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과의 연대 – 미래는 노동자 계급에게 있다!

대중매체는 오바마의 '의기양양한' 유럽방문이나 성추행혐의로 구속된 IWF총재 도미니크 스트라우스-칸 스캔들로 가득차 있는 반면 유럽을 강타하는 진정한 지진에 관해서는 우리에게 그리 많이 알려주지 않는다. 이 지진은 스페인에 중심을 두고 있지만 그리스에 직접적인 반향을 갖고 있으며 다른 나라들에서도 일어나려 위협한다.

 

 

스페인에서의 사건들은 실업, 사파테로정부의 긴축정책 및 정치가들의 부정부패등에 대해 반항하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마드리드의 푸에르따 델 솔(태양의 문) 광장을 점거하면서 515이래 전개되고 있다. 이 사회운동은 소셜네트워크(페이스북, 트위트...)와 유튜브에 올려진 비디오들을 활용해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그라나다, 세비아, 말라가, 네온과 같은 스페인의 대도시로 들불처럼 빠르게 번져나갔다. 그리고 이런 방식을 통해서 우리는 스페인밖에서 그 운동에 대해 정보를 얻는다. 왜냐하면 부르조아 매체들은 이 사건들에 대해 상당히 많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체들이 오히려 오바마나 도미니크 스트라우스-칸이나 셔릴 콜의 여행으로 쪽으로 우리들의 관심을 돌리려 한다면, 그 이유는 스페인에서의 이러한 운동이 자본주의라는 막다른 골목에 직면한 세계노동자계급의 투쟁과 사회투쟁들의 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한 한 단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운동의 전제들

 

스페인에서 “분노한 사람들”의 운동은 연금개혁안에 대항해 일어난 2010929일의 총파업이래 무르익어왔다. 이 총파업은 노조가 정부와 협상하여 개혁안(40-50세의 현노동자들은 그들이 정년퇴직시 현재 연금수령자들보다 20% 낮은 연금을 받게되는 것)을 수용함으로써 패배로 끝났다. 이러한 패배는 노동자계급 내에 깊은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특히 노동자들의 피켓과 함께, 연대감을 표현함으로써 그 파업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했던 젊은이들 사이에서 심오한 분노를 유발했다.

 

2011년 초부터 그러한 분노는 대학들에서 날카로와지기 시작했다. 지난 3월 포르투갈에서는 '비정규직 젊은이들'이라는 그룹이 제안한 시위에 리스본에만 25만명이 모여들었다. 이 예는 스페인의 대학들에, 특히 마드리드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대다수의 학생들과 30대 미만의 젊은 이들은 시간제 일을하며 월 600유로로 살아야만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여명의 학생들이 '호베네스 신 푸투로' (미래없는 젊은이들)이라는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다. 주로 노동자계급출신인 이 가난한 학생들은 47일 시위를 소집했다. 5천명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들었고, 이렇게 처음의 동원이 성공함으로써 호베네스 신 푸투로 그룹은 515일 시위를 계획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마드리드에서 데모크라시아 레알 야(진정한 민주주의를 지금)이라는 공동체가 출현했다. 그것의 강령은 실업과 “시장의 독재”를 비판하지만 좌파도 우파도 아닌 “비정치적”임을 주장한다. 데모크라시아 레알 야 역시 다른 구역들에서 515일에 시위를 할 것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5만명의 시위대가 참가함으로써 거대한 성공을 이룬 것은 마드리드에서 였다. 처음의 의도는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서 조용히 끝나는 평화적인 행진을 하는 것이었다.

