 장래에 이 문제의 극복을 위해 일할 결심이다.
  4. 미래의 논쟁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들 중의 하나는 노동조합문제이다. 한국의 동지들이, 특히 1980년대 이래의 그곳에서의 노동조합의 역사를, 좌파공산주의에 의해 옹호된 입장들 속에 집적되어 있는 것과 같이 세계프롤레타리아계급의 역사적 경험의 견지에서 분석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전망

그 모든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대회가 극동에서 좌파공산주의 원칙의 존재를 그리고 동서양의 혁명가들 사이의 공동작업을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단지 한 걸음을 내디딘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안다. 즉, 우리는 이 대회가 개최되었다는 사실과 그 속의 논쟁들이, ICC가 항상 주장해 오고 있으며 또 노동자계급의 미래 세계공산당의 건설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 될 2가지 점들을 확인시켜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 첫째는 그러한 조직이 건설될 정치적 기반이다. 모든 근본적인 문제들-노동조합문제, 의회문제, 민족주의의 문제 및 노동해방투쟁-에 대해서 새로운 국제주의운동의 발전은 1920년대에서 50년대 사이에 좌파공산주의의 작은 그룹들(특히, 빌랑(Bilan), KAPD, GIK, GCF)에 의해 이뤄진 기초작업을 기반으로 성취될 수 밖에 없다. 이 그룹들로부터 ICC는 기원을 갖는다[23].

두번째, 한국에서의 이번 대회는 그리고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연대를 완수하자"라는 SPA의 명쾌한 요청은 또한 , 국제주의운동이 기존의 국가적 정당들의 연방을 기초로 해서가 아니라 곧 바로 국제주의적 수준에서 발전하고 있음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24].

이것은, 혁명의 와중에 그리고 제 2인터네셔널의 국가적 정당들로부터 출현한 좌파 분파들을 기반으로 제 3인터네셔널이 창건되었을때의 그 상황을 너머선 역사적 진보이다. 그것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세계적인 생산 과정에서, 그리고 세계적 규모로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함으로써만 그 모순들이 극복될 수 있는, 세계적인 인류공동체에 의해 대체될 세계적인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단결된 하나의 계급이라는, 현재 노동자계급의 본성을 또한 반영한다.

존 던/하인리히 쉴러

[1]    우리는 15세기에 이뤄진 한글의 발명을 또한 언급해야 겠는데, 이는 구어형의 언어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에 근거해 표기법을 창조한 아마도 최초의 시도일 것이다

[2]    이것은 수 천명의 한국여성들이 일본 군대의 사창가에서 겪어야 했던 강요된 매춘을 포함했고, 한국농업이 일본 자체의 식량필요에 의해 점점 더 직접적으로 지배되면서 이뤄진 전통적인 농업경제의 파괴를 포함했다.

[3]    „미국은 비공산주의 영역과 공산주의 영역 사이에 군사적인 장벽을 만드는데 관심을 갖고 있다. 장벽이 효과적이라면 뒤에 놓인 영역은 안정적일 것이다(...) 미국은 동요의 특정 원인들을 결정해야만 하고 그것들을 제거하는데 있어서 지능적이고 대담하게 조력해야 한다. 중국에서의 우리의 경험은 동요의 원인들과 타협하는 것이 쓸모없음을, 일시적인 안정을 추구하는 정책은, 일반적인 요구가 영구적인 변화를 갈망하기 시작하면 실패할 밖에 없음을 보여주었다. " 멜빈 코넌트 주니어, „JCRR: 구체적 실례(an object lesson)", 극동 조사(Far Eastern Survey)에서, 5월 2일, 1951

[4]    아시아의 용들이 기운을 잃어간다" 인터네셔널리뷰 제 89호(1997)

[5]    분배된 적산을 그 가치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재벌이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 제일이자 가장 중요한 재정적 원천이었다. 전쟁직후 이것은 남한이 일본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의 30%에 달했다. 초기에 미군정의 적산분배에 대한 통제 하에서 그것들은 군정 자체에 의해 그리고 한국정부에 의해 분배되었다.

