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계급의식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공산주의의 근본적인 성격중 하나는, 그들이 노동자계급의 의식적이고 집단적인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해야한다 : ‘계급의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전의 혁명을 동반했던 이데올로기적 과정을 똑같이 경험해야만 하는가? 프롤레타리아 의식은 과거 사회의 특징적인 그런 유형의 지적인 과정과 어떤 공통점을 갖는가?

모든 현존하는 이데올로기로부터 계급의식을 구분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 일반으로부터 계급의식을 구분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공산주의 혁명에 유익하게 될 생산력의 놀라운 발전과, 마찬가지로 사회사상들의 엄청난 발전도 참작해야 한다. 공산주의가 생산력의 발전과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의 심화에 의해 가능하게 되는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의식 또한 과거의 사회에서 발전해 온 전체 범위의 사상들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위기의 압박 아래에서 이러한 사상들이 극복됨을 나타낸다.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발전은, 그러므로 이전의 지적 발전 기간 전체에 기초한다. 사실, 인류의 역사를 사실들의 일관성 없고 ‘자연적인’ 연속이나 사건들의 기계적인 연쇄로 파악하는 것보다 더 진실과 거리가 먼 것은 없다. 이와 같이 인간의 역사가 ‘운명’이라는 저항할 수 없고 맹목적인 힘에 의해 결정된다는 생각은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동물은 그 자신의 활동과 전적으로 동일시되지만, 인간은 그들의 삶의 활동을 의지와 의식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다.

 

인간은, 자신의 실천 활동으로 사물의 세계를 창조할 때, 비유기적 자연을 가공할 때 인간이 의식적인 존재라는 것을 증명 한다 … 분명히 동물도 생산을 한다. 꿀벌, 비버, 개미 등등처럼 동물은 둥지, 주거를 짓는다. 그렇지만 동물은 자기나 자신의 새끼들에게 직접적으로 필요한 것만을 생산 한다 ; 동물은 단편적으로 생산하지만, 반면에 인간은 보편적으로 생산 한다 ; 동물은 즉각적인 육체적 필요의 지배하에서만 생산하지만, 반면에 인간은 육체적인 필요가 없어도 생산하고 그 필요로부터 자유로울 때 진정으로 생산한다…그러므로 인간은 또한 미의 법칙들에 부합하는 것들을 만든다.”

(맑스,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

 

명확히, 인류에 의한 전적으로 자발적이며 명료한 세계 변혁을 이야기하는 것은 또한 거짓일 것이다. 더욱이, 인간은 역사를 추상적이거나 정신적인 방식으로 만들어가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즉 자신이 선택한 상황 하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상황 하에서 만든다.”(맑스, 『브뤼메르의 18일』)

 

행동은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 “의식은 존재에 의해 결정 된다” 생산력의 발전에서 도달된 순차적 단계는 사회사상의 진보에 반영된다. 인간, 좀 더 정확히 사회 계급이 생존 수단을 생산하고 자연적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성취한 의식의 상대적 수준은 물질적 환경에 의해 엄격하게 결정된다.

인류의 모든 역사는, 인간들이 자신들에 대해, 다른 것들과의 자신의 관계들에 대해, 그리고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자신들의 관계들에 대해 의식하는 역량의 성장과 더불어 점점 더 생산력이 풍부하게 성장함을 보여준다.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발전과, 그 기반이 되는 물질적 혁명은, 이 유산을 계속 풍부화하고 능가한다.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의 등장

여기서 인류의 모든 역사를 서술하려는 시도는 명백하게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의 이데올로기적 발전의 가장 중요한 단계에 대한 분석을 요약하는 데에 논의를 제한할 것이다.

인간 발전의 첫 번째 단계, 즉 팔기 위한 생산은커녕 교환을 위한 생산조차 알지 못했던 원시 공동체에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진화와 그들을 둘러싼 자연적 힘들의 진화를 구별하지 못했다. 공동체는 직접적인 방법으로 그 필요를 충족시켰고, 노동의 분업도 없었고, 음식과 거주와 마찬가지로 도구들도 공동으로 소유했다. 인간은 그러한 공동체 안에서 진화하면서 스스로를 주변 자연 환경들의 통합적인 일부로 생각했다. 각자를 공동체와 자연적 환경에 연결하는 이러한 직접적인 의존성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그 스스로를 마법적인 통일체의 측면에서 표현했다. 이러한 마법적인 통일체의 징후들은 어디서든 볼 수 있었지만, 통일체 그 자체는 이러한 징후들 그 이상이었다.

그러므로 역사의 초기에 등장한 언어는, 인간들과 그들의 공동체, 그리고 자연의 힘을 잇는 마법적인 연결고리가 되었다. 이 의사소통 수단은 실용적 목적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연의 구체적이고 즉각적인 표현이면서, 금기와 금지의 강제를 통해서 자연에 대해 진정한 권력을 가졌다. 특정한 수렵 또는 채취지역은 거명될 수 없었고, 이것을 어길 경우 제어할 수 없는 힘이 풀려졌다.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를 행사하기 위해서 마법의 주문이 마음속에 간직되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을 둘러싼 자연 세계 사이에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비록 존재의 물질적 조건과 공동체 사이의 이러한 조화로운 관계가 사회적 삶과 자연적 리듬 사이, 사회적 존재와 사상 사이, 그리고 구체적인 활동과 언어 사이의 근본적인 통일을 표현한다는 것이 사실일 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생산력이 거의 발전하지 않아서 끔찍한 결핍이 모든 영역을 뒤덮고 있는 사회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공동체는 지각변동(가뭄, 폭풍, 기아 등)과 같은 자연의 힘에 의해 좌우되었다. 인간이 자신이 의지해 있는 자연에 대해 품은 공포와 경이는 원시적 물신숭배로 이어졌다. 자연현상들(, , 바람, 별 등)은 아직은 신성화되지 않은 채, 독립적인 힘으로 이해되었다. 공경과 공포와 진정의 대상으로서 능동적이고 무시무시한 힘으로 여겨졌다.

인간이 유목 생활을 포기하고 땅에 경작을 시작하고 나서야, 간단한 마법에서 종교적인 의례로의 이행이 이뤄졌다.

 

사냥꾼은 그의 사냥 운을 바랄 때, 주술이나 마법에 의지했다. 계절의 규칙적인 변화, 발아에서 성숙 그리고 죽음까지의 일상적인 순환의 규칙을 알고 있는 농민들은, 자연의 힘을 설명하는 또 다른 형태의 사상에 의지해야 했다. 그러므로 여기서 영혼에 대한 생각과 신화가 탄생했다. (…) 농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생명력은 삶과 죽음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자연 요소들에 놓여 있었다. 서로 어떤 논리적 연관성도 갖지 않는 그러한 요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것들은 하나의 힘의 상이한 측면들로 여겨졌다. , 태양, 여자, , 뱀 등이 그러했다. 이들의 생명력은 별도로 존재하는, 스스로 존재하고, 본질적으로 실재적인 어떤 것처럼 보였다.”(허버트 쿤(Herbert Kuhn))

 

자연의 힘에 대한 이러한 원시적 물신주의는 인간이 스스로 세계와 자연적 현상을 설명하려한 최초의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들이 자연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고 있음을 깨닫자, 종교를 통해 그러한 자연에서 벗어나거나, 혹은 자연을 통제할 길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현실은 아주 간단한 하나의 신성한 개념으로 요약될 수 있었을까? 라고. 농업(그들이 자연 환경에 영향을 행사하는 첫 번째 형태)은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좀 더 높은 권력이 존재한다는 환상을 사회사상 안으로 통합했다. 그러므로 맑스가 설명한 것처럼 “종교는 자기 자신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거나 이미 다시 잃어버린 그런 인간들의 자의식이자 자존심이다.” (맑스, 『권리에 대한 헤겔 학설 비판 서문 Introduction to the Critique of Hegel's Doctrine of Right)

 

그 후 노동의 사회적 분업의 발전, 공동체의 즉각적인 필요를 능가하는 생존 수단의 생산, 잉여의 출현 … 이 모든 것들은 교환 행위를 통해 고대 사회관계를 해체시키고, 원시 공동체를 붕괴시켰다. 공동체들은 그들의 생산에서의 잉여를 서로서로 교환하기 시작했다.

이 단계에서 생산력 발전은 노예제를 통한 노동력의 체계적 이용과 착취를 초래했다. 그러므로 농업은, 땅의 착취와 동물의 가축화를 통해,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부의 원천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발전으로 인해 사회관계의 완전히 새로운 기반이 창조되었다. 더 이상 생산물과 노동 도구들은 공동소유가 아니라, 사적 소유물로 되었다. 분업으로 인해, 인간은 자연스럽게 부의 형태가 된 노동 도구나 먹을거리를 취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남자들은 식량의 새로운 원천인-가축-의 주인이 되었고 그에 이어 새로운 생산 수단인 노예의 주인이 되었다. 남자의 곁에서 여자는, 그녀들의 고대 모계 사회의 권리를 모두 잃고, 가재도구들의 주인으로만 남게 되었다. 이 거대한 사회적 분업의 발달과 나란히, 사회가 최초로 계급들로 분화되었다. 주인과 노예로, 착취자와 피착취자로의 계급분화가 일어났다.