 

민중 전체에게로 번진 '미래없는' 젊은이들의 분노

 

데모크라시아 레알 야 공동체가 호소한 515일의 시위들은 굉장한 성공이었다. 그들은 일반적인 불만을, 특히 졸업과 함께 실업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의 전반적인 불만을 표출했다. 모든 것은 그곳에서 끝나게 되어있었지만 마드리드와 그라나다에서의 시위들의 끝에는 작은 '블랙 블록' 그룹들에 의해 유발된 사건들이 발생해서, 경찰 개입으로 20명이 체포되었다. 체포된 사람들은 경찰서에서 잔인하게 다뤄졌고 그 이후 이들은 경찰폭력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성명서의 공개는 즉각적으로 분노의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공권력에 대항한 연대를 확산시켰다. 전혀 알려지지 않고 조직화되지도 않은 사람들 30명이 푸에르타 델 솔광장에 캠프를 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발의는 즉시 사람들의 동감을 얻었고 이러한 예는 바르셀로나, 그라나다 및 발렌시아로 확산되었다. 경찰의 제 2차 진압은 도화선에 불을 붙혔고 그이후 중앙광장들에 점점 더 증가된 대대적인 집회들이 70개 이상의 구역들에서 개최되었다.

517, 화요일 오후에 '515일 운동'의 조직자들은 조용한 시위나 다양한 극적 퍼포먼스들을 가질 계획이었지만, 광장들에 모여든 군중들은 집회를 갖자고 소리높혀 외치기 시작했다. 저녁 8시 집회들이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및 다른 도시들에서 개최되기 시작했다. 18일 수요일부터는 참으로 이러한 집회들이쇄도하게 되었다. 모든 곳에서 집회들은 공공장소에서의 공개적인 총회의 형식을 띠었다.

 

경찰의 진압에 직면하여 그리고 시 및 지방선거를 앞두고, 데모크라시아 레알 야 공동체는 스페인의 “민주주의의 퇴행”이라는 테마를 둘러싼 논쟁을 시작했다. 그것은 프랑코체제의 붕괴이후 34년간의 “불완전한 민주주의”이후 “진정한 민주주의”를 외치며, 사회당(PSOE)과 우익 대중당에 의해 독점된 2당체제를 끝장내기 위한 선거개혁을 요구했다.

 

그러나 '분노한 자들'의 운동은 대부분 데모크라시아 레알 야의 민주주의적 개혁주의적 강령을 뛰어넘었다. 그것은 “600유로세대”의 반란으로 제한되지 않았다.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말라가, 세비아등의 점거된 광장들과 시위들에서, 플랜카드와 기치들 위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볼 수 있었다: “자본없는 민주주의!”, “PSOEPP, 다같은 쓰레기!”, “너희들이 우리들의 꿈을 방해한다면, 우리는 너희들의 잠을 방해할 것이다!” , “모든 권력을 총회로!”, “문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문제는 자본주의다!”, “일자리가 없다, 집이 없다, 두려움도 없다!”, “노동자들이여 깨어나라!”, “ 600유로, 지금 그것은 폭력이다!”

발렌시아에서 한 여성그룹은, “조부모들이 속임을 당했다, 그들의 자식들도 속임을 당했다, 그 손자손녀들도 속임을 당하게 해서는 않된다!”라고 외쳤다.

 

대중집회들은 “미래를 짊어진 무기”

 

부르조아 민주주의에서는, 선거공약을 결코 지키지 않고, 무자비하게 깊어만 가는 경제위기로 인해 요구되는 긴축계획을 그저 계속 실행하는 정치가들 사이에서 4년마다 “선택”하는 것으로 “정치 참여”는 축소된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면전에 스페인에서의 '분노한 사람들'의 운동은 공개 총회라는 노동자계급의 투쟁무기를 자생적으로 재충당했다. 모든 곳에서 대대적인 도시 집회들이 출현해서, 모든 세대, 모든 비착취사회계층들을 아우르며 수만명의 사람들을 재조직했다. 이러한 집회들에서는 누구나 발언하고, 분노를 표출하고 상이한 문제들에 대해 논쟁하고 제안들을 제시할 수 있다. 전반적인 발효라는 이러한 대기 속에서 혀가 자유로와진다. 사회 생활의 모든 측면(정치적, 문화적, 경제적...)들이 점검된다. 광장들에서 연대와 상호존중의 기운 속에서 토론된 생각들의 거대한 집단적 물결이 넘쳐났다. 몇몇 구역들에서는 “아이디어 상자들”이 설치되었는데, 여기에는 누구나 종이에 그들의 생각들을 적어서 집어넣을 수 있다. 운동 자체가 매우 지혜롭게 스스로를 조직한다.