[6]    이 글에서 우리는, 초강력-군국주의적 스탈린주의적인 체제의 모든 공포를 경험하고 있는 북한의 노동자계급의 상황을 다루지는 않겠다.

[7]    앤드류 남, 한국민중의 역사

[8]   즉각 생각나는 예로서 필리핀과 브라질을 들수 있다.

[9]    SGWC의 몇몇 동지들은 이번 대회에 개인자격으로 참가했다.

[10]   SPA 이외에 네트워크에 속하는 다음과 같은 한국그룹들이 대회에서 발제를 했다: 노동해방연대, 울산 노동자 배움터, 당건투. 계급투쟁에 대한 발제문 하나는  개인 자격으로 참여한 로렌 골드너에 의해 제시되었다.

[11]    이는 서울에서 열린, 데카당스에 관한 토론에서 특히 그러했다. 이때의 토론은 대중에게 공개된 것이어서 청중 속에는 정치적 경험이 적거나 거의 없는 젊은 학생들이 많았다.

[12]    우리는 국제주의전망(Internationalist Perspective) 그룹의 „자본의 형식적이고 실제적인 지배"에 대한 강박관념을 여기서 검토할 생각은 없다. 우리는, IP가 여전히 „ICC의 외부분파(External Fraction of the ICC)"라 자칭하던 1990년에 발간된 인터네셔널리뷰 제 60호에 이 주제를 이미 길게 다룬바 있다(http://en.internationalism.org/ir/060_decadence_part08.html 을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새로운" 이론적 통찰의 우월성을 실상에서 과시하려는 IP의 최초의 노력이 거의 신빙성이 없었다는 점은 언급할 만한데,  IP가 동유럽에서의 사건들은 사실상 소련의 강화를 나타낸다는 주장을 베를린 장벽 붕괴 3년후에도 계속했기 때문이다!

[13]    불가피하게, 이러한 설명은 극도록 도식적으로 남아있고, 교정되고 상세화될 여지가 열려있다. 울산노동자 배움터의 동지가 행한 한국노동운동사에 관한 발제가 영어로 번역되기에는 너무 길어서 우리가 접할 수 없었던 점을 우리는 매우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 동지가 그것의 요점을 요약하는 그 텍스트의 축약본을 준비해서 번역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14]    사실상, 독일혁명 동안의 노동조합은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의 최악의 적이었다. 독일혁명에 대한 설명으로는 인터네셔널리뷰 제80-82호에 실린 기사들을 참조.

[15]    인터네셔널리뷰 제 120, 122, 123, 125호에 실린, 1905년혁명에 관한 우리의 일련의 기사들을 참조:

http://en.internationalism.org/taxonomy/term/340

[16]  이 주제에 관한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프랑스 근교들에서의 폭동: 절망과 마주하여, 계급투쟁만이 미래를 제시한다(Riots in the French suburbs: in the face of despair, only the class struggle offers a future)"와 „아르헨티나: ‚피케테로'운동의 신비화(Argentina: the mystification of the ‚piquetero' movement)" 을 참조. 이 글들은 각각 http://en.internationalism.org/icconline/2005_suburbs.html 와 인터네셔널리뷰 제 119호(http://en.internationalism.org/ir/119_piqueteros.html )에 실려있다. 대규모의 산업노동력의 „소멸"이라는 생각을 제안하는 것은 울산에서는 어쩐지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였다는 점을 말해야 겠다. 이곳에는 현대공장 단독으로도 2만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다!