가축 떼, 노예, 사치품, 생산 수단 등과 같은 형태를 띤 사적 소유가 이렇게 증가함에 따라, 생산자와 생산물 사이가 이렇게 분리됨에 따라, 그리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시작됨에 따라, 인간들은 차츰 자연으로부터 그리고 그 자신들로부터 분명하게 분리되어 갔다. 공동체는 더 이상 자연 환경의 직접적인 표현이 아니며, 더 이상 평등하고 조화로운 관계가 아니라, 반대로 특정 사적 소유 관계들에 기초하게 되었다. 개인은 점차적으로 공동체와의 객관적이고 대대로 이어져온 연결고리를 잃어버리고, 그의 생존 수단과의 직접적인 경제적 연결고리를 잃어버린다. 그는 그의 동료들과 경쟁자가 되어버린다.

역사 발전의 이 단계에서 인간 공동체의 사회 조직은 더 이상 그 공동체 전체의 의지에 의해 좌우되지 않았다. 화해 불가능한 사회적 적대와 내적 모순에 의해 분열된 상품 사회는, 그 사회 위에 군림하게 되고 사회질서의 유지를 목적으로 한 일련의 법과 규칙을 채택해야만 했다.

 

사회로부터 발생하였으나, 사회 위에서 점점 더 사회에 낯선 것이 되어 가는 이 권력이 바로 국가이다.”(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 (The Origins of the Family, Private Property and the State)

 

같은 방식으로, 이러한 정치적이고 법률적인 구조의 등장과 연계되어, 사회사상의 지배적 양식은 착취하는 지배 계급의 이해관계를 정당화하고 대표하는 것이 되었다. 이 사상은 더 이상 실천적 활동의 직접적인 반영도 아니고, 집단적 의지와 이전 같은 친밀한 접촉을 유지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현실과 그 자체 사이에서 추구되는 간격을 특징으로 한다. 원시 공동체에서 실제 삶의 언어의 한 표현이었던 사상은, 상품사회에서는 지배 계급의 사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정치적 상부구조와 동시에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가 나타났다. 그래서 지배 계급은 사회가 계급들로 새롭게 분리된 것을 정당화했고 영원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착취의 현실은 은폐되고, 특권층 소수의 특정한 이해관계는 마치 사회 전체의 이해관계인 것처럼, 진보의 전제조건인 것처럼 제시되었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리를 통해서, 이러한 사상을 보호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삼는 전문화된 계층이 나타났다.

그 이후,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는 현실을 이렇게 정당화하는 것은 계속해서 재확인되고 강화되었다. 그러나 주창되는 정당화가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니었다.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인류가 현실을 이해하는 능력은 더 커졌다, 진보의 행로에서 각각의 단계는, , 자연의 지배에 대한 인류의 승리는 사상과 사회의 이해를 풍부히 하면서 함께 나아갔다.

 

사회는 발전했고, 근래의 세기동안은, 매우 가파른 속도로 발전했다. 노동의 형식은 변화되었다. 인간들 사이의 관계, 노동에 대한, 자연에 대한 그 자신들을 지배하는 더 고차원의 힘에 대한 그들의 태도, 이 모든 것들 또한 발전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삶과 세계에 대한 관점이 진화하는 그 원인이다.”(안톤 판네쿡, 『노동자 평의회(The Workers Councils)

 

다른 동물 사회, 심지어 가장 잘 조직된 다른 동물 사회와는 달리, 인류는 그의 생존-활동의 단순하고 무의식적 재생산에 만족하지 않는다.

인간의 사회적 요구는 그것의 만족을 위한 물질적 역량에 따라 증가한다.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즉각적인 만족을 기초로 하거나, 단일한 과정의 무한정한 재생산을 기초로 하여 자신의 요구에 반응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는 매개가 필요하다. 인간은 그들의 생존수단을 생산해야 하지만, 또한 생산의 도구들과 수단들을 점점 더 의식적인 방식으로 이용해야만 한다. 더욱이, 이것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반드시 서로와의 관계를 발전시켜야 하며, 진보에 장해가 되는 조직 형태들을 다소 의식적으로 극복해야 한다.

옛 구조와 생산관계를 물적으로 극복하는 것은, 필수적으로 과거의 낡은 사회사상 형식들과 지배적인 관념들의 극복을 동반한다. 이것은 생산력의 발전이 사회사상의 발전을 가져오기 때문만이 아니라, 혁명적 계급은 자신이 대변하는 이해관계의 사회적 효율성을 - 권력을 가진 계급과는 반대로 - 사회 전체에 증명해 보임으로써만 그 역사적 과업을 효과적으로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물질적 하부구조에서 이뤄진 각각의 개선에 대해서 사회사상에서도 그에 따른 유사한 발전과 풍부화가 이뤄진다.

사회가 물질적, 즉 생산적 발달의 관점에서 성숙한 수준에 이르렀을 때마다 언제나 사상, 과학, 예술, 그리고 문학은 모두 번성한다. 사회관계의 발전의 각 진전 단계, 모든 기술적 진보와 사회 변화는 그에 상응하여 일어나는 사상 세계의 혁명에 의해 표시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이전에 선행된 아시아적, 중세적, 고대적 사회들에 비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이데올로기적 물질적 진보를 나타낸다고 이야기될 수 있다. 자본주의가 기술과 과학의 진보에 부여한 특별한 추진력은, 만약 이 진보가 통합되고 유지되려면, 현실에 대한 합리적이고 유물론적인 분석이라는 체계화를 요구한다. 이러한 생각은 부르주아 경제 발전이 정점에 다다름과 동시에 승리하게 되었다.

부르주아 사회는, 경제적으로는 이미 정복한 사회를 그 원시성과 오래된 믿음들로부터 빨리 해방시키기 위해, 낡은 중세 도그마(dogmas)에 대한 합리적 비판을 시작했다. 부르주아지가 이탈리아 도시들에서 통제권을 획득하고 있었던 르네상스 시대에 이미,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적 대변자들은 영혼의 불멸성과 신의 존재 유무와 같이 봉건주의의 신성한 중세적 가치들에 도전했다. 그러나 설령 부르주아 사상이 종교적인 특성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이자와 폭리에 대한 관념에 더 잘 어울리는 종교인 프로테스탄티즘을 강요하려 노력했다.

어디서든, 부르주아지는 새로운 생산 관계들을 강제했는데, 그 관계들이란 중세 영주에 대한 농노의 경우처럼 직접적인 의존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법적 평등의 개념에,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 팔 수 있는 ‘자유’를 가진 개개인의 존재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 당시 과거의 미신… 등을 정복하고 있던, 세계를 정복하게 되는 자본주의 사회 관계의 기초였다.

 

세계는 하루아침에 거의 10배나 커져 있었다. 이제 서유럽인의 시야에는 반구의 4분의 1이 아니라 지구 전체가 있었다. 그들은 남아있는 모든 구석구석을 차지하기 위해 돌진했다. 그리고 출신 국가라는 낡고 좁은 경계가 무너짐과 동시에, 천년을 내려온 중세적 사고방식의 족쇄도 무너졌다. 인간 육체의 눈에도 마음의 눈에도 훨씬 더 광대한 지평이 열렸다.” (엥겔스, 『가족, 사유 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

 

이러한 정신적 각성, 현실을 이해하려는, 물리적, 자연적, 그리고 인간적 현상을 이해하는 역량의 이러한 증가…이 모든 것의 근원은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역량에, 부르주아 사회가 생산수단과 생산 기술에 부여한 추동력에 있다. 과학적 유물론(scientific materialism)은 자연을 ‘정복하고’ 그 법칙을 이해하고 통제하는 역량의 증가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표현이다.

 

자연은 인간이 의지하고 있는 ‘필요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의 법칙에 대한 지식이 증가하는 만큼 이러한 의존성을 합리적 방법으로 통제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자연을 사회화함으로써 이러한 지식을 얻는다. 다시 말해 생산할 때 자연을 인간 자신이 실용적으로 변형함으로써 그러한 지식을 얻는 것이다.”(F.Jakubowski. 『역사적 유물론에서 이데올로기와 상부구조 (Ideology and Superstructure in Historical Materialism)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한계가 있다:

- 생산력의 발전은 인간이 그들의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아직도 불충분했다. 자본주의 아래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깨지고, 더럽혀지고 오염되었다. 자본주의는 생산을 사회화시켰으나, 생산의 전유 양식까지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 부르주아지는, 착취 계급으로서 이 착취의 현실을 은폐할 수밖에 없다. 특히, 모든 생산양식은 본질적으로 역사적이고 일시적임을 인정할 수 없다. 이러한 환상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침투한다.

 

부르주아지는 처음으로 경제를 일련의 통일된 법칙 아래 작동하는 총체적 과정으로서 이해하게 되었다. 바로 자본주의가 이러한 통일을 초래하고, 모든 이전 사회 질서의 특수성과는 반대로 통일성 있는 사회를 창조한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지에게는 이러한 법칙들이 그 참여자들의 의식과는 상관없는 자연적 법칙으로 보였다. 만약 부르주아지가 이러한 법칙들을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면, 이는 그 자신의 지배를 역사적 한계가 있는 것으로 인식해야 함을 또한 의미할 것이다. 계급의 이해관계와 계급의식이 서로 모순된다.

