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당에 관한 그릇된 이론들

공산주의 혁명의 본질, 프롤레타리아 의식 성장의 특징,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계급으로 구성하는 것, 이 모든 개념들은 매우 이론적으로 다루어져 왔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분석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물어야만 한다. 혁명가의 역할을 정의하고, 또 이데올로기와 계급의식 사이의 차이점을 강조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가? 공산주의 혁명의 본질이 공산주의자들의 개입에 영향을 주는가? 사실, 이것은 그 문제를 다루기엔 너무 학구적인 것은 아닌가?

오늘날 혁명가들이 계급투쟁의 구체적이고 복잡한 과정을 그들의 눈앞에 전개되는 그대로 이론화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의 분석은 여전히 매우 일반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고, 그들에게는 너무나 빈번히 노동자 투쟁의 경험이나 그러한 투쟁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부족하다. 50년간의 반혁명의 무게가 노동자계급을 무겁게 짓누르고, 오늘날 혁명가들은 과거의 혁명 조직들로부터 오래 동안 단절된 이후, 마치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와 같다. 50년 전의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당연했던 것이 오늘날의 혁명가들에게 깜짝 놀랄만한 것으로 다가오고, 과거의 일상적인 실천과 생생한 개입으로부터, 즉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은 오늘날에는 추상적이고 여전히 애매모호한 발상처럼 보인다. 공산주의자들의 적극적인 역할, 계급과 공산주의자의 관계, 투쟁 속에의 효과적인 개입(…), 이 모든 것들을 1920년대 혁명가들은 실천에 옮겼고, 구체적으로 논했다. 오늘날 이러한 전통을 되살리려는 혁명가들은 여전히 배워야 할 것이 많다. 최근 계급투쟁의 부활로 인해 그들의 공산주의 전위로서의 책임이 천 편의 이론적인 문서보다 좀 더 구체적이고 좀 더 효과적으로 정의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의 역할과 그 책무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들의 관점은 여전히 다소 이론적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면, 이 팸플릿을 과거의 저작들을 기초로 작성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왜 이 절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대회에서의 당에 대한 태제를 충실하게 인용함으로써 시작되지 않는가? 레닌의『무엇을 할 것인가(What Is To Be Done)는 훌륭한 참조점이 아닌가? 불행하게도, 아니다.

사실, 1920-1921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당에 대한 이론적 저작들은 1917년 볼셰비키의 실천을 진정하게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졸렬한 모방이나 변형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이론적 수준에서, 특히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 담겨있는, 기존의 현저한 혼란들을 증폭한다. 우리가 혁명가의 역할 문제를, 공산주의에 관한 문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화에 관한 전반적인 분석과 함께 시작할 필요를 느꼈던 이유는, 공산주의자들의 개입에 관한 일반적인 이론적인 틀이 제3 인터내셔널의 노동자 운동에게도, 심지어는 그 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퇴락에 반대하여 투쟁한 좌익 분파에게마저도 완전히 명확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성과들을 재전유한다는 것은 우리에 앞서 존재한 혁명 조직들을 흉내 내서 과거 문서들을 한자 한자까지 그대로 베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경험을 재전유한다는 것은 또한 긍정적인 교훈과 부정적인 교훈을 끌어내면서 비판하는 것을 뜻한다. 1920년대의 혁명적 물결과 그에 뒤따른 투쟁의 퇴조는 교훈의 무궁무진한 보고이다. 이러한 교훈들로 인해 우리는 세계 혁명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화 과정과 자기 조직화의 특징들을 좀 더 명확하게 다시 정의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교훈들로 인해 우리는 당의 역할과 노동자계급과의 관계에 대해 이전에 존재할 수 있었고, 심지어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혼란들을 좀 더 잘 드러낼 수 있다.

대리주의 개념의 역사적 기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2차 당 대회에서 혁명가들은 당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혁명을 독립적인 정치적 당 없이 수행할 수 있다는 관점을 단호히 거부한다.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 투쟁이다. 내전이 될 수밖에 없는 이 투쟁의 목적은 정치권력의 획득이다. 정치권력은 오직 정치적 당에 의해서만 획득되고, 조직되며, 지도될 수 있다. 그 어떤 다른 방법도 아니다.”( 『당의 역할에 대한 테제』, 우리의 강조)

이 입장은, 특정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이 시기 혁명가들 대다수의 입장이었다. 이 입장은 어디서 제기되었는가? 그리고 어떻게 발전해갔는가?

당에 대한 이러한 생각의 기원은 제2 인터내셔널이 표방한 일반적인 입장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번영하는 자본주의로 인해 노동자계급이 지속적인 개량을 여전히 획득할 수 있던 시기와, 혁명가들이 혁명의 궁극적인 목표를 멀리 떨어져 있어 닿을 수 없는 미래로 격하시킨 시기와 동시에 일어났다.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는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 시기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고 파악하면서 노동조합의 일을 강조하고 당이 의회의 일에 전념할 필요를 강조했다. 영국 사회민주주의자, 에드워드 데이비드(Edward David)가 다음과 같이 강조했을 때처럼: “혁명주의의 짧은 개화는 매우 다행히도 과거의 일이 되었다.(…) 당은 의회에서 그의 권력을 긍정적으로 활용하고 확장하는데 전념할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해서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의 ‘수정주의’가 탄생하고, 노동자의 (노동조합에 의해 이끌어지는) 경제적 활동과 그들의 (대중 의회 정당에 위임된) 정치적 활동사이의 점점 더 날카로운 분리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은 노동자 투쟁의 최종 목적의 포기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1902년에 벌써, 카우츠키는 ‘점진적인 운동, 민주주의적이며 거의 알아차릴 수 없는 수단을 통해,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를 주창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의 유일한 임무는, 이러한 점진적인 운동을 강제할 목적으로 의회에 참여하는 것뿐이었다. 권력 쟁취는 더 이상 노동자들 스스로가 부르주아 국가를 폭력적으로 전복하는 것, ‘노동자들의 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당들의 일로서, 부르주아 국가를 평화적으로 정복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맑스주의가 이렇게 엄청나게 왜곡됨으로써, 또 다른 왜곡이 초래되었다. , 프롤레타리아 당은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 준비하는 필수적인 분파(a fraction)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당은 통치 기구가 되었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 당에 투표함으로써 자신의 정치 활동과 권력을 그 당에 위임해야만 한다.

사회민주주의는 공공연한 목표로 부르주아 국가의 ‘정복’을 내세웠지만, 노동자계급의 대중 정치 기관에 대한 생각은 존재하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유일한 정치 기구는 당이었다. 만약 국가가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통제 아래에서 프롤레타리아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고 친다면, 2인터내셔널이 그렇게 믿었듯이, 권력 쟁취는 오직 당에 의해 조직되고, 수행되며, 지도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논리적이었다. 이러한 책무를 위해, 특히 개량을 위한 투쟁을 이끌기 위하여, 당은 대중적이고, 극도로 규율 잡히고 위계적인 조직이어야 했다. 부르주아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유산이 이러한 발상들에 심하게 남아 있었다.

20세기 초, 사회민주주의의 좌파 인자들은 건강하게 제2 인터내셔널의 테제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큰 이점은 새롭게 열리고 있는 시대를 인식하고 그 시기에 비추어 혁명가들의 역할을 명확히 한 점에 있었다. 그들의 첫 번째 행동은 베른슈타인, 카우츠키와 그 친구들에 의해 만들어진 경제 투쟁과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궁극적인 목적 사이의 분리에 집중되었다.

레닌은 나로드니크스 (Narodniks, 농민 꼬뮌에 기초한 혁명을 지지했던 러시아 인민주의자)에 반대하는 그의 첫 번째 저작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제 투쟁의 최종 목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러시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들의 활동과 관심을 산업 노동 계급에 집중시키고 있다. 이 계급의 선진 인자들이 과학적 사회주의 (scientific socialism) 의 생각들을 흡수하고, 러시아 노동자들의 역사적 역할을 이해했을 때, 그들의 생각들이 널리 퍼지고, 현재의 지리멸렬한 경제적 전투를 의식적인 계급투쟁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안정된 조직을 만들어 내었을 때, - 러시아 노동자들은 모든 민주주의 인자들의 선두에 나서서, 절대주의를 전복시키고,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를(모든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공산주의 혁명의 승리를 위한 공개적인 정치적 투쟁으로 이끌 것이다.”(레닌, 저작집, 1)

 

그 후 레닌은, 사회민주주의 당의 일부로서 러시아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객관적인 조건들을 보지 못했던 '멘셰비키에 반대하여’ 맹렬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또한 대중 정당이라는 사회민주주의적 개념을 버렸다. 레닌에게, 투쟁의 새로운 조건들은, 경제적 투쟁을 정치적 투쟁으로 변환시킬 소수 전위 정당이 필요함을 의미했다.

로자 룩셈부르크 또한 그녀의 저작 『사회개량이냐 혁명이냐』(Sozialreform oder Revolution)(1898)에서, 2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적이고 반혁명적 일탈에 대해 반대했다.

그녀는 특히 “사회민주주의에게는, 현존하는 체제 내에서의 투쟁만이, 즉 개량을 위해, 노동자들 상태의 개선을 위해, 민주주의적 수단을 위해 일상적으로 투쟁하는 것만이,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개입하고 그 최종 목표, 정치권력의 정복과 임금 체제의 철폐로 향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로자 룩셈부르크, 『대대적 파업, , 그리고 노동조합』, 우리의 강조.)라고 상기시켰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또한 경제적 투쟁과 정치적 투쟁의 통일을 주장했고, 방어적인 투쟁들은 오직 권력 쟁취를 위한 최종적 정치 투쟁을 준비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주장했다.

전 세계적으로, 사회민주주의의 좌파는 새로운 시대에 의해 의제(agenda)로 부과된 공산주의 혁명의 필요성을 단언했다. 이러한 좌익 반대파는, 1차 세계대전 초기에 제2인터내셔널과 노동조합들을 결정적으로 압도해버린 애국주의와 민족주의에 반대하여 그 보루로써 1915년 찜머발트에서, 그리고 그 이후 1916년 케인탈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러한 보루는 여전히 약하며 미성숙했다. 시기는 극적으로 변화했다. 사회민주주의의가 죽음을 고함으로써 혁명가들은 자신들이 이전에 가졌던 ‘개량주의적’이고 조합주의적인 생각들을 거부해야만 했다. 투쟁의 새로운 필요에 적응하기 위해서, 공산주의 강령을 발전시키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이 모든 것들에는 희생이 필수적이었다. 과거 사상들에 대한 쓰디쓴 투쟁에도 불구하고, 혁명가들은 여전히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사회민주주의의 무게를 느꼈다. 레닌, 룩셈부르크, 판네쿡 등과 같은 혁명가들의 정치적이고 전투적인 저작들이 제2 인터내셔널의 이론적 짐을 다 청산하지는 못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혁명가의 대부분이 처음 무기를 들었던 것은 자본주의가 여전히 진보적이고, 카우츠키의 테제들이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질 때였다. ‘낡은 껍질을 벗어던지기’는 전혀 쉽지 않고, 구시대의 생각들의 찌꺼기는 여전히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었다.