[17]    예를 들어, „비정규의 노동"이 „새로운 투쟁형태"로서의 „플라잉 피켓츠"의 창안을 결과시켰다는 생각을 살펴보면, 우리는 이 생각이 단순히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다는 점을 볼 수 있다. 플라잉 피켓(즉, 투쟁중인 노동자들의 대표단이 다른 노동자들을 투쟁에 합류시키기 위해 다른 작업장으로 가는 것)은 이미 오랫동안 시행되고 있다. 영국의 예만 보더라도 플라잉 피켓은 1970년대에 있었던 2개의 중요한 파업들에서 유명하게 사용되었다. 즉, 광부들이 발전소에 피켓을 보냈던 1972년과 1974년의 광부파업들에서, 그리고 건설노동자들이 다른 공사장으로 파업을 확산시키기 위해서 피켓을 보냈던 1972년의 건설노동자파업에서. „비정규의" 노동력의 존재도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사실상, 혁명적 노동조합주의자 톰 만(Tom Mann)의 „총노동자조합(General Labourers' Union)"(엥겔스 그리고 맑스의 딸 엘레노어도 이 노조의 발전에 관계했었음)이 1889년에 설립되게 만든것이 정확히 정확히 바로 이러한 대규모의 비숙련의 비정규 노동력의 출현이었다.

[18]    세계혁명 제 295호에 실린 기사를 참조: http://en.internationalism.org/wr/295_vigo

[19]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의 운동을 거기에 맞추고자 하는 바의 특수한 원리들을 세우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이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의 다양한 일국적 투쟁들에 있어서 국적에 상관없는,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공동 이해를 내세우고 주장한다는 점에서만, 다른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조아지 사이의 투쟁이 경과하는 다양한 발전 단계들에 있어서 항상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만 다른 프롤레타리아 정당들과 구별된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은 실천적으로는 모든 나라의 노동자 정당들 중에서 가장 단호한 부분, 언제나 운동을 추동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부분이다: 그들은 이론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조건들, 진행 일반적 결과들에 대한 통찰을 여타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에 앞서서 가진다(공산주의당 선언, 맑스-엥겔스저작선집 1권, 412-3쪽,박종철출판사)"

[20]    이 선언은 온라인상으로 http://en.internationalism.org/icconline/2006-north-korea-nuclearbomb에서 찾아볼 수 있다.

[21]    이 그룹의 영어명은 Socialist Worker이다. 그 명칭에도 불구하고, 이 그룹은 영국의 „사회주의 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와는 무관하다. 만약 우리가 그 동지의 생각을 잘못 제시했다면 먼저 사과한다-언어 장벽때문에 우리가 해석의 오류를 범했을 지도 모른다.

[22]    이 대회에서 국제주의자들이 전쟁위협에 직면하여 침묵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보기에는 1970년대 말의 좌파공산주의대회에 비해서 한 걸음 진보 한 것이다. 그 당시에는 다른 참가자들-그리고 특히 바타글리아 코뮤니스타와 CWO-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어떤 공동선언도 거부했다.

[23]    IP에 따르면, 우리는 „좌파공산주의"를 넘어서야 한단다. 적어도 우리가 거명한 모든 그룹들 중에서 그 누구도, 그들이 이런 저런 문제들에 대해 최종의 말을 한 것인 체 하지 않았다. 역사는 전진하고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토대를 세우지 않고 집을 짓는 것은 불가능하며, 우리의 관점에서 볼때 그러한 건설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토대들은 좌파공산주의의 선구자들의 그것이다. IP의 입장의 논리는 우리가 출현한 그 역사를 내던져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는 우리와 더불어 시작된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IP가 이 생각을 얼마나 싫어하든 간에, 이것은 „당(the Party)"(IBRP의 경우에는, „사무국(the Bureau)")이 지혜의 유일한 원천이고 다른 누구로부터도 어떤 것도 배울 필요가 없다라는 보르디가주의의 입장의 한 변형에 불과하다.

[24]    미래의 국제주의 조직의 발전의 이러한 측면은 1980년대에 ICC와 IBRP사이의 논쟁의 한 주제였다. IBRP는 국제주의 조직은 상이한 나라들에서 이미 존재하는 독립적인 정치조직들을 기반으로 형성될 수 밖에 없다는 견해를 고수했다. 이 „이론"을 현재의 국제주의운동의 진정한 실천이 완전히 무효화시킨 점은 IBRP의 실천적 이론적 파산을 보여준다. 