그러나 이 사실 하나만으로 부르주아지의 사회적 위치에서부터 비롯되는 의식의 이데올로기적 본질을 설명할 수 없다. 사회적 생산과 사적 전유 사이에 좀 더 결정적인 모순이 존재한다. 생산수단은 사회적으로 생산되며 사회를 위해 생산되지만, 개개의 자본가들의 손 안에 떨어진다. ‘자본은 사적이 아니라 사회적인 권력이다 (Capital is not a personal but a social power)’, 그러나 이 권력의 운동은, 자신의 활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전반적인 관점을 갖지 못한 개별적인 자본 소유자의 이해관계에 의해 지배된다. 자본의 법칙과 사회적인 기능은 ‘그들의 머리 위에서, 그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한다.(루카치)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는 부르주아지의 위치에서 가능한 유일한 관점이 자본주의자 개개인의 관점일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본가 개개인에게는, 노동의 소외로부터 비롯된 법칙이 인간과 독립된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F. Jakubowski. 『이데올로기와 상부구조』)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생산과 상품 생산 일반의 객관적 한계는 부르주아지 사상의 한계에 반영된다. 이러한 한계를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을 구분할 수 있다. 확실히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세계를 의식하려는 시도의 한 표현이다. 그러나 이 의식은 이미 제한되어 있었고 환상을 발전시켰다. 이는 위에서 약술했던 두 가지 이유, 즉 자본주의 생산의 본질, 그리고 자본주의 생산의 일시적인 본질을 부르주아지가 인정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상품 - 구조의 본질은 자주 지적되었다. 그 토대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사물의 특징을 취해서 ‘환영적인 대상성(phantom objectivity)’을 획득한다는 점, 즉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그 근본적인 본질의 어떤 흔적도 감춰버릴 만큼 엄격하게 합리적이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자치를 손에 넣는다는 점이다.”(루카치. 『역사와 계급 의식(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

 

마찬가지로, 계급 사이의 사회관계는 사물 사이의 자연적인 관계처럼 보인다. 더욱이, 생산자들은 자신들의 노동 성과물과 분리된 채 그들의 사회적 활동을 마치 자신들과 독립적인 것처럼, 자신들의 통제 밖에 있는 것처럼 바라보게 된다.

 

이 모든 귀결들은 노동자가 마치 낯선 대상에게처럼 그의 노동 생산물에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러한 전제에 따른다면 다음의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 노동자가 힘을 들여 노동하면 할수록, 그가 창조한 낯선 대상들의 세계는 더욱더 강력하게 노동자 자신을 넘어서 그에게 대립하게 되며, 그 자신 - 그의 내적 세계 - 은 더욱더 빈약해진다. 이는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신에게 더 많은 것을 부여할수록, 그가 자신 속에 지니는 것은 더욱더 적어지게 된다. 노동자는 대상 속에 자신의 생명을 불어넣는데, 그 생명은 이제 더 이상 그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게 귀속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활동이 더 크면 클수록 노동자에게는 대상의 결핍이 더욱 더 심해진다. 그의 노동 생산물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 자신은 아니다. 따라서 이 생산물이 커질수록 그 자신은 더욱더 작아진다. 노동자가 그의 생산물 속에서 소외된다는 것은, 그의 노동이 하나의 대상, 하나의 외부적 실존으로 된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노동이 그의 외부에, 그로부터 독립되어, 그에게 낯설게 실존하며, 그에게 대립하는 자립적 힘으로 된다는 것, 즉 그가 대상에게 부여했던 생명이 그에게 적대적이고 낯설게 대립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국민경제학은 노동자(노동)와 생산 사이의 직접적 관계를 고찰하지 않음으로써 노동의 본질 내부의 소외를 은폐한다.”(맑스, 188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Economic and Philosophical Manuscripts)

 

이 소외는 사회사상의 수준에 필연적으로 반영될 수밖에 없다. 사실 사상의 발전은 현실의 발전이 인간 두뇌 속에서 이동되고 전치된 채 단순히 반영되는 것에 불과하다.”(맑스, 자본론 1) 그렇기 때문에, 생산의 사회적 조건들의 체화 (다시 말해, 그들이 대상 또는 사물로 나타나는)를 암시하는 상품 생산이 가진 물질적 한계는 사회사상에서 그에 상응하는 한계에 반영된다. 자본주의적 소외가 사회적 차원에서 반영되어 다음과 같은 것이 결과된다:

사상과 학문(thought and science)은 본질적으로 심사숙고의 활동인 것처럼 나타난다. 이때 사상은 현실에 ‘맞도록’ 만들어진 ‘장갑’이나, 현실에 따라 형을 뜬 거푸집과 같은 것이지, 현실을 변형시키지는 않는다.

사회관계는 초역사적 법칙을 따르는 현상으로서 연구된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는 이러한 법칙을 바꾸거나, 인간 그 자체를 변형시키는 인간 활동의 여지가 전혀 없다.

자연과학은 관찰대상으로부터 분리되어 현실을 관조하고 ‘사실’의 경험주의적 평가를 통해 결론을 도출하는데 그칠 뿐인 ‘정확한 학문(exact science)’의 원형이었다.

사상은 각각의 법칙을 가진 서로 독립적인 많은 ‘전문적 연구 분야’로 파편화된다. 총체(totality)는 이러한 개개의 사실들의 단순한 합처럼 여겨진다.

이 모든 것들은 이데올로기가 현실을 이해할 능력이 없거나 일관적인 방법으로 현실의 발전을 이해할 능력이 없음을 함축하고 있다. 사회적 삶의 상이한 측면들은 마치 서로 전혀 연관성이 없는 특이한 요소 또는 특수한 상황들처럼 보여진다. 그것들은 인간의 발전과는 독립적인 고정된 실체들인 것처럼 나타난다. 현실은 마치 하나의 대상처럼 나타나지, 인간 활동의 산물이자 인지될 수 있고 구체적인 어떤 것처럼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이데올로기는 소위 사상가가 확실히 의식적으로 하지만 잘못된 의식으로써 성취하는 어떤 과정입니다.” (엥겔스. 『「철학연구」에서 메링에게 보낸 편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

이제 질문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의 출현에 대해 말할 때는 어떤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가? 어떻게 우리는 이데올로기를 정의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탄생을 이해할 수 있는가?’

우리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의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한다면, 명백히 이는 프롤레타리아가 의식화되는 그 현상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탐구가 아직 규명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현재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적 계급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의식하게 되는 그러한 경향이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님을 알고 있다. 과거의 다른 혁명적 계급들도 자신들의 세계관을 위해 투쟁했고, 그 전의 도그마와 경직된 생각들에 대항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과거에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 생산 양식을 제도화하기 위한 투쟁에 사상끼리의 투쟁, 서로 다른 세계관들 사이의 투쟁이 동반하여 일어났다. 그러므로 인간 사회 발전 과정 전체를 통틀어 언제나 새로운 사회적 관계 설립을 위한 계급투쟁은 동시에, 새로운 보편사상의 승리를 위한 투쟁이었다. 사회가 경제적 수준에서 경화되는 순간부터, 사회의 생산 관계가 사회의 진보와 삶을 제한하는 껍질로 변형되는 그때부터, 과거의 사회진화에 상응하는 모든 이데올로기적 형식들은 뿌리 뽑히고, 내용이 없어졌으며, 공공연하게 사회적 현실에 대립하게 된다. 이데올로기, 철학, 그리고 예술에서 표현되던 낙관주의와 생기는, 일단 사회가 경제 수준에서 노쇠와 데카당스의 시기에 진입하고 나면, 철학적 비관론, 반계몽주의, 그리고 예술 표현과 사회사상의 쇠락으로써 대체된다. 이렇게 증대되는 분열은, 사회를 통제하는 현존 관계와 그 사회가 직면한 새로운 역사적 필요뿐만 아니라, 인간이 사회에 대해 갖는 사상들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그런 시기에 정말 진보적일 수 있는 유일한 사상들은 새로운 사회를 선언하는 것들이다. 사회관계의 새로운 유형을 내다볼 수 있는 사상들이 나타나서, 혁명적 사상이 되기 전에 처음에는 비판적이고 유토피아적이며 논쟁적인 형태를 띤다.

계급의식도 같은 맥락에서 전개된다. 쇠퇴하는 자본주의 경제적 모순의 심화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쇠퇴의 과정은, 노동자계급에게는 역사의식을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비옥한 지형을 제공한다. 또 다른 비교점은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발전과, 과거의 혁명 계급들의 투쟁을 특징짓는 이데올로기적 과정들 그 사이에 존재한다. 프롤레타리아 의식은, 이데올로기 일반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사회적인 물질적 조건들의 총체성을 토대로 한다. 그러한 구체적인 토대가 존재한다는 점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인 전진을 결정짓는다. 그러므로 계급의식의 발전은, 두 사회 계급간의 현실의 경제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대립, 바로 그것을 표현한다. 이러한 본질적으로 실천적인 운동의 과정에서, 계급의식은 그 스스로 정립하고 승리할 수 있다.

 

사람들의 대대적인 변화는 반드시 공산주의 의식의 이러한 대대적인 창조 속에서 확인되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변화는 단지 하나의 실천적인 운동, 혁명 속에서만 실행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혁명이 필요한 까닭은 혁명이 단지 지배 계급을 전복할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계급을 전복한 계급이 오직 혁명 속에서만 스스로 낡은 체제의 모든 썩은 것들을 쓸어 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맑스, 『독일 이데올로기』)

 

프롤레타리아 의식은, 과거의 혁명 사상과 마찬가지로, 노동 계급의 정치적 사회적 승리의 끝에 이르러서야 정말로 승리할 수 있다.