그런 생각의 보기를 들자면, 몇몇 혁명가들이 여전히 주장하는 것인데,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을 앞당기는 데에 민주적 기구들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20세기 초, 대부분의 공산주의자들은 1871년의 빠리꼬뮌을 노동자계급에 의한 민주 공화국의 통제의 모델로서 보았고, 민주주의적인 기관을 노동자 권력의 도구로서 사용하는 모델로 보았다.

 

국제 사회주의는 공화국을 사회주의 해방의 유일한 가능한 형태로 본다 - 이런 조건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의 손에서 이것을 빼앗아 ‘ 한 계급에 의한 다른 한 계급의 억압을 위한 도구’로부터 인류의 해방을 위한 사회주의의 무기로 변화시킨다.” (레온 트로츠키. 그 후 35: 1871-1906)

 

사실, 네덜란드 좌파만이 『자본의 축적(Accumulation of Capital)에서 룩셈부르크의 분석에 기초하여, 자본주의의 쇠퇴시기에는 부르주아 혁명들은 파산했고 민족 해방 투쟁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옹호했다.

레닌은 “부르주아지에 반대하는 계급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는 모든 민주주의적 기구들과 열망들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레닌,『전집 23,1915-1916)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Two Tactics of Social Democracy, 1905)에서 그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제(autocracy)의 힘을 제거하기 위해 농민 대중들과 결연함으로써 민주주의 혁명을 성공적인 결말로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을 옹호했다. 볼셰비키들에게 어떤 민주주의적 국가의 창설도 진보적이었다. 반면 판네쿡과 네덜란드 좌파에게는 인류를 제국주의적 학살 속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체제가 그 역사적 파탄을 드러낸 시대에는, 오직 국제적 프롤레타리아 혁명만이 실행 가능한 전망이었다.

더 심한 혼란 하나, 사회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유산 하나가 여전히 혁명적 운동에 부담을 주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화에 대한 도식적인 사고, 즉 당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관계에 대한 왜곡된 관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혼란은 특히 1902년 레닌의 저작, 『무엇을 할 것인가』 속의 테제에서 특히 분명하게 나타난다. 레닌은 계급투쟁의 퇴조기에 만들어진 이 저작을 러시아에서 그 시기에 유행했던 사상 학파인 경제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이용했다.

이 조류는 베른슈타인 이론의 작은 소산으로서, 계급투쟁이 엄격하게 경제적 영역에 남아있을 필요를 극찬했다. 이러한 발상은 맑스주의를 역사적 숙명론(fatalism)의 이데올로기로 변형시켜버리고, 노동자들의 수동적인 자생성(spontaneity)을 숭배하며 당의 비활동성을 불가피하게 만들어 버렸다. 레닌은 이와 대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경제적 투쟁을 넘어서 정치적 투쟁으로 나아갈 필요성을 매우 강력히 역설했고, 혁명적 이론과 활동의 힘을 옹호했다. 경제투쟁의 궁극적인 목표를 추진한다는 옳은 관심에서 시작하여, 레닌은 그 반대쪽으로 ‘막대를 너무 구부려버렸다’. 비록 그가 투쟁의 경제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 사이에 경제주의자들이 도입한 잘못된 분리에 대항해서 이러한 투쟁들의 정치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대답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을지라도, 레닌은 경제적 투쟁을 과소평가하고 말았다. 방어적인 투쟁은 더 이상 계급의식 발전의 비옥한 토양으로 보이지 않았고, 운동의 정치적 차원은 ‘생산관계들의 영역의 외부에서’ 발전했다. 경제와 정치는 물론 만나긴 하지만, 무한에서야 비로소 만나는 두개의 평행선들과 같다. 더욱이 당은 이 융합을 조직하고 노동자들에게 의식을 가져다줄 수 있는 유일한 실체가 된다.

레닌의 논의가 실상 사회민주주의의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책 속에 카우츠키의 저작들로부터 문구들을 그대로 취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요점1901『새로운 시대』(Neue Zeit) 실린 카우츠키의 글에서 인용된, 이제 유명해진 문구들에 포함되어 있다.

 

물론 사회주의는, 일종의 교의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이 그러하듯이, 근대 경제 관계에 그 뿌리를 갖고 있고, 그리고 그 계급투쟁과 마찬가지로, 대중의 가난과 비참함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부터 출현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계급투쟁은 나란히 생겨나는 것이지,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아니며, 각각 다른 조건들 아래 나타난다. 근대 사회주의 의식은 오직 심오한 과학적 지식(scientific knowledge)을 기초로 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사실 근대 경제학(economic science), 말하자면 근대 기술만큼이나 사회주의 생산에 있어서 한 조건이며, 프롤레타리아는 아무리 바란다고 해도 그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창조할 수 없다. 둘 다 근대 사회 과정에서 일어난다. 학문(science)의 견인차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부르주아 인텔리겐챠 (bourgeois intelligentsia)이다. 근대 사회주의가 발생한 것은 이 계층의 개별 성원들의 정신 속에서 였고, 또한 이것을 지적으로 가장 발전한 프롤레타리아들에게 전달해서 그들로 하여금 조건이 허락하는 곳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 속으로 도입할 수 있게 만든 것도 이 계층의 개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의식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외부로부터 도입되는 것이지, 그 속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계급의식이 경제투쟁에서부터 기계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레닌의 오류는 계급의식이 경제 투쟁을 바탕으로 발전할 수 없고 당에 의해 외부로부터 도입되어야 한다고 믿은 것에 있었다. 당과 노동자들의 투쟁 사이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관점은 결국 다음과 같은 말이 레닌의 펜으로부터 나오게 되는 신비주의의 한 형태를 초래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의 역할이, 자생적인 운동 너머로 비상할 뿐만 아니라 그 운동을 일으켜 세워 자신의 강령으로 만드는 ‘정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가?”(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기술적 학문적 지식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쟁취에 관한 사회민주주의의 관점과 매우 멋지게 융합된 지적 전문가들 특유의 재산이라는 점에 대해 이보다 더 나은 변명이 있는가? 당이 부르주아 국가를 장악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위해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권력 장악에는 권력의 고삐를 쥘 관리자적 능력을 가진 유능하고 지적인 기술자들이 존재할 필요가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녀의 저작 『사회개량이냐 혁명이냐』에서 이미 계급의식과 투쟁 사이의 분리,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경제적 측면들과 정치적 측면들 사이의 분리가 초래한 다른 궤도 이탈을 다루었다. 카우츠키와 레닌은 사회주의 의식을 생산관계의 외부에 위치시키면서 공산주의 혁명과 그 발전을 추상적이고 종교적인 이상으로 축소시켰다. 그러한 견지에서, 사회주의 강령과 혁명의 필요는 더 이상 경제 현실의 결과물이 아니며, 계급투쟁의 객관적인 조건들의 산물이 아니다. 더 이상 자본주의의 명백한 내적 모순들이나 그 붕괴의 긴박함을 반영하지 못하고, 자체의 속성인 완벽성에만 설득력의 근거를 두는 그러한 일종의 ‘이상(ideal)’으로 축소시켜 버린다 . 룩셈부르크는 그녀의 비판을 계속한다 :

 

우리는 여기서, 간단히 말해서, ‘순수 이성’으로써 사회주의의 강령을 설명하는 것을 본다. 우리는 여기서, 좀 더 간단한 언어를 사용하자면, 사회주의에 대한 관념주의적 설명을 본다. 사회주의의 객관적 필요성을 설명하는 것은, 사회의 물질적 발전의 결과로서 사회주의를 설명하는 것은 실패로 돌아간다.”(룩셈부르크, 『사회개량이냐 혁명이냐』, 1898)

 

1904년 그녀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좀 더 직접적인 답변으로 혁명가들의 개입이 처한 세계적 틀을 개관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완전한 해방을 위한 국제적인 운동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특수한 과정이다: 문명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은 그들의 의지를 모든 지배 계급들에 반대하여 그리고 의식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의지는 오직 현존하는 체제의 틀을 넘어서야만 만족될 수 있다. 대중들은 이 의지를 현존하는 사회적 질서에 저항하는 일상적인 투쟁의 과정 속에서, 즉 자본주의 사회의 한계 내에서 획득하고 강화할 수 있을 뿐이다. 한 편으로, 우리에게는 대중들이 있고, 다른 한 편으로, 그 역사적 목표는 기존 사회 바깥에 위치한다. 한 편으로 우리는 일상적인 투쟁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사회 혁명을 한다. 이런 것들은 사회주의 운동이 자신의 길을 만들며 나갈 때 통과해 나가게 되는 변증법적 모순의 측면들이다. 따라서 이 운동은 자신을 지속적으로 위협하는 두 가지 위험들 사이의 중간 위치에서 지그재그로 항해함으로써 가장 잘 나아갈 수 있다. 그 위험의 하나는 그 대중적 성격을 상실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목적을 포기하는 것이다. 하나는 종파의 상태로 되돌아 침몰할 위험이며, 다른 하나는 부르주아적인 사회 개량 운동이 되어버릴 위험이다.”

(룩셈부르크, ‘사회민주주의의 조직적 문제(Organisational Question of Social Democracy)’, 1904년 『새시대』(Die Neue Zeit)에서, 우리의 강조)

 

트로츠키 역시 레닌에 반대하는 논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상 투쟁과 계급의식의 관계에 대한 그 정확하고 변증법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그는 ‘정치적 대리주의를 타도하자(Down with Political Substitutionism)’이란 제목의 구절에서 1904년 다음과 같이 썼다.