데카당스(쇠퇴)이론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조건과 원칙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1) 역사적 유물론의 구체화

데카당스 이론은 원시 공산제, 고대 노예제, 봉건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등의 생산양식의 발전을 분석하는 역사유물론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따라서 데카당스 이론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 시기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틀이다. 사회가 아직도 진보하고 있는지 또는 사회가 진보를 완결하여 ‘역사'로 되었는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정치, 사회, 경제적인 수준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모든 과거에 존재하였던 사회처럼, 자본주의의 상승 단계는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생산관계의 역사적으로 필요한 성격, 즉 사회의 생산력 확대에서 생산관계가 하는 중대한 역할을 나타내 준다. 이와 대조적으로, 데카당스 단계에서 생산관계는 생산력을 확대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생산력 확대를 막는다. 이것은 맑스와 엥엘스가 우리에게 남겨준 주요한 이론적 성과 가운데 하나이다.

20세기는 인류의 역사에서 보기를 찾을 수 없는 참으로 잔인한 시기였다. 20세기에 일어난 수많은 전쟁은 규모와 빈도, 기간에서, 그리고 그 결과 인간들에게 안겨준 재앙의 폭에서 다른 어떤 시기와 비교할 수 없었다. 즉 전쟁은 지구 전체를 뒤흔들고 수천만 명의 프롤레타리아트와 인류를 절망적인 가난으로 몰아넣은 경제위기를 가져왔고, 역사에서 가장 커다란 기근에서 체계적인 집단학살까지도 낳았다. 19세기와 20세기는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시대였다.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Belle Epoque)」동안 부르주아 생산양식은 비할 바 없이 가장 전성기를 누렸다. 이 때 부르주아 생산양식은 전에는 꿈으로만 꾸어왔던 생산성과 기술의 정교화를 이루면서 지구를 하나로 묶어 놓았다. 사회의 토대에 긴장이 쌓여가고 있었지만, 자본주의가 성장한 지난 20년(1894-1914)은 가장 번영한 시기였다. 자본주의는 적이 없는 것처럼 보였고, 군사적 갈등은 주변부에 한정되어 있었다. 거의 끊이지 않고 도덕적, 지적, 물질적 진보를 이룬 "긴 19세기" (역사가 홉스봄의 표현)와 달리, 1914년 이후의 20세기에는 모든 면에서 뚜렷한 퇴보가 있었다. 지구를 가로질러 더욱 더 세계의 종말을 방불케 하는 경제와 사회생활의 성격, 끝없이 이어지는 갈등 속에서 자멸의 위협, 그리고 심상치 않은 생태계의 재앙은 당연한 숙명도 아니고 단순히 인간의 광기의 산물도 아니며, 자본주의 발생과 더불어 시작된 자본주의의 특성도 아니다. 그러한 퇴보는 처음부터, 즉 16세기에서 1차 세계대전까지 경제, 사회, 정치 발전의 강력한 요인인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데카당스의 징후였다. 그리고 이는 모든 그러한 발전의 족쇄가 되었으며, 인류의 생존 그 자체에 대한 위협이 되었다.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물질적 가난 없는 세상을 향해, 인류의 필요와 욕망, 그리고 의식을 근거로 하여 인류가 활동할 수 있는 통일된 사회를 향해 움직일 수 있게 한 수준으로 생산력이 발전했던 바로 그 순간에 왜 인류는 생존의 문제와 마주하게 되었는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는 정말로 자본주의가 이끌어온 막다른 골목에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혁명세력을 이루는가? 왜 우리 시대에 노동자 투쟁의 대부분의 형식은 특정한 민족국가의 헌법이나 부르주아지의 진보적인 특정분파를 지지하면서 노동조합주의와 의회주의를 통한 점진적 개혁을 위한 투쟁과 같은. 지난 세기에 두드러진 노동자 투쟁의 형식일 수밖에 없는가? 이러한 초보적이지만 중요한 질문에 답변할 수 있는 지구적이고 일관된 전망도 없고, 여전히 전위 역할을 할 수 없는 현재의 역사적 상황에서 우리의 방향을 찾는 것은 힘든 일이다. 맑스주의, 즉 역사유물론은 그러한 질문을 풀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세계관이다. 대답은 명확하고 단순해서 몇 마디로 할 수 있다. 앞 선 생산양식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는 영원한 체제가 아니다.