 

현실 세계의 종교적인 반영은, 어떤 경우에서든,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에서 일상적인 삶의 실천적인 관계들이 인간에게 그것들 스스로를 일반적으로 투명하고 합리적인 형태로 드러낼 때 비로소 사라질 수 있다. 자유롭게 연합된 인간들이 생산하고 그러한 물질적 생산이 그들의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통제하에 놓여 있을 때에야 비로소 사회적 삶의 과정, 즉 물질적 생산과정의 겉모습으로부터 베일이 벗겨지게 된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사회가 물질적인 기반들, 즉 일련의 물질적 실존 조건들을 소유해야 하는데, 이러한 조건들은 다시, 고통스럽고 오랜 역사 발전의 자연적이고 자생적인 산물이다.”(맑스, 『자본론 1권』)

 

그래서 과거의 낡은 사상들을 결정적으로 극복한다는 것은 (이것은 언제나 그러한 경우였다) 낡은 경제적 모순들을 물질적으로 극복함을 함의한다.

종교, 가족, 국가, , 윤리, 학문, 예술 등은 생산 양식의 특수한 형태일 뿐이며, 그러므로 그 일반법칙을 따른다. 사적 소유를 긍정적으로 폐지하는 것, 인간적인 삶을 전유하는 것은 그러므로 모든 소외를 긍정적으로 폐지하는 것이자, 인간이 종교, 가족, 국가 등으로부터 자신의 인간적인, 즉 사회적인 실존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종교적인 소외는, 의식의 영역에서만, 즉 인간의 내적 삶의 영역에서만 일어나지만, 경제적 소외는 실제 삶의 소외이다. 그래서 그것의 폐지는 두 영역 모두를 포괄한다.”(맑스,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

 

그런데, 일정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거에 대해 말할 때는 이데올로기들을 이야기하고,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 말할 때는 계급의식을 계속 이야기한다. 이것은 단순히 용어상의 차이인가?

실제로, 우리의 관심이 근본적으로 다른 두 과정들을 정밀하게 특징짓는데 있기 때문에, 이러한 두 가지 다른 용어들을 쓴다. 과거의 혁명적 계급들의 이데올로기적 과정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 발전 사이의 차이는 그들이 일반적으로 공유하는 얼마 되지 않는 요소들에 비해서 훨씬 더 중요하다. 게다가,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바로 그 진정한 본질과 근원이 단순한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것을 막는다.

이데올로기와 계급의식 사이의 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에 기반을 둔 경제적 하부구조의 존재를 사회사상의 수준에서 표현한다. 이러한 하부구조에서 지배적이며, 경제적 권력, 생산수단과 물리적 힘을 가진 그러한 사회적 계급은 그 지배를 정당화하는데 필수적인 이데올로기적 수단들까지도 마찬가지로 소유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데올로기적 “반영”을 이야기할 수 있다. 심지어 지배계급의 사상이 현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들이 실체없는 애매한 개념들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들은 여전히 훨씬 더 결정적인 현실, 즉 경제적인 현실과 그 법칙을 수동적으로 따라야만 한다. 그래서 부르주아지가 봉건제에 맞선 혁명적 투쟁의 과정에 있을 때조차도, 부르주아 사상의 비판적 행동은 그 최종적 분석에 이르기까지도 오직 빙산의 일각이었을 뿐이었다. 실제 혁명적 행동은 더 낮은 곳, 즉 사회의 토대에서 발생했었다.

비록, 계몽기의 철학자들의 저작들 - 프랑스 백과전서파의 저작들, 볼테르, 디데로, 몽테스큐, 칸트, 로크 등등의 저서들 –이 부르주아지의 혁명적 투쟁에 그리고 그것이 정치적 규칙을 강제하는 데에 신뢰성을 주는 한편으로 중세의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를 심각하게 약화시키는데 공헌한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들의 공헌들은 항상 이미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경제적 변혁 과정을 뒤따른 것뿐이라는 점도 진실이다. 부르주아지의 선각자들이었던 모든 천재들(로저 베이컨, 폼포나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에라스무스, 토마스 모어 등)은 생산력의 발전 정도와 봉건적 사회관계 사이에 점점 더 극악해지는 모순들을 표현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그 혁명적 역할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지가 경제적 힘을 획득한 이후로는 일종의 정당화처럼 보였다.

 

자본주의는 19세기에만, 그러니까 그 역사적 궤적의 끝에서만, 그 투쟁의 역사적 강령을 구체적으로 결정하는 데 성공했다. 바로 그 승리의 전야까지 자본주의의 역사적 지성은, 그것의 경제적 지위가 구 사회 내에서 발전하고 그 지속적 발전을 위한 길을 명확히 하는 그 만큼 점진적으로 실현되었다.” (Bilan , 5. 19343, 우리의 강조)

 

반면에,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은 어떤 경제적 하부구조에도 기반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경제적 권력이 전혀 없고, 새로운 착취 형태의 확립을 그들의 목표로 삼을 수 없다. 심지어 사회의 지배 계급으로서 스스로를 확인할 때조차도, 프롤레타리아트는 착취 계급이 되지 않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착취의 영속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꾸며내도록 강요당할 어떠한 경제적 이해관계도 갖고 있지 않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비록 그들이 원한다 하더라도,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를 창조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계급의식의 정치적 성취물은 그것이 절대적인 사상으로, 이데올로기로 굳어버리는 순간, 그 혁명적 성격을 잃고, 부르주아적 편견의 혼잡한 체계들로 통합되어 버린다.

이러한 상황의 귀결들은 다음과 같다:

 

1. 과거의 사회사상의 진보와 대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은 구 사회의 경제적 변혁에 종속되어 있지 않으며, 그것에 수동적으로 따르지도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아무런 경제적 특권도 갖고 있지 않기에, 기존 질서의 물질적 전복으로 나아가기 이전에 처음부터 의식적이고 정치적인 운동을 통해서 스스로를 주장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 즉 혁명적 강령은 계속 전진하여, 기존 사회의 전복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

자본주의처럼, 프롤레타리아트 역시 계급으로서의 특정한 원칙들에 대해 기반을 설립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기반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롯되는 반대, 동요, 봉기들을 흡수하여, 그것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확립을 지향하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자본주의가 체계적이지 않고, 무질서적이며, 모순적인 형태의 역사적 강령을 정교화하면서 전진할 수 있었다면, 반대로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 투쟁의 성장에 필수적인 정치적 기반을 먼저 설립해야 한다.”(Bilan519343)

 

공산주의 의식은 현실 상태를 반영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반드시 그 스스로를 혁명 과정에서 능동적 요소로 표현해야한다.

 

2. 이데올로기는 지배적인 사회 질서를 그대로 둔 채, 불변적이라 선언함으로써 보존하려한다. 권력에 있어서도, 착취계급은 신비화와 독단론을 영속화하는데 모든 관심을 쏟는다. 이 때문에 부르주아지는 소외를 기뻐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권력을 인식한다. 현실은 은폐되고, 사회관계의 역사적 성격도 베일에 가려진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적 상황은 부르주아지의 상황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그 상황은 부르주아지가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게 ‘이해’할 가능성을 제공한다. 결국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상황에 반대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모든 이들로 하여금 자본주의 사회의 영원한 본질을 믿게 만든 자본주의의 자기만족적인 이데올로기적 가면을 찢어버릴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상황을 변혁하고, 그 착취를 끝내기 위해 필요한 첫 번째 조건들 중 하나는, 자본주의는 잠정적이고 역사적이며 변혁될 수 있다는 특성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착취를 규정하는 경제적 사회적 법칙들이 인간 행동과는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자연법칙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일시적인 현실을 반영하는 법칙임을 부분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그 스스로 착취에 반대하여 정면으로 나서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오직 그렇게 이해함으로써만 생산자와 생산수단 사이의 분리를 폐지하고, 경제에서 하나의 사물처럼 자신에게 대상화된 그 자신의 힘에 대한 지배력을 획득하여 이러한 현실을 변혁 할 수 있다. 현실로부터 그것의 ‘구체화된’ 겉모습을 분리하고 그 물질적 토대를 분쇄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있어서 사활이 걸린 문제다.”(F. Jakubowski,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사고에서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Ideological Superstructures in the Materialist Conception of History)

 

다소 추상적인 이러한 말 뒤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담겨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에 대항한 투쟁에서 도움이 될 만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의 상황을 변혁하기 위해서 그러한 상황을 신비화의 껍질을 깨고 이해하는 것을 발전시켜야 한다. 계급의식을 통해서 그들은, 당대의 자본과 노동의 관계가 일단 한 번 확립된 뒤 영원히 지속되는 어떤 추상적인 것들 간의 관계가 아니라, 바뀔 수 있고, 바꿔야만 하는 살아있는 사회관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모든 이데올로기들은, 그것이 어떤 경향이든 간에, 절대로 이러한 전반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3. 이데올로기의 출발점은 무엇인가?