 

정치적 대리주의의 체계는, ‘경제주의자들’이 추진하는 단순한 체계와 마찬가지로, 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 프롤레타리아트의 객관적인 이해관계들과 그 의식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기인한다. 이에 대해 맑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관계들은 존재의 객관적인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이해관계들은 매우 강력하고 불가피해서, 결국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들의 객관적 이해관계들의 실현을 자신들의 주관적인 이해관계로 만들 수밖에 없다. 이러한 두 요소 - 그 계급 이해관계의 객관적인 사실들과 주관적인 의식 – 사이에, 모든 삶의 부분을 이루는 영역 - 갈등과 대립, 오류와 실망, 변화와 패배의 영역 - 이 놓여있다.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전술적 통찰력은 전적으로 이러한 요소들 사이에 놓여 있고,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의 길을 단축시키고 촉진하는 데 있다.”(트로츠키, 『우리의 정치적 책무(Our Political Tasks), 1904, 우리의 강조)

 

혁명에 대한 이러한 생생하고 변증법적인 관점 – 여기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운명을 그 자신의 손에 거머쥔다 - 은 혁명적 과정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순수하게 기술적이고 조직적인 준비로 제한했던 경직된 생각에 대한 트로츠키의 응답이다.

그러나 레닌의 대리주의적인 『무엇을 할 것인가』의 관점과, 로자와 트로츠키의 전적으로 명확하고 건강한 관점을 단순히 대조한다면 이는 일종의 희화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1920년대에 와서 트로츠키는 노동의 군사화와 당의 강력한 독재를 옹호했다는 점이다.

 

첫째로, 레닌은 그 스스로 『무엇을 할 것인가』의 요지를 어느 정도는 ‘정정했다’. 1905년 계급의 구체적인 경험과 평의회의 등장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전투적인 활동에 의해 풍부해진 그의 후기 저작에서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테제들을 기계적으로 따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서, 볼셰비키 당은 계급의 방어적인 투쟁에 개입함으로써 그 스스로가 외부 요인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능동적이고 필수적인 분파임을 주장했다. 혁명 운동의 전체 경향은 당과 계급의 관계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전적으로 명확한 것은 아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독일 혁명가들도 러시아 혁명가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을 사회민주주의에 묶고 있는 탯줄을 완벽하게 절단하지는 못했다. 룩셈부르크가 카우츠키의 교의로부터 결별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1910년 룩셈부르크는 카우츠키를 기회주의의 수문을 열었다고 비판한 이후, 어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로부터도 지원을 받지 못했고, 그녀의 규탄을 ‘과장되었다고’ 생각한 레닌으로부터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당의 가장 기회주의인 멘셰비키로부터 조직적인 분리를 가장 명확하게, 가장 빨리 촉구한 것은 로자가 아니라 레닌이었다. 룩셈부르크와 카우츠키는 오히려 이러한 ‘분리’ 정책을 비난하고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재통합을 호소한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1919년 독일 공산당(KPD)을 창건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룩셈부르크는 여전히 주저했다. 그녀는 사회민주주의당(SPD)을 떠날 것인지 망설였고, 처음으로 소수가 될 위험이 있는 분리 조직을 건설하는 데 주저했으며, 새로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건설하는 레닌의 집요한 욕망 앞에서 뒤로 물러섰다. 룩셈부르크가 독일의 SPD에 집착했던 것은 사회민주주의의 객관적인 부패를 인식할 수 있는 정치적 지각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1916년 출간된 『사회민주주의의 위기(Die Krise der Sozialdemokratie)에서, 2 인터내셔널이 취한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태도와, 사회민주주의가 민족 부르주아지들을 지원한 점을 맹렬히 비판했다. 아니, 룩셈부르크를 구속하고 망설이게 했던 것은 대중의 혁명적 행동에 대한 그녀의 전반적인 생각과 그것이 당의 역할에 대해 갖는 귀결들이었다.

사회민주주의라는 학교를 통과해 온 이 혁명가는, 혁명 운동의 대중적 성격에 무조건적 애착을 발전시켜서, 그녀에게 당은 대중적 성격을 가진 어떤 것에도 적응시켜야 했다. 사회민주주의의 대중 정당에 대한 관점에 애착을 가졌기 때문에, 룩셈부르크는 운동에 앞서가는 것을 꺼려했다. 그녀는 노동자 ‘대중’들이 여전히 신뢰하고 있는 조직을 떠나기를 망설였다. 1914SPD와 제2 인터내셔널의 명백하고 결정적인 사망 이후에도, 룩셈부르크는 기회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대중 운동이라는 것을, 그리고 혁명가들은 이 운동을 가속화할 수 없다는 것을 계속 되풀이했다.

그녀에게는, "진정으로 혁명적인 노동자 운동에 의해 저질러진 오류는 가장 훌륭한 중앙 위원회의 무오류성보다 역사적으로 훨씬 훌륭하고 소중한 성과였다" (『사회민주주의의 조직의 문제』). 그래서 혁명가들은 옛 사회민주주의적 조직들을 넘어서는데 주도권을 발휘할 수 없었다.

노동자 운동의 집단적 성격을 강조할 때 룩셈부르크의 일반적 관심은 정확했다. 그러나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자들 자신들의 문제다”라는 주장은 정확하지 못한 실천적 결론들을 초래했다. 그리고 단순한 관심이 쉽게 이상주의로, 물신주의로 떨어질 수 있다. 대중적 성격을 띠는 모든 것에 대한 물신주의는 혁명가들을 제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로 떨어질 수 있는 위험한 경사로로 이끈다. 이러 저러한 조직이나 정치적 도구의 대중적 성격에 대한 애착은 (‘노동자 대중은 계속해서 투표하기 때문에’) 단순히 의회 정치를 지원하도록 오도될 수 있다. 룩셈부르크 사후 KPD의 뛰어난 대표자였던 폴 레비(Paul Levi)는 그 길을 뒤따랐다. 전적으로 대중들의 운동에 종속된 그의 ‘대중 당’이라는 개념으로 인해 그는 점차 사회민주주의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KPDSPD 좌파의 융합을 추진했고, 1922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서 축출된 후에는 USPD에 가입했으며, 결국 SPD에 다시 가입했다.

룩셈부르크는 혁명 활동의 집단적인 성격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동질화는 한꺼번에 이뤄지지 않는다. 당은 노동자계급의 광대한 다수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있을 때, 효과적으로 소수로 남아있을 수 있는 조직이다. 그 때의 당의 책무는, 대중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스스로 적응해가는 게 아니라 정치적 수준에서, 또한 조직적 수준에서 공산주의 강령 전체를 방어해 내는 것이다. 오직 이런 방법으로, 당은 계급의식의 동질화 과정에서 효과적으로 그 역할을 해낼 수 있다.

독일 혁명가들은, 그 시기의 대부분의 혁명가들처럼,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에 대해 전적으로 명확하지만은 않았다. 대체로,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 평의회를 권력 장악을 위한 기관으로 보았다. 1920년까지 모든 경우에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은 혁명에서, 권력의 실천에서 평의회의 탁월한 역할을 강조했다. 그러나 어떤 공산주의자도, 어떤 혁명적 조직도 지역 소비에트(이행기 국가의 토대)와 노동자 평의회 사이의 관계에 대해 명확하게 바라보지 못했다. 국가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사이의 혼란 또한 존재했다.

더욱이, 룩셈부르크가 1918KPD(스파르타쿠스 연맹, Spartacist League)의 창립대회에서 한 연설은 여전히 굉장히 애매모호한 여지를 남겨두고 있었다. 그 텍스트는 특히 부르주아 국가를 프롤레타리아트가 파괴하는 문제에 대한 정치적인 명료성이 부족하다.

 

그래서 우리에게 권력의 정복이 한 번의 타격으로 결과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점진적인 행동일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장악한 것은 끝까지 방어하면서 점진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의 모든 지위들을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평의회가 국가의 모든 권력을 가져야 한다(…) 한 단계 한 단계씩, 손에 손을 잡고, 모든 지역에서, 모든 마을에서, 모든 도시에서, 모든 공동체에서, 국가의 모든 권력은 조금씩 조금씩 부르주아지에서 노동자 병사 평의회로 옮겨가야만 한다.”

 

이 텍스트가 제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1.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 국가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그 국가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 (이 입장은 혁명적 의회주의의 흔적이 나타날 수 있도록 만들었다)

2.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 국가를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해야 한다는 것

3. 노동자들의 독재는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통해 표현된다는 것

부르주아 혁명의 도식과 유사한, 혁명에 대한 이러한 발상으로 인해, 프롤레타리아 당이 권력을 장악할 필요가 있다고 혁명가들이 생각한 것은 납득할 만하다. 스파르타쿠스 단원들이 옹호한 입장이 레닌의 입장과 많이 다르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권력 쟁취에 있어서 당의 ‘대중적’ 성격을 굉장히 강조했다.

 

스파르타쿠스 연맹은 단지 샤이데만-에버트의 인자들이 전적으로 그들 스스로를 불신했기 때문에 정부 권력을 차지하는 것을 거부한다(…) 스파르타쿠스 연맹은 오직 독일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절대 다수가 그 의지를 의심할 바 없이 명확히 선언함으로써만 정부 권력을 차지할 것이다.” (1918년 설립 당시 KPD(스파르타쿠스단 단원들)이 채택한 강령 제안, 붉은 깃발 (Die Rote Fahne)에서 출판, 191812)

 

대리주의의 기원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 사회민주주의적 사고의 무게라고. 그러나 ‘무엇이 대리주의 개념의 발전을 유발시켰나’는 질문에 대해서는, 우리는 대답해야만 한다: 국제 노동계급의 일반적인 정치적 미성숙함이라고.