"어느 선을 지나면, 생산력의 발전은 자본에 대한 장애요소가 되고, 결과적으로 자본 또한 노동의 생산력 발전의 장애 요소가 된다. 일단 이러한 관계가 형성되면, 족쇄로서의 길드체제, 농노제, 그리고 노예제가 해체되었던 것처럼 자본, 다시 말하면 임금 노동은 사회적 부의 발전과 생산력과 같은 관계로 시작된다. 노예체제의 마지막 형태, 한편으로는 임금 노동, 다른 한편으로 자본으로 구성된 형태가 분출되고 이 분출은 자본에 대응하는 생산양식의 결과이다. 그것은 임금노동과 자본의 부정, 부자유한 사회적 생산의 이전 형태에 대한 부정을 위한 물질적 그리고 정신적 조건들을 발생시키는 자본의 생산과정이다.

사회의 생산력 발전과 그것을 특징 지워 주는 생산관계들 사이에 증가되는 부조화는 모순, 위기, 변동으로 표현된다."(칼 맑스,「요강」 전집 29권, 133-4쪽)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충분히 발전하지 않는 한,  프롤레타리아 투쟁은 세계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투쟁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생활조건을 실질적으로 개혁하고 영원히 개선하기 위하여 노동조합과 의회의 투쟁을 경험하면서 스스로를 계급으로 인식하고 주장할 수 있게 했다. 자본주의 체제가 데카당스로 들어간 순간부터, 세계 공산주의 혁명은 가능하고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프롤레타리아의 투쟁형식은 완전히 달라졌다. 당면 수준에서도, 방어투쟁은 형식으로나 내용으로나 노동조합주의와 노동자 정치조직을 위한 의회주의 대의제와 같은 지난 세기를 이끌었던 투쟁 수단을 통해 더 이상 나타낼 수 없었다.

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는 혁명운동이 전개되면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the Communist International : 코민테른)은 부르주아지가 더 이상 역사적으로 진보 계급이 아니라는 인식을 중심으로 하여 1919년에 세워졌다.

"2. 자본가 계급의 쇠퇴기 - 세계경제상황의 평가에 기초하여 제3회의는 자본주의가 생산력 발전의 사명을 수행해 왔으며 현재 역사적 발전뿐만 아니라 인간 생존의 가장 기초적인 필수조건들과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의 단계에 도달했음을 단언할 수 있다. 이런 기본적 모순은 최근의 제국주의 전쟁에 반영되었고, 그 전쟁이 생산과 분배의 조건에 가한 심각한 손해에 의해 날카로워 졌다. 자본주의적 노예제라는 족쇄에도 불구하고 진부한 자본주의는 그것의 억제할 수 없는 힘으로 야기된 파괴행위가 노동자계급에 의해 이루어진 경제적 성과물들을 무능케 하고 황폐화시키는 단계에 있다. 현재의 자본주의라는 것은 그 자본주의의 소멸의 고통이다."(「코민테른 첫 4차 대회의 결의와 선언」에서 "코민테른 전술에 대한 테제", Hessel, 388-9쪽)

그때부터는, 제1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 체제를 쇠퇴 국면으로 들어서게 했다. 이러한 이해는 공산주의 좌파그룹 대다수의 공동 전술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나침반 덕택에 공산주의 좌파는 비타협적이고 일관된 계급지형에 남아있을 수 있었다. 단지 ICC는 1930년대와 40년대에 이탈리아와 독일, 네덜란드 좌파, 그리고 1940년대와 1950년대의 GCF(The Gauche Communiste de France)가 가치를 풍부하게 하여 전달한 유산을 받아 발전시켰다.