사유 재산으로서 묶여진 생산수단은 부르주아지에 속한 개개인들을 고립시킨다. 개별 자본가, 국가, 경쟁하는 개인들, 상품의 개별 소유자, 이러한 것들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출발점이다. 이데올로기는, 비록 한 사회 계급의 지배를 매우 잘 보여준다고 할지라도, 진정으로 집단적인 산물이 될 수 없다. 하나의 거울이 조각나서 생긴 수 천 개의 파편들이 모두 같은 이미지를 비추듯이, 이데올로기는 스스로를 모든 개인에게 강제한다. 사회는, 그 자체에 의해 제어되지 않고 외부적 힘처럼 보이는 경제적 상황에 굴복하듯이 마찬가지로 지배 이데올로기에도 굴복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서로 경쟁하는 개인들은 모두 같은 이데올로기적 위협, 같은 환상, 같은 편견과 도그마에 종속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개인은 다른 사람들을 타인으로 그리고 경쟁자로 간주하며, 각자는 그 자신만의 고유한 개성과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한다. 행동과 사상에서 진정한 연대(real solidarity)는 자본주의 사회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관점에서는 생산수단의 집단화와 인간관계의 사회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정말 어쩔 수 없이 혼자이고, 그 모두 부르주아지 지배의 산물인 그의 생각과 그의 삶의 방식은 진정으로 집단적인 운동 속으로 진입할 수 없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는 생산 과정에서 연합되어 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의 조건들로 인해서 연합하여 연대할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오직 투쟁 속에서 연합함으로써, 노동 과정에서 연합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결실을 통해서만 그 자신들의 공동의 적, 자본을 압박할 수 있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은 그들의 투쟁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 자신들의 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에는 개별 노동자들이, 그 다음에는 한 공장의 노동자들이, 또 그 다음에는 한 노동 부문의 노동자들이, 한 지역에서, 그들을 직접 착취하는 개별 부르주아에 대항하여 투쟁한다. (…) 그러나 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프롤레타리아트는 단지 수적으로만 증가하는 것이 아니다, 더 대규모로 집결되고, (…) 개별 노동자와 개별 부르주아 사이의 충돌은 점점 더 두 계급들의 충돌이라는 성격을 띤다.”(『공산주의 선언』)

 

프롤레타리아트만이 국제적 연대(international solidarity)에 기초한 하나의 계급을 구성할 수 있다. 이러한 연대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존재하게 될 사회관계의 선구체로서, 투쟁에서 자생적으로 분출한다. 이것은 믿기 힘든 현상이다. 노동자들은, 어제는 지옥 같은 노동의 압박으로 말하지도 않고 심지어 때때로 서로 간 경쟁을 느끼다가, 어느 날 갑자기 투쟁의 열기 속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벽을 허물고 서로를 돕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들의 강고한 연대를 깨려면 노동조합과 경찰 등, 부르주아지의 모든 권력이 필요할 만큼, 노동자들은 그렇게 강하게 연합되어 있음을 느낀다. 이것이야말로 계급의식의 출발점이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있어서 정치적 성찰의 출발점은 개체로서 개인(the individual as an individual)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일부로서 개인(the individual as a part of a whole), 계급의 부분으로서 개인에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노동자나 저 노동자가 무엇을 생각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어떤 의식을 가져야 하는가에 있다. 계급의식은 총체(totality)로부터 시작하며, 고도로 집단적인 과정이다.

 

4. 그러나 그러한 총체, 즉 프롤레타리아 계급 의식이 그 안에서 비롯되는 바로 그 계급은, 특질 없는 대중이 아니며, 부르주아 사회를 구성하는 그 모든 것들 중의 평범한 한 부분이 아니다. 종파나 수도회 또는 종교 단체들 중에서도 그들의 삶과 사상에서 총체적 공동체를 획득했다고 주장하는 것들이 있다. 부르주아지도 프롤레타리아트의 공격에 직면하면 자신들끼리 ‘연대’할 수밖에 없고, 농민들도 크고 작은 집단체를 구성해 낼 수 있으며 … 실제로, 이러한 다른 계급들 중 그 어떤 계급이나 종파도 프롤레타리아 연대의 수준에 이를 수 없는데, 이는 단지,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관계의 새로운 유형의 담지자로서 하나의 역사적인 계급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에 적대적인 하나의 역사적인 계급을 구성하며,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살아있는 부정(the living negation)이다. 계급의식 또한 이러한 역사적 차원을 포함한다. 이것은 단지 주어진 상황의 이데올로기적 반영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단순히 자본주의의 파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계급투쟁은 자의적인 상상의 산물일까? 그 반대다! 노동자들이 획득하고, 그들의 투쟁을 앞으로 추진하게 하는 계급의식은, 완벽하게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과정이다. 그것은 매우 정밀하게 물화되는 능동적인 힘으로서, 생존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투쟁의 생생한 경험을 요구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론적으로는 풀리지 않았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그 스스로의 실천 속에서 해결해 나가며, 낡고 닳아빠진 사상은 폐기하고 다른 사상을 소생시킨다. 그리고 다시 질적 단계 하나를 통과해 나가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들의 과거 경험에서부터 정치적 이론적 교훈을 끌어내야 한다.

1920년대 혁명적 물결 속에서 계급의식의 뛰어나고, 실천적이고, 생동하는 특질이 확인되었다. 러시아, 독일, 헝가리 혁명 모두에서는 풍요롭게 넘쳐나는 생각들이 계급 안에서 강하게 분출했다. 투쟁이 발전함과 동시에, 모든 장소에서 노동자 평의회(worker’s councils)와 총회(general assemblies)가 나타났고, 모든 곳에서 즉흥적 화합과, 진실한 토론, 생각과 제안들의 무수한 교류가 발생했다. 어제의 노동자들은 자본주의가 그들에게 부과한 심각한 무지 속에 침체되어 있었지만, 오늘의 노동자들은 실천적인 지성과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대담함을 보여주는 연설자가 된다. 자본의 지배에 침묵하며 속박되어 있던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별안간 연설하기 시작하여, 모든 곳에서 수많은 생각과 사상들을 교환하고 정보를 모으며, 함께 정치적 토론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주도성과 창의력을 생생하게 증명한다(…) 정치적인 환경은 열정적인 음조를 띠고, 교류와 성찰을 위한 수많은 통로들이 창조된다(…) 계급의식이 집단적이고 실천적으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의 발전을 확인하기 위해서, 폭동의 시기나 혁명적 시기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착취에 대한 일상적인 저항은, 현실 투쟁의 결실이자, 마찬가지로 계급 단결과 계급의식의 확장을 위한 비옥한 지형을 형성한다. 우리는 1920년대 혁명적 시기와 동일한 현상들, 즉 모든 열정적이고 생동하는 생각들, 토론들의 갑작스런 폭발들이, 하지만 좀 더 소규모로 이뤄지는 것을 본다.

이 과정이 기계적이거나 균질적이지 않다는 점을 잘 이해해야 한다. 노동자들의 회합들에 의해, 자본주의에 대한 일상적인 투쟁들을 통해 얻어진 의식 수준으로는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제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계급투쟁은, 프롤레타리아트 내에서 의식화 과정과 마찬가지로, 변동적인 운동이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새롭게 하지만 또한 동시에 퇴조할 수도 있는 물결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힘과 실천은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의 사상에 종속된 채 남아있는 한 휴면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잠재력을 효과적인 위력으로 바꾸는 것이 바로 계급의식이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실천을 통해서, 자신들이 하나의 계급을, 즉 자본에 의해 착취되는 특정한 계급을 형성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러한 착취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자본에 대항해 싸워야만 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자신들의 투쟁을 통해서 경제체제를 이해하고, 그들의 적들과 그 동맹들이 발견될 그 사회를 알게 된다.

 

대중의 진정한 교육은 대중 스스로의 독립적이고 정치적이며 특히 혁명적인 투쟁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오직 투쟁만이 착취받는 계급을 교육한다. 오직 투쟁만이 그 고유한 힘의 정도를 드러내고, 그 지평을 넓히며, 능력들을 높이고, 정신을 명확히 하며, 그 의지를 단련시킨다.”(레닌, 1905년 혁명에 대한 강연』 1917122, 1905년 혁명으로 재판)

 

5. 계급의식은 프롤레타리아트 자신들의 투쟁에서 시작한다. ‘경제적인’ 것과 ‘사회회적’ 인 것, ‘정치적인’ 것들 사이에 분리가 있다고 가정하는 이데올로기와 대조적으로, 계급의식은 경제적 정치적 투쟁이 한 번에 그리고 동시에 기반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분리될 수 없다.

 

정치적, 경제적 파업, 대대적 파업과 부분 파업, 시위적 파업과 전투적 파업, 각 산업 부문의 총파업과 개개 도시의 총파업, 평화적 임금 투쟁과 거리의 대량 학살, 바이케이트 투쟁 –이 모든 행동들은 이것에서 저것으로 넘나들며, 나란히 발생하기도 하고, 또 순환하여 일어나기도 한다 - 이것은 현상들의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바다이다.”(로자 룩셈부르크,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 (Massenstreik, Partei und Gewerkschaften)

 

부분적이든 전면화된 투쟁이든 간에, 오직 경제 파업과 정치 파업 사이의 밀접한 연계를 통해서만 이후의 투쟁의 발전, 국제적 일반화, 그리고 계급의식의 풍부화가 가능하다.