 

자본주의의 상승기의 끝을 알린 제1차 제국주의 전쟁이 19세기 노동자 운동과 그 당면 목표들에 있어서 돌이킬 수 없는 절대적인 점을 찍었다. 전쟁에 대한 인민의 혐오는 빠르게 정치화되어 유럽의 주요 국가에서 국가들에 대한 전면적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의 다수는 과거의 유물(이제는 계급 적의 산실이 되어버린 제2인터내셔널의 정책들에 집착하는 것)을 완전히 폐기시킬 수 없었고, 새로운 시대의 함의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었다. 전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도, 그들의 정치 조직도 ‘전쟁과 혁명’,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새로운 시대에 프롤레타리아 투쟁에게 요구되는 것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이 시기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영웅적 투쟁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물결은 유럽에서 노동자계급의 학살 속에 익사했다. 러시아 혁명 시기에 노동자 계급 전체의 지침이었다는 사실이 그 고립이 심각한 위험이었다는 사실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혁명적 봉기들 사이의 일시적 간극조차도 그러한 위험을 내포할 수 있었지만, 1920년경 그 격차는 점점 더 벌어져서 다시 이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J.A. ‘러시아 혁명의 변질 (The Degeneration of the Russian Revolution)’, 『인터내셔널 리뷰(International Review), 3, 1975)

 

그러나 계급, , 그리고 국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혼란은, 계급이 충분히 강하고 혁명적 운동이 격동기에 있는 한, 구체적인 투쟁의 경험으로 극복될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 노동자들의 실천은, 노동자 당은 비록 자체가 그 계급에 속한 소수라 할지라도 노동자계급 전체의 활동을 대체하는 것은 물질적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191710, 러시아에서 누가 권력을 차지했는가 하는 질문은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의 역사와 실천으로 대답할 수 있다. 봉기의 전날 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소비에트들의 회의 (a Congress of Soviets)의 소집을 요구해서 그 회의에서 무장 봉기의 준비를 촉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고, 지역에서 충분한 지원을 받고 있다고 느꼈다. 소비에트는 그 회의의 역할이 “혁명 권력을 조직하는 문제에 대해 해답을 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소비에트와 공장 위원회에서 볼셰비키 당이 불굴의 선전을 펼친 이후, 노동자들 다수는 결국 그들 스스로 권력 쟁취를 선언했다. 군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페트로그라드에서 봉기를 준비한 것은 바로 <혁명 위원회>였다. 이 위원회는 소비에트, 해군, 공장 위원회, 철도와 적위대(Red Guard, 무장된 노동자들)에서 파견된 대표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비록 볼셰비키가 그 속에서 지배적이었다 할지라도 당의 기관은 아니었다. <혁명 위원회>는 전체 노동자계급과 지속적인 접촉을 유지하는 상태였고, 끊임없이 계급의 통제 하에서 행동했다. 그것은 소비에트와 공장 위원회에 직접적으로 연결된 기관이었다. 병영, 공장들, 위원회와 당 사이의 접촉은 한 순간도 끊기지 않았다. 생생하고 지속적인 연결이 계급의 집단의지를 굳히면서 모든 기관들 사이에 존재했다. 비록 일상적인 군사행동들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이뤄졌을 지라도 노동자들 전체가 결정했고, 그들의 손에 역사의 고삐를 쥐고 있었다. 이랬기 때문에, 트로츠키가 작은 그룹의 ‘음모론자들’, <혁명 위원회>로써 권력을 차지하려했다고 기소되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포크로브스키(Pokrovsky)교수는 소비에트냐 당이냐는 양자택일의 바로 그 중요성을 부인한다. 군인들은 형식주의자가 아니라며, 그는 웃는다. 그들은 케렌스키(Kerensky)를 전복시키기 위해 「소비에트 회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그 모든 농담과 더불어 그런 식의 표현은, 왜 당으로 충분하다면 소비에트 따위를 만드는가?라는 설명되지 않은 문제를 남긴다. 그 교수는 계속해서, ‘합법적으로, 즉 소비에트의 합법성으로써 모든 것을 행하려는 이러한 열망으로부터는 아무것도 결과되지 않았고, 권력이 결국 마지막 순간에 소비에트에 의해서가 아니라 명백히 비합법적인 특별 조직에 의해 쟁취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라고 말한다. 포크로브스키는 여기서 트로츠키가 소비에트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군사 혁명 위원회’의 이름으로, 케렌스키의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인용한다.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결론이다. 군사 혁명 위원회는 소비에트의 선출된 기관이었다. 전복에서 위원회의 지도적 역할을, 이 교수는 조롱하지만, 대중들은 극히 열광하는 그 소비에트 합법성을 결코 위반하지 않았다.”(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3, 우리의 강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0월 혁명이 엄격한 부르주아 합법성 아래에서, 형식적 민주주의의 보호 아래서, 어떤 비밀 결사적 행동도 없이 일어났음을 암시하는가? 물론 아니다! 트로츠키가 말한 ‘소비에트 합법성(Soviet Legality)’은 단지 노동자들의 집단 의지의 필요성, 즉 혁명 과정 전체를 노동자들이 통제할 필요성 바로 그것이었다. 러시아에서 권력 쟁취는 어떻게 노동자들 전체가 혁명을 결정하고 통제할 수 있는지를 놀라운 방법을 보여주었다. 러시아 혁명사』에서 트로츠키는 이 통제가 어떻게 구체화되었는지, 노동자들이 소비에트를 통해 봉기를 어떻게 준비했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어떤 당도 실천적이고 결정적인 노동자들의 행동을 대체할 수 없다. 볼셰비키는 그들의 계급 안에서 단호하게 행동했지만, 그들은 노동자들을 대신해서 권력을 차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 노동자계급, 그리고 국가 사이의 관계의 본질과 당의 역할에 대한 이론적 혼란이 존재했다. 그리고 당은 단순히 의식의 수동적인 반영이 아니기 때문에, 1902년부터 맹아적으로 존재하던 이러한 오해들은 혁명의 퇴행을 확장시키고 가속화시켰다. 1918년부터 계속,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권력은, 그 정상에 볼셰비키 당이 앉아있는 국가기구들에 의해 제한되고 억압되어 왔다. 권력 장악후, 볼셰비키 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단위 기관들과 갈등하게 되고, 그 스스로를 통치의 당의 면모를 드러냈다. 이렇게 당의 권력이 평의회 권력을 대체하는 것은, 20년대 초의 트로츠키의 저작 『테러리즘과 공산주의(the Terrorism and Communism)- 크론슈타트 학살과 같은 행동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내용을 이미 포함하고 있던 비극적 저작 – 에서 (노동의 군사화와 함께) 이론적으로 정당화되었다.

 

우리는 소비에트 독재를 당 독재로 대체했다고 여러 번 비난받았다. 그러나 소비에트 독재는 오직 당 독재를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었다고 완전히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당의 이론적 비젼의 명확함과 그 강력한 혁명조직 바로 그 덕분에, 당은 소비에트가 볼품없는 노동자들의 의회(parliaments of labour)로부터 노동자들이 우위를 갖는 기관으로 변화될 가능성을 제공했다. 노동자계급의 권력을 당의 권력이 이렇게 ‘대체’하는 것에, 우연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사실상, 대체란 전혀 없다.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의 근본적인 이해관계를 표현한다. 역사가 그러한 이해관계들을 전적으로 당대의 질서가 되도록 만든 시기에,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자계급 전체의 대표성을 자각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트로츠키, 『테러리즘 또는 공산주의』)

 

일단 당과 국가가 노동자계급 전체의 공언된 ‘대표자’가 되고나자, 그들은 절대 틀릴 수가 없었으며, 비록 전체 노동자계급에 대항하게 될 지라도, 학살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항상 옳았다. 그 순간부터, 사회주의 자체는 당과 국가의 일이 되어버린다. 그 순간부터 러시아 국가는 평의회를 파괴하기 시작했고, 이는 혁명의 힘을 파괴하고 반혁명으로 빠져드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심각한 혼란들과 나란히,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공동전선(United Front)의 개념, 대중 정당을 통해 최소 강령을 보호한다는 생각, 노동조합 작업의 필요성, 혁명적 의회주의 입장 등을 발전시켜갔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혁명적 물결의 퇴조에 저항하며 공산주의 원칙들을 그대로 지키려 노력하기 보다는, 오히려 더욱 더 이러한 후퇴에 전념하고 이러한 실천들에 적응해나고 있었다. ‘전술’과 원칙들 사이의 차이는 제2인터내셔널의 안에서 그랬던 만큼이나 발전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이해를 항상 염두에 두기보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더더욱 러시아 국가의 대변자가 되었고, 일국 사회주의 이론(the theory of Socialism in One Country)을 선택했을 때, 그 조종을 울렸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의해 옹호된 이러한 테제들은 단지 러시아의 국가자본주의의 강화를 옹호하기 위해서 제출되었을 뿐이었다. 바로 그 지점부터 볼셰비키 당은 반혁명의 가장 유순한 도구가 되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유산과 그 퇴행에 대한 반응

인간의 몸은 병균에 의해 공격받으면 항상 반응을 일으킨다. 인간의 몸은 나쁜 것을 점검하여 파괴하도록 항체를 만들어낸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조직도 같은 방법으로 반응한다. 비록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바이러스에 심각하게 공격받을 지라도, 혁명적 조직은 죽음으로부터 구제될 수 있다. 삶의 불꽃이 그대로 남아있는 한, 그 안에서 일련의 방어기제로써 건강한 반응을 재촉한다. 그러나 그 병든 조직이 프롤레타리아 진영을 떠나는 순간 그 조직의 그 죽음은 역행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는 단호하게 그 시체를 포기하고 투쟁의 새로운 무기를 재구축할 수밖에 없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점진적인 퇴행은 가장 건강한 혁명적 인자들 사이에 분출을 촉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출은 얼마나 어려웠던가! 오늘날 모든 것을 새롭게 날조하려 하고, 자신들의 우수한 지적인 위치에서 역사를 심판하는 이들은, 실상은 순전히 유아적인 태도로 그 시기에 ‘일어났어야만 했을’ 일들을 상상하며, 그들의 추상적인 도식을 벗어나는 모든 것들을 비난한다. 우리는 역사를 심판하지 않는다. 단지 미래를 위한 교훈들을 끌어낼 뿐이다. 우리가, 혁명적 물결의 퇴조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위기를 마치 그것들이 볼셰비키들의 마키아벨리적 계획의 산물인 것처럼, 마치 볼셰비키들이 1902년부터 그들의 쿠데타를 준비한 것처럼 분석한다면, 그것은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안에서 나타난 좌익 분파에게 모든 진실의 미덕을 부여하며 이것을 이상화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우스운 일일 것이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재난을 가져온 반혁명 과정은 노동자 운동에 끔찍한 혼란의 씨앗을 뿌렸다. 심지어 1930년대의 암흑기동안 이론적인 정련화를 추구했던 사람들, 좌파공산주의의 인자들도 패배의 모든 함의들을 알아보기 위해서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어떤 좌익 분파도 그 문제들에 대한 모든 열쇠들이나 ‘모든 진실’을 쥐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끔찍한 패배의 남겨진 모든 흔적들과 그들의 정치적 입장들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변형되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혁명가들이 겪었던 호된 시련들은 참으로 끔찍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계급은 1927년 이후 국제적인 수준에서 파괴되었고, 세계 혁명의 요새는 점차 더욱 더 고립되어 반혁명의 요새로 변형되어갔다. 그들의 국제 조직은 ‘일국 사회주의’ 이론을 도입한 순간에 결정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점점 더 고립되어가던, 영국,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 동지들은 추방의 고통 아래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의해 가장 비열한 종류인 중도주의자들과 기회주의자들과 합치도록 강요받았다. 이러한 파괴적인 타격 아래서,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굴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투쟁을 계속할 충분한 전투적 용기와 혁명적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퇴행에 대해 반응한 사람들은 소수였고, 그들은 조직적이고 일관적인 국제적 반대파를 결코 만들어낼 수 없었다. 세계의 일부(멕시코에서 아시아까지, 물론 러시아를 포함하여)에서 그들의 출현은, 정치적이거나 조직적인 수준에서 진정으로 조정되지는 않았다. 비록, 특히 KAPD, 보르디가 분파, 팽크허스트(Pankhurst) 주위의 영국 동지들과 벨기에 좌파 등등 사이에서 눈에 띄게 많은 접촉과 교류가 있었지만, 『일 소비에트』(Il Soviet,이탈리아 좌파의 기관지)가 좌파 흐름들의 많은 문서들을 출간했고 제2차 세계대전까지 국제적인 접촉들이 존재했었지만, 반혁명 충격의 무게와 힘은 좌익 분파를 심각한 고립으로 몰아넣었다.