모든 종류의 문제들에 대해 위원회들이 만들어졌고, 공권력과의 비조직화된 충돌을 방지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총회 내에서의 폭력이 금지되고, 음주도 “라 레볼루시옹 노 에스 보테이온”(대충 번역하자면, “혁명은 곤드레 만드레 만취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기치로 금지된다. 매일 청소팀들이 조직된다. 공공매점들이 식사를 제공하고, 자원봉사자들이 어린이들을 위해 보육시설을 세운다. 도서관과 “타임 뱅크”가 세워져서, 여기서 과학, 문화, 예술, 정치 및 경제 등 모든 종류의 문제들에 대해 토론이 이뤄진다. “반성의 날”들이 계획되어 있다. 모든이가 그들의 지식과 기술을 함께 나눈다.

 

표면적으로는 이러한 사색의 폭발이 아무것도 초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구체적인 제안들이나 직접적으로 실현가능한한 요구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일어나고 있는 것은 그 분명히 무엇보다도 가난에, 긴축안들에, 현사회질서에 대해 느끼는 거대한 염증이다. 그리고 동시에 사회적인 원자화를 돌파하려는, 그래서 함께 모여서 심사숙고하려는 집단적인 의지이다. 많은 환상들과 혼돈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말 속에서 그리고 플랜카드와 기치들 위에서 “혁명”이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집회들에서, 논쟁들은 다음과 같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을 제기했다:

·         민주주의의 퇴행”에 우리들을 제한해야만 하는가? 문제들의 근원이 개량될 수 없는 완전히 파괴되어야만 하는 체제인 자본주의 자체에 있지는 않는가?

·         이 운동은 선거후인 522일에 끝나야만 하는가 아니면 계속 진행되어 생존 조건들에 대한 공격, 실업, 비정규직화, 퇴출에 대항한 대대적인 투쟁으로 발전해야 하는가?

·         집회를 작업장으로, 이웃으로, 취업 사무실로, 고등학교로, 대학교로 확대해야 하지 않는가? 전반적인 투쟁을 끌어낼 역량을 가진 노동자들사이에 운동을 뿌리내려야 하지 않는가?

 

집회들에서의 논쟁들에서 두가지 경향들이 매우 분명하게 나타났다:

·         그중 하나는 비프롤레타리아 사회계층들에 의해 활성화된 보수적인 경향으로서, 자본주의 체제가 “민주주의적인 시민혁명”에 의해 개량될 수 있다는 환상을 씨뿌린다.

·         다른 하나는 프롤레타리아적 경향으로서, 자본주의 철폐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선거당일인 522일 개최된 집회들은, “설혹 선거가 분출구라 할지언정, 그것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 ”라며 운동의 계속을 결정했다. 프롤레타리아적 경향은 실업, 비정규직화, 사회적 공격들에 대항한 요구들을 제시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을 향해 나아가는” 제안들 속에서 스스로를 분명히 했다.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서는 지역들에서 “대중집회”를 조직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작업장에서, 대학교에서, 취업 사무실에서 그와 같은 것을 하자는 제안들이 이뤄졌다. 말라가, 바르셀로나 및 발렌시아에서 집회들이 사회 임금감축에 대항한 시위를 조직하는 문제가 제기되어, 발언자들 중의 한명의 표현을 빌자면, “이번에는 진짜인 ” 새로운 총파업을 제안했다.