 

두드러진 특징은 혁명의 시기에 경제 파업이 정치 파업과 결합하는 방식이었다. 이 두 가지 형식의 파업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 때에만 비로소 그 거대한 힘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착취 받는 광범위한 대중들은, 어떻게 다양한 산업 부문들의 임금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조건들을 자본가들이 개선하도록 강제하였는지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혁명적 운동에 휩쓸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러시아 대중들을 새로운 정신으로 물들였다.”(레닌, 윗글)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생활 조건들의 악화에 저항함으로써 자신의 힘에 대한 감각과 의식을 획득한다. 그 투쟁과 의식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자신들의 사회적 획득물들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다시 강탈되는 것을 지켜볼 때 확장된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죽음의 위기라는 것, 이러한 곪아가는 체계는 노동자계급에게 어떤 것도 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자본주의는 이미 진보적 체계가 아니라는 것을 차츰 주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가 그것들을 진정으로 의식하게 되는 것은, 더더욱 급진적인 방법으로 투쟁하고, 내핍과 전쟁을 부추기는 자본주의의 추동력을 거부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가 엄격하게 경제 투쟁에만 머물러 있는 한 그 투쟁은 부분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다. 투쟁에서 만들어진 요구 수준에서 일련의 ‘패배’들(, 부르주아지가 오늘은 허용하지만 내일은 다시 빼앗아가는 것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과 정치적 통일의 수준에서는 점차 승리로 변화되어 간다. 투쟁의 운동은 조금씩 조금씩 사회 전체에 대한 정치적이고 혁명적 문제제기로 향한다.

계급의식이 본질적으로 계급의 경험의 산물이자 실천적 투쟁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진실로 계급 전체의 행동이 대체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혁명 의식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해방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 자신들의 일이다. 이것은 경직된 생각들, 계급 외부에서 이미 만들어진 처방들을 수집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이와 유사하게도,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자신의 상황에 대해 갖는 의식은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신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다. 프롤레타리아 의식은 계급으로서 자신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인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매우 단순히, 프롤레타리아트가 생산 과정에서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의식할 때 그들은 자본주의 체계의 복잡성과 야만성의 본질에 대한 모든 것을 의식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계급의식의 이러한 발전은 항상 계급투쟁과 동의어다. 계급의식은,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적 계급으로서, 의식적인 존재로서 스스로의 본질을 확인하는 것이다.

조직, 그리고 계급의식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 발전과 이데올로기를 구분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았다. 그 전에, 우리는 왜 공산주의의 특성들이 프롤레타리아트 의식을 불가결한 요소로 만드는 지 이해하려 했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답해야 한다. : ‘계급의 의식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계급의식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계급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첫 번째 요소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 계급으로서 본질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과거의 다른 혁명 계급들과 마찬가지로, 낡은 정치적 경제적 질서들을 전복하려면 그들 스스로 의식적으로 조직해야한다.

 

인간의 모든 활동들처럼, 계급 행동은 특히 그것이 사회 운동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조직된 행동이다. 사실, 모든 계급은, 특히 혁명 계급은, 스스로 조직하는 경향을 그 자신 속에서 발생시킬 때에야 비로소 그 자신의 살아있는 실체를 나타낸다. 이 경향은 즉각적이고, 실천적이며, 물질적인 필요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존재와 현존과 미래를 성찰하고 이해하고 의식할 좀 더 일반적인 필요성에도 부합한다.” (『계급의식과 조직화 (Class consciousness and Organisation)ICC바타글리아 코뮤니스타 (Battaglia Comunista)의 주도로 조직된 제2차 국제대회(IInd International Conference)에 제출한 문건, 197810; 좌익 공산주의 그룹의 두 번째 대회 (Second Conference of Groups of the Communist Left) 팸플릿 참조)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스스로를 조직하는 것과 의식은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 전체를 떠맡아야 할 사명을 띠지만, 이전의 계급들과는 달리, 그들이 미래에 사회를 지배할 것임을 전주곡처럼 알릴, 권력의 어떤 경제적 토대도 현존 사회 안에 갖지 않는 유일한 계급이다. 프롤레타리아가 가진 유일한 물질적 힘은 그 조직화이다. 이렇기 때문에 조직화는 다른 계급들에게 있어서보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있어서 훨씬 더 그들의 투쟁의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조건을 이룬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조직화 역량은 즉자적 계급(class-in-itself)에서 대자적 계급(class-for-itself)로 나아간, 자본주의 생산의 간단한 경제적 범주로부터 역사적 계급으로 나아간 정도를 가늠케 하는 척도이다. 같은 이유로, 의식은 이전의 혁명 계급들의 투쟁보다 프롤레타리아 투쟁에서 훨씬 더 근본적인 요소인 것이다.”(『계급의식과 조직화』, 윗글 52)

 

맑스가 말했듯이, “노동자들이 가진 유일한 사회적 힘은 그들의 숫자상의 우세이다. 그러나 그 힘은 단결되지 않으면 분쇄 당한다. 노동자들의 분열은 그들의 불가피한 경쟁에 의해 생기고 유지된다.” 이러한 분열과 경쟁을 극복하고 자본주의에 대항해 최종적으로 승리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에게는 하나의 선택 밖에 없다. 그들의 공통된 이해를 위해 조직하여 함께 투쟁하는 길 밖에 없다. 노동자들은 그들이 생산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인해서 단결과 연대에 기반하여 조직할 수 있다. 그러한 조직화는 사실 가공할 힘이다.

 

공동체 정신은 늘 혁명의 진전에 주요하고 필수적인 힘이었다. 이러한 진전은 노동자들의 연대, 상호결속, 그리고 단결의 성장 속에 체화된다.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노동자들의 새롭게 성장하는 권력은 투쟁을 통해 획득된 새로운 특징들이다. (…) 연대와 헌신이라는 덕목 그리고 사회적 투쟁에서 만들어진 공고한 단일체로서 행동하려는 충동은 공동 노동(common labor)에 기반하게 될 새로운 경제체제의 바로 그 토대이다.” (판네쿡, 『노동자 평의회(Workers’ Councils), 1941)

 

그러나 그들의 조직화와 연대만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의 붕괴를 결정짓지 못한다. 전투적인 의지와 집단적인 의식으로써 이러한 조직화와 연대를 유지하고 끈끈하게 결합할 필요가 남아있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손에 성공을 위한 한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 그것은 그들의 숫자다. 그러나 연합에 의해 단결되지 않고, 의식에 의해 지도되지 않으면, 숫자상의 우세로는 능가할 수 없다. 과거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해방을 향한 투쟁 속에서, 다른 나라들의 노동자들 사이에 우애적인 연결고리들(fraternal links)이 존재해서, 그들이 함께 서로 어깨 걸고 연대하도록 자극해야 한다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연결고리들을 무시한다면, 그 대가로서, 모든 분열된 시도들은 공통적으로 패배하고 말 것이다.”

(맑스, 『국제 노동자 연합이 전 세계의 노동자들에게 한 연설』, 1864)

 

통일된 조직, 집합적인 기능, 노동자들의 생생하고 능동적인 참여, 정치적 의식, 연대 (…)등은 모두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스스로를 혁명적 계급으로 구성해 내는 경향 속에 결합된 여러 요소들이다. 조직화와 계급의식은 함께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 분리 될 수도 없는 것이다. 바로 정치적인 이해력의 발전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화를 강화하여 하나의 혁명 계급으로 만든다. 계급이 자기 조직화에서 이뤄낸 진보는 그 의식을 풍부하게 한다. 이렇기 때문에, 부르주아지의 관점을 수용함으로써 혁명적 삶의 마지막 불꽃을 잃어버린 프롤레타리아 조직은 결국 더 이상 운동의 최종적 목표를 지켜내지 못하고, 더 이상 노동자들의 실천으로부터 새로운 피를 수혈 받을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조직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송장과 다름없으며, 그래서 투쟁의 새로운 혁명적 물결 속에서 반드시 일소되고 대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계급의 조직

 

역사에서 노동계급이 창조하는 조직 유형은 자본주의 자체가 거치는 상이한 단계에 반드시 연관되어 있고, 그 단계가 만들어내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에 부과하는 목적들에 따라서 변한다.”(『계급의식과 조직화』)

 

19세기 초 노동자들이 기계와 그 기계를 자본주의가 이용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구분하는데 익숙해졌을 때(노동자들이 일으킨 처음 폭동은 기계를 부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공격 목표를 물질적 생산수단으로 잡지 않고, 사회 체계 자체로 잡았을 때, 그들 자신을 재편하려는 최초의 시도가 실제로 나타났다. 단체 결성의 권리를 위한 최초의 투쟁이 발생한 것이 바로 이 때이다. 유토피아주의자들은 이러한 최초의 계급투쟁들에서 비롯된 이론가들이었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조직된 운동들에 개입해서 그러한 운동들의 정치적 차원을 강조하려 했다. 그러나 그 자신들의 유토피아적 성격과 계급투쟁 자체의 상태 때문에 그 이론들은 주위를 맴돌 뿐이었다.