우리는 인터내셔널 안에서 나타난 모든 좌익 분파나 반대파 조직들을 살펴볼 시간은 없다. 그래서 가장 의미 있는 좌익 흐름들이 볼셰비키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당에 대한 특정 입장에 어떻게 반응 했는지를 분석하는 것으로 만족해야할 것이다.

 

이탈리아 좌파

 

이탈리아 좌파를 형성하게 만든 모든 정치적 역사적 세부사항을 모두 살펴보지 않고, 간단히 이탈리아 좌파가 이탈리아 공산당에서 축출된 1926년으로 되돌아가면, 그들은 보르디가를 중심으로 하여, 주로 다음과 같은 것에 반대하여 싸웠다:

1.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혁명적 의회주의(revolutionary parliamentarism)’ 발상

2. 공동 전선(united front) 개념, 그리고 중도주의자와 명백히 부르주아 요소들과 함께 공산주의 당을 형성하는 문제와 관련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지시

3. 러시아 국가가 부르주아 국가로 발전한 것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차츰 국제주의적 입장을 포기한 것

4. 공산주의당들이 ‘반파시즘’과 ‘민주주의의 수호’를 기치로 내걸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함으로써 점점 부르주아 민족주의당으로 되어가는 것

 

그러나 당의 역할 그리고 노동자계급과 당의 관계 문제에 관해서, 이탈리아 좌파는 러시아 혁명의 퇴행의 모든 교훈들을 끌어낼 능력은 없음을 증명했다. 사실 이탈리아 좌파는, 혁명에서 당의 역할과 관련하여 전적으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테제와 입장(1920년 채택한)으로 되돌아갔다. 이것은 1921년과 1922년 출판된 이탈리아 좌파 공산주의자의 텍스트들에 잘 나타나 있다. 이 텍스트들에서 보르디가는 오래된 분리, 즉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발전된, 경제와 정치 투쟁 사이의 진부한 분리를 또 다시 채택했다. 현실의 정적인 사진들이 사회적 계급들을 부동의 경제적 실체들로 간주하는 것을 비난하는 세밀한 추론으로부터 시작하여, 보르디가는 노동자계급은 오직 혁명적 소수를 통해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계급으로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다는 부정확한 결론에 이른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를 경제적으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정치적 운동을 통해서, 즉 당을 통해서만 정의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르디가는, 계급이 단순히 경제적 범주만이 아니며 혁명적 당은 그 정치적 의식의 동질화와 분리될 수 없다는 정확한 전제에서 출발하여, 불합리한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그는 매우 단순하게, 의도하지 않게, 결국 그러한 계급의식과 당의 존재에 진정한 기초가 되는 경제적 물질적 결정들을 지워버리는 것으로 끝난다. 카우츠키가 개량과 혁명 사이의 분리를 만들었던 것과 꼭 같은 방법으로, 보르디가는 공산주의 혁명의 필요를 물질적 상황 속에서가 아니라, 이상의 완벽함 속에 둠으로써 결론을 내려버린 것이다.

당 활동을 떠나서는 계급의식과 계급행동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는 생각을 발전시킴으로써,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당의 존재가 노동자계급의 존재에 선행하게 만듦으로써, 이탈리아 좌파는 물구나무를 서서 손으로 걷는다. 만약 계급의 의식과 그 행동 의지가 계급 정당 안에서만 응축되고 구체화될 수 있다면, 또 만약 혁명적 조직들을 배출함으로써 스스로를 표현하고 의식을 향한 이러한 운동을 만들어내는 것이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아니라면, 만약 이것이 지금 있는 그대로라면, 그러면 당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되는가? 어떻게 발생하는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인가? 과거와 현재의 보르디가주의자들을 만족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대답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해, 혁명가들은 ‘노하우(knowhow)’를 알고 이해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노동자들에게 계급의식을 완성된 채로 가져다주는 지식인들인 것이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외부에 있는 인자들이다.

바로 이처럼 지나치게 단순하고 틀린 발상이 <이탈리아 공산주의당(PCI)>의 텍스트 (공산주의 강령, Programma Communista)에 나타나는데, 이는 오늘날 이탈리아 좌파를 가장 잘못 희화해서 제시한다. PCI에 따르면, 한 편으로, 우리에게는, 프롤레타리아 군대의 총사령관격인 당의 직접적인 개입 없이는 당면주의(immediatism)를 넘어설 능력이 없는 대중들이 있고, 다른 한 편에서는 당이 있는데, 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이해관계를 생각하고 진정으로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유일한 실체이자, 변하지 않는 공산주의 강령의 유일한 담지자라는 것이다. 혁명이 무엇보다 의식적인 혁명인 한(PCI는 이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유일한 의식적인 기관, 즉 그 자신들의 당이 이끌고, 지휘하고, 만드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자신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하나의 계급으로 스스로를 형성하도록 보증하는 것은 당이기에, 그 당이 권력을 잡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행하는 것은 논리적이게 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그러므로 공산당의 독재가 될 것이며, 정부의 당이 될 것이다. (참조: ‘이탈리아 공산당의 『기권주의 분파』(Abstentionist Fraction)의 테제’, 1920)

그러나 그렇게 충격적인 논증들을 앞에 놓고 제기돼야만 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 만약 노동자들이 생각 없는 양떼들이라면, 왜 그들은 부르주아지의 명령보다 혁명가들의 명령에 따라야만 하는가? 어떻게 그들은 당이 제시하는 혁명적 지향을 판별할 수 있게 될 것인가? PCI의 답변을 들어보자. “프롤레타리아트가 당을 따른다면, 그것은 수동적인 복종의 영향 때문이 아니다. 당이 결정하고, 계급이 ‘복종’한다고 결론짓는 것은 분명 불합리하다.” 그러나 PCI에 따르면, 그것은 대중들이 당의 신성한 지성의 일부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만약 당이 효과적인 지도 기관이 될 수 있고 되어야만 한다면, 그리고 만약 소비에트들을 강제해서 권력으로 인도할 수 있게 해 줄 결정적인 영향력을 당이 쟁취해 낼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면, 이는 당이 「공산주의 선언」에서 이야기된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대중에 비해서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조건과 일반적인 결과를 알고 있다는 이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계급투쟁의 매 순간에 그리고 미래 발전들에 앞서서, 이 투쟁을 가능한 효과적으로 만들고 그 최종 목표를 향해 갈 수 나아가도록 만들게 될 목표들, 방법들, 그리고 조직화를 당이 가르쳐 줄 수 있고 또 가르쳐 주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투쟁의 필요에 의해 노동자들에게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실천적인 정치적 해답을 줄 수 있고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르 플로레테르(Le Proletaire), 269, ‘당의 지도력 없이는 혁명적 행동도 없다 (No revolutionary action without party leadership)’, 19786)

 

이 답변의 빛나는 명료성에 주목하라! 만약 노동자들이 당의 명령에 따른다면, 그것은 “노동자들이 당의 명령을 따를 수 있고 따라야만 하기” 때문이다. 만약 노동자들이 당의 명령을 따를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당이 가장 명확할 수 있고 명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실, 여기서 어떻게 더 자연스러울 수 있는가? 옛날에 사람들은 성직자들의 좋은 말들은 맹목적으로, 또는 믿음에 대한 ‘그들의 자유의지’로 따랐는데, 그것은 성직자들이 신성한 의지의 화신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미래에 노동자들은 당의 말을 따를 것인데, 왜냐하면 당이 공산주의로 향하는 길을 체화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의 정치적 명료성이라는 바로 그 기적적인 미덕이 노동자들로 하여금 당의 지시에 복종하며 따르게 만드는 것이다.

얼마나 경직되고 빈약하며 임기응변식의 시각인가! 보르디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안경 너머로 고정하면서 볼 수 없는 것은 바로 생생한 계급투쟁이다. 왜냐하면 당의 이론적 명료성이 노동자 투쟁에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그 자신들의 경험에 의해 연마된 그 자신들의 정치적 틀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프롤레타리아트(혁명가들의 개입만큼이나 객관적 조건에 자극받은)의 더 커다란 역량에 단단히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그러한 이론적 명료성은 쇠약해지고 경직되어 결국 죽어버릴 뿐이기 때문이다.

왜 노동자들이 그들의 당이 제안하는 그 방향(direction)을 수용할 것인가를 이해하는 문제는 단순한 강령의 옳음에 근거하지 않는다. 만약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이해하지도, 일상적인 경험 속으로 소화하지도, 그들의 세계적 역사적 이해관계가 표현된다고 보지도 않으면서, 당의 ‘명령(directives)’을 그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따르는데 만족한다면,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손발을 부르주아지의 영역에 묶인 채 내버려 두는 태도를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공산주의 혁명은 이것에 의해 심각하게 손상될 것인데, 왜냐하면 그러한 노동자들 측의 빈약한 정치적 신념이 계급의 적들에게 유리하게 이용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혁명의 유일한 보증은 노동자들이 당의 지도에 비록 그것이 적극적인 복종이라 할지라도, 복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집단적 힘에, 그들이 혁명적 활동의 목적과 수단을 이해하는 전반적인 역량에, 그리고 집단적 계급의식에 있다.

이탈리아 공산주의 좌파에서 유래하는 그룹들이 갖는 당에 대한 이 모든 혼란들은, 정확히 공산주의 혁명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과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가 의식적으로 되는 가를 이해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결여된 데에 기인한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은 하나의 생생하고 복잡하며 집단적인 과정 전체를 기술적 군사적 준비의 문제로 축소한다. 그들이 당에 의한 국가 권력의 쟁취와 동일시하는 공산주의 혁명은 정부의 지배권을 인수할 역량이 있는 ‘전문’ 직업 혁명가들을 필요로 했다. 그들은 볼셰비키의 당, 국가, 계급의 관계에 대한 오래된 혼란을 다시 채택함으로써 부르주아지의 권력 쟁취와 공산주의 봉기를 단순히 동일시한다.