 

스페인의 산업적 수도인 바르셀로나에서, 카탈로니아 광장의 중앙집회는 가장 과격했고, 프롤레타리아 경향에 의해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민주주의의 퇴행”이라는 환상으로부터 가장 거리가 먼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텔리포니카의 노동자들, 병원노동자들, 소방관들, 사회적 삭감에 대해 싸우는 학생들이 바르셀로나 집회에 합류해서 그것에 다른 음색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525일 카탈로니아 광장집회는 병원노동자들의 파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을 결정한 반면, 마드리드의 푸에르타 델 솔 광장 집회는 참여적이고 “수평적인” 민주주의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이웃지역에서 “대중 집회들”을 이끌어냄으로써 운동을 탈중심화할 것을 결정했다. 발렌시아에서는 시위하는 버스노동자들이 학교예산 삭감에 대항한 지역 주민들의 시위에 함께 했다. 사라고사에서는 버스 운전사들이 마찬가지로 열광적으로 집회들에 합류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분노한 사람들“이 615일까지 캠프를 유지하고 카탈로니아광장의 점거를 계속할 것을 결정했다.

 

미래는 노동자계급의 젊은 세대들의 손안에

 

이 운동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든지, 그 결과가 어떠하든지, 실업(스페인에서 20-25세 인구중 45%가 실업상태)에 직면한 젊은 세대에 의해 시작된 이 반란이 확실히 노동자계급 투쟁의 일부임은 명백하다. 계급의 국제적 운동에 대한 그것의 기여는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모든 비착취 사회계층들,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모든 세대들을 아우른 전면화된 운동이다. 비록 계급이 “대중적인” 분노의 물결의 일부였고, 대대적인 파업들과 특정한 경제적 요구들을 통해 스스로를 확언하지는 않았을 지라도, 이 운동은 여전히, 세계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의 의식의 진정한 성숙을 표현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점점 더 명백해지는 파산에 직면해 상당수의 사람들이 서유럽의 “민주주의” 나라들에서 떨쳐일어나기 시작해서 프로레타리아 투쟁의 정치화를 향해 길을 열어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운동은 그 절대다수가 비정규직 노동자이거나 실업자인 젊은이들이 노동자계급의 무기들, 즉 대대적이고 공개적인 총회들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무기들을 통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연대를 확인하고 정치적 정당들과 노동조합의 외부에서 운동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었다.

 

비록 소수 중에서 일지라도, 그 운동 내부에서 출현한, “모든 권력을 집회들로”라는 슬로건은 러시아 혁명의 옛슬로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의 리메이크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옛 동구권의 스탈린주의 체제의 붕괴 이후 부르주아 캠페인의 무게 때문에) 여전히 “공산주의”라는 단어를 두려워할 지라도, 그와는 반대로 “혁명”이라는 단어는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운동은 데모크라시아 레알 야 공동체가 주장하는 그러한 “스페인 혁명”이 결코 아니다. 착취당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실업, 비정규직화, 높은 생활비용 및 생활조건의 끊임없는 악화는 결코 스페인만의 특수성은 아니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실업이라는 어두운 얼굴은 마드리드에서와 마찬가지로 카이로에서, 파리뿐만 아니라 런던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 뿐만 아니라 아테네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이러한 하향 나선 속에서 모두 함께이다. 우리는 모두가 자본주의 사회의 부패에 직면하고 있는데, 이러한 부패는 가난과 실업에서뿐만 아니라 재앙과 전쟁의 증가 속에서도, 사회관계들의 혼란과 증대되는 도덕적 야만성(이는 무엇보다도, “3세계”와 “선진”국가들 모두에서 여성들에 대한 성적 공격과 폭행에서 표현됨)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낸다.

 

분노한 사람들”의 운동은 혁명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없는” 젊은이들에게 그리고 인류 전체에게 전망을 열어줄 수 있는 유일한 투쟁인, 세계 규모의 노동자계급투쟁의 발전에서 단지 하나의 새로운 단계이다.

푸에르타 델 솔의 독립공화국”에 관한 그 모든 환상들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새로운 사회의 지평이 낡은 사회의 내장 속에서 그 형상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스페인 지진”은, 잃을 것이 없는 노동자 계급의 신세대들이 역사라는 무대 위에서 이미 배우들로 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인류의 해방의 길을 정화할 훨씬 더 거대한 폭풍들의 선봉들이다.