결정적인 계급 전투가 임박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거의 2세기에 걸친 노동자 투쟁과 노동자 정치 조직의 이론작업을 통해 발전했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세계관을 다시 갖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야만의 가속화와 착취의 끊임없는 증가가 당연한 사실이 아니라, 20세기 시작 이래 역사적으로 쓸모없는 것이 되었지만 세계를 계속해서 지배한 자본의 경제·사회적 법칙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19세기에 배웠던 투쟁형식(개량투쟁의 최소강령, 부르주아지의 진보적 분파에 대한 지지 등)이 사회 안에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존재를 "견뎌낼" 수 있었던 자본주의의 상승 시기에는 상식이었지만, 자본주의의 쇠퇴기에는 19세기의 투쟁 형식이 막다른 골목으로 이끌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노동계급이 아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공산주의 혁명이 쓸데없는 꿈이나 유토피아가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데카당스를 이해하는 과학적 근거였던 "필연"이자 "가능성"임을 아는 것이 프롤레타리아트로서는 훨씬 더 중요하다.

2)자본주의의 데카당스

① 역사적 진화의 결과로서, 노동력은 하나의 상품이 된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력은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

"고대시기에, 우리는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잉여노동을 착취하는 것을 보았다. 고대의 노예제나 중세의 농노제 모두 도달된 생산성 수준, 즉 다수의 개인을 지탱하기 위해 한 개인의 노동력에 의존한다. 노예제나 농노제는 한 사회계급이 다른 사회계급의 노동력에 의지하는 생산성으로부터 이윤을 추구하는 방식의 다른 표현이다. 이런 점에서, 고대사회의 노예나 중세 농노는 현재 임금노동자의 선조격이다. 그러나 고대나 중세의 노동력은 그것의 생산성과 착취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상품화되지 않았다.

상품으로서 노동력의 판매는 일련의 특수한 역사적 그리고 사회적 관계들을 뜻한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시장의 출현은 다음을 뜻한다.

  1. 노동자는 개인으로 자유롭다.
  2. 노동자는 생산수단과는 분리되고, 이후에 노동하지 않는 자의 소유 하에 합쳐진다.
  3. 노동 생산성은 최고 수준에 이른다. 다른 말로, 잉여노동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시장경제는 지배적인 체제가 된다. 다시 말해, 상품의 형태로서 잉여 노동의 창출은 노동력 구매의 목적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정치경제 입문」 제5장 「임노동」)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노동력이 상품으로 된 것은 지난 시대와 견주어 볼 때 전혀 새로운 차원의 빈곤이다.

"원시부족은 자연환경이 호의적이지 않을 때 배고픔을 겪었다. 원시부족의 빈곤은 대체적으로 사회의 빈곤이었다. 어떤 부족 구성원이 빈곤한 반면에, 다른 구성원이 부유하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생활수단들은 사회전반에 쓰일 수 있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평등하게 쓰일 수 있었다. 이것은 고대와 동양 노예제에도 해당된다. 그러나 이집트의 공공 노예나 그리스 사노예들은 강제되고 착취되었으며, 그들의 빈약한 생활환경과 주인들의 풍요로움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예로서의 그들의 조건들은 그의 존재를 확인시켰다. 어떤 사람도 그들의 말이나 가축이 굶어 죽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는 것처럼 노예들도 굶어 죽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중세 노동제도 여기에 해당된다. 소작농이 토지에 밀착되고, 모든 개개인이 주인이거나 다른 사람의 하인인 봉건적 종속 체제는 개개인들로 하여금 사회적 위치를 결정지었다. 농노는 강제되었지만, 어떤 지주도 농노를 토지로부터 쫓아내고 따라서 농노로부터 생존수단을 박탈할 권리를 가지지 않았다. 봉건적 관계는 지주로 하여금 대재앙, 화재, 홍수, 해일 등이 발생할 경우 소작농을 도와주도록 강제하고 있었다. 봉건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자본주의가 출현하기 시작하는 중세 후기 상황은 변화한다.

(.....)

자본주의 상품 생산은 인간역사에서 노동과 인구 대다수의 생존 수단의 부재, 그리고 인구의 다른 부분에서의 가난의 결과임과 동시에 필요조건이고 경제의 생존 조건인 새로운 경제 형태이다."(로자 룩셈부르크, 앞의 글)

②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의 조건을 창조한다.