 

국가의 통제권을 정복한 이후, 프롤레타리아트는 복잡한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일정한 준비와 전문화가 단순히 옛 체제내의 전통적인 기능들에 따른 직업을 기초로 하여 노동자들을 조직함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근본적인 실수다 (…) 우리는 정치적, 행정적, 군사적 준비의 종합을 요구하는 훨씬 더 복잡한 본질의 업무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한 준비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명확한 역사적 책무와 정확하게 부응해야 하며, 오직 정치적 당(the political party)에 의해서만 보증될 수 있다. 요컨대, 정치적 당은 한 편으로 혁명적 과정과 그 필요들에 관한 하나의 일반적이고 역사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계급의 최종적 일반 목적에 대한 모든 특정한 기능들을 하는 하나의 엄격한 조직을 가진 유일한 유기체이다. (…) 이 때문에 계급의 지배는 당의 지배일 수밖에 없다.” (보르디가. 『당과 계급 행동(Party and Class Action), 1921)

 

혁명의 완수를 (과거의 혁명들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소수의 정치적 ‘전문가들’에게 위임하는 이러한 왜곡된 관점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는 간단히 두 가지를 인용하겠다. 첫 번째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반대하는 뜨거운 논쟁 중에 쓰인 트로츠키의 저작, 『우리의 정치적 임무(Our Political Tasks)』에서 인용한다.

 

레닌이 사회민주주의자 자코뱅에 대한 공식을 만들어낸 바로 그 순간, 우랄지역의 그의 정치적 동료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의 새로운 공식을 고안하고 있었다. 우랄지역의 맑스주의자가 말하기를, ‘1871년의 빠리꼬뮨이 실패한 것은,- 그것은 그 안의 다양한 경향들, 서로 모순되고 상반되는 경향들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쓸데없이 말참견을 하고 수많은 논쟁을 벌였으나 행동은 거의 없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러시아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강하고 위력적인 조직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독재를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를 준비시키는 것은 다른 것들이 그에 종속되어야 되는 중요한 조직적 책무이다. 이러한 준비는 특히, 강하고 위력적인 조직을 지지하는 정신 상태를 만들고, 그 조직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을 포함한다. 어떤 사람은 독재자들이 나타나 그렇게 제멋대로 행동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나 이와 같지 않았으며, 프롤레타리아 당은 언제나 모든 자생주의와 기회주의를 거부해야 한다. 그것은 매우 높은 수준의 지식과 절대적인 의지로 단결해야 한다.(…)그 하나가 다른 하나를 함축해야 한다.”

 

이 철학은 다음과 같은 세 테제로 요약할 수 있다.

 

1. 독재를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를 준비시키는 것은 조직의 문제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독재자’의 왕관을 쓴 강력한 조직을 ‘받아 들이’도록 준비시키는 것에 있다.

2.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이러한 독재의 출현을 의식적으로 준비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다.

3. 이 강령에서 벗어나는 어떤 것도 기회주의의 표현이다.

어쨌든, 이 문서의 저자들은, 그 자신들에게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하는 독재처럼 보인다고 큰 소리로 말할 용기가 있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자치 행동을 통해 사회의 운명을 스스로의 손에 거머지는 것이 아니라, ‘강하고 위력적인 조직’, 즉 프롤레타리아를 지배하며 이를 통해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조직이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보장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사실, 정치적 지배를 할 수 있도록 노동자계급을 준비시키기 위해서는 , 혁명의 모든 행정 인력들을 지속적으로 통제하면서 노동자계급의 자율적인 활동(self-activity), 활동의 습관을 계발하고 배양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 이것은 국제적 사회민주주의의 중대한 정치적 책무이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 자코뱅’과 정치적 대리주의의 대담무쌍한 대변자들에게는, 국가 권력을 접수할 수 있도록 계급을 준비시키는 중대한 사회적 정치적 임무는 권력 기구의 구성이라는 조직-전술적 임무에 의해 대체된다.

첫 번째 접근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끊임없이 성장하는 계층을 적극적인 정치 활동에 참여시킴으로써, 교육하고 재교육하는 방법을 강조한다. 두 번째는, ‘강하고 위력적인 조직’의 상이한 단계들에 훈련된 간부를 선발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선발은 일을 손쉽게 하기 위해, 적합하지 않는 이들을 기계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완수 될 수 있을 뿐이다.”(트로츠키.『우리의 정치적 임무』, 1904)

그 뒤로 계속해서, 트로츠키는 ‘우랄지역’ 경향의 입장과 블랑키주의자들의 입장을 정확하게 비교했다. 사실, 블랑키주의는 “소수의 착취자"를 누르고 "절대 다수의" 착취당하는 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착취당하는 다수에 반대하는 착취하는 소수”에 의해 이뤄진 이전의 부르주아 혁명들을 구별 짓는 중대한 차이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특징으로 한다. 오늘날 보르디가주의자들이 혁명에서 당의 역할에 대해 갖는 시각은 블랑키주의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당을 “그 자체의 이론으로 완벽하게 단일체적이며 유일한 특출 난 구조물을 건설할 때가 오면” (공산주의 강령(Programme Communists,76) 출현하는, 통찰력 있는 전문가들로 만들어진 강철더미로 보았다. 노동자 의식의 유일한 방어자로 행세하면서, 우리의 보르디가주의자 동지들은 과대 망상적이고 유아적인 정신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혁명에 대한 음모적이며 반란자적 관점을 가졌다. 당에 대한 그들의 우스운 묘사는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우스운 묘사와 나란히 진행된다.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왜곡된 관점을 이미 19세기 맑스주의자들이 적절히 비판했다. 다음은 블랑키주의자들이 사회주의 혁명의 순간에 그들의 역할이라고 한 것에 대한 엥겔스의 언급이다.

 

음모의 학파 안에서 키워지고, 그 안에 있는 엄격한 훈련으로 단결된 그들은, 유리한 순간이 오면, 상대적으로 소수의 단호하게 잘 조직된 사람들이 국가의 지배권을 쥘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거대하고 무자비한 에너지를 보여줌으로써 대중을 휩쓸어 혁명으로 나아가도록 만들어서 지도자들의 작은 무리 주위에 결집시키는데 성공할 때까지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관점으로부터 출발했다. 이것은 특히, 새로운 혁명 정부의 손에 모든 권력을 가장 엄격하고 전제적으로 집중하는 것을 포함했다.” (엥겔스, 『프랑스 내전(The Civil War in France)』 서문)

 

이 두 인용문은 공산주의 혁명에서 혁명가들의 역할에 대한 생각과, 혁명 그 자체의 본질 사이에서 필수적이며 논리적인 연결고리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당의 역할을 과대평가한다는 것은 혁명을 그 중대한 집단적 힘으로부터 절단해버림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계급의식을 실체화할 권력을 당에게 준다는 것은, 계급의식이 완전히 꽃피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는, 대다수 노동자들의 의식의 현 상태를 기정사실로 여기고 그 약점을 경직시킴을 의미한다. 의식과 결단을 요구하는 임무를 혁명적 소수에게 위임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대단하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태도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복종하도록 고무할 뿐이다.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혁명가들은 그들 스스로 혁명의 길에서 장해물로 바뀐다.

공산주의를 그에 선행하는 사회로부터 분리하는 그 간극을 우리가 그렇게 강하게 강조하는 까닭은 이러한 덫을 피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계급의식과 단순한 이데올로기를 구분하려고 시도했던 것 또한 이러한 이유에서다.

사실, 당의 역할에 대한 대리주의의 개념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에서 기반 할 뿐만 아니라, 이행 국가와 당, 노동자계급 사이의 혼란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개념들은 계급의식에 대한 하나의 제한적인 이론으로부터, 잘못된 분석 하나로부터 논리적인 결과된다. 이탈리아 좌파에서 비롯된 대부분의 그룹들은, 레닌과 카우츠키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이론적 오류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 프롤레타리아 이론과 실천 사이의 진정한 동일성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계급의식을 살아 움직이는 과정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인 존재의 확인으로 보지 않았다. 당이 계급 외부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계급의식을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래서 보르디가주의자들은 의식을 지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성취해야 한다든가, 맑스주의가 ‘학문(science)’이 되어야 한다든가, 공산주의 강령이 고정된 교리(doctrin)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상이다. 이럴 경우에 혁명가들이 노동자들에게 의식을 전달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해박한 정치 전문가로 보여야만 하는 것이 정상이다.

이러한 혼란들은 또한 이탈리아 좌파 중에서 덜 경직화되고, 덜 획일화된 그룹들에서도 발견된다. <국제주의 공산당(Partito Comunista Internazionalista (Battaglia Comunista)>의 이론 기관지, 프로메테오(Prometeo)의 한 텍스트 속에는 계급의식에 대한 다음과 같은 분석이 있다 :

 

다시 한 번 우리는 공산주의 교리의 본질적인 지점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것에 따르면, ‘계급 본능’과 ‘계급의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첫 번째 것은 노동자 자신들의 자산인 노동자 투쟁에서 발생하고 발전한다. 그리고 그것은 물질적 이해관계의 적대로부터 비롯되며, 그러한 적대로부터 비롯되는 경제, 사회, 정치적 모순의 발전에 의해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마지막으로, 프롤레타리아들과 자본가들 사이 존재하는 어느 정도의 긴장에 의존한다. 두 번째의 것, 즉 의식은 계급 모순을 과학적으로 검토함으로써 발생하여, 이러한 모순에 대한 지식의 발전과 함께 성장한다. 그것은 계급의 역사적 경험에서 나오는 사실들을 검토하고 연구함으로써 살아가며 자양분을 공급 받는다. (…) 의식은 그러므로 정확히 ‘그렇게 되도록 하는 조건이 없어도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도입되는’ 요소이다 (카우츠키, 논쟁적 형식으로 ICC가 인용함, 『인터내셔널 리뷰 (Revolution Internationale), 12).