 

봉건 사회가 전복되어가던 전반적 소요의 시대에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 자신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직접 관철시키려고 행했던 최초의 시도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프롤레타리아트 자체가 발달되지 않은 상태였고, 또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의 물질적 조건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절히 말해서, 소위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체계들, 즉 생시몽, 푸리에, 오웬 등등의 체계들은 앞에서 말한 적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투쟁이 발전하지 못한 초기시기에 출현하였다.” (『공산주의 선언』)

 

후에, 차티스트 운동(Chartist movement)과 접촉하게 되면서, 그리고 노동조합주의의 발전에 영향을 받게 되면서, 프롤레타리아트와 그들의 가장 의식적인 인자들은 역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을 위한 토대를 설립할 수 있었다. 역사적 유물론은 탈신비화된 방식으로 현실을 이해하는 도구이자, 마찬가지로 행동과 투쟁 방법의 기초다. 그러한 의식의 강화를 통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비밀스럽고 음모적인 모임이었던 <정의로운 자들의 모임(the society of the Just)>1847년에 선동과 투쟁의 혁명적 조직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1년 후,공산주의 선언(Communist Manifesto)』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치 조직( an autonomous organistaion)과 정치 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제시했다. 노동조합과 정치조직들의 결합된 노력들의 결과로, 노동자계급은 정치 운동 내부에서 자신들의 투쟁을 부르주아지의 민주주의적 조직과 그 사상과는 구분되게 점차적으로 구획 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와 혁명적 인자들에게는 여전히 이해(understanding)라는 결정적인 요소가 부족했다. 1인터내셔널은, 그 설립 시기(1864)가 임박한 권력 장악을 가져오게 될 “사회적 혁명”의 시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항상 최종 목표를 내다보면서도 경제적 요구를 위해서 투쟁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혁명적 조직의 임무들과는 구별되는 임무들을 계급의 단위기관들(unitary organs)에게 부과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시기를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었기에, <국제노동자협회>는 노동자들의 연합들과 노조들 그리고 정치적 조류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혁명이 아직 의제가 아니라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의식은, 2 인터내셔널의 발전에 이르러서야 노동자 운동의 실천 속에서 나타날 수 있었다. 그리고 운동의 가능성과 필요성에 적합한 조직화의 두 가지 형식들이 마침내 의식적이고 체계적으로 건설될 수 있다.” (R.빅터, 『프롤레타리아와 그 전위(The Proletariat and its Vanguard), 국제 혁명( Revolution Internationale), 17, 1975)

 

2인터내셔널과 더불어, 그 시기에 대한 이해,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단위조직과 정치조직 사이의 구분들이 좀 더 명확해졌다. 부르주아지 질서의 결정적 전복은 투쟁의 당면 목표가 아니었다. 그 시기에 해야 할 일은 정치적 경제적 개량을 위해 투쟁함으로써 최종적 투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들 스스로를, 한 쪽에서는 단위적인 경제 조직(a unitary economic organisation), 즉 모든 노동자들이 노동자라는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가입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어야 하고,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성원의 기준이 그 사회적 출신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정치적 동의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 조직(a political organisation)을 만들어야 했다. 이 조직은 또한 의회적 조직(a parliamentary organisation)이었다. 이것은 노동조합, 협동 조직 등과 대중 정당을 만드는 문제였다.

확실히, 노동자 투쟁의 경제적 정치적 성격은 여전히 하나의 동일한 과정에 묶여 있었다. 이렇기 때문에,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에 만들어진 구분과 ‘최소’와 ‘최대’ 강령 사이의 엄밀한 분리는, 2 인터내셔널의 이론가들이 이러한 구분을 이론화시킨 후(베른슈타인에게 운동이 모든 것이고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다), 계급의식의 발전에 진정한 장해가 되었다. 이런 발상은,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 물질적인 조건들이 실현되자마자 사회민주주의가 자본주의 늪에 빠지는 길을 ‘촉진시켰’다. 그 이후로 계속, 계급 조직의 새로운 형식이 요구되는 그 만큼 계급의식의 새로운 성숙 과정도 요구되었다.

1차 세계대전 말 특히 러시아와 독일에서 폭발한 혁명 운동은, 부르주아 지배의 결정적 파괴라는 역사적 의제에 마침내 도달한 그 새로운 책무에 적합한 새로운 조직 형태를 창조함으로써, 바로 그곳에서 그때에 ‘최대 강령’을 즉각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1905년 러시아의 계급 운동에서 최초로 자생적으로 발생한 노동자 평의회는, 계급 조직의 특별한 형식으로서, 자본주의 국가에 대항한 투쟁 속에서 모든 노동자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재창조될 조직 형식임을 보여주었다. 노동자평의회 - 공장들과 노동자 거주 지역들(working class neighborhoods)에서 형성된 회합체 –는 프롤레타리아트 스스로가 자신들의 투쟁을 이끌 수 있도록 해 주는 조직 형태였다. 평의회는 물리적으로 노동자계급 전체를 재조직하며, 동시에 투쟁의 경제적 정치적 성격을 포괄했다. 이러한 투쟁의 두 가지 측면들은, 그러므로, 비록 순간적일지라도 서로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R.빅터,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전위』)

그러나 이 모든 것 중에, 혁명가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대중 정당’이라는 조직화 형식은 쇠퇴하는 자본주의 속에서 그 본질적 기반을 잃었다. 그 기반은,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 의회에 참여하여 자본주의로 하여금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개량을 단행하도록 강제할 가능성과 필요성이다. 부르주아 국가는 그 모든 형식들에서 파괴되어야 하고, 이러한 파괴의 행위는, 계급의 한 분파나 소수가 아무리 깨어있다 할지라도 그러한 한 분파나 소수의 업무일 수가 없다. 그것은 노동자계급 전체의 일이어야 한다, 노동자 평의회의 일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상황과 시기에 혁명가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평의회가 경제적 투쟁과 정치적 투쟁을, 계급의식과 조직화를 합치한다면, 혁명가들은 왜 존재해야 하는가? 심지어 우리는, 평의회가 계급이 자본주의의 착취와 이데올로기를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모두 극복할 수 있도록 해 준다고 할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평의회를 조직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의 멍에로부터, 특히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멍에로부터 점진적으로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다. 평의회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그 자신에 대한 의식 그리고 그 계급의식을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표현하려는 의지가 점차 실현된다.”(<독일 일반 노동자 연합(AAUD)> 3차 대회의 테제, 1920)

 

쇠퇴 시기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왜 가장 전투적이며 의식적인 요소인 공산주의 전위로 구성된 소수 조직을 발전시키는가?

그러한 문제의 대답은 자기-조직화 과정과 계급의식의 발전 과정 전반에 놓여있음에 틀림없다. , “과정”이라는 용어는, 계급의식이 어떤 특정한 시기에 완결되고 완벽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난데없이 등장하지도 않으며, 계시처럼 노동자들 위에 내려오지도 않는다. 계급의식은 점진적으로 단련되며, 이 과정은 매우 길고 고통스럽다.

 

과정으로서 계급의식

 

비록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가 평의회로 조직되어 공산주의 혁명을 끝까지 수행할 책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노동자들 속에서 이러한 필요성에 대한 의식이 오로지 변하지 않고 동질적 방식으로 존재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프롤레타리아트를 평의회 안에 단위적으로 조직하는 것 또한 항구적인 현상이 아니다.

공산주의에 도달하기 위해서, 평의회에로 스스로를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식에 도달하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험난한 길을 걸어야만 한다. 심지어 투쟁하고, 파업하고, 자본주의 착취에 저항하겠다는 간단한 의지조차도, 노동자계급 안에서 항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소강이나 낙담 또는 환상의 시기가 투쟁의 물결을 잠식시킬 수 있고, 물러서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만약 부르주아지가 노동자들의 운동을 유혈 진압함으로써 투쟁의 퇴조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혁명에 대한 전망은 좀 더 먼 미래로 밀려나게 된다.

계급투쟁의 과정, 프롤레타리아트가 스스로를 혁명적 계급으로 형성하는 과정은, 점진적으로, 평탄하지 않게, 엎치락뒤치락 전개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요한 투쟁이나 파업이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불타오르는 것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노동자 투쟁의 세계화는 자본주의의 위기의 세계화의 압력 아래 점차로 진행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지, 어떻게 파업을 혁명으로 이끌어야 하는지 동질적인 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 어떤 부문들, 어떤 노동자들은 더욱 단호하며, 더욱 전투적일 것이다. 반면 다른 이들은 계속 망설이며, 그들 스스로 끝까지 투쟁에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해답은 분명하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소외가 극에 달하도록 내몰린 계급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지가 그 이데올로기를 강하게 주입하고, 경쟁을 통해 분리시키는 계급인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자신을 통일되고 의식적인 계급으로 구성할 때 지향하게 되는 목표는, 하나의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산출하는 자본주의의 조건들과 모순된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와, 경쟁하는 개인으로 원자화되거나 경제적 요구를 위해 처음 투쟁을 시작한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는 변증법적 모순이 존재한다. 그 모순은 자발적이고 의식적이며, 조직적으로 행동하는 계급 속에서 절정점에 이른다.