『공산주의자 선언』은 부르주아지가 했던 탁월한 혁명적 역할을 강조한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낡고 제한된 사회형태를 쓸어버리고 결코 본 적 없는 가장 역동적이고 팽창적인 생산양식으로 바꾸어 놓았다. 즉 그러한 생산양식은 지구 전체를 정복하고 통일시킴으로써, 그리고 엄청난 생산력으로 추진함으로써 마침내 계급적대를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좀 더 높은 사회형태의 토대를 놓았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그 자체에 의한 전대미문의 생산력의 발전 때문에 물질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보편적 상품생산에 기초한 사회는 필연적으로 그 자신의 내적 기능의 논리에 따라 쇠퇴하여 결국 몰락하는 것으로 운명 지워 졌다. 『선언』에는 자본주의의 몰락을 이끌 내적 모순이 이미 확인되었다.

"부르주아적 생산 관계들과 교류 관계들, 부르주아적 소유 관계들, 즉 그토록 강력한 생산 수단과 교류 수단을 마법을 써서 불러내었던 현대 부르주아 사회는, 주문을 외워 불러내었던 지하 세계의 힘에 더 이상 군림할 수 없게 된 마법사와 같다. 지난 수십 년 이래로 공업과 상업의 역사는 현대의 생산관계들에 대한,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지배의 존립 조건들인 그 소유 관계들에 대한, 현대 생산력들의 반란의 역사일 뿐이다. 주기적으로 재발하며 점점 더 위협적으로 부르주아 사회 전체의 존재를 문제 삼는 상업공황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상업 공황 때에는 제조된 생산물들뿐만 아니라 이미 있는 생산력들까지도 으레 태반이 절멸된다. 공황 때에는, 이전의 모든 시기에는 어불성설로 보였을 하나의 사회적 전염병이 돌발한다. 과잉 생산이라는 전염병이 그것이다. 사회는 갑자기 순간적인 야만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기아와 전면적인 섬멸전은 사회에 대한 모든 생활 수단들의 보급을 차단해버린 것처럼 보인다. 공업과 상업은 절멸된 듯이 보인다. 왜 그런가? 사회가 너무 많은 문명, 너무 많은 생활 수단, 너무 많은 공업, 너무 많은 상업 따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칼 맑스, 『공산주의자 선언』, Pelican Marx Library, 72-73쪽)

『선언』을 쓴 뒤 맑스는 몇 년 동안 잉여가치의 추출과 실현 사이의 관계, 그리고 십년 또는 그 이상 자본주의 사회의 기초를 흔들었던 과잉생산의 주기적 위기를 좀 더 면밀히 분석하였다.  잉여가치의 비밀을 벗기면서, 맑스는 자본주의를 쇠퇴와 필연적으로 최종적 붕괴로 이끌게 될 엄청난 모순이 자본주의의 특징이었다는 점을 밝혀냈다. 이 모순은 임노동의 본질에 기초한 것이다.

  • 과잉생산의 위기 : 자본주의 하에서 인구 대부분은 잉여가치의 본질에 따라 과잉생산자와 과소소비자로 구성된다. 자본주의는 그 자신의 생산관계의 폐쇄회로 속에서 생산된 모든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
  • 이윤율 하락의 경향 : 인간의 노동력만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경쟁 때문에 자본주의는 이윤율이 하락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죽은 노동(기계, 원료)과의 관계에서 살아있는 노동의 양을 줄일 수밖에 없다.

지구 전체를 그 자신의 법칙에 종속시키는 믿을 수 없는 팽창적인 본질과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로마 노예제나 중세 봉건제처럼 역사적으로 이행기적인 생산양식이다. 자본주의는 선행한 모든 생산양식처럼, 거대한 역사 운동이 다하여, 사라지도록 운명 지워졌다. 그러한 운명은 도덕적 파산이 아니라 스스로를 파괴하도록 강제한 내적 모순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자본주의를 좀 더 높은 사회조직의 형식으로 대체할 수 있는 계급을 자본주의가 그 자체 내에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그러한 모순의 해결도 암시했다 : 즉 공산주의가 그것이다. 상품관계의 지배로 혼돈에 빠져든 사회는 오직 임노동과 교환을 위한 생산을 폐지한 사회, 즉 인간사이의 관계가 더 이상 불명료하지 않고 단순하고 명백하게 될, 인간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유롭게 연합한 생산자" 사회를 통해 대체될 수 있다.