ICC의 논쟁은 그들이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반대로, 그 논의들은 이 동지들이 변증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 다시 말해서, ICC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학문의 견인차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다’ (ICC가 카우츠키와 레닌에 대항하여 재인용)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으며, 그들이 맑스의 독일 이데올로기를 이해한 것도 아니다. (…)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인가, 그렇지 않은가? 생산의 물질적 수단을 가진 사람들은 생산의 지적 수단도 가지고 있는 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착취당하는 그래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지배되는 계급이라는 것이 맞는가, 맞지 않는가?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근대 사회주의가 발생한 것은 이 계층의 개별 성원들의 정신 속에서 였고, 또한 이것을 지적으로 가장 발전한 프롤레타리아들에게 전달해서 그들로 하여금 조건이 허락하는 곳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 속으로 도입할 수 있게 만든 것도 이 계층의 개인들이었다’ (카우츠키와 레닌)라는 것도 사실이다.” PCInt(『계급과 의식 : 이론에서 정치적 개입까지(Class und Consciousness: from Theory to Political Intervention)』에서, 프로메테오, 1978년 전반기, 우리의 강조)

이 인용문은 보르디가와 레닌의 분석에서 우리가 강조했던 오류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PCInt의 추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옳은 전제, 즉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며,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 문장의 시작부터, 그들은 거의 완전히 무익하고 경직된 분석을 만들어낸다. 첫 번째 판단 오류는 다음과 같다: 혁명을 이뤄내기 위해 노동자들은 그들의 계급적 적들과 동일한 정도로 학문적으로 분석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급의식은 ‘계급 경험의 과학적 반영(scientific reflection of the experiences of the class)’이다. 그것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적대가 사상의 영역에 반영되는 것(the reflection in the domain of ideas)이며,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혁명적 파괴를 통해 이 모순이 극복될 수 있게 하는 주체적 요소이다.” 그래서 계급의식은 이데올로기와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정의되는데, 이 이데올로기 또한 객관적 현실이 사상의 영역에 반영되는 것이다.(참고, 맑스, 『독일 이데올로기』)

두 번째 판단 오류는 다음과 같다: 노동자들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있는 한, 그들이 생산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는 한, 그들은 역시 계급의식, 다시 말해, 혁명적 이데올로기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직 부르주아지의 성원으로서, 지적 생산 수단을 가진 혁명가들만이 노동자에게 사회주의 의식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공산주의 혁명은 부르주아지의 학문적 역량을 (노동자들을 위해) 이용함으로써 가능해진다는 불합리에 도달하게 된다. 계급의식은 이데올로기와 경쟁하지만 같은 도구로 연마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가 되고 마는 것이다!

변증법적으로 보이려고 애쓰는 중에 결국 PCInt는 자가당착에 빠지고 만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설명에 뒤얽혀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계급의식이 단순히 이데올로기적 반영이라면, 그것은 어떤 경제적 힘 위에 존재하는가? 노동자들에게 실제적으로 어떤 경제적 권력들도 없는데, 어떻게 그들은 이데올로기를 만들낼 수 있는가? 혁명가들에 의해 연마된 이데올로기는 공중에 떠 있는가? 그것은 계급투쟁의 내부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내부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가? 노동자들에게는 그 어느 때에도 지적, 물질적 생산수단이 없는데, 어떻게 그들은 그러면 공산주의 혁명과 전체 사회의 변혁을 이뤄낼 수 있는가? 그들의 단순한 “계급 본능”이 충분하다면, 왜 이미 혁명을 이뤄내지 못했는가? 어떤 기적적인 수단에 의해 혁명가들은, 노동자들에게 언제라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그 어떤 것을 그 계급에게 간신히 도입할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PCInt의 대답이 매우 불만족스럽고, 그들의 대답에 굶주려 있다:

 

여기에는, 사회주의 의식은 계급으로부터 나오는가, 아니면 ‘역사의 법칙을 어떻게 설명할 지 아는’ 사람들로부터 오는가라는 잘못된 문제설정이 있다. 그것은 변증법적 방법으로, 다시 말해 사회적 역사적 현실을 포착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기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된 문제설정이다. 그 해답은 사실, 그러한 양자택일의 바깥에 존재한다. 사회주의 의식은 계급의 경험과 그것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에 대한 과학적 성찰(scientific reflection on the experience)로서, 이 성찰을 수행할 수단을 가지며 자신들을 노동자계급과 정치적으로 동일시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발전된다.”(앞의 책)

아니, 동지들, 우리가 제기한 문제는 그렇게 쉽게 피해갈 수 있는 잘못된 문제설정이 아니었다. 우리가 제기한 문제의 핵심은 계급의식에 대한 두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들이다. “누가 계급의식을 보유하고 발전시키는가”라는 문제에 답하는데 실패하면, 동지들은 스스로를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고 모순 속에 머물게 된다. 당신들이 이러한 막다른 골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하는 ‘변증법적노력들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계급의식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이 문제에 대답하려 시도하며,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의 도움 없이도) 공산주의 혁명을 이뤄낼 수 있는가에 대해 해명하려 시도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의식의 유일한 담지자인 이유는, 어떤 경제적 권력, 어떤 생산수단도 갖고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은 행동과 사고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이론적 진화는 단순히 그 실천의 “반영”(a reflection of its practice)으로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세계의 철학적 해석이 아니라, 현실의 구체적인 변혁을 위한 능동적인 요소이자, 수단이다. 이론과 실천은 분리가 불가능하다. 오직 계급투쟁 속에서 노동자계급만이 사회주의 의식의 이 두 가지 측면을 통합시킬 수 있다. 혁명가들의 활동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전반적이고 집단적인 활동에서 특권적인 순간임이 확실하지만, 계급 활동의 여러 국면들 중의 하나(그렇지만 필수불가결한)를 구성할 뿐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계급의 적에 대항해 싸우면서 적의 것과 동일한 이데올로기적 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확실히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힘은 사실상, 착취당하지만 혁명적인 계급으로서 그 조건에 있다. , 사회에서 어떤 권력도 없지만 동시에 유일하게 모든 착취와 계급지배의 형식에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계급이라는 점이다. 계급의식은, 현실을 엄정하게 이해함과 동시에 실천적으로 변혁하는 것, 정확히 바로 그 사실을 특징으로 하며, 어떤 이데올로기도 어떤 ‘학문적인’ 이해도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위력은 전적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계급의식과 조직화에 있다. 계급에서 이러한 위력을 빼앗는 것, 즉 그 이론과 계급투쟁 사이에 수많은 매개들을 위치시키는 것은, 계급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달성할 역량을 빼앗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프롤레타리아트 전체가 구세계를 파괴할 수 없다면, 우리는 차라리 드러누워서 죽는 편이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의지도, 어떤 경건한 소망도 그것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탈리아 좌파가 혁명 이론의 풍부화에 많은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의 성취들을 보존하려 노력한 그 용기와 고집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퇴행,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무게가 여전히 오늘날 공산주의 그룹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ICC는 모든 것을 이해한 체 하지는 않는다. ‘계급의식의 유일한 담지자’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ICC의 성찰 작업이 기반하는 관심사는 정확히 말해서, 볼셰비키를 함정에 빠뜨린 오래된 덫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 혁명과 20년대의 혁명적 물결의 퇴조에서 최대한의 교훈을 뽑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경험에서 결과된, 우리가 보기에 중요한 교훈들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오직 통일되고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사회를 변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당, 어떤 소수도 이 책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트를 대신할 수 없다.

 

독일 좌파

 

독일 네덜란드 좌파는 20년대 초부터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의해 울려 퍼진 반혁명의 합창에서 벗어나려 노력했던 다른 하나의 혁명적 목소리를 대표한다.

독일 좌파는 ‘공식적인’ 공산주의당, KPD(s)에서 축출된 좌익 인자들이 설립한 KAPD를 중심으로 1919년에 재편되었다. KAPD, ‘동조하는 당’으로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이 허락되었는데, 이들은 주로 인터내셔널의 의회와 노동조합에 대한 입장 (1920년 호르터(Gorther)의 레닌에 대한 대답을 참고), 공동전선의 개념에, 그리고 민족 해방주의의 투쟁을 지지하는 것에 반대했다.

KAPD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다른 좌파 그룹들, 예를 들어 벨기에, 헝가리, 이탈리아, 멕시코, 불가리아, 덴마크 좌파와 접촉하여 일관된 좌익 반대파를 형성하려 했다. 이러한 기회는 KAPD1921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서 축출됨으로써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당에 대한 문제에서, KAPD는 전반적인 정치적 방향을 제시할 수 있고 당분간 소수로 남을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계급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강하고 일관된 당을 건설할 필요를 매우 정확하게 주장하는 점에서 그 공을 인정받고 있다 (1921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대회에서 발표하기 위해 쓰인, 당에 관한 테제들 중 제 7항과 8). 이것은 독일 좌파의 입장 속에서 보르디가주의자들이 보고 싶어 하는 ‘아나코-생디칼리스트’적 입장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당에 관한 테제들 전체에서, 당이 권력을 쟁취할 필요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아마 이것이 이탈리아 좌파가 KAPD를 비난해서 말하는 그 아나키스트적 변형인가 보다). 반면, 강조점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도구로서 평의회(당과는 별도로 존재하는)의 역할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네덜란드 좌파는 이탈리아, 영국, 헝가리나 멕시코 좌파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혁명과 그 패배로부터 모든 교훈을 다 뽑아낼 수는 없었다. KAPDKAI(1922KAPD의 인자들에 의해 창설된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문서에서도, 당과 국가가 평의회 권력들을 대체한 것이 러시아 혁명의 퇴행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 대해 어떤 언급도 없다.

반대로, 일련의 심각한 혼란들이 독일 좌파 안에서 발전했다.

 

1. 러시아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과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혁명 두 가지 모두로서(1921) 그런 다음엔 부르주아 혁명으로서 파악한 잘못된 분석 때문에, 정치적 당의 존재를 러시아 혁명의 부르주아적 본질의 근거로 보는 경향이 KAPD 안에서 발전했다.

 

2. 권력을 잡아야 하는 의회적인 당의 하나로 간주되는 것을 옳게 거부하고 그러한 거부를 이론화함으로써, KAPD-AAUD 안에서 정확히 ‘반-(anti-party)적’ 입장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경향이 형성되었다. 이 ‘반-인텔리(anti-intellectual)’ 흐름은 KAPD의 에센(Essen) 경향에서 그리고 그 후에 <평의회 공산주의자 연맹(League of Council Commmunists)>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잘 알려진, KAPD-AAUD와의 불화로 인해 1920년대 초, 오토 륄레(Otto Ruhle)를 중심으로 AAUD(E)가 결성되었다.

 

3. 정치적 당과 같은 별도의 존재를 거부하면서, AAUD(E)는 당과 평의회의 중간정도 되는 조직, <일반 노동자 연합(the General Workers Union)>(AAU)의 발전을 옹호했다. 이러한 분석의 그 마지막 귀결까지 추구한 일부 인자들은 반-조직적(anti-organisational) 분석에 기초하여 분열하다가 결국 스스로 해산했다. 1925년 륄레 자신은 결국 스스로 모든 조직된 정치 활동을 포기했다.