인터넷, 소셜네트워크 그리고 핸드폰의 활용을 통해 이 젊은 세대는, 부르주아지와 그 매체들의 침묵을 돌파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국경을 넘어선 연대의 기초를 놓았다.

이 새로운 세대는 2003년부터 국제 사회의 무대에 등장했는데, 처음에는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에 대한 군사적 개입에 대항한 항의들(많은 나라들에서 젊은이들이 부시의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음)에서 그런 다음은 프랑스 연금개혁에 대항한 최초의 시위들에서였다. 이는 2006년 같은 나라에서 CPE에 반대하는 대학생 및 고등학생들의 대대적인 운동과 더불어 재등장했다. 그리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영국에서 수학중인 젊은이들은 자본주의가 그들에게 제공하는 절대빈곤과 실업이라는 미래에 대항하여 목소리를 높혔다.

이 “미래없는” 세대의 밀물결은 최근 튀니지와 이집트를 강타해서 벤 알리와 무바라크를 넘어뜨린 거대한 사회반란을 낳았다. 그러나 주요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부르주아지(특히 바락 오바마)가 벤 알리와 무바라크를 버리도록 강제한 결정적인 요소는 노동자 파업들의 출현과 총파업운동의 위험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이후, 타흐리르 광장은 여러 나라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젊은 세대들에게 하나의 상징이 되었고, 투쟁을 고무하는 것이 되었다. 이것을 모델로 삼아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은,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 캠프를 쳤고, 70여 구역들의 주요 광장들을 점거했으며, 모든 억압받은 사회 계층들을 집회들로 끌어들었다(바르셀로나에서는 “분노한 사람들”이 심지어 카탈로니아광장을 “플라사 타흐리르(타흐리르 광장)”으로 이름을 바꿔부르기도 했다).

스페인에서의 운동은, 사실,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서 결정화된 극적인 반란보다 훨씬 더 심오하다. 그것은 두 대륙을 잇는 다리인 이베리아 반도의 주요 국가에서 발생했다. 그 운동이 서유럽의 “민주주의”국가(게다가 “사회주의” 정부가 이끄는!)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은 튀니지에서의 “재스민 혁명”이래 매체들에 의해 전개되는 민주주의적 신비화들을 침식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데모크라시아 레알 야가 이 운동을 “스페인 혁명”이라 부를 지라도, 스페인 국기는 거의 나부끼지 않았던 반면, 타흐리르 광장은 국기가 물결쳤다.1

이 운동을 동반하는 불가피한 혼동들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오늘날 사회투쟁들의 사슬에서 하나의 매우 중요한 연결점이다. 자본주의의 세계적 위기의 악화와 더불어 이러한 사회운동들은 점점 더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과 만나게 되고 그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이 “분노한” 세대에 의한 용기와 결단과 깊은 연대감은 다른 세계가 가능함을, 세계 인류공동체의 통일인 공산주의가 가능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인류의 이 오랜 꿈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사회의 모든 부의 본질적인 것들을 생산하는 계급인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의 모든 공격들에 대항해 대대적인 투쟁들을 전개함으로써 그 계급 정체성을 재발견해야 한다.

분노한 사람들”의 운동은 다시 한번 혁명의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의 타도를 목표로, 운동에 분명한 계급적 방향을 부여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달려있다. 상품생산과 이윤에 기반한 이 착취체제를 무너뜨린 그 폐허 위에서만 새로운 세대들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고, 진정 보편적인 “민주주의”를 성취하고 인류에게 존엄성을 회복시킬 수 있다.

Sofiane, 2011527

 

 

1반면에, 우리는 “세계 혁명”을 요구하며 국경을 넘은 운동의 “확대”를 주장하는 슬로건들도 보았다. 모든 집회들에서 “국제”위원회가 하나씩 만들어졌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대도시들에서, 심지어 도쿄, 프롬펜과 하노이에서 연대 시위를 볼 수 있었다.