생애 말년 동안, 맑스는 그의 지적 힘의 대부분을 고대사회 연구에 바쳤다. 모건(Morgan)의 『고대사회(Ancient society)』가 출판되고 러시아의 노동자 운동이 러시아에서 혁명 전망에 대한 문제를 던지자, 맑스는 강도 높은 연구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 연구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아주 중요한 『민족지 노트(Enthnographic Notes)』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전해졌다. 이 연구는 엥엘스의 위대한 인류학적 작업인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의 버팀목이 되었다.

맑스와 엥엘스에게, 미국 인디언에 대한 모건의 연구는 원시공산주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분명히 확증시킨 것이었다. 즉 사유재산, 사회적 위계 그리고 성의 불평등이 인간 본성에 내재해있다는 전통적인 부르주아 개념과 반대로, 모건의 연구는 사회구성이 원시적일수록 재산은 더욱 공동소유가 되고, 의사결정 과정은 더욱 집합적이 되며, 남녀 사이의 관계는 더욱 서로의 존경에  기초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원시사회에 대한 맑스주의적 접근은 사회의 역사적 진화가 마지막 순간에 사회의 경제적 하부구조의 변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유물론적 방법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동은 원시공동체의 종말을 가져왔고 더욱 발전된 사회형태가 출현하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역사 진보에 대한 맑스의 견해는 어둠에서 빛으로의 직선의 상승, 즉 부르주아 문명의 찬란한 광채가 그 정점을 이룬 상승을 순진하게 상상했던 사소한 부르주아 진화론에 철저히 반대한 것이었다. 맑스의 관점은 아주 변증법적이다. 즉 원시공산주의를 인간이하로 보며 거부하는 것과 달리, 그의 『노트』에는 부족공동체가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그 공동체가 지닌 질적인 특징은 스스로 다스리는 능력, 상상력과 예술창조의 힘 그리고 성의 평등이다. 원시사회의 불가피한 한계, 특히 개인과 부족단위에서 인간의 분화에 부과되는 제약은 역사의 진보를 통해 극복되었다. 그러나 이들 사회의 긍정적 측면은 역사의 진보 과정에서 상실되었고 공산주의의 미래에서 좀 더 높은 수준으로 복원되어야 할 것이다.

수십만 년 동안 인류가 계급 없고 국가 없는 사회에서 살면서 얻은 발견은 노동자 운동의 수중에서 강력한 무기로 될 것이고, 사유재산에 대한 사랑과 위계제의 필요성이 인간본성의 타고난 부분이라는 모든 주장들을 상쇄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3) 제국주의 단계, 자본주의의 정점이자 데카당스의 서곡

『공산주의자 선언』이 쓰여 졌을 당시, 과잉생산의 순환적 위기는 아직 "새로운 시장의 정복과 옛 시장의 보다 철저한 착취를 통해" 극복될 수 있었다. 즉 자본주의의 앞에는 여전히 긴 팽창의 단계가 놓여 있었다.

1870년대와 1880년대 동안 자본주의 삶에 새로운 국면이 펼쳐졌다. 자본주의 체제는 이제 더 이상 국민국가를 세우기 위해 등장한 부르주아지의 계급투쟁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식민지정복의 방법을 사용하는 팽창과 세계 정복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섰다. 19세기 마지막 30년 동안 지구의 대부분이 정복되어 거대한 제국주의 열강 사이에서 분할되었다.

 엥엘스가 1891년 주목할 만하게 통찰한 바와 같이, 자본주의 데카당스의 첫 조짐이 나타나자, 강대국 사이에는 긴장이 점점 늘었고 주변부에서는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위의 모든 것은 독일이 평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