 

30년대 초부터, 독일-네덜란드 좌파로부터 남은 것이라고는, 고립된 ‘반-(anti-party)’적인 개인들, 반 데어 루베(Van der Lubbe)와 같은 테러리스트들, 그리고 AAUD(E)에서 나와서 공산주의 강령의 원칙들을 보존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조직의 필요성을 거부한 그러한 공산주의자들이 전부였다.

사실,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의 일반적 패배로 인해 그리고 혁명적 물결 동안의 독일 혁명가들의 허약함으로 인해 심각하게 타격을 입은) 이러한 독일 좌파의 이러한 인자들의 큰 실수는, 첫째로 그들이 쇠퇴기(decadent period)에 당의 본질과 기능에서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실패한 것에 있다. KAPD는 이 변화를 어렴풋이 눈치 챘다. 그것은 혁명적 시기와 의회주의 시기 사이의 차이를 정확하게 지적했고, 19세기 의회적인 노동자 정당의 역할과 사회주의 혁명 시기의 공산주의당의 역할 사이를 구분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의 모든 함축된 의미들을 독일 좌파가 완전히 흡수했던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KAPD 안에서 대중 의회 정당의 개념과 당의 개념을 혼란시킨 한 경향이 발전했다. 이 경향은 시기의 변화가 갖는 실천적인 귀결들을 모두 도출할 수는 없었기에, 볼셰비키의 대리주의적 실수를 노출할 수 없었던 까닭에, ‘욕조의 물을 비우려다 아기까지 버리고’ 말았다. 이 뒤에 놓인 추론 근거는 다음과 같다 : “그러한 당의 역할이라고는, 지도자로, 즉 그들의 위치에서 대중을 지배하고 권력을 휘두르려는 의회주의의 우두머리로 되는 것밖에 없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들은 이 역할을 거부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당을 지양할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 독일 좌파는 언제나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전반적 미성숙함으로 인해, 이론으로 무장하고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물결을 맞이할 준비가 된 혁명적 당을 만드는 데 무능력한 이 나라 혁명가들로 인해 고통받았다. 오랫동안, SPD 좌파의 인자들은 공개적으로 사회민주당과 결별하고 독립적인 당을 만드는데 망설였다. 이러한 이유로, KAPD는 경험이 거의 없는 어린 조직으로서 등장했다.

계급의 이러한 일반적 미성숙함은 독일 좌파의 시야를 흐리는데 큰 역할을 했고, 특히 계급들 사이의 힘의 균형의 본질에 대해, 혁명적 물결의 충격에 대해 그러했다. 이렇게 해서 KAPD1921년의 사건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패배의 시작을 알리는 것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을 혁명 운동의 고조의 상징으로 보았다. 이러한 과대평가로 인해 그들은 1921년 ‘3월 행동’이라는 모험을 감행했다.

독일 혁명가들의 수많은 망설임, 자신들의 역할에 대한 신뢰 부족, ‘3월 행동’의 실패 이후 쓰디쓴 패배주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퇴행과 혁명적 물결의 퇴조,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힘의 균형의 변화를 이해하는데 실패 : 이 모든 것들은 독일 좌파의 혼란, 비관주의 그리고 최후의 붕괴를 촉진해서 결국에는 테러리스트들의 행동에 절망적으로 의지하는 지점까지 이르도록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 시기에 대해 좀 더 실제적인 대차대조표를 그릴 수 있었던 이탈리아 좌파와 대조적으로, 독일 좌파는 반혁명기 동안 혁명가들의 책무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이해하기에는 그 스스로가 무능력하고 나약함을 증명했다. 이탈리아 동지들과 달리, 독일 혁명가들은 과거 투쟁의 성과를 모두 지켜낼 역량을 갖춘 분파를 자신들로부터 만들지 않았다.

이렇기 때문에, 오늘날 평의회주의 조직들은 결코 과거의 혁명적 물결과 명확하고 일관된 연속성을 유지하고 표현하지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비판했을 때의 그 독일-네덜란드 좌파의 강력함을 표현하지도 않고, 모든 약점과 혼란을 극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보르디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평의회주의자들도 계급의 경제 투쟁의 잠재적인 혁명적 본질을 부정했다. 혁명적 과정에 대한 그들의 분석은, 이탈리아 좌파의 분석과 마찬가지로, 결과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노동조합’ 수준의 투쟁과 의식을 넘어설 가능성과 필요성을 박탈해 버렸다. 보르디가주의자들에게는 이 무능력을 당의 존재가 보완하지만 평의회주의자들에게는, 아나코-생디칼리스트들에게처럼, 국가를 파괴하기에는 경제 투쟁 그 자체만으로 충분했다. 네덜란드 좌파의 명백히 경직된 예의 하나인, <다아트 엔 게다흐테(Daad en Gedachte)> 노동조합에 의한 파업과 공산주의 혁명 사이에 질적 차이가 없다! 이 그룹은 경제적 투쟁에 대한 변명을 불합리한 지점까지 밀고 나가서, 명백히 제2 인터내셔널과(…) 레닌의 ‘경제주의적’ 입장으로 끝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가 노동조합 수준을 넘어설 필요성을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해했던 레닌과는 달리, <다아트 엔 게다흐테>는 경제적 투쟁에 끊임없이 찬사를 보낸다. 투쟁의 양적 확장은 구세계를 뒤흔들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아트 엔 게다흐테>에게 있어서, 이러한 양적 축적(quantitative accumulation) 또한 질적 발전(qualitative development)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혁명은 일상적인 계급행동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보기를 들어 노동자들이 그들 스스로 혁명의 과정에서 높은 의식적 수준에 도달하는 사실만 보아도 그러하다. 혁명은 이러한 계급행동과 질적으로 전혀 다르지 않으며, 유일한 차이점은 양적인 면 뿐이다.” (다아트 엔 게다흐테, 19755)

<다아트 엔 게다흐테>에게, 노동자계급의 의식은 순수하게 경험적이며 즉각적인 것이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조직적 정치적 경험들을 일반화할 필요가 없다. 각각의 투쟁은 그 자체로 충분하며, 그 공장, 지역, 한정된 영역 안에 제한된다. 평의회주의자들은 경제 투쟁들의 혁명적 성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계급의식의 동질화를 통해 그러한 투쟁을 정치적으로 확장할 필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여기서 우리는, “운동이 모든 것이며, 목표는 중요하지 않다”라는 사회민주주의의 오래된 후렴구를 발견한다.

계급의식에 대한 이러한 당면주의적 사고로 인해 평의회주의자들이 노동조합주의와 지역주의로 비틀거리며 쓰러지게 되고, 투쟁에서 혁명가들의 역할을 완전히 방치하게 되는 것은 논리적이다. 어떤 경우에, 이러한 과소평가는 단순히 혁명가들의 역할을 전적으로 부정하게 만든다. 이런 식으로 <다아트 엔 게다흐테>는 엄격하게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활동의 한계 속에 머문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을 엄격히 경제적인 투쟁에 국한시키는 것에 대한 평의회주의자들의 변명을 그 마지막 결론까지 추구하면, 그것은 모든 혁명적 조직의 완전하고 단순한 자기-파괴로 끝난다.

평의회주의자들은 1920년대의 혁명적 물결의 성숙에 의해 남겨진 정치적 성과들을 거둬들이는데 있어서 보르디가주의자들보다 더 유능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더 이상 왕겨에서 알곡을 분리할 역량도 없고, 대리주의적 일탈을 거부하면서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 조직의 필요를 안전하게 보호할 역량도 없다. 평의회주의자들은 보르디가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50년간의 반혁명, 50년간의 혼란과 이론적 당황에 치뤄진 희생이었고, 그러는 동안 흐름을 거슬러 헤엄치는데 성공한 혁명가들이 거의 없었다. 오직 <프랑스 좌파 공산주의>(Gauche Communiste de France) (1940년대와 50년대 『국제주의(Internationalisme)』라는 이론지를 발간함)와 같은 그룹만이 러시아 혁명의 경험이 남긴 소중한 성과들을 보전할 역량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국제주의』의 텍스트 중 하나인, 194810월 발간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당의 본질과 기능에 대해(On the nature and function of the political party of the proletariat)’에서 보이듯이, 이 그룹은 보르디가주의자들과 평의회주의자들의 입장들에서 드러난 정치적 변질에 물들지 않은 거의 유일한 그룹이었다.

결론

우리는 보르디가주의자들과 평의회주의자들의 혼란이 같은 기원을 가졌다고 반복함으로써 간단히 결론내릴 수 있다. , 방어적 투쟁의 혁명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들 두 가지 정치적 흐름들은, 겉으로 보기에 서로 그렇게 달랐지만, 혼란에는 함께 빠져들었다. 왜냐하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사이의 분리에 기반을 둔 어떤 정치적 입장도,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역사적 목적을 의식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혁명 계급임을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보르디가주의와 평의회주의가 향하는 곳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자신의 으로는 엄밀히 방어적인 영역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래서 그 차이를 메우는 것이 당이라고 반복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이 영역을 뛰어넘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모더니스트들은 노동자계급이 경제적 요구를 위해 투쟁하면, 그것이 마치 “자본을 위한 계급(class-for-capital)", 다시 말해 자본주의 지배에 완전히 종속된 경제적 범주의 하나인 것 인양 가장함으로써 더 심하게 못 박아 버린다. 의식에 대한 그러한 관점으로 인해 다수 모더니스트들이 쁘띠부르주아지적 절망에 빠져버린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보르디가주의자들과 평의회주의자들은 투쟁을 발전시키는 객관적 조건들로부터 계급의식을 분리시킨다. 그 둘은 모두 혁명가들을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 외부적인 요소로 파악한다. 보르디가주이자들이 보기에 의식은 프롤레타리아트 자체만으로는 발전할 수 없고, 그러므로 의식을 외부에서 가져오는 것이 문제이며, 그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당이다. 평의회주의자들에게 혁명가들의 역할은 철학적인 역할, 단순히 지적인 구경꾼들로서의 역할로 제한되어야만 한다. 이런 관점은 곧 혁명가들이 구체적인 계급투쟁의 바깥에 위치하도록 만든다. 그 둘 중 아무도, 계급의식을 정확하고 변증법적으로 사고하는 것과 그 계급의식이 꽃피는 것은, 혁명가들이 계급의 생동하고 적극적인 일부로서 이해하는 것과 나란히 나아간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