 

사회주의 혁명의 근본적인 어려움은 이러한 복잡하고 모순적인 상황에 있다. 한편으로, 혁명은 오직 노동자계급의 절대 다수의 의식적인 행동을 통해서만이 실현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계급의식의 발전은 사회에서의 노동자계급의 조건들에 반대하여, 즉 그들의 역사적 혁명적 과업을 생각하는 노동자들의 의식을 방해하고 끊임없이 파괴하는 조건들에 반대하여 이루어진다.”( ‘당의 본질과 기능에 관하여(On the Nature and Function of the Party)’, 『국제주의』(Internationalisme), 38, 1948, Bulletin d'etude et de discussion, 재판, 6, 1974)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투쟁에서 어떤 일치 단결에 이르든 간에, 마치 한 개인이 행동하듯이 그렇게 똑같이는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목표를 향해서 마치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그렇게 기계적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의식을 이데올로기의 고정되고 얼어붙은 원칙이나 이미 준비된 일련의 처방에 따라서 발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사회적 존재의 물질적 조건과 연결된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과정 속에서만 그들의 상황에 대해 의식하게 된다. 근본적으로 투쟁의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실천적이고 이론적인 무기를 연마한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들 자체의 원천은 매우 길고 복잡한 사회적 과정 속에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페테르스부르크 사건에 크게 자극을 받아 1월에 갑작스럽게 일으킨 총반란은 외적으로는 절대주의에 대한 혁명전쟁을 선포하는 정치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 최초의 전면적인 직접 행동은 내적으로 훨씬 더 강력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마치 전기충격과도 같이 몇 백만의 사람들에게서 계급감정과 계급의식을 처음으로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계급감정을 자각하면서 몇 백만을 헤아리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은 자본주의의 사슬에 묶여 몇 십 년 동안 끈기 있게 견뎌 왔던 사회적 경제적 존재 조건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것인가 하는 것을 아주 갑작스럽고 철저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사슬을 흔들고 잡아당기려는 자생적이고 전반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

지각없는 사람들만이 무정부주의적 계획에 따라 한 번 벌인 ‘장기간’의 총파업으로 절대주의를 한방에 파괴할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다. 러시아의 절대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분쇄해야 한다. 그러나 절대주의를 분쇄하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높은 수준의 정치 교육과 계급의식, 그리고 조직화가 필요하다. 이 모든 조건들은 소책자나 전단으로는 충족될 수 없고 오직 살아 있는 정치 학교인 투쟁을 통해서만 그리고 투쟁 속에서, 혁명의 연속적인 과정 속에서만 마련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절대주의는 단지 적절한 ‘노력’과 ‘인내’ 속에서 원하면 언제든 분쇄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절대주의가 무너지는 것은 단지 러시아 사회 안의 사회적, 계급적 발전이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이처럼 겉으로는 단순하고 순전히 기계적인 것으로 보이는 문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절대주의의 타도는 오랫동안의 연속적인 사회과정이며, 그 해결책은 사회 지반을 완전히 침식하는 것이다. 최상층은 최하층으로 바뀌고 최하층은 최상층으로 바뀌어야 한다. 겉으로 보이는 ‘질서’는 혼돈으로 바뀌어야 하고 겉보기에 ‘무정부주의적인’ 혼돈은 새로운 질서로 바뀌어야 한다.”(로자 룩셈부르크,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

 

프롤레타리아 의식은 물질적 경제적 조건의 부패와, 자본주의의 공포와 모순의 노출, 사회적 긴장의 악화에 의해 발전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옥한 지형이 휴경지로 남겨져 있으면 안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그들의 정치적인 이해(understanding)를 일반화시키기에 좋은 상황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행동으로부터 충분한 교훈들을 끌어냄으로써 그 투쟁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일반화하는 것은, 심지어 투쟁의 침잠기에도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러한 시기에, 프롤레타리아트는 과거의 경험을 반성해 볼 수 있고, 그들이 경험해 왔던 승리와 패배의 대차대조표를 그려서, 미래를 준비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계급의식의 발전은 주어진 상황의 즉각적인 반영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이론적 과업을 실행하기 전에 다음 투쟁의 물결을 기다리며 앉아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 의식의 발전은, 계급의 다수 속에서 동질적이고 지속적으로 살아있을 수는 없을 지라도, 끊임없는 이론적 성찰, 과거 경험의 비판을 요구한다. 그것은 공산주의 강령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이해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정련을 포함한다.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가 끊임없는 성찰과 그 정치적 성취들의 적극적인 일반화를 수행해 낼 수 있는가?

한 가지는 명확하다. 모순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하기에,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러한 일들을 전체 구성원들에게 맡길 수 없다. 사회적 안정기에, 절대 다수의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 이데올로기의 압력에 종속되어 있다. 정치적 성취들을 일반화하고 계급의식을 균질화하는 책무는 계급의 가장 결정적이고 가장 전투적인 인자에게 돌아간다. 이러한 분파들 덕분에, 즉 그 자체의 이러한 일부(정치적인 관점으로 정의된) 덕분에, 프롤레타리아트는 의식에 있어서 즉각적인 우연성과 부분적인 경험을 극복함으로써 의식에서의 성취들을 집단화할 수 있다. 이러한 분파가 운동의 목적을 더 일찍 이해했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노동자계급은 그 경향을 강화하여, 자신들의 투쟁을 파편화하고 약화시키는 고립과 분열을 분쇄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방법으로, 강력하고 의식적인 계급은 자본주의에 대항하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이러한 계급의 요소들은 그들의 책무를 만족스럽게 처리하기 위해, 그들 스스로를 혁명적인 공산주의 조직으로 재편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그들의 계급투쟁 속에서 본질적으로 적극적인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혁명가들은, 이러한 이질적 과정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진로와 조건들과 전반적인 결과들’ (공산주의 선언)를 최초로 분명하게 이해한, 계급의 구성인자들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기’ 때문에, 혁명가들은 어쩔 수 없이 계급의 소수를 이룬다. 계급에서 유래하며, 의식화 과정의 표현으로서 혁명가들은 이러한 의식화과정에 능동적인 요소가 됨으로써만 그렇게 존재할 수 있다. (ICC 강령. 국제 공산주의 흐름(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의 강령과 선언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은 영어로 각각 출판됨)

 

그러므로 혁명적 조직들이 노동자계급 속에서 생겨날 때, 그것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스스로를 평의회 속에서 조직하도록 만드는 그것과 동일한 토대 위에서 그리고 동일한 필요성으로부터 생겨난다. 그래서 혁명가들은 자신들 계급의 자생적이고 자발적인 산물(a spontaneous and voluntary product)이다. 자생적인 이유는, 그들의 존재가 투쟁의 산물이고 그들 계급의 실천적인 경험에 의해 풍부해지기 때문이다. 자발적인 이유는, 그들은 단순하고 제한적이며 기계적인 경제적 요소들로부터가 아니라 계급투쟁의 역사적 필요성으로부터 출현하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승리를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자계급이 국제적으로 이해하는 것(the international understanding of the workers), 그것뿐이다. 이러한 필요 때문에 <국제 노동자 협회(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가 탄생했다. 이것은 하나의 종파나 이론의 자식이 아니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자생적인 산물이며, 근대 사회의 자연적이고 억제할 수 없는 경향들에 의해 비롯된 것이다. (…) 노동자계급의 열망들과 일반적인 경향들은 그들이 위치한 현실의 조건들로부터 나온다.”(맑스, 『폴 라파르그(Paul Lafargue)에게 보낸 서한』, 1870, 우리들의 강조)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생적이며 역사적인 운동들이, 진정으로 혁명가들의 존재를 위한 유일한 기반을 이룬다. 혁명가들은 마키아벨리적 목표나 독재의 꿈을 추구함으로써 자신들의 열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들은 계급의 단위조직 그 자체로는 노동자들의 다수에 의해 제기되는 의식적인 자기 조직화의 복잡한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등장한다. 혁명가들이 나타나는 이유는 또한, 노동자계급이 혁명의 최종목표를 마침내 깨달았을 때마저도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 안에 존재하며 그 모순과 굴욕, 타락한 분위기와 유혹적인 거짓말 속에서 계속 고통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수천 년 노예 상태의 유산과 매일 매일의 몽매주의로부터 자신을 그렇게 간단히 해방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공산주의 사회가 존재할 때까지, 계급의 의식 발전 과정은 비록 일반화되고 점점 더 발전하는 경향을 띨 지라도 이질적인 현상들로 남아있을 것이다.

만약, 계급 전체가 각각의 파업 뒤에, 투쟁에서의 부분적 패배와 승리 이후에 만들어지는 이론적 정치적 성취에 대한 ‘기억’들을 집단적으로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계급의식의 일반화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만약, 프롤레타리아트가, 각각의 전투 이후에, 리용 직공들의 투쟁부터 1917년 러시아 노동자들의 투쟁들을 거쳐, 오늘날 1982년의 노동자들의 투쟁에 이르는 역사적 길을 다시 걸어야만 한다면, 어떻게 계급의식의 동질화가 가능하겠는가?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투쟁의 교훈들을 어디에서 얻을 것인가? 이러한 교훈들이 뜬 구름 속에서나 집단적인 무의식 속에서 발견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만약 이러한 교훈들이 존재한다면(그리고 그것들이 혁명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들 중의 하나라면), 그것들은 물질적 인간의 형식으로 존재해야한다. 공산주의 의식은 신비스런 것이 아니며, 오히려 매우 구체적이고 인간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공산주의 의식과 행동은 혁명 강령과 혁명 조직 없이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러한 필요성은 공산주의와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본질에 의해 부과된다. 만약 공산주의 혁명과 사회의 변혁을 이뤄내려 한다면,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역사적 이해관계를 파악하는 방법에 있어서 질적 발전 없이는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